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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경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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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지진 등 지각활동이 활발한 탓에 한때 전 세계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할 만큼 상당한 규모의 은 보유국이었고, 덕분에 15세기 센고쿠 시대 때부터 포르투갈 등 일부 서양 국가들과 교류를 시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동전의 재료로 쓰이는 구리도 풍부하게 생산되었기 때문에 17세기 이후 에도 막부 시기에는 화폐 경제를 통한 상업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쇄국을 유지하면서도 데지마를 통해 네덜란드와 부분적으로나마 교류하면서 꾸준히 서양 세계와 접촉해왔다.

1850년대 쿠로후네 사건을 계기로 서구 열강들에게 개항을 하게 된 일본은 처음엔 물가가 폭등하는 등 혼란을 겪었다.

1.1. 1860년대 ~ 1940년대

서구 열강을 맞아 개항을 한 일본은 처음에는 물가가 급등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로 경기가 개선된다. 그 전까지는 선진 공업국이라고 보기 어려웠던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전쟁 특수로 수출이 수입을 추월하면서 만성 무역적자국에서 무역흑자국이 되었다. 물론 당시의 조선이나 중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보다야 훨씬 잘 살던 중진국 수준이었지만, 서구 열강과 미국에 비해서는 한참 뒤처져 있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일본은 다시 무역적자국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1890 ~ 1910년 내내 일본의 중공업 발전은 세계 평균의 2배에 달할정도로 꾸준히 발달하였고 무역적자의 대부분의 서구의 제조업 장비수입이나 기술, 경협에 의한것으로 일본 자체에겐 큰 문제는 아니었다. 실제로 1차대전까지만 해도 일본 경제비중의 80%를 차지하던 농업이 1929년엔 20%까지 떨어지며 공업선진국으로 도약하게 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우향이긴해도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전쟁에는 이겼으나 전비의 지출때문에 극심한 빚을 지게 되는등 우여곡절을 겪었으므로 순항만 한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1차대전이 끝나며 전쟁특수도 끝이 난데다 1923년에 발생한 관동 대지진 때문에 수도인 도쿄와 수도권인 간토 일대가 폐허가 되며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본데다 1927년에 추가로 쇼와공황이 발생하면서 일본은 1920년대의 상당 기간을 불황 속에서 보내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1929년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대공황이 터지면서 일본 경제도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 미국발 경제 위기를 일본이 그간 40년을 투자해 키워놓은 공업력으로 간신히 버텨냈으니 그 간의 오랜 투자가 위기 때 빛을 발한 셈.[1] 대략적인 수치로, 1935년 1인당 국민 소득이 미국[2]의 12% 정도였다.[3] 그나마 인구가 많아서 경제 규모 자체는 작지 않았는데, 인구는 6위로 GDP는 9위에 해당하는, 어느 정도의 국민 소득과 꽤 많은 인구를 가진 지역 강대국이었다. 한마디로 어느정도의 소득을 가지고 있지만 많은 인구로 경제력이 높은 현대의 중국, 인도, 베트남 정도의 느낌이다. 실제로 상대적인 관점으로 보면 당시 일본과 현재 중국의 질적 수준이 비슷하다.[4] 당시 일본은 세계 열강들 중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5] 이 당시 일본은 아시아 최강의 국가로 이름을 날렸어도, 빈부격차가 매우 심했다. 우선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프랑스 민법을 들여놓았지만, 토지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소작농의 경작권을 보호하는 법안도 입법되지 않았으며, 소수의 부유한 계층이 다수의 토지를 독식하였다. 따라서 농민의 대다수는 소작농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처지였다. 이는 식민지 조선에도 영향을 미쳐서 지주의 권리가 강화되고 기존의 사회적 보호조치들이 해체되면서 소작농들만 늘어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예방접종의 보편화와 마비키의 근절로 인구가 매년 급속히 증가한것과 엮어져서 토지부족 문제는 매년 심해져나갔다. 이 때문에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상경하게 되었지만 태반이 일용직 노동자였고, 1920년대 이후로는 불황으로 인한 높은 실업률이 고착화되고,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노동쟁의도 크게 늘어났다.

그래서 이 당시에 식민지는 물론이고 브라질과 필리핀 등으로 이민을 가는 일본인들이 많았던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이 때문에 빈민층들이 군입대를 하거나 식민지로 가서 특권계급이 되어 인생역전을 하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떡고물이라도 얻자는 이유에서 제국주의가 횡행한 측면이 강했다. 단적으로 1930년대 만주국에 주거하던 일본인 학생들이 일본 본토로 수학여행갈때마다 일본인들이 납품팔이나 소작농으로 근근히 생계를 이어나가는 것에서 충격을 받았다는 일화가 있고, 일본제국 패망 직전의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들은 조선 인구의 3% 남직한 수준으로 수가 적었음에도 자산의 82%를 차지하고 있었을 정도로 일본인들은 특권계급에 위치해있었는데, 이는 식민지 주거 일본인들의 삶과 사회적 위치와 경제적 지위가 일본 본토의 일본인들보다 훨씬 나았다는것을 의미했다.[6]

또한 인구과밀 해소 + 경제 위기 타파를 목적으로 위해 만주를 점령한다. 당연히 중일관계는 크게 악화되었고 일본은 중국을 완전히 굴복시키려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1941년엔 미국을 상대로 진주만 공습을 단행하며 태평양 전쟁으로까지 전선을 확대시키며 경제적인 상황이 다시 악화되고 미국에게 공습을 얻어맞고 패배함으로써 애써 만들어놓은 산업시설과 건물의 상당수가 파괴되고, 일본 채권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며 극심한 인플레이션, 실업, 빈곤과 기아에 시달리게 된다.

1870~1950년까지 일본, 한반도, 대만의 1인당 GDP 비교(2011년 환율)[7]

1.2. 1950년대

여기에 전후 일본 열도미국에게 점령되었다. 미국은 일본군재벌을 해체하며 일본을 미국에 도전하지 못하는 농업국가로 만들기 위해 연합군 최고사령부 주도하에 연구단지, 군수기업 및 재벌기업의 강제 해체 등 동원 가능한 각종 경제 재재를 가하게 된다. 또한 1934년에 시작된 물가상승 또한 종전 직전에 일본정부가 실시 무분별한 돈방출로 가속화되었고, 거기에다가 전후기때 전쟁 당시에 발행된 채권을 갚기 위한 금융완화가 추가적으로 단행되자, 1949년 상반기까지 초인플레이션이 지속되었다. 이 당시 일반인들은 마땅히 일할곳이 없어서 암시장에서의 장사로 생계를 꾸리고 미국에서 나눠주는 밀가루를 값싸게 얻어서 연명하는것이 일상적이었다. 하지만 곧 1948년 미국의 입장은 일본을 공산주의 남하를 막는 보루로 삼기 위해 제재를 해제하고 제국으로의 부활은 억누르되 경제는 일부분 풀어주기로 전환한다. 국공내전이 당초 예상과 달리, 국민당과 장제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하며 공산당이 중국대륙을 먹을 가능성이 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49년 결국 국부천대로 중국대륙이 공산화되자, 미국의 동아시아 외교 및 군사계획은 큰 타격을 받는다. 당시 상황을 보자면 1,2차 대전을 통해 미국은 세계 유일의 강대국으로 부상하였으나 심상치 않은 공산주의 이념의 확대가 미국의 최대 위협으로 부상 되었다. 이 당시 한국과 대만, 태국은 낙후되었던 시대였었는데, 일본은 전쟁을 거치기는 했으나, 그래도 일본 전역이 전쟁의 피래를 받았던것은 아니었기에 사회인프라 시설이 남아있고, 타 아시아 국가에 비해서 학력도 상대적으로 높아서[8] 제재만 풀면 성장이 가능한 여건을 이미 갖추고 있었고, 미국 당국도 이를 의식해서 기존의 일본을 낙후된 상태로 남게하는 정책을 뒤엎고 일본 살리기에 나섰던것이었다.

미군정 아래에서 미국의 컨트롤을 받고 있었기에 미국이 이념방패로 휘두르기 딱 좋은 나라였기에 미국의 대일관계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연구들이 많다.[9] 여기에 닷지가 방일하여 일본의 재무재건에 참가함으로써 일본 경제제재를 하지 않겠다는 대외적인 입장을 미국은 몸으로 실천했으며 이때 닷지의 경제정책[10] 또한 일본 국내 경기 안정에 도움이 된다.

1949년에 닷지 플랜이라는 경제정책이 시행되어 물가는 안정화되었지만, 단기적으로 실업률이 늘어나서 불황이었던것은 여전했었다. 그러나 1950년 한반도에서 북한남한을 기습 남침하며 6.25 전쟁이 터졌고, 일본은 엄청난 호황을 누리기 시작하였다. 6.25 전쟁이 터지면서 미국이 드넓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병참기지가 필요했는데 직전해인 1949년 말 중국 대륙이 공산당의 손에 넘어가는 바람에 한반도 주변의 친미 국가가 일본 밖에 없어 일본이 낙점되었고, 일본은 미군의 다양한 병참 역할을 소화했던것으로, 1950년 상반기만 해도 높았던 실업률은 바닥 수준으로 낮아져 실업자들은 사라지고, 1인당 국민소득 또한 급속히 늘어나는 경제 특수를 누렸던것으로 직접적으로 10억 달러, 간접적으로 36억 달러에 달하는 거대한 경제효과를 창출했던것이었다.

이는 일본의 국민소득 증가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도요타 같은 군수 도움을 줄수 있는 분야의 중견 기업들이 큰 이익을 보았고 주요 기업은 하늘의 도움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악화된 경영실적을 단번에 흑자로 돌려놓았다. 기업뿐 아니라 특수 일자리 창출로 민생에도 영향을 끼친다. 이외에도 전쟁 중 한반도 전쟁에서 한계를 느낀 미국은 아시아에 강한 우방이 필요함을 다시 한번 느끼고 단순한 경제제재 완화가 아닌 완전한 경제제재 해제를 통해 일본이 빨리 성장하길 바라며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서 GHQ의 모든 경제 재제를 푸는데 합의를 한다(발효 1952년).

이로써 GHQ에 의해 강제 해체된 일본 경제의 중심축인 대기업들이 다시 생겨날수 있게 되었으며 일본의 억눌리던 잠재력이 완전히 해방되는 계기가 된다. 6.25 전쟁 특수로 시작된 일본 경제의 급속한 성장으로 1950년에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110달러에 불과했지만 1955년에는 270달러까지 급속히 치솟기에 이를렀고, 6.25 전쟁이 종전된 이후로도 그 추세는 꺽이지 않고, 고도성장은 지속되어 1950년대 말에는 흑백TV와 세탁기, 냉장고가 각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할정도로 일반인들의 경제상황은 더욱 나아졌다. 전전 일본 경제를 주름잡은 미쯔비시, 도요타 같은 경제 족벌, 일명 자이바츠(財閥)들도 빠르게 강제해체되어 독립한 기업들을 다시 병합하여 대기업으로 복귀하게 된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일본은 그동안 획득, 축적된 자본지식을 재투자하여 무역 장벽, 기술·경영 혁신을 하였으며 1950년대 후반에 다시 아시아 제1의 경제대국 자리에 올랐고, 중국의 후퇴와 맞물려 아시아 제1의 경제대국이라는 타이틀을 따게 되었다.[11]

1.3. 1960년대

1960년대 초반 일본의 모습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전후 복구와 경제성장의 결과가 눈에 띄게 드러났음을 알 수 있다. 불과 20년도 채 되지 않아서 전쟁 전, 아니 그 이상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1960년 일본의 1인당 GDP는 세계은행 통계 기준으로 475달러였는데, 이는 한국(158달러)[12]의 3배이긴 했으나 미국(3,007달러)의 1/7 수준이었고, 심지어 세계 평균(459달러)에 비해서도 그렇게까지는 높지 않았던 만큼 당대 기준으로는 중진국 수준이었다. 물론 1960년에도 일본은 아시아에서는 이스라엘을 제외하면 가장 잘 사는 나라이긴 했고 그 부를 과시하듯 같은 해에 제트 여객기와 컬러 TV를 도입하기도 했으나[13] 동시기 기준으로 전세계 국민총생산의 2.8%에 불과한 비율을 차지하던 만큼 당시 일본의 경제는 구미 선진국과 비교하면 확연히 뒤쳐졌다고 할 수 있었다.[14]

하지만 196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은 무역장벽과 기술혁신, 민관의 아낌없는 투자와 일본에게 유리한 시대적 배경 등, 긍정적인 요소로 인해 상당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였고 1965년경에는 이미 영국, 프랑스와 맞먹는 세계 5~6위권의 경제대국으로 구미 선진국을 바짝 추격하는 상황이었다. 1964년 4월 26일에는 OECD에도 가입하게 되고[15] 같은 해 10월 1일에는 세계 최초의 고속철도도카이도 신칸센을 개통하고 1964 도쿄 올림픽도 치르며 일본의 경제 성장을 세계에 알렸다. 1964년 일본의 1인당 GDP는 843.6달러로 세계 평균(561.4달러)의 딱 1.5배 수준이었는데,[16] 참고로 동시기 미국은 3,574달러, 한국은 124달러였다.

1966년은 일본이 GDP 1,000억 달러 돌파와 1인당 GDP 1,000$ 돌파를 동시에 하면서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고의 경제대국으로 자리잡은 해인데, 한국이 1인당 GDP 1,000$를 돌파한 것은 11년 뒤인 1977년이고, 중국은 무려 34년 뒤2000년이 돼서야 달성했다.

그런 일본의 약진에 긴장한 기존 선진국들에게 상당한 압력과 비난을 받았으나, 일본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케다 하야토사토 에이사쿠 총리대신 재임 시기를 시작으로 80년대 초반까지 대장성, 통상산업성 및 정부 관료 주도에 경제, 산업정책을 통해 고도 성장을 시작하고[17] 계속 성장을 거듭하여 1969년에는 독일(정확히는 서독)을 제치고 소련[18]을 제외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약 40년 동안 자리를 굳히게 된다. 빈부격차도 매우 심해서 1960년대 도쿄는 (당시 기준으로) 최신식 빌딩과 허름한 목조가옥이 공존하는 풍경이 일상적이었다.[19] 세계적으로도 굉장히 이른 시기인 1960년 컬러 TV 방송이 시작되었음에도 컬러 TV가 워낙 비쌌기에[20] 1960년대 후반까지 대부분의 국민들은 흑백 TV로 만족해야 했다.

여하튼 1968년 일본은 세계은행 통계 기준으로 1인당 GDP가 약 1,451달러[21]를 기록, 702달러[22]도 되지 않던 세계 평균의 2배를 기록하며 선진국 진입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미국은 약 4,696달러[23]였고 한국은 198달러[24]였다.

1.4. 1970년대

1970년대의 신주쿠
이 시기 일본식 경제성장 모델에 북미식 경제모델을 결합하는 시도가 사회전반에 일어났는데 1970년대 터진 두 차례의 오일 쇼크에도 불구하고 산업 구조 개편이 성공적으로 완료되며 구미 선진국들을 상회하는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보였다.

이 때부터 선샤인60이나 게이오플라자호텔 등 초고층 건물이 다수 들어서면서 도쿄의 시가지가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일본은 이미 도쿄의 도심에 자동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고층 빌딩도 많이 건립되었으며,[25] 아시아 최초/세계 5번째로 보잉 747 여객기(1970)[26]맥도날드(1971)[27]를 들여오기도 했다. 도쿄오사카에도 지하철 노선이 6개를 넘겼으며, 1970 오사카 엑스포로 일본이 선진국에 진입했음을 사실상 공포했다.[28]

1970년대 초반에는 국제통화위기(1971년)와 1차 오일 쇼크(1973년)로 인한 혼란을 겪었다. 오일쇼크 이후 일본은 경제구조를 3차산업 위주로 재편했다. 또한 마이크로 전자공학(microelectronics) 혁명을 비롯한 신기술 혁신을 바탕으로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했다. 197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 일본의 경제는 다시 순조롭게 성장했으며 당시 경제지표는 구미 선진국들과 비교해도 우수한 것이였다. 1970년대 일본은 낮은 실업률을 기록하였으며 안정된 노사 관계를 유지하였다. 사실 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일본은 선진국이라 하기에는 다소 애매한 준선진국 수준이었지만[29] 이때부터 미국과 특히 60년대 중후반부터 식민지를 잃고 몰락하는 구 서유럽 식민제국들의 경제규모를 점점 넘어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일본이 과연 미래에 미국을 추월할 가능성에 대한 분석도 나올 정도였다.

1970년대 중반부터 서민들의 경제적 수준도 그 전보다 대폭 향상되었다. 일본 국민들의 대다수가 2층집에 19인치 컬러TV를 들여놓고 준중형차 혹은 중형차[30] 자가용을 몰 수 있게 된 것이다. 1973년을 기점으로 일본의 컬러 TV 보급률이 흑백 TV 보급률을 추월했다. 그래서 이 시기부터 80년대까지를 일억총중류(1억 인구가 중산층이 된) 시대로도 부른다.

물론 일본 최고의 품질관리상인 데밍상 자체가 미국인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고 CNC 공작기계도 미국에서 개발되어 1세계로 전파된 만큼 일본의 성장 기반 자체가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일본만의 자체적인 기반을 만들어 미국을 뛰어넘지 않는 이상 절대 미국을 넘을 수 없는 게 근본 현실이었고 실제로도 실패하였다. 일본이 미국의 압력에 무력하게 굴복한 것도 위와 같은 현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이 일본에게 가하던 압력은 장난 수준이 아니었다. 관세는 물론이고 제품의 점유율[31]까지 마음대로 정했으며 이를 무시하거나 어기면 정치, 경제, 과학기술 등에서 무자비하게 압박하겠다고 협박하거나 실제로 하기도 했다. 옛날 패권국들이 속국들에게 했던 것보다도 심해서 세계사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였는데, 일본 국세청 관련 인물인 오무라 오지로(大村大次郞)에 따르면 심지어 현재 일본의 막대한 부채조차 절대 다수가 당시 미국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굴복하면서 생긴 것으로 당시 일본의 부채는 선진국 중에서도 양호한 편이었고 경제 정책 또한 부채를 늘릴 계획은 없었다고 한다.

1.5. 1980년대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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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이후 일본의 출산율은 점점 감소했지만, 여전히 1980년대 내내 연평균 4~5%대의 안정적인 성장을 하고 있었고 80년대의 일본 경제는 그야말로 탄탄대로였다. 플라자 합의로 인해 엔화가치가 오르면서(85년의 달러당 239엔에서 88년의 달러당 121엔으로) 1인당 국민소득도 81년 1만 달러에서 87년 2만 달러[32]로 겨우 6년만에 두배 올랐으며, 88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4위에 올랐다. 만약 이때의 엔고가 없었다면 일본은 원래보다 3년 늦은 1990년에 국민소득 2만달러를 달성했을 것이라고 한다. Japan as No.1[33]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 시대의 일이었다. 이 시기 일본인들은 "더 이상 외국의 경제 모델을 배울 필요가 없다."는 자부심까지 느끼게 되었으며, 일본식 호송선단형 경제 운영이 최선의 모델이라고 생각하기까지 이르렀다. 일본은 1980년에 화력 발전의 비중이 상당히 높아 전체의 약 67%에 달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가파른 상승세에 긴장한 미국 등 구미 선진국들은 일본을 지속적으로 압박했는데, 1980년대에 미일 반도체 협정, 플라자 합의, 루브르 합의 등으로 인해 수출 경쟁력이 매우 악화되었다. 일본은행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저금리 통화 정책을 시행하였고, 이로 인해 일본 내수의 주식부동산 등 금융자산으로 막대한 유동성이 공급되며 거품경제가 시작되었다.[34] 일본의 저금리 정책으로 환리스크를 보유한 미국 채권 등이 일본 국내시장에 침투한 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87년 철강 공업 구조조정에 성공하면서 경제가 다시 살아나, 일본의 국민소득은 처음으로 2만 달러를 돌파했다. 그리고 이듬해 1988년엔 무려 미국을 따라잡으며 국민소득 세계 4위에 올랐고, 소련을 추월하며 국내총생산 세계 2위에 오르는 등 그야말로 전성기를 누렸다. 이때 당시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 등지에서도 빠른 시일 내에 일본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전망이 존재했을 정도로 일본의 경제력은 대단했다.

1989년 12월 29일, 닛케이 225 평균주가(日経平均株價)가 사상 최고치인 38,915엔 87센을 기록했다.

1.6. 1990년대, 2000년대

Tokyo-1990 (2010 전시 비디오)
1990년 일본은 GDP 440조 1,249억 엔을 달성하였다. 1인당 GDP는 미국의 81%까지 추격한다. 그러나 1991년 2월 닛케이 지수 주가가 급락하기 시작하였다. 1998년 10월 19일, 12,879엔 97센을 기록한다. 이는 1989년 최고치에 비교하여 67%나 하락한 수치였다.

사실 일본의 불황이 오래 이어진 만큼, 불황에 진입하는 속도도 상당히 느렸다. 당장 1990년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4.8%, 1991년에는 3.4%였다. 1992년부터 0%대로 진입했지만 1990년대 초반에는 어차피 미국이나 유럽도 불황[35]이었고, 한때 세계를 호령하던 구 소련은 체제 자체가 방금 망했으니, 일본의 경제 불황이 딱히 부각되지는 않았다. 40년간 최우수 경제 모범생이었던 일본 경제는 곧 회복된다는 것이 당시 분위기였다. 거기다 버블이 꺼지기는 했어도 1996년까지 성장이 이어져, 1995년 일본경제 최정점에서 명목 GDP 총액은 5조 4,508억 달러로 당시 미국 GDP 7조 6,640억달러의 71.12%까지 따라잡았다.[36] 괜히 1990년대 초반까지 할리우드 영화에서 일본의 위협이나 일본적 색채가 강조된 것이 아니다.

특히, 1980년대 후반에 시작한 일본의 거품경제가 완전히 끝난 1995년, 엔화가 지나치게 고평가되어 1달러당 79엔까지 떨어지며 일본 국민소득은 정점에 달했는데, 1995년 1인당 GDP는 무려 $44,200(!)[37] 2024년 달러 가치로 환산하면 8만 달러를 훌쩍 넘으며, 오늘날 싱가포르, 카타르 등과 맞먹는 수치이다.

일단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 일본 경제는 1995년 2.7%, 1996년 3.1% 성장하면서 느리게나마 회복세에 접어 들었다. 그러나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로 인해 주요 교역국이었던 일본의 불황도 더욱 연장되었다.[38] 한국이나 동남아시아처럼 외환위기로 국가 경제가 파탄나고 통화가치가 50% 이상 추락하는 일은 없었다. 불경기였다고는 하지만 그 이전에 쌓아 올렸던 세계 2위의 경제력과 넘사벽급의 외환보유고로 버텨냈기 때문이다.[39] 만약 일본 경제가 체급이 크지 않았거나 외환보유고가 부족했다면 일본도 한국처럼 외환위기를 겪었을지도 모른다. 1990년대 초중반만 해도 최고 실적을 누렸던 제조업이 버티고 있었고 고령화도 본격적으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7년 일본의 암울했던 경제상황을 보여준 것인지 당시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한자가 "(넘어질 도)"였다. 1990년대 말 일본 경제는 주가 하락, 실업률 폭등에 시달리며 아시아 금융위기 주범이라는 지탄을 받았고, 미국 빌 클린턴 정부로부터 강한 경제 개방 압력을 받기도 했다.

1998년부터 소비세 인상에 따른 경기 악화를 겪었지만 이후 오부치 게이조의 강력한 경제 정책으로 잃어버린 10년의 극복이 시작되었다. 또한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고이즈미 개혁'이라 불리는 강력한 신자유주의 개혁과 큰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서비스업 중심으로 체제가 개편되며 어느 정도 불황에서 벗어나나 싶었지만, 2008년 미국발 대침체의 영향이 일본에도 불어닥치자 또다시 주저앉으며 이듬해 중국에게 세계 2위 경제대국 자리를 내어주었다.

1.7. 2010년대

2002년~2011년 10년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0.4%에 불과했다.[40]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5.8%로 하락했다. 2011년 8월, 무디스는 일본의 국채 신용등급을 Aa2에서 Aa3로 강등해 일본 경제에 충격을 주었다. #

이런 상황에서 2012년 아베 신조 총리가 집권하고 엔저정책을 펼치면서 상황이 조금씩 나아졌다. 아베 내각디플레이션 극복을 위해 무제한 양적완화를 필두로 한 아베노믹스를 시행하면서 일본 경제는 점차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실제로 일본의 주가 지수닛케이 225는 아베 집권 전보다 2.1배 이상 상승하였고, 잃어버린 n년 돌입 이후 최고치인 24,000선을 돌파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국내총생산, 실업률 등 대부분 경제 지표들이 아베 내각 기간에 줄줄이 신기록을 경신했다.

물가 상승을 각오하고 시중에 돈을 푸는 한편 수출에 힘쓴 것이 아베노믹스의 특징인데 그 결과 1980년대 수준은 아니지만 고교생과 대학생들이 기업을 골라가는 시대가 다시 도래한 것. 2015년 7월 기준 일본의 대학생 취업률은 무려 96.7%에 이르러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이며 고교생도 그보다는 조금 낮지만 비슷한 취업률을 보여 맘만 먹으면 취업 자체에는 문제가 전혀 없게 되었다. 게다가 취직의 질도 날이 갈수록 나아지고 있어 그야말로 1990년대 한국을 연상하게 하는 상황이다.[41] 다만 이는 아베노믹스보다도 저출산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한편 아베노믹스와 함께 GDP가 폭락하여 32,000달러대까지 추락했다. 다만 달러가치 GDP가 떨어진 거지 PPP는 오히려 성장했기 때문에 실제 경제 규모는 증가했다. 한국도 이 점은 마찬가지인데, 2016년 6월 현재 25,000대까지 추락했지만 PPP는 계속 성장했다. 사실 일본이 경제 위기를 겪던 시절에도 PPP는 계속 성장을 했다.

하지만 2016년 들어서서 마이너스 금리에 대한 반작용으로 다시 엔화가 상승하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는 더 강한 아베노믹스로 대처하겠다고 했지만 잘 될지는 아직 의문이다. 단, 이론상으로 보면 지금 상태가 옛날 고평가 시절보다는 더 유리하기는 하다.

그런데 핵폭탄이 터졌다. 브렉시트의 여파로 4년동안 낮춰둔 엔화가 급등하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브렉시트/세계 각국의 영향 문서 참조. 일본은 이번 브렉시트에서 가장 피해를 많이 본 국가중 하나다. 이 때문에 아베노믹스가 끝난 게 아니냐는 여론이 생기고 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 사태를 잘 수습하지 못하면 큰 악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자동차 부품 제조회사인 타카타가 에어백 결함을 숨기다가 파산했다. 일본 제조업체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파산이다. 타카타에는 1차 하청업체만 일본 내 130여곳이 있다고 한다. 연합뉴스 기사 동아일보 기사 YTN 기사

아베노믹스 이후 최초로 세수가 20조원이나 미달이 났다. #

현재 일본 국채가 바닥나서 통화정책이 한계를 보이고 있다. # 환율을 어떻게든 만져보려 하고 있지만 한계에 이른 듯 하다. #

다만 일본 내에서는 잃어버린 20년을 이제 빠져나올 수 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대기업 파산이 줄지어 일어나고 있음에도 현 일본 경제가 그다지 큰 타격을 겪지 않는 것에는 지난 몇년간 내각에서 일본 내의 관광업을 적극 육성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아베노믹스의 내용에 대해 양적완화를 부각시키고 이민 진흥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 내에서는 이민을 완화하는 김에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관광업도 함께 육성했고, 그 결과로 지금과 같이 일본 전자업계의 추락에서 오는 경제적 충격을 완화할 수 있었다.

물론 여전히 이것이 장기적으로 옳은 결정인지에 대해선 이견이 있다. 길게 봤을 때는 제조업에 비해 관광업이 훨씬 불안정한 수입원이기 때문이다.[42] 그러나 일본 전자업계의 추락은 이미 늦게 잡아도 2012년부터 월가 헤지펀드 등을 통해 거론됐고, 이를 무시하지 않고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한 것만큼은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다.[그런데]

2018년 5월 4일 일본 내각부는 일본 정부와 공공기관이 발행한 국공채의 잔액이 지난해(2017년) 연말 기준으로 1천42조 엔에 달한다고 밝혔다. 일본의 국공채 발행 잔액은 2002년 601조 엔이었지만 2017년까지 15년 동안 73.37%나 늘어났다. 동일본 대지진 극복 등을 이유로 아베노믹스를 바탕으로 대규모 양적완화가 계속 시행된 결과 일본의 국가부채가 사상 첫 1경을 돌파함에 따라 국공채 발행액이 이 같은 속도로 계속 늘어나면, 10년 후에 국가부도가 야기된다는 우려가 나왔다. 일본 국가부채 사상 첫 1경 돌파, 15년간 73.37% 증가 … 2027년 기초적 재정수지 흑자 목표 참고로 일본의 GDP 대비 부채 비율은 2002년에 처음으로 100%를 돌파했고, 이후로도 가파르게 상승하여 불과 9년만인 2011년에는 200%를 돌파하고야 말았다.

2018년 10월 닛케이 지수가 27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하면서 일본경제 전반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도 보인다. 그런 한편 일본의 철강 3위 업체인 고베제강의 무려 반세기에 걸친 품질 조작, 닛산자동차의 품질 데이터 조작, 스바루(자동차)의 30년 이상 품질 데이터 조작 등이 발각되면서 '메이드 인 재팬' 제조업 신화의 붕괴 우려가 전세계 언론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 '고베제강 사태' 일파만파…'메이드 인 재팬' 위기로 번졌다 파벌·실적주의 골병 든 일본 기업…'회계 스캔들'은 예고된 추락이었다 日 기업들 줄잇는 조작·부정 스캔들은 고질병인가 2019년 4분기에 마이너스 성장에 빠졌다.#

2019년 101조 엔(약 1,000조 원)이 넘는 사상 최대 규모 예산을 편성했다.

일본의 경제 규모가 확대되어 가는 상황이라면 모르겠으나 상술했듯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데 지금 같이 윤전기를 돌리는 것이 옳은 선택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본질적으로 현대 지폐는 국가 재정을 담보로 한 유가증권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쓰던 금은화나 태환화폐처럼 귀금속을 담보로 하지 않고 정부의 세수를 통해 직접 보증하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해외 신평사들은 일본이 이전의 세수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문화 정책을 피할 수 없다고 본다. 물론 미국이 히스패닉들과 겪는 상황처럼 정치적 갈등도 수면 위로 올라올 가능성이 100%이다.

1.8. 2020년대

세계적인 코로나 19 유행에 따라, 일본도 코로나 19에 휩쓸렸다.

특히 대면접촉을 기피하면서 그에 관련된 업종들이 타격을 받아,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경제 취약계층이 가장 크게 피해를 입었다. 유흥업에 종사하는 여성들, 비정규직이나 가정교사를 하던 프리터 등이 수요가 급락하면서 타격을 받았다. # @

아베 내각은 2020 도쿄 올림픽을 통해 올림픽 특수를 노림과 동시에 일본이 기나긴 불황에서 벗어났음을 세계에 과시하려 했으나,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올림픽이 1년 연기되면서 예산이 더 들어간 데다, 무관중으로 개최되며 계획들이 수포로 돌아 갔다.

미국-중국 무역 전쟁으로 반도체 수급이 불안정해지자 일본측이 반도체 산업을 자국으로 유치하는 방안이 담긴 성장전략 원안을 마련했다.#

2020년에는 실질 GDP가 4.6% 감소했다. #

2022년에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2022년 식량·에너지 위기로 인해 버블 경제 이후 최고의 물가 상승률을 기록하였다.

엔저가 지속되면서, 불과 6개월만에 GDP가 6천억 달러 증발했다.[44] 그에 따라 GDP 순위가 독일에게 밀리며 4위로 떨어졌다. 또한 1인당 GDP도 약 39,200$에서 34,000$로 급격히 떨어져 대만에게 추월을 당했다.

2023년 1월, 경상수지에서 1조 9,766억엔 적자가 났다. 경상수지가 적자로 돌아선 것은 작년 10월 이후 3개월 만이다. 주요 원인은 1월 상품수지가 3조 1,818억 엔(약 30조 원) 적자였기 때문이라고 니혼게이자이 신문이 짚었다. #

IMF 기준 2024년 4월 예측치로도 심각한 엔저가 지속되어 1인당 GDP대한민국에게 추월당하여 [45] 여기에 대만[46]스페인, 슬로베니아에게도 추월을 허용하였다.[47]

현직 일본 총리인 기시다 후미오는 일본의 임금 수준이 거의 30년째 정체되어 있다는 문제점에 주목하여 새로운 자본주의를 내세우고 있는데,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 그나마 기업 밸류업이 소기의 성과를 보여 닛케이 지수가 역대 최고치를 돌파하고, 기업 실적 호조와 30여년만의 5% 임금인상을 이루어 냈다. 그럼에도 엔저 고착화로 장기간 GDP 정체는 지속되고 있다.

2024년 8월 15일, 일본 내각부 통계에 따르면 일본의 경제 역사상 최초로 국내총생산(GDP) 600조엔을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IMF 기준 2024년 10월 통계를 보면 한국과의 차이가 더욱 벌어져 1인당 GDP10%의 격차를 보였다.[48] 여기에 여전히 대만[49]보다도 낮은 예측치를 보였다. 또한 예측치 수정을 통해 대만은 한국의 1인당 GDP를 추월한 적이 없는 것으로 수정되었고, 일본은 올해 추월된 것으로 바뀌었다.

2. 관련 문서



[1] 1930 ~ 1935년 당시 일본의 경제력은 열강에 들수 있는 선진 국가였다.[2] 583달러, 2024년 가치로 환산하면 약 13,362달러다.[3] 식민지 제외한 수치로, 대만은 8%, 조선은 4% 정도였다. 덤으로 중국대륙은 3%.[4] 2차대전 이전 일본의 소득이 미국의 16%였으며 2020년대 초반 기준 중국도 미국의 25% 정도 된다.[5] 서유럽의 후진국 취급받던 스페인포르투갈, 동유럽의 체코보다도 가난했다.[6] 비슷하게 벨 에포크 시대 당시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나라라도 아메리카로 이민을 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이 아메리카 각 국가에서 스페인계, 영국계, 프랑스계, 독일계, 이탈리아계, 포르투갈계 조상을 두었다는 사람들을 쉽게 볼수있는 이유이다.[7] 2011년의 1달러는 2024년의 1.4달러 남짓 수준이다.[8] 일본은 메이지 시대때 의무교육이 확립되었고, 1940년대 기준으로 중학교 진학률이 아주 높았던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국민의 대다수가 기초적인 한자 수백자와 가나 문자 정도는 읽고 쓸줄은 아는 상태로 패전 직후에 문자개혁을 위해(이 당시 미군정에서 문자개혁을 실시할 계획이 있었다.) 실시된 문맹률 조사에 의하면, 일본의 문맹률은 2% 정도였었다. 의무교육이 실시되지 않던 한반도는 문맹률이 78%에 달했던것과 비교된다.[9] 또한 유럽 강대국들에게 식민지 해방을 주창하던 미국이 언제까지고 미국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군정국가들을 유지할수도 없는 노릇이였다.[10] 일명 닷지라인[11] 1980 ~ 90년대 이전 아시아 국가들은 몇몇 중동 산유국을 제외하면 대다수가 개발도상국이었다.[12] 공식환율이 실질환율의 2배 이상이였기에 실질 가치는 158달러의 절반 미만이었다.[13] 후자는 아시아 최초가 맞았지만, 전자는 이미 보잉 707을 도입한 파키스탄인도에게 선두를 뺏겼다.[14] 그래도 동시기 기준으로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을 밑돌던 남유럽 국가 스페인, 포르투갈보다는 나았다. 스페인은 1962년, 포르투갈은 1968년에야 세계 평균을 넘기는 데에 성공했다. 사족으로 스페인, 포르투갈은 모두 1인당 GDP 세계 평균의 2배를 넘기는 것도 평균 초과로부터 10~20년도 더 뒤에야(스페인: 1973년, 포르투갈: 1991년) 겨우 이룩할 수 있었다.[15] OECD 가입 신청서한은 1962년 11월 정식으로 제출했고, 가입 협정서에는 1963년 7월 서명했다.[16] 한국으로 치면 1988 서울 올림픽 직후인 1989년 OECD에 가입한 격이다. 실제로 당시 한국의 1인당 GDP(5,817달러)가 세계 평균(3,896달러)의 약 1.5배 수준이었다.[17] 이 시기 대표적인 경제, 산업 각료로는 미즈타 미키오, 후쿠다 다케오, 다나카 가쿠에이, 아이치 기이치, 오히라 마사요시, 나카소네 야스히로, 미야자와 기이치, 고모토 토시오가 있다.[18] 이것도 공산권 특유의 고정환율 때문에 과대평가된 수치이다.[19] 오사카, 나고야 같은 지방도시는 더했으며 10만 미만의 지방 소도시들은 종전 직후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한다. 이는 1961년 도쿄의 슬럼가를 담은 영상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그나마 1960년대 후반엔 이탈리아와 비슷한 소득을 보이고 1970년대 부터 본격적으로 서민들의 경제가 점점 나아지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유럽(프랑스, 서독, 영국)도 이때부터 종전시기 흔적을 싹 뒤엎고 서민들도 풍족해진 시기였으나 이때는 미국을 제외하면 서민들은 해외여행은 꿈같은 것이고 빈부격차도 심각했다. 그나마 서독이 복지를 신경써서 주변국이나 일본보다는 사정이 훨씬 나았다.[20] 컬러 방송 극초기에는 컬러 TV 가격이 신입 공무원의 3~4년치 연봉에 육박하는 수준이었던 반면 흑백 TV는 신입 공무원의 반년~1년치 봉급이면 살 수 있었다. 물론 흑백 TV 중 비싼 것은 신입 공무원의 1.5년치 봉급을 내고 사야 하기도 했다. 참고자료 그나마 싸졌다는 60년대 중반에도 대졸 신입사원의 1년치 연봉에 준하는 수준의 엄청난 고가였다. 자세한 사항은 텔레비전/역사 문서 참조.[21] 2023년 환율로는 약 12,802달러다.[22] 2023년 환율로는 약 6,193달러다.[23] 2023년 환율로는 약 41,430달러다.[24] 2023년 환율로는 약 1,740달러다.[25] 동시대 대한민국 서울자동문이 열리는 건물이 있었지만 그런 건물은 극소수였다. 엘리베이터 또한 신기한 고급 기계 취급이었다.[26] 보잉 747 운항이 시작된 해가 1970년으로, 미국팬 아메리칸 항공을 시작으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스페인 순으로 747 운항을 시작했다. 사족으로 왜 영국이 이들 대열에 없냐면, 747을 인도받은 영국의 플래그 캐리어 BOAC(오늘날 영국항공의 전신)와 조종사들과의 급여 분쟁 때문에 보잉 747 운항이 늦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영국은 과거 식민지였던 아일랜드보다 근소하게 늦게 747 운항을 시작해야 했다.(...)[27] 일본의 맥도날드 진출 당시 맥도날드가 들어온 국가는 미국, 캐나다, 코스타리카, 호주 4개국이 전부였다. 일본 진출과 같은 해에 네덜란드(유럽 최초), 파나마, 서독에도 맥도날드가 들어왔다.[28] 한국은 1993 대전 엑스포, 중국은 2010 상하이 엑스포가 이와 비슷한 포지션이다. 마침 이 대회들도 올림픽 후 개최되어 이들의 경제적 부흥을 온 세계에 공표한 대회라는 것이 오사카 엑스포와 비슷하고.[29] 1990년대 초반 ~ 2000년대 초반의 한국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30] 1970~80년대에는 일본에서도 중형차 이상의 큰 차를 선호하는 풍조가 있었다.[31] 일본 반도체가 순식간에 망한 것도 미국의 힘을 빌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민중들이야 그것을 자신들의 힘으로 생각하였으나 본질적으로 미국의 힘으로 미국을 이기려고 하니 이길 수가 없었다.[32]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3,480달러로 세계평균을 갓 돌파한 시점이었다.[33] 1979년 출간된 에즈라 보글 하버드 대학교 교수의 저서. 당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풀네임은 Japan as Number One: Lessons for America. 당시 미국이 일본을 보고 배워야 한다고 할 만큼, 일본은 경제 모범생으로 확고한 자리매김을 했다.[34] 이중 금리하락은 당시 미국의 눈치를 보다가 내렸는데 당시 눈치 덜 본 독일은 버블경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동시기 서구의 국가들은 실업과 인플레이션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35] 사실 미국의 90년대 초반 불황은 짧고 가볍게 끝나서 이후 미국이 황금의 10년을 맞게 되었지만, 유럽의 불황과 높은 실업률은 몇 년 더 갔다.[36] 미국과 세계를 양분하던 초강대국이자 세계 2위 GDP를 자랑하던 소련마저도 최전성기이던 1960 ~ 70년대 당시 GDP가 미국의 50%대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정말 대단한 것이다. 참고로 1995년 일본 GDP는 영국+프랑스+독일의 총 GDP(5조 5,365억 달러)랑 맞먹는다. 독일이 3위, 프랑스가 4위, 영국이 5위였는데 3, 4, 5위 합쳐야 일본과 비슷하다.[37] 이는 전 세계 TOP 5 안에 드는 어마어마한 수치였다. 당시 미국이 3만 달러가 채 안 됐고, 한국은 1만 2천 달러였다.[38] 사실 1997년 4월에 소비세를 5%로 인상한 것도 컸다. 그 전까지는 확실히 경제가 회복할 기미가 보였는데, 이로 인한 소비 둔화가 아시아 금융위기와 맞물리면서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39] 외환위기 직전 일본과 대한민국의 경제력 격차는 7 ~ 8배나 차이가 났었다.[40] 이자나미 경기라 부르는 2004년부터 2007년까지는 연평균 성장률 2.3%로 선방했다. 문제는 일본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타격을 제대로 받고, 2010년에 그나마 일어서나 했더니 2011년엔 동일본 대지진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라는 최악의 재앙이 연달아 터지면서 점점 더 수렁에 빠져들었다.[41] 다만 이쪽은 대학진학률 자체가 낮고, 한국과는 달리 4학년때 사실상의 취업 활동이 마무리되고 (내정) 그 시점에 중소기업 공장 중규직이라도 불만없이 가야 하는 문화도 같이 고려해 봐야 한다. 한국처럼 졸업 후 일자리를 계속 찾을 수 있는 문화가 아니다. #[42] 2018년, 이에 대한 부작용이 실제로 나타나고 있다. 금융시장에서는 아무런 이상 징후도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단순히 일본 열도가 여름철에 평소보다 강한 태풍을 맞으면서 방일 관광객의 수가 크게 줄어든 것만으로 7~9월 분기에 마이너스 성장을 했는데, 이는 연초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그런데] 정작 2017년경부터 일본 정부는 “이제 잃어버린 10년을 극복했다!”는 식으로 선전을 해보거나 하기는 커녕 아예 “일본에게 잃어버린 10년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는 이상한 역사왜곡을 하며 삼천포로 빠지고 있다. 사실 처음부터 경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전형적인 권위주의 정부의 모습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44] 2022년 4월에는 약 4조 9300억 달러였는데, 10월에 발표된 수치는 4조 3,000억 달러다. 약 12.5% 감소했다.[45] 한국: 34,165달러(31위), 일본: 33,138달러(34위)[46] 이쪽은 한국보다 높게 나왔다. 2022년에 한국과 일본을 추월했으나 23년 4월에는 일본에 동년 10월에는 한국에게 추월당했다가 24년 4월에 한일 양국을 앞질렀다.[47] 34년간의 1인당 GDP 추이를 비교했을때 타 선진국 대비 1인당 GDP가 정체되었다는 점이 두드러졌다. 성장률 저하와 경제침체, 저출산/고령화는 선진국들이 으레 겪는 공통적인 리스크지만, 미약하게나마 꾸준히 성장한 여타 선진국들과 달리 일본은 아예 제자리 걸음이었다. 최근에 불거진 엔저를 원인으로 지목할 수도 있겠지만 코로나 팬데믹 이후 일본은 물론, 한국, 유럽 등 대다수의 국가들도 강달러로 환율 하방압력을 받았던지라 일본만의 특수한 원인이 아니다.[48] 한국: 36,130달러(30위), 일본: 32,860달러(36위)[49] 대만: 33,230달러(35위). 그나마 대만의 1인당 GDP가 하락하여 격차가 줄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