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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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fff,#1c1d1f> | <rowcolor=#09003e,#fff>한국방송공사 韓國放送公社 Korean Broadcasting System | }}} | ||
공정과 혁신으로 새로운 KBS | |||||
<colbgcolor=#2282b9><colcolor=#fff> 국가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
설립 | 1973년 3월 3일([age(1973-03-03)]주년) | ||||
개국 | <colbgcolor=#2282b9><colcolor=#fff> TV | 1961년 12월 31일([age(1961-12-31)]주년) | |||
라디오 | 1927년 2월 16일([age(1927-02-16)]주년) | ||||
DMB | 2005년 12월 1일([age(2005-12-01)]주년) | ||||
인터넷 | 2010년 3월 3일([age(2010-03-03)]주년) | ||||
본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공원로 13 (여의도동) | ||||
<nopad> | |||||
채널 | TV | KBS 1TV KBS 2TV | |||
라디오 | KBS 제1라디오 KBS 제2라디오 KBS 제3라디오 KBS 1FM KBS 2FM KBS 한민족방송 | ||||
DMB | U-KBS STAR U-KBS HEART U-KBS MUSIC | ||||
인터넷 | KBS NEWS D | ||||
국제 방송 | TV | KBS 월드 KBS 코리아 | |||
라디오 | KBS 월드 라디오 | ||||
링크 | | | | | | ||||
링크 | 실시간 | KBS ON AIR[1] 장애인 서비스[2] 시청자센터 시청자위원회 | |||
노동 조합 | 언론노조 KBS본부(교섭대표노조) KBS 노동조합(소수노조)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기업 정보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2282b9><colcolor=#fff> 대표자 | 박민 | |||
주요 주주 | 대한민국 정부: 100% | ||||
법인형태 | 공공기관 / 국영방송 (1948~1973) 특수법인 / 공영방송 (1973~) | ||||
업종명 | 지상파 방송업 | ||||
상장여부 | 비상장기업 | ||||
기업형태 | 영조물법인체, 공직유관단체 | ||||
직원 수 | 4,041명(2023년 12월 31일 기준) | ||||
자본금 | 2,061억 9,158만 4,736원(2023년) | ||||
매출액 | 연결: 1조 6,623억 1,981만 7,819원(2023년) 별도: 1조 3,865억 1,568만 871원(2023년) | ||||
영업이익 | 연결: -507억원(2023년) 별도: -645억원(2023년) | ||||
순이익 | 연결: -506억원(2023년) 별도: -553억원(2023년) | ||||
자산총액 | 연결: 1조 3,640억 7,577만 9,327원(2023년) 별도: 1조 2,784억 2,398만 5,010원(2023년) | ||||
부채총액 | 연결: 6,418억 7,579만 80원(2023년) 별도: 5,774억 1,377만 4,845원(2023년) | ||||
자회사 | KBS 미디어, KBS N, KBS America, KBS Japan, KBS 비즈니스, KBS 아트비전, KBS 시큐리티, KBS미디어텍, e-KBS, 방송차량서비스, KGCS 문화산업전문회사, 몬스터유니온 | }}}}}}}}} |
1. 개요2. 상징3. 경영 철학4. 마케팅5. 역사6. 사옥7. 특징8. 임직원9. 채널
9.1. 지상파 텔레비전 방송9.2. 지상파 라디오 방송9.3. PP(KBS N)9.4. 인터넷 방송9.5. 유튜브 채널9.6. 실시간 스트리밍 및 VOD, AOD9.7. 팟캐스트
10. 방송 현황11. 간행물12. 평가13. 논란 및 사건 사고14. 노동조합15. 교통편16. 메일 주소17. 여담18. 관련 문서19. 둘러보기[clearfix]
1. 개요
<nopad> |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 |
오늘을 담고 내일을 열다[3] |
방송법 제4장(한국방송공사)
제43조(목적)
①공정하고 건전한 방송문화를 정착시키고 국내외 방송을 효율적으로 실시하기 위하여 국가기간방송으로서 한국방송공사(이하 이 章에서 “公社”라 한다)를 설립한다.
②공사는 법인으로 한다.
<후략>
제43조(목적)
①공정하고 건전한 방송문화를 정착시키고 국내외 방송을 효율적으로 실시하기 위하여 국가기간방송으로서 한국방송공사(이하 이 章에서 “公社”라 한다)를 설립한다.
②공사는 법인으로 한다.
<후략>
대한민국 대표 공영미디어
공식 홈페이지 문구
한국방송공사(Korean Broadcasting System, KBS)는 대한민국의 최대 규모 방송사로 공영방송, 지상파 방송을 운영하며, 자회사를 통해 케이블/위성/IPTV 채널을 운영한다. 본사 주소는 (우)07235,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공원로 13 (여의도동).[4] EBS처럼 메인 방송 채널이 1TV, 2TV 두 개로 나뉘어져 있으며 한국에서 3개 이상의 무선국을 운용하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5][6]공식 홈페이지 문구
2001년 3월 3일[7] 이후 약칭인 한국방송으로 부르고 있으며#, 정식 명칭은 한국방송공사.[8] 별명으로는 크브스, 케백수 등이 있다.
2023년 3월 3일 창립 50주년을 맞이하였다.
2. 상징
2.1. 로고
KBS(한국방송공사) 로고 변천사 (사표-社票) | ||
1세대 로고 (1961년~1973년) | 2세대 로고 (1973년~1984년) | 3세대 로고 (1984년~현재) |
TV 채널 전용 1세대 로고 (첫 번째) (1961년~1972년) | TV 채널 전용 1세대 로고 (두 번째) (1972년~1973년) |
- 1세대 로고 (1961년 12월 31일~1973년 3월 1일): KBS가 국영방송이었던 중앙방송국 시절 사용한 로고. 1973년 당시 해당 로고가 적용된 간판이 달린 KBS 중앙방송국 건물 모습 묘하게 조선중앙TV 로고를 닮았다.
한편 TV 채널에서는 아예 다른 형태를 가진 로고를 사용했다. 로고는 TV 화면 우측 하단에 표시되었다. 첫 번째 로고가 적힌 ID카드 모음[9], 두 번째 로고가 적힌 ID카드 모음, 두 번째 로고가 적용된 당시 방송 화면, 두 번째 로고가 적용된 ID 영상
- 2세대 로고 (1973년 3월 2일~1984년 10월 28일): 문화공보부 산하 국영 중앙방송국에서 현재의 한국방송공사로 개편되면서 쓰게 된 로고. KBS 무대부에 있었던 변승우가 디자인했다. 억센 자형은 약동하는 힘과 진취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1984년에 아래의 CI가 공개되었지만, 1985년 8월 15일까지는 혼용된 것으로 보인다. 예시 1, 예시 2, 예시 3[10], 예시 4[11] 현재도 일부 지역방송국에서 사용중인곳도 있다. 대표적으로 KBS전주방송총국.[12]
- 3세대 로고 (1984년 10월 29일~현재): KBS의 최장수 CI. 디자인포커스 대표였던 정준 주도로 만들어졌다. 글씨체는 1960년에 나온 글꼴인 Handel Gothic[13]을 약간 수정한 것이다. 1984년 10월 29일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태극모양 심벌마크는 1985년 11월 4일 통합로고 추인과 동시에 적용되었다.
뉴스 프로그램에 한해 1997년 1월부터 1999년 9월까지는 오른쪽 하단에 회색의 심볼이 있는 워터마크를 사용하였다가 1999년 10월부터 2003년 11월까지는 심볼마크가 황토색으로 주로 사용되었고, 2003년 12월 1일 이후로는 모든 방송에 심볼마크는 뗀 채로 글씨로고만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고 심볼마크가 공식적으로 폐기된 건 아니고, 홈페이지와 사옥 건물, 촬영용 차량 등에는 여전히 파란색과 황토색으로 당당히 붙어있다.[14] TV에서는 간간히 파란색으로 간접적으로라도 나오지만 이전에 비해서는 등장빈도가 굉장히 적다. 이처럼 몇가지 색이 존재하지만 공식적인 색깔은 파란색. 선 개수도 미묘하게 다를때도 있다. 4선과 6선이 있는데, 4선은 방송 타이틀 등에서 쓰였고 6선은 인쇄물 등에 사용되었지만, 2013년 8월에 개편하면서 6선으로 고정했다. 이때 색깔도 파란색으로 고정했다. # 문화방송체처럼 한글 글씨체도 있는데[15] 이 글씨체는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로고 표기로만 사용하였으나,[16] 2001년 KBS 한국방송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자막의 '제작'에 로고 표기로 TV에 등장하였으며, 이후 2012년부터 TV에서 NEXT 영상, ID영상, 홈페이지 등에서 여러가지로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현존하는 방송국 CI들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쓰이고 있는 CI다.[17] 여담이지만 이 로고는 원래 디자이너 정준이 디자인한 서울 올림픽 로고 후보작 중 하나였고, 낙선한 이후 KBS가 주워간 것이다. 참고로 이 대회에 당선된 양승춘 디자이너는 이후 SBS의 초대(初代) 로고를 디자인했다.
2.2. 마스코트
KBS의 통합 마스코트 Kebit(케빗) | KBS2의 옛 마스코트 K2(동글이) |
- KBS의 통합 마스코트 Kebit(케빗): 출처 voozclub에서 만들었다.(포트폴리오)[18] 지구로 내려온 외계인이다. 디자인의 호불호가 꽤 많은 편으로, 루리웹에 올라온 글에서 댓글창을 보면 알겠지만 난장판이다.
동글이 다시 데려와이 때문인지 초창기에만 많이 쓰이고, 양승동 사장 취임 이후에는 올림픽 기간이나 몇몇 ID 등을 제외하면 거의 방송에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2024년 총선에서 간만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잘 활용하고 있는 편이다. 게다가 처음으로 AI로 제작된 캐빗의 목소리도 공개되었다.
- KBS2의 옛 마스코트 K2(동글이): 다들 정확한 이름을 몰라서 방송 마니아들 사이에서 '원탱이'라고도 불리었는데 KBS 본사에서 확인된 바로는 정식 이름은 K2다. 그런데 9년 전에 나온 KBS 스테이션 ID에 대한 홍보지에는 공이라고 쓰여있다.
KBS 2TV에서 2003년 6월, '젊은 채널' 이라는 슬로건을 도입하며 함께 등장한 마스코트로, 아르헨티나 방송 텔레페에서 1994년부터 2001년까지 쓰인 마스코트와 비슷하다.#[19]
2015년부터는 방송 안내나 SNS 페이지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쓰이지 않고 있으며, 이 마스코트에서 팔다리를 없앤 모습의 노란 공 디자인은 간간히 쓰이고 있었다.
그리고 2016년 7월 15일 새 마스코트인 케빗에게 대를 이어달라는 말과 함께 13년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현재는 자사의 유튜브 채널인 깔깔티비에서 약간 변형된 모습으로 채널의 마스코트 노릇을 하고 있다.
3. 경영 철학
3.1. 기업 정신
1973~2003[20]- 사훈
품위있는 방송, 능률적인 경영, 협조 속의 단결[21]
1992
- 방송이념
문화의 샘터, 겨레의 길잡이[22]
- 경영목표
믿음주는 방송, 앞서가는 기술, 함께하는 경영
- 인재상
봉사하는 방송인, 탐구하는 창조인, 서로돕는 협동인
1993~1994
- 방송이념
인간 사랑, 자연 사랑, 나라 사랑 - 그린정신
2015~2019
- 비전
가장 신뢰받는 창조적 미디어
- 미션
TV를 넘어! 세계를 열광시킨다!(Beyond TV! Rock the World!)
- 핵심가치
우리의 중심에는 시청자가 있다: 공정, 혁신, 열정, 소통
2019~2022
- 중장기 목표
대한민국 대표 공영미디어 KBS: 신뢰, 창의, 혁신
- 5대 세부목표
독보적 신뢰, 압도적 영향력, 콘텐츠 도달률 강화, 글로벌 미디어로 변화, 창의적 조직으로 변화
2023~
- 중장기 목표
공영방송 50년, 국민의 KBS로 거듭나겠습니다
- 5대 핵심비전
개방, 신뢰, 안전, 품질, 다양성
3.2. 슬로건
3.2.1. TV
3.2.1.1. 1993년~2002년
- 좋은 방송 밝은 세상[23]
3.2.1.2. 2003년~현재
- 한국인의 중심채널[24]
- 젋은 채널[25]
- 사랑하기 때문에[26]
- Beyond the TV! Rock the World![27]
- 다함께 KBS2[28]
- TV는 2TV가 재미있습니다[29]
- TV는 2TV, 재밌다[30]
- 함께하는 평화 함께여는 미래[31]
- 오늘을 담는 창[32]
- 내일을 여는 빛[33]
- Digital · Disaster · Depth[34]
- 오늘을 담고 내일을 열다
3.2.2. 라디오
3.2.2.1. 1970년대
3.2.2.2. 1980년대
- 슬기로운 생활의 벗[37]
3.2.2.3. 1993년~2002년
- 좋은 방송 밝은 내일[38]
3.2.2.4. 2003년~현재
3.3. 방송지표
<rowcolor=#fff><colbgcolor=#2282b9><colcolor=#fff> 연도 | 문구 | <colbgcolor=#2282b9><colcolor=#fff> 연도 | 문구 |
1986년 | <colcolor=#2282b9> 하나로 세계로 미래로 # 우리의 1년 세계의 10년 | 1987년 | <colcolor=#2282b9> 믿는 사회, 밝은 내일, 세계와 함께 # |
1988년 | 소중한 가정, 건강한 사회, 행복한 나라 | 1989년 | 인간화, 민주화, 국제화 |
1990년 | 인간화, 민주화, 세계화 - 21세기를 준비한다 # | 1991년 | 환경을 지킵시다 # |
1992년 | 우리의 선택이 우리를 살린다 # | 1993년 | 새로운 출발 - 국민의 힘을 모읍시다 # |
1994년 | 국민과 함께 세계로 # 2TV | 1995년 | 광복 50주년 - 새 반세기의 출발 |
1996년 | 21세기 앞으로 5년, 국민과 함께 KBS가 열어갑니다 1TV | 1997년 | KBS 50년, 새로운 반세기 국민과 함께 1TV 2TV |
1998년 | 경제위기 극복, 국민과 함께 KBS가 앞장섭니다 | 1999년 | 21세기가 눈앞에, 다시 일어서는 한국 1TV 2TV KBS국민제안 제2의 건국, 힘차게 새롭게 |
2000년 | 벽을 넘어서 화합의 시대로 1TV(오전) 2TV(오후) | 2001년 | 디지털 KBS, 희망을 함께 나눔을 함께 1TV(오후) 2TV |
2002년 | 2002 코리아, 하나되어 세계로 미래로 2TV | 2003년 | 새출발 대한민국 화합의 시대로 1TV 2TV |
2004년 | 함께 가자, 대한민국! 1TV 2TV | 2005년 | 국민감동 KBS 1TV |
2006년 | 아시아의 창 KBS 2TV | 2007년 | 한국인의 희망 KBS 1TV 2TV |
2008년 | 하나되는 대한민국 함께하는 KBS | 2009년 | 공정·공익 KBS 2TV |
2010년 | 희망 2010 대한민국의 힘 KBS 2TV | 2011년 | 시청자와 함께! 디지털 KBS 1TV |
2012년 | 하나되는 대한민국 글로벌 KBS 2TV | 2013년 | 글로벌 KBS 행복한 대한민국 |
2014년 | 창의와 신뢰로 미래를 여는 KBS 1TV 2TV | 2015년 | 광복 70년, 미래 30년, 대한민국 100년의 드라마 # |
2016년 | 청년 대한민국 1TV 2TV | 2017년 | 희망 2017, KBS가 함께 합니다 1TV 2TV |
2018년 | 희망과 감동, KBS가 함께 합니다 1TV 2TV | 2019년 | 함께하는 평화, 함께여는 미래 1TV 2TV |
2020년 | 2020 새로운 시작 - 공정·창의·혁신 KBS 1TV 2TV | 2021년 | 수신료의 가치를 더욱 높이며 국민의 방송으로 거듭나겠습니다 1TV 2TV |
2022년~ 2023년 | 신뢰로 여는 통합의 창 KBS 1TV 2TV | 2024년 | 공정과 혁신으로 새로운 KBS 1TV 2TV |
3.4. 사가
자세한 내용은 KBS 사가 문서 참고하십시오.KBS 사가
김수철 작사ㆍ작곡
밝은 미래를 함께 여는 우리는 KBS
새 시대 새로움으로 이 세상을 가득 채운다
우리의 진실한 열정은 세계를 밝혀주리라
우리는 KBS 사랑과 정의를 전해주리라
우리는 KBS 기쁨과 행복을 함께하리라
KBS 한국방송
맑은 지혜가 샘 솟는다 우리는 KBS
사랑과 믿음이 모여 동서남북 하나가 된다
우리의 인류애로 온 누리엔 평화의 꽃 피어난다
우리는 KBS 희망찬 미래를 열어가리라
우리는 KBS 이 세상 환하게 비춰주리라
KBS 한국방송
김수철 작사ㆍ작곡
밝은 미래를 함께 여는 우리는 KBS
새 시대 새로움으로 이 세상을 가득 채운다
우리의 진실한 열정은 세계를 밝혀주리라
우리는 KBS 사랑과 정의를 전해주리라
우리는 KBS 기쁨과 행복을 함께하리라
KBS 한국방송
맑은 지혜가 샘 솟는다 우리는 KBS
사랑과 믿음이 모여 동서남북 하나가 된다
우리의 인류애로 온 누리엔 평화의 꽃 피어난다
우리는 KBS 희망찬 미래를 열어가리라
우리는 KBS 이 세상 환하게 비춰주리라
KBS 한국방송
4. 마케팅
4.1. 로고송
KBS 노래 (1974년~1993년)1974년 3월 1일부터 라디오 시그널로 쓰기 위해 노래보다는 가벼운 느낌의 곡으로 만들어 쓴 곡이다. 일종의 로고송이다. 1970년대에 TV에도 중간중간에 나왔던 것으로 보이며, 1984년부터 1993년까지 KBS 9시뉴스 시작전 ID로고송으로 멜로디 일부가 나온 적이 있었고, 그 때까지만 해도 방송시작 고지에서 이 음악이 나왔으며 1992년과 1993년 총 두 해에 걸쳐서 2TV ID 로고송으로도 쓰이기도 했다.[42] 2005년까지 KBS 사회교육 제1방송(972kHz. 현재 KBS 한민족방송)의 오후 1시 오프닝때도 이 음악이 사용되었다.
1990년대에는 실로폰음이 나왔다. 꽤 중독성이 있기는 하다(...).
로고송 가사는 다음과 같다.
KBS 노래 공동위원회 작사 / 이희목 작곡 동이 튼다 랄라라 새 날이다 랄라라라 맑은소리 곱게 곱게 KBS 빠르고 올바르게 KBS 즐거운 우리들의 KBS KBS 라디오도 랄라라 텔레비젼도 랄라라라 밝은소리 굽이굽이 KBS 힘차고 슬기롭게 KBS 영원한 우리들의 KBS KBS |
KBS 로고송
역대 KBS 1TV 로고송에 대한 내용은 KBS 1TV 문서 참고하십시오.
2021년 8월 16일에 공개된 새 로고송의 여러 버전에 대한 내용은 오늘을 담는 창 문서 참고하십시오.
역대 KBS 2TV 로고송에 대한 내용은 KBS 2TV 문서 참고하십시오.
4.1.1. TV
4.1.1.1. KBS 1TV
- 중앙방송국입니다 (1973년 공사 출범 이전) #
- KBS 텔레비전입니다 (1973년 공사 출범 이후~1980년 11월)
- KBS 제1텔레비전입니다 (1980년 12월~1984년)
- 서울올림픽을 세계에 보여주는 우리의 KBS (1988년)
- 영원한 우리들의[43] KBS KBS (1991년~1993년)
- KBS KBS 제1텔레비전 (1993년 10월 18일~1994년 10월 9일)
-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 KBS (1994년 10월 10일~2001년 3월 2일)[44]
-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 KBS 한국방송 (2001년 3월 3일~현재)[45][46][47]
- 정성을 다하는 KBS 국민의 방송 (2007년 3월 3일~2010년)
- 함께하는 평화 함께여는 미래 국민의 방송 KBS (2018, 2019년, 국경일)[48]
4.1.1.2. KBS 2TV
- KBS 제2텔레비전입니다 (1980년대 초반~1984년)
- 즐겁고 유익한 KBS 제2텔레비전 (1984년~1987년)[49][50]
- 사랑과 기쁨이 솟는 KBS 제2텔레비전 (1987년~1991년)[51]
- KBS KBS 제2텔레비전 (1993년 10월 18일~1994년 10월 9일)
- 좋은방송 밝은세상 KBS (1994년 10월 10일~2001년 3월 2일)
- 좋은방송 밝은세상 KBS 한국방송 (2001년 3월 3일~2003년 6월 27일)[52]
- KBS KBS KBS 한국방송 (사랑해) (2003년 6월 28일~2009년 일자 미상)[53][54][55]
- 정성을 다하는 KBS 국민의 방송 (2007년 3월 3일~2010년)
4.2. 라디오
- 사랑하기 때문에 KBS(2007년~현재)[56]
- (반주) KBS 1라디오(2013년~2018년)[57]
- 대한민국 중심채널 KBS 1라디오(2018년~현재)[58]
- 즐거움과 행복을 주는 KBS Happy FM(2007년~현재)[59]
- 함께하는 평화 함께여는 미래 국민의 방송 KBS(2018~현재)[60]
- 너와나의 U-KBS MUSIC
- Listen to the music
5. 역사
자세한 내용은 한국방송공사/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6. 사옥
자세한 내용은 한국방송공사/사옥 문서 참고하십시오.7. 특징
7.1. 지배구조
주주명 | 지분율 |
대한민국 정부 | 100% |
7.2. 법인현황
- 설립근거: 방송법 제43조 1항 외 관련 법령
- 임무 및 기능: 동법 §43~§68 참조[61]
- 조직현황: #KBS 홈페이지 조직도 참조.
- 인력현황: 사장 포함 상임임원 9인, 비상임임원(이사) 11인[62], 정규직 총원(T/O) 5,548명 중 현원 4,041명.(2023년 말 기준)[63]
- 직원평균보수: 기본급 5,011만 원 + 수당 등 4,688만 원 = 합계 9,699만 원[64]
- 2020년 손익현황: 수입 1조 4,341억 6,200만 원[공적재원 6,922억 700만 원(수신료 6,790억 2,400만 원+정부보조금 131억 8,300만 원), 자체수입(광고+콘텐츠판매+협찬+자산매각 등) 7,419억 5,500만 원)] / 지출 1조 4,014억 7,200만 원, 당기순이익 326억 9,000만 원
기타 정보는 KBS 홈페이지의 경영공시 항목 참조.(#)[65]
7.3. 조직도
- 박민 사장
- 류삼우 부사장 - 비서실/노사협력주간/지역정책실
- 인적자원실 - 인사기획, 인사운영, 인재개발원
- 심의실
- 성평등센터
- 시청자센터 - 서비스, 사업
- 전략기획실(이춘호 실장) - 법무실, 데이터정책
- 전략기획국 - 정책기획, 전략개발, 계열사협력, 예술인고용보험프로젝트팀
- 예산국
- 대외협력국 - 대외협력, 커뮤니케이션
- 공영미디어연구소
- 편성본부(김동윤 본부장)
- 멀티플랫폼전략국 - 전략, 데이터, 운영, 브랜드마케팅, 개발
- 멀티플랫폼편성국 - 1TV편성, 2TV편성, 디지털편성, 편성제작, 콘텐츠아카이브
- 국제방송국 - TV국제방송, R국제방송
- 아나운서실 - 1·2부, 한국어연구
- 영상제작국 - 총감독1~3
- 보도본부(장한식 본부장) - 기획, 뉴스전문위원실, 남북교류협력단, 보도그래픽, 선거방송기획단
- 재난미디어센터
- 통합뉴스룸 - 탐사보도
- 취재1주간 - 정치, 통일외교, 사회, 네트워크, 경인취재센터
- 취재2주간 - 국제, 경제, 산업과학, 문화복지
- 방송뉴스주간 - 뉴스제작1~3부
- 디지털뉴스주간 - 1·2부, 뉴스시스템개발
- 시사제작국 - 1부(더 보다), 2부(시사기획 창)
- 스포츠국 - 사업제작, 취재, 중계, 국제스포츠이벤트추진단
- 보도영상국 - 영상취재1·2부, 뉴스영상콘텐츠
- 제작1본부(이제원 본부장) - 제작기획1부, 제작운영
- 시사교양1국 - 1~4CP
- 시사교양2국 - 1~4CP, 현대사영상프로젝트팀
- 협력제작국 - 1~4CP
- 라디오센터(김병진 센터장)
- 라디오편성기획국 - 기획/편성, 사회공헌방송
- 라디오제작국 - 1~4CP
- 제작2본부 - 제작기획2부
- 예능센터 - 1~9CP, 예능사업, 대형이벤트방송사업단
- 콘텐츠사업국 - 콘텐츠사업, 지식재산권
- 광고국 - 기획, 마케팅
- 드라마센터(문보현 센터장) - 1~7CP, 드라마사업
- 기술본부(강동구 본부장) - 미디어송출
- 기술관리국 -기획, 운영, 장비관리
- 미디어인프라국 - 제작시설, 시스템구축
- 방송네트워크국 - 네트워크운영, 송신시설, 송신소(소래/남산/관악산/김제/당진/화성)
- 미디어기술연구소 - 연구
- 제작기술센터(문용석 센터장) - 후반제작
- TV기술국 - 총감독1~4
- 보도기술국 - 총감독1·2
- 중계기술국 - 총감독1·2
- 라디오기술국
- 경영본부(조봉호 본부장) - 안전관리실, 신청사추진단
- 총무시설국 - 총무시설, 건축가전, 전력운영
- 경영관리국 - 재무, 구매, 자산운용, 후생
- 수신료국 - 수신료운영, 사업지사(강북/강남/인천/경기남부/경기동부/경기북부)
- 경영정보국 - 경영정보, 정보인프라
- 이사회(서기석 이사장) - 이사회사무국
- 감사(박찬욱 감사) - 감사실(기획/방송/기술/경영)
7.3.1. 조직
박민 체제 인사 2024년 01월 27일 기준 | |||
집행기관 | |||
부사장 류삼우 | 전략기획실장 이춘호 | 편성본부장 김동윤 | 보도본부장 장한식 |
제작1본부장 이제원 | 제작2본부장 | 기술본부장 강동구 | 경영본부장 조봉호 |
센터장 | |||
라디오센터장 김병진 | 드라마센터장 문보현 | 제작기술센터장 문용석 |
7.4. 편성정책
자세한 내용은 한국방송공사/편성정책 문서 참고하십시오.8. 임직원
8.1. 임원
8.1.1. 공사화 이전 (1927~1973)
경성방송국 제2방송과장- 윤백남 (1932~1933)
- 김정진 (1933~1936)
- 심우섭[66] (1936~1939)
경성방송국 제2방송부장
- 이혜구 직무대행 (1942)
- 노창성[67] (1942~1943)
조선방송협회장
- 이정섭 (1945~1948)
공보부 서울중앙방송국장[68]
- 이혜구 (1945~1947/1949)
- 홍양명 (1947~1948)
- 이관희 (1948~1949)
- 노창성 (1949~1953)
- 이운용 (1953~1960)
- 조흔파 (1960~1961)
- 윤길구 (1961~1963/1966)
- 김재연 (1963/1966~1968)
- 이홍수 (1963~1966)
공보부 서울국제방송국장[69]
공보부 서울텔레비전방송국장[71]
- 황기오 (1962)
- 이홍수 (1962~1963)
- 김재연 (1963~1965)
- 김진영 (1966~1968)
문화공보부 중앙방송국장[72]
8.1.2. 한국방송공사 (1973~현재)
이사장역대 이사장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nopad> 전두환 정부 | <nopad> 노태우 정부 | <nopad> 문민정부 | <nopad> 국민의 정부 | |
<nopad> 관선 | <nopad> 1·2기 | <nopad> 3기 | <nopad> 4기 | ||
초대 송지영 | 제2·3대 노정팔 | 제4대 김태길 | 제5대 김채윤 | 제6대 이세중 | |
<nopad> 국민의 정부 | <nopad> 참여정부 | <nopad> 이명박 정부 | |||
<nopad> 5기 | <nopad> 6기 | <nopad> 7기 | <nopad> 8기 | ||
제7대 지명관 | 제8대 이종수 | 제9대 김금수 | 제10대 유재천 | 제11대 손병두 | |
<nopad> 이명박 정부 | <nopad> 박근혜 정부 | <nopad> 문재인 정부 | |||
<nopad> 9기 | <nopad> 10기 | <nopad> 11기 | |||
제12대 이길영 | 제13·14대 이인호 | 제15·16대 김상근 | |||
<nopad> 문재인 정부 | <nopad> 윤석열 정부 | ||||
<nopad> 12기 | <nopad> 13기 | ||||
제17대 남영진 | 제18·19대 서기석 | }}}}}}}}} |
1984년 '정부투자기관관리기본법' 제정에 따라 이사장제가 신설됨.
- 송지영 (1984~1988)
- 노정팔 (1988~1993)[74]
- 김태길 (1993~1996)
- 김채윤 (1996~1998)
- 이세중 (1998~2000)
- 지명관 (2000~2003)
- 이종수 (2003~2006)
- 김금수 (2006~2008)
- 유재천 (2008~2009)
- 손병두 (2009~2012)
- 이길영 (2012~2014)[75]
- 이인호 (2014~2018)
- 변석찬 이사장대행 (2018)
- 전영일 이사장대행 (2018)
- 김상근 (2018~2021)
- 남영진 (2021~2023)
- 서기석 (2023~)
사장
역대 사장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nopad> 박정희 정부 | <nopad> 최규하 정부 | <nopad> 전두환 정부 | ||
제1·2대 홍경모 | 제3대 최세경 | 제4·5대 이원홍 | 제6대 박현태 | ||
<nopad> 전두환 정부 | <nopad> 노태우 정부 | <nopad> 문민정부 | <nopad> 국민의 정부 | ||
제7대 정구호 | 제8대 서영훈 | 제9대 서기원 | 제10·11대 홍두표 | 제12·13대 박권상 | |
<nopad> 참여정부 | <bgcolor=#0095da> 이명박 정부 | ||||
제14대 서동구 | 제15-17대 정연주 | 제18대 이병순 | 제19대 김인규 | 제20대 길환영 | |
<nopad> 박근혜 정부 | <nopad> 문재인 정부 | <nopad> 윤석열 정부 | |||
제21대 조대현 | 제22대 고대영 | 제23·24대 양승동 | 제25대 김의철 | 제26대 박민 | |
<nopad> 윤석열 정부 | |||||
제27대 박장범 |
순서 | 이름 | 시기 | 비고 |
초대~2대 | 홍경모[76] | 1973~1979 | |
3대 | 최세경 | 1979~1980 | |
4~5대 | 이원홍 | 1980~1985 | |
6대 | 박현태 | 1985~1986 | |
7대 | 정구호 | 1986~1988 | |
8대 | 서영훈 | 1988~1990 | |
9대 | 서기원 | 1990~1993 | |
10~11대 | 홍두표 | 1993~1998 | 최초의 방송인 출신 사장 |
12~13대 | 박권상 | 1998~2003 | |
14대 | 서동구 | 2003[77] | 최초의 최단명 사장, 사퇴[78] |
15~17대 | 정연주 | 2003[79]~2008 | 최초로 3연임에 성공한 사장, |
사장대행 | 이원군 | 2008 | 제명 |
18대 | 이병순 | 2008~2009 | |
19대 | 김인규 | 2009~2012 | |
20대 | 길환영 | 2012~2014 | 최초의 프로듀서 출신 사장, 해임 |
21대 | 조대현 | 2014~2015 | |
22대 | 고대영 | 2015~2018 | 최초로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친 사장, |
사장대행 | 조인석 | 2018 | 제명 |
23~24대 | 양승동 | 2018~2021 | |
25대 | 김의철 | 2021~2023 | 해임 |
사장대행 | 김덕재 | 2023~2023 | |
26대 | 박민 | 2023~2024 | |
27대 | 박장범 | 2024~ | 최초의 KBS 뉴스 9 앵커 출신 사장 |
사실상 한국 방송계를 선도하는 자리이기도 한데, 이들 중 상당수가 한국방송협회 회장 및 지상파UHD방송추진협회(UHD코리아) 회장을 겸하기 때문이다.
1973년 이후 역대 사장 중 암묵적인 외압이나 내부 반발에 의한 사임 등은 제치고 공식적으로 사장에서 해임당한 사례는 정연주와 길환영, 고대영, 김의철 사장으로 4명이다. 정연주 사장은 업무상 배임으로 기소, 길환영 사장과 고대영 사장은 각각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에 대한 보도 통제 논란 등과 보도국장으로 재직시 금품수수 및 보도 누락 의혹, 한선교 민주당 도청 의혹 사건 등 여러 논란로 인한 공영성 훼손으로 이사회에서 강제 퇴출당했다. 다만 정연주 사장의 배임은 훗날 무죄로 판명났고(해임 무효 소송에서도 승소), 실제 의도는 이명박 정권의 언론통제라는 평가가 대다수. 이어 고대영 역시 취소소송에서 승소하여, 문재인 정부의 위법한 해임처분이었음이 확정되었다. 김의철은 경영적자로 해임되었다.
그리고 이들 중 이원홍과 정연주 두 사장은 역대 KBS 사장들 중 왕PD 칭호가 붙어있다. 그 이유는 프로그램 제작 등에 있어 시시콜콜 개입했기 때문(...)[82] 그리고 사장들 대부분은 기자 출신이며,[83] 이병순 사장 이후로는 내부 출신이 사장이 되는 관행이 이어지다 박민 사장이 취임하며 이 관행은 깨졌다. 2014년 방송법 일부 개정에 따라 사장 선임 시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치도록 했다.
부사장
- 최창봉 (1973~1976)
- 김재중 (1976~1980)
- 윤혁기[84] (1989~1990)
- 손영호[85] (1990~1994)
- 최동호 (1994~1998)
- 이형모[86] (1998~2000)
- 강대영[87] / 김형준[88] (2000~2003)
- 안동수[89] (2003~2005)
- 김홍 (2005~2008)
- 이원군[90] (2007~2008)
- 김성묵[91] / 유광호 (2008~2009)
- 조대현 / 김영해[92] (2009~2011)
- 길환영 (2011~2012)
- 전홍구[93] / 류현순[94] (2013~2014)
- 금동수[95] (2014~2015)
- 전진국[96] (2015~2017)
- 조문재[97] (2015~2016)
- 조인석[98] / 이종옥 (2017~2018)
- 정필모 (2018~2020)
- 임병걸 (2020~2021)
- 김덕재 (2021~2023)
- 류삼우 (2023~)
감사
- 노정팔 (1973~1977)
- 이치순 (1977~1980)
- 임진택 (1980~1982)
- 김수득 (1982~1986)
- 유태완 (1986~1990)
- 차종호 (1990~1992)
- 조봉균 (1992~1994)
- 이철호 (1994~1998)
- 방원혁 (1998~2000)
- 전준모 (2000~2003)
- 강동순 (2003~2006)[99]
- 변원일 (2006~2009)
- 이길영 (2009~2012)
- 김승종 (2012~2015)
- 전홍구 (2015~2018)
- 김영헌 (2018~2021)
- 박찬욱 (2021~)
편성책임자
TV는 편성본부장, 라디오는 라디오센터장이 책임자 위치에 있다. 1973년 공사창립 당시 방송총국이 책임지다가 1976년경부터 '방송담당이사' 호칭으로 변경되었고, 1980년 언론기본법 제정 이후 방송편성책임자 공표가 의무화되어 1981년에는 1TV, 2TV, 3TV-라디오담당이사로 3분할되었다가 1984년 사업본부제 도입 후 '방송본부'로 통일되었다.
1986년 조직개편 때 TV-라디오본부로 이원화되었다가 1991년 '방송총본부'가 생기면서 그쪽 예하로 재편되었고, 앞서 말한 두 본부에 각자 속했던 매체별 편성실이 분리/통합되어 '편성실'로 개편되었다. 1993년 방송총본부가 해체되어 그 임무가 편성운영본부로 넘어갔다.
1998년 편성운영본부가 해체되어 그 기능은 산하 기구였던 편성실에 넘겨졌고, 동년 12월에는 신설된 방송정책실이 맡기 시작하여 편성실도 그쪽 예하로 가면서 '편성국'이 되었다. 2000년에는 편성본부로 넘겨졌다가 2010년 조직개편 때 편성본부가 편성센터로 격하되었고, 일부 핵심 기능은 신설된 사장 직속기구 '편성실'로 넘겨졌다가 2013년 이 둘이 합쳐져 편성본부로 다시 확대되었고, 2016년 방송본부로 또 바뀌었으나 2019년에 전 명칭으로 환원되었다.
- 최서영 (1980~1981)
- 윤혁기 (1981~1984(1TV) / 1984~1985)
- 손영호 (1981~1984(2TV) / 1985~1986)
- 정순일 (1981~1983, 3TV 및 라디오)
- 차종호 (1983~1984, 3TV 및 라디오)
- 김도진 (1986~1988, TV) / 박근주 (1986~1988, 라디오)
- 장한성 (1988~1991, TV) / 전영효 (1988~1991, 라디오)
- 강병우 (1991, 1993~1996)
- 박성범 (1991~1993)
- 안국정 (1996~1998)
- 최충웅 (1998)
- 이석우 (1998)
- 강대영 (1998~2000)
- 이흥주 (2000~2001)
- 김승종 (2001~2003)
- 이원군 (2003~2005, TV)
- 조원석 (2004~2006, 라디오)
- 장윤택 (2005~2006, TV)
- 남성우 (2006~2008, TV)
- 이기진 (2006~2008, 라디오)
- 최종을 (2008~2009)
- 이혁주 (2009~2010)
- 서재석 (2010~2012)
- 서재원 (2012)
- 전진국 (2012~2014)
- 권순우 (2014~2015)
- 김성수 (2015~2017)
- 김영국 (2017~2018)
- 황용호 (2018~2020, TV / 2018~2019, 라디오)
- 국은주 (2019~2020, 라디오)
- 한창록 (2020~2021, TV) / 최봉현 (2020~2022, 라디오)
- 강희중 (2021~2023, TV)
- 신원섭 (2023, 라디오)
- 정일서 (2023, 라디오)
- 신재국 (2023, TV)
- 김동윤 (2023~, TV)
- 김병진 (2023~, 라디오)
8.2. 직원
공채는 공사 출범 이전과 이후로 구분되며 서울중앙방송국 시절에 관리직은 문화공보부 공무원[100], 전문직은 임시직이었으나, 1973년 공사 출범 이후부터 사원 신분으로 하고 있다. 다만 1984년에는 공채 없이 134명을 특채했고,[101] 1985년 11기 공채는 '올림픽방송요원'이란 이름으로 뽑았다.[102] 2004년 공채부터 언론사로서 최초로 지방대 출신자에게도 할당제를 도입한 후# 2006년 경력직 채용을 개시했다.직급은 공사 출범 이전에 국장-부장-과장-계장 순으로 했다가 1973년 공사 출범 시부터 총국장-국장-부장-차장 순으로 했다. 1980년 총국제 폐지 후 이사가 최상위 직급이 됐고 1984년 본부제 도입 후 본부장-주간-부주간-담당 순으로 개편한 바 있다. 1986년 원래 직제대로 되돌리고 1990년 일부 부서에 주간-부주간제를 재도입했다가 2004년 대팀제 도입 후 본부장-팀장-직원 순으로 단순화했다. 2008년 12월 대국팀제 개편에 따라 본부장-국장-팀장(EP)-선임(CP)-직원 순으로 했으나 2010년 조직개편 후 본부장-국장-부장-팀장-직원 순으로 확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하 명단 내력은 <한국신문방송연감(현 한국언론연감)> 1977~2004, <KBS 연감> 1962 ~ 2021, <한국방송연감> 1966 ~ 1973, <신문백년인물사전(1988)>, <한국언론인물사전: 1883~2009>, 조선일보 인물정보 등 공개 정보들을 토대로 참고.
8.2.1. 보도본부
8.2.1.1. 기자
자세한 내용은 KBS NEWS 문서 참고하십시오.8.2.1.2. 기상캐스터
자세한 내용은 KBS NEWS 문서 참고하십시오.8.2.1.3. 장애인 앵커
자세한 내용은 KBS NEWS 문서 참고하십시오.8.2.2. 아나운서
편성본부 아나운서실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남성 아나운서 | ||||||||
강성규 | 강승화 | 김기만 | 김승휘 | 김은성 | |||||
김재원 | 김재홍 | 김종현 | 김진웅 | 김진현 | |||||
김태규 | 김홍성 | 한국어연구부장 김희수 | 남현종 | 박노원 | |||||
박철규 | 박태원 | 배창복 | 성세정 | 오승원 | |||||
오언종 | 오태훈 | 원석현 | 윤인구 | 이광엽 | |||||
이규봉 | 이상협 | 이상호 | 이영호 | 이재성 | |||||
실장 이재홍 | 이재후 | 이창진 | 이형걸 | 임지웅 | |||||
장웅 | 조항리 | 최시중 | 한상권 | 한상헌 | |||||
여성 아나운서 | |||||||||
가애란 | 국혜정 | 김보민 | 김성은 | 김솔희 | |||||
김지윤 | 김진희 | 박사임 | 박소현 | 2부장 박주아 | |||||
박지원 | 박지현 | 백승주 | 백정원 | 변우영 | |||||
성기영 | 신성원 | 신윤주 | 엄지인 | 유지원 | |||||
윤수영 | 윤지영 | 이각경 | 이선영 | 이슬기 | |||||
이승연 | 이승현 | 이예원 | 이윤정 | 이지연 | |||||
이현주 | 장수연 | 전주리 | 정은혜 | 정지원 | |||||
최원정 | 1부장 최윤경 | 태의경 | 허유원 | 홍소연 | |||||
홍주연 | }}}}}}}}} | ||||||||
지역 아나운서 | 전직 아나운서 |
(KBS 아나운서 소개 페이지 'KBS오피스') |
재직 중인 아나운서를 기수(공사화 이후 기준)-성별-이름 순으로 나열하며 지역권 아나운서는 '지역권' 란에 같은 기준으로 나열합니다.
취소선은 사망(재직 전후)·퇴사(프리랜서/정년퇴직)·전향(타 부서 이동/일반관리직 영전)·이직(다른 직종)·이적(다른 방송국) 등 각종 사항들로 당사를 떠난 모든 아나운서에게 적용됩니다.
1980년 언론통폐합 당시 타 방송사에서 이적한 아나운서는 괄호 안에 TBC(동양방송)·DBS(동아방송)·CBS(기독교방송)를 표기하며 언론통폐합 전에 퇴사한 아나운서는 기재하지 않습니다.
이 목록에서 괄호가 없는 아나운서는 전부 KBS 입사자입니다.
기수 | 입사년도 | 남성 | 여성 | 지역권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공사화 이전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ddeeff> | <colbgcolor=#ddeeff> 1947년 | | ||||||
1948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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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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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 | | |||||||
1970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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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1974년 | | | ||||||
3 | 1975년 | | | ||||||
1976년 | | | |||||||
4 | 1977년[150] | | | ||||||
5 | 1978년 | | | | |||||
6 | 1979년 | | | | |||||
7 | 1980년 | | | ||||||
8 | 1981년 | | | | |||||
10 | 1982년 | | 위영미(광주), 조원숙(울산), 진두연(충주) | ||||||
비기수[173][A] | 1983년 | | |||||||
1984년 | | ||||||||
1985년 | | | |||||||
11 | | | | ||||||
12[178] | | | 김승일(마산)[181], 김혜정(원주), 문의순(제주), 박재효(광주), | ||||||
13 | 1986년 | | | |
<colbgcolor=#ddeeff> 14 | <colbgcolor=#ddeeff> 1987년 | | | |
15 | | | | |
16 | 1989년 | | | |
17 | 1990년 | | | 김경미(강릉), |
18 | 1991년 | | 성기영, 임수민[211], 정용실, 태의경, | |
19 | 1993년 | | | |
20 | 1994년 | 이형걸[218], 최승돈 | 변우영, | 김수진(전주), 김윤혜(청주), 김태은(전주), |
21[222] | 1995년 | 김재원[223] 김홍성 | | |
22[226] | 김태규, 원석현, 유지철[227] | 백정원, 신윤주 | 김연선(대전), 김평래(부산), | |
23 | 1996년 | 이창진, 최시중 | | |
24 | 1997년 | 김은성, 윤인구, 이재후 | 국혜정[232], 윤지영, | |
25 | 1998년 | 이재홍(실장) | | |
26 | 2000년 | 이규봉, 장웅 | 박주아(2부장), 최원정[243], 최윤경(1부장), | |
27 | 2001년 | 김기만, 박노원 | | 김숙경(대전)[246], 현송희(제주) |
28 | 2002년 | 김희수(한국어연구부장), 이상협, 이영호 | | |
29 | 2003년 | | 김보민[250], | |
30 | 2004년 | 박태원[255], | | 이의선(춘천), 임정섭(광주), 정은숙(춘천), 정은아(광주)[259], 최연수(대전) |
31 | 2005년 | 김재홍, | 윤수영, 이선영, | 심인보(창원), |
32 | 2006년 | | | |
33 | 2007년 | 오언종[269] | | 박명원(대전), 최인희(청주) |
34 | 2008년 | 김승휘 | 가애란, 유지원, | 채윤아(광주), |
35 | 2009년 | | 김솔희, 이현주, | |
36[A] | 2010년 | 김서련(춘천), 손지민(대구), 양문석(청주)[279], 이해수(청주), 정현정(제주)[280], 차재환(부산)[281], 한승훈(제주) | ||
37 | 오승원 | 이지연, 전주리 | | |
38 | 2011년 | | | |
39 | 2012년 | 강승화, 조항리 | | |
40[A] | 2013년 | | ||
41 | 2014년 | | | 고새롬(제주), 김형철(대전),백선일(청주), 봉효정(전주), 신유진(창원), 이지현(청주), 진유현(대구), 최현호(부산) |
42 | 2015년 | 이재성 | 박소현 | 이현정(안동), 정지성(충주), |
43 | 2016년 | 강성규, 김종현 | | |
44[A] | 2017년 | | ||
45 | 2018년 | 남현종 | | |
46 | 2019년 | 김진웅, 이광엽 | 이윤정 | 강유미(강릉), 박종화(청주), 박찬송(충주), 송지원(창원), 유도희(광주), 최용수(포항) |
48 | 2021년 | 김진현, 임지웅 | 홍주연 | |
50 | 2022년 | 박철규 | 이예원, 정은혜, 허유원 |
8.2.3. 성우
자세한 내용은 KBS 성우극회 문서 참고하십시오.8.2.4. 탤런트
활동중인 탤런트를 중심으로 나열하며 퇴사 혹은 무명 및 특채 탤런트도 함께 기재합니다.
취소선은 은퇴하거나 재직 중 사망하거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제명된 탤런트입니다.
취소선은 은퇴하거나 재직 중 사망하거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제명된 탤런트입니다.
기수 | 입사년도 | 남성 | 여성 |
서울텔레비죤방송국 → 중앙방송국 탤런트 | |||
<colbgcolor=#ddeeff> 특채 | <colbgcolor=#ddeeff> 1961년 | | 이수연 · |
1 | 김관수 · 김용호 · 박병호 · 양영준 · 윤형일[293] · 이규홍 · 이완균 · 이청용[294] · 정용재 · | 김경자 · | |
2 | 1962년 | 권명오 · 김성욱[296] · 노위진 · 박자서 · 신동훈[297] · 안정윤 · 이묵원 · 이태우 | 강부자 · 김선희 · 김현숙 · |
3 | 1963년 | | |
특채 | 오지명 | 김민자 | |
4 | 1964년 | | 반효정 |
특채 | 홍영자[298] | ||
5 | 1965년 | 박규식 · 백일섭 · | 권미혜 · |
6 | 1966년 | 김무영[299] · 김봉근 · | 남능미 |
특채 | 민지환 | ||
7 | 1967년 | 김용건 · 서상익 · 이대근 · 최불암 | 김미영 · |
특채 | 김해권 · | ||
8 | 1969년 | 기정수 · 김병기 · 김창봉 · | 김윤경 · 권병숙 · |
특채 | | ||
9 | 1970년 | 공경구 · 김경하 · 구충서 · 박해상 · 백윤식 · 송석호 · 유병한 · 이춘식 · 이원종 · 이현두 · | |
특채 | 주현 | ||
10 | 1971년 | 김장열 · 최영욱 · 김상훈 · 안성진 | 이학순 · 안인자 · 신정용 · 김명순 · 임경선 · 이영림 · 한혜숙 · 박정희 · 강경희 · 박혜숙 · 박양옥 |
한국방송공사 탤런트 | |||
1 | 1973년[305] | 오영갑 · 박승규(박태민) · 박헌용 · | 문길자 · 홍성희 · 김금자(유가영) · 김영숙 · 김채연 · 김상남 · 김영자 · 유승림 · 하미혜 · 한혜경 |
특채 | 정동환 | ||
특채 | 1974년 | 김동수 · 송동섭 | 강나윤 · 송은숙 · 이정심 · 이화영 · 김정란 |
2 | 1975년 | 박미덕 · 허준희 · 김은자 · 구양옥 · 박춘신 · 배미자 · 장명순 · 한주영 · 이경희(이영성) · 장미자 · 이명원(이한나)[308] · 안해숙 · 김혜숙 · 한영봉 · 장순자 · 박선옥 | |
특채 | | 지미옥 | |
3 | 1976년 | 이한수 · 김태환 · 임정혁 · 한경수(허영) · 이강수 | |
특채 | 김흥기 · 유종근 · 이한승 · 홍요섭 | ||
4[309] | 1977년 | 구우룡 · 박시영 · 박종호 · | 김옥진 · 박영귀 · 서희 · 신경순 · 정채선 |
특채 | 최동균 · 하대경 | ||
5 | 1978년 | 정애리 · 유시내 · 진수경 · 김경옥 | |
남성식 · 박재주 · 박태서 · 안성호 · 최재성(崔在成)[311] | 박승희 · 권기선 · 김성근 · 김영순 · 박양례 · 설영순 · 이유진 · 허양미 | ||
6[312] | 1979년 | 김미숙 · 김진옥 · 선우은숙 · 이덕희 · 이진희[313] · 조남경 | |
7[314] | 1980년 | 김재만 · 김진오 · 이구순 · 이두섭 · 이용훈[315] · 이환지 · 임혁주 · 정인철 · 정종준 | 김선화 · 김옥미 · 김진란 · 서승연 · 서정순 · 이나야 · |
특채 | 이대로 · | 강주희 | |
8 | 1981년 | 권순현 · 권재희 · 고소희 · 김미현 · 김은선 · 김현주 · 명복원 · 박경득(박선희) · 박민영 · 손현자 · 송경희 · 안문숙 · 오혜경 · 우제영 · 이경례(이동백) · 이남경 · 이윤선 · 이인경 · 이제신 · 이주영 · 이춘화 · 임성희 · 장순천 · 전쇼리 · 전영미 · 정혜영 · 조성희 · 조용원 · 채은희 · 천진순 · 한명순 · 홍복심 | |
특채 | 주용만 · 선동혁 | 박준금 | |
9 | 1982년 | 윤승국 · 이정욱 · 조정국 · 원석연 · 김범기 · 김효관 · 이희정 · 윤용덕 · 김용호 · 박상훈 · 김기복 · 김덕수(장학수) · 김동우 | 김영실 · 윤연순 · 윤정호 · 김수연 · 길춘영 · 이화영 · 이종남 · 강영자(강영아) · 최경선 · 김배옥 · 노영화 · 남영미 · 최정실 · 윤성옥 · 권명숙[317] · 김은주 · 김령 · 김혜경 · 이현정 · 김순덕 · 김현숙 · 송윤진 · 이현숙 · 정복임 · 정선애(정서임) · 손해경 |
특채 | 강석우 · 윤성국 | 김명희 · 최선희 · 강양례 | |
10 | 1983년 | 김영선 · 박광진 · 손영춘 · 안승훈 · 이경영 · 이배국[318] · 이한위 · 이형표 · 이효정 · 최석구 · 최재성 | 강덕미 · 김선자 · 김향한 · 김희윤 · 문수화 · 박경숙 · 박연은 · 송수정 · 양미경 · 오경아 · 윤효영 · 이예자 · 이인숙 · 이정원 · 이혜정 · 조혜란 · 장정희 · 장혜숙 · |
11[319] | 1985년[320] | 차두옥 · 조동환 · 박진성 · 김종구[321] · 정하완 · 이상원 · 이기홍 · 김일우 · 함원영 · 이용진 · 안석훈 · 차기환 · 이승률 · 김병욱 | 예명숙(예진) · 이릴리 · 한성경 · 김경숙 · 김희동 · 유현자 · 박윤정 · 염선용 · 박경희 · 고광진(고아라) · 정유경 · 김희령 · 황규숙 · 이현실 · 한명숙 · 채행아 · 유기숙 · 김경애 · 유영희 · 강은주(강인희) · 이미경[322] · 윤지수 |
특채 | 신상문 · 이광기 · 정보석 | 배종옥 · 전인화 · 김희애 · 서주화 · 원미연 | |
12[323] | 1987년[324] | 백경훈 · 신용규 · 조동신 · 이영재 · 편인호 · 양재만 · 황덕재 · 최호진 | 최수지 · 최은영 · 남경희 · 오진수 · 한진주 · 홍영미 · 강현미 |
특채 | 최수종 | 이주경 | |
13[325] | 1989년[326] | 이정돈 · 김재준 · 권혁호 · 정형기 · 윤인중 · | 김미숙 · 진희진 · 박경숙 · 박은영 · 정재은 · 김미경 · 신미아 · 김원미 · 서주희 · 김지예 · 지경원 · 임종순 · 이정희 · 이정아 |
특채 | 도지원 · 지수원 | ||
14[327] | 1991년[328] | | 유선회(유루나) · 김선애[a] · 김지은 · 김수미(김주미) · 백경미 · 김현아 · 서미애 · 김성희 · 고영 · 김연수(김희수) · 박삼순(박인서) · 최정원 · 윤영아 · 어수경 · 윤성은(윤정빈) · 김선영[b] · 김선애[b] · 이향아 · 안효진 · 박지애(박지혜) · 윤승희 · 주수정(김나라) · 노현희 · 문윤선 · 김현진 · 강경숙 · 곽근아 · 황선정 · 이주은(이경실) · 김수미라 · 임주연 · |
강민석 | 조하나 | ||
특채 | 1992년 | 나현희 | |
15 | 1993년[334] | | 신소민 · 정선희 · 이은경 · 명정옥 · 정미숙[336] · 박혜경 · 오지영 · 문수인[337] · 박윤선 · 심미경 · 김미라 · 조민희 · 오영순 · 김현성[338] · 김선화 · 김주영 · 이주화 · 유정연 · 오경은 · 박민아 |
16 | 1994년 | 이영범(이우석) · 이철수 · 이병춘 · 신동일 · 이승우 | 이윤정 · 이은주[339] · 정유진 · 성지은 · 김서형 · 정은숙 · |
17 | 1995년 | 김광필 · 이형철 · 차태현 · 홍정욱 · 허정규 · 최재원 · 최기훈 · 이인근 · 정의갑 · 박진형 | 박상아 · 임세미 · 송윤아 · 정혜정 · 이효진 · 하다솜 · 김영주 · 조수진(조윤정) · 염정연 · 이미정 · 박근혜 · 공정인 · 박현정 · 방혜영 · 김효정 |
18 | 1996년 | 이주현 · 안성민 · 유원일 · 심현민 · 이상민 · 이용태 · 황석규 · 이원희 · 김태우 · 김주호 · 이상인 | 박선영 · 김미성 · 유지연 · 박현숙 · 강경헌 · 김지영 · 김애란 · 고지영 · 신소미 · 윤지숙 · 김태연 · 민재희 · 김여랑 · 김숙미 |
19 | 1997년 | 안홍진 · 김준수 · 박철 · 강성진 · 김규 · 김진국 · 고세원 · 정휘석 · 안홍진 · 서동수 · 박상욱 · 박경철 | 황은하 · 이은주 · 권현영 · 권이지 · 유금란 · 배민희 · 유민주 · 이영주 · 이승원 · 구자미 · 강양화 · 강우경 · 구본영 · 최진희 · 조승희 · 이현미 · 장세래 · 손주연 · 이칸희 |
20 | 2003년 | 김육륭 · 나경민 · 이병용 · 최당석 · 고규필 · 정경호 · 이지훈 · 신화식 · 신우철 · 주형태 · 허충호 · 강우석 · 양주호 | 김수연 · 곽진경 · 김현진 · 선은정 · 백좌현 · 백소미 · 서예진 · 이언정 · 조은애 · 김지헌 · 서은혜 · 최지해 · 김경희 · 우경진 |
21 | 2008년 | 강수한 · 김지민 · 지성우 · 이승복 · 문상훈 · 김주환 · 이재우 · 이태승 | 김은유 · 안남희 · 최윤영 · 안선영 · 가득희 · 홍정민 · 지주연 · 김예랑 · 노은별 · 김주은 · 임하나 · 이희영 |
8.2.5. 코미디언
활동중인 코미디언을 중심으로 나열하며 퇴사혹은 무명 및 특채 코미디언도 함께 기재합니다.
기수 | 입사년도 | 남성 | 여성 |
한국방송공사 코미디언 | |||
<colbgcolor=#ddeeff> 특채 | <colbgcolor=#ddeeff> 1981년 | 김정식 · 임하룡 · 정광태 · 최양락 | |
1 | 1982년 | 김형우 · 노영석 · 심형래 · 이경래 · 이선민 · 이승오 | |
2 | 1984년 | 김재훈 · 김한국 · 이봉원 · | 김미화 · 김혜정 · 이경애 · 이선우 · 이정문 · 임미숙 |
특채 | 엄용수 | 지영옥 | |
3 | 1985년 | 김용 · 김의환 | 최홍림 · 팽현숙 · 한혜승 |
4 | 1986년 | 곽재문 · 김영선 · 김호남 · 김황우 · 박승대 · 박현웅 · 서원섭 · | 김정빈 · 김지은 · 김혜란 · 문정숙 · 이숙녀 · 이현순 · 임인하 · 전형진 |
5 | 1987년 | 김종국 · 김진호 · | 문정숙 · 성낙앙 · 안숙희 · |
특채 | 오재미 · 이창훈 | ||
6 | 1990년 | 서인석 · 배동성 · 김찬 · 주윤태 · 최영준 · 한윤형 · 김민석 · 최순석 · 박경호 · 백현욱 | 김지선 · 서현선 · 김현영 · 문형주 · 안수미 · 오미란 |
7 [대학개그제] | 1991년 | 금병완 · 김국진 · 김수용 · 김용만 · 남희석 · 박병득 · 박수홍 · 양원경 · 유재석 · 윤기원 · 이영재 · 최승경 | 엄정필 · 전효실 |
8 | | 남진아 · 한송이 | |
9 [대학개그제] | 1992년 | 이창명 · 조성준 · 하철승 · 권영찬 · 허동환 · 권정민 · 김병재 · 손동환 | 장미화 · 오지연 · 이세레나(세리) · 박수림 · 이정희 |
특채 | 1993년 | 김생민 · 백재현 · 이인철 · 지석진 | 김영 · 송은이 · 윤주형(윤이지) · 임미경 · 안현정 · 조혜련 |
10 | 김성규 · 이덕재 · 이태식 · 장웅 | ||
11 [대학개그제] | 1994년 | 심원철 · 고명환 · 임수철 · 홍석우 · 김경태 · 김장렬 · 이광준 · 이광빈 | 김경희 · 서길자 · 이춘선 |
특채 | 이병진 | 강남영 | |
12 [대학개그제] | 1995년 | 공성수 · 홍석천 | 이영주 · 김숙 · 이장숙 · 유은주 |
특채 [대학개그제] | 황승환 · 한상규 | ||
13 | 1997년 | 김현기 · 박성호 · 박준형 · 서동균 · 손윤상 · 유재현 · 이상철 · 이승환 · 임혁필 | 김미자 · 김현희 · 양재희 |
14 | 1999년 | 김대희 · 김상태 · 김영철 | 김미진 · 김지혜 · 박은혜 |
특채[개그콘서트] | 김준호 | ||
15 | 2000년 | 남상호 · 남진우 · 윤석주 · 정종철 · 조수원 · 홍종호 | 권혜수 · 김혜진 · 양희성 |
16 | 2001년 | 김영삼 · 김시덕 · 허승재 · 이재훈 · 김인석 · 김기수 · 정명훈 | 최희선 · 윤선희 · 손소연 |
특채[개그콘서트] | 엄태경 · 윤성호 · 최국 | ||
17 | 2002년 | 김병만 · 이경우 · 이정수 · 정형돈 | 권진영 · 김다래 · 김민정 |
18 | 2003년 | 김병헌 · 김진철 · 류담 · 서남용 · 오지헌 · 이동혁 · 장동혁 · 채경선 | 강주희 · 하지영 |
특채[개그콘서트] | 이수근 | ||
19 | 2004년 | 김대범 · 안상태 · 유상무 · 유세윤 · 장동민 · 홍경준 · 홍인규 · 황현희 | 강유미 · 안영미 · 윤경화 · 최정화 |
특채[폭소클럽] | 정철규 | ||
20 | 2005년 | 김재욱 · 김지환 · 김진 · 노우진 · 박휘순 · 변승윤 · 유민상 · 이동윤 · 이상구 · 조지훈 | 김선하 · 신고은 · 신봉선 · 정경미 |
특채[폭소클럽] | 변기수 · 윤형빈 · 이종훈 | ||
21 | 2006년 | 권재관 · 김종은 · 안일권 · 이상호/이상민 · 이혜석 · 한민관 · 홍순목 | 김경아 · 김지민 · 박나래 |
특채[개그사냥] | 강일구 · 고혜성 · | ||
22 | 2007년 | 김준현 · 김지호 · 박성광 · 박영진 · 송준근 · 안윤상 · 양상국 · 양선일 · 이광섭 · 이원구 · 정범균 · 조윤호 · 최효종 · 허경환 | 곽현화 · |
특채[개그사냥] | 김원효 | ||
23 | 2008년 | 김대성 · 남영환 · 류정남 · 정태호 | 김민경 · 김희원 · 박소영 · 오나미 · 조승희 · 허민 |
특채[폭소클럽] | 김영민 · 조준우 | ||
24 | 2009년 | 김선웅 · 김성원 · 류근지 · 이조원 | 안소미 · 허안나 |
25 | 2010년 | 김기리 · 김장군 · 송영길 · 신종령 · 이성동 · 장기영 | 권미진 · 김영희 · 신보라 · 이희경 · 정은선 · 정지민 |
26 | 2011년 | 김수영 · 김정훈 · 김태원 · 류근일 · 서태훈 · 이문재 · 이상훈 · 임우일 · 정승환 · 정진영 · 정해철 · 홍훤 | 김혜선 · 박소라 · 홍나영 |
27 | 2012년 | 김회경 · 곽범 · 김현기 · 남궁경호 · 송왕호 · 송필근 · 신윤승 · 오기환 · 유인석 · 이찬 · 임재백 · 정윤호 · 정찬민 | 박은영 · 이수지 |
28 | 2013년 | 김병선 · 박성호 · 복현규 · 윤한민 · 장유환 · 장윤석 | 김나희 · |
29 | 2014년 | 송준석 · 윤승현 · 이상은 · 이세진 · 이은호[353] · 이창호 · 임종혁 · 정승빈 · 정재형 · 최재원 · 홍현호 | 김니나 · 김승혜 · 박보미 · 이현정 |
30 | 2015년 | 김원훈 · 송재인 · 심문규 · 이창윤 · 조충현 · 홍성현 | 김민희 · 장하나 |
31 | 2016년 | 박진호 · 방주호 · 배정근 · 이승환 · 임성욱 · 조래훈 · 조진세 | 손별이 · 최희령 · 황정혜 |
32 | 2018년 | 김두현 · 민성준 · | 송이지 · 엄지윤 · 이가은 · 이정인 · 전수희 |
33[354] | 2023년 | 김시우 · 남현승 · 오민우 · 오정율 · 장현욱 · 최기문 | 나현영 · 서아름 · 이수경 · 임선양 · 임슬기 · 채효령 · 황은비 |
8.2.6. 프로듀서
볼드체로 표시된 인물은 집행기관을 역임한 인물이다.시사교양, 예능, 드라마, 라디오, 편성, 전문언어, 스포츠
- 1945년 입사:
노정팔,이상만 - 1957년 입사:
김영우,박종민,조부성[355] - 1961년 입사
- 라디오:
곽현[356],변형하,오용한[357],이동린,이무영[358],전영효,조남호 - TV:
고성원,김영호[359],김재형,박재민,신윤생,오승호,이기하,이남섭[360],이동희[361],임학송,최한영,홍두표,황정태 - 서울국제방송국:
박근주,최춘[362] - 1962년 입사:
김창수[363] - 1963년 입사:
이근배,차재영[364] - 1964년 입사:
김영희,박창학[365],정유일[366] - 1965년 입사:
김연진[367],박철[368],방원혁,이원규[369],이정훈[370] - 1966년 입사:
김종성(金鍾成)[371],허동웅,이상원[372] - 1967년 입사:
문수복[373],이흥주[374] - 1968년 입사:
강병우[375],김지문[376],윤대작[377],정승배[378],최선규(崔善圭)[379] - 1969년 입사:
강대영[380],김성응[381],이유황,이진욱,정영철,조수영[382],주일청[383] - 1970년 입사:
박경식,안국정[384],홍태희,김성호[385],김원태[386],박교서[387],이신웅[388],이현화[389] - 1971년 입사:
장한성[390],김동성[391],김승종[392],김영택,김충길,김현[393],김현숙[394],김홍종,백재하,이상욱[395],이정헌[396],장경수(張炅洙),장기오,장형일,최상식[397] - 1972년 입사:
김수동[398],정선언,진해인[399] - 1973년 입사
- 경력:
정연수[400],최상현[401] - 공채(1기)[402]:
곽명세[403],금웅명[404],김재현,김종건,정수웅[405],박현순,조의진,홍성룡,이종하,한신평[406],이석우(李晳宇),박윤행,윤기호[407],장병도,박건삼[408],김균태,윤재동,장동선,주대식,안경은,박인배,김광식,강동순[409],고성균[410],이규창[411] - 1974년(2기) 입사[412]:
이양구,조원석[413],윤창환,윤상문,이청용(李青鎔)[414],손장권,유시창 - 1975년(3기) 입사:
송영구,강진호,이윤선,홍성우,양성수,이동순,홍성용,차갑진[415],류시형,김세근 - 1976년 입사:
고범중[416],김상근(金相根)[417] - 1977년(4기) 입사:
이원군[418],허규,방진혁,박진수,강진환,박수창,임근택[419] - 1978년 입사
- 특채:
김영렬[420] - 공채(5기):
경명철[421],박현정(朴顯鉦)[422],이순철,이영국[423],임웅빈[424],변연식,박영규,조대현,김혜경,박준남,장충길,전숙영[425] - 1979년(6기) 입사:
김영신,박희정,윤영묵[426],윤종배,이규환,이양훈,이원익,김시연,이승원(李昇元)[427],진병윤,현정주,이성수(李成洙)[428],민은경 - 1980년 입사
- 통폐합/경력:
사상완[429],정영식[430],정영모[T],강일파[T][433],윤혁기[T],임강호[T],전세권[T],최충웅[T],박준영[T],정병식[T],김창동[T],유영순[T],이정웅[T][443],하강일[T],신광철[T],곽영범[T],김홍소[T],심현우[T],김웅래[T],이동석[T],장윤택[T],김인경[T][453],남성우[T],신완수[T],이남기[T],이명룡[T],김성묵[T],김세웅[T][460],윤흥식[T],이문태[T],임진택[T],김재순[T],김태기[T],이근용[T],이종수[T],차성모[T],최홍철[T],홍순창[T],강관선[T][472],김우광[T],박문영[T],안영동[T],염현섭[T],운군일[T],이상흡[T],이성연[T],정동천[T][481],정수나모[T][483],한정희[T],홍성주[T][486],안인기[T][488],이웅모[T],이경숙[T][491],김종찬[T][493],박태경[T],배철호[T][496],정초영[T][498],김정태[499],박재권[D],안평선[D],박승열[D][503],윤병일[D],장영수[D],장인식[D],김기동[D],유승호(柳勝鎬)[D][509],이원용[D][511],조석근[D][513],이혁주[D],김천응[D],신행식[D],이기진[D],정종현[D],하인성[D],김상일[D][521],김영환[D][523],오장환[D],이형모[525],김광희[C][527],강민구[C][529],선정은[전],구성진[전][532],김재규(金才奎)[전][534],오태수[전],김학[서][537],백봉기[서],장찬정[서][540],김재연[541] - 지역국:
강성철[542] - 1981년 입사
- 특채:
신상용[543],유시청[544],이종한 - 공채(8기):
길환영,김영선(金榮宣)[545],김철수[546],남기석,박일경,송희일,오동석,원춘건[547],윤용훈,이상근,이영희[548],이응진[549],전용길[550],진기웅[551],최종을[552],황우섭[553],정혜실[554] - 공채(9기):
강부길[555],강선모[556],고희일,곽윤전,권순우[557],공영화[558],김경식,김대화,김세균,김영길,김영식A,김영식B,김영준,김제진,김현준[559],김형일(金亨一)[560]노윤구,박경규,박수동,박영주,박환욱,서태룡,성준기[561],손대식,송주하,승원세,신상익[562],신영주,신혜승,안연희,엄기백,오수성,유동중,유운상,오필훈,윤명식,윤정수[563],이녹영[564],이두엽,이미희,이상여,이영돈,이원익,이은미,이장종,이재훈,이충용[565],이학송,이현석,임종성,임진호,장성환,장옥님,전형태[566],조성근,조연동,조재흔,주평문,채치성,최갑주,최길규,최수형[567],최영근[568],최영민,최종덕[569],홍성덕,윤군필[570] - 1982년 입사
- 1983년 입사:
박해선,안희구[574],이노수[575] - 1984년 입사[576]:
김광년,김영국[577],김혁[578],나동명,나상엽,박정옥,박태호(朴泰鎬)[579],송성근[580],정상일[581],정훈[582],주인영,최훈근,허성룡 - 1985년 입사
- 특채:
변석찬[583],현주희[584],황제연 - 공채(11기)[585]:
강세묵,강영권,강영원,강인식[586],고영탁,권오석,김광필,김덕기, 김명욱,김성환,김인생[587],김용규,김종국[588],김종대,김찬호,김태민,김혜선, 나혜경,남현주[589],문정수[590],문창석,노윤갑,박영무[591],박인규, 박정미[592],박찬홍[593],백능영,서재석[594],손대식,손원열[595],신동인,안석복[596],양기선,양정임,예미란,오진산,온형옥[597],왕현철,유찬욱(庾贊旭),윤석호,이근형,이덕건[598],이상요[599],이상출,이인숙,임주빈, 임혜선,장기랑[600],전기상[601],전산,전성홍,전진국[602],정석규,정환식[603],조덕현[604],조인석[605],주연자,차형훈[606],채원식,최승혜,최영,허웅[607],한상길,현상윤[608],홍권섭[609],홍성민(洪性珉)[610],홍혜경(洪惠卿)[611],김성수[612],김평렬,양희섭[613],엄민형[614] - 공채(12기)[615]:
김무관,곽삼주,이경균[616],장충순,송대원,오창해[617],조규진,강대택,경종록,최공섭,허진(許鎭),신동환[618],박종기,안정균,김규효,김상우,이상익[619], 김승일[620] - 지역국[621]:
김현,박태호(朴泰昊),박정용,서양택,손윤희[622],양원석,김한곤,최경수,서미경[623],김종선[624],임혜선,윤세정,서은섭[625],강명욱,주미영,고영규[626],유한식,진재중[627],정순길,오순화[628] - 1986년 입사
- 특채:
홍승철 - 공채(13기)[629]:
김명욱,이달현,박정용,오강선,고영산,김창수[630],김진봉,김동현[631],안병락,최태엽,김영묵,박상조[632],함형진[633],김기표,구수환 - 1987년 입사
- 공채(14기)[634]:
황송주[635],안용수[636],정순영[637],이상훈,이상오[638],신정관[639],박인규[640],김평중[641],민영문[642],김진홍[643],임대배[644],심재흔,김학순,신경섭[645],이기원[646],설상환,권오주,이상운[647],이성주,이강주,김정기,정동희, 조경숙, 김승우[648],김영환[649],김광호,구중회,이명용[650],민승식,김용두,연규완,방성룡,한덕규,황용호[651],문정근,서기철[652] - 공채(15기) 입사[653]:
고흥식[654],곽기원,곽병재,국순엽,국은주[655],김서호,김성종,김영식,김영진,김인호,김정수,김창조[656]김해천,남궁현,남주현,문동희,박중민[657],박흥영,배대준[658],서현철,성영준[659],소상윤,송길우[660],송성익,송재헌,심웅섭,우종택[661],오세강[662],유경탁,윤기철[663],윤찬규,윤형구,이상묵,이용우A[664],이은수[665], 이강현,정성연,정재학, 정현동,조성만,최보식[666],허완석,허태원,황용명 - 1989년(16기) 입사[667]:
김영한,심상구,권영태,양승동, 윤한용, 김동훈, 노지영,이용우B, 이금보, 어수선,이재영, 이완희,최영재,정성욱[668], 박일성, 최우철, 장영주,김창범,이석진, 박병대, 김홍석, 정기윤, 이영철, 김영두,표만석,이기홍,나운한, 배성호,김광준,이연식,송영재[669],성수일, 강원호, 이정환, 전보원,강민부 - 1990년(17기) 입사: 문보현 (드라마센터장)[670], 정성효[671], 박종성, 이현철, 이도경, 박기완[672],
김시규[673], 신영진,이강택[674], 권오대, 김득수,최철호[675], 이성수,임재익[676], 조해달,김덕재[677], 공용철, 조계찬, 이만천, 공광일, 곽한범, 박형노[678],권혁만[679], 류호석, 목천균,안창현, 박서현, 홍성협 - 1991년(18기) 입사: 김동윤 (편성본부장), 이제원 (제작1본부장), 김충 (KBS JAPAN 사장(파견)),[680],
강일수[681], 김우석,김종창, 손병규, 신동만,신재국, 신창석,우장균[682], 윤태호, 이명신, 이석주, 이영준, 이제헌,임세형[683],전영식[684], 최석순, 최지영,표민수[685],한창록[686], 황범하 - 1993년(19기) 입사[687]:
김석윤, 김영도, 김영종, 김태성,김평중,김혁[688],김혁동, 김형석, 김형일[689], 김홍철, 김효선, 문형열,박민호[690], 박복용, 배원열, 서정협,성윤숙, 심광흠, 오정근, 원자영, 윤남중, 이경우, 이연희, 이용준, 이재상, 이재우,이훈희[691], 장성주, 전흥렬,정해룡[692], 조재철, 조혜림,최봉현, 최성일, 하석필, 하종란,한정석[693], 한준서, 홍승주 - 1994년(20기) 입사:
강희중, 류지열[694], 배경수[695], 손현철, 유건식[696],이건준[697], 황대준[698], 황의경[699] - 1995년 입사
- 공채(21기): 한경천 (예능센터장)[700], 김병진 (라디오센터장), 김성근[701],
김호상, 박건영, 배경수, 윤선원,이욱정,이형민[702], 최기록, 홍석구[703],황대준 - 공채(22기): 송웅달 (협력제작국장), 고정훈, 고찬수[704], 권오훈,
권용택[705],김규태, 김민철, 김상무,김영삼[706], 김윤환, 김정환[707], 김은주, 김정록, 김진수, 김창회, 김한석, 김현기, 김현수, 김현철, 김형석, 김형준, 나원식, 류송희, 민노형, 박건, 박기현[708], 박성철, 박유경, 박정수, 박충원, 배용화,서수민, 서용하[709], 성준해, 손성배, 송주미, 안종호, 안주식, 양홍선[710], 유태진,윤성식[711], 윤성도, 윤중경, 이경묵, 이계창, 이내규[712],이명한, 이민호, 이병창, 이선동,이재오[713], 이재혁, 이정수, 이진서, 이황선, 이후락[714], 임기순, 임현진,전창근, 전희수, 정일서[715], 정현모,정희섭[716], 최기석, 최재복[717], 한경택[718], 한응식, 홍경수, 홍진표, 김현철 - 1996년(23기) 입사: 김은정, 김종석, 김형주, 김희수, 남유진, 문석민, 박성용, 박융식[719], 박은희, 백종희, 손종호, 손준영, 연종우, 오인교, 은경수, 이병용, 이제석, 장영우, 정승우, 최용수, 한상준
- 1997년(24기) 입사: 황응구 (편성제작부장), 강병택[720], 강성훈, 강요한,
곽정환, 권계홍[721],권재영[722], 기민수[723], 김강훈, 김광수[724], 김상휘[725],김석현, 김신일, 김영선, 김원, 김정규[726], 김정은[727], 김정희, 김진환, 김필준, 나영, 류명준, 문소산, 문준하, 민일홍, 박기호, 박성주[728], 박일해, 박창, 백주환, 신동조, 오수진, 원종재, 유경숙, 유웅식, 유현기, 유희원, 윤영식,윤현준[729],이동희[730], 이세희[731], 이원규, 이정환, 전우성[732], 정택수, 정혜경,조승욱[733], 조정훈, 조현아[734], 최근영,최재형, 최지원, 최필곤, 하태석,함영훈홍기호, 홍순영 - 1998년(25기) 입사: 김영동,
김정민, 박용석, 이동우, 이정섭, 이혁휘, 조준희, 지병현, 지형욱, 한동규 - 2000년(26기) 입사: 김연미, 김영조, 김용호, 박정연, 손승현, 유광태, 이소연, 이승하, 이형진, 이호경[735], 황혁
- 2001년(27기) 입사:
김성윤, 김영균,김원석, 김호상,나영석,모완일, 박정유,박현석[736],신원호, 황인혁 - 2002년(28기) 입사:
고민구[737],김수아[738], 김지연, 김형주, 노상훈, 문성훈,송현욱[739], 신미진, 이성범,이응복, 윤병준 - 2003년(29기) 입사: 강윤기, 고세준, 기훈석, 김경정, 김상미, 김세원, 김영민, 김자현,
김진원, 김홍범, 박지영[740], 박진호, 안준용, 염지선[741], 오은일, 이기리, 이진희, 이태웅, 이현정, 전인태, 정미영[742], 정효영, 조성숙, 허양재 - 2004년(30기) 입사: 강남경, 김광수, 김대현, 김무성, 김민희, 김승욱, 김영숙,
김진우, 김한솔, 김해룡, 남진현[743], 류종훈, 박덕선, 박석형, 박성재, 박용훈, 박정훈, 백상훈, 백승철, 손지원, 양자영, 양천호, 윤진영, 이기연, 이동은,이예지[744], 이은형, 이은진, 이정윤, 이준화, 이지운, 이충언, 이형일, 임병석, 전수영, 정경아, 정범수, 정희선, 조민지, 조지호, 지성찬, 최수영, 최승화, 최형준 - 2005년(31기) 입사
- 공채: 강민승, 고국진, 김문식, 김웅식, 김자영, 김종연, 김효진, 맹남주, 박소율, 송윤선, 손광우, 신주호,
신효정[745], 심하원, 염정원, 오준석, 오현숙, 우현경[746], 윤성현, 이경민,이나정[747], 이동훈, 이송은, 이승현, 이지윤, 이지희, 이진희, 이휘현, 장소랑, 정현진, 차영훈[748], 최승희, 한상우, 함혜영, 황국찬, 황혜지 - 경력:
강봉규[749], 강승연, 강지원, 김명숙, 이민정, 이은미,유학찬 - 2006년(32기) 입사: 김미해, 남상원, 박진석[750], 손자연, 유재우, 유지윤, 장윤선, 지우진, 하종백
- 2007년(34기) 입사: 김동휘, 김영우, 김윤정, 김정하, 김정현, 김태두, 박수정, 박지은, 박현진,
유종선, 윤민아, 이선희, 이재훈, 이태헌, 장효선, 전온누리, 조영중, 진정회, 홍아람 - 2008년(35기) 입사: 김근해, 김민경, 김범수, 박민정, 서승표, 안상미, 안지민,
원승연[751], 유정아, 유혜진,유호진, 이명희, 이윤정, 정연희, 정현재, 현재성, 황초아 - 2009년(36기) 입사: 김은비, 손수희, 심정애, 안상은, 이주영, 이호, 임종윤, 최윤석
- 2010년(37기) 입사: 김민정, 김아리, 유경현, 유희진, 이지희, 전진, 최진영, 하동현
- 2011년(38기) 입사: 길다영, 김가람,
김민석[752], 김은곤, 문지혜, 박병길, 박상욱, 상은지, 손성권[753],유일용, 이승문, 이원식, 이정규, 임효주, 정재윤, 최승현 - 2012년(39기) 입사: 강민채, 김민회,
김성, 김희선, 이해돈, 배선정, 장민석, 전혜란, 조나은, 조현웅, 최지훈 - 2014년(41기) 입사: 구상모, 김승용,
방글이, 이다솔, 이은규, 이인건, 최윤영, 최현정 - 2015년(42기) 입사: 권재오, 정부교, 문경원, 박정환, 이상혁, 조애진, 정승안, 최승범, 최유빈
- 2016년(42기) 입사: 서지원, 이승민, 이이백, 이지웅, 이현정, 장민구, 전아영, 최윤화
- 2018년(44기) 입사: 신민섭, 유혜진
- 2019년(45기) 입사: 정용재
- 2021년(48기) 입사: 강재훈, 김미래[754], 김상엽, 노준호, 임지수, 임현정, 조수민
- 2022년(49기) 입사: 김동녘, 박성하, 조영진
그외
애니메이션 및 외화 더빙 제작
1991년 이후 이들은 KBS 미디어 소속이다.
8.2.7. 엔지니어
현직- 강동구(1994년 입사, 기술본부장)[763]
- 김성하(1993년 입사, 춘천방송총국장)[764]
- 양창근(1989년 입사)[765]
- 최수철(1989년 입사)[766]
- 박종원(1993년 입사)[767]
- 남병국(1994년 입사)[768]
전직
- 공사화 이전
- 노창성(1924년 입사, 1943년 퇴직, 1949년 복귀, 1955년 사망)[769]
- 한덕봉(1925년 입사, 1950년 납북)[770]
- 한영희(1937년 입사, 1974년 정년퇴임, 2006년 사망)[771]
- 이인관(1937년 입사, 1948년 체신부 이직, 1950년 복귀, 1979년 퇴임, 2007년 사망)[772]
- 김성재(1938년 입사, 1944년 퇴직, 1945년 복직, 1949년 체신부 이직, 1997년 사망)[773]
- 이종훈(1938년 입사, 1972년 정년퇴임, 1997년 사망)[774]
- 성기석(1938년 입사, 1975년 정년퇴임, 1990년 사망)[775]
- 박한국(1941년 입사, 1977년 정년퇴임)[776]
- 유병은(1943년 입사, 1974년 정년퇴임, 2009년 사망)[777]
- 한기선(1944년 입사, 1974년 정년퇴임, 2001년 사망)[778]
- 권오진(1945년 입사, 1980년 정년퇴임)[779]
- 이승균(1945년 입사, 1981년 정년퇴임)[780]
- 윤헌영(1946년 입사, 1982년 정년퇴임, 1986년 사망)[781]
- 이성실(1947년 입사, 1951년 사망)[782]
- 박능상(1947년 입사, 1965년 퇴직, 2002년 사망)[783]
- 정경순(1947년 입사, 1976년 정년퇴임, 2008년 사망)[784]
- 김선영(1947년 입사, 1979년 정년퇴임, 2012년 사망)[785]
- 박경환(1947년 입사, 1983년 퇴임, 2016년 사망)[786]
- 강기년(1948년 입사, 1978년 정년퇴임)[787]
- 김성배(1948년 입사, 1980년 퇴사, 2016년 사망)[788]
- 임동익(1949년 입사, 1980년 퇴사)[789]
- 고세혁(1950년 입사, 1979년 정년퇴임)[790]
- 한윤갑(1950년 입사, 1980년 퇴사, 2023년 사망)[791]
- 한영신(1952년 입사, 1965년 퇴직)[792]
- 최순용(1952년 입사, 1983년 정년퇴임, 2015년 사망)[793]
- 우제탁(1952년 입사, 1984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 2015년 사망)[794]
- 이정규(1953년 입사, 1963년 DBS 이직, 1980년 복귀, 1987년 정년퇴임, 1995년 사망)[795]
- 강정도(1955년 입사, 1983년 정년퇴임, 2015년 사망)[796]
- 민흥식A(1956년 입사, 1959년 후포어업무선국 이직)
- 김일영(1956년 입사, 1984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797]
- 송재극(1956년 입사, 1987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 1988년 복귀 및 퇴사, 2021년 사망)[798]
- 강진구(1957년 입사, 1964년 동양TV 이직, 2017년 사망)[799]
- 김길회(1957년 입사, 1984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 2022년 사망)[800]
- 권병실(1957년 입사, 1964년 동양TV 이직, 1981년 복귀, 1989년 정년퇴임, 2020년 사망)[801]
- 김준형(1957년 입사, 1984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 1988년 복귀, 1989년 정년퇴임)[802]
- 조찬길(1957년 입사, 1991년 KBS아트비전 사장 임명, 2014년 사망)[803]
- 이용실(1957년 입사, 1980년 강제해직, 1989년 복직, 1992년 정년퇴임)[804]
- 안흥식(1958년 입사, 1962년 MBC 이직)
- 서구호(1958년 입사, 1982년 정년퇴임, 2021년 사망)[805]
- 박수한(1958년 입사, 1985년 정년퇴임, 2011년 사망)[806]
- 김무기(1958년 입사, 1962년 MBC 이직, 1980년 복귀, 1992년 정년퇴임)[807]
- 이용억(1959년 입사, 1968년 UBC(현 울산MBC) 이직)
- 장길태(1959년 입사, 1963년 DBS 이직, 1980년 복귀, 1984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 1988년 2차 복귀, 1992년 정년퇴임, 1995년 사망)[808]
- 장용섭(1959년 입사, 1992년 정년퇴임)[809]
- 오승룡(吳承龍)(1959년 입사, 1968년 MBC 이직, 1972년 복귀, 1993년 정년퇴임)[810]
- 홍기준(1960년 입사, 1964년 MBC 이직, 2015년 사망)
- 김영선(金英選)(1960년 입사, 1992년 KBS시설관리사업단 사장 임명)[811]
- 구연도(1960년 입사, 1995년 정년퇴임)[812]
- 김순식(1961년 입사, 1964년 동양TV 이직, 2007년 사망)
- 최인열(1961년 입사, 1964년 MBC 이직, 2019년 사망)
- 김윤식(1961년 입사, 1969년 MBC 이직, 2008년 사망)
- 하용득(1961년 입사, 1980년 정년퇴임)[813]
- 김기화(1961년 입사, 1984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814]
- 유진동(1961년 입사, 1984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 2015년 사망)[815]
- 변영준(1961년 입사, 1988년 사망)[816]
- 조영길(1961년 입사, 1984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 1988년 복귀, 1990년 사망)[817]
- 김광식(1961년 입사, 1991년 KBS시설관리사업단 감사 임명, 2017년 사망)[818]
- 윤성호(1961년 입사, 1984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 1988년 복귀, 1991년 정년퇴임)[819]
- 유준희(1961년 입사, 1984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 1988년 복귀, 1992년 정년퇴임)[820]
- 권영원(1961년 입사, 1984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 1988년 복귀, 1993년 정년퇴임)[821]
- 이완규(1961년 입사, 1964년 DBS 이직, 1980년 복귀, 1993년 정년퇴임)[822]
- 지승표(1961년 입사, 1984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 1988년 복귀, 1993년 정년퇴임)[823]
- 최진성(1961년 입사, 1993년 퇴임)[824]
- 강석두(1961년 입사, 1995년 광주불교방송 이직, 2017년 사망)[825]
- 서정원(徐廷元)(1961년 입사, 1997년 KBS아트비전 사장 임명)[826]
- 고흥복(1962년 입사, 1969년 MBC 이직)
- 김원기(1962년 입사, 1969년 MBC 이직)
- 이정은(1962년 입사, 1969년 MBC 이직)
- 윤두림(1962년 입사, 1984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 1988년 복귀, 1994년 퇴사)[827]
- 윤성현(1962년 입사, 1969년 TBC 이직, 1980년 복귀, 1994년 퇴사)[828]
- 조성탁(1962년 입사, 1984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 1988년 복귀, 1994년 퇴사)[829]
- 최용순(崔鎔淳)(1962년 입사, 1987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 1988년 복귀, 1994년 퇴사)[830]
- 이병윤(1962년 입사, 1996년 정년퇴임)[831]
- 임염용(1962년 입사, 1996년 정년퇴임)[832]
- 진성군(1962년 입사, 1997년 정년퇴임, 2020년 사망)[833]
- 박상수(1963년 입사, 1994년 퇴사)
- 이일로(1963년 입사, 1995년 KBS아트비전 사장 임명)[834]
- 이수영(李守郢)(1963년 입사, 1998년 정년퇴임, 2019년 사망)[835]
- 김순길(1964년 입사, 1969년 MBC 이직)
- 오정수(1964년 입사, 1969년 MBC 이직)
- 심익섭(1964년 입사, 1969년 TBC 이직, 1980년 복귀, 1990년 SBS 이직)[836]
- 조세동(1964년 입사, 1994년 퇴사)
- 김영송(1964년 입사, 1998년 정년퇴임)
- 윤송남(1964년 입사, 1966년 대농 이직, 1974년 복귀, 2001년 정년퇴임)
- 윤재덕(1965년 입사, 1969년 MBC 이직, 2008년 사망)[837]
- 조동근(1965년 입사, 1969년 MBC 이직)
- 한태헌(1965년 입사, 1994년 퇴사)[838]
- 정승철(1965년 입사, 1984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 1988년 복귀, 1996년 정년퇴임)[839]
- 문관철(1965년 입사, 1997년 사망)[840]
- 김성현(1965년 입사, 1998년 정년퇴임)[841]
- 정근춘(1965년 입사, 1969년 MBC 이직, 1972년 복귀, 1998년 퇴사)[842]
- 천기태(1965년 입사, 2004년 정년퇴임)
- 백운학(1966년 입사, 1994년 퇴사)[843]
- 민흥식B(1966년 입사, 1997년 정년퇴임)[844]
- 이근우(1966년 입사, 1984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 1988년 복귀, 1997년 ubc 이직)[845]
- 박상규(1966년 입사, 2003년 퇴임)[846]
- 김원대(1966년 입사, 2004년 정년퇴임)[847]
- 이종성(1967년 입사, 1969년 MBC 이직)
- 구본출(1967년 입사, 1984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 1988년 복귀, 1998년 명예퇴직)[848]
- 최판원(1967년 입사, 1998년 명예퇴직)
- 김병환(1967년 입사, 1998년 퇴사)
- 오영근(1967년 입사, 1998년 정년퇴임, 2018년 사망)[849]
- 엄호현(1967년 입사, 2001년 사망)[850]
- 원종은(1967년 입사, 1984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 1988년 복귀, 2001년 정년퇴임, 2013년 사망)[851]
- 김광일(金光鎰)(1967년 입사, 2004년 정년퇴임)[852]
- 김진평(1967년 입사, 1987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 1988년 복귀, 2005년 정년퇴임)[853]
- 이준영(1968년 입사, 1998년 명예퇴직, 2004년 사망)[854]
- 박현종(1968년 입사, 1999년 퇴임, 2014년 사망)[855]
- 신건균(1968년 입사, 2003년 정년퇴임)[856]
- 안규갑(1968년 입사, 2005년 정년퇴임, 2021년 사망)[857]
- 박영석(朴英錫)(1968년 입사, 2006년 정년퇴임)[858]
- 심분녀(1968년 입사, 2006년 정년퇴임)[859]
- 신영부(1969년 입사, 1998년 정년퇴임)[860]
- 오계환(1969년 입사, 2002년 정년퇴임)[861]
- 홍웅표(1969년 입사, 2002년 정년퇴임)[862]
- 이석찬(1969년 입사, 2006년 정년퇴임)[863]
- 임영수(1969년 입사, 2008년 정년퇴임)[864]
- 최상호(1969년 입사, 2008년 정년퇴임)[865]
- 이상필(李相弼)(1969년 입사, 2009년 정년퇴임)[866]
- 장년환(1969년 입사, 1984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 1988년 복귀, 2011년 정년퇴임)[867]
- 이현철(李鉉喆)(1970년 입사, 1995년 TJB 이직)
- 김탁(1970년 입사, 2005년 정년퇴임)[868]
- 정석현(1970년 입사, 2007년 정년퇴임)[869]
- 이광태(1972년 입사, 2002년 퇴임)[870]
- 공사화 이후
- 이상수(李相守)(1973년 입사, 2003년 정년퇴임)[871]
- 강태인(1973년 입사, 2004년 정년퇴임)
- 문종철(1973년 입사, 2004년 정년퇴임)
- 홍수완(1973년 입사, 2005년 퇴임)[872]
- 오갑환(1973년 입사, 2007년 정년퇴임)[873]
- 박명삼(1973년 입사, 1984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 1988년 복귀, 2008년 정년퇴임)[874]
- 김선권(1973년 입사, 1984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 1988년 복귀, 2012년 퇴임)[875]
- 최용균(1973년 입사, 2014년 정년퇴임)[876]
- 안동수(1974년 입사, 1991년 해고, 1993년 복직, 2003년 부사장 임명)[877]
- 정찬수(1974년 입사, 2003년 정년퇴임)[878]
- 임정규(1974년 입사, 2004년 KBS아트비전 감사 임명)[879]
- 이항로(1974년 입사, 2005년 정년퇴임)
- 안덕상(1974년 입사, 2006년 정년퇴임)[880]
- 김명환(1974년 입사, 2008년 정년퇴임)
- 주우식(1974년 입사, 2008년 정년퇴임)[881]
- 최일순(1975년 입사, 2004년 정년퇴임)[882]
- 유강석(1975년 입사, 2008년 퇴임)[883]
- 박상헌(1975년 입사, 2009년 정년퇴임)[884]
- 김현호(1975년 입사, 2012년 정년퇴임)
- 임종기(1976년 입사, 2006년 정년퇴임, 2024년 사망)[885]
- 이수영(李壽泳)(1976년 입사, 2008년 정년퇴임)[886]
- 김창희(金昌熺)(1976년 입사, 2008년 퇴임)[887]
- 전영일(1976년 입사, 1991년 해고, 1993년 복직, 2010년 정년퇴임)[888]
- 박태웅(1976년 입사, 2011년 정년퇴임)[889]
- 고천산(1977년 입사, 1994년 정년퇴임)[890]
- 한삼용(1977년 입사, 1984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 1988년 복귀, 2005년 정년퇴임)
- 문금주(1977년 입사, 2009년 정년퇴임)[891]
- 전서환(1977년 입사, 2009년 정년퇴임)[892]
- 최덕규(1977년 입사, 2009년 정년퇴임)[893]
- 신석원(1978년 입사, 1991년 KBS영상사업단 이직)[894]
- 조세현(1978년 입사, 2006년 정년퇴임)
- 김영해(1978년 입사, 2008년 본사 부사장 임명, 2022년 사망)[895]
- 서순석(1978년 입사, 2010년 정년퇴임)[896]
- 이상목(1978년 입사, 2010년 정년퇴임)
- 장석주(1978년 입사, 2010년 정년퇴임)
- 김영식(金永植)(1979년 입사, 1991년 SBS 이직)
- 김홍련(1979년 입사, 1995년 퇴사)[897]
- 강성삼(1979년 입사, 2013년 정년퇴임)
- 전현찬(1979년 입사, 2014년 정년퇴임)[898]
- 정창교(1979년 입사, 2014년 정년퇴임)[899]
- 황길웅(1980년 입사, 1989년 퇴사)[900]
- 김종대(1980년 입사, 1990년 BBS 이직)[901]
- 원종화(1980년 입사, 1991년 SBS 이직)[902]
- 윤공섭(1980년 입사, 1991년 SBS 이직)[903]
- 백운춘(1980년 입사, 1993년 정년퇴임)[904]
- 전하도(1980년 입사, 1994년 바둑TV 이직)[905]
- 최인식(1980년 입사, 1995년 PSB 이직)[906]
- 정구언(1980년 입사, 1997년 동아방송예술대학 이직)[907]
- 김순기(金順起)(1980년 입사, 1998년 KBS아트비전 사장 임명)[908]
- 김영호(1980년 입사, 1998년 정년퇴임)[909]
- 이일성(1980년 입사, 1998년 퇴사)[910]
- 김청길(1980년 입사, 2001년 정년퇴임)[911]
- 배정광(1980년 입사, 2003년 정년퇴임)[912]
- 조해남(1980년 입사, 2010년 KBS비즈니스 감사 임명)[913]
- 고철수(1980년 입사, 1984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 1988년 복귀, 2011년 정년퇴임)[914]
- 최겸수(1981년 입사, 1991년 SBS 이직)[915]
- 김갑기(1981년 입사, 1987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 1988년 복귀, 1993년 퇴사)[916]
- 민광식(1981년 입사, 1993년 정년퇴임)[917]
- 이계성(1981년 입사, 1994년 YTN 이직)
- 하성우(1981년 입사, 1995년 PSB 이직)
- 조문재(1981년 입사, 2011년 정년퇴임, 2016년 사망)[918]
- 강충실(1981년 입사, 2013년 정년퇴임)
- 권대복(1981년 입사, 2014년 정년퇴임)
- 김수태(1981년 입사, 2014년 정년퇴임)
- 이상필(1981년 입사, 1984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직, 1988년 복귀, 2014년 정년퇴임)[919]
- 이위찬(1981년 입사, 2014년 정년퇴임)
- 이정우(李正雨)(1981년 입사, 2014년 정년퇴임)[920]
- 김석두(1981년 입사, 2015년 퇴임)[921]
- 우종구(1981년 입사, 2015년 정년퇴임)
- 황해섭(1982년 입사, 2012년 정년퇴임)
- 목하균(1982년 입사, 2015년 정년퇴임)
- 이종화(1982년 입사, 2015년 정년퇴임)[922]
- 강태흥(1985년 입사, 2003년 정년퇴임)[923]
- 구자룡(1985년 입사, 2014년 정년퇴임)[924]
- 이종옥(1985년 입사, 2014년 KBS비즈니스 이사 임명)[925]
- 조경래(1985년 입사, 2014년 정년퇴임)[926]
- 박영찬(1985년 입사, 2018년 정년퇴임)
- 김대현(1985년 입사, 2020년 정년퇴임)
- 이재필(1985년 입사, 2020년 정년퇴임)
- 정화섭(1985년 입사, 2020년 정년퇴임)[927]
- 김칠성(1986년 입사, 2021년 정년퇴임)[928]
- 임영선(1987년 입사, 1994년 YTN 이직)
- 박병열(1987년 입사, 2017년 KBS비즈니스 감사 임명)[929]
- 김순기(金舜基)(1987년 입사, 2018년 퇴임)[930]
- 진종철(1987년 입사, 2019년 정년퇴임)[931]
- 장수기(1987년 입사, 2019년 정년퇴임)[932]
- 이창형(1987년 입사, 2021년 퇴임)
- 김명환(1987년 입사, 2021년 정년퇴임)[933]
- 김용덕(1989년 입사, 2019년 퇴임)[934]
- 김병국(1989년 입사, 2023년 퇴임)[935]
8.2.8. 카메라맨
현직- 김순일(1994년 입사, 영상제작국장)
- 변춘호(1994년 입사, 총감독)
- 이규하(1993년 입사)
- 추재만(1993년 입사)
- 오난향(1994년 입사)[936]
- 허정(1995년 입사)
- 신재욱(1997년 입사)
전직
- 신면식(1961년 입사, 1964년 동양TV 이직)[937]
- 권유철(1964년 입사, 1994년 정년퇴임)[938]
- 차종식(1965년 입사, 1969년 MBC 이직)
- 김명균(1967년 입사, 1969년 MBC 이직)
- 양경운(1968년 입사, 1969년 MBC 이직, 2021년 사망)
- 김창순(1968년 입사, 1994년 퇴사, 1998년 사망)[939]
- 김기철(1970년 입사, 2001년 KBS아트비전 이사 임명, 2015년 사망)[940]
- 이남무(1970년 입사, 2002년 정년퇴임)[941]
- 김성진(金成鎭)(1970년 입사, 2003년 정년퇴임)[942]
- 김형진(金瀅震)(1971년 입사, 2004년 정년퇴임)[943]
- 이항수(1971년 입사, 2004년 정년퇴임)[944]
- 유영조(1972년 입사, 1990년 정년퇴임, 2017년 사망)[945]
- 박노한(1973년 입사, 1994년 퇴사, 2021년 사망)[946]
- 장태환(1973년 입사, 1998년 퇴사)[947]
- 한건용(1978년 입사, 2006년 정년퇴임)[948]
- 신현국(申鉉國)(1978년 입사, 2010년 정년퇴임)
- 이거종(1978년 입사, 2010년 정년퇴임)[949]
- 백순모(1979년 입사, 1993년 헬기 사고로 사망)[950]
- 함창기(1980년 입사, 1983년 제일기획 이직, 2019년 사망)[951]
- 김기찬(1980년 입사, 1994년 제일기획 이직, 2006년 사망)[952]
- 남기원(1980년 입사, 1998년 퇴사)[953]
- 정정수(1980년 입사, 2001년 정년퇴임)[954]
- 박희환(1980년 입사, 2013년 정년퇴임, 2023년 사망)[955]
- 김형탁(1982년 입사, 2014년 정년퇴임)
- 박길홍(1982년 입사, 2015년 정년퇴임)
- 이천복(1984년 입사, 1991년 SBS 이직)
- 지한규(1984년 입사, 2006년 정년퇴임)[956]
- 강찬희(1985년 입사, 1994년 엠넷 이직)
- 곽노창(1985년 입사, 2015년 정년퇴임)
- 양기성(1985년 입사, 2018년 정년퇴임)
- 진교승(1987년 입사, 2020년 정년퇴임)
- 오인식(1993년 입사, 2001년 교통사고로 사망)[957]
8.2.9. 미술/그래픽
1991년 이후 타이틀, 소품, 의상, 세트 등 일부 방송미술 제작업무는 KBS아트비전으로 이관되었다.[958]현직
- 김종욱(1996년 입사, KBS아트비전 경영이사(파견))
- 진수아(1996년 입사)[959]
전직
- 김성호(金聲昊)(1963년 입사, 1966년 TBC 이직)
- 박수명(1964년 입사, 1969년 MBC 이직, 2022년 사망)
- 권혁준(1967년 입사, 1972년 MBC 이직)
- 정영기(1969년 입사 및 MBC 이직, 2022년 사망)[960]
- 박영대(1969년 입사, 1991년 KBS아트비전 이직)
- 한동수(1969년 입사, 1991년 KBS문화사업단 이직)[961]
- 이석우(李錫雨)(1970년 입사, 1991년 KBS아트비전 이직, 2007년 사망)
- 윤인섭(1971년 입사, 1995년 퇴사, 2024년 사망)
- 박한영(1973년 입사, 1991년 KBS아트비전 이직)
- 배구직(1976년 입사, 1991년 KBS아트비전 이직)[962]
- 전순호(1976년 입사, 1991년 KBS아트비전 이직)[963]
- 차효석(1976년 입사, 1991년 KBS아트비전 이직)[964]
- 김복균(1980년 입사, 1982년 정년퇴임)[965]
- 김동원(1980년 입사, 1991년 KBS아트비전 이직)[966]
- 서상정(1980년 입사, 1991년 SBS 이직, 2019년 사망)[967]
- 이일구(1980년 입사, 1991년 KBS아트비전 이직)[968]
- 조상래(1980년 입사, 1991년 KBS아트비전 이직)[969]
- 홍충태(1980년 입사, 1991년 SBS 이직, 2010년 사망)[970]
- 장명헌(1980년 입사, 1998년 명예퇴직)[971]
- 송병철(1980년 입사, 2006년 정년퇴임)[972]
- 김만규(1981년 입사, 1991년 KBS아트비전 이직)[973]
- 우종만(1981년 입사, 1991년 KBS아트비전 이직)
- 최명락(1981년 입사, 1991년 KBS아트비전 이직)
- 김학권(1982년 입사, 1991년 KBS아트비전 이직)
- 강현석(1985년 입사, 1991년 KBS아트비전 이직)[974]
- 조현주(1985년 입사, 1991년 SBS 이직)
- 권신(1985년 입사, 2015년 정년퇴임)
- 이석인(1985년 입사, 2021년 정년퇴임)[975]
- 김형민
- 이영범[976]
8.2.10. 경영/관리직
현직- 조봉호(1991년 입사, 경영본부장)[977]
- 유용욱(1993년 입사, KBS N 경영본부장(파견))[978]
- 주성범(1993년 입사, 청주방송총국장)[979]
- 신경균(1997년 입사, KBS 아메리카 사장(파견))
- 조현인(1991년 입사)[980]
- 정지영(1993년 입사)
- 김남용(1995년 입사)[981]
전직
- 최영신(1958년 입사, 1989년 방송시설관리사업단 이직)[982]
- 송형근(1959년 입사, 1989년 정년퇴임)[983]
- 박재윤(1961년 PD로 입사, 1973년 전직, 1984년 정년퇴임, 2000년 사망)[984]
- 엄복영(1961년 아나운서로 입사 및 PD로 전직, 1973년 전직, 1992년 정년퇴임)[985]
- 장정훈(1962년 PD로 입사, 1974년 전직, 1994년 정년퇴임)[986]
- 이장춘(1963년 PD로 입사, 1973년 전직, 1998년 퇴사)[987]
- 조남민(1964년 기자로 입사, 1973년 전직, 1987년 정년퇴임, 2023년 사망)[988]
- 양영곤(1964년 기자로 입사, 1982년 전직, 1994년 정년퇴임, 2019년 사망)[989]
- 박명양(1966년 입사, 1992년 정년퇴임)[990]
- 이범경(1966년 입사, 1993년 퇴임)[991]
- 손영호(1967년 입사, 1988년 퇴임, 2004년 사망)[992]
- 민병국(1967년 입사, 1998년 퇴사)[993]
- 윤구상(1967년 입사, 1998년 정년퇴임)[994]
- 김현중(1967년 입사, 2000년 정년퇴임)[995]
- 김영안(1968년 입사, 1997년 정년퇴임)[996]
- 박헌기(1969년 입사, 2006년 정년퇴임)[997]
- 박삼봉(1969년 입사, 2008년 정년퇴임)[998]
- 구능회(1969년 기술직으로 입사, 1991년 해고, 1993년 경영직으로 복직, 2009년 정년퇴임)[999]
- 김형준(1969년 입사, 1998년 KBS시설관리사업단 사장 임명)[1000]
- 김현국(1970년 입사, 1994년 퇴사)[1001]
- 조태제(1970년 입사, 1998년 명예퇴직)[1002]
- 김동경(1971년 입사, 1994년 퇴사)[1003]
- 권의철(1971년 입사, 1998년 퇴사)[1004]
- 김학선(1971년 입사, 1999년 정년퇴임)[1005]
- 현서(1972년 입사, 1993년 정년퇴임)[1006]
- 이영철(1972년 입사, 2000년 KBS비즈니스 사장 임명)[1007]
- 손소진(1973년 입사, 1993년 KBS문화사업단 이사 임명)[1008]
- 임태화(1973년 입사, 1993년 정년퇴임)[1009]
- 인태오(1973년 입사, 1995년 KBS시설관리사업단 사장 임명)[1010]
- 문영수(1973년 입사, 1997년 KBS영상사업단 사장 임명)[1011]
- 엄위영(1973년 입사, 1998년 퇴사)[1012]
- 김무열(1973년 입사, 2000년 정년퇴임, 2019년 사망)[1013]
- 이봉원(李奉遠)(1973년 입사, 2001년 KBS아트비전 사장 임명)[1014]
- 박동식(1973년 입사, 2003년 정년퇴임)[1015]
- 김묵(1973년 입사, 2004년 정년퇴임)[1016]
- 이광수(1973년 입사, 2004년 정년퇴임)[1017]
- 최덕용(1973년 입사, 2004년 정년퇴임)[1018]
- 정종철(鄭鍾喆)(1973년 입사, 2005년 정년퇴임)[1019]
- 최병린(1973년 입사, 2005년 정년퇴임, 2013년 사망)[1020]
- 김규학(1973년 입사, 2006년 정년퇴임)
- 김기인(1973년 입사, 2006년 정년퇴임)[1021]
- 유광호(1973년 입사, 2006년 정년퇴임)[1022]
- 이현원(1973년 입사, 2006년 정년퇴임)
- 이동섭(1973년 입사, 2009년 KBS 미디어 감사 임명)[1023]
- 진무세(1974년 입사, 1980년 강제해직, 1988년 복직, 1997년 정년퇴임, 2023년 사망)[1024]
- 한안성(1974년 입사, 2003년 퇴임)[1025]
- 전봉찬(1974년 입사, 2004년 KBS비즈니스 감사 임명)[1026]
- 김구동(1974년 입사, 2006년 정년퇴임)[1027]
- 김진홍(1974년 입사, 2006년 정년퇴임)[1028]
- 김찬송(1975년 입사, 1993년 KBS문화사업단 이사 임명)[1029]
- 정태진(1975년 입사, 2005년 퇴임)[1030]
- 변원일(1975년 입사, 2005년 정년퇴임)
- 황인덕(1975년 입사, 2008년 퇴임)[1031]
- 심은철(1976년 입사, 2008년 정년퇴임)[1032]
- 김홍(金鴻)(1977년 입사, 1993년 해고)[1033]
- 이춘재(1977년 입사, 1995년 PSB 이직)
- 이성억(1977년 입사, 1998년 명예퇴직)[1034]
- 남효성(1977년 입사, 2008년 정년퇴임)[1035]
- 고홍만(1977년 입사, 2010년 정년퇴임)
- 정진근(1977년 입사, 2010년 정년퇴임)[1036]
- 조용건(1977년 입사, 2010년 정년퇴임)
- 이기범(1977년 입사, 2011년 정년퇴임)[1037]
- 주병찬(1978년 입사, 2005년 정년퇴임)
- 임재호(1978년 입사, 2007년 정년퇴임)
- 민명기(1978년 입사, 2011년 정년퇴임)
- 정하천(1978년 입사, 2011년 정년퇴임)
- 백경준(1978년 입사, 2012년 정년퇴임)
- 육경섭(1978년 입사, 2012년 정년퇴임)[1038]
- 박성희(朴成熙)(1979년 입사, 1989년 방송시설관리사업단 이직)
- 민장홍(1979년 입사, 2004년 정년퇴임)[1039]
- 진규동(1979년 입사, 2014년 정년퇴임)
- 이광형(1980년 입사, 1988년 퇴사)[1040]
- 박용식(1980년 입사, 1998년 퇴임)[1041]
- 권오정(1980년 입사, 2001년 정년퇴임, 2019년 사망)[1042]
- 최정기(1980년 입사, 2010년 정년퇴임)[1043]
- 길주(1981년 입사, 2003년 정년퇴임)[1044]
- 김영석(1981년 입사, 2009년 정년퇴임)[1045]
- 길기철(1981년 입사, 2010년 정년퇴임)
- 피태호(1981년 입사, 2010년 정년퇴임)[1046]
- 장윤상(1981년 입사, 2011년 정년퇴임)[1047]
- 정구성(1981년 입사, 2011년 정년퇴임)
- 전홍구(1981년 입사, 2013년 부사장 임명)[1048]
- 최용규(1981년 입사, 2013년 정년퇴임)[1049]
- 한남철(1982년 입사, 1991년 KBS문화사업단 이직, 1993년 사망)[1050]
- 김영준(金英俊)(1982년 입사, 2010년 정년퇴임)
- 김태준(1982년 미술직으로 입사, 1991년 해고, 1993년 홍보직으로 복직, 2011년 정년퇴임, 2015년 사망)[1051]
- 금동수(1982년 입사, 2014년 정년퇴임)[1052]
- 김성오(1982년 입사, 2015년 퇴임)[1053]
- 정복승(1982년 입사, 2015년 정년퇴임)[1054]
- 이경희(李慶姬)(1982년 입사, 2018년 정년퇴임)[1055]
- 서강원(1982년 입사. 2019년 정년퇴임)[1056]
- 권용수(1983년 입사, 1992년 KBS문화사업단 이사 임명)[1057]
- 박희성(1984년 입사, 2017년 KBS교향악단 사장 임명)[1058]
- 오항열(1985년 입사, 2003년 정년퇴임)[1059]
- 지연옥(1985년 입사, 2011년 KBS비즈니스 이사 임명)[1060]
- 김영헌(1985년 입사, 2013년 정년퇴임)
- 박희찬(1985년 입사, 2013년 정년퇴임)
- 공원보(1985년 입사, 2014년 정년퇴임)
- 김원한(1985년 입사, 2014년 정년퇴임)
- 문창석(1985년 입사, 2014년 퇴임)[1061]
- 신창섭(申昶燮)(1985년 입사, 2014년 정년퇴임)[1062]
- 이준용(1985년 입사, 2014년 퇴사)[1063]
- 고강균(1985년 입사, 2015년 정년퇴임)
- 오영철(吳永喆)(1985년 입사, 2015년 정년퇴임)[1064]
- 신용훈(1985년 입사, 2018년 정년퇴임)[1065]
- 전영식(1985년 입사, 2018년 정년퇴임)
- 이완성(1985년 입사, 2018년 퇴임)[1066]
- 김종석(金鍾奭)(1985년 입사, 2018년 정년퇴임)[1067]
- 차근철(1985년 입사, 2018년 정년퇴임)
- 김열우(1985년 입사, 2019년 정년퇴임)
- 이기백(1985년 입사, 2019년 정년퇴임)
- 이흥숙(1985년 입사, 2019년 정년퇴임)
- 강상구(1985년 입사, 2020년 정년퇴임)
- 은문기(1985년 입사, 2020년 정년퇴임)[1068]
- 정인균(1985년 입사, 2021년 정년퇴임)[1069]
- 유병돈(1985년 입사, 2022년 정년퇴임)
- 조남희(1985년 입사, 2022년 정년퇴임)
- 박갑진(1986년 입사, 2012년 퇴임)[1070]
- 노승희(1986년 입사, 2014년 정년퇴임)
- 박상섭(1986년 입사, 2020년 정년퇴임)
- 이광희(1986년 입사, 2020년 정년퇴임)
- 이청기(1986년 입사, 2021년 정년퇴임)
- 유신열(1987년 입사, 2018년 정년퇴임)
- 이제학(1987년 입사, 2019년 정년퇴임)
- 김윤로(1987년 입사, 2020년 정년퇴임)
- 이재희(1987년 입사, 2020년 정년퇴임)
- 서병용(1987년 입사, 2021년 정년퇴임)
- 박재홍(1989년 입사, 2019년 퇴임)[1071]
- 조현국(1990년 입사, 2021년 퇴임)[1072]
- 박범서(1990년 입사, 2021년 정년퇴임)
- 이영태(1990년 입사, 2023년 정년퇴임)[1073]
- 김진권(1991년 입사, 2022년 사망)[1074]
- 류삼우(1991년 입사, 2023년 부사장 임명)[1075]
- 박연(1991년 입사, 2023년 퇴임)[1076]
- 오상섭(1993년 입사, 2023년 정년퇴임)
8.2.11. 기타
- 차재완(1980년 입사, 2005년 정년퇴임)[1077]
9. 채널
참조 사항: 2002년 5월 이전까지는 뉴스, 스포츠 프로그램을 제외한 나머지 프로그램에는 KBS 로고(워터마크) 표시가 없었다. 이후 처음으로 도입할 당시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가[1078], 2003년 12월 1일부터 2010년 12월 31일까지 로고(워터마크) 위치가 왼쪽, 2011년 1월 1일부터 다시 오른쪽에 표출중이다. 2018년 9월 3일부터 1TV와 2TV의 로고(워터마크)가 바뀌었다. 2020년 10월 20일부터 로고가 좀 더 우측으로 이동하였으며 지역국 폰트는 KBS 내부에서 사용하는 폰트로 변경하였다. 예전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엔딩 크레딧에 '제작' 폰트로 사용된 바 있었고 1990년대 중반 이후에 TV에서 사용하지 않고 내부용 폰트로 썼다가 30년 만에 TV에서 다시 쓰이게 된 셈이다.방송국명 | 주파수ㆍ채널 | |
KBS 1TV | U-KBS STAR | Ch.15(관악산), 22(남산) |
KBS 2TV | U-KBS HEART | Ch.17(관악산), 45(남산) |
KBS 제1라디오 | AM 711㎑/FM 97.3㎒ | |
KBS 제2라디오 | Happy FM | AM 603㎑/FM 106.1㎒ |
KBS 제3라디오 | 사랑의 소리 방송 | AM 1134㎑/FM 104.9㎒ |
KBS 1FM | Classic FM | FM 93.1㎒ |
KBS 2FM | Cool FM[DMB] | FM 89.1㎒ |
KBS 한민족방송 | 제1방송 AM 972㎑, 단파(SW) 6015㎑, 제2방송 AM 1170㎑ |
9.1. 지상파 텔레비전 방송
1961년 12월 31일 저녁 7시 30분 남산연주소에서 첫 전파를 쏘아올렸다. 당시 화재로 문을 닫고 방치되어 있던 DBC 대한방송의 TV 장비와 인력을 인수하였고, DBC가 원래는 KORCAD-TV(HLKZ)라는 RCA 제휴 민간방송이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아시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후덜덜한 방송장비를 갖고 있었다.[1081]
현재 지상파 TV채널로는 KBS 1TV과 KBS 2TV를 운영하고 있으며, 1981년부터 교육방송인 KBS 3TV도 있었지만[1082] 1990년에 한국교육개발원으로 송출을 제외한 모든 업무가 이관되었다가 1997년에 한국교육방송원으로 독립하여 2000년 한국교육방송공사가 되었다.[1083]
참고로 KBS1에는 한국의 지상파 TV채널 중 유일하게 상업광고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1084] 하지만, 1994년 10월 1일 이전에는 상업광고를 했었다. KBS1에서 대놓고 9시뉴스가 시작하기 전에 XX약품 광고가 나왔다.)[1085][1086] 다만 아무 시간대나 프로그램에다가 광고를 하는 방식은 아니었고, 주로 스포츠 중계방송이나 특집 프로그램에다가 광고를 편성하거나 특정시간대를 정해서 광고를 하는 방식이었다.
2012년 10월 8일 05:00부터 KBS 1TV의 24시간 방송을 개시했다. 지상파로서는 최초다.[1087]
KBS2의 경우 1980년에 내려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에 명시된 신문-방송 겸영 금지로 과거 민영방송이었던 동양방송이 한국방송공사로 이관되며 추가된 채널이다. 보도와 교양프로그램은 기존의 KBS 채널이었던 KBS1에서 담당하고 있었기에, 9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KBS2에서 뉴스 프로그램의 비중이 적었으며, 심지어 각종 대형사건 및 중요 행사와 관련하여 다른 지상파 방송국들은 뉴스속보나 생중계를 내보내는데 혈안이 되는 시점에서도 정규방송을 당당하게 방송해 주던 단 둘 뿐이였던(EBS 포함) 지상파 채널이었다. 그래서 이 당시에 KBS2는 전쟁이 나도 드라마나 쇼프로를 방송해 줄 거라는 우스갯 소리가 돌기도 했다.
2003년부터 KBS1은 푸른색(한색) 계열 '큐브' 디자인을, KBS2는 비슷한 시기부터 노란색(난색) 계열 '서클' 다자인을 BI로 쓰고 있다. 2015년 이 CI를 중심으로 방송 디자인이 개편된 적이 있었는데, KBS 9시 뉴스의 2015년 오프닝이나 KBS2 NEXT 영상 등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2018년 이후에는 대놓고 채널 로고와 방송 디자인에 적용되어 있는 상황이며 표어도 각각 '오늘을 담는 창', '내일을 여는 빛'이 붙었다.
2021년 2020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UHD 지상파 다채널 서비스를 시범적으로 시작했다.
한편 해외에서 시청할 수 있는 KBS 월드라는 채널도 운영하고 있는데, 자체제작이 아니라 그냥 방송콘텐츠에다가 외주 업체에서 만들어온 영문 자막을 그대로 덧씌워서 내보내는 형식이다.[1088] 시청 국가 및 지역에 따라 편성표는 각각 운영된다. 그래도 해외에서 한국 문화에 목마른 사람들에겐 꽤 인기있는 모양이다.[1089]
KBS 예능 프로그램의 경우, 효과음을 돌려쓴다.
9.2. 지상파 라디오 방송
과거에는 '사회교육방송'이란 것도 존재했으며[1096], 섬마을 사람들은 매일 오전 9시 45분부터 방송되는 일기예보를 듣고 실제로 일기도를 그렸다. 물론 대략 80년대 얘기이며, 이제는 매시 58분마다 KBS 제1라디오에서 날씨를 전하고 있다.[1097][1098]
하지만 국가기반 공영방송국 주제에 KBS 2FM은 광고방송을 이유로 수도권에서만 방송한다.[1099] 그래서 지방에서는 U-KBS MUSIC이라는 T-DMB V-Radio방송을 들어야하는데 한 프로그램만 릴레이를 하지 않고 자체방송을 했었지만 지금은 모든 프로를 청취할 수 있다가 면허문제로 두 프로그램 대신 새 자체 프로그램을 송출하다 2024년부터 쿨FM의 일부 프로를 DMB 쪽으로 옮겼다.
9.3. PP(KBS N)
- KBS drama
- KBS joy
- KBS N SPORTS
- KBS Story: 2013년 1월 1일 개국. 케이블TV 각 SO에서 기존 KBS Prime을 송출하던 번호를 배정받았다.
- KBS Kids
- KBS LIFE: 2015년 3월 8일자로 KBS Prime에서 변경.
- KBS N PLUS: 2017년 6월 개국한 OTT 전용 채널.
지상파 채널 외의 계열 방송사로는 KBS N이 있으며, 케이블 채널로 KBS drama, KBS joy, KBS N SPORTS, KBS W, KBS Kids, KBS N LIFE를 운영하고 있다. 처음에는 KBS위성1,2를 관할하는 위성방송 PP로 출범했으나 이 채널들이 전부 폐국하면서[1100] 2006년 이후 유료방송 PP로 노선을 전환했다.
9.4. 인터넷 방송
- KBS NEWS D (舊 KBS 24시 뉴스)
KBS N 전 채널의 오리지널 콘텐츠를 편성하는 OTT 전용 채널, 2017년 6월 개국했다. KBS+, wavve 등에서 볼 수 있다.
독도의 풍경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채널.
9.4.1. esports KBS
e-스포츠 전문 유튜브 채널.9.5. 유튜브 채널
KBS 산하 | MBC 산하 | SBS 산하 |
EBS 산하 | JTBC 산하 | CJ ENM 산하 |
MBN 산하 | TV조선 산하 | 채널A 산하 |
YTN 산하 | OBS 산하 | skyTV 산하 |
참고: 대한민국의 뉴미디어 브랜드 |
운영 소관 부서는 편성본부 멀티플랫폼편성국이며, 2016년부터 3년 동안 미래사업본부 산하 디지털서비스국이었으나, 2019년 조직 개편 후 편성본부 산하로 이동되어 '디지털미디어국'이 됐다가, 2021년 조직 개편으로 현 명칭이 되었다.
- 공식 채널
- 뉴스
- 시사: 구 시사기획 창
- 선거방송기획단: 구 정치합시다
- 남북의 창
- 사사건건
- 질문하는 기자들 Q(종영)
- KBS추적: 구 시사멘터리 추적(2022년 8월 25일 이후로 KBS 시사와 통합)
- 댓글 읽어주는 기자들
- 머니올라 - 구 사건 탐구: 사탐 티비
- 체크살 - 구 팩톡: 가짜뉴스 퇴치 프로젝트(폐쇄)
- 크랩: KBS DIGITALNEWSLAB
- 윤창희의 생존경제: 구 속고살지마
- 보다 VIEW(폐쇄)
- KBS News Sao Paulo
- KBS 교양
- KBS LIFE
- 다큐멘터리, KBS 다큐
- 해보라: 구 KBS지식 / 해 볼만한 아침 M&W
- 생방송 심야토론(종영(2022년 6월 25일 방영분 이후 업로드 중단))
- 국악한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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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모든 다큐: 구 디지털 시청자칼럼((2018년 9월 10일~2021년 8월 17일), 구 기막힌 티비(2021년 8월 18일~2022년 10월 8일) 2022년 10월 8일 이후로 KBS 실험실과 통합. 2023년 부터 현재 계정으로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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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9.6. 실시간 스트리밍 및 VOD, AOD
1995년 10월 9일에 한국 방송사로서 최초로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한 이래 1997년 뉴스클립 다시보기 서비스, 1998년 본격적인 VOD 서비스 시작 때부터 2001년 초반까지는 주로 리얼 플레이어를 통해 회원가입/로그인 없이 무료로 실시간 스트리밍 및 VOD, AOD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지만[1101] 이후 회원제로 전환되었고, 2006년에 라디오 전용 프로그램인 Kong 플레이어가 출시되었다. 2012년경에 myK가 출시되어 이제는 회원가입/로그인 없이도 실시간 스트리밍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모바일 방송 서비스를 막아놓은 MBC와 3분마다 광고를 봐야 하는(...) SBS와도 차별화되는 부분. 한국교육방송공사도 EBS Play를 무료로 서비스하고 있다. 하지만 BBC의 iPlayer(플래시 기반)와 다르게 K플레이어는 그놈의 ActiveX 설치를 요구하기에 Internet Explorer 웹브라우저에서만 사용가능(...). 다만 일반적인 AOD, VOD는 2012년경 방영분부터는 WMA/WMV기반이 아닌 AAC/MP4 기반이기에 크롬 등 다른 웹브라우저에서도 이용 가능. 홈페이지 자체는 2002년부터 자회사 KBS 인터넷(구 크레지오닷컴)이 위탁 운영을 맡기 시작했고, 2011년 그 회사가 KBS 미디어로 합쳐지면서 KBS 미디어가 운영 중이다.KBS의 VOD 서비스가 다른 방송사와 차별화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저화질에 한해 무료라는 점. EBS마저도 일부 VOD가 유료이다. 그러나 KBS만큼은 무료 VOD 서비스를 고수하고 하는데, 고화질 다시보기의 경우 WMP 시절에는 일정 기간 동안 300K까지 제공했다가 2005년경 이후 '고화질(700K)'을 추가시켜 KBS 미디어의 유료 VOD 사이트인 콘피아와 연동되게 했고, 2010년대 들어 일정 기간 동안 무료로 제공해주거나 Wavve로 연결되게 했다. 2018년 7월에 KBS 홈페이지가 개편된 이후에는 드라마(일일 드라마를 제외한 월화 드라마/수목 드라마 등 평일 및 주말 드라마들)와 해피선데이, 해피투게더,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 등 일부 예능 프로그램은 3주 정도 유료 서비스를 하다가 기간이 지나면 저화질에 한해 무료로 전환된다.[1102] 수신료를 받는 마당에 이거라도 무료로 해주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다만 타 방송사도 무료 VOD/AOD 서비스가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문화방송과 SBS는 라디오 AOD 서비스를 팟캐스트를 통해 무료로 시행 중이고, 지역방송과 지역민방의 자체 제작 TV 프로그램일 경우 무료로 제공된다.
2018년 7월에 KBS 홈페이지가 개편되면서 대부분 프로그램의 VOD 서비스를 하지 않고 있으며 일부 서비스하고 있는 프로그램들도 대부분 이전 방송분은 서비스를 하지 않는다. 이는 라디오 프로그램도 역시 마찬가지이다.[1103] 이로 인해 옛날 프로그램 매니아들은 당연히 불만을 품어왔고, 일부는 비싼 돈 들여가며 KBS 미디어를 통해 프로그램 복사구매를 하는 경우도 있다. 2000년대 중후반~2010년대 들어 홈페이지에서 옛날 프로그램 다시보기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SBS, MBC와 비교해 더욱 까이나, 2019년부터 '옛날티비', '깔깔티비', '크큭티비', 'KBS Drama Classic', '같이삽시다', 'KBS실험실' 등지 유튜브 채널들에 옛날 프로그램 업로드를 분산시키고 있다.[1104]
이곳에서 독도의 영상을 실시간으로 스트리밍 중계해 준다. 청와대, 정부서울청사, 서울특별시청 등지의 구내 TV에 나오는 것과 같은 영상이다.[1105] 그리고 평창 동계 올림픽 D-50 특별 생방송도 방송 이후 다음날에 VOD 서비스를 시작했다.
9.7. 팟캐스트
2013년까지는 Internet Explorer 웹브라우저를 통해 접속한 후 별도의 프로그램(ActiveX)을 설치하여 로그인후 다운로드해야 하는 등 BBC, MBC와 비교해도 폐쇄적으로 운영해왔으나 2014년부터는 아이튠즈 체제로 전환하여 회원가입/로그인 없이도 다운로드 받을 수 있게 되었다.10. 방송 현황
10.1. 프로그램
자세한 내용은 한국방송공사/프로그램 문서 참고하십시오.10.2. 재난 방송
언젠가부터 KBS는 자사의 특보방송이나 재난 대비용 spot 홍보영상 등에 "KBS는 재난주관방송사입니다"라는 문구를 삽입하고 있다. 실제로 KBS는 태풍, 산불, 폭설 등 기상 재난재해 관련 주관업무를 담당하고 있고, 영어로 된 뉴스 티커 자막도 제공 중이다.[1106]아직은 지진재난방송에 대해서는 비교적 미흡하다. 옆나라 일본을 보면 지진 2초 후 세부적인 지도, 상황, 앵커의 대처, 지진전문방송으로 넘어가는 등 대처에 적극적이다. 아무래도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미흡한 편은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2021년 12월에 발생한 ‘제주 서남서 41km 해역 지진’에서 대처하는 모습은 ‘경주 지진’, ‘포항 지진’ 때의 보도보다 훨씬 나아졌다. 방송 송출 중, 경보와 대략적인 지진 상황을 알리고, 3~4분 후에 지도를 포함한 지진파가 미치는 지역, CCTV 등 지진 피해 현황이 담긴 세부적인 내용을 송출, 보도하는 등 많이 발전했다고는 보여지지만 이건 지진에만 해당되는 사항.
우리나라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산불, 장마/호우 등의 재난의 경우에는 2019년 고성-속초 산불 당시의 논란과 같이 아예 재난주관방송사의 임무를 망각한듯한 모습을 보여 논란이 된 적 있으며, 2022년 중부권 폭우 사태/수도권/논란 항목에서 보는 것과 같이 수도권, 그 중에서도 서울 위주의 재난방송을 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오히려 재난관련 속보는 타 방송사 자막속보를 보는 것이 더 빠른 경우도 있다. 실제로 태풍이 한반도를 직격할 때 가만히 보면 수도권을 강타할 경우와 아닌 경우 방송편성 자체가 확연히 차이날 정도이다. 2023년 현재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보도본부가 속보체제로 들어가는 시간은 빨라야 20분 내외로, 이웃나라 NHK와 비교해보면 너무 많이 차이나서 할 말이 없을 수준이다.[1107]
10.3. 방송망
자세한 내용은 한국방송공사/전국 방송망 문서 참고하십시오.10.4. 네트워크
서울 외에도 지방에 9개 방송총국, 9개 방송국, 1개 센터를 두고 있으며, 8개 해외지국[1108]을 개설하여 운영 중이다.또한 각 지역방송국은 MBC-지역 MBC, SBS-지역민방처럼 네트워크 협력관계가 아닌, KBS라는 단일조직 내에 있다. 그렇기에 방송총국장과 방송국장은 전원 직원이며 서울 본사 출신 직원이 파견되거나 지역국 내부 출신 직원이 승진하여 총국장과 방송국장에 보임되는 방식으로 인사발령이 이뤄진다. 의외라 생각할 수 있지만 특정 직군에 편중되지 않고 골고루 보내지는 경향이 있다.[1109][1110]
지역에 따라 순환발령을 통해서 본사 직원이 지역으로 내려갈 수도 있고, 반대로 지역방송국 직원이 본사로 올라올 수도 있으며 지역국에서만 말뚝박은 채로 정년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1987년 15기 이후부터 신입사원 선발 시에 전국권 TO와 지역권 TO를 분리해서 뽑는데, 전국권 TO만 서울 본사로 바로 발령이 가능하고, 지역국 TO로 입사한 경우 최소 5년간 서울 본사로 전출이 불가능하다.[1111][1112]
지역 방송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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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서 북부 | 영서 남부 | 영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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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사, △: 방송센터, ◇: 방송총국 | }}}}}}}}} |
2004년 지역국 통폐합으로 없어진 KBS 방송국 | |
강원권 | |
영월방송국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금강공원길 84-3 |
태백방송국 | 강원도 태백시 문화로 36 (황지동) |
속초방송국 | 강원도 속초시 장안로3길 22 (동명동) |
충청권 | |
공주방송국 |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로 19 (신관동) |
호남권 | |
여수방송국 | 전라남도 여수시 관문6길 10 (관문동) |
남원방송국 | 전라북도 남원시 만인로 92 (향교동) |
군산방송국 | 전라북도 군산시 대학로 330 (나운동) |
2004년 감사원 지적사항으로 지방 방송국 통폐합이 이루어 지면서 군산시, 남원시 (이상 전주), 속초시, 태백시 (이상 강릉), 영월군(원주)[1113], 공주시(대전), 여수시(순천) 7개 방송국이 인근 방송(총)국으로 합쳐졌다. 그런데 KBS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라디오 주파수 목록에는 10년이 넘도록 아직도 이 7개 방송국이 독립된 방송국으로 적혀있다(...).[1114] 당시 각 지역에서 반발이 많았으며, 여러 사연도 많았다. 여수방송국은 전라남도 동부권에서 순천방송국보다 훨씬 먼저 생겼지만 결국 문을 닫아야만 했다. 현재 여수국은 철거되어 아파트가 들어섰다. 태백국 역시 철거되어 아파트 공사가 진행중이며, 전라북도에서는 2개의 지역국이 문을 닫으며 전주총국만 남게 되었으며, 충청남도에서도 공주국이 문을 닫으며 대전총국이 대전·충남 전역을 책임지게 되었다.[1115] 그리고 유일하게 군에 있던 영월국이 없어졌다. 참고로 폐국된 영월국이 이후 영화 라디오 스타의 촬영지로 쓰인 바 있다.
라디오에서 1990년대 중반부터 2015년까지 본사에서 지역국으로 시보나 방송시작멘트를 넘길 때 나는 효과음(띠리리리~ 띠리리리~)이 난 적이 있었다. 2016년부터 사용하지 않고 있다. 지역국 멘트를 송출할 때 서울 본사 멘트가 희미하게 들리곤 했었다.
2019년 8월 들어 KBS 본사 측에서 적자 경영개선 대책 중 하나로 지역방송국 기능축소를 제시해 구성원들의 반발이 크다. 2020년부터 지역방송국(경인, 강릉, 울산 제외)의 뉴스를 비롯한 TV 로컬방송을 폐지시키고 모두 상부 총국으로 이관하는 이른바 거점센터 기능으로 전환하겠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되면 지역방송국에서는 라디오 프로그램 제작,송출과 수신 개선 서비스, 수신료 징수 등의 반쪽 기능만 가능하게 된 셈이다. 당장 이 내용이 알려지자 지역 언론에서 기사들이 나오고 있고, 몇몇 구성원들은 삭발시위까지 했다. 심지어 여수MBC는 뉴스데스크를 통해 옆동네 KBS순천방송국의 기능 축소 문제를 보도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KBS는 2020년 2월 3일부로 지역총국 중심 뉴스 통합 정책을 밀어붙여 시작했다. 매주 월-목 KBS 뉴스 7은 본사 뉴스를 받지 않고 40분 통으로 지역뉴스를 진행하며[1116] 다만 을지역국의 경우 KBS 뉴스 9 로컬방송은 살려 놨다. 그러나 애초에 을지역국의 취재인력이 취재기자 2명, 영상기자 1명(...)으로 확 줄었기 때문에 을지역국에서 만들 수 있는 리포트기사는 꼴랑 1~2꼭지에 불과해 이거 말고는 그냥 총국에서 만든 기사를 중계하는 셈이 되었다. 게다가 2월 중순부터 코로나19 사태가 확산되며 KBS가 재난방송 체제로 접어들자, 여기에 총국중심으로 전 취재인력이 투입되다 보니 뉴스9 로컬도 총국에서 모두 때우고 있다.
10.5. 계열사
- 현존
- 해산/매각
- KBS 문화사업단: 구 한국방송사업단. 1999년 KBS 영상사업단으로 합병.
- KBS 인터넷: 구 크레지오닷컴(2000년 설립). 2002년에 사명(약칭 KBSi)이 변경되었고 2011년 KBS 미디어로 합병.
- KBS 제작단(현 한국방송제작단): 1999년 코네스컨소시엄으로 매각.
- KBS LA: 구 미주한국방송(KTE). 기존의 SBC(중앙일보 계열)와 KTB(한국일보 계열), TV 코리아 3개 방송사를 합병한 방송사로 2008년 KBS 아메리카에 합병.
10.6. 관계사
- 한국방송출판: 구 KBS 미디어 출판사업부. 《TV 유치원》 및 《굿모닝 팝스》 등의 발행처다. 유사역사학 서적을 간행한 적도 있다.
10.7. 공익재단
- 현존
- KBS강태원복지재단
- 해산
- 디지털시청100%재단: 2010년 KT스카이라이프와 공동으로 기금출연했으며 2019년 사업 종료 후 2021년 청산.
11. 간행물
11.1. 기록물
- KBS 연감 (1961~1962/1973/1995~)[1117]
- KBS 연지 (1975~1995)
11.2. 정기간행물
11.2.1. 잡지
- 여성백과[월간](1981~1993)
- 월간 방송[월간](1981~1984)
- 텔리비전[월간](1984~1985)
- 문화정보[월간](1985~1989)
- KBS 저널[월간](1988~2005/2010~2012)
- TV유치원[월간](1991~)
- 굿모닝 팝스[격월간](1991~2024)
- 지구촌 영상음악[월간](1993~2005)
- FM매거진[월간](1993~1996)
- 게임피아[월간](1995~2003)
11.3. 교재
12. 평가
자세한 내용은 한국방송공사/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13. 논란 및 사건 사고
자세한 내용은 한국방송공사/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 참고하십시오.14. 노동조합
-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교섭대표노조): 민주노총 소속. 2009년 KBS 1노조의 우경화에 반발한 젊은 조합원들이 1노조를 탈퇴한 뒤 만들었으며, 2018년부터 1노조를 제치고 교섭대표로 승격되었다. 2018년에는 언론노조 방송사비정규직지부 KBS분회(방송차량서비스 노조)를 통합해 '방송차량지부'로 개편시켰다. 박민 사장 취임 이후 한직에 있는 사원들 다수가 속해 있는 노조이기도 하다.
- KBS 노동조합: 1988년 결성. 미가맹. 원래 메인노조이자 언노련의 핵심이었으나, IMF 시대에 지역방송국 통폐합 과정에서 기술직들이 대거 갈려나가면서 기술직 출신 조합원들과 아나운서, PD 출신 조합원들 간의 내분이 일어났고, 결국 기술직들의 지지를 받아 2006년 당선된 박승규 노조위원장(전 스포츠국장)이 이명박 정부의 정연주 사장 축출 시도에 암묵적 지지를 보내면서 언론노조에서 제명되었다. 2009년 언론노조 KBS노조가 생긴 후 대항 노조 자리를 굳히고 있다.
- KBS 공영노동조합: 미가맹. 2011년 복수노조 허용 후 무보직 1직급 직원들이 결성한 노조.
- KBS 같이노동조합: 2023년 청년 직원들을 중심으로 결성한 노조.#
15. 교통편
15.1. 본관/신관
지하철버스
- KBS 정류장: 부천 버스 10, 부천 버스 70-2, 서울 버스 162, 서울 버스 163, 서울 버스 5615, 서울 버스 5618
- 국회의사당역 정류장: 용인 버스 7007-1, 파주 버스 G7625, 서울 버스 163, 서울 버스 260, 서울 버스 361, 서울 버스 461, 서울 버스 463, 서울 버스 6713, 서울 버스 7613, 서울 버스 영등포10
- 여의도공원/전경련회관 정류장: 광명 버스 11-1, 광명 버스 11-2, 부천 버스 83, 부천 버스 88, 부천 버스 700, 시흥 버스 530, 안산 버스 301, 안산 버스 320, 서울 버스 160, 서울 버스 360, 서울 버스 503, 서울 버스 600, 서울 버스 662, 서울 버스 5012, 서울 버스 5713, 서울 버스 6623, 서울 버스 6628, 서울 버스 6633
- 국회의사당 정류장: 김포 버스 1002
15.2. 별관
지하철버스
- KBS별관 정류장: 서울 버스 162, 서울 버스 261, 서울 버스 262, 서울 버스 503, 서울 버스 505, 서울 버스 5012, 서울 버스 5633, 서울 버스 5634, 용인 버스 7007-1, 파주 버스 G7625, 부천 버스 700, 서울 버스 영등포11
- 샛강역.앙카라공원/진주아파트 정류장: 서울 버스 162, 서울 버스 503, 서울 버스 505, 서울 버스 5012, 서울 버스 5633, 서울 버스 5634, 서울 버스 영등포10
- 샛강역1번출구.여의도자이 정류장: 서울 버스 162, 서울 버스 163, 서울 버스 261, 서울 버스 262, 서울 버스 361, 서울 버스 461, 서울 버스 503, 서울 버스 753, 서울 버스 5012, 서울 버스 5623, 서울 버스 6713, 파주 버스 G7625, 서울 버스 영등포11
- 샛강역4번출구.여의도자이 정류장: 서울 버스 162, 서울 버스 163, 서울 버스 361, 서울 버스 461, 서울 버스 503, 서울 버스 753, 서울 버스 5012, 서울 버스 5618, 서울 버스 5623, 서울 버스 6713, 서울 버스 영등포10
16. 메일 주소
사원들의 이메일 주소가 비범하다. 박대기(waiting)를 필두로 최선중(best-ing), 신선민(freshmin), 김빛이라(glory), 정새배(newboat), 안양봉(beebee), 이지은(easy), 노태영(lotte0), 김진화(evolution), 이효용(utility), 정해주(seyo)(...) 등 자신의 이름을 활용해 재미있는 이메일 주소를 만든다. 단순히 이름을 따서 ptk(박대기) 식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그대로 직역해 주소로 사용하는 것이 포인트.
박대기가 트위터에서 밝힌 바로는 본인들이 직접 이메일 주소를 만들어서 사용한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지으면 이메일 주소가 더 쉽게 각인이 될 것이고, 그러면 제보가 더 많이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지은 것이라고. 개중에는 면접 당시부터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만들어서 온다는 열정적인 지원자들도 있다고 한다.
17. 여담
- 아시아태평양방송연맹 가맹사이며 2002년부터 이사국 지위를 지녔고, 2011~2018년 및 2021년부터 두 차례 회장사를 맡을 정도로 일본 NHK, 중국 CCTV 등과 더불어 아시아 방송계에서 영향력을 떨치고 있다.
- 간혹 영국의 BBC와 독일의 ARD, ZDF, 도이칠란트 라디오와 프랑스의 프랑스 텔레비지옹, 라디오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PBS, NPR 등 해외 공영방송들과 비교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회적 역할이나 개념상으로 일본의 NHK와 비슷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고, 실제로도 많은 제작 협력 및 교류를 하고 있다.[1128] 과거 KBS가 공영방송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할 때 NHK의 방송 포맷을 많이 벤치마킹하기도 했고, 현재도 비슷한 점이 보인다. 이처럼 일본 NHK와 닮은 방송성격 때문에 아직도 기성세대에서는 '국영방송'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확한 법인격적 성질은 국영이 아닌 영조물법인체로서의 공사(공기업)이다.[1129] 예산과 인사문제는 KBS이사회에서 심의, 의결하며, 결산에 있어서만 방통위 제출 후 감사원 검토 및 국회 의결 절차를 진행하게 되어 있다. 정부는 KBS이사 임명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할 뿐, 민주화 이전처럼 재정과 인사에서 통제를 받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점이 다른 공공기관과 구별되는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다만 전시방송 및 재난방송을 주관하는 방송사인 점, 대북방송을 송출한다는 점 등은 과거 내무부 산하 국영방송 시절의 흔적이고, 여전히 정부와 밀접한 관계인 것은 사실이다. 케이블의 지상파 관련 논쟁에서 KBS 1TV가 EBS와 더불어 지상파 채널 중 의무재송신 대상 채널이라는 점이 알려진 것도 이의 흔적 중 하나이다.
- KBS를 공영방송이 아닌 '국영방송'으로 아는 사람들이 좀 있는데, KBS 측에서는 자사를 국영방송으로 칭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KBS는 1973년 공기업으로 전환되기 전까지 문화공보부 산하 국영방송이었으나 공기업 전환 이후에는 정부가 대주주로만 남아있을 뿐 국영이 아닌 공영방송이다. 다만 땡전뉴스 보도 등으로 정권에 사실상 종속된 흑역사 시절도 있고 편성 및 보도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많은 방송 언론인들이 헌신했던 적이 있는데 이 시기에 받았던 정권의 억압이 트라우마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 시절 새천년민주당 당직자들이 KBS에 찾아왔는데 조순형 당시 대표가 "다른 곳도 아니고 국영방송이 말이야 이렇게 편파적으로 보도하면 되느냐"라고 말했다가 KBS 직원들이 "KBS가 어째서 국영방송입니까?"라고 맞받아쳤고 결국 KBS 측이 반박 차원의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자 새천년민주당 측이 KBS에 사과했고 KBS도 고소를 취하한 적이 있다. 그 이후에도 정부 관계자 등 높으신 분들이 방송국을 방문해서 국영방송이라 했다가 갑분싸가 나는 일이 종종 있다.[1130] KBS에서 떨어져나온 EBS 역시 공영방송으로, '국영방송'이라는 단어를 매우 싫어하니까 주의. MBC는 KBS나 EBS처럼 칼같이 '공영방송'이라는 표현을 지키지는 않는다. 그래서 KBS를 깔 때 일부러 정부 뜻대로 움직인다는 뜻으로 국영방송이라고 부르는 반감층도 있다.
- KBS가 방송법에 따라 설립된 공영방송사이며 대한민국 정부가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을 많이 받거나 적자가 나도 폐국 자체는 불가능하다.
- 공식적으로 규정된 업무는 아니지만 난시청과 공시청, 공시청 장비에 관한 업무도 본다. 케이블방송이 아파트나 연립주택의 공시청 장비를 훼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들을 복구하는 일이 많다. 이따금씩 광고도 하고. KBS 수신기술서비스[1131]
- KBS의 일베 관련 논란으로는 개그콘서트의 부엉이 코너 관련 논란이나[1132] 렛잇비 베충이 사건[1133], 일베 기자 채용 사건이 있다. TV는 사랑을 싣고에서 일베 합성 로고를 노출시킨 적이 있었다.
- 2015년 4월 1일 네이버 실검에 'KBS 일베 기자'가 올라왔는데, 만우절 장난이 아니라 일베저장소 활동 의혹을 받는 KBS 수습기자가 31일 정식 기자로 임용됐다는 내용의 진짜 기사다. 링크(네이버뉴스) 링크(소방방재신문) 이 경우 사규에 어긋나지 않고 외부 법률자문에도 문의결과 임용을 취소하기 어렵다고. 일단 그 수습기자는 정책기획본부 남북교류협력단(일반직 4직급)으로 파견발령되었으며, 이 부서는 취재·제작 업무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2016년 3월에는 보도국으로 발령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기사보기 2018년 2월에 춘천으로 발령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기사보기 당연히 춘천지역 기자들은 반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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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 명량 해상케이블카ㆍ목포해상케이블카ㆍ여수해상케이블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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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악산 케이블카가 이 회사 소유이며, 따라서 일반인들은 허가받지 않고서는 탑승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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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화질만 제공되며, 고화질 이상은 KBS+에서 사용하거나(일반 고화질만 제공) Wavve 등에서 이용권을 구입하여 시청이 가능하다.[2] 이 주소에서도 온에어 서비스가 되고 있다. 하지만 PC에서만 시청할 수 있으며 화질은 720p로 나쁘지 않은 편이다.[3] TV 채널 공식 통합 슬로건[4] 지번주소로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18.[5] 단, KBS의 경우 전두환 때문에 언론통폐합의 영향으로 동양방송을 한국방송공사에 흡수해서 만들어져서 두 개의 채널이 되었으며 아날로그부터 시작해서 두 개의 채널 번호와 콜사인 자체가 다르다. (7번 (2TV), 9번 (1TV)) EBS의 경우에는 동일 채널이었다가 다채널방송 기술을 이용해 하나의 채널을 분리하여 만들어진 채널이기 때문에 콜사인과 두 개의 가상채널번호 앞자리(10-1번 (1TV), 10-2번 (2TV))가 동일하다.[6] 무선국의 경우 60년대부터 교육방송, 국제방송을 비롯한 대내외 방송을 모두 떠안았다 보니 운용 수가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1997년까지는 제1방송 계열 콜사인을 MW(HLKA)/VHF(TV, 표준FM/이상 HLCK)/FM(HLQK)으로 나눠 운용했기 때문에 가용 콜사인이 8개에 달했었다.[7] 이 날은 위에도 적혀 있듯이 한국방송공사의 공영방송으로서 창립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슬로건 변경도 3월 3일에 이뤄지며 자체 공식 휴일이기도 하다.[8] 지금 KBS 한국방송이라 호칭하는 부분을 2001년 3월 2일 이전에는 전부 한국방송공사 KBS라고 했다.[9] 링크를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KBS-TV'의 서체가 항상 일정한 것은 아니었다.[10] 다만 예시 3의 KBS부산의 경우, 사옥 이전 직전까지 옛 로고를 혼용했다.#[11] 방송국 차량은 2세대 로고를 적용하고 자막은 3세대 로고를 적용하였다. 이 방송은 논산에서 촬영한 것으로 방송국 차량은 KBS부산처럼 지방국에 신 로고 적용이 늦었던 사례로 보아 화면 화질상 번호판이 보이지 않지만 인근 KBS대전방송총국 차량을 지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2]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서 사용중이다.[13] 일본판 슈퍼 패미컴의 영문 로고타입도 이 글씨체에 기반한 것이다.[14] 다만, 2004년까지는 완전히 자리를 잡은게 아닌지 가끔 오른쪽 하단에 보이는 경우도 간간히 있다. #[15] KBS TV에서 크레딧으로 나오는 '한국방송'이라는 글씨체[16] KBS 전용 차량과 신문광고에서 활용되었다.[17] SBS는 2000년부터, MBC는 2005년부터, YTN은 2014년부터, 채널A는 2024년부터 EBS는 2001년~2004년(부분수정)부터 MBN는 2011년~2019년(부분수정)부터현재의 로고를 사용하고 있다.[18] 참고로 이 회사는 MBC의 마스코트인 엠빅의 초기 디자인도 했던 곳이다.[19] 이쪽은 로고 특성상 한명이 아니라 3명이다.[20] 2003년 6월, 新 KBS상 정립 이후 잘 쓰이지 않는다.[21] 1979년 12월 31일까지는 '조화 속의 협조'였다.[22] 문구 자체는 1976년 여의도 사옥 건립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친필탑에 새겨져 있다.[23] 94년 하반기부터 2003년 상반기 KBS 2TV에서 사용. 현재는 쓰이지 않는다.[24] 1라디오,1TV 전용 슬로건.[25]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사용한 2TV용 슬로건.[26] 2007~2008년에 TV 자체 SPOT에 나왔던 슬로건으로 현재에는 쓰이지 않지만 KBS 2FM 무광고 시보와 1FM 자체 광고뒤 멜로디로만 나온다.[27] KBS의 인터넷 전용 슬로건. 유튜브 등에 올라온 각종 K팝 영상 등에서 KBS 공식계정으로 올린 클립 뒤쪽에 삽입되어 있다.[28] 2015년 2TV 슬로건.[29] 2TV에서만 사용됐다. 2018년 이후 슬로건이 바뀌었다. 대구방송총국 ID에는 2021년 5월 30일까지 사용했다.[30] NEXT/ID 영상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슬로건. 유튜브에 이 슬로건만 검색해도 ID 영상들이 나온다.[31] 2018년 남북정상회담 준비 과정에서부터 나온 슬로건이며 동시에 KBS의 2019년 방송지표였다.[32] 2021년 5월 31일부터 사용 중인 1TV 전용 슬로건.[33] 2021년 5월 31일부터 사용 중인 2TV 전용 슬로건.[34] 2021년 5월 이전부터 사용 중인 KBS NEWS D 전용 슬로건.[35] 70년대~80년대에 사용했던 슬로건이다. 이쪽도 라디오 시보멘트에서 나왔다.[36] 70년대~80년대에 사용했던 슬로건이다. 이쪽도 라디오 시보멘트에서 나왔다.[37] 198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사용한 슬로건. 라디오 시보와 방송 시작, 종료 멘트에 쓰였던 슬로건이었다. 2023년 현재는 KBS부산 제1라디오의 방송종료멘트에서 들을 수 있다.[38] 1993년 가을개편부터 쓰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2001년 광고방송 시작 전까지 KBS 2FM, 2008년까지 KBS 제1라디오에서 시보멘트로 쓰였다. 그 후 2014년까지 KBS 1FM에서 시보할 때 나왔지만 2015년 개편으로 시보멘트가 개정되었고, 현재는 KBS 지역국 FM방송에서만 나온다. 다만, '한국인의 중심채널'을 밀고 있는 1라디오를 제외한 어느 KBS 라디오 채널이든 오전 5시 시보에 아직도 나오긴 한다. 예외로 춘천FM은 2015년 본사처럼 '클래식을 더 가까이'라는 멘트를 하고 있으며, 2023년 기준 광주 2라디오는 다른 시간대와 마찬가지로 'KBS 해피FM 제2라디오가 다섯 시를 알려드립니다' 라는 멘트를 송출하고 있다.[39] 2003년부터 2009년까지 사용한 1라디오 전용 슬로건.[40] 2007~2008년에 TV 자체 SPOT에 나왔던 슬로건으로 현재에는 쓰이지 않지만 KBS 2라디오, 2FM 무광고 시보와 1FM 자체 광고뒤 멜로디로만 나온다.[41] KBS 1TV, KBS 1라디오, KBS 3라디오에서 사용하는 슬로건. KBS 뉴스 9 시작 전에 이 로고송이 나온 다음 시보음이 울리고 뉴스를 시작한다.[42] 1TV와 멜로디를 공유하기도 했다. 1992년 당시에는 사랑과 기쁨이 솟는 KBS 2텔레비전을 전자음악 버전으로 편곡한 버전과 같이 썼던 것으로 보인다.[43] 보컬은 가끔 나왔고 거의 반주 처리[44] 95년에서 2001년까지 쓰인 KBS2 로고송이랑 같은 혼성 합창단이 불렀고 비슷했다.[45] 제일 근본인 로고송이라는 평가가 많다.[46] 장혜진이 불렀으며, 현재는 1TV 9시 뉴스 직전과 한민족 제1방송 개시 때 사용. 장혜진은 유희열의 스케치북(2020년 1월 31일 방송분)에 출연할 때 본인이 부른 로고송임을 인증한 바 있다. [47] 장나라가 부른 '국민의 방송' 부분을 생략한 짧은 버전도 있었다. #[48] 오연준이 불렀다.[49] KBS 합창단이 불렀다.[50] 자세히 들어보면 텔'리'비전이라고 발음한다.[51] 1992년에는 이 음악을 전자음악 버전으로 리메이크해서 썼으며, 가사는 뒷부분 "KBS 제2텔레비전"만 송출된다.[52] 자세히 들어보면 현재 KBS1 로고송을 부른 같은 합창단이 불렀다는 걸 알 수 있다.[53] 비가 불렀다. 윤도현과 장나라가 부른 버전도 잠깐 나온 적이 있다. 2013~4년 즈음에 KBS 2TV에서 보컬이 빠진 피아노 버전이 잠시 나온 적 있으며, 피아노 버전은 대구방송총국 ID에서 사용 중이다.[54] 지역 방송국(특히 KBS울산방송국)에서는 아직도 쓰인다. 1라디오에서도 토요일 11시 5분 정시 뉴스와 경제세미나 사이에 '사랑해~'가 잘린 버전이 나온다. 그리고 쿨 FM에서도 조정식의 FM 대행진에서 끝에 '한국방송~' 부분을 '난 조정식~'으로 바꿔서 나온다.[55] 유튜브 채널 KBS HUMAN: 뭉클티비에 업로드된 영상 말미에 사용 중이다.[56] 2007-2008년 TV SPOT 로고송으로 나왔으며 현재 KBS Cool FM과 KBS 2라디오(Happy FM)에서 시보할 때 나온다. 2015년 KBS Cool FM 개편으로 시보멘트는 개정됐지만 로고송은 그대로 쓰이고 있고 KBS 2라디오(Happy FM)에도 오전 11시대와 지역권 2라디오(Happy FM)로 교차송출(오후 12시~2시, 저녁 6시~8시)되는 Cool FM 시간대를 제외하고 쓰이고 있다.[57] 옥상달빛이 불렀다.[58] 각각 2개의 멜로디가 있으며 앞의 '대한민국 중심채널' 부분을 생략한 버전과(음원 길이는 같다) 아예 짧은 버전 총 3가지가 있다.[59] 2라디오(Happy FM) 무광고 시보할 때 나온다.2022년 7월 7일부터 오전 11시대, 지역권 2라디오(Happy FM)로 교차송출(오후 12시~2시, 저녁 6시~8시)되는 Cool FM 송출 시간대에만 나온다.[60] 2018년 남북정상회담 때부터 쓰여지다가 최근에는 잘 안쓰이는 추세인데, KBS 한민족방송에서는 여전히 로고송 형태로 송출되고 있다.[61] 죄다 한국방송공사의 임무 및 기능을 정의해놓은 항목이다. 한국방송공사법과 방송법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설립근거가 전부 방송법에 포함되었다.[62] 여당추천 7명, 야당추천 4명[63] 단, 이 수치에는 KBS 인력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작가, 프리랜서, 무기/한시계약직, 파견근로자, 자회사(KBS 미디어, KBS시큐리티, KBS비즈니스 등)파견인원, 단기 아르바이트, 전속단체원(관현악단, 국악관현악단, KBS 성우극회 등)은 빠진 순수 정규직만 포함되어 있다. 이런 인원까지 모두 포함할 경우 대략 6,000~7,000명 정도가 KBS 내에서 근무하고 있다.[64] 2011년 대졸초임 삭감사태 이후 인상분이 반영되어 기존 8,373만원보다는 올랐다. 다만 이는 전체 평균이라 이렇게 나오는 것이고 실제 대졸초임은 약 4,500~5,000만원선으로 메이저 방송국 중 가장 짜다![65] 홈페이지 하단 왼쪽의 'KBS소개' 메뉴를 통해서 들어갈 수 있다.[66] 시인 심훈의 큰형.[67] 아나운서 이옥경의 남편,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의 부친.[68] 1945년부터 조선방송협회 산하였다가 1946년부터 미군정청 공보처에 소속됨. 그리고 그해 3~10월에는 잠시 중앙방송과장임.[69] 1968년부터 서울중앙방송국에 통합.[70] 중국군에서 활동하며 광복군을 도운 독립운동가이자 군인, 시인.[71] 1968년부터 서울중앙방송국에 통합.[72] 1968년부터 서울중앙방송국에 통합.[73] 공사화 이후 본사 부사장,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 본사 사우회장, MBC 사장,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이사장 등을 역임함. 2016년 작고.[74] 최초의 KBS 프로듀서 출신의 KBS 이사장[75] 최초의 KBS 기자 출신의 KBS 이사장[76] 제7대 문화공보부 차관 역임. 이후 (주)현대경제일보-일요신문(현 한국경제신문) 사장으로 영전. 1985년 작고.[77] 3월 22일부터 4월 2일까지 낙하산 논란으로 인하여 사퇴[78] 선임 당시 낙하산 논란이 일면서 반발이 심해지자 같은 해 4월 3일에 자진사퇴하였다. 서동구 문서 참고.[79] 4월 28일 부터[80] 법원이 무효임을 확인함[81] 법원이 취소함[82] 다만 정연주를 이원홍에 빗댄 것이 정연주 입장에서는 크게 억울한 것이 정연주는 KBS 뉴스9 아이템 선정에 개입을 하지 않은 현재까지의 KBS 사장 가운데서 거의 유일무이하다싶은 유일한 인물이었고 현장 PD나 기자들의 아이템 선정제안에 대해서는 잘 받아들었던 인물이었기 때문. 하지만 영월이나 군산 KBS를 폐지시키는 등 구조조정 드립을 쳤기에 PD나 기자는 몰라도 지방방송사 직원이나 간부들 사이에서 왕PD라고 욕먹는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2010년대 와서는 구관이 명관이지 하며 재평가된다지만.[83] 가장 대표적으로 이원홍(한국일보), 박현태(한국일보), 박권상(동아일보), 정연주(동아일보), 이병순(4기 기자), 김인규(1기 기자), 고대영(11기 기자), 김의철(17기 기자), 박민(문화일보), 박장범(20기 기자)이 있다.[84] 해임 뒤 한국방송개발원장, SBS 2대 사장 역임. 2016년 3월 10일 사망.[85] 전 2TV담당이사, 방송본부장, 경영본부장. 퇴직한 후에 (주)우방 사장을 역임함.[86] 전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위원장. 본사 최초의 차장 출신 부사장.[87] 전 TV본부장, 방송정책실장.[88] 전 군산방송국장, 노무국장, 감사실장, 제주방송총국장, 특임본부장, KBS시설관리사업단 사장. 본사 최초 부사장 2인 체제 운영.[89] 1990년 본사 파업때 노조위원장. 전 남산송신소장.[90] 전 편성본부장, TV제작본부장. 부사장 선임과 동시에 4년만에 KBS의 부사장 2인 체체 부활. 2010년에 금품수수 혐의로 대법원서 최종 유죄 선고.[91] 전 춘천방송총국장. 2020년 사망.[92] 전 기술본부장. 2017년 6월에 언론부역자 3차 명단에 올랐다.#[93] 2015년부터 KBS 감사로 이동. 2017년 5월에 언론부역자 2차 명단에 올랐다.#[94] 본사 유일 여성 부사장, 이후 한국정책방송원장 역임. 현 KBS 이사.[95] 전 KBS 미디어 사장, 글로벌전략센터장, 창원방송총국장. 2017년 5월에 언론부역자 2차 명단에 올랐으며, 2018년 11월 본사 사장 공모와 2019년 EBS 사장 공모에도 나섰으나 떨어졌다. 2020~2021년까지 인터넷 뉴스사이트 <경제포커스>에 칼럼 '금동수의 세상읽기'를 기고한 뒤 2022년 '공정언론국민연대' 발기인으로 참여.#[96] 전 창원방송총국장, 예능국장, 편성본부장, KBS아트비전 사장. 퇴임 후 경인대학교 한류문화대학원 특임교수, 새미래포럼 대표, CGN 대표 등 역임.[97] 전 기술연구소장, 방송기기정비국장, 뉴미디어센터장. 역대 부사장 중 유일하게 임기 1년만에 사망.[98] 본사 PD협회에서 영구제명. 퇴임 후 2019년 자유미디어국민행동의 운영위원을 맡은 바 있고, 2022년 20대 대선을 앞두고 윤석열 캠프 홍보특보로 선임됨.[99] 2006년에 <KBS와 권력>이란 책을 내면서 그동안 유지돼 온 권력과 방송의 기생 자체를 비판한 바 있으나, 방송위원회(現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재직하던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 유승민 의원과 윤명식 KBS 심의위원, 전직 방송사 대표와 함께한 자리에서 "우리가 정권을 되찾아오면 방송계는 하얀 백지에다 새로 그려야한다."라며 방송의 독립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해서 논란이 일었다. 출처 다만 그는 2016년 한겨레 기사에서 그때의 발언에 대해 "방송을 선거의 전리품으로 쓰지 말고 제도를 뜯어고치자는 것"이라 밝혔다. 정연주의 해임 이후에도 18~22대 사장 후보로 매번 출마했다.[100]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KBS 간부로 입사하는 경우도 있었다.[101] 출처: <현장기록, 방송노조 민주화 운동 20년> - 새언론포럼 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8.[102] 출처: <KBS 사보> 1985년 4월호 p24.[103] 1928년생. 6.25 전쟁과 9.28 서울 수복 소식을 최초로 방송한 아나운서다.[104] 1982년 정년퇴직, 1988년 사망.[105] 강경화 전 외교부장관의 아버지. 1998년 사망.[106] 1964년 MBC 이직, 2020년 사망.[107] 2023년 사망.[108] 1934년 12월 5일생. 1963년 DBS 이직 후 언론통폐합과 함께 KBS 재합류. 1984년 퇴직 후 수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와 인문대학장을 역임.[109] 1961년 MBC 이직, 1964년 TBC 이직, 2019년 사망.[110] 1964년 MBC 이직, 1984년 사망.[111] 1964년 MBC 이직, 현재 예지원 원장.[112] 1964년 TBC 이직 후 언론통폐합과 함께 KBS 재합류.[113] 1962년 퇴사, 2020년 4월 3일 사망.[114] 1963년 DBS로 이직 후 1980년 언론통폐합과 함께 KBS 재합류. 아나운서실 방송위원(1980~1984), 사회교육방송국 방송위원(1986~1990), 목포방송국장(1990~1993) 역임. 1993년 정년퇴임.[115] 1994년 퇴사, 2021년 사망.[116] 춘천방송국, CBS를 거쳐 언론통폐합과 함께 KBS에 재합류. CBS 시절 공/민영 합동방송단에 취재부장으로 합류하여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활약했다.[117] '욕이라는 건 말이다'로 잘 알려져 있다. 1960년 성우, 1969년 배우로 전직. 김영길, 김영옥 두 아나운서는 부부기도 하다.[118] 2020년 4월 8일 사망.[119] 1997년 정년퇴직. 이상협 아나운서의 아버지.[120] 1939년 2월 4일생, 1971년 7월 퇴사.[121] 1964년 MBC 이직.[122] 1964년 TBC 이직 후 1972년 공사화를 약 1년 앞두고 KBS 합류, 1993년 명예퇴직.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 가요무대 MC. KBS 아나운서 명예퇴직 1호로 알려져 있다.[123] 1937년생. 1968년부터 1985년까지 대한뉴스의 나레이션을 담당했다. 1994년 명예퇴직 후 1998년까지 불교방송 방송위원으로 재직했다. 2024년 1월 15일 사망.[124] 1969년 MBC 이직.[125] 퇴직 후 방송위원 자격으로 PSB에서 2005년까지 스포츠 중계를 담당했다.[126] 1998년 퇴직.[127] 1970년 서해방송으로 옮겼다가 1971년 목포MBC, 1972년 전일방송을 거쳐 1980년 언론통폐합과 함께 KBS 재합류. 방송심의실 라디오심의부장(1989~1992), 순천방송국장(1993) 역임. 퇴사 후 1994년 종합유선방송위원회 영화부장으로 영전되어 1998년까지 지원부장, 심의기획부장, 관리부장 등을 거쳐 1999년 리엔텍 이사까지 지내기도 했다.[128] 2023년 7월 23일 사망.[129] MBC 개국요원 출신, 1995년 정년퇴직, 2021년 담도암으로 사망.[130] MBC 개국요원 출신, 1964년 TBC 개국 첫 방송을 한 아나운서다. 1995년 퇴직 후 한국스포츠TV(현 SBS Sports)의 이사대우 방송위원으로 합류하여 스포츠 중계를 담당했다. 2024년 사망.[131] 1987년 퇴사. 1995년부터 2002년까지 CJ오쇼핑에서 활동한 대한민국 최초의 쇼호스트다. 2020년 12월 21일 사망.[132] 1967년 퇴사, 군복무 후 1969년 MBC 이직.[133] 1981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134] 2024년 8월 1일 사망.[135] 2000년 12월 명예퇴직, 2018년 사망.[136] 1980년 5.18 보도 문제로 해고당하였다가 1989년 복직, 1995년 퇴사.[137] 1999년 정년퇴직. 박태원 아나운서의 아버지.[138] 2006년 정년퇴직.[139] 가수와 동명이인.[140] 1998~2001년 원주방송국장 역임, 2007년 정년퇴직.[141] 1990년 불교방송 이직.[142] 원주방송국 입사, 1972년 TBC 부산방송국으로 이직, 1980년 언론통폐합과 함께 KBS 재합류.[143] 1991년 퇴사. 1992년 SBS 이직.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144] 1991년 SBS 이직.[145] 1980~1990년대 농구대잔치의 인기가 한창이던 시절 이름을 날린 스포츠 캐스터다. 2009년 교통사고로 사망. 3기 채영신 아나운서의 남편.[146] 1978년 퇴사 후 초등학교 교사로 전직하여 2015년 8월 정년퇴직. 2기 이명용 아나운서의 아내.[147] 1983년 교양PD로 전직, 2006년 정년퇴직. 개그맨 김준현의 아버지.[148] 1991년 SBS 이직.[149] 2007년 정년퇴직 후 2011년까지 KBS N SPORTS에서 배구 중계를 담당했다.[150] 명단 출처: <KBS 연지 1975.3~1977.2> p157.[151] 2012년 정년퇴직. KBS 여성 아나운서 최초로 정년퇴직하였다.[152] 1991년 SBS 이직.[153] 현재 아나레슨 대표.[154] 2008년 정년퇴직. 현재는 아나운서 아카데미에서 지망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개인 블로그도 운영하고 있다.[155] KBS로 넘어와서 기자로 전직, 2009년 정년퇴직.[156] 1987년 퇴사, 같은 해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갔다. 이후 미국으로 옮겼고 1991년 귀국하여 프리랜서 방송인이 되었다.[157] KBS 지역권 아나운서로서 본사로 발령받은 최초 사례다. TBC 부산방송국에 입사하였다가 1980년 언론통폐합에 따라 KBS 부산방송총국으로 이직. 이후 1994년에 본사로 발령받아서 아나운서 차장, 한국아나운서연합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1999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158] 1995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159] KBS로 넘어와서 PD로 전직, 1992년 퇴사.[160] 2014년 정년퇴직. MBC 안종순 아나운서의 동생.[161] 2014년 정년퇴직.[162] 속초국, 춘천총국을 거쳐 1993년에 본사로 발령받았다. 2012년 정년퇴직.[163] 현재 라디오 서울에서 활동하며(#) KBS에서도 LA 통신원으로 자주 출연하고 있다.[164] 1993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165] 2014년 정년퇴직. 현재 한라대학교 영상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KBS 한민족방송의 '말 트고 마음 트고'를 진행하고 있다.[166] 1993년 퇴사.[167] 2009년 사망.[168] 2021년 사망[169] 1993년 퇴사.[170] 2018년 정년퇴직.[171] 2019년 정년퇴직.[172] 1993년 퇴사, 2018년 사망.[173] 출처: <KBS 사보> 1984년 10월호 p34, 1985년 2월호 p33, 1986년 1월호 p42.[A] 모두 지역권이다.[175] 2002년 퇴사.[176] 前 아나운서실 방송위원, 2021년 정년퇴직.[177] 포항방송국장(2018~2020) 역임.[178] 한 명 빼고 모두 지역권이다. 출처: <KBS 사보> 1986년 1월호 p42.[179] 전주총국에서 근무하다가 2002년 본사로 발령. 2003년 9월 19일 사망.[180] 대구총국에서 근무하다가 2000년에 본사 발령. 2014년 정년퇴직.[181] 현재 KBS창원 PD[182] 前 BBS 불교방송 아나운서, 현재 봄온아카데미 대표.[183] 2017년 2월 22일 위암으로 사망.[184] 2019년 정년퇴직.[185] 1991년 SBS 이직[186] 2019년 정년퇴직.[187] 2022년 정년퇴직.[188] 2019년부터 제주총국에서 근무하고 2022년 정년퇴직.[189] 1997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190] 1997년 퇴사.[191] 2024년 안식년 중. 2025년 정년퇴직 예정.[192] 1991년 SBS 이직[193] 부산KBS에서 라디오 PD로 이직.[194] 2022년 정년퇴직, 현재 K리그2 캐스터. 곽은주 아나운서의 남편.[195] 1991년 SBS 이직 , 1994년 YTN 이직.[196] 1997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197] 원로배우 최정훈의 딸.[198] 1993년 퇴사, 현재 작가로 활동 중이다.[199] CBS 출신, 1991년 SBS 이직, 탤런트 김자옥의 동생. 2021년 사망.[200] 1997년 퇴사, 前 한국IPTV방송협회 회장.[201] 2000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202] 2002년 퇴사, 前 이롬라이프 대표이사 사장.[203] 2007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204] 1997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 진양혜 아나운서의 남편.[205] 1992년 기자로 전직, 2004년 4월 16일 췌장암으로 사망.[206] 서기철 아나운서의 아내.[207] 2002년 퇴사.[208] 1997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209] 현재 KBS 라디오 PD.[210] 1995년 YTN 이직. 현재 YTN 논설위원.[211] 성평등센터장(2024. 6.~)[212] 2024년 명예퇴직,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213] 2004년 퇴사.[214] 1997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 손범수 아나운서의 아내.[215] 2015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216] 2024년 명예퇴직,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217] 2002년 퇴사.[218] 청주방송총국장(2021. 12.~ 2023. 12.)[219] 2020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220] 2001년 퇴사, 현재는 배우로 활동.[221] 前 iTV 경인방송 아나운서,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222] 1995년 2월 1일 입사.[223] 개명 전 이름은 김재민.[224] 2023년 5월 17일 지병으로 사망.[225] 2002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226] 1995년 10월 1일 입사.[227] 원주방송국장(2023. 12~).[228] 1997년 퇴사 후 MBC 이직.[229] 대전총국 기자로 전직.[230] 2012년 JTBC 이직, 2020년 퇴사. 현재 국회의원(서울 중구·성동구 을).[231] 2007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232] 조성원 KBS 기자의 아내.[233] 2007년 퇴사, 현재 여행작가 겸 프리랜서 방송인.[234] 1999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235] 2024년 명예퇴직.[236] 1999년 퇴사, 현재 중부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국범죄학연구소 연구위원.[237] 현재 TBC 대구방송 아나운서.[238] 현재 YTN 앵커.[239] 前 JTBC 기자.[240] 2012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241] 37기 이지연 아나운서와는 동명이인. 2014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 방송인 이상벽의 딸.[242] 2008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243] 최영철 기자의 아내.[244] 2012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245] 2024년 명예퇴직.[246] 강릉방송국, 원주방송국에서 근무하다 대전방송총국으로 이동.[247] 2006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248] 2024년 명예퇴직,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249] 2015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250] 배우자는 김남일 전 축구선수.[251] 2024년 명예퇴직.[252] 2006년 퇴사.[253] 2012년 퇴사.[254] 2017년 퇴사.[255] 제주총국에서 근무하다가 2010년부터 본국으로 이동. 박용호 아나운서의 아들.[256] 2021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257] 2017년 퇴사, 현재 국회의원[258] 2008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259] 1979년생[260] 2016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 정다은 아나운서의 남편.[261] 2022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262] 2019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263] 현재 스튜디오뮤지컬 대표.[264] 2006년 퇴사 후 SBS로 이직.[265] YTN 출신, 2012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266] 2015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267] 2014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 배우자는 김정근 전 MBC 아나운서.[268] 2008년 퇴사, 현재 배우로 활동.[269] CBS 출신.[270] 2020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271] 부산총국에서 근무하다가 2012년부터 본국으로 이동.[272] 2023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 조우종 아나운서의 아내.[273] 현재 TV CHOSUN 기자.[274] 2021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 가수 장윤정의 남편.[275] 2015년 퇴사.[276] 현재 KTV 아나운서.[A] [278] 2015년부터 본사에서 근무.[279] 대구총국에서 근무하다 2016년에 청주총국으로 이동.[280] 전주총국에서 근무하다 제주총국으로 이동.[281] 2010년부터 2014년 6월까지 창원총국에서 근무. 2014년 7월 부산총국으로 이동.[282] 2019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 김민정 아나운서의 남편.[283] 2019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 조충현 아나운서의 아내.[284] 원주방송국에서 근무하다 2012년부터 본사에서 근무. 2021년 퇴사.[A] [286] 현재 KBS 기상캐스터.[287] 2022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288] 2020년 퇴사.[289] 2020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A] [291] 2022년 퇴사,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292] 프리랜서 신분으로 재입사, 2019년 계약 만료[293] 윤길구 아나운서의 아들.[294] 축구선수와 동명이인.[295] 이남섭 작가의 아내. 1985년 2월 26일 신장암으로 사망.#[296] 가수와 동명이인.[297] 1953년생 배우와 동명이인.[298] 배우 김봉근의 아내.[299] 신성금고 창업주 김명복(1910~1985)의 장남.#[300] 본명 박경수. 1975년 11월 18일 드라마 <전우> 촬영 후 예비군 훈련차 버스에 올라타려다 앞바퀴에 치여 사망.#[301] 1944년 10월 19일생. 활동 중반에 미국으로 이민갔다가 1991년 귀국 후 MBC 드라마 <산너머 저쪽> 등에도 나왔고, 그해 9월 11일 SBS 드라마 <분례기> 촬영 도중 화재로 사망.(출처 <방송연기자> 1991년 가을호 8, 36쪽)[302] 1978년 드라마 <귀향> 촬영 도중 고열 증세를 보여 병원에서 결핵성 뇌막염 진단을 받아 투병, 1981년 1월 5일 사망.#[303] 탤런트로 입사했으나 코미디언 활동을 많이 했으며, 2000년 3월 11일 지병으로 사망.#[304] 배우 조향기의 아버지. 2007년 1월 23일 간암으로 사망.#[305] 이하 명단 출처: <KBS 연지 1973. 3.~75. 2.> p17.[306] <한예조신문> 2001년 11/12월호 26면 기사에 따르면 2001년 9월 17일 사망.[307] 가수 장은숙의 오빠.[308] 배우 홍승일의 아내.[309] 이하 명단 출처는 <KBS 연지 1975. 3.~77. 12.> p166 참고.[310] <TV가이드> 1982년 제57호 152쪽에 따르면 1957년 6월 19일생. 1949년생 배우하곤 동명이인.[311] 1953년 2월 16일생으로, 1964년생 배우와 동명이인.[312] 주연급 여자 탤런트만 선발해 총 6명 합격. 이하 명단 출처는 <KBS 연지 1979> p352 참고.[313] 1960년생.[314] 이하 명단 출처는 <KBS 연지 1980> p250 참고.[315] 1983년 미국 이민 후 복사기 사업을 해 오다가 1997년 SBS 드라마 <장미의 눈물>의 원안을 마련하면서 문필 활동을 시작, 2006년 소설 <17마일 드라이브>를 냈다.#[316] 1970년 피살당한 정일권 내연녀와는 동명이인으로, 1960년 1월 30일생.[317] 가수 강남의 어머니, 현재 미술작가.[318] 배우 장정희의 남편.[319] 남자 14, 여자 23 총 37명 최종합격[320] 자세한 내용과 명단은 <KBS 사보> 1985년 4월호 9쪽 및 <TV가이드> 197호 컬러화보 참고.[321] 1959년 2월 9일생.[322] 이남섭 작가-김난영 배우 부부의 장녀로 1963년 8월 18일생.[323] 당시 <토지>, <푸른 해바라기>, TV소설 등 주연급 기용 목적으로 선발. 남자 8, 여자 7 총 15명 최종합격.[324] 자세한 내용과 명단은 <KBS 사보> 1987년 4월호 컬러화보 및 <TV가이드> 297호 컬러화보 참고.[325] 남자 10, 여자 14 총 24명 최종합격.[326] 자세한 내용과 명단은 <KBS 저널> 1989년 6월호 기사 참고.[327] 남자 21, 여자 45 총 66명 최종합격했지만, 2명(남자 1, 여자 1)이 활동포기를 선언함에 따라, 2명의 추가 합격자를 공채 선발함.[328] 자세한 내용과 명단은 <KBS 저널> 1991년 6월호 130~133쪽 및 <TV가이드> 11권 23호 컬러화보 참고. 다만 저널에서는 최종합격자가 아닌 합격예정자를, TV가이드에서는 최종합격자 명단을 기사와 화보에 실었다.[활동포기] [a] [b] [b] [활동포기] [334] 자세한 내용과 명단은 <TV저널> 77호 72쪽 및 <KBS 저널> 1993년 7월호 76쪽 참고.[335] 1950년생 배우와 동명이인. 아역 시절 <조선왕조 오백년> '인현왕후'의 어린 경종, <맥랑시대> 최동현 역 등으로 주목받은 바 있다. 1995년 교통사고로 전신마비를 입었으나, 1999년 <사랑의 가족>을 통해 재활에 매진하는 근황이 나왔다.#[336] 성우와 동명이인. 1996년까지 드라마 외에 리포터 활동 등을 하다 연극 활동에 더 매진하고 있으며, 2015년부터 가톨릭관동대학교 방송연예학과 교수로도 재직 중.#[337] 1973년생으로 모델과 동명이인. 아역 시절 <눈이 큰 아이> 등지에서 이름을 알렸다.[338] 1991년 MBC 공채 20기 탤런트 출신.[339] 1980년생 배우와 동명이인.[대학개그제] 대학개그제 수상자 및 본선 진출자.[대학개그제] [대학개그제] [대학개그제] [대학개그제] [개그콘서트] 개그콘서트 데뷔.[개그콘서트] [개그콘서트] [폭소클럽] 폭소클럽 데뷔.[폭소클럽] [개그사냥] 개그사냥 데뷔.[개그사냥] [폭소클럽] [353] 29기들 중에 혼자만 개그콘서트에 미출연했다.[354] 최초 Crew(크루)라는 명목으로 신인 개그맨을 선발했으나, 이후 추가 응시생과 함께 시험 등의 경쟁을 거쳐 최종 13명에게 공식으로 33기 공채 개그맨 자격을 주었다. 기존 크루에서 선발되지 못한 인원은 문지후, 이상민, KOKOON이며 새로 합류한 인원은 김시우, 오정율.[355] <산너머 바다건너> 등 연출. 1963년 DBS 개국에 따라 옮겼다가 1980년 언론통폐합 후 복귀.[356] 본명 곽복현, 1990년 정년퇴직, 2018년 12월 5일 사망.[357] 前 TV국 음악반장(1979~1980), 前 제작지원국 미술부장(1982). 1982년 퇴사 후 미국으로 이민가서 목회 활동 중.#[358] 1964년 TBC로 이직했다가 1980년 언론통폐합 이후 복귀, 前 부산방송국(본부) 업무부(국)장(1980~1987/1988), 前 제주방송총국 업무국장(1987~1988), 前 부산방송본부 업무국 전문위원(1988~1991). 1991년 7월 8일 사망.[359] 같은 해 편성요원으로 입사한 PD와 동명이인.[360] 배우 김난영의 남편으로 <신부 일년생>, <10분쇼>, <돌쇠> 등 연출. 1972년 프리랜서 전환 후 <여로> 등 수많은 드라마들을 연출/집필했으며 1985년 8월 2일 사망.[361] <전우> 등 연출. 1980년 해직되었다가 1989년 복직, 1990년 퇴사 후 '후리기획' 설립/운영.[362] 1963년 DBS 개국 당시 합류했다가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복귀.[363] 가수 이미자의 둘째 남편. 前 TV국 오락반장(1979~1980), 前 제작지원국 미술2부장(1980~1981), 前 예능국 방송(제작)위원(1981~1984/1986~1987/1989~1990), 前 TV센터 제작위원(1986), 前 제작지원국장(1990~1991), 前 방송심의실 심의위원(1991~1993), 前 TV본부 제작위원(1993~1995). 1995년 정년퇴임.[364] 1968년 MBC 이직.[365] 독립운동가 박정환의 손자.[366] 부흥부 정무차관실 비서 출신.[367] 서울뚝배기의 PD, 1998년 정년퇴임.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세명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2014년 2월 11일 사망.[368] 1969년 MBC 이직, 2020년 7월 13일 사망.[369] 前 라디오2국 2FM부주간(1994~1997), 前 2R부주간(1997~1998), 前 전문프로듀서(1998~1999), 前 라디오3국 전문프로듀서(1999~2000), 前 라디오제작센터 제작위원(2000~2004). 2005년 정년퇴임 후 원음종합미디어 매체총괄사장 및 한방건강TV 사장 역임.[370] 배우 박혜숙의 남편, 2014년 4월 17일 사망.[371] 1997년 정년퇴임 후 1999년 국제방송교류재단(아리랑TV) 고문 역임.[372] <내강산 내고장>, <인간승리> 등 연출. 前 TV국 청소년반장(1979~1980. 9.), 前 군산방송국장(1980~1982), 前 제작지원국 미술부장(1982~1984), 前 강릉방송국장(1985~1987), 前 시청자사업국장(1987~1990), 前 방송심의실 심의위원(1990), 前 청주방송총국장(1990~1992), 前 위성방송준비국장(1992~1993), 前 노무국장(1993~1995). 1995년 KBS시설관리사업단 이사로 임명된 후 1998년 경영본부장으로 본사에 돌아왔다가, 1999년 KBS아트비전 사장으로 또 옮겨 2001년까지 맡았다.[373] 서울FM방송(TBC FM의 전신) 출신으로 원래 라디오PD였다가 1972년 TV PD로 전직. 前 부산방송본부(총국) 편성제작국장(1991. 4.~1994. 2.), 前 TV1국 제작1부주간(1994. 2.~8.), 前 창원방송총국 편성제작국장(1994. 8.~1998. 10.). 1998년 퇴사 후 2001년 부산원음방송 개국 때 그쪽으로 합류해서 2003년 편성제작국장까지 맡았다.#[374] <애기들 차지>, <다람쥐 3형제> 등 연출. 前 편성2국 운행2부장(1983. 1.~1984, 7.), 前 기획제작실 제작총무(1984~1985), 前 특집제작총무(부주간)(1985~1986. 12.), 前 특집1부주간(1986. 12.~1987. 8.), 前 올림픽국내방송실시단 기획조정반장(1987. 8.~1989. 1.), 前 TV편성실 총괄조정담당 국장(1989. 1.~1990. 1.), 前 편성운영국 주간(1990. 1.~1991. 3.), 前 편성실 방송기획주간(1991. 3.~1993. 4.), 前 TV1국 교양주간(1993. 4.~1994. 2.), 前 편성실장(1994. 2.~1995. 7.), 前 TV1국장(1995. 7.~1996. 4./1997. 3.~1998. 4.), 前 TV2국장(1996. 4.~1997. 3.), 前 심의평가실장(1998. 4.~6.), 前 인력개발센터 교수(1998. 6.~8.), 前 대구방송총국장(1998. 8.~2000. 6.), 前 편성본부장(2000. 6.~2001. 12.). 2002년 KBS미디어 사장으로 임명된 후 2년 간 지내고 이 외에 여의도클럽 회장, 한국디지털위성방송 방송본부장, 텔레비전경인컨소시엄 대표, 복지TV 사장, KBS사우회 부회장 및 회장 등 역임.[375] 1969년 TBC로 옮겼다가 1973년 복귀, 1976년 제일기획으로 옮겼으나 2년 후 TBC를 거쳐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복귀. 前 편성국 TV편성부장(1981. 2.~1982. 11.), 前 편성(방송운용)국 부국장(1982. 3.~1984. 7.), 前 프로그램관리실장(1982. 11.~1984. 7.), 前 편성실장(1984. 7.~1985. 12./1991. 3.~1993. 4.), 前 방송심의실장(1986. 1.~12.), 前 TV편성실 제1TV편성기획담당 국장(1986. 12.~1989. 1.), 前 교양정보편성담당 국장(1989. 1.~1990. 1.), 前 뉴미디어위원회 주간(1990. 1.~1991. 3.), 前 편성운영본부장(1993. 4.~1996. 4.). 1996년 KBS제작단 사장으로 임명되어 2년 간 맡았다.[376] 원래 아나운서였으나 1991년 편성PD로 전직. 前 편성실 TV편성부주간(1997. 3.~1998. 10./1999. 12.~2002. 1.), 前 TV운행부주간(1998. 10.~1999. 12.), 前 편성정책주간(2002. 1.~2003. 5.), 前 위성방송국장(2003. 5.~2004. 5.), 前 KBS 미디어 이사(파견, 2004. 5.~2005. 5.), 前 심의실 심의위원(2005. 5.~2008. 9.). 2008년 9월 정년퇴임 후 KBS 시청자위원회 위원,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방송언어특별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TV편성 현장보고서(1998)>, <살아온 날의 내 작은 흔적들(2022)> 등이 있다.[377] 원래 아나운서로 입사했으나 1980년경 이후 PD로 전직. 前 편성실(국) TV운행부주간(1991. 3.~1994. 2.), 前 TV2국 제작8부주간(1994. 2.~1996. 7.), 前 감사실 감사1부장(1996. 7.~1998. 12.), 前 편성국 외주제작주간(1998. 12.~1999. 12.), 前 전주방송총국장(1999. 12.~2001. 12.), 前 심의평가실장(2001. 12.~2002. 10.), 前 방송문화연구소 위원(2002. 10.~2003). 2002년 12월 KBS강태원복지재단 설립 후 초대 사무국장으로 파견되어 2003년 본사 정년퇴임 후에도 2009년까지 맡았다. 그 외에 원광대학교 겸임교수, 방송위원회 연예오락심의위원, KBS사우회 감사 등 역임.[378] <날아라 슈퍼보드>, <옛날 옛적에> 시리즈, <영심이>, <초롱이의 옛날여행> 등 자사 애니메이션 기획. 前 라디오본부 라디오편성부주간(1995~1996), 前 사회교육방송국 사회교육부주간(1996~1998), 前 라디오1국 전문프로듀서(1998). 1998년 명예퇴직.[379] 1970년 MBC 이직, 2023년 6월 26일 사망.[380] <명작의 고향> 등 연출. 前 TV국 교양반장(1979~1980. 9.), 前 교육2국 교육특집부장(1980. 12.~1981. 11.), 前 교육국 교육3부장(1981. 11.~1982. 3.), 前 교육국 부국장(1982. 3.~11.), 前 제작1국 부국장 겸 교양1부장(1982. 11.~1984. 7.), 前 TV센터 교양·교육부주간(1985. 8.~1986. 2.), 前 장기다큐멘터리-장기제작부주간(1986. 2.~12.), 前 교양국 교육부국장(1986. 12.~1987. 8.), 前 TV편성실 제3TV편성기획담당 국장(1987. 8.~1989. 7.), 前 TV편성실 교육담당 국장(1989. 7.~1990. 1.), 前 TV편성국 운행주간(1990. 1.~1991. 3.), 前 기획제작국장(1991. 3.~1993. 4.), 前 TV1국장(1993. 4.~1995. 7.), 前 방송심의실장(1995. 7.~1998. 4.), 前 TV본부장(1998. 4.~12.), 前 방송정책실장(1998. 12.~2000. 5.). 2000년에 부사장으로 임명되어 3년간 지낸 후 2005년 한국디지털위성방송 부사장으로 영전되어 3년 간 맡았고, 2009년부터 2년 간 KBS사우회 부회장을 맡았다가 2013년 회장으로 추대되어 2015년까지 역임.[381] 아나운서로 입사했으나 후에 PD로 전직했으며 <아침마당> 등 연출. 前 TV1국 제작4부주간(1994. 2.~1998. 10.), 前 TV1국/교양국 교양주간(1998. 10.~2000. 12.), 前 뉴미디어센터 위성주간(2000. 12.~2001. 4.), 前 비서실장(2001. 4.~2002. 10.), 前 편성국장(2002. 10.~2003. 5.), 前 외주제작국 제작위원(2003. 5.~2004). 2004년 정년퇴임 후 독립제작사 '프로덕션마당기획' 설립/운영.[382] 조용직 헤럴드경제 기자의 아버지. 2007년 12월 11일 사망.[383] 배우 주현의 형. 1991년 SBS 이직.[384] <우리들세계> 등 연출. 前 교육국 교육3부장(1982. 3.~11.), 前 제작1국 기획제작1부장(1982. 11.~1984. 7.), 前 기획제작실장(1984. 7.~1986. 6./1986. 12.~1988. 6.), 前 TV센터 제작위원(1986. 6.~10.), 前 방송본부 특별제작반담당 국장(1986. 10.~12.), 前 TV편성실 기획위원(1988. 6.~1989. 1.), 前 방송개혁위원회 사무국 방송담당 국장(1989. 1.~1990. 1.), 前 방송편성운영위원회 편성담당 국장(1990. 1.~1991. 3.), 前 교양제작국장(1991. 3.~1993. 3.), 前 TV본부장(1993. 3.~1996. 4.), 前 편성운영본부장(1996. 4.~1998. 4.). 1998년 SBS TV제작본부장으로 영전되어 사장, 부회장까지 지냈고 2009년 동아일보 방송설립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발탁되어 2011년 '채널A' 개국을 주도, 부회장까지 1년여 간 맡았다.[385] 아나운서로 입사했으나 PD로 전직. 前 뉴미디어국 방송부주간(1993. 4.~1994. 8.), 前 원주방송국장(1994. 8.~1996. 8.), 前 방송연수원 교수(1996. 8.~1998. 9.), 前 개혁기획단 국장(1998. 9.~12.), 前 정책기획국 중장기기획위원(1998. 12.~1999. 5.), 前 밀레니엄기획단 국장(1999. 5.~2000. 12.), 前 밀레니엄기획단장(2000. 12.~2001. 4.), 前 경영개선추진단장(2001. 4.~2003. 5.), 前 정책기획센터 정책위원(2003. 5.~6.), 前 KBS인터넷 사장(2003. 6.~2007. 2.). 이후 광운대학교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및 정보콘텐츠대학장, 한국언론학회 이사, 한국소통학회, 한국가톨릭언론인협의회 회장 등 역임. 저서로 <한국방송관계 문헌색인(1976)>, <한국방송인물지리지(1997)>, <한국 아나운서 통사(2010)> 등이 있다.[386] 아나운서로 입사했다가 1975년 전직. 1980년 퇴사 후 1983년부터 29년 간 전남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강단에 서 왔으며 2012년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저서로는 <아빠의 보물이야기(2022)>가 있다.[387] 아나운서로 입사했으나 PD로 전직.[388] 아나운서로 입사했으나 PD로 전직.[389] <KBS무대>, <시집가는 날>, <영스튜디오>, <문화가 산책> 등 연출. 업무 외적으로 197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요한을 찾습니다'로 등단해서 극작가로도 활동.# 前 교양제작국 교양제작3부장(부주간)(1990. 2.~1992. 2.), 前 편성실 장기기획부주간(1993. 2.~4.), 前 방송정책부주간(1993. 4.~1994. 2.), 前 편성2부주간(1994. 2.~8.), 前 뉴미디어국 기획운영부 위성방송부주간-위성방송부장(1994. 8.~1996. 5.), 前 방송심의(심의평가)실 심의위원(1996. 5.~2001. 9.). 2001년 9월 정년퇴임.[390] 공보부 방송문화연구실, 방송관리국, 극동방송, DBS 출신. 前 편성국 편성부장(1979~1980), 前 편성국 TV편성담당 부국장(1980~1982), 前 방송운영실장(1982), 前 방송운용국장(1982~1985), 前 TV센터주간(1985~1986), 前 TV편성실장(1986~1988), 前 교양국장(1988), 前 TV본부장(1988~1991). 1991년 KBS영상사업단 창립 당시 초대 사장으로 임명되어 2년 간 지내고 파라비전 대표 및 고문, 젠터닷컴 회장, 한국방송인회 회장, 코리아드라마페스티벌 조직위원장 등 역임.[391] MBC 출신으로 <인간승리> 등 연출. 1978년 TBC로 이직했다가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복귀 후 1981년 한국방송광고공사 창립 시 그쪽으로 합류.[392] <우리들의 새노래>, <KBS 음악회>, <일요스페셜(3TV)> 등 연출. 1982년 한국공연예술매니저협회(현 한국공연예술경영협회) 창립 멤버들 중 하나였다. 前 예능2국 음악1부주간(1990. 2.~1991), 前 예능제작국 부주간(1991~1993. 4.), 前 TV2국/TV1국 문화예술주간(1993. 4.~10./1994. 8.~1995), 前 TV1국 문화예술1주간(1993. 10.~1994. 8.), 前 TV2국 주간(1995~1996. 4.), 前 KBS홀운영국장(1996. 4.~1998. 4.), 前 심의평가실 심의위원(1998. 4.~1999. 12.), 前 시청자국(센터)장(1999. 12.~2001. 12.), 前 편성본부장(2001. 12.~2003. 5.). 이후 국제방송교류재단 방송본부장으로 영전되어 3년을 지내고 과학기술부 정책자문관(2006~2008), 서울문화재단 이사(2010~2012) 등을 거쳐 2012년 본사 감사로 돌아와 3년 간 맡았다. 2016년부터 3년 동안 경기콘텐츠진흥원 이사장도 맡았다.[393] 공보부 방송문화연구실, TBC 출신.[394] 은행원 출신으로 원래 MC로 입사했다가 얼마 안가 PD로 전직, <젊음의 행진(1974)>, <모이자 노래하자>, <9시에 만납시다> 등 연출. 前 예능국 제작부주간(1986~1990), 前 예능2국 제작위원(1990), 前 방송심의실 심의위원(1990~1992), 前 편성실 전문위원(1993), 前 TV2국 제작10부주간(1993~1994). 1994년 동아TV 제작본부장으로 이직한 이래 스타서치 대표, 디지탈미디어 총괄전무, 인터드림 대표 등 역임. 자세한 정보는 <조선일보> 1971년 7월 3일자, <동아일보> 1973년 6월 28일자 및 1994년 6월 9일자, <샘이깊은물> 1988년 12월호 기사# 등에서 다루어졌다.[395] MBC 전 기자와 동명이인. 前 올림픽국 올림픽제작부장(1985~1986), 前 올림픽총괄부장(1986), 前 올림픽기획국 협력부장(1986~1989), 前 방송개혁발전위사무국담당 부장(1989~1990), 前 라디오제작2국 2라디오제작부장(1990~1991), 前 라디오(제작)1국장(1992~1993/1995~1996), 前 라디오(제작)2국장(1993~1995), 前 라디오본부장(1996~1998), 前 특임본부장(1998), 前 사장특별보좌역(1998~1999). 1999년 KBS제작단(훗날의 한국방송사업단) 사장으로 내려갔다가 2001년 미국으로 건너가 '코리아위성방송' 설립 및 운영.#[396] 1991년 KBS제작단으로 옮겼다가 1995년 CJB 개국 때 합류.[397] 성우 송도영의 남편.[398] 언론인 김을한의 아들이자 영화감독 출신. 1992년 정년퇴임 후 자회사 KBS 제작단으로 갔다가 1994년 삼화프로덕션으로 모셔지기도 했고, 1996년 프리랜서 전환. 2023년 4월 7일 사망.(KMDb)[399] 2001년 12월 27일부로 정년퇴임.[400] 목포MBC 출신. 1990년 평화방송으로 이직.[401] 방송계 입문 전 배우, 연극 연출가였으며 TBC 출신.[402] 출처: <KBS 연지 1973~75> p111.[403] <100분쇼>, <가요톱10> 등 연출. 1988년부터 2년여 간 한국PD연합회 부회장을 맡았다. 前 예능국 예능2부장(1990. 2.~1991. 3.), 前 특집부주간(1991. 3.~1993. 4.), 前 TV2국 부주간(1993. 4.~1994. 2.), 前 제작6부주간(1994. 2.~1995. 7.), 前 연예오락주간(1995. 7.~1996. 4.), 前 생활정보주간(1996), 前 주간(1996~1997. 3.), 前 편성운영본부/편성실 프로그램평가주간(1997. 3.~1998. 8.), 前 편성제작주간(1998. 9.~12.), 前 춘천방송총국장(1998. 12.~2001. 12.), 前 시청자센터장(2002. 1.~2003. 5.), 前 심의평가실-심의팀 심의위원(2003. 5.~2006. 6.). 2006년 6월 정년퇴임 후 2008년부터 5년 간 평택대학교 방송미디어학과 교수 역임.[404] 원래 드라마PD로 입사했으나 1974년 교양PD로 전직, 1983년 퇴사 후 1985년경부터 시네텔 서울에서 일했다가 1988년 복귀. <문예 75>, <교양 국사>, <어느 재일동포 소년의 죽음> 등 연출. 1991년 SBS 이직.[405] <한국의 미(1977)>, <초분(1977)>, <불교문화의 원류를 찾아서(1978~1981)>, <비구니의 세계, 석남사(1979)> 등 연출. 1982년 일본 니혼오디오비주얼센터(NAV)로 이직했다가 1984년 MBC를 거쳐 1985년 '다큐서울'을 설립 및 운영했고, 2000년에 '한중일 PD포럼'을 창설하여 한국-중국-일본 3국의 PD 간 교류에 주춧돌을 놓았다. 2020년 1월 5일 사망.(PD저널 기사)[406] 2014년 9월 19일 사망.[407] <한국인의 건강> 등 연출. 前 기획제작실 장기제작부주간(1989. 4.~1990. 2.), 前 기획제작국 기획제작3부장(부주간)(1990. 2.~1991. 9.). 1991년 9월 퇴사 후 1992년 독립제작사 '제3채널(현 제3영상)' 설립 및 운영.[408] 1984년 MBC 이직.[409] 아나운서로 입사했다가 1976년부터 PD로 전직했으며 <11시에 만납시다> 등 연출. 前 기획제작실 특집1제작부주간(1988. 6.~1990. 2.), 前 기획제작국 기획제작2부장(1990. 2.~6.), 前 편성운영국 부주간(1990. 6.~1991. 3.), 前 교양제작국 교양5부주간(1991. 3.~1992), 前 교양2부부주간(1992~1993. 4.), 前 TV1국 교양4부주간(1993. 4.~1994), 前 프로그램기획반 부주간(1994~1996. 4.), 前 TV2국 생활정보주간(1996), 前 주간(1996~1998. 4.), 前 춘천방송총국장(1998. 4.~12.), 前 심의평가실장(1998. 12.~2001. 4.), 前 방송문화연구원장(2001. 4.~2003. 5.), 前 심의평가실 심의위원(2003. 5.~7.). 2003년 7월 감사로 임명되어 3년 간 지내고 2006년부터 2년 간 방송위원회 상임위원까지 맡았다. 저서로는 <KBS와 권력(2006)>이 있다.[410] 아나운서로 입사했으나 1980년 라디오PD로 전직, <가로수를 누비며> 등 연출. 前 제주방송총국 편성제작국장(1995. 11.~1998. 5.), 前 라디오2국 제작부주간(1998. 5.~2001. 4.), 前 원주방송국장(2001. 4.~2003. 5.), 前 라디오3국 전문프로듀서(2003. 5.~2004. 7.), 前 라디오제작본부장(2008. 11.~2009. 11.). 퇴임 후 대한적십자사 홍보특보, 동아방송예술대학교 방송기술과 외래교수, 선문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외래교수,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통신특별심의위원, 복지TV 사장, MCN 해치온TV 및 정바시TV 대표PD 등 역임.[411] 원래 기자로 입사했으나 1978년 스포츠PD로 전직, 1980년 신군부의 언론자율정화 당시 강제 해직되었다가 이후 사례직, 계약직, 전문직 등을 거쳐 1989년 정식 복직. 前 스포츠국 제작3부주간(1991. 3.~1993. 4.), 前 제작1부주간(1993. 4.~1995. 9.), 前 중계부주간(1995. 9.~1998. 5.), 前 제작부주간(1998. 5.~12.), 前 스포츠국장(1998. 12.~2001. 4.), 前 2002월드컵방송기획단장(2001. 4.~2002. 12.), 前 보도본부 보도위원(2002. 12.~2003. 5.). 2003년 KBS비즈니스 사장으로 임명되어 2년 간 맡고 KBS N 제작위원(2006. 1.~2009. 12./2013. 4.~2018. 7.), 인천아시안게임조직위원회 방송본부장(2010. 1.~2013. 3.) 등 역임.[412] 출처: 위의 책 p128.[413] 개그맨과 동명이인.[414] <모이자 노래하자>, <TV유치원 하나둘셋> 등 연출. 1988년 1월 11일 출근 도중 교통사고로 사망.(출처: <KBS 사보> 1988년 2월호 p61.)[415] <일요토론>, <상쾌한 아침입니다>, <추적 60분>, <가정저널>, <6시 내고향> 등 연출. 1988년 KBS 노동조합(1노조) 초대 부위원장도 역임했다. 前 교양제작국 제작5부/TV1국 교양5부주간(1992~1994. 2.), 前 TV2국 제작1부주간(1994. 2.~1995), 前 TV1국 부주간(1995~1997), 前 심의평가실-심의팀 심의위원(1998~2001/2004. 7.~2006. 12.), 前 편성국 편성제작부주간(2001~2002), 前 수원센터 센터운영주간(2002~2004. 7.), 前 시청자센터장(2006. 12.~2007. 12.). 2007년 12월 17대 대선 불공정방송 비판 기자회견을 할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와의 인연을 맺어서 논란이 생겨 보직 사퇴했고, 회사로부터 6개월 정직 처분을 받았다.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문경·예천 선거구에 공천했으나 탈락했다. 1986년 국무총리표창, 2007년 제7회 외대언론인상 수상.[416] 원래 아나운서로 입사했으나 PD로 전직. 1990년 총파업 당시 노조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다 구속되어 집행유예 후 1991년 해고 처분되었다가 1993년 사면되어 복직. 前 원주방송국장(2003. 5.~2004. 7.). 2005년 6월 정년퇴임 후 CJ홈쇼핑 방송사업총괄, 에이스미디어 대표 등 역임.[417] 코미디언 김준현의 아버지로 원래 아나운서로 입사했으나 1985년 PD로 전직.[418]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생방송 심야토론> 등을 연출했으며 1991년부터 1년여 간 한국프로듀서연합회 회장을 맡았다. 前 위성방송준비국 방송부주간(1992. 7.~1993. 4.), 前 TV1국 제작3부주간(1993. 4.~1995. 2.), 前 TV2국 부주간(1995. 2.~1996. 5.), 前 공주방송국장(1996. 5.~1998. 4.), 前 편성실 편성제작주간(1998. 4.~9.), 前 편성실(국) 편성주간(1998. 9.~2000. 6.), 前 편성국장(2000. 6.~2002. 10.), 前 교양국장(2002. 10.~2003. 4.), 前 편성본부장(2003. 4.~2005. 4.), 前 TV제작본부장(2005. 4.~2007. 4.), 2007년 부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2008년에 정연주 사장이 해임되면서 직무대행#을 맡았으나 이후 부사장 사임후 금품수수 혐의로 2년 간 법정소송 끝에 결국 집행유예 선고받았다.# 2007년에 여의도클럽 회장을 맡았으며 1983년 국민포장, 2002년 대통령표창, 2005년 철탑산업훈장, 2015년 올해의 PD상 공로상 등 수훈.[419] 원래 행정직으로 입사했으나 1982년 편성PD로 전직해 영화부 시절 백 투 더 퓨처(1편 구더빙판.), 아라비아의 로렌스, 콰이강의 다리 등 더빙 연출. 前 청주방송총국 편성제작국장(1999. 12.~2001. 4.). 2006년 정년퇴임.[420] 연극계 출신으로 <장수만세>, <쇼 비디오 자키>, <TV 손자병법>, <추천석뎐>, <문화가 산책> 등 연출. 1993년 KBS제작단(현 한국방송제작단)으로 이직했다가 2001년 퇴사 후 월드이벤트TV 편성제작국장, 아이앤유니버셜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비디오저널리스트협회 이사 등 역임. 그 외에 계원예술조명대학, 안양대학교, 인덕대학 겸임교수와 옥천범음대학 교수 등을 맡았으며 저서로는 <철학쪽에서 온 연극(1982 / 앙리 구이에 저, 번역)>, <영산재의 문화콘텐츠 만들기(2010)> 등이 있다.[421] <출발 동서남북>, <전국노래자랑>, <가요톱10>, <쇼특급>, <가요무대>, <쇼 파노라마>, <KBS 빅쇼> 등 연출. 前 TV2국 부주간(1995. 2.~1999. 3.), 前 음악주간(1999. 3.~2000. 6.), 前 예능국장(2000. 6.~2002. 10.), 前 심의평가실 심의위원(2002. 10.~2003. 5.), 前 외주제작국장(2003. 5.~2004. 7.), 前 편성본부 2TV편성팀장(2004. 7.~2006. 12.), 前 편성기획팀장(2006. 12.~2007. 4.), 前 TV제작본부장(2007. 4.~2008. 8.). 2008년에 금품수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바 있으며# 이후 드림이앤엠(현 셀트리온엔터테인먼트) 대표를 역임했다. 자세한 정보는 2001년 <PD협회보> 기사서 확인 가능.[422] 前 스포츠국 제작부주간(2001. 4.~2004. 7.), 前 보도본부 스포츠기획사업팀장(2005. 4.~2006. 12.). 2012년 정년퇴임 후 2015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조직위원회 홍보방송본부장을 역임했으며 1996년 한국방송대상 스포츠보도부문 수상.[423] 前 국무조정실장 이영탁의 동생으로 원래 라디오PD로 입사했다가 1979년 TV PD로 전직, <전설의 고향>, <TV문학관>, <무풍지대>, <적색지대>, <장녹수>, <장희빈> 등 연출. 前 드라마제작국 부주간(1996~1998), 前 심의평가실 심의위원(1998~2000), 前 드라마제작국 전문프로듀서(2000~2004). 2006년 정년퇴임.#[424] <전설의 고향>, <형사>, <드라마게임>, <사랑의 학교> 등 연출. 1992년 3월 15일 사망.[425] 원래 아나운서로 입사했으나 1981년 전직. <아침마당>, <객석과 공간>, <클래식 오디세이> 등 연출.[426] 1991년 SBS 이직.[427] <생방송 전국은 지금> 등 연출. 前 춘천방송총국 편성제작국장(1997. 4.~1998. 5.), 前 위성방송센터 위성편성제작부주간(1998. 5.~1999. 12.), 前 TV1국 제작부주간(1999. 12.~2000. 6.), 前 TV제작센터 제작부주간(2000. 6.~2001. 4.), 前 교양국 제작부주간(2001. 4.~12.), 前 강릉방송국장(2002. 1.~2003. 5.), 前 심의(평가)실 심의위원(2003. 5.~12./2009. 4.~2014. 3.), 前 시청자센터 시청자주간(2003. 12.~2004. 7.), 前 KBS 미디어 이사(파견, 2005. 5.~2008. 12.), 前 대전방송총국장(2009. 1.~4.). 2014년 3월 정년퇴임.[428] 원래 아나운서로 입사했으나 후에 PD로 전직. 1995년 GTV 방송본부장으로 영전된 후 SDN TV 대표, 리얼TV엔터테인먼트 대표, KT스카이라이프 총괄전무 및 부사장 등 역임.[429] 배우 사미자의 오빠로 DBS, TBC 출신. 1991년 10월 29일 사망.[430] MBC,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433] 본명은 강신창이며 <TV유치원 하나둘셋>, <모두모두 잘한다>, <혼자서도 잘해요> 등 연출. 前 교양제작국 제작위원(1991~1993), 前 TV본부 제작위원(1993~1997). 1997년 정년퇴임.[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443] 배우와 동명이인. 前 보도본부 특별프로담당 부장(1981. 5.~11.), 前 다큐멘터리부장(1981. 11.~1982. 11.), 前 보도기획부장(1982. 11.~1984. 7.), 前 기획보도실(보도제작국)장-뉴스센터 기획보도부주간(1984. 7.~1986. 12./1991. 3.~1992. 2.), 前 기획제작실 제작위원(1987. 11.~1990. 1.), 前 편성운영국 주간(1990. 1.~1991. 3.), 前 중기발전기획단 방송주간(1992. 2.~1993. 4.), 前 KBS홀운영국장(1993. 4.~1994. 2.), 前 편성실 TV편성주간(1994. 2.~8.), 前 편성실장(1994. 8.~1995. 7.), 前 청주방송총국장(1995. 7.~1997. 4.). 1997년 에센스프로덕션 창립 당시 초대 대표이사로 영전되어 2년 간 맡고 이후 대한적십자사 총재보좌역, 동아방송예술대학 초빙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2013년 '이웅' 이란 필명으로 시집 <나의 부끄러움>을 냈다.[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453] <안개>, <미로>, <불꽃놀이> 등 연출. 1985년 2월 23일 교통사고로 사망.[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460] 1991년 SBS 이직.[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472] <밤으로 가는 쇼>, <KBS 빅쇼> 등 연출. 1994년 SBS 이직.[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481] 1991년 SBS 이직.[T] TBC 출신.[483] <아침마당>, <TV쇼 진품명품>, <김동건의 한국 한국인> 등 연출. 前 광주방송총국 편성제작국장(1999~2002), 前 심의평가실 심의위원(2002~2004), 前 위성제작국 제작위원(2004). 2010년 정년퇴임.[T] TBC 출신.[T] TBC 출신.[486] 1991년 SBS 이직.[T] TBC 출신.[488] 배우 안성기의 형.[T] TBC 출신.[T] TBC 출신.[491] 원래 아나운서였으나 1981년 교양PD로 전직, 1985년 편성 쪽으로 가서 <코스비 가족 만세> 등 외화 더빙연출에 전념하다가 1991년 SBS로 이직.[T] TBC 출신.[493] 1991년 SBS 이직 후 2004년 1월 8일 사망.[T] TBC 출신.[T] TBC 출신.[496] 가수 배철수의 동생.[T] TBC 출신.[498] 지영서 아나운서의 남편. 2011년 정년퇴임 후 2013년 11월 9일 사망.[499] CBS, TBC 출신.[D] DBS 출신.[D] DBS 출신.[D] DBS 출신.[503] 1981년 동아일보로 복귀.[D] DBS 출신.[D] DBS 출신.[D] DBS 출신.[D] DBS 출신.[D] DBS 출신.[509] 1994년 PSB 이직.[D] DBS 출신.[511] 배우와 동명이인. 1981년 동아일보로 복귀.[D] DBS 출신.[513] 1981년 동아일보로 복귀.[D] DBS 출신.[D] DBS 출신.[D] DBS 출신.[D] DBS 출신.[D] DBS 출신.[D] DBS 출신.[D] DBS 출신.[521] 1991년 SBS 이직.[D] DBS 출신.[523] <농부들의 4계>, <혼의 노래, 진도의 소리> 등 연출. 업무 외적으로 한국 토속전통문화 수집 및 비디오 제작에 열을 올려 1997년 넷츠고에 '우리문화영상기행'이란 통신망을 개설#, 1999년 8월 명예퇴직.#[D] DBS 출신.[525] CBS, DBS 출신.[C] CBS 출신.[527] 통폐합 이전엔 아나운서였으며 前 편성실 편성부주간(1996~1997), 前 편성운영본부 부주간(1997~1998), 前 심의평가실 심의위원(1998~2001). 2001년 정년퇴임.[C] CBS 출신.[529] 배치 당시 TV PD였으나 넉달 만에 라디오PD로 재전직했으며 <엄정화의 가요광장>, <임백천의 뮤직쇼> 등 연출. 자세한 정보는 <KBS 저널> 1999년 4월호 82~85쪽서 확인 가능.[전] 전일방송 출신.[전] 전일방송 출신.[532] 2010년 정년퇴임.[전] 전일방송 출신.[534] 1995년 KBC 이직.[전] 전일방송 출신.[서] 서해방송 출신.[537] 2001년 12월 27일부로 정년퇴임했으며 PD 외적으로 1980년 <월간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2021년 1월 28일 사망.[서] 서해방송 출신.[서] 서해방송 출신.[540] 1995년 KMTV 이직.[541] 김재형 PD의 동생으로 한국교육개발원 교육방송부 출신.[542] <즐거운 세계여행>, <지구촌 기행>, <이것이 인생이다> 등 연출. 前 TV1국 제작부주간(1997. 3.~2000. 6.), 前 교양국 부주간(2000. 6.~2001. 4.), 前 교양주간(2001. 4.~2003. 5.), 前 편성국장(2003. 5.~2004. 7.), 前 TV제작본부 교양정보팀장(2004. 7.~2006. 12.), 前 편성본부 프로그램개발팀장(2006. 12.~2007. 4.). 2007년 퇴사 후 팬엔터테인먼트 교양/예능부문 사장으로 영전되었다가 미디어쿠오레, 미디어리버 등에서 대표이사 역임. 저서로는 <따뜻한 TV 행복한 PD(2022)>가 있다.[543] <날아라 슈퍼맨>, <천풍무>, <인형극장> 등 연출.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출신으로 입사 이전에 유현목 감독 밑에서 일하며 16mm 소형 청소년영화제에 나가 수 차례 입상했고, 방원혁 PD가 연출한 모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방송에 눈을 떴다고 한다.(출처: <KBS저널> 1993년 5월호 p71.) 前 TV2국/예능국 부주간(1996. 5.~2001. 4.), 前 안동방송국장(2001. 4.~2002. 1.), 前 심의평가실 심의위원(2002. 1.~2003. 5.), 前 교양국 제작위원(2003. 5.~2004. 7.). 2007년 정년퇴임 후 KBS사우회 부회장 역임.[544] 국립영화제작소 출신으로 <전국일주>, <맛자랑 멋자랑>, <6시 내고향> 등 연출. 1994년 교통관광TV(현 리빙TV) 개국을 앞두고 제작국장으로 영전된 이래 KNS뉴스통신 영상미디어감독 등을 맡았고, 2023년 6월 23일 사망.[545] 2014년 퇴사.[546] <추적60분>, <카메라 동서남북> 등 연출 및 <민원25시> 진행. 1990년 KBS 사태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으며 당시 수배 중이던 안동수를 대신해 노조위원장을 맡다가 구속되어 1991년 집행유예 확정 후 해고되었고, 1992년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사무처장으로 있다가 1993년 특별사면 후 서울지법 남부지원 해고무효확인소송에서 이겨 복직. 前 TV제작센터/위성방송국 위성제작부주간(1999. 12.~2004. 2.), 前 디지털미디어센터장(2004. 2.~2007. 2.), 前 KBS인터넷(KBSi) 사장(파견, 2007. 2.~2008. 12.). 2013년 6월 25일부로 정년퇴임.[547] 1991년 퇴사 후 1992년 제3채널(현 제3영상) 설립 참여.[548] <이화에 월백하고>, <사랑이 꽃피는 나무>, <내일은 사랑>, <당신이 그리워질 때> 등 연출. 1997년 퇴사 후 프리랜서로 활동.[549] <달빛가족>, <희망>, <딸부잣집>, <첫사랑>, <4월의 키스>, <내사랑 금지옥엽> 등 연출. 前 드라마제작국 드라마부주간(1997. 10.~2002. 7.), 前 심의평가실 심의위원(2002. 7.~2003. 5.), 前 드라마제작국 제작위원(2003. 5.~2004. 1.), 前 수원센터/인적자원센터 연수팀 전임교수(2004. 1.~2006), 前 TV제작본부 드라마기획팀장(2008. 9.~12.), 前 드라마(제작)국장(2009. 1.~2010. 11.), 前 창원방송총국장(2011. 7.~2012. 12.). 2014년 6월 30일부로 정년퇴임 후 '한국드라마연구소'를 세웠으며 같은 해 TV본부장으로 본사에 돌아와 1년을 지냈다. 저서로는 <사랑으로 장난치기(2014)>가 있다.[550] <8시20분>, <사람과 사람>, <추적60분>, <뉴스비전 동서남북>, <KBS 일요스페셜> 등 연출. 前 보도국 LA특파원(1992~1995), 前 뉴욕특파원(1996. 6.~1999. 12.), 前 TV1국(교양국) 부주간(1999. 12.~2001. 4.), 前 청주방송총국 편성제작국장(2001. 4.~2003. 5.), 前 기획제작국 제작부주간(2003. 5.~11.), 前 기획제작국 프로그램전략기획부주간(2003. 11.~2004. 7.), 前 TV제작본부 시사정보팀장(2004. 7.~2005. 4.), 前 포항방송국장(2006. 12.~2008. 12.), 前 심의실 심의위원(2009. 1.~2011. 9.), 前 콘텐츠본부장(2011. 9.~2012. 12.). 2013년 KBS 미디어 사장으로 발령나 2년여 간 맡고 KBS N 고문, 한서대학교 특임교수 등 역임.[551] 송지나 작가의 남편. 원래 기자였으나 1983년 PD 전직 후 <추적60분>, <양자강> 등 연출. 1994년 SBS프로덕션으로 옮겼다가 1997년 프리랜서로 전환하여 <몽골리안 루트(2000)> 등을 제작했다.[552] 前 외주제작국 외주제작부주간(2002~2003. 5.), 前 시청자센터 시청자프로그램부주간(2003. 5.~2004), 前 편성본부 외주제작팀장(2005~2006. 12.), 前 편성본부장(2008. 8.~2009). 2011년 조선방송(TV CHOSUN) 창립 당시 교양콘텐츠팀장으로 영전.[553] <수도권 패트롤> 등 연출. 2011~2012년 및 2014~2015년에 두 차례 KBS공영노조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前 위성방송국 전문PD(2003. 5.~2004. 7.), 前 심의팀(실) 심의위원(2004. 7.~2009), 前 이사회사무국 편성·제작전문위원(2010. 1.~2011), 前 심의실장(2012. 12.~2014. 8.), 前 인재개발원장(2015. 12.~2017. 7.). 2018년 6월 19일부로 정년퇴임 후 9월 이사로 임명되어 2021년까지 지냈다. KBS 외적으로 2018년 '미디어연대'를 창설하여 대표를 맡고 있다.[554] 원래 아나운서였으나 1990년대 이후 라디오PD로 전직하여 <음악이 흐르는 밤> 등 연출. 2018년 12월 20일부로 정년퇴임.[555] 1991년 SBS 이직.[556] 1991년 SBS 이직.[557] <딩동댕 7시>, <모이자 노래하자>,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사랑방중계>, <달려라 중계차>, <과학탐험대>, <TV유치원 하나둘셋>, <아침마당> 등 연출. 前 TV제작센터 위성편성부주간(1999~2003), 前 편성국 편성정책주간(2003~2004), 前 시청자센터 시청자서비스팀장(2004~2006), 前 편성국장(2009), 前 심의실 심의위원(2009~2011), 前 편성본부장(2014~2015). 2016년 KBS 미디어 부사장으로 임명된 후 2017년 사장으로 승진하여 1년여 간 재직했다.[558] 1991년 SBS 이직.[559] <절반의 실패>, <야망의 세월>, <지워진 여자>, <정때문에>, <아내> 등 연출. 前 드라마제작국 드라마부주간(2000. 6.~2003. 5.), 前 드라마제작국장(2003. 5.~2004. 7.), 前 TV제작본부 드라마1팀장(2004. 7.~2007. 6.). 2007년 퇴사 후 삼화네트웍스 대표, 조선방송(TV CHOSUN) 콘텐츠본부장 등 역임. 1990년 백상예술대상 신인연출상, 2007년 문화포장 수상.[560] 前 춘천방송총국 편성제작국장(2002~2004). 2011년 정년퇴임.[561] 1995년 SBS 이직.[562] <생방송 심야토론> 등 연출. 2000년 크레지오닷컴 설립 당시 제작이사로 임명.[563] 코미디언과 동명이인으로 1991년 SBS 이직.[564] <여명의 그날>, <먼동>, <찬란한 여명>, <야망의 전설> 등 연출. 前 드라마제작국 드라마부주간(2002. 7.~2004. 8.), 前 TV제작본부 HD문학관100선프로젝트팀장(2004. 8.~2006. 12.), 前 드라마기획팀장(2007. 6.~2008. 9.). 2009년 KBS아트비전 사장으로 임명되어 3년 간 재직.[565] 1991년 SBS 이직.[566] <진도>, <해방과 분단>, <자본주의 100년 한국의 선택> 등 연출. 1994년 SBS프로덕션으로 옮겼다가 1997년 독립제작사 '제이알엔'을 세워 9년 간 운영했고, 2007년 '인스토리(훗날의 더라이브)'를 또 세워 몇년 후 동생에게 대표직을 넘겼다.[567] 영화부 시절 <모래요정 바람돌이>, <라붐>, <달려라 하니> 등 더빙 연출 담당. 前 외주제작국 만화/영화부주간(2003. 5.~2004. 5.), 前 시청자센터/시청자권익보호국 시청자서비스팀(부)장(2009. 11.~2012. 9.), 前 심의실 심의부 심의위원(2012. 9.~2019. 9.). 2019년 9월 30일부로 정년퇴임.[568] 전 MBC 드라마PD와 동명이인.[569] <과학세계>, <지구촌 기행>, <6시 내고향> 등 연출. 1994년 대교방송으로 이직했다가 1995년 독립제작사 '비전마스타(현 씨커뮤니케이션즈)' 설립 및 운영을 맡았고, 2018년부터 서초방송아카데미 원장도 역임.#[570] 야구선수 출신. 1991년 SBS 이직.[571] <이주노의 FM 인기가요>, <다큐멘터리 인물과 사건>, <KBS 무대> 등 연출. 前 라디오2국 2R제작부주간(1999~2000), 前 라디오3국 사회교육부주간(2000~2002), 前 라디오2국 제작부주간(2002~2003), 前 라디오2국-2라디오팀장(2003~2006), 前 1라디오팀-라디오1국장(2008~2010), 前 라디오센터장(2010~2012), 前 KBS 미디어 사장(파견, 2012~2013). 2014년 3월 31일부로 정년퇴임 후 KBS N 감사 역임.[572] <추적60분>, <현장기록 요즘 사람들>, <뉴스비전 동서남북>, <다큐멘터리극장>, <세계는 지금>, <환경스페셜>, <한국의 미> 등 연출. 현역 시절인 1997년부터 1년 간 제11대 한국PD연합회 회장을 맡았다. 前 교양국 부주간(2001. 4.~2003. 5.), 前 비서실(팀)장(2003. 5.~2005. 7.), 前 경영혁신프로젝트팀장(2005. 7.~2006. 12.), 前 편성본부 1TV편성팀장(2006. 12.~2008. 3.), 前 KBS JAPAN 사장(파견, 2008. 3.~2009. 12.). 2014년 정년퇴임 후 세명대학교 저널리즘스쿨 교수, TBS 시청자위원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언론위원, 국회방송 자문위원, EBS 사장 등 역임. 저서로는 <그 현장 25시(공저, 1984)>, <한국의 아름다운 소리 100선(2001)>, <TV 다큐멘터리 세상을 말하다(2004)>, <디지털시대, 프로듀서와 프로그램을 묻다(2017)> 등이 있다.[573] 1991년 SBS 이직.[574] <중학생 퀴즈>, <사건25시>, <긴급구조 119>, <녹색보고>, <환경스페셜>, <퀴즈 대한민국>, <110년만의 추적 명성황후 시해사건> 등 연출. 前 안동방송국장(2009. 1.~11.), 前 경영개혁단장(2009. 11.~2010. 6.), 前 뉴KBS추진단장(2010. 6.~2011. 1.). 2014년 12월 31일부로 정년퇴임 후 2015년 '안스프로'를 세워 총감독으로 근무해왔으며 가톨릭관동대학교 산학협력중점교수, KNS뉴스통신 미디어본부장 등 역임.[575] 1995년 대구방송 이직.[576] 이하 명단 출처: <KBS 사보> 1984년 6월호 p34, 10월호 p34.[577] <6시 내고향>, <긴급구조 119>, <백두에서 한라까지> 등 연출. 前 교양국 부주간(2001. 4.~2002. 1.), 前 전문프로듀서(2002. 1.~10.), 前 제작부주간(2002. 10.~2003. 5.), 前 강릉방송국장(2003. 5.~2004. 8.), 前 TV제작본부 신장르개발프로젝트팀장(2004. 8.~2005. 4.), 前 편성본부 APEC방송프로젝트팀장(2005. 4.~12.), 前 TV제작본부 교양정보(제작)팀장(2005. 12.~2008. 9.), 前 한국디지털위성방송 정책협력실장 및 콘텐츠본부장(파견, 2008. 9.~2010. 11.), 前 교양국장(2010. 11.~2012. 2.), 前 KBS N 사장(파견, 2012. 2.~2014. 8.), 前 글로벌(한류)센터장(2014. 8.~2015. 11.), 前 심의실 심의부 심의위원(2015. 11.~2017. 7.), 前 방송본부장(2017. 7.~2018. 4.). 2017년 본사 PD협회에서 제명되었고# 퇴임 후 2022년 지니뮤직 사외이사로 영전.[578] 1991년 SBS 이직.[579] <TV는 사랑을 싣고>, <체험 삶의 현장>, <연예가중계>, <전국노래자랑>, <열린음악회> 등 연출. 前 예능국장(2012. 12.~2014. 8.). 2019년 MBN 제작본부장으로 이직했다가 2021년 12월 21대 대선을 앞두고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회 홍보본부장을 맡았다. 이후 와이엠미디어(다문화TVDA) 제작총괄대표(2022~2023), 종교콘텐츠본부장(2023) 등 역임.[580] <사랑방중계>, <스튜디오 830>, <독도 재발견>, <추적60분>, <세계 석학에게 듣는다>, <생방송 심야토론>, <정범구의 세상읽기>,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들> 등 연출. 前 외주제작국 만화/영화부주간-편성본부 영화(/만화)팀장(2004. 5.~2008. 12.), 前 심의실 심의위원(2009. 1.~2013). 2018년 정년퇴임. 저서로는 <신화를 세운 사고뭉치들(2009)>이 있다.[581] 한국교육개발원 교육방송부 출신. 1991년 SBS 이직.[582] TBC, 한국교육개발원 교육방송부 출신. 1992년 SBS 프로덕션으로 옮겼다가 1994년 월드와이드넷(당시 A&C코오롱) 개국 준비를 위해 합류하여 전무까지 맡았다. 이후 iTV 전무, 한국DMB 회장 등지 역임.[583] 前 라디오제작본부 라디오편성부주간(2004. 2.~7.), 前 라디오1국 EP3(2009. 1.~2010. 6.), 前 라디오1국장(2010. 6.~2012. 1.), 前 라디오센터장(2012. 2.~2013. 7.), 前 KBS비즈니스 감사(2013. 7.~2014. 9.). 2014년 3월 31일 정년퇴임 이후에도 KBS비즈니스 감사 신분이었다가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2015년 9월부터 6년 동안 본사 이사 역임.[584] 2021년 3월 25일부로 정년퇴임.[585] 이하 명단 출처: <KBS 사보> 1985년 4월호 p26~28.[586] 1991년 SBS 이직.[587] 1991년 12월 8일 심야 불법영업 취재 후 돌아가다 교통사고로 순직.[588] 전 MBC 사장, 가수와 동명이인.[589] 배우와 동명이인으로 <가요톱10>, <가족오락관>, <빅쇼> 등 연출. 2023년 7월 27일부로 정년퇴임.[590] 1991년 SBS 이직.[591] 1994년 현대방송 이직.[592] 前 KBS N 대표이사[593] 교양PD 시절 <신세대 보고 - 어른들은 몰라요> 등을 연출하다 1998년 종영 후 드라마 쪽으로 전향해 <학교> 1~2, <해뜨고 달뜨고>, <비단향꽃무>, <부활> 등을 연출했고, 특히 김지우 작가와 협업하는 예가 많았다. 2007년 올리브나인으로 이직.[594] <추적 60분>, <KBS 일요스페셜>, <역사스페셜> 등 연출. 前 기획제작국 부주간(2001. 4.~2003. 5.), 前 제작위원(2003. 5.~2004. 7.), 前 편성본부 외주제작팀장(2006. 12.~2008. 9.), 前 편성본부/편성국 편성기획팀장(2008. 9.~2009. 7.), 前 편성국장(2009. 7.~2010. 6.), 前 편성센터장(2010. 6.~2012. 11.), 前 기획국장(2012. 11.~2014. 1.), 前 TV본부장(2014. 1.~8.), 前 정책기획본부장(2014. 8.~2015. 12.). 2015년 KBS아트비전 사장으로 임명되어 3년 간 지내고 2018년부터 3년 간 KBS 이사까지 역임.[595] 1991년 SBS 이직.[596] 1991년 SBS로 옮겼다가 1997년 iTV 이직.[597] 1993년 SBS 이직.[598] <가면속의 천사>, <전설의 고향>, <폭풍속으로>, <색소폰과 찹쌀떡>, <아름다운 유혹>, <별난여자 별난남자>, <미우나 고우나>, <돌아온 뚝배기>, <바람불어 좋은 날>, <사랑은 노래를 타고>, <별난가족>, <파도야 파도야> 등 연출. 前 드라마제작국 EP1(2009. 1.~11.). 2019년 12월 31일부로 정년퇴임.[599] 차마고도의 CP. 세명대학교 교수 재직.[600] 2013년 7월 8일 위암 투병 중 사망.[601] 2005년 칼리스타 이직. 2018년 1월 17일 교통사고로 사망.[602] <지구촌 영상음악>, <가요톱10>, <사랑의 리퀘스트> 등 연출. 前 TV제작본부 예능2팀장(2004. 7.~2007. 9.), 前 창원방송총국장(2007. 9.~2010. 6.), 前 예능국장(2010. 6.~2012. 12.), 前 편성센터(본부)장(2012. 12.~2014. 8.). 2014년 9월 KBS아트비전 사장으로 임명된 후 2015년 12월 부사장으로 본사에 돌아와 2017년 7월까지 맡았다. 이후 경기대학교 한류문화대학원 특임교수, 새미래포럼 대표, CGN 대표 역임. 2017년 6월에 언론부역자 3차 명단에 올랐다.# 자세한 내용은 2018년 <헤럴드경제> 기사에 나온다.[603] 1991년 SBS 이직.[604] 1994년 현대방송 이직.[605] 본사 PD협회에서 탈퇴.출처.[606] 1999년 퇴사 후 케이블 증권채널 'WOW TV(현 한국경제TV)' 설립.[607] 1995년 SBS 이직.[608] 1999년 KBS노동조합(1노조) 위원장 취임 후 동년 통합방송법 개정 반대 파업을 주도하다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 및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가 2000년 광복절 특사 때 사면되었고, 같은 해 환경직 청소부 정리해고 반대 등을 주도하다 직권면직되자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낸 후 2001년 원직 복직되었다. 2014년 정년퇴임 후 2015년부터 4년여 간 미디어협동조합(국민TV) 이사장 역임.[609] 1992년 12월 22일 <지구촌 파노라마> 치앙마이족 파트를 취재하다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사망.[610] 배우와 동명이인.[611]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생방송 여성>, <파워 인터뷰>, <시사난타 세상보기>, <KBS 스페셜> 등 연출. 前 TV제작본부 교육문화팀장(2004. 7.~2005. 4.), 前 편성본부 프로그램개발팀장(2007. 4.~2008. 12.), 前 편성국 2TV편성팀(부)장(2009. 1.~2011. 9.), 前 편성국장(2011. 9.~2014. 8.), 前 콘텐츠창의센터장(2015. 11.~2016. 8.), 前 제주방송총국장(2016. 8.~2018. 4.), 前 심의실 심의부 심의위원(2018. 4.~2020). 2020년 정년퇴임.[612] 아나운서와 동명이인이며 원래 전문언어PD로 입사했으나 후에 편성PD로 전직. 前 편성본부 2TV편성팀장(2006. 12.~2008. 4.), 前 콘텐츠본부 콘텐츠기획부장(2010. 12.~2011. 10.), 前 외주(협력)제작국장(2012. 12.~2014. 8.), 前 KBS아트비전 이사(파견, 2014. 9.~2015. 11.), 前 편성(방송)본부장(2015. 11.~2017. 7.), 前 미래사업본부장(2017. 7.~2018. 4.). 2017년 PD협회에서 탈퇴.출처.[613] 원래 전문언어PD로 입사했다가 후에 TV PD로 전직.[614] 원래 미술직으로 입사했다가 1993년 편성PD로 전직. 1989년부터 노조 편집국장을 맡아 1990년 총파업 때 비상대책위원회 대변인으로 활동하다가 구속되었으나 1993년 사면되었다. 이후 노조 정책실장, 조직발전특별위원장, 전국언론노동조합 민주언론실천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맡기도 했다. 前 편성본부 DMB추진팀-DMB팀장(2004. 7.~2007. 9.). 2020년 정년퇴임.[615] 이하 명단 출처: <KBS 사보> 1986년 1월호 p42.[616] <르포 부산사람들>, <열린채널 부산> 등 연출. 前 부산방송총국 편성제작팀장(2005. 4.~2007. 9.). 2019년 12월 31일부로 정년퇴임.#[617] 1995년경 이후 파라비전으로 이직.[618] <기동취재 현장>, <KBS 9시 일요현장>, <KBS 일요스페셜> 등 연출. 1993~1996년경 사이에 기자로도 일했다. 2004년 사내기업 'KBS플러스' 창립을 주도하고 2007년 '한국방송플러스(현 KP커뮤니케이션)'로 법인화하면서 독립.[619] 당초 회계직으로 입사했으나 PD로 전직.[620] 당초 아나운서로 입사했으나 2004년부터 PD로 전직.[621] 출처: <KBS 사보> 1985년 2월호 p33.[622] 당초 아나운서로 입사했으나 PD로 전직.[623] 배우와 동명이인.[624] 태조 왕건 연출 PD. 장사의 신 - 객주 2015를 끝으로 정년퇴직.[625] 2021년 6월 17일 사망.[626] 무역회사 직원 출신으로 <농어촌의 시간>, <오늘도 명랑하게>, <태백의 슬기>, <주간 치악산>, <6시 내고향>, <신화창조의 비밀> 등 연출. 前 광주방송총국 편성제작팀장(2005~2007), 前 목포방송국장(2009~2011), 前 핵안보정상회의방송기획단장(2011~2012), 前 시청자권익보호국장(2012~2013). 2014년 정년퇴임했으며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KBS 저널> 1991년 3월호 126~131쪽에 나온다. 저서로는 <휘파람을 부세요(1995)>, <학교여 일어나라(2003)>, <PD 고전을 탐하다(2012)> 등이 있다.[627] 원래 엔지니어였다가 PD로 전직.[628] 원래 아나운서였다가 2000년대 이후 라디오PD로 전직. 2022년 12월 28일부로 정년퇴임.[629] 이하 명단 출처: <KBS 사보> 1986년 5월호 p61.[630] 1937년생 PD와 동명이인.[631] 배우, 방송작가와 동명이인[632] 배우와 동명이인.[633] <6시 내고향> 등 연출. 前 편성본부 DMB팀장(2007. 9.~2008. 12.), 前 교양국 교양1EP(2010. 6.~12.), 前 교양문화국장(2014. 8.~2015. 12.), 前 전주방송총국장(2015. 12.~2017. 8.), 前 심의실 심의부 심의위원(2017. 8.~2019. 3.). 2019년 3월 31일부로 정년퇴임.[634] 이하 명단 출처: <KBS 사보> 1987년 1월호 p61.[635] 증권사, 신문기자 출신으로 <생방송 전국은 지금> 등 연출. 1989년 3월 19일 사표를 낸 후 27일 월북을 기도하려다 안기부에 의해 압송, 4월 18일 구속 후 11월 징역 3년 및 자격정지 3년 선고.#[636] 1991년 SBS 이직.[637] 1991년 SBS 이직.[638] 1991년 SBS 이직.[639] 1991년 SBS 이직.[640] 1999년 퇴사 후 인하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 역임.[641] 드라마 <두번째 프로포즈>, <위대한 유산> 등 연출. 2007년 올리브나인 이직.[642] 영심이, 아기공룡 둘리, 날아라 슈퍼보드, 달려라 하니, 검정고무신 등 자사 애니메이션 연출. 2010년 4월 26일 사망.#[643] <열전 달리는 일요일>, <유머1번지>, <슈퍼 선데이>, <코미디 세상만사>, <전국노래자랑>, <코미디쇼 7080>, <천하무적 야구단> 등 연출. 前 예능국 예능3EP(2011. 10.~2013), 前 KBS 미디어 콘텐츠기획본부장(파견, 2014. 10.~2015. 12.), 前 예능국장(2015. 12.~2016. 5.), 前 제작본부 TV프로덕션6담당(2016. 5.~2017. 7.), 前 제작본부장(2017. 7.~2018. 4.). 2017년 본사 PD협회에서 제명되었으며# 2023년 복지TV 자문위원장으로 위촉.[644] 2018년 12월 20일부로 정년퇴임.[645] <퀴즈! 대한민국>, <체험! 삶의 현장>, <영상앨범 산> 등 연출. 2012년부터 1년여 간 KBS 공영노동조합 위원장도 맡았다. 前 대전방송총국 편성제작국장(2009. 1.~2010. 12.), 前 원주방송국장(2013. 6.~2014. 8.). 2021년 6월 30일부로 정년퇴임했으며 저서로는 <길을 걷다가 때로는 뒤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2020)>가 있다.[646] 미녀들의 수다의 PD.[647] 前 제주방송총국 편성제작국장(2014. 3.~2015. 4.), 前 제작본부 TV프로덕션1담당(2018. 4.~2019. 2.), 前 시사교양1국장(2019. 2.~2020. 2.), 前 제작1본부장(2020. 2.~2021. 12.).[648] 배우와 동명이인.[649] 라디오PD와 동명이인. 2020년 12월 정년퇴임 후 M이코노미뉴스 영상뉴스국장 역임.[650] 아나운서와 동명이인.[651] 前 방송본부장/편성본부장.[652] 입사 1기수 후배 아나운서와 동명이인으로 본인 역시 아나운서였으나 PD로 전직, <전통으로 소리길로> 등 연출. 前 라디오제작본부 라디오편성(제작)팀장(2008. 9.~2010. 6.), 前 원주방송국장(2010. 6.~2012. 1.), 前 라디오1국장(2012. 2.~2013. 12.). 2022년 정년퇴임.[653] 이하 명단 출처: <KBS 사보> 1987년 11월호 p61.[654] 1991년 SBS 이직.[655] <김영하의 문화포커스>, <더가까이 고민정입니다> 등 연출. 前 라디오센터장(2018. 4.~2020. 2.), 前 전략기획실장(2020. 2.~2022. 3.). 2022년 KBS N 사장으로 발령나 2024년 1월까지 역임.[656] <TV유치원 하나둘셋>, <사람과 사람들>, <KBS 일요스페셜> 등 연출. 前 편성국 편성기획팀(부)장(2009. 7.~2011. 2.). 2011년 JTBC 개국 준비 당시 그쪽으로 합류.[657] 前 KBS N 대표이사.[658] <추적 60분>, <KBS 일요스페셜>, <인물현대사>, <낭독의 발견>, <생로병사의 비밀>, <세상은 넓다> 등 연출. 前 청주방송총국 편성제작팀장(2006. 12.~2008. 12.), 前 심의실 심의부 심의위원(2015~2019. 6.). 2019년 6월 30일부로 정년퇴임.[659] 1991년 SBS 이직.[660] 1991년 SBS 이직.[661] 前 KBS 미디어 사장.[662] 1992년 SBS 이직.[663] 1997년 8월 23일 위암으로 사망.[664] <서세원쇼>, <토요일 전원출발>, <슈퍼TV 일요일은 즐거워>, <한국이 보인다> 등 연출. 2005년 DSP엔터테인먼트 제작대표로 영전.[665] <KBS 일요스페셜>, <환경스페셜> 등 연출. 前 교양제작국 EP3-교양국 3EP(2009. 9.~2012. 1.), 前 교양국장(2012. 2.~12.), 前 방송문화연구소장(2016. 6.~2017. 7.), 前 심의실장(2017. 7.~2018. 4.). 2020년 정년퇴임 후 2021년 이사로 임명.[666] 1988년 조선일보 이직.[667] 이하 명단 출처: <KBS 사보> 1989년 1월호 p60.[668] 1996년 퇴사.[669] 1991년 SBS 이직.[670] <전설의 고향>, <인생은 아름다워>, <백만송이 장미>, <슬픔이여 안녕>, <하늘만큼 땅만큼>, <대조영>, <싱글파파는 열애중>, <집으로 가는 길> 등 연출. 前 드라마국 CP4(2013. 6.~2014. 8.), 前 드라마국장(2014. 8.~2016. 6.), 前 몬스터유니온 드라마부문장(파견, 2016. 6.~2017), 前 드라마사업부(센터)장(2018. 10.~2020. 3.), 前 KBS 미디어 사장(파견, 2020. 3.~2022. 3.). 2023년 4월 박스미디어 드라마총괄사장으로 영전되었다가 11월 복귀.[671] 미안하다 사랑한다, 열아홉 순정 등 연출.[672] <KBS 무대> 등 연출.[673] <슈퍼TV 일요일은 즐거워>, <윤도현의 러브레터> 등 연출. 2011년 JTBC 이직 후 예능국장, 드라마/예능 제작총괄, JTBC스튜디오 총괄대표 등을 거쳐 2024년 원헌드레드 고문으로 영전.[674] 현재 TBS 교통방송 사장.[675] <추적 60분> 등 연출. 현역 시절 노조 사무처장(2005~2006), KBS직원연대 대표(2021~2023)를 각각 맡았다. 前 정책기획센터 기획팀장(2008. 9.~2010. 6.), 前 기획예산국장(2010. 6.~2011. 9.), 前 외주제작국장(2011. 9.~2012. 12.), 前 인재개발원장(2013. 6.~2014. 8.), 前 KBS N 사장(파견, 2014. 10.~2016. 1.). 2023년 2월 퇴사했으며 KBS 외적으로 2022년 '공정언론국민연대' 창설에 참여하며 상임운영위원장을 역임했다가 2024년 시청자미디어재단 이사장 임명.[676] 1991년 SBS 이직.[677] 前 제작본부장/제작1본부장, 前 KBS PD협회장, 前 KBS아트비전 사장, 前 KBS 교향악단 사장, 前 본사 부사장(2021~2023.11).[678] <아침마당 대전> 등 연출.[679] <특종 비디오저널>, <추적60분>, <TV 책을 말하다>, <환경스페셜> '침묵의 강, 설악산은 쉬고 싶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 손양원>, <일사각오 주기철>, <머슴 바울, 김창식> 등 연출. 2021년 퇴사 후 2022년 '권필름'을 설립했다.[680] <자유선언 토요대작전>, <폭소클럽>, <열린음악회> 등 연출. 前 예능국 EP(CP)4(2012. 12.~2014. 8.), 前 예능1CP(2014. 8.~2016. 5.), 前 2TV사업국 2TV제작투자담당(2016. 5.~12), 前 한류기획단장(2016. 12.~2019), 前 KBS 미디어 스마트사업본부장(파견, 2020. 5.~2022. 4.).[681] <태조 왕건>, <해신> 등 연출. 2007년 초록뱀미디어로 이직.[682] 1994년 YTN 이직 후 기자로 전직.[683] <한국사회를 말한다>, <차마고도>, <KBS 스페셜> 등 연출. 前 보도국 국제부 파리특파원(2010~2012), 前 콘텐츠개발실장(2013. 6.~2014. 6./2014. 8.~9.), 前 콘텐츠창의센터 콘텐츠창의1CP(2014. 9.~2015. 1.), 前 기획제작국 기획제작1CP(2015. 2.~2016. 5.), 前 제작본부 TV프로덕션3담당(2016. 5.~2017. 8.), 前 심의실 심의부 심의위원(2017. 8.~2021), 前 제작1본부장(2023. 11.~2024. 1.).[684] 1995년 TJB 이직.[685] 2001년 팬엔터테인먼트로 이직.[686] 예능PD로 입사하였으나 지역순환근무를 거치면서 시사교양PD로 전직했고 이후 시사투나잇, 추적 60분, 생방송 심야토론 등의 CP, KBS 심의위원을 맡았다. 2020년 편성본부장으로 승진했으며 퇴임 이후에는 KBS 교향악단 사장으로 영전했다. 배우자는 정용실 아나운서.[687] 명단 출처: <KBS 사보> 1993년 1월호 p40.[688] 선배 PD와 동명이인, 2009년 SBS로 이직.[689] <위험한 사랑>, <프레지던트>, <태종 이방원>, <효심이네 각자도생> 등 연출. 前 드라마국 드라마3CP(2014. 8.~2016. 6.), 前 2TV사업국 2TV제작투자담당(2017. 5.~2018. 4.).[690] 2021년 9월 12일 사망.[691] <해피투게더> '쟁반노래방', <뮤직뱅크>, <해피선데이> '여걸식스' 등 연출. 2006년 퇴사 후 2007년 코엔미디어 대표이사로 옮겼다가 2012년 '훈미디어'를 차린 바 있었다. 2013년에 훈미디어가 SM C&C로 합쳐지면서 그쪽 상무로 들어가 2017년 공동 대표이사까지 올랐다가 2019년 제작2본부장으로 본사에 돌아왔고, 2022년 스타쉽엔터테인먼트 대표로 또 영전.[692] <모정의 강>, <학교 4>, <분이>, <웨딩>, <투명인간 최장수>, <며느리 전성시대> 등 연출. 前 드라마국 CP1(2013. 12.~2014), 前 드라마2CP(2014~2016. 6.), 前 2TV사업국 2TV제작투자담당(2016. 6.~2018. 10.), 前 몬스터유니온 대표이사(파견, 2018. 10.~2021. 4.). 2021년 11월 코퍼스코리아 제작사업본부 대표로 영전.[693] 현대증권 출신으로 <세계는 지금>, <KBS 일요스페셜> 등 연출. 2000년 크레지오닷컴 법인 출범 후 그쪽으로 이직했다가 2001년부터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보좌관을 3년 간 맡으며 2002년 제16대 대선 시즌 당시 이인제 캠프 인터넷팀장으로 영입되어 이인제 의원의 정무/언론비서관도 맡았다. 2004년 광고기획사 '시너지웍스'를 세워 2011년까지 운영했고, 이후 미래한국 편집위원을 거쳐 2019년부터 유튜브 채널 '한정석의 자유TV' 운영.[694] 前 한국PD연합회장.[695] 소문난 칠공주의 연출,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아버지가 이상해, 황금빛 내 인생, 사랑은 뷰티풀 인생은 원더풀의 CP.[696] 거상 김만덕, 성균관 스캔들, 드림하이 2, 학교 2013의 프로듀서.[697] 구미호: 여우누이뎐, 부탁해요, 엄마 등의 PD,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 저스티스, 동백꽃 필 무렵의 CP.[698] 前 대전방송총국장(2021. 12.~2023. 12.).[699] 웨딩, 미스터 굿바이, 매드독 등 연출. 前 몬스터유니온 대표이사(2021. 4.~2022. 12.), 前 드라마센터장(2022. 12.~2023. 11.).[700] <사랑의 리퀘스트>, <뮤직뱅크>, <해피선데이> 등 연출. 前 예능국 CP4-4CP(2013. 12.~2014. 9./2015. 12.~2016. 5.), 前 콘텐츠창의센터 콘텐츠창의2CP(2014. 9.~2015. 12.), 前 제작본부 TV프로덕션8담당(2016. 5.~2018. 4.).[701] 대왕세종, 다함께 차차차,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PD.[702] <상두야 학교가자>, <미안하다 사랑한다> 등 연출. 2005년 윤스칼라로 이직.[703] 골든 크로스, 완벽한 아내, 란제리 소녀시대, 하나뿐인 내편의 PD.[704] 한국PD연합회장.[705] 현재 KBS 미디어 콘텐츠제작본부장.[706] 2022년 KBS 미디어 사장 임명.[707] 前 국제방송국장(2023. 3.~11.).[708] 6시 내고향, 연예가중계, 전국노래자랑, 부부 클리닉 사랑과 전쟁, 꽃길만 걸어요 연출.[709] 前 멀티플랫폼전략국장(2023. 3.~11.).[710] 前 부산방송총국장(2022. 12.~2023. 12.).[711] 대조영, 남자 이야기, 각시탈, 최고다 이순신, 왕의 얼굴의 PD, 미워도 사랑해의 CP. 2019년 TV조선으로 이적.[712] 前 시사제작1국장(2022. 12.~2023. 11.).[713] 前 제작1본부장(2023. 3.~11.).[714] 추적60분 등 연출.[715] 前 라디오센터장(2023. 1.~11.)[716] 해피투게더 3와 유희열의 스케치북 연출. 2018년에 TV 조선으로 이적.#[717] 前 멀티플랫폼편성국 1TV편성부장(2023. 3.~11.).[718] 前 협력제작국장(2022. 12.~2023. 11.).[719] 前 멀티플랫폼편성국장(2023. 3.~11.).[720] 정현민 작가와 함께 정도전과 어셈블리 연출.[721] 비켜라 운명아 연출.[722]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의 CP. 현재 A9 미디어 소속.[723] 오작교 형제들과 굿 닥터 연출.[724] 해피투게더 시즌 3 PD, 뮤직뱅크 CP.[725] 징비록, 퍼퓸 연출.[726] 아이 엠 샘 연출.[727] 前 제작1본부 제작기획1부장(2023. 3.~11.).[728] 추적 60분, 세계는 지금, KBS 스페셜, 역사저널 그날, 임진왜란 1592 연출. 前 멀티플랫폼편성국 편성제작부장(2021. 12.~2023. 11.).[729] 해피투게더 시즌 1~2 연출. JTBC로 이적.[730] JTBC로 이적.[731]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의 전 CP이자 옥탑방의 문제아들의 CP.[732] 대왕 세종 조연출. 천상의 약속, 당신의 하우스헬퍼 연출.[733] 현재 JTBC로 이적.[734] 前 예능센터장(2022. 1.~2023. 11.).[735] 도쿄 PD특파원[736] 공주의 남자, 비밀의 숲 시즌 2 연출. 현재 스튜디오 드래곤이나 CJ E&M 소속일 것으로 추정.[737] 미녀들의 수다 2 연출. 2014년 2월 CJ E&M으로 이적.[738] 2011년 JTBC로 이적.[739] 또 오해영, 뷰티 인사이드 연출. 현재 스튜디오앤뉴 소속[740] 김승우의 승승장구, 더 유닛 연출.[741] 다큐 인사이트 모던코리아 공동연출 및 CP.[742] 위기탈출 넘버원 연출.[743] 2013년 추적 60분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의 전말 편 연출.[744] 우리동네 예체능 연출. 2015년에 SM C&C로 이적.[745] 1박 2일등 연출. CJ ENM으로 이적.[746] 추적60분, 파워인터뷰 등 연출.[747]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 쌈, 마이웨이 연출. CJ E&M으로 이적.[748] 각시탈, 동백꽃 필 무렵 연출.[749] 슈퍼맨이 돌아왔다을 연출한 바 있다.[750] 학교 2017 연출.[751] 구라철 연출. 2020년 SM C&C로 이적.[752] 2018년 CJ ENM으로 이적.[753] 즐거운 챔피언 시리즈, 청춘야구단 연출.[754] 2022년 신입사원 공개채용 홍보용 스팟 영상에 등장한다.링크[755] 텔레토비, 은하공주 디지캐럿, 영화 시간 여행자의 아내의 PD. 2012년에 퇴사했다.[756] 오펀 블랙 시즌 1과 플루팔루 대모험의 연출 PD다.[757] 외화시리즈 투명인간, 탐정 몽크, 일본 애니메이션 리리카 SOS, 영화 신과 함께 가라의 PD.[758] 1991년 SBS 이직.[759] 영화 레옹,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성룡의 미라클, 홀랜드 오퍼스의 PD.[760] 외화시리즈 6백만불의 사나이, 영화 코만도의 PD.[761] 애니메이션 돌고래 요정 티코, 외화시리즈 베이워치의 PD.[762] 셜록 시즌 1, 콜드 케이스, 007 네버 다이의 연출 PD다. 초창기(90년대초)에는 '비밀의 화원'(애니판)의 더빙연출을 맡기도 했다.[763] 현역 시절인 2006년부터 1노조 부위원장을 맡다가 2008년 위원장까지 등극해 2년여 간 맡았다. 前 네트워크관리부 남산송신소장(2011. 9.~2013. 6.), 前 목포방송국장(2014. 8.~2015. 12.).[764] 현역 시절 1노조에서 총무국장 및 교섭국장을 맡았다. 前 재원관리국 난시청서비스부-네트워크운영국 수신기술운영부장(2014. 8.~2018. 4.).[765] 현역 시절인 2010년부터 2년 간 제14대 본사 기술인협회장 및 제22대 한국방송기술인연합회 회장을 맡았다. 前 기술전략국 기술운영부장(2013. 1.~2014. 1.), 前 네트워크관리(운영)국 소래송신소장(2015. 12.~2016. 12.), 前 네트워크센터장(2016. 12.~2018. 4.).[766] 前 정책기획센터/경영기획단 난시청(해소)프로젝트팀-수신료정책국 난시청서비스부장(2008. 9.~2011. 9.), 前 방송시설국 디지털품질관리부장(2013. 6.~2015. 4.).[767] 현역 시절 제11대 본사 기술인협회장(2006~2008) 및 한국방송기술인연합회 부회장 등을 맡았다. 前 네트워크시설국장(2018. 4.~2019. 2.), 前 제작기술센터장(2019. 11.~2021. 12.), 前 춘천방송총국장(2022. 6.~2023. 12.).[768] 前 중계기술국장(2017. 1.~2018. 4.). 2023년 KBS 연예대상 올해의 스태프상 수상.[769] 아나운서 이옥경의 남편이자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의 아버지로 경성방송국 창립 멤버 중 하나. 前 경성방송국 기획부장(1931~1932), 前 조선방송협회 총무부장(1932~1938), 前 함흥방송국장(1938~1939), 前 제2방송부장(1939~1943), 前 공보처 서울중앙방송국장(1949~1953), 前 방송관리국장(1953~1955).[770] 선박 무선기사 출신. 前 함흥방송국 기술과장(1940~1941(?)), 前 평양방송국 기술과장(1941~1943(?)), 前 조선방송협회 기술과 부과장(1945), 前 기술부(국)장(1945~1948), 前 공보처 방송기술국장(1948~1949), 前 기감(1949/1949~1950). 2001년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KBS방송기술인협회에선 그를 기리고자 그의 이름을 딴 '한덕봉상'을 시상 중이다.[771] 광주방송총국 및 목포방송국 개국멤버 중 하나. 前 청주방송국 기술과장(1959~1963), 前 광주방송국 기술과(부)장(1963~1974). 1975년 목포MBC 송신소장으로 재직.[772] 前 서울중앙방송국 연희방송소장(1945~1948), 前 방송국 송신과장(1952~1953), 前 방송관리국 기감(1953~1968), 前 중앙방송국 남양송신소장(1968), 前 기술부장(1968~1970), 前 방송관리국 기술담당관(1970~1973), 前 기술총국장(1973~1979). 퇴사 후 1988년부터 KBS 사우회 부회장을 맡다가 1991년 회장까지 올라 4년 간 역임. 1960년 방송문화상 기술부문을 비롯 홍조근정훈장(1960), 녹조근정훈장(1967), 국무총리표창(1970), 대통령표창(1971), 옥관문화훈장(1977) 등 수훈. 2001년 방송인 명예의 전당 헌액.[773] 체신부 이직 후 전파관리과장, 무선기술과장 등을 거쳐 1960년 '중앙전기' 설립 및 운영.[774] 前 (서울)중앙방송국 연희송신소장(1953~1956/1960~1961/1964~1971), 前 기술과장(1956~1960), 前 서울국제방송국 수원송신소장(1962~1964), 前 중앙방송국 소래송신소장(1971~1972). 퇴직 후 캐나다로 이민갔으며 자세한 정보는 <방송> 1990년 7월호 112~115쪽, <방송과 기술> 2002년 1/2월호 153~156쪽서 확인 가능.[775] 1942년 단파방송 밀청사건 관련자 중 하나로 아호는 효암(曉岩). 前 이리방송국 기술과장(1949~1951), 前 서울중앙방송국 연희송신소장(1956~1960/1961~1964), 前 방송관리국 시설과장(1960~1961), 前 서울국제방송국 수원송신소장(1964~1966), 前 서울중앙방송국 기술과장(1966~1968), 前 중앙방송국/조정국 남양송신소장(1968~1975). 퇴사 후 아세아방송 제주송신소장을 역임했으며 1959년 방송문화상 기술부문, 1977년 문화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등 수훈. 2001년 방송인 명예의 전당 헌액.[776] 前 광주방송국 기술과장(1958~1961), 前 부산방송국 기술과(부)장(1961~1974), 前 조정국 남양송신소장(1976~1977).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방송과 기술> 2005년 9월호 200~204쪽서 확인 가능.[777] 前 춘천방송국 기술과장(1944~1950), 前 대전방송국 방송과장(1950~1952), 前 서울국제방송국 기술과장(1961~1966), 前 서울중앙방송국 기술과장(1962~1966), 前 서울국제방송국 수원송신소장(1966~1968), 前 중앙방송국 기술부 제1조정과장(1968~1970), 前 남산송신소장(1970~1973), 前 대전방송국장(1973~1974). 1963년 이화여자대학교 시청각교육과를 시초로 한동안 여러 대학을 돌며 강사로 활동했으며 1976년 한국 최초의 사설 방송박물관인 '청원방송박물관'을 세워 운영하기도 했다.[778] 1944년 청주방송국 개국요원들 중 하나. 前 서울중앙방송국 기술계장(1948~1950), 前 전시방송국 기술과장(1950~1953), 前 서울중앙방송국 기술과장(1953~1956), 前 방송관리국 시설과장(1956~1960), 前 서울중앙방송국 기술과장(1960~1961), 前 수원송신소장(1961), 前 남양송신소장(1962~1968), 前 기술담당관(1968~1970), 前 중앙방송국 기술부장(1970~1973), 前 조정국 소래송신소장(1973~1974). 저서로는 <음학공학(1961)>, <건축의 음향설계(시릴 M. 해리스 & 번 O. 너드슨 공저 / 번역)>, <소리와 빛(1984)> 등이 있으며 방송문화상 기술부문(1961), 한국방송대상 공로상(1974), 홍조근정훈장(1975) 등 수훈. 2001년 방송인 명예의 전당 헌액.[779] 前 서울중앙방송국/서울국제방송국 수원송신소장(1958~1961/1961~1962), 前 기술과장(1961), 前 서울텔레비전방송국 기술과장 겸 남산송신소장(1967~1968), 前 중앙방송국 기술부 제2조정과장(1968~1970/1972~1973), 前 방송관리국 시설과장(1970~1972), 前 조정국장(1973~1977), 前 기술국 소래송신소장(1977~1980). 1964년 방송문화상 기술부문 수상.[780] 前 대구방송국 기술과(부)장(1972~1977), 前 기술국 영일송신소장(1977~1980). 2024년 4월 19일 100세를 맞이하여 대구총국 로컬프로 <라이브 오늘>에 출연했다.#[781] 前 속초방송국장(1974~1977), 前 기술국 수원송신소장(1977~1980), 前 남양송신소장(1980), 前 기술국장(1980~1981), 前 기술본부 소래송신소장(1981~1982).[782] 1949년 연희송신소 시절 방송용 송신기를 최초로 만들어 기사(4급 갑류)로 승진, 1950년 제주방송총국 개국 멤버 중 하나이며 1951년 7월 29일 출력 증강 및 전국방송링크용 단파 송신기 설치 등에 임하다가 감전 사고로 순직. KBS 개국 이래 '순직 방송인 1호'로 기록.[783] 제주방송총국 개국 멤버 중 하나로 前 제주방송국 기술과장(1950~1953), 前 서울텔레비전방송국 기술과장(1962~1965). 퇴직 후 아르헨티나로 이민갔으며 1963년 방송문화상 기술부문 수상.[784] 前 서울텔레비전방송국 남산송신소장(1965~1966), 前 서울국제방송국 기술과장(1966~1968), 前 중앙방송국 기술부 기술과장(1968~1970), 前 제2조정과장(1970~1972), 前 중앙방송국/조정국 소래송신소장(1972~1973/1974~1976), 前 수원송신소장(1973~1974).[785] 前 청주방송국 기술부장(1974), 前 방송센터건설국 관리부장(1974~1977), 前 기술국 제주송신소장(1977~1979).[786] 입사 이래 1948년 런던 올림픽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식을 비롯, 1949년 백범 김구 국민장, 1958년 경부역전 및 경인역전 마라톤, 5.16 혁명 기념 시가행진 등지 현대사 속 중요한 사건들의 실황중계를 맡았고, 1976 몬트리올 올림픽까지 올림픽 중계방송 업무도 맡았다. 前 조정국 라디오조정부장(1973~1975), 前 조정국/제작기술국 중계부장(1975~1976/1977~1979), 前 TV조정부장(1976~1977), 前 기술국 당진송신소장(1979~1980), 前 소래송신소장(1980), 前 제작기술국장(1980), 前 기술이사(1980~1983). 1988년부터 3년 동안 KBS 민선 1기 이사를 역임했으며 1982년 국민훈장 동백장 수훈. 사후 국립이천호국원에 안장.[787] 만주전신전화 신경방송국 출신. 前 대전지방방송국 기술과장(1955~1958), 前 대구방송국 기술과장(1958~1961), 前 서울텔레비전방송국 남산송신소장(1966~1967/1968), 前 중앙방송국 기술부 중계과장(1968~1970), 前 기술과장(1970~1973), 前 기술국장(1973~1978). 1960년 근정포장, 1978년 한국방송대상 기술상 수훈.[788] 기자와는 동명이인. 1950년 6.25 전쟁 당시 대전, 대구, 부산으로 각각 피난다니며 중앙방송을 도왔고, 1960 로마 올림픽 때 기술요원으로 투입되기도 했다. 前 방송관리국 시설담당관(1972~1973), 前 기술국 기술관리부장(1973), 前 시설국장(1976~1980), 前 기술국 소래송신소장(1980). 1987년 KBS 사우회 창립 당시 초대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1991년 감사까지 올라 4년 간 맡았고, 한국방송인동우회 부회장도 맡았으며 1979년 대통령표창 수훈. 사후 국립이천호국원에 안장.[789] 前 광주방송국 기술부장(1974~1980).[790] 일본 신일본인쇄, 교통부 해사국, 대한조선공사 제주지사 출신.[791] 前 대구방송국 기술과(부)장(1963~1972/1977~1980).[792] 퇴직 이후 1968년부터 7년여 간 '한국TV기술학원' 설립 및 운영. 저서로는 <정설 무선공학(1970)>이 있다.[793] 前 전주방송국 기술과장(1963~1966), 前 춘천방송국 기술부장(1973~1975), 前 조정국/제작기술국 라디오조정부장(1975~1980), 前 기술운용국/기술본부 당진송신소장(1980~1983). 1983년 한국방송대상 기술상 수상.[794] 아호는 벽산(碧山). 前 제주방송국 기술부장(1981~1983), 前 기술본부 제주송신소장(1983~1984).[795] 前 조정국 라디오조정부장(1980~1983), 前 조정국 TV조정부 위원(1983~1984).[796] 前 춘천방송국 기술과장(1971~1973), 前 시설국 건설1부장(1975~1976), 前 시설2부장(1976~1977), 前 부산방송국 기술부장(1977~1979), 前 감사실 기술검사역(1979~1980), 前 관재국 관재부장(1980), 前 제작기술국 중계부장(1980), 前 기술국 기술부장(1980~1981), 前 방송연구소 연구위원(1981~1982). 퇴사 후 1999년부터 2년 간 한국방송인동우회 회장 역임.[797] 前 대전방송국 기술과장(1963~1966), 前 방송센터건설국 관리부장(1973~1974), 前 조정국 라디오조정부장(1974~1975), 前 기술국(본부) 김제송신소장(1975~1977/1981~1984), 前 시설국 시설2(관리)부장(1977~1980), 前 기술국 남양송신소장(1980~1981), 前 시설국장(1981).[798] 前 기술국 시설부장(1973), 前 기술관리부장(1973~1976), 前 기술국장(1976~1980), 前 시설국장(1980~1981), 前 기술운용국 남산송신소장(1981), 前 기술본부장(1981~1983), 前 방송기기종합정비실(소)장(1983~1985), 前 종합조정실 기술정책개발반 국장(1985~1986), 前 방송연수원 교수(1988). 퇴직 후 한국데이타통신 연구위원, 한국방송개발원 연구위원 및 이사, 고문, 한국방송공학회(현 한국방송미디어공학회) 부회장 등을 지내며 1991~1993년 및 2001~2003년까지 두 차례 KBS 이사를 지냈다. 대통령표창(1972 / 1976), 한국방송대상 기술상(1983), 국민포장(1986) 등 수훈.[799] TBC 이직 이후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 삼성전자 및 삼성반도체통신 대표이사, 삼성전기 회장 등지 역임.[800] 前 춘천방송국 기술부장(1975~1979), 前 기술국 김포송신소장(1979~1980), 前 수원송신소장(1980~1981), 前 방송연구소 연구위원(1981), 前 기술본부 기술위원(1981~1982), 前 기획관리실 기획위원(1983~1984).[801] 前 기술연구소장(1981~1989). 퇴사 후 삼성종합기술원으로 영전.[802] 前 조정국/기술국 연천중계소장(1976~1980), 前 기술국/기술운용국/기술본부 김포송신소장(1980~1981/1983~1984), 前 감사실 검사역(1981~1982), 前 방송망관리실 운용기술부장(1982~1983), 前 남양송신소장(1988~1989).[803] 前 조정국 중계부장(1973~1974), 前 기술국 시설부장(1974~1976), 前 시설국 시설1부장(1976~1980), 前 기술운용국/기술본부 김제송신소장(1980~1981), 前 방송망관리실장(1981~1983/1988), 前 방송기기종합정비실장(1983~1984), 前 방송망감시실장(1984~1986), 前 라디오기술국장(1986~1988), 前 기술본부장(1988~1991), 前 제작지원단준비단장(1991). 1993년 KBS 제4기 이사로 임명되어 3년 간 재직.[804] 前 전주방송국 기술부장(1973~1974), 前 시설확장추진사무소 기술반장(1974~1975), 前 시설국 시설관리부장(1975~1976), 前 관재국 관재부장(1976~1980), 前 자재부장(1980), 前 방송연수원 교수(1989~1992).[805] 전라남도 경찰국 통신과 출신. 前 광주방송국 기술부장(1980~1982).[806] 공보실 신문관리국 시설과에서 전보. 前 조정국 남산송신소장(1973~1977), 前 기술국 남양송신소장(1977~1980), 前 기술국/기술운용국 소래송신소장(1980~1981), 前 기술본부 기술위원(1981~1984).[807] 前 기술운용국장(1980~1981), 前 기술위원(1981~1982), 前 서울올림픽방송준비본부/올림픽방송본부 부본부장(1982~1984), 前 방송센터건설단장(1984~1985), 前 기술본부 부본부장(1985~1989), 前 기술관리국장(1986~1989), 前 기술연구소장(1989~1992). 1993년 YTN 창립 준비 당시 자문위원으로 영전.[808] 前 기술운용국/기술본부 개봉송신소장(1980~1983), 前 TV기술국 부국장(1989~1990), 前 중계기술국장(1990), 前 시설국 기술위원(1990~1992).[809] 前 청주방송국 기술부장(1979~1980), 前 감사실 검사역(1980~1981), 前 기술본부 수원송신소장(1981~1987), 前 기술관리국 방송시설부장(1987~1988), 前 라디오기술국장(1988~1989), 前 방송망관리실 운용국장(1989~1990), 前 방송망관리국장(1990~1992). 1993년 KBS시설관리사업단 이사로 임명되어 1년을 지내다 1994년 마포종합유선방송 기술이사로 영전되었고, 1997년 전무까지 승진해 2년을 지냈다. 1991년 한국방송대상 송출기술상 수상.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KBS 저널> 1993년 1월호 p66~68에 나온다.[810] HLKZ-TV 출신. 前 기술국 라디오조정부장(1973~1974), 前 중계부장(1974~1976), 前 부산방송국 기술부장(1979~1981), 前 기술국 기술보전부장(1981), 前 기술본부 기술위원(1981~1982), 前 올림픽방송준비본부/올림픽방송본부 기술위원(1982~1984), 前 기술개발실 기술기획담당(1984~1985), 前 올림픽방송본부/올림픽기술국 기술부장(1985~1987), 前 TV기술국 부국장(1987~1988), 前 시설국장(1988~1991), 前 방송연수원 교수(1991~1993).[811] 前 기술국 기술부장(1979~1980), 前 보전부장(1980~1981), 前 방송망관리실 운용기술부장(1981~1982), 前 소래송신소장(1982~1983), 前 방송망관리실장(1983), 前 당진송신소장(1983~1987), 前 김제송신소장(1987~1989), 前 라디오기술국장(1989~1990), 前 방송기기정비센터 국장(1990~1991), 前 기술본부장(1991~1992). 이후 중앙케이블비젼 대표이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 등 역임. 1992년 국민포장 수훈.[812] 前 제주방송국 기술부장(1979~1981), 前 부산방송(총)국 기술부(국)-현업기술부(국)장(1981~1984/1986~1988/1993~1995), 前 대구방송국 현업기술부장(1984~1986), 前 라디오기술국 라디오중계부장(1988~1989), 前 창원방송총국 (현업)기술국장(1989~1993). 1990년 한국방송대상 지역방송인상 기술부문 수상.[813] 前 감사실 검사역(1977~1979), 前 방송위원(1979~1980).[814] 前 제주방송국 기술과(부)장(1969~1979), 前 기술국(본부) 제주송신소장(1979~1984).[815] 前 대전방송국 기술부장(1980~1981), 前 제작기술국 라디오조정1부장(1981).[816] 前 제주방송(총)국 현업기술부(국)장(1986. 2.~1988. 6.), 前 광주방송총국 현업기술국장(1988. 6.~7.).[817] 前 기술국(본부) 영일송신소장(1980~1982), 前 부산방송국 김해송신소장(1982~1984), 前 방송망관리실 소래송신소장(1988~1989), 前 당진송신소장(1989~1990).[818] 前 건설본부 기술부장(1973~1977), 前 제작기술국 텔레비전중계부장(1977~1979), 前 제작기술국장(1979~1980), 前 시설국장(1980~1983), 前 기술본부장(1983~1988), 前 올림픽기술본부장(1987~1988), 前 기술상담역(1988~1991). 이후 KBS 공영방송발전연구위원, 다솜방송 기술고문 등 역임.[819] 前 부산방송국 기술부장(1974~1975), 前 기술국/방송망관리실(국) 남산송신소장(1977~1980/1988~1990), 前 제작기술국 라디오조정부장(1980~1981), 前 기술본부 화성송신소장(1981~1983), 前 남양송신소장(1983~1984), 前 방송망관리국 기술위원(1990~1991). 퇴사 후 하이게인안테나 연구실장, 모든텔레콤 연구실장, 금화산업 회장을 역임했으며 1989년 한국방송대상 기술상 수상.[820] 前 전주방송국 기술과(부)장(1969~1971/1975~1982), 前 방송망관리실(국) 당진송신소장(1988~1989), 前 김제송신소장(1989~1992).[821] 前 기술국 기술부장(1978~1979), 前 시설국 시설부장(1980~1981), 前 기술운용국/기술본부 남양송신소장(1981~1983), 前 소래송신소장(1983~1984), 前 시설국장(1988~1990), 前 기술본부 부본부장(1990. 1.~1991. 3.), 前 중계기술국장(1990. 11.~1991. 3.), 前 기술관리국장(1991. 3.~1993), 前 시설국/기술본부 기술위원(1993). 이후 MBN 기술고문 역임.[822] 前 춘천방송총국 기술국장(1987~1989), 前 라디오기술국 라디오송출기술부장(1989~1991), 前 송출기술국 송출관리부장(1991~1993).[823] 前 청주방송국 기술부장(1980), 前 기술운용국 회선운용부장(1980~1981), 前 기술본부 건축시설부장(1981~1984), 前 방송망감시실 방송감시담당(1984), 前 방송망관리실 김포송신소장(1988~1989), 前 방송망관리실(국) 소래송신소장(1989~1991), 前 전문위원(1991~1992), 前 방송기기정비실장(1992~1993).[824] 前 기술국 보전부장(1979~1980), 前 제작기술국/조정국 TV조정부장(1980~1982), 前 기술본부 송-중계소현대화작업반장(1982~1983), 前 기술기획부장(1983~1984), 前 기술현대화작업단장(1984~1985), 前 기획관리국 기획부장(1985), 前 방송센터건설단장(1985~1991), 前 시설국장(1991~1992), 前 기술본부장(1992~1993).[825] 前 광주방송(총)국 기술부-현업기술부(국)장(1984~1988), 前 방송망관리실 김제송신소장(1988~1990), 前 방송망관리국 방송망관리부장(1990~1993), 前 전주방송총국 기술국장(1993~1995).[826] 前 대전방송국 기술부장(1981~1982), 前 감사실 검사역(1982~1984), 前 강릉방송국장(1984~1985), 前 기술본부/기술관리국 기술기획부장(1985~1988), 前 방송망관리실(국) 화성송신소장(1988~1992), 前 시설국 기술위원(1993), 前 기술관리국장(1993~1994), 前 중계기술국장(1994~1995), 前 기술본부장(1995~1997). 1987년 국민포장 수훈.[827] 前 기술운용국/기술본부 김포송신소장(1981~1983), 前 방송망관리실 운용기술부장(1983~1984), 前 방송망감시실 시설운용담당(1984), 前 기술관리국 기술기획부장(1988~1989), 前 방송망관리실(국) 남양송신소장(1989~1991), 前 방송기기정비실장(1991~1992), 前 시설국장(1992~1994).[828] 前 제작기술국 라디오조정2부장(1980~1981), 前 조정국 위원(1981~1984), 前 조정국/TV기술국 조명총감독(1984~1990), 前 방송연수원 교수(1990~1991/1992), 前 방송망관리국 남양송신소 총감독(1992~1994).[829] 前 기술본부 화성송신소장(1983~1984), 前 방송망관리실 관악산송신소장(1988~1989), 前 시설국 시설2부장(1989~1991), 前 자동화사업부장(1992~1993), 前 시설2부 건설현장총감독(1993), 前 시설1부 총감독(1993~1994).[830] 前 기술국 관악송신소장(1979~1981), 前 기술본부/기술관리국 방송(시스템)시설부장(1981~1987), 前 방송시설2부장(1988~1989), 前 방송센터건설단 IBC건설부장(1989~1990), 前 방송망관리국 남산송신소장(1990~1992), 前 방송망관리국장(1992~1994).[831] 前 기술관리국 기술위원(1988~1991), 前 방송연수원 교수(1991~1992), 前 송출기술국 총감독(1993), 前 라디오기술국 송출1총감독(1993~1994), 前 기술본부 기술위원(1994~1996).[832] 前 춘천방송국 (현업)기술부장(1980~1985), 前 기술본부 송신감시담당(1985~1986), 前 방송망감시실 방송시설운용담당(1986), 前 라디오기술국 라디오송출기술부장(1986~1989), 前 방송망관리국 수원송신소장(1989~1991), 前 소래송신소장(1991~1993), 前 라디오기술국장(1993~1994), 前 기술본부 기술위원(1994~1996).[833] 前 방송망관리국 당진송신소 총감독(1990~1996), 前 기술본부 기술위원(1996~1997).[834] 前 춘천방송국 기술부장(1979~1980), 前 보도본부 보도기술부장(1980~1984), 前 방송망감시실 시설운용담당(1984~1986), 前 전송시설관리담당(1986), 前 기술관리국 방송망관리부장(1986~1988), 前 운용국장(1988~1989), 前 TV기술국장(1989~1990/1991~1993), 前 제작기술국장(1990~1991), 前 기술본부장(1993~1995). 1997년 KBS 영상사업단 고문으로 추대되어 1년 간 지낸 후 한국멀티넷 기술부문장(2000~2001), 한국디지털위성방송 기술고문(2002~2005), KBS 경영평가위원(2003~2005) 등을 맡다가 2003년 '한국방송제작기술협회(현 한국정보통신기술산업협회)' 설립을 주도하여 회장을 지내고 있으며, 2009년부터 한국방송기술산업협회 회장도 맡고 있다. 저서로는 <TV프로그램 제작기법(1981)>, <뉴미디어 시대가 오고 있다(1984)>, <방송기술의 이해(1992)>, <디지털 방송기술사전(1995, NHK방송기술연구소 저 / 번역)> 등이 있으며, 공보부장관 표창(1965), 제6회 백제미술대전 사진부문 대상(1987, 체육부장관상) 등 수훈.[835] 前 춘천방송(총)국 현업기술부(국)장(1985~1987. 10.), 前 전주방송총국 (현업)기술국장(1987. 10.~1993. 2.), 前 광주방송총국 기술국장(1993. 2.~1994. 2.), 前 방송망관리국 김제송신소 총감독(1994. 2.~1995. 7.), 前 부주간(1995. 7.~1998).[836] 前 기술위원(1980. 12.~1981. 2.), 前 제작기술국 기술부장(1981. 2.~11.), 前 기술본부 기술기획부장(1981. 11.~1983. 11.), 前 기술본부 부국장(1982. 7.~1983. 11.), 前 조정국장(1983. 11.~1985. 12.), 前 아시아경기대회기술운용팀장(1985. 1.~12.), 前 올림픽국 기술위원(1986. 1.~10.), 前 올림픽기술국장(1986. 10.~1987. 8.), 前 IBC기술국장(1987. 8.~1989. 1.), 前 센터방송시설담당 국장(1989. 1.~1990. 1.), 前 송출기술국장(1990. 1.~12.). 1990년 SBS 창립 당시 초대 기술이사로 영전되어 관리본부장, 상담역 등 역임. 1985년 국민훈장 목련장, 1988년 체육포장, 2002년 한국방송대상 공로상 등 수훈.[837] 극단 드라마센터 출신.[838] 前 마산방송국 (현업)기술부-창원방송총국 현업기술국장(1985~1988), 前 부산방송본부 (현업)기술국장(1988~1993), 前 대구방송총국 기술국장(1993~1994).[839] 前 춘천방송총국 기술국장(1991~1996), 前 기술본부 기술위원(1996).[840] 前 광주방송총국 기술국장(1993~1996), 前 방송망관리국 제주송신소장(1996~1997), 前 기술본부 기술위원(1997).[841] 前 청주방송총국 현업기술국장(1987~1988), 前 기술관리국/방송망관리국 회선망운용부장(1988~1993), 前 방송망운용부장(1993~1994), 前 남산송신소장(1994~1998).[842] 前 시설국 (방송)시설1부장(1989~1991), 前 기술관리국 장비관리부장(1991~1993), 前 청주방송총국 기술국장(1993~1995), 前 중계기술국 TV중계부장(1995~1998). 퇴사 후 2011년 KBS사우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가 2013년 회장으로 추대되어 2년 간 맡았다. 1995년 한국방송대상 지역방송인상 수상.[843] 前 제주방송국 (현업)기술부장(1983~1986), 前 IBC기술국 기술총괄부장(1987~1989), 前 올림픽협력국 기술관리부장(1989~1990), 前 방송망관리국 관악산송신소장(1990~1991), 前 남산송신소 총감독(1992~1994).[844] 前 조정국 TV조정부장(1983~1984), 前 운용부장(1984~1985), 前 방송제작국 '86기술부장(1985~1986), 前 올림픽기술국 장비관리부장(1986~1989), 前 시설국 부대시설(담당)부장(1989~1991), 前 송출기술국장(1991~1993), 前 기술연구소장(1993~1997), 前 기술본부 기술위원(1997).[845] 前 TV기술국 송출2총감독(1993. 4.~7.). 1997년 ubc 개국에 참여하여 초대 기술국장 역임.[846] 前 조정국 영상총감독(1984~1986), 前 올림픽기술국 IBC시설운영부장(1986~1989), 前 방송센터시설국/시설국 TV시설담당(부장)-센터TV시설부장(1989~1991), 前 송출기술국 총감독(1991~1992), 前 시설국 시설1부장(1992~1993), 前 방송기기정비실 정비부장(1993~1994), 前 시설국장(1994~1997), 前 방송기기정비실장(1997~1998), 前 방송망운용국장(1998), 前 TV기술국장(1998~2000/2002), 前 기술관리국장(2000~2002), 前 기술본부장(2002~2003). 이후 한국방송기술표준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고 1996년 한국방송대상 TV기술상 수상.[847] 前 TV기술국 TV제작기술부 영상총감독(1994~1995), 前 방송망관리국 개봉송신소장(1995~1998), 前 TV송출국 송출총감독1(1998~2000), 前 심의평가실 심의위원(2000~2001), 前 TV송출국 TV송출기술부 송출총감독2(2001~2002. 1.), 前 기술본부 기술위원(2002. 1.~2004. 3.).[848] 아호는 송암(松巖). 前 대구방송총국 영일송신소장(1992. 2.~1994. 8.), 前 방송망관리국 방송망관리부장(1994. 8.~1995. 7./1996. 1.~1998. 3.).[849] 오대훈 기술감독의 아버지. 前 조정국 기술총감독(1985~1986), 前 TV기술국 TV제작기술부장(1986~1990), 前 기술연구소 영상연구책임연구위원(1990~1994), 前 방송기기정비실 정비부주간(1994~1998).[850] 前 라디오기술국 라디오송출기술부 송출2총감독(1993), 前 청주방송총국 기술국장(1998~2000), 前 방송망운용국 검사부주간(2000~2001).[851] 前 창원방송총국 현업기술국장(1988~1989), 前 방송망관리실(국) 남양송신소 현업담당 부장(1989~1991), 前 시설국 시설1부장(1991~1992), 前 중기발전기획단 기술부주간(1993), 前 방송망관리국 방송망관리부장(1993~1994), 前 소래송신소장(1994~1996), 前 시설국 수원센터건립주간(1996~1998), 前 라디오기술국장(1998), 前 기술본부 기술위원(1998~2001). 1999년 한국방송대상 라디오기술상 수상.[852] 아호는 관주(觀周). 前 방송망관리국 관악송신소장(1991~1994), 前 방송망운용부장(1994~1998), 前 남산송신소장(1998~2000), 前 중계기술국장(2000~2002), 前 기술본부 기술위원(2002~2004). 퇴사 후 2011년 KBS사우회 감사로 선임되어 부회장(2013~2015/2017~2019), 회장(2019~2021)까지 맡았다. 2002년 한국방송대상 TV기술부문 수상.[853] 前 대구방송총국 영일송신소장(1988~1990), 前 방송기기정비센터 검사부장(1990), 前 방송센터건설단 IBC건설부장(1990~1991), 前 기술관리국 기술관리부장(1991~1993), 前 시설국 시설1부장(1993~1996), 前 소래송신소장(1996~1999), 前 방송망운용국 방송기기정비주간(1999~2001), 前 방송기기정비국장(2001), 前 시설국장(2002), 前 기술본부 대엔지니어(2002~2004).[854] 前 감사실 기술검사역(1984~1989), 前 인사관리실 노무관리담당-노무국 노무부장(1989~1991), 前 방송망관리국 남양송신소 총감독(1991~1992), 前 중기발전기획단 기술부주간(1992~1993), 前 방송망관리국 회선망운용부장(1994~1995), 前 방송망관리부장(1995~1996), 前 당진송신소장(1996~1997), 前 기술관리국장(1997~1998).[855] 前 기술본부 송출기술부장(1983~1984), 前 기술본부/기술관리국 기술기획부장(1984~1985/1989~1992), 前 방송망감시실 송신감시담당(1985), 前 기술본부 기술개발담당(1985~1986), 前 장비총괄담당(1986), 前 라디오기술국 라디오제작기술부장(1986~1987), 前 청주방송총국 현업기술국장(1988~1989), 前 중계기술국 라디오중계부장(1992~1993), 前 방송망관리국 화성송신소장(1993~1994), 前 기술관리국장(1994~1997), 前 기술연구소장(1997~1998), 前 기술본부장(1998~1999). 1997년 한국방송대상 송출상 수상.[856] 前 기술본부 개봉송신소장(1983. 6.~1984), 前 시설국 시설2부 건설현장총감독(1995. 2.~1998. 5.), 前 방송망운용국 김제송신소 현업총감독(1998. 5.~1999. 12.), 前 기술본부 전문엔지니어(1999. 12.~2001).[857] <즐거운 우리집>, <백마고지>, <형사 25시>, <뜨거운 강>, <달빛가족> 등 기술감독. 前 보도본부 보도기술부 (기술)현업총감독(1998. 5.~2001. 4.), 前 방송망운용국 소래송신소 총감독(2001. 4.~2003. 5.), 前 TV기술국 기술위원(2003. 5.~2004. 7.).[858] 前 부산방송본부 김해송신소장(1991. 6.~1993. 2.), 前 제주방송총국 기술국장(1993. 2.~1995. 2.), 前 전산정보실 개발부장(1995. 2.~1998. 5.), 前 정보자료센터 뉴미디어부주간(1998. 5.~12.), 前 정보자료실 정보네트워크부주간(1998. 12.~2000. 1.), 前 방송정책실 시스템네트워크부주간(2000. 1.~6.), 前 뉴미디어센터 뉴미디어방송주간(2000. 6.~2001. 4.), 前 뉴미디어국장(2001. 4.~2004. 2.), 前 방송문화연구소 연구위원(2004. 2.~7.). 퇴사 이후 '엠티아이지'를 설립, 운영 중이며 한국화가로도 활동 중.[859] <백마고지>, <아기공룡 둘리>, <한국의 미>,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취미백선>, <노영심의 작은음악회>, <신 전국일주> 등 편집 담당. 1997년 한국PD대상 특별상 기술부문, 2003년 한국방송대상 TV기술부문 수상. 자세한 내용은 <주간여성> 1979년 제519호 26쪽, <조선일보> 1981년 11월 1일 기사, <동아일보> 1982년 5월 10일 기사, <KBS 저널> 1992년 8월호 75~78쪽 등에서 확인 가능.[860] 前 TV기술국/제작기술국 음향총감독(1989. 1.~1992. 7.), 前 TV제작기술부장(1992. 7.~1994. 8.), 前 라디오기술국장(1994. 8.~1996. 1.), 前 기술본부 기술위원(1996. 1.~1998. 3.).[861] 前 제작기술국/TV기술국 편집관리부장(1990. 2.~1993. 2.), 前 기술연구소 기기연구책임연구원(1994. 2.~1997. 3.), 前 TV기술국장(1997. 2.~1998. 12.), 前 방송망운용국장(1998. 12.~1999. 12.), 前 기술본부 기술위원(1999. 12.~2002). 1999년 한국방송대상 TV기술상 수상.[862] 외화 <코난> 더빙판 등 녹음감독. 前 업무국/재원관리국 수신운영부주간(1997. 3.~2000. 6.), 前 기술본부 기술위원(2000. 6.~2002).[863] <형사 25시>, <왕룽일가>, <먼동> 등 조명 담당. 前 TV기술국 TV제작기술부 조명총감독(1998. 5.~2003. 5.), 前 기술위원(2003. 5.~2004. 7.). 1999년 한국방송대상 조명상 수상.[864] 前 부산방송총국 기술국장(1999. 12.~2002. 1.), 前 김해송신소장(2002. 1.~10.), 前 창원방송총국 기술국장(2002. 10.~2004. 8.). 2001년 한국방송대상 지역방송인상 수상.[865] 前 뉴미디어국 기획운영부장(1994~1997), 前 위성방송국 뉴미디어부장(1997), 前 라디오기술국 위원(1997~1998), 前 기술관리국 기술기획부장(1998), 前 방송망운용국 김포송신소장(1998~2000), 前 속초방송국장(2000), 前 기술본부 기술위원(2001~2004). 2004년 국무총리표창 수훈.[866] 前 대구방송총국 기술국장(1996. 4.~2000. 12.), 前 속초방송국장(2001. 1.~2002. 12.), 前 포항방송국장(2003. 1.~2004. 7.), 前 편성본부 TV송출팀장(2004. 7.~2005. 12.), 前 기술본부 송신인프라팀 소래송신소장(2005. 12.~2006. 12.).[867] 前 방송망운용국 화성송신소장(2000. 12.~2004. 8.). 자세한 정보는 <KBS 저널> 1999년 5월호 87~89쪽에 나온다.[868] 前 시설국 부주간(1994~1995), 前 방송망관리국 회선망운용부장(1995~1996), 前 방송망운용국 남산송신소 총감독(1996~1998), 前 보도본부 보도기술부장(주간)(1998~2001), 前 방송망운용국 당진송신소장(2001~2003), 前 수원센터/인적자원센터 연수팀 교수(2003~2005. 9.). 이후 원음방송 기술위원 및 서울기술국장 등 역임.[869] <쇼 스튜디오A> 등 음향 담당. 前 TV기술국 TV제작기술부 음향총감독(1995. 7.~1997. 3./1998. 5.~2002. 10.), 前 TV제작기술부장(1997. 3.~1998. 5.), 前 시청자센터 KBS홀기술총감독(2002. 10.~2004. 7.). 자세한 정보는 <KBS 저널> 2001년 6월호에서 확인 가능.[870] 前 기술연구소 방식연구실장(1989~1990), 前 시설국 시설2부장(1990~1992), 前 기술관리부 기술기획부장(1992~19995), 前 방송망관리국 김제송신소장(1995~1997), 前 시설국장(1997~1998), 前 기술본부 기술위원(1998~1999), 前 기술본부장(1999~2002). 이후 사라컴 고문, KBS 미디어 고문, 여의도클럽 방송기술분과장 및 연구이사, 동아방송대학 방송기술계 초빙교수 등 역임.[871] 前 TV기술국 TV제작기술부 편집관리총감독(1994~1998. 5.), 前 TV제작기술부장(부주간)(1998. 5.~2002), 前 기술본부 기술위원(2002~2003).[872] 前 보도본부 보도기술부 현업부주간(1995~1998), 前 속초방송국장(1998~2000), 前 TV기술국 편집총감독(2000~2001), 前 보도본부 보도기술주간(2001~2003), 前 TV기술국장(2003~2004), 前 기술본부장(2004~2005).[873] 前 감사실 감사2부장(1996. 4.~1998. 12.), 前 방송기기정비실 방송기기정비주간(1998. 12.~1999. 12.), 前 방송망운용국 소래송신소장(1999. 12.~2001. 12./2002. 7.~2003. 5.), 前 중계기술국장(2002. 1.~7.), 前 대구방송총국장(2003. 5.~2004. 7.), 前 인적자원센터 방송기술연구팀장(2004. 7.~2005. 4.).[874] 前 방송망운용국 여주송신소장(1998. 12.~2000. 6.), 前 재원관리국 수신운영부주간(2000. 6.~2003. 5.), 前 방송망운용국 남산송신소 총감독(2003. 5.~2004. 7.).[875] 前 제주방송총국 기술국장(1999~2001), 前 기술관리국 장비관리부주간(2001~2003), 前 방송망기기정비국 검사부주간(2003~2004), 前 남산송신소장(2004~2008), 前 소래송신소장(2009~2010), 前 뉴미디어·테크놀로지본부장(2010~2012).[876] 前 영상그래픽실 특수영상총감독(1998. 12.~2003. 5.), 前 TV기술국/TV제작본부 TV제작기술총감독(팀장)(2003. 5.~2005. 4.), 前 교양기술팀장(2005. 4.~12.), 前 TV편집기술팀장(2005. 12.~2006. 12.), 前 제작리소스센터장(2011. 9.~2012. 12.). 퇴사 후 KBS 경영평가위원을 역임했으며 2001년 한국방송대상 효과상 수상.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방송과 시청자> 1998년 5월호 72~75쪽에 나온다.[877] 현역 시절인 1989년 제2기 KBS 노동조합(1노조) 위원장으로 선출된 후 1990년 KBS 사태 당시 총파업을 지휘하다 구속 후 1991년 해고 처분을 받았고, 1993년에 사면 후 복직. 前 기술본부 기술위원(1994~1995), 前 기술관리국 기술협력부주간(1995~1999), 前 기술연구소장(1999~2000), 前 남산송신소장(2000~2003). 부사장 퇴임 이후 2006년 '미래방송연구회' 설립에 참여해서 초대 회장을 맡았으며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비례후보 신청도 했다가 떨어졌다. 그 뒤 한국블록체인기업진흥협회 수석부회장, 콘텐츠웨어 회장, 서울벤처정보대학원 겸임교수, 유비쿼터스미디어콘텐츠연합 수석부총재 등 역임. 2007년 국무총리표창 수훈.[878] 광주MBC 출신.[879] 자황중학교 교사 출신. 현역 시절 1990년 한-소 수교 및 1992년 한-중 수교,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 등 역대 대통령들의 정상외교 과정을 TV 화면에 담아내는 데 기여해왔다. 前 보도본부 보도기술부 현업총감독(1994~1995), 前 위성(기술)총감독(1995~2001), 前 TV기술국 TV제작기술주간(2001~2002), 前 TV기술국장(2002~2003), 前 기술본부장(2003~2004). 2012년 KBS 이사회 경영평가위원을 거쳐 동년도부터 3년여 간 이사까지 맡았으며 저서로는 <역대 대통령 정상외교(2014)>가 있다.[880] 1987년 본사 기술인협회 창립멤버로 초대(1987~1988) 및 3대(1989~1990) 회장을 맡았으며 한국방송기술인연합회 창립에도 참여해 초대(1987~1988) 및 3대(1990~1991) 회장까지 맡았다. 1990년 KBS 사태 당시 총파업에 나섰다가 구속되어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업무 외적으로 1987년 월간 <현대시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여 <나는 너의 그림자조차 두렵다(1996)> 등 총 5권의 시집을 냈다.[881] 前 재원관리국 수신운영부주간(2003. 5.~2004. 7.). 퇴사 후 2010년 '디지털시청100%재단' 설립 당시 초대 이사장을 맡았으며 저서로는 <방송공동수신의 이론과 실제(2008)>가 있다.[882] <이화>, <토지>, <왕과 비>, <새엄마> 등 조명 담당. 2002년 한국방송대상 조명상 수상. 자세한 정보는 <KBS 저널> 2001년 7월호에서 확인 가능.[883] 현역 시절인 제6~7대 본사 기술인협회장 및 제7~8대 한국방송기술인연합회 회장(1994~1998)을 맡았다. 前 제주방송총국 기술국장(2003~2004), 前 라디오제작본부 라디오송출기술팀장(2004~2005), 前 기술본부장(2005~2008). 퇴임 후 학교법인 일현학원 감사 및 이사를 역임했으며 자세한 정보는 <KBS 저널> 2002년 2월호에서 확인 가능. 2007년 화관문화훈장 수훈.[884] 前 부산방송총국 기술국장(2002. 1.~2004. 8.).[885] 前 방송망운용국 개봉송신소장(1998. 10.~12.), 前 소래송신소 총감독(1998. 12.~2001. 4.), 前 TV기술국 위성방송송출총감독(2001. 4.~2003. 5.), 前 TV제작기술주간(2003. 5.~2004. 7.).[886] 前 부산방송총국 김해송신소장(1998~1999), 前 시설국 제작시설부장(부주간)(1999~2002), 前 TV기술국 TV제작기술주간(2002~2003), 前 시설국장(2003~2004), 前 기술본부 방송네트워크팀장(2004~2005).[887] 前 밀레니엄기획단/경영개선추진단 경영개선부주간(2000~2003), 前 기술관리국장(2003~2004), 前 기술본부 기술기획팀장(2004~2005), 前 춘천방송총국장(2005~2006), 前 특임본부장(2006~2008), 前 기술본부장(2008). 퇴임 며칠 후 KBS비즈니스 사장으로 임명되어 1년 간 역임.[888] 1990년 총파업 당시 노조 조직국장으로 있다가 구속되어 집행유예 선고된 바 있었지만 1993년 3월 특사 때 사면되었고, 1995년부터 2년 간 위원장, 2001년부터 2년여 간 전국언론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까지 맡았다. 前 정책기획센터/특임본부 수신료프로젝트팀장(2006. 12.~2008. 9.). 퇴사 이후 한국노동복지센터 이사, 민주언론시민연대 부이사장, KBS 이사 등 역임.[889] MBC 기자와 동명이인. 前 제주방송총국 제주송신소장(2004. 8.~2005. 12.).[890] 국립극장 출신으로 <즐거운 7시>, <가요무대>, <클래식 사전>, <쇼 비디오 자키>, <쇼특급>, <자니윤 쇼>, <젊음의 행진> 등 조명 담당. 퇴사 후 서진레스피아 고문 등 역임. 자세한 내용 <조선일보> 1986년 10월 7일 기사, <방송의 현장> 1987년 2월 1일 방영분, <KBS 저널> 1989년 7월호 p102~107 등 참고.[891] <열린음악회>, <노영심의 작은음악회>, <기쁜우리 젊은 날> 등 다수의 야외공연 프로,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 스포츠 중계방송 등 음향 담당. 前 시청자센터 KBS홀팀장(2005~2007).[892] 前 영월방송국장(2001. 4.~2003. 5.), 前 TV기술국 2TV송출부주간(2003. 5.~2004. 8.), 前 기술본부 방송네트워크팀 개봉송신소장(2004. 8.~2005. 12.).[893] 前 전주방송총국 기술국장(2000~2004), 前 기술본부 송신인프라팀 화성송신소장(2006~2007).[894] KY녹음실 출신. 자세한 정보는 <KBS 저널> 1991년 2월호 114~119쪽 참고.[895] 前 영월방송국장(2003~2004), 前 보도본부 보도기술팀장(2004~2006), 前 춘천방송총국장(2006~2008), 前 기술본부장(2008~2009).[896] 前 방송망운용국 당진송신소 총감독(2002. 1.~2004. 8.), 前 기술본부 방송네트워크팀 김포송신소장(2004. 8.~2005. 12.).[897] 현역 시절 제4~5대 본사 기술인협회장(1990~1994) 및 제5~6대 한국방송기술인연합회 회장(1992~1994) 역임. 1994년 '한국방송정보협회' 설립/운영.[898] 前 TV기술국 1TV기술총감독(2002. 1.~10.), 前 부산방송총국 김해송신소장(2002. 10.~12.), 前 속초방송국장(2003. 1.~2004. 7.), 前 TV제작본부 드라마기술팀장(2004. 7.~2005. 12.), 前 춘천방송총국장(2008. 9.~2010. 6.), 前 제작리소스센터장(2010. 6.~2011. 9.).[899] 前 대구방송총국 기술팀장(2006. 12.~2007. 9.), 前 영일송신소장(2007. 9.~2008. 12.).[900] TBC 출신.[901] TBC 출신. 前 부산방송본부 현업기술국장(1984~1986).[902] TBC 출신.[903] TBC 출신.[904] MBC, TBC 출신. 前 제작기술국/보도본부 위성중계부장(1980~1984), 前 조정국/TV기술국 음향총감독(1984~1988), 前 라디오기술국 부국장(1988~1990), 前 제작기술국 부국장(1990~1991), 前 라디오기술국장(1991~1993). KBS 외적으로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서 음향운용담당관, 기술전문위원 등을 맡으며 1988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음향총괄을 맡았고, 한국음향가협회 부회장, 인터엠 사외이사 등 역임.[905] 체신부 전무국, DBS 출신.[906] TBC 출신.[907] TBC 출신.[908] TBC 출신. 前 기술운용국/기술본부 시흥송신소장(1980~1983), 前 연천중계소장(1983~1984), 前 방송망감시실 유무선통신망관리담당(1984~1986), 前 방송시설운용담당(1986), 前 기술본부 수원송신소장(1987~1988), 前 시설국 자동화사업부장(1988~1992), 前 위성방송준비국 방송부주간(1992~1993), 前 방송기기정비실장(1993~1994), 前 방송망관리국장(1994~1997), 前 기술본부장(1997~1998). 2003년 국제방송교류재단(아리랑TV) 고문으로 추대. 1995년 국민포장 수훈.[909] TBC 출신.[910] TBC 출신. 前 뉴미디어국 기술부주간(1993~1994), 前 기획예산국 기술부주간(1994), 前 김포송신소장(1994~1997).[911] TBC 출신.[912] TBC 출신.[913] TBC 출신. 前 기술개발국 장비관리부주간(2003~2004), 前 기술본부 장비보전팀장(2004~2005), 前 인적자원센터 방송기술연구팀장(2005), 前 중계인프라팀장(2005~2008), 前 방송망운용국 남산송신소장(2009), 前 기술본부장(2009~2010). 2011년 JTBC 기술센터장으로 영전된 후 기술부문이 'JTBC미디어텍'으로 분사되면서 초대 대표이사를 5년여 간 맡았다. 2002년 체육훈장 백마장 수훈.[914] TBC 출신. 前 기술본부 송신인프라팀 여주송신소장(2005. 12.~2008. 9.).[915] 대한전선, 한국과학기술원 출신.[916] 육군 통신장교 전역. 前 기술본부 기술위원(1981~1982), 前 서울올림픽방송준비본부/올림픽방송본부 기술위원(1982~1984), 前 수급관리국 재물관리부장(1984~1986), 前 기술본부 기술관리부장(1986), 前 라디오기술국 라디오중계부장(1986), 前 방송망관리실 남양송신소 현업담당 부장(1988~1989), 前 방송망관리실(국) 김제송신소 기술위원(1989~1991).[917] 체신부, 이화전기 연구소, TBC, 삼성전자 연구소 출신.[918] 한국과학기술원, 금성전기, 한국전기통신연구소 출신. 前 기술연구소 기기연구책임연구위원-기기책임연구원(1990~1993/2000~2001), 前 방송심의실 심의위원(1993~1994), 前 TV기술국 TV송출기술부 송출1총감독(1994~1995), 前 기술연구소 영상연구책임연구원(1995~1997), 前 방식(연구)책임연구원(1997~2000), 前 기술연구소장(2001~2003), 前 방송기기정비국장(2003~2004), 前 디지털미디어센터장(2008), 前 뉴미디어센터장(2009~2010). 퇴사 후 2015년 부사장으로 본사에 돌아왔으나 2016년 8월 30일 사망.[919] 퇴사 후 TX Tech 이사 역임.[920] 방송작가와 동명이인.[921] 前 춘천방송총국 기술국(팀)장(2001~2005), 前 정책기획센터 난시청해소프로젝트팀장(2005~2007), 前 기술전략기획팀장(2008), 前 기술관리국장(2009~2010), 前 네트워크관리국장(2010~2011), 前 기술본부장(2014. 8.~2015. 11.). 이후 영화키스톤건축사사무소 전무 역임.[922] 前 기술관리국 기술협력부주간(1999~2001), 前 기술기획부주간(2002~2003), 前 기술연구소 연구부주간(2003~2004), 前 디지털미디어센터 멀티미디어팀장(2004~2005), 前 미래미디어전략국장(2010~2011), 前 기술전략국장(2011~2012), 前 제주방송총국장(2012~2013). 저서로는 <HDTV 이론과 기술(공저, 1999)>이 있으며 1999년 다산기술상, 2013년 대통령표창 등 수훈.[923] 해군 항공조종사 출신. 前 중계기술국 항공취재주간(1996. 1.~1998. 12.), 前 전문항공위원(1998. 12.~2003). 자세한 정보는 <KBS 저널> 1989년 9월호 96~101쪽, <방송문화> 2002년 5월호 24~25쪽서 확인 가능하며 1970년 인헌무공훈장, 1998년 이달의 기자상 특별상, 1999년 삼성언론상 시각영상부문 등 수훈.[924] 현역 시절 노조 경남지부장(1993~1995), 사무처장(2001~2002) 등 역임. 前 창원방송총국 기술국장(2009. 1.~2010. 6.), 前 진주방송국장(2010. 6.~2012. 6.).[925] 前 대전방송총국 기술팀(국)장(2006~2010), 前 방송시설국 제작시설부장(2010~2011), 前 방송시설국장(2011~2012. 12.), 前 뉴미디어·테크놀로지본부/기술본부장(2012. 12.~2014. 7.). 2015년 KBS비즈니스 이사직에서 퇴임한 후 2017년 본사 경영부사장으로 복귀하여 1년여 간 맡았다. 자세한 정보는 <명지뉴스> 2018년 3월 7일자 기사 참고.[926] 前 부산방송총국 김해송신소장(2003. 5.~2005. 12.), 前 TV제작본부 드라마기술팀장(2005. 12.~2006. 12.).[927] 前 감사실 기술부주간(2003~2004), 前 기술본부 네트워크팀장(2005~2006), 前 품질관리팀장(2006~2008), 前 라디오제작본부 라디오생방기술팀장(2008), 前 방송망운용국 당진송신소장(2009), 前 기술관리국장(2009~2011), 前 네트워크관리국 소래송신소장(2011~2012), 前 한국지상파디지털방송추진협회 사무총장(파견, 2012~2013), 前 제작기술센터장(2013~2014), 前 UHD추진단장(2016~2018), 前 심의실 심의부 심의위원(2018~2020). 퇴사 이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통신자문특별위원, KBS 경영평가위원, 공정미디어연대 대표 등을 역임했으며 2017년 한국방송대상 기술진흥상 수상.[928] 前 기술본부 기술전략기획팀 RF전문엔지니어(2004. 12.~2006), 前 방송시설국 송신시설부장(2010. 6.~2012. 6.), 前 기술전략국장(2012. 6.~12.), 前 방송시설국장(2012. 12.~2015. 4.), 前 제주방송총국장(2015. 4.~2016. 8.).[929] 철도청, 한국전기통신공사 출신. 前 광주방송총국 기술팀장(2006~2010), 前 미래미디어전략국 미래미디어기획부장(2010~2011), 前 기술기획부장(2011~2012), 前 원주방송국장(2012~2013), 前 한국지상파디지털방송추진협회 사무총장(파견, 2014~2015), 前 기술본부장(2015. 11.~2016), 前 제작기술본부장(2016~2017. 1.). 2020년 안세기술 상무이사로 영전.[930] 前 춘천방송총국 기술팀장(2006~2007), 前 TV제작본부 TV편집기술팀장(2007~2008), 前 기술관리국 기술기획팀장(2009~2010), 前 미래미디어전략국 미래미디어운영부장(2010~2011), 前 제작리소스센터/제작기술센터 보도기술국장(2011~2014), 前 제작기술센터장(2014~2016), 前 네트워크센터장(2016~2017), 前 제작기술본부장(2017~2018). 퇴임 이후 2019년부터 자유미디어국민행동 운영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2017년 방송의 날을 기념해 국무총리표창 수훈.[931] 현역 시절 KBS노동조합(1노조, 당시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제4~5대 대의원, 6~8대 안동지부장, 대구-경북 시도지부장 등을 거쳐 2005년 위원장까지 오르며 반 정연주 성향의 선두에 있었다. 前 시청자센터 KBS홀팀장(2009), 前 시청자사업팀장(2009~2010), 前 시청자권익보호국장(2010~2011), 前 네트워크관리국장(2011~2012), 前 디지털시청100%재단 사무국장(파견, 2012~2018).[932] 前 미래미디어전략국 미래미디어운영부장(2011. 9.~10.), 前 기술전략국 기술기획부장(2011. 10.~2012. 12.), 前 제작리소스센터장(2012. 12.~2013. 6.), 前 춘천방송총국장(2013. 6.~12.).[933] 입사 13년 차이 선배와 동명이인. 前 KBS N 기술팀장(파견, 2007. 7.~2009. 12.), 前 감사실 기술감사역(부장)(2009. 12.~2012. 12.), 前 기술전략국장(2012. 12.~2013. 12.), 前 춘천방송총국장(2013. 12.~2015. 12.), 前 네트워크관리국장(2015. 12.~2016. 5.), 前 인프라투자국장(2016. 5.~2018. 4.).[934] 현역 시절 KBS기술인협회 사무처장, 한국방송기술인연합회 사무국장, 제6대 KBS노동조합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前 제작기술본부장(2018~2019), 前 기술본부장(2019). 2021년 KBS비즈니스 이사로 임명.[935] 현역 시절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부산지부장 등지에 몸담은 바 있다. 前 네트워크센터장(2018~2019), 前 지상파UHD방송추진위원회 사무총장(파견, 2019~2020), 前 제주방송총국장(2020~2021), 前 기술본부장(2021~2023).[936] 창사 최초의 여성 공채 카메라맨으로 <한명회>, <바람은 불어도>, <첫사랑>, <우리말 겨루기> 등 스튜디오 촬영 및 2002 한일 월드컵 등 중계촬영 담당. 前 영상제작국 영상제작3총감독(2016. 5.~2018. 4.). 2017년 국무총리표창 수훈.#[937] HLKZ-TV 출신.[938] 중앙공보관 출신. 前 TV국/제작지원국 촬영반-지원1(촬영)부장-총감독(1979~1980/1980~1988), 前 TV국 제작관리부장(1980), 前 방송연수원 교수(1988~1993), 前 TV본부 영상제작위원(1993~1994).[939] 前 조정국/TV기술국 카메라총감독(부장)(1984~1990), 前 영상제작국 영상관리부장(1990~1993).[940] 前 영상제작국 영상제작2부장(1990~1993), 前 스튜디오총감독(1993~1996), 前 영상제작주간(1996), 前 영상제작국장(1996~1998), 前 전문카메라맨(1998~2001).[941] 前 영상제작국 스튜디오총감독(1996~1997), 前 영상관리부장(1997~1998), 前 전문카메라맨(1998~2002).[942] <대한국인>, <11시에 만납시다>, <드라마게임>, <생방송 심야토론>, <사랑방중계> 등 스튜디오 촬영 담당. 1986 서울 아시안게임 축구,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 및 서울올림픽 축구 등 중계촬영 역시 담당. 前 영상제작국 다큐총감독(1994~1995), 前 드라마총감독(1995~1997), 前 다큐멘터리/특수촬영총감독(1997~1998), 前 ENG총감독(1998), 前 영상제작국장(1998~2000), 前 TV제작센터 제작위원(2000~2003).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KBS저널> 1988년 11월호 120~122쪽서 확인 가능.[943] 前 영상제작국 ENG총감독(1996), 前 중계총감독(1996~1998), 前 카메라2총감독(1998~2000), 前 영상제작국장(2000~2003), 前 전문카메라맨(2003~2004).[944] TBC 출신.[945] 영화 촬영기사 출신으로 <적도전선>, <지리산>, <지포리에서 생긴 일> 등 야외촬영 담당. 퇴사 후 서울텔레콤, KBS제작단, 한국영상연구소 등지에서 제작위원 역임. 1990년 제26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기술상 수상.#[946] 영화 촬영기사 출신으로 <전우>, <청춘극장>, <남자는 외로워> 등 야외촬영 담당. 특히 장형일 PD와 협업하는 예가 많았다.(출처: <KBS 저널> 1992년 8월호 p62~64)[947] 국립영화제작소 출신. 前 영상제작국 드라마총감독(1994~1995/1997~1998), 前 다큐/특수총감독(1995~1996), 前 다큐총감독(1996~1997).[948] 前 영상제작국 카메라총감독(2001. 4.~2004), 前 TV제작본부 스튜디오/중계영상팀-스튜디오영상팀 특수촬영전문카메라맨(2004. 12~2006. 6.). 퇴사 이후 동아방송예술대학 미디어학부 인터랙티브컨텐츠학과, 우송대학교 디지털미디어대학 방송영상학부 등에서 교수를 맡았으며 저서로는 <영화, TV 영상제작론(2021)>이 있다.[949] 1996년 엄홍길 마나슬루봉 원정을 시초로 14년 동안 히말라야 산맥 등정 촬영 15회 기록. 前 영상제작국 촬영총감독(1998. 12.~2000. 12.), 前 카메라총감독(2000. 12.~2001. 4.), 前 촬영1총감독(2001. 4.~2002/2003. 5.~2004. 7.), 前 촬영2총감독(2002~2003. 5.), 前 TV제작본부 드라마영상팀장(2004. 7.~2005. 12.), 前 영상제작국장(2009. 1.~2010. 1.). 퇴사 이후 KBS미디어텍 고문을 맡다가 2011년 독립제작사 '채널A뉴스네트워크(이하 CANN, 현 씨앤유니버스)'를 세워 3년 간 운영했으며 1991년 서울언론인클럽 언론상 기획취재상, 1996년 한국방송대상 촬영상, 2002년 체육훈장 기린장 등을 수훈. 자세한 정보는 <KBS 저널> 1996년 11월호 48~49쪽 및 2001년 4월호 72~77쪽, 2001년 6월 8일 <경향신문> 기사, 2008년 4월 7일 <홍성신문> 기사, 2016년 4월 12일 <홍주일보> 기사 등에서 확인.[950] <맥랑시대>, <드라마게임>, <비가비> 등 야외촬영 담당. 사후 1993년 한국방송대상 촬영부문, 1994년 한국PD대상 제작진상 촬영부문 추서.[951] TBC 출신으로 <TV문학관> 등 야외촬영 담당.#[952] TBC 출신. 업무 외적으로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골목 안 풍경> 시리즈로 이름을 알렸다. 前 제작지원국 방송위원(1980~1981), 前 촬영부 (방송)위원(1981~1988), 前 제작지원국 촬영부-영상제작국 영상제작1부장(1988~1993), 前 방송연수원 교수(1993~1994).[953] TBC 출신. 前 영상제작국 영상관리부장(1993~1997), 前 스튜디오총감독(1997~1998), 前 전문카메라맨(1998).[954] 축구선수와 동명이인으로 TBC 출신. 前 영상제작국 중계부주간(총감독)(1993~1996), 前 ENG총감독(1996~1998), 前 현업총괄부주간(1998~2000. 6.), 前 카메라총감독(2000. 6.~2001. 4.). 2007년 대한민국 영상대전 공로상 수상.[955] TBC 출신.[956] 신필름영화예술학교 출신으로 상업사진을 찍다가 1977년에 선배의 조언으로 수중촬영에 발을 들였으며 <한려수도 해저1천리>, <형사 25시>, <검생이의 달>, <용의 눈물> 등 야외촬영 담당. 2006년 그리메상 공로상 수상.(출처: <TV가이드> 1990년 제478호(11월 17일) p64~65.)[957] <좋은걸 어떡해> 등 촬영 담당.[958] 2002년에 KBS아트비전의 세트 제작업무가 '케이아트(구 디지털미술센터)', 무대 디자인은 '비주얼아트센터'로 또 독립.[959] KBS아트비전 출신. 前 보도본부 보도그래픽부장(2018. 4.~2020. 5.).[960] 영화 연출부, 국방부 행정보조원 출신.[961] <파천무(1980년판)> 등 타이틀 제작 담당. 1990년 '한국색채연구소' 창립 주도자로 1991년부터 KBS문화사업단 부설로 있다가 1995년 재단법인 형태로 독립시켰다.[962] <떠돌이 까치>, <회전목마>, <서울뚝배기>, <옛날의 금잔디> 등 타이틀 제작 담당.[963] <전설의 고향>, <대명>, <풍운>, <개국>, <노다지>, <토지>, <왕도> 등 소품 제작 담당. 자세한 내용은 <KBS 저널> 1992년 5월호 82~85쪽, <주간한국> 2002년 기사 참고.[964] 대전MBC 출신.[965] TBC 출신. 퇴사 후에도 자사 교육프로 타이틀을 만들어 오다가 1991년 SBS로 재입사.[966] <즐거운 우리집>,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6시 내고향>, <잘난걸 어떡해>, <하늘만큼 땅만큼>, <미우나 고우나> 등 타이틀 제작 담당.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KBS 저널> 2002년 1월호 64~67쪽에 나온다.#[967] TBC 출신.[968] 아호는 담운(覃雲). 날아라 슈퍼보드, 용의 눈물, 개그콘서트, 인간극장, 아침마당 등 자사 프로그램 타이틀로고 디자인을 맡아왔고, 서예에도 능해 2001년 제24회 원곡서예상 등 3개의 상을 받았다. KBS아트비전 배치 이후 2002년 그래픽부장을 시초로 간부직에 올라 경영기획국(팀)장(2003~2008), 미술제작국장(2009~2010), 의상제작부장(2011~2012), 상임이사(2012~2013) 등지 역임.(참고: <KBS 저널> 1997년 11월호 p68~70, 네이버 블로그, 1997년 조선일보 인터뷰)[969] TBC 출신.[970] TBC 출신.[971] TBC 출신. 前 보도국 보도미술부장(1988~1993/1994~1996), 前 보도위원(1996~1997), 前 방송70년·KBS50년사업위원회 기획위원(1997~1998), 前 박물관설립준비사무국 기획위원(1998).[972] 코미디언과 동명이인으로 TBC 출신. 前 보도국 보도미술부장(1996~1998), 前 영상그래픽실장(1998~2001), 前 제작위원(2001~2002), 前 심의평가실-심의팀 심의위원(2002~2006).[973] <형사>, <파랑새는 있다>, <이소라의 프로포즈>, <TV동화 행복한 세상> 등 타이틀 제작 담당.[974] <꼬마 자동차 붕붕>, <천방지축 하니> 등 타이틀 제작 담당.[975] 아호는 지평(砥平) 혹은 지산(砥山). 미술부 시절 <달려라 하니>, <명탐정 번개>, <아기공룡 둘리>, <TV 손자병법> 등 타이틀 제작 담당. 前 보도기술국 보도그래픽부장(2011~2013). 그 외에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이사, 지평캘리연구소 대표 등을 역임함.[976] <형사 25시>, <영심이>, <2020 우주의 원더키디>, <지구는 초록별> 등 타이틀 제작 담당.[977] 현역 시절인 2006년부터 2년 간 1노조 사무처장을 맡았다. 前 KBS N 마케팅본부장(파견, 2012~2014), 前 광고국장(2014~2016/2017~2018).[978] 현역 시절 1노조에서 문화국장, 노사국장을 맡았다. 前 미래전략기획국 성과평가부장(2016. 5.~12.), 前 법무실장(2016. 12.~2018. 4.).[979] 前 인력관리실/미래전략기획국 인사기획(전략)부장(2014. 8.~2018. 4.), 前 인적자원실장(2023. 11.~2024. 2.).[980] 前 기획국 계열사정책부장(2012. 13. 1.~2014. 8.), 前 미래공간추진단장(2014. 10.~2015. 12.), 前 성장동력실장(2018. 4.~2019. 2.), 前 자산운용국장(2019. 2.~12.), 前 KBS N 정책기획본부장(파견, 2019. 12.~2022. 3.).[981] 前 경영정보국장(2018. 4.~2021), 前 전략기획국 예술인고용보험프로젝트팀장(2021~2023).[982] 前 업무국 업무부장(1980~1981/1981~1984), 前 징수부장(1981), 前 포항방송국장(1984~1986), 前 경영관리실/총무국 총무부장(1986~1989), 前 총무국 부국장(1986~1989). 1989년 '방송시설관리사업단' 창립 당시 그쪽으로 합류하여 초대 체육관장을 2년 간 역임.[983] 前 업무국 도봉출장소장(1980~1981), 前 업무(자금관리)국 강남출장소장(1982~1985/1988~1989), 前 성북출장소장(1985~1987), 前 강동출장소장(1987~1988).[984] 前 대전방송국 방송부장(1975~1977), 前 대구방송국 방송부장(1977~1979), 前 연수원 교수(1979~1980), 前 목포방송국장(1980~1981), 前 방송연구원 연구위원(1981~1984).[985] 라디오PD 시절 <통일무대> 등 연출. 前 감사실 방송검사역(1976~1979), 前 강릉방송국장(1979~1980), 前 업무국 징수부장(1980~1981), 前 군산방송국장(1982~1984), 前 기술본부 기술관리부장(1984~1986), 前 제작지원국 지원관리부장(1986~1987), 前 진주방송국장(1987~1989), 前 전주방송총국장(1989~1991), 前 기획조정실 위원(1991~1992).[986] 前 업무국 중앙출장소장(1981~1983), 前 안양출장소장(1983~1985), 前 관악출장소장(1985~1987), 前 부천출장소장(1987~1988), 前 남부출장소장(1988~1990), 前 총무국 시설관리부장(1990~1994), 前 경영본부 연구위원(1994).[987] 前 업무(자금관리)국 인천출장소장(1980~1985), 前 중앙출장소장(1985~1987), 前 광주방송총국 업무국장(1987~1989), 前 기획조정실 기획예산관리담당 부장(1989~1990), 前 관리국 관리2부장(1990~1991), 前 관재국 관재부장(1992~1993), 前 전산정보실장(1993~1994), 前 관재국장(1994~1995/1998), 前 업무국장(1995~1997), 前 제주방송총국장(1997~1998). 퇴사 이후 KBS사우회 부회장 및 감사, 한국방송인동우회 이사 등 역임.(블로그)[988] 문화공보부 공보국 보도과에서 전보. 前 전주방송국 방송부장(1977~1980), 前 남원방송국장(1980~1981), 前 업무국 인천북부출장소장(1982~1983), 前 성북출장소장(1983~1985), 前 춘천방송총국 업무국장(1987).[989] 공보부 조사국에서 전보. 前 부산방송본부(총국) 업무국장(1988~1994), 前 위원(1994).[990] 공보부, 대한공론사 출신. 前 춘천방송(총)국 업무부(국)장(1985~1987), 前 업무국 중앙출장소장(1987~1990), 前 동부출장소장(1990~1991).[991] 공보부 총무과에서 전보. 前 TV국 교양부장(1973~1977), 前 제작관리부장(1977~1979), 前 감사실장(1979~1980), 前 업무국장(1980~1981), 前 제작지원국장(1981~1983), 前 대전방송국장(1983~1984), 前 수급관리국장(1984~1986), 前 자금관리국장(1986), 前 총무국장(1986~1988), 前 경영(관리)본부장(1988~1991), 前 특임본부장(1991~1993), 前 중기발전기획단장(1992~1993). 1993년 마포종합유선방송 설립 준비 당시 사업단장으로 영전된 후 이듬해 설립 당시 초대 대표이사를 맡았고, 이후 한국케이블TV경기방송 사장, KBS사우회 회장 등 역임. 저서로는 <한국방송사(1994)>가 있으며 1992년 중앙언론문화상 수상.[992] 공보부 공보국에서 전보. 前 TV국 편성부장(1973~1975), 前 운영심의실장(1975~1976), 前 편성국장(1976~1977), 前 대구방송국장(1977~1979), 前 TV국장(1979~1980), 前 예능국장(1980~1981), 前 제2TV담당이사(1981~1984), 前 시청자본부장(1984~1985), 前 방송본부장(1985~1986), 前 경영관리본부장(1986~1988), 前 올림픽총괄본부장(1987~1988). 1989년 방송제작단 설립 당시 초대 사장으로 영전되어 1991년 부사장으로 본사에 복귀해 3년 간 맡았고, 1994년 우방건설 사장으로 영전되어 3년 간 역임. 1974년 새마을포장, 1985년 국민훈장 동백장, 1989년 체육훈장 맹호장 등 수훈.[993] 前 경영관리부문/총무국 차량부장(1983~1984/1990~1993), 前 업무국 부천출장소장(1989~1990), 前 홍보실 시청자부 상담위원(1997~1998), 前 총무국 경영위원(1998).[994] 前 보도본부 보도관리부장(1989~1992), 前 총무국 차량부장-총무부 차량부주간(1993~1998).[995] 前 노무국 급여부장(1989~1990), 前 업무국 중앙출장소장(1990~1993), 前 남부사업소장(1994~1995), 前 TV본부 TV제작관리부 드라마제작국부주간(1995~1997), 前 업무국 수신지원부주간(1997~1998), 前 업무(재원관리)국 강남사업소장(1998~1999), 前 경영본부 경영위원(1999~2000).[996] 前 업무국 수신기술부장(1990~1993), 前 업무2부장(1993~1994), 前 수원사업소장(1994~1997), 前 경영본부 기획위원(1997).[997] 前 업무국 평택출장소장(1981~1982), 前 자금관리(업무)국 동대문출장소장(1986~1987), 前 서대문출장소장(1987~1989), 前 강남출장소장(1989~1993), 前 수원사업소장(1993~1995), 前 대구방송총국 업무국장(1995~1998), 前 재원관리국 인천사업소(국)장(1998~2001), 前 경영본부 경영위원(2002~2004).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KBS 사보> 1989년 8월호 46~47쪽에서 확인 가능.[998] 前 업무국 부천(인천)출장소장(1990~1992), 前 조직관리국 조직관리부장(1992~1994), 前 편성실 편성관리부장(1994~1998), 前 TV본부 TV제작운영부장(1998), 前 편성국 제작관리부주간(1998~2000), 前 정책기획실(센터) 기획주간(2000~2001), 前 재원관리국장(2001~2003), 前 경영본부 경영위원(2003~2004), 前 시청자센터 전문위원(2004). 퇴사 후 세계결핵제로운동본부 사무총장, 도로교통공단 인천교통방송본부장, 시니어하우스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자세한 정보는 <KBS 사보> 1988년 11월호 44~45쪽에서 다루어졌다.[999] 아호는 도헌(陶軒). 1990년 총파업 당시 노조 청주지부장으로서 동참하다 구속되어 1991년 집행유예 선고받고 1993년 특별사면. 前 재원관리국 재원관리부주간(2003~2004), 前 충주방송국장(2004~2006). 저서로는 <시로 만나는 이순신(2019)> 등이 있다.[1000] 前 시청자봉사국 시청자관리부장(1986~1989), 前 군산방송국장(1989~1991), 前 노무국장(1991~1993), 前 감사실장(1993~1996), 前 제주방송총국장(1996~1997), 前 특임본부장(1997~1998). 2000년 부사장으로 본사에 돌아와 1년 간 지내고 2002년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이사장으로 영전되어 3년 간 역임.[1001] 문화공보부 내에서 전보. 前 경영관리부문 차량부장(1980~1983), 前 경영관리부문/총무국 총무부장(1983~1986), 前 제주방송(총)국장(1986~1989), 前 감사실장(1989~1991), 前 총무국장(1991~1993), 前 대전방송총국장(1993).[1002] 前 업무국 동대문출장소장(1979~1980), 前 마을금고사무국장(1980~1982), 前 자금관리국/업무국 징수부장(1986~1989), 前 관재국 조달부장(1989~1993), 前 노무국 후생부장(1994~1996), 前 업무국 징수기획부주간(1996~1997), 前 업무부장(1997~1998).[1003] 前 업무국 중앙출장소장(1980~1981), 前 인사관리실-인사국 인사관리(담당)부장(1989~1991), 前 업무국 업무1부장(1991~1993), 前 업무2부장(1993), 前 강남사업소장(1993~1994).[1004] 前 전주방송(총)국 업무부(국)장(1984~1987), 前 업무국 구로출장소장(1987~1990), 前 춘천방송총국 업무국장(1990~1993), 前 총무국 산업안전부장(1993~1994), 前 업무국 인천사업소장(1994~1998).[1005] 문화공보부 문화선전국, 문화재관리국 출신. 前 라디오편성실 편성관리부장(1989~1991), 前 중기발전기획단 경영2부주간(1992~1993), 前 총무국 총무부장(1993~1998), 前 총무부 위원(1998~1999).[1006] 문화공보부 내에서 전보. 前 업무국 강남출장소장(1980~1982), 前 안양출장소장(1982~1983), 前 업무(자금관리)국 도봉출장소장(1983~1985), 前 인천출장소장(1985~1987), 前 동부출장소장(1988~1990), 前 중앙출장소장(1990), 前 업무1부장(1990~1991), 前 시청자홍보실 시청자상담부 위원(1991~1992), 前 총무국 산업안전부장(1992~1993).[1007] 문화공보부 내에서 전보. 前 총무국 후생부장(1986~1989), 前 총무부장(1989~1993), 前 업무국장(1993~1995), 前 조직관리국장(1995~1996), 前 총무국장(1996~1998), 前 관재국장(1998~1999), 前 경영본부장(1999~2000).[1008]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기획관리실 출신. 前 기획관리실/기획조정실 예산부장(1980~1984), 前 방송본부 방송관리부장(1984~1986), 前 TV편성실 부실장 겸 편성관리부장(1986~1988), 前 관재국장(1988~1992), 前 업무국장(1992~1993), 前 방송연수원 교수(1993).[1009] 대한석탄공사 출신. 前 업무국 업무부장(1975~1976), 前 징수부장(1976~1980), 前 관재국 구매부장(1980~1981), 前 경영관리부문 총무부장(1981~1982), 前 마을금고사무국장(1982~1987), 前 심사평가담당국장(1987~1990), 前 기획조정실 기획위원(1990~1993).[1010] 내무부 지방국 세정과 공무원 출신. 前 기획관리실 관리부장(1980), 前 업무국 총무부장(1980~1983), 前 업무국/경영관리실 인사부장(1983~1985), 前 청주방송국장(1985~1986), 前 수급관리국장(1986), 前 인력관리담당국장(1986~1987), 前 감사실장(1987~1989), 前 경영관리본부 부본부장 겸 방송개혁위원(1989), 前 대구방송총국장(1989~1991), 前 조직관리국장(1991~1993), 前 경영본부장(1993~1995).[1011] 한국조폐공사 출신. 前 기획조정실 경영기획부장(1984~1985), 前 경영관리실/총무국 인사부장(1985~1987), 前 기획조정실 인력관리담당 국장(1987~1989), 前 방송연수원 교수(1989~1990), 前 인사국장(1990~1991), 前 방송연구원 주간(1991~1992), 前 관재국장(1992~1993), 前 기획예산국장(1993~1995), 前 경영본부장(1995~1997).[1012] 前 인사국 인사2부장(부주간)(1993~1995), 前 전산정보실 기획부주간(1995~1998), 前 정보자료센터 문헌부주간(1998).[1013] 前 방송심의실 심의기획(운영)부장(1986~1993), 前 방송연수원 방송연수주간(1993~1994), 前 업무국 수신서비스센터주간(1994~1996), 前 노무국장(1996~1997), 前 업무국장(1997~1998), 前 감사실장(1998), 前 경영본부 경영위원(1999~2000).[1014] 前 편성실 편성관리부장(1991~1992), 前 TV본부 TV제작관리부장(1992~1996), 前 편성실 제작비관리부주간(1996~1997), 前 제작비관리주간(1997~1998), 前 TV본부/제작본부 제작운영주간(1998~2001). 2002년 KBS아트비전의 세트제작 업무가 '디지털미술센터(현 케이아트)'로 독립될 당시 초대 대표를 맡았다.[1015] 前 업무국 수원사업소장(1997~1998), 前 재원관리국 강북사업소장(1998), 前 대구방송총국 총무국장(1998~1999), 前 경영본부 경영위원(1999~2003).[1016] 경향신문, 대한일보 출신. 前 방송자료센터(실) 부주간(1990~1994), 前 방송자료실-정보자료센터국-정보자료실장-뉴미디어센터 방송자료주간(1994~2001), 前 보도본부 보도위원(2001~2002), 前 KBS 미디어 이사(파견, 2002~2004).[1017] 배우, 성우, 소설가와 동명이인. 前 부산방송총국 업무국장(1994~1996), 前 관재국 예산/원가·결산/결산·세무부주간(1996~2001), 前 남원방송국장(2001~2003), 前 경영본부 경영위원(2003~2004). 1983년 재무부장관 표창 수훈.[1018] 前 조직관리국 심사분석부장(1995~1996), 前 노무국 노무부장(1996~1998), 前 관재국 관재부장(1998~2000), 前 태백방송국장(2000~2001), 前 영업국 광고기획주간(2001~2003), 前 경영본부 경영위원(2003~2004).[1019] 前 감사실 감사1부장(1992~1993), 前 업무국 광고부장(1996~1998), 前 방송문화연구원/인력개발실 연수1부주간(1998~2001), 前 재원관리국 인천사업국장(2001~2002), 前 진주방송국장(2003~2004). 퇴사 이후 원음방송 기획조정실장, 도로교통공단 부산교통방송본부장 등 역임.[1020] 前 KBS사내근로복지기금 사무국장(파견, 1993~1995), 前 기획예산국 기획부 중기기획부주간(1995~1996), 前 관재국 경리부장(1996~2001), 前 영업국 광고운영부주간(2001~2003), 前 경영본부 경영위원(2003~2004).[1021] 前 업무국 업무부장(1988~1989), 前 징수(업무1)부장(1989~1990), 前 노무국 노무부장(1990~1993), 前 조직관리국 계열사관리부장(1993~1994), 前 기획조정실 예산부장(1994~1995), 前 기획예산국/정책기획실(국)/정책기획센터 예산주간(1995~1999/2002~2003), 前 재원관리국장(1999~2000), 前 인재개발실장(2000~2001), 前 재무국장(2001), 前 KBS아트비전 감사(파견, 2002), 前 편성본부 편성운영주간(2003~2004), 前 방송문화연구소 연구위원(2004).[1022] 前 노무국 급여부장(1990~1991), 前 경리국 회계부장(1991~1993), 前 노무국 노무부장(1993~1994), 前 기획조정실 계열사부장(1994~1995), 前 조직관리부장(1995~1998), 前 개혁사무국 부주간(1998), 前 라디오본부 라디오제작운영부장(1998), 前 시청자국 시청자사업부주간(1998~1999), 前 총무국장(1999~2000), 前 경영본부 노사협력주간(2000~2002), 前 수원센터 연수주간(2002~2003), 前 경영본부 경영위원(2003), 前 KBS비즈니스 이사(2003~2007). 2008년 부사장 임명으로 본사에 돌아와 1년여 간 역임.[1023] 前 기획예산국 예산부 급여제도부주간(1993. 4.~1995. 7.), 前 예산부장(1995. 7.~1998. 5.), 前 총무국 총무부장(1998. 5.~1999. 12.), 前 관재(재무)국 조달부장(부주간)(1999. 12.~2003. 5.), 前 재무국장(2003. 5.~2004. 2.), 前 정책기획센터 예산주간(2004. 2.~8.), 前 이사회 사무국장(2004. 8.~2007. 9.), 前 청주방송총국장(2007. 9.~2008. 9.), 前 경영본부장(2008. 9.~2009. 12.).[1024] 문화공보부 비서실, 전라북도 도지사 비서실장 출신. 前 시청자봉사국 봉사부장(1989~1990), 前 교향악단사무국 공연관리부장(1990~1991), 前 보도본부 보도관리부장(1992~1993), 前 중기발전기획단 부주간(1993), 前 기획예산국 정책개발부주간(경영, 1993), 前 심의실 심의운영부장(1993~1996), 前 심의위원(1996~1997).[1025] 前 기획예산담당국 예산담당부장(1989~1990), 前 기획국 예산1부장(1990~1992), 前 업무국 업무2부장(1992~1993), 前 업무1부장(1993~1994), 前 업무부장(1994~1996), 前 조직관리국장(1996~1998), 前 인력관리국장(1998~1999), 前 제주방송총국장(1999~2000), 前 경영본부장(2000~2003).[1026] 前 인사국 인사(담당)부장(1989~1993), 前 방송연수원 연수1부장(1994~1995), 前 군산방송국장(1995~1998), 前 경영본부 노사협력주간(1998), 前 총무국장(1998~2000), 前 KBS아트비전 이사(파견, 2000~2002), 前 수원센터 전문위원(2002~2003), 前 경영본부장(2003~2004). 2013년 KBS사우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2015년 회장까지 등극해 2년간 맡았다.[1027] 前 인사국 인사관리부장(1992~1993), 前 인사(1)부장(1993~1994), 前 업무국 업무2부장(1994~1995), 前 관재국 조달부장(1995~1998), 前 정책관리실 조직관리부주간(1998), 前 경영본부 노사협력주간(1998~2000), 前 관재국장(2000~2001), 前 인력관리실장(2001~2003), 前 수원센터 교수(2003~2004). 퇴사 후 방송위원회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어 2008년까지 재직.[1028] 입사 12년 차이인 후배 예능PD와 동명이인. 前 방송자료실/정보자료실/뉴미디어센터 영상-제작정보-영상자료부주간(1993. 4.~2001. 4.), 前 방송문화연구원/수원센터 교수(2001. 4.~2003. 5.).[1029] 대한석탄공사 출신. 前 관재국/수급관리국 경리부장(1978~1984/1986), 前 기획조정실 예산회계부(국)장(1984~1986/1986~1990), 前 수급관리국 재물관리부장(1986), 前 심사평가국장(1990~1991), 前 업무국 전문위원(1991~1993).[1030] 前 인사국 인사2부 복무관리부주간(1994), 前 조직관리국/인력관리국 조직관리부장(1994~1995/1998~1999), 前 감사실 감사기획부장(1995~1998), 前 정책기획실/정책기획국 기획(부)주간(1998/1999~2000), 前 개혁기획단 조직개선부주간(1998), 前 총무국장(2000~2001), 前 제작본부 제작운영주간(2001~2003), 前 인력관리실장(2003~2004), 前 경영본부장(2004~2005). 퇴임 8개월 후 KBS 미디어 사장으로 임명되어 2008년까지 역임.[1031] 前 대구방송총국 총무국장(1998), 前 경영본부 노무부주간(1998~1999), 前 재원관리국 광고판촉부주간(1999~2002), 前 경영본부 노무주간(2002~2004), 前 영업국장(2004), 前 광고팀장(2004~2005), 前 경영본부장(2005~2008).[1032] 前 부산방송총국 총무국장(1998. 10.~2001. 10.), 前 정책기획센터 예산운영부주간(2001. 10.~2004. 7.), 前 경영본부 재무팀장(2004. 7.~2005. 12.).[1033] 한국전자공업, 한국전자계산소 출신. 前 기획관리실 전산부-시스템관리실-중앙컴퓨터실-경영정보관리실장(1979~1987), 前 방송자료정보센터 국장(1987~1990), 前 기획국장(1990~1991), 前 기획예산국장(1991~1992), 前 미주한국방송(KTE) 상무(파견, 1992~1993). 1992년 12월 학력변조 사실이 드러나 1993년 3월 직권면직 처분.#[1034] 현대자동차, 한국전자계산소 출신. 前 방송정보자료센터 경영정보실장(1989~1990), 前 경영정보센터 운영관리부장(1990~1991), 前 전산정보실 (시스템)운영부장(1991~1994), 前 방송연수원 교수(1994~1996), 前 방송자료실 문헌부주간(1996~1998. 3.).[1035] 前 부산방송총국 총무국장(2001. 10.~2003. 5.), 前 편성본부 제작비·원가부주간(2003. 5.~2004. 7.).[1036] 前 춘천방송총국 총무국(팀)장(2003. 5.~2006. 12.).[1037] 前 정책기획국 경영분석부주간(1998~2000), 前 총무국 후생안전부장(2000~2002), 前 편성본부 편성운영부주간(2002~2004), 前 재원관리국 인천사업국장(2004), 前 경영본부 재원관리팀 강남사업소장(2004~2006), 前 강북사업소장(2006~2008).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KBS 저널> 2001년 3월호 68~71쪽에서 확인 가능.[1038] 前 인력관리국(실)/인력개발실/인적자원센터 인사관리부장-인사운영부주간-인사(운영)팀장(1999~2004/2004~2008), 前 인력관리실장(2004), 前 경영본부 재원관리팀장(2008). 퇴사 후 KBS사우회 부회장(2021~2023) 및 회장(2023~) 역임.[1039] <KBS 사보> 1990년 3월호 45쪽에 따르면 한국교육개발원 교육방송부 출신. 前 노무국 후생부장(1991~1993), 前 전산정보실 운영부장(1994~1998), 前 태백방송국장(1998~1999), 前 정책기획국 법무관리부주간(1999~2000), 前 방송정책실/정책기획실 정보시스템주간(2000~2001), 前 감사실 주간(2001), 前 수원센터 교수(2001~2004).[1040] 대통령비서실 출신. 前 비서실장(1980~1985), 前 자금관리국장(1985~1986), 前 청주방송(총)국장(1986~1988). 퇴사 후 1993년 삼양산업(현 EG) 상무로 영전되어 대표이사까지 역임.#[1041] 배우와 동명이인으로 TBC 출신. 前 영업국 영업부장(1981), 前 업무(자금관리)국 광고부장(1981~1988), 前 업무국 광고부국장(1988~1991), 前 업무국장(1991~1992), 前 기획예산국장(1992~1993), 前 중기발전기획단 기획주간(1993), 前 관재국장(1993~1994), 前 인사국장(1994~1995), 前 기획조정실장(1995~1997), 前 경영본부장(1997~1998). 그 외에 데이콤 사외이사, 방송회관건립추진위원회 부위원장, 한국광고자율심의기구 심의위원, 한국검도협회 상임고문, 서울지방노동위원회 공익위원, 방송위원회 방송평가위원회 위원, 방송발전기금위원회 위원 등 역임.[1042] 대한준설공사, 서해방송 출신. 前 전주방송총국 총무국장(1998~2001).[1043] TBC 출신. 前 정책기획실 법무관리부주간(2000. 6.~2001. 4.), 前 재원관리국 수원(경기남부)사업국장(2001. 4.~2002. 11.), 前 KBS사내근로복지기금 사무국장(파견, 2002. 11.~2004. 7.), 前 경영본부/인적자원센터 후생안전팀장(2004. 7.~2007. 9.). 저서로는 <돌아본 발자취 홀로 30년, 더불어 20년(2000)>, <내 삶의 족적(2003)> 등이 있다.[1044] 국제신문 기자 출신. 자세한 내용은 <미디어오늘> 1996년 8월 7일 및 2003년 8월 27일, <대한매일> 2003년 4월 22일 기사 참고. 저서로는 <나도 이제는 스타!(2001)>가 있다.[1045] 한국연합광고 출신. 前 춘천방송총국 총무국장(1998~2001), 前 제작본부 제작운영부주간(2001~2002), 前 총무국 후생안전부주간(2002~2004), 前 감사실(팀)장(2004~2006).[1046] 일본생산성본부 출신. 前 뉴미디어국 신사업개발팀장(2003. 5.~2004. 2.), 前 디지털미디어센터 전문위원(2004. 2.~7.). 퇴사 후 KBS 미디어 뉴미디어연구소장으로 영전.[1047] 前 정보자료실 전자정보부주간(1998~2000), 前 방송정책실/정책기획실 시스템개발부주간(2000~2001), 前 뉴미디어본부 경영정보부주간(2001~2003), 前 방송콘텐츠주간(2003~2004), 前 디지털미디어센터 전문위원(2004), 前 감사실장(2009~2011). 이후 경기도시공사 감사자문위원 등 역임.[1048] 前 경영본부 인사관리부주간(1998~2000), 前 인사/임금제도부주간(2000~2003), 前 총무국(팀)장(2003~2006/2009), 前 관재팀장(2006~2008). 2015년 감사까지 올라 3년 간 재직.[1049] 前 부산방송총국 총무국장(2003. 5.~2004. 8.), 前 TV제작본부 TV제작운영팀장(2007. 9.~2008. 12.), 前 편성본부/편성센터 편성운영팀(부)장(2009. 1.~2011. 1.), 前 수신료정책국 경기남부사업지사장(2011. 1.~2012. 12.).[1050] 본명 한남규. 소설가이며 사상계, 동아일보, 중앙일보 잡지기자 출신.[1051] 미술부 시절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까치의 날개>, <사랑의 굴레>, <꽃피고 새울면> 등 타이틀 제작 담당. 1990년 총파업 당시 노조 운영위원으로 참여했다가 구속되어 집행유예를 받았으나 1993년 특별사면.[1052] 前 경영본부 노무부주간(1999~2002), 前 KBS SKY 사장(파견, 2002~2005), 前 편성본부 저작권팀장(2005~2006), 前 노사협력팀장(2006~2008), 前 인적자원센터장(2008), 前 인력관리실장(2009~2010), 前 KBS 미디어 사장(파견, 2010~2011), 前 글로벌전략센터장(2011~2012), 前 창원방송총국장(2012~2014). 퇴사 2달 후 부사장으로 임명되어 2015년까지 맡았다.[1053] 前 인력개발실 인사관리부주간(2000. 6.~2003. 5.), 前 정책기획센터 계열사관리부주간(2003. 5.~2004. 7.), 前 시청자센터 시청자사업팀장(2004. 7.~2005. 4.), 前 경영본부 광고팀장(2005. 4.~2007. 9.), 前 이사회사무국장(2007. 9.~2008. 9.), 前 글로벌센터 콘텐츠전략팀장(2008. 9.~12.), 前 편성본부 지식재산권팀장(2009. 1.~2010. 6.), 前 시청자본부장(2014. 8.~2015. 11.).[1054] 前 정책기획센터 조직관리부주간(2001. 4.~2003. 5.), 前 인력관리실 인사관리부주간(2003. 5.~2004. 7.), 前 경영본부/재원관리국 관재팀장(2004. 7.~2006. 12./2009. 1.~2010. 6.), 前 총무팀(국)장(2006. 12.~2008. 12./2011. 1.~10.), 前 제작#리소스센터 제작리소스운영부장(2010. 6.~2011. 1.), 前 경영관리국장(2011. 10.~2012. 12.), 前 감사실장(2012. 12.~2014. 8.).[1055] 한국전자계산(현 KCC정보통신) 출신으로 1990년 총파업 때 노조 여성국장을 맡다가 구속되어 집행유예 선고 후 1993년 특별사면. 前 방송정책실/정책기획실 멀티미디어부주간(2000. 1.~2001), 前 뉴미디어본부 방송정보부주간(2001~2003. 5.), 前 경영정보팀부주간(2003. 5.~2004. 2.), 前 디지털미디어센터 정보시스템주간(팀장)(2004. 2.~2006. 12.).[1056] 前 뉴미디어본부 시스템관리팀부주간(2003. 5.~2004. 2.), 前 디지털미디어센터/뉴미디어센터 IT인프라팀장(2005. 4.~2010. 6.), 前 디지털미디어국장(2010. 6.~2011. 11.), 前 KBS 미디어 부사장(파견, 2011. 11.~2013. 6.), 前 미래미디어센터장(2013. 6.~2014. 10.).[1057] 육군 장교 전역. 前 비상계획실장(1983~1986), 前 전주방송(총)국장(1986~1988), 前 비상계획실 기획위원(1989~1992).[1058] 前 영업국 광고판촉부주간(2004), 前 편성본부 저작권팀장(2006~2008), 前 경영본부 광고팀-광고국장(2007~2012), 前 KBS N 사장(파견, 2013~2014), 前 시청자본부장(2015~2017). 그 외에 가톨릭커뮤니케이션협회 회장, 의정부문화재단 대표이사 등 역임.[1059] 감사원, 농협 출신. 前 관재국 조달부장(1993~1994/1998~1999), 前 방송연수원 연수2부장(1994~1996), 前 조직관리국 심사분석부장(1996~1997), 前 방송연수원 연수1부장(1997~1998), 前 수원사업국장(1999~2001), 前 방송문화연구소 교수(2001~2003).[1060] 前 수원센터 교수 겸 연수2부주간(2003~2004), 前 시청자센터장(2008~2009), 前 경영본부장(2009~2010), 前 시청자본부장(2010~2011). 이후 학교법인 성신학원 이사, 언론중재위원회 언론중재위원, 대진대학교 대외협력부총장 등 역임.[1061] 前 정책기획센터 경영전략부주간(2001. 4.~2002. 6.), 前 경영본부 노무부주간(2002. 6.~2003. 5.), 前 태백방송국장(2003. 5.~2004. 7.), 前 경영본부 조직운영팀장(2004. 7.~2005. 12.), 前 인적자원센터 인사기획팀장(2005. 12.~2008. 12.), 前 원주방송국장(2009. 1.~2010. 6.), 前 KBS N 부사장(파견, 2010. 6.~2012. 12.), 前 시청자본부장(2012. 12.~2014. 7.). 2013년 자랑스러운 건국언론인상 수상.[1062] 前 정책기획센터 경영전략부주간(2002. 7.~2004. 2.), 前 기획부주간(2004. 2.~8.), 前 경영본부 재원관리팀 경기남부사업소장(2004. 8.~2005. 11.), 前 KBS아트비전 이사(파견, 2005. 11.~2007. 9.), 前 시청자센터 KBS홀팀장(2007. 9.~2008. 12.), 前 총무국 후생안전팀장(2009. 1.~11.), 前 총무국장(2009. 11.~2010. 6.), 前 청주방송총국장(2010. 6.~2012. 2.). 퇴사 후 2015년 12월 KBS아트비전 제작이사로 임명되어 3년여 간 맡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방송특위 위원, 자유언론국민연합 집행위원, 서울문화재단 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방송법 50년 약사(2014)>가 있다.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동대신문> 2011년 4월 11일자 기사서 확인 가능.[1063] 덕수 이씨 충무공파 16대손#. 현역 시절 KBS노동조합(1노조)에 몸담으며 편집국장(1991~1993)을 비롯 한국조사기자협회 간사장(1994~1996), 노조 중앙위원 및 감사(1996~1998), 부위원장(2006~2008) 등을 맡은 바 있었다. 前 뉴미디어센터 IPTV프로젝트팀장(2009~2010), 前 충주방송국장(2010~2012). 2014년 제6차 지방선거를 앞두고 당진시장 예비후보로 나섰다가 낙선된 후 KBS N 사장(2016~2018), 한국방송채널진흥협회 회장(2017~2018), 호서대학교 혁신융합학부 교수(2020~2022), EBS 이사(2021~) 등 역임.[1064] 前 보도본부 보도운영부장(2010. 6.~2011. 1.), 前 광주방송총국 시청자서비스국장(2011. 1.~2012. 12.).[1065] 前 농구선수 김화순의 남편. 前 KBS SKY 이사(파견, 2003. 6.~2006. 4.), 前 이사회사무국장(2008. 9.~2009. 4.), 前 경영본부 노사협력주간(2009. 4.~2010. 6.), 前 KBS 미디어 뉴미디어사업본부장(파견, 2014. 10.~2015. 7.), 前 KBS시큐리티 사장(파견, 2015. 7.~2016. 4.).[1066] 동양정밀 출신. 前 경영본부 노무부주간(2003~2004), 前 KBS사내근로복지기금 사무국장(파견, 2004~2007), 前 라디오제작본부 라디오제작운영팀장(2007~2008), 前 경영본부/정책기획센터 노사협력팀장(주간)(2008~2009/2011~2012. 2.), 前 정책기획센터 정책주간(2009~2011), 前 청주방송총국장(2012. 2.~2014. 4.), 前 KBS시큐리티 사장(파견, 2016. 4.~2017. 1.), 前 시청자본부장(2017. 1.~2018. 4.). 이후 아이텍 사외이사 역임.[1067] 前 디지털미디어센터 방송콘텐츠팀장(2004. 7.~2008. 12.).[1068] 前 편성본부 콘텐츠정책부주간(2002~2004), 前 글로벌센터 글로벌전략주간(팀장)(2004~2007), 前 KBS 아메리카 사장(파견, 2007~2011), 前 감사실장(2011~2012), 前 스마트KBS추진단장(2012~2014), 前 창원방송총국장(2014~2015), 前 지상파UHD방송추진협회 사무총장(파견, 2015~2017. 1.), 前 KBS시큐리티 사장(파견, 2017. 1.~9.).[1069] 前 인력관리실 인사·임금제도부주간(2003~2004), 前 조직제도팀장(2010), 前 인사운영부장(2010~2011), 前 감사실 기획·경영감사부장(2011~2012), 前 인적자원실장(2012), 前 감사실장(2014~2015), 前 창원방송총국장(2015~2017. 9.), 前 KBS시큐리티 사장(파견, 2017. 9.~2018. 4.).[1070] 민주정의당 국회의원 비서관 출신. 前 대전방송총국 총무국장(2000~2002), 前 재원관리국 경기북부사업국장(2002~2003), 前 영업국 광고운영부주간(2003~2004), 前 라디오제작본부 라디오제작운영팀장(2009), 前 인력관리(인적자원)실장(2009~2010), 前 시청자본부장(2011~2012). 2013년 KBS비즈니스 사장으로 임명되어 2년 간 재직.[1071] 前 KBS인터넷 콘텐츠사업이사(파견, 2007. 2.~2008. 12.), 前 시청자(경영)본부장(2018. 4.~2019. 11.). 이후 KBS아트비전 감사 역임.[1072] 前 재원관리국 강북사업지사장(2014. 8.~2015. 12.), 前 KBS비즈니스 이사(파견, 2018~2019. 11.), 前 경영본부장(2019. 11.~2021. 12.).[1073] 前 인적자원실 인사운영부장(2011~2013), 前 총무국 수원센터운영부장(2013~2015), 前 인재개발원장(2015/2017~2018), 前 인력관리실장(2015~2017). 퇴사 후 공정언론국민연대 감사, 언론중재위원회 선거기사심의위원, KBS 시청자위원회 위원 등 역임.[1074] 前 미래미디어전략국/뉴미디어센터 플랫폼개발(운영)부장(2010~2013), 前 KBS 미디어 콘텐츠서비스본부장(파견, 2013~2014), 前 정보화기획국 정보인프라부장(2014~2015), 前 정보개발부장(2015~2016), 前 경영정보국 경영정보부장(2016~2017), 前 경영정보국장(2017~2018).[1075] 前 재원관리(수신료정책)국 강남사업지사장(2010~2011), 前 강북사업지사장(2011~2012), 前 정책기획본부 노사협력주간(2012~2013), 前 충주방송국장(2013~2014), 前 인력관리실장(2014~2015).[1076] 前 수신료정책(재원관리)국 경기남부사업지사장(2012. 12.~2014. 8.), 前 재원운영부장(2014. 8.~2015. 12.), 前 정책기획국 지역정책실장(2015. 12.~2016. 5.), 前 KBS N 마케팅본부장(파견, 2018. 5.~2020. 3.), 前 울산방송국장(2020. 12.~2021. 12.), 前 경영본부장(2021. 12.~2023. 11.).[1077] TBC 출신. 성우 최수민의 남편이자 배우 차태현의 아버지.[1078] 매우 흐릿하게 보였다. HD방송의 경우에는 초창기에 불투명한 로고가 나왔다.[DMB] U-KBS MUSIC[1080] 한국교육개발원 산하로 이관되어 EBS TV가 됨.[1081] 다만 그 와는 별개로 당시 방송자료는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이유는 생방송 프로그램이 많았던데다가 그나마 녹화된 프로그램도 테이프와 필름 가격 때문에 보관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혹시나마 당시(90년대까지) 프로그램이 있다면 여기에 기증하자.[1082] 그래서 'KBS 가정중학', 'KBS 가정고교'라는 월간 학습지도 있었다. 대략 1994년까지 존속했다.[1083] EBS든 KBS3이든 그 시초는 '정부 제공 과외방송'이었다. 교육방송 자체는 1950년대부터 존재했지만 박정희 정권 시절에 있었고 교육방송채널의 개국 방안 자체는 1970년대부터 존재해있었지만 재정편성 문제로 차일피일 미루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에서 과외금지 조치를 내렸는데 이 과정에서 학부모들과 학생들을 달래기 위해서 처음에는 평일 밤 시간대와 아침시간대에 가정고교방송을 편성하도록 해놓았고, 이것이 꽤 좋은 호응을 얻자 따로 채널을 만들어서 개국해놓았다. 또한 기존에 평일 밤시간대 편성했던 가정고교방송을 비롯한 교육 프로그램과 일부 교양프로그램들을 별도의 채널로 이동시켜놓았으니 이것이 KBS 3TV였다. 그래서 EBS도 초기에는 한국교육개발원 산하에 있었다. 지금은 한국교육방송공사로 독립했고 미국 PBS처럼 공영 서비스를 강화하려 하고 있다. 독립 전후인 1998년 비슷한 논란이 다시 불거지자 이제는 무궁화 위성채널을 이용해 EBS위성1, 2채널을 런칭하고 과외방송을 했다. 이것이 현재의 EBS플러스 1, 2채널의 전신. 참고로 이 때 EBS 위성 1 강의멤버로는 이만기 현 유웨이에듀 대표, 이원희 전 서울특별시교육감 후보 등 쟁쟁한 강사들이 많았다.[1084] 지상파 다채널방송(MMS)까지 포함하면 EBS2와 함께 상업광고가 나오지 않는 단 둘뿐인 채널이다.[1085] 정확하게는 1963년 1월 1일부터 1969년 4월 30일(특집 프로그램이나 스포츠 중계방송은 1971년 12월 31일까지), 1981년 3월 7일부터 1994년 9월 30일까지 광고방송을 했었다.(HLKZ(DBC)-TV 시절은 제외)[1086] EBS-TV(구 KBS 3TV)도 상업광고을 안했으나, 재정문제로 인해 1997년 9월 1일부터 상업광고방송을 하게 되었다.[1087] 케이블의 경우 개국 당시부터 24시간 방송을 했지만, 지상파는 언론사의 반발과 전파낭비 등을 이유로 정부에서 종일방송을 허가해 주지 않고 있었다. 물론 낮 방송이 허가된 2005년 12월 이후로는 사실상 사장된 정책이었고 최종적으로 2012년에 해금된 것이다.[1088] 그러나 영문 자막에 병맛이 가득하다. 사극 드라마 대조영 방영 시 거란군이 고구려군을 기습하는 장면에서 고구려군 병사가 '기습이다!'라고 외친 것을 "Sudden Attack!"이라고 자막을 띄우는 얼빠진 상황을 연출해 내었으며, 모 드라마의 등장인물 '장미'의 이름을 'Rose'라고 내보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래도 로즈는 외국에서도 쓰이는 이름이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안녕하세요 하느님' 방영 당시에는 주인공 하루(유건 분)의 이름을 'Day'로 출력하는 이뭐병 스러운 짓을 행하기도 했다. 무료 번역기와 동급, 혹은 그 이하의 퀄리티를 보여준 자막은 고국 청취를 느껴보고자 한 해외 동포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하였다는 후문. 본격 역 왈도체라고 볼수도 있다. 하지만 다행이도 한인들이 많이 모인 지역에서는 한인 방송시스템이 따로 있기 때문에, KBS에서 프로그램을 구매해서 자막을 다시 만들어 방송하고 있어서 그나마 안심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1089] 참고. 이런 클립까지 올라왔다.[수도권] FM채널 수도권 송출[수도권] FM채널 수도권 송출[1092] 언론통폐합 당시 동양방송 라디오의 이름이 바뀐 것으로, 폐국 후 주파수와 호출부호는 제2라디오를 거쳐 사랑의 소리방송으로 재활용됨.[1093] 언론통폐합 당시 동아방송의 이름이 바뀐 것으로, SBS 개국 후 그 주파수는 SBS 러브FM으로 사용되다 2023년 폐국.[1094] 한국교육개발원 산하로 이관되어 EBS FM이 됨.[1095] 국방홍보원 산하로 이관되어 국군방송이 됨. 다만 인가상으로는 여전히 KBS의 채널로 남아있다.[1096] 2007년 KBS 한민족방송으로 바뀌었다.[1097] 마림바-실로폰 듀엣 연주곡 시그널은 들어 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1098] 그래도 일기도를 실제로 그려보면 의외로 꽤 재밌다. 물론 일기도에 대한 기본지식은 알아야 한다.[1099] 2FM이 지역송출을 하기 위해선, 주파수 하나를 추가로 할당받거나, 기존 1FM 혹은 2라디오를 포기해야하는데, 주파수 추가할당은 지역MBC 및 지역민방에서의 견제, 2010년대 후반부터 불거진 주파수 포화 문제로 인해 어려운 상황이다. 이유는 KBS라디오 중에 가장 젊고 경쟁력이 있는 채널이 2FM이다 보니 신규진입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기 때문. 1FM/2라디오 주파수를 돌려쓰는 대안은 광고불가 문제(1FM), 뉴스편성문제(2라디오), 기존청취자(두 채널 모두)의 반발 등으로 인해 추진이 쉽지 않았다. 당장 2001년 2FM이 광고방송 기능을 회복하자 지역국 송출이 대거 감축된 것이 좋은 예시. 그나마 뉴스편성문제는 아직 뉴스를 송출하고 있었던 2016년부터 편성을 야금야금 전환했던 이력으로 봤을 때 큰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2020년 8월 31일 2라디오 뉴스가 전면 폐지되면서 옛날 얘기가 되었고 2024년 하반기 들어 더욱 과감하게 2FM/2라디오 동시방송을 늘리고 있다.[1100] KBS위성1은 아예 사라졌고 KBS위성2는 KBS KOREA로 재편되었다.[1101] 이때 자회사 크레지오닷컴이 홈페이지를 통해서 <용의 눈물>이나 <신세대 보고 어른들은 몰라요> 같은 역전 프로그램들도 올려놓았지만 2002년을 즈음해서 사이트가 개편되면서 사라졌다. 참고로 리얼플레이어는 모뎀(!)도 볼 수 있도록 56kbps 대응이었지만 크레지오는 당시 막 깔리기 시작했던 ADSL/동축케이블 통신망에 대응할 수 있도록 300kbps였다.[1102] 장애인 서비스에 들어가면 3주를 기다릴 필요 없이 무료로 시청할 수 있지만 로그인(KBS 아이디가 없다면 회원가입을 해야 한다.)을 해야 한다.[1103] 라디오 프로그램은 장애인 서비스로 들어가면 2012년 방영분부터 듣을 수 있으며 TV 프로그램들과 달리 로그인을 하지 않아도 듣을 수 있다.[1104] SBS, MBC는 버닝썬 게이트처럼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킨 연예인 사건 사고 아니면 대부분 올려주는 편이다.[1105] 다만, 카메라에 조명이 달려있지 않아서 밤에는 영상을 볼 수 없다.[1106] 최근에는 MBC 등 경쟁사들도 재난 대응 홍보영상에 영문자막을 삽입하기 시작했다.[1107] 다만 이는 NHK가 시스템을 완벽히 갖추고 KBS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예산을 재난방송에 투입한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1108] 도쿄, 베이징, 방콕, 두바이, 파리, 베를린, 워싱턴, 뉴욕[1109] 기자 출신 중에서는 백운기·박영환·엄경철 기자 등이, 아나운서 출신 중에서는 유애리·이형걸 아나운서가 총국장을 지낸 바 있다.[1110] MBC 서울 본사는 각 지역사의 지분 51%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SBS는 아예 법적으로 지역민방의 지분을 일정 비율 이상으로 소유하지 못한다. MBC만 법적으로 예외를 인정 받은 것이다.[1111] 2003년 공채 사번까지만 해도 KBS 본사에 입사하는 신입사원들은 지역 순환근무를 반드시 거치도록 되어 있었으나, 직군에 따라서 이런 경향이 많이 사라지고 있다. 애초에 서울에서 대부분 제작을 하는 드라마, 예능 PD야 말할 것도 없고, 본사 인력 부족에 따라 시사교양 PD, 경영, 기술 등의 직군도 신입사원 지역근무는 거의 없어진 상황. 확실하게 신입사원 지역 근무가 남아있는 직군은 아나운서 정도가 전부다. 바로 서울에서 근무하게 되면 재직 기간 중에 어떻게든 지방으로 내려가서 일하고 오라는 권유를 받는다고 한다. 황정민 아나운서는 가정 사정으로 인해 지역 근무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상술한 권유를 30년차가 넘어서까지 받게 되자 명예퇴직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1112] 지역권 입사자의 경우 방송경영, 방송기술직군은 그나마 5년을 채우면 서울로 올라올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데 비해(건강이나, 결혼 등의 사유로 전국권으로 입사하고도 지역국으로 가려는 수요가 제법 있다.), 아나운서, 기자의 경우 본업을 하면서 본사로 올라오는건 불가능하다. 과거 각종 문제가 생겨서 아예 자체적으로 막아버렸다. 지역권 아나운서나 기자가 본사에서 일하려면, 공통직군부서에서 자신의 직군과 관련 없는 일을 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장벽 때문에 배성재가 KBS광주방송총국으로 입사해서 다시 SBS 시험을 응시한 것.) 지역권 시사교양 PD는 수상실적이 좋으면 그나마 기회가 생긴다.[1113] 이 때 영월방송국 관할이던 정선중계소와 사북중계소 등 정선군의 방송권역은 강릉방송국으로 통합되었다.[1114] 방송국 자체는 동일하나, 지형적인 이유로 라디오 주파수를 지역마다 달리하는 것이다. 예컨대 태백권의 경우 태백산맥으로 강원 영동지방과 가로막혀 있으니 강릉 인근에서 송출하면 들릴 리 없다.[1115] 이 때문에 충청남도에서는 지속적으로 KBS 충남방송국(가칭) 신설을 요구하고 있다. 실제로 도청이 있는 내포신도시에 KBS 충남방송국(가칭)을 설치할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신 현황은 KBS대전 참조.[1116] 경인방송센터와 울산국은 참여하지 않고, 후반부 뉴스를 그대로 한다. 사실 울산국도 2019년 11월 뉴스7 목요 시험방송 당시 부산총국에서 하는 '7시 오늘 부산울산'에 참여했지만, 울산의 소식은 잠깐 나오고 부산 얘기만 나온다는 시청자들의 불만을 감안해, 두달만에 방송을 접었다.[1117] 2004년부터 2018년까지 CD 형태로 발행했다가, 2019년판 이후 전자책 형태로 국립중앙도서관 및 국회도서관 홈페이지에서 공개.[월간] [월간] [월간] [월간] [월간] [월간] [격월간] [월간] [월간] [월간] [1128] 일례로 NHK가 1994년 제작한 다큐멘터리인 'NHK스페셜 - 생명~40억년에의 여행~'은 KBS가 제작비를 대고 디스커버리와 이탈리아 방송과 협력해서 만들어졌다. 국내 방영 제목은 생명 그 영원한 신비. 또한 2011년 3월 11일 도호쿠 대지진 보도에서도 KBS는 국내 타 방송국과 달리 대지진 당일 9시 뉴스에서 NHK가 송출한 HD 소스를 사용했다. 참고로 NHK 서울지국은 KBS 신관 7층에, KBS 도쿄지국은 NHK 동관 7층에 있다.[1129] 다만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에 의거, 공공기관으로 지정할 수 없다. 언론의 독립성을 위해서 이뤄진 조치이며, 따라서 재정과 인사 모두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지 않는다.[1130] 그렇다고 한국에 국영방송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KTV 국민방송이 바로 정부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정책방송원에서 운영하는 방송이다. 또한 대한민국 국회의 사무처에서 운영하는 국회방송도 국영방송에 해당한다.[1131] 진짜 훼손했다면 공시청 장비 문서에서 작성된 수신민원 전화번호로 연락하자.[1132]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련된 부분이 상당히 보인다며 고인드립 논란이 일었다. 일단 사측에서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사실 이와는 별개로 코너 자체가 노잼이라고 혹평을 받아서 금방 종영됐다.[1133] 베충이는 일베의 비공식 마스코트 캐릭터인데, 이게 방송에 등장한 것이다. 실수인지 고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개콘의 흑역사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