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08:47:20

선조(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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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4대 국왕
선조 | 宣祖
파일:선조.jpg
선조 추정 어진[1][2][3]
출생 1552년 12월 6일[4]
(음력 명종 7년 11월 11일)
한성부 인달방 덕흥군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5]
즉위 1567년 8월 17일[A] (14세)
(음력 명종 22년 7월 3일)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7]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사망 1608년 3월 16일 (향년 55세)
(음력 선조 41년 2월 1일)
한성부 정릉동 행궁 정전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능묘 숙릉(肅陵) → 목릉(穆陵)[8]
재위기간 조선 제14대 국왕
1567년 8월 17일[A] ~ 1608년 3월 16일
(음력 선조 즉위년 7월 3일 ~ 선조 41년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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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균(鈞) → 연(昖)[10]
부모 친부 덕흥대원군
친모 하동부대부인
양부 명종
양모 인순왕후
형제자매 3남 2녀 중 3남
왕비 정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
후궁
13명 [ 펼치기 · 접기 ]
공빈 김씨, 인빈 김씨, 순빈 김씨, 정빈 민씨, 정빈 홍씨, 온빈 한씨, 귀인 정씨, 숙의 정씨, 숙의 김씨, 숙의 한씨, 폐소원 윤씨, 상궁 김개시, 상궁 박씨
자녀 14남 11녀 (15남 14녀)
종교 유교 (성리학)
봉호 하성군(河城君)[11]
전호 영모전(永慕殿)
묘호 선종(宣宗) → 선조(宣祖)
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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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
(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
계통광헌응도융조이모수유광휴연경
(啓統光憲凝道隆祚貽謀垂裕廣休延慶)
경명신력홍공융업
(景命神曆弘功隆業)
시호 조선: 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
(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 소경(昭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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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photo-media.hanmail.net/20060929163306.254.0.jpg
선조 한글 어필[12]
1. 개요2. 생애
2.1. 하성군 시절2.2. 즉위2.3. 목릉성세(穆陵盛世)2.4. 종계변무기축옥사2.5. 임진왜란 시기2.6. 후계 문제2.7. 대여진 정책(여진 정벌)2.8. 목릉
3. 평가4. 가족관계
4.1. 친가(전주 이씨)4.2. 배우자/자녀
5. 기타6. 대중매체
6.1. 소설6.2. 만화6.3. 게임6.4. 영화6.5. 드라마6.6. 교양ㆍ다큐멘터리
7. 관련 문서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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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제14대 국왕. 묘호선조(宣祖), 시호소경정륜립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는 연(昖).

조선 왕조 최초로 적통 출신이 아닌 국왕이다. 원래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예정이었던 순회세자가 갑자기 이른 나이에 요절하면서 명종의 뒤를 이을 친자식이 없자, 왕실 종친 가운데 후사(後嗣)를 정하도록 하였고, 덕흥군 제삼자(德興君第參子) 즉 어린 하성군이 선택되어 명종과 인순왕후양자로 들어가 명종의 뒤를 잇게 하였다. 초창기에는 숙모이자 법적으로 어머니인 인순왕후수렴청정을 했지만 곧 철렴하고 1년만에 친정을 하게 된다.

조선 역사의 중간에 위치한 임금으로, 왕위 계승도를 보면 선조 시기와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계보도가 나눠지며, 이후 조선 임금들은 모두 선조의 직계 후손들이 된다.[13]

2. 생애

2.1. 하성군 시절

1552년 11월 11일에 한성의 인달방에서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의 3남으로 태어난다. 하동군부대부인은 집현전의 학사로 일하다가 세조 치세에 영의정으로 등극한 정인지의 증손녀이고 덕흥대원군은 중종과 창빈 안씨의 아들로 하성군은 중종의 서손자이다. 선조의 본명은 이균으로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하동군에서 이름을 따와 하성군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하성군이 태어난 잠저, 도정궁은 덕흥대원군이 어린 시절에 중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집인데 터가 안 좋다는 말을 들었는지 공사가 끝나가던 즈음에 우물물이 안 나온다는 핑계를 대면서 집을 바꿔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중종은 우물이 아주 잘 나오는데 별 말을 다한다며 무시하고 집을 마저 지었다. 나쁜 터인 줄 알았더니 미래의 왕이 태어난 것이다.[14]

덕흥대원군은 하성군이 8살이 되기 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하성군은 숙부인 명종의 지시로 중종의 장남이자 서백부인 복성군의 양자로 들어간다. 명종은 사망한 덕흥대원군을 대신하여 조카들에게 많은 정을 주었는데 외아들인 순회세자가 요절한 이유도 있었다. 3형제를 자주 궁궐로 불렀는데 특히 하성군을 총애하였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명종은 하원군, 하릉군, 하성군을 궁궐로 불러서는 익선관을 벗고 조카들에게 써보라고 말한다. 하원군과 하릉군은 명종의 말대로 써보았는데 하성군만 극구 사양하였다. 명종이 하성군에게 임금과 아버지 중에 누가 더 중요하냐고 묻자 하성군은 둘은 다르게 보이지만 본디 충과 효는 하나라고 대답하였다. 감동한 명종은 하성군에게 "이 관은 네 것이니라."고 대답하였다.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의심받기도 하나 일단 이 일화는 광해군일기의 선조 행장#에 기록되어 있다.[15]

1565년 9월 15일에 명종이 혼수상태에 빠지자 신하들은 후계자 지명을 서둘렀다. 의식이 없어서 대화가 불가한 명종 앞에 신하들이 모여들었고 영의정인 이준경이 말을 꺼내는데 명종은 의식이 없어서 당연히 대답이 없었다. 2일이 지난 17일에도 명종이 일어나지 않자 신하들은 인순왕후와 후계자 문제를 논의한다. 인순왕후는 평소에 명종이 총애하던 하성군에게 간호를 맡긴다. 조선에서 왕의 간호는 세자의 업무이기에 하성군의 간호는 하성군을 명종의 후계자로 낙점한다는 상징적인 행동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명종은 의식을 회복하고 다시 일어난다. 그래서 하성군을 명종의 후계자로 지명하는 문제는 수면 밑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명종도 자식이 없는 상황에서 하성군을 후계자로 삼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왕인 자신을 두고 하성군을 후계자로 논한 신하들을 잡지 않았다. 선조 시절에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내세우다가 목숨이 위태로울 뻔한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신하가 왕의 후계자를 택하는 것은 '택군'이라 하여 역모에 준하는 처벌이 내려지는 중범죄이다. 이준경의 건의를 책망하지 않고 넘어간 점이나 양자를 들이라는 상소를 올린 선비인 김택에게 벼슬을 준 점을 감안하면 명종은 하성군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는 걸 암묵적으로 동의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히지만 명종이 진심으로 하성군을 후계자로 인정하였는데 공개적으로 지명하지 않은 것인지 하성군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만 아직 자신의 나이가 많지 않으니 조금만 기다려서 중전에게 아들을 얻으면 세자로 지명하고 실패하면 하성군에게 물려주자는 차선책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선조실록과 그 행장에는 1565년에 병이 깊어진 명종이 하성군을 후계자로 지명하였다고 기록되었으나 이렇게 중요한 내용이 명종실록에 없다는 점이 의심을 불러온 것이다. 후대의 추정으로는 하성군을 공식적인 후계자로 확정짓는 행위가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기 때문에 암묵적으로만 동의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명종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사망한 사실을 후손들은 알지만 당시에는 모르는 일이다. 하성군을 후계자로 선포하고 명종이 아들을 낳으면 후계 문제는 심각하게 복잡해지는데 당시 명종은 30대이므로 자식을 기대할 수 있는 나이였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의 30대는 현대의 중년에 해당하는 나이지만 후계자를 얻어야 하는 왕임을 감안하면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2년 후인 1567년 6월 28일에 명종이 다시 위독해지자 인순왕후는 하성군을 후계자로 내정한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인순왕후는 을축년의 일에 따라 덕흥대원군의 삼남인 하성군으로 결정한다고 선언하였는데 을축년의 일은 하성군이 명종을 간호한 일을 의미한다. 인순왕후도 당시의 일을 계기로 하성군이 후계자로 인정받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준경을 비롯한 신하들도 인순왕후의 선언을 수용하였던 점을 감안하면 신하들 사이에서도 하성군이 적합하다는 생각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하성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은 이미 고인이고 어머니인 하동부대부인도 하성군이 즉위하기 1달 전에 사망한다. 게다가 하동부대부인의 친정 역시 권세가 큰 가문이 아니고 아직 하성군도 혼인하지 않은 몸이므로 처가의 문제도 없었다. 그래서 척신들이 발호할 여지도 없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반감도 적었다. 그리고 하성군은 복성군의 형식적인 양자이다. 중종의 적자인 인종과 명종이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 중종의 서장자인 복성군의 양자가 서열상으로도 가장 높다. 복성군의 처가가 문제가 될 수도 있었지만 복성군의 아내도 이미 고인이어서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마땅한 선택지도 없었다. 중종의 손자 중에서 적자는 덕흥대원군이 낳은 3형제와 덕양군의 아들인 풍산군이 전부이다. 가장 많은 아들을 둔 해안군은 적자가 없고 서자만 두는 바람에 덕흥대원군은 하원군만 남겨두고 하릉군과 하성군을 이복형들의 양자로 보냈다. 이걸로도 모자라 금원군 슬하의 왕자인 영양군과 봉성군은 3촌 조카가 아닌 5촌 종질들 중에서 양자를 들였다. 하원군은 덕흥대원군의 장남이고 풍산군은 덕양군의 장남이므로 양자로 데려올 수 없으므로 남은 후보군은 하릉군과 하성군이고 심지어 하릉군은 이 당시에 작위조차 하릉군이 아니었다. # 하성군을 중종의 막내아들인 덕흥대원군의 막내아들로만 인식하면 하성군이 엄청난 방법을 통해서 범접하지 못하는 자리에 올라온 것처럼 보이기 쉽지만 실제로는 경쟁자가 적었고 조선의 종법을 감안하면 하성군에게 더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는 정식으로 후계자 수업을 받지 못한 상태로 즉위하기에 차라리 어린 후계자를 옹립해서 성년이 되기 전까지 군주의 역량을 기르는 수업을 진행할 수 있으니 선호되는 측면도 있었다. 세자로 책봉된 막내아들인 의안대군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고종도 하성군과 다르지 않은 상황으로 추정된다.

명종이 승하하자 하성군이 왕으로 즉위하여 선조가 된다. 즉위가 끝나고 선조의 즉위에 공이 있다고 주장하는 투서가 밀려들었는데 이준경이 이미 대행대왕[16]께서 정한 일인데 무슨 공이냐고 반문하면서 투서를 모두 모아서 불태웠다. 동시에 경복궁에서 즉위한 마지막 왕이 된다. 선조의 치세에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화재로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경복궁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270년을 방치되었다가 고종의 치세에 수렴청정의 방식으로 섭정을 하던 흥선대원군이 각계의 반대와 원성에도 불구하고 복원한다. 정작 고종 본인이 스스로를 황제로 격상시켰음을 선포한 곳은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이었고 고종의 아들인 순종도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에서 즉위하였다.

선조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서자 출신의 방계 인사로 적자가 낳은 대군이 아니다. 그동안 장남은 아니어도 왕비나 세자빈이 낳은 적자가 후계자로 올랐다. 성종은 삼촌인 예종보다 먼저 후계자로 지명된 의경세자의 아들이라 자신의 자리에 뒤늦게 오른 셈이지만 형식적으로는 삼촌인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에는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을 무시할 수 없었으나 3살이라 너무 어려서 왕위는 성종에게 넘어간다. 하지만 적통 문제를 따지면 성종에게 위험이 될 소지가 있어서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고 인수대비안순왕후보다 높이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계유정난중종반정으로 즉위한 세조와 중종도 과거 대군이었다. 적장자 출신인 왕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이 전부고 그마저도 연산군, 현종, 숙종을 제외하면 재위한 기간이 10년 미만이다. 물론 선조도 서자는 아니고 엄연히 덕흥대원군의 적자이니 서자 출신인 왕은 영조가 최초이다. 잠시 왕비에 올랐다가 후궁으로 격하된 희빈 장씨를 숙종의 첩으로 간주한다면 경종이 최초가 된다.

2.2. 즉위

처음부터 선조는 왕이 되기에는 정말 어려운 위치였다. 선조의 부친인 덕흥군중종의 9남, 그것도 서자이며 선조 자신은 3남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조선에는 방계승통의 사례가 조선 역사상 없었다. 성종의 경우 선대 왕 예종의 조카이기는 하지만 성종은 예종의 형이자 요절한 의경세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방계승통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자리에 뒤늦게 올랐을 뿐이다.[17]

즉위 후 나이가 어려서 양모이자 법적으로 모후인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인순왕후는 수렴을 단 1년 만에 그쳤다. 이를 보아 총명하다 할 만 했다. 즉위 초기에는 낭비를 줄이고 쇠락한 훈구파 대신 사림파를 끌어들여 부족한 정통성을 잡는 한편 명종 대에 외척의 전횡이 심했던 내정을 장악하고 조광조의 관례가 된 그간의 폐정을 회복시키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기묘사화조광조가 밀려난 후 무시되었던 방납의 폐단을 비롯한 각종 사회모순 해결을 위해 민생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사림 세력들을 상호 견제시켜 정계를 장악했다.

즉위 2년 만인 1569년(선조 2년) 송영종의 예를 들어 아버지 덕흥군을 대원군(大院君)으로, 어머니 하동군부인은 하동부대부인으로 추존했다. 그러나 바로 그 송 영종의 예 때문에 아버지를 왕으로 승격시키지는 못했다. 선조는 자신의 덕흥대원군의 제사를 받드는 자신의 맏형 하원군과 그 후손들을 정1품으로 세습하려 했지만 신하들이 그런 예가 없다고 반대하여 무산되었다.[18] 조선 예법상 덕흥군은 이젠 선조에게 종친 숙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명종의 후사로 왕위를 이었으므로 법적이나 종법상 아버지는 명종이었기 때문에 친부모인 덕흥군이나 하동부대부인의 제사상에 한낱 절을 할 수도 없었다.[19] 실록에서 즉위 40년차에 다시 생부에 대한 추숭 떡밥이 여럿 나왔지만 별 논의 없이 무산되기도 한다.

다만 총명하였다고 할지라도 즉위 당시 16세라는 어린 나이로, 그것도 왕위 계승자로서 제대로 된 후계자 수업도 없이 즉위하여 아직 제왕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기에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하기 어려운 면은 분명 있었다. 오랜 기간 왕조가 이어지면서 적지 않은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을 스스로도 인식하였으나 제대로 이를 고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명종후사(後嗣)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척신 집안의 일원인 대비 인순왕후 심씨의 지명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에 적어도 인순왕후가 살아있는 1575년 전까지는 적극적으로 나설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2.3. 목릉성세(穆陵盛世)

즉위 직후 율곡 이이를 통해 즉위를 반대하던 부패한 척신 심통원[20]을 파직시키는 등 단호한 면모는 보였지만, 사림붕당이 크게 대두되면서 파당(동인VS서인) 갈등 문제도 새롭게 수면 위로 부각되었다.

무엇보다 사대부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명종 대에 역적으로 몰려 숙청된 윤임을 사면 복권시켰다. 그 이후 윤임의 5남 윤흥신이 무과에 급제해 다대포 첨사가 되었고, 그 윤흥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과 싸우다 부하들과 함께 부산 다대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이 시기의 치세는 선조의 능인 목릉을 따서 목릉성세(穆陵盛世)[21]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사실 목릉성세(穆陵盛世)는 한문학의 융성을 뜻하는 용어로 선조 이후 사림파가 대대적으로 흥기했다는 사실에 바탕해서 나온 표현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당대의 정치백성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반영한 것은 아니다. 이전 시기에 비해서 민생이 확실히 나아졌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22] 무엇보다도 그것에 선조가 기여한 부분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된다. 명종 대에 사단칠정논변이 명종의 업적은 아니지 않은가? 민간주도라는 성격에서 정조 대에 문예부흥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 여기에 있다.

2.4. 종계변무기축옥사

1588년 명나라 측에서 태조 이성계를 간신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기록한 조선 왕실 족보인 선원록을 마침내 제대로 고쳤다.[23] 사대를 했던 조선 왕실과 성리학 유학계의 너무나 오랜 숙원으로, 이른바 '종계변무'[24]라고 한다.

정치 분야에서는 선조의 치세 때 본격적인 당쟁이 시작되어 격렬한 정치투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처음엔 다소 덜 다듬어진 면이 있던 선조도 왕으로서 감각을 기른 중기 이후 상당한 정치적 수완으로 신하들을 편가르고 이용했다. 이러한 선조의 정치적 수완이 악용된 것을 볼 수 있는 사건이라면 정철과 합작하여 몰아간 정여립의 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의 여파로 선조는 정언신, 김우옹, 이발, 백유양, 정개청, 최영경을 왕의 권력을 위협할 권신이나 국정을 농단하여 나라를 망칠 간신으로 생각하여 죽이거나 쫓아냈다. 참고로 사화라는 딱지가 붙진 않았으나 피해자들은 대부분 동인계 유림이었고 피해 규모는 4대 사화를 합친 것보다 크며 친국을 자주 실시하며 옥사를 즐기는 등의 가학적이고 잔악한 모습을 보이며 사실상 선조가 옥사를 주도한 것이라는 견해도 많다.

결과적으로 선조에게 '복종'하는 신하들은 많았으나 '충성'하는 신하들은 드물었으며, 이 점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에 대한 하극상이 일어난 점을 볼 때 선조가 정권 장악에 능했음은 사실이나 그 방식이 결코 건강한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선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즉위 후 11년에 걸처 '원상제'와 비슷한 형태로 신하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과정에서 취약해진 왕권을 강화하려 증폭시킨 공안 사건이었고 실제 선조의 입김이 강해지는 결과로 이어졌지만 이러한 방식은 생산적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올바른 정치 기술이 아닌 정권 그 자체의 획득이 목적인 정치 술수 및 공작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가령 기축옥사의 주요 연루 인물이자 호남 사림을 이끌었던 정개청은 본인이 “권신이나 간신이 아니며 차라리 조정에서 들어와 관리를 생활한 다음 감옥에 가두는 것이 낫다”고 결백을 주장했으나 모진 고문으로 끝내 사망했다. 그의 자산서원은 추종자들에 의해 꾸준히 재건되었으나 효종숙종 때 반대파 서인 측에 의해 지속적으로 훼철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우득록>에 따르면 "남쪽 선비 중 곤재를 추종했다 하여 옥에 가둔 자가 50여 명, 귀양 보낸 자가 20여 명, 금고된 자가 400여 명이었다" 며 후폭풍이 굉장했음을 밝히는 내용도 있다. 자산서원의 훼철은 영조 때에도 있었다. 이들은 수대가 거듭되고도 서인의 경계 대상으로 찍혀 누명이 벗겨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옥사의 핵심 연루 인물들은 후대에도 괴로움을 겪었다.[25] 이 옥사로 인해 사망한 사람만 수백명 가량으로 가히 조선 역사상 최대규모의 옥사라 할만했으며 정확히 백명이 죽었던 그 악명 높은 갑자사화의 몇 배에 달하는 규모였다.[26]

옥사를 주도해 정적들을 제거한 정철 등 22명은 평난공신에 올라 권세를 떨쳤지만 <송강연보>에 따르면 정철은 오래지 않아 세자 책봉(건저 문제)과 관련해 류성룡이산해 등과 함께 광해군을 건저하려다가 정철만 제대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당한다. 선조는 정철에게 미운 털을 박기 무섭게 입장을 급선회하여 자신이 조정에서 관리로 추천받지 않으면서 권간이라는 이유로 옥사 당시에 희생된 최영경에 대해 “음흉한 성혼과 악독한 정철이 나의 어진 신하를 죽였다”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정국도 반전되어 선조 후반기에는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집권당에 올라섰으며 이들은 서인의 처분 수위를 다루는 과정에서 남북으로 분당된다.

2.5. 임진왜란 시기

많은 유림들이 억울히 피를 흘린 기축옥사로 인해 더 서인동인 사이에서 치열해진 당쟁이 3년째 진행되던 1592년에 조선 역사상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던 그 임진왜란이 벌어졌다.

전쟁 발발 전 신립에 의해 "왜군이 수전에 강하다"며 "육상전에 주력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27] 축성을 비롯한 실제 전쟁 대비도 이에 역점을 두어 이루어졌다. 하지만 당초 조정의 예상을 벗어난 너무나 많은 왜군의 대규모 외침에 전면 패주 상황이 계속되었다. 왜군의 북진 소식에도 선조는 이를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고 신임하는 신립에게 육군 주력을 넘겨 왜군을 잘 격퇴해 쫓아내주리라 기대하고,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본래 신립이 끌고 갈 수 없는 경군 8천여까지 지휘권을 주어서 전장으로 보냈지만 신립의 무모한 지휘[28]로 인해 참패. 수도 한양을 사수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선조는 즉시 몽진을 결정하고, 평안도 영변부에서 광해군에게 임시로 세자로 책봉하고 왕권의 일부 권한을 일부 위임하여 조정의 절반인 분조(分朝)책임을 회피하고 떠넘기듯 넘겨줬다.

이때 실록은 선조에 대해 아주 시니컬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회의 중에 혼자 사라져서는 점을 치고 있었던 정황이라든가, 한양에서 도망간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종친들에게 "나는 여기서 죽을 것"이라고 말하고는 # 몇 시간 후에 도주를 한다든가, # 자기만 강을 건너고는 배를 가라앉혀 자기를 따라오며 고생하던 신하들을 버린다든가, # 하는 내용들이 마치 슬랩스틱을 곁들인 블랙코미디처럼 묘사된다.

그리고 선조는 부랴부랴 개성부평양부를 거쳐 영변을 거쳐 의주목으로 급하게 몽진길에 오른다. 파천 자체는 고려-거란 전쟁이나 고려-몽골 전쟁 때 고려 왕실처럼 전쟁 수행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합리적인 전쟁 수행을 위해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택하며 결국 여요전쟁을 승리로 이끈 성군 현종과 달리 선조의 파천은 오늘날까지 두고두고 욕을 대차게 먹고 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조선의 국토와 만백성을 버리고 자기 안위만 챙기고자 명나라로 튀려고 했다는 것 때문이다. 한 나라의 국왕이 나라와 백성을 버린다면 관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질 것이고 스스로 일어난 의병도 와해될 공산이 크다. 물론 왕이 잡히면 패전은 기정사일이지만 문제는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도망가고자 했다는 것.

한양을 떠난 선조는 급기야 조선을 버리고 요동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웠는데 파천 직후인 개성에서부터 윤두수가 갑자기 왕은 전쟁이 터지면 군대를 모아 반격을 해야하며 왕이 요동으로 떠나지 않으면 신하들이 따를것이라고 선조를 상대로 직접적으로 조선을 지킬것을 주장하는 기록을 보아 이미 한양을 떠난 직후나 혹은 한양을 떠나기 전부터 조선을 버리고 명나라로 도망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닌것으로 추정된다. 평양을 지난 후에 영변에서는 선조가 대놓고 요동으로 떠나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다가 명에 망명한다고 요청하는 모습을 보인다.

명은 조선군을 지휘하는 선조가 타국으로 도망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과 너무나 빠른 선조의 도망 속도 때문에 혹시 조선일본과 내통해서 명을 치는 게 아닌가 하는 점입가경의 의심을[29] 하게 되고, 이에 수행원을 100명으로 제한하고[30] 압록강의 배를 요동 쪽으로 철수시켜서 거부 의사를 완강히 표했다. 거기에다 신하들의 눈물 머금은 반대[31]에 결국 의주목까지 피난한 선조의 명나라 망명은 일단락되듯 무산되었다. 특히 영변대도호부에서 왕실과 종묘사직과 신주에 대한 모든 권한을 세자였던 아들 광해군에게 떠넘기고 본인은 명나라로 도주하려고 하였기에, '종묘사직과 왕실을 지키기 위해 도주하였다'는 명분도 사라지면서, 사실상 한 나라의 왕이자 어버이가 자신의 안전만을 지키기 위하여 백성과 나라, 자식들마저 일신에 버린 것이라는 비판을 크게 받게 되었다.[32] 특히, 그냥 내준 평양성의 함락은 두고두고 왜군에게 전략적 거점을 내어준 실책이 되었고, 명군을 동원하고도 수개월 이상을 소비해야 했다.

백성들이 관청을 습격하고 궁성의 창고가 약탈당했다는 실록 기사가 존재하고. 서애 류성룡의 문헌인 징비록에 따르면 '남대문 안 창고'가 약탈, 방화당했다고 한다. 이 와중에도 왕자인 임해군순화군은 왕족으로서 체면과 자존심을 지키기는커녕 각지에서 온갖 횡포와 민폐만 끼치고 다녔다. 결국 함경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그들을 잡어들어다가 바쳤을 정도.[33] 이쯤 되면 당시 왕실의 평판이 밑바닥까지 실추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선조 자신도 당연히 그 후폭풍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군사력을 가진 군벌이 지방 정치세력과 결합, 반란군을 일으켜 조선을 멸망시키는 것을 내심 우려했다.[34] 임란 말기에 우려한 대로 1596년엔 종실 출신이 벌인 이몽학의 난이 터졌을 때 굶주림으로 지치고 불만이 많던 백성들이 순식간에 규합해 수천 명으로 세를 불리기까지 하였다. 물론 난민이 속출하고 민심이 불안한 전시라서 가능했던 거고, 흩어지는 속도는 더 빨랐지만 선조를 불안하게 만들기엔 충분했고, 의심병이 매우 심해졌다. 이는 곧 이순신의 각종 고문백의종군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전쟁이 한참인 시기임에도 이순신을 가차없이 숙청한 점이다. 숙청으로 유명한 한고제와 이오시프 스탈린도 적어도 강력한 적을 앞두고 전쟁을 하던 시기에는 숙청하지 않았고 한신이나 게오르기 주코프처럼 마음에 들지 않아도 유능한 인재들은 더 중용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의 후임으로 선발한 원균의 무능력을 파악하지 못한 점은 선조의 큰 실책이다. 이순신의 후임으로 지명한 원균의 형편없는 지휘로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대패하고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가 왜군의 손아귀에 들어갈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한다. 이 부분은 선조도 할 말이 없었는지 이순신에게 보낸 교서에서 "나도 사람인지라 실수하였고 뭐라고 할 말이 없다."고 인정할 정도. 사실 이건 선조만의 잘못은 아닌데 원균이 자기합리화에 아주 능숙한 사람이라 선조는 물론이고 많은 신하들도 원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다가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칠천량 해전에서 패배한 원흉이 선조이다. 막바지에야 상황을 깨닫고 필사적으로 출진하지 않으려 버티던 원균에게 "안 나가면 사사로이 자신도 절대 용서 못한다"고 죽일 듯한 협박까지 했기 때문이다.[35] 그러나 사건이 터지고 나서는 하늘이 한 일이라고 둘러댔다. 이에 대한 책임 회피는 전후 논공행상에 이어져 조선 수군을 녹여버린 일본 국가유공자 원균 따위를 억지로 선무일등공신으로 추증시켰으며 이것이 1980년대 원균 옹호론(역사왜곡)의 시발점이 된다. 원균정론으로 원균옹호론을 처음 부각시켰을 때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선조 옹호였으며 원균을 일등공신으로 추증할 때 "이순신에게 도움을 청한 공이 있다" 라고 했으며 이것은 "도움을 청한 것도 공"→"나는 명나라에 도움을 청했음"→"나도 공이 있다!" 이러한 식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는 일부 주장도 있다.

2.6. 후계 문제

임진왜란 발발 후 평안북도 의주까지 몽진하는 와중에 광해군영변부에서 임시로 세자로 책봉하였고 그에게 분조(分朝)를 맡겨 황폐해진 민심을 달래고 만약을 대비하도록 했다. 사실 장남 임해군이 차남 광해군보다 왕위 계승에서 우선 순위이긴 하지만, 임해군이 취미삼아 백성들을 살해할 정도로 워낙 싸이코패스적 기질의 광패한 망나니인지라 사회적 인식이 나빴고 그로 인해 세자로 책봉되지 못했다. 그런데 세자에게 분조를 맡겨놓고서도 항전 활동 중인 그 세자 때문에 자신이 왕 자리에서 밀려날까 불안감을 가진다. 그래서 아들 광해군을 왕위를 위협하는 정적으로 보았고 임진왜란 중에도 잦은 양위 소동을 벌였으나 당연히 생전 양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잦은 양위 소동은 세자의 정치적인 위상을 떨어뜨리고자 하는 왕권강화 쇼로 보는 입장이 많다.
사신은 논한다. 상(上)이 200년 조종(祖宗)의 기업(基業)을 당저(當宁)452)[36] 에 이르러서 남김없이 다 멸망시켜 놓고 겸퇴(謙退)하면서 다시는 백성의 윗자리에 군림(軍臨)하지 않고자 하여 하루아침에 병을 이유로 총명(聰明)하고 인효(仁孝)한 후사(後嗣)에게 대위(大位)를 물려주려고 하니, 그 심정은 진실로 서글프나 그 뜻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진실로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겠는가. 대신(大臣)으로서는 눈물을 흘리며 봉행(奉行)하더라도 잘못됨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백관(百官)을 인솔하고 끈질기게 설득하고 극력 간쟁(間爭)하여 반드시 승락(承諾)을 받고서야 그만두려 하는가. 왜적이 물러가기 전에 그 일을 시행하려 하면 우선 왜적이 물러가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간쟁하고, 왜적이 물러간 다음에 그 일을 시행하려 하면 우선 환도(還都)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간쟁하고, 환도한 다음에 그 일을 하려 하면 중국의 조사(詔使)가 공관(公館)에 있으므로 할 수가 없다고 하고, 조사가 돌아간 다음에 그 일을 하려 하면 세자(儲宮)가 어려서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세월을 끌며 말을 바꿔 임금과 신하 사이에 마치 어린아이가 서로 희롱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사리(事理)인가. 당시에 세자의 나이가 이미 약관(弱冠)이었고 학문도 고명(高明)하였으며 덕망도 이미 성숙하였으니 대위(大位)를 이어받는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난을 평정하고 화를 종식시켰을 것인데, 계속 어린 세자(沖嗣)라고 하였다. 옛부터 약관의 어린 세자가 언제 있었던가. 끊임없이 간쟁하여 상의 훌륭했던 생각을 중지시켰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선조실록 42권, 선조 26년 9월 7일 무오 5번째기사[37]
잦은 양위 소동에서 드러난 변덕과 견제, 이후 선조와 계비 인목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 영창대군의 탄생까지 겹치면서 세자 광해군으로선 아버지와의 사이가 한층 더 껄끄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광해군의 세자 자리가 위협받진 않았다. 조정 당파 중에서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건 소북 그중에서도 류영경의 탁소북에 국한된다. 나머지 대북, 청소북, 서인, 남인은 모두 광해군을 지지했다. 전란 기간 중 신하들에게 전위 권유를 받았을 정도로 선조의 권위가 취약했던지라 전란을 통해 충분히 능력이 검증된 세자를 교체할 힘이 없었고 나이(20살 이상)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할 명분도 없었다.[38]선조 승하 당시 영창대군 나이는 겨우 만 2살이다. 게다가 광해군이 서자라는 것도 당시 종법 해석으론 별 문제가 안 되었다. 왜냐하면 이미 16세기에 이미 사대부 사이에서도 적자가 태어나 양자를 파양하고자 하는 소송은 기각하는 판례가 형성되었고[39] 왕가의 법도대로 광해군이 서자이건 차자이건 정식 세자로 옹립된 이상 군신명분이 세워져서 영창대군은 태어난 순간 신하가 되기 때문에 한번 세워진 명분을 뒤집을 수 없다는 게 그 당시 성리학 종법 제도로 왕가는 물론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널리 받아졌기 때문이다. 설사 아무리 정통성이 있다고 한들 군국 대사를 처리해야 할 군주2살짜리를 옹립하는것은 선조나 인목왕후는 물론 류영경의 소북에서도 불가능한 걸 알고 있었다.[40]

결국 이런 양위 소동에 제대로 열받은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은 선조에게 양위 소동을 두고 류영경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양위 소동의 주범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보면 사실상 선조를 의도적으로 돌려까는 상소다. 이 상소를 읽은 선조는 빡쳐서 정인홍을 귀양보낸다. 결국 선조는 양위 소동은 권력 유지를 위해서 세자의 지위까지 흔들어가면서 벌인 쇼라는 것을 선조가 직접 인증해버렸다.

음모론 중에는 위험을 느낀 광해군이 아버지를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계축일기 등에 등장한 이른바 "찹쌀밥 독살설". 간신히 몸을 회복하던 선조가 찹쌀밥을 먹고 그날 바로 승하했기 때문이다. 이런 음모론 때문에 당시 어의자 국왕 주치의였던 허준까지도 졸지에 국왕 살해범으로 왜곡되기도 했지만 이런 모함에 낚이지는 말자. 당대에 이미 헛소리 취급받고 있었다. 당장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반정 세력도 이 주장은 믿지 않았다. 그야말로 "찹살 떡밥거리" 정도이다.

선조가 때때로 영창대군세자로 바꿔볼까 잠깐 방황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왕조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왕과 왕세자의 갈등 구도의 연장선이었고 나이 차이 때문에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실제로 선조는 죽기 며칠 전에 장성한 광해군을 정식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교지까지 완성해 영의정 류영경에게 건넸으나, 류영경은 이를 자신의 집에 몰래 빼돌린 채 선조가 입장을 번복해주길 빌며 시간을 끌다가 끝내 적발당했다. 결국 사사된 이후 대역죄로 부관참시에 처해진다.

2.7. 대여진 정책(여진 정벌)

"선조 대왕께오선 북로(北虜, 여진족)에 대처함은 명석하고 뛰어났으나, 남왜(南倭, 일본)를 대처함은 명석하지 못했다."
선조의 대표적 치적 중 가장 많이 간과되고 있는 치적이다.

선조대는 여진족 내부의 정치적·사회적 변동으로 인해 대규모 침입이 잦아졌고, 이에 대응하여 여진 정벌도 마지막으로 빈번히 이루어진 시대였다. 특히 조선의 지배로부터 이탈하여 반란을 일으킨 번호에 대한 응징이 주된 목표가 되었다. 1583년(선조 16년)에는 함경북도 경원부(慶源府)의 니탕개(尼湯介) 등이 2~3만 명이 넘는 대군을 일으켜 경원부와 아산보(阿山堡)를 함락시키는 니탕개의 난이 일어나 6진이 위협을 받게 되자, 조정에서는 현지에 증원군을 파견하여 이를 격퇴시켰다. 그러나 이는 정벌이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는 방어전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약 10년 전에 발생한 이 니탕개의 난신립을 보내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방어에 성공한 선조는 북병사 이제신과 장수들을 보내 금득탄 등 여진족 소굴 700여 개를 무자비하게 초토화시켰다.

1587년(선조 20)에는 녹둔도(鹿屯島)에 설치한 둔전을 여진족이 습격하여 국경을 지키는 조선의 국경수비병을 죽이고 백성들을 포로로 납치해 끌고 가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렇게 여진족들이 기습적으로 녹둔도를 습격하여 조선인 10여 명을 살해하자, 선조는 2천 5백여 명의 경장사와 토병 군대 등을 보내 여진족 수급(머리) 380여 급을 베고, 여진족 산채 200여 채를 불태웠던 적이 있었다.

녹둔도 침공에 대한 당시 선조의 대응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당시 조선은 이에 대한 응징·보복을 위해 북방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은 11월에 우후(虞侯) 김우추(金遇秋)에게 400여 기를 주어 강을 건너 추도(楸島)의 여진족을 치게 하여, 3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으며, 이어서 이듬해인 1588년(선조 21)에는 본격적으로 녹둔도를 공격한 여진족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져 1월 14일에 함경도의 토병(土兵) 및 경장사(京將士) 2,500여 명이 두만강을 건너 시전부락(時錢部落)을 향해 진격, 15일에 장막 200여 채를 태우고 380명의 목을 베는 등의 큰 전과를 거두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다면 바로 왜란 뒤의 여진족 정벌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혼란스러운 조선의 상황을 틈타 노략질을 감행했던 여진족[41] 임진왜란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그 세가 강성해지기 시작하더니 임란 후의 혼란한 조선의 국내정세와 맞물려 본격적으로 국경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그 탓에 여진 정벌은 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도 곧바로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당시 일부 여진족들은 조선이 약체화된 틈을 타서 함경도의 변경을 수차례 공격하고 약탈하였는데, 특히 두만강 건너의 여진족 추장 이라대(伊羅大)·역수(易水) 등은 먼 곳에 사는 홀라온과 연결하여 조선의 변경을 활발히 침공했다. 이에 대해 함경북도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 정현룡(鄭見龍)은 군사 1,325명, 항왜(降倭) 25명을 동원하여 역수의 부락을 공격, 266명의 수급을 베었고, 투정내(投丁乃) 등이 추장으로 있는 두만강변의 부락도 공격하여 60명의 수급을 베었다.

함경도 지역에 이렇게 빈번한 여진 정벌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으로 인해 변경의 수비가 약화된 상황에서는 번호의 이탈 및 여진족의 침입을 완전히 근절하기 어려웠다. 특히나 그 중에서도 무산(茂山) 부근에 있던 노토(老土)의 부락은 1598년(선조 31년)경부터 조선의 변경을 위협하기 시작하였고, 분노한 선조와 조정은 이들을 토벌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그 즈음에 1599년(선조 32년) 함경감사 윤승훈(尹承勳)이 노토 정벌의 의견을 15개항으로 정리해 올리자, 선조는 이에 대해 크게 칭찬하며 전폭적인 지지를 천명하게 된다. 사헌부가 2차례에 걸쳐 반대 의견을 개진했으나, 선조는 듣지 않고 자신을 지지하는 신하들과 함께 노토 토벌에 대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1600년(선조 33년) 4월 14일에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42]이 이끄는 5천 명의 기병을 중심으로 한 조선 정벌군이 출병하여 명천현감(明川縣監) 이괄(李适)·회령부사(會寧府使) 조경(趙儆)·길주목사(吉州牧使) 양집(梁諿)이 각각 부대를 이끌고 좌위, 중위, 우위의 3로로 나누어 진격했다. 여기서 조선군은 가옥 1천여 채를 불태우고 적 110명을 참수했다. 이번 원정에서 조선군 전사자는 7명에 불과했다. 여진족이 철저하게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가옥을 모두 불태우고, 잘 타지 않은 가옥들은 도끼로 때려부쉈다. 산위(야산)로 도망간 여진족은 위에서 바라만 보고 울부짖었고, 여진족이 파묻은 곡식까지 쌍그리 다 파내어 불태웠으며, 밭에 심은 곡식은 모조리 짓밟고 곳곳에 방화를 저질렀다. 이수일은 후에 올린 장계에서 '매우 장쾌(壯快)했다'라고 평했다. 이를 통해 아주 오랜만에 대규모 여진족 집단에 큰 타격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함경도 지역의 여진족들이 다시금 조선에 투항하고 복속하도록 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진족의 정세는 조선이 정벌로써 통제하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누르하치에 의한 여진족 통일 전쟁이 격화되면서, 그 여파가 조선에 미치게 된 것이다. 1600년대 초반 누르하치 및 그와 적대하는 홀라온 양쪽은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의 번호를 끌고 가고자 했는데, 이 중 홀라온은 더 나아가 1603년(선조 36년) 조선의 변경을 직접 군사적으로 습격하였고, 1605년(선조 38년) 3월에는 동관진(潼關鎭)을 함락시키기까지 했다. 동관진을 약탈한 여진 홀라온의 본대는 본거지로 퇴각하였으나, 300여 기는 건가퇴(件加退)에 남아 있었고, 원래 있던 1천여 명의 여진족과 함께 조선의 북변에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이들을 징벌하기 위해 북병사 김종득(金宗得)은 현지의 병력을 징집하여 4월에 1차로 이항(伊項)과 우허(牛虛) 부락을 공격하여 80여 명을 죽였고, 5월에 2차로 함경도의 포수·사수(射手) 3천 명과 번호 탁두(卓斗)가 거느린 여진족 기병 3백 기를 이끌고 건가퇴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였다. 그러나 여진족 기병과의 접전에서 위기에 몰려, 우후 성우길(成佑吉)의 활약으로 적 50여 명을 죽이고 간신히 후퇴에 성공하였으나 정군(正軍)으로서 전사한 자만 213명이라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함경감사 서성(徐渻)이 파직되고 김종득은 유배되는 등 처벌을 받았다.

이후 1607년(선조 40년) 누르하치가 홀라온 세력을 격퇴한 이후 두만강 유역에 거주하는 상당수의 여진족을 자신의 본거지로 이주시킴으로써, 조선은 울타리가 되어주던 번호를 상실한 채로 강대해진 후금누르하치 세력을 상대하게 되었다. 물론 선조는 이후에도 대규모의 병력을 다시 일으키려 하였으나 그 뒤로는 움직임이 없었고, 그렇게 조선의 울타리가 되어주던 복속 여진족인 번호(藩胡)들은 누르하치에게 완전히 흡수되어 이후 여진족을 정벌하는 것이 아닌 방어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2.8. 목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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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목릉 선조릉.jpg
목릉 전경
1608년, 재위 42년째 되는 해에 선조는 55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끝마친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에 있는 목릉(穆陵). 원래는 의인왕후 박씨의 능역이었다가 선조도 이 곳으로 이장[43]된 것이다.

의인왕후의 능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의인왕후의 장지를 찾던 도중 지관이 현대의 경기도 용인에 있는 명당을 꼽았다. 하지만 그 곳에는 사대부들이 특히 존경하던 인물인 포은 정몽주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선조도 차마 이 곳에 의인왕후의 무덤을 쓰지 못하고 동구릉(東九陵) 경내에 모셨다는 야사이다. 계비 인목왕후 김씨도 죽어 여기 묻힘으로써 동역이강릉의 형태로 묻혀 있는데, 1986년부터 비공개 능역이었지만 2006년 비공개가 완전 해제되어 관람 가능하게 되었다. 다른 동구릉의 능들은 능침 앞까지 올라가 볼 수 없고 왕릉 언덕 밑의 정자각 쪽에서 구경해야 하지만 선조의 목릉은 동구릉의 능들 중에서 유일하게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 있는 능이였다. 2015년에 변경되어서 선조와 의인왕후의 능은 능침 앞까지 못 올라가게 막아 놓았고 유일하게 올라갈 수 있는 능은 인목왕후의 능 뿐이다.

목릉 능역 안으로 들어가면 능이 3개가 있는데 선조의 능은 능역 홍살문 기준으로 맨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선조 능 뒤편에 의인왕후의 능이 있고 맨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위 사진에서는 왼쪽에 있는게 선조의 능이고 오른쪽에 있는 게 의인왕후의 능이다. 그런데 목릉의 석물들은 조선 왕릉 중 최악의 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하는데 목릉이 조성된 인조병자호란으로 경제가 피폐해진 데다가 우수한 석공들을 구할 수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다른 왕릉들과 비교해보면 목릉의 석물들은 크기만 컸지 다른 능들의 석물보다 균형이나 조형미 같은게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목릉의 석물에서는 총탄 자국도 볼 수 있으며 이는 한국전쟁 때의 흔적이라고 하는데 살아서도 전란을 겪었는데 죽어서도 끝내 전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44]

카카오맵 리뷰 별점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45]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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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서 보인 처참한 행적 덕분에 대중적으로 큰 증오를 받는 왕이다. 사실 임란 때의 실책만으로 욕을 먹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의 괴상한 행적이 워낙 임팩트가 크기에 오히려 후술할 평시의 통치 태도가 가려지는 면도 있다. 일단 통치(내정) 면에서 보면 노비 인구 증가, 토지 잠식, 군역과 요역의 문란 같은 중종 대에 제기되고 이어진 민생문제에 대한 개혁담론들이 선조 대에 활발히 논의되었다.[46]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본인의 한심한 추진력과 무원칙하고[47] 보신적인 행태로[48] 제대로 된 결실을 맺지도 못했으며[49][50] 무엇보다도 임진왜란 때 드러난 국가 지도자로서의 결격 사유 때문에 전반적인 여론은 긍정적이지 못하다. 그러니까 파천으로 대표되는 무책임한 면모와 이순신 해임 등 전시의 무능 때문에 대중적 이미지는 최악이라고 해도 좋다.[51]

물론 선조 시기의 긍정적 면모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선조 시기의 긍정적 면모를 말한다면 조선은 건국 이후로 체제의 모순이 쌓여 와서 다양한 병폐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는데 선조 시기에 이에 대한 공론화가 점차 시작되었다. 특히 공납제도와 관련해서는 대동법프로토타입인 수미법(收米法)을 율곡 이이 같은 신하들이 제시하자 선조 또한 농업국의 한계에서는 적절한 정책이라며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문제는 논의가 점차 진행되면 될수록 당대에는 지주들의 반발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 등의 소극적인 모습만 보이며 그 어떠한 진전도 없이 제자리걸음만 걸었다는 것이다.[52][53] 물론 전란 전에 논의되었던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전란 중에 처음으로 공포하고[54] 했으나 얼마 못가 폐지되었다.

선조가 전란 전에 묻어간 것이 치세(治世)라고 알려지기는 했지만, 애초에 목릉성세(穆陵盛世)라는 이름의 전란 전에 치세(治世)라는 것은 명종 대에 퇴계 같은 천재철학자들이 갑자기 등장해 이미 절정에 다다른 민간의 문화융성이 그대로 선조 대에 이어진 것에 불과할 뿐이며 그것이 민생경제 차원의 태평성대라고 개념이 전도되어 오인된 것에 불과하다. 여전히 조선 전기부터 누적된 구조적 모순은 계속 심화되고 있었으며 그것에 대해서 선조는 군주로서 거의 전적으로 문제해결력이 없다시피한 극도로 무능한 모습을 드러냈고[55] 그냥 단지 무능한 것을 넘어서 오히려 붕당이라는 자신의 재위기에 새로 발생한 문제는 증폭시키며[56] 문제해결을 방해했다.[57]

일부 선조 옹호론자들은 끈질기게도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기만 이어졌다면 명군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지만, 만약이고 자시고 간에 선조에 대한 평가는 이미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25년이라는 기나긴 집권 기간도 반영되어 내려진 것이다. 애초에 이상의 선조 관련 평가는 어디 어중이떠중이 재야학자들도 아닌 주류 학계에서 일관적으로 내려 왔던 것인데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선조가 명군감이라는 괴상한 미화가 나오는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정작 그 전란 전에 25년 동안에도 국가의 발전에 선조가 제대로 기여한 것이 있었는지는 그리고 내세울 만한 업적이 무엇이라도 있었는지는 매우 의문스럽다.[58]

일각에서는 "선조는 성리학 카르텔의 수장이었으므로 좋은 기록을 받았다"거나 "전시 대비에 무능하고 게을렀다"는 식으로 잘못된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선조를 옹호하고 미화하는 무리들에게는 매우 좋은 빌미를 제공한다. 오히려 선조는 대의명분이나 유교적인 절차를 허례허식 따위로 치부하며 제멋대로 정치를 했다. 이러한 성향이 좋은 쪽으로 시너지를 냈더라면 파격적이고 개혁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현실은 선조의 방종함과 어리석음 때문에 가히 최악의 결과만 가져왔다.[59] 임진왜란 중에 보인 해괴하고 황당한 파천 계획만 보더라도 선조는 대의명분보다 일신의 이득만 중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와 같은 행태는 국가적인 위기 중에도 사회 전반의 안녕을 도모하기보다는 단기적 손익 계산에 혈안인 현대의 부패 정치인에 가깝지 전제군주제 시대의 왕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통치 태도이다.

심지어 국가적 위기가 닥쳤을 때 오로지 자신 한 몸의 안위만을 위해 아예 요동으로 들어가서 국가와 백성들을 완전히 포기할 의사를 내비치는 추태를 보여 민심을 잃고 왕권에 먹칠까지 하는 등 선조의 인간적인 하자는 정말 상상 이상으로 심각했다. 오죽했으면 신하들이 선조가 임란 동안 저질러 댔던 얼빠진 짓거리들을 보며 질린 나머지 나중에는 대놓고 왕의 면전에다 필부[60]라는 멸칭을 사용했으랴. 전근대 사회에서 왕에게 이런 멸칭이 공공연히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왕의 권위에 심각하게 금이 갔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현대에 와서도 딱 그 수준에 맞는 대접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전쟁 중의 선조의 평가는 군주로서 결격 수준이며 가히 최악이다. 선조는 왜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하자 쉬지 않고 북으로 몽진했고 의주에 이르르자 아예 타국으로 도주하면서 어린 아들에게 선위할 것처럼 분위기를 짜 놓았다. 여차하면 자기 국가를 버리고 요동에서 새로운 정권을 만든 후 전란이 끝나면 다시 돌아와 통치하겠다는, 왕으로서는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 자체가 죄악인 어처구니없는 발상을 실행에까지 옮겼다가 이 따위 작자를 왕으로 모셨던 조선은 물론 입경을 사실상 거부한 명나라와 함께 심지어 적국인 왜까지 삼국 모두를 당혹시켰다. 이렇듯 선조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은 일신의 안위와 사리사욕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실로 평범한 백성보다도 못한 행동거지였다.

이처럼 아무런 생산적인 기여는 못하면서 명신들과 명장들이 세력을 키운다 싶으면 여지없이 숙청해 버렸으며 전쟁이 끝나자 돌아와서 실권을 잡은 후에는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도 선위 쇼 같은 얕은 술수 따위나 쓰면서 지대추구를 꾀했을 정도로 간악하고 이기적인 인간이었으니까 조선 최악의 암군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것은 전혀 억울할 것이 없는 것이다. 선조가 분명 인재를 보는 눈이 조금 있었다는 것까지는 주류 사학계에서도 인정하는 점이지만 딱 거기까지다. 선조는 그 인재를 선발한 후에는 국가와 민족에 이롭게 사용할 지혜는 전혀 갖추지 못했고 그 인재로 국가를 제대로 된 방향으로 다스리는 방법은 전혀 몰랐던 어리석은 임금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한낱 양아치에나 어울리지 한 국가를 다스릴 그릇이 안 되는 자가 전근대 사회의 한계로 인해 왕손이라는 이유로 왕 자리를 차치해서 생긴 비극이라고 볼 수 있다.

총평을 하자면 일부 인선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지도자로서 필요한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인간 됨됨이가 극히 졸렬하고 천박한데다 기본적인 도덕관념조차 결여되었고 무엇보다도 최고정책결정권자로서 정작 필요한 정책적 혜안이 탁월한 것도 아니라서[61] 별다른 성과조차 거두지 못하고 시간만 죽이다 전란이라는 비상상황에서는 그것을 넘어서 아예 국가를 나락에 빠뜨리기까지 해버린 왕이라고 할 수 있다. 일국을 다스려야 할 왕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보신과 권력욕 충족 외에는 별다른 성실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거시적 비전도[62] 원칙도 없는[63] 방만한 국정 운영으로 제대로 된 업적도 남기지 못했다.[64]

설상가상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결여되고 이기주의적인 지도자들이 대개 그렇듯 자기가 그나마 지니고 있었던 몇 안 되는 장점조차도 자식들에게 제대로 계승해 주지 못했다. 선조는 조선 왕조 역사를 통틀어 자식농사까지 최악으로 지어 후대에 민폐를 무진장 끼친 것으로 유명한데 왕자들이 하나같이 개차반이 된 이유도 남탓할 것 없이 결국 선조 본인의 잘못이 가장 컸다.[65] 이처럼 인간으로서는 됨됨이가 저열했고 국가지도자로서도 성과가 형편없었으니까 악인인 주제에 암군이기까지 하다는 박한 평가를 면할 길이 없는 것이다.

4. 가족관계

4.1. 친가(전주 이씨)

4.2. 배우자/자녀

선조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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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순번 작호 생몰기간 모후 비고
<colcolor=#ffd400> 1남 <colcolor=#b82647,#d94767><colbgcolor=#fff> 임해군
臨海君
<colbgcolor=#fff><colcolor=#000> 진
<colbgcolor=#fff><colcolor=#000> 1572년 ~ 1609년 <colbgcolor=#fff><colcolor=#000> 공빈 김씨 <colbgcolor=#fff>
2남 광해군
光海君

1575년 ~ 1641년 15대 국왕
3남 의안군
義安君

1577년 ~ 1588년 인빈 김씨
4남 신성군
信城君

1578년 ~ 1592년
5남 정원군
定遠君

1580년 ~ 1619년 추존 국왕
- 왕자 ~ 1603년
6남 순화군
順和君

𤣰
1580년 ~ 1607년 순빈 김씨
7남 인성군
仁城君

1588년 ~ 1628년 정빈 민씨
8남 의창군
義昌君

1589년 ~ 1645년 인빈 김씨
9남 경창군
慶昌君

1596년 ~ 1644년 정빈 홍씨
10남 흥안군
興安君

1598년 ~ 1624년 온빈 한씨
11남 경평군
慶平君

1600년 ~ 1673년
12남 인흥군
仁興君

1604년 ~ 1651년 정빈 민씨
13남 영창대군
永昌大君

1606년 ~ 1614년 인목왕후
14남 영성군
寧城君

1606년 ~ 1649년 온빈 한씨 }}}}}}}}}

자식이 10명을 넘겼던 왕 중 하나로 이후에는 인조(6남 1녀), 효종(1남 7녀), 현종(1남 3녀), 숙종(6남 2녀)[76]을 거쳐[77] 영조 때가 되어서야 2남 12녀로 10명 이상의 자녀를 둔 왕이 나온다.[78]

5. 기타

  • 원래는 선종(宣宗)이었으나 1617년(광해군 9년) 선조(宣祖)로 변경됐다. 대명회전에 태조 이성계의 부친이 이성계의 정적인 이인임으로 오기된 것을 바로잡은 종계변무의 공로다. 사대주의 국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왕가정통성을 바로잡는 일로 태조 3년(1394년)부터 200여년 간 조선의 정말 오래된 숙원이었다. 실록은 선조의 공을 종계변무명나라 사람 정응태가 조선일본을 도와 을 친다는 무고를 바로잡은 것, 왜란을 극복한 공로로 돌리고 있다. 선조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들인 광해군이 자신의 권위와 즉위에 대한 정당성을 강화하고자 밀어붙인 사안이었다. 죽은 사람에게 칭송과 권위를 덧붙이는 이유는 죽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의 권력자를 위해서다. 참고로 이 묘호는 북송의 건국자 태조 조광윤의 아버지 조홍은이 황제로 추존되며 받은 묘호이기도 하다.
  • 선조 재위 시기에 민간에서의 조보(朝報) 인쇄를 금지하기도 했다.[79] 조보란 오늘날의 관보와 같은 것으로 왕의 하교 등 조정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다. 인쇄가 아니라 필사를 시켜 한성부윤(정 2품의 고위직, 현재의 서울시장) 이상 고위 관리 몇몇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민간에서 활자 인쇄해 배포하였는바 금지한 것.
  • 실록에 따르면 선조는 직접 신무기를 만들어 류성룡에게 베타테스트를 권하기도 했다. 선조가 만든 총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부사수가 돌려가며 장전한다는 언급으로는 리볼버개틀링의 원리로 작동하는 공용화기로 추측된다. 이 와중에 사관은 임금이 전시에 직접 무기를 만들고 살펴보는 걸 왕이 쓸데없이 공졸을 논한다며 까고 류성룡도 세트로 깠다. 전쟁 발발 전에도 국방 강화에 힘을 쏟은 것을 보면 군과 국방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던 듯 보인다.
  • 선조는 인물 욕심이 많았다. 과거 시험이 아니라 추천이나 평판 등을 누군가에게 듣고서 꼭 곁으로 불러 관직을 줬다. 중종-인종-명종 대를 지나면서 훈구파가 퇴조하고 사림파가 득세를 하게 됐는데, 선조는 사화(士禍)를 당하고 역적 취급을 받은 선비들을 죄다 사면하고 그 후손들 중 뽑을 만한 자를 가렸다.[80] 덕분에 선조 대와 임진왜란 때 이름을 떨친 선비들이 현재도 많이 조명되고 있다. 아울러 자연에 은둔해서 도를 닦는 사람들(산림 세력)까지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서 현감직이라도 꼭 내렸다고. 반면 비리를 저질러 탄핵된 인사들은 여지없이 끝까지 쫓아내 벌을 줬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처럼 끊임없이 많은 인재들을 발탁하고 돌아가며 등용하고 갈아치워 권력이 한 곳에 집중하는 일을 막았다고 평가했다.
  • 조선시대 대부분의 왕이 그랬지만 선조는 그 중에서도 유난히 피로스트레스를 받은 듯 하다. 애초에 태어날때부터 몸이 허약했다고 하니... 실제로 왜란 전에도 이명, 소화불량, 심질[81]에 시달린다고 스스로 인정할 정도였을 지경. 특히 왜란 이후에는 정신적으로 충격을 크게 받아 온갖 병이 도져 도저히 못하겠다며 광해군에게 계속 양위하려 하였다. 물론 이를 당대나 지금이나 왕권강화를 위한 선위파동 쇼라고 보기도 하나 극심한 정신병으로 실제로 양위하려 했던 걸로 보는 의견도 없지는 않다.[82] 그의 아들들이 대부분 성격이 거칠고 모난지라 특유의 기질이 유전된 것일지도 모른다. 임해군도 난폭함과 더불어 우울증이 있었다고 한다.
  • 지봉유설의 기록에 의하면, 선조나 그의 아들인 광해군 대에 잉글랜드사략선단이 조선 해안을 침공했다가 조선 수군에 의해 격퇴되었다고 한다. 광해군일기에도 같은 기록이 있으므로 실제로는 광해군 시기의 일이 와전되었을 수도 있지만, 지봉유설에서는 이 사건이 선조 때의 일이었다고 기록되어있다.[83] 지봉유설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이 사략선단은 프랜시스 드레이크[84]의 함대라고 추정된다.
  • 서양과 관련된 선조 대의 또다른 기록이 있는데, 포르투갈인 선원인 마링예이루[85]일본으로 가다가 풍랑으로 인해 조난당하여 조선의 해안에 표류했다는 서술이 그것이다. 이 사람은 현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한반도에 도달한 최초의 유럽인인데[86] 조선 조정에 의해 명나라를 거쳐 본국인 포르투갈로 송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중에 포르투갈인 선교사들이 만력제에게 바친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 노예들이 조선으로 파견되어오자[87] 이들에게 관직을 하사하고 신기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있는 등, 서방과의 인연이 꽤 되는 왕이다.
파일:선조.jpg*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첫째아들 임해군을 수행해 피난했던 윤탁연의 후손들이 이것을 선조의 어진이라 주장했는데, 후손들은 이 어진을 윤탁연의 『중호관북일기』와 함께 대대로 보존해 왔다고 하지만, 감정사들은 ①전복 차림이 측면의 자세이고 ②좋은 필치가 못 되며 ③아무 기록이 없는 점을 들어 선조의 어진으로 봐야 할 근거가 희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만약 이 그림이 진짜 선조의 어진이라면 광해군의 얼굴을 유추해볼 수 있는 자료이다.
파일:1610636a2e221d3ed.jpg* 원본은 아니고 누군가 모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선조 어진으로 추정되는 어진이 이베이에 떴었다. 현재는 판매된 상태이고 이 어진은 선조라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런 기록이 없어 진짜 선조의 모습을 보고 그렸을 가능성은 낮다.
파일:external/img.khan.co.kr/6i30k11b.jpg
파일:external/photo-media.hanmail.net/20060929163306.254.0.jpg* 위는 속리산 법주사에 있는 오언절구 중 첫 수로 '담장 가의 매화 한 가지가 / 추위에도 능히 홀로 피었네 / 멀리서도 눈송이가 아님을 알겠으니 / 은은한 향기가 나오고 있음이어라.'(墻角一枝梅 凌寒獨自開 遙知非是雪 爲有暗香來)라고 쓴 것이다. 아래는 여동생 정안옹주의 병을 걱정하며 편지를 보낸 딸 정숙옹주에게 보낸 답장으로 언문 편지다. 만력 31년 계묘 복월 사시라 적혀 있는 것을 번역하면 복월(復月)은 음력 11월을 뜻하고 사시(巳時)는 대략 오전 9시 반~11시경이므로 1603년 음력 11월 19일 오전에 쓴 편지다. 전문 현대어 해석은 조선 왕실의 한글 편지를 참조. 선왕들과 마찬가지로 선조는 글씨(서예)와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고 평가된다. 특히 글씨는 명나라 장군들이 얻고 싶어할 정도로 뛰어났으며 당대의 명필인 한석봉의 글씨에 대해서도 "한석봉이는 액자(額字)가 비록 훌륭하지만 초서와 해서는 부족하다."라고 평가했을 정도로[88] 자신의 글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모양. 실제로도 조선 역대 국왕 중 명필의 하나로 꼽히며 후대 왕들의 서체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데[89] 지금까지도 그의 친필은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계비 인목왕후와 유일한 적녀(嫡女) 정명공주도 명필로 유명했다.
  • 은근히 삼국지연의에 관심이 많았다. 즉위 초 삼국지 내용을 언급하다가 기대승에게 까인 것은 유명한 일화인데 주변에서 들었다고 핑계를 대긴 했지만 잠저가 되었든 궁중이 되었든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연의의 내용을 어린시절부터 접한 것은 확실하기에 한국 최초의 삼국지덕후들 중의 한 명으로 추정된다. # 그 외 선조 38년인 1605년엔 선조가 향시 과거에 '제갈량관우를 구하지 않았다'는 주제를 냈는데 '제갈량이 관우를 죽이려고 일부러 그랬다'라고 쓴 합격자를 보고 '이건 무슨 개소리냐?'라고 합격을 취소시키기도 했다. #자치통감강목(제왕교육)을 공부하면서 왠만한 촉빠들도 실드치기 어려운 유비유장 통수를 가지고도 "유비는 호걸일 뿐 아니라 사실 인자한 사람이었다. 유장에 대한 처리를 보면 그의 선(善)함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작은 악이라 하여 행하지 말고 작은 선이라 하여 행하지 아니하지 말라.'는 말은 삼대(三代) 이후에 없었던 말이다.","'사자(嗣子)가 하잘것 없다면 그대가 스스로 차지하라.'하였으니, 이 어찌 천하를 공공물로 여기는 마음이 아니겠으며 제갈량이 아니면 어찌 그 말을 들을 수 있었겠는가."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 사실 본인이 원하지는 않았다지만 임진왜란 때 관우 신앙을 처음 받아들인 왕이기도 했고 왜란 직후 나온 소설 임진록에서는 장비의 환생 취급을 받기도 했으니 여러모로 삼국지와 촉한과는 인연이 많은 왕이긴 했다. 그래서 일각에선 사실 진성 촉빠라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90]
  • 조선 역대 임금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모진 풍파를 겪은 임금이다. 정여립의 난이몽학의 난 등 반란이 계속 일어난 데다가 조선 역사상 최고로 큰 전쟁인 임진왜란까지 겪었다. 선조의 입장에서 보면 왜 하필 나냐고!라며 고함을 지를만할 정도로 고생을 엄청나게 했다. 충분히 정신병이 걸리고도 남을 상황이긴 하다. 이 풍파는 선조가 죽어서까지 병자호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6. 대중매체

6.1. 소설

  • 이우혁의 소설 <왜란종결자>에서는 임진왜란기 당시 선조의 부정적인 행동들에 대해 선조의 몸에 마수가 깃들었지만[91] 그걸 제외해도 원래부터 암군에 인성 자체가 구제불능이라고 묘사했다.[92] 같은 케이스로 설정된 원균[93]과 비교해도 그 패악성과 인간성이 심각하게 묘사되어 주인공인 은동 입으로 살아있을 가치가 없는 인간 쓰레기라 평가되었고[94] 이순신의 경우 다시 지휘관에 부임했다가 은동의 격려로 마음을 다잡은 뒤로는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연승하여 이 인간을 부들거리게 만들겠다는 증오심으로 싸움에 임했다.
  • 김성한의 소설 <7년전쟁>에 등장하며 특유의 찌질함이 잘 묘사되었다. 정여립의 난 에피소드 때 우의정 이양원이 이발의 팔십 노모를 제대로 고문하지 않고 보고를 올리는데 이 때 이양원을 갈구는 모습은 가히 인상적. 임진왜란 발발 후부터는 말할 것도 없다.
  •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서는 무능하고 잔혹하게 표현되는 "칼로 벨 수 없는" 권력의 정점에서 정치로 전쟁을 수행하며 유능한 지휘관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악인으로 표현된다.

6.2.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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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리 콤판의 만화 <YI SOON SHIN>에서는 무능하고 찌질한 임금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짜리몽땅하고 비만한 왕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선조가 뚱뚱했다는 기록은 없다.[95] 사실 비만보다 더 문제는 서구권 폭군 클리셰대로 만화고기를 손으로 들고 뜯어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무리 연산군 같은 폭군이라도 명색이 예법에 엄격했던 조선의 왕이 이런 창피한 짓을 신하들 보는 앞에서 할 리는 없으므로 한국인이 보기엔 심히 어색한 장면.
  • 웹툰 <호랭총각>에 나오는 왕의 모델이 선조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는데 그 이유는 아무래도 호랭총각의 배경이 임진왜란 직전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의 시대가 명나라인 점이 크다. 선조 이후의 중국은 청나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통신사 설정이라든가 박문수가 작중에 등장하는 등 호랭총각은 작가의 말 그대로 '조선시대 비슷한 시대' 정도로 보는 것이 맞다. 즉 나대용이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그 시대의 왕인 선조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왜구네이터 편에서 나대용이 이순신의 부하 나대용과 동일 인물이며 시대도 임진왜란 직전임이 밝혀져 사실상 선조가 맞다는 것이 드러났다.
  • 웹툰 <오성X한음>에서 등장해 명군처럼 보였으나 역시 두 얼굴의 왕이었다. 율곡 이이에게 일부러 스트레스를 줘서 죽게 만들었고 정여립을 예의 주시하면서 한바탕 피바람을 예고하는 등 인식이 좋지 않았는데 결국에는 정철을 배후에서 조정해 기축옥사를 일으켜 왕권을 강화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오성과 한음에게 울면서 살려달라 통곡하는 등 찌질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 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자신의 손자와 더불어 박시백 작가가 제일 비판하는 군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조에 비해선 평가가 좀 낫긴한데 그래봤자 도찐개찐
  • 만화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에서 등장한다.

6.3. 게임

  • <임진록 2> 오리지날 캠페인에서 유일한 캠페인 전용 등장 인물로 등장한다. 완전한 픽션을 다룬 확장팩과 달리 그나마 현실의 임진왜란 사건을 어느 정도 재현한 <임진록 2>의 캠페인에서 등장하는 빈도가 높은 편이며 전용 초상화도 있지만 이순신이나 권율처럼 자신이 직접 싸우는 장수 유닛이 아닌 '선조의 어가'라는 이동 밖에 할 수 없는 유닛으로 딱 1번 등장한다. 확장팩에서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 <토탈 워: 쇼군2>의 임진왜란 모드인 Morning Sun에서 조선 국왕으로 등장하며 후계자로 광해군을 두고 있다. 전투에서 장군 호위대와 함께 말을 타고 전투에 참여할 수 있고 플레이어의 플레이에 따라 능력 6성에 명예수치 만땅을 찍는 명군이 될 수도 있다.

6.4. 영화

6.5. 드라마

  • 1999년 MBC 드라마 《허준》에서는 배우 박찬환[97]이 연기했다. 사람 좋은 임금님으로 묘사되어서 사극 매니아나 역덕후들이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98]불멸의 이순신과 교차해서 보면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하게 된다. 주인공 허준 편에 서서 허준을 지원해주고 임진왜란 때는 분조를 이끄던 광해군을 걱정하는 인자한 성군으로 그려졌다. 다만 광해군과의 사이가 돈독하게 나온 것은 아니고 광해군과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실제 역사나 이후 다른 사극에 등장하는 선조에 비하면 부자지간이 나쁘지 않게 나온다. 인기있던 드라마라 선조의 이미지 재고에 도움이 될 법도했지만 대중들이 여기서 나온 왕이 선조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극 중에서는 다른 사극에서 흔히 보이던 인물 이름을 알리는 자막이 1번도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적 배경을 알지 못하면 선조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다. 극 중에서 허준이 존재했던 시기를 알 수 있는 단서는 오로지 1부에 등장한 '선조 1년'이라는 자막과 후반부에 등장하는 임진왜란뿐이다.
  • 2000년 KBS 드라마 《천둥소리》에서는 배우 이호재[99]가 연기했다. 기존의 선조에서 다르지는 않지만 조선군을 매우 나약하게 여긴다. 이순신의 첫 승전을 과대하게 부풀린 장계라고 여기는가 하면 서산대사가 행재소에 찾아와 "5천 승병이 일어났다"고 하자 서산대사가 떠난 이후 "파리 때만 모인다"고 비난하는 등 오로지 명나라 군대만 찾는다. 특이점이라고 하자면 호통칠 때 벼락치는 듯이 우렁차다는 게 특징이며 다른 임진왜란 배경 드라마와는 다르게도 신하들에게 하대한다.[100]
  • 2003년 SBS 드라마 《왕의 여자》에서는 배우 임동진이 연기했다. 위엄은 전혀 없는 선조인데 왕비인 의인왕후에게 내심 고마워하는 모습이 보인다. 드라마 내내 임해군과 충돌하며 광해군 역시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곽정욱(아역), 최철호(성인)[101]가 연기했다. 이 작품에서는 왕권에 집착하는 왕으로 묘사되었고 임진왜란으로 몽진을 하던 도중 이순신의 첫 승전보에 감격하며 이순신을 매우 중용하는 듯 보였으나 민중들이 이순신을 추앙하는 모습과 류성룡을 시기하는 윤두수와 이순신의 공적을 시기하는 원균의 보고가 겹치면서 점차 이순신을 위험시하기 시작하며 점차 암군의 면모를 보인다. 마지막까지도 명나라 유정의 말을 듣고 선전관을 보내 노량 해전을 준비하는 이순신을 방해하는 것도 모자라 "칙사를 가두고 출전했다"며 노발대발하는 모습을 보인다.

6.6. 교양ㆍ다큐멘터리

1994년 KBS 교양 프로그램 《역사의 라이벌》 〈이순신과 원균〉 편에서는 배우 임혁이 연기했다.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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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진왜란 시기 어진으로 전해지나 확실하지는 않다.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시기 윤탁연이 평소 어진을 그리는 것을 꺼리던 선조의 초상화를 발견하여 보관했고, 그가 입수한 어진은 후손에 의해 보존되어 오다가 1974년 이은상이 윤탁연의 후손을 찾아내면서 발견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해당 어진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선조의 어진으로 보지 않는다. 애초에 조선시대에는 개인이 어진을 소장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만약 발견하면 바로 조정에 바쳐야 한다. 설령 선조가 아니라 해도 다른 어진 중 하나라는 의견이 있는데, 이는 가슴의 흉배에 용이 그러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은 흉배가 아니라 원형의 보를 사용하는데, 이는 천원지방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을 네모나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의 흉배는 어진이라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어진은 정면상 혹은 좌안 8분면상인데, 이 그림은 반측면상이라는 점과 어진에서는 없는 지물을 보이고 있다는 점. 어진은 한번도 사복본이 그려진 점이 없다는 점 등을 볼때도 해당 그림은 공식적인 어진으로 보기 어렵다. 이러한 그림은 최치원, 남이나 경순왕 등 민간이나 불교 사찰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보이는 무속화의 양식을 더 많이 보이고 있다. 따라서 사찰이나 당집, 개인이 사사롭게 모시던 그림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2] 반우향(半右向)으로 호피가 깔린 이동좌식 교의(交椅)에 앉아 왼손은 팔걸이를 잡고 오른손은홀(혹은 부채)을 팔걸이에 세운채 붉은색 차양밑의 갓끈달린 갓모자를 쓰고 있는데, 화려한 운보문(雲寶紋)녹포단령 안에는 붉은 용포를 껴입었고, 흉배의 용문과 풍만한 얼굴의 기품은 사대부의 그것과는 또다른 고귀한 신분의 풍모로써 앞을 응시하는 맑은 눈에는 여유있는 만기친람의 기품이 넘쳐 흐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임진왜란시 의주로 몽진한 선조가 상황이 급박하여 세자 광해군과 분조(分朝)하여 후일을 기약하며 서로 달리 갈때, 맏아들 임해군에게 본 어진을 주었는 바, 임해군은 곧 왜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그래서 임해군을 배종하던 본도도순찰사 윤탁연(尹卓然,1538-1594)에게 이 어진을 잘 보관토록 맡기시어 지금까지 전해 온 것이라 한다. 선조 임금 어진[3] 아들인 정원군의 어진이 현존한다.[4] 율리우스력 11월 26일.[5] 조선시대에 사직단이 위치했었던 사직공원 근처다. 도정궁(덕흥군 사저)의 건물이었던 경원당은 오늘날 건국대학교 서울캠퍼스 내부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A] 율리우스력 8월 7일.[7] 선조 재위 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전란 중 경복궁이 불타버리면서 선조는 조선 왕실에서 경복궁에서 즉위한 마지막 왕이 되었다.[8] 선조 시기 신하들 중 유명하거나 뛰어난 인물, 재상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이 시기의 왕인 선조의 무덤, 목릉을 따와서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부른다.[A] [10] 선조가 명종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니 이름이 부()였던 형 순회세자의 이름을 따라 '날 일(日) 변'의 한자로 바꿔야 한다는 건의로 바꾼 것이다.[11] 봉호는 경상도 하동군(河東郡)에서 유래했다.[12] (네가 쓴) 편지 보았고, (정안옹주의 얼굴에) 돋은 것은 그 방이 어둡고[너 역질 앓던 방\] 날씨도 흐리니 햇빛이 (그 방에) 돌아서 들거든 내 친히 보고 자세히 기별하마. 대강 약을 쓸 일이 있어도 의관과 의녀를 그 방에 들여 명령을 기다리게 하려 한다. 염려 마라. 자연히 좋아지지 않겠느냐. 만력 31년 계묘 (1603년) 복월(11월) 19일(9일) 사시(오전9~11시)[13] 고려 왕조에서는, 태조 왕건의 적통이 제7대 왕 목종에서 끝나고, 제8대 왕 현종이 조선 선조의 위치에 해당한다. 그래서 현종을 고려 왕조의 중시조로 보며, 이후 고려의 왕들은 모두 현종의 직계 후손들이다.[14] 덕흥대원군의 저택 공사에 당시 중종실록의 기사에서는 여러 폐단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고 덕흥 대원군 뿐만 아니라 당시 중종 서왕자들의 저택 공사가 폐단이 많아 대간들이 상소로 여러 번 지적할 정도였다.[15] 하지만 이 일화가 기록된 광해군 일기의 선조 행장은 선조 이후의 기록이라 선조 아들인 광해군과 그 신하들을 비롯한 선조 진영에서 서술된 기록물이기에 선조의 겸손과 능력을 과대 포장하려 주관적인 의도로 서술되어 객관성이 떨어질수밖에 없고 명종실록에도 이 일화가 수록되지 않은 정황을 고려하면 선조측의 주관적인 과장 서술일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16] 사망한 후 아직 묘호를 올리지 않은 전대의 왕을 대행왕이라고 부른다. 즉 여기서는 명종.[17] 사실 위로 세조의 장손이자 의경세자(덕종)의 장남 형 월산대군이 있기는 했지만, 당시 실세였던 한명회의 사위였기 때문에 그 권세에 힘입어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18] 그러나 결국 후대에 덕흥대원군 봉사손들은 경술국치 전까지 정3품 대우를 받으며 종친부 군 작위를 대대로 세습한다. 조선 말 효종의 자손이 희소해진 상황에서 이들은 선조 가문의 적통 계파로서 우대받았으며 철종 시절 봉사손이었던 이하전의 경우 안동 김씨 세도의 경계를 사서 사사되기도 했다.[19] 대원군은 왕의 생부라서 인정(人情)상 예우하는 것이지 그 지위가 신하에 불과하기 때문에 임금이 신하에게 절 할 수 없기 때문이다.[20] 심의겸인순왕후작은 아버지[21] 또는 '목릉지치(穆陵之治)'[22] 사림세력의 집권 이후 조정은 이전보다 덜 부패했을지 몰라도, 국정 운영 및 현안에 대한 해결 능력이 더 향상되거나 효율적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림의 집권 이후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나타난 ‘동서분당’은 그러한 비효율이 표현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선조 대 당쟁의 양상과 전개 양상 이이를 중심으로>[23] 명나라가 처음 편찬을 시작했을 시기에도 이인임과 이성계의 관계를 모르지 않았겠지만 그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가 정말 나빴기에 누군가 의도적으로 악필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조선은 이후에 새로운 기록들이 추가되어서 재간행될 때마다 이를 수정하고자 하였으나 명나라는 과거 이유가 있어서 기록한 것이라니, 재간행이 이미 완료되었다느니 하는 핑계로 유야무야 흘리듯 넘겨 버렸었다.[24] 명나라 기록에,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권력을 휘어잡은 간신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잘못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걸 무려 200여 년 뒤에야 이자춘의 아들이라고 바로잡은 일이다. 그러므로 이를 왕실의 종(宗)사와 계(系)통에 대한 무(誣)함을 변(辨)호했다는 의미로 '종계변무(宗系辨誣)'라고 한다. 선조 사후, 광해군은 종계변무를 명분 삼아 부왕의 신위를 '불천위(不遷位)'로 지정하였으며, 이로 인해 선조의 신위는 5대가 지나더라도 종묘 정전에 자리를 영원히 보존하는 세실(世室)이 되었다. 사실 즉위 기간이 짧거나 반정으로 쫓겨난 왕이 아닌 이상, 조선조 임금의 웬만한 신위는 거의 다 세실로 지정되어 있긴 하다.[25] 조선시대를 이어 현재까지도 있는 호남 혐오에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다.[26] 옥사가 일어나던 처음에는 상이 수십일 간을 친국(親鞫)하였고 그후에는 혹 정국(廷鞫)하면서 대신이 아울러 참여하였으며, 최후에는 삼성 교좌(三省交坐)로 추국하면서 한 대신이 감국(監鞫)하였다. 경인년039)(註 039)(경인년 : 1590 선조 23년.) 5월 이전에는 정철(鄭澈)이 감국하였고 그 후에는 유성룡(柳成龍)·이양원(李陽元) 등이 대신하였다. 이 해에는 이발 형제 외에는 갇힌 사람이 없었으며, 기축년040)(註 040)(기축년 : 1589 선조 22년.) 10월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20개월 사이에 죽은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는데, 조신(朝臣)·명관(名官) 중에 죽은 자가 10여 인이었으며 【이발·이길·백유양(白惟讓)·유덕수(柳德粹)·조대중(曺大中)·유몽정(柳夢井)·김빙(金憑)은 장(杖)형으로 죽었고, 윤기신(尹起莘)·정개청(鄭介淸)은 장형을 받고 유배되던 도중 길에서 죽었으며, 최영경(崔永慶)은 옥사하였다.】 연좌되어 유배된 자가 몇백 명이었는데 조신 가운데 귀양간 자로는 정언신(鄭彦信)·김우옹(金宇顒)·홍종록(洪宗祿) 등이었으며, 파출(罷黜)된 자도 수십 인이었다. 이들은 모두 옥사가 일어난 초기에 결정된 자들이다. (선조수정 선조 24년 5월 1일)[27]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격렬한 반대로 수군 전폐론은 없어졌지만 부산진다대포의 경상 좌수군이 바다가 아니라 각 성에서 항전한 점, 경상좌수사 박홍이 2천 병력으로 동래산성으로 간 점 등을 보면 경상 좌수영에 한해서는 이루어진 듯하다.[28] 신립이 전쟁 발발 전부터 일본 풍신수길의 전략과 당시 조선군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던 조총의 위력을 전혀 무시한 채로 과거의 경우처럼 평지에서 싸울 수 있다고 오만했다. 그리하여 신립은 오만한 자신감에 고무되어 방어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산악지형의 조령(지금의 문경새재)을 버리고 사방 뻥뚫려 있는 충청도 충주 탄금대 평야지대에서 기마 전술로 펼치다가 왜군의 제1군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에 의한 조총 전술로 거의 전멸당한다. 그러고 탄금대 절벽에서 투신해 생을 마감한다.[29] 명나라 입장으로서는 나름 합리적인 의심이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게 수차례 자신들은 명을 치는 길을 빌려주고 지원하라고 압박을 해왔었다. 수나라, 당나라, 거란, 여진, 몽골의 외침에 맞서 선전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고구려, 신라, 고려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조선에 대해 명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조선이 군사력을 증강하는 것에 경계해왔다. 이러니 강군의 조선이 일본군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는 것을 명나라는 당연히 믿지 않고 의심하였던 것이다. 근데 이전 왕조인 고구려는 국력이 강해지기 전 관구검이 이끄는 고작 1만병력에게 수도까지 털린 적이 있고, 고려 역시 카다안의 침입이 발생했을 때 여요전쟁에서 보여준 모습은 잃어버린 상태로 쿠빌라이 칸한테 "당태종도 고구려에게 패했고, "우리도 너희를 굴복시키는데 매우 큰 힘을 쏟았는데, 왜 지금은 그깟 도적떼에 쩔쩔매느냐?"는 식으로 디스 당한 적이 있으며, 조선 당시 명나라 또한 영락제이후 토목의 변을 시작으로 가정제만력제등 막장황제들로 인해 국력이 약해져 본인들 역시 만만히 보던 왜구에게 남부지역을 유린당한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의심은 합리적인 의심이 아닌 동아시아 역사에 대해 명나라 조정의 무지를 보여주는 것이다.[30] 100명이라 함은 작은 고을의 수령 쯤으로 대우하겠다는 뜻이다.[31] 이때만큼은 동인이든 서인이든 간에 모두 한목소리로 '요동으로 가면 안 된다'며 명을 거두어 달라고 흰 소복차림으로 머리 풀고 정말로 결사 반대했다.[32] 이때 정철과 류성룡은 심지어 진지하게 선조에게 명나라로 도망갈 거면 선위하라며 하야요구를 하려하였는데 이 둘다 선조의 불같은 성격을 아는지라 선조에게 별 말 못하고 '신들이 못나서 나라가 이꼴입니다.'라고 사죄하고 도망치며 조선 역사상 최초의 신하에 의한 하야요구는 없던 일로 돌아갔다.[33] 물론 이들은 정문부가 이끄는 함경도 의병에게 변절(순왜)을 이유로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34] 일단 조선부터가 대홍건적, 대왜구 전쟁에서 공을 세운 변방의 장수 이성계고려를 무너뜨리고 건국한 나라다.[35] 물론 선조 입장에서는 빡칠만 했다. 애초에 원균이 먼저 자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면 부산에 있는 왜구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근자감 넘치는 장계를 올렸다. 막상 그렇게 통제사가 되고 한다는 소리가 '왜군의 수가 엄청 많아서 전투를 하기엔 여력이 부족하다, 육군의 지원이 필요하다' 등이니 속았다는 생각에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36] (註 452) 당저(當宁) : 현재의 임금을 가리키는 말. 본래는 임금이 조회 때에 서 있는 곳을 말한다. 《예기(禮記)》 곡례(曲禮).[37] 요약하자면 "열심히 나라 멸망시키고 갑자기 왕 그만하겠다는데 아주 훌륭한 생각이다. 근데 왜들 시답잖은 핑계로 말렸냐. 말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매우 안타깝다" 라는 뜻이다. 보다보다 열받은 사관의 심정이 드러난다.[38] 이런 일을 억지로 벌이면 어떻게 되는지는 비슷한 시기 도요토미 히데츠구 숙청이 여실히 보여준다. 권위가 흔들리던 선조와 달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권위와 실권 모두 꽉 잡고 있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지만, 결국 이 참사로 민심 이반이 일어나고 어린 후계자는 조처를 하지 못해 외부의 적에게 기회를 주었다.[39] 서강대학교 계승범 역사학 교수[40] 그러니 이후 문제삼은 살제에서 폐모로 이어지는 일련의 비극은 어디까지나 광해군이 지고 가야할 책임이자 숙명이다.[41] 당시 정현룡(鄭見龍)이 군사 1,325명, 항왜(降倭) 25명을 동원하여 반격을 가해 역수의 부락을 공격, 266명의 수급을 베었고, 투정내(投丁乃) 등이 추장으로 있는 두만강변의 부락도 공격하여 60명의 수급을 베었다.[42] 곤양군수로 이순신 아래서 백의종군 했다. 효종의 북벌을 상징하는 무인 이완의 부친.[43] 동원이강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다.[44] 조선인민군이 선조에게 얼마나 악감정을 가졌는지 알 만한 대목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선조는 악질적인 반동 전제군주이기 때문이다.[45] 선조왕릉의 카카오맵 별점은 왜 1.4인가 (이명지의 IT뷰어)[46] 전라 감사가 치계(馳啓)하였다. "영암(靈巖)·강진(康津)·해남(海南) 세 고을은 양영(兩營) 사이에 끼여 있는 데다가 제주가 곧장 갈 수 있는 길목의 요충지여서 공부(貢賦)가 다른 고을보다 갑절이나 많습니다. 특히 을묘 왜변(乙卯倭變)을 겪은 뒤로는 방비에 대한 제반 일이 매우 많아 백성들이 심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세 고을에는 녹미(鹿尾)·녹설(鹿舌)·쾌포(快脯)가 생산되지 않으니 장록(獐鹿)이 많이 생산되는 제주에 옮겨 정하게 하소서. 교서관의 책지(冊紙)와 장흥고(長興庫)의 견양지(見樣紙)는 정공 도감(正供都監)018)[102] 으로 하여금 일이 덜한 내륙 지방으로 옮겨 마련하게 하소서." (선조 4년 9월 12일)[47] 반면에 선조는 때로는 동인을, 때로는 서인을 지지하며 대립을 이용했다. 국왕이 개혁의지가 부족하고 명확한 국정목표나 개혁의 원칙을 제시하지 않는 상태에서,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고자 할 때, 신하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깊어지고 고착화되어갔다. 선조는 성종처럼 교화라는 정치비전을 목표로 내걸고 서로 대립하는 세력을 중재하지 않았다. 또한 조광조 일파의 희생을 바탕으로 훈구세력과 정치적 타협을 시도했던 중종처럼 어느 한쪽 세력에 힘을 실어주지도 않았다. 만약 그가 동서분당 초기에 명확한 정치비전과 원칙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신하들 간의 대립을 조정하였다면,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개인적 원한이 당쟁으로 귀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서분당과 선조의 리더십: 당쟁의 기원에 관한 재해석>[48]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설치하였다. 이준경(李逡慶) 등이 건의하여 국(局)을 개설하고 상밀하게 의논함으로써 대납(代納)의 간람(奸濫)한 폐단을 없애야 한다는 청에 따라 설치한 것으로, 삼공(三公)이 주관하고 식견 있는 조사(朝士)를 선임하여 낭속(郞屬)으로 삼았다. 처음에는 폐단을 없애고 백성에게 이익을 주기 위하여 설치했던 것인데, 상의 뜻이 전례를 따르기에만 힘쓰고 대신들 역시 경장(更張)을 싫어해서 단지 문서로 필삭(筆削)하며 감정(勘定)만 하였으므로, 결국 아무 이익도 없었다. (선조수정 3년 11월 1일)[49] 조칙(詔勅)을 맞이하는 습의(習儀)를 1차는 8일에, 2차는 13일에 할 것으로 개정하여 부표(付標)해서 아뢰었다. 상이 우성전(禹性傳)이 아뢴 바에 따라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혁파하였다. (선조 5년 9월 30일)[50] 며칠 전에 수찬 우성전(禹性傳)이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혁파할 것을 청하여 상이 따랐는데, 오늘 대간이 혁파하지 말고 시의(時宜)에 합당한 것을 가려 정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선조 5년 10월 6일)[51]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의 유능한 인재를 알아보는 눈은 상당히 뛰어났으며 실제로 그 인재들은 이순신 외에도 다방면에서 많은 공로를 남겼다.[103][104] 군사와 첩보에서도 많은 인재들을 긁어모아서 후대인 광해군인조 때까지도 그나마 쓸만한 실무자들은 선조가 직접 발탁해둔 케이스일 정도로 인재의 등용과 배치에 있어서 유능했다. 그 유명한 이순신을 중령급에서 중장급으로 파격적인 인사이동을 시킨 인물이다. 물론 원균이 말아먹고 복귀시켰을때 소장급으로 원복시킨 찌질한 면도 있다. 권율 또한 선조의 파격적인 발탁이 있었기에 활약할 수 있었다.[105][52] 광해군 시기는 경기도 외에도 최초로 임시적인 공물작미(貢物作米)들이 광역단위로 시행되기도 했는데 선조 40년 정미년에 이루어진 공물작미(貢物作米)의 근거라고 알려진 기사[106]는 광해 9년 정사년의 오기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즉 광해 9년 정사년에 충청전라 해읍에서 공물작미(貢物作米)가 실시된 것이다. 이충(李沖)은 선조 대에 호조판서가 아닌 광해 대에 호조판서이고 병진년은 정사년 바로 전해이다. 병진년 이후 납입할 충청전라 해읍의 공물을 정사년에 작미(作米)해서 납입할 것을 광해군이 결재했다는 기사이다. 광해군 의문의 1승 이충(李沖)이 호조판서로 있을때 실제로 했었던 다음의 발언[107]을 참고하라[53] 하는 짓은 딱 중종 같은 암군인데 막상 중종보다 제대로 한 것이[108] 많은가 하면 중종이 명군으로 보일 지경이니 그렇지도 않은 것이 문제다.[54] 결국 군량도 뜯고 공물도 또 뜯는 식으로[109]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애초에 군량 자체도 못 모았다.[110] 사기를 치려다 제대로 치지도 못한 셈이다.[55]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설치하였다. 이준경(李逡慶) 등이 건의하여 국(局)을 개설하고 상밀하게 의논함으로써 대납(代納)의 간람(奸濫)한 폐단을 없애야 한다는 청에 따라 설치한 것으로, 삼공(三公)이 주관하고 식견 있는 조사(朝士)를 선임하여 낭속(郞屬)으로 삼았다. 처음에는 폐단을 없애고 백성에게 이익을 주기 위하여 설치했던 것인데, 상의 뜻이 전례를 따르기에만 힘쓰고 대신들 역시 경장(更張)을 싫어해서 단지 문서로 필삭(筆削)하며 감정(勘定)만 하였으므로, 결국 아무 이익도 없었다. (선조수정 3년 11월 1일)[56] 반면에 선조는 때로는 동인을, 때로는 서인을 지지하며 대립을 이용했다. 국왕이 개혁의지가 부족하고 명확한 국정목표나 개혁의 원칙을 제시하지 않는 상태에서,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고자 할 때, 신하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깊어지고 고착화되어갔다. 선조는 성종처럼 교화라는 정치비전을 목표로 내걸고 서로 대립하는 세력을 중재하지 않았다. 또한 조광조 일파의 희생을 바탕으로 훈구세력과 정치적 타협을 시도했던 중종처럼 어느 한쪽 세력에 힘을 실어주지도 않았다. 만약 그가 동서분당 초기에 명확한 정치비전과 원칙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신하들 간의 대립을 조정하였다면,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개인적 원한이 당쟁으로 귀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서분당과 선조의 리더십: 당쟁의 기원에 관한 재해석>[57] 사림세력의 집권 이후 조정은 이전보다 덜 부패했을지 몰라도, 국정 운영 및 현안에 대한 해결 능력이 더 향상되거나 효율적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림의 집권 이후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나타난 ‘동서분당’은 그러한 비효율이 표현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선조 대 당쟁의 양상과 전개 양상 이이를 중심으로>[58] 선조(조선)/평가[59] 전란 전에는 기축옥사 그리고 전란 후에는 칠천량 해전 등.[60] 匹夫; 신분이 낮고 보잘것없는 남자.[61] 업적이 없는 것이야 관대하게 넘어가 줘서 그렇다고 치더라도 조선 정부의 행정적인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조선이라는 국가 전체의 가난만을, 그것도 심지어 수백 년 전의 고려와 비교하며 한탄하는 그 유명한 망언을 보면[111] 도첩제 존폐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은 연산군만도[112] 머리는 좋기라도 한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정책적 성과를 내는 능력은 하다못해 중종명종 부자보다 낫다고 할 수도 없고 출범 이후 아무런 일도 제대로 못해본 정공도감(正供都監)을 스스로 날려처먹은 것을 보면 이정청(釐整廳) 설치 그리고 이정절목(釐整節目) 도출까지는 어떻게 이뤄낸 철종만도 한참 못하다. 그나마도 앞서 언급한 왕들조차 전혀 명군 축에 못 드는 범부 수준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머리를 따지기 이전에 그냥 사람 자체가 왕으로서 거의 전적으로 문제해결력이 없다시피 무능했는데 전제군주제 사회라서 자동으로 왕 자리를 처먹은 폐혜가 아닌지 의심을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다.[62] 그나마 왜란 종결 후 여민휴식(與民休息)이라는 기조를 내세워 토지 복구, 국가 재정 감축, 세금 감면 등을 행하기는 했으나 당장의 성과를 낼 수 있는 기발한 정책을 내놓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후 현종 대에 숙종 대에 입안절수(立案折受) 규제강화 같은 선조 대에 규제완화의 부작용[113][114]들을 수습해야 했던만큼 세부계획에 있어서 치밀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장기적으로 성과를 내기에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이거나 하는 대안을 선조 대에 제시한 것도 아니었다. 또한 이후에 실시된 대동법 같이 국가의 구조적 문제를 직접 건드리는 대안을 제시하고 제대로 실시한 적은 선조 대에 전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을 고상하게 돌려서 이것을 원칙으로 간주하겠다고 승인했을 뿐이었다. 한마디로 선조라는 왕이 집권한 동안에는 무엇인가 실질적인 효과를 가져온 개선책이 실시되고 성과를 낸 적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전란 전에는 원칙이 없었고 전란 후에는 그나마 여민휴식(與民休息) 같은 그것 자체로는 합리적인 원칙을 제시하기는 했으나 세부계획이 뻔하고 허술해서 민간의 자생능력에 대부분 의지하는 것이 사실상 전부였다.[63] 반면에 선조는 때로는 동인을, 때로는 서인을 지지하며 대립을 이용했다. 국왕이 개혁의지가 부족하고 명확한 국정목표나 개혁의 원칙을 제시하지 않는 상태에서,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고자 할 때, 신하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깊어지고 고착화되어갔다. 선조는 성종처럼 교화라는 정치비전을 목표로 내걸고 서로 대립하는 세력을 중재하지 않았다. 또한 조광조 일파의 희생을 바탕으로 훈구세력과 정치적 타협을 시도했던 중종처럼 어느 한쪽 세력에 힘을 실어주지도 않았다. 만약 그가 동서분당 초기에 명확한 정치비전과 원칙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신하들 간의 대립을 조정하였다면,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개인적 원한이 당쟁으로 귀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서분당과 선조의 리더십: 당쟁의 기원에 관한 재해석>[64] 오히려 명군이라는 괴평가가 나오기도 하는 전란 전의 집권기가 더 그러한 경향이 있다. 성종25년 vs 선조25년 두개의 태평성대[65] 임해군순화군만 보더라도 자식을 계도하고 꾸짖기는커녕 무턱대고 감싸고 돌기만 해서 결국 강간살인을 밥 먹듯 저지르는 싸이코들로 만들어 버렸다. 게다가 정식 후계자이자 그나마 왕자 노릇은 하고 있던 광해군을 자기 자식이면서도 시기해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면서 후계 구도를 어그러트릴 뻔하는 등 후계를 굳건히 해야 하는 유교 사회에서의 임금이 해야 할 역할을 대놓고 방기하였다. 이 정도면 의도적으로 조선 종묘에 분탕을 치기 위해 패악질을 부리는 것인가 싶을 지경이다.[B] 영창대군이 영성군보다 약 9개월 정도 일찍 태어났다.[67] 장남 임해군은 자신의 개인 노비들을 무장시킨 뒤 여기저기 돌아다녀 사람들에게서 땅을 갈취했으며, 갑부 상인에게는 죄를 무함하여 때리고 매질하다가 뇌물을 주면 '잘못을 뉘우칠 생각이 있구나' 라고 말하면서 석방했다. 게다가 수천마리의 거위오리를 기르면서 매일 아침 이 거위와 오리들을 논 밭으로 내몰았는데 이 거위와 오리들은 논과 밭을 헤짚고 다니면서 먼지를 일으키고 쌀을 쪼아먹었는데 그 논의 농부들은 그 거위와 오리의 주인이 주인인지라 암소리 못해야만 했다. 그리고 여기에 불만을 내지 않았어도 되려 임해군이 불만을 드러내 그 농부를 벌했다. 또한 남의 아내 중 생긴 게 괜찮으면 그 아내의 남편을 장살로 죽인 뒤 그 아내를 자신의 노비와 강제로 결혼시켰다. 게다가 시주를 받으러 다니는 승려들에게 노략질을 했으며 그리고 살인을 하면 자신이 죽인 사람의 아내를 반드시 노비와 결혼시켜서 고발을 못하게 막았다. 선조 36년 8월, 임해군은 도승지 유희서를 자기 노비들로 강도를 시켜서 죽이고 그 아내를 강간한 후 강도인 김덕윤을 시켜 그 아내도 죽였다. 그런데 정작 심문을 하려고 김덕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김덕윤과 그 패거리들은 전부 죽었고 유희서의 아들 유일은 왕자 모독죄로 유배를 보냈으며 이 사건을 수사했던 사또 변양걸 역시 왕자 모독죄로 삭탈관직 후 감옥에 가뒀다. 선조가 붕어하고 그 후임 임금으로 동생인 광해군이 즉위하자 광해군은 임해군을 가택에 연금했으나 임해군은 여장을 하고 탈출하다가 잡혀서 도로 가택에 연금당했으며 이후 의문사당했다.[C] 정원군이 순화군보다 약 2개월 정도 일찍 태어났다.[69] 술만 마시면 괜히 사람을 죽이고 그 재산을 강도했다. 정원군은 순화군보다 머리가 좋았는지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여, 처남을 과거에 부정 합격시켜준 혐의로 사헌부에 고소를 당하기도 했으며, 병역 회피자를 돈을 받고 자신의 집에 숨겨주는 등 자신이 왕자라는 것을 최대한 이용해서 전횡을 일삼았다. 정원군의 권력이 얼마나 막강했던지, 정원군의 노비들이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양민들을 아무 이유 없이 때리고 다닐 정도였다. 각 왕자들에게 할당된 마부들은 직무유기를 일삼았는데 정원군의 마부에게 마차를 요청하면 정원군은 그 요청한 근무원들을 모질게 구타했다. 10일 초저녁에 정원군의 노비 7명이 창기를 끼고 하원군의 집을 지나가다가 하원군의 노비들과 싸움이 일어났는데 정원군의 노비들이 하원군의 가택에 침입해 마구 때려부수고 귀부인을 끌어내 개끌듯 끌고갔는데... 그게 바로 하원군의 부인인 남양군부인 홍씨였다. 그러니까 정원군은 자기 큰어머니의 머리 끄댕이를 움켜쥐고 땅바닥에 질질 끌고 갔던 것이다. 하원군은 선조의 큰 형으로 정원군에게는 큰아버지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정원군은 탄핵을 당했다.[C] 정원군이 순화군보다 약 2개월 정도 일찍 태어났다.[71]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선조 임금의 명으로 의병을 모으라고 했지만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는 그러기는 커녕 백성들을 학대하고 백성들에게 저지르는 행패가 침략군 장수인 가토 기요마사 따위 아득하게 능가할 정도로 잔악무도했다. 결국 백성들은 이 두 왕자들을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줬으며 가토 기요마사는 이 왕자들을 일본에 압송해서 이들은 1년이 조금 넘는 기간동안 일본에 있다가 귀국했다. 순화군은 일본에 있으면서 더욱 극악무도해졌는데 순화군의 비교 대상은 저 연산군도 뛰어넘고 조선에는 이런 악인이 없으며 저기 해릉양왕 정도는 되어야 순화군과 비교대상이었다. 순화군은 어렸을 적부터 주변의 동물들을 보기만 하면 반드시 죽여야만 직성이 풀렸으며, 매해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등 그 악행은 끝이 없었다. 이후 순화군은 의인왕후의 장례식장에서 의인왕후의 시종 궁녀를 강간하는 짓을 저질렀다. 선조는 이 혐의로 순화군을 수원으로 유배보냈는데, 선조 34년 2월 9일 순화군은 술을 나르는 노비를 재미삼아 구타했고, 2월 12일에는 노비를 벌거벗기고 결박한 뒤 해가 뜰 때까지 옷을 입히지 않았다. 장석을시와 굿을 하는 무당을 잡아 묶어두고 고문한 뒤 밤새도록 매달아 놓았다. 이 과정에서 순화군은 장석을시의 이빨을 위 9개, 아래 9개를 강제로 발치했고 무당도 이빨을 위 1개, 아래 1개를 강제로 발치했다. 얼마나 잔인하게 고문했는지 무당은 피가 목구멍을 막아 호흡곤란으로 사망했다. 순화군의 악행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수원에 있는 모든 사또들이 전부 도망가서 수원의 통치가 마비될 정도였다. 백성들도 사또를 따라 죄다 도망쳐서 그 거대한 수원이 허허벌판으로 바뀌었다. 이에 선조는 순화군을 다시 압송해서 자신의 저택에 감금했는데 순화군은 살인을 못하는 충격으로 풍을 맞아 사망했다.[72] 과부들을 능욕하고 백성들에게서 땅과 금품을 마구 갈취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괄에 의해 임금으로 옹립되었다가 이괄이 무악재에서 패했는데 흥안군을 미처 챙겨가지 못한 채 달아났고 그렇게 흥안군은 관군에게 잡혔는데 국문도 없이 즉결처분 당했다.[73] 인조보다 5살 연하의 숙부이긴 한데 조카인 인조조차 경평군을 실성한 사람 취급을 했을 정도로 인간성이 글러먹었다. 사람을 가두고 패는 악취미가 있었고, 형 흥안군과 함께 사대부에게 트집을 잡아 그 사대부의 집을 습격해 완전히 철거 수준으로 때려부쉈으며 노비를 가둬서 장살해버리기도 하고 자신의 귀중품을 몰래 숨긴 뒤 애꿎은 사람을 도둑으로 몰아 죽이고 재산을 강탈하는 등 행패가 장난이 아니었다.[B] 영창대군이 영성군보다 약 9개월 정도 일찍 태어났다.[75] 송강 정철의 조카이다.[76] 이 중에서 성인까지 성장한 건 세 명 뿐이다.[77] 경종은 아예 없어서 제외[78] 이후 고종 때가 되어서야 또다시 자식이 10명이 넘는 왕이 나온다.[79] (유머) 조선의 신문.jpg[80] 윤흥신이 그 중 한 사람으로 훗날 다대포 전투에서 목숨걸고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81] 心疾, 발작이나 혼절을 하고 감정 기복이 심한 증세로 추정. 조현병으로 추정하는 경우도 많다.[82] 다만 선조 말년에 정인홍이 이런행태에 열받아 진짜 양위하라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리자 선조가 격분한 걸 보면 정치적 쇼일 가능성이 더 높다[83] 시기 상으로도 광해군 치세에 있었던 싸움은 1622년(광해군 14년)에 일어난 일인데 반해, 지봉유설은 그보다 8년 전에 쓰인 책이다. 그래서 지봉유설에서 언급하는 사건이 광해군 시기의 일이었을 리는 없다. 참고로 이 해전은 종전처럼 잉글랜드 해적의 소행이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그 정체가 네덜란드 선박이었다는 설이 있다. 이에 관해서는 흥양 해전 문서를 참고할 것.[84] 칼레 해전의 주역인 그 드레이크다. 실제로 선조의 치세 기간에 드레이크의 사략함대가 태평양아메리카에서부터 서쪽으로 횡단하여 세계일주 항해를 하는 중이었으므로, 중간에 일본이나 조선 앞바다를 지나갔을 가능성도 있다.[85]선조실록》에서는 '마리이(魔離異)'라고 기록되어있다. 마링예이루는 본명이 아니고, 포르투갈어로 선원을 뜻하는 일반명사다.[86] 신라 시대나 고려 시대동로마 제국에서 추방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들이 한반도에 정착했다는 설은 있으나, 이를 입증할 만한 사료나 유물 등이 전무하다.[87] 다만, 《선조실록》에는 이들 흑인들의 출신국이 프랑스라고 잘못 기록되어 있다.[88] 한석봉은 조선 4대 명필로 꼽히는데다가 선조 자신부터가 한석봉 팬이라 한석봉에게 가평군수에 앉혀준 적도 있었다.[89] 인조효종이 선조 서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90] 의외로 촉빠였던 사람[91] 원균도 그렇고 원래 성격부터가 문제가 많았는데 마수들이 이성과 절제력을 없애자 숨겨왔던 본성이 튀어나와 부정적인 행동을 일삼았다고 묘사했다.[92] 한양을 등지고 피난하는 첫등장에서 흑호와 태을사자가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태을사자도 저사람은 마수가 아니였어도 본래부터 의심이 많고 음험한 인물이라고 평했고 흑호도 정말 저 인간이 싫다고 반응했다.[93] 원균의 경우 패전 후 도망치면서 마수가 떨어져나가면서 비로소 자신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깨닫고 절망 속에서 이순신에게 용서를 빌면서 최후를 맞이했지만 선조는 그런 거 없다.[94] 은동은 이 인간의 패악질 때문에 천계에 부여받은 권능을 써서 죽여버리려 한 게 한두 번이 아니고 태을사자조차 이에 대해 적극적인 반대를 못할 지경이었다. 한 번은 선조가 이순신의 누명을 빌미로 그를 압송하여 국문 후 죽이려 했을 때 분개하여 선조를 염라대왕의 비술(주문은 "저승의 명령이다!" 이 한마디면 그 즉시 사람이건 동물이건 혼백이 달아나버릴 정도의 위력이라고 한다)로 사살하려고 하였으나 태을사자의 "지금 상감을 없앤다고 이 난리가 끝날 것 같으냐?" 라는 만류에 간신히 참았고, 한 번은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려고 온 선조의 선전관을 두들겨 패 죽여버린 후 내친김에 선조를 다시 죽여버리려고 하였으나 은동 본인이 다시끔 간신히 참아넘겼다.[95] 오히려 기록을 통해서 실제로 비만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으로는 세종경종이 있다.[96] 2008년 SBS 드라마 <일지매>에서는 인조 역.[97]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순천부사 겸 이순신의 심복인 권준 역.[98] 실제로 기록상에 선조는 허준에게 중인이라는 신분임에도 정1품 보국숭록대부라는 작위를 내리려다 실패하는 등의 허준을 총애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이후 허준이 사망했을 때 광해군은 비로소 정1품 작위를 추증하였다. 물론 허준이 정1품 작위를 받을만큼 충분한 공적을 세운 것은 명약관화지만 이순신이 당시 정2품 정헌대부에 불과했던 것을 볼 때 신하를 대함에 있어 편차가 컸다는 것을 볼 수 있다.[99] 2006년 MBC 드라마 <>에서는 내관 역.[100] 선조보다 나이가 많은 신하도 예외는 없어서 하였소? 와 같은 체는 거의 보이지 않고 하였느냐? 하였는가? 라는 어체를 쓴다. 간혹 화를 낼 때 하였소? 라는 어투를 쓴다.[101] 당초 배우 조민기가 선조 역이었으나 제작진과의 마찰을 빚고 심지어 무단으로 촬영을 펑크내자 최철호로 변경되었다. 배우가 교체되면서 캐릭터의 성격도 달라졌는데 조민기의 선조는 의심이 많고 음험한 군주의 인상이라면 최철호의 선조는 말 그대로 찌질이. 훗날 이 이야기는 조민기가 미투 운동에 엮이면서 재조명되었는데 당시 들리는 말로는 조민기가 <불멸의 이순신> 촬영장에서 뚱한 표정만 짓고 있었으며 한번은 "어떻게 여자 한번 보기가 힘드냐? 내 평생 이렇게 여자없는 작품은 처음이다. 엑스트라 궁녀가 이뻐보일 지경이다."라고 한 적도 있다고 하며 궁녀 역할 엑스트라를 사진으로 찍어가려고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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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註 018) 정공 도감(正供都監) : 각 고을의 공물을 균등하게 징수하기 위하여 특별히 설치한 관직. 이이(李珥)의 《석담일기(石潭日記)》 선조(宣祖) 3년 11월 조(條)에 "정공 도감을 두었는데 이는 이준경(李浚慶) 등이 민폐를 구제하기 위하여 특별히 도감을 두어 삼공이 이를 관장하고 조정 선비로서 재주와 학식이 있는 사람을 뽑아 낭관에 충차하여 백성들을 이롭게 하려 한 것이다." 하였다.[103] 유교 사회에서 멸시받았던 의학에 관심을 가지고 허준 같은 인물을 지원해서 《동의보감(東醫寶鑑)》[115]의 편찬을 명했다.[104] 그리고 이원익과 같이 선조 시절에 중용받은 신하들은 이후의 왕조를 그나마 유지시켜주었던 여러 개혁안에 대해 탐색했으며 이원익은 결국 광해군[116] 즉위 직후 이후 백년간 개혁의 효시[117]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의 초안을 올림으로써 후대에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105] 이순신이야 본래 패기있는 젊은 무관이었다 쳐도 40이 넘어서 문과에 급제한 양반 자제를 무관으로 돌려 끝에는 도원수로 임명하는 것은 말 그대로 소설에서도 안 나올 기막힐 이야기다. 그러나 선조는 이걸 그대로 실행했고 권율은 선조의 기대에 부응했다.[106] 지난 정미년058)(註 058)(정미년 : 1607 선조 40년.) 에 이충(李沖)이 본조의 판서로 있을 때에 전라도와 공홍도 등의 바닷가 고을의 공물을 병진년059)(註 059)(병진년 : 1616 광해군 8년.) 이후의 것에 대해서 제사에 필요한 공상(供上)을 제외하고는 모두 작미(作米)하도록 하여 경비에 보태자는 일로 사유를 갖추어 입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광해 12년 6월 15일)[107] 공물을 작미(作米)하는 일에 있어서는, 이번에 본 호조에서 각사를 취사 선택해서 작미하거나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체 전의 규정에 의거해서 하였으며, 제향(祭享)과 어공(御供)에 관계되는 것은, 성상의 분부에 따라서 작미하는 가운데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광해 9년 3월 8일)[108] 성종 본받겠답시고 《동문선(東文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覧)》, 《대전속록(大典續錄)》 이것들을 각각각 《속동문선(續東文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이것들로 이른바 속찬증보(續撰增補)[118] 한 것 정도의 업적은 남겼다.[109] 비변사가 아뢰기를, "해주(海州) 16사(司)에서 납입할 공물을 이미 반감하였는데, 이제 만일 전수를 감해 준다면 경중(京中)에서 쓸 것도 부족할 것이 염려됩니다. 요역마저 감한다면 중국군의 지대(支待) 등에 관한 물자가 다른 데서는 나올 데가 없으니, 감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전(內殿)의 공상(供上)까지도 이미 인근의 관아에 나누어 보냈으니, 본주의 공물은 비록 반수만 감한다 하더라도 은휼(恩恤)을 입는 것이 많을 듯합니다." 하니, (선조 27년 11월 16일)[110] 그러나 이 대공수미법은 시행된 지 1년도 못되어 폐지되고 말았다. 징수한 쌀의 수량이 예정과는 달리 매우 적어서 군량 조달에 차질이 생겼을 뿐 아니라, 정부의 소요 물품을 구입하는 일도 여의치 못하여 수시로 원래의 현물로 징수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1. 대동법의 시행 > 1) 공납제의 변통과 대동법의 실시)[111] 그런데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우리 나라는 지역이 수천 리가 되지만 산천(山川)이 많이 차지하고 있어 생산되는 곳이 없다. 산에는 나무만 있고 물에는 돌만 있을 뿐이라서 중원(中原)에 비하면 1도(道)에도 미치지 못한다. (선조 38년 9월 28일)[112]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국가가 백성에게 중이 되는 것을 금하여, 그 도첩(度牒)이 없는 자는 모든 고을로 하여금 조사해 내서 공역(公役)에 배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중이 되는 것은 어찌 산간의 거친 밥과 나물국을 즐겨서이랴. 오로지 국가가 인정(人丁)을 하나도 빠짐없이 수색하여 비록 한 집안에 서너명의 인정(人丁)이 있더라도 다 군적(軍籍)에 기록하므로 집안에는 남은 장정이 없어서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이 때문에 생계의 이익이 적으므로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이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여름철에 더웁거나 비가 많이 와도 소민(小民)은 원망하고, 겨울철에 추워도 소민은 역시 원망하는 법이니, 백성을 다루기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 어려운 점을 미루어 평이한 길을 찾아내야 백성이 편안하다.’하였으니, 지금 백성으로 하여금 남은 장정을 가지고서 농사에 전력하게 하여 생계를 넉넉하게 만들어 주자면 어떤 길이 있겠는가?" 하매, (연산 2년 1월 3일)[113] 임진왜란 이후 절수 관행은 더욱 확대되었다. 선조는 임진왜란 중의 극심한 재정난 속에서 왕자와 공주에게 어전(漁箭)·염분(鹽盆)·시지(柴地) 등을 임시변통으로 떼 주었는데, 이를 절수로 표현하였다. 이후 이를 선례로 하여 왕실과 왕족에 대한 궁방전 절수가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궁방전은 일명 궁장토(宮庄土)·사궁장토(司宮庄土)라고도 하였다. 조선후기에 후비·왕자대군·왕자군·공주·옹주 등의 궁방에서 소유하거나 또는 수조권(收租權)을 가진 토지이다. 이는 궁방의 소요 경비와 그들이 죽은 뒤 제사를 받드는 명목으로 지급되었다. 절수(折受)[114] 임진왜란 이후 각 궁방은 광범위하게 존재하던 주인 없는 진황지와 한광지를 입안절수(立案折受)의 방식으로 불하를 받아 개간하였다. 즉, 정부가 각 궁방의 청원을 받아들여 주인 없는 토지를 떼 주어 개간하여 소유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경우 절수는 궁방에 토지소유권을 부여한 것이지만, 정부가 수조지(收租地)를 궁방에 할급하여 절수하도록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정부가 가졌던 일반 민전의 수조권을 궁방에 양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형성된 조선후기의 궁방전이 이른바 무토면세전이었다. 궁방전 절수가 급격히 확대되면서 민전 침탈 등 여러 문제점이 생겨났고, 정부 재정에도 점차 부담을 주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궁방전을 혁파하지는 못하고 더 이상 절수하지 않고 축소하는 수준에서 정리되었다. 그 결과가 『속대전』의 결수 제한으로 나타났다. 절수(折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