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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민족 혹은 조선민족((Ethnic) Koreans / 韓民族[1] / 朝鮮民族[2])은 모국어로 한국어를 사용하고 한민족으로서의 공통 혈통과 문화, 정체성을 공유하는 민족으로 주로 대한민국과 북한에 거주하고 있다.한국인은 정치, 국가적 의미에 중점을 둔 반면 한민족은 공통된 혈통과 풍속 등 민족의 정체성을 뜻하는 인종, 문화적 의미에 중점을 둔다. 즉, 국적은 한국인이지만 한민족이 아닌 사람도 있고 한민족이면서 국적은 한국인이 아닌 경우도 있다.[3] 외국으로 이주하여 외국 국적을 취득한 한국인과 그 자손은 한국계 외국인이고, 한국으로 이주하여 한국 국적을 취득한 외국인과 그 자손은 외국계 한국인이다. 한국계 외국인을 한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2022년 기준 한반도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총 8,446만 명으로 추산되며 대한민국 국적자는 51,423,955명[비고1], 북한 국적자는 26,160,821명[비고2][6]이 있는데 귀화인과 혼혈인을 제외한 한민족은 약 8,00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외에도 미국에 약 260여만 명, 중국에 약 210여만 명, 일본에 약 82여만 명 등 # 한반도 밖에 거주하는 한민족은 7,493,587명으로 추산된다.(2023년 기준)
영어로는 일단 Ethnic Koreans이다. 그리고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한국인과 한국계를 통틀어 Koreans라고 지칭하고 있고 '한민족/조선민족'이라는 단어 자체는 Han race로 번역하고 있으며, 하위 항목으로 Overseas Koreans 또는 Korean diaspora(재외동포)가 있다.
2. 명칭
대한민국에서는 주로 한민족(韓民族)이라 부르고, 북한에서는 주로 조선민족(朝鮮民族)이라 부른다.한국에서는 한민족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쓰이지만, 중국, 일본 등에서는 조선민족이라는 용어도 많이 쓰인다. 이는 고려 중기까지 고려를 고구려[7] 혹은 신라[8]라고 부르거나, 고려라는 명칭이 조선 중기까지도 계속 남아있었던 것처럼 과거부터 사용해 온 용어의 익숙함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한편 한민족의 민족국가가 둘로 남북 분단돼 있고 북한과 북한계 단체[9]들은 조선을 사용하기 때문에 제3자인 이들은 남북 중 하나만 쓰는 '한'을 쓰기보단 옛날부터 쭉 써온 조선을 쓰는 것도 있다. 일본에서는 아직까지도 한반도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조선을, 그 중 남한만 가리킬 때만 한국으로 구분해 쓰고 있고 북한만 가리킬 땐 북조선이라 부르며 민족의 경우 아예 영어로 '코리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韓)이라는 용어는 사용한지 매우 오래 되었는데, 마한, 진한, 변한이다. 삼국시대부터 한민족의 거주 지역을 뜻하는 관용적인 말로 쓰였고 외국에서도 그렇게 인식했다.[10] 예를 들어 오키나와의 슈리성 만국진량의 종(1458년)에 적힌 명문(銘文)을 보면, "류큐국은 남해의 승지에 위치하여 삼한(三韓)의 빼어남을 모아놓았고, 대명(大明)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 일역(日域)과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류큐는 이 한가운데에 솟아난 봉래도(蓬萊島)이다. 선박을 통해 만국의 가교가 되고, 이국의 산물과 보배가 온 나라에 가득하다." 라고 되어있다. 이처럼 한(韓)이라는 표현은 오래전부터 한반도의 국가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정한론도 있다.
3. 인구
전세계 한민족 인구는 대략 8,446만 명[11]이지만 혼혈인이나 귀화인을 제외하면 8,000만 명 전후 수준으로 추정된다. 숫자 자체는 20세기 들어 크게 폭증하기는 했지만, 전 세계적인 인구 비율로 보면 오히려 줄어들었다. 그 이유는 20세기에는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인구가 급증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특히 당시 미국, 유럽 같이 일찍이 산업화를 이룬 선진국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국가들이 정치적으로 조금씩 안정되어 가던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베이비 붐 시대를 열었다. 2022년 한국보다 약 2배 인구인 이집트, 필리핀은 1960년도에 한국보다 인구가 겨우 2~3백만 명 많았고, 역시 한국보다 약 1.5배 이상 많은 이란, 에티오피아, 콩고민주공화국은 오히려 인구가 더 적었다. 한국의 경우 베이비붐 세대인 1956~1962년도를 포함하여 1971년도까지 출생아 100만 명 시대를 유지한 후에 산아제한정책으로 출산율이 급격하게 줄어 2000년대부터 세계 최저인데, 같은 시기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출생률을 가지고 있던 국가들의 대부분은 훨씬 더 오랫동안 유지하고 아직까지 유지한다(아프리카의 경우). 예를 들어 2022년 기준 5천만 이상인 케냐의 경우, 1960년대에 800만 명으로 당시 한국 인구인 2,500만과 비교해보면 3분의 1도 안 되었다.
물론, 필리핀이나 아프리카 국가들의 인구 증가 속도가 폭발적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전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줄어든 것이지, 객관적으로 보면 한반도 지역도 20세기 전반에 걸쳐서 폭발적인 인구 증가를 보였던 지역이다. 20세기 중반부터 현재까지 약 2배 이상이나 되는 가공할 수준의 인구 증가율을 보였으며, 이는 중국보다도 높은 수치다.
21세기 이후로는 대한민국의 저출산과 북한의 경제난[12] 때문에 인구 증가율은 하락세를 겪고 있다.
아래는 한국 국적 해외 체류자, 한국계 외국인[13]을 합한 숫자이다. 그래서 해외에 체류하는 사람이 중복 집계될 수 있다.[14]
지역 | 인구 |
대한민국 | 5,183만 |
북한 | 2,561만 |
미국 | 260만[15] |
중국(조선족) 및 재중동포 | 210만[16] |
일본 | 90만[17] |
독립국가연합(고려인) | 50만 |
캐나다 | 16만 |
호주 | 10만 |
필리핀 | 9만 |
베트남 | 8만 |
브라질 | 5만 |
영국 | 4만 |
인도네시아 | 4만 |
4. 역사
전 세계에 존재하는 42개 인구 집단 간의 유전적 거리 |
|
동아시아인(해당 도표에서는 Northeast Asian, 즉 동북아시아인으로 표기되어 있다.)에 속하는 민족과 그 밖에 여러 민족의 대분류와 유전적 거리를 알 수 있다.[18] |
아시아에 존재하는 39개 인구 집단 간의 유전적 거리 |
|
일본의 국립유전학연구소와 도쿄대학이 만든 본토 일본인, 류큐인, 아이누와 동아시아 민족들의 계통수. |
현대 한국인은 만주족(여진족), 일본인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깝다고 한다.[19]
UNIST 생명공학과 연구팀에서 진행한 한국인의 기원에 대한 게놈분석 연구에 따르면, 현대 한국인의 유전형질은 최소 8천년 전(기원전 6000년 경)부터 러시아 연해주의 악마문 동굴과 그 인근 일대에서 거주하던 북아시아 신석기인(선남방계)과 대략 5-4000년 전(기원전 3~2000년 경) 무렵에 중국 남부에서 발원한 후남방계 인구집단의 결합으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들 후남방계 인구집단은 이후 동남아, 북중국, 만주 등 다양한 방면으로 급격히 확산되었는데 그 중 한반도로 이동한 집단이 선주하던 선남방계 집단과 결합하여 현재의 한민족을 이루게 된 것이다.[20] 이에 따르면 선남방계와 후남방계 집단이 대략 3:7의 비율로 혼합이 이루어졌다고 한다.[21]
상기 연구에서는 선주민인 북아시아 신석기인 역시 오래전 동남아시아에서 발원하여 북아시아로 확산된 인구집단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따라서 상기 UNIST 연구진은 이들을 '선남방계'라 지칭하고 있다. 다만, 아직까지 이들 신석기인 집단의 기원과 확산경로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존재한다.[22]
지금은 통합·재정립된 개념으로서 "한(韓)민족"이라는 용어를 쓰지만, 고대~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고조선과 예, 맥, 한이라는 원류가 있었다. 초창기 이들은 하나로 통합된 정치체제가 아니었기에 아래와 같이 분류할 수 있다.
단, 이 분류는 사실 고고자료를 토대로 엄밀하게 정립된 개념은 아니고, 주로 문헌사에서 사후적으로 정립된 개념에 가까워서 어떤 측면에서건 당대인들의 인식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을 감안하자. 이들은 초창기 단계에서부터 서로 완전히 다른 계통이나 뿌리를 가진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마치 이들 광범위한 집단 사이에 통합된 정체성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들은 청동기시대부터 어느정도 고조선 문화권을 중심으로 서로 연루된 정황이 존재한다.
먼저 서북한 지역과 한(韓)의 원류가 되는 한반도 중서부 일대는 이들도 고조선 문화의 기층 중 하나가 되는 요령 일대의 쌍타자, 마성자 문화권 등에서 이주한 농경민의 영향을 받아 청동기문화를 형성한 데다 청동기시대 전기 내내 도록 작농경민의 이주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23] 이후에도 고조선이 중심이 된 중국 동북지역의 비파형동검과 다뉴경의 교역 네트워크에 속해 있었다.[24] 그리고 그 이후 기원전 5-4세기 이후 고조선 계통의 점토대토기문화가 한반도 중서부로 유입되어 사회 변혁의 획기로 작용하기도 하였을만큼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한 편이었다.
마찬가지로 부여와 고구려 역시 그 선주문화라 할 수 있는 '서단산하층문화'와 '공귀리형토기문화'는 고조선과 동일한 계통이거나 그 기층문화의 외곽에 있었던 문화로 여겨지며, 이들은 요서일대의 철기 문화 계통의 이주민과 결합하여 고구려와 부여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25]
고조선의 문화범위 |
하지만 이처럼 이들이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문화적인 영향을 주고받으며 교류한 것은 사실이기는 하나, 이들이 역사시대 이전에 이미 하나의 통일된 종족성을 이루었다는 주장은 별다른 고고학적 근거가 없으며, 물질문화상으로 적지 않은 차이가 관찰된다.
특히 예맥이라 범칭되는 집단들이 하나의 상위 문화에서 분화되었다거나 고조선, 부여, 고구려가 단순히 친연성이 있는 것을 넘어 동일한 종족 계통에 있다고 볼만한 근거는 나타나고 있지 않다.[26][27]
마찬가지로 한(韓)족 역시 문헌기록이나[28] 일부의 고고학적 근거[29]로 이들 요령일대 고조선계통 이주민이 기존의 한반도 중남부 청동기시대의 토착민들을 대체하여 형성된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역시 실제의 종합적인 고고자료에는 잘 부합하지 않는 인식이다.[30][31][32]
그러나 이후 원삼국시대와 삼국시대를 거치며 이러한 다양한 종족들은 점차로 더 밀접해지고 유사해졌으며, 결국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되기에 이르게 된다.
역사 속에서 다른 인근 국가 민족들이 일부 유입되는 사례도 있었지만 소수로 그치기도 했거니와 적극적인 동화 정책을 펼쳐 모두 한민족으로 흡수시켰다. 그리하여 원래는 예맥과 한, 그리고 여타 군소 종족들로 분화돼 있었던 한반도 인근의 여러 제종족들이 세월을 거치며 점차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여 현대 한민족으로 이어지고 있다.
고구려에서 기록한 광개토대왕릉비의 아래 구절로 보아 당시에는 같은 계열 민족이라 해도 지금 한민족 만큼의 공동체 의식은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중에서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중에서
고구려 당나라와 전쟁당시 |
그럼에도 동시에 맥인(貊人)인 광개토대왕이 여기에서 삼한일통의 시초로 보이는 인식 또한 보여주었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현대보다도 더 많은 고대 민족들이 있었던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굳이 '한인'과 '예인'만을 따로 찝어서 언급한 점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이들을 고구려가 품어야 할 천하관의 일부로 여겼음을 드러내었다는 것이다.[33]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점차 서로에게 동질성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확실한 것은 삼국시대에 걸쳐 한반도와 만주의 여러 제종족들이 정치, 군사적으로 밀접히 연루되면서 서로 문화를 교류하고 공유하는 등 유사성을 강화해 나갔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변 민족인 중국과 왜는 차츰 언어와 문화가 유사하고 서로 정치적으로 밀접하게 연루된 이들 한반도계 종족들을 동이나 삼한과 같은 명칭으로 통칭하기 시작했고, 전쟁이 지속되며 삼국은 다양한 출신들의 피지배 집단을 아우르게 되며 이들을 포괄하는 새로운 정체성 및 지배체제가 필요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진흥왕 순수비에는 새로 주민으로 편입된 피정복민인 신민(新民)을 원신라인인 고민(古民)과 동등하게 대우하겠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본디 이전의 도시국가적 관점에서 피정복민을 단순히 복속민으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34] 이들을 차별하지 않고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바라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35] 그 이전까지 한반도의 여러 정치체들이 협소한 단위의 국(國)이나 부족 단위의 공동체의식만을 느꼈다면 삼국시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차츰 당시 사회에 있어 전통적인 공동체 범위를 넘어서는, 보다 더 광의의 공동체인 국가 내지 종족성을 자각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한민족사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국가체제를 이룩한 것은 고조선과 부여이다.[36] 고조선은 요동을 중심으로 삼아 중국 전국시대에 전국칠웅들과 마찬가지로 왕을 칭할 정도로 강성했지만 연나라의 침입으로 큰 타격을 입고 한반도 북부로 밀려났으며 후에는 한나라의 침입으로 멸망한다. 부여는 고조선 유민들을 받아들이고[37], 고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한나라와 좋은 관계를 맺으며 융성했지만 부여에서 유래한 이주민과 압록강 유역의 토착민이 합쳐진 고구려가 발흥하여 밀려나기 시작했으며 선비족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어 빈사상태로 빠진다.
맥 계통의 고구려는 예 계통인 부여인의 일파가[38] 압록강 유역의 토착국인 졸본부여에 정착하며 시작한다. 고구려는 또 다른 맥 계통의 소국들과 예 계통의 소국들, 그리고 빈사상태였던 부여 등을 흡수하면서 한반도 북부로 진출해 고조선인과 마한인, 잔존한 한사군의 소수 한족들[39]을 통합·흡수하여 고구려인이라는 정체성을 이루었다.
이후 한반도 중부에서 고구려계 이주민과 마한 토착민의 연합으로 출발한 백제는 한반도 중부와 남부로 진출하면서 잔여 한사군의 한족들과 마한 세력들을 흡수하면서 또 다른 정체성을 이루었다.
동남방의 진한에서 기원한 신라는 고조선의 예맥계 유이민들이 진한 세력들을 병합하며 정체성을 형성했다.
남방의 변한에서는 가야 소국들이 발흥했지만 맹주국들(금관국, 반파국)이 나머지 가야 세력들을 통합하지 못 하여 단일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실패했고 결국 신라에게 흡수된다.
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키고 대동강 이남 영토를 병합하여 삼한일통을 표방하며 세 종족의 융합을 진행시켰다. 고구려, 백제 유민들 중에서는 당나라로 끌려가거나 왜국으로 이민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그대로 남아 다음으로 등장할 통일신라와 발해로 흡수된다. 여기까지가 삼국시대로 후에 한민족 정체성의 기저를 이루게 될 여러 영토국가들이 활발하게 성장하던 시대였다.
발해와 통일신라 (남북국시대) |
한편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인들은 고구려에 대한 동화가 상당히 진행되었던 말갈족과 연합해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걸친 후국 발해를 세우고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성공하고, 백제 유민의 일부인 웅진도독부도 여기에 흡수된다.[40] 이후 이전의 삼국시대와는 달리 중국 역사상 최대 전성기를 달리던 당나라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국제체제가 완성되며 발해와 신라는 별다른 전쟁 없이 라이벌 관계로 대치 상태를 유지한다. 이 시기가 남북국시대로 삼국시대에서 발전한 영토국가들의 이합집산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모습이 보이지만 여전히 기존 토착문화와 동아시아의 고전문화라 할 수 있는 당풍이 혼재했으며 정체성 형성도 완전하지 않아 일종의 과도기적인 시대였다.
이후 당나라가 멸망하며 동아시아에서는 오대십국시대를 비롯한 대혼란기가 도래하고 발해는 이 와중에 거란족의 요나라에게 멸망하게 된다. 신라 또한 혼란기가 도래하여 각지에서 도적이나 반란군, 호족들이 발흥했고 특히 이전에 멸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은 옛 나라들의 복고를 주장하기 시작하여 아예 신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궁예의 태봉(후고구려)과 견훤의 후백제가 세워진다. 태봉과 후백제는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옛날의 고구려와 백제처럼 격렬하게 대립했고, 신라는 쇠락했지만 나름 다시 패권을 차지하고자 분투한다. 태봉의 영토가 넓어지며 백제 및 신라계 인구 또한 많이 흡수하게 되자 궁예는 고구려계 호족들을 밀어내고 중앙집권화를 추구하기 위해 아예 고구려의 정체성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되는데, 이에 왕건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계 호족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고려를 세웠고[41] 이후 고려는 신라와 후백제를 통합한다. 발해인들은 멸망 후 지배층의 일부와 만주에 남아있던 유민들은 요나라로 복속되었다. 한편, 태자 대광현을 중심으로 한 집단 등 나머지 유민집단들이 발해부흥운동을 전개했지만 실패하여 엄청난 수의 유민들이 고려로 넘어오게 된다. 이 때 고려에서는 발해를 형제국으로 보아 발해유민들을 크게 환대했으며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에 대해서는 화이관으로 인한 멸시까지 더해져 원수처럼 여기게 된다. 이 시대가 후삼국시대로 현대사를 제외하면 한민족 정체성 형성기의 거의 마지막 과정이었으며 이 때 수많은 호족들끼리의 갈등은 멀게는 심지어 원삼국시대 삼한 소국들 간의 갈등에서도 기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오랜 고대로부터 기원한 통합과정이 일단 마무리가 된 것. 아무튼 후삼국시대가 마무리됨으로써 이후에도 몇몇 부흥운동세력이나 소국들이 있긴 했지만 대체로 한민족의 여러 세력들은 고려라는 단일국가로 통합된다.
고려 시대는 시대분류상으로는 중세에 해당하며, 한민족의 정체성이 크게 원숙해진 시기로서 당대 지식인들에게서도 정체성에 대한 많은 고민이 엿보인다. 일단 문화적으로는 기존 토착문화를 바탕으로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며 새롭게 섞여 들어오는 중국문화를 흡수해 가면서 한민족 전통문화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면서 시작했던 만큼 수도 개경의 중앙귀족들은 동명성왕을 특별한 시조로 여기긴 했지만 현실적으로는 백제, 신라계 주민들은 물론이고 가야계 주민들까지 합친 인구가 태반이었던 만큼 중앙정부는 이들을 포용해야 했으며 동명성왕이란 존재는 이들에게까지 어필하기에는 모자랐다. 이전의 삼국시대에서야 발흥하는 삼국이 아직 원시적이었던 각종 세력들을 쉽게 흡수할 수 있었지만 이미 삼국시대에 형성된 삼국에 대한 원숙한 정체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으며 전통 시조인 혁거세 거서간 또는 김알지/성한왕에게서부터 내려온 신성성과 삼한일통을 내세웠던 이전 신라의 정체성 통합시도 또한 삼국의 유민의식을 따라 다시 분리되며 실패했던 바 있었다. 게다가 산지가 많은 한반도의 지형 특성상 전통적으로 지역에서 자리를 잡아온 호족들의 세력이 강성했기에 중앙정부가 단순히 힘으로 찍어누르는 것도 힘들었고 이들이 자발적으로 따르게 할, 최소한 중앙정부에는 등지더라도 국가공동체는 배신하지 않을 정체성이 필요했다.
상황이 이랬기에 무신정변이라는 혼란기가 도래하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유민의식은 백제, 신라부흥운동은 물론이고 고려 왕조는 가짜 고려에 불과하다는 주장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고구려부흥운동까지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고려시대 중기부터는 이들을 모두 하나의 정체성으로 통합할 수 있도록 아주 옛날 한민족(예맥족)의 최초 국가였던 고조선의 단군이 새로운 시조로서 부상하게 된다. 그는 이른바 한민족의 영역권을 가리키는 해동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나라를 세웠던 성인이었기에 큰 이견없이 금방 떠받들게 되었으며 중앙귀족들의 근거지였던 북부지방의 성인이기도 했으니 중앙정부의 입맛에도 거슬리지 않았다. 그러다 여몽전쟁이라는 초유의 국난을 맞아 전 국토가 28년동안 난리를 겪으면서 엄청난 유망민이 발생해 기존의 지방공동체는 해체됐고 이에 따라 호족세력도 해체되면서 마침내 삼국의 정체성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으며 모두가 단합해 외세에게 저항하는 과정에서 단군과 기자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체성은 한반도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만주에 남아있던 일부 발해 유민들의 경우 이후 요나라가 멸망하고 여진족의 금나라가 들어섰을 때도 정체성이 지워지지 않아 발해부흥운동이 이어졌으며 요나라와 금나라에서는 부흥운동을 약화시키기 위해 많은 발해인들을 요서나 중원으로 강제이주시킨다. 하지만 그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발해인들의 후손은 몽골족의 원나라가 전성기를 누릴 때도 주로 요동 일대에서 정체성을 유지한다.[42] 대체로 요동 일대에서는 여몽전쟁의 여파로 유실된 일부 고려 유민들이 기존에 남아있던 발해인들과 뒤섞여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엄밀히 둘을 구분했다기 보단 그냥 싸잡아서 고려인으로 취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해서 요동에서는 고려 왕족이 임명되는 심왕직이 설치되었고 원나라가 멸망하고 한족의 명나라가 세워질 무렵인 제1차 요동정벌의 기록을 보면 '요동에서는 주민들이 본국인 고려로 복속하길 희망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끝내 요동은 고려가 아닌 명나라로 복속되었고 이로 인해 요동에 남아있던 발해·고려 유민들 또한 한족으로 동화된다. 이후 만주족의 청나라가 건국되면서 이들은 다시 만주족으로 동화되었으며 청나라 멸망 후 지금은 만주족 대부분이 한족으로 거의 동화됨에 따라 결과적으로는 다시 한족으로 동화되었다.
조선 시대는 시대분류상으로는 근세 및 근대에 해당하며 국호에서 알 수 있다시피 고조선을 이어받았음으로 삼국의 정체성에서 완전히 탈피하게 된다. 단군에 대한 숭배는 더욱 더 유행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한 정체성에 대한 인식도 더욱 확고해졌고, 무엇보다도 유교적 관념론 및 사관이 유행하면서 정통성에 대한 연구가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후기로 가서는 실학이 발달하며 실학자들이 참신한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고 실증주의에 기반한 엄밀하고 과학적인 연구를 시도하기도 했으며 이 때 나온 성과들 중 일부는 현대까지도 정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다만 후기로 갈수록 중앙정계에서는 성리학의 교조화가 심해지게 되며 소중화사상이 당시의 정체성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는데 이는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의 여파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애초에 국학으로 삼았던 성리학 자체가 중국이 북송/남송 시기에 요, 금, 원이라는, 화이관에 따르면 소위 오랑캐인 나라들에게 심하게 데이던 시대를 배경으로 발전했던 학문이기에 그런 면이 강했던 것도 있다. 그러나 소중화 항목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이는 '중화(문명의 중심)이던 명나라가 멸망했으니, 이제 중화(문명의 중심)는 우리다'라는 인식이었지 무조건 중국을 따라하자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니었다. 참고 이후 대한제국은 고조선을 이어받은 조선의 왕이 직접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를 아우른 정통성 즉 삼한의 정통성을 다시 강조하며 이어받은 것이므로 이 때 부터 "고구려·백제·신라 사람들의 나라"라는 뜻인 대한, 한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며 고조선과 삼국시대 나라들을 모두 계승하게 되었다.
현대 대한민국으로 와서는 고고학, 역사학 연구가 발전함과 동시에 민족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한반도로 왔다는 근거가 미약한 데다 상징성마저 떨어진 기자는 배제되었지만 단군을 시조로 하는 정체성은 지금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6.25 전쟁과 남북분단이라는 충격적인 사건들의 여파가 해결되지 않은 와중에 남한으로 한정해서는 급격한 산업화, 근대화로 인한 자본주의, 민주주의, 개인주의 발달, 서구화, 세계화, 정보화, 양극화와 세대격차, 보수와 진보 진영의 심각한 정치적 갈등 등 각종 현대문명의 충격이 덮쳐오며 아노미 현상, 배금주의가 발생하기도 하는 등 현대 한민족에게 혼란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현대의 이같은 혼란이 꼭 한민족에게서만 나타나는 문제인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해외 사례 등을 참고하여 연구, 개선할 필요성을 갖는다면 좋을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한민족의 동질성에 대해 서구 학계에서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만주와 경계를 맞대고 있지만 황해를 사이에 두고 중국과 좀 더 안전하게 떨어져 있는 한국은 우리 주제에 걸맞은 고전적 사례다. 원시시대 한반도에서는 기원후 제1천년기에 세 개의 독립된 왕국이 등장했다. 중국의 침략을 이겨낸 그들은 한자(15세기에는 고유의 문자를 창안했다.), 불교, 유교를 비롯한 중국 문화의 많은 특징들을 흡수했다. 7세기에 신라가 이 땅을 통일하면서 신라어가 표준어가 된 것으로 보인다.[43] 936년에 고려가 신라를 대체했고, 이 때부터 근대까지 한국은 중국, 몽골, 일본의 침략과 지배를 겪으면서도 대체로 통일과 독립을 꾸준히 유지해왔다. 한국의 문화와 정체성과 국체는 1천년이 넘게 일치된 상태로 이어져왔다. 여기에서 의문은, 외견상 엘리트 지배와 계급 분열로 규정되는 전근대 국가사회에서, 집단정체성이 정치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면 어째서 이런 일치가 이토록 오랫동안, 강대한 이웃나라들을 이겨내고 끈질기게 지속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인식을 지닌 동질적 집합성이 서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것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국가의 조직적 활동에 의해 창출되었을 수도 있다."[44] ... 근대주의 이론가/역사학자인 에릭 홉스봄도 지적했듯이 중국과 한국, 일본은 "민족적으로 거의 또는 완전히 동질적인 주민으로 구성된 극히 희귀한 사례다."[45][46]
민족 / 아자 가트, 알렉산더 야콥슨 저
민족 / 아자 가트, 알렉산더 야콥슨 저
5. 중국어 위키백과의 한민족 표제어 관련 논란
중국어 위키백과에서 한민족 문서의 표제어를 '조선족(朝鲜族)'으로 표기한 것에 관해 한국에서 논란이 있다. 2023년까지 중국어 위키백과는 한민족을 다루는 문서의 표제어를 '조선족(朝鲜族)'으로 택하고 있었으며, 중국어 대다수 화자 그리고 일본어 및 한국어에서의 조선족에 대해서는 '중국조선족' 표제어를 택하고 있다. 한편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선족의 인구를 170-200여만명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가민족사무위원회 - 중화 각 민족 - 조선족중국 당위통전부에서는 조선족(朝鲜族)은 중국의 소수민족 조선족을 특정적으로 지칭하며, 2010년 중국 제6차 인구조사자료에 따르면, 중국 국적을 가진 조선족은 약 183만명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47]
청나라는 자국 영토내 조선 사람들을 한민(韓民)이라고 불렀고, 중국국민당은 당시 중화민국 내 조선인들을 한교(韓僑)라고 불렀다. 조선족(朝鲜族)이라는 표현은 이후 중국공산당의 민족식별공작에 의해 1949년 이후에 생긴 표현이다.
"한국어로든 중국어로든, 한국인과 조선족을 둘다 한 집단(약 8,000만)으로 엮으려면, '한민족(韩民族)'이나 '조선민족(朝鲜民族)'으로 표기해야 타당하다"는 게 한국 주요 언론의 관점이다. 매일경제 한국경제 중앙일보 국민일보
표준 중국어에서도 조선족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한국인, 북한 국적을 가진 북한인과 구분되는 단어이며, 중국인이 일상생활과 공문서 등에서 조선(朝鲜)족을 말하면 십중팔구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소수민족을 의미한다. 다만 사전적으로는 제일 첫번째에 중국의 소수민족이라는 해석이 있으며, 둘째로는 한반도의 주요민족이라는 해석을 달아놓는 상황이다. 그리고 1953년 이후부터 1992년 한중수교 이전에는 한민족을 조선족이라고 표기해왔었다. 일종의 신조어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 조선족(朝鲜族•Korean ethnic minority group) 인구:1920597
중국왕이신문 - 조선족은 중국인이다.
다만 2023년말 18년만에 조선족이 조선민족으로 표제어가 변경되면서 드디어 중립성을 확보했다. 현재는 조선민족과 한민족 사이에 교묘하고 애매하게 조선족이라는 명칭을 끼워놓았다. 자세한 내용은 중국어 위키백과의 논란 문단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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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자 표기.[2] 북한, 중국, 일본에서 부르는 표현[3] 우리말로 깨닫다, 한국인은 누구인가?, 재외동포신문[비고1] 단순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람을 기준으로 함.[비고2] 단순 북한 국적을 가진 사람을 기준으로 함.[6] 다만 북한 인구 통계의 경우 인구 부풀리기를 하고 있다는 의혹을 사고 있어 정확한 인구 통계는 불분명하다.[7] 고려도경, 쿠빌라이 칸, 무쿠리코쿠리 등.[8] 계림잡전 등.[9] 일본 같은 경우 조총련 등이 있다.[10] 고구려, 백제, 신라를 삼한으로 부르기도 했다. 똑같지는 않지만 가변적이면서 관용적이라는 점이 넓은 의미의 요동과 비슷하다.[11] https://ko.wikipedia.org/wiki/한국인[12] 북한의 경우, 단순한 경제 악화뿐만 아니라 최빈국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저출산이다. 이미 2004년 기준 고령화사회에 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구나 열악한 식량 사정으로 대부분의 인구가 기아 문제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도 인구 사정의 악화에 일조한다.[13] 한국계 미국인, 한국계 중국인, 한국계 일본인 등.[14] 보통 90일 이상 체류하면 체류자에 포함한다.[15] 미국 시민권자 한국계 미국인 및 한국 국적 유학생과 한인들 포함[16] 한국 국적 유학생 및 사업차 중국 체류중인 주중 한인들 포함. 재한 조선족까지 하면 더 줄어든다.[17] 재일 한국인 조선인 및 조선적만 포함되며 재일조선족은 재일 중국인으로 분류되어 포함되지 않는다. 만약에 7~8만 중국국적 한민족인 재일조선족도 포함되면 100만 가량이 된다.[18] 참고로 왜 'South Chinese'가 동남아시아인으로 분류되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수도 있는데, 'South Chinese'에는 징족, 태족, 묘족 등 중국 최남부에 거주하는 여러 소수민족도 포함되고, 북중국과 남중국으로 나눈다고 중국 대륙을 딱 절반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통 유전학계에서 남방 한족이 있다고 보는 지역은 난링·우이 산맥 이남 지역으로, 중국 대륙 기준으로 매우 일부분이다. (혹은 중국과 인도차이나 반도 국경 근처의 소수민족 거주지까지 포함할 수도 있다.) 사실 이마저도 다른 지역에서 유입된 인원이 너무 많아서 분류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의 역사적인 대도시는 전부 난링·우이 산맥 이북에 있다. 다만 난링·우이 산맥 이남에 거주하는 객가인은 북방 한족의 일파로서 전쟁 등으로 인해 중원에서 남쪽으로 피난 간 이들의 후손이다. 이들은 유전적으로 북방 한족에 가깝다고 한다.#[19] # 전 세계 기준 유전적 거리 아시아 대륙 기준 유전적 거리[20] # #[21] 고고학적으로도 한반도 청동기시대 전기인 기원전 13세기에 이르러 재래의 신석기사회가 해체되고 정주농경문화가 급격히 확산되는 정황이 나타나는데,(김장석, 남한지역 신석기-청동기시대 전환, 2002) 이는 이들 후남방계 인구집단의 유입의 결과일 수 있다.[22] #[23] 천선행, 청동기시대 조기설정 재고, 2015[24] 강인욱, 초기 고조선 네트워크의 형성과 비파형동검문화, 2018[25] 문안식, 요하문명과 예맥, 2012. 다만 아직까지 고구려와 부여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한다.[26] 오영찬, 예맥의 종족성과 물질문화, 2023[27] 마찬가지로 문안식 역시 '요하문명과 예맥, 2012'에서 고구려와 부여를 건국하는 데에 기여한 예맥의 원류가 되는 요서의 철기문화 이주민 집단은 고조선 주민 사이에 문화적으로 동질적이고 혈통 역시 가깝다고 보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동 일대 고조선과 요서지역의 예맥이 동일한 종족 갈래는 아니었으며, 문화 양상 역시 적지 않았다. 예컨대 지석묘는 요동반도와 길림ㆍ화전 등 길림성 일부 및 한반도 일대에 주로 분포하며, 요하 서쪽에서는 조사되고 있지 않다"고 기술하며 양자가 분명하게 이질적인 측면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고조선의 주민들을 예맥족으로 표현하는 것은 잘못일 수 있다. 단, 이 역시도 고구려와 부여의 건국을 이끈 철기문화의 담지자가 어디에서 기원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많은 이견이 존재한다.[28] 중국측 문헌 기록들에 의하면 공통적으로 고조선 유민들이 부여와 마한, 변한, 진한으로 상당수 유입되었다고 일관되게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기자조선설처럼 문헌기록에서 나타나는 출자의식은 실제의 사실과 맞지 않은 부분이 많으므로 이는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삼국지 동이전은 이러한 인구 변동이 나타난지 수백년이 훨씬 지나 기술되었고, 이러한 변동과정에 대한 중국 측의 피상적인 인식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므로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29] 기원전 5-4세기 무렵 점토대토기문화가 한반도 중서부에 유입되었고 이들의 문화가 초기철기문화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30] 한반도 중남부의 토착주민들은 적어도 청동기시기부터 벼농사를 통해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었고 예맥계 이주민들은 오히려 토착의 묘제, 벼농사 등을 흡수하면서 토착 주민들에게 흡수, 동화된 측면이 강하므로(문안식, 요하문명과 예맥, 2012) 이들이 한족(韓族) 사이에서 주류였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전진국 역시 '삼한'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외래에서 이식된 것일 수는 있어도 삼한사회 자체의 기원은 송국리문화 단계에서부터 기원하여 여러 외래 이주민을 흡수함으로써 형성-발전한 것이라고 본다.(삼한의 실체와 인식에 대한 연구, 2017) 특히 전진국은 준왕남래설과 같은 문헌기록을 불신한다.[31] 물론 일부 점토대토기문화 계통 이주민이 한반도 중서부에 존재하기는 했을 것이나, 이들 취락은 입지나 크기에서 그다지 토착민에 대해 우월성이 관찰되지 않는데다가(이형원, 청동기시대 갑천유역의 유적 분포양상과 그 의미, 2016 등) 이들의 생활취락 자체가 동시기의 분묘유적에 비해 매우 빈약하게 나타나므로 이들의 이주로 인해 재지의 송국리문화가 해체되었다고 볼 수 없고, 이들 송국리형 취락이 한반도 중서부에서 꽤 늦은 시기까지 존속했다고 할 수 있다.(김장석, 호서와 서부호남지역 초기철기-원삼국시대 편년, 2009) 오히려 이 당시 한반도 중남부의 상황은 토착문화에 근거하여 이들 이주민의 문화가 융합된 흔적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뿐이어서, 설령 이주민은 존재했더라도 소수이며, 대개 토착사회의 자체적인 사회발전 및 외래문화흡수의 결과로 초기철기시대가 개막했다고 보는 입장도 존재한다.(송만영, 중부 지역 점토대토기 사회에 대한 다른 인식, 2019) 어떤 측면에서건 고고학적으로 이들 이주민 집단이 대규모로 유입되었다고 볼만한 정황은 없으며, 오히려의 재래의 토착사회가 꽤 늦은 시기까지 잔존하고 있는 것이다.[32] 현재 고고학계에서는 초기철기시대 한반도 중남부 사회에서 이주민과 토착민 중 누가 사회의 주도권을 행사했느냐를 두고 이주민 집단에 의해 토착사회가 재편됐다는 재편론과, 이주민들이 문화적 영향만을 남기고 토착사회로 흡수되었다는 흡수론이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재편론에서도 이들 이주민이 대체로 소수이고 사회 기층은 토착민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에는 동의하고 있으며, 다만 양자가 서로 사회발전정도가 서로 다르고 이주민이 문화역량이 우월하여 그들이 토착사회를 재편할 수 있었다고 볼 뿐이다.(조진선, 진·변한의 형성과 분립 과정, 2023 등)[33] 이해를 돕기 위해 해외의 사례를 들자면, 진시황은 중국 천하관과 관련 없는 이민족 국가인 고조선을 진(秦)나라의 중원통일 대상으로 포함하지 않았다. 반면에 초나라는 조상이 중원 일대의 종족과 다른 남방계임에도, 문화적으로 중원과 동질화되었기에 통일대상이 되었다.[34] 예컨대 법흥왕 대까지는 신라는 피정복민, 복속민을 노인(奴人)이라고 하는 피차별 계층으로 대우했다.[35] 이일규, 신라 진흥왕대의 새 영토·주민 시책, 2019[36] 정확히 언제 세워졌는지 모를 소국들도 동시대에 많이 있었지만 끽해야 군장국가 수준이었고 제대로 된 체계를 갖춘 영토국가로는 고조선과 부여라고 추정하고 있다.[37] 부여로 가지 않은 고조선 유민들은 한반도 남쪽으로 가 마한, 진한, 변한에서 살았다.[38]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이 부여 출신이기도 했고, 그 외 여러 사료를 들어 예와 맥은 별개의 민족이 아니라 원래 하나인 민족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하는 설들이 있는데 자세한건 예맥 항목 참고. 어느 결론이든 비슷한 문화를 가진 종족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39] 다수가 이미 한나라로 피신했다.[40] 발해는 고구려를 이어받아 '고려'라는 국호를 공식적으로 내세우고 싶어했으나 외교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통일신라와 고구려의 부활을 껄끄러워하던 당나라가 방해한 듯 보인다.[41] 고구려는 지금의 황해도와 평안도, 특히 황해도 부근이 중심지였는데 왕건을 비롯한 여기 지역 출신 귀족들이 고려를 세운 고구려계 호족들이다.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과 고려의 수도인 개성의 위치를 생각해 보자. 둘 다 황해도 부근이다.[42] 만주 동부 및 연해주쪽의 경우 요나라 때 이미 대대적으로 발해인들을 요서 방면으로 이동시켰기에 이 무렵이면 이미 함경도 일대까지도 여진족이 대세가 되었던 걸로 보인다. 요동 일대와는 달리 고려 때든 조선 때든 이쪽은 그냥 여진족들의 황량한 땅으로 여겨지고 있었다.[43] 현재는 한국어 연구가 진척을 이루며 고구려어와의 연관성이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중이다. 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 항목 참고.[44] 출처: Proto-Nationalism in Pre-Modern Korea / John Duncan[45] 출처: Nation and Nationalism since 1780[46] 다만 같은 책의 다른 문단에서 "민족적으로 거의 또는 완전히 동질적인 주민으로 구성된 극히 희귀한 사례다."라고 한 것은 '명백한 과장이다'라는 설명도 등장한다. 즉 극히 희귀한 사례까지는 아니라는 것.[47] 조선족은 사전에 가장 자주 쓰이는 뜻으로 중국 소수민족으로 적혀있고, 둘째가 한반도의 주요민족이다. 다만 명칭이 중국어로도 굉장히 중구난방이라, 정립이 필요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