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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기본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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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공식 명칭
한국어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大韓民國과 日本國 間의 基本關係에 關한 條約)
일본어 日本国と大韓民国との間の基本関係に関する条約
영어 Treaty on Basic Relations between Japan and the Republic of Korea

1. 개요2. 전문
2.1.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2.2. 청구권 협정
3. 체결 경위와 후속조치의 상세
3.1. 역사적 배경3.2. 한국에서의 배상의 규모와 유사 사례
4. 한일병합은 이미 무효인가? 이제 무효인가?5. 한일청구권협정 관련 법적 분쟁
5.1. 일제지배가 불법한지 여부5.2. 한일간의 합의 내용에 관한 문제
5.2.1. 한일청구권협정의 모호성5.2.2. 조약해석의 원칙 5.2.3. 일반원칙에 따른 해석
5.2.3.1. 조약문언에 불법행위가 포함되었는가?
5.2.4. 보충원칙에 따른 해석
5.2.4.1. 조약체결 과정에서 불법행위관한 협의가 있었나? 5.2.4.2. 독립 축하금이다? 보상만 했다?5.2.4.3. 배상에 불법행위 손해배상은 미포함되었다? 5.2.4.4. 위에 대한 이견
5.3. 한국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했다?5.4. 한국 개인의 소권은 소멸했다?5.5. 포괄적 권리처분의 문제5.6. 협정은 무효다?
6. 한일 양국의 전략 비교
6.1. 일본정부의 전략6.2. 한국정부의 전략
6.2.1. 한국 대법관의 양심선언(?)
7.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4조8. 한국 정부의 입장
8.1. 청구권에 대한 입장8.2. 독일은 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배상을 끝냈음에도 추가로 배상을 했다8.3. 독일은 재단을 만들어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법적 배상을 했다?8.4. 독일 대법원의 개인 배상 기각 판결8.5. 이탈리아의 배상 판결에 대처하는 독일의 자세
9. 대한민국 대법원의 입장
9.1. 다수 의견
9.1.1. 판결요지9.1.2. 판결이유9.1.3. 결론
9.2. 별개의견(대법관 이기택)
9.2.1. 판결요지9.2.2. 판결이유
9.3. 보충의견(대법관 김소영, 대법관 이동원, 대법관 노정희)
9.3.1. 판결이유
10. 미국의 사례11. 일본의 사례
11.1. 여타 국가들의 사례
1. 문화재 협정2. 문화재 문제3. 비판
3.1. 3억 달러가 일본이 빌려준 차관이라는 주장
4. 중일공동성명과 비교5. 한국 정부의 문서 공개 거부 논란
5.1. 한국 정부의 문서 완전 공개와 그 파장5.2. 일본 정부의 문서 일부 공개와 근황
6. 외부 자료7. 관련 문서8. 기타

1. 개요

1965년 국교 정상화와 전후 보상문제의 해결을 위해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한일기본조약으로 한국과 일본은 외교, 영사관계를 개설해 국교가 정상화 되었으며, 청구권 문제가 해결됨과 동시에 경제협력관계가 시작되었다.

당시 제3공화국이었던 한국은 이 협정을 통해서 확보한 무상자금과 차관을 산업화를 위한 기간산업에 투자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시절의 실제 피해자에게는 대부분 전달되지 않았고 이후 한국 정부는 '위로금'의 형태로 피해자에게 보상하였다.

현재 한일기본조약에 대한 한일 정부간의 (혹은 사법부간의) 해석의 차이가 존재하여 한일 양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2. 전문

2.1.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국민관계의 역사적 배경과, 선린관계와 주권상호존중의 원칙에 입각한 양국 관계의 정상화에 대한 상호 희망을 고려하며, 양국의 상호 복지와 공통 이익을 증진하고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양국이 국제연합 헌장의 원칙에 합당하게 긴밀히 협력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또한 1951.9.8 샌프란시스코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의 관계규정과 1948.12.12 국제연합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 제195호(III)을 상기하며, 본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여, 이에 다음과 같이 양국간의 전권위원을 임명하였다.

대한민국
대한민국 외무부장관 이동원
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 김동조

일본국
일본국 외무대신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다카스기 신이치(高杉晋一)

이들 전권위원은 그들의 전권위임장을 상호 제시하고 그것이 상호 타당하다고 인정한 후 다음의 제 조항에 합의하였다.

제1조 양 체약 당사국간에 외교 및 영사관계를 수립한다. 양 체약 당사국은 대사급 외교사절을 지체없이 교환한다. 양 체약 당사국은 또한 양국 정부에 의하여 합의되는 장소에 영사관을 설치한다.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제3조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연합 총회의 결정 제195호(III)에 명시된 바와 같이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확인한다.

제4조 (가) 양 체약 당사국은 양국 상호간의 관계에 있어서 국제연합 헌장의 원칙을 지침으로 한다.
(나) 양 체약 당사국은 양국의 상호의 복지와 공통의 이익을 증진함에 있어서 국제연합 헌장의 원칙에 합당하게 협력한다.

제5조 양 체약 당사국은 양국의 무역, 해운 및 기타 통상상의 관계를 안정되고 우호적인 기초 위에 두기 위하여 조약 또는 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교섭을 실행 가능한 한 조속히 시작한다.

제6조 양 체약 당사국은 민간항공 운수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기 위하여 실행 가능한 한 조속히 교섭을 시작한다.

제7조 본 조약은 비준되어야 한다. 비준서는 가능한 한 조속히 서울에서 교환한다.

본 조약은 비준서가 교환된 날로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이상의 증거로써 각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서명 날인한다.
1965년 6월 22일 동경에서 동등히 정본인 한국어, 일본어 및 영어로 2통을 작성하였다. 해석에 상위가 있을 경우에는 영어본에 따른다.

대한민국을 위하여 이동원 김동조
일본국을 위하여 椎名悅三郞 高杉晋一

2.2. 청구권 협정

대한민국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1965년 6월 22일 동경에서 서명
1965년 12월 18일 발효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및 양국 국민의 재산과 양국 및 양국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것을 희망하고, 양국간의 경제협력을 증진할 것을 희망하여,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제 1 조
1. 일본국은 대한민국에 대하여

(a) 현재에 있어서 1천8십억 일본 원(108,000,000,000원)으로 환산되는 3억 아메리카합중국 불($ 300,000,000)과 동등한 일본 원의 가치를 가지는 일본국의 생산물 및 일본인의 용역을 본 협정의 효력발생일로부터 10년기간에 걸쳐 무상으로 제공한다. 매년의 생산물 및 용역의 제공은 현재에 있어서 1백8억 일본 원(10,800,000,000원)으로 환산되는 3천만 아메리카합중국 불($ 30,000,000)과 동등한 일본 원의 액수를 한도로 하고 매년의 제공이 본 액수에 미달되었을 때에는 그 잔액은 차년 이후의 제공액에 가산된다. 단, 매년의 제공 한도액은 양 체약국 정부의 합의에 의하여 증액될 수 있다.

(b) 현재에 있어서 7백20억 일본 원(72,000,000,000원)으로 환산되는 2억 아메리카합중국 불($ 200,000,000)과 동등한 일본원의 액수에 달하기까지의 장기 저리의 차관으로서, 대한민국 정부가 요청하고 또한 3의 규정에 근거하여 체결될 약정에 의하여 결정되는 사업의 실시에 필요한 일본국의 생산물 및 일본인의 용역을 대한민국이 조달하는데 있어 충당될 차관을 본 협정의 효력 발생 일로부터 10년 기간에 걸쳐 행한다. 본 차관은 일본국의 해외경제협력기금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것으로 하고, 일본국 정부는 동 기금이 본 차관을 매년 균등하게 이행할 수 있는데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전기 제공 및 차관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유익한 것이 아니면 아니된다.

2. 양 체약국 정부는 본조의 규정의 실시에 관한 사항에 대하여 권고를 행할 권한을 가지는 양 정부간의 협의기관으로서 양 정부의 대표자로 구성될 합동위원회를 설치한다.

3. 양 체약국 정부는 본조의 규정의 실시를 위하여 필요한 약정을 체결한다.

제 2 조
1.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런시스코우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2. 본조의 규정은 다음의 것(본 협정의 서명일까지 각기 체약국이 취한 특별조치의 대상이 된 것을 제외한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a) 일방체약국의 국민으로서 1947년 8월 15일부터 본 협정의 서명일까지 사이에 타방체약국에 거주한 일이 있는 사람의 재산, 권리 및 이익

(b)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1945년 8월 15일 이후에 있어서의 통상의 접촉의 과정에 있어 취득되었고 또는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 들어오게 된 것

3. 2의 규정에 따르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본 협정의 서명일에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 있는 것에 대한 조치와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제 3 조
1. 본 협정의 해석 및 실시에 관한 양 체약국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하여 해결한다.

2. 1의 규정에 의하여 해결할 수 없었던 분쟁은 어느 일방체약국의 정부가 타방체약국의 정부로 부터 분쟁의 중재를 요청하는 공한을 접수한 날로부터 30일의 기간내에 각 체약국 정부가 임명하는 1인의 중재위원과 이와 같이 선정된 2인의 중재위원이 당해 기간 후의 30일의 기간내에 합의하는 제3의 중재위원 또는 당해 기간내에 이들 2인의 중재위원이 합의하는 제3국의 정부가 지명하는 제3의 중재위원과의 3인의 중재위원으로 구성되는 중재위원회에 결정을 위하여 회부한다. 단, 제3의 중재위원은 양 체약국중의 어느편의 국민이어서는 아니된다.

3. 어느 일방체약국의 정부가 당해 기간내에 중재위원을 임명하지 아니하였을 때, 또는 제3의 중재위원 또는 제3국에 대하여 당해 기간내에 합의하지 못하였을 때에는 중재위원회는 양 체약국 정부가 각각 30일의 기간내에 선정하는 국가의 정부가 지명하는 각 1인의 중재위원과 이들 정부가 협의에 의하여 결정하는 제3국의 정부가 지명하는 제3의 중재위원으로 구성한다.

4. 양 체약국 정부는 본조의 규정에 의거한 중재위원회의 결정에 복한다.

제 4 조
본 협정은 비준되어야 한다. 비준서는 가능한 한 조속히 서울에서 교환한다. 본 협정은 비준서가 교환된 날로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이상의 증거로서, 하기 대표는 각자의 정부로부터 정당한 위임을 받아 본 협정에 서명하였다.

1965년 6월 22일 토오쿄오에서 동등히 정본인 한국어일본어로 본서 2통을 작성하였다.

대한민국을 위하여(서명) 이동원 김동조
일본국을 위하여(서명) 시이나 에쓰사부로오 다까스기 싱이찌

3. 체결 경위와 후속조치의 상세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미군정은 1945. 12. 6. 공포한 군정법령 제33호로 한국에 있는 일본재산을 국유와 사유를 막론하고 미군정청에 귀속시켰고, 이 일본재산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한 직후인 1948. 9. 20.에 발효한 「대한민국 정부 및 미국 정부간의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에 의하여 한국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한국내에 있는 일본재산에 대한 권리를 이양 받았다.

이후 미국 등을 포함한 연합국 48개국과 일본은 1951. 9. 8. 전후 배상문제를 해결하기 위 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해 1952. 4. 28. 발효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 4조

(a) 이 조항의 (b)의 규정에 따라, 제 2조에[1] 열거된 지역의 일본국 및 일본 국민의 재산의 처분과, 현재 그 지역을 통치하는 당국 및 그 주민(법인을 포함)에 대한 일본국 및 일본 국민의 청구권(채무를 포함)과, 일본국에서의 이들 당국 및 그 주민의 재산, 일본과 일본 국민에 대한 당국과 그 주민의 청구권(채무를 포함)의 처분은, 일본국과 이들 당국 간 특별협정의 주제로 한다.[2]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 4조에 의해,[3] 일본국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한국 정부와 재산과 청구권에 관한 특별약정 의무를 부담하였고,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1951년 말경부터 국교정상화와 전후 보상문제를 논의하였다. 이 논의는 1952. 2.15. 제1차 한일회담 본회의를 시작으로 총 8차례 진행되었고, 1965. 6. 22.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과 그 부속협정인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일명 청구권 협정)이 체결되었다.

청구권협정은 1965. 8. 14. 대한민국 국회에서 비준 동의되고 1965. 11. 12. 일본 중의원 및 1965. 12. 11. 일본 참의원에서 비준 동의된 후 그 무렵 양국에서 공포되었고, 양국이 1965. 12. 18. 비준서를 교환함으로써 발효되었다.

한국정부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지급되는 자금을 사용하기 위한 기본적 사항을 정하기 위하여 1966. 2. 19. 「청구권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하 ‘청구권자금법’이라 한다)을 제정하였고, 이어서 보상대상이 되는 대일 민간청구권의 정확한 증거와 자료를 수집함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기 위하여, 1971. 1. 19. 「대일 민간청구권 신고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였다. 청구권신고법에 따라 국민들로부터 대일청구권 신고를 접수 받은 후 실제 보상을 집행하기 위하여 1974. 12. 21. 「대일 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1977. 6. 30.까지 총 83,519건에 대하여 총 91억 8,769만 3,000원의 보상금(무상 제공된 청구권자금 3억 달러의 약 9.7%에 해당한다)을 지급하였다.

일본정부는 1965. 12. 18.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일본국과 대한민국 간의 협정 제2조의 실시에 따른 대한민국 등의 재산권에 대한 조치 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였다. 주된 내용은 대한민국 또는 그 국민의 일본 또는 그 국민에 대한 채권 또는 담보권으로서 청구권협정 제2조의 재산, 이익에 해당하는 것을 청구권협정일인 1965. 6. 22. 소멸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후 한국 정부에서 2004. 3. 5.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의 진상을 규명하여 역사적 진실을 밝힐 목적으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해 '일제강점하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전면조사가 이루어 졌다.

이 과정에서 2005년 1월경 청구권협정과 관련한 일부 문서를 공개하였는데, 민관공동위원회에서는 2005년 8월 26일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간 재정적, 민사적 채권 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정부와 군대 등 일본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으며, 사할린 동포 문제와 원폭피해자 문제도 청구권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라는 취지의 공식의견을 내었다.

이에따라 한국 정부는 2006. 3. 9. 청구권보상법에 근거한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불충분함을 인정하고 추가보상 방침을 밝힌 후, 2007. 12. 10.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을 시행령으로 규정하였다. 추가로 2010. 3. 22에 사할린지역 강제동원피해자 등을 보상대상에 추가하였다.

3.1. 역사적 배경

박정희 정권 이전부터 식민지배 배상 자체는 논의가 되고 있었는데, 일본은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 의무는 만국공법에도 없다고 배상을 일관되게 거부하였다. 오히려 일본은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에 남겨놓고 간 사유재산에 대한 역청구권을 주장했는데, 이는 SCAP가 추산하기로는 약 60억 불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즉 연합군도 60억 불이라는 가치를 산정하였으니, 서로 배상을 외치는 상황에서 외교가 단절된 한일 양국이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리 없다. 일본의 한국내 국유 사유 재산은 패전후 미국 군당국에 모두 압수되었고,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의해 한국내 일본재산에 대한 청구권을 포기당했으나 헤이그 육전규칙에도 점령군이 민간 자산을 처분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있기 때문이다. 즉 국가 소유의 국유 재산을 처분한 것은 유효하지만 민간의 사유 재산을 처분하는 것은 국제법 위반으로 한국 정부는 배상해야 한다는 것. 결국 1957년, 청구권과 역청구권을 통틀어 양국이 동등하게 모든 청구권을 포기하자는 큰 틀의 합의를 내놓았을 뿐 배상금의 규모에 이견이 있어 합의는 평행점을 달렸다.

그러던 와중 5.16 군사정변으로 쿠데타에 성공하여 박정희가 집권하면서 협정이 급물살을 타게 된다. 경제개발 등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문제가 매우 시급하였고, 이에 따라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였으나 문제는 이를 실행할 자금이 없었다. 당시 포스코 설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세계은행이 한국의 기간산업에 채산성이 없다는 판정을 내리는 바람에 자금 조달에 빨간불이 켜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한 국가는 미국이다. 미국은 일본을 중심으로한 아시아 지역 경제 블록의 형성을 기획하고 있었으며, 일본, 대한민국, 대만 간의 외교적 관계를 정상화하고 장기적으로는 필리핀 등 동남아 국가들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여 소련중국 공산진영에 대한 포위망을 완성, 효과적으로 압박하고자 하였다. 이에 더하여, 미국은 추가로 한일 간에 강화조약을 통해 6.25 전쟁 이후로 본격화된 냉전에서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를 견제하는 전략적 요충지이며 지리상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일본을, 공산주의 진영 국가들과 맞닿은 한국을 자신들의 진영으로 끌어들여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원래 미국은 1953년 조인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배경에서 볼 수 있듯, 일본까지를 이념적 방어선으로 삼고, 한국은 DMZ와 같이 충돌을 예방하는 지점으로서 삼는 대제재선언을 발표하려고 하였으나,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며 한국을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상황이 바뀐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미국의 계획이 맞물리며 배상금 논의가 진전되었다. 이를 통해 일본은 미국의 강한 압박에 당시 외환보유고의 약 50%에 달하는 금액을 경제 협력 목적으로 지불하였다.[4]
한일기본조약 타결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김종필

이러한 배경에서, 이번에는 양측이 주장하는 지급의 명목과 방법이 대립하였다. 5차 한일 예비회담 13차 회의에서 한국측은 '강제징용으로 피해를 입은 개인에 대한 보상'을 일본측에 요구하였는데, 이에 일본측은 '개인의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인지', '한국은 한국인 피해자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를 할 용의가 있는지' 등에 묻자, 한국측은 '나라로서 청구하는 것이며, 피해자 개인에 대한 보상은 국내에서 조치할 성질의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일각에서는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가 보상을 유용할 것을 알고 뒤탈없이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하기 위하여 피해자를 찾아가 직접 배상금을 지급하길 원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이 전략적으로 만든 논리이고, 본래의 의도는 한국정부에 구체적인 조사를 행하게 하여 징용,징병의 인원수 증거자료 등을 확보해 보상금액을 낮추기 위한 것이다. 예상하다시피 서류등의 증거를 모두 확보하기 곤란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기 때문에 구두와 정황에 대한 증거는일본이 트집잡을 경우 협상이 길어지고 보상금액이 낮아지기 때문.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애시당초 배상금을 유용할 생각으로 조약을 맺으려 했기에 "외교 정상화도 되지 않은 시점에 공관을 설치하고 관리가 드나드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5] 그 결과 지급에 대한 전권은 한국 정부가 가져간 채 김종필을 앞세워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배상이 어떻게 진행될지 안봐도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러다보니 국내 정치가 완벽히 정비되지 않아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기 어려운 환경임에도 불구하고[6] 전국 각지에서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이 서울특별시로 올라와 격렬 시위를 벌였다.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1964년 6월 3일의 시위, 이른바 6.3 항쟁이다.[7][8]

위안부 피해자, 일제에 강제징용된 사람들 등 많은 사람들이 20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부역 매국노라며 손가락질당하던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했다. 때문에 야당에서 자금에 대해 알게 되고, 국회에서 법률을 통과시켜 정부가 신문기사를 통해 배상금 지급 신청을 모집할 때에도 자신의 피해 사실을 밝히기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해당 조약은 한일관계 정상화 및 한국 기간산업 육성에는 큰 역할을 발휘했으나, 일본의 과거사 청산에는 죽 쒀서 개 줬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법리적으로 일본은 이 조약으로 일제 강점기를 비롯해 1965년 이전 존재했던 모든 청구권 문제를 공식적으로 해결하였다.

이후 위안부 문제 관련 시민단체들이 "우리에게 와야할 보상금이 본래 만들어질 수 없었을 포항제철이 만들어지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했고, 이를 통해 포항제철과 국민경제가 이처럼 성장했으니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일말의 보상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라고 요청했으나 포스코는 무대응과 쫓아내기로 일관, 포스코 명예회장에게 도움을 얻고자 만남을 요청했으나 이마저도 묵묵부답, 피해자들이 사무실까지 찾아갔으나 문전박대. 결국 소송으로 이어졌으나 패소하였다. 당시 판결문을 보면 법적 판단 이외에는 언급을 최대한 금기시하는 판결문 작성 관례로는 이례적으로 "포스코가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에게 어떠한 법적 의무도 없지만, 청구권자금으로 설립된 포스코가 적어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측면에서 강제징용이나 임금미지급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하여 나름대로의 노력을 다해야 마땅할 것이다."[9] 하는 판사의 의견이 들어갔다.[10]

2005년 한국 정부는 한일협정 문서를 일부 공개하였다. 1963년 3월 5일 쓰여진 ‘한국의 대일청구권 8개항목에 관한 양측 입장 대비표’ 문서에서는 정부가 징병·징용 피해자 103만 2,684명에 대해 총 3억 6,400만 달러의 피해보상금을 일본에 요구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서 국가가 막아놓았던 강제 징용 임금 문제 등을 일본에 요구할 최소한의 근거가 생겼다. 링크

미국 중앙정보국(CIA) 보고서에 따르면 박정희가 한·일협정 체결과정에서 일본기업으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수수했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한일협정 배상금을 민주공화당 예산에 편입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본이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일본 기업을 시켜 뒤에서 뇌물을 갖다 바쳤다는 의혹 제기. 보고서에 따르면 민족문제연구소는 일본기업이 1965년까지 5년동안 민주공화당 예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6,600만달러를 지원했다고 주장했다. 링크1 링크2

결국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그나마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준거해 타국에 비해 불리한 입지를 가짐에도 더 큰 배상금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냉전의 최전선이라는 입지상 미국에게 있어 이념 면에서 우호국인 한국과 일본이 차후 자국을 방어하며, 동맹국으로써 함께 싸울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할 필요성이 있었고, 때문에 미국이 일본에게 한국을 대상으로 큰 금액의 배상을 시행하도록 압박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일본 사회에서도 한일기본조약에 대해 반대여론이 꽤나 극심했는데, 이유는 반일여론이나 식민지배 관련주제가 쟁점이었던 한국 내의 반대여론과는 명확히 달랐다.
좌익계열이 주축이었던 일본 야권 세력은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을 놔두고 한국과 단독수교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미국을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으로 여기고 반전, 평화를 외치며 안보투쟁에 나섰던 학생운동, 시민운동 계열세력은 베트남전에 파병을 결정한 한국을 미국의 하수인, 용병이라며 경멸해 마지않았기 때문이다.

3.2. 한국에서의 배상의 규모와 유사 사례

또한 일본 내에서 한국에 대한 비판 여론에 불을 지피는 사유 중 하나가 바로 배상의 규모다. 자민당의 우츠노미야 도쿠마 의원[11] 또한 다음과 같은 발언을 남겼다.
"이 조약은, 전제적으로 일본으로서는 양보하는 바가 지나치게 많고 무상 공여 외에, 한국에 부여하는 경제적 이익이 과다하며, 그로 인해 일본 국민이 치르는 희생이 너무 크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상 공여 3억 달러, 장기 저리의 차관 2억 달러, 이외의 민간 상업 차관 1억 달러까지 합한다면 모두 합해서 6억 달러 이상의 대략 금액은, 법적 근거가 있다고 인정되는 대일 청구권에서 보자면 부당한 거액이고, 한국 경제의 반제 능력에 비추어 보건데 극히 위험한, 전망이 없는 투자라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반대했다. (윤노 후쿠쥬, 한국 병합사 연구, p.57.)
1960년대~2010년대의 달러화 인플레이션은 약 750% 수준이므로 현재 기준으로는 60억 달러 정도의 가치를 지닌다. 외환보유고가 2018년 기준으로 4천억 달러 정도인 대한민국에서도 정부가 60억 달러 수준의 일방적인 이익을 보면 이는 언론에 연일 대서특필될 엄청난 규모다. 그런데 한국 경제의 인플레이션과 경제규모가 당시에 비해 750%만 성장하지 않았으며, 당시 대내외 신용도도 바닥이라 차관을 발행할 수도 없었으므로 당시 한국 경제에 있어 8억 달러는 현재 가치로 60억 달러를 훨씬 상회하는 가치를 지닌다.

이는 현재 가치로 추산하는게 쉽지 않으나, 당시 국가예산이 850억 원이었으므로 약 2년치 국가예산이 들어온 셈이며[12], 원화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적어도 수십조 원에서 크게는 수백조 원의 가치가 있었다 판단할 수 있다.원화 인플레이션이 2018년 기준 약 41배임을 고려한 수치다. 여기에 더해 당시 한국에서는 외화를 벌어올 기간산업이 전무했던지라 파독 광부 및 간호사, 월남 파병 등 인적자원을 수출하여 외환보유고를 확보하는 각종 방법이 동원되었는데 이러한 사람들의 노동을 인년으로 환산하면 이를 통해서도 최대 수백조 원의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수백조 운운은 둘째치더라도 어쨌든 당시 대한민국에겐 엄청난 금액이었음까지는 그 어떤 사람도 부정하지 않았고 우츠노미야 도쿠마 자민당 의원의 발언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대신 지원을 발판으로 선진국이 되었고 이를 통해 일본도 주요 무역국을 확보하여 상당한 이익을 얻었으니[13] ‘반제 능력에 비추어 전망이 어두운 지원’이라는 예상만큼은 빗나갔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다만 일본 측도 전부를 달러로 제공한 것은 아니고, 차관을 지급한 뒤 이를 일본 기업이 한국에서 일하는데 사용하게끔 하는 등 여러 방식으로 제공되었기에 일본의 부담이 생각보다는 크지 않았을 수 있다는 일각의 반박이 있다. 하지만 정확히는 한일 양국에 도움이 되는 형태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예를 들자면, 우선 세계은행이 채산성이 없다는 판정을 내려 설립에 빨간불이 들어온 포스코는 한일기본조약 배상금으로 설립되었으나, 대성한 이후에도 시민단체와 양금모 위안부 피해자가 요구한 도의적 책임을 등한시하다가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한일기본조약 차관으로 일본 기업에 용역을 구매하여 한국 기업과 공동으로 소양강댐 설계용역을 체결할 수 있었고, 건설 당시에도 국가가 차관으로 건설장비를 구매하여 현대건설에 대여해줄 수 있었다. 이 당시 축적한 기술과 양성된 기능공은 현대건설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현대자동차는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모델이자 대한민국 자동차공업 자립화의 신호탄인 포니를 미쓰비시 랜서의 FR 플랫폼 및 구동계를 갖고 와서 스킨 체인지하여 만들었고, 이후에도 여러 도움을 받다 2009년에 이르러서야 미쓰비시와 종속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즉 거의 모든 한국의 대기업들은 일본 기업들이 차관을 받고 한국에 재화와 용역을 제공해주는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차관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설비와 중간재를 수입하였는데 주로 일본을 통해 이루어졌다. 한국은 설비를 갖춰 중간재를 수입한 뒤 완제품을 생산하여 외국에 수출하는 현대 대한민국의 기간산업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었다. 때문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준거한 전쟁 당사국도 아닌 한국이 무상차관 3억, 유상차관 2억, 상업차관 1억 달러 이상을 약속받았고 결국 상업차관을 3억 달러까지 늘려 8억 달러라는 거금을 받았으면 달러든 엔화든 차관이든 상당히 큰 금액이 맞다! 외환보유고로 채워놓을 것도 아니고 어차피 결국 다 재화 사는데 써야 하는게[14] 당시 한국의 현실이고, 당연히 6.25 전쟁 당시 부를 축적했던 것처럼 일본에게 상당부분 흘러들어가는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타 전쟁 피해국들과 한국의 배상 규모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은 1955년부터 1959년에 걸쳐 미얀마, 인도네시아, 필리핀, 남베트남에 대해 보상하였고, 당시 인도네시아 국회에서 조약 비준이 부결되거나, 남베트남과 필리핀이 배상청구권을 포기하지 않는 등 여러 잡음이 있었으나 결국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준거하여 청구권을 포기하였다. 배상의 규모는 필리핀 100만명, 베트남의 경우 200만명 이상, 인도네시아 또한 240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이들이 받은 전쟁배상은 ① 필리핀[15]의 경우 무상 6여억달러 , 상업차관 2억 5천만 달러 규모, ② 베트남[16]의 경우 무상차관 3,900만, 상업차관 910만 규모 ③ 인도네시아[17] 의 경우 무상차관 2억 2,300만, 상업차관 4억, 무역채권 1억 7천 만 달러, ④ 미얀마[18] 무상지원 2억, 추가지원 1억 4천만 달러다. 규모를 놓고 볼 때 필리핀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국에 비해 훨씬 작은 규모의 금액이다.[19]

물론 대한민국이 충분한 배상을 받았다 생각하지 못할 수는 있으며 이는 분명 일리가 있다. 하지만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규정하는 법이 국제조약 어디에도 없음을 고려하면 일본이 패전국이기에 이루어진 배상이고 당시 냉전으로 국제적 군사 논리가 통용되어서 가능했던 것이다.[20] 과거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인 연합국이 패전국인 독일베르사유 조약으로 과도한 전쟁배상[21][22]을 요구하였다가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전적이 있음을 생각해보자. 다른 나라는 둘째치더라도 일본이 전쟁하면서 죽이거나 부순 미군 피해만 전부 배상하라 해도 일본은 파산했을 것이다. 피해에 걸맞는 배상을 받지 못한건 한국만이 아니다. 그리고 제3자의 입장에서도 21세기의 대표적 선진국인 G7의 전원이 제국주의 침략 전력이 있다.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배 피해에 대해서는 정당한 통치였다는 둥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에 피해 사실 자체를 인정받기 힘든 현실이었다.

4. 한일병합은 이미 무효인가? 이제 무효인가?

논란의 대상이 되는 부분은 "한일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에서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부분이다. 조약은 한국어, 영어, 일본어로 각 각 1통씩 총 3통이 작성되었는데 기준이 되는 영어로는 already null and void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한국에서는 이미(원천) 무효라는 입장을 일본에서는 이제는 무효라는 입장이 다수설이다. "이미 무효"라고 하면 일제가 대한제국을 침탈하면서 단행한 일련의 조약들 자체가 그 당시부터 무효였으므로 일본의 한일병합은 원천 무효이며 불법 행위가 된다.

일본 측이 주장하는 "이제는 무효"의 경우에는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고 경술국치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 즉 제2차 한일협약 등의 협약이나 조약이 체결 당시에는 합법적이었으나, 연합국과 일본을 일방 당사자로 하는 관계에서 조선반도에 관한 모든 권리, 권원의 포기를 명시한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발효 시인 1952년 4월 21일부터 효력을 상실(무효)했다는 입장이다. 당연히 국권 침탈의 연장선상이자 최종 도착지인 한일병합조약은 무효가 아니므로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는 합법적인 것이 된다.

당연히 식민지배 자체가 불법인 경우와 합법인 경우는 청구권의 규모는 물론 식민지배에 대해 법적으로 사죄(謝罪) 유무 등 큰 차이가 존재한다.[23]

한국에서는 null and void를 일본에서는 already null and void를 각각 주장하였다. 영문판의 already null and void는 일본측의 주장이 수용된 것이다.

정확히는 차관이 급했던 한국이 양보함으로서 결국 한국어본과 일본어본에는 각각 '이미 무효', '이제 무효(もはや無効)'라고 표현하고 영어본에서 'already void and null(이미 무효하며 효력이 없음)'이라고 표기하기로 합의하게 되었다.

사실, 50년대부터 양측간 오랜 기간 진행된 한일 회담 당시의 대화록을 살펴보면,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의해 이미 무효화된 일본의 조선반도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에 관한 사항을 다시 한번 조약에 명시하자는 한국 측의 주장에 관해, 일본 측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했으며, 그렇다면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결정된 사항을 단순확인만을 하는 조항이라는 것을 명시하기 위해, 일본 측은 already를 넣자는 주장을 하였다.

즉 이 한일협정이 중요한게 아니라 "과거 을사조약에서 외무대신 등의 장관급 인사가 과연 일개 신분으로써 외국과의 독자적인 조약 등을 체결할 권리가 있었고 당시 한국의 주권이 완전한 독립국의 지위를 국제적으로 상실되지 아니하였으며 인정받는 상태였다."가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일본이 한일기본조약 배상금을 독립 축하금이라는 명분으로 제공한 이유가 된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5. 한일청구권협정 관련 법적 분쟁

한일청구권협정 관련하여 그 해석을 놓고 한일간에 이견이 오랜기간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다. 특히 지난 몇년간 한국의 강제징용피해자들이 한국에 있는 전범일본 기업을 상대로 정신적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면서 이미 법적차원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아니 두 국가간의 조약인데 왜 법적 논쟁이 중심으로 떠오른지 의아하겠지만, 국민의 권리와 관련된 조약은 필수적으로 국회의 비준을 거쳐서 국내법과 동일한 위치를 가지도록 되어있다. 특히 한일청구권은 1965. 8. 14.에 대한민국 국회의 비준을 거친 만큼, 엄연히 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 따라서 관련된 논의는 법률적 문제일 수 밖에 없다.

5.1. 일제지배가 불법한지 여부

법에서 청구권 관련 논리를 전개할 때 그 첫번째 단계는 청구권이 존재하는지를 검토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한국과 일본정부 모두 말을 아끼는 편이다. 어차피 이 부분은 논쟁해봐야 각국법의 영역이기 때문에 바뀔게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법부 입장에서 청구권의 존재는 논의의 가장 전제가 되는 쟁점이기 때문에 아주 심혈을 기울여서 검토할 수 밖에 없다.

즉, "일제지배의 불법성 여부"라는 거창한 제목과는 달리 의외로 한국법원 빼고는 아무도 관심없는 주제다. 단, 예전에 강제징용피해자들이 일본 법원에서 소를 제기한적이 있기 때문에 이때는 일본법원도 이 문제에 판단을 내렸던 적이 한번 있기는 하다.

법에서 손해배상을 받는 방법에는 채무불이행과 불법행위가 있다. 채무불이행은 밀린 임금을 받아내는 것과 같이 A와 B 사이에 계약이 있었는데 지켜지지 않을 때, 법이 끼어들어서 계약을 지키라고 하는 경우다. 반면 불법행위는 법이 A를 다그치면서 네놈이 나쁜 일을 했으니 B한테 돈으로 물어주라고 하는 상황이다.

채무불이행에 기한 손해배상은 보다시피 그 전제로 "당사자간에 계약"의 존재가 필요하다. 반면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은 "가해자의 불법행위"의 존재가 전제된다.

일제지배가 불법행위인지 여부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 부분이다. 일제시대 한국인 피해자가 일본정부나 일본(법)인에게 요구하는 단 두가지 손해배상중 한개가 성립하냐 안하냐 결정되기 때문이다. 자칫 주장해 볼 수 있는 손해배상이 반토막 날수도 있는 문제인 것이다.

한국의 강제징용피해자들은 대한민국 법원에 민법 제751조 제1항의 불법행위에 기한 정신적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사실 불법행위 손해에는 종류가 더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정신적 손해배상만이 문제가 된 이유는 나머지가 실질적 경제적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대한민국 법 체계상 물가 상승을 고려 안하는 바람에 일제시대 임금을 환산해보니 불과 20원이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때문에 피해자인 원고측이 주장을 안한것이지 다른 종류의 손해가 존재안한다는 것이 아니다.
민법 제5장 불법행위
제750조(불법행위의 내용)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위법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제751조(재산 이외의 손해의 배상) ①타인의 신체, 자유 또는 명예를 해하거나 기타 정신상고통을 가한 자는 재산 이외의 손해에 대하여도 배상할 책임이 있다.

이에대해 한국 대법원은 2012.5.24. 불법행위가 맞다는 판단을 내렸다. 근거는 다름 아닌 1962년 개정된 헌법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4·19의거와 5·16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함에 있어서...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이래로 몇 개정을 제외하고는 일관되게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3·1운동을 통해서 시작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다. 따라서 같은 시기의 일제의 한반도 통치는 대한민국 헌법상으로는 꼼짝없이 불법이다. 그리고 그 침략행위에 종사하기 위해서 발효된 강제징용 마찬가지로 불법이 된다. 비록 일제시대의 법률에 근거를 두고 있다하더라도 말이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침략하여 지배한 행위를 판단함에 있어서 국제법도 아니고 고작 한 국가의 헌법을 인용한다는 것이 납득이 안갈 수도 있으나, 여기서 판단 주체가 대한민국 법원이란 것을 기억해야한다. 한국 법원은 반드시 한국의 법에 따라서 판단을 내려야만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최상위 법은 알다시피 헌법이다. 대법관 13명 전원 이 부분에서는 동의를 했다.

반면에 일본법원은 같은 사건에 관해서 당연히 불법행위가 아니라고 판단을 내렸다. 이것도 일본판사가 딱히 혐한이라서가 아니라 일본 법에는 위 대한민국 헌법 전문 같은 법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한민국 법률상 일제의 한반도 지배와 그 침략을 위한 강제징용은 모두 불법행위이고, 이로 인하여 동원되었던 한국의 강제징용자들은 그로인해 정신적 손해를 입었기 때문에 일본정부와 해당기업에 청구권이 발생한다.

하.지.만. 법률적으로 볼때 청구권이 발생한다는 것은 법적 검토의 시작점에 불과하다. 이것을 거꾸러트릴 항변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항변으로써 비로소 등장하는게 바로 한일청구권협정 문제이다. 즉, "한국 강제징용 피해자들한테 정신적 손해배상 청구권이 있었던건 맞는데~ 한일청구권협정 때문에 지금은 없어졌어~" 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부터가 한국정부와 일본정부가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쟁점들이 산적해 있다.

5.2. 한일간의 합의 내용에 관한 문제

5.2.1. 한일청구권협정의 모호성

한일청구권협정이 논쟁의 여지가 생기는 것은 그 내용에 모호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한국인 일제시대 피해자가 일본정부나 일본국민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채무불이행"이라 해서 계약을 근거로 해서 배상해달라고 하는 것인데, 일제시대에 못 받은 밀린 임금을 요구하는 게 그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불법행위"라고 해서 불법적으로 끌려가서 고생한 데 대한 손해를 물어내라고 하는 것이다.
한일청구권협정 제 2 조
3.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그런데 위와 같이 한일청구권협정은 대한민국 국민이 "모든 청구권"에 대하여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손해배상 청구권은 청구권의 일종이다. 따라서 저기서 말하는 "모든 청구권"이, 손해배상 청구권을 포함하는 개념인지가 문제가 된다. 일반 언어생활에서는 포함이 되는 걸로 해석하는 게 타당하겠지만, 의외로 법적 관점에서는 모호하다.

한일청구권협정은 문언상 내용이 매우 간결하기는 하다(지나치게 쓸데없이). 한국정부와 한국인이 일본정부와 일본인에게 가진 청구권은 물론, 일본정부와 일본인이 한국정부와 한국인에게 가진 모든 청구권을 더 이상 주장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문언대로 따르면, 한국인 일제피해자가 일본정부와 일본인에게 손해배상을 청구를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면 된다. 법률검토는 끝나고 다들 손 흔들고 집에 가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결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한일청구권협정은 법적으로 볼 때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한국말로 깔끔하게 쓰여져 있는데 이해를 못 하겠다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싶겠지만 정말이다. 한국 대법관들도 이 부분을 지적하였다.

사법부는 법을 해석하는 기관이다. 사법부를 만약에 컴퓨터라고 한다면 법은 프로그래밍 언어와 같다. 프로그래밍 언어가 자체적인 문법과 단어가 있듯이, 법 또한 자체적인 문법과 표현들이 존재한다. 때문에 이에 맞게 법률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법률가들은 그 나름대로의 규칙에 따라 해석할 수가 없다.

조약은 일단 국회비준을 받으면 그 때부터는 국내법과 다름이 없다. 법은 사법부의 판사들에 의해서 해석되어서 적용되어야 할 대상이다. 따라서 웬만한 조약은 언젠가는 법률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위 한일청구권협정은 전혀 법률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씌어 있다. 코딩해달라고 했더니 사람말로 일기를 써온 셈이다. 에러가 안 날 리가 없다.

청구권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이란 문구가 그렇다. 보통사람이 보기에는 뭔가 모든 것이 깔끔하게 해결되는 듯한 속시원한 문구라고 보이겠지만 법률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표현이다. 청구권이 단순 소멸한다는 뜻인가? 채무를 국가가 대신 인수라도 하겠다는 건가? 앞으로 법적으로 소송을 걸지 않겠다는 합의문인가? 법률가들은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다.

"모든 청구권"이란 표현도 그렇다. 청구권은 법학에서 화학의 원자 정도의 위상을 가진 개념이다. 민사적으로는 한마디로 안 들어가는 데가 없다. 지나치게 범위가 넓은 것이다. 보통사람이 보기에는 청구권이라고 하면 돈 달라고 하거나 재산 돌려달라고 하거나 그 정도밖에 안 떠오르겠지만, 법에서 청구권이란 남에게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가령 인지청구권이라는 게 있는데, 사생아가 친아버지한테 가서 나를 아들로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방해제거청구권이란 것도 있다. 이건 가령 내 땅에 뜬금없이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 건물을 짓고 있을 때 나가라고 하는 것이다.

한일청구권협정을 문언 그대로 해석하면 위에 예로 든 청구권도 행사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문제는 법적으로는 그 성질 상 포기하는 게 불가능한 청구권도 널렸다는 것이다.

조약이란 게 외교의 특수성 상 본래 이렇게 대충 두루뭉술하게 쓰는 것 아닌가 싶다면 다음과 비교해 보자.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14조(b)
...연합국은 모든 보상청구, 연합국과 그 국민의 배상청구 및 군의 점령비용에 관한 청구를 모두 포기한다.
보다시피 2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과 연합국 간의 조약에서는 매우 구체적으로 3개의 청구권을 지정해서 "포기"한다는 법적표현을 명확히 해주고 있다.
평화 조약 제77조
4독일 및 점령국들의 이탈리아 및 이탈리아 국민의 이익을 위한 이들 및 기타의 어떤 규정을 해칠 것 없이 이탈리아는 1945.5.8 현재의 독일 및 독일 국민에 대한 일체의 미해결 청구권을 자국을 위해 및 이탈리아 국민을 위해 포기한다. ... 이 포기는 전쟁 중에 체결된 협정에 관한 금전 채권, 정부 간의 일체의 청구권 및 전쟁 중에 생긴 손실 또는 손해에 대한 일체의 청구권을 포함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독일 이탈리아의 전후 조약에서도 "포기", "금전채권", "전쟁 중에 생긴 손실 또는 손해에 대한 일체의 청구권" 과 같은 정확한 법률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즉 다른 조약들과 비교해봐도 한일청구권협정은 매우 특출나게 비법률적으로 쓰여진 조약인 것이다. 작성한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법알못이었던 게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모호함 때문에 한일청구권협정은 그 해석을 놓고서 왈가왈부할 여지가 매우 많아진 것이다. 이런 전제 하에 지금부터는 구체적으로 조약을 해석해 보기로 한다.

5.2.2. 조약해석의 원칙

법학은 법을 해석하는 학문이다. 때문에 당연히 법을 해석하는 방법론들이 상당히 완성되어있다. 짧게잡아도 1천년이 훌쩍 넘어가는 역사를 가진 학문인데 상식적으로 없을리가 없다.

법학에는 "일반원칙"과 "보충적 수단"이란 개념이 있는데, 일반원칙은 무조건 최우선적으로 적용되는 원칙을 말하고, 보충적 수단은 그 원칙을 쓸 수 없는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쓰도록 허락된 차선적 원칙을 말한다. 법은 일반원칙상 "문언의 통상적 의미"대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고 만약에 명확하지 않은 개념이 사용되었다면, 그제서야 비로서 보충적 수단으로써 법률의 입법 취지와 목적, 그 제·개정 연혁, 법질서 전체와의 조화, 다른 법령과의 관계 등등이 동원된다.

조약의 해석도 크게 다를게 없다. 조약의 해석과 관련하여 대한민국은 1969년 체결된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협약(Vienna Convention on the Law of Treaties)’을 1980. 1. 27. 발효했기 때문에 이 시점 부터는 엄연한 법으로써 꼼짝없이 따라야만 한다.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협약 제3절 조약의 해석
제31조 (해석의 일반규칙)
① 조약은 조약문의 문맥 및 조약의 대상과 목적으로 보아, 그 조약의 문면에 부여되는 통상적 의미에 따라 성실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
제32조 (해석의 보충적 수단)
제31조의 적용으로부터 나오는 의미를 확인하기 위하여, 또는 제31조에 따라 해석하면 다음과 같이 되는 경우에 그 의미를 결정하기 위하여, 조약의 교섭 기록 및 그 체결시의 사정을 포함한 해석의 보충적 수단에 의존할 수 있다.
(a) 의미가 모호해지거나 또는 애매하게 되는 경우', 또는
(b) 명백히 불투명하거나 또는 불합리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
다만 한일청구권 협정은 비엔나 협약이 발효되기 훨씬 이전인 1965년에 체결되어 시제적인 문제가 있다. 때문에 한일청구권협정의 해석에 관하여 한국 법관들은 비엔하 협약에 구속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비엔나협약은 그 내용이 보다시피 법학의 기본 원칙을 확인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법률가들한테는 이미 존재해오던 상식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비엔나 협약에 의한 구속이 없다하더라도 한국 법관들은 거의 같은 기준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 실제로도 한국 대법관 13명 중 13명 모두가 비엔나 협약의 내용과 같은 원칙에 따라서 해석을 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조약을 해석하는 과정을 보도록 하자. 법해석의 일반원칙에 따라서 우선 "문언의 통상적 의미"대로 해석해야만 한다.

5.2.3. 일반원칙에 따른 해석

조약의 문언을 확인하여 그 통상적인 의미대로 해석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부터 한국과 일본측이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한다.

일단 조약의 어떤 부분을 읽어야 하는지 확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에관해서는 비에나 협약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제31조 (해석의 일반규칙)
② 조약의 해석 목적상 문맥조약문''에 추가하여 조약의 전문 및 부속서'''와 함께 다음의 것을 포함한다.
(a) 조약의 체결에 관련하여 모든 당사국간에 이루어진 그 조약에 관한 합의
(b) 조약의 체결에 관련하여, 1 또는 그 이상의 당사국이 작성하고 또한 다른 당사국이 그 조약에 관련되는 문서로서 수락한 문서.
즉, 조약문인 "한일기본조약"과 부속된 "한일청구권협정", 이에 "관한 합의", "관련된 문서로서 수락한 문서"가 해석의 대상이 된다. "모든 청구권"이란 "샌프란시스코우시...평화조약"에서 규정한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볼 때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전제로 이루어진 협정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제4조 (a)는 "관련된 문서로서 수락한 문서"로써 "해석 목적상 문맥"이다.
한일청구권협정 제 2 조
1. 양 체약국은 ...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런시스코우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
3.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4조
(a) 이 조항의 (b)의 규정에 따라, 일본의 부동산 및 제2항에 언급된 지역의 일본 국민들의 자산 처분 문제와, 현재 그 지역들을 통치하고 있는 당국자들과 그곳의 (법인을 비롯한) 주민들에 대한 (채무를 비롯한) 그들의 청구권들, 그리고 그러한 당국자들과 주민들의 부동산의 처분과 일본과 그 국민들에 대한 그러한 당국자들과 주민들의 채무를 비롯한 청구권들의 처분은 일본과 그 당국자들 간에 특별한 협의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일본에 있는, 그 당국이나 거류민의 재산의 처분과, 일본과 일본국민을 상대로 하는 그 당국과 거류민의 청구권(부채를 포함한)의 처분은 일본과 그 당국간의 별도 협정의 주제가 될 것이다.
여기서 해석이 본격적으로 갈리기 시작한다.
5.2.3.1. 조약문언에 불법행위가 포함되었는가?
협정의 범위에 관한 문제이다. 가장 핫한 이슈로써, 본 단계에서는 보충적 해석에서 본격적으로 한판 붙기 이전의 전초전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한국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모든 청구권"의 범위는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만이 포함되고, 불법행위에 기한 책임은 "당연히 포함된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거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4조 (a)에 언급된 청구권 중에는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청구권이 단 한개도 등장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우리가 조약을 그렇게 쓴건 맞는데~ 조약의 '모든 청구권'이란게 꼭 불법성을 전제로한 청구권을 포함하는게 확실한건 아니잖아~"라고 재항변하는 것이다.

"단정할 수 없다"는 표현은 모호하다면 상태를 유지시키는게 권리를 지키는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반영한다. 이건 법적으로 기본원칙이기 때문에 전혀 무리한 주장이 아니다. "안정성"은 법의 최상위 가치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일본기업은 "모든 청구권"은 통상적인 문언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한다. "모든 청구권"은 모든 청구권이란 것이다. 해석의 기본 원칙에 충실한 해석방법이다.

한국 대법원은 이 부분에 관해서 특별히 명시적인 판단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충적해석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볼 때 한일청구권협정의 문언의 의미가 모호 또는 애매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위 "한일청구권협정의 모호성 문제"에서 보았듯이, 법적인 시각에서는 모호하다고 판단해도 별 무리는 없어 보인다.

5.2.4. 보충원칙에 따른 해석

"조약의 교섭 기록 및 그 체결시의 사정 등"을 이용하여 해석하는 단계이다. 정황적인 증거들을 종합하여 당시에 당사자인 한일이 어떠한 의도로 조약을 체결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한국측의 주장이 집중되어 있는 부분이다. 온갖 증거가 제시되기 때문에 매우 복잡하다.
5.2.4.1. 조약체결 과정에서 불법행위관한 협의가 있었나?
한국 강제징용 피해자 측의 주장은 최초의 한일간의 회담에서 부터 한일청구권협정까지 불법성을 전제로한 청구권에 관해서는 논의 된적이 없다는 것이다.

자동차 사는데 매수인이 딜러보고 "그런 옵션은 넣자고 이야기 한적 없는데 왜 넣었니?"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반면에 일본은 "자동차 브레이크가 어떻게 옵션이냐? 자동차 사면 당연히 들어가는거지!" 하는 입장.

이 부분은 한국측의 증거제시와 온갖 주장인 집중되어있는 부분인데, 양이 정말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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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2. 독립 축하금이다? 보상만 했다?
이것은 일본이 한국에 지급한 돈의 성격문제이다. 만약에 배상금으로서 지급되었다면, 지급이 완료된것 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청구권이 만족을 얻어서 소멸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돈 받은건 맞는데~ 그건 이 배상금이 아니었잖니~"라는 재항변이다.

우선, 해당 조약은 분명 배상의 성격을 띄고 있으나 일단 일본은 독립축하금을 한국에 외화를 지불하였는데 이에는 사정이 있다.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배상은 "불법 행위로 인한 피해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의미하며 보상은 "불법이 아닌 행위로 인한 피해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의미한다. 일본은 국가적 차원에서 한일합병이 도덕적 과오임은 인정하고는 있으나 법리적으로 1910년 이후 조선인들은 일본 국민으로 분류되었기에 자국 내에서 벌어진 일로 인식하고 있다. 즉 한일합병 이후 발생한 자국민의 피해에 대한 책임만을 가질 뿐 한일합병조약 자체가 불법이었으며 식민지배까지 배상해야 한다는 주장까지는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즉 일본 측은 "불법 행위가 없었으니 '배상'할건 없고 '보상'은 하겠다"는 태도였다. 전술한 것처럼 미국의 의향이 강하게 들어간 상황이라 조약을 성립해야 했지만, 배상 규모 확대, 배상금 지급 주체 등 여러 부분에서 양보를 한 일본도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박정희 또한 정권의 기반이 미약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기간산업을 일으킬 자금이 급하게 필요했고, 이미 많은 양보를 받아낸 상황에서 더 밀어붙이다간 조약 체결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으므로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지급하는 것에 동의하고 조약을 체결한다.

어쨌거나 한일 양국은 각자 자국 국민들에게 설명하게 좋게끔 입맛대로 이 조약을 해석하였으나 변하지 않는 두가지 사실이 '청구권 문제의 해결'과 '일본의 자금 지원'이다. 때문에 한국 입장에서는 일본에게 일제 시절의 전쟁범죄에 대한 배상을 받았다고 설명하고, 일본은 독립축하금을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대승적 차원에서 지급했다고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2018년 대한민국 대법원은 식민지배 행위를 불법으로 보고[24] 배상을 하라고 판결하였고 이와 관련해서 양국 간에 논란이 재발되었다.

대법원에서 피고 일본기업은 한국이 제1한일회담에서 말한 "보상금"이 배상금을 포함한다는 주장을 했다. 문안상으로는 보상금이지만 한일 외교대표자들은 둘다 뭉뚱그려서 이해했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보상과 배상은 혼동되어 사용되는 단어다. 보상이나 배상이나 한자로 써도 그 의미가 같다. 하지만 법학에서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보상은 가해자의 합법적인 행위를 전제로 하고, 배상은 불법적인 행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물론 법률가들도 일반인들이 두 단어를 혼용한다는 점은 잘 알고 있고, 이를 고려해서 판단을 한다. "그래, 뭐, 모를 수도 있지."하고 눈감아 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일청구권협정의 당사자들은 일반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법적으로 볼 때 정부는 기본적으로 법률에 대해서 잘 알것으로 기대된다. 즉 "정부 주제에 어떻게 법도 모를 수가 있지?"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정부에서 법률과 무관한 부서도 아니고, 외교성 직원이 보상과 배상을 착각한다? 현실에서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지만, 판사는 객관성을 가져야하기 때문에 무시할 수 밖에 없다.
5.2.4.3. 배상에 불법행위 손해배상은 미포함되었다?
한국 강제징용 피해자측의 주장은, 한국이 제1차 한일회담에서 요구한 금액과 비교하여 일본이 지급한 금액이 턱없이 낮으므로,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은 한일기본조약에 포함이 안된채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한국이 배상금을 받은건 맞을지 모르지만~ 여기에 불법행위 손해배상은 포함이 안되어 있었어~"라고 말하는 재항변이다.

한국 정부의 대일배상요구조서에서는 금융부문에서 일제의 자금 수탈 규모는 약 174억 3천만 엔이며 물자 수탈 규모는 약 93억 엔으로 추산하였다.##2
일제의 자금 수탈 > 금융 부문
일본계 유가증권액 : 7,435,103
대출금 : 847,433
대일 환거래 잔고 : 3,020,660
보험금 : 467,336
기타 미수금 : 893,245
체신관계 유출액 : 1,868,660
총계 : 17,429,362(단위 : 천 엔)
일제의 물자수탈
농산물 > 면화 공출액 : 984,027
축산물 > 우피 공출액 : 33,659,920
축산물 > 축우 공출액 : 203,544,760
축산물 > 군수용 건초 공출액 : 39,145,701
임산물 : 493,057,029
기타 > 전쟁으로 인한 물적 피해액 : 8,430,136,612
기타 > 유기 공출액 : 89,684,635
합계 : 9,290,212,685
사실 한국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청구권 문제를 해소하였으므로 이 수치는 실질적 배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다만, 이 조약으로 한국 정부가 받은 배상이 적합하였는지를 평가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당시 박정희 정부를 비판하는 자료로는 사용할 수 있다. 이 자료를 근거로 한국의 민족주의 우파와 국내 진보 역사 학계에서는 일본의 무상 3억 달러 및 5억 달러 차관 지원이 식민지 수탈에 비해서 터무니 없는 작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통계 자체가 신뢰성을 담보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우선 통계 산정에 한국과 일본 이외의 제3국이 산정에 참여하지 않은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반대로 일제가 조선에 들여왔으며 GHQ 불하한 60억 불에 달하는 자산 규모의 경우, 연합군 각국이 참여한 GHQ에서 직접 산정한 규모임을 고려하였을 때 당연히 신빙성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당연히 일본에서도 60억 불은 터무니없이 적게 산정된 규모라 주장하지만, 애초에 이해당사자가 주장하는 주장은 편향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대내외적으로 60억 불로 보는 것인데 한국의 주장에는 이러한 제3자의 보증이 없는 상황. 또한 35년에 걸친 식민지배 피해를 산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를 고려하였을 때 갓 정부를 수립한 시기에 이를 신빙성을 담보할 수 없음을 고려하면 당연히 20세기 후반~21세기 해당 자료를 보강하는 추가 조사가 진행되어야 하는데, 민족문제연구소의 일부 조사를 제외하면 별다른 후속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 후속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수탈 규모랑 상관없이 청구권 문제가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일배상요구조서는 신빙성과 별개로 그 자체로서 국민의 기본권이나 주요 통치구조 등에 전혀 영향을 줄 수 없다. 때문에 어디까지나 참고로 보는 편이 좋다.
5.2.4.4. 위에 대한 이견
불법행위에 대한 양국의 합의 문제를 논하기 전에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부터 설명하겠다.

비엔나 협약은 국제 사회가 조약은 어떤식으로 해석하는게 맞는지 합의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가령 조약 해석 관련 분쟁이 발생해서 유엔 국제사법재판소가 재판을 할 경우 재판부는 위 비엔나 협약을 통해 조약을 해석한다.

위에 나와있는 비엔나 협약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1. 조약을 해석하는 데 있어 최우선적인건 조약 문언 그 자체다. 조약은 조약 문언의 통상적 의미에 따라 해석한다. 2. 단, 조약 문언이 애매할 경우 조약 체결까지의 교섭 기록이나 정황을 해석의 보충적 수단으로써 이용할 수 있다.
구체적인 예시
A조약 : B국은 C국에게 'XX'란 전차 1대를 줘야 한다.

B국 해석 : 꼭 'XX' 전차를 주지 않더라도 'XX' 전차의 값어치 만큼의 대가를 준다면 조약을 지킨 것
C국 해석 : 조약문에 나와있는 대로 'XX' 전차를 줘야만 조약을 지킨 것

비엔나 협약에 의한 해석 : A조약에는 'XX' 전차를 주라고 나와있다. 따라서 C국 해석이 맞다. 만약 A조약이 'B국은 C국에게 'XX'란 전차 1대를 주거나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였다면 B국 해석이 맞을 것이다.

이제 불법행위에 대한 양국의 합의 문제를 논하겠다.

한국 측은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 문제에 대한 합의는 논의되지 않았으므로 배상 청구권이 유효하다는 입장인데, 강제징용에 대해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25] 우선,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제2조에 대해 한국 정부일본 정부의 견해가 다르다.[26] 우선, 일본 측의 주장은 한일병합이 체결 당시 유효했으므로 당시 조선인들은 법적으로 일본 국민으로 분류되고 있었고, 때문에 1938년 국가 총동원법에 의해 자국민을 징용한 것 또한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는 주장이다. 반면 한국 측의 주장은 한일병합이 체결 당시 이미 무효였으므로 이후 타국의 국민을 징용한 행위는 위법하다는 논리이다. 즉 양국간의 한일병합에 대한 입장차에 대한 합의에는 이르지 못한 채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 것이다.

이 조약으로 배상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고 하기 위해서는 양국 정부가 배상 청구권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양국 정부가 징용은 위법했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배상이 아니라 보상의 영역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 그런데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한 채 조약이 체결되었으므로 배상 청구권이 존재하는지조차 합의를 보지 못한 채 조약이 체결되었다 볼 수 있다. 때문에 여기에서 한국의 입장은 조약 체결 당시 존재 유무조차 확인되지 않은 청구권이 조약을 통해 해결될 수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 측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1. 위 한국 측 논리는 청구권협정 문언이 너무 명확하니 협정문 해석을 통한 반론은 포기하고, 대신 한일회담 교섭 과정을 통해 조약을 뒤집으려는 논리다.[27]

2. 그러나 한일회담의 교섭 과정을 통해 조약 문언을 뒤집으려는 한국 측의 논리는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에 의해 부정당한다. 왜냐하면 비엔나 협약에 의하면 조약의 해석은 조약의 문언을 통상적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조약의 교섭 과정을 통한 조약 해석은 문언이 애매할 때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이다.

3. 그리고 한일청구권협정의 의미는 명백하다. 한일청구권협정의 1965년 이전의 모든 청구권 문제를 해결시켰다. 간단히 말해서 당시 없었으면 지금도 없는거고, 당시 있었어도 1965년에 해결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조약 체결 전에 청구권이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비엔나 협약 이전에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양국 교섭의 최종 결과는 조약 문언으로 보는게 타당하다는 의견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 교섭의 최종적 결과인 조약 문언을 교섭 기록을 통해 뒤집으려는건 인과관계를 의도적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4. 만일 한국측이 살짝 논리를 비틀어서 '불법행위 합의 논쟁은 교섭 과정이 아닌 조약 체결 이후 발생했다'고 주장한다면 애초에 조약 해석은 조약 문언을 통해 해석하므로 불법행위에 관한 양국의 입장차를 고려할 필요도 없이 조약문만 따지면 된다. 그리고 한일청구권협정의 문언은 명확하게 모든 청구권을 포함시키므로 배상 청구권 역시 포함된다.

즉, 한국 측의 주장이 성립하려면 애초에 조약문에 '배상 청구권을 제외한 모든 청구권' 또는 '합의가 되지 않은 청구권을 제외한 모든 청구권' 같은 예외조항이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조약문에 그러한 예외조항은 존재하지 않는다.
알기 쉬운 정리

A : 조약 체결 까지의 교섭, 타협 과정[28]

B : 조약 문언[29]

한국 측 논리 : B(조약 문언)에 모든 청구권이라 나와있다 하더라도 A(교섭 과정)에 의해 배상 청구권은 포함되지 않는다.

비엔나 협약에 의한 해석 : 조약의 해석은 B(조약 문언)의 통상적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B의 의미는 모든 청구권을 포함하여 이후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배상 청구권도 포함된다.

※ 만일 한국측이 교섭과정과 무관하게 조약 체결 이후 불법행위 합의가 안 되었다고 주장한다면, 애초에 불법행위에 관한 양국의 입장차를 고려할 필요도 없이 조약문만 따져서 해석하면 된다. 한일청구권협정에는 명확하게 모든 청구권도 포함시켰으므로 배상 청구권도 포함하여 해결된다.

5.3. 한국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했다?

한일청구권협정 제 2 조
3.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협정의 효과에 관한 문제이다.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것"의 의미가 과연 청구권의 "소멸"을 의미하는지 여부다. "한국인에게 청구권이 있었던건 맞는데~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그건 소멸했어~"하는 항변이다.

이 문제는 사실 당장, 그러니까 한국에서 일본에 청구하는 상황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실질적으로 청구권이 "소멸"하든지, "주장 못"하든지 일본에서 못받는 다는 것은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에 문제가 되는데, 만약에 청구권이 소멸한다고 한다면, 국가가 조약을 통해서 국민의 청구권을 멋대로 소멸시켜버렸다는 것이 된다. 때문에 그로인해서 국민이 받은 피해에 대해서 국가가 보상해야하는 책임이 발생한다. 즉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을 대신해서 한국 정부가 보상금을 줘야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멸하지 않는다. 위 협정은 분명히 청구권에 관하여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고 적시하고 있다. 이것은 일반인이 보기에는 이 말이 청구권이 "소멸"했다는 것과 별 다를게 없는 것으로 읽히지만 아주 약간의 차이가 있다.

평상시에, 그러니까 일제강제징용 피해자가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일본과 전범기업이 이것을 씹는 상황에서는 청구권이 "소멸"하는 것과 "주장 할 수 없는 것"은 별 차이가 없다. 어차피 현실적으로 못받는 것은 똑같으니까. 문제는 만약에 일본이나 전범기업이 갑자기 덜컥 손해배상을 해줬다가 갑자기 또 다음날 마음이 바뀌어서 돌려달라고 할 때다. 만약에 청구권이 "소멸"했다면 돈받았던 강제징용 피해자는 고스란히 돈을 다시 뱉어내야만 한다. 왜냐면 청구권의 반대말은 "부당이득"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단순히 청구권을 "주장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

보다시피 실질적으로는 아주 쓸데없는 개념차이에 불과하다.

일본도 청구권이 소멸한다는 주장은 한적이 없다. 일본은 처음부터 청구권이 소멸하는 것이 아닌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는 것으로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 만약에 일본정부의 누군가가 이런 주장을 했다면 그건 말한 사람이 법알못이라 크게 말실수한 거다. 왜냐면 청구권이 소멸된다고 위 조약을 해석해버리면 당장 일본정부가 매우 곤란하기 때문이다. 일본이 이렇게 청구권 소멸 주장을 못하는 이유는 소권관련 쟁점에서 후술한다.

2018년 한국 대법원에서 강제 징용공들이 개인 청구권이 남아있다고 판결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설명회를 열어 국제법위반이라며 일본 기업들이 보상 혹은 배상을 하지 말 것을 요구했으며,외무상은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 “국제사회에 대한 도전”이며 “폭거”라며 강하게 반발했다.게다가 강제 노동 자체를 부정하며 징용공이라는 표현 대신 ‘조선반도(한반도) 출신 노동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이들은 강제 노동이 아닌 자원해서 노동하러 왔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고 말했다. 국내의 국제법 전문가 사이에서도 외교로 개인 청구권을 소멸시킬 수 있다는 입장과 국제법상 외교적 해결이 개인의 청구권을 소멸시킬 수 없다는 입장이 갈린다. 당연히 일본에서도 입장이 다르다. 이에 대해 후자의 입장을 가진 일본인 변호사 100명은 일본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문제의 본질을 흔들고 있다고 성명을 냈다. # 기사에서 인터뷰한 변호사 한 명에 따르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일본이 패소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일본 정부는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으나 외국인 피해자는 이를 행사할 권리(외교적 보호권)을 잃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 나온 일본인 변호사에 따르면 “최근 국제인권법 흐름은 우선 국내 재판소에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보장 받지 못했을 경우에는 국제인권재판소 등을 통해서 구제받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2018년 11월 14일 고노 다로 외무상은 일본 외무위에서 공식적으로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는다고 발언하였다.# 하지만 한일기본권협정은 한국정부가 개인에게 보상하기로 약속한 협정이며, 한국정부가 보상하라고 요구했다. #

5.4. 한국 개인의 소권은 소멸했다?

그렇다면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문제된다. 이 부분은 의외로 큰 쟁점이 되었는데 가능한 해석은 크게 2가지이다.

첫째는 "소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해석이다. 소권이란 자신의 청구권을 가지고 법원에다가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피해자는 자신의 청구권을 가지고 법원에서 소송을 제기해서 승소하면, 그 판결문을 가지고 강제집행을 통해서 가해자에게서 돈받는다. 즉 소권이 없다는 것은 바로 이 소송을 제기 못한다는 뜻이다. 만약에 소를 제기한다고 신청해도 법원에서 각하해버린다. 소송을 제기하지 못하니 변론도 없고, 판결도 없으며, 강제집행도 당연히 없고, 돈도 받을 수 없다. 일반인이 가장 먼저 떠올릴 만한 해석이다. 법률가들도 별반 다를바 없어서 대한민국 대법관 13명중 10명이 택했다.

둘째는 "외교적 보호권 한정 포기"하다는 해석이다. 국제법상 개념으로 좀 복잡한 말인데, 피해자의 나라가 가해자 나라의 정부를 상대로 피해자를 대신해서 소송을 걸거나, 외교적 수단을 동원한다던가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피해자가 혼자 알아서 가해자 나라에다가 소송걸고 하는 것은 막지 않는다. 언뜻 조약의 문언과 맞지 않는 이상한 해석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유력한 해석 방법인 이유는 바로 일본정부가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대법관 3명이 택한 소수의견이기도 하다. 한국법관이 일본의견에 찬성했다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 이 세분은 평소에 일본정부가 떠들던 것을 고대로 돌려주면서 엿먹이는 판단을 내렸다. 반면에 일본기업에 유리한 판단을 낸 2명의 법관은 오히려 첫번째 해석을 택한 위의 10명 중에서 나왔다.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도대체 일본은 왜 "외교적 보호권 한정 포기"라는 국제법이론을 끌어다쓰는 독특한 해석을 고집해 왔던 것일까? 또 위에서와 같이 왜 청구권이 소멸한다고 주장하지 않은 것일까? 상식적으로 둘다 일본에게 불리해 보이는 해석과 주장이다. 청구권을 행사 못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당연히 아예 청구권을 없애버리는게 더 확실한 방법이고, 외교적 보호권 한정 주장 못한다는 것보다는 모든 주장을 못한다고 하는것이 가해자로써 돈 뜯길 입장에서는 당연히 유리하다.

이것은 매우 의외인 부분인데, 다름아니라 일본에게 한일기본조약은 한국의 손해배상 요구를 봉쇄하는 요구뿐만아니라 자국민, 그러니까 이와 관련해서 일본인이 일본정부에 손해배상을 요구하는것을 봉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전쟁 동안 일본 밖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연합국에 의해서 그 재산을 빼았겼다. 손해가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전후에 일본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한일기본조약등을 체결시켰다. 그래놓고서는 자국민에게 "일본정부는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 그러니까 너희 그 청구권가지고 당사자인 대한민국 정부에다가 요구해봐라. 아 그런데 한일기본조약 때문에 이것도 일본정부가 안타깝게도 도와줄 수는 없을거야 ㅇㅇ" 이라고 해버린것.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해석하는 것도 만약에 청구권이 소멸 된다고 해석해 버린다면, 조약을 통해서 자국민의 권리를 없애버린 일본정부에 인과관계상 당연히 책임이 발생하고, 일본정부가 대신해서 배상해야하기 때문이다. 즉 일본정부는 한국인 일제 피해자 뿐만 아니라 자국민 전쟁피해자도 무시해왔다는 것. 어찌보면 더욱 섬뜩한 부분이다.

5.5. 포괄적 권리처분의 문제

저 위에서와 같이 청구권의 소멸여부는 현실적으로 매우 쓸데없는 쟁점이지만, 법학적으로는 꽤나 중요한 쟁점이 된다. 왜냐면 국가간의 조약 따위가 감히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를 멋대로 없애버릴 수 있느냐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가능은 한데, 매우 까다롭다.

법적으로 볼 때 국가는 국민이 자신의 생명, 재산등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만든것이다. 그런데 국민을 지키라고 만들어놨더니 국가가 멋대로 국민의 기본권리를 처분한다면 이건 심각한 모순이다. 같은 이유로 법률가들은 대체로 사형제를 반대한다.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한게 있을 리가 없는데, 국민이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국가에 바치면서까지 국가를 만든다는것은 논리적으로 좀 이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가 보기에 정말 어쩔 수 없이 국민의 더 큰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국민의 권리를 처분해야하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이런것까지 못하게 막으면 결과적으로 국민에 더 큰 피해가 발생하는 문제가 생긴다. 때문에 꼭 필요한 경우에만 아주 까다로운 조건하에 제한을 두고 가능하다.

그 조건이란 법률의 형태(조약 포함)로써 일반성, 명확성, 구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명확성이란 법률적으로 정확한 용어를 쓰는 것이고, 구체성은 제한하려는 국민의 권리의 범위를 특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한일청구권협정의 그 모호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명확성, 구체성이 없기 때문이다. 앞뒤없이 그냥 "모든 청구권"을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문언은 무슨 권리를 얼마나 제한한다는 것인지 전혀 제약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포괄적인 권리 처분"은 지구상 그 어느나라의 법률체계도 용인하지 않는다. 심지어 히틀러의 나치 독일도 저렇게 법을 만든 적은 없다. 18세기 절대왕권시대에나 있었을 법한 조문이다. 다시 다른 조약을 비교해 보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14조(b)
...연합국은 모든 보상청구, 연합국과 그 국민의 배상청구 및 군의 점령비용에 관한 청구를 모두 포기한다.
독일-이탈리아 평화 조약 제77조
4 ... 이 포기는 전쟁 중에 체결된 협정에 관한 금전 채권, 정부 간의 일체의 청구권 및 전쟁 중에 생긴 손실 또는 손해에 대한 일체의 청구권을 포함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한일청구권협정은 이부분이 분명 매우 부족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법원은 당연히 최대한 엄격하고, 범위를 좁혀서 해석을 할 수 밖에 없다. 법원은 그 누구보다도 국민의 권리를 보호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대법관 13명중 3명도 위와 같은 이유로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청구를 인용했다. 심지어 이 3명은 일본이 주장하는 내용 그대로 조약을 해석까지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청구를 인용한 것이다.

판시에서 대법관들은 비록 한일청구권 협정이 일괄처리협정(lump sum agreements)으로 보이기는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협정을 통해 국가가 개인의 청구권까지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다고 보려면, 적어도 해당 조약에 이에 관한 명확한 근거가 필요하다고 보아야 한다고 봤다. 권리의 ‘포기’를 인정하려면 그 권리자의 의사를 엄격히 해석하여야 한다는 법률행위 해석의 일반원칙에 의 할 때, 개인의 권리를 국가가 나서서 대신 포기하려는 경우에는 이를 더욱 엄격하게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본 쟁점은 다른 쟁점을 모두 씹어먹을 만큼 법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5.6. 협정은 무효다?

한일청구권협정이 있었던 것은 맞으나, 치명적인 무효사유가 있기 때문에 무효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런 협정이 있었던건 맞는데~ 그런 불법 내용이 들어간건 무효야~"라는 재항변이다.

이는 두가지 상황이 있는데, 하나는 국제법에 위반하여 무효인 경우이고, 또 하나는 한국 헌법에 위배되어 무효인 경우다.

한국 강제징용피해자 측이 예비항변으로 주장했지만, 여기까지 가기도 전에 대법원에서 청구인용을 했기 때문에 판단이 된적은 없다. 만약에 여기까지 밀렸으면 사실상 패소하기 일보 직전의 마지막인 상황이다.

그만큼 법에서는 일반적으로는 거의 마직막에 한번 던져보는 수에 불과하다.

국제법상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해 가해국을 면책하는 조약은 원칙적으로 무효라는 주장도 있으나 간단하게 논파된다.

종합하면 차라리 협정에 대해 다른 해석을 시도하는거라면 모를까, 협정 자체를 무효라고 하는건 무리수다.

6. 한일 양국의 전략 비교

한국과 일본은 이 문제에 관해서 각기 다른 방향에서 접근해 왔다.

둘의 전략을 비교하자면, 일본은 국제법과 그 사례와 이론을 적극 활용하는 반면에 한국은 법의 일반원칙을 주로 사용해왔다(때문에 서로 자주 사용하는 법률 용어도 틀리다). 이러한 접근의 차이는 일본은 스스로 한국과 비교하여 국제분쟁에 경험과 학술적 성과가 더 쌓여있어서 이러한 우위를 적극 활용하려고 하는 반면에, 한국은 스스로의 열세를 축소하기 위해서 가능한 회피하다보니까 이러한 선택해온 것이다.

6.1. 일본정부의 전략

일본은 이 문제에 있어 법적으로 다소 복잡한 입장을 선택해 왔는데, "일제의 합법적인 한반도 지배" 주장과 "개인 청구권 존속" 주장, "외교보호권 포기" 주장이 그것이다.

이는 "한국 개인의 소권은 소멸했다?"에서 살펴봤듯 일본정부가 처한 환경에서 비롯되었다. 즉, 일본 정부를 향해서 한국인 또는 일본인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을 법적으로 막기 위한 것이다. 일본이 염두에 둔 것은 다음 4가지 상황으로 보인다.

1. 한국인이 일본법원을 통해 일본 정부에 청구: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한국정부에 지급된 금액에 포함 되었으므로 채권적 청구권은 소멸했고, 일제의 지배는 합법적이었으므로 불법행위 책임은 없다.

2. 재일 한국인이 일본법원을 통해 일본인에 청구: 한일기본조약 외에 추가적으로 일본법 제144호에 의해서 일본 내 한국인의 모든 채권채무는 소멸했다. 제144호는 그 범위가 한일청구권협정과 중복된다는 점 때문에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측에서 그 목적이 의심된다는 지적을 많이 받는데,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일본인을 두텁게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볼 수도 있다.

3. 한국인이 한국법원을 통해 일본의 관련 기업에 청구: 한일기본조약 이외에도 법률 제 7호와 40호에 의해 일제시대 기업들은 모두 파산하고 같은 이름의 다른 법인 설립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전 기업과의 동일성을 부정한다.

4. 일본인이 전쟁 중 연합국에게 입은 손해에 대한 배상을 일본정부에 청구: 강화조약은 일본의 외교적 보호권 포기에 불과하므로 일본인의 연합국에 대한 청구권은 존속하고, 일본정부는 가해주체가 아니라서 당사자가 아니므로 책임도 없다.

1번과 2번 상황에 대한 대응(일본법 제144호)을 볼때 보더라도 일본은 한일기본조약 체결당시인 65년에 이미 계획이 완성형으로 있었고, 이를 유지해온것으로 보인다.

다만 마지막 4번 상황은 65년에는 생각을 못했는지 90년대 초에 일본계 캐나다인이 일본정부에게 배상청구를 하면서 부랴부랴 확립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전에 확인된 것이 있다면 추가바람.

이러한 상황별 접근법은 매우 유효해서 오랜 기간 효과적으로 일본 정부에 대한 배상청구를 차단해왔다.

6.2. 한국정부의 전략

한국의 전략은 노무현정권시기에 국내 법률가들에 의해서 개발되어서 확립되었다.

일본과 달리 한국정부는 그렇게 초기부터 체계적인 전략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2005년까지 한국 정부는 전략이 없었다는 의심이 드는이유는 다음과 같다.

민주화 이후로도 오랜기간 한국 외교부는 외교에 관한 내용이라며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한 입장표명을 거부했다. 외교부의 이러한 태도가 바뀌는 것은 2005년에 와서부터이다. 그것도 노무현 대통령의 결단으로 한일회담문서 공개가 이루어지고 후속대책을 마련할 때이다.

2005년 이전의 전략 부재는 한국의 주장에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더욱 의심이 된다. 한국정부가 제시한 주장은 외교적으로나, 보통사람이 보기에 일관성이 없다. 오히려 중구난방일 정도로 다각화 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한마디로 '되는데로 막 던져본다'식 접근이다. 뒤늦게 이 문제 뛰어들어서 손에 짚히는데로 대응책을 찾았다는 인상을 준다.

한편 이것은 한국의 전략이 법률가들에 의해서 만들어졌진게 분명하다는 점으로 연결된다. 위와 같은 중구난방스러운 논리들도 법적인 시각에서는 아주 일정한 방향성이 있기 때문이다. 즉, 그 논리가 외교관이 구성했다고 보기에는 괴상하지만, 만약에 변호인이 법정에서 주장한다면 하나 같이 타당하면서도 단계별로 물고늘어지도록 매우 체계적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노무현 정부의 뒤늦은 전략은 외교적인 해결이 아니라 위 일본 전략의 3번 상황, 즉 한국인이한국 법원에 일본전범기업을 향해 청구권을 행사하게 하는데 증거와 논리를 지원하고, 겉으로는 팔짱끼고 "개인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한다는데 정부가 뭐 어쩌겠냐?"는 식으로 대응 방향을 잡았던게 분명해 보인다.

전략이 노무현 정권시기에 확립돠었다는 것은 한국의 주장이 법리적으로 볼 때도 2000대 후반이전에는 계획하기 힘든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들어난다.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불법성이 그것인데, 이건 2008년에 헌재가 친일파 재산환수법에 대한 합헌 판단을 내리기 이전까지는 한국 법원에서도 명시적으로 부정되던 것이다. 헌법전문을 일제지배의 불법성의 근거로 활용한다는 발상 자체도 2000년대 초반에나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외에도 일본 법원이 이미 판단한 사건을 한국 법원이 또 판단 할 수 있느냐 여부, 일본법상 일제시대 기업과 종전 이후 법인은 별개인데 둘을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느냐 문제가 있었다. 여기에 한국 법원은 직접 관련된 법리는 아니더라도, 유추라도 할만한 법리조차 2000년대 초반까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즉 여러모로 한국의 주장은 2000년대 중후반이라는 매우 특정 시점 이전에는 법률가들도 떠올리기 힘든 주장이라는 것이다.

어찌되었든지 한국의 전략은 2018.10.30에 일제 강제징용피해자들의 청구가 대법원에서 받아들여지면서 그 목적을 달성했다.

한국법원은 일본기업에 정신적 손해배상을 판결했고, 해당 기업의 한국에 있는 재산에 대해서 압류에 들어갔기 때문에 이미 일본 정부가 아니라 이를 방치한 한국 정부조차도 막기 어려운 단계에 들어섰다.

일본은 한방 먹은 셈인데, 일본이 여기에 관해서 직접적으로 가진 선택지는 없기 때문이다. 한국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청구권을 행사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

ICJ로 끌고 가는 방법이 있긴한데, 한국의 동의없이는 불가능하다는 한계도 있다. 또한 의외로 일본의 승리를 장담 하기 어렵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어서 일본 정부가 이 위험을 감수 할지 미지수다.

그러나 한국이 이러한 승리를 자축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일본은 외교적 보복 수단을 검토하고 있고, 만약 외교적 보복이 현실화된다면 비록 그러한 보복이 한계 때문에 한국에 유효한 피해를 입히지 못한다 하더라도 한일관계가 후퇴한다는 점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대법원 판결 관련 외교적 평가에 대해서 추가 바람.

6.2.1. 한국 대법관의 양심선언(?)

다음은 한국 대법원 판결에서 일본 기업에 유리한 판결을 내릴 2명의 법관이 내놓은 소수의견 일부이다.
"일본 정부가 청구권협정의 협상과정에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던 상황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청구권협정을 체결한 것이 과연 옳았는지 등을 포함하여 청구권협정의 역사적 평가에 관하여 아직도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청구권협정이 헌법이나 국제법에 위반하여 무효라고 볼 것이 아니라면 그 내용이 좋든 싫든 그 문언과 내용에 따라 지켜야 하는 것이다.

청구권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을 더 이상 행사할 수 없게 됨으로써 피해를 입은 국민에게 지금이라도 국가는 정당한 보상을 하여야 한다. 대한민국이 이러한 피해국민에 대하여 지는 책임은 법적 책임이지 이를 단순히 인도적․시혜적 조치로 볼 수는 없다.
...
이상과 같은 이유로 다수의견에 반대한다."

즉, 이 소수의견은 툭 까놓고 말해서 한일기본조약에 따라 일본정부가 한국정부를 통해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줬는데 피해자에게 가야 할 배상금을 한국정부(박정희정부)가 경제발전자금(포항제철+경부고속도로 등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중간에서 몰래 빼돌려 유용 하지않았음? 한국정부가 팔짱끼고 나 몰라라 할 것이 아니라 이제라도 한국정부가 책임지고 한국민에게 대신 배상하는 것이 맞는 것 아님?이라는 의견이다.

위 문단은 문제있는 해석이다. 대법원 소수의견의 뜻은 한일청구권 조약의 문언대로 해석하고 따라야한다는 지극히 법학적인 시각의 의견에 불과하다. 즉 "악법일지라도 법은 법이다"라는 뜻에 가깝다.

법학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부분이다. 법률가들은 사안 전체를 올려놓고 저울질하는 솔로몬이나 조선시대 원님식 재판을 하지 않는다. 대신에 잘게 논리를 쪼게서 그 순서에 따라서 해당 부분만 검토한다. 그리고 만약에 논리 1단계에서 걸러지면 굳이 2단계로 넘어가지도 않는다.

위와 같은 대법관 소수 의견의 경우 1단계에서 부터 걸러버린 상황이기 때문에 2단계, 3단계에 해당하는 한국 정부가 돈을 빼돌렸네 따위의 사정은 고려조차하지 않았다. 단지 문언에 쓰여있으니 그대로 따라야한다는 의미 그 이상그 이하도 아니다.

7.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4조

한일청구권협정 제 2조
1.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런시스코우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 4조
(a) 이 조항의 (b)의 규정에 따라, 제 2조에 열거된 지역의 일본국 및 일본 국민의 재산의 처분과, 현재 그 지역을 통치하는 당국 및 그 주민(법인을 포함)[30]에 대한 일본국 및 일본 국민의 청구권(채무를 포함)과, 일본국에서의 이들 당국 및 그 주민의 재산, 일본과 일본 국민에 대한 당국과 그 주민의 청구권(채무를 포함)의 처분은, 일본국과 이들 당국 간 특별협정의 주제로 한다.[31]

한국 측은 한일청구권협정을 '한일청구권협정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양국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위와 같은 주장은 2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한일청구권협정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범위에 제한되는 조약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범위를 포함하는 조약이다. 한일청구권협정은 '샌프런시스코우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한다는 문구가 있다. 즉, 한일청구권협정은 애초에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포함하는 거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나오는것만 다루는게 아니다. 그러니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뭐라 나와있든 한일청구권협정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제약을 받을 일은 없다.

둘째,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는 재정적 채권,채무 관계만을 다루는게 아니다. 위에 4조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당국과 주민의 청구권, 즉 한국과 한국인의 청구권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재정적 채권이나 채무은 그 청구권에 포함되는 '일부'일 뿐이다. 결국 한국 측에 주장대로 샌프란시스코 조약 4조만 따져봐도 개인의 청구권은 포함된다.


한편 대한민국 대법원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4조(a)의 범위를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문언에서 불법행위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첫째,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14조에는 '일본은 전쟁 중에 발생한 손해 및 고통에 대하여 연합국에 배상을 지불하여야 함을 승인한다.'고 되어있는 반면, 한국은 승전국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으므로 손해 및 고통에 대한 배상청구권도 인정받지 못했다. 한일회담 당시 한국 정부가 발간한 한일회담백서에도 한국은 승전국이 향유하는 손해 및 고통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인정받지 못했고,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 4조가 한일간 청구권 문제의 기초이며, 제 4조에 의한 대일청구권에 배상청구권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명시하였다.

둘째, 한일기본조약 체결 당일 청구권 협정 합의의사록(Ⅰ)에서는 구체적으로 청구권의 범주를 한일회담시 한국의 대일청구요강 8개 항목에 속하는 것으로 하기로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일회담 당시 한국의 대일청구요강 8개 항목은 다음과 같다.
⑴ 조선은행을 통해 반출해간 지금, 지은의 반환청구
⑵ 1945.8.9 현재 일본정부가 조선총독부에 지고 있는 채무 변제 청구
⑶ 1945.8.9 이후 한국으로부터 이체 또는 송금된 금품의 반환 요구
⑷ 1945.8.9 현재 한국에 본사, 본점 또는 주된 사무소가 있던 법인의 재일 재산의 반환청구
⑸ 한국법인 또는 한국자연인의 일본국 또는 일본국민에 대한 일본 국채, 공채, 일본 은행권,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의 변제 청구
⑹한국인(자연인, 법인)의 일본정부 또는 일본인에 대한 개별적 권리행사에 관한 항목
⑺ 전기 제재산 또는 청구권에서 발생한 법정 과실의 반환 청구
⑻전기한 제재산과 청구권의 반환 및 결재는 협정성립 후 즉시 개시하여 6개월 이내 종료할 것
보다시피 모든 항목은 민사적, 재정적 청구권을 다루고 있으며
다만 5항에 '피징용 한국인의 기타 청구권'에 강제동원 등 불법행위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이 포함될 여지는 있어 보인다.

그러나 대법원은 여기에 불법행위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8개 항목 모두 재산상 관계를 다루고 있고, 어디에도 불법성을 전제로 하는 내용이 없으므로 언급되지 않은 기타 청구권에는 불법행위에 관한 청구권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석하였다.

셋째, 한일기본조약 2조에서는 '샌프란시스코 조약 4조(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해결된 것으로 한다고 적혀있으나, 대법원은 이 또한 불법행위에 관한 청구권은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청구권 협정문이나 기타 부속 서류 어디에도 일제의 불법행위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점을 볼 때 특별히 제 4조(a)의 범주를 벗어나는 청구권을 인정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8. 한국 정부의 입장

8.1. 청구권에 대한 입장

2005년 한일회담 문서 공개가 이루어지면서 참여정부에서는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를 개최하였고, 여기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정부․軍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해당 협정에 의하여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다고 발언하였다. 그러나 2009년 헌법재판소의 한일청구권협정 부작위 사건 변론에서 한국 정부는 "법적 책임이라는게 배상을 뜻하는건 아니다"라고 밝혔으므로, 이를 종합하면 추가적 배상이 필요하다는 입장보다는 법적 책임이 반드시 배상만을 의미하지는 않음으로 해석하여야 한다.[32]

이에 대해 한국 정부가 말하는 법적 책임이란 독일의 반나치법과 같은 차후 과거사 부정 행각을 막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고, 비록 실질적 배상이었다곤 하나 명분상 독립축하금으로 한일기본조약 배상금이 지급되었음을 감안하여 추가적인 사죄가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해석할 수 있다.[33] 즉 이 입장은 한국 정부가 한일기본조약으로 청구권 문제가 해소되었음을 부정하는 행보로 해석할 수 없다. 여담으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준거한 전쟁피해국에 대한 배상 또한 강화조약 4조 항목에 기술되어있듯 재정적, 민사적 채권-채무 관계를 다룬다기 보단 포괄적 청구권을 다루고 있는 등, 실제 한국이 청구권 문제가 해소되지 않았음을 주장하더라도 국제적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

여담으로 원폭 피해자들이 배상 청구권에 대한 해석상 분쟁을 해결하지 않고 있는 외교통상부의 부작위의 위헌 여부에 대한 판례[34]에서 헌법재판소는 해석상의 분쟁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즉 분쟁 상태 자체가 원폭 피해자들의 배상청구권이라는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외교통상부는 해석상 분쟁을 협정 제3조에 의한 분쟁해결절차에 따라 해결해야 함을 주문하였다. 즉 원폭 피해자들은 배상청구권 소멸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못박은 것이 된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법부는 결국 분쟁해결절차를 한국 정부에 넘겼을 뿐이고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취지의 판결은 내리지 않는다. 애시당초 한일청구권협정 조문이 명시하는 청구권이 워낙 광범위해 애초에 분쟁이 성립하질 않는 상황이므로 한국 정부는 국민정서를 고려해 일부러 어중간한 태도를 취하고 있을 뿐 실제로 일본에게 배상을 요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들도 사람인지라 그분들 안에서도 서로 갑론을박이 많다. 1995년 일본이 재단을 설립했을 때에도 보상받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있었고, 반면 이걸 받았다고 배신자라고[35] 말하는 위안부 할머니도 있었다. 또한 자신들에게 와야 할 돈을 한국 정부가 멋대로 포스코에 줘 버렸다고 포스코에게 소송을 건 사례도 존재한다. 마냥 일본을 욕하기만 하는 할머니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하지만 당연히 이러한 소송은 법정에서 패소했고[36]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정치적으로 활용하는데 도움이 되는 사례만을 집중 조명하는 경향이 있고, 이에 대해서는 일본의 유력 일간지에서도 강하게 경계한 바 있다. 예시

2017년 8월 17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청구권 문제에 대한 NHK 기자의 질문에 "말씀하신 것 중 일본군 위안부 부분은 한일 회담 당시 알지 못했던 문제였습니다. 말하자면 그 회담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문제입니다. 위안부 문제가 알려지고 사회 문제가 된 것은 한일 회담 훨씬 이후의 일입니다. 위안부 문제가 한일 회담으로 해결됐다는 것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강제 징용자 문제 양국 간의 합의가 개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는 없습니다. 양국 합의에도 불구하고 강제 징용자 개인이 미쓰비시를 비롯한 회사를 상대로 가지는 민사적인 권리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게 한국의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의 판례입니다. 정부는 그런 입장에서 과거사 문제에 임하고 있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 해석.[37]

대한민국 대법원이 2018년 강제 징용공들이 일본 기업들을 대상으로 낸 재판에서 다수 판관들이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단함에 따라 판결을 내렸다.[38] 한일기본협정이 일본의 불법적인 식민지배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었으며 "한·일 청구권협정의 협상과정에서 일본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에 따라 한·일 양국 정부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관해 합의에 이르지 못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강제동원 위자료 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명시했다.


더불어 "한·일 청구권협정 제1조에 따라 일본정부가 대한민국정부에 지급한 경제협력자금(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이 제2조의 양국 및 양국 국민간 청구권 등 권리문제의 해결과 법적인 대가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며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의 발표 등을 통해 알 수 있는 대한민국정부의 입장도, 정부가 수령한 무상자금 중 상당금액을 강제동원 피해자의 구제에 사용하여야 할 책임은 '도의적 책임'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한국 대법원은또한 청구권 문제 해결과 자금 지원 간에 법적인 대가관계는 없다고 판시했다.
청구권 협정에서는 무상3억, 유상2억 달러에 대해 실행한다고만 적혀있을 뿐 구체적인 명목에 관한 내용이 없고, 차관은 일본의 경제협력기금에서 행하되 대한민국 경제발전에 유익한 곳에 쓰이면 된다는 제한만 있을 뿐이다. 일본 측 또한 한일기본조약 1조에 따른 자금 지원은 경제협력의 성격이며 2조 청구권 문제 해결과 법률적 상호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라 보았다. 또한 1975년 청구권보상법, 2007년 희생자지원법, 2010년 희생자지원법에 의해 한국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자금을 지급한 적이 있으나 이 또한 모두 위로금과 같은 도의적 성격의 보상일 뿐이라고 명시하고 있고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은 아니라고 밝혔다.

일각에선 제5차 한일회담에서 한국이 강제동원의 고통에 대한 피해보상을 요구한 적이 있고, 제6차 한일회담 예비회담에서 구체적으로 12억 2천만 달러를 요구하면서, 그 중 3억 6400만 달러는 강제동원 피징용자에 대한 피해보상금으로 산정한 적이 있다는 반론도 있으나, 대법원은 이 언급들이 정부의 공식적 입장이 아닌 교섭 과정에서 교섭 담당자가 언급한 것으로 정황을 볼 때 협상에서 유리한 지위를 점하기 위한 발언으로 보이고, 한일회담에서 일관되게 주장된 내용도 아니며, 5차 한일회담은 일본의 반대로 타결되지 않았으며, 6차 예비회담에서 12억 2천만 달러를 요구한 것에 비해 실제 타결된 금액은 무상 3억달러에 불과하므로, 강제동원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도 포함되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겠다고 말했다. # 일본 정부가 강하게 항의하자 이낙연 국무총리는 “이런 사법부의 판단은 외교적 사안이 아니”고 “사법부는 법적 판단만 하는 기관이며 사법부의 판단에는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간이다.”라고 삼권분립을 설명했다. 또한 대법원의 판결문이 한일기본조약을 부정한 것이 아니며 조약의 적용 범위를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8.2. 독일은 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배상을 끝냈음에도 추가로 배상을 했다

1950~1960년대 독일이 서유럽 국가들과 나치 피해 관련해서 청구권 협정을 맺은건 사실이다. 그러나 해당 청구권 협정은 일반적인 전쟁범죄에 대한 청구권까지 포함한게 아니라 나치즘에 의한 피해에만 한정한 협정이었다. 예를 들어, 당시 독일은 강제징용은 나치즘에 의한 피해가 아니라며 청구권 협정에 포함시키지 않았고, 그 뒤에도 끝끝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법적 배상을 하지 않았다. 또한 1950~1960년대 독일은 공산권이었던 동유럽 국가와는 아예 청구권 협정조차 맺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니 당연히 1990년 독일 통일 이후에 동유럽 국가 배상 문제나 전쟁범죄 배상 문제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다.
1960년대 독일과 프랑스는 '독불간 나치피해 박해조치로 피해를 입은 프랑스 국민을 위한 지불에 관한 조약'을 맺은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조약은 독일과 프랑스간의 나치 피해에 관한 포괄적인 배상협정이었다. 즉, 나치 피해 이외의 전쟁범죄나 강제징용 등의 배상 문제는 빠졌고, 나중에 프랑스측에서 강제징용 문제 등 추가 배상을 요구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배상 요구에 독일은 해당 문제에 대해선 배상 한 적이 없기에 당연히 배상을 한 것이다. 한마디로 독일은 배상을 한 적이 없어서 배상을 한거지 배상을 했음에도 다시 배상을 한 게 아니다.

이는 한일관계에서도 동일하다. 우리나라 대법원도 불법적인 식민지배로 인한 배상은 청구권 협정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입장이다.

8.3. 독일은 재단을 만들어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법적 배상을 했다?

' 2000년도에 설립된 독일의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은 법적인 책임이나 배상이 아닌 어디까지나 인도적인 차원의 보상과 지원을 하는 재단이었다. 독일은 개인의 청구권 자체는 소멸되지 않았다고 인정하였으나, 끝내 법적 배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은 징용피해자들에게 그런 인도적인 차원의 보상과 지원도 하지 않았으니 독일과는 너무 차이가 난다.

참고로 일본도 1995년 위안부 피해자들 관련해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 재단을 설립하였다. 일본도 위안부 문제의 법적 배상은 청구권 협정으로 끝났다는 입장이었으나, 독일과 마찬가지로 인도적 차원의 보상과 지원을 위한 재단을 설립하였다. 정대협 측은 일본정부의 법적 배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지원을 거부했다. 그리고 보상받은 사람들을 배신자라고 욕했다[39]

8.4. 독일 대법원의 개인 배상 기각 판결

2003년, 나치 독일군에게 학살당한 그리스인들의 유족들이 독일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건 적이 있었다. 이에 독일 정부는 "1960년대 그리스 정부와 협정을 맺어 더 이상 그리스인들에 대한 배상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그리스 유족들은 "국제법 상 독일 정부의 면책은 국가 대 국가 간의 관계에 한정하며 정부와 개인 간에 관한 책임은 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기사

그러나 독일 연방대법원은 "1960년대 독일 정부가 그리스 정부에 배상금을 지불했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독일 정부에게 개별적으로 배상금을 받을 법적 근거가 없다"고 판결을 내렸다. 기사

8.5. 이탈리아의 배상 판결에 대처하는 독일의 자세

심지어 독일은 이탈리아의 강제징용 피해자, 학살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에 불복하여 이탈리아를 유엔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한 적도 있다. 2008년, 독일이 강제징용 피해자 및 학살 피해자들에 대한 법적 배상이 끝났다며 배상 하길 거부하자 이탈리아 법원이 독일에게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고 판결을 내렸다. 기사

이에 독일은 1. 강제징용, 학살 등의 배상 문제는 국가간 조약으로 이미 끝났으며 2. 국가 면제 특권을 무시한 판결이라고 반발했다. 기사 그러자 이탈리아는 1. 강제징용, 학살 등의 배상 문제는 국가간 조약으로도 끝나지 않았으며 2. 반인륜적인 범죄에 국가 면제 특권은 적용되지 않는다고 다시 반박했다.

한일 양국의 입장과 굉장히 유사했던 이탈리아-독일의 대치는 결국 독일의 이탈리아 제소로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판가름이 나게 되었는데...

독일이 승리했다.

15명의 국제사법재판소 판사 중에 단 3명의 판사만이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배상 청구권은 국가간 합의에 의해 포기될 수 없다며 이탈리아의 손을 들어줬고, 나머지 12명의 판사는 반인륜 범죄라도 국가 면제 특권은 적용된다고 독일의 손을 들어줬다.기사#

결국 2015년 현재까지도 독일은 강제 징용이나 학살 등 전쟁 범죄에 대한 법적 배상은 끝났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실상이 이러니 독일만 높이고 일본을 비난하는 건 잘못된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적어도 배상과 관련해서는 독일과 일본의 입장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배상에 한정해서는 일본이 독일보다 나은 점을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일본은 한일청구권협정으로 1965년 이전의 일에 대한 법적 배상에 대해 모두 종결시켰으나, 독일은 강제징용 등 일부 문제에 관해선 특별히 청구권 협정을 맺지도 않았으면서 법적 배상을 거부했다. 이러한 독일의 태도에 분노한 독일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1990년대 소송을 걸었으나 결국 독일은 법적 배상은 거부한 채 인도적 차원의 보상만 했다.[40]

9. 대한민국 대법원의 입장

판결문
이 링크에서 "청구권"에 대한 대한민국 대법원의 판례, 즉 공식 입장이 나와있다. 지금부터 대법원의 입장 내용 출처는 위의 링크인 "대법원 2018. 10. 30. 선고 2013다61381 전원합의체 판결"에 근거한다.
먼저 조약 해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는 전원 동의한 내용이다.

【판결요지】
[1] 조약은 전문·부속서를 포함하는 조약문의 문맥 및 조약의 대상과 목적에 비추어 조약의 문언에 부여되는 통상적인 의미에 따라 성실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서 문맥은 조약문(전문 및 부속서를 포함한다) 외에 조약의 체결과 관련하여 당사국 사이에 이루어진 조약에 관한 합의 등을 포함하며, 조약 문언의 의미가 모호하거나 애매한 경우 등에는 조약의 교섭 기록 및 체결 시의 사정 등을 보충적으로 고려하여 의미를 밝혀야 한다.
[2] 다수의견으로 다음 문단 참조.

【상고이유】 ※ 판결문에 직접 드러나 있지는 않음
[1] 일본 법원에서 이 사건에 대해 원고 측(일본 기업)이 무죄라고 판결하였음.
[2] [1]의 판시와 같은 이유를 들어, 원고들을 노역에 종사하게 한 구 일본제철이 일본국 법률이 정한 바에 따라 해산되고 그 판시의 ‘제2회사’가 설립된 뒤 흡수합병의 과정을 거쳐 피고로 변경되는 등의 절차를 거쳤음.
[3] 피고(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됨.
[4] 추가 바람.
[5] 추가 바람.

【판결이유】 ※ 【상고이유】의 번호와 일치함.
[1] 일본판결이 일본의 한반도와 한국인에 대한 식민지배가 합법적이라는 규범적 인식을 전제로 하여 일제의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을 한반도와 망 소외인, 원고 2에게 적용하는 것이 유효하다고 평가한 이상, 이러한 판결 이유가 담긴 이 사건 일본판결을 그대로 승인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위반하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이 사건 일본판결을 승인하여 그 효력을 인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

[2] 법원은 원고들이 구 일본제철에 대한 이 사건 청구권을 피고에 대하여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환송 후 원심의 판단 역시 환송판결의 취지에 따른 것으로서, 거기에 상고이유 주장과 같이 외국법 적용에 있어 공서양속 위반 여부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는 등의 위법이 없다.

[3] 다수의견으로 다음 문단 참조.

[4] 환송 후 원심은, 1965년 한일 간에 국교가 정상화되었으나 청구권협정 관련 문서가 모두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청구권협정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일본국 또는 일본 국민에 대한 개인청구권까지도 포괄적으로 해결된 것이라는 견해가 대한민국 내에서 널리 받아들여져 온 사정 등 그 판시와 같은 이유를 들어, 이 사건 소 제기 당시까지도 원고들이 피고를 상대로 대한민국에서 객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봄이 상당하므로, 피고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여 원고들에 대한 채무의 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현저히 부당하여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환송 후 원심의 판단 또한 환송판결의 취지에 따른 것으로서, 거기에 상고이유 주장과 같이 소멸시효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는 등의 위법이 없다.

[5] 불법행위로 입은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 액수에 관하여는 사실심법원이 제반 사정을 참작하여 그 직권에 속하는 재량에 의하여 이를 확정할 수 있다판례.
환송 후 원심은 그 판시와 같은 이유로 원고들에 대한 위자료를 판시 액수로 정하였다. 환송 후 원심판결 이유를 기록에 비추어 살펴보면, 이 부분 판단에 상고이유 주장과 같이 위자료 산정에 있어서 현저하게 상당성을 결하는 등의 위법이 없다.

【결론】 다수의견으로 다음 문단 참조.

9.1. 다수 의견

9.1.1. 판결요지

[2] 일제강점기에 강제동원되어 기간 군수사업체인 일본제철 주식회사에서 강제노동에 종사한 갑 등이 위 회사가 해산된 후 새로이 설립된 신일철주금 주식회사(이하 ‘신일철주금’이라 한다)를 상대로 위자료 지급을 구한 사안에서, 갑 등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이하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이라 한다)인 점,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조약 제172호, 이하 ‘청구권협정’이라 한다)의 체결 경과와 전후 사정들에 의하면,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이는 점, 청구권협정 제1조에 따라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지급한 경제협력자금이 제2조에 의한 권리문제의 해결과 법적인 대가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는지도 분명하지 아니한 점, 청구권협정의 협상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하였고, 이에 따라 한일 양국의 정부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관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 등에 비추어, 갑 등이 주장하는 신일철주금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 사례.

9.1.2. 판결이유

가. 조약은 전문·부속서를 포함하는 조약문의 문맥 및 조약의 대상과 목적에 비추어 그 조약의 문언에 부여되는 통상적인 의미에 따라 성실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서 문맥은 조약문(전문 및 부속서를 포함한다) 외에 조약의 체결과 관련하여 당사국 사이에 이루어진 그 조약에 관한 합의 등을 포함하며, 조약 문언의 의미가 모호하거나 애매한 경우 등에는 조약의 교섭 기록 및 체결 시의 사정 등을 보충적으로 고려하여 그 의미를 밝혀야 한다.

나. 이러한 법리에 따라, 앞서 본 사실관계 및 채택된 증거에 의하여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원고들이 주장하는 피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우선 이 사건에서 문제 되는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이하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이라 한다)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원고들은 피고를 상대로 미지급 임금이나 보상금을 청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위와 같은 위자료를 청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환송 후 원심의 아래와 같은 사실인정과 판단은 기록상 이를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즉 ① 일본 정부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 불법적인 침략전쟁의 수행과정에서 기간 군수사업체인 일본의 제철소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조직적으로 인력을 동원하였고, 핵심적인 기간 군수사업체의 지위에 있던 구 일본제철은 철강통제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일본 정부의 위와 같은 인력동원정책에 적극 협조하여 인력을 확충하였다. ② 원고들은 당시 한반도와 한국민들이 일본의 불법적이고 폭압적인 지배를 받고 있었던 상황에서 장차 일본에서 처하게 될 노동 내용이나 환경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 채 일본 정부와 구 일본제철의 위와 같은 조직적인 기망에 의하여 동원되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③ 더욱이 원고들은 성년에 이르지 못한 어린 나이에 가족과 이별하여 생명이나 신체에 위해를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열악한 환경에서 위험한 노동에 종사하였고, 구체적인 임금액도 모른 채 강제로 저금을 해야 했으며, 일본 정부의 혹독한 전시 총동원체제에서 외출이 제한되고 상시 감시를 받아 탈출이 불가능하였으며 탈출시도가 발각된 경우 혹독한 구타를 당하기도 하였다. ④ 이러한 구 일본제철의 원고들에 대한 행위는 당시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해당하고, 이러한 불법행위로 인하여 원고들이 정신적 고통을 입었음은 경험칙상 명백하다.
(2) 앞서 본 청구권협정의 체결 경과와 그 전후 사정, 특히 아래와 같은 사정들에 의하면,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인다.
① 앞서 본 것처럼, 전후 배상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51. 9. 8. 미국 등 연합국 48개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a)는 ‘일본의 통치로부터 이탈된 지역(대한민국도 이에 해당)의 시정 당국 및 그 국민과 일본 및 일본 국민 간의 재산상 채권·채무관계는 이러한 당국과 일본 간의 특별약정으로써 처리한다’고 규정하였다.
②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체결된 이후 곧이어 제1차 한일회담(1952. 2. 15.부터 같은 해 4. 25.까지)이 열렸는데, 그때 한국 측이 제시한 8개 항목도 기본적으로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무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위 8개 항목 중 제5항에 ‘피징용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의 변제청구’라는 문구가 있지만, 8개 항목의 다른 부분 어디에도 일본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하는 내용은 없으므로, 위 제5항 부분도 일본 측의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보인다. 따라서 위 ‘피징용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의 변제청구’에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까지 포함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③ 1965. 3. 20. 대한민국 정부가 발간한 ‘한일회담백서’(을 제18호증)에 의하면,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가 한·일 간 청구권 문제의 기초가 되었다고 명시하고 있고, 나아가 “위 제4조의 대일청구권은 승전국의 배상청구권과 구별된다.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조인당사국이 아니어서 제14조 규정에 의한 승전국이 향유하는 ‘손해 및 고통’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한·일 간 청구권 문제에는 배상청구를 포함시킬 수 없다.”는 설명까지 하고 있다.
④ 이후 실제로 체결된 청구권협정문이나 그 부속서 어디에도 일본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언급하는 내용은 전혀 없다. 청구권협정 제2조 1.에서는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라고 하여, 위 제4조(a)에 규정된 것 이외의 청구권도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위와 같이 일본 식민지배의 불법성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이상, 위 제4조(a)의 범주를 벗어나는 청구권, 즉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직결되는 청구권까지도 위 대상에 포함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청구권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Ⅰ) 2.(g)에서도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는 것’에 위 8개 항목의 범위에 속하는 청구가 포함되어 있다고 규정하였을 뿐이다.
⑤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도 ‘청구권협정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공식의견을 밝혔다.
(3) 청구권협정 제1조에 따라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지급한 경제협력자금이 제2조에 의한 권리문제의 해결과 법적인 대가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는지도 분명하지 아니하다.
청구권협정 제1조에서는 ‘3억 달러 무상 제공, 2억 달러 차관(유상) 실행’을 규정하고 있으나, 그 구체적인 명목에 대해서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 차관의 경우 일본의 해외경제협력기금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것으로 하고, 위 무상 제공 및 차관이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유익한 것이어야 한다는 제한을 두고 있을 뿐이다. 청구권협정 전문에서 ‘청구권 문제 해결’을 언급하고 있기는 하나, 위 5억 달러(무상 3억 달러와 유상 2억 달러)와 구체적으로 연결되는 내용은 없다. 이는 청구권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Ⅰ) 2.(g)에서 언급된 ‘8개 항목’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일본 측의 입장도 청구권협정 제1조의 돈이 기본적으로 경제협력의 성격이라는 것이었고, 청구권협정 제1조와 제2조 사이에 법률적인 상호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는, 청구권협정 당시 정부가 수령한 무상자금 중 상당 금액을 강제동원 피해자의 구제에 사용하여야 할 ‘도의적 책임’이 있었다고 하면서, 1975년 청구권보상법 등에 의한 보상이 ‘도의적 차원’에서 볼 때 불충분하였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 제정된 2007년 희생자지원법 및 2010년 희생자지원법 모두 강제동원 관련 피해자에 대한 위로금이나 지원금의 성격이 ‘인도적 차원’의 것임을 명시하였다.
(4) 청구권협정의 협상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하였고, 이에 따라 한일 양국의 정부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관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청구권협정의 일방 당사자인 일본 정부가 불법행위의 존재 및 그에 대한 배상책임의 존재를 부인하는 마당에, 피해자 측인 대한민국 정부가 스스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까지도 포함된 내용으로 청구권협정을 체결하였다고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5) 환송 후 원심에서 피고가 추가로 제출한 증거들도,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위와 같은 판단에 지장을 준다고 보이지 않는다.

위 증거들에 의하면, 1961. 5. 10. 제5차 한일회담 예비회담 과정에서 대한민국 측이 ‘다른 국민을 강제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입힌 피징용자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대한 보상’을 언급한 사실, 1961. 12. 15. 제6차 한일회담 예비회담 과정에서 대한민국 측이 ‘8개 항목에 대한 보상으로 총 12억 2,000만 달러를 요구하면서, 그중 3억 6,400만 달러(약 30%)를 강제동원 피해보상에 대한 것으로 산정(생존자 1인당 200달러, 사망자 1인당 1,650달러, 부상자 1인당 2,000달러 기준)’한 사실 등을 알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위와 같은 발언 내용은 대한민국이나 일본의 공식 견해가 아니라 구체적인 교섭 과정에서 교섭 담당자가 한 말에 불과하고, 13년에 걸친 교섭 과정에서 일관되게 주장되었던 내용도 아니다. ‘피징용자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언급한 것은 협상에서 유리한 지위를 점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발언에 불과한 것으로 볼 여지가 크고, 실제로 당시 일본 측의 반발로 제5차 한일회담 협상은 타결되지도 않았다. 또한 위와 같이 협상 과정에서 총 12억 2,000만 달러를 요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청구권협정은 3억 달러(무상)로 타결되었다. 이처럼 요구액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3억 달러만 받은 상황에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도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 것이라고는 도저히 보기 어렵다.

다. 환송 후 원심이 이와 같은 취지에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은 정당하다. 거기에 상고이유 주장과 같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과 효력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는 등의 위법이 없다.
한편 피고는 이 부분 상고이유에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는 전제하에, 청구권협정으로 포기된 권리가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에 한정되어서만 포기된 것이 아니라 개인청구권 자체가 포기(소멸)된 것이라는 취지의 주장도 하고 있으나, 이 부분은 환송 후 원심의 가정적 판단에 관한 것으로서 더 나아가 살펴볼 필요 없이 받아들일 수 없다.

9.1.3. 결론

상고를 모두 기각하고, 상고비용은 패소자가 부담하도록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 주문: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상고비용은 피고가 부담한다.

9.2. 별개의견(대법관 이기택)

9.2.1. 판결요지

[2] 이미 환송판결은 ‘갑 등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아니하고, 설령 포함된다고 하더라도 그 개인청구권 자체는 청구권협정만으로 당연히 소멸하지 아니하고 다만 청구권협정으로 그 청구권에 관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이 포기되었을 뿐이다’라고 판시하였고, 환송 후 원심도 이를 그대로 따랐다.

상고심으로부터 사건을 환송받은 법원은 그 사건을 재판할 때에 상고법원이 파기이유로 한 사실상 및 법률상의 판단에 기속된다. 이러한 환송판결의 기속력은 재상고심에도 미치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환송판결의 기속력에 반하는 상고이유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9.2.2. 판결이유

[3] 가. 이 부분 상고이유 요지는, 원고들이 주장하는 피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고, 청구권협정에 포함된 청구권은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뿐만 아니라 개인청구권까지 완전히 소멸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이미 환송판결은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아니하고, 설령 포함된다고 하더라도 그 개인청구권 자체는 청구권협정만으로 당연히 소멸하지 아니하고 다만 청구권협정으로 그 청구권에 관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이 포기되었을 뿐이다’라고 판시하였고, 환송 후 원심도 이를 그대로 따랐다.
상고심으로부터 사건을 환송받은 법원은 그 사건을 재판할 때에 상고법원이 파기이유로 한 사실상 및 법률상의 판단에 기속된다. 이러한 환송판결의 기속력은 재상고심에도 미치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환송판결의 기속력에 반하는 위와 같은 상고이유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나. 법원조직법 제8조는 “상급법원 재판에서의 판단은 해당 사건에 관하여 하급심을 기속한다.”라고 규정하고 있고, 민사소송법 제436조 제2항은 “사건을 환송받거나 이송받은 법원은 다시 변론을 거쳐 재판하여야 한다. 이 경우에는 상고법원이 파기의 이유로 삼은 사실상 및 법률상 판단에 기속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상고법원으로부터 사건을 환송받은 법원은 그 사건을 재판할 때에 상고법원이 파기이유로 한 사실상 및 법률상의 판단에 기속된다. 다만 환송 후 심리과정에서 새로운 주장이나 증명이 제출되어 기속적 판단의 기초가 된 사실관계에 변동이 생긴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기속력이 미치지 아니할 수 있다판례.
이 사건에서 만약 환송 후 원심의 심리과정에서 새로운 주장이나 증명을 통해 환송판결의 이 부분 판단의 기초가 된 사실관계에 변동이 생겼다고 평가할 수 있다면, 기속력이 미치지 아니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선 다수의견이 적절히 설시한 것과 같이, 환송 후 원심에서 피고가 추가로 제출한 증거들에 의하여 알 수 있는 제5차 및 제6차 한일회담 예비회담 과정에서의 대한민국 측의 발언 내용들만으로는, 도저히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아니한다’라는 환송판결의 기속적 판단의 기초가 된 사실관계에 변동이 생긴 경우라고 보기 어렵다.
또한 환송판결의 가정적 판단, 즉 ‘개인청구권 자체는 청구권협정만으로 당연히 소멸하지 아니하고 다만 청구권협정으로 그 청구권에 관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이 포기되었을 뿐이다’라는 부분도 그 판단의 기초가 된 사실관계에 변동이 생겼다고 보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와 관련하여 환송 후 원심에서 새로 제출된 증거들은 주로 청구권협정의 해석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밝힌 것에 불과하여 ‘사실관계’의 변동이라고 평가하기도 어렵다.

다. 환송판결의 기속력은 환송 후 원심뿐만 아니라 재상고심에도 미치는 것이 원칙이다판례
다만 대법원 2001. 3. 15. 선고 98두15597 전원합의체 판결은 “대법원은 법령의 정당한 해석적용과 그 통일을 주된 임무로 하는 최고법원이고, 대법원의 전원합의체는 종전에 대법원에서 판시한 법령의 해석적용에 관한 의견을 스스로 변경할 수 있는 것인바(법원조직법 제7조 제1항 제3호), 환송판결이 파기이유로 한 법률상 판단도 여기에서 말하는 ‘대법원에서 판시한 법령의 해석적용에 관한 의견'에 포함되는 것이므로 대법원의 전원합의체가 종전의 환송판결의 법률상 판단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그에 기속되지 아니하고 통상적인 법령의 해석적용에 관한 의견의 변경절차에 따라 이를 변경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여, 환송판결의 기속력이 재상고심의 전원합의체에는 미치지 아니한다는 취지로 판시한 바 있다.
그러나 위 98두15597 전원합의체 판결의 의미를 ‘전원합의체에서 판단하는 이상 언제라도 환송판결의 기속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여서는 아니 된다. ‘환송판결에 명백한 법리오해가 있어 반드시 이를 시정해야 하는 상황이거나 환송판결이 전원합의체를 거치지 아니한 채 종전 대법원판결이 취한 견해와 상반된 입장을 취한 때와 같은 예외적인 경우에 한하여 기속력이 미치지 아니한다’는 뜻으로 새겨야 한다. 이렇게 보지 아니할 경우 법률에서 환송판결의 기속력을 인정한 취지가 무색하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위 98두15597 전원합의체 판결의 사안 자체도, 환송판결에 명백한 법리오해의 잘못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환송판결이 전원합의체를 거치지도 아니한 채 기존 대법원판결에 저촉되는 판단을 한 경우였다.
이러한 법리에 따라 이 사건에 돌아와 살펴보면, 청구권협정의 효력과 관련하여 환송판결이 설시한 법리에 명백한 오류가 있다거나 종전 대법원판결에 반하는 내용이 있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사건을 전원합의체에서 판단한다고 하더라도 쉽사리 환송판결이 설시한 법리를 재심사하거나 뒤집을 수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라. 결국, 어느 모로 보나 이 부분 상고이유 주장은 환송판결의 기속력에 반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
한편 앞서 본 상고이유 제1, 2, 4점에 관한 판단 부분에서 ‘환송 후 원심의 판단이 환송판결의 취지에 따른 것으로서 상고이유 주장과 같은 위법이 없다’고 판시한 것은, 위와 같은 환송판결의 기속력에 관한 법리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이 부분 판단에 대해서는 다수의견과 견해를 달리하지 아니한다는 점을 덧붙여 두고자 한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상고를 기각하여야 한다는 결론에서는 다수의견과 의견을 같이하지만 상고이유 제3점에 관하여는 다수의견과 그 구체적인 이유를 달리하므로, 별개의견으로 이를 밝혀 둔다.

9.3. 보충의견(대법관 김소영, 대법관 이동원, 대법관 노정희)

9.3.1. 판결이유

[3]
가. 청구권협정에도 불구하고 원고들이 피고를 상대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 관해서는 다수의견과 결론을 같이한다. 다만 그 구체적인 이유에서는 다수의견과 견해를 달리한다.
다수의견은 ‘원고들이 주장하는 피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볼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청구권협정의 해석상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원고들 개인의 청구권 자체는 청구권협정으로 당연히 소멸한다고 볼 수 없고, 청구권협정으로 그 청구권에 관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만이 포기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원고들은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피고를 상대로 소로써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이렇게 보아야 하는 구체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 우선 조약의 해석 방법에 관하여 다수의견이 밝힌 법리에 관하여는 견해를 달리하지 않는다. 이러한 법리에 따라, 환송 후 원심에서 비로소 제출된 증거들(을 제16 내지 18, 37 내지 39, 40 내지 47, 50, 52, 53, 55호증)까지 포함하여 원심이 적법하게 채택·조사한 증거들에 의하여 알 수 있는 사실관계를 살펴보면, 다수의견과 달리, 원고들의 피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 환송 후 원심에서 제출된 증거들을 비롯한 채택 증거들에 의하여 알 수 있는 청구권협정의 구체적인 체결 과정은 다음과 같다.
(가) 앞서 보았듯이, 1952. 2. 15. 개최된 제1차 한일회담 당시 대한민국은 8개 항목을 제시하였는데, 이후 일본의 역청구권 주장, 독도 및 평화선 문제에 대한 이견, 양국의 정치적 상황 등으로 제4차 한일회담까지는 8개 항목에 관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나) 제5차 한일회담에서부터 8개 항목에 대한 실질적인 토의가 이루어졌는데, 제5차 한일회담에서는 아래와 같은 논의가 있었다.
① 1961. 5. 10. 제5차 한일회담 예비회담 일반청구권소위원회 제13차 회의에서 대한민국 측은 8개 항목 중 위 제5항(한국법인 또는 한국자연인의 일본은행권, 피징용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의 변제청구)과 관련하여 ‘강제징용으로 피해를 입은 개인에 대한 보상’을 일본 측에 요구하였다. 구체적으로 ‘생존자, 부상자, 사망자, 행방불명자 그리고 군인·군속을 포함한 피징용자 전반에 대하여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라면서 ‘이는 다른 국민을 강제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입힌 피징용자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에 대한 보상을 의미한다’는 취지로 설명하였다. 이에 일본 측이 개인의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인지, 대한민국에서 한국인 피해자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를 할 용의가 있는지 등에 대하여 묻자, 대한민국 측은 ‘나라로서 청구하는 것이며, 피해자 개인에 대한 보상은 국내에서 조치할 성질의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다.
② 일본 측은 대한민국 측의 위와 같은 개인 피해 보상요구에 반발하면서 구체적인 징용·징병의 인원수나 증거자료를 요구하거나 양국 국교가 회복된 뒤에 개별적으로 해결하는 방안 등을 제시하는 등 대한민국 측의 요구에 그대로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③ 제5차 한일회담의 청구권위원회에서는 1961. 5. 16. 군사정변에 의해 회담이 중단되기까지 8개 항목의 제1항부터 제5항까지 토의가 진행되었으나,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를 확인하였을 뿐 실질적인 의견 접근을 이루는 데는 실패하였다.
(다) 제6차 한일회담이 1961. 10. 20. 개시된 후에는 청구권에 대한 세부적 논의가 시일만 소요될 뿐 해결이 요원하다는 판단에서 정치적 측면의 접근이 모색되었는데, 아래와 같은 협상 과정을 거쳐 제7차 한일회담 중 1965. 6. 22. 마침내 청구권협정이 체결되었다.
① 1961. 12. 15. 제6차 한일회담 예비회담 일반청구권소위원회 제7차 회의에서 대한민국 측은 일본 측에 8개 항목에 대한 보상으로 총 12억 2,000만 달러를 요구하면서, 강제동원에 대한 피해보상으로 생존자 1인당 200달러, 사망자 1인당 1,650달러, 부상자 1인당 2,000달러를 기준으로 계산한 3억 6,400만 달러(약 30%)를 산정하였다.
② 1962. 3.경 외상회담에서는 대한민국 측의 지불요구액과 일본 측의 지불용의액을 비공식적으로 제시하기로 하였는데, 그 결과 대한민국 측의 지불요구액인 순변제 7억 달러와 일본 측의 지불용의액인 순변제 7,000만 달러 및 차관 2억 달러 사이에 현저한 차이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③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측은 당초부터 청구권에 대한 순변제로 하면 법률관계와 사실관계를 엄격히 따져야 될 뿐 아니라 그 금액도 적어져서 대한민국이 수락할 수 없게 될 터이니, 유상과 무상의 경제협력의 형식을 취하여서 금액을 상당한 정도로 올리고 그 대신 청구권을 포기하도록 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대하여 대한민국 측은 청구권에 대한 순변제로 받아야 하는 입장이나 문제를 대국적 견지에서 해결하기 위하여 청구권 해결의 테두리 안에서 순변제와 무상조 지불의 2개 명목으로 해결할 것을 주장하다가, 후에 다시 양보하여 청구권 해결의 테두리 안에서 순변제 및 무상조 지불의 2개 명목으로 하되 그 금액을 각각 구분하여 표시하지 않고 총액만을 표시하는 방법으로 해결할 것을 제의하였다.
④ 이후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일본에서 이케다 일본 수상과 1차, 오히라 일본 외상과 2차에 걸쳐서 회담을 하였는데, 오히라 외상과 한 1962. 11. 12. 제2차 회담 시 청구권 문제의 금액, 지불세목 및 조건 등에 관하여 양측 정부에 건의할 타결안에 관한 원칙적인 합의를 하였다. 그 후 구체적 조정 과정을 거쳐 제7차 한일회담이 진행 중이던 1965. 4. 3. 당시 외무부 장관이던 이동원과 일본의 외무부 대신이었던 시이나 에쓰사부로오 사이에 ‘한·일 간의 청구권 문제 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2) 앞에서 본 것처럼, 청구권협정 전문은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및 양국 국민의 재산과 양국 및 양국 국민 간의 청구권(이하 ‘청구권협정상 청구권’이라 한다)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것을 희망하고, 양국 간의 경제협력을 증진할 것을 희망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라고 전제하고, 제2조 1.은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 9. 8.에 샌프란시스코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라고 정하였다.
또한 청구권협정과 같은 날 체결된 청구권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Ⅰ)은 위 제2조에 관하여 “동조 1.에서 말하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되는 청구권협정상 청구권에 관한 문제에는 한일회담에서 한국 측으로부터 제출된 ‘한국의 대일청구요강’(소위 8개 항목)의 범위에 속하는 모든 청구가 포함되어 있고, 따라서 동 대일청구요강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게 됨을 확인하였다.”라고 정하였는데, 8개 항목 중 제5항에는 ‘피징용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이하 ‘피징용 청구권’이라 한다)의 변제청구’가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청구권협정 등의 문언에 의하면,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은 국가와 국가 사이의 청구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일방 국민의 상대국 및 그 국민에 대한 청구권까지도 협정의 대상으로 삼았음이 명백하고, 청구권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Ⅰ)은 청구권협정상 청구권의 대상에 피징용 청구권도 포함됨을 분명히 하고 있다.
(3) 청구권협정 자체의 문언은 제1조에 따라 일본이 대한민국에 지급하기로 한 경제협력자금이 제2조에 의한 권리문제의 해결에 대한 대가인지에 관하여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지는 아니하다.
그러나 앞에서 본 것처럼, ① 대한민국은 1961. 5. 10. 제5차 한일회담 예비회담 일반청구권소위원회 제13차 회의에서 피징용 청구권 관련하여 ‘생존자, 부상자, 사망자, 행방불명자 그리고 군인·군속을 포함한 피징용자 전반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며 ‘다른 국민을 강제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입힌 피징용자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에 대한 보상’까지도 적극적으로 요청하였을 뿐만 아니라, 1961. 12. 15. 제6차 한일회담 예비회담 일반청구권소위원회 제7차 회의에서 강제동원으로 인한 피해보상금을 구체적으로 3억 6,400만 달러로 산정하고 이를 포함하여 8개 항목에 대한 총 보상금 12억 2,000만 달러를 요구하였고, ② 제5차 한일회담 당시 대한민국이 위 요구액은 국가로서 청구하는 것이고 피해자 개인에 대한 보상은 국내에서 조치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일본은 구체적인 징용·징병의 인원수나 증거자료를 요구하여 협상에 난항을 겪었으며, ③ 이에 일본은 증명의 곤란함 등을 이유로 유상과 무상의 경제협력의 형식을 취하여 금액을 상당한 정도로 올리고 그 대신 청구권을 포기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안하였고, 대한민국은 순변제 및 무상조 등 2개 명목으로 금원을 수령하되 구체적인 금액은 항목별로 구분하지 않고 총액만을 표시하는 방법을 다시 제안함에 따라, ④ 이후 구체적인 조정 과정을 거쳐 1965. 6. 22. 제1조에서는 경제협력자금의 지원에 관하여 정하고 아울러 제2조에서는 권리관계의 해결에 관하여 정하는 청구권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러한 청구권협정의 체결에 이르기까지의 경위 등에 비추어 보면, 청구권협정상 청구권의 대상에 포함된 피징용 청구권은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까지도 포함한 것으로서, 청구권협정 제1조에서 정한 경제협력자금은 실질적으로 이러한 손해배상청구권까지 포함한 제2조에서 정한 권리관계의 해결에 대한 대가 내지 보상으로서의 성질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다고 보이고, 양국도 청구권협정 체결 당시 그와 같이 인식하였다고 봄이 타당하다.
(4) 8개 항목 중 제5항은 피징용 청구권과 관련하여 ‘보상금’이라는 용어만 사용하고 ‘배상금’이란 용어는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 ‘보상’이 ‘식민지배의 적법성을 전제로 하는 보상’만을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위와 같이 협상 과정에서 양측이 보인 태도만 보더라도 양국 정부가 엄밀한 의미에서의 ‘보상’과 ‘배상’을 구분하고 있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양국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배상’도 당연히 청구권협정의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상호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5) 그뿐 아니라 대한민국은 청구권협정에 의해 지급되는 자금을 사용하기 위한 기본적 사항을 정하기 위하여 청구권자금법 및 청구권신고법 등을 제정·시행하여, 일본에 의하여 노무자로 징용되었다가 1945. 8. 15. 이전에 사망한 자의 청구권을 청구권협정에 따라 보상하는 민간청구권에 포함시켜 그 피징용사망자에 대한 신고 및 보상 절차를 마쳤다. 이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어 있음을 전제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청구권협정 관련 일부 문서가 공개된 후 구성된 민관공동위원회도 2005. 8. 26. 청구권협정의 법적 효력에 관하여 공식의견을 표명하였는데, 일본국 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정부와 군대 등 일본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되었다고 볼 수 없다고 하면서도,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에 관하여는 ‘청구권협정을 통하여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3억 달러에는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되었다’고 보았다.
나아가 대한민국은 2007. 12. 10. 청구권자금법 등에 의하여 이루어진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불충분하였다는 반성적인 고려에서 2007년 희생자지원법을 제정·시행하여, 1938. 4. 1.부터 1945. 8. 15.까지 사이에 일제에 의하여 노무자 등으로 국외로 강제동원된 희생자·부상자·생환자 등에 대하여 위로금을 지급하고, 강제동원되어 노무를 제공하였으나 일본 기업 등으로부터 지급받지 못한 미수금을 대한민국 통화로 환산하여 지급하였다.
이와 같이 대한민국은 청구권협정에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이 포함되어 있음을 전제로 하여, 청구권협정 체결 이래 장기간 그에 따른 보상 등의 후속 조치를 취하였음을 알 수 있다.
(6) 이상의 내용, 즉 청구권협정 및 그에 관한 양해문서 등의 문언, 청구권협정의 체결 경위나 체결 당시 추단되는 당사자의 의사, 청구권협정의 체결에 따른 후속 조치 등의 여러 사정들을 종합하여 보면,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럼에도 이와 달리, 원고들의 피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본 환송 후 원심의 이 부분 판단에는, 조약의 해석에 관한 법리 등을 오해한 잘못이 있다.

다. 그러나 위와 같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원고들의 개인청구권 자체는 청구권협정만으로 당연히 소멸한다고 볼 수 없고, 다만 청구권협정으로 그 청구권에 관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이 포기됨으로써 일본의 국내 조치로 해당 청구권이 일본 내에서 소멸하여도 대한민국이 이를 외교적으로 보호할 수단을 상실하게 될 뿐이다’라는 환송 후 원심의 가정적 판단은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 이를 수긍할 수 있다.
(1) 청구권협정에는 개인청구권 소멸에 관하여 한일 양국 정부의 의사합치가 있었다고 볼 만큼 충분하고 명확한 근거가 없다.
과거 주권국가가 외국과 교섭을 하여 자국국민의 재산이나 이익에 관한 사항을 일괄적으로 해결하는 이른바 일괄처리협정(lump sum agreements)이 국제분쟁의 해결·예방을 위한 방식의 하나로 채택되어 왔던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 그런데 이러한 협정을 통해 국가가 ‘외교적 보호권(diplomatic protection)’, 즉 ‘자국민이 외국에서 위법·부당한 취급을 받은 경우 그의 국적국이 외교절차 등을 통하여 외국 정부를 상대로 자국민에 대한 적당한 보호 또는 구제를 요구할 수 있는 국제법상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개인의 청구권까지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다고 보려면, 적어도 해당 조약에 이에 관한 명확한 근거가 필요하다고 보아야 한다. 국가와 개인이 별개의 법적 주체라는 근대법의 원리는 국제법상으로도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권리의 ‘포기’를 인정하려면 그 권리자의 의사를 엄격히 해석하여야 한다는 법률행위 해석의 일반원칙에 의할 때, 개인의 권리를 국가가 나서서 대신 포기하려는 경우에는 이를 더욱 엄격하게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구권협정은 그 문언상 개인청구권 자체의 포기나 소멸에 관하여는 아무런 규정도 두고 있지 않다. 이 점에서 연합국과 일본 사이에 1951. 9. 8.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14조(b)에서 “연합국은 모든 보상청구, 연합국과 그 국민의 배상청구 및 군의 점령비용에 관한 청구를 모두 포기한다.”라고 정하여 명시적으로 청구권의 포기(waive)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과 구별된다. 물론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표현이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위와 같은 엄격해석의 필요성에 비추어 이를 개인청구권의 ‘포기’나 ‘소멸’과 같은 의미로 보기는 어렵다.
앞서 든 증거들에 의하면, 청구권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 과정에서 일본은 청구권협정에 따라 제공될 자금과 청구권 간의 법률적 대가관계를 일관되게 부인하였고, 청구권협정을 통해 개인청구권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만이 소멸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에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은 청구권협정 체결 당시 향후 제공될 자금의 성격에 대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청구권협정을 체결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청구권협정에서 사용된 ‘해결된 것이 된다’거나 주체 등을 분명히 하지 아니한 채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는 등의 문언은 의도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야 하고, 이를 개인청구권의 포기나 소멸, 권리행사제한이 포함된 것으로 쉽게 판단하여서는 아니 된다.
이러한 사정 등에 비추어 보면, 청구권협정에서 양국 정부의 의사는 개인청구권은 포기되지 아니함을 전제로 정부 간에만 청구권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하자는 것, 즉 외교적 보호권에 한정하여 포기하자는 것이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2) 앞서 본 것처럼, 일본은 청구권협정 직후 일본국 내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일본국 및 그 국민에 대한 권리를 소멸시키는 내용의 재산권조치법을 제정·시행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청구권협정만으로는 대한민국 국민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음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즉 앞서 본 바와 같이 청구권협정 당시 일본은 청구권협정을 통해 개인청구권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만 포기된다고 보는 입장이었음이 분명하고, 협정의 상대방인 대한민국도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고 보인다. 따라서 양국의 진정한 의사 역시도 외교적 보호권만 포기된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대한민국이 1965. 7. 5. 발간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조약 및 협정 해설’에는 청구권협정 제2조에 관하여 “재산 및 청구권 문제의 해결에 관한 조항으로 소멸되는 우리의 재산 및 청구권의 내용을 보면, 우리 측이 최초에 제시한 바 있는 8개 항목의 대일청구 요강에서 요구한 것은 모두 소멸케 되는바, 따라서 피징용자의 미수금 및 보상금, 한국인의 대일본 정부 및 일본 국민에 대한 각종 청구 등이 모두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소멸케 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당시 대한민국의 입장이 개인청구권까지도 소멸되는 것이었다고 볼 여지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와 같이 당시 일본의 입장이 ‘외교적 보호권 한정 포기’임이 명백하였던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내심의 의사가 위와 같았다고 하여 청구권협정에서 개인청구권까지 포기되는 것에 대한 의사의 합치가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더욱이 이후 대한민국에서 청구권자금법 등 보상입법을 통하여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하여 이루어진 보상 내역이 실제 피해에 대비하여 극히 미미하였던 점에 비추어 보더라도, 대한민국의 의사가 청구권협정을 통해 개인청구권까지도 완전히 포기시키겠다는 것이었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3) 일괄처리협정의 효력 및 해석과 관련하여 국제사법재판소(ICJ)가 2012. 2. 3. 선고한 독일 대 이탈리아 주권면제 사건(Jurisdictional Immunities of the State, Germany v. Italy: Greece intervening)이 국제법적인 관점에서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쟁점은 차치하더라도, 1961. 6. 2. 이탈리아와 서독 사이에 체결된「특정 재산 관련, 경제적·재정적 문제의 해결에 관한 협정(Treaty on the Settlement of certain property-related, economic and financial questions)」및「나치의 박해를 받은 이탈리아 국민들에 대한 보상에 관한 협정(Agreement on Compensation for Italian Nationals Subjected to National-Socialist Measures of Persecution)」이 체결된 경위, 그 내용이나 문언이 청구권협정의 그것과 같지 아니하므로 청구권협정을 이탈리아와 서독 사이의 위 조약과 단순 비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아니하다.
라. 결국, 원고들의 피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 다수의견의 입장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청구권협정에도 불구하고 원고들이 피고를 상대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본 환송 후 원심의 결론은 타당하다. 거기에 이 부분 상고이유 주장과 같이 청구권협정의 효력, 대한민국 국민의 일본 국민에 대한 개인청구권의 행사가능성에 관한 법리 등을 오해한 잘못이 없다.



10. 미국의 사례

1999년 캘리포니아주에서 2차대전 피해자들이 독일, 일본 기업 등에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미국 연방정부에서 "배상 문제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으로 끝났고, 정부의 외교권한을 침해했다"며 캘리포니아 주법(州法)은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기사

이후 캘리포니아 주법(州法)에 자극 받아 2차대전 전쟁포로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합작으로 미국에서 독일, 일본 기업에 배상 소송을 걸었다.

재판 결과 전쟁포로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패소했다.

1심에서 재판부는 "미일평화조약(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르면 전쟁포로들이 일본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금지돼 있다"고 판결했다. 기사

2심에서 재판부는 "미국이 서명한 협정들은(샌프란시스코 조약) 포로들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1999년 캘리포니아 주법(州法)에 대해서도 "외교문제에 관한 연방정부의 독점권을 침해하여 위헌"이라고 밝혔다. 기사

3심에서도 마찬가지로 전쟁포로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패소하며 재판이 끝났다. 기사

한국에서는 국가간 협정으로 개인의 배상을 끝내는건 불가능하며, 설령 끝냈다 하더라도 무효라는 인식이 다수지만 오히려 세계적으로는 국가간 협정으로도 개인의 배상 문제를 해결시키는건 가능하다는게 대세다. 즉 국가 차원에서 개인에게 배상금을 나눠 줘야 하는 것이다.

11. 일본의 사례

1945년 8월 9일, 전쟁 막바지에 소련은 만주, 사할린 등을 침공했는데, 이 때 소련군에 의해 일본군 일부가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소련에 의해 강제노역당한 역사가 있다. 억류 및 강제노역 피해자들은 1979년 전국억류자보상협의회를 결성하고 일본 정부에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는데, 일본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일소 공동선언에 의해 외교적 보호권은 소멸하였지만 개인의 청구권은 여전히 유효하므로 일본은 이에 대해 보상할 의무가 없다"는 입장으로 응수한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일본국에 대해 일체의 배상 청구권을 포기한다.
일본국 및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1945년 8월 9일부터 전쟁의 결과로 생긴 각각의 나라, 그 단체 및 국민의 각각 다른 나라, 그 단체 및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을, 상호간에, 포기한다.
일본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간의 공동선언 (1956)

일본은 민주당이 정권을 잡고 있던 2010년 소련 억류 피해자인 '현' 일본 국민에 대해 특별급부금의 형태로 강제징용에 관련된 피해를 보상하도록 하는 입법을 하였으나 조선인 등 국적을 이탈한 사람들은 보상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1.1. 여타 국가들의 사례

식민지가 아닌 전쟁 피해국의 지위에 있던 2차대전 승전국 중에서도 대일청구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사례가 제법 있으나, 식민지였던 나라가 과거 지배국에 보상을 받은 사례는 본협정이 유일하다.

전쟁 피해국 중에는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이 그 중 하나인데, 오랜 내전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화되어 한국 못지 않게 배상금이 필요한 나라였으나 중화민국은 타이완으로 쫓겨난 상황에서 일본과 대일배상청구권에 대해 협상함으로써 자신을 정통 중국 정권으로 인정해줄 우방을 확보했고, 중화인민공화국은 대소관계가 악화되면서 데탕트가 찾아오는 70년대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대일배상청구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중일국교정상화를 하였다. 각각 어느정도 계산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야기하면 청구권을 자진 포기한 것.[41] 다만 이건 국가 차원의 배상포기라 개인의 배상청구는 가능하다. 일본 기업들이 중국인들에게는 배상을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거하여 전쟁 피해국의 지위를 갖던 캄보디아라오스는 배상 청구권을 자진해서 포기했다. 사실 피해를 입은 기간도 상대적으로 짧고 거리도 멀다보니 동북아 국가들에 비하면 피해가 약하긴 했다. 다만 절대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이후 이어지는 일본의 경제원조는 톡톡히 받았다.

1. 문화재 협정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문화의 역사적인 관계에 비추어,
양구의 학술 및 문화의 발전과 연구에 기여할 것을 희망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제 1 조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국 정부는 양국 국민간의 문화 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가능한 한 협력한다.

제 2 조
일본국 정부는 부속서에 열거한 문화재를 양국 정부간에 합의되는 절차에 따라 본 협정효력 발생후 6개월 이내에 대한민국 정부에 인도한다.

제 3 조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국 정부는 각각 자국의 미술관, 박물관, 도서관 및 기타 학술문화에 관한 시설이 보유하는 문화재에 대하여 타방국의 국민에게 연구의 기회를 부여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의 편의를 제공한다.

제 4 조
본 협정은 비준되어야 한다. 비준서는 가능한 한 조속히 서울에서 교환한다.
본 협정은 비준서가 교환된 날로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이상의 증거로서 하기 대표는 각자의 정부로부터 정당한 위임을 받아 본 협정에 서명하였다.

1965년 6월 22일 토오쿄오에서 동등히 정본인 한국어 및 일본어로 본서 2통을 작성하였다.


대한민국을 위하여(서명) 이동원 김동조
일본국을 위하여(서명) 시이나 에쓰사부로오 다까스기 싱이찌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

1965년 6월 22일 동경에서 서명
1965년 12월 18일 발효


한국측 대표는, 일본 국민의 사유로서 한국에 연유하는 문화재가 한국측에 기증되도록 희망한다는 뜻을 말하였다.

일본측 대표는 일본 국민이 소유하는 이러한 문화재를 자발적으로 한국측에 기증함은 한일 양국간의 문화협력의 증진에 기여하게도 될 것이므로, 정부로서는 이를 권장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1965년 6월 22일 토오쿄오에서

2. 문화재 문제

문화재 협정에서 문제가 되는 건 '반환'이 아닌 '인도'란 표현이 사용된 점이다. 당초 문화재 협정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게 빼앗긴 문화재를 반환 받기 위해 체결한 협정이었으나 '인도'란 표현을 씀으로써 일본의 문화재 강탈을 정당화 시켰다. 또 일본의 문화재 반환 책임을 의무가 아닌 '가능한 협력', '기증되도록 희망' 등의 표현을 씀으로써 우리의 문화재를 돌려받는데 일본의 자비를 구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이 협정으로 돌려받은 문화재도 소수라서 더 암담한 상황.

3. 비판

우선 이 조약은 한미일 삼국의 외교/경제적 필요성에 의해서만 체결되었다는 가장 큰 문제점이 있다. 실제 한국으로서는 정작 피해 당사자인 국민의 정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합의되었고 그 결과 국민들이 여전히 배상 문제가 종료되지 않았다고 생각할만한 불씨를 만들었다. 최악의 병크

물론, 위에서 설명했듯 이와 별개로 해당 조약은 법리적 하자 없이 맺어졌다. 대한민국 헌법 제6조에 따라 정식으로 체결된 조약은 국회에서 제정한 법률과 같은 효력을 지니며 입법권[42], 사법권을 구속한다. 또한 해당 조약은 조약으로 성립하는데 문제되는 그 어떠한 법리적 하자도 없는 상황이므로, 당연히 국제 사회에서는 이 조약이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맺어진 조약으로 인식될 뿐 한국 내의 사정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43] 따라서 당시 정권이 제3공화국이었으며 이들이 청구권 문제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해당 조약으로 정당한 배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한국 내부에서 해결해야 한다. 왜냐하면 피해자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조약을 체결한 제3공화국에 책임이 있으며 이를 계승한 제6공화국이 책임을 질 의무가 있다. 때문에 일본 정부가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주장에는 설득력이 없다.[44] 이렇기에 더더욱 해당 조약과 관련해서 박정희에 대한 비판이 끊이질 않는 것이다. 그나마 한국 정부도 배상 요구 일변도에서 벗어나 문재인 정부에서 박근혜 정부 당시 체결된 위안부 협상에서 지급된 위로금도 돌려주겠다며 한국 국민을 자극한 언사에 대한 사죄에 집중하기로 결정한 태도를 보였다.

한편, 박정희 정부가 피해자들과 상의도 없이 받은 이 돈을 유용했다는 비판이 당시에도 현재도 존재한다. 실제 이 조약을 전후로 박정희를 비롯한 당시 정부 여당에 엄청난 음성적 정치자금이 흘러들어간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감시하는 주체도 없으니 유용하려면 얼마든지 유용할 수 있는 셈.

게다가 지금까지도 박정희 지지자들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는데, 경제를 살리기 위해 과정을 무시한다는 논리는 일제강점기 시절 철도가 세워지고 농업의 발전이 일어났으니 일제강점기는 긍정적이었다라는 논리와 마찬가지다. 공보다 과가 더 큼에도 마치 공만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는 것. 또 정치적 지향을 떠나 객관적으로 분명한 것은 경제가 발전한 이후에도 한국 정부는 자국민들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그에 따른 보상도 하지 않았으며 피해자 조사 등도 하지 않고 묻어버렸다. 역사적 사실은 민간단체의 노력에 의해 발굴 되었다.

실제 이 조약으로 받은 돈 중 상당부분을 투입해 세운 포스코의 경우, 초대 회장인 박태준은 조상의 핏값으로 세운 회사라고 스스로 말했으면서도 정작 2천년대 피해자들이 이제 기업도 성공했으니 배상금을 좀 해결해달라고 직접 찾아가자 만남을 거부했다.# 일본으로부터 받은 차관이 투입된 기업의 주식이라도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좀 제공했다면 비난 받을 이유가 없을테지만, 그런 것도 없이 국영기업의 주식은 국가가 보유하고 있다가 민영화 한다면서 일부를 팔았고, 차관이 공여 된 대기업의 이익은 피해자가 아닌 총수 일가의 재산만 늘렸다.

3.1. 3억 달러가 일본이 빌려준 차관이라는 주장


한일기본조약으로 인해 한국이 받은 3억 달러는 일본에게 갚아야할 차관이고, 개도국 이하의 경제상황이었던 한국이 이 거액을 갚으려면 우선 위안부 피해자들보다 기업에 우선적으로 배분하는 수 밖에 없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주장의 문제는 일단 한일기본조약에서 이 3억달러가 " 현재에 있어서 1천8십억 일본 원(108,000,000,000원)으로 환산되는 3억 아메리카합중국 불($ 300,000,000)과 동등한 일본 원의 가치를 가지는 일본국의 생산물 및 일본인의 용역을 본 협정의 효력발생일로부터 10년기간에 걸쳐 무상으로 제공한다. " 라는 1조 A항과 정면으로 대치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게다가 일본이 3억 달러를 차관으로 제공하면서, 그 빚을 돌려 받으려고 박정희 정부가 3억 달러를 어디에 사용했는 지 내역을 철저히 감시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 주장의 문제는, 일본이 감시했다는 건 한국의 예산집행에 일일이 간섭할 정도로 내정간섭을 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 당시 극도로 나쁜 한국의 경제상황을 감안할 경우 만약 3억 달러가 상환의무가 있는 유상 차관이었다면 이 주장에 설득력이 있겠지만, 1조 A항에 있다시피 이 차관은 상환의무가 없는 무상 차관이다.

4. 중일공동성명과 비교

한-일, 중-일은, 전자는 식민지배/피지배 관계이고, 후자는 전쟁가해/피해 관계여서 직접비교는 곤란하나, 한일협정과 중일공동성명을 단순비교해보는 항목이다.

1. 과거사 부분
일본은 일본국이 과거 전쟁으로 인해 중국 인민에게 입힌 중대한 손해와 책임을 통감하며 심각한 반성을 표한다.
-중일공동성명 中-

한일협정은 일본에게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받지 못했고, 사과 역시 받지 못했다. 결국 이로 인해 일본은 현재까지도 식민지배는 합법적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중일공동성명은 일본이 중국에게 피해를 입힌 사실을 인정받고 사과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2. 포기한 청구권의 범위
한일청구권협정 제2조
1.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런시스코우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중략)

3. 2의 규정에 따르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본 협정의 서명일에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 있는 것에 대한 조치와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제5조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중일 양국 국민의 우호를 위하여 일본에 대한 전쟁 배상 요구를 포기할 것을 선포한다.
-중일공동성명 中-

한일협정은 위 여러 항목에 나와있듯이 정부 뿐만 아니라 개인(법인 포함)의 모든 청구권을 포기하였으나, 중일공동성명에서 청구권 포기의 주체는 오직 중국 정부 뿐이라는 중국 정부의 입장이 있다. 중국 정부는 개인 청구권의 여지를 남겨두었다고 하나 일본 정부의 입장은 개인 청구권 문제도 해결되었다는 입장이다. 다만 일본 기업이 중국인 피해자들과 합의에 나서는 경우가 있다. 이런 합의는 일본 기업들의 중국 시장 공략을 위한 이미지 개선 작업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 기업과 중국인 피해자들의 합의 사례
* 가시마 기업의 사례 : 2000년, 하나오카 사건 피해자들에게 총 5억엔의 배상금을 지급했다.
* 니시마쓰 기업의 사례
* 미쓰비시 기업의 사례

2차 대전 당시 약 4만 명의 중국인이 일본에 강제 징용돼 일했으며 이 기간 7천 명의 중국인이 일본에서 사망했다. 강제노역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와 기업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나 일본 법원은 중국이 1972년 체결된 '중일공동성명'을 통해 배상권을 포기했다며 1995년 이후 제기된 14건의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http://m.yna.co.kr/kr/contents/?cid=AKR20130514107400083&site=0100000000

3. 배상금 부분
한일협정으로 일본은 한일협정에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공식적인 입장과 달리 일본의 공식적인 입장은 자금지원은 독립 축하금이었다.

5. 한국 정부의 문서 공개 거부 논란

현 한국 정부의 관련 문서 공개 거부 역시 문제이다. 법적으로 비공개 기간인 30년이 훨씬 지난 마당에 문서 공개를 거부하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협정 과정에서 스스로 배상청구권이라는 무기를 버린 점이나 협정 체결 이후 개인에게 돌려줘야 할 배상금을 거의 돌려주지 않고 관련 공지도 거의 하지 않은 것을 한국 정부 측에서 자행했다는 점이 문서 공개 거부의 원인이다. 이쯤 되면 국가의 기본 의무인 국민의 편의와 안전을 책임지는 것을 한참 어긴 셈이다.

5.1. 한국 정부의 문서 완전 공개와 그 파장

2004년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이 정부에 협정문 공개 소송을 걸었고, 일부 승소했다. 그 결과 전체 협정문 중 청구권 관련 5권이 일부 공개되었다. 이후에도 시민단체들과 일제 피해자들이 문서 완전 공개를 요구했다. 결국, 정부는 2005년 8월, 알 권리를 명분으로 협정문을 완전히 공개하였다.

5.2. 일본 정부의 문서 일부 공개와 근황

일본 정부도 2006년 8월부터 2008년 5월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협정문을 공개해서 어느 정도 대조해 볼 수 있었으나, 6만 페이지 중 25%의 중요 부분에 먹칠되어 있었다. 결국 이 문제는 일본이 나머지 25%를 공개해야만 해결이 될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 한일관계가 사실상 냉전 상태라 가능할지는 의문.1 2 3 4

2014년 7월 25일, 도쿄 고법에서 독도 관련 한일 교섭, 한일 청구권 협상, 일본 내 한국 문화재 등과 관련한 48건의 문서에 대해 1심 재판부의 공개 명령을 취소했다.#

결국 이에 대해 소송단은 상고를 포기했다.#

6. 외부 자료

한일기본조약의 진실 낱낱이 파헤치다
일본 전문 뉴스인 JP뉴스의 기사. 협정으로 인해 당시 재일동포들이 받은 영향과 협정을 주도하게 된 정치적 흐름과 세계정세, 한일기본조약과 연관된 독도 관련 회담 내용 등을 자세히 조사하여 기사화했다.

7. 관련 문서

8. 기타



[1]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2] (a) Subject to the provisions of paragraph (b) of this Article, the disposition of property of Japan and of its nationals in the areas referred to in Article 2, and their claims, including debts, against the authorities presently administering such areas and the residents (including juridical persons) thereof, and the disposition in Japan of property of such authorities and residents, and of claims, including debts, of such authorities and residents against Japan and its nationals, shall be the subject of special arrangements between Japan and such authorities.[3] 1965. 3. 20. 대한민국 정부가 발간한 '한일회담백서'(을 제18호증)에 의하면,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가 한일간 청구권문제의 기초가 되었다고 명시하고 있고, 나아가 "제4조의 대일청구권은 승전국의 배상청구권과 구별된다.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조인당상국이 아니어서 제14조 규정에 의한 승전국이 향유하는 '손해 및 고통'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한일간 청구권 문제에는 배상청구를 포함시킬 수 없다" 라는 설명이 있다.[4] 물론 다 달러였다는 소리는 아니고 규모가 그렇다는 의미.[5] 일본은 국교 정상화후 개별지급도 제안했었다[6] 물론, 박정희 정부 이전에 장면 내각에서도 한일국교정상화 논의는 이루어져왔다.[7] 여담으로, 고려대학교 쪽에서 시위를 주도한 사람이 당시 고대 학생회장 대행이자 훗날 서울특별시장을 거쳐 대통령이 된 이명박이다. 그는 이 시위를 주도했다는 명목으로 체포되어 6개월 간 유치소에 구금된 뒤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 전과 때문에 졸업 후 한동안 취직하지 못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잘못 알려진 이야기. 이명박의 고려대 졸업과 현대건설 공채 입사는 1965년으로 완전히 동일하다. 이명박청와대에 편지를 썼다는 것도 이르면 현대건설 입사가 진행되던 시기, 좀 박하게 보는 경우는 입사한 다음이다.[8] 의사 겸 시인 마종기도 군의관 복무 도중 제대를 1년 앞두고 이 협정에 반대한다고 대놓고 말했다가 고초를 겪었다. 결국 마종기는 제대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버렸다.[9] 서울중앙지방법원 2007. 8. 17. 선고 2006가합42288 판결[10] 사실 정부가 포스코에 돈을 준 것이기에 피해자들은 정부에 배상금 지급을 요구해야 하는데 이것 자체가 특별법 제정 등 여러 모로 골치아픈 문제다.[11] 제암리 학살사건 당시 일본군 사령관이던 우츠노미야 다로의 장남. 당은 자민당인데 한-일 밀월관계를 비판하면서 군사정권에 탄압받던 김대중 구명운동에 발벗고 나섰고, 알제리의 사회주의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하고, 북한 태조와 여러차례 독대하는 등 자민당 주류와는 이질적인 행보를 보였다. 애초에 당의 규모상 자민당에도 여러 파벌이 존재하기 때문.[12] 참고로 2019년 기준 한국정부 예산이 470조원이다. 단순비교는 무리가 있지만 2019년에 2년치 예산이면 940조원(!)이다. 사실 일본이 역사인식&태도에 관한 문제 때문에 외교관계가 좋지 않치만 은 다른 국가에 비해서도 많이 주었다.[13] 특히 한국은 전통적으로 일본과 무역하여 적자를 보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일본은 흑자를 본다는 의미다.[14] 상식적으로 당장 굶어죽게 생겼는데 장기적인 안목에서 원화 가치 확보를 위해 일종의 저축에 비유되는 외환보유고 확보가 가능하겠는가?[15] 일본의 침략 당시 미국의 식민지였다.[16] 일본의 침략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다.[17] 일본의 침략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18] 일본의 침략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다.[19] 물론 상기한 국가들이 전쟁배상을 받은 것과 한국과 일본간의 청구권 협정은 성격이 다르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겠지만.[20] 일본은 국내 군대를 포기하고 한반도의 휴전선을 전선으로 삼아 남한이 북한과 싸움으로서 자국 방위를 이룬다는 전략이었다. 이는 위에서도 설명했듯 한국이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던 점이 크다. 반면 베트남 등은 당시 공산국가이가 때문에 일본의 전략적 이익이 없었다.[21] 당초 베르사유 조약에서는 금액이 확정되지 못하고 협상을 거듭한 끝에 1921년에 타결된 런던 스케줄에서 정해진 배상금액이 1320억 금태환 마르크였다.[22] 1320억 금태환 마르크가 어느 정도의 금액이냐면 당시 역시 금태환되던 330억 미국달러에 상당하는 액수로서, 순금 5000 가량의 가치였다. 이 막대한 금액의 배상금을 제때 받지 못한 프랑스는 라인강 동쪽의 루르 지역을 점령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고, 독일 내부적으로는 초인플레이션으로 엄청난 혼란을 겪었으며, 이후 독일에서 나치스 집권의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23] 몇 번 더 나오겠지만 종주국(식민지배국)이 종속국(피식민지배국)에게 법적으로 사죄를 인정한 사례는 전세계에서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는 현재 지구상에서 영향력이 강한 강대국들 대부분(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미국, 러시아 등)이 18~19세기 식민지배로 국력을 강하게 하는 기반을 닦았고 피지배국가들 대부분은 독립 후 경제난, 쿠데타, 내전, 독재 등으로 사회혼란이 꾸준했기 때문에 발전이 더뎌지며 중진국에 머물거나 중진국 함정에 빠져 후진국에 재진입하기도 했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목소리가 약했기 때문이다.[24] 참고로 한국정부는 식민지배를 명확한 불법이라 하진 않았지만 유사한 유권해석을 하였다.[25] 참고 판례: 2009다68620, 2009다22549.[26] '3.1.1. 이미 무효 논란' 참고.[27] 교섭 당시 양국 정부는 징용의 합법 여부 합의를 못했고 따라서 배상청구권도 존재한다.[28] 한일회담 교섭 당시 양국 정부는 징용의 합법 여부 합의를 못했고 따라서 배상청구권도 존재.[29]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 ...중략...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30] 한일기본조약에선 대한민국과 그 국민이 해당하게 된다.[31] (a) Subject to the provisions of paragraph (b) of this Article, the disposition of property of Japan and of its nationals in the areas referred to in Article 2, and their claims, including debts, against the authorities presently administering such areas and the residents (including juridical persons) thereof, and the disposition in Japan of property of such authorities and residents, and of claims, including debts, of such authorities and residents against Japan and its nationals, shall be the subject of special arrangements between Japan and such authorities.[32] 실제로 일반 국민들의 경우에도 상황에 따라 벌금 이외에도 징역, 금고, 사회봉사, 약물치료 등 다양한 법적 책임이 부가된다. 국가간의 문제이므로 1:1로 매칭되는 개념은 아니지만...[33] 역사왜곡에 대해 일본에서는 요시다 세이지의 좌편향 날조 / 좌편향 위협기사로 경계하였다.[34] 2008헌마648[35] 법적 배상이 아닌 위로금 형태인데 이걸 왜 받냐는 주장.[36] 법리적으로 포스코는 국가에게 돈을 받았을 뿐이고 그 지원금의 출처가 어디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진 않은 것. 오히려 국가에 소송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으나 그랬다고 돈을 받으실 수 있었을지는 과연...[37] 2005년 8월 노무현 정부는 사할린 동포 문제, 원폭 피해자 문제, 위안부 피해자 문제 등 세 가지는 한일기본조약으로 해결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38] 2013다61381[39] 취소선이 그어져 있어 장난 같이 보이지만 안타깝게도 사실이다. 실제 당시 일본 정부의 공식적 배상이 아니기에 보상금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여론이 형성되어 있었으나 경제적 문제로 보상금을 수령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일부 있었고(200명이 넘는 당시 생존자 할머니들 중 60여 명이 수령하였다) 이에 대해 보상을 거절한 측의 비난이 있었다.[40] 이게 위에서 언급된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 얘기다. 법적 배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과 '아시아 여성기금'은 동일한 성격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41] 하지만 이런 현실과는 달리 중화민국은 '중국의 관대한 도량'을 일본에게 보여준다고 자국민에게 선전했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보다 더 관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의 도량'을 일본인에게 보여준다고 자국민에게 선전했다.[42] 일반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간의 합의이기에 특별법으로서 효력이 다른 법보다 우선적으로 적용된다.[43]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타결의 경우 명문화된 문서가 존재하지 않는 해당 협약이 법률적 효력을 지닐 수 없음은 한국의 일방적 주장이 아니라 제3자의 해석으로도 동일하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한일기본조약이 무효라는 일각의 주장은 말 그대로 일각의 주장이며 제3자에게 이해와 공감을 구할 수 있는 영역이 절대 아니다.[44] 과거에 체결된 조약이라는 이유로 정권의 연속성을 부정하면 애시당초 일본도 일제 제국주의 시절, 즉 과거에 저지른 과오를 일본국이 된 뒤에 배상을 할 이유 자체가 없다. 연속성이 없다면 애초에 일제와 일본국은 별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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