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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쑨더밍 손덕명 | 孫德明 | Sūn Démíng | Sun Dakming | ||
출생 | 1866년 11월 12일 (청나라 동치 5년) | ||
청나라 광동성 광주 (現 중화인민공화국 광둥성 중산시) | |||
사망 | 1925년 3월 12일 (향년 58세) | ||
중화민국 베이징시 협화의원 (現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둥청구 협화의원) | |||
묘소 | 장쑤성 난징시 자금성 중산릉 | ||
재임기간 | 초대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 ||
1912년 1월 1일 ~ 1912년 3월 10일 | |||
서명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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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아버지 손달성, 어머니 양태군(楊太君) | ||
배우자 | 루무전 (1885년-1915년) 천추이펀 (1892년-1925년) 아사다 하루 (1897년-1902년) 오쓰키 가오루 (1903년-1906년) 쑹칭링 (1915년-1925년) | ||
자녀 | 아들 쑨커, 장녀 쑨진위안, 차녀 쑨진완, 삼녀 미야가와 후미코 | ||
학력 | 서의서원(現 홍콩대학 의학부) 졸업 | ||
직업 | 정치인, 외과의사, 혁명가 | ||
사상 | 삼민주의 | ||
종교 | 개신교 (회중교회) | ||
신장 | 168cm[2] | ||
정당 | |||
휘 | 쑨원 손문 | 孫文 | Sūn Wén | Sun Man | ||
호 | 얏센 일선 | 逸仙 | Yìxiàn | Yat-sen | ||
별명 | 중산 (中山, Zhōngshān) | }}}}}}}}} |
공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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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쑨원은 정심(正心), 성의껏 모두 앞에서 선서한다. 지금부터 구(舊)를 없애고 신(新)으로 바꾸고 자립하여 국민이 된다. 성의를 다하고 전력을 당하여 중화민국을 옹호하고, 삼민주의를 실행하고, 오권헌법을 채용한다. 정치를 공명하게 하며, 인민을 안락하게 하고, 국가의 기초를 영원히 강고하게 하며, 세계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1919년(민국 8년) 1월 12일, 중화혁명당 모임에서.
청나라의 정치사상가이자 중화민국의 초대 임시 대총통으로, 중화민국의 국부(國父)다. 진나라의 시황제 이래 2,000년 이상 이어져 오던 중화제국과 전제군주제를 무너뜨린 혁명가로서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양쪽에서 모두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다.[3]1919년(민국 8년) 1월 12일, 중화혁명당 모임에서.
한국에서는 당시 중국 지도층 중에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한 인연으로 인해 1968년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여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있다.
2. 이름
본명은 덕명(德明)인데, 이후 스스로 문(文)이라 이름을 바꿨다. 공자가 존경한 고대 문명국 주나라의 초대 왕이 무왕(武王)이고 그의 아버지가 문왕(文王)이며, 중국은 옛날부터 암암리 중국 문화의 계통을 상징적으로 문왕 → 주공 → 공자로 이어진다 생각하였다. 문(文)이란 글자는 아무한테나 올리지 않는, 중국에서 최고의 시호였다. 따라서 이름을 문으로 바꿨을 때부터 자신이 새로운 공화국 문명의 시조가 되겠다는 야망을 가진 것으로 추측된다.관화 병음으로는 쑨원(Sūn Wén), 쑨원의 모어인 광동어로는 쉰만(syun1 man4). 호(號)는 중산으로 일본에 있을 때 사용한 가명인 나카야마(中山)[4]에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광둥성의 중산시는 여기서 따서 붙인 지명이다.
현대 중국인들에게는 손중산(孫中山)이라는 경칭으로 불리고 있다. 영미권에선 쑨원의 호 일선(逸仙)의 광둥어식 발음 얏센(Yat-sen)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쑨얏센(Sun Yat-sen)은 중국의 광저우시에 있는 중산대학의 영어 명칭 Sun Yat-sen University로도 쓰인다. 또 대만의 가오슝시에 있는 국립 중산 대학의 영어 명칭도 National Sun Yat-sen University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한국 한자음인 손문으로 잘 알려졌다.
3. 생애
자세한 내용은 쑨원/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4. 평가
쑨원은 그의 행적이나 사상, 상징성 등으로 인해 여러 측면에서 평가되어, 오늘날 중화민국이나 중화인민공화국 양안뿐만 아니라 홍콩, 마카오 더 나아가 동남아 등의 중화권 화교 지역에서도 대체로 존경받고 있다.[5]중화민국이야 사실상 쑨원이 건국자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중화인민공화국에서조차 쑨원의 묘를 중산묘가 아닌 중산릉(中山陵)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그가 현대 중국사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중국에서 묘지명으로 능(陵)은 천자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중산릉 부근에 명나라를 세운 홍무제의 효릉(孝陵)이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중국 난징 교외에 위치한 중산릉. 1929년 6월 1일에 안장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쑨원을 기념하는 건물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싱가포르 세 곳에 모두 존재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광저우의 중산기념당, 중화민국은 타이베이의 국부기념관, 싱가포르에도 중산기념당이라는 이름으로 존재. 영어로는 모두 Sun Yat-sen Memorial Hall로 불리고 위치해 있는 도시만 구분한다.
한마디로 중화권에서는 어느 진영에서도 적극적 안티를 찾아보기 힘든 인물. 그나마 개인 단위가 아닌 집단 단위로 뽑자면 대만 독립파 중 강경파들 정도가 있는데, 이들도 쑨원을 자기들과는 무관한 인물로 여기기 때문에 다른 중화권처럼 국부로 대접하지 않을 뿐이지 딱히 그의 행적을 까는 건 아니다. 연장선상에서 중화인민공화국 학자들도 쑨원하면 떠오르는 신해혁명이 부르주아들의 왕조 전복 운동이었지 무산계급들의 계급 타파 운동은 아니었다며 평가절하하는 측면이 있는데[6] 즉, 중국 학자들 입장에선 신해혁명도 평가는 할 만하지만 공산 혁명이 더 위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공산 혁명보다 덜 중요하다는 거지 신해혁명도 그 다음으로 중요했다는 정도 입장이기 때문에 쑨원의 적극적 안티라고 보기는 어렵다.
삼민주의를 주창하며 안팎으로 썩어들어가던 중국의 개조를 위한 청사진을 제공한 인물이다. 그의 이념과 지도가 신해혁명, 국민당의 1차 북벌 등 굵직한 사건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본인의 대에 벌어진 일들에서는 끝내 성공을 보지 못했고 계속되는 실패에 좌절해야 했다. 하지만 중국국민당, 중국공산당의 후계자들이 그의 청사진을 바탕으로 군벌들을 토벌하고 새로운 정치 체제를 도입하는 데 성공한다.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모두 쑨원을 진시황 이래 2,000년간 이어져 온 천자 제도를 최초로 전복시킨 혁명의 선행자(先行者), 건국 이념을 제공한 중화민족의 국부(國父)로서 존경하고 있다. 객가인으로 알려져 있고, 광둥성 중산시(中山市) 출생이기 때문에 흔히 생각하는 표준 중국어를 쓰던 사람은 아니고, 홍콩 영화에 자주 나온 광동어 구사자였다.[7] 소위 삼민주의로 통칭되는 현대 중국의 이념적 뼈대를 세운 사람으로, 작금의 중화권에서 여러모로 가장 중요하게 취급받는 근현대 시기 인물 중 한 명이다.
4.1. 중화민국
중화민국 국민대회는 전체 국민의 위탁으로 손중산(孫中山) 선생의 중화민국 건국 이념에 근거하고 국권을 공고히 하며 민권을 보장하고 사회안녕을 수호하며 인민의 복지를 증진하기 위하여 이 헌법을 제정하며 전국에 공포 시행하고 영원히 준수한다.
中華民國國民大會受全體國民之付託,依據 孫中山先生創立中華民國之遺教,為鞏固國權,保障民權,奠定社會安寧,增進人民福利,制定本憲法,頒行全國,永矢咸遵。
중화민국 헌법 전문
1946년 12월 25일 제정된 중화민국 헌법은 아예 헌법 전문에 중화민국은 쑨원의 삼민주의에 근거했다고 못 박아뒀다.中華民國國民大會受全體國民之付託,依據 孫中山先生創立中華民國之遺教,為鞏固國權,保障民權,奠定社會安寧,增進人民福利,制定本憲法,頒行全國,永矢咸遵。
중화민국 헌법 전문
위에서부터 장징궈, 리덩후이, 천수이볜, 마잉주, 차이잉원, 라이칭더이다.
중화민국 정부는 국부(國父)로 그를 추앙하고 있다. 주요 관공서마다 그의 초상화가 걸려있고, 장제스를 비롯한 역대 총통들은 정당 관계없이 모두 그의 초상화 앞에서 취임 선서를 거행하고 있다.
다만 쑨원의 위상과 별개로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된 21세기 들어서도 이런 신격화에 가까운 정치인 숭배 현상이 이뤄지고 있다는건 비판의 여지가 있는 대목이긴 하다. 쑨원 본인부터가 기독교 신자로 우상숭배를 배척했던 인물이란 걸 생각하면 더더욱 아이러니하다.
범록연맹을 비롯한 대독진영 강경파 에서는 은근히 부정적 인식을 받기도 한다. 이것은 쑨원 개인이 대만에 뭘 잘못해서라기보다는 "대만과 중국은 별개이다"라는 인식에서 쑨원은 외국인에 불과하고, 또 쑨원을 추종했던 국민당과 장제스가 대만에 와서 철권독재를 편 데 대한 반작용이다.[8] 이들은 쑨원을 추종하는 것 역시 국민당 시절 중국화 교육의 유산이라고 규정한다. 중화민국의 국민의례에는 국기와 국기 앞에 거는 쑨원 사진에 3차례 허리를 숙여 절하는 것이 있는데, 일부 독립파들은 이것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정난룽은 쑨원을 국부로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대학 시절 교양 필수 과목인 국부 사상을 이수하지 않아서 졸업을 못 했다. 대만에서는 천수이볜 정부 시절 역사 교과서에서 쑨원을 기존의 국부가 아닌 외래인으로 규정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고, 2010년대 타이난시에서는 쑨원 동상이 일부 독립파 대만인들에게 파괴되기도 하였다.[9] 그 외 쑨원의 동상에 "중화민국은 떠나라, 국민당은 물러나라"고 글을 남긴 사례도 있다. 물론 화독 혹은 온건파들은 국부까진 아니라도 아시아의 민주주의 지도자 정도로 쑨원을 평가한다.
4.2. 중화인민공화국
20세기에 들어와 중국에는 천지개벽의 위대한 역사적 변혁이 일어났다. 1911년 쑨원 선생이 지도한 신해혁명은 봉건적 군주제를 폐지하고 중화민국을 창건하였다. 그러나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중국인민의 역사적 임무는 아직 달성되지 않았다. 마오쩌둥 주석을 수령으로 하는 중국공산당이 이끌었던 중국의 여러민족인민은 오랜 기간에 걸친 곤란하고 곡절 많은 무장투쟁 및 그밖의 형태의 투쟁을 거쳐 1949년에 드디어 제국주의, 봉건주의 및 관료자본주의의 지배를 물리치고 신민주주의 혁명의 위대한 승리를 전취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하였다. 이때부터 중국 인민은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의 주인이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서언 中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서언 中
2016년 쑨원 탄생 150주년 기념식. 기념연설을 하는 사람은 시진핑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쑨원을 마오쩌둥에 앞선 혁명 선행자 정도로 평가한다. 사실 몇몇 지식인의 동아리로 출발한 중국공산당이 대폭적으로 세를 확장할 수 있던 것도 쑨원이 국공합작을 받아들임으로서 가능했다. 게다가 쑨원은 국민당 우파의 반발에도 공산당을 품고 가려고 했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이 가지고 있던 이권을 중국에 반환하기 인색하고 서로 나눠가지려던 영미일 열강의 거동에 쑨원이 실망한 탓도 있었다. 때문에 쑨원은 당시까지만 해도 그나마 약소국 도우던 레닌의 소련을 환영하게 되고, 이들의 지원을 받아 황포군관학교와 국민혁명군을 창건하게 된다. 또 쑨원의 마지막 부인인 쑹칭링 역시 동생의 남편이었던 장제스와 계속 대립하다 장제스가 대만으로 쫓겨갈 때도 같이 가지 않고 본토에 남아 중공 정권에 참여했고 쑨원 사후에 공산당에 대한 탄압으로 일관하던 장제스와 달리 생전에도 공산당에게 유화적이었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은 전 중화민국 정권의 창시자이긴 해도 쑨원을 딱히 격하할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국경절이나 전승절과 같은 주요 기념일에는 마오쩌둥의 초상에 앞서 쑨원의 초상화가 등장한다. 상술했듯이 묘지를 능으로 칭한다거나 주요 도시[10]에 중산이라는 도로명이나 지명이 거의 반드시 존재할 만큼 공식적으로 중국의 위인 대우는 확실히 받고 있다. 오히려 중국에서는 지명에 공산당 지도자의 이름이 붙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자 격인 마오쩌둥보다는 아래로 취급받는다. 중국의 모든 화폐에는 마오쩌둥의 초상이 들어가 있고 쑨원의 초상은 들어가 있지 않으며 천안문 광장에도 마오쩌둥의 초상화만이 걸려 있다.
또 대만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는 만큼,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기 위해 쑨원을 양안의 공통 국부로서 강조하는 경향도 있다. 대만독립파들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장제스에 대한 평가가 대륙에서 과거보다 나아진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다보니 쑨원 탄생 150주년 기념식에 본토에서는 시진핑 주석이 참가하였으나, 정작 이때 대만은 조용한 편이었다. 당시는 차이잉원 행정부 1기가 막 출범하고 연초에 TWICE 쯔위 청천백일만지홍기 논란으로 인해 대만 내 반중 감정이 고조된 상태였다. 쉽게 말해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려고 쑨원을 띄우는 중공의 속내가 뻔히 보이기에 오히려 대만은 차분했다는 것이다. 차이잉원 정권이 대만 독립파를 지지층으로 두고 있는 정권이니 더 그랬다.
4.3. 기타
홍콩이나 마카오의 경우 쑨원 본인부터가 홍콩과 인연이 깊었고 홍콩 사람들과 똑같은 언어인 광동어를 쓴 점 등 때문인지, 국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작금의 민주파 홍콩인, 마카오인들에게도 민주주의를 추구한 선구자로서 나름 존경받고 있다. 이는 홍콩 독립운동 지지자들도 마찬가지라, 쑨원을 외부에서 온 사람 취급하는 대만 독립파들과 비교해보면 재미있는 부분이다.홍콩 본토파들은 쑨원의 혁명 정신처럼 우리도 홍콩을 중국으로부터 독립시키자고 하고, 민주파들은 중공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중국 내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동기부여를 하기 위해 쑨원의 이미지를 이용하는 측면이 있다.
또 홍콩, 마카오 뿐만 아니라 인접한 광둥성은 중국에서 기독교 교세가 상대적으로 강한 만큼, 기독교 신자였던 쑨원을 더 취급하기도 한다. 여담으로 홍콩인 기독교 신자들이 꼽는 이름난 중화 기독교인으론 쑨원 외 중국 최초의 목사 량파 목사, 이후 중화민국 총통을 지낸 장제스 등이 있다.
동남아 등의 중화권 화교 지역에서도 대체로 존경받고 있다.
이런 상황을 보면 중화권의 다양한 진영에서 서로서로 쑨원의 필요한 점을 평가하고 이용한다고 볼 수 있다. 영어 위키백과를 비롯한 서구권에선 쑨원을 민주사회주의자로 분류하고 있고 실제 그런 성향이 있지만, 쑨원의 사상인 삼민주의[11]는 오늘날 진영적으로 보면 좌우파적 사상의 성격도 모두 가지고 있기에, 각 진영에선 자기들한테 필요한 부분만 강조하는 식이다.[12] 즉, 삼민주의에서 민족주의는 하나의 중국, 민생주의는 경제적 평등, 민권주의는 서방식 민주주의와 통하는 바가 있으며, 쑨원의 계승을 표방하는 각 정치세력들은 이들 중에서 자기에 맞는 부분만 강조하면서 쑨원의 이름을 빌리는 모양새다. 덕분에 살아생전엔 실권이 부족해 여러모로 고생했던 쑨원의 삶과 사상이, 오히려 죽고 나서 더 대접받는 측면도 있다.
물론 쑨원을 무조건 찬양하는 이들만 있는 게 아니라서 그를 반대하는 반대자들도 꽤나 많았다고 한다. 오권분립과 삼민주의를 내세울 때 여러 군벌의 인사들과 일부 한족주의 성향의 일부 국민당이 쑨원에게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오족공화[13]를 헌법에 명시하자 오히려 그에게 반감을 품은 이들도 있다고 한다. 중국 연방공화국을 꿈꾸던 몇몇 이들도 쑨원에게 의문을 가졌다. 쑨원을 중화민국 시절 때 인물이라며 무덤을 훼손시키려던 홍위병들도 마오쩌둥이 존경한 인물이라며 말한 한 농부의 제지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
5. 기타
- 인민복의 기원격인 중산복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흔히 인민복은 중국 본토에서만 입는다고 알려져 있는데, 쑨원이 유럽의 사냥복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설과 일본에 거주할 당시 가쿠란에 영향을 받아서 "우리도 저런 실용적인 옷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만들어 낸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이 옷이 훗날 재봉 방식의 변화에 따라 인민복과 국민복으로 나뉘게 된다.
- 제2차 국공내전 직전 협상 과정에서 찍은 장제스와 마오쩌둥. 두 사람이 입은 옷을 보면 둘의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는데, 상의 앞 주머니를 드러나지 않게 안쪽으로 재봉하면 인민복, 드러나게 재봉하면 국민복이 된다.
- 꽤나 미남인데다 명망도 있어서인지, 여자 관계가 상당히 복잡했다. 첫 아내는 19세에 결혼한 루무전(盧慕貞)으로 쑨원은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쑨커[14]와 딸 쑨얀, 쑨완을 두었다. 쑨원이 결혼하거나 첩으로 두었던 다른 여인들은 전부 신식 교육을 받거나 혁명 투쟁을 같이 한 여성들이었으나 루무전은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전족을 한 전통적인 중국 여인이었기에 쑨원의 정치적 동지도 될 수 없었다. 둘은 1915년 9월에 이혼했다. 이후 남편과는 전혀 왕래가 없었으며, 루씨는 마카오에서 여생을 마쳤다. 1915년 결혼한 두 번째 아내인 쑹칭링은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사상적 동지였던 쑹자수의 딸이었으며 쑨원의 비서였다. 쑹자수는 찰리 송이라는 미국식 이름이 유명하다. 중국어판 성경을 팔아서 떼돈을 번 후, 정치 활동 = 혁명 사업에 투신했다. 즉, 쑨원과 쑹칭링의 아버지는 친구 사이. 고로 그와 그녀의 사이는 부녀뻘로 나이차는 무려 26세 차이. 이 때문인지 현재 타이완에서는 "쑨원이 진성 로리콘이 아니었는가?"하는 평가도 있고, 그의 패러디 동인지도 있다. 사실 쑹칭링의 아버지는 해당 결혼을 결사 반대했으나, 쑹칭링은 가출까지 하면서 결혼을 강행했고 대노한 쑹자수와 쑨원은 멀어지게 된다. 근데 저 둘 외에도 일본 망명 중에 결혼한, 22세 차이나는 일본인 아내 오오츠키 카오루(大月薰)(1888~1970)가 있었다. 1903년 결혼 후 1906년 아이를 낳은 그 해에 쑨원은 제대로 된 관계 정리 없이 떠나버렸다. 생몰년도를 보면 알겠지만 15세 소녀와 결혼해 18세 때 임신시키고 사실상 버렸다. 둘 사이에 딸인 미야가와 후미코(1906~1990)가 있으며 그의 손자는 2020년까지 일본에서 살다가 사망했다. 그 외 첩이 둘 더 있었는데 특히 첩 중 한 명인 천추이펀은 말이 첩이지 사실상 20년 넘게 쑨원과 살았던 실질적 본처격으로, 단순히 쑨원의 여인이기만 한 게 아니라 혁명군을 위해 밥이나 빨래를 해주는 등 착실한 뒷바라지를 해주던 혁명 동지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쑨원의 동지들도 조강지처인 루무전은 물론이요, 사실상 본부인이나 다름없던 천추이펀을 안타까워하며 쑨원과 쑹칭링의 결혼식에 가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 하와이에 유학하면서 기독교 사상을 접하게 된 뒤 독실한 개신교 신자가 되었는데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우상숭배를 타파한다는 이유로 고향 후배인 육호동과 함께 세 개의 신상을 부숴버렸을 정도로 믿음이 신실했다. 그는 자신을 혁명으로 이끈 동기가 출애굽을 이끈 모세 일화와 전 인류를 죄에서 해방시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기원한다 밝혔으며 사람들이 자신의 혁명적 성과만 보고 그 동기를 바라보지 못하자 아래와 같은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혁명은 불이고, 기독교는 기름이다. 사람들은 나의 혁명만 보고, 나의 신앙을 보지 못한다. 기름이 없으면 어떻게 불이 일어나겠는가?
- 소련의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 사람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의 처녀다운 순진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실제 둘의 행보는 조금 다르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 이전부터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표트르 크로포트킨 같은 전 세대 러시아 혁명 원로들에겐 비정하고 냉혹한 정치 방식으로 비판받고 혹자에겐 그런 마키아벨리적 결단력이 성공의 비결이었다고 평가받기도 했다.[15] 반면 쑨원은 위대한 사상가적 입지와 카리스마와는 별개로 마키아밸리적 관점에선 현실 정치가로서 상당히 미숙하고 어설픈 부분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장기적으로 남긴 역사적 영향력과는 별개로, 살아생전 쑨원은 명망과 입지에 비해 부족한 실권 때문에 항상 중요한 부분에서 실패가 많았다. 물론 이건 그가 원래부터 실권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딱히 마키아벨리적 결단을 했냐 안 했냐가 핵심적인 사안은 아니었다. 어쨌든 쑨원 본인도 시인했듯 당시 국민혁명은 반쪽짜리 성공으로 남아버렸다. 다만 레닌의 소련이 망해버린 지금에 와선 쑨원이 최후의 승자 비슷하게 되긴 했다.
- 냉소적인 관점에서 보면, 당시 쑨원은 이상을 떠들었지만 현실은 중국 내 군벌이나 국민당 내 기회주의자, 야심가 혹은 일본, 서양, 소련, 나중엔 공산당 같은 속이 시커먼 세력들에게 "암, 그 분 위대한 분이지."라는 식으로 립서비스만 실컷 받고 막상 자기들 야망 채울 용도로 이용당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일본은 훗날 중일전쟁 당시 일제가 설치한 괴뢰정부도 어쨌든 이름은 중화민국 임시정부(괴뢰정부)였다는 점이 보여주듯, 제국주의적 야욕과는 별개로 일본에서 쑨원에 대한 평가 자체는 민관 양쪽에서 으레 높았다. 오히려 일본 극우파들이 쑨원이 일본 유학 중 받은 영향을 엄청나게 과장하며 그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보인 경계심은 애써 무시하고, 일차원적이고 무비판적인 일뽕이었던양 왜곡하려고 들 정도였다. 물론 현실적으론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용당하는건 없고, 당대 쑨원은 자기에게 부족하던 실권을 상대측은 쑨원의 명망을 보고 서로 이용했고, 이후 쑨원의 명분론적 입장이 밑 세대로 갈수록 지지를 받아 오늘에 이르러선 진짜 존경심으로 우러났다고 보는게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이런 냉소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어쨌든 서로 이해관계나 목적이 확연하게 다른 여러 세력 중 청 황실 복벽주의자 같은 소수만 빼곤 전부 표면적으로나마 쑨원을 긍정적으로 또는 더 나아가 극찬했고, 결국 오늘날 와서는 서로 대립하던 국민당, 공산당 양쪽에서 모두 인정하는 중화권의 통합적 상징 위인으로 거듭났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업적이다.
- 문화대혁명 시절, 쑨원이 광둥 정부 시절 거주한 광저우의 사저와 난징의 중산릉 역시 홍위병들에게 파괴당할 뻔 했는데, 당시 관리인이 마오쩌둥이 쑨원을 찬양한 시를 읊어주면서 "마오 주석이 가장 존경하는 분의 사저를 박살낸다고?"라는 식으로 대들자 홍위병들이 물러갔다고 한다.
-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대만)의 도로에도 보면 중산이라는 이름을 붙인 도로가 있는데, 시내도로 이름이 중산로(中山路)라든가 중산대도(中山大道)라는 식으로 되어있다. 대만의 경우에는 고속도로 이름까지 중산이라고 되어있는데, 중산고속공로가 그렇다.
- 중일전쟁 당시 중화민국 해군이 운용한 건보트 중산함과 중화민국이 건조한 자국함인 경순양함 이셴(얏센)은 쑨원의 호를 붙인 함선들이었는데, 이셴은 장인 전투에서 좌초 당해 일본군에게 노획되어 아타다라는 이름으로 개명당한 채로 일본군 해군에 편재되어 연습함으로 운용되었고 중산은 우한 전투에서 격침당했다. 다행히 이셴은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아 대만으로 반환되었고, 중산은 격침당한지 59년 뒤에 인양되어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 대만에서 발간한 쑨원의 말을 모아둔 국부전집에 따르면, 쑨원은 "주변국은 중국에 조공할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그렇지 못 한 것을 치욕으로 안다.", "태국은 중국의 한 성이 되고 싶어 한다.", "조선과 베트남도 중국에 가입하게 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16] 근데 국내에선 이를 가지고 쑨원이 한국, 베트남, 몽골 등 과거 중국과 조공 관계였던 나라를 중국의 속국 비슷하게 인식한 비뚤어진 중화사상을 가진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비난은 딱히 합리적이지가 않다. 쑨원은 반(反) 제국주의를 주창한 정치가로, "중국의 위상이 회복되면 제국주의의 피해를 입고 있는 다른 약소국을 도와야 한다.", "여러 민족들이 서로 평등한 관계에서 협력하는 공화국을 건설해야 한다." 등의 발언을 했기에 절대로 패권주의를 옹호한다고는 할 수 없다. 애초에 중화민국이 초기에 내세웠던 이념인 오족공화에는 조선인, 베트남인 등은 포함 자체가 되지를 않았다. 이게 세월에 따른 사상적 흐름의 변화인지,[17] 아니면 그저 발언의 앞뒤를 자른 왜곡인지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나, 그와 별개로 쑨원은 그에 걸맞은 의무를 중국이 짊어질 것을 강조했다.[18] 다만 한국에 대한 인식은 연설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1921년에 중국이 잃어버린 영토는 가장 최근의 것부터 말하자면 웨이하이웨이와 뤼순, 다롄, 칭다오, 홍콩, 광저우 만이 있고 그 전의 것으로는 조선, 타이완, 펑후열도가 있다고 연설했으며 1923년 8월과 1924년 2월에는 중국이 다시 강력해지면 조선이 저절로 중국 밑에 다시 들어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어떻게 본다면 쑨원은 한반도가 옛날부터 중화대륙의 속국이었지만 사악한 서양오랑캐들과 결탁한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탈환해야 할 중국의 영토로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19] 초기에는 이러한 사상이 내재되어있다가 20세기 들어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게 되면서 바뀌었다는 관점 또한 존재한다.
6. 대중매체에서
- 쿠보 노리타다의 《도교사》에서는 청조의 관헌에게 쫓기는 도중 관세음보살을 만났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 했다고 하지만, 쑨원은 전술한 것처럼 기독교(신교)를 믿었기 때문에 신빙성은 떨어진다. 기독교 인구가 적은 당시 동아시아인에게 어필하기 위해 한 얘기일 가능성은 있다. 특히 일본은 기독교 신자 비율이 낮은 지역이다.
- 영화 황비홍 시리즈의 2편에서 등장하는데, 시기가 1895년이다보니 20대 중반의 의사로 등장한다. 항상 시계를 보는 버릇이 있으며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서양의사들에게 중의학을 설명하는 황비홍의 말을 통역해준다. 그후 대사관에 잠시 몸을 숨기며 황비홍과 다친 환자들을 치료하는데 주력한다. 마지막에는 청조 관리들의 추격을 피해 무사히 도피하면서 혁명동지 육호동이 죽어가면서 전해준 청천백일기를 배 위에서 펼쳐든다. 황제의 딸에서 황제를 맡은 배우 장철림이 열연했다.
- 중국 CCTV 에서 2003년에 방영한 근현대사 TV 드라마인 <주향공화>(走向共和)에서는 청말 광서 20년부터 중화민국 개국까지 약 30년 동안 격동의 중국사를 다뤘는데 쑨원 역시 주인공 중 하나로 큰 비중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가 주는 공화주의, 민주주의 메시지가 당시 중국 공산당 정부의 심기를 건드리는 바람에 1회가 방영된 후 방송 금지가 되었다가 민감한 부분을 삭제 편집한 후 재방영했는데 전체의 2% 정도가 검열로 삭제 편집되었다. 마지막 화는 쑨원이 중국 국민들에게 자신의 공화적 신념, 삼민주의와 오권분립을 강력히 호소하며 끝맺음을 맺는다.주향공화 쑨원의 마지막 연설 배우는 마소화로 이 배우는 훗날 건당위업에서도 쑨원 역을 맡았으며 덩샤오핑 전기 드라마에서 덩 역을 맡은 적도 있다.
- 서유요원전에서는 백운동의 석벽에 새겨진 천강 36성의 명단 가운데 한 명으로 써있다. 서유요원전의 천강 36성은 천하를 뒤엎는데 성공하는 천명을 받은 혁명가들의 목록이다. 쑨원 밑에는 마오쩌둥이 써있다.
- 청천을 찔러라에서는 단역으로 등장하며 시부사와와 교섭을 한다. 결국은 시부사와와 입장 차이를 확인하는 정도이다.
-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왕도의 개》에서는 주인공과 가끔씩 만나거나 협조하는 조역으로 등장하는데 아직 채 제대로 된 혁명가가 되기 이전의 젊은 시절의 모습이다. 이 때는 위에서 설명한 국민복도 입지 않고 청나라 복식을 하고 있고. 여기서 쑨원은 근대 중국의 국부가 아니라 의욕은 넘치되 상당히 새파란 얼치기였던 것으로 젊은 모습이 그려져 다른 매체 대비 상당히 너프된 듯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야스히코가 김옥균에 무지막지하게 버프를 거는 것과 대비하면 꽤 신기하다. 사실 그렇게 많이 나오지도 않는다. 다만 이 작품의 손문은 한편으로는 무지막지한 버프를 받고 있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주제는 손문 사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멸만흥한으로 대표되는 초기 손문의 민족주의적 사상보다는, 후기 손문의 사상을 주제로 다뤘다.
- 후속작인 하늘의 혈맥에서도 중국인 유학생들 동창회에서 잠깐 등장하는데, 왕도의 개보다 나이가 많은 모습으로 등장하며 중국인 유학생들로부터 국부로서 존경받는 모습을 보인다.
- 중국의 모바일 게임 벽람항로에서는 손중산의 다른 이름 얏센(逸仙)에서 따온 중화민국의 경순양함이 의인화되었다. 또한 월드 오브 워쉽 에서는 범아시아 트리 중 프리미엄 전함 쑨얏센(孫逸仙, 손일선) 이란 이름으로[21] 등장한다.
-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세계관에서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코믹스 "어쌔신 크리드 : 템플러스"에서 중국 템플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였다는 사실이 언급된다.[22] 또한 실제로는 병으로 타계했는데 여기선 그냥 죽은 것도 아니고 암살단에게 암살당했다고 나온다.
-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 이형에게 잠깐 언급된다. 도쿠가와 요시노부와의 대화에서 위험인물이니 해치워야 한다고 이형이 주장한다. 물론 요시노부는 그 말을 새겨듣고 실행하려 하지만, 이형이 왜 그렇게 이야기하는지 이해하진 못한다.
-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조선 인천부에 있는 경일학당에서 의학을 배운다.[23] 그러다가 의회가 설치되자 곧바로 귀국하여 국민당에 입당한 후, 유영복을 대신해서 자의원 의원이 된 고홍명의 비서 노릇을 하고 있다. 국민당 내에서 보국회라는 청년 조직을 이끌고 있다. 서태후 독살 미수 사건 때 광서제가 변법의 뜻을 밝히자 원세개와 함께 광서제의 측근이 된다. 그리고 소위 변법공자들과 함께 변법을 밀어붙였으나 강남에서 역풍이 불고 북양군이 자기들이 가진 힘에 취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조선군의 활약과 광서제의 성단으로 혼란을 간신히 수습한 이후 천하대세가 분구필합 합구필분이라면 미국의 예를 본떠 천하를 합치지도 갈라놓지도 않고 금만 간 채로 묶어두면 된다는 생각으로 연방제를 도입했다.[24] 창의군[25]에 합류해 오랜만에 등장한다. 전쟁이 끝난 이후 국민당의 이념으로 삼민주의를 내세웠는데 그 내용이 원 역사의 민족(民族), 민권(民權), 민생(民生)이 아니라 중민(中民), 교민(交民), 부민(富民)이다.
-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순진한 혁명가로 등장하며 조선에서 자신의 삼민주의에 영양을 받는것으로 보이는 삼균주의가 등장하자 큰 인상을 받으며 삼균주의를 만든 조지원[26]과 친해진다. 본인 역시 중국에서 혁명을 일으키지만 한국보다 너무 거대한 중국 특성상 삼민주의와 민주주의 정착, 경제 개발은 실패로 돌아가고[27] 스스로 신해혁명이 실패했다면서 자책하며 죽는다. 마지막 죽기 전에 중국의 인민들이 스스로 민주주의를 일으키는 환상을 보며 죽는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나름 정략과 비전은 있지만 속이 다보이는 아시아주의 혁명가로 등장한다. 외세의 지원을 받아 한족만의 중화민국을 만드는데 성공하지만 원세개의 반란에 쫒겨나고[28] 원세개를 토벌한 호국전쟁 이후에는 단기서에게 쫒겨나고 쫒겨난 곳에서도 천중밍의 반란에 쫒겨난다. 관동대학살 당시에는 아시아주의의 영향이 남아있어 일본을 비판하기를 꺼리지만 결국 일본을 비판하고 국공합작에 동의한다. 역사의 변화로 한국의 도움을 받았기에 중화사상을 버리고 순수한 아시아주의 혁명가가 되고 한국과 연대하여 아시아주의를 실현시켜야한다고 주장한다. 중화사상을 버려서인지 중국의 영토는 본토 18성 뿐이며 만주,몽골, 티베트, 신강은 독립된 국가를 가져야한다고 주장한다.
- 빅토리아 3에선 청의 역사적 선동가로 등장한다. 한국어판은 오역으로 손 얏센도 아닌 손 야트센이란 이름으로 나온다.
7. 주요 경력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 | |||||||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 선출 | → | 1대 | → | 2대 | |||
쑨원 | 위안스카이 | ||||||
중화민국 호법군정부 육해군 대원수 | |||||
(초임) | → | 초대 | → | 대원수제도 폐지 | |
쑨원 |
중화민국 비상 대총통 | |||||
(초임) | → | 초대 | → | 광동정부 붕괴 | |
쑨원 |
중화민국 육해군대원수대본영 육해군 대원수 | |||||
(초임) | → | 초대 | → | 대행 | |
쑨원 | 후한민 |
8. 관련문서
- 신해혁명(1911-1912)
- 장전우 사법살인 사건(1912)
- 쑨원-위안스카이 회담(1912)
- 쑹자오런 암살 사건(1913)
- 선후대차관 사건(1913)
- 계축전쟁(1913)
- 중화민국 국회 해산(1914)
- 홍헌제제(1915)
- 호국전쟁(1915-1916)
- 장훈복벽(1917)
- 호법운동
- 1922년 홍콩 선원 파업(1922)
- 영풍함 사건(1922)
- 안직전쟁(1920)
- 1차 직봉전쟁(1922)
- 1차 국공합작(1924)
- 강절전쟁(1924)
- 광저우 상단 사건(1924)
- 2차 직봉전쟁(1924)
- 북경정변(1924)
- 선후회의(1924)
- 국민당의 1차 동정(1925)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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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 신해혁명 · 쑨원-위안스카이 회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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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식 직책명은[2] 후쭝난의 증언.[3] 중화민국에선 헌법 전문에 이름을 새길 정도이고,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헌법 서언에 그를 언급하며, 다양한 매체에서 혁명가라 칭하는 등 중화권에서의 위상이 대단하다.[4] 정확히는 中山樵. 독음은 나카야마 키코리(なかやま きこり)라고도 하고 나카야마 쇼(なかやま しょう)라고도 하는데 인터넷에서는 전자가 더 많이 보인다.[5] 동남아에 가면 쑨원 기념관이 있는게 괜히 있는게 아니다.[6] 물론 중화민국 학자들은 신해혁명이 전 계층이 참여한 전민혁명이었다며 반박한다.[7] 광동어만 가능 했고, 표준 중국어는 거의 불가능 해서 이홍장이 매우 애를 먹었다고 한다.[8] 쑨원은 대륙에서 활동하다가 사망했기에 국부천대 이후 국민당 정권의 대만 탄압에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 쑨원 본인은 일본이 통치하던 대만을 몇차례 방문한 적은 있었다.[9] 여담으로 이때 일부 대만 원주민들은 이른바 본성인들도 결국 외성인보다 좀 더 일찍 대만에 이주한 외래인에 불과할 뿐 아니냐며, 내로남불하지 말란 식으로 정성공 동상에 연기를 피우기도 했다.[10]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칭다오 등[11] 민족주의(民族主義), 민권주의(民權主義), 민생주의(民生主義)를 뜻한다.[12] 장제스가 독재정치를 펼쳤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 당시 중화민국(대만)의 헌법이 상당히 진보적인건 쑨원의 영향 덕분도 있다.[13] 한족, 만주족, 몽골족, 무슬림, 티베트족으로 구성된 중국의 겨레들이 어울리자는 사상이다.[14] 훗날 중화민국의 고위직[15] 다만 레닌도 진짜 마구잡이로 숙청하고 죽이던 스탈린에 비하면 양반이었다.[16] 그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장제스는 몽골을 되찾아야 할 땅으로 인식해 중화민국은 2012년 몽골의 독립을 승인하기 전까지 실제 몽골을 자국 영토로 인식했다. 또한 한국의 독립을 도우며 한편으로는 독립될 한국을 국민당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고 계획했다. 조소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장제스가 사상 및 영향력을 과하게 주입하고 있다."고 미국에 불평을 할 정도였다.[17] 애초에 쑨원은 생애의 대부분을 추하게 몰락 중이던 이민족들의 정복 왕조 청나라에서 보냈다. 당시 조선도 마찬가지였으나, 중국도 외국 열강들에게 온갖 공격을 받던 시기였다. 쑨원이 민족주의를 내세웠다고는 해도 이는 외국의 침략에 맞서는, 이른바 저항적인 민족해방에 가까운 것이었다.[18] 사실 흔히 착각하는 것과 달리 전통적 중화사상은 주변 약소국이 중국을 상국으로 모시면 중국도 그 국가들에게 물질적으로 보상을 해줄 것을 강조했으며, 결코 국수주의로 점철된 이기적인 사상이 아니었다. 쑨원도 전통적 중화사상에 아시아주의적 가치를 더하여 계승했던 것이다. 국내에선 중국 내셔널리즘이나 한족 민족주의를 부정하기 위해 이들을 그저 전근대부터 통용된 중화사상 하나로만 결부시키고, 나아가 동의어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현대의 중국 내셔널리즘은 원래 중화사상의 동의어가 아니라 별개의 개념이다.[19] 실제로 그 시기에 중국 대륙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였던 박은식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일단은 중국과 협력해야겠지만 그와 같이 "만일 중국이 강성해진다면 교만해질 것이며 한반도에 대한 야심이 생겨 중국의 동정은 얻을 생각도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날카롭게 경고했다.[20] 이는 계획으로만 끝났고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뒤인 1953년에 마오쩌둥이 구상하게 된다.[21] 소련이 소비에츠키 소유즈급 전함을 인민해방군 해군에게 공여해 줬다는 아스트랄한 설정(...)[22] 쑨원은 부패한 몰락 왕조를 무너뜨린 엄연한 혁명가인데도 그냥 개신교인이라 넣은 것으로 보인다. 템플 기사단/템플 기사단원과 협력자 문서를 보면 미디어 믹스 등에서 딱히 출연하지 않는데도 기독교인, 우익, 독재자(일부 공산주의자들도 포함) 등이 템플 기사단에 포함된 것을 볼 수 있다.[23] 을축양요 당시 좌초된 프랑스 선박의 선원들을 구하러 나섰다가 자국의 오인 사격을 맞고 조선인 신도들과 함께 순교한 베르뇌 주교를 기리기 위해 조선식 이름인 경일을 붙였다.[24] 원 역사에서는 연방제는 중국을 분열시키는 것이라며 반대했다.(…)[25] 작중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지자 전쟁의 참상을 최대한 막고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조선에서 조직되었다.[26] 조지원 역시 위선일지는 몰라도 손문을 늘 친구라고 부르면서 친해진다.[27] 그와중에 위의 중화사상 모습을 반영하여 한국을 도와주려다가 오히려 중화민국이 경제적으로 곤란해진다.[28] 이때 한국에 망명와서 짜장면을 먹는장면이 되게 불쌍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