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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가해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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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명령 구조3. 나치 독일
3.1. 독일 정부나치당3.2. 친위대
3.2.1. 무장친위대3.2.2. 해골부대3.2.3. 질서경찰3.2.4. 국가보안본부3.2.5. 기타 기관
3.3. 독일 국방군3.4. 전범기업
3.4.1. 독일국영철도3.4.2. 이게파르벤3.4.3. 헤르만 괴링 국가공업3.4.4. 크루프3.4.5. 독일 토양 및 석재 유한공사(DEST)3.4.6. 기타 기업
4. 독일 외 추축국 및 부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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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홀로코스트의 가해 주체는 다양하다. 나치 독일의 정부 산하 조직들과 나치당을 중심으로, 다수의 기업과 부역자들이 포괄적으로 얽혀 있다.

2. 명령 구조

성명 직책 비고
아돌프 히틀러 퓌러
국가 대통령
국가 수상
최고지도자
구두로 명령
선전선동으로 홀로코스트를 정당화
홀로코스트의 이념적 기반 마련
홀로코스트 문서 승인
[1]
헤르만 괴링 제국원수
부총리
경제 장관
항공 장관
공군 최고사령관
행정적 지휘권자
최종 해결책 지시
강제노동 지시
유대인 재산 강탈 지시
빌헬름 카이텔 육군 원수
국방군최고사령관
행정적 지휘권자
아돌프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명령을 독일 국방군에 하달
독일 국방군무장친위대의 유대인 학살을 방조
마르틴 보어만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퓌러 비서
제국 장관
당수부장 겸 당장관
행정적 지휘권자
최종 해결책 권한 부여
절멸수용소 권한 부여
폴란드 총독부,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의 가혹한 지배 정책을 승인
하인리히 힘러 친위대 국가지도자
친위대 장관
내무 장관
국가보안본부 본부장
행정적 지휘권자
최종 해결책 지시
절멸수용소 권한 부여
아인자츠그루펜 설립
T4 작전 지시
빌헬름 프리크 내무 장관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총독
행정적 지휘권자
뉘른베르크 법 제정 관여
홀로코스트의 법적 근거 마련
요제프 괴벨스 국민계몽선전장관
총리
행정적 지휘권자[2]
선전선동으로 홀로코스트를 정당화
홀로코스트의 이념적 기반 마련
알베르트 슈페어 군수 장관
산업생산장관
행정적 지휘권자
유대인 강제이주 명령
유대인 강제노동 명령
절멸수용소로의 물자 이송 승인
슈츠슈타펠의 홀로코스트를 방조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동방영토 장관
지적 및 이념교육부장
대외정책국장
행정적 지휘권자
유대인 재산 강탈 지시
홀로코스트의 이념적 기반 마련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외무 장관
행정적 지휘권자
유대인 강제이주 명령
유대인 강제수용소 수감 명령
슈츠슈타펠의 홀로코스트에 협력
홀로코스트를 외교적 선전으로 은폐
롤란트 프라이슬러 인민재판소장 홀로코스트의 이념적 기반 마련
반제 회의 참석
홀로코스트의 법적 근거 마련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게슈타포 국장
국가보안본부 본부장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총독 권한 대행
실무 지휘자
반제 회의 주도
아인자츠그루펜 설립
유대인 게토 강제이주 실무 담당
유대인 절멸수용소 강제수감 실무 담당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국가보안본부 본부장
실무 지휘자
아인자츠그루펜 작전지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설립 관여
수감자 대상 인체실험 승인
하인리히 뮐러 친위대 집단지도자
게슈타포 국장
유대인 이주계획 전국본부장
실무 지휘자
반제 회의 참석
아인자츠그루펜 설립
유대인 게토 강제이주 실무 담당
유대인 절멸수용소 강제수감 실무 담당
쿠르트 달루게 친위대 최상급집단지도자
경찰상급대장
질서경찰 총수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부총독
실무 지휘자
벨라루스 초토화 관여
리디체와 레자키 학살 명령
유대인 강제이주 관여
오스발트 폴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경제관리본부장
실무 책임자
절멸수용소 실태 관리자
강제노동 지시
유대인 재산 약탈 지시
오딜로 글로보츠닉 친위대 집단지도자
총독부 루블린 SS 지도자
실무 책임자
절멸수용소 설립 지시
강제노동 지시
유대인 재산 약탈 지시
카를 브란트 친위대 집단지도자
퓌러 주치의
실무 책임자
T4 작전 감독관
절멸수용소 인체실험 관여
아돌프 아이히만 친위대 상급돌격대지도자
게슈타포 제5국장
실무 책임자
반제 회의 참석
유대인 열차수송의 최종책임자
절멸수용소 실태 관리자
헝가리 유대인 색출
카를 에버하르트 쇤가르트 친위대 여단지도자 실무 책임자
반제 회의 참석
한스 프랑크 폴란드 총독부 총독 실무 책임자
폴란드 내 유대인 홀로코스트 관여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폴란드 부총독
네덜란드 국가판무관
실무 책임자
폴란드 내 유대인 홀로코스트 관여
네덜란드 내 유대인 홀로코스트 관여
에리히 코흐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
실무 책임자
우크라이나 내 유대인 홀로코스트 관여
아르투어 그라이저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바르테란트 대관구지도자
실무 책임자
폴란드 내 유대인 홀로코스트 관여
헤움노 절멸수용소 설립 지시
강제노동 지시
오딜로 글로보츠닉 친위대 집단지도자
루블린 경찰 사령관
라인하르트 작전 사령관
실무 책임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설립
헤움노 절멸수용소 설립
베우제츠 절멸수용소 설립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실무 책임자
벨라루스 초토화바르샤바 봉기 진압 주도
아인자츠그루펜 지휘
절멸수용소 소장 및 간부, 인체실험에 동참한 의사, 아인자츠그루펜 지휘관, 무장친위대 지휘관, 게슈타포 간부, 독일 국방군 지휘관을 비롯한 현장 책임자들. 자세한 내용은 나치 독일/인물 참고.

3. 나치 독일

3.1. 독일 정부나치당

파일:Goring Authorization Letter.jpg
1941년 7월 31일, 베를린

제국원수
4개년계획부 전권 장관
국방위원회 의장

공안경찰 및 보안대 최고책임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SS중장 귀하

베를린

1939년 1월 24일 최적의 수단을 동원해 유대인을 이주시키고 추방하라는 귀하의 의무에 더해, 독일의 영향력이 미치는 전 유럽에서의 유대인 문제를 완벽히 해결하기 위해 발생하는 조직적이고 기술적이며 실제적인 문제에 관련된 모든 필수적 사항들을 준비할 책임을 귀하에게 부여한다.

정부의 다른 부처가 관련될 경우 그들은 언제든 귀하에게 협조해야 한다.

나는 귀하에게 우리가 바라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Endlösung der Judenfrage)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조직적, 기술적, 실제적 수단들을 모두 포함하는 전체 계획을 가까운 시일 내에 제출하도록 요구하는 바이다.

괴링(서명)
- 제국원수 괴링이 당시 국가보안본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게 보낸 서한. 이 명령을 받은 하이드리히는 베를린 교외 반제의 한 별장에 독일 정부의 각 부서 요인들을 초대하여 유대인 문제 해결법에 대한 회의를 비밀리에 열었다. 이 회의가 그 유명한 반제 회의다.

3.2. 친위대

3.2.1. 무장친위대

3.2.2. 해골부대

3.2.3. 질서경찰

3.2.4. 국가보안본부

3.2.4.1. 보안대
3.2.4.2. 비밀경찰
3.2.4.3. 친위특무대
파일:Men_with_an_unidentified_unit_execute_a_group_of_Soviet_civilians_kneeling_by_the_side_of_a_mass_grave.jpg
▲ 민간인들을 총살하는 특무대원들. 프리드리히 예켈른이 개발한 '정어리 통조림' 방식으로 사람들을 처형하고 있다. 1941년, 일자 불명.
...예를 들면 라트비아의 다우가프필스에서 유대인 집단 학살이 있었어요. 친위대와 보안대가 수행했지요. (중략) 일요일 이른 아침 침대에 누워 있는데, 일제사격 소리가 두 번 나고 그다음 소총을 쏘는 소리가 들렸어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와 말했죠. "왜 총을 쏜 거야?" 참모부 배속 장교가 말했죠. "대령님, 가 보셔야겠습니다.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그 근처까지만 갔지만 그래도 볼 건 다 봤어요. 다우가프필스에서 끌고 온 300명이 구덩이를 하나 파 놓았지요. (중략) 한 사람이 명령을 하면 스무 명의 인간이 마치 과녁처럼 넘어지면서 구덩이로 떨어졌지요. 그다음에 제일 끔찍한 일이 벌어졌죠.
- 라트비아 메스켐프에서 특무대가 벌인 학살에 대한, 독일 육군 하인리히 키텔 중장의 증언. 키텔 중장은 영국군에 포로로 잡혀 트렌트파크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도중 동료 수감자[3]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해당 증언을 구술했다. 위 대화는 1944년 12월 28일 영국 정보부의 포로 감시 부서인 MI19에 의해 도청되어 독일 장성 특별보고서(SRGG)에 기록되었다.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의 《나치의 병사들》 168p에서 발췌.

최초로 집단 총살을 시작했으며, 가장 열성적으로 수행한 이들이자 가스 밴을 최초로 사용한 이들은 바로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이다. 번역하여 특무부대, 특무대 또는 특수작전집단이라 불리며, 나치당 친위대 소속의 보안대와 보안경찰(게슈타포)이 주축이 된 부대였다. 일부 무장친위대질서경찰 전투대대들도 배속되었다. 나치당이 지정한 사상적, 인종적 적들을 제거하는 임무를 맡은, 오직 살인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다. 설립자는 국가보안본부 총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SS대장이었다.

이들은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체코슬로바키아 병합 당시 최초로 결성되어 독일의 병합에 저항하는 이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두 국가의 병합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에는 이미 진행되고 있던 우생학적 장애인 학살인 T-4 프로그램에 투입되어 장애인들을 살해하였다. 1939년 폴란드 침공부터는 본격적으로 재조직되어 폴란드인들을 노예화하는 목표의 사전 작업으로서 폴란드 지식인들을 집중적으로 총살하였는데, 이들이 육군의 진격로를 따라가며 진행한 학살은 훗날 독일군 전체가 수행할 인종 전쟁의 청사진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의 개시와 함께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특무대는 북부, 중부, 남부집단군에 분속되어 본격적인 살해작전을 벌인다.

우선 특무대 A(Einsatzgruppen A)의 경우 프란츠 발터 슈탈레커 SS소장의 지시를 받았으며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가 이끄는 북부집단군의 소속이 되어 발트 3국 지역을 맡았다. 이들은 넷 중 특히 가장 열성적으로 유대인들을 살해한 집단으로, 1942년 초 반제 회의가 열리기 전 약 8개월 만에 발트 3국 유대인들의 씨를 거의 다 말렸다. 아이히만이 반제 회의에서 에스토니아 유대인들이 없다고 보고할 정도였다.

한편 아르투어 네베 SS중장이 이끄는 특무대 B(Einsatzgruppen B)는 페도어 폰 보크 원수의 중부집단군 소속으로서 벨라루스와 중서부 러시아를 휩쓸었다. 이들은 후술할 파르티잔 토벌전에 가장 큰 중역이 된다.

특무대 C(Einsatzgruppen C)는 오토 라슈 SS소장의 지휘를 받으며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의 남부집단군 소속이 되었으며, 북부 우크라이나를 파괴했다. 키이우 일대에서 벌어진 바빈야르 학살이 바로 이들의 소행이다.

마지막으로 오토 올렌도르프 SS중장의 특무대 D(Einsatzgruppen D)는 남부집단군 중에서도 오이겐 리터 폰 쇼베르트 상급대장, 그리고 그 후임자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 상급대장의 11군 소속으로 남부 우크라이나와 남러시아 및 크림 반도 등 흑해 연안 지역의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3.2.5. 기타 기관

3.3. 독일 국방군

3.4. 전범기업

3.4.1. 독일국영철도

3.4.2. 이게파르벤

3.4.3. 헤르만 괴링 국가공업

3.4.4. 크루프

3.4.5. 독일 토양 및 석재 유한공사(DEST)

3.4.6. 기타 기업

4. 독일 외 추축국 및 부역자

독일군 외에도 독일의 동맹국이나 괴뢰국, 점령지역 주민들이나 기업들 또한 학살에서 유의미한 비중을 차지했다. 반유대주의와 민족주의는 독일에서 특히 급진적이기는 했으나, 상술한 것처럼 나치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독일은 점령 지역 주민들을 탄압하였으나, 동시에 그들이 가진 행정력과 반유대주의, 민족적 적개심을 이용했다. 그리고 많은 수의 점령 지역 부역자들 및 독일의 동맹국들은 각자의 이유로 독일의 힘에 편승했다.

독일 동맹국 중 가장 홀로코스트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곳은 루마니아였다. 호리아 시마철위대국민군단국가 말기 시절 권력을 빼앗기기 전 최후의 발악으로 악명높은 부쿠레슈티 포그롬을 주도했으며, 이온 안토네스쿠루마니아군은 독소전쟁 당시 루마니아에서 알렉산드루 C. 쿠자 등에 의해 자생적으로 발생한 반유대주의를 매우 격심하게 표출하며 남부 우크라이나와 트란스니스트리아에 자체 수용소를 세우고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필리프 페탱 원수의 비시 프랑스는 딱히 파시즘 체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권력을 동원해 자발적으로 독일에 협조하여 유대인들을 체포했다.[4] 그나마 프랑스 국적을 가진 유대계 프랑스인들은 공직 추방이나 사회 운동 참여 금지 정도의 상대적으로 가벼운 조치에 그쳤으나, 독일에서 탈출한 인원을 포함한 외국발 유대 난민들은 대부분 귀르스 등 비시 프랑스가 자체 운영하는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렇게 체포된 유대인들은 훗날 독일이 비시 프랑스 영토에 진주한 후 수용소 이동 간 몰살당하거나, 대부분 아우슈비츠 등지로 보내져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친독 매국노 비드쿤 크비슬링이 이끄는 노르웨이 국민정부 또한 독일에 적극 부역하며 노르웨이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당연하지만 노르웨이 강역 내에도 독일의 수용소 및 고문실이 여럿 세워졌다. 크리스티안산4번 기록물 보관실게슈타포에 의해 일종의 블랙 사이트로 개조당했고, 노르웨이 점령 기간 내내 악명을 떨쳤다.
독일의 첫 괴뢰국인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요제프 티소슬로바키아 인민당과 그 사병인 흘린카 근위대도 친위대 특무대와 협력했다. 흘린카 근위대는 자체적인 수용소인 세레지 수용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유고슬라비아 지역의 경우, 독일군은 이탈리아 왕국헝가리 왕국의 지원으로 다시 유고슬라비아에 돌아오게 된 크로아티아 우스타샤와 협력하고 보슈냐크인들로 구성된 무장친위대 부대인 한트샤르를 동원하며 유대인과 세르비아인들을 살해했다. 그 중 우스타샤의 경우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를 비롯한 자체적인 수용소들을 운영하며 인종 청소를 자행했다. 우스타샤유고슬라비아 침공 이후 추축국의 비호를 받아 세운 크로아티아 독립국 정권은 유럽 내에서도, 독일의 동맹/괴뢰국들 중에서도 가장 나치 독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주로 가톨릭교도 크로아티아인들로 구성된 우스타샤 민병대의 만행은 독일조차 경악할 정도로 악랄하기 그지 없었다.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가 바로 나치에 협조한 크로아티아인들의 만행의 대표적 사례이다. 우스타샤는 전후에도 완전하게 청산되지 않았다. 두령 안테 파벨리치를 비롯한 중요 인물들이 대부분 미주 등 해외로 도피했기 때문이다. 파벨리치는 아르헨티나로 먼저 도피한 우스타샤 전범들의 지원을 받아 후안 페론의 측근이 되었고, 이를 이용해 유고 내에 잔류한 우스타샤 전범들을 성공적으로 해외로 도피시켰다. 딘코 사키치 등 해외로 도피한 이들 잔당들은 야트 항공 367편 폭파 사건 등의 크고 작은 테러를 일으키며 지하 테러조직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다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중앙정권에 맞서며 우스타샤를 부활시키고 프라뇨 투지만 당시 크로아티아 대통령과 접선하기도 하며 다시 한 번 세르비아인들에 대해, 그리고 거기에 더해 이번엔 보슈냐크인들에 대해서도 인종 청소를 자행했다.

덴마크의 경우 독일의 간섭을 매우 약하게 받았던데다 자체적인 반유대주의도 약한 국가였다. 덴마크 유대인들은 크리스티안 10세의 비호로 노란 다윗의 별을 달거나 시민권을 잃지도 않았으며, 대부분이 살아남았다. 심지어는 독일에 잡혀간 이들도 덴마크 정부의 요청으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덴마크 정부 또한 피난 온 외국 유대인들까지 보호해 주지는 않았다. 그들은 덴마크 정부와 독일군에 의해 체포되어 독일로 전부 보내졌고, 폴란드에서 살해당했다. 또한 6000명 가량의 덴마크인들과 일부 노르웨이인, 그리고 일부 핀란드인들은 무장친위대 제5기갑사단 "비킹"에 자원하여 복무했으며, 동유럽에서 대량 학살을 벌였다. 당장 1943년의 수확제 작전 당시 루블린에서 여타 독일군 부대들과 함께 4만 2천명의 유대인들을 살해한 이들이 바로 무장친위대 5기갑사단이다.

헝가리 왕국의 경우 호르티 미클로시 섭정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1944년까지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안전한 국가였다. 헝가리는 자체적인 반유대주의가 매우 격심한 국가였음에도 왕국 정부는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1944년 초 독일군이 진주하고 최고지도자 살러시 페렌츠와 그의 화살십자당이 정권을 장악하면서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새로 세워진 헝가리 국민단결정부는 독일에 적극적으로 부역했고, 그들은 자국 국민인 헝가리 유대인들을 독일에 넘겨주어 아우슈비츠에서 살해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을 보이지 않았다. 국민단결정부 기간은 1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 짧은 기간동안 화살십자당은 15,000여명의 헝가리 유대인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이탈리아 왕국의 경우에는 반유대주의가 상당히 약한 국가였고, 파시스트 정부 또한 유대인들을 배제하지 않았다. 점령 지역의 유대인들마저도 이탈리아 군대에 의해 보호받았다. 1940년 무솔리니가 페라몬티 디 타르시아를 비롯한 15개의 수용소를 세워 독일에서 빠져나온 유대인들을 잡아 가두는 일이 있긴 했지만, 당시 이런 이탈리아 왕국의 수용소는 절멸수용소도, 노동수용소도 아닌 난민 캠프에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총 든 경비만 있을 뿐 어느 정도 자율성을 보장받았다.[5][6] 그러나 1943년 이탈리아의 항복 이후 독일이 베니토 무솔리니를 내세워 북부에 괴뢰국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을 세우면서부터 이탈리아의 홀로코스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탈리아 괴뢰군과 치안 유지 집단으로 전락한 검은 셔츠단은 독일군에 협조하여 받아 빨치산 토벌전을 벌이거나 유대인 색출에 가담했다. 피에트로 카루소를 비롯한 이탈리아 괴뢰 경찰들도 적극 참여하였다. 살로 공화국이 세워지며 북이탈리아 지역에도 포솔리, 보르고 산 달마초 등 독일군 및 친위대가 직접 운영하는 수용소가 여럿 세워졌고, 수용자들은 아우슈비츠로 보내지는 등의 방법으로 목숨을 잃었다. 트리에스테에서 슈츠슈타펠이 운영했던 리시에라 디 산 사바 수용소는 일개 5층짜리 정미소 건물에 불과했지만 이 단일 건물에서 3천~5천명의 수용자가 목숨을 잃었다.

불가리아 왕국의 경우에도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추축국 가입 초기부터 총리 보그단 필로프나 외무장관 페터르 가브로프스키 등 친나치, 반유대 인사들의 입김 때문에 1943년까지는 유대인들을 살해하고 체포하여 독일의 절멸수용소로 보내기도 했다. 알렉산더르 찬코프 같은 악명 높은 친독 히틀러빠 인사들까지도 정교회와 협력하여 유대인 학살에 반대하는 서명에 동참하기도 할 정도였다. 디미터르 페셰프가 주도하고 43명이 참여한 이 서명은 성공적으로 불가리아 정부에게 전달되었고, 이후에는 반유대주의 정책이 폐지되었다. 페셰프는 이 공로로 사후 열방의 의인으로 등록되었으나, 살아생전에는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반공주의자에 반유대주의자(?)라는 이유로 박해받아야 했다.

독일에 맞선 '대조국전쟁' 프레임이 강력하게 지배하는 동유럽 또한 부역자들이 아주 많았다. 이는 주로 러시아와 소련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거기다 절멸전쟁이라는 동부전선의 성격 때문에 점령 지역에서 이용할 행정력이 사실상 박멸된 관계로 양상이 서유럽과는 많이 달랐고, 보다 더 과격했다.

우선 과거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라트비아인, 리투아니아인폴란드인들은 제국 멸망 이후 독립하여, 2차 대전 바로 직전까지도 독립국을 가지고 있었으나 나치와 불가침 조약을 맺은 소련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다시 나라를 잃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자신들을 탄압하고 다시 집어삼킨 러시아와 소련의 지배에 매우 불만이 많았다. 그 중 폴란드는 독일의 폭압적인 지배 또한 여러 차례 받았기에 독일에 대한 부역 행위가 그나마 적었으나, 발트 3국은 러시아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바라며 적극적으로 나치에 협력했다. 발트 3국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는 리투아니아인들과 라트비아인들을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다.

동슬라브에 속하는 벨라루스인들과 러시아인들의 경우 소련에 대부분 충성했다. 그러나 사상적으로 소련 정부와 대립하거나 집단농장 등 소련 체제의 행태에 불만이 많던 사람들은 벨라루스 자치경찰 등에 가담하여 독일군의 진격에 편승하기도 했으며, 사상에는 딱히 관심이 없지만 소련군 파르티잔들의 활동으로 인해 생활이 어려워진 주민들이 독일군에 협력해 파르티잔들을 쓸어버리려고 하기도 했다. 한편 우크라이나인들의 학살 가담은 좀 더 복합적인 이유였다. 그들 역시 러시아와 공통점이 많았기에 소련과 그 맹주 러시아에 충성한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인은 동시에 독립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기도 했으며, 실제로 러시아 제국의 붕괴 이후 잠깐이나마 독립을 이루기도 했다. 30년대에는 우크라이나 대기근까지 겪고 집단농장으로 농촌 공동체가 강제로 해체되자, 민족주의적 우크라이나인들은 소련 체제에 대한 반감이 불타올라 독일에 협조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이 이러한 이들 중 대표격으로 꼽힌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은 우크라이나 민족 국가 건설을 위해 동갈리치아 지역의 폴란드인과 유대인들을 대규모로 학살하였다.

그리고 이 동유럽 주민들 대부분은 공통적으로 주변 유대인들에 대해서 뿌리깊은 반감을 가졌다. 특히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던 지역에 살았던 주민들은 농노였던 자신들과 달리, 유대인들은 마름이나 상인 또는 귀족으로서 그들을 착취했다고 생각했다. 상술한 기독교적 이유도 있었다. 때문에 독일 부역자뿐만 아니라 독일에 반감을 가진 주민들 중에서도 유대인들을 박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 유대인들 중에서도 게토 평의회와 유대인 경찰은 같은 유대인들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폴란드인 중에는 유대인들을 도와 숨겨준 사례들도 있었지만, 유대인을 학살하는데 동참한 경우도 있었다. 유대계 폴란드 역사학자인 시몬 다트네르는 당시 유대인 20만 명이 폴란드인에 살해되었다고 보았다.#

동부전선의 현지 부역자들은 주로 질서경찰 보조경찰부대(Hilfspolizei)를 구성하거나, 역시 무장친위대 외인부대에 소속되었다. 무장친위대의 경우 러시아인 및 벨라루스인 부역자들이 주가 된 카민스키 여단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들 대부분은 상술한 국방군 보안사단들 또는 친위특무대, 질서경찰과 함께 파르티잔 토벌전에 투입된다. 또는 일반친위대 소속의 수용소 경비대(SS-Totenkopfverbände) 소속의 보조병들이 되어, 절멸수용소 등지에서 경계 업무를 맡거나 처형 임무, 시신 처리 업무같이 '더러운' 일들을 도맡아 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분노에 찬 마을 사람들이 농기구나 냉병기를 들고 나와 다른 민족이 지배적인 옆 마을을 파괴하는 겅우도 비일비재했다.

한편 프랑스 국철, 벨기에 국철, 체코슬로바키아 국철과 같은 점령지 국가들의 철도들의 경우 독일군에 징발당하거나 이용되어 유대인 이송 작업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우선 자국에 위치한 게토에서 유대인들을 수송해 독일 또는 그 인근에 위치한 집결수용소들로 옮겼다. 그러면 거기서부터는 독일국영철도가 이들을 수송하여 각지의 수용소들로 이송했다. 또는 이들 점령지 철도업체들의 열차가 직접 그대로 아우슈비츠까지 달려가기도 했다. 독일국영철도의 홀로코스트 열차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또한 화물열차에 사람들을 과적하여 수송하였다. 이 때문에 이들 현지 철도업체들 또한 전후에 배상금을 내야만 했다.

이 현지인들의 학살 참여는 홀로코스트의 위계를 더 복잡하게 만들어버리는 일등공신이다. 다른 민족들 또한 나치의 피해자였지만, 동시에 나치와 협력한 가해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특히 동유럽남동유럽의 경우 다수의 민족들이 같은 공간 속에서 함께 섞여 살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중층적으로 존재하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역사적이고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보다 직접적으로 얽혀 있었기에 때로는 독일군보다도 더 극심한 인종적 증오를 서로에게 표출했다. 이들 또한 전후에 법적으로 처벌받았으나, 다수의 참여자들은 죗값을 치르지 않았다. 가장 큰 원죄를 짊어진 독일에 간편하게 책임을 떠넘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까지도 이 앙금은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다. 가령 지난 2016년 폴란드의 집권 여당인 법과 정의당은 홀로코스트법을 제정해 '독일에 협력한 폴란드'를 묘사하면 벌금형이나 징역형에 처하면서 폴란드 나치 부역자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한편 발트 3국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진영 중 극단적인 일부는 여전히 제20 무장친위대 척탄병사단이나 페르콩크루스츠, 스테판 반데라 같은 독일 부역자들을 찬양한다.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막심 마르친케비치드미트리 웃킨, 루시치 그룹 같은 러시아의 극우와 네오 나치들은 이들 친독 부역자들의 행동을 긍정하며 이민족을 차별한다.[7] 현대 러시아를 지배하는 블라디미르 푸틴실로비키 권력자들은 과거 나치의 만행에 대해서는 꾸준히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한편으론 바그너 그룹이나 루시치 그룹 등의 형태로 권력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이들의 호전성과 배타성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1] 아돌프 히틀러는 행정에 관심이 없었고, 또 책임 회피를 위하여 구두로 명령을 내리거나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수정된 문서화된 지령을 하달했다. 이 것을 행정적으로 구체화시킨 자들이 바로 밑에 있는 고위 고관들이었다.[2] 그 역시도 행정적 지휘에 가담했는데 유대인들에게 다윗의 별을 패용하도록 지시한 자가 바로 괴벨스였다.[3] 펠베르트라는 인물로, 트렌트파크 수용소에 수감된 포로 중 영국의 정보부와 협력하며 정보를 빼내던 인물이다.[4] 프랑스에는 홀로코스트 시행을 위한 인프라(?)가 제3공화국 시절부터 얼추 갖춰져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패주한 공화파 및 국제여단 패잔병들이 프랑스로 도망쳐와 외국인 혁명가들이 급증하자 프랑스는 이 골치아픈 세계혁명 투사들을 대거 검거하여 수용소에 집어넣었는데, 나치와 협력한 비시 프랑스에서는 이들 시설과 체제를 유지하며 유대인 검거 및 강제수용에도 써먹었고 심지어 원래 수감되어있던 유대인 수감자들을 조금씩 아우슈비츠 등 나치 독일 절멸수용소로 보내기도 했다. 그러자 이들 망명객들은 레지스탕스자유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비시 정부와 나치에 맞서기 시작했고, 그 덕에 종전 이후에도 프랑스 사회에서 일정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프랑스를 기반으로 反프랑코 전선의 대오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전후 프랑스에서도 이들을 경계한 자유 프랑스가 스페인 투사들을 다시 잠깐 수용소에 넣었다가 풀어준 소동도 있었지만 유럽 상황이 충분히 안정화된 후엔 이들을 정식으로 파시스트에 함께 맞선 동지로 대접하며 오늘날에도 관련 행사에서 스페인 공화파의 삼색기가 게양되는 등 영웅으로 대우받고 있다.[5] 환경이 너무 자유로워서 지역 의인들에 의해 독일 절멸수용소로 갈 인원들을 구원하기 위해 대신 이들을 보낼 수용소로 선택될 정도였던 캄파냐 수용소같은 곳도 있었다. 캄파냐에 수감된 인원들은 동네 주민들에게 이웃사촌 취급을 받으며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고, 음식, 옷, 금전적 형태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마을을 벗어나지 않는 외출, 면회도 자유였고 유대인 의사들 덕분에 의료 서비스도 받을 수 있었으며 종교 및 예술 활동도 자유였다. 자체 도서관, 축구팀도 있었다. 중앙에서 파견된 국가 파시스트당 서기가 유대인들이 너무 편하게 살고 있다고 경찰에게 항의할 정도였고, 당시 캄파냐 시장, 주교와 경찰서장은 수천명의 유대인들을 독일의 마수에서 구하기 위해 이들을 캄파냐에 대신 수용시켜놓고 모른 척 발뺌하기도 했다.[6] 물론 이는 이탈리아 본토에 한정된 사항이었다. 살로 공화국 이전 세워진 해외 수용소들은 본토 수용소에 비해 자율성은 커녕 독일 수용소에 버금가는 가혹한 환경을 자랑했다. 이탈리아령 리비아의 유대계 리비아인들을 수용하기 위한 부크 부크 노동수용소의 수용자들은 불결한 환경에서 강제 노동을 강요받았고, 남슬라브인들과 유고 지역 거주 유대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이탈리아령 달마티아 지역에 세워진 몰라트 수용소라브 수용소에서는 가혹한 환경으로 4천여명의 사망자가 나오기도 하는 등 이탈리아의 학살도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7] 러시아 지역의 네오나치들은 히틀러가 슬라브인들을 '열등 민족'으로 취급한 것을 자신들의 진가를 몰라본 '단순 실수'라고 주장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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