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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AVGVSTVS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1] CAIVS OCTAVIVS THVRINVS[2] | ||
출생 | 기원전 63년 9월 23일 | ||
로마 공화국 로마 시[3] | |||
사망 | 기원후 14년 8월 19일 (향년 75세)[4][5] | ||
로마 제국 이탈리아 속주 놀라[6]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
기원전 27년 1월 16일 ~ 기원후 14년 8월 19일 (40년 7개월 3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9F0807><colcolor=#fecd21> 존호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CAESAR DIVI FILIVS AVGVSTVS |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7] Imperator Caesar Augustus | |||
휘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8] | ||
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 |||
신장 | 175cm[9] | ||
가족 |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아버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양아버지[10]) 아티아(어머니) 소 옥타비아(누이) | ||
부인 | 클로디아 풀크라(첫째 부인) 스크리보니아(둘째 부인) | ||
황후 | 리비아 드루실라 | ||
자식 | 대 율리아[11] 가이우스 카이사르(양아들) 루키우스 카이사르(양아들)[12] 티베리우스(양아들) | ||
영묘 | 아우구스투스 영묘 | ||
종교 | 로마 다신교 | ||
왕조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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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마지막 프린켑스 세나투스(원로원 제1인자), 초대 로마 황제이자 로마 제국의 첫 번째 왕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개창자이다.2. 상세
본인 스스로는 한 번도 황제나 국왕을 칭하지 않았으나 역대 로마의 프린켑스 가운데 "프린켑스는 곧 종신 임페라토르"라는 공식을 만들고 이를 아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자신의 혈육들에게 합법적으로 승계해 프린키파투스(원수정)[14]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후대 로마인과 역사가들에게 로마 최초의 황제이자 유럽 최초의 황제로 평가받는다. 태어날 당시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 종신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 · 후계자로 지명 후 개명한 정식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기원전 40년 이후 새롭게 사용한 새로운 이름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다.카이사르의 누나 율리아의 외손자[15]로, 3월 15일(이두스 마르티아이)[16] 이후 카이사르 유언장에 따라 그의 양자이자 후계자가 되었다. 기원전 43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연합해 제2차 삼두정치 시대를 열었고, 이후 최후의 경쟁자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의 오랜 내전은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면서 사실상 끝나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때 지중해 세계의 권력을 거머쥐었는데, 안토니우스와 연합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멸망시킨 뒤 이집트를 로마의 영토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공화정 로마는 사실상 제정으로 변하게 된다. 기원전 27년, 내전이 종결되었으므로 자신에게 위임된 비정규적 특권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반납한다고 선언하면서 로마를 형식상 공화정 체제로 되돌리는 선언을 했고, 이에 원로원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존칭을 부여했다. 따라서 이때부터 옥타비아누스는 본명 대신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리게 된다.
서기 4세기까지 모든 로마 황제가 사용한 표준 제호의 기준을 제시한 인물이다. 그는 공식 직함에서 가이우스 율리우스를 공문서상 대체할 칭호로 '임페라토르 카이사르(IMPERATOR CAESAR)'의 표준 명칭을 처음 제시하면서, 원로원이 기원전 27년 1월 16일 준 존칭 아우구스투스(AVGVSTVS)까지 모두 로마 황제 칭호의 표준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살아있던 시절, 전임자였던 카이사르처럼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보다는 자신을 단지 "제1의 시민(Princeps, 프린켑스)"[17][18]으로 자칭했다.
재위 기간은 기원전 27년부터 서기 14년까지이며, 외치에서는 히스파니아 북부, 아이깁투스(이집트), 달마티아, 판노니아, 노리쿰, 라이티아를 합병하고 파르티아와의 교섭으로 카르헤 전투 때 빼앗긴 군단기를 찾아왔으며 내치에서는 조세 제도를 개편하고 속주와 본토 이탈리아에 걸친 도로망을 구축했고, 상비군, 근위대, 치안기관, 소방기관 등을 신설하고 군을 감축하고 대우를 개편했으며 여러 공공 시설을 확충하여 로마市의 많은 부분을 재개발했고 시민과 군에 수차례 세스테르케스를 기증하는 등 공인으로서도 숱한 업적을 세웠다. 죽기 한 달 전에는 업적록(Res Gestae Divi Augusti) 저술을 마치고 죽은 뒤 원로원과 민회에 의해 신격화되었다. 이후 모든 로마 황제들은 황제명에 아우구스투스가 사용한 존칭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개인성씨 ‘카이사르’를 제호에 넣어 사용했다[19]. 또한 그를 기념하기 위해 기존의 "여섯 번째 달(Sextilis)"을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한 자)로 바꿔 불렀다.[20] 그의 뒤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큰 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인 티베리우스가 물려받았다. 옥타비아누스의 친구이자 유능한 군사적 조력자였던 장군 아그리파도 유명하다. 군재는 아그리파에게 맡긴 만큼 부족했지만 집권 과정과 공공 사업은 모두 대성시킨 덕에 정치질에 있어서든 진짜 정치에 있어서든 서양사에서 손꼽히는 능력자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팍스 로마나 또한 그가 내전을 끝내고 개관했기 때문에 아우구스타로 불리기도 한다.
3. 생애
자세한 내용은 아우구스투스/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4. 평가
자세한 내용은 아우구스투스/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5. 여담
- 아우구스투스는 공적으로는 냉혈한이었고, 관용을 내세웠던 자신의 양아버지와 반대로 한번 손 보기로 결정한 정적이나 그 주변인물은 끝까지 용서하지 않고 그 화근까지 철저히 잘라낸 사람의 전형이었다.[22] 이는 외손녀 소 율리아, 외손자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괜히 배짱 두둑하고 아우구스투스와 성격이 판박이인 티베리우스가 첫 아내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이혼하라는 양부 아우구스투스의 명에 백기투항하듯이 굴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개인사적으로는 냉혈한이라는 평과 어울리지 않은 면이 많았다. 특히, 동갑내기 친구로 18살부터 함께 한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나, 외손자 중 양자로 입양해 키운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형제, 아내의 둘째 아들로 정식 입양을 하지 않았지만 양자 입적까지 준비한 대 드루수스, 누나의 외손자들로 대 드루수스, 소 안토니아 부부의 삼남매 자녀들인 게르마니쿠스, 리빌라, 클라우디우스 1세에게는 세상 어떤 사람보다 다정했다. 어느 정도로 다정했는지, 이들 중 친혈육들인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리빌라, 클라우디우스에게는 아우구스투스가 진짜 싫어한 행동인 엉뚱한 말을 하면서 시간 낭비를 하는 것조차 모두 받아줬고, 대단한 팔불출답게 그들이 사소한 성공만 해도 어린애처럼 좋아하기로 유명했다.
- 꽤 농담을 잘했고, 유머 감각이 걸출하면서도 이를 상황에 맞게 활용하는 재주가 뛰어났다. 무미건조한 글을 여러 개 남겼지만, 정작 목욕탕에서 마사지 등을 받으면서 풍자시를 짓는 등 의외의 모습이 많았다. 다만, 서정시를 쓰거나 관심있어 하는 것은 흥미가 없었고, 어린 시절부터 상황에 맞지 않은 엉뚱한 말을 대화 주제로 삼아 떠드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고 한다. 따라서 필요한 말만 하고, 엉뚱한 말 자체를 시간낭비로 여긴 아그리파와는 이런 점에서 잘 맞았다고 한다.
- 후대 귀족, 기사계급들 사이에서는 그리스어가 매우 유창하다고 알려진 황제였다. 후대의 수에토니우스 글에는 어린 갈바의 볼을 꼬집으면서 그리스어로 "이 녀석 권력 맛 좀 보겠구나"라고 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또래 귀족들과 달리 그리스어가 그렇게 유창한 편이 아니었다. 그리스어를 반드시 해야 할 자리에서도 하고 싶은 말은 모국어인 라틴어로 말하고 쓴 다음에 번역해 이를 보여주면서 명령한 사람이 아우구스투스였다. 다만, 아우구스투스가 이렇게 행동한 것에는 그가 그리스어 실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확실하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이 점은 고려해봐야 한다고 한다.
- 상대를 대할 때 당해주는 척 하면서 상대를 골탕 먹이는 재주가 천재적인 사람이었고, 본인이 굴욕을 당하면서도 그 결과물을 위해 과정을 즐기는 면이 많았다. 그 피해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파르티아의 샤한샤 프라아테스 5세였다. 프라아테스 5세는 이탈리아 노예 출신 어머니 무사와 함께 샤한샤에 올랐다가 아우구스투스에게 골탕을 먹고, 결국 불만을 품은 귀족들에게 축출돼 로마로 망명까지 했다. 이때 일에 관해 서기 3세기 세베루스 왕조 시대에 살았던 원로원 의원, 집정관, 장군 출신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이 과정을 위해 아우구스투스가 먼저 프라아테스 5세의 모든 존칭, 칭호를 생략하고, 파르티아 측에 보낸 외교문서에 어린 애 혹은 본인 아래 귀족 꼬마 부르듯이 "프라아테스"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머리 끝까지 열 받은 프라아테스 5세는 맞불을 제대로 놓겠다고 원로원 앞에서 공개될 외교 문서에 대놓고 "로마에 산다는 카이사르 씨", "카이사르 씨"라고 하면서 똑같이 대했다. 하지만 이렇게 행동한 것은 결국 아우구스투스가 굴욕을 당한 것 같아도, 그가 철저히 의도한 대로 먹힌 결과가 됐다고 한다. 왜냐하면 본래부터 아버지인 선왕 프라아테스 4세 독살 문제로 지지 기반이 불안정하고, 어머니 무사 출신이 아우구스투스가 프라아테스 4세의 선물로 보낸 노예인 까닭에, 이는 아우구스투스에게 꽃놀이패가 됐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상대가 이렇게 반응하자, 그때부터 그 분위기를 즐기면서 다시 협상 전략을 가졌는데, 이는 무사, 프라아테스 5세가 어쩔 수 없이 아우구스투스가 원하는 대로 끌려가다가, 서기 4년 정변으로 모자가 함께 로마 제국으로 망명한 일로 확대됐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아우구스투스는 본인의 자서전 형식으로 적고 있던 「업적록」에 이 부분의 공로를 적었고, 망명 당시에는 본인이 미숙한 프라아테스까지 포용했다며 자화자찬을 해, 자국 내 본인 인기를 더 끌어 올렸다.
- 아우구스투스의 친구 중에 푸블리우스 베디우스 폴리오(Publius Vedius Pollio, ? ~ 15년)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실수를 저지른 노예를 곰치[23]에게 먹이로 주는 악랄한 주인으로 악명을 떨쳤다.
가이우스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어느날 아우구스투스가 베디우스 폴리오의 집에 방문하였을 때 한 노예가 비싼 유리잔을 깨트린 일이 터졌다고 한다. 그러자 베디우스 폴리오는 그 노예를 평소대로 처벌하겠노라고 했다. 즉, 아우구스투스가 돌아가면 그 즉시 곰치의 밥으로 던지기로 한 것인데,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우구스투스가 처벌을 멈추라고 명령 후 그 집안의 모든 유리잔을 가져오게 해서, 자기 손으로 모두 깨트리고 정색하면서 노려봤다고 한다.[24][25] 이에 아우구스투스의 의중을 알아챈 폴리오는 사색이 되었고, 노예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으며 그 자리에서 노예 신분에서 풀려나 자유인이 되었다고 한다(출처: Publius Vedius Pollio, Naturalis Historia, 9장 29절).
이 외에도 자신의 정적이었던 안토니우스의 아이들 중 정치적으로 위협이 되는 아이들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죽이지 않고 신분을 유지해주고 돌봐준 점 등을 보면, 정치적으로 냉정하긴 해도 사적인 인품이 잔인무도한 인물은 아니었던 듯하다.[26]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전남편 소생이자 양아들이었던 티베리우스나 대 드루수스도 비록 정략 결혼에 이용하긴 했어도 오히려 친딸인 대 율리아보다 더 친자식처럼 총애했다. 다만 문란한 사생활로 온갖 문제를 일으킨 친딸 대 율리아에 비해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는 유능하고 총명했기에 그 역시 특유의 정치적 냉정함으로 쓸모에 따라 대한 것일 수도 있다.
- 좋아하는 취미 중 하나가 주사위 놀이와 홀짝 맞추기 같은 도박이었다. 당시 로마는 사투르날리아 축제가 열리는 12월에만 도박을 허용해주는 등 도박에 부정적인 국가였는데, 아우구스투스는 기간에 상관없이 도박을 매우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본인이 양자 티베리우스에게 쓴 편지에서도 확인되는데, 주로 주사위나 홀짝 도박을 즐겨했다고 쓰고 있다. 딸 율리아와 나눈 편지에서도 아우구스투스는 평소처럼 내 아들 드루수스와 주사위를 던지면서 논다고 적을 만큼 주사위 던지기 놀이도 진짜 좋아했다. 돈을 따려고 도박을 했다기 보다는 정치적인 면모도 강해서 일부러 돈을 잃어주거나 하면서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27]
-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 양자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사위이자 친구 아그리파처럼 검투사 경기가 필요이상으로 잔인하다며,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로 검투사 경기를 혐오했는지, 굳이 검투사 경기를 후원하더라도 검투사가 죽거나 유혈 사태로 큰 부상을 입으면 안 된다고 전제조건까지 달았다.[28] 다만, 로마 서민들이 좋아한 각종 경기, 대회는 꾸준히 후원하고, 이를 시기적절하게 개최하며 본인과 가문 홍보를 천재적으로 이끌어냈다. 개인적으로는 모의해전, 전차 경기, 서커스, 레슬링 경기 관람을 무척 좋아했고, 무언극과 연극 관람을 즐겼다.
- 태양력에서 2월이 짧아진 이유가 아우구스투스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로마 달력에서도 현재 1월과 2월에 해당하는 Ianuarius와 Februarius는 각각 29일과 28일이었단걸 모른 오해다.[29]
- 집안 노예, 가문 해방노예, 클리엔테스에게 자상하고 따뜻함을 넘어 친구였다. 차갑고, 매우 권위적인 성격이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집안 노예들과 서로 놀리고 농담을 주고 받으면서 이를 즐겼다. 그는 서로를 놀리면서 농담을 주고 받고, 그들을 "내 친구"라고 부르며 무척 자상했다. 가정의 여성 노예들이 결혼, 출산, 양육을 할 때에는 주기적으로 휴가를 줬고, 집안 노예들이 아프면 정성스럽게 치료를 돕고, 사망시 그 가족들을 위로하고, 손수 묘비를 세워주고 무덤을 만들어줬다. 다만, 집안 노예, 해방노예, 클리엔테스들이 본인의 이름이나 명성을 내세워 뇌물을 받거나, 누설하면 안 될 비밀을 본인 허락 없이 폭로하면 가차없이 처벌했다. 아우구스투스 생전에 딱 4번 있었는데, 이들은 아우구스투스의 명으로 모두 처벌받아, 3명은 처형됐고 1명은 로마법에 따라 추방됐다. 양아버지 카이사르의 해방노예로 본인의 집사이자 갈리아 파견 대리인이었던 갈리아인 율리우스 리키누스는 로마의 1년은 13달의 윤달이 있다는 거짓말을 하면서 1달치 세금을 본인 호주머니에 넣고 횡령했다가 파면됐다. 원래는 처형할 생각이었는데, 횡령을 했어도 그 금액 전부를 아우구스투스 개인재산에 전부 넣었고, 양부 카이사르의 정식 양자로 입양되는 과정에서 대리인으로 충성을 다한 점이 감면 사유가 됐다고 한다. 그리스인 노예 폴루스는 주인 부부가 자신을 신임함을 믿고, 귀부인과 불륜을 저지르고 횡령까지 하면서, 자살형을 명령받고 죽었다. 또 다른 그리스인 해방노예로 황실 비서관까지 오른 탈루스는 절대 누설하면 안 될 업무를 금화 25닢을 뇌물로 받고 폭로했다가, 꼬리가 잡혀 양다리를 부러뜨려 앉은뱅이가 된 채 영구 추방됐다가 유배 중 죽었다. 마지막 처벌을 받은 사람은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가정교사였는데, 그는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아르메니아에서 부상을 입고 치료 중임에도 아나톨리아 반도를 돌아다니면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이름을 팔면서 속주민들을 쥐어짜다가 고발받아 처벌받았다. 이때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아우구스투스는 개인교사와 그 시종들의 목에 무거운 돌을 달아 놓고 강에 수장시켜 죽였다.
- 양자 티베리우스와 마찬가지로, 본인의 집안 노예, 해방노예 외의 자유민, 로마 시민이 자신에게 "도미누스(주인님)" 같은 상하관계 내지 주종관계 비슷한 단어로 말하면 질색하고 정색하면서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의 황실비서를 지낸 수에토니우스가 기술했듯이, 양자 티베리우스 이상의 짠돌이였고, 무척 검소했다. 살았던 팔라티누스 언덕 위의 사저는 후일 황궁으로 불렸지만, 평수만 넓을 뿐, 형편없고 소박하기로 유명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옥타비아누스 시절부터 이 집을 구매해 살았는데, 거의 대부분 시간을 "내 작은 작업장"이라고 부르며 지낸 집무실 겸 서재인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 방은 수에토니우스의 표현을 빌리면 형편없는 쪽방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이보다 놀라운 점은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부부가 일평생 산 집의 특징이었다. 이 집은 중저가 돌덩이로 만든 땅딸막한 페페리노산 돌기둥이 떠받친 구조로, 돈 나가는 화려한 벽화 없이 칙칙하기로 유명했다. 딱 공화정 초기의 전형적인 파트리키, 노빌레스 가정 구조였는데, 살던 집 바닥은 회색의 싸구려인데다, 집무실을 비롯해 침실, 주방, 연회장 어느 곳을 가던지 간에 귀족이나 부자들 집에 반드시 있는 대리석은 집안에 보이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별장들도 위치만 좋을 뿐, 전부 시골집 수준이었고, 값나가는 것은 없었으며, 정원이라는 것도 말 그대로 노예들이 제철 채소를 심는 텃밭 정도로 이용될 만큼 화려함이 전혀 없었다.
-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 양자 티베리우스와 함께 겨울이 되면 감기 걸리기 좋고, 엄청 추운 침실에서 짚 등을 넣은 싸구려 이불만 덮고 사계절 내내 살았다. 이런 모습은 로마 제국의 귀족, 부자들이 계절, 날씨마다 거처와 방을 옮기며 지낸 것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 공개적으로 자신이 돋보이는 것을 무척 꺼렸다. 낯가림이 심했기 때문인데, 젊을 적부터 아내 리비아와 단둘이 공연장 구석에 앉아 조용히 관람하거나, 양자 중 친아들로 여긴 대 드루수스나 외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손자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정도를 데리고 잠시 보고 사라지기 일쑤였다.
- 관람 중 자신에게 중지를 들어올려 면전에서 욕설을 한 배우를 용서해주거나, 원로원 안에서 정적들이 비꼬면서 비방함도 넘길 정도로 본인에 대한 조롱을 관대하게 넘어간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본인의 혈육이 무시당하면 반드시 응징하기로 유명했다. 서기 7년 황실 사람들에게 제공된 황실 지정석에서 앉아 구경 중 본인의 친혈육인 클라우디우스 1세가 다리 한쪽이 불편해 미세하게 절뚝인 것을 보고, 원로원 의원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아들들이 신기한 동물 보듯이 히죽된 일에 분노해, 아내 리비아와 아들 티베리우스에게 서한으로 "내가 두고 보고 있다"며 이를 간 일도 그 일 중 하나였다. 이때 아우구스투스 손자 클라우디우스를 보고 히죽거린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두 아들 중 한명이 외손녀 소 율리아가 처벌받을 때 간통범으로 몰려 추방된,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차남 데키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이다. 따라서 학자들은 데키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가 이 사건 후 1년도 못 되어 아우구스투스에게 간통한 원로원 의원으로 지목받아 처벌받았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중이다.
- 거의 반세기 동안 성공적으로 재위 기간을 지켰고, 성공했음에도 긴 재위 기간을 가져간 훌륭한 통치자들이 대개 그렇듯 후계자들이 단명했다. 그의 경우에는 자신이 직접 정한 친혈육과 양자까지 모조리 요절하면서 끝내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장남인 티베리우스에게 제위를 물려줬다고 평가받는데[30] 그가 살아생전 정한 후계자들은 양자 티베리우스 사후 제위를 약속받은 두 혈육까지 티베리우스 대에 모두 요절하는 비극을 경험했다.[31] 그래서 티베리우스 사후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 남성 중 모든 음모 끝에 생존한 사람은 겨우 3명이었다.[32]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는 외종조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따라 양자가 됨으로써 외할머니 가문인 율리우스 씨족 일원이자 유일무이한 후계자가 됐지만 4번의 결혼 생활 중 친아들은 얻지 못했고 딸도 1명뿐이었으므로 결혼과 입양을 통해 이런 약점을 보완코자 했다. 따라서 아내의 본가, 누나의 시댁, 두 양자의 본가인 클라우디우스 가문들과의 결합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가문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인 카이사르 가문을 완성했다. 아우구스투스 일가라고도 불린 이 가문은 마르켈루스와 네로 가문이라는 클라우디우스 씨족 내 유력 가문들, 10대부터 자신에게 모든 것을 바친 친구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그 혈육이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결합으로 완성된 황실을 형성해 직계를 이었는데 그 직계는 브리타니쿠스와 네로[33]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이마저도 로마인들에게 아우구스투스 부부의 직계손이라고 불린 이는 브리타니쿠스가 마지막이었다.
-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가 첫 남편과 사이에서 임신해, 리비아와 결혼 후 3~4개월 뒤에 태어나, 자신이 직접 키운 대 드루수스를 친아들 이상으로 여겼고, 당대부터 드루수스가 친자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돌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공식적으로 부인하거나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양자 입양을 게르마니아 개선식 직후 준비했었고, 대 드루수스의 자녀들이 갈리아에서 태어났을 때 따로 축원을 하거나 할아버지임을 강조하는 등 티베리우스와는 다른 모습을 많이 보였다. 이런 모습처럼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9년때 큰 충격에 빠져 평생을 힘들어했다. 그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와 함께, 이 해에 요절한 양자 대 드루수스를 잃은 상실감이 큰 나머지, 침실, 집무실에 드루수스 실제 크기의 전신입상을 설치해, 서기 14년 사망 때까지 매일 같이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 정도로 그가 상실감을 표한 것은 외손자로 양자로 입양했던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요절 외엔 없을 정도였다.
- 카피톨리누스 언덕 위에 있는 신전 중 아우구스투스가 지은 유피테르 신전은 일반적으로 천둥의 신 유피테르 신전으로 불리는데, 그 이유가 재미있다. 아우구스투스가 이 신전이 완공될 때, 방문한 날에 천둥이 치더니, 아우구스투스의 해방노예가 벼락을 맞고 즉사하면서, 그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 어린 시절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내란을 끝낼 것이란 계시를 꿈 속에서 받고 찾아온 키케로와 만난다.
저래서 카이사르 사후 키게로를 만나 아버지라고 부른 거에 그리 김칫국물을 들이킨 건가
6. 대중매체에서
6.1. 드라마
6.1.1. 로마
시즌 1의 맥스 퍼킨스 | 시즌 2의 사이먼 우즈 |
HBO의 드라마 ROME에서 주요 등장인물로 묘사된다. 어린 나이에 권모술수를 부릴 줄 알고 타고난 두뇌와 비범한 명석함의 소유자이다. 그 덕분에 작중에서 이루어지는 계략이나 정치인들의 속셈을 해설하는 역을 맡기도 한다. 하지만 결벽증과 지나친 냉혹함 같은 인성적 결함도 지니고 있다.[36]
유년 시절이 매우 불행했던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남자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늘 어머니인 아티아에게 모지리 취급을 당했기 때문이다. 옥타비아누스도 그래서 가족에 대한 정이 없고, 어머니에 대한 원한이 깊다.[37] 드라마에서 악독했던 아티아가 더 악독하고 냉혈한이 된 옥타비아누스의 황제 개선식에서 기죽은 표정을 짓는 마지막화의 모습이 백미. 훌륭한 로마인이길 원하는 어머니의 등쌀에 떠밀려서 본인이 제일 하기 싫다는 검술훈련을 하고[38] 강제로 전쟁에 나가게 된다. 그러나 이 시절에도 확실히 비범한 모습도 보이는데 티투스 풀로가 루키우스 보레누스의 아내 니오베의 불륜 사실을 조사할 때에 동행하여 불륜 상대남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귀신처럼 꿰뚫어보았고 고문 지시도 아무렇지도 않게 내린다.[39] 이 사실은 자신들이 묻은 것으로 루키우스가 이 사실을 영원히 알지 못하게 하라는 등 인간적인 면모도 보여줬다. 또 똑같이 어머니 때문에 늘상 스트레스를 받고 사는 누나 옥타비아의 멘토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냥 이 때는 똑똑하지만 덜 성숙하고 인간적인 어린 시절의 옥타비아누스를 표현했다고 보면 되겠다.
시즌 2에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면서 자신을 후계자로 세운다는 유언장을 확인하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아티아 때문에 바지사장 신세가 되어버린다. 그럼에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다 결국 어머니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모욕하고 한바탕 싸움질을 벌인 끝에[40] 집을 뛰쳐나온다.[41] 그리고선 돌아올 땐 강력한 군대와 유능한 친구들을 끌고,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냉혈한에 새디즘, 마조히즘[42]까지 있는 카리스마형 캐릭터로 재등장한다.
시즌 2에서 어머니 아티아와 누이 소 옥타비아를 꾸짖을 때와[43] 악티움 해전에서의 대패로 몰락을 눈앞에 둔 클레오파트라에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생사 상관없이 데려오면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자식들은 물론, 휘하의 이집트 왕국과 백성들도 살려주겠다는 편지를 보냄으로서 클레오파트라가 어쩔 수 없이 본인의 손으로 직접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자살하게 만드는[44] 모습에서 이 캐릭터가 얼마나 냉철한 인간인지 보여준다. 특히나 안토니우스가 사망한 뒤 대면한 클레오파트라의 맞장구를 쳐주면서도, 결국 자신의 의지[45]를 끝까지 관철시키고 강요하는 모습은 일부 시청자들조차 소름이 돋을 정도다.[46][47]
다만 시즌 2라고 마냥 유능하게만 나온건 아니고 오히려 실제 역사보다 너프된 편이다. 키케로에게서 집정관 자리를 얻었지만 섣불리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했다 가진 병력이 적어 위기를 맞았고, 삼두정치 때는 전쟁을 노리고 노골적으로 곡물 수출을 거부하는 안토니우스 때문에 또 한번 위기를 맞기도 했다. 둘다 결정적인 한 방으로 위기를 타개하는데는 성공하지만,[48] 스스로의 힘이라기보다는 조력자의 역할이 컸음을 생각하면 실제 역사만큼의 유능함은 보여주지 못한 셈이다.[49]
내전 중에서 유일하게 전투 장면이 구현된 필리피 전투에서는 마치 신병처럼 안토니우스에게 줄곧 어린애 취급을 당하고 안토니우스가 돌격을 할 때 아그리파만 뒤따라 보내고 자신은 줄곧 본진에 남아있는 모습을 연출한다.[50] 공화파쪽 진영에서도 카시우스만 전투에 나섰을 뿐 브루투스는 계속 본진에 남았기에 역사상 두 사람의 대결은 연출되지 못하고 덕분에 브루투스에게 깨지는 모습은 생략되었다.
6.1.2. 임페리움 시리즈
2003년에 제작된, 로마사를 주제로 한 임페리움 시리즈의 <임페리움: 아우구스투스>에서 주인공으로 나온다. 젊은 날의 활약을 회상하는 노년의 아우구스투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보통의 매체에서는 잘 드러내지 않는 아우구스투스의 불행한 가족사를 주제로 하고 있다. 즉, 로마를 위해서 딸의 인생을 망칠 수 밖에 없는[51] 아버지의 고뇌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최종 보스는 아우구스투스를 암살해서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는 율리우스 안토니우스. 마지막에 임종 장면에서 부인 리비아 드루실라, 후계자 티베리우스[52]와 신하들 사이에서 유배지를 탈출한 율리아가 나타나서 화해를 하는 장면은 명장면. 피터 오툴이 아우구스투스 역을 맡았다.6.2. 영화
6.2.1. 박물관이 살아있다 시리즈
자세한 내용은 옥타비우스 문서 참고하십시오.6.3. 소설
6.3.1.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소설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서는 3번째 아내이자 초대 황후인 리비아에게 쉽게 조종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리비아가 자신을 독살할 것을 두려워해 음식을 거절하고 직접 딴 무화과로 연명하나 리비아가 그 무화과에 독을 발라두어 결국 독살당하는 것으로 묘사한다.6.4. 만화
6.4.1. 클레오파트라(애니메이션)
데즈카 오사무의 클레오파트라(애니메이션)에서는 클레오파트라가 그가 차기 지도자감임을 알고 유혹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게이라서 유혹이 안통해서 결국 역사대로 클레오파트라랑 싸우게 된다.[53]6.4.2. 권투암흑전 세스타스
고대 로마를 다룬 권투암흑전 세스타스에서도 당연히 언급되었다. 작중 배경은 네로의 시대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등장은 없지만, 역사대로 뛰어난 명군이자 불세출의 정치가로 언급된다. 네로를 제외한 나머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족들[54]은 다 하나 같이 얼간이들로 연출되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가 더 돋보인다. 아우구스투스 말고 정상적으로 나온 황족은 게르마니쿠스 뿐이다.
6.4.3. 무사만리행
콤모두스 황제가 나루와 결투를 벌일 때, 그의 조각상을 무기로 활용한다. 말 그대로 조각상을 들고 몽둥이처럼 휘두른다. 심지어 나루의 빠른 스피드에 대응하기 위해, 무게를 줄여야 한다며 냅다 두동강내서 휘두르기까지 했다. 어찌보면 자식 농사 말아먹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다음으로 욕 보고 있는 로마 황제.6.4.4. 샌드맨 시리즈
말년의 모습으로 등장. 16세 때, 종조부에게 강간당한 뒤에 후계자로 낙점되었고 로마의 미래를 위한 모든 예언과 계획들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서 로마의 지배자가 된 후에는 다른 계획을 품게 되고, 종조부를 포함한 로마의 신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들킬 것을 두려워하다가 영원 일족의 꿈이 들려준 충고를 받아들여서[55] 하루 동안 거지로 분장하고 거리로 나가서 자신의 계획을 정리할 시간을 갖는다. 그의 사후, 계획대로 로마의 정복은 정체되고 우리가 아는 역사대로의 길을 걷게 된다.6.5. 게임
6.5.1.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
문명 4와 문명 5에서 로마 문명의 지도자로 나온다. 문명 4에서는 양아버지 카이사르와 같이 나왔고, 5에서는 단독 출연. 문명 6에서는 트라야누스가 새로 등장했다. 문명 7에서 다시 지도자로 나온다.6.5.2. 토탈 워: 로마 2
역사적 전투에서 목소리로만 출연한다.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나오는데, 이때 대사는 그 유명한 "바루스, 내 군단을 돌려다오!" 라는 말을 한다.그리고 토탈 워: 로마 2에 드디어 그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캠페인인 황제 아우구스투스에서 등장한다. 이때는 시대가 BCE 41년도라서 아직 황제는 아니고 레피두스와 안토니우스와 대립 구도로 나온다.
6.5.3. 스타크래프트2
코랄 행성에 수도가 아우구스투스를 패러디한 아우구스트그라드 이다. 이 아우구스트그라드에 이름을 따서 만든 자치령 근위대의 전함 아우구스트그라드의 자랑이 있다6.5.4. 도미네이션즈
동상 흉갑이 전설 유물로 등장한다.자세한 내용은 전설 유물/아우구스투스 동상 흉갑 문서 참고하십시오.
6.5.5. Warhammer 40,000
13번째 프라이마크인 로부테 길리먼의 모티브다. 명문 귀족 출신이면서도 민중파 성향을 가졌던 양부를 두었으며, 그 양아버지를 상대 파벌인 귀족파에 의해 암살로 잃었다는 점이 동일하다. 또한 외모적으로도 금발에 로마인 특유의 짧은 머리스타일이 매우 흡사하다. 두 인물은 뛰어난 정치력과 행정 능력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필요할 때는 냉혹한 숙청을 실행해 절대권력을 쟁취했던 옥타비아누스와 달리, 길리먼은 양아버지를 암살한 원수를 상대로도 철저히 법과 제도를 따르는 모습을 보여줘서 정적들을 감화시켜 자발적으로 추대되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또한 옥타비아누스는 군사적인 부분에서는 뛰어나지 못했지만, 길리먼은 인류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전술가이며, 개인 무력도 상당히 뛰어나다는 차이도 있다.[1] 흔히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로 알려진 이 사람의 본래 이름이다.[2] 라틴어식 표기이며, 영어식 표기로는 Gaius Octavius Thurinus.[3] 現 이탈리아 라치오주 로마[4] 76번째 생일을 1달 4일 남긴 상태에서 사망했다.[5] 75년 320일[6] 나폴리 광역시에 속한 시이다.[7] 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였지만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사용된 제호 개념의 이름이다. 아우구스투스는 황제가 된 후에 모든 공식기록에서 본명 대신 이 이름을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임페라토르는 프라이노멘으로 사용됐고, 카이사르는 카이사르의 양자가 된 이후부터 사용된 개인 분파 가문 성씨(코그노멘)가 공식직책 임페라토르와 함께 붙여진 이름에 해당된다. 참고로 위에 나온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위 필리우스'는 사후 신격화되면서 붙여진, 최종 존호 개념이자 기원전 40년 이후 함께 사용된 제호이다.[8] 보통 로마인 이름 중 입양의 경우는 반드시 출생 가문의 끝부분에 -anus 를 붙인다. 옥타비아누스 역시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면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로 바뀌었다. 즉, 본가 옥타비우스(Octavius) 끝부분에 ‘anus’가 붙어지면서 옥타비아누스(Octavianus)라고 이름이 붙여지고 불리게 된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는 본래 아이밀리우스 가문 출신이지만 스키피오 가문의 양자가 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emilianus)가 있다.[9] 출처[10] 혈연상으로는 어머니 아티아의 외삼촌이라 외가 쪽 작은할아버지뻘 되는 친척 어른이었다.[11]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친자식, 자기 친구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결혼했다.[12]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아우구스투스의 딸인 대 율리아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사이에서 난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로 각각 3살, 1살 때 입양됐다.[13] 영어로는 "I found Rome a City of bricks and left it a City of marble(나는 벽돌의 도시 로마를 발견했고 대리석의 도시로 남겨 두었다)"라는 번역으로 알려졌다. 세간에는 "나는 진흙으로 된 로마를 발견해, 대리석의 로마로 남겨 두었다"는 식으로 벽돌이 아닌 진흙으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는데, 로마 시대에도 벽돌은 진흙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나온 오역으로 보인다.[14] 아우렐리아누스가 청사진을 그리고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완성한 도미나투스(전제정) 아래에서 로마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와 달리, 로마 원로원의 원수(프린켑스)에 취임하지 않거나 올라도 특수한 정치적 상황 아래에서만 잠시 취임했다. 왜냐하면 하드리아누스 이래로 모든 국정은 황제자문회의에서 처리할 수 있는데다, 세베루스 왕조의 개혁 이후에는, 근위대 프라이토리아니를 통솔하는 근위대장의 보좌 아래 내각정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15] 외할아버지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고종사촌동생이므로, 폼페이우스와도 혈연상 친척이었다.[16]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날이다.[17] 본래 '프린켑스'는 로마 공화정 당시 원로원으로부터 큰 공적을 인정받았다는 의미로 쓰이던 명예로운 호칭이며,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 체제를 상징하는 원로원 의장 같은 지위다. 아우구스투스는 키케로 이후 정식으로 이 직위에 올랐는데, 내전 기간 내내 실질적인 프린켑스라서 우리가 제정의 시작이라고 부른 기원전 27년 전부터 자신을 프린켑스라고 칭했다. 이는 그가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선례를 알고 있어 군림하는 자로 여겨지기를 경계해, 비교적 겸양의 표현으로 '프린켑스'를 칭했다고 해석된다. '아우구스투스' 역시 '존엄한 자'의 의미이긴 하지만, 프린켑스보다는 높은 어감을 지녔기 때문이다.[18] 프린켑스는 기원전 28년 1차 조정헌법 체제(로마 제정) 아래에서 로마 황제의 전유물이었다. 다만, 군인황제시대로 부른 서기 235년 이후, 서기 275년 타키투스 황제가 제위에 오르기 전까지 약40년 정도 원로원이 프린켑스 세나투스 직을 돌려가며 맡은 시절이 원수정(프린키파투스) 아래에서 있긴 했다. 서기 238년 폼포니우스 바수스가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취임한 사건이 그것인데, 이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국가의 적이 되고,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고르디아누스 3세가 같은 해에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직에 오른 특수한 사정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이 역시 그 권한은 황제가 관습상 이유로 모두 행사했고, 폼포니우스 바수스 같이 돌아가며 오른 의원들은 외적과의 전쟁으로 바쁜 황제를 대신해 회의 사회자 역할 정도만 맡았다고 한다. 허나 이런 모습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아래에서 도미나투스(전제정)로 로마 국제가 바뀌면서 달라져, 후기 로마 황제들은 발렌티니아누스 1세처럼 원로원과 힘싸움을 벌일 때만 잠시 취임할 뿐 이 직책에 무조건 오르지 않았다.[19] 단, 티베리우스,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는 개인성씨가 카이사르이므로, 제호에 굳이 넣어 사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두 사람에게 카이사르라는 이름 자체는 원로원에서 개인 성씨로 사용된 것일 뿐, 황제 제호에 넣어 사용한 황제 명사형 칭호가 아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 클라우디우스 1세는 아우구스투스 생전,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입양되지 않았기에, 여전히 개인 성씨는 '클라우디우스'였다. 따라서 그는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같은 카이사르 가문 사람임에도, 즉위 후 정통성을 위한 이름으로 '카이사르'를 제호로 취했다.[20] 로마력 기준으로 6번째 달이다. 카이사르의 율리우스력 기준으로는 현재와 마찬가지로 8월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8월을 의미하는 영단어 August의 어원이 된다.[21] 아우구스투스는 이 두 저술을 제외한 카이사르의 모든 저술들을 없애버렸다. 카이사르는 신이었고, 그의 신성성을 모독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없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의 사적인 면을 엿볼 수 있는 연애 편지, 지인들과 주고받은 귀중한 기록들은 전부 없어졌다. 후대인들에게는 정말 애석한 일이다.[22] 카이사르의 정적에 대한 무조건 관용에 대해 반 카이사르파 인사들은 카이사르가 '난 관용을 베푼 대인배'라며 우쭐대는 것에 수치심을 느꼈고 카아사르를 비판하면 현란한 말솜씨로 망신 주는 것은 위선이라며 증오했다. 결국 카이사르의 관용이 카이사르 본인의 목숨을 앗아가게 되었고 카이사르의 관용에 칼로 답한 이들은 다시는 관용을 받지못하고 아우구스투스의 손에 끝장났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관용에 칼로 답한 반 카이사르파 인사들을 본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권력과 신변에 충분히 위해를 가할 수 있다고 판단된 정적을 끝까지 쫓아가 죽여버린 것은 당연했다.[23] 칠성장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오역이다.[24] "어디 나도 한 번 곰치에게 던져봐라."라는 뜻. 그리고 벌을 주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유리는 상당히 고가품이었기 때문.[25] 다른 썰로는 이렇게 던지면서 나도 던져 보거라라고 한 뒤, 경고를 보냈다는 것도 있다. 만일 본문 내용이 진짜라면, 폴리오가 친구라서 유리잔을 깨는 정도로 덮어버렸다고 봐야 한다. 만약 폴리오가 황제의 친구가 아니었다면 황제에게 인육 사료로 키운 고기를 대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고, 어떻게 될지는 뻔했기 때문이다.[26] 이런 점에서 정적에게 매우 잔악했던 술라와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술라는 정적의 친인척까지 모조리 살생부에 이름을 올려 추방하거나 목을 날려버렸다.[27] 출처 수에토니우스, 황제열전, 아우구스투스전, 71장[28]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검투사 경기는 무조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시민들의 욕구를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싸워야 패배하더라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 뿐, 시민들이 보기에 대충 싸우거나 비겁하다고 생각되면 끔찍한 죽음뿐이었다.[29] 고대 로마에서는 연초를 Martius로 두고 1주일에 8일, 1년에 38주(총 10개월, 304일)를 두는 달력을 쓰고 있었고 나머지를 겨울로 부르며 딱히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따라서 정규 해의 한달은 관습적으로 보통 달의 주기와 비슷한 30일 또는 31일이었다. 이후 겨울에 해당하는 두 달(연초인 Ianuarius와 연말인 Februarius)을 도입하고 매달 홀수인 29일과 또는 그 다음 홀수인 31일을 부여해 1년 356일을 만들고 다시 1년을 홀수로 맞추기 당시 달력에서 마지막 달에 해당하는 Februarius에서 하루를 뺐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2년~3년마다 Februarius 23일부터 한달을 27일로 하는 일종의 윤달인 Mercedinus을 시행했으니 일반적으로 Februarius는 28일을 채우지 못하는 보조적인 달로 취급받았다. 28일로 정하는 건 수백년 간 지켜온 로마의 전통인 셈. 실제로 아우구스투스가 시행한 달력 개혁은 율리우스력에서 확립된 윤년 제도를 재조정하기 위해 당분간 윤년을 미루는 제도를 도입한게 전부였다.[30]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차남인 대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가 리비아 드루실라와 재혼할 당시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고 태어난 이후에도 걸음마를 뗄 때까지 아우구스투스가 친아들로 여겨 키우면서 친부의 집에 돌려보내지 않았다. 따라서 풍자 작가들이 불륜으로 태어난 자식이라고 조롱하고 세간에서도 안 좋게 보자 돌려보낸 일화가 있다. 정황상 개선식 이후 정식 양자로 삼아 외손자들이 장성할 때까지 제위를 맡기고 누나의 외손자들인 드루수스의 아이들을 손이 많지 않은 율리우스 가의 자녀들로 받아들일 준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아우구스투스는 개선식 통과 직전부터 측근들과 원로원에게 "내가 죽으면 내 후계자는 드루수스", "두 외손자 못지 않게 드루수스를 진지하게 후계자로 생각한다"고 떡밥을 던졌다. 대 드루수스는 기원전 9년 게르마니아 전쟁 개선식을 앞두고 낙마 사고 후유증으로 요절했다.[31] 본래 티베리우스 입양 당시 아우구스투스는 포스투무스,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에게 모두 제위를 약속했고 그에 따라 입양 절차를 완성했다. 하지만 외손자 포스투무스는 학습 부진과 난폭성으로 외할아버지에게 직접 이 문제가 원로원에 상정돼 파양되고 추방됐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 임종 직전까지 그의 지시와 교육 아래 제왕 교육을 공식적으로 받은 이는 게르마니쿠스와 소 드루수스 둘 뿐이었다.[32] 클라우디우스(누나 소 옥타비아의 딸인 소 안토니아의 아들), 칼리굴라(누나 소 옥타비아의 딸인 소 안토니아의 아들인 게르마니쿠스의 아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누나 소 옥타비아의 딸인 소 안토니아의 딸인 리빌라의 아들)였다. 다행이라면 양할아버지이자 외종조부인 아우구스투스는 살아생전 클라우디우스가 가진 비범함과 훌륭한 인성을 알고 일찍부터 그에게 로마 귀족이자 자신의 직계 혈육으로서 필요한 모든 교육을 시켰는데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담당한 품성 교육, 식사 예절과 원로원을 다루는 대화법, 웅변술부터 각계 최고 명사와 역사가들이 직접 담당한 학문 수업도 포함됐다. 따라서 일찌감치 현실적인 한계로 제위 계승에서 배제됨에도 클라우디우스는 약관의 나이부터 알아주는 역사가가 됐는데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정치 활동을 만류하면서도 자신의 보좌사제는 반드시 맡게 했다. 또 사후 발표될 유언장에 "내 친혈육이자 손자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에게 재산을 남긴다"고 명시해 만일의 사태까지 대비했다.[33] 네로는 입양 관계로 직계 남자 황족이 된 '타 가문 출신의 먼친척'이자 '입양자'였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로마 귀족들이 말하는 가문 번영과 안녕을 위해 데리고 온 자식이었던 셈. 당장 양부가 된 외종조부 클라우디우스에게 그는 입양 전 이름인 아헤노바르부스로만 불렸고 그의 즉위는 궁중 쿠테타였다. 여기에 더해 네로는 그의 외삼촌으로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가부장이었던 3대 황제 칼리굴라 생전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피를 이었다고 해도 직계 남자 황족에서 사실상 배제된 까닭에 그 정통성이 없었다. 이는 칼리굴라가 중병에서 회복한 직후 결정내린 후계 구도와 연관된 정치적 결정 때문인데 그는 자신의 둘째 여동생 율리아 드루실라와 그의 남편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이들 부부의 후손들, 숙부 클라우디우스와 자신이 중매하여 결혼시킨 메살리나 부부와 그 후손들 외에는 상속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로마 귀족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문 당주에게 네로는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피만 흐른 방계 친척로 공인된 셈. 이런 이유로 네로와 그의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는 칼리굴라 생전부터 소 아그리피나의 재혼 전까지 철저히 로마 사회에서 잊혀진 존재가 됐다.[34] 마스터 앤드 커맨더에서 영국 해병 생도 블랭크니 역을 맡았다.[35] 공교롭게도 맥스 퍼킨스와 사이먼 우즈 모두 이튼 스쿨을 졸업한 엘리트이며 2020년대에는 배우 일을 그만둔 상태다.[36] 자신과 살짝 몸이 닿은 여노예의 따귀를 때린다던지, 말 위에서 졸고있는 자신을 깨우는 노예에게 '절대 허락없이 내 몸에 손대지 마라'고 쏘아붙인다.[37] 단, 이는 실제 역사와는 판이한 드라마의 창작이다. 사료에서 아티아는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인 코르넬리아, 카이사르의 어머니인 아우렐리아와 함께 로마사의 대표적인 현모양처로 기록되어 있다. 아우구스투스도 카이사르의 아내 칼푸르니아가 사망하자 자신의 친모 아티아를 현숙한 어머니의 상으로 선전했다.[38] 이 때 불러들인 무술사범이 티투스 풀로이다.[39] 덤으로 너는 어차피 여기서 살아서 나갈 수는 없으니, 고통스럽지 않게 죽고 싶다면 사실을 고하라는 협박을 한다. 그리고 한참 고문하고는 '곧 플루토를 만날텐데 거짓말을 하는건 현명치 못하지'라며 악마처럼 꼬드긴다.[40] 물론 안토니우스에게 일방적으로 맞았다. 그럼에도 끝까지 반항했지만.[41] 이때의 연출은 비록 옥타비아누스가 권세와 남자로서의 기세에 눌렸지만 그 속에는 안토니우스가 예감하지 못할 더 큰 야망이 있음을 암시한다.[42] 리비아 드루실라를 아내로 맞아들일 때 리비아에게 자신은 성적 쾌락을 위해 상대방을 때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해서 S임을 인정했고, 리비아는 옥타비아누스가 실제로는 M 취향임을 알고 관계 중에 옥타비아누스의 뺨을 때리고 질식시키기도 한다.[43] 그리고 어머니와 누이의 입장도 1부와는 확연히 달라진다. 아티아는 세르빌리아가 죽으면서 한 저주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의 결별로 야망이 흐트러지면서 1부에서의 독함도 사라졌고, 옥타비아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정략결혼하면서 안토니우스의 입장을 어느 정도 대변하게 된데다 어린 시절의 비교적 순수했던 동생이 냉혹함만 남은 인간으로 돌아오자 크게 실망해 돌아선 상태.[44] 옥타비아누스가 알렉산드리아에 당도하기 전날 밤 함께 자살하기로 약속했지만 다음날 아침 자신이 먼저 죽었다는 편지를 보냈고,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고 철석같이 믿고 절망한 안토니우스는 루키우스 보레누스에게 부탁하여 그의 칼에 찔려 자살한다. 당연히 편지부터가 거짓말이었고 클레오파트라는 멀쩡히 살아서 안토니우스의 시신과 대면했고 이를 본 루키우스도 어이없어 한다.[45] 승리를 과시하기 위해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자식들을 로마에 끌고 가는 것.[46] 클레오파트라가 로마로 끌려가지 않도록 이런저런 핑계를 대 보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그 핑계를 가볍게 논파하고 클레오파트라를 굴복시키는 무지막지한 카리스마를 과시한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할 것을 정확하게 예상한 아그리파와는 달리 그럴 리 없다며 오판하기도 했다. 여기서 자신의 냉혈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팩폭을 날리는 아그리파와 마이케나스가 은근 개그 포인트.[47] 대면한 옥타비아누스에게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를 잔혹한 괴물이라고 했지만 자기 눈에 선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보인다며, 어떻게든 비위를 맞추려던 클레오파트라마저 자신과 아이들을 로마에 전리품으로 데려가려는 옥타비아누스의 진위를 깨닫고 절망한다. 결국 모든 희망을 잃은 클레오파트라는 혼자 있게 되자마자 안토니우스의 시신에게로 달려가, 당신을 배신하면서까지 살고 싶었는데 옥타비아누스는 날 조리돌림시키려는 속셈이고 이제 다 끝났다며 처절하게 절규한다. 이후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시신 곁에서 독사에 물려 자살하고, 왕궁에 들이닥친 옥타비아누스에게 "네 놈의 영혼은 이미 부패했어"라고 악에 받친 유언을 남긴 뒤 사망한다.[48] 브루투스와의 싸움은 안토니우스와의 동맹으로, 안토니우스와의 싸움은 포스카가 유언장을 빼돌린 덕이 컸다.[49] 이는 제작비와 시청률의 문제로 당초 계획에 비해 축소된 드라마의 시즌 편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축약된 내용 속에서도 드라마 시즌2 속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종종 소름끼칠 만큼 상대의 속을 파악하며 낱낱이 읽어낸다던가 상대방을 완전히 물 먹이는 등 멋진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대표적으로는 집정관 자리에 오르자 카이사르 암살파에 대대적으로 선전포고를 하며 당황한 키케로를 권력으로 누르는 장면이다.[50] 이때 안토니우스는 전투 자체를 즐기는 듯한 열혈남아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반면에 옥타비아누스는 전황을 읽지 못하고 아그리파에게 기댄다. 드라마는 단순히 안토니우스를 용기 가득한 장군으로 묘사하고 옥타비아누스는 전투에 있어서는 애송이라는 듯이 묘사해 흔히 두 사람에 갖는 이미지를 묘사하긴 했지만 안토니우스가 단순히 군대를 이끌고 적군을 향해 돌격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이 시기에 전술을 짜고 군대를 지휘하며 전황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가장 유능한 장수라고 할 것 같으면 당연히 안토니우스였다.[51] 작중 율리아의 실제 대사이기도 하다.[52] 실제로 아우구스투스의 강요로 진심으로 사랑했던 본처 빕사니아와 이혼한 것 때문에 분노했고, 그 분노를 표출코자 새로 결혼한 율리아를 강간하는 장면이 나온다.[53] 물론 아우구스투스가 게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애시당초 로마에서 동성애자는 그리 좋게 생각되지 않았고 또, 아우구스투스는 아내를 여러 번 맞이한 적도 있으며 특히 리비아 드루실라를 매우 사랑했기 때문.[54] 네로,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55] 이때 꿈은 경계/한계의 신 터미누스(Terminus)의 부탁으로 아우구스트의 꿈에 나타나 충고를 했다. 로마가 전세계를 정복하게 되면 국경, 즉 경계가 없어지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