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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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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 Persophillia

1. 개요2. 역사
2.1. 고대 그리스2.2. 아랍 이슬람 왕조2.3. 근세 유럽
3. 현황4. 비판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일반적으로 이슬람 이전 고대 페르시아에 대한 애호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사산 왕조 이후 페르시아는 이슬람화, 인도화가 되었기 때문에 아랍, 인도와 구분이 힘들게 되었기에 그 이후로 튀르크리인도마니아와 혼동되었다.

다만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어느 시대의 페르시아를 애호했는지가 달랐다.

2. 역사

2.1. 고대 그리스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문화와 제도, 학문이 도시 국가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리스에 비해 발전했기에 당시 페르시아를 선진국으로 여겼다.

고대 그리스의 저명한 철학자들도 아케메네스 왕조의 영토였던 바빌론에 유학을 간 적이 있었고 키루스 대제가 반포한 법령이 진보적이라고 옹호할 정도였다. 게다가 당시 페르시아의 타종교, 타민족에 대한 관용 정책도 당시 고대인들에게는 혁신적으로 보였다.[1] 이는 고대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려고 했던 알렉산더 대왕조차 바빌론에 있었던 페르시아 문화에 동화될 정도였다.[2]

2.2. 아랍 이슬람 왕조

우마이야 왕조 당시에는 칼리프들의 헬레니즘 문화 애호가 두드러졌었다면,[3] 아바스 왕조 당시 아랍인들은 헬레네즘 문화 애호 외에도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된다.

아랍인들의 정복으로 그동안 이란인들과 싸워 온 동로마 제국 영토가 크게 축소되고, 중앙아시아의 유목 제국이 동쪽으로 후퇴하면서 페르시아인들은 본격적으로 학문과 생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이란 문화는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이른바 이슬람 황금기는 어떻게 보면 페르시아의 황금기이기도 했다.

애초에 압바스 왕조의 건국 세력부터가 페르시아인들이 많았고, 한동안 아랍인들의 지배 밑에서 2등 시민으로 차별받던 페르시아인들은 압바스 왕조가 들어서고 나서야 이슬람 제국의 학문과 산업을 떠받드는 중추가 되었다.[4] 다른 한편으로 중앙아시아가 이슬람화 되는 과정에서 중앙아시아 각지에 호라즘인, 박트리아인, 사카족, 소그드인 등등은 현지어 대신에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되었고, 그 결과 아제르바이잔에서부터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에 이르는 지역이 "대 페르시아 문화권"으로 묶여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오늘날 이란인들이 반아랍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면서도 이슬람을 부정하지는 않는 이유는 압바스 왕조 시대, 그중에서도 서기 8~12세기가 바로 페르시아 문화의 최전성기였기 때문이다.

우마이야 왕조 시기부터 이란이 인도 문화권에 속하는 파키스탄 영토까지 하나의 영토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인도 문화가 이란으로 유입되었다. 이 시기부터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 문화와 달리 근대 페르시아 문화의 시작이었고 와하비즘 성행 이전인 19세기까지 이슬람 문화의 특징이 되었다.[5]

2.3. 근세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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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초에 유럽인들은 유럽과 가장 가까운 오스만 제국을 문화를 애호했는데 당시 오스만 제국은 페르시아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층이 투르크족이라는 이유로[6] 이를 튀르크리라고 칭했다.[7]

정작 튀르크인들이 지리적으로 아나톨리아를 점령한 역사가 비교적 짧다 보니 유럽인들이 "튀르크리"라는 명목으로 즐기는 요소들의 상당수는 엄밀히 따지고 보면 페르시아 문화 또는 아랍권, 이마지헨(베르베르), 유대인 문화에서 비롯된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는 것이다. 일단 튀르크리 자체가 상술했듯이 사실상 머리를 비우고 즐기는 문화다 보니 대다수 유럽인들에게는 당장 와닿는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튀르크리 자체가 근동 문화를 제대로 공부하고 이해하는 게 아닌, 겉모습만 보고 향유하는 문화였다 보니 페르소필리아라는 명칭을 쓰자는 게 현대까지도 거의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당장 튀르크리를 향유하는 대중들의 상당수가 막상 근동의 문화적 배경을 각 잡고 공부할 생각은 그다지 없는 사람들이다 보니 그냥 갑분싸처럼 여겨졌을 가능성이 크다.[8]

3. 현황

1979년에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이슬람 혐오자 사이에서 팔레비 왕조나 이슬람화 이전 페르시아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들은 현 이란 정부가 아랍도 아닌 주제에 너무 아랍적이라고 하면서 그들이 페르시아의 전통문화를 말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차도르가 고대 페르시아때부터 입은 복장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중앙아시아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의 복식, 아제르바이잔같은 캅카스 여성의 복식을 페르시아 여성 복식이라고 우기고 있다.[9]

4. 비판

파일:Capture+_2018-04-09-20-54-03-1-1.png
무함마드와 그의 동료들이 묘사된 세밀화, 7세기 당시가 아닌 오스만 제국 시기에 페르시아인이 그렸다.[10]

일부 이슬람 혐오자들은 페르소필리아 성향을 지니면서 지금의 이란아랍의 정신적 식민지나 다를 바가 없다고 비하하고 이란=아랍 드립[11]치고 있는데 와하비즘 성행 이전인 18세기 말까지 전세계 이슬람 문화가 근대 페르시아 문화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현상이다. 그들은 대표적으로 터번, 차도르, 나스탈리크, 양탄자, 아라베스크, 아라비안 나이트[12]가 이슬람, 아랍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원래 페르시아 문화로 이슬람이 발생한 히자즈 지역과 관련이 없다.

사산 왕조 시기까지의 페르시아만을 진정한 페르시아로 간주하는 것은 이집토마니아가 고대 이집트만이 진정한 이집트라고 간주하는 것과 같은 심리인데 이슬람 혐오와도 연관되어있다. 그들은 사산 왕조 이후 페르시아인들도 이슬람을 창시한 아랍인들보다도 더 세련된 문화를 창조해왔고 이러한 창조물이 이슬람에 반영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못 깨닫는 것이다. 근대 페르시아 문화를 대표하던 화약제국들이 몰락하고 영국, 미국의 지지받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와하비즘을 선교하고 이집트에서 이슬람주의가 발흥하자 19세기 이전 이슬람 문화는 이단적으로 간주되어 말소당하고 말았다. 게다가 1979년에 이란에서 시아파 이슬람주의자들이[13] 집권하여 이슬람의 근대 페르시아적 요소가 말살되었기 때문에 페르시아 문화가 사산 왕조 시대까지만이라는 오해가 세계화가 된 것이다.

그들은 무슬림들이 조로아스터교를 말살하는 제노사이드를 자행했다는 낭설이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조로아스터교의 쇠퇴는 우마이야 왕조 시기가 아니라 아바스 왕조 중엽인 10세기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당시엔 튀르크 군벌들이 군웅할거를 하고 있었고 당시 무슬림 지배자들도 아바스 왕조 초기와 달리 다원주의보다는 자신의 기득권만을 챙기는 언행을 보여 이란 고원이 혼란에 빠진 시대였다. 게다가 이란 고원은 인도 아대륙과 달리 건조하기 때문에 농업생산성이 낮아 지즈야를 지불할 여력이 없어 조로아스터교를 버리고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경우도 아바스 왕조의 안정기가 아닌 이란 고원이 군웅할거를 겪은 시대에 급격히 늘어났다.

하지만 현 이란 정부의 이슬람 근본주의적 정책은[14] 페르시아 전통문화에 대한 외면과 완전히 무관하진 않다. 이란이 이란적이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이란 밖의 외국인들이 판단할 문제이기 때문에 현 이란 정부가 아랍적, 비페르시아적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무시못할 의견이다. 사실 페르시아가 이슬람에 미친 영향이 예전보다 더 잘 알려진 현대에는 사산조 뿐만 아니라 팔레비 왕조까지도 페르시아로 보는 인식이 다수인데, 현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원리주의에 입각한 정부의 문화탄압정책 때문에 예전처럼 이슬람 문화를 선도하기는 커녕, 과거의 페르시아 문화를 제대로 계승하지도 못하는 실정이다. 현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아랍과 동일시하는 태도도 문제이지만, 그렇게 된 배경에는 이란 정부의 잘못된 정책이 있음을 간과해선 안된다.

5. 관련 문서


[1] 당시 고대인들은 무력으로만 지배하면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지만 아케메네스 왕조는 신아시리아 제국의 통치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일종의 정치적 실험을 했는데 그것이 성공한 것이다.[2] 바빌로니아는 메소포타미아에 있는데 어떻게 페르시아 문화일 수가 있냐는 의문이 있지만 이란 고원은 고대부터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란 고원과 메소포타미아의 문화가 유사할 수 밖에 없었다. 차도르도 메소포타미아에서 생겼지만 이란 고원에서 유행하게 된 것이다.[3] 다마스쿠스의 칼리프들이 머무르던 궁정이든 헬레니즘 스타일의 벽화로 가득 차 있었을 정도였다. 애초 우마이야 왕조의 창시자 무아위야 1세부터가 세속주의 성향이 꽤 있는 인물이기도 했고[4] 이전 우마이야 왕조의 학문과 산업을 떠받드는 중추는 시리아와 이라크 일대의 아람어 사용자들이었다. 비교하자면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는 오늘날 시리아 수도에 해당하는 다마스쿠스이고 압바스 왕조는 처음에 호라산 일대에서 시작하여 후일 바그다드를 수도로 삼았다.[5] 아랍 무슬림들이 묘사된 세밀화에 등장하는 터번은 원래 원류가 인도였고 잘못 반영된 것이다. 쿠피야로 묘사되는 것이 맞다.[6]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투르크인이 세운 제국인 것은 맞지만 이슬람을 믿고 재능이 입증된다면 민족이니 혈통이니 하는 것은 크게 고려하지 않고 지배층으로 받아들였으며, 제국의 최고 통치자인 황제도 순혈 투르크인은커녕 여러 민족의 피를 고루 받은 혼혈인이었기 때문이다.[7] 당연히 유럽인들이 마냥 바보인 건 아니기에 당시에도 제대로 파고드는 사람들 중에는 이 문제를 확실하게 인식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페르소필리아라는 말이 탄생한다. 근동 문화를 즐기는 것까진 좋지만 좀 더 실제로 돌아가는 현상에 맞는 명칭을 쓰자는 거였다.[8] 일례로 2019년 기준 지금도 Persophilia를 구글에 검색해보면 결과가 18,200 건 정도 밖에 나오지 않는다. 참고로 Turquerie는 77,800건이 나온다.[9] 차도르는 이슬람화 이후로 치장을 금지하는 율법에 따라 검은색으로만 규제되었을 뿐 원래 차도르는 장식이 있고 화려하다. 이란 영내 조로아스터교 여성들은 현재도 차도르를 화려하게 입고 있다.[10] 인터넷에 검색해도 나오는 초기 이슬람 세밀화들을 보고 선지자 무함마드는 7세기에 터번을 착용했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실증적으로 아랍 베두인들이 착용하는 쿠피야싸웁으로 묘사되어야한다.[11] 이란인들이 특히 반발하는 것이 자신들을 아랍인과 동일시받는 것이다.[12] 아랍에서 유래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라비아라는 단어가 붙는 이유는 중세 유럽부터 현재까지 아랍으로부터 이슬람 문화를 배웠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흔히 아는 아라비아 숫자도 아랍에서 발명된 것이 아니다.[13] 이슬람주의자들은 수니파든 시아파든 간에 미국에서 유래된 반지성주의를 수용했기 때문에 자기 조상의 과거 역사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이슬람주의가 중동에서 발생한 순수한 이념이라고 알려져있지만 해당 문서를 보듯이 서양에서 발생한 옥시덴탈리즘, 기독교 우파, 반지성주의의 영향으로 생겨난 것이다.[14] 다만, 이슬람 혐오적 페르소필리아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혹독한 탄압을 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소수종교로 인정하고 보호하는 정책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