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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中華思想[1]영어: Sinocentrism
프랑스어: Sinocentrisme
중국인(주로 한족[漢族]) 특유의 자문화 중심주의 사상. 골자는 중화 문명(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며, 그 문화적 역량이 어떠한 다른 문명보다도 우수하다고 믿으며, 다른 문명을 오랑캐로 낮잡아보는 사상. 국가 명칭부터가 '중심 국가'라는 의미의 '中國'이다.[2] 중화사상은 근현대의 서구 내셔널리즘과 결합해 한족 민족주의(특히 대한족주의)로 이어지게 된다.
2. 중화사상의 내용
북적 (北狄) | ||
서융 (西戎) | <nopad> 중화(中華) 중원(中原) | 동이 (東夷) |
남만 (南蠻) |
한족은 전통적으로 자신들 밖의 다른 나라나 민족은 자신들과 구별지어 오랑캐로 여기고 멸시하는 성향이 강했다. 중원을 중심으로 각각 동이(동쪽 오랑캐), 남만(남쪽 오랑캐), 북적(북쪽 오랑캐), 서융(서쪽 오랑캐)이라 칭하였다.[3]
사실 고대 중국들의 입장에서는 가운데 나라(中國)라고 할 만한 것이 북쪽은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싶은 혹한과 눈밭이 있는 시베리아가, 서쪽은 현대에도 교통이 어렵고 살기 척박한 타클라마칸 사막이 막고 있고,[4] 동쪽으로는 자연재해가 잦은 섬들과 끝을 알 수 없는 바다 태평양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정글지대와 섬들이 있을 뿐이다. 특히 고대 중국의 화남 지방은 습지와 정글로 차있었으며, 전염병으로 유명하였다. 이러한 습지가 개간되기 시작한 것이 오나라이며,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동진 시절부터이다. 그러다보니 고대 중국인의 입장에서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최고의 땅이자 국가라는 세계관은 이러한 지리적 상황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명칭인 '중화(中華)'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화사상은 중앙[中]을 중심으로 미개한 주변부를 다스린다는 관념을 깔고 있으며, 따라서 중국이 '세계 유일의 황제' 개념이 정립되며,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등 나머지 지역은 왕 혹은 제후 개념이 정립되어 발전한 중국의 역사 및 세계 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완전한 황제의 통치를 위해서는 '중심부[中]의 절대 권력자인 황제를 정점으로, 각지의 왕 혹은 제후'로 이어지는 위계질서가 확립되어야 하는 것이며, 이를 정당화하는 것이 '하늘(天)로부터 부여받은 권위'(천명) 및 인구와 영토에서 기인하는 문화력이었다.
따라서 근대 이전의 중화사상은 동아시아 문명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사상임과 동시에 국가간 권력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국제외교였다. 때문에, 과거 역사의 중화사상을 정당화하는 것이 단순히 천명을 바탕으로 하는 위계질서'라는 것은 옳지 않다. 이론적인 사상으로야 천명사상과 황제주의를 바탕으로 했으나, 실제로는 동아시아 어떤 국가를 상대로도, 심지어 당시 동아시아 전 국가가 연합해서 공격해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국력을 자랑했던 중국의 국력과 지위를 인정하고, 중국은 황제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고 황제국의 권위를 누리는 대신 한반도 국가를 비롯한 주변국들의 군사적 안전(독립)과 정치적 안정성을 보장하고, 하사품이라는 명목으로 매년 수많은 선물을 지급하는 일종의 거래였다. 이 때문에 중국이 강할때면 주변국들이 중국의 눈치를 보았지만 중국이 약해지면 바로 주변국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요나라나 서하, 금나라 등에 의해 국가의 존망이 위협받던 송나라는 정통 한족 국가임에도 황제국 행세는 겉치레였을 뿐, 거란과 여진을 자력으로 물리친 고려의 눈치를 보며 고려에 꼼짝하지 못했고, 중화식 외교관계에 어두워 주변국으로부터 뜯어내기만 할 뿐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하지 않았던 원나라는 황실의 내분으로 군사력이 약해지려는 낌새가 보이자마자 바로 고려에 의해 쌍성총관부를 공격받게 된다. 또, 명나라와 청나라는 조선과 외교관계가 안정화되고 우호국이 된 후에 매년 조선에 보내는 하사품으로 인해 재정 부담을 겪었으며, 국가가 안정적이던 명나라 초중기에도 조선의 사신에게 '제발 적당히 좀 오면 안 되겠냐'며 조선의 공물을 오히려 부담스러워했다. 조선이 공물을 보내오면 그 공물의 몇 배는 되는 값어치의 하사품을 단순히 '천자의 은혜'라는 명목으로 지출해야 했으니까. 특히 명은 몽골과도 몽골이 보내는 공물로 크게 갈등하여 전쟁이 터진적이 있다.
2010년대와 2020년대에 중국은 이 중화사상 때문에 외국들과의 갈등이 커져 중국의 외교가 갈수록 시궁창이 되어가고 있다. 일본의 침략이라는 고통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음에도 한중관계는 갈수록 경색되어가고 있으며,[5] 자국의 어민들이 벌이는 불법 조업을 제대로 단속하지 않는 태도와 남중국해 문제 때문에 동남아시아 국가들과도 관계가 좋지 않다. 또한, 한때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막대한 지원을 해주며 관계를 돈독히 하려던 중국이었으나, 아프리카 및 남미 국가들 사이에서도 현지인 고용을 잘 하지 않는 등 투자로 인한 경제적 혜택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불만들로 반중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6]. 외교 전문가들도 중국은 과거 명청 시대의 외교보다도 후진적이며, "중국의 외교관들은 이대로라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평가를 내릴 정도로 중화사상은 중국의 외교적 행보에 있어서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전근대에 조공무역은 중국이 관리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도 안정적으로 통일왕조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오호십육국시대나 오대십국시대, 원 정도를 제외하고 중국은 광대한 영토를 가진 국가답지 않게 통일 왕조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왔으며, 국가가 분열될 때도 외세의 침입보다는 내분과 반란으로 멸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현대 중국은 공산국가 건국과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유교적 질서가 파탄나면서 체면 문화가 사라지고 인문학이 박살난 반면, 공산당의 국수주의 정책으로 강한 민족주의만 남게 되면서 주변국을 향한 일방적인 갑질로 바뀌어버렸다. 이 때문에, 외국과의 갈등이 심해졌고 과거와 달리 현대 중국은 변질된 중화사상으로 인해 외교에 큰 지장을 받고 있으며, 사실상 현대 국제사회에서 믿을만한 동맹국 하나 없이 고립되어버린 가장 큰 원인으로 변질된 중화사상이 지적받고 있다.
사실 이는 광대한 영토를 안정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원동력이었던 중국의 전통과 유교사상이 사회주의/공산주의의 도입으로 인해 '낡은 것'으로 치부되어 중국인들 스스로가 박살내면서 유지되던 각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복속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그간은 천하제일국이라는 자부심과 화의 민족이라는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지켜왔으나, 이것이 박살나면서 중앙정부가 손길이 안 닿는 지방을 복속시킬 방도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다보니 중화사상을 부활은 시켜야 되는데, 이는 또 모든 국가가 평등하다는 현대식 평등주의와 사회주의에 정확하게 반대되며 어줍잖게 부활시킨 중화사상에 민족주의를 섞고, 거기에 중국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는 내용을 섞다보니 지금의 민폐 중화사상이 부활하게 된 것이다.
3. 형성 과정
역사적으로 '중국'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것은 상주 시대부터 확인할 수 있는 일로, 이(夷), 만(蠻), 융(戎), 적(狄) 등을 비롯해 수많은 이민족들이 존재했던 상황을 당시 문헌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후 춘추전국시대에 이민족과의 잦은 충돌을 빚으면서 '중국'과 '중화'의 정체성이 확립되다. 이 사상은 춘추전국시대부터 진(秦)ㆍ한(漢) 시대에 걸쳐 등장하기 시작했고, 특히 전한 시대의 공양학(公羊學)에서 두드러지며 오행 사상 등과 결합하면서 이론적으로 정립되고 기본적인 외형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한나라가 주변 민족들을 동서남북 다 털어버리기 전까지는 내부에서도 흉노와 같은 유목민들이 더 남자답다고 여기고 가서 선우가 되어 한나라를 괴롭힌 사람들이나 조타처럼 다른 농경 이민족들의 왕이 되어 나름 부심을 부리고 산 사람들이 꽤 있었다. 국제적 왕조인 당나라 이후부터는 주변국에도 본격적인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으며, 남송대 이후 발달한 성리학은 천자 중심의 질서를 더욱 크게 강요하였다.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중화 사상이나 중국 문명 자체의 시초[7]라고 볼 수 있는 주나라의 경우 연구 결과 의외로 초기에는 유목민 정복자[8]들이었다. 기록에는 상나라가 매우 포악해서 망했다고 되어 있지만 막상 주나라 사람들 역시 초창기에는 주변 민족들에게 별로 자비롭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9]
4. 특징
4.1. 중국 전체의 통합
흔히 중화사상을 '오래된 중국의 민족주의' 정도로 이해하고는 하나, 단순하게 볼 것은 아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 중의 하나는 혈통적으로 다른 공동체들을 많이 흡수하면서 중국이 성장해 나갔기 때문이며, 중화사상을 정당화하는 중요한 근간 중의 하나가 '우월하게 세계의 중심에 선 화(華) 문화'이기 때문이기도 하다.만주족인 청나라의 옹정제 같은 경우, 동이[10] 출신의 순 임금과, 서융 출신의 주문왕[11]을 거론하며, 이들도 한족 질서에 편입될 수 있었음을 《대의각미록》에서 주장하여 청나라의 정당성을 삼는 근거로 내세웠다. 한족 항목에서 볼 수 있듯, 실제로 남중국과 북중국은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제법 큰 차이가 있음에도, 역대 중국의 국가들은 '중화'의 범위로 이들을 묶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는 만주족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인 면이 강한 주장으로, 정작 한족 신사[12] 계층이 청 황실을 오랑캐라고 보는 관점은 청 말기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이들 한족 신사층은 지방에 웅거하면서도, '멸만흥한(滅滿興漢; 만주족을 멸절시키고 한족을 부흥시킨다)'을 표방하며 언젠가 '오랑캐의 지배'를 뒤엎을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고, 그것이 대대적으로 폭발한 것이 이른바 태평천국의 난이다[13]. 이는 외세에 의해 나라를 빼앗겼다고 인식하고 있다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이념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근대적 민족구분이 없던 상태의 근대 중국에 민족주의가 유입되면서 이런 인식도 생겨났다. 아무튼 청나라가 안정된 뒤에도 한족에 대한 강경책과 탄압이 완전히 사그라진 건 아니었다. 문자의 옥 항목 참조. 다만 당시의 민족 탄압은 근대적 민족주의가 적용된 형태는 아니었고 민족간의 경계도 애매했다고 한다. 중화주의가 민족주의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보통 태평천국의 난 전후로 본다.
현대에도 중화사상은 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사용되고 있다. 우선 종족 혁명론에 근거해서 반청복명을 주장하던 한족들이 자신들이 권력을 잡고나자 중화민족 개념을 급조해서 한족이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걸 정당화했다는 점이 대표적인 예다.
물론 이민족 왕조의 경우는 이민족이라는 이유로, 잘한 점은 덜 인정받고 한족 왕조와 똑같은 병크를 저질러도 더 까이는 성향은 컸지만, 하여튼 청나라 말기의 혁명파들은 청나라의 지배기간을 한족이 식민지배당하는 것으로 해석하며, 신해혁명은 한족의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근대적 민족주의를 이렇게 해석한 것이다. 현대 중국에서는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기 위해 정 반대의 주장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 서구의 개념인 민족과 식민지에 대해 당시 중국에서는 여러 해석이 나왔는데, 특히 중화라는 개념이 근대적 민족주의로 따지면 어디까지의 범위인가 하는 것이다.
반청복명의 혁명파들의 주장은 장빙린의 종족 혁명론에 근거한 해석이었다. 종족 혁명론은 한족만이 중화로 여겨질 수 있기에 수준 낮은 이민족을 배척해야 한다는 관점인데, 그래도 장빙린은 '한족과 만주, 몽골, 티벳, 위구르가 모두 별개의 나라가 되어야 하므로 한족이 새 나라를 세우고 나면 다른 민족들도 알아서 독립해서 나라를 세우라'는 나름 공평하고 쿨한 태도였다. 다만 이후 중화주의와 한족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다른 세력의 주장에 밀려 오족공화는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반면에 개혁파들은 청 왕조도 중화에 포함할 수 있다면서 혁명파의 이 주장을 반박했다. 삼합회(三合會)의 시초가 되었다는 말도 있는 홍문(洪門)은 명나라 말기~청나라 초기에 일어난 비밀결사(秘密結社)로, "반청복명"(反清復明, 청을 몰아내고 명을 부활시킨다)를 모토로 삼는다. 이후 홍문은 모든 산당(山堂)과 반청조직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 되었다.[14] 이러한 '멸만흥한' 이념이나 조선 및 베트남 등에서 내세운 소중화 사상은, 오랑캐로 일컬어지는 외래인 중심의 지배를 부정하는 기조에서 성립된 것으로, 뿌리 깊은 중화사상 하에서 정통 중화인이 아닌 오랑캐를 질서의 정점에 세우는 것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 들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다만 현대의 중국은 자국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며 무조건 하나의 중국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조상들이 이민족을 거부했다는 것을 묻으면서까지 '중국은 처음부터 다민족국가였다' 라고 하는 방향으로 역사관을 굳히는 중이고 동북공정도 이 과정의 하나. 근대에는 혁명파와 개혁파의 해석이 충돌하긴 했지만 결국 이러저러 하다가 신해혁명이 발발하면서 공화국 중국은 한족 중심의 체제일 수밖에 없는 형태로 출발한다.
그런데 문제는 혁명파 이론을 지지하던 한족들도 정작 시대가 바뀌고 나자 다른 민족들의 독립운동은 탄압하는 이중잣대를 보인다. 위구르와 몽골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중국 군벌과의 투쟁이 계속되었고, 이 부분은 근대 중국의 제국주의적인 면모이지만 그냥 그 부분은 축소되고 군벌시대의 흥미진진한 통일 과정 정도로 여겨진다. 하여튼 여기에서 현대의 소수민족 문제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즉 '중화인'들이 중화사상을 정당화하는 이유는 중화 문화였지만, 그 기저에는 혈통이나 인적 공동체의 의미가 깔려 있었다. 특히 근대에 와서 더 이런 성향이 굳어진다. 그러나 고대 이래 황하 인근 집단이 주변의 이민족을 흡수하며, 지금의 한족으로 세를 불려 나아가는 과정에서 '중화'의 범위는 끊임없이 확장되었다. 이것은 중국의 중심 지역에서 인구가 팽창하는 범위 이상으로 이루어진 문화의 확장을 동반한 것이었고, '중화인'의 혈통적, 인적인 구성도 중화사상의 주장과는 다르게, 계속해서 유동하면서 넓어져 갔다. 시대가 지나면서 중국의 영토가 계속해서 확장된 것 또한 이렇게 당연하게 자신을 '중화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전국시대에 중국의 일원으로 취급받게 된 연(燕), 초(楚), 오(吳), 월(越), 진(秦) 등의 공동체는 본래 전혀 다른 정체성을 지닌 '다른 세계'였다는 사실이 상주 시대 기록의 분석을 통해 드러나고 있으나, 역사의 방향성은 이 모두가 '중국'에 편입되는 쪽으로 흘러갔다.[15] 오호십육국시대 중국에 진입했던 수많은 이민족과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의 정복왕조 역시도 막상 유목민 시절을 벗어나 정주민이 되면서부터는, 중국의 압도적인 문화와 인구 속으로 빨려 들어가 중화사상에 물들어 이 질서 안으로 편입되었다. 물론 이러한 이민족들이 중국에 미친 영향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중화사상과 민족의 팽창이 단지 문화와 인구를 앞세운 평화적 과정이라는 통념은 중화주의적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다. 한족들에 의한 원주민 대량 학살과 식민화가 정석적인 수법이었고 삼국지 같은 고서만 봐도 의도적으로 이민족을 사냥하고 흡수해서 동화시키는 행위가 숱하게 존재했다. 그 많은 비한족 원주민 노예들은 다 어디서 왔겠는가?
이민족 문화가 흡수되어 중국문화가 형성된 경우로는 청나라 시절에, 중국인 전통의 상투가 사라지고 변발로 문화적 습속이 바뀌었으며, 이후 현대화를 거침에 따라 상투는 다시 부활하지 못했다. 문화란 일방적으로 한쪽이 다른 한쪽을 물들이는 게 아니다.
이처럼 중화사상의 막대한 힘이 동아시아에 작용한 결과, 근대 이전까지의 2,000년간 중국이 방대한 면적과 수많은 인구를 하나의 틀 안에 묶고, 이를 제국의 형태로 실현할 수 있었던 중요한 통치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수 있었다.
또한 지금까지도 중국이 그 거대한 세력을 유지 가능하면서, 다른 국가들에 비해 꾸준히 정치적-통치적 폐쇄성을 띄는 근간이 되기도 하였다. 이는 중화사상으로 인해 동아시아의 문화적 다양성이 사라졌다는 말이 된다. 한국 신화가 한국의 세계관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된 것도, 개별적인 정체성보다 중화사상에 근거한 세계 체제를 지향했던 중화 문화권의 과거사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본래 반청복명,멸만흥한을 외치던 한족들이 갑자기 '하나의 중국'을 외치게 된 이유는 결국 정치적 이유가 90퍼센트인데, 막상 만주족의 지배를 뒤엎으며 독립하고 나니 마찬가지로 만주족의 지배를 받던 티벳,위구르,외몽골의 영토가 탐이 나서다. 만주족 왕조 청나라, 즉 '만청'을 부정하면 그 만청이 두배로 넓힌 광대한 영토를 다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것. 그래서 갑자기 '56개 민족의 연합체'라는 사상이 강조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자면 청나라가 무너진 후에 티벳도 독립했는데, 50년대에 마오쩌뚱이 티벳을 강제병합 한 이후로 중공은 지금까지 쭉 '역사적으로 티벳도 중국의 일원이었기 때문에(청나라) 강제병합이 아니며 티벳 독립운동도 반란분자들에 불과하다'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4.2. 배타성
신체 구조, 군집성, 배타성 면에서 한족은 오랑캐와 구별되지 않지만, 그래도 한족은 전적으로 오랑캐와 구별되어야 한다. 왜 그러한가? 만약 인간이 스스로를 사물과 구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늘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다. 한족이 스스로를 오랑캐와 구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상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다. 천지가 인간들을 서로 구별하고 통제하고 있는데 인간이 스스로 사회 집단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다.
- 왕부지(王夫之 1619~1692)
- 왕부지(王夫之 1619~1692)
중화사상은 자문화 중심주의 사상이기 때문에, 그 특성상 당연히 강한 배타성을 깔고 있다. 사실, 현재의 중국인들도 다른 민족들을 깔보면서 오만하게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16]
이 배타성이 어느 정도로 강하냐면, 송나라 때 거란의 요나라와 전연의 맹을 맺은 이후로도 샌드백마냥 털리자, 송나라에서는 고려에서 온 사신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당시 고려는 거란을 자력으로 물리친 전과가 있었기에 국격이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고려 사신을 인솔하던 소동파(시인으로 유명한 그 소동파 맞다)는 '오랑캐 놈들이 중화 민족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니, 그 꼬라지를 차마 볼 수 없다.'며 내내 툴툴거렸다고 한다. 송나라로서는 고려의 지원을 받아야만 요나라를 상대할 수 있는 입장이었기에 대놓고 화를 내지는 못했지만, 중국인들, 특히 한족들의 배타성과 자국 우월주의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다.[17]
전근대 중국이 동아시아권에서 막대한 문화적인 영향력을 행사함에 따라, 중국 바깥 권역은 자연히 오랑캐라고 멸시되었으며, 이를 방위와 결합해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라 호칭하며 깔보았다. 이는 중국의 문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중국에 사대하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조선 역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례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국왕 선조를 만난 명나라 사신 송응창은 "조선 왕이 고집이 세어 내 말을 듣지 않으려 하니 한심하다. 오랑캐를 설득시키는 일이 이와 같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처음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조선의 지원 요청에 북경에서는 황제에게 두 오랑캐(조선과 일본)끼리 싸우는 것이니 도울 필요도 없다는 자국 내 의견도 있었다. 한마디로 일부 중국인들에게는 소중화를 내세우던 조선도 대놓고 오랑캐였던 셈이다.
4.3. 다른 문화권과의 비교
과거 중화사상의 유래가 된 서적들의 내용을 살피면, 전간기 이전의 범게르만주의나 범슬라브주의와 크게 다른 점은 없다. 과거 중화사상은 현재 서구식 민족주의와는 비슷한 점이 별로 없어 민족적 거부감이 적었다. 또 하나의 다른 예로, 초기 로마가 팽창하던 시절, 라틴 문화권이 가장 우월하다는 사상도 있었다. 현실은 로마와 라틴 연합이 싸우게 되었지만, 결국 승리한 로마가 점령한 라틴 도시국가들을 대한 것만 봐도, 로마 역시 이런 생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로마는 이들에게 완전한 자치를 주고, 투표권을 제외한 모든 로마 시민과 동등한 권리가 보장된 라틴 시민권을 주었다. 연공도 요구하지 않았고, 단지 요구한 것은 전쟁이 났을 때 로마에게 보조병을 보냄으로써 협력하라는 것이었다.이런 점을 보면, 로마의 민족 역시 라틴 민족들을 자신들과 동일하게 여겼으며 같은 라틴 문화권으로서 상당한 특혜를 베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마의 경우 한니발의 침략을 받았을 당시 라틴 문화권에 있는 국가들의 자발적 지원을 받았던 반면에 중국의 한족 통일 왕조들이 이민족의 침략을 여러번 당할 때마다 중화문화권임을 자처하며 지원병을 제대로 보낸 나라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로마와는 상당히 다르다. 중화문화권에 속한 백제 또한 그 멸망 과정을 살펴보면 사비성이 함락되는 순간까지도 지방 유력자들이 능동적으로 군대를 보내지 않았거나 지휘부가 통일되지 못해 각개격파당하는 모습을 주로 보인다. 부흥운동도 마찬가지로 세력들이 통합되지 못하고 따로 노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무엇보다도 백제는 중화문화권에 속해 당나라에 조공하는 등 사대하던 나라였는데도 침략당하여 멸망했다는 점이다. 이는 라틴 문화권과 중화문화권이 제각기 매우 다르게 작용되었음을 뜻한다.
물론 중국의 통일왕조들은 중화권의 영향이 크진 않은 편인 원나라 같은 이민족 왕조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중화권에 속한 나라들에 상당한 특혜를 베풀어 주었다. 하지만 항상 그랬던건 아니었는데 중화 패권에 위협이 될만한 세력, 특히 고조선, 고구려, 신라, 여진족처럼 요동과 만주 지역을 차지한 세력들과 베트남은 중국에 잘 사대하거나, 딱히 위협을 가하지 않았음에도 중국에 통일왕조가 들어서고 나면 별의별 트집을 잡혀 침공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특히 베트남이 숱하게 중국의 침공과 지배를 받은 이유는 원래 한나라, 당나라 시대에 자신들의 영토였으로 '다시 회복해야 할 영토'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18] 중화사상 덕분에 중국과 주변국들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 경우도 있었지만 베트남과 요동, 만주 지역을 집요하게 복속시키려한 시도들은 중화사상이 수틀리면 상대국가를 얼마든지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명분을 중국 통일왕조들에게 제공한 예시로 볼 수 있다.전근대에는 당연히 혈연에 기반한 민족적인 면보다 학문적, 문화적 우월성이 강조된 사상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들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이 사상의 영향으로 이민족들이 중국을 정복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서 중국을 자처한 사례들이 많다. 한 예로 청나라는 40년 만에 중국을 자처했다. 이 경우 민족끼리 동화되었다고 보기보다는, 중국을 지배함으로써 타민족, 타국들보다 우월한 문명을 갖게 되었다는 선포에 가깝다. 중화권에 속하는 국가들이 중화사상을 받아들인 이면에는 우리는 이런 위대한 문명의 일원이라는 생각이 있었으며, 서구에서 근대적 민족주의가 들어온 최근의 시각이 아니라면 딱히 민족적 자부심을 훼손하지 않는 사상이기 때문에 실질적 창시자인 한족만이 아닌 다른 민족들에게도 빠르게 전파되었다. 중국이나 중화 자체가 근대적 민족 개념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최근에는 과연 이민족들이 마냥 동화되었다는 기존의 해석이 합당한가에 대한 의문은 제시된다.[19] 역사해석에도 중화주의가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4.4. 내셔널리즘과의 비교
중화사상은 민족주의 또는 국수주의와 일견 비슷한 듯하면서도 차이가 있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흔히 민족주의로 번역되어 쓰이고 있는 'nationalism'은 근대 영국에서 출발하여 유럽을 중심으로 퍼진 개념이라서, 그 이전부터 존재한 중화사상과는 태생이 다르다.'nationalism'은 특정한 집단의 구성원 개개인이 하나의 공동체인 '민족'에 속한다는 자기의식을 지니고, 이를 대표하는 정체인 국가를 성립 및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이다. 이를 통해 개별적인 국민 국가는 고유의 언어, 문화 등을 누리며 타 국가와 구분된다. 이 개념이 수입되는 과정에서 민족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일단 '근대 민족주의의 수입 이전에도 중화민족이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대 이후에나 등장한 개념화 작업이 근대 이전에 존재했다고 보는 점에서 무리한 해석이다.
유럽에서도 소위 '민족주의'로 지칭되는 'nationalism'이 18세기나 되어서야 등장했다고 이야기되는 이유는, 'nation'의 구성원들이 뚜렷한 독립적 공동체 속의 자기 정체성을 보유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국민 국가의 보통 교육과 같은 것인데, 유럽에서 이것이 태동한 것은 18세기 계몽주의 사상 전파 이후이며, 그것의 실현은 19세기에 들어서야 보편화되었다. 그런데 중국만이 이러한 'nation'의 개념을 근대 이전부터(그것도 기원을 찾자면 상나라와 주나라 시대부터) 갖고 있었다고 보는 데에는 무리가 많다. 때문에 최근 학계에서는 '민족'의 개념을 근대 이전으로 소급하는 데 조심스러운 편이며, '자국 의식' 정도의 용어로 대체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반면 '화(華)'라는 개념은, 물리적인 혈통보다는 정신적인 사상, 문화, 관념적인 성격이 강하며, 소위 소중화를 표방한 주변국들도 중화사상을 인정하고, 조공 체제와 사대로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상기했듯 그래도 오랑캐로 취급하는 중국인들은 있었지만. 하여튼 동아시아에서는 이러한 중화사상에 반드시 중국 중심의 세계 체제가 동반되었으므로, 화이관(華夷觀) 자체가 개별 국가의 이념을 덮는 보편적인 세계관의 역할을 크게 했다.
일단 중화사상은 소국 혹은 속국이 중국이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평화적인 주종관계를 맺는다면 중국은 이런 소국에게 문화-정치면에서 원조를 해준다는 것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중화사상 그 자체가 팽창주의인 것은 아니다. 중국은 이런 중화질서 내에서 행해진 조공무역에서 다른 문화권에 비해 이익을 주면서 소국을 자신의 편으로 잡아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베트남처럼 중국에 사대해도 지속적 침략을 받은 경우도 있으며 고대부터 현대까지 제국들은 대개 아군에게 관대한 면모를 보이기 때문에 '중국 문명만의 특수한 평화주의 사상'이라는 해석은 현대 중국의 타민족 지배를 합리화하는 신중화주의에 기반한 측면이 있다.
중화 질서에서의 서열도 국력의 영향이 있기는 했지만 딱 국력에 의해서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와 별개로 한족이 팽창주의적 면모를 보이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며, 사상과 문화의 차이로 흔히 소개되는 팽창 방식과 차이가 있어 느끼기 어려울 뿐이다. 동남아시아의 일부 지역, 중국 남방 지역, 만주, 대만 등의 사례를 보면 제노사이드, 강제 이주 등으로 그 지역에서 타민족의 뿌리를 뽑은 후에서야 이주하는 방법이 한족의 팽창에 주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타민족의 문화를 금지시켜 동화시키는 정책은 근대 식민주의에서 나타나는 것과도 비슷하다.
춘추전국시대 같은 시대를 보면 이는 고대부터 중국에서 널리 통용되던 방식으로 이민족 정복 기록 후에도 이주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고, 영토도 딱히 크게 늘어나지 않고 있다가 이민족이 그 지역에서 대규모 학살, 인간 사냥, 이주 혹은 한족 혈통을 자처한 후에서야 영토와 그 지역에서 한족 인구가 빠르게 팽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교과서에서 보면 중국 대륙의 촉한 지역, 남방 개척 등이 마치 한 번에 그냥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나 중국 대륙의 한족이나 이민족들의 역사를 교차검증하면 실제로는 위의 대량 학살과 식민화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딱히 혈연에 한정된 사상이 아니기 때문에 소위 '중화민족'의 구성원이 아니어야 할 일본 등지에서 오히려 스스로가 중화임을 주장하는 소위 소중화 사례가 나타난다. 이들이 혈통적, 인적으로 중화를 주장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며, 문화적인 의미가 크게 작용한 것이다. 즉 민족주의라는 말로는 문화의 파급과 세계 체제라는 의미에서 중화사상의 외연을 포괄하지 못한다. 이는 근대 유럽의 민족주의와 달리, 독립적인 자기 정체성[20]을 가진 공동체의 성립과, 이것의 수호를 동반하지 않는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근대 민족주의와 중화사상은 그 근저를 특정한 인적 집단에 둔다는 점에서 많은 공통점을 지니지만, 근대 민족주의는 자기 민족(nation)과 타자와의 명확한 구분, 자기 공동체를 대표할 국가의 건립과 공동체의 정체성 유지에 굉장한 힘을 쏟는 반면에, 중화사상은 문화적 역량(그리고 그것을 통한 외부 세계의 '교화')과 세계 체제라는 의미가 더욱 강조되며, 그로 인해 동아시아 체제와 중국의 정체성을 떼어내서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차이로 들 수 있겠다.
다만 근대 이후 중국에 민족주의가 전파됨에 따라, 근대 민족주의와 중화사상 간에도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속성이 강해졌다. 이는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입을 겪으면서 대내적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했던 것이기도 하다. 청나라 시절까지의 중화사상이 동아시아 세계의 종주국으로서 일종의 자뻑이었다면, 현재의 중화사상은 '하나의 중화민족'을 주장하는 근거로서, 국민 국가의 구성을 위한 자국 통합의 중요한 도구로 작용하고 있다. 그 결과 중화사상은 소수민족 통치를 합리화하는 하나의 중국의 이념적 이데올로기로서도 기능하고 있다. 그렇기에 현대의 중화사상은, 19세기 이전의 것과 일정한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즉 종합하면 전근대의 중화사상은 근대 민족주의와는 차이가 있으나 현대에 와서는 근대적 민족주의로 발전했다.[21]
5. 21세기 신(新) 중화사상(중화민족주의)
자세한 내용은 중국 내셔널리즘 문서 참고하십시오.젊은 중국인일수록 중국 정부의 민족주의 교육으로 인해 중화주의가 더 강하게 나타난다. 해외와의 교류가 많은 지식인층 중국인들의 경우는 안 그런 경우도 많지만, 중국에서 자국 여권 보유자 비율은 고작 8%밖에 안 된다.[22] 즉, 그 수가 별로 없다.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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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에서 유래한 학술용어로 원어민들은 보통 화이지변(華夷之辯 :중화와 이족(夷族)의 구별) 또는 중국중심주의, 중화중심주의라 한다.[2] 정확하게는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또는 중화민국(中華民國)의 약칭이지만 오래전부터 中國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왔다.[3] 사실 중국이 진나라 이후로 영토 확장을 하면서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기 전까지는 중화의 영역이 중원으로 한정되었다. 즉, 지금은 중국의 일부인 산동 반도나 수도 베이징이 있는 중국 동부 지방도 모두 예전에는 동이로 취급되었다. 베이징이 수도로서의 위상이 오른 것은 명나라 때부터이며 그전까지 중화문명의 중심은 시안과 무려 13개 왕조가 도읍으로 정한 뤄양이었다.[4] 그나마 위구르와 티베트, 카자흐스탄 지역에 실크로드가 있긴 했다. 다만 중~근세 쯤에 육로를 통한 동서 무역이 줄어들면서 한동안 잊혀졌다.[5] 2010년대 초만 해도 넷상에 반중보다 반일이 더 짙은 분위기였는데, 2010년대 후반은 인터넷의 반중 감정도 반일 감정과 동급 혹은 그 이상으로 짙어졌다.[6] 남미의 경우 반미를 내세워서 접근해 초반엔 상당한 성과가 있었으나 코로나와 함께 대중인식이 악화되었다.[7] 상나라는 동이족이라는 이야기가 예로부터 중국에서도 있었고 백성들 대부분은 상나라나 그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천(天) 사상, 제후 체계 혹은 중국 인문주의의 기틀을 놓았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기틀 자체는 주나라가 형성했다고 본다. 여담으로 역대 통일왕조 중 왕실이 완전한 한족 중심인 왕조는 주나라, 진나라, 한나라, 송나라, 명나라, 위안스카이의 괴뢰국인 중화제국뿐이다. 수나라, 당나라는 한족화된 선비족에 의해서 세워진 왕조이고 상나라, 원나라, 청나라는 이민족이 건국하고 한족을 통치한 왕조다. 다만 상나라는 중국티베트어족으로 보인다.[8] 중국 사료에서도 초기 주나라 사람들을 유목민으로 추측하기도 했으며 상나라와 만나고 그들의 문물을 흡수하며 점차 농경 민족이 되기는 했지만 많은 면에서 그들과 달랐다. 만주원류고에서도 서이의 후예(한족)인 너희나 동이(만주족)인 우리나 같은 오랑캐인데 누가 지배하든 무슨 상관이냐는 주장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꽤 최근까지도 그러한 관념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9] 매우 공격적으로 활동하며 자기들 앞을 막으면 죄다 오랑캐 취급을 했기에 옛날 중국인들이 상나라 사람들을 동이족 같은 오랑캐로 생각하기도 하거나 상이라는 글자가 전해진 이유로 추측되기도 한다(상인은 장사치라는 뜻이지만 상나라인들에게서 기원했으며 주나라인들은 서쪽에서 와서 상나라인들도 그들 입장에서 보면 동이족이었다. 물론 한때는 상나라의 제후였고 상나라의 문물을 받은 만큼 다른 오랑캐들에 비하면 경멸적 뜻이 적긴 하다).[10] 은나라 왕조 시절 그 지배권 동부에 해당하는 산둥 반도 부근. 한반도나 일본도 취급 자체는 동이라고 할 수 있으나, 춘추전국시대 이전에는 지리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11] 그런데 주나라 같은 경우는 서융을 가리켜 도의를 지키지 않는 오랑캐라 욕하고 진나라 왕을 책봉하면서 서융을 정복하라고 했기 때문에 출처에 의문이 있다.[12] 紳士: 지방 유지, 명문가.[13] 다만 청조에 적극 협력하여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 앞장선 것도 한족 신사층이다. 증국번, 좌종당, 이홍장등이 대표적. 이들은 점차 군권을 쥐던 만주팔기를 대체하여 중화민국 초기 군벌로 성장한다.[14] 여기서 주로 수련시킨 무술이 홍가권(洪家拳)으로 발전해 나아갔다고 하며, 무협소설, 무협영화의 좋은 소재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15] 연나라는 주나라의 전진 멀티로서, 주나라의 문화를 이 지역에 전파하는 선봉이었고, 초, 오, 월은 주나라와는 다른 정체성을 주장하면서도, 주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중국으로 편입됐다. 진나라는 전자인지 후자인지 좀 논란이 있는 편.[16] 본래 중화사상에서 말하는 중화는 중국 본토 중에서도 중원(中源), 즉 황하 중 하류만을 뜻하였다. 즉, 한족들의 본래 생활터전인 중원 밖에 있는 민족은 모조리 오랑캐로 봤다는 뜻이다. 동이족이라는 요임금도 한반도를 뜻하는 말이 아닌 오늘날의 중국 동부지방 사람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나마 춘추전국시대가 끝나고 진, 한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중화의 범위가 국가 전체로 커지게 되었으나, 그전까지 중화는 오로지 중원만의 것이었다.[17] 다만 소동파의 경우에는 고려에 대해서 그렇게 말한게 단순한 중화사상 때문만이 아닌 국력이 상승한 고려 정부에서 송나라에게 오만하게 굴었던 것이 이유였던 것도 감안해야 한다.[18] 동남아시아 국가들중에서 중국이 식민통치한 국가는 베트남이 유일하다.[19] 사실 살호령에 의해 사라진 갈족, 준가르처럼 하드파워에 의해 말살된 민족들도 꽤 많다.[20] 이는 타자와의 명확한 구별을 동반한다. 즉 동아시아 세계 자체를 뭉뚱그려 파악하는 중화사상의 기저와는 큰 차이가 있다.[21] 영어 위키백과에서도 중화사상을 중국 내셔널리즘으로 분류중이다.[22] 사실 8%도 1억명이 넘는 수치라 웬만한 국가를 압도하기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