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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가해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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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나치 독일
2.1. 독일 정부나치당2.2. 친위대
2.2.1. 무장친위대2.2.2. 해골부대2.2.3. 질서경찰2.2.4. 국가보안본부2.2.5. 기타 기관
2.3. 독일 국방군2.4. 전범기업
2.4.1. 독일국영철도2.4.2. 이게파르벤2.4.3. 헤르만 괴링 국가공업2.4.4. 크루프2.4.5. 독일 토양 및 석재 유한공사(DEST)2.4.6. 기타 기업
3. 독일 외 추축국 및 부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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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홀로코스트의 가해 주체는 다양하다. 나치 독일의 정부 산하 조직들과 나치당을 중심으로, 다수의 기업과 부역자들이 포괄적으로 얽혀 있다.

2. 나치 독일

2.1. 독일 정부나치당

파일:Goring Authorization Letter.jpg
1941년 7월 31일, 베를린

제국원수
4개년계획부 전권 장관
국방위원회 의장

공안경찰 및 보안대 최고책임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SS중장 귀하

베를린

1939년 1월 24일 최적의 수단을 동원해 유대인을 이주시키고 추방하라는 귀하의 의무에 더해, 독일의 영향력이 미치는 전 유럽에서의 유대인 문제를 완벽히 해결하기 위해 발생하는 조직적이고 기술적이며 실제적인 문제에 관련된 모든 필수적 사항들을 준비할 책임을 귀하에게 부여한다.

정부의 다른 부처가 관련될 경우 그들은 언제든 귀하에게 협조해야 한다.

나는 귀하에게 우리가 바라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Endlösung der Judenfrage)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조직적, 기술적, 실제적 수단들을 모두 포함하는 전체 계획을 가까운 시일 내에 제출하도록 요구하는 바이다.

괴링(서명)
- 제국원수 괴링이 당시 국가보안본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게 보낸 서한. 이 명령을 받은 하이드리히는 베를린 교외 반제의 한 별장에 독일 정부의 각 부서 요인들을 초대하여 유대인 문제 해결법에 대한 회의를 비밀리에 열었다. 이 회의가 그 유명한 반제 회의다.

2.2. 친위대

2.2.1. 무장친위대

2.2.2. 해골부대

2.2.3. 질서경찰

2.2.4. 국가보안본부

2.2.4.1. 보안대
2.2.4.2. 비밀경찰
2.2.4.3. 친위특무대
파일:Men_with_an_unidentified_unit_execute_a_group_of_Soviet_civilians_kneeling_by_the_side_of_a_mass_grave.jpg
▲ 민간인들을 총살하는 특무대원들. 프리드리히 예켈른이 개발한 '정어리 통조림' 방식으로 사람들을 처형하고 있다. 1941년, 일자 불명.
...예를 들면 라트비아의 다우가프필스에서 유대인 집단 학살이 있었어요. 친위대와 보안대가 수행했지요. (중략) 일요일 이른 아침 침대에 누워 있는데, 일제사격 소리가 두 번 나고 그다음 소총을 쏘는 소리가 들렸어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와 말했죠. "왜 총을 쏜 거야?" 참모부 배속 장교가 말했죠. "대령님, 가 보셔야겠습니다.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그 근처까지만 갔지만 그래도 볼 건 다 봤어요. 다우가프필스에서 끌고 온 300명이 구덩이를 하나 파 놓았지요. (중략) 한 사람이 명령을 하면 스무 명의 인간이 마치 과녁처럼 넘어지면서 구덩이로 떨어졌지요. 그다음에 제일 끔찍한 일이 벌어졌죠.
- 라트비아 메스켐프에서 특무대가 벌인 학살에 대한, 독일 육군 하인리히 키텔 중장의 증언. 키텔 중장은 영국군에 포로로 잡혀 트렌트파크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도중 동료 수감자[1]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해당 증언을 구술했다. 위 대화는 1944년 12월 28일 영국 정보부의 포로 감시 부서인 MI19에 의해 도청되어 독일 장성 특별보고서(SRGG)에 기록되었다.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의 《나치의 병사들》 168p에서 발췌.

최초로 집단 총살을 시작했으며, 가장 열성적으로 수행한 이들이자 가스 밴을 최초로 사용한 이들은 바로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이다. 번역하여 특무부대, 특무대 또는 특수작전집단이라 불리며, 나치당 친위대 소속의 보안대와 보안경찰(게슈타포)이 주축이 된 부대였다. 일부 무장친위대질서경찰 전투대대들도 배속되었다. 나치당이 지정한 사상적, 인종적 적들을 제거하는 임무를 맡은, 오직 살인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다. 설립자는 국가보안본부 총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SS대장이었다.

이들은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체코슬로바키아 병합 당시 최초로 결성되어 독일의 병합에 저항하는 이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두 국가의 병합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에는 이미 진행되고 있던 우생학적 장애인 학살인 T-4 프로그램에 투입되어 장애인들을 살해하였다. 1939년 폴란드 침공부터는 본격적으로 재조직되어 폴란드인들을 노예화하는 목표의 사전 작업으로서 폴란드 지식인들을 집중적으로 총살하였는데, 이들이 육군의 진격로를 따라가며 진행한 학살은 훗날 독일군 전체가 수행할 인종 전쟁의 청사진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의 개시와 함께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특무대는 북부, 중부, 남부집단군에 분속되어 본격적인 살해작전을 벌인다.

우선 특무대 A(Einsatzgruppen A)의 경우 프란츠 발터 슈타흘레커 SS소장의 지시를 받았으며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가 이끄는 북부집단군의 소속이 되어 발트 3국 지역을 맡았다. 이들은 넷 중 특히 가장 열성적으로 유대인들을 살해한 집단으로, 1942년 초 반제 회의가 열리기 전 약 8개월 만에 발트 3국 유대인들의 씨를 거의 다 말렸다. 아이히만이 반제 회의에서 에스토니아 유대인들이 없다고 보고할 정도였다.

한편 아르투어 네베 SS중장이 이끄는 특무대 B(Einsatzgruppen B)는 페도어 폰 보크 원수의 중부집단군 소속으로서 벨라루스와 중서부 러시아를 휩쓸었다. 이들은 후술할 파르티잔 토벌전에 가장 큰 중역이 된다.

특무대 C(Einsatzgruppen C)는 오토 라슈 SS소장의 지휘를 받으며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의 남부집단군 소속이 되었으며, 북부 우크라이나를 파괴했다. 키이우 일대에서 벌어진 바빈야르 학살이 바로 이들의 소행이다.

마지막으로 오토 올렌도르프 SS중장의 특무대 D(Einsatzgruppen D)는 남부집단군 중에서도 오이겐 리터 폰 쇼베르트 상급대장, 그리고 그 후임자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 상급대장의 11군 소속으로 남부 우크라이나와 남러시아 및 크림 반도 등 흑해 연안 지역의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2.2.5. 기타 기관

2.3. 독일 국방군

2.4. 전범기업

2.4.1. 독일국영철도

2.4.2. 이게파르벤

2.4.3. 헤르만 괴링 국가공업

2.4.4. 크루프

2.4.5. 독일 토양 및 석재 유한공사(DEST)

2.4.6. 기타 기업

3. 독일 외 추축국 및 부역자

독일군 외에도 독일의 동맹국이나 괴뢰국, 점령지역 주민들이나 기업들 또한 학살에서 유의미한 비중을 차지했다. 반유대주의와 민족주의는 독일에서 특히 급진적이기는 했으나, 상술한 것처럼 나치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독일은 점령 지역 주민들을 탄압하였으나, 동시에 그들이 가진 행정력과 반유대주의, 민족적 적개심을 이용했다. 그리고 많은 수의 점령 지역 부역자들 및 독일의 동맹국들은 각자의 이유로 독일의 힘에 편승했다.

유고슬라비아 지역의 경우, 독일군은 크로아티아 우스타샤와 협력하고 보슈냐크인들로 구성된 무장친위대 부대인 한트샤르를 동원하며 유대인과 세르비아인들을 살해했다. 그 중 우스타샤의 경우 자체적인 수용소들을 운영하며 인종 청소를 자행했다. 이온 안토네스쿠루마니아군은 독소전쟁 당시 루마니아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반유대주의를 매우 격심하게 표출하며 남부 우크라이나에서 대량 학살을 저질렀으며, 필리프 페탱 원수의 비시 프랑스는 딱히 파시즘 체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자발적으로 독일에 협조하여 유대인들을 체포했다.[2] 친독 매국노 비드쿤 크비슬링이 이끄는 노르웨이 국민정부 또한 독일에 적극 부역하며 노르웨이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슬로바키아 인민당과 그 사병인 흘린카 근위대도 친위대 특무대와 협력했다.

덴마크의 경우 독일의 간섭을 매우 약하게 받았던데다 자체적인 반유대주의도 약한 국가였다. 덴마크 유대인들은 크리스티안 10세의 비호로 다윗의 별을 달거나 시민권을 잃지도 않았으며, 대부분이 살아남았다. 심지어는 독일에 잡혀간 이들도 덴마크 정부의 요청으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덴마크 정부 또한 피난 온 외국 유대인들까지 보호해 주지는 않았다. 그들은 덴마크 정부와 독일군에 의해 체포되어 독일로 전부 보내졌고, 폴란드에서 살해당했다. 또한 6000명 가량의 덴마크인들과 일부 노르웨이인, 그리고 일부 핀란드인들은 무장친위대 제5기갑사단 "비킹"에 자원하여 복무했으며, 동유럽에서 대량 학살을 벌였다. 당장 1943년의 수확제 작전 당시 루블린에서 여타 독일군 부대들과 함께 4만 2천명의 유대인들을 살해한 이들이 바로 무장친위대 5기갑사단이다.

헝가리 왕국의 경우 호르티 미클로시 섭정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1944년까지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안전한 국가였다. 헝가리는 자체적인 반유대주의가 매우 격심한 국가였음에도 왕국정부는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1944년 초 독일군이 진주하고 최고지도자 살러시 페렌츠와 그의 화살십자당이 정권을 장악하면서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헝가리 정부는 독일에 적극적으로 부역했고, 그들은 자국 국민인 헝가리 유대인들을 독일에 넘겨주어 아우슈비츠에서 살해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을 보이지 않았다.

이탈리아 왕국의 경우에는 반유대주의가 상당히 약한 국가였고, 파시스트 정부 또한 유대인들을 배제하지 않았다. 점령 지역의 유대인들마저도 이탈리아 군대에 의해 보호받았다. 그러나 1943년 이탈리아의 항복 이후 독일이 베니토 무솔리니를 내세워 북부에 괴뢰국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을 세우면서부터 이탈리아의 홀로코스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탈리아 괴뢰군은 독일군에 협조하여 받아 빨치산 토벌전을 벌이거나 유대인 색출에 가담했다. 그 외 불가리아 왕국의 경우에도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추축국 가입 초기부터 페타르 가브로프스키와 같은 반유대 인사들의 입김 때문에 1943년까지는 유대인들을 살해했다. 오히려 알렉산더르 찬코프같은 친독 히틀러빠 인사들이 유태인 학살에 반대하는 서명에 동참하기도 할 정도였다.

독일에 맞선 '대조국전쟁' 프레임이 강력하게 지배하는 동유럽 또한 부역자들이 아주 많았다. 이는 주로 러시아와 소련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거기다 절멸전쟁이라는 동부전선의 성격 때문에 점령 지역에서 이용할 행정력이 사실상 박멸된 관계로 양상이 서유럽과는 많이 달랐고, 보다 더 과격했다.

우선 과거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라트비아인, 리투아니아인폴란드인들은 제국 멸망 이후 독립하여, 2차 대전 바로 직전까지도 독립국을 가지고 있었으나 나치와 불가침 조약을 맺은 소련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다시 나라를 잃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자신들을 탄압하고 다시 집어삼킨 러시아와 소련의 지배에 매우 불만이 많았다. 그 중 폴란드는 독일의 폭압적인 지배 또한 여러 차례 받았기에 독일에 대한 부역 행위가 그나마 적었으나, 발트 3국은 러시아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바라며 적극적으로 나치에 협력했다. 발트 3국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는 리투아니아인들과 라트비아인들을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다.

동슬라브에 속하는 벨라루스인들과 러시아인들의 경우 소련에 대부분 충성했다. 그러나 사상적으로 소련 정부와 대립하거나 집단농장 등 소련 체제의 행태에 불만이 많던 사람들은 독일군의 진격에 편승하기도 했으며, 사상에는 딱히 관심이 없지만 소련군 파르티잔들의 활동으로 인해 생활이 어려워진 주민들이 독일군에 협력해 파르티잔들을 쓸어버리려고 하기도 했다. 한편 우크라이나인들의 학살 가담은 좀 더 복합적인 이유였다. 그들 역시 러시아와 공통점이 많았기에 소련과 그 맹주 러시아에 충성한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인은 동시에 독립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기도 했으며, 실제로 러시아 제국의 붕괴 이후 잠깐이나마 독립을 이루기도 했다. 30년대에는 우크라이나 대기근까지 겪고 집단농장으로 농촌 공동체가 강제로 해체되자, 민족주의적 우크라이나인들은 소련 체제에 대한 반감이 불타올라 독일에 협조했다.

그리고 이 동유럽 주민들 대부분은 공통적으로 주변 유대인들에 대해서 뿌리깊은 반감을 가졌다. 특히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던 지역에 살았던 주민들은 농노였던 자신들과 달리, 유대인들은 마름이나 상인 또는 귀족으로서 그들을 착취했다고 생각했다. 상술한 기독교적 이유도 있었다. 때문에 독일 부역자뿐만 아니라 독일에 반감을 가진 주민들 중에서도 유대인들을 박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 유대인들 중에서도 게토 평의회와 유대인 경찰은 같은 유대인들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폴란드인 중에는 유대인들을 도와 숨겨준 사례들도 있었지만, 유대인을 학살하는데 동참한 경우도 있었다. 유대계 폴란드 역사학자인 시몬 다트네르는 당시 유대인 20만 명이 폴란드인에 살해되었다고 보았다.#

동부전선의 현지 부역자들은 주로 질서경찰 보조경찰부대(Hilfspolizei)를 구성하거나, 역시 무장친위대 외인부대에 소속되었다. 무장친위대의 경우 러시아인 및 벨라루스인 부역자들이 주가 된 카민스키 여단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들 대부분은 상술한 국방군 보안사단들 또는 친위특무대, 질서경찰과 함께 파르티잔 토벌전에 투입된다. 또는 일반친위대 소속의 수용소 경비대(SS-Totenkopfverbände) 소속의 보조병들이 되어, 절멸수용소 등지에서 경계 업무를 맡거나 처형 임무, 시신 처리 업무같이 '더러운' 일들을 도맡아 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분노에 찬 마을 사람들이 농기구나 냉병기를 들고 나와 다른 민족이 지배적인 옆 마을을 파괴하는 겅우도 비일비재했다.

한편 프랑스 국철, 벨기에 국철, 체코슬로바키아 국철과 같은 점령지 국가들의 철도들의 경우 독일군에 징발당하거나 이용되어 유대인 이송 작업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우선 자국에 위치한 게토에서 유대인들을 수송해 독일 또는 그 인근에 위치한 집결수용소들로 옮겼다. 그러면 거기서부터는 독일국영철도가 이들을 수송하여 각지의 수용소들로 이송했다. 또는 이들 점령지 철도업체들의 열차가 직접 그대로 아우슈비츠까지 달려가기도 했다. 독일국영철도의 홀로코스트 열차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또한 화물열차에 사람들을 과적하여 수송하였다. 이 때문에 이들 현지 철도업체들 또한 전후에 배상금을 내야만 했다.

이 현지인들의 학살 참여는 홀로코스트의 위계를 더 복잡하게 만들어버리는 일등공신이다. 다른 민족들 또한 나치의 피해자였지만, 동시에 나치와 협력한 가해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특히 동유럽과 동남유럽 발칸 반도의 경우 다수의 민족들이 같은 공간 속에서 함께 섞여 살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중층적으로 존재하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역사적이고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보다 직접적으로 얽혀 있었기에 때로는 독일군보다도 더 극심한 인종적 증오를 서로에게 표출했다. 이들 또한 전후에 법적으로 처벌받았으나, 다수의 참여자들은 죗값을 치르지 않았다. 가장 큰 원죄를 짊어진 독일에 간편하게 책임을 떠넘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까지도 이 앙금은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다. 가령 지난 2016년 폴란드의 집권 여당인 법과 정의당은 홀로코스트법을 제정해 '독일에 협력한 폴란드'를 묘사하면 벌금형이나 징역형에 처하면서 폴란드 나치 부역자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한편 발트 3국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진영 중 극단적인 일부는 여전히 제20 무장친위대 척탄병사단이나 스테판 반데라 같은 독일 부역자들을 찬양한다.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극우와 네오 나치들은 이들 친독 부역자들의 행동을 긍정하며 이민족을 차별한다. 최악의 경우는 크로아티아였는데, 그들은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세르비아에 맞서며 우스타샤를 부활시키고 다시 한 번 인종 청소를 자행했다.


[1] 펠베르트라는 인물로, 트렌트파크 수용소에 수감된 포로 중 영국의 정보부와 협력하며 정보를 빼내던 인물이다.[2] 프랑스에는 홀로코스트 시행을 위한 인프라(?)가 제3공화국 시절부터 얼추 갖춰져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패주한 공화파 및 국제여단 패잔병들이 프랑스로 도망쳐와 외국인 혁명가들이 급증하자 프랑스는 이 골치아픈 세계혁명 투사들을 대거 검거하여 수용소에 집어넣었는데, 나치와 협력한 비시 프랑스에서는 이들 시설과 체제를 유지하며 유대인 검거 및 강제수용에도 써먹었고 심지어 원래 수감되어있던 유대인 수감자들을 조금씩 아우슈비츠 등 나치 독일 절멸수용소로 보내기도 했다. 그러자 이들 망명객들은 레지스탕스와 자유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비시 정부와 나치에 맞서기 시작했고, 그 덕에 종전 이후에도 프랑스 사회에서 일정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프랑스를 기반으로 反프랑코 전선의 대오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전후 프랑스에서도 이들을 파시스트에 함께 맞선 동지로 대접하며 오늘날에도 관련 행사에서 스페인 공화파의 삼색기가 게양되는등 영웅으로 대우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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