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5 03:44:55

김구림

Kim Kulim, 金 丘 林
1. 개요2. 상세3. 작품 설명
3.1. 태양의 죽음3.2. 1/24초의 의미3.3. 현상에서 흔적으로3.4. 매스미디어의 유물3.5. 피아노 위의 정사3.6. 걸레
3.6.1. 행위예술 〈걸레〉3.6.2. 판화 〈걸레〉
3.7. 음과 양 시리즈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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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유행에 따라가지 마라
남들이 작가라고 하든 말든, 작품이라고 생각하든 장난이라 생각하든
자기 소신껏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이거야
나도 과거에는 내가 무슨 작품을 해놓으면 '저게 무슨 작품이냐? 되도 안되겠다'는 이런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래도 나는 내 나름대로 "내가 하고 싶어 했다. (내가) 한 건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 내 것이 작품이 아니라고 해도 좋다"
하고 그런 식으로 해 나온 사람이예요. 나는.
나는 위축 안돼요. 스프링이 있으면은, 조금 누르면 조금 튀어나오고 많이 누르면 많이 튀듯이
남들이 그런 걸 욕을 하고 (그러면), 더 하면 더 튀어버려요. 나는.
국립현대미술관(MMCA)와의 인터뷰 중.
(1936년 8월 22일-)([age(1936-08-22)]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1세대 행위예술가이자 전위예술가.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초.[1]

한국 최초의 전위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 1969〉, 한국 최초의 대지미술 〈현상에서 흔적으로, 1970〉, 한국 최초의 메일아트 <매스미디어의 유물, 1970>, 한국 최초의 일렉트릭 아트 〈공간구조 69, 1969〉 등 시대를 앞서간 아방가르드(전위) 예술의 선구자.

국내 평단에서는 항상 비주류에 비판만 받던 아웃사이더였으나, 해외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가로 알려져 있다. 2012년,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은 잭슨 폴록, 데이비드 호크니, 앤디 워홀, 이브 클랭, 쿠사마 야요이 등과 현대미술을 이끄는 세계적인 예술가 20인 명단에 김구림이라는 이름을 올려놓았다.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 한국인의 이름이 올라간 건 백남준 이후로 두 번째.

2. 상세

경북 상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지역에서 유명한 한의사였다고 한다. 대구에서 학업을 하다가 우연히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라이프》지를 보고 충격을 받아서 전업 전위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6.25 전쟁 당시 군대에 징집되어 군악대에 배치되었는데, 약이 없어 사람들이 날마다 죽어나가고, 시체를 아무데나 내동댕이 치는 모습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 <태양의 죽음, 1964>, <묘비> 등 초기 작품을 만들었다고..

부산에서 개인전을 하기도 했으나 첫날 오픈 때 어떤 화가가 '대학도 못나온 사람이 미술가를 한다'며 작품에다 컵을 던졌다. 이 때 김구림은 서울로 가야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서울로 간 그는 2년동안 유영산업의 기획실장을 맡으면서 CF를 제작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내 돈으로 작품을 찍어보는게 어떨까는 생각에 〈문명, 여자, 돈〉이라는 첫 미디어 작품을 만든다. 그 유명한 〈1/24초의 의미〉도 이 때 만들어진 것.

이후 '한국 아방가르드 협회(속칭 AG 그룹)', '제 4집단'을 만들어 그 당시로써는 충격적인 행위미술을 시작하였다. 기존 예술책을 넣은 을 매고, 기성 예술에 대한 장례식을 하다가 경찰한테 잡혀가서 북한 간첩으로 몰리기도 했으나,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자 부담스러워진 정부가 졸속으로 무죄판결하고는 풀려나기도 했으며, 또한 한국일보에서 '한국미술대상전'에 작품을 출품해 달라고 연락이 오자,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는 작품들은 케케묵은 작품들 뿐이라면서 큰 광목 천을 사서 국립현대미술관 전체를 꽁꽁 묶는 퍼포먼스를 펼치고는, 이후 '이것은 작품이 아니다'며 천 쪼가리(작품)를 철거한 한국일보와 싸우기도 했을 정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작품의 형태가 사라지는 〈현상에서 흔적으로, 1970〉이라는 대표작을 이 시기에 만들었으며, 나중에 테이트 모던에 전시되기도 했던 〈바디페인팅, 1969〉도 이 시기의 작품. 당시에도 바디페이팅을 시도한 작가들은 여럿 있었지만 신체에 구슬, 액세서리 등 오브제를 부착한 것은 김구림이 최초였다. 또한 이 시기에 국립극장에서 열린 서울국제현대음악제에서 백남준과 2인전, 〈피아노 위의 정사, 1970〉를 연출하였다. 피아노 위에서 남녀 2인이 천을 덮고는 발만 내밀어 무작위적으로 피아노를 치는 퍼포먼스였는데, 윤리적인 문제로 거론되어 한국에서 다시 시연된 적은 없다고... 제10회 한국미술협회전에서는 김구림 자신 스스로가 작품이 되는 〈도(道), 1970〉 퍼포먼스를 하였다. 미술관 내에서, 작품 대신 작가가 앉아 있는 모습에 경악한 기자들이 '이것도 미술인가?' 싶어서 앞다투어 보도했으나, 한국 미술계 내에서는 '대학도 못 나온 놈이 자기 명예나 날리려고 그런 이상한 짓만 하고 돌아다닌다'며 화가 취급을 해주지 않았다. 이 때 한국 미술계에 크게 실망한 김구림은 1973년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 미술계는 김구림을 환대했다. 〈삽, 1973〉과 〈걸레, 1974〉 작품을 동경에 전시하였을 때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수많은 일본 미술계 거물들과 교류를 하였다. 날이 갈수록 명성이 올라가자 한국에서도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작품 〈걸레〉는 여러 버젼의 작품이 있는데, 행위예술작품 〈걸레〉는 외국에서 큰 호평을 받았었고, 판화 〈걸레〉는 당시 한국 미술계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킨 문제작이자 화제작이 되었었다. 김구림은 물에 젖은 보자기와 컵이, 그 밑의 하얀 천을 누렇게 얼룩지게 하는 것을 두고, '이것은 실크스크린 판화'라고 주장하였는데, 주최측인 동아일보는 같은 모양을 여러 장 찍어낼 수 없기 때문에 판화로 볼 수 없다며 전시를 거부했다. 미술계에서는 이 〈걸레〉를 두고 "판화다." "아니다."는 주장이 오고갔고, 김구림은 변호사를 고용하면서까지 적극적인 대응을 하였다. 그 결과, 결국 동아일보의 사과를 받아낸다. 또한 이 시기에 김구림은 현대무용도 연출하였다. 1981년 무용가 박명숙을 소개받아 〈이상의 날개, 1981〉의 안무, 무대의상과 무대미술을 연출하였다. 지금이야 미술 작가의 무대연출이 흔하다지만 1970년대부터 시작한 김구림의 이러한 시도는 그야말로 파격적...

10여년 간의 일본에서의 성공을 뒤로 하고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한 김구림의 열망은 미국 유학으로 이어졌다. 1984년[2]부터는 자신의 작품에 '음양'을 붙여 작품번호를 매기기 시작한다. 김구림 본인의 말에 따르면 '음'과 '양'으로 붙인 이유는, 뉴욕에서 '자연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세상 만물의 원리는 모두 둘로 대립되어 나타나며, 이 대립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와중에, 미국에서 미국미술을 배우면서 졸업작품으로 '미국의 유명한 미술가들 중 한명'[3]으로 뽑히기도 하고, 브루스 나우만과 같이 세계적인 작가들과 함께 그룹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런 활약들이 현지 매체와 아트잡지에 실렸으며, 이것을 본 캘리포니아 모던 뮤지엄[4]에서 김구림에게 개인전을 제안한다. LA의 공방에서 3년 동안 준비한 이 개인전시회에서 김구림은 크게 성공을 했다. 미국에서 인지도가 높아지는 만큼 덩달아 한국에서의 인지도도 높아져 갔다.

김구림이 유명해지자 한국문예진흥원은 끊임없이 귀국 요청을 하였고,[5] 정부지원예산까지 편성되자 김구림은 후배양성을 위한 명분도 있고 그래서 2000년 한국 복귀를 선언한다. 한국문예진흥원에서 김구림의 모든 작품에 보험을 들고 작품 운반까지 다 맡아서 했을 정도로 지극 정성이었다. 한국에서 귀국 기념 전람회까지 마친 김구림은 한국 미술계의 달라진 대우에 새삼스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귀국 후 작품의 주된 주제는 '미디어(media)라는 기계적 세상에 점령당한 현시대의 인간성 회복'이다. 하지만 평소에 "시대가 변하면 사고가 변하고 사고가 변하면 작품의 표현 방식도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만큼, 주제와 표현방식이 자주 바뀌는 편. 다만 기계세상의 인간성 회복이라는 주제는 이미 지난 100여년간 닳고 닳은 소재라서 식상함을 느낄 수 밖에 없으며, 그의 최근 음양 작품들의 기법을 살펴보면 디지털 스크랩 프린팅(구상) 위에 추상회화를 그리는 것이 대부분으로, 이미 한물 지나간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콤바인 페인팅을 보는 듯하여 신선함은 떨어진다.

1960년대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끊임없는 실험정신과 넓은 스펙트럼의 결과물들은, 자칫 안일함에 빠질 수 있었던 한국 미술계에 신선한 자극이 되어 왔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비주류의 삶을 겁없이 걸어온 그의 삶은, 주류와 트렌드만 쫓는 동시대 미술의 예술과 작가들에게, 자신의 현주소를 뒤돌아보게 만드는 촉매제로써 부족함이 없다고 평가받는다.

3. 작품 설명

3.1. 태양의 죽음

3.2. 1/24초의 의미

3.3. 현상에서 흔적으로

3.4. 매스미디어의 유물

3.5. 피아노 위의 정사

3.6. 걸레

3.6.1. 행위예술 〈걸레〉

3.6.2. 판화 〈걸레〉

3.7. 음과 양 시리즈

4. 여담

  • 2023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최한 대규모 개인전 김구림 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미술관과의 의견 불일치를 작가가 직접 언론사에 제보하여 분란을 일으킨 바 있다. # # #
  •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는 김구림에게 “1960년대 말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를 발표하고 다양한 국제무대에 참석해 한국 전위예술의 첨병 역할을 한 점을 인정한다”며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
  • 판화에 애착이 많다. 2007년 판화 입문자와 수집가, 감상자들을 위해 <판화 COLLECTION 보는 법에서 수집까지>(서문당)를 내고, 2014년엔 <서양판화가 100인의 판화감상>(미진사)를 저술하기도..
  • 시대가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단색화를 고집하는 미술가들을 비판하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기계로 인해 인간의 상상이 매몰되고, 종내는 기계에 종속되고 있다. 문명의 노예가 되어 거기에 매몰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이 노예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더 편한 것만을 만들고 추구하려한다. 이럴 때 인간은 무엇을 생각해야하는가? 이걸 제시해야한다.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물방울만 찍고, 점만 찍어서 그림으로 내놓는 이들이 많다. 그래놓고 그것이 현대미술이란다. 정말 케케묵은 생각이다. 지금도 ‘현대판 노예’[6] 이야기가 뉴스를 통해 나오고 자식이 아비를 살해하는 등의 무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점이나 찍고 있다니? 현대판 노예, 난민을 부각시키는 작업. 그것이 곧 리얼리즘이기도 하다. 현실이 작품을 만들라고 나에게 명령한다. ‘시대가 나를 작품을 하게 만들었다’는 말은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1] 홍경한(미술평론가) "김구림은 일찍부터 일상의 사물을 이용해 일상성을 다뤄왔다는 점에서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초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2] 찾아보면 음양시리즈 80년도 작품은 확인 안되고 90년도 작품부터 나오던데.. 어떤 웹사이트에서는 1984년도부터 시작한 것이라고 나와 있음.[3] 1985 Selected as One of America’s Distinguished Artists, Lincoln Center, NY, United States[4] '캘리포니아 모던 뮤지엄'을 찾아보면 없다. 아무래도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샌프란시스코 모던 뮤지엄'을 말하는 듯. 약력을 보면 '1991년 Solo Exhibition, The Modern Museum of Art, California, United States'라고 되어있다.[5] 팩트가 확인안된 김구림 본인의 말이긴 하다.[6] 제주의 한 생수 제조업체에서 현장실습생 이민호군(18)이 제품 적재기에 목이 끼이는 사고를 당해 사망하였는데, 저임금 고강도의 노동에 시달리는 전문계 고등학교 학생들의 현장실습을 '현대판 노예제'로 비판한 기사를 말하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