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2. 동로마 제국
2.1. 레오 왕조2.2.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전반기2.3.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2.4.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후반기2.5. 이라클리오스 왕조2.6. 20년간의 혼란2.7. 이사브리아 왕조2.8. 니키포로스 왕조~아모리아 왕조2.9. 마케도니아 왕조
3. 발칸 반도 서부(현재의 크로아티아+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세르비아+알바니아+코소보)4. 발칸 반도 동부(현재의 불가리아+루마니아)5. 에게 해 일대[clearfix]
1. 개요
발칸 반도와 에게 해는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래로 오랫 동안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굳건하게 있었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말기에 발생한 전염병의 창궐로 인구수가 격감하였고, 이후 국내외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정세가 어지럽히면서 슬라브인들과 불가리아인, 마자르족들이 순차적으로 발칸 반도로 남하하면서 발칸 반도 복쪽에 있던 실질적인 영토들을 상실하고 만다.2. 동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의 경우 특유의 정치 구조 덕에 겉으로 안정적으로 보일지라도 황제가 틈을 보이거나 무능하면 정변이 빈번하게 발생해 중세가 개막한 이례로 테오도시우스 왕조에서 마케도니아 왕조에 이르기까지 왕조가 자주 전복되었다.더구나 포카스같은 희대의 폭군이 등장해 나라를 파국에 몰아넣기도 했고,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한 차례 폐위되어 코가 잘리는 신체훼손형을 받은 뒤 유배되었다가 하자르족과 불가르족의 칸 테르벨과 손잡고 제위를 되찾았으나, 이후의 보복 과정이 동맹인 하자르를 이용해 자신을 배신한 케르손을 공격하는 등 비이성적이었기에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4세가 애써 구축한 안정된 제국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러한 혼란은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쿠데타로 죽은 이후에도 6년 더 이어졌다.
하지만 중세 중기까지 레오 왕조의 레오 1세, 아나스타시우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라클리오스 왕조의 이라클리오스, 콘스탄티노스 4세, 이사브리아 왕조의 레온 3세, 콘스탄티노스 5세, 아모리아 왕조의 미하일 2세, 테오필로스, 마케도니아 왕조의 바실리오스 1세, 레온 6세, 콘스탄티노스 7세, 로마노스 1세, 요안니스 1세, 바실리오스 2세에 이르기까지 명군들이 즉위해 온갖 외침과 내란에도 동로마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다방면의 정책을 이어갔으며, 무엇보다 고대 로마의 공화주의가 전제군주제로 전환된 지 1,000여 년간 이어짐에도 그 영향력이 남아 있어 황위 자체가 세습이 가능하더라도 실력이 없다면 가차없이 대체되는 것이 허용되는, 이른바 '공화적 전제군주제'였기에 궁정쿠데타가 발생하더라도 성공시 전임 황제의 근위대들이 쿠데타로 새로 즉위한 황제에게 충성했다.
무엇보다 8세기 중엽 콘스탄티노스 5세때 아들 레온 4세가 태어나자 부여한 데서 시작한 포르피로게니투스 제도는 동로마 황위가 그나마 안정적으로 계승되면서 정국 안정화에 기여했다.
국가 정체성이 로마에서 그리스화되어 가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라클리오스가 즉위한 후 공용어를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완전히 공식화되었고, 콘스탄스 2세 황제는 로마에 방문해 교황 비탈리아노의 따뜻한 환영에도 불구하고 판테온을 비롯한 옛 건축물들의 장식이나 청동을 떼어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기도 했다.
2.1. 레오 왕조
475년 11월 레오 1세의 황후인 아일리아 베리나와 그 오빠인 바실리스쿠스[1]가 내란을 일으키자 제노는 이사우리아로 도피하였고, 바실리스쿠스가 일시적으로 제위에 오른다. 내란 당시 제노는 경마장에서 전차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는데 군대가 오고 있으니 당장 도망가는 게 좋을 거라는 쪽지를 받았다. 제노는 그것을 읽자마자 저항도 하지 않고 뒤도 보지 않으며 도피했다고 한다.그렇게 제위에 오른 바실리스쿠스는 베리나의 애인을 암살하여 베리나의 지지를 잃었고, 수도에 남아있던 이사우리아 군인들을 학살하였으며, 과세 정책으로 인해 민심도 잃었다.
바실리스쿠스는 쿠데타를 도운 일루스라는 이사우리아인 장군에게 제노를 잡아 올 것을 명령한다. 일루스는 제노의 동생 플라비우스 롱기누스를 인질로 잡아 제노를 조종하려 했지만 바실리스쿠스가 이사우리아인들을 학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노의 편이 되었다. 제노는 또 바실리스쿠스의 조카 하르마티우스를 구슬려서 20개월 만에 제위를 되찾는다.[2] 제위를 되찾은 후 제노는 하르마티우스를 제거한다. 또 제노는 교회로 피난처를 찾은 바실리스쿠스에게 너그럽게도 피를 흘리지 않을 것을 약속해 밖으로 유인한 다음 진짜로 피는 흘리지 않았지만 대신에 그와 그의 가족들을 굶겨 죽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오 1세의 작은 딸인 레온티아의 남편, 즉 한국식으로 따지면 제노의 아랫동서이자, 마르키아누스 황제의 외손자이고 안테미우스 서로마 황제의 아들인 플라비우스 마르키아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명분은 아내 레온티아가 그 언니 아리아드네와 달리 아버지 레오가 이미 황제일 때(딱 그해인 457년이었다) 태어난 포르피로게니타라서[3], 작은딸 및 작은사위라고 할지라도 오히려 본인 부부가 아리아드네-제노 부부보다 정통성이 있다는 논리였다. 제노는 결국 제압하고 제위 수성에 성공했다.[4]
477년의 지중해 세계
제노가 복위한 476년 서로마 제국은 오도아케르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다. 제노는 제국 영토 내 거주하던 동고트족의 테오도리쿠스와 동고트족이 오도아케르를 타도하면 그 영토를 동고트족에게 주겠다는 협약을 맺었다. 로마로서는 통제하기 힘들어진 고트족을 서방으로 보내버릴 수 있었고[5], 동고트족으로서는 안정된 영토를 얻을 수 있어 서로에게 득이 되는 것이었다. 이로써 이탈리아 반도에 동고트 왕국이 성립되었다.
네 차례의 공의회를 통해 칼케돈 교리(삼위일체론)가 정통 교리로 확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세계, 즉히 로마 제국 동부에서는 단성론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484년 제노 황제와 아카키오스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는 <헤노티콘>이라는 문서를 통해 양측을 절충하려 하였으나 이 조치는 교황를 격노케 하였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양대 총대주교가 서로를 파문하는 아카키오스 분열 사건이 일어났다. 이 분열은 유스티누스 1세 치세에 이르러서야 봉합되었다.
제노의 황권 강화에 큰 공을 세운 일루스는 승진하여 권력을 잡게 되었지만 베리나의 미움을 받았다. 베리나와 그녀의 딸이자 제노의 아내인 아리아드네는 차례대로 일루스의 암살을 시도하지만 그의 귀를 자르는 것만 성공했다. 황후의 암살 작전 뒤에 제노도 가담했으리라고 생각한 일루스는 484년 레온티우스의 반란에 참여했다. 또한 일루스는 유배지로 간 베리나로 하여금 레온티우스를 황제로 추대하게 만들었는데 제노는 4년간의 내전 끝에 겨우 이들을 제압하고 일루스와 레온티우스는 처형당했다. 재위 중 일어난 반란만 3번이나 되었다.
한편 484년 제노의 종교 탄압정책에 반발한 사마리아인들이 유스타를 왕으로 선출하여 반기를 들었지만 진압당했다.
491년 제노는 사망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묻히고 사흘간 "부탁이야! 제발 꺼내 줘!"라는 비명소리가 들려왔지만, 모두가 황제를 싫어했기에 내버려두었다고 한다.[6] 제노가 생전 인기가 없었던 만큼 시민들은 로마인이자 정통파 황제를 요구하였고 황후 아리아드네와 원로원은 그 후임으로 디라키온 출신의 재무관 아나스타시우스 1세를 추대했다.
황제 제노가 491년에 죽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정통 로마인 황제를 원하는 여론이 일었다.[7] 이에 원로원과 제노의 황후 아일리아 아리아드네는 전 황제의 동생 롱기누스 대신에 에피루스 지방에서 명망이 높았던 환갑의 노인 아나스타시우스를 황제로 택하고 그의 황후가 되었다. 이렇게 황녀가 정통성을 갖고서 군주로서의 남편을 택군(擇君)하는 제위계승 메카니즘은 전대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아일리아 풀케리아와 후대 마케도니아 왕조의 조이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하지만 여제까지 오른 것은 조이뿐인데, 이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통치기간이 테오도시우스 왕조나 레오 왕조와는 달리 당시 기준으로 150년이 넘었을 정도로 오래되어서 정통성 내지는 통치정당성을 더욱 높게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갑작스레 황제가 된 아나스타시우스는 정통 교회의 빈축을 샀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입장에서는 독실한 단성론 신자였던 그는 이단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아나스타시우스는 교회와의 협상을 통해 총대주교가 제시한, 황제로서는 칼케돈 공의회를 따른다는 조건을 받아들여 종교 문제를 일단락 시켰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이 있었으니, 바로 청색당이었다. 정통 교리를 지지하던 청색당은 듣보잡 출신에 단성론 신자인 자를 황제로 앉힐 수 없다고 반발하였다. 그들은 아나스타시우스가 교회와의 협약을 맺은 후에도 종종 불온적 기세를 보였고, 이는 512년의 대규모 반란으로 이어졌다.
신임 황제에 대한 마지막 걸림돌은 바로 제국의 신흥 세력의 본거지이자 전임 황제를 배출한 지역인 이사우리아[8]였다. 아나스타시우스 즉위 이듬해인 492년, 전임 황제 제노의 동생 플라비우스 롱기누스는 고향으로 돌아가 반란을 일으켰다. 새 황제에게는 다행히 스키타이 출신 장군 요한네스가 쿼타히아에서 반란군을 격파하였고 요한네스 깁부스가 이끈 제국군은 493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이사우리아인들은 494년부터 산간의 요새에 틀어박혀 해상으로 안티오키아에서 보급을 받으며 제국군의 공세를 버텼으나, 497년에 스키티아 속주의 요한네스 군에게 함락되어 주동자들이 타르수스의 성문에 효수되었다. 제노의 동생 롱기누스는 498년에 요한네스 깁부스에게 사로잡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고, 아나스타시우스 황제는 히포드롬에서 포로들에게 절을 받으며 개선식을 치렀고 승리의 기념으로 황궁에 칼케 문 건설을 명하였다. 승장인 스카타이의 요한네스와 깁부스는 각각 498년과 499년에 황제와 함께 집정관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
제위를 굳힌 아스타시우스는 납세의 기준을 현물이 아닌 화폐로 통일하여 제국에게 재정적 여유를 안겨주었다. 또한, 기존의 불안정한 구리 합금 경화는 순수한 동전인 폴리스로 교체되었다. 화폐 사용 확대와 부패에 대한 강력한 처벌로 중간 관리들의 착복이 줄어들었고 그로 인하여 농민의 부담을 줄여주면서도 동시에 국가의 세수도 증가하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나타났다.
정부의 재정적 여유가 생기자 황제는 군인들의 급여를 올릴 수 있었고 그러자 많은 제국민들이 자원 입대하여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이전의 황제들과 달리 충성심이 불투명한 외래 종족 출신 용병들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천년도 더 후대의 작품을 예시로 드는 것이기는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계속 나오는, 믿을 수 없고 배신하기 쉬운 용병 대신 상비군(국민군)을 위주로 하라는 메세지가 제대로 실천된 것이다. 아나스타시우스부터 티베리우스 2세까지 100년 가까이 황제는 일단 즉위하고 나서는 친정(親征)하는 일이 전혀 없이 문민 황제로서 통치했으며, 황제 본인이 총사령관으로서 전장에 직접 다시 나서기 시작한 것은 마우리키우스였다. 따라서 이 때를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의 회복으로 보는 학자도 있는데, Anthony Kaldellis의 'Byzantine Republic'은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재위기에 높은 비중을 두어 책의 시간순서상 시작점을 그 때로 잡았다.
사산 제국의 샤한샤 카바드 1세는 498/9년에 동쪽의 유목 세력인 백훈족 (에프탈) 용병의 도움을 받아 즉위하였기에 그 빚을 갚을 재원 마련의 방편으로 과세에 예민해져 있었는데, 마침 곡창지대인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강이 진로를 바꾸며 남부 수메르 지방에 홍수나 나며 기근이 들었다. 이에 페르시아 조정은 사신을 파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내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점을 들며 거절하였다. 이에 카바드 1세는 60여 년간 동안 이어진 동로마 제국과의 평화를 깨기로 하였다.
502년 가을, 이란 군대는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 침략에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테오도시오폴리스[9]를 함락시켰고 겨울에 아미다[10]를 포위하였다. 정규군이 부재한 상태에서 시민들은 필사적으로 저항, 세달을 버텼으나 결국 503년 초에 항복하였다. 이후 카바드 1세의 주력군은 오스로네[11]로 진출하여 에데사를 포위하였지만 아미다가 벌어준 시간 동안 준비를 마친 수비대에게 격퇴되었다. 한편, 동로마군도 주력군의 부재를 틈타 이란으로부터 아미다를 탈환하려 도시를 포위하였지만 역시 격퇴되었다.
그해에 캅카스의 훈족이 아르메니아로 쳐들어오자, 양국은 휴전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상호 간의 불신의 늪이 깊어 휴전 협상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고, 506년 초엽에는 동로마 측이 이란 사신들을 의심하여 억류한 후 이란 측이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하자 풀어주는 일까지 있었다. 그러다 결국 그해 11월, 니시비스에서 양측이 7년간의 휴전에 합의하였다. 후대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동로마 측이 배상금을 지불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다. 하지만 동로마는 전쟁 이전에 이란이 요구하던 정기적인 금전 요구로부터 벗어났고 계속 탈환하지 못하고 있던 아미다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제국의 각각 동과 서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디라키움과 다라에 대규모 요새를 건설하여 서방 세력과 사산 왕조의 위협에 맞섰다. 이에 사산 왕조는 상호 간 국경 요새 신축을 금한다는 422년의 협정에 대한 위반이라고 항의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은 황제는 507-508년에 사산 왕조 측 니시비스에 견줄 만한 다라 요새의 완공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507년부터 512년까지 트라키아 반도[12]에 56km에 달하는 장벽을 쌓고, 아나스타시우스 성벽(Anastasian Wall)이라고 명명하였다.[13] 이 장벽을 담당하는 비카리우스(관구장급)을 별도로 두었었다고도 하는데, 문제는 기존 트라키아 관구의 비카리우스와의 업무분장이 꼬였었고, 그러 머지 않아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로마 전국의 관구 및 관구장을 모두 폐지할 때 같이 폐지되었다. [14]
이사우리아 반란 진압, 이란과의 전쟁 종결, 그리고 재정 개혁에 의한 민중의 지지를 얻게 된 80대의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즉위 시에 교회와 맺은 약속 (정통파 존중)에 도전해 보기로 하여 512년 말에 평소에 자신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보이던 칼케돈 주교를 파면하고 측근인 단성론자를 주교로 임명하였다.
이에 녹색당이 격하게 반발하였고, 사산 왕조와의 전쟁에서 맹활약했던 아레오빈두스 장군을 황제로 추대하려 했다. 하지만 아레오빈두스가 잠적해버려서 무위에 그쳤다. 이듬해인 513년, 칼케돈 정통파였던 트라키아의 군사령관(Magister Miletum per Thraciam) 플라비우스 비탈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현재의 불가리아 일대가 정통파 반군의 손에 떨어졌고, 황제군은 연전연패 하였다. 이에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그를 발칸 반도 방면 사령관으로 임명하며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515년 여름에 단성론 도입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탈리아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였는데, 해군 제독 마리누스에게 격퇴되었고, 민중들도 황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여 단합하였다.
마찬가지로 재정관리를 빡세게 해서 각계각층의 불만을 샀으며, 여러 반란을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던 마우리키우스와 비교할 경우 분명히 아나스타시우스가 훨씬 불리했지만 이미 노년의 나이에 즉위하고도 27년이나 재위하면서 천수를 누렸다. 먼저 즉위 시점에서 나이가 43세로 적절했던(539년생, 582년 즉위) 마우리키우스와 달리 즉위 시점에서 이미 나이가 60세로 당시 기준으로는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떠날 날을 기다릴 정도로 매우 많았고(431년생, 491년 즉위) 비탈리아누스에게 쿠데타를 당했던 510년대 당시에는 무려 80대였다.
또한 장군 출신이라 본인이 군 지휘능력을 보유하고 있어서 발칸 전선 방위라는 군사적 업적을 세울 수 있었으며 여차하면 반란을 친히 진압할 수 있었던 마우리키우스와 달리 아나스타시우스는 군무와 연이 없는 순수 문관 출신이었다. 한편, 정통 칼케돈파여서 종교계와의 마찰요소가 훨씬 적었던 마우리키우스와 달리 단성론을 믿어서 총대주교를 위시한 종교계 및 수도 시민들과의 갈등 소지가 컸고 실제로 갈등도 여럿 있었다.
마지막으로, 전임자 티베리우스 2세에게 확실하게 후임자로 지명을 받았던 마우리키우스와 달리, 아나스타시우스는 전임자에 의한 계승이 아니라 선대 황후 아리아드네의 일종의 택군(擇君)에 의한 추대로 즉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년에 권좌를 30년 가까이 유지해 내면서 자리보전만 하지 않고 나름의 업적을 세웠던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연장선상에서, 군무와 별 연이 없는 스스로를 550년 전쯤의 그 폼페이우스와 동일시하는 프로파간다를 본인 직속 Panegyrists를 통해 전파했다. 이 점은 Brian Croke의 2008년작 'Poetry and Propaganda: Anastasius I as Pompey'라는 논문에서 제시되어 있는 한편, 당시 5세기 말 6세기 초만 해도 (서로마가 이미 멸망하고 나서임에도 불구하고) 흔히 그리스적 성향이 종래의 라틴적인 성향을 대부분 대체한 것으로 여겨지는 동로마가 라틴적인 고대 로마에서 그리 떨어져 있지 않고 꽤나 밀접했음을 알 수 있다.
노령의 황제는 자식이 없었고 3명의 조카가 있었다. 루머에 따르면 임박한 죽음을 예감한 황제는 궁정에 의자 3개를 비치하고 그중 하나에 황제의 인감을 숨겨 놓은 후 조카들을 궁정으로 불러 자리에 앉게 하였다. 그러나 한 의자에 조카 둘이 함께 앉았고 인감이 있던 곳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15]
실망한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후계 문제를 신의 뜻에 맡기기로 하였고 다음 날 아침에 처음으로 자신의 침실에 들어온 사람에게 황제위를 물려주기로 하였다. 다음 날 아침, 근위대장 유스티누스가 방에 들어온 것을 본 황제는 그를 제위 계승자로 선포하였다. 노쇠한 황제는 518년 7월 9일경에 사망하였고, 유스티누스 1세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국고에는 제국의 3년치 예산에 해당하는 2300만 노미스마[16]가 들어있었다.
2.2.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전반기
이후 근위대장으로 근위대의 추대와 원로원의 동의로 유스티누스 1세가 새황제로 즉위하면서 유스티니아누스 왕조가 창건했다. 유스티누스 1세 본인은 문맹이라서 통치에 어려움이 많았기에 머리가 매우 좋고 학식이 뛰어난 조카 플라비우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를 수도로 소환하여 유스티니아누스라는 이름으로 개명시킨 후 제국 전반의 행정을 돌보게 하였고, 레오 1세 때부터 50년간 끌어온 아카키오스 분열을 종결하였으며, 사산 왕조와 동로마 제국간의 국경을 따라 요새들을 광범위하게 설치했다. 526년 지진으로 파괴된 안티오키아 복구 작업을 진두지휘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했다.뒤를 이어 즉위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치세의 시작을 524~525년 사산 왕조와 전쟁을 끊어야 했다. 당시 사산 왕조는 동로마 제국과의 국경 지대인 이베리아[17]의 주민들에게 조로아스터교로 강제 개종을 명하였다.
이에 동로마 제국 측은 같은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를 묵인할 수 없다며 강력히 반발하였다. 동로마 측을 자극하기 싫었던 사산 왕조의 샤한샤 카바드 1세는 동로마 측에 한 세기 전의 선례[18]를 들어 자신의 아들 호스로의 후견인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황제 유스티누스 1세와 유스티니아누스는 찬성 의사를 보였으나, 대신이었던 프로쿨루스가 반대하는 등 여론이 나쁘게 흐르자 거부 의사를 나타내어 결국은 양국 간의 전쟁이 발발하였다. 다만, 유스티누스 1세가 재위하는 527년까지는 양 제국 간의 직접적인 전투가 벌어지진 않았다.
당시 중근동 세계를 주름잡던 두 제국 간의 격돌은 530년 이전까지는 대리전의 성격으로 치러졌다. 525년, 동로마 제국의 홍해 함대는 에티오피아의 친로마 동맹국인 악숨 왕국의 군대를 바브 알 만다브 해협의 건너편 아라비아로 이동시켰다. 악숨 군대는 현재 예멘 일대에 있던 사산 제국의 동맹국인 히미야르 왕국을 점령하였다. 그에 대한 반격으로, 525/526년에 친이란 부족국가인 라흠 왕국[19]군이 동로마 제국의 국경 일대[20]를 습격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즉위한 직후인 527년까지 이베리아인들의 반 이란 봉기는 진압되었고, 반란을 이끌던 이베리아의 전임 군주 고르제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피신하였다. 같은 해에 동로마군은 페르시아 측의 니시비스를 공격하였으나 격퇴당하였다. 게다가 시리아 동부의 요새인 탄누리스에 파견된 로마 측의 지원군마저 차단되었다. 이에 유스티니아누스는 전임 황제 유스티누스의 경호원으로 두각을 드러내었던 벨리사리우스를 동방 군단의 사령관[21]으로 임명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528년, 이란군이 이베리아를 넘어 라지카 해안까지 공격해 오자, 벨리사리우스는 가산 왕국군과 연합하여 탄누리스로 출정, 그곳을 요새화하는 일꾼들을 보호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사산 제국의 대군은 동로마 측의 방어선을 돌파해냈고, 요새는 폐허가 되었다. 그 결과 로마 측 지휘관 2명이 전사, 3명이 페르시아 측에 포로가 되었고, 가산 왕국의 군주였던 자발라흐 4세[22]도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벨리사리우스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북쪽의 거대 요새인 다라로 후퇴하였는데, 행군 중에 수백여 명이 기갈로 죽었다고 한다. 한편, 승리한 페르시아 측도 많은 병력을 잃어서 후퇴하였는데, 전사자 중에는 근위대인 불사 부대 5백여 명도 포함되어 사령관 크세르크세스는 샤한샤 카바드 1세에게 문책을 들었다고 한다.(탄누리스 전투, 페르시아 측의 피로스의 승리.)
529년, 사산 제국의 속국인 라흠 왕국이 시리아 동부를 침공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그들의 라이벌인 가산 왕국의 중앙집권화를 돕는 한편, 동방 군단을 재편성하여 아르메니아 방면으로는 시타스, 메소포타미아 방면으로는 벨리사리우스를 파견하였다. 그 사이에 동로마 제국 수뇌부는 페르시아 측에 평화 협상을 제안하며 재정비된 군대가 전선으로 이동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한편 유스트니아누스는 평소 법학에 관심이 많았던 군주였기에 한세기 이전에 편찬된 테오도시우스 법전을 대신할 법전을 만들기 위해 1200년 분량의 판례를 집대성한 법전을 편찬한다. 이 작업의 책임자로는 트리보니아누스(Tribonianus)란 사람이 임명된다. 법전의 초안은 529년 4월 7일에 로마법 대전을 공개하였다.
530년, 다라 요새에 집결한 벨리사리우스의 병력 2만 5천은 참호를 파고 5만의 이란 군대와 대치하였다. 수적 우세와 벨리사리우스의 기만 전술에 속은 이란군은 동로마 제국 측 매복조의 역습에 흔들렸다. 그리고 이미 깊숙히 들어온 이란 군대는 로마 궁병대의 화살 세례를 받았고, 결국 기병대와 보병대를 분리하여 각개격파하는 벨리사리우스의 전술에 말려들어 사령관 중 한 명인 바레스마나스를 포함한 8천의 전사자를 남기고 후퇴하였다.(다라 전투)
같은 시기, 현재 조지아 일대를 점령한 이란 군대는 로마령 아르메니아로 진군하여 테오도시오폴리스를 점령하고 로마의 군단 기지였던 사탈라를 포위하였다. 그곳의 사령관 시타스는 군대 대부분을 성 안에 두고 자신은 성 밖 언덕에 주둔하였는데, 먼지를 피워 대군으로 위장하였다. 이에 페르시아의 대군이 언덕으로 진군하였는데, 그 후방을 성 안에 있던 동로마 군대가 공격하여 그들을 포위하였다. 그러한 역경에도 이란 군대는 잘 버텨내었으나 플로렌티우스라는 로마 장교가 분견대를 이끌고 돌진하여 페르시아의 대장기를 뺏었다. 비록 그는 곧 전사하였지만, 군기를 상실한 이란 군대는 퇴각하였고, 압도적인 적군에게 승리를 거둔 동로마 측도 추격하지 않았다.(사탈라 전투)
이 전투로 사산 제국은 아르메니아에서 철수하였고, 오히려 페르시아령 아르메니아의 몇몇 부락은 동로마 측에 붙어 국경이 동로마에 더 유리하게 바뀌게 되었다. 벨리사리우스의 다라 전투에 못지 않은 쾌거임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가치가 떨어지고 시타스 본인의 인지도가 떨어져서 묻히는 경향이 있다. 한편, 사탈라 전투 이후로 양국 간의 휴전 협상이 논의되었는데, 이어진 칼리니쿰 전투에서 페르시아 측이 승리하며 무산되었다.
다라 전투의 패배에도 사산 제국의 샤한샤 카바드 1세는 포기하지 않고 2만여의 군대를 안티오키아 방면으로 보냈다. 벨리사리우스는 그들 앞에 나타났고, 그러자 페르시아 군대는 철수하였다. 동로마군은 이를 추격했는데, 현재 시리아의 라카인 칼리니쿰에서 따라잡았다. 벨리사리우스는 원래 페르시아 군대를 국경 밖으로만 쫓아내려 하였으나, 다라 전투를 기억하는 병사들은 전투를 요구하였고, 통제에 실패한 벨리사리우스는 결국 전투를 하게 되었다.[23] 531년 4월, 양 진영 간 팽팽한 전투가 벌어지던 중, 페르시아 측의 사령관 아자레테스는 벨리사리우스의 눈에 띄지 않게 중앙의 병력 중 다수를 몰래 좌익으로 이동시켰고, 라흠 왕국 출신 아랍 기병대의 돌격과 함께 진격하여 동맹국 군대로 구성되어 있던 로마 측의 우익을 무너뜨렸다.[24] 좌익이 견디며 시간을 버는 동안 동로마군 대부분은 퇴각에 철수하였지만, 우익과 중앙의 사령관 대부분이 전사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유프라테스 강의 선박으로 잔존 병력을 후퇴시켰다. 다만 페르시아 측의 피해도 상당한 편이어서, 그들 역시 시리아 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하였다.[25]
칼리니쿰 전투 이후 벨리사리우스는 사령관 직에서 해임당했으나, 군대 운용 능력을 눈여겨 본 유스티니아누스는 그에게 재정복 원정을 맡기게 된다. 531년 9월에 카바드 1세가 죽었고, 고토 수복 원정을 준비하던 유스티니아누스는 새로 샤한샤로 즉위한 호스로 1세와의 협상을 지속하여 결국 532년 9월에 '영원한 평화 조약(ἀπέραντος εἰρήνη)'을 체결하게 된다. 조약의 내용은 페르시아 측이 라지카에서 철수 하는 등 국경을 전쟁 이전으로 되돌리고, 동로마 측은 일시불로 110 센테나리아를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로마 측으로 피신온 이베리아인들의 거취는 그들 자율에 맡기며(로마에 남든지 페르시아령 이베리아로 돌아오든지), 로마로 귀순한 아르메니아의 부족들도 거취를 자율에 맡긴다.
532년 새해가 되면서 전차 경기가 열리던 동로마 제국의 히포드롬은 고대 로마의 포룸이나 고대 아테네의 아고라처럼 민중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내세울 수 있는 장소였다. 이 장소를 장악한 청색당, 녹색당의 두 당파는 현대와 비교하면 정당과도 같은 존재로 성장했다고 할 수 있었다. 전자인 청색당은 칼케돈파, 즉 정통 교리를 따르며 대토지를 소유하였던 고위 귀족들의 비호를 받던 보수 세력[26]이었고 후자인 녹색당은 단성론을 따르며 상공업계와 궁정관료들의 지지를 받던 세력[27]이었다.
보통의 경우, 양 당 중 한 당이 정부의 비호를 받고 정부의 비호를 받지 못한 당은 반정부적인 기류를 형성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두 당이 공동 전선을 펴는 경우도 있었는데, 중앙권력의 전제적인 지배가 나타나려 할 때 양 당은 손을 잡고 정부에 공동으로 대항하기도 했다. 양 당은 모두 자유 시민의 전통을 이어받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숙부인 유스티누스 1세가 재위하던 당시까지만 해도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지지를 받던 녹색당 대신 청색당을 비호하던 인물이었고, 청색당은 그런 황제에게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제위에 오르게 된 유스티니아누스는 즉위와 함께 양 당 모두를 강력하게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양 당은 강력한 형사적 처벌 조치와 탄압을 받았고, 이는 양 당의 불만을 동시에 촉발시키기에 충분한 정도였다. 거기에 더해서 유스티니아누스의 고토 수복으로 대표되는 대사업은 필연적으로 제국의 시민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안겨주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전역에서 황제에 대한 반발심이 들끓고 있었다. 양 당은 서로 연대하여 황제의 절대권력에 대항할 것을 선포했다. 여기에는 전제적이고 귀족을 억제하는 정책을 폈던 황제를 싫어하는 유력 원로원 의원들의 책동도 있었다. 이 원로원 의원들은 자기네들 중에서 새 황제를 세우고 싶어했다.[28]
정확한 일자는 불명이나 531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옛 로마 제국의 영토를 바탕을 5대 총대교구를 설정해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주교들만을 찝어서 '총대주교'(Patriarchs)라고 부르며 교회 위계상 다른 모든 주교들의 위에 놓이게 했다.
당시 5대 총대교구의 각 영역은 아래 지도와 같다.
로마 총대교구는 구 서로마 제국 전체에 동로마 제국의 다키아 관구[29] 및 마케도니아 관구[30]에 이르는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하고 있다. 고대 로마 후기의 15개 관구 기준으로, 이 시대 지도에 대입하면 14개 기준으로(호노리우스 시절 410년에 자진해서 철수했어서 그런지, 브리타니아가 아예 빠져 있다.) 9개의 관구를 거느리고 있었다. 로마 주교가 주교 서열상 1위라 면적이 가장 넓었을 수도 있으며, 한편 구 서로마 지역이 5세기의 혼란기 이전에도 인구밀도가 동로마보다 다소 낮았는데 5·6세기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더 줄었기 때문에 겉보기에 면적은 넓지만 관리해야 할 주교와 신자 수가 적었던 것일 수도 있다. 눈여겨보이는 점은 당시 제국 밖의 구 서로마 영역에 자리잡은 외국인 프랑크, 서고트, 무어-로마 왕국에도 마치 서로마 멸망 전과 같이 교구를 설정했다는 점이다. 제국이 명목상으로나마 기독교 세계 전체의 종주국이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정교회를 통상 그리스 정교회라고 하지만 740년에 레온 3세가 로마 교황과의 충돌에 대한 보복조치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교구 소속으로 옮기기 전까지 재미있게도 현대 그리스의 대부분은 로마 총대교구에 속해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교구는 트라키아, 아시아나, 폰토스 3개의 관구를 거느리고 있었다. 행정구역상 동방 관구는 팔레스타인 주변의 예루살렘 총대교구와 그 밖의 안티오키아 총대교구로 이루어져 있다. 알렉산드리아 총대교구는 키레나이카를 포함한 이집트 관구로 이루어져 있었다.
532년 1월, 양 당은 자신들의 근거지이자 정치적 의사를 전통적으로 표출해 온 히포드롬에 집결했고, 거대한 외침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자비로운 녹색당과 청색당.이여, 부디 영속하라!
반란의 기세는 뜨거웠다. 제국의 수도는 화염에 휩싸였고, 양 당은 유스티니아누스의 폐위와 새 황제의 즉위를 선포했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조카인 히파티우스[31]가 새 황제로 선포되는 지경에 이르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수도를 떠나 도망칠 준비를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런 그를 가로막은 것이 황후 테오도라였다. 그녀는 이때 '보라색 옷은 가장 좋은 수의'라고 말하며, 제위를 지키기 위한 결사항전을 주장하였다. 테오도라의 단호한 만류에 정신을 다잡은 유스티니아누스는 반란에 대항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그런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주어진 두 칼이 있었다. 바로 제국 제일의 명장 자리를 놓고 겨룰 수 있던 장수들,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가 있었던 것이다.
우선 나르세스가 노회한 책략가다운 면모를 확실히 발휘했다. 나르세스는 반란 세력의 연대를 해체하는 게 선결과제라고 보았고, 청색당의 지도부와 접촉을 시도했다. 유스티누스 1세와 유스티니아누스의 공동통치기에 청색당에 베풀어진 은혜를 상기시킨 나르세스는 청색당의 지도부와 담판을 짓는 데 성공했고, 강력한 연대를 이루고 있던 두 당은 결국 분열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시점에 제국 최고의 용장이자 전술가라고 할 수 있을 벨리사리우스가 나섰다. 벨리사리우스는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던 병력들을 지휘하여 반란의 진원지였던 히포드롬으로 진격했다. 공격은 신속하고 기습적이었다. 허를 찔린 봉기자들은 벨리사리우스의 지휘를 감당하지 못했고, 전해지기로는 약 3만 명이 이 공격에서 학살당했다. 배후의 원로원 의원들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후 유스티니아누스는 원로원 의원들이 자신을 폐위시키려고 했던 것에 대한 보복으로 원로원 의사당을 황궁의 접견 홀로 용도변경했다.[32]
최종적으로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반란을 진압하면서 자유 시민의 전통을 확실히 꺾고, 절대적인 황제권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수백 년을 이어온 사회가 그리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 이후에도 로마의 공화적 전통은 이어졌다. 현대에는 중기, 후기 동로마 제국의 공화적 전통에 주목하는 시각이 많다. 다만 이 반란의 와중에 불타오른 하기아 소피아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손에 의해 재건되었고,[33] 그는 완공된 성당을 보고 솔로몬이여, 내 그대를 이겼노라!라 했다고 전해진다. 절대적인 황제로 자리매김한 유스티니아누스에게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다만 강경 진압을 강권 했던 황후 테오도라는 안그래도 매춘부 출신이란 점때문에 그다지 인기가 없었는데 니카의 반란 이후로는 인기가 더 떨어졌다.
2.3.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자세한 내용은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2.4.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후반기
554년 프랑크 왕국과 그리고 반란으로 얻은 왕위를 굳히는데 성공한 서고트 국왕 아타나길드의 반격으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탈환한 지역 몇개를 빼앗긴 것을 끝으로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은 종결되었다. 하지만 전쟁 중 발생한 역병으로 인구가 급감한데다가 무리한 고토 회복으로 말기에 재정이 바닥이 났다. 특히 이탈리아 반도의 경우 동고트족의 학살로 붕괴다시피한 로마 원로원을 복구시키는 등 옛 로마의 총치 질서들을 회복시키려고 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과중한 세율이 이탈리아의 라틴인들에게 부과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중 발발한 라지카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536년에 동로마 제국은 라지카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군사령관을 파견하였고, 그는 국왕 구바제 2세의 왕권을 제한하며 라지카의 중요한 경제 활동이었던 무역 역시 자신의 허가 하에 두었다. 이에 라지카인들은 분노하였고, 결국 541년에 티오키아가 함락되자 반로마 봉기를 일으켰다. 그리고 실권을 잃은 구바제 2세는 호스로 1세에게 밀사를 보내어 원조를 요청하였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란군이 출정하였고, 이로써 라지카 전쟁 (541 ~ 562년)이 발발하게 되었다. 페르시아 군대는 토착민의 지지에 힘입어 동로마군을 격파하였고, 주요 거점인 페트라마저 함락하며 라지카를 사산 제국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후 호스로 1세는 태도를 바꾸어 이란인들을 대거 이주시키는 등 라지카에 대한 직접 지배를 하려 하였고, 열정적인 조로아스터교 포교 활동은 20여년간 기독교를 믿어왔던 라지카
인들의 분노를 유발하였다. 게다가 국왕 구바제 2세에 대한 암살 시도까지 일어나자, 라지카인들은 이번에는 반페르시아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구바제 2세는 동로마 제국과 알란인, 그리고 사비르인 등 북방 유목민에게도 구원을 요청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장군 다기스테우스 휘하의 7천의 동로마군과 1천의 콜키스 동맹군으로 구성된 지원군을 파견하였다. 548년 말, 다기스테우스는 우선 주요 항구 도시인 페트라를 포위하였는데, 호스로 1세도 이에 질세라 미흐로에 장군 휘하의 구원병을 파견하였다. 미흐로에는 라지카 동부 산악지대의 고갯길을 지키던 동로마군을 격파하고 페트라에 입성, 3천의 정예병을 뽑아 성을 지키게 하였고 5천의 군대로 반란을 일으킨 라지카 지역을 유린하게 지시한 후, 자신은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진격하였다. 라지카 일대를 약탈하던 5천의 이란 군대는 549년, 파시스 강 전투에서 다기스테우스의 동로마군에 괴멸되었고 호리아네스가 이끈 이란 군대도 히피스 강 전투에서 호리아네스 본인이 전사하며 괴멸되었다. 550년 경에 콜키스의 동로마 주둔군 사령관은 이탈리아에서도 활약한 바 있는 베사스로 교체되었는데, 그가 이끄는 동로마군은 압하지야의 부족인 아바스기 부족이 일으킨 친페르시아 봉기를 진압하였고 페트라를 다시 포위하였다. 551년 봄, 6천의 사비르 족 동맹군의 도움을 얻은 로마군은 페트라를 함락시켰다. 소수의 이란 군대가 요새에서 최후의 저항을 하였으나 베사스는 그곳에 불을 질러버렸다. 페트라의 상실에 충격을 받은 미흐로에가 아르메니아에서 복귀하여 라지카의 수도인 아르카에오폴리스 앞에서 동로마 군대와 회전을 치렀으나 대패하였고, 라지카 대부분은 다시 동로마 제국의 영역이 되었다.(551년)
다만 이란 군대는 여전히 라지카 동북부의 고지대를 점령하고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수도인 아르카에오폴리스를 굽어볼 수 있었다. 또한, 승리에 자만한 베사스는 군사 활동을 중지하였고 아예 폰토스로 은퇴를 선언하였다. 한편, 시간을 번 미흐로에는 그동안 군세를 재정비 하였고, 552년에 호스로 1세는 라지카에 지원군을 파견하였다. 이에 힘을 얻은 미흐로에는 폰투스와 콜키스를 잇는 주요 도로의 요충지 몇 곳을 장악하여 동로마군의 교통을 방해하였다. 폰토스에서 편안한 은퇴 생활을 하던 베사스는 554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으로 마르티누스, 유스티누스 등의 장군과 악화된 라지카 전선에 복귀하였다. 복수의 칼날을 갈던 미흐로에는 555년, 텔레피스 전투에서 라지카 - 동로마 연합군을 대패시키며 그들을 남부의 네소스로 몰아내는 쾌거를 올렸고 아르카에오폴리스 서편에 있는 위성도시인 오노구리스도 함락하였으나 아르카에오폴리스 자체의 함락은 실패하였다.
한편, 페르시아의 명장 미흐로에는 그 해에 병사하였고, 그의 후임으로 나코라간이 부임하였다. 555년 봄, 나코라간은 6만 대군을 이끌고 흑해안의 파시스를 포위하였고, 이에 [[동로마.] - 라지카 연합군은 수비 병력이 줄어들은 오노구리스 탈환에 나섰는데 여기서 일이 터졌다.
전황을 지켜보던 라지카의 군주 구바제 2세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서신을 보내어 장군들의 무능함을 고발했는데, 이에 베사스는 직위해제 됨과 동시에 재산이 몰수되어 압하지야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일개 속국의 왕이 제국의 사령관을 해직시켜 버린 것에 두려움과 분노를 느낀 장군 마르티누스와 루스티쿠스는 구바제 2세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황제에게 구바제가 이란 진영과 내통하였다고 모함하였고, 이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직접 심문하고자 필요하다면 무력 사용을 허가하며, 체포할 것을 명하였다. 명분을 얻은 두 장군은 555년 가을, 구바제에게 포위된 페르시아 측 요새에 대한 공성전을 함께 지휘하자며 그를 초청하였고, 순진하게도 초청에 응한 구바제 2세는 영문도 모른 채 살해되었다. 그가 막사로 접근하자 루스티쿠스의 동생 요한이 왕의 목에 단검을 찔러넣었고, 고통스러워 하며 낙마한 그를 대기하고 있던 루스티쿠스의 하인들이 숨통을 끊어버렸다고 한다. 황제에게는 그가 체포에 반발하였다고 보고한 것은 예상되었던 수순. 이에 로마의 동맹군으로 종군하던 라지카 '인들은 종군을 거부하였고, 오노구리스 탈환에 실패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동로마군은 철수하였고, 이틈을 노린 나코라간의 이란 군대는 아르카에오폴리스에 입성하는 쾌거를 올렸다.
라지카인들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탄원서를 보내어 구바제 2세 암살 사건과 반역 혐의에 대한 진상규명 및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볼모로 있던 그의 동생 차트흐를 왕으로 임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황제는 원로원 의원 중 평이 자자한 아타나시우스를 수사 담당관으로 파견하였고, 그는 구바제 2세의 무고함을 확인하였다. 암살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루스티쿠스와 그의 동생 요한은 처형되었고, 마르티누스는 그간의 공로 덕에 직위해제에 그쳤다. 라지카의 신임 국왕 차트흐 2세는 다시금 동로마 제국과의 동맹을 확고히 하였고, 라지카 인들도 연합 작전에 다시 종군하였다. 사건이 어느 정도 재규명되고 마무리된 556년, 동로마 - 라지카 연합군은 아르카에오폴리스를 탈환하였고, 포위되어 있던 파시스 구원에 나섰다.
555년 봄부터 개시된 파시스 포위전은, 나코라간이 이끈 6만의 이란 군대와 마르티누스, 유스티누스[34]가 지휘한 2만이 되지 않는 동로마 군대 사이의 공성전으로 전개되었다. 파시스는 목조 성채로서 화공에 취약하였지만 서쪽은 흑해, 동쪽과 북쪽은 파시스 강으로 보호받는 천혜의 요새였다. 그나마 공격에 용이한 남쪽은 깊은 해자로 방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란 군대는 수일간의 노력으로 해자를 메우는 데에 성공하였고, 강에도 다리와 배를 띄워 삼면으로 도시를 포위하였다. 계속된 공격들은 결국 격퇴당하였지만 수비대의 사기는 매우 낮아져 있었는데, 이에 사령관 마르티누스가 꾀를 내어 사기를 올리고자 하였다. 그는 자신의 하인을 황제의 칙사로 변장시킨 다음, 병사들을 모아 지원군이 오고 있으며, 황제는 그들 모두에게 큰 포상을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을 연설하게 하였다. 이후 유스티누스는 결사대를 모집, 밤중에 요새를 빠져나가 근처의 성당에 은신하였고 다음 날 페르시아 군대가 파시스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할 시에 그들의 배후를 급습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이러한 작전에 양 진영은 모두 동로마 측이 지원군을 보낸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었고, 나코라간은 철수를 결심하였다. 페르시아 군대는 데일럼 지역 출신의 동맹군을 시간을 끌어줄 방패막이로 성 앞에 놓아두고 후퇴하려 하였는데, 동로마군은 그들을 분쇄하고 노도와 같이 이란 군대를 공격, 그들의 좌익을 무너뜨렸다. 페르시아인들은 반격을 하려 하였으나, 우익에 배치되었던 전투 코끼리 중 하나가 두려움에 등을 돌리면서 진영이 완전히 붕괴되었고, 이란 병사들은 뿔뿔히 흩어져 패주하였다. 해가 지자, 하루 종일 이어진 전투에서 사산 제국은 1만명을 잃었고 로마군은 2백여 명의 희생만을 기록하였다. 한편, 로마인들은 이란 측의 공성 기계에 불을 질렀는데, 이것이 도시가 함락된 표식으로 오인한 페르시아의 운반병들이 밤중에 도시로 돌격하였다가 2천여 명이 전사하고 나머지가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556년 여름)
556년 가을, 동로마군은 동부 산악지대의 미시미아 족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였고 겨울까지 사산 제국군을 라지카 영내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 한편, 겨울에 나코라간은 이베리아로 패주하였는데, 호스로 1세는 6만의 대군 중 반 이상을 상실한 그에 분노하여 책형을 내렸고, 그의 가죽은 경고의 뜻으로 전시되었다. 557년, 양대 제국 간의 협약이 체결되어 적대행위가 종결되었고, 이후 5년간 협상이 이어진 후, 562년에 다라에서 '50년간의 평화조약'이 체결되며 20여 년간 지속된 라지카 귀속 문제는 최종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사산 제국에게 연공으로 3만 노미스마타의 금을 지불하게 되었고, 처음 7년치는 일시불로 562년에 지급되었다. 그 대가로 동로마 제국의 라지카 영유가 확정되었고 라지카 북부 산간지방인 수아니아 지역에 대한 귀속 문제는 결정되지 못하였지만, 어찌되었건 이란의 기독교도들에 대한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다. 그 이전까지는 조로아스터교 국교화 정책으로 박해를 받았다.
라지카 까지 이어진 전쟁 동안 유스티니아누스는 540년 사경을 헤멘 이후 기력이 쇠하였고 극도로 의심이 많아졌다. 거기에 심적으로 의존하였고, 또 정치적인 부담을 나누던 황후 테오도라가 548년에 죽은 후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성당 건축, 영토 확장, 법전 편찬에도 시민들의 지지도는 낮았다. 불필요한 곳에 예산만 축낸 황제라는, 또 페르시아에게 저자세를 취하는 황제라는 인식이 퍼질대로 퍼진 상태였다.
549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벨리사리우스는 국내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고관들을 이끌고 칼케돈에 틀어박힌 교황 비질리오를 설득하러 간 것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대저택에 틀어박혀 있었다. 은거한 영웅을 다시 전선에 복귀시킨 것은 바로 야만인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위협이었다.
라틴, 게르만 할 것 없이 전 유럽을 충격과 공포에 삐뜨렸던 훈족은 453년에 아틸라가 급사한 이후 와해되었다. 남은 훈족의 일부는 쿠트리구르와 우투르구르 족으로 나뉘어[35] 다뉴브 강 ~ 카스피해 북안까지 펼쳐진 스텝 지역에 잔존하였다.[36] 그들은 로마 측 사료에는 레오 1세 때부터 등장한다. 551년, 1만 2천의 쿠트리구르족은 아조프 해의 서쪽을 떠나 랑고바르드족과 싸우던 게피드족을 지원하였다. 이후 둘은 동로마 제국을 침공, 트라키아 일대를 약탈하였다.
이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뇌물과 외교를 통해 형제 부족이었던 쿠트리구르와 우투르구르를 이간질시켜 싸우게 하는 전통적인 이이제이 전략을 씀으로서 이 두 훈족의 후예들을 끊임없이 싸우게 만들었다. 산딜릭의 우투르구르족은 쿠트리구르족을 격파하고 그들에게 큰 손실을 입혔다. 이후 쿠트리구르는 동로마 제국과 평화 조약을 맺었고 2천여명의 남녀가 족장 신니온[37]의 인솔과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허가 하에 트라키아 지방에 정착하였다.(558년 초) 하지만 새로 칸에 등극한 자베르간이 쿠트리구르 훈족에 그 예하 부족까지 합친 수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도나우 강을 건너 제국을 침공한 것이다.
558년 겨울, 훈족의 후예이자 불가르족의 전신인 쿠트리구르 족의 칸 자베르간이 이끄는 튀르크 - 슬라브 혼성부대가 얼어붙은 다뉴브 강을 건넜다. 원인은 아바르족의 압박 혹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대한 반란 중 하나로 추정되는데 아마도 전자일 것으로 추정된다. 트라키아의 동로마 방위선을 뚫고 병력을 삼분하여 진격하였다. 1로군은 테살리아를 약탈하며 테르모필레까지 진출하였고 2로군은 칼리오폴리스 일대를 약탈하였다. 그리고 559년 봄, 7천의 기병으로 구성된 자베르간의 본대는 아나스타시우스 성벽을 넘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서쪽 30km 부근까지 도달하며 황제와 신민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였다.
출정을 꺼리는 가운데 황제는 노장 벨리사리우스를 다시 호출하였다. 10년의 은퇴 생활 후 다시 지휘봉을 잡게 된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습격에 수도에는 불과 수백의 근위대 만이 있었다. 7천의 훈족 기병을 상대하게 된 벨리사리우스는 3백 명의 겁에 질린 군대를 이끌고 출전해야 했다. 쿠트리구르족은 멜렌티오스에 기지를 차렸고 벨리사리우스는 그보다 북쪽으로 수 km 떨어진,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으로부터 30km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주둔하였다. 자베르간은 숙영지에 2천을 남기고 동로마군을 기습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 계획을 파악한 벨리사리우스는 매복을 통해 쿠트리구르족의 선봉 4백여 명을 전사시켰고,[38] 자베르간은 적장이 벨리사리우스라는 사실을 알자 곧 후퇴하였다. 이것이 명장 벨리사리우스의 마지막 활약이었다. (멜란티아스 전투, 559년)
전투 이후 벨리사리우스는 쿠트리구르를 추격하려 하였으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를 저지하였다. 그들은 다뉴브 강 너머로 가기 전에 트라키아 일대를 다시 약탈하였다. 노황제는 벨리사리우스를 무시한 채 자신이 개선식을 거행하였고 쿠트리구르에게 연공을 바치는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체결해 버렸다. 늙고 병든 황제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동로마 제국은 영토나 인구상으로나 당대 세계의 최강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산 제국과 쿠트리구르족에게 연공을 납부하게 되었다.
562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다시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다만 세간에는 잠시나마 황제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에 벨리사리우스는 그에 대한 비판적 언사를 내뱉었으며 일부 귀족들은 제위 계승자인 유스티누스 2세 대신 벨리사리우스를 새 황제로 추대하려 하였다. 이 소식이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귀에 들어갔고 대노한 황제는 모반자들을 체포, 고문하였는데 그들이 벨리사리우스도 모의를 알고 있어 연관이 있다고 실토, 결국 벨리사리우스를 체포하였다. 그는 이전까지의 공로를 감안하여 삭탈 관직과 불명예 제대되는 굴욕에 가까운 처벌을 받았다.
이 내용은 중세시대에 의심많은 황제가 명장 벨리사리우스의 눈을 뽑아버리고 추방하여 거지로 살다가 죽게 만들었다는 내용으로 와전되기도 하였다. 국내에서도 유스티니아누스 1세 비판론자들이 이것을 진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래 처럼 거지몰골이 된 벨리사리우스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들이 상당수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8개월 후, 벨리사리우스의 무혐의가 밝혀져 빼앗겼던 명예와 관직도 모두 복권되었지만, 이미 그는 지쳐버렸다. 은둔의 세월이 흐른 후 565년 3월, 명장 벨리사리우스는 자신의 집에서 사망하였다. 8개월이 흐른 11월 14일, 로마 제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든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도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향년 83세로, 40대에 즉위했는데도 38년이나 재위했으며, 또한 매우 장수한 군주이다. 그가 죽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민들은 환호했다.
다음 황제인 유스티누스 2세는 명망이 높았던 명장이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사촌이었던 게르마누스는 1순위 제위 계승자였는데, 이탈리아 원정군을 모집하다가 550년에 세르디카에서 급사하였다. 이후로는 게르마누스의 장남이고 유스티니아누스의 (5촌)조카이며, 라지카 전쟁에서 활약하였던 동명이인 유스티누스가 후계자로 촉망받았다. 게다가 그는 대제가 사망할 당시에 수도 근처의 군 사령관이어서 마음만 먹으면 황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대제의 임종을 지킨 유일한 대신인 칼리니쿠스는 당시까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조카를 주목한 듯하다. 칼리니쿠스와 원로원은 대제의 유언이라고 주장하며 유스티누스 2세를 추대하였고, 내심 제위 계승을 예측하고 있던 사령관 유스티누스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스티누스 2세는 그를 포함한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의 친척들을 황궁에 소집하였다. 초대된 유스티누스는 황제 다음가는 2인자의 자리를 보장받았고, 융숭한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다음날, 황제의 명령으로 대장군 유스티누스는 체포되어 지하 감옥에 갇혔고, 이후 유스티누스 2세는 그를 용서하며 이집트 행정 총독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속임수였다.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유스티누스는 침상에서 암살되었다. 그의 잘린 목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였다. 당시 서고트 왕국의 스페인 역사가 요한은 암살 명령을 내린 주체가 황후 아일리아 소피아였다고 기록하였다.
어차해서 제위에 오른 유스티누스는 재정이 바닥을 드러냈기 때문에 긴축 정책을 강제로 실시해야 했다. 하지만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아바르족의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했다. 사절단은 유스티누스에게 선황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자기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던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보다 앞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제국의 변방을 위협하는 부족들에게 보조금을 지불해 안정을 꾀했다. 하지만 아바르족은 보조금을 꼬박꼬박 받고도 562년에 트라키아를 침략했고 유스티니아누스가 제의한 판노니아를 터전으로 삼지 않겠다고 거부하기도 했다. 유스티누스는 이런 믿을 수 없는 자들에게 끌려간다면 제국의 위신이 실추될 것이며 재정이 파탄 지경에 이른 상황에서 보조금 지급을 지속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하고 사절단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후 그는 유스티니아누스가 보조금 지불을 약속한 다른 부족들과 사산조 페르시아에게도 보조금 지불을 거부했다.
아바르족은 황제의 이 같은 태도에 분노했고,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로 이동한 후 자신들이 롬바르드족의 옛 영토를 새 터전으로 삼으면서 세력을 키운 뒤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는 제국을 응징하기로 한다. 568년, 아바르족은 달마티아로 쳐들어와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유스티누스는 군대를 소집하고 자신의 근위대장인 티베리우스에게 지휘를 맡겼다. 그러나 3년간의 전쟁에서 딱히 우세를 점하지 못한 티베리우스는 더이상 싸우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황제에게 강화를 요구했다. 결국 유스티누스는 571년 아바르족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은괴 8만 개를 아바르족에게 지불해야 했다.
567년, 오스트리아 일대에 거주하던 롬바르드족은 아바르족과 동맹을 맺고 이웃 민족인 게피드족을 공격해 섬멸했다. 그리고 이듬해(568) 봄, 롬바르드족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벌인 20년 전쟁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고 동로마 제국 관료들이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이는 바람에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러 주민들은 침략자에 저항할 의욕을 잃었다. 따라서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에 침입했을 때 어느 누구도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롬바르드족은 파비아를 3년간 포위해 함락시킨 것 외에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남하했다. 그러면서도 라벤나에 주둔한 제국군을 의식해 라벤나 주변 지역을 공격하지 않았다. 롬바르드족의 왕 알보인은 토스카나에 자리를 잡았고 휘하 귀족들은 좀더 남쪽으로 가서 스폴레토와 베네벤토에 독립 공국들을 세웠다.
롬바르드족은 이탈리아에 정착한 뒤 현지 주민들과 통혼하고 언어와 문화를 배웠다. 다만 그들은 라벤나, 나폴리,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베네치아 등 동로마 제국군이 주둔한 주요 도시 및 남부 지역을 건드리지 않았고 이탈리아에서의 동로마 제국의 세력권을 존중했다. 이 당시 유스티누스는 아바르족의 침략에 맞서 싸우느라 이들을 저지할 수 없었고, 결국 롬바르드족이 북이탈리아의 패권을 확립하는 걸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571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아르메니아의 기독교 신자들이 대거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동로마 제국이 자신들을 보호해주길 희망했고 유스티누스에게 구원병을 요청했다. 그러자 페르시아의 왕중왕 호스로 1세는 아르메니아의 반란을 철저하게 진압하는 한편 반란의 배후로 여겨지는 데다 보조금 지불을 거부해버린 동로마 제국을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이러하여 양 제국은 572년 초부터 전쟁을 벌였고, 이 전쟁은 중간의 휴전기를 포함할 시 장장 20년간 지속되었다.
573년 11월, 페르시아는 티그리스 강변의 요새 다라를 점령했다. 또한 페르시아군은 시리아를 침공해 재물을 약탈하고 수많은 포로를 끌고 갔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페르시아군은 이 시기 29만 2천명에 달하는 포로를 잡아갔다고 한다. 에페수스의 요한네스가 저술한 <교회사>에 따르면, 호스로 1세는 투르크의 칸과 동맹을 맺을 때 이 포로들 중 2천명의 처녀들을 선발해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처녀들은 끌려가던 중 큰 강에 이르자 목욕을 하고 싶다며 호위 병사들을 멀리가게 하고는 신앙과 정조를 모두 잃느니 차라리 죽겠다며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동로마군은 이렇듯 강하게 밀어붙이는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처절하게 저항했으나 불리한 전황을 뒤집지 못했다.
제국이 외세의 침략으로 많은 영토를 잃고 날로 쇠약해지자, 황제는 미쳐버렸다. 에페수스의 요한네스에 따르면, 황제는 광기가 가라앉았을 때 작은 수레에 앉아서 시종에게 수레를 밀고 숙소를 몇 바퀴 돌게 하면서 즐거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걸핏하면 주변 사람을 폭행했고 심지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까지 돌았다고 한다.
그들은 힘센 청년들을 뽑아 황제의 시종이자 간수 역할을 하게 했다. 이 청년들이 황제의 뒤를 쫒아 붙잡을 때면, 힘이 대단한 황제는 청년들을 공격하고 물어뜯기까지 했다. 그중 두 명은 황제에게 머리를 심하게 물려 중상을 입었다. 그들은 곧 병원으로 옮겨졌고 수도에는 황제가 시종 두 명을 잡아먹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에페수스의 요한네스, <교회사>
또한 유스티누스는 창문에서 뛰어내리려고 해서 창문에 가로로 막대를 설치해 황제가 창문을 열어도 바깥으로 몸을 던질 수 없게 했다. 그를 진정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아라비아 소부족인 가산족의 지도자 하리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황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족장의 이름을 들으면 공포를 얻고 조용해졌다고 한다.에페수스의 요한네스, <교회사>
정신이 나가버린 남편을 대신해 제국의 통치를 맡은 아일리아 소피아 황후는 574년에 호스로 1세에게 4만 5천 노마스마타의 돈을 주고 휴전에 합의했다. 그녀는 혼자서 제국을 다스리는 건 어렵다고 판단하고 잠시 정신이 돌아온 남편을 설득해 티베리우스를 섭정에 임명시켰다. 이리하여 티베리우스는 소피아 황후로부터 추천받은 자이며 황제는 그의 미덕과 행운을 자신이 현명하게 선택한 성과라 여겼다. 티베리우스가 카이사르 또는 아우구스투스에 오르는 즉위식이 총대주교와 원로원 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황궁에서 열렸다.(574년 12월)
하지만 제국의 분란은 멈추지 않았다. 당시 투르크족은 동로마 제국과 손을 잡고 페르시아와 공동 대응하고 있었는데, 동로마 제국이 페르시아와 강화를 맺자 자신들과 상의하지도 않고 전쟁을 멈췄다며 화를 내고 제국을 배신자라고 욕하며 동맹을 깨고 크리미아의 동로마 제국 요새를 점령했다. 또한 577년에는 대략 10만에 달하는 슬라브족이 트라키아와 일리리쿰에 침입해 그곳에 정착했다. 게다가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한 소피아 황후와 티베리우스 부제와의 갈등도 극심했다. 소피아는 티베리우스가 불필요하게 사치스럽다며 비난했고 황실의 재정을 움켜쥐고 티베리우스에게 가족이 먹고 살 만큼만 내줬다. 또한 그녀는 티베리우스의 아내인 이노와 그의 두 딸이 황궁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했다.
한편 576년, 사산조 페르시아군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자 동로마군은 이것에 대응해 페르시아군과 맞서 싸워 그들을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티베리우스가 급파한 유스티니아누스 장군이 이끄는 동로마군은 페르시아 영토 깊숙이 진군했다. 그러나 577년 유스티니아누스는 적의 매복에 걸려 대패해 유프라테스 강을 도하해 본진으로 퇴각했다. 이 소식을 접한 티베리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를 경질하고 마우리키우스를 새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또한 티베리우스는 야만족 신병 1만 5천명을 동방으로 파견해 페르시아의 침공에 맞설 전력을 갖춰나갔다. 이 야만족 신병대는 훗날 그 유명한 바랑기안 가드의 기반이 된다.
578년 10월 5일, 유스티누스가 마침내 사망했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황위에 올랐고 자신을 폐위시키려고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된 소피아를 수도원에 감금했다. 이노는 소피아가 실각한 후에야 비로소 황후의 특권을 차지했고 이름을 아일리아 아나스타시아로 바꿨다.
티베리우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우세한 방향으로 끌고 간 후 시선을 서쪽으로 돌렸다. 579년, 그는 이탈리아 전선에 군대를 투입해 롬바르드족이 더이상 남하하지 못하게 하고 라벤나를 보강했다. 또한 그는 장군들을 북아프리카로 파견해 약탈을 일삼는 베르베르인들을 제압하게 했고 에스파냐를 장악한 서고트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가 서방에 군대를 파견하는 사이 발칸 반도의 군대는 약화되었다. 아바르족은 이 틈을 타 시르미움을 포위해 제국을 압박했다. 게다가 슬라브족이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그리스로 이주해 제국을 압박했는데, 티베리우스는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없어서 그들이 제국에게 충성을 바치는 선에서 이주를 허락했다. 게다가 제국 동방의 군대는 급료가 제때 지급되지 않자 불만을 품었고 폭동의 조짐이 일었다.
580년, 마우리키우스 장군은 폭동의 조짐이 일던 군대를 빠르게 통제했다. 그후 그는 호스로 1세가 죽고 아들 호르미즈드 4세가 막 즉위해서 페르시아가 어수선한 틈을 타 침공을 개시했다. 581년, 마우리키우스는 가산 왕조의 장로 알 문디르와 연합해 메디아와 메소포타미아의 남부를 가로질렀다. 그런데 문디르는 이 정보를 호르미즈드 4세에게 제공했고 페르시아군은 너무 깊숙이 들어온 동로마군을 향해 역공을 가했다. 그러나 문디르는 다시 동로마 제국과 협력하기로 하고 페르시아군을 격파했으며, 마우리키우스는 이 틈에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다.[39] 그러나 마우리키우스는 국경에 다다랐을 때 페르시아의 장군 아다르마한과 교전을 벌여 패배했다.
582년, 페르시아는 자국의 영역을 침범한 동로마 제국에게 보복하기 위해 탐호스로 장군이 이끄는 군대를 파견해 콘스탄티나를 공격했다. 그러자 마우리키우스는 응전했고, 탐호스로는 마우리키우스에게 패배한 직후 전사했다. 하지만 발칸 반도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자, 티베리우스는 마우리키우스를 급히 소환해 상황을 수습하게 했다. 마우리키우스를 대신해 동방의 제국군을 통솔하게 된 미스타콘은 티그리스와 님피우스 강이 교차하는 지점을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결국 미스타콘은 해임되고 필리피키우스가 그의 직위를 이어받았다.
이렇듯 티베리우스는 유스티누스 2세 시절 일방적으로 페르시아에게 밀리던 상황을 반전시켜 페르시아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페르시아의 왕중왕 호르미즈드 4세는 티베리우스의 수차례에 걸친 평화 협상 제의를 거부하고 끝까지 전쟁을 감행했다. 결국 동로마 제국은 이후로도 수십년간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지속해야 했다. 또한 티베리우스는 가산 왕국의 장로 문디르가 배신하는 바람에 아군이 위험에 처했다는 마우리키우스의 보고를 받자 곧바로 문디르를 체포해 처형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의 충실한 동맹이었던 가산 연맹은 붕괴되었다.
한편 티베리우스는 인심을 사기 위해 돈을 펑펑 썼다. 그는 즉위 직후 제국 전역에 부과된 모든 세금을 4분의 1이나 탕감했고 즉위 첫해에만 금을 7200파운드나 썼으며[40] 은, 비단, 기타 여러 사치품들을 마구 구입했다. 이 때문에 유스티누스 2세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애써 끌어모았던 재정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582년 8월 13일, 티베리우스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햅도몬의 궁전에서 죽었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현재까지도 확실하지 않다. 일부 기록에는 그가 자연사했다고 기술되었고, 일부 자료에는 그가 설익고 특별히 즙이 많은 오디 요리를 먹다가 요리에 들어있는 독을 먹고 죽었다고 한다. 그는 죽기 하루 전에 후계자로 마우리키우스를 지명하고 자신의 둘째 딸인 콘스탄티나와 결혼하게 했다.
사위로서 뒤를 이어 제위를 승계한 마우리키우스는 아바르 칸국과 슬라브인들이 발칸 반도로 남하하면서 국가 행정력이 약화되고 있었다. 이에 584년 이탈리아 중북부에 라벤나 총독부를 설치하여 랑고바르드족의 전진을 저지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고, 572년부터 간헐적으로 계속되던 페르시아와의 전쟁 중, 586년에는 솔라콘 전투에서 헤라클리우스[41]의 활약으로 사산 제국군을 격파하였다. 591년, 동로마 군대는 호스로 2세를 도와 찬탈자인 바흐람 추빈의 군대를 블라라톤 전투에서 격파하고 호스로를 복위시켰다. 따라서 양국 간의 전쟁은 우호적으로 귀결되었으며 그 대가로 호스로 2세로부터 아르메니아와 코카서스의 상당한 영토를 할양받았다. 향후 포카스가 찬탈하고 나서 호스로 2세는 은인 마우리키우스의 복수라는 명목으로 동로마 제국을 침공, 시리아와 이집트 일대를 15년간 지배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솔직히 구실이고, 실제로는 복위를 댓가로 땅을 넘겼기 때문에 국내에서의 권위가 떨어졌고 그걸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땅을 언젠가는 찾아야 했는데, 마침 구실로 붙일 적절한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자세한 것은 Byzantine–Sasanian War of 572–591, Sasanian civil war of 589–591을 참조하면 좋다. 이 중 영토를 페르시아에서 할양받았던 점이 위키백과 중 전자 문서에서 'Territorial changes : Khosrow II gives the Byzantine Empire most of Persian Armenia and western half of Iberia after the Sasanian civil war of 589-591'라고 적시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 지배한 기간은 그 유명한 602-628년의 전쟁이 일어났었으며 이후 수복했지만 얼마 안 있다가 640년대에 아랍이 아르메니아와 코카서스 일대를 점령했던 관계로 얼마 안 된다. 이후 이 지역에 로마가 다시 진주한 것은 400여 년 뒤의 바실리오스 2세였다. 이때 할양받은 땅에는 구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였던 티그라노케르타(Tigranocerta), 먼 미래에 로마가 대패했던 것으로 잘 알려진 만지케르트가 포함되어 있다. 참고로 티그라노케르타의 '케르타'와 만지케르트의 '케르트'는 같은 표현이다. 저 위의 지도에서는 흑해 해안선이 소아시아와 라지카 사이에서 꺾이는 지점보다도 국경이 꽤나 더 동쪽으로 확장되어 있는데, 600년 지도이므로 이 591년의 영토할양을 반영한 것이다. 즉 연도별 영역을 표시하는 역사 지도나 동영상에서 591년에 로마 영토가 동쪽으로 확 넓어지는 것이 반영되지 않았다면 오류이다.
387년 아킬리세네(Acilisene) 조약으로 성립된 로마-페르시아 간 국경과 591년 영토 할양으로 변경된 국경 지도. 하지만 10년 조금 넘어서 호스로 2세가 도로 회수해 갔다.(...) 반 호수 인근에 다시 세력을 뻗히는 것은 후대의 1021년 바실리오스 2세이다.
600년의 로마 제국.
마우리키우스가 페르시아 전선에 신경쓰는 동안, 제국의 핵심부인 발칸 반도 일대는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에게 유린당하였다. 582년에 아바르에게 다뉴브 최대의 거점인 시르미움이 함락당하였고, 584년에는 슬라브족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포위당하였다. 침공이 극에 달했던 586년에는 아바르족이 테살로니카를 포위하였고 슬라브인들은 그리스를 관통, 펠로폰네소스 반도까지 남하하였다. 591년부터 반격을 개시한 마우리키우스는 592년에 시르미움을 회복하였고 593년에는 아바르 - 슬라브 - 게피데 연합군을 격파한 후 다뉴브 강을 도하하여 북진하였다. 599년까지 다뉴브 강 이남의 야만인들은 일소되었고, 602년에 슬라브인들은 왈라키아에서 대패를 맛보았다. 마우리키우스의 발칸 작전에 대해서는 영어 위키백과에 따로 문서(Maurice's Balkan campaigns)가 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고 싶으면 이곳을 참조하면 된다. 591년 마우리키우스는 다뉴브 전선에서도 맹활약하여 599년까지 아바르족을 다뉴브 강 이북으로 몰아내었다.
한편, 마우리키우스는 서방 한정으로 새로운 속주 체제를 세웠다. 종래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이래의 민정-군정의 엄격한 분리가, 수십 년에서 백 년 가까이 뺏겼다가 다시 찾은 서로마 지역에는 그 득보다는 실이 크다고 판단하여, 민정과 군정을 다시 합치는 형태로(노골적으로 말하면 군사령관이 민간통치를 겸한 일종의 군정의 형태로) 584년 이탈리아 라벤나에 총독부를 설치했는데, 총독은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오로지 황제에게만 책임을 졌다. 이러한 그의 체제 정비는 효과를 봐 롬바르드족이 더이상 남진하지 못하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591년, 마우리키우스는 뒤이어 아프리카 속주의 수도인 카르타고에 아프리카 총독부를 설치해 이탈리아처럼 총독이 속주를 수호하게 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탈환한 서방속주에만 민군합동 총독부/총독령[42]을 설치했고, 기존의 동로마 영역은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로 계속 유지되었던 대관구[43]-관구[44]-속주[45] 3층위와 민정-군정 분리 체제를 계속 유지함으로써 이원화했다는 점이다. 7세기 중후반에 아랍에게 뺏기지 않고 남은 영토를 기존 속주-관구 체제에서 테마로 바꾸었을 때도 서방의 총독부를 테마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둠으로써, 이러한 이원적 지방행정구조는 아프리카 총독부가 무너지는 698년은 물론, 라벤나 총독부가 무너지는 751년까지도 테마와 총독부가 공존하는 형태로 계속되었다.
한편, 마우리키우스는 긴축 정책을 실시했다. 그는 주요 행사에 더 이상 돈을 투자하지 않았고 시민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하는 걸 중단했다. 또한 국고가 탕진될 지경에 이르자 지출을 줄이기 위해 군축을 감행했다. 하지만 문제는 군축이 지나쳤는데 서기 588년에 모든 군량의 4분의 1을 감축했고 군인들의 급여도 분기별로 삭감했다. 그래서 이에 반발한 페르시아 전선의 제국군 동방 군단이 폭동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게다가 599년에는 아바르족이 잡아간 제국군 포로 1만 2천 명의 몸값을 지불하는 것을 거부해 포로들이 모조리 학살당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그의 이 같은 긴축정책은 시민과 군대의 불만을 크게 샀고 그가 몰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구글 검색 시 첫페이지에 나오는, 미디엄의 The Seventh Century Transformation of Byzantium에 따르면, 'Maurice was trying to maintain control over war expenses and while he was right in that regard, he was far more frugal than it was politically wise', 즉 해석하면 마우리키우스는 전쟁비용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려 노력했고, 이런 관점에서 옳았기는 하지만, 그는 정치적으로 현명하지 못할 정도로 과하게 알뜰한것이다. 왜냐면 로마 황제 자리는 근본적으로는 군사적 공적을 쌓고 그렇게 얻은 재물을 시민들에게 잘 베풀어줌으로써 민심을 얻었던 포풀라레스(민중파)의 카이사르와 그를 이은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이어지는 자리이기 때문에, 빵과 서커스로 대표되는 후한 복지와 국고 관리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했는데, 마우리키우스는 후자에 기울어진 나머지 전자를 너무 등한시하다가, 충분히 능력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너무 잃어서 몰락했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재정관리를 빡세게 해서 각계각층의 불만을 샀으며, 여러 반란을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살아남아서 천수를 누린 아나스타시우스 1세와 비교할 경우 분명히 마우리키우스가 이점이 훨씬 많았다. 먼저 즉위 시점에서 나이가 60세로 많았고(431년생, 491년 즉위) 플라비우스 비탈리아누스에게 쿠데타를 당했던 510년대 당시 80대였던 아나스타시우스와 달리 즉위 시점에서 나이가 43세로 적절했다.(539년생, 582년 즉위) 또한, 순수 문관이었던 아나스타시우스와 달리 장군 출신이라 본인이 군 지휘능력을 보유하고 있어서 발칸 전선 방위라는 군사적 업적을 세울 수 있었으며 여차하면 반란을 친히 진압할 수 있었다. 한편, 단성론을 믿었던 아나스타시우스와 달리 정통 칼케돈파여서 종교계와의 마찰요소가 훨씬 적었다. 또한, 전임자에 의한 계승이 아니라 황후의 일종의 택군(擇君)에 의한 추대로 즉위했던 아나스타시우스와 달리 위에서 보듯이 전임자 티베리우스 2세에게 확실하게 후임자로 지명을 받았다. 591년의 페르시아 왕위쟁탈전 개입에 대한 댓가로 아르메니아와 코카서스 일대의 큰 땅을 할양받은 업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우리키우스는 아나스타시우스와 달리 결국 쿠데타를 막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던 점을 볼 때, 재정을 아끼는 것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것을 위해서 12,000명이나 되는 포로를 (재정능력이 허락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도) 구출해오지 않고 다 죽게 방조한 것의 충격이 당대인에게 매우 컸던 것으로 볼 수 있다.
597년, 마우리키우스는 장남 테오도시우스를 동방의 황제로, 차남 티베리우스를 서방의 황제로 계승시킨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가 그의 어린 네 아들들로 하여금 알렉산드리아, 카르타고, 안티오크, 라벤나에서 제국을 4등분해 통치하는 것을 고려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치와 흡사한 정책이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602년의 반란으로 실패한다.
마우리키우스는 602년에 아바르족에게 당한것을 갚아주려고 그들과 맺었던 평화 협정을 파기하고 전쟁에 나선다. 마우리키우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은 다뉴브 강을 건너 모에시아 지방에서 아바르 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여기서 아바르군을 2만명 이상 죽이는 대승을 거둔다. 게다가 이 전투를 치르고 추가로 공격해서 승리를 거두면서 아바르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여기까지 거둔 승리들로 떨어진 인기를 회복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에 한 결정이었다. 마우리키우스는 돈을 아끼기 위해 아바르군과 승전을 거두고 온 포카스의 군대에게 진지로 돌아오지 말고 겨울을 다뉴브 강 이북의 춥고 황량한 땅에서 숙영지를 만들어 지내라고 했다. 이는 장병들이 크게 반발했고 나중에 가면 그들의 불만이 커지는 것을 넘어서 폭발하여 장군 포카스를 필두로 한 반란이 일어났다. 게다가 수도에서도 황제를 증오하는 시민들이 일으킨 폭동이 발생하였다.[46] 마우리키우스는 아내 콘스탄티나와 자식들을 데리고 수도를 떠나 도주한다. 수도의 귀족들과 시민들은 포카스와 그의 군대를 환영하며 마우리키우스를 폐위했다. 마우리키우스는 페르시아로 망명하려 했으나 포카스가 보낸 추격군에게 모두 체포된다. 체포된 마우리키우스는 가족과 함께 유트로피우스 항구로 끌려나와 새로 즉위한 포카스에게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아들들과 함께 공개 참수형에 처해진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마우리키우스는 자신의 눈 앞에서 어린 다섯 아들이 무참히 살해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연신 아래의 말을 중얼거렸다고 한다.
효수된 마우리키우스와 다섯 아들들의 머리[47] (출처, CC BY-NC-ND 3.0) |
이후 마우리키우스와 다섯 아들의 시신들은 바다에 던져졌고, 머리 여섯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져와 헵도몬에 효수되어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방치되었다. 아내 콘스탄티나와 3명의 딸들도 교회에 감금되었다가 3년후인 605년에 반역죄로 모두 참수된다. 마우리키우스에 대한 불만이 워낙 컸기에 그와 자식들이 전부 공개 참수되며 목이 내걸렸을 때 제국민들은 모두 기뻐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의 시민들은 마우리키우스를 죽인 것이 얼마나 멍청한 행동이었는지를 깨닫고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교묘한 언론플레이를 통한 반란으로 제위를 찬탈한 포카스는 즉위 후 정권을 공고히 해야 했는데, 바로 자신과 마찬가지로 마우리키우스에게 반기를 든 경쟁자들을 제거해야 했다. 우선 동방 방면군 사령관 나르세스가 마우리키우스 황제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진압군 사령관 게르마누스를 상대로 에데사 인근에서 승리했고, 게르마누스는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11일 만에 사망했다. 포카스 황제는 레온티오스 장군에게 진압 명령을 내렸다. 레온티오스는 나르세스를 에데사에 몰아넣고 공세를 가했지만, 나르세스는 기회를 틈타 포위망을 벗어난 뒤 히에라폴리스에 자리를 잡았다.
포카스는 레온티오스가 일부러 나르세스를 놓아줬다고 의심해 604년 레온티오스를 체포해 감옥에 집어넣고, 자신의 동생인 도멘치올루스를 새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도멘치올루스는 나르세스를 무력으로 응징하기보다는 협상하기로 하였고, 나르세스는 신변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귀순하였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동했지만, 포카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나르세스를 산채로 불태웠다. 테오파네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페르시아인들에게 공포를 안겨줄 만큼 뛰어난 장수였기에, 페르시아인들은 나르세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 날뛰었다고 한다.
605년, 지난날 수도원에 들어갔던 게르마누스가 무리를 모아 포카스를 암살하고 황제가 되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었다. 포카스는 이에 연루된 자들을 모조리 처형하게 했는데, 그 중에는 콘스탄티나 황후도 있었다. 콘스탄티나는 세 딸과 함께 칼케돈에서 처형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수원장 게오르기우스 케드레누스는 콘스탄티나의 머리가 효수되었고 시신은 보스포루스 해협에 던져졌다고 기록했다.
포카스는 처음 집권했을 때 녹색당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녹색당의 권세가 강해지는 것을 경계한 포카스가 녹색당 지도자 세르기우스를 처형해버리면서, 그와 녹색당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609년, 군중이 히포드롬에 들어선 포카스를 향해 "술에 취한 것 아니냐"고 야유를 보냈다. 이에 분노한 황제는 군대를 풀어서 야유를 퍼부은 군중들을 학살하게 했다. 녹색당은 이에 대응해 수도 곳곳에 불을 질렀고, 이로 인해 많은 공공건물이 파괴되었다.
이렇듯 수많은 반란과 음모에 시달렸고 이에 대응해 가혹한 숙청을 단행했지만, 모든 귀족을 적으로 돌리지는 않았다. 그는 제국 근위대인 엑스쿠비토레스의 지휘관인 프리스쿠스를 자신의 딸 도멘치아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프리스쿠스는 종종 황제의 의심을 사 숙청 위협을 받아야 했다고 전해진다. 고대의 여러 기록은 프리스쿠스가 아프리카 총독부의 총독 대 헤라클리우스에게 반란을 선동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밝히기도 했지만,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다.
이후 603년, 호스로 2세는 자신을 마우리키우스의 장남 테오도시우스라고 사칭한 자를 전면에 내세우며, 찬탈자를 몰아내고 은인의 아들을 복위시키기 위한 성전이니 로마인들은 적대하지 말라고 선전하며 전쟁을 단행했다. 물론 실제 의도는 591년 제위를 되찾았을 때 로마 제국에 할양해야 했던 영토를 되찾으려는 것이었다. 사산 왕조군은 타우루스 산맥의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공격했고, 포카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나르세스가 여기에 호응했다. 호스로는 다라 요새를 포위하였고, 별동대를 파견해 에데사에서 토벌군에게 포위된 나르세스를 돕게 하였다. 사산 왕조군은 에데사에서 로마군을 격파하였고, 나르세스는 가짜 테오도시우스를 에데사에서 보호받게 하였다. 포카스는 도나우 강 건너편의 아바르족과 평화 협약을 체결한 뒤 나르세스-사산 연합군을 상대로 반격하였으나 패배했다.
포카스는 나르세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유인해 죽인 뒤, 여러 장군들을 반역을 일으킬 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체포해 처형하거나 감옥에 가두었다. 사산 왕조군은 동로마군이 포카스의 이같은 조치로 인해 약해진 틈을 타 맹공을 퍼부었고, 그 결과 604년 다라 요새를 함락시켰고 591년 이전의 옛 영토를 모두 회복하였다. 이후 간간히 습격대를 보내서 적을 피로하게 만들면서 숨을 고르다가, 607년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했다. 당시 동로마군 사령관은 포카스의 동생 도멘치올루스였으나, 군사적 역량은 별로 없었다. 사산 왕조군은 그를 상대로 연전연승하여 메소포타미아 서부와 시리아, 아르메니아, 카파도키아, 파플라고니아, 갈라티아 등지를 모조리 휩쓸었고, 608년엔 사산 별동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빤히 바라다보이는 칼케돈까지 이르러 무력시위를 한 뒤 돌아갔다. 여기에 테오도시오폴리스가 가짜 테오도시오스를 영접한 뒤 사산 왕조에 귀순하였고, 609년 에데사도 함락되었다.
포카스는 이렇듯 동방 속주가 사산 왕조군의 맹공으로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유대인들을 기독교로 강제 개종시키려 했다. 이에 유대인들은 608년 대대적으로 봉기해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를 살해하고 현지 기독교도들을 대량 학살했다. 여기에 티레와 아크레에서도 610년 유대인 반란이 일어났으나 곧 진압되었고, 티레의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집단 학살되었다. 이렇듯 제국의 동방 영토에서 기독교 신자들과 유대인들 간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유혈극이 벌어지면서, 유대인들은 동로마 제국에 대해 강한 반감을 품게 되었다. 이는 614년 사산 왕조군이 시리아에 이르렀을 때 유대인들이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고 사산 왕조군의 편에 선 계기가 되었다.
동방 전선이 혼란스럽게 돌아간 반면, 발칸 전선은 그의 치세 내내 평온했다. 지난날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대대적인 원정으로 인해 아바르와 슬라브인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에 전쟁을 재개할 여력이 되지 않기도 했을 테지만, 포카스를 황제로 옹립한 발칸 방면군의 충성도가 강력했기 때문에 변고가 일어날 여지가 적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포카스는 아바르족에게 상당한 공물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고 발칸 전선군을 동방으로 보내 사산 왕조의 공세를 최대한 막아보려 노력했다.
아바르족은 평화 협상을 맺어놓고 이를 거리낌없이 어기고 제국을 침략하기로 악명높았다. 그런 그들이 그의 치세에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것을 볼 때, 포카스가 병력을 다른 곳에 보내고도 다뉴브 전선 방위를 여전히 굳건히 해뒀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몇몇 사료에서는 슬라브인들이 그의 치세에 테살로니카를 습격했다고 기술되었지만 다른 사료와 교차검증되지 않기에 신빙성은 의심된다.
발칸 전선이 본격적으로 무너지는 시기는 포카스가 이라클리오스에 의해 축출된 직후였다. 이는 포카스의 실각으로 그를 추종했던 발칸 방면 로마군의 조직력이 붕괴되었고, 아바르와 슬라브인들이 이를 기회로 삼아 대대적으로 침략했음을 암시한다. 다만 포카스가 다른 전선에 몰두하느라 다뉴브 전선에 신경을 잘 쓰지 못했기에 단기간에 전선이 붕괴되었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603년 6/7월 리우바 2세를 축출하고 서고트 왕국의 국왕에 오른 위테리크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동로마 제국의 영토가 된 베티카 남부 일대에 대한 공세를 감행했다. 그러나 위테리크의 공세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군툼에서 일부 동로마군을 사로잡은 것 외에는 특별한 승전을 거뒀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그가 로마 병사들과 자주 싸웠지만 적절한 영광을 거두지 못했다고 기술했다. 다만 610년 툴레도 공의회에 카르타헤나 인근의 비가스트룸 시 주교가 참석한 것을 볼 때, 비가스트룸 시가 그의 치세 때 서고트 왕국의 영토로 귀속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포카스가 이베리아 전선에 신경을 썼다는 기록은 전무하며, 아마도 이베리아 총독이 자체적으로 지방군을 이끌고 저지했을 것이다.
포로 로마노 한가운데에 있는 포카스를 기리는 기둥[48] |
전임 황제 마우리키우스는 교황청과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 588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네스가 '세계 교회'라는 용어를 채택해, 자신이 교황을 포함한 모든 고위 성직자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교황 펠라지오 2세는 이에 분노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비판하는 설교를 했다. 뒤이어 교황에 오른 그레고리오 1세는 마우리키우스에게 제국의 평화를 위해 총대주교에게 주의를 주라고 권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요한네스가 그런 용어를 쓴 것은 적그리스도의 시대가 왔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우리키우스는 자신은 총대주교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내용의 답신을 보냈고, 이로 인해 양자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여기에 마우리키우스는 랑고바르드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어달라는 교황들의 간절한 호소를 무시하고 라벤나 총독부에 전쟁을 지속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교황들은 자연히 이런 마우리키우스에게 반감을 품었다.
반면에, 포카스는 교황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는 그레고리오 1세로부터 즉위를 축하한다는 서신을 받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로마 교황이 보편 또는 세계 교회의 수장임을 인정한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또한 교황청의 호소를 받아들여 라벤나 총독을 교체하고 랑고바르드 왕국과 평화 협상을 추진해 605년 4월 평화 협정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만투아와 크레모나를 포함한 여러 주요 도시를 랑고바르드 왕국에게 빼앗겼다. 로마 교황들과 로마 원로원은 전임 황제와는 달리 자신들의 호소를 귀담아 들어주는 그에게 깊은 호감을 품었고, 포로 로마노 한 가운데에 포카스를 기리는 기둥을 세우는 것을 받아들였다.
608년, 아프리카 총독 대 헤라클리우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다른 지역은 외세의 침략으로 고통받는데 비해 아프리카 속주만은 평온했다. 그런 곳의 총독이었던 대 헤라클리우스가 반란을 일으킨 동기는 불분명하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대 헤라클리우스는 자신을 총독으로 선임했던 마우리키우스 황제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황제를 추도하는 의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마우리키우스의 복수를 위해 거병했다기에는 6년이 지나서야 반란을 일으킨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황제의 사위였던 프리스쿠스가 그에게 반란을 부추기는 편지를 보냈다는 기록도 있으나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다. 친 이라클리오스 성향의 사료들은 그가 포카스의 폭정으로부터 제국을 구하고자 떨쳐 일어났다고 주장했지만, 시카고 대학 역사 교수이자 동로마 역사 사학자인 월터 캐기(Walter Kaegi)는 황위를 장악할 적기를 노려 반란을 일으켰을 거라고 추정한다.
대 헤라클리우스는 먼저 이집트를 정복하기 위해 조카 니키타스를 이집트로 파견했다. 니키타스는 베르베르인으로 구성된 보조군으로 충원된 육군을 이끌고 키레나이카와 이집트로 쳐들어갔다. 키레나이카는 쉽게 공략되었지만, 이집트의 나일 강 삼각주의 요새인 세마누브와 아트리브는 포카스를 지지하는 보노수스 장군이 올 때까지 버텼다. 보노수스는 팔레스타인의 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한 인물로 유명했다. 그는 이집트에 도착한 뒤 니키타스의 부관 보나키스를 격파하여 사로잡은 뒤 처형하였고, 니쿠를 공략하여 반란을 지지했던 주요 인물들을 처형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에서 포카스를 지지하는 청색파와 이라클리오스를 지지하는 녹색파간의 내전이 벌어졌고, 곧 청색파가 이라클리오스 지지로 선회하면서 알렉산드리아가 니키타스에게 넘어갔다. 보노수스는 알렉산드리아를 되찾으려 했지만 실패하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고, 니키타스는 610년 여름에 이집트 전역을 공략했다. 이로 인해 이집트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공급되어야 하는 밀이 끊어지면서, 포카스의 입지는 매우 약해졌다.
한편, 포카스는 대 헤라클리우스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대 헤라클리우스의 아내 에피파니아와 그의 아들 이라클리오스의 약혼자인 파비아 에우도키아를 네아 메타토니아(Nea Metanoia, 새로운 회개) 수도원에 연금했다. 그러나 헤라클리우스는 이에 개의치 않고 이라클리오스를 발칸 반도로 파견했다. 이라클리오스는 테살로니카로 진군해 유럽의 모든 불만분자들을 병사로 받아들이고 610년 여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다. 이라클리오스는 수도로 진군하는 동안 여러 도시에 들러 지지자들을 확보했다. 이때 포카스에 의해 억류되었던 에피파니아와 파비아 에우도키아가 녹색당에 의해 풀려나 이라클리오스에게 보내졌다. 이라클리오스는 이에 마음을 놓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610년 10월 3일, 이라클리오스는 마르마라 해를 거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 이틀 뒤, 포카스는 달아나려 했다가 원로원이 파견한 관원에게 체포된 뒤 이라클리오스 앞으로 끌려왔다. 파스칼레 연대기에 따르면, 이라클리오스는 자신 앞으로 끌려온 포카스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대가 바로 제국을 이 꼴로 만든 자인가?"
포카스가 답했다.
"당신이 다스린다면 나을 거라 생각하는가?"
이라클리오스는 그의 뻔뻔한 태도에 격노해 포카스를 참수하고 그의 몸을 여러 조각으로 잘라낸 뒤 사냥개들의 먹이로 던졌다고 한다. 또다른 기록에 따르면, 청색당과 녹색당의 공동 처분에 맡겨진 뒤 그들의 손에 처형당했다고 한다. 여기에 포카스의 동생이자 동방군 총사령관이었던 도멘치올루스와 핵심 지지자인 보노수스 역시 체포된 후 처형되었다. 또다른 동생 코멘티올로스는 두 형의 원수를 갚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610년 말 또는 611년 초 부하 유스티누스에게 피살되었다.2.5. 이라클리오스 왕조
610년 포카스를 죽이고 동로마 황제가 된 이라클리오스는 포카스가 벌여놓은 개판이 된 제국을 정리해야 했다. 포카스의 폭정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을 숙청하면서 제국의 방위 체계를 모조리 망가뜨려 놓았던지라, 사산조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가 진격했을 때는 제대로 방어가 가능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마침내 로마-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하자 611년에 시리아, 아나톨리아를 정복당하고, 613년 막기 위해 군사를 보내지만 안티오크에서 이마저도 격파당하며 다마스쿠스도 점령당하고, 614년에는 예루살렘마저 빼앗겨 제국의 최고 성유물인 성십자가마저 빼앗긴다. 뒤이어 호스로 2세는 617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보스포루스 해협 바로 건너 편의 칼케돈까지 도달했다. 619년에는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했고 621년쯤에는 나일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이집트를 거의 완전히 접수했다.[49] 그래서 기원전 123년에 그라쿠스 형제 중 동생인 가이우스의 주도로 수도 시민에게[50] 곡물을 제공하기 시작한 이래 750년 가까이 계속되어 오던, 그 유명한 빵과 서커스의 '빵'이 이 때 완전히 끊어졌다. 거기다가 622년에는 로도스 섬마저 함락당하는 초유의 위기 상황이 되었다.대단히 임팩트가 큰 이 상황 때문에 이라클리오스가 무력하게 영토를 잃고 있었다는 오해가 있었으나, 그에게는 남은 야전군을 끌어모아 회전에서 도박적인 승부를 벌이는 방법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라클리오스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일단 후퇴는 하더라도 시간을 벌어가면서 후퇴하는 대신 잔여 병력을 철저하게 훈련시켜 단위 전투력의 질을 끌어올리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622년, 영토를 절반 넘게 잃은 상황에서도 동방 방면 야전군들은 그래도 병력을 2/3 넘게 건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제국 서쪽에서 슬라브와 아바르에게 호스로 2세의 페르시아군에게 입은 것보다 훨씬 더 큰 타격을 입어 일리리쿰군이 거의 궤멸되고 말았다. 훗날 아랍인들과의 전투에서도 야전군 전체가 통째로 날아가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을 돌이켜 볼 때, 이 참사가 이라클리오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안겨주었을지는 상상이 어렵지 않다.
때문에 이래도 저래도 방법이 없겠다 싶은 이라클리오스는 카르타고로 수도를 옮길 생각까지 하지만, 카르타고로 가려는 배가 악천후로 침몰한 데다가 총대주교의 만류로 생각을 고쳐 먹는다.
한편 619년 환관이자 라벤나 총독이었던 엘레우테리우스가 황제를 자칭하고 로마를 수도로 하는 황제국을 세우려 했지만, 620년 병사들에게 피살되어 무위에 그쳤다.
심기일전한 이라클리오스는 622년 이콘을 앞세워 군사들을 격려하고 성전을 주장하며, 교회에서도 많은 기부를 받아(하기아 소피아의 금까지도 벗겨가며) 돈을 충당하여 드디어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걸게 된다. 그래서 이것을 최초의 십자군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면 '비잔티움 연대기'(줄리어스 노리치 저)라든가... 또한 아예 이 견해가 책 제목에 들어간 단행본 외서도 존재한다.[51] 앞서 봤듯 이라클리오스가 그동안 했던 치밀한 준비를 보면 그렇게 아주 놀라운 기적이라고까진 할 수 없으나, 이라클리오스에게 비범한 조직력과 장군으로서의 천부적인 자질이 함께 있었던 건 분명하다. 조직력이라면 몰라도 이라클리오스는 그전까진 야전에서 제대로 된 전투를 경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본인이 직접 군대를 통솔해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은 높이 사줄 만한 동시에, 제국에 다른 믿을 만한 장군이 없었다는 암울한 점도 시사한다.
이라클리오스가 이끄는 군대는 샤흐르바라즈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둬 아나톨리아를 위협하는 페르시아 군대를 어느 정도 처리하는 데 성공하였다. 623년 수많은 배신 행위에도 불구하고 아바르와 강화를 맺은 이라클리오스는 2만 명만의 군사를 이끌고 페르시아의 중심부로 출발한다.
놀랍게도 이라클리오스는 계속 승리를 거둬 아르메니아의 수도를 점령하고 호스로 2세의 군대를 상대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며 유명한 조로아스터교 사원인 성화(聖火) Ādur Gušnasp의 사원을 부수는 등의 활약을 한 뒤 티그레니커트에서 페르시아의 세 부대를 각개격파하는 놀라운 전과를 세운다. 625년 반 호수 북쪽에서 겨울을 보낸 이라클리오스는 빼앗긴 도시들을 수복한 뒤 아다나에서 황제가 직접 진삼국무쌍을 찍으며 트레비존드로 퇴각하는데 성공한다.
호스로의 뚝배기를 깨는 이라클리오스. 그림을 잘 보면 ‘이라클리오스 대제’라고 쓰여 있다. |
626년 호스로 2세는 아바르족과 힘을 합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한다. 하지만 제국의 우월한 해군력에 아바르족과 페르시아의 해군은 궤멸당하고 공략은 실패로 돌아간다.
이때 이라클리오스는 군대를 세 부대로 나누어 하나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게 하고 하나는 동생[52] 테오도로스에게 주어 사힌의 군대를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가장 적은 수의 부대를 이끌고 페르시아로 진격한다. 사힌의 부대를 상대한 테오도로스가 승리를 거두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전투도 승리했는 데다가 투르크족의 일파마저 끌어들여 페르시아를 공격하게 하니 황제는 아무 것도 걱정하지 않고 페르시아로 진격할 수 있었다.
성십자가를 가져오는 이라클리오스. |
이라클리오스의 제국군이 니네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53] 628년에 사산 왕조의 수도인 크시테폰까지 점령한 후 궁전까지 약탈하게 되자 호스로 2세는 궁정 반란으로 축출된다. 부친을 몰아내고 새로운 샤가 된 카바드 2세는 동로마 제국에 화친을 요청하였고, 이라클리오스는 모든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 성십자가 등의 성유물을 가져와 한니발 바르카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이후 가장 대담하고 놀라운 일을 해냈다고 칭송받으며 국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게 되었다. 원로원도 새로운 스키피오라는 존호를 바쳤다고 한다. 로마 공화정, 즉 고대 로마와의 연속성을 인식하고 있는점이 잘 드러나는 부분.[54]
여기서 만약 그가 이쯤에서 죽었다면,
-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망가트리던 포카스 축출
- 멸망 직전의 나라를 되살림
- 제국 역사상 한 번도 제대로 이기지 못한 사산 왕조를 완전히 괴멸시켜 그들의 샤한샤를 '동로마의 노예'로 만듦
- 최고의 성유물 성십자가를 탈환
한마디로 위대한 업적을 달성한, 그야말로 동로마 제국의 전성기를 구가했다는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나란히 평가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오래 살았고 거기에 제국의 변방에서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새로운 세력이 태동하고 있었다.
잘있거라, 시리아여. 그대에게 기나긴 작별 인사를 고한다. 나의 사랑하는 속주여. 너의 아름다움은 이제 이교도의 수중에 있구나. 오, 시리아여, 그대에게 평화가 있으라.[55]
638년의 이라클리오스, 시리아를 떠나며
이슬람 팽창 문서 참고.638년의 이라클리오스, 시리아를 떠나며
625년까지만 해도 이슬람 제국은 1,000명이 싸웠다 하면 300명이 도망칠 정도의 오합지졸이었다. 하지만 이라클리오스가 사산조 페르시아에게서 힘들여 수복했던 영토 중 상당 부분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를 앞세운 이슬람의 공세에 모두 빼앗기고 만다. 지금까지 싸웠다 하면 이겼던 황제였지만 본인이 노쇠와 병마 때문에 직접 전투를 지휘하지 못했고, 휘하의 동로마 장군들은 수적 우세를 가지고도 할리드에게서 단 한 번의 승리도 거두지 못한 것이 참으로 제국에 큰 불운이었다. 또한 종교적 갈등도 컸다. 시리아에 우세하던 단성론은 한 세기 이상 로마 당국에게 차별을 받다가 6세기 초엽 약 20년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며 종교적 관용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이라클리오스의 재정복과 함께 칼케돈 주의가 재차 강요되자 단성론 신자들은 분노한 것이다. 이는 페르시아처럼 저항만 하지 않는다면 종교적 자유를 약속한 이슬람에게 현지인들이 무관심 혹은 환영의 자세를 취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또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엄청난 세금을 과세한 동로마에 비해 이슬람의 지즈야가 덜 가혹했던 점도 있다.
이렇게 온갖 패배를 당하고 백성들로부터는 조카딸과 결혼해서 신의 천벌을 받은 것이라는 온갖 비아냥을 들었으며 각종 병마에 시달린 나머지[56] 폭이 좁은 곳은 750m밖에 되지 않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널 때조차 별별 이상한 방법을 동원해서 겨우 건넜다.[57] 이 와중에 사생아 요안니스 아탈라리치오스 등이 이라클리오스가 수도를 비운 틈을 타 반란을 꾀했다가 조기에 발각되어 신체 절단형과 유배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또 대관식을 겨우 끝낸 다음 640년에는 알렉산드리아까지 공격당했다는 소식과 641년에는 새로운 로마 교황 요한 4세가 단의론을 반대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실감에 빠져 죽고 만다. 거기다가 그는 죽으면서 저서 진술의 내용을 부정하며 "모든 게 세르기우스의 거짓말"이라는 단의론을 인정하는 말을 하고 죽는다. 그의 마지막마저 누구나도 알 만한 뻔한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죽고 나서도 3개월 뒤에 그의 계승자였던 장남 콘스탄티노스 3세의 명령에 따라 석관을 열고 함께 매장된 보석 제관을 벗겨내게 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비록 5대 대교구 중 3곳인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를 비롯해 팔레스타인, 시리아, 이집트, 아르메니아 등 아나톨리아를 제외한 동방의 모든 땅을 다 잃었지만 이라클리오스는 사산조 페르시아에게서 효과를 본 전략을 다시 가동하여 제국에 생존할 수 있는 기회와 역량을 부여했다. 이슬람 제국은 제국에게 그렇게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제국의 핵심 야전군 다섯 중 그 어느 야전군도 제대로 궤멸시키질 못했다. 아바르와 슬라브족이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하며 일리리쿰 야전군 자체를 골로 보내버린 것에 비하면 생각보다는 놀라운 결과며, 이는 이라클리오스가 어느 순간부터 영토는 잃어도 군대만은 보존한다는 방침을 고수하며 방어적 전략으로만 일관한 데 이유가 크다. 물론 영토는 제국 본진인 아나톨리아 앞마당까지 다 뺏겼지만...[58]
641년 이라클리오스가 사망한 후 이라클리오스의 첫 황후 파비아 에우도키아의 아들로 613년부터 공동 황제였던 콘스탄티노스 3세가 단독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라클리오스의 조카이자 두번째 황후였던 마르티나는 의붓아들인 그가 황위에 오른다면 자기가 낳은 자식들이 위험해지리라 여겼다. 그녀는 이라클리오스의 사생아 아탈라리쿠스와 조카 테오도로스와 함께 이라클로나스를 황제로 즉위시키는 음모를 꾸몄다. 마르티나는 남편을 압박했고, 이미 기력을 상실한 데다 폐병에 시달리는 콘스탄티노스를 걱정한 이라클리오스는 아내가 원하는 대로 해줬다. 이리하여 마르티나의 아들 이라클로나스는 638년 7월 콘스탄티노스와 함께 공동 황제가 되었다. 여기에 마르티나의 딸인 아우구스티나와 아나스타시아도 아우구스타의 칭호를 받았다.
641년 2월 11일 이라클리오스가 사망할 때, 마르티나는 다 죽어가는 남편을 압박해서 콘스탄티노스와 이라클로나스와 함께 자신을 공동 통치자로 지정하는 유언장을 작성하게 했다. 그 후 피루스 총대주교와 원로원, 그리고 다른 고위 관리들을 원형 경기장에 불러서 공식 집회를 조직하고 유언장을 발표하면서, 자신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그 자리에 모인 군중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거부했다.
"당신은 황제의 어머니로서 영광을 누리게 되었지만, 그들은 우리의 황제이자 주인입니다. 여인이시여! 당신은 야만인이나 다른 외국 사절들을 궁궐에서 맞이하고 대화를 나눌 수 없습니다. 성모님께서 로마 제국이 그런 고비를 맞이하는 걸 막아주시길 바랍니다."
마르티나는 결국 황궁으로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콘스탄티노스 3세가 병에 걸렸다. 그는 칼케돈 궁전으로 가서 요양하였으나, 즉위한 지 석 달이 지난 641년 5월 25일에 사망했다. 그가 오래도록 앓았던 폐병이 악화되었거나 결핵에 걸린 게 사망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민중은 마르티나가 그를 독살했다고 의심했다. 여기에 마르티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피루스가 공범으로 지목되었다.
아무튼 콘스탄티노스 3세가 사망하면서, 15세의 이라클로나스가 단독 황제가 되었고, 마르티나는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마르티나는 콘스탄티노스 3세의 지지자들을 포섭하기 위해 막대한 기부금을 지불하였고, 회계관 필라그리우스를 포함해 대중에게 미움받던 관원들이 처벌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콘스탄티노스의 측근들을 모조리 유배보냈고, 인기 없는 단의론을 교회의 정식 교회로 지정했다. 성직자, 청색당, 녹색당, 원로원, 군대 등 모든 계층은 이에 분노하였고, 동부 총사령관인 아르메니아계 장군 발렌티노스 아르샤쿠니는 마르티나 타도를 외치며 군대를 일으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마르티나는 수도 수비를 강화하였지만, 발렌티노스는 칼케돈까지 진격하여 압박하였다. 여기에 콘스탄티노스의 아들들을 황제로 세우라는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결국 마르티나는 민중을 달래기 위해 콘스탄티노스 3세의 아들 콘스탄스 2세와 또다른 아들 다비드 티베리오스를 공동 황제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시위는 계속 이어졌고, 641년 9월 28일 성난 시민들이 아야 소피아에 침입하여 피루스 총대주교를 공격했다. 피루스는 다음날인 9월 29일 총대주교를 사임하고 카르타고로 달아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키던 군대마저 봉기하여 황궁을 삽시간에 장악했고, 원로원의 명령에 의해 마르티나와 이라클로나스가 체포되었다. 마르티나는 혀가 잘렸고, 이라클로나스와 다비드 티베리오스는 코가 베어졌다. 또다른 아들 마르티노스는 거세되었다. 그 후 마르티나와 자식들은 로도스 섬으로 유배되었고, 다시는 섬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콘스탄스는 제위를 굳히는데는 성공했지만 조부인 이라클리오스가 해결하지 못했던 이슬람 제국의 팽창을 저지해야 했다. 하지만 642년 라쉬둔 칼리파(정통 칼리파)의 아랍 군대가 이집트의 마지막 동로마 거점인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였다. 이후 643년 중국 당나라 당태종 시절 사신을 파견해 적파리와 녹금정 등을 선물을 보냈다. 물론 중화사상에 빠져 있던 당태종 이하의 중국인들은 그것을 조공으로 해석했다.
정관 17년(643년)에 불름국왕인 파다력이 적파리와 녹금정 등을 바치자, 태종이 옥새를 찍은 교서를 내리고 답장하여 위로하고, 꽃무늬를 수놓은 얇은 비단을 하사하였다.
구당서, 신당서
구당서, 신당서
644년 자신을 황제로 올렸지만 공동 황제를 요구하며 제위 찬탈을 노골화하던 발렌티노스 아르샤쿠니를 숙청하지만 제국의 위기는 계속되었다 645년에 제국 해군이 알렉산드리아를 탈환했지만,[59] 이듬해에 [[무슬림의 이집트 정복 전쟁|쫓겨났다]. 645년에는 아르메니아, 647년에는 카파도키아를 침략당했으며, 아르메니아는 제국의 지원군이 아랍 군대에 패배하자, 아르메니아의 토후들이 이슬람의 지배를 받아들여 이르미니아 총독부가 설치되었다. 아프리카 역시 648년에 공격을 받았는데 3년 전인 645년 아프리카의 총독이자 왕실의 일원으로 추정되는(황제 콘스탄스 2세는 이라클리오스의 손자였으며, 그레고리오스는 이라클리오스의 사촌 니키타스의 아들이라고 하니 서로 7촌관계가 된다)[60] 그레고리오스가 단의론(Monothelism)을 주창하는 황제에 맞선다는 명분을 걸고 실제로는 자기들을 제대로 아랍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하는 제국에 대해 실망했던 아프리카 지역민의 여론을 등에 업고 그레고리오스의 야심이 분출된 반란을 일으켰는데[61], 마침 아랍인들이 튀니지 내륙까지 쳐들어와서 그레고리우스의 군대과 싸워 총독이 죽고(수페툴라 전투), 그 총독의 측근 내지는 후계자가 아랍군과 적당히 협상한 후 반란을 멈추고 제국에 다시 충성의 의지를 밝혔다.
이후에도 아랍인들은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에까지 진출하여 648년에 프리기아를 침공하였고, 해군을 조직하여 649년에는 크레타 섬을 습격하였고, 키프로스마저 공략하였다. 650 - 651년 아랍 군대는 킬리키아와 이사우리아 등 소아시아 남부를 유린하였고, 콘스탄스는 시리아의 총독 무아위야와 협상, 황금을 바치고 휴전 조약을 맺어 아르메니아 서부를 보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콘스탄스는 제국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정통교회와 단성론, 단의론의 논쟁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걸 지긋지긋하게 여겨, 648년 초 <전범(Typos)>을 발표해, 앞으로 예수의 인격, 신격을 운운하는 자는 모두 처벌한다고 밝혔다. 주교나 사제라면 즉각 해임하고, 수도사라면 파문할 것이며, 군인이나 관리라면 지위나 직함을 박탈하며, 원로원 의원이라면 재산을 몰수하고, 민간인이라면 매질을 하고 유배를 보내겠다고 했다. 하지만 로마 총대주교였던 마르티노 1세가 이에 반발, 649년에 라테라노 공회의에서 공식적인 반대입장을 선언하자, 라벤나 총독 올림피오스에게 마르티노 1세의 체포를 명령고 명령하였으나 불복하자 해임하고, 새로운 총독으로 테오도로스를 임명해 653년에 로마로 군대를 보내 교황을 체포하게 하였다. 교황 마르티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되어 문책당하였고, 크림 반도의 케르손으로 유배시킨다.
654년 콘스탄스 2세의 장남 콘스탄티노스 4세가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같은 해 아르메니아가 완전히 이슬람 제국에 정복되어 아르메니아 총독부가 설치되었고, 해상으로도 로도스를 공략하고 에게 해의 여러 섬과 해안가를 약탈했다. 이 일련의 성공에 고무된 무아위야는 655년 아나톨리아에 대규모 병력을 출동시키는 한편 200척의 함대를 부관 아부 알 아와르[62]에게 맡겨 아나톨리아 남부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게 했다. 이 소식을 접한 황제 콘스탄스 2세는 적 함대가 에게 해를 거슬러 올라가 다르다넬스 해협을 거쳐 콘스탄티노폴리스 앞바다인 마르마라 해로 들어가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친히 500척의 함대를 통솔하기로 했다.
655년 여름, 양측 함대는 리키아 해안선의 포이닉스 항구 앞바다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양측은 해안가에 정박한 채 서로 대치하면서 다음날에 벌어질 해전을 준비한 후 다음날 양쪽의 전함들이 충돌했다. 하지만 콘스탄스 2세의 해군에 대한 지휘 미숙으로 무작정 돌진하다보니 전열이 흐트러졌고, 때마침 바람이 불지 않아서 선원들이 배를 움직이기 위해 노를 힘껏 젓느라 탈진할 지경이었고, 아랍군은 그런 적을 향해 갈고리를 던져서 배를 옴짝달싹 못하게 한 뒤 적선에 올라타서 닥치는 대로 살육하였고, 콘스탄스 2세는
평범한 선원의 복장을 한 채 쪽배를 타고 탈출했다고 한다. 그 후 아랍군의 공격으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한 함선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돌아가려 했다가 폭풍우를 만나 대부분 파괴되었다. 한편 아랍 함대 역시 대규모 해전을 벌이는 동안 막대한 손실을 입었기에 항해를 중단하고 아크레로 귀환했다. 이후 칼리파 우스만은 이 여세를 몰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고자 하였으나, 656년에 1차 피트나 (무슬림 내전)가 발발하며 무산되었다.
아랍 군대의 침공이 뜸해진 틈을 탄 콘스탄스는 658년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슬라브족의 이동에 대해 반격다운 반격을 했다. 여러 슬라브 부족들을 산하에 복종시켰으며, 소아시아로 사민시켰다.[63] 659년 메디나에서 4대 칼리파 알리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고 낙타 전투가 벌어지자, 동쪽으로 진군한 콘스탄스는 무아위야에게 연공을 받는 동시에 아르메니아를 동로마 측이 회복한다는, 매우 유리한 조건의 평화 조약을 맺었다. 아르메니아는 특히 이라클리오스 왕조의 발상지라는 점에서 더욱 뜻깊었을 것으로 여겨진다.[64] 또한 이시기쯤에 테마 제도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아들 이라클리오스와 티베리오스마저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하지만 동생 테오도시우스가 제위를 노리고 있다고 의심하여 그에게 그러지 않을 것을 맹세시켰으나 그럼에도 미덥지 않았는지 결국 660년에 처형을 명하였다. 그로 인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민중들은 콘스탄스로부터 등을 돌렸다. 이러한 민심으로 인해 콘스탄스 2세는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로 궁정을 이전한 뒤 남이탈리아 공략을 시도해, 663년 랑고바르드 국왕 그리말트가 프랑크 왕국의 네우스트리아[65]에 있는 틈을 타 베네벤토 공국으로 출정하였다. 타란토에서 북진한 동로마 군대는 루체라를 함락하였으나, 수도인 베네벤토에서는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함락에 실패하고 나폴리로 퇴각하던 콘스탄스는, 카푸아 백작 트라사문트의 군대의 습격으로 패배했다. 이에 카푸아를 재차 공격했지만, 살레르노 인근의 포리노 전투에서 또다시 패배했다. 그해 말 로마를 방문하여 판테온을 비롯한 옛 건축물들의 장식이나 청동을 떼내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고, 666년 교황의 라벤나 대주교에 대한 간섭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후 사르데냐, 칼라브리아 등지를 순행하며 연공을 강요했다.
얼마 후, 아프리카 속주 총독 게나디오스 2세가 공물을 증액하라는 콘스탄스 2세의 칙사를 쫓아내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665년 엘레우테리오스가 콘스탄스 2세를 위해 역적을 처단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민병대를 일으켜 게나디오스를 축출하고 총독을 자칭했다. 게나디오스는 다마스쿠스로 달아난 뒤 무아위야 1세에게 자신이 총독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했다. 무아위야 1세는 즉시 우크바에게 아프리카 원정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게나디오스는 이들을 따라가다가 665년 말 알렉산드리아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우크바는 그대로 아프리카 속주를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했고, 시칠리아에서 달려온 동로마 장군 니키포로스를 격파한 뒤 이집트로 회군했다.
668년 9월 15일 콘스탄스 2세는 시라쿠사의 궁정 욕탕에서 시종장에게 살해되었고, 16세의 콘스탄티노스 4세가 새 황제로 즉위했다. 이때 콘스탄스 2세의 암살 배후였던 시칠리아 원정군 장군이었던 미지지오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콘스탄티노스 4세는 즉시 원정군을 일으켜 시칠리아로 가서 로마 총대주교인 비탈리아노의 지원에 힘입어 7개월 만에 미지지오스 일당을 사로잡아 처형한 후 비탈리아노의 도움에 보답하고자 로마 교구에서 독립하려던 라벤나 교구가 로마 교구에 예속된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반란의 위험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칼리프 무아위야 1세는 아르메니아의 군 사령관인 사보리우스로부터 자신이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기 위해 도와달라는 요청을 접수했다. 그는 아들 야지드에게 즉각 군대를 이끌고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게 했다. 야지드는 칼케돈에 도착하여 동로마 제국에게 메우 중요한 요새 중 하나였던 아모리온을 점령했다. 뒤이어 이슬람 군대는 669년 카르타고와 시칠리아를 공격했다. 670년, 이슬람군은 시지쿠스를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기 위한 기지를 세웠다. 또한 그들의 함대는 672년 스미르나와 다른 해안 도시들을 점령했다. 콘스탄티노스가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사이, 슬라브족은 테살로니카를 포위했다.
672년, 이슬람 함대는 헬레스폰트를 지나 마르마라 해로 들어와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해로로 불과 8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시지쿠스 반도에 주둔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할 준비에 착수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674년, 이슬람 함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그들은 육중한 공성기와 거대한 투석기를 싣고 와서 성벽과 방어 병력을 한꺼번에 포격하려 했다. 그러나 마르마라에서 황금뿔 지대까지 늘어서 있는 요새들은 적의 공세를 훌륭하게 방어했는데, 바로 이 시점에서, 그 유명한 그리스의 불이 등장해 이슬람군의 함대는 화염에 휩싸였고 배에 탄 병사들은 살기 위해 앞다퉈 바다로 뛰어들었다.
675년 봄, 이슬람 함대는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이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이슬람군은 678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게다가 육로에서 그들을 돕기로 했던 마르다이트족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결국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패배한 칼리프 무아위야는 679년 콘스탄티노스의 강화 제의를 받아들여 그동안 점령했던 에게 해의 섬들을 반환하고 황제에게 매년 노예 50명, 말 50마리, 금 3천 파운드의 공물을 보내기로 했다. 그 후 무아위야는 1년 뒤 사망했다.
680년 11월 콘스탄티노스는 170명 이상의 주교들을 수도로 모이게 한 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개최했다. 공의회는 열 달에 걸쳐 18차례 열렸다. 콘스탄티노스는 그 중 처음 11차례와 마지막 회기에서 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해당 공의회에서 단성론과 단의론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정통교회의 교리만을 따르기로 합의하였고, 681년 9월 16일에 열린 최종 회의에서, 그는 만장일치로 결정된 합의서에 서명했다. 이리하여 오래도록 지속된 교리 분쟁은 표면적으로나마 종식되었다.
그러나 공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콘스탄티노스는 발칸 반도의 제국 영토를 잠식해가는 불가르족을 공격하기로 했다. 680년, 황제는 대규모 함대를 직접 이끌고 보스포루스를 거쳐 흑해로 들어가 다뉴브강 삼각주 바로 북쪽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그런데 그는 사전에 척후병을 보내지 않아 이 지역이 늪이 많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결국 동로마군은 조직적인 행군을 하지 못했고 병사들 사이에 전염병이 창궐했다. 급기야 콘스탄티노스는 통풍에 걸려 인근의 메셈브리아로 가서 며칠 쉬었다. 그런데 돌연 황제가 도망쳤다는 소문이 돌자 병사들이 겁먹고 도주했다. 아스파루흐가 이끄는 불가르족은 이 틈을 타서 추격하여 다뉴브 강을 건너 모에시아까지 진격하여 제국군 병사들을 학살했다.
다뉴브강 이남으로 진군한 불가르족은 여세를 몰아 일곱 개의 슬라브 종족을 손쉽게 정복하고 불가리아 제1제국을 세웠다. 황제는 앞서 입은 뼈아픈 패배 때문에 당장 불가르족에게 대적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공물을 바치고 불가리안의 국가를 인정해야 했다.
681년, 콘스탄티노스 4세는 형제들을 끌어내리고 단독 황제가 되려 했다. 그러자 아나톨리아의 한 부대가 수도를 향해 진군하면서 콘스탄티노스에게 두 동생을 공동 황제로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하늘이 삼위일체에 의해 통치되므로 지상도 그래야 한다는 기묘한 논리를 제시했다. 콘스탄티노스는 그 부대의 지휘관들에게 논의를 해보자며 궁전으로 초대했다.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었다. 그들은 궁전에 들어오자마자 곧장 체포되어 현장에서 처형되었다. 그들의 시신은 갈라타 교외의 교수대에 내걸렸고 사람들은 콘스탄티노스에게 복종했다. 이후 콘스탄티노스는 두 동생 이라클리오스와 티베리오스의 코를 잘라버리고 기록말살형에 처했다.
685년 9월 14일, 콘스탄티노스는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향년 33세. 사후 아나스타시아 황후 사이에서 낳은 장남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즉위하게 되는데, 1세기 가까이 이어져 온 이라클리오스 왕조에 암운이 드려지게 된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즉위할 당시 공교롭게도 우마이야 왕조의 아브드 알 말리크도 5대 칼리파로 즉위하였다. 686년, 장군 레온티오스는 캅카스로 진군하여 알바니아 (아제르바이잔의 고대 지명)에서 아랍 군대를 격파하였다. 한편, 내부의 불안 (이븐 주바이르 등)에 먼저 집중해야 했던 말리크는 688년에 동로마 제국과의 평화 조약을 갱신하였고, 일시불로 1,000 노미스마타를 지급하며 매주 금요일마다 말과 노예를 바치기로 하였다. 또한, 키프로스와 이베리아 (현재 조지아 중부), 아르메니아의 세금도 양국이 양분하기로 하였다. 특히 키프로스는 근현대에도 상당히 이례적이고 전근대에는 전례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던 양국의 공동통치구역(Condominium)으로 삼았다.[66] 그 밖에도 시리아 해안의 그리스도교 해적인 마르다이트를 동로마 측에 귀순시켜 헬라스 테마의 노꾼으로 정착시켰다. 이렇듯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치세는 7세기의 황제들 중 가장 순조롭게 시작하였다.
이후 688 ~ 689년에 걸쳐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불가르 칸국을 공격, 그 예속민인 슬라브인들을 생포하였고, 인구가 감소하던 아나톨리아로 그들을 이주시켰다. 그 숫자는 무려 25만 명에 이르렀는데, 소아시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67] 참고로 이렇게 유럽에서 얻은 인구 집단을 아시아로, 아시아에서 얻은 인구 집단을 유럽으로 재배치하는 것은, (멀리 재배치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이산가족으로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인적 집단 자체를 한 덩어리로 유지시키지 않고 분산배치했던 것과 더불어, 로마의 전통적인 디바이드 앤 룰 통치술이었다.[68] 아예 자기의 연고지와 한참 먼 지역으로 재배치되면 그 곳 현지인들과는 말부터가 잘 안 통하니 뭉쳐서 반란을 선동한다던지 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고, 기댈 데는 제국 당국밖에 없게 된다. 동쪽 출신 사람을 서쪽에, 서쪽 출신 사람을 동쪽에 배치함으로써 제국 내 지역색을 줄이고 통합을 추구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어쨌든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그들을 자작농으로 만들어 귀족 지주들의 간섭을 피하게 하였으나 대신 막 정착한 이들에게 과도한 세금[69]을 부과하였다. 따라서 슬라브인들은 당연히 불만이 많았고 결국 691년에 우마이야 왕조와의 전쟁 시에 아랍 측에 2만여 명이 투항해 버리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그러자 분노한 황제는 니코메디아에 슬라브인들을 모은 후 수천여 명을 죽여 마르마라해에 던져버렸다.
690년 동로마 제국은 우마이야 조와 협정을 갱신해 자국의 동전을 주조해 그대로 받치게 했다. 692년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새겨진 노미스마 금화를 주조하기 시작하였다. 이슬람 교리에 따라 인간의 모습을 새기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 칼리파는 황금의 무게는 같게 하되 예수의 모습이 없는 동전을 주조하여 바쳤는데,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그를 빌미로 삼아 선전포고하였다.
허나 재차 발생한 아랍과의 전쟁은 이전과 달랐다. 당시는 이븐 주바이르가 메카에서 마지막 저항을 할 무렵이었고, 이슬람 사회가 재차 단결된 것을 확신한 우마이야 조의 칼리파 말리크는 즉각 반격에 나서며 동생인 무함마드 이븐 마르완에게 아나톨리아 공격을 명령하였다. (692년) 그후 아나톨리아 동부의 세바스토폴리스[70]에서, 동방 군사령관 레온티오스가 아랍 군대와 맞서 그들의 1차 공격을 격퇴해 냈다. 유리해 보이던 전황은, 무함마드 이븐 마르완이 본래 불만이 많던 동로마 측의 슬라브 군인들을 매수하며 결정되었다. 20,000여 명의 슬라브 병사들이 진영을 이탈하였고, 아랍 군대는 손쉬운 승리를 거두었다. 황제는 지금까지 잘 싸우다가 단 한 차례 배신으로 패배한 레온티오스를 문책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이 결정적인 전투로 동로마 제국은 아르메니아를 상실하였고 향후 200년 넘게 회복하지 못하였다. 결국 금화 문제로 빌미를 잡아 전쟁을 개시하지 않은 것만 못한 상황이 되었다.
이슬람 제국과의 전쟁 전인 691년 유스티니아노스는 165명의 동방 주교들을 소집해 퀴니섹스툼 공의회를 소집했다. 'quin'은 라틴어로 5, 'sex'는 6으로, 이 공의회는 제5차와 제6차 세게 공의회 이후에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다뤘다. 하지만 이 공의회는 황제가 종교 문제에 깊숙이 개입해 시시콜콜한 문제를 논의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진행되었다. 이 공의회에서 제정된 교회법은 그 시대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가령, 교회법 3조는 성직자의 재혼을 금지하며 세례를 받은 뒤 과부, 창녀, 노예, 여배우와 결혼한 남자는 절대 사제가 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또한 교회법 11조는 사제는 유대인 의사에게서 진료를 받거나 유대인과 함께 목욕탕에 들어가지 말 것을 규정해 이 시대의 반유대주의를 보여준다. 그 외에도 온갖 사소해보이는 것까지 중요하게 다뤘는데, 692년 공의회가 마무리 되었으나 문제는 동방교회는 찬성했으나 서방 교회 측은 대표들이 참석조차 하지 않은데다가 일방적으로 따르라는 통보에 로마 총대주교인 세르지오 1세가 거부 의사를 보였고, 이에 유스티니아누스 2세 황제는 세르지오 1세를 잡으러 라벤나 총독 요안니스 2세 플라티노스에게 지시를 내렸고, 요안니스 2세는 자신의 심복인 자카리아스를 보내지만 자카리아스가 교황을 잡으러 로마에 들어오자, 오히려 그를 따르던 병사들이 로마 시민들과 함께 자카리아스를 감금했다. 자카리아스는 교황의 침대로 피신했다가 세르기우스 1세가 직접 중재에 나선 덕분에 겨우 살아 나왔다. 황제는 이에 분노를 터트렸지만 교황을 해치우려 병력을 보내려고 했다.
695년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그리스의 슬라브 인들을 복속시키고 헬라스 테마를 설치하였는데, 그 스트라테고스로 2년 전에 투옥시켰던 레온티오스를 임명하였다. 하지만 레온티오스는 부임하러 가기는커녕, 비슷한 처지의 감옥 시절 고위직 수감자들 및 콘스탄티노폴리스 청색당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힘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성공했다.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찬탈당한 후 쇠사슬에 묶인 채 군중으로부터 비난과 욕설을 들으면서 원형 경기장을 한바퀴 돌았다. 그는 목숨만은 건졌지만 코가 잘린 후 크림 반도의 헤르손[71]으로 유배되면서 20년간의 혼란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2.6. 20년간의 혼란
695년 레온티오스는 제위를 찬탈하는데 성공했지만 697년, 우마이야 왕조 알 말리크 이븐 마르완 칼리프가 이끄는 이슬람 군대에게 카르타고를 빼앗기면서 인기가 급락하고 말았다. 레온티오스는 카르타고를 탈환하기 위해 게르만족 출신 장군 아프시마로스를 지휘관으로 한 병력을 보냈으나 실패해 함대는 크레타 섬으로 후퇴했는데,, 아프시마로스는 반란을 일으켜 제위를 찬탈했다. 레온티오스는 유스티니아노스 2세에게 했던 것처럼 코와 혀가 잘리고 달마티아의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아프시마로스는 이름을 로마식으로 바꾸어 티베리오스 3세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티베리오스 3세는 로마 제국의 최초이자 마지막 게르만족 황제로 즉위했다.티베리오스 3세는 카르타고의 탈환을 포기하지만 그의 동생인 헤라클리오스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소아시아와 시리아에서 성공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고, 그나마 헤라클리오스는 탁월한 지휘관으로 이슬람 군대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아나톨리아의 방어를 강화한 뒤 700년과 701년에 북부 시리아를 급습하여 승리를 거뒀다. 이후 그의 군대는 아르메니아의 영토를 잠시 장악했고, 703년과 704년 이슬람 군대가 킬리키아를 급습해오는 것을 가볍게 물리쳤다.
동생의 활약으로 동방을 안정시킨 티베리오스 3세는 행정 체계를 재정비한 후 키프로스 섬의 부족한 인구를 늘리기 위해 다마스쿠스에 있는 칼리파에게 사절단을 보내 포로로 잡힌 키프로스 출신 포로들을 풀어주라고 요청해 승인을 받아낸 뒤 키프로스 출신 포로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또한 그는 키프로스 섬의 방어를 강화함으로서 동부 지중해의 재해권을 확보했다. 또한 티베리오스 3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해상 성벽을 수리해 수도의 방어 상태를 강화했다. 한편 티베리오스는 귀족 바르다네스[72]를 세팔로니아 섬으로 유배보냈다
그러나 케르손으로 추방당한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다시 황제로 권토중래하기 위해 지지자들을 규합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차 도모하려 했다. 702년 또는 703년 초, 케르손 현지 당국은 유스티니아노스 일당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를 눈치챈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자신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면 처형될 거라고 여기고 몰래 케르손을 빠져나와 하자르족의 카간인 이부지르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이부지르는 그를 크게 환대하고 여동생을 시집보냈다. 이 여동생의 원래 이름이 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스티니아노스 2세와 결혼한 뒤 이름을 의미심장하게도 테오도라로 바꿨다.
704년 어느 날, 제국의 사절이 이부지르의 궁정을 방문해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넘겨주면 많은 돈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이부지르는 처음엔 거부했지만 제국의 압력을 받자 마침내 굴복했다. 며칠 후, 한 무리의 병사들이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있는 파나고리아를 찾아갔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위해 파견된 경호병이라고 밝혔지만,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왔다는 걸 눈치챘다. 그는 병사들의 두 지휘관을 따로 자기 집에 초대해 그들이 집 안에 들어오는 순간 바로 달려들어 목을 졸라 죽여버렸다.
그 뒤 임신한 테오도라를 남긴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항구로 나와 낚시배 한 척을 징발한 후 한밤 중에 크리미아 해안을 돌아 케르손으로 향했다. 그는 지지자들을 비밀리에 규합한 후 야음을 틈타 배를 타고 서쪽으로 흑해를 가로질러 항해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이 탄 연약한 배는 사나운 폭풍을 만났다고 한다. 그때 한 사람이 황제에게 신의 분노를 달래려면 그가 제위를 되찾았을 때 예전에 그에게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을 모두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한 놈이라도 살려주느니 차라리 지금 당장 물에 빠져죽겠다!"
얼마 후 폭풍은 가라앉았고, 배는 무사히 불가르족의 영토인 도나우 강 삼각지대에 도착했다. 불가르 칸 테르벨은 하자르족의 카간이 그랬던 것처럼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따뜻하게 맞아줬고 그의 제위를 되찾아주기 위해 모든 군사적 지원을 해주는 대가로 부제의 직함을 받고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딸을 아내로 맞기로 했다. 마침내 705년 봄,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슬라브족과 불가르족을 끌고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마치 콧구멍에서 콧물을 닦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의 죽음을 명하였다.
파울루스 디아코누스[73]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앞에 도착한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3일 동안 대기하면서 수비병에게 성문을 열라고 요구했지만 수비병과 시민들은 조소와 욕설을 퍼부었다. 그동안 정찰병들은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았던 옛 수도가 성벽 아래를 통해 도시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에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병사 몇 명만을 데리고 직접 수도를 따라 들어가서 성벽의 북쪽 끝에 위치한 블라케르니아 궁전의 바로 바깥에 도착해 졸고 있는 경비병들을 해치웠다. 이렇게 해서 궁전은 유스티니아노스 2세와 병사 몇 명에 의해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이튿날 아침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궁전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접한 티베리오스 3세는 비티니아로 도망쳤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야만족에게 약탈당하느니 항복하기로 하고 유스티니아노스 2세에게 복종했다.파울루스 디아코누스[73]
얼마 후, 티베리오스 3세는 체포되었고,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폐위시키고 코를 잘랐던 레온티오스도 수도원에서 끌려나왔다. 706년 2월 15일, 두 사람은 사슬에 묶인 채 시내를 가로질러 원형 경기장을 돌았고, 시민들은 그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오물을 던졌다. 그후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그들의 목에 발길질을 한 번씩 가했다. 그러자 군중은 성경의 시편 91장 13절[74]를 읊었다. 이후 두 사람은 형장으로 끌려가 참수되었다.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제위에 복귀한 뒤 불가르 왕 테르벨의 어깨에 자주색 황제복을 걸쳐주며 그를 부제로 공식 임명했다. 이후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티베리오스 3세와 레온티오스의 측근 및 지지자들을 모조리 참수하거나 교수형에 처했고, 두 반역자의 대관식을 치러준 갈리니쿠스 총대주교는 두 눈을 뽑힌 후 로마로 추방되었다. 그 밖에 수많은 시민들이 고문과 사지 절단 형벌을 당했다. 한편 하자르족의 카간 이부지르는 테오도라와 아들 티베리오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고, 테오도라는 로마 제국 역사상 최초의 이민족 출신 황후가 되었다.
복위한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전임 티베리오스 3세 대에 사로잡은 아랍인 포로 6,000여명을 우마이야 조에 송환하였고, 칼리파 왈리드 1세에게 메디나의 대모스크 재건을 위한 금과 숙련공, 모자이크 장식을 보내주었다. 이에 대한 답례로 왈리드는 수십 톤의 후추와 향신료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돈을 아무리 퍼부어도 사방의 적들은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유능한 장군들을 대거 숙청한 것을 좋은 기회로 여겼다. 708년 동로마군은 불가리아의 성장세를 두려워한 황제의 명에 따라 다뉴브 강 하구의 앙키알로스를 공격했지만 불가르 국왕 테르벨에게 참패했다. 그리교 709년엔 아랍군이 카파도키아의 중요한 요새 티아나를 함락시켰다.
709년 봄,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테오도루스에게 함대를 맡겨 라벤나로 파견해 사사건건 제국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들을 제압하게 했다. 라벤나에 도착한 테오도로스는 황제의 이름으로 연회를 열어 모든 고관들을 초청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고관들은 아무 의심 없이 약속된 날짜에 연회에 참석했다가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다. 황제는 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으나 펠릭스 대주교만이 실명형에 처해진 후 폰투스에 유배되었다가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처형된 뒤에야 자기 교구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한편 테오도로스의 병사들은 라벤나를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라벤나 시민들은 당연히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이같은 조치에 분노해 봉기를 일으켰고 라벤나 총독부는 수년간 마비되었다.
하지만 로마 총대주교인 콘스탄티노는 이런 상황에서도 퀴니섹스툼 공의회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710년에 출발한 교황은 711년 초봄에 도착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와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아들이자 공동황제인 티베리오스의 성대한 영접을 받았다. 교황 일행은 금으로 된 마구를 달고 화려한 옷을 입힌 말을 타고 금문을 통해 공식적으로 수도에 입성하여 플라키디아 궁전으로 행진했다. 당시 니케아에 있었던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환영의 서신을 보내 니코메디아로 가는 길의 중간 지점에서 마나자고 제안했다. 교황은 선뜻 동의했고, 이틀 뒤 두 사람은 만났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광경이 연출되었다. 수많은 이들을 잔혹하게 학살한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정복을 입고 제관을 쓴 차림으로 바닥에 엎드려 교황의 발에 입을 맞춘 것이다! 이후 황제는 일요일에 교황이 주재한 성찬식에 참석하여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빌었고, 교황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서 회의를 시작했다. 교황은 퀴니섹스툼 공의회의 교회법 중 약 절반 가량을 승인했고, 황제는 나머지 조항들을 폐기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작별했고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교회의 모든 특권을 부활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교황은 로마를 출발한 지 1년 만인 711년 10월에 로마에 도착했다.
711년 초,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케르손 공격에 나섰다. 당대의 역사가 니케포루스와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황제는 케르손 시가 자신을 찬탈자 티베리오스 3세에게 넘겨주려 한 것에 복수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황제는 복위한 지 6년이 지난 후에야 케르손을 공격했기 때문에 정말 그랬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사실 케르손은 하자르족의 카간이자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처남이었던 이부지르가 임명한 총독의 지배하에 놓여 있어서, 유스티니아노스 2세로서는 케르손을 되찾기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원정군은 목적을 달성했다. 케르손 시 지도자 7명이 산 채로 화형에 처해졌고, 수많은 시민들이 돌멩이가 매달린채 강물에 던져졌으며, 하자르족 총독과 시장 조일로스를 포함한 30명 가량은 가족과 함께 사슬에 묶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다. 또한 엘리아스가 케르손 총독에 임명되었고 많은 동로마 병사들이 이곳에 주둔했다. 그런데 황제가 원정군을 귀환시키던 중 흑해에서 폭풍이 닥쳐 함대가 뒤집히며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광기가 가득찬 채 크게 웃었다고 한다.
얼마 후, 하자르족이 케르손으로 쳐들어와서 동로마군이 도시 방어에 나섰지만, 엘리아스 총독과 제국군 수비대가 하자르족에게 투항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하자르족 총독과 시장 조일로스를 석방하고, 300명의 호위대를 붙여 케르손으로 돌려보냈다. 아울러 로고테테스 책임자인 시리아의 게오르기우스를 보내 이번 사건에 대한 사과를 이부지르 카간에게 전하게 하는 한편, 엘리아스 총독과 바르다네스를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학살을 경험한 케르손 시민들은 이미 유스티니아노스 2세에게 돌아선 상태였다. 그들은 게오르기우스를 처형했고, 제국에 반기를 들었다. 여기에 크리미아의 여러 도시들이 가세해 공식적으로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불신임하며 바르다네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바르다네스는 옛 로마식 이름인 '필리피코스'로 이름을 고치고 황제를 자칭했다.
케르손 시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파트리키우스 마우루스에게 케르손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성 안에 살아있는 것은 모조리 죽이라는 끔찍한 명령을 내렸다. 마우루스는 거대한 공성기를 가지고 와 케르손의 방어용 망루 두 개를 파괴했다. 그런데 하자르족 대병력이 도착하자, 마우루스는 중과부적이라고 판단하고 필리피코스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후 반란군은 여세를 몰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갔다.
이 당시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수도를 떠나 아르메니아에서 일어난 소규모 봉기를 진압하러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필리피코스가 마우루스를 굴복시키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최대한 서둘러 수도로 돌아오려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먼저 도착한 필리피코스는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수도에 입성했다.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도망쳤지만 몇달 전 자신이 케르손의 총독으로 임명했던 엘리아스가 지휘하는 병사들에게 체포되었다. 엘리아스는 자신이 직접 처형을 담당하겠다고 나서서 단칼에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목을 베어 머리를 새 황제에게 보내고 시신을 마르마라 해에 던졌다.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모친인 아나스타시아 태후는 황급히 어린 손자 티베리오스를 데리고 블라케르나이에 있는 성모 성당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필리피코스의 부하 2명이 들이닥쳐 황태자를 내놓으라고 다그쳤다. 늙은 태후가 애원했으나, 요한네스 스트로우토스라는 부하가 한 손으로는 제단을, 다른 손으로는 성십자가의 한 조각을 움켜쥔 채 덜덜 떨고 있던 티베리오스에게 다가갔다. 그는 소년의 손아귀에서 십자가 조각을 빼앗은 후, 공손하게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황태자의 목에 걸린 성물함을 벗겨 자기 목에 걸었다. 그 다음에는 소년을 이웃 성당의 현관으로 끌고 가서는 옷을 벗기고 목을 베었다. 이리하여 이라클리오스 왕조는 창건자 이라클리오스의 4대손[75]인 유스티니아노스 2세 대에서 종말을 맞게 되었다.
황위에 오른 필리피코스는 예전에 끝났던 신학 논쟁을 부활시키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단의론 신봉자임을 밝히고 제6차 세계 공의회의 결정, 즉 단의론 폐기를 거부하는 칙령을 반포했으며, 공의회의 회의 장면을 묘사한 황궁의 그림을 치우고 밀리온 성문에 부착된 공의회의 장식판을 떼어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유스티니아노스 2세와 친분이 있었던 로마 교황 콘스탄티누스는[76] 격분해 필리피코스의 칙령을 거부하고 새 황제의 초상을 주화에 찍는 것, 황제의 치세로 문서의 날짜를 정하는 것, 교회 기도자의 명단에 그의 이름을 넣는 것을 금지했다. 파울루스 디아코누스(부제: Paul the Deacon)에 따르면 필리피코스의 서신을 교황은 이단으로 여기면서, 로마 시민(Populus Romanus)의 지지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화의 기제로서 언급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분쟁의 상대 또한 (동)로마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뒤에는 로마 시민들의 지지가 있다고 했다는 점이다. (국가로서의) 로마로부터 (도시 및 교회조직으로서의) 로마가 분리해 나가려는 독자정체성을 주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77] 또한 교황은 황궁의 그림을 없앤 것에 대한 보복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78]의 벽을 제1차에서 제5차 세계공의회 전부를 그린 그림들로 특별히 장식하라고 명령했다.
712년, 불가르 족의 왕 테르벨은 자신이 후원했던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죽음을 빌미로 삼아 동로마 제국을 침략했다. 이전에, 그는 복위를 도운 공로로 유스티니아노스 2세로부터 제국의 부제로 인정받고, 황제의 자의를 착용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부제로서 찬탈자를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여러 촌락들을 파괴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벽에 들이닥쳤다. 필리피코스는 마르마라 해 건너편에 있는 옵시키온 테마에 주둔한 제국군에게 당장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와서 침략자들을 격퇴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 요청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옵시키온 군대는 필리피코스에 대한 충성심이 전혀 없었고 제국을 위기에 빠뜨린 그를 폐위시키고 새 황제를 옹립하기로 결정했다. 713년 6월 3일, 병사들은 황궁을 습격하여 오전 연회를 즐기고 낮잠을 자고 있던 황제를 끌어내 원형 경기장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녹색당 소속 전차 경주 선수들의 탈의실로 데리고 가서 황제의 두 눈을 뽑았다. 이후 원로원은 전 황제의 비서장이었던 아르테미우스를 황제로 추대했고, 아르테미우스는 이름을 아나스타시오스로 개명한 후 제위에 올랐다.
황위에 오른 아나스타시아 2세가 먼저 한 일은 필리피코스를 실명시킨 병사들을 처형한 것이었다. 이후 그는 제6차 세계 공의회의 결정을 지지했고, 전임 황제가 임명했던 단의론 성향의 대주교를 정통파인 게르마누스로 교체했다. 또한 필리피코스와 갈등을 빛었던 로마 교황 콘스탄티누스와 화해했다.
이렇듯 전임 황제로 인해 소란스러웠던 국내 문제를 정리한 아나스타시오스 2세의 다음 문제는 외세의 침략이었다. 앞서 동로마 제국을 침략했던 불가르족은 옵시키온 군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자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왈리드 1세의 활발한 정복 활동(이베리아 반도(구 서고트 왕국) & 중앙 아시아)을 지켜보면서 다음 원정 대상이 동로마 제국이 될 것을 우려했다. 그는 다마스쿠스로 사절단을 파견해 평화를 원한다고 하며 한편으로는 염탐을 할 것을 명령했다.
사절단이 복귀하여 이슬람 군대의 다음 목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보고하자, 황제는 그에 대한 대비를 시작했다. 제국의 수도를 지키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전면 보수되었고, 금각만에서 함선 건조가 시작되었으며, 식량의 대대적인 비축도 진행되었다. 황제는 시민들에게 각자 3년치의 식량을 저장해 놓을 것을 하달하였고 그럴 역량이 못되는 사람들은 포위 동안 도시를 떠나 피난해 있을 것을 권고하였다. 715년, 원정을 준비하던 왈리드가 죽고 젊은 칼리파 술라이만이 즉위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황제는 이슬람 세력이 새 칼리파 즉위로 어수선한 틈을 타 선제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715년 초,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로고테테스 장군 요안니스를 로도스 섬으로 파견해 원정군을 조직하게 했다. 그런데 옵시키온 군대는 지난날 필리피코스를 폐위한 동료들을 처형한 황제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켜 요안니스 장군을 곤봉으로 때려 죽이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면서 평범한 징세관이었던 테오도시오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테오도시오스는 틈을 봐서 산으로 도주했지만 병사들이 추격해 도로 잡혔다. 결국 그는 병사들이 칼을 들이대며 협박하자 어쩔 수 없이 황제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수도에 도착한 반란군과 몇달 동안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나 끝내 패배했고 니케아로 도망쳤다가 716년에 항복하고 테살로니카의 한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719년,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테오도시오스 3세를 쫓아내고[79] 제위에 오른 레온 3세에 대항해 불가리아 칸 테르벨의 지원을 받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군대는 그해 11월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으나 레온 3세의 진압군에게 궤멸되었고,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체포된 뒤 사형에 처해졌다.
즉위 직후 이슬람 군대가 제국에 쳐들어왔다. 이에 테오도시오스 3세는 이슬람군에 맞서 싸우는 한편 불가리아와 우호적인 협정을 체결해 후방을 안정시켰다. 717년, 아나톨리콘의 스트라테고스였던 레온 3세가 반란을 일으켰다. 레온이 이끄는 반란군은 니코메디아에서 테오도시오스 3세의 아들이 이끄는 소규모 군대를 무찌르고, 테오도시오스 3세의 아들을 체포했다. 이후 레온은 총대주교와 원로원을 상대로 협상했다. 억지로 황위에 올랐던 테오도시오스 3세는 선뜻 황제의 관을 레온에게 보내고 자신은 퇴위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며, 717년 3월 25일 정식으로 제위에서 물러났다. 레온은 별다른 저항 없이 자신에게 선뜻 황관을 넘긴 것에 대한 보답으로 그를 에페수스의 수도원으로 보내 여생을 편안히 보내게 했다. 레온 3세의 즉위과 함께 20년 동안의 혼란은 끝이 났고, 아사브리아 왕조가 성립되었다.
2.7. 이사브리아 왕조
이사브리아 왕조를 창건해 20년간의 혼란을 종식한 레온 3세는 그는 즉위 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해로에서 공격한 이슬람 해군을 불가리아 제1제국의 칸이었던 테르벨과 함께 서기 717년 7/8 15일 ~ 718년 8월 15일 동안 진행된 해전에서 격퇴하였고, 719년 불가르 칸의 지원을 받고 황위 복귀를 꾀한 아나스타시오스 2세가 반란을 일으키자 레온 3세가 불가리아 측에 항의하는 서신을 보내자[80] 그들은 제국 국내 문제에 끼어든 것(transgression)을 사과하면서 오히려 아나스타시오스 2세와 그 일파들을 체포해 레온 3세에게 넘겨주었고(...) 이들은 당연히 내전에 외국군을 끌어들인 외환의 죄를 지은 것이 되어 모두 처형당했다.[81] 이후 아랍을 상대로 이에 대한 예방전쟁 차원으로 해군을 보내 시리아의 라오디케아(라타키아)를 약탈[82]하는 등 성과를 거뒀지만, 아랍군은 곧 회복되어 공세를 개시해 이코니움과 카이사레아를 약탈하였고, 아르메니아로 진군한 동로마군을 격파했다.이후 20년간의 혼란기로 인한 제국 정부를 쇄신하는 등 내부 개혁을 단행했다. 다만 시리아 출신으로 내심 이슬람교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던 레온 3세는 721년 칼리프 야지드 2세가 자기 영토 내의 모든 성당, 시장 주택에서 그리스도교의 성상들을 즉각 파괴하게 했을 때, 레온은 전혀 항의하지 않았다. 또한 레온은 725년에 대중들 앞에서 성상에 대한 공경 행위가 모세의 십계명 중 둘째[83] 계명[84]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726년 여름, 테라 섬과 테라시아 섬 사이의 에게 해에서 해저 화산 폭발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해일이 발생했고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레온은 이를 제국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해석하고 성상 공경을 우상 숭배로 간주하며 본격적으로 성상 파괴 운동을 개시했다. 그는 우선 소피아 대성당의 입구에 위치한 칼케 대문 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대형 성화를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시민들은 파괴 작업을 감독하는 지휘자에게 거센 공격을 가해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고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여기에 에게 해의 함대와 트라키아의 육군에서도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이시기 법률 개정판인 <에클로가(Ecloga)>를 발표했는데, 해당되는 처벌이 사형으로 규정되어 있었던 죄의 상당수를 '신체훼손형'(mutilation)으로 낮추었다. 한편 그러면서도 인구를 늘리기 위함이었는지, 낙태를 불법화했고 동성애의 최대 처벌을 사형으로 규정했으며, 이혼에 어느 정도의 제한을 가했다. 종전의 사형 수위를 낮추었으면서도 동성애에 대해서는 오히려 새로이 사형까지 할 수 있게 한 것은 인구 문제에서는 타협은 없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727년, 라벤나 총독령의 백성들은 황제가 성상 파괴운동을 벌이는 것에 격노해 교황 그레고리오 2세의 지원을 받으며 반란을 일으켰다. 파울로스 총독은 살해되었고 휘하의 관리들은 달아났다. 반란군은 자체적으로 지휘관을 뽑고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다. 또한 투시아에서 티베리오스 페타시오스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황제를 칭하다 3년만에 진압되었다. 레온은 군대를 파견해 라벤나의 반란군을 제압하는 한편 3년간 동서방의 교회 지도자들과 협상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황제는 730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제르마노스를 해임하고 유약하고 고분고분한 성직자 아나스타시오스를 세계 총대주교로 앉힌 뒤 마침내 성상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 칙령으로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던 성상과 성물들이 파괴되었고, 성상을 간직한 자들은 체포되어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한편 거의 같은 시기에 소아시아 남부의 카라비시아노이 테마와 그리스 지역의 헬라스 테마에서도 아갈리아노스 콘토스켈레스 등의 주도로 반란이 일어났지만 진압당했다.[85]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이러한 황제의 칙령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에 레온은 그레고리오 2세를 체포하기 위해 함대를 보냈으나 아드리아 해에서 풍랑으로 침몰해버렸고 그 직후 교황은 병으로 사망했다. 후임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731년 초 황제가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의 교회들에서 나오는 연간 수입을 몰수해버리자 그해 11월에 시노드를 소집하여 "성상에 불경스럽게 손을 대는 자는 파문에 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에 황제는 시칠리아, 칼라브리아, 그리고 발칸 지역의 교구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관할로 옮기는 것으로 응수했다. 이렇듯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갈등은 성상 파괴운동으로 인해 갈수록 격화되었다.
참고로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관할구역상 경계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정해졌던 다키아 및 마케도니아 관구와 트라키아 관구[86]가 이 때까지 그대로 왔었기 때문에 공교롭게도 지금 정교회의 통칭이 '그리스' 정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이 때까지 오늘날의 그리스에 해당하는 지역은 북동부 일부를 제외한 전역이 저 경계선의 서쪽에 있기 때문에 로마 교회의 산하에 있었는데, 레온 3세가 교황의 관할에서 떼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에 줌으로써 이 때부터 정교회 및 그 전신에 속하게 되었다.
727년 니케아, 739년 니코폴리에서 아랍군을 격파하였고, 730년에는 이탈리아 반도를 포함한 제국 전역에 '센서스'를 실시했다. 그런데 로마 교황은 황제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본인의 힘이 직접 닿는 로마-라벤나의 이탈리아 중북부 지역에서는 센서스를 못 하게 막았다고 한다. 740년 아크로이논 전투에서 아나톨리아 반도로 침입한 아랍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은 수세에서 벗어나 아랍을 상대로 적극적인 공세를 가하기 시작했다.
741년 6월 18일 레온 3세가 사망했다. 제위는 마리아 황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남 콘스탄티노스 5세가 계승했는데, 이는 685년 콘스탄티노스 4세에서 유스티니아노스 2세로의 왕조 내 세습 이후 거의 60년만에 이루어진 세습이다.(둘 다 부자세습) 하지만 세습은 절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즉위하자마자 아르메니콘 테마의 사령관이자 본인의 매부였던 아르타바스도스에게 당시 3차 피트나로 어지럽던 우마이야를 공격하여 고토를 수복할 것을 명령하였다. 국경을 향하던 그는 수도로 회군하여 황위를 찬탈하였다. 콘스탄티노스는 부친 레오 3세와 마찬가지로 성상 파괴론자였으나 아르타바스도스는 성상 옹호론자였다. 아르타바스토스는 방패 위에 아나스타시오스 총대주교와 함께 올라 그로부터 대관을 받았다.
콘스탄티누스의 성상 파괴 진영은 아나톨리콘 테마와 트라케시안 테마로 구성되었고 아르타바스도스의 성상 옹호 진영은 아르테미콘 테마와 옵시키온 테마가 중심이었다. 743년 11월, 두 세력은 소아시아의 사르디스에서 맞부딪쳤고, 콘스탄티노스 군이 이겼다. 바로 끝난 것은 아니었고 아르타바스도스가 우마이야 왕조에 도움을 요청했던 등 다소의 전개과정이 있었지만, 결국 콘스탄티노스가 승리하여 복위하게 되었다.[87] 아르타바스도스와 두 아들 니키타스, 니키포로스는 원형경기장에서 공개적으로 실명되었고, 그에게 대관을 해주었던 아나스타시오스 총대주교는 곤장을 맞은 후 벌거벗은 채로 당나귀를 거꾸로 타고 경기장을 한바퀴 도는 수모를 받았다.총대주교 직첩도 잠깐 회수되었다가 아르타바스도스 시절에 성상 옹호론으로 돌아섰던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자 콘스탄티노스는 그를 용서해주고 총대주교에 바로 복직시켰는데, 이는 총대주교의 힘을 누르고 황권을 드높이려는 콘스탄티노스 5세의 속셈이었다.
콘스탄티노스의 재위기간은 동방의 아랍-이슬람 세계가 3차 피트나 및 우마이야-압바스 왕조교체로 혼란했던 시간이었다. 746년 동로마 군대는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게르마니키아(現 터키 마라쉬; Marash)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트라키아의 주민들을 이주시켜 도시를 방어하게 했다. 사실 7세기 동방 영토 상실 이전의 게르마니키아가 그렇게 중요한 도시는 아니었지만, 주민을 이주시킬 정도로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아버지 레온 3세의 출생지가 게르마니키아였던 것이 크게 작용한다. 영어 위키백과 Marash에 의하면 645년에 동로마가 이슬람에게 뺏겼다고 하고, 레온 3세는 685년생이므로 적국의 영토에서 태어난 것이다.[88] 하지만 이 외의 도시들은 오히려 접수하고서 고의적으로 파괴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흑사병으로 공세 및 안정화 작업이 지지부진하여 결국 다시 뺏겼다. 황제부터가 인구밀도가 높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내를 피해서 니코메디아로 피난을 갔었을 정도이니 원정과 국책사업이 제대로 굴러갔을 리가 없다. 745년 ~ 747년간 제국 내에 유행한 흑사병은 인구의 1/3을 앗아가며 541년의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이래로 제국의 가장 많은 인구 손실을 유발하였다.[89] 한편, 콘스탄티노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인구 부족을 그리스 본토 및 에게 해의 여러 섬의 인구를 이주시켜 채웠다고 한다.[90] 저 때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인구수는 2.5~5만명까지 떨어졌다고 한다. 다만 아나톨리아의 인구 부족은 달리 대처할 수 없었다. 747년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발진한 아랍 함대를 그리스의 불로 격파하였고 아르메니아, 더 나아가 (무려 백년만에) 메소포타미아까지 공격하는 위엄을 보였다. 하지만 영토는 결국 아랍 세계가 혼란상에 빠졌다고 한들 근본적인 국력차가 있어서 새 압바스 왕조가 안정되자 대부분 다시 뺏겼고, 그 사이에 현지 인구를 동로마 내지로 옮긴 것이(특히 유럽으로) 군사활동의 주 성과였다고 한다. 접수했던 여러 도시들을 일부러 파괴했던 것도, 어차피 국력차 때문에 오래 유지하지 못할 땅인데, 인구만 빼가고 도시는 파괴함으로써 아랍 측이 다시 탈환해도 동로마에 대한 유격 거점으로 쓰기 어렵게 하거나, 쓰더라도 도시 재건에 다소 시간이 걸리게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91] 어째든 이때의 승전으로 시리아, 아르메니아 인들이 제국에 투항하였는데 콘스탄티노스는 게르마니케아로의 이주로 빈 땅이 생긴 트라키아 북부에 그들을 정착시켰고 새로운 성을 쌓았다.
동방에서의 활약과는 달리, 서방에서는 제국의 위세가 약화되었다. 라벤나 시민들은 성상 파괴주의를 밀어붙이는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고, 751년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 아이스툴프가 라벤나를 점령하고 에우티키오스 총독을 죽였다. 이로서 제국의 북이탈리아 거점은 완전히 사라졌다. 라벤나 뿐만 아니라 안코나, 리미니 등 펜타폴리스 일대, 페루자도 랑고바르드 왕국에 빼앗겼다. 다만 755-6년에 걸쳐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가 랑고바르드 왕국을 축출했고, 피핀 3세는 로마 교황에게 이 영토를 헌납함으로서 교황령이 성립되었다. (피핀의 기증)
손을 놓고만 있던 건 아니라서 랑고바르드 및 교황은 물론 프랑크 왕국과도 교섭해보았지만[92] 결국 실패했다. 하지만 군사적 개입은 시도도 하지 않았다.[93] 즉 이탈리아 전선은 소아시아 전선 및 발칸 전선에 비해서 우선순위가 밀리기 때문에 -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발칸반도의 동쪽 끝에 있고 좁은 해협만 건너면 소아시아이다 - 흑사병으로 타격 받은 상황에서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포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754년 2월 10일, 황제는 칼케돈 동남쪽의 도시인 히에리아(Hieria)에서 시노드를 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가 마침 죽고 새 세계 총대주교를 뽑기 이전의 공석 상태라서 20년간의 혼란 당시의 황제였던 티베리오스 3세의 아들이자 에페소스의 주교였던 테오도시오스가 사회를 맡았고, 몇달에 걸친 회의 끝에 그해 8월 29일에 결론이 공개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은 명확히 규정할 수 없으므로 유한한 공간의 형상(이콘)으로 표현할 수 없으며 따라서 성상은 우상숭배로 간주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황제는 '새로운 콘스탄티누스(대제), 12사도와 동급이신 분, 우상숭배를 타파하신 분'으로 칭송받았다.[94]
레온 3세 때에 성상파괴운동이 시작되며 성상과 성유물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던 수도원은 탄압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 5세 시기에 그 강도는 이전과 바교할 수 없을만큼 강해졌는데, 바로 수도원의 수도자들에게 직접적인 억압이 미친 것이다. 그에 강력히 반발하던 비티니아의 대수도원장 스테파노스는 투석형으로 죽었고 트라키아에서는 수백명의 수사(남성 수도자), 수녀(여성 수도자)들이 공개적인 모욕, 신체 절단, 심한 경우에는 처형까지 받았다. 트라키시온 테마의 총독은 남녀 수도자들을 모아놓고 결혼을 강요하고 거부하자 수사들의 수염에 불을 붙이기도 하였다.
그런 식으로 제국 각지에서 수도원의 성물과 재산이 매각되어 황제의 금고로 들어갔으며 수도원 토지 역시 몰수되었다. 다만 이러한 수도원 파괴 운동의 와중에 수도원에 소장되어 있던 많은 고문서들이 파괴되어 8세기의 동로마 역사를 암흑 시대로 기록되게 하였다. 수도원 억압으로 인해 콘스탄티노스 5세는 이후, 대부분 수도원 출신이던 연대기 작가들에 의해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하지만 그를 변호해 보자면, 연속된 전쟁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위안을 찾아 수도원으로 몰려들었고, 그 덕에 수도원의 재산과 규모는 늘어났던 반면, 농촌 인구와 농업 생산성, 군인의 수가 줄어들었다. 이는 제국의 경제와 국방력에 큰 손실이 되어 콘스탄티노스는 중흥기를 준비할 인력과 재산을 창출해내려 했다고도 할 수 있다.
한편 황제를 400년 전쯤 황제인 발렌스나 율리아누스에 비유하며 비난했던 수도승 안드레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히포드롬으로 끌려와 채찍질당해 죽었다고 한다. 발렌스는 아리우스파였고,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95] 고트족에게 패하고 죽었다.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 시대에는 안 들키게 기독교인 코스프레를 했지만 즉위하자 그리스-로마 전통 다신교도임을 드러내며 다신교 부흥 정책을 내세웠으며, 페르시아 원정을 갔다가 불미스럽게[96] 죽었다. 즉 이 둘의 공통점은 정통파 기독교도가 아니며, 전사했다는 것이다. 즉 황제 당신도 성상파괴운동을 벌였으니 정통파 기독교도가 아니며, 또한 저 둘과 마찬가지로 말로가 좋지 않을 것이라고 저주했던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곱게 죽기는 힘들었다.
상술한 대로 740년대 후반의 승리로 시리아, 아르메니아 인들이 제국에 투항하였는데 콘스탄티노스는 게르마니케아로의 이주로 빈 땅이 생긴 트라키아 북부에 그들을 정착시켰고 새로운 성을 쌓았다. 이에 불가르 측은 716년의 협약 (비무장지대 설정) 위반이라 주장하며 756년 코르미소쉬 칸의 지휘 하에 남하하였지만 아나스타시아 성벽 전투에서 콘스탄티노스 5세에게 완패했고, 비네흐가 쿠데타를 일으켜 새 칸으로 등극했다. 이후 전쟁은 매년 이어졌다. 759년에는 Rishki Pass의 전투에서 불가리아가 이겼지만, 그 여세를 몰아서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평화협정을 맺자 이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비네흐와 그 일가를 모두 죽이고서 텔레츠를 새 칸으로 옹립했다. 불가리아의 슬라브인들은 이런 정세불안으로 제국으로 피난 왔고, 이들은 아나톨리아로 이주되었다.[97] 참고로 이렇게 유럽에서 얻은 인구 집단을 아시아로, 아시아에서 얻은 인구 집단을 유럽으로 재배치하는 것은, (멀리 재배치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이산가족으로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인적 집단 자체를 한 덩어리로 유지시키지 않고 분산배치했던 것과 더불어, 로마의 전통적인 디바이드 앤 룰 통치술이었다.[98] 아예 자기의 연고지와 한참 먼 지역으로 재배치되면 그 곳 현지인들과는 말부터가 잘 안 통하니 뭉쳐서 반란을 선동한다던지 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고, 기댈 데는 제국 당국밖에 없게 된다. 동쪽 출신 사람을 서쪽에, 서쪽 출신 사람을 동쪽에 배치함으로써 제국 내 지역색을 줄이고 통합을 추구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불가리아와의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과학진흥에 힘을 기울여 궁정 천문학자를 신설했다고 한다. 766년에 가뭄이 들자, 그간에는 기능을 좀 잘 못해도 그럭저럭 굴러갔던 상수도 체계를 시급하게 개보수해야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626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때 망가져서 기능이 떨어졌던 이후로 방치되었던 수도교를 개보수하는 큰 공사를 벌였다. 이 공사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는지, 저 멀리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쓰인 '나폴리 교회사'(Gesta Episcoporum Neapolitanorum)에는 이 공사가 망가진 수도관 안에 살면서 독을 뿜어내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을 죽여왔던 용을 퇴치한 것에 비유되어 있다.[99] 여러 각주에 나온 유튜브 출처 제목의 'Dragon-slayer'가 이 의미다. 이 외에도 'The Legend of Constantine V as Dragon-Slayer'라는 학술 논문 또한 존재한다. 출처는 'Eastern Roman History' 유튜브의 Constantine V: The Dung-named Dragon-slayer이다.
763년 6월 30일에 큰 전투가 일어났는데( Battle of Anchialus (763)), 콘스탄티노스는 병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친정하여 하루종일 벌어진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다. 따라서 오랜만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개선식과 그를 기념하는 경기가 열릴 수 있었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새 칸으로 옹립된 텔레츠는 얼마 재위 못 하고서 이 패배의 책임을 묻고 암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추대된 사빈 칸은 평화조약을 맺었는데, 유약해 보인다고 또 귀족들이 분개해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다고 한다.[100] 이후 우모르가 칸에 올랐으나 40일 만에 토크투, 바얀 형제에게 피살되었고, 이들 형제 역시 1년밖에 버티지 못하고 살해되었다.
뒤이어 새 칸으로 등극한 파간은 동로마 제국과의 협상을 원했고, 콘스탄티노스 5세와 협상을 논의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이 자리에서 불가리아인들의 변덕을 비난하면서, 자신은 불가리아의 평화를 수호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협상은 성공리에 마무리되는 듯했고, 파간은 수도로 귀환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는 돌연 기습을 가해 불가리아 영내를 약탈한 뒤 귀환했다. 이에 불가리아인들이 격노하여 파간에게 책임을 물었고, 그 역시 1년 만인 768년 피살되었다. 이리하여 불가리아는 칸이 7명이나 전쟁 실패의 책임을 지고 교체되는 엄청난 불안정에 빠졌는데, 이는 콘스탄티노스 황제가 재위 기간이 길었고, 또 이탈리아를 과감히 손절하며 이슬람 세력도 정권교체로 정신이 없었던 덕에 불가리아에 집중할 여력이 되어 꾸준하게 공세를 넣었던 것이 누적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101]
이와 같은 불가리아에 대한 승리를 상징하는 황제로 동로마인의 집단의식에 강하게 각인되었는지, 수십 년 뒤인 812년, 니키포로스 1세가 이끄는 로마군이 그 전 해 811년에 플리스카에서 크룸의 매복에 걸려서 황제 본인까지 전사하고, 그 여세를 몰아 콘스탄티노폴리스 목전까지 역공해 온 불가리아군의 위협에 맞닥뜨리게 된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콘스탄티노스 5세의 묘역에 몰려가서 석관에서 시신을 끌고 나온 후 시신을 향해서 "깨어나서 위험에 처한 그대의 신민들을 구해주시옵소서"하고 외쳤다고 한다.[102] 평시라면 대단한 불경죄였겠지만, 대패하고 난 직후인데다가, 침략자가 아닌 내국인으로서 황제의 묘역에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말이 시민이지 평범한 시민이라기보다는 귀족, 유력자에 가까웠을 것이다.
여하튼 이후 772년, 773~774년, 774~775년에도 불가리아에 계속 전쟁을 벌였는데, 앞의 둘은 일진일퇴였던 것으로 보이고, 뒤의 전쟁은 선공을 들어온 것을 성공적으로 막고서 해군으로 역공을 가려는데 역풍이 불어 좌절되었다.[103] 그리고 나서 텔레리그 칸은 위에서 나온 전임 칸들과 똑같이 전쟁 패배로 왕위가 위태로워지자 밀서로 망명 의사를 전하면서 불가리아에서 누구를 믿어야 할지를 물어봤는데 황제가 왜였는지 몰라도 그 명단을 알려주자 칸은 쟤들이 스파이들이구나 하고 모두 처단했다고 한다.(...)[104] 이에 대한 보복으로 775년 8월에 재차 친정에 나선 콘스탄티노스는 폭염으로 다리가 붓자 아르카디오폴리스를 거쳐 회군하였는데, 수도를 목전에 두고 배 위에서 죽었다.(9월 14일) 향년 57세였다. 한편 텔레릭은, 앞선 것처럼 궁정 내 동로마 스파이들을 죽였기 때문에 동로마로 망명할 경우에 예상되는 후환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귀족들을 더더욱 두려워했는지, 콘스탄티노스의 아들로서 새로 즉위한 레온 4세에게 망명을 타진하였다. 동로마 당국은 이를 받아들여, 피난처를 제공하고 파트리키오스 칭호를 주었으며, 이리니 황후의 사촌을 결혼상대로 붙여주었고 테오필락토스라는 세례명을 주어 정교회로 개종시켰다.[105] 부황이 적국 군주 때문에 원정을 나갔다가 병이 악화되어 죽었는데도, 그 원흉인 적국 군주가 망명해 오자 대접을 잘 해주는 것이 재미있다.
그 뒤를 레온 4세가 이었고, 그러나 레온은 결핵에 걸려 있어서 정상적인 통치가 어려웠고 황후 이리니의 보좌를 받아야 했다. 776년, 레온은 콘스탄티노스 6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공동황제로 봉했다. 그 직후 레온의 이복 형제인 니키포로스와 크리스토프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레온은 이들을 처형하라는 여론을 묵살하고 핵심 음모자들을 헤르손에 유배보내고 나머지는 용서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778년, 레온은 동방의 제국군에게 시리아를 침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비잔틴움 제국군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시리아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혔고 시리아에 거주하던 수많은 그리스도교도들이 트라키아에 강제로 이주했다. 이듬해인 779년, 아바스 왕조가 아시아 테마에 공격을 가했지만, 제국군은 이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레온은 아버지처럼 성상 파괴주의를 신봉했다. 그는 몇몇 관료들이 성상을 숭배한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내쫓았다. 하지만 이리니 황후는 성상 옹호론자였으며 이를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레온은 황후의 의향에 따라 성상 파괴의 강도를 약화시키고 유배되었던 성상 옹호론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780년 9월 8일, 레온은 결핵으로 인해 온몸에 열기가 도는 증상에 시달리다가 사망했다. 콘스탄티노스 6세가 즉위했지만 아직 어렸기 때문에, 이리니가 섭정 황태후로서 통치를 대행했다.
787년 이리니 황후의 주도로 제2차 니케아 공의회가 개최되어 성상 파괴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성상 공경을 확정지었다. 아들인 황제를 파플라고니아 유력 귀족의 딸인 암니아의 마리아(Μαρία_της_Άμνιας, 770~823)와 결혼시켰으나 당사자인 콘스탄티노스는 아내를 싫어하였던데다가 성상 파괴주의를 지지하게 되면서 모후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790년에 이리니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아들을 몰아내려 했으나, 콘스탄티노스를 지지하던 성상 파괴주의자들 등의 역공을 받고 유폐되어 콘스탄티노스 6세가 2년 동안 단독 황제로 제국을 통치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의 숙부이자 부제(Caesar)인 니키포로스가 쿠데타를 시도하고 이슬람과 불가리아의 침략까지 겹치자 콘스탄티노스는 792년에 모후를 다시 공동 통치자로 복귀시켰지만 이미 모자지간의 관계는 파탄으로 치닫고 있었다. 또한 반란을 일으켰던 니키포로스의 눈을 뽑은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사촌들이기도 한 니키포로스의 아들 4명의 혀를 뽑아 버리는 잔혹한 형벌을 내리면서 민심을 잃기 시작했다.
791년과 792년 불가리아를 상대로 원정에 착수해 할아버지 콘스탄티노스 5세의 영광을 이으려 했지만, 카르담이 이끄는 불가리아군에게 참패하고 공물을 바쳐야 했다. 796년 공물을 바치길 거부하고, 이에 "트라키아 전역을 파괴하고 금문으로 가겠다"라고 위협하는 사절에게 "너희에게 금보다 어울리는 공물을 주겠다"라며 똥물을 보냈다. 이후 호기롭게 불가리아로 쳐들어갔지만, 정작 적군을 보고 겁에 질려 17일간 진영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다가 공물을 더 바치기로 합의하고 귀환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사건은 콘스탄티노스 6세가 스스로 자초하였는데, 황후 마리아를 버리고 시녀였던 테오도테(780~797)를 황후로 삼으면서 성상 옹호론자에 이어 귀족과 교회, 신민들의 지지까지 완전히 잃고 말았다. 결국 2년 뒤인 797년, 이리니는 쿠데타를 일으켜 제위를 찬탈, 아들을 폐위한 후 두 눈을 뽑아 수도원으로 추방했다.
여자의 몸으로 황제에 오르는 것은 매우 불안한 정치적 위치일 수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아들을 폐위시키면서 강제로 실명케하기까지 했으니 민심도 좋지 않았다.[106] 로마의 전통에 따르면 황제는 임페라토르, 즉 군사권을 가지고 있는 몸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여자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으며, 게르만족은 아예 로마를 공위 상태로 간주하였다.
이리니는 성상옹호정책을 펼쳤는데, 독특하게도 성상 공경을 옹호했지만 성상파괴주의자들에게도 관용을 베풀었다.[107] 하지만 당대에는 성상파괴주의 세력을 처벌하지 않는 것이 그녀의 지지세력에게 불만을 가져다 주었고, 반대세력 역시 이와 같은 관용에 만족하지 않았다.[108] 이리니는 종교정책 외에도 테마를 몇 개 더 확립하고, 슬라브인에게 포교를 하는 등 대외적으로도 안정된 정책을 이어나갔다. 이리니는 군사적으로 실책은 없었으나, 콘스탄티노스 6세의 군사적 실책으로 불가리아에 많은 조공을 헌납하고 있었고, 이는 사라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포교자체는 성공적이었어서 이 때 상당한 수의 교구가 증설되었다. 또한 성상 공경이 합법화되자 자연히 예술도 부흥하였다. 성상파괴로 단절되었던 비잔틴 예술이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리니의 통치가 안정을 찾을 무렵 위기는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찾아왔다. 샤를마뉴는 교황과 동로마 제국이 성상 옹호로 일치해 단결할 위험이 보이자, 프랑크푸르트 시노드를 개최해 동로마 제국과 충돌하는 몇 가지 교리(필리오케 논쟁)를 들먹이며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무효라고 주장하며 교황을 압박하였다. 교황은 이에 프랑크 왕국의 손을 들면서도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정당한 것이라고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이후 몇 차례의 대립 끝에 결국 교황은 동로마 제국이 아닌 프랑크 왕국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고, 이는 샤를마뉴의 서로마 황제 대관으로 이어진다. 샤를마뉴는 이리니와의 결혼으로 동서 제국의 합일까지 바라보았으나, 이에 분노한 귀족들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에 의해 이리니가 폐위되면서 무산되었다. 폐위된 이리니는 레즈보스 섬으로 유배되어 강제 노동형을 선고받았고 폐위된지 1년만에 사망한다.
2.8. 니키포로스 왕조~아모리아 왕조
이리니를 몰아낸 동로마 제국의 귀족들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민들을 다음 황제로 당시 재무 대신이었던 니키포로스 1세를 추대했다. 그는 아랍인으로 가산 왕국의 왕족 출신이었기에 필리푸스 아라부스 이래로 5백 년 만에 등장한 아랍인 로마 황제였다.즉위 후 니키포로스는 수도원에 대한 세금 감면 정책의 폐지였는데, 전임 황제였던 이리니가 지지기반이었던 교회에 너무 많은 특혜를 주면서 심각하게 재정이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자주 교회와 수도원을 압박하여 국가 재정 확충을 꾀하였으며, 상당한 재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교회와 수도원에서는 "야이 막장 황제야!"라면서 수시로 디스질을 해댔다. 이 디스질은 죽은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됐다(…).
다만 이렇게 확보한 재정은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슬라브족 등 이민족을 대거 받아들이면서 토지를 테마병으로 편성하는 등 테마 제도를 완전히 정비하였으며, 711년부터 개편되기 시작한 세제가 완성되는 등 체제 개편이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즉위 직후에 일어난 바르다니스 투르코스의 반란 역시 바르다니스의 사위들인 (후에 차례로 황제가 되는) 레오와 미하일[109]이 배신하며 무너졌다. 이후 두 장군은 니키포로스에 의해 중용된다.
일단 첫타는 7세기~8세기 초까지 이어진 대혼란 와중에 제국 영내로 떼로 몰려온 슬라브인이었다. 이들은 토착민들을 쫓아내거나 동화시키는 등의 과정을 통해 발칸 반도 전역에 걸쳐서 눌러앉았으며 대혼란 와중에도 제국이 가까스로 행정력을 유지한 동트라키아 지방과 펠로폰네소스 반도 동부, 아티카 지방, 테살로니키 주변을 제외한 그 외 나머지 지역은 제국의 행정력이 완전히 박살난 무법천지였다. 여러 차례의 원정을 통해 니키포로스는 지금의 그리스 일대인 테살리아와 이피로스, 마케도니아,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부 등을 회복해 테마를 설치하였으며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슬라브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켜 제국의 신민으로 동화시킴과 동시에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으로 황폐화된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그리스계 유민들을 대거 정착시키는 과정을 통해 그리스를 완전히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콘스탄티노스 6세 때에 시작되었지만, 콘스탄티노스 통치 말기와 이리니 때에는 국내정치 혼란 및 카롤루스의 황제대관, 혼사 등이라는 외교문제에 밀려서 잠정적으로 중단 상태에 있다가 니키포로스가 마무리를 지었다. Sclaveni(남슬라브인들의 공통조상) 문서를 보면 이 내용이 나오는 즈음에서 re-Hellinzed 및 re-Hellenization, 즉 재그리스화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와 있다. 이후 그리스는 4차 십자군으로 제국이 일시적으로 멸망할 때까지 제국의 영토로 남게 된다. 그러므로 헤라클리우스 이후 7세기 중반~8세기 동안에 동로마가 발칸반도(그 중에서도 그리스)를 제대로 영유하고 있다고 나오는 지도나 영상이 종종 있는데, 이는 실제 역사적 사실과 완전히 틀린 것이다. 온라인 브리타니카 백과에도 그리스 수복에 있어 주된 역할을 수행한 것은 전통적으로 니키포로스 1세의 공적으로 여겨진다고 나와 있으며[110], 위키백과에도 제대로 된 성공적인 수복은 니키포로스 1세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고 있다.[111]
그 다음은 아바스 왕조와의 대립이었다, 당시 칼리프였던 하룬 알 라시드는 동로마 제국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공을 요구하였는데,[112] 니키포로스 1세는 거절하였다. 이로 인해 805년부터 806년까지 양측 사이에 대규모 전쟁이 벌어졌는데, 동로마군이 크게 패하는 바람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강화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이슬람 사가들의 기록에 의하면 이 시기 아바스 왕조에 대한 니키포로스 1세의 외교적 실책이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 분명 사방에 불가르족이나 샤를마뉴의 프랑크 제국 같은 막강한 적수들을 두고 있으면서 니키포로스는 이슬람 제국의 최고 권력자인 하룬 알 라시드와의 평화 조약을 무려 세 번이나 본인 쪽에서 어기면서 강력한 적을 본인 손으로 더 늘렸다. 물론 이는 전대 황제인 이리니 시절 맺어버린 불평등한 평화 조약을 제국의 위신을 생각해서, 막대한 조공 금액이 아까워서, 제국 귀족들의 요구 때문에서라도 깨뜨려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평가도 있다.[113]
하룬 알 라시드 입장에서도 중앙 아시아 유목민들이 국경을 넘어 호라산 일대를 약탈하려고 들고 하마단 총독의 반란 획책 소문 등으로 제대로 된 침공을 하지 못했기에 망정이지 아바스 왕조 최대 전성기였던 이 시기에 사방에 적을 둔 니키포로스는 이 때 잘못했으면 제국을 멸망으로 몰고갈 수도 있었다. 실제로 2번째로 평화 조약을 파기했을 때에는 당시 하마단 총독을 추궁하려 병력을 동쪽으로 움직이고 있던 라시드가 매우 분노하여 약 14만여 명의 대군을 소집하여 아나톨리아 전역을 휩쓸어버렸다. 라시드가 만약 좀 무리를 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성하려고 들었다면 어떤 사태로 이어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니키포로스는 결국 다시금 조공을 바치겠다고 허리를 굽혔으며 하룬 알 라시드는 이에 동의하여 병력을 철수시켰다.
한편 806년에는 여전히 동방 제국의 제위를 탐내던 카롤루스 대제가 베네치아와 달마티아 지역을 공격하여 맞서 싸워야만 했다. 다행히 카롤루스의 군대가 패배하면서 이 지역을 지켜낼 수 있었으며, 이 지역을 놓고 벌어진 분쟁은 훗날 니키포로스 1세가 죽고 난 후 맺어진 조약에서 동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영토로 인정받으면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최대의 골치거리는 불가르족이었다. 크룸이 칸으로 등장하면서 하나로 통일된 불가르족은 주변의 다른 민족들을 위협하였으며, 제국의 영토에도 자주 침입하였다. 특히 초창기에는 불가르족에게 밀려난 슬라브족들이 제국 영토로 대거 침입하면서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에 황제는 제국민들을 펠레폰네소스 반도로 이주시키고, 제국에 침입한 슬라브족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정착을 도우면서 안정을 꾀하였다. 사실 이전부터 추진하던 정책이긴 했지만 이를 지속적으로 더욱 체계적으로 밀어붙여 콘스탄티노스 5세가 거둔 귀중한 발칸에서의 군사적 성과 토대를 정치적, 경제적 성과로 굳힌 것이 니키포로스 1세다.
다음으로 불가르족의 위협에 군사적으로 맞대응하려 하였다. 불가르족의 약탈이 계속되자 809년에 불가르족의 수도였던 플리스카를 털어버렸으며 아나톨리아의 테마 부대들과 타그마 부대들을 총동원하여 811년에는 대규모 원정을 단행하였다. 1년간 철저하게 준비한 전쟁이었던 덕분에 초반에는 크룸의 불가르족들을 개발살냈는데 이 때 크룸이 당황하여 사절을 보내 화평을 애걸할 정도로 위세를 날렸다. 하지만 이 참에 불가르족의 위협을 뿌리채 뽑아버릴 심산이었기에 화평을 거절하고 전쟁을 계속 수행하였다.
하지만 811년 7월 24일, 도망가는 불가르족을 추격하여 수도 플리스카 근처의 좁은 협곡으로 들어갔다가[114] 그만 함정에 빠져서 갇혀버리고 말았다. 유리한 고지를 장악한 불가르족은 황제가 이끄는 군대를 포위하여 맹공격을 가했고 결국 동로마군은 완전히 괴멸당했다. 황제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며 시신은 불가르족들이 수습하여 참수하였고 몸 부분은 승전의 상징으로 전시되었다가 버려졌다. 그의 두개골은 은으로 도금하여 크룸이 한평생 술잔으로 사용하였다(중국 춘추전국시대 조양자가 라이벌 지백을 죽이고 한 일과 비슷하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전사한 발렌스 이후 두 번째로 전투에서 전사한 동방제국의 황제로 기록되었으며 최후도 비참했다.
아들 스타우라키오스가 그 뒤를 이어 제위를 계승하였으나, 그 역시 이 전투에서 척수가 끊어지는 중상을 입은 상태로 도망쳐 간신히 목숨만 건진 상태였고 당연히 제대로 황제직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는 3개월 만에 죽었는데 차기 황제로 황후 테오파노를 임명하려 했으나, 궁정에서는 스타우라키오스의 매형[115]인 미하일 1세를 황제로 추대했다.
미하일 1세 랑가베스는 즉위 후 전임 황제 니키포로스에 의해 제정된 과중한 세금 제도를 폐지하고 감세 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그는 군대, 관료, 그리고 교회에 돈을 관대하게 나눠줬고, 정교회의 입장을 적극 지지해 성상 파괴론자들을 열심히 탄압했다. 한편, 미하일은 로마 교황의 중재를 받아들여 카롤루스 대제를 바실레우스, 즉 황제로 인정하여 이탈리아에서 벌어지던 로마 - 프랑크 전쟁을 종식시켰다. 다만 로마인의 황제는 여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었고 카롤루스는 서방 황제, 즉 프랑크인의 황제로 인정하였다.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카롤루스는 베네치아의 동로마 제국에 대한 귀속을 인정하고 군대를 후퇴시켰다.
812년, 크룸의 불가리아 군대가 국경을 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면서 그곳을 보호하는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그렇지만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위용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새 황제 미하일 1세에게 매년 자신들에게 공물을 바치고 포로를 돌려보낸다면 물러가겠다고 제안했다. 미하일 1세가 제안을 거부하자, 크룸은 812년 메셈브리아를 포위했다. 그는 일찍이 니키포로스 1세에게 고용되었다가 황제의 강압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고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이탈하여 불가르군에 가담한 아랍 공성 기술자들을 동원해 각종 공성 무기를 제작했다. 결국 메셈브리아는 함락되었고, 도시에 있던 그리스의 불과 같은 무기들이 불가르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813년 2월, 크룸은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지만 동로마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미하일 1세는 이 성공에 고무되어 동로마 제국 전역에서 군대를 소집해 적과 일전을 벌이려 했다. 양측은 813년 6월 아드리아노폴리스 인근의 베르시니키아 인근에서 마주쳤다. 2주간 대치가 이어진 끝에 6월 22일 본격적인 교전이 벌어졌다. 한 때 동로마 좌익 부대가 상대를 밀어붙이면서 전세가 동로마 쪽으로 기울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아르메니아 출신의 장성 레온 5세가 이끌던 우익 부대가 독단적으로 도주하면서 동로마 전열이 무너졌고, 불가르군이 이 틈을 노려 대대적으로 공격하는 바람에 참패당했다. 그 후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뒤 아내 프로코피아의 반대를 무릅쓰고 레온 5세에게 황위를 넘겼다.
레온의 즉위 과정을 보면 그가 크룸과 모종의 계약을 했다는 의심이 든다. 회전을 피하던 그가 미하일의 전면전 참여 요청에 응했다가 전투 도중 도주한 것과 레온 즉위 이후 크룸이 테오도시우스 성벽 앞까지 와서 '약속대로' 금, 비단, 미인을 요구한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레온은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레온은 크룸에게 골든혼 해변가에서 비공개 회담을 갖자고 제안한 후, 크룸이 일부 수행원만을 대동하고 오자 복병을 배치하여 그들에게 화살을 쏘았다.
하지만 매복에도 수행원들만 사망하고 크룸은 부상만 입고 살아 돌아가 레온의 암살이 실패한다. 그래서 크룸은 격분하여 복수심에 가득찬 불가르 군대를 이끌고 셀렘브리아 등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 지역을 유린하였으며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함락하여 주민 1만 명을 학살하였다. 이에 레온도 보복으로 813년 메셈브리아를 공격하여 그곳의 불가르 수비대를 학살하였다. 그러자 제대로 화가 치민 크룸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준비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718년 이후 백여년만에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레온은 위기를 타개하고자 프랑크 제국의 2대 황제로 갓 즉위한 경건왕 루트비히 (그해 1월에 즉위)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니키포로스의 평화를 상기시키며) 불가르의 후방을 공격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프랑크 측도 상황이 여의치 않아 무산되었다. 하지만 이때, 하느님이 동로마를 도와준 듯한 일이 일어났으니, 바로 814년에 크룸이 병으로 죽은 것이다. 크룸의 뒤를 이어 칸이 된 오무르타그는 전란으로 피폐해진 국가(애초에 수도 플리스카가 폐허였다)를 위해 평화 조약을 제안하였고 레온 역시 동의하며 20년간의 휴전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이슬람 제국 (아바스 왕조) 역시 하룬 알 라시드 사후 이어진 내전 (4차 피트나) 때문에 수도 바그다드가 파괴되는 등의 피해를 입어 동로마를 건드리지 못하였다. 정말 오랜만에 서부, 북부, 동부 전선이 모두 안정된 평화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한편, 813년에 크룸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할 때에 성당들에서는 구국 기도회가 열렸다. 그런데 이때 나이가 지긋한 퇴역병들이 콘스탄티노스 5세가 부활하여 제국을 구해줄 것을 기도하며 성당 앞의 무덤으로 모여들었다. (원래 군대는 성상 파괴파가 다수였다) 이를 자켜본 (군인 출신의) 레오 5세 역시 본래 성상 파괴론자였고, 숨기고 있던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기로 하였다.
평화가 찾아온 814년의 6월부터 레온 5세는 신학위원회를 구성하였고, 머지않아 성경에 성상을 공경하라는 얘기가 없다면서 성상 파괴 노선을 확립하였다. 이후 레온 5세가 즉위 직전에 무릎 꿇었던 황궁의 칼케 문 위에 있던 성상[116]을 철거하였다.[117] 그리고 815년에 황궁에서 열린 시노드에서는 성상 옹호파와 성상파괴파 모두 참석하였으나 결국은 황제의 뜻이 관철되었다.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 28년에 성상파괴파가 재림한 것이다.
황제는 그해 4월에 성상 옹호파인 세계 총대주교 니키포로스를 현재 프린스 아일랜드 (마르마라 해에 위치)로 유배보내었고[118] 강경 단성론파인 파울리키아파에 대한 탄압도 실시하여 그들의 세력을 아르메니아로 축소시켰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상 옹호론을 억압한 것도 아니어서 제국은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다만 지나치게 황제를 비난한 옹호론자 몇 명은 처형되었다)
레온 5세는 소아시아의 아모리움 출신 장군인 미하일[119]이라는 장군과 친했다. 니키포로스 1세 문서에도 나오듯 그들은 803년에 바르다니스 투르코스의 진영에서 이탈하여 황제에 항복할 때도 함께 했고 레온이 미하일 1세를 배신할 때에도 그들은 함께였다. 비록 미하일은 문맹인데다 말도 더듬었지만, 레온이 미하일의 아들의 대부가 되어줄만큼 친했다. 하지만 레온이 미하일이 아닌 자신의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하자 그들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820년 여름, 레온은 미하일이 자신을 험담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불러 타일렀다. 하지만 그해 성탄 대축일에 미하일이 반란을 모의한다는 소식이 들자 레온은 그를 체포하였고, 미하일은 레온 앞에서 모반 사실을 털어놓았다. 분노한 레온은 당장 그를 죽이려 하였지만, 황후 테오도시아는 "성탄 대축일이 2시간 남았는데 성찬예배 직전의 살생은 불길하다"며 막았다.
마침 간수와 미하일 모두 졸고 있었는데, 레온은 조용히 둘러보고 나왔다. 한편, 감옥에는 간수와 미하일 외에도 미하일의 심복 하나가 탁자 밑에 숨어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도포 자락과 독수리가 새겨진 장화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누가 다녀갔는지 알아차렸다. 레온이 떠나자 그는 미하일과 간수를 깨웠고, 간수에게 "황제가 왔는데도 졸고 있었으니 처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결국 셋은 레온을 죽이기로 하였고, 간수의 협조로 미하일의 부하들 몇 명을 소환하였다.
820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새벽 4시, 레온은 황궁 성당에서 성찬예배에 참례하고 있었는데 수도복 차림을 한 미하일의 부하들이 성가가 울려퍼지고 있던 때에 돌진하여 도포 속에 숨기고 있던 칼을 뽑아 휘둘렀다. 암살자들의 칼은 황제 옆에 있던 사제를 내리쳤고[120], 그에 당황한 레온은 제대의 십자가를 들고 대항하였으나, 순식간에 그 십자가를 쥐고 있던 팔은 잘려나갔다.
황제가 쓰러지자 암살자들은 그의 목을 찔렀다. 레온 5세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고, 성찬예배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후 암살자들은 경악하고 있던 사제들을 밀치고 현장을 빠져나가 감옥에서 미하일을 데려와 아직까지 족쇄를 차고 있던 그를 황제 미하일 2세로 선포하였다. 큰 철제 족쇄는 그날 정오에 이르러서야 망치로 해체될 수 있었고 미하일은 황제에 즉위하면서 아모리아 왕조를 개창했다.
미하일 2세는 즉위하자마자 명분없는 찬탈에 민심이 격양되면서 한때 바르다니스 투르코스의 반란군에 속해 있던 슬라브인 토마스가 레온 5세의 암살 소식을 듣고 콘스탄티노스 6세라고 자칭했는데 눈이 뽑히기 직전에 도망쳐 살아있는 것이라고 둘러대었다. 신빙성이 떨어지는 엉터리 주장이었지만 미하일 2세가 자행한 명분 없는 쿠데타에 분노한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에는 충분했고, 미하일 2세의 고향이자 바르다니스가 봉기한 곳인 아모리온에서 거병한 토마스는 미하일 2세에게서 진압 명령을 받은 아르메니아콘 테마를 격파하고, 이윽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해 동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121]
한편, 토마스의 반란 소식에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마문은 소아시아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토마스가 그에게 동맹을 청하였으나 거절당하자 821년 봄에 아르메니아를 공격하였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아랍 군대는 패배하였고 알 마문은 그제서야 동맹을 허락하였다.[122] 알 마문은 토마스에게 영토 통행권과 군대 모집권을 주었고, 토마스는 황제가 되면 칼리파의 조공국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동로마와 아바스 조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했던 소아시아 동부의 분쟁 지역을 떼어주기로 하였다.
군대가 모이자 토마스는 이슬람 지배하의 안티오크에서 황제를 칭하였고, 부하 콘스탄티우스를 양자로 삼으며 공동 황제로 임명하였다. 민중들 사이에서도 예배 중인 황제를 살해한 문맹의 미하일 2세보다 비록 이민족 출신이지만 위트 있고 점잖은 토마스가 더 나은 황제감으로 평가받았다. 그리고 다민족으로 구성된 8만 대군이 소아시아로 진격하자 아르메니아콘과 옵시키온 테마를 제외한 아시아 방면의 모든 테마가 항복하였고, 토마스는 821년 12월, 별다른 저항 없이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2번의 공격을 버텨내었다. 전임 황제인 레온 5세가 크룸의 공격에 대비하여 취약점인 블라헤르네 등을 보수한 것도 토마스에게는 악재로 다가왔다. 게다가 그의 함대 역시 그리스의 불로 파괴되었으며, 1년이 지나 822년 겨울이 되자 포위군은 지쳐버렸다. 이때 미하일 2세는 불가르의 오무르타그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고, 823년 불가르 기병대가 토마스의 후방을 습격하자 포위가 풀려버렸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토마스는 후퇴하여 최후의 결전에 운을 걸었다.
823년 5월, 양측은 아나스타시우스 성벽 인근에서 만났고 토마스는 후퇴하는척 하다가 반격하는 전략을 세웠다. 하지만 전략은 좋았으나 사기는 그를 따라가지 못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토마스 측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미하일 2세에게 투항해버려 작전이 무산된 것이다. 이후 토마스는 패잔병을 이끌고 아르카디오폴리스에서 농성하였는데, 5달을 버텨내었으나 미하일 2세가 항복하면 부하들은 죄를 묻지 않겠다고 선포하자 병사들이 배신하여 토마스를 쇠사슬로 묶고 성문을 열어 투항하였다. 미하일 2세는 쓰러진 토마스의 머리 위에 발을 얹고선 그의 손과 발을 자른 후 처형할 것을 명령하였다. 토마스의 시신은 장대에 걸려 성벽에 걸렸다. 이후 824년 초 그의 양자인 콘스탄티우스도 처형되었고 소아시아의 반란군 잔당도 척결되며 동로마 역사상 가장 컸던 내전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내전이 마무리되기 무섭게 이번에는 남쪽 바다에서 새로운 적이 나타나 동로마를 위협하였다. 바로 아랍인이었는데, 특이하게도 기존의 이집트나 시리아 방면이 아니라 안달루스, 즉 스페인 출신 집단이었다.
그 배경은 이러하다. 816년, 후우마이야 왕조의 수도 코르도바에서 아랍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에미르 알 하캄에게 진압되었다. 헌데 반란이 워낙 큰 규모다보니 잔당만 1만 5천이 넘었는데, 그들은 배를 타고 지중해를 가로질러 이집트에 도달, 818년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고 눌러 앉았다. 하지만 내전을 끝낸 알 마문이 타히르를 보내어 도시를 공격하자 그 중 1만 2천은 다시 지중해를 떠돌다가 824년 아부 하프스[123]의 지휘하에 내전으로 해군이 약화된 동로마의 크레타 섬을 점령한 것이었다.
이후 825년에 알렉산드리아가 타히르에게 함락되자 안달루스인들은 크레타에 완전히 정착하였다. 826년 미하일 2세는 섬을 수복하기 위한 원정대를 보내었으나 회복에 실패하였다. 안달루스인들이 29개 도시들을 완전히 정복한 것은 (시칠리아 정복이 시작된) 827년이었으며, 기독교가 허용된 1개의 자치 도시를 제외하고는 종교 탄압을 개시했다. 이후 해적들의 메카로 전락한 크레타를 되찾고자 동로마 측은 수차례 원정대를 보내었으나 지속적으로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크레타에 이어 시칠리아마저 상실하게 되었는데, 시칠리아에 아랍 군대가 도달한 것은 다소 어이없는 일에 의한 것이었다. 826년에 미하일 2세는 메시나 출신의 에우페미오스를 시칠리아 해군 제독으로 임명하였는데, 그는 상당히 유능하였다. 하지만 827년에 그는 수녀와의 결혼을 빌미로 지탄받았고 평소에 그의 능력을 질투하던 미하일은 그를 해임하고 코를 자르게 하였다. 그러자 에우페미오스는 함대를 점거하고 시라쿠사에서 황제를 칭하였다. 하지만 발라타 등 시칠리아의 장군들은 곧바로 출정하여 시라쿠사를 회복하였고, 쫓겨난 에우페미오스는 바다를 건너 북아프리카의 아글라브 왕조에 의탁하였다. 그러곤 당시 아미르이던 지야다트[124]에게 시칠리아를 회복해주면 매년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125]
지야다트는 70대의 노장 아사드 이븐 알 푸라트에게 1만 보병과 7백 기병을 주어 80여척의 배에 태워 시칠리아로 보냈다. 수스에서 출항하여 3일간 항해한 함대는 827년 6월에 시칠리아 서남부 마자라 (마르살라)에 도착하였고, 동로마 장군 발라타와의 서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마자라는 함락되어 아랍 측의 교두보가 되었고, 발라타는 중상을 입고 후퇴하던 중 사망하였다. 시칠리아 남부의 동로마 군대가 괴멸되자 아랍 군대는 동진하여 섬 동남부의 아크리[126]를 거쳐 828년 가을 시라쿠사를 포위하였다.
미하일 2세는 크레타에 신경쓰느라 시칠리아 문제에 바로 대처하지 못하였고, 동로마 소속인 베네치아에서 파견된 원군[127] 역시 격퇴되었다. 시칠리아 테마의 치소인 시라쿠사 함락은 임박해 보였고, 300년에 걸친 동로마의 시칠리아 지배는 곧 끝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신이 개입한듯 포위군 진영 내에 전염병이 돌았고, 사령관 아사드 또한 828년 봄에 사망하였다. 이로써 곧 끝날 것 같던 아글라브 왕조의 시칠리아 정복은 밀고 밀리며 902년까지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이후 사기를 잃은 포위군은 여름까지 공격해 보다가 식량마저 고갈되자 서쪽의 미네오로 퇴각하였고, 동로마 군대가 추격해 오자 군대를 둘로 나누어 퇴각하였다. 절반은 남쪽의 아그리젠토로 갔고 나머지는 에우피미오스를 따라 서쪽의 엔나를 공격하였다. 수비군 측에서는 에우페미오스에게 협상을 위한 특사를 보내었는데, 협상장에서 에우피미오스는 살해되었다. 한편, 아사드가 병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미하일 2세는 시칠리아 총독을 지낸 경력이 있는 테오도토스에게 구원 함대를 준비시켰다.
시칠리아에 상륙한 테오도토스는 서진하여 섬 중앙부의 요새도시 엔나를 포위하고 있던 아랍 군대를 역포위하였다. 격렬한 전투 끝에 테오도토스는 아랍 군대에 패배하였고 인근 요새로 후퇴하였다. 동로마 정예병에 승리한 아랍인들은 승리를 확신하여 아미르 지야다트의 이름으로 동전을 주조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테오도토스는 자만하여 경계를 늦추고 있던 아랍 군대를 패배시켰고, 그들의 진영을 포위하였다. 아랍인들은 밤을 틈타 포위를 뚫으려 했지만 이를 예측한 테오도토스의 매복에 걸려 대패하였다. 이후 패전병들이 미네오로 가려 했지만 다시 습격을 받아 패하고 흩어졌다.
섬 중부의 엔나와 미네오 등지가 동로마에게 수복되자 남부 아그리젠토의 아랍 군대도 서남쪽의 마르살라로 후퇴하였다. 829년 가을 시칠리아는 다시 동로마 제국 하에 평화를 회복하는듯 하였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아글라브 왕조 측은 이베리아 반도의 후우마이야 왕조에 도움을 청하였고, 그 지원군은 830년에 당도하여 전세를 재차 바꾸어 놓는다. 하지만 60세의 미하일 2세는 테오도토스의 승전보만을 접한 채로 829년 10월 2일에 사망하였다. 이후 902년에 이르러서야 아랍인들의 시칠리아 정복은 마무리된다.
한편 미하일은 성상 파괴주의자였지만, 전임 황제 레온 5세처럼 성상 옹호론자들을 딱히 박해하지 않고 추방된 자들을 불러들였다. 또한 행정을 재정비하고, 아랍의 침략에 분전하였다. 이리하여 제국은 크레타를 상실하고 시칠리아가 위협받고 있기는 했지만 내부적으로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미하일은 토마스의 반란이 한창이던 822년에 테클라 황후 사이에서 낳은 외아들 테오필로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였고 829년에 사망하였다. 미하일은 780년에 사망한 레온 4세 이후로 반세기 만에 황제 직위를 유지한 체로 자연사 한 동로마 황제였다. 그에서 시작된 아모리아 왕조는 867년까지 48년간, 손자 미하일 3세의 사생아인 레온 6세의 후예인 마케도니아 왕조까지 포함하면 1056년까지 236년간 이어지며 10세기 동로마 중흥기의 기반이 되었다.
829년 10월 2일 미하일 2세가 사망하면서 17세의 나이에 황위에 올랐다. 다소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올랐기에 미하일 2세의 두번째 황후이자 테오필로스의 계모인 에우프로시나가 초기에 통치를 도왔다. 830년, 에우프로시나는 18세의 황제를 위해 신부 경연대회를 열었다. 그 결과, 대단한 미녀였다고 전해지는 테오도라가 황후로 선출되었다. 이후 테오필로스가 빠르게 황제로서의 업무에 적응하자, 에우프로시나는 정계를 은퇴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정의로운 황제가 되는 데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권력을 잡자마자 레온 5세를 성찬예배 때 잔혹하게 살해한 자들을 규탄하고 처벌했다. 또 한 번은 시리아에서 막대한 사치품을 실은 채 콘스탄티노폴리스 항구로 찾아온 배가 있었다. 테오필로스가 이 배가 누구에게 화물을 전달하러 왔는지를 묻자, 선장은 황후에게 전달하러 왔다고 답했다. 이에 테오필로스는 배를 불태운 뒤 테오도라 황후에게 먼 속주에서 물건을 사지 말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시장에서 구매하라고 권고했다.
또한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수도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민중의 고충을 듣고 그들을 괴롭힌 이들을 가차없이 처벌했다. 한 번은 한 과부가 테오필로스에게 자신이 시 교구장에게 말을 빼앗겼다고 호소했다. 테오필로스는 즉시 조사를 명령했고,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즉시 그 고위관리를 엄히 처벌한 뒤 과부에게 말을 돌려줬다. 한편, 그는 변장한 채 시장에 숨어서 상인들이 물건을 정당한 가격에 팔고 있는지를 확인하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황제는 학식이 뛰어난 사람 답게 가능한 많은 이가 우수한 교육을 받기를 희망해 수도에 있는 대학을 늘리고 수도원의 필사본을 집필하는 필사실을 늘렸으며, 교사들이 국가로부터 급여를 받도록 보장했다.
테오필로스는 아랍 세력이 수시로 쳐들어와서 큰 타격을 입히곤 했던 아나톨리아 방비에 힘을 기울였다. 830년, 그는 아나톨리콘 테마의 일부를 카파도키아 테마로 분리했다. 카파도키아 테마는 서로는 타타 호, 북으로는 할리스 강, 남으로는 타우로스 산맥으로 둘러싸인 지역이었다. 그는 테마를 가로지르는 타우로스 산맥에 20개 이상의 요새를 설치하거나 강화했다. 특히 시리아에서 아나톨리아로 진입하려면 일반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킬리키아 관문의 방위를 대폭 강화했다. 칼리파 알 마문은 이에 대응해 아나톨리아로 쳐들어가 카파도키아 테마의 수도인 코론을 점령하고 순두스와 시난 등 2개 요새를 함락시킨 뒤. 지난날 동로마 제국으로 끌려갔던 백성들을 도로 아바스 왕조의 영역으로 데려가면서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831년 봄, 킬리키아의 아랍인들이 아다타 고개를 통해 아나톨리아로 진입했다. 테오필로스는 즉시 기병대를 이끌고 이들을 요격하여 하시아논 인근에서 적을 급습해 섬멸하고 7,000명의 포로를 잡았으며, 뒤이어 타르수스를 공략하고 무슬림 1,600명을 살해했다. 그 후 금문교를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서 아야 소피아로 행진하며 군중의 환호를 받은 뒤, 승리를 기념하는 경마 대회를 개최했다. 알 마문이 이에 보복하고자 그해 가을 킬리키아로 이동했을 때, 테오필로스로부터 평화 협약을 맺을 용의가 있다는 전갈과 함께 500명의 아랍인 포로를 받았다. 그러나 알 마문은 이를 무시하고 형제 알 무타심, 아들 알 아바스와 함께 각각 한 개 분견대 씩 거느린 채 카파도키아로 진입하여 티아나 요새를 공략하고 테오필로스가 이끄는 구원 부대를 격파한 뒤 상당량의 전리품과 포로를 확보한 후 귀환했다.
테오필로스는 다시 사절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자고 청했지만, 알 마문은 서신에서 동로마 황제가 칼리파보다 우선 순위로 두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832년 봄, 아랍군은 다시 카파도키아를 침공해 이 지역의 주요 군사 거점인 로우론 요새를 포위했다. 그러나 요새가 좀처럼 함락되지 않자, 알 마문은 부하에게 포위를 맡긴 뒤 다마스쿠스로 귀환했다. 로우론 수비대는 야간 기습을 가해 적장을 포로로 잡는 등 분투했지만 포위망을 풀지 못했다. 그해 9월 테오필로스가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왔지만 아랍군에게 패해 철수했고, 결국 로우론 수비대는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은 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는 대가로 항복했다. 아랍군은 그해 겨울을 로우론에서 보내면서 카파도키아를 점진적으로 공략하고자 했다.
테오필로스는 이러한 상황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평화 협약을 맺자고 호소했지만, 알 마문은 이슬람교로 개종하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며 못을 박았다. 833년 5월, 알 아바스가 이끄는 아랍군이 재차 카파도키아를 침공해 동로마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카파도키아 전역을 석권하려 했다. 이에 테오필로스는 총대주교 요안니스 7세를 알 마문에게 파견해 금화 10만 개와 아랍 포로 7천 명을 석방할 테니 물러가달라고 청했고, 알 마문은 일단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알 마문은 장차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공략하기 위한 대규모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던 833년 여름 돌연 중병에 걸려 쓰러졌고, 그해 8월 7일에 사망했다. 이후 이복동생 알 무타심이 새 칼리파로 등극했지만, 각지에서 그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를 수습하느라 동로마 제국에 대한 원정을 벌이지 못했다.
834년, 나스르가 이끄는 15,000명의 아르메니아 반란군이 아바스 왕조군의 공세를 피해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했다. 나스르는 테오필로스의 지시에 따라 기독교로 개종하고 테오포보스로 개명했으며, 그의 부하들 역시 기독교로 개종했다. 황제는 아내의 누이를 테오포보스에게 시집보내고, 그가 데려온 병사들을 로마군에 편입시켜 전력을 대폭 강화했다. 그렇게 준비를 갖춘 그는 837년 7만 대군을 일으켜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소조페트라를 공략한 뒤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휩쓸며 사모사타를 함락시키고 멜리테네(말라티아)를 조공 도시로 만들었다.
838년 봄, 알 무타심은 작년의 패배에 보복하고자 타르수스에 8만 대군을 집결시킨 뒤 아나톨리아로 쳐들어갔다. 아바스군은 칼과 방패에 테오필로스 가문의 고향인 아모리움 글자를 새겨 복수 의지를 다졌다. 이들은 알 아프신과 칼리파의 부대로 나뉘었다. 알 아프신의 부대는 카파도키아로 진군했고, 칼리파의 부대는 칼라키아 관문을 통해 진격했다. 테오필로스는 두 부대의 합류를 저지하기 위해 토카트 인근의 다지몬(얀첸)에서 알 아프신의 군대와 대적했다.
당시 동로마군에 귀순한 뒤 용맹을 떨쳤던 아르메니아 장군 테오포보스가 이 전투에서 맹활약하여 아바스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알 아프신이 급파한 튀르크 궁기병이 갑자기 튀어나와 돌격하는 동로마 대열을 파괴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게다가 테오필로스가 말을 잃고 친위대와 함께 동분서주할 때, 병사들이 황제가 보이지 않자 죽은 줄 알고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해버렸다. 이리하여 테오필로스가 얼마 안 남은 친위대와 함께 언덕에서 무슬림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아르메니아인 마누일이 사력을 다해 싸워 황제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으나 곧 전사했다.
결국 다지몬(얀첸) 전투에서 동로마군은 완패했고, 아바스군은 여세를 몰아 앙카라를 공략한 뒤 아모리움을 포위해 2주만에 함락시키고 7만에 달하는 시민 중 절반을 학살하고 나머지는 노에로 끌고 갔다. 그러나 승리를 거두고 귀환한 알 무타심은 알 마문의 아들 알 아바스가 주변인들의 권고에 따라 칼리파를 찬탈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즉시 얄 사흐르 이븐 샤히, 아므르 알 파르하나, 우제이프 이븐 안바사, 아흐마드 이븐 알 할릴을 처형하고 아바스는 감옥에 갇힌 뒤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중에서 사망했다. 심지어 다지몬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던 알 아프신 마저 정적들의 모함으로 인해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다.
한편, 테오포보스는 다지몬 전투 패배 후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시노페에서 아랍군에 대항할 준비에 들어갔다. 이때 병사들은 테오필로스가 전사했다는 소문을 믿고 그를 황제로 추대했다. 하지만 얼마 후 테오필로스가 살아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테오필로스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하겠으니 직위를 유지해달라고 요청했다. 테오필로스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그 대신 그가 이끌고 있던 부대를 여러 연대로 나누어 각지의 테마로 분산시켰다. 이후 839년 소규모 아랍군이 카파도키아로 쳐들어왔다가 격퇴되었고, 841년에는 동로마군이 게르마니키아와 아다타를 약탈했다. 842년 1월 테오필로스와 알 무타심이 잇따라 사망하면서 전쟁은 중단되었다.
한편 시칠리아는 상황이 달랐다. 테오필로스가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830년 초 코르도바 토후국이 파견한 베르베르 지휘관 아스바흐 이븐 와킬이 시칠리아에 도착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그는 미네오에 포위된 수비대와 연락을 취했고, 자신이 그들을 구하는 대신 시칠리아 방면 무슬림군 총사령관이 되기로 했다. 830년 7월 또는 8월, 테오도토스는 아스바흐와 미네오 수비대의 합동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엔나로 퇴각했다. 그 후 무슬림군은 미네오를 불태운 뒤 바라프랑카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역병이 또다시 발생하면서 아스바흐를 포함한 수많은 무슬림들이 죽었다. 무슬림들은 가을 무렵에 바타프랑카를 함락했지만, 숫자가 매우 줄어들었기 때문에 테오도토스의 역습에 버티지 못하고 서쪽 해안 요새로 도주했다. 그러나 테오도토스 역시 이 시기에 알려지지 않은 전투를 치르던 중 전사했다.
한편, 마자라로 피신했던 무슬림군은 아프리카 본토에서 온 병력과 일부 코르도바인들을 규합한 뒤 팔레르모로 진격했다. 팔레르모는 831년 9월까지 1년간 스파타리오스 시메온의 지휘하에 격렬하게 항전했다. 그러나 구원군이 올 기미가 없고 식량이 바닥난데다 전염병까지 돌면서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시메온은 도시의 고위 관리들과 수비대가 안전하게 떠나는 대가로 항복했다. 아랍 역사가 이븐 알 아티르에 따르면, 본래 팔레르모에는 7만 명이 있었지만 공방전이 끝났을 때 3천 명만 남았고, 그들 모두 노예로 끌려갔다고 한다. 832년 3월 아글라브 왕조가 파견한 왈리(총독) 아부 피르 무함마드 이븐 압달라가 팔레르모에 도착한 뒤 통치를 시작했다. 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온 무슬림과 아프리카에서 온 무슬림 간의 불화를 누그러뜨리고 현지 주민들을 온화하게 대하는 등 국정을 잘 다스렸다.
그 후 시칠리아 전쟁은 2년간 소강 상태였다. 무슬림들은 새로 확보한 지역의 통치력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고, 동로마 제국은 아바스 왕조 칼리파 알 마문이 아나톨리아 지역을 잇따라 침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했기에 멀리 떨어진 시칠리아에 지원군을 새로 보낼 여력이 없었다. 그러던 834년 초, 아부 피르 무함마드 이븐 압달라는 엔나 원정에 착수했다. 그는 수비대를 격파한 뒤 포위를 벌였지만 쉽게 공략되지 않자 철수했다. 835년 다시 시칠리아 중부로 진군해 동로마군을 격파한 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령관의 아내와 아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아부 피르는 시칠리아 동부로 깊숙이 진군하려 했지만, 도중에 그에게 불만을 품은 무슬림인들에게 살해당했다.
아글라브 에미르 지야다탈라 1세는 아부 피르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알 파딜 이븐 야쿱 알 파지리를 새 왈리로 선임했다. 야쿱은 도착하자 마자 시라쿠사 주변 지역을 습격한 뒤 엔나 주변 지역을 잇따라 공격했다. 로마군은 이들을 무찌르러 출격했지만, 습격대는 적이 쫓을 수 없는 산악지대와 울창한 숲 지역을 가로질러 철수했다. 이에 로마군은 철수했지만, 도중에 매복하고 있던 소규모 무슬림군에게 습격당하자 전의를 잃고 달아났다. 무슬림군은 상당량의 무기, 장비, 동물들을 확보했다.
하지만 야쿱은 그해 9월에 자야다탈라 1세의 사촌인 아부 알 아글라브 이브라힘으로 교체되었다. 이브라힘은 팔레르모로 함대를 끌고 가던 중 동로마 함대의 급습을 받고 후퇴하다가 폭풍으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가까스로 팔레르모에 소규모 잔여 함대와 함게 도착한 이브라힘은 판텔라리아 등 여러 해군 기지를 급습한 후 포로로 잡은 기독교인들을 참수하는 방식으로 복수했다. 이와 동시에, 무슬림 기병대가 에트나 산 주변 일대를 습격하여 마을과 농작물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붙잡아 노예로 삼았다.
837년, 아브드 알 살람 이븐 아브드 알 와하브가 이끄는 무슬림군이 엔나를 공격했으나 크게 패했고, 아브드 자신도 포로로 전락했다. 이브라힘은 이에 대응해 엔나를 포위 공격했다. 838년 겨울, 무슬림군은 도시로 통하는 산길 하나를 찾아내고 이를 통해 도시를 급습하여 성채를 제외한 도시 대부분을 장악했다. 이후 성채를 마저 공격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자, 이브라힘은 수비대와 협상한 끝에 거액의 몸값을 받는 대가로 철수하기로 했다.
838년 봄, 테오필로스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시칠리아 구원 작전에 착수한 알렉시오스 모셀레가 현장에 도착했다. 알렉시오스 모셀레는 당시 남자 후계자가 없었던 테오필로스에 의해 카이사르(부제)로 지명되었고 황제의 막내딸 마리아 공주와 결혼한 인물이었다 그는 먼저 무슬림군에 포위되었던 세파루 요새를 구원한 뒤 여세를 몰아 서쪽으로 진격하여 그들에게 몇 차례의 패배를 안겼다. 그러나 838년 말 새로운 무슬림 지원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공세가 중단되었다.
그러던 중 테오도로스의 막내딸이자 자신의 약혼자였던 마리아가 사망했다. 이로 인해 테오필로스와의 인맥이 끊긴 데다, 정적들이 그가 무슬림들과 결탁하여 시칠리아에서 황제가 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모함했다. 테오필로스는 시라쿠사 대주교 테오도로스 크리티노스를 보내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테니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오라고 권고했다. 그는 황제의 부름을 받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갔다가 직위를 박탈당하고 투옥되었다. 알렉시오스 모셀레는 나중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안니스의 권고를 받아들인 테오필로스 황제에 의해 풀려난 뒤 지위와 재산을 회복했다.
838년 6월 11일, 시칠리아 정복 전쟁을 이끌었던 지야다탈라 1세가 사망하고 형제 알 아글라브 아부 이칼이 계승했다. 그는 시칠리아에 새 병력을 파견해 전쟁을 조속히 마무리하려 했다. 무슬림군은 콜레오네, 플라타니, 칼타벨로타, 마리노, 게라치 등 여러 요새를 공략하고 841년 엔나에서 그로테까지 공격했다. 이 무렵, 베네벤토 공국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던 나폴리 공국이 시칠리아의 무슬림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들은 이를 빌미삼아 이탈리아 본토로 쳐들어가서 브린디시를 약탈했다. 얼마 후 베네벤토 공국에서 내전이 발발하자 이 기회를 노려 840년 타렌툼을 함락하고 847년 바리를 공략한 뒤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았다. 바리 토후국은 871년 동로마 제국군에 의해 무너질 때까지 30년 가까이 이탈리아 해안과 아드리아 해 연안지대를 주기적으로 습격했다.
더욱이 동방과 시칠리아의 전쟁 중 836년, 테오필로스는 816년 동로마 황제 레온 5세와 오무르타그 칸의 평화 협약 이래 20년간 이어지던 불가리아 제1제국과의 평화를 파기하고 불가리아로 쳐들어가 국경 지대를 황폐화시켰다. 이에 말라미르 칸은 카반 이스불이 이끄는 불가리아군을 파견해 필리포폴리스와 그 주변 일대를 공략했다. 그런데 말라미르 칸은 얼마 안가 갑자기 사망했는데,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칸위에 오른 프레시안 1세는 837년 다시 한번 카반 이스불을 파견해 동로마 제국을 꽁략하게 했다. 카반 이스불은 필리포폴리스 인근에서 동로마군을 격파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테살로니카 사이의 육로를 차단했고, 때마침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반기를 든 테살로니카 인근의 슬라브인들을 불가리아의 산하로 포섭했다.
839년 블라스티미르 대공을 위시로한 세르비아 부족들이 테오필로스 황제의 동의하에 자치국을 세우고 불가리아에 반기를 들었다. 이에 프레시안 1세는 세르비아를 전격 침공했다. 그러나 3년간의 전쟁에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842년 별다른 영토 변경 없이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의 독립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에 대한 공세를 이어갈 여력이 없었기에, 발칸 전선은 안정되었다.
한편 9세기경까지 크림 반도와 폰토스-카스피 스텝 지대를 장악하고 있던 하자르는 갈수록 강성해지는 키예프 루스의 공세에 시달렸다. 이에 그들은 돈 강 유역을 사수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테오필로스는 하자르인들이 패배해 루스인들이 크림 반도로 남하한다면 동로마 제국이 보유한 헤르손 지역을 포함한 크림 전체가 루스인들에게 넘어가고 흑해의 패권이 위험해질 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이에 기술자인 페트로나스 카마테라스를 파견해 돈 강 하류 왼쪽 둑에 위치한 사르켈에 강력한 요새를 건설하게 했다. 하자르인들은 이에 대한 대가로 헤르손 주변의 영토를 제국에 양도했다. 이후 테오필로스는 지금까지 제국의 별다른 간섭 없이 자율적으로 운영되던 헤르손 테마에 스트라테고스(군사 지휘관)를 배치해 루스인들의 침략을 막게 했다. 그러면서도 838년 루스 사절단을 맞이하여 무역 협정을 맺음으로써 그들과 지나치게 갈등을 벌이는 것을 방지했다.
테오필로스의 치세는 아랍과의 전쟁이 이어지는 시기였지만 동로마 제국과 아랍의 문화가 교류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테오필로스는 예술을 사랑하는 황제로서 미술과 음악을 적극 후원했고 이슬람 문화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그는 황궁을 새로 지었는데, 그 구조엔 아랍의 문화가 깊게 배여 있었다. 테오필로스는 마그나우라 궁전에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옥좌를 설치했다. 황제를 영접한 대사들은 황금 플라타너스의 그늘 아래 놓은 옥좌의 위용을 보고 감탄했다. 황금 플라타너스 나뭇가지에는 보석으로 만든 새가 가득했는데, 그 중에는 막 옥좌로 뛰어내릴 듯한 자세로 조각된 새들도 있었다. 또한 나무 주위에는 황금으로 제작된 사자와 그리핀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대사들은 그 다음 장면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신호가 내려지자, 동물들이 모두 제각기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이후 황금 오르간 소리가 울러퍼지면서 사방이 조용해졌고 황제와 손님들의 접견이 시작됐다. 이윽고 접견이 끝나고 손님들이 떠나가려는 순간, 다시 동물들의 합창이 시작되었고 황제는 자리에서 물러난다.
테오필로스는 건축 사업을 활발하게 시행했다. 그는 황궁을 확장하고 대리석과 모자이크로 장식했으며, 테오도시우스 성벽 바깥에 자리잡은 블라헤르네 지구 개발에 전념했다. 그리고 해상 성벽의 대대적인 강화에 착수했으며, 하기아 소피아의 청동 문을 복원했다. 또한 성 판틸레이몬 수도원 등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여러 수도원을 후원했으며, 트라키아 비제에 성 소피아 교회를 세웠고, 보스포러스 해협의 아시아쪽 해안에 아바스 왕조의 양식에 영향을 받은 별궁을 세웠다. 또한 그는 9세기 동로마 제국 최고의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수학자 레오(Λέων ὁ Μαθηματικός)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레오는 테오필로스 사후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을 설립했으며, 소아시아의 로우론 요새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연결하는 광학 전신 시스템을 개발해 수도에 아랍인의 공격을 가능한 한 빨리 알릴 수 있게 했다.
한편 테오필로스의 치세에서는 새로운 풍조가 일어나고 있었다. 종교에 대한 신비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풍조는 사그라졌고, 새로운 인문주의의 분위기가 생겨난 것이다. 그리하여 이성과 명증성을 지지하는 옛 고전 정신이 부활해 고대 그리스-로마 철학자 및 문학자들의 서적이 재연구되었다. 또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시각적 아름다움을 갈망했고, 옛 시절의 성화상을 갈망했다. 테오필로스 본인은 아버지처럼 성화상 파괴주의자로, 당대 최고의 성상 화가 라자로스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을 탄압했으며, 성상 파괴주의를 가장 열렬히 지지했던 요안니스 7세 하릴라스를 총대주교로 지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상 파괴주의는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사실 황후 테오도라를 포함한 황제의 친척들 조차 성상 파괴를 지속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테오필로스가 사망한 직후 성상 파괴주의는 황후 테오도라에 의해 자취를 감추었다.
테오필로스는 830년 테오도라 황후와 결혼했다. 그러나 831년 이전에 태어난 콘스탄티노스 왕자는 얼마 안가 요절해버렸고, 이후로 네 딸 테클라, 안나, 아나스타시아, 마리아, 풀케리아가 잇따라 태어났지만 아들을 좀처럼 갖지 못했다. 이에 황제는 아들이 태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여기고 막내딸 마리아 풀케리아의 남편인 알렉시오스 모셀레를 카이사르(부황제)로 지명했다. 그러던 840년 1월 19일, 차남 미하일 3세가 뒤늦게 태어났다. 이로 인해 알렉시오스 모셀레의 입지는 위태로워졌다. 결국 알렉시오스는 842년 이전에 테오필로스의 압력을 받고 크리소폴리스의 안테미오스 수도원으로 은퇴했다.
842년 1월 20일, 테오필로스는 30세의 나이에 이질일 가능성이 있는 질병으로 임종을 눈앞에 두었다. 그는 2살밖에 안 된 어린 황태자 미하일의 섭정으로 테오도라 황후와 누이 테클라를 지명했다. 또한 반란을 또다시 일으킬 지도 모르는 테오포보스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테오필로스의 처남 페트로나스가 테오포보스를 처형했고, 테오필로스는 테오포보스의 수급을 확인한 뒤 눈을 감았다.
미하일 3세와 그의 모친 테오도라[128]
뒤를 이은 미하일 3세는 불과 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모친 테오도라, 테오도라의 삼촌 세르기오스 니케티아테스, 테오도라의 오빠 바르다스, 그리고 환관 테옥티스도스의 섭정을 받았다. 테오도라는 성상 옹호론자였으며 성상 파괴주의를 자신의 대에 종식시키기로 결심했다. 843년 3월 초, 공의회를 소집해 성상 파괴론자인 요안니스 총대주교를 해임하고 성상 옹호론자 메토디우스를 선출했다. 그리고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한 성상 파괴주의 단죄를 재차 추인했다. 이후 성상 파괴론은 두 번 다시 거론되지 않았다.
이후 테오도라는 테옥티스도스와 더불어 제국을 평탄하게 이끌었다. 파트리키우스이자 환관인 테옥티스도스는 학식이 풍부하고 문화에 해박한 인물로, 수도의 교육 수준을 개선하는 데 많은노력을 기울였고 경제 정책에서도 탁월한 성과를 거두어 막대한 금을 확보해 국고를 가득 채웠다. 테옥티스도스는 군사 방면에서도 뛰어났다. 그는 크레타 원정에 직접 참여해 사라센군과 맞서 싸웠다. 그 결과 사라센군을 축출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들이 크레타 섬을 정복하는 시기를 상당 기간 늦추는 데 공헌했다. 이듬해 말라티야의 태수와 격돌한 마우로포타모스 전투에서 패배해 평화조약을 맺어야 했고, 848년에는 이슬람 왕조인 아글라브 왕조를 시칠리아에서 몰아내기 위해 벌인 원정도 실패했지만, 855년 5월 22일에는 비잔티움 함대를 환관 다미아노스의 지휘하에 나일강 삼각주의 동쪽 끝자락에 있는 다미에타로 파견해 사라센 함선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무기고를 파괴하며, 많은 포로들을 잡아오게 했다. 그리고 이듬해의 킬리키아 아나자르부스 원정도 성공적이었다. 아랍 문헌에 따르면, 약 300척의 함대로 이뤄진 제국 함대가 에게 해와 시리아 해안 일대를 3차례 이상 공격했다고 한다.
한편, 테오도라와 테옥티스도스는 이단으로 낙인 찍힌 파울리키아파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파울리키아파는 서기 600년대에 아르메니아에서 탄생한 이래 제국 동방에 자리잡은 소수 종교 집단이었다. 그들은 성상 파괴를 옹호하는 동시에 세례성사, 견진성사, 결혼성사, 성체성혈성사, 십자가의 의미, 구약성서 전체와 신약성서의 일부, 교계제도 자체를 모조리 거부했다. 그들은 선과 악의 대립적인 두 원리를 내세우는 마니교의 신앙을 지지했으며, 물질세계가 악마의 창조물이라고 믿었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의 단일한 본성은 물질세계와 무관한 것이며, 성모는 "물이 관을 통해 흐르는 것처럼" 신성한 본질이 담겨진 물리적 그릇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테오도라는 파울리키아파의 모든 교도들에게 잘못을 시정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종교관을 바꾸지 않자, 테오도라가 파견한 제국군이 대대적으로 학살을 자행해 10만에 달하는 이들이 살해되었다. 이때 많은 이들이 제국의 경계를 넘어 멜리테네의 아미르인 우마르 이븐 아브둘라에게 피신했다.
855년, 15살이 된 미하일 3세는 어머니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그는 이 시기에 스웨덴 혈통인 에우도키아 잉게리나를 정부로 뒀지만, 테오도라는 그녀를 인정하지 않고 아들이 에우도키아 데카폴리티사와 결혼하게 했다. 그러나 미하일 3세는 아내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에우도키아 잉게리나와 관계를 계속 맺으면서 어머니를 실각시키기 위한 음모에 가담했다. 음모의 주동자는 테오도라의 오빠 바르다스였다. 그는 842년 테오도라의 측근으로서 나라를 통치했지만 테옥티스도스에게 실각당한 후 오랫동안 복수의 칼날을 갈아오고 있었다. 여기에 함대를 이끌고 큰 전공을 세웠지만 별다른 보상을 받지 못해 불만을 품었던 다미아노스도 음모에 가담했다. 황제는 이들의 설득에 따라 먼저 테옥티스도스부터 제거하기로 했다.
855년 11월 20일, 테오도라의 거처에 가기 위해 황궁 안을 걷던 테옥티스도스의 앞을 미하일과 다미아노스가 가로막았다. 미하일은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자신은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며 처리해야 할 국정이 있으면 어머니가 아니라 자신에게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테옥티스도스는 황제와 말다툼을 벌이다 몸을 돌이켜 왔던 길로 돌아갔다. 그때 바르다스가 돌연 장교들과 함께 들이닥쳐 그를 땅바닥에 쓰러뜨렸다. 테옥티스도스는 간신히 칼을 뽑아들었지만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황제는 경비병들에게 직접 그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소식을 접한 테오도라는 즉각 달려와서 아들에게 항의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어머니를 뿌리쳤고, 경비병들은 의자 밑으로 기어들어간 테옥티스도스를 끌어내 그의 가슴에 칼을 박았다. 이렇게 해서 테옥티스도스를 제거한 미하일은 856년 3월 15일 원로원 특별 회의에서 단독 황제로 공인되었고 어머니를 수녀원에 유배보냈다.
비록 어머니를 유폐하고 단독 황제로 등극하긴 했지만, 미하일 3세는 아직 15살의 소년이었고, 책임감이 결여되어 통치는 뒷전이고 향락을 추구했기 때문에 실권은 바르다스에게 주어졌다. 바르다스는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손에 쥐었지만 정치적 식견과 탁월한 행정 능력을 갖췄으며 군사적 재능도 뛰어났다. 856년, 당시 멜리테네의 아미르인 우마르 이븐 아브둘라는 파울리키아파 난민들을 받아들여 전력을 크게 증강시킨 후, 카르베아스를 파울리키아파 리더로 삼아 원정에 대동시켰다. 그 후 흑해 남부의 아르메니아콘 테마를 거쳐 아미수스를 약탈했다. 이에 바르다스는 동생 페트로나스가 이끄는 5만여 제국군을 파견해 이들을 치게 했다. 페트로나스는 병력을 셋으로 나눠 북쪽, 남쪽, 서쪽에서 동시에 진격해 포손-할리스 강과 그 지류인 랄라카온 강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우마르 이븐 아브둘라의 군대를 포위했다. 곧이어 벌어진 처절한 전투에서, 우마르와 그의 병사들은 거의 다 전사했다. 페트로나스는 뒤이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아미다(지금의 디야르바키르)까지 진군하게 해 많은 포로를 확보해 트라키아로 이주시켰다. 3년 후에는 미하일 3세가 직접 원정군을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사라센을 공격했다. 859년엔 제국군이 다미에타를 다시 습격하여 많은 포로를 확보했다. 863년, 루스인과 아랍인이 침공했지만 제국군은 이를 격퇴하고 아랍군 사령관들은 모두 전사했다. 또한 제국군은 불가리아를 상대로 몰아붙여 필리포폴리스, 메셈브리아 등을 수복했다.
한편, 바르다스는 미하일 3세의 동의를 받아 친교황파인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를 해임하고, 중립적인 포티오스를 총대주교로 선출했다. 이 일은 서방 교회와의 분열로 이어졌다. 이그나티오스는 교황 니콜라오 1세에게 도움을 호소했고, 교황은 이를 받아들여 863년에 포티오스를 파문했다. 미하일 3세는 이에 맞서 867년 포티오스와 다른 세 명의 동방 주교들을 소집해 교황 니콜라오 1세를 파문했다. 이러한 분열의 와중에 두 교회는 발칸 반도의 슬라브인들에 대한 사목권을 놓고 다투었는데, 모라비아에 파견된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가 키릴 문자를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모라비아는 서방 교회를 택하였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미하일은 가뭄으로 혼란에 빠져 있던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보리스를 항복시키고 동방 교회로 개종시켰다. (864년)[129]
이렇듯 로마 제국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큰 문제 없이 잘 나가고 있었지만, 미하일 3세와 바르다스 간의 대립은 갈수록 격화되었다. 바르다스는 책임감 없이 향략만 추구하려 드는 황제를 여러 차례 제지했고, 미하일 3세는 황제의 권위마저 훼손시킬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가진 바르다스를 못마땅하게 봤다. 결국 미하일 3세는 바르다스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황제는 무도회 의상을 입고 친구들과 함께 시끌벅적하게 거리를 활보하곤 했다. 그 친구들 중엔 바실리오스라는 인물도 있었다. 바실리오스는 아르메니아 사람으로, 본래 트라키아에 정착해 살고 있다가 불가리아군에게 포로로 잡혀 다뉴브 강 너머 '마케도니아'에 끌려갔다. 바실리오스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로마 제국이 불가리아를 몰아치는 틈을 타 제국에 귀순했다. 그는 문맹이었으며 학식은 형편없었지만 엄청난 힘과 말을 잘 다루는 솜씨가 있었다. 황제는 그를 마음에 들어해 궁정에 데려와 친구로 삼았고, 몇년 후에 시종장에 임명했다. 게다가 황제는 자신의 정부인 에우도키아 잉게리나를 바실리오스와 결혼시켰다.[130] 이는 자신의 정부를 황궁으로 데려올 때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바실리오스와 결혼시켰던 것으로 짐작되며 잉게리나는 레온과 스테파노스를 낳았다. 그리고 미하일은 자신의 누나인 테클라를 바실리오스의 정부로 삼게 했다.[131]
866년 봄, 바르다스는 크레타를 회복시키기 위한 대규모 원정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 전해 겨울에 황제와 시종장 바실리오스가 자신의 목숨을 빼앗을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첩보를 들었다. 그는 원정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고 조카를 찾아가 당당하게 따졌다. 이에 미하일 3세와 바실리오스는 866년 3월 25일 성모 희보 축일[132]에 성모 마리아 칼로프라테이아 성당에서 바르다스에게 적대적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내용의 공식 서명서에 서명했다. 이 맹세는 소피아 성당의 성해 가운데서도 가장 귀중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서명할 만큼 엄숙했기에 바르다스는 의심을 풀었다.
바르다스는 황제와 함께 함대를 타서 소아시아의 고대 도시 밀레투스 부근 마이안데르 강 어귀의 어느 지점까지 가서 닻을 내렸다. 그때 황제가 바르다스를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첩보를 접했지만, 그는 웃어넘겼다. 그러나 내심 걱정됐는지 그날 밤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튿날 아침 친구인 필로테오스 로고테테스 장관에게 두려움을 털어놨다. 그러자 필로테오스는 애써 그를 달래며 "복숭아 색깔의 황금 외투를 입고서 적을 상대하게. 그들은 자네 앞에서 뿔뿔이 흩어질 걸세."라고 말했다. 바르다스는 그 말에 따라 화려한 의복을 차려 입은 채 말을 타고 황제의 막사로 갔다. 그러고는 황제 곁에 앉아 로고테테스 한 명이 읽는 아침 보고서를 주의깊게 읽었다. 보고가 끝난 뒤, 바르다스는 황제를 돌아보며 별다른 일이 없다면 지금 크레타 공격을 개시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바로 그 순간, 바실리오스가 신호를 보냈다. 이걸 목격한 바르다스는 재빨리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들려 했지만, 바실리오스가 무지막지한 힘으로 그를 쳐서 쓰러뜨리자 다른 음모자들이 급히 달려들여 그를 죽여버렸다. 미하일 3세는 즉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포티오스 총대주교에게 서한을 보내 바르다스가 반역죄로 즉결 처분되었다는 소식을 통보했다. 포티오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폐하의 덕과 자비로 말미암아, 저는 그 서한이 날조되었다거나 바르다스가 다른 이유로 죽었다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후 미하일 3세는 원정을 취소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바르다스의 반역을 공표하고 시종장 바실리오스를 부황제(카이사르)로 임명한다고 선포했다. 이리하여 바실리오스는 한낱 농부에서 불과 9년 만에 부황제로 등극했다.
삼촌을 제거하고 바실리오스를 부황제에 임명한 뒤, 미하일 3세는 향락에 몰두했다. 그는 매일 술에 흠뻑 취했고 술에 취하지 않은 때는 오로지 전차 경주만 생각했다. 그는 벽이 온통 대리석으로 뒤덮인 마구간을 지었고 성 마마스 궁전에 경주로를 설치하여 원형 경기장에서의 경주를 위한 개인 연습장으로 삼았다. 또한 경주자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에게 금은보화를 선물하고 그들의 자식들의 대부 노릇을 했다. 심지어 경기 도중에 자기가 경주에 참여하게 되자 황제석에 성모 마리아 이콘을 세워놓고 성모 마리아에게 자신이 이기도록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이렇듯 향락에 취해 기행을 벌이는 미하일을 지켜본 바실리오스는 그를 제거하고 단독 황제에 오르기로 결심한다.
867년 9월 24일, 두 황제와 에우도키아 잉게리나는 성 마마스 궁전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날 무렵, 바실리오스는 핑계를 대고 방을 나와서 미하일의 침실로 갔다. 그는 방문의 걸쇠를 구부려놓아 문이 잠기지 않도록 해놓고는 다시 식탁으로 돌아왔다. 미하일은 여느 때처럼 만취한 상태에서 비틀거리며 잠자리에 들어 곧 깊은 잠에 빠졌다. 그때 음모자들은 황궁의 외딴 구석에 집결했고 바실리오스가 곧 그들과 합세해 미하일의 침실로 향했다. 당시 황제의 술친구인 파트리키오스 바실리스카우오스는 황제의 옆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다급하게 문을 닫으려 했지만 걸쇠가 망가져 있어서 그럴 수 없었다. 바실리오스는 파트리키오스를 걷어차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
이후 음모자들은 한 사람씩 황제를 찔렀고 바실리오스의 사촌 아실라이온이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암살자들은 죽어가는 미하일을 내버려두고 황금뿔로 내려가서 대기하고 있던 배를 타고 황궁으로 건너갔다. 이튿날 아침, 바실리오스는 에우도키아 잉게리나를 황제의 숙소로 부르고 비로소 미하일의 사망을 공표한 후 황제로 등극했다. 미하일의 시신은 아시아 쪽 해안의 크리소폴리스에서 약식으로 장례식을 치른 뒤 매장되었다.
2.9. 마케도니아 왕조
미하일 3세를 시해하고 황제로 즉위한 바실리오스 1세는 우선적으로 미하일 3세까지 이어져 오던 포티오스 분열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로마 교회와의 화해를 꾀하고자 하였고, 이에 교황의 뜻대로 포티오스를 파면하였다. 그리고 후속 조치를 위해 공의회를 열고, 새로운 교황 하드리아노 2세는 여기에 교황 사절을 파견하였다. 869년부터 870년까지 열린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포티오스와 그를 서품한 그리고리오스를 단죄, 로마의 수위권 인정, 5대 총대주교좌의 서열이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으로 결정, 주교 선출에 대한 국가의 간섭권 부정[133], 성화상 공경에 대한 제2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 재확인이 되었다.[134]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거룩한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 곧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0,40)와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라는 말씀이, 그들의 뒤를 이어 그들을 따라, 가톨릭 교회의 교황들과 최고 사목자들이 된 모든 이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믿으며너,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권력들도 총대주교좌를 다스리는 이들에게서 어떤 것도 절대로 불명예스럽게 하거나 그들의 주교좌에서 어떤 것도 제거하려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옛 로마의 교황 성하와 그다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그다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그리고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들이 모든 영예와 존경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판단할 것을 결정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옛 로마의 교황 성하를 거슬러, 포티우스가 최근에 한 것과 오래 전에 디오스코루스가 한 것처럼, 마치 어떤 범죄를 알리는 듯한 핑계로, 글들을 쓰거나 이야기를 꾸며 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누가 포티우스와 디오스코루스처럼,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 좌에 반대하여 글로써 또는 글을 쓰지 않고 어떤 모욕을 야기시키는 그런 자만심과 대담함을 행사한다면, 그는 저들과 동등하고 같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
만일 세속의 권력을 향유하거나 차지하면서 이미 언급한 사도좌의 교황이나 다른 총대주교들 중 어느 누구를 내쫓으려 시도한다면 그는 파문될 것이다.
더 나아가, 만일 보편 공의회가 소집되어 로마인들의 거룩한 교회에 대해 어떤 의심이나 논쟁이 생겼다면,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마땅한 경의를 가지고 제기된 문제에 대하여 알아보고, 도움을 받든지 도움을 주든지 해결책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지만, 결코 옛 로마의 교황들을 거슬러 감히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카논 21[원문]
그러나 만일 누가 포티우스와 디오스코루스처럼,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 좌에 반대하여 글로써 또는 글을 쓰지 않고 어떤 모욕을 야기시키는 그런 자만심과 대담함을 행사한다면, 그는 저들과 동등하고 같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
만일 세속의 권력을 향유하거나 차지하면서 이미 언급한 사도좌의 교황이나 다른 총대주교들 중 어느 누구를 내쫓으려 시도한다면 그는 파문될 것이다.
더 나아가, 만일 보편 공의회가 소집되어 로마인들의 거룩한 교회에 대해 어떤 의심이나 논쟁이 생겼다면,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마땅한 경의를 가지고 제기된 문제에 대하여 알아보고, 도움을 받든지 도움을 주든지 해결책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지만, 결코 옛 로마의 교황들을 거슬러 감히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카논 21[원문]
때문에 동로마 측은 사략선까지 동원하여 공의회 문서를 탈취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의회는 869년 10월 5일부터 870년 2월 28일까지 황제 특사 바네스의 사회로 회의를 열었다. 개막 당시에는 이냐티우스파 주교 열둘만이 참석한 극히 보잘것없는 회합이었으나, 마지막에는 참석자가 최대 103명까지 늘어났다. 이 공의회의 부수현상 가운데 중요한 것: 포티우스가 로마와의 싸움을 근본적인 차원으로 몰고가자, 로마 교황 사절들 쪽에서도 이 기회를 이용하여 참된 신앙의 규범이자 교회일치의 중심으로서의 교황수위권에 대한 원칙적 인정을 요구했다. 이 일은 '「명예회복 문서」{{{-2 Libellus satisfactionis''}}}를 통해 행해졌던바, 포티우스 추종자들은 복권과 재임용을 원한다면 이 문서에 서명해야 했다. 근본적으로 519년 「호르미스다스 정식」의 표현들을 다시 채택한 이 문서에 따르면, 참된 신앙과 교회일치를 위한 보증은 로마와의 결속에 있다. 포티우스 추종자들에게는 이 문서에 서명하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 후에 일어난 사건들은 주목할 만하다. 주교들은 황제에게 로마 교회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를 자매가 아니라 마치 여주인의 하녀처럼 취급하는 것을 황제가 용납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황제로서도 로마 사절들이 자신도 원하던 포티우스 사건의 해결을 넘서서서 그것을 교회론 문제의 전반적 해결 기회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매우 불쾌했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 「명예회복 문서」의 서명본들이 사절들의 숙소에서 없어졌다. 그들에게 배정된 하인들이, 물론 높은 분들의 지시로, 그것들을 훔쳐냈던 것이다. 사절들은 즉시 위협하기를, 자기들은 곧바로 떠나 공의회를 흩어 버리겠다고 했다. 그러자 서류들이 "우연히" 다시 발견되었다. 로마 사절인 도서관원 아나스타시우스는 그러나 이 사건 때문에 조심하게 됐고, 그래서 모든 공의회 문서의 사본을 만들어 두었다.
아나스타시우스의 행동이 참으로 적절했음은 공의회가 끝난 뒤에 드러날 터였다. 귀국 길에 사절들의 배가 아드리아 해에서 해적들에게 습격을 당했다. 사절들은 상당히 오랜 기간 잡혀 있다가 개별적으로 풀려났으나, 문서들은 돌려받지 못했다. 그러나 해적들과 그들에게 그 일을 지시했음이 확실한 황제는 도서관원 아나스타시우스가 사본을 만들어 다른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돌아가리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튼 그렇게 하여 이 공의회의 문서들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그리스 교회는 훗날 공의회를 무효로 선언했기 때문에 문서들도 폐기해 버렸다.
-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 이종한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5), 121-122쪽
아나스타시우스의 행동이 참으로 적절했음은 공의회가 끝난 뒤에 드러날 터였다. 귀국 길에 사절들의 배가 아드리아 해에서 해적들에게 습격을 당했다. 사절들은 상당히 오랜 기간 잡혀 있다가 개별적으로 풀려났으나, 문서들은 돌려받지 못했다. 그러나 해적들과 그들에게 그 일을 지시했음이 확실한 황제는 도서관원 아나스타시우스가 사본을 만들어 다른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돌아가리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튼 그렇게 하여 이 공의회의 문서들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그리스 교회는 훗날 공의회를 무효로 선언했기 때문에 문서들도 폐기해 버렸다.
-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 이종한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5), 121-122쪽
이렇게 로마 교황에게 저자세로 많은 것을 양보할 정도로 포티오스 분열을 마무리한 것에 대해서 그동안 성상파괴운동과 이슬람 제국, 불가리아와의 전쟁으로 오랫동안 신경을 제대로 못 썼던 이탈리아에 다시 신경을 쓰기 위한 목적이 컸다.
또한 로마 교황에게 무작정 퍼주지도 않았는데 미하일 3세 이후 서방 교회 관할로 넘어갔는데, 때마침 불가리아 제1제국의 보리스 1세가 불가리아 총대주교구를 인정해 달라고 요청해 오는 일이 있었다. 바실리우스는 이를 기회로 불가리아를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관할로 만드는 데 성공했으나 교황 니콜라우스가 이일을 알게 된 후 바실리오스의 목적이 유럽 전역의 교회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는 것이라 확신한 후 바실리오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면서 관계는 다시 벌어지게 되었다.
어째든 바실리오스가 염두에 두고 있던 이탈리아 남부의 동로마 제국령은 시칠리아를 제외한 남이탈리아 본토의 영역은 지도로 볼 때 면 단위가 아니라 거의 점 단위로 줄어 있었고, 그의 목표는 이탈리아 남부를 차지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을 약화시켜 아드리아 해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서방황제를 겸하고 있던중프랑크 국왕인 루도비쿠스 2세와 제휴했고, 아드리아 해에 함대 139척을 보냈다. 크로아티아 해변인 달마티아에 대한 지배권 재확립, 궁극적으로 이탈리아를 수복하는 것이었다. 목표대로 전부 다 되지는 않았지만 변방의 새로 나타난 이민족을 몰아냈으며 871년 함대를 파견해 바리, 오트란토, 타렌토, 칼라브리아를 수복했다. 하지만 시칠리아는 오히려 뺏겼다. 여기에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136]가 일선 사령관으로 큰 역할을 했다.
게다가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루도비코 2세와는 결혼 동맹[137]을 제의하고 바리를 함께 수복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동로마의 제독이 신성 로마 제국군의 준비가 불성실하다고 여겨 루도비코를 '프랑크의 왕'으로 부르자 루도비코는 모욕에 분통을 터뜨렸고[138] 이로써 바실리오스가 동맹자로 점찍었던 두 사람은 적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이와 같이 외교적 실패와는 반대로 동로마의 육군은 사라센만이 아니라 세력을 키워 서쪽으로 소아시아까지 진출한 파울리키아파[139]도 상대해야 했다. 격전끝에 바실리오스는 파울리키아를 내몰고 주요 기지를 파괴했으며 지도자를 죽였다. 서유럽에서도 성과를 올려 크레타와 시칠리아는 비록 수복하지 못했으나[140] 달마티아 전역에서 사라센을 몰아내어 전 지역에 테마를 설치했고 베네벤토의 아델키스, 오트란토, 바리를 손에 넣었다. 제국은 사실상 남이탈리아 전역을 손에 넣어 이로써 교황령과 서방 제국은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의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제국 해군도 테옥티스토스와 바르다스의 조련을 받아 만만찮은 전력을 회복했고 바실리오스 대에는 언제 어디서든 사라센의 기습함대가 나타나면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이 같은 군사적 업적은 이후로 100년간 동로마 제국이 외부의 적들의 공세에 맞설 수 있는 군사적 기반을 만들어주었다.
선교 사업 역시 활발하게 진행됐고 발칸의 슬라브 부족들은 하나둘씩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은 정교회가 지배하게 되었다. 새로 만들어진 불가리아 교구 역시 정교회의 품에 돌아왔다. 바실리오스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낡고 붕괴 위험에 처한 대성당들을 보수하고 모자이크 장식을 더했으며 소피아 대성당에 비할만한 대성당인 네아[141]를 지었다. 황궁과 다른 궁전들도 보수하고 화려함을 더했으나 오늘날 바실리오스가 만든 건축물은 하나도 전하지 않는다. 법전도 개정하였다.
다만 바실리오스의 후계는 매우 불안정했다. 미하일 3세의 의향으로 맞이한 에우도키아 잉게리나의 장남인 레온 6세는 당대에 바실리오스가 아니라 미하일의 자식으로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바실리오스의 후사들로 여겨져 마케도니아 왕조로 불리나 이는 후대 역사가들이 보기에도 신빙성 있어 보이는 듯. 바실리오스의 자식은 첫째인 콘스탄티노스로 바실리오스를 닮았으며 둘째, 셋째 자식은 미하일의 자식인지 바실리오스의 자식인지 불분명하다.[142] 바실리오스는 전 부인의 소생인 콘스탄티노스를 끔찍이 아꼈으며 첫 아들이 죽자 바실리오스는 이를 자신이 저지른 두 차례의 암살에 대한 댓가로 여길만큼 큰 실의에 빠지며 때로 광기마저 보일 정도였다. 이어서 정식 후계자가 된 레온[143]에 대한 바실리오스의 감정은 싫어하던 것을 넘어 거의 혐오에 가깝게 발전한다. 레온은 반역에 대한 혐의를 받아 감옥에 갇히고 실명할 뻔 하였으나 간신히 피하고 죽을 뻔 하였으나 가까스로 석방된다. 바실리오스는 사냥 중 죽는데 기록은 상세하나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 정황상 암살로 추정된다.[144]
바실리오스 2세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죽게 되면서 바실리오스가 가장 증오했던 레온 6세가 즉위하게 되었다. 레온은 즉위 후 애인 조이의 아버지인 스틸리아노스 자우치스(Στυλιανὸς Ζαούτζης)에게 각종 칭호를 하사하는 한편, 체신부 장관(Logothetes tou dromou)이라는 요직에 임명해 제국의 대내외 정책을 총지휘하게 했다. 반면 전 황제 바실리오스 1세와 밀접한 관계였던 총대주교 포티오스를 퇴임시키고 886년 크리스마스에 막내동생 스테파노스를 총대주교로 임명했다.[145] 이후 레온은 899년에 종교회의를 소집해 동방교회와 서방 교회의 관계를 개선시켰다.
이렇듯 종교 문제를 해결한 뒤, 레온은 로마법을 개정하고 재편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그는 바실리오스 1세가 구성한 법률위원회의 프로토스파타리오스인 심바티오스의 도움을 받아 법 개정 작업에 돌입했다. 그는 동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들 중에서 가장 학식이 풍부한 황제여서 이런 일에 적합했다. 그 결과 <바실리카 법전>이 몇 년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 법전은 대체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칙법휘찬>과 <학설휘찬>에 바탕을 두었지만 <프로케이론> 같은 후대의 법전도 포함되었다. 이 <바실리카 법전>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어가 되어버린 지 오래인 라틴어 대신 그리스어로 법규들을 기록했다.
또한 레온은 <신법령>을 제정했다. 이 법전은 정치와 종교의 이념이 변화한 상황에 맞춰서 낡은 법들을 개정하거나 폐지한 113개 조의 법령집이다. <신법령>은 황제가 지상에서 신을 대리하는 사람으로 규정했지만 교회서열로는 평신도에 지나지 않으며 교회의 지도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라고 밝혔다. 물론 황제가 총대주교를 임명하긴 하지만, 그것은 모든 성직자들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또한 황제는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야 했고 교리 문제에 대한 황제의 의무는 정교회 신앙을 규정된 대로 보호하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종교 외의 다른 분야에서의 황제의 권력은 절대적이었고 원로원은 입법 기능을 박탈당하고 단지 자문 기능만 수행할 수 있었다. 황제는 12사도와 동격이며 제국 정부의 주인이고, 군대의 총사령관이며, 유일한 입법자이자 최고 판사였다. 그의 결정은 그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따라야 했다.
또한 레온은 공공 건물 건설에도 박차를 가했다. 특히 이 시기에 건설된 키프로스 라르나카의 라자로스 교회는 비잔틴 건축 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그리고 레온은 <총독의 책(Book of the Eparch)>과 <필로테오스의 글레토롤로그온(Kletorologion of Philotheos)>을 발간했다. 총독의 책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무역 및 무역 조직에 관한 규칙과 규정이 기술되어 있고, 글레토롤로그온은 동로마 제국 법원의 관리와 집행 체계를 표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레온은 <탁티카(Tactica)>의 저자 또는 후원자로 여겨지며, 이 책은 동로마 제국의 군사 조직과 전술, 그리고 외적에 대한 동로마의 대응 방식 등이 기술된 중요한 군사 사료다.
894년, 레온의 최측근인 스틸리아노스 자우치스는 자기 심복 두명에게 불가리아 무역의 독점권을 내주었다. 그들은 제국으로 수입되는 모든 물품에 대해 불가리아 상인들이 지불하는 관세를 대폭 인상하고 물자 집산지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테살로니키로 옮겼다. 그러자 불가리아와 제국간 무역로가 붕괴되었고, 불가리아 국왕 시메온은 즉각 항의했지만 레온은 듣지 않았다. 이에 시메온은 무력 행사를 하기로 결심하고 트라키아를 침공해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시메온 전쟁)
레온은 남부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었던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를 급히 소환해 시메온의 공세를 저지하게 하는 한편 마자르족에게 도움을 요청해 불가리아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자 시메온은 또다른 유목민족인 페체네그족에게 막대한 양의 황금을 바치고 마자르족의 후방을 공격하게 했다. 마자르족의 영역은 페체네그족에게 큰 타격을 입었고, 마자르족은 시메온과 페체네그족의 협공을 피해 카르파티아 고개를 넘어 판노니아 대평원으로 들어갔다.[146] 마자르족이 완전히 물러가자, 시메온은 다시 동로마 제국을 공격했다. 896년, 그는 불가로피곤 전투(Battle of Boulgarophygon)에서 제국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결국 레온은 5년간 평화 협상 끝에 매년 많은 공물을 바치기로 하고 강화를 맺었다.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발칸 반도로 가서 시메온과 맞서던 사이, 사라센은 남부 이탈리아로 쳐들어왔다. 902년 8월 1일, 시칠리아에 남아있던 제국의 마지막 거점인 타오르미나가 함락되었다. 사실 타오르미나가 마지막은 아니고, 타오르미나의 소속도 계속 변했었으며, 로제타는 965년까지 버텼지만 일반적으로 902년에 이슬람 세력이 시칠리아를 거의 또는 완전히 통일했다고 본다.[147] 이후에도 1025년 바실리오스 2세 때 메시나에 상륙했었지만 그 해 마침 황제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취소되었던 적도 있었고, 1038~1042년 동안에 탈환을 위한 원정이 있었고 한때는 메시나를 포함하여 시칠리아의 동해안을 전부 장악했었다고 하지만 내분으로 좌절되었다. 그리고 제국 동방에서는 아르메니아가 사실상 무방비 상태에 빠졌으며 킬리키아도 위험해졌다. 그리고 테살리아의 테메트리아스가 파괴되었다. 904년, 트리폴리의 레온이라는 이름의 동로마인 출신의 전향자가 사라센 함대를 이끌고 헬레스폰트를 거쳐 마르마라 해로 진입했다가 격퇴되자 테살로니키로 진군해 904년 7월29일 제국 제2의 대도시였던 테살로니키를 함락하고 일주일간 살육을 자행하고 귀중한 전리품과 3만여 포로를 싣고 떠났다.
레온은 테살로니키가 파괴된 것에 대한 보복을 결심했다. 그는 우선 파괴된 테살로니키의 요새를 재건하고 강화한 뒤 선박을 대량으로 건조하여 대규모 함대를 구성했다. 그는 905년 가을에 이메리오스 장군이 지휘하는 함대를 출격시켜 아탈레이아로 가서 현지 군대 총독인 안드로니코스 두카스가 지휘하는 육군을 태운후 타르소스로 진군하는 작전을 수립했다. 타르소스는 사라센의 거점이자 테살로니키와 맞먹는 항구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이메리오스는 아탈레이아로 진군했는데, 두카스는 자신보다 아래 계급이라고 여긴 이메리오스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것에 반발하여 합류하기를 거부하고 제국에 대해 공공연히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이메리오스 장군은 작전을 강행하기로 마음먹고 타르소스로 진군해 사라센 함대를 완전히 격파하고 일대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한편, 안드로니코스 두카스는 제국에 반기를 들었다가 토벌대를 피해 이코니온 부근의 한 요새로 도망쳤다. 그는 여기서 906년 3월까지 머물다가 제국군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와 함께 사라센 영토로 넘어가서 파괴된 타르소스에 잠시 체류한다음 바그다드로 피신했다. 이에 레온은 바그다드로 사절단을 보내 포로 교환 협상을 벌였다. 이때 황제는 사절단에게 비밀 서신을 맡겨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에게 전하게 했다. 그 서신의 내용은 예전처럼 충성하면 모든 것을 용서하고 원대 복귀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서신은 도중에 발각되었고, 안드로니코스 두카스는 이슬람교로 개종해 처형을 피했지만 철저한 감시를 받다가 얼마 후에 사망했다.
한편, 레온은 제국 서방에서도 니키포로스 포카스의 분전으로 남이탈리아 랑고바르드 지배 지역의 핵심이던 베네벤토 (베네벤툼)을 탈환하여 '롱고바르디아' 테마를 창설하는 등 마냥 밀리지만은 않은 모습을 보였다.
레온은 황제 즉위 전에 테오파노 마르티나키아와 결혼했고 황제 즉위 후 그녀를 황후로 삼았다. 하지만 그는 테오파노를 싫어했다. 테오파노는 종교에 깊이 빠져 하루종일 기도를 올렸고, 심지어 밤에 남편과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고 방 한구석에서 거친 요를 깔고 자다가 매 시간 일어나 기도를 올렸다. 이러니 후계자 생산이 요원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두 사람간의 유일한 혈육인 에브도키아가 892년 겨울 사망하자, 테오파노는 은둔 생활에 더욱 깊이 빠졌고 블라헤르나에 법궁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 속한 수녀원에 들어가더니 897년 11월 10일 딸의 뒤를 따라갔다.
레온은 테오파노의 장례식을 성대히 치러준 뒤 즉위 전부터 연인으로 삼았던 조이 자우치나와 898년에 결혼했다. 사실 그녀는 바실리오스 1세에 의해 테오도로스(Theodore Gouniatzizes)와 결혼했으니 레온과 맺어질 수 없었지만, 공교롭게도 테오도로스는 바로 이 시점에서 사망했다. 우연 치고는 기막힌 시점에서 죽었기에 황제에게 모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증거는 없다. 아무튼 황제와 결혼한 조이는 곧 임신했고, 레온은 아들을 기대했지만 막상 태어난 아이는 딸이었고 안나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레온이 겪게 될 불행의 시작이었다.
899년 봄, 조이의 아버지이자 레온의 최측근 스틸리아노스 자우치스가 사망했다. 레온은 장인에게 바실레오파토르라는 직함을 부여해 명복을 기렸다. 그리고 그해 겨울, 조이는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레온은 깊은 슬픔에 잠겼지만 또 다시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그에겐 마땅한 아들이 없었고 명목상 공동 황제인 알렉산드로스 2세는 술과 방탕한 생활로 인해 레온보다 먼저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국의 국교인 정교회는 삼혼을 '점잖은 간통'으로 간주했으며 4년 동안 영성체를 하지 못하는 형벌을 받아야 했다. 영성체는 신의 은총을 정기적으로 받는 행사였으니 황제가 그걸 받지 못한다면 국가 전체의 중대한 문제였다.
당시 총대주교인 안토니오스 2세 카울리아스[148]는 레온을 위해 특별히 삼혼을 허락하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900년 여름, 레온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린 '신부 전시회'를 통해 프리기아 출신의 에우도키아 베아나를 새 아내로 맞이했다. 901년 4월 12일 부활절, 에우도키아는 마침내 레온에게 아들을 선사했다. 그런데 그녀는 출산의 고통으로 얼마 안가 죽었고 아이마저 며칠 뒤에 사망했다. 이때 성 라자로스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은 에우도키아가 삼혼이라는 죄악을 저질렀으니 자기 수도원의 경내에 매장하는 걸 단호하게 반대해 가뜩이나 슬픔에 잠긴 황제를 격분하게 만들었다.
레온은 이제 네 번째 결혼을 하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네 번째 결혼은 지난 3차례의 결혼 때에 비할 수 없이 극심한 반발을 살 우려가 있었다. 정교회 교리에 따르면, 사혼은 간통보다 나쁜 일부다처의 죄이며, 사혼을 한 인간은 '인간이 아닌 금수와 같은 존재'로 취급되어 8년 동안 영성체를 하지 못하는 벌이 부과되었다. 그래서 레온은 일단 이메리오스 장군의 조카딸 조이 카르보노프시나를 정부로 삼았다. 그 후 905년 9월, 조이가 마침내 아들을 낳았다. 안토니오스 총대주교는 이 아이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해 달라는 레온의 요청에 장기간 고민한 끝에 조이를 황궁에서 내보내는 대신 태어난 아들에게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주기로 했다. 이리하여 906년 1월 6일, 아기 황태자는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고 콘스탄티노스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는 법적으로 '사생아' 취급이었기 때문에 이대로는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레온은 어떻게든 조이를 정식 황후로 삼아야 했다. 이에 레온은 황궁 내의 조그만 예배당에서 평범한 교구 사제를 앞에 두고 조이와 함께 극비리에 결혼식을 올린 후 이 사실을 공표하고 조이를 황후로 선포했다. 그러자 황제의 전횡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게다가 하필 이 시기에 온순했던 안토니오스 총대주교가 사망하고 새 총대주교에 등극한 니콜라오스는 당대 최고의 학자인 케사리아의 주교 아레타스의 맹공을 받고 있어서 황제를 돕기 힘든 처지였다.
니콜라오스 총대주교의 입지가 좁아지고 자신에 대한 비난이 폭주하자, 레온은 초조해졌다. 그는 어떻게든 특면장을 얻어내 사혼을 인정받고 싶었지만 니콜라오스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이에 황제는 906년 가을에 프사마티아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인 에우타미오스와 일종의 밀약을 맺었다. 그를 새 총대주교로 선출할 테니 특면장을 발급해달라는 것이었다. 또한 레온은 교황 세르지오 3세에게 사혼 문제에 관한 질문서를 보내 동방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길 희망하던 교황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건 니콜라오스 총대주교를 몰아낼 구실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906년 크리스마스, 레온은 조이를 데리고 행사에 참여했다. 이때 니콜라오스는 황제가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 들어오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다. 황제는 이에 항의하지 않고 잠자코 황궁으로 돌아왔지만 907년 2월 교황 특사가 수도에 도착하기 전날 밤에 니콜라오스가 반역자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와 비밀 연락을 주고받은 혐의가 있다며 그를 긴급 체포해 강제로 총대주교직에서 몰아냈다. 이후 교황의 사절이 교황의 승인을 담은 서신을 황제에게 전해줬고, 에우타미오스는 총대주교에 올라 황제가 그토록 고대하던 특면장을 부여했다.[149]
이렇게 해서 마침내 사혼을 달성하고 후계자 생산에 성공한 레온은 이제 열여덟 달이 된 아기 콘스탄티노스에게 '포르피로옌니토스', 즉 적장자 황태자라는 어엿한 신분을 부여했다. 이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훗날의 바실리오스 2세 때의 중흥기는 없었다.
910년, 레온은 이메리오스 장군에게 시리아의 라오디키아 항구를 공략하게 했다. 이메리오스는 임무를 충실히 완수한 후 단 한 척의 함선도 잃지 않고 무사히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그후 레온은 911년 가을 크레타 섬을 공략하기 위해 이메리오스를 파견했다. 하지만 사라센군이 크레타 섬의 방어를 강화했기 때문에 섬 공략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메리오스 장군은 911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여섯달 동안 포위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912년 4월, 수도로부터 황제의 건강이 악화되어 오래가기 어렵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포위를 풀고 수도를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그의 함대가 히오스 섬을 돌았을 때, 갑자기 대규모의 사라센 함대가 그들을 포위했다. 이 사라센 함대의 지휘관은 바로 테살로니키를 파괴했던 트리폴리의 레오였다. 동로마 제국의 함대는 이 전투에서 궤멸되었고 이메리오스는 간신히 미틸리니로 피했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이 재앙이 황궁에 전해졌을 때, 레온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그는 이 소식을 듣자 고개를 벽으로 돌려버렸고 912년 5월 11일 밤에 향년 45세로 사망했다. 그가 사망할 당시 콘스탄티노스는 아직 어렸기에 제위는 이부 동생인 알렉산드로스 2세에게로 넘어갔다.
912년 5월 11일 형 레온 6세가 사망하자, 알렉산드로스는 레온의 어린 아들 콘스탄티노스 7세와 함께 황제에 등극했다. 그는 화폐에 "전제 군주"(영어: autocrator, 그리스어: αὐτοκράτωρ πιστὸς)라는 용어를 삽입하게 한 최초의 동로마 제국 군주였다. 그는 레온이 취했던 모든 정책을 중단하게 했고 조카의 모친 조이 황후를 수도원에 감금했으며 조이의 삼촌이자 제국을 위해 혁혁한 공적을 세웠던 이메리오스 장군을 파면 후 투옥시켜 감옥에서 여섯 달 뒤에 옥사하게 만들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는 레온 6세에게 쫓겨났던 전 총대주교 니콜라오스를 총대주교에 복직시키고 형이 임명했던 총대주교 에우타미오스를 해직시켰다. 니콜라오스 총대주교는 복수심에 불타 에우타미오스를 고문한 후 아가톤 수도원으로 유배보내고 황제를 설득해 에우타미오스와 교황의 이름을 딥티코스(diptyque)[150]에서 삭제한 뒤 성직의 서열을 가리지 않고 에우타미오스를 따르는 무리들을 모조리 해임했다. 그러나 해임된 주교들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고 황제가 군대를 보내 무력으로 자신들을 쫓아내지 않는 한 자신의 교구에서 평상시처럼 성무를 돌보겠다고 선언했다. 급기야 몇 개 도시에서 소요가 일어나 심각한 폭동으로 이어지자, 니콜라오스 총대주교는 뒤늦게 자신이 실책을 범했음을 깨닫고 모든 명령을 황급히 취소했다. 이때까지 완전히 해임된 주교는 겨우 4명 뿐이었다고 한다.
한편, 알렉산드로스의 기행은 극에 달했다. 그는 공공장소에서 떠들썩한 주연을 즐겼고 고대의 신들을 제국 전역에서 다시 부활시키려 하기도 했다. 한번은 이교적 미신이 광기에 치달아 원형 경기장에 있는 청동 멧돼지상이 자신의 분신이라고 믿고 쇠약해진 자기 몸을 고쳐보겠다면서 멧돼지상에다가 새로 이빨과 생식기를 붙이라고 명령했다.[151] 심지어 알렉산드로스는 공동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를 거세하려 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 7세의 어머니 조이 카르보노프시나 황태후를 미워한[152] 니콜라오스 총대주교마저도 이것만은 결사 반대했기에 감행하지 못했다.
한편, 불가리아 왕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을 보내 알렉산드로스의 즉위를 축하하면서 901년에 맺었던 평화 조약을 갱신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그 조약은 형 레온이 맺은 것이니 무효라면서 앞으로는 조약 따위는 필요도 없고 더는 공물도 바치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치고는 그들을 쫓아버렸다. 이에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할 준비에 착수했다.
913년 6월 6일, 알렉산드로스는 41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점심을 잔뜩 먹은 뒤 한낮의 열기 속에서 무리하게 폴로 경기를 하다가 발작을 일으켜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는 성 불능을 치료하려는 목적으로 원형 경기장의 모든 조각상(아마도 그 청동 멧돼지상도 포함되었을 것이다.)들 앞에서 온갖 이교식 제사를 치르고 나서 곧바로 쓰러졌다고 한다. 그의 재위 기간은 고작 13개월이었지만, 그 짧은 기간에도 막 가파른 성장세를 타고 있었던 불가리아를 심히 자극하여 후대 황제들에게 큰 어려움을 주었다. 그의 사후 제위는 형의 아들인, 즉 조카인 콘스탄티노스 7세에게 넘어갔다.
콘스탄티노스가 즉위하고 섭정단이 통치를 대리하게 되었지만, 막상 황제의 어머니이자 아우구스타인 조이 황태후는 섭정단에 끼지 못했다. 이에 그녀는 강력히 항의했지만, 섭정단의 대표 니콜라오스 총대주교는 그녀를 체포해 삭발한 후 페트리움의 성 에우페미아 수녀원에 추방해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도 안나 수녀라는 소박한 이름으로 바꿔 부르게 했다. 이후 군사 장관인 콘스탄티노스 두카스[153]가 니콜라오스 총대주교와 밀약을 맺고 쿠데타를 기도했다. 그는 트라키아의 주둔지에서 동쪽으로 행군하여 밤중에 소수의 병력만 거느리고 수도에 들어왔다. 그가 보기에 궁전의 대문은 내통자들에 의해 활짝 열려 있을 테니 이 정도 병력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섭정단의 한 사람인 마기스테르 요안니스 엘라다스는 그가 올 것을 예상하고 민병대를 급히 모집하고 대기하고 있다가 두카스 일행이 오자 급습했다. 두카스는 전투 도중 자신의 아들인 그리고리오스를 비롯한 병사 몇 명이 죽자 달아나려 했지만 그가 탄 말이 젖은 포도 위에 미끄러졌다. 그가 땅바닥에 쓰러지자, 수비병 한 명이 한 칼에 그의 머리를 베었다.
하지만 니콜라오스 총대주교는 자신이 두카스와 음모를 꾸몄다는 것을 부인했고 두카스와 연루된 혐의가 있는 모든 이들을 가혹하게 다뤘다. 많은 이들이 처형되었고 그들의 시신은 장대에 꽂혀 보스포러스 해협의 아시아 쪽 해안에 전시되었다. 매질과 실명의 형벌을 당한 사람도 많았고 하기아 소피아로 피신한 사람들도 끌고 나와 삭발시키고 수도원으로 추방했다. 두카스의 아내는 가문이 소유한 파플라고니아의 외딴 영지로 유배되었고 두카스의 또 다른 아들은 거세형을 당했다. 섭정단이 "너무 무자비하지 않냐"고 항의할 때에야 그는 비로소 유혈극을 중단했다.
두카스의 정변이 일어난 지 2달 후, 불가리아 국왕 시메온이 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했다. 그의 군대는 마르마라 해에서 황금뿔 만의 상류 구역까지 이어지는 육로 성벽을 따라 세운 진지의 길이가 6km에 달할 만큼 거대했다. 그는 수도로 이르는 육로를 차단하고 주변 촌락들을 철저하게 파괴하겠다고 으름장 놓으면서 햅도몬 궁전을 장악한 뒤 전령을 보내 협상할 의사가 있음을 통지했다. 이에 니콜라오스는 시메온의 두 아들을 수도로 초청해 콘스탄티노스가 참석한 가운데 블라케르나이 궁전에서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이후 그는 비밀리에 헵도몬 궁전에 가서 시메온을 찾아가 은밀히 논의했다. 시메온은 그동안 밀린 공물을 보내라고 요구했고 콘스탄티노스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킬 것을 제안했다. 니콜라오스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자, 시메온은 불가리아로 철수했다.
그러나 니콜라오스가 자신들과 의논도 없이 시메온과 그런 밀약을 맺었다는 것을 알게 된 섭정단은 분노했다. 가뜩이나 조이 황태후를 유페보내고 두카스 사태를 잔혹하게 처리한 것만으로도 분개할 일인데, 시메온의 딸을 황제와 결혼시키는 중차대한 일을 자기 멋대로 처리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더구나 시메온은 황제의 장인이 된 후 장차 공동 황제로 즉위할 속셈이었다. 만약 이 일이 성사된다면 불가리아 국왕이 제위까지 얻게 되므로 제국은 불가리아에게 넘어가고 말 것이다. 이런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섭정단은 914년 2월 정변을 일으켜 니콜라오스를 실각시키고 수도원에 유폐되었던 조이 황태후를 복귀시켜 섭정을 맡게 했다. 또한 황후의 옛 친구들과 조언자들 역시 원직에 복귀했다. 이후 니콜라오스는 정치 문제에 절대로 뛰어들지 않겠다는 약속을 걸고 총대주교직을 유지했다.
우여곡절 끝에 섭정을 맡게 된 조이 황태후는 먼저 아쇼트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즉위시키고 그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초청하여 아르메니아로 원정 가는 문제를 논의했다. 이듬해 봄, 아쇼트는 제국군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페르시아의 아미르 유수프는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중과부적으로 밀렸고, 아르메니아의 서부 전체와 동부 대부분이 아쇼트의 수중에 들어왔다. 이후로도 4년간 더 전쟁이 벌어졌지만, 대체로 아쇼트가 아르메니아에서 우세를 확보했고 조이는 첫번째 원정을 승리로 장식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또한 제국군은 타르소스에서 쳐들어온 사라센군을 격파했고 남이탈리아의 랑고바르디아 테마에서 사라센군을 궤멸시켰다.
915년 9월, 시메온은 니콜라오스 총대주교가 실각하고 조이 황태후가 섭정을 맡게 되었으며 자기 딸과 콘스탄티노스 황제를 결혼시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접하자 대군을 이끌고 아드리아노폴리스로 진군해 손쉽게 현지 총독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조이 황태후가 도시를 수복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했다는 급보를 접하자, 이렇게 빨리 맞대응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시메온은 황급히 철수했다. 이후 시메온은 2년 동안 테살리아와 이피로스의 크고 작은 도시들을 수시로 공략했다.
그러다가 917년에 시메온의 군대가 트라키아로 돌아가자, 조이 황태후는 선제 공격을 하기로 결심했다. 크리미아 케르손의 군사 총독 요안니스 보가스는 황태후의 밀명을 받들어 한때 시메온의 동맹 세력이었던 페체네그족을 매수하여 북쪽에서 불가리아를 침공하게 했다. 동로마 함대는 페체네그족을 다뉴브 강 건너편으로 수송해줄 것이며, 그동안 제국 육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진군할 것이다. 그러면 대규모 협공에 걸려든 시메온은 강화를 제의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을 터였다.
그런데 사단이 일어났다. 함대 지휘관 로마노스 레카피노스는 요안니스 보가스와 만나자마자 서로 자신의 권한이 우월하다며 심한 말다툼을 벌였다. 그러더니 로마노스가 군대 수송을 거부해버렸다! 이로 인해 페체네그족은 자신들을 수송할 제국 함대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지쳐 고향으로 돌아가버렸다. 한편 대 레온 포카스가 이끄는 육군은 수도를 떠나 흑해 연안을 따라 행군했다. 이들은 불가리아로 진입했다가 8월 20일 새벽에 앙키알로스 항구의 외곽에 진지를 차렸다. 시메온은 이들을 기습해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이날 제국군은 거의 전멸했고 레온 포카스를 비롯한 소수의 병사들만이 가까스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재앙의 소식이 수도로 전해지자, 조이 황태후는 로마노스 레카피노스를 공식 심문에 회부하여 실명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이 중재에 나서 준 덕분에, 로마노스는 간신히 처벌을 면제받았다. 그해 겨울, 시메온이 군대를 이끌고 동부 트라키아를 유린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까지 밀어닥치자, 조이 황태후는 다시 레온 포카스에게 군대를 맡겼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카사시르타이의 서쪽 외곽에서 또다시 시메온에게 완패했다. 하지만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을 넘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불가리아로 철수했다.
한편, 조이 황태후는 2차례의 참패로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자신과 아들을 지켜줄 후견인을 모색했다. 그녀는 레온 포카스를 황궁으로 불려들어 조언자로 삼았지만 황제의 가정교사 테오도로스는 레온이 적임자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로마노스 레카피노스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에 로마노스는 어린 황제를 받들어 모시겠다고 선언하고 함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다. 황태후는 그에게 함대를 해산하라고 명령했지만 로마노스는 황태후가 보낸 시종장을 체포했다. 이에 황태후가 해명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지만, 그들은 돌맹이 세례를 맞고 쫓겨났다.
사안이 심각해지자, 황태후는 부콜레온에서 각료 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그녀에게 등을 돌렸고, 결국 그녀는 아들이 "어머니의 섭정을 끝내고 니콜라오스 총대주교와 옛 섭정단원인 마기스테르 스테파노스에게 공동 섭정을 맡기겠다"고 연설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이튿날 아침 한 무리의 병사들이 조이 황태후를 성 에우페미아 수녀원으로 호송하러 찾아왔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가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자 병사들은 마음이 흔들렸고, 그 덕분에 그녀는 권력만 잃은 채 황궁의 규방에 머물 수 있었다.
919년 3월 25일, 로마노스 레카피노스는 함대를 이끌고 부콜레온으로 와서 해상 대문을 통해 황궁에 들어가 제국의 정권을 장악했다고 선언했다. 1달 후, 그는 자신의 아름다운 딸 엘레니 레카피니와 콘스탄티노스의 결혼식을 하기아 소피아에서 치르고 그 자신은 바실레오파토르가 됨으로써 황제의 후견인이 되었다. 대 레온 포카스는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근거지인 크리소폴리스에서 반기를 들었다. 그는 제위를 찬탈하려는 바실레오파토르의 손아귀에서 어린 황제를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에 로마노스는 사제와 창녀를 비밀 첩자로 활용하여 황제의 위조 서명이 있는 문서를 널리 퍼트리게 했다. 그 내용은 콘스탄티노스가 장인에게 전권을 위임했으며, 레온 포카스는 반역자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사제는 곧 체포되었으나 창녀는 임무를 잘 완수해 레온의 병사 수백명이 무기를 내려놓게 만들었다. 레온은 거사가 실패했다는 걸 깨닫고 도망치려 했다가 비티니아의 어느 마을에서 붙잡혀 두 눈을 뽑히고 쇠사슬에 묶인 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왔다. 이 가련한 반역자는 그 후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며 노새를 타고 광장을 돌았다.
920년 여름, 로마노스는 니콜라오스 총대주교의 협조하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결혼에 관한 최종적으로 수정된 교회법이 포함된 '토무스 우니오니스(Tomus Unionis)'가 발표되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재혼은 완전히 합법적이고 삼혼도 나이 40살 미만의 아이 없는 홀아비의 경우 회개하는 조건 하에 허락되지만 사혼은 어떤 상황에서도 금지되며 사혼을 한 사람은 그 배우자와 영구히 결별할 때까지 파문에 처하는 형벌을 받는다. 이 법은 소급 적용되지 않았지만 레온 6세의 삼혼과 사혼은 훨씬 강도 높은 비난을 받았고 콘스탄티노스의 위상은 훼손되었다.
1달 후, 조이 황태후는 로마노스를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녀는 다시 머리를 삭발당하고 성 에우페미아 수녀원에 유폐되었다. 그리고 로마노스를 초청했던 테오도로스도 동생 시메온과 함께 체포되어 아나톨리아 북서부로 유배되었다. 이제 콘스탄티노스의 아군은 없었다. 콘스탄티노스는 자신의 15번째 생일 며칠 뒤에 로마노스를 부황제로 임명했고 3달 뒤인 920년 12월 17일에 로마노스의 머리에 황제 관을 씌워줬다. 이로서 로마노스 레카피노스는 로마노스 1세로서 제위에 등극했다.
이제 콘스탄티노스의 운명은 조만간 끝나는 듯했다. 로마노스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 어린 황제를 죽여버리는 건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노스는 그에게 손을 대지 않고 이름 뿐인 황제로서 목숨을 부지하는 걸 허용했다. 그리고 그의 아내이자 로마노스의 딸인 엘레니는 콘스탄티노스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콘스탄티노스의 생명을 부지할 수 있다면 기꺼이 앞장설 각오를 다졌다. 콘스탄티노스는 이 덕분에 무탈하게 성장했다. 그는 몸이 약한 대신 정신력이 뛰어났고 예술적이고 지적인 분야에서의 관심 폭이 넓었다. 그는 그림에 재능이 있었으며, 하루에도 몇 시간씩 동로마 궁정 예법을 지켜봤다. 그는 이 시기에 <궁정 예법>(Περὶ τῆς Βασιλείου Τάξεως)이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이 서적은 현재까지도 매우 귀중한 사료다.
또한 콘스탄티노스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921년 5월 로마노스가 맏아들인 흐리스토포로스 레카피노스를 공동 지배자로 내세웠을 때, 925년 로마노스가 다른 아들 2명을 황제로 만들면서 총 5명의 황제가 공존하는 상황을 연출했을 때, 심지어 927년 로마노스가 흐리스토포로스를 서열 2위로 올리고 콘스탄티노스 본인을 서열 3위로 밀어냈을 때에도, 콘스탄티노스는 항의의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아무런 불평 없이 유순하게 자신의 의무를 수행함으로서 로마노스의 경계심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속으로 이러한 굴욕을 가슴 깊이 새겼고 '로마노스 패거리들'의 야만성을 혐오했다.
어째든 로마노노스 1세가 정제로 즉위한 후 대내외적으로 동로마 제국을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황제로 즉위한 로마노스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불가리아의 국왕 시메온이었다. 시메온은 스스로를 차르로 칭하고 있었으며 이전부터 콘스탄티노스 7세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킴으로서 로마 황제로서의 제위 계승권을 얻으려 했다. 하지만 로마노스가 이를 차지하는 바람에 제위에서 멀어지자, 그는 로마노스와 갈등을 빚었다. 로마노스는 즉위 초부터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시메온과 우호 관계를 회복하려 했지만 시메온은 로마노스가 퇴위하지 않으면 어떤 협상에도 응하지 않겠다고 나왔다.
919년, 시메온은 헬레스폰트까지 진군해 제국을 압박했고 921년에는 카사시르타이까지 전진했다. 또 922년에는 보스포러스의 유럽 쪽 해안까지 진군해 제국의 군대를 격파하고 황금뿔만 건너편의 스테논(Stenon) 일대를 약탈했고, 로마노스가 아끼던 페게(Pegai)의 궁전들을 불태워 버렸다. 923년에는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점령한 뒤 끝까지 저항하다가 붙잡힌 모롤레온 총독을 고문 후 처형했다. 하지만 그는 육로 방면으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할 수 없었다. 이에 시메온은 924년 파티마 왕조와 협상하여 함대를 지원받고 해상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려 했다. 그러나 아랍 대표들을 데리고 귀국하던 불가리아 사절들은 공해상에서 로마 제국 함대에게 사로잡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다. 로마노스는 불가리아 사절을 억류하고 아랍인들에게는 선물을 안겨주면서 칼리프에게 화친의 의사를 전하고 시메온이 주겠다는 선물보다 더 많은 공물을 매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로 인해 파티마 왕조는 시메온을 돕지 않기로 했다.
시메온은 일이 틀어지자 로마노스와 평화 협상을 갖기로 했다. 924년 9월 9일, 로마노스는 친히 협상 자리에 나와서 시메온과 대면했다. 그는 이어진 회의에서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는 평화를 구걸하기보다는 그리스도교도로서의 선한 본성에 호소하면서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생각을 바꾸라고 열심히 설득했다. 또한 그는 연례 공물을 늘리겠다고 제안하면서도 그 제안을 설교 속에 포함시킴으로서 자신이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자애로운 후원자가 선뜻 도와주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당대 문헌에 따르면, 그 순간 독수리 두 마리가 하늘 높이 날아 함께 선회하더니 서로 떨어져서 한 마리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망루 위로 급강하하고 다른 한 마리는 서쪽의 트라키아 쪽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불가리아와 로마 제국은 하나로 뭉칠 수 없다는 신의 계시라고 여겼다고 한다.
평화 협상 결과, 제국은 매년 최고급의 공물을 불가리아에게 보내주는 대신 시메온은 제국의 영토에서 철수하고 그동안 점령한 흑해 연안의 요새들을 반환하기로 했다. 그리고 3년 후, 시메온이 사망하고 페터르 1세가 즉위했다. 페터르 1세는 재차 트라키아를 침공했다. 이에 로마노스 1세는 결혼 동맹을 제안하는 한편 세르비아와의 동맹을 추진해 불가리아를 견제하려 했다. 927년 페터르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로마노스의 손녀 마리아와 결혼해 불가리아와의 대립을 마무리했다. 불가리아 제국 황제가 불가리아 인과 로마 인의 황제를 자칭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쟁의 소지가 남아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협상을 통해 일단 불가리아 제국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는 현상 유지하는 형태의 40년간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교황과의 대립을 일단 해소한 것도 그의 업적이다. 그 외에도 루스, 마자르 등과도 주로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혼인 동맹을 통해 분쟁을 줄이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일단 양면 전선 중 한 전선 만이라도 갈등을 줄이려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가리아나 서유럽과의 관계는 주로 혼인 동맹으로 해결했지만 동방 전선에서 로마노스의 정책은 강경했다. 그는 오랜 친구인 요안니스 쿠르쿠아스를 사령관으로 하여 동방에 파견했다. 요안니스는 우선 반란을 제압하고 926년에는 아바시니아에서 공세를 펼치기 시작해 934년 멜리티니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동로마 제국은 처음으로 무슬림에게서 도시를 탈환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제국군이 동방에 집중해서 튀르크와 싸우는 동안 세력을 확장한 키예프 루스의 이고리 류리코비치가 로마노스 1세의 유대인 박해를 빌미로 94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기록상 천여척의 배를 이끌고 공격했는데 이때 로마노스는 육지쪽은 3중 성벽으로 방어되었고 바다쪽의 공격만 막으면 된다고 판단, 퇴역함 15척을 모아 이물과 고물에 그리스의 불을 탑재시키고 이것으로 방어에 활용해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이런 방법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방어는 성공했지만 퇴역함들은 후퇴하는 루스 선박들을 쫓아가지 못했다. 후퇴한 루스들은 분풀이로 주변 지역을 약탈하고 포로가 된 거주민들의 머리에 못을 박거나 십자가에 메달았지만 이듬해가 되자 동로마 제국은 요안니스 쿠르쿠아스와 바르다스 포카스, 2명의 장군을 수도로 소환하여 아직 머물고 있는 루스를 쫓아내었다.
루스 인들은 반격에 밀려 주변의 트라키아로 목표를 옮기기로 하고 함대도 거기로 이동시키려 했으나 때맞춰 테노파네스의 제국 함대가 이들을 기습해 거의 전 선박을 파괴해 버렸다. 이제 근거지인 크리미아로 돌아갈 배가 거의 남지 않게 된 루스는 토벌대에 쫓겨다니는 처지가 되어 대부분의 포로들이 참수되어 성벽에 내걸렸으며 극히 일부만이 소형선박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하자르 칸국의 기록으로는 루스 들은 카스피 해로 도망쳐서 아랍과 싸우게 되었다고 하며 동로마 제국은 이고르가 도주한 뒤에 다뉴브 강에 머물러 있는 동안 사절을 보내어 새로운 평화 조약을 맺었다.
내치로는 로마노스는 소규모 자영농에 바탕을 둔 민병대를 오래전부터 토지 겸병을 하고 있는 부유한 귀족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일련의 법을 공표했다. 또한 그는 귀족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을 인상해 제국의 재정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그는 제국 곳곳에서 발생한 폭동을 효과적으로 진압했고 928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역사상 가장 길고 추운 겨울이 찾아오자 솔선수범하여 비상 식량 공급 체계에 따랐고 빈민들을 추위로부터 구하기 위해 일련의 비상 조치를 실시했다.
한편 943년, 요안니스 쿠르쿠아스 장군이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이 에데사를 포위했다. 요안니스는 에데사 주민들에게 강화를 제의하고 모든 포로들을 돌려보내면서 그 대가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154]을 요구했다. 에데사 주민들은 비록 무슬림이었지만 예수를 위대한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어서 초상을 귀한 유물로 여기고 있었기에 그의 요구에 난감해했다. 그들은 칼리프에게 직접 문의하겠다면서 칼리프의 지침을 받을 때까지 공격을 유보해 달라고 부탁했다.
944년 봄, 에데사 주민들은 칼리프에게서 "그대들을 구할 방법이 딱히 없으니 그리스도의 초상을 저들에게 넘겨라."는 답신을 받았다. 이에 주민들은 성대한 의식을 거행한 뒤 초상을 요안니스에게 넘겨줬고, 요안니스는 곧바로 엄중한 호위를 붙여 그것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 8월 초, 그 초상은 보스포루스의 아시아 쪽 해안에 도착했고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 테오파네스가 직접 그것을 로마노스 황제에게 보냈다. 8월 15일, 그리스도의 초상은 금문을 통해 수도에 당당히 입성했다. 이 당시 로마노스는 몸이 아파 참석하지 못했고 흐리스토포로스는 931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나머지 세 황제가 총대주교와 함께 그리스도의 초상을 영접했다.
이 때 두 가지 사건이 벌어졌다. 하나는 로마노스의 두 아들 황제들은 천에 남겨진 그리스도의 초상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콘스탄티노스만이 분명하게 알아본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연도에 모인 군중 가운데에서 한 미친 사람이 느닷없이 뛰어나와 다음과 같이 외친 것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여, 영광과 축복을 받으라! 그리고 콘스탄티노스여, 제위를 받으라!"
이 무렵, 로마노스는 70대의 노인이었으며 수도자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국정에서 손을 떼고 신앙에 깊이 빠졌다. 또한 그는 두 아들 스테파노스 레카피노스와 콘스탄티노스 레카피노스가 부도덕하고 방탕한 생활로 악명이 높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에 그는 콘스탄티노스가 그의 두 아들들보다 선임 황제임을 분명히 못박는 유언장을 작성하고 이를 공개하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두 아들들은 아버지를 막기로 결심했다. 944년 12월 20일, 두 형제는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황궁으로 들어가 황제를 끌어내 프로티의 어느 작은 수도원에 감금하고 머리를 삭발시켰다.
이후 두 형제는 콘스탄티노스를 제거하려 했지만, 여론이 콘스탄티노스를 열렬히 지지한다는 걸 깨닫자 어쩔 수 없이 콘스탄티노스를 공식적으로 선황제로 인정했다. 콘스탄티노스의 아내이자 로마노스의 딸인 엘레니 레카피니는 남편에게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촉구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아내의 설득에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945년 1월 27일 두 공동 황제를 체포해 머리를 삭발한 후 아버지가 있는 프로티로 추방했다. 이후 콘스탄티노스는 두 형제를 격리시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각기 다른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콘스탄티노스 레카피노스가 간수를 살해하고 탈출을 기도했다가 감옥 경비병들의 칼을 맞고 죽었다.[155] 이렇게 해서 콘스탄티노스는 25년 만에 단독 황제로 등극했다.
콘스탄티노스는 황제에 오른 뒤 자신의 아들을 공동 황제인 로마노스 2세로 임명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장차 단독 황제가 되어 제국을 다스릴 때 도움이 되기 위해 952년에 통치의 기술에 관한 실용적인 교과서를 편찬했다. 그는 이 책의 제목을 '내 아들 로마노스에게'(Πρὸς τὸν ἴδιον υἱὸν Ρωμανόν)라고 지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De Administrando Imperio)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황제가 제국의 변방을 둘러싼 각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여러 야만족에 관해 서술한다. 콘스탄티노스는 이 책에서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적 상황에 관한 상세한 평가, 장차 소년을 인도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언들을 덧붙였다. 특히 이 책에선 슬라브족과 튀르크족, 페체네그족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본능적으로 전쟁을 싫어했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전쟁을 가급적 하지 않았다. 한편 이 책에서 황제는 ([[그리스어를 로마자로 썼을 때) 자국민(동로마인)을 'Rhōmaioi'라고, 슬라브족의 이동 이후로 동로마 본국에서 고립되었지만 슬라브인에 흡수되지 않고 정체성을 지켜 온 달마티아의 로마계 주민을 'Rhōmanoi'라고 구별해서 불렀으며, 한편 동로마령 이탈리아에서 그리스어로 쓰인 문서에서는 로마 시와 관련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Rhōmanos'라고 지칭했다고 한다.[156]
그는 <제국의 평화에 관하여>에서 야만족에게 다양한 종류의 선물을 보내고 인질을 받아내 평화를 가급적 확보하라고 조언했다.
또한 황제는 <테마 제도에 관하여>(Περὶ τῶν θεμάτων; De Thematibus)를 저술해 동로마 제국 여러 테마의 기원과 발달에 대해 서술함으로서 차기 황제들의 제국 운영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참고로 이 테마 제도에 관한 책에서 황제는 유감스럽게도 조상들이 그리스어에 의지하게 된 나머지, 선대의 로마어(라틴어)를 버리게 되었다고 기록했다고 한다.[157] 그렇게 라틴어를 버리고 그리스어로 완전히 이행한 것이 7세기 초라고 기록했다. [158]
콘스탄티노스는 열정적인 수집가로서, 책과 원고 만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예술품을 수집했다. 또한 그는 그림 그리기를 즐겼고 모자이크 작가와 에나멜 기술자, 작가와 학자, 금 세공인, 은 세공인, 보석 세공인 등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는 과식과 과음을 즐겼지만 주정뱅이는 아니었고 유능하고 양심적인 행정가였다. 그는 인재를 발탁하는 솜씨가 뛰어나 육군, 해군, 교회, 행정, 학술게에 두루 적임자를 임명했다. 또한 고등 교육 제도를 개발하는 데도 주력했고 사법 제도의 운영에 큰 관심을 기울여 빈민에 대한 사회적 학대를 조사하고 장기수의 수형 문제에 관해서 직접 검토했다. 또한 그는 유머 감각이 풍부했고 각계 각층의 사람들에게 친절했으며 결코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콘스탄티노스는 비록 로마노스 1세를 혐오했지만 로마노스 1세의 정책을 바꾸지 않고 계승했다. 로마노스 1세가 제정한 입법의 방향은 주로 소규모 자영농에 바탕을 둔 민병대를 오래전부터 토지 겸병을 하고 있던 부유한 봉건 귀족들로부터 보호하는 데 있었다. 콘스탄티노스는 이 정책을 계승해 자영농 보호 정책을 추진했다. 947년, 그는 '힘센 자'(Dynatoi)들이 겸병한 모든 토지를 무상으로 농민들에게 반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군인이 생계를 유지하고 군사 장비를 마련하는 데 필요한 재산은 양도할 수 없다는 법령, 소규모 자영 농지의 판매는 처음 결정을 내린 이후 40년이 지날 때까지는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법령을 반포했다. 그 결과, 토지를 가진 농민들의 생활은 이전보다 상당히 나아졌다.
949년, 콘스탄티노스는 크레타 정벌을 위해 100척의 함대를 파견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도 949년에서 952년에 걸친 동방 전선에서 킬리키아 일대를 수복했으나, 953년에 함단 왕조의 사이프 알 다울라에게 역습을 받아 게르마니케아를 상실했다. 그러나 제국군은 포기하지 않고 958년에서 959년까지 유능한 장군인 니키포로스 포카스와 요안니스 치미스케스의 지휘를 받으며 사모사타 등지를 점령하고 유프라테스 강까지 진격하며 실지 회복에 성공했다.
957년, 키예프 루스의 섭정 올가 대공녀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했다. 그녀는 몇 차례 성대한 영접을 받은 뒤 소피아 대성당에서 총대주교에게 세례 성사와 견진 성사를 받고 대모 역할을 한 엘레니 황후와 같은 이름을 채택했다. 일설에는 콘스탄티노스가 올가에게 반했지만 올가가 황제에게 자신의 대부가 되어 줄 것을 요구해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올가의 개종은 훗날 러시아가 정교회를 국교로 삼는 밑바탕이 된다.
올가 대공녀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기 전 956년, 콘스탄티노스는 환관 수도자 폴리에욱토스를 총대주교에 임명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총대주교에 임명된 뒤 분란을 유발시켰다. 시종장 바실리오스를 탐관오리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는가 하면, 레온 6세의 4번째 결혼 문제를 다시 제기하더니 레온 6세의 결혼을 승인해준 에우테미오스 총대주교의 이름을 딥티코스[159]에 등재하라고 요구했다. 콘스탄티노스는 내심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는 걸 원했지만 이제와서 모든 사안을 다시 끄집어 내는 걸 원하지 않았다, 폴리에욱토스의 행동으로 시끄러워지자, 콘스탄티노스는 더는 참지 못하고 959년 9월 아시아로 건너가 키지쿠스의 주교를 만나 총대주교를 몰아낼 방법을 논의했다.
그후 그는 부르사로가서 그곳의 유명한 온천 목욕으로 고질적인 열병을 치료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무런 효험이 없자, 그는 도시에서 35km 쯤 떨어진 미시아의 올림푸스 산 기슭에 있는 수도원으로 갔다. 그러나 그의 병세는 이 무렵에 호전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그는 황급히 수도로 돌아온 후 959년 11월 9일 황후 엘레니, 5명의 황녀, 그리고 아들 로마노스 2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54살의 나이로 붕어했다.
콘스탄티노스 7세가 죽자 단독 황제가 된 로마노스 2세는 새 황제로 즉위한 로마노스는 아내 테오파노의 설득에 따라 어머니 엘레니 레카피니를 별궁에 보냈고 다섯명의 누이들을 수녀원에 보냈다. 또한 정부와 궁정의 원로 대신들도 무더기로 교체되었고, 시종장 바실리오스는 원로원 의장(Proedros)직을 얻어 황제의 오른팔이 되었으며 그의 후임으로는 환관인 요시포스 브링가스가 임명되었다. 브링가스는 시종장을 맡는 동시에 총리 대신과 해군 총사령관을 겸임했는데, 대단히 지적이고 명민했지만 한편으로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잔인했다고 한다. 그는 로마노스의 신임을 받아 절대 권력을 획득한 후 크레타 원정에 착수했다.
크레타 원정에 대한 준비가 마무리되자 니키포로스 포카스와 동생 레온 포카스는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각각 동부와 서부 군대에 배치되었다. 960년, 니키포로스는 크레타를 정벌하기 위해 2만 7천명의 해군 및 선원들을 징집하고 5만 명의 군대를 태우기 위한 308척의 함대를 소집했다. 장관 요세프 브링가스의 권고에 따라, 니키포로스는 이슬람교도인 크레타 섬의 에미레트가 이 원정을 감독하게 했다. 니키포로스는 7월 13일에 성공적으로 그의 함대를 크레타에 상륙시켰고 아랍군의 반격을 격파했다.
그는 곧 크레타 최대의 도시 한닥스 요새를 9개월 동안 포위 공격했다. 포위 공격하는 동안에는 섬 내 다른 이슬람군을 진압하고 그 시체에서 벤 머리를 공성병기에 담아 성내로 투하할 정도로 잔혹하게 싸웠다. 전해지는 말로는 살아있는 당나귀를 성 안에 투척했다고도 한다.[160] 이 끈질긴 포위 공격 끝에, 한닥스는 마침내 961년 3월 6일 함락되었고 요새에 피난 가 있던 여자들은 모두 윤간당하고 아이들은 모조리 살해당했다.[161] 그런데 아미르인 아브드 알 아지즈 이븐 슈아이브는 죽지 않았고 오히려 선물과 정착할 토지를 받았다고 한다. 개종 후 원로원 의원을 시켜주려고도 했었지만 개종을 완강히 거부해서 무산되었고, 대신 그 아들은 개종하고 군에 들어갔다. 이후에 등장하는 귀족 가문인 아네마스 가문이 그의 후손이라는 학설도 있다고 한다.[162] 여하튼 이로써 크레타 섬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성공한 니키포로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당당하게 돌아왔다. 그러나 로마노스 황제와 환관 요세포스 브링가스는 그를 위협적인 존재로 여기고 개선식을 치러주지 않고 원형 경기장에서 시민들에게 갈채와 환영을 받는[163] 것만 허용했다.
962년, 니키포로스 포카스는 동방 전선으로 파견되어 함단 왕조의 사이프 알 다울라(Sayf al-Dawla)와 대결했다. 이보다 앞서, 니키포로스의 동생 레온 포카스는 형이 크레타 원정을 나가 있는 동안 사이프와 대적했다. 960년 초여름, 사이프는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제국의 국경을 넘어 타우로스 산맥 동쪽의 협곡들을 무사히 통과하고 멜리티니 부근의 하르시아누의 요새로 가서 수비대를 죽이고 많은 포로를 잡았다. 레온 포카스는 대응하려 했지만 수적으로 열세인데다 길고 험한 원정으로 지쳐서 함부로 맞서지 않고 산악 지대에 주둔하고 주요 길목에 병력을 세심하게 배치한 뒤 사이프가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렸다. 11월 초, 사이프는 본국으로 귀환하다가 쿨린드로스 고개에서 레온 포카스가 이끄는 제국군의 기습을 받고 300명의 기병대와 함께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병사들은 절반 가까이 죽었고 붙잡힌 병사들은 노예로 전락했다.
동생의 활약으로 기세가 꺾이긴 했지만, 사이프가 언제라도 세력을 회복해 제국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니키포로스의 가세는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니키포로스는 962년 초 동생과 함께 킬리키아로 진군해 불과 3주 만에 킬리키아의 도시 55개를 되찾고 부활절에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진군을 개시해 알렉산드레타 근처의 시리아 성문을 통과했다. 이후 그의 군대는 남쪽으로 서서히 이동하면서 도상의 촌락들을 불태우고 알레포를 포위, 39만 디나르의 은, 낙타 2천 마리, 노새 1400마리,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랍산 종마들을 약탈하고 궁궐을 불태웠다. 사이프는 알레포 성벽 바깥에서 사로잡혔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왔고, 현지 방어군은 저항하다가 결국 12월 23일 무너졌다. 병사들은 알레포 시내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와 지칠 때까지 학살을 계속했다.
963년 3월 15일, 로마노스는 불과 25살에 나이에 급사했다. 황후 테오파노가 남편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당대부터 파다했지만, 그녀가 실제로 그랬다는 증거는 없으며 그럴만한 동기도 부족하다. 역사학계에서는 로마노스는 황음을 일삼다가 몸에 무리가 와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테오파노는 로마노스 사이에서 네 명의 자식을 낳았고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 막강한 권력을 휘둘렸다. 그러나 남편이 급사하는 바람에 그녀의 권력이 위태로워졌고 어린 자식들은 제위를 노리는 야심가들에게 위협받았다. 이에 그녀는 비밀리에 니키포로스 포카스에게 전갈을 보내 황궁으로 돌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니키포로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달려와 그녀와 그녀의 자식들을 지켜주겠다고 맹세했다. 당대 실권자 브링가스는 그를 어떻게든 제거하려 했지만, 민심은 니키포로스에게 쏠렸고, 결국 니키포로스는 테오파노 황후와 결혼하고 황제 니키포로스 2세가 된다.
니키포로스는 964년 4만의 군대를 일으켜 965년 여름에 키프로스를 점령했다. 또한 킬리키아의 정복을 본격적으로 감행하여 타르수스를 포위해 2주일만인 8월 16일에 공략하고 트리폴리로 진군하면서 주변의 대부분의 요새를 공략했다. 또한 알레포를 보호령으로 삼았고 안티오키아에서 알렉산드레타로 가는 길에 있는 바그라스 요새에 1500명의 병사들을 배치했다. 이렇듯 니키포로스는 황제 즉위 후에도 아랍인들에 대한 일방적인 공세를 지속해 "사라센인의 저승사자"라는 별칭이 부여되었다.
동방에서 연이은 승리를 거둔 것에 자만해진 탓인지 그는 서방과의 외교를 그르치는 바람에 위기를 초래한다. 965년 초, 불가리아 차르 페터르 1세는 일찍이 제국과 맺은 조약에 따라 제국의 공물을 받기 위해 대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니키포로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사 앞에서 불가리아인들을 혐오스럽고 더러운 거지 민족이라고 비난하고[164] 불가리아 왕은 짐승 가죽 옷이나 입는다고 욕한 뒤 내쫓았다. 그후 니키포로스는 군대를 일으켜 불가리아 변방으로 쳐들어가 국경 요새 몇 곳을 함락시켰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키예프 루스의 스뱌토슬라프 1세에게 막대한 금을 건네며 불가리아 공격을 사주했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당장엔 제국의 위세를 드러내는 데 성공했지만, 스뱌토슬라프가 단시일에 불가리아를 제압한 뒤 동로마 제국까지 노리면서 문제가 발생했고(스뱌토슬라프 전쟁), 향후 수십년간 제국이 불가리아의 침략으로 몸살을 앓게 만든 근시안적인 정책이었다.
962년 이슬람군이 시칠리아 섬에 몇 안 남은 로마 요새들 중 하나인 타오르미나(Taormina) 시를 점령했다. 타오르미나는 902년에 뺏겼지만 통제력이 제대로 닿지 못했는지 어찌저찌해서 동로마령으로 넘어와 있었는데 다시 뺏긴 것. 영어 위키백과에 의하면 크레타를 뺏긴 것에 대한 보복조치일 수 있다고 한다.[165] 이에 시칠리아에 있는 마지막 주요 로마 요새인 로메타는 니키포로스 황제에게 구원을 호소했다. 황제는 환관이었던 니키타스 아발란티스[166]를 총사령관 겸 해군사령관으로, 본인의 조카인 마누일 포카스를 그 산하의 상륙군 사령관으로 하여 4만여 명에 달하는 대군을 일으켜 시칠리아로 파견했다.[167]
상륙하고서 메시나, 시라쿠사, 히메라, 타오르미나, 레온티니 등 시칠리아 북동부(Val Demone)의 여러 곳을 쉽게 탈환했지만, 너무 의기양양해져서 쉽게 생각하고 로메타를 구원하러 들어갔다가 매복당해서 크게 패하고 마누일까지 죽었다. 구원군이 끊긴 로메타는 이내 항복했다.[168]
이렇게 되어 그 패잔병은 메시나로 후퇴하였고, 이들을 증원해 주려고 메시나 해협의 이탈리아 본토 쪽에서 이륙한 동로마 함대를 파티마 함대가 타이밍 좋게 덮쳤다. 선상에서 뛰어내린 잠수부가 적선 하단에 그리스의 불(...)이 담긴 토기를 던져 적선 자체를 하단에서부터 파괴하는 전술을 사용함으로써 파티마 해군은 동로마 해군에게 (메시나)해협의 해전(Battle of the Straits)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아발란티스 및 주요 간부들은 파티마 왕조에 포로로 잡혔다. [169] 이렇게 되어 동로마는 점령한 것을 다 토해내게 되고 시칠리아 전역이 이슬람군의 수중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후 967년, 니키포로스는 파티마의 시칠리아 영유를 인정하며, 또한 칼라브리아에 대한 약탈을 더 이상 못 하게 해주는 대가로[170] 연공을 바치는 것으로 하는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당시 파티마는 이집트를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동로마 제국은 함단 왕조 문제 때문에 시칠리아에서 다툴 여력이 적어서 평화 협정 체결이 가능했다.[171] 실제로 얼마 안 있고 나서 969년에 사이좋게(?) 파티마는 이집트를, 동로마는 안티오키아 등의 시리아 북부를 정복했다. 630년대 후반에 잃은 지 약 330년만의 탈환이었다.
이 평화 협정으로 아발란티스를 포함한 포로들이 몸값과 교환되어 석방되었다. 이 아발란티스는 포로생활 동안 어느 정도의 자유를 인정받았는지, 4세기의 3대 카파도키아인 교부들 중 두 명인 카이사리아의 바실리오스(대 바실리오스) 및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의 설교집(Homilies)을 필사했고[172] 그 필사본은 지금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현존하고 있다고 한다.[173]
한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는 남부 이탈리아 문제로 크레모나 주교 리우트프란트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했다. 그러나 니키포로스는 오토가 감히 황제를 칭하고 자신을 그리스 황제로 칭한 것에 열받은 데다 남부 이탈리아를 멋대로 넘보는 것도 화가 났기에 오토를 왕이라 부르고 사신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고 급기야 억류하기까지 했다. 그후 양측은 수차례 무력 충돌을 벌였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시 이 리우트프란트가 남긴 기록은 중요한 사료로 취급되고 있으나, 당시 그가 당한 박대 때문인지 동로마의 풍습을 야만적이라고 비하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174] 그런데 리우트프란트가 이전에 동로마에 왔을 때는 호화스러운 대접을 받고 제국 궁정의 화려함에 감탄하는 내용을 남겼다. 리우트프란트는 본인의 저술에서 '로마인은 최악의 모욕 중 하나로 여겨진다'고도 했는데[175], 이 로마인은 동로마인 및 로마 시의 주민 둘 다를 중의적으로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176]
니키포로스의 인기는 주로 그의 정복 전쟁에 바탕을 두었다. 그래서 니키포로스는 군대에 할당한 막대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엄격한 경제 정책을 실행했다. 그는 성직자의 면책권을 축소시키고 고행 처분을 자주 내렸으며 새로운 수도원의 설립을 금지했다. 또한 제국의 중앙 집권 제도를 추진하는 동시에 세금을 과도하게 부과해 귀족들과 백성들이 반발하게 되었으며 대중의 인기를 잃었고 곳곳에서 폭동이 발발했다. 또한 니키포로스는 신학적인 문제에서 교회와 마찰을 빛었다. 그는 교회가 사라센인과의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을 순교자의 위치로 높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교회는 이 요구에 난색을 보였고 황제가 성직 서임권을 행사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게다가 역사 유튜브 Kings and Generals의 'Byzantine Reconquista - Cilicia and Aleppo 961-962'에 의하면, 군과 민간이 부딪치는 각종 영역들에서[177] 대부분 군의 편을 들어주었던 점 또한 군부 밖 민간에서의 인기 하락에 한 몫 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전 시대의 이라클리오스(헤라클리우스)가 622년에 몸소 원정을 나가기 전 12년간 원정을 나가기 싫어서 안 나간 것이 아니었다. 그 사이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먼 지역은 어쩔 수 없이 내주더라도 가까운 지역은 최대한 지켰고, 군대를 건사하면서 훈련시켰으며, 또한 쿠데타로 제위에 오른 본인이 원정을 나가며 수도를 비워도 될 정도로 수도의 지도층들과의 유대를 쌓았고, 그 중에서도 제국 교회 측 및 그 대표자인 세르기우스 총대주교를 특히 잘 신경써주였으며 그러면서 동시에 본인의 요구사항(교회의 재물을 전비로 내어줄 것)을 요청하여 받아들여졌다. 이렇게 각계 지도층과의 관계에 시간과 공을 들여야 국정협조를 잘 받고 원활하게 굴러가게 되는데 니키포로스는 이러한 정치적 수완이 부족하여 그 군공을 갖고도 인망을 쌓지 못하고 급기야 매우 나쁜 최후를 맞았다.
그러던 967년 부활절에 대형 참사가 터졌다. 이날 아르메니아 경비병과 트라키아 선원들 간의 다툼이 있었는데 이것이 대규모 폭동으로 번져 수십명이 부상당했고 일부는 치명상을 입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원형 경기장에서 부활절 경주가 시작되려 할 때 황제가 자신의 불쾌함을 표시하기 위해 관중 가운데서 아무나 골라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시민들은 불안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휴식 시간에 그는 무장 병사들에게 경기장으로 내려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병사들이 돌연 경기장에 내려가는 걸 본 시민들은 소문대로 황제가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고 판단해 앞다퉈 달아났다.
그 결과 아비규환이 일어났다. 수천 명의 군중들이 출구로 몰리다가 발에 깔려 죽임을 당했다. 그러다가 시민들은 경기장의 병사들이 가만히 있고 황제도 황제석에 차분하게 앉아있다는 걸 깨달아 비로소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니키포로스가 이 사태의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다.
두달 후인 예수 승천 대축일에 니키포로스는 성모 성당에서 아침 기도를 마친 뒤 거리를 지나가던 중 부활절 때 가족을 잃은 것에 격노한 군중들에게 포위되었다. 하지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길을 앞에 고정시킨 채 군중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이튿날 아침엔 어느 모녀가 황궁 근처의 저택 지붕 위에서 황제를 향해 벽돌을 던졌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이렇듯 백성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게 되자 황제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는 황궁의 담을 튼튼히 보강하라는 명을 내리고 가족과 함께 부콜레온의 요새에 틀어박힌 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병적으로 종교에 빠져들었고 침대에서 잠을 자지 않고 침실 한 귀퉁이에 깔아 놓은 표범 가죽 위에서 잤다. 이렇듯 공포에 몸을 떨던 그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으니......
니키포로스가 인기를 잃고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무렵, 황후 테오파노는 황제의 부하이자 외조카이며 빼어난 미남이었던 요안니스 치미스키스와 사랑에 빠졌다. 니키포로스는 황후가 조카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요안니스가 위협적인 존재라고 판단해 965년 말에 군대 사령관직을 박탈하고 아나톨리아의 자기 영지로 돌려보냈다. 이에 테오파노 황후는 남편에게 요안니스에 대한 처벌이 과하다고 설득했고 니키포로스는 이에 흔들려서 요안니스를 불려들었지만 대신 칼케돈에 있는 그의 집에만 머물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올 때는 별도로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후 요안니스는 한밤 중에 해협을 건너 황궁의 외딴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테오파노 황후와 만나 정을 나누었다. 그후 두 사람은 니키포로스를 죽이자는 음모를 꾸몄다. 이 음모에는 지난날 안티오키아를 포위 공격하다가 황명에 불순종했다는 이유로 해임당한 미카일 부르체스도 포함되었다. 그 후 음모가들은 여자로 변장하고 옷 안에 칼을 숨긴 채 황후를 만나러 온 척하면서 황궁의 규방으로 들어갔다. 황후는 그들을 여러 작은 방에 분산시키고 신호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게 했다.
참고로 부르체스의 황명 불순종이란 다음과 같다. 역사 유튜브 Kings and Generals의 'Byzantine Reconquista - Cilicia and Aleppo 961-962'에 의하면, 안티오키아가 옛 총대주교좌로 워낙 위상이 높았기 때문에, 직접 공성하여 도시를 훼손시켜 가면서 점령하기보다는 주변에 구원군과 식량 보급을 막는 요새를 깔고서 천천히 말려죽이려는 것이 니키포로스의 의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장군으로서 정복활동으로 인기를 얻어 황통을 갈아치우지는 않으면서도 어린 황제(바실리오스 2세)의 보호자라는 명목으로 어린 황제를 제끼고서 본인이 선임 황제로 올라선 니키포로스의 모델은 다른 장군들에게도 욕심나는 롤모델로 다가왔고, 안티오키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거리가 제법 멀어서 황제 및 중앙정부가 바로바로 군의 움직임을 컨트롤하기가 어려워 결국 현지 사령관에게 어느 정도 재량권이 주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여기서 부르체스는 황명을 정면으로 어기지는 않았지만 본인의 공적을 극대화하기 위해 어찌어찌하여 안티오키아를 공략하여 점령했다.
969년 12월 11일, 날씨가 몹시 춥고 눈이 많이 내리며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날이었다. 음모가들은 황궁을 떠나 보스포루스를 건너 황제가 있는 요새로 가려 했지만 폭풍이 워낙 거세 건너기가 쉽지 않았다. 요안니스는 친구 세 명과 함께 칼케돈에서 배를 타고 죽을 고생을 하며 해협을 건너 밤 11시에 요새 바로 앞에 도착했다. 이윽고 황후 처소의 창문에서 밧줄 하나가 소리없이 내려오자, 음모자들은 한 명씩 차례로 밧줄을 타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사전에 내통하여 대기하고 있던 환관 한 명이 황제의 침실로 안내했다.
음모가들이 방 안으로 들이닥치자, 바닥에서 표범 가죽을 깔고 자고 있던 니키포로스는 인기척에 잠을 깨고 일어났다. 그 순간 레온 발란테스라는 자가 달려들어 그를 칼로 찔렀다. 이 칼은 니키포로스의 얼굴을 스쳤고 황제는 피투성이가 된 채 비명을 지르고 큰 소리로 성모 마리아에게 도움을 청하며 침대 발치로 기어갔다. 그러나 요안니스 치미스키스는 그를 침대 바깥으로 끌어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 다음 음모가들은 황제의 부정과 배은망덕을 비난하고는 그의 몸을 무자비하게 걷어차면서 머리털과 수염을 잡아뜯었다. 이윽고 한 사람이 황제의 턱을 부수었고 다른 사람은 칼집으로 그의 앞니를 후려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길고 굽은 칼이 황제의 목숨을 끊었다. 그 후 자객들은 소리를 듣고 달려온 경비병들한테 그들의 정체를 밝히며 권력으로 위협하자 경비병들이 저항할 의지를 상실하게 만들고 니키포로스의 머리를 잘라 시신을 창문 아래에 내던졌다. 이리하여 크레타 탈환의 영웅이자 사라센인의 저승사자였던 니키포로스는 아내와 외조카의 배신으로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찬탈로 제위에 오른 요안니스 1세는 백성들에게 관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폴리에욱토스 총대주교의 요청을 받아들여 개인 재산을 백성들에게 나눠줬고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연이어 닥친 흉년으로 고통을 겪고 있던 백성들에게 나눠줬다. 특히 기근이 몹시 심했던 트라키아의 농촌들이 많은 혜택을 입었다. 또한 그는 보스포루스 맞은 편의 크리소폴리스에 노소코미움이라는 나환자 병원을 지었다. 그는 정기적으로 그곳을 방문하면서 환자들을 격려해주고 때로는 상처를 손수 씻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그는 토지 겸병을 일삼는 봉건 귀족들로부터 자영농을 보호하는 정책을 일괄적으로 밀어붙였다. 이에 반발하는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는 이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해 사태가 악화되는 걸 미연에 방지했다.
전임 황제 니키포로스 2세는 동로마 제국의 큰 적인 불가리아를 견제하기 위해 키예프 루스에게 발칸 진출을 용인했다. 이에 키예프 루스는 남하하여 불가리아에게 큰 타격을 입혔지만, 곧 동로마 제국을 위협했다.(스뱌토슬라프 전쟁) 요안니스는 재위 초기 키예프 루스의 위협에 맞서 싸워야 했다. 요안니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는 키예프 대공 스뱌토슬라프 1세와 협상하려 애썼다. 그가 제국의 영토에서 떠나 준다면, 전에 니키포로스 2세가 불가리아를 공격하라고 할 때 주겠다고 해놓고 지불하지 않은 돈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스뱌토슬라프 1세는 콧방귀를 뀌며 거부했고, 일전에 니키포로스 2세가 불가리아를 쳐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파견했던 사절인 칼로키로스를 황제로 내세웠다. 이제 전쟁은 불가피했다. 요안니스는 자신의 입지가 아직 확고하지 않아서 수도를 떠날 수 없어 죽은 아내 마리아의 오빠인 바르다스 스클리로스와 환관 페트루스 포카스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당시 스뱌토슬라프 1세가 이끌고 온 군대의 규모는 당대 기록에 따르면 30만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건 터무니 없는 수치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며 대략 5만 명 정도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을 상대할 제국군의 규모는 1만 2천 명 가량이었다. 바르다스 스클리로스는 970년 제국군을 이끌고 아드리아노폴리스로 진군한 후 적이 다가오자 천천히 퇴각하면서 마치 싸우기를 두려워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는 한편, 그는 요안니스 알라카스 파트리키우스에게 기병대를 맡겨 적을 유인하는 미끼로 삼았다. 키예프군이 기세를 올려 추격에 나서자, 기병대는 퇴각 속도를 높혔다. 키예프군은 정신없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그만 제국군의 매복에 걸려들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키예프군은 일방적으로 학살당했고 스뱌토슬라프 1세는 잔여 병력을 수습해 불가리아로 퇴각했다.
971년 초봄, 요안니스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불가리아로 진군해 키예프군을 완전히 몰아내려 했다. 이때 니키포로스 2세의 조카 바르다스 포카스가 유배지에서 탈출해 카이사레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황제를 참칭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여기에 레스보스에 유배되어 있던 레온 포카스와 그의 맏아들이 현지 주교를 통해 바르다스의 반란 소식을 트라키아에 퍼트리고 반군이 곧 도착할 테니 모두들 제위 찬탈자에 맞서 봉기하자고 선동한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요안니스는 즉각 신속하게 대응했다. 레온 포카스의 지시를 받고 선동하고 있던 주교는 체포되어 모든 것을 털어놨고, 요안니스는 레온과 그의 아들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가 이내 눈을 멀게 한 후 영원히 추방해버리라고 지시했다가 다시 마음을 돌려 눈을 멀게 하지 말고 단지 유배만 보내라고 명령했다.
이후 요안니스는 바르다스에게 사자를 보내 항복하면 목숨과 재산을 보전해주겠다고 알렸다. 그러나 바르다스는 거부하고 수천의 병력을 거느린 채 수도를 향해 진군했다. 이에 요안니스는 바르다스 스클리로스를 파견해 이들을 진압하게 했다. 다만 요안니스는 내전을 원치 않아 스클리로스에게 가능한 피를 보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면서 항복하는 자에게는 아무런 벌을 내리지 말고 명예와 경제적 보수도 주겠다는 제안을 하라고 명령했다. 스클리로스는 그 명에 따라 반군을 회유했고, 반란군은 매일 밤 진영에서 몰래 빠져나와 스클레루스에게 투항했다. 결국 바르다스 포카스는 자신의 병력이 수백명 밖에 남지 않자 야음을 틈타 가족과 함께 티로포이온 요새로 대피했다. 그러나 스클리로스가 티로포이온 요새를 포위하자, 바르다스 포카스는 모든 사람의 목숨을 살려준다는 조건하에 항복했다. 요안니스는 바르다스 포카스의 목숨을 살려주는 데 동의하고 그의 머리카락을 삭발한 후 가족과 함께 키오스 섬으로 보냈다.
971년 가을, 요안니스는 불안한 황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수녀원에 있던 로마노스 2세의 딸 테오도라와 결혼했다. 또한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의 아들 오토 2세와 요안니스 가문의 여식인 테오파노와 결혼시킴으로서 니키포로스 2세의 외교적 삽질로 인해 발생한 신성 로마 제국과 로마 제국 간의 전쟁을 종식시켰다. 이렇게 해서 기반을 탄탄히 다진 뒤, 요안니스는 971년 군대를 이끌고 불가리아에 아직도 남아 있던 키예프 대공 스뱌토슬라프 1세를 상대하러 진군했다. 이후 키에프군과 제국군은 골지마 캄지야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그 결과 키예프군은 괴멸되었고 생존자들은 프레슬라프로 도망쳤다.
요안니스는 프레슬라프를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해 도시를 함락시키고 살육을 자행했다. 키예프군은 불에 타 죽거나 달아나다가 칼을 맞고 죽었고 불가리아의 전 차르인 보리스 2세를 체포했다. 스뱌토슬라프 1세는 불가리아의 주요 항구인 드리스트라에 피신했다가 제국이 쳐들어오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석달에 걸친 포위 끝에 보급품이 떨어지자, 스뱌토슬라프는 마지막 공격에 모든 것을 걸기로 결심하고 971년 7월 24일에 남은 병력을 이끌고 성문 밖으로 나와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도저히 포위망을 뚫지 못하자, 스뱌토슬라프는 강화를 요청했다. 이후 그는 불가리아에서 물러나고 불가리아에 온 이후 사로잡은 포로들을 모두 송환하고 크리미아의 동로마 제국의 도시인 케르손을 다시는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스뱌토슬라프 1세는 키예프로 돌아가다가 972년 초에 페체네그족에게 습격당해 살해되었고 그의 두개골은 페체네그족 족장의 술잔으로 사용되었다. 참고로 이 스뱌토슬라프에 대한 승리 기념 주화를 발행하면서 주화의 뒷면에 '왕중왕 예수' 문구를 제법 오랜만에 라틴어로 새겼는데, 이는 라틴어가 고대 로마 제국을 상기시키는 효과가 있어 정치 이념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 기독교 세계에 대해서 종주권을 다시금 주장하기 위한(ecumenic claim) 의도적인 부활이라고 한다. [178]
요안니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개선식을 거행한 뒤 불가리아의 보리스 2세를 폐위하고 동부 불가리아를 다시 제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또한 불가리아 총대주교청은 폐지되었고 그 휘하 교구들은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에 귀속되었다. 요안니스는 보리스에게 동로마의 명예 마기스테르라는 관직을 줬지만 보리스의 동생 로만은 거세되었다. 그러나 서부 불가리아는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났고 사무일 코메토풀루스가 불가리아 제국을 수립하고 제국에 맞서 싸우게 된다.
한편, 이슬람의 파티마 왕조는 973년 7월 아미다 성벽 앞에서 현지의 동로마 제국군을 괴멸시켰다. 이 소식을 접한 요안니스는 동방으로 진격해 대대적으로 복수하기로 했다. 그런데 974년 봄, 아르메니아 귀족들이 일치단결하여 제국에 반기를 들고 아쇼트 3세를 왕중왕으로 추대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요안니스는 일단 아르메니아는 내버려두고 파티마 왕조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그는 아쇼트 3세에게 사절을 보내 그의 제위를 인정해주고 제국의 동맹이 되기를 바란다고 알렸다. 이에 아쇼트 3세는 선뜻 동의하고 정예병 1만 명을 내줬다.
요안니스는 974년 군대를 이끌고 남쪽의 아미다와 마르티로폴리스를 공략한 후 이렇다 할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메소포타미아의 평원지대에 이르렀다. 이후 그는 바그다드를 지나쳐 안티오크로 가서 안티오크의 겨울 주둔지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서 서방의 교황과 총대주교 간의 갈등을 수습한 후 975년 동방으로 돌아간 요안니스는 안티오키아를 출발해 에메사로 가서 싸우지도 않고 항복을 얻어냈고 바알베크, 다마스쿠스, 티베리아스, 카이사레아, 베이루트, 비블로스까지 정벌했다. 이후 예루살렘까지 진격하려 했지만 파티마 왕조군이 철저하게 방비하자 포기했다. 이로서 요안니스는 이라클리오스 황제 이래 동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가 밟아본 적이 없던 팔레스타인, 시리아, 레바논의 대부분을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귀속시켰다.
975년 말, 요안니스는 동방 원정을 마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그러나 그는 중병에 걸려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당대 기록은 시종장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가 황제를 독살했다고 주장한다. 기록에 따르면, 황제는 귀환 도중 아나톨리아를 지나칠 때 그 일대의 질 좋은 토지의 소유자가 바실리오스라는 걸 듣고 크게 화를 내면서 돌아가는 대로 당장 시종장을 불러 해명을 듣겠다고 엄포했다고 한다. 바실리오스는 이 말을 전해듣고 사람을 시켜 황제가 먹는 음식에 독을 타게 했다. 이후 황제는 사지를 거의 움직일 수 없고 눈에서는 피가 흐르고 목과 어깨는 온통 고름투성이가 되는 증상에 걸렸다. 이에 황제는 어떻게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려 애썼다. 가까스로 보스포루스까지 도착하긴 했지만 황제는 더이상 가지 못하고 976년 1월 10일 51살의 나이로 재위 6년 만에 붕어했다.
976년 1월 10일 공동 황제 요안니스 1세 치미스키스가 사망하자, 18세의 바실리오스 2세는 사실상 단독 황제로서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이 당시 바실리오스는 정치적 경험이 부족한 풋내기에 불과했다. 황제는 자신의 친척이자 시종장(παρακοιμώμενος, Parakoimomenos)인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Βασίλειος Λεκαπηνός)[179]의 후견으로 착실히 국정 경험을 쌓았다. 실권을 장악한 레카피노스는 이 어린 황제를 얕잡아보며 조종하려 들었다. 이에 황제는 내심 불만을 품었으나 군말없이 따르며 행정과 군사를 익혔다.
바실리오스 2세의 집권 초반부는 내전으로 점철되었다. 두 전임 황제(니키포로스 2세, 요안니스 1세)는 모두 무력으로 즉위한(심지어 한 명은 전임 황제를 암살하고 즉위한) 장군 출신 황제였다. 이로 인해 바실리오스 2세의 정통성은 이미 상당히 약해져 있었고, 제국의 귀족들은 앞의 두 사람처럼 황제가 되고자 바실리오스 2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반란의 중심에는 요안니스 1세의 처남인 바르다스 스클리로스(Βάρδας Σκληρός)와 니키포로스 2세의 조카인 바르다스 포카스(Βάρδας Φωκᾶς)가 있었다.[180]
요안니스 1세가 사망한 지 몇 달 후인 976년의 봄, 바르다스 스클리로스가 스스로 황제임을 선언하며 내전이 시작되었다. 반란은 격렬했다. 977년에는 니케아가 반군 손에 넘어갔고,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 또한 반군에게 공격받았다. 이에 레카피노스는 바르다스 포카스를 유배지 히오스 섬에서 소환, 군권을 부여해 반란 진압을 명령했다. 비록 충성심은 의심스러웠으나 바르다스 포카스가 요안니스 일가에게 확실한 반감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181] 라이벌 제거가 목적인지 단순한 반감 때문인지는 불명확하지만, 어쨌거나 포카스는 적극적으로 스클리로스의 반란군을 진압했다. 979년 스클리로스가 바그다드로 도주하면서 반란은 종식된 듯 보였다.
979년, 스클리로스의 반란을 진압한 바실리오스 2세는 갓 스무 살을 넘긴 청년 황제였다. 젊은 황제는 내정 안정에 온 힘을 쏟으며 실권자이자 정적인 레카피노스에 대한 견제를 착착 진행해나갔다. 그러던 985년, 바실리오스 2세는 레카피노스가 바르다스 포카스와 내통하여 반란을 계획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레카피노스는 반란 및 부정부패 혐의로 유배형과 전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 바실리오스 2세는 레카피노스가 독단적으로 반포한 모든 법률을 무효화시키는 것으로 숙청 작업을 마무리했다.
요안니스 1세 사망 당시, 불가리아 지역을 다스리던 사무일은 스스로 불가리아 제1제국의 차르를 칭하고 동로마 제국을 공격했다. 986년에는 사무일이 테살리아 지역을 공격해 라리사를 점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위협을 느낀 바실리오스 2세는 직접 군사 2만을 이끌고 사르디카를 공격하지만 불가리아군의 저항으로 실패했고, 오히려 8월 17일 트라야누스 관문이라는 고개에서 매복한 불가리아군에게 기습 당해 참패했다. 이 패배로 동로마 귀족들 사이에서는 바실리오스 2세에 대한 반란 움직임이 다시 일기 시작했다. 내전의 불씨가 또 당겨진 것이다.
987년 8월 15일, 바르다스 포카스는 칭제. 내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포카스는 바그다드로 도망친 바르다스 스클리로스에게 서로 바실레프스임을 인정하고 공동 황제로서 제국을 양분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을 반긴 스클리로스는 협정을 맺고자 포카스를 찾아갔지만, 이는 포카스의 함정이었다. 스클리로스는 피로포이온 요새에 감금되었고, 후방의 위험을 제거한 포카스는 거병, 서방으로 진군했다. 아비도스로와 크리소폴리스를 점령했고 여세를 몰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
이때가 바실리오스 2세의 최대 위기였다. 수도는 포위당했고, 자신을 구원해줄 세력은 없었다. 게다가 말이 반란군이지 당시 동로마 정예 병력은 몽땅 포카스의 반란군의 지휘 하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설사 항복하더라도 기존의 위치인 꼭두각시 황제가 되는 선에서 끝나지 않고, 폐위되거나 죽임당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바실리오스 2세는 휘하에 있던 해군으로 시간을 벌면서 키예프 루스의 대공 블라디미르 1세에 도움을 요청해 약 6,000명의 바랑인을 지원받지만[182] 그 대신 그의 여동생인 포르피로예니티 안나를 블라디미르에게 시집보내야 했다.[183]
989년 2월, 바실리오스 2세는 바랑인 병력 6천을 중심으로 크리소폴리스를 기습하여, 반란군을 몰살하는데 성공했다. 포카스도 역습을 위해 해군 주둔지인 아비도스를 공격하지만 황제군의 완강한 방어에 막혀 실패했다. 3월에는 바실리오스 2세가 동생 콘스탄티노스와 같이 아비도스로 진격하여, 아비도스 외곽에서 반란군을 격퇴하고 포카스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184] 포카스의 아내는 피로포이온 요새에 감금시킨 스클리로스를 내세워 반란군 잔당을 모으려 했지만, 이미 대세는 황제군에게 기운데다 스클리로스 또한 실명 직전의 노인이었다. 스클리로스는 항복 제안을 받아들였다.
바실리오스는 비티니아에서 스클리로스를 만나, 앞으로 이와 같은 내전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스클리로스는 본인 스스로가 반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래와 같이 바실리오스에게 제대로 조언했다.
자만해진 총독의 봉급을 삭감하십시오. 전장에 나간 장군에게 너무 많은 자원을 주지 마십시오. 부당한 요구로서 그들을 지치게 만들어, 자기 일에 전념하기도 바쁘게 하십시오. 여인의 의논을 허락하지 마십시오.[185] 누구에게도 이해받기 쉽지 않게 하십시오. 가장 은밀한 계획은 소수의 사람들하고만 공유하십시오.
과연 바실리오스는 이 조언을 평생에 걸쳐 실천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스클리로스를 쿠로팔라티스(κουροπαλάτης)에 임명해 여생을 보내게 했다. 이로서 두 번째 반란도 종결되었으니 989년 10월 일이었다. 이때 황제의 나이 31세였다.
월 단위를 기준으로 한 바실리오스 2세 시대의 영토. 바르다스 포카스의 내란이 터지자마자(0분 59초) 아나톨리아가 전부 반군 수중에 들어가는 부분이 눈에 띈다. |
두 차례의 반란을 거치며 바실리오스의 성격은 판이하게 바뀌었다. 본래 탐욕적이고 열정적이었던 성격은 내전 이후 모든 욕망이 죽어버린 듯 했다. 그가 한평생 독신 생활을 한 유일한 황제가 된 이유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보는 학자도 있다. 네이버 캐스트에서는 전설로나마 남아 있는 스캔들조차 없다고 써놓았다. 심지어 상단의 초상화에도 혼자만 있다.[186]
일찍이 트라야누스 관문 전투에서 불가리아에게 참패했던 바실리오스는 당시의 패전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반드시 불가리아인들에게 복수할 것을 맹세했고, 결국 그 맹세를 지켰다.
내전이 끝난 후, 바실리오스는 복수를 위해 불가리아를 재침공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995년 알레포와 안티오키아가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187] 손에 함락당하기 직전이라는 안티오키아 총독의 급보를 받았기에, 황제는 불가리아 정벌을 단념하고 시리아 지역으로 원정을 떠났다. 바실리오스는 전군에 노새를 지급해 최소 석 달은 걸릴 원정길을 빠르게 주파했고, 불과 16일 만에 알레포에 16,000여 명의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었다. 파티마 왕조는 패배하였고, 황제는 이참에 기세를 몰아 에메사와 트리폴리까지 밀고 내려갔다. 아쉽게도 트리폴리는 함락시키지 못했지만, 황제는 만족하며 귀환길에 올랐다. 이것으로 한동안 파티마 왕조는 로마 제국에 도전하지 못할 터였다.[188]
귀환하던 도중 바실리오스는 소아시아의 유지 에브마티오스 말리노스에게 대접을 받게 되었다. 황제에 버금가는 부귀를 누리는 말리노스의 연회 내내 그는 조용히 있었다.
짐은 가난한 사람을 상대로 허구한 날 (제국의 테마들을 가로질러 원정길에 오를 때마다) 탐욕과 불법 행위가 자행되는 것을 똑똑히 목도했다. 토지를 불리고 가난한 백성의 재산을 제 것인 양 부당하게 떵떵거리는 세력가들의 땅은 몰수하는 것이 마땅하다.
996년 바실리오스 2세의 칙령[189]
996년 바실리오스 2세의 칙령[189]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그는 소아시아 귀족들에게 치명타를 날릴 새로운 칙령을 공포했다. 이 칙령은 그동안 토호들이 강탈한 농민들의 토지를[190] 무상으로 반환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귀족들 또한 호구가 아닌지라 가만히 있지 않았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라는 귀족들의 항의에, 바실리오스는 아우구스투스 때에 그대의 조상이 이 땅을 받았음을 증명한다면 소유를 인정하겠다고 맞받아쳤다.
고대 로마로부터 면면히 이어왔다는 계승 의식이 잘 드러나는 말. 아우구스투스가 묻혀 있는 로마 시 외곽의 아우구스투스 영묘가 제국령에서 벗어난 지 200년도 넘은 시점에 이런 말을 하는 건 당연히 배째라는 뜻이었다. 이 칙령으로 말리노스는 정의를 어지럽혔다는 죄명으로 감옥 신세를 지게 되었고, 많은 귀족들이 몰락했다. 또한 바실리오스 2세는 토지 반환은 물론이고, 대토지 소유자들에게 농민들의 미납된 조세를 내도록 했다.[191] 그리고 당시 교회로의 기증을 통해 봉건 영주화 되어가고 있던 수도원의 토지 소유를 억제하려고 했다.[192] 당연히 성직자들도 반발하며 소아시아 지역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고, 그는 한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러야 했다. 이는 물론 10세기 들어 눈에 띄게 강력해진 아나톨리아 지방 귀족들과 성직자들을 견제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이 개혁을 끝으로 바실리오스 2세 치하의 중세 로마는 중세 중기로 넘어가게 된다.
3. 발칸 반도 서부(현재의 크로아티아+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세르비아+알바니아+코소보)
발칸 반도 서부 본디 달마티아 속수와 모이시아 수페리오르 속주(Provincia Moesia Superior)의 서쪽 지역이 포함되었으며 서로마 제국의 관할 지역이었으나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당시 오도아케르 왕국이 달마티아의 연안 지역, 동고트족들이 내륙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하지만 오도아케르는 서로마를 멋대로 멸망시켰다는 점 때문에 동로마 제국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데다 그가 군사적 성과를 거두면서 계속 세력을 확장해 나가자 동로마 제국의 제노 황제는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견제 세력을 찾고 있던 제노는 동고트족의 지도자였던 테오도리크와 협약을 맺고 그를 동로마 제국의 장군으로 받아들이며 오도아케르의 축출을 명령했다. 드디어 489년에 테오도리크는 알프스를 건너 이탈리아 반도로 침공해 들어갔다. 오도아케르는 그와 맞붙었으나 연전연패했으며 여기에 서고트족의 왕이었던 알라리크 2세까지 테오도리크를 지원하자 오도아케르는 난공불락의 도시인 라벤나에 은신하게 되었다.
테오도리크의 공성에 맞서서 3년간 라벤나에서 버티던 오도아케르는 라벤나의 주교 요한의 주선으로 테오도리크와 협상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오도아케르는 안전을 보장받고 테오도리크와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테오도리크는 라벤나 입성 10일 후 오도아케르와의 연합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이다가 흥이 오를 때쯤 갑자기 오도아케르를 검으로 목 아래쪽으로부터 옆구리까지 단칼에 세게 베어내려 죽여 버렸다. 동시에 오도아케르의 친위세력도 테오도리크의 부하들에게 공격을 받아 잔치가 벌어지는 동안에 모조리 살해었고, 그의 영토는 동고트 왕국에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535년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에 의해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이 발발하면서 유럽 방면에 주둔하고 있던 동로마 제국군은 문두스의 지휘하에 달마티아에 위치한 살로나(Salona)를 점령한 후 달마티아 전역을 차지하는데 성공한다. 536년 3월에 달마티아를 회복하고자 동고트 군대가 문두스의 군대를 공격하였는데, 문두스는 그들을 격파하였으나 이과정에서 아들인 마우리키우스가 동고트족의 계략에 빠져 전사하자, 분노한 문두스는 동고트 군대를 패배시키고 그들을 추격하였는데, 추격 중에 부상을 입고 결국 그로 인하여 사망하면서 살로나를 제외한 달마티아는 다시 동고트 왕국령이 되었다. 같은 해 6월 동고트 장군 그리파스는 달마티아의 주도 살로나를 결국 점령했는데, 콘스탄티아누스의 군대가 다가오고 이탈리아에 벨리사리우스가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자 후퇴하였다. 따라서 콘스탄티아누스는 손쉽게 달마티아를 회복하였고 살로나의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였다.
554년 동고트 왕국이 멸망한 후 발칸 반도 서부는 완전히 동로마 제국령으로 편입되었지만 그과정에서 막대한 전비가 생기면서 이에 대한 보충으로 막대한 세율을 강요했으며, 무엇보다 전쟁 막바지에 잘생한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인구수가 죽으면서 행정적 공백지들이 발생하고 말았다. 결국 6~8세기 경 북쪽에서 슬라브족들이 남하하여 발칸 반도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지배권이 위협받기 시작했다.
4~5세기 무렵 훈족에 성장으로 인한 게르만 대이동으로 게르만족들의 원래 땅들이 무주공산지가 되면서 슬라브인들은 바로 그 자리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게르만족들을 따라 계속해서 서쪽으로 이동하다 6세기에 동로마 제국 국경인 다뉴브 강에 다다랐는데, 이때 유스트니아누스 1세의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과 사산 왕조와의 전쟁으로 동로마 제국이 정신이 없는 사이, 이들은 아바르 칸국의 산하에 놓여 아바르족과 함께 슬금슬금 다뉴브 강을 넘어 로마인들의 땅인 발칸 반도를 습격하였다. 그 중에서도 순수 유목민인 아바르족은 적당히 약탈을 하고 다시 다뉴브 강을 넘어 돌아갔지만, 순수 유목민은 아니었던 슬라브족 중 일부는 아예 발칸 반도에 정착해서 살기도 했다.
초기에야 깔짝대는 수준에 그치긴 했어도 동로마가 어느 정도 통제 가능한 상황이었지만 580년대부터는 통제가 불가능할 만큼 대규모로 발칸 반도를 습격하였다.[193] 발칸 서북방의 거점인 시르미움이 582년에 함락되는 등3 부쩍 거세졌던 것이다.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591년에 페르시아 제위계승분쟁에 개입하여 바흐람 추빈을 몰아내고 호스로 2세를 복위시킨 댓가로 아르메니아와 코카서스의 넓은 영토를 할양받으면서 동방전선을 안정시켰고, 나아가 그전까지는 572년부터 산발적으로 계속되던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할애하느라 수세적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던 발칸 전선에서 완전히 공세 모드로 바꾸었다. 이에 대해서 아예 영어 위키백과에 마우리키우스의 발칸 전역(戰役)이라는 문서가 따로 있으니 자세하게 알아보고 싶으면 이를 참조하면 좋다. 이는 굉장히 성공적이었어서 그간 침탈당한 땅을 다 되찾고 아바르 및 슬라브인을 강 너머로 다시 몰아냈다.
하지만 7세기 이후 상황이 다시 악화되었다. 그것도 절묘한 수준이자 동로마 입장에서 재앙이었지만 절반 가까이는 동로마인들 스스로 벌인 벙크에서 비롯되었다.
7세기, 슬라브족의 이동(빨간색 화살표) |
마우리키우스는 성과지향적이면서도 엄격한 황제였다. 위에서 서술된 580년대 수세로 일관했던 기간 동안 발칸 각지가 함락되었고 그 곳들의 주둔군이 포로로 많이 잡혀서 약 1만 2천 명 남짓이었는데, 포로 몸값 지불을 거부해서 그 포로들이 다 희생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인심을 크게 잃었던 데다가, 602년에는 이미 좁은 의미로 '발칸 방위'라는 목표는 이미 다 완수되었던 가운데, 다뉴브 너머에서 아바르와 슬라브 상대로 예방전쟁을 치르는 과정 중 다뉴브 이쪽의 로마 영내가 아닌, 다뉴브 너머에서 그대로 주둔하며 월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방어도 아니고 예방전쟁인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던 장병들은 단체로 폭발했고, 여기에 편승한 백인대장 포카스가 선동해서 일리리아군을 이끌고 그대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내려가 마우리키우스를 축출 및 시해한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눈 앞에서 분명히 자기들을 위기로 몰아넣던 로마군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후퇴하자 아바르인과 슬라브인들은 얼마 안 가 동로마의 정정불안을 눈치챘다. 이러한 가운데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가 자신을 복위시켜 준 은인인 마우리키우스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개시했다. 결국 동로마에게는 지옥 같은 양면전선이 만들어졌다. 마우리키우스의 성과는 몇 년 못 가서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되자 국가의 존망 위기를 맞은 동로마는 국가 행정력 자체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저그처럼 내려오는 이들을 막아낼 능력이 없었다. 결국 침공에 시달린 원주민들은 슬라브인들이 살지 않거나 접근하기 힘든 험한 산지나 섬으로 이주 혹은 아직 동로마의 행정력이 온전한 몇몇 거점들로 도망치거나 아니면 그대로 잔류해 슬라브인들과 통혼하면서 자연스럽게 슬라브인에 동화되었다. 콘스탄스 2세가 그나마 630~40년대의 폭풍과도 같은 이슬람의 침략이 소강상태가 된 658년부터 여러 슬라브 부족들을 산하에 복종시키는 한편 소아시아로 사민시키는 등 처음으로 반격다운 반격을 했지만[194] 온전하지는 못했고, 그 공백을 불가르인들이 치고들어와서 동로마 제국의 수도권이었던 트라키야 지역을 제외한 발칸 반도 동부 전역을 포함해 발칸 서부에 살고 있던 상당부분의 슬라브인을 복종시키고 불가리아 제1제국을 세웠다.
남은 슬라브인들은 저마다 공국을 건국했는데, 현재의 크로아티아인들의 선조는 판노니아와 크로아티아에 지역에 정착한 후 두 개의 공국을 세웠고, 세르비아인들의 선조들은 각각 세르비아(Србија) 혹은 라쉬카(Рашка), 파가니야(Паганија), 자후믈례(Захумље), 트라부니야(Травунија), 두클랴(Дукља).를 건국했다.
다만 세르비아인들은 불가리아와 달리 통일된 국가를 이루는데 실패했고, 불가리아보다 늦게 정교회로 개종한 후 차슬라프(Часлав Клонимировић, 재위 927?-960?)의 재위기에 영토를 대대적으로 확장하는데, 그는 이미 페타르 고이니코비치(Петар Гојниковић, 재위 892~917)에 의해 이미 병합되어있던 파가니야를 제외한 세르비아계 공국들을 모두 통합했지만 북쪽에서 내려온 마자르인들의 침공으로 차슬라프가 붙잡혀 죽임을 당하면서 동로마 제국에 편입되고 만다.
3.1. 아바르 제국령⇒프랑크 제국령 니더 판노니아⇒크로아티아령 니더 판노니아
현재의 크로아티아의 슬라보니아 및 자그브레와 현재의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 서부인 드라바 강과 사바 강 사이의 지역은 567년을 전후로 아바르족의 영토가 된 상태였다. 아바르의 칸 바얀 1세는 판노니아를 동로마 제국에 귀순한 시르미움을 제외하고 대부분 장악했다. 그 후 바얀 1세가 동로마 제국을 향한 공세를 본격적으로 벌이기 시작했고, 58년간 이어지는 동로마-아바르 전쟁을 일으킨다.568년, 아바르족은 동로마 제국에 귀순한 시르미움을 포위 공격했지만 공성전 역량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략에 실패했다. 여기에 아바르 칸국에 복속된 유목민족인 쿠트리구르족 10,000명이 동로마 제국의 영역인 달마티아를 침략해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다. 유스티누스 2세는 황실 친위대인 엑스쿠비토레스 병단의 코메스를 맡고 있던 티베리우스를 급히 파견해 아바르 칸국과 평화 협상을 하도록 했다. 티베리우스는 여러 아바르족 족장들과 협상한 끝에 그들이 데려갔던 포로를 제국군이 확보한 아바르족 포로와 교환하고 아바르족이 발칸 반도의 동로마 제국 영토에 정착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유스티누스 2세는 아바르 칸 바얀 1세의 가족을 인질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바얀 1세가 이를 거부하면서 전쟁이 재개되었다.
570년, 티베리우스는 트라키아에서 아바르족 군대를 격파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570년 말 또는 571년 초, 그는 또다시 승리를 쟁취하려고 아바르족 군대와 맞붙었으나 대패하고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했다. 더이상 전쟁을 벌여봐야 소용 없겠다고 판단한 티베리우스는 유스티누스와 조약 조건을 의논하려는 아바르족 특사들에게 호위병을 제공했다. 이때 특사들이 지역 주민들에게 공격당해 물품을 강탈당하고 도와달라고 호소하자, 티베리우스는 책임자를 추적해 훔친 물건을 돌려주게 했다. 이후 유스티누스는 8만 솔리두스를 아바르족에게 매년 넘겨주는 조건으로 평화 조약에 합의했다.
그 후 아바르족은 574년 시르미움을 한 차례 습격한 것을 제외하고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위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579년, 새 황제 티베리우스 2세가 이탈리아와 이베리아 반도의 로마 영토를 지키기 위해 병력을 파견하느라 발칸 반도 방면의 병력이 줄어들자, 바얀 1세는 다시 한 번 공세를 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동로마 제국이 제때에 연공금을 지불하지 않았다는 명목을 내세워 시르미움을 포위해 581년 또는 582년에 함락에 성공했다.
582년 8월 14일 티베리우스 2세가 사망한 후 황위에 오른 마우리키우스는 사산 왕조의 지속적인 침략에 맞서고자 주력군을 동방 전선으로 파견했다. 이로 인해 다뉴브 강 유역의 동로마 수비대가 약화되자, 아바르족은 피지배 민족인 슬라브족, 불가르족 등을 총동원해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했다. 583년, 바얀 1세는 동로마 제국에 공물을 10만 솔리두스로 늘리면 공격하지 않겠다고 제의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이를 받아들이면 아바르족이 추가로 요구할 게 분명하다고 여기고 공물을 더 이상 바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에 바얀 1세는 대대적인 공세에 착수해 싱기두눔을 공략하고 뒤이어 아우구스타이(Augustae), 비미나키움(Viminacium)을 공략했으며, 안키알루스(Anchialus)를 포위했다.
로마 사절단이 안키알루스 인근에서 바얀 1세를 찾아와 평화 협상을 요청했다. 바얀 1세는 병력을 좀더 끌어모아 더 많은 영토를 정복할 거라며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안키알로스가 좀처럼 함락되지 않자 마음을 바꿔 협상에 임했다. 584년 마우리키우스는 바얀 1세가 처음에 요구한 대로 10만 솔리두스를 매년 공물로 바치기로 동의했다. 그러나 아바르 칸국에 귀속되었던 슬라브족은 이 협약에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아테네 인근 아티카와 펠로폰네소스 반도까지 쳐들어가서 약탈을 자행했다. 584/585년에는 트라키아를 습격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아나스타시우스 장성까지 이르렀다가 코멘티올루스 장군에게 격파되었다. 마우리키우스는 수도를 지킨 코멘티올루스에게 마기스테르 밀리툼 프라 에센탈리스(magister militum praesentalis)이란 직책을 내렸고, 얼마 후엔 파트리키우스 칭호를 하사했다.
586년, 아바르족은 평화 협약을 무시하고 다뉴브 강 유역의 요새화된 도시인 라티아리아(Ratiaria)와 오에스쿠스(Oescus)를 파괴하고 뒤이어 테살로니키를 포위했다. 코멘티올루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은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전면전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유격전과 야간 습격을 벌여서 적군을 괴롭히는 작전을 구사했다. 이로 인해 식량 보급이 힘들어진 데다 테살로니키가 좀처럼 함락될 기미가 없자, 바얀 1세는 본국으로 후퇴했다. 587년 안키알루스에서 10,000명의 정예병을 집결한 코멘티올루스는 또다시 다뉴브 강을 넘어 발칸 반도를 휘젓고 있던 바얀 1세를 흑해 연안의 토미스에서 습격했다. 바얀 1세는 이로 인해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부하들의 분전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석호 모양의 해안을 통해 달아났다. 코멘티올루스는 다시 발칸 반도 남쪽 경사면에서 바얀 1세를 습격하려 했지만, 매복군 간의 의사소통이 잘못되어 병사들이 "도망쳐라"는 명령이 내려진 줄 알고 달아나는 바람에 실패했다.
588년 동방 전선으로 보내진 코멘티올루스를 대신해 다뉴브 전선을 맡은 프리스쿠스는 국고가 바닥나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군대 급료를 4분의 1로 삭감한다는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칙령에 분개한 병사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달아났고, 병사들은 포에니케 공작 게르마누스를 지도자로 선출하고 마우리키우스에게 대적했다. 하지만 마우리키우스가 계획을 취소하고 군심을 수습한 덕분에 반란은 곧 진압되었고, 프리스쿠스는 다시 다뉴브 전선을 맡아 아바르족에 맞서 원정을 벌이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원정군은 페린투스에서 아바르족의 측면 공격으로 패퇴했고, 아바르족은 치랄룸(Tzirallum)으로 퇴각한 프리스쿠스를 포위했다.
7세기 역사가인 시모카타의 테오필락토스에 따르면, 프리스쿠스는 한 병사를 시켜 마우리키우스가 프리스쿠스에게 보낸 것으로 위조한 편지를 들고 아바르족에게 일부러 체포되게 했다. 편지의 내용은 황제가 친히 해군을 동원하여 아바르 칸국 본토를 급습하려 하니 좀더 버티라는 것이었다. 바얀 1세는 이 편지가 사실이라고 믿고 서둘러 철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프리스쿠스와 협상한 끝에 연간 공물을 다시 받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고 한다. 12세기 신학자이자 역사가인 시리아인 성 미하일에 따르면, 동로마 제국은 연간 60,000 솔라두스를 아바르 칸국에 지급하기로 했다고 한다.
590년, 마우리키우스는 안키알루스 등 트라키아의 여러 도시를 방문해 재건을 감독하고 군대와 지역 주민들의 사기를 높였다. 그리고 591년 마우리키우스의 지원 덕분에 샤한샤에 복위할 수 있게 된 호스로 2세가 아르메니아 대부분을 동로마 제국에 헌납하고 전쟁을 종식하면서, 동로마 제국은 마침내 발칸 전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마우리키우스는 동방 전선에서 정예병을 차출해 다뉴브 전선에 투입시켜서 전력을 보강한 뒤 592년부터 반격을 개시했다. 이해에 그의 군대는 싱기두눔과 시르미움을 탈환했다. 또한 로마 분견대는 모이시아에 침입한 슬라브족 약탈자들을 토벌하는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해 로마 도시들간의 교통을 재구축했다.
593년, 프리스쿠스는 다뉴브 강 연안도로스톨론으로 진군한 뒤 강을 건너려고 준비하던 슬라브 부족들을 야간 기습해 전멸시켰다. 이후 다뉴브 강을 도하한 뒤 그해 가을까지 현재 루마니아 문테니아의 여러 늪과 숲에서 슬라브족들을 여러 차례 격파했다. 그러나 마우리키우스가 다뉴브 강 북부 강둑에서 겨울을 보내라는 지시를 내리자,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프리스쿠스는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도나우강 남쪽의 오데소스(현재 비르나)에서 겨울을 보냈다. 로마군이 물러나자, 593년 겨울 슬라브족이 모이시아와 마케도니아 속주로 쳐들어가 도브루자의 아퀴스, 스쿠피, 잘다파 마을을 파괴했다. 여기에 프리스쿠스가 마우리키우스의 승인도 받지 않은 채 바얀 1세에게 보상금을 지급받는 대가로 5,000명의 아바르 포로들을 돌려보내고 휴전 협상을 추진하자, 마우리키우스는 격분해 프리스쿠스를 해임하고 형제 페트루스를 새 지휘관으로 선임했다.
594년 새 지휘관에 부임한 페트루스는 모이시아로 재차 쳐들어온 슬라브족과 맞붙었다. 초기에는 슬라브족에게 패배했지만, 군대를 수습한 뒤 마르키아노폴리스리스에서 슬라브족을 격파하고 노바에(현재 스비슈토프)와 흑해 사이의 다뉴브 강을 순찰했다. 그해 8월 말에 노바에 서쪽에서 다뉴브 강을 도하한 뒤 새로운 약탈 원정을 벌이려던 적을 격파했다. 595년 마우리키우스의 용서를 받고 다뉴브 상류의 또다른 로마군 지휘관으로 부임한 프리스쿠스는 다뉴브 강의 로마 함대와 연합해 싱기두눔을 공략하려던 바얀 1세의 군대를 효과적으로 격퇴했다. 이에 바얀 1세는 달마티아로 이동한 후 프리스쿠스와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면서 여러 요새를 약탈했다. 로마 병사들이 구석진 곳인데다 빈곤해서 약탈물을 챙기기 어려운 달마티아로 가서 목숨 바쳐 싸우려 하지 않자, 프리스쿠스는 소규모 분견대만 파견해 아바르족의 진군을 방해하고 적이 확보한 전리품 일부를 탈취하는 정도로 그쳤다.
596년, 바얀 1세는 프랑크 왕국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가 이끄는 아바르군은 드라바 강에서 바이에른군을 격파한 뒤 튀링겐을 침공해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고, 프랑크인들로부터 막대한 조공을 확보한 뒤 귀환했다. 이 성과에 고무된 아바르족은 597년 가을 도나우강을 기습 도하한 뒤 토미스에서 프리스쿠스의 군대를 포위했다. 그러나 598년 코멘티올루스가 구원군을 이끌고 토미스에서 30km 떨어진 지키디바에 이르자, 지난날 자신을 상대로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던 코멘티올루스를 경계한 바얀 1세가 코멘티올루스부터 무찌르기로 하면서 토미스 포위가 풀렸다. 프리스쿠스는 모종의 이유로 코멘티올루스로 향하는 아바르군을 요격하지 않았고, 코멘티올루스는 이아트루스로 후퇴한 뒤 고지대에서 아바르족에 맞섰으나 끝내 패배를 면치 못하고 하이무스 산맥 남쪽으로 퇴각했다.
바얀 1세는 기세를 이어가 아드리아노폴리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사이에 있는 아르카디오폴리스를 포위 공격했으나, 전염병이 창궐하는 바람에 7명의 아들을 비롯한 다수의 병력을 상실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코멘티올루스를 일시적으로 해임하고 필리피쿠스로 대체하는 한편, 킵소스에서 병사들을 소환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서쪽의 아나스타시우스 성벽을 지키게 했다. 그러면서 바얀 1세에게 평화 협상을 제의하면서 여러 아바르 귀족들을 매수했다. 바얀 1세는 아들들을 전염병으로 잃은 것에 깊은 충격을 받은 데다 귀족들이 철수를 종용하자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평화 협정을 맺은 뒤 돌아갔다. 그 직후, 마우리키우스는 협약을 파기하고 프리스쿠스와 코멘티올루스에게 아바르 칸국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벌일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599년, 프리스쿠스와 코멘티올루스는 다뉴브 강 하뉴의 비미나키움에서 강을 도하한 뒤 아바르족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후 프리스쿠스는 아바르 칸국의 중심지인 판노니아 평야지대로 진격했고, 코멘티올루스는 다뉴브강 인근에 남아서 보급을 담당했다. 프리스쿠스는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이 발칸 반도에서 했던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티자 강 동쪽의 광대한 지역을 황폐화시켰고, 여러 아바르 부족과 게피드족을 학살했다. 599년 가을, 프리스쿠스는 수십년 동안 사용되지 않았던 트라야누스 관문을 재개통해, 발칸 반도 도시들간의 연락망을 정상화시켰다. 그러나 마우리키우스 황제가 아바르족이 잡아간 제국군 포로 1만 2천 명의 몸값을 지불하는 것을 거부해 포로들이 모조리 학살당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601년, 페트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티사 강으로 진격해 아바르 칸국의 세력을 다뉴브 강 삼각주로부터 몰아냈다. 이 덕분에 로마 다뉴브 함대가 시르미움과 싱기두눔으로의 접근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602년 페트루스는 왈라키아에서 아바르-슬라브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둬 2만여 명을 사살했고, 동로마 제국와 동맹을 맺은 안테스족이 아바르 칸국의 영역을 침범해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다. 여기에 여러 아바르 부족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면서, 아바르 칸국은 해체될 위기에 직면했다. 심지어 일부 아바르족은 동로마 제국에 귀순하기도 했다. 이렇게 아바르 칸국이 지리멸렬해지면서, 다뉴브 강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재구축하고 왈라키아와 판노니아에서 아바르족을 몰아낸다는 마우리키우스의 목표가 현실화되는듯 했다.
그러던 602년 가을,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원정의 성과를 더욱 많이 거두고 귀환에 필요한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다뉴브 강 남쪽의 겨울 숙영지로 돌아오지 말고 판노니아에서 겨울을 보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593년 프리스쿠스가 같은 명령을 황제로부터 접수받았으나 병사들이 반발하자 명령을 거부하고 귀환한 적이 있었지만, 마우리쿠스의 형제인 페트루스는 황제의 명령에 복종했다. 병사들은 이에 격분해 포카스를 새 황제로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고, 마우리키우스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 호응하면서 결국 마우리키우스 정권은 붕괴되었다. 이리하여 동로마군의 아바르 칸국에 대한 공세는 중단되었고, 아바르 칸국은 멸망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마우리키우스를 무너뜨리고 새 황제에 오른 포카스 황제는 자신을 복위시켜줬던 마우리키우스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쳐들어온 호스로 2세의 사산 왕조군에게 연전연패했고,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의 동방 전선은 매우 위급해졌다. 반면, 발칸 전선은 포카스의 치세 내내 평온했다. 아바르 칸국이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대대적인 원정으로 인해 막심한 피해를 입고 반란에 휘말렸기 때문에 전쟁을 재개할 여력이 되지 않기도 했을 테지만, 포카스를 황제로 옹립한 발칸 방면군의 충성도가 강력했기 때문에 변고가 일어날 여지가 적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포카스는 아바르족에게 상당한 공물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고 발칸 전선군을 동방으로 보내 사산 왕조의 공세를 최대한 막아보려 노력했다. 몇몇 사료에서는 슬라브인들이 그의 치세에 테살로니카를 습격했다고 기술되었지만 다른 사료와 교차검증되지 않기에 신빙성은 의심된다.
그러던 614년, 아바르 칸국의 새로운 칸인 바얀 2세는 포카스를 몰아내고 제위에 오른 이라클리오스가 사산 왕조군을 상대로 연전연패한 틈을 타 달마티아를 습격해 달마티아의 수도 살로나를 공략하고 그곳에 살던 주민들을 노예로 삼았다. 뒤이어 니스를 공략한 뒤 발칸 반도로 깊숙이 침투해 여러 마을과 농촌들을 파괴했으며, 슬라브 해군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에게 해 섬까지 침략했다. 615년 아바르 족이 유스티아나 프리마와 살로나, 나이소스, 세르디카, 노바에를 공략하고 철저하게 파괴했다. 테살로니카 역시 615년과 617년에 2차례 포위되었지만, 동로마 해군의 물자 지원 덕분에 함락을 모면했다. 619년 마르마라 해 연안인 헤르클레아 페린토스에서 동로마 해군이 슬라브 해군에게 격파당했고, 623년 슬라브 해군이 크레타를 습격해 심각한 파괴를 자행했다.
이라클리오스는 가뜩이나 사산 왕조군이 대대적으로 쳐들어와서 시리아, 이집트, 소아시아 상당수를 상실한 상황에서 아바르 칸국과 전쟁을 이어가는 건 무익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아바르 칸국에 막대한 연공금을 바침으로써 평화 협약을 이루는 데 성공한 뒤, 사산 왕조와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후 이라클리오스의 활약으로 전세가 갈수록 불리하게 돌아가자, 사산 왕조 샤한샤 호스로 2세는 아바르 칸국에 사절을 보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합동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마침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고 발칸 반도를 완전히 제패하기 위한 원정을 기획하고 있던 바얀 2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626년, 아바르족과 슬라브족 연합군이 트라키아로 진입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접근하면서 발렌스 수로를 파괴했다. 여기에 샤흐르바라즈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편 도시인 칼케돈으로 이동하여 바다를 건너려 했다. 그러나 동로마 해군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제했기 때문에 바다를 건널 수 없었고, 공성 능력이 탁월했던 사산 왕조군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된 아바르-슬라브 연합군은 콘스탄티폴리스 공략에 애를 먹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무거운 공성 장비를 제작한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이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향해 한달 동안 공성전을 벌였지만, 지휘관 보노스의 지휘를 받은 수비대가 결사적으로 항전해 쉽사리 공략하지 못했다. 여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지오 1세가 성모 마리아의 이콘을 들고 성벽을 행진하면서 병사들을 독려했고, 시민들 역시 합심하여 수비대를 지원했다.
그 해 8월 7일,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 군대를 수송하려던 페르시아 함대가 동로마 함대에 포착되어 파괴되었다. 여기에 아바르 칸국에 동원된 스칼베니족 함대가 골든 혼 건너편에서 바다쪽 성벽을 공략하려 했다가 보노스가 동원한 갤리선에게 격퇴되었고, 아바르족의 지상 공격 역시 격퇴되었다. 얼마 후 이라클리오스의 형제 테오도로스가 샤힌 바르마자데간이 이끄는 군대를 시리아에서 격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연합군의 사기는 바닥나 버렸다. 8월 8일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은 철수하면서 공성 탑을 파괴했고, 뒤이어 블라케르나이 성당에 불을 질렀다. 하지만 로마인들이 불을 끄러 성당에 갔을 때는 이미 불이 꺼져 있었다고 한다. 샤흐르바르즈는 이후에도 칼케돈에 남아있었지만 해군이 무너졌기에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못하다가 결국 시리아로 철수했다.
626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막대한 희생만 치른 아바르 칸국은 급격하게 쇠락했다. 630년 바얀 2세가 사망하자, 그동안 아바르족의 지배를 받았던 불가르족과 슬라브족이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전력 손실이 컸던 아바르족은 이를 조기에 진압하지 못했다. 여기에 이라클리오스가 연공금 지불을 중단해버리면서, 아바르 칸국의 경제적 기반이 박탈되었다. 심지어 620~630년경에 프리올리를 공격하다가 아리알트에 의해 격퇴되기까지 했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아바르족[195]은 슬라브인[196]들의 아내와 딸과 함께 잠을 자며 겨울을 보냈으며, 슬라브인들은 매년 칸에게 경의를 표하고 공물을 바쳤다. 아바르족 아버지와 슬라브족 아내와 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이 수치스러운 억압을 참을 수 없어 칸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즉 해당 봉기는 아바르-슬라브족 혼혈 세대들의 주도하에 발생한 것이었다.
슬라브인들은 사모(Samo)를, 불가르족은 쿠브라트(Kubrat)를 중심으로 독립에 성공해 판노니아 평원과 현재의 러시아 불가강 유역과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독자적인 왕국을 세웠고, 더욱이 635년 이라클리오스가 발칸 반도에서 아바르 족을 몰아내기 위해 불가르 족의 칸 쿠브라트와 동맹을 맺기까지 했다. 그나마 사모와 쿠브라트가 각각 658년과 665년에 사망한 뒤 재차 사모 제국의 영역을 공략하는 데 성공하지만 불가르족은 또다른 튀르크계 유목민족인 하자르의 침략으로 인해 영향력 하에 두는데 실패한데다가 쿠브라트의 아들들이 제각기 분열되어 세방향으로 나눠 이동해 제각기 세력을 일구기 시작였고, 이후 아바르 칸국은 쇠락했다.[197]
그동안 아바르 칸국은 지금의 헝가리 일대에서 겨우 영역을 보전했고, 재차 영향력하에 두었던 보헤미아와 모라바 일대의 슬라브족들에 대한 영향력 또한 상실되었고, 자기들끼리 칸 자리를 두고 내전을 치르는 경우가 많았고, 이과정에서 알제코와 같은 부족장이 세력에서 이탈해 랑고바르드의 로무알트 1세에게 의탁하는 등 심한 내분이 나타났으며, 심지어 658년 동로마 황제 콘스탄스 2세가 발칸 반도 에 대한 원정을 착수하여 아바르 족을 격퇴하였고, 그나마 700년대쯤 아직 복속된 슬라브족들과 함께 발칸 반도를 공격하는 등의 반격적 행동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얼마 가지 못했다.
780년 중반 프랑크 왕국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788년 아바르 족은 프랑크 왕국의 복속된 바이에른의 공작 타실로 3세와 동맹을 맺고 동프랑크 지역을 공격하였고, 카롤루스는 이를 명분으로 타실로 3세를 폐위시키고 바이에른을 프랑크 왕국의 일부로 편입시킨다. 이후 오보트리테스 연맹을 비롯한 북부 슬라브족들의 원정을 진행하던 카롤루스는 다뉴브 강 일대로 아들 피핀으로 바이에른 지역에 머물면서 아바르족에 대한 방어와 반격이 진행하게 했다. 이 당시 카롤루스는 이전에 군대를 둘로 나눠 움직이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군을 셋으로 나누어 움직였는데, 이는 그만큼 프랑크 왕국의 군대가 한층 강력해졌음을 뜻한다.
788년 아바르족의 공격에 대한 방어로 시작된 전쟁은 북 슬라브족에 대한 원정이 끝난 이후인 790년부터는 아바르족 본토에 대한 공격으로 전환하였다. 피핀이 이끈 랑고바르드 군대는 791년 드라바 계곡을 지나 아바르족의 본토인 판노니아로 진격했으나 페스트로 인해 군대가 타격을 받았으며 작센족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면서 그 이상의 진격을 멈췄다.
작센족의 반란이 정리된 후인 795년, 카롤루스가 직접 지휘하면서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카롤루스의 전기인 <카롤루스 대제의 생애>에서도 이 전쟁은 매우 치열했고 어떤 전쟁보다도 많은 전리품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796년 아바르족의 핵심 야영지가 프랑크 왕국군의 손에 떨어지고 그곳에 비축되어 있던 모든 재화가 프랑크 왕국에게 빼앗겼다. 카롤루스는 이후 귀환하여 자신이 획득한 전리품들을 주변의 여러 세력들에게 배분할 수 있었다. 프랑크 왕국은 다뉴브 강과 드라브 강 사이의 아바르 세력권 서쪽 부분으로 달마티아, 슬라보니아, 크로아티아 일대를 자국 영토로 흡수했다. 이때 판노니아 지역에 거주하던 크로아티아족의 보이노미르 또한 카롤루스에게 복종하고 같이 아바르족을 공격했고, 이 공로로 보이노미르는 판노니아 슬라브족들의 공작 칭호를 받게 되었다. 결국 796년에 아바르족들이 항복하자 그들을 개종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프랑크 왕국의 세력권 하에서 국경선 일대에 위치한 변방 왕국으로 존속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프랑크 왕국에 지배를 받는 것을 거부하는 아바르족들이 있었고, 특히 달마티아, 슬라보니아, 크로아티아 일대를 담당하던 프리올리 공작 에리히가 테르사토 공성 도중 기습공격을 받아 전사하는 등 저항이 거셌다. 린츠를 중심으로 한 오버외스터라이히 지역의 대부분은 여전히 바이에른에 속해이었으며, 오버외스터라이히의 일부와 함께 니더외스터라이히에 속하게될 지역들이 아바르 변경주로 재편되었다.아바르 변경백은 초대 바이에른 지사인 게롤드가 겸하고 있었다가 799년 끝까지 복속하지 않은 아바르족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고, 아바르 변경주의 통치는 르드흐에 주둔 중이었던 게롤드의 부관들인 베르너 1세와 고테람이 각기 분담하게 되었다.
이시에 아바르 변경주의 지방 행정이 재조직되었는데, "구 바이에른" 트라우가우는 "신 바이에른" 카란타니아, 카를의 아바리아, 그리고 잃어버린 프리울리 공국의 북동부 지역과 합병되었다. 아바르 변경주의 주도는 당초 로마의 옛 마을인 로르히 앤 데어 엔스였으나 바이에른 지사가 변경백을 겸하고 있었기에 사실상 바이에른의 레겐스부르크가 주도 역할을 했다. 카롤루스는 점령지를 여러개의 가우(Gau)로 나눴으나 라바강까지만 직활 통치지였으며 그 너머에는 프랑크 제국의 봉신이지만 내부 독립성을 갖춘 아바르족 및 슬라브족들이 자치권역이었으며, 이후 니더 판노니아 지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802년 복속되어 있던 아바르족들이 세번째 반란을 일으키자 고테람이 이들의 반란을 진압하다가 전사하고 만다. 이에 다른 지역의 카롤루스를 비롯한 프랑크 귀족들이 반란 진압과 함께 아직 미정복된 아바르의 영토를 공격했다. 결국 803년 아바르족의 칸 조단은 항복을 결정, 프랑크 왕국의 수도 아헨을 방문하고 샤를마뉴의 신하임을 맹세했다. 조단은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아 테오도르라는 세례명을 받아 되돌아갔다. 이후 아바르족을 판노니아 평원의 서부로 이주시키고 전부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기 시작했다.
이후 804년 한때 피지배족이었던 불가르족의 불가리아 제1제국의 공격으로 트란실바니아 지역까지 빼았겼으며, 프랑크군은 아바르인들을 학살하였고, 이후 805년에 칸이 죽자 아브라함이라는 새로운 칸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 때를 기점으로 아바르 내에서도 단독적으로 세력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시하기 시작했고, 결국 직접 카롤루스의 궁정에 직접 와 기독교 세례를 받고 그의 봉신이 되는 길을 택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아바르 공국(Awarisches Fürstentum)이 성립되었다. 또한 이대 베르너 1세가 사망한 후 아바르 변경주는 현재 이탈리아 북동부에 위치했던 프리올리 공국에 속하게 되었다. 810년 보이노미르가 죽자 류데비트가 니더 판노니아 슬라브족들의 통치자가 되었다.
이후 811년 811년에도 추가 원정이 이어졌다. 이 전쟁 과정에서 프랑크족의 영향력 아래 있던 국경 지역은 판노니아 깊숙한 곳까지 확장되었다. 카를루스 대제의 아바르 원정은 아바르 칸들과 다른 아바르 고위 인사들의 복속으로 끝났다. 그들이 최종적으로 복속되기 전에도 카룰루스는 아바르 변경주를 를 세운다.
이후 카롤루스는 805년을 기점으로 아바르족을 기독교화하려했다. 파사우 교구는 엔스 와 라브강 사이의 지역에 대한 아바르족의 기독교 선교를 담당했으며 잘츠부르크 대주교는 발라톤 호수 주변과 라브, 다뉴브 및 드라우강 사이의 지역을 담당했지만 현대 고고학자들이 이시기에 살던 아바르족들의 유적지를 발굴하면서 기독교 선교와 관련된 유물들이 발견되지 않아 아바르족들의 대부분이 여전히 탱그리 신앙을 유지했음을 추정하고 있다.
814년 카롤루스가 죽고 루도비쿠스 1세가 프랑크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기까지 아바르 변경주는 남쪽으로 현재의 크로아티아의 내륙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시기에 들어서 아바르족의 세력은 약해진 상태로 프랑크족이 지배층으로 아바르족과 슬라브족들은 부족장을 그대로 두며, 프랑크 왕실이 주는 칭호를 쓰기는 했지만 프랑크족 관리들의 통제하에 있어야 했고, 상술한대로 아바르 변경주는 프리올리 공국의 통제하에 있었다.
그러다가 817년 카돌라가 프리올리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카돌라는 자신의 통제하에 있던 판노니아 지역의 슬라브 부족들을 가혹하게 다뤘고, 류데비트를 비롯한 판노니아계 귀족들이 항소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819년 프랑크 왕국에 반기를 들었다.
이때 달마티아계 크로아티아를 이끌고 있던 보이노미르는 류데비트 포사프스키의 반란에 동참하기 보다는 판노니아의 공작직을 주겠다는 루도비쿠스의 약조에 따라 친프랑크파로서 류데비트의 장인 드라고무에와 함께 반란을 진압하려는 카돌라와 합휴해 819년 쿠파 전투에서 류데비트에게 맞섰으나 패배해 드라고무에는 전사하고 보이노미르는 자신의 근위병들과 함께 가까스로 도주했고, 카돌라 또한 간신히 프리올리로 돌아왔으나 전투에서 얻은 중상 내지는 중병으로 사망하였다. 류데비트는 여세를 몰아 달마티아를 침공했다. 하지만 프랑크측에서 카돌라의 후임으로 발데릭을 프리올리 공작으로 임명했고, 820년 보이노미르를 지원하면서 류데비트는 세르비아인들에게 망명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류데비트의 반란을 진압했다.
결국 류데비트는 본거지인 시사크에서 탈출해 세르비아계 부족 국가들로 도주했다. 824년 오무르타그는 826년까지 티모차니 부족의 거취 문제를 놓고 루도비쿠스에게 사절을 잇달아 보내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가 없자, 군대를 파견하여 판노니아 남동부인 드라바강의 스티리아(Styria) 혹은 카린티아(Carinthia)에 사는 슬라브족을 복속하였다. 프랑크군은 이에 맞서 이탈리아 분국왕 로타리우스 1세와 프리올리 공작 발데릭의 지휘 하에 군대를 파견했지만, 양군은 큰 충돌을 벌이지 않았다. 이후 양측이 서로 인질을 교환하기로 하면서, 분쟁은 해결되었다. 양측은 도나우 강과 타자 강 사이에 펼쳐진 평야 지대에 슬라브인들의 자치국가 카자르사그를 세워서 완충지로 삼기로 하였다. 다만 이로 인해 발데릭은 불가리아의 침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단 점으로 인해 해임되었고, 프리올리 공국은 네 개의 변경주로 분할되었다.
이시기 라티미르가 하 판노니아 지역의 슬라브족의 군주로 임명되었는데 임명의 주체가 프랑크 제국이 아닌 불가리아였다. 829년에 드라바(Drava)의 불가리아 함대가 다시 언급되었으며, 프랑크 측에서는 루도비쿠스의 아들인 루트비히 2세가 군대를 이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크족은 슬라브족을 제압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는데, 이는 아마도 후처인 유디트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아들인 샤를 2세에 대한 편애로 분할 상속을 변경하려는 루도비쿠스에게 불만을 품은 로타리우스와 루트비히 등 전처 소생의 아들들이 아버지인 루도비쿠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그런 다음 그의 전 후원자였던 동부 변경주와 오버 판노니아의 변경백 라트보트와 적대감을 느낀 전 니트라 공작 프리비나가 라티미르에게 망명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라트보트는 자신의 주군인 루트비히에게 라티미르와의 전쟁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했고, 그는 838년에 이를 허용했다. 라티미르는 라트보트와의 전쟁에 패해 도주했고, 라티미르에게 도망쳤던 프리비나는 라트보트와 화해를 했고, 오버 판노니아에 속해 있던 발라톤 호수를 중심으로 하는 공국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880년 드라바 강과 사바 강 사이의 지역을 통치할 마지막 통치자로 브라슬라프가 등장하게 되었다. 당시 북쪽에서는 바라톤 호수 공국의 통치자인 코셀의 사망하자 모라비아 공작 스바토플루크 1세가 바라톤 공국을 차지하면서 위협적 존재로 부상했다.
이 때문에 884년, 브라슬라프는 동프랑크 왕 카를 3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케니히스슈타텐으로 왔다. 데벨은 스바트플루크에 대해 황제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했지만, 그 후 스바트푸르크도 황제와 화해했다. 그러나 887년 카를 3세가 조카 아르눌프에 의해 폐위된 후, 아르눌프는 스바트풀크에 대한 원정을 시작했고, 브라슬라프는 동프랑크 측으로 참전했다. 아르누르프는 또한 마자르족을 이끌던 아르파드와 동맹을 맺었고, 마자르족은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스바트풀크에 대한 동프랑크의 승리를 돕고, 현재의 트란실바니아쪽인 동판노니아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896년 마자르족이 동로마 제국과 함께 불가리아 제국을 공격하다가 불가리아군의 반격에 의해 그들은 다시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중앙 판노니아에 정착했다. 그 후, 아르눌프는 브라슬라프에게 하판노니아(구 브라튼스키 코슈텔)의 통치권을 준다. 이후 브라슬라프는 달마티아 해안지역을 공격하는 등 활발한 군사 활동을 했으나 판노니아쪽 패권을 두고 마자르족과의 분쟁으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드라바와 사바 강 사이의 지역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는 기록이 없으나 10세기 초, 달마티아 해안의 크로아티아 공작이자, 크로아티아 왕 토미슬라브는 판노니아 크로아티아와 연해 지역을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한다.
3.2. 크로아티아 공국 ⇒ 크로아티아 왕국
크로아티아 공국은 로마 시대 달마티아 속주가 있던 지역에 세워진 나라로, 아바르 칸국에서 독립한 남슬라브족들이 주체가 된 나라이다. 비슷한 시기 판노니아 분지에 건설된 판노니아 크로아티아 공국과는 별개의 국가이다. 크로아트(흐르바티)라는 이름 자체는 아마도 흑해 유역의 사르마트인으로부터 유래된 이름으로 추정되나, 공국의 주요 언어와 주민은 남슬라브계 및 남슬라브인과 동화된 달마티아 주민들이었다.
현대 학계에서는 "달마티아 크로아티아"(Dalmatinska Hrvatska) 또는 프리모스카 크로아티아(Primorska Hrvatska)로 칭하지만, 이는 현대에 만들어진 용어이며, 때때로 '크로아티아 공국'으로 불리기도 한다. 교황청을 비롯한 당대 서유럽인들은 '크로아티아인의 땅(regnum Croatorum)'이라 일컬었으며, 동로마 사료는 '크로아티아(Χρωβατία)'라고 불렀다. 크로아티아는 로마 제국 시대에 달마티아 속주가 있던 곳에서 발흥했다. 7세기 달마티아 대부분은 아바르족이 이끄는 아바르 칸국의 지배를 받았다. 614년, 아바르족과 이들의 가신인 슬라브족이 달마티아 지방의 수도인 살로나를 약탈하고 파괴했다. 그러다가 아바르 칸국이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쇠락하자, 남슬라브 계열인 크로아트인들이 아바르족을 축출하고 달마티아 지방을 지배했다.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의 저서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De Administrando Imperio)에 따르면, 크로아트인은 이라클리오스의 명령에 따라 아바르족을 몰아낸 뒤 달마티아에 정착했다. 이후 '포르가의 아버지'가 아르콘(Arcon)을 맡아 그들을 다스렸고, 포르가가 뒤를 이어 아르콘이 된 뒤 동로마 제국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자율적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을 보내 세례를 해달라고 요청했고, 이라클리오스는 이에 응해 주교들을 파견해 포르카와 주민들에게 셰레를 베풀었다고 한다. 콘스탄티노스 7세는 포르가가 통치한 영토가 Hlebiana, Tzenzena, Emota, Pleba, Pesenta, Parathalassia, Brebere, Nona, Tnena, Sidraga, Nina 등 11개 구역으로 구성되었으며, Kribasan, Litzan, Goutzeska에 반(Ban)이 별도로 무리를 이루어 통치했다고 밝혔다.
프랑크 왕국은 790년대부터 카롤루스 대제에 지도하에 판노니아와 달마티아를 지속적으로 공략했다. 그 결과 803년경, 프랑크 왕국은 판노니아 전체와 달마티아 북부 대부분의 주권을 확보했다. 814년, 닌(Nin)의 반(Ban)이었던 보르나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도비쿠스 1세가 오보트리테스 족, 티모치아니족, 하부 판노니아 슬라브 공작이자 프리올리 변경백인 류데비트와 헤르스탈에서 회동했을 때 구두스카니족의 지도자로서 참여했다. 학계에서는 구두스카니 족이 크로아티아 중부 리카 지방의 가츠카 강 어귀에 거주한 부족이었을 거라 추정한다. 보르나는 역사 기록에서 전해지는 크로아티아 공국의 첫번째 반이다.
819년 7월, 잉겔하임에서 또다른 제국 의회가 열러 제국에 반기를 든 하부 판노니아(일명 판노니아 크로아티아) 공작 류데비트를 진압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때 보로나는 제국에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기록상에서는 이 시기에 "달마티아의 공작"으로 언급되었다. 보르나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쿠파 강에서 류데비트군과 맞붙었지만, 전투 중에 구두스카니족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참패를 면치 못하고 패주했다. 당시 류데비트의 시아버지였지만 보르나와 합류했던 드라고무즈(Dragomuž)도 이때 전사했다고 한다. 보르나는 본구그로 돌아간 뒤 구두스카니족을 복속했다. 그해 12월, 류데비트가 대군을 이끌고 달마티아를 침공해 많은 영역을 약탈했다. 보르나는 성에 가능한 한 많은 병력을 비축한 후, 정예 병력을 거느리고 류데비트군이 지친 틈을 타 그들의 후방과 측면을 공격했다. 이로 인해 3,000 병력과 300 마리 이상의 류데비트는 판노니아로 퇴각했고, 보르나는 사절을 루도비쿠스 1세에게 보내 이 소식을 전했다.
820년 1월, 아헨에서 제국 의회가 열렸다. 제국군은 이탈리아에서 동부 알프스 산맥을 거쳐 판노니아로 진군하는 부대와 케른티아를 거치는 부대, 바이에른에서 상부 판노니아를 거쳐 진군하는 부대의 3갈래로 쳐들어가기로 했다. 이때 보르나는 사절을 보내 작전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고 전해진다. 이탈리아에서 출발한 부대와 바이에른에서 출발한 부대는 긴 경로로 인해 느리게 움직였고, 케른티아에서 출발한 부대는 드라바 강을 건너 류데비트를 상대로 3차례 승리를 거둔 뒤 빠르게 진군했다. 이윽고 세 부대가 연합한 뒤 하부 판노니아 일대를 황폐화하고 큰 손실 없이 귀환했고, 류데비트는 산악 성채에 숨었다.
821년 2월, 또다른 제국 의회가 아헨에서 열렸고, 3개 군대를 동원해 류데비트를 공격하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후 제국군이 투입되어 류데비트의 영지를 약탈하고 10월에 작전을 마치고 귀환했다. <프랑크 왕실 연대기>에 따르면, 보르나는 이즈음에 사망했고, 그의 조카인 블라디슬라브가 크로아트 족의 의지와 황제 루도비쿠스 1세의 승인으로 직위를 계승했다고 한다. 하지만 불러다슬라브의 이후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블라디슬라브가 823년 이전에 사망하고 류도미슬이 뒤를 이었다고 추정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류도미슬이 "달마티아의 공작"으로 언급되는 걸 볼 때, 그는 달마티아만 통치했고 리부르니아와 가츠카는 블리다슬라브가 통치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프랑크 왕실 연대기>에 따르면, 류도미슬은 보르나의 삼촌으로, 823년 류데비트가 제국군의 공세를 피해 자기에게 망명했을 때 한동안 손님으로 대접했지만 얼마 후 기습적으로 체포한 뒤 살해했다고 한다. 아마도 제국의 충성스러운 가신의 모습을 보여줘서 지위를 강화하려고 그랬을 것으로 추정된다.
835년경에 집권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미슬라브는 말리 코자크(Mali Kozjak) 산의 경사면인 푸탈리에 성 유르자 교회를 세우고 스플리트의 동쪽 지역인 플리차의 라자네와 투가레를 영지로 수여했다.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과 전쟁을 치렀던 것으로 보이나 전쟁의 원인과 과정은 알려지지 않았다. 839년, 베네치아 도제 피에트로 트라도니코(Pietro Tradonico, 800 ~ 864)는 해군을 이끌고 달마티아 해안을 공격했지만 해안 요새인 성 마르틴에서 크로아트군을 상대로 고전한 뒤 미슬라브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콘스탄티노스 7세의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에 따르면, 크로아트족이 프랑크족에 대항해 7년간 투쟁한 끝에 독립을 쟁취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사건이 미슬라브 치세에 벌어졌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845년 미슬라프의 뒤를 이어 크로아티아의 반이 된 트르피미르 1세는 공식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로타리우스 1세를 주군으로 섬기면서도 광범위한 자치권을 인정받고 통치를 행사했다. 작센인 신학자 고트샬크(Gottschalk, 805 ~ 868/869)에 따르면, 846년에서 848년 사이에 바다와 육지에서 동로마 제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을 상대로 전쟁을 성공적으로 펼쳤다. 그에게 소속된 네레트바니족이 베네치아 도시 카오를레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고, 자다르의 동로마 총독이 그의 군대에게 패배했다고 한다. 또한 고트샬크는 불가리아 제1제국이 854년에서 860년 사이에 크로아티아를 침공했지만, 트르피미르가 크로아티아와 불가리아가 국경을 접하고 있던 보스니아 북동부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격퇴했다고 밝혔다. 고트샬크는 예정설을 주장했다가 이단으로 기소되자 동프랑크 왕국에서 탈출해 트르피미르의 궁정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852년 3월 4일, 트르피미르는 말리 코자크(Mali Kozjak) 산의 경사면인 푸탈리에 세워진 성 유르자 교회에 기부하고 증서를 발행했다. 일명 <트르피미르 공작의 기증(Povelja kneza Trpimira)>으로 알려진 이 기증서에서, 그는 자신을 "신의 은총으로, 크로아티아인의 통치자(Tirpimir, dux Chroatorum , iuuatus munere diuino)>라고 밝혔으며, 전임 반 미슬라브가 스플리트 대교구에 푸탈리의 재산을 기부한 것을 확인했다. 증인 목록에는 5명의 총독, 궁정 관리자, 3명의 신부, 다른 고위 인사 5명이 언급되었다.
한편, 트르피미르는 아펜니노 반도의 베네딕토회 중심지인 몬테카시노에서 몇몇 베네딕토회 수녀들을 초대해 클리스(Klis) 기슭에 있는 리지니체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정착하도록 했다. 수도원에 정착한 베네딕토회 수녀들은 종교 생활과 교육 생활, 그리고 읽고 쓰는 능력을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리지니체에는 아래의 문구가 새겨진 제단 들보 조각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기도 했다.
...pro duce Trepim(ero)
트르피미르 공작을 위해
트르피미르 공작을 위해
콘스탄티노스 7세는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에서 트르피미르를 크레시미르 1세의 아버지라고 일컬었으며, 그의 통치 기간을 10세기로 정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 트르피미르는 트르피미르 2세라고 추정한다. 베네치아 연대기 작가 이반 부제는 즈데슬라브가 트르피미르 가문 출신이라고 언급했다. 또한 트르피미르는 15세기와 16세기의 두 연대기로 구성된 <코로나 베네토룸(Corona Venetorum)>에서 크로아티아의 트르피미르 왕(Trpimir re di Croatia)으로 언급되었다.
864년 트르피미르 1세가 사망한 뒤의 상황은 불분명하다. 일설에 따르면, 트르피미르 1세의 장남 페타르는 일찍 죽었고, 또다른 아른 즈데슬라브가 뒤를 이었지만, 트르피미르 가문 출신이 아닌 도마고이에게 전복되었다고 한다. 또다른 설에 따르면, 도마고이가 페타르를 살해하고 크로아티아의 반이 되었다고 한다. 15세기와 16세기의 두 연대기로 구성된 <코로나 베네토룸(Corona Venetorum)>에 따르면, 도마고이는 "네레트반족의 지도자"(Domoghoi, prinze de Narentani)라고 한다.
865년, 베네치아 도제 오르소 파르티치파치오가 크로아티아 해안을 침공했다. 이후 도마고이는 아드리아해에서 베네치아 선박의 안전한 통행을 보장하기 위해 인질을 제공하는 협약을 맺는 대가로 베네치아군이 물러나게 했다. 866년 사라센 해적이 달마티아 해안을 공격했다. 당시 그들은 바리와 타란토를 포함해 이탈리아 해안가 도시들을 보유했다. 사라센은 코토르, 키샨, 부드바를 파괴한 뒤, 라구사를 포위했지만 15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동로마 해군의 반격으로 격퇴되었다. 이후 도마고이는 871년 2월 가신으로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도비코 2세의 바리 토후국 정벌전에 참여했다. 바리 토후국이 멸망한 뒤, 베네치아 정부는 도마고이를 전복해 크로아티아 공국에 베네치아에 우호적인 지도자를 세우려는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음모는 발각되었고, 도마고이는 음모에 가담한 자들을 모조리 죽였으며 음모를 폭로한 공모자 역시 처단했다.
874년, 교황 요한 8세는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파견된 교황 특사를 태운 선박이 크로아티아 해적에게 공격당한 것에 대해 따지는 편지를 도마고이에게 보냈다. 요한 8세는 이 서신에서 아드리아해에서 활개치는 해적을 억제해달라고 요청했으며, 그를 "영광스러운 공작 도마고이(Domagoi duci glorioso)"라고 언급하면서도 해적 토벌에 만전을 가하지 않는다면 도마고이가 결백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876년,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한 뒤 카를로만이 왕위에 올랐다. 도마고이는 이때를 틈타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하기로 마음먹고, 이스트리아, 우마그, 노비그라드, 시파르, 로빈 등 동프랑크 왕국에 속한 4개 도시를 습격해 파괴했으며, 피란 만에서 베네치아 선박을 습격했다. 이후 크로아티아군은 그라도 시를 공격했지만 베네치아 해군에게 격퇴되었다. 이 무렵 도마고이는 사망했고, 성명 미상의 아들[198]이 뒤이어 반이 되었지만 878년 동로마 제국 황제 바실리오스 1세의 지원을 받으며 크로아티아에 귀환한 즈데슬라브에게 축출되었다. 즈데슬라브는 크로아티아 공국과 전쟁을 치르던 베네치아 공화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고, 동로마 제국을 주군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879년 5월 브라니미르의 봉기에 직면했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크닌으로 진군했지만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즈데슬라브를 살해하고 크로아티아의 반에 오른 브라니미르는 즈데슬라브가 속한 트르피미르 가문에 속하지 않은 듯하다. 브라니미르의 기원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비문과 이름의 형태로 볼 때 크로아티아 내륙에 거주하는 슬라브인일 가능성이 높다. 브라니미르가 도마고이의 아들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가설이 제기되었지만, 이를 입증하는 증거는 없다. 888년 이전에 닌(Nin)에서 건설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에서 발견된 그의 비문에는 라틴어로 "(Bra)nnimero dux Slavorum(슬라브족의 지도자 브라니미르)"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스크라딘 인근에 발견된 로마네스크 교회에서 출토된 파편에는 "(Bra)nimero duce(m) Clavitnoru(m)(크로아티아의 지도자 브라니미르)"으로 적혀 있었으며, 1928년 벤코바츠 인근의 소포트에서 출토된 조각에는 "Branimiro com... dux Chruatoru(m)" 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로 볼 때 그는 둑스(dux)와 반(Ban)을 동시에 칭했을 것이다. 하지만 교황 요한 8세는 그에게 둑스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고 '프린스(Prince)'라는 호칭을 사용했는데, 이는 교황이 그를 특정 지역의 독자적인 통치자로 간주했음을 암시한다.
879년 5월 21일, 교황 요한 8세는 크로아티아를 기독교를 신봉하는 독립국으로 인정한다는 교서를 반포했다. 그해 6월 7일, 요한 8세는 5월 21일에 선포한 교서를 확인하면서, 즈데슬라브를 죽이고 작위를 찬탈한 브라니미르를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했다. 그러면서 그가 로마 교회로 돌아온 것을 칭찬했고, 그를 "사랑하는 아들 브라니미르"라고 칭했다. 또한 닌의 주교 테오도시우스와 성직자들과 모든 평민들을 "사랑하는 아들들"이라고 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교황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직속 관할권을 받고 있던 달마티아 주교들에게 로마 교구로 돌아가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로 볼 때, 브라니미르는 포티오스 분열 시기에 로마 교황의 편을 들었지만 달마티아는 동로마 제국을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브라니미르는 닌의 주교 테오도시우스와 함께 요한 8세에게 답장을 보내, 크로아티아 국민의 이름으로 그에 대한 충성과 사도 베드로의 왕좌로의 복귀를 표명했다.
887년 9월 18일, 네레트바인들은 마카르스카 전투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이 파견한 군대를 물리치고 베네치아 도제 피에트로 1세 칸디아노(Pietro I Candiano. 842 ~ 887)를 살해했다. 이반 부제에 따르면, 베네치아인들은 이때부터 아드리아해 항해를 위해 크로아티아인과 네레트바인들에게 공물을 바쳤다고 한다. 또한 달마티아의 도시와 섬들도 브라니미르에게 공물을 바쳤다. 스플리트는 200, 자다르는 110, 트로기르, 오소르, 라브, 크레스는 각각 100골드를 지불했다고 한다. 한편, 브라니미르는 모라비아에서 추방된 메토디오스의 제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이후로 크로아티아 교회에는 라틴어 외에도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가 개발한 글라골 문자가 쓰였으며, 크로아티아 민속 문화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브라니미르는 892년 이전에 사망했고, 문치미르가 새 반이 되었다. 892년에 크로아티아 당국이 발간한 헌장에 따르면, 문치미르는 트르피미르 1세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에 많은 학자들은 브라니미르가 사망한 뒤 문치미르가 정변을 일으켜 권좌를 탈환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기록이 부족해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892년 헌장은 닌 교구와 스플리트 대교구가 트르피미르 1세갸 852년에 토지를 기부한 일을 놓고 벌인 분쟁을 다뤘다. 닌 교구는 트르피미르 1세가 말리 코자크(Mali Kozjak) 산의 경사면인 푸탈리에 세워진 성 유르자 교회에 기부했을 때 푸탈리의 재산을 영구적으로 넘긴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문치미르는 닌 주교의 진술이 틀렸다는 결론을 내리고 아버지의 기부를 재확인했다.
콘스탄티노스 7세는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에서 문치미르 통치 기간의 크로아티아 공국의 영역을 언급했다. 이에 따르면, 크로아티아 공국은 북쪽의 쿠파 강과 그보즈드강에서 남쪽의 세티나 강과 비오코보 강까지 뻗었으며, 네레트바 강에서는 훔 지역과 접했으며, 드리나 강까지 크로아티아 내륙으로 확장되었다고 한다. 또한 크로아티아 공국은 11개의 주로 나뉘었고, 3개 교구가 여기에 추가되었다고 한다. 또한 문치미르는 달마티아 해안가의 도시들로부터 경의를 받고 공물을 받았으며, 왕실 장관(iupanus palatinus), 철퇴 운반자(maccecharius iupanus), 신랑(cavallarius iupanus), 시종(camerarius iupanus), 잔 운반자(pincernarius iupanus)로 둘러싸였고, 자신만의 인장(annulo nostro)을 휴대했다고 한다. 한편, 문치미르는 남쪽의 라쉬카 공국에서 페타르 고이니코비치가 망명하자 그를 용숭하게 대접했으며, 나중에 라쉬카의 공작위를 회복할 수 있도록 원조했다. 896년 마자르족들이 판노니아 평원으로 이주해 오면서 판노니아 크로아티아 공국을 쳐 브라슬라브를 죽이면서 크로아티아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문치미르의 사망 시점과 후임 반인 토미슬라브의 집권 시기가 언제인지는 불분명하다. 스플리트 대주교 토마스가 쓴 13세기 연대기 <히스토리아 살로니타나(Historia Salonitana)>에서 토미슬라브가 914년에 벌어진 사건에 언급된 것을 봤을 때, 문치미르는 914년 이전에 사망했을 것이다. 학계에서는 910년 즈음이었을 거라는 의견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베네치아 공화국 출신으로, <베네치아 연대기>를 집필한 안드레아 단돌로에 따르면, 마자르족이 914년과 921년에 크로아트족을 유린했다고 한다. <두클랴 성직자 연대기>에 따르면, 토미슬라브는 마자르족을 상대로 혈투를 벌인 끝에 925년경 드라바 강 우안에 있는 요새화되지 않은 지역에서 맞붙은 끝에 마자르족을 축출했으며, 하부 판노니아 일대(일명 판노니아 크로아티아)를 그때까지 자기가 통치하던 크로아티아 영역과 통합했다고 한다. 콘스탄티노스 7세의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에 따르면, 크로아트인과 마자르족간의 끊임없는 전쟁이 있었다고 밝히면서, 마자르족 장군들이 10세기에 드라바 남쪽의 세 요새, 즉 자그레브, 포제가, 부코보를 점령했다고 밝혔다. 이는 이전에 이 세 요새가 크로아트인들의 손아귀에 있었음을 암시하며, 일부 학자들은 토미슬라브가 드라바 강 연안 전투에서 승리한 뒤 세 요새를 점령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닌의 주교이며 토미슬라브의 최측근이었던 그르구르 닌스키(Grgur Ninski, 9세기 후반 ~ 928년 이후)는 928년 스플리트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닌 주교직이 폐지되면서 스크르딘의 주교로 옮겨졌다. 이는 판노니아 크로아티아에 속한 시사크 시가 토미슬라브의 통치를 받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기록이다. 하지만 그 외에 판노니아 크로아티아가 토미슬라브에게 통합되었다는 걸 드러내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가 판노니아 크로아티아를 통합했다는 <두클랴 성직자 연대기>의 내용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에 대해 학자들의 논쟁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924년, 시메온 1세가 파견한 불가리아 원정대가 세르비아 지역을 공력해 그곳을 다스리던 크냐지 자하리야를 축출하고 세르비아를 장악했다. 토미슬라브는 자하리야를 비롯한 세르비아 망명자들을 받아들였고,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프로콘술의 직을 받는 대신 달마티아 테마의 통치권을 이양받았다. 926년 또는 927년, 시메온은 크로아티아에 알로고보투르가 이끄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지만, 보스니아의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알고로보투르를 비롯한 대다수 장병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참회자 테오파네스, 게오르기오스 케드레노스, 게오르기오스 하마르톨로스, 요안니스 조나라스 등 동로마 제국 역사가들은 시메온 1세는 참패 소식을 접한 직후 심장마비에 걸려 사망했다고 기술했다.
콘스탄티노스 7세는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에서 크로아티아가 기병 60,000명과 보병 100,000명을 배치할 수 있었으며, 각각 최대 40명의 선원이 탑승하는 80척의 대형 선박과 각각 10~ 20명의 선원이 탑승하는 100척의 소형 선박을 보유했다고 기술했다. 학계에서는 이를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하지만, 토미슬라브 치세 당시 마자르족과 불가리아 제1제국을 물리쳤던 걸 볼 때, 크로아티아의 군사력이 동로마 제국 입장에서 절대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건 사실이라고 본다. 또한 콘스탄티노스 7세는 크로아티아에는 닌, 비오그라드, 벨리신, 스크라딘, 흘리예브노, 스텁, 크닌, 코리, 클로북 등 인구가 많은 도시들이 여럿 있으며, 크로아티아 상인들은 네레트바 지역과 달마티아 만의 항구에서 베네치아까지 항해한다고 기술했다.
925년에 열린 제1차 스플리트 공의회는 교회 관할권과 크로아티아 교회에서 슬라브어가 예배에 사용되는 것이 거론되었다. 이 공의회에서 스플리트의 이반 대주교가 크로아티아 추기경의 명예를 누릴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에 닌의 주교인 그르구르 닌스키가 자신이 주장이 될 자격이 있다고 교황 요한 10세에게 항의했다. 토미슬라브 역시 그르구르 닌스키를 옹호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928년에 열린 제2차 스플리트 공의회에서, 스플리트 대주교의 직위가 확정되었고 닌 교구직은 폐지되었고, 그르구르 닌스키는 스크르딘 주교로 옮겨졌다. 또한 슬라브어가 예배에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오직 라틴어만 사용할 수 있었다.
925년, 교황 요한 10세는 토미슬라브에게 답신을 보냈다. 이때 요한 10세는 "크로아티아의 왕(rex)"이라는 칭호로 불렸다. 이에 크로아티아 가톨릭 신부이자 역사가, 정치인인 프라뇨 라치키(Franjo Rački, 1828 ~ 1894)는 토미슬라브가 925년 즈음에 왕을 자처했다고 주장했다. <두클랴 성직자 연대기>는 토미슬라브가 달미 들판에서 동로마 황제게 보내준 왕관을 쓰고 대관식을 거행했다고 기술했다. 크로아티아 역사가, 정치가이자 크로아티아 고고학의 창시자인 이반 쿠쿨예비치 사크친스키(Ivan Kukuljević Sakcinski, 1816 ~ 1889)는 대관식 장소는 'Duvanjsko polje(현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남서부의 카르스트 지역 고원 지대)'일 거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교황은 그를 왕으로 인정했지만 동로마 제국은 '임시로' 달마티아 테마를 관리하는 것만 받아들일 뿐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거라고 추정한다.
대다수 크로아티아 학자들은 925년 즈음에 토미슬라브가 교황 요한 10세의 승인을 받고 국왕을 칭하면서, 크로아트 왕국이 건국되었다고 본다. 이를 확증하는 고고학적 기록은 없으나, 그의 후계자들은 비문과 헌장에서 자신을 "왕"이라고 칭했던 것으로 볼 때, 크로아트 왕국이 토미슬라브의 시대에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토미슬라브는 923년과 928년 사이에 하부 판노니아와 달마티아를 크로아트 왕국의 영역에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세운 왕국의 지리적 범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달마티아, 판노니아, 북부 및 서부 보스니아 대부분을 포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는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De administrando imperio)에서 크로아티아가 기병 60,000명과 보병 100,000명을 배치할 수 있었으며, 각각 최대 40명의 선원이 탑승하는 80척의 대형 선박과 각각 10~ 20명의 선원이 탑승하는 100척의 소형 선박을 보유했다고 기술했다. 학계에서는 이를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하지만, 토미슬라브 치세 당시 마자르족과 불가리아 제1제국을 물리쳤던 걸 볼 때, 크로아티아의 군사력이 동로마 제국 입장에서 절대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건 사실이라고 본다. 또한 콘스탄티노스 7세는 크로아티아에는 닌, 비오그라드, 벨리신, 스크라딘, 흘리예브노, 스텁, 크닌, 코리, 클로북 등 인구가 많은 도시들이 여럿 있으며, 크로아티아 상인들은 네레트바 지역과 달마티아 만의 항구에서 베네치아까지 항해한다고 기술했다.
토미슬라브는 928년 이후 더이상 언급되지 않았고, 트르피미르 2세가 그의 뒤를 이었다. 그의 기원에 대해 문치미르의 아들이자 토미슬라브의 남동생이라는 설과 토미슬라브의 아들이라는 설이 병립하지만, 기록이 미비해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 그는 영토 확장에 주력했던 토미슬라브와는 달리 별다른 군사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토미슬라브 치세 때 불가리아 제1제국이 달마티아 테마를 공략하는 걸 막기 위해 크로아트 왕국이 달마티아의 주권을 행사하는 걸 인정했지만, 트르피미르 2세 치세 때는 불가리아 제1제국이 시메온 1세 사망 후 확장 정책을 중단하면서 달마티아가 위험에서 벗어나자 도로 제국의 관할로 넘겼다. 하지만 달마티아 일대의 실질적인 통치는 여전히 크로아트 왕국에 의해 주도되었다.
935년 트르피미르 2세가 사망한 뒤, 아들 크레시미르 1세가 왕위에 올랐다. 콘스탄티노스 7세는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에서, 크레시미르 1세는 크로아트 왕국의 군사력을 유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945년 크레시미르 1세가 사망한 뒤 장남 미로슬라브가 뒤를 이은 직후 또다른 아들인 미하일로 크레시미르 2세가 프리브나 반의 지지를 받으며 반란을 일으키면서 크로아티아 전역이 내란에 휘말렸다. 이로 인해 군대는 크게 약해졌고, 해군은 절반으로 줄어들었으며, 변경 지역들은 잇따라 이탈했다. 브라치, 흐바르, 비스 섬은 네레트바 족의 지도하에 독립했고, 달마티아 섬과 해안 도시들은 동로마 제국에 합류했고, 보스니아 동부(현재 사라예보 주변 지역) 및 크로아티아의 일부 공국은 세르비아의 대공이자 동로마 제국의 봉신인 차슬라프에게 넘어갔다.
949년, 미하일로 크레시미르 2세가 프라브나 반의 지원에 힘입어 미로슬라프를 처단하고 크로아트의 새 국왕에 등극했다. 그 후 그는 크로아티아의 권력을 어느정도 회복했다. 내전 당시 떨어졌던 보스니아 동부 지역인 우스코플라예, 루카, 플레바를 파괴해 보스니아 전역을 복종시켰으며, 969년 이탈리아 몬테 가르가노 반도 인근에서, 크로아티아 해군이 사라센 해적과의 해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한편, 미하일로 크레시미르 2세는 옐레나 슬라브나라는 여인과 결혼했는데, 일각에서는 자다르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인 마디예바츠 가문 출신이라고 추정하지만 기록이 희박해서 불확실하다.
969년 미하일로 크레시미르 2세가 사망한 뒤, 아들 스테판 드르지슬라브가 왕위에 올랐지만 나이가 어려서 어머니 옐레나가 섭정을 맡았다. 그녀는 976년 10월 8일에 사망할 때까지 왕국을 통치하면서, 솔린에 2개의 교회를 세웠는데, 하나는 크로아티아 왕들의 무덤 역할을 했던 성 스테판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1070년대 초까지 대관식에 쓰였던 성 마리아 교회였다. 어머니 사후 실권을 잡은 스테판 드르지슬라브는 불가리아 제1제국의 차르 사무일이 동로마 제국의 바실리오스 2세와 전쟁을 치르면서 세력을 키우는 상황에 직면했다.
사무일은 보스니아, 스리젬, 세르비아, 세티나 강 남쪽 아드리아 해 연안 전체로 통치를 확장해 두클랴, 트라부냐, 자클루미아, 네레트바 일대를 장악했다. 이후 여세를 몰아 크로아티아를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스테판은 이에 맞서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기로 했다.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바실리오스 2세는 986년에서 990년 사이에 스테판이 자신과 동맹을 맺은 것에 보답하고자 달마티아 총독으로 선임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역사가들은 스테판에게 그런 권한이 내려진 사실은 없다고 본다. 또한 스플리트의 토마스 대주교에 따르면, 스테판은 동로마 황제로부터 인정의 표시로 왕실 휘장과 'reges Dalmatie et Chroatie(달마티아와 크로아티아의 왕)'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996년, 베네치아 총독 피에트로 2세 오르세올로는 1세기 동안 아드리아해 연안에 대한 안전한 통행을 보장받기 위해 크로아트 왕국에 납부했던 세금을 더 이상 내지 않기로 했다. 이에 크로아트 왕국은 네레트비아인과 함께 비스에서 바도라이 브라가딘이 이끈 베네치아 함대와 맞붙었으나 참패했고, 비스 섬 섬 주민들의 대부분이 포로로 전락했다. 일부 학자들은 베네치아가 그 해에 이리 나온 건 스테판이 이미 죽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통상적으로 그의 사망 년도로 알려진 997년이 아니라 996년에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확실한 기록은 없다.
스테판 드르지슬라브는 장남 스베토슬라브 수로냐에게 'dux Hroatorum(흐로트족의 지도자)' 칭호를 내리고 공동 통치자로 세웠다. 여기에 또다른 두 아들 크레시미르 3세와 고이슬라브도 각자 특징 지역의 반(Ban)으로서 통치하도록 했다. 그러나 996년 또는 997년 스테판이 사망한 후, 스베토슬라브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크로아티아 전역에서 통치를 행사했다. 996년, 베네치아 도제 피에트로 2세 오르세올로는 1세기 동안 아드리아해 연안에 대한 안전한 통행을 보장받기 위해 크로아트 왕국에 납부했던 세금을 더 이상 내지 않기로 했다. 이에 크로아트 왕국은 네레트비아인과 함께 비스에서 바도라이 브라가딘이 이끈 베네치아 함대와 맞붙었으나 참패했고, 비스 섬 섬 주민들의 대부분이 포로로 전락했다. 일부 학자들은 베네치아가 그 해에 이리 나온 건 스테판이 죽었고, 크로아트 왕국이 내전에 휘말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큰형 스베토슬라브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자, 이에 반감을 품은 두 형제는 불가리아 제1제국의 차르 사무일과 동맹을 맺고 그를 축출하기로 했다. 사무일은 자신의 최대 적수인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고 있는 스베토슬라브를 전복하는 걸 도와주기로 하고, 998년 크로아티아를 침공해 스플리트, 트로기르, 자다르까지 공략한 뒤 보스니아와 라슈카를 거쳐 불가리아로 돌아갔다. 여기에 딸 테오도라 코사라를 세르비아 대공 요반 블라디미르와 결혼시켰으며, 또다른 딸 미로슬라바 공주를 동로마 장성으로서 포로로 잡아뒀던 아쇼트와 결혼시킨 뒤 디라키움 총독으로 임명했다. 사무일은 자기가 점령한 크로아티아 영역을 두 형제에게 넘겼다.
1000년, 피에트로 2세 오르세올로는 스플리트, 트로기르, 비오그라드 등 해안 도시들과 크르크, 크레스, 라브, 코르출라, 라스토보 섬 주민들의 보호 요청에 따라 그곳을 빠르게 접수했다. 여기에 자다르도 네레트바의 크로아티아인들이 998년 자다르 시민 40명을 생포한 뒤 베네치아의 보호를 받아들였다. 그 후 스베토슬라브 수로냐는 크레시미르 3세와 고이슬라브 형제에게 축출되어 베네치아로 망명했다. 크레시미르 3세와 고이슬라브는 크로아트 왕국의 공동 왕이 되었고,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빼앗긴 달마티아를 탈환하기 위해 몇 차례 무력 원정을 벌여야 했다.
3.3. 세르비아계 공국들
9세기 세르비아 공국들. 오른쪽의 회색 영역은 세르비아(Србија) 혹은 라쉬카(Рашка), 왼쪽은 북쪽부터 순서대로 파가니야(Паганија), 자후믈례(Захумље), 트라부니야(Травунија), 두클랴(Дукља). |
스클라비니, 즉 세르비아인들은 정착한 곳에서 라쉬카(Рашка)라는 국가를 이뤘으며, 아드리아 해안지방에도 세르비아계 공국들이 들어서 크로아티아 남부에 파가니야(Паганија), 보스니아 서부에 자후믈례(Захумље), 헤르체고비나 서부에 트라부니야(Травунија), 몬테네그로에 두클랴(Дукља)가 있었다. 이 다섯국가 중 세르비아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던 곳은 라쉬카였으며,[199] 해안의 세르비아계 공국들에는 로마인들이 남아 세르비아인 지배자들에게 공물을 바쳤다. 이 중 세르비아 역사에서 중요한 국가는 라쉬카와 두클랴였다.
3.3.1. 라쉬카
세르비아계 국가들 중 먼저 구체적인 기록이 등장하는 건 라쉬카였는데, 라쉬카는 세르비아인들이 처음 자리를 잡았을 때 세르비아인들의 지도자였던 사람의 후손이 다스리고 있었다. 라쉬카의 군주로서 최초로 언급되는 사람은 비셰슬라프(Вишеслав)로 단편적인 기록으로 780년부터 통치했다고 기록되었다. 그에 대한 유일한 기록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작가였던 콘스탄티노스 7세가 자신의 후손들을 위해 남겨 놓은 『제국의 통치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 것이 전부이다.헤라클리우스 황제에게서 도망쳐 온 그 세르비아인 아르혼트가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과 손자 등 그의 가문에서 순서대로 상속받아 아르혼트가 되어 통치했다. 일정한 햇수가 지나 그들에게서 비셰슬라프가, 그에게서 라도슬라프가, 그에게서 프로시고이가 또 그에게서 블라스티미르가 태어났다… .『제국의 경영에 대하여』, 32
콘스탄티누스 7세는 그리스어로 비셰슬라프의 이름을 기록해 놓았는데, 어떤 사학자들은 비셰슬라프 대신 보이슬라프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다수의 많은 사학자들은 비셰슬라프라고 번역한다. 콘스탄티누스 7세는 성명 미상의 초대 아르혼트와 비셰슬라프 사이의 아르혼트의 이름을 기록해 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비셰슬라프는 이름을 알 수 있는 최초의 세르비아 통치자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름 이외에 그 어떤 기록도 남겨놓지 않아 비셰슬라프에 대해서 더 이상 알기는 힘들다.
블라스티미로비치 가라는 명칭 대신 비셰슬라프를 왕가의 시조로 간주하여 비셰슬라프의 이름에서 유래한 비셰슬라비치 가라는 명칭으로 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아들 라도슬라프(Радослав)는 9세기 초 라쉬카를 통치했으며, 이때 819년에서 822년까지 판노니아 슬라브족들의 지도자로서 프랑크계 서로마 제국 황제인 루도비쿠스 1세에게 반란을 일으키다가 남쪽으로 도주한 류데비트가 망명한 세르비아계 공작들 중 한명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의 대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다음 공작인 프로시고이(Просигој)는 803년까지 군림하면서 프랑크의 연대기 작가인 아인하르트는 그의 대에 라쉬카가 달마티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기술했다.
다음 대인 블라스티미르(Властимир, 재위 830~851) 대에 이르러서야 구체적인 역사가 기록된다. 블라스티미르 통치하의 세르비아는 불가리아 칸 프레시안 1세가 통치하던 제1차 불가리아 제국과 국경을 접한 후 얼마 안가 소위 '3년 전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와의 3년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배경과 원인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콘스탄티누스 7세의 기록에 따르면 세르비아인들과 불가리아인들은 가까운 이웃으로 평화롭게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세르비아의 역사학자 티보르 지브코비치는 두 가지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는 세르비아가 당시 서쪽으로 팽창 정책을 쓰던 불가리아의 길목에 있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불가리아, 동로마 그리고 세르비아 등 세 나라의 복잡한 상호 관계의 결과로 불가리아와 동로마 간에 발생한 전투에 세르비아가 동로마의 동맹국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라는 가설이다.
불가리아와 동로마의 전쟁은 846년 불가리아의 칸 프레시안이 동로마를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동로마 황제는 5살 먹은 미카일 3세(842년 ~ 867년)였다.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그의 어머니 테오도라가 섭정하고 있던 때였으로 불가리아의 프레시얀은 동로마의 군력이 약해졌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프레시얀은 트라키야 국경선 부근에서 접전을 벌였던 전쟁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공격 목표를 세르비아로 돌려 전쟁을 일으켰다. 그 전쟁은 848년 ~ 851년 사이 3년 동안 진행되었으나 프레시얀은 소기의 성과는커녕 패자로서 전쟁을 끝내야만 했다.
또 다른 역사학자인 스타노예비치는 다른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스타노예비치의 가설에 따르면 블라스티미르는 불가리아와 동로마 간의 전쟁을 이용하여 동로마로부터 독립을 시도했는데, 프레시얀은 세르비아의 독립이 불가리아에게 유익하지 않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시 불가리아에 속해 있던 다른 슬라브인들이 세르비아를 따라 독립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847년 불가리아가 세르비아를 공격했다는 가설이다.
어쨌든 이전쟁으로 통해 블라스티미르의 권력은 강해졌고, 이때 현재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남부에 있던 트라부니야 공국의 통치자인 벨로제의 아들 크라지나 벨로예비치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면서 라쉬카의 세력권 안에 넣었다. 이후 불가리아 제국은 재차 공격을 세르비아인들을 정복하려 했으나 또다시 실패했다. 850/851년 블라스티미르가 사망한 후 장남인 무티미르가 동생들인 스트로지미르와 고이니크와 함께 공동으로 라쉬키를 통치했다.
세르비아의 기독교화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콘스탄티누스 7세(Constantinus VI, 905~959, 재위 913~959)의 기록에 의하면 이미 헤라클리우스 재위기에 발칸 반도로 이주해온 세르비아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본격적인 기독교화는 9세기에나 이루어졌는데, 먼저 두클랴가 로마 교황의 도움으로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라쉬카는 블라스티미르의 아들인 무티미르(Мутимир, 재위 850~891)대에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무티미르는 동·서 양 교회 중 어느 쪽에 설지 고민하다 불가리아의 예에 따라 동쪽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에 귀의하였다.
사실 이는 국제정세를 반영한 조치였다. 미하일 3세를 암살하고 동로마 황제[200]로 즉위한 바실리오스 1세는 달마티아를 군관구로 개편하면서 라쉬카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불가리아 또한 보리스 1세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라쉬카만 비기독교 국가로 남아 있는 상태였기에 언제든지 침공당할 위험성이 있었기에 이러한 명분을 사전에 차단할 목적으로 개종을 고려한 것이었다. 어쨌든 그의 아들에게는 세르비아 역사상 처음으로 스테판(Стефан)이라는 기독교식 이름이 붙여졌다.
852년 불가리아에서는 칸 프레시얀이 죽고 그의 아들 보리스 1세가 즉위했다. 보리스 1세는 세르비아가 무티미르를 포함한 3형제에 의해 분할 통치되는 사실에 주목했다. 분할 통치하의 세르비아가 효과적으로 방어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 아버지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세르비아를 공격했다.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전쟁이 몇 년도에 발생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학자들마다 의견을 달리한다. 이는 무티미르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 포르피로게니투스가 쓴 『제국의 경영에 대하여』 인데 거기에 아무런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형제들과 힘을 합쳐 불가리아군의 공격을 크게 물리친 무티미르는 불가리아 칸 보리스 1세의 아들이었던 블라디미르를 포함한 12명의 귀족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에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와 평화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평화 조약에 따라 불가리아 포로들을 두 나라의 국경선 근처인 라스 지역에서 넘기고 상호 선물 교환을 했다.
불가리아와의 전쟁이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무티미르와 형제들 간의 충돌이 발생했는데 그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무티미르는 형제들을 진압하면서 불가리아의 원조에 힘입어 스트로지미르와 고이니크를 생포하고 그들을 불가리아에 넘겨 유폐시켰다. 또한 고이니크의 아들 페타르를 인질로 붙잡아 두었는데, 페타르는 인질 생활 도중 크로아티아로 도망쳤다.
대외적으로 불가리아와 평화 조약을 맺고 대내적으로 형제들을 제거한 무티미르는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었으며 891년 숨을 거둘 때까지 별 어려움 없이 세르비아를 통치했다.
891년 무티미르가 사망하고 세르비아의 권좌는 무티미르의 장자였던 프리비슬라브(891년 ~ 892년)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프리비슬라브는 권력을 승계한 지 채 1년도 못돼 크로아티아에서 넘어 온 사촌 형제 페타르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형제들과 함께 892년 크로아티아로 도망쳐야만 했다. 페타르는 무티미르에 의해 생포되어 불가리아로 추방된 고이니크의 아들로 무티미르가 인질로 잡고 있었는데 용케 크로아티아로 도망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는 무티미르가 죽고 프리비슬라브가 왕위에 오르자 크로아티아의 도움을 받아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지역에서 세르비아로 진격하여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페타르는 권좌를 차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촌들의 도전에 직면했다. 약 894년 형 프리비슬라브와 함께 크로아티아로 도망쳤던 무티미르의 둘째 아들 브란이 크로아티아 문지미르의 원조를 받아 라쉬카를 공격하면서 895년 ~ 896년 사이 잠시 권좌를 잃기도 했으나 결국 페타르는 그를 생포하여 눈을 멀게 함으로써 왕위를 넘보지 못하게 했다. 이후 896년경에 스트로이미르의 아들 크로니미르가 불가리아의 칸 시메온 1세의 지지를 업고 세르비아에 쳐들어왔으나 페타르에 참패, 목숨을 잃었다. 이후 페타르는 권좌에 대한 도전 없이 세르비아를 통치할 수 있었다.
페타르는 불가리아와 동로마 제국 등 강국들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펼침으로써 오랫동안 별 탈 없이 라쉬카를 통치할 수 있었다. 페타르는 불가리아의 새로운 통치자 시메온(893년 ~ 927년)의 대부가 되는 한편, 동로마 제국의 레온 6세(866년 ~ 912년)의 최고 통치권을 인정함으로써 양국과의 분쟁 소지를 없앴다. 불가리아와 동로마의 위협을 제거한 페타르는 파가니야를 공격하여 세르비아의 영토로 병합시켰다.
페타르 고이코비치의 통치 시절, 발칸반도의 패권을 놓고 다퉜던 불가리아와 비잔틴제국은 전쟁과 휴전을 반복했다. 894년 일어난 불가리아와 동로마의 전투는 896년에 휴전을 체결하여 동로마 황제 레오 6세(866년 ~ 912년)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913년 불가리아와의 전쟁이 다시 시작되면서 동로마는 발칸반도에서 동맹 세력을 찾는데 열심이었다. 동로마는 세르비아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세르비아와의 동맹 협상을 드라츠의 군통치자 라브 라브두흐에게 일임했다. 파가니야에서 열린 라브 라브두흐와 페타르 간의 협상에서 헝가리와 세르비아, 그리고 동로마 제국이 동맹을 맺어 불가리아를 공격하기로 합의했다. 이런 사실을 알아챈 자후믈례의 통치자 미하일로 비쉐비치가 불가리아의 칸 시메온에게 세르비아가 동로마 진영에 함께 한다는 것을 알렸다.
불가리의 칸 시메온은 먼저 비잔틴을 공격, 917년 아켈로오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자신의 부대 중 일부를 세르비아로 보냈다. 배신자 페타르를 응징하고 페타르에 의해 눈이 먼 브란의 아들 파블레를 공위에 앉힌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세르비아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계략을 꾸몄다. 페타르가 자신의 대부임을 언급하며 신변 보장을 약속하고 회담에 초대한 것이었다. 불가리아의 신변 안전 보장을 믿은 페타르는 회담 초대에 응했다. 하지만 불가리아군은 그를 생포하여 불가리아로 압송했고, 계획대로 파블레를 라쉬카 공작으로 올려 속국화시켰다.[201]
하지만 라쉬카가 불가리아의 지배를 받기 원하지 않았던 동로마 제국은 자국 내로 망명 중이었던 프라비슬라프의 아들 자하리야를 앞세워 920년 라쉬카를 공격했다. 하지만 자하리야가 패배해 생포되어 불가리아로 보내졌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의 계속된 설득 끝에 파블레는 동로마로 편을 바꿨다.
파블레의 배신에 분노한 불가리아는 구금된 자하리야를 앞세워 다시 라쉬카를 공격했고, 자하리야는 파블레의 군대를 이겨 세르비아의 왕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자하리야 또한 곧 불가리아를 배신하고 친동로마적 입장을 고수했다. 이는 자하리야가 짜리그라드에서 성장하여 본질적으로 친동로마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물론 불가리아의 실상을 보고 느낀 것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자하리야는 라쉬카가 불가리아보다는 동로마와 함께 하는 것이 좀 덜 위험하며, 세르비아에 더 유익하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자하리야의 배신은 곧 불가리아 시메온의 군사적 공격을 불렀다. 자하리야는 마르마이와 테오도르 시르기짜 두 장군이 이끄는 불가리아군을 격파하고 장수들의 머리를 베고 무기를 빼앗아 충성 표시로 짜리그라드로 보냈다. 이에 분개한 시메온은 클로니미르의 아들인 차슬라프와 함께 대규모 군대를 보내 세르비아를 공격했다.
924년 불가리아의 대규모 군대가 공격해온다는 소식을 들은 자하리야는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겁을 먹고 크로아티아로 도망쳤다. 자하리야가 도망쳤다는 소식을 들은 불가리아군은 차슬라프를 세르비아의 군주로 맞는다는 선언식을 열어 세르비아의 모든 지방 수령들을 불러모았다. 지방 수령들이 모이자 그들을 모두 잡아 불가리아로 압송하여 투옥하고 세르비아를 약탈·파괴하였다. 그리하여 세르비아는 이후 2~3년간 황폐화되었으며 군주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927년 불가리아 황제 시메온 1세가 사망하자 불가리아에 머물던 클로미니르의 아들인 차슬라프 클로니미로비치(Часлав Клонимировић, 재위 927?-960?)는 황폐화된 라쉬카로 귀환했다. 차슬라프는 동로마 제국에 군사 요청을 한 후 불가리아의 점령하에 있던 세르비아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당시 내부 문제의 해결이 시급했던 불가리아는 차슬라프의 봉기를 진압할 여유가 없었다. 차슬라프는 봉기에 성공하여 924년 무너졌던 블라스티미로비치 가의 세르비아 통치를 재건할 수 있었다.
블라스티미로비치 가의 재건에 성공한 차슬라프는 황폐화된 라퀴라를 빠른 속도로 복구하며 이전 블라스티미로비치 가의 그 어떤 군주들 보다 더 강한 라쉬카를 만들었다. 또한 차슬라프의 강한 국가 건설이라는 계획은 동로마 제국의 이익과도 합치되는 것이었다. 동로마는 라쉬카가 발칸반도에서 강국으로 성장하여 불가리아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영원한 동맹국이 되기를 원했다.
2~3년간 불가리아의 잔혹함과 야만적인 파괴를 겪은 세르비아 부족들은 차슬라프를 중심으로 모여 통일된 세르비아를 건설했다. 세르비아 귀족들과 블라스티미로비치 가의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기도 하고 주변국으로 피신했기 때문에 차슬라프의 권력에 도전하는 사람은 없었다. 차차슬라프의 등장으로 세르비아에 중앙 집권적인 권력이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차슬라프의 재위기에 영토를 대대적으로 확장하는데, 그는 이미 페타르 고이니코비치(Петар Гојниковић, 재위 892~917)에 의해 이미 병합되어있던 파가니야를 제외한 세르비아계 공국들을 모두 통합했다.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의 기록에 따르면 차슬라프 시절 세르비아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보스니아, 두클랴, 트레비냐, 동쪽으로는 라스, 북쪽으로는 사바 강까지 포함했던 것으로 보인다. 차슬라프 통치기의 세르비아의 강역
차슬라프는 동로마 제국과 불가리아의 위협을 최소화시키고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시행하면서 조금씩 영토를 넓혀나갔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위협은 북쪽에서 왔다. 당시 파노니아 평원에 정착해 남쪽으로 팽창 정책을 추진하던 마자르족은 동로마 제국과 불가리아는 물론 세르비아의 차슬라프에게도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960년 헝가리의 키쉬가 이끌던 부대가 세르비아의 영토였던 보스니아를 공격하여 약탈을 감행했다. 이에 차슬라프의 지휘 아래 세르비아 군대가 찌빌린(오늘날의 포차) 근처에서 헝가리군을 무찌르고 키쉬는 사망했다. 키쉬가 사망하자 그의 미망인이 군대를 거느리고 마츠바를 공격, 야음을 틈타 세르비아 진영을 습격하여 차슬라프를 비롯한 많은 사람을 생포했다.헝가리군에 생포된 차슬라프는 손발이 묶인 채 사바 강에 내던져 익사시켰다. 그의 죽음으로 블라스티미로비치 왕가는 단절되었다. 그나마 그의 사위였던 티호미르가 그의 뒤를 이었지만 이미 라쉬카와 자흐믈레를 제외한 나머지 세르비아계 공국들이 독립한 상태였고, 설상가상 969년 티호미르가 죽으면서 정치적 공백이 더 가증된 라쉬카는 971년 요안니스 1세에 의해 동로마 제국에 병합되어 카테파노(katepano)라 불리는 군지휘관이 통치하는 라스 카테파노(Catepanote of Ras)령이 되었다가 976년 불가리아 제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3.3.2. 파가니야
파가니야라고 통칭하고 있지만 정확한 명칭은 네레토바 강에 정착했기에 네렌탄스인으로 베네치아의 문헌에선 나렌타니, 동로마 제국 문헌에서 파가노이로 부르는데 파가노이는 이교도를 뜻하는 단어로 이는 후술하겠지만 다른 남슬라브인들이 10세기 말까지 기독교로 개종한지 오래인 반해 네렌탄스인들은 슬라브 이교신앙을 유지했다. 다른 남슬라브인들과 마찬가지로 6세기 경에 발칸 반도로 이주, 상술한대로 네레토바 강 하구에 정착하면서 마카르스카, 브렐라 자오스트로그, 그라닥과 같은 현재 도시가 들어선 곳에서 코르쿨라, 믈젯, 흐바르, 브라치 등의 섬들까지 들어가 거주했다.경제적으로 발칸 반도 본토 쪽은 농사를 짓던 반면 섬 지역들은 양들을 방목하는 목축업으로 양분되었지만 후술할 해적질로 볼 때 이것들 만으로 자급자족할 여력이 없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640년 전후 남슬라브인들의 발칸 반도 정착 당시 파괴된 나로나라는 도시 폐허에 정착해 옛 로마 신전 위에 자신들의 신인 스베토비드의 신전을 지었고, 이후 상술한 지역들에 나눠서 정착했다. 다른 남슬라브 집단과 달리 국가를 형성하는데 실패하고 여러개의 씨족 집단으로 나눠져 있었다. 게다가 상술한 대로 본토는 농업, 인근 도서 직역은 양을 방목한는 목축업에 종사했지만 인구를 부양하기엔 턱 없이 부족했기에 642년부터 이탈리아 남부를 시작으로 해적길을 시작했다. 이후 8세기를 전후로 동로마 제국의 해군력이 약해지고, 이슬람 해적들까지 가세하면서 이로 인해 아드리아 해는 비무장한 배들이 다니기에 안전치 않은 장소가 되었다.
812년 새롭게 부활한 서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가 이스트리아 반도까지 정복한 후 달마티아까지 세력을 확대하면서 네렌탄스인들이 살고 있던 도서 지역중 하나인 브라치 섬을 공격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베네치아 공화국과는 830년 전후로 이들의 해적질로 인해 해상무역에 피해를 입자 당시 도제였던 죠반니 1세는 네렌탄스인들과 평화조약을 채결했고, 이후 이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고 했지만 네렌탄스인들은 다른 남슬라브인들과 달리 끝까지 개종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몇몇 씨족 집단들이 베네치아의 상선들을 약탈하자 결국 834~835년 사이 새로운 베네치아 도제인 피에트로 드라도니코는 함대를 이끌고 네렌탄스인들의 해적선들을 진압한 후 크로아티아 공작인 미슬라브와 함께 드루작이란 추장과 평화 협정을 맺었지만 840년 네렌탄스인들은 다시 해적질을 시작하면서 평화 조약은 휴지조각이 되었고, 피에트로는 이를 진압하려고 하다가 100명의 병력을 잃었고, 846년에는 베네치아 인근의 카올레마저 약탈되었다. 다만 이때 네렌탄스인들은 세르비아계임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와 밀접한 관계가 되었다.
867년 바실리오스 1세가 동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게 되면서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 바실리오스는 발칸 반도로 이주해온 이민족 세력들과 공존하는 것을 택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군사력을 다시 복구해 제국 주변에 군사력을 투사하기 시작했고, 이슬람 해적들의 약탈 위협에 시달린 라구사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인 것을 시작으로 아드리아해에 개입했는데, 바실리오스가 파견한 니케타스 오리페스는 바실리오스의 명령에 따라 중프랑크 왕국과 협동해 이슬람 해적들의 본거지중 하나인 바리 토후국을 공격하기도 했다. 다만 네렌탄스인들은 여전히 해적질을 멈추지 않았으며 870년 3월 이들 중 일부 해적 집단이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고 있던 로마 교황의 사절단들을 납치하는 사건을 일으켰는데, 871년 동로마 제국의 공격을 받고 굴복했으며 이때 동로마측은 이들을 파가노이라 명명하면서 도서지역들을 몰수했지만 여전히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에 대해 완강하게 저항했다.
887년 베네치아의 도제 피에트로 1세 칸디아노는 직접 함대를 이끌고 와 네렌탄스인들을 공격했으나 8월 마카스카 전투에서 5척의 군선이 침물, 도제인 피에트로 1세 칸디아노까지 전사하면서 패배했고, 9월 18일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948년까지 베네치아로부터 막대한 공물을 받게 되었다.
네렌탄스인들은 라쉬카인들과는 남슬라브라는 근연 관계에 있던 민족이었다. 그렇기에 라쉬카의 페타르 고이니코비치의 즉위 기간 라쉬카에 의해 복속되었다. 그러다가 913년 제1차 불가리아 제국과의 전쟁이 다시 시작되면서 동로마 제국은 발칸반도에서 동맹 세력을 찾는데 열심이었다. 동로마는 라쉬카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라쉬카와의 동맹 협상을 드라츠의 군통치자 라브 라브두흐에게 일임했다. 파가니야에서 열린 라브 라브두흐와 페타르 간의 협상에서 헝가리와 라쉬카, 그리고 동로마 제국이 동맹을 맺어 불가리아를 공격하기로 합의했다. 이런 사실을 알아챈 자후믈례의 통치자 미하일로 비쉐비치가 불가리아의 차르 시메온 1세에게 라쉬카가 동로마 진영에 함께 한다는 것을 알렸다.
대부인 페타르의 통수에 분노한 시메온 1세는 즉각 불가리에 망명하고 있던 파블레를 앞세워 라쉬카를 공격했고, 공격이 실패하자 계략을 꾸며 페타르가 자신의 대부임을 언급하며 신변 보장을 약속하고 회담에 초대해 그를 생포하여 불가리아로 압송한 후 파블레를 압송한 후 라쉬카는 파블레와 자하리야 간의 권력 다툼으로 정세가 혼란스러워졌다가 결국 924년 불가리아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때 파가니야는 923년 경, 크로아티아의 토미슬라브, 비잔티움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 그리고 두 교회 총대주교는 비잔티움 달마티아 도시들의 지배권을 새로운 크로아티아 왕국으로 이양하는 협상에 관여했는데, 이때 파가니야에 속한 브라치 또한 크로아티아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1년 만인 925년 토미슬라브가 사망한 후 크로아티아는 약화되었고, 때마침 불가리아에 있던 차슬라프 클로니미로비치가 라쉬카로 귀환해 라쉬카의 공후가 되었다. 그는 라쉬카 주변에 위치한 다른 세르비아계 공국들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였고, 파가니야 또한 라쉬카에 의해 더욱 구속되었다. 크로아티아의 국왕 크레시미르 1세가 죽자 945년 크레시미르 1세가 죽으면서 네렌탄스인들은 871년 동로마 제국에게 넘어갔던 수샤크, 비스 라스토보 등을 되찾았고, 948년 피에트로 3세 칸디아노는 네렌탄스인들에게 더이상 공물을 받치지 않을 것이란 선포와 함께 전함 33척 파가니야로 파견하나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949년 크로아티아의 반 프리비나가 왕인 미슬라브에게 반란을 일으키면서 이때 크로아티아 영토로 귀속되었던 브라치와 흐바르 두 섬이 파가니야로 돌아섰다. 960년 라쉬카의 차슬라프가 마자르족과의 사바가 전투에서 패배해 생포후 사바 강에 던져 죽으면서 라쉬카의 패권이 붕괴되면서 파가니야는 사실상 독립하게 되면서 해적질을 더 일삼았다.
997년, 나렌타인들은 라틴계와 베네치아계 마을들에 대한 습격을 늘렸다. 당시 크로아티아에선 스체판이 사망하면서 크로아티아의 왕위는 스베토슬라브 수로냐가 계승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동생들인 크레시미르 3세(Krešimir III)와 고이슬라브(Gojslav) 형제는 스베토슬라브의 왕위 계승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불가리아 제1제국의 차르였던 사무일은 크레시미르와 고이슬라브 형제를 지지했고 동로마 제국은 스베토슬라브 국왕을 지지했는데, 파가니야의 네레탄스인 해적들은 스베토슬라브를 지지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달마티아 해안에 위치하고 있던 라틴계 및 베네치아계 해안 마을들은 더 이상 스베토슬라브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998년 이들은 베네치아 공화국에 원조를 요청했고, 도제인 피에트로 2세 오르세올로는 베네치아의 확장과 함께 네렌탄스인 해적 집단을 토벌하기 위해 이들 해안 마을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반 베네치아 성향의 하안 마을과 도시들은 네렌탄스인들 지원하면서 상황이 복잡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1000년, 피에트로 2세 오르세올로는 스플리트, 트로기르, 비오그라드 등 해안 도시들과 크르크, 크레스, 라브, 코르출라, 라스토보 섬 주민들의 보호 요청에 따라 그곳을 빠르게 접수했다. 여기에 자다르도 네레트바의 크로아티아인들이 998년 자다르 시민 40명을 생포한 뒤 베네치아의 보호를 받아들였다. 그 후 스베토슬라브 수로냐는 크레시미르 3세와 고이슬라브 형제에게 축출되어 베네치아로 망명했다. 크레시미르 3세와 고이슬라브는 크로아트 왕국의 공동 왕이 되었고,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빼앗긴 달마티아를 탈환하기 위해 몇 차례 무력 원정을 벌여야 했다.
3.3.3. 자후믈레
자후믈레 또한 라쉬카 그러했듯 630년경 발칸반도로 이주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이라클리오스 황제 승인을 받고 오늘날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동부 일부인 달마티아 남부 해아 지대에 정착했다. 이지역의 통치자에 대한 일대기는 10세기 중반까지 전해져 내려온 것이 전무하지만 그나마 자후믈레를 비롯한 발칸 반도의 정세에 대한 기록들은 관련 국가들에 남아 있어 어느 정도의 윤곽은 알 수 있는 편이다.7세기의 자후믈레는 크로아티아의 영향을 받았는지 13세기 스플레토 출신 가톨릭 대주교였던 토마소의 기록에 따르,면 10세기말 스테판 드르지슬라프의 통치까지 크로아티아의 일부로 보고 있지만 후술할 내용으로 볼 때 오인한 것으로 보고 있다. 8~9세기 프랑크 왕국이 카롤루스 대제때까지 이스트리아 반도를 넘어 달마티아까지 세력을 확대할 당시 자후믈레는 주목받지 못했다.
9세기 중반인 866년 이슬람 해적들이 아드리아 해를 유린하면서 두브로브니크를 비롯한 동로마계 해안 도시들인 일제히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는 니케파스 오리파스에게 100척의 함대를 지휘해 아드리아 해에 날뛰고 있는 해적 토벌과 함께 달마티아의 동로마계 도시들을 다시 제국의 복속시킬 것을 명령하였고, 866~867년 동안 두브로브니크를 포위하고 있던 이슬람 해적들을 격퇴한 후 동로마계 해안 도시들에게 충성 맹세를 받아내면서 이슬람 해적 토벌에 가담한 슬라브인에게도 충성 맹세를 받아냈는데, 자후믈레 또한 동로마 제국에 복속되었다.
이후 자후믈레는 870~871년 사이 벌어진 동로마의 바리 토후국 정복에 자신들의 군사력을 지원했으며, 870년대 후반 달마티아 테마가 설치되었음에도 트라부니야와 함께 금화 71개를 공물로 받치는 것 외에는 자치권을 누렸다. 또한 879년 교황청은 남부 달마티아와 자훔리에를 가로지르는 대표단을 위한 무장 호위를 위해 크로아티아의 즈데슬라브 트르피미로비치 공작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지역의 치안이 불안정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880년 후반 브라니미르에게도 똑같은 요청을 했던 것을 볼 때 이때까지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자후믈레의 본격적인 역사적 기록은 미하일로 비셰비치 공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미하일로의 가문과 선조, 그리고 유년 시절에 대해서 여러 기록들이 제각기이나 하지만 미하일로의 선대 공작이 비셰부체라는 것과 912년부터 자후믈레를 통치하는 것과 함께 친불가리아 성향임을 인정한 것은 동일했다.
911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인 오르소 2세 파르티치파치오는 아들 피에트로를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해 레오 6세에게 충성 맹세 서약을 대행하게 하면서 프로토스파타리오(Protospatario)의 지위를 수여받았다. 그러나 피에트로는 발칸 반도의 육로로 귀환하는 중 자흐믈레에서 미하일로에게 붙잡혀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인 시메온 1세에게 넘겨주면서 그 자신이 시메온 1세의 동맹임을 중명했다.
미하일로는 시메온의 눈으로서 발칸 서부의 정세를 파악해 그에게 밀고를 했는데 913년 불가리아와의 전쟁이 다시 시작되면서 동로마는 발칸반도에서 동맹 세력을 찾는데 열심이었다. 동로마는 세르비아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세르비아와의 동맹 협상을 드라츠의 군통치자 라브 라브두흐에게 일임했다. 파가니야에서 열린 라브 라브두흐와 라쉬카의 공작 페타르 고이코비치 간의 협상에서 헝가리와 세르비아, 그리고 동로마 제국이 동맹을 맺어 불가리아를 공격하기로 합의했다. 이런 사실을 알아챈 미하일로 비쉐비치는 시메온에게 라쉬카가 동로마 진영에 함께 한다는 것을 알렸다.
이로 인해 라쉬카는 불가리아의 공격을 받다가 결국 917년 시메온 1세의 계략으로 페타르 고이코비치가 붙잡혀 불가리아로 끌려가면서 라쉬카는 불가리아가 내세운 파블레와 동로마 제국이 세운 자하리야 간의 다툼으로 어지러운 상태에 이르고 만다.
자흐물레의 기독교 개종에 대해서는 정확한 시기가 밝혀지지 않았으나 늦어도 9세기경으로 보고 있으며 미하일은 920년대 중반 크로아티아 왕국의 중요한 교회 업무에 관여하였다. 925년에서 928년 사이 두차례에 걸쳐 스플리트에서 공회의가 개최되었고, 달마티아 전지역의 대교구로 인정받는 것을 공식적으로 확립한 것과 함께 교회의 예배 의식에서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것으로 현존하는 기록들이 저마다 달라 크로아티아의 국왕인 토미슬라브와 미하일로가 만났다는 기록이 교차검증하기 힘들다.
다만 926년 발생한 크로아티아와 불가리아와의 전쟁에서 자후믈레가 이전에 보여줬던 친불가리아적 행보와 달리 중립적 입장을 내세운 것을 볼 때 미하일로 입장에서 불가리아의 힘만 믿고 크로아티아 왕국과 적대하는 것을 어리석다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
926년 7월10일 미하일로는 동로마 제국의 통제하에 있던 시폰토 항구를 점령해 약탈했다. 또한 미하일로는 독단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칭호인 안티파토스(anthypatos)와 파트리키오스 칭호를 자칭했다. 동로마에 적대적이지만 동시에 로마 교황청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927년 동맹이었던 시메온 1세가 죽은 후 940년 죽기 전까지 자후믈레를 통치했다.
미하일로가 죽은 후 자후믈레는 차슬라프의 통치를 받게 되었는데, 그에게 후계가 없었는지 아니면 있더라도 친 불가리아파였던 미하일로의 존재가 거슬렸던 차슬라프에 의한 침공으로 합병된 것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이후 자후믈레는 차슬라프가 960년 사바 강 전투에서 마자르족을 막다가 붙잡혀 강에 던져저 익사로 죽기 전까지 통치를 받았고, 이후 그의 사위였던 티호미르가 969년까지 통치하다가 이후 자후믈레는 크로아티아 왕국에 997년까지 귀속되다가 이후 트라부니야로 귀속되었다.
3.3.4. 트라부니야
다른 남슬라브인들처럼 트라부니야 또한 630년 발칸반도로 이주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이라클리오스의 허락하에 현재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몬테네그로에 걸친 달마티아 남부 해안에 정착한 이들이 건국한 국가였다. 트라부니야의 역사 또한 9세기 중엽까지 밝혀진 것이 없으나 대체로 다른 남슬라브 집단인 라쉬카, 자후믈레, 특히 자후믈레와 비슷하게 비슷하게 전개된 편으로 차이점이라면 자후믈레가 크로아티아에 영향을 많이 받았던 반면 트라부니야는 라쉬카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쳤던 곳이었다.트라부니야의 군주로 최초로 기록이 있는 벨로제는 839년 이후부터 트라부니야를 통치했다. 하지만 그는 라쉬카의 공작인 블라스티미르의 봉신에 가까운 위치였고, 트라부니야의 군주 칭호 역시 크냐지가 아닌 주판[202]으로 불렸다. 851년 불가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블라스티미르는 자신의 딸을 벨로제의 아들인 크라지나 벨로예비치에게 시집을 보내면서 트라부니야를 라쉬카의 세력권에 넣으면서 주판이란 칭호 또한 수여했다.
이후 벨로제가 죽고 아들인 크라지나가 트라부니야의 주판직을 세습했고, 이후 아들인 흐발리미르, 추치미르와 함께 이름만 거론될 뿐 더 이상 트라부니야의 주판으로서 행한 치세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는다,트라부니야는 다른 세르비아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920년 라쉬카의 공작이 된 차슬라프에 의해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어 가려고 하다가 960년 사바 강에서 마자르족을 막다가 그들에 붙잡혀 강에 던져저 익사하면서 트라부니야는 라쉬카의 영향에서 벗어났으나 결국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다가 990년대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 사무일의해 불가리아로 편입되었다.
3.3.5. 두클랴
두클랴 또한 630년경 동로마 제국의 이라클리오스 황제에 의해 정주를 허락받아 현재의 몬테네그로에 속한 제타 강 유역과 스카다르 호수 일대, 코토르만 일대에 거친 지역에서 사실상 건국되었다. 10세기 중반까지 이지역을 통치한 통치자들의 대한 기록은 없지만 동로마 제국과 인접한 곳이었기에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가장 많이 받은 지역이었다. 다만 동로마 제국의 간접 지배 방식 황제에 의해 현지 유력자가 동로마 제국의 관직을 받고 통치하는 구조로 이로 인해 기독교화 또한 빠른 것으로 추정된다. 두클랴의 경우 파가니야처럼 부족 내지는 마을 단위로 분산된 공동체로 살았다.하지만 8~9세기경 세르비아계 공국중 라쉬카가 비셰슬라프의 등장과 함께 점차 세력을 확장하다가 블라스티미르에 이르려서는 제1차 불가리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트라부니야를 시작으로 점차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해 페타르 고이노비치가 공작이 된 이후 불가리아의 계략으로 부잡히기 전까지 거의 세르비아계 공국들을 통합시킬 뻔했다가 이후 927년 라쉬카 내부가 혼란스러운 와중에.차슬라프 클로니미로비치가 돌아와 라쉬카 공작의 자리에 오른 후 다시 내부적으로 안정화시키면서 다시 세르비아계 공국들에 영향력을 확대했는데, 두클랴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라쉬카의 영향력하에 들어가 라쉬카 공작이 임명한 주판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960년 차슬라프가 사바 강에서 북쪽에서 쳐들이온 마자르족들의 침입을 막다가 패배, 생포 후 강에 던져저 익사되면서 라쉬카는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사위인 티호미르가 그 뒤를 이었지만 파가니야와 트라부니야가 이탈했으며, 두클랴 또한 라쉬카 세력에서 이탈한 후 다시 동로마 제국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디오클레아의 페트로가 두클랴의 군주들 중 최초로 이름이 언급되었다.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따르면 트라부니야의 주판인 흐발리미르의 후손이라고 한다
3.4. 달마티아의 도시국가들
달마티아의 여덟 도시들의 위치달마티아의 해안 도시들인 자다르로 불리는 자데라(Jadera), 3세기경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전 내부에 형성된 피난지에서 시작된 훗날 스플레토로 불리는 스팔라툼(Spaltum), 달마티아 북부 섬마을인 츠레스섬에 위치한 크레스파(Crespa), 츠레스섬 인근에 위치한 라브에 위치한 아르바(Arba), 살로나에서 멀지 않은 섬에 있는 훗날 트로기르로 불린 트라구리움(Tragurium), 츠레스와 라브 위에 위치한 또다른 섬인 크르크에 위치한 베클라(Vecla), 오늘날 두브로브니크로 불리는 라구시움(Ragusium), 오늘날 코토르로 불리는 카타룸(Cattarum) 등이 있었다. 이들 도시들 또한 달마티아 내륙 지역과 마찬가지로 476년 서로마 제국의 붕괴 당시 동고트의 영역이었으나 이들 해안 도시들 역시 동고트의 수중에 있었다.
그러다가 535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에 의한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의 발생한지 몇개월만에 문두스가 이끈 군대는 육로를 통해 동고트령 달마티아의 중심 도시인 살로나(솔린)로 진군하여 살로나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536년 3월에 달마티아를 회복하고자 동고트 군대가 문두스의 군대를 공격하였는데, 문두스는 그들을 격파하였으나 이과정에서 그의 아들 마우리키우스가 동고트족의 계략에 빠져 전사하자, 분노한 문두스는 동고트 군대를 패배시키고 그들을 추격하였는데, 추격 중에 부상을 입고 결국 그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지휘관을 잃은 로마군은 철수하였고, 살로나를 제외한 달마티아는 다시 동고트 왕국령이 되었고, 얼마 안가 동고트 장군 그리파스는 달마티아의 주도 살로나를 결국 점령했는데, 콘스탄티아누스의 군대가 다가오고 이탈리아에 벨리사리우스가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자 후퇴하였다. 따라서 콘스탄티아누스는 손쉽게 달마티아를 회복하였고 살로나의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였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의 서로 고토 수복 전쟁은 엄청난 군사비의 지출을 요구했고, 그밖에도 사산 왕조와의 전쟁을 물론이고, 막판에 발생한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유럽과 중동 일대를 덮쳤던 만큼 동로마 제국 전역도 역병의 영향으로 인구수가 크게 감퇴했고, 이는 달마티아 지역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640년 슬라브족의 이동으로 그리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일대를 제외한 발칸 전역이 슬라브인들이 정착하게 되었는데, 해안 및 도서 도시인 자데라, 스팔라툼, 크레스파, 트라구리움, 베클라, 라구시움, 카타룸 등만이 로마의 영향력이 여전히 남아 있게 되었다.
이들 도시들은 달마티아에 정착한 남슬라브인들인 크로아티아 공국과 세르비아계의 여러 공국들로 나눠져 건국됨에 반해 동로마 제국의 보호령으로 남아있었다. 8세기 말경 카롤루스 대제 통치하의 프랑크 왕국이 랑고바르드 왕국을 무력으로 병합한 후 이탈리아 반도의 북·중부를 석권하며 달마티아와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방 교회 지도자인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800년 12월 25일 카롤루스의 아들의 도유식과 함께 카롤루스에게 서로마의 제관을 씌우면서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 간의 관계가 악화되다가 802년 니키포로스 1세 동로마 황제가 되면서 극으로 치닿다가 결국 806년 카롤루스는 자신의 차남인 피핀 카를로만에게 동로마 제국의 보호령인 베네치아 공화국에 대한 공격을 지시하면서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간의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달마티아 또한 전쟁터가 되었다. 이때 달마티아 북부와 함께 자다르가 프랑크 왕국에 점령되었다.
그러다가 810년 동로마 제국이 제1차 불가리아 제국과.전쟁을 벌이다가 패전해 황제인 니키포로스 1세는 붙잡혀 참수되어 그 머리가 불가리아 칸 크룸의 술잔이 되는 치욕을 겪게 되었다. 또한 자다르의 주교와 독스가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을 중재하기 시작했다.
결국 812년 새로운 황제 미하일 1세 랑가베스는 프랑크 왕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게 되었는데 이때 크로아티아령은 프랑크 왕국의 속령임은 인정했지만 달마티아 해안 도시들은 그대로 동로마 제국의 속령으로 그대로 남게 되었고, 자다르 또한 다시 동로마측으로 반환되었다. 하지만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셋으로 분할되면서 크로아티아 공국의 공작인 미슬라프는 프랑크족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하였고, 846년 트르피미르 1세가 베네치아 공화국을 공격하는 등 달마티아 동부와 아드리아 해에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870년 미하일 3세를 암살하고 새로이 동로마 황제가 된 바실리오스 1세는 프랑크 제국을 비롯한 서방 세력 견제할 목적으로 자데라, 스팔라툼, 크레스파, 트라구리움, 베클라, 라구시움, 카타룸를 한데 묶은 달마티아 테마를 만들었고, 자다르의 집정관이 스트라티고스를 겸했다. 이때까지 이들 해안 도시는 그러저럭 동로마의 영향력이 강했다. 그러나 920년대 크로아티아는 토미슬라브의 통치하에 공국에서 왕국을 자칭하는 등 그 세력이 커져가고 있었고, 이는 그들의 세력권이 아닌 달마티아 해안 지대와 아드리아 해 도서지역들에까지 그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했다.
자다르와 스팔라툼은 여전히 로마 문화가 강세였지만 라구시움과 카타룸은 점차 크로아티아인을 비롯한 남슬라브에 융합되어가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924년 도미슬라프는 불가리아 제1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으로 부터 프로콘솔의 직을 받는 대신 달마티아 테마의 통치권을 이양받았다. 하지만 925년 토미슬라브가 죽자 그의 동생으로 추정되는 트르피미르 2세가 국왕으로 즉위했고, 불가리아 제1제국의 시메온 1세가 사망한 이후에 동로마 제국은 크로아티아와의 동맹 관계를 단절하게 된다. 비잔티움 제국은 달마티아에 대한 크로아티아의 패권이 무효임을 선언했지만 크로아티아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정책은 바뀌지 않았다.
935년 트르피미르가 사망하고 크레시미르가 왕위를 승계했지만 제위 10년만인 945년에 동생 미항일로의 반란으로 인해 크로아티아 왕국의 정세가 혼란스러워졌는데, 미하일로는 자다르의 집정관의 딸인 엘레나와 결혼했기에 자다르의 지원으로 4년 간 대치 끝에 크로아티아의 반이었던 프리비나에게 암살되면서 왕위를 승계했지만 이때의 내전을 이용해 동로마 제국은 달마티아 테마를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950년 콘스탄티노스 7세때 동로마 제국이 중동을 비롯한 아시아에서의 전쟁에 전력을 투입하면서 달마티아 테마에 대한 관심이 적어지면서 아드리아 해의 해적들의 활동이 더 심화면서 달마티아의 여덟 도시들은 동로마를 의지하는 것보다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군력에 의지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969년 미하일로의 아들인 스페판 드르지슬라브가 크로아티아의 왕위에 오르면서 동로마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크르크섬, 라브섬, 자다르, 트로기르, 스플리트 등을 한시적으로 크로아티아의 영토로 편입시켰다.하지만 997년 스체판이 사망하면서 크로아티아의 왕위는 스베토슬라브 수로냐가 계승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동생들인 크레시미르 3세(Krešimir III)와 고이슬라브(Gojslav) 형제는 스베토슬라브의 왕위 계승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불가리아 제1제국의 차르였던 사무일은 크레시미르와 고이슬라브 형제를 지지했고 동로마 제국은 스베토슬라브 국왕을 지지했다. 998년에는 불가리아 군대가 크로아티아를 침공했지만 자다르 전투에서 패전하고 만다.불가리아는 크로아티아의 영토를 고이슬라브와 크레시미르 3세 형제에게 양도했다.
999년 가을에는 스베토슬라브 국왕의 지배에 불만을 갖고 있던 달마티아의 도시들이 베네치아 공화국에 지원을 호소하게 되고, 아드리아 해를 자신들의 앞마당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베네치아의 도제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는 달마티아 도시들의 요청을 수락하게 되었다.
4. 발칸 반도 동부(현재의 불가리아+루마니아)
현재의 불가리아 공화국이 자리 잡은 발칸 동부는 3세기 말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도나우 강 이북의 다키아를 방위선의 선형 문제로[203] 포기하고 나서 다키아 지역민들에게 그 땅에 남을 사람은 남게 허락하고 로마 본토로 내려갈 사람은 같이 내려가자고 한 후 같이 내려온 사람들에게 도나우 강 이남의 모이시아와 트라키아의 일부를 끌어모아 정착시킨 후 세르디카(현 불가리아 소피아)를 주도로 하는 신(新) 다키아 속주(Provincia Dacia Aureliana), 현 세르비아 대부분과 불가리아 서부. 주요도시로는 신기두눔(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및 나이수스(현 세르비아 니쉬)가 있고 주도는 비미나키움(현 세르비아 코스틀라치)로 하는 모이시아 수페리오르 속주(Provincia Moesia Superior), 현 불가리아 대부분 지방이자 다뉴브 강의 가장 하류 지역이다. 라이티아-노리쿰-판노니아 수페리오르-인페리오르-모이시아 인페리오르-수페리오르로 이어지는 도나우 방위선의 최종착지이며 주도는 노바이(현 불가리아 스비슈토프)로 하는 모이시아 인페리오르 속주(Provincia Moesia Inferior)로 구성하고 있었다.한편 옛 다키아 속주에 남은 사람들은 그대로 잔류해 현지에서 살아갔으나 로마의 통치권에서 떨어져 갔기에 몇 년 안가 그들이 살고 있던 로마의 도시들은 유지되었으나, 그 수준은 낮아졌고, 무엇보다 다뉴브 이북에 정착했던 사르마티아족, 바스타르나이족, 카르피족, 콰디족 등의 과거 부족들은 북쪽에서 반달족의 도래함에 따라 압박이 심해졌고, 동시에 게피드족과 고트족이 동쪽과 북동쪽에서도 압박을 가했다.
결국 290년 로마 제국은 고트족과 군사 동맹을 채결하면서 그 댓가로 그들이 옛 다키아에 정착하게끔 했다. 하지만 이때 게피드족이 현재의 헝가리 서부과 함게 현재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 북서부 지방에 정착했다.
그러다가 4세기 중반 훈족이 유라시아 대초원 서부에서 나타나 흑해 북안의 게르만족들을 격파하고 복속시키며 옛 다키아까지 도달해 그 곳에 살던 고트족과 게피드족을 복속키며 판노니아까지 걸치면서 아틸라 때에는 동서로 분할된 로마 제국을 위협했으나 아틸라 사후 자식들간의 분란으로 인해 469년 붕괴되었고, 게피드족이 완전히 동부 판노니아와 함께 다키아의 서부(트란실바니아), 남부(왈라키아 서부 일부)에 걸쳐 자신들의 왕국을 건국했고, 서로마 제국이 붕괴되기 3년전에는 시르디움까지 장악했다.
4.1. 게피드 왕국
489년, 게피드족의 왕 트라우스틸라는 테오도리크 대왕의 이탈리아 원정 중에 동고트족이 부카강을 건너려고 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했지만 동고트족은 슬라우스티라군을 패주시켰다. 월터폴에 따르면 게피드족은 동고트족에게 시르디움도 잃었다. 테오도리크 대왕은 504년에 시르디움을 점령한 시르디움을 탈환하려는 게피드족에 대한 원정을 시작하기 위해 피치아를 파견했다. 피치아는 큰 저항 없이 게피드군을 시르디움에서 몰아냈다.잠시 동안 게피드족은 도시에서 손을 떼고 536년 새롭게 즉위한 엘레문드 왕 아래 동고트 왕국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 이 안전성으로 인해 서쪽에 있던 헤롤리족의 일부는 공격적인 랑고바르드족을 피해 게피드 왕국로 도주했다. 와쵸는 보답으로 엘레만드의 딸과 결혼했다.
526년 테오드릭 대왕이 죽자 게피드는 다시 시르디움을 되찾기 위해 528년에서 530년을 거쳐 시르디움 지방에 침공했지만, 비티게스가 그들을 격파했다. 게피드족은 537년 이후 세력의 정점에 이르렀으며, 신기두눔(현재 베오그라드) 주변의 풍부한 지역에 정착했습니다.
535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에 의해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때 게피드 왕국은 버려진 다키에 지방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동로마의 정복 대상이 아니었으나 동로마 제국군의 대부분이 페르시아에 있었기 때문에, 게피드족과 헤룰리족이 모에시아를 약탈하고, 치안 판사 카르크를 살해하자 분노한 유스티니아누스는 100년 동안 이어온 게피드와의 동맹을 해체 하고 보조금 지급을 중단했다.
한편 이시기 랑고바르드족이 현재의 슬로바키아 지방에 정착한 상태였다. 이때 아우도인이 레딩스 혈족의 마지막 왕 발타리를 암살하고 랑고바르드족의 되자 그는 다뉴브 강을 건너 판노니아로 이주했다. 이때 엘레문트는 판노니아의 패자가 되었지만 546년 사망하고 게피드의 귀족 중 한명인 투리신드가 엘레문트의 아들인 오스트로고타를 몰아내고 왕이 된 상태였다.
랑고바르드족의 갑작스러운 남진에 투리신드는 이들을 몰아내려 했고, 랑고바르드족은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항쟁을 벌여야 했다. 그 과정에서 동로마 제국의 도움을 받고자 그들의 봉신이 되었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을 벌일 때 대규모 보조군을 보내 나르세스 장군이 이끄는 동로마군이 동고트 왕국을 무너뜨리고 이탈리아를 석권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랑고바르드족들 또한 552년 다뉴브강과 사바강 사이로 추정되는 아스펠드에서 아우도인의 아들인 알보인이 게피드 족의 군주 투리신드의 아들 투리스모드를 처단하면서 판노니아에 완전히 정착하는데 성공한다,
후대의 랑고바르드 왕국의 연대기 작가인 파울 부제에 따르면, 알보인은 전투가 끝난 후 관례에 따라 게피드 족의 본거지로 찾아가서 투리스모드가 생전에 착용했던 무기를 돌려줬고, 투리신드는 투리스모드의 팔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560년 아우도인이 죽자 알보인이 랑고바르드족의 왕이 되었다. 그는 동로마 제국에 종속된 부족이 새로운 길을 모색할 발판을 마련하고자 프랑크 왕국의 군주 클로타르 1세의 딸 클로신드와 결혼했다. 그 후 게피드족을 꺾기 위해 당시 판노니아로의 진출을 꾀하던 아바르족에 사절을 보내 자신을 도와준다면 게피드족의 땅을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아바르족의 군주 바얀 1세는 흔쾌히 수락하고, 랑고바르드족과 연합하여 게피드족을 대적했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567년 쿠니문드 왕이 이끄는 게피드족이 랑고바르드족을 선제 공격했지만 아바르족의 원군에 힘입은 랑고바르드족이 완승을 거두었고, 알보인은 쿠니문드를 주살한 뒤 수급을 전리품으로 가져가서 와인 잔으로 만든 후 허리띠에 착용했다고 한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바얀 1세가 쿠니문드를 죽이고 수급을 벤 뒤 알보인에게 넘겼다고 한다. 또한 알보인은 쿠니문드의 딸 로자문드를 아내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하녀처럼 대우했고 온갖 학대를 자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바르족을 끌여들인 것이 큰 실책이었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바얀 1세는 게피드족의 영역을 빼앗은 뒤 랑고바르드족까지 몰아내려 했다. 알보인은 자신에게 귀순한 게피드족과 힘을 합쳐 아바르족과 맞섰으나, 아바르족의 군사적 역량이 월등했기에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었다. 이에 판노니아에 계속 있다가는 종족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장고를 거듭한 끝에 이탈리아로 이동하기로 마음먹고 판노니아를 떠난다.
그러는 동안 발칸 반도 남서부 및 동남부 지역 또한 5세기 중엽부터 발생한 대역병의 여파가 발칸반도까지 미쳤고, 이후 슬라브족의 이동과 함께 이지역의 방위 또한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4.2. 아바르 칸국의 영토⇒불가리아족의 정착지
이때 아바르족들이 다뉴브 강을 경계로 서쪽으로 판노니아, 동쪽 현재의 우크라이나 지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지배하에 두었던 만큼 현재 왈라키아 지방 또한 아바르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하지만 아바르족의 칸 바얀 1세가 일으킨 58년간 이어진 동로마-아바르 전쟁에서 바얀 2세가 패하면서 아바르 칸국은 약화되어 체코·슬로바키아 및 우크라이나의 슬라브족과 불가리아족들이 독립했다.
한편 옛 다키아 지방에 살던 라틴족 및 로마화된 다키아인들은 다키아 및 발칸 반도로 이주해온 슬라브족들과 통혼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이들은 변질된 라틴어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그리스어권에 속한 발칸 반도 북부에 위치했음에도, 주변의 슬라브족들로 부터 원시 게르만어로 이방인을 의미하는 발하즈(Walhaz)에서 유래한 단어인 '블라흐(Vlach)'라고 불리게 되었고, 훗날 루마니아인과 몰도바인들의 조상이 되었다.
이들 블라흐 족들은 선조들과 달리 농경 민족으로 사는 것이 아닌 목축업에 종사했으며, 문화적으로도 더 퇴보되어 천막은 아니지만 약탈을 피해서 쉽게 피난갈 수 있도록 농사를 짓는 것 보다 목축을 선호했으며, 유목민처럼 텐트를 치고 살지는 않았으나, 땅을 판 후 지붕만 덮는 아주 간단한 형태의 주거를 선호하였다.
그러다가 660년경 불가 강에서 시작한 일의 여파가 이지역의 미래를 바꿔버리게 되었다. 665년 우크라이나에 자리를 잡고 있던 불가르 칸국이 하자르의 공격으로 인해 존폐의 기로에 섰다. 이때 불가르 칸이자 둘로 씨족의 지도자로 불가르족을 아바르족의 지배로부터 독립시켰던 쿠브라트의 3남인 아스파루흐가 형들과 서로의 세력을 분할한 후 자신의 지지 세력을 이끌고 왈라키아 지방으로 와 이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아바르족들을 몰아낸 후 원주민인 블라흐족 및 슬라브족들을 피지배층으로 흡수하였고, 다시 좀더 남하해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잠식해가다가 680년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스 4세가 지휘하던 동로마군을 온길라 전투에서 격파한 후 681년 현재의 불가리아 슈멘 주에 위치한 플리스카 지역에 수도를 건설해 불가리아 제1제국을 세운다.
4.3. 불가리아 칸국 ⇒ 불가리아 제1제국
4.3.1. 불가리아의 건국 및 초기
볼가 강가에 살고 있던 불가르는 아바르 칸국 휘하에서 동로마 제국 등 여러 국가들을 공격하고 다니다가 7세기 전반에 독립해 캅카스 북부의 대 불가르 지역을 중심으로 볼가르 칸국을 세웠다.그러나 대 불가리아를 세운 쿠브라트의 죽음과 함께 하자르의 침입으로 칸국이 무너지면서 그의 아들들이 서로 갈라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불가르도 자연스레 분열되었다.
3남 아스파루흐(Аспарух)는 자신을 따르는 불가르족을 이끌고 발칸 반도를 따라 오늘날의 불가리아 지역까지 내려갔다. 시 그를 따르는 무리는 3만에서 5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동로마 제국은 우마이야 왕조군의 침략에 시달렸고, 급기야 674년부터 678년까지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치렀다. 아스파루흐는 이 틈을 타 다뉴브 강을 건너 동로마 제국의 여러 요새를 공략했고, 도브루자 북부 일대를 손에 넣었다.
680년, 황제 콘스탄티노스 4세는 우마이야 왕조와 강화를 맺은 뒤 발칸 반도의 제국 영토를 잠식해가는 불가르족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는 대규모 함대를 직접 이끌고 보스포루스를 거쳐 흑해로 들어가 다뉴브강 삼각주 바로 북쪽에 상륙했다. 아스파루흐는 적군의 수가 많은 걸 보고 페브키 섬에 건설된 온길라 요새로 후퇴했다. 황제는 즉각 이 요새를 포위하러 진격했지만, 사전에 척후병을 보내지 않아 이 지역이 늪이 많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결국 동로마군은 조직적인 행군을 하지 못했고 병사들 사이에 전염병이 창궐했다. 급기야 콘스탄티노스는 통풍에 걸려 인근의 메셈브리아로 가서 며칠 쉬었다. 그런데 돌연 황제가 통풍으로 인해 후방으로 물렸났다는 사실이 도망쳤다는 오보로 소문이 돌자 병사들이 겁먹고 도주했다. 불가르군은 이 기회를 틈타 추격하였고, 다뉴브 강을 건너 모에시아까지 진격하여 제국군 병사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했다.
아스파루흐는 여세를 몰아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었던 7개의 슬라브 종족을 손쉽게 정복하였고, 발칸 산맥 이남의 동로마 영토를 약탈했다. 이과정에서 그의 친척으로 추정되는 쿠버가 따로 독자 세력을 거느리고 본대에서 떨어져 나와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쿠베로바 불가리아를 건국한다. 결국 동로마 제국은 불가르족과 협상하여 681년 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하여 불가리아의 건국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공물을 매년 바치는 대신 불가르족이 발칸 산맥 너머로 약탈하는 걸 금지했다. 또한 양측은 무역 관계를 맺기로 했다. 이렇게 동로마 제국의 동의를 받아낸 그는 폴리스카를 수도로 삼고 왕위에 올랐다. 이 당시에는 차르를 칭하지 않았지만, 후대에 시메온 대제가 차르를 칭하면서 그를 초대 차르로 추존하였다.
건국 당시의 발칸 불가리아
이후 아스파루흐는 불가리아가 발칸 반도 북동부에 완전히 뿌리를 내리기 위해 내실을 다지기 시작해 하자르와 아바르의 거듭된 침략에 맞서 드네프르 강 일대에 여러 요새를 세워 복속시킨 7개의 슬라브족들로 하여금 해당 국경 지대들을 지키게끔 했지만, 701년 하자르족과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사후 테르벨이 뒤를 이어 불가리아의 칸이 되었다.
705년 폐위된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망명 생활을 하다가 그를 찾아와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그는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따뜻하게 맞이했고, 15,000명의 군대를 빌려주는 대가로 제국의 부황제가 되기로 약조받았다.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불가리아군의 지원에 힘입어 황위를 되찾고 자신을 축출한 레온티오스와 티베리오스 3세를 처형한 뒤, 테르벨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초청했다. 그리고는 그의 어깨에 자주색 황제복을 걸쳐주며 부황제로 공식 선임했다. 그는 이외에도 자르고나 일대와 황금 및 다양한 귀중품들을 받고 불가리아로 귀환했다.
708년경,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불가리아가 너무 커지자 위협을 느끼고 원정군을 일으켜 다뉴브 강 하구의 앙키알로스를 공격했다. 그러나 테르벨의 역공으로 제국군이 참패했다. 앙키알로스 전투의 승전 후 테르벨은 이에 대한 기념으로 불가리아 북동부 슈멘에서 동쪽으로 약 2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다라 고원에 마다라 기사상이라는 암벽 부조와 비문을 세긴다. 711년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필리피코스의 반란으로 참살된 뒤, 그는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712년 마케도니아 지역의 쿠베로바 불가리아와 함께 동로마 제국을 침략하여, 여러 촌락을 파괴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벽으로 들이닥쳤다. 그러다 옵시티온 테마 부대가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와 필리피코스를 폐위하고 수도에 주둔하자, 본국으로 귀환했다. 이후에도 매년 동로마 제국을 침략하였고, 716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재차 진격했다. 당시 우마이야 왕조의 압박에 시달리던 테오도시오스 3세 황제는 그와 협의 끝에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1. 값비싼 붉은 가죽을 불가리아에 기증한다.
2. 자고리아 지역을 포함한 불가리아 왕국의 영역을 인정한다.
3. 양국은 정당한 통치자에 대해 음모를 꾸민 혐의로 기소되어 망명한 자들을 인도한다.
4. 각국 정부의 인감이 있는 상품만 수입할 수 있으며, 위반 시 압수될 수 있다.
2. 자고리아 지역을 포함한 불가리아 왕국의 영역을 인정한다.
3. 양국은 정당한 통치자에 대해 음모를 꾸민 혐의로 기소되어 망명한 자들을 인도한다.
4. 각국 정부의 인감이 있는 상품만 수입할 수 있으며, 위반 시 압수될 수 있다.
717년 여름 우마이야 왕조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대대적으로 침략하자(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온 3세는 테르벨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는 이에 응했고, 718년 초 콘스탄티폴리스 인근에서 혹독한 추위로 고통받던 아랍군을 상대로 기습 공격을 강행해 완승을 거두었다. 참회자 테오파네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22,000명에 달하는 아랍인이 전사했다고 한다. 아랍군은 패배의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철수했다.
이후 719년, 지난 날 테오도시오스 3세에게 축출되었었던 전 황제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불가리아를 찾아가서 자신을 복위시켜달라고 청했다. 그는 군대와 50 센타나리온의 금화를 주었고,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레온 3세는 이를 격퇴하고 아나스타시오스 2세를 붙잡아 처형했다. 이후 테르벨에게 서신을 보내 "지난날 아랍에 공동으로 싸워놓고 어찌 이러느냐?"라고 항의했다. 이에 테르벨은 제국 국내문제에 끼어든 걸 사과하였고, 불가리아에 망명한 아나스타시오스의 잔당을 레온 3세에게 보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으나, 721년경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4.3.2. 혼란기
3대 칸 코르메시와 4대 칸 세바르 시대엔 동로마 제국과 별다른 갈등을 벌이지 않고 무역을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바르가 753년 사망하면서 둘로 왕조가 단절되자, 불가리아는 혼란에 휩싸인다. 불키 가문의 코르미소쉬 칸은 콘스탄티노스 5세가 불가리아와의 국경지역을 요새화하자 사절단을 보내 양국의 국경지대에 요새를 세우지 않기로 했던 협약 위반이라고 항의하면서, 공물을 더 달라고 요구했다. 콘스탄티노스 5세가 사절단을 추방하자, 756년 대군을 일으켜 트라키아로 진격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40km 떨어진 아나스타시아 성벽 전투에서 콘스탄티노스 5세가 친히 이끈 동로마군에게 참패하였고, 그 직후 궁정 쿠테타가 일어나면서 피살당했다.6대 칸 비네흐는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이어갔다. 756년 콘스탄티노스 5세가 육로와 해로를 통해 쳐들어오자 마르첼레에서 응전했으나 참패했고, 자식들을 인질로 바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759년 콘스탄티노스 5세가 재차 쳐들어오자 이번에는 리슈카 고개에서 매복 공격을 가해 물리쳤다. 하지만 리슈카 공개 전투에서 우세를 점했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동로마 제국과 평화 협상을 하려 하다가 전쟁을 지속하고자 했던 귀족들의 반발을 사면서 760년 가족과 함께 피살당했고, 불가리아의 귀족들은 7대 칸 텔레츠를 새로 선출시켰다. 즉위 직후 텔레츠는 군대를 이끌고 동로마 제국의 국경 지대를 황폐화시켰다. 이에 콘스탄티노스 5세는 763년 6월 16일 800척에 달하는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불가리아로 쳐들어갔다. 텔레츠는 처음엔 20,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산길을 차단했지만, 곧 마음을 바꿔 평야 지대에서 회전을 벌이기로 했다.
763년 6월 30일, 양군은 안키알로스 평원에서 접전을 하게 되었다. 전세는 2만이 넘었던 불가리아측이 우세했으나 하루 종일 지속된 격전 끝에 불가리아군이 참패하여 많은 병사가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군의 피해 역시 컸기에, 황제는 더 이상 진격하지 않고 수도로 돌아간 뒤 개선식을 개최했다. 이 일로 신망을 잃은 텔레츠는 정변으로 피살되었다. 그 후 새 칸으로 선임된 사빈은 비밀리에 동로마 제국과 평화 협상을 이어갔으나, 766년 호전파 귀족들이 이 사실을 눈치채고 인민 회의를 열어 그를 축출하기로 결의했다. 사빈은 즉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해 목숨을 건졌다.
사빈을 축출한 귀족들은 우킬 가문의 일원인 우모르를 9대 칸으로 선임했지만, 40일 만에 우가인 가문의 토크투와 바얀 형제가 정변이 일으키면서 우모르 역시 피살되었다. 토크투는 새 칸에 즉위했지만, 1년만인 767년 반란군을 피해 달아나던 중 다뉴브 강 북쪽의 어느 숲에서 형제 바얀과 친척들과 함께 피살되었다. 11대 칸에 오른 파간은 콘스탄티노스 5세와 친히 만나서 평화 협상을 성공적으로 하였지만, 황제가 돌연 불가리아 영내로 쳐들어갔는데, 이는 불가리아에 속한 일곱 슬라브족에 속한 세베리족의 족장 슬라분을 제거할 목적으로 그의 선조들은 오랫 동안 아스파루흐에게 복속된 이후 오랫 동안 동부 스타나 플라니라를 수호해 왔었다. 동로마 제국군은 약탈을 자행하면서 슬라분을 제거하는 성공했고, 갑작스러운 동로마 제국의 통수로 인해 파간은 백성의 신망을 잃었고, 768년 바르나 주변에서 부하들의 배신으로 피살되었다.
12대 칸에 오른 텔레리그는 774년 콘스탄티노스 5세를 상대로 일진일퇴를 벌이다가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해 말 평화 협약을 파기하고 1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베르치티아(현재의 마케도니아 북부)로 진격했다. 그러나 수도 폴리스카에 동로마 제국과 내통하던 세력이 있었고, 결국 이 정보는 사전에 황제의 귀에 들어갔고, 콘스탄티노스 5세는 훨씬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불가리아군을 물리쳤다. 황제는 여세를 이어가 불가리아로 쳐들어가려 했지만, 함대가 메셈브리아(현재 네세바르) 인근에서 북풍에 저지되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이후 텔레리그는 내부의 배신자가 황제에게 정보를 누설했다고 여기고, 귀순을 하겠다며 불가리아 내에서 도와줄 이를 알려달라는 서신을 보냈다. 황제는 그 말을 믿고 알려줬고, 텔레리그는 그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콘스탄티노스 5세는 자신을 속인 그를 응징하려 했지만, 도중에 병사하면서 무위에 그쳤다. 그러나 텔레리그는 777년 궁정 쿠데타로 축출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다. 이렇듯 불가리아는 753년부터 777년까지 24년간 8명의 칸이 교체되는 정국 혼란에 휩싸였고,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연전연패하면서 국력이 쇠락하였다.
4.3.3. 중흥기
카르담 칸은 777년 텔레리그 칸이 동로마 제국에 망명한 뒤 칸의 직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때는 791년이다. 그해 4월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노스 6세는 스트루마 강에 침입하여 동로마군을 섬멸한 불가리아군을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개시했다. 하지만 사전에 적이 쳐들어올 거라는 정보를 입수한 카르담은 아드리아노폴리스 근처 프로바트 마을에서 군대를 사열하였고, 적군이 근방에 이르자 역공을 가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동로마군은 패퇴하였고, 불가리아군은 적의 기지를 점령했다. 하지만 더 밀고 들어가지는 않고 본국으로 귀환했다.792년 7월 콘스탄티노스 6세는 앞선 패배를 보복하고자 또다시 군대를 이끌고 불가리아-동로마 제국 국경 근처에 도착했다. 그는 마르켈라 요새(현재 카르노바트 인근)를 건설하여 전진기지로 삼고자 했다. 카르담은 7월 20일 그의 군대와 함께 인근 고지를 점거한 후 동로마군의 상황을 정찰하였다. 이때 점성술사 판크라티우스가 별자리를 보니 불가리아군을 섬멸하는 미래가 보였다고 주장하자, 황제는 이에 고무되어 주둔지를 떠나 불가리아군이 점거한 고지로 진격했다. 그러나 불가리아군은 역공을 가해 동로마군을 격파하였고, 판크라티우스를 포함한 많은 장군들이 전사했다. 카르담은 황제의 천막과 수많은 물자를 점거했다. 결국 전의를 상실한 황제는 불가리아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매년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796년, 콘스탄티노스 6세가 공물을 내놓지 않자, 카르담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서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지 않으면 트라키아 전역을 파괴하고 금문으로 가겠다."라고 위협했다. 이에 콘스탄티노스 6세는 금 대신 똥물을 보내며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당신에게 어울리는 공물을 보낸다. 당신은 늙었지만, 나는 당신이 평안히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마르켈라에 가서 당신을 만나겠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그 후 콘스탄티노스 6세는 불가리아로 출정했지만, 아드리아노폴리스 북쪽 숲에 불가리아군과 대면하자 주둔지를 세워둔 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참회자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카르담이 17일 동안 어서 회전을 벌이자고 촉구했지만, 황제는 주둔지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동안 양측은 평화 협상을 이어갔고, 792년의 조약을 갱신하기로 합의했다. 불가리아에 대한 거듭된 원정 실패는 콘스탄티노스 6세의 위상을 실추시켰고, 결국 797년 어머니 이리니가 정변을 일으켜 아들을 붙잡아 실명형에 처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796년 이후로는 기록상에 전혀 등장하지 않으나, 크룸이 등장하는 803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크룸이 그 뒤를 이었다.
그가 역사의 기록에 등장하는 건 그 당시 판노니아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아바르 칸국과의 전쟁에 관련해서다. 크룸은 803년부터 805년까지 2년간 프랑크 제국의 카롤루스 대제와의 전쟁에서 큰 타격을 입은 아바르 칸국을 상대로 공세를 개시해, 프랑크 왕국이 아바르 칸국의 서쪽 영역을 장악하는 동안 동쪽 영역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프랑크 왕국과 불가리아는 다뉴브 중류를 따라 새 경계선을 정했다. 이렇듯 날로 강성해지는 불가리아가 조만간 제국을 침략할 것을 우려한 동로마 황제 니키포로스 1세가 불가리아를 선제 공격하면서, 장장 9년간 이어진 전쟁의 막이 올랐다.
807년, 니키포로스 1세는 불가리아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하여 아드리아노폴리스로 진군했다. 그러나 도중에 내부에서 반란이 터지는 바람에 원정을 중단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야 했다. 크룸은 로마군이 국경 근처까지 왔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하자, 동로마 제국을 응징하기로 마음먹었다. 808년, 그는 다뉴브 강의 지류인 싀트루마 강 계곡에서 동로마군을 습격해 큰 타격을 입히고 막대한 양의 금을 압수한 뒤 병사들에게 골고루 분배했다. 이후 809년 동로마 제국의 요세인 세르디카(현재 소피아)를 포위 공격한 끝에, 수비대에게 항복하면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하여 항복시킨 뒤 도시에 입성하자마자 수비대 전체를 몰살했다.
세르디카 함락에 진노한 니키로포스 1세는 군대를 끌어모아 응징에 나섰다. 니키포로스 1세가 수도에 보낸 서신에 따르면, 황제의 군대는 불가리아 국경을 통과해 플리스카에 입성한 뒤 철저히 파괴했다.[204] 황제는 돌아오는 길에 세르디카에서 요새 재건 작업을 실시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귀환했다. 811년, 아나톨리아의 테마 부대들과 타그마 부대들을 총동원해 대규모 병력을 모집한 니키포로스 1세는 이번 기회에 불가리아를 파괴하고자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그해 5월, 아들 스타브라키오스와 함께 불가리아 영내로 진입한 니키포로스 1세는 6월 말에 마르셀라를 공략한 뒤 15일 이상 주둔했다.
크룸은 이번에는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사절을 보내 평화 협정을 맺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니키포로스 1세는 불가리아를 멸망시킬 작정으로 온 터라 이를 거부하고 계속 진군하면서 잔학행위를 벌였다. 참회자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동로마군은 진군로 주변에 살던 민간인들을 모조리 죽였는데, 특히 여성과 유아들을 반드시 쳐 죽여서 씨를 말려버리려 했다고 한다. 크룸은 5만 병력을 규합해 반격했으나 동로마군에게 패배하고 산악 지대로 피신했고, 플리스카에 남겨진 12,000명의 수비대는 7월 20일 최후의 한 사람까지 결사적으로 싸웠지만 끝내 전멸했다. 그리하여 플리스카에 입성한 동로마군은 건물 전체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학살한 뒤, 그곳에 남겨진 수많은 보물을 나눠가졌다. 이에 크룸은 두 번째 사절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자고 호소했다.
"당신이 이겼소. 이제 빼앗은 모든 것을 가지고 평화롭게 떠나주길 바라오."
그러나 니키포로스 1세는 이 말을 무시하고 전쟁을 이어가기로 했다. 그는 플리스카 주변의 마을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불가르인을 잡는 대로 죽이거나 노예로 삼았다. 그 후 불가르족이 충분히 약해졌다고 판단하고 개선식을 거행하고자 귀환길에 올랐다. 그는 처음에 세르디카로 향하려 했지만, 크룸이 통로를 막고 매복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는 길목으로 이동했다. 811년 7월 25일, 동로마군은 바르비사 협곡 인근에서 여러 개의 분견대로 나뉜 채 숙영했다. 크룸은 아바르, 슬라브인들을 용병으로 끌어모으고 여자들까지 동원하여 모든 병력을 이끌고 이들을 추격하다가 적이 협곡에서 숙영하는 틈을 타 해자와 나무 벽으로 협곡 입구를 막고 협곡 주변에 매복했다.
다음날 새벽, 불가르군은 황제가 있는 중앙 부대를 급습했다. 동로마군은 급히 무기를 챙겨 맞서려 했지만 조국을 짓밟고 가족을 해친 것에 대한 원한이 사무친 불가르군의 압도적인 기세에 압도당했다. 수많은 로마군이 강 쪽으로 달아났다가 건널목을 찾지 못하고 익사했고, 다른 이들은 전방으로 달아나 해자와 나무 벽을 뚫으려 했지만 쉽사리 그러지 못하다가 몰살당했다. 니키포로스 1세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일설에 따르면, 크룸은 그의 유해를 찾아내고 도끼로 목을 자르면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평화(Pax)를 받기 싫다면 도끼(Axe)나 받아라!"
그 후 크룸은 니키포로스 1세의 두개골를 장대에 몇 달 동안 전시한 후 살과 가죽을 벗긴 뒤 은으로 다듬어서 술잔으로 개조한 뒤 죽기 전까지 슬라브 지도자들과 함께 잔치를 벌일 때 두개골에 술을 따르며 명예를 지키고 나라를 구원하게 해준 신에게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205] 동로마인들은 크룸의 이러한 행동에 두려움을 품고 아시리아의 왕 센나케립에 빗대어 "새로운 센나케립"이라고 불렀다.
니키포로스 1세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때, 그의 아들 스타브라키오스는 바르비사 협곡에서 일부 패잔병과 함께 가까스로 빠져나왔지만 그 과정에서 척추가 골절되고 다리가 부러지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한 뒤 황제로 추대되었지만 누가 봐도 오래 살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이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국가 비상 사태를 극복할 적임자로 니키포로스 1세의 사위인 미하일 1세 랑가베스를 추대하려 했다. 여기에 미하일의 아내이자 스타브라키오스의 누나 프로코피아도 스타브라키오스를 설득했다.
그러나 스타브라키오스는 주변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어떤 이유 때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미하일을 매우 싫어했고 오히려 자기 아내인 테오파노를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다. 그러나 죽어가는 황제가 동의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 811년 10월 2일에 마하일 1세 랑가베스가 황제가 되었다. 이후 원로원 의원들은 스타브라키오스를 강제로 수도원에 보내 삭발식을 거행하게 했다. 그후 스타브라키오스는 석달 만인 812년 1월 11일에 사망했다.
812년, 크룸의 군대가 국경을 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면서 그곳을 보호하는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그렇지만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위용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새 황제 미하일 1세에게 매년 자신들에게 공물을 바치고 포로를 돌려보낸다면 물러가겠다고 제안했다. 미하일 1세가 제안을 거부하자, 크룸은 812년 메셈브리아를 포위했다. 그는 일찍이 니키포로스 1세에게 고용되었다가 황제의 강압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고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이탈하여 불가르군에 가담한 아랍 공성 기술자들을 동원해 각종 공성 무기를 제작했다. 결국 메셈브리아는 함락되었고, 도시에 있던 그리스의 불 무기들이 불가르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813년 2월, 크룸은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지만 동로마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미하일 1세는 이 성공에 고무되어 동로마 제국 전역에서 군대를 소집해 적과 일전을 벌이려 했다. 양측은 813년 6월 아드리아노폴리스 인근의 베르시니키아 인근에서 마주쳤다. 2주간 대치가 이어진 끝에 6월 22일 본격적인 교전이 벌어졌다. 한 때 동로마 좌익 부대가 상대를 밀어붙이면서 전세가 동로마 쪽으로 기울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아르메니아 출신의 장성 레온 5세가 이끌던 우익 부대가 독단적으로 도주하면서 동로마 전열이 무너졌고, 불가르군이 이 틈을 노려 대대적으로 공격하는 바람에 참패당했다. 그 후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뒤 아내 프로코피아의 반대를 무릅쓰고 레온 5세에게 황위를 넘겼다.
베르시니키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크룸은 여세를 몰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앞에 진을 치고 불가르인들이 섬기는 신들을 위한 의식을 거행하는 한편, 도랑을 파고 요새를 쌓아 오랫동안 주둔할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레온 5세에게 약속한 대로 금, 비단, 그리고 미인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로 볼 때 레온 5세는 사전에 크룸과 밀약을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레온 5세는 크룸과 골든혼 해변가에서 협상하자고 제안했고, 크룸은 이에 따라 몇몇 수행원을 대동하여 협상장으로 갔다.
그러나 크룸 일행이 혐상장에 도착하자, 사전에 매복해 있던 궁수들이 그들을 향해 화살을 일제히 쐈다. 이로 인해 수행원들이 대부분 죽었고, 크룸 역시 부상을 입었지만 타고 다니던 군마가 재빨리 달아나 준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일로 극도로 분노한 크룸은 불가르 군대를 이끌고 셀렘브리아 등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 지역을 유린하였으며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함락하여 주민 1만 명을 학살했다. 이에 레온도 보복으로 메셈브리아를 공격하여 그곳의 불가르 수비대를 학살했다.
크룸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켜 동로마 제국을 끝장내기로 작정하고, 슬라브인과 아바르인을 소집하고 강철로 제작된 충차 5,000대 등 공성병기들을 실은 함대를 준비했다. 이 소식을 접한 레온 5세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보강하는 데 힘을 기울이는 한편 신성 로마 제국의 군주 루도비쿠스 1세에게 사절을 보내 불가리아의 후방을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루도비쿠스 1세는 제국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수습하는 데 애를 먹고 있던 터라 동로마 제국을 돕지 못했다.
이제 동로마 제국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접어드는 듯했던 814년 4월 13일, 크룸이 급병에 걸려 사망했다. 시기 미상이나 크룸은 생애 전반에 걸쳐 동로마와의 전쟁을 통해 보여준 전쟁 군주로서의 면모 외에도 내치에도 어느 정도 주력했다. 동로마 제국과의 오랜 전쟁과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트라키아의 부족 자치권을 폐지하고 그 지역을 카반(Kavhana), 이치르구보일(Ichirgu-boila)과 같은 군사적 업무를 맡은 관리 및 자신의 형제에게 맡기는 등 이제까지 부족간 배타적 성향을 어느 정도 극복하였다.
또한 행정기구 설립을 통해 보다 조직적인 국가 운영의 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 증거가 바로 함바를리 비문이다. 함바를리 비문은 오늘날 불가리아의 말로미로보라(당시의 함바를리)는 도시에 세워진 비석에 한 크룸이 베르시니키야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쓰여진 그리스어 비문이다. 이 비문에는 불가리아를 행정상 동서로 분할하였다는 내용이 쓰여 있는데, 이로 인해 넓어진 영토를 행정 구역으로 분리하여 다스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크룸은 불가리아 최초로 명문화된 법을 만들었다. 해당 범은 온전히 남아 있지 않으며, 10세기 동로마 제국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수다에 일부 법조항이 언급되었는데, 따르면 위증자는 죽음의 형벌을 받았고,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그의 가산을 몰수하고 손과 발을 자르는 형벌로 다스렸다. 한 크룸의 성문법은 사회를 엄격하게 통제하고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여 중앙집권화할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이러한 엄격한 통치 방식으로 인하여 '무서운 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다만 현대 불가리아의 역사학자들은 크룸의 법이 크룸이 살아 생전 만든 것이 아닌 수다로 통해 동로마인들이 만든 창작물로 보고 있다.
한편 레온 5세는 이 소식을 접하자 반격에 착수해 815년 말 또는 816년 초 제국 함대를 파견해 불가리아의 후방 지대인 네세바르 요새를 공략했다. 여기에 동로마 육군이 동부 트라키아의 여러 요새를 공략했고, 프랑크 왕국과도 연합할 움직임을 보였다. 결국 불가리아의 새 칸 오무르타그는 평화 협약을 맺기로 결의했고, 816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양측의 국경지대, 특히 트라키아의 경계가 정해졌고, 동로마 제국 내 슬라브인들의 거취는 개개인의 의사에 맡기기로 했으며, 동로마 제국은 불가리아의 이교 신앙을 용인하고 불가리아는 자국 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지 않기로 했다. 이리하여 9년간 이어진 전쟁은 막을 내렸다.
다만 이때 오무르타그는 곧바로 칸이 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문헌에는 814년에서 816년 사이에 두쿰(Дукум), 디츠쟁(Диценг), 그리고 토그(Цог) 등 세 귀족이 통치자로 언급되어 있다. 이 귀족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선 아직 어린 오무르타그의 섭정이라는 설, 칸 직을 찬탈했다는 설, 불가리아 각지의 지배자였다는 설 등 여러 가설이 제기되지만, 어떤 게 맞는지는 불분명하다.
어째든 816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30년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양측의 국경지대, 특히 트라키아의 경계가 정해졌고, 동로마 제국 내 슬라브인들의 거취는 개개인의 의사에 맡기기로 했으며, 동로마 제국은 불가리아의 이교 신앙을 용인하고 불가리아는 자국 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지 않기로 했다.
818년, 다뉴브 강 중부 지역에 거주하는 슬라브계 티모차니 부족이 프랑크 왕국에 합류하려고 경건왕 루트비히에게 사절을 보냈다. 그들은 이듬해 크로아티아 공국의 일부로서 불가리아에 남았지만, 루트비히의 통치를 계속 따르려 하였다. 820년경 오무르타그는 불가리아 서부의 일부 슬라브 부족인 티모차니족(Timochani), 브라니체프치족(Branichevtsi) 및 아보드리티족(Abodriti)이 프랑크 왕국의 지배를 받기로 하자 그들의 족장을 자신이 파견한 총독으로 교체했다. 이후 오무르타그는 불가리아의 정치 구조를 부족제에서 중앙집권제로 전환하기 위해 건국 후 그동안 이어져온 슬라브족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코미타티(comitati)라 불리는 10개 행정단위로 분할시켰고, 코미트가 다스리게끔 했다.
823년, 동로마 제국 황제 미하일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슬라브인 토마스의 반란군을 물리치기 위해 오무르타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오무르타그는 헬라클케아 부근 케둑토스 평원에서 반란군을 습격해 막심한 타격을 입혔다. 토마스는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디아바시스로 후퇴하였지만, 결국 토벌대에게 패배하고 몰락하였다.
오무르타그는 824~826년까지 티모차니 부족의 거취 문제를 놓고 경건왕 루트비히에게 사절을 잇달아 보내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가 없자, 군대를 파견하여 판노니아 남동부에 사는 슬라브족을 복속하였다. 프랑크군은 이에 맞서 군대를 파견했지만, 양군은 큰 충돌을 벌이지 않았다. 이후 양측이 서로 인질을 교환하기로 하면서, 분쟁은 해결되었다. 양측은 도나우 강과 타자 강 사이에 펼쳐진 평야 지대에 슬라브인들의 자치국가 카자르사그를 세워서 완충지로 삼기로 하였다.
오무르타그는 슬라브인들의 분리운동을 모조리 제압한 뒤, 슬라브 족장들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직접 통치를 받게 하였다. 또한 전국을 코미타티(comitati)라 불리는 큰 지방으로 나누어, 각 코미타티마다 카나수비기(Kanasubigi)라 불리는 관리의 통치를 받게 했다. 코미타티는 다시 주피(zhupi)라 불리는 더 작은 지역으로 나뉘었고, 수도 플리스카 주변 지역은 특별한 지위를 가졌다. 또한 더이상 슬라브 보병과 불가르족 기병으로 분리되던 관행을 파기하여 전군을 여러 민족이 뒤섞인 통합군으로 개편하였다.
오무르타그는 811년 니키포로스 1세에 의해 파괴된 플리스카를 재건하면서 화려한 궁전을 건축하였다. 그는 이때 다음과 같은 비문을 세웠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언젠가 죽고 또다른 사람이 태어난다. 나중에 태어난 사람이 이 비문을 보고 이 궁전을 만든 사람을 기억하리라. 군주의 이름은 오무르타크 칸 슈비기(Омортаг хан ювиги)이다. 신께서 그가 100년간 존귀하게 살도록 해주시기를 바라노라.
그는 뒤이어 이교도 사원을 짓고 플리스카를 지킬 요새도 건설했다. 또한 다뉴브 강 인근에 새로운 궁전을 세웠는데, 기둥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새겼다.
옛 집에 살고 있는 오무르타그 칸 슈비기는 다뉴브 강에 새로운 영광스러운 집을 짓고, 두 집 사이의 거리를 재고 중간에 봉분을 쌓았노라. 봉분의 중간에서 옛 궁전까지는 2만 개의 봉분이 있고, 다뉴브 강 까지는 2만 개의 봉분이 있다. 땅을 잰 뒤 이렇게 비문을 세우노라. 사람이 잘 살아도 죽고 또 다른 사람이 태어난다. 나중에 태어난 사람이 이 비문을 보고 그것을 만든 사람을 기억하게 하라. 군주의 이름은 오무르타크 칸 슈비이기다. 그가 백년을 살도록 신께서 영광으로 여기시기를.
또한 투카 다리에 또다른 비문을 세웠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대한 오무르타그 칸은 그가 태어난 땅에서 신의 왕자이니라. 플리스카에서 궁전을 건설하고 그리스와 슬라브에 대한 그의 힘을 늘렸노라. 그리고 궁전 뒤에 투카 다리를 능숙하게 건설했노라. 그는 요새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 사이에 2개의 놋 사자를 세웠노라. 칸께서 많은 불가리아의 적들을 발로 짓누르고, 100년간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살도록 신께서 은총을 베푸시길 바라노라.
이밖에도 플리스카의 물공급을 원활하기 위해 수로 건설 또한 시작했다.
오무르타그 칸의 통치 기간 동안, 기독교를 믿는 많은 슬라브인이 불가리아 영내에 귀속되었다. 평화 협약에는 기독교인을 박해하지 않기로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암암리에 박해가 이어졌다. 이는 이들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장차 동로마 제국과 충돌할 때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흐리드의 테오필락트가 저술한 <테베르폴의 순교자 15인>에 따르면, 오무르타그의 장남 엔라보타가 기독교를 받아들여 세례를 받았고, 이로 인해 왕위 계승권을 잃었다고 한다. 동시대의 역사가 테오도로스 수투디토스에 따르면, 많은 슬라브인이 기독교 박해에 불만을 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다고 한다.
오무르타그는 831년경 사망하였다. 장남 엔라보타는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고, 둘째 아들 즈빈니카는 일찍 죽었기에, 셋째 아들 말라미르가 뒤를 이었다.
칸이 된 말라미르는 833년 불가리아 이교 신앙으로 다시 개종하려는 것을 거부한 형 엔라보타를 살해한 후 카반 이스블과 함께 불가리아를 통치해, 부친의 건설 사업을 지속하여 그의 시대에 수도 플리스카의 수로 건설이 완료되었다. 또한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간의 관계를 좋게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836년, 동로마 제국 황제 테오필로스는 평화 협약을 파기하고 불가리아로 침공하여 국경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카반 이스불이 이끄는 불가리아군은 즉시 보복에 나서 아드리아노폴리스까지 동로마 제국을 몰아낸 후 현재의 플로브디프인 필리포폴리스와 그 주변 일대를 공략해 합병했다. 또한 이시기 마케도니아에 있던 쿠베로바 불가리아를 합병했다.
말라미르의 통치 기간 동안 불가리아의 사회 계급 또한 분화되어 보야르의 어원인 보일라와 바겐, 그리고 일반 평민 등으로 나눠졌는데, 보일라는 다시 외보일라(външни)와 내보일라(вътрешни)로 나눠졌는데, 내보일라는 코미타티를 비롯해 칸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바겐의 경우 하급 귀족으로서 수많은 하위 계급으로 나누어졌다.
그러나 836년경 갑자기 사망했는데,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상술한대로 그는 833년 끝내 배교를 거부한 큰형 엔라보타를 처형했는데, 엔라보타의 부하가 이를 보복하고자 그를 죽였다는 설이 제기되지만 확실하지 않다. 사후 둘째 형 즈빈니카의 아들인 프레시안 1세가 뒤를 이어 칸이 되었다.
그는 선대 말기에 발발한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이어가기로 했다. 837년 테살로니키 근처의 슬라브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동로마 제국은 카이사르 알렉시우스 모젤라를 지휘관으로 하는 군대를 파견했다. 이에 프레시안은 카반 이스불에게 군대를 맡겨 이들을 지원하게 하였다. 카반 이스불은 필리포폴리스 인근에서 동로마 제국군을 격파하고 필리포폴리스를 점령했다. 이리하여 불가리아는 건국 이래 처음으로 백해 연안에 이르렀고,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테살로니키 사이의 육로를 차단했고, 테살로니키 근처의 슬라브인들은 불가리아의 산하로 들어갔고, 프레시안은 이에 대한 기념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비문을 세운다.
839년까지 발칸 서부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마침내 세르비아족이 세운 라쉬카 공국과 접하게 되었다. 이에 위기 의식을 느낀 블라스티미르 대공을 위시로한 세르비아 부족들이 테오필로스 황제의 동의하에 자치국을 세우자, 이에 위협을 느낀 그는 세르비아를 전격 침공했다. 그러나 3년간의 전쟁에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842년 별다른 영토 변경 없이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이무렵 경건왕 루트비히가 사망한 뒤 프랑크 왕국의 영토가 세 아들에 의해 3분할되자, 845년 동프랑크 왕국에 사절을 보내 일전에 맺었던 평화 조약을 재확인하였다.
846년 동로마에 미카일 3세가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르자 프레시안은동로마의 군력이 약해졌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프레시얀은 트라키야 국경선 부근에서 접전을 벌였던 전쟁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공격 목표를 세르비아로 돌려 전쟁을 일으켰다. 그 전쟁은 848년 ~ 851년 사이 3년 동안 진행되었으나 프레시얀은 소기의 성과는커녕 패자로서 전쟁을 끝내야만 했다.
라쉬카와의 전쟁에 대해 역사학자인 스타노예비치는 다른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스타노예비치의 가설에 따르면 블라스티미르는 불가리아와 동로마 간의 전쟁을 이용하여 동로마로부터 독립을 시도했는데, 프레시얀은 세르비아의 독립이 불가리아에게 유익하지 않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시 불가리아에 속해 있던 다른 슬라브인들이 세르비아를 따라 독립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847년 불가리아가 세르비아를 공격했다는 가설이다. 어째든 라쉬카와의 전쟁 852년, 프레시안 1세가 사망하였고, 아들인 보리스 1세가 새 칸으로 즉위했다.
4.3.4. 기독교로 개종하다
보리스 1세의 치세 초반에 현 체코 지역의 대 모라비아가 불가리아 국경까지 확장하자, 불가리아는 모라비아를 견제하기 위해 동프랑크 왕국과 동맹을 맺고 있었고, 세르비아와 동로마 제국과는 긴장상태에 놓여있었다.
852년년경 보리스 1세는 아버지 프레시안 1세가 실패한 발칸 서부로 진출을 다시 시도하려고 했다. 당시 발칸 서부에서 그나마 어중중하게 강했던 라쉬카는 블라스티미르가 사망하고 라쉬카는 무티미르를 비롯한 세 아들에 의해 분할 상속된 상태로 분할 통치하의 세르비아가 효과적으로 방어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 보리스는 자기 아버지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세르비아를 공격했다.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전쟁이 몇 년도에 발생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학자들마다 의견을 달리한다. 이는 무티미르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 포르피로게니투스가 쓴 『제국의 경영에 대하여』 인데 거기에 아무런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리스의 라쉬카 원정은 형제들과 힘을 합쳐 불가리아군의 공격을 크게 물리친 무티미르가 불가리아 칸 보리스 1세의 아들이었던 블라디미르를 포함한 12명의 귀족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에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와 평화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평화 조약에 따라 불가리아 포로들을 두 나라의 국경선 근처인 라스바테 요세에서 넘기고 상호 선물 교환을 했지만 라쉬카 원정에서 패한 보리스 1세의 입지는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리스 1세는 적국을 줄이고 내부를 통합하기 위해 기독교의 도입을 모색했는데, 처음에 보리스 1세는 동프랑크 왕국과의 관계를 맺기 시작해 동프랑크 왕 루트비히 2세를 지원해 루트비히 2세의 아들카를로만의 반기와 그리고 현재의 모라비아 지방을 중심으로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하려는 모라비아 공국을 견제하는 데 도움을 줬다. 이러한 관계를 고려하여 보리스 1세는 가톨릭[206]을 받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당시 가톨릭의 세력확장을 경계[207]한 동로마의 황제 미카엘 3세는 크로아트 공국과 모라비아 공국과 동맹을 맺고 불가리아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다뉴브 중부 지역에서 불가리아인의 영향력이 크게 흔들렸다. 863년, 미카엘은 불가리아로 동로마 제국 함대를 이끌고 침공하여,보리스 1세에게 정교회로 개종할 것을 강요했다. 불가리아는 당시 주력부대가 북쪽으로 가있던데다 기근과 지진에 시달리고 있어 동로마를 제대로 상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불가리아에게 있어서도 기독교로의 개종은 손해만 보는 것은 아니었다.
보리스 1세는 불가리아가 제국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유럽 사회에 합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기독교를 수용함으로써 지난 두 세기 동안 이교도적 정치 체계가 이어지던 불가리아는 동로마 제국과의 평화조약으로 기독교 국가, 특히 북서쪽의 국가들과 비교적으로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는 불가리아 역사에 새로운 변화의 시기가 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교 신앙을 물리치고 기독교 국가로의 편입은 불가리아를 불신하던 유럽의 다른 나라와 동등한 파트너가 될 수 있는 기회였다.
결국 보리스 1세의 결정에 따라 불가리아는 동프랑크 왕국과의 동맹을 끊고, 정교회로 개종할 것을 받아들여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에서 세례를 받았고, 불가리아에는 동로마의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동로마로부터 빼앗긴 영토를 돌려받았다. 이때 세례를 받아 미카엘 3세의 대자(代子)가 되면서 받은 세례명이 미카엘 3세와 똑같은 미하일(Михаил)이었다. 참고로 이때의 개종으로 불가리아 통치자의 칭호는 칸에 슬라브어의 크냐즈로 개칭되었다.
개종 직후 보리스의 기독교 개종에 대해 10개의 코티미티에 속한 이교 신앙을 고수하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반란은 진압되었고, 반란에 가담한 52명의 보야르와 그의 가족이 잔인하게 숙청되었는데, 훗날 보리스는 이때 보인 자신의 잔인함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고 술회하기도 하였다. 이후 보리스는 코티미티 내에 작은 행정단위로서 주파(zhupa)라 불리는 행정 단위를 설치해 주판으로 하여금 주파 내의 행정을 전담토록 하게 했고, 이때 농민들의 공동체인 자드루가들이 주판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교 신앙을 유지하려던 보야르들의 반란을 정리한 후 정교회로 개종한 보리스 1세는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이러한 전례를 거행하고 싶어 했고, 포티오스(포티우스)에게 불가리아 총대주교를 임명하고 개종한 뒤에도 불가르 고유의 전통을 유지할 수 있게 해달라는 서한을 보냈다. 포티오스가 요청을 거절하자, 보리스 1세는 교황 니콜라오 1세(니콜라우스 1세)에게 사절을 보내 가톨릭의 교리가 불가리아의 풍습과 충돌되는지를 묻는 서한을 보냈다. 니콜라오 1세가 보리스 1세에게 그에 대한 답[208]을 보내주자, 답변에 만족한 보리스 1세는 동로마에서 온 선교사들을 모두 추방했고, 가톨릭의 선교사들을 받아들였다.
이는 반로마적 정서가 있던 보야르들을 달래기 위한 것과 함께 불가리아 교회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에 대해 취지였다.그리하여 869년 ~ 870년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요시프 1세를 불가리아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십여 년이 지난 879년 ~ 880년 불가리아 정교는 자율성을 확대하고 주교는 보리스에 의해 임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불가리아 정교회가 총대주교구로 인정을 받은 것은 보리스 1세의 아들 시메온 1세의 사후에야 이루어졌야 했다.
한편 보리스는 교황 니콜라오 1세에게 가톨릭의 교리가 불가리아의 풍습과 충돌되는지를 묻는 서한을 보냈을 당시 불가리아의 법률 또한 개혁하려는 시도를 했고, 이후 니콜라오 1세로 부터 동로마 제국의 성문법인 에클로그와 교회법인 노모케논을 받아들였는데, 두 개의 법률을 불가리아의 실정에 맞게 개정해 새로운 법전을 만드는데 이것이 인민 법원법이다.
870년에 로마 교황이 보리스 1세가 요구한 총대주교 자리를 거부하자, 보리스 1세는 다시 동로마로 사신을 보냈고, 그해 3월 4일에 불가리아에 대주교 1명과 주교 몇 명이 임명되었다. 885년, 동프랑크의 지지를 받아 공작의 자리에 오른 대 모라비아의 스바토플루크 1세(Svatopluk I, 840–894, 재위 870–894)의 탄압을 피해 동로마 제국에 선교사로 가있던 메토디우스의 제자들이 불가리아로 왔다. 보리스 1세는 그들을 극진히 대접해 피난처를 제공하면서 선교를 맡겼다.
그들이 가져온 글라골 문자와 슬라브어 기도서는 보리스 1세의 기독교 정책을 한층 더 수월하게 했고, 이를 통해 민중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불가리아에서 메토디우스의 제자들은 그리스어 예식을 슬라브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글라골 문자를 불가리아어에 맞게 변형하여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정교회권 슬라브 국가에서 널리 사용되는 키릴 문자이다.
이때 제자들 중 클리멘트는 후에 오늘날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 접경 지역에서 오흐리드 학파를 만들었고, 나움 역시 오늘날 불가리아 동북부 프레슬라프에 학파를 만드는 등 스승의 업적을 이어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889년, 보리스 1세는 왕좌에서 내려온 후 장남인 블라디미르 라사테(Владимир Расате, 재위 889–893)에게 군주의 자리를 물려주고, 삼남 시메온(Симеон)에게 주교 자리를 맡겼다. 하지만 블라디미르는 동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매개로 불가리아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우려해 불가리아를 이전의 이교도 국가로 돌려놓으려 했다. 결국 블라디미르는 아버지 보리스 1세에 의해 눈이 뽑혀(...) 쫓겨났고, 수도 또한 폴리스카에서 나옴의 학파가 있던 프레슬라프로 천도하였고, 블라디미르를 대신해 시메온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시메온 1세(Симеон I Велики, 864/865~927, 재위 893~927)다.
4.3.5. 제국을 자처하다
블라디미르의 폐위와 시메온 1세의 즉위는 불가리아의 기독교화가 더이상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만 즉위 초부터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부왕인 보리스 1세의 치세 때인 863년 동로마 제국과 체결된 평화조약으로 인해 대외적으로 국가가 안정이 되자 불가리아 공국은 인구가 증가하고 도시가 발전했으며 외적으로 팽창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에 따라 불가리아는 발칸반도 내에서 국가적 지위가 공고해졌다. 반면에 9세기 말 동로마 제국은 귀족층의 부패와 잦은 정권 교체로 내부적으로 심각한 정치적 분열이 일어나 위기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시메온 1세 집권 초기에 불가리아 왕국과 동로마 제국의 정치 관계를 변화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893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레오 6세는 불가리아 상품 시장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오늘날 그리스 테살로니키의 솔룬 지역으로 옮겼고, 장인이자 스틸리아노스 자우치스를 체신부 장관(Logothetes tou dromou)이라는 요직에 임명해 제국의 대내외 정책을 총지휘하게 했다. 자우치스는 아테네 출신의 상인들인 자기 심복 두명에게 불가리아 무역의 독점권을 내주었다.
문제는 그리스의 두 상인이 관세를 멋대로 매기자 두 국가 사이의 교역량마저 저조하게 만들어 불가리아인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시메온 1세는 즉각 항의했지만 무시당하자 동로마 제국에 실력 행사를 하는 한편, 이참에 동로마 제국을 굴복시키고 발칸 반도의 패권을 확보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보리스 1세의 개종 이래 20여 년간 평화를 이어가던 양국의 전쟁이 막을 올랐다.
894년, 시메온 1세는 트라키아를 침공해 약탈을 일삼았다. 레온 6세는 급히 스트라테고스 직책을 맡고 있던 프로코피우스 크레니테스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주둔하고 있던 하자르 경비대를 중심으로 한 수비군을 맡겨서 적을 무찌르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드리아노폴리스 인근의 마케도니아 평원에서 참패했다. 프로코피우스를 비롯한 동로마 장성들은 전사했고, 생포된 하자르인들은 시메온의 명령에 따라 코가 베어진 뒤 "로마인들을 부끄럽게 만들겠다"는 목적으로 수도로 보내졌다. 하지만 아직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압박하기에는 준비가 덜 되었다고 판단한 시메온은 인근 마을을 약탈한 후 많은 포로를 거느리고 귀환했다.
레온 6세는 남부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었던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209]를 급히 소환해 시메온의 공세를 저지하게 하는 한편, 마자르족에게 사절을 보내 막대한 선물을 바치며 불가리아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 동시에 아나스타시오스를 레겐스부르크에 있는 동프랑크 왕국의 통치자 아르눌프에게 보내, 그들이 불가리아와 손잡지 않게 하려 노력했다. 그러는 한편 시메온 1세에게 강화를 요청했지만, 그는 동로마 제국의 사절 콘스탄티나키우스를 감옥에 집어넣는 것으로 응답했다.
895년 초, 마자르족이 동로마 함대에 올라타서 다뉴브 강을 거슬러 내려갔다. 불가리아군은 쇠사슬로 강을 차단했지만, 리엔티카가 이끄는 마자르군이 강 남쪽 기슭으로 건너가는 것을 저지할 수 없었다. 당시 시메온 1세는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 불가리아와 동로마 국경 지대에 있다가 마자르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그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도브루자 인근에서 패배한 뒤 드리스트라로 도주하여 그곳에서 농성했다. 마자르인들은 공성 기술을 몰랐기 때문에 요새를 함락시킬 수 없었고, 그 대신 드리스트라 주변 마을들을 모조리 약탈하고 파괴한 뒤 불가리아의 수도 프리슬라프로 이동하여 역시 약탈을 자행했다. 이후 동로마 제국에 불가리아 포로를 팔아넘긴 후 다뉴브 강 북쪽 지역으로 돌아갔다.
시메온 1세는 마자르족이 떠난 후 레온 6세에게 포로 교환 협상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알렸다. 이에 레온 6세는 지휘관들에게 불가리아에 대한 군사 작전을 자제하라고 명령하고 레온 조이노스파크테스를 프리슬라프로 보냈다. 그러나 시메온은 새 병력을 모을 시간을 벌 용도로 협상을 했을 뿐이었기에, 온갖 구실을 대며 사절의 접견을 지연했다. 이와 동시에, 마자르족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페체네그인들과 동맹을 맺었다. 896년 초, 불가리아군과 페체네그 연합군이 마자르를 협공해 큰 타격을 입혔고, 마자르족은 적의 공세를 피해 카르파티아 고개를 넘어 판노니아 대평원으로 들어갔으니, 이 지역이 바로 헝가리다.
마자르의 압박에서 벗어난 뒤, 시메온 1세는 비로소 사절을 접견해 이전에 마자르인에 의해 동로마 제국으로 이송된 모든 불가리아 포로를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레온 6세는 아랍인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던 데다 뛰어난 지휘관이었던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병사해버렸기 때문에 시메온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그러나 896년 여름, 시메온은 동로마 제국이 불가리아에 예속된 슬라브 포로들을 아직도 가두고 있다는 구실을 들며 트라키아를 침공했다. 레온 6세는 서둘러 아랍인들과 휴전 협약을 맺은 뒤 아시아 지역에서 대부분의 군대를 발칸 반도로 옮기고 레온 카타칼론을 지휘관으로 삼아 불가리아군과 대적하게 했다.
양군은 896년 6월 7일 불가로피곤 평원에서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동로마 육군 부사령관 격인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를 맡고 있던 테오도시오스를 비롯한 대다수 장병이 전사했고, 레온 카타칼론 본인은 소수의 추종자들만 거느린 채 전장에서 빠져나왔다. 이때 루카스라는 이름의 동로마 병사 하나가 목숨을 건진 뒤 전쟁 자체에 회의를 느끼고 수도원에 입문했고, 나중에 수도자로서 이름을 떨치면서 정교회 성인이 되었다. 불가리아군은 불가로피곤 전투에서 승리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며 모든 마을을 파괴하고 수많은 동로마인들을 잡았다.
아랍 역사가 알 타바리에 따르면, 레온 6세가 평화 협약을 맺자고 호소했지만 시메온은 "우리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이길 때까지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겠다"라며 거부했다. 이에 절박해진 레온 6세는 아랍과의 전쟁 도중에 붙잡았던 아랍인들을 석방시키는 대가로 불가리아에 맞서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불가리아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한 뒤 포위했지만, 시메온 1세는 함락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협상을 재개했다. 그 결과 양자는 포로를 교환하고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했으며, 불가리아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빼앗은 디라키움을 포함한 30개 요새를 반환하는 대가로 흑해와 스트란자 산맥 사이의 영토를 넘겨받으며, 매년 막대한 공물을 받기로 했다. 여기에 전쟁의 빌미가 되었던 교역소는 테살로니카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다.
시메온은 전쟁에서 승리한 뒤 프리슬라프에서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단행하고 세르비아 일대의 부족장 페타르를 통치자로 인정하는 대가로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게 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하지만 그는 내심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동로마 제국을 완전히 무너뜨리거나 불가리아에 굴복하게 만들고 싶은 야망을 품었다.
같은 시기 시메온은 발칸 서부에 위치한 라쉬카의 내정에 간섭했는데, 보리스 1세때 볼모로 넘긴 무티미르의 동생 스트로이미르의 아들 크로니미르를 앞세워 라쉬카를 침공해 라쉬카 공작 페타르를 몰아내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크로니미르는 전사했다. 결국 무력으로 라쉬카를 제압하지 못한 시메온은 평화조약 채결과 함께 페타르를 자신의 대부로 인정했다.
904년 아랍인들이 동로마 제국에서 2번째로 큰 도시인 테살로니카를 약탈하고 시민들을 대거 끌고가면서 도시가 텅 비자, 시메온 1세는 즉시 군대를 그쪽으로 보내 에게 해의 중요한 항구인 테살로니카를 자국의 영역으로 삼으려 했다. 이에 레온 초이로스파크테스가 레온 6세의 지시에 따라 시메온에게 가서 협상했다. 그 결과 동로마 제국이 테살로니카를 계속 점유하는 대가로 불가리아가 영토를 남쪽으로 좀더 확장하는 걸 허용했다. 여기서 다른 영역을 대신 희생시키더라도 테살로니카는 사수해야 할 정도로 테살로니카가 당시 제국에 얼마나 중요하게 인식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210]
이러한 군사적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시메온 1세는 불가리아의 국격의 상승과 함께 자신의 야망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면서 동로마 황제와 대등한 관계라는 명분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그가 생각한 해결책은 바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가 했던 것처럼, 로마 황제로 즉위하는 것이었고, 913년에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를 칭하면서 실행에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칭제는 기독교 세계의 성직자 서열 1위였던 교황에게 대관식을 받은 카롤루스의 칭제보다도 명분이 떨어졌기에, 그는 동로마의 어린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에게 딸을 시집보내서 황제의 장인으로서 공동 황제가 됨으로써 진짜 로마 황제가 되려 했다.
912년 5월 11일, 레온 6세가 사망하고 동생 알렉산드로스 2세가 황위에 올랐다.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을 보내 알렉산드로스의 즉위를 축하하면서 평화 조약을 갱신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그 조약은 형 레온이 맺은 것이니 무효라면서 앞으로는 조약 따위는 필요도 없고 더는 공물도 바치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치고는 그들을 쫓아버렸다. 이에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할 준비에 착수했다.
913년 8월, 시메온 1세가 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알렉산드로스 2세의 급사와 당시 7살이었던 콘스탄티노스 7세의 등극,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의 반란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기에 불가리아군을 상대로 전력을 다해 맞서 싸울 수 없었다. 불가리아군은 순조롭게 남하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에 도착했다. 그들이 세운 진영은 마르마라 해에서 황금뿔 만의 상류 구역까지 이어지는 육로 성벽을 따라 세워졌는데, 그 길이가 6km에 달했다고 한다.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어지는 육로를 차단하고 주변 촌락들을 철저하게 파괴하겠다고 으름장 놓으면서 햅도몬 궁전을 장악한 뒤 전령을 보내 협상할 의사가 있음을 통지했다.
당시 콘스탄티노스 7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고 있던 니콜라오스 미스티코스 총대주교는 시메온의 두 아들을 수도로 초청해 콘스탄티노스가 참석한 가운데 블라케르나이 궁전에서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이후 그는 헵도몬 궁전에 있던 시메온을 찾아갔다. 시메온은 총대주교 앞에 엎드렸고, 총대주교는 자신의 관을 시메온에게 씌우며 그가 차르를 칭하는 걸 용인했다. 이후 두 사람은 밀약을 맺었다. 시메온은 그동안 밀린 공물을 보내라고 요구하면서 콘스탄티노스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킬 것을 제안했다. 니콜라오스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자, 시메온은 불가리아로 철수했다. 그러나 이 밀약이 알려지자 니콜라오스와 함께 어린 황제를 보좌하고 있던 섭정단이 반발했다. 니콜라오스가 그런 중차대한 일을 혼자서 결정한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데다 시메온의 딸을 황후로 삼게 했다가는 시메온이 공동 황제가 되려 들 테고, 그랬다간 불가리아 국왕이 제위까지 얻게 되므로 제국은 불가리아에게 넘어갈 게 뻔했다.
섭정단은 914년 2월 정변을 일으켜 니콜라오스를 실각시키고 수도원에 유폐되었던 조이 카르보노프시나 황태후를 복위시켜 섭정을 맡게 했다. 또한 황후의 옛 친구들과 조언자들 역시 원직에 복귀했다. 다만 니콜라오스는 정치 문제에 절대로 뛰어들지 않겠다는 약속을 걸고 총대주교직을 유지했다. 이로 인해 딸을 황제에게 시집보내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시메온 1세는 915년 9월 군을 이끌고 아드리아노폴리스로 진군해 손쉽게 현지 총독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조이 황태후가 도시를 수복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했다는 급보를 접하자, 이렇게 빨리 맞대응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시메온은 황급히 철수했다. 이후 시메온은 2년 동안 테살리아와 이피로스의 크고 작은 도시들을 수시로 공략했다.
917년 6월, 동로마 제국은 불가리아에 전력을 쏟기 위해 아바스 왕조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여기에 디라키움의 스트라테고스인 레온 랍도초스는 불가리아로부터 독립할 기회를 노리던 세르비아 공작 페타르를 설복해 동로마 제국 편으로 끌여들었다. 하지만 사전에 페타르의 배신을 전해들은 시메온은 아켈로오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테오도로스 시그릿사에게 자신의 부대 중 일부 맡겨 세르비아를 공격하게 했다. 시메온은 페타르를 몰아낸 후 페타르에 의해 눈이 먼 브란의 아들 파블레를 공위에 앉힌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세르비아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계략을 꾸몄다. 페타르가 자신의 대부임을 언급하며 신변 보장을 약속하고 회담에 초대한 것이었다. 불가리아의 신변 안전 보장을 믿은 페타르는 회담 초대에 응했다. 하지만 불가리아군은 그를 생포하여 불가리아로 압송했고, 계획대로 파블레를 라쉬카 공작으로 올려 속국화시켰다.[211]
한편, 크리미아 케르손의 군사 총독 요안니스 보가스는 조이 황태후의 밀명을 받았던 불가리아 북동부의 스텝 지대에 거주하고 한 때 시메온과 함께 마자르인들을 협공했던 페체네그인들에게 막대한 선물을 보내며 불가리아를 협공하게 했다. 동로마 함대는 페체네그족을 다뉴브 강 건너편으로 수송해줄 것이며, 그동안 제국 육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진군할 것이었다. 그러면 대규모 협공에 걸려든 시메온은 강화를 제의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을 터였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함대 지휘관 로마노스 레카피노스는 요안니스 보가스와 만나자마자 서로 자신의 권한이 우월하다며 심한 말다툼을 벌였다. 그러더니 로마노스가 군대 수송을 거부해버렸다. 페체네그인들은 제국 함대가 좀처럼 오지 않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편 대 레온 포카스가 이끄는 육군은 수도를 떠나 흑해 연안을 따라 행군했다. 이들은 불가리아로 진입했다가 8월 20일 새벽에 앙키알로스 항구의 외곽에 진지를 차렸다. 시메온은 이들을 기습해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이날 제국군은 거의 전멸했고 레온 포카스를 비롯한 소수의 병사들만이 가까스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재앙의 소식이 수도로 전해지자, 조이 황태후는 로마노스 레카피노스를 공식 심문에 회부하여 실명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이 중재에 나서 준 덕분에, 로마노스는 간신히 처벌을 면제받았다.
917년, 이 유튜브 지도 영상에 의하면 시메온은 군대를 이끌고 헬라스로 진군해 코린토스 지협까지 도달했다. 수많은 피난민이 에우보이아 섬과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달아났지만, 미처 달아나지 못했던 이들은 생포되었고 현지 주민들은 불가리아에 세금을 내도록 강요받았다.[212] 헬라스 속주의 수도 테베는 함락당했고 주변의 요새들은 파괴되었다. 그해 겨울, 시메온은 동부 트라키아를 유린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까지 밀어닥쳤다. 조이 황태후는 다시 레온 포카스에게 군대를 맡겼다. 그러나 레온 포카스는 카사시르타이의 서쪽 외곽에서 또다시 시메온에게 완패했다. 하지만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육지에서 공격해봤자 승산이 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이쯤에서 물러났다.
조이 황태후는 2차례의 참패로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자신과 아들을 지켜줄 후견인을 모색했다. 그녀는 레온 포카스를 황궁으로 불려들어 조언자로 삼았지만 황제의 가정교사 테오도로스는 레온이 적임자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로마노스 레카피노스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에 로마노스는 어린 황제를 받들어 모시겠다고 선언하고 919년 봄에 함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다. 황태후는 그에게 함대를 해산하라고 명령했지만 로마노스는 황태후가 보낸 시종장을 체포했다. 이에 황태후가 해명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지만, 그들은 돌맹이 세례를 맞고 쫓겨났다.
사안이 심각해지자, 황태후는 부콜레온에서 각료 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그녀에게 등을 돌렸고, 결국 그녀는 아들이 "어머니의 섭정을 끝내고 니콜라오스 총대주교와 옛 섭정단원인 마기스테르 스테파노스에게 공동 섭정을 맡기겠다"고 연설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이튿날 아침 한 무리의 병사들이 조이 황태후를 성 에우페미아 수녀원으로 호송하러 찾아왔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가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자 병사들은 마음이 흔들렸고, 그 덕분에 그녀는 권력만 잃은 채 황궁의 규방에 머물 수 있었다. 대 레온 포카스가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 진압당했고, 로마노스 레카피노스는 920년 12월 17일 공동 황제 로마노스 1세로서 권좌에 오른 뒤 자신의 딸 엘레니 레카피니를 콘스탄티노스 7세의 황후로 삼았다.
시메온은 로마노스를 찬탈자로 간주했으며, 일개 아르메니아 농민의 아들이 자신이 원하는 지위를 차지한 것에 모욕감을 느꼈다. 그는 로마노스로부터 혼인을 통해 친족 관계를 맺자는 제의를 거부하고 920년 가을 대군을 일으켜 트라키아로 진군해 다르다넬스 해협에 도착하여 소아시아의 람파쿠스 시 바로 맞은편에 있는 갈리폴리 반도 해안에 숙영지를 세웠다. 만약 불가리아군이 갈리폴리와 람파쿠스를 확보한다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에게 해로부터 단절될 수 있었다. 총대주교 니콜라오스가 시메온을 찾아가 협상을 시도했지만, 시메온은 "찬탈자 로마노스가 물러나지 않는 한 협상은 없다"며 거부했다.
시메온은 자신을 격퇴하러 오는 동로마군을 잇따라 격파하고 황금뿔만 건너편의 스테논(Stenon) 일대를 약탈했고, 로마노스가 아끼던 페게(Pegai)의 궁전들을 불태워 버렸다. 한편 시메온에 의해 세르비아 공작으로 선임되었던 파블레 브라노비치는 동로마 제국의 편으로 돌아서자, 파블레의 배신에 분노한 시메온은 구금된 자하리야를 앞세워 다시 라쉬카를 공격했고, 921년 자하리야 프리비사블예비치를 파견해 그를 토벌하게 했다. 자하리야는 파블레를 물리치고 세르비아를 장악했지만, 얼마 후 동로마 제국의 편으로 돌아섰다. 이는 자하리야가 짜리그라드에서 성장하여 본질적으로 친동로마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물론 불가리아의 실상을 보고 느낀 것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자하리야는 라쉬카가 불가리아보다는 동로마와 함께 하는 것이 좀 덜 위험하며, 세르비아에 더 유익하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자하리야의 배신은 곧 불가리아 시메온의 군사적 공격을 불렀고, 마르마이와 테오도르 시르기짜 두 장군이 이끄는 불가리아군이 라쉬카를 공격했고, 시메온 1세 본인은 동로마 제국 공격에 전념했다.
923년, 시메온은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점령한 뒤 끝까지 저항하다가 붙잡힌 모롤레온 총독을 고문 후 처형했다.하지만 악명높은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뚫기엔 역부족이라는 걸 잘 알았던 그는 924년 파티마 왕조와 협상하여 함대를 지원받고 해상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려 했다. 그러나 아랍 대표들을 데리고 귀국하던 불가리아 사절들은 공해상에서 로마 제국 함대에게 사로잡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다. 로마노스는 불가리아 사절을 억류하고 아랍인들에게는 선물을 안겨주면서 칼리프에게 화친의 의사를 전하고 시메온이 주겠다는 선물보다 더 많은 공물을 매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로 인해 파티마 왕조는 시메온을 돕지 않기로 했다. 설상가상으로, 924년 배신자 자하리야를 토벌하는 임무를 맡아 세르비아에 파견되었던 테오도로스 시그릿사와 마르마이스가 자하리야가 지휘하는세르비아군의 매복 공격을 받고 전사해 수급들이 충성의 표시로 동로마 제국에 보내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시메온은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자 로마노스와 평화 협상을 갖기로 했다. 924년 9월 9일, 로마노스는 친히 협상 자리에 나와서 시메온과 대면했다. 그는 이어진 회의에서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는 평화를 구걸하기보다는 그리스도교도로서의 선한 본성에 호소하면서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생각을 바꾸라고 열심히 설득했다. 또한 그는 연례 공물을 늘리겠다고 제안하면서도 그 제안을 설교 속에 포함시킴으로서 자신이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자애로운 후원자가 선뜻 도와주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당대 문헌에 따르면, 그 순간 독수리 두 마리가 하늘 높이 날아 함께 선회하더니 서로 떨어져서 한 마리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망루 위로 급강하하고 다른 한 마리는 서쪽의 트라키아 쪽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불가리아와 로마 제국은 하나로 뭉칠 수 없다는 신의 계시라고 여겼다고 한다.
협상의 결과 동로마 제국은 매년 최고급의 공물을 불가리아에게 보내주는 대신 시메온은 제국의 영토에서 철수하고 그동안 점령한 흑해 연안의 요새들을 반환하기로 했고, 시메온 1세는 콘스탄티노스 7세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낼 것을 포기하고, 로마노스의 제위를 인정하는 대신, 로마노스는 시메온 1세가 불가리아인의 황제를 칭하는 것은 묵인하게 되었다. 이로써 시메온 1세은 비록 진짜 로마 황제가 되진 못했지만, 황제 칭호를 인정받아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면서 로마 황제와 대등한 관계가 된다는 목표는 달성하게 되었고,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919년 대제라는 칭호를 받은 유일한 불가리아 군주가 되었다.
이후 시메온 1세는 말머리를 돌려 클로니미르의 아들인 차슬라프와 함께 대규모 군대를 보내 세르비아를 공격했다. 불가리아의 대규모 군대가 공격해온다는 소식을 들은 자하리야는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겁을 먹고 크로아티아로 도망쳤다. 자하리야가 도망쳤다는 소식을 들은 불가리아군은 차슬라프를 세르비아의 군주로 맞는다는 선언식을 열어 세르비아의 모든 지방 수령들을 불러모았다. 지방 수령들이 모이자 그들을 모두 잡아 불가리아로 압송하여 투옥하고 세르비아를 약탈·파괴하였다. 그리하여 세르비아는 이후 2~3년간 황폐화되었으며 군주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시메온 1세 시기 불가리아 제국 영토
동로마 제국과의 조약과 별개로 시메온 1세는 자신의 개인적 야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애당초 시메온은 동로마 제국에 유학한 경험이 있어 차르의 어원인 카이사르가 사실상 부황제를 뜻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과 불가리아의 국격을 높이려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92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동로마 제국을 공격할 준비를 준비했으며, 별도로 세르비아와의 전쟁, 크로아티아와 페체네그인들과의 충돌 등을 통해 불가리아 제국의 축적된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게 되었다.
특히 925년 시작한 크로아티아 왕국과의 전쟁은 시메온 1세가 동로마와의 전쟁중 발생한 라쉬카의 공작 자하리야 프리비슬라블예비치가 불가리아 제국을 배신하고 동로마 제국과 손을 잡으려고 하자 이에 대한 응징으로 라쉬카를 침공해 점령하고 자하리야는 크로아트 공국으로 도주하면서 시작되었다. 라쉬카를 점령하면서 불가리아는 크로아트와 접하게 되었다. 925년 일단 불가리아와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이 일단 잠점적으로 끝난 상황에서 크로아트 공국은 토미슬라브가 새로운 공작으로 즉위한 후 10년만에 왕국을 자칭할 정도로 발칸 서부의 강국으로 부상한 상태였다.
토미슬라브는 자하리야를 따라 도주한 세르비아인들을 받아들였고, 동로마 황제 로마노프 1세로 부터 달마티아 비잔틴 테마의 해안 도시에 대한 어떤 형태의 통제권을 부여받았을 수 있으며, 도시에서 수집한 공물 중 일부를 보상으로 받아 동로마 제국의 동맹이 되어 있었다. 이에 시메온은 동로마의 동맹 및 불가리아의 잠재적 적들을 숨기고 있는 크로아티아를 위협으로 보았고 이에 대해 원정을 단행했다. 자신의 군사 지휘관중 한명인 알로고보투르에게 적당한 수의 군대를 붙여 크로아티아를 공격하게 했다.
콘스탄티노스 7세에 따르면 당시 크로아티아는 보병 10만 명, 기병 6만 명, 대형 전함 80척, 소형 전함 100척으로 구성된 군대를 배치할 수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이 숫자는 상당한 과장으로 간주되며 실질적으로 2만 명으로 추정되지만 이에 비해 불가리아 군대의 규모는 불명이다.
불가리아인들은 보스니아 동부 산악 지역에서 크로아티아 군대와 맞닥뜨렸는데, 불가리아 군대는 익숙지 않은 지리적 문제로 인해 전투가 시작될 당시 불가리아인들은 불리한 위치에 있었고 크로아티아군은 보스니아 고원의 산악 지형에서의 전투 경험이 더 많았기 때문에 자신들보다 수적으로 많은 적들에 맞춰 군사 전술, 전투 시간, 장소를 조정했고, 이는 불가리아의 패배로 귀결되었고, 알로고보투르는 병사들과 함께 전사했다.
시메온은 큰 패배를 당했지만 그의 병력 대부분을 잃지 않았다. 그는 원정에 군대의 일부를 보냈고 그 군대는 큰 손실을 입었지만 그의 전체 군대는 동로마의 또 다른 침공을 수행할 만큼 충분히 강력했다. 이에 토미슬라브는 불가리아와 합의를 모색했고, 교황 특사 마달베르트의 중재로 평화가 체결되어 전쟁 전 상황이 회복되었지만 크로아티아인들은 로마인들과의 동맹을 포기했다. 이후 시메온은 죽기 전 보로포러스 해협을 포위하기 위해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 압둘라 알마흐디와 협상하는 의지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927년 5월 27일 심장마비로 돌연 사망하였고, 그의 차남인 페터르 1세가 새 차르가 되었다. 본래라면 장남인 미하일이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가 페터르의 모친보다 신분이 낮았기에 수도승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페터르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는지, 그의 외삼촌인 게오르기 수르수불이 섭정이 되었다.
페터르가 즉위하자마자 섭정인 게오르기 수르수불은 트라키아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이에 동로마 제국 황제 로마노스 1세는 결혼 동맹을 제안하는 한편 세르비아와의 동맹을 추진해 불가리아를 견제하려 했다. 페터르 1세는 전쟁을 지속하는 건 무익하다고 판단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로마노스 1세의 손녀 마리아와 결혼했다.
불가리아 제국 황제가 불가리아 인과 로마 인의 황제를 자칭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쟁의 소지가 남아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협상을 통해 일단 불가리아 제국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는 현상 유지하는 형태의 40년간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이후에 체결된 협정에 따라 불가리아 대주교는 공식적으로 불가리아 총대주교로 승격하였으며, 실리스트라 대주교가 최초의 불가리아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리고 국경선은 897년과 904년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정해졌고, 동로마 제국의 연간 공물 지급이 갱신되었다.
그러나 모두가 평화를 반가워한 건 아니었다. 동로마 제국에 대한 강경책을 폈던 선제 시메온을 지지했던 이들은 페터르 1세의 평화 지향 정책에 반대했다. 그러다가 게오르기 수르수불이 섭정 자리에 물려나자 내부에서 페터르가 차르가 되는 것에 못마땅한 세력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928년, 페터르의 동생 요한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지만 발각되자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했다. 930년 시메온의 장남 미하일이 수도원을 탈출한 뒤 스트루마 일대에서 많은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얼마 안가서 병사했고, 페터르는 미하일의 잔당을 소탕했다.
931년, 세르비아의 통치자 차슬라프 클로니미로비치는 프레슬라프에서 탈출한 뒤 세르비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페터르는 반란 진압을 위해 토벌군을 잇달아 파견했으나 모조리 격파당하자 어쩔 수 없이 세르비아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 여기에 마자르 족이 934년, 943년, 948년, 958년에 잇달아 불가리아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고, 불가리아군은 연전연패했다. 그는 그들에게 공물을 바칠 수밖에 없었고, 다뉴브 강 북쪽의 불가리아 영역에 정착하는 걸 허용했다.
이렇듯 제위 초기에는 내란에 시달렸고 후기에는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긴 했지만, 그의 재위 기간은 전반적으로 평화로웠다. 그는 역대 불가리아 제1제국 군주들 중에서 가장 긴 재위기간인 43년간 집권하면서 교회에 아낌없이 기부하는 등 정교회 진흥 정책을 실시했다. 하지만 이것이 역효과를 야기하여, 성직자들이 기득권 세력으로 군림한 뒤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백성을 착취하는 결과를 야기하였다. 민중은 이에 반감을 품었고, 많은 이가 이단으로 정죄된 보고밀파를 수용했다. 페터르는 이들을 강경하게 탄압하여 정교회를 수호하고자 하였다.
965년 초, 불가리아는 일찍이 제국과 맺은 조약에 따라 제국의 공물을 받기 위해 대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니키포로스 2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사 앞에서 불가리아인들을 혐오스럽고 더러운 거지 민족이라고 비난하고 불가리아 왕은 짐승 가죽 옷이나 입는다고 욕한 뒤 내쫓았다. 그후 니키포로스는 군대를 일으켜 불가리아 변방으로 쳐들어가 국경 요새 몇 곳을 함락시켰다. 니키포로스 2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키예프 루스의 발칸 반도 진출을 용인했다. 이에 키예프 루스의 스뱌토슬라프 1세는 968~969년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벨키 플레슬라프까지 진격했다. 페터르 1세는 이들의 침략에 심한 압박을 받다가 970년 1월 30일 뇌졸중으로 급사했다. 차르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불가리아는 무기력해졌고, 아들 보리스 2세는 키예프 루스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4.3.6. 몰락기
즉위한지 얼마 안 가서 보리스 2세는 동생 로만과 함께 키예프 루스 대공 스뱌토슬라프 1세가 이끄는 슬라브군이 불가리아의 수도 프레슬라프를 공략하면서 생포되었고, 키예프 대공의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하였다. 그 후 슬라브군을 따라 여러 곳을 정처없이 떠돌다 971년 봄 슬라브군을 격파하고 프레슬라프를 공략한 요안니스 1세에게 붙잡혔다.요안니스 1세는 보리스와 동생 로만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데려가서 개선식에 강제 참석시켰고, 보리스는 이 행사에서 차르의 휘장을 빼앗기고 마기스토로스 칭호를 대신 받았으며, 로만은 거세된 뒤 수도원에 보내졌다. 이후 불가리아 동부는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라즈메타니차를 비롯한 서부는 자유롭게 남아 있던 상태였다. 927~969년 라즈메타니차의 코미트는 니콜라라는 인물로 그가 죽을 당시 코미트 또한 세습되었는지 969년 죽사망할 당시 자신의 네아들인 다비드, 모세, 아론, 사무일 등에게 자신의 임지를 분할 상속했다. 971년 불가리아의 크롬 왕조가 키예프 루스와 동로마 제국에 공격을 받고, 몰락하고, 이들 형제들을 다스리던 서부 지역만 잔존한 상태에서 서부 불가리아에서 세력을 일으켜 동로마 제국에 맞섰다.
97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에게 사절을 보내 동로마 제국에 공동 대응할 것을 제의하였고, 다비드에게 테살로니키와 테살리아 주변의 국경지대를 지키게 하였다. 또한 모세에게 에게해 연안과 세레스에 대한 공격의 전초기지가 될 스트루미차를 다스리게 하였고, 아론은 스레데츠를 통치하며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베오그라드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키게 하였다. 사무일 본인은 비딘의 강력한 요새에서부터 불가리아 북서부를 통치했으며, 장차 옛 수도 프레슬라프를 포함한 동부 불가리아 영토를 해방시키고자 하였다.
976년 1월 요안니스 1세가 사망하자, 사무일은 본격적으로 공세를 시작했다. 동로마 제국에 병합되어 카테파노(katepano)라 불리는 군지휘관이 통치하는 라스 카테파노(Catepanote of Ras)령이 된 라쉬카 또한 불가리아 제국령으로 병합되었다. 동로마 제국군은 패배를 거듭하여 트라키아로 패주하였고, 동로마의 정복에 반대하지 않았던 불가리아 귀족과 관리들이 모조리 처형되었다. 당시 제국은 바르다스 스클리로스의 반란을 수습하느라 불가리아의 침략에 대처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과정에서 사무일의 두 형인 다비드와 모세가 사망했는데, 다비드는 프레스파와 코스투르 사이에서 방랑하는 블라흐족에게 살해당했고, 모세 또한 세레스를 공격하는 도중 던져진 돌에 맞아 전사하면서, 이제 불가리아의 권력은 아론과 사무일이 양분하게 되었다.
이에 어린 황제를 대신해 실권을 쥐고 있던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는 음모를 통해 사무일을 실각시키기로 하고, 사무일의 형 아론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시켜주고 트라키아의 지배자로 세워줄 테니, 사무일을 배신하라고 권유했다. 아론은 이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양자는 긴밀한 교류를 이어갔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무일은 아론을 공격했고, 976년 6월 14일 뒤프니차 인근에서 아론과 그의 부하들을 모조리 처단했다. 다만 아론의 아들인 이반 블라디슬라프만은 사무일의 아들 가브릴 라도미르가 간청한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론을 이용한 공작이 실패로 돌아가자,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는 전 차르인 보리스 2세와 로만을 불가리아로 돌려보내서 내분을 일으키게 하였다. 보리스 2세는 국경 근처의 숲을 지나가던 중 동로마 복장을 입은 것을 보고 오해한 불가리아 경비대에게 살해되었다. 조금 뒤쳐져서 걷던 로만은 경비대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로만은 비딘으로 끌려갔는데, 사무일은 의외로 그를 차르로 추대하고 자신은 장군을 자처했다. 당시 로만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갔을 때 요안니스 1세의 명령에 따라 거세되었다. 따라서 그는 자식을 둘 수 없으니 사무일이 결국 그의 뒤를 이을 게 확실했다. 로만은 사무일에게 국정을 맡겼고, 자신은 신앙 생활에 전념했다.
사무일은 동로마군이 바르디스 스클리로스의 반란군에 집중된 틈을 타 트라키아와 테살로니키, 테살리아, 헬라스, 펠로폰네소스 일대를 휩쓸었고, 많은 동로마 요새들을 공략했다. 977년 테살리아의 중요한 항구도시인 라리사를 포위하여 983년까지 공성전을 벌였다. 바실리오스 2세는 구원군을 파견했으나 중도에 격파당했다. 결국 라리사 주민들은 항복하였고, 남자들은 불가리아 군에 강제 입대하고 여자와 노약자는 불가리아 내륙으로 끌려갔다. 985년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를 숙청하고 실권을 잡은 바실리오스 2세는 이대로 밀리기만 하면 답이 없다고 판단하고, 986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출정하여 이흐티만 주변의 산맥지대를 지나 소피아를 포위했다. 그러나 20일 동안 공성전을 벌이고도 별 소득을 겪지 못하자 트라키아로 철수했다. 사무일은 트라야누스 관문 주변 계곡에 매복해 있다가 986년 8월 17일 그곳을 지나던 동로마군을 습격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군대는 와해되었고 그가 소유한 보물들은 모조리 사무일에게 돌아갔다. 바실리오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뒤, 불가리아가 자신에게 항거했던 날을 뼈저리게 후회할 만큼 철저한 복수를 해주겠다고 맹세했다.
그 후 바르다스 포카스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동로마 제국이 또다시 내전에 휘말리자, 사무일은 테살로니키에 공세를 개시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그레고리오스 타로니티스에게 군대를 맡겨서 테살로니키를 지키게 했지만, 989년까지 연전연패했다. 불가리아군은 동로마 제국 영역 깊숙이 침투하여 베로이아 등 여러 중요한 요새들을 점령했다. 또한 남쪽에서는 이피로스를 장악했고, 서쪽에서는 아드리아 해의 디라키움을 공략했다. 991년 바르다스 포카스와 스클리로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한 바실리오스 2세는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했다. 황제는 테살로니키로 진군하여 그곳의 방어망을 강화한 뒤, 도시의 수호 성인인 성 데메테리오스의 제단 앞에 기도를 올렸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사무일은 패배를 면치 못했고 로만은 포로로 잡혔다. 동로마 제국군은 베로이아를 포함한 여러 도시를 수복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이후에도 불가리아를 꾸준히 공격했지만, 995년 아랍인들이 소아시아를 침략하자 많은 군대를 동방으로 보내야 했다. 사무일은 이 틈을 타 남진하였고, 996년 테살로니키 전투에서 적군을 섬멸해 그레고리오스 타로니티스를 죽이고 그레고리오스의 아들 아쇼트를 사로잡았다. 이후 테살리아를 약탈하고 테르모필레 관문을 넘어 헬라스 테마로 진입해 코린트까지 유린하고 약탈했다. 니키포로스 우라노스 휘하의 동로마군이 그들을 추격했고, 사무일은 군대의 방향을 돌려 이를 맞이했다. 양군은 스페르케이오스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봤는데, 마침 강이 범람해서 건너기 힘들었다. 그래서 불가리아군은 방심하고 있었으나, 우라노스는 996년 7월 19일 밤 극비리에 상류 쪽으로 강을 건너서 불가리아군을 급습했다. 사무일은 팔에 화살이 꽂힌 채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그는 아드리아 해의 주요 항구인 디라키움을 점령한 후 달마티아의 오지를 횡단하여 보스니아까지 행진해 불가리아로 돌아갔다.
997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로만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무일은 정식으로 차르에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5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을 차르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고, 불가리아에 가톨릭을 전파하고 싶어했던 교황은 긍정적인 답변을 해줬다. 998년, 세르비아의 두클랴 공국이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으려 하자, 그는 군대를 일으켜 두클랴를 침공했다. 요반 블라디미르 대공을 비롯한 적군이 두클랴 산성에 들어가자, 그는 일부 병력을 산기슭에 남겨두고 울치니의 해안 요새를 포위했다. 요반 블라디미르 대공은 항복을 거부했지만, 세르비아 귀족들이 불가리아군에 계속 투항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투항했다. 요반은 프레스파에 있는 사무일의 궁전으로 끌려갔다.
그 후 불가리아군은 달마티아를 통과하여 코토르를 공략하고, 뒤이어 두브로브니크를 공격해 함락시키지는 못했지만 주변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또한 크로아티아를 침공하여 스플리트, 트로기르, 자다르까지 공략한 뒤 보스니아와 라슈카를 거쳐 불가리아로 돌아갔다. 그는 딸 테오도라 코사라를 요반 블라디미르와 결혼시킨 뒤 두클랴로 돌려보냈고, 또다른 딸 미로슬라바 공주를 아쇼트와 결혼시킨 뒤 디라키움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장남이자 후계자인 가브릴 라도미르와 헝가리 대공 게저의 딸과 결혼시킴으로써 헝가리와의 결혼동맹을 성사시켰다.
사무일 시기의 불가리아 제국의 영토
5. 에게 해 일대
에게해 일대는 동로마 제국의 영역 내에 있으면서 오랫 동안 평화기를 누려왔다. 이 지역들은 해로로 통해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그외의 지중해의 여러 지역들을 연결해왔기에 해상무역의 거점지 역할을 해왔다. 에게 해의 섬들은 제각기 아카이아와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아시아, 그리고 당시 북아프리카 리비아 바르카 지방과 묶여 있던 크레타 등의 속주들로 분할되어 있었다.하지만 7세기 중반부터 그 평화가 깨지기 시작했다. 632년 신흥 종교인 이슬람교를 국교로 메디나에서 건국된 제정일치의 정체로 시작된 라시둔 칼리파국은 1년만에 아라비아 반도 전체를 통일한 후 1년만에 동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를 공격해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결과 동로마 제국은 레반트 지역을 시작으로 644년에 중요한 곡창 지대였던 이집트마저 빼앗기면서 동지중해 일대가 안전하지 않게 되면서 에게해 일대 또한 이슬람 세력에 의해 위협을 받게 되었다. 결국 648년 이슬람 세력은 해군을 창설했고, 652년 시칠리아와 로도스, 키프로스 등을 공격하다가 655년 아나톨리아 리키아 연안 포이닉스 앞바다에서 동로마 황제 콘스탄스 2세가 직접 지휘한 500척의 해군이 아부 알 아와르가 이끌던 이슬람 해군 200척의 해군을 막으려 했지만 결국 패배해 이슬람 제국이 동부 지중해 해상권 장악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슬람 해군 또한 상당한 피해를 입었기에 잠시 추스리고 있다가 671년 스미르나, 키지코스 해군 거점 마련하다가 1년 후 크레타 공격을 시작으로 로도스, 타르수스 점령하였다. 673년 초대 칼리파 무아위야 1세의 아들 야지드 1세가 지휘하는 이슬람군이 최초로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기 시작, 1년간 포위를 했고, 이기간 675년에 크레타 섬이 점령되었만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4세의 노련한 지위와 그리스의 불 앞에 패배하였고, 이후 678년 동안 재차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실패로 귀결되었다.
패배한 칼리프 무아위야는 679년 콘스탄티노스의 강화 제의를 받아들여 그동안 점령했던 에게 해의 섬들을 반환하고 황제에게 매년 노예 50명, 말 50마리, 금 3천 파운드의 공물을 보냈다. 30년간 평화가 지속되었고, 이후 680년 이후 우마이야 제국이 제2차 피트나를 겪으면서 동로마 제국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장기간의 대내전은 명군 아브드 알 말리크의 치세인 692년에야 진정되었고, 우마이야 제국은 전성기를 맞았다. 세바스토폴리스 전투에서 동로마 군대를 격파하여 내전기에 상실했던 아르메니아를 회복했고, 698년에 북아프리카의 중심도시 카르타고를 함락하여 마그레브를 평정했다. 아브드 알 말리크의 뒤를 이은 왈리드 1세 시기에는 이베리아 반도 와 중앙아시아 및 인도의 신드 지방이 정복되었다.
우마이야 왕조의 상승세를 경계하던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식량을 비축해 두었다.715년 2월, 왈리드 1세가 사망하고 술라이만이 뒤를 잇자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정권 교체기를 노려 시리아를 공격하려 했는데, 출정 명령을 받은 옵시키온 테마군이 오히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고, 6개월 간의 포위 공격 끝에 아나스타시오스 2세를 폐위시킨 후, 옵시키온 테마의 세금 징수원을 '테오도시오스 3세'로 즉위시켰다(715년 11월). 한편, 동로마 제국의 내분을 지켜보던 우마이야 왕조의 신임 칼리파 술라이만은 시조 무아위야 1세 때에 이루지 못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을 결심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나톨리콘 테마의 레온과 아르메니콘 테마의 아르타바스도스는 신임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으며, 이에 칼리파 술라이만은 동로마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결심했다. 하지만 술레이만의 공격은 실패로 끝났고, 716년 아나톨리콘 테마의 레온 3세가 아르타바스도스의 추대를 받고 황제를 자칭, , 옵시키온 테마로 진격하여 니코메디아를 함락시킨 후, 테오도시오스 3세의 아들을 생포했다. 동시에 마슬라마는 이븐 무아드와 합류하여 페르가몬과 사르디스를 약탈하고, 에게 해 연안에서 월동했다. 해가 바뀐 717년 3월 말, 레온의 군대는 별 저항없이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고, 수도원으로 은퇴한 테오도시오스 3세의 양위를 받아 레온 3세로 즉위했고, 불가르 칸국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황제로 즉위한 레온 3세는 마슬라마와의 밀약을 지키지 않았다. 717년 6월, 마슬라마는 수만명의 병사들을 태운 전함과 함께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나 8월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외곽에 상륙했다. 그들은 성을 쌓아 장기 주둔을 준비했고 주변의 트라키아 지역을 약탈했다. 9월 초에 보스포러스 해협에 상륙한 이븐 무아드의 우마이야 군대가 마슬라마와 합류했다.
하지만 우마이야 해군은 40년 전의 포위전 때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의 불에 막혀 패퇴했다. 따라서 동로마 해군은 여전히 흑해의 곡창 지대[213]로부터 밀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한편, 717년 10월에 술라이만이 죽고, 그의 사촌인 우마르 2세가 칼리파로 즉위했다.
718년 봄, 우마이야 왕조의 증원 함대가 마르마라 해에 진입하며 본격적인 포위가 시작되었다. 8세기의 아랍 연대기는 무슬림 전사의 숫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고 기록했고 10세기의 연대기는 그 숫자가 120,000 ~ 200,000명에 이르렀다고 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의 연대기 작가 테오파네스는 이슬람 함대가 1,800여 척에 달했다고 기록했다. 그 해 6월 경, 마슬라마의 군대도 프리기아를 점령한 후 헬레스폰트 해협(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넜고 (워낙 대군이었기에) 7~8월의 두 달에 걸쳐서야 1년 전에 와있었던 선발대와 합류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 바깥에 포위망을 구축한 우마이야군은 앞뒤로 성벽을 쌓아 동로마군의 후방 습격에 대비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여담으로 이는 갈리아 전쟁 시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보여주었던 2중 포위망과 유사하다. 이에 위협을 느낀 레온 3세는 마슬라마에게 수도의 시민 전체 몫에 해당하는 금화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평화를 제시했다.
9월 3일에는 헵도몬에 정박 중이던 술라이만 이븐 마우드의 함대가 보스포루스 해협에 나타나는 등 동로마 측에는 더욱 악재가 쌓여갔다. 술라이만의 함대는 갈라타와 칼케돈 인근에 정박했고, 따라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흑해와의 항로도 이용하기 힘들어졌다.
처음에는 우세를 점한 우마이야군이었지만 동로마 해군을 격파하지 못한 이상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봉쇄하는 건 불가능했다. 전투는 지구전 양상으로 흘러갔는데 마침 717년에서 718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은 혹독했고, 보다 더운 지역 출신이라 우마이야군은 월동 준비가 제대로 안 되어 동상, 기아, 전염병이 겹쳐지면서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공성용 동물들도 그 사이에 많이 죽어서 공성에 차질이 생겼다고도 한다.[3] 파울로스 디아코누스는 기아와 질병으로 무려 300,000명이나 사망했다고 추산했다.
새로 칼리파가 된 우마르 2세는 이집트와 키레나이카에서 새로 편성한 병력을 2개 함개로 나누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 이 상황을 타개하려고 했다. 지원군은 그리스의 불을 피해 니코메디아와 칼케돈에 각각 상륙했지만 많은 수가 이집트 출신 기독교인이었던 이 병력에서 상당수의 탈영병이 속출했고, 그에 힘입은 레온 3세는 다시금 해전에서 승리하여 우마이야군의 보급품을 빼앗았다.
여기에 테르벨이 이끄는 불가르 칸국의 기습까지 당하자 칼리파 우마르 2세는 더 이상 공성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후, 포위 13개월 째에 철수를 개시했다. 그런데 재수없게도 하필 우마이야군이 철수하는 도중에 산토리니 분화가 겹쳐 오직 5척의 배만이 귀환할 수 있었다. 당시 이슬람측 기록으로만 150,000명의 무슬림이 사망했다고 기록할 정도의 대참패였다.
다만 이 전쟁에서 알 수 있듯이 에게 패 섬들은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키기에는 더 이상 전략적 요충지가 아님임을 증명하고 말았다. 다만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끝으로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위협을 받지 않게 되었고, 무엇보다 에게 해의 도서 지역들 중 가장 컸던 크레타는 지중해 동부 해상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만큼 사력을 다해 사수했다. 그러나 821~823년 슬라브인 토마스의 대규모 반란으로 인해 제국이 혼란해지면서, 크레타의 방비는 자연스럽게 허술해졌다.
그러던 826년, 코르도바 아미르국에서 추방된 뒤 알렉산드리아를 잠시 점거했다가 도로 쫓겨난 아부 하프 우마르 알 이크리티시(Abu Hafs Umar al-Iqritishi)가 아끄는 아랍인들이 크레타 섬에 상륙했다. 그들은 2년간 전쟁을 치른 끝에 크레타 섬을 완전 장악하고 기존의 중심지였던 고르티나를 파괴한 뒤 새로운 성채를 건설했다. 그들은 이 성채에 라브드 알 한다크(ربض الخندق)[214]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그리스인들은 이 성채를 한닥스(Χάνδαξ)라고 불렀다. 그 후 한닥스를 중심지로 삼은 크레타 토후국은 아바스 왕조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했지만 그와 별개로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이들은 크레타 섬 북쪽에 우치한 키클라데스 제도를 습격하는 등 에게해에서 해적 행위를 일삼으며 동로마 제국의 본토인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해안 지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기독교도들을 대거 잡아서 노예로 팔았다.
동로마 제국은 당연히 크레타를 탈환하고자 노력했다 미하일 2세는 안달루스의 이슬람 해적들에 의해 크레타가 정령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크레타를 탈환하기 위해 원정군을 보냈다. 하지만 슬라브인 토마스의 대규모 반란으로 인해 동로마군의 힘은 약해진 상태였고, 무엇보다 동시기 튀니지의 아글라브 왕조 또한 시칠리아를 공격하고 있던 상태였다. 미하일 2세는 두 차례나 원정군을 파견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다만 키클라데스 제도를 습격하는 이들의 공격을 간신히 막을 수준이었다. 839~40년 미하일 2세는 아바스 왕조에 대항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된 코르도바 토후국의 압드 알 라흐만 2세의 사절을 통해 상호협조조약을 서명하면서 로르도바 토후국과 함께 크레타 토후국에 대한 공동 전선을 제안했지만 무산되었다.
842~843년, 미하일 3세의 섭정인 테오크리스토스가 파견한 동로마 함대가 크레타의 일부 영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테오크리스토스는 다른 전선에서 외적과 대항하느라 크레타에 지속적인 지원을 하지 못했고, 크레타 토후국은 얼마 후 이들을 축출했다. 866년 봄, 미하일 3세의 또다른 섭정 바르다스가 크레타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개시하려 했지만, 출항 전 날에 미하일 3세와 바실리오스 1세의 음모로 인해 살해당했다. 이후 855년 아부 하프 우마르 알 이크리티시가 죽고 슈아브 이븐 우마르가 크레타의 토후가 되었다. 873년 동로마 황제가 된 바실리오스 1세는 시칠리아와 함께 크레타 또한 수복하려고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880년 슈아브 이븐 우마르가 죽자 우마르 이븐 슈아브가 뒤를 이었지만 895년 펠레포네소스 반도 연안을 약탈하다가 난파되어 펠레포네소스 총독 콘스탄티노스 테사라콘타페키스에 의해 생포되었고, 그의 자리는 동생 무하마드 이븐 슈아브 알 자쿤이 이어 받았다.
904년, 트리폴리의 레온이 테살로니카를 습격해 20,000명 이상의 포로를 잡아들인 뒤 크레타에 모조리 팔았다. 910년 무하마드가 죽자 우마르 이븐 슈아브의 아들 유수프 이븐 우마르 이븐 슈아브가 토후직을 승계했다. 이에 레온 6세는 911년 이메리오스 제독 휘하 177척을 맡겨 크레타를 탈환하게 했다. 이메리오스는 911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6개월간 한닥스를 포위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912년 4월, 수도로부터 황제의 건강이 악화되어 오래가기 어렵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포위를 풀고 수도를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그의 함대가 히오스 섬을 돌았을 때 트리폴리의 레온이 이끄는 사라센 함대가 습격했고, 이메리오스는 얼마 안 되는 함선만 수습하여 본국으로 도주했다.
915년 유수프 이븐 우마르 이븐 슈아브가 죽고 알리 이븐 유수프 이븐 우마르가 토후직을 승계해 925년까지 통치하다가 사망한 후 숙부 아흐마드 이븐 우마르가 토후직을 승계했다. 그의 통치 기간인 930년대에 크레타의 이슬람 해적들은 에게 해 주변의 비잔틴 영토를 심하게 습격했으며, 펠로폰네소스 반도, 중부 그리스, 아토스 산, 소아시아 서부 해안에 공격이 기록되었다. 940년 아흐마드가 사망하고 아들인 슈아븐 이븐 아흐마드가 토후직을 승계했지만 3년만에 죽은 후 동생인 알리 이븐 아흐마드가 승계한다.
949년, 해군 사령관 콘스탄티노스 곤길리스가 콘스탄티노스 7세의 명령을 받들어 크레타 탈환에 착수했다. 그는 섬에 순조롭게 상륙한 뒤 한닥스를 포위했지만, 원정군 진영을 요새화하는 것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사라센군이 야간 기습을 할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결국 군대는 와해되었고, 곤길리스는 기함을 타고 간신히 탈출했다. 콘스탄티노스 7세는 이를 복수하고자 더 많은 함대를 준비하고 한닥스 요새를 공략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고, 그 사이 알리 이븐 아흐마드가 죽고 슈아이브 이븐 아흐마드의 아들인 압드 알 아지스 이븐 슈아브가 토후직을 승계했다. 콘스탄티노스 7세는 959년 원정을 추진하기 전에 사망했다.
콘스탄티노스 7세 사후 황위에 오른 로마노스 2세는 정사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환관 요세프 브링가스가 권세를 누렸다. 그는 선제의 계획을 밀어붙이기로 하고, 무슬림과의 전쟁에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던 니키포로스 포카스를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삼았다. 니키포로스는 소아시아와 에페수스 일대에서 병력을 소집해 2만 7천 명의 해군 및 선원들을 징집하고 5만 명의 육군을 태우기 위한 308척의 함대를 소집했다. 레온 부제에 따르면, 그의 함대는 그리스의 불을 갖춘 드로몬 위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의 크레타 탈환 작전의 막이 올랐다.
960년 늦봄에 출항한 니키포로스 포카스의 함대는 7월 13일 크레타에 상륙했다. 테오파네스 콘티니아토스와 테오도시오스 부제는 동로마군이 상륙하는 동안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다고 기술했지만, 레온 부제는 사라센들은 해안가에 군대를 배치하고 적이 상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밝혔다. 레온 부제의 설명에 따르면, 니키포로스는 적이 기다리고 있는 걸 보고 병력을 3개 대열로 편성한 뒤 곧바로 돌격했고, 압드 알 아지스 이븐 슈아이브와 그가 지휘하고 있던 사라센 해적들은 적의 예상치 못한 맹공에 크게 패한 뒤 한닥스 요새로 달아났다고 한다.
그 후 니키포로스는 한닥스 요새를 곧바로 공격해 단시일에 함락시키려 했지만 실패하자 장기간 포위해 굶겨죽이기로 결정했다. 그는 도시 외곽에 긴 참호를 파고 요새화된 진영을 건설했으며, 함대를 한닥스 항구 앞에 포진시켜서 단 한 척의 적선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 후 니키포로스는 트라키아 테마의 장군 니키포로스 파스티야스에게 기동대를 이끌고 크레타의 여러 시골 지역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적군의 움직임을 정찰하게 했다.
그런데 파스티야스는 적을 우습게 여기고 시골을 약탈한 뒤 부하들과 함께 음식과 포도주에 탐닉했다. 숲에 숨은 채 적의 동태를 살펴보고 있던 사라센들은 이 광경을 보고 로마군이 술에 잔뜩 취한 야간에 습격했다. 레온 부제에 따르면, 로마군은 술에 잔뜩 취한 상태에서도 잘 싸웠지만, 지휘관 파스티야스가 많은 화살을 맞고 전사하자 전의를 상실하고 달아나다가 소수의 생존자를 제외하고 학살당했다고 한다.
생존자들로부터 이 사태를 보고받은 니키포로스는 본대에게 성벽의 해안 지대와 아군의 참호를 잇는 경사로를 건설하라고 명령하는 한편 자신은 소수의 정예병을 이끌고 야간에 진영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후 적병 몇 명을 붙잡은 그는 4만 가량의 적병이 로마군 진영을 공격하기 위해 인근 언덕에 모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현지인의 길안내를 받으며 적이 숨어있는 언덕 주변으로 접근했다. 이윽고 적진 포위가 완료되자, 그는 전투 나팔을 분 뒤 취침 중이던 사라센들을 급습했다. 사라센들은 갑작스런 공격에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궤멸되었다.
니키포로스는 부하들에게 적군 시신의 수급을 모조리 베어서 진영으로 가져가라고 명령했다. 그 후 진영에 돌아온 그는 투석기에 적병 머리를 잔뜩 실은 후 한닥스 성채 안으로 날려버리라고 명령했다. 전승에 따르면, 살아있는 당나귀를 성 안에 투척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라센들은 동요하긴 커녕 전의를 불태웠고, 니키포로스의 이어진 공격을 격퇴했다. 니키포로스는 이후에도 궁수대와 투석기를 투입해 성벽 위의 적병을 사살하고 성벽에 사다리를 걸려 했다. 그러나 한닥스 성벽은 투석기의 맹공을 버텨냈고, 모든 사다리는 부서졌으며, 성벽으로 접근했던 병사들은 대거 사살당했다.
니키포로스는 공세를 중단한 뒤 기술자들이 더욱 강력한 공성 무기를 개발할 때까지 도시를 봉쇄하기로 했다. 한편, 크레타 에미르 아브드 알 아지즈 이븐 슈아브는 주변의 무슬림 통치자들에게 도움을 호소했다. 크레타 사절은 먼저 이집트의 이흐시드 왕조에 찾아갔지만, 실권자 아부 알 미스크 카푸르는 크레타 구원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크레타 사절은 파티마 왕조의 칼리파 알 무이즈에게 향했다. 수니파 칼리파 지위를 꿰차고 있던 아바스 왕조와 경쟁하고 있던 알 무이즈는 크레타를 구원한다면 이슬람 세계에 자신을 진정한 지하드 수행자로 알릴 수 있다고 여기고, 로마노스 2세에게 로마군이 크레타를 떠나지 않는다면 958년에 로마와 파티마 왕조가 체결했던 휴전 협정이 무효화될 것이라고 위협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면서 전 함대에 크레타로 출격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파티마 왕조가 개입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니키포로스는 가능한 한 빨리 한닥스를 공략해야 한다고 여겼다. 겨울 동안 심각한 추위가 몰아치면서 많은 병사가 얼어죽고 보급이 늦어지면서 상당수의 장병이 굶어죽는 상황이 전개되자 이러한 마음은 더욱 간절해졌다. 다행히 얼마 후 보급이 들어오면서 병사들의 기력이 회복되자, 그는 전면 공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961년 3월, 로마군은 더욱 강력한 공성 무기를 활용하여 성벽에 퍼부었지만 이번에도 파괴하지 못했다. 이에 공성추를 성벽에 접근시켜 직접 타격을 가해 파괴하려 했다. 사라센군은 공성추의 접근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하지만 이것은 속임수였다. 니키포로스는 광부들에게 성벽 아래를 파고 들어가서 약한 부분에 폭발성 및 인화성 물질을 배치한 뒤 불태우게 했다. 그러자 성벽 한 측면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수비대는 재빨리 성벽이 파괴된 지역에 전투 대열을 배치했지만, 로마군의 맹렬한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결국 무너졌다. 961년 3월 6일 한닥스 요새는 함락되었고, 로마군은 오랜 고생 끝에 공략한 것에 단단히 열받아서 여자들을 모조리 윤간하고 아이들을 살해했으며, 도시를 사흘간 약탈했다.
하지만 크레타 아미르인 아브드 알 아지즈는 죽임을 당하지 않고 생포되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간 뒤 니키포로스 포카스의 개선식에 참여했다. 그 후 로마노스 2세로부터 정착할 수 있는 토지와 선물을 제공받았다. 로마노스 2세는 기독교로 개종한다면 원로원 의원으로 삼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다만 그의 아들 알 누만은 기독교로 개종하여 아네마스로 개명한 뒤 동로마군에 편입되었고, 971년 도로스톨론 전투에서 전사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후에 등장하는 귀족 가문인 아네마스 가문이 그의 후손이라는 설을 제기한다.
한닥스 요새 함락 후 크레타 섬의 나머지 지역은 로마군에 재빨리 항복했다. 동로마 제국은 어렵게 확보한 크레타를 기독교화하기 위해 장기간 포교 활동을 전개했고, 스트라테고스(군 사령관)를 한닥스에 배치해 섬의 전반적인 관리와 경비를 맡겼다. 그리하여 동로마 제국은 에게해의 안보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파티마 왕조가 이를 빌미삼아 휴전 협약을 파기하고 시칠리아의 남은 동로마 영역을 모조리 탈취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 후 크레타는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동로마 제국이 무너진 뒤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역이 될 때까지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 그 함대 엄청 말아먹고 돌아온 그 자가 맞는다.[2] 일단 쫓겨났다가도 다시 복위에 성공했으며, 반란자가 피가 직접 섞인 친척은 아니고 인척인 점은(조카사위-처외삼촌) 후대 콘스탄티노스 5세-아르타바스도스의 관계(처남-매부)와 유사하다.[3] 이때부터 벌써 고대 로마에는 없던 포르피로게니투스 개념이 태동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4] 영어 위키백과 Leontia Porphyrogenita 중, 'Ousted from both thrones, Marcianus and Leontia plotted a revolt against Zeno, in 479, which was based on Leontia's right of precedence over her sister as porphyrogenita; the revolt was however quelled.'[5] 격하게 싸워서 둘 다 소모되어 버리면 그게 제국에는 베스트였다.[6] 썩 신빙성이 없는 설화이긴 하지만 꽤 알음알음 퍼져있었던 모양인지, 훗날 이라클리오스 황제 역시 자신이 생매장당할까봐 죽고난 후 사흘간 관을 열어놓게끔 했다고 한다.[7] 이 정통 로마인이라는 것은 라틴인이나 그리스인 같은 종족 개념이 아니다. 제노 문서에 나오듯 그는 소아시아 중남부 이사우리아 지방의 산악 부족 출신의, 로마인 입장에서는 야만인 출신의 황제였다. 475년에 제노가 시민 봉기에 의하여 폐위당한 것도 그의 출신이 한몫했다.[8] 아나톨리아 반도 중남부에 위치한 이 지역은 제국 내에서 상당히 낙후된 곳이었는데, 5세기 들어 테오도시우스 2세와 레오 1세가 일종의 이이제이로 군부의 게르만 출신 장군들을 견제하기 위해 이 지역 출신을 우대하여 신흥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결국 그 지역 출신의 황제인 제노까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다만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9] 현 터키의 에르주름[10] 현 터키의 디야르바크르[11] 메소포타미아 북부, 동로마령[12] 현 터키의 유럽 영토의 동부. 흑해와 에게 해 사이의 남북 50여km의 반도. 에디르네와 이스탄불 사이, 즉 당시 (동)로마의 수도권이다! 즉 수도권 방위용.[13] 5세기 후반인 469년(레오 1세의 치세) 과 478년(제노의 치세)에 축조된 목축을 대대적으로 보강한 것이다[14] 영어 위키백과의 Roman diocese 문서 중 'In May 535, Justinian abolished the vicariates of Thrace and the Long Walls, in order to improve the defence of the Long Walls by ending the continuous conflicts between the two vicars'라는 대목이 있다.[15] 아들이 없어서 조카들을 물망에 두고 테스트한 것은 조선의 명종과 공통점이 있다. 명종의 경우 조카(하성군: 선조)가 계승하는 데 성공한 반면, 아나스타시우스의 경우 조카들 대신 엉뚱한(?) 근위대장 유스티누스가 계승했다는 차이점 또한 있지만.[16] 황금 320,000 파운드 혹은 황금 14만 5천 kg[17] 흔히 알려진 스페인 일대가 아니라 캅카스에 위치한 국가인 조지아 동부 일대의 고대 지명이다. 현재 조지아의 동부 일대. 서부 해안 일대는 콜키스(현재 압하지아 등지)라고 부른다.(라틴어 명은 라지카) 두 지역 모두 기독교를 믿었는데, 당시 동로마 제국의 일관된 보호령이었던 콜키스 (라지카)와는 달리 이베리아는 로마와 이란의 지배를 번갈아가며 받아오다가 결국 523년에 왕정이 폐지되고 이란의 직할 지배를 받게 되었다.[18] 408년경, 당대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아르카디우스는 자신의 어린 아들 테오도시우스의 후견인으로 당시 사산 제국의 황제였던 야즈데게르드 1세를 지목하였다. 그 결정에 놀란 야즈데게르드는 그 약속을 지켜 자신의 치세 (399 ~ 421년) 동안은 동로마 제국에 대한 군사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동로마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에게 호평을 받았다.[19] 이라크 서부에 위치했던 아랍계 기독교 국가.(300년경 ~ 633년) 이란의 속국이었다.[20] 현재 요르단, 시리아 동부 일대[21] 정확히 말하면 대규모 요새인 다라의 방어를 맡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사실상 총사령관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정식으로는 530년에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22] 자블라흐 4세 이븐 알 하리스 (جبلة بن الحارث, 재위 518 ~ 528년). 아부 샴마르 (أبو شمر), 가발라스 (Γαβαλᾶς) 등으로도 알려져 있다.[23] 명장인데도 부하 통제를 잘 못했다는 점에서 로마 공화정 시기의 명장 루쿨루스와 비교되기도 한다.[24] 마침 바람의 방향도 로마 진영을 향해 불어와 페르시아 측에 유리하였다.[25] 승장 아자레테스는 병력의 큰 손실 때문에 카바드 1세에 의해 해임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직위 해제 당하며 불명예 제대까지 당했다.[26] 고대 로마(제국 전체로는 서부)의 전통을 이어받은 자들의 정당이었다.[27] 오리엔트(시리아, 이집트) 일대에서 상업을 통해 세력을 키운 신흥 세력[28] 'Lars Brownworth'라는 미국의 교사 출신 역사 저술가의 블로그에는 'In 532 they participated in the Nika Riots hoping to replace Justinian with one of their own members.'라는 대목이 있다.[29] Serdica, 즉 現 불가리아 소피아 주변[30] 다키아 관구 이남의 그리스, 알바니아 지역.[31] 진압 후 유스티니아누스는 그를 살려두고자 했지만 테오도라 황후가 죽이라고 촉구해서 결국 죽였다고 한다.[32] 마찬가지로 위의 각주의 블로그에 'Justinian repaid them by confiscating the Senate House and turning it into a reception hall for the Great Palace.'라는 대목이 있다.[33] 532년 2월 23일에 시작된 재건 공사는, 밀레투스의 이시도로스와 트랄레스(현 터키의 아이딘)의 안테미우스의 지휘로 537년 12월 27일에 축성식이 거행되며 완공되었다.[34] 유스티니아누스의 사촌이자 카르타고의 군단병 반란을 진압한 게르마누스의 아들.[35]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키메르인의 부족장이 두 아들을 남기고 죽었는데 두 아들이 세력을 양분하며 그들의 이름을 딴 두 부족이 형성된 것 이라고 한다. 우투르구르 족의 수장 산딜릭의 말이 그 증거로 제시된다. '우리 형제의 부족(쿠트리구르)을 절멸시키는 것은 공정하지도, 옳지도 않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언어를 구사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웃이며 같은 의복과 생활방식을 갖춘다. 비록 그들은 우리와 다른 생활권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친척이다.'[36] 크림 반도를 경계로 서쪽의 돈 강과 몰다비아 일대는 쿠트리구르, 동쪽 볼가 강 일대는 우투르구르 족의 영역. 여담으로 동로마 제국 역사가들은 스텝 지역의 유목민들을 13개로 분류하였는데, 그 중에는 그들 외에도 오노구르, 위구르, 사비르, 불가르, 에프탈 등이 있었다.[37] 대표적인 친로마 파였던 그는 반달 전쟁의 아드 데키움 전투 (533년)에서 600명의 마사게타이/훈족 궁기병대를 이끌고 동로마군에서 활약하였다.[38] 역사가 아가티우스에 의하면 벨리사리우스는 근처의 농민들에게 부탁하여 나무를 때려 숲에 먼지를 일으키게 하였다. 따라서 쿠트리구르 족에게 동로마군의 수를 부풀리게 하였다. 근처를 지나던 훈족이 먼지를 보고 동요하는 사이에 습격하여 4백 명을 죽였다고 한다.[39] 문디르의 배신에 격노한 페르시아군은 라흠족과 연합해 가산 왕국을 공격했지만, 문디르는 단독으로 이를 격파했다.[40] 그 중 800파운드는 아시아의 군대에 충당되었다.[41] 다다음 황제로 즉위하게 되는 이라클리오스의 부친.[42] 라틴어 Exarchatus, 영어 Exarchate.[43] 라틴어 Praefectura praetorio, 영어 Praetorian prefecture.[44] 라틴어 Dioecesis, 영어 Diocese.[45] 라틴어 Provincia, 속주 Province.[46] 이때 제국 전역에서 대대적인 흉년이 발생해 농사를 망치게 되고 식량난까지 심해져 수도의 시민들까지 굶어죽는 사태가 터졌다. 그런데도 마우리키우스는 제대로 대처를 못했기에 수도의 시민들에게 분노를 크게 사고 말았다.[47] 분명 10대 언저리였을 아들들이 지나치게 나이들게 묘사되긴 했다.[48] 기록상 남아있는 로마 원로원의 마지막 활동이 바로 포카스에게 즉위를 축하하는 서신을 보낸 것이다. 이후 원로원은 점차 쇠퇴해 어느 순간 소리소문없이 사라졌고,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이탈리아와 로마가 혼란한 와중에 원로원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거냐고 한탄했다.[49] 영어 위키백과 Sasanian conquest of Egypt에 의거.[50] 초기에는 당연히 로마 시, 이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포함. 로마 시의 곡물배급이 끊긴 것은 #에 의하면 반달족에게 북아프리카를 뺏기고 나서라고 한다.[51] Geoffrey Regan 저 'First Crusader: Byzantium's Holy Wars'라는 책으로서, 책 앞 표지의 전투삽화가 다름아닌 이라클리오스 시절 페르시아와의 전투로 잘 알려진 사진이다.[52] 영어 위키백과에 의하면 이복동생이라고 한다.[53] 전해지는 바로는 이 전투에서 이라클리오스는 페르시아 장군 라자테스와 일기토를 벌여 승리했다고 한다.[54] 이런 연속성 인식은 적어도 바실리오스 2세 시대까지는 계속해서 이어진다.[55] 뒤에 '정말 아름다운 적들의 땅이 되겠구나' 부분이 덧붙여져 있다.[56] 물을 무서워하게 되었다고 한다.[57] 다리를 만들었다는 설 또는 배를 꾸며서 육지처럼 해놨다는 설이 있다.[58] 결국은 사산 제국에게 빼앗긴 것을 힘들게 되찾고 역습을 가했다가 새로운 세력에게 다시 빼앗긴 것.[59]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60] Gregory the Patrician 중, 'Gregory the Patrician was related by blood to Emperor Heraclius (r. 610–641) and his grandson Constans II (r. 641–668), and was possibly the son of Heraclius' cousin Niketas.'[61] Gregory the Patrician 중, 'In 646, Gregory launched a rebellion against Constans. The obvious reason was the latter's support for Monotheletism, but it undoubtedly was also a reaction to the Muslim conquest of Egypt, and the threat it presented to Byzantine Africa. Given the failure of the imperial government in Constantinople to stop the Muslim advance, it was, in the words of Charles Diehl, "a great temptation for the powerful governor of Africa to secede from the feeble and remote empire that seemed incapable of defending its subjects".' 및 'The revolt seems to have found broad support among the populace as well, not only among the Romanized Africans, but also among the Berbers of the interior.'[62] 전체 이름은 아부 알 아와르 아므르 이븐 수피안 이븐 아브드 삼스 알 수아미(أبو الأعور عمرو بن سُفيان بن عبد شمس السلمي )[63] Siege of Thessalonica (676–678) 중, 'The only imperial reaction came in 658, when Emperor Constans II campaigned in Thrace, brought many Sclaviniae under imperial control, and relocated many Slavs to Asia Minor.'[64] 이라클리오스는 아르메니아계의 혈통이었다.[65] 프랑스 북부, 파리 근교[66] 이따금씩 한 쪽이 차지했던 적도 있지만 10세기 중반까지는 대강 현상유지가 되었다가, 조약의 원래 상대였던 우마이야 왕조의 후신인 압바스 왕조가 바그다드마저 부와이 왕조에게 내어주고서(945-946) 그 칼리프가 신흥 정권에게 도장이나 찍어주는 상징으로 전락하여, 조약 자체의 구속력이 떨어졌으며, 또한 더 이상 라쉬둔-우마이야-아바스의 통일 이슬람 제국 시절의 이슬람권 전체를 상대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지방정권인 함단 왕조 정도만 상대하면 되어서 힘의 균형이 깨져 키프로스 인근의 육지인 킬리키아 및 안티오키아를 위시한 북시리아 일대가 키프로스와 함께 960년대에 앞서거니 뒷서거니 전부 동로마에게 넘어갔다. 키프로스 Cyprus in the Middle Ages 중 'In 688, the emperor Justinian II and the caliph Abd al-Malik reached an unprecedented agreement. The Arabs evacuated the island, and for the next 300 years, Cyprus was ruled jointly by both the Caliphate and the Byzantines as a condominium, despite the nearly constant warfare between the two parties on the mainland. The collected taxes were divided among the Arabs and the emperor. Under Basil I the Macedonian (r. 867–886) Byzantine troops recaptured Cyprus, which was established as a theme, but after seven years the island reverted to the previous status quo. Once again, in 911, the Cypriots helped a Byzantine fleet under admiral Himerios, and in retaliation the Arabs under Damian of Tarsus ravaged the island for four months and carried off many captives.'[67] 이렇게 유럽에서 소아시아로 재배치강제이주된 슬라브인을 가리키는 (영어 위키백과)'Asia Minor Slavs'라는 용어까지 있다. 이들의 후손 중 하나가 제6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반란군의 주동자였던 슬라브인 토마스(Thomas the Slav)이다.[68] 서로마 멸망의 신호탄은 로마가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패배한 탓에 협상력이 떨어져, 이민족에 대한 이 전통적인 정책(뭉쳐서 살려면 멀리 가든가, 아니면 흩어져 살든가)의 강요가 불가능해진 상태에서, 고트족이 멀리 가지도 않으면서[215] 종족 단위로 뭉쳐 있는 상태로 제국 영내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던 것에서부터 시작했다.[69]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150년 전 동명의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를 선망하여 재정복과 성당 건립을 자신의 목표로 삼았고, 따라서 세금을 많이 거두었다.[70] 토카트에서 서남쪽으로 40km 떨어진 마을. 고대에는 시바스에서 아마시아로 가는 길목이었다[71] 당시의 지명 ‘헤르손’의 위치는 현재의 헤르손과는 좀 거리가 있다.[72] 훗날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참수하고 황위에 오르는 필리피코스다.[73] 영어명 Paul the Deacon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몇 십년 정도 후에 랑고바르드 왕국 ~ 프랑크령이었던 북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베네딕토회 수도사제였다. 랑고바르드의 역사(Historia Langobardorum)를 집필한 바 있고 오늘날에도 잘 전해지고 있다.[74]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75] 이라클리오스-콘스탄티노스 3세-콘스탄스 2세-콘스탄티노스 4세-유스티니아노스 2세 이렇게 5명이 전부 뒤가 앞의 아들로 부자상속이다.[76] 711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해 유스티니아노스 2세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77]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11p, 원문: 'Paul the Deacon allows for the agency of the populus Romanus in one instance, when the Emperor Philippicus sent a letter to Rome regarded as heretical by the pope: then 'the Roman people confirmed that they would not receive the name, the charters or the image on the coins of the heretical emperor.' This was the populus of the city of Rome. It is remarkable that the pope relied on legitimation by the people of Rome to back his stance against what he regarded as a heretical measure by the emperor.'[78] 지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아니라 그 전에 지어졌던 옛 성 베드로 성당이다.[79] 사실상 안전하게 양위를 받았다.[80] 아마 '불과 얼마 전에 같이 이슬람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사이인데 당신들 이럴 꺼야?' 였을 수도 있다.[81] 출처: 유튜브 'Eastern Roman History'의 Leo III: The Lion of the East의 5분대 후반[82] 출처: 유튜브 'Eastern Roman History'의 Leo III: The Lion of the East의 4분 20~50초 정도[83] 유대교, 정교회, 개신교 기준. 가톨릭과 루터교에서는 1계명의 일부로 본다.[8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마라.[85] Cyril Mango의 'The Oxford History of Byzantium'의 139p 중, 'In 727 the Carabisian Theme and the Theme of Hellas rebelled against him, possibly because of the edict; but he defeated them.'[86] 여기서의 관구는 교회 관구가 아니라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이래의 고대 후기 로마 제국의 세속 관구이다.[87] 일단 쫓겨났다가도 다시 복위에 성공했으며, 반란자가 피가 직접 섞인 친척은 아니고 인척인 점은(처남-매부) 전대의 제노-바실리스쿠스의 관계(조카사위-처외삼촌)와 유사하다.[88] 단 출생만 거기에서 하고, 어릴 때 자의로든 아니든 어쨌든 국경을 넘어(...) 이사우리아에 정착하여 거기가 실질적 고향이었기 때문에 이 왕조를 소위 '이사우리아 왕조'라고 하는 것이다.[89] 7세기부터 이어진 전쟁에 전염병까지 겹치자 고대 로마부터 내려오던 귀족 계급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한다.[90] 영어 위키백과 Constantine V 중, 'The same year saw a serious outbreak of plague in Constantinople, which caused a pause in Byzantine military operations. Constantine retired to Bithynia to avoid the disease and, after it had run its course, resettled people from mainland Greece and the Aegean islands in Constantinople to replace those who had perished.'[91] 출처: 'Eastern Roman History' 유튜브의 Constantine V: The Dung-named Dragon-slayer[92] 공동의 적인 랑고바르드를 양쪽에서 협공하려는 의도로 생각된다.[93] 영어 위키백과 Constantine V 중에서 'Constantine sent a number of unsuccessful embassies to the Lombards, Franks and the papacy to demand the restoration of Ravenna, but never attempted a military reconquest or intervention.'[94] 'Byzantium in the Iconoclast Era, C. 680-850: A History' 중 162~163p, 원문: 'As Paul Magdalino has observed, the 754 council acclaimed him as "New Constantine", the equal of the apostles, who had abolished idolatry.'[95] 장소부터가 이 당시의 불가리아와의 국경과 가까웠다.[96] 넓게 보면 전쟁통에 전쟁터에서 죽었으니 전사이지만 좁게 보면 적군에 의한 전사인지, 아군 기독교인에 의한 암살인지부터가 갈린다.[97] 이렇게 유럽에서 소아시아로 재배치된 슬라브인을 가리키는 (영어 위키백과)' Asia Minor Slavs'라는 용어까지 있다. 이들의 후손 중 하나가 제6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반란군의 주동자였던 슬라브인 토마스이다.[98] 서로마 멸망의 신호탄은 로마가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패배한 탓에 협상력이 떨어져, 이민족에 대한 이 전통적인 정책(뭉쳐서 살려면 멀리 가든가, 아니면 흩어져 살든가)의 강요가 불가능해진 상태에서, 고트족이 멀리 가지도 않으면서[216] 종족 단위로 뭉쳐 있는 상태로 제국 영내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던 것에서부터 시작했다.[99] 'Byzantium in the Iconoclast Era, C. 680-850: A History' 중 162p, 원문: 'The project was sufficiently impressive to spill over into other arenas, generating the legend of Constantine V as a dragon slayer, according to which Constantine dispatched a dragon blocking an aqueduct, whose appalling smell killed many.[100] 출처: 'Eastern Roman History' 유튜브의 Constantine V: The Dung-named Dragon-slayer[101] Constantine V 문서 중, 'The cumulative effect of Constantine's repeated offensive campaigns and numerous victories caused considerable instability in Bulgaria, where six monarchs lost their crowns due to their failures in war against Byzantium.'[102] Sergio Bertelli의 'The King's Body; Sacred Rituals of Power in Medieval and Early Modern Europe' 중 30p, 원문: 'At the time of the siege of Constantinople by the Bulgars, in 812, the crowd broke down the gates that led to the imperial tombs and dragged the body of Constantine V from its sarcophagus, crying: "Arise! Save your endangered people!"'[103] Telerig 문서 중, 'However, in October 774, Telerig sent an army of 12,000 men to raid Berzitia, Macedonia, and transfer its population to Bulgaria.' 및 'Constantine surprised the Bulgarians and won a resounding victory. The subsequent attack on Bulgaria failed since the imperial fleet had encountered contrary winds in the Black Sea.'[104] Constantine V 중, 'In 775, the Bulgarian ruler Telerig contacted Constantine to ask for sanctuary, saying that he feared that he would have to flee Bulgaria. Telerig enquired as to whom he could trust within Bulgaria, and Constantine foolishly revealed the identities of his agents in the country. The named Byzantine agents were then promptly eliminated.'[105] Telerig 중, 'In spite of his apparent success, Telerig found it necessary to flee to the new Byzantine emperor, Leo IV the Khazar, in 777. The Byzantine government gave Telerig asylum and the title of patrikios. Telerig converted to Christianity under the name of Theophylaktos and married a cousin of Empress Eirene.'[106] 이리니는 이런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나쁘지 않은 통치를 이어갔으나, 결국 지지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외세와 접촉해야 했고, 이로 인해 파국을 맞았다.[107] 성상파괴주의 세력을 함부로 건들 수 없던 탓도 있겠지만, 이는 동로마 제국의 고질적인 문제인 종교의 통합을 시도한 것으로 상당히 높게 평가할 수 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상을 공경하지(venerate) 숭배하지는(worship) 않는다는 점을 확실히 한 것도 현명한 종교-정치적인 수사였다.[108] 성상파괴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은 소아시아에서부터 왕조의 운명을 걸고 싸운 군부세력이었고, 그리스와 소아시아 출신의 갈등의 골은 생각보다 깊었던 것 같다.[109] 사위이자 사실상 다음 황제인 미하일 1세 랑가베스 말고 그 다음 다음인 미하일 2세[110] https://www.britannica.com/place/Greece/Byzantine-recovery 중, 'The emperor Nicephorus I is traditionally credited with a major role in this, although the process was certainly under way before his accession.'[111] Sclaveni 중, 'A serious and successful recovery began under Nicephorus I (802–811).'[112] 이 부분은 정확히 말하자면 선황제인 이리니 시절에는 싸움을 피하고자 바쳤던 조공을 새 황제가 즉위하고 바치지 않자 하룬 알 라시드가 "너희들 조공 바치기로 해놓고 왜 안 바치냐."고 추궁해온 것에 가깝다.[113] 이슬람 아바스 조 시기 사가의 기록에 의하면 이리니 여제 시절에는 동로마 제국 측이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를 자처하며 아바스 조 쪽을 우대하는 문맥의 글로 외교 문서를 써서 외교관을 보냈는데 니키포로스 1세가 즉위하면서 아바스 조 쪽을 로마 황제에게 통보를 받는 지방 군주 쯤으로 격하시키는 표현의 글로 외교 문서를 써서 외교관을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외교문을 통보받고 하룬 알 라시드가 너무나 격분하여 당시 궁정에 있던 대소신료들이 얼굴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을 정도였다고.[114] 그래서 이 황제가 죽은 전투명이 플리스카 전투이다.(Battle of Plisca)[115] 니키포로스 1세의 사위이다.[116] 레온 3세에 의해 철거되고 이리니에 의해 재건된[117] 그 과정이 치밀하고도 웃긴데, 726년처럼 병사들의 일방적인 철거가 아닌 명분을 만들었다. 우선 병사들을 보내 성상 앞에서 저주와 투석을 시킨 후, 황제가 (우연히) 그 앞에 나타나 성상을 '보호'하고 신성모독을 금한다는 이유로 성상을 철거하라 하는 것이었다.[118] 828년에 그곳에서 죽는다.[119] 레온의 아내인 테오도시아의 여동생의 남편이기도 했다.[120] 성찬예배 때에는 황제와 사제가 잘 구별되지 않는다[121] 레온 5세와 미하일 2세는 반란이 진압되기 전 니키포로스 1세에게 투항했으나 토마스는 바르다니스 밑에서 계속 종군했었기에 반란이 진압된 후 10년 간 유배되다가 레온이 황제가 되면서 사면받아 아나톨리콘 테마의 피데라티[217] 투르마(기병대) 지휘관으로 임명했다.[122] 비슷한 시기 아제르바이잔 일대에서 조로아스터교도인 바박이 반란을 일으킨 것도 한몫했다[123] 그는 크레타에 상륙하자마자 배를 불태우고 배수진 크레타 정착을 명령하였다. 병사들이 알렉산드리아에 부인과 자녀들을 두고 왔다고 항의하자 크레타 여자들과 새 가정을 꾸리라는 로마 건국 신화에나 나올만한. 명령을 내렸다.[124] 재위 817 ~ 838년[125] 시칠리아의 토마스 반군의 잔당이 지중해 너머 마그레브의 아랍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126] 이곳에서 시라쿠사의 특사를 만났으나 아사드는 협상을 거부하고 바로 공격을 명했다[127] 도제인 귀스트니아노가 이끌었다[128] 출처 Ancient History Encyclopedia[129] 이후 로마 측 선교사들이 와서 보리스를 설득시켰으나 867년에 두 교회 간의 갈등이 봉합되고 서방 측이 불가리아를 동방에 양도하며 불가리아는 현재까지도 정교회 국가로 남아있다.[130] 바실리오스는 이 결혼 때문에 아내 마리아와 이혼했지만, 마리아가 낳은 콘스탄티노스를 사랑했고 잉게리나와의 사이에서 낳은 레온은 미워했다.[131] 테클라는 훗날 궁정 귀족 요안니스 네아토코미테스와 연인이 되었으나 바실리오스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매질을 당하고 블라케르나이의 집 외의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뒤 가난에 시달리며 몇 년 동안 몸져누워 지내다가 죽었다.[132] 대천사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의 잉태를 알린 날[133] 물론 이것이 지켜졌을 리 없고, 후대 서유럽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교황 사이의 서임권 투쟁이 일어난다.[134]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로도 동로마에서는 성상 파괴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2차 성화상 논쟁 시기에는 그 이전과 같은 격한 박해는 눈에 띄지 않았다. 9세기 중반에 가서야 동방에서도 성상 파괴파가 자취를 감춘다.[원문] 사서 아나스타시우스의 라틴어 번역본. 번역 출처: 덴칭거[136] '대'(Elder)로 구분하는 이유는, 손자인 황제 니키포로스 2세와 구분하기 위해서이다.[137] 이 결혼 동맹이 성사되었으면 바실리오스에 이은 다음 황제는 서방과 동방을 함께 다스리는 통일 로마 황제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뤄지지 않았으나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138] 루도비코 2세는 '프랑크인의 황제'가 아니라 샤를마뉴도 받지 못한 칭호인 '로마인의 황제'즉 로마 황제라는 칭호로 불러주기를 원했다.[139] 양자론(예수가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일반 사람들처럼 태어났으나 세례를 받을 때에 하느님의 아들로 선택되어 하느님의 양자로 입양되었다고 주장) 쪽 교파이다. 삼위일체를 그야말로 정면으로 위반하니 제국 입장에서는 이단.[140] 시칠리아의 주요 거점인 시라쿠사이는 878년에야 함락되었다[141] 성모 마리아, 성 미카엘, 성 엘리야, 성 니콜라오스에게 공식적으로 봉헌되었으나 네아라는 짧은 이름으로 불렸다[142] 미하일은 바실리오스의 본처 마리아를 내쫓고 미하일의 정부 에우도키아 잉게리나를 바실리오스와 결혼시켰다. 그렇게 하면 합법적으로 궁에 들일 수 있기 때문에. 미하일은 바실리오스에게 누나 테클라를 정부로 삼게 했다.[143] 레온은 결혼하기 전 정인 조이 자우치나가 있었으나 하도 염문을 뿌려대는 통에 바실리오스가 레온에게 테오파노 마르티나키아를 주선해주었고 여자는 먼 곳으로 보내 다른 남자와 결혼시킨다. 레온은 독실한 신자로 숨이 막힐 것 같은 배우자를 좋아하지 않았다.[144] 기록에 따르면 사냥 중에 벨트가 사슴 뿔에 걸려 몇 시간 동안 끌려가다 간신히 구출됐는데 구출한 사람이 암살자였다고 한다...더욱 황당한 것은 그 암살자와의 결투에서 승리했으나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했다는 것. 당시 75세의 고령임을 감안하면 더욱 믿기 어려운 일.[145]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포티오스가 레온 6세를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민 혐의로 축출되었기에, 함부로 이의를 제기했다가는 포티오스와 같은 부류로 엮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146] 이 지역이 바로 오늘날까지도 마자르족의 고향인 헝가리다.[147] 영어 위키백과 Muslim conquest of Sicily 중, 'Although few strongholds in the northeast remained unconquered and in Christian hands, the fall of Taormina marked the effective end of Byzantine Sicily, and the consolidation of Muslim control over the island.' 및 'Taormina itself threw off Muslim control soon after 902, and it was not until 962, possibly in response to the Byzantine reconquest of Crete the previous year, that the Fatimids retook the town, following a 30-week siege.'[148] 레온의 동생 스테파노스 총대주교는 893년에 사망했다.[149] 다만 사혼 자체는 재가하지 않아서, 레온은 조이와 함께 사는 동안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는 고해자의 자격으로만 들어갈 수 있었고, 성소에는 입장이 불허되었으며 성무 중에는 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 있어야 했다.[150] 정교회에서 사용하는 세계 정교회 독립교회 주교들의 명단이다. 성찬예배 중에 보제가 큰소리로 낭송하는데, 세계 각지 여러 정교회들과 영적으로 연대하고 기억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말하면 딥티코스에서 이름을 언급하지 않겠다는 것은 상대를 독립교회의 합법적인 수장으로, 또는 아예 독립교회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151] 서기 10세기경 동로마 제국에는 '모든 인간은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본질이 담긴 스토이케이온(stoicheion)이라는 또 다른 저장소를 가지고 있다'라는 속설이 떠돌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런 소문에 근거해 자신의 스토이케이온이 청동 멧돼지상이라고 주장한 것이다.[152] 교회에선 3혼까지만 허용하는데, 레온 6세가 3혼까지 했는데도 후사를 보지 못해 제4혼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총대주교를 위시한 교회 측과의 여러 실랑이와 우여곡절 끝에 겨우 제4혼이 성사됐고, 다행히 후사 콘스탄티노스를 보았다. 하지만 니콜라오스는 조이와 레온 6세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다가 쫓겨났기 때문에 조이를 매우 미워했다.[153] 레온 6세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다마스쿠스로 망명가서 죽은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의 아들이다.[154] 당시 에데사는 2가지 보물로 유명했다. 하나는 아브가르 1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에데사로 와서 치료해달라고 초청했을 때 예수가 보낸 답신이었고, 또 하나는 예수의 초상이 기적적으로 남겨진 천이었다.[155] 스테파노스 레카피노스는 레스보스의 레팀나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963년에 사망했다.[156]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중 18p, 원문: 'Another regional Roman group, presented in Francesco Borri's contribution, lived in Dalmatia, where Carolingian annals distinguish between Roman and Slavic settlers. In the tenth century, Constantine Porphyrogenitus distinguished these as Rhōmanoi from the general subjects of the Empire, Rhōmaioi' 및 'The Greek term Rhōmanos also appears in Italo-Greek documents for the representatives and inhabitants of Rome.'[157]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114p, 원문 'Constantine Porphyrogenitus(10th century) made a remarkable statement that to his regret 'his ancestors turned to Greek and got rid of their fathers' Roman language'.[158] 'Two Romes: Rome and Constantinople in Late Antiquity' 396p, 원문: 'in the tenth century, the emperor Constantine VII Porphyrogennetos dated the final transition to the early seventh century'[159] 정교회에서 사용하는 세계 정교회 독립교회 주교들의 명단이다. 성찬예배 중에 보제가 큰소리로 낭송하는데, 세계 각지 여러 정교회들과 영적으로 연대하고 기억한다는 뜻이다.[160] 유튜브 채널 'Kings and Generals'의 영상 Byzantine Reconquista Siege of Chandax 960-961에 나온다.[161] 사실 크레타가 애초에 이슬람 세력에게 함락당할 때도 같은 일이 있었긴 했지만. 게다가 포위가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데도 항복하지 않아 점령군도 고생을 많이 해서 (960년에서 961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는 둘러싼 공격자 측인 로마군도 보급품이 떨어져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급품이 도착해서야 비로소 한 숨 돌렸다고 할 정도다.)[218] 바짝 약이 올라 있었고 때문에 살해를 말리려던 니키포로스의 명령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162] 영어 위키백과 Abd al-Aziz ibn Shu'ayb 중 'After the capture of Chandax, Abd al-Aziz was taken captive with his family to Constantinople, where they were paraded at Nikephoros Phokas' triumphal procession. They were then given rich presents and an estate to settle by Romanos II. The Byzantine sources report that the emperor considered making Abd al-Aziz a senator, but the latter refused to convert to Christianity. One of his sons, however, al-Nu'man, or Anemas in Greek, converted and entered Byzantine service, until he was killed at the Siege of Dorostolon in 971. Some modern researchers consider it possible that the later Byzantine aristocratic family of the same name descended from him.', Anemas 중 'An-Nu'mān ibn ʿAbd al-ʿAzīz ibn Shuʿayb ibn ʿUmar al-Qurṭubī, known by the Byzantines as Anemas (Greek: Ἀνεμᾶς), was the son of the last Emir of Crete, Abd al-Aziz ibn Shu'ayb.' 및, 'Upon settling in Constantinople, Anemas converted to Christianity and joined the Byzantine army as a member of the imperial bodyguard.' 및, 'It is possible that the Anemas family that appears in the Byzantine aristocracy in the 11th–12th centuries were his descendants.'[163] 정식 개선식보다 한 급 낮은 이것을 Ovation이라고 한다.[164] 기독교화 이전이라면 모르겠지만 불가리아도 정교회를 도입한 지 100년 되었다. 무작정 기독교화 이전의 전통 종교가 미개하며 정교회는 문명적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쨌든 자국이 전파해 주어 같은 종교를 믿고 같은 문화권으로 묶이게 된 지 100년이 됐는데도 상대국의 사절 면전에서 국가단위로 싸잡아 미개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외교적으로도 현명치 못한 것은 당연하거니와, 나아가서 제 살 깎아먹기로도 볼 수 있다.[165] Muslim conquest of Sicily 중, 'Taormina itself threw off Muslim control soon after 902, and it was not until 962, possibly in response to the Byzantine reconquest of Crete the previous year, that the Fatimids retook the town, following a 30-week siege.'[166] Niketas Abalantes 중, 'According to the contemporary historian Leo the Deacon, Niketas was a eunuch, but also a pious and god-fearing man.'[167] Battle of the Straits 중, 'The garrison of the latter sent for aid to Emperor Nikephoros II Phokas, who prepared a major expedition, led by the patrikios Niketas Abalantes and his own nephew, Manuel Phokas.' 및, Niketas Abalantes 중, 'Niketas was the commander of the fleet and overall commander-in-chief, while the land forces were led by the Emperor's nephew, Manuel Phokas.'[168] Battle of the Straits 중, 'The Byzantine force landed in October 964 and quickly captured Messina and other forts in the Val Demone, but its attempt to relieve Rometta was decisively defeated, with Manuel Phokas among the dead. Left without hope of relief, Rometta fell in spring 965.' 및, Niketas Abalantes 중, 'According to Leo the Deacon, upon arriving in Sicily, the Byzantines were able to capture Syracuse and Himera, while Taormina and Leontini surrendered without resistance. Encouraged by this success, the army under Manuel Phokas advanced heedlessly into the interior to relieve Rometta, but was ambushed in October 964 and destroyed by the Fatimid troops.'[169] Battle of the Straits 중, 'Following their defeat before Rometta, the remaining Byzantine forces were forced to withdraw to Messina. Niketas with the Byzantine fleet tried to cross over the Straits of Messina from the Italian mainland, but he was intercepted by the Fatimid fleet under Ahmad al-Kalbi. In the ensuing battle, known in the Arabic sources (Ibn al-Athir, al-Maqrizi, Abu'l-Fida) as the "Battle of the Straits" (waq‘at al-majāz), the Fatimid governor employed divers equipped to attack the Byzantine ships: in the description of Heinz Halm, "they would dive from their own ship and swim over to the enemy ship; they would fasten ropes to its rudder, along which earthenware pots containing Grecian fire were then made to slide over to the enemy ship, and shattered on the sternpost". This tactic succeeded in destroying many Byzantine vessels, and the battle ended in a major Fatimid victory; according to the Arab historians, a thousand prisoners were taken, including the Byzantine admiral, Niketas, with many of his officers, as well as a heavy Indian sword which bore an inscription indicating that it had once belonged to Muhammad.' 및, Muslim conquest of Sicily 중, 'In the next year, they tried to resume their offensive, but were annihilated in the "Battle of the Straits" (waqʿat al-majāz) off Messina.'[170] 파티마가 시칠리아를 꽉 쥐고서 직할통치했던 것이 아니라, 시칠리아 내 이슬람계 세력간의 내부 투쟁에서 승리한 알 하산 알 칼비(al-Hasan al-Kalbi)에게 948년에 파티마가 시칠리아 총독(아미르) 직함을 제수해 주고 그 세습을 인정 내지는 묵인해주어, 이 아미르 이름의 '칼비'에서 따온 (사실상의)칼비드 왕조(Kalbids)가 세워진 게 당시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해관계가 충분히 서로 다를 수 있었고, 파티마는 이들의 이탈리아 본토에 대한 경략 의지를 단념시켰다는 이야기이다.[171] Battle of the Straits 중, 'This defeat led the Byzantines to once more request a truce in 966/7, resulting in a peace treaty leaving Sicily in Fatimid hands, and renewing the Byzantine obligation to pay tribute in exchange for the cessation of raids in Calabria. Both powers were willing to come to terms, as both were occupied elsewhere: Phokas with his wars against the Hamdanids and the conquest of Cilicia, and the Fatimids with their planned invasion of Egypt. The caliph al-Mu'izz li-Din Allah refortified a number of towns in Sicily during this time, and built Friday mosques and settled Muslims in hitherto Christian-dominated towns in the Val Demone. Taormina, however, was razed, perhaps as part of the terms of the peace treaty, and not resettled until 976.[172] 기독교 자료 필사하면서 포로생활을 보내는 것을 이슬람 국가인 파티마 왕조에서 허용받았다는 이야기도 된다.[173] Battle of the Straits 중, 'As part of the peace treaty, the Byzantine captives, including Niketas, were ransomed by the Empire. Niketas had spent his captivity in Ifriqiya copying the homilies of Basil the Great and Gregory of Nazianzus in a fine calligraphic manuscript, which after his release he donated to a monastery, and which is now in the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in Paris (Par. gr. 947).'[174] 한 예로 리우트프란트는 니키포로스가 주최한 연회에 나온 음식들마다 참을 수 없는 고약한 냄새가 풍기는 피시 소스가 잔뜩 뿌려져 있어서 도저히 먹지 못하고 그냥 굶었다고 한다(...) 여기서 리우트프란트가 언급한 피시 소스는 바로 로마인들이 즐겨먹었던 생선 액젓인 가룸이었다. 로마인들은 이 가룸을 굉장히 좋아하여 음식들마다 잔뜩 뿌려서 먹는 걸로 유명했는데, 이게 리우트프란트의 입맛에는 도저히 맞지 않았던 듯하다.[175] "로마의 이름을 따온 로물루스는 형제 살해자였고 간통자의 자식이었소. 이는 역사가 증명하오. 또한 그는 망명지를 세워서 지불 능력이 없는 채무자와 도망친 노예, 살인자, 사형수를 받아들였소. 그리고 이런 무리에 둘러싸여서 이들을 로마인이라고 불렀소. 이 모든 것이 역사가 말하고 있는 바이오. 바로 이 무리의 귀족계급으로부터 당신들이 코스모크라토레스(황제)라고 칭한 자들이 생겨났던 것이오. 우리 롬바르드인, 색슨인, 프랑크인, 로렌인, 바바로인, 수에비인, 부르군트인들은 그들을 경멸한 나머지 화났을 때 적에게 '이 로마놈!'하고 욕하지요. 로마인이라는 하나의 이름 속에는 온갖 비천함, 비겁함, 탐욕, 방탕함, 위선이 담겨 있고 심지어 이는 모든 악의 줄임말이오." 출처: 비잔틴 제국/ 미셸 카플란 지음/ 노대명 번역/ 시공사/ 135쪽[176]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39p, 원문: 'As Liudprand of Cremona put it in the tenth century: 'We regard "Roman!" as one of the worst insults.' 및 이 각주의 'For the bad reputation of the citizens of Rome, see the contribution by Paolo Delogu, in this volume.'[177] 오늘날 한국으로 따지면 군 주요시설 근처의 고도제한 등이 있다.[178]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114p, 원문: 'another source, the history of John Scylitzes, confirms, that in the tenth century the ideological significance of the Latin language as an instrument of politics was not forgotten, and the prominent use of Latin words appeared again in order to indicate the ecumenic claim of the Byzantine emperors. After his victory over the prince of the Rus' Svjatoslav in 971, the emperor John Tzimiskes minted gold coins (nomismata) and copper coins (oboloi), showing the icon of the Saviour and on the reverse in Latin characters the words 'Jesus Christ, king of the kings'–‘This didn't happen before' ,comments Scylitzes.'[179] 시종장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는 로마노스 1세 레카피노스의 사생아로, 바실리오스 2세의 할아버지 콘스탄티노스 7세와는 처남 관계였다. 바실리오스 2세 입장에서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는 아버지의 외삼촌 즉 진외종조부였다.[180] 두 사람 모두 군에서 각자의 유력한 지위를 활용하여 당대 제국군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두 사람의 반란은 멜리시노스 가문, 코르티키오스 가문, 타로니티스 가문 등 소아시아 지역 유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기도 했다.[181] 일찍이 바르다스 포카스는 971년에 요안니스 1세에게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이 일가를 싫어했다.[182] 이 사건 이후 동로마인들은 지속적으로 바랑인들을 고용해서 바랑인 친위대가 창설되는 계기가 된다.[183] 이후 블라디미르가 개종해 키예프 공국은 동방 정교회 국가로 거듭났다. 이 명맥은 키예프 공국의 후예인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로 이어지게 된다. 마침 볼로디미르는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겸 귀의할 세련된 종교를 찾고 있었다. 가톨릭, 이슬람, 정교회, 심지어 유대교까지 모두 검토했는데, 조사 작업 차 하기아 소피아에 방문한 사절단이 지상의 것인지 천국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극찬한 기록이 남아있다. 반면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이슬람은 돼지 고기와 술에 대한 금기가 빡세서 제외되었고(다른 전승에 의하면 이슬람교 예배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절단이 "그들의 종교 의식에서는 즐거움이 전혀 없고 오직 슬픔과 우울함만 있었습니다."라고 보고하자, 블라디미르가 그런 종교는 믿고 싶지 않다면서 이슬람교를 거부했다고 한다.), 유대교는 유대인의 민족 종교인데 블라디미르가 유대인의 운명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민족 종교면서 그 민족도 제대로 구원해 주지 못하는 종교가 무슨 소용이냐면서 제외되었다. 가톨릭은 교황수위권 등 교회 / 주교 간의 서열 관계가 정교회보다 빡셌고, 러시아 입장에서 로마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제외되었다.[184] 여담으로 아비도스 전투에서 포카스가 홀로 바실리오스를 기습했지만, 바실리오스 2세가 노려보자 그 자리에서 쓰러져 급사했다는 전설이 있다.[185] 이는 아무리 가까운 황실 여인이어도 주요 정치적 결정에서 배제하라는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바실리오스가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나고, 동생 콘스탄티노스 8세는 딸 둘을 남기고 몇 년 뒤에 따라 세상을 떠남으로써, 그 딸 둘(바실리오스에게는 조카딸들)은 20여년간 황후, 공동 황제, 여제의 지위에 있었다.[186] 이런 이유로 서구권에선 그가 동성애자가 아닌가? 하는 의혹도 있는 듯하다. 다만 그가 남성을 좋아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어찌 보면 무성애자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이지만, 젊었을 때에는 여자들 꽁무니 쫓아다니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는 기록도 있다. 종합해 봤을 때, 반란으로 인해서 사람이 많이 바뀐 듯.[187] 당시 기세를 떨치던 강국이라 오랫동안 로마 안보에 위협이 되었다.[188] 이때 이집트 군의 침공에 어리버리하게 대처한 안티오키아 총독 미하일 부르치스(젊은 시절 니키포로스의 시리아 원정 당시 가장 먼저 안티오키아 성벽을 용감히 돌파한 공으로 총독까지 출세한 인물이지만, 이 무렵에는 한심한 모습을 보였다.)를 해임하고 용감하게 싸운 젊은 군인을 새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가 바로 그는 후기 동로마 역사에서 지겹도록 언급되는 달라시노스 가문의 선조, 다미아노스 달라시노스였다.(팔레올로고스 가문은 11세기 후반에야 기록에 등장한다. 주목할 만한 기록은 디라히온 전투에서 등장). 그리고 된통당한 파티마 왕조는 예루살렘의 성묘 교회를 부수면서 엉뚱한 곳에 화풀이한다.[189] 주디스 헤린의 『비잔티움』, 425쪽[190] 당시 동로마 제국의 귀족들은 고리대금업으로 농민들의 땅을 뺴앗는일이 흔했다. 심지어 고리대금업으로 빼앗지 못하면 협박과 강압으로 빼앗기까지 했다.[191] 이전에 농민들의 미납된 조세를 귀족들은 내지않고 다른 농민들이 내게하는 횡포를 부렸다.[192] 이는 당대 서유럽에서도 일어난 일로, 교회권의 성장에 기여하여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이 일어나는 요인이 되었다.[193] 영어 위키백과 Siege of Thessalonica (676–678) 중 'From the 560s, the Slav communities came under the control of the newly established Avar Khaganate. Raids became larger and resulted in permanent settlement, especially as the Avars were able to capture fortified cities, leading to loss of imperial control over the surrounding areas. While the Byzantines were preoccupied in the East against the Persians, the 580s saw ever deeper and more destructive raids in the Balkans, even into southern Greece.'[194] Siege of Thessalonica (676–678) 중, 'The only imperial reaction came in 658, when Emperor Constans II campaigned in Thrace, brought many Sclaviniae under imperial control, and relocated many Slavs to Asia Minor.'[195] 프레데가르 연대기에서는 훈족이라고 기술되었다.[196] 프레데가르 연대기에서는 '벤트인'이라고 기술되었다[197] 이때 세력을 분할한 쿠브라트의 삼남이 불가리아 제1제국 초대 칸 아스파루흐였다.[198] 일리코로 알려졌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안드레아 단돌로 연대기의 라틴어 텍스트를 잘못 해석하여 만들어진 상상의 통치자라고 본다.[199] 그래서 보통 세르비아를 지칭할 때 라쉬카라고 했다.[200] 단독 황제[201] 생포된 페테른 감옥에 투옥되다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202] 헝가리 왕국의 이스판의 유래로 추정되고 있다.[203] 유려하게 이어진 다뉴브 강 방어선에서 다키아만 툭 북쪽으로 튀어나와 있어서 영역 대비 국경선이 훨씬 넓었던 탓에 방어의 효율이 상당히 떨어졌다.[204] 다만 참회자 테오파네스는 플리스카 함락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205] 이 해골잔 관습은 스키타이 때부터 일부 유목민들이 즐겨쓰던 방식인데 귀족층은 금이나 은도금을 하고 일반인은 가죽을 씌워서 사용했다고 한다.[206] 가톨릭과 정교회의 본격적인 분열은 1054년 동서 대분열부터이지만, 이 문서에서는 편의상 이하 동방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를 '정교회', 서방의 로마 교회를 '가톨릭'으로 칭한다.[207] 김차규 교수의 논문 《9세기 비잔티움의 불가리아 선교 의미》에 따르면 그 외에도 당시 동로마 제국의 상업발전을 위한 국경 안정화의 이유도 작용했다고 한다.[208] 이 답변문서는 지금까지도 남아있으며, 영역본을 이 링크에서 볼 수 있다.[209] 수십년 뒤 960년대 황제 니키포로스 2세의 친조부이다.[210] 이는 거의 정확히 천 년 뒤에도 반복되었는데, 당시 그리스 수상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마케도니아 방면으로 진격하는 그리스군이 테살로니키와 마나스트르 중 어느 도시로 진격할 것인지 결정해 줄 것을 요청해오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테살로니키를 점령하라!(Θεσσαλονίκη με κάθε κόστος!)"고 지시했다고 한다.[211] 생포된 페테른 감옥에 투옥되다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212] 이 전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하면 영어 위키백과의 Byzantine–Bulgarian war of 913–927, 을 참고하면 된다.[213] 이집트를 상실한 이후로는 시칠리아와 우크라이나쪽이 곡창지대 역할을 수행했는데 시칠리아의 밀은 주로 이탈리아에서 소비되었으므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밀은 상당량이 흑해 항로로 운송되었다.[214] 해자가 있는 성이란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