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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e800><colcolor=#D50000> 왕호 | 라마 5세 (Rama V) |
이름 | 프라짜오록얏 짜오파 쭐랄롱꼰 (พระเจ้าลูกยาเธอ เจ้าฟ้าจุฬาลงกรณ์) |
출생 | 1853년 9월 20일 |
사망 | 1910년 10월 23일 (향년 57세) |
재위 기간 | 시암 국왕 |
1868년 10월 1일 ~ 1910년 10월 23일 | |
부모 | 아버지 라마 4세 (1804 ~ 1868) 어머니 뎁시린드라 (1834 ~ 1862) |
배우자 | 수난다 쿠마리라타나 (1860 ~ 1880)[A] 수쿠말라 마라스리 (1861 ~ 1927)[A] 사방 바다나 (1862 ~ 1955)[A] 사오바바 퐁스리 (1861 ~ 1919)[A] 그 외 후궁 143명 |
자녀 | 슬하 32남 44녀 라마 6세 (1881 ~ 1925) 라마 7세 (1893 ~ 1941) 마이돈 아둔야뎃[5] (1892 ~ 1929) |
종교 | 상좌부 불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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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식 초상화 |
태국 짜끄리 왕조의 제5대 국왕으로 라마 5세로도 불린다.
라마 4세[6]와 그의 왕비인 라마 3세[7]의 손녀 데브리씨린드라 사이에서 출생했으며 2016년 10월 13일에 사망한 태국 국왕 푸미폰 아둔야뎃(라마 9세)의 할아버지, 현 태국 국왕 라마 10세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그리고 짜끄리 왕조에서 선조인 라마 1세, 손자인 라마 9세와 함께 대왕 칭호를 받은 왕이다.
2. 재위
부왕이 적극적으로 서양식 교육을 장려해서 유럽 선교사들의 교육을 받았다. 부친의 사망 후 15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이후 5년간의 섭정기간 동안 세계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고 주변 국가들을 순방하며 정치적 우의를 다졌다. 섭정 중인 1885년에 개혁안을 발표했을 때, 개혁안 중에는 입헌군주제 실시가 있다보니 모든 개혁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이후 섭정이 끝난 20세부터 정치, 경제, 사회 개혁에 주력하였다. 20여 개의 소왕국으로 분산되어 있던 국가를 중앙집권체제로 정비하고 내각제 도입, 행정조직 개편, 군대 현대화, 바트화 발행, 토지개혁 실시, 조세 징수 시스템 개혁 등의 국가 근대화에 기여했으며 국민의 교육을 장려하고 병원과 의료, 교육 시스템을 정비하는 데 힘썼다. 그리고 근대화 정책과 더불어서 노예제를 폐지한 업적 등으로 인해 쭐랄롱꼰 대왕으로 불린다.
제도적으로는 추밀원, 내각평의회, 재무부 등을 신설했다. 지금의 두싯 지역[8]은 그가 동경하는 유럽풍 양식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서 설계되었다.
태국에 철도가 처음 등장한 게 이때로 방콕의 후아람퐁역[9]도 이때 생겼다. 철도로 말레이시아 및 싱가포르, 베트남 등 이웃들과도 접속되었다. 기차가 제일 먼저 등장한 동남아시아 국가가 태국인 셈이다.[10] 물론 현재 태국 국철은 협궤로 그때의 19세기 시설을 그대로 써서 낙후하기는 했다만 어쨌든 이웃의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베트남 등의 상황을 보면 인도차이나에서 가장 앞선 나라가 태국이었던 셈이다.
1897년과 1907년 두 번 유럽을 방문하여 각국의 군주들과 회담했는데 이는 태국을 한 나라가 먹지 못하도록 한 노력이며 이 시기로부터 태국 왕족들이 외국에 유학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3. 대나무 외교
태국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국제 외교 정책인 대나무 외교도 쭐랄롱꼰 대왕의 작품이다. 대나무 외교란 당시 태국의 위치상 서쪽의 영국령 인도 제국과 동쪽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이 두 세력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라마 5세만의 외교술이자 라마 5세의 업적 중에서도 뺄수 없는 것으로서, 이 외교정책은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에도 태국이 독립과 근대화를 성공시킬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이 정책으로 태국은 라오스와 씨엠립 일대를 프랑스에, 버마, 말라야와의 접경지대 일부[11]를 영국에 각각 떼어주고 독립을 유지했다.대나무 외교는 태국과 시암 역사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되며, 쭐랄롱꼰은 태국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다. 만일 이 사람이 태국 국왕이 아니었다면 태국도 미얀마,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 인도네시아 등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처럼 영국 및 프랑스, 네덜란드 같은 서양 열강들에 의해 고스란히 국권을 피탈당하고 식민지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나라를 보전했다는 위대한 업적에 태국인들은 그를 무척 사랑하고 경외한다.
4. 노예제 폐지
노예제를 폐지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일부다처제도를 통해 영토 확장 및 정치적 통합을 위해 총 113-116명의 아내와 자식 33남 44녀를 둔 그가 가장 사랑했던 아내는 첫 번째 아내[12]인 수난타였다. 그녀는 남편인 쭐랄롱꼰을 열심히 내조한 현모양처임과 동시에 현명하고 국민들을 아껴 왔기 때문이었다. 1879년 딸을 출산한 수난타 왕비가 둘째 아이를 임신한 1880년 왕을 만나기 위해 방파인으로 향하던 와중, 차오프라야 강에서 칸나폰 공주[13]와 물에 빠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런데 차오프라야 강은 수심도 비교적 얕았고 당시 지켜보던 사람도 많았으나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결국 만삭의 왕비와 공주, 그리고 왕비 뱃속에 있던 아기 모두 물에 빠져 숨을 거두고 만다.
그러나 사실은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았던 게 아니라, 도와주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지켜보던 사람들이 많았으나 아무도 왕비를 도와주지 못한 것은 당시 태국에는 노예제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 국민의 1/3이 노예[14]였던 당시 노예가 고귀한 사람에게 손을 댔다가는 손을 댄 사람이 죽음을 면치 못했기에 왕비가 물에 빠졌지만 아무도 그녀를 구할 수가 없었던 것이며, 이것이 결국 쭐랄롱꼰의 아내 수난타 왕비와 그녀의 자녀들이 모두 죽게 된 원인이 된다.
결국 한순간에 사랑하는 아내와 딸, 뱃속의 아이까지 모두 잃은 라마 5세는 큰 상심에 빠져 슬퍼하다 그 후 30여년 후인 1905년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이후 방파인에는 수난타 왕비와 칸나폰 공주의 초상화가 그려 있는 추모비가 건립되었고 평상시 국민들의 교육에 신경썼던 왕비를 기리기 위해 수안 수난타 라차팟 대학이 설립되기도 했다.
이 부분은 2017년 5월 14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다만 위키피디아의 'Sunanda Kumariratana' 항목에선 좀 다른 설명을 싣고 있다. 라마 5세의 일기에 따르면, 선박 간의 충돌로 인해 부인과 공주가 강물에 빠지자 뱃사공이 강에 뛰어들어 커튼 장식에 휘말려 있던 두 사람을 다른 보트로 꺼내 올렸고 수행원들이 두 사람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즉 아무도 나서지 않아서 살릴 수 있는 사람이 죽은 사건이 아니라 현장에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난 불행한 사고라는 것. 이 사고에서 모녀 둘을 제외한 다른 사망자는 없었다고 전해진다. 위키피디아의 이 항목에서 이 내용을 언급하며 제시한 근거 서적은 'Bulletin de la Société académique indochinoise de France'와 'The Palace Law of Ayutthaya and the Thammasat: Law and Kingship in Siam'이다.
그리고 노예제 폐지와 관련해서도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완전히 폐지된 것은 1905년이지만 사실상의 노예제 폐지를 위한 정책이 실시되기 시작한 건 1874년 경 부터다. #1. #2. 1874년이면 부인과 딸의 사망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기 때문에 두 사람의 사망으로 인한 충격에 노예제 폐지를 결심했다는 건 꾸며낸 이야기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5. 기타
5.1. 가계
정실부인 외에도 공식적으로 153명의 후궁을 두어서 유산하거나 사산된 자녀를 포함해서 97명의 자녀를 두었다. 왕비들이 전부 이복여동생이다.[15] 당연히 근친혼 농도가 매우 높아서 자녀들 대부분이 어린 시절 죽었고 라마 5세 사후 라마 6세, 라마 7세는 후사가 없어서 또다른 아들 마히돌 아둔야뎃의 아들 라마 8세, 라마 9세를 데려와야 했다.- 정비: 수난다 쿠마리라타나 (1860 ~ 1880)[A]: 익사
- 공주: 칸나폰 베자라타나 (1878 ~ 1880): 익사
- 계비: 사오바바 퐁스리 (1861 ~ 1919)[A]
- 공주: 바후라다 마니마야 (1878 ~ 1887)
- 왕자: 라마 6세 (1881 ~ 1925)
- 왕자: 트리벳루타마 담롱 (1882 ~ 1887)
- 왕자: 착라봉세 부바나 (1883 ~ 1920) / 왕자비: 카테리나 데스니츠키 (1886 ~ 1960) 우크라이나 귀족 출신
- 왕손: 출라 착라봉세 (1908 ~ 1963): 태국-우크라이나 혼혈
- 왕자: 시리랏 카쿠다반드 (1885 ~ 1887)
- 왕자: 앗사당 데차붓 (1889 ~ 1925)
- 왕자: 춧타툿 다라딜록 (1892 ~ 1923)
- 왕자: 라마 7세 (1893 ~ 1941)
- 계비: 수쿠말라 마라스리 (1861 ~ 1927)[A]
- 공주: 숫다 디뱌라타나 (1877 ~ 1922)
- 왕자: 파리바트라 수쿰반두 (1881 ~ 1944): 해군 복무
- 계비: 사방 바다나 (1862 ~ 1955)[A]
5.2. vs 대한제국 고종
비슷한 시기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과 자주 비교되며 고종 안티들의 주요한 논거로 쓰인다.논지는
고종이나 라마 5세나 똑같이 전통 교육을 받으며 어린 나이에 정사에 임하였고 각각 대영제국, 프랑스 식민제국 사이에 있는 태국과 청나라, 일본 제국, 제정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조선의 국왕으로서 제국 사이에 위치한 약소국의 지배자였다는 공통점에도 라마 5세는 부국강병하였고 고종은 망국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태국의 경우에도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내정개혁도 내정개혁이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완충지대라는 지리적 문제 역시 큰 이유였고 추가적으로 한반도만큼 커다란 땅덩어리를 떼주었다. 고종이 주권을 유지하기 위해 영토를 떼 준다는 게 당시 상황에서 가능한 일인가? 만일 태국이 할양한 면적만큼의 영토를 내준다면 이씨왕가와 조선 조정의 직할지는 서울/경기/인천의 경기지방 및 경기지방과 가까운 강원도 영서 일부나 충청도 북부 일부분밖에 안 되게 될것이다.
그리고 태국이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프랑스에 넘겨준 것과 당시 대한제국의 상황을 비교하는 것은 약간 무리가 있다. 일단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시암(태국)의 속국이었지 정식으로 편입된 영토가 아니었고 애초에 이 3국은 같은 민족의식도 딱히 없었다.[20] 심지어 캄보디아의 경우 태국이나 프랑스나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21] 고종이 제주도나 거제도, 울릉도, 거문도, 백령도 등 도서 지방들이나 부울경/ 대구광역시/ 경상북도의 영남 및 강원도 영동지방 등 일본과 인접한 동부지방 조선 영토들을 일본에게 떼어주거나 러시아 제국에 함경북도 웅기-나진, 신의주시 용암포 등 러시아 및 청나라와 가까운 북부 지역을 떼어주는 시나리오와 태국이 라오스/캄보디아를 프랑스에게 넘겨주는 건 일치하는 상황이 아니라는 얘기다. 구한말 당시 조선이 제주도, 거제도, 울릉도, 백령도 같은 섬 지역 영토나 혹은 부산/진해/여수 등 일본과 인접한 영호남 항구도시 일부를 떼어 러시아, 일본에게 할양했다 해도[22] 러시아 제국, 일본 제국이 일부 조선 땅을 차지하는 선에서 그치고 조선을 주권국으로 내버려뒀을지는 의문인데, 어느 쪽이든 조선 영토 전역을 병탄해야만 동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본이 설쳐대서 그렇지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네덜란드, 덴마크 등 유럽에서도 19세기 초부터 이양선을 보내며 조선 해안을 자주 깔짝거렸다.
게다가 지리적으로 따져도 같은 태국은 열강들이 정면충돌을 피하기 위해 설정한 반면 조선은 주변국 모두가 정면충돌을 불사해서라도 자국 영향권으로 편입시키려 했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애시당초 태국은 저 멀리 떨어진 유럽 열강들이 이해당사자인 반면 조선은 바로 이웃한 일본, 청나라, 러시아가 이해당사자이고 자국 영향권에 넣지 않으면 안보에 큰 위협이 된다는 점[23]에서 비교가 불가능하다.[24] 당장 조선 주변의 만주나 일본 열도같은 영토는 모두 일본과 청의 본국이며 러시아는 일본과 전면대결도 불사하고서라도 만주와 한반도 북부는 꼭 필요했다. 블라디보스토크만 갖고는 태평양에 나가는 부동항을 확보했다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리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개방성이나 군대의 근대화 수준도 태국이 조선보다 우위에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이야 대한민국이 명실상부 선진국으로서 개발도상국인 태국보다 경제력이 매우 앞서고 군사력도 비교가 안 되게 앞서는 상황이지만 냉전 이전에 전근대에서 개화기로 넘어가는 19세기 말의 상황에서 태국의 경제력은 조선보다 근소하게 앞서 있었으며 군사력도 프랑스인, 포르투갈인들과의 접촉으로 이미 유럽식 무기를 갖추는 등 세도정치로 쇠퇴하기 시작하던 조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태국은 이미 아유타야 왕국시절부터 태국은 네덜란드, 프랑스와 같은 나라들과 무역을 하며 막대한 부와 이익을 창출하고 있었다. 이후17세기 말부터 펫라차 국왕의 쇄국정책이 실시되면서 무역이 쇠퇴하였지만 다시 라마 3세 시기인 1840년 서양 열강들이 태국을 보급기지로 사용하고자 무역 및 자국군의 일시적인 주둔을 요구하였고 태국은 다시 정식으로 나라의 문을 열게 된다. 이를 통해 근대화를 위한 교육과 자금이 축적되고 라마 5세시기에 이르러 활발한 근대화정책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정식으로 나라의 문을 열게 된 강화도조약의 계기가 된 운요호 사건이 1876년의 일임을 감안한다면 태국보다 30년 가량 개방의 시기가 느리며 이미 60여년의 세도정치 기간 동안 나라의 국고가 텅텅 비게 되어서 근대화할 자금도 여력도 부족하였고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또한 군사적 면에서도 군대의 신식화기 보유량 역시 세도정치 기간에 기술발달이 쇠퇴하고 군자금을 횡령하는 등의 추태까지 벌어지면서[25] 태국 군대가 조선보다 앞섰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일본과 청이 마음놓고 조선 군대를 무시하고 조선땅에서 국지전을 펼친 반면 태국에서 전투를 하고 식민화하려면 서양 열강들 역시 근대화된 태국군과 만나 큰 희생을 감수해야 했었다.
차라리 이런 태국과 비슷한 전략을 취할 수 있던건 중국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워낙 땅덩어리가 커서 누구 하나가 독점했다간 반발이 클 수 밖에 없었기에 어느 누구도 혼자 독식한다는 발상 자체를 못했고 너무 거대한 나머지 이권만 뜯어먹어도 나름 만족스러웠던데다가 지리상으로도 여러 세력의 중간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태국보다 운이 좋았던 것은 땅을 뜯겼어도 홍콩, 마카오, 칭다오 등 일부였다는 것, 물론 이는 태국과 중국의 체급 차이가 애초부터 상대가 되는 수준이 아니었던 것도 감안해야 한다.
이뿐만 아니라 유럽에서의 중립국의 개념이 있었던 것에 비해 동아시아에서는 중립국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다. 중국이라는 질서 아래의 수많은 조공국과 그 질서를 따르지 않는 적대국이 존재했던 동아시아에 비해 유럽은 스위스나 벨기에같이 중립국들이 존재했다. 태국을 둘러싼 국가들은 영국과 프랑스로 중립의 개념을 아는 국가들이다. 두 국가들은 아프리카에서 파쇼다 같은 사건을 겪으면서 서로를 어느 정도 견제했다. 그런 정치적 흐름과 지형적 이점, 중립국에 대한 이해가 대나무 외교를 가능하게 했다. 그에 비해 일본과 청나라는 중립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국가들은 조공국이거나 식민지 또는 동맹국과 적대국일 뿐이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동아시아의 질서에 없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고종이 중립 노선을 추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5.3. 비슷한 인물
비슷한 시기에 에티오피아에도 라마 5세와 비슷한 업적을 남긴 황제 메넬리크 2세가 있었다.에티오피아에서는 혼란했던 에티오피아를 통일하고 이탈리아의 침공을 막아낸 명군으로 추앙받는다. 더구나 근대화 개혁에 힘쓴 점, 북아프리카에 뻗어오던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여 에티오피아를 19세기 말 아프리카에서 유일한 독립국으로 지켜낸 점 등 비슷한 업적이 많지만 태국은 라마 5세의 사후에도 왕실이 폐지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유지되어 온 반면 에티오피아 제국은 메넬리크 2세의 사후 결국 베니토 무솔리니의 침공으로 이탈리아의 식민지로 전락하고[26] 이후 공산혁명으로 황실이 폐지된 데다 이후 폴 포트 정권[27] 당시의 캄보디아와 별 차이 없는 막장 상황을 겪고 그 후유증이 적지 않기 때문에 아무래도 라마 5세에 비해 묻히는 감이 있다.
6. 여담
그의 이름을 딴 쭐랄롱꼰 대학교는 대한민국의 서울대학교, 일본의 도쿄대학, 대만의 국립타이완대학, 홍콩의 홍콩대학과 같이 태국을 대표하는 플래그십 명문 대학교이다. 이 학교와 탐마삭 대학교가 태국 내 명문들이며 민주화 운동에도 가장 앞서 총대를 매왔고 그만큼 많이 희생을 치르기도 했다.[A] 라마 5세 본인의 이복동생[A] [A] [A] [5] 라마 8세와 라마 9세의 아버지[6] 왕과 나의 주인공이 되는 인물.[7] 라마 3세 낭끌라오는 유명한 라마 4세 몽꿋의 이복형이다. 라마 2세는 총명한 몽꿋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고 했으나, 귀족들은 조종하기 좋은 낭끌라오를 왕으로 올렸고 몽꿋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낭끌라오가 죽자 몽꿋이 왕이 되었으나 그 조건으로 낭끌라오의 손녀를 왕후로 삼아 그녀의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했던 것이다. 즉 쭐랄롱꼰은 뭉꿋과 그의 조카손녀 사이에서 태어났다.[8] 두싯 지역에 짜끄리 왕조의 2번째 왕궁인 위만맥 궁전이 있다.[9] 차이나타운 근처에 있다.[10] 그 다음은 영국령이던 말레이시아[11] 이 지역들은 미얀마 독립 이후 샨주(거의 대부분), 카야주, 카인주, 몬주, 타닌타리구로 나뉘어 편입되고 말레이시아에게는 크다, 프를리스로 각각 편입된다.[12] 그의 이복 여동생이기도 했으며 그녀의 두 친여동생들도 쭐랄롱꼰의 왕비들이었다.[13] 사망 당시 1세였다.[14] 이유도 다양했는데, 빌린 돈을 갚지 못하거나, 범죄를 저지르거나, 군대를 안 가는 등 여러가지 많았다.[15] 아버지 라마 4세 역시 이복 조카손녀이자 라마 3세의 손녀인 뎁시린드와 결혼하여 라마 5세를 낳았다. 라마 3세와 라마 4세는 이복 형제지간.[A] [A] [A] [A] [20] 그나마 이싼 지방과 라오스는 조금이라도 있으나 캄보디아는 그것도 없었다.[21] 그나마 언어나 문화등이 상당히 유사한 라오스는 캄보디아와는 달랐다.[22] 이는 영국이 청나라에서 뜯어간 신계처럼 조차지거나 혹은 영국령 홍콩 중 홍콩 섬처럼 정식 영토일 수도 있다.[23] 청나라와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러시아도 부동항과 만주를 지키려면 조선이 필요하다.[24] 참고로 이는 2020년 현재도 마찬가지인데, 왜 중국이든, 일본이든, 미국이든, 러시아이든 대한민국과의 국제관계를 소홀히 하지 않는지 생각해보면 된다.[25] 바로 직전 영조-정조 시절만 해도 천보총이 나오는 등 화약무기 발전 자체가 활발하였다. 이 때부터 조선은 서쪽 청나라의 만주족 및 몽골족 궁기병과 일본의 조총을 모두 대응 가능하도록 교리를 바꾸었으며 그 결과 기병에 편곤과 장창이 들어오고 조총을 쏘는 총기병도 등장하였다.[26] 하지만 점령 기간이 매우 짧아 나치 독일의 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폴란드 등 유럽 점령과 마찬가지로 정식 식민지 말고 임의점령으로 취급받는다.[27] 사실 에티오피아 공산당을 이끈 멩기스투 그 작자도 에티오피아의 폴 포트다. 진짜로 아프리카에서 꽤 앞서던 그 나라의 모든 걸 작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