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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 불가침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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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36349> 연표 사건
1936년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1939년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1940년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1941년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1942년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1944년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1945년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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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 how long the honeymoon will last?
신혼 생활얼마나 오래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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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렘린에서 만나 악수하는 이오시프 스탈린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1. 개요2. 독일-소련 관계의 파국3. 1938년 위기와 소련4. 리트비노프 구상5. 1939년 위기와 서방-소련의 접촉
5.1. 집단 안보 체제의 엇갈림5.2. 폴란드의 입장5.3. 소련의 입장5.4. 영국의 입장
6. 소련의 정책 변화와 독일의 접근7. 조약 체결8. 결과9. 평가10. 여담11. 관련 어록12.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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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독일국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독소 불가침조약
독일어 Deutsch-Sowjetische Nichtangriffspakt
러시아어 Договор о ненападении между Советским Союзом и Германией
영어 Treaty of Non-Aggression between Germany and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이데올로기상으로 불구대천의 원수인 두 나라가 은밀한 회의에 열중해서 터무니없는 현실 정치(Realpolitik) 속에서 동유럽 국가들을 조각내는 것, 그것은 기괴한 일이었다.
(···중략···)
이데올로기는 스탈린에게 대수롭지 않았다. 소련 국경 저 먼 쪽에서는 국가 이성(raison d'etat)이 더 우세해졌다. 그는 파시스트 독일과 조약을 맺을 수 있는 만큼 손쉽게 제국주의 서구와 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소련이 보기에 유럽의 반동 국가들은 모두 사회주의라는 쇠바퀴에 깔려 종국에는 모두 가루가 될 것이었다.
(···중략···)
무엇보다도 독일은 소련이 1939년에 그저 꿈에서나 바랄 수 있던 것을 내놓았다. 그것은 유럽에서 차르 제국을 재건할 가능성이었다. 그 가능성이 독일의 동의를 받아 이루어진다고 해서 그 제공의 중요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작은 완충 국가들의 네트워크 대신에 독일과 소련이 국경을 맞대는 상황을 가져오리라는 사실은 감내할 만했다.
- 리처드 오버리 저, 류한수 역,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 p. 77-79
독소 불가침조약()은 1939년 8월 23일 나치 독일소련이 체결한 불가침조약이다. 서명자인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의 이름을 따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Molotov–Ribbentrop Pact)이라고도 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을 알리는[1] 결정적인 문건이지만 정작 독소 불가침조약의 협정문 원본은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다. 나치 독일 보유본은 전쟁 중[2]에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고, 소련 보유본은 알 수 없는 이유로 행방이 묘연하기 때문이다. 만일 원본이 발견된다면 세계기록유산에 무조건 오를 후보 중 하나라고 꼽히는 문서이다.[3]

2. 독일-소련 관계의 파국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독일과 소련은 매우 사이 좋은 우방국이었다.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으로서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항공 전력, 전차 등의 보유가 금지되었고, 또한 국제 연맹 가입을 거부당하고 있었다. 소련 역시 사회주의 국가였기에 국제 사회에서 왕따당하는 처지였다. 비록 양국이 1차 대전 때 피 터지도록 싸웠다고는 하나, 소련에 있어 그것은 러시아 제국의 일이었고, 독일 역시 독일 제국의 문제였으며, 두 제국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또한 카를 마르크스가 독일 출신인만큼 독일 내 공산주의자도 꽤 많았기 때문에 멸시받는 둘은 사이가 좋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의 타결책을 모색하던 독일과 소련의 이해 관계가 접점을 이루면서 독소 양국은 1922년 라팔로 조약이라는 우호 조약을 체결했다.[4] 독일은 소련에 여러 선진 군사 기술을 제공하고, 소련은 항공 전력과 탱크 등의 보유 및 개발이 금지된 독일에 비밀리에 신기술 연구 및 군사 훈련을 할 수 있는 시설을 자국 영토 내에 제공하는 등 서로 편의를 많이 봐주었다. 아울러 양국 모두 폴란드라는 가상 적국[5]에 대한 견제가 필요했다. 독일은 국경 인정 문제로, 소련은 1920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이후로 폴란드와 사이가 안 좋았다.

그러나 이런 양국 관계는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수상에 취임하면서 깨져 버렸다. 동유럽과 러시아를 정복해서 게르만 민족의 터전으로 삼아야 한다는 레벤스라움이 나치즘의 핵심사상이었는데다가 "반공"을 외치면서 세력을 키워서 정권을 장악한 게 히틀러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소련과의 관계는 나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전체주의를 통해 민주주의도 부정했기 때문에, 자신의 체제가 우월하다고 전세계적으로 선전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스탈린도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체제 경쟁을 똑같이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독일-소련 관계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파일:1937 파리 엑스포 독일-소련.jpg

독일-소련 관계를 나타내는 1937 파리 엑스포 때의 사진. 1941년 독소전쟁리허설이라고 불리는 사진이다. 왼쪽이 나치 독일의 독일 국가관, 오른쪽이 소련의 소련 국가관이다. 소련은 낫과 망치를 들고 있는 노동자를, 독일은 세계를 내려다보는 국가수리를 형상화했다. 이 당시 두 열강은 스페인 내전이란 전장에서 대리전쟁을 한창 치르는 중이었다. 중간에 위태로운 듯이 낀 에펠탑이 당시 전세계적으로 극우, 극좌 사이에서 위태롭던, 역사학자 마크 마조워의 말을 빌리자면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를 보여주는 듯하다.

3. 1938년 위기와 소련

1938년,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주데텐란트 할양을 요구하며 유럽에 전쟁이 터질 위기가 도래하자 소련도 움직였다.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 군사 동맹을 체결한 상태였으며, 그에 따라 유사시 동맹국의 안전 보장을 위해 참전하여 독일과 싸워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와 국경을 접하지 않고 있었기에 폴란드 혹은 루마니아의 영토를 통과해야 했다. 둘 중 폴란드는 죽으면 죽었지 소련군에게 영토 통과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천명했고, 루마니아는 일단 거절했지마는 고려해 보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때 영국과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를 버리고 독일과 화평하는 길을 선택했고, 그 결과가 바로 뮌헨 협정, 일명 서구의 배신이었다.

4. 리트비노프 구상

파일:Beck,_Litwinow_1934.jpg
1934년 당시 폴란드 외무부 장관 유제프 베크(좌)와 대담하는 막심 리트비노프(우)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 위기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와 동맹을 맺고 있었고, 소련군은 유사시 루마니아를 통과하여 체코슬로바키아에 출동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나, 정작 서유럽이 체코슬로바키아를 포기하고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할양하자, 큰 위협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집권 당시부터 소련을 비난해왔고 소련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독일이 곧 소련과의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위기감이 소련 지도부를 덮쳤고 영국, 프랑스, 소련이 구성한 집단 안보 체제는 크게 흔들렸다.

소련 외무부 장관 막심 리트비노프는 반독 - 친서방파로서 영국, 프랑스, 소련, 체코슬로바키아가 연합해 독일을 포위하는 구상을 했으나, 스페인 내전과 안슐루스 등의 사태에서 4국 집단 안보 체제는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고 뮌헨 협정은 그의 구상에 결정타를 가했다. 수년에 걸친 노력이 헛수고로 끝나자, 스탈린은 격노하여 1939년 4월 17일에 리트비노프를 경질하고 대서방 강경파인 몰로토프를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집단 안보 체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몰로토프를 외무 장관으로 임명한 뒤에도 외교 정책 기조를 유지했다.[6]

5. 1939년 위기와 서방-소련의 접촉

5.1. 집단 안보 체제의 엇갈림

나치 독일은 뮌헨 협정으로 주데텐란트를 양도받은 뒤에도 멈추지 않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를 강점하여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을 설립했다. 기세가 오른 나치 독일이 폴란드에게 폴란드 회랑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자, 유럽에는 다시 전운이 고조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의 한끼 식사가 된 이상, 영국과 프랑스는 자국의 안보가 흔들리는 문제를 막을 필요가 커졌다.

소련과 나치 독일은 스페인 내전에서 간접적으로 싸운 전적이 있었고 나치와 국경을 맞대게 된 상태였기 때문에 소련은 소련대로 절박한 상황이었다. 1938년과 달리, 이번엔 양측 모두 상당히 진지하게 접촉하며 의견을 주고 받았다. 최우선적으로 독일의 팽창 저지와 제압을 목표로 하는 데에는 양측의 의견이 동일했다.

소련의 외무 장관 몰로토프는 영국, 프랑스에게 '발트해-지중해까지 모든 나라의 영토 보전을 보장하고, 그 나라 중 어느 한 나라라도 독일의 공격을 받을 경우 영국, 프랑스, 소련 세 열강이 모두 전쟁에 돌입한다'는 내용의 동맹 관계를 제안하는 문서를 전달했다.

그러나 삼국 간의 협상은 회담 시작 전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영국은 문서를 전달받은지 6주가 지나서야 답신을 보내왔으며, 그마저도 동맹 관계를 구축하자는 것이 아니라 예비 회담을 열자는 데 동의하는 것이었다. 초조해진 몰로토프는 7월 17일, 영-불-소 외교 회담에서 군사 협약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의 사절단은 한 달 가까이 지난 8월 10일이 되어서야 소련에 도착했는데, 협상단이 비행기가 아닌 여객선 '시티 오브 엑서터(City of Exeter)'호를 타고 느긋하게 넘어와서 지체된 것이었다. 게다가 레닌그라드에 입항하고 나서도 바로 모스크바에 가지 않고 관광부터 하면서 소련 측에 '저것들 놀러왔나?'와 같은 나쁜 인상을 심어주고 말았다.

하루 동안 관광이 끝나고 8월 12일이 되어서야 모스크바에서 겨우 협상이 시작되었는데, 회담에 참가한 협상단도 문제였다. 소련 측 협상단장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최측근이자 친구인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였다.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보고할 필요 없이 바로 군사 협정에 서명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았으며, 이를 증명하는 문서를 영-불 협상단에게 보여주었다. 보로실로프 외에도 당시 소련 육군참모총장이던 보리스 샤포시니코프 원수 등 소련군 고위 장성 여럿이 협상에 참석하였다. 본디 외교에서 위압적으로 나오는 일이 많던 독재자 스탈린이 자신의 최측근을 협상단장으로 임명한 데에서 소련이 이 협상에 얼마나 진지하게 임했는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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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에 도착한 영불 협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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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협상단장
레지널드 드락스 경(1880-1967)
프랑스 협상단장
조제프 두망(1880-1948)
반면 영국과 프랑스의 협상단장은 소련에 비해 그 지위가 상당히 떨어졌다. 프랑스 협상단장은 프랑스 제1군관구사령관 육군 대장(Army General) 조제프 두망(Joseph Doumenc)으로, 보로실로프와 마찬가지로 협정 서명권을 위임받고 있었기는 하나[7] 당시 프랑스군 내 서열 40위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영국은 한술 더 떴는데, 영국 협상단장 레지널드 드락스 경(Reginald Drax)[8]은 해군 소장으로, 일개 함장 출신인데다 영국 정부에 협상 내용을 보고만 할 수 있었을 뿐 직접적인 협상 권한조차 없는 위치였다. 자국의 거물들을 협상단으로 때려박은 소련에서는 당연 이같은 처사에 매우 당황하고 불쾌해했다.[9]

어쨌든 협상이 시작되고, 전쟁 발발 시 각국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 수치에 대해서 소련 협상단은 120개 사단, 중포 5천여 문, 탱크 9천여 대, 항공기 5천여 대를 투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1941년 독소전 개전 당시 소련은 1938년부터 시작해서 9000대 이상의 폭격기와 1만 3천의 전투기, 장갑차 2700여 대를 생산해서 주요 전선에 배치해 두었고, 탱크 2만 2000 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2년의 기간과 생산 속도, 배치 과정 등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해 볼 때, 1939년 협상 당시의 소련은 가지고 있는 모든 카드를 영-불 양국에 보여줬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만큼 소련은 독일에 대해 가지는 경계심이 컸으며, 희생하는 역할을 기꺼이 맡을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소련의 답변에 대해 프랑스는 110개 사단, 전차 4000여 대를 파병 가능하나, 영 - 프 - 소 3국의 군대는 각자 개별적으로 국가를 방위하고, 협력 국가의 요청이 있을 경우에 개입한다고 답했다. 게다가 영국 협상단은 한술 더 떠 동원 가능한 병력이 16개 사단이라고 밝히면서 보로실로프가 "통역을 잘못한 것 아닌가?" 라고 되묻게 만들었다. 당황한 소련이 세부 사항을 캐묻자 영국은 사실 단 4개 사단만이 투입 가능하다고 실토했다. 회담 종료 후 스탈린이 영국 대사에게 구체적으로 더 묻자, 4개 사단 중에서도 2개만이 제대로 된 사단이고, 나머지 2개 사단은 좀 더 뒤에야 완편된다는 것이었다.[10][11]

이런 어처구니없는 답변이 돌아오자 소련은 어이를 상실한 나머지 할 말을 잃었고,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열강 측이 '의도적으로 소련과 독일의 전쟁을 부추기려는 것 아닌가'하는 의심까지 품었다. 사실 이런 의심은 의심이랄 것도 없이 영국 정계에서 공공연하게 거론되고 있어서 의심이라기보다 영국이 선택을 한 것으로 생각했고, 사실 당시 영국 정계의 상황이나 훗날 2차 대전 막판에 처칠이 구상한 언싱커블 작전 등으로 보면 스탈린의 판단이 크게 틀린 것도 아니었다.

스탈린의 눈에 이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게, 제1차 세계 대전 초반에 미지근하게 대응하던 영국이 마지못해 파병한 대륙 원정군의 1진이 4개 사단 규모였는데 이제는 거기에도 못 미치는 소규모 병력만 있다는 소리였다. 전쟁은 바로 코 앞으로 다가와 있다고 판단되는 와중에 병력 준비가 저 모양이었으니 소련은 영국인들이 제대로 싸울 의지 자체가 없다고 보았다. 영국은 이미 1938년 후반부터 방위 산업 생산 규모를 대폭 확장하기 시작한 상황이었으므로 소련인들은 실제로 영국군이 훨씬 많은 병력을 동원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섬나라이고 전통적으로 모병제를 시행했기 때문에 평소에는 대규모 상설 육군은 존재하지 않는 나라였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워털루 전투에 출동한 영국군도 약 3만 명에 불과했고 (프랑스군 약 7만), 크림전쟁 때도 약 10만, 1차 대전 발발때도 24만에 불과했다. 전쟁 직전 프랑스군이 60만, 독일이 120만이었다. 다만 영국도 2년차부터는 육군을 확장하여 최종적으로는 전쟁 말기에 380만의 병력을 동원하게 되지만 이건 전쟁이 실제로 터지고 난 이후에 총동원령을 내려 동원한 거지 전쟁 터지기 전에 대기시킬 수 있는 병력이 아니었다.

대영제국의 식민지가 많았으니 식민지에서 병력을 차출하면 되는거 아닌가 하는 소리도 있지만 식민지의 병력은 기본적으로 식민지를 통치하고 방어해야 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차출할 수 있는 게 아닌데다 식민지인으로 구성된 병력은 문화언어의 차이로 인한 장벽 때문에 대규모로 운용하기도 어려웠으며 식민지인들도 지배자에 불과한 식민종주국의 그들만의 전쟁에 그닥 협조적으로 나올 리가 없으니 처음부터 대규모로 동원하기도 어려웠다.

2차대전 당시 식민제국을 보유한 많은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인 부대를 운용했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병력이었고 대다수의 주력은 본토인으로 구성된 병력이었다. 또한 1930년대의 대영제국은 이미 식민지들에 대한 통제력이 와해되고 있어서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으로 각 식민지들이 거의 독립국에 준하는 자치령으로 개편되었기 때문에 제국이 건재하던 1차대전 당시와는 달리 비해 식민지를 곧바로 전쟁에 동원하는게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육군 보다는 공군, 그리고 공군보다는 전쟁 재정에 대한 확충을 더 우선시 했다.[12][13]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영국도 독일과의 전쟁이 다시 벌어지면 참호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동(폴란드)서(프랑스)로 각각 100만의 대군[14]을 면전에 둔 독일군은 적어도 한동안 지체될 것이지만, 영국 육군의 개입 없이도 독일군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1차 대전 때도 영국 육군은 초반 2년을 매우 소극적으로 임했고,[15] 이는 대륙의 전쟁에 개입하는 영국의 전통이기는 하지만, 당장 히틀러와 독일군의 총칼에 맞서야 하는 소련이 "돈 댈 테니까 내가 올 때까지 좀만 참으라."라는 태도를 좋게 봤을 리는 만무하다.

요약하면 프랑스가 보인 행동은 1차 대전 당시의 악몽에서 비롯된 것이고, 영국이 보인 행동은 지금까지 대륙 전쟁에 개입할 때의 전통을 따른 것이라 나름 근거는 있었지만, 소련의 입장에서는 그냘 고깝게 보이는 핑계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만큼 설득력이 부족했다.

이렇게 확실한 전쟁 준비보다는 금융 자본의 확보에 주력하고 있는 영국 측의 태도가 당장 나치와 총칼을 맞댈 수도 있는 소련에게 "이 제국주의 열강놈들이 같이 싸울 생각은 안 하고 돈벌이에만 급급해?" 라는 커다란 의심을 불러 일으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영국의 금융 자본은 1차 대전 때도 프랑스에 전쟁 자금으로 각국에 엄청난 차관을 빌려주었고, 패전국인 독일에 전쟁 배상금을 탕감해주면서도, 정작 동맹국이었던 프랑스에는 그런 혜택 없이 받을 것을 전부 받아가서 커다란 이익을 얻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반영 감정이 고조된 바 있었다.[16]

영국이 육전에 대한 대비보다는 전쟁에 필요한 자본을 확충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던 것은 대륙 국가들이 당분간은 어떻게든 독일을 막아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 이는 엄청난 오판이었다.[17] 소련 입장에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 문제로 전쟁이 시작되면, 군병력 동원이 오래 걸리는 자신들을 대신해서 소련과 폴란드가 힘을 합쳐 적어도 6개월에서 1년쯤 독일군을 동부에 붙들어 주기를 기대했다.[18][19] 그리고 소련은 그런 장기 지연전의 결과로 소련군만 피를 흘리고 마는 게 아닌가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경우, 독일과 소련이 다같이 기진맥진해 있을 때 영불이 기습 공격으로 두 나라를 동시에 무너뜨리는 것조차 가능해 보였다.

매사에 의심 많은 스탈린으로서는 그런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러시아 제국 시절 때부터 그레이트 게임으로 인해 영국과 오랫동안 적대적인 관계[20]였기 때문에 소련의 그런 의심은 충분히 타당했다. 적어도 러시아 내전 때 전 세계가 자신들을 공격하는 경험을 잊지 않은 소련과 스탈린에게는 타당해 보였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영프는 처음부터 소련을 그렇게 신뢰하지 않았다. 1920-30년대 서방권 외교 기류였던 윌슨의 이상주의는 역사의 선악을 구분하는 흑백논리적인 경향이 있었고 거기다 당시 영프는 파시즘보다 공산주의를 더욱 경계하였기에 당연히 서로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협상이 진행될 리 만무했다.[21]

5.2. 폴란드의 입장

우리는 독일과의 관계에서는 자유를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소련과 붙으면 영혼을 잃어버릴 것이다.
-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폴란드군 총사령관)
리트비노프가 구상한 집단 안보 체제에[22] 폴란드는 협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폴란드는 독일 못지않게 러시아 및 소련과 역사적인 여러 악연이 있었으며, 영토할양을 요구하는 독일에 강경한 것과 마찬가지로 집단안보에 참여하라는 소련의 요청도 거절했다.

소련은 유사시에 붉은 군대가 독일로 진군할 수 있도록 동유럽 국가, 특히 폴란드(영-불의 동맹국)가 소련군에 군사 통행권을 내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소련에게 국경을 열어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에 영국과 프랑스에게 "소련과 군사협정을 맺지 않았으며 맺을 생각도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하였고, 영불 양국의 설득에도 요지부동이었다.

이처럼 폴란드가 소련과 대독 방위조약을 거절한 배경에는 역사적인 원한이 있었다. 폴란드는 1648년 일어났던 대홍수에서 이미 스웨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23], 루스 차르국 등에게 영토를 뭉텅 뜯기면서 동유럽의 맹주 위치를 빼앗겼고, 1772년, 1793년, 1795년 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 3국에 의해 영토가 3번이나 강제 분할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이 때 러시아는 3국 중 가장 가혹한 통치를 펼쳤다. 특히 러시아 제국은 두 차례의 봉기를 경험한 이후 폴란드 민족주의를 더욱 혹독히 탄압하기 시작했고, 동군연합 형태로 명목상으로나마 존재해오던 폴란드 입헌왕국을 폐지시키고 프리비슬린스키 지방이라는 일개 지방으로 격하시켰다. 이 시기 수많은 폴란드 지식인들은 민족주의 운동을 벌였다는 이유로 투옥되거나 해외로 망명해야 했고, 폴란드 학생들은 학교에서 폴란드어 대신 러시아어로 말해야 하는 등 민족 말살에 가까운 탄압을 겪어야 했다.

여기에 폴란드 제2공화국은 러시아 혁명 중인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소비에트 러시아와 직접적으로 전쟁을 치르면서 수도인 바르샤바까지 함락될 뻔한 적이 있었다. 따라서 폴란드 제2공화국 입장에서는 소련이 폴란드를 지원할 경우 폴란드 내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건 당연하고 심하면 이전 전쟁으로 얻은 동부 영토까지 잃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24]

이렇게 소련과 역사적인 악연이 있기는 했지만 뮌헨 협정 이후 폴란드에 대한 독일의 압력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에 폴란드는 어떻게든지 안보 전략을 재고할 필요성은 있었다. 하지만 전통적인 우방인 프랑스는 폴란드의 생각과는 달리, 1차 대전 때 엄청난 피해를 보았기 때문에 독일과 충돌을 야기할 수 있는 군사적 압력을 가하는 데 매우 소극적이었다. 또한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를 폐기한 이후에도 적극적으로 제지하기는커녕, 독일의 공세적인 군비확장에 미온적인 대응을 할 뿐이었다.

폴란드가 믿고 있었던 또 다른 나라였던 영국 또한 대공황에 대한 후유증이 극심해 독일의 팽창주의적인 도발에 기껏해야 외무성 성명이나 발표하는 정도였다. 폴란드-독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영국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독일에 대한 해상봉쇄가 전부였다. 이런 폴란드의 실책을 서방에서는 전간기의 외교실패 중 하나로 본다.[25]

그나마 독소 양쪽 모두 계속 적대시하면서 폴란드 중심으로 다른 중, 동유럽 국가들을 끌어들여 중부 유럽 일대를 제3세력으로 일으킨다는 선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시절 외교정책도 당장 폴리투 재건이라는 비현실적인 면모 뿐만 아니라, 뮌헨 분할 참여를 비롯해 막상 폴란드 자체도 민족 영토 분쟁이 걸렸을 때마다 다른 동유럽 이웃 국가들과 마찰을 빚으면서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 잠잠해진지 오래였다. 폴란드는 독립 영웅 피우수트스키의 지도 아래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는데, 그는 과거에 사회주의자였으나, 후에 우파로 전향하였고 독립 후에는 1925년 쿠데타를 일으켜 권위주의적인 독재체제를 수립했다.

그는 발트해(발트3국)로부터 흑해(우크라이나)에 이르는 거대한 연방을 구성하고 폴란드가 그 맹주가 되어 서로는 독일, 동으로는 소련(러시아)와 맞서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미엥지모제(Międzymorze)[26]라고 부르는 이 정책은 사실상 실체적인 의미는 없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폴란드-루마니아-헝가리 간의 삼국동맹이 진지하게 논의된 정도였으나 이마저도 루마니아와 헝가리 간의 트란실바니아 문제로 인하여 무너졌다.

피우수트스키 사후 1936년부터는 피우수트스키의 대령단이라고 불린 피우수트스키 휘하 대령들이 정권을 잡고 일종의 선군정치를 폈다. 비록 강력한 군사독재자는 없었지만 군부가 사회의 모든 면을 지배하는 일종의 군국주의적인 국가가 된 것이다. 그나마 피우수트스키는 정치현실주의자였기 때문에, 소련과 독일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면서도 양국을 자극하는 일은 극히 피했다.

양국과 불가침조약 (소련과 1932년, 독일과 1934년)을 맺었지만, 그의 후계자들인 군부 지도자들은 대외정책에 있어 현실적 고려 없이 점점 더 강경한 정책을 폈다. 게다가 폴란드는 뮌헨 협정에 한몫 끼기도 하여, 헝가리와 함께 자그마한 체코 영토를 얻기도 했다. 이 당시 폴란드의 외무장관은 군 출신 "대령단"의 일원인 유제프 베츠크(1894~1944)였는데 베츠크는 소련-폴란드-영불과 연합하여 독일에 맞서려는 리트비노프 구상을 거부했다.

베츠크는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엄정중립을 강조하는 한편, 폴란드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및 폴란드와 비슷한 동유럽 국가들인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루마니아의 5국동맹을 맺고 소련과 독일에 대항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헝가리와 루마니아는 매우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같은 동맹에 끌어들이는 것이 어려웠고, 이탈리아, 헝가리는 뮌헨 협정 이후 독일에 더 가까워졌다. 유고슬라비아는 세르비아가 주도하는 연방구조가 허술하여 대외동맹은커녕 연방분열을 더 염려하는 지경이었다.

게다가 헝가리, 루마니아는 유고를 분열시켜 자신의 영토를 늘리고 싶어했을 정도로 이들 4개국은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으니, 폴란드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다. 결국 5국 동맹은 뮌헨 협정 이후에는 그나마 독일을 견제할 수 있는 이탈리아가 독일 편으로 돌아서면서 거의 불가능해진 것이다. 나머지 4개국은 서로 사이도 나빴지만, 동맹을 맺었다 한들 현실적 국력으로는 독일이나 소련과 대결하기가 매우 어려웠다.[27]

이처럼 폴란드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면 폴란드가 소련과 방위조약에 회의적이었던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폴란드는 점점 자국이 군사, 외교적으로 불리해지는 상황에서 주변 국가들을 잠재적 적국으로 돌리는 외교적 악수를 두었고, 결국 자유와 영혼을 모두 강탈당하는 결과를 맞이한다.

5.3. 소련의 입장

소련군 총참모부는 스페인 함락 이후 나치와 제국주의 진영이 침략하여 소련이 파멸할 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나치는 이미 1938년에 오스트리아를 병합했고, 1939년 3월 리투아니아 정부를 위협했다. 이탈리아도 1939년 4월 알바니아를 점령했고, 두 파시스트 열강 이탈리아와 독일은 1939년 5월 결정적인 강철조약(Pact of Steel)에 서명했다. 1938년 뮌헨 회의에서 파시즘 진영에 대한 영국의 유화책은 제국주의와 파시즘 블록의 공모를 암시했다. 이것이 바로 1939년 8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약이 체결된 배경이었다. (조약을 통해) 소련은 나치의 불가피한 공격 이전에 군사력을 건설할 시간을 벌기를 희망했다. 파시즘과는 어떤 타협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정치(Realpolitik)"의 영역이다. 다가올 전쟁 이전에 시간을 버는 방법이었다.
제3세계의 붉은 별 p.132
한편 소련의 의심에는 역사적인 근거가 있었다. 러시아 혁명 직후 서방 세계는 직접 군대를 파병하여 러시아 내전에 개입해 사회주의 정권을 붕괴시키려다가 실패한 전례가 있었고, 스탈린 본인 역시 서기장이 되기 이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견제 및 폴란드 지지에 제대로 물을 먹으며 털린 전적이 있었다. 특히 이전 스페인 내전 당시에도 서방 측은 파시즘의 위협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이 더 컸고 오히려 공산주의자 탄압을 위해 프랑코에게 지원을 넣어주는 등 여러모로 반공적 기조가 강했다. 즉, 소련으로선 서방 세계가 파시즘 국가와 소련의 전쟁을 유발하여 양측을 모두 공멸시키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에 충분했다. 특히 3월 10일에 있었던 공산당 대회 선언문에서 스탈린은 다가올 전쟁을 제국주의자들끼리의 전쟁이라고 부른 점에서 이런 의심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스탈린의 의심병에 기름을 부은 것은 나치 독일의 급격한 성장 및 팽창주의와 이에 대한 미진한 영국-프랑스 연합국의 반응이었다. 나치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지방에도 손아귀를 뻗치며 노골적으로 소련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갔으며, 이에 대해 프랑스와 영국 등 근처 국가들의 보호국들은 말로만 독일을 위협하고 실제로는 병력을 움직이지 않으며 소련의 지원 요청에도 역시 매우 소극적인 답변만 내놓는 등 실상 자신들을 방치해버리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때문에 소련 역시도 이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차라리 나치 놈들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챙길 수 있는 거나 챙길까'라는 비상한 수를 떠올리고 있었다.

5.4. 영국의 입장

영국은 1920년대초부터 1차 세계대전 이후 여타 모든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서의 모순가운데서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 영국과 미국 사이의 적대관계에 직면했다. 사실 전시 동맹에도 불구하고 1차대전 이후 미국과 영국의 관계는 파트너 관계라기보다는 경쟁자 관계였다. 그 이유는 "동맹국의 제국주의와 해군주의"에 대한 윌슨의 혐오감에 있었다(...). 따라서 파국이 도래할 때까지 영국은 미국과의 갈등을 제거하거나 파트너쉽을 구축하려 하지 않았다.
체임벌린이 독일과의 유화정책을 추진한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가 미국이 지원의 대가로 영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 지배를 요구할 것이라는 판단에 있었다. 이러한 인식에서 체임벌린은 제국특혜관세의 수정과 미국의 무역과 투자에 제국을 개방하는 것을 포함하는 미국이 지배하는 국제질서를 수용하기보다는 독일과의 유화를 추구했다.
1925년 10월에 체결된 로카르노 조약은 독일의 위상에 일정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유럽에서 전쟁을 위협하는 실질적 위협은 동쪽에 있는데 로카르노 조약은 이 문제를 거의 논의하지 않았다. 따라서 영국은 서부 유럽에서의 현상유지의 의무가 있지만,동유럽에서의 전쟁에 서유럽으로 확산될 경우에는 의무가 없다. 사실 로카르노 협상전의 영국의회에서 요구한 조건 중 하나가 동부 유럽에 대해서는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Lothian and the Problem of Germany, 1933-1939 인용

영국은 그렇다고 미국을 꼬드기지도 않았다. 미국도 미국대로 영국의 제국주의에 대한 해체를 민족자결주의 운운하며 국가시책으로 내걸고 있는 반란군의 나라였고, 소비에트도 마찬가지였다. 체임벌린은 독일보다 미국과 소련을 더 위험한 국가로 생각했고, 결과적으로 그 두 국가가 대영제국을 해체했으므로 틀린 생각도 아니었다. 영국은 영일동맹과 베르사유 조약 이후 내내 독일 편을 들어줬고, 뮌헨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 합병을 도와준 것으로 인해 일본독일 이 두 국가가 대영제국의 가장 큰 전략적인 위협인 소련과 미국을 견제하고, 가능하면 독일과 일본이 이들과 전쟁까지 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과 독일이 막상 전쟁을 일으켰을 때는 그들은 군축으로 허약해진 영국부터 물어뜯기로 결정했고 프랑스 침공말레이 해전에서의 참패로 영국은 기르던 개들에게 물리는 실로 낯뜨거운 추태를 연출하게 되었다.
체임벌린은 국민생활이 전력증강보다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당시 육군장관 호어-벨리샤가 방위산업 활성화를 통한 경기 활성화 방안을 보고했을 때 이를 무시했다. 그리고 항상 재무장을 위한 여유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1937년까지 재무장을 위한 예산 논의조차 하지 않았다(...). 영국의 역사학자 파커는 체임벌린의 편협한 정책관보다 그의 독선적인 성격에 주목했다(...). 고데스베르크 회담 이후 대부분의 정책전문가들이 히틀러는 유화정책을 악용하고 있으며 정책 수정이 필요하다고 조언했을 때, 이 권고를 무시하고 정책을 추진한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다.
체임벌린의 대독 유화정책 결정 과정과 평화체제 유지의 상관관계 연구 한승윤 인용

네빌 체임벌린에 대한 수정주의적 평가가 극단적인 나머지 독일에 대해 가장 엄격한 지도자라거나 영국 재무장의 기수같이 묘사하는 서술들이 있지만, 사실에 대한 완전한 왜곡이다. 체임벌린은 재무장관이던 시절부터 다른 누구보다 과감한 군축으로 인기를 얻은 정치인이었고 뼛속부터 군대를 거추장스럽고 비싼 기구라고만 생각했다. 대전쟁의 기운이 다시 닥쳐오고 전력증강의 요구가 거듭되어도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고, 최소한의 무장안만을 재가했을 뿐이다. 그리고 체임벌린은 미국과 소련 두 국가와 제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소련의 다급한 초청에 대해 해군 소장 나부랭이를 보내어 시간이나 보내다 오게 만듦으로써 소련의 동맹요구에 대해 정중하지만 동시에 단호하게 거부한 것이다.

체임벌린은 전간기 내내 일본으로 미국을, 독일로 소련을 막을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따라서 전쟁의 기운이 고조됨에 따라 처칠 등이 소련과의 동맹을 통해서라도 독일을 제어해야한다고 주장했음에도 체임벌린 정권은 이 두 국가와의 제휴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으며 히틀러의 공격방향을 동쪽으로 돌리는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이 한발 빨리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독일의 진격 방향을 서쪽으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체임벌린은 그 대가로 실각하고 분사해버리고 말았다.

여기에 대해 추가적인 자세한 내용은 "필사적인 포옹 : 독·소 불가침 조약 (1939·08·23)과 소련 측의 동기분석"을 중심으로 수정주의적 해석으로는 Geoffrey Roberts의 논문을, 전통주의적 해석은 The Deadly Embrace: Hitler, Stalin and the Nazi-Soviet Pact라는 책을 보기를 권한다.

6. 소련의 정책 변화와 독일의 접근

스탈린이 협상 내내 상당히 양보적이고 유연한 자세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소극적인 협상 태도를 보고 나서 스탈린은 이들이 소련과의 안보 체제를 강화하여 함께 독일에 맞설 생각이 없다고 판단했다. 스탈린은 양국이 독일과 소련을 싸우게 하고 뒤로 빠지지 않을까 하는 의심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의심은 상당히 그럴 듯 했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인들 중에도 정말 그런 이이제이를 바란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영국과 프랑스의 분위기는 즉각 소련의 대외 첩보망에 감지되어 스탈린에게 보고되었고, 스탈린은 자신의 의심을 확신으로 굳혔다.

뮌헨 협정을 휴짓조각으로 만든 체코 병합, 폴란드에 대한 침공 준비 등이 시작되고 5월경부터 영프는 소련이든 뭐든 독일을 막으려면 누구와도 손잡아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윈스턴 처칠 등 거물들의 강한 제안이 있었음에도 소련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 때문에 협정 체결은 지지부진했다. 이런 꼴을 수년간 질리도록 봐온 스탈린의 마음을 흔든 것은 다름 아닌 아돌프 히틀러였다.

독일 또한 지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선을 마구 넓혀서 패배한 이후 양면전쟁의 위험성을 뼈저리게 깨달았으며,[28] 아울러 소련과 서방 세계가 접촉하는 것도 눈치채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실제 참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침략 전쟁에 소련이 개입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으며, 만약에 대비하며 동부에서의 세력 균형을 위해 소련을 묶어둘 필요성이 있었다. 계획의 스타트를 끊게 될 폴란드 침공에 소련이 폴란드 편으로 개입하면 초장부터 만사를 그르칠 수 있으므로[29] 히틀러는 소련을 어떻게 묶어둘 것인지 고심하고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영불이 폴란드를 구하러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고,[30] 대신 그 뒤에 있는 소련의 개입은 우려했다.

8월 2일,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이런 걱정을 하는 히틀러에게 스탈린과 협상하도록 권했고, 히틀러는 리벤트로프의 제안을 받아들여 소련에게 '발트해에서 흑해까지의 지역의 결산' [31]을 제안했다.

소련으로서는 구미가 매우 당기는 일이었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서방놈들과 함께 자기들 도움은 죽어도 싫다는 폴란드를 돕느니, 세력권을 나눠서 서로 맛있게 잘 먹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독일의 제안이 훨씬 달콤했다. 또한 냉정한 현실주의자였던 스탈린은 히틀러가 미치지 않고서야 서방, 특히 대영제국을 뒤에 두고 소련을 적대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32] 8월 17일 소련은 독일과의 회담에 동의했고, 8월 19일 양국은 독소 신용 협정(German-Soviet Credit Agreement)를 체결하였다. 경제 협정 체결 후 하루 뒤인 8월 20일, 히틀러는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스탈린 서기장 귀하

1939년 8월 20일

1. 본인은 독일과 소련의 관계 개선을 위한 디딤돌인 새로운 독소 무역 협정의 서명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2.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의 체결은 장기적인 독일 정책임을 의미합니다.
3. 귀측의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전달한 불가침조약을 수락하지만 이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점들을 가장 신속히 설명하고자 합니다.
4. 독일과 폴란드 간의 갈등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습니다. 폴란드의 대국에 대한 무례한 행위는 언제라도 위기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5. 양국이 함께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의도가 있다면 빨리 서둘러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귀하가 나의 외무장관을 8월 22일(화), 혹은 늦어도 8월 23일(수)에 맞이할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귀하의 즉각적인 회신을 요망합니다.

아돌프 히틀러
스탈린은 이 전보를 받고 매우 기뻐하며 다음날 답신을 보냈다.
히틀러 총통 귀하

1939년 8월 21일

귀하의 서한에 감사합니다. 나는 독일과 소련간의 불가침 협정을 계기로 양국 간의 정치적 관계가 개선되었으면 합니다. 양국의 국민들은 평화로운 관계가 필요합니다. 독일 정부가 불가침 조약에 합의키로 한 사실은 정치적 갈등의 제거와 양국 간의 평화와 협력을 구축할 계기가 될 것입니다. 소련 정부는 독일 외상 리벤트로프의 8월 23일 모스크바 방문에 동의하는 것을 귀하께 알립니다.

이오시프 스탈린
히틀러는 전보를 보낸 후 답장을 기다리며 잠도 못 이룰 정도로 긴장했다고 하며 스탈린으로부터 긍정적인 톤의 답장을 받자 미친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7. 조약 체결

이어 스탈린은 답신을 보낸 8월 21일 외무라인에 영불과의 협상 모색을 중단시키고 독일과의 협상 준비를 시킨다.

8월 23일 히틀러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리벤트로프를 위시한 독일 외교단이 소련으로 비행기를 타고 갔다. 모스크바 공항에는 하켄크로이츠 깃발들이 장식되어 있었고, 리벤트로프는 모스크바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몰로토프의 영접을 받으며 공항에서 점심을 먹고 크렘린으로 직행했다. 크렘린에서는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스탈린 본인이 직접 독일 사절단을 맞이했다.[33]

원래는 양국의 외무장관인 몰로토프와 리벤트로프가 협상을 해야 했지만, 스탈린이 동석하면서 사실상 스탈린이 직접 리벤트로프와 교섭하게 되었다. 협상은 리벤트로프가 도착한 8월 23일 오후부터 밤 늦게까지 계속되었으나 의외로 양 독재국가는 아귀가 잘 맞아서 여러 현안[34]에 대해 쉽게 합의했다.[35] 스탈린과 리벤트로프는 협상이 의외로 술술 풀리자 점점 의기투합하여 나중에는 서로 극단적인 농담까지 주고받았을 정도였다.[36] 실제로 리벤트로프는 스탈린에게 1936년의 독-이-일의 3국 협정은 겉으로는 소련을 적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미-영-불이 주도하는 서방 질서를 흔들기 위한 것이라고 협상 내내 주지했으며, 이는 영불에 의심을 넘어 배신감을 느끼던 스탈린을 기쁘게 했다. 대단히 흡족한 스탈린은 8월 23일 밤, 다차에 측근들을 불러모아 연회를 베풀면서 "영국과 프랑스놈들도 내일이면 알게 되겠지. 그놈들은 빈손으로 집에 가야 할거야."라고 비웃으며 흐루쇼프를 비롯한 측근들에게 소련이 얻게 된 이득에 대해서 설명했다.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조약을 심의하면서 서방이 히틀러를 앞세워 소련을 침공하려 하지만 이 조약으로 판을 완전히 뒤집었다고 대단히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자신을 속였다고 여기겠지만 사실은 자신이 히틀러를 속인 것이라는 자신감을 보였다.

영불과의 협상이 질질 끌려서 1년이 지나도록 진척이 없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소련-독일은 단 하루 만에 유럽의 운명을 결정할 모든 현안에 대해 합의하고 다음 날인 24일 모든 항목에 대한 합의문을 작성하였다. 그리하여 아래 그림과 같이 스탈린이 지켜보는 가운데 리벤트로프와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MolotovRibbentropStalin.jpg
크렘린에서 조약에 서명하는 몰로토프. 몰로토프 바로 뒤에 있는 양복 차림의 사람이 리벤트로프이다. 그리고 그 오른쪽이 스탈린. 리벤트로프의 바로 왼쪽의 군복 입은 사람이 당시 소련군 총참모장이었던 보리스 샤포시니코프 원수.[37][38][39]

스탈린은 조약 체결후 환영 만찬에서 리벤트로프에게 "히틀러 총통에게 전해주시오. 나는 이 협약을 끝까지 지키겠다고."라고 맹세했고, 리벤트로프도 이 조약에 대해 끝까지 충실하겠다고 다짐했다.[40] 하지만 스탈린은 미래에 대해 완전히 낙관하진 않았다. 그는 리벤트로프에게 "우리는 서로 욕을 잘도 해댔습니다. 그렇지 않았나요?"[41] 라고 발언했는데, 이는 지금까지 소련과 독일 사이의 해묵은 원한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도 없고, 이후 재발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베르히테스가덴에서 불가침 조약이 성공리에 체결됐다는 것을 보고받은 히틀러는 샴페인을 주문해 한 잔 마신 후, "이제 유럽은 내 것이다!"라며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파일:external/gdb.rferl.org/97C7E3FD-2173-4AD8-9E72-0658A132D986_w650_s.jpg
조약을 체결하고 의기양양하게 베를린에 돌아온 리벤트로프를 맞이하며 크게 기뻐하는 히틀러. 환희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 결과

조약 체결 당시 언론에 공개된 조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독일과 소련, 양국은 10년 기한의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
  • 독일과 소련, 양국 중 한 쪽이 제3국의 공격을 받으면 다른 쪽은 중립을 유지하며 한 쪽을 공격한 제3국을 일절 원조하지 않는다.
  • 독일과 소련, 양국은 상대방을 적대하는 단체에 가입하지 않는다.
  • 독일과 소련, 양국 간에 분쟁이 생길 경우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한다.
  • 독일과 소련, 양국은 경제협력을 통한 상호이익의 증진을 도모한다.

해당 조약은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 언뜻 보면 군더더기 없이 매우 깔끔하고 무난한 불가침 조약이었다. 그러나 언론에 공개된 위의 내용은 껍데기에 불과했고, 공개되지 않은 아래의 밀약이 바로 이 조약의 핵심이었다.

파일:attachment/docso.png
왼쪽은 비밀조항에 의한 국경선, 오른쪽은 실제로 분할된 국경선.
양국은 서로간의 사정상 밀약을 철저하게 준수[43]했다. 폴란드 침공에서 독일과 소련은 공동작전으로[44] 폴란드를 분할했으며, 이후 독일의 묵인 아래 소련의 압력을 받은 루마니아는 베사라비아에 북부 부코비나를 얹어서 소련에 반환했다. 변경점으로는 발트 3국이 소련의 협박에 모조리 소련에게 넘어갔는데[45], 폴란드 침공 당시 독일군이 소련령으로 합의되어 있던 바르샤바 주 동부와 루블린 주까지 차지하자 원래 독일이 먹기로 합의된 리투아니아를 소련에게 넘겨주었다.

한편 핀란드는 통째로 소련에 넘어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소련이 핀란드를 접수하기 위해 쳐들어간 겨울전쟁에서 핀란드군이 크게 선전하며 소련군은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으면서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다. 핀란드가 국력의 격차를 넘지 못하고 항복하며 영토의 11% 정도(산업 능력의 30%)를 소련에 넘겨주었지만, 소련에 통째로 먹힌 발트 3국과는 달리 소련에 흡수되는 운명은 면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핀란드는 추후 독소전쟁에서 독일 편에 붙었다.

물자 지원도 이전에는 소련에서 일방적으로 퍼준 것으로 취급했지만, 현재 연구로는 독일에서 난방용 석탄(연간 300만 톤), 최신 기계류(엔지니어 파견 포함), 발전설비, 방산 기술(비스마르크급 전함 설계도, 아트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5번함 뤼초, 자이스 광학설비, PaK 36, He 100 프로토타입, Fi 156 등)이 소련으로 넘어가면서 독일의 일방적인 흑자는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일방적인 흑자는 아니었어도 독일이 이득을 본 것은 사실이다. 독일의 대 소련 수입액이 3억 1,800만 마르크인 데 반해 대 소련 수출액은 5억 3,600만 마르크였고,[46] 독일이 소련에게 보내주는 공급량은 소련의 공급량과 비교하면 57 ~ 67% 정도밖에 안 되었다. 그 자세한 내막에 대해 알아보자면 소련은 독일에게 막대한 원자재와 전략 자원들을[47] 보내주었고 소련의 철도망과 수로, 항구를 이용하고 영토를 통과할 수 있는 권리를 주어 연합군의 경제 봉쇄를 무력화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독일은 보내주기로 약속한 각종 기계와 설비, 기술을 매우 불성실하게 보내주었다.[48] 1941년 바르바로사 개전 직전에 이뤄진 독일의 물자 공급은 거의 사보타주 수준이었고,[49]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시작하기 몇 시간 전까지도 소련이 보내주는 물자를 꾸준히 받아챙기다가 통수를 치고 소련을 침공했다.

이 조약의 체결로 독일은 서방국가들과 전쟁을 하더라도 소련의 개입을 차단하여 양면전쟁을 피하는데 성공하면서 불과 8일 뒤에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쟁터지고 말았다. 그 첫 번째로 폴란드를 침공하여 소련과 나눠먹은 이후 폴란드 침공 종료 8개월 후에는 프랑스를 항복시켰고 최전성기를 달리게 되었다. 소련도 동유럽에서 확보한 지역을 발판으로 세력을 크게 키웠으며, 독일과 함께 세계구도 차원에서의 세력 분할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의 야욕은 마침내 동쪽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소련에게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 소련을 기습 공격했다. 이것이 바로 독소전쟁의 시작이었다.

독소 불가침조약의 대가로 스탈린이 독일에 넘겨준 것은 원자재와 전략물자들만이 아니었다. 소련이 불순하다고 생각한 독일 공산당원 명부도 넘어갔고 나치 독일에서 은신하고 있던 여러 명의 독일 공산당원들이 투옥되거나 처형되었다. 이들은 트로츠키주의자로 간주된 자들로서, 스탈린이 별로 쓸모 없다고 생각한 자들이었다.[50] 비단 이들 뿐만 아니라 자국으로 망명한 독일인 중에서도 스탈린 체제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된 자들은 독일로 바로 송환했고, 이들은 당연히 송환되자마자 투옥되거나 처형되었다.[51]

연합군의 독일 본토 폭격이 심화되던 1943년, 중요 기밀문서들이 소실될 것을 우려한 리벤트로프가 1933년 나치 집권 이후 작성된 9,800여 장에 달하는 독일 외무부의 기밀문서들을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보존처리할 것을 지시했다. 전쟁 후반 베를린으로 진격해오는 소련군을 피해 외무부 부서들이 튀링엔으로 이동할 때 마이크로필름 관리 담당 공무원이었던 카를 폰 뢰슈(Karl von Lösch)는 상부로부터 마이크로필름을 파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뢰슈는 마이크로필름을 파기하지 않고 대신 자신의 신변 보장을 위한 보험으로 마이크로필름을 헤센 주 마르부르크의 숲에 몰래 묻어두었다.

전쟁이 끝나고 뢰슈는 서방 연합군에 접촉해 신변 보장을 조건으로 외무부 기밀문서의 마이크로필름이 묻혀있는 장소를 알려주겠다고 거래를 제안했고, 거래를 받아들인 서방 연합군은 뢰슈의 도움으로 마이크로필름을 발견하였는데 그 중에는 독소 불가침조약의 독일측 보유분의 복사본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이크로필름 해독 결과 독소 불가침조약에 기존에 알려진 조약 내용 외에 비밀조항이 있었음이 밝혀졌고,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그 내용이 만천하에 공개되면서 비밀조항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52]

9. 평가

조약을 체결한 당사자였던 소련은 페레스트로이카 말 소련 인민대표대회의 결의로 공개하는 1990년까지 비밀조항의 내용을 부인했고,[53] 후계국인 러시아 연방이 소련의 모든 과거를 부정하면서 밀약의 존재를 사실상 인정했다. 다만 러시아는 이에 대한 책임은 모두 나치 독일 그리고 소련에 넘기고 있고, 과거에 대한 사과는 거부하고 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가 보인 소극성은 소련이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시킨 주요 원인으로 지적된다. 스탈린의 제안을 건성으로 취급한 당시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과 프랑스 정치권(알베르 르브룅 대통령 및 폴 레노 총리)이 이 조약의 체결에 책임이 있다고 평가받으며, 특히 체임벌린의 오판은 심각하게 비판받는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당시 제3공화국 특유의 정쟁으로 대외정책에 크게 신경을 쓸 새가 없어서 오로지 영국의 방침에 따라간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체임벌린은 영불과 동맹을 맺으려는 소련에 대해 소극적으로 임하면서 뮌헨 협정을 통해 나치 독일과 동맹국이었던 체코슬로바키아를 사실상 독일에 넘겼다. 당시 이런 상황을 고려했을 때 스탈린은 영국과 프랑스가 언제든 독일과 협력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고, 실제로 스탈린은 히틀러를 돕는 방향으로 외교정책을 전환했다. 미국의 선전포고 직전까지 독일에 체류하며 취재했고, 전후에 명저 <제3제국의 흥망>을 저술한 미국 기자 윌리엄 샤이러조차 이 조약의 책임을 두고 스탈린보다는 체임벌린을 더욱 비난했다.

그러나 독소 불가침조약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결국 자신들이 그토록 타도하려던 나치 독일과의 야합에 불과했다. 비록 영국과 프랑스의 행보나 다른 여러가지 요소들도 무시할 수 없지만, 결국 스탈린이 이념적으로 정반대인 히틀러와 함께 불가침조약을 맺고 주변국을 침공할 수 있었던 배경은 스탈린 개인의 패권주의적 욕구 없이는 불가능했다. 실제로 조약 체결 이후 서구권 내 사회주의자들은 소련이 나치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 및 발트 3국, 핀란드를 침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소련 및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당 체제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각국 공산당들은 내부적으로 여러 비판 여론이 있었음에도 소련의 결정을 일방적으로 지지했다. 이는 당시 대숙청 등과 더불어 서구권 공산당원들이 대거 탈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례로 미국에서는 독소 불가침조약 전후로 약 8,500명 가량의 미국 공산당원들이 탈당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는 조약 이전 전체 당원이었던 66,000명 중 약 13%에 달하는 수치였다.[54] 소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당시 자국에 망명해 있던 독일오스트리아 공산주의자들을 게슈타포에 넘겨주면서 이념적으로 같은 사회주의자들까지 배신하는 모습을 보였다.[55] 이처럼 스탈린은 히틀러를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판단했지만,[56][57] 결국 유럽 전역에서 힘을 키운 히틀러는 1941년 6월 22일 소련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면서 소련인 2천만명의 목숨을 앗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독소 불가침조약은 오늘날 러시아 입장에서 2차대전에서의 승리라는 국가신화의 정당성을 정면으로 부정할 수도 있기에 이를 필사적으로 정당화하려 한다. 반면 조약의 직접적인 피해국들인 발트 3국이나 폴란드는 해당 조약을 반세기 가까이 지속된 암흑기의 시작으로 여기면서 오늘날 러시아가 보여주는 태도를 극도로 경계하고 반러 여론을 강화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58]

10. 여담

2024년 9월 18일, 러시아 외무부는 1939년 9월 17일에 붉은 군대가 폴란드 동부 지역에서 군사 작전을 개시하여 폴란드에 의한 벨라루스 서부와 우크라이나 서부의 대량 학살을 막았다고 자화자찬하는 트윗을 올렸다. # 이에 독일 외무청 계정은 독소 불가침 조약 당시 나치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분할안 지도 사진을 올리며 미쳤냐고 답글을 날렸다. #

11. 관련 어록


유럽 천지가 복잡하고 괴기스럽다.

- 히라누마 기이치로[59]
"독-이-일 방공 협정은 사실 소련이 아니라 영미를 겨냥한 것입니다. 스탈린 수상께서도 이 방공 협정에 가입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 리벤트로프의 농담, 협정 후 만찬장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오늘부로 나도 반공주의자요."
- 스탈린의 농담,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회상록에서.
우리는 서로 욕을 잘도 해댔습니다. 그렇지 않았나요?
- 스탈린, 리벤트로프를 맞이하며[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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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차 세계대전의 시작은 폴란드 침공이지만, 독소 불가침 조약이 폴란드 침공의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다.[2] 특히나 1945년에는 베를린이 소련에 함락되는 과정에서 도시 전체가 잿더미가 됐고 그 전부터 독일 전역을 연합군이 폭격해댔으니 협정문이 소실됐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3] 제1차 세계 대전의 시작을 알린 세르비아 왕국에 대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선전포고문은 이미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다.[4] 라팔로 조약 이후, 25년에 게오르기 주코프에리히 폰 만슈타인 등, 미래의 원수들이 양국을 방문했다.[5] 특히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치하 폴란드는 주변국들을 상대로 끊임없이 분쟁을 일으키고 있었다.[6] 리트비노프는 해임 당시에 라브렌티 베리야가 자택을 수색하는 등 거의 숙청될 뻔 했으나, 스탈린의 신임을 완전히 잃지는 않아서 미국 대사로 전보되었다. 리트비노프는 독소 전쟁 당시 미국에서 여러 활약을 하여 미국의 분위기를 소련에 우호적으로 바꾸는데 큰 역할을 한다. 또한 그는 레닌과 함께 혁명 운동을 한 고참 볼셰비키였고, 1920년대 소련이 서유럽 여러 국가들과 다시 외교 관계를 복원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능력있는 외교관이었기 때문에, 스탈린도 함부로 이런 인재를 숙청할 수 없었다. 하지만, 스탈린의 의중과는 상관 없이 독일 측은 리트비노프 경질을 자국에 유리한 조치로 보았다. 왜냐하면 리트비노프는 반독일주의자였고, 뮌헨 협정 당시부터 독일에 극단적으로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리트비노프는 나치가 혐오하는 유대인이었다. 이런 인사 경질에서 독소 협력의 가능성을 포착한 것이 바로 리벤트로프였으며, 아래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히틀러에게 독소 회담을 제안한다.[7]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는 두망 장군이 서명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8] 본명은 레지널드 에일머 랜펄리 플렁켓언리얼드락스(Reginald Aylmer Ranfurly Plunkett-Ernle-Erle-Drax). 조지 6세 직속 해군 장교였다. 최종 계급은 해군 대장[9] 주영 소련 대사였던 이반 마이스키(Ivan Maisky)는 영국 외무장관인 핼리팩스 경(Lord Halifax)을 협상단장으로서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10] 1차 대전 때 대륙에 파견된 영국군 사단만 해도 80여 개에 달했다. 따라서 16개, 4개, 2개 운운한 건 영국이 독일의 확장 야욕을 진심으로 억누르고자 하는지 의심스럽게 보일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의 성장과 대공황으로 영국의 국제적 지위가 많이 하락하긴 했으나,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나라인데다, 당시 인도 제국 등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다. 또한 영국은 해군과 공조하는 해병이 매우 잘 정비되어 있기로 유명했는데,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강한 나라가 완편 사단을 겨우 2개 동원할 수 있다는 건 듣는 입장에서 황당한 대답이었다.[11] 그러나 영국은 실제로 전간기에 상당히 군비감축을 했기 때문에 능력이 1차 대전 때보다 매우 줄어든 상태였고, 1차 대전에도 본격적으로 지상군을 투입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동안 프랑스가 혼자 막아내야 했던 것을 고려하면, 즉시 투입할 수 있는 전력이 많을래야 많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수병들한테 지급할 월급도 부담스러워 삭감하려고 했었을 정도였다. 또한 영국은 전세계에 걸쳐 있는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 거대한 규모의 지상군을 식민지에 분산 배치해야 했기 때문에 본토에서 동원 가능한 병력은 많지 않았다. '인도 제국을 비롯한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앞 주석의 내용이 영국의 병력 분산 문제를 잘 설명해준다.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싶다면 영어 위키백과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의 협상 과정 문서를 참조하면 좋다. 물론 그렇다 해도 겨우 2개 사단만이 완편되었을 정도까지 줄어든 건 절대 아니었다.[12] 이는 대륙 전쟁에 말려들 때 영국의 관습적인 대응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때도, 제1차 세계 대전 때도 시작은 똑같았다. 대륙에서 전쟁이 악화되더라도 본진은 털릴 일이 잘 없기 때문에 전쟁에 필요한 자본을 확보하는 데 우선적으로 신경을 썼다. 뿐만 아니라 해군에 집중하는 섬나라의 특성상 영국 육군의 규모는 다른 대륙국에 비해서 규모가 작았던 만큼 대규모 병력을 확보할 시간도 필요하다. 게다가 나폴레옹 전쟁과 1차 대전 모두 영국은 결국은 대규모의 육군을 투입해서 싸웠다.[13] 사실 당시 영국도 결코 재정상태가 좋지 않았다. 특히 1차 대전 직후 파운드화가 미국 달러에 밀려 기축통화에서 밀려났다. 그러므로 영국 정부가 가능하면 유럽의 육상전에 참전하지 않으려고 한 것은 사실 당연한 결정이었다.[14] 여기에 유사시 연합국을 도울 수 있는 소련군 500만이 플러스 요인이다.[15] 대전 발발 2년 후까지 징병제가 아니라 모병제였다. 그 동안 독일 서부군의 주공은 모두 프랑스군이 막아냈고, 프랑스가 엄청난 손실을 봤다.[16] 영국의 논리를 요약하자면 '벌금은 탕감해줄 수 있지만, 빚은 탕감해줄 수 없다'였다. 국가 간 채무관계는 중요하지만, 제1차 대전에서 프랑스가 탱커 역할을 하면서 독일 서부군의 주공을 막아낸 것을 감안하면 프랑스 국민으로서는 분노할 만 하다. 당장에 영국은 전쟁 초기에는 꽤 미적지근하게 기여했다.[17] 대륙 국가들이 독일과 전쟁을 하게 되는 동안 돈놀이를 해 보겠다는 의도 또한 부정할 수 없기는 하다. 이런 차관은 국가대 국가도 있지만 영국의 금융기업이 각국 정부에 돈을 빌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영국 정부도 그다지 손댈 수 없었다. 유대계 영국자본인 로스차일드는 1차대전때 영국을 포함해 연합국 각국에 거액의 전쟁자금을 대출해주고 이후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18] 훗날 폴란드가 예상과 달리 1달만에 초고속으로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라인강을 넘어 공세하지 않는 가짜 전쟁을 펼쳤는데 소련과의 협상 당시 보인 전략, '독일군이 잘 준비된 자신들의 방어선에 들이받아 아주 약화시켜놓으려는 것' 그대로 실행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19] 다만 폴란드가 빠르게 무너진 건 소련에 의한 양면전선의 영향도 크다. 독일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준비가 미흡했고 소련의 도움이 있었음에도 폴란드에게 시간을 더 끌렸으며, 금방 물자가 바닥날 정도였다. 자세한 것은 폴란드 침공을 참고.[20] 1850년대 크림 전쟁부터 쭉 적대 관계. 1900년대 초에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때도 진영 이름이 동맹이 아닌 협상이었다. 다시 말해 오월동주. 삼국 협상 가운데 동맹 관계는 오직 러시아-프랑스 뿐이었다.[21] 소련과의 관계를 넘어서 영프는 공산주의를 순수 악으로 보았고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에도 독일의 공산주의 세력이 득세하는 것을 나치당이 득세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게 보았다.[22]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에 대항해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하였고, 리트비노프는 여기에 폴란드도 참여시킬 생각이었다.[23]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1618년부터 프로이센 공작이었는데, 프로이센 공국은 태생부터가 폴란드 왕국의 봉신국이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는 칼 10세 구스타브와 손잡고 연방을 공격했고, 스웨덴이 수세에 몰리자 벨라우-브롬베르크 조약을 연달아 체결하여 프로이센 공국에 대한 폴란드의 종주권을 청산했다.[24] 폴란드가 전간기에 획득한 동방영토였던 크레시(Kresy)는 기초적인 산업조차 없는 낙후한 땅이었기에 이득은 거의 없었고 완충지대로서의 의미가 더 강했다.[25] (출처) 이 사이트의 해당 내용은 미국 의회 도서관의 출판부에서 펴낸 책(Glenn E. Curtis, ed. Poland: A Country Study. Washington: GPO for the Library of Congress, 1992)에서 발췌한 것이다. 여기 실린 내용은 소련을 악마화하던 냉전시대에조차 폴란드 2공의 대외정책은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이 취한 외교실패의 대표적인 예로 언급될 정도이다.[26] "바다에서 바다까지"라는 뜻이다.[27] 결과적으로 헝가리, 루마니아는 폴란드가 패망한 다음에 독일에 붙어버렸다.[28] 사실 이 점은 프로이센 시대부터 강조되었다. 군사적 천재였던 프리드리히 대왕조차도 7년 전쟁 당시 동서남북으로 적국을 두고 전쟁을 벌여서 멸망할 뻔했다. 후일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말 그대로 기적이 일어났던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다.[29] 그 당시 히틀러는 폴란드와 전쟁을 벌이기로 이미 결정해 놓고 있었는데, 폴란드군 자체는 몰라도 소련이 폴란드를 돕는다면 전쟁을 첫판부터 완전히 그르칠 여지가 있었다.[30] 실제 히틀러의 생각대로 양국은 자국 젊은이들을 희생하며 폴란드를 도울 생각이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 침공으로 대독 선전포고는 했으나, 어떠한 군사 작전도 벌이지 않은 채 본진에서 방어전이나 준비했다. 이러한 영불 양국의 행태를 소위 가짜 전쟁이라고 부른다.[31]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는 이를 유럽에서 옛 차르 제국을 재건할 가능성이라고 표현했으며, 스탈린은 리벤트로프를 만날 때 어린애같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 기록했다.[32] 그러나 헨리 키신저의 말에 따르면 불행히도 히틀러는 자신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는 이성적 판단과는 거리가 먼 바보였고 실제 영국을 배후에 놔둔 채 독소전을 일으켰다. 반면 스탈린은 강철 인간이라는 별명답게 굉장히 기계적이고 냉정한 외교를 지향했으나 이것이 대표적 단점이기도 했다. 스탈린의 외교술은 너무 기계적인 나머지 타국의 결정에 감정적인 판단이 들어가는 것을 고려하지 못하고 장기적인 판세를 말아먹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이후 냉전기의 동유럽 분할 때도 비슷한 실수를 하고 만다. -헨리 키신저의 diplomacy 인용-[33] 사실 의전에서 일개 외무장관을 최고권력자가 맞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좀 더 환영 제스처를 보였다면 바지사장이었던 소련 국가 원수 미하일 칼리닌이 영접했겠지만, 당시 전쟁이 임박했음은 유럽인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최고 권력자였던 스탈린이 직접 나옴으로써 환대의 의사를 표시했다.[34] 유일하게 합의가 잘 안 됐던 곳은 라트비아였는데, 리벤트로프가 히틀러에게 보고를 하자 히틀러가 라트비아를 바로 포기하며 마무리되었다.[35] 소련은 유럽 국가들과 독일이 서로를 견제하는 동안 국력을 키울 시간을 얻었고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국제조약을 휴지조각으로 생각하던 히틀러에게도 독소불가침은 유럽을 쓸어먹고 소련의 통수를 치기까지의 귀중한 시간을 벌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36] 리벤트로프가 스탈린에게 "독일 반공협정에 소련도 가입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스탈린이 이에 "오늘부터 나도 반공주의자요." 라고 화답한 게 바로 이때 나왔다. 히틀러 집권 이래 독소 양국간의 관계를 본다면, 이런 농담은 마치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이 교황에게 "교황 성하도 이슬람교 신자가 되는 게 어떻습니까?" 라고 말하자 교황이 "오늘부터 나도 무슬림이오." 라고 대답한 것과 같은 충격적인 발언으로, 리벤트로프가 가져온 보따리가 스탈린에게 그만큼 크게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보여준다.[37] 맨왼쪽 키 큰 사람은 리벤트로프의 비서인 리하르트 슐체(1914-1988)로 SS장교였다. 2차 대전 발발 이후 외교업무를 그만 두고 전선으로 나갔으나 전후 미군에 체포되었다. 3년간 복역끝에 풀려나 사업가로 일했다. 이 사람은 끝까지 무장친위대의 전쟁범죄를 부인했다.[38] 스탈린의 바로 옆 오른쪽의 서류뭉치를 안고 있는 사람은 소련 고위직의 독일어-영어 통역이었던 블라디미르 파블로프(1915-1993)로 이후 소련 외교관으로 일했다.[39] 몰로토프에게 서류를 건네주는 사람은 알렉산드르 슈크바르체프(1900-1970)으로 소련 외교부 고위 관리였고 이후 주독일 소련대사로 일했다.[40]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리벤트로프는 추후 독소전쟁 개전에 매우 소극적이었고, 개전 후 소련 외교관들에게 "나는 이 전쟁에 반대했다고 스탈린 각하께 전해주시오."라고 변명하듯 말했다. 게다가 전쟁 내내 소련과의 강화를 모색했다. 사실 외무장관이니만큼 전쟁을 해봤자 성과는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으며 대소 개전은 자신이 기껏 만든 성과를 갈아엎어 버리는 짓이니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다. 국익을 추구해야 하는 외교관 입장에서 사방팔방에 적을 만드는 히틀러의 비이성적 행동은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소련에게 리벤트로프가 소련과의 우호관계에 큰 공을 세웠고 정말 전쟁을 원치 않았던 것은 중요하지 않았고 리벤트로프는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홀로코스트의 주범이자 나치의 전쟁 수행의 핵심으로 제일 먼저 교수형을 집행받게 된다.[41] 출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77[42] 조약 원문은 이렇게 노골적인 표현은 아니고, "폴란드에 중대한 정치적 변동이 있을 때, 독일과 소련의 양국의 영향력의 경계선은 피사 강, 나레프 강과 비스툴라 강, 산 강을 기준으로 한다."는 식의 완화된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다.[43] 일단 소련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숙청을 하면서 핀란드를 노리던 도중이었고, 독일폴란드와의 국경 분쟁지를 노리던 도중이었다. 문제는 소련으로써는 독일까지 신경쓰기에는 국가 내부가 좀 그랬는데다 독일도 폴란드를 먹는 순간 영국프랑스는 전쟁을 선포할 테고 소련도 자극해서 참전하게 되면 제1차 세계대전처럼 양면전선 꼴이나 망할 게 분명한 상황이었다는 거다. 양측은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정확히 맞게 되자 일단 자국의 내부사정으로 인해 불가침 조약을 깰 이유가 없었기에 준수한 것이다. 후일 독일이 프랑스까지 먹으며 승승장구하게 되는데 영국이 상륙하지 않는 이상 양면전선이 생길 위험이 적어지자 독일은 바로 뒤통수를 치며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선제공격을 가한다.[44] 독일군의 침공에 발 맞춘 소련의 폴란드 침공은 폴란드의 조기 패망에 큰 역할을 했는데, 독일은 2주도 안 되어 바르샤바에 도달했지만 바르샤바 시민들과 폴란드군의 강력한 저항에 고전하고 있었다. 여기서 소련이 뒤통수를 친 덕에 폴란드의 후방이 붕괴되어 폴란드 동부군이 대독일 전선으로의 지원이 차단되었다.[45] 1939년 9월에 협약이 재조정되었다.[46] 독일이 2억 1,800만 마르크의 이득을 본 셈이다.[47] 220만 톤의 농업 생산물, 100만 톤의 석유와 목재, 2만 6천 톤의 크롬광, 1만 4천 톤의 구리, 3천 톤의 니켈, 500톤의 몰리브덴텅스텐.[48] 독일은 기한도 자주 어겼고 수량도 잘 지키지 않았지만, 소련은 기한과 수량을 철저하게 지켰다.[49] 대표적인 예시를 들자면 독일은 소련에게 순양함 '류트조프'를 인계해주기로 했는데 각종 기계장치와 장비 없이 선체만 보내주었고, 43년에 인수를 마무리짓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독일은 1941년에 가장 많은 물자를 보내주기로 약속했지만 6월 22일에 소련을 침공했다.[50] 독일 공산당은 나치에 의해 해산되기 전까지 36만명의 당원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이들이 모두 처형된 것은 아니다.[51] 스탈린에 충성하는 독일인들은 당연히 송환되지 않았고, 이들은 독소전 때 소련을 위해 일했으며, 독소전이 끝나자 동독 정권을 세우는 데 일조했다.[52] 덤으로 해당 필름에는 윈저 공 에드워드 8세와 나치 최고 사령부 사이에 오간 전보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를 마르부르크 필름이라고 부른다. 이 마르부르크 필름에는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이 있었는데, 에드워드 8세는 히틀러의 유럽 패권에 대한 시각에 동의하며 독일에 영국을 효과적으로 폭격한다면 영국의 전쟁 수행의지가 꺾어 강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는 등, 자신의 동생과 국민들은 독일을 상대로 사력을 다해 싸우는데 이를 뒤통수 치는 친나치 서신이 담겨 있었다. 왕실 측에서는 필사적으로 숨기려고 했으나 영-미 공동 연구진에 의해 복사본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연히 에드워드 8세는 나치와의 내통 의혹을 생전 부인하였다.[53] 당시 소련이 독소 불가침조약을 비롯해 카틴 학살 등 여러 민감할 수도 있는 과거사 문서를 공개한데는 폴란드의 줄기찬 요구도 있었다. 당사자인 몰로토프는 말년까지도 펠릭스 추예프와의 인터뷰에서 비밀조항의 존재는 서방의 모략이라고 꿋꿋하게 부인했다.[54] (출처) The Soviet World of American Communism, 1998[55] Gestapo–NKVD conferences (영어 위키피디아)[56]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까지 이런 방식으로 영국, 폴란드, 소련을 유혹하면서 전쟁 준비를 해 왔다. 1933년 총리 취임 이후에는 폴란드에게 먼저 무역전쟁을 종결하자고 손을 내밀고 1934년 3월 1일부 독일-폴란드 불가침 조약과 무역 협정을 체결하였고 영국에게는 자신들이 영국과 전쟁할 의사가 없다고 강조하며 영국-독일 해군조약과 뮌헨 조약을 따내는 데 성공했었다.[57] 그리고 사실 소련을 공격한다는 것이 몹시나 무리수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에 스탈린은 히틀러가 생각이 있다면 금방 소련으로 침공해 올 일은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다만 스탈린 스스로 일으킨 대숙청으로 소련군의 힘이 약해지고 이로 인해 겨울전쟁 등에서 보인 추태를 바탕으로 히틀러는 소련에 대한 야심을 키우게 되었으며, 결국 이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당분간은 일어날 리가 없으리라 착각했던 독소전쟁의 단초가 되었다.[58] 웃기게도 이렇게 무려 나치와 불가침조약 겸 영토 분할 협정까지 맺었던 러시아는 그 과거를 망각한 듯 본인들 맘에 안 드는 나라들에게는 죄다 나치 낙인을 찍어버리는 내로남불스런 행보를 보이고 있다.[59] 당시 일본 총리. 애당초 일본이 독일과 동맹을 맺은 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독일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방공협정 동맹국이자 소련과 할힌골 전투를 치르던 일본에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는 막장외교를 보였고, 결국 당시 일본 내각은 외교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각총사퇴를 단행했다.[60] 출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