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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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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2.1. 한국사
2.1.1. 상고시대 및 삼국시대2.1.2. 후삼국고려2.1.3. 조선2.1.4. 근현대사
2.1.4.1. 대한민국2.1.4.2. 북한
2.2. 동아시아/동남아시아2.3. 서아시아(중동 중 아시아 지역)
2.3.1. 튀르키예
2.4. 아프리카
2.4.1. 적도 기니
2.5. 스페인-중남미2.6. 유럽
2.6.1. 그리스2.6.2. 독일2.6.3. 프랑스
2.7. 러시아와 구소련2.8. 미국

1. 개요

쿠데타의 사례들을 정리한 문서.

2. 상세

2.1. 한국사

2.1.1. 상고시대 및 삼국시대

  • 고조선
  • 고구려
  • 백제
    • 고이왕이 종손자인 사반왕을 폐위하고 즉위함
    • 계왕의 석연찮은 재위 기간과 죽음: 단 2년 만에 승하했다. 여기에서 부여구 근초고왕을 비롯한 초고왕/비류왕 계열 왕족들이 고이왕계 왕족이었던 계왕을 시해하고 근초고왕을 왕위에 추대한 것이 아니냐는 가설이 있는데, 확실치는 않다. 심지어 계왕은 백제의 계보를 늘리기 위하여 만들어진 가상인물이라는 가설도 존재한다. 여하간 이로써 고이왕 - 책계왕 - 분서왕 - 계왕으로 이어지는 고이왕계는 완전히 몰락해 버린다.
    • 숙부 진사왕이 사냥 나간 것을 틈타 아신왕의 지원을 받아 왕위를 찬탈: 삼국사기에서는 그냥 진사왕이 사냥 중 행궁에서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일본서기에는 이 상황이 나름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런 정황을 보았을 때, 아신왕의 쿠데타에 가 적극 지원한 듯하다.
    • 아신왕 사후 전지왕일본에서 귀국하기 전 섭정으로서 국사를 대리하던 부여훈해를 암살하고 왕을 칭한 부여설례의 사례
    •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 의자왕의 어머니인 사택왕후가 죽은 후인 642년[1] 의자왕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는 당시 무왕으로부터의 태자 책봉도 늦었고, 의자왕이 왕으로 즉위한 후에도 사택왕후의 권력에 눌려있던 것을 타개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의자왕은 왜에 머물러 있던 동생의 입국을 금지시키고, 조카,4명의 누이, 40명의 대신들을 유배한다. 이로 인해 왕권에 방해되는 대성팔족이 약화되고 의자왕의 왕권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좌평 임자가 김유신과 내통을 시도하고, 좌평 성충과 흥수가 투옥되는 등 정치세력이 급변하고 국가가 혼란해졌다. 이로 인해 나중에 나당연합군이 쳐들어 올 때도 구귀족들은 의자왕에게 비협조적인 자세를 보였고, 백제의 멸망을 앞당긴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실제로 백제 멸망 후에도 부흥운동 세력이 많이 남아있던 것을 보면, 백제는 멸망 직전에도 전투에 투입할 병력이 더 존재했다. 그런데 친위쿠데타로 구귀족의 반감을 사면서, 이를 날려버린 것이다.
    • 예식진의 의자왕 배신: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하자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신을 해서 결전을 준비하였으나 웅진성을 기반으로 두고 있던 예식진과 동일 인물로 추정되는 예식이 쿠데타를 일으켜 의자왕을 체포해서 나당연합군에게 바쳤다. 예식진은 주군을 팔아먹은 대가로 당나라에서 좌위위대장군의 벼슬 자리까지 얻었다. 그의 손자 예인수는 묘지명에다 대놓고 자신의 조부인 예식진이 의자왕을 당 고종에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신을 신임한 주군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국가까지 멸망당하게 만들었다.
  • 신라

2.1.2. 후삼국고려

2.1.3. 조선

조선 초기에는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이 쿠데타 주동자였던 세종이 있었다. 정작 본인은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다.[2]
  • 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
  • 2차 왕자의 난
  • 조사의의 난: 무인정사로 실권을 빼앗기고 상왕으로 물러난 태조가 권력을 되찾기 위해 벌인 역쿠데타.
  • 계유정난: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친위세력을 제거한 쿠데타로 이를 통해 훗날 수양대군은 세조로 즉위한다.
  • 이시애의 난
  • 중종반정
  • 기묘사화: 중종친위 쿠데타다.
  • 정여립의 난
  • 인조반정
  • 이괄의 난
  • 임오군란: 시작은 군졸들의 봉기였지만, 군란 세력이 흥선대원군을 포섭하여 대원군도 이에 응했기 때문에 후반에는 쿠데타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리고 임오군란의 경우에는 부패한 민씨 일족들 특히 선혜청 당상으로 있었던 민겸호가 군졸들 봉급이던 쌀에다 모래와 겨를 섞어주는 군납비리를 저질렀기 때문에 군졸들이 분노해서 일어난 것이다. 다른 쿠데타들은 정권 탈취를 목적으로 쿠데타를 계획적으로 실행한 반면, 임오군란 같은 경우는 우발적인 행위에서 시작한 것이다. 사실 조선 조정이 봉급을 제대로 주고 군란의 원흉 민겸호를 제대로 처벌해서 군인들을 잘 달래기만 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쿠데타였다. 하지만 조선 조정이 민겸호를 조사관으로 임명하고 조사관이 된 민겸호가 군졸들을 탄압하는 바람에 쿠데타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 갑신정변
  • 을미사변: 일본이 주도하고 흥선대원군과 친일 급진개화파[3], 조선군 훈련대가 참여한 쿠데타다.
  • 춘생문 사건
  • 아관파천: 고종이 왕권 회복을 위해 친일 개화파 내각을 붕괴시킨 역쿠데타적인 요소가 큰 사건이다.

2.1.4. 근현대사

2.1.4.1. 대한민국
현대 한국사에서는 박정희, 김종필, 전두환, 노태우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인물들인데, 그 중 이승만의 경우에는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갈아 엎는 것이 아닌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인물. 자세한 건 대한민국 제1공화국 관련 문서(발췌 개헌, 3.15 부정선거, 4.19 혁명) 등을 참고.
  • 1952년 발췌 개헌(부산 정치파동): 1952년 1월 18일 실시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에 대한 표결은 찬성 14, 반대 143, 기권 1표로 부결되었고, 이승만은 국회 내에서 자신의 지지세력이 미약함을 깨닫게 되었다. 야당 국회의원들은 정부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에 맞서 내각제 개헌안을 제출하였고, 反이승만 성향 의원들이 다수였던 국회 의석 구조로 인해 내각 책임제 개헌안이 통과될 확률이 높았다. 결국 이승만은 정치 깡패들을 동원하여 국회 해산에 대한 여론을 부추기고, 이후 1952년 5월 26일에 개헌에 반대하던 야당 국회의원 50여 명이 탄 통근버스를 헌병대를 동원하여 강제 연행하는 최악의 만행을 저질렀으며, 10명의 국회의원들을 국제 공산당에 관련이 있다는 혐의로 구속하였다. 이에 국회에서 구속 의원 석방과 계엄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이승만 정부는 이를 묵살하였다는 점에서 정권을 위한 친위 쿠데타다.
  • 1954년 에버레디 계획: 한국 군대가 아닌, 미국 정부가 꾸민 쿠데타 계획. 반공포로 석방 사건 등으로 인해서 이승만이 미국 정부와 사이가 나빠지자, 미국 정부에서 한국 군대를 사주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을 몰아내고 한국군 장성이 한국 정부의 수반이 되는 일종의 군사 정권 수립 계획을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에버레디('언제나 준비'라는 뜻) 계획이었다. 놀랍게도 이 에버레디 계획으로 한국 정부의 수반이 되는 한국군 장성은 백선엽이었다. 이 사실에 대해 백선엽 본인이 미리 알고 있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다만, 이 에버레디 계획은 이승만을 몰아낼 경우, 야기되는 한국의 정치적 혼란을 우려하여 끝내 실행되지는 않았다.[4][5]
  • 1961년 5.16 군사정변
  • 1965년 원충연 반혁명 사건: 1965년 5월 실행 직전에 들켜서 미수에 그친 군 일각의 쿠데타 계획이다.
  • 1972년 10월 유신: 정권 연장을 위한 친위 쿠데타.
  • 1973년 윤필용 사건: 쿠데타 모의 혐의로 시작했지만 사실은 굳이 따지자면 불경죄에 가까운 사건이었고, 보안사의 고문 끝에도 쿠데타 혐의는 찾지 못해 뇌물, 횡령 등의 혐의를 뒤집어 씌워서 당사자들을 몰락시킨 정치적 숙청 사건이다.
  • 1979년 10.26 사건
  • 1979~80년 12.12 군사반란5.17 내란: 시작부터 완료까지 6개월이나 걸린, 세계 각국의 쿠데타 중 가장 긴 쿠데타란 타이틀을 얻었다. 이 쿠데타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란 희대의 말이 나오기도 했다.
  • 1989~1990년 청명계획: 1989년 3월 당시 보안사령부가 친위쿠데타를 성공시키는데 방해가 될 만한 반정부인사 목록을 만들고 이들을 개별적으로 사찰한 사건이다.
2.1.4.2. 북한

2.2. 동아시아/동남아시아

2.2.1. 중국

2.2.1.1. 춘추전국시대~전한
2.2.1.2. 후한 ~ 삼국시대
2.2.1.3.
2.2.1.4. 오대십국시대
2.2.1.5.
2.2.1.6. 중화민국
2.2.1.7. 중화인민공화국

2.2.2. 일본

근대 일본에서 군국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이 쿠데타였다. 물론 그 이전의 봉건 사회에서도 쿠데타는 종종 있었으나, 현대적인 쿠데타는 아래의 사건들로 더 유명하다. 다만, 일본의 쿠데타는 천황제를 비롯한 지배 체제의 완전한 전복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국가 정책이나 이념의 수정을 목표로 하는 제한적인 형태의 것들이라는 의미가 있다.

2.2.3. 베트남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에선 1963년 ~ 1967년 사이에 5차례의 쿠데타가 있었고, 1960년에도 쿠데타가 있었으나 진압되었다. 혼란기의 4년 동안은 군사혁명위원회, 임시지도위원회, 국가지도위원회라는 군정 기구가 설치되어 군정 기구 의장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아래는 확인된 쿠데타 및 미수 기록.베트남 전쟁 시기에 계속 쿠데타가 일어났기 때문에 베트남 공화국은 그만큼 정국이 혼란스러웠다.

2.2.4. 태국

태국의 쿠데타는 쿠데타 지휘관들이 국왕 앞에서 무릎 꿇고 울며 "죄송합니다 폐하!" 하면 국왕이 등을 다독이며 "내가 니 맘 다 알아 인마."라고 한다. 쿠데타가 벌어져도 그 대상에서 국왕은 완전히 배제되고 쿠데타군이든 정부군이든 국왕에게 절대 충성하는 특이한 경우이다. 고려 무신정권의 태국 버전[8] 태국의 국왕은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존경을 받고 있기 때문에[9] 국왕을 무시했다가는 민중 혁명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물론 정부 수반들이나 쿠데타를 일으키는 장군들도 결국은 태국 국민인만큼, 무의식 중에 배였을 충성심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태국의 쿠데타는 국왕의 조종으로 이뤄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태국도 헌법상으로 입헌군주제지만, 워낙 국왕의 권위가 세기 때문에 마음에 안 드는 민간정부는 국왕이 저런 식으로 해산한다고 한다. 탁신 총리의 정부를 뒤집은 쿠데타가 이런 경우인데, 태국 국왕은 권력을 늘리는 탁신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탁신의 부패혐의를 이유로 군부에 쿠데타를 사주했다고 한다. 반대로 1991년 수친다 장군이 일으킨 쿠데타의 경우에는 국왕이 처음에는 묵인하여 수친다는 총리로 취임하였으나 1992년 청백리로 이름높은 잠롱 방콕 시장이 주도하는 시민 봉기가 일어나 유혈사태가 벌어지자 국왕이 수친다와 잠롱을 어전으로 불러 수친다를 힐책하였고, 수친다는 총리직을 사임하고 해외 망명을 떠났다. 2014년에도 탁신 총리의 여동생인 잉랏 총리에 대항해서 쁘라윳 짠오차 육참총장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탁신 때와 마찬가지로 국왕의 승인을 받아 짠오차 장군이 총리직을 꿰찼다.

하지만 위 상황은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재위시기에나 가능했던 일이다. 푸미폰 국왕의 신성화는 태국의 전통적 성격 + 태국 근대 역사의 상징성[10] + 상좌부 불교 + 미국의 지원 + 푸미폰 국왕의 정치력이라는 복합적 형태로 완성된 것이다. 현 왕 마하 와치랄롱꼰에게는 그만한 권위가 없다. 워낙 사고를 많이 쳐서 오래전부터 주요 지도부는 왕자 반대 운동을 벌였다.[11]

2.2.5. 캄보디아

캄보디아 총리 훈센이 1997년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지금도 절대 권력의 총리로 있다. 국왕이나 종교 지도자들, 군부도 훈센의 눈치를 보고 있는 지경. 2018년엔 장남 훈 마넷에게 권력을 물려줄거란 보도가 나왔다. # 사실상 캄보디아판 최충헌 또는 일본 막부. 훈씨 막부

2.2.6. 미얀마

2021년 미얀마 쿠데타: 독립 직후부터 폭압적인 군사정권이 지배하고 있다가 민주화세력 지도자 아웅 산 수 치가 군부와의 타협을 통해 민간정권을 출범시켰고 2021년 1월 총선에서 아웅산 수지 세력이 승리하자, 경제난과 로힝야족 사태로 인한 국제적 비난 등의 악재를 핑계로 2021년 1월 31일 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차지했다.#

2.3. 서아시아(중동 중 아시아 지역)

중동 역시 아프리카나 중남미에 비해 덜할 뿐이지 쿠데타가 만만치 않게 일어났었다. 대표적으로 이라크, 시리아, 예멘, 오만, 카타르, 이란 등…. 심지어 구약성경에는 다윗의 아들인 압살롬이 아버지에 대항한 쿠데타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다.

2.3.1. 튀르키예

튀르키예의 경우, 쿠데타는 일어나는데, 정권은 맨날 민간에 이양하는 좀 이상한 경우다. 즉, 튀르키예군은 쿠데타를 일으키더라도 직접 권력을 잡지 않는다는 얘기. 덕분에 튀르키예에서는 쿠데타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 단, 군인이 직접 정치에 입문하는 일은 (심지어 군인이 멀쩡하게 전역해서 정상적으로 정치에 입문하는 경우에도) 금기시되며, 대중의 지지도 얻지 못한다. 튀르키예군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이유는 군대 자체가 케말 아타튀르크 시대부터 국가원리가 된 세속주의와 '서구화 정책'의 강력한 지지세력이기 때문이다. 즉, 보수적 이슬람 세력이 정권을 잡고 세속주의를 후퇴시키려고 하면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쪽도 스페인, 중남미와 같이 정부가 친이슬람 성향으로 가려 하면, 공동성명을 열어 "니들 자꾸 그러면 정부 뒤집는다?" 라고 경고를 하고, 그래도 정부가 듣지 않으면 쿠데타를 일으켜 뒤집는 경우이다. 단 2016년 쿠데타는 기존의 전통(?)과 달리 아무 말도 없이 쿠데타가 발생했기 때문에, 그리고 과정 및 결과가 에르도안에게 너무나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주작설이 돌고 있다.

이러한 튀르키예군의 세속주의에 대한 고수는 오스만 제국 후기, 제조업과 군대 운용 방식의 후진성(당시 근대화 정책의 반대 세력은 보수적 이슬람 법학자(=울라마)집단을 중심으로 모이고 있었다)으로 인하여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의 열강들에게 심심하면 털리던 튀르키예의 쓰라린 기억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이 오스만 제국 시대의 예니체리 반란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 또한 존재한다.[12]

2000년대 중순 와서 압둘라 귈 총리를 비롯한 이슬람계 정당의 약진에 튀르키예 군부는 고민중이다. 1960년, 1971년, 1983년, 1998년까지 그야말로 10년을 주기로 쿠데타를 벌였고 그럴 때마다 국제적으로 까였으며 여러 모로 엉망이 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미국이 옹호해주었으나 계속되는 쿠데타에 EU 가입 문제와 여러가지로 마찰을 빚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2000년대 후반에 와서 이슬람계 정당인 정의개발당에 완전히 정국의 주도권이 넘어갔으며, 이 당 출신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는 그동안 군부의 눈치를 보던 관행을 탈피하여 "정치군인"들을 주도적으로 해임하고, 쿠데타 모의를 적발했다며 튀르키예군 총사령관 등을 체포하여 종신형에 처하는 강수를 두었는데도 군부는 꼼짝도 못했다.# 아마 여기도 민간 정치의 군부에 대한 우위가 확실해지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그 결과가 오히려 에르도안의 문민독재로 흘러가서 문제지만. 에르도안이 총리직을 버리고 대통령이 된 이후인 2016년 드디어 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에르도안에 역습을 가했으나 오히려 패배하고 말았다. 이번에야말로 에르도안이 군부를 100% 장악하고 길들일 것이라는 전망. 자세한 내용은 2016년 튀르키예 쿠데타 미수 사건 참고.

2.4. 아프리카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냐, 나미비아, 지부티, 탄자니아, 말라위, 앙골라, 모잠비크, 세네갈, 카보베르데, 보츠와나, 잠비아, 모로코처럼 쿠데타가 없었던 국가들도 있긴 하다.[13] 하지만 그 외에는 대부분 쿠데타가 매일같이 일어났다. 그리고 일어나는 국가들에서는 허구한날 일어나서 내전까지 벌인다는 특징도 있다. 1957년 가나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독립한 이래 70번이 넘는 쿠데타가 성공했고 그것을 넘어서는 숫자들의 쿠데타 실패 사례가 있었다.

아프리카의 수많은 국가들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던 원인들을 분석하자면, (일반화시키기는 어렵지만) 식민지 이전 아프리카의 국가와 사회는 군과 군사주의 정신을 중요하게 여겼다. 서유럽에서 군부는 시간이 지나면서 비정치적이고 전문적인 집단으로 변했고 문민통제가 확립되면서 자연스럽게 정치 결정 과정에서 군부의 역할이 축소되었으나 식민지 이전의 아프리카 사회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북아프리카를 막론하고 대게 군사와 정치를 결합하고 있었고 둘의 구분이 불가능했으며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이 군인들이었다. 성공적인 통치자가 되기 위해서는 몸소 전투에 나가서 훌륭하게 지휘를 해야 했고, 무훈담을 널리 퍼뜨리는 등의 행위가 지도자의 정통성을 유지시키는 기반이 됐다. 또한 대부분의 아프리카 사회가 정규군 또는 상비군의 개념이 없었다. 군인들은 대다수가 시간제 민병대원들이었으며 특정 지도자와 씨족의 족장, 유복한 특정인을 따른다는 측면에서만 보면, 공공의 목적을 위해서 싸우는 정규군이라기보다는 사병에 가까웠다. 따라서 정치와 분리된 오로지 국가를 위해서만 봉사하는 군대라는 개념은 아프리카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었다. 따라서 유럽 식민 당국이 도입한 전문적이고 독립적인 집단으로서 근대적 국민군의 역할은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었으며 식민지 군대는 내부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또한 식민지 시절의 군대가 아프리카 대륙에 빈발하는 쿠데타에 큰 영향을 끼치는데 독립을 전후하여 창설된 아프리카 국가들의 정규군들은 대체로 식민지 군대에서 기원을 두었다. 따라서 군의 뿌리는 1890년대와 1900년대까지 아프리카 내지를 활발하게 정복하던 정복군의 성격을 벗어 던질 수가 없었으며 정복군들은 같은 아프리카인들을 정복하고 통제하던 집단들이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식민지와 본토 전토를 휩쓸고 가며 식민 제국의 중추적 성격이 변화하면서 동시에 식민지 군대들의 성격이 변화하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모든 기간을 통틀어 '식민지'에 대한 '물리적 통제'의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이유로 독립 직후의 아프리카 국가들의 군대들은 전문적이고 독립적이며 훈련이 잘된 집단의 틀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많은 장교들이 1960년대에 유럽 군대의 장교로 복무하고 있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군사정부의 지도자들은 넓은 의미에서 대부분 식민 통치에 협조한 토착민들의 직계 후손이었으며 장교들은 식민지 군대가 국민국가의 정규군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분명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또한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 직후에 초대 지도자들이 집권하자마자 일당제 및 일인 독재를 실시하며 국정운영의 실패를 보이자 믾은 사람들에게 군부가 대안으로 떠올랐고 이에 따라 코트디부아르펠릭스 우푸에부아니, 케냐조모 케냐타, 세네갈레오폴 세다르 상고르.기니아메드 세쿠 투레등의 소수의 케이스를 제외하면 상당수의 많은 문민 초대 대통령들이 군부에게 실각당했고 사람들의 호응을 받았다. 전반적으로 군사정권들은 그들이 축출한 문민독재정부보다는 덜 부패하고 잔인하고 유능했으나[14] 점차 한계를 드러내면서 일부 국가에서는 내전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또한 1980년대 이르면 냉전이 끝나가는 여파가 아프리카 대륙에도 미쳐서 군부를 능가하는 무장세력들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AK-47 같은 자동화기들이 아프리카 대륙 전역에 대규모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만 해도 반국가 투쟁을 벌일 때 2차 대전 때 사용하던 회기를 들고 싸우거나 심지어 시골 오지에서는 창과 칼로 싸우기도 하였으나 1980년대 들어서는 반정부 집단들조차 자동화기와 로켓포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여파로 과거 1970년대까지 군사정부의 철권통치가 가능했던 것과 달리 1980년대 이후로는 아프리카 국가들은 과거와 달리 반정부군에 시달리며 행정력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많아졌다.

대표적으로 바로 라이베리아새뮤얼 케니언 도[15]리비아무아마르 카다피, 우간다이디 아민, 콩고민주공화국모부투 세세 세코, 중앙아프리카공화국장 베델 보카사앙드레 콜링바프랑수아 보지제, 소말리아시아드 바레, 에티오피아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말리무사 트라오레아시미 고이타,알제리우아리 부메디엔,적도 기니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수단 공화국가파르 니메이리오마르 알 바시르,이집트가말 압델 나세르압델 파타 엘 시시,감비아야햐 잠미,나이지리아야쿠부 고원모하마두 부하리[16], 토고냐싱베 에야데마, 베냉마티외 케레쿠, 가나제리 존 롤링스,차드이센 아브레이드리스 데비, 콩고 공화국드니 사수 응게소, 르완다쥐베날 하뱌리마나, 기니마마디 둠부야, 부르키나파소토마 상카라[17]블레즈 콩파오레,이브라힘 트라오레 등이다. 하지만, 이렇게 무력으로 집권한 이들도 결국에는 무력으로 축출당했거나 반란군들에게 생포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거나 혁명으로 축출되었다. 물론 가나제리 존 롤링스처럼 안정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토고냐싱베 에야데마, 이집트가말 압델 나세르, 알제리우아리 부메디엔처럼 죽을 때까지 안정적으로 종신집권하는 예외사례도 있다.

SBS 정글의 법칙 촬영 당시에는 촬영지였던 마다가스카르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는 바람에 출연진과 제작진 모두 움직이지도 못한 적도 있었다.

중앙아프리카 공화국다비드 다코는 2번 대통령으로 집권했지만, 2번 다 쿠데타로 퇴진당했다는 기록을 보유했다.[18]

수단 공화국은 독립 이래로 여러 번의 쿠데타가 일어나 많은 기간을 군부독재정으로 보냈다. 그 중에서 가파르 니메이리오마르 알 바시르는 둘 다 쿠데타로 집권했으며 이슬람 원리주의와 군부독재를 혼합한 최악의 독재를 실시했었다. 가파르 니메이리1985년쿠데타로 실각했으며 이후 군정 과도정부를 거쳐서 민간정부가 들어섰으나 1989년오마르 알 바시르쿠데타를 일으켜서 민간정부를 실각시키고 30년간 집권했다. 그러나 오마르 알 바시르2019년쿠데타로 실각했으며 이후 군부와 민간합동의 과도정부가 구성되어 2년동안 유지되어 오다가 과도정부의 국가원수인 압델파타흐 알부르한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민간인 총리를 해임하고 가택연금 한 뒤 정부 구성원들을 체포한 다음에 정부를 해산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이후 군부내에서 압델파타흐 알부르한과 독자적 군사조직 신속지원군의 사령관모하메드 함단 다갈로와의 반목으로 쿠데타가 일어나서 영토 전역이 내전으로 악화되는 중이다.

모리타니는 독립 이래로 6번의 쿠데타국가원수들이 교체되었으며 2008년 8월 6일에 쿠데타가 다시 발생해 국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다.다만 쿠데타주동자인 모하메드 울드 압델 아지즈가 민정이양을 하면서 본인이 2009년2014년 대선에서 연속 승리하여 재임하고 2019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고 후임자가 당선되고 안정적인 정권이양이후로 정치가 나름 안정되는 중이다.

알제리1965년우아리 부메디엔대령이 쿠데타를 통해서 집권한 바 있으며 1991년 12월에 치러진 첫 다당제 총선에서 이슬람주의 정당들이 약진해서 기존의 집권정당이던 민족해방전선을 누르고 집권을 눈 앞에 두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선거를 무효화 시키자 이에 반발한 이슬람주의 세력들과의 내전이 10년간 벌어지기도 했다.

이집트1952년가말 압델 나세르쿠데타로 장권을 잡은 이후로 안와르 사다트, 호스니 무바라크에 이르기까지 군부가 2011년까지 59년동안 정치권력뿐 아니라 경제,사회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었고 아랍의 봄이후에도 영향력은 막강했다. 이러한 막강한 군부의 영향력은 민주화 이후에도 무함마드 무르시의 실정이 부각되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무함마드 무르시를 실각시키고 압델 파타 엘 시시가 집권하는 데 어려움이 거의 없었다. 물론 이집트인들이 격렬히 군부 독재에 반대했으나 탄압 당한 후 숨 죽이고 사는 상태다. 물론 무슬림 형제단정권도 문제가 많은 정권이었으나 쿠데타는 방법론이 틀렸다.

부르키나파소는 독립 이래로 초대 대통령부터 토마 상카라를 포함한 모든 대통령들이 쿠데타로 실각되었다. 블레즈 콩파오레 역시 장기집권에 반발한 시민들의 시위로 실각하고 이후 과도정부 수반을 맡은 미셸 카판도 역시 쿠데타로 며칠간 실각했으나 쿠데타의 실패로 민선때까지 과도정부 수반으로 재임했다. 그러나 민선으로 당선된 로크 마르크 크리스티앙 카보레는 2015년과 2020년 대선에서 당선되었으나 2022년 1월에 쿠데타로 실각했다. 이후 2022년 9월에 군부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났는지 쿠데타가 또 일어나서 기존의 군부 지도자를 밀어내고 새 군부지도자가 군정을 이끌고 있다.

케냐는 독립 이래로 일당독재와 일인독재가 있었으나 쿠데타로 정권이 교체되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1982년일등병(...)이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했는데, 쿠데타의 실태를 보면 가히 인류 역사상 가장 황당한 쿠데타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1982년 케냐 쿠데타 항목 참조.

말리에서도 여러 차례 쿠데타가 일어났으며, 1968년 말리 쿠데타이후로는 무사 트라오레가 23년 가까이 집권하다가 1991년에 다시 쿠데타가 일어나서 실각했다. 2012년에는 2012년 투아레그 반란에 대한 정부의 대응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했다. 2020년 말리에서 쿠데타가 또 일어났다. 그리고 1년후, 다시 한번 쿠데타가 일어났다.

기니는 프랑스로 부터 독립한 이유 3번의 쿠데타가 발생했다. 특이한 점은 그 중에서 2번의 쿠데타는 권력의 공백시기에 벌어졌다는 점이다. 초대 대통령 아메드 세쿠 투레1984년 3월 26일에 사망한 직후 1984년 4월 3일에 란사나 콩데 대령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이후 란사나 콩데 정권이 24년간 이어져오다가 란사나 콩데 대통령이 재임 중 2008년 12월 22일에 사망한 이후 이틀 뒤에 대위 무사 다디스 카마라의 주도 하에 쿠데타가 일어나서 과도 군사정부 기간을 거쳐서 민정이양을 했다. 이후 알파 콩데 대통령이 민선 대통령으로 재임했으나 2020년3선을 강행하면서 정국이 혼란해지더니 2021년 9월 5일에 군사쿠데타로 실각했다.

니제르1974년 쿠데타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총 5번의 쿠데타와 2번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 가장 최근에는 2023년 7월 26일 모하메드 바줌 대통령을 억류하면서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가봉은 1960년 8월 17일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래로 가봉 민주당일당제하에서 레온 음바와 오마르 봉고,알리 봉고 온딤바부자의 독재가 이어오면서 몇 차례의 쿠데타시도가 실패하면서 오랫동안 문민독재가 유지되어 왔었다. 그러나 알리 봉고 온딤바대통령이 대선에서 3선에 성공한 후 몇분도 안돼서 일어나서 독립 이래 처음으로 쿠데타로 정권을 교체하게 되었다. 군부는 대통령 선거 결과 무효를 선언했다.

2.4.1. 적도 기니

1979년 6월 중순에 적도 기니의 초대 대통령이자 독재자였던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가 밀린 임금을 지불해달라는 장교들을 처형했는데, 이로 인해 막내동생을 잃은 마시아스 응게마의 조카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는 삼촌을 배신하고[19] 쿠데타를 일으켜 삼촌을 몰아내고는 삼촌의 다른 부하 6명과 함께 특별군사재판에 회부하여 사형 확정 6시간 만에 모조리 처형시켰다.

2004년 3월 7일에는 마거릿 대처 영국 전 총리의 아들인 마크 대처가 지휘하는 영국인 용병들이 망명한 유명 야당 정치인인 세베로 모토 은사를 대통령에 앉히려는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짐바브웨하라레에서 쿠데타에 참여할 용병들을 태운 비행기가 억류되면서 실패로 끝났다.[20]

2017년 11월 12일에 온갖 부정선거 의혹 속에 치러진 적도 기니의 총선이 여당이 의석 170개 중 169개를 싹쓸이하는 압승을 가두자, 의석을 차지한 유일한 야당인 '혁신을 위한 시민(CI)' 이 사건에 항의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그로부터 약 1개월 정도 지난 12월 27일에 적도 기니 정부는 'CI와 반정부 정당들이 외국인 용병을 고용하여 카메룬 인근 변경에서 쿠데타를 시도하려고 한 것이 적발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쿠데타 혐의로 구속된 사람들에게 황당할 정도로 무자비한 형량이 선고되는 등[21]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기 일각에서는 이 쿠데타가 응게마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친위 쿠데타 아니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2.5. 스페인-중남미

역사적으로 이베리아 반도중남미에서는 쿠데타를 '딱히 자랑스러울 건 없지만 고유의 정치적 전통'으로 여겨왔고, 아예 Pronunciamiento(프로눈씨아미엔토)라고 하는, 정부를 뒤엎기 전에 쿠데타 주모자들이 미리 모여서 공개적인 장소에서 "정부가 이러이러한 이유로 똑바로 기능을 못하고 있으니 국가의 수호자인 군대가 나서서 정권을 갈아 엎겠다!"고 쿠데타 선포부터 하고 국가 기관을 장악하려고 하는 요상한 관례가 있다.[22] 하도 쿠데타가 많이 일어나니까, 스페인어로 군부 지도부를 의미하는 훈타(junta)가 영어에서 쿠데타 지휘부를 일컫는 일반 명사가 되었다.[23]

대표적인 경우가 1868년 이사벨 2세의 정부를 무너뜨린 후안 프림프란시스코 세라노 장군의 쿠데타이다. 20세기 들어서는 이런 전근대 사회 특유의 대중 권력과 기사도에 기반한 쇼맨십이 넘치는, 기본적으로 귀족주의적 정서에 기반한 정치적 쇼맨십의 약발이 떨어지기 시작해 1932년 스페인 제2공화국을 상대로 한 호세 산후르호 장군의 군사 쿠데타는 실패하고, 여기서 한계를 깨달은 우파와 군부는 4년 뒤 오히려 프로눈시아미엔토와 거리가 먼 동시다발적, 기습적 쿠데타를 일으켜 스페인 내전의 서막이 되었다. 이 경우에서는 일반적인 쿠데타를 일으켜 3년간 내전이란 과정을 겪긴 했지만 어쨋든 성공했는데도 불구하고 별로 배운 교훈은 없었는지 프란시스코 프랑코 사후 군부, 국가 헌병대 내 골수 반동 파시스트 세력이 일으켰던 23-F는 전형적인 프로눈시아미엔토 과정으로 퇴행한 이후 당시 국왕과 반쿠데타 세력의 빠른 뒷수습에 망했다.

이웃이자 같은 이베리아 반도의 형제국가 포르투갈도 군부 쿠데타로 제1공화국이 무너진 바 있다. 그리고 그 군부는 자신들이 영입한 살라자르에 의해 뒷방 늙은이로 밀려났다. 그리고 살라자르가 구축한 제2공화국은 1975년 군부 개혁파들의 쿠데타로 무너지고 포르투갈은 민주화된다. 쿠데타가 민주화를 부른 극히 드문 사사례.

당연히 여기서 많은 걸 배워 간 중남미의 경우 쿠데타계에서 거의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1945년부터 15년간 30명이 넘는 지도자들이 쿠데타에 교체되는 충격적인 기록을 남겼다.

중남미의 쿠데타는 냉전의 연장으로서 반미 성향이 강한 좌파세력의 확산을 막기 위해 미국의 CIA가 개입한 경우도 많다. 피노체트가 일으킨 칠레1973년 쿠데타나 1976년 아르헨티나호르헤 비델라 3군총사령관이 주도한 쿠데타는 미국이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0년대에는 온두라스에서 또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 등을 돌리고 러시아중국과 친해지는 반미반서방 좌파 노선을 택했다. 물론 미국 눈치는 여전히 보고 있어 미국을 대놓고 적대하지 않으며 최대한 자극하지 않는다.

중남미에서 쿠데타가 안 일어난 나라는 코스타리카를 포함해서 손에 꼽을 수준이다. 볼리비아처럼 심한 나라는 지금까지 일어난 쿠데타만 수십 번으로 정상적인 정권이양보다 쿠데타에 의한 정권교체가 더 많을 지경이라고 한다. 3선에 성공했던 에보 모랄레스도 사실상 '실패한' 쿠데타[24]로 퇴임했다.

멕시코의 경우 멕시코 혁명 이전까지는 쿠데타가 잦았는데, 혁명 이전에는 산타 안나포르피리오 디아스가 쿠데타로 집권한 대표적인 사례이며 혁명 이후에도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알바로 오브레곤이 쿠데타로 집권했다. 멕시코의 경우 쿠데타의 성격이 단순한 군사독재[25]뿐만 아니라 민간 세력[26]들도 많았고, 주로 소수 주동자들이 기습적으로 일으키는 쿠데타보다는 좀 더 규모가 크며, 지속된 군사 반란으로서의 성격이 짙다. 멕시코는 1938년에 일어난 사투르니노 세디요의 쿠데타 미수 이후로 쿠데타 시도가 일어나지 않았다.

브라질1889년페드로 2세의 노예해방에 반발한 지주들의 지원으로 데오도루 다 폰세카 장군을 중심으로 한 군부쿠데타로 브라질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이후 대공황의 여파로 1930년에 다시 군부쿠데타로 브라질 제1공화국이 붕괴되었으나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지 않고 민간인인 제툴리우 바르가스를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후 제툴리우 바르가스역시 1945년 10월군부압력으로 실각했으며, 이후 브라질 제4공화국체제에서 제툴리우 바르가스대통령으로 다시 선출되었으나 1954년 8월군부와의 갈등으로 군부의 퇴진요구로 자살했다. 이후 브라질 제4공화국1964년 브라질 쿠데타가 발생하고 이때 쿠데타를 주도한 카스텔루 브랑쿠가 악명이 높았다. 심지어 브라질은 지우마 호세프의 탄핵과 룰라 다 시우바의 돈세탁과 간접적 뇌물수수로 인한 대전 출마 정지, 그리고 자이르 보우소나루의 취임과정 또한 사법쿠데타라고 불릴 정도로 사법부가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는 1862년 전국가를 통치하는 연방국가 성립 이래로 70년 가까이 평화적인 정권이양이 이루어지다가 대공황의 여파로 1930년에 쿠데타가 일어났으며 이후 1943년에도 쿠데타가 일어나고 1955년에는 쿠데타후안 페론을 실각시켰으며, 1962년에도 쿠데타가 일어나 아르투로 프론디시가 물러났고, 1966년에도 쿠데타가 일어나서 1973년까지 군부독재가 이어졌다. 그리고 1976년에는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해서 이전의 군사정권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악명을 떨쳤다.

칠레는 건국 이래로 1891년에 발발한 내전을 제외하면 안정적으로 나라가 운영되다가 대공황의 여파로 1932년에 쿠데타가 발생해서 정권이 교체되었으며 이후 1973년까지 안정적인 민주주의를 유지해오다가 피노체트의 주도 하에 1973년 칠레 쿠데타아옌데를 실각시키고 17년간 군부독재정권으로 악명을 떨쳤다.

아이티에서는 2024년 3월 총리의 해외 방문을 틈타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쿠데타의 주체가 아이티군이 아니라 갱단연합들이었다. 아이티는 정부군보다 갱단의 세력과 무력이 더 클 정도로 치안이 엉망이었는데 결국 갱단이 쿠데타까지 일으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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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유럽

2.6.1. 그리스

20세기 그리스는 쿠데타의 시대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친 동맹 성향인 국왕을 갈아버린 당시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의 쿠데타 이후로 쿠데타는 일종의 전통이 되어서 튀르키예 독립전쟁의 패배 이후 혁명으로 들어선 공화 정부를 1936년 요안니스 메탁사스 장군이 쿠데타로 뒤집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내전, 왕정 복고로 들어선 정부도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장군이 1968년 쿠데타로 뒤집어 1973년까지 집권한다. 대체로 쿠데타군은 왕정 복고 및 반공을 내세웠으며, 집권 과정 및 내용은 중남미의 쿠데타와 유사한 편이다. 냉전 시기 쿠데타에는 역시 미국의 CIA가 뒤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6.2. 독일

문서가 존재하는 사례들:

2.6.3. 프랑스

프랑스 대혁명 시기 테르미도르 반동, 방데미에르 13일의 쿠데타,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등의 굵직한 쿠데타들이 여럿 터졌다. 쿠데타(coup d'etat)이라는 단어 자체가 프랑스어에서 왔을 정도. 프랑스 대혁명 이전까지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전제군주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으므로 성공한 쿠데타가 드물었다. 프랑스어 쿠데타라는 단어가 아예 일반명사로 자리잡은 것을 보면 프랑스 혁명기에 수시로 쿠데타가 터져 집권세력이 바뀌며 어제의 집권자가 오늘은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일이 비일비재한 혼란상을 처음 보았던 당대 유럽인들의 충격을 짐작할수 있다. 쿠데타 사건에 별다른 제목을 붙이지 않고 그냥 쿠데타가 벌어진 날짜로만 언급하는 관습[34]도 프랑스 혁명의 영향이다.[35] 프랑스 혁명기 쿠데타와 반란이 하도 밥먹듯이 터지다 보니 아예 별도의 제목 없이 사건들을 날짜로만 언급한 것이 관습으로 굳어진 것.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나폴레옹 3세친위 쿠데타(1851년 프랑스 쿠데타), 알제리 전쟁 와중에 군부 강경파의 쿠데타 시도 등이 터지기도 했다.

2021년에도 프랑스 군부가 이슬람 이민자 세력을 척결하겠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경고 메시지가 나오기도 했다.#

2.7. 러시아와 구소련

소련 시절 공산당 보수파들이 소련 해체를 막기위한 마지막 방법으로 8월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이 쿠데타를 저지했던 보리스 옐친은 자신이 집권한 후 자신을 탄핵하려는 연방의회를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친위 쿠데타를 통해 제압했다.

러시아 외에도 중앙아시아와 캅카스 지역의 쿠데타 위험은 낮지 않은 편이다. 2018년 민주화를 이룩한 아르메니아의 경우 2년만에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패전으로 정국이 혼란해졌다. 2020년 종전 직후에는 파시냔 총리의 암살과 뒤따른 쿠데타 시도가 아르메니아 정보부에 막혔으며#, 2021년엔 합참의장 오닉 가스파랸을 필두로 40여명의 고위 군 장성들이 총리 니콜 파시냔의 정부가 아르메니아인들의 중대시국에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주장, 야당연합 구국수호운동을 지지했다. 파시냔은 이를 군의 쿠데타라 비난하고 가스파랸과 40인 장성 해임을 시도하나 대통령의 거부로 오히려 파시냔이 사임을 선언하였다.

중앙아시아 또한 수차례 내전을 겪었고 독재정들이 수립되었으며 유일하게 민주주의를 지키고 있는 키르기즈스탄의 경우 종종 선거를 앞두고 쿠데타를 모의하는 이들이 잡히는 등 혼란한 상태이다. #

2023년 6월 24일, 민간군사기업 바그너 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무장반란을 일으켰다가 스스로 군을 다시 돌려서 실패했다. 자세한 내용과 멍청하게 쿠데타를 말아먹은 뒷일은 바그너 그룹 반란예브게니 프리고진 문서의 사망 항목 참조.

2.8. 미국

미국은 강력한 문민통제와 안정된 민주주의 시스템으로 내전을 겪었던 적은 있으나 건국 이래 단 한 번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이 전복된 적이 없었으며 중간에 몇 명의 대통령들이 암살당한 것을 빼고는 정권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어 왔으며 평화적이고 민주적으로 정권교체를 해왔다.

건국 이전 미국 독립전쟁시기 루이스 니콜라 대령을 비롯한 일부 군부 세력이 조지 워싱턴을 국왕으로 모시고 공화정부를 뒤집어 엎자는 소위 뉴버그 편지 사건을 일으켰으나 워싱턴이 명확히 거부하고 군부를 달래 무력화시켰다.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도널드 트럼프 현직 대통령이 선거 결과를 무효화시키기 위해 지지자들을 선동했고 이에 자극 받은 폭도들이 폭동을 일으켜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이 발생했으나 조기에 진압되며 미수로 끝났다. 하지만 그 후폭풍은 여전하다. 다만 이 점거 폭동은 FBI 조사나 미국의 공식적인 조사로 트럼프의 조직된 쿠데타나 반란으로 인정되진 않는다.#

이후 QAnon이 도널드 트럼프의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기 위해 지속적으로 조 바이든 암살시도를 암암리에 계획하고 실행하려고 눈독을 들이고 있다.

미국 언론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가 측근들에게 8월에 내가 대통령 직에 복위한다라고 주장했다고 하며, 측근 마이클 플린이 5월 말 QAnon 집회에 참석해 미국에서도 미얀마처럼 쿠데타를 일으켜 트럼프를 복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발언이 알려지면서 제 2의 의사당 폭동 사태가 재발할 것이라는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미군은 민병대 소집법에 의해 연방 의회의 동의 없이 군이 자체적으로 계엄을 선언하거나 치안유지 활동을 하면 불법이고 강력한 문민통제로 미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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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에 대해 655년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2] 세종대왕 본인 또한 장남양녕대군을 제치고 삼남으로서 세자에 책봉된 터라 정통성을 의문을 품는 수도 있겠지만, 충녕대군 또한 엄연히 정실인 원경왕후의 소생인 적자(嫡子)고, 양녕의 폐위와 충녕의 책봉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제대로 된 절차를 거쳐 태종이 직접 시행한 사안이다. 따라서 정통성 측면에서 문제될 것이 없었기에, 당시나 후대에나 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3] 갑신정변때 행동대원이었던 유혁로, 정난교가 을미사변에 가담하였다.[4] 이승만 본인은 미국이 에버레디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눈치챈 듯한데, 에버레디 계획이 실행되던 때에 백선엽을 황급히 중화민국 주재 한국 대사로 발령해서 중화민국으로 보내버렸다. 군인(무관)인 백선엽을 문관인 대사에 임명해서 그것도 거리가 먼 중화민국으로 서둘러 보낸 이유는 이승만이 미국의 에버레디 계획을 무산시키기 위해 그 적임자인 백선엽한테서 군사권을 빼앗으려 했기 때문이었다.[5] 또한 이승만을 대체할 지도자가 거의 없어 불가능했고, 미국의 사주가 들키기도 하는 날에는 반미로 돌아서고 스스로 적화되는 것도 이상하지도 않았다. 거기에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한국군도 통제해야 하는데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카리스마와 권력을 가진 이는 맥아더뿐이었다. 트루먼과의 갈등 끝에 해임이라는 수단까지 동원해 겨우 맥아더의 폭주를 진정시키나 했는데, 여기서 맥아더와 한 몸이었던 이승만까지 같이 제거하면 그로 인해 맥아더가 정치적 희생양처럼 비춰지면서, 맥아더가 강력한 대선후보로 부활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 맥아더의 부관을 수년간 해온 아이젠하워야말로 정치군인 맥아더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 테니 맥아더&이승만 커넥션은 건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6] 당시 대통령이던 응오딘지엠이 암살당했다.[7] 위의 쿠데타를 지휘했던 즈엉반민의 행보에 반감을 가진 미국이 응우옌카인을 지원해 즈엉반민을 실각시킴.[8] 쿠데타 주도 세력이 군주의 권위를 존중한다는 점은 일본도 마찬가지여서, 5.15, 2.26, 궁성사건 같은 근현대사의 쿠데타에서 덴노는 어디까지나 공격 예외 대상이었다. 심지어 2.26 당시 히로히토에게 쿠데타의 취지를 설명하러 황궁에 들어간 한 장교는 총애하던 각료들이 쿠데타로 죽어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고 있던 히로히토가 "감히 어딜 들어오느냐!"며 불같이 화를 내자 사죄하고 밖으로 나가 덴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며 스스로 할복했다고 한다. 1868년 무진전쟁 당시 막부군도 신정부군이 덴노 가문의 깃발인 니시키노미하타(錦旗)를 앞세우자 함부로 덤비지 못하고 도망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9] <옹박: 두번째 미션>으로 국내에 개봉된 <똠양꿍>이라는 영화에서 이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평생을 가족처럼 애지중지 키운 코끼리임에도 국왕 폐하께 코끼리를 바칠 심사대회에 나갈 수 있게 되자, 극 중에서 토니 쟈의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합장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절대로 과장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태국 국민들의 국왕에 대한 존경심에 비추어 보면 모자란 감이 있을 정도.[10] 나라 보존 문제. 다만 이 문제는 운 + 영토 할양 + 일본과의 동맹이라는 복잡한 형태로 완성되었다. 마지막 문제 때문에 태국은 전범 국가가 될 뻔했으나, 냉전 상황이라서 넘어갔다.[11] 탁신이 쿠데타로 밀려난 이유가, 탁신의 부패 문제 때문이라기보다는 왕자를 지지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이 입장에서 보면, 탁신을 몰아낸 쿠데타는 왕의 의도일 수도 있지만, 당시에도 건강상으로 문제가 많았던 푸미폰 국왕과는 아무 상관없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높다. 푸미폰 국왕의 권위가 떨어진 증거는 수완나품 국제공항 점거 중단 명령이 무시당한 것을 포함해서 분명히 존재한다.[12] 오스만 제국 시절 중앙군인 예니체리의 반란은 후기로 갈수록 정권획득을 위한 반동이라기보다는 군의 요구 관철을 위한, 혹은 각 사회계층의 요구를 대리하기 위한 보조수단적인 면이 강했기 때문이다. 실제 반란의 주체가 직접 중앙의 정권을 잡은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으며, 많은 반란이 일방적인 진압이 아닌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종결되었다. 물론 그 후에 정치적으로 보복을 당한 경우도 허다하다.[13] 다만 상술한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은 국가들이라고 평화로웠거나 처음부터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던 것은 절대 아니다. 앙골라모잠비크는 사회주의 일당제를 실시해 이에 반발하는 세력의 내전을 겪었고, 세네갈, 카보베르데, 잠비아, 케냐, 탄자니아, 말라위 등의 국가들도 일인 독재 또는 일당 독재를 시행했으며 이들이 군부를 통제하는 능력이 강했기에 쿠데타가 성공하지 않았거나 쿠데타 시도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보츠와나보츠와나 민주당일당 우위 정당제하에 초대 대통령 세레체 카마와 2대 대통령 퀘트 마시레가 장기집권하였으나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하면 평화로웠고 민주적이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아파르트헤이트시절 국민당의 사실상 일당제 시절이었고 지부티는 여전히 세습 독재국가이다. 다만 상술한 국가들은 지부티를 제외하면 현재 민주주의가 나름 안정적으로 정착된 편이다.[14] 물론 우간다이디 아민처럼 처음부터 무능하고 잔인한 케이스도 있기는 했다.[15] 전두환 시대 때 방한한 적이 있으며, 이때 한국외국어대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를 수여하자, 매우 자랑스러워했다는 일화가 있다. 새뮤얼 도는 원래는 군 하사 출신이다. 쿠데타 당시 계급은 상사.[16] 2015년부터 2023년까지 나이지리아의 대통령를 역임했었다. 다만 2015년 이후에는 국민들의 직선으로 당선되었고 1983년 12월 31일에 나이지리아 최초의 민선 대통령을 쿠데타로 전복시켜서 본인도 쿠데타로 실각하기까지 2년 가까이 군사정부 수장으로서 집권한 바 있다.[17] 다만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어도 다른 군사독재자들과 달리 개혁정책으로 지금도 많은 아프리카인들에게 높이 평가받고 있다.[18] 1차 임기 중에 장 베델 보카사의 쿠데타로 축출되었다가 보카사가 황제를 참칭하며 중앙아프리카 제국을 세우고는 학생 중심의 반정부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자 이에 분노한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로 재집권했으나, 재집권 2년도 안 되어 앙드레 콜링바의 쿠데타로 쫓겨났다.[19] 참고로 오비앙은 이전까지는 '아프리카의 폴 포트'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로 악랄했던 삼촌의 독재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마시아스와 오비앙의 관계는 히틀러와 힘러의 관계와도 같았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20] 여담으로 마크 대처는 어머니가 준 보석금 덕분에 집행유예만 받았다.[21] 형량을 선고받은 130명(용병으로 판단되어 해외에서 납치된 외국인 24명 포함) 중 25명이 징역 70년형 이상을 선고받았으며, 심지어 쿠데타를 주모한 것으로 알려진 3명은 징역 96년형을 선고받았다.(이들 중 2명은 스페인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다가 2019년 11월 12일에 남수단으로 떠난 후 3일 뒤에 적도 기니 당국에 납치되어 수감되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은 없었는데, 이는 응게마가 이 무렵에 사형제를 선고할 것이라고 발표했기 때문이었으며, 실제로 적도 기니의 사형제는 2022년 9월 19일에 완전히 폐지되었다.[22] 보통 프로눈시아미엔토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1. 어느 유력한 군 장교가 공개적으로 선언을 한다. 2. 잠깐 조용히 하고 주변 반응을 본다. 3-1. 군부나 정치권, 국민여론 등등 사회유력집단의 반응이 열광적이면 굳이 들고 일어날 것도 없이 알아서 혹은 국왕의 승인과 같은 절차를 통해 권력을 얻는다.(굿 엔딩) 3-2. 반응이 좋지 않으면 망명하거나 형사재판을 받거나 적어도 불명예 제대된다.(배드 엔딩) 즉, 프로눈시아미엔토는 일반적인 쿠데타에 비해 정치적인 여론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23] 고려시대 무신정권중방이나 5.16 쿠데타 이후에 등장한 국가재건최고회의도 영어권 자료에서는 훈타로 소개되고 있다.[24] 바로 다음 대통령에 모랄레스와 같은 당인 루이스 아르세가 당선되었다.[25] 디아스의 경우 쿠데타로 집권한 뒤에는 선거를 통한 재선으로 민주주의의 외형만은 유지했다.[26] 오브레곤은 혁명군에 가담하며 군벌이 된 케이스이다.[실패] [실패] [실패] [성공] [성공] [실패] [실패] [34] 한국의 5.16, 12.12, 일본의 5.15, 2.26, 스페인의 23-F[35] 예를 들어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에서 브뤼메르 18일은 프랑스 혁명력의 두번째 달(브뤼메르)의 18일이란 뜻. 즉, 2.18 쿠데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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