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에우페미오스 (영어: Euphemios, 그리스어: Εὐφήμιος) |
출생 | 미상 |
사망 | 828년 |
직위 | 시칠리아 함대 사령관 |
반란 대상 | 미하일 2세 |
[clearfix]
1. 개요
동로마 제국 아모리아 왕조의 반란자. 미하일 2세에게 숙청당할 위기에 몰리자 반란을 일으켰으나, 토벌대에게 축출되었다. 이에 북아프리카의 아글라브 왕조에 의탁하여 시칠리아를 치게 유도하여 복귀를 꾀했으나, 결국 피살당했다. 무슬림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을 유발시킨 인물이다.2. 행적
826년, 미하일 2세는 시칠리아 속주 총독 콘스탄티노스 소우다스의 추천에 따라 에우페미오스를 시칠리아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북아프리카의 해안을 수시로 공격하여 아랍상선들을 나포하였고 여러 마을을 황폐화시켰다. 그런데 얼마 후, 미하일 2세는 수녀와 놀아났다는 이유로 그의 강등과 처벌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함대를 이끌고 시칠리아로 귀환하던 그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이대로 숙청당하느니 반란을 일으키기로 마음먹었다. 827년, 그는 황제를 자칭하고 시칠리아의 수도 시라쿠사를 빠르게 공략했다. 콘스탄티노스 총독은 내륙으로 도피한 뒤 군대를 모아 반격에 착수했지만 가볍게 격파되었다. 콘스탄티노스는 카나타에 피신했다가 에우페미오스가 보낸 추격병에 잡혀 처형되었다.그러나 얼마 후 팔레르모의 군사 사령관 발라타가 거병하여 시라쿠사를 공격하였고, 에우페미오스는 그들에게 패해 시칠리아에서 축출되었다. 그는 북아프리카로 피신 한 뒤 아글라브 왕조의 아미르에게 구원을 청하면서, 자신을 시칠리아의 지배자로 만들어준다면 매년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아미르는 영토를 확장할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827년 6월 14일 기병 700명과 보병 1만 명, 함선 70~100척을 파견하여 시칠리아 공략전에 착수했다. 사령관은 카이루완 종교 법정의 판사를 역임하던 아사드 이븐 알 푸라트였다.
아랍 함대는 출발한 지 3일 만에 시칠리아 남서부의 마자라에 상륙했다. 발라타는 이들을 막으려 했지만 가볍게 격파당하고 칼라브리아로 피신했다. 이후 아랍군이 팔레르모와 시라쿠사를 제외한 시칠리아 전역을 휩쓰는 동안, 그들과 함께 했다. 하지만 그는 곧 아랍군이 시칠리아 섬을 자기네 것으로 삼으려 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아랍군을 축출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과 비밀리에 접촉했다. 아랍군은 곧 시라쿠사 공성전을 벌였으나 828년 봄까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데다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수많은 병사가 죽어나갔다. 급기야 지휘관 아사드 마저 병사했고, 동로마 함대가 도착하면서 아랍군은 퇴각했다. 그들은 점령지를 대거 내주고 밀려났지만, 시칠리아 서쪽 해안의 여러 요새들에서 버텼다.
이후 아랍군 1개 부대와 함께 엔나를 공격했다. 이때 엔나의 수비대는 아랍군을 물리쳐준다면 그의 권위를 인정하겠다고 제안했다. 소규모 호위병들을 거느리고 구체적인 협상을 위해 엔나의 사신 2명과 접촉했지만, 그들이 숨기고 있던 검으로 찌르면서 현장에서 피살당했다. 그 후 아랍군은 시칠리아에서 동로마군을 상대로 시칠리아에서 꾸준히 맞붙다가 878년 시라쿠사를 정복하면서 섬 전체를 장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