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6 01:42:52

이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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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왕공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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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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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교육가·독립운동가
1969
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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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의민황태자의 태자비
자행황태자비 | 慈行皇太子妃
파일:1200px-Yi_Bangja.jpg
출생 1901년 11월 4일
일본제국 도쿄부 도요타마군 시부야마치 별저
(現 일본 도쿄도 시부야구 시부야)
사망 1989년 4월 30일 (향년 87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낙선재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능묘 영원(英園)
재위기간 이왕세자비
1920년 4월 28일 ~ 1926년 4월 25일
이왕비
1926년 4월 27일 ~ 1947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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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colcolor=#FFF> 본관 사성 전주 이씨[1]
방자(方子)[2]
부모 부친 나시모토 모리마사
모친 나시모토 이츠코
배우자 의민황태자 영왕[3]
자녀
슬하 2남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이진 (李晋, 1921 ~ 1922)
차남 - 회은황세손 이구 (懷隱皇世孫 李玖, 1931 ~ 2005)
종교 신토천주교 (세례명: 마리아)
신체 156cm, 46kg[4]
가혜(佳惠)
작호 여왕(女王)
→ 이왕세자비 여왕(李王世子妃女王)
→ 이왕비 여왕(李王妃女王)
사시 현덕정목온정자행황태자비
(顯德貞穆溫靖慈行皇太子妃)[5]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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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장애자 재활협회 부회장 (1963~1982)
자행회 설립[6] (1965)
사회복지법인 명휘원 이사장, 총재 (1967~1986)
수원시 자혜학교 이사장 (1975)
광명시 명혜학교 이사장 (1982)
부용회 명예회장[7]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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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3위 훈이등보관장 (1919)
정3위 훈일등보관장 (1926)
서울특별시 문화상 (1972)
대한적십자 박애장 금상 (1977)
국민훈장 모란장 (1981)
소파상 (1981)
5.16 민족상 (1981)
국민훈장 무궁화장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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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이름과 호칭3. 생애4. 가족 관계
4.1. 친가4.2. 외가4.3. 형제
4.3.1. 친자매4.3.2. 사촌 여동생
4.4. 시가
4.4.1. 가정
5. 여담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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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결혼 전 이방자 여사.png
파일:19_영친.jpg
<rowcolor=#fff> 결혼 전, 여동생 노리코와 함께 1920년 영친왕과의 결혼식 사진출처

왕공족이자 교육인.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의 부인이다.

1962년, 대한민국 국적 취득 후 복지 사업에 전념하였다. 한국의 마지막 왕비는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계비인 순정효황후이나, 일제강점기 이왕가까지를 범주에 포함할 경우 한국 구 황실의 마지막 왕비로 간주한다.

2. 이름과 호칭

원래 이방자는 일본 방계 황족이었으며, 부계 혈통상 스코 덴노의 18대손이다. 결혼 전의 호칭은 마사코 여왕(方子女王)였으며 지위는 여왕(女王)이었다. 여왕은 일본 황실의 칭호 중 하나다. 본래 천황의 4대손까지를 친왕(남)/내친왕(여)이라 하고 5대손부터를 왕/여왕이라 했다. 그러다가 1947년(쇼와 22년)에 현행 황실전범으로 개정된 이후부터는 손주까지를 친왕/내친왕, 증손부터를 왕/여왕이라 한다.

영친왕과 결혼하면서 왕공족의 일원이 되었다. 일본 황족은 본래 성씨가 없다. 성으로 알려진 '나시모토노미야'는 미야고(궁호)다. 미야고는 해당 미야케(宮家)의 당주에게만 붙이는 것이기 때문에, 정식 호칭은 그냥 '마사코 여왕(方子女王)'이었다.[8] 영친왕과 결혼 후 부인이 남편의 성을 따르게 하는 당시 일본의 민법에 따라 남편과 같은 '이(李)'씨 성이 되었다. '이방자'라는 이름은 본명인 마사코(方子)를 그대로 한국식으로 읽어서 완성된 이름이며, 일본에서는 원어 그대로 '리 마사코'라고 부른다. 남편의 성을 그대로 따랐으므로 본관은 전주 이씨라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영친왕의 지위는 이왕세자였고, 순종황제가 사망한 후에 이왕이 되었다. 이에 이방자는 결혼 당시 '이왕세자비 마사코 여왕(李王世子妃方子女王)'으로 불렸고, 영친왕이 이왕에 오른 뒤에는 '이왕비 마사코 여왕(李王妃方子女王)'이 되었다. 엄밀히 따지면 이방자는 황족 이외의 남성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신적강하가 될 수도 있었지만, 당시 왕공족은 일본 황실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고, '여왕' 칭호를 유지하라는 다이쇼 덴노의 칙령(『관보』 제2320호 「궁정록사」)도 있었기에 이후에도 여왕 지위를 유지하였다. 1947년(쇼와 22년) 왕공족 제도 폐지 뒤에는 그저 '이방자(리 마사코)'로 불렸다.

대한민국에선 대한제국의 기준에 맞출 경우 '영친왕비(英親王妃)'라고 부르거나 '의민황태자비(懿愍皇太子妃)'라고 부르는데, 사실 이는 틀렸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현덕정목온정자행황태자비(顯德貞穆溫靖慈行皇太子妃)'라는 사시(私諡)[9]를 올렸으므로 대한제국에 맞춘 다면 '자행비'가 올바른 명칭이기 때문이다.

기타 존호를 앞에 쓰고 시호를 맨 끝에 붙이는 조선의 관행상, 시호로 호칭할 경우 '자행황태자비'나 '자행태자비'가 된다. 그런데 왜 '자행비'로 부르는 게 맞냐면, 대한제국 황태자비의 시호는 '○○비'였기 때문이다. 순명효황후가 황태자비로서 받은 시호는 '순명비'였다. 중국에선 이런 경우 '○○황태자비'로 시호를 올렸는데, 이방자의 사시는 이를 참고해서 지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의민황태자비'든 '자행비'든 간에 상기해야할 점이 있다. 이방자는 대한제국황태자비로 정식 책봉받은 적이 없다는 것. 왜냐하면 1897년부터 1910년까지 존속했던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인 1920년에 영친왕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들은 왕공족을 여전히 황족으로 여겼기 때문에, 8.15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도 왕공족과 결혼한 이나 왕공족으로 태어난 이들도 일반적으로 대한제국의 황족으로 간주하는 편이지만, 엄밀하게 따지자면 이들은 '대한제국의 황족'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이방자 외에 1912년생인 덕혜옹주이우, 1931년생인 이구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당시 왕공족으로서 이왕세자 지위에 있었던 이은과 결혼한 이방자를 '황태자비'로 대우하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옳지 않다. 다만 황태자 이은의 하나뿐인 아내이기 때문에 황태자비로 여기고 대우했던 것이다. '자행황태자비'라는 황태자비 자격의 시호는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이 멸망한 대한제국 황실을 대신하여 사사로이 올린 시호(사시)일 뿐이다. 그 때문인지 이방자는 사시나 그 약칭으로 불린 적이 거의 없다.

'이방자 비'라 부르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이 명칭은 일본 황실의 호칭 체계에 따른 것(이름+비)이라 현대 한국에선 원칙적으로는 적절한 호칭이 아니다. 다만 왕공족 시절의 이방자를 가리키는 경우에 한해서 쓰이는 경우가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호칭은 '이방자 여사'이며, 엄밀히 따지면 이 호칭이 가장 적절하다. 현대 한국에서 사시를 인정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이왕가 시절의 호칭을 부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전에 본인 스스로 '이방자 여사'라는 명칭으로 대중매체와 접촉했으며, 1981년 한 여성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어였던 배우 장미희가 "호칭을 어떻게 할까요? 비 전하(妃殿下)라고 해야 할까요?"라고 묻자, 이방자 본인이 "그냥 편한 대로 '여사'라는 호칭을 써 주세요."라고 직접 대답한 적이 있다.

3.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방자/생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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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족 관계

파일:2ba0aeeb413ba641cb723dae154df559.jpg
어린 시절의 이방자.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4.1. 친가

아버지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梨本宮守正王)은 일본 황실의 분가인 나시모토노미야의 당주로,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과 '뇨보(女房)'라는 직위의 시녀였다고 전해지는 측실 하라다 미쓰코(原田光枝子)의 4남으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구니노미야 다다(久邇宮多田)였으나, 메이지 덴노의 명에 의해 작은할아버지 모리오사(守脩) 친왕이 창설한 나시모토노미야 가문에 양자로 입적되면서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으로 개명했다. 모리마사 왕의 형제로는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10] 왕,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 등이 있다.

메이지유신 이전의 남성 황족들은 유명한 사찰에서 대처승로 있었으나, 메이지유신 이후로는 승려 대신 군인이 되어야 했다. 이방자의 할아버지인 아사히코 친왕도 밀교(천태종) 사찰인 쇼렌인(青蓮院)의 주지승었으나 환속했고, 아버지 모리마사 왕도 군인이 되었다. 사실 나시모토미야 가문 자체가 교토 산젠인(三千院)의 별칭 중 하나였던 '나시모토보(梨本坊)'에서 따온 것으로, 히에이산 엔랴쿠지(延暦寺) 근처에 있던 커다란 배나무 옆에 암자를 지었다는 일화에서 유래했다.

이후 모리마사 왕은 이세 신궁의 신주도 맡았는데, 그 때문에 패전 후 일본 황족으로서는 유일하게 전범으로 극동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었고,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세 신궁 항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일본 황실의 조상신을 모시는 신토의 핵심을 이루는 장소이므로, 국가신토에 대한 처벌을 이유로 상징적으로 기소·처벌된 것이다. 모리마사 왕은 스가모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했다.

패전 후인 1947년, 다이쇼 덴노의 직계 후손을 제외한 모든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은 평민 신분으로 강등(박탈)당했다(신적강하). 황족이던 나시모토노미야 가문도 이때부터 평민 나시모토 가문이 되었고, 신분과 재산을 잃고 어려움을 겪었다.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에는 이런 일화도 나온다. GHQ가 옛 황족들에게도 막대한 세금을 내도록 요구하자, 일자리가 없던 옛 황족들은 당연히 저택과 별장 등을 팔아서 겨우 생계를 이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집에 침입해서 옷가지까지 모조리 쓸어가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는데, 이를 알고 불쌍히 여긴 황실에서 옷을 하사해서 한동안 그 옷을 입고 다녀야만 했다고 한다.

모리마사 왕은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이복동생 다카 왕의 막내아들인 노리히코1966년 나시모토 가문에 입적되었다.

다만, 모리마사 왕 생전에는 외손자(차녀 노리코의 3남) 요시미쓰(儀光)가 양자로 들어왔으나 관계가 악화되어 파양했고, 이후에 새로이 양자로 들어온 사람이 노리히코. 참고로 현재도 그렇지만 황실전범에서는 황족의 양자 입양을 허락하지 않는데, 역설적으로 신적강하로 평민이 되었기 때문에 양자를 들일 수 있었던 것.

노리히코는 5촌인 마사코 여왕(正子女王, 1926-)[11]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내 마사코와 자녀들도 노리히코와 함께 나시모토 가문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노리히코와 마사코는 1980년 이혼했고, 이때부터 자녀들과 관계가 소원해진 노리히코는 아들을 후계자에서 제외해 버렸다. 2002년 노리히코는 황족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다카오(隆夫, 1938-)라는 사람을 양자로 입적했고, 이 사람이 현재 나시모토 가문의 당주이다.

====# 일본 구황족 가계도 #====
쇼와 22년(1947년) 직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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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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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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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라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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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외가

어머니 이츠코(伊都子) 비는 화족 나베시마 가문 출신으로, 나베시마 나오히로(鍋島直大)와 후처 히로하시 나가코(廣橋榮子)의 딸이다. 나오히로에게는 차녀(셋째), 나가코에게는 장녀(첫째)가 된다.

나베시마 가문은 히젠국(肥前國) 사가(佐賀) 번의 다이묘 가문으로, 시조인 나베시마 나오시게임진왜란 때 대규모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한 바 있다. 나오시게는 임진왜란 당시 2진이었던 가토 기요마사의 휘하로 참전했다. 휘하라고는 하지만 출정 당시 가토의 본진보다도 병력이 많았다. 선조의 두 서자 임해군순화군을 사로잡기도 했다. 정유재란 때는 4진으로 왔고, 울산성 전투 당시 조명 연합군에 의해 울산성에 고립된 가토를 구원하였다.

왜란 이후 나오시게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서군)의 편에 가담했고, 사가 성을 짓는 등 가문의 기초를 다졌고, 나오시게의 아들 나베시마 가츠시게(鍋島勝茂)가 사가 번의 번주가 되었다.

이방자의 외할아버지인 나오히로는 제11대 번주였다. 사가 번이 속한 히젠 지역이 사쓰마 번, 조슈 번, 도사 번과 더불어 토막운동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나오히로도 무진전쟁에 참전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화족 제도가 생기자 나오히로는 후작 작위를 받았고, 새로운 메이지 정부에서 일했으며, 영국 유학 이후에는 외교관으로도 일했다.

본래 나오히로는 우메타니 타메코(梅溪胤子)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낳았으나, 타메코가 죽은 후 히로하시 나가코와 재혼하여 4남 4녀를 더 낳았고, 아사치요(朝千代)라는 측실에게서도 딸을 1명 낳았다. 이탈리아의 수도인 로마에 있을 때 낳은 차녀에게 '이츠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이는 '이탈리아(伊)의 수도(都)에서 낳은 아이(子)'라는 뜻이다.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 들어 일본청일전쟁, 의화단 운동 진압, 러일전쟁 등을 치르며 제국주의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해외에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일본 여성들도 애국부인회와 간호부인회 등의 단체를 조직해 후방에서 일본군을 지원했다. 나베시마 가문의 근거지인 사가현에서도 승려(대처승)의 딸인 오쿠무라 이오코(奧村五百子)에 의하여 애국부인회가 결성되었고, 이오코는 일본 전역을 순회하며 열성적으로 활동했다.[12]

황족·화족 여성들도 이러한 활동에 참여했으며, 이방자의 외할머니 나가코와 어머니 이츠코도 일본적십자사 간호부인회에서 활동했다. 나가코는 간호부인회 총괄 책임자로서 1900년 7월 1일 요코하마 항구에서 청나라로 떠나는 적십자사 간호부들을 배웅했다. 이츠코는 붕대 감는 법, 의복 및 침상 교환하는 법 등을 배웠고, 결혼하여 이방자를 낳은 후로도 간호 교육을 받았다.

나오히로의 4녀 마츠다이라 노부코(松平信子)는 훗날 다이쇼 덴노의 차남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장모가 되었다. 노부코는 황실의 사돈이라는 배경으로, 가쿠슈인 동창회장 및 황족·화족들의 우두머리로 군림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1959년 평민 쇼다 미치코아키히토 황태자에게 시집올 때는 반대 운동의 선봉에 섰다. 이츠코도 여동생 노부코와 함께 미치코를 반대했다. 이츠코는 평생에 걸쳐 일기를 썼는데, 당시 일기에 "이제 일본도 다 끝났구나!!"라고 썼다고.

나오히로와 측실 아사치요 사이에서 태어난 5녀 마츠다이라 도시코(松平俊子)는, 의친왕의 장남이자 자신의 시조카가 되는 이건의 장모가 되었다.

메이지유신대정봉환으로 도쿠가와 막부 체제가 붕괴되고 천황이 직접 일본을 통치하게 되자, 일본의 유력한 다이묘 가문들은 황족 가문과 결혼하려고 애썼다. 다이묘들은 가문의 격을 높이고 싶었고, 대부분 별로 유복하지 못했던 황족들은 경제적인 도움을 원했기에, 일종의 윈 - 윈인 셈이었다. 나시모토노미야 가문의 아들 모리마사 왕과 나베시마 가문의 딸 이츠코의 결혼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에 나베시마 가문은 이츠코를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가문에 시집보내면서, 재물을 그야말로 쏟아부었다. 한 예로, 프랑스 파리까지 하인을 보내어 왕관 등 각종 보석 세트를 만들어왔는데, 하인이 일본과 프랑스를 오가는 시간과 보석 세트를 만드는 시간을 다 합하여 꼬박 1년 반이나 걸렸다고 한다. 왕관 하나에만 2만 몇천원이었고, 보석 세트를 다 합하면 십 수만 원이나 들었다. 당시는 일본 총리의 연봉이 9,600원이었고, 30,000원만 있어도 그 이자만으로 평생 부유하게 살던 시절이었다. 거기다가 하인의 교통비와 프랑스에 머무는 비용까지 합하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게다가 혼수로 왕관과 보석만 마련해 간 것도 아닐 테니, 상상도 되지 않는 규모이다.

4.3. 형제

4.3.1. 친자매

친자매로는 6살 아래의 여동생 히로하시 노리코(廣橋規子, 1907-1985)가 유일하다. 노리코 여왕은 방계 황족인 야마시나노미야 다케히코 왕(山階宮武彦王, 1898-1987)[13]의 후처가 될 예정이었으나, 다케히코 왕의 정신병으로 인해 약혼이 취소되었다.

다케히코 왕은 1922년 방계 황족인 사키코 여왕(佐紀子女王)과 결혼했으나, 관동 대지진 때 임신 중이던 사키코 비가 건물 붕괴로 깔려 사망했고, 그 충격으로 다케히코 왕은 정신병을 앓게 되었다고 한다. 다케히코 왕은 1931년 현역에서 예비역으로 편입되었고(최종 계급은 일본 해군 소좌), 1947년 신적강하 당시 평민으로 격하되어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가 1987년 8월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 야마시나노미야 가문은 직계 기준으로는 단절되었다. 다케히코 왕의 친남동생인 요시마로(芳麿, 1900-1989)는 전쟁 전에 후작 직위를 받고 신적강하했는데, 그도 자식이 없어 여동생 아사노 야스코(淺野安子)의 차남 요시마사(芳正)를 양자로 들여야 했다. 그리고 더 아래에 있던 이복 남동생들도 신적강하하여 황적에서 이탈했다.

파혼 이후 노리코 여왕은 히로하시 타다미츠(廣橋眞光) 백작과 결혼하여 백작부인이 되었고, 3남 2녀를 낳았다. 타다미츠는 노리코의 외할머니 나가코의 오빠인 히로하시 마사미츠(廣橋賢光)의 아들로, 노리코의 어머니 이츠코 비에게는 외사촌 남동생이며, 노리코 본인에게는 당숙이 된다.

나시모토노미야 가문에 딸만 둘이라서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하자, 노리코의 3남 요시미츠(儀光)가 나시모토노미야 가문에 입적되었다. 그러나 요시미츠는 외할머니 이츠코 비와 사이가 나빠져 파양되었다. 이후 위에서 서술한 대로 노리히코와 다카오가 나시모토 가문을 이었다.

4.3.2. 사촌 여동생

사촌 여동생 중에는 훗날의 고준 황후가 된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이 있다. 이방자는 1984년경향신문》에 기고한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에서, 어린 시절의 나가코 여왕에 대하여 "여성으로서 마음씨가 곱고, 우아하고, 총명하며, 노래를 잘 불렀다."라고 회고했으며, 히로히토 황태자의 비가 된 나가코 여왕에 대해 "내 백부님[14]의 딸이며 사촌 여동생이기 때문에, 그녀가 황태자비가 된 것이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이종사촌 여동생인 마츠다이라 세츠코아이즈 번의 마지막 번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의 손녀로,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비가 되었다. 또 다른 이종사촌 여동생 마츠다이라 요시코(松平誠子)는 의친왕의 장남 이건의 아내가 되었으나, 패전 후 이혼하였다. 이때 요시코는 이름의 한자를 佳子로 고쳤는데, 고준 황후의 증손녀 카코 공주와 같은 한자이다.

4.4. 시가

4.4.1. 가정

  • 남편 : 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英王) 이은(李垠)
    • 장남 : 황손(皇孫) 이진(李晋) - 요절
    • 차남 : 회은황세손(懷隱皇世孫) 이구(李玖)
      • 며느리 : 줄리아 멀록(Julia Mullock, 이주아(李珠亞))
        • 양손자 : 황사손(皇嗣孫) 이원(李源)
        • 양손녀 : 이은숙(李恩淑, Eugenia Unsuk)

5. 여담

  • 일본 방계 황족 출신이고 한국어는 사망할 때까지도 서투른 편이라서, 대부분의 대화도 거의 일본어로 했다. 드라마 작가인 신봉승 선생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2011년), 일본인 혼다 세츠코(本田節子)의 《비련의 황태자비 이방자》(1989년) 등에는 이방자 여사의 한국어 실력에 관해 비판적인 어조로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 이방자 여사의 생애 중 한국어에 노출된 시간이 과연 얼마였을지 생각해보면, 한국어에 서툴다고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이방자 여사는 원래 일본인이었고, 결혼한 후에도 내내 일본에서 지내다가, 박정희가 집권한 1960년대에야 한국 국적을 취득하여 한국에서 살게 되었는데, 그 때는 이미 노년이라 외국어를 새로 배우기는 힘들었다. 또한 남편 영친왕도 어려서 일본으로 끌려가 인질 생활에 일본식 교육을 받았던 탓에 일본어가 유창했고, 소위 옥음방송이 있던 1945년까지 눈치가 보였는지 왕래하던 한국인들 앞에서도 한국어로 말한 바가 거의 없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어 자체는 숨을 거둘 때까지 유창했다고 한다. 당시 MBC 뉴스데스크에 보도되었던 생전 인터뷰 영상을 보면 서툰 한국어 실력[20]을 확연히 알 수 있다.(당시 이방자 여사 인터뷰)[21]
  • 국적을 묻는 질문에는 단호하게 "이제는 한국인입니다"라고 말할 만큼 한국인으로서 살려는 의지를 보였고, 경계인으로서 생애나 사회사업과 자선사업 등의 말년 행적 때문인지 국내에서의 평가도 우호적 또는 동정적인 편이다.이방자, 봉사와 헌신의 기품(한국일보)[22]
    내게는 2개의 조국이 있다. 하나는 나를 낳아준 곳이고, 하나는 나에게 삶의 혼을 넣어주고 내가 묻힐 곳이다. 내 남편이 묻혀있고 내가 묻혀야 할 조국, 이 땅을 나는 나의 조국으로 생각한다.



    ―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 中.[23]
  • 다만 일부 다른 관점에서 본 반론도 존재한다. 온당치 못했던 결혼 과정 자체가 결국은 대한제국 황족의 독립운동을 견제하고 감시하기 위해서였다는 주장으로, 이 설에 따르면 이방자가 시집가기 전 친정아버지 모리마사 왕이 이방자를 앉혀놓고 "남편을 잘 감시하라"며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물론 아버지와 딸의 생각이 같다는 보장도 없을 뿐더러, 이후 이방자 여사의 삶을 보면 딱히 남편을 감시한 삶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또 아버지의 말도 좋게 해석하자면, 단순히 딸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다. 사위일본 제국과 사이가 틀어지기라도 하면 딸의 인생도 고단해질게 뻔하니까. 애초에 자신의 혼인 자체를 신문을 보고 알게 되었을 정도로, 어찌보면 이방자 역시 정략결혼의 피해자였다.
    망국한을 되씹으며 몸부림치는 그 분을 보며, 나는 한·일 융화보다 외로운 그분의 따뜻한 벗이 되고자 했다. 암담한 인생길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인간으로서 깊은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이방자,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 中.[24]
  • 황손 이석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방자 여사가 한국에서 활동할 때 다른 황족을 도우라는 명목으로 정부에서 받은 지원금을 사회봉사 등 자신의 자선활동에만 썼다"고 주장했지만, 이석이 논란이 있는 사람인만큼 그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데에는 어려움이 있다.[25]
  • 한국에 귀화한 이후 남편 영친왕의 유지를 이어받아, 당시 한국에서 아직 진행되지 않았던 장애아동 교육[26]에 몰두했다. 그는 1967년 경기도 안산시소아마비정신지체 장애인을 위한 사회복지법인 '명휘원'을 설립했고, 1971년에는 수원시에 지적장애 어린이 학교인 '자혜학교'를, 1982년에는 광명시특수학교 '명혜학교'를 잇달아 세웠다. 학교와 단체를 운영하기 위해 그는 정부 지원 외에 자신의 서예와 그림, 자수 등 작품들로 자선바자를 열곤 했다.
  • 그가 설립한 장애인 보호시설 명휘원의 이름은 남편 영친왕의 아호 '명휘(明暉)'에서 따온 것으로, 이방자가 1967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에 설립한 것이 그 시초다. 1983년 천주교 세례성사를 받은 이방자 여사는 2년 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을 통해[27], 1985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에 운영을 맡겼고, 1990년 현 장소로 이전됐다.## 이 수녀회에서 이 여사가 설립한 명혜학교도 인수해서 그 뜻을 이어받아 운영 중이다.
    “(이방자 여사는) 당신의 정신과 사랑을 불우한 이들, 지체장애인들에게 쏟으셨습니다. 때문에 복음에서 이어지는 모든 말씀은 이분에게 그대로 해당된다고 아니 말할 수 없습니다. 영세하시고 그리스도께 귀의하신지는 오래 되지 않았지만, 이분의 마음에는 하느님이 일찍부터 계셨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김수환 추기경, 이방자 여사 장례 미사 강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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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자 여사와 김수환 추기경
  • 취미이기도 했던 칠보소식의 특기를 살려 서울칠보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오늘날 현대 칠보는 1960년대 말에 김기련(金琦連)씨, 이방자 여사와 같은 독일과 일본에서 배우고 돌아온 인물들에 의해 칠보 유약의 개발, 교육 등 본격적으로 보급·발전됐다고 한다.#
  • 기금 마련을 위해 칠보와 자기, 글씨, 그림 등을 그려 전시회도 열었으며, 하루 종일 일을 하여 20~30개의 반지, 브로치 액자 등을 만들어 바자회도 열고, 궁중의상 쇼도 열며 자금을 모았고#, 그 돈으로 지적장애아동시설인 명휘원과 지적장애 양호학교인 자혜학교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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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보 작품을 만들고 있는 이방자 여사
  • 생전 창덕궁 옆에 위치한 중앙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담배를 피우고 교사 몰래 꽁초를 창덕궁 안에 던져 처리하는 일이 있고는 했다는데, 이방자 여사는 이 모습을 볼 때마다 "어디서 감히 학교에서 담배를 피우냐"며 크게 역정을 내고는 했다고 한다.
  • 가장 즐겨 쓰고 좋아했던 글자는 '화합할 화()'[28]
  • 어느 날 창덕궁 낙선재에 낯선 스님이 불쑥 나타나 친척이라며 면회신청을 했다. 이방자 여사는 처음에 어리둥절 하다가 스님이 "자신은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라고 설명을 하자 활짝 웃으며 “맞아요. 전주 이씨는 모두 일가친척이지요. 친척 스님이 귀한 걸음을 하셨네요.”라고 말하며 반겨주었다고 한다.[29]
  • 1973년 숙원사업이던 영왕(영친왕)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켜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영친왕과 왕가의 유물들을 보전하는 데 마지막 사명을 다하였다.#
  • 이방자 여사는 1981년 4월 20일 장애인 복지활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으며, 사후인 1989년 6월 1일 국민훈장의 최고 등급 무궁화장에 추서됐다.
  • 복지단체 '자행회'를 발족시킬 때부터 이방자 여사와 특수교육을 함께 했던 김수임 할머니는 책 《영왕비 전하의 뜻을 따라》를 통해 이방자 여사의 사회봉사를 기리는 한편, 그를 참배하기 위해 한달에 2번씩 어김없이 '영원'을 방문하고 있다고 한다.기사 두 사람의 인연은 1965년 늦가을, 이방자 여사가 부군인 영친왕의 복지사업 뜻을 받아 특수학교 견학 차 김수임 할머니의 장남이 교사로 근무하던 수원농아학교를 방문하면서 시작됐다.
김수임 할머니는 일본어가 능숙했고, 중국에서 일본인과 같은 집에서 살았던 적이 있어 일본 요리도 곧잘 만들어 이방자 여사와 첫 만남부터 대화가 잘 통했다고 한다. 더욱이 복지사업을 구상하던 이방자 여사에게 할머니는 '장애인 교사'의 어머니로서 대단한 열성과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첫 눈에 인정받았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힘을 합쳐 1967년 심신 장애아를 위한 복지단체인 자행회(慈行會)를 발족시켰다. 1971년에는 사회복지법인 명휘원(명휘는 영친왕의 아호)을 설립하는 등 그 당시 개념조차 정립이 안 돼 있던 '장애인 복지와 사회복지'를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이방자 여사와의 첫 만남부터 계속되는 참배에 대한 소회를 풀어 지난 1월 15일 <영왕비 전하의 뜻을 따라>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이방자 여사와 얽힌 여러 가지 일화를 잔잔하게 들려준다. 이 책에 글귀 중 하나다.
"본의 아니게 일생을 두 나라 국민으로 일본에도 한국에도 성(誠)을 다하신 그분을 곁에서 25년 동안 지켜보며 많은 것을 배웠고, 아껴주신 고마움을 한 순간도 잊지 못하며 고집쟁이 내 인생의 역사를 바꾸어주신 덕분에 오늘도 남 위해 살려고 노력하는 나날이 나이를 잊고 힘에 겨운 목표를 향해 기적을 바라며 살고 있다."#
  • 이방자 여사가 사망하기 8년 전인 1981년 새해 초, 당시 톱스타였던 장미희가 창덕궁 낙선재로 이방자 여사를 찾아와 인터뷰를 했다. 주제는 '여자의 행복'.#
  • 자서전으로 《지나온 세월》, 《세월이여 왕조여》를 남겼다. 《세월이여 왕조여》는 《경향신문》에 1984년부터 연재하기 시작해 1985년 단행본으로 나왔으며 2013년에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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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년에는 이방자 여사의 일생을 담은 평전 《낙선재의 마지막 여인》이 출판됐다.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시즈오카복지대학 명예교수 오타베 유지(小田部雄次)가 저술했다.
  • 2010년, 친필 일기가 공개됐다. 1919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총 136일의 기록이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로서의 설레는 감정과 약혼자 영친왕에 대한 연민, 결혼식을 나흘 앞두고 발생한 고종 황제의 승하와 그로 말미암아 결혼 연기, 영친왕의 고국 조선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 등의 내용이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 2015년에는 이방자 여사가 설립한 자혜학교에 이방자 여사와 영친왕의 동상이 세워졌다. 약 3m 높이의 제단 위에 놓인 동상은 이 여사와 영친왕이 나란히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염태영 수원시장을 비롯해 지역 사회·교육 관련 단체와 종교계 인사, 주한일본대사관 관계자도 참석해 축하했다.#
  • 2018년에는 이방자가 손수 만든 작품들이 전시회로 대거 공개됐다. 칠보 한복부터, 어릴 적 쓴 글씨와 그림, 도자기 등 200여 가지가 공개됐다. 밑 그림 한매쌍작'(寒梅雙雀·연도미상)은 이방자의 수묵채색화 중 대표작이다. 1970년 사망한 남편 영친왕을 그리워하며 즐겨 그리던 주제라고 한다.# 뿐 아니라 여러 수묵채색화 작품을 남겼는데, 자선사업을 위해 다작을 한 편이라서 퀄리티에 비해 가격대가 그리 높지 않아 고미술 매니아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때 자선사업으로 도자기도 많이 남겼는데, 직접 제작한 것은 아니고 천한봉, 유근형 등의 1세대 도예가들의 작품에 수결을 넣어 완성한 작품들이다. 1세대 도예가들이 워낙 대단한 명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방자 여사의 도자기도 인기가 많다. 1세대 도예가들은 대중적 인지도는 굉장히 낮은 편인데 반해, 이방자 여사는 아무래도 역사책에도 등장할 만큼 대중적 인지도가 큰 편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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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매쌍작(寒梅雙雀)
  • 2019년 사망 30주기를 맞아 일본에서 추모제가 열리기도 했다.# 요미우리 테레비에서도 특집 방송을 하기도 했다.방송
  • 2021년 그가 보관하던 조선시대 왕가의 어린이들이 입은 옷이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됐다. 영친왕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문화재청은 "영친왕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전하지만 옷의 주인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고, 옷의 크기로 미루어 볼 때 실제 영친왕이 착용했다고 특정할 수는 없다."고 전했다. 이 복식 유물은 1998년 숙명여자대학교가 기증받았고, 이방자 여사가 보관하던 것으로 전해진다.#

6. 대중매체에서

  • 이방자를 다룬 방송 프로그램으로는 1989년 5월 1일 MBC에서 추모 특집으로 방영한 다큐멘터리 〈최후의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가 있다.
  • 1990년 KBS 8.15 광복절 특집드라마 〈왕조의 세월〉에서는 배우 이휘향이 연기했다. 10대 후반부터 80대 노인의 모습까지 나왔으며, 남편 영친왕은 서인석이, 이방자의 부친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은 김진해가, 어머니 이츠코 왕비는 정영숙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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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세월
  • 소설가 송우혜[31]의 《마지막 황태자》 시리즈[32]에서도 이방자의 삶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 2005년 정하연 작가와 함께 이방자 여사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 제작을 준비 중이라는 기사가 뜨기도 했다. 언론 기사에는 "현재 시놉시스가 완성된 상태이며 주연으로는 김희애가 물망에 오르고 있다"고 적혀있었다. 그러나 독도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갈등이 빚어져 무산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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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를 이은 왕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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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마지막 근현식
한국 측에서 촬영 협조를 받았기 때문인지 역사적 서술에서 일제강점기를 의도적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일례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가 잠시나마[36] 언급되는가 하면, 관동 대지진 당시 한국인 학살에 대해 남편 영친왕이 격노해서 뛰쳐나가려 하고, 이방자는 학살에 대해 "너무 심하다"고 한탄하는 장면까지 있었다. 그러나 드라마의 타이틀에도 언급되는 주 소재가 부부애인 만큼, 둘 사이에서 있었던 일 중 껄쩍지근한 면[37], 특히 일본에 불리한 측면은 언급없이 넘어가는 부분도 있기는 하다. 경제 사정으로 상당히 고생했던 일본 패망 이후의 삶 전까지의 내용만 다루고 있는데 이방자 여사는 전후 작은아들인 이구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여 살던 기간을 가장 행복한 시기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하지만 이 내용까지 다루려면 긴 방영 기간이 필요했을 것. 일제강점기를 다룬 작품임에도 신경을 쓴 흔적이 많이 보이는 괜찮은 작품이다.
  • 2015년 그의 인생을 일본에서 뮤지컬로 만들기도 했다. 제목은 〈더 라스트 퀸 조선 왕조 마지막 황태자비(ザ・ラストクイーン 朝鮮王朝最後の皇太子妃)〉.# 재일동포 성악가 전월선(田月仙)이 이방자 역을 맡았다.#
  • 2020년부터 일본의 유명 소설가 하야시 마리코(林真理子)[38]가 이방자 여사와 영친왕의 결혼을 그려낸 소설 《이왕가의 혼담(李王家の縁談)》을 연재했다.#

[1] 일본 방계황족이라 원래 성씨가 없었으나 결혼 후 남편 영친왕 이은의 성을 따랐으므로 자연스레 전주 이씨가 되었다.[2] 일본어 발음은 '마사코'인데, 일본에서는 왕공족 제도 폐지 후 '리(이) 마사코'라고 부르기도 했다.[3] 영친왕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의민황태자 영왕'이란 명칭은 처음 들어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영친왕이 1970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사적으로 시호를 올리는 사시(私諡)제도를 했기 때문이다. 사시 제도는 아무런 법적인 효력은 없으나, 영친왕이 마지막으로 종묘 영녕전 세실에 모셔지게 되면서, 통상 명칭을 영친왕으로 하나, 사시에 올려진 것은 의민황태자 영왕이라 했기에 표기한다.[4] 출처[5] 사망 후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으로부터 받은 사시(私諡).[6] 장애인교육과 복지증진을 위해 창립한 자선단체.[7]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남편과 결혼한 일본인 아내들 중 해방 직후 귀국하지 못한 사람들의 모임.[8] 다만 성씨가 없는 일본 황족 특성상, 당주가 아니더라도 미야고를 성씨처럼 쓰기도 한다.[9] 사적인 시호. 영친왕과 이방자는 순정효황후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수립 이후 사망했으므로 공적인 시호를 받지 못했다.[10] 고준 황후(나가코)의 아버지이자 쇼와 덴노의 장인. 훗날 조명하 의사의 타이중 의거에 피습당해 암살당했다.[11] 고준 황후의 큰오빠인 구니노미야 아사아키라 왕(久邇宮朝融王)의 장녀.[12] 한편 이오코는 일본의 폭력 우익조직 흑룡회를 등에 업고 전라남도 광주에 왔으며, 한국일본 불교를 포교하고 일본인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13] 아버지 쪽으로 6촌이 된다.[14]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사실 더 위로도 가야노미야 구니노리 왕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병약해서 구니노미야 가문을 잇지 못하고, 구니요시 왕이 구니노미야 가문을 이었다.[15] 의친왕의 차남으로, 후에 운현궁 종가의 영선군 이준용에게 양자 출계한다.[16] 의친왕의 3남으로, 후에 소현세자파 종가의 이기손에게 양자 출계한다. #[17] 의친왕의 4남으로, 후에 은전군의 종가인 은전궁 종주 이헌용에게 양자 출계한다.[18] 의친왕의 5남으로, 후에 인평대군의 종가인 대궁 종주 이인용에게 양자 출계한다.[19] 의친왕의 7남으로, 후에 연령군의 종가인 계동궁 종주 이기용에게 양자 출계한다.[20] 엄격하게 말하면 발음 문제이지 대한민국 사람이면 어느정도 알아들을수 있는 상황이다.[21] 자세히 들어 보면 순헌황귀비시어머니라고 인터뷰 했다.[22] 때문에 운보 김기창, 이당 김은호 등의 화가들이 친일파 논란을 겪는데 비해, 되려 이방자 여사의 서예과 그림 등은 이런 논란없이 인기가 있는 편이다.[23] 출처 : #.[24] 출처 : #.[25] 오히려 이석 씨야말로 중앙정부나 문화재청도 아닌, 전주시민들의 세비를 그것도 무상에 어거지로 받아 승광재라는 곳에 살면서 멋대로 사용(私用)해 몇 번씩이나 구설수에 오른 바 있다. 이와는 별도로 이방자의 자선활동은 육영수 여사의 지원을 등에 업고 이뤄진게 많다. 이 때문에 육영수의 차녀인 박근령이 이방자 동상 건립때 축하인사를 건넸다.[26] 주로 지적장애아, 지체장애아.[27] 이방자 여사가 1989년에 사망한 후, 김수환 추기경은 창덕궁 낙선재에서 장례 미사를 주례했다.[28] 출처 : #.[29] 출처 : #.[30] 1984년 《경향신문》에 연재한 〈세월이여 왕조여〉를 기본 텍스트로 하고, 이후 황손 이구가 사망한 2005년까지 조선 황실의 근황을 정리하여 보완했다.[31] 송몽규의 조카이다.[32] 1권: 《못생긴 엄 상궁의 천하》, 2권: 《황태자동경 인질살이》, 3권: 《왕세자 혼혈 결혼의 비밀》, 4권: 《평민이 된 왕 이은의 천하》.[33] 영친왕을 맡은 오카다 준이치의 한국어가 엄청나게 어눌한데 정작 영친왕은 일본어와 한국어를 둘 다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던 사람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당시 인기 남녀 배우가 대한제국황족 역할을 맡았고 이를 긍정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34] 극 중 영친왕 내외가 입고나온 대례복과 궁중 한복도 MBC 의상팀에서 제공해준거라고 한다. MBC와 미국 CBS, 일본 후지 TV 등은 서로 민간 네트워크 제휴 관계를 맺고 있고 MBC는 후지TV 오다이바 사옥에 도쿄 지국이 있고 거꾸로 후지TV는 MBC의 상암 본사에 서울지국이 있다.[35] 궁녀의 경우 전익령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재연 배우인 변신호가 연기했다. 특히 전익령이 연기한 궁녀 이천희는 어린 시절의 영친왕과 매우 친한 사이로 나오고 이후 궁을 나와 일반인과 결혼해서 낳은 딸이 숙명여학교에 진학하여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영친왕을 만나는 모습도 나온다.[36] 안중근 의사가 손가락을 끊고 단지동맹으로서 맹세하는 장면까지 묘사한다.[37] 이방자 여사에 앞서 이미 영친왕과 약혼했던 민갑완의 존재를 일언반구도 없이 그냥 건너뛴다.[38] 일본의 새로운 연호인 레이와 제정의 관여한 인물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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