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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분류
2.1. 밀덕, 역덕 독빠
3. 특징4. 각국의 독빠5. 독빠인 캐릭터6. 여담2.1.1. 독일 제국 / 제1차 세계 대전 독빠/문제점
2.2. 정치 독빠2.3. 기술 독빠2.4. 스포츠 독빠2.5. 문화 독빠2.1.1.1. 배후중상설 신봉2.1.1.2. 프랑스군 비하2.1.1.3. 독일 제국의 침략성 미화2.1.1.4. 벨기에 학살 옹호2.1.1.5. 동맹국 비하2.1.1.6. 독일 제국군 과대평가
2.1.2. 나치 독일 / 제2차 세계 대전 독빠/문제점2.1.2.1. 편파성2.1.2.2. 전쟁범죄 왜곡
2.1.3. 현대 밀리터리 독빠2.1.2.2.1. 소련군과의 비교2.1.2.2.2. 다른 열강과의 비교2.1.2.2.3. 연합군의 전략 폭격 비난2.1.2.2.4. 일본 제국과의 비교2.1.2.2.5. 현 이스라엘과의 비교
2.1.2.3. 독일 내 집단의 무오설2.1.2.4. 음역과 직역 고집2.1.2.5. 대체역사에 대한 가정2.1.2.6. 총론2.5.1. 판타지 독빠
2.6. 학문 독빠2.7. 역사 독빠1. 개요
독일+빠. 독일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을 뜻한다. 아시아로 한정한다면 와패니즈의 서양 버전으로, 여러모로 상당히 대칭적이다. 특히 한때 벤치마킹의 대상이었고 2차 대전에서는 같은 추축국이었다는 걸 의식해서인지 일본쪽 미디어에서 독빠적 기질을 보이는 경우가 꽤 많이 있으며, 한국에서도 일본 문화 덕후들이 독빠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와패니즈에도 순수하게 일본문화만을 좋아하는 양성이 있는가 하면, 일본의 병크나 군국주의까지 옹호하는 악성이 있는데, 독빠도 이런 양성과 악성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읽기 전에: 본 문서를 편집할 시 다른 문서나 다른 사이트에서의 서술에 대한 박제성 언급, 지나친 감정적 서술을 지양해 주기 바란다. |
2. 분류
2.1. 밀덕, 역덕 독빠
영어로는 Wehraboo(베어부)라고 한다. Weeaboo(일빠)+Wehrmacht(독일 국방군). 밀리터리 덕후로서 독일을 좋아하는 부류. 이쪽이 다수인데 국내에서는 이쪽도 크게 두가지 부류로 나뉜다. 이들이 다수인 이유는 국내의 자료 대부분이 일본을 거친 번역본(외서 → 일본어 → 한국어)이거나 일본발인 경우가 많아서 독빠 성향이 강한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1]미빠나 러빠(정확히는 소뽕)들과 의견 대립이 일어나기도 한다. 영빠와 불빠와도 대립하지만 일단 미빠나 러빠에 비하면 소수라(특히 불빠) 주목받지는 못하는 편.
물론 아래에 서술할 문제점들은 객관적인 눈으로 독일군과 기갑 장비를 바라보거나, 나치에 대한 찬양 없이 그저 군복과 장비의 외관을 보거나 그냥 악의 세력인 게 좋아서 등의 이유로 좋아하는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넓게 본다면 쿠로모리미네 여학원의 팬들이나 강철의 왈츠에서의 독일계 전차소녀, 벽람항로의 독일계 함희, 소녀전선의 독일계 총기 전술인형 등을 좋아하는 사람도 해당될 수 있지만 이런 경우는 순수 밀덕(?)과는 구분되는 편이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밀덕을 겸임하는 경우도 있다.
2010년에 접어들면서 월드 오브 탱크의 영향으로 국내 수 많은 독뽕 유저들에게 냉혹한 현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독일 트리의 경우 독일 전차 특유의 수직장갑 때문에 고통받은 수 많은 독뽕 한국인 유저들이 현실을 깨닫고 소련으로 갈아타거나 그나마 탈만한 미국이나 프랑스로 갈아타는 추세이다.
그런데 워 썬더의 상황은 정 반대이다. 거기는 아예 운영진부터가 독빠 의혹이 있을 정도로 대전기만큼은 순수 지상장비만큼은 독일이 매우 강력한 편이다. 게다가 독빠 유저들에게 완벽하게 장악되었던 포럼은 이미 독일이 최강인 상황에서도 독일에 새 장비를 달라거나 버프시켜달라는 말만 나왔었고, 오죽하면 유저들은 포럼을 "퓌럼(퓌러+포럼)" 이라고 부르면서 비웃고 조리돌림할 정도였으나, 현재는 현대전기는 독장연이라는 밈이 있을 정도로 상황이 많이 안 좋아졌다.
독빠들은 수많은 밀리터리 게임에서 취급이 좋지는 않은 편이다. 머릿수와 활동력을 앞세워 포럼을 장악하여 여론을 강요하는 것은 물론이고 유저 피드백을 받는 제작사가 고증과 밸런스를 오판하여 잘못된 패치를 하게 하기도 한다.
2.1.1. 독일 제국 / 제1차 세계 대전 독빠/문제점
2차 세계대전의 국방군 빠들에 비하면 수가 적긴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제2제국 빠도 엄연히 존재한다. 오히려 요즘은 국방군&무장친위대빠나 연방군빠들보다도 더 기승을 부린다. 다만 밀덕, 특히 한국의 밀덕들 대다수가 워낙 1차대전엔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는 것일 뿐.요새는 배틀필드 1 등 1차 대전 시대 독일군과 독일 제국이 등장한 게임들이 나와서 이들의 머릿수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1차대전 독빠들은 2차대전의 독빠짓을 하다가 그 뿌리가 되는 독일 제국군까지도 숭상하게 된 부류가 대부분이고 오직 1차대전의 독일만 좋아하고 나치 정권 시절의 독일은 부끄럽다고 하거나 혹은 역겹다고 하는 부류도 몇 있다. 반면 독일 2차대전 고위직, 즉 히틀러를 비롯한 대부분의 나치 독일 수뇌부나 독일 원수나 장성들은 1차대전에 참전했고, 독일 제국군의 법통은 독일 국방군으로 바로 이어지기에, 2차대전의 독일 국방군을 찬양하던 독빠들이 1차대전의 독일 제국군까지도 찬양하는 경우가 많다.
나치 독일을 찬양하는 것이 오늘날 세계적으로 금기시되는데 비해, 독일 제국이나 독일 제국군에 대한 찬양이나 옹호는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며 나치 독일 내에서도 SS가 아닌 독일 국방군에 대한 호평가는 어느 정도 용인된다. 어쨌든 노구교 사건과 폴란드 침공을 시작한 추축국이 직접적인 개전 당사자인 제2차 세계 대전에 비해 협상국과 동맹국의 관계는 선악을 나누기 애매한 측면[2]이 있고, 1차 대전 자체가 독일이 일으킨 전쟁도 아닐 뿐더러, 독일 제국 역시 다른 연합국인 러시아 제국보다는 삶의 질이나 인권 측면에서 훨씬 발전된 국가였으며, 유대인도 충성심만 있다면 독일 제국에서 받아들여졌을 정도로 인종 문제에서도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영국이나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는 재학 중 귀국해 1차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독일 유학생들은 적어도 자국의 전몰 학생들과 비슷한 대우를 해준다.[3] 물론 1차대전의 독일 제국 역시 군국주의-전체주의적인 국가였으며 전쟁 범죄에서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4][5], 사상적인 관점에서 독일 제국을 옹호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사실 이 타 서유럽이나 미국[6], 러시아도 해당되는 바라 그렇게 문제시되진 않는다.
2.1.1.1. 배후중상설 신봉
2차대전 국방군빠들과 마찬가지로, 1차대전 제국군빠들도 협상국(연합국)의 승리는 기적이다!이라거나 배후중상설을 굳게 믿고 독일은 1차대전에서 패한게 아니라 연합국들과 동등한 관계의 휴전을 맺은 것에 불과하다. 라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독일 제국은 군사적으로 패배한 적이 없고 오로지 내부의 적. 즉, 독일 혁명으로 인해 스스로 무너진 것에 불과하다 라고 주장한다.일단 동부전선만 놓고 보면 독일 제국이 승리한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제정 러시아는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브루실로프 공세를 제외하면 별다른 큰 승리를 거두지도 못했고, 초반부터 텐넨베르크 전투로 크게 한 번 밀리고 이후로도 나로치 호수 공세나 케렌스키 공세 같은 삽질만 반복하다 결국 혁명으로 왕조가 붕괴되고 이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라는 굴욕적인 조약을 맺고 1차 세계대전에서 이탈하였다.
그러나 주 전장이었던 서부전선을 보자면 독일은 적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보다 열악한 상황이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물자를 공급받았던데 비해, 독일은 영국 해군에 의하여 해상이 완전히 막혀버렸기에 외부에서 자원을 일체 들여오지 못해 순무의 겨울같은 끔찍한 상황들이 발생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이었던 독일군의 파리 점령은 루덴도르프 공세의 실패로 사실상 달성 불가능해지고 만다.
적어도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등은 제2제국같이 외교에서 엄청난 병크를 일으킨다거나 무리한 해상 작전에 실패하여 해양을 봉쇄당하는 등의 잘못을 피하고 광활한 영토와 나름대로 쌓여있던 외교관계, 식민지 등의 여러 자원들을 이용하여 독일과 비슷한 수준의 물자 및 식량난에까지 몰리지 않았다.
결국엔 영국 해군의 봉쇄를 뚫으려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서 대양함대는 수상병영 신세가 되어 버리고 본토에 프랑스, 영국, 러시아인들이 오는 것을 막았지만 영향력은 어찌할 수가 없었던 1918년의 상황을 승리로 볼 수 있다는게 참 신기할 따름이다.
2.1.1.2. 프랑스군 비하
밀덕 독빠들의 특징이 항상 독일군의 라이벌인 프랑스군을 비하한다[7], 마치 역사적으로 항상 프랑스군이 독일에게 호구 노릇을 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는 프랑스군이 독일측에 참패한 전쟁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2차 대전 초기 뿐으로, 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과 프랑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협상국들과 동맹국들이 서로 대등하게 싸웠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나폴레옹 시절 독일어권 지역은 틸지트 조약, 라인 동맹 등으로 프랑스에게 착취를 당했으며 러시아 원정으로 60만 대군을 잃기 전까지 독일어권은 프랑스를 상대로 갑을관계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리고 더 이전인 30년 전쟁에서는 독일을 수백 개의 소국들로 갈가리 찢어 버려 프로이센이 북독일 연방을 주도하기 이전까지 동네북으로 만들었던 장본인이 프랑스였다.1차대전에서 독일을 포함한 각국이 참호전에 휘말려들어서 갖은 삽질을 했는데, 밀덕 독빠들은 마치 프랑스만 참호전에서 삽질을 한 것처럼 왜곡을 하고 있다. 애초에 프랑스군만 삽질을 했다면 진작에 독일이 1차대전의 승기를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참호속에서 사이좋게 죽어갔다. 전차가 도입돼서 참호를 돌파할 방법을 찾기 전까지 독일이건 프랑스건 영국이건 철조망과 기관총 사선에 보병들이 돌격해야 했다. 거기에 최초의 전차를 개발한 영국과 최초의 회전포탑을 개발한 프랑스하곤 다르게 성능은 그렇지 않지만 육상전함에 가까운 A7V의 성능을 1차대전의 티거라고 부르면서 장갑을 왜곡하기도 했다.[8]
또한 프랑스의 전략을 가지고 까는 경우도 있다. 프랑스는 개전시 알자스-로렌 지방으로 진주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알자스-로렌 지방은 역사적으로 독일계 공국들이 다스린 땅이었으나,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프랑스가 뜯어낸 땅이었다. 이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프러시아가 다시 뜯어낸 것. 그러나 그 사이 이 땅은 상당 부분 프랑스화 되어 있었고(아일랜드 독립 시 영국으로 남은 북아일랜드를 생각하면 된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역사적인 치욕의 증거품이자 독일에게는 전리품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 당시 프랑스 국민이 느낀 치욕과 복수심을 일부 표현(더 자극하는 역할도 하였다)한 작품으로 마지막 수업이 있다. 그만큼 알자스 로렌 지방은 프랑스인에게 있어 잃어버린 땅이자, 회복해야만 하는 실지였다. 더군다나, 이 지방은 프랑스 석탄 및 철광석 생산량의 반 이상을 담당하는 요충지로서, 공업화의 원동력을 제공해주는 전략적인 요충지이기도 했다. 프랑스의 이런 사정을 꿰뚫어본 슐리펜은 일부러 알자스-로렌 지방의 방어선을 깊고 느슨한 종심으로 짜고, 주공을 벨기에-네덜란드로 우회기동하여 프랑스군을 와해시킬 계획을 가졌다. 실제로 독일의 슐리펜 계획이 원안대로 실행되었다면 프랑스군이 포위되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재현 또한 가능했기에, 전략적이고 승리지향적이기보다는 근시안적이고 감정적이며 지극히 정치적인 이러한 프랑스의 행보를 빌미로 까는것.
전부 맞는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논리라면, 독일 또한 똑같은 비평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맹점. 굳이 히틀러까지 가지 않더라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가장 큰 원인중 하나가 독일의 최대 오판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전쟁나면 내다 버리라고 했던 동프로이센을 수도인 베를린과 독일 제국의 발원지 브란덴부르크가 위협에 노출된다는 이유로, 프랑스 전선에 할당되어야 할 병력을 대거 러시아 전선으로 재배치 한것.[9] 심지어 벨기에-네덜란드의 주공을 빼서 알자스-로렌 지방의 종심방어선을 더 두텁게 하여 슐리펜 계획을 말아먹었다.
또한 1차대전 당시의 프랑스군을 정신론에만 입각하고 엘랑 비탈에 심취한 군대로, 2차대전 당시 일본군과 비교하며 깐다.
이는 과대한 논리 확장에서 나온 것으로, 정신론을 강조한 프랑스군을 따라한 일본군의 졸전을 프랑스군에까지 적용시켜버린 것이다. 실제 1차대전 원수이자 총사령관이었던 페르디낭 포슈의 명언인(어린왕자에도 인용되었다) "전투에 이기는 것은 결코 졌다고 믿지 않는 것이다."의 정신론은, 2차대전에서 일본군이 채용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부 공통점만으로 프랑스군 전체를 일본군과 같은 레벨로 생각하는것은 지나친 비약.
프랑스군의 정신론은 전쟁에서 지면 모두가 끝장이니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싸워야 한다.의 의미였지, 화력과 무기의 성능이 부족해도 근성과 정신력으로 극복이 가능하다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 증거로 1인용 자동화기인 쇼샤를 26만정 가까이 찍어서 투입시킨게 프랑스였고[10], 1차대전 물건 주제에 75mm가 달려있던 생샤몽, 1차대전판 T-34나 다름없던 르노 FT-17 등 프랑스군도 독일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화력을 중요시하던 국가였다.
1916년부턴 프-독간 전투 교전비가 1:1로 수렴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프랑스가 산업 역량을 영혼까지 끌어모아 화력을 강화시킨 결과다. 그 외 1897년식 75mm 야포, 슈나이더 M1917C 155mm 곡사포, 호치키스 중기관총, 뉴포르, 스패드 등 독일 대비 동등한 화력을 갖추기 위해 애단히 노력했다.
비록 프랑스가 무리한 공세를 펴다가 많은 사상자를 낸 것은 사실이지만, 참호전의 수렁은 그당시 어떤 군대도 피할 수 없었다. 독일군도 1916년에 베르됭 전투에서 막대한 병력과 탄약을 동원했지만 소모전 끝에 결국 기껏 점령해낸 지역들까지 다 토해내며 패배했고, 프랑스군 최악의 참사이자 독일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던 니벨 공세에서도 막상 전투 교환비는 1:1 에 수렴하고 결국 무승부 판정을 받았으며, 그 뒤 벌어진 말메종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3:1 이상의 교환비로 결정적 패배를 당했고, 전쟁 막바지인 1918년 봄, 동부전선에서 끌어모은 병력을 합쳐 루덴도르프 공세를 펴다가 수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결국 전선을 돌파하는데 실패, 여파로 바로 이어진 연합국의 반격인 백일 전투때 변변히 저항도 못해 보고 결국 항복에 이른것을 보면 독일은 국가의 체급을 제외하곤 지휘관들의 능력이나 장비들의 양적/질적 측면에선 프랑스보다 별로 나을 건 없었다. 이렇게 프랑스군을 과도하게 비하하는 경향은 독빠가 주류인 한국 밀덕계의 특징이었던데다 영미식 세계관의 바탕에서 비롯된 프랑스군에 대한 정보 부족도 있었으며, 나무위키 내의 1차 세계대전 및 프랑스군 관련 몇몇 문서들에서 조차 이런 경향이 많이 보였으나 최근에는 1차 대전에 대한 정보가 많아짐에 따라 많이 개선된 편이다.
프랑스는 인구가 개전시 독일 인구의 반을 조금 넘는 60%였음에도 불구하고, 동맹국 주력인 독일 서부군을 끝끝내 막아냈으며, 당연히 승전국의 최고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11][12] 물론 독빠들은
동서의 양면전을 치러낸 독일군은 물론 막강했지만, 1차대전의 승자는 결국 러시아를 제외한 연합국 측이었으며 서부전선의 주력은 프랑스군이었다. 끝물에 참전한 미군, 과다출혈로 도중에 이탈한 러시아군, 1916년 이후에나 본격적으로 출병한 영국군[13]과 달리, 독일의 주력군과 처음부터 끝까지 맞상대한 것이 프랑스군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프랑스군이 독빠들이 말하는대로 비정상적인 군대에 무능하고 약했더라면 에리히 루덴도르프, 파울 폰 힌덴부르크 같은 장군들이[14] 이끄는 독일군 상대로 교환비를 1:1 찍어가며 각종 굵직한 전투들에서 독일군을 패배시키고[15] 결국 독일군 최후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시킬 수도 없었다.
2.1.1.3. 독일 제국의 침략성 미화
그리고 1차대전 독빠들은 독일 제국은 "평범한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전혀 다를 바 없거나 덜한 평범한 나라였다고 주장한다.그러나 이러한 피장파장의 논리는 위험하다. 당장 1차 대전 직전에 조선을 합병한 일본의 경우만 해도, 평범한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버린다. 조선을 비롯한 수탈당한 수많은 나라들 입장에서, 그저 시대가 그랬다는 이유가 변명이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독일 제국은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 등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을 잔인하게 통치하기로 유명했는데, 타 제국주의 국가들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다만 명백히 악질 중의 악질이었던 나치 독일과 달리 1차 대전 시기의 독일은 절대악 개념이 아니었다. 이는 같은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불가리아, 오스만 제국도 마찬가지다.[16] 만행의 규모나 기간을 놓고 본다면 더 많은 식민지를 거느린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이 독일을 욕할 처지가 못된다. 따라서 제국주의 문제는 독일만이 아닌 전 서유럽권이 반성해야 하는 문제이며 따라서 이 부분에 있어서는 영빠나 불빠 등도 독빠를 욕할 처지가 못된다.
2.1.1.4. 벨기에 학살 옹호
일부 독빠들은 1차대전 당시의 벨기에 학살을 옹호하기도 한다. 독일 제국군이 벨기에를 무력점령 하면서 1914~1918년까지 벨기에인들을 마구 학살하고 수탈한 사건을 말하는데, 독일군의 고의적인 민간인 학살로 인해 1914년 한 해에만 1,000명이 넘는 민간인이 죽었고, 디낭 시에서는 700명 가까히 되는 인명이 살해당했다. 벨기에의 적은 인구를 고려해볼 때 절대 낮은 수치가 아니다. 그러나 독빠들은 "레오폴드 2세는 콩고인들 1,000만 명 죽였으니 벨기에는 독일한테 당해도 싸다"라며 제국군의 전쟁 범죄까지도 옹호한다. 덜하게는 "레오폴드 2세가 콩고 자유국 사람들을 백만명 넘게 죽이더니 기어코 그 업보로 애꿎은 벨기에 국민들한테 화가 미치는군." 하는 식의 유감 표명도 있다.독일은 더도 아니라, 콩고의 바로 남단의 나미비아에서 1904년과 1907년 사이에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원주민 10만명을 학살했으며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 이는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기록될만큼 잔혹한 것이었다.[17] 옆의 콩고에서 벨기에가 워낙 잔혹해서 묻혔을 따름이지만, 독일도 비슷한 짓을 한건 사실이니 벨기에의 악행을 들어 독일을 옹호하는 행태는 전형적인 내로남불 논리다.[18]
무엇보다 1차 대전 당시 벨기에 국왕은 레오폴드 2세가 아닌 알베르 1세였으며 살해당한 민간인들이 콩고 학살에 가담했던 것도 아니다. 이런 논리라면 미국도 필리핀을 침공해서 민다나오 섬의 필리핀인들을 학살했으니 훗날 진주만 공습에서 애꿎은 하와이 민간인들이 제로와 케이트 떼의 기총 소사를 당한 일, 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이 미군 포로를 대할 때 행한 각종 학대 행위가 정당하다는 말이 된다.
2.1.1.5. 동맹국 비하
나머지 동맹국, 즉 독일을 제외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과 오스만 제국군 등을 비하하는 것 역시 이들의 주된 특징이다. 주로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동맹국들이 벌여대는 졸전을 항상 독일이 개입하여 수습한다는 것이 주된 골자인데, 이는 일방적인 독일 위주의 시각이다.독일의 역할이 동맹국 내에서 큰 지분을 차지했던 것은 맞지만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역시 자신들이 담당한 역할은 충실히 수행했다. 이탈리아, 중동, 발칸 및 캅카스 전선에서 독일군은 항상 보조 전력이거나 아예 없었으며 주력은 항상 오스트리아와 오스만군이었다. 이들 역시 독일처럼 1918년까지 4년 간 협상국에 교착 상황을 강요해냈다. 반대로 독일 역시 이들이 협상국의 군사력을 곳곳에서 분산해 준 덕에 그나마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 주력을 배치할 수 있었다.
2.1.1.6. 독일 제국군 과대평가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제국은 확실히 강대국이었다. 육군의 전투력은 세계 1위, 해군력은 세계 2위였다. 하지만 독일과 맞서 싸웠던 영국, 프랑스 등의 연합국들도 독일이 그렇게 쉽게 어찌해 볼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영국은 독일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해군력을 자랑하던 세계 1위의 해군 강국이었고, 프랑스와 러시아는 육군 군사력에 있어서 만만찮은 전력을 보유했다.그러나 독빠들은 슐리펜 계획이 갑작스런 러시아 제국의 기습으로 틀어져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제 2제국이 프랑스는 물론 영국까지 손쉽게 정복하는 것이 일도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러시아의 동원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은 분명 독일이었으며, 그 와중에도 동맹인 오스트리아에 협조를 구하지 않고 동부전선을 비워버린 것 또한 독일이다. 결국 슐리펜 계획이 소위 '기습'에 대비하지 못한 비현실적인 전략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제국 해군 역시 전체적인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독일 북부 연안에 그대로 고립되어 있었다.
독일 제국군의 체계 역시 과대평가되었다. 실상은 독일 제국군이야말로 오스트리아군과 더불어 전 세계 열강 중에서 가장 낙후된 군 체계와 문화를 갖추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혼재되었다는 쪽에 더 가까운데, 한쪽에서는 세계 군사사에 한 획을 긋는 참모본부의 엘리트 장교진들이 군대를 이끌었으나 막상 장교 충원 방식은 시대에 뒤떨어진 귀족들의 전유물에 가까웠다. 군국주의화된 독일 제국의 프로이센 군부는 그 자체로 민간 정부와 동등한 또 하나의 권력집단이었다. 자신들의 정치권력을 놓기 싫었던 귀족 엘리트들은 일반 평민들, 특히 라인란트 일대의 소위 '프랑스 물 먹은 자유주의자들과 마르크스 물 먹은 빨갱이들'을 제국 군대의 장교로 모집하는 것을 매우 꺼렸다.
육군과 해군 간의 협조 체계도 없었고, 황제의 개인 비서진이 군 인사문제에 개입했다. 마지막으로 육군은 제국정부가 아니라 프로이센 왕국, 바이에른 왕국, 작센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네 개 영방국이 나눠 갖는 중세적 체계를 명목상으로나마 계속 유지했다. 육군성만 네 개였다. 주로 비교되는 프랑스는 이와 반대로 이미 18세기 말 혁명정부 시절부터 정부의 일원적 통제를 받는 현대적인 국민군 조직을 완성해 놓은 상태였다. 1914년 프랑스가 독일군의 노도와 같은 진격을 끝내 저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효율적인 군 체계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 외에도 다른 볼트액션 소총과 별 다를 바 없는 Gew98이 리-엔필드나 르벨 M1886, 스프링필드 M1903보다 훨씬 우월하며[19], 연합군은 꿈도 못 꿨던 기관단총이라는 물건을 최초로 개발했기 때문에 1차대전 당시 가장 시대를 앞서 내다본 국가라고 옹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연합군 역시 MAB 18를 오히려 MP18보다 더 먼저 전선에 배치했고 M1918 브라우닝같이 현대의 분대지원화기의 근간이 되는것도 만들었다. 또는 독일의 중기관총인 MG08에 열광하기도 하는데, MG08은 영국 기관총인 맥심의 독일판이다.
마지막으로 나치 독일의 전차군단 이미지를 그대로 독일 제국에 적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명백히 오류이다. 보수적인 독일 제국 장교단은 전차라는 신기술을 도입하는 것을 매우 꺼렸다. 그리고 독일 제국이 그나마 실용화한 유일한 기갑 전력은 A7V 전차였는데, 실제로는 기술적으로도 전술적으로도 완전히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A7V는 장갑 재질 문제로 측면에서 기관총 사격을 당하면 전면장갑의 방호력과 다르게 승무원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고작 100대만이 주문되었으며 실제 생산된 것은 고작 21대에 불과했다.
오히려 당대의 전차 선진국은 최초의 전차인 Mk 시리즈를 만든 나라인 영국과 현대 전차들의 직계조상인 르노 FT를 개발한 프랑스다. 괜찮은 기갑 전력이 없던 독일 제국군은 프랑스가 자그마치 3400대나 작정하고 찍어낸 르노 전차 군단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는 1918년 백일 전투에서 독일군이 협상국의 유기적인 제병협동작전에 추풍낙엽처럼 밀려버리는 원인이 되었다. 심지어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던 미군이 생 미이엘 공세에서 전차와 항공기를 앞세워 밀고 들어왔을 때에도 베테랑이라는 독일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훗날 2차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이 획득한 우월한 전차 운용 능력은 바로 이때 협상국의 전차군단 앞에서 느꼈던 무력감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2.1.2. 나치 독일 / 제2차 세계 대전 독빠/문제점
무장친위대 역사재현동호인과 나치 물품 수집가가 무해한 취미 애호가인지, 아니면 사악한 행위인지는 시간만이 말해줄 것이다. 그러나 중대한 도덕의 문제에 관한 절반만의 진실과 더 나쁜 것을 밀거래하는 행태는 가벼이 여겨질 수 없다.
― 미국 툴레인 대학 교수 로렌스 N. 파월의《제2차세계대전의 신화와 진실: 독소전쟁과 냉전, 그리고 역사의 기억》서평 中
― 미국 툴레인 대학 교수 로렌스 N. 파월의《제2차세계대전의 신화와 진실: 독소전쟁과 냉전, 그리고 역사의 기억》서평 中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독일을 좋아하는 사람들. 독일 국방군이 물량이 딸리는 상황에서도 나름 잘 싸운 군대이고, 무기와 군복이 간지난다는 이유로 빠가 된 경우가 많다.
2.1.2.1. 편파성
2.1.2.1.1. 독일 기술 과대평가
독빠들은 2차대전 독일의 무기체계를 절대 기준으로 삼으며 그것이 당시의 주류며 전술적으로 반드시 옳다고 보는 오류를 범하면서 독일과 다르면 이를 비주류며 틀린 선택으로 인식하는 문제를 가진다. 당연하지만 무기체계에서 주류, 비주류와 옳고, 그름은 없고 자신들의 전술 교리에 따라서 선택을 할 뿐이다. 거기다 성과나 결과는 제처두고 당시 베르사유 조약으로 묶여 있던 독일의 교리는 절대로 세계적 주류가 될 수도 없었다. 대표적인 예시로 독일의 전차들이 차장, 포수, 탄약수, 조종수, 무전수 5인 승무원 체계를 가지고 있으니 이것이 주류이며 다른 국가는 나중에 독일을 따라서 승무원 체계를 정립했으며 이를 따르지 않은 승무원 체계는 비주류였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대표적 주류 전차 생산국인 영국은 무전수를 사용하지 않았고 이것이 현대 주력전차로 계승 되었으며 2차 대전 당시에도 사실상 주류였다.이런 스펙상으로 보이는 숫자에만 현혹된 사람들에 의해 생겨난 환상이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MG42. 특히나 히틀러의 전기톱이란 별명의 이유인 분당 1200발 이상의 연사력을 보고 추종하는 경우가 많은데, 스펙만 보면 연사력 높은 게 당연히 더 좋고 만들기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지만, 소형화기에겐 연사력은 성능이 아니라 특징에 불과하며, 기술적으로도 어렵지 않다. 이는 세계 최초의 권총탄 연발 기관총인 이탈리아제 빌라르-페로사가 현대의 미니건 수준인 분당 3000발을 발사한다는 것에서부터 알 수 있다.
고연사력=고성능 논리도 소형화기의 과도한 연사력은 정상적인 군대가 그닥 달가워하지 않는 현실에서 논파되는데, 똑같이 두세 발만 맞아도 죽는 사람에게 잠시 방아쇠를 당기면 초당 8발을 쏘든 20발을 쏘든 일은 똑같이 끝나지만 연사력이 과하면 총알이 낭비된다. 다수 상대 측면에서도 분당 500~600발의 기관총으로도 1차대전 때 보병들을 마구 갈아버린 경험이 있고, 오히려 탄막 형성 면에서도 연사력이 너무 빠르면 반동에 총기가 흔들려 명중률이 떨어지므로 못 맞춘다.[20] 반동을 팍 낮춘 대다수의 FPS 게임에서조차 무작정 난사하면 안 맞는데, 현실에서야 말할 것도 없으며, 연사력이 늘면 반동도 같이 늘어서 목표를 명중시키는데 배나 되는 탄약을 써야 한다. 그리고 탄약은 공짜가 아니며,[21]"연사력이 높아? 아마 총알을 낭비해서 10분 만에 나라가 파산할 거야."(...)] 독일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기관총 총알을 세어 가면서 싸웠다는 말로 유명한 국방군에게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설명이 필요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사력 높으면 최고라는 단순한 시각이 드러난 편집이 잦았는데, MG42 항목의 역사를 보면 "세계 최고의 명품 기관총", "부정할 수 없는 최강의 기관총" "처칠 전차도 단번에 뚫어버리는 기관총(...)"[22]등의 찬양 문구가 붙었던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탄종을 변경한 후계 기관총인 MG3와 비교해서 연사력이 낮아졌다는 이유로 개량품인데도 성능이 더 떨어졌다는 어처구니없는 서술이 강조 표시되어 있었다. 물론 사용 탄종의 변경으로 인해 사거리와 파괴력이 상대적으로 감소된게 맞기는 하다.
이미 전세계에서 1000발/분 이상의 연사력은 쓸데없다는 시각이 많아서 연사력을 떨어뜨리는 경우가 잦으며, 총기 설계기업과 군대 모두 과도한 연사력은 장점이 아니라 문제거리라는 생각이 팽배한데다 그게 정석이다.[23] 이는 일부러 연사력을 떨어뜨려 사용하거나 아예 단발, 점사 기능을 넣는 현대 총기들을 보면 알 수 있으며, 끝까지 초월적인 연사력을 고집한 총기들은 민간이나 특수부대 등에만 관심을 끌다 제식 채용은 꿈도 못 꾸고 단종되는 경우가 잦다. 제식 기관총을 고를 때도 연사력이 낮은 것을 장점으로 보고 채용하는 선진국까지 있다. 하지만 그런 현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직도 연사력 끝내주니 최강이고 최고라는 주장들은 나무위키는 물론이고 여러 사이트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MG42와 그 후계기인 MG3이 종합적인 명품이라고 듣는 것은 성능 덕분이 아닌 새로운 기관총의 용도에 대한 선진적인 개념 덕분이다.
물론 MG42가 좋은 성능을 보유했던 기관총임은 사실이지만, 단점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위에 서술했듯 지독한 독일의 군수생산 비효율성과 빠른 연사력의 조합은 오히려 단점에 가까웠으며, MG42는 맨손으로 총열을 교체하지 못하지만, 동시기 체코의 Vz.26이나 일본의 99식 경기관총은 총열에 손잡이가 달려있어 장갑 없이도 총열교환이 가능함은 물론 캐링핸들 역할까지 겸해 MG42보다도 기동성이 우수했다. 또한 1950년대 후반부터는 벨기에의 FN MAG, 구 소련의 칼라시니코프 기관총 같은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해 MG42 계열들과 동등하게 경쟁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투기 간 교환비가 크기 때문에 소련군 전투기의 성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기술도 있다.[24] 물론 2차대전을 통틀어서 소련군 조종사들의 평균적인 실력이 독일이나 서방연합군, 심지어 대전 초기 일본에 비해 뒤쳐지는 편이긴 했다. 당장에 고공성능에 문제가 있는 항공기들이 대부분이라 에너지 파이팅 같은 공중전 전술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 거기다 그 소련에 비해서 좋았던 프로펠러전투기의 과급기 기술도 미국에 비해 안좋아서 미국 폭격기 고도로 올라가는 요격기는 전쟁 말기에나 생산할 수 있었으며 연합군 폭격으로 100대도 안되는 댓수만 생산 되었다.(Fw 190 D-1X형 21대, Ta 152 69대))
그리고 IS-2 문서의 경우도 IS-2의 화력과 장갑이 뛰어나다고 적혀 있으면 장갑[25]을 지워 버리는 이들 독빠들에게 있어서는 다른 연합군, 특히 소련군의 무기는 독일보다 무조건 열등해야 정상이다. 그리고 모든 육상장비 평가를 본 용도와 상관없이 독일 중전차에 맞서는 대전차전에 맞춰 평가하는 경향이 매우 심하다. 물론 전차의 주 목적 중 하나가 대전차 임무이긴 하지만 2차 대전 당시 전차 특히 소련 전차들은 철갑탄보다 고폭탄을 많이 싣고 다니는 경우가 흔할 정도로 보병이나 벙커, 장애물 제거 등 다른 임무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IS 시리즈의 원래 목적은 최일선에서 벙커나 대전차포 등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122mm 고폭탄의 강력한 화력으로 제거하며 돌진해 전선을 찢어 놓는 돌격전차에 가까웠다) 그리고 SU-152나 ISU-152 같은 대전차전도 수행 가능한 다목적 자주포를 구축전차 설명하듯 설명하며 독일전차에 비해 열등하다고 까기도 한다.[26]
이러한 서술은 소련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서 영국의 전투기인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문서에는 Bf 109는 항상 스핏파이어를 상대로 2:1의 우월한 교환비를 보였으므로 영국을 구했다는 것은 영국인들의 정신승리에 불과하다라던가 스핏파이어는 항상 109보다 열등했다는 서술을 추가하기도 했다. 물론 초기형~중기형 스핏파이어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109보다 약간 열세이기는 했으나 문제는 그 격차가 크지 않았으며 후반기에는 잘못된 전술 등으로 인하여 격차가 더 좁혀졌고, 기체도 개량에 따라서 우열이 뒤바뀌기도 한 데다 후기형은 전반적인 성능에서 스핏파이어의 우세가 유지되었다는 걸 무시했다는 것이다.[27]
또한 영국 순항전차의 얇은 장갑을 비난하는데, 이는 그 얇은 순항전차와 3, 4호 전차의 장갑은 별 차이가 없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3, 4호 전차도 영국의 순항전차 개념에 큰 영향을 받아 순항전차와 비슷한 장갑을 가지고 있었다. 순항전차는 종이장갑이라고 비난하면서 3, 4호 전차는 비난하지 않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이들이 주로 믿는 미신은 독일의 과학기술이 연합군의 것보다 모든 분야에서 월등했다는 것. 독일이 2차대전 주요 참전국중 기술적으로 뛰어난 축에 든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타 강대국과의 차이는 별로 크지 않았으며, 연합국이 우세한 다른 분야와 자원 및 물량으로 충분히 커버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특히 VT신관과 레이더를 위시한 전자장비의 기술력은 영국이 독일에 비해서 월등한 수준이였고 공수부대원들의 낙하산조차도 연합군보다 저열해서 크레타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독일이 다른 연합국을 압도하고 있었던 기술 분야[28]로 V2를 앞세운 미사일 분야를 들 수 있는데, 그마저도 보병용 다연장 로켓은 추진체의 저열함 때문에 후기에는 소련의 항공로켓을 베껴서 사용했다. 그리고 V2의 개발이 미국의 로버트 고다드가 개발한 로켓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29] 항공기 제작 분야는 영국이나 미국에 비해 큰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30] 전투기뿐만 아니라, 대형 항공기의 제작기술 중 폭격기와 수송기는 미국에, 지상 공격기는 일본과 미국에, 대형 비행정은 영국과 일본에 절대적으로 못 미쳤다. 또한 많은 부분에서 미국, 영국, 심지어 소련이나 일본보다 부족한 부분도 있지만 가볍게 넘어간다. 영국의 글로스터 미티어보다 몇 개월 정도[31] 빨리 나온 Me262를 2차대전 유일 제트전투기로 둔갑시키고[32] 수십 년 전 인력 부족 때문에 후일 전쟁에서 질 수도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사람 없이 움직이고 기관총만 쏘는 수준이 아니라 화염방사기들까지 쏠 수 있던 TT-26을 가지고 있던 소련이나 석유 엔진인 TT-26과 달리 친환경 에너지로 작동하는 나가야마 전차를 만든 일본 옆에서 프랑스 것 빼앗아 만든 무선자폭차량 가지고 전쟁에 사용된 최초의 로봇이라고 외치는 수준이다. 특히 Ki-84 하야테 항목은 레퍼런스까지 달아놓고 모든 포케볼프 모델보다 빠르다고 서술된 바로 밑에 독일기가 비웃는 속력이라고 써놓은 바도 있었다.
또한 그나마의 기술적 우위도 후진적인 생산공학(혹은 산업공학) 시스템으로 다 갉아먹은게 독일이다.[33] 중세때부터 내려오는 장인-도제 시스템 때문에 여러 무기의 설계/시험 속도는 매우 느렸으며,[34] 이 때문에 애써 연합국보다 우수한 무기를 내놓는다고 해도 적당한 성능의 병기를 대량생산한 연합군의 공세에 압도당하기 일쑤였다. 이런면에서 독일의 생산공학은 20세기 초반부터 포드주의로 대규모 생산체계를 확립한 미국은 물론 소련에도 뒤떨어졌다. 6호 전차 티거 1대가 T-34 10대와 맞붙어야 하는 상황은 독일의 자원이 부족했다기보다는[35][36] 독일의 후진적인 생산시스템이 낳은 문제점이었고, 결국 2차대전의 승패를 결정했다. 그러므로 연합국에 비해 부분적으로 앞선 기술적 우위만으로는 독일이 절대로 승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기술개발 역시 통상적 생산에 밀려서 미친듯이 발악한 결과 개발한 것이다.[37]
게다가 다른 국가에서 개발한 모든 기술은 무조건 독일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전후 개발된 모든 기술은 증거가 없지만 일단 독일에서 나온 것이며[38] 독일 기술의 복제품일 뿐이라는 것. 이런 식으로 따지면 독일이 이룩한 모든 기술은 산업혁명 이룩한 영국의 것을 훔친 것이다. 물론 V1 미사일을 미군이 카피해서 JB-1 룬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생산했던 등 일부 제대로 된 예시가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빠들의 문제는 새로 개발되는 무기는 당대의 다른무기를 참고하기 마련인데 단지 일부를 참고했다고 하나 같이 전부 직계후손이나 카피품 취급하기 때문이다[39] 반대로 독일이 타국의 장비를 그대로 카피하고 약간의 변형을 준 물건은 완전히 똑같지는 않으니 독일 자체개발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이중잣대를 보여준다. 슬라이드가 총열을 감싸지 않은 권총만 보면 하나같이 죄다 루거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을 하는 데서 이들의 수준을 알 수 있다. 수많은 국가를 거치며 발전한 분야도 거슬러 올라가다 독일이 나오면 그냥 독일개발과 동일시 한다. 모든 화포가 화약을 처음 개발한 중국제라는 정도의 주장이다. 현대에도 독일이 유럽의 다른 국가와 공동개발을 하면 그냥 독일제로 취급해버린다.
거기다 이러한 독일 영향설이 상당히 오래되어 국내에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잘못된 인식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판터를 보고 각 국가들이 주력전차를 만들어 판터가 주력전차의 시조라는 설과 3호 전차의 승무원 체계가 주력전차에 계승되어 확정되었다는 것들이다. 이 두가지 모두 현재는 해당 전차들의 문서에서는 모순에 대한 반박이 되어있지만, 국내에서 10년 이상 지속되어온 설들이라 인식이 고쳐지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릴 듯하다.
무기 성능 왜곡은 비단 서방 연합국과 소련군에 대한 왜곡된 서술에서 끝나지 않고, 독일의 동맹군 일본군까지도 번져나간다. 물론 일본군이 미흡한 무기에 엄청난 삽질을 많이 한 건 사실이지만, 무기 성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일까 성향에 독빠 성향이 덧붙어서 끝내주는 왜곡성 서술이 완성된다. 오랜 기간 동안 아리사카 문서는 왜곡의 절정이었으며,[40] 마우저 소총의 마이너 카피판이라는, 기도 안 차는 서술이 오랫동안 서술되어 있었다. 정작 아리사카의 화약은 프랑스식 화약의 영향력 아래 있으며, 당시의 다양한 볼트액션 소총들 대다수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차라리 독일의 영향이 컸다면 모르겠지만 마이너 카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게다가 독일 무기는 독일 상태가 멀쩡해서 생산 라인이 잘 돌아갈 때 나온 최상품을 기준으로 평가하지만 일본 무기는 대전 말기 미군 폭격에 기반 시설이 모두 파괴되어 버린 후 막 만들어낸 상태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모습도 많이 보인다. 똑같이 대전 말기 성능이 구려졌는데도 불구하고 아리사카는 성능이 별로이고 Kar98k는 볼트액션 계의 명총이라는 식이다. 치하가 천자총통에 뚫릴지도 모른다는 말이 안 되는 소리는 덤.[41] 최근에서야 감정적인 서술을 자제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시각이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모자란 편이다.
2.1.2.1.2. 전차에 대한 환상
문단이 길어져서 분리하였다. 이 문서로.물론 객관적으로 보고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나 독일과 관계가 약하거나 거의 없이 흑삼봉 팬인 사람,[42] 그저 포고 장갑이고 기동성이고 다 때려치우고 외양 때문에 독일 전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43]
2.1.2.1.3. 군조직 과대평가
또 하나의 미신은 독일군이라는 군조직이 매우 합리적이고 전략, 전술적 식견이 높은 군대였으나 히틀러의 군사적 무지와 오판 때문에 그 능력을 전부 발휘하지 못하고 패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만슈타인, 구데리안, 롬멜로 이어지는 소수의 우수한 명장들의 사례로 인해 독일군의 전체 군조직 역시 필연적으로 그들과 동급이거나 모자라더라도 타국가의 군조직 보다 우수하다고 확대해석하는 경향도 있다.분명 당대의 독일군은 헬무트 폰 몰트게의 군 개혁 덕분에, 주변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적능력을 더 잘 활용 할 수 있는 참모본부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한스 폰 젝트의 전간기 군조직 개편 덕분에 유능한 인재들로 구성된 뛰어난 엘리트 집단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이 국방군을, 국방군 장교단을 뛰어난 군 경영자들로 받아들이고 히틀러라는 존재의 간섭이 없었더라면 전쟁에서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는 식의 주장을 뒷받침하기에는 지적해야 할 문제점들이 많다.
독일군은 매우 합리적인 조직이었는가? 병력과 보급 그리고 자원의 운용 면에서 효율을 추구하고 원활한 전쟁수행을 위해 부서간에 긴밀한 협력을 유지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상은 웃기게도, 독일군은 일본군과 비견될 정도로 육해공 그리고 친위대 간에 부서 이기주의가 만연했으며, 나치 지지자들과 비 지지자들 사이에 신경전과 소장파 장교들과 보수파 장교들의 갈등이 산재하고 이러한 조직내 파벌싸움이 전쟁수행에 영향을 끼칠정도의 문제투성이 집단이었다.
우선 첫째로 독일군은 작전을 수립하는 하나의 통일된 부처가 없었다. 같은 전쟁을 수행하는데 OKH(육군 최고사령부)와 OKW(국방군 최고사령부)가 서로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립하고 히틀러를 통한 간접적인 소통을 제외하면 서로간의 의견 교환이 없었다는 말이다.
이런 기형적인 지휘체계는 육군 내부에서의 파벌 싸움에서 기인하는데, 1차 대전 패전후 병기국으로 축소 개편당한 OKL(구 독일제국 육군최고사령부)는 히틀러 집권후 OKH(육군최고사령부) 명명되며 다시 이전의 명칭과 위상을 되찾았다. 그러나 시대는 변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OKL시절과는 다르게 루프트바페와 독일 해군이 그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하였다. 루트비히 베크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는 1차대전 시기 막강한 권력과 비대했던 총참모부(Oberste Generalstab) 시절을 생각하며 히틀러에게 육해공 통합 사령부를 요청했다.
새 사령부의 실권자 자리는 독일제국군 시절에 그러했듯 자신들, 육군이 가지기를 바랬으나 해군과 공군이 반대했고 괴링은 거의 발작했다. 예상과 달리 히틀러는 빌헬름 카이텔이라는 허수아비를 자리에 앉혔고 국방군 최고사령부는 육군의 것이 아닌 히틀러의 것이 되어버린다. 동시에 블롬베르크를 압박하여 퇴역시켜버리고 충격을 받은 베크 역시 자리에서 물러난다. 후임으로 들어온 프란츠 할더 역시 OKW를 아니곱게 본것은 마찬가지였다. 할더는 OKW의 작전과장인 알프레드 요들에게 OKH의 작전에 간섭하면 죽여버리겠다고 살벌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이러한 이유로 사실상 OKH는 OKW의 인사들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육군의 작전에 있어서 OKW의 개입 없이 독단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했다. 육해공의 유연한 협력을 위해 설립된 OKW를 자신들에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철저하게 무시한 OKH는 육군중심의 타 부서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작전을 수립하면서 공군과 해군에 불만을 유발했다. OKW는 초기에는 육해공 의견조율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히틀러의 지시로 베저위붕 작전을 준비하면서 OKH를 엿먹이게 된다.
이렇듯 서로 살벌했던 OKH와 OKW는 바르바로사 작전의 실패로 프란츠 할더가 물러나고 쿠르트 자이츨러가 임명되면서 사이좋게 히틀러의 허수아비가 된다.
비단 OKW를 중심으로 한 적극적인 나치 지지자와 OKH를 필두로 한 암묵적인 나치 지지자들 사이의 파벌 갈등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파벌간 갈등도 상당했다. 대표적인 예로 총참모장 베크가 물러나고 당시 제 1 참모차장이었던 만슈타인를 제치고 제 2 참모차장이었던 프란츠 할더가 참모총장 자리에 올랐는데, 취임후 얼마되지 않아 만슈타인을 야전사령부로 좌천시켜버린 사례가 있다. 그 후 만슈타인은 히틀러와 접선하여 낫질 작전을 성공시키기 전까지 한직에 머물렀다. 군부 내부의 고위 장교 갈등도 상당한데 권력조차 없던 하급 장교들은 어떠했을지 의문이다.
둘째 이중적이고 비합리적인 명령체계의 문제도 있었다. 그들은 독일 군부와 장군들은 우수했다면서 히틀러의 무능함을 물고 들어지지만 히틀러 없이는 의견 조율도 되어지지 않는 집단이 독일 국방군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덩케르크 포위망을 두고 일어난 일련의 갈등인데 구데리안과 클라이스트 및 현장의 기갑지휘관들과 프란츠 할더 vs 후방에서 보병으로 포위섬멸을 하고 있던 클루게 및 룬트슈테트를 위시한 구 세대 장교들 끼리 '방어선을 짜기 전에 포위 섬멸해야 한다' vs '대규모 공세 전에 보병들의 포위 섬멸이 끝나고 보급방이 안정되어야 한다'를 두고 실랑이 하며 시간을 버렸고 히틀러가 보다 못해 정지명령을 내리면서 의견이 반 강제로 조율되어진다.
현대에 와서는 학자들의 분석으로 덩케르크에서 정지시킨 히틀러의 판단이 희대의 오판으로 판명되었지만 당시에는 히틀러 뿐만 아니라 엘리트 독일 군부 내에서도 구데리안 같은 소수의 급진적인 장교들 이외에는 전황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발언을 하지 못했다.
결국 괴링이 자신이 해결하겠다는 다크나이트(...)를 자처하여 적들의 탈출을 용인하고 모든 욕을 들어먹으면서 허무하게 끝났다.
물론 대전 후반기에 가서는 히틀러가 브라우히치를 해임하며 총사령관 자리를 맡고 군부를 쥐락펴락했지만 당시에는 히틀러의 간섭도 총통 명령이나 OKW를 통해서로 국한되었고 OKH 총사령관으로 브라우히치가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이 독일군이 혁신적이라는 이미지를 말할때 빠지지 않는 전격전, 그 중추를 맡은 집중운용 되어지는 기갑 전력 역시 초기에 독일 군부내에서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우선 전간기 전차는 느렸고, 보병의 매복에 취약했으며, 주행거리가 끔찍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변의 전차들과의 소통은 커녕 전차 내부에서 승무원들끼리의 대화조차 불편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대론자들이 내세웠던 표면적인 주장이었고 실상은 보병이 전쟁의 중심으로 부터 밀려나야 한다는 사실에 불만을 가졌다. 선배들이 보병이 주력이었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영광을 누리며 퇴역하고 자신들이 1차 세계대전을 겪은 구 세대 장교들은 고작 수송병과에서 파생된 기갑이라는 신생병과가 아니꼬워 보였다. 기병장교들은 더 했는데 자신들이 맡았던 역할을 전부 물려주고 퇴역해야할 처지에 내몰려 구데리안식 기갑운용에 발작하며 반대했다.
웃기게도 구데리안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원에 소극적이던 군부를 대신하여 적극적인 지지를 준 사람은 히틀러였다. 그의 지원에 힘입어 구데리안은 자신과 선임들이 주장해 왔던 기갑교리가 받아드려졌지만 군부 내에서 나치의 후광을 업고 출세한 장군이라는 딱지가 붙게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일군은 수뇌부부터 일선 장교까지 군사적 판단 이외의 사고가 굳어있었다는 것이다. 모순적이게도 군인으로써 가장 이상적인 자세이지만 이러한 사고가 독일을 1차 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으로 몰고갔다. 그들은 현상에 대한 모든 해결책을 전쟁에서 찾으려 했으며 전쟁이 외교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라 믿었고 심지어 외교가 전쟁을 위해 보조적인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몰트케가 경고했던 무조건적인 전쟁확대를 그의 후임들은 독일의 생존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독재자와 함께 그것을 실현하려다 자멸했다.[출처]
독일의 비밀무기들이 양산만 되었다면 연합군을 이길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애초에 비밀무기들 자체가 일반 병기 양산에서 연합군에 밀리기 때문에 기획된 물건들이었고, 여기에 안 그래도 부족한 자원을 지나치게 분배하여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와 비슷한 시도와 행동을 한 일본군은 뻘짓이라 까면서 독일군은 "참신한 시도를 했다"라고 하고 있다. 현대에서 비슷한 예를 하나 들자면, 오늘날 북한 조선인민군이 대칭전력으로는 한미연합군에게 상대가 안 되니 자꾸 핵무기라는 비대칭전력에 집착하고, 그걸로 과도한 군비를 지출하고 경제제재를 받는 등 국력이 자꾸 감소하면서 그나마 있던 대칭전력조차 점점 더 약해지고 있는 것을 떠올려 보면 된다.
이같이 독일 장교진에 대한 평가가 높은 것은 같은 추축국이었던 일본과 이탈리아의 무능함과 대비되며 독일 장교들이 초반 선진적인 전법으로 판세를 부풀렸기 때문이다.[45] 분명 대전 초기 독일군은 획기적인 전략으로 전 유럽을 점령하며 승승장구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결국 무리한 전쟁의 결과로서 독일은 패전에 따른 인명피해, 전국토의 황폐화, 연합군의 점령과 뒤이은 동서독 분단, 그리고 영구적인 동방 영토의 손실 등 참혹한 대가를 치렀으며 당연히 유능하다고 평가받는 독일 장교진도 이에 대해 결코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2.1.2.1.4. 전투력 과대평가
이들은 독일군이 마치 천하무적의 군대였고, 연합국의 물량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졌다고 착각한다. 특히 이들은 독소전에서 독일은 철저하게 소련군의 물량에 밀려서 결국 졌다고 말하면서, 소련군 전사자는 2,700만명이나 된다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특히 데이비드 글랜츠가 발굴한 "르제프 전투"를 강조하면서 소련군은 사실 독소전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독일군이 서방 연합군을 막으러 서쪽으로 이동한 공백을 차지해 동유럽을 차지했을 뿐이라는 식으로 결론내는 경우가 많다. 정작 데이비드 글랜츠는 "노르망디나 렌드리스가 없었어도 소련군이 독소전쟁에서 승리했을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46]소련군 전사자는 최소 700만에서 최대 1,100만 정도로 추산되며, 동부전선에서의 소련인들의 사상자가 1,60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더욱이 소련군 전사자가 700만이라지만, 순수하게 전투, 그러니깐 서로 제대로 싸워서 생긴 전사자의 교환비는 1:1.3~1.5 가량으로 추산되는 편.[47][48] 예를 들어 독소전 초기인 1941년에만 해도 독일은 소련군 포로를 335만 명 가량 잡았는데 이는 초기 소련군 병력에서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병력들이었으나 기습과 스탈린 서기장과 당의 혼선으로 싹 날려먹은 것이다. 이런 피해는 병력 손실에만 그친게 아니었기에 소련은 전쟁 초반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그러면 전쟁 말기에는 독일이 이러한 전과를 보여주었을까? 물론 전술적 차원에서 독일군이 선전한 건 사실이고, 소련군에게 지속적으로 타격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전략적으로는 분명히 제대로 잡아내지 않으면 질 수밖에 없는 전략적 거점들을 소련에게 내주고 그 결과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여 결국 전선이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전차 및 자주포를 예로 들면 대전 후기로 갈수록 소련군과 독일군의 교환비는 1:1로 수렴해가며, 이는 독빠들이 무적이라고 찬양하는 티거와 판터가 나섰을 때의 교환비로서, 독일군의 주력이 3호 전차나 4호 전차였을 때보다도(약 1:5) 오히려 교환비가 나빠지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독빠들이 소련군의 T-34 및 IS-2를 판터나 티거에는 상대도 안 되는 야라레메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애초에 기본적으로 전술과 처한 상황 자체가 달랐기 때문에 무기 간의 성능을 쉽게 비교하는건 말이 안된다.
유튜브 댓글 같은 곳을 보면, 승패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독일군 우세에서 영미 연합군/소련 우세로 넘어가는 전쟁의 전환점으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거나 반대로 승패는 동부전선에서 결정났고, 서부전선에서 밀고 온 서방 연합군은 오합지졸들의 독일군을 격파해 온 것이며, 서방 연합군은 이런 오합지졸들에게조차 고전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주된 소스는 오토 카리우스가 소련군을 높이 평가한 반면, 서방 연합군은 소련군보다 한참 아래로 평가했다는 단 한 명의 주장을 맹신하는데, 서방 연합군도 만만치 않은 독일군과 싸웠다. 코끼리와 코뿔소가 득시글대던 이탈리아 전선은 물론이며 노르망디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삽질이긴 했지만 네덜란드에서 영국군이 어그로를 끄는 사이 아르덴에서 미군이 독일군을 완전히 꺾어버리고 쾰른에 신형 중전차까지 배치하며 선전한게 서방측이며, 서부전선에서도 동부전선에 배치되었던 판터 전차나 티거 전차, 티거 2, 야크트판터, 나스호른, 엘레판트는 물론 동부전선에는 배치된 적도 없는[49] 야크트티거같이 상당히 강한 무기들이 배치됐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말을 한 카리우스는 야크트티거를 타고 미군을 잠깐 상대하다 종전되어 항복한 게 전부다. 그리고 크릭스마리네와 루프트바페의[50] 등뼈를 꺾은건 말할것도 없이 영국 해군/공군과 미국 육군 항공대이다.
독일군의 패전은 "히틀러의 실책",[51] "날씨와 같은 행운(특히 독소전쟁)[52]에 힘입은 석패이고, 독일군의 승전은 "연합군이 범접할 수 없는 독일군의 압도적인 작전능력 및 우수한 지휘관 탓"이라는 왜곡도 있다.
정치장교의 삽질, 형벌부대 운용 같은 면에서 냉전 시절이나 독일군이 퍼트린 도시전설이 아직까지도 독빠들에게 진실처럼 여겨지고 있다. 나무위키의 어느 항목을 보면 소련군 정치장교들은 작전에 앞서 중무장을 한 독전대를 거느리고 돌격에서 낙오하거나 후퇴하는 병사들을 사살했다는 주장을 써놓고 있는데, 이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초기처럼 소련군에 패배주의가 흑사병처럼 번질 때의 특정한 일화를 일반화하는 주장이다. 애초에 후퇴하는 아군들 몇 죽이려고 중무장한 독전대를 끌고 다니는 것은 병력과 자원의 낭비며, 공산당은 이러한 낭비를 지켜만 볼 정도로 무능한 집단은 아니었다. 또한 현실의 정치장교들은 뻘짓도 많이 했고 지휘 체계를 엉망으로 만들기도 했었지만 병사들과 함께 싸우다가 죽어나갔고, 무엇보다 정치장교들은 공산당원이었고 독일군에겐 공산당원은 포로가 아닌 처형 대상이었다.
이런 독일측의 흑색선전은 자신들의 패배 원인을 소련인의 노예 근성으로 돌리고 소련인들의 애국심을 폄하하려는 독일군의 흑색선전에서 비롯되었다. 즉, 독일군은 애국심으로 싸우는데, 소련인들은 노예근성과 정치장교의 등떠밈으로 인해서 전선으로 밀려 보내진다는 주장이다. 이런 근거없는 낭설은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 그대로 묘사되어 소련의 참전용사들의 엄청난 비난을 받은 바가 있다. 이는 포로가 된 정치장교에 대한 처형을 합리화하기 위한 독일군의 흑색선전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형벌부대도 알려진 것보다 덜 잔인했다는 증거가 속속 나오고 있다. 자세한 점은 형벌부대 문서 참고.
소련군의 정치장교가 상당히 문제가 있는 조직이긴 했지만 적어도 군대의 기강을 잡고 사기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으며 창설 목적은 군사 반란등을 일으킬 수 있는 용의자들을 체포하는 등의 문민통제를 위한 조직이었고, 독일 국방군은 이와 비교하면 아예 정부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문민통제를 씹어먹는 조직이었던데다 페르디난트 쇠르너의 사례로 알 수 있듯 국방군은 프로이센 전통으로 꾸며져온 광기의 절정이었다.
무장친위대는 본래 경호 조직으로 만들어졌을지 몰라도 결국 일선에서 학살과 전투를 병행하는 명목상 나치당 사실상 히틀러의 사병으로 변질되었으며 공군 야전사단이 괴링의 망상이 현실화된 존재들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소련 정치장교의 비효율을 탓하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일.
게다가 이렇게 독빠들이 과장하는 정치장교와 형벌부대는 소련군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독일군은 그보다 한술 더 떴다. 독일군은 대전 초기부터 소련군 못지 않게 형벌부대를 운용했으며, 특히 패전이 임박하자 히틀러와 OKW(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낙오병 사살명령을 내리기도 했고 이에 병사들의 탈주를 막고 전쟁범죄를 막아야할 야전헌병대는 패잔병들을 사살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주체적으로 전쟁범죄의 주체가 되었다. 소련군 폄하는 자신들이 하면 위대한 승리를 방해하는 낙오자들을 사살하는 것이지만 소련군이 하는 낙오병 사살은 패닉에 빠진 정치 장교들과 학살일뿐이라는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다.
무엇보다 2차대전기 독일은 결국 패배했다. 물론 패배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저평가받아야 할 이유는 없지만, 어쨌거나 독일 정도의 강대국이 초기의 놀라운 전술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패했다는 것은 독일군의 궁극적인 대전략이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반면 연합국은 전쟁 내내 막대한 희생을 치렀지만, 그 과정에서 소련은 넓은 영토를 통한 지연전과 막대한 인력을, 미국은 막대한 자본·산업력을, 영국은 정보 기술과 해상·공중에서의 우세 확보에 각각 집중하면서 자국이 가진 강점을 잘 활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나치가 강대했다고는 하지만 온갖 반나치 세력을 감안하면 나치 독일이 유럽에 미치는 영향력은 오늘날 독일이 유럽 연합에 미치는 영향력보다도 낮았고, 각론에서는 유능했을지언정 미국과 소련, 영국 등 주요 강대국들을 모조리 적으로 돌린 시점에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전략적 실책을 저지른 것이었다. 군대의 목적은 질적·양적 팽창이 아니라 국가 전략에 맞게 최대한의 국익을 도모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는 '''오히려 미/소 양국의 지원을 받아 3차대전이 터지면 양쪽 진영을 대표해 유럽전선 최전방 탱커 겸 딜러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었던 동독군/서독군이 결국 궁극적으로 국가의 패망을 막지 못했던 독일 국방군보다 더 뛰어난 집단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
2.1.2.2. 전쟁범죄 왜곡
연합국에 소속되었던 국가들이 저지른 전쟁 범죄들을 핑계삼아 나치 독일의 범죄를 미화하거나 변명하는 경우가 있다. 같은 밀덕이라도 전과 부풀리기 정도는 잘못된 지식 내지는 편향적인 빠심이 불러온 오류 정도로 이해해줄 수 있지만, 추축국 전쟁범죄 미화는 엄연히 현대 사회에서 금기시된 일이며, 도의적인 비판에 더하여 지역에 따라서는 법적인 처벌까지 받을 수 있는 악질적인 죄이다. 물론 연합국의 죄과가 아예 없었다거나 필요악이었다는 식으로 옹호하는 것도 곤란[53]하겠으나, 2차대전 연합국과 추축국의 민간인 사망자 수만 비교해 보더라도 양측이 저질렀던 전쟁범죄의 규모 차이가 명확히 드러난다. 무엇보다 나치 독일처럼 국가가 공식적으로 나서서 특정 인종의 절멸을 시도했던 국가는 심지어 다른 추축국들을 포함하더라도 단 하나도 없었다.[54]2.1.2.2.1. 소련군과의 비교
나치 독일과 히틀러의 전쟁범죄나 야만성을 논할 때 흔히 소련의 스탈린이 카운터파트로 언급되곤 한다. 이는 양국의 이념이 극우와 극좌로 명확히 나뉘는 극단적인 전체주의 독재 국가였으며, 전후 냉전 체제에 접어들면서 소련이 나치의 뒤를 이은 자유세계의 주적으로 떠올랐고, 실제로 전시에도 교전 당사자들 사이에서 가장 격렬한 증오범죄가 오갔던 곳이 바로 동부전선이었기 때문이다.[55] 실제 반인륜적인 범죄의 추이를 살펴보면 일부 독빠들은 주로 소련의 잔혹 행위를 부각하면서 정작 나치 독일의 문제점에 대해 물타기를 시전한다. 그러나 나치 독일과 소련의 전쟁범죄는 겉보기에 엇비슷해 보여도 자세히 보면 차이점이 제법 있다.소련이 국가 주도하에 벌였던 전쟁범죄는 대전 초기 스탈린의 밀명 하에 폴란드인들을 대상으로 저질러졌던 카틴 학살 뿐[56]으로, 이후 독일과의 전쟁 과정에서는 공식적으로 모든 형태의 대민 범죄를 엄금하여 헌병 노릇을 하던 NKVD 부대, 부대 정치장교 등에게 적발되면 엄벌에 처했다.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 지도부가 초중반부의 전쟁범죄를 암묵적으로 허용하다가 문제가 되니 그제서야 통제했다"는 주장도 옳다고 보기 힘든 것이, 소련군은 대숙청으로 장교단이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 나치 독일의 기습공격 여파로 초반의 지휘체계마저 거의 무너졌기 때문에 군에 대한 통제력이 다소 부족할 수밖에 없었고, 온갖 학살극을 저지르며 침공해 들어오는 "악마의 군대"[57]에 맞서는 데 남은 여력을 끌어모아야 했기 때문에 다른 범죄를 엄격하게 처단할 수 없었을 뿐이다. 게다가 소련군은 침략을 당한 대상이었기 때문에 초중반부에는 주로 자국 영내에서 전투를 벌였고, 당연히 독일 민간인을 마주칠 일 자체가 많이 없었다. 물론 자국민에 대한 범죄는 당연히 엄격하게 처벌했다.[58]
반면 독일군의 학살극은 조직적인 차원에서 발생하였다. 당장 아돌프 히틀러부터가 '강조명령'이라는 이름 하에 슬라브인에 대한 철저한 말살을 촉구했고, 현지 독일 장군들은 대부분 이를 충실하게 따랐다. 국방군과 SS를 구별하는 것도 무의미한 것이, 라이헤나우 강조 명령을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국방군 장성인 발터 폰 라이헤나우였고, 이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59]를 포함하여 단 한 명[60]을 제외하면 장교는 그렇다 치더라도 1,360만 장병(=즉 징집된 독일 민간인) 중 누구도 반대 의견을 내지 않았다. 2백만의 사망자를 낳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 역시 대표적인 예시이며, 이외에도 독일군이 조직적으로 저지른 범죄는 셀 수 없이 많다. 소련군 포로 학살도 만만치 않아서, 기록에 따르면 많은 수의 소련군 포로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해당했다. 아우슈비츠 최초의 독가스 학살은 소련군 포로 600명과 유대인 250명에게 치클론B를 살포하여 살해한 것이었으며, 최종적으로 14만에서 50만 사이의 소련 포로들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어갔다. 독일군 내 소련인 포로의 사망자는 독일 측 기록에 따르면 570만 중 330만(약 57.8%)에 달했고, 이는 NKVD 문서에 따른 소련군 내 독일인 포로의 사망자 추산인 273만 중 38만(약 13.9%)[61]에 비해 네 배가 넘는 압도적인 수치이다.
한편 독소전쟁 말기 소련군이 동유럽을 진격하는 과정에서 200만 건이 넘는 강간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강간의 군대"라고 비난하기도 하나 정작 독일군에 의한 소련 여성 강간은 그 수십 배인 수천만 건에 달했으며 강간 후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62] 실제로 42년 한 해만 밝혀진 성범죄 건수가 1천만 건이 넘고, 75만 명의 신생아가 독일군의 강간에 의해 탄생했다.[63] 42년만 해도 이 정도인데,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된 41년부터 독일군이 소련 영토에서 거의 쫓겨나는 44년까지의 통계치를 다 합친다면 그 수치는 배로 늘어날 것이다.
반면 소련군은 1941년 이후 이런 식의 약탈을 공식적으로 허용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뿐더러, 승전이 가까워지고 점령지의 통제권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부터는 강간 등 중범죄자들을 즉결처분하는 식으로 군 기강을 다잡았다.[64][65] 소련군의 강간사례로 베를린의 여인이 흔히 인용되는데, 베를린의 여인의 주제가 그런 쪽이 아니라는 건 둘째치고 "독일군이 소련에게 한 만큼 소련군이 우리를 대했으면 독일 민족은 이미 지도상에서 사라졌을 것" 이라는 주인공의 대사는 절대 언급하지 않는 걸 보면 이율배반적인 태도이다.
물론 적군 포로의 사망률·민간인 대상 전쟁범죄 추이 등 객관적인 수치를 감안했을 때 소련군이 연합군 내에서 가장 악질적인 군대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를 나치 독일이 저지른 전쟁범죄의 복수라는 식으로 정당화하는 것 역시 잘못된 일이다.[66] 하지만 국가 단위에서 대놓고 인종청소를 자행한 것과, 국가에서 민간인 범죄를 금지하는 상황에서 병사/지휘관 개개인이 민간인에게 범죄를 저지른 것은 그 죄질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르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독일 정부는 독일군이 먼저 동유럽 점령지에서 벌여놓은 짓이 있기 때문에 소련군의 만행들이나 전후 독일계 주민들에 대한 보복성 학살·추방에 대한 외교적인 항의를 가급적 피하고 있으며, 기껏해야 자국 내로 도망쳐온 독일계 실향민들에게 약간의 보조를 제공할 뿐이다. 오늘날 소련군이 동유럽에서 저지른 전쟁범죄는 주로 학술적 차원에서 논의가 되고 있으며, 정치적으로는 대전기 독일과 소련 사이에 끼여 많은 피해를 입었고 전후에는 사실상 소련의 식민지배까지 받았던 동유럽 국가들, 그리고 같이 나치에 맞서 싸웠다는 명분이 있는 서방연합국 쪽에서 비판하는 편이다.
2.1.2.2.2. 다른 열강과의 비교
소련과의 비교 다음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 주로 대영제국 시기 영국의 행보나 콩고 자유국 시기 벨기에의 악행 등이 언급되지만, 이외에도 역시 제국주의 열강이었던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러시아 등의 사례를 언급하며 "나치만 욕먹는 것이 억울하다"는 식이다.[67]특히 윈스턴 처칠의 벵골 대기근이 주요 타깃. 심지어 이것과 히틀러와 손기정의 악수[68] 같은 사례를 버무려서 "식민 제국들은 비백인을 차별했지만 나치 독일은 비유럽권에 대해서는 인종주의적이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벵골 대기근은 당시 벵골 지방의 인프라가 엉망이었던 점,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종교 갈등으로 인한 지자체 간 비협조, 그리고 행정력의 미비, 태풍으로 인한 수확 감소, 전시 상황까지 복합적으로 겹쳐진 단순한 기근이기에 홀로도모르나 대약진 운동 당시의 기근과 같은 고의성이 없었다. 그리고 손기정과 히틀러가 악수한 것은 매우 지엽적인 사례이다. 인종주의가 만연했던 당시에도, 타국의 대표를 접견하거나 시상하는 공식 석상에서 인종의 차이를 이유로 악수를 하지 않을 정도의 인종차별적인 행태는 대부분의 경우 예의가 아니었다. 히틀러는 독일 국가원수로서 이러한 당연한 외교적 관례를 지켰을 뿐이고, 이는 다른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가령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당시, 국제연맹 회의장에서 이탈리아 대표단은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에게 '깜둥이'와 같은 인종적인 욕설을 섞어 가면서까지 모욕하였다. 그러나 이 행태에 대해 다른 유럽 국가 대표들은 동조하기는 커녕 매우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루마니아 왕국의 대표 니콜라에 티툴루스쿠는 아예 이탈리아 대표단을 가리켜 '야만인 놈들'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애시당초 식민지는 점령국에게 이익을 제공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착취해도 무너지지 않고 유지가 가능할 정도만큼은 잘 경영해야 한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점령국은 식민지를 착취할 땐 하더라도 어느 정도 개발하고 자국에 우호적인 엘리트들을 심어두려 했으며,[69] 오랜 식민지 경영 경험이 있는 대영제국은 이 분야의 대가였다. 반면 간디를 필두로 한 인도 독립운동이 한창이던 당시 히틀러는 영국 외무장관에게 조언이랍시고 이런 말을 한다. 간디를 사살하시오. 만약 그것으로도 복종시키기에 충분하지 않다면, 국민회의 지도부 열댓 명을 사살하시오. 그래도 충분하지 않다면, 200명 등 질서가 잡힐 때까지 사살하시오. 그리고 나치가 네덜란드와 폴란드를 점령하자 진짜로 이런 정책이 실행되어, 독일군 하나가 테러로 죽을 때마다 공포감 조성을 위해 수백 명의 무고한 인질들이 끌려와 처형당했다. 심지어 레벤스라움을 위해 자신이 점령한 지역의 '열등 인종'들을 국가 정책으로 철저히 말살해 나갔고, 이 과정에서 별다른 충돌이 없다면 억지로 명분을 만들어 내서라도 학살을 자행했다.
정반대로 서구권에서는 다인종·다민족화 된 오늘날의 미국·유럽에 반감을 표하며 나치 독일을 백인우월주의의 상징으로 추앙하는 경우도 있다. 소위 "조상의 뼈 위에서 춤추는 패륜아들"이라는 사설로 유명한 러시아의 네오나치들이 바로 이런 부류로, 이들은 히틀러가 러시아를 친 것이 실수였을 뿐 유대인과 기타 열등인종을 말살하고 '우월한 유럽 백인들만의 통합된 제국'을 건설하려는 방향성은 옳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은 나치 독일이 같은 백인 국가, 심지어 같은 권위주의 우파 정부에 불가침조약도 맺었으며 추축동맹국인 일본 제국(!)마저 반대했던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되었고, 이후에도 폴란드의 저항운동을 무참히 진압하고, 네덜란드에서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으며, 동유럽 백인들은 아예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던 걸 보면, 결코 백인 민족주의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애초에 나치의 이데올로기는 오로지 게르만 민족만을 앞에 놓았고, 그 외의 인종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명예 아리아인' 취급하면서 일시적인 우호를 맺기는 했어도 근본적으로는 열등 인종으로 여겼다.[70] "히틀러가 다른 민족은 탄압했어도 우리 민족은 우대해줬을 거야"라는 건 말 그대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다.
물론 제국주의 식민지 경영은 분명 보편윤리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으며, 인권이 발달된 현대 사회에서는 비판받아 마땅한 어두운 역사이다. 그러나 나치 독일의 악행은 경제적 착취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적인 식민지 경영과 궤를 달리하는 인종 말살이라는 이념적 잔혹성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근대화된 공장식 학살과 같은 국가 주도의 범죄를 낳았다. 그렇기에 제국주의를 이유로 나치즘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다. 더불어 미국과 러시아를 포함하여 유럽 열강들 중 식민지 문제에 대해서 자유로운 나라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며, 독일 역시 나치의 죄과와는 별개로 식민지 나미비아에서의 만행 역시 떠안고 가야 하는 처지이다.
2.1.2.2.3. 연합군의 전략 폭격 비난
연합군의 전략 폭격으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한 점을 들어 "연합군도 민간인을 죽였다"고 물타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략 폭격은 적국의 군수산업 역량을 약화시켜 장기적인 보급 및 전쟁수행능력을 저해시키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수적 피해는 공격자의 입장에서도 최대한 억제하려고 노력한다.[71] 물론 도쿄 대공습처럼 적국 국민들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거나[72] 히로시마 핵폭격처럼 수뇌부를 겁주려고 본보기로 국민을 날리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나마도 커티스 르메이와 아서 해리스가 지적했듯 "총력전 체제에서는 민간인들도 가내 수공업을 통해 군수물자 생산에 도움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당화될 여지는 있으며, 실제로도 군수공장이 밀집한 지역을 선정하여 폭격하였다. 게다가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는 군사 목표물과 민간인이 섞여있을 경우 민간인만 피해서 공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73] 당시 연합군 장성의 일부가 민간인의 피해가 발생해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인 것 역시 본질적으로는 당시의 기술 수준상 민간 피해가 발생하지 않으면서 군사 목표물만을 타격하기는 불가능한데다 어쨌든 민간인들도 군수공장에서 일하며 전쟁 수행에 한몫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종종 지적받는 드레스덴 폭격이나 함부르크 폭격 역시, 드레스덴과 함부르크는 둘 다 주요 공업도시였으며, 드레스덴은 동부전선으로 가는 보급, 교통의 요충지였고 함부르크에는 유보트 기지가 있었다.게다가 이런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폭격은 추축국이 먼저였으며,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도 전략 폭격 과정에서의 민간인 사상자를 이유로 기소된 독일 지휘관은 없었다. 당장 최초의 전략 폭격은 영국의 소도시인 코번트리에 행해졌고 이 이후 나치 독일은 대 피해를 입혔다고 여기며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든다는 표현으로 코번트리하다(coventrieren)라는 말을 썼다. 심지어 런던 대공습이나 충칭 대공습 등 대놓고 민간인에 대한 심리적인 효과를 노린 공격 역시 추축국 진영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2.1.2.2.4. 일본 제국과의 비교
일제의 만행을 강조하면서 나치 독일은 그나마 양호했다고 주장하는 경우이다. 주로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체계적인 학살 시스템을 마련한 나치가 일제보다도 더 큰 비판에 시달리기 때문에 일제가 주로 악행을 자행한 일선부대 수준에서의 비교가 많다.그러나 전선에서의 독일군의 만행도 일본군 못지 않았다. 비록 서부전선만 놓고 보면 독일군이 덜 잔혹했던 것이 사실이나[74], 동부전선까지 포함시키면 절대로 그렇게 볼 수가 없다. 일본군이 중국에서 난징 대학살이니 신멸작전이니 하며 학살극을 벌일 때, 독일군 역시 폴란드에서의 바르샤바 봉기 진압이나[75] 소련 점령지의 홀로코스트 등 무차별 학살을 수도 없이 저질렀고, 이로 인해 죽어나간 사람들의 수는 인류 역사상 최대 수준이다. 게다가 독일군의 포로학대 역시 일본군보다도 심각한 수준이었으며, 포로의 사망률만 비교해봐도 독일군에 잡힌 소련군 포로의 사망률은 57%에 달한다. 일본군에 잡힌 미군 포로의 사망률도 27%로 매우 높은 편인데 독일군은 그것의 2배를 넘는 수준이다.[76] 독일군은 소련군 포로들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둬놓고 치클론B 독가스 실험을 하여 살해하기도 하였다. 가끔 독소전쟁 당시 독일군의 전쟁범죄를 현장 사진을 몇 장 올려놓으면 "그래도 끝까지 고통스럽게 죽이는 일본군보다는 차라리 깔끔하게 죽이는 독일군이 낫네요."라는 식의 헛소리도 꾸준히 등장하는데, 독일군도 온갖 생체실험을 자행했음은 물론이고 수용소의 생리도 일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나치 독일이 일본 제국보다 나았다는 주장은 사실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주장과 달리 나치 독일의 특정 민족의 절멸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광신적이고 집착스러운 학살 행위는 일본 제국보다도 더 큰 충격을 주었으며 20세기 중반 이후 서양 철학계의 조류 자체를 바꿔놓았다. 당대 독일의 동맹인 일제나 파시스트 이탈리아조차 특정 민족의 완전한 절멸을 국가대전략 목표로 삼지 않았으며, 그런 짓에 낭비할 만큼 국가 역량이 넘치지도 않았다. 반면 나치 독일은 아인자츠그루펜이나 홀로코스트에서 알 수 있듯 이념적인 이유로 전례없는 규모의 집단 학살을 벌였으며, 심지어 전세가 기울어가는데도 절멸수용소로 학살을 위한 물자를 끊임없이 배송했을 정도로 전쟁 수행보다도 유대인 대학살을 더욱 우선시했다. 오늘날 독일의 학살이 일본을 비롯한 기타 케이스보다 훨씬 주목받는 건 물론 나치즘의 피해자들이 서구 백인이라는 점도 있기는 하나, 기술적·구조적으로 선진화된 현대 관료제 국가가 특정 민족의 완전한 절멸을 위해 범국가적 규모의 학살 시스템을 마련한 유일무이한 사례이기 때문이다.[77]
독일은 주로 요제프 멩겔레, 일본의 731부대는 이시이 시로의 주도 하에 포로 대상의 각종 생체실험 역시 양국 모두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두 국가 모두 인류에게 유례 없이 엄청난 재앙을 안겨 줄 물건을 만들고 있었다. 독일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를 책임자로 하는 '우라늄 클럽'을 조직하여 핵개발을 시도하였고, 일본 역시 니고연구 등을 통하여 핵개발을 시도하였다. 독일의 경우
국내에서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의 비교가 자꾸만 논란이 되는 이유는, 언론사나 교과서 책과 같은 매체에선 일본과 비교하기 위해 현대 독일의 전후 반성이 비교적 깔끔했다고 알려져 있는데다[82] 한국은 나치와는 달리 위안부와 731 부대로 대표되는 일제의 전쟁범죄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반일 정서가 팽배하고, 게다가 냉전의 영향으로 독소전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83], 국내 민간인 대다수는 나치 독일이 저지른 전쟁범죄라고는 홀로코스트밖에 모른다.[84] 하지만 폴란드 침공과 독소전쟁 당시 그 못지않게 잔혹하고 규모가 큰 대학살이 수두룩했다.
물론 "나치 독일이 일본 제국보다 나았다"는 주장이 반드시 독일의 전쟁범죄를 미화하려는 의도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반일 성향의 단체 혹은 방송과 같은 언론사들이 일본 제국이나 현대 일본을 독일과 대조하여 비판하기 위한 반례로 독일의 사례를 인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85] 하지만 ‘나치와 일제가 벌인 전쟁범죄의 잔학성’과 ‘전후 양국이 보인 다른 태도’는 서로 전혀 무관한 별개의 사안이다. 즉, 전후 독일의 태도가 일본보다 전향적인 것은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가 더 나았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며 전후 독일의 처사는 그것대로 칭찬할 문제이지 그것을 빌미로 전쟁 당시 나치의 전쟁범죄를 축소하려는 시도는 정당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한쪽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반대쪽을 미화하는 태도 역시, 악의적인 왜곡의 의도는 없었을지라도 무지의 소산이라는 측면에서 비판의 여지가 존재한다.[86]
물론 독일의 전후 움직임이 더 널리 인정받고 있지만[87] 이는 전쟁범죄의 잔혹성 여부와 논점 자체가 다르다. 현대 독일 정부의 전향성과 진정성은 높이 평가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나치가 저질렀던 전쟁범죄 자체가 별게 아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전후 독일과 일본 모두 나름대로 과거사를 청산했고[88] 두 나라 모두 오늘날에는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고 보편 인권의 개념을 중시하는 서방 세계의 선진국이다. 그러므로 21세기 두 나라의 외교적 행보에 대한 평가는 역사보다는 현실정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합리적이고, 전쟁범죄와 어두운 과거사에 대한 청산은 각각의 사안에 얽힌 이해당사자들끼리 정부 간 혹은 시민외교를 통해 해결할 문제이지 굳이 누가 더 낫네를 비교하며 한쪽을 옹호하거나 깎아내릴 문제는 아니다.
2.1.2.2.5. 현 이스라엘과의 비교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들이 세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의 분쟁 과정에서 저지르는 만행을 바탕으로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단순히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이 나치에게 핍박받은 역사를 망각했다는 지적은 일리가 있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나치와 이스라엘이 다를 바 없다는 물타기식 논리를 전개하거고 유대인들을 세계의 악 취급하며 나치 정권의 홀로코스트를 은근슬쩍 가볍게 치부한다.[89]그러나 당대 유대인들이 죄다 부자에 독일이 망하기를 바라는 매국노가 아니었다. 당장 프리츠 하버 같은 사람은 유대인이었음에도 독일 제국의 전쟁 수행을 위해 오명을 감수하고 독가스를 개발하는 등 충성을 다했지만, 바로 그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악화되는 사회적 분위기에 등떠밀려 조국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따져 보면 유대인들이 정말로 독일 경제를 쥐락펴락했다 한들, 독일이라는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다해야 할 의무만 다했다면 마땅히 같은 독일인으로 대우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설사 유대인들이 집단화된 이익을 추구하며 다른 구성원들에게 피해를 주었다 하더라도, 불이익을 주어 간접적으로 추방하는 정도면 모를까[90] 일방적으로 수용소에 가두어 놓고 집단 학살을 벌인 것에 대한 면죄부는 될 수 없다. 애초에 유대인 음모론부터가 거짓이지만, 설사 참이라 하더라도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는 어떤 상황에서도 용인되기 어려운 인류사 최악의 인종절멸작전이었다.
또한 현대 이스라엘이 비록 가자 지구 등에서 비인도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것은 사실이나[91], 한편으로는 적성국가들로 둘러싸인 채 독립 직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국가의 존망을 건 전쟁을 벌여온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예방공세를 취하는 면도 없지는 않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이집트와의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진 7~80년대 이후로는 지나친 확전을 자제하고 있고, 국지적인 도발에 대해서 과할 정도로 보복하는 것이 문제일 뿐 무력충돌이 없을 때는 팔레스타인과도 나름 대화를 시도하는 편이다. 이스라엘의 정책은 공격성 면에서 일제의 충칭대공습이나 미국의 도쿄대공습 정도라면 모를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이는 족족 잡아넣어서 학살을 저질렀던 나치의 유대인 정책과는 완전히 다르다. 무엇보다 설령 이스라엘과 나치가 동급이라 해도 그건 각기 별도로 비판할 부분이지 한쪽이 다른 한 쪽의 면죄부가 될 수 없으며, 1930~40년대 나치의 범죄에 희생당한 유대인들 입장에서 미래에 세워질 이스라엘의 정책에 대해 책임질 이유는 당연히 없다.
게다가 오늘날 모든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의 정책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고, 개중에는 이스라엘 밖에서 태어났거나 거주하는 유대인들도 많다. 나치에 반대했던 독일인들이나 독일계 미국인들에게 독일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치의 범죄에 대한 연대책임을 강요할 수 없듯, 유대계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스라엘의 정책에 대한 연대 책임을 져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인류가 인권이라는 개념을 자각한 이래 특정 국가를 멸망시키려는 경우나 단순히 악에 받쳐 특정 민족을 전술적으로 전멸시키려고 한 경우는 많았어도 특정 민족을 전략적으로 완전히 절멸시키려는 범죄는 전무후무했으며, 오직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만이 유대인이라는 거대한 민족 집단[92]을 겨냥하여 벌어졌다. 그렇기에 이러한 관점에서의 나치 옹호는 반유대주의의 죄업을 부분적으로 공유하는 유럽/북미 사회에서 특히나 금기시되고 있으며, 이들 국가에서 넷 우익 수준 이상의 공개적인 자리에서 함부로 이런 발언을 했다가는 나치 미화에 더해 인종차별적 증오 발언으로 간주되어 법의 심판을 받을 확률이 높다.
2.1.2.3. 독일 내 집단의 무오설
2.1.2.3.1. 면죄부 및 미화
일부 독빠들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나 헤르만 호트와 같은 동부전선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으나, 미국의 소환거부로 소련의 전범재판에 넘겨지지 않은 독일군 지휘권들에 대해, "소련이 어거지를 부려 넘겨달라고 했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또한 소련의 형무소에서 사망한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는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며 분개하곤 한다.[93][94]하지만 당대에 밝혀진 것만으로도 이들이 직접 전범행위를 지시했는지가 불확실했을 뿐 예하부대가 동부전선에서 벌인 전쟁범죄는 이미 부지기수였으며, 오늘날에는 추가적인 사료들이 공개되면서 유대인·포로 학살에 관여하였음이 다시 밝혀지는 등 애초부터 별로 면죄의 여지가 없는 자들이었다. 오히려 태평양 전쟁에서 비슷한 짓을 저지른 일본군 장성(마쓰이 이와네, 야마시타 도모유키, 혼마 마사하루, 홍사익 등)들이 직접적인 증거가 없어도 감독부실의 책임을 물어 미국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 것을 보면, 소련의 전범재판은 장성급에서는 거의 사형이 없을 정도로 관대한 편이었다.[95]
2.1.2.3.2. 국방군 무오설
나치빠와는 좀 다르지만 역시 큰 문제가 되었던 사례로 90년대와 2000년대 초까지는 SS가 아닌 독일 국방군과 국방군에 징집된 병사 개개인은 그저 자신들의 의무를 수행했기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깨끗한 국방군 개념을 신봉하는 한심한 작태를 보인 적도 있었다. 독일인들이야 섣불리 비판했다간 패드립이 될까 봐+정치적 이유 때문에 이걸 주워섬길 이유가 있었다지만[96], 아무 상관없는 이역만리 타국(그것도 추축국 정부, 군대, 민간인 모두의 발아래 고통받은 과거가 있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그걸 그대로 믿어버리면 어쩌자는 걸까?이들의 문제점 중 하나는, 덕질 분야가 분야이다보니 독일 국방군과 나치의 관련성을 과도할 정도로 부정한다는 것이다. 물론 악행으로는 무장친위대가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진 않았고 당시 독일 국방군 개개인 중에서는 나치에 협력하지 않은 사람도 있고 비판적인 사람, 심지어 정치엔 관심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가 징집영장 받아 끌려온 사람도 당연히 있다. 그러나 독일 국방군의 전공 즉 명령을 받고는 잘못된 것임을 알고도 그런 명령을 (자의가 있었든 강제적으로든) 수행한 병사 각각의 전공이 곧 명백하게 나치 정권의 이득이 되어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국방군을 징병된 병사 개개인은 잘못이 없네 어쩌네 하면서 철저하게 나치와 분리하여서 꼬리 자르기를 하는 것은, 북한군(=즉 징집 대상/징집 예정인 모든 북한 민간인)을 북한 전체주의와 분리하는 시도만큼이나 파렴치한 짓이라 할 수 있다. 독소전쟁에서 이들에게 죽은 민간인이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00만 단위이다. 당시 독일의 기술력이나 전술 등을 중립적인 차원에서 이렇다 저렇다 평가를 하는 것이야 문제가 없지만, 독일 국방군과 그곳에 징병, 군수 형태로 인력을 제공한 독일 민간인들에서 나치를 분리하고 미화를 하는 것은 정말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봐야할 문제이다.
2.1.2.3.3. 나치 부역기업 문제
일본과 마찬가지로 독일 역시 전후 경제부흥을 위해 군수물자 생산 등으로 침략전쟁 수행에 협력했던 기업들의 과오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은 채 밀어주는 정책을 취하였다. 벤츠, 라인메탈, 마이바흐, 폭스바겐 등등이 대표적인 예.2.1.2.3.4. 오스트리아에 대한 책임 전가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사실과, 오스트리아가 현대에도 네오나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는 현실로 인해, 나치에 대한 책임에서 물타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현대의 네오나치 문제는 독일도 오스트리아와 대동소이하며,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다문화, 다민족적 분위기가 싫어했고, 열등감 때문에 독일로 갔으며, 실패한 미대생 아돌프 히틀러를 전쟁과 학살을 벌인 정치 괴물로 키운 것은 엄연히 독일 내의 우경화 분위기였다.히틀러 출생지가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당시에는 현지의 유력한 소수민족으로 존재했던 발트 3국, 루마니아 트란실베니아, 아니 심지어 러시아령 볼가 독일인이나 독일계 미국인 출신이었다 한들, 히틀러와 나치가 패악질 친 국가적 기반이 독일이었다면 결국 독일의 책임이 가장 크다. 애초에 히틀러 같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다문화주의적 이념과 결코 융화될 수 없었던 인간을 싫어서 뱉어낸 오스트리아 입장에선 단순히 히틀러의 출신지가 오스트리아라는 이유만으로 비판받는 것이 억울할 일이다.[97] 따라서 당연히 모든 책임을 오스트리아에 뒤집어 씌우는 행태는 분명 비판받아 마땅하다.
단, 안슐루스 이후 오스트리아가 대체로 나치 정권에 협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에는 일방적인 피해자 행세를 하여 비난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며, 이는 이것대로 나치 청산의 일부로서 다루어야 할 문제이다. 실제 현대인 대부분은 나치의 책임을 전적으로 독일에게 전가하지 오스트리아를 이와 잘 연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치빠들의 변명과 별개로 독일의 일부로서 오스트리아인들이 행한 과거 악행에 대해서는 새로운 인식이 필요한 면은 있다.[98]
2.1.2.4. 음역과 직역 고집
2차 대전 독일군 및 친위대의 부서, 군종, 계급 및 장비 명칭은 유달리 독일어 원어로 표기되는 일이 잦다. 이는 국적을 불문하고 친독적 밀리터리 동호인들 전반이 지닌 대표적인 특징으로 잘 알려져 있다.비단 영미권뿐만 아니라 한국의 밀리터리 동호인들 또한 그들의 영향을 받아 독일어 원어를 최대한 살려서 표기하거나, 독음을 병기하곤 한다. 가령 독일 공군을 '루프트바페'로 표기하거나, 친위대 상급대장을 '최상급집단지도자'라고 표기하는 식이다. 또는 나치 독일을 지칭하는 용어로 '대독일국'을 고집하기도 한다. 나무위키 또한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며, 많은 문서에서 비슷한 표기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국가 군대들에 대해서는 딱히 그렇지 않다. 가령 영국 해군의 '원수(Admiral of the Fleet)'를 '에드머럴오브더플릿'이라고 발음 그대로 음역하거나 이탈리아 육군 '대장(Generale di corpo d'armata con incarichi speciali)'을 '특수임무군단장군'이라고 일일히 풀어 번역하지는 않는다. 번역의 목적은 한 언어로 쓰인 의미를 다른 언어 사용자들도 알 수 있게끔 적절하게 옮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번역하려는 단어와 대응되는 단어가 이미 자국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사에 원어의 느낌과 합성된 어근을 일일이 살려서 번역하는 것은 낭비일 뿐더러, 독자의 이해를 방해한다. 세계 각국의 군 조직은 각자의 언어와 역사에서 기반한 각각의 명칭들을 보유하고 있다. 가령 같은 영어권이라도 미 해군 원수는 영국과 달리 Fleet Admiral이라고 다르게 표기한다. 이런 마당에 영국 해군 원수의 계급명을 그대로 풀어 함대 제독이라고 서술하면 이게 어느 정도의 계급인지, 한국군의 해군 원수(元帥)와 대등한 계급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반면 대부분의 독일군 관련 명칭들은 소리나는 그대로 표기되거나 직역된다. 물론 비슷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영미권에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그대로 이탈리아어로 읽어 '레지아 마리나(Regia Marina 왕립 해군)'라고 부른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 역시 프랑스어를 그대로 읽어 '그랑다르메(Grande Armée 대육군)'라고 불리며, 미얀마군의 경우에도 버마어를 그대로 읽어 '땃머도(Tatmadaw 국군)'라고 칭한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본국의 표기를 최대한 존중하고자 하는 영미권의 번역 전통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서로 강하게 영향을 주고 받은 유럽 문화권 국가들의 언어적 전통 상, 서로에 대해 이런 식으로 번역을 하는 것이 그다지 낯설지 않고 익숙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한자문화권에 속한 한중일 3국이 서로의 조직명이나 인명을 자국 발음으로 자연스럽게 읽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독일군 관련해서 직역과 음역이 처음 보는 사람들의 이해를 방해할 정도로 특히 과도하게 활성화된 것은 사실이다. 몇몇 조직명뿐만 아니라, 계급이나 장비의 명칭까지 그러하다.
이는 1970년대 당시 서구권에서 범람했던 친독적 밀리터리 창작물들의 영향으로, 매니아화된 소비자들이 독일어 명칭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굳어진 현상이다. 전쟁이 끝나고 감옥에 가거나 목이 달아나기 싫었던 독일군 장성들은 냉전의 시작과 함께 자신들의 전쟁 범죄를 부인했으며, 미군 역사과에 초빙되어 소련과의 전쟁에서 있었던 경험들을 회고록과 역사서로 만들어 출판했다. 이 책들은 당연하게도 실패한 범죄 전쟁의 가담자인 자신에 대한 적극적인 자기변호와 소련군의 능력에 대한 폄하로 구성되어 있다. 동시에 동방에서 벌어진 전쟁 범죄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누락하며, 전쟁 속에서 겪었던 흥미진진한 다수의 개인적인 에피소드들을 포함하여 흡입력을 높인다. 대표적인 서적이 바로 만슈타인의 '잃어버린 승리'다.
이 서적들에 담긴 의도적으로 왜곡된 독일군의 시선은 냉전기 소련을 상대해야 하는 미군의 필요에 의해 일종의 전훈 분석으로서 수용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군 내부에만 머문 것은 아니었다. 소련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스스로를 나치와 분리한 고귀한 전사로 포장한 그들의 회고록들은 냉전 체제 하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민간으로도 퍼져나갔다. 1950~70년대부터는 대중매체의 발달과 맞물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다수의 전쟁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어 인기를 끌면서 대중으로도 이러한 국방군/무장친위대 무오설에 입각한 시각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람들의 관심이 많아지고 깊어지면서, 매니아층이 형성되고 보다 고증을 따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당연하게도 이들이 접하게 된 '역사적 사료'는 위와 같은 독일군 스스로가 남긴 자료들이었다. 이 매니아층은 역사적 맥락과 진실에 대한 객관적 이해 없이 단순히 좋아하는 대상의 전공과 세세한 요소들만을 탐닉했다. 다만 이들을 위해 변명을 하자면 시대적 상황 때문에 객관적인 이해가 불가능했다고 보는 편이 더 맞기는 하다. 보완이 되는 소련측 자료들은 철의 장막 너머에 있어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음역된 독일어 단어들이 퍼져나간 것은 바로 이렇게 형성된 밀리터리 동호인 단체들의 문화에서 기인한다. 1975년에 미주리 주에서 시작하여 200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던 미국의 밀리터리 동호인/리인액트먼트 클럽인 '총통경호대 아돌프 히틀러(Leibstandarte Adolf Hitler)'를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그들은 클럽 이름을 친위대 1사단에서 그대로 따왔으며 회원 명칭조차 전부 국방군이나 친위대에서 사용하던 독일어 명칭에서 가져왔다. 클럽 내의 회원 등급 심사 또한 친위대 진급제도를 그대로 따라 독일어로 표기했고, 가입 절차를 밟고 있는 예비회원까지도 독일어 단어인 '칸디다트(Kandidat)'로 호칭했다. 회원들은 친위대를 재현하는 데에 천착하면서 옷의 재질, 무늬, 시기별 장식까지 세세하게 '고증'했는데, 가령 모직 군복이 아니라 헤링본 무늬 능직 군복을 입고 온 회원 하나는 고증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르브(Farb)'라는[99] 멸칭으로 불리며 극렬한 성토의 대상이 된 적도 있다. 심지어는 독일군의 콧수염 형태에 관한 자료를 찾아내어 공지사항으로 배포하거나 전쟁 당시 독일군 병사들의 이발을 담당했던 핀란드인 이발사까지 찾아내어 두발을 정리하기도 했다. 회원들 간의 관계를 '동지애'를 뜻하는 독일어 단어 '카마라트샤프트(Kamaradschaft)'라고 칭했음은 물론이다.
이 클럽은 2006년 당시 회원 수가 자그마치 35만에 달했다. 하지만 이들이 유일한 '독일군 고증 덕후'는 아니었다. 이외에도 많은 밀리터리 동호인들이 비슷한 조직들을 우후죽순으로 설립했다. 이 클럽들을 중심으로 생산되는 각종 독일군 관련 정보들은 당연하게도 전부 독일어를 그대로 음역했다. 클럽들에서는 독일어 단어를 영어로의 번역 없이 그대로 쓸 것을 규칙에 명시했고, 회원들은 이 독일어 단어들을 그대로 이해하고 말하는 극단적인 '고증'을 지킴으로써 자신이 세계대전 당시의 국방군과 친위대원이 되었다는 느낌을 충족할 수 있었다. 독일어 단어들은 타국인들에게는 너무나 긴 합성어와 다수의 움라우트로 인해 독음이 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동호인들의 고증 열정 때문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산된 정보들은 인터넷이 생겨나자 각 밀리터리 클럽들의 홈페이지와 위키백과에 독일어를 그대로 음역한 표제어를 달고 저장되었다.[100] 이 정보들이 다양한 루트를 거쳐 국내에 그대로 수입되면서 한국 밀리터리 커뮤니티와 나무위키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때문에 미국 유타 대학교 사학과의 근현대 유럽사 연구자인 로널드 스멜서 교수와 현대 미국사 연구자인 에드워드 J. 데이비스 교수는 독일군 관련한 지나친 음역과 과잉 교정들을 친독적 토테미즘 신앙이라며 비꼬는 어조로 비판하기도 했다. 해당 조직을 과도하게 좋아한 나머지, 자기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원어의 발음과 운율을 살리는데 지나치게 천착한다는 것이다. 소위 '독빠'들이 독일 공군을 루프트바페(Luftwaffe)라고, 그리고 해군을 크릭스마리네(Kriegsmarine)라고 꼬박꼬박 불러주면서도 육군은 헤어(Heer)라고 부르는 경우는 드문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뭔가 강인하고 특별한 느낌을 주는 루프트바페나 크릭스마리네와 달리, '헤어'는 발음이 머리카락을 의미하는 영단어 '헤어(Hair)'와 유사한데다 뭔가 맥빠지고 멋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독일군의 명칭은 일종의 고유명사화되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을 스멜서 교수와 데이비스 교수의 시각처럼 배척할 이유는 없다. 다만 번역의 목적으로 다시 돌아가, 이러한 현상이 과연 과한 지적 허영이 아닌지, 독자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지 아닌지 생각해 보고 과도한 경우에는 자제해야 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가령 친위대의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친위특무대)'이나 '게슈타포(Gestapo 비밀국가경찰)'의 경우 역사상 전례없을 정도로 독보적이었던 조직 특성 상, 명확하게 이들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지칭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적절할 것이다. 또는 '일반참모(Generalstab)'과 같이 독특한 특징을 지닌 제도를 고유명사로 존치하는 것은 논란은 있으나 그 제도적 특수성을 강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해군의 경우 시기별로 명칭이 다른 점도 고려해, 고유명사화하여 시기를 구분하기 쉽게 한 점도 고려할 수 있다.
반면 '독일 공군(Luftwaffe)'과 같은 단어의 경우 딱히 그럴 필요가 없다. Luftwaffe란 단어를 그냥 그대로 읽어서 '루프트바페'라 표기하는 경우, 처음 보는 이들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전혀 알 수 없다. 따지고 보면 그냥 한국어의 공군과 대응하는 단어일 뿐인데도 말이다. Luftwaffe라는 조직이 공군이라는 일반적인 틀을 벗어난 특별한 역사적/문화적 고유성이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므로, 이 경우에는 그냥 간단하게 '독일 공군' 또는 '나치 독일 공군'이라고 표기하면 무방하다. 글의 서두에서만 원어를 '독일 공군(Luftwaffe)' 같은 식으로 괄호 안에 병기하면 되며, '루프트바페' 같은 독음은 굳이 일일이 추가할 필요가 없다. 이는 가독성을 해치는 과잉정보이자 사족일 뿐이다. 굳이 설명해야 한다면 별도의 주석을 달아 표기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단, 루프트바페는 독빠가 아니라도 이미 2차대전 때 연합국 장병들이 고유명사처럼 쓰다 보니 굳어진 것이라, 이거만 놓고 독빠질이라 할 수 있는지는 이견이 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등 2차대전 유럽 전선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도 이를 고증해, 대부분의 미군 및 영국군이 독일 공군을 저먼 에어 포스가 아닌 루프트바페로, 독일 공군의 공수부대를 저먼 파라트루퍼가 아닌 팔슈름예거로 원어 그대로 부르는 모습이 나온다.
'대독일국(Großdeutsches Reich)' 이라는 명칭 역시 마찬가지다. 이 국호는 일부 친독적 밀리터리 동호인들과 역사 동호인들이 여전히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표면적으로는 당시 독일의 '공식 명칭'이라는 이유에서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선호하는 원어의 강인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 직역을 고집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는 전혀 적절하지 못한 태도이다. 대독일국이라는 표현 자체가 중립적이지 못하며, 레벤스라움 건설에 대한 의지와 나치 이데올로기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대독일국'이라는 단어는 독일에서조차 터부시되는 대표적인 나치 단어로 인식되며, '나치 독일(NS-Staat)'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따라서 1차 사료에의 직접 인용과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사용을 지양해야 한다.
가장 심한 부분은 바로 친위대 관련 문서 및 언급들로, 유달리 이런 부분에선 나무위키 문서들이 독일어 발음 혹은 직역으로 제목이 작성되거나 문서 내 언급이 되어 있다. SS 대령이라는 언급을 하면 꼭 뒤에 누군가가 (SS연대지도자) 같은 식으로 쓸데없는 표기를 달아 놓는다. 해군 계급이 언급될 때마다 대령 뒤에 (함장), (1급함장)같은 표기가 계속 뒤따르는 게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이 직역되거나 음역된 독일어 명칭들은 오직 친독적인 밀리터리 동호인들만이 사용하며 대중성이 떨어진다.[101] 반면 학계에서 저술한 역사서들이나 논문들에서는 '친위대', SS와 같이 제대로 번역된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SS의 경우는 서방권에서 밀덕이 아니더라도 매우 흔하게 쓰는 약칭으로, 수많은 친위대 중 나치 친위대임을 바로 알아볼 수 있어 편한 데다 2차대전 때부터 연합국에서도 써왔기에 별다른 이견이 없이 두루 쓰인다.
2.1.2.5. 대체역사에 대한 가정
친독적 밀리터리 동호인들의 또다른 주요한 특징 중 하나로 대체역사를 상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이 패배하지 않고 승리하는 경우에 대해 가정한 다수의 창작물들을 생산하고 또 소비한다. 2차 대전과 독일군은 대체역사 장르에 있어 독보적인 비중을 차지한다.이 역시 기원은 냉전이 한창이고 친독적 밀리터리 클럽들이 우후죽순으로 성장하던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 국방군의 전술적 능력에 심취한 밀리터리 동호인들은 소련을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었을까에 대하여 많은 논의를 이어갔는데, 여기에 전문성을 불어넣은 이들은 바로 생존한 국방군 장성들과 대소전 전략을 짜던 당대 미국의 일부 군사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은 히틀러의 간섭에 대한 배제, 주요 전장에서의 군사적 실수에 대한 반성, 여러 제반 조건의 조정 등을 통해 독일군이 이길 수 있었던 환경을 다시 돌아보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 전쟁의 시나리오를 짬으로써 독일이 이기는 결과를 도출했다. 이 작업은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102]과 같은 실제 참전자이자 장성들의 조언과 증언에 기반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부여된 전문성은 다시 친독적 밀리터리 동호인들 사이에서 이 책들이 널리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한마디로 독일 관련 대체역사소설들은 냉전이라는 배경 속에서 성장한 국방군 무오설과 워 게임, 그리고 대중매체의 융합체였다.
국방군의 '잃어버린 승리'를 논하는 이 소설들은 그 성격상 군사적 승리를 논할 뿐, 나치 독일의 범죄는 완전히 누락한다. 가령 미국 해군대학원의 근대 유럽사 교수인 러셀 H. S. 스톨피가 쓴 "히틀러의 동부 기갑부대"와 같은 대체역사 서적들에서 소련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나 각종 학살들은 언급되지 않으며, 대신 대숙청과 같은 소련 정부의 잔악성이 조명된다. 정리하자면 당시의 대체역사소설들은 국방군 신화에 입각하여 나치의 범죄에 대해 조명하지 않았고, 실제론 존재하지 않았던 승리를 여러 전문가 집단의 분석을 통해 구체화함으로써 독일 국방군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심리적인 만족감을 가져다 준다.[103]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의도를 담지만 않았을 뿐이지 전후 일본에서 유행한 극우 미디어물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미국에서 형성된 이 독일군 관련 대체역사물들은 자체적인 밀리터리 오타쿠 문화가 발달했던 일본으로도 전파되어 환생물과 같은 서브컬쳐 문화와 다시 접목되었고, 그것이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 지금에 이른다. 때문에 한국과 일본의 국방군 관련 대체역사 창작물들 또한 이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가령 대체역사의 속성을 지닌 판타지 소설인 2000년대의 "강철의 누이들"의 경우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나치의 대표적인 범죄를 작중의 소련에 해당하는 국가에 전가하면서 큰 비판을 받았다.
한편 2020년대 이후 등장한 한국의 많은 인터넷 대체역사 소설 중 독일을 주제로 하는 몇몇 소설들 역시 이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 이 소설들은 2차 세계대전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이전을 시작 시점으로 잡거나, 원 역사를 아는 주인공이 나치에 가담한 인사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나치가 연관된 논란을 회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수의 유명한 국방군 장성들은 반대로 주역으로 등장하며 환생자인 주인공이 개변한 역사 속에서 영광을 얻는다.
때문에 이 소설의 작가들이 나치당의 범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실제 2차 세계대전과는 다른 역사를 전개한다 한들, 그들의 의도와는 반대로 작품 내에는 실제 역사에서 나치당의 전쟁 범죄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했던 독일 장성들이 주인공의 세력으로 병존하는 모순이 드러난다. 아무리 가상이더라도 작위적으로 역사를 비틀면서까지 실제로 범죄 집단에 가담했던 이들의 책임을 누락하고 그들의 군사적 전공만을 부각시켜 소위 "뽕"을 채울 필요성이 있는지, 그리고 그 서술 방식에 과연 문제가 없는지 항상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독일 국방군과 관련된 대체역사물들은 그 탄생 배경이 국방군 무오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장르와 소재의 태생적인 문제는 40년이 지난 현재도 여전하다. 대체역사소설의 창작자들이 아무리 나치 요소를 배제하고자 노력하더라도, 이는 완전히 제거될 수 없다. 오히려 창작자들의 이런 시도는 전후 독일 사회에서 국방군 군인들을 단순가담자(Mitläufer)로 분류하여 면죄부를 제공했던 행위를 답습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한다. 다시 말해 나치와 관련된 요소를 배제하고 역사를 비틀고자 하는 대역물 작가들의 시도야말로, 자신들의 범죄 책임을 면하고 위대한 군사 지도자로 역사에 남고자 했던 국방군 장성들의 노력에 힘을 실어주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이러한 양산형 대체역사 창작물들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예시는 로버트 해리스의 "당신들의 조국"이다. 이 소설이 다른 2차대전 관련 대체역사 창작물들과 달리 명작 반열에 올라 수십 개국에 번역되어 지금까지 읽히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해리스의 유려한 문체나 각종 역사적인 문서들까지 동원하는 치밀한 집념 때문이 아니다. 국방군 무오설이라는 불순한 의도와 덕질이라는 얄팍한 목적으로 역사를 개변한 동시대의 다른 대체역사 소설들과 달리, 해리스는 나치 독일의 승리라는 가정을 통해 홀로코스트라는 실제로 벌어졌던 역사적 비극과 나치 범죄에 희생된 사람들을 조망했기 때문이었다.
2.1.2.6. 총론
"이 저자들은 전투, 날짜, 제복, 훈장, 약장에 관한 세부사항과 박진성에 기울이는 세심한 주의를 영웅적 에토스에 아로새겨진 편향되거나 수정주의적인 역사적 맥락과 결합한다. 아니면 역사적 맥락이랄 것이 전혀 없다. 또한 그들은 일종의 도상학적 효과를 지니도록 자기 책의 본문에 –부대의, 전투 장면의, 여러 개인의– 사진을 많이 끼워넣는다. 용어, 즉 독일군 계급, 차량 명칭, 훈장도 마찬가지여서, 늘 독일어 원어로 표기되며 토템적 가치도 지닌다. 책 제목도 낭만성을 자주 띤다. 몇 개만 들면, ‘플랑드르의 사자’, ‘유럽 북방인 전사’, ‘강철의 기사’, ‘동방을 향한 질주’, 이런 식이다. 눈길을 끄는 책 표지 그림은 한결같이 영웅적 자세를 하고 있는 사나이들의 낭만화된 모습인데, 이 모습은 그 사나이들을 찬미하고 책의 논조를 처음부터 독자에게 확실히 드러내준다. 그 논조란 동방에서 벌어진 전쟁의 특징이었던 진정한 참상에 관한 논쟁을 일절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로널드 스멜서, 에드워드 데이비스 2세, 《제2차 세계대전의 신화와 진실》 中
― 로널드 스멜서, 에드워드 데이비스 2세, 《제2차 세계대전의 신화와 진실》 中
이 독빠들의 주장이나 경향은 사실 한국에 한정한 것이 아니다. 원류로 시작하면 서방권, 특히 미국과 영국이다.[104]
전쟁이 끝나고 냉전체제가 시작되던 1946년부터 서방 연합군에게 최대의 적으로 떠오르던 소련군에 대응하기 위해 소련군과 전쟁을 치른 적 있는 독일 국방군 장성포로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 국방성의 역사국의 주도 하에 1948년에 무려 1,000건이 넘는 문건을 작성했다. 그말인 즉슨 대부분의 영어로 된 서구의 자료들이 독일군, 그것도 독일 국방군의 시각에 따라 미화되거나 왜곡된게 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프란츠 할더가 존재했다. 프란츠 할더는 최대한 자신을 반나치 인사로 포장하며 문건을 작성하는 전직 국방군 장성포로들에게 국방군의 작전과 나치 친위대의 범죄를 구분하게, 자신들의 전략전술적 실패를 자연환경과 히틀러의 무능 탓으로 포장하게끔 지시했다. 냉전 체제 때문에 소련과의 대대적인 교차검증도 불가능했다.[105] 그리고 영국의 군사학자인 리델하트는 만슈타인을 이용해서 자신의 입지를 높히고자 했으며 전범 재판 당시 만슈타인을 옹호하며[106] 국방군의 우수함을 칭찬하는 서술 등으로 인해 전격전 같은 개념의 미화와 왜곡이 가속되었다. 그리고 미국과 영국, 그리고 서독조차 국방군의 그러한 소련군 폄하가 사실임을 알면서도 묵인했다.
즉, 여기서부터 독빠들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독빠들이 "근거자료"라고 내놓는 소련군 폄하적인 영어판 저서들도 사실 독일자료나 다름없다. 사실 소련-러시아의 군사문건들은 소련 붕괴후 그 일부가 해제되어 공개되었지만, 현재도 상당수가 비밀로 분류되어 공개되지 않고 있으며, 언어적 어려움이나 자료 접근의 문제도 겹쳐서 현재까지 일부가 아닌 온전한 소련측 시각이 포함된 영어권의 독소전쟁사는 발간되지 않고 있다.[107][108] 그렇기 때문에 현재 독소전쟁사의 대부분은 독일군 자료로 작성되었으며,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편파적인 서술이 나올 수밖에 없다.
버블경제와 함께 일본에서도 취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위에서 설명한 왜곡된 자료들은 자연스레 정보를 원하는 일본 밀덕들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것이 한국으로 또다시 흘러 들어오면서 오늘날의 독빠 밀덕 문화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실 한국의 여러 오류가 있는 군사 관련 정보들 상당 수가 왜곡된 유럽발 자료들을 받아들이거나 아예 자체 생산을 하던 일본 밀덕계에서 흘러왔다고 볼 수도 있고, 독일 국방군과 친위대 관련 이야기 역시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2.1.3. 현대 밀리터리 독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 연방군(서독 시대 포함) 계통 밀리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과거에는 일본에서 유행하던 밀리터리 장르를 국내에서 번역해 들여오기 시작하면서 탄생했으며, 지금도 지속되는 일본의 독빠 기질에 영향을 받아 국내에서도 2차대전 독빠들의 위세에 힘입어 일단은 카테고리가 같은 현대전 분야에도 상당수의 밀덕들이, 심지어 대전기 전문가들도 이 분야를 병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주로 전차에 집중되어 있으며, 레오파르트2를 추종하는 '레오신교'가 대표적이었다.
문제는 양 차 대전기 독빠들에게서 나타나듯 현대전 독빠들 역시 남의 말을 들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2000년대 밀덕판은 독빠들이 당시에 소수였던 미빠와 수는 비슷했지만 자료의 부족으로 키배에서 독빠를 이기기 어려웠던 러빠들을 소위 본좌님 말씀 앞세워 일방적으로 린치하는 양상이 흔했다.
00년대 미군의 이라크와 아프간에서의 부진을 이유로 미군의 무기와 전략전술은 사실상 거품이었고 따라서 독일식이야말로 우수하다는 견해가 나타났는데 위의 나치 문제와 결별한 독일에 대한 호감과 겹쳐 독일이야말로 EU를 이끌 국가이며 독일군은 미국을 배제한 상태에서 유럽 최강의 군사력을 투사할 것이다라는 설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에는 매우 그럴듯해 보이는 논리였는데 문제는 유럽이 전반적으로 군축 분위기에 힘입어 돈을 덜 쓰고 있었다는 점에 있었고 독일은 특히 안보무임승차에 적극적이었다. NATO의 방위분담금조차 미국과 유럽이 반반을 부담하던것이 미국 혼자 75%를 부담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외형적으로 당장 큰 문제가 없어보인다면 속은 다 곪았다는 결론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눈에 띄는 붕괴현상은 보이지 않았기에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은 당시까지 키배를 할때 어떤 본좌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언급하면서 밀리터리 본좌의 검증되지 않은 증언이나 퍼날랐지 다른 자료를 사용하지 않았다.
결국 2013년에 터질 것이 터지고 만다. 레오2A7+ 수출 불발과 푸마의 사망 선고를 시작으로 까들이 소식을 빠르게 풀어버렸고 이걸 쉴드칠 '본좌'들은 진작에 공개석상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결국 독빠들은 이를 기점으로 빠르게 주류에서 퇴장당하고 지금은 형편없는 생산능력과 발전이 없는 외교,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참극의 동조자로 지적받으며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현재 독일 연방군의 문제점은 단순히 예산의 문제라고 보기도 힘들다. 독일이 GDP 대비 국방비 비율이 낮아 비판받았지만 경제규모가 받쳐주다보니 국방비로 퍼붓는 비용이 절대 작은 수준이 아니라서 2000년 이후 독일의 국방비 순위는 10위권 밖으로 밀려난적이 없다. 문제는 이 예산을 전력 개선에 제대로 쓰지를 못하는데 있었다.
또한 독일은 과거사를 유럽 안보에서 열외타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으며 독빠들은 여기에 호응하고 있다. 메르켈 정권은 독일이 군비증강을 하면 주변국이 불안해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군 재건에 손을 넣고 러시아와 밀월 관계를 강화했으며 독빠들은 좋아라 이 주장을 퍼날랐는데 러시아가 과거의 제국주의 국가에서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이 확인된 이후 그 어떤 나라, 독일에게 역사적으로 유감이 많은 폴란드조차 독일의 군비증강에 불안해한 적이 없다. 독일의 안보무임승차를 비난하면 했다.
공동개발은 거의 독일의 영향으로 만들어졌거나 그냥 독일제로 써버리는 경우도 많다. 특히 프까들이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그리고 사실 독일이 어마어마한 걸 만들었는데 전후 혼란기라 없어지거나 남에게 뺏겼다, 나토 표준을 지키려고 안 쓴 장비가 있는데 엄청난 성능을 가졌다는 둥의 주장을 펼치는데 말하는 그 물건의 이름도 모르고 주장하는 바를 구글에 검색해도 문서 하나가 안나온다. 제작회사가 판촉하려고 올린 스펙과 광고 동영상을 그대로 믿고 외계인 장비라고 생각하는 독빠들이 있는데 물론 타국의 장비는 실전 중에 발생한 문제나 개발 중에 나타나서 이미 고쳐진 문제들까지 파내서 비하한다.
2.2. 정치 독빠
독일의 정치 제도를 좋아하는 사람들. 은근히 민주계 진영, 진보 진영에서 독일 정치에 호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독일 정치계에서는 독일 사회민주당이나 녹색당 등의 좌파 정당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으므로 "우리도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으로 호감을 느끼는 듯 하다. 이 때문에 독일식 정당명부제의 도입을 주장하기도 한다.(2019년 통과) 그리고 독일의 복지 정책에 호감을 느끼기도 한다. 보수 진영에서도 대륙법계가 독일 중심이었고 제조업 수출 중심 경제, 파독 광부 및 간호사 등으로 독일에 대한 호감이 큰 편이고 일부는 연정과 내각제를 주장하기도 한다.한편 유럽 사회의 후발주자로 강대국 반열에 들어서고, 다시금 분단된 국가에서 또 다시 재통일을 이뤄내며, 현재까지도 유럽연합의 실질적인 수장으로서 민주적으로 유럽을 좌우하는 독일의 정치적 역량을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적어도 강대국 사이에 끼인 신흥국가로서 과거, 현재, 미래의 한국이 추구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을 앞서 보여준 것이 독일의 근현대사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예컨대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인 한반도의 위치는 프랑스·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끼인 독일의 위치와 유사하며,[109] 독일의 경우 18세기까지,[110] 한국의 경우 20세기까지 오랫동안 주변국에 시달려온 처지라는 것, 냉전 시대에 분단되었다는 점도 유사하다. 때문에 프로이센 왕국의 외교적 승리를 통한 제국 형성, 국력신장에 기여했지만 끝내 몰락의 단초도 제공했던 군국주의 이념, 소련의 괴뢰국으로 끝난 동독,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계에 편입되어 번영한 서독, 평화 통일, 숙적에서 혈맹으로 변한 프랑스와의 관계, 유럽연합과 같은 역내 협력체를 통한 국가 체급 한계의 극복 등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여기서 유럽을 아시아로, 프랑스·영국을 일본으로, 러시아를 중국으로, 동서독이나 프로이센-오스트리아를 남북한으로 치환해 보면, 만주 등을 겨냥한 군사적 고토 회복주의의 가능성과 위험성, 경제발전의 방식, 통일의 방식, 아시아연합 같은 지역 내 정치 협력체를 통한 외교적 영토 확장 가능성,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 외교가 취해야 할 방향성 등 반면교사로서든 성공사례로서든 한국의 미래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이쪽은 위의 극우 파시즘적 성향의 밀리터리 독빠랑 별 접점이 없다. 그래서 반박받을지언정 비난받지는 않는다.
2.3. 기술 독빠
중공업, 경공업 등 각종 독일의 기술력을 좋아해서 독일에 호감을 느끼는 사람들. 주로 아우디, 메르세데스-벤츠, BMW, 포르쉐 같은 독일 자동차를 좋아하고, 그 외에 엔진이나 기계 계열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독일차빠가 이 부류에 속한다. 그리고 고속철도 독빠도 있다.
독일의 기술력이 뛰어나다는 것
참고로 일본이 21세기 이후 노벨상 갯수와 특허 갯수, 독점산업 갯수 전부 독일을 앞선다. 폴란드볼이나 할리우드 영화만 봐도 서구권에도 일본하면 기술력이 대단하다는 인식이 있다.
미국의 경우는 뭐 설명이 필요한가? 2차 대전 이후 지금까지 압도적으로 현대문명을 견인해온 국가다.
실제로 이들중에는 실제 독일의 뛰어난 기술에 대한 지식은 심각하게 얕고 기술력이 높다는 독일 기업의 이미지 마케팅에만 빠져든 알못들이 많다.
2.3.1. 독일차빠
자세한 내용은 독일차빠 문서 참고하십시오.2.4. 스포츠 독빠
2.4.1. 독축빠
"Football is a simple game; 22 men chase a ball for 90 minutes and at the end, the Germans always win."
"축구는 단순한 게임이다. 90분 동안 22명이 공을 쫓는데, 결국에 항상 독일인이 이긴다."
개리 리네커
분데스리가와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을 좋아하는 사람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독일이 홈팀 브라질을 무려 1-7이라는 무시무시한 스코어로 털어버리고 우승하면서 더욱 늘어났다. 하지만 그 이후로 (독일이) 독일본좌설을 내세우며 다른 대표팀을 깎아내리는 짓을 많이 하고 돌아다녀 타 팀의 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한다."축구는 단순한 게임이다. 90분 동안 22명이 공을 쫓는데, 결국에 항상 독일인이 이긴다."
개리 리네커
독일의 승리의 실체는 아주 더러운 경우가 많은데 알제리한테 졌다고 해서 오스트리아와 짜고 점수를 1-0 독일 승리로 조작하는가 하면 유럽끼리 나눠먹기 위해 아르헨티나에게 갖은 편파판정으로 억지로 우승한 일도 있는 등 정당하지 못한 승리들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는 편이 아군이라는 사람들의 심리로 인해 독축빠들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이는 순수하게 실력이 극강이라서 팬들이 늘어나는 프랑스, 2008년에서 2012년까지의 스페인, 2000년대까지의 브라질, 실력은 있는데 맨날 고전하는 것이 불쌍해서 팬들이 늘어나는 아르헨티나와는 다른 양상이다.
따라서 독축빠는 다른 축구빠가 그 팀 자체에 대한 애착으로 인해 팬이 되는 것과는 아주 다르게 오직 성적 하나만 보고 팬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 팬들이 기하급수적으로 확 쪼그라들어 버린다. 이건 독축빠 특유의 아주 악질 고질병으로 팬 성향으로만 따진다면 차라리 유니폼이 간지나서 팬이 되는 아르헨티나, 스페인, 프랑스 만도 못한 팬덤이다.
차범근의 월드컵 결승전 해설을 보면 괴체의 결승골 장면에서 매우 좋아함을 알 수 있다. 다만, 차붐의 경우는 독일에서도 대접받고 독일에서 생활도 오래했으며 아들도 독일서 출생하는 등 약간 특이한 케이스이고, 차범근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독일 경기를 중계할때 생각만큼 편파적인 해설은 안 한다. 다만, 2014년 월드컵 알제리와의 16강전에서 연장전 혈투끝에 메수트 외질의 결승골이 나오자 터져나오는 기쁨을 참지는 못했다(...). 다만, 브라질 월드컵에서의 우승 이후로 경거망동+기고만장해져서 이런저런 기행들을 많이 대놓고 선보이면서 독일 축구에 대하여 정나미가 떨어졌다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특히 2016년 가을, 토마스 뮐러의 산마리노 축구 국가대표팀 비하 사건 때문에 뮐러뿐만 아니라 독일 축구에 대한 이미지는 그야말로 땅바닥에까지 떨어진 상태.[111]
하지만 이러한 토마스 뮐러의 논란속에서도 2014~2018년 이 기간은 그야말로 독축빠들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가장 극심하게 날뛰었을 때인데, 사실상 모든 축구관련 댓글을 독축빠들이 점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바로 절정의 시기는 유로 2016 이후 인데, 독일의 유일한 천적이었던 이탈리아를 승부차기에서 꺾고 4강까지 갔었기 때문이었다.[112] 그렇게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7대1로 대파하고 2016년 유로에서 이탈리아를 제치고 2017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2군 전력으로 우승을 차지하자 이 때는 독축빠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행복한 열광의 도가니의 기간이었다.
결정적으로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본선에서 한국이 독일을 꺾는 대이변이 터진 것을 시작으로, 영원할 것 같은 독일 축구의 전성기가 끝난 이후 여러 암흑기를 거쳐 과도기를 지나가는 중이다.[113] UEFA 네이션스리그 2020-21에서 스페인한테 6대0으로 영혼까지 털리고, 3년 후에 유로 2020에서는 16강에서 만난 잉글랜드한테 메이저 토너먼트에서 무려 55년 만에 2대0으로 패배하게 된다. 더군다나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1:2 패배, 이후 2023년 9월 A매치에서도 홈그라운드인 볼프스부르크에서 또 다시 1:4 로 무너지는 대형 쇼크가 터진 이후에는 독축빠들에게 반발했던 다른 팀의 팬들이 독일의 밑도 끝도 없는 추락을 보고는 아주 꼬시다는 반응을 보였고 계속되는 독일의 졸전으로 인해 독축빠들이 많이 줄어든 듯하다.[114]
심지어 남자 대표팀 못지않은 강호로 알려진 독일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마저 모로코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을 6대0이라는 큰 스코어로 잡아놓고선 콜롬비아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1대2 석패, 조별리그 3차전에서 대한민국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1대1 무승부로 발목을 크게 잡히는 바람에 '독일 여자 대표팀 역사상 여자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최초 탈락'이라는 불명예를 같이 뒤집어쓰게 되었다.
그래도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에겐 희망의 불씨가 아직 남아있는 편이다. 2023 FIFA U-17 월드컵 결승전에서 독일 U-17 축구 국가대표팀이 프랑스 U-17 국가대표팀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번 어린 선수들의 활약으로 인해 남성, 여성 성인 대표팀이 전부 부진했었던 2022 ~ 2023년에 독일이 나름이나마 힘이 될 수 있는 결과가 되었다.
하지만 2024년에서는 개최국으로써 홈 그라운드 이점을 가진 유로 2024에서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을 8강에서 너무 일찍 만나 탈락하면서 전차 군단의 전성기 회복은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다. 특히 토니 크로스가 해당 대회를 끝으로 현역 커리어 은퇴를 선언하면서 라스트 댄스를 출 수 있는 확실한 기회였기에 독일 축구팬들은 너무 이른 매치업과 탈락을 매우 아쉬워했다.
2.5. 문화 독빠
독일 전통 문화나 특히 독일 음식이나 독일 맥주, 게르만족 등에 빠진 부류. 다만 문화 독빠는 클래식 음악을 제외하면 대중문화 본좌인 영국과 상류층문화의 강자인 프랑스 사이에 껴서 존재감이 좀 적은 편.그 외에도 교육적인 측면으로서도 빠도 있다, 예를들어 독일에는 마이스터 스쿨이 있는데(장인양성학교, 다르게 말하면 기술학교)에서 자격증을 취득하면 독일전역, 유럽전역에서도 취직시 매우 큰 어드밴티지를 얻을 수 있고[115] 국가적으로도 장려하기 때문에 대학을 가기위한 과정 중 하나로 전락한 한국 중, 고등학교의 교육체계를 보고 실망을 해서 빠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음악 마니아들 중에서도 독빠가 상당히 많다. 클래식 음악에서도 걸출한 연주자와 작곡가들이 많은 편인데다가 현대 음악 및 독일 팝음악까지 걸쳐서 상당수의 마니아가 존재한다. 그림 형제 동화 덕후들도 많고 파우스트 문학 덕후들도 많다. 비슷한 민족 구성으로 이루어진 국가인 오스트리아, 스위스까지 좋아하는 경우도 있다.
2.5.1. 판타지 독빠
상술한 파우스트, 그림 형제 동화 등에 엮이는 면도 있고 해서 판타지 덕후들도 많다.2.6. 학문 독빠
학문 쪽에도 있다. 철학 쪽을 보아도 임마누엘 칸트나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카를 마르크스 같은 유명 철학자들의 영향 때문에 서양철학을 공부할 때 독일철학을 빼놓기가 어려운 데 이 때문에 학문적으로 독빠가 되기도 한다. 당장 20세기 초의 독일철학 인맥만 따져봐도, 에드문트 후설의 제자 마르틴 하이데거, 하이데거의 친구 칼 야스퍼스, 하이데거의 애인 한나 아렌트라는[116] 황당한 라인업이 나온다.뿐만 아니라 신학에서도 독빠가 많은데, 독일이 가톨릭에서건 개신교에서건 신학적 기반이 워낙 탄탄하다보니 현대까지도 네임드 신학자들을 꾸준히 배출하고 있다. 유학을 갈 때도 대체로 가톨릭에서는 이탈리아 혹은 독일권(오스트리아 포함)으로, 개신교에서는 미국 혹은 독일(오스트리아X)로 보내는 편. 토마스 아퀴나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독일 신학은 최고의 시녀(철학)들과 함께하는 셈이다. 참고로 위에서 소개한 먼치킨 인맥은 신학계로도 이어지는데, 20세기 최고의 가톨릭 신학자로 여겨지는 카를 라너는 하이데거 밑에서 철학을 배웠고, 에디트 슈타인이라는 세속명으로 더 유명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십자가의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는 후설의 제자이다. 그리고 네임드 개신교 신학자인 루돌프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친구이기도 하다. 이쪽도 간혹 문제를 터뜨리는데 과학의 모든 업적은 독일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사례도 있다. 그 와중에 닐스 보어의 국적을 독일로 세탁하는건 덤(...)[117]법학쪽으로 가더라도 대륙법 국가인 대한민국에서는 독빠가 많은 편.
2.7. 역사 독빠
신성 로마 제국,[118] 오스트리아 제국, 독일 제2제국이나 영토를 개척하며 생활 기반을 늘린 튜튼 기사단과 프로이센 왕국[119]에 반해서 역사적으로 독빠가 되는 경우가 있다. 나치빠랑은 다른게 보통 위에 쓰여진 국가들을 빨다가 독빠가 될 정도면 이미 상당히 체에 걸러진 상태인지라 악질 나치빠가 될 가능성은 좀 적은 편이다.독일 민족사적 관점에서 보면 나치의 집권이 동방식민운동을 통해 수 세기간 개척한 동방 영토를 싸그리 날려먹은데다 정체성 면에서 독일과 통합할 여지가 많은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귀속될 가능성을 영원히 불살라버렸기 때문에 역사 독빠는 나치빠와 상극이다. 예를 들어, 대독일(Großdeutschland) 개념같은 경우 히틀러와 나치당이 2차 세계대전의 개전 명분으로 써먹은 이래 나치의 과오에 민감한 국가들에서는 입 밖에 내는 것만으로도 정치적 품성을 의심받을 정도로 철저히 금기시되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보면 단순히 독일인(독일 민족, 말하자면 독일어를 쓰고, 독일 문화권에 속하는 게르만족 혈통의 -또는 게르만족 혈통이라고 여겨지는- 집단) 전체를 아우르는 통일 국가를 지향하는 개념으로써, 19세기에서 20세기 중반 사이 전 세계를 풍미한 민족주의, 특히 민족자결주의 적 국가관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독일 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 '대독일의 건설'이란 한국인의 입장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치당의 집권 전까지는 말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이나 주데텐란트 합병[120]에 영국과 프랑스가 명확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 역시 (상당부분 1차 세계대전의 피해로 인한 혐전 정서에 기반한 것이기도 하지만) 당시 세계를 풍미하던 민족주의적 입장에 따라 독일인 역시 자신들의 단일한 민족국가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여겼던 것에서 기인했다. 그러나 나치의 만행 이후 독일 민족주의의 지향점이던 대독일주의는 철저히 금기시되어 버렸다. 즉, 독일 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면 (독일 민족주의 자체가 히틀러의 집권에 상당부분 기여하고 그 만행에 부역한 과오가 막대함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히틀러와 나치당이 날뛴 덕분에 전후 '대독일' 존재 자체가 철저히 부정당해 버린 셈이다. 특히 중세때부터 독일계 국가들의 맹주 노릇을 하던[121]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통합되는 길이 막혀버렸다.
그래서 역사 독빠들은 나치를 극혐한다. 문화, 역사적인 의미로 나치는 독일 본토의 유구한 유산들을 잿더미로 만들었음은 물론, 저 멀리 트란실바니아까지 퍼져있던 독일어권·독일 문화권의 판도를 한큐에 말아먹은 것도 모자라 재건조차 논의되기 힘든 여건[122]을 만들어 버렸으니 좋아할 이유가 없다.
2.7.1. 신성 로마 제국 독빠
'서방의 (보편)제국'이라는 화려한 간판을 가진 신롬에 하악거리는 아이러니한 부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볼테르의 그 유명한 조롱을 비롯하여, 신롬이 말기의 모습 때문에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 아니다'라고 폄하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당대의 서유럽인들에게는 엄청난 진실성을 가진 정체성이었다(신성 로마 제국/오해 문서 참조). 다만 샤를마뉴 제국에서 동(독일)중(이탈리아)서(프랑스)로 갈라지고 다시 신성로마제국이 수많은 제후국들로 쪼개지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점점 서유럽인들의 인식이 비웃음의 대상으로 변하는 건 사실이긴 하다.신롬빠의 경우 12세기로 대표되는 중세의 전성기에 보여준 신롬의 모습을 좋아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카를 5세 시절 스페인과 이탈리아 일부를 포함한 합스부르크 영지를 숭상하는 경우도 있고, 오스트리아를 구심점으로 하는 대독일주의 독일을 지지하는 경우도 보인다. 카를 5세 이후의 합스부르크 제국 모습을 좋아한다면 프로이센에 의한 소독일주의를 거부하며 밑의 독빠들을 짝퉁으로 까기도 한다.
신롬빠 중에선 신롬으로 대표되는 '대독일'적 모습보다는 그냥 오스트리아가 좋아서 신롬빠를 겸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넓은 의미에선 독빠일 순 있지만,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빠에 가깝다. 사실 저렇게 카를 5세의 재상 메르쿠리노 가티나라가 주장했던 서방 그리스도교권의 보편 제국을 추구했던 이념을 빨며 이탈리아, 스페인빠를 겸하거나, 아니면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확실하게 신성 로마 제국 강역에서 실질적인 국력을 뽑아 내려는 걸 포기하고 현대 오스트리아와 역사적 강역인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중심으로 형성 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빠는 건 빠질의 대상이 되는 합스부르크 帝國을 구성하는 諸國 중에 독일계 국가인 오스트리아가 있다이지 순수한 독빠라고 보기에도 애매하다.
재밌는 건, '보편제국'이란 신롬의 정체성을 떠올려 보면, 결국 위에서 설명하는 독빠로서의 면모나 오빠로서의 면모 모두가 실제 신롬의 특성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록 "독일 민족의"라는 수식어가 후대에 붙긴 했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독일인들이 다수를 차지했다는 사실 때문이었지 신롬의 성격을 독일인들의 민족국가로서 재정의한 것은 결코 아니었으며, 멸망할 때까지 신롬은 지상에 세워진 하느님의 왕국이라는 성격을 버린 적이 없었다. 따라서 본문의 첫 줄에서 '간판에 애착을 갖는다'는 말은, 이 유형에 속하는 독빠들이 신롬을 좋아하는 건 신롬이 그리스도교 보편제국이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독일 민족사에서 대부분을 차지하고 또 독일 민족이 주도했다는 19세기식 역사관에 근거했다고 말하는 게 더 명확한 설명이 된다.
2.7.2. 동독빠
동독은 기본적으로 군사적으로 자료도 많이 없고, 헬멧 같은 것을 제외한다면 서독과 달리 서방은 물론 같은 공산 유럽권 국가들에 비해서도 두드러지는 특징이 없는데다 결과적으로 21세기 현재 멸망해 사라진 나라다보니 상당히 마이너한 장르라 소뽕/러빠이면서 독빠인 사람들이 앝게나마 파는 정도가 대다수다. 소련 위성국인 독일이라는 좋아하는 요소들은 다 갖췄으니 완전체라고 볼 수 있다.국가인민군(동독군)을 보고 동독빠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들은 소뽕보다는 독일 제국이나 나치뽕에 더 가깝다. 더 정확히는 서독까에 가까운데 보여지는 것으로는 과거의 프로이센식 군국주의 문화를 완전히 배제한 서독군과는 달리 동독군은 슈탈헬름 등 프로이센 문화를 유지한 항목들이 꽤나 많기 때문에 동독은 붉은 프로이센이라며 빨고 서독은 미국물 먹고 과거를 잊었다며 깐다. 즉 자기들이 숭상하는 프로이센 - 독일 제국 - 나치 독일을 완전히 계승한 나라는 없다 보니 꿩 대신 닭이라고 동독을 빨아주는 셈이다. 사실 서독이나 동독이나 나치 출신 장교들이 군을 이륙했기 때문에 각각 취사선택한 산물이라 서독이 유지한 프로이센 문화와 동독이 버린 프로이센 문화도 수도 없이 많다. 이들이 동독을 빠는 사실상 유일한 이유는 슈탈헬름과 거위걸음을 유지했기 때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밀리터리 룩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도 동독 계열은 어느정도 입지가 있다. 독일이 통일되면서 모든 기준을 서독에 맞추어 동독군 물자가 대량으로 민간에 풀렸는데 위 문단의 슈탈헬름도 그렇고, 특유의 레인드롭 위장패턴을 비롯해 서독이나 그 외 전세계 국가들과 차별화되는 색다른 디자인이 많기 때문이다. 동독이 멸망한 지 30년이 넘게 지난 2020년대에도 군복을 비롯한 각종 동독군 물자가 전국의 온라인 중고장터와 구제샵에서 돌아다니고 있다.
동독이 아닌 로자 룩셈부르크, 클라라 체트킨 등 바이마르 시대의 독일 사회주의자들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쪽은 역덕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좌파 내지는 운동권이라는 정치적 정체성에 의거해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3. 특징
밀덕 독빠들은 밀덕 특유의 편협함까지 곁들여서 밀리터리를 넘은 방면에서까지도 억지를 부리는 경우가 많다. 일부 밀덕 커뮤니티나 독빠가 많은 커뮤니티(예를 들어 엠팍) 등에서는 자동차나 축구처럼 전통적으로 독일이 강세를 보이는 방면 이외의 모든 방면에서도 독일이 다른 나라를 압도한다는 식이다. 예를 들어 이런 독빠들은 독일어가 프랑스어보다 유용하다거나[123] 혹은 (영어보다 가까워서) 한국인에게 쉽다는 주장을 늘어놓거나, 유럽문학 중에서 독문학이 최고라는 이야기도 한다.[124] 베를린이 파리보다 훨씬 볼거리가 많고[125], 독일인이 프랑스인보다 친절하고 교양있다는 주장도 빠지지 않는다. 물론 이런 주장은 모두 개인적인 감상이거나 근거가 없는 것이다.독일의 라이벌 국가인 프랑스에 대한 비하도 이들의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밀덕의 주류를 이루는 독빠(+미빠)들에 의해 프랑스의 역대 사기 행각 전설이 약 2000년대 10여년간 한국 밀덕계를 지배했는데, 이후 모든 것이 거짓으로 판명되었음에도 독빠중에서는 아직까지 이런 사기를 믿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의 프랑스에 대한 인식은 와패니즈들이 인식하는 중국과도 완벽히 호환된다.
그리고 국내에 독빠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비교적 너그러운 편이다. 현재 독일의 기술력이나 문화 부분을 찬양하는 건 대부분 취향이라 생각하지, 뭐라 하지는 않는다. 다만 문제는 여기까지는 비교적 괜찮지만, 독일 제국과 나치 독일에 대해 약간의 찬양이나 넷상에서 나치 컨셉을 하는 독빠들도 크게 문제를 잡지 않고 넘어간다. 아돌프 히틀러 문서 한국 관련 서술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국내에선 히틀러와 같은 인물이 넷상이나 농담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사용된다는 것을 보면 생각외로 너그러운 편이다. 가령 넷상 에리히 폰 만슈타인같은 전범을 프로필로 하고 다녀도, 크게 문제를 잡거나 지적을 하지 않는다.[129]
이러한 한국 독빠들의 맹목적인 독일 미화는 정작 독일인들조차 우려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다니엘 린데만의 인터뷰 기사나 주한 독일 대사의 인터뷰만 # 봐도 한국의 맹목적인 독일 미화에 으쓱해하기는 커녕 오히려 이것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특히 나무위키 내에서도 "이 차량은 독일의 차량[130]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되었는데..." 등의 서술로 교묘하게 특정 장비를 깎아내리고 독일 기갑차량의 위신을 올리기도 한다.
이런 기갑차량 같은 분야는 밀덕이나 관련직 종사자, 언어능통자가 아닌 이상 일반인이 교차검증을 할 수 없기에 잘못된 정보가 알음알음 퍼지는 일도 있다.
4. 각국의 독빠
4.1. 일본의 독빠
메이지 유신 때부터 일본은 독일을 주요한 모델로 하여 발전하였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개념 독빠 무개념 독빠 골고루 가장 많은 나라이다. 의학, 약학, 화학 등 많은 분야에서 독일어를 도입했으며, 정치체계까지 독일(프로이센)에서 모델을 따왔다.일본 밀덕계에서도 전반적으로 독빠 성향이 짙다. 이 점이 한국 밀덕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보는 견해도 많다. 초기 밀덕용 자료들 대부분이 일본 출처라거나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고 애당초 밀덕과 만화,애니 같은 서브컬처가 상당히 연관이 많기 때문. 여기에 당시 조악했던 한국 밀리터리 프라모델 업계에서 일본쪽 금형을 카피한 제품을 낼 때 2차대전 중 독일군 프라모델도 같이 흘러들어온 것이 시너지 효과를 이루었다.
또한 애니메이션계도 밀리터리를 다루면 무조건 독일제 무기가 주인공 측의 무기로 등장할 정도로, 독뽕 메타가 사실상 일본 밀리터리 애니메이션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2차대전 독빠들의 문제점 역시 일본 독빠들은 거의 똑같이 가지고 있다. 일본 독빠는 지극히 당연한 역사적인 이유로 그나마 최소한의 도덕적 딜레마도 없이 나치스도 긍정하고, 일제도 긍정하고, 파시즘도 긍정해버리는 그냥 극우가 되기 쉽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 독빠 커뮤니티의 암적 요소 상당부분을 사전주입해 놓은, 악성 독빠계의 최종보스정도로 심하다.
4.2. 미국의 독빠
마찬가지로 미국에도 상당수 독빠들이 존재한다. 제2차 대전 전에는 미국나치당(American Nazi Party)(...)이 존재하였고, 이들이 워싱턴 DC에서 시가행진을 할 정도였다. 이들의 주장은 유대인과 흑인 반대. 다행히(?) 나치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이 미국을 선제공격하고 제3제국이 미국에 선전포고 하면서 미국나치당은 불법화되었다.1960년대부터 미국에서도 밀덕 독빠들이 많아졌다. 한국에도 간간히 번역되는 각종 영문판 2차대전 밀리터리 서적들의 소비층이 바로 이들이다. 다만 이들은 한국이나 일본처럼 나치를 노골적으로 옹호하지는 못하고, 홈페이지를 봐도 자기들은 순수한 취미활동으로 독일군이나 무장친위대를 좋아하지, 네오나치와 그 이념과는 무관하다며 선을 긋고 있다. 미국은 유대인들의 입김이 세기 때문에 설령 어떤 꼴통이 그런 생각을 하더라도 공개적으로 펼칠 수가 없다.
미국에는 문화독빠나 정치독빠는 그다지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문화적으로는 불빠나 일빠가 많고, 정치적으로는 지나치게 자국중심주의라서 문제. 다만 자동차 독빠는 상당히 존재하는 편.
다만 이들도 독소전쟁은 지나치게 소련을 비하하고 독일에 편파적인 기술하는 것으로 악명 높다. 미국에서 펴낸 제2차대전 통사를 보면 대부분 독소전쟁은 아프리카 전역 정도의 마이너 전역이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이야말로 나치에 사형선고를 내렸다는 식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131] 덤으로 소련군의 만행을 강조하는 것도 냉전 초기 미국의 프로파간다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유튜브에서도 일부 중증 나치 추종자들이 2차대전기 SS와 국방군의 사진이나 동영상과 군가를 편집한 비디오을 올려놓고, 댓글에서는 나치 독일이나 SS를 진정한 영웅, 용감한 병사들로 치켜세우고 찬양하며 연합군과 소련을 악의 축으로 폄하하고 각종 인종 차별 발언을 서슴치 않는 등의 추태를 보여주기도 한다. 예시 보다보면 지금이 21세기인지 1930년대 나치 집권기인지 헷갈릴 정도.[132] 댓글에는 독일계가 많이 보이고, 독일 혼혈인걸 자랑스러워하는 댓글도 있다. 근데 웃긴 건 덧글 단 사람 대부분이 나치랑 박 터지게 싸웠던,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서양권에서는 특이하게 주로 영어권 국가들이 나치에 대한 혐오감이 없는 편인데, 그러다보니 나치 추종자들도 불어권 국가나 기타 서방 국가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다.
고의적인 나치 찬양 영상뿐 아니라 일반적인 총기 리뷰 영상, 그중에서도 2차대전기 나치독일의 총기 관련 영상에도 주로 서식하며 AK와 AR15는 모두 Stg44 짝퉁이라고 주장하거나, 독일공학, 무기에 대한 찬양 일색인 댓글들을 쓰고 베댓란을 독차지하며, 왜 영상 총기 소개부분에서 하켄크로이츠대신 독일 국기를 걸어놨냐고 묻는 댓글에 유대인들 때문이라고 답글을 다는 등 역사의식 제로에 더해 인종차별적인 모습까지도 보여주어 보는 이들을 불쾌하게끔 만든다. 총기뿐 아니라 제3제국을 다루는 동영상의 댓글란을 보면 고의적인 트롤링인지 아니면 유대인에 대한 피해망상인지 의도는 모르지만 유대인에 대한 인종차별, 폴란드 등 나치 독일에 침공받은 국가들에 대한 조롱을 담은 댓글이 추천 폭격을 받고 베댓으로 올라가 있는 일이 빈번하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 이후 미국 청년들 사이에서 대안 우파 열풍이 불고 인터넷에도 그 영향을 끼쳐 대안 우파 성향의 네티즌들이 급격히 증가하게 되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각해 지고 있다. 단순 독빠를 넘어서 나치빠 수준의 행태를 보여준다. 독일은 찬양해도 나치는 부정하던 이전과 달리 위의 예시들 처럼 당당히 나치를 옹호, 찬양하는 글을 쓰고, 유대인과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을 조롱하고 비방하며, 이를 비판하는 정상적인 네티즌과 키배를 벌이기도 한다. 다만 유대인에 대한 비난은 이전부터 유대인들의 미국 사회 엘리트 계층 진출에 대한 WASP를 위시한 기존 미국인들의 반감과 이스라엘의 여러 만행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반유대인 사상이 네티즌들에게 확산되어 왔던것을 감안하면 그 수가 늘었을 뿐 과격함의 정도는 과거와 달라진게 없다.
이런 웹독빠들을 부르는 Wehraboo(Wehrmacht + Weeaboo), Nazi fanboy라는 신조어가 있다.
카투사로 복무할 경우 미군 사무시설에 들어가면 내셔널 지오그래픽부터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에 이르기까지 각종 잡지들이 비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혹시 시간이 된다면 이중 군사학이나 밀리터리 관련 잡지들을 잘 찾아보자. 읽다보면 컨텐츠의 상당량이 나치 독일군 관련 자료들을 다루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2015년에 발간된 모 잡지의 칼럼 중에서는 루프트바페 원수인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에 대해서는 매우 유능했던 공군 지휘관으로써의 모습이 부각되어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5. 독빠인 캐릭터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경훈: 나치빠 + 히틀러빠 + 기술 독빠 + 독일제국빠를 겸한다. 당시 뒤틀린 자본가들의 인물상을 대표한다.[133]
- 함대 컬렉션 - 이8: 실제 모티브가 된 한 구일본군 잠수함이 당시 동맹이었던 나치 독일과 인연이 닿은 점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거기에 덧붙여 이 게임의 흥행에 일조한 히라노 코우타의 헬싱에 등장하는 소령의 대사를 오마주한 것은 덤.
- 은하영웅전설 - 루돌프 폰 골덴바움: 이름을 보면 원래 독일계[134]로 보이는데, 게르만 문화에 심취해서 황제로 즉위한 뒤 은하제국 골덴바움 왕조를 독일식으로 뜯어고쳤다. 이름, 미술, 건축, 군대, 사회, 지명, 통화, 언어, 종교까지 전 분야가 독일식으로 바뀌었다. 유일하게 바뀌지 않은 분야는 도량형 뿐이다.
- 걸즈 앤 판처
- 마츠모토 리코 - 에르빈 롬멜의 재킷과 모자를 걸치고 다닌다.
- 니시즈미 마호 - 그렇게까지 열성 독빠는 아니지만 티거를 타고, 독일로 유학도 가고, 월탱 콜라보 만화에서 '독일의 전차는 세계제일' 이라고 말한 바 있다.
- 니시즈미 시호 - 애초에 니시즈미류 자체가 중장갑과 고화력으로 전열을 맞춘 포격전, 그러니까 독일식 전차 전술에 가깝다.
- 데이트 어 라이브 - 야마이 카구야: 중2병짓을 할때마다 독일어를 심심찮게 사용한다.
- 존 윅 시리즈 - 존 윅: 2편의 소믈리에의 말에 의하면 독일제 무기를 선호한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대표 권총인 P30L은 독일제 무기다. 물론 2편과 3편, 4편을 거치면서 P30L은 물론 H&K 브랜드 대신 타란 TTL의 총기들을 쓰게 되지만.
6. 여담
- 중국에 '독빠족'이라는 민족이 있다고 한다.
- 매우 매니악하지만 소뽕, 넓게 보면 러빠인 동시에 일빠, 독빠인 사람은 동독빠가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일본의 넷 우익처럼 이들은 한국, 중국을 별로 좋게 보지 않는다.
[1] 밀덕분야 뿐 아니라 세계 3대~, OO의 아버지(어머니)~ 등등 유명 별명 대다수는 일본 서적에서 선정한 것들이 80,90년대 한국에 들어온 것들이다. 때문에 한국과 일본에서만 통하는 경우가 많다. 나이팅게일의 "백의의 천사", 바흐의 "음악의 아버지"라는 별명이 일본과 한국에서만 통하는 것이 유명하다.[2] 제1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의 가해자는 연합국 세르비아의 비밀결사였고, 피해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였다.[3] 물론 2차대전 나치 독일군에 복무했다가 전사한 유학생들에게는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4] 근대 이후 전쟁에서 처음으로 민간인에 대한 폭격이나 학살을 저질렀고, 독가스를 대규모로 사용한 것도 독일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이들은 나치 독일보다 덜한 것뿐이지 빠짓의 대상이 될만큼 신사적인 군대는 절대 아니었다.[5] 군대가 전쟁 중에만 문제를 일으키던 게 아니라, 독일 제국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수탈과 학살을 저질렀고 100여 년이 된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사과나 배상을 안 해 주고 있다.[6] 미군, 프랑스군은 당시 극심한 인종차별이 있어서 유색인종은 장교로 임관하기 어려웠다.[7] 불빠를 제외하면, 밀덕계 전반적으로 프랑스군이 까이는 경향이 있긴 하다. 그 이유는 보통 2차 대전에서의 무기력한 항복 뿐 아니라 이후 베트남과 알제리에서의 독립전쟁에서 추한 모습을 보이며 패퇴했기 때문이다. 다만 베트남은 국력 피크찍던 냉전시기 미국도 20년 가까이 삽질하다 진 마당에 2차대전으로 힘 다빠져 미국의 돈으로 전쟁을 치루던 프랑스가 이길 가능성은 0이나 마찬가지였고, 알제리도 군사적으로는 프랑스가 승리했지만 정치적 이해관계로 독립시켜준것이다.[8] 막상 비유 대상인 티거도 무쌍전차가 아니라 타국의 다른 중전차들과 비교했을 땐 일장일단이 있는 대등한 수준이었다.[9] 독일 제국의 기원은 프로이센 공국이 있던 동프로이센이 아니라 호엔촐레른 가문이 대대로 통치해온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었다. 프로이센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 왕국에 속해 브란덴부르크 국왕을 칭하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자동으로 겸하는 독일왕과 동격이 되는 문제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하지 않았던 변두리인 프로이센의 이름을 빌린 것이다.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 제국의 수도가 왜 튜튼 기사단의 심장부이자 프로이센 공국의 고도 쾨니히스베르크가 아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수도 베를린이었는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10] 프랑스와 벨기에 조병창에서 만든 쇼샤는 충분히 쓸만했다. 쇼샤의 악명은 야드파운드법 변환 과정에서 설계기 어긋난 미군용에서 비롯된 낭설이다. 비슷하게 노획해서 미국에서 역설계한 MG42 기관총도 야드파운드법 변환 과정에서 어긋나 못써먹을 물건이 되어버렸던 역사가 있다. 그나마 당시 화기들 중 생산량에서 비벼볼만한 물건이 15만정이 나온 루이스 경기관총 이었고, 당시 독일군엔 대량생산된 동급의 자동화기는 없었다.[11] 1차대전의 연합국 최고지분은 미국이나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왜 1차대전 서부전선 총사령관을 프랑스군의 페르디낭 포슈 원수가 맡았는지를 생각해보자. 또한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도 비교적 독일에 유화적이었던 영국과 미국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초강경이었던 프랑스의 의견이 적극 반영된게 괜히 그런 것이 아니다.[12] 또한 2차대전에서의 졸전에도 불구하고 전후 프랑스가 상임이사국, 독일 본토 점령 등 높은 지위를 얻은것도 1차대전 당시 서방 연합군 가운데 가장 큰 희생을 치뤘던것이 감안됐기 때문이다. 사실 영국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1차대전 당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나머지 뮌헨 협정 같은 외교적 악수들을 두면서까지 전쟁을 피하려고 들었고 1940년까지 전쟁 준비가 하나도 안 되어있었던건 매한가지였다. 당연히 프랑스 침공 당시 영국군은 프랑스군 못지않은 졸전을 벌였고 무기들도 다 내팽겨치고 철수했다. 스텐 기관단총이 왜 나왔는지를 생각하자. 프랑스에다 무기를 다 버리고 와서 본토엔 기관단총이 100정도 없었기 때문에 만든 물건이다. 또한 프랑스가 본토는 먹혔어도 자유 프랑스가 식민지들을 하나둘씩 포섭해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후 최대 130만 병력을 이끌고 같이 독일 본토로 진격했다. 따라서 프랑스가 승전국이 될 자격이 없었다고 주장할거면 영국도 승전국이 될 자격이 없었다. 섬나라라는 지정학적 위치덕분에 프랑스마냥 단기간에 본토가 점령당하는것을 피했을 뿐. 또한 미국덕분에 제대로 무장하고 싸울 수 있게된건 프랑스와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 영미권이 전세계를 통제하는 패권의 축으로 올라서며 1940년 영국이 벌인 오만가지 삽질은 은근슬쩍 묻혀버렸다.[13] 애초에 영국은 섬나라, 그리고 해군을 주로 키운 국가이고 영국은 독일 제국 해군을 상대로는 삽질도 좀 했지만 독일 제국의 숨통을 충분히 막아주며 해야 하는 일은 다 해줬다. 그리고 일단 본격적으로 출병한 이후에는 프랑스 다음가는 주력으로 자리잡았다.[14] 1차대전 동맹국 진영 당시 가장 유능했던 장성들로 평가받는다.[15] 베르됭 전투,말메종 전투,루덴도르프 공세 등[16] 거기다 당시 동맹국 및 패전국 중에서 패전으로 종합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는 오히려 독일이 아니라 사라예보 사건의 피해자이기도 한 오스트리아이다. 1차 세계대전은 온건파+평화주의자인 오스트리아의 황위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한게 원인이 되어 전쟁이 시작된것이다. 심지어 당시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적대국인 영국과 프랑스 마저도 세르비아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여 오스트리아 편을 들었고, 세르비아 편을 든 러시아에서도 오히려 비선실세이자 러시아를 좀먹었던 라스푸틴조차 사건의 정당성과 명분이 오스트리아에게 기울어있던 상황에서 러시아가 세르비아 편을 들어 독일과도 충돌하며 전쟁을 하는건 장기적으로 본인한테든 러시아 자체로든 명확한 손해라서 반대했을 정도다. 그런데 정작 패전으로 인해 공화국이 되면서 황실 자체가 몰락한 것을 넘어서 패전국에만 편파적용된 민족 자결주의로 인해 다민족으로 구성되어있던 제국 영토가 패전의 영향까지 더하여 모두 찢겨나가면서 내륙국+약소국화 되었으며 이로 인해 20년후 히틀러가 너무나 쉽게 오스트리아 병합을 할 수 있었다. 이후 국가를 복원하여 중립국이 되고 선진국 반열에 들어선뒤에도 1900년대 초까지 리즈시절 러시아와 국력이 어느정도 대등했었다는게 믿기지 않을정도로 유럽에서도 약소국 중 하나에 불과한건 현재진행형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최전범국이기도 한 독일이 영토만큼은 거의 보전하여 예전만큼 대등한건 아니여도 러시아에게 큰 소리를 치며 압박할수 있을정도로 무시못할 국력을 여전히 과시하는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17] 1985년에 국제연합에 의해서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독일은 그 이전까지 사과도 배상도 거부해왔고 2016년에 들어서야 사건 자체는 인정하였고 배상은 2021년에나 했다.[18] 무엇보다 결정적인 차이는 그 후신인 나치 독일과 동맹국이었던 일본 제국의 학살은 벨기에보다 잔혹했으며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심지어 나치 독일은 학살에 관료제적 체계까지 썼을 정도였다. 당장 유태인, 집시, 동성애자, 정치범 절멸 전용 수용소를 만든 곳이 나치 독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벨기에의 만행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19] 리-엔필드의 경우 연사력 면에서,르벨은 장탄수 면에서 Gew98보다 뛰어났다. 물론 르벨은 장전과 탄창 문제가 있었지만[20] 탄막을 형성할때도 난사로 대충 갈겨서 형성하는게 아니다. 실제로는 화력을 평소보다 퍼붓되, 난사하는 게 아니라 점사에 가깝게 적당히 조절해서 끊어야 한다. 게다가 연사력이 높은 화기로 마구 갈겨대면 탄 소모로 인해 탄막 형성이 일찍 끝나버려 차라리 점사하느니만 못한다. 영화에서야 기관총의 화력을 부각시키기 위해 난사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21] 하이럼 맥심이 기존에 있던 구식 개틀링 기관총보다 연사력을 포함한 성능을 높인 자신의 신형 기관총을 팔 때 유일하다시피 덴마크 정부만 거절했다. 그 이유가 뭔고 하니[22] 오토 풍크라는 양반 얘긴데, 떡장갑에 그게 먹힐 리가 없으니 연료탱크에 난사해 유폭시켜서 격파하기는 했다. 전차의 장갑을 관통시키는 것이랑 연료탱크에 기관총으로 불을 질러서 유폭시키는 것은 매우 큰 차이다. 그게 똑같다면 각 국의 군 관계자들이 뭐하러 무겁고 비싼 대전차포를 개발했겠나.[23] 좋은 예로 베트남전 당시 M16A1은 자동 사격이 되었으나, 그 결과 1인당 탄약의 소비가 연간 수만 발에 이를 정도로 탄 낭비가 심해지자 개량형인 A2 버전에서는 단발과 점사만 남겨 버렸다.[24] 물론 Yak-9가 고공에서의 성능이 나쁘다는 서술이면 차라리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MiG-3을 제외한 대전기 소련군 항공기의 대부분은 고공에서의 성능이(정확히 말하면 과급기 기술이) 형편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내용도 아니고 뜬금없이 손실비(그것도 전체 전투기 간의)를 비교하여 저런 결론을 내리는 것은 뜬금없는 내용이다.[25] IS-2는 모든 모델의 정면장갑이 120mm로 티거보다 두꺼우며, 1944년형에서는 전체 60도 경사로 변경되어 티거의 88mm로는 정면에서 노릴 수 있는 부분은 오직 차체 하단뿐이었다. 킹타를 끌고 온다 해도 여전히 전면에서 관통 가능한 부분은 적었다. "장갑재의 품질이 소련제가 독일제보다 열등하니..." 라고 주장할 수도 있으나, 그래 봤자 1940년대 수준인데다가 1944년형이 나올 무렵엔 독일은 합금 생산에 필수적인 특수 금속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기 시작했다.[26] 사실 철갑탄 비관통으로도 그 육중한 중전차가 그냥 장갑재 붕괴로 전면 상판이 주저앉아버리기 일쑤였고, 고폭탄은 어디든 갖다 맞히기만 해도 독일 중전차들의 하드포인트마저 사정없이 뭉갸고 으깨놓으며 한 방에 전차를 버리기를 강요하고 승무원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반드시 철갑탄으로 관통시켜야만 적 중전차를 잡을 수 있던 야크트티거나 야크트판터따위와는 급이 다른 물건이었으며, 전술적 기동성도 중전차 기반임을 감안하면 유의미한 수준이었다. 단, 이건 독빠가 아니라도 벨라루스의 모 게임에서 SU-152 같은 자주포들을 편의상 죄다 구축전차로 분류해버려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구축전차라고 생각하거나 알고 있더라도 편의상 퉁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27] 물론 최후기형인 Bf 109 K-4가 나오면서 스핏파이어 Mk IX에게 다시 동등 이상의 성능을 확보하게 된다. 그 시점에서 스핏파이어 역시 엔진을 멀린 엔진에서 그리폰 엔진으로 바꾸고 7.7mm 기관총 혹은 .50 브라우닝+20mm 히스파노 혼용이던 무장을 올 히스파노로 바꾸고 시야도 개선하여 Bf 109 K-4는 물론이고 Ta 152나 Me 262 상대로도 우세인 후기형과 최후기형, 최종 진화형이 나왔지만 스핏파이어 Mk XXIV와 Bf 109 K-4가 싸울 일 자체는 거의 없어진 시점이었다.[28] 물론 밀덕들이 보기에 표면적으로 그런 것이고 실제로 다른 유럽 국가보다 독일 기술력이 뛰어났던 분야는 합성화약, 액화석탄 등의 화학이었다. 또한 석탄을 석유로 액화시키는 기술 덕분에 독일이 조금이나마나 더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거기도 하다.[29]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상당한 영향을 준건 확실해 보인다. 고다드는 V2를 조사한 다음 독일인들이 자신의 기술을 훔쳤다고 판단하였으며 V2의 개발자인 베르너 폰 브라운조차도 고다드의 연구가 자신이 V2를 개발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했다.[30] 특히 제트기를 들먹이며 독일의 항공기술력이 최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먼저 타국을 보자면 당시에 미국과 영국 또한 슈팅스타와 미티어, 뱀파이어를 개발해서 실전 투입할 준비까지 갖춰 놓고 있었고 일본이 전쟁 말기 개발한 제트기인 깃카와 화룡은 독일 Me262의 기술이 들어갔지만 일부 면에선 Me262보다 발전시키려고 노력한 흔적도 보이고, 무엇보다 일본은 이미 전쟁 초기에 램제트엔진 전투기를 설계한 상태였다. 그리고 당시 제트엔진 기술이 초기단계라서 (연합군이건 추축군이건 할 것 없이)문제점이 많은 상태에서 굳이 어거지로 투입할 필요성이 낮았고, 기존에 사용중인 레시프로기로도 충분히 밀어버릴 수 있었다는 점, 괜히 최신 기술이 들어간 제트기가 노획되어서 만에 하나 소련으로 넘어가면 곤란하다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미티어가 배치되었을 때 독일이 점령한 지역으로 못 넘어가게 한 이유가 이것이다.)[31] 제트기의 배치를 기준으로 하면 3개월, 비슷한 성능의 기체가 배치된 건 6개월정도 차이가 난다. 물론 제트기 자체는 독일이 먼저 만들어본 경험이 있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일본이 더 빠를 수도 있다 그러나 Ku-4는 설계도상의 전투기라 최초 타이틀은 독일에게 넘겨줄 수밖에.[32] 그게 안되자 다른 나라는 쓸만한 제트기를 못 만들어서 배치가 늦어진 걸 독일이 배치하자 어거지로 배치했다는 정신승리를 시전하기도 한다. 글로스터 미티어나 P-80 슈팅스타의 성능은 Me262와 비교해서 그렇게 떨어지지 않으며 엔진 신뢰성 등 일부 성능은 오히려 우세한 부분도 있다. 깃카와 화룡은 성능 자체는 열세지만 일부 기능에서는 Me262보다 우위였다.[33] 이에 관한 좋은 예시 하나로 포케불프 Ta 152를 들 수 있다.[34] 생산 자체는 다른 나라와 다를 것 없이 컨베이어에서 이루어졌다.[35] 독빠들이 잊고 있는 것은 식량 위주의 렌드리스를 제외하고 무기대여가 제대로 가동된 것은 적어도 1943년이며, 1944년 초까지는 독일은 프랑스나 이탈리아 북부 등의 공업 지대를 활용할 여지가 있었고, 영향력 하에 있었던 지역들의 자원을 모조리 쓸 수 있었다는 점이다. 즉, 우랄 산맥 서쪽의 산업시설이 반이나 파괴되었던 소련보다도 훨씬 유리한 위치였다. 다만 그 막대한 유럽 전역의 자원을 가지고 영국엔 폭격만 날리다 레벤스라움 같은 막연한 이론에 기대어 독소전쟁을 일으키고 홀로코스트와 동부전선의 인종청소에 낭비하였을 뿐이다.[36] 독빠들은 소련이 공업 지역의 상당수를 잃고도 독일 이상으로 기갑부대를 찍어낸 것을 모두 다 미국의 랜드리스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랜드리스가 제대로 가동되는 1943년 이전에 생산되었던 T-34의 생산량이 1차 세계대전 시기부터 2차 대전 종전 직전까지 독일에서 생산되었던 모든 전차들의 총 생산량을 능가한다.[37] 사실 이것은 '독일의 생산시스템이 후졌네, 그리고 이걸 기술적 우위로 상쇄하기 위해 발악을 했네'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1945년까지, 독일군의 주력 전차는 강력한 맹수 시리즈가 아니라 군마와 삼돌이였으며, 주력 전투기는 Me262가 아니라 Bf109와 Fw190이었다. 또한 주력 소총은 StG44가 아니라 Kar98k였다. 그리고 앞에 언급된 모든 병기들은 1940년대의 나치 독일에서도 위에서 언급된 장인-도제 시스템 운운에 의해 고급형 가구처럼 제작된 물건이 아니라 연합국의 군수공장 노동자들처럼 독일 노동자들이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분업을 하여 생산한 물건들이다. 그러나 이렇게 차이가 크게 벌어진 이유는 이런 기초적인 생산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주도해서 이끌어야 하는 전시 체제에서 산업 자체를 국가 단위에서 효율적으로 운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전차를 살펴보자면, 미국/소련의 경우 셔먼/T-34라는 단일 차종을 GM, 포드, 우랄바곤자보드, 옴스크트란스마쉬 등의 다양한 기업에서 생산하여 규모의 경제를 실현했다. 이런식으로 공통 모델을 다양한 산업체에서 생산하여 군사적인 물량의 우세를 확보하는 것은 국가에서 주도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하지만 독일의 경우 주력 전차인 4호 전차는 크루프 사가 단독 생산하고, 티거는 헨쉘 사가 단독으로 생산했으며, 거기에 더해서 병기국 차원에서의 병기 파편화가 있었다(예시로 3호 돌격포와 4호 구축전차, 헤처가 있다.). 이것이 나치당 특유의 정경유착과 당 관료들의 쓸데없는 개입+독일군 내부의 알력 등이 맞물려 안좋은 시너지를 크게 냈던 것. 물론 미영소라고 이런 사소한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독일의 경우 이러한 문제가 비교할 수 없을만 큼 컸다.[38] 물론 독일의 기술자들이 승전국으로 가서 개발을 돕거나 일부 기술은 관련분야에 널리 쓰인 경우도 있었던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 큰 영향이 아니거나 일부분에만 독일 기술이 적용된 경우도 많았다. 이들의 문제는 진짜 독일의 영향이 큰 물건이 아닌 것에도 확실한 증거 없이 비슷하게 생겼다고 이런 주장을 하는건데 각 국가의 개발사를 알고 있는 사람 눈에는 어이가 없을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서 StG44와 AK-47. 둘은 기본구조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39] 당장 독일의 판터가 소련의 T-34의 경사장갑을 보고 경사장갑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월탱을 해 본 사람이라면 VK 30.01(D)를 마주친 적이 한두번은 있을 것이다. 이것이 벤츠에서 T-34의 경사장갑뿐 아니라 전방 포탑 구조까지 모방해 만든 판터의 프로토타입 중 하나이다.[40] 아리사카의 경우 38식 소총이 6.5mm탄을 사용해 7mm급 탄환을 사용하는 국가에 비해 사거리와 관통력이 떨어진다는 점 이외에는 특별한 단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7.7mm 탄을 사용하도록 변경된 99식 소총에서는 이 문제가 해결된다. 일본 무기들이 대전 말기로 갈 수록 열악한 생산력에 의해 저질이 많았었는데 그런 사례가 심각하게 부각이 되었을 뿐, 제대로 만들면 성능 자체는 크게 떨어지는 정도는 아니다.[41] 그러나 PTRD-41이나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에는 제한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뚫리는 전차였다(...)[42] 어차피 걸판 특성을 따라 흑삼봉 전차들도 경기용 오버스펙이나 다름없다. 애초에 걸판은 야크트티거와 엘레판트가 최후열이긴 하지만 대열을 아주 잘 따라가고 니시즈미 마호의 212번차 티거의 포탑 회전이 엄청 빠른 데다 15톤짜리 헷처가 200톤 전차를 들어올리는 만화다.[43] 실제로 독일 전차의 각진 외형에 매료된 밀덕은 세계적으로도 흔하다. 간지 > 성능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 전차는 티거라는 농담도 있다.(실물 티거는 천대가 조금 넘었지만 프라모델이나 장난감 같은 것을 합치면 수가 어마어마해지는 탓에 만들어진 농담이다.)[출처] 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년. 제프리 메가기 저.| 독소전쟁. 오키 다케시 저[45] 일본도 전쟁 초기 판세를 크게 부풀리기야 했지만 식민지를 점령한 일본과 달리 독일은 유럽 강국의 본진을 털었기에 고평가받는 측면이 있다. 태평양 전쟁 초 일본의 급격한 팽창은 독일이 유럽 대부분을 정복했기에 가능했다.[46] 물론 글랜츠의 평가와 별개로 서방의 지원없이 소련 자력으로 방어전은 물론 독일 본토에 대한 반격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을 수 있을지는 학계에서도 첨예하게 이견이 갈리는 주제이기에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무리하게 영국, 소련, 미국을 한번에 적으로 돌린건 다름아닌 독일이었다.[47] 자료에 따라서는 1:1.5정도까지 나오기도 한다. 순수 사망자와 전투에 의한 사망자의 숫자가 다른 이유는 소련군 포로들이 많이 죽었기 때문인데 총 사망자의 33% 이상이 그렇게 발생한 사망자이다. 양쪽의 포로 사망률이 너무 차이가 났기에(소련군 포로의 사망률은 독일군 포로 사망률의 2~4배에 달한다.) 이를 고려하지 않고 계산하면 차이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48] 넷상에는 1944년에도 소련군의 사망자가 독일군 사망자보다 2배나 많았다는 주장이 있으나 해당 주장은 전사자뿐만 아니라 포로 사망자까지 포함한 통계를 근거로 한 주장으로, 포로를 제외한 전사자 수만 비교하면 1944년부터는 독일이 방어자 입장이었는데도 소련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바그라티온 작전부터는 독일이 전투 사상자 교전비로도 경합~경합우세 수준이었을 뿐 확실한 우세를 점하지 못했고, 독일군도 대규모로 항복하기 시작하면서 포로까지 포함한 회복할 수 없는 병력 손실비에서는 소련보다 오히려 열세해졌다.[49] 원래 계획대로라면 동부전선엔 비만쥐가 배치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50] 안타깝게도 소련 공군은 종전 직전까지도 루프트바페의 격추 셔틀 신세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소련이 격추시킨 독일기는 높게 잡아도 20%를 넘지 못하는게 현실이다.[51] 웃긴건 이렇게 패전의 원인을 특정한 개인에게 돌리는 것은 이들이 믿는 또 다른 미신인 독일 국방군이 철저히 합리적인 조직이었다는 주장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합국의 스탈린이나 처칠도 뻘짓은 제법 많이 했는데 정작 독일의 승리를 저들의 뻘짓 탓으로는 절대로 돌리지 않는다.[52] 날씨는 행운이라고 볼 여지가 있으나 그런 날씨에 고통받는건 양쪽이 동일하다. 날씨 때문에 졌다는 것은 결국 그 날씨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소련군도 동장군 때문에 겨울 전쟁에서 고전했다.[53] 국군이 정의의 편이었다고 한국 전쟁에서 국군이 저지른 학살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고, 반대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보다 더 심한 학살극을 벌였던 조선인민군의 죄질이 가벼워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진영논리와 좌우를 떠나서 전쟁범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 행위이다.[54] 그 악독했던 일본 제국조차 일제강점기 조선인이나 점령지의 중국인을 황국신민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즉, 일본 입장에서도 조선인이나 중국인은 자국의 부족한 노동력과 산업력을 때워 줄 훌륭한 노예였기 때문에, 일본에 충성하되 권리는 제약당하는 2등 시민을 만들려고는 했어도 말살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반면 나치 독일은 이미 나치의 등장 이전부터 독일을 위해 충성하던 유대계 독일인들조차 인종적인 이유로 완전히 절멸시키려 했고, 에르하르트 밀히처럼 극소수의 예외는 있었을지언정 수많은 유대계 엘리트들이 자기가 평생 조국이라 믿어왔던 독일에게 버림받은 채 수용소에서 죽어갔다. 대표적인 예시중 하나가 바로 괴링의 전우이자 1차대전 에이스였던 프릿츠 베크하르트였다. 그나마 그는 괴링의 비호로 수용소에서 탈출해서 외국으로 망명을 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다른 독일계 유대인들은 수용소에서 비참하게 죽어갔다. 일제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치 독일의 절멸정책은 바로 그 자신과 동맹들에게도 비수가 되어 돌아왔을 만큼 이해할 수 없는 광기의 발로였고, 오늘날 나치 독일이 3대 추축국 가운데서도 독보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다만 나치의 영향보다 일본의 영향이 큰 아시아권에서는 대부분 그냥 '나치는 나쁘다.' 정도의 피상적 인식 수준에 그치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55] 그나마 여기에 비견될 만한 전역은 태평양 전역이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는 미군과 호주군이 강자이다 보니 옥쇄 운운하는 일본군의 기상천외한(...) 자살 행위가 주로 부각된 반면, 동부전선에서는 중반부까지는 독일군이 강자였던 관계로 조직적인 전쟁범죄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독소전의 인명피해는 태평양 전쟁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굳이 따져도 독일-소련 간의 증오심이 더욱 컸다. 소련의 반독 감정이 미국의 반일 감정보다도 훨씬 컸다는 사실은 전후 소련의 대독일 태도와 미국의 대일본 태도의 차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56] 이는 명명백백한 소련의 잘못이며, 소련이 전쟁 초기 나치 독일의 공범자였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 독일이 폴란드에서 저질렀던 잔혹사를 살펴본다면, 폴란드나 다른 동유럽 국가들이 소련에 항의할 문제지 독일이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다. 게다가 카틴 학살조차도 이념적으로 반소 인사들을 숙청했던 것이지, 폴란드인에 대한 완전한 절멸 작전은 아니었으며 규모 역시 그 자체로는 상당했으나 수십만 단위의 학살을 방방곡곡에서 저지른 나치에 비할 바는 아니다. 애초에 당사국인 폴란드에서도 독일이 자국의 비극적인 역사를 명분삼아 전쟁범죄를 정당화하려 한다면 당연히 분노한다.[57] 실제로 소련에서는 이런 식의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 문서 참고.[58] 레닌그라드 포위전 당시 NKVD가 기강을 잡기 위해 식인행위를 한 사람들을 즉결처형한 사례 등은 많이 알려져 있다.[59] 라이헤나우는 6군 사령관이었고 룬트슈테트는 6군이 소속된 남부집단군 사령관이었다. 따라서 상명하복이라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60] 다름아닌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그러나 라이헤나우가 남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영전한 이후 6군 사령관이 된 다음 이 강조 명령을 폐기했다. 파울루스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프로이센 원수봉은 버려도 자신의 양심을 버리지는 않았으며, 그 대가로 전후 전범재판에서 처벌받는 대신 오히려 증인으로 참관하였다.[61] 독일 포로 사망자 수는 독일 측 최대 추산조차도 33%, 약 100만 명을 넘기지 않는다.[62] 나치는 인종주의에 의거해 열등인종과의 성행위를 '인종의 품격을 떨어트리는' 범죄로 여겼기 때문에, 이런 강간 범죄자들은 증거를 인멸한다는 측면에서라도 살인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63] 심지어 이것은 가해자인 독일 측의 보고서다. 보통 일제의 난징대학살이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입장에서 알 수 있듯 전쟁범죄, 특히 성범죄는 가해자 측이 의도적으로 피해 규모를 쉬쉬하며 축소하는 편이다. 그런데 그 가해자 측에서 너무 많아서 축소하고 쉬쉬하며 적은 규모가 1천만 건에 신생아 75만 명 탄생이다. 실제론 이 몇 배 이상의 강간이 발생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64] 소련을 디스해서 미국으로 추방당한 반체제 작가인 솔제니친의 자전적인 소설인 수용소 군도에서도, 스탈린에게 불경죄를 범해 굴라그로 온 주인공의 감방 동료 두 명은 독일 여인을 강간했다가 NKVD에 체포된 소련군 병사였다.[65] 결과론적으로 비슷한 얘기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나치가 열등인종과의 성행위를 금기시했다는 건 그들을 인종청소하는 건 허용하고, 심지어 장려했다는 말이다. 이에 비해 소련군은 현실적인 패권국가로서 자국의 이익을 추구했을지언정, 어쨌든 해방자로 동유럽에 진주했다.[66] 전쟁범죄에 대한 재판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담당하는 법적인 영역이며, 소련군이 이기고 있는 시점에서 전후 전쟁 범죄자에 대한 대대적인 처벌이 가능하리라는 것 역시 이미 명약관화했다. 하다못해 자기 부모를 죽인 직접적인 당사자를 만난 거라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은 상황에서 어떠한 국제법적 권한도 없는 개인이 복수심에 불타 사적제재를 벌이는 행위는 (정상적인 법치주의가 통하는 국가라면) 처벌받아도 할 말 없는 범죄이다.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소련 정부에서도 독일 민간에 대한 복수를 금지했던 것이며, 이를 무시하고 독일군에게 당한 화풀이를 독일 민간인에게 풀었던 소련 군인들 역시 죄에 대한 도의적 책임의식을 가져야 마땅하다.[67] 그래서 독빠가 아닌 사람들 중에서도 "히틀러가 그동안 유럽이 저지른 악행들을 덮을 만한 짓을 했으니 유럽은 고마워해야 한다" 이런 농담조의 드립 아닌 드립도 간간히 나온다.[68] 손기정은 안타깝게도 일본 선수의 신분이었다. 히틀러가 손기정을 이미 한참 전에 망한 나라인 대한제국의 국민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69] 예시로 일제강점기의 일본조차도 산미증식계획 당시 잡곡을 들여와서 풀게 하는 등 최소한의 인프라는 살려두려 했다. 반대로 이러지 않고 극단적인 학살을 벌였던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는 피해 당사자인 콩고뿐 아니라 유럽 내 다른 식민제국, 심지어는 벨기에 내에서도 욕을 먹는다.[70] 그래도 혈맹인 일본 앞에서는 나치 입장에선 동양인은 싫은데 그래도 동맹이라 좀 말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나치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을 내놓은 적 있다. '일본인의 조상은 아이누인이다→아이누인은 결국 아리아인이다! 알아먹기 참 쉽죠?'[71] 도의적인 이유를 떠나서, (징병할 만한 인원은 이미 전장에 끌려갔을 테니) 총을 잡지도 못할 적국 노약자 한둘을 살상할 폭탄으로 적국의 군수산업시설이나 기반시설을 파괴하는 것이 훨씬 가성비가 좋다.[72] 다만 이쪽은 일본이 모든 가정을 군수물자 생산 시설로 개조했기 때문에 공포감 조장 외에도 폭격의 목적이 명확했다.[73] 이는 지금도 완벽하지는 않아서 의도치 않게 민간인의 피해가 발생하곤 한다. 하물며 2차 세계대전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는 더더욱 불가능한 이야기다. 디즈니 폭탄항목 참고.[74] 그러나 병종에 따라서 서부전선에서도 잔혹한 보복 학살극이 벌어졌다. 우선 숨어서 적군 머리통만 따고 다니는 사람의 경우는 제네바 협약의 보호 대상이 아닌지라 서방연합군·독일군·소련군을 가리지 않고 즉석에서 잔혹하게 처형하였으며, 처칠 크로커다일처럼 보병 입장에서 상대하기 짜증나는 강력한 군사장비에 탑승한 승무원들이 생포되면 거의 죽은 목숨이었다.[75] 심지어 바르샤바 봉기 때는 비무장 민간인을 상대로 잘 짜여진 요새를 때릴 때 쓰는 무식하게 큰것들까지 투입했을 정도였다. 다만 군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쨌든 비무장 민간인도 조직적 저항을 하는 시점에서 적군으로 간주할 수 있으므로 무슨 무기를 쓰든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항복한 포로나 점령지 민간인들을 잔혹하게 대한 게 잘못이지.[76] 소련군 포로의 경우 소수의 견해로 70%까지 잡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57% 정도로 잡는다. 일본군의 경우 중국군을 집계에 넣으면 최대 40%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물론 어느쪽이든 영미권에 비해서 훨씬 많이 죽은건 변함이 없다.[77] 르완다 내전이나 스레브레니차 학살처럼, 전쟁 과정에서 특정 민족에 대한 혐오심과 증오심으로 학살이 일어나는 일은 물론 빈번하다. 그러나 독일처럼 열강의 반열에 드는 국가가 이데올로기적인 이유로 공정화된 학살을 직접 주도한 사례는 현대까지도 전무하다.[78] 하이젠베르크 본인은 자신이 핵개발을 막기 위해서 고의로 사보타주를 했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진위여부는 불명. 한가지 분명한건 독일의 개발자들이 핵무기 개발에 대해서 제대로 방향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할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는 것이다.[79] 일본, 패망직전 흥남 앞바다서 원폭 실험했다[80] 물론 저 변명을 그대로 믿어주기는 어렵지만, 핵무기 개발이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면 저런 변명은 나오지도 못한다.[81] 소련의 핵개발은 1942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소련은 맨해튼 프로젝트 참가자들의 일부를 포섭하여 정보를 빼온 것+소련 과학자들의 연구로 이루어진거지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는 근거는 없다.[82] 실제로는 독소전쟁이나 식민지배에 관해서는 그리 깔끔하다고 보기 힘들지만, 냉전의 영향과 식민지배에 관한 국제사회의 비교적 관대한 인식 덕분에 독일이 깨끗하게 과거사를 청산했다고만 알려져 있다.[83] 그나마 이쪽은 많이 개선된 편이라 소련의 기여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편이고 반대로 "그냥 노르망디 뚫은 후에 오합지졸들 쉽게 쓸어버리고 엘베 강까지 왔네." 이렇게 서방연합군에 대한 저평가가 일어나는 부작용도 있다. 다만 역시 전쟁범죄 피해는 주목을 못 받는 편이다.[84] 그나마도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이라고 생각하지 집시(총 인구 대비 비율로는 유대인보다 더 많이 죽었다), 사회주의자, 장애인, 성소수자 등도 수백만이 학살되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항목 참고. 게다가 사실 홀로코스트만 해도 600만 명이 죽었기에 일반적인 학살과 규모의 궤가 다르다.[85] 예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권에선 하켄크로이츠를 사용하거나 보인다 해도 딱히 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과 SS 친위대와 같은 복장이 멋지다는 이유로 복장의 디자인을 인용을 해서 사용해도 큰 논란이 일어나지 않고 아예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를 카리스마 있는 리더로 미화 하는 것에도 별 반응이 없는 반면, 서구권에선 나치의 사소한 흔적에도 기겁하고 아예 위와 같은 사례는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서구권에선 일본 제국의 범죄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며, 욱일기와 같은 일본 제국주의 성향이 강한 상징적인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거나, 심하면 카미카제 돌격과 같은 행위를 남자답고 멋지게 죽는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굳이 극단적인 예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일본을 마냥 '평화의 나라, 와(和)의 나라' 정도로 인식하는 퍼져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86] 어느 나라의 전쟁범죄가 더 악랄했는가의 논쟁은 서로 경쟁할 만한 것도 아니고, 한쪽의 전쟁범죄를 부각하기 위해 다른 쪽을 가볍게 치부하는 것은 그 나라에 희생된 피해자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꼴이다. 일본과 독일 모두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저질렀던 여러 전쟁범죄의 멍에를 지고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일본의 전쟁범죄를 앞세우며 독일의 전쟁범죄를 묻어가는 행위는 나치 독일에 비해 일본의 전쟁범죄는 별거 아니라는 일본 극우들의 주장과 하등 다를 바 없다.[87] 독일은 유럽연합의 주도국으로 프랑스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폴란드와도 적어도 과거사 문제로 크게 충돌하지는 않는다. 반면 일본은 한국, 중국 등 주변국과 끊임없이 충돌하며, 특히 한일관계는 비슷한 체제와 문화를 공유하는 선진국들이기에 딱히 적대적일 이유가 없는데도 과거사가 양국 간의 주요 현안으로 남아있다. 국내 관점으로 보면 일본 또한 전후에 간 나오토 담화, 고노 담화 혹은 천황의 공식적 사죄 발언 등의 노력이 있었으나, 국내에선 정치적 이득을 위해 일반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양국 국민들이나 정치권이 속으로야 어떻게 생각하든, 독일이 현실적인 의미에서 과거를 더 잘 '청산'한 것은 맞다.[88] 국제사회에서 독일과 일본에 과거의 나치와 일제를 투영하는 국가는 많지 않다. 게다가 현대 독일과 일본은 과거의 팽창주의적 외교를 펼칠 역량이 거세당한 처지이다. 세계 3, 4위의 경제대국이 이제 와서 굳이 다시 폐허만 남길 전쟁을 벌이려 들 이유도 없겠지만, 미국에 의해 군사적 역량이 제약당한데다 중국과 러시아가 매의 눈으로 견제하는 이상 그럴 의도가 있더라도 무의미할 뿐이다. 때문에, 피해자의 입장에서 독일과 일본의 역사 인식이 부족하다고 지적할 권리는 당연히 있지만, 그들을 과거의 파시스트 체제와 동일시하며 비판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공감을 받기 어려운 국내 정치용 프로파간다일 뿐이다.[89] 심지어 일부 극우들은 히틀러가 세계 경제를 점령한 유대인 세력에 맞서 외로이 싸운 투사였다는 식으로 미화한다. 나치가 써먹은 배후중상설 같은 거짓 프로파간다와 판박이이다. 다만 이러한 주장은 너무 나간 주장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음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으며 양지에서는 나치와 이스라엘을 동일시하며 피장파장의 논리를 전개하는 경우가 더 많다.[90] 비슷한 예로 대한민국 군사정권 시기 화교에 대한 추방운동이 있었고, 동남아와 달리 한국 경제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중국에 대한 종속을 피할 수 있었다.[91] 이는 팔레스타인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인 경우도 없지 않다.[92] 물론 현대 사회에서 유대인의 기준은 유대교에 대한 믿음이지만, 나치의 기준에서는 어쨌든 혈통이 중요했다.[93] 다만 전범임이 확실한 만슈타인과 호트, 룬트슈테트와 달리 클라이스트는 되려 점령지 유화 정책을 편 인물이었다.[94] 클라이스트의 경우에는 아예 말이 안되는 주장은 아니다. 게다가 유고슬라비아에서의 학살에는 반대하였다. 방임죄라는 죄를 짓긴 하였지만 재판 당시의 죄목은 러시아인들을 분열시킨 죄라는, 지극히 소련 중심적인 명분으로 기소당한 것.[95] 사실 소련은 전후 동독 건국과 유지를 위해서라도 나치에 부역한 독일군(독일 국방군 한정)들을 전방위하게 숙청하지는 않았다. 당장 동독군(국가인민군)의 초대 장성들과 지휘관들은 대부분 다 독일 국방군 출신 중 소련에 협조적인 자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는 서독의 독일연방군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96] 현재 독일에서는 국방군 출신들이 세운 기록 자체는 인정해 주지만, SS는 얄짤없다. 예를 들어 보자면 국방군 출신의 오토 카리우스는 현재 생전에 그가 세운 훈장과 기록은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SS 출신의 미하엘 비트만은? 전적이 말소되었다.[97] 애시당초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대표하던 당시 오스트리아의 왕실 복고주의 반동주의자들은 좌파와 나란히 나치에 저항한 몇 안 되는 오스트리아 내의 반나치 세력에 가담했고, 나치 정권 또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남아 있는 일원들을 집중적으로 감시, 투옥 등 탄압했다.[98] 오스트리아의 여러 장성들과 병력들이 국방군에 편입되어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안슐루스 당시에 오스트리아는 병합을 환영했다. 심지어 오스트리아는 체코와 같이 강대국 놀음에 나라를 잃은 것도 아니고 폴란드, 네덜란드, 프랑스 등과 같이 무력으로 패해 점령당한 것도 아니다. 자국민이 자발적으로 나치 정권의 프로파간다에 감화되어 국민투표를 통해 독일로의 병합에 찬성했기 때문에 나치 문제와 관련하여 독일 외 타 국가들과 책임의 무게가 다르다. 심지어 나치의 우호적 중립국이었던 스웨덴, 스위스조차 비판받는 판국에 단순한 부역국 정도도 아니고 아예 나치의 공범이었던 오스트리아가 전후 나치의 피해자로 둔갑한 것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99] 미국 리인액트먼트 단체들에서 '고증'에 맞추어 옷을 입지 않는 회원을 지칭하는 은어다. 예를 들어 다 갖춰 입어 놓고서는 현대식 손목시계를 차고 오는 경우 등.[100] 로널드 스멜서 외 1인, 『제2차 세계대전의 신화와 진실: 독소전쟁과 냉전, 그리고 역사의 기억』, 류한수 옮김, 산처럼(2020), 419 ~ 443p.[101] 여담으로, 이런 현상은 대척점에 있는 소련군의 계급, 특히 소련 해군 계급을 다룬 문서들에서도 나타나는데, 친소련적 밀리터리 동호인들 중에서도 소련군의 계급, 특히 함대식 계급명만 골라 직역하는 경우가 있다. 보통 육군, 공군 계급은 의역하면서, 해군식 계급만 직역하는 경향이 있다.[102] 국방군 소장 출신이며 9군 휘하에서 독소전쟁에 참전했다. 국방군 신화를 믿는 사람들의 애독서인 "기갑 전투(Panzer Battles)"의 저자이기도 하다. 반대로 볼프람 베테와 같은 현대의 많은 군사사학자들에게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103] 로널드 스멜서 외 1인, 『제2차 세계대전의 신화와 진실: 독소전쟁과 냉전, 그리고 역사의 기억』, 류한수 옮김, 산처럼(2020), 445 ~ 461p.[104] 공교롭게도 둘 다 게르만족이 주류를 차지하는 국가다. 앵글로색슨족이 게르만족의 일파이기 때문.[105] "독일국방군: 2차대전과 깨끗한 독일군의 신화"에서도 잘 나와있다.[106] 이때 만슈타인의 변호인단은 영국계 유대인으로 편성되었다.[107] 사실 이는 한국 전쟁사도 마찬가지다. 북한-중국측 자료가 거의 공개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영어권 자료들은 그저 유엔군-국군측의 시각으로만 전쟁의 추이를 그리고 있다.[108] 서방에서는 데이비드 글랜츠 정도가 그나마 소련측 자료를 비교적 많이 섭렵했고, 소련에 우호적인 전쟁사가인데, 희한하게 독빠들은 위에서 지적한대로 그의 설의 일부(르제프 전투)만을 아전인수로 끌어와서 독일군 무적설을 옹호하고 있다.[109] 이 때문에 독일은 외교를 잘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한 바람에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모두에서 양면 전선을 형성했고 결국 두 번 다 지고 말았다(...)[110] 30년 전쟁, 7년 전쟁, 라인 동맹, 틸지트 조약, 올뮈츠 협약 등 참조. 유럽 한 가운데에 놓인 독일이 스웨덴, 프랑스 왕국, 러시아 제국 같은 주변 강대국들에게 계속 침략받거나, 압박받아온 것을 알 수 있다.[111] 독축빠들의 안티 뿐만 아니라 일부 독축빠들도 사실 독일의 이미지 자체가 겸손하게 실력을 갈고 닦으며 보여줄 때 확실히 보여준다는 것이었고, 기복도 없이 꾸준하고 우직하게 좋은 성적을 낸다는 점때문에 독일과 독일축구를 좋아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 선수들의 계속되는 좋은 성과에만 취해서 아주 대놓고 오만방자한 모습을 보고 실망했다는 여론을 조금씩 형성해오고 있었으며 독축빠를 그만두는 사람들도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론 독일의 졸전이 시작된 러시아 월드컵 이전까지는 여전히 독축빠들이 각종 포털사이트와 유튜브 댓글에서 날뛰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112] 그동안 독축빠들의 안티들이 버로우시키기 위한 방어기제성 멘트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것.[113] 국내에 그렇게 많던 독축빠가 눈녹듯이 확 빠진 계기가 대한민국 국대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그래도 이 때 까지만 해도 독빠들은 독일이 금세 다시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큰 착각이었다.[114] 물론 그 전에도 줄어든 편이었으며, 2020년대에 축구 강국으로 떠오른 프랑스, 잉글랜드, 아르헨티나, 브라질, 크로아티아 등 다른 국대팀의 팬으로 갈아탄 편이다. 최소한 여기 언급된 팀들은 아시아팀과 수준차이를 보여주는 경기력을 보여 줄 때가 많았지만 독일은 2018년 부터 농어촌 지역예선이라고 국내 축구팬들에게 조롱받는 아시아팀한테도 깨지는 모습을 보여주니 지금은 독축빠가 예전보다 줄어들면 줄어들었지 늘어나기는 힘든 상황이다. 진짜 독일이라는 국가에 애정있는 것 아니면 모를까. 그리하여 독빠들은 2020년대 현재의 독일 국대에 대한 팬심을 이어가기가 힘들게 되자 화려했던 독일이 승승장구했던 과거 시절의 월드컵 영상을 보며 마음의 위안을 찾고 있는 중이다.[115] 물론 해당직업, 예를들어 소세지나 맥주 마이스터 자격을 취득한뒤 맥주나 소세지 업체에 입사하려할 때[116] 다만 이분은 나치 때문에 미국으로 망명했다.[117] 보어는 덴마크 사람이고 영국에서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제자였다.[118]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만의 역사가 아니라 이탈리아, 보헤미아와 역사를 공유한다. 다만 학계에서 독일의 비중을 높게 두는 것은 사실이다.[119] 정작 프로이센 왕국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계승 국가였고, 호엔촐레른 가문과 프로이센 융커 계층은 튜튼 기사단으로부터 이어진 유산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당장 독일 통일을 이끈 오토 폰 비스마르크부터가 자신의 고향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뿌리 알트마르크(Altmark) 지역(현재는 행정구역개편으로 작센안할트)을 가리켜 프로이센의 요람(Wiege Preußens)이라고 말했다. 프로이센의 뿌리가 독일 기사단국-프로이센 공국이라면 비스마르크의 저 말은 말이 안된다.[120] 단, 체코슬로바키아 합병은 현지에 살던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을 무시하는 처사였기 때문에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민족주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이후의 단치히 회랑 요구가 더 정당성이 있던 편. 이는 뮌헨 협정에 대해 전혀 모르고 "체코슬로바키아 합병이라니까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다 집어먹은거겠거니..." 하는 사람들이나 할법한 착각이다. 뮌헨 협정으로 독일이 합병한 것은 주데텐란트를 비롯한 독일인 거주지역이었고, 그 와 슬라브인 거주 지역에 대해서는 헝가리나 폴란드에게 떼주거나 형식적인 독립국으로 그냥 남겨놨다. 즉, 뮌헨 협정 까지는 국가 주권의 측면에서는 도무지 말도 안 되는 폭거이긴 한데 그나마 민족주의적 관점을 내세워 억지로 정당화 했던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뮌헨 협정으로 자신감을 얻은 히틀러가 이후 벌인 일들에 대해서는 민족주의적 관점으로도 도저히 정당화가 불가능하긴 한데, 이 쪽은 그냥 히틀러가 민족주의적 명분을 핑계삼는것조차 그만두고 막 나가기 시작한 것이니 같은 선상에서 논할 문제는 아니다.[135] 세상에 대체 어떤 멍청이가 폴란드 침공이나 프랑스 침공을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해석하겠는가.[121] 아무리 저평가를 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독일계 가톨릭 국가들의 에이스 대접은 받았다.[122] 예를 들어, 명확한 반나치/평화주의 성향을 보여주고 실천한 하인리히 뵐 같은 인물이, 그저 역사책(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 한 권 읽고 '우리 조상님들 대단했던 거 같다' 라는 서평을 기고했다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비판에 직면했을 정도였다. 민족 개념이 공공연히 받아들여지고, 민족에 대한 애정이나 자부심이 상당히 권장되기까지 하는 한국인으로써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말 그대로 '우리 민족' 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 만으로도 '저거 네오나치 아니냐'고 낙인찍힐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말 그대로 나치의 만행 이후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그 존재 자격 자체를 철저히 부정당한 것. 상당부분 (선배 세대의) 자업자득이라고는 해도, 비참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123] 독일어권의 모어 사용자가 많긴 하지만 모어를 제외한 사용자는 프랑스어가 독일어를 압도한다. 당장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예술권 공용어가 프랑스어이다.[124] 이는 매우 주관적인 이야기다. 독문학이 다른 나라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유럽문학 3대장은 영국 문학, 러시아 문학, 프랑스 문학으로 본다.[125] 객관적으로 봐도 파리는 제대로 보려면 일주일도 모자라며, 반면 베를린 시내만 구경하면 꼼꼼히 봐도 3일도 걸리지 않고, 근처 포츠담, 드레스덴, 라이프치히까지 다 갔다와도 일주일도 안걸린다.[126] 그리고 독빠들은 영국, 미국의 제국주의 행각도 비난하지만 독일의 만행에 대해선 침묵한다.[127] 히혼의 수치 항목이 사실상 오랫동안 작성금지였던 것이 좋은 예시.[128] 폴란드 제2공화국의 외교적 실수와 스스로 일으킨 불화(빌뉴스 점령 등)를 명분삼아 전간기 폴란드도 잘한 게 없다며 비판하는 걸 넘어 그냥 폴란드 자체를 싸잡아 욕하기도 한다. 프랑스의 경우는 프랑스의 잘못이 아님에도 비난한다.[129] 만약 구미권 넷상에서 이러한 행동을 하면 얄짤없이 매장 당한다. 누군가 우리나라 넷상에서 도조 히데키와 같은 전범을 프로필로 하고 다닌다고 생각해보자.[130] 대부분 티거, 판터가 들어가는데, 티거와 판터는 독일에서 결전병기를 목표로 제작한 물건이었으므로 당연히 동시대의 전차들보다 성능이 압도적인 것이 당연한데도, "티거와 판터에게 "마저도" 털리는 쓰레기"라는 식으로 포장하는 것이 문제다.[131] 물론 서부전선을 제외해도 독소전도 깊이 들어가면 미국의 랜드리스가 소련의 전쟁 수행에 상당히 큰 도움을 주었기에 미국도 동부전선 승전의 상당한 공로자이긴 하다.[132] 단, 발트3국이나 핀란드 등지에서는 자국의 SS 의용군단을 실제로 우호적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거나 국가마다 입장은 다른 법이고, 당장 이들 지역은 소련의 침략과 전쟁범죄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던 상황이니, 나치의 전쟁범죄를 무리하게 옹호하는 것만 아니라면 딱히 비난할 것도 아니고. 비슷하게 자유 인도처럼 일제와 연계해서 해방운동을 전개했던 사람들도 그들 나라에서는 애국자고, 우리가 뭐라할 건 아니듯이.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못하고 진영논리에 빠져 나치가 자기들을 도와줬으니 선역이고 연합군은 죄다 위선자라는 식으로 너무 나가니까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133] 출처는 이성과힘판 난쏘공 264, 265페이지.[134] 정확하게는 유태계 성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