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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

<colbgcolor=#a4a4a4><colcolor=#fff>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
파일:마르셀 뒤샹 프로필.jpg
본명 앙리 로베르 마르셀 뒤샹
Henri-Robert-Marcel Duchamp
출생 1887년 7월 28일
프랑스 제3공화국 블랭빌
사망 1968년 10월 2일 (향년 81세)
프랑스 뇌이쉬르센
국적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제3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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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조각가, 화가, 체스 선수
가족 형 자크 비용(1875~1963)

1. 개요2. 상세3. 작품4. 체스 선수로 전향5. 평가6.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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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제 회화는 망했어. 저 프로펠러보다 멋진 걸 누가 만들어 낼 수 있겠어? 말해보게, 자넨 할 수 있나?”
마르셀 뒤샹, 1912년 항공 공학 박람회를 관람한 뒤 친구(콘스탄틴 브랑쿠시)에게
''예술가는 영혼으로 자신을 표현해야 하며, 예술 작품은 그 영혼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마르셀 뒤샹, 자신을 소변기 샘의 영혼과 동격으로 놓으며
“그림을 그린 것, 삶을 이해하는 요인으로 삶의 방식(modus vivendi)을 창조하기 위해 예술을 한 것, 살아 있는 동안 그림이나 조각 형태의 예술작품들을 창조하는 데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차라리 내 인생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이 가장 만족스럽다.”
마르셀 뒤샹, 예술가로서 살아오며 가장 만족스러운 것이 무엇이던가 하는 질문에 답하며.

프랑스의 예술가. 오늘날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현대미술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작가이다.[2] 현대미술과 철학의 관계에 대해 물질과 개념[3]의 ‘엥프라망스[4]’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흔히, '현대미술은 난해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으로는 <샘>, <큰 유리>, <자전거 바퀴 의자>, <주어진(에탕 도네)>와 이 밖에 텍스트 작업, 이동식 작품상자, 체스판, 로즈 셀라비 연작 등의 수많은 작품이 있다.

개념미술의 창시자이자 선구주자로 불리고 다다이즘의 맥락에서 레디메이드를 창시하였다. 뒤샹은 예술 이론에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미메시스 이론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예술은 모방이 아니라 창조(무언가를 새롭게 보는 것을 포함하여)라고 주장했다. 현대 예술 이전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던 예술 이론은 미메시스로, 예술은 천상에 있는 어떤 완벽한 정신을 모방(미메시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예술이 현실을 모방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현실이 예술을 모방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고 그렇게 전통적인 미메시스 이론과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뒤샹은 차라의 다다선언만큼이나 파격적인 예술 활동을 해나가고 그렇게 현대 예술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된다.

2. 상세

1887년 7월 28일노르망디의 작은 마을인 블랭빌에서 태어났다. 뒤샹의 아버지는 공증인이었으며, 뒤샹은 6남매 중에서 셋째였다. 뒤샹 위로 두 형이 예술가로 먼저 데뷔를 했는데, 뒤샹이 자신도 예술을 하겠다 하자 형들이 뒤샹을 무시했다고 한다. 이에 열등감을 느끼고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초현실주의의 파리 다다 작가와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작품을 많이 남겼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한 뒤, 1955년에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뒤샹의 작품과 아이디어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미술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많은 근대 미술 수집가에게 한 조언은 수집가들이 서양 미술 세계의 취향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3.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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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1912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는 뒤샹의 초기 작품 중 가장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이는 당대 미래주의와 마찬가지로 신기술인 활동사진을 어떻게 회화로 풀어낼 것인가를 고민하다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머이브릿지 등 당대에 활동사진을 연구했던 사람들은 모델에게 쫄쫄이 옷을 입힌 뒤 (오늘날 3D 모델링에서 사용하는 뼈대(bone)처럼) 그 옷에 관절을 표시하고 연속으로 사진을 찍어 신체의 움직임을 관찰했다고 한다. 형 중에 의사가 있었던 뒤샹은 이런 신기술들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회화에 적용했다고 한다. 자세한 사항은 작품 설명 참고
파일:external/www.mapa.co.kr/duchamp_bicycle_wheel.jpg
<자전거 바퀴>, 1913
뒤의 <샘>에서 이야기하겠지만, 뒤샹은 이미 1913년에 창작에 기성품(ready-made)을 활용하는 전략을 선보였다. 자전거 바퀴를 의자에 거꾸로 박은 이 작품은 일상의 물건을 예술작품으로 바꾸려는 시도였다. 서로 아무 연관이 없는 사물들을 엉뚱하게 결합하여 사물이 가진 본래 용도를 제거한 대신, 새로운 예술적인 느낌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67px-Duchamp_Fountaine.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Marcel_Duchamp_Fountain_at_Tate_Modern_by_David_Shankbone.jpg
<>, 1917
제1차 세계 대전 후인 1917년 4월 10일, 뒤샹은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미술가협회[5] 전시회에 <샘>을 출품한다. 이 독립미술가협회는 뒤샹이 알렌스버그, 월터 팩 등과 함께 설립한 협회였다. 즉, 자기가 만든 협회 전시회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한 것이다. 독립미술가협회는 특이하게 심사위원도 없고, 상도 없는 미술전으로, 전시회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소정의 수수료만 내면 작품을 전시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골때리는 것은 뒤샹이 동네 철물점에서 그냥 남성용 변기를 하나 산 다음에 'R. Mutt' 란 가명으로 서명하고 출품했다는 것. 당연히 이 작품은 독립미술가협회에서 거부당했고, 전시회가 진행되는 동안 후미진 곳에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아무도 그게 작품인 줄 몰랐다. [6]이후 뒤샹은 자신이 발간하는 다다이즘 잡지인 <The Blind Man>에 'R. Mutt' 라는 무명의 작가를 옹호하는 척 하며 이 작품에 대한 글을 투고했다. # 아래 인용문은 투고글 내용.
"분명히 어느 예술가라도 6달러를 내면 전람회에 참여할 수 있다. 머트 씨는 <샘>을 출품했다. 그런데 아무런 의논도 없이 그의 작품이 사라졌다. 머트 씨의 <샘>이 배척당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변기가 부도덕하지 않듯이 머트 씨의 작품 <샘>은 부도덕하지 않다. 배관수리 상점의 진열장에서 우리가 매일 보는 제품일 뿐이다. 머트 씨가 그것을 직접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일상의 평범한 사물이 실용적인 특성을 버리고 새로운 목적과 시각에 의해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생각으로 창조된 것이다."

하지만 처음 전시를 기획했을 때부터 이와 같이 명확한 컨셉을 염두에 두고 있진 않았다. 뒤샹이 <샘> 전시 당시 그가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변기의 곡선과 형태 등 시각적으로 보이는 부분에서 미적인 것을 찾아 감상하는 것을 권유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후에 논란이 진행되면서 뒤샹 스스로가 작품의 가치와 장소성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개념이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 작품은 예술과 예술가는 무엇인지에 대해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고. 이 논쟁은 지금도 충분히 효력을 가지는 논쟁이다. 이 논쟁과 관련된 질문들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예술가(Artist)는 꼭 장인(Artisan)처럼 손수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냥 자기 발상(idea)에 맞는 사물을 선택하기만 해도 되는가?
  • 예술가에겐 손재주가 중요한가? 아니면 창의적인 발상이나 계획(idea)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한가?
  • 예술가가 자기 예술작업을 위해 선택한 기성품(ready-made)과 사용하지 않은 다른 일상 기성품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 예술작품을 예술로 인증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예술가인가? 관객인가? 미술관같은 예술기관인가?
산업 사회 이전이었다면 이건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을지 모른다. 당연히 장인의 손재주가 더 중요하니까.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전까지는 장인의 손재주와 계획 능력을 굳이 구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산업사회가 된 오늘날, 이제 굳이 작가가 손수 작품을 만들지 않아도 재료로 삼을 기성품, 상품은 넘친다. 게다가 이미 사진영화 등이 개발된 상황에, 굳이 애써서 회화를, 초상화를, 구상화를 그려야 하는 이유가 뭔가? 뒤샹은 당대 예술가라면 한 번쯤은 해봤을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저런 파격적인 작품으로 내놓은 것이다. 그의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은 후대 예술가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예술가는 계획이나 발상을 세우는게 중요하다. 예술가는 자기 발상에 맞는 물건(오브제)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교나 기술적 요소는 단지 작가의 발상을 전달할 때 필요한 요소일 뿐, 중요한 것은 작가의 생각이나 사상을 전달하는 것이 된 것이다.

기성품을 선택해 전시하는 것만으로도 작품이 될 수 있다는 논리와 더불어 뒤샹이 제시한 또 하나의 조건이 있다. 원문을 보면 바로 위에서 인용한 부분 아랫 문단[7]이 그 단서가 될 수 있는데 해석하자면 이러하다.
"배관용품이기에 가해진 비판은 불합리하다. 미국이 만들어낸 유일의 예술작품은 배관과 다리이다."
언뜻 보기에는 뒤샹이 농담삼아 던진 말인 것 같다. 하지만, 이 말의 참 의미를 알려면 선택된 소재에 부여된 제목과 관련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뒤샹은 프랑스 태생이기 때문에 화장실 배관이 좋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런데 미국으로 작품 활동 무대를 옮긴 뒤 우수한 미국 배관 시설에 감탄을 했을 것이다.[8] 뒤샹은 그런 경험을 표현하기 위해 변기에 미적 황홀함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샘"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다. 여기서 엿볼 수 있는 뒤샹의 또 하나의 예술철학은, 예술이 개인의 경험, 특히 미적인 경험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샘>은 전시가 끝나고 얼마 후에 실종되었는데, 뒤샹의 전기를 쓴 캘빈 톰킨스는 누가 쓰레기인 줄 알고 버렸다고 추정 중이다(...). 이후 1950년 뉴욕에서 전시한 버전을 시작으로 몇 가지 복제품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복제품은 원작 <샘>하고 똑같이 생기지는 않았다는 게 특이한 점.[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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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O.O.Q.〉, 1919
1919년에는 〈L.H.O.O.Q.〉라는 작품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모나리자콧수염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밑의 L.H.O.O.Q 라는 제목은 프랑스어로 읽으면 "엘르(L) 아쉬(H) 오(O) 오(O) 뀌(Q)"가 되는데, 이것을 연음시켜 "엘라쇼오뀌"라고 읽으면 "그녀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Elle a chaud au cul)"라는 문장과 같은 발음이 된다고 한다. 동음이의를 이용한 말장난. 앞서 <샘>이 산업사회의 기성품을 전혀 다른 예술적 맥락 안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이었다면, 〈L.H.O.O.Q.〉는 이전 시대 예술작품을 현대예술의 전혀 다른 맥락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전 세대의 예술 전통을 모독하는 건 덤이고 말이다. 신세대가 구세대와 세대차를 느끼는 건 어느 세대에나 있던 일이지만, '옛날 세대보다 우리 세대가 더 우월하다' 라고 주장하는 건 그야말로 모더니즘 시대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그런 면에서 뒤샹의 〈L.H.O.O.Q.〉야말로 모더니즘적인 셈. 어쩌면 그 모더니즘을 또 까는 것의 효시일 수도 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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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원판 Rotary Glass Plates (Precision Optics)>, 1920
<현기증 영화(Anemic Cinema)>, 1926
1920년에는 만 레이를 만나 같이 작업했고, 이후 광학적오브제와 영화 실험 작업을 했다. <회전원판 Rotary Glass Plates (Precision Optics)>의 경우 되게 단순해 보여도 초기 키네틱 아트 작품 중 하나이다. 1926년 만든 <현기증 영화(Anemic Cinema)>의 경우 일부러 보는 사람이 현기증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이는 오늘날 인지과학에서 따지는 시각적 경험 연구를 앞선 것. 옵아트의 맥락에서 이해되기도 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roseSelavy.jpg
<에로즈 셀라비>, 1921
1921년 뒤샹은 여장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앞서 〈L.H.O.O.Q.〉도 그랬지만, 이는 성역할(gender)의 문제에 대한 물음 제기로도 읽을 수 있다. 과연 사회적 성은 생물학적 성을 따라가는가? 뒤샹은 사진을 찍어 이 물음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셈이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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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서조차 벌거벗겨지는 신부, 조차도 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Even>, 1915-1923
뒤샹은 연금술에도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서조차 벌거벗겨지는 신부, 조차도>, 줄여서 속칭 <큰 유리>로 불리는 이 작품에서, 뒤샹은 온갖 연금술 지식을 동원해 작품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유리에 수년 동안 먼지가 쌓이게 만든 뒤, 특정 부분을 지우고 그림을 붙이고 하는 식으로 만든 작품이다. 작품에서 밑쪽은 남자 구혼자들, 위쪽은 신부라고 하는데, 딱 꼴이 결혼대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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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땅 돈네 (1. 폭포수 2. 점등용 가스 : 가 주어졌다고 할 때) Étant donnés (Given: 1 The Waterfall, 2. The Illuminating Gas)>, 1946–1966

아래에서 나오듯이 뒤샹은 1923년부터 체스선수로 전향하며 작품 활동을 그만두면서 간간히 체스 행위를 바탕으로 한 예술 행사를 참여하는 것 외에는 예술과 거리가 먼 삶을 사는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뒤샹이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고정 설치될 한 작품을 20여년간 비밀리에 작업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사후에 발견되도록 기획한 작품이 있었으니 바로 이것이다. 뒤샹이 사망한지 1년이 지난 1969년 대중에게 공개된 이 작품은 크고 두꺼운 목재 문의 열쇠구멍 위치의 엿보기 구멍으로 안을 보게 되어있다. 인생 최후의 섹드립 관람객을 다 관음증으로 만드는 매직

4. 체스 선수로 전향

1923년부터 뒤샹은 프로 체스선수로 전향했다. 사실 뒤샹의 체스에 대한 애정은 가족들과 체스를 즐겼던 어렸을 때부터 평생 지속된 것으로, 초기작부터 후기작까지 꾸준하게 체스를 오브제로 한 작품들을 만들었으며 체스로 맺어진 인간관계는 말년까지 계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체스의 엔드게임에 대한 이론서를 출간하기도 할 정도였다.마르셀 뒤샹과 체스의 관계 이후 뒤샹은 생의 대부분을 주위와 단절한 채 작품 활동도 완전히 그만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회고전이나 체스를 소재로 한 행위 예술 행사 참여 등 외부 활동은 간간이 이뤄졌다.

참고로, 뒤샹의 체스 실력은 상당하여 1925년에 본인이 포스터를 디자인을 한 체스 대회에 출전해 체스 챔피언이 되기도 하였으며,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체스 전략집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5. 평가

그가 한 각종 기괴한 예술은 오늘날 아방가르드 예술, 개념미술, 키네틱 아트, 젠더이론, 제도비판 등 굉장히 많은 분야에 영향을 주었다. 심지어 새로운 예술이 나오면 뒤샹과 연관관계를 찾는 일이 나올 정도. 물론 미디어 아트 등장 이후 이를 '만물뒤샹설'이냐고 까는 사람도 생겼지만 말이다.

현대예술가는 뒤샹이 현대 산업사회의 산물에 종속된 호구가 되지 말고 자기만의 예술을 해라라고 말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가 바로 오늘날의 현대예술 신세계다. 말 그대로 아주 미세하고 소소한 차이라도 발상으로 끌어들여 개념화하는 것이 오늘날의 예술 추세이다. 뒤샹은 본격적으로 그 시작을 연 셈. 이는 오늘날의 예술 관람객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연 기업이 만들고 마구 유포하는 상품이, 혹은 대중문화가 진짜 나의 것인지는 곰곰히 따져봐야 할 일이다.

뒤샹의 실질적 영향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현대미술사의 인기와 정치적 권력구조가 뒤샹을 비롯한 거두들 때문에 유럽을 떠나 미국에서 부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프랑스를 떠난 프랑스 미술인이 미국에 새로운 누보-프랑스를 세운 것 같은 그림이다.

감상이 목적인 음악에서 아무리 작품성이 뛰어나도 미술과는 달리 화젯거리가 되지 않지 않고 머니 메이킹이 되지 않는다. # 예전의 백남준처럼 피아노해머로 부순다고 머니 메이킹이 되고 이슈가 집중되지 않는다. 뒤샹은 이러한 개념, 설치, 시각예술인 미술과 음악의 차이점과 한계 또한 분석해냈다.

6. 외부 링크



[1] 1955년 귀화했다.[2] 현대미술은 이 마르셀 뒤샹과 피카소만 알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3] 개념미술의 '개념'으로써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 자신의 의도, 메시지를 말한다.[4] 극도로 얇고 예민한 것, 미묘함을 뜻한다.[5] 앙데팡당(independent)이라고도 한다.[6] 이 이야기는 뒤샹이 1916년에 타자기 덮개를 출품했을 때 있었다고도 한다.[7] 이 부분에 주목하는 이유는 원문이미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폰트의 크기가 상당히 크게 편집되었다. 글쓴이는 중요한 부분을 상대적으로 눈에 띄게 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부분의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8] 또 프랑스 지역에 흐르는 작은 강에 만들어진 다리에 비해 미국의 거대한 강에 만들어진 다리는 규모와 기술력에 있어 엄청난 차이를 깨달았을 것이다.[9] 어느 복제품 중 하나에는 한 행위예술가가 진짜로 오줌을 갈기는 사고(?)가 일어났다. 해당 예술가는 곧 경찰에게 잡혀갔는데 본인은 이를 행위예술의 일환이라고 주장했고 전시 측에서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 그냥 넘어갔다는 일화가 있다.[10]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만일 뒤샹이 정말로 성 정체성을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양측 성 모두에 대한 존중이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뒤샹은 앞선 작품에서도 그렇고 후기의 작품에서도 꾸준히 남성의 시각에서 바라본 성적 욕망만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저 사진 속처럼 여장을 할 때는 로즈 셸라비라는 예명을 썼는데, 로즈 셸라비의 이름으로 발표된 것은 대부분 순수미술에서 벗어난 상업적 활동과 연관된 것이라고 한다. 즉 뒤샹은 그냥 순수미술이 아닌 다른 걸 하고 싶을 때 저 캐릭터를 갖다 쓴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