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22:58:28

명군이 되어보세!/개변된 역사/4부

명군이 되어보세!
등장인물 (1부 · 2부 · 3부 · 4부 · 이재석 · 김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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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철도
2. 대아주3. 대유주4. 대미주
4.1. 대한령 미주
4.1.1. 북미주4.1.2. 남미주4.1.3. 빙주4.1.4. 중미주4.1.5. 서미주4.1.6. 동미주4.1.7. 동변
4.2. 캐나다 지역4.3. 서반아령 신서반아멕시코(맥고국)4.4. 프랑스령 누벨프랑스 → 누벨프랑스 제국(신불랑국)4.5. 미주합중국4.6.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 → 중앙아메리카 연맹4.7. 아이티 공화국
5. 대삼주6. 대상주7. 오세아니아

1. 개요

슈타인호프 작가의 웹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의 4부에서 작중 세상에 생긴 변화들을 소개하는 문서.

4부 시작 시점의 세계지도
대한-신불랑 회담 이후 시점의 세계지도
4부 시점 세계지도

4부에서 동아시아의 황제국 중 유구와 후금이 각각 대한과 청의 번국이 되면서 독립을 잃는 큰 변화가 생긴다.

1.1. 철도

대한으로부터 시작된 철도가 유럽으로도 전파되나 원역사도 그렇지만 궤간 통일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이다.
  • 대한식: 궤간 1500mm(대한식으로 5척, 미국식으로 4피트 11인치)로 원역사의 광궤와 비슷하다. 대한, 건주 양국, 러시아, 대한령 미주, 신불랑, 미국이 채택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태평양 표준궤라고 부른다.
  • 프랑스/라인 표준궤: 궤간 1300mm(프랑스식으로 4피드)로 원역사의 스코틀랜드 협궤와 비슷하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표준궤라고 명명했고,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주도하는 독일 연방도 이 규격을 받아들였지만 국가 자존심 상 라인 표준궤라고 명명한다.
  • 영국식: 아직 정확한 수치는 언급이 안되었지만 대한식보다는 약간 좁다고 하니 원역사의 표준궤(1435mm)일 가능성이 높다.
  • 일본식: 아직 정확한 수치는 언급이 안되었지만 일본의 지형과, 타국과 철도망 연결이 어차피 안되는 점 때문에 원역사처럼 협궤를 채택했다고 한다.
  • 후송식: 영조척 3척(대략 960mm)의 협궤. 어차피 수로 운송이 주류고 철도는 보조적인 역할만 맡기에 비용을 절감하고자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매우 좁은 협궤를 채택했다.

2. 대아주

2.1. 대한

대한국
大韓國
파일:대한민국 국기(1945-1948).svg 파일:조선(명군이 되어보세)의 국기.png
국기 군함기
위치 한반도, 요서주, 북한 10도[1],
북변[2]], 동토[3],
구주총관부, 대남도, 주산 군도,
아모 열도, 연역주,
빙주, 북미주[4], 남미주, 동미주,
동변[5], 중미주, 서미주,
누손주[6], 해사도, 영귀 제도
번국 하와국, 조홀국, 술루국, 유구국, 안남국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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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 1392년 8월 13일
훈민정음 반포 1446년
경국대전 반포 1474년
무자호란 1588년
경인왜란 1590년
을미동정 1595년
대한 수립(칭제건원) 1632년
경신대기근 1670년 ~ 1671년
을병대기근 1695년 ~ 1697년
무인지변 1698년
계미남변 1703년 ~ 1707년
수도 황도 한성부(皇都 漢城府)
민족 한민족, 여진족 등 퉁구스인,
한족, 일본인, 대만 원주민, 묘족, 말레이인, 필리핀인
유럽계 백인
에스키모, 아메리카 원주민, 하와이 원주민
언어 근대 한국어
문자 한자, 국문
종교 유교(성리학, 국교),
불교, 천주교, 무속 신앙
정치체제 전제군주정
국가원수 태황(太皇)(임금)
국성 전주 이씨(李)
연호 건원(建元) (1632년 ~ 1650년)
연가(延嘉) (1651년 ~ 1678년)
건복(建福) (1679년 ~ 1699년)
건흥(建興) (1700년 ~ 1740년)
원강(元康) (1741년 ~ 1775년)
영태(永泰) (1776년 ~ 1782년)
원평(元平) (1783년 ~ 1829년)
광덕(廣德) (1830년 ~ 1834년)
흥선(興宣)[7] (1835년 ~ )
통화 대한통보, 푼(分)<전(錢)<냥(兩)
[clearfix]

2.1.1. 정치

  • 정도전 복권
    원 역사에서 1차 왕자의 난으로 조선조 내내 역적 취급 받다가 1860년대에 이르러서야 흥선대원군에 의해 관직이 회복되었던 정도전이 여기서는 원 역사보다 정통성과 권위가 막강한 대한 황실을 배경으로 둔 덕분에 태황 원평제가 대한(조선)이 건국되는데 큰 공훈을 세운 점은 인정해야 한다며 자비를 베풀어 원래 역사보다 40년 빨리 신원되었다. 마찬가지로 왕자의 난과 관련된 태조의 후처 신덕왕후 역시 복권되었다.
  • 경화사족과 붕당
    원 역사처럼 중앙 정계의 주요 직위는 한양에 세거하는 경화사족들이 점차 독점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진입장벽이 있을 뿐 경화사족으로 편입은 가능하며, 4색 붕당은 있으나 원역사와는 달리 당쟁 없이 공존하고 있다. 영남학파를 중심으로 하는 동인, 기호학파를 중심으로 하는 서인, 천주교도들을 중심으로 하는 남인, 압록-두만강 이북 북한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북인으로 나뉘어져 있다. 외지 출신의 관료들은 대체로 비교적 개방적인 남인과 북인에 들어간다. 나라가 큰 굴곡없이 번영해서인지 세도정치의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있으며, 가문들 간의 긴장관계도 어디까지나 내부의 권력투쟁이지 황권을 넘보진 않으며 분쟁도 의견충돌에서 그치고 있다. 다만 경화사족들이 요직을 독식하고 외지 출신을 차별하는 문제는 있다. 현재 가장 우세한 붕당은 서인이라고 한다.
  • 대명공
    명나라 황실의 후예로써 대한에게서 그동안 받은 은혜에, 목종 때 서나라가 운남으로 밀려나면서 한양의 서나라 주재관들이 대명공에게 귀부하는 것을 대한이 허락한 은혜까지 입고, 대명공이 대한 태황에게 보내는 축하 서한이나 공물도 더 격상되는 등 태황에게 더 종속적인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대명동 내부에서는 대명공의 세자인 대공자를 전하라고 부르는 등[8] 외왕내제를 넘은 '외공내제' 놀음을 하고 있다. 물론 대명동 밖에서 그러면 큰일난다는 건 본인들도 잘 알고 있으므로 외부에 나가면 호칭에 단단히 주의를 준다.
  • 국수주의지역 갈등
    무종 이래 한 번도 국력이 쇠퇴하는 일 없이 수백 년 동안 성장만 거듭해 동북아시아 최강의 강대국이 되고, 장조 때 경인왜란을 마지막으로 200년이 넘도록 본토를 침략당한 경험이 없어져 조정, 민간 가릴것 없이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넘어 국수주의가 퍼져있다. 그리하여 엄연히 대등한 황제국이자 황실이 혈연을 맺은 형제국인 건주 양국에 대해서도 조야를 막론하고 오랑캐라고 무시하는 분위기로, 건주 양국도 서서히 불만을 품어가고 있다. 여기에 광덕제와 태자 재석이 서부 캐나다와 옐로스톤 지역을 신불랑에서 구입하려 하자 본토의 시보들이 '미주 놈들이 장난을 쳐서 황상의 눈을 가린다'며 미주 백성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등 지역갈등까지 팽배해 있다. 또한 외지 출신의 관료들은 모두 합쳐도 1할을 넘지 못하며[9][10] 승진에서도 큰 차별을 받는다. 이로 인해 미주 중 먼 외지에서는 불만이 상당하며 그 영향으로 공화주의까지 들어온 상태이다. 이러한 국수주의와 지역주의가 4부에서 재석이 겪을 위기의 원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 유구 번국화와 아모국 포기
    1830년 제2차 경인조약에 따라 대한이 유구를, 일본이 아모국을 정식으로 번국으로 들이기로 하고 설득 작업을 거쳐 1831년 양력 4월 한양 천단에서 정식으로 유구 황제 상육이 대한 태황 광덕제에게 유구 황제위를 선양하는 선위식을 갖고 유구는 대한의 번국인 왕국으로 격하된다. 대한 태황의 칭호도 '대한의 태황 겸 유구의 황제'가 된다. 반면 유구 황제의 칭호는 명에 칭신하던 시절로 돌아가 '유구국 중산왕'이 되었다.
  • 역사관
    대한의 공식적인 역사관은 단군으로 시작된 천명이 기자를 거쳐 삼한으로 전해지고, 삼국시대 때 갈라졌다가 신라로 합쳐지고, 고려, 그리고 조선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부여, 가야, 동예, 옥저 등의 소국들은 천명을 받지 못한 지방정권, 발해는 신라가 힘이 부족해서 얻지 못한 고구려의 잔재로 취급한다. 또한 대동양 주변 강역을 지배하는 정통성을 문무왕의 유훈에서 찾아 신라 정통론을 밀고 있다.
  • 친왕의 시강원, 익위사 폐지
    대한은 칭제건원한 이래 태자 뿐 아니라 적통 친왕들에게도 시강원, 익위사를 배정하였는데, 재석이 흥선제로 즉위한 후 이것이 자신이 과거 중종이었을때 경험한 것처럼 친왕들의 세력 강화라는 문제가 있으므로 폐지하고, 태자에게만 시강원, 익위사를 배정하게 한다. 친왕들은 다른 종친들처럼 종학에서 공부하도록 하고 경호도 금군에서 맡도록 한다.
  • 실용주의
    이미 3부에서도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도달했지만 4부에선 아예 재석이 미주로 건너가서 나폴레옹과 정상회담을 하기 전 국정을 미리 돌보는데 너무 빡세서 숨을 좀 돌리려고 경연을 하자고 하자, 신하들이 국정이 더 중요하다며 경연을 거부해서 말을 꺼낸 재석을 아연실색하게 만들 정도가 되었다.[11]

2.1.2. 언어

  • 마트카
    폴수국어외래어. 후궁 소생 황자녀들이 친모를 부를 때 쓰는 호칭. 폴수국어로 어머니를 뜻하는 단어인데, 3부에서 귀비 소씨 올렝카가 자기 딸 루시아, 율리아에게 공식적으로는 어머니로 불리지 못하는 법도를 우회하기 위해 자신을 부를 때 알아듣는 이가 거의 없는 폴수국어로 마트카라고 부르도록 했던 데에서 유래했다. 올렝카 사후 이 단어는 후궁 소생 황자녀들이 친모를 부르는 명칭으로 정착하였다. 3부 당시 사람들도 대충 마트카가 무슨 뜻인지는 알았지만 당사자들인 재석과 상희가 그걸 이유로 올렝카를 벌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넘어간 듯하다.[12]

2.1.3. 지역

  • 마포
    3부에서 중종이 경희궁을 세운 이후 크게 발전하여 4부 시점에서는 불야성을 이룬 번화가가 되었고, 유럽의 전란을 피해 온 유럽 이민자들이 정착해 상업에 종사하여 정통 프랑스식 아이스크림 전문점이 있을 정도이다.
  • 연희동
    실제 역사에서도 서울 연희동 지역. 서나라의 암군 함녕제가 다른 나라 대사관보다 더 크고 화려한 대사관을 짓기를 원하여 은 백만냥을 들여 4층짜리 호화건물 '대서관'을 지었는데, 함녕제가 청나라에 잡혀가고 서나라가 운남에 갇히게 되면서 본국과 연락이 단절되자 청과 후송이 전리품으로 간주하고 소유권을 다투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서나라 주재관들은 청이나 후송에 귀부하기는 싫어 명나라의 후예인 대명공에게 귀부하겠다고 선택하여 대서관은 대명공의 한양 저택인 '대명관'으로 바뀌게 되고, 그 주변에 점차 새로 중원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모여 차이나타운이 형성되고 유흥가도 형성되어 '연희동(宴姬洞)'으로 불리다가 좀더 점잖은 한자인 '연희동(延禧洞)'으로 바뀌었다.
    • 대명관(명빈관)
      대명관을 대명공이 물려받은 후에도 대명공은 주로 대구에서 지내므로 빈 집으로 남아있다가. 제11대 대명공 주성진이 대명공 작위를 승습한 후 대명관을 특급 빈관(호텔)로 개조해 돈벌이를 한다. 침실, 객실, 욕실, 사우나가 포함된 스위트룸은 하루 숙박비가 대한 은화 100냥(프랑스 1000프랑에 상당)이다.
  • 황천동
    신불랑과의 회담에서 나폴레옹이 북부 캐나다 지역 땅을 추가로 대한에 팔겠다 제안했다. 재석은 당장은 춥고 황량해 쓸모없는 땅으로 여겨지지만 향후 자원의 보고가 될 것임을 알고, 대한이 안 산다고 하면 영국에게 팔 가능성이 높아 차라리 사들여 완충지대를 만드는 게 낫다는 점에서 태황 광덕제와 의견이 일치해 매입을 결정하고, 여기에 추가로 천혜의 자연경관인 옐로스톤 지역도 돈을 더 얹어 매입하려 한다. 그러나 조야에서 넓기만 하고 별 쓸모도 없는 땅을 백성들이 낸 세금으로 사들이려 한다며 격하게 반대해서 결국 캐나다 지역은 포기하고 옐로스톤만 샀다.
  • 신도시
    영종의 명으로 국상 정약용이 대한 본토의 양 끝 관문인 부산과 의주에 대대적인 신도시 건설을 시행한다. 부산은 부산진과 동래부를 통합하여 종2품 부윤이 맡는 신도시 부산부를 건설하였고, 의주는 실제 역사의 신의주 자리로 옮기고 압록강 건너편 실제 역사의 단둥 지역까지 다스리는 신도시 의주부를 건설하였다. 또한 수원에는 수원성과 수원화성[13]을 건축하였다. 이외에도 북한의 주요거점으로 심양, 요양, 북평, 용원, 삼성, 할빈, 순원, 해삼위 등이 발전하고 있다.
  • 행정구역 개편
    북한의 6주 중 국경인 요서주를 제외하고 요동주를 2개, 부여주와 연해주는 3개로 나누고 속말주와 영락주는 명칭만 변경하여 10도로 만들었다. 요동주의 서쪽은 요심도, 동쪽은 요동도 부여주의 남쪽은 발해도, 중간은 삼강도, 북쪽은 부여도이다. 연해주는 남쪽의 연해도, 북쪽의 연흑도로 갈라졌고 연해주 관할이던 현토주(사할린) 역시 현토도(玄汢道)로 개편하였다.
  • 주산군도
    명목상 명의 마지막 영토였으나 유구 합병 논의와 함께 주산군도 문제도 거론되자 재석이 미리 나서서 대명공부로부터 정식으로 헌납받고 종 3품 도호부사가 파견되어 다스린다.
  • 요서 획득
    후금 내전에 청나라가 지원하는 럭더훈을 함께 지원한 대가로 승리하여 후금을 번국으로 격하시킨 청나라에게서 구 후금령인 대흥안령 산맥과 구하 동쪽 요서 비옥한 평야지대를 획득하여 요서주에 편입했다.
  • 초성해 복속
    스페인령으로 남아있던 북마리아나 제도, 팔라우를 50만냥에 구입하였다. 이후 하와국의 침략으로 인해 피해를 본 마셜 제도와 스페인령 캐롤라인 제도가 복속을 요청하자 영유권이 없던 마셜 제도는 복속하고 캐롤라인 제도는 구매하여 대한령이 된다.

2.1.4. 인구

1823년 시점에서 본국 인구는 남한(한반도) 2200만 명, 북한(북방영토) 1200만 명으로 나온다. 그외 미주 8백만명, 누손주 등 해외영토까지 합치면 약 5천만 명 이상이라고 한다. 한양 인구는 100만 명.

4부 256화에서는 남한만 3000만에 근접하고 북한을 포함한 본국 전체는 4500만, 북구주 180만, 대남도 650만, 미주 1200만, 누손주 600만으로 총합 7100만 명 정도로 인구가 증가했다고 언급된다.

2.1.5. 군사

  • 퍼커션 캡 개발
    중종의 3자이자 화학자인 정친왕 이권이 현종 재위기에 뇌홍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하고, 그의 차자 웅천공 이헌이 연구를 이어받아 실용적인 퍼커션 캡을 만들어낸다. 영종 시절부터 영국에 뇌홍 특허권을 판매하여 30년동안 80만냥의 특허료를 받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뇌관식 총기가 비싸 1823년 시점에서도 금군과 기병대만 뇌관식 총을 장비하고 있다. 연발총도 시제품이 여럿 개발되었으나 실용화는 아직 안 됐다. 하지만 덕후 기질이 강한 광덕제가 현역 관군의 총을 전부 뇌관식으로 교체하도록 하여 신품 생산 외에도 기존 수석총의 격발부를 뇌관총으로 교체하는 사업을 통해 1835년 경에는 교체가 거의 완료된다.
  • 군복군장
    군복은 디자인은 3부와 큰 차이 없으나 재질이 동복은 면직 솜누비옷에서 모직으로, 하복은 면직에서 면마혼방으로 변경되었다. 입대 시에 동, 하복 각각 2벌을 지급하고 추가로 필요할 경우 개인이 구입해야 한다. 가슴의 휘장과 전립에 꽂은 깃털[14]로 소속 군영을 표시하고, 군관과 기병은 장화를 신고 보병은 단화에 각반을 착용한다. 보병들은 투구, 갑옷, 창, 활 장비가 폐지되어 전립과 전복 차림에 총으로만 무장하고, 기병들은 투구와 활, 편곤, 기병창, 환도는 장비하나 갑옷은 폐지되었으며 친위기병들만이 의장용 금속제 흉갑을 착용한다. 흥선제 재위기에 기병대에 갑식 기총이 배치되면서 기병창과 활도 도태된다.
  • 해군력
    대한의 주력함은 이미 전열함과 증기 장갑함으로 바뀌었으며, 광덕제 시기 프로펠러 추진기가 도입된다. 해군력은 영국 다음이고 프랑스와 버금가는 세계 2위의 해군력으로 평가된다. 원역사의 HMS 빅토리USS 컨스티튜션처럼 기념함 명목으로 12척의 판옥선과 3척의 거북선이 현역으로 남아있다.
  • 육혈포 발명
    2부 김지 장군의 후손이자 군기시 제조인 김귀훈이 조상 김지의 유지를 이어 발명했다. 황동 탄피가 실용화된 후 황동 탄피를 사용하는 신형 리볼버 권총도 개발되어 모로족 토벌군에 우선 지급되었으며, 흥선제 연간에 나왔다 하여 흥선권총이라고 불린다. 또한 이를 확대한 리볼버 기병총인 갑식 기총도 만들어져 기병대에 지급된다.
  • 장갑열차, 장갑차
    증기기관차가 만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군용 장갑열차가 만들어지고, 군 수송대 호위를 위한 증기 장갑트럭, 장갑버스도 개발되어 배치된다.
  • 복합장갑
    중량 제한이 있는 증기 장갑트럭, 버스의 장갑판을 강화하려고 실험하다가, 강철판과 참나무 목판을 몇겹씩 적층하면 같은 두께의 그냥 강철판보다 방호력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어 복합장갑의 개념이 만들어진다.
  • 트랩도어식 소총, 황동 탄피 개발
    군기시에서 자모포의 원리를 소총에 응용하는 제안을 재석에게 올렸고 재석이 트랩도어 방식과 황동 탄피를 사용하는 신형 소총의 아이디어를 정리해줘 1839년 개발된다. 재석이 갑식 보총이라는 제식명을 붙였다.[15] 태평천국 토벌을 통해 대한의 갑식 보총을 본 미국 의용군들의 요청으로 미군은 레밍턴 롤링블럭 소총을 원역사보다 일찍 개발 지급하게 되었다.
  • 회선연자포 개발
    군기시에서 백연자포라는 이름으로 처음에는 총열 100개짜리 제사총으로 개발을 시작했으나, 재석이 개틀링의 아이디어를 주어 군기시에서 수동식 10총열 개틀링을 개발하여 회선연자포라는 이름을 붙이고, 시험에 성공하여 양산하기로 한다. 비용 문제로 아직은 종이탄피를 사용한다. 후금 내전과 태평천국 토벌에 첫 투입되며, 후금 내전에서 굴마훈의 반군을 도륙하는 것으로 첫 실전 전과를 올린다.
  • 귀차
    대한의 발명가 홍총각이 개발한 무한궤도를 적용하고 회선연자포 3문과 자모포 2문을 탑재한 7인승 증기기관 전차인 신형 귀차가 개발되어 태평천국 토벌전에 30량이 투입된다. 구식 화포밖에 없는 태평천국군이 귀차에 대응할 방법은 함정 뿐인데 무한궤도 덕분에 어지간한 함정은 자력 탈출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후 태평천국군이 거의 절벽 수준으로 깊게 함정을 파서 격파당하는 사례가 생긴다.
  • 삼군부 참모본부 창설
    대한에 건너온 헬무트 폰 몰트케가 전해준 프로이센식 장군참모 제도를 기존 대한군 참모제도와 통합하여 그동안 위상이 낮았던 삼군부 참모부를 참모본부로 격상하고 참모본부장도 오군대총관, 대한북병사, 대한남병사, 대한수군통제사와 동급인 정2품 상장으로 임명한다.
  • 추격진천뢰
    세계 최초의 항공 폭탄. 태평천국군 토벌전에 비행선이 시범적으로 투입된 후 재석은 폭격의 아이디어 정도만 제시했지만 미운 놈 머리 위에 뭘 떨구고 싶은 욕망은 인지상정에 시대를 초월하는지시대를 뛰어넘는 창의성이 발휘되어서 기존 진천뢰를 공중에서 투하하면 명중률이 떨어지는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나무 날개를 단 가죽 주머니에 넣어서 명중률을 높였다. 기본형인 건물 폭격용 갑형, 인명 살상을 위해 도화선 길이를 줄여 공중에서 터지도록 한 을형, 소이탄인 병형의 3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임시방편이었던 추격진천뢰가 큰 성과를 올리자 재석은 대신기전 탄두를 사용해 본격적인 항공 폭탄을 만들도록 지시한다.
  • 응룡군(應龍軍) 창설
    태평천국군 토벌전에서 첫 비행선이 큰 전과를 올리자 추가로 비행선 4척을 더 파병하면서 삼군부 직속 비행선 함대인 응룡군을 창설하여 세계 최초의 항공대가 만들어진다.

2.1.6. 치안

  • 총기 소지의 자유
    조선의 원래 전통대로 민간의 총기 소지에 규제가 없으며, 시보에도 총포상 광고가 자유롭게 실린다. 외국산 총기도 자유롭게 수입되어 유통되고 있다. 민간에 유통되는 총기는 무종 시대 수준의 화승총부터 뇌관총까지 다양하다.
  • 범죄자 지문 등록
    지문이 사람마다 다 다르고 평생 불변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원평제가 한번 수감된 범죄자들의 지문을 찍어 등록하여 재범을 방지하도록 조치한다. 하지만 한번 수감된 범죄자들만 대상으로 하고 감식 기술도 부족하기 때문에 범죄 수사에 활용되기는 아직 어려운 상태.
  • 압슬형 폐지
    압슬을 당하면 다리가 상해 장애인이 되는 점을 딱하게 여긴 영종 원평제가 즉위하자마자 폐지했다. 의금부에서 처음엔 난감해했지만 수십년이 지나니 없이 수사하는 것도 익숙해졌다고 언급되는 것을 보면 다른 혹형도 폐지될 가능성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 전신선 훼손죄 신설
    1839년 유선전신이 실용화되면서 국가 기간 통신망인 전신선을 끊거나 전신주를 쓰러트린 자는 봉화대 파괴나 철도 파괴와 마찬가지로 역모죄로 처벌하기로 한다. 또한 전신선의 보안은 철도경찰 업무까지 담당하는 우포청에서 함께 맡기로 한다.
2.1.6.1. 마약
  • 아편
    아편 때문에 후송이 망해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아편 재배나 유통은 반역죄로 취급하여 의금부가 처리한다. 단지 의료용 마취제 용도로 외수사가 벵골에서 직수입하는 아편 일부만 국내에 유통되고 있다. 하지만 재석 몰래 외수사가 벵골 칸과 결탁하여 벵골산 아편을 후송 아편 잠상들에게 팔아먹고 있고, 후송의 덕성도 지부 중 아편 잠상으로 타락한 무리들이 덕성도 네트워크를 통해 본국으로 아편을 유통시킬 위험성이 있어서 재석이 주시 중이다.
  • 곡가목
    3부에서 안돈이가 남미에서 가져온 코카 종자는 본국의 풍토에서 자라지 못해 당시 재석이 한숨 돌렸으나, 목종 시절 의원 양병현이 코카 종자를 대남도에 심은 것이 성공하여 농장이 만들어진다. 아직 코카인 정제까진 못하지만 코카 잎을 섞은 차나 커피를 마시면 기분이 흥겨워진다고 암암리에 퍼지고 있어 재석이 근심 중이다.
  • 대마
    대한산 대마는 마약 성분이 원래부터 적은데다가 섬유로 쓰기 위해 꽃을 일찍 따버리기 때문에 대체로 안전한 편인데, 누손주의 모로족 반군들이 대마에 취해 총에 맞고도 덤벼들어 싸우는 문제로 누손주의 군사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2.1.7. 경제

  • 포목 산업
    기계 성능은 영국에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좋다. 다만 좋은 노동자 대우의 반작용으로 낮은 인건비의 후송제, 영국제 면포를 압도하지는 못하고 있다.
  • 한공과 묘노
    대한에서 단순 노무직, 3D업종은 대부분 이들이 맡으며, 같은 한족이어도 청에서 온 자유인 노동자는 한공, 후송에서 팔려온 자는 묘노라고 구별하는 전통도 이어지고 있다. 한공은 자유인이라 계약기간이 끝나면 귀국할수도 있고 대한에 남아 화교로 살 수도 있다.
  • 대한중보 금화 발행
    기존에는 대한통보 은화와 동화, 재무부에서 발행하는 금 보관증(사실상의 지폐)만 있었으나 장조 때부터 350년간 쌓아온 금을 바탕으로 1840년에 드디어 금화 발행이 결정된다. 금화 1닢이 동화 75 닢에 해당하여 신하들은 당백전으로 부르자고 했으나 원역사 흥선대원군의 실책 중 하나인 당백전이 떠오른 재석이 명칭과 실제 화폐가치가 맞지 않아 혼란을 줄 수 있고 이를 악용해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거부하고 '대한중보'란 명칭으로 발행한다.

2.1.8. 외교

  • 대송관계
    3부에서 국교를 수립 후 대한에서는 형제국 청을 더 중시하는 것은 여전하며 군부는 청에 기울어져 있지만, 교역 수익과 안정된 외교 환경의 현상유지를 바라는 관료들은 후송과 사이가 나빠지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서나라 패망 후 서나라 대사관인 대서관의 귀속 문제를 두고 청과 후송이 다툴때 한쪽 편을 못 들고 4년이나 끌 정도로 관계가 호전되었다.
  • 대청관계
    여전히 우호국으로 지내고 있지만 자신들을 여전히 오랑캐로 취급하는 풍조에 대해 불만이 쌓인 상태이다. 또한 이전과 달리 전쟁기록 조공도 중단된 상태다. 때문에 우호관계 유지를 위해 재석이 태자의 신분으로 처음 건주 양국의 명목상 공식 수도인 북경에 방문하였다. 하지만 청나라가 후금의 왕위계승에 개입하여 건주일통을 노리려 하는 점에서 불씨가 남아있다.[16]
  • 대유주관계
    3부에서는 황제국 선포를 하고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으로 바꾸었지만, 서양 내에서는 로마 황제위만 황제로 인정했기 때문에 조선의 국왕 폐하, 혹은 임금이라는 고유명사로 불렸으나 4부 시점에서는 대한이라는 국호가 정착이 되고 한국 황제, 혹은 임금이라는 고유명사가 통용이 되었다.
  • 대영관계
    특별한 마찰 없이 지내고 있으며 서양 국가 중 몇 안되는 상주 공사를 파견하고 있는 관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국이 인도를 대한의 영향권인 뱅골을 제외하고 모조리 장악하며 마찰이 생길 가능성이 생기고 있다. 영국 정부는 아시아 최강국이자 북태평양을 지배하는 대한을 적대시하는 걸 피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뱅골이 당시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인 만큼 영국이 탐을 낼만한 땅이고 또한 원 역사의 그레이트 게임 당시 영국의 편집증적인 태도를 감안하면 대한과 적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대미관계
    특별한 마찰 없이 지내고 있으며 서양 국가 중 몇 안되는 상주 공사를 파견하고 있는 관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포경선 기항 문제로 인한 갈등이 있다.

2.1.9. 사회

  • 신문궤 제도
    현종 때 과거의 신문고 정신을 되살려 궐문 앞에 신문궤라는 큰 뒤주를 두고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상소문을 넣고 갈 수 있게 하여 언로를 보장했다. 원칙적으로는 제출자의 이름을 써야 하지만 감독을 느슨하게 하다보니 간혹 무기명 투서도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 건흥옥 난로 보급
    중종 건흥제 때 한양 대화재 후 새로 지어진 건물들을 서양식 3층 벽돌 건물(건흥옥이라 불린다)로 지으면서 2, 3층은 온돌을 설치하지 못해 겨울이 되면 2, 3층 거주자들이 1층으로 내려와 더부살이를 하던 문제가 현종 연간부터 서양식 철제 난로가 보급되면서 해결되었다. 하지만 난로를 살 돈이 없는 사람들이 바닥을 파내고 일본식 이로리를 임의로 설치하거나 싸구려 옹기 난로가 팔리는 등 화재, 안전사고 문제도 빈발하고 있다.
  • 층간소음
    난로가 보급되면서 건흥옥 2, 3층 거주자가 1층 거주자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지자 층간소음이나 오물 투척 등의 문제가 빈발하여 사회 문제가 되고 순검들이 출동할 정도의 싸움도 자주 일어나고 있다.
  • 사설 소방대 국유화
    소방도감 외에 별도로 존재하던 사설 소방대들은 출동할 때 돈을 받는다는 것이 논란이 되었으며, 일거리를 늘리기 위해 일부러 방화를 저지른다는 소문이 있었고 일부 실제로 적발된 사례도 있었다. 결국 현종 대에 사설 소방대들은 해체되고 그 인력과 장비를 소방도감으로 흡수하게 되어 도성에서는 사설 소방대가 사라졌다. 그러나 지방에는 지역 사정에 따라 남아있는 곳도 있다.
  • 노동조합
    노동조합이 계(契)라는 이름으로 기능하고 있다. 원래는 동향 사람들끼리 돕는 조직인 동계(洞契)였으나 공업도시로 이주한 노동자들이 서로를 돕기 위해 조직한 행계(行契)가 노동조합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성리학 이념 덕분에 노사관계도 대체로 상호 협조적인 편이다.
  • 청소년근로보호법
    원평제가 만든 노동법이다. 16세 이하 청소년들은 공장에서 야간 근로를 배제하거나 아니면 저녁식사를 제공해야 노동이 가능하고 임금 체불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으며, 법을 위반 시 장형에 처한다.
  • 노비제 폐지
    노비에 엄청난 과세를 물린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손들고 속량시키다보니 국내에 존재하는 노비의 숫자가 매우 줄어들었고, 1833년 영국에서 노예제를 폐지하며 세계의 추세가 노예제 폐지로 흘러가자 대한 역시 노비제 폐지를 결정하였다. 공노비였던 이들은 무기한 계약을 해주거나 종신 고용하는 형식으로 양인 신분이 되어도 계속 일할 수 있게 해주었고, 궁녀는 양인 중 지원자를 받기로 했다. 기존에 노비가 맡던 궂은일들은 고액을 주어 사람을 고용하거나, 한공 또는 묘노에게 시키는 것으로 대체하기로 하였다. 예전 같았으면 노비가 되는 형벌을 받았을 범죄자들은 평생 도형수로 삼기로 했다.
    역설적으로 노비제 폐지 이후 묘노들의 처우는 더 열악해졌다. 기존에는 외국 노예상에게서 묘노를 구입한 후 그들의 노비 신분을 면천해주는 대신 빚을 지워서 일종의 채무 노예처럼 사용했는데, 이때는 어찌되었건 법적으로 대한 호적을 가진 자유인이었으므로 지나치게 가혹한 대우는 할 수 없었고 이론상으로는 빚을 갚고 자유의 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노비제 폐지로 면천을 대가로 빚을 씌우는 것이 불가능해졌는데, 대한인의 노비 소유는 금지지만 외국인은 여전히 소유가 허용된다는 점을 이용해 묘노의 소유권은 외국 노예상이 그대로 가진 채로 대한의 사업체에 임대해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말뿐이라도 대한 국적의 자유인이었던 묘노들의 신분이 외국인 소유의 노비가 되어버리면서 법으로부터 최소한의 보호도 받지 못하게 되었고 언젠가 빚을 갚고 풀려날 가능성조차 없어져버렸다. 이렇게 고통받던 묘노들이 태평천국에 포섭되어 1841년 홍적의 난이 터지는 원인이 되어 1842년 재석의 결단으로 묘노에게도 노비제 폐지가 적용되는 것으로 개선된다.
  • 대형 시보사
    기차를 통해 한양에서 발행된 시보가 늦어도 3일 안에는 본토 전국에 배달 가능해지면서 한양에는 전국지라고 할 정도의 메이저 시보사들이 생겨나 여론에도 큰 힘을 미치게 되었다. 동서남북 4당파별로 하나씩, 중립을 표방하는 곳 2곳 해서 총 6개의 대형 시보사로 정리되었으며, 이들 시보사의 영향력을 통해 여론을 호도하거나 조작하려는 일도 늘어나고 있다.
  • 우정청 설립
    1839년 유선전신이 실용화되고 내무부 우정국이 전신 관리 책임을 맡게 되자 법무대신 홍성규의 제안으로 우정국을 승격시켜 우정청으로 개편한다. 이와 함께 철도도감과 운하도감도 철도청, 운하청으로 개편한다.

2.1.10. 교육

  • 초등 의무교육의 확대
    중종 건흥제가 처음 한성부에 소학당을 세운 이후 현종 원강제 시대에 차근차근히 소학당을 지방에도 설치하기 시작하어 원강 34년(1774년)에는 전국 각 현 소재지에 소학당이 세워지고, 원평 9년(1791년)에는 '모든 남아는 학당에 다녀야 한다'는 의무교육 칙령이 반포된다.
  • 여성 의무교육 시작
    원평제 말년부터 여성도 초등 의무교육을 시작하자는 여론이 지식층 사이에서 높아졌으나 보수적인 성품을 지닌 원평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신념을 지닌 광덕제[17]는 모두 거부했지만 재석이 흥선제로 즉위한 후 노비제도 폐지 문제처럼 이미 유럽 각국에서 여성 의무교육을 시작했으니 대한도 늦을수는 없다는 김정희의 제안을 받아들여 여성도 의무교육을 시행하기로 한다. 일반 여학교에서는 기본적인 국문, 산수, 가사, 도덕을 가르쳐 현모양처를 길러내겠다는 것을 취지로 하며, 태황태후와 황태후가 설립하기로 한 이화학당(李花學堂)에서는 사대부 규수들에게 품격있는 신부수업을 시키게 되고, 황후 권나현이 설립한 숙명의숙(肅明義塾)에서는 궁녀 양성 과정, 초등교원 양성 과정, 의학교 입시 예비과정 등 평민 소녀들을 위한 직업 교육을 시키게 된다.
  • 한성대학당 창설
    재석이 흥선제로 재위하면서 대한에서 연구활동을 한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도움 등을 받아 기존의 서학당을 포함하여 법학, 의학, 인문학, 자연과학 등 성리학 외의 고급 교육기관을 가르치는 상급학교들을 통합하여 국립 종합대학교로 창설한다.
  • 지방 대학당 창설
    한성대학당의 학제에 맞추어 각 도에 관립 지방대학당을 세우고, 사립대학당도 이 학제에 맞추도록 하는 등 근대 대학교 체제가 갖추어진다.

2.1.11. 문화

  • 무협지
    원 역사처럼 김조순이 젊었을 때 '오대검협전'이라는 무협지를 썼으며, 재석 빙의 직후에는 백산대인[18]이라는 작가가 쓴 '구대검협전'이라는 무협지가 인기이다. 김조순은 삼국지연의도 한글로 번역했는데 뛰어난 필력 덕분에 4부 시점에서 대한에서는 표준 삼국지연의 판본으로 취급받고 있을 정도.
  • 화담집
    삽화 자체는 삼강행실도 때부터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글이 아닌 그림이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만화가 등장하여 '화담집'이라고 불린다.
  • 석전
    화약 무기의 발달로 더 이상 석전꾼이 전장에서 유효한 시대가 아님에 따라 조정에서도 했다하면 사상자가 생기는 위험한 석전을 금지시키려 여러 번 시도했으나,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뿌리 깊은 민속놀이인 석전을 백성들이 그만두지 않아 여전히 계속된다. 그나마 영종 때 보호장비 착용을 의무화하여 사상자라도 줄인 게 고작.
  • 홍제궁
    장조 때 진왕이 명나라에서 사온 가품 장팔사모와 경조가 진왕을 배려하여 사온 가품 청룡언월도,[19] 중종 건흥제가 젊었을때 유럽에서 모은 미술품 등등 황실 보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건흥제는 경희궁을 완공하면 보물들을 경희궁에 전시하려 했으나 인현황후가 승하하면서 우울해진 건흥제가 관심을 잃어버렸고 후대 태황들도 굳이 일을 벌이고 싶어하지 않아 홍제궁이 그대로 황실 보물 보관소 역할을 하고 있다.
  • 대한축구사
    현대의 축구협회 같은 조직으로 14개의 구단이 속해 있다. 과거에는 송상의 후원이 대부분이었기에 개성에서만 열렸으나 현재는 송상의 독점이 깨지며 여러 지역에서 열리고 있다. 경기 방식은 리그전으로 각 팀이 다른 팀과 2회씩 대결해서 가장 승수가 높은 4팀이 준결승, 결승전을 벌인다.
  • 연극
    새로 만들어진 연극으로는 박문수를 배경으로 하는 부마어사(駙馬御史), 부마포적(駙馬浦贼)과 하와갑오정난(夏窪甲午靖難)을 소재로 하는 해도지용(海島之龍) 등이 있다.
    반촌극단과 정도극단은 여전히 전국적인 인기를 누리며 양대 극단으로 남아있으며 그 소속 배우들도 연예인 수준의 인기를 누린다. 이들의 극성팬들은 축구 극성팬과 마찬가지로 후리건이라고 불리며, 1840년에 재석이 한-신불랑 정상회담 및 미주 순행길에 반촌극단을 데리고 가서 공연을 시키고 돌아오면서 누손주에 들렸다가 주연 배우들이 몽땅 말라리아에 걸리는 사태가 생기자 후리건들이 무엄하게도 신문궤에 태황인 재석을 비난하는 투서를 수천통을 보내어 항의하는 사태가 생겼다.
  • 시조묘
    동명왕과 고왕의 사당은 숭현전(崇賢殿), 온조왕의 사당은 숭렬전(崇烈殿), 박혁거세의 사당은 숭덕전(崇德殿), 고려왕들의 사당은 숭의전(崇義殿), 단군의 사당은 숭령전(崇靈殿), 기자의 사당은 숭인전(崇仁殿)으로 모시고 있다.

2.1.12. 식생활

  • 딸기
    원역사에서는 1712년에 프랑스군 첩보원 프레지에가 칠레에서 첩보 활동을 하다 발견한 현지 야생 딸기를 시초로 약 100년간 품종 개량을 거쳐 1810년대에 나온 것이 현재의 딸기인데, 이 역사의 대한에서는 태황 원평제가 미식 취미를 갖고 있는 덕에 유럽에서 개량한 최신 딸기 모종을 바로 수입하여 재배 중이나 아직은 궁중에서만, 그것도 태황 본인이 아니면 생과일이 아닌 딸기잼으로나 맛볼 수 있는 귀한 과일이다.
  • 미주병
    샌드위치. 3부에서 재석이 빙의한 건흥제가 성친왕 시절 미주관리사로 있을때 발명한 그것이다. 그 후로 본국에서는 미주병, 미주에서는 처음 발명됐을 때 이름대로 '전하병'이라 부른다. 재료에 딸기잼이 들어간다고 하여 군대리아를 연상케 하며, 4부에서 재석의 부친인 태자 이순은 막노동꾼이나 군졸들이 끼니를 때울 때나 먹는 허접한 음식 취급을 한다. 한편 영국에서도 원 역사처럼 샌드위치 백작이 샌드위치를 별도로 발명했다고 한다.
  • 감설병
    우유를 얼려서 만든 진짜 아이스크림. 그간 빙과[20]만 있던 대한에 드디어 들어왔다. 미식가인 태황 원평제가 여름에 즐긴다고 하며, 마포 번화가에서 프랑스 망명객이 경영하는 베르사유의 백합이라는 가게가 맛집이라고 한다.
  • 석관식
    영종 재위 초기에 미주행 배의 요리사이던 김민생이 의사인 아버지의 의학 책에서 본 압력솥 살균법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병조림을 발명했고(원역사대로 같은 시기 프랑스의 아페르도 독자적으로 병조림을 만들었다), 제물포의 철공 박춘제가 주석도금 철판으로 통조림을 만들어 석관식이라고 이름지었다. 원역사와 달리 통조림 따개까지 같이 만든 것은 덤. 김민생과 박춘제는 동업자 관계를 맺고 영등포에 춘생식행(椿生食行)이라는 통조림 공장을 세워 시장을 장악하고 있으며, 영종의 명으로 은 2천 파운드(8천 냥)를 받고 영국에 특허권을 팔았다. 공장에서 압력솥이 폭발하는 산업재해가 종종 일어나는 대신 직원들에게 보수는 후하게 주고 있다.
  • 호떡, 마화(꽈배기)
    원역사에서 임오군란 이후에 유입되었으나 대한에서는 타국간 교류가 활발하다 보니 중국계 길거리 간식이 빠르게 전파되었다. 마화는 지금처럼 설탕이 뿌려진 튀긴 빵이지만, 호떡은 본래처럼 고기소가 들어간 모습이다.
  • 까리(천향탕)
    장조 때 무굴제국과 바로 국교를 트면서 벵골식 커리가 바로 대한으로 들어왔다. 약재로 쓰는 향신료가 듬뿍 들어간 보양식이라고 알려져 중종 시대에는 대한에서 자리를 잡았고, 군대에서도 여름철 보양식으로 고기국에 까리 가루를 타서 배급하는데 그 색깔 때문에 군졸들은 똥국이라고 부른다. 열대지역인 술루국, 하와국에도 대한을 통해 까리가 전파되어 많이 먹는다고 한다.
    • 천향환
      현대 일본에서 주로 생산되는 기름으로 굳힌 고형 카레. 태평천국 토벌전에서 군에 납품되었고 원래 커리에 익숙하고 인도계 병사가 많은 영국군이 이를 수입한다. 인도계 병사들을 위해 소고기가 없는 천향환을 주문하자 아예 영국뿐 아니라 인도를 포함해 각국에 팔기 위해 인도에 천향환 공장을 세워서 한국인들이 인도인들에게 카레를 팔아먹는 재밌는 구도가 나왔다.
  • 양무관
    임꺽정의 후손들이 운영하는 명륜동에 위치한 고기집. 양무관 고기를 먹으면 임꺽정처럼 출세할 수 있다는 마케팅을 내세운다.
  • 복어 조리 면허제
    재석 즉위 초 3부 정호찬의 자손들이 집안 잔치에서 야매 숙수가 요리한 복어를 먹고 복어 독에 중독되어 집안 성인들이 떼죽음당하고 아이들만 살아남는 횡액이 일어나자 명문 집안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사건의 심각성 때문에 대책 마련의 여론이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높아져, 이미 면허제를 시행하는 일본의 제도를 참고하여 1837년 복어 조리 면허 제도를 만들고 기존 복어 숙수들에게는 3년의 유예기간을 준다.

2.1.13. 의학

  • 병원 확충
    한양의 광혜원은 병상 1200에 달하는 대형 병원으로 확장되었고, 병원장인 광혜원 제조는 종 2품, 진료부원장인 광혜원 정은 정 3품의 고위직이다. 그 외에도 관립 병원으로 100병상급 병원 6개소를 포함해 한양에 있는 병원들을 합치면 총 3천 병상이 나온다고 한다.
  • 치의학
    발치를 거부하는 충치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신경치료 기법이 있는데, 그 방법이란 충치를 앓는 이에 구멍을 뚫어 고름을 전부 긁어낸 후 묽은 황산을 부어 '이를 갉는 벌레를 박멸한다.'는 방법이다. 물론 아편으로 마취를 하고 시행하지만 마취가 풀린 후의 고통이 상상을 초월하여 의원들도 그냥 발치하는 쪽을 권하는 편.
  • 지문
    현종 시대에 우편으로 손금을 봐주는 점집이 늘어나면서 손도장을 찍는 사람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문이 사람마다 다르고 평생 불변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원평제가 범죄자는 지문날인을 시키는 등 사회적으로 활용된다.
  • 부패 기전 파악
    2부와 3부 사이에서 처음으로 현미경을 발명하고 병의 미생물 기원설, 니코틴의 독성 등을 스스로 알아낼 정도로 의학이 발전한 대한 의학계는 부패도 사람의 질병과 같이 미생물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임을 파악해 냈다. 마찬가지로 음식을 상하게 하는 곰팡이도 대균이라고 부르며 병균의 일종으로 인식하고 있다.
  • 양매창 치료법
    원역사에서 율리우스 바그너 야우레크가 매독 환자에게 말라리아 환자의 피를 주입해서 1917년에 완치를 증명해 1927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지만 여기서는 누손주의 의원인 김시형이 양매창 환자가 학질에 걸리자 완치했다는 현상을 보고했다. 태황 광덕제가 이 보고에 관심을 가지고 양매창 환자를 거세하는 조치를 중지한 뒤 양매창 환자들을 누손주로 보내 이 방법을 치료법으로 쓸 수 있을지 인체실험을 하도록 지시한다.
  • 마비산 개발과 외과수술 발전
    영종 초에 한성의학교 연구진들이 아편 추출물을 적절히 조합하여 마취제인 마비산을 개발한다. 안정제 효과를 내는 환약과 수술 마취제 효과를 내는 탕약이 있고, 이 마비산 덕분에 대한 의사들은 절단수술은 물론이고 개복수술까지도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항생제가 개발되지 않아 개복수술의 생존률은 그리 높지는 않은 편이다.

2.1.14. 과학, 공학

  • 고무지우개
    원역사처럼 영국에서 발명되었고, 학용품으로의 활용과, 간단한 제조법으로 대한에도 들어왔다.
  • 철도망 확충
    중종 때 처음 만들어진 철도는 그 사이 주요 간선철도는 나주선(호남선), 동래선(영남선), 전라선, 심양선 등이 있고 그외 국내 주요 도시는 철도로 모두 연결되었으며, 심지어 북한산성을 오갈때도 강삭철도를 사용할 정도. 또한 심양을 지나 청의 부수도 북경과 금의 수도 상도까지 가는 국제선 열차까지 생겼다.
  • 증기 자동차
    3부에서 발명된 증기 자동차가 4부에서는 대중 교통수단으로 실용화되어 한양에서는 승객들을 나르는 증기 버스가 운용되고 있다.
  • 증기기관 수출
    무종의 유훈이라 하여 중종 건흥제 치세까지 증기기관을 절대 수출하지 않았고 그 기술도 비밀로 해오다가 형제국인 청이 자체 증기기관을 개발하자 일부 기술지원만 하는 정도였으나, 1755년(원강 15년) 후송이 자체 증기기관을 개발하자 더 이상 기술비밀 유지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증기기관과 증기기관차 수출을 시작한다. 심지어 영국에도 증기기관차를 수출하였다. 단 100우력 미만 출력 기관만 수출 가능하고, 잠재적국인 후송에게는 여전히 수출이 금지되었다.
  • 보온병
    원역사와 달리 일찍 발명되었다. 묘사된 구조로 내부는 도자기, 중간 사이의 공간은 양털, 외부는 나무로 되어 있고 겉은 모피로 싸였다.
  • 육분의, 크로노미터
    3부까지만 해도 대한에서는 구식 사분의를 항해에 사용했고, 경도 측정에 필수적인 크로노미터도 3부에서 개발은 하였으나 내구성이 약해 배에 싣지 못한 상태였는데, 1779년(영태 4년) 귀국길에 대한에 들른 잉글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목종을 알현하고 신형 육분의와 크로노미터를 진상하여 그 후 대한에서도 복제 생산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대한제 크로노미터는 아직 영국제만 못해 어승선인 동진 함에서는 영국제 크로노미터를 사용한다.
  • 증기 거중기
    실제 역사와 유사하게 수원성과 화성을 축조하기 위해 정약용이 만든 것으로,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한다. 도성이라면 사복시의 코끼리를 동원했겠지만, 수원은 코끼리를 동원하기엔 멀다 보니 대신하여 만들어,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코끼리'라는 뜻으로 별칭이 기상(機象)이다.
  • 석탄가스 기구
    기존의 열기구가 승룡대에서 많은 양의 화목을 때서 뜨거운 공기를 만들어내는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해 처음에는 수소기구를 연구했으나 폭발성 때문에 실용화되지 않고, 수소보다는 부력이 약하지만 더 취급이 쉬운 석탄가스를 봉입한 가스 기구가 군기시에서 개발, 실용화된다. 적재량 1톤 가까이 되는 초대형 기구도 만들어지지만 아직 동력원을 구하지 못해 비행선으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있다. 원평제 때 이 기구로 대한해협을 건너 북구주로 가는 실험도 했으나 무동력이라는 한계 상 추락하여 사상자를 내거나, 불시착으로 목숨은 건지거나 무사히 착륙해도 엉뚱한 곳에 닿는 등 목적지 도착에 실패하는 일이 잦자 보다못한 원평제가 실험을 중단시켰다.
  • 비행선
    4부 표지에 그려져 있다. 4부 201, 202화에서 묘사되기로는 원평제가 친히 비행선이라는 이름을 짓고 석탄가스 기구에 동력원만 달면 충분히 비행선이 될 수 있으니 개발하도록 지시해서 유선형 기낭과 소형 증기기관까지는 완성되었으나, 프로펠러가 배는 추진시키지만 비행체를 추진시키지는 못할 것이라는 장인들의 고정관념 때문에 퍼덕이는 날개를 단다거나 하는 다른 추진 방식만을 연구하다 실패하기를 거듭하여 광덕제 재위기까지도 실용화에 실패하고 있다. 그러다가 재석이 흥선제로 즉위한 후에야 프로펠러를 실제로 장착해보고 작동되는 것을 알게 되어 비행선 개발에 속도가 붙고 있다. 1837년에 길이 48미터, 직경 12미터에 1백 관(375kg) 중량의 2우력 증기기관을 달고 승무원 3명이 탑승하는 시제기가 개발되어 재석과 군기시 제조 김귀훈이 탑승하여 한양 상공에서 첫 비행에 성공한다. 1844년 석유를 연료로 하는 증기기관이 도입되면서 길이 100미터에 탑재량 1톤까지 늘어난 개량형이 성공한다. 태평천국 토벌전에 1기가 투입되어 정찰, 폭격, 삐라 살포 등의 임무를 맡는다.[21] 비행선 격추를 위해 태평천국군이 열기구를 띄우자 탑재된 회선연자포를 사격하여 6기를 격추하면서 세계 최초의 공중전이 열린다. 이 비행선이 기대 이상의 큰 전과를 올리자 재석은 비행선을 5기로 증원하고 본격적인 항공 폭탄을 생산하도록 한다.
  • 포낭
    3, 4부 사이에 기구가 고장난 경우 비승군 군사가 비상탈출 할수 있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아직 성능이 미흡해 생명을 완전히 보장할 수는 없는 상태.
  • 나선장
    대한에서는 증기선을 세계 최초로 만들었지만 외륜선 기술이 너무 발달하다보니 프로펠러 추진에 대해서는 연구만 하고 있다가 19세기 초 영국에서 스크루 프로펠러를 실용화하자 한발 늦게 프로펠러를 만들기 시작했지만, 대한 자체 기술로는 외륜선보다도 성능이 떨어지자 재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덕제는 영국에 특허료를 물고 프로펠러 기술을 사오기로 했다.[22]
  • 고마 가황법 발견
    원 역사에서는 1839년 찰스 굿이어가 발견하여 고무의 산업적 이용이 가능해졌는데 여기서는 대한 서학당 화학자들이 발견했다. 대한에서는 고무를 누에바에스파냐에서 처음 접했기 때문에 스페인어로 고마라고 부른다.
  • 고무신, 고무장화
    고무 가황법이 발견되고 조홀국에서 남미에 보냈던 고무나무 원정대가 돌아오면서 남미 원주민의 고무신을 가져와 진상한 것에 아이디어를 얻은 송방에서 서학당과 협력하여 고무신 공장을 세운다. 원역사처럼 당혜 디자인을 사용했다고 한다. 민간용 고무신은 습기가 통하지 않아 무좀을 유발한다는 단점을 기존 가죽신 업계에서 물고 늘어져 기대만한 매출이 나오지 않았으나, 고무장화는 1844년부터 벌어진 태평천국 토벌전쟁에 투입된 대한군과 그외 다국적군 병사들이 양쯔강 유역 습지대에서 사용하면서 크게 호평을 받아, 고무장화 생산에만 전념해도 공급이 항상 부족할 정도가 되었다.
  • 고무 타이어
    역시 고무 가황법이 발견된 후 개발되어 마차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아직 마차 바퀴에 철테 대신 고무테를 두른 수준의 초기 타이어지만, 재석은 바람을 넣은 타이어를 만들지 고민한다.
  • 석유 개발
    재석이 신불랑 황제 나폴레옹과 협상을 통해 텍사스에서 석유 채굴 권리를 얻어내고, 청나라로부터 고대부터 소금물을 캐내던 사천 기술자들을 지원받아서 시작된다. 원래는 바로 텍사스로 보낼 예정이었지만 당시 조정 중신들 입장에선 허황된 이야기라 검증하고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평소 국정에 관심 없던 광덕제가 하필 관심을 보여서 만주 일대를 헤매면서 시간을 낭비했고, 결국 광덕제가 사망한 후 태황이 된 재석이 당대 기술로 캐낼 수 있는 요하 일대를 채굴하도록 명령해서 본격적으로 석유산업이 시작된다.[23] 처음에는 고래기름을 대체할 조명용 등유부터 일반에 판매하기 시작하며, 등유는 일반 등잔을 사용하면 폭발 위험이 있어 내수사에서 등유에 맞는 호롱도 대량으로 만들어 함께 판매한다. 상인들이 '땅의 영험한 기운을 받은 신령한 기름'이라고 선전하여 날개돋힌 듯 팔리지만 석유냄새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 축전지 개발
    1835년(을미년)에 서학당 화학부에서 볼타 전지보다 수명이 길고 전압도 높으며 안전한 축전지를 개발해 을미전지로 이름붙였다. 대한에서는 이런 황산식 축전지를 전해액에 담근다고 하여 습전지라고 부른다.
  • 전신기모스 부호, 절연 전선 개발
    재석은 미주의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서는 전신기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서학당 물리학부에 개발을 명하였고 시제품도 나왔으나 전기 신호를 중간중간 증폭시키는 부분의 해결이 안되어, 결국 미주합중국에 유학생 6명을 보내 이 부분을 배워오기로 한다. 한글 모스 부호는 재석이 힌트를 주어 이미 개발되었고, 한자 모스 부호는 재석은 굳이 필요없다고 생각했으나 서학당에서 자체적으로 4자리 숫자 코드를 이용해 상용한자 1만자를 배당한 코드를 개발한다. 또한 대한이 앞서가는 고무 기술을 이용해 전신선에 고무 피복을 씌운 절연 전선을 개발하여 한강 하저로 전신선을 부설할 수 있었으며, 1839년 경인 전신선이 개통된다. 개통식에서 처음으로 보낸 전문은 '태황 폐하 만세'.
  • 면화약 발명
    1837년 군기시에서 전지 실험을 하던 중 엎질러진 질산+황산 전해액을 닦은 면 걸레로 실험용 주정 화로 불을 끄려고 덮는 순간 폭발사고가 난 것을 계기로 발명. 부상자 6명이 나왔지만, 이 사고를 통해 왕수로 면을 질산화시켜 면화약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무한궤도 발명
    원역사보다 일찍 증기자동차가 실용화되면서 여러 국가에서 무한궤도 발명에 나섰고, 그 중 대한 요양 사람 홍총각이 쇄판이라는 실용적인 무한궤도 발명에 성공하여 증기 귀차에 적용하여 본격적인 전차가 만들어진다.
  • 석유 외연기관 발명
    대구부 열기창 장인 김기두가 석유 램프도 물을 끓일 열에너지가 있는 것을 보고 착안하여 증기기관의 연료로 석유를 사용하는 석유 외연기관을 발명했으며, 비행선에 도입되어 비행선의 성능을 끌어올리는 성과를 낸다.
  • 철조망 발명
    흥선제 재석이 직접 내수사에 명해 유자철선형 철조망을 발명하여, 내수사 소속 목장에 우선적으로 적용하여 맹수를 막는 데 효과적임을 입증한다. 프로이센 크루프사에서도 라이센스를 따갈 정도.

2.1.15. 환경, 생물

  • 외국 포경선과의 갈등
    미국을 비롯한 유럽 포경선들이 대한 영역인 북대동양에 들어와 마구잡이로 포경을 하고, 고래기름만 빼내고 바다에 버리는 행동을 하여 대한 포경업자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원평제가 1811년 북대동양에 외국 포경선의 진입을 금하는 법령을 반포했지만 외국에게는 무시당하고 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원평제에게 '고래왕'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 자연발생설 부정
    서양에서는 아직 자연발생설이 정설로 여기나 대한에서는 성리학의 기반인 효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이유로 자연의 모든 생물은 부모가 존재해야 발생이 성립한다는 주장을 한다.
  • 대해우
    서양권에서는 원역사와 달리 최초로 실물을 본 쿡 선장의 이름을 따 '쿡 해우'라고 부른다. 쿡 선장이 표본을 얻기 위해 사냥을 하려 했으나 경비를 맡은 한국군이 막아서 실패하였다. 때문에 서양에는 표본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로 인해 비글호 탐험대에서 태황의 허락을 받고 대한에 방문하여 표본을 얻어간다.
  • 한지후단론
    원역사의 알렌의 법칙과 베르그만의 법칙에 해당하는 내용. 대한의 영토가 적도 부근부터 시베리아까지 넓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여러 기후에 사는 동물들을 비교하게 되었고, 추운 곳에 사는 동물들이 상대적으로 덩치가 크고 말단 부위가 작다는 법칙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아직 진화론까지 도달하지는 못했으며, 여러 형태로 태어난 동물들이 자신에게 맞는 기후를 찾아 이주하며 흩어졌다고 여기고 있다.
  • 천하어보
    정약전이 관직을 은퇴한 후 대한의 강역인 북태평양 전역을 직접 답사하여 집필한 총 12권짜리 해양생물학 전집. 동판화로 찍어낸 다채로운 삽화까지 곁들여져 대한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권위있는 학술서로 인정받고 있다. 여담이지만 그중 제 6권은 하와국을 다룬 하와어보이다.

2.1.16. 종교

2.1.16.1. 불교
  • 원각사
    일본측 국혼사인 미즈노 타다아키라에게 예물로 높이가 다섯 자나 되고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된 7만냥 가치의 금동탑을 기증받았다.
  • 불무도
    원래부터 승병들이 익히던 불교 무예에 인도 성지순례 후 배워온 요가 동작들이 합쳐져 만들어진 불교의 체조.
2.1.16.2. 예수교
  • 천주교
    원역사와 동일하게 교황에 의해 예수회는 해체되었고, 41년 후 재건되긴 했으나 대한 내 천주교의 주도권은 이미 파리 외방전교회로 넘어갔다.
  • 개신교
    대한 조정은 선교 금지 기조를 유지했으나 미국 선교사들이 유입되며 대미주에 반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미주 최대 유지인 원씨 가문은 집안 전체가 개종한다. 초기에는 탄압이 있었으나 본래 대한의 정책은 '반주교 선교 금지'였지 '반주교를 믿는 자국민 처벌'이 아니었고, 법왕청의 예수회 해체에 대한 항의도 겸해 선교가 공식적으로 허용된다. 반주교라는 멸칭도 개신교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으면서 대체되었지만 아직 미주에만 신자가 있기에 본토에 퍼지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으로 보이고, 무엇보다 대한식 국가 제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관직에 진출할 가능성이 없어 재석도 위험요소로 보지는 않고 있다.
  • 후기 성도 교회
    창시자 조셉 스미스가 일부다처제를 이유로 미국에서 탄압받자 7000여명의 신도와 함께 대한령 미주로 이주하여, 원역사처럼 청구호 주변에 거주를 허락받는다.
2.1.16.3. 회회교
2.1.16.4. 덕성도
3부에서 타락의 조짐을 보여 사이비 종교가 되어 태평천국의 난과 비슷한 사건을 일으킬 것이라는 독자들의 추정과 달리 정상적인 종교로 발전하여 기성 종교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대한에서 난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후송에서 난을 일으켰다. 예수교와 불교 양쪽 모두에서 사이비 취급을 받는다. 서양 국가들도 예수교가 아닌 예수교의 영향을 받은 불교의 분파 정도로 보고있다.
  • 교세
    덕성도 측에서 주장하는 신도 수는 총 300만이다.
  • 상징
    덕성도의 상징은 세 번 나타나는 부처를 상징하는 세 개의 원과 그 셋을 연결하는 광진을 의미하는 작은 원이다. 십자가처럼 덕성도의 상징이 되어 깃발에 사용하거나 귀걸이로 만들어 달고다니곤 한다.
  • 천사
    덕성도의 교주. 그러나 중앙집권과 거리가 멀고 개인의 수양과 기도를 중시하는 덕성도의 특성상 법왕과 달리 신도들에 대한 통제력은 약한 편이다. 11대 천사는 현도.
  • 시조대천사
    초대 천사였던 창시자 광진은 사후 '시조대천사'라고 불리며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생전의 광진이 자신을 신격화하지 말라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씁쓸한 결말. 그래도 이후의 천사들은 신격화되지 않은 것을 보면 광진의 뜻이 일부나마 지켜지긴 했다.
  • 구월산
    광진이 덕성도를 창시하고 죽은 뒤 묻힌 구월산은 덕성도의 성지가 되었으며 모든 덕성도 신도는 평생에 한 번은 참배하고 싶어 한다. 이슬람의 순례처럼 의무까지는 아닌 듯.
    • 천산궁
      구월산에 지어진 덕성도의 본원.
  • 성덕도
    불교의 불무도에 육군 도수체조와 태극권이 합쳐져 만들어진 덕성도의 고유 체조.
  • 해외 선교
    주변국으로도 많이 전파되었는데 청으로는 대한에서 노동하다 돌아간 한공들을 통해, 후송에는 교역선을 통해 덕성도가 전파되었으며 중원의 신도 수는 대략 100만이 넘는다. 후송의 소태제는 외래 종교인 덕성도 신도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해 학살을 시도하고 이 때문에 덕성도의 난이 일어나 무려 5년간 지속된다. 당시 대한의 덕성도인들은 물자와 무기를 모아 후송의 덕성도에 조정 몰래 전달해서 지원했다.

    후송 덕성도가 지하조직화되면서 그들 중 상당수가 배상제회처럼 이단이 되거나 아편 밀매에 뛰어든다. 후송 덕성도 교단들의 통제는 이후 임칙서가 아편 잠상 토벌에 덕성도 교단들의 도움을 받기로 하면서 차츰 회복되었다. 그러나 후송에서 배상제회를 토벌하겠다면서 아편 잠상 토벌에 협력하던 정상적인 덕성도인들을 학살하는 사태가 생기자 분노한 덕성도인들의 대다수가 배상제회 쪽에 붙어버린다.

2.1.17. 연도별 주요 사건

스포일러가 될 정도로 자세하게 기술될 경우 문피아 측에 대한 이익 침해로 항목이 삭제될 위험이 있으므로 지나치게 자세한 기술은 자제 바람.
  • 무신지변 - 1788년
    원평제의 장남과 차남이 병으로 죽은 틈을 타 목종의 후궁인 귀비 오씨가 원평제를 독살하고 자기 소생인 숙왕 이정을 태황으로 추대하려던 음모. 계획 단계에서 발각되어 관련자들은 처형당하고 오씨는 누손주로, 이정 일가는 북변으로 종신 유배를 당한다.
  • 원릉 도굴 미수 사건 - 1809년
    원평 27년, 성친왕의 첫 왕비였다 사후 황후로 추존되었던 인선황후 강씨가 묻힌 원릉(元陵)이 도굴당할뻔했던 사건. 생전 남편 성친왕(3부 재석)에게 선물받은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부장품으로 같이 매장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도둑들이 이를 노리고 땅굴을 파 도굴을 시도하다 발각되어 붙잡힌 뒤 주모자들은 모두 거열형을 당하고 일가족은 전원 북변으로 유배, 능을 관리하던 능참봉과 경계를 서던 수릉군 및 해당지역 수령인 양주목사까지 전원에게 책임을 물어 해우도로 종신 유배형에 처해지고 대신들도 여러명 사직해야만 했다. 원 역사의 임진왜란 당시 선릉과 정릉 도굴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고 대한이 세계에 많이 알려진 강국이 돼서 오페르트 도굴 사건도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이니 작중 대한 사상 최악의 도굴 미수 사건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 탐보라 화산 대분화 - 1815년
    원 역사와 똑같이 탐보라 화산이 분화하여 전 세계적으로 몇 년간 흉년이 이어지고 이를 틈타 종교계 일부와 사이비 종말론자들이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과거에 경신대기근 등 몇 차례 대재앙을 겪으며 기근 대비 노하우가 쌓이고 물류망과 구휼 대책 등 사회적 인프라를 충분히 갖춘 대한은 큰 사회적 혼란 없이 무난하게 넘어갔다.
  • 기묘년의 변 - 1819년
    원평 37년 일어난 대한 해군 사상 최악의 사고. 누손주 남부통제영에 배속된 2등 대선 한 척이 관리부실로 화재가 발생하여 1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 대한-신불랑 회담 - 1828년
    대한 황태손 이진(재석)과 신불랑 황제 나폴레옹의 정상회담을 통해 신불랑의 괴뢰국인 멕시코 공화국이 뉴 멕시코 주 일부, 서북부 소노라 주 전체와 치와와 주 ⅔를 900만 달러에 대한에 판매하고, 대한 미주와 신불랑을 잇는 대륙횡단철도 건설에 합의한다.[24]
  • 유구 제위 선위식 - 1831년
    1831년 양력 4월 한양 천단에서 정식으로 유구 황제 상육이 대한 태황 광덕제에게 유구 황제위를 선양하는 선위식을 갖고 유구는 대한의 번국인 왕국으로 격하된다.
  • 남응중의 난 - 1832년
    광덕제의 이복동생인 소왕 이청이 광덕제와 태자 재석을 동시에 암살하고 제위를 찬탈하려는 야망을 품고 문객들과 함께 국구 김조순의 장례식장에 광덕제와 태자가 모이는 틈을 타 폭탄 테러로 암살하려고 소왕저에서 폭탄을 제조하다가 실수로 폭발하면서 들통이 난다. 수사 책임을 맡은 재석은 소왕의 아들인 종성공이 일본과의 국혼 대상자인 점 때문에 소왕이 역모 주동자임을 공표할 수 없어 폭탄 제조 책임자인 남응중 등 문객들이 벌인 짓이라고 공표하고 소왕 일가는 도의적 책임을 지고 자진해서 북변으로 이주하며 종성공은 화재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처리하고 국혼 대상자도 영왕의 아들 명주공으로 바꾼다. 주동자 30여명은 참수되고 가담자 200여명은 광덕제의 서양 취향 때문에 판옥선의 노젓는 노예로 20년간 일하는 벌을 받는다.
  • 백두산 봉선 의식 - 1835년 음력 5월 5일
    흥녕 3년에 예부에서 대한도 당당한 천자국이니 예전 중원 천자들처럼 봉선 의식을 치루자고 건의하고, 재석은 시큰둥했지만 의외로 조정 대신들의 호응이 높아 백두산[25]에서 봉선 의식을 치르기로 한다. 수행원만 3천 명[26]에 외교관, 전국에서 모여든 유생들, 각 종교 지도자들, 평민 구경꾼까지 포함하면 약 2만 명 이상이 참여하는 대 축제가 열린다. 이 소식을 접한 후금에서는 제물에 보태라고 소 1천 마리를 보내주며, 청나라에서는 태산에서 자기들도 봉선 의식을 치루기로 한다. 후송에서도 진정한 중원 천자의 봉선을 보여주겠다는 경쟁심을 보이나 중원에서 봉선 의식을 올리는 장소인 태산이 청나라 강역이라 형산에서 봉선을 하게 된다.[27] 재석은 봉선을 마친 후 3개월간 속말주, 연해주 지역까지 순행하고 현지 민심을 돌본 후 돌아온다.
  • 무술남진 - 1838년
    누손주의 모로족 토벌전.
  • 한-신불 정상회담 - 1840년 6월 1일 ~ 7월 1일
    북아메리카 대륙횡단철도 개통을 기념하여 신불랑 나폴레옹 1세가 대한령 미주에서 한번 만나자고 요청하고, 나폴레옹을 존경하던 재석이 현직 태황이 미주에 간 전례가 없다는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에 응해 1840년 대미주 천사동에서 한-신불 정상회담이 개최된다.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약 한 달 간 진행되었으며, 재석은 이를 기념해 천사동을 두 황제가 만난 곳이라 해서 제회부(帝會府)로 개명한다. 재석은 귀경길에 하와국, 누손주, 대남도, 유구국을 순행하고 12월에 한양으로 귀경한다.
  • 홍적의 난(태평천국 묘노 반란 사건) - 1841년 음력 9월 그믐(양력 11월 12일)
    1840년 후송의 배상제회가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키면서 그동안 묘노들 속에 배상제회 선교사를 섞어서 대한으로 보내 만들어두었던 태평천국 추종 조직이 대한에서도 묘노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으나, 포섭 대상이던 한공 왕가가 이를 의금부에 고변하면서 발각된다. 왕가는 포상으로 대한 국적을 받게 된다. 그러나 모든 배상제회 조직을 적발한 건 아니라서 결국 반란이 일어나는데 그것도 대한 뿐 아니라 하와국,[28], 누손주, 조홀국[29], 대미주 등 대한 전역, 일본, 청, 영국령 홍콩, 신홀란도, 안남, 누벨프랑스[30], 미합중국, 남미 등 묘노들이 있는 곳 전역에서 홍수전이 지령한 날짜에 동시에 반란이 일어난다. 대부분은 얼마 안 가 진압되나 많은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입게 되며,[31] 배상제회에 대해 신경 안 쓰던 나라들도 이를 계기로 탄압으로 돌아선다. 특히 대한 다음으로 피해가 컸던 일본은 막부에서 정식으로 토벌군을 편성할 계획이며 반란으로 홍콩이 폐허가 된 영국은 의회에서 정규군 3만명 파병을 결의한다.[32] 묘노들 중 정통 덕성도 교인들은 이단인 배상제회에 맞서서 관군을 도와 싸웠기 때문에 그 보답으로 자유를 얻고 포상금을 받는 경우도 나왔다.
  • 태평천국 토벌군 파병 - 1843년
    원 역사의 태평천국보다 더한 어그로를 끌었고 대한을 포함해서 참전국가들도 더 늘어나서 원 역사처럼 홍서당의 패배가 점쳐젔으나, 독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게릴라전을 통한 전과 확대와 원 역사보다 뛰어난 홍수전의 능력[33], 거기다가 후송군의 막장스러운 부정부패와 연합군의 대민작전 실패로 인해 전황은 의외로 팽팽한 상태이다. 이 세계관에서 명나라 멸망의 신호탄이 되었던 양응룡의 난과 유사점이 있으며[34] 무더운 지역에서 인종차별과 문화차이로 대민작전에 실패해 게릴라전에 시달리는 서양 연합군의 모습을 보고 원 역사의 베트남 전쟁이 떠오른다는 의견도 많다.

2.2. 대한의 국외 영토(대한령 미주 제외)

2.2.1. 대남주

외지 출신 대과 합격자 중 절반 이상이 대남도 출신이라 한다.
  • 대남병
    대남주가 대한의 영토가 된지 200년 가까이 흐른 시점에도 여전히 후송에도 악명을 끼칠 정도의 정예병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다만 세월이 흘러서인지 제식 군복을 착용하고 전립을 쓰지 않는 대신 깃털을 달고 화려하게 치장한 단검을 패용한다.

2.2.2. 북구주

여전히 대한령이지만 명목상으로는 일본이 관리를 위임한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 일인들의 성향상 문과보단 무과 합격자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35]

2.2.3. 누손주

대한이 스페인령 동인도 제도를 구입한 뒤 누손주 관할로 묶었다. 인구는 미주의 절반 정도이나 그 절반은 토인이다. 양반 이주자는 거의 없으며 대과 합격자가 한명도 없는 해가 허다하다고 한다.

2.2.4. 해사도

요충지인 해사도는 대한 직할령으로 병력 8천명과 함선 30여척이 항상 주둔하여 말라카 해협의 제해권을 확보하고 조홀국을 위협하는 아체 술탄국섬라국을 견제하고 있다.

2.3. 대한의 번국

2.3.1. 심왕

4부 시점에서도 유지되고 있다. 초대 심왕이었던 이준이 처음 심왕부가 설치되었을 때 한청금 세 나라로부터 받은 재산을 낭비하지 않고 철도와 포경선을 비롯한 생산적인 사업들에 투자하였고 이후의 후손들도 재산을 늘리는 데 공을 들인 덕택에 심왕부의 자산이 3부에서 연수익 10만냥이었던 게 4부 시점에서는 50만 냥으로 다섯 배 이상 늘었다.
  • 심양전석
    그동안 심왕부가 부유해진 덕분에 새로운 요리가 계속 추가되어, 70가지 요리가 차려진 상 7개가 나오는 것으로 메뉴가 크게 늘어나 더 대단한 요리가 되었다.

2.3.2. 술루국

현종 말엽부터 본국에서 파견하던 집정이 폐지되고 술루국왕이 내정을 스스로 통치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술루 왕족들은 대한식 이름과 스페인식 이름을 같이 짓는 것과 술루 왕자들이 본국에 일정 기간 건너와 친위군에서 복무하는 전통은 유지되고 있다.

인구는 약 40만명 정도이며 그중 절반은 원주민과 안남인, 나머지 절반은 한인, 스페인인, 일본인이 3:1:1 정도 비율로 차지하고 있다. 인구가 부족하기에 보르네오섬 내륙은 직할령이 아니며 원주민들에게 선물을 주며 교류하여 신속시킨 상태이다. 국교는 가톨릭이지만 이슬람교도 제후들도 봉신으로 받아들이고 종교에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하는 등 융통성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보르네오섬 남부의 이슬람 토후국들과의 전쟁이 지속되어 대한 본국에서 군비 지원은 계속 받고 있으며, 가톨릭 왕국이란 점이 국가 정체성을 구성하는 나라임에도 보르네오 내륙의 무슬림 원주민 부족들을 회유하여 번국으로 끌어들이는 외교정책을 펴면서 대한 남방을 지키는 번국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군대는 인구에 비해 좀 과한 규모인 3만명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로 인한 재정부담은 대한의 보조금으로 충당한다.

2.3.3. 조홀국

정주신이 반란을 진압하면서 말레이인과 화교를 탄압하고 그 대신 노동자로 영국 동인도 회사를 통해 인도인을 이민시키는 정책을 펴서, 1823년 현재 인도인이 30만명이 되어 가장 인구가 많고, 말레이인 인구는 15만 명, 화교 인구 6만 명, 대한인 14~15만 명, 일본인 14~15만 명 정도라 한다. 총합 80만명으로 번국 중 인구가 제일 많다.

정주신은 아체국과는 정면 충돌 대신 냉전 상태가 되지만, 말레이 반도의 소국들을 대부분 병합하고 섬라와 국경을 맞대게 된다. 정주신의 손자인 충정왕 정인선은 전쟁을 피하고 교역과 산업 진흥에 힘쓰고 있다. 특히 대한에서 석관식(통조림) 산업이 발달하면서 깡통의 원료인 주석 수요가 늘어나 조홀국은 주석 광산업으로 큰 이익을 본다. 그러나 정인선의 아들 정윤진은 왕위에 오른 후 어차피 대한이 지켜줄 것이라며 최정예 왜병들을 해고해 3만 명이던 군대를 1만으로 감축하고 남는 돈을 서양식 궁궐인 태서궁을 짓고 주지육림에 빠져 국가 안보와 산업 발전에는 게으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대한령 연해주에서도 주석 광산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린다. 조홀국 주석 산업에 타격을 입으면 더이상 주지육림을 즐기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긴 했어도(...) 어쨌든 각성하게 되어 간신들을 몰아내고 충신들을 재등용하였으며, 세자 정호석이 재석에게서 들은 고무 산업의 유망성에 대해 전하자 즉시 남미에서 고무 묘목을 들여와 고무 플랜테이션을 세우게 하면서 다시 부흥할 모습을 보이고 있다.

2.3.4. 하와국

파일:하와국 국기.jpg
하와국 국기[36]
  • 지역
    수도는 하와이 섬(빅아일랜드)에 있는 홀랄루로 왕궁은 본래 하와도 여왕 케아케알라니와히네가 살던 궁을 '무우궁'이라 하여 사용했으나, 1778년 터진 하와무술지변 때 궁이 불타고 그 후 방어에 용이한 언덕 위에 요새화한 새 궁인 마우카 궁(마가궁)이 세워진다. 한편 오아후 섬 진주만의 대한 해군기지에 있던 유흥업소들이 군기를 문란케 한다고 판단한 원평제가 명령을 내려 유흥업소들이 모두 인근 호놀룰루로 이전하면서 호놀룰루는 원역사처럼 번화한 관광지가 된다.
  • 대한식 성씨
    강녕왕의 후손들은 당연히 전주 이씨를 사용하고, 그 외에도 벼슬아치들이나 대한 본국에 파견된 근위병 등은 대한식 이름을 사용하는데, 용맹함을 숭상하는 기풍 때문에 대한식 성씨로 용(勇), 감(敢), 맹(猛), 호(虎), 상(象), 저(猪), 응(鷹), 교(鮫) 등 무예나 맹수와 관련된 한자를 사용한다고 한다.
  • 외국 상선 기항 허용 → 제한
    중종 시대에는 외국 상선들을 통해 전염병이 퍼진 경험 때문에 대한 국적 상선의 기항만 허락했으나, 중종 사후 진주만 해군기지 때문에 돈이 궁하지 않은 오아공을 제외한 하와국왕과 나머지 다섯 공들이 돈맛을 알아 외국 상선 기항을 다시 허용한다. 물론 전염병도 다시 퍼지는 바람에, 대한에 복속된 지 80년이 지났고 대한의 선진의료를 받아들였음에도 인구가 30만 정도로 중종 때에 비해 크게 늘지 않았다. 심지어는 대한 본국에서 금하는 미국 포경선들까지 구휼 명목으로 몰래 기항시킨다. 하지만 재석과 함께 지내며 견문이 넓어진 하진교가 국왕으로 즉위한 후 대한 본국의 방침대로 외국 포경선의 기항은 전면 금지시키며, 다섯 공들의 반발은 대한에서 받은 보조금을 풀어 무마한다.
  • 산업
    대한 본국의 행단들이 하와국에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들을 세우고, 하와국 토인이나 묘노들을 임노동자로 삼아 경영한다. 벼농사는 쌀의 장기보존이 가능하지만 품이 많이 든다는 점 때문에 군량미나 구휼 대피 비축 용도로 재배하고, 각 섬에서 국왕에게 바치는 세금도 , 설탕, 고래기름, 어물 등 상품작물로 바뀌었다. 일반 토인들의 주식은 예전처럼 고구마토란, 돼지고기, 생선 등이다.
  • 경기대회
    3부에서 대한에 복속되면서 각 섬 간의 전쟁 대신 대표를 뽑아 각종 스포츠로 겨루는 풍속이 계속 발전하고, 대한 본국에도 알려져 일부러 직관하러 가는 관광객이 생길 정도로 발전했다.
  • 군사 파병
    멧돼지 사냥대회에서 큰 공을 세운 최정예 전사들을 대한 본국의 금군에 파견하여 친위대 복무 및 술루, 조홀국 전장에 파병하여 큰 전과를 올린다.
  • 노예 사냥
    하와국 독자적으로 대한에서 받아들인 조선기술로 대형 쌍동선 카누들을 건조하여 남태평양 섬들에 대해 약탈 원정을 간간히 시행하고 매년 천 명 이상의 노예를 잡아온다. 어머니가 노예 출신인 하현생도 본인이 노예 사냥을 다니면서 무리를 모아 반정에 성공했기 때문에 왕위에 오른 후에도 노예 사냥을 금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폭정과 식인을 일삼는 야만족 추장들에게서 백성들을 구해내어 왕화를 입게 해주는 숭고한 의무라고 포장하기까지 한다. 그나마 잡혀온 노예들 대부분이 하와인들과 같은 폴리네시아인이라 다음 대에는 대부분 속량되어 평민이 되기는 한다고. 이 노예 사냥꾼들 때문에 남태평양 여러 섬들이 방어를 위해 서양 포경선들을 기항시키고 총을 사들이는 등 남태평양 정세가 원역사보다 훨씬 혼란스러워졌으며, 뉴질랜드 마오리족들도 하와국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영국의 보호령을 선택하게 된다.
  • 하와본궁
    강정왕 하상운과 의순공주 사이에서 태어나 대한 문화에 관심을 더 갖게 된 4대 국왕 하원식이 함흥본궁을 본따 하와국 왕실의 발상지가 된 와가촌에 지은 별궁으로, 이후 와가촌을 성역화해서 외국 배의 기항을 금했다. 문제는 유교를 어설프게 받아들여서 마우이의 옛 집터를 뒤집어 엎고 카우이의 별궁도 허물어서 오히려 문화파괴가 되었다는 것.
  • 역사 편찬
    3부에서 현도왕 카우이가 죽기 전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50만 자짜리 구술을 남겼는데, 이를 적은 당시 하와국 학무대신 격인 이종이 1747년 '하와국사'라는 책으로 엮어냈다. 다만 성친왕을 제일 먼저 만났을 뿐 일개 추장이던 카우이의 부친 마우이가 하와국왕이 되기까지 벌인 각종 음모와 뒷공작의 핵심 인물이 카우이였던지라, 그 전모가 죄다 담겨 있어서 대한은 번국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금서로 지정했고, 규장각과 집현전에만 몇 권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애초에 트릭스터마우이를 조상으로 여기는 하와국에서는 이를 전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신 이종이 괴력난신이라며 제외한 하와이 창세신화가 수록되지 않았음을 문제 삼았다. 그래서 다시 11년간 작업한 끝에 이 신화를 덧붙이고 마우이가 태초의 영웅 마우이의 후예라고 저술한 '하와본사'가 출간되었다.
  • 교주어해가
    하원식이 용비어천가를 흉내내어 편찬한 하와국 역사를 담은 서적. 하와이 신화에서 상어가 가장 신성한 동물이기에 군주를 상징하는 신수가 상어이며, 서문에 의하면 하늘은 대한을 의미하는 천룡이, 그 하늘 밑에서 가장 으뜸인 대동양과 하와이는 상어가 변신한 교룡이 다스린다고 한다.
  • 하와이안 피자
    3부에서 재석이 성친왕 시절 미주에 있을 때 재미 삼아 몇 번 만들어 먹은 것이 전부였는데, 피자를 좋아하던 강녕왕이 하와이에 피자를 전파하고 한자로 피자라는 이름까지 붙여 4부에서는 하와이의 대표 아침 해장 음식이 되었다. 남만시봉리는 이것저것 넣다보니 잘 어울려서 추가되었다고 한다.
  • 하와무술지변
    1778년 터진 하와이판 왕자의 난. 하와국에서는 정당한 왕이 돌아왔다고 하여 왕의 귀환이라고 부른다. 4대왕 하원식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면서 평소 눈밖에 난 적장자 하정응이 대한에서 호환을 당해 죽자 후계자 자리를 두고 왕자들과 왕비들을 피흘려가며 경쟁시키다가 나중에 모두 상어밥으로 만들고 가장 총애하는 왕비이자 강녕왕의 후손인 13번째 왕비 울라오칼라니의 소생인 어린 하정일을 세자로 삼은 후 노환으로 사망하자 울라오칼라니가 수렴청정을 하며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폭정을 하여 민심이 들끓으나 상국인 대한에서는 우유부단한 목종이 울라오칼라니의 폭정을 그대로 방치해둔다. 3년 뒤 하정일도 어린 나이에 병사하자 울라오칼라니가 웬 갓난아기를 하원식의 서자라며 왕위에 올리려한다. 이에 하와이인들이 전면적으로 반발하고 추방된 하정응의 아들이자 하원식의 적장손 하현생(카메하메하)이 반정을 일으켜 울라오칼라니를 처형하고 보위에 오른 후 관용정책을 펼쳐 하와도의 민심을 안정시켰다.
  • 하와갑오정난(夏窪甲午靖難)
    하와국의 제1왕비 칼레이아가 죽은 후 8대 국왕 하민상이 제2왕비 카네카폴레이의 참소에 넘어가 하진교를 폐세자하고 카네카폴레이 소생인 쿠아이와를 세자로 삼는 짓을 벌였으나 하와국으로 귀국한 하진교가 호위무사 40명을 데리고 본궁으로 처들어가면서 시작되었다.[37] 이에 쿠아이와도 직접 나가 하진교와 일 대 일로 붙었으나 하진교가 쿠아이와를 쓰러뜨리고 카네카폴레이가 항복하면서 끝났다.
    사태를 정리한 하진교의 보고를 받은 광덕제는 하민상은 하진교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되어 남은 여생을 대한 본국에서 보낼 것과 카네카폴레이와 쿠아이와는 현토도로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 발리호랑이 유입
    하진교가 내세운 정책으로 멧돼지의 개체 수 조절과 하와국에 호랑이가 있고 싶다는 개인적 욕망으로 발리에서 발리호랑이 15마리를 잡아 하와이에 풀었다. 하진교는 본국의 호랑이보다 왜소한 발리호랑이를 얕보았지만 이내 호환 사태가 겉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자기 이복동생 한명까지 죽게 되자 1년만에 하와이에 퍼진 호랑이들을 전부 잡는데 성공했다. 그 뒤로는 일정 주기마다 호랑이 한마리만 풀어 엿새동안 놔두다 잡는 방법을 쓰게 되었다.

2.4. 중원

  • 남북조 체제의 고착화
    서나라는 완전히 몰락했으나 서나라의 영토를 나눠가진 청과 후송은 오히려 이로 인해 심각한 내부 문제를 겪게 되었고, 왕조가 세워진지 2세기가 지나면서 여느 중원 왕조들처럼 각자 국가 체제들에 누수가 생기고 있다. 결국 청과 후송은 오랜 전쟁 끝에 자신들에게 서로를 정복할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가끔 국지전만 벌일 뿐 더 이상 대규모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

2.4.1. 후송

대송국
大宋國
국호 대송국(大宋國)
별칭 후송(後宋)
위치 직예, 절강, 강서, 양광, 복건, 호남, 호북
번국 남월국
수도 남경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38]
국성 (趙)
국가원수 황제
연호 천개(天開) (1633 ~ 1668)
홍광(弘光) (1669 ~ 1680)
융무(隆武) (1681 ~ 1684)
소무(紹武) (1685 ~ 1736)
태안(太安) (1737 ~ ?)
태녕(○○) (? ~ ?)
소태(紹泰) (? ~ 1804)
영강(○○) (1805 ~ 1834)
함화(咸和) (1835 ~ )
언어 중국어(오어)
문자 한자
종교 유교, 대승 불교, 도교, 덕성도
민족 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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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와 4부 사이에 황제였던 혜종 태녕제 조경소는 19세에 즉위해서 12년 동안 재위하면서 사치와 향락에만 몰두하다 31세에 복상사로 사망한 암군으로, 작중에선 연산군을 대신해서 '흥청망청'이란 표현을 만들어냈다.

조경소 사후 제위에 오른 소태제 조승번은 부황의 막장짓 잔재를 수습하고, 서나라의 암군 함녕제가 안남 내란에 개입했다가 20만 대군을 날려먹은 틈을 타 1777년 정주도통사 홍사옥의 지휘 하에 양광을 침공한다. 서나라 양광총독 임호관이 중과부적으로 항복하자 홍사옥의 주선으로 황제 조승번이 임호관을 그대로 양광총독에 유임시키고, 이에 분노한 서나라 함녕제가 40만 대군을 보냈으나 양광군과 합동으로 이를 격파하고 양광 지역 정복에 성공하여 국력을 크게 끌어올리나, 황제 소태제 조승번이 덕성도를 괜히 의심하여 탄압하다가 덕성도의 난이 일어나 5년간 혼란에 빠진 데다, 운남산 아편의 창궐로 기껏 끌어올린 국력을 다시 소모한다. 소태제가 덕성도의 난으로 마음고생을 하다 1804년 사망한 후 4부 시점의 황제인 영강제 조형윤 대에 와서는 도통사들은 완전히 지방 군벌화되어 자식에게 직책을 세습하고 조정에는 사후에 표문만 올리는 데가 황궁에서도 환관의 힘이 커지는 등 완전히 당나라 말기같은 상황이 되버렸다. 영강제는 황제 직할령의 경제력을 끌어올려 간신히 도통사들에 대한 힘의 우위를 유지했으나, 후계자 문제로 인해 황후 송씨와 환관들에게 독살당하고, 뒤를 이은 태자 조심원은 어리석고 향락만 즐기는 암군인데다 태후가 된 송씨가 국정을 농단하고 있고, 아편 잠상들을 단속하기 위해 덕성도 탄압을 중단하고 덕성도에게 아편 잠상 단속권을 부여한 것도 덕성도 내에 홍수전의 배상제회가 세력을 키우고 있어 큰 위험요소로 작용 중이다.

또한 국제적으로도 무시당하고 있는 처지이다. 서구권에서는 태평양을 재패한 한국은 물론이고, 용병업으로 영향력이 큰 일본, 천주교를 우대하는 건주 양국에게 인지도가 밀리는 처지이다. 동방 국가들과 수교해서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는 프로이센도 후송은 무시할 정도. 서양에서는 시니카로 부른다.

결국 원 역사대로 태평천국의 반란까지 일어나며 혼란이 가중되고, 홍서당의 묘노 봉기에 자극받은 외국들의 연합군이 도착해 전쟁을 치르면서 큰 피해를 입는다. 게다가 관군이라는 작자들이 외국군에게 애먼 민간인들을 태평천국파라고 모함해 공격시킨 다음, 죽은 민간인들의 수급을 베어 전공을 조작하거나 살아있는 포로들을 묘노로 팔아넘기는 막장 짓거리를 하고 있어[39] 설령 난을 진압한다 해도 다른 반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확실하게 망조가 든다. 3부에서 언더독 이미지로 인기를 끈 후송이 4부에선 원 역사의 중국 역사가 그랬듯이 순탄치 않을 거라 생각한 팬들은 많았으나, 이렇게까지 추하게 무너질 것이라는 예상은 없어서 적잖은 팬들을 당황케하고 있다.
  • 증기기관 자체개발
    후송의 저력을 두려워한 대한, 청, 일본 등이 후송에게는 절대 넘기지 않았으나, 프랑스에서 수입한 백과전서에 실린 증기기관 자료를 기반으로 1755년(대한 원강 15년) 자체 개발에 성공한다.
  • 증기선
    기존의 인력 철갑선 대신 증기기관을 탑재한 철갑선을 실전 배치에 성공하고 양광 원정에 투입한다.
  • 아편
    덕성도의 난과 탐보라 화산 폭발을 겪고 사회가 혼란해진 후송에 운남산 아편이 퍼지면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후송 조정은 아편을 단속하지만 많은 농장주와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이 딴생각을 갖지 못하게 하는 수단으로 아편을 외려 장려한다. 이 때문에 아편중독 치료제로 대한제 인삼이 각광받고, 품질이 떨어진다는 미국산도 수요층이 있다. 황실에서는 당연히 아편을 단속하려 하지만 황실 직할지 바깥에 있어서 번왕이나 다름없는 양광, 형주, 복건, 한양 도통부에서 황실을 무시하고 아편의 유통을 묵인해버렸다. 이를 통해 막대한 세금을 거두고 아편 거래로 황실 직할지의 부를 빨아들이면서 황실 직할지를 발전시켜서 군사력을 확충하고 다른 도통사들을 제압하려고 한 후송 조정의 계획도 망쳤는데 아마 여기까지 의도하고 한 것으로 보인다. 나름 명군인 영강제가 임칙서의 계획을 받아들여 덕성도를 합법화해주는 대신 덕성도에게 아편 단속을 맡기면서 아편 밀매가 약간 줄어들긴 했으나 근본적인 해결은 안되는 상황. 또한 서나라산 아편의 유통이 임칙서와 덕성도의 단속으로 줄어들면서 아편 가격이 오르자, 벵골산 아편이 대한 벵골 상관의 중개로 서양 무역상들을 통해 유입되면서 원역사 아편전쟁 직전과 비슷한 상황이 되어간다.
  • 덕성도의 난(1796~1801)
    후송 소태제가 양광 정복 후 백련교의 난으로 혼란해진 청나라를 치려다가 대한을 뒷배로 둔 종교인 덕성도가 사회 불안요소라고 의심하여 반란 따위는 생각지도 않던 덕성도를 탄압한다. 소태제가 1796년 덕성도 신도 10만명을 학살하자 전국의 덕성도 신도들이 봉기하여 5년 동안 후송 전국을 뒤흔들고, 간신히 난을 진압하긴 했지만 북벌도 무산되고 마침 탐보라 화산 폭발로 인한 기근까지 덮치자 운남산 아편이 퍼진다.
  • 덕성도 합법화
    덕성도가 그동안 탄압을 받아왔지만 아편을 엄금하는 교리를 가진데다 대한의 총본산에서 어느정도 통제력이 있다는 점에 착안한 임칙서의 건의를 영강제가 받아들여 덕성도를 합법화하고 아편 잠상 단속권을 부여한다.

  • 묘노
    후송 조정에서는 엄히 금지하고 있으나 금령이 미치지 않고, 지역에서 한번씩 계투가 터졌을 때 패배해 사로잡힌 포로들이 광동, 복건, 홍콩을 통해 대한, 일본, 영국 상인들에게 묘노로 팔려나간다. 태평천국의 난이 터진 후에는 관군이 나서서 태평천국 포로들은 물론 무고한 양민들까지 외국에 묘노로 팔아버리기 시작한다.
  • 도통사의 군벌
    태조 조승복 때만 해도 황제에게 꼼짝도 못했던 도통사들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사실상 군벌에 가깝게 변했고, 태녕제 시기에는 사치와 향락으로 중앙 재정을 낭비하면서 중앙군의 전력이 약화되어서 통제도 불가능할 지경이 되었다. 양주, 회주, 요주, 항주, 명주, 한양, 형주, 정주 총 8개의 도통부와 양광총독부를 두고있다. 암군 태녕제조차도 도통사들이 거두는 세금은 손을 댈 수 없었기 때문에 도통사의 군사력은 유지되어서 정주도통사의 병력으로 양광을 함락할 수 있었지만, 그 때문에 원래 귀순한 임호관이 아닌 황제의 측근을 양광에 임명하려고 했으나 홍사옥의 청을 거부하지 못했다. 영강제 시기에 황제가 직접 통치할 수 있는 지역은 직례, 절강, 강서 단 3개 성 뿐이며 통제할 수 있는 도통사는 양주도통부, 회주도통부 둘 뿐이고 심지어 그 직할지에 있는 요주도통부, 항주도통부, 명주도통부도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 그나마 몇 년이 지나면서 황제 직할지는 중원에서 가장 풍요로운 땅이라 그 경제력과 영강제의 노력에 힘입어 금군과 직할 2개 도통부는 가장 정예 전력으로 육성하여 직할지의 3개 도통부도 다시 황실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황제 직속 병력을 동원하면 다른 도통부도 제압할 순 있지만 그러면 청나라와 대치하는 북쪽 전선에 구멍이 뚫리니 감행하진 못한다.
  • 추밀원의 권력기관화
    후송은 옛 남송의 계승을 표방하여 남송의 관제를 사용하는데, 추밀원은 본래 군정을 관장하는 기관이었으나 청과의 전쟁이 반복되고 도통사들의 군벌화가 심해지면서 실제 역사에서 조선의 비변사처럼 모든 국정을 사실상 관장하게 되었다. 좌 ·우 지추밀원사도 종 1품이지만 정1품인 상서령보다 실권이 강하여 좌 ·우 승상이라고 불린다.
  • 봉선으로 인한 국론 분열
    태후 송씨가 대한과 청나라의 봉선의식을 보고 질투심에 불타 자국령인 형산에서 아들 함화제의 봉선의식을 올리게 하면서 호화찬란한 봉선의식 준비를 위해 백성들을 착취하게 되어 민심이 동요하고 배상제회의 세력이 퍼지는데다, 태산이 아닌 형산에서 봉선을 한다는 것은 북벌의 의지를 버리고 강남 왕조로써의 현상을 유지한다는 정치적 의미가 되어 화북에서 내려온 귀족 가문들인 북인들은 반발이 심하고, 토착 강남 귀족 가문들인 남인들은 북벌 포기를 적극 찬성하는 등 국론이 크게 분열되었다.
  • 강용군
    임칙서가 아편 잠상들과 배상제회를 토벌하기 위해 오합지졸인 관군 대신 서양, 일본 용병과 중국인 지원병으로 조직한 멸독군(滅毒軍)이라는 특수부대를 만들어 큰 성과를 냈으며 이후 태평천국이 정식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강용군(強勇軍)으로 명칭을 바꾼다.
  • 귀갑차
    좌종당이 대한군의 증기 귀차를 모방해서 만든 기갑차량. 증기기관을 탑재하는 대신 평상시에는 소가 끌고 전장에서는 안의 병사들이 인력으로 움직인다. 때문에 진격 속도가 느리지만 탄약 적재량은 많은 편이며 태평천국군의 강선 없는 구식 대포로는 귀갑차를 격파하기 어렵기에 태평천국군을 상대로 큰 전과를 올린다. 그러나 대한 귀차와 달리 무한궤도가 없어서 함정에 매우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다.

2.4.2. 태평천국

원역사와 다르게 홍수전이 덕성도 접주 출신이었기에 기독교가 아닌 덕성도의 분파로 출범했으며, 교리가 많이 변질되고 구월산의 통제도 받지 않으면서 사실상 완전히 다른 종교가 되었다. 홍수전은 장기적으로 배상제회를 바탕으로 후송을 멸망시키고 태평천국을 세울 계획이다. 1839년 가을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키며 형주도통부를 격파하고 호남, 귀주, 광서 지역을 장악하고 국경 너머 청나라의 사천과 귀주까지 세력을 뻗친다. 다국적군의 공격으로 후송 방면 진격이 돈좌되자 대신 대홍수와 후금 내전 개입으로 전력이 약화된 청 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허창 근교까지 점령한다. 토벌전조차 장기화되며 태평천국 측에서도 종전을 원하며 접촉하고 있기에 재석은 이대로 간다면 태평천국이 몰락한 서를 대신해서 중원의 세 솥발 중 하나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 명칭
    공식 명칭은 국호는 태평천국, 국교는 배상제회지만 여러 멸칭으로 불린다. 태평천국이 믿는 종교라서 태평도, 붉은색 책인 홍서를 숭상한다고 홍서당(紅書黨), 홍서를 따르는 도적이라서 홍적 등. 변종 기독교라는 점이 유사하기 때문인지 서양에는 배상제회가 중국 부두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다.
  • 천왕(天王)
    배상제회의 교주 홍수전의 칭호. 천왕 홍수전은 자신이 전생에 수많은 공덕을 쌓아 예수불의 동생으로 환생했으며, 신도들도 배상제회의 가르침을 잘 따른다면 내세에 자신처럼 상제의 자식으로 환생할 수 있을 것이라 가르친다. 장사 함락 후 칭호를 천황으로 올리고 칭제하라는 제안을 들었으나 천황은 예수불뿐이라며 거절했다.
  • 신벌(神罰)
    배상제회가 덕성도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 자발적 기부를 통한 부의 재분배를 중시하는 덕성도와 달리, 배상제회는 예수불의 말씀에 '천하가 너희 것이라' 했다 하여 부자들을 약탈하고 죽여서라도 재산을 빼앗아 분배하라고 가르치며, 이러한 약탈 행위를 신벌이라고 부른다. 때문에 배상제회의 공격을 당하는 부자들은 이들을 도적 떼로 취급한다. 이렇게 신벌을 통해 빼앗은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분배하는 것으로 배상제회는 빠르게 교세를 확장한다.
  • 교세
    홍수전의 말빨 덕에 배상제회의 신도 수는 4년만에 10만명으로 불어났다. 또한 노예가 되어 각국으로 팔려나가는 쿨리(묘노)들 사이에 신도들을 침투시키는 방식으로 해외 선교도 노리고 있다. 대미주에서는 비슷한 처지인 흑인 노예들 중 일부가 배상제회로 개종하기도 했다.
  • 홍서
    천왕 홍수전의 말을 기록한 어록으로 배상제회의 경전. 붉은색[40] 표지를 입히기 때문에 홍서라고 불린다. 그외에도 자기들이 승리하면 붉은 하늘이 다스리는 세상이 온다고 하는 등 여러모로 원역사 공산당을 오마주한 듯.
  • 태평천국 거병
    1839년 1월에 후송 조정에서 배상제회 토벌령을 내리자 부패한 요주도통부 병력이 정상적인 덕성도 교인들까지 배상제회로 몰아 학살 약탈을 자행한다. 후송 조정을 도와 아편 잠상 토벌을 도우던 덕성도 교인들은 이 배신행위에 분노하여 70% 이상이 태평천국에 가담하게 되고, 홍수전과 12원수가 군사적인 재능을 크게 발휘하여 작년 봉선 의식 비용 부담으로 재정난이 심한 형주도통부 지역부터 거의 장악하게 된다. 포로가 된 관병과 단련병은 개종하면 태평군에 편입, 개종을 거부하면 묘노로 팔아버리면서 그 속에 접주들을 침투시키는 작전도 그대로 진행된다.
  • 정치제도
    홍수전은 황(皇)이나 제(帝) 칭호는 예수불만이 쓸 수 있으며 자신은 천왕(天王)이면 족하다고 천왕을 칭하고 있고, 육부 제도를 쓰되 각 부의 명칭을 마치 발해처럼 천지춘하추동(天地春夏秋冬)으로 붙이고 각 부의 장은 상서/시랑 대신 정/부/참 승상을 두었다. 그 중 이부에 해당하는 천부의 장인 천정승상이 최선임 관료가 된다.
  • 군사제도
    원수가 지휘하는 12개 군으로 나뉘어 있고 그중 좌신위대원수와 우신위대원수가 지휘하는 2개 군이 천왕 홍수전이 직접 이끄는 본대다. 항복하는 후송군은 배상제회로 개종시켜 받아들이고 항복을 거부하다 포로가 된 후송군은 묘노로 팔아버린다. 각지의 도적이나 아편 잠상 조직 중 태평천국을 따르기로 맹세한 무리는 소천병(小天兵)이라 부르며 후송 후방의 게릴라전을 맡기고 있다. 체격이 좋은 경우에 한해 여군도 모집한다. 또한 작중에서 동서교류가 활발해진 영향인지 외국인 혐오 성향과 별개로 서를 통해 유입된 전투력이 좋은 서양인, 일본인 용병들도 일부 동원하고 있으며, 대한의 전차에 대전차호를 파서 대응하고 비행선도 열기구를 띄워서 요격하려고 시도하는 창의적인 모습도 보이고 있다.
    • 홍의군
      홍수전의 직속 정예 친위대. 붉은 옷을 입었다. 여군도 존재하는데 키가 크고 미인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면 홍수전의 개인적 욕망이 반영된 듯하다.
    • 자체 조병창 건설
      본래 태평천국군의 무기는 조악한 구식 활강총이었으나 전쟁이 장기화되며 태평천국 각인이 찍혀있는 비교적 좋은 품질의 전장식 강선총을 든 병력이 나타난다. 안남 주재 프랑스 동인도회사를 이끄는 샤를 루이 나폴레옹이 자신의 정치자금 마련을 위해 서나라를 통해 태평천국에 유주산 공작기계를 팔아먹으면서 규격화된 소총 자체 생산을 시작할 수 있었다.
  • 멸만흥한
    원역사의 태평천국처럼 멸만흥한을 구호로 사용하는데, 만(滿)이 청나라의 지배층인 만주족을 뜻했던 원역사와 달리 작중의 태평천국은 후송의 배상제회를 믿는 한족을 제외한 모든 민족을 만으로 규정하며 극단적인 외국인 혐오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한족이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주장하며 그 근거는 바로 예수불의 아우인 홍수전이 한족의 몸으로 강림한 것이라고 한다. 본래는 모든 외국인을 추방하는 정도였으나, 외국인 용병 위주로 구성된 임칙서의 강용군에 의해 태평천국의 공세가 돈좌되자 외국인은 전투원 뿐 아니라 상인이나 선교사까지 외국인은 죄다 처형하는 식으로 극단화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외국인 용병도 소수 동원하고 샤를 루이 나폴레옹과 손잡고 프랑스에서 공작기계를 밀수하는 등 이중적인 면을 보여준다.
  • 홍적의 난
    1841년 음력 9월 그믐(양력 1841년 11월 12일) 대한, 일본, 청, 대미주, 대삼주 등 전세계의 배상제회를 믿는 묘노들이 일시에 집단 봉기를 일으킨 사건. 무려 2년에 걸친 준비 기간 동안 완벽에 가깝게 비밀을 유지하는 철저함을 보였다. 봉기 날짜를 그믐달로 정한 것은 묘노들은 시계도 달력도 없기 때문에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지만 하늘을 보고 그믐달은 언제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약 반 년에 걸쳐 묘노가 없는 대유주를 제외한 전세계가 혼란에 빠졌다. 많은 민간인을 학살하고 산업시설을 파괴하며 여러 국가들을 혼란에 빠트리는 성과는 거뒀지만 해방구를 만들지는 못하고 모두 진압되었고 여러 열강들이 태평천국을 적대하게 되었으며 파병을 결정하여 외교적으로는 악수가 되었다. 홍수전은 예상 외의 사태에 당황했지만 이를 기회로 삼아 반대파들을 숙청한다.
  • 반-태평천국 다국적 의용군
    홍적의 난을 계기로 분노한 세계 각국이 파병한 의용군들. 다국적군의 개입으로 후송은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홍수전은 대한을 포함한 각국에 친서를 보내 홍적의 난으로 입힌 피해에 대해 사과하고 철군할 것을 요청한다.
    • 대한 - 약 45000, 번국인 하와, 술루, 유구, 조홀, 그리고 조심원 휘하 병력 도합 5000. 재석이 수백 년간 민사작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전통을 확립해 왔기에 가장 훌륭한 민사작전을 보여주며 전력도 가장 강하다. 세계 각국과 함께하는 전장을 귀차, 회선연자포, 비행선 등 신무기 실험 겸 판촉의 무대로 쓰고있다.
    • 일본 - 약 40000. 번국인 에조에서도 형식적으로 500명을 보냈다. 대한 다음으로 준수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주 무장은 드라이제 후장식 소총을 수입해서 사용한다. 체제에 위협이 되는 도막파를 숙청하기 위해 그들을 의용군으로 내보내서 태평천국의 손을 빌려 숙청하려는 것인데 역으로 그들에게 실전 경험을 주는 부작용도 일어나고 있다. 에조군 500명은 절반은 더위에 적응하지 못해 알아누웠고 나머지 절반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만 막대한 전리품을 받아가는 등 에조 지도층의 충성심을 얻기 위한 형식적인 파병이다.
    • 잉글국 - 약 30000. 전력만은 대한 못지않은 강군이지만 민사작전이 개판이라 제대로 활약을 못 하고 있다. 작전 초기 반 태평천국 촌락에서 이들을 환영하여 연회를 열어줬는데 병사 몇 명이 촌장의 딸을 윤간하면서 은혜를 원수로 갚았고, 강간범들을 처형하게 해달라는 요구까지 거절하자 분노한 주민들이 대포까지 끌고와서 태평천국 지지도 아니었던 양민들에게 포위되어 섬멸당할 뻔하는 망신을 당한다. 전쟁이 장기화되던 중 태평천국이 강화를 제안하자 협상을 통해 적당히 보상받고 발을 뺄 계획을 하고있다.
    • 미주합중국 - 약 3000. 개신교 근본주의 목사들의 영향으로 이 전쟁을 십자군으로 여기고 배상제회 신자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기에 후송 관군과 붙어먹으며 전쟁범죄를 많이 저지르고 있다. 그나마 한양에 있는 선교사들이 버지니아 연대에 대한 기사 때문에 한국에서 미국 선교회에 대한 여론이 안 좋아진다는 급전을 여러 통 보낸 후에는 자중해서 백성 구휼과 치료를 통한 선교로 선회했다. 2년이 지나자 많은 병력이 슬슬 집에 가고 싶다며 귀국하지만 그만한 수의 보충병이 오지 않아 점점 수가 줄어들고 있다.
    • 신불랑국 - 약 2000. 신불랑 정규군이 간판만 의용군으로 바꿔달고 온 것이라 기강이 잘 잡혀있어 약탈이나 학살을 하지 않는다.
    • 기타 아메리카 국가 회의 국가들 - 약 1000. 나폴레옹에게 잘 보이려고 억지로 파병한 터라 나폴레옹이 사망하자 원래부터 타국 대비 30% 정도 주던 의용군에 대한 급료 지급을 아예 중단해버렸다. 지구 반대편까지 왔다가 갑자기 돈 한 푼 못 받게 생겼으니 손해를 메꾸기 위해 열심히 민간인들을 약탈하고 있어 골치거리가 된다.
    • 내달국, 불랑국, 백이의국, 포도아국, 외수터국 - 이권을 노리고 소규모 병력을 파병한 국가들. 그나마 마카오 출신 병력을 투입한 포도아군을 제외하면 유의미한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다.
    • 포뢰선 - 전쟁 2년차에 뒤늦게 파병했다.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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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국
大西國
국호 대서국(大西國)
위치 운남
정치 체제 전제군주정[41]
국성 장(張)
연호 대순(大順) (1635 ~ 1656)
영창(永昌) (1657 ~ 1715)
승평(承平) (1716 ~ 1728)
흥시(興始) (1729 ~ ?)
광안(廣安) (? ~ 1759)
함녕(○○) (1760 ~ 1787)
복흥(復興) (1788 ~ 1820)
영무(○○) (1821 ~  )
문자 한자
민족 한족, 그외 소수민족
[clearfix]

원래도 다른 두 중원 국가에 비해 국력이 딸리는 서였는데, 암군 함녕제 장시원의 활약(?)으로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사치와 향락에 빠져 놀고먹던 장시원은 무리한 안남 원정으로 주력군을 죄다 날려먹는다. 이 빈틈을 타서 양광 지방에 후송이 쳐들어왔고, 그러자 배후의 청은 생각하지 않고 사천의 병력을 다 뺐다가 청까지 빈집을 노리고 쳐들어온다. 결국 후송과 청이 영토 대부분을 갈라먹었으며, 함녕제는 청나라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 죽고, 서는 운남 지방만 남은 내륙국이 되어 더이상 다른 두 국가와 대등한 경쟁이 불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그나마 운남인들이 예전 청나라가 화북에서 저지른 대학살을 기억하여 서나라 유지를 택했기 때문에 국가가 유지되는 것으로, 서나라 황제는 세금만 받아먹는 허수아비이고 각 지역 호족들이 멋대로 할거하는 상태이다.

청에서는 함녕제의 항복으로 서가 멸망했다고 간주하며 운남에 남은 서는 그냥 변방을 장악한 지방정권으로 간주하고 '서왕(西王)으로 대하고 있다. 운남이 워낙 지형도 험하고 인구도 산업도 별볼일 없는 땅이라 놔두고 있지만 청이든 후송이든 서를 정복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바로 무너질 수준. 내륙국이 되면서 대한과의 외교도 단절되어 한양에 있던 서나라 주재관들은 명나라 황실의 후예인 대명공에게 귀부하였다. 그 후 탐보라 화산 분화로 인한 흉년과 벵골에서 들어온 콜레라까지 겹쳐 큰 피해를 입자 어떻게든 식량을 수입하기 위해 아편을 대량 재배해 의화당의 주도로 후송과 청으로 밀수출하여 특히 후송에 큰 사회 문제를 일으킨다. 호족들이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도 아편팔이로 마련한 것이어서 황제 영무제가 자괴감에 괴로워할 정도. 벵골산 아편과 경쟁이 붙자 호족들이 황제에게 압력을 넣어 벵골 칸국에 항의 서한까지 보내게 할 정도다.

태평천국의 난이 발생하면서 아편 수출길이 막히자[42] 안남의 프랑스 총독부와 접촉하여 새로운 아편 무역루트를 마련한다.
  • 의화당
    서나라 일대에 널리 퍼진 종교로 백련교의 분파이다. 본래 서 조정의 후원을 받아 널리 퍼졌고, 청이 사천 지방을 정복한 후 서 조정에서 후원하던 도교와 백련교를 싸잡아 탄압하려 하자 1793년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킨다. 이후 지하로 숨어든 의화당은 아편 밀매에 손을 댄다.

2.4.4. 영국령 홍콩

홍적의 난으로 대한, 일본 다음으로 큰 피해를 입어 사망자 2천명, 재산 피해 6백만 파운드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미 임칙서와 엘리엇의 협의로 의회 비준을 받아 홍서당 토벌군을 준비 중이던 영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여론도 찬성에 기울 수 밖에 없게 되어 3만명이란 대병력을 준비하게 된다.

2.5. 건주

여전히 대한과 우호관계지만, 대한에서 건주 양국을 자신들보다 아래인 오랑캐 취급하는 풍조가 있다는 걸 알기에 내심 대한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다. 건주 양국은 여전히 북경을 공동수도로 여기는 등 겉으로는 가까운 사이지만 후금 대칸 후계자 문제를 놓고 점차 서로 상대방을 쳐 없애고 건주를 일통할 계획을 세우는 등 대한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뒤흔들 위험이 보이고 있다. 서양에서는 이 두 나라를 호엔촐레른 가문처럼 본가와 분가로 보고 있으며, 후송과 구분하여 건주 양국을 카타이라고 부른다.

후금 내전의 결과로 1844년 후금이 청의 번국으로 격하되면서 드디어 건주일통이 이뤄진다.

2.5.1.

대청국
大淸國
국호 대청국(大淸國)
위치 직예, 산동, 산서, 하남, 섬서, 사천, 귀주, 감숙
수도 북경 > 동경 개봉부 > 북경
정치 체제 전제군주정
국성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애신각라)
국가원수 황제
연호 천명(天命) (? ~ ?)
숭덕(崇德) (? ~ 1663)
만방(滿邦) (1664 ~ 1671)
순치(順治) (1672 ~ 1695)
중통(○○) (1696 ~ 1728)
홍화(○○) (1729 ~ ?)
건강(建康) (? ~ ?)
강희(康熙) (? ~ ?)
계정(契正) (? ~ ?)
도광(道光) (? ~ 1838)
가정(嘉正) (1839 ~ ?)
언어 중국어(관화), 만주어
문자 한자, 만주문자
민족 만주족, 한족
[clearfix]

군사적인 재능이 출중한 계정제가 황위에 올라, 서나라가 후송과 양광을 놓고 싸우느라 전 병력을 양광으로 보낸 틈을 타 서나라의 중심지인 사천 지역을 기습 공격, 33일 만에 서나라 황제 함녕제를 사로잡아 항복을 받고 사천과 귀주 지역을 장악한다. 하지만 그 후 백련교의 난과 기근으로 국력이 약해지고 운남산 아편이 들어온다. 여기에 입관한 지 2백 년이 지나서인지 새로 영토로 편입한 지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청 도광제와 뒤를 이은 가경제는 후금의 황위 계승 분쟁을 물밑에서 조장하며 후금을 장차 합병하여 건주일통을 이루겠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 다만 후술할 황하 대범람으로 인한 국력 손실과 민심의 이반, 그리고 이를 틈탄 홍서당 세력의 침투로 내부가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다.

하지만 후금 내전에 개입한 것이 성공하여, 1844년 후금을 청나라의 번국으로 만들고 후금군을 흡수하게 되어 손실된 국력을 보충할 수 있게 된다.
  • 인구
    현재 청나라 인구는 약 1억이다. 그 중 한족이 대략 9천 4백만이고 지배층인 기인(旗人)은 만주인에다 몽골인, 왜인, 한인까지 다 합쳐도 6백만이 되지 않는다.
  • 증기기관 전파
    3부에서 어렵게 자체 개발한 증기기관을 대한의 물밑지원을 통해 개량해서 후금, 유구에 수출할 정도가 되었다.
  • 종교
    원역사와 달리 티베트를 차지하지 못했고 티베트 불교를 믿는 준가르와 대립하고 있기에 티베트 불교가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한다. 때문에 원역사에서는 티베트 불교 사원이 가득했던 열하에는 티베트 불교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43]
  • 봉선
    대한 흥녕제가 백두산에서 봉선 의식을 치루자, 청에서도 마침 1837년이 누르하치의 건주 건국 4갑자(240주년)임을 들어 태산에서 봉선 의식을 치루기로 한다.
  • 황하 대범람과 북경 재천도
    1841년 6월 호우로 인해 황하가 대범람을 일으켜 수도 개봉부는 물론이고 황하 주변 지역이 큰 홍수 피해를 입는다. 후금 내전에 군사 개입 중인 상황에서 수도 개봉부에서만 8만명의 인명피해를 내자 청 가정제는 개봉부 복구를 포기하고 북경으로 다시 천도한다. 피해를 입은 하남과 산동 일대에서는 우리들은 홍수로 굶어죽어 가는데 황제와 건주 귀족들만 안전한 북경으로 도망갔다며 민심이 흉흉해지고, 배상제회가 이 틈을 노리고 스며들어 1841년 전 세계 배상제회 대봉기 때 동참하는 등 청나라의 내부 사정이 매우 혼란스러워진다. 마침 다국적군 개입으로 후송 방면 진출이 어려워진 태평천국군이 북진을 하면서 허창 근교까지 태평천국군에게 장악당하고 허창이 함락 위기에 처한다.
2.5.1.1. 후금→실위
대금국
大金國
국호 대금국(大金國)→실위국(室韋國)
위치 몽골
수도 상도, 카라코룸
정치 체제 전제군주정[44]
국성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애신각라)
국가원수 대칸(大汗)가한(可汗)
연호 천총(天聰) (? ~ ?)
명창(明昌) (? ~ ?)
천권(天券) (? ~ ?)
대덕(大德) (? ~ ?)
태화(○○) (? ~ 1722)
천정(天正) (1723 ~ 1760)
장락(長樂) (1761 ~ ?)
함녕(咸寧) (? ~ ?)
승광(承光) (? ~ ?)
덕창(德昌) (? ~ 1840)
언어 만주어, 몽골어
민족 만주족, 몽골족, 한족
종교 천주교
[clearfix]

가장 숭무적인 성향이 강했고 유목민족의 습속을 최대한 보존한 나라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4부 들어서는 준가르 원정이나 청나라의 후송 공격에 지원병을 보내는 것 외에는 천주교를 보호하고 교역을 하며 가장 안정적으로 평화를 누린다.[45] 게다가 청과 후송이 장서 잔당이 퍼트린 아편으로 큰 사회 문제를 겪고 있는 것과 달리 국교인 천주교가 아편을 엄금하는 데다, 국민 대부분이 유목민인 몽골족과 수렵민인 만주족인지라 아편에 취해 있다가는 굶어죽는다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한족 노예들 일부를 제외하면 아편도 퍼지지 않아 내정도 안정되어 있다. 주변국 중 대한과 청은 형제국이고, 준가르는 신장 지역만 간신히 유지할 정도로 약화되었고, 러시아와도 부수의 난 이후는 우호 관계인데다가 향후 남진과 서진에 더 주력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아래에 나오는 후계 문제를 제외하면 4부에서도 큰 문제가 있진 않을 것으로 보였으나… 그 후계 문제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후금의 유일한 문제는 대칸 계승 문제로, 몽골족과 만주족의 옛 습속을 간직하여 선대 대칸들도 형제들과 서로 암살 음모를 꾸며가며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거는 싸움을 벌이고 패배한 황자들은 눈을 뽑히거나 수도원에 유폐되는 등 동로마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문제는 현임 대칸인 박락이 서자만 셋 있고 청 공주인 대복진 소생 적자가 없어 박락의 서자들과 야심 많은 박락의 동생들 사이에 서로 자객을 보내는 암투가 벌어지고 있고 청 황실이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이를 견제하기 위해 박락의 동생들은 대한의 개입도 요청하고 있어, 박락이 후계 문제를 매듭짓지 못하고 죽을 경우 후금 판 왕좌의 게임이 벌어지고 이에 청과 대한이 말려들 위험성이 높다. 게다가 청 도광제는 이 기회에 후금을 아예 삼키려는 야심을 갖고 있어 4부 전반부에 일어날 대전쟁은 후금 황위 계승전쟁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 덕창제가 죽으면서 다섯 왕자들의 내전이 터지고 만다.

1844년 1월 청나라와 대한의 도움을 받은 럭더훈의 승리로 내전은 끝나지만, 청나라의 도움을 받은 댓가로 후금은 독립 황제국에서 청나라의 번국인 실위국으로 격하되고 군주도 황제와 동급인 대칸에서 심왕보다도 격이 낮은 청나라 친왕과 동급인 가한으로 격하, 외교권과 군사권도 박탈당하고 후금군은 청군으로 흡수되어 독립을 잃게 되었다.
  • 증기기관 도입, 철도망 확충
    중종 건흥제의 장례식에 후금 성종 부수가 대칸임에도 직접 조문하러 온 것에 대한 태황 현종이 감동하여, 증기기관 수출 금지를 해제하자마자 후금에 증기기관차를 수출하고 대한 서북선, 심왕부 노선과 연결한 국제 철도망이 확충되었다. 대한과 후금 사이 교역의 70%가 철도를 통해 운송될 정도,
  • 데우스 불트
    후금 근위 팔기병들의 경례구호로 사용된다. 청의 속국이 된 후에도 종교의 자유는 인정하고 청 팔기로 편입된 후금 팔기 출신들은 그대로 십자가 군기를 쓴다.
  • 가무사
    일본계 용병들을 통해 유입된 일본어 카게무샤가 가무사로 변형되었다. 귀족들간의 암투가 일상인 후금에서는 가무사를 내세우는 경우가 많으며 두도 또한 가무사를 내세운 덕에 굴마훈에게 살해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 제2차 후금 내전
    1840년 겨울 덕창제 보로가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갖은 암살과 모략으로 경쟁자들을 몰아내고 보로에게 후계자로 내정되었던 보로의 서2남 굴마훈이 국내에 남아있던 경쟁자인 보로의 동생 두도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면서 후금 내전이 터지는데, 약 1년이 지나는 동안 굴마훈의 후금 중앙군 12만, 두도의 귀족군 6만, 청나라가 밀어주는 굴마훈의 서형 럭더훈의 청군+자기 파벌 군 3만, 두도의 조카 얀신의 게릴라병 2천, 두도의 동생 찰니가 중앙아시아에서 고용한 용병 5만 등 다섯 왕자들의 군대가 서로 맞붙는 내전이 벌어진다. 게다가 찰니는 후금의 철천지 원수인 준가르 병사들까지 고용해 데려온 바람에 후금 서부지역 백성들은 준가르의 보복약탈로 도탄에 빠진다. 그리고 찰니가 외세인 준가르군을 데려오면서 청나라의 군사 개입이 가능해져, 재석은 결국 청나라가 미는 럭더훈이 대칸에 오르고 후금은 청나라의 속국이 될 것을 예상하고 청나라에게 이를 묵인하는 댓가로 요서 지방을 대한에게 넘길 요구를 하려고 한다.
  • 청의 속국화
    결국 청의 대대적인 개입으로 후금 내전은 청과 대한의 후원을 받은 럭더훈의 승리로 끝났다. 종전 후 럭더훈은 보로의 후계자로 대칸위를 상속받는게 아닌, 청 황제의 봉신인 실위가한이라는 형태로 책봉되었으며 그 격은 청의 친왕들 수준으로 떨어졌다. 국호도 감히 여진족의 조상인 금이라는 국호를 쓸수 없다 하여 실위로 변경되었다. 독립국에서 번국으로 격하되면서 외교권도 잃게 되었고 대한에게 요서 평야를 뜯기며 몽골 지역만 영토로 남게 되었다. 그래도 외왕내제하며 내부적으로는 금국 대칸이라는 칭호를 쓴다. 후금 팔기도 전부 해체되어 청 팔기의 예비대로 편입되면서 군사력조차 거세당한다. 재석은 사실 심양회맹 위반이긴 하지만 후금 상황이 워낙 개판이라 어쩔 수 없다는 명분으로 대한 몫인 대흥안령 산맥과 구하(狗河) 동쪽 요서 평야와 남은 실위국 영토 내 철도 부설권 등의 이권을 제대로 뜯어낸다.

2.6. 일본

도쿠가와 막부는 대한과의 우호정책을 잘 지켜가며 좋은 관계를 유지 중이다. 일본 용병들은 3부에 이어 여전히 좋은 평가를 받으며 아메리카 대륙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한이 북태평양을 사실상 호수로 만들며 본국은 고립됐지만 동서양의 교류와 해양활동이 활발해진 기조를 정면으로 거스르지는 않은 덕분에 일본인들의 활동 영역은 원 역사보다 훨씬 넓어진 모양새로,[46] 준가르 라자국이 국교를 정토진종으로 개종하게 하는 성과도 거뒀다. 쇼군의 권위 역시 쇼군가의 혈통이 6대인 이에노부 이후로는 끊어지지 않았고 계속 범군 이상은 되는 자들이 즉위한 덕분에 원역사보다 훨씬 강하다.
  • 강화된 막부 직할군
    막부 직할군은 원역사를 압도하는 규모로 무려 8만에 근접한다. 이는 전부 합쳐도 3만에 불과한 다이묘들의 군대를 압도한다.[47] 또한 해외 군사고문단에게 훈련을 맡기고 간혹 해외파병도 하기에 질적으로도 우수하다.
  • 증기기관 도입
    대한, 청에게서 증기기관 도입이나 기술제공을 받지 못했는지, 영국에서 증기기관을 도입했다고 한다.
  • 텐메이 대기근
    원역사처럼 7년을 끌면서 최소 10만 명 이상 아사자를 내고, 대한의 식량 원조로 겨우 극복한다. 이 과정에서 대한의 식량 원조와 해외 교역을 독점한 에도 막부와 미쓰이 상회의 힘이 커지고, 각 번들의 힘은 더 약해지게 된다.
  • 존황양이
    3부에서 미토 번 국학파의 태동을 묘사했는데 4부 시점에서도 원역사처럼 막부의 탄압 하에서도 천황이 있는 교토를 중심으로 서서히 세를 불려가고 있는 모습이다. 재석은 2부에서 강항을 일본에 보내 성리학을 전한 결과가 이렇게 되어가는 것에 대해 쓴웃음을 짓는다. 다만 원역사랑 달리 존왕파 사이에서도 친한 성향인 자들이 상당히 있는 등 존왕파 간 노선 차이가 커 보인다.[48]
  • 성(城)
    을미동정 때 파괴된 오사카 성은 재건되었으나 화재로 인해 또 천수각이 소실되었다. 나고야 성은 원역사보단 소규모로 건설되었다.[49] 아즈치 성은 처음 세워진 그대로 보존된 상태이다. 그리고 에도 성의 천수각이 9대 쇼군 이에나리에 의해 재건되었다.
  • 고산케
    원 역사의 고산케는 오와리 번, 기슈 번, 미토 번이였지만 여기서는 히로시마 번이 고산케로 추가되었다.[50] 6대 쇼군 이에노부가 후사없이 사망하여 쇼군가의 대가 끊어진 이후 히로시마 번의 혈통이 쇼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막부를 보좌하라고 만들어진 번들이지만 미토 번과 오와리 번이 존왕파에 기울어져 있어 막부의 불안요소가 된 상태이다.
  • 와카슈도 금지
    강항에 의해 성리학이 퍼진 영향으로 금지되었다. 다이묘와 고위 사무라이에게만 해당되며, 민간에는 아직 암암리에 존속되고 있다.
  • 통선산
    대한에서 자국산 마취제인 마비산에 특허를 걸자 일본에서 개발한 마취제. 아편 농도가 높아 마비산보다 마취효과가 높은 대신 조금만 잘못 써도 환자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거나 실명하는 등 의료사고 위험성도 높다고 한다.
  • 명란젓 유행
    간인노미야 친왕에게 시집온 대한 황양공주가 친정에서 즐겨먹던 명란젓을 계속 친정에서 갖다 먹자 일본 상류층 사이에서 대한의 공주가 드시는 귀한 반찬이라면서 먹기 시작하고, 괜찮은 가성비 덕분에 서민들에게도 인기가 높아져, 명란젓의 주산지인 연해주는 대박이 난다.
  • 신센구미
    존황양이파 중에서 무력으로 막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탈취하자는 토막파가 천황이 있는 교토에서까지 암살 등 테러를 일으키자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구가 대 토막파 특수부대로 창설했다. 오랜 평화에 찌든 무사 계급 대신 쇼군 직할령에서 신분 상승 욕구에 목말라 있는 평민 계급에서 대원을 모집하여 180명을 정원으로 운영하고 있다. 또한 평민들의 출세욕구를 막부에 대한 충성심으로 모으기 위해 여러 미디어를 통해 신센구미를 영웅시하고 있다. 체포된 토막파들 중 단순 가담자는 후송에서 모집한 강용군에 용병으로 내보내버리기도 한다.
  • 공무합체
    존황양이파의 명분을 빼앗기 위해 쇼군 이에츠구가 계획하고 있다. 또한 각 번에서 고쿠다카 비례로 뽑은 대표들이 모이는 '참예회의'라는 일종의 의회도 창설하여 각 번이 자기들끼리 화합하지 못하고 경쟁하도록 만들 계획도 갖고 있다.
  • 낭인
    본래 주인 없는 하급 무사를 이르는 말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일본을 나가서 각국을 전전하는 일본계 떠돌이 용병을 칭하는 말로 의미가 변했다. 돈만 주면 누구에게든 고용되기에 태평천국 쪽에 붙어서 활동하는 낭인들도 있다.

2.7. 유구국

<colbgcolor=#695370><colcolor=#fff> 유구국
琉球國
국호 유구국(流球國)
위치 오키나와
수도 슈리(首里, 수리)
정치 체제 전제군주정
국성 상(尙)
국가원수 유구국왕 > 유구황제 > 중산왕
연호 영락(永樂) (1710 ~ 1711)
천안(天安) (1712 ~ ?)
영원(永元) (? ~ ?)
○○(○○) (? ~ ?)
○○(○○) (? ~ ?)
대흥(大興) (? ~ ?)
성평(成平) (? ~ 1831)
언어 유구어
민족 유구인
국교 유구 신토, 불교, 유교, 신토

황제국으로 자처하며 자신들의 역사가 1만 8400년으로 대한, 일본보다 더 길다는 허세는 여전하나, 오히려 대한 주둔군이 8천 명으로 늘어나 유구군 5천 명을 숫자로도 압도하게 되어 사실상 대한의 속국인 상태가 지속된다. 대한이 유구를 번국으로 합병하지 않는 것은 순전히 일본 도쿠가와 막부와 유지하는 평화를 깨트리기 싫어서이다. 그러나 새로 대한의 태황으로 즉위한 광덕제는 인구가 대구 정도밖에 안되는 초약소국 류큐가 대한과 감히 맞먹으려 한다는걸 매우 아니꼽게 보고 류큐를 번국으로 들이거나 아니면 아예 동군연합을 통해 병합하려는 계획을 신하들의 의견을 모조리 물리치고 추진하여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해있다. 여기에 류큐병합계획이 대한 전국에 퍼지는 바람에 광덕제의 유구와의 관계를 완벽한 상하관계로 재정립한다는 정책이 민간 여론을 등에 업고 더욱 탄력을 얻었다. 결국 광덕제가 태자 재석을 일본에 보내 제2차 경인조약으로 일본 도쿠가와 막부와 합의하여 유구 황제 직위는 대한 태황이 가져가고 유구 황제는 중산왕으로 격하, 대한에서 실질적 총독인 집정대신의 파견, 외교권은 박탈하고 자치권과 치안 유지를 위한 경찰 병력 유지만이 허용된 대한의 번국으로 삼도록 합의한다. 유구 조정에서는 이를 어떻게는 막으려 하고 있으나 이미 현실을 깨달은 유구 국민들은 나라를 지키는 것을 포기한 상태다.[51] 결국 1831년(신묘년) 음력 1월 22일(양력 3월 6일) 유구 조정이 대한의 요구를 모두 수락하며 독립을 잃었다.

이후 유구 주둔 대한군의 주둔비를 부담하고, 대한군의 대민 행패가 심해지고 대놓고 해우 밀렵을 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났으나, 이를 다스리는데 무관심했던 광덕제와 달리 흥선제는 자체적으로 자국민의 범죄 행위를 처벌하고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유구 왕실에는 누손주산 최고급 가구들을 선물하는 배려를 아끼지 않아서 유구 왕족과 신하들도 대한의 번국이 된 것에 더이상 불만을 품지 않게 되었다. 한편 광덕제는 내가 유구의 황제이기도 한데 대한에 조공을 바치게 하면 내가 나한테 조공을 바치란 말이냐며 유구의 조공을 면제해 주었고, 재석과 신료들도 중종이 인정한 유구의 독립을 박탈했으니 이정도 특권은 줘야 한다고 동의하여 유구는 조공이 계속 면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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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아모국

3부에서처럼 여전히 정치적으로 통합되지 않았고 미주로 가는 도중에 들러 아모국의 실상을 확인한 재석도 답이 없다는 판단을 내릴 정도로 일본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가는 중이다. 태황 광덕제도 아모국이 사실상 일본에게 종속되었다 여겨 유구를 병합하는 대가로 아모국을 일본에게 넘기기로 일본 막부와 합의한다. 유구국처럼 아모국 국왕의 직위를 쇼군의 신하로 낮추는 대신 자치권과 기존 추장들의 권력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하자 아모국 추장들도 압도적인 찬성을 보여 일본의 번국으로 확정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막부는 본색을 드러내서, 기근을 빌미로 수많은 일본인 난민들이 아모국에 몰려들면서 아모국을 난장판으로 만드는데도 이를 제지하려는 시도를 무력 시위를 동원해서 막으면서 손놓고 바라보는 처지에 놓이면서, 수세기 동안 자주성을 유지하려는 어떠한 노력을 하지 않고 허송세월 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 인구
    30만 명 정도. 일본인이 벌써 반을 차지한 상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서 아모국을 영향력 하에 넣기 위해 이주시킨 일본인들이[52] 원주민 영주들이 훨씬 적은 세금을 걷자[53] 일본인보다는 아모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화되어서, 막부에서는 아모국은 천황의 내린 영지가 아니니 존황양이파와 맞설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는 기뻐하면서도 일본계 아모인들의 동향은 향후 통치의 불안요소로 인식하게 되었다.
  • 정치
    여전히 600여명의 추장들 중에서 국왕을 뽑으나 명목상 자리일 뿐이다. 수도 오타올내에는 2부에 나온 초대 국왕 석탈왜가 지은 한국식 궁전과 그 후 일본 미쓰이 상회에서 지어준 일본식 성채가 있으나, 국왕도 평소에는 자기 부족 마을에서 살기 때문에 텅텅 비어있다. 1년에 한 번 '깨어난 곰들의 모임'(추장 회의) 때나 사람이 모이는 정도. 특히 최대 도시인 토카부치 지역에서는 추장이 용병을 고용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추장직을 세습 영주 직으로 바꿔버렸다. 일본의 번국이 된다는 소식에도 추장회의에서 기존 추장들의 권력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는 것을 듣자 오히려 대한에 조공을 안내도 되는 것이 더 좋다며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된다.
  • 경제
    여전히 과거처럼 소규모의 수렵, 어업, 채집, 텃밭 농업으로 자급자족하고 있다. 일본인 거주자가 바치는 세금으로 사치품을 구입하며 편하게 지내는 상황에 맛들려 마치 원 역사의 나우루인들 같은 상황이다. 일본인들은 대규모 농장, 어장, 광산, 항만 경영을 하고 있으나 아모인들은 그런 험한 일은 하기 싫어해서 후송에서 팔려온 묘노들이 험한 일을 도맡고 있다.
  • 도시
    최대의 도시는 토카부치 항구로, 대한이나 일본에서 미주로 가는 배들이 꼭 들려 보급품을 싣고 가는 요충지가 되었고 인구는 8천여명인데 대부분 일본인이나 묘노들이고 아모인은 10%도 되지 않는다. 수도 오타올내에는 3천여명이 살고 있다.
  • 태평천국의 난 파병
    막부에서 아모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약 500명의 아모인 부대를 태평천국의 난 토벌군으로 파병된 일본군에 끼워준다. 전투력은 사실상 없고 후방에서 풍토병에 걸려 드러눕거나 놀다가 귀국하지만 아모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막부에서 많은 전리품과 묘노를 분배해 주기 때문에 사정을 모르는 아모인들은 대한 태황보다 일본 쇼군이 더 우리를 잘 챙겨주어 우리 전사들이 용맹을 떨칠 기회도 주니 일본이 더 낫다고 생각하며 회유당하고 있다.

2.9. 대남국

대남국
大南國
국호 대남국(大南國)
별칭 안남, 남월
위치 베트남
수도 후에(化, 화)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성 완(阮)
국가원수 황제(외왕내제)
연호 가륭(嘉隆) (? ~ ?)
명명(明命) (? ~ 1840)
소치(紹治) (1841 ~ )
종교 유교,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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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처럼 떠이선 농민 봉기가 일어나 북쪽의 찐씨 정권과 남쪽의 광남국 응우옌씨 정권을 모두 멸망시키고, 명목상의 황제인 후 레 왕조가 서나라에 청한 원군까지 모두 격파하여 떠이선 왕조를 세우나, 응우옌씨 정권의 후손 응우옌푹아인대한의 지원을 받아 떠이선 왕조를 다시 멸망시키고 응우옌 왕조를 세운다. 응우옌 왕조는 외왕내제 체제를 유지하여 대한에 칭신하여 안남국왕 책봉을 받고 매년 조공을 바치며 복승항에 대한 육군 4000명과 대한 수군 함대의 주둔을 허용하는 한편 후송에게도 칭신하여 남월국왕 책봉을 받는다. 대한에서는 안남이라 부르지만 공식 국호는 대남이다. 또한 원 역사처럼 주변국인 진랍, 남장을 침략하며 섬라와 갈등을 빚고 있다. 유럽에서는 대한의 속국으로 인식하고 있어서 원 역사와 달리 식민지가 되는 운명을 피하게 됐다. 하지만 2대 황제 명명제가 천주교를 매국노라고 인식하여 탄압하는 바람에 많은 천주교인들이 대한군이 주둔한 복승을 통해 술루국으로 망명하고, 명명제의 호족 탄압 정책 때문에 제대하여 호족이 된 고참 왜병들이 동족 왜병들까지 불러들여 반란을 일으키고 북쪽에는 레 왕조의 후예를 자칭하는 반군이 준동하는 등 내부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다. 결국 반군을 제압하기 위해 프랑스군을 불러들이는 등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만다.

2.10. 준가르 본국

원 역사에서 건륭제에 의해 진작에 학살당해서 세상에서 사라진 것보다는 상황이 낫지만 본국에서 쫒겨난 로브 샨쇼노의 무리가 인도에서 벵골을 정복하고 잘 사는 데 반해, 준가르 본국은 러시아와 후금 사이에 끼어 거의 망하고 간신히 신강지역만을 지키고 있다. 결국 러시아의 위협에 굴복한 대칸 타마치가 러시아 차르에게 복속을 택하면서 러시아의 속국이 되고, 5년에 한번씩 칸이 직접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입조해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이런 현실에 절망해서 동족의 나라인 남쪽 벵골로 떠나는 전사들도 종종 있다고 한다. 1840년 후금 내전이 터지고 후금 사패륵 찰니가 준가르에서 용병을 고용하자 이 기회에 원수 후금에 대한 복수의 의미로 용병들이 후금 서부지역을 크게 약탈하게 된다.

수도는 '굴자'라는 도시이지만 성벽은 따로 없다.

2.11. 천축국

시크 왕국과 벵골 칸국을 제외한 인도 대부분을 원역사처럼 영국 동인도 회사가 지배하게 되었다. 굴람 카디르의 난을 계기로 무굴 황제는 완전히 동인도 회사의 허수아비가 되고 동인도회사 총재가 무굴 제국 재상을 겸임하게 된다.

1833년에는 시크 왕국도 영국에게 굴복하여 대한이 지원하는 벵골 칸국만이 유일한 독립국으로 남게 된다.

2.11.1. 준가르 라자국(벵골 칸국)

나디르 샤의 무굴 정벌에 용병으로 따라왔던 준가르 왕자 '로브 산쇼노'가 벵골 태수와 관계가 틀어진 대한의 골가타 상관의 지원을 받아 벵골 태수를 죽이고 벵골을 정복, 명목상 나디르 샤의 봉신국인 벵골 칸국을 세우고 본인을 구르칸으로 선포한다. 나디르 샤가 죽은 후 구르칸은 공식적으로 독립국을 칭하고, 마라타 동맹 등 다른 인도 국가들과 싸우면서 대한과 다시 정식 외교관계를 맺어 지원을 받는다. 티베트가 네팔과의 전쟁에 자신들을 계속 끌어들이려 하자 티베트의 간섭을 차단하기 위해 국교 또한 준가르 시절 믿던 티베트 불교에서 일본 승려들이 포교한 정토진종으로 바꾸고, 무력으로 벵골인들에게 개종을 강요한다. 그래서 새로운 카스트 제도가 생겼는데 최상위는 준가르인,[54] 2위는 일본 용병, 3위는 인도인 관료나 군인,[55] 4위는 인도인 평민, 5위는 후송에서 팔려온 묘노, 그리고 불가촉천민으로 개종을 거부한 유랑민이 있다.

벵골을 제외한 인도 전역이 영국의 손아귀에 떨어지면서 대한의 지원이 더 절실한 상황이 되었다. 다행히 현재 영국 정부는 대한의 국력과 거리의 차이, 그리고 대한과의 우호관계의 중요성 때문에 벵골을 무력으로 병탄할 생각은 없다.[56] 가혹한 수탈을 일삼는 영국과 달리 정당한 값을 치루고 교역을 하는 대한의 보호에 만족하고 있으며, 주변국들도 고만고만하여 준가르의 가장 큰 적은 말라리아를 옮기는 모기라고 할 정도로 안정된 상태.

하지만 영국이 태평천국의 난 진압을 지원하여 정식으로 후송에서 이권을 얻는 대신 벵골산 아편의 수출을 중단하기로 하고, 그나마 남은 후송의 아편 수요도 안남국에 자리잡은 프랑스 동인도회사가 가로채는 바람에 벵골의 주산업 중 하나인 아편 산업이 큰 타격을 입는다. 이 와중에 대칸 토를로시가 말라리아로 사망하자 후계자 암투가 벌어져 3남 소남자르갈이 형 담바수렌을 죽이고 대칸이 되며, 취약한 정통성과 경제적 침체, 영국령 동인도 회사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더욱 더 대한과 밀착하려 한다.

3. 대유주

세부적인 진행은 다르지만 이 세계선에서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났다.

한편 유럽에도 증기기관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며,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는 철도망이 깔리기 시작하고, 7년 전쟁 중 도버 해협에서 프랑스 해군의 증기선 전투함과 영국 해군의 장갑함이 해전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대한보다는 기술이 딸려 전함이라기보다는 모니터함 수준이라고 한다. 열기구도 전쟁 중에 널리 사용된다. 특히 나폴레옹이 최초로 철도망을 이용한 병력 이동, 야포 견인용 증기자동차 도입 등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대한 황실의 유별난 태자 교육, 그리고 명군만 배출되는 결과가 유명해졌는지 유럽 왕실들에서도 대한을 본받아 자식들을 빡새게 교육시키는 열풍이 불고 있다. 이 때문에 빅토리아처럼 대한에 악감정을 가진 사람이 나올 정도.
  • 아시아에 대한 인식
    동아시아의 3대 문명국을 '대한, 일본, 키타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대한은 북태평양을 내해로 둔 명실상부한 동아시아 최강국이자 어지간한 유럽 열강을 능가하는 강대국이며 일본은 교역과 용병업으로 큰 영향력을 가졌고 키타이는 동아시아 유일의 기독교 독립국이기 때문. 건주 양국을 묶어서 키타이라고 칭하며, 한 국가처럼 여기고 있다. 후송의 경우 '시니카'라고 부르는데, 별다른 교류가 없기에 인구수가 많아서 덩치만 큰 비문명국으로 여기고 있다.
  • 한국인 백인설
    장조 시기 견서사로 유럽을 방문한 조선인들과 세스페데스가 교황청에 보낸 보고서, 중종이 성친왕 시절 빈 공방전에 참전한 일화랑 올렝카와의 사랑을 소재로 비발디가 창작한 오페라의 영향으로 4부 시점에서 대한 황실이 귀비 소씨(올렝카)의 후손이란 오해가 퍼져 3부에 이어 한국인들이 사실은 백인이란 주장이 더 만연해지고 있다. 훔볼트처럼 직접 대한을 방문한 학자들이 한국인은 백인이 아니라는 걸 알려도 인종주의 때문인지 한국인이 백인이란 근거랍시고 온갖 허무맹랑한 낭설과 추측이 난무하고 있으며 심지어 러시아 황태후처럼 한국인 백인설을 진지하게 믿는 높으신 분들도 나올 정도다.

3.1. 외수터국

3부 시점까지는 '황제령'이라고 불렸으나 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면서 외스터라이히를 음차한 외수터국으로 불리고 있다.

요제프 1세가 종두를 맞아 장수하는 바람에 동생 카를 6세가 늦게 즉위하여 국사조칙 반포가 늦었지만 원역사처럼 마리아 테레지아프란츠 1세 부부가 즉위했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동맹의 역전, 7년 전쟁을 치뤘다. 7년 전쟁 후 요제프 2세는 동맹이던 폴란드 왕국의 뒤통수를 치고 제2차 폴란드 분할에 참여한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는 등 큰 피해를 입는다. 나폴레옹 전쟁 후에는 원역사처럼 재상 메테르니히의 활약으로 국력을 상당히 회복하기는 한다.

3.2. 포뢰선

프리드리히 대왕이 원역사처럼 군사적 천재성을 발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거듭 승리한다. 원 역사와 달리 폴란드 왕국도 대 프로이센 동맹에 가담하여 '네 여인 동맹'과 싸웠지만 홀슈타인 공작 카를 페터 울리히가 스웨덴 국왕이 되면서 초장부터 스웨덴과 동맹한 데다, 러시아도 루시아 태후 사망과 함께 동맹에서 이탈하여 원역사처럼 승리를 거두고 폴란드를 분할하며 동유럽의 강대국 반열에 들어선다.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원역사처럼 나폴레옹에게 털렸지만 나폴레옹이 신대륙으로 도망친 후로는 멸망한 신성로마제국의 영방 국가들이 재통합된 독일 연방에서 2인자격 위치에 올랐으며 의장국인 오스트리아를 재치고 독일어권을 통합하려 한다.

3.3. 불랑국

  • 미국 독립전쟁
    증조부 루이 14세를 본받으려던 루이 16세가 7년 전쟁 패전에 충격을 받고 사망하고, 그 아들 루이 17세는 영국에 보복하기 위해 미국 독립전쟁에 원역사처럼 미국을 도와 참전한다. 루이 17세가 1780년 사망한 후에도 그 아들 샤를 10세가 아예 프랑스 육군을 파병까지 하며 미국을 지원한다.
  • 철도 부설
    샤를 10세가 국영 철도회사를 통해 프랑스 전역을 철도망으로 연결하겠다는 계획을 무리하게 추진하여 엄청난 재정 적자를 낳는다. 하지만 이 철도망은 곧 나폴레옹이 군사용으로 유용하게 사용하게 된다. 나폴레옹 몰락 후에는 공화파 반군을 진압하고 체제를 굳히는데도 유용하게 쓰였으니 장기적으로는 좋은 투자였던 셈.
  • 프랑스 대혁명
    샤를 10세와 마리아 카롤리나 부부가 원역사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부부보다 훨씬 강압적인 대처를 하여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에 대해 바로 무력진압으로 대응하면서 프랑스 전역이 내전 상태에 빠져든다. 결국 혁명군 총사령관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국왕 부부를 생포했으며, 혁명정부에 의해 처형된다.
  • 나폴레옹 전쟁
    원역사와 비슷한 양상으로 일어났으며,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 패배 후 한인 사략선장 홍경래의 도움으로 루이지애나로 파천하여 누벨프랑스 제국을 세운다.
  • 부르봉 왕정 복고
    샤를 10세의 왕세자 루이 18세가 귀국해 왕정 복고를 이루고, 부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 하에 반동정치를 편다. 원 역사와 달리 알제리 원정을 미루고 본국을 지켰기 때문에 프랑스령 알제리는 원역사보다 좀 늦게 정복되고, 철도망을 잘 활용해서 7월 혁명과 뒤따른 반란도 철저히 진압했다.
  • 1830년 7월 봉기1832년 6월 봉기 진압
    원역사와 달리 루이 19세가 알제리 원정 등을 하지 않고 혁명에 대비하여 병력을 파리 주변에 유지하고 있었던 데다 철도망을 통해 추가 병력 증원도 원활했고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의 지원까지 받아 두 봉기를 진압했다.
  • 프랑스 외인부대
    원역사와 비슷하게 루이 19세가 알제리 침공 주력부대로 창설한다. 외인부대이므로 프랑스인 부대와 달리 루이 19세에게만 충성할 것이라는 점을 노려 알제리 침공에 성공하면 신불랑 침공에도 투입할 계획을 갖고 있다.
  • 알제리 정복
    원역사와 같은 프랑스 대사 모독 사건이 구실이 되어 루이 19세가 4만 대군을 투입해 정복하고 프랑스령 알제리를 세운다.
  • 1842년 2월 혁명과 공화국 부활
    수에즈 운하 건설과 알제리 전쟁, 이집트 독립전쟁 개입으로 재정이 파탄나는데도 루이 19세와 귀족들은 호화생활을 즐기는 데 분노한 국민들이 다시 들고 일어나 루이 19세를 폐위시키고 프랑스 제2공화국을 수립하고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를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대한 황태후 박씨에게 자금을 받아간 샤를 루이 나폴레옹이 봉기에 큰 역할을 하여 정계의 거물로 떠오른다.
  • 아시아에서의 만행
    원 역사의 혐성국이었던 영국은 3부에서 이미 홍콩을 아시아 거점으로 확보했고, 대한의 존재로 인해 동서교류가 활발해져서 후송도 유럽 국가들에 딱히 적대적인 모습을 안 보이는데다가 태평천국과 전쟁으로 인해 훨씬 모양 좋게 아시아에 영향력을 넓히게 되고 임칙서와 거래로 아편 밀수도 중단하게 된 반면 이 포지션을 작중 프랑스 동인도회사가 차지하게 되어서, 아편 밀수에 태평천국에 공작기계를 거래하는 등의 혐성짓을 벌이고 있다.

3.4. 루스국

차르 알렉세이 2세가 사망한 후 아들 표트르 2세가 즉위했지만, 루시아 태후가 아들이 성년이 되었는데도 섭정을 거두지 않아 표트르 2세는 이에 반감을 품었다. 루시아 태후는 딸 카타지나를 도와 7년 전쟁에서 대 프로이센 동맹에 참여했지만 표트르 2세는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친근감이 있던 데다 어머니에 대한 반감, 폴란드를 차지하려는 여동생 카타지나에 대한 미움 때문에 어머니가 죽고 친정을 선포하자마자 동맹을 이탈하고 프로이센 편으로 편을 바꿔 이 세계에서도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이 일어난다. 표트르 2세의 배신으로 카타지나가 충격을 받고 사망하자 거리낄 것 없이 폴란드를 분할하여 동폴란드를 점령한다. 하지만 그 후 프랑스 대혁명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차르 알렉산드르 1세와 표트르 3세가 모두 짧게 재위하고 죽고, 어린 알렉산드르 2세의 섭정태후 마리아 표도로브나의 우유부단한 대처로 국력에 큰 손실을 입었으며 알렉산드르 2세가 모후를 끌어내리고 친정하면서 국력 회복에 시동을 걸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 때는 대한 원평제의 무기 지원을 받기도 했다.

재석은 3부 중종일때 표트르 1세와 의형제 관계와 혼인동맹을 맺으면서 러시아의 진출 방향을 동로마제국 계승을 명분삼아 콘스탄티노플로 돌리려 했지만, 후대 차르들은 오스만 제국을 상대하기 어렵다는 난관 때문에 원 역사처럼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로 남진하려고 하며, 무굴 제국이 원역사보다 빨리 영국의 손아귀에 떨어지면서 중앙아시아 소국들의 수입원이던 무굴 제국에 대한 군마 수출도 끊기게 되어 국력이 크게 약화되자 그 틈을 노리고 중앙아시아 소국들을 합병하면서 인도와 페르시아를 향해 남진하고 있어 영국과 조만간 그레이트 게임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3.5. 폴수국

암군인 루드비크 2세 대신 국정을 맡은 카타지나 왕비가 주도하여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에 오스트리아와 동맹하여 참전하나 프리드리히 2세에게 거듭 패전하고 만다. 7년 전쟁의 결과 친오빠 표트르 2세에게 배신을 당한 데다, 패전으로 국왕 친위군을 날려버리자 그동안 카타지나의 중앙집권 정책에 반감을 품었던 폴란드 귀족들도 배신을 때려 카타지나 왕비는 충격으로 1765년 사망하고, 후임 국왕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가 최후의 노력을 했지만 결국 폴란드 분할을 당해 독립을 잃게 된다. 그 후 나폴레옹 전쟁나폴레옹 1세가 원역사처럼 바르샤바 공국을 세우나 이 역시 나폴레옹이 유럽전선에서 패배하고 루이지애나로 파천하면서 멸망하고, 많은 폴란드인들이 나폴레옹을 따라 신불랑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과거 카타지나 왕비가 비발디를 시켜 만든 오페라의 영향으로 지금도 상당수 폴란드인들이 대한 황실이 귀비 소씨(올렝카)의 후손인 줄 안다.

러시아령 폴란드는 명목상의 폴란드 왕국이 남아있는 동군연합으로 러시아 차르가 폴란드 국왕을 겸하며, 실권은 없지만 세임 의회도 남아있다.

3.6. 수배국

원 역사에서 러시아 황제 표트르 3세가 되었던 홀슈타인-고토로프 공작 카를 페터 울리히와 예카테리나 2세였던 조피 프리데리케 부부가 이 역사에서는 스웨덴 국왕 '칼 13세' 부부가 되었다. 칼 13세는 원 역사처럼 프리드리히 대왕을 숭배하였기 때문에 7년 전쟁에서 처음부터 프로이센과 동맹하여 참전했으나, 승전했음에도 순수한 덕질이 목표였기에 아무 대가도 받지 않자 이에 반발한 귀족들과 아내 조피에 의해 강제로 퇴위, 연금된다. 조피 왕비는 원역사와는 달리 스스로 왕위에 오르지는 않고 어린 아들 파울 1세를 국왕으로 옹립한 다음 스스로 섭정태후가 되어 의회를 억눌러 왕권을 강화하고 스웨덴의 국력을 회복시키는 업적을 쌓는다. 파울 1세의 아들 구스타브 3세(원 역사 알렉산드르 1세) 시절에는 나폴레옹 전쟁 때 끝까지 나폴레옹과 맞서 싸워, 전후 빈 회의에서 그 보상으로 독일 내 영토를 잃는 대신 덴마크에게서 노르웨이를 얻어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까지 이어지는 통일 스칸디나비아를 완성했다.

3.7. 잉글국

7년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원 역사와 같은 양상으로 북미 식민지가 미주합중국으로 독립해버린 데다 인도에서도 경제적 가치가 높은 벵골 영유에 실패하여 원 역사보다는 손해를 봤다. 미영전쟁도 원역사처럼 치뤘고,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나폴레옹의 신불랑 건국을 방조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공하고 함대를 인수할 때 기습해서 몰살시키고,[57] 누벨프랑스 건국 후 바다로의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미시시피강 하구를 점령하는 등 원 역사의 명성에 부끄럽지 않게 활약하고 있어서 대한 조정에서도 앞으로 대한의 세력권인 벵골과 말레이 지역으로 잉글국이 손을 뻗칠 것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가 나올 정도이다.

원 역사처럼 1833년 노예제 완전 폐지 선언을 하여 대한, 미국 등 다른 열강에도 영향을 준다.

몰락한 서나라에서 아편을 제조해서 후송에 퍼지면서 원 역사의 악행을 저지를 일이 없어진 줄 알았지만, 후송 내에서 아편 수요가 계속 늘어나 자국 내에서 생산되는 것만으로는 충당이 안 되자 이 틈을 비집고 동인도회사가 벵골산 아편을 밀수해 후송에 팔아넘기면서 이득을 취한다. 이를 보다못한 임칙서가 영국제 무기와 공작기계를 수입하는 조건으로 아편 밀매를 그만둘 것을 요구하자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들도 태평천국 토벌에 동참하고 자국 상선들이 남경까지 입항할 수 있게 해달라는 역제안을 해서 전개만 달라졌을 뿐 원 역사보다 악명도 덜 얻고 중국에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게다가 원 역사와 달리 명분도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원 역사 아편전쟁을 반대했던 글래드스턴 의원이 '아편 판매를 중단하는 계기일 뿐 아니라 사교도를 토벌하는 정의로운 전쟁'이라며 참전을 적극 찬성하는 모습을 보여 이 소식을 들은 재석이 쓴웃음을 짓는다.

후송 파병은 왜 남의 나라 반란 진압에 나서야 하냐는 부정적 여론도 많아 의회에서 55표 차이로 간신히 통과했으나, 그 후 홍서당의 난으로 홍콩이 초토화 되었기에 이 시점에 다시 투표한다면 250표 정도 차이가 날 거라 할 정도로 여론도 파병 찬성으로 돌아섰다.

3.8. 내달국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에게 본국을 점령당했으나 네덜란드령 동인도 식민지는 나폴레옹에 반감을 가진 대한 원평제가 본국 해군, 조홀국과 술루국 육군을 파병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여 프랑스를 막아내고 나폴레옹 전쟁이 끝날 때까지 버텨낼 수 있었고, 독립을 회복한 후에도 대한에 저자세를 취하고 있다. 백이의국이 원역사대로 독립한 후 국력이 약화되었지만 홍서당의 난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도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태평천국 토벌 다국적 연합군에 소수 병력이지만 참전을 표명한다.

3.9. 서반아

3부에서 성립된 비텔스바흐 왕조 호세 페르난도 1세의 증손자인 페르난도 6세가 젊은 혈기에 프랑스 혁명전쟁에 반혁명군을 도와 마르세유를 침공하려다가 나폴레옹에게 박살나고, 1804년 나폴레옹이 친히 13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하여 페르난도 6세는 과달라하라 조약을 맺고 폐위,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원역사처럼 괴뢰 군주가 되고 페르난도 6세는 가족과 함께 프랑스 아비뇽에 유폐되었다가 35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한다. 그 아들 호세 페르난도 2세가 나폴레옹 패배로 16세에 복위했지만 스페인 본국도 전쟁의 여파로 폐허가 된 데다 아메리카 식민지도 모조리 독립해버려 2류 국가로 전락한다.

필리핀의 상실로 가치가 없어진 태평양의 팔라우, 북마리아나 제도, 캐롤라인 제도를 대한의 제안으로 50만 냥을 받고 대한에 매각하였고 매각 대금을 쿠바의 방위 강화에 투입한다.

3.10. 백이의국

원역사대로 1831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했다. 약소국이지만 태평천국 토벌 다국적 연합군 파병 때 중국에 거점 마련을 노리고 참전을 선언한다. 프랑스를 견제하려는 영국의 개입으로 원역사의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이 아닌 신불랑국 집정관 외젠 드 보아르네의 아들 오귀스트 드 보아르네가 오귀스트 1세로 즉위하면서 보아르네 가문이 왕위를 가져갔다.

3.11. 포도아국

원역사대로 나폴레옹 전쟁에 휩쓸리고 브라질이 독립해 국력이 약화되었다. 홍서당의 난으로 마카오에서도 피해를 입어 태평천국 토벌 연합군에 참가를 선언한다.

3.12. 양시칠리아 왕국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당시 양시치리아의 부르봉 왕조의 후계가 끊기자 프랑스 부르봉 본가를 지원하는 대가로 합스부르크가 계승권을 가져가 원역사와 왕조가 바뀌었다.

3.13. 교황령

원역사대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강력한 수구반동 정책을 펼쳐 심지어 철도도 악마의 산물이라며 거부할 정도이다.
  • 성 베드로의 로마를 지키는 카타이 근위대
    후금 내전에서 패해 러시아로 망명한 굴마훈과 부하 3천명, 그 식솔들은 청과의 관계 악화가 부담되는 러시아와 병력이 필요한 교황령의 이해관계가 맞아 교황령으로 보내지게 된다. 교황은 본래 이들을 기사단으로 하려 했으나 굴마훈을 포함한 대부분이 기혼자라는 것을 알고 근위대로 만든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에 주둔시켜 청년 이탈리아당 탄압에 투입하려 한다.
  • 지혜당
    2부 당시 천주교에 귀의한 이혼 스테파노스 추기경이 세운 도서관.

3.14. 돌궐국

원역사처럼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 영불러 연합군이 그리스를 지원한 때문에 패배하여 그리스를 잃고, 이집트도 메흐메드 알리가 자립해 명목상의 봉신국으로만 남은 등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4. 대미주

4.1. 대한령 미주

  • 인구
    원평제 즉위 초에는 6백만 명, 탐보라 화산 폭발로 본국이 기근을 겪은 후인 1826년에는 8백만명으로 늘었다.
  • 철도 부설
    현종 때인 원강 24년(1764년)에 지선성과 태호성을 잇는 간선철도가 개통되고 원강 30년(1770년)에 지선성과 유타성을 잇는 간선철도도 개통된다. 그 후 재석과 나폴레옹 1세의 협정에 의해 지선성부터 누벨오를레앙을 잇는 대륙횡단철도가 1833년 착공되며 대부분의 노동력은 묘노와 한공들이 맡는다.
  • 반강제 머슴제 폐지
    미주의 인구와 납세가 충분히 늘어나, 장조 시절부터 있었던 새로 건너온 이주민을 관에서 원 거주자들에게 반강제로 수년간 머슴으로 일하게 만들던 제도가 원평제 재위 중 폐지되었다.
  • 개신교 전파
    미주합중국에서 무역상을 따라 넘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이 개신교를 전파하여 초기에는 탄압을 받았으나 원평제가 개신교 금지령을 해제한다. 아직 대한 조정에서 미주까지는 초등 의무교육이나 의료 시설 개설이 부족한 틈을 노려 미국 선교사들이 학교와 병원을 세워 미주인들을 끌어들이고 있는데, 북미주 최고의 명가인 미주 원씨 가문이 개신교로 개종하는 등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특히 후송에서 미주로 팔려온 묘노들이 개신교에 귀의하는 수가 늘어났으며, 재석이 미주 순행에 나선 시점에서는 미주 개신교도의 숫자가 5만 명 정도이다. 그후 재석이 흥녕제로 즉위한 지 2년째인 1837년이 되면 미주에 있는 교육기관의 30%가 개신교 미션스쿨일 정도로 미주에서 무섭게 세를 불려가고 있다.
  • 백정
    수백년이 흐르면서 원래의 백정들은 본국에서도 동화되거나 변경으로 흩어져 도적이 되었는데, 미주에서도 변경으로 흩어지면서 3부 장길산 패거리처럼 다민족 도적단으로 변화하여 4부 시점에서는 백정은 변경의 도적단을 가리키는 멸칭이 되었다.
  • 미주순검대 편성과 미주 속오군 해체
    신불랑에게서 구입한 멕시코 2개 주 지역에 신설되는 동미주의 치안을 담당하기 위해 편성되는 부대. 신불랑과의 조약 상 대한 정규군을 국경에 배치할 수 없게 되어 별도의 부대를 편성하게 되었으며, 본국에서 전역했다 재입대한 베테랑 3천명이 기간요원으로 파견되어 현지에서 기존 속오군 중 정예병을 전속시켜 총 3만명으로 편성할 예정이며, 순검대 완편과 동시에 미주 속오군은 소집훈련도 중단하고 명목만 남겨두기로 한다.
  • 천부공화론
    미주 개척 200년이 넘도록 미주인이 본국 관직을 얻는데 차별이 있고 미주대총관 등 미주의 요직은 전부 본국인이 차지하는 현실에 미주 청년들이 점차 불만을 가지며, 신불랑의 자유주의자들, 미국에서 온 개신교 선교사들에게서 전해진 천부공화론 사상에 빠져드는 청년들이 많다. 대부분은 대한 태황은 군주로 모시되 모든 관직과 법률은 미주에서 자체적으로 정하는 동군연합 체제로의 전환을 바라지만 완전 독립과 공화정을 바라는 사람들도 있어 4부에서 미주 독립전쟁이 터질 복선이 되고 있다. 심지어 태황의 미주 봉선을 청원하는 상소문에 서명을 받으러 다니던 동빈 김씨의 아버지 김재정에게 대놓고 공화정을 주장하다가 김재정의 신고로 잡혀가 곤장을 맞은 인물도 있었다고 할 정도.

4.1.1. 북미주

감영은 덕진성에 있다.
  • 인구
    인구는 200만이고 그 중 토인이 16만이다.

4.1.2. 남미주

감영은 지선성(至善城)에 있다. 천사동을 1840년 6월 한-신불랑 황제 회담 이후 제회부(帝會府)로 개칭한다.
  • 인구
    인구는 420만이고 그 중 토인이 24만이다.
  • 철도
    지선성에서 산대고까지 철도가 부설되었으며 이후 서미주까지 연장할 계획이다.

4.1.3. 빙주

  • 인구
    정주민이 거의 없어 인구 통계가 아예 없다.

4.1.4. 중미주

감영은 위주(威州)에 있다.
  • 인구
    인구는 140만이고 그 중 토인이 8만이다.

4.1.5. 서미주

  • 인구
    인구는 23만이고 그 중 한인은 14만 명, 토인은 1만 명 미만, 그외에는 대부분 멕시코인, 극소수 스페인 크리올이 있다.

4.1.6. 동미주

신불랑국, 멕고국과의 협상을 통해 구입한 멕고국 북서부 영토, 처음에는 안정화를 위해 미주안핵사가 다스렸으나 9년 후 충분히 안정화되자 미주안핵사를 상설직인 동미주지사로 변경한다. 치소는 축손(逐損)이었으나 안정화된 후 에르모시요로 옮기기로 한다.
  • 인구
    인구는 약 30만이다.
  • 영토
    원역사의 누에보 멕시코(뉴 맥시코)와 치와와는 각각 리오그란데 강과 콘초스 강을 기준으로 분할했으며 소노라는 전 지역을 넘겨받았다.
  • 아파치 사포대
    안핵사 이용태가 조직한 아파치족 민병대. 대한의 통치에 저항하는 산적들과 토호들을 토벌하고 전리품의 2/3를 갖는 조건으로 복무하나 대한에 복종하는 토호까지 털어서 향후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4.1.7. 동변

  • 인구
    인구는 17만이고 한인과 토인이 반반이다. 흥선제 때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교인들이 망명해 와 청구호 인근에 정착하면서 백인 인구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 지역
    지선성과 태호성을 오가던 동변관리사 치소는 유타성으로 이동하였고, 150년 전 3부에서 중종이 동변관리사일 때 원주민 유트족에게 유타성 토지 사용료로 매년 말 50마리를 주기로 한 계약이 150년 동안 그대로 이행되고 있다. 긴 세월 동안 대한의 은혜를 입은 셈이 된 유트족도 덕분에 대한에 충성한다.
  • 산업
    주된 산업은 목축, 3부에서 중종이 처음 개발하기 시작한 광산업, 청구호 연안의 염전업 등이다.

4.2. 캐나다 지역

태평양 연안지대는 대한령 북미주의 일부이고, 그외 서부는 신불랑 제국의 영토가 되어 대한령 북미주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캐나다 중부는 원역사처럼 영국의 '허드슨 베이 회사'가 지배하는 '루퍼츠랜드'가 있고, 캐나다 동부는 영국령 캐나다 총독부가 있다.

1830년대 들어서 퀘벡의 프랑스계 주민들이 영국 총독의 영국 풍습 강요에 반발하여 잦은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4.3. 서반아령 신서반아멕시코(맥고국)

원역사처럼 멕시코 독립운동이 일어나 멕시코 제1제국을 선포하지만 아직 스페인과 전쟁 중이다. 대한 태황 원평제는 스페인으로부터 반란한 반적들이라면서 국가로 승인하지 않았다.

스페인 정부군 잔존세력과의 싸움이 끝나지 않은데다 아구스틴 1세의 독재정으로 민심이 혼란한 틈을 타, 1823년 텍사스를 노리던 신불랑국의 침공을 당하여 2년 만에 수도 멕시코시티가 신불랑군에게 함락되고 아구스틴 1세는 이탈리아로 망명하여 제1제국은 붕괴되고 신불랑의 보호령 신세로 전락한다. 그러나 신불랑군도 병력이 적어 멕시코시티와 동부 해안지역만을 확고히 장악한 상태이고 나머지 지역은 군벌과 도적들이 날뛰는 무법상태로 전락한다. 나폴레옹은 텍사스는 신불랑에 합병하고 나머지 멕시코 지역은 괴뢰국인 멕시코 공화국을 세웠으나 명목상의 정부인 상황이다.

4.4. 프랑스령 누벨프랑스 → 누벨프랑스 제국(신불랑국)

3부에서 묘사된 것처럼 많은 한인들이 루이지애나로 넘어와 농사와 교역이 발달하면서 원 역사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풍요한 지역이 되었다. 때문에 7년 전쟁에서도 캐나다는 원역사와 똑같이 영국에게 할양했지만 루이지애나는 원역사와 달리 스페인에게 넘기지 않고 그대로 프랑스령으로 남았다. 원역사에서 나폴레옹이 미국에게 루이지애나를 판 루이지애나 구입 역시 일어나지 않았고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후 한인 사략선장 클로드 홍(홍경래)의 도움으로 루이지애나로 탈출해 누벨프랑스 제국을 세웠다.

3부의 재석은 대한령 미주가 루이지애나를 장악하면 너무 커져서 독립할 것 같고, 그렇다고 미국이 가지게 두면 미국이 너무 커져서 대한령 미주를 노릴 것 같아 완충국으로 두기 위해 미주 토인들이 국가를 건설하도록 유도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건국의 주체는 달라도 원하던 위치에 완충국 역할을 할 세번째 국가가 생겨난 셈이니 미주는 이렇게 3강 구도를 유지할 듯하다.

1845년 건국황제 나폴레옹이 노환으로 사망한 후, 그의 양자 외젠 드 보아르네가 의회의 만장일치 추대에 의해 집정관 자리에 오르면서 국호는 제국이나 실제로는 공화국과 다름없게 되었다.
  • 명칭
    공식적으로 누벨프랑스 제국이며 대한에서는 신불랑국으로 불리고 있다. 나폴레옹 프랑스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 영토
    프랑스 식민지였던 누벨프랑스 지역에 건국되었으며 1823년 멕시코 원정에 성공하면서 텍사스를 준주로 편입했다. 본래 신불랑 지역 유일한 대도시였던 누벨 오를레앙을 수도로 삼고 생 루이를 부도로 삼는다. 그 외에도 포트 샤를 등을 거점으로 삼는다. 하지만 국토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데다 미주합중국과 지나치게 가깝다는 이유로 신도시를 건설해서 수도를 이전하기로 한다. 새로운 수도는 현실의 휴스턴의 위치이며 이름은 여러 논의 끝에 나폴레옹의 고향 아작시오의 이름을 따서 '누벨 아작시오'로 결정된다. 대한에서는 '신불패'라는 이름으로 부르는데 아작이라고 하면 어감이 좋지 않으니 대신 나폴레옹의 고향 아작시오를 유방의 고향 패현에 비유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58]
  • 정치
    작중 언급에 따르면 입헌군주제를 채택했다고 하지만 나폴레옹 1세의 개인적 카리스마로 건국된 국가이므로 사실상 전제군주제에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나폴레옹에 대한 의존도가 크지만 그의 카리스마에 끌려서 유럽의 혁명가들, 계몽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이 대거 이주했기 때문에 나폴레옹 사후 정국 불안정의 원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주민들 중에 관료는 적어서 행정에 문제가 있던 것도 미국인들이 대거 이민와서 해결되고 있다. 의회는 기존 루이지애나의 토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하원과, 나폴레옹을 따라 이주한 유럽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상원으로 견제와 균형이 이뤄지고 있다.

    나폴레옹은 본래 자신의 친아들 나폴레옹 2세를 후계자로 선포했으나 오스트리아에 감금당한 나폴레옹 2세가 자살하면서 후계자는 공석이 되었다. 이후 좌절한 나폴레옹은 다른 후계자를 택하는 대신 국민들이 차기 황제를 택하게 하는 선거군주제 국가로 개편할 계획이다. 이 계획대로면 신불랑국 황제는 일종의 종신 대통령이 되는 셈이다. 결국 나폴레옹 사후 의회가 추대한 마타모로스 공작 외젠은 황제가 아닌 집정관 직위를 가지고 통치하게 되었다.
  • 외교
    원 역사에선 군사적 능력에 비해 과소평가되었던 나폴레옹의 외교적 능력이 절정으로 발휘되어서, 건국 직후 국경을 접하는 대한, 미국, 스페인과의 국경을 확정해서 안정을 도모했고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미국과는 나폴레옹이 프랑스 통령이던 때부터 미시시피 강의 자유통항권을 허용하는 등 우호관계를 맺고 있고, 제퍼슨 총통이 대한령 미주로 가는 길을 찾으라고 보낸 탐험대의 통과도 허락하는데다가 신불랑국 건국 이후로는 공동으로 '나폴레옹-먼로 공동선언'을 1823년 겨울 발표할 정도로 우호적이다. 하지만 신불랑이 미주합중국의 확장을 막아버렸기에 언제든지 관계가 악화될 수 있으며 이를 대비하기 위해 대한과의 관계도 신경쓰고 있다.[59] 대부분의 유주 국가들이 여전히 대한을 조선이라고 표기하는 반면 신불랑은 대한이라고 제대로 불러주는 등 우호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60] 나폴레옹은 간과하고 있지만 앤드루 잭슨이 이끄는 남부 노예주들은 신불랑을 걸림돌로 생각해 장기적으로 침공, 정복할 음모도 꾸미고 있다. 대한에서는 원평제 재위 기간에는 표면적으로는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불랑국의 번국으로 간주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국임을 인정하고 있었으며, 완충국의 필요성도 이해하고 있기에 원평제 말년 정식으로 제국으로 인정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한다. 현재 태황인 재석은 나폴레옹을 존경하고 있기 때문에 유사시 미주합중국과 신불랑국의 전쟁이 발발하면 신불랑국을 도울 것으로 보인다. 반면 불랑국 본국에서는 신불랑국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국 영토 일부를 점거한 반군으로 간주한다.
    • 아메리카 국가 회의
      나폴레옹이 설립한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회의 기구로 신불랑국을 맹주로 미국, 멕시코,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 베네수엘라, 에콰도르가 가입되어 있다. 신불랑의 괴뢰국인 멕시코를 제외하면 가맹국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되 외부의 침략에는 공동 대응하는, 작중 나폴레옹-먼로 선언을 실질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기구로 보인다.
  • 군사
    나폴레옹이 도주에 성공한 후 프랑스 왕 루이 18세는 장드디외 술트 원수에게 5만 병력을 주어 토벌군으로 보내지만 누벨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술트가 나폴레옹에게 투항하는 바람에 5만 정예병만 거저 준 꼴이 되고 말았다.건국 선물 이를 기반으로 루이지애나 전역을 안정시켰으며, 이후 나폴레옹을 따라 망명한 옛 부하들, 루이 19세가 보냈다가 투항한 병력 1만에 원래부터 거주한 프랑스계 이주민, 유럽계 이민자들, 미주 한인들, 인디언들, 심지어 흑인들까지 징집해서 인구에 비해 비대한 12만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나폴레옹의 군사적 천재성에 힘입어 멕시코 원정을 성공시키는 강병이 되었다. 다만 영토에 비해 적은 군대이므로 향후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해군은 정규 해군은 없고, 홍경래 총사령관이 포섭한 미국 사략선들로 구성된 사략함대가 활동한다. 1840년 시점에서도 기함인 2천톤급 기범선 오리앙 함을 제외하면 500톤급 증기선, 범선 10여척만이 정규 신불랑 해군이고, 유사시에는 미국 해군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어 위험요소로 남아있다.
    • 아파치 기병
      나폴레옹이 신불랑 건국 과정에서 직접 격파하고 복속시킨 아파치 부족들은 나폴레옹을 위대한 전투추장으로 받들며 신불랑국 기병대로 활동한다. 하지만 나폴레옹에 반발하고 복속을 거부하는 아파치 부족들도 상당수 있다고 한다.
    • 텍사스 레인저
      원 역사에서 텍사스 레인저를 창설했던 스티븐 오스틴이 이 세계에서는 신불랑국 땅이 된 텍사스로 이민왔다가 나폴레옹의 신임을 받아 텍사스 준주 주지사가 되어 텍사스 레인저를 창설한다.
  • 인구
    본래 100만 정도였으나 건국 후 이주민이 급격하게 유입되어 순식간에 약 200만으로 2배 가까이 급증한다. 대한령 미주에서 이주한 한인계, 미합중국에서 이주한 미주계는 물론 유럽에서도 폴수국계 등이 유입되고 있으며, 정치적 박해를 피해서 자유, 평등, 박애를 내세우는 신불랑국으로 오거나 경제적 목적으로 오거나 옛 주군인 나폴레옹을 따라 오거나 모험을 찾아 오는 등 이유는 다양하다.
    • 한인
      3부에서 언급된 한인 도망자들이 상당히 많이 늘어나서 제국 인구의 10%를 차지할 정도이다. 인디언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으나, 내륙에 사는 인디언들과 달리 논을 만들 수 있는 강가에 주로 살아서 충돌은 많지는 않은 편. 1세대는 여전히 한인으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아서 재석이 방문하니 어쩔 줄 몰라하며 꿇어 엎드리지만, 이후 세대는 언어도 프랑스어, 인디언 말, 한국어가 섞인 크레올어를 구사하며 한인의 정체성이 없을 정도로 동화되었다.
    • 인디언
      원 역사의 미국인들과 달리 인디언을 제국민으로 인정하고 있다. 인디언들을 병사로 쓰고 수우족, 샤이엔족 등 주요 부족의 추장들에게는 작위를 뿌리고 수우족 추장의 딸을 후궁으로 들이기도 한다. 대부분은 충성 서약서에 서명만 하고 원래 살던 대로 살고 있다. 재석이 나폴레옹에게 장차 이주민들이 늘어나서 인디언들의 생활 공간을 잠식하게 되면서 생길 갈등에 대해서 묻자 국법으로 공정하게 결정될 것이라고 원론적인 말을 하므로, 말뿐이거나 생각이 없는 모양.
  • 경제
    아직 미주합중국도 스페인 은화를 쓰고 있는 시점이라서 건국 이전부터 루이지애나 일대에 유통 중이던 스페인 주화를 그대로 사용한다. 단위는 달러. 대신 누벨 프랑스라는 뜻으로 NF라는 글자를 덧씌워 사용한다. 세간에서는 나폴레옹 달러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국가 규모에 비해 비대한 군대를 갖고 있어서 부채가 4천만 달러에 달하고 유럽에서 나폴레옹의 악명을 모르는 미국 은행들에서 텍사스 유전을 미끼로 대출을 받아서 대륙횡단철도 건설비의 상당 부분을 충당한지라 대한에서 사업을 하루 빨리 개시하라고 독촉하고 있다.
    • 텍사스 유전
      대한에서 보내준 청나라 사천성 염정 기술자들이 1836년 텍사스 유전 개발에 성공한다.
  • 노예제
    나폴레옹의 건국 이념상 노예제를 인정할 수는 없으나 건국 이전부터 이미 루이지애나 지역에 노예와 대농장을 소유한 토호들이 많았기에 국법으로는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고 국법으로 제정하는 시도도 차단하고 있지만 각 주의 자율에 맡긴다는 식으로 하여 노예제는 사실상 아래에 나오는 노예계약제로 바뀌어 존속하고 있으며 존 칼훈이 미국에서 대사로 오는 등 노예주들과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미주합중국 남부 노예주들의 지원을 받고 있다. 하지만 노예제가 남아있는 주에서도 노예를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거나 의식주를 제공하지 않거나 가족들을 따로따로 팔아버리는 일은 국법으로 엄금하고, 해방된 노예는 정식 시민권을 부여하는 등 노예의 처우가 상당히 좋은 편이어서[61] 미국 흑인 노예들이 부러워할 정도라고 한다. 외젠이 집권한 후로는 의회에서 노예제 완전 폐지까지 논의되고 있다.
    • 쿨리
      그러나 신불랑 정부와 나폴레옹도 말로만 노예제에 반대할 뿐, 실제로는 채무 관계에 얽혀 노예나 다름없는 자유민 노동자들을 동원해 플랜테이션을 운영 중이며, 이들은 원 역사대로 쿨리라고 불린다.[62] 중국계가 다수이긴 하나 중국계만 쿨리라고 부르지는 않으며, 흑인이나 백인도 채무관계에 얽혀 강제노역을 한다면 역시 쿨리라고 불린다. 중국계 쿨리들은 100% 남성이며, 현지인 여성을 만날 수 없는 것은 물론 같이 팔려온 중국계 여성들도 다른 인종에게 창녀나 매매혼으로 팔려가기에 이들은 여자를 접할 기회가 전혀 없다. 때문에 쿨리들 사이에서는 동성 강간이 흔하게 발생하며 미국인들과 신불랑인들은 이를 보고 중국인들은 동성애를 즐기는 남색의 민족이라고 오해하게 된다.
  • 신불랑-맥고국 전쟁(1823년~1825년)
    1823년(원평 41년), 나폴레옹은 텍사스를 빼앗고 아직 취약한 신불랑국의 경제 기반을 다지기 위해, 멕시코 제1제국이 혁명의 이상을 더럽힌 것을 벌한다는 명분으로 멕시코를 침공한다. 마침 멕시코는 아구스틴 1세의 실정과 스페인 정부군 잔존세력의 준동으로 혼란 상태였으며, 프랑스 왕 루이 19세가 나폴레옹을 치려고 한 것도 개전의 원인이 되었다. 바다에서는 사략 면허를 발급해서 통상 파괴전을 펼친 덕분에 1825년 멕시코시티가 신불랑군에게 함락되고 아구스틴 1세는 이탈리아로 망명, 멕시코는 신불랑의 보호령이 된다. 하지만 아무리 나폴레옹이라도 병력이 적어 맥고국 전역을 장악하지는 못하여 여기저기서 맥고국 잔당, 스페인 왕당파, 도적패 등이 날뛰고 있다.

4.5. 미주합중국

원역사와 같은 양상으로 7년 전쟁 후 전쟁 비용 감당 문제로 영국 본국에서 세금을 늘리자 식민지인들의 반발이 일어나 보스턴 차 사건을 시벌점으로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났고 조지 워싱턴을 초대 총통으로 미주합중국이 독립했다.[63] 프랑스는 원역사처럼 미국을 지원했고, 영국은 대한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대한은 개입을 원하던 목종을 신료들이 영국 견제를 위해 방관하자고 말렸고 곧 목종이 죽는 바람에 방관만 했다고 한다. 이 역사에서는 북쪽은 영국령 캐나다가 있고, 서쪽은 그 나폴레옹이 다스리는 신불랑국이 있어 확장할 방향이 마땅치 않다. 여기에 원 역사와 다르게 인종주의 성향인 앤드루 잭슨이 당선되지 못하고 외교와 교역을 중시하는 헨리 클레이가 당선되어 연임에 성공하고 민주당으로 정권 교체 후에도 후임인 마틴 밴 뷰런 역시 확장을 지양하고 온건한 대외정책을 추구해 한동안 주변국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남부의 지지를 받는 제임스 포크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확장주의 노선을 추구하려 한다.
  • 인재 유출
    원 역사의 미국이 초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요인이 수많은 이민자들이 자신의 재능을 발휘했기 때문임을 감안하면 "확장할 곳이 없다"는 따위 정도로 여겨질 큰 피해다. 나폴레옹이 신불랑국을 건국하면서 폴란드인들을 포함해서 유럽에서 오는 이민자들은 나폴레옹의 카리스마와 혁명 정신을 따라 신불랑으로 이민하고, 심지어 모험을 찾거나 미국 내의 경쟁에서 밀려서 관료들이 신불랑국으로 이주하는 경우도 많다.[64]
  • 미영전쟁
    원 역사와 비슷한 양상으로 치뤄졌다고 하는데, 뉴올리언스 전투는 대승이긴 했지만 피해가 더 컸다.
  • 나폴레옹-먼로 공동선언
    1823년 겨울 미국의 먼로 총통과 신불랑국의 나폴레옹 황제가 공동발표한 선언, 원역사의 먼로 선언과 골자는 같지만 유럽 뿐 아니라 아시아의 초강대국, 즉 대한도 대상에 포함된다.
  • 합중국 산삼
    북아메리카 동부가 인삼의 주요 산지인 만큼 상인들이 인삼을 채취해 판매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대한산 인삼의 품질과 명성을 따라가지 못해서 후송 등에다 저렴하게 팔고 있다.
  • 한미관계
    북미 중부에 신불랑국이 건국되어 대한과 직접 영토를 접하고 있지는 않으나 상인들이 1786년 무역선을 타고 대한을 방문하면서 민간 교역부터 시작하고 이후 국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 지시로 본격적인 교역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토마스 제퍼슨 정부 때 루이스 & 클라크 사절단이 루이지애나를 거쳐 대한령 미주를 방문하여 교섭 끝에 육로를 통한 교역이 주를 이루게 된다. 고래잡이 문제로 갈등 요소가 있다.[65]
  • 남북전쟁의 가능성
    신불랑국의 존재로 인해 대륙횡단철도가 미국 남부를 거쳐 뉴잉글랜드 지역으로 올라가는 선로로 부설되게 되었고, 재석은 이 경우 남부에서 먼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남북전쟁이 아예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게 되었지만... 이는 원 역사에서 노예제가 경제적 문제 이상으로 이념적인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앤드루 잭슨의 지지기반인 개척민들은 더 넓은 개척지를 원하는데 인디언의 땅을 뺏는 것을 막고 인디언들에게 작위를 뿌려서 이들에게 고개 숙여야 하는 신불랑국의 상황을 굴욕적이라고 받아들이며, 노예제 유지를 원하는 남부 노예주들은 신불랑국의 존재를 불편하게 여기며, 여기에 노예세를 신설해서 잭슨의 지지기반을 꺾으면서 대륙횡단철도를 놓으려고 하는 헨리 클레이 행정부와 신불랑국까지 얽히면서 더 큰 전쟁이 될 가능성이 생겼다.
  • 인디언 독립국
    역사가 달라져 앤드루 잭슨이 총통에 당선되지 못하고 체로키족 추방을 중단시킨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인해 연방정부와 조약을 맺은 부족을 국외로 추방할 수 없게 되자 후에 정권교체를 이룬 제임스 포크 정부와 민주당이 이를 우회하기 위한 꼼수로 문명화된 다섯 부족인 체로키족, 크리크족, 세미놀족, 치카소족, 촉토족을 독립국으로 인정한 다음 이들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영토를 빼앗을 계획을 세운다.[66]
  • 미국-스페인 전쟁의 가능성
    신불랑국의 존재로 인해 서쪽으로의 진출이 좌절되자 타개책으로 제임스 포크 정부와 민주당의 주도로 원 역사보다 훨씬 더 빨리 쿠바를 노리는 중이다. 스페인 역시 미국을 경계하여 마지막 남은 아메리카 식민지인 쿠바를 지키기 위해 대한에게 받은 영토 판매 대금으로 쿠바의 방위를 강화한다.

4.6.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 → 중앙아메리카 연맹

원역사처럼 멕시코 독립전쟁의 혼란을 틈타 독립했으나 멕시코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이어서 멕시코의 산타 안나는 중앙아메리카를 정벌해 멕시코에 편입시킬 속셈이다. 그러나 1839년 12월 31일 연방공화국은 해산되고 중앙아메리카 연맹으로 재편되어 니카라과, 과테말라 등이 독립한다.

4.7. 아이티 공화국

원역사처럼 프랑스 대혁명의 혼란을 틈타 흑인 노예들의 봉기로 독립했고 나폴레옹 1세의 군대와 싸워 독립을 지켜냈다. 그때문에 신불랑과는 공식적인 적대관계이며 아메리카 국가회의에도 가입을 거부했다.

5. 대삼주

5.1. 그란 콜롬비아 합중국 → 그란 콜롬비아 연맹

원 역사처럼 시몬 볼리바르가 지도한 독립운동으로 건국되었으나, 대한 태황 원평제는 멕시코와 마찬가지로 국가로 승인하지 않고 있다. 볼리바르 사후 해체되어서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 베네수엘라, 에콰도르가 되었으나 나폴레옹의 중재로 그란 콜롬비아 연맹을 결성하고 나폴레옹이 만든 아메리카 국가 회의의 회원국이 되었다.

5.1.1.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

그란 콜롬비아의 해체 후 건국했다.

5.1.2. 에콰도르

그란 콜롬비아의 해체 후 건국했다. 갈라파고스 제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나 아메리카 국가연합의 맹주인 나폴레옹부터 대한을 지지하고, 이주민을 보냈더니 하와국 순찰사들에게 두들겨맞고 쫒겨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5.2. 브라질 제국

남아메리카의 맹주를 자처해 나폴레옹이 주도하는 아메리카 국가연합과는 비우호적인 상태이다.

5.3. 영귀(英龜)제도

중종이 안용복을 보내 갈라파고스땅거북들을 데려오면서 대한에 알려졌다. 무주지여서 해적의 소굴이 되어있었는데, 대한 목종이 결단을 내려 함대를 보내 해적을 전부 쓸어버리고 하와국에게 관리를 맡긴다.[67] 하와국왕이 매년 한 차례 전사들을 보내 그 해 잡을 분량의 땅거북을 잡아와 등딱지로 잔치용 솥 등 사치품을 만든다.1835년 원역사처럼 영국 탐험선 비글 호가 도착하여 연구 도중 하와국에서 온 거북 사냥대와 접촉하게 된다.

신생국 에콰도르가 독립 이후 영유권 주장을 하고 개척민을 보내기도 했으나 하와국 관원들에게 바로 참교육당하고 쫒겨나는 일이 반복되고, 누벨프랑스 주재 대한 공사관과 에콰도르 공사관도 계속 투닥거리고 있으나 나폴레옹도 이 문제는 대한 편을 들고 있다.

6. 대상주

6.1. 알제리

프랑스 국왕 루이 19세가 국내의 자유주의자들과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이 벌인 1830년 7월 봉기1832년 6월 봉기를 진압하느라 외부로 군사력을 투사할 겨를이 없어 일단은 프랑스의 침공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가 수에즈 운하 공사의 걸림돌인 바르바리 해적 토벌을 위해 알제리 침공의 필요성을 느끼던 중 원역사와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당시 알제리에 진 식량값 상환 문제로 프랑스 대사와 싸우던 알제리 태수가 프랑스 대사를 파리채로 때린 일이 구실이 되어 루이 19세가 전면침공하면서 시간차만 있을 뿐 원역사대로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6.2. 이집트

원역사처럼 오스만이 임명한 이집트 총독 메흐메드 알리가 자립하여 사실상의 독립국이 된다.

6.3. 모로코

프랑스의 위협 때문에 알제리를 지원하였으나 프랑스가 모로코까지 공격해 전쟁에 패배하며 알제리에 지원하지 않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는다.

7. 오세아니아

7.1. 신홀란도

3부에서 영국이 개척을 시작한 이래 4부 시점에서는 호주 해안 지역은 전부 영국 식민지가 들어섰고 아직 내륙 진출은 안한 듯. 원역사와 달리 죄수보다는 자코바이트 같은 정치적 추방자나 일반인 개척민의 인구가 더 많다. 개척을 네덜란드령 바타비아와 가까운 북서부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총독부 소재지는 여전히 북서부 조지타운이다.

7.2. 신질란도[68]

원역사와 달리 하와국 노예사냥부대가 남태평양을 들쑤시고 다닌데다 대한이 북태평양에서 유럽, 미국의 포경을 금지하면서 포경선들이 남태평양으로 몰린 나비효과로 남태평양 여러 섬들의 정세가 불안해졌고, 이에 마오리족 추장들이 스스로 영국과 조약을 맺고 영국 영토가 된다. 마오리족들이 영국군에 복무하는 대신 부족 자치와 토지 소유가 허락되는 등 원역사보다는 더 나은 조건으로 조약을 맺었다.

7.3. 나오에로 → 대한령 나오도

원역사와 달리 하와국 노예사냥부대 출몰 때문에 유럽 교역상에게서 구식 수석총을 사들여 무장하는 수준까지는 되어 있다. 1841년 1월 대한 순해국 탐사선을 타고 온 알렉산더 폰 훔볼트와 제자들이 이 섬을 조사하다가 인광석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고 돌아와 재석에게 보고하고, 재석은 3부에서부터 그렇게 찾았던 나우루가 사실 나오에로였다는 것에 허탈해하면서 남부통제영 함대를 보내 나오에로를 복속시도록하여 나오에로는 대한령 나오도가 되었으며 인근 부아나바 역시 복속하여 대한령 부아도가 되었다.

7.4. 부아나바 → 대한령 부아도

원역사의 키리바시 바나바섬. 나오에로가 대한에 복속하는 과정에서 인근 부아나바도 대한에 복속하여 대한령 부아도가 되었다.

7.5. 미크로네시아

대한에서는 섬들이 별처럼 흩어져 있다고 하여 초성해라고 부르며, 나오도와 부아도가 대한에 복속하여 하와국의 습격에서 벗어나면서 공물로는 돌덩이만 바치는 것을 보고 캐롤라인 제도, 마셜 제도의 추장들이 단체로 대한을 찾아와 흥선제에게 스스로 복속을 청하여 대한령이 된다.


[1] 요동주 → 2도(요심도, 요동도), 부여주 → 3도(발해도, 부여도, 삼강도), 연해주 → 3도(연해도, 연흑도, 현토도), 속말주 → 1도, 영락주 → 1도[2] 흑룡강 이북 외만[3] 레나 강 이동 이르쿠츠크 주 극동 연방관구[4] 워싱턴 주, 브리티시 컬럼비아[5] 네바다, 유타 주[6] 남변(累蓀) → 누손주[7] 본래 작가가 흥녕(興寧)으로 설정했으나 4부 364화에서 설정을 변경하여 흥선으로 수정했다.[8] 즉, 대명공은 대명동 안에서는 폐하라고 불리고 있을 것이다.[9] 여기서도 절반 이상이 대남도 출신이다.[10] 다만 한 독자가 문의한 것에 대해 작가가 대답한 바에 따르면, 과거 급제자의 출신지 집계는 응시 지역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실제 출신지가 외지였어도 내지에서 응시했으면 내지 출신으로 집계된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 출생지를 기준으로 하면 북구주인들은 대부분 영남에 유학하여 영남에서 응시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므로 순위가 뒤바뀔 수 있다.[11] 사실 이는 재석의 지식수준이 너무 대단해서 경연관들이 부담스러울 지경인 것도 한몫했다.[12] 실상은 재석이 중종 건흥제의 몸에 들어가서지만 겉으로 보았을 때 유주에서 사실상 유배되있던 건흥제의 황자 시절 변화에 큰 지점이 올렝카와의 만남으로 알려져있고 이후 상희가 중전으로 들어오며 후궁의 신분으로 밀려났을 때에도 불만없이 받아들이며 소란을 일으키지 않았기에 성리학적 관점으로 보아도 올렝카는 유주인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조선 선비들에게도 현모양처로써 높은 평가를 받았다. 때문에 3부 시점에서 아무도 '마트카'를 별다른 문제로 만들지 않았고 그대로 관습으로 굳어져 4부에 시점에 이른 상황이다.[13] 원역사의 화성과 다르게 둘레 10리의 팔각형 요새로 폭 60m의 해자인 축만제를 가지고 있다.[14] 군관은 공작 깃털, 사졸은 꿩 깃털.[15] 한제국건국사에 나오는 갑식 보총과는 작동 원리가 다르다. 그래도 이 명칭을 사용하기 위해 슈타인호프 작가가 친구인 윤민혁 작가에게 허락은 받았다고 한다.[16] 대한 측에서야 후금의 대칸이 누가 되는 별다른 손익이 없기는 하나 청나라가 후금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경계할 문제이다.[17] 개방적인 성향인 광덕제가 유독 여성 의무교육에는 반대했던 걸 두고 일부 독자들 사이에서 '광덕제 미래인 빙의자설' 떡밥과 엮어 미래에 벌어진 젠더갈등들을 겪고 학을 떼 그런 거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었다.[18] 김조순이 정체를 숨기기 위한 필명이다[19] 김좌근이 청나라 사기꾼에게 속아서 구입한 가품 쌍고검도 이 컬렉션에 추가될 예정이다.[20] 곱게 간 얼음이나 눈에 꿀을 뿌린 간식.[21] 과거 열기구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일본인들이 이를 요괴로 여기며 공포에 질린 것과 달리 열기구 자체는 후송 관군은 물론 태평천국에서도 많이 쓰고 있기에 '자력추진이 가능한 열기구라니 대단하다' 정도의 반응을 보인다.[22] 이 에피소드가 나갔을 때 문피아 댓글과 대역갤에서 많은 독자들이 세계 최초로 증기기관을 만든 대한이 아직도 프로펠러를 못만들어서 영국에서 수입할 정도로 기술 발전이 정체되었느냐, 재석 없으면 곧 퇴보해서 망할 나라냐고 분노하는 의견을 달아서 작가가 기계공학은 영국보다 좀 뒤쳐지는 대신 화학은 대등하고 생물학은 영국보다 오히려 앞선다는 내용을 후속 연재분에 넣어서 겨우 수습했다.[23] 재석이 광덕제가 미래인이 아닐까라고 의심하게 된 또다른 근거로, 다칭유전에 대해서 듣기만 하고 깊이 파묻혀 있어서 1960년대가 돼서야 캐낼 수 있었다는 것을 모른게 아닐까라고 추정한다.[24] 원 역사와 달리 신불랑 수도인 뉴올리언스를 잇고 미국 남부를 통해 뉴잉글랜드 지역으로 올라가게 될 것이라, 작중 역사가 또 대격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25] 명분상으로도 가장 최적인 곳. 다른 후보로는 서울 남산, 구월산, 금강산도 꼽혔지만 남산은 수도와 너무 가까워서, 구월산은 덕성도의 성지여서, 금강산은 선대 태황이 사고를 당한 장소이므로 기각되어 결국 백두산으로 결정되었다.[26] 환웅이 하늘에서 3천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으로 내려온 것을 유래로 하여 고조선, 삼한, 발해, 고려를 계승하는 대한 역시 수행원을 3천으로 해야 한다는 대신 및 관료들의 강력한 주장으로 결정되었다.[27] 이는 곧 태산이 있는 화북을 수복하겠다는 국가 목표를 포기했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에 추후 후송의 정세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28] 하와인들은 묘노를 안 쓰지만 한인 농장주들이 부렸다. 하와인들의 피지컬이 피지컬인지라 가장 쉽게 진압되었다.[29] 조홀국은 내부 반란 진압 경험이 많아 하와국 다음으로 쉽게 진압했다.[30] 이쪽은 흑인 노예들 일부는 주인들을 돕고 일부는 배상제회에 포섭되어 흑인들끼리도 싸웠다. 주인들을 도운 흑인들은 자유인으로 해방되고 상금도 받는다.[31] 대한 본국에서는 묘노들의 12%인 2만 4천명이 반란을 일으켜 대한 군경 전사자 300여명, 대한 민간인 사망자 1400명, 재산피해 5백만 냥, 그 외 속령들까지 합치면 약 20만의 묘노가 반란을 일으켜 10만명 이상이 사살된다. 일본에서도 인명피해 7000여명을 입었다.[32] 단, 영국군 파병 자체는 홍적의 난 이전에 통과한 것이다. 그 때는 왜 먼 나라 반란에 군대를 보내야 하냐는 반발이 많아 55표 차이로 간신히 통과했으나, 홍적의 난 이후에 투표했으면 여론이 뒤바뀌어 250표 정도 차이로 통과했을 거란다.[33] 재석이나 광덕제와 같은 회귀자라는 떡밥이 뿌려져있는 상태다.[34] 차이점이 있다면 당시 명나라 관군보다 후송 관군이 더 썩어있다는 점. 양응룡의 난 당시 명군도 조선 의병들이 실망했을 정도로 부패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후송군은 더 심해서 외국군대를 끌어들여 무고한 양민을 습격해 포로로 둔갑시켜 팔아먹고 자기네 지역이 아니라고 타 지역민들에게 무고로 누명을 씌우는 등 단단히 맛이 간 상태이다.[35] 북구주 거주 한인들은 경상도로 가서 공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36] 대한의 국기인 태극기를 기반으로 하와이 제도를 이루는 일곱 개의 큰 섬과 남십자성, 왕실의 본관인 하와이섬의 세 화산 마우나케아, 마우나로아, 후알랄라이를 형상화했다.[37] 하진교의 외숙부 카마우아와와 국사 윤호원은 하와첨사진으로 피해 태황의 도움을 받자고 제안했으나, 하진교는 시간이 오래 걸리며, 그 틈을 타 카네카폴레이가 어떤 암투를 벌일지 모르고, 대한에서 배운 무인정사계유정난의 사례를 들어 최대한 빨리 본궁으로 들이쳐 사태를 정리하는 방법을 선택했다.[38] 다만 각 성을 점유한 도통사들의 권한이 봉건군주수준이라 봉건제도도 혼재되어 있다.[39] 대한군은 재석이가 민사작전의 중요성을 철저하게 교육시켜서 넘어가지 않았으나, 지원병으로 구성된 미군은 인종차별과 종교적 열망과 약탈 욕심 때문에 알면서도 넘어가 아예 학살과 강간을 즐기는 지경이고, 유구군은 전공과 포로 욕심에 혈안이 된 후송관군이 제대로 정보를 알려주지 않아 무고한 민간인 마을 토루에 보병만으로 진압하다가 초전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영국군은 자기들을 환영하는 마을 촌장의 딸을 병사들이 윤간하고, 이에 촌장이 처벌을 요구하자 영국군은 형식적으로나마 문제를 일으킨 병사들에게 태형을 집행하려는데 오히려 후송군에서 더 막나가 감히 천병과 그 천병을 지원하러 온 군대에게 대들었으니 괘씸하단 이유로 대놓고 촌장을 매질하여 모욕을 주자 눈이 뒤집힌 촌장이 이웃 마을들까지 불러모아 영국군과 후송군을 습격하여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40] 예수불이 흘린 피와 예수불이 말세에 세상을 심판할 불을 상징한다고 한다.[41] 하지만 운남으로 쫓겨난 이후로는 황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황태자가 호족에게 암살당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등 연맹왕국 수준으로 떨어졌다. 전제군주정의 탈을 쓴 연맹왕국.[42] 후송 관군과 태평천국군 모두 서나라의 아편상인을 보기만 하면 죽여버리고 아편을 빼앗아가버렸기 때문. 이 때문에 청나라에게 같이 태평천국과 후송을 정벌하자는 제안까지하지만 서나라를 같잖게 여기는 청나라에게 씹힌다.[43] 대신 그 자리는 청황실에 신자가 많은 일반 불교 사원과 후금의 국교이자 청에서도 우대받는 천주교 성당이 차지하였다.[44] 청나라와는 달리 몽골 귀족들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 각지에 영지까지 가진 대영주들이 존재하여 봉건제도 섞여있다.[45] 대한은 나폴레옹이 완충지대였던 루이지애나 지역에 신불랑국을 건국하면서 새로운 안보 환경에 접어들었고, 청은 귀주와 사천을 획득하면서 국력을 신장했지만 주적인 후송 역시 양광 지역을 획득해서 여전히 국운을 걸고 대치 중이다.[46] 당장 대한의 번국인 조홀국과 술루국에 각각 15만명, 4만명 정도의 일본인이 살고 있으며 건주 양국의 왜인팔기 역시 존속되고 있다. 왜군 용병의 명성 역시 여전해 누벨프랑스에서도 고용하려 할 정도이다.[47] 심지어 이중 1만은 막부 2중대나 다름없는 군마 마츠다이라번의 병력이니 실질적으로는 2만에 불과하다.[48] 특히나 원역사에서 존왕운동과 확장주의의 필두였던 조슈 번은 북구주와의 밀무역으로 얻는 수익 덕분에 친한파 번이 되었다고 한다.[49] 원역사에서는 도요토미 잔존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거점으로 지어졌기에 오사카 성에 밀리지 않는 규모로 만들었지만 본작에서는 도요토미가 일찍 몰락하였기 때문.[50] 미토 번은 히로시마 번에 밀려난 것으로도 보이나 함께 고산케로 묶여 언급되기도 하는 등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것으로 보인다.[51] 황제국을 칭해봤자 주변의 황제국들에게서 조롱을 받는 상황이었고, 오히려 번국이 아니라 차라리 대한의 직할령이 되면 대한에서 과거시험도 볼 수 있고 관세를 안 무니까 더 좋지 않냐는 여론도 상당히 있다.[52] '아모인'이라고 하면 대한에서는 원주민들을 지칭하지만 일본에서는 원주민은 에조라고 부르고 아모인은 일본에서 이주해서 아모국 호적으로 옮긴 일본인들을 지칭한다.[53] 일본에서는 기본세율 70%에 잡세도 있지만 아모국에서는 기본세율 50%만 내고 잡세도 없다.[54] 다만 카자흐 등의 타민족 출신이여도 북방계면 일단 준가르인으로 취급한다.[55] 고위에 오른 인물은 일본인 급으로 취급된다.[56] 다만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왕자 한 명을 친영파로 포섭하려 했으나 그 왕자가 콜레라로 죽어버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57] 작중에선 트라팔가 해전을 대체하게 된다.[58] 달리 말하면 나폴레옹은 대한에서 유방에 비유될 정도로 고평가받는 외국 군주라는 뜻이다.[59] 나폴레옹도 이를 의식하는지 대륙횡단철도를 미국에서 지척인 세인트루이스가 아니라 뉴올리언스로 연결하고자 한다.[60]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한 정서에 밝은 클로드 홍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61] 이건 나폴레옹이 개선한 게 아니고, 본래 부르봉 왕조 시절부터 있었던 법이라고 한다.[62] 플랜테이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현실에서 노예제가 없어진 후의 플랜테이션도 작중에서 묘사되는 것과 크게 다르진 않은 편이다. 오히려 국가가 감독하니 작중 시대에서는 선진적이라고 평가할 여지가 있긴 하다.[63] 여기서는 합중국 국가원수인 'president'를 '대통령'이 아닌 '총통'으로 번역하는데 원 역사에서 대통령이란 단어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한 거지만 여기선 대한이 일본을 거치지 않고 먼저 합중국의 존재를 인지하였기에 차이가 생긴 것. 재석은 총통이란 단어를 들을 때마다 원 역사의 그 인물이 떠오르는지 속으로 움찔거린다.[64] 유능하더라도 정치가 체질이 아니라서, 정치하는 능력만 떨어져서, 운이 안 좋아서 경쟁에서 밀려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65] 개변된 역사로 인해 기술발전은 빠르게 이루어졌지만 석탄•석유로의 연료 전환이 늦어 고래 기름을 얻으려는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자 고래잡이가 기존 역사보다 크게 증가하면서 동양 바다까지 침범하는 것이다.[66] 다만 이들을 형식적으로라도 국가로 인정한다는 것은 이들이 미국의 침략을 받았을 때 신불랑, 대한 등에 지원을 요청해도 내정간섭이 아니라는 의미와 같기에 독자들은 한 치 앞만 보고 그 이상은 보지 못한 미국의 자충수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67] 하와국에선 영토를 하사한 것으로 여긴다. 하와국이 대한의 충실한 번국인 때는 실질적으로는 크게 다를 바 없으니 문제될 일도 없지만, 만약 훗날 하와국이 독립한다면 영토 분쟁이 생길수도 있다.[68] 新秩欄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