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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철도 환경/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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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개화기(1877~1910): 한국철도의 태동기
2.1. 연표2.2. 설명
3. 일제강점기(1911~1939): 일제 치하의 한국철도
3.1. 연표3.2. 설명
4. 한반도의 격동(1940~1962): 전쟁으로 허리가 끊긴 한국철도
4.1. 연표4.2. 설명
5. 경제발전(1963~2003): 한국철도의 대격변
5.1. 연표5.2. 설명
6. 현재(2004~): 한국철도 고속화 시대 개막
6.1. 연표6.2. 설명
7. 북한의 철도 역사8. 한국 철도 차량의 종류
8.1. 관련 문서

1. 개요

1899~1945▼
1945~현재▼
이 블로그도 참고.[1]

한국의 철도 환경의 역사에 대해 서술한 문서. 이 문서의 내용은 철도주요연표(2010년에 철도창설 제111주년을 기념해 한국철도공사에서 출간)를 많이 참조하였음을 밝힌다.

2. 개화기(1877~1910): 한국철도의 태동기

파일:external/railroadmuseum.cafe24.com/59343ec0109aa8688a9127225c72ffbd_1.png
한국 최초의 기관차인 모가형 증기기관차.
파일:external/railroadmuseum.cafe24.com/59343ec0109aa8688a9127225c72ffbd.png
처음 지어질 당시의 인천역.

2.1. 연표

연도 일자 일어난 일
1877년 2월 수신사 김기수가 일동기유에서 처음 일본철도 시승기를 소개
1882년 1월 1일 영국, 일본의 회사들이 한국의 철도 부설권을 요구
1889년 이하영이 철도 모형을 고종과 백관들에게 소개하며 철도의 필요성을 역설
1892년 3월 25일 주한전권공사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 초빙, 경인선 건설을 위한 철도창설조약 체결
1894년 7월 청일전쟁을 일으켜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이 김홍집 내각을 세우고 철도국 신설. 8월에는 일본 정부에서 경인선과 경부선을 부설한다는 내용의 조일잠정합동조관을 강제로 체결
1895년 2월 청일전쟁진평선 평양~진남포 간 개통[2]
이후 평남선이 계승
1896년 3월 29일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미국과 경인철도특허조관 체결. 제임스 모스가 경인선 철도 부설권 획득
7월 3일 프랑스 피브릴르(Fives Lile) 사가 경의선 부설권 획득
7월 15일 국내철도규칙 7조 재정 및 공포. 궤간을 영척 4척 8촌 5분[3]표준궤로 확정
1897년 1월 15일 국내철도규칙 개정. 표준 궤간을 5척의 광궤로 변경
3월 22일 제임스 모스가 우각동역에서 경인선을 표준궤로 기공
8월 24일 일본 회사가 경부선 부설권을 획득
1898년 5월 10일 제임스 모스가 경인선 부설권을 일본의 경인철도인수조합에게 양도
9월 8일 경부선 부설 최종 허가
9월 표준 궤간을 표준궤로 환원
1899년 5월 17일 서대문~청량리 간 서울전차 개통
6월 17일 경원선함경선 부설권을 국내 회사가 획득
6월 18일 경인선의 완공 구간에서 모갈 탱크(Mogul Tank) 기관차가 최초의 시운전
6월 19일 건설열차 최초 운전
6월 30일 프랑스 피브릴르 사의 경의선 부설권이 소멸
7월 8일 국내 회사가 경의선 부설권을 획득
7월 모가형[4] 기관차를 인천공착장에서 최초로 조립
9월 13일 궁내부 내장원에 서북철도국 설치
9월 18일 경인선 노량진~인천 구간 개통
1900년 7월 8일 한강 교량 준공. 경인선이 서대문역으로 연장
12월 4일 한국철도 최초의 운전규정 제정
12월 11일 한국철도 최초의 신호규정 제정
1901년 6월 25일 일본의 경부철도주식회사 설립
8월 22일 영등포에서 경부선 북부구간 기공식
9월 21일 초량에서 경부선 남부구간 기공식
1902년 3월 경의선 서울~개성 구간 착공
12월 18일 영남지선철도회사에서 마산선 부설권 획득.
1904년 1월 3일 마산선 착공
4월 9일 경의선 개성~평양 구간 착공
6월 25일 경의선 평양~신의주 구간 착공
1905년 1월 1일 경부선 전 구간 개통
5월 26일 마산선 개통
9월 11일 부관연락선 운행 개시
1906년 1월 남대문정거장 준공
4월 3일 경의선 완전 개통
4월 16일 초량~서대문 간 최초의 급행열차 운행
1907년 4월 20일 융희호 운행 개시
1908년 4월 1일 경부선경의선의 융희호 직결 운행 및 부산정거장 영업 개시
1909년 12월 20일 부산전차 운행 개시
1910년 1월 1일 호남선 착공
8월 29일 경술국치
10월 15일 경원선 착공
10월 16일 평남선 개통

2.2. 설명

1887년 박정양이 주미공사에 부임하여 워싱턴 D.C에 근무한 이후 고종과 한반도 철도 사업을 논의한다. 1887년 2월 9일에는 뉴욕 조선영사 프레이저가 김윤식에게 '전등 및 철도 신설계획의 요청' 공문을 보내고 이에 조선은 1888년 10월 경인선 설치를 미국에 제안하였다. 1892년 3월 고종은 주한미국 전권공사였던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와 '철도창설조약'을 체결했으나, 일본 정부가 이에 반발하여 지속적으로 방해하였다.#

1894년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키며 경복궁을 공격해 점령해버리고 김홍집 내각을 세운다. 그리고 철도 부설권을 얻고자 공사 오토리를 통해 1894년 8월 김홍집 내각과 '조일잠정합동조관'을 체결하였는데 그 내용은 조선 정부가 재정적 여유가 없으므로 일본 정부에서 경인선과 경부선 철도를 부설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을미사변 이후 1896년 아관파천을 통해 경복궁을 탈출한 고종은 철도창설조약을 체결했던 제임스 모스에게 경인선 부설을 맡긴다. 당시 경인철도조관에는 특허일로부터 12개월 내 기공하고 3년 내 준공하며 이를 어길 시 특허가 상실된다고 명시하였다. 1896년 7월에는 국내철도규칙 7조를 재정 및 공포하여 궤간을 영척 4척 8촌 5분의 표준궤로 정했다. 1897년 1월에는 러시아와의 협의로 광궤로 변경되었던 적도 있었으나 경인선은 1897년 3월 22일 도원역 부근에서 표준궤로 기공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부설권을 가져오기 위해 조선이 정치적으로 어지러워 철도 대금을 회수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소문을 유포했고, 미국 투자자들이 들였던 자금을 회수해 버리는 바람에 제임스 모스는 자금난을 겪게된다. 여기에 기술적인 난제까지 겹쳐 공사는 중단되었고, 경인선은 1898년 5월 10일 170만 2452원 75전 (당시 1백만 달러)에 일본의 '경인철도합자회사'에 양도돼 버린다.

1899년 9월 18일 노량진과 인천 사이 33킬로미터 구간이 개통되었다. 당시 개통된 역은 노량진 오류동 소사 부평 우각동 축현 인천이었다. 1900년 7월 8일에는 노선이 노량진에서 경성역까지 연장되었고 1900년 11월 12일 경성역에서 경인철도 완전개통식을 열었다.

뒤이어 경부선경의선의 부설권도 일본에게 넘어가며 일본의 의도대로 철도가 만들어진다. 그 영향 몇 가지를 이야기해보자면 아래와 같다.
  • 경부선의 선형: 전통적으로 서울과 부산을 잇는 최단 경로는 영남대로(혹은 동래로)라 불리는, '서울-용인-이천-충주-문경-대구-밀양-부산'의 루트였다. 하지만 러일전쟁으로 급하게 철도가 필요했던 일본은 청주와 추풍령을 정말 애매하게 지나가는 루트를 선택한다. 이에 대해, 충주와 상주의 유림들이 반발해서라는 설과, 조령의 공사 난이도가 높아서라는 설, 다른 열강들의 대체 철도 부설을 막기 위한 설이 있다. 아마 정말 절박했던 일본은 유림들의 반대도 귀찮고, 공사가 힘들며, 이미 영향권 아래 들어온 조선에 또 다른 열강들이 뻗치는 것은 더더욱 싫었을 테니 셋 다일 가능성이 높다. 덕분에 영남대로상에 위치했던 전통적인 도시들은 경부선이 지나가는 대구 정도를 빼면 모조리 몰락해버렸다. 이 때문에 천안과 충주의 운명이 뒤바뀌었고, 희대의 철도도시 대전이 탄생하는 떡밥이 되었다. 밀양은 특이 케이스로, 경부선이 지나가는데도 몰락해버렸다.
  • 서울역: 원래 경인선의 서울 쪽 시종착역은 연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노량진역이었다. 하지만 경성을 대도시로 키우려던 일제는 도시 중앙에 거대한 철도역 하나쯤은 있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한강을 건너는 철교를 지나 남대문 앞의 작은 정거장이었던 곳으로 서대문역을 통합하고 그곳에 경부선을 종착시키니, 이 것이 바로 현재 서울역 위치에 있는(정확하게는 문화역서울 284로 쓰이는 구 서울역 건물)인 경성역이다.
  • 경의선의 시종착역: 본래 대한제국의 경의선 부설 계획에서 경의선의 시종착역은 마포였다. 하지만 일본이 부설권을 가져가면서 일본군 주둔지였던 용산으로 경의선을 끌어오게 된다. 이후 경성역을 거점역으로 만들려는 계획에 따라 수색에서 분기해서 경성역으로 가는 노선을 만들고 이쪽을 경의선 본선으로, 용산 방향을 용산선으로 분리하게 된다. 그런데 수색~서울 간 선형이 억지로 경의선을 끌어오려다보니 급곡선이라, 당대의 최대 난구간이 되었다. 바로 현재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의 서울~신촌 구간이며 심지어 이 구간은 현재도 서행을 한다.
  • 표준궤와 좌측통행: 대한제국 정부가 '국내철도규칙’(1896. 7. 15)을 반포하면서 철도규격을 표준궤로 채택하고 1897년 3월 경인선 사업을 같은 표준궤였던 미국에 맡겨 공사를 진행한다. 조선정부가 대금을 지불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소문을 퍼트려 미국 투자자들의 자금을 회수해버리게 만든 일본은 제임스 모스와 협상을 벌여 1899년 부설권을 가져왔는데 당시 일본의 철로는 협궤였기 때문에 협궤로 바꾸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경인선은 이미 표준궤로 공사가 진행중이었고 대륙과 연결이 용이하단 이점 덕에 협궤논의는 무산되고 계속해서 표준궤로 공사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일본이 좌측 통행을 하고 있던 터라 한반도에서도 당연히 철도는 좌측 통행이 정립되었다. 훗날 도시철도법 덕분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게 좀 문제기는 하지만.

3. 일제강점기(1911~1939): 일제 치하의 한국철도

파일:external/www.sotongsinmun.com/1.jpg
익산역 개통당시의 열차의 모습(1912)

3.1. 연표

연도 일자 일어난 일
1911년 6월 1일 한강 교량 준공
6월 10일 군산선 이리~군산 구간 착공
7월 11일 호남선 대전~연산 간 부분 개통
10월 15일 경원선 용산~의정부 간 부분 개통
11월 1일 압록강철교 준공
11월 10일 최초의 국제열차 운행 시작
1912년 3월 24일 군산선 개통
1913년 4월 1일 최초의 야간열차 운행
7월 9일 전남선 송정리~광주 구간 부설 허가
8월 21일 경원선 원산 이북 구간 착공
1914년 1월 22일 호남선 전 구간 개통
3월 17일 전라선 이리~전주 구간 부설 허가
8월 16일 경원선 전 구간 개통
10월 1일 함경선 착공
11월 17일 전라선 이리~전주 구간 부분 개통
1915년 8월 1일 함경선 원산~문천 구간 개통
10월 15일 남대문역 증축. 경성역으로 개칭 영업 개시
1916년 7월 21일 함경선 문천~영흥 구간 개통
11월 15일 함경선 청진~창평 구간 개통
1917년 7월 31일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한국철도 위탁 경영 시작
11월 1일 경동선 대구~하양 구간 개통
11월 25일 함경선 풍산~회령 구간 개통
1918년 10월 31일 하양~포항 구간 개통
11월 1일 경동선 영천~경주 구간 개통
1919년 12월 15일 함경선 함흥~영흥 구간 개통
1921년 10월 10일 진해선 진해~창원 구간 착공
11월 1일 충북선 조치원~청주 구간 개통
1922년 6월 1일 경남철도 천안~온양 구간 개통
6월 10일 안성선 착공
7월 1일 전남선 송정리~광주 구간 개통
12월 21일 전남선 전 구간 개통
1923년 12월 1일 경남철도 온양~광천 구간 개통
1925년 6월 15일 경남선 개통
1929년 4월 18일 광려선 착공
1930년 12월 25일 광려선 개통
1933년 4월 1일 특급열차 하카리 투입

3.2. 설명

그나마 이때는 일제가 좀 먹고 살 만한 시기였고, 일본 정부가 미쳐 돌아가기까지는 좀 시간이 남아있던 터라, 교두보인 한반도에 대해 '전쟁은 보급! 보급은 철도!'라는 걸 잘 인식하고 있던 시기였다. 덕분에 일제는 한반도 여기저기에 신나게 철도를 깔기 시작했다. 물자 보급과 더불어 호남 지방의 쌀을 수탈하기 위한 철도들도 많이 지어졌다. 뭐 하여튼 이때 현재 한국의 간선망이 거의 완성되었다. 이 당시에 지어진 노선들이 경북선, 경원선, 경전선, 동해선, 장항선, 전라선, 중앙선, 충북선, 함경선, 호남선 등. 현재에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들을 하고 있는 철도가 많다.

그리고 질적인 성장도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데, 특급열차가 투입되고 국제열차가 돌아다니는 등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게 많던 시기였다. 시기상으로는 일제강점기의 무단통치기, 문화통치기와 거의 비슷하며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가장 집중하는 시기이기도 하나, 일제가 한반도의 백성들을 위해 이걸 깐 게 절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중앙선은 기존의 경부라인과는 전혀 다르게 부설했는데 이유는 전쟁 중에 경부선이 제 1타격임을 인지했던 일제가 대비용으로 부설한 것이 중앙선이다.[5] 또한 경성전차 요금을 조선인 거주지와 일본인 거주지를 차별해서 반발이 일었다.

그리고 호남선의 초기 선형은 일제 기준에서 일본 본토 방향(한반도의 경우 부산역 방향)을 상행으로 잡아 호남선은 대전역에서 현재의 대전선을 타고 나가는 지선 형태로 놓았다. 애초에 호남선의 목적이 호남 지방의 곡물들을 일본으로 빠르게 수송하기 위함이었으니...이 때문에 서울을 오가는 호남선 열차는 대전역에서 기관차 방향을 바꾸는 불편을 겪었다. 그리고 잔교 시설도 환적을 통한 수탈의 목적으로 지어져 광복 직후 사라졌다.

4. 한반도의 격동(1940~1962): 전쟁으로 허리가 끊긴 한국철도

4.1. 연표

4.2. 설명

일단 태평양전쟁 말기 물자가 급해진, 아니 정말 있는 것은 박박 긁고 없는 것도 만들어내야 할 정도로 물자가 궁했던 일제는 결국 철도에 손을 댄다. 이 시기 안성선, 전남선의 광주 이북 구간, 경북선 예천~안동 구간 등을 그냥 통째로 뜯어가버렸다. 이게 다 경부.경의선 등을 복선화할 때 쓸 레일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라고. 경북선의 경우 결국 영주를 경북 내륙의 터미널로 만들어 효율성 측면에서 전화위복이 되었지만, 전남선의 폐선 구간은 다시 돌아오지 못한 채 그냥 광주선으로 남아있다. 그나마 전남선은 달빛내륙철도 계획이 있다.

이렇게 최악의 암흑기를 지나 광복이 됐건만 결국 남은 게 하나도 없었다. 이 시기는 정말 개판으로, 남북분단 때문에[6] 증기 기관차 돌릴 석탄조차도 없어 대동맥인 경부선이 하루 1왕복으로 축소될 지경이었다.[7] 더 심한 경우로는 그렇게 하루 1왕복으로 운행하던 경부선마저 운행이 중단되어 경성역에서 출발하던 열차가 경인선 1왕복 밖에 없던 시기도 있었다. 거기다 당시 철도 종사자들의 증언을 보면 정말 개판 5분 전이었던 게, 일제 시절 기계 작동을 조선인에게 잘 알려주지 않아 운전할 줄 아는 사람도 몇 없고, 신호는 사람이 신호기에 횃불 들고 올라가서 직접, 폐색은 모두 수신호와 통표로 처리했을 정도로 답이 없었다. 운행속도도 느려진 것이, 일제강점기에 특급 아카츠키호가 서울 ~ 부산 간을 6시간 대에 주파하던 것이 해방 이후에는 최속달 열차인 조선해방자호가 9시간 걸려 운행하는 상황이 되었다.

거기다 광복이 된 지 얼마 안 돼 남북이 분단되어버렸다. 당장 사람으로 치면 경의선은 머리만 남은 셈이 됐고, 그나마 상태가 나은 경원선도 허리가 잘렸으며, 동해북부선은 발목만 남기고 온몸이 절단된 셈이 되어 끝내 현재까지 복구되지 못했다. 미군정을 거쳐 한국정부 수립 이후 이제야 안정을 찾아갈 무렵, 6.25 전쟁이 터지고 만다. 기관차,객화차,교량등 철도시설물들이 절반이상 파괴되거나 북한에게 탈취당하고 말았고, 동해북부선은 폭격으로 초토화되어 폐선되었으며 경원선과 경의선은 짤리고 만다. 그나마 남한에 있던 철도는 덜 손상을 입었지만 북한의 경우 제공권과 제해권을 가지고 있던 유엔군이 신나게 불바다를 만든 탓에 있던 철도까지 모조리 날려먹었다.

오늘날의 한국 교통이 도로 중심으로 짜여질 수밖에 없었던 건, 철도의 황금기였던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건설되었던 철도 노선이 일제강점기 당시 지어진 노선 몇개 빼고는 몇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1960년대 이후 산업화시대로 돌입하면서부터 국가에서 철도에 열심히 투자하기 시작했지만 그 때는 이미 자동차교통의 시대로 돌입했기 때문에 시대의 흐름을 억지로 막을 수는 없었다.

5. 경제발전(1963~2003): 한국철도의 대격변

5.1. 연표

연도 일어난 일
1963 황지본선 개통 및 기존 인클라인 폐지, 기존선을 영동선으로 통합
능의선 가릉-의정부간 개통과 함께 교외선 완전개통
1966 정선선 예미 - 고한 개통
경북선 예천 - 영주 이설 재개통
1968 경전선 진주 - 순천 개통
1969 문경선 진남 - 문경 개통 및 진남 - 가은 구간을 가은선으로 분리
1971 태백선 고한 - 황지 개통 및 기존 구간을 태백선으로 통합
1972 수려선 폐선
1974 서울 지하철 1호선, 서울 - 수원 / 서울 - 인천, 청량리 - 성북 국철 개통
1975 중앙선 청량리 - 제천, 태백선 전구간, 영동선 철암 - 북평 전기철도 개통
1978 경원선 용산 - 청량리 국철 개통
1979 영동선 강릉 - 경포대 구간 폐선
1980 당인리선 폐선
1981 경부선 구로 - 수원 2복선화
1984 서울 지하철 2호선 순환선 완전 개통
1985 서울 지하철 3호선 구파발 - 양재 개통
서울 지하철 4호선 상계 - 사당 개통
부산 도시철도 1호선 1차구간 범내골 - 범어사 개통
1986 수도권 전철 1호선 의정부 구간 연장
1988 안산선 개통
호남선 대전 - 송정리 복선화 완료
1989 안성선 폐선
1990 진삼선 폐선
1992 서울 지하철 2호선 신정지선 개통
1994 주인선 폐선
과천선 완전 개통
1995 수인선 협궤열차 운행중단 및 사실상 협궤 폐선[8]
1996 일산선 전철 개통
서울 지하철 5호선 서울구간 개통
1996 안산선 안산 - 오이도 개통
1999 서울 지하철 8호선 개통
부산 도시철도 2호선 1차구간(서면 - 호포) 개통
인천 도시철도 1호선 1차구간(동막 - 박촌) 개통
2000 서울 지하철 6호선 개통
서울 지하철 7호선 온수 - 장암 개통
비둘기호 폐지
2003 수도권 전철 1호선 수원 - 병점 연장개통

5.2. 설명

한반도에 철도가 들어온 이래 구한말과 일제 초기를 거쳐 여러 철도 노선이 지어졌다 일제의 전쟁 광기, 그리고 6.25 전쟁이라는 민족의 비극을 거치며 분단과 초토화를 거친 철도는 1960년대 초반까지는 그냥 기존에 살아 남은 선로를 어떻게든 복구하고 열차 운행을 정상화하는 것 만으로도 벅찬 일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경제 개발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물류의 확보, 그리고 당시 물류의 핵심인 철도의 확충 역시 중요한 국가 과제가 되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 경제 발전기의 급속한 사회 변화에 따른 여러 혼란은 철도에도 영향을 주었고, 그 결과 도로 확충에도 신경을 썼지만 철도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시기일부 간선 노선을 제외하고는 철도의 영향력이 급락한 암흑기라는 두 가지 상반된 의견이 충돌하는 혼란한 결과가 나온 시기이기도 하다.

일단 KTX 등장 이전의 한국 철도는 도로교통에 밀려 쇠락해가고 있었을 뿐이라는 오해와는 달리, 20세기 후반 자동차가 대세가 된 시대적 흐름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꾸준한 투자 덕택에 어느 정도는 꾸준히 양적, 질적인 성장을 해나가고 있었다. 일제 시대에 건설이 완료된 간선 철도, 그리고 21세기에 접어 들어 새로 부설한 노선을 제외한 나머지 주요 일반 철도 노선은 이 시기에 만들고 개량한 것이다.

1950~60년대 철도의 확충은 당시 국가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는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예상보다 빠르게 공업화를 진행시키자 1963년부터는 매년 4~5월이면 철도 파동[9]이 일어났다. 1966년 우리나라의 철도는 총 2586만톤의 화물 중 2517만톤밖에 수송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69만톤의 화물이 수송되지 못하고 쌓이자 이를 보관하기 위한 보관비/인건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파산하는 중소기업까지 생겨날 정도로 문제는 심각했다. 심지어 대한민국 철도청은 원활한 화물 수송을 위해 철도를 이용한 학생들의 수학여행 자제를 호소할 정도였다. 이는 1966년 10월 절정에 달해, 철도청은 당시 전국 무연탄 공급의 71%를 차지하던 황지역, 고한역, 도계역 등에는 하루 평균 840량의 화차[10]를 투입해 무연탄 파동을 막기 위해 애를 썼으나 석탄에 치중한 나머지 시멘트, 방직 수송이 막혀 시멘트 공장이 멈추고 방직 공장의 가동률이 급락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현대에도 물류와 교통의 중요성을 설명할 때 예시로 자주 등장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11]

이렇게 철도가 산업의 확대에 중요한 변수가 되었기에 정부에서도 철도 건설을 중요 과제로 생각했고, 이 시기에 산업철도의 부설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무연탄 수송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황지선, 동해북부선, 수도권에 안정적으로 중앙선을 통해 올라온 무연탄과 시멘트를 공급하기 위한 망우선 외에도 산업단지 인입선들도 부설되어 전주공단인입선, 여천선, 포항제철에서 생산하는 철강 수송을 위한 동해남부선 효자~영일 구간 등이 건설되었다.

1963년 교외선 개통을 시작으로, 65년에 경인선 복선화, 68년에 경전선이 완전 개통되었으며, 산업선인 중앙선, 태백선의 전철화가 74년에 완료되어 강원도 탄광에서 채굴한 석탄과 시멘트를 서울까지 원활하게 수송할 수 있게 되며 이때 프랑스로 부터 8000호대 전기기관차를 운용하게 된다.[12] 80년에는 충북선이 복선화되었는데, 당시 서울행 노선도 아니고 지방-지방 사이 바이패스 노선이었던 충북선을 복선화시켰다는 것을 보면 결코 당시의 국가당국이 철도교통을 푸대접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호남선이 78년에 대전조차장-익산구간 1단계 복선화, 88년에 익산-광주송정 구간이 2단계 복선화가 완료되어 서울에서 광주까지 복선철도로 쭉 달릴 수 있게 되었으며 여기에 85년에 시행한 주요간선 고속화(새마을호 140km/h, 무궁화호.통일호 120km/h로 증속) 덕분에 서울 ~ 부산 간 새마을호 운행시간은 4시간 10분, 서울 ~ 광주 간은 3시간 50분으로 단축되었다.

이처럼 1970년대 이후 본격적인 자동차 물류 시대에 돌입했음에도 국가에서는 도로 건설 및 자동차 보급 못지 않게 철도에도 균형있는 투자를 하고 있었던 셈이며, 진짜로 한국이 산업화 시대에 도로에만 편향적으로 투자했다면 강원도 탄광 및 시멘트 광산 지대에 건설된 산업선도 고속도로와 고속화 국도 건설로 대체했을 것이며, 간선철도 고속화를 통해 서울 ~ 부산 간 440km가 넘는 거리를 4시간 10분만에 주파하게 된 새마을호는 꿈도 못 꿨을 것이다. 적어도 1960년대가 끝날 때 까지는 그러했다.

그렇지만 1960년대까지 정부의 역점 사업으로 열심히 기획하고 건설한 철도였지만 1970년대에 들어, 즉 경부고속도로의 건설과 함께 무게추가 도로 교통 중심으로 기울게 된다. 실제로 서해안선을 비롯하여 1960년대 후반까지의 철도 건설 광풍 시기에 기획했던 미건설선은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방점이 찍히자 예산 및 효용성 문제로 건설을 포기한 것들이다. 철도는 고정된 지점 사이의 대규모 운송에는 적합하지만 소량, 다양한 위치에서의 운송에는 적합하지 않은데다 많은 건설 비용이 들며 신규 고용 창출 등 국내 경제 규모 확대에 주는 영향이 도로 및 자동차 산업에 비해 적은 점 등이 영향을 주어 1973년 태백선의 완전 개통 이후로는 기존 노선의 개량이나 인입선 수준의 노선 신설을 제외한 중장거리 철도 노선의 신설은 이뤄지지 않았다. 1960년대의 철도 건설 붐은 이렇게 끝났고, 그 이후로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폐선시대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철도 건설 붐이 일었던 1950~60년대의 대한민국은 전형적인 경공업과 자원 채굴 중심으로 국가 경제가 운영되었고 철도 역시 그에 맞춰 건설/개량되었다. 또한 이 때까지는 이촌향도 현상이 이후 시기보다는 심각하지 않아 흔히 말하는 '시골'의 인구 역시 적지 않아 지방 노선의 이용객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철도 건설 붐이 끝난 1970년대 중반 이후로는 산업이 급격히 중공업 중심으로 재편되고 이촌향도 역시 더욱 심해졌다. 1950~60년대를 지탱했던 산업철도인 영동선, 태백선, 경북선, 문경선, 가은선 등은 1980년대부터는 그냥 지방 로컬선으로 전락했고 1988년에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이 시행되고 탄광들이 문을 닫으며 여객 수입은 물론이고 화물 운송까지 급감하게 되자 이들 노선은 1990년대 이후에는 대한민국 철도청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대표적인 적자노선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이런 지방 로컬 노선의 적자를 감당하지 못한 정부는 건설한지 한 세대 남짓밖에 되지 않은 지방 노선까지 폐선을 진행하는 칼을 뽑아 들었다. 대표적인 예가 문경선과 가은선, 진삼선, 교외선 등의 페선(동결)이다. 탄광의 수요에만 기댄 문경선과 가은선, 도로교통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진삼선, 수도권 북부(구 고양, 양주 지역)의 개발 실패로 인한 수요 부족으로 동결을 맞은 교외선 등 이유는 다양하지만 공통적으로 '화물 운송이 급감한 상태에서 이용객도 부족한 상황'이 발목을 잡았다. 1950~60년대에는 이들 지역에 철도를 못 놓고 못 개량해 큰일이었다면 1990년대 중후반 이후로는 적자 때문에 없애지 못해 안달이 나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의 경제 구조 변화, 그리고 그에 따른 철도 구조의 변화는 고작 한 세대 전후로 일어났고, 산업과 인구 구조의 변화로 인한 철도 구조조정은 철도 선진국으로 불리는 국가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라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대한민국의 지형 변화는 너무 급격하고 빨랐기에 그 여파를 바로 몸으로 받아낸 한국의 철도 환경은 일제시대 말기~대한민국 건국 초기 이상으로 혼란스러운 결과를 낳게 되었다. 한 때 정부의 업적으로 당당히 홍보하던 노선들도 폐선을 당하던 시기였으니 당인리선같은 인입선의 폐선은 굳이 적을 필요가 없을 정도다.

아예 폐선까지는 면했어도 지방 인구 급감으로 인한 지방 로컬선의 폐역은 피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판 대폐선시대에도 시멘트 등 벌크화물의 수요가 어느 정도 있는 영동선/태백선은 폐선의 근처에도 가지 않았지만 효자 노선에서 적자 로컬선으로 그 위세는 확 꺾였고, 정선선은 폐선의 위기에서 정선군의 도로교통 상황도 너무 막장이라는 특수성 덕분에 정선아리랑열차라는 반 관광 노선 형태로 어떻게든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이들 이외에도 지방의 간선 철도 역시 폐역은 피할 수 없었는데, 경북선경전선의 폐역이 특히 심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으로 강등되어 사실상 방치되었고[13] 시간이 지난 뒤 선로 개량으로 인한 이설 등 명분을 얻을 때 일괄적으로 폐역 처리가 이뤄졌다.

이처럼 산업철도의 건설과 폐선, 폐역이 자비 없이 이뤄지는 와중에도 전통적으로 이용 인구가 많았던 간선 철도는 이러한 칼질에서 완전히 비켜갔다. 도로 교통의 발전으로 인해 이전보다 수송분담률 자체는 떨어졌을지언정 수송량 자체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 1970년대 초 고속도로의 개통 이후 고속버스의 등장과 시외버스의 시간 단축 효과로 인하여 잠시 간선철도 여객수요가 줄기는 했지만, 꾸준한 철도 인프라 개선을 통한 고속화와 운행시간 단축 덕택에 철도 승객은 다시 꾸준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고속도로와 간선국도의 교통체증이 심해지면서 오히려 고속버스는 철도에 수요를 뺏겨 승객이 줄어드는 반면 빠르고 정시성이 보장되는 철도의 승객 수는 더더욱 급증하게 된다. 우등고속버스가 나오기 전까지는 새마을호는 편안한 프리미엄 교통 수단의 상징이었고, 그 이후에도 정시성과 편안함은 철도의 장점으로 경쟁력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하여 수요가 많은 호남선전라선의 복선화와 개량, 전철화는 산업철도의 쇠퇴 및 지방 로컬 노선의 폐선과 페역과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이뤄졌고 이는 호남이 전반적으로 도로교통 우위 지역으로 불림에도 어떻게든 경쟁력을 갖고 살아남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변화된 산업 구조에서도 여전히 중요도가 높았던 충북선도 복선화의 혜택을 입었다. 충북선과 경합되는 청주 ~ 충주 ~ 제천간 국도 전구간의 4차로 확장은 복선철도가 개통된지 무려 20년 뒤에나 이뤄졌고[14], 이마저도 평면교차가 많아 철도보다는 느린 편이며 최근에야 평택제천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충청내륙로 사업이 추진되어 도로사정이 개선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충북선의 가치가 그만큼 일찍 평가받았다 할 수 있다.

이 시기 철도 교통에서 또 하나 중요한 이정표는 지하철을 비롯한 도시철도의 건설이다. 1968년 서울전차를 폐선하면서 서울의 교통은 버스와 택시 등 자동차에만 의존하였으나 산업화/도시화의 물결에서 서울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자동차로는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교통난이 들이닥쳤다. 여기에 서울과 인접한 위성도시 사이의 교통난이 겹쳐[15] 정시성이 확보되면서 수송량이 자동차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지하철(전철)의 건설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그리하여 일차적으로 경부선의 서울역-수원역간, 경인선의 구로역-인천역간, 경원선의 청량리역-성북역간을 전철화했고, 경원선과 경부선을 종로로 연결하는 수도권 전철 1호선을 건설하여 이들 구간을 합친 수도권 전철이 1974년에 개통되었다. 그 이후에도 순환선서울 지하철 2호선의 개통이 이뤄졌고, 1988 서울 올림픽 개최, 그리고 서울 주변 위성도시의 발전에 맞춰 1호선의 의정부시 연장, 수도권 전철 3호선/4호선 건설까지 이어졌다. 부산에도 부산 도시철도 1호선이 이 시기에 개통이 이뤄져 서울 이외의 도시에도 지하철이 들어서게 되었다.

서울 올림픽 이후에도 수도권의 신도시 개발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서울의 교통정체 해결을 위해 지하철 건설은 계속 이뤄졌다. 2기 지하철 계획으로 서울의 전철망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고, 1기 신도시 계획에 따른 위성 도시와의 교통망 구축을 위해 경원선, 분당선, 일산선, 과천선, 안산선의 개통도 함께 이뤄졌다. 안산선은 1980년대 후반 당시 '''서울에서 안산시를 잇는 광명로47번 국도가 왕복 2차로로 매우 열악하여 확장이 시급했음에도 이를 미루고 복선전철부터 우선 건설할 정도로 중요시한 전철 노선이다,[16] 철도 기술면에서도 발전이 이어져 1977년에는 전동차가 국산화되고 열차집중제어(CTC) 시스템이 도입되는 등 다방면에서 성장을 이루었다. 부산 이외의 대도시 가운데는 대구 도시철도가 이 시기에 처음 등장하였다.

6. 현재(2004~): 한국철도 고속화 시대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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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월 30일 경부고속선 1차 개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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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4월 28일 광주 도시철도 1호선 개통식

6.1. 연표

연도 일어난 일
2004 한국 최초의 고속철도경부고속선 개통 및 경부고속철도 운행 시작.
통일호 완전 퇴역.
광주 도시철도 1호선 개통.
호남선 전 구간 복선전철화 및 호남고속철도 운행 시작.
분당선 보정 연장.
가은선 공식 폐선.
2005 대구 도시철도 2호선, 부산 도시철도 3호선 개통.
수도권 전철 중앙선 개통.
수도권 전철 1호선 천안 연장.
영동선, 충북선 전 구간 전철화.
경인선 전 구간 2복선화.
2006 대전 도시철도 1호선 개통.
수도권 전철 1호선 소요산 연장.
경부선 전 구간 전철화.
2007 장항선 군산~장항 구간 개통으로 군산선장항선에 편입.
남북철도연결사업에 따라 동해선 제진~감호 구간 연결. 인천국제공항철도 구간 개통.
수도권 전철 중앙선 팔당 연장.
인천 도시철도 1호선 계양 연장.
대전 도시철도 1호선 반석 연장.
2008 장항선 신창까지 구간이 복선전철화되고 수도권 전철 1호선 신창 연장.
수도권 전철 중앙선 국수 연장.
부산 도시철도 2호선 양산 연장.
광주 도시철도 1호선 평동 연장.
2009 서울 지하철 9호선, 수도권 전철 경의선 개통.
수도권 전철 중앙선 용문 연장.
2010 수도권 전철 경춘선 개통. 경부고속선 부산 연장.
서울 지하철 3호선 오금 연장.
인천국제공항철도 서울 연장.
경전선 마산까지 복선전철화 및 경전선 KTX 운행 시작.
2011 한국 최초의 경전철이자 무인운전 노선인 부산 도시철도 4호선 개통.
신분당선 개통.
부산김해경전철 개통.
수도권 전철 분당선 기흥 연장.
전라선 전 구간 복선전철화 및 전라선 KTX 운행 시작.
2012 한국의 마지막 스위치백영동선 스위치백 이설.
수도권 전철 수인선, 의정부 경전철 개통.
경원선 백마고지 연장.
서울 지하철 7호선 부평구청역 연장.
수도권 전철 경의선 공덕 연장.
수도권 전철 분당선 왕십리망포 연장.
대구 도시철도 2호선 영남대 연장.
2013 용인경전철 개통.
수도권 전철 분당선 수원 연장.
2014 스카이큐브개통.
수색직결선 개통 및 인천국제공항철도에 KTX 운행 시작.
수도권 전철 경의선수도권 전철 중앙선이 직결운행을 시작하여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 탄생.
2015 경부고속선 대전, 대구 도심구간, 호남고속선, 평택선, 대구 도시철도 3호선 개통.
건천연결선 개통 및 동해선 KTX 운행 시작.
서울 지하철 9호선 종합운동장 연장.
2016 수서평택고속선 개통.
경강선 서원주-만종, 판교-여주 구간 개통.
동해선 부전-일광 개통.
인천국제공항 자기부상철도 개통.
인천 도시철도 2호선 개통
신분당선 광교 연장.
원주강릉선 KTX 운행.
2017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 용문역~지평역 개통.
부산 도시철도 1호선 신평역~다대포해수욕장역 개통.
서울 경전철 우이신설선 북한산우이역~신설동역 개통.
2018 수도권 전철 서해선 소사역~원시역 개통.
서울 지하철 9호선 중앙보훈병원역 연장.
2019 김포 골드라인 개통.
2020 하남선 상일동~하남풍산 간 개통.
수인분당선 수원~오이도 개통.
중앙선 도담~안동 이설.
2021 중앙선 서원주~제천 복선전철화.
중앙선 영천~신경주 복선전철화.
동해선 광역전철 일광~태화강 개통.
하남선 강일, 하남풍산~하남검단산 간 개통.
KTX-이음 운행개시.
동해선 태화강~신경주개통.
중부내륙선 부발~충주 개통.
2022 진접선 개통.
신림선 개통.
2023 수도권 전철 서해선 소사역 ~ 김포공항역 ~ 대곡역 ~ 일산역 개통
수도권 전철 1호선(경원선) 동두천역 ~ 소요산역 ~ 연천역 개통
경전선 진주역 ~ 광양역 전철화 개통
중부내륙선 KTX 판교역 진입
2024 수도권 광역급행철도 A선 수서역 ~ 동탄역 개통
수도권 전철 경강선 성남역 개통
별내선 개통

6.2. 설명

한동안 도로에 눌리고 빠르게 변화하는 산업 구조에 뒤따르지 못하여 한 쪽에서는 폐선을 하면 다른 쪽에서는 확장 개량을 하는 카오스 상태에 빠졌던 한국 철도는 1990년대에 고속철도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획기적인 방향 전환을 맞았다. 고속철도는 여객 수송면에서 고속버스와 항공기에 눌려 있던 철도를 최고의 장거리 여객 수단으로 만들었고, 정부를 비롯한 사람들이 철도에 갖는 인식을 완전히 바꿔놓는 데 성공했다.

사실 도로교통 중심으로 방향을 튼 1970년대 이후에도 정부의 교통정책은 철도를 아예 외면하지는 않았지만[17] 아무래도 초점은 도로 교통의 확대에 있었다. 1970년대 4만km대였던 도로 총연장은 2008년 104,236km로 급격히 증가하였으나 철도 총연장은 1962년 3,032km에서 2008년 3,399km로 10% 연장에 그쳤다. 그러나 이런 꾸준한 주도종철[18] 정책의 결과로, 도로가 혼잡해져 낭비되는 사회적 비용을 뜻하는 교통혼잡비용은 1996년 16조원에서 2015년 33.3조원으로 20년도 되지 않아 배가 되었다. 처음에는 정체를 줄이기 위해 꾸준히 고속도로를 신규 개통하고 국도지방도를 확충 개량했지만 늘어나는 자동차에는 턱없이 부족하여 전국 어디서나 교통체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여기에 넘쳐나는 자동차들로 인한 환경오염 문제까지 지적되고, 화물연대 파업 등을 겪으며 도로교통에 모든 것을 올인할 경우 비상 시 나라 전체의 물류망이 마비된다는 점을 정부에서 뼈저리게 깨달으면서 도로 교통의 대체/보완재로서의 철도의 중요성이 커지게 되었다.

철도가 차세대 대한민국 교통의 중심에 서게 한 시작은 고속철도, 즉 KTX의 개통이었다. 고속철도 건설은 1992년부터 이뤄졌으나 1997년 외환 위기 등을 겪으며 예산 부족 등의 여러 이유로 개통이 2004년에, 그것도 일단 경부고속선동대구역까지만 이뤄진 반쪽 개통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그 반쪽 KTX로도 획기적인 시간 단축 효과를 얻을 수 있었고, 경부고속선 KTX 개통으로 가장 이용객이 많은 경부축 장거리 교통에서의 도로 우위가 완전히 무너지고 철도 우위로 바뀌게 되었다. 심지어 입지와 이착륙 절차 문제로 시간이 걸리는 항공 교통보다도 시간면에서 더욱 우위에 설 수 있게 만들어 철도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바꿔 놓으며 전국을 "반나절 생활권"으로 만들게 된다. 경부고속선이 완전 개통된 지금은 서울-대전은 1시간대, 서울-부산이 2시간대에 갈 수 있는 생활권이 되었다.

여기에 2015년에는 호남고속선 오송~광주송정 구간이 새롭게 개통되어 도로 교통 우위의 호남권, 특히 광주광역시를 철도가 고속버스에 결코 밀리지 않는 지역으로 탈바꿈 시켰다.[19] 2016년에는 기존 경부고속선의 수도권 구간의 문제 보완을 위한 수서평택고속선도 신규개통되어 KTX의 이용은 더욱 편리해졌다. 고속철도의 개통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경부고속선 노선은 20량짜리 KTX-I이 꽉꽉 들어차 그야말로 매일 승객으로 터져나갈 정도로 철도 우위로 재편되었다.

경부 및 호남고속선의 성공에도 정부와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서의 고속철도 성공에 대해서는 그리 확신을 하지 못했다. 경부 및 호남선은 KTX 개통 이전에도 철도 수요가 꾸준했던, 수요가 확실히 존재하는 지역이었지만 나머지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 이 불안을 성공의 확신으로 바꾼 것이 경강선, 즉 강릉선 KTX의 개통이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을 대비하여 지은 강릉선 KTX는 개통 전까지만 해도 올림픽 이후에는 수요 부족으로 적자 노선이 될 것으로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으나, 서울역, 청량리역, 강릉역 등 주요 수요처의 뛰어난 접근성과 고속버스 대비 빠른 속도, 합리적인 요금으로 수도권과 영동 지역의 교통 혁명을 일으키며 이후에도 충분한 수요를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더군다나 이는서울양양고속도로가 경강선 완공 직전에 개통되어 영동지방과 수도권을 잇는 도로망의 확충이라는 철도 입장에서는 불리한 요소를 안고도 얻은 결과였기에 사람들은 이 성공에 다른 간선 노선에서도 고속철도가 성공할 수 있음을 확신했다.

추가적으로 중앙선의 고속화 개량에 따라서 일차적으로 안동역까지 영업중인 중앙선 KTX 역시 중앙고속도로 개통 이후 도로교통에 주도권을 빼앗긴 안동시 지역을 서울과 2시간 거리로 묶으면서 다시 철도 우위 지역으로 탈바꿈시켰다. 부발-충주의 짧은 거리로 개통한 반쪽 노선인 중부내륙선 KTX는 그리 반응이 좋지는 않았으나, 부발역에서 판교역으로 연장 개통 후 이용객이 3배 가까이 증가하였다. 이 역시 공사가 끝나는대로 단계적으로 남쪽으로 추가 개통이 이뤄지고, 출발점 역시 접근성이 좋은 수서역으로 연장될 예정이기에 수 년 뒤에는 평가가 더 좋아질 가능성이 있다.

경부선 KTX로 21세기 철도의 경쟁력을 확인한 정부는 지금까지의 주먹구구식의 철도 건설이 아닌 최소한 10년 단위로 운영하는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을 세워 중장기적인 철도 정책을 세우고 이에 맞춰 종전 철도의 개량과 신규 철도 노선의 건설에 나섰다. 1980~90년대의 철도 정책이 수요가 없는 곳을 폐선하고 폐역하는 데 급급했다면 이제는 어느 정도 정리된 기본 인프라를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도로교통 수요를 빼앗아 올 수 있도록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새 판을 짜는 형태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철도를 미래의 대한민국 교통 수단으로 삼은 정부는 고속철도 이외에도 일반 간선철도 역시 새로운 인구 배치에 맞춰 신규 노선 건설이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특히 2010년대 들어 빨라졌는데, 경강선수도권 전철 경강선과 강릉선 KTX 형태로 먼저 형태를 잡았고, 현재 이설한 구 동해남부선과 삼척선 사이를 채워 하나로 합쳐 통일 시대까지 대비하는 동해선도, 경북 구간 개량이 남은 중앙선 및 지선격인 대구선도 공사중에 있다. 나름대로 철도 불모지에 가까웠던 경기도 서해안 측에는 서해선 및 개량중인 장항선, 역시 철도 불모지였던 경북 북부의 경북선문경선을 일부 재활용하는[20] 중부내륙선의 공사가 이뤄지고 있다. 낙후돼 까이던 경전선부마선과 개량을 등에 업고 격변중이고, 여기에 건설이 확정된 춘천속초선, 남부내륙선 등을 합하면 대한민국의 철도망도 고속도로 못지 않은 수준으로 확장되고 중추적인 노선을 확충하게 된다. 여기에는 준 고속철도인 KTX-이음이 들어가 있거나 들어갈 예정이라 철도가 도로 교통보다 느리다는 말도 점차 과거의 일이 되고 있다.

이러한 간선 철도의 신규 건설은 기술력 부족과 비용 절감을 위해 돌아가는 선형이 많았던 과거 철도와 달리 도로 교통 포화에 따른 여객 운송의 질적 불만과 물류 부담을 완화할 목적으로 산업과 인구 재편이 이뤄진 21세기의 환경에 맞춰 노선을 선정하고, 터널과 교량을 다수 사용한 직선화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또한 도로 교통과 연계하면서 이를 보완하는 형태로 건설되고 있는 것 역시 중요한 부분이다. 실제로 새로 건설되는 간선철도는 고속도로나 국도의 선형과 유사한 경우가 많은데, 경강선영동고속도로, 중부내륙선중부내륙고속도로, 서해선서해안고속도로의 선형과 비슷하다. 동해선은 고속도로는 아니지만 준 고속도로 취급인 7번 국도의 노선을 기반으로 한다. 검증된 수요를 얻음과 동시에 도로 교통과의 연계와 수요 분산을 노리는 것.

그리고 2000년대 후반 들어 수도권과 지방 대도시권에 지하철과 광역전철이 더욱 확대되며 통근 수요에서도 철도의 중요도는 더욱 커졌다.수도권의 경우 3기 지하철 계획이 IMF 사태를 거치며 백지화되고 9호선만 살아 남았지만 우이신설선이나 서울 경전철 신림선 같은 경전철의 신규 건설, 그리고 기존 노선의 연장 등을 통하여 어느 정도 보완하고 있다. 특히 서울과 수도권 위성도시를 연결하는, 위성도시끼리의 연결 전철 역시 이 시기에 꾸준히 건설이 이뤄졌는데, 수도권 전철 1호선에서도 천안역, 신창역까지의 전철화가 이뤄져 경기도 남부 지역과 충남 일부 지역이 서울 및 수도권 남부 중심 도시들과 저렴하고 편하게 이어졌다. 서울 북쪽에서도 경원선경의선의 일부 전철화를 통한 수도권 전철 1호선의 북부 노선 연장 및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의 개통으로 한국의 수도권의 철도망은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심지어 한 때 폐선된 수려선이나 수인선도 도시 권역의 확대에 따라서 도시철도로서 각각 수도권 전철 경강선수도권 전철 수인분당선의 형태로 부활하였다. 서울과 분당 지역을 빠르게 잇는다는 분당선의 당초 계획이 무너지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한 신분당선의 건설 역시 이뤄졌다. 한편 수도권 내 이동을 빠르게 할 수도권 광역급행철도, 신안산선도 공사중이다.

지방 도시권에서도 도시철도 건설은 이어져 부산과 대구에 이어 인천광역시, 대전광역시광주광역시에서도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지하철 체계를 먼저 갖춘 부산과 대구는 상당한 수준의 노선을 확보하게 되었고, 수도권 전철망에 포함되는 인천은 자체 지하철 노선망이 조금 적지만 수도권 전철의 공급으로 이들 지역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할 것이 없는 노선망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예산 문제와 함께 건설 방식 및 노선 논란이 끊이지 않는 광주와 대전의 경우 상대적으로 지하철 건설이 더딘 것이 흠이고, 가장 늦게 광역시로 성장한 울산시는 여전히 지하철이 없다.

KTX 전용 고속선의 건설은 상대적으로 기존 선로의 부하를 줄이는 효과를 가져왔고, 이러한 여유를 바탕으로 광역시를 중심으로 기존선에서 수도권 전철과 같은 방식의 중형 전철을 운용하는 방안이 나왔다. 이미 수도권 전철은 경부선, 중앙선, 경의선, 경원선, 경춘선, 용산선 등 있는 철도는 전부 이 목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21], 부울경권에 동해선 광역전철이 개통하였고 2022년 기준 태화강역까지 운행하면서 울산광역시에도 일단 전철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 이외에도 경부-호남선 기존선 구간인 대구, 대전, 광주시 모두 이들 구간을 활용하여 주변 도시를 잇는 광역전철 계획을 갖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꼭 희망찬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객철도가 가격이 비싼 고속철도, 그리고 통근 중심의 전철로 양분화되어 재편되면서 기존선을 달리는 새마을/무궁화호는 찬밥 신세가 되어 편성이 크게 줄어들었으며 이용하고 싶어도 시간이 맞지 않고 공급이 부족하여 이용하지 못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ITX-새마을이나 누리로 등 새로운 등급의 차량이 계속 투입되고 있으나 전체적인 기존선 장거리 열차 공급은 줄어든 상태. 기존선의 개량으로 인하여 새로 투입되는 장거리 편성도 많은 경우 가격이 비싼 KTX-이음이라 지갑 사정이 좋지 못한 노년층이나 학생들에게는 부담이다.[22] 또한 많은 구간에 KTX-이음이 투입되면서 기존선의 장거리 편성이 대부분 사라지고 구간별 수요만 노린 단거리 편성으로 대부분 바뀌었다. 그 이외에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철도포인트 제도의 개악, KTX 여승무원 비정규직 관련 문제 등은 철도의 오점으로 남았다.

한편, 2000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경의선과 동해북부선이 다시 연결되었는데, 이와 더불어 도라산역과 제진역이 각각 민통선 내부에 새롭게 생기게 된다. [23]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동해선 연장을 통하여 북한과는 상관없이 제진역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보이고 있고 결국 확정됐다.

7. 북한의 철도 역사

북한의 철도 환경/역사

8. 한국 철도 차량의 종류

※폐지된 열차부터 현재 열차 전부 포함해 서술한다.
※도시철도(광역철도) 전동차는 제외하고 일반열차 종류만 서술한다.

3등 객차 < 비둘기호 < 통일호 < 무궁화호 = 누리로 < 새마을호 = ITX-새마을 = ITX-마음 < ITX-청춘 < KTX-이음 < KTX, KTX-산천, SRT
파일:코레일_기본_로고.svg 한국철도공사연도별 여객열차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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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특급열차 보급열차 준급열차 보통열차
1969-1974 관광호 특급열차 보급열차
1974-1977 새마을호
1977-1982 우등열차 특급열차 보급열차
보통열차
1982-1984
1984-2000 무궁화호 통일호 비둘기호
2000-2004 -
2004-2009 파일:KTX BI.svg - 새마을호 무궁화호 통근열차
2009-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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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012 파일:KTX-산천 BI.svg 무궁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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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2021 무궁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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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2023 파일:KTX-이음.png 파일:ITX-청춘 BI.svg 새마을호 무궁화호 통근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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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2024 새마을호 무궁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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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년 열차 등급 개정 이전까지 노선마다 다양한 열차 명칭들이 있었는데 명칭만 통일되지 않았던 것일 뿐 차량은 비둘기호나 통일호 객차였다.
  • 1984년 열차 등급 개정 이후로 새마을호, 무궁화호, 통일호, 비둘기호의 4등급 체계가 정해진다.
  • 2000년 비둘기호 폐지, 2004년 통일호 폐지[24]와 함께 고속철도 KTX가 개통하게 된다.

8.1. 관련 문서



[1]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 철도의 구체적인 역사가 이야기처럼 재미있게 서술되어 있다.[2] 청일전쟁 이후 영업이 중지되었다가 이후 평남선으로 다시 개통된다.[3] "영척"은 영국의 도량형, 즉 야드파운드법을 뜻한다. 따라서 4척 8촌 5분은 4피트 8½인치(=1435 mm)를 뜻한다.[4] 위의 6월 18일 기사에 있는 것[5] 현재는 이 또한 수도권-영남권을 잇는지라 중앙선은 충분히 그 역할을 하다못해 선로용량이 터질 지경에 이르러,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었음에도 끝내 복선전철화와 준고속화를 진행 중에 있다. 그만큼 도시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다.[6] 당시 북한에 발전소가 많아서 북한이 전기 공급을 끊자 전기 부족으로 허덕이는 상황에서 탄광의 석탄을 넘기지 않는 것은 뻔하다.[7] 이미 경부선은 일제강점기 말기에 복선화까지 되어있었다.[8] 형식상 표준궤 개궤[9] 제 때 화물을 운송하지 못해 문제가 생기는 것. 대표적으로 무연탄이 제 때 수송되지 못하면 시민들이 추위에 떨고, 시멘트가 제 때 수송되지 못하면 건설현장이 멈춘다.[10] 2010년대 평균적으로 화물열차 1편성에 화차 20 ~ 30량이 투입되는 것을 생각해보면 무려 매일 30여 편성의 화물열차가 운행한 것이다.[11] 출처 : <한국경제60년사> IV p.263~265[12] 이러한 수송력 강화를 통해 앞서 서술했던 철도 파동이 사실상 없어지게 된다.[13] 공식적인 폐선과 페역은 지역 정치권 등의 반발같은 여론 문제로 쉽게 결정을 내리기는 어렵다.[14] 청주 ~ 충주 구간만 따져도 충북선 개통 15년 뒤에야 4차로화가 완료되었다.[15] 이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는데, 이 시기 박정희 정권의 주요 사건인 광주대단지 사건 역시 서울로의 대중교통 공급 부족이 발생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16] 결국 저 도로들은 90년대 중반에야 확장을 하게 된다.[17] 산업철도는 폐선과 폐역이 이어지면서도 간선인 호남선/전라선의 개량은 계속 이뤄졌고, 산업적인 중요도가 여전했던 충북선 역시 복선화와 전철화를 거쳤다.[18] 主道從鐵, 도로교통이 주가 되고 철도교통이 마이너한 교통수단이 되는 체계. 대표적인 예로 미국이 있다.[19] 광주가 대구, 부산 등 경부선 연선 지역과 달리 완전한 철도 우위 지역이 되지 못한 이유는 KTX 정차역이 광주의 상대적인 외곽 지역인 광주송정역이기 때문이며, 반대로 고속버스 터미널인 유스퀘어의 입지가 매우 좋은 것이 원인이다. 하지만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항공 교통에는 완전한 압승을 거둔 것은 동일하다.[20] 문경선은 사실상 폐선된 구간이 많아 신규 건설과 같은 수준이다.[21] 동결된 교외선은 예외인데, 비용 부담 문제로 동결 상태가 유지되다 2024년에 무궁화호 셔틀열차가 운행할 예정이다. 다만 수도권전철로 편입 여부는 불투명.[22] KTX의 경로 할인은 있으나 주말에는 적용되지 않는다.[23] 2007년 5월 남북철도 시범운행 및 2008년까지의 화물열차 운행을 제외하면 남북 간 철마는 아직 달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도라산역은 안보관광지로서 나름 이름값을 하고 있지만 제진역은 지못미.[24] 이 둘은 CDC 디젤동차수도권 전철이 물려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