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10:47:37

관동대학살/일본군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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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조선인 학살
2.1. 계엄령 이후 색출과 학살2.2. 나리시노 수용소 학살
3. 중국인 학살4. 아마카스 사건5. 은폐와 왜곡
5.1. 일본 정부와 군대5.2. 윤서인

1. 개요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군이 주도해서 벌인 학살을 다룬 문서. 사건 당시 일본 정부는 군인들의 가해는 숨기고 민간 자경단만이 주도한 것으로 꾸며내기도 했다. 이건 한국에서도 비슷한데 관동대학살은 알아도 군경이 이를 방조했다는 정도로만 알지 군대가 주도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제법 많다.

또 후술된 일본군 학살 관련 내용이 작성되기 전에는 무슨 일본군이 자경단의 학살으로부터 조선인을 보호했다느니, 일본군은 학살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느니, 학살을 저지른 자경단을 나무랐다느니 하는 식의 내용들이 버젓이 올라와 있기도 했다.

2. 조선인 학살

2.1. 계엄령 이후 색출과 학살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조선인들은 모여들었다. 조선에서는 일본 같은 지진이 잘 일어나지 않으니 일본인들보다 훨씬 당황하였으며 일본인과는 문화와 언어도 달라서 소통도 힘들었다. 그러니 말과 문화가 통하는 조선인들끼리 모인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일본군은 이런 행위를 이상한 움직임으로 봤다. 그리고 계엄령이 내려진 뒤 군인들이 출동했는데 이것을 적을 '토벌'하는 행위로 인식했다.

의사(국회의원)인 일본 육군 소장 쓰노다 고레시게[1]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우리 집 부근에서도 매우 소란스러워 문밖으로 나가보았더니 무장한 군대가 있었다. 그리고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적은 지금 하타가야 방면에 나타났다"고 호령하고 있어 그 장교를 붙들고 "적이라 누구인가"라고 질문했더니 "조선인이다"고 답했다. 내가 다시 "조선인이 어째서 적인가"라고 묻자 "상관의 명령일 뿐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2]

이 점은 제 5·6 구원대의 행동에서 볼 수 있다. 이와나미 기요사다 소위 등 69명과 5·6구원대는 9월 2일 오전 10시반 고마쓰가와에 도착했다. 이 군인들은 무슨 일을 했을까?

구보노 시게지가 이 때 사건을 일기에 기록했다. 구보노 시게지는 당시 제1연대 제6중대(중대장 사사키 헤이키치 대위, 뒤에 중국인·조선인 호송 담당)의 병사였다.(149-150)

구보노 시게지가 쓴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모치즈키 상등병과 이와나미 소위는 재해지 경비 임무를 띠고 고마쓰가와에 가서 병사들을 지휘하여 아무런 저항도 없이 온순하게 복종하는 조선인 노동자를 200명이나 참살했다. 부인들은 발을 잡아당겨 가랑이를 찢었으며 혹은 철사줄로 목을 묶어 연못에 던져 넣었다. 고통스럽게 죽이거나 수없이 학살한 것에 대해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처사라며 다른 사람들도 나쁘게 평가했다.」[3]

그리고 '관동계엄사령부상보' 제3권에는 '진재 경비를 위해 병기를 사용한 사건조사표'가 있다. 여기에서도 다음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일시: 9월 3일 오후 4시경
장소:에이타이바시 부근
군대 관계자: 야중 1의 2(제1연대 제2중대) 특무조장 시마자키 기마케
병기 사용자: 야중 1의 2, 포병 일등병 다이마 기사부로, 2등병 이야마 히데 외 1명
피병기 사용자: 조선인 약 32명(그 가운데 18명은 성명 미상)
처치: 사살
행동 개요: 위의 병졸 3명은 스사키 경찰서에서 호송업무 도움을 요청받고 특무조장 시마자키 기마케의 명령을 받아 순사 5명과 함께 스사키에서 폭행죄를 범한 조선인 약 30명을 동 경찰서에서 히비야 경시청에 ○○하기위해 에이타이바시에 이르렀음. 교량이 불에 타버려 건너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도선을 준비하던 도중조선인 한 사람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다른 18명도 갑자기 스미다 강에 뛰어들기에 순사들의 요청에 따라 실탄 17발을 강물을 향해 쏘았음. 강물로 뛰어들지 못하고 도망치려 한 자는 다수의 피난민과 경관에게 타살되었음.」[4]

근위사단 기병1여단(기병 13·14연대)과 제1사단의 기병 제2여단(기병15·16연대, 모두 나라시노), 야전중포병 제3여단(야중포 1·7연대)은 조선인 학살을 위해 연합하기도 했다.

엔도 사부로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실제로 나와 같이 육군대학을 졸업한 이시모토 도라조(최우수로 졸업했고, 아버지는 육군대신까지 지냄)는 나라시노 기병대에 있었고 나는 고노다이 연대에 있었지. 그 지진 때 그 녀석이 찾아온 거야. 그렇게 우수한,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게다가 군도까지 받은 사람이 말이야. 나보다 사관학교도 3년 빠르지. 그러한 인물이 '엔도 군, 협공을 하려 하니 자네도 협력해주게'라고 말하는 거야. 기병대만으로는 빠져나갈 염려가 있으니까 내 쪽에 퇴로를 차단하고, 기병대가 고토 방면의 조선인을 모두 죽이겠다는 말이었어. 어쨌든 죽이면 훈장이라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 '당치 않습니다. 그런 터무니없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라고 나는 반대하였는데, '그러나 아무래도 분위기가 그래. 죽이지 않으면 주민들이 납득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이었어. 군대란 게 그런 정도였지.[5]

경시청 외사과장 히로세 히사타다는 외무서에 다음 상황을 보고했다.
「오시마초 중국인·조선인 살해사건
현재 도쿄 지방에 중국인은 약 4,500명이 있고 그 가운데 2,000명은 노동자임. 9월 3일 오시마초 7초메에서 조선인 방화 소문과 관련하여 중국인과 조선인 300명 내지 400명을 3회에 걸쳐 총살하거나 타살했음. 제1차는 그날 아침 군대에서 청년단으로부터 넘겨받은 2명의 중국인을 총살했고, 제2차는 오후 1시경 군대와 자경단(청년단 및 재향군인회)에서 약 200명을 총살 또는 타살. 제3차는 오후 4시경 약 100명을 같은 식으로 살해했음. 이들 중국인·조선인의 사체는 4일까지도 아무런 처리가 되지 않음. 경시청에서는 바로 야전중포병 제3여단장 가네코 다다시 소장과 계엄사령부 참모장에게 이의 처리방법과 같은 지역에 아직 남아 있는 200명 내지 300명의 중국인 보호책을 요청하여 우선 고노다이 병영에서 집단적 보호를 준비하도록 함.」[6]

당시 군인들은 자경단과 합동해서 조선인과 중국인을 대량학살했다.

기병 제15연대는 교도쿠에 파견됐다. 당시 나라시노 기병연대 병사였던 에추우야 리이치는 당시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있던 나라시노 기병연대가 출동한 것은 9월 2일, 시간은 정오 조금 전이었을까, 어쨌든 몹시 급했다. 사람과 말이 전시 무장을 갖추고 병영에 정렬하기까지 소요 시간은 거의 30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2일분의 식량과 말먹이, 예비말굽까지 휴대하고 실탄은 60발, 장교는 자기 집에서 가져온 진짜 칼로 지휘·호령을 했기 때문에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뭐가 뭔지 모르는 채로 질풍처럼 병영을 뒤로하고 지바 거리를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갔다. 가메이도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경이었는데 이재민으로 범람하는 홍수같았다. 연대는 행동 개시로 먼저 '열차 검색'이라는 것을 했다. 장교는 칼을 뽑아 들고 열차의 안팎을 조사하며 돌아다녔다. 어느 열차나 초만원이어서 기관차에 쌓여 있는 석탄 위까지 파리처럼 떼지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섞여 있던 조선인은 모두 끌어내렸다. 그리고 바로 칼날과 총걸 아래 차례차례 거꾸러졌다. 일본인 피난민 가운데서 구름처럼 퍼져나오는 만세·환호의 소리! "원수! 조선인은 모두 죽여라!"하는 소리. 우리 연대는 이것을 '피의 잔치'의 시작으로 하여 그날 저녁부터 밤중까지 본격적인 조선인 사냥을 했다.」[7]

엔도 사부로의 회상에 따르면 이시모토 도라조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지금 부하가 조선 정벌을 하고 있는데 모두 도쿄 쪽에서 도망쳐온다는거야. 그러니 자네 부하를 시켜서 말이야, 나는 고노다이 소속이니까, 거기에 강이 있지? 에도가와가. 거기서 도망치지 못하게 그물을 치고 있다가 내가 고기를 몰듯이 몰아주면 그곳에서 죽여달라는 말이야.[8]
당시 일본군이 매복살인을 한 점을 증언하고 있다.

후쿠시마 젠타로는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2일 정오를 조금 지났을 때 나는 이치카와의 동네 어귀에서 10초[9] 정도 떨어진 논길을 배급받은 주먹밥으로 배를 채우며 걷고 있었습니다. 여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대형 육군 비행기가 여러 차례 열기로 가득 찬 하늘을 날아갔습니다. 고노다이의 기병대가 계속해서 피난민 대열을 제치고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조선놈들을 군대가 때려죽이고 있다네", "폭동을 일으키려 한 패거리야!", "뻔뻔스런 놈들! 개새끼들!", "우와아!" 지금까지 발을 질질 끌다시피 걷고 있던 피난민들이 큰소리를 외치며 기세 좋게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그만 이끌리듯 달렸습니다. 그리고 100m 가까이 달렸을 때 군중들의 머리 너머 왼쪽 논 가운데서 무섭도록 잔혹한 참상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조잡한 무늬 있는 흩옷을 입은 사람, 불에 그을린 청색 작업복을 입은 사람 7명이 뒤로 손이 묶인 채, 게다가 염주 꿰듯이 엮인 채로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분명 조선사람들이었는데, 창백한 얼굴로 무언지 알 수 없는 말을 울부짖고 있었습니다.……"씨부렁거리지 마, 새끼야!" 갑자기 한 사람의 군인이 총검의 개머리판을 크게 휘들러 올리는가 싶더니 맨 끝에서 마구 몸부림치던 남자의 머리를 퍽 하고 내리쳤습니다. "앗!" 군중에게서는 아무 소리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고개를 돌리고 말았습니다. 이윽고 슬금슬금 시선을 돌렸을 때에는 두개골이 바스라져서 새빨간 피가 부근에 튀어 흩어지고 손발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습니다. "아하하하, 꼴좋다."…… 이 새끼들 모두 때려죽여버려!" "좋아, 이 개새끼들!" "야! 불령선인 놈들! 뒈져버려!" 10여명의 군인들이 일제히 총검과 개머리판을 휘둘러댔습니다. 2일 오후 2시 전후에 이치가와로 건너가는 다리 앞 몇 초 되는 곳에서 이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가슴을 찔려 흐릿하게 하늘을 쳐다보다가 숨이 끊어진 자, 거의 끊어질 정도로 팔이 잘린 채 진흙밖에 머리를 처박고 버둥거리던 자, 넓적다리가 석류 벌어지듯이 갈라져 터질 듯한 상처가 입을 벌리고 있던 자, 끊어지려는 숨을 진흙과 함께 들이마셨는지 가슴을 고통스럽게 헐떡이던 자 등등의 광경은 지금 생각해도 오싹합니다.[10]

미나미시노자키의 스가 후쿠타로(당시 18세)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이마이바시(시모에도가와바시)에는 나라시노의 기병연대가 계엄령으로 와 있었다. 당시 후지 제지에는 지금의 히라타구미 처럼 펄프를 운반하거나 둥글게 마는 기노시타구미 라는 운송 하청조직이 있어서 그 합숙소에서 조선인도 일하고 있었다. 9월 4일경 세 사람인가 끌려가 군대에 넘겨져 저녁 어두워진 후 총살당하는 것을 보았다. 뒤로 손이 묶인 채 강물에 던져지는 것을 보았다. 이때 처음으로 총의 위력을 눈으로 직접 보고 알게 되었다. 기병들은 장화를 신고 있었다.」[11]

소부센 북쪽 기병 제13연대의 대위 이와타 분조 외 52명의 '공훈조서'에서는 9월 2일 오후 7시 반 이후 가메이도 부근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때 불령선인들이 습격해온다는 유언비어가 일어나 혼란이 더욱 심해짐. 여기저기서 함성이 들려오고 불온한 형세가 시시각각 더해짐. 이에 예비대인 기관총대의 일부로 정류장을 경비토록 하고, 주력은 함성이 들리는 곳으로 진군해서 치안 유지에 적극 노력함. 극도록 흥분한 주민들은 무차별로 조선인을 폭행할 뿐 아니라 종을 난타하기도 하고 소총을 발사하기도 함. 이런 혼란으로 밤에도 기관총 병사들은 동분서주하여 한잠도 못 잔 채 날이 밝아옴.」

마지막 줄에 따르면 "이런 혼란으로 밤에도 기관총 병사들은 동분서주하여 한잠도 못 잔 채 날이 밝아왔다"고 한다. 그럼 무엇 때문에 한잠도 못 잔 걸까? 그건 기관총 병사들이 조선인을 학살하는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엔도 사부로가 증언하기를 나라시노의 기병 연대장 미요시 하지메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기관총이 한 자루도 없다. 모두 토벌하는 데 가져가 버렸다."

데라시마 5초메에 살던 하세가와는 다음처럼 증언했다. "2일인가 3일경에 군대가 아라카와 갈대밭에 기관총을 쏘아댔다."

아사오카 주조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옛 요쓰기바시 아래쪽의 스미다구 쪽 강변에서 조선인을 10명 정도씩 묶어세우고 군대가 기관총으로 쏘아 죽였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을 광차 선로 위에 줄지어 눕히고 석유를 끼얹어 불태웠다.[12]

'극비 부내자료 사법성 조사서' 제 10장 '군대의 행위에 대하여' 항목에는 다음과 같은 자료가 있다.
「재변 후 경비 임무를 맡은 군대가 조선인 및 기타를 살상했다는 소문이 없지 않다. 특히 고토 방면에서는 군대가 살상 행위를 함부로 자행했기 때문에 민중이 이를 모방하여 살상 행위를 감행했다는 소문이 있다.」[13]

군인들은 학살에 조직적으로 참여했는데 그것도 조선인들을 노려서 했다. 어떻게 봐도 '민간 자경단'이 주체가 아니며 '자연재해를 틈타 일본의 사회주의 세력을 처치하려는 게 주요 목적이었고 조선인들은 이용당한 케이스'도 아니다. 오히려 민중이 모방해서 학살을 벌일 정도였다. 일본군은 명백히 조선인을 적으로 인식하고 '토벌'하였다.

2.2. 나리시노 수용소 학살

민간 자경단으로 따져 봐도 군인과 나눌 수 없다. 왜냐면 군인들이 민간 자경단에게 시킨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건이 진정돼서 조선인들을 수용할 때 (나리시노 수용소) 그 과정에서도 학살이 일어났다. 조선인들은 힘든 현장을 버티며 겨우 살아가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나리시노 수용소에서 학살을 당했다.

우라베 마사오는 이렇게 증언했다.
「(9월 5일 밤)나라시노로 보내지는 조선인 행렬을 보았습니다.……가메이도 남쪽으로는 다테카와를 따라 지바가도가 고마쓰가와 다리로 이어지지요. 그곳에 다다랐을 때입니다. 지바가도로 나오자 1,000명 가까이 될 것으로 여겨지는 조선인이 4열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가메이도 경찰서에 일시 수용되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헌병과 군대가 얼마간 붙어 나라시노 방향으로 호송하는 중이었습니다. 물론 걸어서였지요. 행렬에서 벗어나면 구타하는 등 포로처럼 다루었으며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다지 부상을 입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붕대 따위는 안 하고 있었어요. 치료를 해줄리가 없었지요. 저는 당시 아주 순수했재요. 정말로 이 사람들이 나쁜 일을 했을까. 불쌍하게 느껴져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당시 라칸지는 지금 고토 종합구민센터(지하철 니시오시마 역 위)자리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오백나한의 흔적'이란 석탑이 서 있습니다. 길도 더 좁았고 20m 정도 움푹 들어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라칸지보다 소규모였고 오른쪽으로 좀 떨어져 목욕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양쪽 뒤편은 라칸지의 묘지였습니다. 여기까지 오니 철사로 묶여 연행된 조선인이 8명씩 16명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사람의 일부이지요. 헌병은 2명, 병사와 순사가 4,5명이 동행했습니다. 그 뒤를 사람들이 우르르 뒤쫒아가면서 '내놔라, 내놔라', '우리 원수를 내놔라'하며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헌병은) 군중들을 쫒아내고 조선인들을 목욕탕에 넣었지요. 저는 호기심에 거기까지 따라갔는데 '여기서 안전하게 나라시노로 이송하겠구나, 휴, 잘됐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돌아가려고 하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뒤쪽으로 나온다!'며 소란스러워졌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가보니 군중, 자경단이 몰려가고 있었습니다. 뒤쪽이라는 곳은 묘지로서 지대가 낮아서 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군대와 순사는 뒷일은 알아서 하라는 듯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자, 이제 그 다음에는 베고, 찌르고, 때리고, 차고……총은 사용되지 않았지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16명을 모두 완전히 죽인 겁니다. 5~60명이 모여 반광란의 상태에서.」[14]

이런 내용은 한 사람이 가져다 준 '진재일기'에 나온다.[15]
「7일……오후 4시경 병영에서 조선인을 넘겨줄 테니 데리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조선인을 데리러 가서 9시경에 도착, 2명을 데리고 총 5명을(나기노하라 산지기의 무덤이 있는 곳에) 구덩이를 파고 앉혀 목을 베리고 했다. 제일 먼저 구니미쓰가 단칼에 목을 베었다. 2번째 게이지는 힘이 모자라 중간까지밖에 자르지 못했다. 3번째 고지는 목 가죽이 약간 덜 잘렸다. 4번째 미쓰오는 구니미스가 잘랐던 칼로 단칼에 죽였다. 5번째 요시노스케는 힘이 모자라 중간까지밖에 자르지 못해 2번 칼질을 했다. 구덩에 묻고 나니 모두 지쳐서 여기저기 쓰러져서 잤다. 밤이 되자 다시 각자 맡은 경계선으로 갔다.」[16]

오와다·신덴 지구 아베 코는 이렇게 증언했다.
「10일 전후, 15일 정도였을까, 오와다·신덴에 3명의 조선인이 오게 되었으니 데리러 오라는 통보가 있었지요. 이 구역에는 총 3명의 조선인이 배급됐던 것이지. 오와다·신덴·가야타에 모두 3명씩, 많은 곳은 4명 정도였을까. 경우에 따라서는 나라시노하라까지 데리러가기도 했지……손은 뒤로 묶고 발은 걸을 수 있을 만큼만 1m 정도 떨어뜨려서 발과 발을 마끈으로 묶어놓았어. 제일 연장자가 42~43살이었고, 35~36살, 26~27살된 사람도 있었지. 세 사람이 온 것은 저녁 3,4시경이었던가. 도로 막다른 곳에 꿇어않게 했는데 우리가 보고 있었더니 어머니가 '보지 마, 보지 마'라며 집안으로 쫒아 보내셨지」[17]

물론 군인들이 직접 학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14연대 본부 서기였던 아이자와 야스시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구호할 목적으로 데려왔지만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킬 것 같으니 끌어내라고 하여 끌고왔지요. 저희 연대에서도 16명을 영창에 넣었는데 연대가 4개 있었으니까……수상한 자들은 모두 연대로 끌고와 조사했습니다. 군대에서 수상한 자는 왜 흔히 하는 말이 있잖아요.……베어버렸습니다.……저는 안 했어요. 30명 정도 있었을 걸요. 그런데 우리 연대만이 아니고 다른 연대도 했어요. ……저는 2번인가……베는 장소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뒤로는 넌더리가 나서 가지 않았습니다. 하룻밤에 세 사람 정도 갔을 거예요. 영창에 있던 사람들은 누가 한 번 불려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니 이상하게 생각했겠지요?」[18]

3. 중국인 학살

1923년 9월 당시 도쿄에서 중국인 노동자가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지역은 미나미센나 오시마였다. 그 지역의 중국인들은 직업이 행상 같은 상인인 경우도 있었지만 주로 석탄 하역 운반, 강판 운반, 토사운반 등의 육체노동에 종사했는데 일당은 일본인보다 저렴하게 받았다. 그러다 1922년부터 일본은 워싱턴회의 결정때문에 해군 군축을 감행했고 그 때문에 해군공창, 조병창을 비롯한 조선업계에서 대량 해고가 진행됐다.

이런 해고의 여파는 말단의 일용직과 육체 노동자한테까지 미쳤는데 일본인중국인은 경쟁 상대가 됐다. 예로 1922년 10월에는 스미다 강 주변의 인부 300여 명이 중국인 노동자 퇴출을 요구하며 요구 연판장을 경시청 외사과장에 제출했다. 1923년 5월에는 도쿄의 혼조, 후카가와의 인부 하청업자들이 인근 운송업자 및 공장에서 석탄 하역 인부로 중국인을 쓰지 말라고 부탁하면서 중국인 배척 운동을 했다.

그러다 1923년 9월 1일에 도쿄와 인근 지역에 대지진이 발생했다. 중국인 노동자가 모여 있던 미나미 가츠시카 오시마에도 9월 1일 저녁부터 수일에 걸쳐 "조선인 습격"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군인들은 일본 노동자를 앞세워 "한인 사냥"을 핑계로 중국인 학살을 벌였으며 요코하마 지역에서도 중국인에 대한 학살이 벌여졌다. 대지진 발생에서 12일이 지난 9월 12일. 재일 중국인노동자공제회 회장인 왕시티엔은 살해됐다. 육군 야전중포 제7연대 6중대의 가키우치 중위가 상부의 명령을 받고 살해했다.[19]

중국인은 조선인보다 적게 학살된 편인데도 그 숫자가 무려 사망자 656명, 행방불명 11명, 부상 91명이다.[20]

4. 아마카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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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은폐와 왜곡

5.1. 일본 정부와 군대

일본 정부와 군대는 사건 당시부터 군인의 조선인 학살을 은폐하려고 했다. 이 점은 구보노 시게지의 일기에도 나온다.
「11월 28일 비
오후 중대장 훈시가 있었음. 전국 규모의 징병, 병역 제도, 칙서에 대해. 마지막에는 지진재해 시에 군대가 많은 조선인을 살해한 것에 대해서 꿈에서조차 일절 말해서는 안 된다고 엄하게 명했다…[21]

그리고 조선인 학살을 벌인 군인들은 전혀 추궁받지 않고 처벌받지 않았다.[22]

5.2. 윤서인

윤서인의 페이스북

윤서인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1월 9일 오후 11:1·서울에 작성된 글에 다음과 같은 주장이 담긴 댓글을 달았다.
「"일본은 우리 국민을 정부 주도로 계획적 조직적으로 대량학살한 일이 없습니다."(1월 10일 오전 10:42) "관동대학살은 민간 자경단이 일으킨 사건입니다. 자연재해를 틈타 일본의 사회주의 세력을 처치하려는게 주요 목적이었고 조선인들은 이용당한 케이스입니다. 일국의 정부가 민간이 저지른 사건에 대해 대신 나서서 사죄하고 보상한 사례 역시 없습니다."(1월 10일 오전 10:53)

관동대지진 학살은 민간 자경단이 일으킨 학살이며 주요 목적은 사회주의 세력 처치라이며 민간이 저지른 사건이며 민간측 범죄를 정부가 대신 사과한 사례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주우석이란 사람은 거기에 덧붙여서 "당시 일본 제국 경찰 서장이 학살당하는 조선인들을 보호하고 그로 인해 일본 정부로부터 포상 받은 사실도 있습니다."(1월 10일 오전 10:54)라고 주장했고 윤서인은 그 뒤에 "숫자가 중요한게 아니라고요? 그럼 우리 정부도 김구 선생이 살해한 무고한 일본 청년에 대해 정부차원에서 사죄하고 배상해야죠. 과거에 얽매이기 시작하면 끝도 없음."(1월 10일 오전 11:20)이란 글도 작성했다.

허나 개인적인 사상은 그렇다 쳐도 윤서인의 글은 기본 사실 관계가 틀렸다. 전문적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기본적인 확인도 되어 있지 않으며 윤서인의 논리에 따라도 말이 안 되는 주장으로 점철되었다.

민간 자경단이 일으킨 사건이란 것부터 사실오류인 건 이 문서만 봐도 알 수 있다. 거기다 "자연재해를 틈타 일본의 사회주의 세력을 처치하려는게 주요 목적이었고 조선인들은 이용당한 케이스"라는 부분은 따지면 따질수록 더욱 말이 안 된다. 오히려 조선인 학살 과정에서 중국인까지 같이 학살될 정도였다. 대체 "사회주의자 처치가 주요 목적"이라면 조선인은 왜 학살당한건가?

게다가 윤서인의 말이 맞다고 가정해도 민간에서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 세력을 처치한다'는 것 자체가 위법적인 사적제재에 해당한다. 이런 행동이 정부의 개입 없이 대규모로, 자발적으로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건 일본 국민의 민도가 형언할 수 없이 저열한 수준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는데도 일본 정부에서 계엄령을 내리고 군대를 이용해 적극적으로 나서서 제지하지 않았다면 일본 정부에서는 정치사상 탄압을 위해 폭도들의 난동을 방치한 셈이 되니 결국 이 역시 '정부 차원에서 사죄하고 배상' 해야 할 사건이 된다.

또 여기서도 윤서인의 말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1월 10일 윤서인은 분명 오전 10시 53분에 이렇게 말했다.
"관동대학살은 민간 자경단이 일으킨 사건입니다. 자연재해를 틈타 일본의 사회주의 세력을 처치하려는게 주요 목적이었고 조선인들은 이용당한 케이스입니다. 일국의 정부가 민간이 저지른 사건에 대해 대신 나서서 사죄하고 보상한 사례 역시 없습니다."

그런데 11시 20분에는 이렇게 말했다.
"숫자가 중요한게 아니라고요? 그럼 우리 정부도 김구선생이 살해한 무고한 일본청년에 대해 정부차원에서 사죄하고 배상해야죠. 과거에 얽매이기 시작하면 끝도 없음."

그리고 윤서인은 분명 자기 손으로 "민간이 저지른 사건에 대해 대신 나서서 사죄하고 보상한 사례 역시 없다"고 말했다. 그래 놓고는 민간인인 김구가 벌인 범죄 행위를 두고 "정부 차원에서 사죄하고 배상"이라는 물타기를 했다. 3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쓴 글인데도 앞뒤가 맞지 않다. (먼저 말하길 윤서인의 주장이 너무 어이없어서 누군가에게 어쩐 이득을 얻는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지만, 저 숫자가 뭘 말하는지는 모르지만 문맥상 민간이 저지른 일을 국가가 배상해야한다면 우리도 김구선생님의 사건을 국가적으로 배상해야할 책임이 있다 정도로 해석되는거 아닌가요?)

당연하지만 윤서인의 전제에 따르자면 이 '김구의 상인 살해'라는 물타기는 반박이 된다. 애초에 항목에서 알 수 있듯 세월이 흐른 뒤라 전후관계가 명확치 않은 부분도 있고 관동대지진으로 돌아와 보면 일본인 민간인들이 학살에 동조하는 등 일익을 담당하긴 했지만, 주도적으로 앞장서 학살을 자행한 것은 군인들이었으며 이후에도 그들은 책임을 지거나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 그러나 김구의 당시 범죄는 일개 민간인이 벌인 형사사건이다. 윤서인의 논리에 따르면 관동대학살과 김구의 범죄는 다른 케이스인 것.


[1] 저 유명한 노기 장군이 이끄는 제3군의 참모장교로 있으면서 러일전쟁에 참전했으며, 일개 참모였던 쓰노다가 군 사령관인 노기에게 작전에 간섭을 하지 말라며 핀잔을 주었다든가, 전장에 파견 나갔더니 전선은 무너지고 현지 지휘관은 도망가는 아찔한 상황에서 쓰노다가 지휘한답시고 발도만 했는데 적병 만 명이 놀라 도망했다더라 등 희한한 무용담이 많다. 러일전쟁 당시 쓰노다는 유럽의 관전무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고 무엇보다 노기는 쓰노다를 아들처럼 대하였고 쓰노다 또한 노기를 아버지 처럼 따랐다고 한다. 의회 재직 시 일본군 사단의 사각편제를 삼각편제로 현대화 감군하는 한편 지휘계통을 개혁하여 간접적인 문민통제를 실시한다는 등의 군축안을 내놓았으나 쓰노다의 친가였던 참모본부의 격렬한 반대로 좌절되었다.[2] 강덕상,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김동수 박수철 역, 역사비평사, 2005, 181쪽에서 재인용; 김광열,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시 학살된 한인과 중국인에 대한 사후조치, 동북아역사논총 , (48), 2015.6, 123쪽에서 재인용[3] 강덕상,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김동수 박수철 역, 역사비평사, 2005, 149쪽에서 재인용; 김광열,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시 학살된 한인과 중국인에 대한 사후조치, 동북아역사논총 , (48), 2015.6, 124쪽에서 재인용[4] 강덕상,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김동수 박수철 역, 역사비평사, 2005, 153쪽에서 재인용[5] 강덕상,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김동수 박수철 역, 역사비평사, 2005, 156쪽에서 재인용[6] 강덕상,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김동수 박수철 역, 역사비평사, 2005, 157쪽에서 인용[7] 강덕상,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김동수 박수철 역, 역사비평사, 2005, 160-161[8] 강덕상,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김동수 박수철 역, 역사비평사, 2005, 169쪽에서 재인용[9] 이때의 초는 거리 단위로 1초는 약 109m다.[10] 강덕상,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김동수 박수철 역, 역사비평사, 2005, 171-172 쪽에서 재인용[11] 강덕상,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김동수 박수철 역, 역사비평사, 2005, 172 쪽에서 재인용[12] 강덕상,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김동수 박수철 역, 역사비평사, 2005, 176쪽에서 재인용[13] 강덕상,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김동수 박수철 역, 역사비평사, 2005, 145-146쪽에서 재인용[14] 강덕상,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김동수 박수철 역, 역사비평사, 2005, 277-278 쪽에서 재인용[15] 기증과정은 강덕상,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김동수 박수철 역, 역사비평사, 2005, 289-290쪽 참조[16] 강덕상,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김동수 박수철 역, 역사비평사, 2005, 291-292쪽에서 재인용[17] 강덕상,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김동수 박수철 역, 역사비평사, 2005, 296쪽에서 재인용[18] 강덕상,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김동수 박수철 역, 역사비평사, 2005, 306쪽에서 재인용[19] 김광열,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시 학살된 한인과 중국인에 대한 사후조치, 동북아역사논총 , (48), 2015.6, 141~142[20] 김광열,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시 학살된 한인과 중국인에 대한 사후조치, 동북아역사논총 , (48), 2015.6, 147[21] 김광열,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시 학살된 한인과 중국인에 대한 사후조치, 동북아역사논총 , (48), 2015.6, 126쪽에서 재인용[22] 김광열,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시 학살된 한인과 중국인에 대한 사후조치, 동북아역사논총 , (48), 2015.6, 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