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8 13:43:21

이튼 칼리지

이튼 스쿨에서 넘어옴
Eton College
이튼 칼리지

파일:이튼 칼리지 로고.svg

학교 정보
<colbgcolor=#a0d1ca><colcolor=#223c59> 교훈 <colbgcolor=#a0d1ca><colcolor=#223c59> 라틴어 Floreat Etona
영어 May Eton Flourish
한국어 이튼이 번창하기를
개교 1440년(개교 [age(1440-01-01)]주년)
국가
[[영국|]][[틀:국기|]][[틀:국기|]]
유형 퍼블릭 스쿨
성별 남학교
교장 사이먼 헨더슨 (Simon Henderson)
학생 수 1,311명(2020)
주소 이튼, 버크셔, SL4 6DW 잉글랜드
교색
Eton Blue (#A0D1CA)
홈페이지 파일:이튼 칼리지 원형 아이콘.png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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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1. 개요2. 역사3. 명성4. 유명 동문5. 매체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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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ton College_Aerial View.jpg
1441년에 개교한 영국학교. 영국 최고의 명문 학교 중 하나로 이름 높은 퍼블릭 스쿨(사립 중·고등학교)로, 이튼 스쿨(Eton School)이라고도 부른다. 영국 잉글랜드 사우스이스트 잉글랜드 버크셔 주의 이튼에 위치해 있으며 학생 전원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남학교다. 예로부터 영국을 포함한 전세계의 내로라하는 수재들과 상류층 자제들이 입학하는 명문 학교로 명성이 높으며 때문에 이튼 칼리지 졸업자를 가리키는 말인 '올드 이튼니언'(Old Etonian)이라는 말이 따로 있을 정도다.

이튼 칼리지가 퍼블릭 스쿨 중에 가장 유명해서 가장 오래된 퍼블릭 스쿨이라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지 않으며, 퍼블릭 스쿨 중에서는 18번째로 오래된 학교이다.

2. 역사

1440년에 잉글랜드국왕헨리 6세가 70명에 달하는 전국의 가난한 소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설립되었고 1670년의 증축 등을 거쳐서 계속 확장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846년에 완공되었다.

오로지 입학 성적만으로 결정되어 선정된 70명의 소년들은 왕립 장학생(King's scholars)라고 부르며 현재까지도 이튼 장학생 기숙사인 칼리지(College)로 5개 학년 70명이 유지되고 있다. 왕립 장학생은 자신의 이름을 사인할 때 왕립장학생임을 의미하는 KS를 붙일 수 있는 관습적인 권리를 얻게 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외의 학생들도 함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는데 이들은 오피던스(Oppidans)라고 하여 인근 주택에서 숙박비를 내고 하숙하며 등교하였다. 이것이 체계화되면서 각각의 기숙사를 담당하는 이들이 생기고 현재는 24개의 오피던스 하우스가 학교의 관리 하에 존재한다.

학생수도 17세기에 200여명, 18세기에 300여명이었다가 20세기에는 13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3. 명성

과거에는 부모, 가문 등을 대놓고 보고 뽑았지만 현재는 공식적으론 극도로 경쟁적인 입학 시험만을 통해 선발한다. 때문에 학생들 중에 등록금을 내느라 허덕이는 중산층 출신도 많아졌다. 물론 왕족들은 성적에 상관없이 입학 특례를 받는다. 전술했듯이 이튼 칼리지는 영국 상류층 자제들이 입학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현대 들어선 아예 입학 전부터 집안을 본다는 카더라 통신도 있다. 물론 딱 욕 먹기 좋은 주제라 정설은 아니고 개인의 주장이기는 하지만 피터 빈트도 비슷한 주장을 한 적이 있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설립된 초기와 달리 목적도 의미도 상당히 변질된 셈이다. 어쨌든 영국의 왕족, 귀족 출신들이 이곳으로 많이 진학한 뒤 옥스브리지로 가는 루트를 탔다. 때문에 대학이 아닌 중등교육기관이지만 이곳의 졸업자는 따로 '이토니언'(Etonian) 식으로 불린다.

1999년부터 영국 전국의 학교에서 체벌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장노년층이나 추억할 법한 한참 옛날 애기가 되기는 했지만 20세기 중반까지는 체벌로도 악명이 높은 학교가 바로 이튼 칼리지였다. 특히 임원과 교사들뿐만 아니라 기숙자장이나 사감들, 학생 자치회 단위로도 자체적으로 체벌 권한을 주어서 두들겨 맞기로 유명했다. 윈스턴 처칠 역시 체벌로 고통스러워 했다니 빈민층 자녀들뿐만 아니라 사회고위층 자녀들조차도 성장 환경이 썩 좋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 잠언에 나와 있다는 명분으로 개교 이래부터 1980년까지 체벌을 유지했으며 지금도 체벌에 쓰이던 테이블은 남아 있다.

4. 유명 동문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사람들에 한해 서술한다.

5. 매체

6. 기타



[1] 19세기 글래드스턴 총리 이후부턴 전부 보수당 출신인 게 재미있다.[2] 조지 5세의 3남.[3] 조지 5세의 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