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탁호텔 Sontag Hotel[1] | 孫鐸賓館[2] | |
<colbgcolor=#7f1c17><colcolor=#fff> 주소 | 한성부 황화방 정동 (現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
설립자 | 마리 안토아네트 존타크 (Marie Antoinette Sontag) |
설립연도 | 1880년대[3] / 1902년 (광무 6년)[4] |
폐쇄연도 | 1917년 |
철거연도 | 1922년 |
이칭 | 손택부인가(孫澤夫人家) | 손택양저(孫擇孃邸) 손택저(孫澤邸) | 손택양관저 (孫擇孃官邸) 손택낭저(孫澤娘邸) | 손택양가(孫擇 / 宅孃家) 손택양씨가(孫擇孃氏家) | 한성빈관(漢城賓館) 손택양여관(孫擇孃旅館) | 정동화옥(貞洞華屋) 궁내부 용달여관(宮內府 用達旅館) 손택양사저(孫擇孃私邸) 정동화부인옥(貞洞花夫人屋) 정동화부인가(貞洞花夫人家) |
<colbgcolor=#7f1c17> 손탁호텔 전경 |
손탁호텔 베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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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 시기 세워진 서구식 호텔. 지금의 중구 정동에 위치했으며 오늘날에는 그 터만 남아있다. 창립자인 손탁(존타크)의 이름을 땄으며, 호텔이라는 말이 아직 전래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손탁빈관(Sontag賓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2. 역사
<colbgcolor=#7f1c17> 손탁호텔의 설립자 손탁 |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 각종 언어에 능통했던 손탁은 한국어도 빠른 속도로 습득하면서 명성황후의 신뢰를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궁궐에서 양식 조리와 외빈을 접대하는 임무를 수여받았다. 당시 조선은 위안스카이에게 한창 내정간섭을 당하고 있었기에 고종과 명성황후는 손탁에게 궁내부와 러시아공사관 사이를 접선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손탁은 '한러밀약‘으로 대표되는 반청운동을 주도하는 등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냈고, 이를 기특히 여긴 고종은 1895년(고종 32년)에 한옥 1채를 그에게 선사한다.[6] 이 한옥은 을미사변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조선 정세 속에서 각국 외교관들의 각축장으로 쓰였고, 아관파천과 같은 각종 정치적 책략의 진원지가 되기도 했다. 손탁 자신도 이런 계획에 깊이 관여했고,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기에 성공한 고종은 그에게 기존의 한옥을 방 5개짜리 양옥으로 업그레이드(?)시켜주는 것으로 보답한다. 이 양옥을 손탁이 서구풍으로 인테리어하고 각종 투숙객을 맞이했던 것이 바로 손탁호텔의 출발점이다.
대한제국은 칭제건원 전부터 세계 여러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었고 제국 선포 이후에도 많은 나라와 국교를 수립했다. 자연스레 외교관들 및 귀빈들의 방문이 증가했기 때문에 이들이 머물 투숙시설[7]이 필요했다. 이 때 대한제국 정부에서 주목한 것이 바로 손탁이 운영하던 손탁빈관이었다. 그렇지만 방 5개는 호텔로 운용하기에는 너무 작았기에,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광무 6년)에 기존 양관을 헐고 2층짜리 양관으로 재건축한 뒤 손탁에게 경영을 맡기니, 이것이 바로 ‘손탁호텔’이다.
개장 당시부터 한동안은 예약손님만 받았다. 건물 2층을 VIP실로 사용했고, 1층을 일반 외국인 객실, 식당, 커피숍, 손탁 개인의 거주공간으로 이용했다. 특히 정동구락부로 위시되는 개화파 관료들과 서구 외교관들이 회합장소로 자주 사용했다. 여담으로 저 커피숍이 한국의 양식 및 커피숍 경영의 시발점이다.
손탁은 1909년에 모국인 독일로 돌아갔고, 손탁호텔은 프랑스인 J. 보에르의 소유가 되었다. 그때부터 예약없이도 일반 투숙객이 머물 수 있게 바뀌었다. 그러나 경술국치를 전후해 손탁호텔은 경영난에 빠졌고, 급기야 1915년에는 비품을 기한없이 경매처리하기에 이르렀으며 결국 1917년에 호텔은 문을 닫았다.
이후 건물과 부지 전체를 이화학당에서 사들여서 기숙사로 사용하다 1922년 철거하고 새로운 건물을 설립했다. 하지만 이 건물도 6.25 전쟁 당시 폭격을 맞았고 학교 측에서 프라이홀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재건했지만 1975년에 화재로 전부 불탄 뒤 철거했다. 그리고 한동안 빈터로 남겨 두었다가 2004년에 이화여자고등학교 백주년 기념관을 건립했다. 현재 백주년 기념관 주차장 입구 앞에는 이 자리에 손탁호텔이 있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흔히 이곳을 서울에 건립된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라고도 이야기 하지만, 손탁호텔에 앞서 이미 서울호텔(정동 황국 구내, 1897년 개업), 팔레호텔(대안문 앞, 1901년경 개업), 스테이션 호텔(서대문 정거장 앞, 1901년 개업) 등이 있어 최초는 아니다. 참고로 근대 조선 최초의 서양식 호텔은 1888년 인천에서 개관한 대불호텔[8] 이며 당시 조선과 서울을 드나들기 위한 주요 관문이 인천[9]이었으므로 서울보다 인천에 최초의 호텔이 세워졌다.
설립자인 손탁의 귀국 후의 일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러시아 혁명으로 전재산을 날리고 객사했다는 등 풍문이 많았으나, 손탁의 추천으로 1905년부터 1906년까지 1년 동안 조선 황실의 외교전례를 담당했던 독일여성 엠마 크뢰벨의 저서 「나는 어떻게 조선 황실에 오게 되었나」의 번역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손탁의 말년 스토리가 드러났다. 크뢰벨 저서를 번역한 김영자 독일 레겐스부르크대 박사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1922년 7월 7일 오전 8시 칸에 있는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돼 있다"고 소개하고 "칸 시립천주교묘지를 찾아가 묘비에 참배했다"고 설명했다. 향년 68세[10]. 묘비에는 '조선황실의 서양전례관 마리 앙트와네트 손탁'이라고 새겨져 있었다.[11] 손탁호텔 건물이 철거된 해와 같은 해에 사망한 것도 뭔가 묘한 인연인 듯하다.
3. 대중매체에서
- 소설 "미스 손탁"에서는 작품의 메인 배경으로 나온다.
* 조선왕조오백년에서는 손탁이 나오게 되는데, 원래 실존인물보다 상당히 젋게 묘사가 되었다.
4. 관련 문서
[1] Sontag을 독일어식으로 발음하면 존타크 호텔이다.[2] '孫鐸(손택)'은 손탁의 한자 표기이고 '賓館(빈관)'은 호텔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3] 손탁의 정동 입주.[4] 정식으로 손탁호텔 건물을 세운 해.[5] 좀 복잡한데, 태어난 곳은 알자스로 태어났을 무렵에는 프랑스 국적이다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독일 국적을 취득했다가 중간에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기도 했다. 최종 국적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6] 그런데 그 한옥 1채의 부지가 무려 1,200평 가량이었다고 한다.[7] 조선시대 사용했던 용어로 표현하자면 영빈관.[8] 일본인 호리 리키타로(堀 力太郎)가 설립. 이 건물은 1919년에 한 중국인이 인수하여 "중화루"라는 음식점으로 경영했고, 음식점이 문을 닫은 뒤에는 임대를 하다가 노후화를 이유로 1978년에 철거되었다. 철거 이후에는 주차장으로 쓰이다가 2011년에 이 부지를 인수한 사업자가 상가를 짓기 위해 터를 파다가 건물 기단부가 발견되었다. 인천광역시는 이 부지를 인수하여 대불호텔을 복원, 전시관으로 꾸며서 2018년에 개장했다.[9] 정확히는 제물포. 제물포에 근대적 호텔이 생기던 무렵에 조선을 방문하는 외국인은 제물포에서 1박을 하고 짐꾼을 고용해서 한양으로 향하는 여정이 일반적이었다. 제물포에 호텔이 발달할 수 밖에 없는 여건이 형성되었던 것. 그러나 제물포에서 성업하던 근대적 호텔들은 경인선이 개통된 이후 급격하게 몰락했다. 외국인들이 굳이 제물포에서 묵지 않고 바로 경인선을 이용해 한양으로 향했기 때문이다.[10] 그당시 기대 수명을 비교하자면 어느정도 오래 살았다고 볼수 있다.[11] 구한말 아관파천을 주도한 서양여인 손탁의 흔적, 2016-03-03, 공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