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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라의 프로포즈 | → | 윤도현의 러브레터 | → | 이하나의 페퍼민트 |
| 윤도현의 러브레터 Yoon Dohyun's Love Lett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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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르 | 음악쇼 |
| 방영 채널 | KBS 2TV |
| 방송 시간 | 금요일 밤 12:15[1]~ 익일(토요일) 1:45[2] |
| 방송 기간 | 2002년 4월 6일 ~ 2008년 11월 14일 |
| 방송 횟수 | 322부작 |
| 진행 | 윤도현 |
| 기획자 | 이기원 |
| 담당 PD | 류명준 |
| HD 유무 | 2007년 9월 7일 ~ 2008년 11월 14일[3] |
1. 개요
2002년 4월 6일부터 2008년 11월 14일까지 KBS 2TV에서 방송되었던 심야 음악 프로그램으로 이소라의 프로포즈의 후속 프로그램이다. 제목은 일본 영화 러브레터에서 따왔으며, 후속 프로그램은 이하나의 페퍼민트와 유희열의 스케치북 등이 있다.오프닝곡은 2002년 첫방송때부터 2005년 3월 25일까지 너를 보내고를 썼다가 2005년 4월 1일부터 종영 때까지 funky train을 썼다.
2. 구성
2.1. 방송 초기
이소라의 프로포즈는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극초반을 대표하는 음악 프로그램이었지만, 내면에는 잡음이 많았다. 특히 MC인 이소라가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가수들(특히 립싱크를 자주 하는 가수들)이 나오면 말도 없이 촬영을 펑크내고 잠수타는 일이 계속 벌어졌고, 이로 인해 제대로 녹화를 진행하기가 힘들어졌다. 결정적인 계기로 2002년 1월 12일, god가 특집으로 출연했을 때 이소라가 리허설, 메이크업까지 다 마치고 녹화를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서 갑자기 촬영을 펑크내고 방송국을 이탈함으로써 KBS는 더 이상 이소라에게는 진행을 맡기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고, 새 MC와 새 형태의 음악 프로그램을 기획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그 뒤 프로포즈는 약 2개월여간 계속 방영되다가 2002년 3월 23일, 이소라가 방송 중도에 하차 선언을 하면서 그렇게 프로포즈는 동년 3월 30일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KBS는 YB의 윤도현을 MC로 섭외, 당시 확실히 결정된건 3월이었고 그 전부터 출연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2002년 4월 6일부터 윤도현의 러브레터로 프로그램명과 컨셉을 완전히 뜯어고치고 새롭게 재시작하면서 심야 음악프로그램의 대를 이었다.
초창기였던 2002년과 2003년까지는 사실상 이소라의 프로포즈의 연장판이었으며, 상품 소개, 세트 분위기나 코너, 그리고 크리스마스 특집 구성도 비슷했다. 차이점이라면 이전작보다는 세트가 넓어졌다는 점이다.[4]
2003년 11월 7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이소라의 프로포즈의 기존 틀에서 탈피해서 여러 코너와 세트 분위기를 바꾸었고, 추후에 실시될 주5일제와 맞물려서 방송 요일을 토요일에서 금요일로 이동했다.
보통 가수나 그룹 3, 4팀을 초청해서 음악을 듣고 윤도현과 이야기를 나누는 식으로 토크가 진행되었으며, 중간중간 코너들이 삽입되었다.
음악방송 사전MC는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너무 잘되고 소문이 파다해서 개그콘서트 제작진, 개그맨들 모두가 러브레터를 구경하러 갔었다고도 한다. 개그맨 뿐만 아니라 업계사람들은 다 갔다고 한다.
2.2. HD 방송 시절
방송 후반기인 2007년 9월 KBS홀에 본격적으로 HD 장비가 설치되면서, 그 해 9월 7일 263회부터 HD 방송 체제로 들어갔다.[5] 이 시기에도 SD 방송을 하던 때와 크게 진행 방식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다른 점이라면 2008년 6월부터 종영 때까지 코너가 없어지고 콘서트 체제로 바뀐 것이다.3. 평가
2005년 KBS 연예대상 최우수 음악 프로그램상을 받았다.YB는 이미 제일 잘나가는 록밴드였고 윤도현은 2000년부터 MBC라디오를 진행하며 2001년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이소라의 프로포즈>에도 자주 출연했는데 반응도 좋았다. PD가 윤도현에게 이소라가 1-3달 쉬다올 것이라하며 시작한 프로그램으로 밝혀지기도 했다.[6]후에 윤도현이 월드컵으로 몸값이 천정부지 치솟았을 때 자신의 출연료보다 음향에 신경써달라고 했다. 자신은 월드컵으로 뜨기 전의 출연료를 받으면서 하차할때까지 출연료를 동결해서 진행했다. 좋은 무대를 만들어서 후배들이나 재능있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든 끌어주고 싶어했던 그저 음악을 사랑하는 꿈 많은 사람이었다.
심야 음악 프로의 대를 잘 이었으며, 또한 다른 음악 프로그램과 달리 알려지지 않은 가수들이나 인디 밴드 등을 자주 초청해 그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마련함으로써 실력이 있는 가수들을 발굴해내는 기회를 마련했다. 윤도현의 러브레터는 후에 바뀐 음악프로그램과 비교해도 장르의 다양성, 인디밴드나 신인발굴의 차이가 아주 극명하게 차이날 정도 였다. 인기많고 사랑받은 시대의 프로그램이었다.
매 주마다 검색어 1위를 찍는 가수가 나왔었고 러브레터로 스타덤에 오른 가수 또한 많다. 타이거jk, 무브먼트크루[7], 롤러코스터, 버즈, 김범수, 성시경, 인순이[8], 더 크로스, 박효신, 바비킴, 김종국[9] 먼데이키즈, SG워너비 등 라이브를 잘하는 사람들이 스타가 되었다. 자우림이나 노브레인, 크라잉넛, 언니네이발관, 롤러코스터, 델리스파이스, 넬 등등 인디밴드들이 대거 출연했었다. 또한 일단 이 시절 유명했던 가수라면 러브레터에서 터졌을 확률이 굉장히 높다.
밴드특집을 하기도 했고 2005년 카우치사건으로 인해 인디밴드가 지상파 출연금지였음에도 출연을 시켰었다. 윤도현이 고위관계자들을 만나 인디밴드 출연을 부탁했다는건 유명한 이야기이다. 당시 러브레터 PD 또한 자신이 직접 공연장에 가서 관람하며 실력있는 가수 발굴에 열을 올리던 PD였다는게 밝혀지기도 했다.[10]
실력있냐 없냐의 유무가 러브레터출연이기도 했다. 음악프로그램 중에 가장 오랫동안 기억되고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MC 윤도현의 가창력을 기반으로 게스트와 만들어낸 콜라보들 또한 아직도 회자되는 무대가 많을 정도로 큰 호평을 받았다. 사전 준비된 무대 외에도 즉흥으로 이루어지는 무대도 많아 신선했다.
윤도현과 김범수의 보고싶다, 박정현과 사랑보다 깊은 상처, 이문세와 메들리, 김조한과 데스페라도, 비의 태양을 피하는 방법, bizzy와 함께한 갱스터파라다이스 등 다른가수가 무대를 할때에도 윤도현을 불러서 함께하기도 했다.
VJ특공대, 부부클리닉 사랑과전쟁과 더불어 금요일 밤 KBS 2TV의 광고판매를 책임지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래서 부부클리닉이 끝나고 12시 15분에 방영했는데 광고가 워낙 많이 붙어서 사실상 12시 30분이 지나서 방영했다. 윤도현의 러브레터가 나올 때까지 광고를 최소 15분 가까이 봐야 윤도현의 러브레터 본방을 사수할수 있는 수준. 대략 광고 20개정도. 러브레터는 KBS의 간판프로그램이었다.
4. 논란 및 사건 사고
4.1. 윤도현 강제 하차 논란
2008년 11월 14일, 윤도현의 러브레터가 뜬금없이 급히 종영하면서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한 것에 대해 "혹시 정부의 압력을 받은 것 아니냐?"라는 의혹에 시달렸다. 실제로 윤도현의 러브레터 마지막회에서 그는 YB 멤버들과 함께 <It Burns>의 한국어 버전인 <빨간 숲속>을 불렀는데, 가사가 사회 비판적인 내용이라 압력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 마지막 방송날 윤도현은 2시간 이상 관객을 위해 방송 외 공연을 하기도 했다.[11]너무나도 급하게 프로그램이 종영했고 후속 프로그램 역시 급조했다는 것이 알려져 파장이 일었다.
<윤도현의 러브레터>가 폐지되고 급조한 후속 <이하나의 페퍼민트>는 6개월도 안돼서 종영했고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자리잡기까지 시간이 걸리기도 했는데 장르의 다양성, 신인발굴, 인디밴드 노출빈도 등 많은 부분에서 러브레터와 크게 차이나서 아쉽다는 비판과 러브레터를 그리워하는 팬이 많았다.
이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12]가 실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윤도현을 끌어내리려고 했던 정황과 정부 외압으로 인한 하차가 기정사실화 되었다.
그동안 윤도현에게 러브레터 시작부터 끝까지 정치적으로도 다분히 악의적 기사들이 수없이 많았고 (이소라의 펑크로 시작한 프로그램임에도 노무현을 지지해서라는 정치적 프레임을 씌우기도 했다) 심현섭은 공중파 정치 연설 방송에서 뜬금없이 가만히 있던 러브레터를 거론하며 프로그램에 정치적 개입을 하려고도 했으며(후에 윤도현에게 사과했다[13]) 심한 파장으로 윤도현은 기자회견을 열어 러브레터를 정치 싸움판으로 만들지 말아달라 부탁까지 했었고 (윤도현은 현재까지도 어느 방송에서든 정치발언을 한 적이 없다) 윤도현이 하지 않은 말들도 기사화가 되거나 왜곡되어 곤혹을 치뤘었다. 후에 검찰은 국정원 심리전단이 민간인을 매수해 윤도현에 대한 심리전으로 여론 조성을 했다는 일을 밝히기도 했다.
러브레터만은 나가고싶다고 매니저를 들들 볶았다는 가수들이 많았던 화제의 프로그램으로 오죽하면 누리꾼들이 ‘윤도현한테 왜 저러냐’, ‘얼마나 시달리는 거냐’고 하기도 했고 이후 김구라 또한 ‘윤도현한테 왜 그러냐’고 화를 내기도 했었다.
4.2. 타이거JK의 글
2008년 11월 하차한 윤도현에 대해 타이거JK가 글을 올리기도 했다.10년 동안 옆에서 목격한 윤도현의 색깔은, 빨간색도 혹은 파란색도 아닌 하얀색이다. 사람들은 하얀 그의 얼굴에 색칠을 하고, 낙서를 한다. 때로는 가꾸어주려 꾸며주고, 때로는 침을 뱉고 염분을 뿌린다. 옆에서 보는 나는 답답해하고, 대신 억울해한다. 더럽혀진 그의 얼굴에 물을 뿌려주려 하지만, 윤도현은 그냥 통기타를 짊어지고 노래한다. 처음 윤밴과 마주친 날은 아주 더운 한여름, 어느 지방 공개방송에서 풍선들이 파도 치는 관중 앞편, 무대 뒤편의 구석 천막에서였다. 밴드들은 무덤덤하게 악기를 닦고, 튜닝을 마치고, 무릎을 치며 장단을 맞추고, 윤도현은 “어! 아!”거리며 목을 풀고 있었다. 좀 어려보이는 후배들은 인사하지 않았다. 스타들은 그들을 지나쳐갔다. 하지만 윤밴은 즐겁게 웃고, 노래하고, 연주하고 자기들 차례를 기다렸다.
같은 처지이던 날 반갑게 맞아주고, 우린 어느덧 형제 같은 사이가 됐다. 내가 아는 진실은 이것이다. 윤밴은 연주하고 노래 부를 수 있는 곳으로, 또 그들을 원하는 관객이 있는 곳으로 여행 다니는 ‘blues travelers’다. 항상 만나면 음악 이야기를 한다. 아주 시시하게, “나 이런 곡 나왔어. 아, 아!” 그리고 노래한다. 자기가 쓴 노랫말과 멜로디에 킥킥거리며, 함께 하자고 한다. 가끔 이런저런 기사들이 메인에 떠서 윤밴이 사회의 적이 되었을 때, 많은 누리꾼의 밥이 되어 꼭꼭 씹힐 때, 그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 특유의 무덤덤한 톤으로 윤도현은 말한다. “나 그런 인터뷰한 적 없는데. 염병~.” 그리곤 또 기타 들고 노래한다.
술에 취해서 어깨동무하고 거리를 다니며 소리 지르고, 가끔 알아봐 주는 이들에게 “고맙습니다” 하며, 가끔 무례한 취객에게도 하이파이브를 날리고 “rock n roll!”을 외치며 그들을 웃기는 윤도현은 동네 형 같다. 사람들을 좋아하고,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동네 형. 특히 소외되거나 왕따 당하는 것 같은 사람들에게 정이 많고, 오해받는 이들의 오해를 풀어주려 노력한다. 많은 장르의 음악인들에게 연결고리가 되어 주기도 하고, 전혀 다른 계통의 인간들을 친구가 되게 해준다.
정작 자신은 숫기없고, 오해받고 무시당할 때 아무 말 못한다. 말하지 않는다. ‘overnight sensation’으로 사랑 받을 때도 윤도현은 한결같았다. 전혀 우쭐하거나, “기회가 왔구나”라며 피식거리지 않았다. 윤도현밴드는 단순히 월드컵을 응원했다. 아니 진실이 담긴 응원 소리였다. 연주가 즐거웠고, 분위기가 사랑스러웠고, 열정에 목말라하던 형들은 그저 같이 기뻐했다. 많은 방송과 광고판까지 휩쓸 때, 비판자들은 음악인으로서 그가 외도했다고 했고, 실제론 정치적이지 않은 그가 어느새 혁명가가 되고, 공공의 적이 되었다.
정이 많은 윤도현은 음악을 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활동할 기회를 주었다. 생각보다 작은 회사에 있는 그는 회사의 가장 노릇을 하고, 열심히 살림했다. 기타, 피아노, 드럼까지 연주하는 재주꾼이고, 영원한 소년이다. 나랑 어울리며 랩질하고, 비보이들과 어울리며 춤질하고, 여러 장르에 도전하고 싶어한다. 사람들은 이런 윤도현의 모습을 기회주의자라고 질타했다. 윤도현은 그저 꿈 많은 어린 소년이었을 뿐인데. 아름다운 아내 자랑하고,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면 지루할 정도로 길어지고, 딸과 아내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너무도 자상한 남편이고 아버지다. 그는 혼자 냇가에 가서 노래하고, 엄마한테 가서 김치 얻어먹고, 나한테 자랑한다. 최고의 김치를 당신의 어머니께서 만드신다고, 한번 먹어보라고. 윤도현 아내의 눈물, 딸의 울음소리를 난 느낀다. ‘잘 되고 있는 놈이 뭘 그리 헝그리한 척하냐’고 모두 손가락질하지만, 윤도현은 녹음실에서 먹고 자고, 시골 산에 박혀 소리 지르고, 작은 앰프에 신기해하며 기타치고, 음악, 음악, 음악만 말하는 촌놈이다.
요즘은 그 하얗던 윤도현이 약간 누렇게 빛바래 있다. 너무도 완벽하게, 완벽한 타이밍에 완벽한 운이 찾아와, 윤도현은 사람들이 칠해준 색깔을 모른 채 노래했고, 그 색깔이 싫어진 사람들은 이제 윤도현을 욕한다. 아무것도 모르던 꼬마 로커 윤도현은 이제 눈치 채려고 한다. 하지만 끝까지 대답하지 않는다. 옆에서 보는 난 정말 억울하고 답답한데. 어쩌면 이런 윤도현의 한결같은 태도, 무뚝뚝함, 저항 아닌 저항이 윤도현에겐 최고의 용기일 수도 있다. 아직도 널 필요로 하는 팬들이 있다는 걸 잊지 말고 노래하라. (writen by tiger JK)
5. 여담
- 윤도현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종의 유행어로 "여러분은 지금 매끄러운 진행을 자랑하는 윤도현의 러브레터와 함께하고 계십니다"라는 멘션을 민 바 있다.
[1] 다만 심야프로그램 특성상 광고를 죄다 프로그램 앞부분에 편성했기 때문에 실제 방송시작 시간은 12시 30분 경이었다.[2] 1시간 30분 방송[3] 여타 프로그램에 비해 HD 방송 송출이 늦었던 이유는 당시 녹화를 했던 KBS홀이 2007년 9월이 다 되어서야 HD 장비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이는 2000년 KBS홀을 지을 때 HD 방송의 계획이 없어 HD 장비를 설치하지 않은 탓이다.[4] 2002 크리스마스 특집은 아예 2년 전의 이소라의 프로포즈 크리스마스 특집과 구성이 똑같았다.[5] 뮤직뱅크도 이 시기부터 HD 방송을 시작했다.[6] 유희열의 스케치북 500회 특집에서 이문세, 이소라, 윤도현이 출연하며 애잔한 그의 뒷이야기를 들을수있다.[7] 왜 다른 래퍼는 안부르냐는 비난이 있기도 했는데 다른 크루의 래퍼도 출연했었다. 출연했었지만 묻힌 것으로 그 비난은 다른 래퍼들을 두번 죽인 셈이 되기도 했다.[8] <거위의 꿈>을 부르고 초대박 히트를 해서 카니발의 곡이었는데 인순이의 곡으로 사람들이 오해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9] 전소속사의 방해로 곡도 제대로 받지 못하며 겨우겨우 낸 1집의 반응이 안좋았고 2년만에 나온 2집도 타이틀곡 반응은 별로였는데 이 때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불렀던 한남자가 말그대로 대히트를 기록했다.[10] 6년이 넘게 진행한 프로그램으로 그동안 많은 PD들이 거쳐가기도 했는데 그중 PD한명이 노래 한곡당 얼마씩 돈을 받아온게 밝혀지기도 했다.[11] 여담으로 러브레터 마지막 방송 전날 밤 만든 곡이 YB 8집 <편지>이며, 제작진들은 윤도현에게 문구를 담은 기타를 선물했다. (문구내용: 윤도현의 러브레터 더 넓은 세상으로... 2008. 11)[12] 명단이 공개되고 몇몇 문화예술계 인물들이 왜 자신의 이름은 없냐고 하기도 했었는데 이후 같은 블랙리스트 멤버(?)인 봉준호, 박찬욱, 한강(소설가) 등 해외에서까지 널리 인정 받게 되면서 전세계에서 인정받는 뛰어난 아티스트 인증서가 아니냐는 말이 돌기도 했다.[13] 이 일로인해 보수 네티즌들은 심현섭이 노무현의 블랙리스트로 피해를 받았다라는 말도 안되는 논리를 펼치기도 했는데 심현섭은 답답했는지 자신은 블랙리스트, 피해자가 아니라고 몇차례 말하기도 했다. 김대중 정권에서 인기절정인 커리어 하이였으며 김대중앞에서 성대모사를 하며 담화도 했었다. 또한 노무현 정권에서 프로그램을 더 많이 했다며 자신에게 그런 피해자 프레임을 씌우지 말라고 수차례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