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0 11:54:01

한국 현대미술

한국 현대 미술에서 넘어옴
韓國 現代美術

1. 개요2. 전개
2.1. 1900년대~1950년대 근대미술2.2.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국전)2.3. 1960년대 앵포르멜2.4. 1960년대 후반 아방가르드 미술2.5. 1970년대 단색주의와 근대미술의 성숙2.6.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신형상회화론2.7. 1980년대 민중미술운동2.8. 1990년대 신세대 미술2.9. 2000년대 이후2.10. 2010년대
3.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현대 미술가4. 외국 사조를 한국에 처음 들고온 현대 미술가5. 관련 항목6. 둘러보기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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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 항목은 구한말(20세기 전반)부터 현대까지 한국에서 나타난 미술들을 정리한 항목이다.

2. 전개

2.1. 1900년대~1950년대 근대미술

20세기 전반에 한국의 역사적 상황은 아주 다사다난 했던 시기였다. 국권을 일제에 빼앗겼고, 일제 군국주의를 거쳐서 해방과 6.25 전쟁을 겪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미술작품을 떨어뜨려서 생각할 수 없다. 시기별로 살펴보자면, 1900년대 초는 근대화로 인해 서양의 문물이 조선으로 들어왔던 시기이다. 작가들은 서양화를 받아들이면서 이를 전통화에 적용을 시도하였다. 이 시기에 유명한 화가는 서양화풍의 동양화로 양반들의 초상화를 그렸던 채용신이 있다.

이후 일제하에서는 1922년부터 1944년까지 조선총독부가 시행했던 공모전 '선전(鮮展)'이라고 하는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화가들이 발굴되었으며, 일본 유학의 과정 속에서 모더니즘 미술을 접하고 이를 자신의 작품 속에 적용시키던 시기였다.[1] 이 시기 미술은 대부분 공모전이었기 때문에 작품의 형태가 대형화되었고, 일본 심사위원의 이국적 취향에 부합하는 조선의 향토성에 관련한 소재들로 작품들이 이루어진다.[2][3] 대표적 작가는 이인성. 1940년대 전후로는 미술이 반민족친일 선전활동을 하는데에 이용되었는데, 이때 '선전(조선미술전람회)'을 통해 활동한 작가들이 동원되었다. 김은호, 김기창이 대표적이다. [4]

1940년~1950년대는 해방과 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작품들이 소실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 작품들은 매우 귀하다. 북한에서는 변월룡, 이쾌대의 작품처럼 사회주의 리얼리즘적인 작품이 만들어졌으며 남한에서는 서구의 모더니즘적인 미술을 받아들이면서 추상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해방과 전쟁의 시기를 겪으면서 좌우익의 대립 그 안에서의 갈등이 작품의 주제로 표현되었으며, 또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나라에 대한 갈망과 염원 또 한편으로는 좌절 등을 포함하는 미술 작품들이 탄생했다. 박수근, 김환기, 장욱진, 이중섭, 이응노 같은 작가들이 이 시기의 작가들이다.

해방 이후의 모더니즘이 그 이전의 모더니즘과 차별되는 점은, 모더니즘이라는 기법에 '왜색'에서 벗어난 한국만의 '향토성'이 표현되고 있느냐는 담론이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향토성이라는 주제는 이미 일제강점기 선전(조선미술전람회)체제에서도 심사위원들이 심사 기준으로 삼았던 중요한 주제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의 향토성이라는 것은 일본인의 시선에서 일제의 근대화와 대비되어 조선의 원시성을 관음하는 우월적 편견을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발전되지 않은 조선의 농촌 모습을 그린 작품들이 많은데, 이인성의 작품 <가을 어느 날>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향토성[5]이라는 단어는 서양의 기법과 한국의 전통 계승이라는 두 개의 이질적인 코드를 융합하는 과정에서, 일본 회화의 영향[6]에서 벗어난 '한국인만의 특유의 정서'를 모색하는 본연의 모습을 찾게 된다. 오래전부터 한국의 전통적인 미로 주목되었던 해학성의 반영 (이중섭, 최영림, 이만익) 또는 민속적인 소재를 통해서 한국의 정체성을 표출하는 경향 (김기창, 박수근, 장리석)이 해방 이후에 생겨났으며, 이 때를 기점으로 한국의 모더니즘은 60년대까지 근대화와 한국적 정체성, 이 두 개를 놓고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2.2.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국전)

1949년부터 1981년까지 30회에 걸쳐서 문교부[7]의 주최로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이 열렸었다. 해방 이후 미술 문화 진흥을 위해서 정부에서 주최한 전시회로, 일제강점기 선전(조선미술전람회)의 연장선으로 보기도 한다. 정부에서 주관하기 때문에 관전(官展)이라고도 불렸으며, 초기에는 경복궁에서 전시되다가 후기에는 덕수궁에서 열렸었다. 한국화, 서양화, 서예, 공예, 건축, 사진의 7개 분야를 다루다가 나중에 사진과 건축은 별도로 분리되었다.

많은 젊은 작가들이 국전을 통해서 데뷔를 하였다. 하지만 국전은 아카데믹한 사실적인 작품에 상을 주었기 때문에 어느 순간 획일화되었고, 심사위원들의 부패 문제도 얽혀서 1981년을 끝으로 폐지한다. 대신 70년대부터 탄생한 민전이라고 해서 언론사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으로 서서히 넘어가게 된다.

2.3. 1960년대 앵포르멜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새로운 회화운동인 '앵포르멜(Informel)'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앵포르멜은 기존의 기하학적 추상에서 벗어나, 윤곽선이 불분명하여 정해진 형태가 없고 얼룩과 터치가 강조되는 등,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을 비정형(非定型, Informel)으로 표현하는 추상미술을 말한다.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미셸 타피에'에 따르면, 그림의 '재질(텍스쳐)'과 작가의 '행위'를 강조한다는 점이, 앵포르멜과 기존 회화의 다른 점이다. 미국에서는 살짝 바뀌는데, 그림의 '재질'보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작가의 '행위'를 더 강조하여 이를 추상표현주의라고 불렀다.

하지만 한국의 초기 앵포르멜은, 용어는 일본에서 수입하고[8], 실제 내용은 미국 잡지의 영향을 받아 미국 추상표현주의처럼 작가의 '행위'를 중시하였다. 1961년 이후로 파리비엔날레에 참석한 한국대표들이 프랑스의 생생한 현지 앵포르멜을 한국으로 전해오고 나서야 비로소 프랑스처럼 '재질'을 더 강조하는 미술로 나아간다. 이는 1957년 한국최초의 앵포르멜 〈회화 No.1〉을 그린 박서보가 프랑스 유학을 가기 전에는 각종 신문에서 미국 추상표현주의와 같이 그림 작업의 '행위'를 강조하다가, 프랑스 유학 후에는 그의 작품 〈원형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림의 '재질'을 강조하는 쪽으로 바뀌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 가능한 부분이다.[9]

따라서 한국의 앵포르멜은 미국 추상표현주의와 프랑스 앵포르멜 사이에서, 한국의 상황에 맞는 부분만 취사선택되어 둘 중 어느 한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또 다른’ 종류의 전후 추상미술로서의 위치를 드러내게 되었다.

박서보, 김창열, 하인두, 정창섭 등이 주도한 한국식(?) 앵포르멜은 대학가에 폭발적으로 유행하였다. 당시 대학에 들어간 젊은 작가들은 너도나도 앵포르멜 그림만을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국전(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이 열리고 있는 덕수궁 외벽에 대형 회화 작품들을 걸면서 '반(反)국전 운동'을 하기도 했다. 국전이 사실적이고 정적인 모양을 위주로 패턴화된 작품들을 전시했다면, 시위에 참여한 작가들은 감정적이고 격정적인 터치의 추상 대형 작품(앵포르멜)들을 덕수궁 외벽에 보란듯이 전시하였다. 여러 그룹들이 덕수궁 벽을 나눠서 소규모 전시회(벽전 壁展)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2.4. 1960년대 후반 아방가르드 미술

1960년대 중후반, 한국의 예술가들은 미국의 영향을 받아 행위예술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행위예술은, 그림에서 재질보다 '행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추상표현주의에서 더 나아가, 그림을 제외하고도 '행위 그 자체' 만으로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앨런 캐프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서양미술에 대한 정보의 부족은, 역으로 한국만의 매우 독자적인 ‘행위예술’을 낳은 요인이 되었다. 미국잡지 등에서는 이런저런 행동을 했다는 얘기만 적혀 있었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비평해 놓지 않았고, 이것을 읽은 한국예술가들은 미국의 해프닝[10]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만의 해석과 방식을 통해 그것들을 한국사회 비판에 적극적으로 적용해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초기 해프닝인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1967)을 비롯하여 <가두시위>(1967), <한강변의 타살>(1968), <기성문화의 장례식>(1970)에는 그 당시 한국사회의 현실이 깊숙이 반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작품들에서 ‘해프닝(행위예술)’이란 용어와 약간의 형식적 유사성을 빼면 그 어떤 작품에서도 미국적인 냄새를 맡을 수 없다.

<가두시위>는 국립현대미술관을 짓자는 염원이 담겨 있거나, ‘좌상’만 그리는 ‘국전풍’을 풍자하고 있으며, <한강변의 타살>은 문화를 빙자해 돈을 챙기는 사기꾼과 문화를 빙자해 부정 축재하는 국전 심사위원들을 향해, 질타의 예리한 칼을 휘두르고 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들은 ‘현실주의자’였다. 전위(아방가르드)의 허울을 쓰고 허공에 붕 떠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을 부르짖거나,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직접 자신들의 피부에 와 닿는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들의 언어와 행동을 통해, 사회적 문제와 그 폐해의 심각성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11] 최근에는 초기의 '해프닝'과 구별하기 위해, 70년대 중후반에 한국에서 펼쳐졌던 행위예술들을 '이벤트(event)'로 정의하기도 한다. '해프닝'은 우연성이 들어가지만, '이벤트'는 1회성 사건이라는 특징이 있다.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김구림, 이건용, 성능경, 이강소, 이승택 등의 행위예술가들이 이 시기에 활동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행위예술가들의 이러한 급진적인 행동들이 현체제를 흔드는 매우 위험한 것이라고 보았으며, 이에 대한 억압으로 70년대 중반에는 대부분의 행위예술가들이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된다.

이 뿐만 아니라 60년도 후반에는 미술표현에 대한 다양한 시도들이 존재하였다. 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 등장한 AG(아방가르드협회)나 ST(Space and Time) 등의 여러 예술가 그룹들은 많은 이론들을 서로 공유하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실험들을 하였고, 이러한 과정속에서 새로운 작품들이 계속해서 등장하였다. 당시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에 맞서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청년문화들이 형성이 되고 이것이 한국미술의 원동력이 됐던 시점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중요한 작가는 곽인식. 일본에서는 모노하(物派)가 1960년 후반에 등장하면서 하나의 중요한 이슈가 되었지만, 곽인식은 이보다 8년 앞선 1962년에 물질에 대한 실험을 전개하였다. 곽인식의 1963년도 작품 〈작품63〉에서 볼 수 있듯이, 유리, 황동, 철이나 점토, 종이 등 각 물질에 대한 탐구를 통해 이를 작품화했고 이후 후배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반면 주류 바깥에서는 물질 탐구를 넘어서는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당시 곽인식이우환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작가들이 '물성(물질)'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이승택은 이를 뒤집어서 물이나 바람과 같이 구체적인 형태나 형체가 없는 것들도 미술작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의문을 품었다. 즉 세계에서 가장 먼저 '물성'이 없는 '비(非)물질'을 소재로 작품을 시도하였던 것. 이는 당시 비주류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가, 이후 5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야 '비물질(비물성)'을 개척한 세계적인 작가로 평가받게 된다.

2.5. 1970년대 단색주의와 근대미술의 성숙


일찍이 단색조의 시조격으로는 곽인식[12]이 있었으며, 이후 박서보가 1973년경 일본에서 모노파 이론가로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하던 이우환과 더불어 연필로 젯소를 지워내면서 그리는(비워내기) 형식의 <묘법> 시리즈를 발표하면서 단색화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후 단색화운동을 자신의 출신학교인 홍대 인맥을 기반으로 전개해 나간다. 단색조 화가들의 국내에서의 결속은 박서보를 매개로 한 국제적 활동의 보장에 의해 유지되었고,[13] 국제전 참여 작가의 대다수가 이들 단색화 화가들인 상황에서 단색화 회화는 자연스럽게 한국을 대표하는 회화양식으로 이해되었다. 1975년에 일본 동경화랑에서 열린 〈한국 5인의 작가-다섯가지 흰색〉전에서 백색의 단색화가 주목받았고, 이후 단색화는 70년대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경향으로 정착되었다. 박서보, 정상화, 정창섭, 하종현, 윤형근 등이 이 시기 단색조 미술 경향을 보여주며, 그 전 세대인 김환기, 이응노 등도 해외에서 단색화를 그렸다. 이 중에서도 김환기는 자기만의 독창성과 예술성으로 그 가치가 가장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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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1976), "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당", 197 x 290.9cm, Oil on Canvas
한편, 박서보, 하인두, 정창섭을 비롯한 몇몇 단색조 작가들은, 당시 정부의 입김으로 민족기록화와 같은 프로파간다적 구상회화를 병행하였는데, 이때문에 단색조 운동은 한국 모더니즘의 모순을 표상한다고도 평가받는다. 가령 박서보<묘법>이 처음 발표된 1973년에는, 박서보의 '민족기록화 경제편' 역시 완성되고 있었다. 이 때 만들어진 박서보의 <수출선박>(1973)을 보면, '체제에 저항하기 위해서 침묵했다'던 그의 말과는 다르게, 단색주의를 역설하면서도 군사정권의 치적을 높혀주는 그림을 동시에 그리고 있었던 이중성을 볼 수 있다.[14]

그 외에 그 시대에 단색조의 방식을 채택하면서 현실 정치와 유리되지 않은 이도 있었는데, 검열된 신문지를 검정 볼펜으로 지워 단색화를 만들었던 최병소[15]와 두 개의 검은색 기둥으로 군사정권에 대한 울분을 표현했던 윤형근이 대표적인 예. 따라서 당연히 이들[16]을 하나로 합쳐서 부르면 안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유신정권에 의해서 작품활동이 끊길까봐 침묵하는 것까지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당시 미술계의 권력을 잡고 군사정권에 대한 침묵으로 동조했었던 일부 단색화 화가들이, 지금에 와서는 사실 '침묵으로 저항'했다고 각종 매체에서 뻔뻔스럽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 문제.

한편 1970년대는 사실상 한국 근대미술 결실의 시기이다. 젊었을 당시 서양화풍을 받아들이기에만 급급했던 일제강점기 시절의 근대 작가들이, 노년기에 접어든 70년대에 이르러 이윽고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완성시켰다. 사실화가인 도상봉이 텁텁하고 담백한 화면의 정물화들을 그려내고, 오지호가 특유의 청색으로 과감한 붓자국의 해변풍경을 그렸으며, 박고석의 굵은 선의 산그림과, 산수화의 준법을 응용해낸 이대원의 점묘와 선묘로 구성된 농원시리즈, 김흥수의 누드와 하모니즘, 천경자의 미인도, 박생광의 후기채색화, 전혁림의 색면적 추상-풍경화, 이승조의 추상 환영주의, 사물에서 이미지-서사성의 귀환을 시도한 김원, 수행적-추상 언어로서 물방울을 그려 환영성을 유희한 김창열 등, 근대미술의 계보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매체의 재창안을 시도했던 시기다.

이 시기 해외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도 있었는데,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과 일본 모노파의 창시자 이우환이 대표적이다.

2.6.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신형상회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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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훈(1974), "This is a Stone 7411", 190 x 400cm, Oil on Canvas.
1970년대 초중반, 김창열, 김홍주, 고영훈, 김원 등이 한국미술 계보에서 추상과 환영성을 자가비평하는 이미지의 귀환을 추동했고 곧이어 포토리얼 회화가 한국에도 유행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70년 후반 ‘신형상’ 회화의 출현과 더불어 모노크롬 계열을 겨냥한 반추상적 비판들이 평론가 일군에 의해 전개되었다. 박서보가 미협 회장을 역임한 1977년부터 미협 국제전 출품에서 구상화가 배제된 것이 그 계기였다. 가령 1979년 김윤수는 추상주의가 현실과 단절되어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 감각적 조형미만 추구하는, 개인주의자본주의 체제에서 사회적 억압과 총체성의 상실에서 나온 무기력한 자유라고 비판했다. 한편 국전 체제의 붕해와 미술시장의 형성은 작가가 대중 관객을 염두에 두게끔 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1983년에 이르면, 형상(구상)과 표현을 중시하고 사회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리얼리즘 미술과 형상회화가 크게 떠올랐다. 이를 이미지의 귀환과 더불어 서사의 복권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영미권의 하이퍼 리얼리즘에 영향을 받아, 극도의 수공적 노력을 통한 대상의 치밀한 묘사를 특징으로 하는 극사실회화가 이 시대의 특징이다. 한국의 극사실회화는 '전후 세대의 사실주의란', '형상 78', '사실과 현실', '시각의 메시지' 등의 소그룹전에 참여하면서 현대생활의 단면, 도시 환경, 자연물 및 인공사물 등을 작품의 주제로 끌어들였다. 당시 극사실회화는 여러 차례 계속되는 '민전'[17]의 수상들을 통해서 미술계의 표면으로 떠올랐다.

한국의 신형상회화는 자연 및 인공의 소재를 재현적 혹은 포토리얼리틱하게 그려내면서 대상을 부각시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사진처럼 사실적인 형상을 보여주면서도 그것을 화면에 근접해서 끊임없이 대상을 반복적으로 쌓음으로써, 공간적 깊이감이 제거되어 단색화와 비슷한 평면성을 보여주는 이중구조를 가지기도 한다. 즉, 당시 유행했던 '물성의 연구' + 영미권의 '포토리얼리즘' + 단색조 및 전후 추상주의 계보 + 후대 '민중민족’적 정치적 미술 등의 특징이 한데 섞인, 과도기적 미술 양상이라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작가에 주태석, 고영훈, 이석주, 김창영, 서용선, 김창열[18]등이 있다.

2.7. 1980년대 민중미술운동

파일:신식독.jpg 파일:신학철모내기.jpg
박불똥(1990),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reproductive original, 49.4 x 50.7cm 신학철(1987), "모내기", Oil on Canvas, 162.2 x 112.1cm

1970년대 후반을 거치면서 신형상회화가 새로운 토대를 마련하자, 1980년경 평론가 일군이 모노크롬 계열이 형식적인 사회와의 통합 대신 사회에 기생하는 형식주의적 장식 정도로 전락했고, 미술의 실천에서 중요한 것은 순수 형식주의가 아닌 역사성과 사회성임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신형상회화의 급진화를 추동한 셈이다. 한창 5.18 민주항쟁을 진압한 신군부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언론통폐합을 언명할 즈음이었다.

윤범모, 오윤, 주재환, 임옥상, 신학철 등은 유채 뿐만 아니라 포토몽타주 및 사진콜라주 그리고 팝아트적인 새로운 경향을 선보였다. 이들은 신문 콜라주, 포토 몽타주, 붓 스트로크 등을 통해 조형적 조악함을 드러내어 엘리트-기술주의 행태를 조롱하고 극복하는 다다적 방식을 채택했다. 현실 정치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믿은 이들은, 학생-노동운동 참여 뿐만 아니라 시민미술학교에서 노동자들에게 미술교육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노동현장에 나아갔다. 판화와 걸개 그림 등을 통해 ‘민중’과 밀착하고(생활미술운동), 노동권 개선, 생활혁신, 독재정권 타도, 민주주의 실현, 남북 평화통일 등을, 한편으로는 반일(역사 바로잡기)-반미(반자본-반개방)-친북적인(순혈 민족주의) 방향성을 통해 당대 반정부 식자층이 설정한 한국의 역사적 ‘실패’ 서사를 극복하고자 했다.[19] 이러한 민중민족예술은 1989년 4월, NL 계열 민중미술가 200여 명이 그린 9.1m의 초대형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1989)를 서울대에서 전시하고, 민미련건준위 공동대표 홍성담이 동년 8월에, 한양대에서 경찰에 의해 소각당한 이 걸개의 슬라이드를 평양세계청년축전에 출품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대표 단체로는 '현실과 발언', PD 계열의 '서울노동자문화예술단체협의회', NL 계열의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건설준비위원회'가 있었으며, 작가로는 오윤, 신학철, 홍성담, 강요배, 이종구, 최병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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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순(1986), "현모양처", 91 x 110cm, Acrylic on Canvas

한편 민중미술운동으로부터 1세대 한국 페미니즘 미술(윤석남, 김인순 등) 경향이 나타나거나, 1세대 한국 LGBTQ 예술 운동(임근준 등)이 파생되기도 하였다. 민중운동이 ‘민중’을 순결을 잃은 여성에 빗대는 등 여성혐오(misogyny)적 세계관을 계승하고 있었고,[20] 반미-반개방 성향에 따라 서구 성소수자의 분류-정체화 체계를 혐오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양태는 독특했다. 또한 한국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을 통해 '우리만의 특징적인 미술이 필요하지 않나'는 것이 학계에서 계속 거론되었다. 이런 움직임 속에 1980년대에 수묵화의 붐이 일었다. 또한 그 동안 채색은 왜색이라고 생각하여 배척하고 있었는데, 한국적인 색채에 대한 고민 속에서 채색이 다시 재발견되기 시작하였고, 먹과 채색을 섞는 '채묵'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작가로 박생광, 박노수, 이숙자 등이 있다.

2.8. 1990년대 신세대 미술

1990년대 이후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민주화 정권이 자리를 잡으면서 민중 미술의 존재 의의도 많이 줄어들었다. 민중 운동의 퇴조, 냉전구조의 붕괴와 국제사회의 상황 변화, IMF 이전까지의 물질적 풍요로움도 이에 영향을 끼쳤다.[21] 특히 88 서울올림픽 이후, 90년대에 급격하게 불어 닥친 세계화 열풍과 해외여행자유화, 시장개방 추세에 발맞춰 외국작가의 국내전과 국내작가의 해외전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때 한국의 화가를 해외에 소개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을 한국으로 들여오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박이소(박모)이다.

안정된 경제생활, 컴퓨터를 비롯한 통신 매체의 급속한 발달과 보급, 다수의 호불호가 주제의 중심이 되는 대중문화시대에 역으로 다시 개인이 부각되었으며, 서도호처럼 ‘다수 속의 소외된 개인의 정체성’을 다루기도 하고, 최정화처럼 일상 속의 ‘익숙하고 평범한 개인’에 초점을 두고 있기도 한 것이 특징적이다. 또한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80년대 후반에 유학을 간 세대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일반 대중들의 미술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눈이 높아지고 인식의 폭 또한 그만큼 넓어졌다. 이들의 높아진 안목과 다양한 취향 차이는 그 동안 서구현대미술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뒤늦게 따라하는 관습에 비판적이었으며, 이는 한국 현대미술의 방향을 보다 복잡한 양상으로 끌고 가게 되었다. 그로인해 기존 미술교육이나 관습과는 다른 균열들이 생겨났고, 아울러 광주비엔날레와 휘트니비엔날레 한국전 등을 통해 세계현대미술의 흐름과 양상을 이 땅에서 직접 목도하면서,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세대는 그 모든 것을 스폰지 마냥 빨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강익중, 이불 등이 이 시기 비엔날레에서 활약한 작가들이다.

90년대 신세대 작가들에 의해 형성된 새로운 미술은 기성세대가 지닌 기존의 미술어법이나 관행을 가로질러 전복과 위반의 제스처를 보여주는, 매우 발랄하고 재치있는 탈권위 작업이었다. 그러나 아이디어 위주의 작업인 동시에 과도한 사적취향과 B급 감성, 컬트주의 그리고 모든 것을 섞어 놓은 ‘짬뽕’과 혼성취향, 의도적인 감성의 위계 혼란, 부조리의 미학, 과도한 나르시시즘과 권태와 허무주의 등으로 범벅져 있기도 했다. 거기에는 또한 냉소주의, 무관심, 도덕적 전망의 결여, 편집적 자기애, 비판성의 결여, 과도한 감각주의, 개념적 사고의 함량미달 등의 비판도 붙어다녔다. 특정한 문화현상이나 장르에는 깊이 몰입하거나 열광하면서도, 다른 문화에 대해서는 냉소적으로 대하는 배타적 나르시시즘을 위한 문화소비가 문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매니아문화는 미술을 키치적(B급 감성), 페티시즘적 성향으로 더욱 강하게 엮어가면서 새로운 댄디즘을 형성하기도 했다.[22] 만화 형식으로 지나간 일상을 묘사한 최호철, 동양화 기법으로 해외 유명인들을 그린 손동현, 유명한 캐릭터들을 이용하여 새 캐릭터를 만들어낸 이동기 등이 B급 감성으로 미술을 전개한 작가들이다.

한편 신기술의 영향을 받은 미디어 아트 역시 한국미술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 시작은 백남준이 점차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그가 시도한 비디오아트가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 계기였다. 사실 90년대 전부터 백남준의 작품에 영감을 받은 박현기가 독립적으로 다양한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미디어 아트가 주류 미술계에 퍼지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광주비엔날레 등의 국제 현대미술 전시회가 개최되면서부터 이다. 민중미술 계열의 작가들을 중심으로 비디오아트 등이 시도되었으며, 이후 미디어 아트의 영향이 점점 강해지면서 한국미술은 점차 혼성예술, 종합예술화 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장영혜, 양아치 같은 작가가 대표적인 미디어 아티스트들. 특히 작가뿐 아니라 기획자 등 까지 넓혀 보면 한국에서 백남준의 영향력은 어찌보면 70년대 추상미술이나 80년대 민중미술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대표 큐레이터인 김선정, 김홍희 등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23]

2.9. 2000년대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는 빠르게 신자유주의 경제에 맞춰 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미술계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가장 큰 변화는 미술관의 변화였다. 서구에서 프랭크 게리가 건축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며, 미술관의 역할과 지위가 변화하게 된다. 역사를 기록하고 민족의 정수를 전시하는 미술관의 역할이 약화되면서, 2000년대의 풍경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투기적 자본의 범람으로, 미술이 하나의 투기적 재화로 다뤄지게 되면서, 미술 시장이 미술 담론과 유리되었다.

고가로 형성되는 '과거'작품들에 대한 반발로, 기존의 '일상을 주제로 한 미술'과 '미디어 아트'는 젊은 작가들에게 계속해서 관심을 받으며 성장하고 있었고, 스마트 폰의 보급으로 전문가의 영역을 넘보는 일반인들의 관심이 늘어남에 따라 권오상, 정연두처럼 미대를 나온 젊은 작가들이 사진으로 미술 작품을 내는 등 기존에 사진을 무시했었던 관행에서 벗어나 사진 작가가 더 대우를 받는 그러한 상황, 즉 사진과 그림의 권력관계가 뒤바뀌기도 했다. 또한 2000년대는 인터넷으로 서양 미디어를 실시간으로 받아들임에 따라, 한국 사회가 성적 표현을 보수적으로 검열하는 것에 대한 예술계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여성들의 사회적 참여 증가에 따라 이불의 활동처럼 페미니즘을 반영한 작품들이 만들어졌으며, 낸시랭처럼 팝과 엔터테인먼트을 동시에 하는 예능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작품들도 이 시기에 벌어졌던 일들이다.

미술을 놀이의 대상으로 삼는 재현적 '극사실주의' 메타(meta) 회화와, 사람간의 관계에 의미를 두고 있는 '사회참여 미술' 역시 이 시기에 유행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의 특징이기도 한데, 하지만 이 시대를 동시대 미술이라고 딱 특정지어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용어의 뜻을 잘 파악해야 되는데, 일단 모더니즘은 '재현적 미술에서의 탈출', 아방가르드는 '이것도 미술인가에 대한 담론성', 포스트모더니즘은 탈-순수미술(탈-모더니즘), 동시대 미술은 그 정의상 '지금 현시대에 유행하고 있는 가장 새로운 미술'을 말하는 것으로, 그 전까지 예술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있었는데 최근에는 예술과 '삶'과의 관계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는 미술에 주목하고 있다. 따라서 '동시대 미술'은 예술을 위한 예술에서 벗어나 '삶과 예술간의 관계'를 생각해보는 것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90년대부터, 포스트모더니즘 미술과 혼재되어 있었다고 봐야되며 2010년에도 전세계적으로 계속되고 있는 미술이기 때문에, 2000년대를 따로 특징지어 '동시대 미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2000년대를 대표하는 용어로서 과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국미술계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음에 따라서, 한국미술을 더이상 하나의 정체성이나 시대정신으로 묶을 수 없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말하는 미술이란, 주류 보다는 비주류와 다양성을 중요하게 보는 미술이고, 모더니즘이 추구한 순수 미술 보다는 기존 2차원적 평면에서 벗어나 상상이나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미술이며, 다수의 지배적 유행의 미술 보다는 개인 각각의 차별화된 철학과 아이디어에 초점을 맞추는 미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2000년대 이후의 한국 미술은 하나의 정체성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시대에 '돋보였던 개인의 활동'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것이 최선이 된다.

2.10. 2010년대

2010년대 이후의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만든 신생공간을 중심으로 소규모로 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 세종문화회관 지하에서 열린 <굿-즈> 행사(공식 트위터)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서울바벨> 전이 주목#을 받았다.

3.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현대 미술가

※세계에서 자신만의 사조를 처음 만들어낸 작가들만 해당. 외국 사조를 한국으로 들여와 자신의 스타일로 작품 활동한 작가들은 목록에서 제외.
* 백남준 :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 이우환 : 일본 모노파 운동의 창시자.[24]
* 곽인식 : '물성' 탐구의 선구자.[25]
* 이승택 : '비물질' 설치 조각의 선구자.[26]
* 박생광 : 한국적 수묵채색화의 새로운 장르를 구축해낸 거장.[27]
* 오윤 : 민중미술의 대표작가.[28]
* 박현기 : 동양적 미니멀 비디오아트를 만들어낸 대부.[29]

4. 외국 사조를 한국에 처음 들고온 현대 미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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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담

  • 많은 인구가 대학에 진학하는 한국에서는 미술대학에서 한해 배출되는 졸업자수에 비해 전업작가가 되는 예술가 수가 현저히 적다. 이는 세계적 현상이나 한국 사회의 특수성 속에서 더욱 증폭되어 나타난 문제이다. 인구 감소와 대학구조조정과 맞물려 그나마 있던 예술기관도 불황에 몸집을 줄이거나 문을 닫아가고 있다.
  • 2016년 초 예술 그룹 뮌(최문선, 김민선)은 아트솔라리스 Artsolaris.org를 통하여 한국 현대미술의 현실을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보여주었다.# 뮌은 한국미술계 내에서 공공적인 부분, 즉 공적자금(세금)이 투입된 전시들. 예를들면, 비엔날레, 공립사립미술관 전시, 각종 공공 프로젝트 등에서 데이터를 수집하였다. (갤러리 등 사적인 영역은 제외) 944미술인, 879전시(2016년 11월 현재)를 분석한 결과, 김선정,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 같은 기획자들을 중심으로 박찬경, 배영환, 안규철, 양혜규, 임민욱, 정연두, 김홍석 등의 작가들이 공공기금이 투입된 전시에서 많은 기회와 네트워크를 차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데이터는 현재에도 계속 업데이트가 되고 있으며, 홈페이지를 자세히 읽어보면 한국 현대미술안에서 공공성과 관련된 분야에 국한하여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한 것을 알 수 있다. 예술이 사회안에서 존재하며, 그것의 사회적 역할을 생각해볼때 공공영역 안에서의 인적 네트워크과 헤게머니의 위치를 분석하는 데에는 어느정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한쪽에서는 미술을 패션 디자인처럼 띄워보려고 애썼다. 유명 기업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을 하려 노력하거나 방송에 출연해 인지도를 쌓으려는 작가들이 등장했다. 아트 스타 코리아 같은 케이블 프로그램의 경우는 슈퍼스타K 같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포멧을 적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난해하고 고민해야하는 미술은 대중의 인기를 얻을 수 없었다.
  • 정부에서는 예술가들을 지원한다고 여러 정책들을 펼치고 있다. 다만 길게 보고 가는 사업이 없고, 1년 단위의 예산 처리 주기에 맞춰서 돌아가는 부분이 있다.


[1] 미국, 일본도 그렇지만, 한국 모더니즘 미술은 외국의 것들을 맥락없이 한꺼번에 수입해 오는 모습을 보였다. 즉 순차적으로 사조별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뷔페식으로 한번에 들어왔다는 것. 이에 따라 어떤 작가는 인상주의, 어떤 작가는 야수파 같은 식으로 자기 입맛에 따라 사조를 선택해 작업했다. 때문에 그 사조의 원래 의미까지 따른 경우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외형상 보이는 양식을 따라하는데 그쳤다.[2] 사전적인 의미에서 향토색은 '예술에 반영되는 그 지방의 기후, 색채, 민속, 사상, 감정 등의 특색, 즉 지방색'을 의미한다. 그런데 일본은 일제강점기 식민지의 낙후된 현실을 '향토'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식민정책에 이용하였다. 일본 국내적으로는 국민들이 사회 현실문제 대신 이국 취향에 관심을 돌리게 함으로써 국민들의 불만을 외부적으로 해소하고 독재체제를 공고히 하였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식민지 국민들에게 그들이 문화적으로 낙후되었다는 사실을 주입시킴으로써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고 문화적 식민주의를 강화하였다.[3] 보통 오리엔탈리즘 사상은 서구 유럽인들이 동양을 바라볼 때의 사고방식이지만, 일본은 스스로를 서구 열강과 동일하다고 생각했으며 또한 자연스레 그들의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바로 이런 오리엔탈리즘, 즉 서양과 동일한 생각을 식민지 조선인에게 투영한 것이 향토성의 강조이다.[4] 김은호는 1940년대 전부터 자진해서 친일미술활동을 했을 정도로 열심이었으나, 김기창은 그래도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이 급해지자 '압박이 심해서 어쩔 수 없이 출품했다'고 변명도 하고 '나중에 한국화단에서 이런 일은 다시 해서는 안 될 것'이라며 사죄를 하기도 했으니, 둘을 똑같이 바라보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어쨋든 이들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어 있다. 위키백과에 게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 문화/예술 항목을 참고.[5] 해방 이후 '민족성', '민족 미술' 등으로 대체된다.[6] 일본 회화(일본화)의 특징은 호분과 암석을 갈아 아교에 녹여 물감을 바르는 방식으로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색감이 특징이다. 이인성이나, 김은호와 그의 제자 김기창, 장우성 등이 이런 방식의 그림을 그렸다.[7] 처음에는 문교부에서 하다가, 나중에는 문화공보부, 국전이 끝나갈 무렵에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주관하였다.[8] 미셸 타피에의 이론은 1956년 일본잡지『미즈에』에 실린 글을 통해 1958년 말에 한국 작가들에게 소개된다.[9] 논문: 한국 앵포르멜 미술의 ‘또 다른’ 의미Another Meaning of Korean Informel 윤난지 (미술사학보 / 2017/ no.48, 145~148 page.)[10] 앨런 캐프로는 자기의 행위 예술을 '해프닝'이라고 말하였다. 추상표현주의에서 인간의 의도가 들어가지 않는 '우연성'을 강조하듯이, 앨런 캐프러는 자신의 행위 예술에 '우연성'을 강조하여 명칭을 정했던 것.[11] 논문: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역사와 비평 History and Criticism on Korean Avant-Garde 윤진섭 (미술사학보 / 2017/ no.49,12~13 page.)[12] 여러모로 곽인식은 선구자임에 틀림없다. 단색화의 경우에는 1950년대 미국에서 유행했던 모노크롬의 영향을 받아 이를 이미 1960년도 초반에 시도했었으며, 이와는 별개로 '물성 연구'는 세계 최초로 봐도 무방하다. 곽인식만의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 '물질 그 자체'의 특성을로부터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작업은, 비슷한 작업인 이탈리아의 '아르테 포베라'나 일본의 '모노하 운동' 보다 5~10년 앞선 것이었다.[13] 박서보는 1970년부터 1977년까지는 한국미협의 부이사장 겸 국제분과위원장을, 그리고 1977년부터 1980년까지는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화가로서 실력을 인정받는 길이 '국전'과 같은 공모전에서의 입상과 '국제전' 참여 정도로 제한적이었던 당시 화단 상황에서 이러한 등용문을 장악하고 있던 그의 지위는 절대적이었다.[14] 논문: ‘한국적 모더니즘’의 창안 :1970년대 단색조 회화 / 권 영 진 (美術史學報 제35집)[15] 2018년에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에 '유신 정권에 저항'하는 의미가 있다고 말하였으나 #, 2021년 인터뷰에서는 70년대 유신에 대한 저항 보다는 '나를 지우고 정화'하는 의미라고 말을 바꾸었다.#[16] 저항 의식이 있었던 최병소, 윤형근 등과 해외파였던 김환기, 이응노 등은, 백색의 단색화를 그렸던 이들과 같은 취급을 해서는 안된다는 뜻. 백색 단색화를 그린 대표적 인물에는 박서보, 이우환, 정상화 등이 있다.[17] 민간 언론사에서 주관하는 전람회.[18] 김창열의 물방울은 추상이 된 이미지/추상 언어로서 이미지일 뿐, 극사실적 재현이 아니었다.[19] '모내기'에 대한 신학철의 발언을 통해 당대 민중민족미술이 추구한 가치를 요약할 수 있다. "통일을 가장 싫어할 것 같은 군사독재정권이고, 미국도 일본도 우리의 통일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도 세상이 바뀌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또 통일된 세상에서는 38선의 철조망과 군사무기도 없어져야 할 것들이다. 이런 저해요소를 쓸어내고 모를 잘 심어서 거름을 주고 논을 메고 벼를 잘 자라게 하여 가을에 풍년이 되어 벼를 베며 돌밥을 먹으면서 즐거워하는 마을사람들의 모습을 통일된 세상의 즐거움으로 나타내고자 했다."는 언설은 ‘통일’이라는 유토피아적 가치를 설정하고, 한국의 ‘실패’를 추동한 군부독재, 외세, 부르주아를 가장 토속적인 방식으로 정화하고자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89년 문익환 방북 직후의 공안정국 가운데, 신학철은 ‘모내기’ 작업으로 인해 국보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3개월간 구속되었으며, 10여 년간 법정투쟁을 겪어야 했다. 결국 상고심에서 1-2심의 무죄 판결과 대조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신학철은 유엔인권이사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20] 이러한 퇴행적 경향은 30여 년이 지난 2010년대에도 여전했는데, 홍성담의 <골든타임- 닥터 최인혁, 갓 태어난 각하에게 거수경례하다>는 박근혜의 출산 이미지를 조악하게 표현함으로써 ‘출산’으로 상징되는 여성성을 저질스럽게 신화화 하고 있다.[21] 이에 민중 미술 작가들은 독재정권 타도나 통일 실현 같은 주제보다 실질적인 인권이나 개인적인 관심사로 작업 방향을 돌리게 된다. 굳이 따진다면 NL보다 PD 성향이 강해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여전히 NL스러운 작업을 고집하는 작가도 많다.[22] 199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다양성 (박영택) #[23] 김선정 작가의 경우 1991년 미국 미시간주 크랜브룩 미술대학원 졸업 후 백남준의 소개로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큐레이터 인턴십 과정을 거친 적이 있고, 이 때 만난 동료 큐레이터와 작가들이 그의 막강한 국내 외 '인적 네트워크'의 기반이 됐다.# 김홍희의 경우 뉴욕 한국문화원에 근무하는 남편을 통해 바버라 툴 여사를 소개받았고, 툴 여사가 키친아트센터에 초대해 백남준을 알게 된 뒤 미술 큐레이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24] 정확히는, 세키네 노부오가 모노파의 창시자이다. 이우환은 이 작가를 평론함으로써 모노파 탄생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다. 함께 모여 모노파 운동을 시작했고, 사실 이우환의 평론이 없었다면 세키네 노부오 혼자만으로 모노파 운동이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므로, 이우환을 창시자 중 한 명이라고 볼 수 있는 것.[25] 비슷한 사조인 '아르테 포베라'나 '모노파'가 생기기도 전에 이미 '물성'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돌이나 유리, 종이 등은 '물질 그 자체'만으로도 미술작품이 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 심지어 곽인식은 이우환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때문에 최근에는 곽인식을 이우환 만큼 대접해줘야 된다는 평단의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26] 곽인식이 '물성' 탐구의 선구자라면, 이승택은 '비물성' 탐구의 선구자이다.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바람이나 물 등을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했으며, '물질의 사라짐'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작품을 태워 없애버리기도 했다. 당시에는 평가받지 못했으나, 최근들어 '세계 미술사를 다시 적어야 된다'거나, '이승택 전후로 한국미술사를 다시 기록해야 된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는 중이다.[27] 박생광 이후 수많은 작가들이 박생광의 영향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하인두는 박생광의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으며, 이후의 한국수묵채색화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28] 모노크롬은 외국에서 들여온 것이지만, 민중미술은 외국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고,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사조이기에 이 목록에 추가. 한국에서는 민중미술하면 '오윤'을 떠올리지만, 외국에서는 작품과 스토리만 놓고보면 신학철의 작품을 더 높게 보는 듯하다.[29] 기존의 비디오아트가 기술적인 면에 촛점을 맞춘 것에 비해, 박현기는 기계를 통해 반대로 탈-기계의 정신을 표현하였다. 이는 그의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비교하자면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는 현란한 움직임이 있지만, 박현기의 비디오아트는 움직임이 없고 정적이다. 즉, 티비 화면을 단순한 하나의 캔버스로 사용한 것. 이를 통해 '기계(티비)'는 '기계로 표현되지 않고', '하나의 자연물(보통 돌이나 물)'로 표현된다.[30] 박서보 본인은 자신의 앵포르멜을 미술사적 계보와 무관하게 자생적으로 추동한 것으로 설명하지만, 전년도의 작업(닭, 1956)과 비교해볼 때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평가된다. 따라서 다다 운동을 계승하여 미적 형식 자체를 재창조하고자 했던 앵프로멜 경향과 달리, 미술사적 계보에서 탈궤한 한국 앵포르멜 미술은 외연적 모방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결점이 있다.[31] 모노크롬 미술과 단색화(단색조)를 분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의 단색화 초기 작품 〈묘법〉은, 미국 화가이자 미니멀리스트인, '사이 톰블리'의 모노크롬 작품들과 유사하다는 것인데, 사실 유사성으로 치면 스웨덴의 여성 화가 힐마 아프 클린트가 시초고, 초현실주의 초기에는 오토마틱 드로잉이 유행을 타기도 했다. 박서보의 묘법은 연필로 하여금 젯소를 지워내는 전복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독창성을 인정받는다. 따라서 모노크롬 미술을 재창안, 탈식민적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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