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22 23:15:12

아우구스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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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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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2대 티베리우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00px-Statue-Augustus.jpg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
(Augustus of Prima Porta). 바티칸 미술관 소장.[1]
제호 아우구스투스
(Augustus)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Julio-Claudian Dynasty)
전임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
CAIVS OCTAVIVS THVRINVS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2]
CAIVS IVLIVS CAESAR OCTAVIANVS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CAESAR DIVI FILIVS AVGVSTVS[3]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로마 제국 이탈리아 속주 놀라[4]
생물년도 기원전 63년 9월 23일 ~ 기원후 14년 8월 19일(향년 만 75세)
재위기간 기원전 27년 1월 16일 ~ 기원후 14년 8월 19일(41년)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
2.1.1. 고향2.1.2. 친부모와 카이사르와의 혈연2.1.3. 어린 시절
2.2. 내전기
2.2.1. 옥타비아누스의 등장
3. 제2차 삼두정치와 원로원파 숙청4. 황제
4.1. 아우구스투스, 프린켑스, 제정의 성립4.2. 프린켑스 제정의 속사정4.3. 행정적 재편성, 대외관계
4.3.1. 원로원 위원회 편성4.3.2. 군 감축4.3.3. 근위대 창설4.3.4. 항구적인 해군 창설4.3.5. 재정 및 세금 체제4.3.6. 영토 확장
4.4. 재위 후기
5. 평가
5.1. 공적인 부분5.2. 사적인 부분
6. 여러 매체에서 묘사된 아우구스투스


1. 개요

"나는 벽돌로 지어진 로마를 발견해 대리석의 로마로 남겨 두었다."[5]
(Marmoream relinquo, quam latericiam accepi)
-아우구스투스
로마 제정의 초대 황제(임페라토르)[6]이자 로마 제국의 첫 번째 왕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The Julio-Claudian dynasty)"의 시조다[7].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유럽 최초의 황제로 평가받는다. 본명은 옥타비아누스이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이자 후계자였다. 카이사르 사후 경쟁자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해 권력을 쥐었고, 이 시기부터 공화정 로마는 사실상 제정으로 변하게 된다. 아우구스투스가 살아있던 시절, 그는 자신을 단지 "제 1의 시민(Princeps,프린켑스)[8]"으로 자칭했다.

재위기간은 기원전 27년부터 서기 14년까지이며, 죽은 뒤, 원로원과 민회에 의해 신격화되었다. 이후 모든 로마 황제들이 그의 황제명인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를 이름으로 썼다. 또한 그를 기념하기 위해 기존의 "여섯 번째 달(Sextilis)"[9]을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한 자)로 바꿔 불렀다. 그의 뒤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큰 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인 티베리우스가 물려받았다. 옥타비아누스의 친구이자 유능한 군사적 조력자였던 장군 아그리파도 유명하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2.1.1. 고향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Gaius Octavius Thurinus). 고향에 대해서는 그가 로마 출신이지만 아버지의 고향인 벨리트라이로 가서 자랐다는 이야기와 본래 벨리트라이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가 태어난 해는 정확하다. 키케로와 가이우스 안토니우스가 집정관이던 해인 기원전 63년 9월 23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어머니는 마르쿠스 아티우스 발부스[10]와 율리아(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누이)의 딸 아티아였다. 친모 아티아는 카이사르의 조카딸이니,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조카손자(종손)가 된다.

로마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벨리트라이는 조그마한 이탈리아 소도시다. 이곳은 훗날 아우구스투스의 회고록에 나와있듯이 그의 집안[11]이 대대로 살았던 동네라고 한다.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로마에서 '소의 머리'라 불리는 곳[12]이 태어난 장소라고 한다. 이때 그의 아버지였던 옥타비우스에게 점성가는 "아이를 들에 버려야 하오."라고 경고를 했다고 한다.[13][14] 그러나 옥타비우스는 이런 경고를 무시하고 아들을 키우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 시내가 북적거려 사람들로 넘쳐나자 그의 가족들은 어린 옥타비아누스를 데리고 로마를 떠나 아버지의 고향인 벨리트라이로 옮겼고, 어린 옥타비아누스는 거기서 자랐다.

2.1.2. 친부모와 카이사르와의 혈연

아버지는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였다. 정적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내전 당시, 옥타비아누스를 경멸조로 "그의 증조부는 투리움에서 밧줄을 만들어 팔던 해방노예, 조부는 환전상, 아버지도 환전상."이라고 문구를 쓰고 네거티브 전략을 펼쳤지만 이는 로마시대 관보를 통해 완벽한 거짓 선동임을 확인할 수 있다.[15]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친아버지에 대해 "내 친부는 벨리트라이 태생의 오래되고 부유한 기사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옥타비우스 가문에서 최초로 원로원에 진출했다."라고 기록했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부유한 기사 가문 태생이었지만,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의 후손들과 달리 본인대에 와서야 뒤늦게마나 원로원에 편입된 신참자였다. 그는 법무관을 지낸 뒤 마케도니아 총독을 지냈으며, 스파르타쿠스의 옛 잔당들이 점령했던 투리움 지역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마케도니아 총독을 지내면서도 성공적으로 통치를 했다. 속주민 통치에 대해 단호하고 공정하게 통치를 했고, 트라키아의 베시아인들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기도 했으며, 동맹부족과의 외교문제에 대해서도 잘 대처했다. 이 증거는 키케로가 자신의 동생 퀸투스의 무능함을 질책하면서 쓴 편지에 나타나있다. 편지에는 "제발 마케도니아 총독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에게 동맹 부족들을 외교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배워라."라고 써 있었다고 한다.[16] 하지만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집정관직에 출마해보지도 못하고 40세가 되기 전에 로마 귀환 중 횡사했다. 그는 두 번 결혼했고 세 명의 자녀를 얻었는데, 앙카리아와의 사이에서 대 옥타비아를, 두 번째 결혼으로 맞이한 아내 아티아와의 사이에서는 소 옥타비아와 아우구스투스를 얻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친모인 아티아는 카이사르의 조카딸이기도 하지만, 명문가인 발부스 가문 출신이다. 이 가문은 아리키아 출신이고, 많은 원로원을 배출한 집안인데 그녀의 아버지 발부스[17]는 법무관을 거쳐, 율리우스 법에 따라 캄파니아 토지를 평민들에게 분배해 주는 20인 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또한 아티아의 외가는 율리우스 씨족 중 하나인 카이사르 집안이며, 외삼촌이 바로 그 유명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에게 카이사르는 외종조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카이사르 암살 후 그의 유언에 의해 율리우스 씨족의 일원이 되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되었지만, 카이사르와 이름이 같았기 때문에 보통 옥타비아누스라고 불렸다.[18]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격파하고 로마로 귀환한 이후에 그가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은 뒤에는 그냥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렸다.[19]

성경에서는 '아구스도'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라틴어 탈격을 적용한 것이라고 한다...[20]

2.1.3. 어린 시절

친가 자체가 아버지대에 와서야 원로원 의석을 갖게 된 것을 보면 그는 평민 출신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실만큼이나 옥타비아누스의 어린 시절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4세 때 아버지를 여의였고, 어머니인 아티아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21]와 재혼하자 의부(義父)인 필리푸스 밑에서 양육되었다. 12세 때 외할머니이자 카이사르의 누이인 율리아 장례식 때 추도연설을 했다. 그 이후, 로마에서 성년으로 보는 16세가 되던 해에는 외종조부 카이사르의 아프리카 전쟁 개선식에서 나이가 어려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훈장을 받았다. 이어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과 싸우기 위해 히스파니아[22]로 떠날 때, 동행하여 원정에 참전했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중병을 앓고 있다가 반절쯤 회복된 상태에서 소규모의 호위대만 이끌고 종조부 카이사르를 쫓아가 합류했는데, 카이사르는 이때 옥타비아누스가 보여준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다. 이들의 원정길은 바다에서 배가 난파되어 적들이 둘러싸고 있는 육로를 따라가는 험한 코스였는데, 약골에다 병에서 완쾌되지 않은 소년이 올바른 성품에 말을 타고 적들과 대치하는 원정길에서 군말없이 견디고 놀라운 투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자신의 조카손자를 히스파니아 속주를 탈환하고 다키아인에 맞서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일 계획을 세우기에 앞서 일리리아 지방의 아폴리니아로 보냈다. 거기에서 옥타비아누스는 그리스 문학을 공부하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2.2. 내전기

파일:external/www.daviddarling.info/Second_Triumverate.jpg

2.2.1. 옥타비아누스의 등장

옥타비아누스가 아폴로니아에서 유학을 가기 전, 카이사르는 군사적인 재능이 결여된 옥타비아누스를 위해 재능 있는 18살의 동갑내기 군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23]를 붙여줘 그리스로 보냈다. 이들은 이곳에서 함께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카이사르가 암살되었고 그가 카이사르의 후계자이자 양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와 함께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조직해뒀던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귀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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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리온(caesarion, 위)과 그리스계 이집트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사진 아래)
파일:external/book.interpark.com/jpseo71_1927295461.jpg
카이사르의 암살

카이사르의 사망 당시 겨우 18세였던 옥타비아누스를 그가 후계자로 삼은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사망 당시 (정치인으로서 젊은 나이인) 50대였던 카이사르의 나이를 감안해볼 때 카이사르가 은퇴를 염두해두고 후계자를 골랐다기보다는 10~20년 앞을 내다 보고 후계자를 선정한 것으로 보인다. 아들이 없었던[24] 카이사르는 유언장을 통해 누이의 손자인 옥타비아누스의 유일한 약점이 될 수 있는 부분을 해결해줬다. 평민 가문에서 로마에서 손꼽히는 귀족 가문인 율리우스 가문의 양자로 입적하게 하고, 그에게 카이사르 가문의 상속자이자 아들로 삼은 것이다(즉 풀네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동시에 그의 이름으로 시민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도록[25] 유언했다. 이를 통해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파의 새로운 결집점이 되었고, 가장 충성심이 많은 카이사르의 군단병들의 지지를 단번에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26] 한편 카이사르는 사후 원로원에 의해 신으로 추존되었고, 옥타비아누스는 하루 아침에 원로원 의원의 아들 내지 평민의 아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가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신의 아들이 되었다.[27]

옥타비아누스가 후계자로 지명되었다는 사실은 카이사르가 죽고 나서 공개되었는데, 내심 카이사르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고 있던 안토니우스는 크게 실망했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전쟁 당시 군단장으로 복무했고, 내전 때부터 독재관 시절까지 카이사르 다음의 2인자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으며 18세의 옥타비아누스와는 쌓아온 커리어가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당시의 안토니우스는 "왠 애송이가 끼어들어서 내 자리를 채가냐?"는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나중에 드러나듯이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정치가로서는 근본적으로 재능의 격이 달랐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카이사르의 안목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비록 죽음을 막지는 못했지만, 후계자 하나만큼은 정말 제대로 골랐다.

당시 집정관이던 안토니우스는 혈연적으로도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외삼촌이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였기 때문이다. 하여튼 충격을 먹은 안토니우스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카이사르의 유산을 옥타비아누스에게 주는 것을 거부했는데, 이는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의 이런 행동은 카이사르의 군단병들을 등돌리게 했고, 로마 민중들의 비난을 받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토니우스는 이 행동으로 카이사르파의 지지를 상당 부분 잃어버리게 되었다. 한편 숨을 죽이고 있던 키케로와 원로원파도 18세 소년이 나타나자 그를 이용해 안토니우스를 몰아내려 했다. 당시 안토니우스와 키케로의 관계는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는데, 안토니우스가 군대를 보내어 키케로를 납치해와라든가, 키케로의 집을 불태우라고 명령하기까지 했지만 여러 사람들이 만류하여 중지시켰다. 그런 증오 관계와 카이사르라는 상징의 지지 기반을 통한 정치적 야심 때문에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와 결합한다.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붙어 신랄한 비판과 훌륭한 라틴어 문법을 동원하며 당대 최고의 라틴어 교과서 정석답게 안토니우스 탄핵 연설을 했고,[28] 18세에 불과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답게 키케로를 아버지라고 부르기까지 하며 존중을 했는데, 후에 키케로를 배신해버린다.[29] 옥타비아누스는 유산을 받아 양부 카이사르의 유언을 집행하게 된다. 한편 옥타비아누스가 군대를 이용해 압박해오자, 안토니우스는 신변의 불안을 느끼고 갈리아 키살피나[30]로 도망친다.

3. 제2차 삼두정치와 원로원파 숙청

원로원은 집정관 히르티우스와 판사를 보내고, 거기에 옥타비아누스에게 최고 지휘권을 주어[31] 안토니우스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안토니우스는 패배했지만, 히르티우스와 판사는 전사했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단독으로 군대의 최고 지휘권을 갖게 되었다. 두 집정관이 하필 둘 다 전사하는 것은 불확실한데, 대표적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안티" 수에토니우스는 그의 저서에서 "이 집정관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등에 칼맞아 죽었다"고 서술한 바 있다. 즉, 지휘권을 독점하기 위한 물밑작업이라고 수에토니우스는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은게, 타키투스를 비롯한 좀 제대로 된 로마시대 역사가들은 전혀 기술하지도 않아서 교차검증이 안되고 있다. 또, 판사와 히르티우스는 심지어 옥타이아누스가 귀국했을 당시 제일 먼저 그를 만나기 위해 뛰어간 카이사르의 절친들이자 동지들이었고,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를 방해하려고 할 때마다 조언을 해주었던 인물들이 바로 이들과 다른 카이사르의 측근들 그리고 저 유명한 카이사르군단의 군단장들과 백인대장들이었다. 그러한 조언자이자 자신의 정치적 후원자를 단순히 지휘권을 이유로 살해한다는 건 아무래도 생각하기 힘들다.

어찌되었던 안토니우스가 패배하자 원로원은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군대의 지휘권을 넘기려 했는데 당시 원로원에게 있어서 당면 과제는 안토니우스를 몰아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파의 적에 가까웠는데도 그를 지지했던 것은 순전히 그를 이용해 안토니우스를 몰아내는 데 이용하기 위해서였고,[32] 키케로가 원래 지지하려 했던 것은 당연히 브루투스를 비롯한 반 카이사르파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군대 지휘권을 이용해 거꾸로 원로원을 압박해 집정관[33] 자리를 얻어낸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화해해 결정적으로 다시 원로원의 뒤통수를 친다.[34]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 역시 카이사르파였고 히스파니아 총독이었던 레피두스와 연합해 제2차 삼두정치를 성립시킨다. 성립 즉시 '삼두'는 원로원파 척결 명령을 내린다.[35][36] 수백의 사람이 희생당했으며, 그중에는 키케로도 포함되어 있었다.[37]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명부를 작성하는 비밀회의에서 옥타비아누스는 키케로의 숙청을 이틀간은 맹렬히 반대했으나, 꼭 죽여야 한다는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의 주장에 밀려 3일째에 양보하고 말았다.[38] 특히 탄핵 연설을 쓴 키케로의 손은 따로 잘려 안토니우스의 분풀이 대상이 된다.[39]

2차 삼두 정치를 한 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병력을 이끌고 그리스로 건너가 공화정 파였던 브루투스 일파회전을 치르게 된다. 첫 교전에서 옥타비아누스는 대패하였으나 두 번째 싸움에서 안토니우스가 대승하여 승리를 거머쥐게 된다. 그 결과 브루투스는 자결을 하고 삼두 정치 일파들은 최고 권력자가 된다.

그 뒤 삼두 정치파들은 영토를 나누어 가졌는데 안토니우스는 부유한 동방을 선택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선택했고 필리피에 참여하지 않고 본국을 지켰던 레피두스는 북아프리카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시칠리아 섬은 폼페이우스의 아들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고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는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영토를 휘하에 두었다.[40] 이탈리아는 명목상 공동 관리 구역이었지만 실제로는 옥타비아누스가 실권을 잡았다. 하지만 코앞의 시칠리아를 장악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숙청을 피한 공화파, 안토니우스파 등이 옥타비아누스를 심하게 견제하는 상황이었다.

이렇듯 옥타비아누스가 맡은 지역은 상황이 안 좋았는데 설상가상으로 안토니우스의 아내였던 풀비아가 로마에 남아 안토니우스의 추종자들의 리더 역할을 하며 옥타비아누스를 견제하였다. 사실상 공화파의 숨통을 끊은 주역도 안토니우스였으며, 반대로 옥타비아누스는 대패하는 등 아무런 역할을 못했기 때문에 안토니우스의 정치적 영향력은 그가 동방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내에서 여전히 강력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러한 풀비아의 방해공작을 참지 못했고, 결국 그는 정략 결혼했던 풀비아의 딸과 이혼한 뒤 풀비아가 로마의 지도자가 되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러자 풀비아는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로마를 빠져나와 이탈리아 내의 안토니우스 추종자들과 연합해 옥타비아누스와 이탈리아 내에서 전쟁을 하려 들었다. 이때 풀비아는 안토니우스의 동생이었던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연합하여 대항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들을 상대하면서 꽤 고전했는데 만일 이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동방의 병력을 이끌고 숨통을 끊으러 왔으면 옥타비아누스는 그대로 소멸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희한할 정도로 동방에 머물며 미적거렸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귀국하면 큰일난다는 것을 안 옥타비아누스는 서둘러 이를 진압했으며 풀비아는 결국 자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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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투스 폼페이우스(Sextus Pompeius Magnus Pius, 67 BC – 35 BC)

이로써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의 지배를 공고히 했으나 아직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시칠리아에서 건재한 상태였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지중해 재해권을 완전히 지배하여 이탈리아 내의 곡물 수송을 끊으며, 옥타비아누스를 위협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가 상대하기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세력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세력을 인정하고 대신 폼페이우스의 처제인 스크리보니아[41]와 결혼을 함으로써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스크리보니아는 딸인 율리아를 낳았는데 율리아는 옥타비아누스의 유일한 혈육이었으며 훗날 아그리파와 결혼해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대 아그리피나를 낳았고, 대 아그리피나게르마니쿠스의 아내가 되어 칼리굴라소 아그리피나를 낳았으며, 소 아그리피나는 네로를 낳았다.

하지만 이러한 결혼은 단지 옥타비아누스가 폼페이우스에 대항할 세력을 모으기 위한 시간 벌기용이었으며 결국 어느 정도 힘이 생기자 스크리보니아와 이혼하고 폼페이우스와 전쟁을 선포한다. 전쟁 초기에는 폼페이우스의 우월한 해군력에 휘둘리며 옥타비아누스 본인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여기서 안토니우스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는데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120척이나 되는 선단을 보내온 것이었다. 이는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에게 2만 명의 군단병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믿은 것이었는데 옥타비아누스는 전쟁이 종료되자 고작 약속한 병력의 10분의 1인 단 2천 명만 보냈다. 안토니우스의 지원 덕에 아그리파가 이끄는 옥타비아누스 해군은 나울로쿠스에서 폼페이우스를 격파하였고 이로써 시칠리아를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다.

이때 삼두 정치의 한 명이었던 레피두스는 예전에 했었던 약속대로 자신이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를 통치하겠다고 하였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시칠리아에서 나가라고 하였다. 이때 레피두스도 상당한 양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하였고 폼페이우스와의 대결 때도 같이 싸웠었다. 이에 대응하여 옥타비아누스는 대담하게도 레피두스의 캠프에 직접 들어가 장교와 병사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권유한다. 그러자 이들은 모두 레피두스를 배반하였으며, 이에 레피두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하고 그가 맡았던 최고 제사장이라는 직위를 유지하는 것을 허락받는다. 그 길로 레피두스는 은퇴하였고 따라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서쪽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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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한편 안토니우스도 옥타비아누스의 세력이 커질 때까지 방관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에서 옥타비아누스를 방해하는 풀비아와 동생 루키우스를 물밑에서 지원하는 한편, 브루투스 일파가 장악했던 동방의 행정을 개편하고 마케도니아, 아시아, 비티니아, 시리아 등 핵심 속주를 제외한 영토들을 로마에 충성하는 현지 유력자들에게 다스리게 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 정책으로 인해 많은 수의 동방 유력자들이 안토니우스의 클리엔테스가 되어 그의 편에 섰으며, 이후 아우구스투스도 안토니우스의 동방 정책을 계승했을 정도였다. 그는 이집트에 머물며 클레오파트라 7세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로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옥타비아누스와 폼페이우스의 평화 협상을 중재하기 위해 직접 이탈리아 본토까지 찾아오기도 했다. 사실 동방을 맡기 전까진 옥타비아누스의 세력은 안토니우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안토니우스가 마음만 먹었으면 옥타비아누스의 정치 생명을 끝장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의 부하들 중 대부분은 카이사르파 출신이었기에 카이사르의 오른팔과 카이사르의 양자가 직접 적대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오히려 폼페이우스와 공화파 잔당을 상대로 옥타비아누스와 연합하길 원했다. 안토니우스가 폼페이우스와 손잡고 옥타비아누스를 처리하는 것은 그의 지지 기반 상당 부분을 이탈하게 만들 우려가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파르티아 원정에 필요한 2만의 군단병의 약속을 받았는데 곧 정치 9단 옥타비아누스에게 거하게 뒷통수를 맞고 말았다.

안토니우스는 동방에서 파르티아 원정을 시작하였으나 기병 전력을 맡은 아르메니아 왕이 전선에서 이탈함으로써 패배하고 만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크라수스보다 군사적 능력이 있었으므로 군단의 많은 수를 보전하고 로마 영토로 후퇴하는데 성공한다. 그 뒤 안토니우스는 아르메니아 왕이 도망간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아르메니아를 공격하였고 그 결과 여기서 승리하게 된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뒤의 안토니우스의 행각은 눈을 의심케 하였는데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현 이집트 소재)에서 로마식의 개선식을 거행한 것이었다. 개선식은 반드시 로마 시내에서 해야 했는데, 그 이유는 이 개선식 자체가 로마에 거주하는 로마의 수호신들에게 바치는 행사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다른 도시에서 거행하는 것은 다른 도시의 신들에게 영광을 바치는 것이었고 따라서 이는 로마의 수호신에 대한 배신행위였으므로 이는 당시 다신교를 믿었던 로마 시민들에게 있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안토니우스는 제멋대로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시리아의 영토를 떼어주고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서 낳은 자신의 쌍둥이에게 동방을 분할해 물려주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로마의 경우 클레오파트라 7세와 카이사르의 아들인 카이사리온이 옥타비아누스를 대신해야 한다고 하였다. 즉 로마의 모든 영토는 클레오파트라 7세의 아들들이 몽땅 지배해야한다는 선언인 셈이다. 이에 대해 로마인들은 당연하게도 매우 분노하였으며 이에 대해 옥타비아누스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 안토니우스를 맹비난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주장은 원로원의 인가를 받지 않았으므로 무효라고 선언하고 또한 그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다.

이때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인 옥타비아와 정식으로 결혼한 상태였는데, 일방적으로 옥타비아와 이혼을 선언한다. 이에 자신의 혈육을 끔찍히 생각했던 옥타비아누스는 분노하여 불법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는데, 그것은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압수해서 공개하는 것이었다.[42] 이는 법적 약점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기도 했지만 승부수였고, 적절한 수였다. 이 사건을 통해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에게 로마의 전통과 상식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는 대신 안토니우스에게 그나마 남아있던 로마 시민과 지지자들의 지지를 단박에 사라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공개된 유언장에서 자신이 죽거든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고 적혀 있었고, 이는 설마하던 로마 시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로마에서 안토니우스의 정치적, 사회적 매장을 확정짓는 사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로마에 남아있던 안토니우스의 추종 세력은 옥타비아누스의 주장에 반신반의 하였다. 이들은 "설마 안토니우스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라고 생각하거나 "조작된 거야"라고 여기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가 막히게도 옥타비아누스의 주장은 대부분 사실이었고 그 결과, 많은 수의 안토니우스파가 옥타비아누스에게 붙게 된다.

하지만 그래도 안토니우스를 따르던 그해의 집정관들과 원로원의 1/3은 옥타비아누스보다는 안토니우스가 믿을 만하다는 판단을 했는지 로마를 떠났고, 안토니우스가 머물던 동방으로 간다.[43] 안토니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향해 이탈리아를 상륙하려고 하였고, 이에 맞서 옥타비아누스는 군대를 보내 이를 그리스에서 저지하려고 한다. 그 결과 이 둘은 아드리아 해의 그리스 서쪽에 있는 악티움에서 맞붙게 된다.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 7세를 데리고 왔는데 클레오파트라 7세는 안토니우스에게 그리스를 버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안토니우스의 병력이 그다지 열세가 아니였으므로 클레오파트라 7세의 주장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싸우지도 않았는데 본거지로 철수해버리는 것은 상대의 기세를 올려줄 뿐 아니라 그리스를 몽땅 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모든 정황을 보건데 악티움에서 그대로 옥타비아누스를 견제하며 물량 싸움으로 나갔으면 풍부한 동방의 자원에 클레오파트라의 돈까지 쓸 수 있는 안토니우스에게 유리햇을 것이다. 따라서 안토니우스의 장군들은 모두 격렬하게 반대하였는데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의견을 받아들여 악티움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이들의 철수를 저지하려고 하였고 따라서 악티움 해전이 벌어진다. 여기서 전투가 한창 벌어지는 동안 클레오파트라는 전선에서 이탈하고 안토니우스도 군대를 그대로 뒤로 남긴 채 클레오파트라를 따라 이탈함으로써 안토니우스의 해군은 괴멸된다.

안토니우스는 악티움 해전의 결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그와 클레오파트라는 악티움에서의 패배가 자신들의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악티움 이후, 안토니우스는 육지에서 군대를 모아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하면 된다라고 판단했고,클레오파트라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둘은 악티움의 싸움은 그냥 지라고 내버려두고 애초 생각대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싸우겠다고 생각하고 몸만 빠져나간 것이었다.

하지만 헬레니즘 세계에 대한 파급효과는 상상이상이었다. 로마 세력권의 동방 도시들과 주둔 군대, 장교와 시민, 동맹국들은 전혀 생각이 달랐던 것이다. 이들은 눈치를 보며 두 세력이 붙는 것을 계속 주목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이 대결은 자신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결정해야 할 바로미터였던 것이다.[44] 특히 이들에겐 과거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대결에서 얻은 교훈이 있어서 더욱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에, 안토니우스의 전략 자체는 오판 of 오판[45] 따라서 이들은 악티움의 결말을 듣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미지근한 태도를 버리고 옥타비아누스에게 붙는다. 이는 지상전에서 승부를 결정짓겠다고 계획을 세운 안토니우스에게 치명타였다.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부하들을 통제하려고 하였으나, 로마군이던 동맹군이던 상관없이 안토니우스를 계속 배신하고 탈영하였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안토니우스는 맨 처음 탈영병들과 배신자들을 강하게 처벌했고 이는 구멍 뚫린 물풍선에 송곳으로 더 큰 구멍을 내듯, 더 큰 탈영과 배신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1년 만에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 이후, 모아온 세력들 중 극소수의 병력만 제외하고 모든 기반을 잃어버린다.

한편 승자인 옥타비아누스는 서둘지 않고 승자로서 행보를 가졌다. 그는 동방의 그리스에 머물며 헬레니즘 세계의 동향을 파악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안토니우스를 배신하고 자신에게 귀순한 도시의 사절들을 환대하고 그들로부터 확고한 지지를 얻기 위해 1년 가까이를 보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거의 모든 도시들을 수중에 넣은 옥타비아누스는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가 이집트에 상륙했다. 그는 즉각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이자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도시 알렉산드리아[46]를 점령한다. 옥타비아누스에게 이는 아주 중요한 행동이었다. 그는 동족인 로마인과 안토니우스파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클레오파트라 7세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만행을 끝내고 지중해 세계의 평화를 다시 찾아오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이다.

한편 안토니우스는 그때까지도 살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자해한다. 안토니우스에게 절망적인 소식이었을 것이다. 유일한 동맹인 클레오파트라마저 죽게 된다면 안토니우스는 완벽하게 재기할 수 없다는 사망 통보였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들은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렸고, 안토니우스의 부하들은 죽어가는 안토니우스를 데리고 오게 된다. 이때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 품에서 죽는다. 안토니우스마저 잃은 클레오파트라는 이제 모든 게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안토니우스마저 죽은 마당에 "안토니우스를 유혹해서 로마를 내전에 몰아붙인 이집트"를 내세운 옥타비아누스의 다음 행보는 뻔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는 편지를 보내 자신의 왕조이자 마지막 남은 헬레니즘 세계의 열강을 살리기 위해 "카이사리온을 살려달라"고 옥타비아누스에게 간청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묵묵무답으로 일관한다. 옥타비아누스의 목표는 명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생존하기를 바랬는데, 그 이유는 클레오파트라를 로마로 데려가 정치적인 상징성을 위해 개선식에 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47] 이런 여론을 의식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있어서 클레오파트라는 반드시 로마로 동행해 개선식 때 로마 시민들에게 보여야 했던 카드이자 전리품인 것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리온은 살려둘 필요가 없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병사를 보내 카이사리온을 즉각 죽이도록 지시했다. 명령에는 "생포하지 마라. 그냥 죽여라."라고 내려져 있을 뿐이었다. 옥타비아누스에게 카이사르의 아들은 오직 본인뿐이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살려둘 필요도 없었다. 이집트가 로마의 속주가 된다면 로마인들이 끊임없이 걱정해온 밀 공급 문제는 단박에 해결될 최고의 카드였기 때문이다. 또한 카이사리온을 살려둬서 희망을 만들어 줄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 카이사르의 양아들이 카이사르의 친아들을 죽이면서 카이사르의 생물학적 계통은 끊어지게 되었다.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철저히 감시케 했다. 자신의 최대 프로젝트를 장식할 상징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의 생각은 달랐다. 로마와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을 개선식에 데리고 가서 로마 시민들에게 선보인 뒤에 연금을 줘서 살려준다고 해도, 이는 치욕이었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군주로서의 체면도 깎아내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시녀들을 시켜 몰래 바구니에 독사를 넣어오도록 했다. 그리고 독사가 든 바구니에 손을 집어 넣어 자결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옥타비아누스는 매우 실망하여 자신의 시종으로 하여금 클레오파트라의 물린 곳에서 엄청나게 많은 독액을 빨아내게 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은 옥타비아누스에게는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문을 닫았고, 이집트에서 일어날 반란거리를 또 하나 제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여기에서 또 하나의 퍼포먼스를 선보이게 되는데 그것은 안토니우스의 유언장대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를 같이 묻어준 것이다.

4. 황제

4.1. 아우구스투스, 프린켑스, 제정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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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누스의 악티움 해전 승전 기념주화. 악어는 이집트와 나일강을 상징한다.

마침내 모든 정적을 물리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최고 권력자이자 진정한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에겐 더 큰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내전의 후유증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는 로마가 분열되지 않기 위해, 카이사르의 생각처럼 강력한 정치 권력이 있어야함을 깨닫고 있었다. 18세부터 정계에 등장했을 때부터 30세가 된 순간까지 충분히 경험을 한 부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카이사르처럼 노골적으로 황제 행세를 하면서 군림할 수는 없었다. 공화정 지지 세력과 원로원이 힘에 눌리긴 했지만 언제라도 이들이 '제 2의 브루투스, 카시우스'가 안 되라는 보장은 없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큰 발표를 했다. "모든 것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에게 넘기겠다!"라는 것이었다. 양부 카이사르처럼 할 줄 알았던 원로원은 당황했고 옥타비아누스의 발표에 진심으로 환호했다.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30세를 갓 넘은 최고 권력자에게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선사했다. 이를 해석하면 '존엄한 자', 혹은 실제로 북한에서 쓰이는 그 유명한 '최고 존엄이 된다. 그러나 정치 9단의 속셈은 달랐다. 그는 명예와 존경도 얻고 알맹이들은 여전히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공화정의 뼈대를 유지하면서 나라를 '수령(프린켑스)'이자 '총사령관(임페라토르)'으로서 죽을 때까지 통치하는 '원수정(프린키파투스)'을 실시했다.[48]

이것이 역사에서 말하는 제정 로마시대의 사실상 시작이었다.[49] 그의 말처럼 "벽돌의 로마를 대리석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는 정치에서도 유효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원로원은 가마솥에 들어간 물고기처럼 이를 몰랐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투스가 자기 이름 앞뒤에 덧붙이고 다녔던 이 타이틀들은 그대로 로마 황제의 칭호가 되었으며, 로마 제국의 후대 황제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선례를 따라 앞뒤로 타이틀을 붙여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본명)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원래 성씨로 붙였는데, 결국 황제 타이틀이 된 케이스. 후일 이 정식 타이틀의 각 단어들, 즉 임페라토르와 카이사르는 그대로 황제라는 의미로 다른 유럽 언어들에 이식된다. 영어 단어 Emperor의 어원이 Imperator라는 것은 유명한 상식. 또한 독일의 카이저와 러시아의 차르도 카이사르에서 따온 단어다.

아우구스투스는 제정 실시를 기정사실화하기 위해 악티움 해전이 끝나자마자 영묘 건설에 착수해 기원전 28년에 완성시켰다. 이것이 바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족들이 매장된 아우구스투스 영묘이다. 이는 동시에 그가 안토니우스 유언장 공개 당시 약속한 "저는 죽어서 로마에 묻힐 겁니다."는 것을 실현하는 것이기도 했기에 원로원은 기꺼이 이를 환호했다.

4.2. 프린켑스 제정의 속사정

정치 천재가 만든 독특한 로마 제정은 근대 유럽이나 페르시아, 중앙 아메리카, 동아시아의 황제들과는 그 양상이 약간 달랐다. 심지어 3세기 이후 등장한 로마 후기 제정과도 달랐다. 황제는 "프린켑스(제 1시민) 이자 임페라토르(최고사령관)였고, 굳이 집정관에 오르지 않아도 호민관 특권인 비토권(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한 본국 이탈리아에 주둔 중인 군대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직할 영지로 부유한 이집트 속주에 장관을 직접 임명할 권리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의 권위를 뒷받침해주는 것은 철저히 공화정기의 잔재였으며 다른 물적 힘은 이집트에서 생산되는 엄청난 양의 곡물과 현지에서 거둬들여지는 막대한 세금,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유지되는 임페라토르로 상징되는 군 지휘권이었다.

사실상 아우구스투스가 제시한 프린켑스 제정이라는 것은 강력한 군사력을 사병화한 개인이 호민관 특권으로 그저 공화정이라는 시스템 위에 올라탄 형세였다고 볼 수 있다. 5현제는 물론이거니와 군인 황제 시대까지도 황제에 도전할 만한 인재들은 모두 공화정의 시스템이었던 명예로운 경력[50]을 통해서 능력을 검증받은 이들이었다. 국가의 제도를 완전히 쇄신하였다고는 볼 수 없었고 아우구스투스의 말처럼 공화정이 복구되었다. 다만 그 공화정을 통해서 생겨나는 국가 행정의 생동성과 풍부한 인재들은 모두 황제의 통치권 행사를 위해 사용되었던 것이다.
  • 이게 종신 대통령의 그것이라고 보는 잘못된 견해가 있으나, 현대의 발전된 민주주의 체제와는 달리 수도 로마의 여론을 제압할 수 있는 개인의 군사력과 경제력만 있으면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황제 자리에 도전이 가능했다. 여기에는 물론 권위가 뒷받침되어줘야 했지만 그 권위라는 것 자체도 지극히 아우구스투스적으로 모호한 것이었다. 로마나 타국이나 누구나 자기 힘과 명분으로 자리에 오르는 것은 똑같다. 지배 엘리트와 일반 대중의 지지 없이 마음대로 정치 못하는 것도 역시 같다.

이처럼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게는 공화정을 되살린다고 안심시킨 후, 뒤로는 야금야금 권력을 집어삼켜 제정으로 가는 길을 연 능구렁이 같은 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아우구스투스는 생전에 원로원과 타협하고 속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었다.[51]

한편 달력에는 카이사르의 이름인 율리우스가 7월을 뜻하는 'July'로, 아우구스투스가 8월을 뜻하는 'August'로써 등록되었다.

4.3. 행정적 재편성, 대외관계

4.3.1. 원로원 위원회 편성

기원전 27~18년,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도와 원로원 의사 일정을 준비할 사실상의 내각원로원 위원회를 조직했다. 종종 원로원 의원들에게 콘킬리움 프린키피스(프린켑스 자문 위원회)라고 불린 이 위원회는 15명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그해의 집정관 2명과 정무관들이 각각 파견한 대표와 제비뽑기로 선출된 원로원의원들이었고 6개월마다 인원을 교체케했다. 서기 13년, 아우구스투스는 위원회의 기능과 구성을 수정했다. 여기에는 황제의 가문 사람들인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 사람들이 새로이 들어가고 기사 신분들이 보강되었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결코 오늘날의 내각이 아니었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모여 활동했지만, 절대 제국의 각종 정책들을 황제와 토론하고 결정하지 않았다.[52]

하지만 여전히 실권은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 등 친한 원로원 의원들, 전문 입법가와 행정각료, 황제 가문의 친구들과 일원들이 쥐고 있었다. 이들은 비공식적이고 비밀리에 모임을 가지며 정부의 정책, 원로원과 민회에 상정할 법률, 속주 총독 인선, 선거 때 아우구스투스 입맛에 맞는 후보자 천거 등을 결정하고 제국의 재정, 외교, 법, 종교, 행정을 결정했다.

4.3.2. 군 감축

아우구스투스는 내전이 끝난 후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함께 60개 군단, 50만 명 이상이던 병력을 25개 군단, 30만 명(군단병 15만+보조병 @)으로 감축했다. 또한 군인들의 복무 기간을 군단병 20년, 보조병 25년으로 설정하는 작업을 수행했다.[53] 또한 세계 최초로 군복무를 마친 퇴역병들(VETERANUS, 베테랑)에게 로마 시민권 및 퇴직금을 지급하는 제도를 마련하였다.[54] 작업을 성공적으로 완료함으로써 로마 제국은 약 2세기 가량 유럽,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에 사는 5,000만명의 사람들을 15만명의 병력으로 지킬 수 있었다. 또한 항구적인 직업군인 제도가 마련되어 중앙에서는 확실한 계산 아래 제국의 국방과 군행정 업무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 다만 여기서 로마인 이야기에 나오는 "한국은 5,000만명의 인구를 약 60만의 군대로 지키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데, 현대 한국군은 고도로 발달된 겹겹의 종심 방어를 실천하는 현대 군대[55]며, 역시 고도의 복잡성을 가진 무장 반란 단체와 대치 중이다. 또한 지켜야 할 전선의 길이도 약 250km 정도로 사방 수천 km에 달하는 국경을 지켜야 하는 로마와 다르다. 이런 것을 무시한 단순 비교는 아주 위험하다. 이 당시 로마는 파르티아를 제외하면 이렇다할 세력을 가진 조직화된 적대 세력이 없었고 파르티아마저도 로마의 그것에 비하면 군사력과 경제력이 단연코 열세였던 데다 접경하는 국경도 전체 국경에 비하면 소소했다. 그러니 군사 전략상으로는 아주 위험천만한 선방어로도 한동안은 괜찮았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는 2세기에 와서는...

4.3.3. 근위대 창설

아우구스투스는 본국 이탈리아에 합법적으로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를 만들어 주둔시켰다.이들은 9개 보병대로 구성되었고 로마 시민들로만 충원되고 구성된 집단이었다. 이들은 즉시 황제의 명령을 직접 받고 수행하였으며 로마와 본국에서 근무하면서 많은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들의 복무 기간은 16년 밖에 안되었고, 375데나리우스의 연봉+ 보너스, 퇴직금 5천 데나리우스를 받았다. 또한 많은 수가 일반 군단의 백인대장 또는 대대장으로 진급했다.(한마디로 원로원이 있는 로마에 자신의 사병을 만들어놓고 무언의 정치적 협박과 압력을 가한 것)

4.3.4. 항구적인 해군 창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대결과 악티움 해전은 아우구스투스에게 항구적인 해군 창설을 필요케 했다. 이제 지중해는 국제해가 아닌 "로마의 호수"였고, 이곳의 해적은 곡물 수송선과 무역선을 위협하는 존재로써 반드시 씨를 말려야 했다. 따라서 그는 1개의 주력 함대를 나폴리 만에 자리잡은 미세눔에 주둔시켜 서(西) 지중해를, 아드리아 해의 라벤나에 1개를 주둔시켜 동쪽의 안전을 지키게 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와 갈리아 속주의 포룸 율리이(오늘날의 프랑스 프레쥐스)에 해군기지를 추가로 건설했다. 더불어서 라인 강, 도나우 강, 갈리아 전역의 강들, 나일 강에 보조 소함대들을 만들어 순찰케 했다.

4.3.5. 재정 및 세금 체제

아우구스투스는 내전으로 원로원이 관장하는 아아라리움 사투르니의 기금이 고갈되고 세입이 탕진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다 그는 로마의 200,000명 가량의 빈민계층에 대해 무상 곡물을 제공하고 공공오락 자금, 도로 및 거리 건설, 행정, 국방 등에 들어갈 자금이 심각한 문제로 다가왔다. 따라서 그는 더디고 신중하게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먼저 기원전 28년, 국고 관할권을 경험없는 콰이스토르들에게서 프라이토르(법무관) 경험자들로 바꿨다. 더해서 기원전 23년 이후에는 매년 추가 선출된 2명의 프라이토르들에게 국고 관할권을 이관케 해서 황제가 직접 국고를 장악하도록 만들었다. 더해서 각 속주에 피스쿠스(무화과 광주리) 라고 불린 기금을 설치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군단 병사들의 월급을 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추가로 서기 6년에는 참전 전역병들의 연금 지급을 원할케 하기 위해 아이라리움 밀리타레라는 군대기금을 만들어 국고 부담을 줄였고, 새로이 막대한 황제 개인 재산을 담당하는 기금을 두었다.

4.3.6. 영토 확장

갈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에 비해 아우구스투스는 비교적 내정 위주의 황제인 이미지가 있으나 아우구스투스 역시 실제로는 매우 공격적인 확장 위주의 정책을 폈다.

아우구스투스는 초대 황제라는 입지의 불안정한 점 때문에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데에 많은 신경을 썼다. 그래서 그는 로마시민들이 지도자의 덕목으로 가장 높이평가하는 군사적 업적을 보여주길 원하였다. 그래서 그는 군사령관(임페라토르)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하기 위해 공공연하게 로마는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선전하였다. 팍스 로마나라는 단어도 이때 만들어진다. 그는 그러한 선전을 함과 동시에 클레오파트라의 사후 공석이 된 이집트의 넓은 영토를 모두 로마에 편입시켰고, 그 후 유다 왕국이 통치하던 팔레스타인 일대와 소아시아의 구 폰토스 영토, 스페인 북부의 미점령지, 그리고 알프스 지역을 모두 점령, 로마의 행정구역으로 편성한다. 그 작업이 끝난 뒤 그는 곧바로 파르티아와 조약을 맺어 시리아 일대의 국경을 확정짓는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일리리아와 도나우 강사이에서 살고 있던 달마티아 부족에 대해 공격을 감행하는데, 그들을 공격한 이유는 그 지역을 정복함으로서 도나우 강을 로마의 북동쪽 국경선으로 확정짓기 위해서였다. 로마인들의 침입에 달마티아 족은 강경하게 반발하였으나 아우구스투스는 단호하게 공격하였고 마침내 이들을 격파한다. 이 후 그 일대를 두개의 속주로 개편, 로마의 영토에 편입시킨다.

그 지역을 정복하는 동안 게르마니아의 정복 사업 역시 추진한다. 이는 라인강 건너에 있는 엘베강을 로마의 국경선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그는 기존의 라인강은 도나우강에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다고 보았다. 라인강과 도나우강 방벽은 길이도 길지만 두 강의 사이에 위치한 알프스로 인해 하나의 통합된 국경선으로서의 관리가 불가능하였다. 만일 엘베강과 도나우강으로 국경을 확정짓는다면 국경선의 길이는 수백킬로미터 가까이 좁혀질 것이며, 두 강 사이에는 알프스와 같은 지형적 장애물이 없으므로 편리한 교통을 통한 보급로의 확보로 인해 한 명의 총사령관이 하나의 국경처럼 통합 관리할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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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는 엘베강과 라인강 사이의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그의 일족들인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를 파견하였는데, 이는 그 지역을 정복하는 것이 매우 중대하다고 판단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드루수스는 로마 선단을 이끌고 북해를 통과해 북상, 지금의 덴마크 일대인 엘베강 근처에 내려 공격할 정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낙마사고로 죽게 된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상당한 영토를 정복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미 노년이 된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의 후계 구도를 구축하기 위해 그를 로마로 소환한다. 그 뒤 티베리우스가 로도스 섬으로 잠적해버리는 등의 소동을 겪게 되고 아우구스투스는 그 와중 우선은 점령한 지역의 안정화를 시도해보려 하였다.

지역 안정화에 적합한 인재로는 유능한 행정가가 적임으로 보였고,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이에 재능을 보인 바루스를 총독으로 부임시켰는데 이는 인사상의 큰 실책이었다. 바루스는 그 지역의 통치를 맡아 동방에서 하던 대로 했었으나 이러한 로마식 행정은 게르만족에게는 영 좋지 않은 압제로 받아들여졌기에 헤르만(아르미니우스)가 대반란을 일으켰고 바루스는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매복해있던 게르만 군에게 공격을 받아 3개 군단과 함께 운명을 달리하였다. 이로써 아우구스투스는 라인강 동쪽의 점령지를 모두 상실하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비보를 접하고는 "바루스! 내 군단을 돌려줘!"하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3개 군단은 대군이라 보기는 어려운 병력으로 해당 군단이 소멸했다고 점령지를 모두 상실하게 된 것은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로 그 군대에는 바루스를 비롯 그 지역을 통치하는 관료들을 대거 동원했었는데 군대가 소멸하면서 점령지의 통치 집단이 증발해 버렸다. 둘째로 해당 전과에 고무된 게르만 족이 대규모로 봉기하여 군단기지를 공격하였고, 3개 군단이 소멸된 직후의 공백으로 인해 그 기지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여 그곳이 모두 점령당한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효율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점령지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 주둔시켜 놓은 것에 기인한다. 셋째로 아우구스투스가 벌인 지나친 팽창 정책으로 인해 병력들이 지리적으로 멀리 배치된 데에 최소한으로 감축한 군단수, 또한 임페리움을 황제가 독점하는 새로운 관료 시스템으로 인해 3개 군단의 소멸을 메울 수 있는 병력이 즉시 동원되어질 수가 없었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그 지역은 상실하게 되었고, 이에 대해 아우구스투스는 심하게 자책하긴 하였으나 엘베-도나우 리메스의 구축은 반드시 해야한다고 보았는지 복귀한 티베리우스를 다시 그 지역에 파견하여 재정복을 꾀한다. 그러나 고령이었던 아우구스투스는 곧 노환으로 인해 죽게 되고 뒤이어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는 그의 후임인 총사령관 게르마니쿠스에게 그 지역의 정복을 맡긴다. 게르마니쿠스는 군사적 재능을 보여 연승을 거두나 티베리우스는 그를 로마로 소환하고 병력을 모두 철수시킴으로서 엘베강을 국경선으로 삼고자 한 아우구스투스의 계획을 백지화시킨다.

결국 엘베강과 도나우강에 이르는 리메스의 구축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아우구스투스는 역대 황제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황제였으며, 그가 확립한 시리아와 도나우 강의 국경선은 수백년에 걸쳐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4.4. 재위 후기

서기 14년 8월 19일, 로마를 떠나 나폴리로 유람을 떠났던 늙은 황제는 놀라에서 갑자기 용태가 악화되었다. 임종 직전에 티베리우스를 불러 은밀한 대화를 나눈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품에서 평온하게 세상을 떠났다.[56] 향년 76세. 그가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
Acta est fabula, plaudite(이야기는 끝났다. 박수를 쳐라.)

그러나 이 에피소드의 근거는 수에토니우스인데, 정작 수에토니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이 유언을 그리스어로 남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의 유언은 위 라틴어 번역보다 훨씬 더 길었다. 우선 그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내가 인생에서 나에게 주어진 배역을 잘 연기한 것 같더냐?"라고 묻고는 그리스어로 이렇게 말했다.
εἰ δὲ πᾶν ἔχει καλῶς, τῷ παιθνίῳ, δότε κρότον, καὶ πάντες ὑμεῖς μετὰ χαρᾶς κτυπήσατε. (그렇다면 기쁜 목소리와 박수로 이 배우에게 찬사를 보내다오.)

혹은, 야사에 따르면 죽기 직전까지도 후계자인 티베리우스나 주변 사람들에게 "게르마니아에서의 일은 내 탓이 아니지?"라고 물으면서 그 일을 끝까지 후회했다고...

로마로 운구된 황제의 유해는 화장되어 자신이 지은 아우구스투스 영묘 중앙에 안장되었다.

5. 평가


5.1. 공적인 부분

아우구스투스는 초대 황제이면서 오랫동안 재위한 몇 안되는 황제였으며 뛰어난 정치력으로 유능한 내정을 펼쳤고, 이 덕분에 로마의 제정은 안정적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시민들의 질서와 생활환경을 정리하고 내실을 튼튼히 하여 로마제국을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장수국가로 만든 원동력을 키웠고 그가 통치하는 기간엔 물레방아를 발명한 비트루비우스, 위대한 역사가인 리비우스와 라틴 문학에 중대한 진보를 가져온 베르길리우스[57]와 같은 위대한 학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의 치세는 매우 안정적이었으나, 말년의 토이토부르크 전투로 군단 3개 말아먹은 것이 흠으로 평가받는다. 정규 군단병에 기타 보조병력까지 합치면 2만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실 카이사르로부터 군사적인 재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은 아우구스투스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사망한 이후 카이사르의 판단을 거스르고 게르만 정벌에 나선 것에서 비극은 예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적 실수가 곧 제국의 위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공화정이 무너지고 제정이 확립된 것이 궁극적으로 로마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는지 아닌지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가령 로마의 공화정은 당시 넓은 땅을 통치하는데 뚜렷한 한계를 보였다. 예를 들어 당시 로마를 통치하였던 원로원은 자신들의 이익 수호를 최우선시하여 국익에 반하는 정책을 여러 차례 가결하였고 또한 과거 효과적으로 민심을 반영했던 시민 집회들은 몇몇 정치가들에게 의해 통제되어 이들의 이익을 반영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가령 로마의 공화정 말기엔 로마의 영토가 엄청나게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평민 집회는 로마 공화국의 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당시 평민 집회는 많아봐야 1~2만 정도만 참여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고작 이 정도의 숫자로 지중해를 거의 다 통치할 수 있는 거대 국가의 정책을 좌지우지 한다는 것은 코미디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마리우스나 폼페이우스의 경우 자신의 퇴역병들 몇천명을 로마로 부르는 것만으로 평민집회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공화정으로는 거대 로마 국가를 통치하는데의 한계는 분명히 있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권력을 잡은 뒤 제정으로 탈바꿈시킨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제정은 여러 문제점이 있었다. 로마인들이 을 바라지 않는 정치적 상황을 우회하기 위해서 아우구스투스는 기존 로마 공화정에 존재하던 합법적인 직책 및 제도를 조합하여 로마 "황제"라는 지위를 만들었다. 이는 다음과 같다. (종신) 호민관 특권, 군 통수권자(임페라토르)의 권위와 권한, 원로원의 1인자(프린켑스), 대제사장(폰티펙스 막시무스)의 지위. 그리고 비공식적으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계승자라는 점에서 발생하는 권위, 마지막으로 황제가 가지는 막대한 양의 부(富).[58]

그러나 제1인자 혹은 아우구스투스란 직책은 당시로서는 편법에 가까웠다. 황제의 지위는 이러한 여러가지 "특권"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취약점이 많았다.[59] 최고 지휘관이었던 황제가 그저 세습에 의해 권력을 손에 넣었다곤 하나 사실 세습이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원로원과 군대의 지지가 있어야 했고, 또 최고 지휘관이 반드시 국가 원수여야만 한다는 관념만큼은 여전히 로마에서 불식되기 어려웠다. 황제로서의 직위가 이런 편법에 기대야했다는 것은 로마 제국의 정체가 어느 일면은 도시국가 수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시민들이기도 한 군인들에게 옹립되면 누구든 '임페라토르'가 될 수 있었다. "무장을 한 자유민"인 로마 병사에게 자신의 지휘관=임페라토르를 선출하는 것은 그들 고유의 권리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의 권위가 흔들리면 곧 각지에서 임페라토르가 선출되어 잦은 내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들의 목표는 "로마"가 되었는데, 그것은 원로원의 추인을 받아 호민관 특권을 얻어 자신의 지위를 정치적으로 반석에 올리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프린켑스"로서 시민들에게 존경과 지지를 받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황제들은 빵과 서커스를 풀어서 서민들에게 선심을 베풀었다. 결국 제정 체계는 처음부터 내재적인 문제를 가지고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제위가 세습됨으로써 엘리트 간의 경쟁엔 분명한 한계선이 그어졌는데 그 이유는 공화정 시절의 명예로운 경력은[60] 명백히 로마 정부의 전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으나 황제의 출현으로 인해 황제의 정부가 새로 생김으로써 원로원의 정부 내에서만 권한을 행사하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는 계속 공화정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로마의 정부를 그대로 남겨둔 채 황제 고유의 정부를 따로 출현시킨다. 따라서 집정관, 안찰관, 재무관 등 과거 로마 정부의 관리직은 예전처럼 시민에 의해 선출되나 따로 황제 정부를 구성하고 이 자리엔 자신의 측근들을 임용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명예로운 경력은 말 그대로 명예직처럼 돼버리고 점점 황제 정부로 힘이 쏠리게 된다. 하지만 황제 정부의 경우 명예로운 경력을 통해 시민들에게 인정받아야 되는 것이 아닌 황제가 알아서 임명하는 것이었으므로 황제와의 연줄이 필수적이었다. 때문에 황제와 혈연이나 인맥을 통해 인연이 닿아야 했고 능력 혹은 군사적 업적으로 시민들에게 어필하여 출세하는[61] 상황은 불가능하였다.[62] 황제와 특권이 중복되는 호민관은 아예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게다가 황제는 원로원 계급으로 구성된 엘리트의 성장을 우려해 기사 계급[63]을 중용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중용되는 기사 계급들은 모두 황제와 친한 사람들이였고[64] 우수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원로원 계급의 젊은이들이 뚜렷하게 출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제정의 로마는 과거와 달리 귀족 출신인 우수한 인재들의 정치 참여가 제한된다. 또한 아우구스투스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은 가문들은 제위 계승권자로 여겨져 숙청되기도 했고, 때문에 더욱 정치적 움직임을 제한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정 시대 로마가 공화정 로마 시대보다 명장이 줄어들고 전투 역량이 퇴보했다는 것은 분명한 오해다. 로마는 원수정 시기에도 사소한 전쟁 같은 경우 해당 지역을 담당하는 군단장에게 맡기면 되었으며, 황제 혹은 황제 대리라 할 수 있는 총사령관들이 나서야 할 때는 전면적인 공세나 적의 대군이 쳐들어온 큰 전쟁에 불과했다.

공화정기 로마는 우수한 장군이 동시대에 즐비하였다는 말이 있으나, 그때는 장군들이 사병을 가지고 공세적인 전쟁이 가능했던 시기였다. 정복할 만한 곳은 다 정복했고 주요 임무는 지키는 게 대세인 시대에서, 설령 우수한 장군들이 있었어도 두각을 드러낼 수가 있을까? 이건 전쟁의 패러다임이 공성에서 수성으로 바뀌어서 그렇지 제정이 되자 갑자기 장군들 역량이 퇴보해서는 아니다. [65]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로마 제국 외곽의 주변부 사회들은 꾸준히 문명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군제와 전투력 그리고 장비가 향상되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하면 안 된다.[66]

제정 로마가 이민족이나 사산조 페르시아에 대한 뚜렷한 군사적 우위를 점한 원인이 원수정 체제라는 생각도 오해며, 때문에 오현제 시대 이후 눈에 띄는 쇠퇴를 거듭하게 된 걸 공화정 시기에 있었던 몇 가지 요소의 미비로 돌리는 시각 또한 아주 문제가 있는 시각이다.

본디 체제란 건 잘될 때도 있고 못 될 때도 있다. 제정으로 바뀌고 나서 단 200년이라고 말하는 얘기가 있으나, 200년이 과연 그렇게 짧은 세월인가? 200년이면 전성기를 구가하던 국가가 멸망의 위기를 겪고 다시 짧으나마 제 2의 전성기[67]를 맞게 될 때까지의 세월이다. 그 세월 동안 로마에서는 외부 문제가 거의 없이 전성기를 구가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 쇠퇴기에 들어섰어도 제국이 공화정으로 회귀하지 않은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로마의 공화정 체제는 사실 적어도 카이사르가 살해당한 시기에서는 일종의 금권정치적 요소가 너무 강하게 부각된 과두정에 지나지 않았으며, 특정 시대의 몇 가지 요소의 미비로 나중 시대의 쇠퇴가 시작된다는 생각은, 너무나도 편향된 잘못된 관점이다.[68]

하지만 여전히 일부 지식인들은 공화정 로마가 제정보다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의 공화정은 카이사르 이전 시기부터 제국을 통치하기엔 여러모로 부적합한 모순을 노출하긴 하였으나 인류 역사에서 몇 가지 획기적인 장치를 발명한 정치 제도인 것이 분명하며, 이는 로마 공화정을 운영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많은 법들이 훗날 근대 법체계의 기본이 된 것에서 입증된다. 때문에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는 노골적으로 공화정을 옹호하고 제정을 비하하는 입장을 취한다. 이들의 서술에서 나오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거리낌 없이 모략을 사용하고 공화정 인사들이 피해자인 것으로 서술된다.

당시의 로마 공화정을 현대의 공화정과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며, 사실상 도시국가 체재의 연장선인 측면이 분명히 강했다고 봐야한다. 따라서 로마의 영토가 넓어지고 수많은 속주가 생기는 상황에서는 로마 공화정이 분명히 한계를 드러냈고 개혁이 확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가 제시한 원수정의 대안이 다소 불안정했던 것도 사실이며, 이런 지속적인 불안감 때문에 제정이 확립된 지 먼 뒷날에도 기존의 공화정에 대한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없어지질 않았던 것이다.

사실 로마식 공화정에 대한 이 환상은 현대 사회에서도 없어진 게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당장에 "보편제국"이라 불렸던 고대 로마의 역사를 해석하는 데 있어 공화정 로마의 행정적 한계는 그다지 인식하지 못하고 제정 로마 때 늘어난 체재적 불안감만을 강조하는 사관을 통해 현대 보수주의 정당들의 가장 큰 이론적 기반들 중 하나가 형성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아우구스투스의 후견인이었던 카이사르의 경우도 당시 제시되어온 대중주의적 정책을 일부 수용하는 과정에서 권력을 얻었고 이것이 아우구스투스에게 큰 정치적 기반이 되어줬기 때문에 대중주의에 비판적인 보수주의 입장에서는 이론적으로 좋은 예시가 된다.

그러나 로마 공화정은 그것을 지키고자 했던 원로원의 전횡으로 인해 그라쿠스 형제가 암살 당했을 때에 이미 그 정치적, 현실적인 정당성을 거의 상실했다.[69] 결론적으로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제정은 분명 문제점이 있었으나 그게 공화정을 무너뜨려서 그렇다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 아우구스투스가 주목받을 때에는 이미 공화정은 실제 사례처럼 서서히 다른 제도가 되던지 그냥 완전히 망해서 오랜 기간 동안 금기시되던지[70] 둘 중 하나로 갈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의 가장 큰 원인 제공자는 바로 오랫동안 개혁을 거부한 부패한 공화주의자들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카이사르와 그를 이은 아우구스투스는 젊은 시절부터 마지막까지 민중파였다. 원수정을 확립한 사람들이지만 정책적으로는 언제나 귀족 vs 민중파의 로마사에서 민중파의 입장이었고 지금으로 따진다면 우파보다는 좌파적인, 그라쿠스 형제를 이은 정책들을 폈다. 특히 아우구스투스의 치세에 백성들의 삶이 크게 높아진 건 사실이다. 아우구스투스가 말년에 나폴리를 들렀을 때 황제를 알아본 어부들이 "우리가 이렇게 잘 사는 것은 모두 당신 덕분이다"라는 식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71]

5.2. 사적인 부분

아우구스투스는 밀짚머리에 회색 눈동자를 가진 미남이었다. 수에토니우스가 한 묘사를 보면, 아우구스투스는 보기 드물게 잘생겼는데 반짝이는 맑은 눈, 금발 곱슬머리, 불규칙적인 치아, 갈매기 눈썹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키가 작아 키높이 신발로 단점을 숨겼다고 한다. 하지만 당대의 기록 담당자였던 마리우스는 그의 키를 지금의 기준으로 약 170~175cm 정도로 기록하였는데 당시 로마인의 평균키를 생각하면 결코 작은 키가 아니다. 수에토니우스가 후대의 사람인데다가 그의 저서가 신빙성이 떨어지는 점, 마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해방노예 출신이라는 점을 참고하여 각자가 판단하면 되겠다. 그리스 조각가들도 그의 외모를 보고 예찬했다고 한다.

다만 그는 이성적인 능력은 무척 뛰어났지만, 양부 카이사르와 달리 상대방의 감정을 전혀 배려할 줄 몰랐다. 즉, 신체적인 매력은 카이사르 이상이었을지 몰라도, 인간적인 매력과 호소력은 카이사르에 비해 훨씬 떨어졌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그는 감정이 없는 차가운 괴물에 가까웠다. 그는 아버지로서의 정이 없었고,[72] 가족조차도 마치 그의 신민들을 다루는 것처럼 통치했다.[73] 그는 그의 주변 사람들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정략과 논리에 의해서만 일을 처리했다. 주위 사람들의 사생활은 무시되었고, 주변 사람들의 거의 모든 이혼과 혼인은 아우구스투스의 뜻대로 처리되었다.

당연하게도, 그가 생전에 그렇게 지키고 싶어했던 혈연으로 탄생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서는 혈연관계에 대한 집착과 철저하게 효율만을 중시한 아우구스투스의 행동 및 아우구스투스의 장수로 인한 부작용으로 끊임없이 잡음이 일었다. 먼저 정치적 판단 아래 복잡하게 꼬인 혈연관계 탓에 후계문제가 복잡해졌다. 생전에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가 41년이라는, 너무 오랜 기간 동안 제위에 머무르는 바람에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처럼 아우구스투스보다 먼저 죽어버리거나, 문제를 일으켜 객사(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해 버렸다.[74] 또 리비아가 첫 결혼에서 얻은 양아들 중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과 주변에게 ‘두 손자[75]와 함께 공식 후계자로 진지하게 생각한다’고 말해왔던 조카딸의 남편 대 드루수스(네로 드루수스)[76][77][78]처럼 불의의 사고로 요절해버렸다.

이런 까닭에 그의 제위를 이어받은 것은 그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결혼으로 혈육을 낳아주지 않았던 양아들 티베리우스였다. 하지만 그의 ‘일방적이고 지나치게 차가우며 상대의 감정을 고려치 않은 행동들’은 자신과 여러모로 비슷한 성향을 가진 양아들 티베리우스조차도 지치게 만들었다. 따라서 유아기때부터 그의 손에서 40여년간 아들로 자라온 티베리우스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시적으로 은퇴하기도 했다.[79] 아울러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자신의 혈통이 아니란 이유로 죽은 이후 유언장에서도 진정한 후계자로 여기기보다는 한낱 대행 내지 징검다리로서 자신의 혈육들이 자리에 오를 때까지 기반을 잡고 자리에 앉아있는 존재로 치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80] 이는 치명적인 실수였고, 생전에 논리와 판단대로 제단하고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꼬아 놓은 정략혼들은 자신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이 단명할 단초를 제공했다.[81]

위에서 언급했듯 혈육에 지나치게 집착한 그는 아내 리비아가 데려온 두 의붓 아들과 친누나 옥타비아의 자녀들, 외동딸 율리아를 ‘문자 그대로’ 정략결혼과 후계자 양성의 도구로 이용했다.[82] 특히 유일한 혈육 율리아는 말 그대로 후계자 양성 도구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녀는 부모가 일찍 이혼해 어머니 손에서 크다가 이후 관심도 크게 주지 않던 아버지에 의해 처음 고종사촌인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누나 옥타비아가 클라우디우스 가문에 시집가서 낳은 아들)에게 시집갔다. 하지만 남편이 일찍 요절하자 그녀는 다시 아버지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 아버지의 동갑내기 친구이자 오른팔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결혼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사위 아그리파가 죽자 율리아를 아내 리비아의 친아들 티베리우스에게 시집보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티베리우스의 가정생활까지 파괴해버렸다. 당시 티베리우스는 멀쩡히 아그라파의 전처 소생인 빕사니아와 결혼해 아들 소 드루수스를 낳고 금슬도 좋았는데, 아그리파 죽음 후 “아우구스투스의 정치적 판단대로’ 율리아의 재혼 상대로 정해져 최대 피해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83]. 그렇다고 그 결혼이 행복했으면 다행인데, 아무리 티베리우스가 노력해도 율리아의 난잡한 사생활과 두 사람의 성격차,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죽음 등이 연이어 터지면서 끝내 파탄나고 만다. 이후 지쳐버린 티베리우스는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로도스 섬으로 떠나버렸고, 율리아는 신전에서 공개 섹스를 하는 등 문란한 생활을 일삼다가 아버지가 만든 간통죄로 고발당해 유배당하게 되고, 티베리우스 황제 때 죽게 된다(티베리우스가 굶겨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확실하지 않다.).
  • 이 유배는 율리우스 안토니우스(안토니우스의 아들[84])와 율리아의 간통이 표면적 이유였고, 율리우스 안토니우스는 사형당했다. 이에 대해서는 율리우스 안토니우스와 율리아가 반역을 도모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거나 어린 동생들을 황제로 삼고 섭정을 하려고 했으며, 딸을 죽일 수 없었던(부정에서든, 율리아의 자손들의 제위 계승을 위해서든) 아우구스투스가 간통죄를 적용해 처벌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85]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와 <내전기>와 같은 생동감 넘치고 열정적인 서술에 비해서[86] 아우구스투스는 매우 무미건조하게 그의 업적을 나열한 <업적록>만을 남겼다.

전반적으로 절제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평시 식사 양이 매우 적었다고 한다. 음식이 생각날 때마다 먹었지만, 빵, 대추야자 약간, 물 정도를 조금씩 먹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며,[87] 아마 이 자주먹는 소식이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줬을 것으로 추정된다. 77세까지 살았는데, 당시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꽤나 장수한 것.[88] 그리고 궁전 역시 카이사르가 머물던 최고 제사장 저택으로 검소했다.[89]

아우구스투스의 친구 중에 베디우스 폴리오(Publius Vedius Pollio ?~15)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실수를 저지른 노예를 곰치[90]에게 먹이로 주는 자였다. 그리고 가이우스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어느날 아우구스투스가 베디우스 폴리오의 집에 방문하였을때 한 노예가 비싼 유리잔을 깨트렸고, 평소대로 곰치의 밥으로 던져질 위기에 처했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우구스투스는 그 집안의 모든 유리잔을 가져오게 해서 자기 손으로 모두 깨트렸다고 한다.[91] 이에 아우구스투스의 의중을 알아챈 폴리오는 사색이 되었고, 노예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으며 풀려나 자유인이 되었다고 한다.(출처: Publius Vedius Pollio, Naturalis Historia, 9장 29절)

그런데 의외의 모습으로 좋아하는 취미 중 하나가 도박이었다. 당시 로마는 사투르날리아 축제가 열리는 12월에만 도박을 허용해주는 도박에 부정적인 국가였는데, 아우구스투스는 기간에 상관없이 도박을 매우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본인이 양자 티베리우스에게 쓴 편지에서도 확인되는데 주로 주사위나 홀짝 도박을 즐겨했다고 쓰고있다. 돈을 따려고 도박을 했다기 보다는 정치적인 면모도 강해서 일부러 돈을 잃어주거나 하면서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92]

태양력에서 2월이 짧아진 이유가 아우구스투스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로마 달력에서도 현재 1월과 2월에 해당하는 Ianuarius와 Februarius는 각각 29일과 28일이었단걸 모른 오해다. [93]

6. 여러 매체에서 묘사된 아우구스투스

미국 드라마인 '로마(ROME)'에선 어린 나이에 권모술수를 부릴 줄 알고 타고난 두뇌로 비범한 명석함을 빛내지만[94] 결벽증과 냉혈적인 성격 등의 인성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95]

어릴 적에는 늘 어머니인 아티아에게 허구헌날 애송이 내지 바보 취급을 당하며, 여기에 치를 떤다.[96][97] 그러나 이 시절에도 확실히 비범한 모습도 보이는데 티투스 풀로가 루시우스 보레누스의 아내 니오베의 불륜 사실을 조사할 때에 동행하여 불륜 상대남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귀신처럼 꿰뚫어보았고 고문 지시도 아무렇지도 않게 내린다.[98] 이 사실은 자신들이 묻은 것으로 루시우스가 이 사실을 영원히 알지 못하게 하라는 등 인간적인 면모도 보여줬다. 그냥 이 때는 똑똑하지만 덜 성숙하고 인간적인 어린 시절의 옥타비아누스를 표현했다고 보면 되겠다. 훌륭한 로마인이길 원하는 어머니의 등살에 떠밀려서 본인이 제일 하기 싫다는 검술훈련 등을 하고 강제로 전쟁에 나가게 된다. 시즌 1에서 배우는 마스터 앤드 커맨더에서 영국 해병 생도 블랭크니 역을 맡은 맥스 퍼킨스. 더빙판 성우는 김영선.

시즌 2에서는 제멋대로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자신의 어머니 아티아에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다 결국 어머니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모욕하는 대형사고 치고 집을 뛰쳐나온다. 그리고선 돌아올 땐 강력한 군대와 유능한 친구들을 끌고,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냉혈한에 새디즘, 마조히즘[99]까지 있는 카리스마형 캐릭터로 재등장. 이 캐릭터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그의 어머니와 누이를 꾸짖을 때와 클레오파트라 대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이 인간이 얼마나 냉철한 인간인지 보여준다. 특히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사망뒤에 클레오파트라와 대면때 클레오파트라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면서 결국 자신의 의지를 끝가지 관철시키고 강요시키는 모습은 일부 시청자들에게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100] 시즌 2에서 배우는 사이먼 우즈. 더빙판 성우는 김일.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소설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서는 3번째 아내이자 초대 황후인 리비아에게 쉽게 조종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리비아가 자신을 독살할 것을 두려워해 음식을 거절하고 직접 딴 무화과로 연명하나 리비아가 그 무화과에 독을 발라두어 결국 독살당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2000년대 초반 로마사를 주제로 한 임페리움 시리즈 시즌 1에서 주인공으로 나온다. 젊은 날의 활약(?)을 회상하면서 노년의 아우구스투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보통의 매체에서는 잘 드러내지 않는 아우구스투스의 안습한 가족사를 주제로 하고 있다. 즉 로마를 위해서 딸의 인생을 망칠수 밖에 없는[101] 아버지의 고뇌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최종보스는 아우구스투스를 암살해서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는 율리우스 안토니우스..마지막에 임종 장면에서 부인, [102] 후계자 티베리우스와 신하들 사이에서 유배지를 탈출한 율리아가 나타나서 화해를 하는 장면은 명장면. 여기서 아우구스투스는 피터 오툴.

시뮬레이션 게임 문명 시리즈가운데 문명 4문명 5에서 로마 문명의 지도자로 나온다. 문명 4에서는 양아버지와 공동 출연.

박물관이 살아있다 에서 나오는데 항목 참조

THE SANDMAN에서는 말년의 모습으로 등장. 16세 때, 종조부에게 강간당한 뒤에 후계자로 낙점 되었고 로마의 미래를 위한 모든 예언과 계획들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서 로마의 지배자가 된 후에는 다른 계획을 품게 되고, 종조부를 포함한 로마의 신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들킬 것을 두려워하다가 Dream의 충고를 듣고서 하루 동안 거지로 분장하고 거리로 나가서 자신의 계획을 정리할 시간을 갖는다. 그의 사후, 계획대로 로마의 정복은 정체되고 우리가 아는 역사대로의 길을 걷게 된다.

토탈워: 로마2의 역사적 전투에서 목소리만 출연한다. 이때 대사는 그 유명한 "바루스, 내 군단을 돌려다오!" 그리고 토탈워: 로마2에 드디어 그가 주인공인 캠페인인 황제 아우구스투스에서 등장한다. 이때는 시대가 BC 41년도라서 아직 황제는 아니고 레피두스와 안토니우스와 대립구도로 나온다.

[1] 인류사에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 조각 작품이다. 이 작품 전까지 인간을 묘사할 때는 신에 대한 겸손의 의미로 고개가 약간 숙여져 있다. 저 위풍당당한 포즈는 신들의 조각상을 만들 때 쓰던 구도로, 처음으로 한 인간을 신격화한 작품이다.[2] 보통 로마인 이름 중 입양의 경우는 반드시 출생가문의 끝부분에 -anus 를 붙인다. 옥타비아누스 역시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면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로 바뀌었다. 즉, 본가 옥타비우스(Octavius) 끝부분에 ‘anus’가 붙어지면서 옥타비아누스(Octavianus)라고 이름이 붙여지고 불리게 된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는 본래 아이밀리우스 가문 출신이지만 스키피오 가문의 양자가 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피키오 아이밀리아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emilianus)가 있다.[3] 순서대로 태어났을 때 받은 첫 이름,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된 후의 이름, 황제로 즉위한 후의 이름이다.[4] 나폴리 광역시에 속한 시이다.[5] 영어로는 "I found Rome a City of bricks and left it a City of marble". 세간에는 "나는 진흙으로 된 로마를 발견해, 대리석의 로마로 남겨 두었다"는 식으로 벽돌이 아닌 진흙으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는데, 로마 시대에도 벽돌은 진흙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나온 오역으로 보인다.[6] 로마 건국자는 절대 아니다. 단지 로마 제정의 본격적인 상징일 뿐.[7] 로마 왕정시대부터 내려온 최고의 명문가인 율리우스 일족과 클라우디우스 일족의 결합. 율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가문이고 클라우디우스는 그의 아내인 리비아 드루실라와 그의 전 남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를 통해 만들어졌다. 이 두 가문의 결합에는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문, 도미티우스 일족, 발레리우스 일족, 코르넬리우스 술라 가문 등도 결합되어졌고, 이들의 혈연관계에는 아우구스투스의 계산과 혈연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8] 본래 '프린켑스'는 로마 공화정 당시 원로원으로부터 큰 공적을 인정받았다는 의미로 쓰이던 명예로운 호칭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선례를 알고있어 군림하는 자로 여겨지기를 경계해, 비교적 겸양의 표현으로 '프린켑스'를 칭했다고 해석된다. '아우구스투스' 역시 '존엄한 자'의 의미이긴 하지만, 프린켑스보다는 높은 어감을 지녔기 때문이다.[9] 로마력 기준으로 6번째 달이다. 카이사르의 율리우스력 기준으로는 현재와 마찬가지로 8월이라고 보면 된다.[10]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고종사촌동생이다. 아티우스의 어머니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고모이다[11] 옥타비우스 가문.[12] 이곳은 포룸 로마눔과 매우 가까운 팔라티누스 언덕에 있던 곳이다.[13] 로마의 관습에 따르면 아이가 태어났을 때, 모든 생살여탈권과 가문 편입 여부는 전적으로 가장에 달려 있었다.[14] 태어났을 때뿐 아니라 사유만 정당하면 아버지는 아이들을 개인적으로 죽일 수 있었는데, 범죄나 간통이나 전쟁 중 도망쳤다거나 하는 식으로 명예를 더럽혔다는 것만으로도 그냥 죽일 수 있었다. 이를 가장권 행사라고 했는데 게르만법과의 큰 차이 중 하나로 게르만법에서 한 인간은 마을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개념이 우선이지만 로마에서는 가족 공동체가 우선했다. 법은 가정의 문턱을 넘지 못한다라는 유명한 법언이 로마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게르만족도 서서히 로마의 영향을 받아 아버지가 아이들을 마음대로 죽이는 게 낭만적이고 합법적인 일로 바뀌게 된다.[15] 안토니우스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로마시대 기사계급은 평민들 중 재산의 규모로만 정해졌으며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 본토의 부유한 자영농 계급이 몰락한 뒤로 금융업자 상인 운송업자 공장 경영자를 뜻했다. 그중에 금융업자는 세금 징수, 환전, 고리대금업 등 사람들이 싫어할 만한 모든 일을 겸했는데 전통적으로 로마 농민들이 경멸하는 존재이기도 했다.[16]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17]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고종사촌동생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종손이기도 하지만, 폼페이우스의 재종손이기도 하다. 카이사르 쪽의 촌수가 더 가깝다.[18] 옥타비우스 가문 출신이란 뜻이다. 로마인은 입양되면 입양된 집안의 성과 씨족을 부여받았고 자신의 출생가문 이름을 약간 변형시켜 뒤에 붙였다.[19] 카이사르, 프린켑스, 임페라토르 등 로마 황제들이 물려밨던 칭호들이 대부분 전제 군주의 호칭으로 남았듯, '아우구스투스' 또한 로마 황제의 칭호로 남았다. 신성 로마 황제의 칭호에까지 덧붙으며 명맥을 유지했다.[20] 성경에 등장하는 라틴어 인명 대부분이 그렇다. '티베리우스'를 '디베료'로, '클라우디우스'를 '글라우디오'로, '폰티우스 필라투스'를 '본디오 빌라도'로, ''코르넬리우스'를 '고넬료' 등등. 전부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 알고 있는 라틴어 인명의 '-us'를 '-o'로 바꾸고, 'ㅋ, ㅌ, ㅍ' 등의 격음을 'ㄱ, ㄷ, ㅂ'등의 평음으로 바꾸면 대충 개신교 성경에서의 표기가 나온다.[21] 전부인에게서 얻은 딸 마르키아가 소 카토의 아내이기 때문에 소 카토의 장인이기도 하다[22] 오늘날의 스페인. 이베리아 반도[23] 미술시간에 석고상으로 자주 나오는 그분. 아우구스투스는 정치에서는 유례가 없을 정도의 먼치킨스러운 능력을 보여줬지만, 군사적인 재능은 없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이뤄낸 군사적인 성취는 많은 부분 아그리파의 공이었다. 이때의 인연으로 아그리파는 훗날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커플과 대결할 때 돕는다.[24] 공식적으로는 없었다. 카이사리온은 정식 혼인관계에서 태어난 아들도 아니고 카이사르가 공식적으로 자신의 아들임을 인정한 적도 없었기에 공식적이고 법적인 아들로 인정받지 못했다. 즉 혼외아들 내지 스캔들로 친아들로 의심받는 아이로 취급. 또한 카이사르의 유언장에는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었다. 아울러 유일한 혈육인 외동딸인 율리아는 폼페이우스의 아이를 낳던 도중 사망했다.[25] 카이사르의 유산을 옥타비아누스의 이름으로 나누어준다는 말은 곧 그가 바로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것을 공언한 거나 다름없으므로 옥타비아누스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26] 즉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후 총사령관에 충성하던 사병들이 공적 직위가 없는 그의 아들에게까지 대를 이어 충성하는 일종의 개인 재산화 된 것으로 나라에 망조가 든 심각한 문제에 해당된다. 사실 이 문제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동맹시 전쟁의 지휘관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이끌던 부대를 세습한 뒤 술라의 내전에 참가한 것으로 충분한 조짐이 보이던 상황이었다. 물론 옥타비아누스 본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내전이 평정된 이후에는 제대로 제도를 개혁하여 군대가 사병화되는 것을 방지하였다.[27] 황제로 즉위한 후의 이름 중 DIVI FILIVS가 신의 아들이라는 뜻이다.[28] 이는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오판 중 하나일 것이다. 키케로는 지인과의 편지에서 '푸에르(애송이) 정도는 갖고 놀 수 있을 것'이라 이야기했고, 원로원 연설에서도 "이 애송이를 적당하게 이용해먹고 구실을 붙여 내쫓자!"라고 얘기했지만 정작 조종당한 것은 옥타비아누스보다 한참 나이가 많았던 키케로였다.[29] 애시당초 키케로는 원로원파였고, 카이사르를 계승한 옥타비아누스는 민중파일 수밖에 없었으니 누가 봐도 오월동주일 수밖에 없다.[30] 현재의 북이탈리아[31] 당시 로마군은 카이사르에게 충성을 하고 있어서 카이사르의 후계자였던 옥타비아누스가 아니라면 군대를 움직이기 힘들었다. 물론 원래대로라면 어떻게든 이를 회수했어야 했지만 이미 로마군은 카이사르의 사병이나 다름없는 상태라 말처럼 그렇게 쉬울 리도 없었고 무엇보다 공화파는 군대에게 줄 농지를 자기들이 쥐고 놓지 않았던 터라 이들이 말을 듣게 할 명분도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죽은 카이사르의 군대 대부분을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식 지휘권을 부여한 것이다.[32] 당시 군대는 카이사르에게 충성했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를 임명하지 않았으면 오히려 병사들이 안토니우스에게 투항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과정은 안 봐도 비디오로 옥타비아누스에게서 군권을 뺏은 뒤 지위는 높지만 실권은 없는 그런 자리에 앉혀서 꼭두각시 노릇이나 시킬 것이 뻔했다.[33] 그 당시 옥타비아누스는 공식 경력이라고는 없는 19세의 어린애였다. 집정관의 제한 연령은 42세에 수많은 전공이 있어야 했다.[34] 안토니우스가 전투에서 지긴 했어도 영향력과 힘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이 선택은 옥타비아누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납득이 가는 게, 원로원 입장에서 정치적 노선이 달라 눈에 가시 같이 여기지만 필요악 같은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를 집정관 임기가 끝난 후에 해산시켜버리기라도 하면, 입지가 굉장히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도 쿠데타를 일으킨 결정적 계기가 군대 해산 논란 때문이었다.[35] 1차 삼두정치의 주역들은 원로원을 무시했을지언정 대놓고 숙청은 안했다.[36] 이는 1차와 2차 삼두정치 간의 사정이 달랐기 때문인데 기본적으로 1차 삼두정치 시절에는 돈의 크라수스, 무력의 폼페이우스, 민중파의 거두 카이사르 세 사람은 사실상 당시 로마 그 자체나 다름없을 정도였고 명분(당시 삼두정치의 가장 큰 명분은 원정 갔다 돌아온 폼페이우스의 병사들에 대한 봉급 미지급 문제였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문제는 제대병들에게 가야 할 공공 재산을 원로원에서 자기들 멋대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으로 보나 세력으로 보나 원로원파 입장에서는 상대도 안되었다. 또, 원로원을 결집하여 삼두정치에 반대할 만한 거물급 정치가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근본적으로 원로원파 정치가들은 필연적으로 인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2차 삼두정치의 일원들은 1차에 비해 무게감도 떨어졌고 비록 원로원파가 카이사르 암살을 통해 민중들에게 인기가 없긴 했지만 그래도 공화제로 돌아가자는 명분이 있었고 무엇보다 거물 정치가인 키케로가 뒤에서 버티고 있었으므로 삼두파 입장에서는 숙청이 필요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37] 무고한 사람도 희생되었는데, 희생자 재산 역시 '삼두'의 손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즉 숙청은 반대파 척결용이기도 했지만 재산 약탈용이기도 했다. 사실 이런 식의 숙청은 술라 및 그의 추종자들이 먼저 실컷 써먹었던 방법이니 누가 누굴 원망할 처지도 아니었다.[38] 옥타비아누스는 키케로를 희생하기로 양보하는 대신 레피두스는 친동생을, 안토니우스는 외삼촌을 제물로 바치기로 협의 했다. 권력욕 앞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드물지 않는 사례 중 하나를 보여준다.. 만 실제로 죽은 사람은 키케로 뿐이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조용히 처박혀 사는 것만으로 더이상 문제삼지 않았다.[39] 비슷한 사례가 앞서 있었는데, 바로 (양)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간의 대결 때였다. 장인-사위 관계로 둘을 묶고 있던 율리아가 죽은 직후였는데, 원로원은 폼페이우스를 밀어줘서 카이사르를 내쫓으려 했던 것.[40] 재미있게도 앞서 제1차 삼두정치에서도 비슷한 구도가 성립되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아버지이자 역시 서방을 선택한 카이사르, 빠르게 몰락한 크라수스 & 레피두스, 함대를 거느린 폼페이우스 & 안토니우스.[41]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와 코르넬리아 술라의 딸이다. 코르넬리아 술라는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딸인 폼페이아 마그나와 독재관 술라의 유일한 아들인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딸이다.[42]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군주론의 리더스타일이다.[43] 사정이야 어찌 됐던 전쟁을 벌인다면 당연히 안토니우스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 판단이었다. 실제로 전쟁 수행 능력은 안토니우스 쪽이 압도적이었기도 하고.[44] 누가 유리해질 것이며, 따라서 앞으로 누구에게 붙어야 할지 계속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었다.[45]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마리우스, 술라의 내전이나 2차 삼두 정치가들이 또다시 피의 숙청을 벌인 선례가 있었기에 정치가들은 한쪽이 조금만 약해진 조짐이 보이면 즉시 갈아탈 준비를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게다가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그의 정치력, 인간적 매력, 아니면 파트리아로 보는 인간적 유대감과는 동떨어진, 그냥 단순히 군사력과 뛰어난 군사적 능력만 보고 안토니우스의 승률이 더 높다고 생각하고 지지하던 상태였다. 그래서 안토니우스의 한번의 패배는 그를 지지할 이유를 없애 놓은 것이었다. 또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낳은 3명의 자식들에게 로마를 삼분해서 유증해주겠다라는 굉장히 이상한 방침을 발표했는데, 그로 인해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국가의 적(enemy of state)이자 모든 공적에서 추방된 반역자로 규정된 상태였다.[46] 알렉산드리아는 사실 여러 개가 있었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건설한 도시들에게는 알렉산드리아라고 붙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중 대표적인 도시는 바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다.[47] 당시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에서 매우 유명했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라는 두 거물들과 염문을 뿌리고 안토니우스를 정신 못 차리게 한 클레오파트라의 악명은 로마 시민들에게 있어 상당한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로마 시민들은 "그 유명한 이집트 여왕 좀 보자"라고 했을까...[48] 참고로 공화정 파괴자라는 비판을 피하려고 이런 칭호들만 보유하고 실질적 군주정을 펼치는 수법은 2000년 정도가 흐르고 나서 북한이 그대로 따라한다. 다만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로마의 프린켑스는 적어도 빵과 서커스를 통해 민중의 지지를 확보하려는 것 정도는 염두에 두었던 것에 비해, 북한의 경우는 대국민 감시 체계를 고도화하는 폭압적인 방식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49] 물론, 거슬러 올라가면 카이사르가 먼저였다.[50] 모든 관직을 두루 경험한 후 집정관으로 정점을 찍는 로마 지도층의 경력[51] 물론 이런 황제의 모습도 제정이 점차 중앙집권적 전제화되면서 점점 사라지고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에 들어서면서 관료제가 강화되고 전제 군주정이 도입되어 사실상 전제군주정화 된다.[52] 아우구스투스의 후임자였던 티베리우스는 필요없는 이 위원회를 해산시켰다.[53] 빠른 시간에 이 작업을 수행한 이유로는 군인이 너무 많아 월급 주기 힘들고, 쿠데타 가능성을 염려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게다가 제국 전체 예산의 반이 군비로 쓰였던지라 재정 압박 또한 상당하다보니 빨리 군 감축을 하여 재정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54] 이를 위해서 로마 시민들에게 12.5%에 달하는 상속세를 부과하였는데, 로마 시민에 대한 유일한 직접세다.[55] 옥타비아누스 시절에 잠수함이나 항공기를 통한 특수부대의 후방 침투, 플라스틱 폭약을 이용한 파괴 공작이나 스커드 미사일 타격 같은 걸 고려할 리가 없다. 이는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특수성에 대한 이해가 없는 무식에서 기인하는 오해이기도 하다. 한국의 수도인 서울은 군사분계선(휴전선)에서 직선거리로 고작 30여 km 떨어져 있으며, 이는 알보병행군만으로도 반나절 내외로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적 역량의 상당 부분이 수도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탓에, 서울이 적의 손에 떨어질 경우 대한민국은 막대한 국가적 피해를 입게 되며, 이는 한국전쟁 당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때문에 한국전쟁 이후, 국군은 과장을 좀 보태서 강박적이라 할 정도로 서울 사수를 위한 병력 편제와 배치에 많은 투자를 해왔다. 이후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국군의 화력이 보강되기 전까지, 경기도강원도 북부 전방 사단의 병력을 공공연히 총알받이 취급하던 인식도 수도 사수를 기저에 두고 있는 국군의 방어 작전계획에서 기인한다. 여기에 실질적인 적군인 조선인민군의 해공군 전력이 현대에 이르러서도 국군과 제해권 및 제공권을 다투기엔 형편없이 빈약한 수준이라 작전술적으로 위협적인 침투 경로는 사실상 육상 루트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때문에 국군 입장에서는 60만이라는 병력의 상당수와 막대한 화력을 군사분계선 인근에 집중적으로 배치하여 서울까지의 좁은 종심을 강력한 모루로 삼고 제공권과 제해권 전력을 망치로 활용하여 조선인민군의 1차 공세를 저지한 뒤 역습을 개시한다는 작전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 된다. 요약하자면 과거에 한 번 털렸던 수도의 지형적 정치적 특성, 한 방향만 막아도 방어가 수월한 국군과 그걸 알아도 그 쪽만을 팔 수밖에 없는 북한의 사정이 복합된 특수한 사례인 셈. 현대전과 고대전의 차이를 감안한다 해도 지중해 일대의 막대한 영토를 수비하던 고대 로마와는 여러모로 사정이 다를 수 밖에 없다.[56] 하지만 자기 친아들 티베리우스에게 제위를 빨리 물려주려던 리비아에게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다.[57] 라틴 서사시 중 가장 유명한 아이네이스(Aeneid)를 집필한 시인, 문학가[58] 에드워드 기번은 이를 "교묘한 권력 배합"(국내 번역본 기준)이라고 표현하고 있다.[59] 사실 뒤에 나오듯 이것은 명목상이나마 공화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도시국가 로마를 제정으로 바꾸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공화정을 대놓고 폐지해 버리면 아무리 내전 종식 직후의 옥타비아누스라고 해도 엄청난 국력 손실, 나아가서는 황제로서 새 정치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위험마저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위험을 감수해도 원수정을 만드는 것보다 성공하기 몇십배는 힘들었을 것이다.[60] 호민관, 안찰관, 법무관, 집정관 등[61] 가령 마리우스, 술라와 같은[62] 하지만 예시로 든 마리우스, 술라 등은 모두 사실상의 독재자들이었고 그들의 사병으로 민회를 완전히 좌지우지 하였다. 이것은 민회가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이고 또 이것은 공화정 체제가 허울만 남은 사실상의 과두정(원로원은 일단 돌아가니까)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63] 에퀴테스라 불렸으며 귀족은 아니나 자력으로 무장을 할 수 있을 만큼 부유한 사람들이다.[64] 마리우스로부터 내려온 군대의 사병화 현상을 그대로 따랐다.[65] 실제로 제정 로마 시기에도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 아그리콜라, 트라야누스, 아우렐리아누스 같은 훌륭한 장군과 황제들이 전쟁터에서 종횡무진 활약했다.[66] 카이사르가 상대했던 게르만족,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상대했던 게르만족 그리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상대했던 게르만족 등은 전략/전술의 터득도나 지휘관의 우수함, 사회 체제의 발전도에서 제각기 넘사벽에 있었다. 이걸 함부로 똑같은 게르만족이라고 묶으면 큰일난다. 자주 간과되는 사실인데, 로마 주변부 사회는 느리지만 꾸준히 사회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당장 그들 주위에는 그들이 벤치마킹할 로마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도 있고.[67] 한국의 사례로 예를 들면 백제는 근초고왕 시기 전성기를 맞이하다 광개토태왕, 장수태왕에 의해 몰락하였지만 이후 성왕 대에 들어와서 짧은 전성기를 누렸던 모든 일이 채 200년도 안 되는 세월에 전부 일어났다.[68] 실제로 도미티아누스를 죽인 근위대가 원로원의 공화정 회복 시도를 무산시킨 것, 베스파시아누스가 법적으로 황제정을 공식화함과 동시에 공화정을 부인한 것,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동양의 그것과 동일한 전제정 체제를 수립한것은 당시 로마에 어울리는 정치 체제는 공화정보다는 제정이라는 인식이 강했음을 시사한다.[69] 술라가 원로원을 강화시키는 개혁을 했으나 그의 부하였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앞장서서 폐지시켜 버린게 대표적인 사례다.[70] 실제로 이런 사례가 있다. 바로 대한제국으로 해방 이후에는 어느 누구도 대한제국을 그리워하지 않았다.[71] 여담이지만 아우구스투스 본인도, 이후의 황제들도 훗날 빵과 서커스라고 불리게 되는 포퓰리즘 정책을 통해 민중들의 지지를 계속 확보하려고 들었다. 원수정 황제는 민중파로 정치 커리어를 시작하여 원로원 체제를 전복한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근본부터 원로원과 대립 관계일 수밖에 없었기에 '로마 시민과 원로원'이라는 명목상 로마의 양대 유권자(원수정 시절에도 로마는 공식적으로는 공화정이었다.) 중 로마 시민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으로 스스로의 지위를 공고히 해야했기 때문. 이를 게을리하여 로마 시민과 원로원 양쪽에게 버림받은 황제는 네로처럼 실각하여 자살하거나, 칼리굴라나 콤모두스 및 이후 군인 황제 시대의 일부 황제들처럼 시민이나 군대의 지지를 잃고 암살당하는 수 밖에 없었다.[72] 자기 딸 율리아가 부정을 저지르자 로마 밖으로 내쫓아 섬으로 귀양보냈으며, 자기가 죽은 후에도 딸이 로마에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유언으로 못박아버렸다.[73] 사실 보수적인 동시대 로마인들은 가정 내에서 가족들의 생사여탈 여부를 행사할때 대부분 그러했다.[74]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집착 수준의 혈통주의자였던 할아버지였던 아우구스투스로 인해 선정된 후계자로 갖은 노력과 교육에도 불구하고 결코 뛰어난 인물들이 아니었고 인망도 없었다. 오죽했으면 이 둘이 줄줄이 죽어버림에도 불구하고 정작 로마 사회에선 별다른 반향도 없이 시큰둥했다.[75]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76]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형제의 첫 결혼 상대만 보더라도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에게 드루수스를 진지하게 후계자로 생각했다는 말은 결코 ‘립서비스’가 아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3살 위의 티베리우스의 혼처와 드루수스의 혼처 모두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의 결정으로 진행된 것을 생각해본다면.[77]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 형제를 모두 아들로 받아들이고 사랑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여러모로 비슷한 성향인 티베리우스보다는 개방적이고 활발한 드루수스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래서 그 유해가 이탈리아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말을 타고 달려가 함께 로마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죽은 양아들 추도사를 직접 읽었고, 자신에게 드루수스와 같은 죽음이 선사되길 원한다고 말하고 자신의 혈육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앞으로 대 드루수스 같이 자랐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말하기도 했다. 또 그는 드루수스의 묘비에 자신이 손수 지은 시문을 새기고 하고도 만족 못해서 전기까지 산문으로 만들었다.[78] 대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결혼식 후 3개월만에 태어났다. 그래서 이 당시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진짜 친아버지는 아우구스투스일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고, 이를 가지고 ‘아이 부모는 참으로 운이 좋다네. 아들을 3개월 만에 얻었으니’라는 내용의 풍자시와 노래까지 나왔다.[79] 티베리우스는 아그리파의 딸인 부인 빕사니아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런데 마르켈루스, 아그리파, 동생 대 드루수스가 연달아 죽고 난 뒤, 양부의 정치적 판단과 혈통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아내였던 빕사니아와 강제로 이혼당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그토록 혐오하던 율리아와 강제로 결혼을 했고,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도 얼마 안가 죽은데다 율리아의 사생활도 문제가 되자 로도스 섬으로 은거해버렸다.[80] 죽은 뒤 로마 시민들에게 공개된 유언장에다가 대놓고 '불행하게 두 손자가 일찍 죽어서 계승할만한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티베리우스에게 제위를 넘겨준다'는 내용을 명시했다. 이 때문에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공식 후계자이자 아들’ 티베리우스는 처음엔 제위를 거부했다. 9살때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집에서 아들로 자랐고 젊은 시절 험한 게르마니아에서 온갖 고생을 다하며 자신의 능력을 아우구스투스와 원로원에게 바친 티베리우스가 단지 양부의 외손자라는 타이틀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가 일찍 죽은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보다 못한 존재가 됐기 때문이다. 즉, 제위를 물려 받을 무렵 모든 것을 갖춘 율리우스 가문의 공식 후계자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사람의 모든 것이 유언장 문구 하나로 우습게 된 것이다.[81] 그 후계자이자 아들 티베리우스는 말년에 정치에 질린 나머지 아에 카프리 섬으로 들어가서 원격 통치를 했다. 그래서 세야누스가 섭정을 하며 사람들을 고발하고 마구 죽였는데 이때 율리우스 혈족 남성들 중 칼리굴라와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제외한 제위 계승자들이 거의 제거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대표적으로는 소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의 두 아들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다. 먼저 그 후계자로 손색없는 아우구스투스의 손자 소 드루수스는 세야누스와 자신의 아내가 간통을 벌이다 공모하여 독살당했고, 증손자 네로 카이사르는 역모죄로 유배형, 또 다른 증손자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아내와 함께 누명을 쓰고 난뒤 아내는 간통죄로 자살, 본인은 황궁 지하실에 유폐되어 방석을 뜯어먹으며 버티다가 굶어죽었다. 더해서 수에토니우스의 표현처럼 ‘그보다 더 충실한 노예는 없을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가까스로 살아남아서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은 칼리굴라와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역시 그 피해를 고스란히 당하고 만다. 칼리굴라는 인격형성기동안 어머니와 두 형이 할아버지의 무관심과 세야누스 음모로 숙청되고 ,성년식도 또래들보다 늦게 치루게 된 상황에다가 은둔정치를 하던 티베리우스와 함께 제왕교육을 받기 위해 같이 살면서 안 좋은 영향은 죄다 받았다. 그리고 칼리굴라의 사촌 동생이자 양자, 또 티베리우스의 유일한 친손자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는 칼리굴라가 중병으로 쓰러졌다가 회복된 직후 칼리굴라에게 살해당해버린다. 이후 칼리굴라마저 짦은 제위 기간 이후 암살당하면서, 아우구스투스가 생전에 그렇게 지키고 싶어했던 율리우스 가문의 대는 완전히 끊겨 버렸다.[82] 이중 정상적인 결혼 관계를 유지했고 서로를 사랑했던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 부부, 이들의 장남이자 아우구스투스에게 차차기 황제로 지명된 게르마니쿠스와 외손녀 대 아그리피나 부부를 제외하고는 아우구스투스의 바램처럼 되지 못했다.[83] 이 결정이 내려졌을 당시, 당연히 티베리우스는 이혼을 거부하고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에게 결정을 반대했다. 하지만 양부의 결정이 확고한데다 어머니의 설득까지 계속되자 빕사니아와 어린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 굴복했다.[84] 전처 풀비아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나 아우구스투스는 풀비아와 안토니우스 사이의 장남만 처형했을 뿐 나머지는 살려 주었다.[85] 다만 진상은 영원히 밝혀질 수 없는 게 율리우스 안토니우스가 기소되서 재판 받기전에 자살해버린다.[86] 아우구스투스는 이 두 저술을 제외한 카이사르의 모든 저술들을 없애버렸다. 카이사르는 신이었고, 그의 신성성을 모독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없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의 사적인 면을 엿볼 수 있는 연애 편지, 지인들과 주고받은 귀중한 기록들은 전부 없어졌다. 후대인들에게는 정말 애석한 일이다.[87] 소화불량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씩 먹은 것이겠지만[88] 게다가 아우구스투스는 일반인이 아니었고. 격무에 시달리는 로마 제국 황제였다. 끊임없이 사방에서 보고가 밀려들었고, 결재해야 할 서류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40년 넘게 대 제국을 다스리며 영토까지 확장하고 법률까지 제정하며 그 당시에 77세까지 장수했다. 그는 오히려 병약했고 특별히 강한 신체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누구 하나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고 본인 역시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더 오래 살 것이라 생각해 그에게 제위를 넘겨주려 했다.[89] 물론 황제의 권위 등을 위해서 외곽에 호화 별장들을 보유하기도 했다.[90] 칠성장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오역이다.[91] "어디 나도 한 번 곰치에게 던져봐라."라는 뜻.[92] 출처 수에토니우스, 황제열전, 아우구스투스전, 71장[93] 고대 로마에서는 연초를 Martius로 두고 1주일에 8일, 1년에 38주(총 10개월, 304일)를 두는 달력을 쓰고 있었고 나머지를 겨울로 부르며 딱히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따라서 정규 해의 한달은 관습적으로 보통 달의 주기와 비슷한 30일 또는 31일이었다. 이후 겨울에 해당하는 두 달(연초인 Ianuarius와 연말인 Februarius)을 도입하고 매달 홀수인 29일과 또는 그 다음 홀수인 31일을 부여해 1년 356일을 만들고 다시 1년을 홀수로 맞추기 당시 달력에서 마지막 달에 해당하는 Februarius에서 하루를 뺐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2-3년마다 Februarius 23일부터 한달을 27일로 하는 일종의 윤달인 Mercedinus을 시행했으니 일반적으로 Februarius는 28일을 채우지 못하는 보조적인 달로 취급받았다. 28일로 정하는건 수백년간 지켜온 로마의 전통인셈. 실제로 아우구스투스가 시행한 달력 개혁은 율리우스력에서 확립된 윤년제도를 재조정하기 위해 당분간 윤년을 미루는 제도를 도입한게 전부였다.[94] 덕분에 등장하는 정치인들의 속내나 계략에 대해 설명해주는 해설역을 맡기도 한다.[95] 자신과 살짝 몸이 닿은 여노예의 따귀를 때리는 등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다.[96] 정작 사료에서의 아티아는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인 코르넬리아, 카이사르의 어머니인 아우렐리아와 함께 이상적인 어머니로 로마 역사내내 존경받은 인물이기에 역사 왜곡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스토리 진행상 옥타비아누스의 성장 과정에 큰 맥락을 제공한다는 점은 좋은 평가를 받는다. 드라마에서 그 악독했던 아티아가 더 악독하고 냉혈한이 된 옥타비아누스의 황제 개선식에서 기죽은 표정을 짓는 마지막화의 모습이 백미. 이 장면에서 그녀가 유일하게나마 영향력을 발휘하는 건 황제의 어머니로서 며느리인 리비아보다 앞에 서고자 한 정도에 불과했다.[97] 그런데 사실 옥타비아누스가 어릴 무렵에도 정치적인 식견은 항상 모친보다 한 수 위였다. 옥타비아누스가 옳게 짚어내도 아티아는 항상 감정적인 이유로, 혹은 표면상 드러난 정황만을 근거로 부정하는 것이 패턴이다.[98] 덤으로 너는 어차피 여기서 살아서 나갈 수는 없으니, 고통스럽지 않게 죽고 싶다면 사실을 고하라는 협박을 한다.[99] 리비아를 아내로 맞아들일 때 리비아에게 자신은 성적 쾌락을 위해 상대방을 때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해서 S임을 인정했고, 리비아는 옥타비아누스가 실제로는 M 취향임을 알고 관계 중에 옥타비아누스의 뺨을 때리고 질식시키기도 한다.[100] 클레오파트라가 로마로 끌려가지 않도록 이런 저런 핑계를 대 보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그 핑계를 가볍게 논파하고 클레오파트라를 굴복시키는 무지막지한 카리스마를 과시한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할 것을 정확하게 예상한 아그리파와는 달리 그럴 리 없다며 오판하기도 했다.[101] 작중 율리아의 실제 대사이기도 하다[102] 실지로 본처와의 이혼때문에 분노하고 그 분노를 표출코자 새로 결혼한 율리아를 강간하는 장면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