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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호텔 소개 영상 |
1. 개요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로23번길 97에 소재한 대한민국 최초의 호텔.
대불호텔[1]은 인천 일본 조계지에 있던 호텔로, 한국 최초의 호텔 대불호텔은 개항 후, 인천항을 통해 입국한 외국인들이 서울로 가기 전 묵었던 조선 최초의 호텔이다. 현재 위치한 완전한 근대건축물 형태의 대불호텔 전시관은 문화재청과 인천시에서 당시 모습으로 재현한 것이다.[2]
대불호텔 설계도면. 객실은 11개 뿐인 소형 호텔이었다.[3] |
2. 연혁
- 1887년~1918년: 일본인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郎), 대불호텔 창업, 1918년 경 경영난으로 폐업
- 1918년~1970년: 화교들에 의해 북경요리점 중화루(中華樓)로 활용
- 1970년~1977년: 각종 임대업과 월세집으로 활용
- 1978년~2011년: 멸실, 주차장으로 활용
- 2011년 5월: 인천시에서 호텔 부지 인수
- 2013년~2018년: 인천시 중구는 문화재청과 함께 복원 사업 추진
- 2018년 ~ 현재: 대불호텔 전시관 으로 활용.
3. 역사
"1885년 4월 5일 다이부츠(대불호텔의 일본식 발음) 호텔로 향했다. 놀랍게도 호텔에서는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편하게 모시고 있었다."
헨리 아펜젤러 (1885년 4월 5일)
헨리 아펜젤러 (1885년 4월 5일)
"우리는 ‘소위’ 고급이라는 다이부츠(大佛)나 해리스(Harris)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다이부츠의 침대는 평평한 침상에 모포 한 장을 펴 놓은 것에 불과했으며, 천정의 누수를 받기 위한 물동이가 매달려 있었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1885년 4월 5일)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1885년 4월 5일)
1883년 강화도 조약에 따라 세번째로 인천이 개항하게 되자, 1887년경 일본인 해운업자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郎)와 그의 아들 호리 리키타로(掘力太郞)는 대불호텔을 건립 및 경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호텔 영업을 시작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당시 2층 목조 가옥이었으나, 1887년에 벽돌조의 서양식 3층가옥으로 재건축하여 확장하였다. 그리고 당시 숙박료는 일본식 호텔의 2배 이상이었으며, 당시 한양으로 가기 위해 배에서 인천항으로 내린 서양인들을 상대로 운영했다. 헨리 아펜젤러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의 회고록에도 대불호텔에서 숙박했던 기록이 남아있다. 이 호텔은 1902년 서울 중구 정동에 들어선 손탁호텔보다 14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이 호텔은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했기에 서양식으로 설계됐다. 대불호텔은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맞았으며 외국인들의 입에 맞는 서양요리도 제공했다고 한다.
한편 당시 대불호텔 건너편에 중국인 이태호(怡泰號)라는 사람이 외국인 상대의 여관업을 시작하였는데 1층에는 잡화상점을 하면서 2층에 스튜워드 호텔(Steward Hotel)을 개업하여 서로 치열한 경쟁을 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커피[4]가 처음 판매된 곳이 대불호텔이라고도 하나 언제부터 판매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을 찾기 어렵다. 1890년경에는 헝가리인이 운영하는 한국호텔(Hotel de Coree)도 영업하면서 경쟁은 치열해져만 갔다.
1890년경 대불호텔의 객실료는 상등실 2원 50전, 일반실 2원으로 다른 여관에 비해 비쌌다. 당시 한국인 노동자 하루 임금이 23전이었던 사실을 고려해보면 상당히 비싼편에 속했다.
명칭 | 객실 수 | 숙박료 | |||
상 | 중 | 하 | |||
서양식 | 대불호텔 | 11실 | 2원 50전 | 2원 | 1원 50전 |
이태호텔 | 8실 | 2원 | |||
일본식 | 수월루 | 11실 | 1원 | 75전 | 50전 |
1899년 경인선이 개통하면서, 인천항에서 한성으로 가는 시간이 크게 줄어들었다.[5] 한성으로 가는 서양인들이 인천항에 머무를 필요가 없어지면서, 그리고 러일 전쟁으로 서양인들의 왕래가 급격히 줄어버림에 따라, 대불호텔은 경영난으로 쇠락하게 되어 문을 닫게 되었다.[6]
3.1. 제2의 전성기
중화루와 인수한 뢰씨 일가와 다른 중국인들 |
얼마나 유명했으면 명소까지 되었냐 한다면 당시 인천에는 이미 몇 개의 중국 요리점이 성업 중이었음에도, 중국풍 간판으로 호화롭게 장식하고서 당시 인천에는 어느정도 생소했을법한 3층 높이의 벽돌 건물로 중화루는 개점 하자마자 그 명성이 인천은 물론 경성에까지 알려질 정도면 위상이 얼마나 대단하지 알수 있는 부분이다.
60년대쯤 중화루 |
3.2. 이후 용도변경과 철거
월세집으로 이용할 당시의 대불호텔[9] |
3.3. 발굴 및 재현복원
2011년 당시 대불호텔 터 |
2011년 5월에 해당 부지에서 상가 신축공사를 하던 중 벽돌을 쌓아 만든 대불호텔 터가 발견되어 문화재청이 보존을 추진하였다. 2013년 인천시 중구는 터 위에 대불호텔 건물을 재현하는 사업을 추진하였고 2018년 완공하였다. 이 건물은 당시 대불호텔을 재현했으며, 대불호텔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다.
3.4. 현재
2019년 4월 재현된 대불호텔 전시관에서 대불호텔의 역사를 알아보고 호텔 객실을 재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대불호텔 전시관은 3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에서는 대불호텔 터에서 발견된 호텔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남아 있는 흔적을 통해 건축양식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대불호텔에서 중화루로, 중화루에서 철거되기까지 역사와 영상자료를 감상할 수 있다.
- 2층에서는 재현된 대불호텔의 객실을 볼 수 있다. 대불호텔과 함께 그 시절 인천의 다른 호텔과 여관 등 숙박업소의 운영방식, 이용요금, 제공된 서비스와 관련된 내용도 전시되어 있다. 고풍스러운 가구와 다기, 커피메이커, 테이블웨어 등 전시된 근대 물품이 재현되어 있다. 대불호텔은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자 국내 최초로 커피를 제공했던 장소였다.
- 3층은 연회장을 재현한 공간이다. 과거에 연회장은 음식과 음악을 제공하는 사교의 장으로 활용했다. 현재 대불호텔 전시관에서는 연회장을 기획전시장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세미나·강연·전시회 등을 진행하고자 하는 시민이나 단체에게 대관 해주고 있다.
- 평일 09:00 ~ 18:00
- 주말 10:00 ~ 21:00
- 매주 월요일 휴무
4. 관련 문서
-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
- 손탁호텔 - 1902년에 개관한 호텔.
- 웨스틴 조선 서울 - 1914년에 개관한 현존 최고(最古)의 호텔.
[1] 大佛 hotel, 다이부츠 호텔(Daibutsu Hotel, 일본어: 大仏ホテル 다이부츠 호테루[2] 다만 말그대로 재현이라 그런지 몰라도 2층창의 아치가 두줄임에도 한줄로 되어있거나 난간 갯수와 형태가 다르고 지붕의 십자로된 무늬도 없다.[3] 왼쪽부터 1층, 2층, 3층이다.[4] '가배차'나 '가비차'는 영어 발음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양탕국'은 일반 민가에서 불렸던 이름이다.[5] 경인선이 개통되기 전에는 우마차로 12시간이 소요되었다. 때문에 인천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야 서울에는 저녁에 도착하기 때문에 인천에 점심 이후에 오면 필히 인천에서 하룻밤을 묵어야만 했다. 하지만 경인선이 개통되자 경인선으로 서울까지는 1시간 40분 1축구 밖에 안 걸리기 때문에 굳이 숙박을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인천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출발해도 서울에 오후 3시 이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6] 서양인을 대상으로한 호텔이였기 때문에 다다미방이 익숙한 일본인 입장에서는 굳이 비싼돈 들여가며 맞지않는 서양식 호텔에 묵어야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수요는 떨어질수밖에 없다.[7] 이때 발코니 부분이 변형되고 아치 부분에 '중화루' 간판이 걸렸었다.[8] 이후 중화루는 중구 홍예문로 12로인 현재 위치로 이동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메뉴판에는 위에 있는 1918년에 뢰씨 일가와 다른 중국인들과 개업당시 찍은 사진을 쓰고 있으며, 중화루의 역사를 설명해주고 있다고 한다.[9] 사진에 보다싶히 아직도 중화루의 간판이 걸려있고, 옆에는 여인숙 건물이 새로 생겨있다.[10] 호텔과는 거리가 멀지만 건물의 원래 용도인 숙박으로서의 기능을 하게 된거니 어찌보면 원래 용도로 돌아온거나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