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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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第二次世界大戰 | World War II | ||
기간 | 1939년 9월 1일[1] ~ 1945년 9월 2일[2] (종전 후 D[dday(1945-09-02)]) |
장소 | 지구 전역[3] | |
원인 | 문서 참조 |
교전국 | ||||||
연합국 | 추축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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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 연합국의 승리, 추축국의 패전[4] | |||||
영향 | 초강대국 미국과 소련의 대두, 냉전 개막 현대의 국제정세 수립 및 유엔 창설 식민제국의 쇠퇴, 탈식민주의의 대두 핵무기와 원자력 시대의 도래 | |||||
피해 규모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373a3c,#ddd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연합군 사망자 | 추축군 사망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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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국 민간인 사망자 | 추축국 민간인 사망자 | |||||
45,000,000명 이상 | 4,000,000명 이상 | |||||
연합국 총 사망자 | 추축국 총 사망자 | |||||
61,000,000명 이상 | 12,000,000명 이상 | |||||
총합 50,000,000 ~ 80,000,000명[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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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은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의해 발발하여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일본 제국 3국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과, 이에 미국과 영국, 소련, 중화민국, 프랑스가 이끄는 연합국[9]이 맞서면서 1945년 일본 제국이 항복할 때까지 총 6년 동안 이어진 전쟁이다.[10]제1차 세계 대전 이후 21년 만에 일어난 세계 대전인 이 전쟁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으로, 미국과 소련이 새로운 초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만듦과 동시에 전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지금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전쟁으로 평가받는다.
2. 서론
제2차 세계 대전의 유럽 전선 전개[11] |
This morning the British Ambassador in Berlin handed the German Government a final note stating that unless we heard from them by 11 0'clock that they were prepared at once to withdraw their troops from Poland, a state of war would exist between us. I have to tell you now that no such undertaking has been received, and that consequently this country is at war with Germany.
오늘 아침 베를린 주재 영국 대사는 독일 정부에 11시까지 그들의 군대가 폴란드에서 후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소식이 없을 시, 양국 간의 전시 상태가 있을 것임을 알리는 최후 통첩을 전달하였습니다. 저는 지금 이 통첩에 대한 아무런 답신이 없었으며, 그 결과 우리 나라는 독일과의 전쟁에 돌입했음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의 대독일 선전포고.[12]
제2차 세계 대전은 대체로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발점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13]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자였던 독일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의 집권 이후 베르사유 조약의 준수를 거부하고[14] 급격한 군 재무장을 시행하며 범게르만주의 이념에 기반한 팽창주의적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독일은 폴란드 침공 이전부터 안슐루스와 뮌헨 협정 등으로 주변국들을 흡수하며 영국, 프랑스와 지속적인 마찰을 빚고 있었으며[15]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과 함께 추축국을 형성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세계 각지를 군사적으로 장악해갔다.오늘 아침 베를린 주재 영국 대사는 독일 정부에 11시까지 그들의 군대가 폴란드에서 후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소식이 없을 시, 양국 간의 전시 상태가 있을 것임을 알리는 최후 통첩을 전달하였습니다. 저는 지금 이 통첩에 대한 아무런 답신이 없었으며, 그 결과 우리 나라는 독일과의 전쟁에 돌입했음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의 대독일 선전포고.[12]
국제 질서를 뒤흔드는 격동 속에서 당시 전세계의 모든 강대국들이 전쟁에 개입해 연합국과 추축국이라는 상호적대적인 두 군사동맹이 생겨났다. 이 전쟁에서 공격 측이었던 추축국 진영은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3국이 이끌었으며, 방어와 반격 측이었던 연합국 진영은 미국, 영국, 소련, 중화민국, 프랑스 5국이 이끌었다.[16] 30개국 이상에서 수천만 명이 넘는 군인이 참전하고 유례 없는 수준의 물자와 자원이 총동원되었으나, 애초부터 사실상 연합국에 비해 추축국은 상대적으로 국력이 부족했다.[17] 제국주의 열강인 이탈리아 왕국이 생각보다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지 못하면서 추축국은 전쟁 초반부[18]의 빠른 승세 이후 정체되었으며, 특히 나치 독일의 성공적이지 못한 소련 침공과 일본의 기습으로 인한 미국의 참전이 결정타가 되면서 빠르게 몰락했다.
가장 먼저 졸전을 거듭하던 이탈리아 왕국이 종전보다 2년 앞서 베니토 무솔리니를 축출하고 항복해 연합국으로 진영을 바꾸었으며[19] 나치 독일은 연합국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서-동 양쪽에서 반격에 돌입하자 급격히 전황이 어두워졌다. 결국 독일은 1945년 봄 베를린 공방전에서 수도 베를린이 함락되던 중 아돌프 히틀러가 퓌러붕커에서 권총 자살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항복하였으며, 마침내 마지막 추축국이던 일본 제국도 미국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로 핵 폭격을 맞고 소련의 침공까지 겹치자 쇼와 덴노가 옥음방송을 통해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전쟁 이후 추축국의 전범을 처벌하기 위해 각각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과 극동국제군사재판이 실시되어 독일과 일본의 전범을 재판했고 이들 중 핵심적인 수괴들은 사형 선고를 받고 교수형을 당하였다.
총 5,000만 명 ~ 8,000만 명[20]의 인명이 희생되고 가공할 재산 피해를 발생시킨 이 전쟁으로 인해 오랜 시간 세계를 지배한 제국주의와 유럽의 식민 제국들은 완전히 몰락했다. 기존의 열강이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은 전쟁으로 완전히 박살나버렸고 승전한 최후의 대규모 식민제국인 대영제국 또한 대전에서 막대하게 소모된 국력으로 인해 세계 무대에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대영제국과 같이 식민지를 비교적 온건하게 놓아준 경우도 있었고 프랑스와 같이 전쟁까지 벌이며 악착같이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경우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식민 제국들은 패권을 상당수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미국과 소련이라는 새로운 초강대국들이 등장해 냉전과 현대 국제 정세의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역사상 최초로 사용된 핵무기는 전쟁사, 나아가 인류에게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가져다주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로도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현대의 국제정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확립된 질서를 배경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구 유럽식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적 파시즘은 이 전쟁을 기점으로 국제사회에서 대부분의 세를 잃어버린다.
3. 원인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세계 대전/원인 문서 참고하십시오.4. 발단
공개석상에서 연설하는 아돌프 히틀러 | 5.15 사건으로 암살된 이누카이 쓰요시 일본 총리 |
일반적으로 대공황에 따른 경제 위기로 부상한 파시즘과 이에 따른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반발 및 기존 세계 질서에서 만족할 만한 패권을 가지고 있지 않던 일본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의 보상심리가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결론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의 수습과 전후 정리 과정에서 현실과 미래를 예단하지 못한 이해당사자들의 인지부조화가 쌓이면서 터진 제1차 세계 대전의 연장선상에 있는 전쟁으로 보는 의견이 학계의 주류로 올라섰다. 이 문단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까지 세계가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4.1. 혼란한 독일과 나치의 집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이 잃은 영토 | 무리한 전쟁 배상금으로 인해 발생한 독일의 초인플레이션 |
폴란드 분할로 멸망한 폴란드가 갑자기 신생 국가로 독립해버리자, 독일은 발트해와 면한 해안 영토를 폴란드 회랑이라는 폴란드의 해안 영토로 빼앗기고, 독일 본토 지역과 동프로이센이 폴란드에게 가로막히게 되었다. 알자스-로렌과 같은 민감한 주요 요충지 또한 프랑스에게 넘겨야만 했다.[22]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라인란트는 명백한 독일의 영토인데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강제로 비무장화 되었고, 독일의 군대는 공군의 보유가 일체 금지되며, 10만 명이라는 극도로 제한된 규모만이 허용되었다.[23]
베르사유 조약은 또한 바이마르 공화국에게 금을 기준으로 1,320억 마르크를 20년 안에 전쟁 배상금으로 지불하라는 무리한 요구까지 포함하고 있었는데, 이는 전쟁으로 재정이 피폐해진 바이마르 공화국으로써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이었다. 영국 재무성을 대표하여 참가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비롯한 협상에 참여했던 경제학자들이 산출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불 가능액은 약 20억 달러(약 100억 마르크) 정도로 실제 배상금은 이에 13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배상금은 석탄과 목재와 같은 현물로도 배상이 가능했으나, 당시 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던 이러한 주요 원자재들이 전쟁 배상금으로 빠져나가자 독일의 공장들은 제대로된 기능을 할 수 없었고, 독일의 경제는 어려움을 겪으며 배상금 지불 능력은 계속 악화되어 갔다. 결국 1922년 연말 독일은 디폴트 상태에 빠졌으며 국가 규모의 부도로 인해 전쟁 배상금의 지불이 불가능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과 전쟁을 벌였던 프랑스와 벨기에는 배상금을 감면해주지 않았다.[24]
이들은 독일이 부강한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독일의 경제를 압박해야 된다고 생각했으며, 같은 협상국이던 영국과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25] 프랑스와 벨기에는 어떻게든 독일에 군사적, 경제적 제재를 부과하고자 하였다. 프랑스는 대전 중에 발생한 높은 적자로 고통받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경제를 안정화 시키기 위해서 독일의 경제적 부담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은채 배상금 지급을 받아내려 했다.
독일 시민과 총칼을 들고 있는 프랑스군 | 시내를 활보하는 프랑스군 전차들 |
독일 시민을 폭행하는 프랑스 군인들[26] |
프랑스군과 벨기에군이 루르를 점령하자 현지 독일인들은 상당히 반발했고 이들은 비폭력 저항과 시민 불복종 운동을 통해 프랑스와 벨기에에게 항의 의사를 나타냈다. 헌데 이에 대한 프랑스의 대응이 전세계적인 비난을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프랑스군이 독일 민간인들을 사보타주 혐의로 처형시켜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희생된 독일인들은 2년 동안 130명 가량으로 추정되고 있다.
유럽 한복판에서 평시에 외국의 민간인들을 처형한 이 사건이 일파만파 알려지자, 프랑스 정부는 맹렬한 국제적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독일을 동정하는 여론이 커지기 시작했으며, 협상국이던 영국과 미국도 프랑스를 비난하기에 이른다. 프랑스의 동맹국인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과 경제적으로 연계된 점과 프랑스의 이런 행동이 독일이 소련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게 만들 것[27]이라는 우려 때문에 점령에 반대했다. 이러한 국제적 외교문제와 경제적 문제를 가지고 있던 프랑스는 막대한 부채를 지고 있던 미국과 영국의 비난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독일의 배상금 부담을 완화시켜주는 도스 안에 찬성한 채 1925년 7월과 8월에 걸쳐 점령지에서 철수했다.
뮌헨 폭동 당시 하켄크로이츠 완장을 차고 있는 나치당원들 |
나라는 초인플레이션에 허덕이고 공산당이 허구한 날 폭동을 일으키며, 국가 안에서는 배후중상설이 돌아 시민들 간에 불신을 만들고, 외국의 군대가 전쟁 배상금 갚으라고 강도처럼 쳐들어와 자국 시민들을 처형하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에 많은 독일 국민들은 큰 실망과 분노를 느꼈다.[29] 이 사건은 독일 정치에서 기존 중도 좌파 성향의 독일 사회민주당과 중도 우파 성향의 독일 중앙당 양쪽에게 불신을 안겨주었으며, 우익~극우 정당의 형성을 가속화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아돌프 히틀러라는 뮌헨의 한 지역 정치인이 뮌헨 폭동을 통해 독일 전국 수준의 네임드 정치인으로 크게 부상하게 된다.
독일 국민들에게 연설하는 아돌프 히틀러[30] |
재판을 담당한 주심판사 게오르크 나이트하르트는 극우 민족주의 사상에 공감하는 인물이었고, 재판이 그의 정치적 텃밭이던 뮌헨에서 열린 덕에 방청객은 히틀러에 우호적인 사람들로 가득 찼다. 결국 이러한 점들이 겹쳐 히틀러는 금고 5년형을 선고받고, 편안한 옥중 생활을 즐기며 나의 투쟁을 옥중 집필하다가 8개월이 조금 지난 뒤 바이에른 주 정부에 의해 가석방 되었다.[31]
석방된 히틀러는 정치 노선을 바꾼다. 기존의 폭력적 쿠데타를 통한 정권 탈취라는 베니토 무솔리니식 방법론을 버리고 선거 등을 통해 합법적으로 권력을 거머쥐는 의회주의 노선을 채택하게 되었다. 즉, 독일 유권자에게 투표 받아서 집권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의외로 1929년까지 나치당은 전국적으로 큰 힘을 쓰지 못했는데, 독일의 경제가 차츰 회복되고 서방과의 관계가 안정화되가면서 어려운 경제와 외부의 적에 맞서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라는 나치당의 캐치프레이즈가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대공황기 미국의 주가 변화와 주요 국가의 실업률 |
이어진 1932년 독일 대통령 선거에서 히틀러는 당시 전쟁 영웅 출신의 거물 정치인이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상대로 36.7%의 득표율을 얻으며, 튼튼한 정치적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뒤 이은 1932년 7월 총선에서 나치당은 37.4%로 230석으로 마침내 원내 1당으로 등극했으며, 의회 해산으로 치러진 1933년 총선에서 44%라는 득표율을 얻은 뒤 의회 내 비나치 우파와 협력해 아돌프 히틀러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수권법을 통과시키며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에 죽음을 알렸다.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 결집한 인파들 | 히틀러의 초상화 |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를 부르는 나치당원들[32] |
4.2. 일본 제국과 중일전쟁
1914년 시점의 일본 제국 영토 |
그러나 대전의 종전 이후 유럽 국가들이 숨을 고르며 다시 생산력을 되찾자 유럽, 미국 등 서방에 비해 열등한 품질을 가진[33] 일본의 산업은 경쟁력을 잃고 수출이 축소되기 시작했고, 서구 열강들은 아시아의 새로운 열강으로 올라선 일본 제국을 서서히 견제하기 시작했다. 20년간 이어져오던 영일동맹은 깨져버렸고 열강들의 압박으로 조인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의해 해군 규모를 제한받게 되었다. 이와중에 닥친 관동 대지진은 일본의 주요 인구밀집지역이자 경제권인 수도권을 초토화시켜 일본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설상가상으로 1927년의 쇼와공황과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이 덮치자 일본 경제는 더욱 수렁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에 군부의 입김이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군 장교들에게 암살 당한 일본 총리 이누카이 쓰요시 | 만주를 집어삼키는 일본 제국 |
그러나 만주국에 대한 세계의 여론이 부정적으로 흐르자 군부는 국제연맹을 탈퇴하도록 정부를 압박하였고,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사실상 고립주의 외교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이 만주에서 일본군을 철수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급진파 장교들에게 암살당하고 후임으로 군인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가 총리가 되어 정당정치를 단절시키자 군부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황도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아라키 사다오 육군대신 | 통제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도조 히데키 내각총리대신 |
황도파를 상징하는 음악인 청년일본의 노래 |
황도파가 주장하던 쇼와 유신은 1930년대 극우 사상가들의 목표로, 일본의 부패한 기득권층을 처단하고 천황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자는 매우 국가주의적 사상이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일본에 만연하던 빈부격차와 사회불안을 내면에 담고 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은 대공황으로 말미암은 경제 악화, 미국의 1924년 이민법과 중국의 동북역치로 인해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대폭 상실하는 등 대외상 불안전화로 말미암아 군부 급진 세력이나 우익 단체를 중심으로 한때 좋았던 시절 메이지 유신의 정신 부흥과 천황의 친정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급속도로 높아졌다. 대외적으로는 서방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소련에 대한 공격을 주장했다.
통제파는 이러한 황도파의 주장에 반대했다. 이들은 군의 문민통제가 존중되고 입헌군주제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여긴 것은 물론 소련과 중국에 대한 외교적 입장도 정반대로 대립했다. 암살 당한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 이후 집권한 사이토 마코토 내각에서 황도파는 통제파에 밀려 서서히 중앙 정계에서 밀려났으며, 이로 인한 불만이 쌓이자 결국 1936년 2월 26일, 20대 청년 황도파 장교들이 주축이 되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2.26 사건)
2.26 사건 당시 진군하는 황도파 군인들 |
下士官兵ニ吿グ
하사관·병에게 고함
一、今カラデモ遲クナイカラ原隊ヘ歸レ
1.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자대로 복귀하라
二、抵抗スル者ハ全部逆賊デアルカラ射殺スル
2. 항거하는 자는 전부 역적이므로 사살한다
三、オ前達ノ父母兄弟ハ國賊トナルノデ皆泣イテオルゾ
3. 너희의 부모형제는 역적이 되어 모두 울고 있다
二月二十九日 戒嚴司令部
2월 29일 계엄 사령부
황도파 군인들의 투항을 독려하는 삐라
2.26 사건을 일어난 당시는 이미 황도파가 육군성 중앙을 장악한 통제파에 상당히 밀려난 때로, 항거한 황도파 장교들은 대게 20대의 소위부터 대위가 중심이 된 청년 장교들이었다. 이들은 초기 도쿄의 주요 정부 기관을 점거하고 사이토 마코토[34], 다카하시 고레키요[35], 스즈키 간타로[36] 등 일본 최고위층 인사들을 대거 습격해 대다수를 살해했다. 황도파의 최우선 목표였던 당시 현직 일본 총리인 오카다 게이스케는 겨우 이들을 피해 차량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37] 하사관·병에게 고함
一、今カラデモ遲クナイカラ原隊ヘ歸レ
1.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자대로 복귀하라
二、抵抗スル者ハ全部逆賊デアルカラ射殺スル
2. 항거하는 자는 전부 역적이므로 사살한다
三、オ前達ノ父母兄弟ハ國賊トナルノデ皆泣イテオルゾ
3. 너희의 부모형제는 역적이 되어 모두 울고 있다
二月二十九日 戒嚴司令部
2월 29일 계엄 사령부
황도파 군인들의 투항을 독려하는 삐라
그러나 가장 중요했던 쇼와 천황이 황도파의 반역 행위에 매우 격노하면서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처음에는 스스로의 부덕을 탓하며 당황하던 천황이었지만 스즈키 간타로를 비롯한 쇼와 덴노가 신임하는 주요 중신들이 쿠데타 군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중상을 입은 것이 결정적으로 쇼와 천황의 노여움을 초래하였다.[38] 2월 27일 천황 명의의 원대복귀 명령이 떨어졌고, 쇼와 유신을 외치던 황도파는 순식간에 명분을 잃고 혼란에 빠져 일부는 자결을 시도했다. 다음날 군부는 병력 23,841명을 투입하여 본격적인 무력 진압 태세에 돌입하였으며 육군 뿐만 아니라 해군 또한 해군 대장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가 살해 당한 것에 분노해 함대를 끌고와 진압에 참여했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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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당시 황도파 반란군을 설득하는 라디오 방송 |
이렇게 2·26 사건으로 황도파가 스스로 자멸해버리자 일본 군부 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한 통제파는 세계의 열강 각국에서의 집산주의 대두, 대공황에 대해 효용성을 나타낸 블록 경제에 대한 선망이 나타나면서 당초의 결성 목적・본분으로부터 천천히 빗나가 합법적으로 정부에 압력을 가하거나 자신들과 맞지 않는 정부의 외교 정책에 대해 "통수권 침범"을 방패로 공공연히 비협력적인 태도・행동을 취하는 군 파벌로 변해갔다. 이들을 근대적인 군비나 생산 기구의 정비에 근거하는 총력전에 대응한 고도국방국가를 구상했다.
루거우차오 사건을 통해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본격적으로 폭주하기 시작한 일본 제국은 아시아를 서구 열강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대동아공영권 정책에 기반하여 팽창주의, 군국주의적 행보를 이어갔고 이 과정에서 미국과의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이후 1940년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과의 삼국 동맹 조약 체결로 추축국의 일원이 된다.
5. 발발 과정
오스트리아가 독일에게 합병되었음을 선언하는 아돌프 히틀러 | 상하이 전투 당시 방독면을 쓰고 작전 중인 일본 해군 육전대 |
일본 제국은 내전으로 분열되고 약화된 중국을 노리며, 제국주의적 확장을 꾀하고 있었다. 이미 만주사변으로 만주가 일본에게 넘어갔으며, 구식 무기로 무장하고 부패로 물든 중국군은 도저히 일본군을 상대할 여력이 되어 보이지 않았다. 한편 이러한 일본 제국의 제국주의 팽창을 못마땅해하던 서방 국가들과 이미 대규모 식민지를 지닌 서구 열강이 후발주자인 자국의 성장을 억제하려 한다고 보는 일본 간의 대립은 심해져 갔다.
이 문단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불과 몇년 전, 세계가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5.1. 라인란트 재무장
베르사유 조약과 로카르노 조약 이후 독일의 영토 빨간 점선으로 그어진 부분이 독일이 잃은 영토와 라인란트 비무장지대다. |
라인란트의 비무장화는 승전국 중에서도 특히 프랑스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독일이 서부 이웃 국가[43]를 공격하는 것을 막고, 독일 서부 국경 전역이 사실상 무방비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독일이 만약 전쟁을 일으킨다면 프랑스의 파괴적인 공세에 귀중한 산업 역량이 쏠려 있는 서부 본토 대부분이 노출될 것이었다.
이 때문에 1933년 나치 집권 이전부터 많은 독일 엘리트들은 라인란트의 비무장 상태를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외교적으로 기회가 있을 때 재무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지만 독일의 분야를 막론한 엘리트들은 라인란트의 재무장이 1937년 이전에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인식은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고 나치 독일이 출범한 뒤로도 한동안 이어졌다.
스트레사 체제의 구성국(파랑) |
한편 그 다음해인 1935년 2월 26일, 나치 독일은 세간에 베르샤유 조약에 따라 금지되었던 자국의 공군인 루프트바페를 공개했다. 약 2주 뒤인 3월 16일에 이르러선 독일은 군 재무장을 대대적으로 공표하며 육군의 규모를 조약이 제한하고 있는 인원 이상으로 확대하고, 징병제를 시행하면서 베르사유 체제를 점점 대담하게 무시하게 된다. 독일의 팽창이 곧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이에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1935년 4월 14일, 이탈리아의 스트레사에 있는 마조레 호수에 모여 스트레사 전선이라는 대(對)독일 동맹을 체결하게 된다. 프랑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소련과의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하고,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은 독일 인근 동유럽 국가들과 동맹을 맺었다. 이론상으로 보면 독일은 사방으로 포위되어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프랑스는 이를 통해 독일 뿐만 아니라 소련의 동유럽 진입도 차단할 수 있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당시 군대를 시찰하는 베니토 무솔리니 | 이탈리아군의 에티오피아 침공 경로 |
이런 상황에서 영국은 독일에 대항하여 대규모 군대를 배치하는 것에 주저할 수밖에 없었고 독일-폴란드 불가침 조약을 체결해 독일과 폴란드간 긴장을 평화적으로 해결한 아돌프 히틀러를 외교적으로 타협이 가능한 인물이라 평가하기 시작했다. 결국 영국은 독일을 군사-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것 대신 1935년 6월 18일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베르사유 조약으로 묶여 있던 독일의 주력함 건조를 완전히 풀어주게 된다. 유일한 제한은 당시 세계 1위이던 영국 해군 전체 주력함들 총 배수량의 35%는 넘지 말라는 것 뿐이었다. 이는 독일의 재무장을 막자는 스트레사 전선의 근간을 뒤흔드는 조약이었고, 이탈리아는 영국의 무력함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에서는 이러한 스트레사 전선의 균열을 기회로 여겼다.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이 영국-이탈리아 관계에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전망해 에티오피아에 무기를 지원하며 장기전으로 끌고 가고 싶어했다. 독일은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에서 장기간 전쟁을 벌이게 되면 영국이 국제연맹에 이탈리아에 대한 제재를 가하도록 압력을 가하게 될 것이라 예상했고, 이후 영국-이탈리아 관계에 위기가 초래되면 독일이 영국에 실망한 이탈리아에게 접근해 베니토 무솔리니를 동맹으로 확보하고 스트레사 전선을 파괴해버릴 수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하는 베니토 무솔리니 |
마침내 1936년 3월 1일, 히틀러는 국제연맹이 이탈리아에 대한 석유 제재 관련 논의로 인해 에티오피아에 시선이 쏠린 틈을 노려 1936년 3월 7일 아침 독일 국방군 22,000명, 지역 경찰 14,000명을 라인란트에 진주시켰다. 그 날 히틀러는 독일 국회에서 라인란트가 재무장되었다고 발표했으며, 동시에 독일과 달리 세계 모든 국가에서는 자국 군대를 국토 내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베르사유 조약을 독일에 불공정한 것이라고 열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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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3월 27일[45] 독일 국민들에게 연설하는 아돌프 히틀러[46] |
당초 우려되었던 프랑스와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프랑스 내 여론은 라인란트 재무장에 대해 적대적이였지만 독일과의 전쟁을 주장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당시 프랑스는 지옥 같았던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전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곧 있을 총선에서 집권 내각에 커다란 악재로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또한 프랑스는 1935년 말부터 1936년 초까지 발생한 금융 위기로 인한 경제적 문제를 겪고 있었고, 독일 국방군을 필요 이상으로 과대평가하여 영국의 개입 없이는 독일이 자신들보다 우세하다는 오판을 했다. 실제 당시 독일군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수준이었는데 말이다.
폴란드,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같은 프랑스의 동맹국들도 대독일 강경 대응에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으며, 오직 체코슬로바키아만이 프랑스와 함께 대응하겠다고 할 뿐이었다. 스트레사 체제의 일원이였던 영국과 이탈리아 왕국도 프랑스에게 협조적이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 침공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국제연맹에서 자국에 대해 경제제재를 결의한 것에 대한 앙심으로 베니토 무솔리니가 직접 라인란트 재무장을 공개적으로 인정한다고 연설했다.
영국의 여론은 매우 친독적이였다. 영국 국민의 상당수는 히틀러가 위반했다는 베르사유 조약이 애초에 불공정하다는 점에 주목했으며, 영국이 이 불공정한 조약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할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 스탠리 볼드윈 영국 총리는 영국이 독일에 대한 군사 행동을 할 여유가 적고 여론 또한 전쟁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으며, 영국이 독일과 전쟁을 벌이면 일본 제국이 영국의 아시아 식민지를 노릴 수 있다는 점도 우려되었다.
프랑스가 할 수 있었던 건 국제연맹에 독일에 대한 경제제재를 결의하는 것 밖에 없었으나, 이에 찬성한 나라는 오직 1935년 체결된 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을 지키려고 했던 소련 뿐이었다. 다른 대부분의 국가들에게 독일에게 경제 제재를 가한다는 건 아직 대공황의 그늘에서 못 벗어난 자국 경제에 스스로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주저할 뿐이었다. 소련 역시 한 달 뒤인 1936년 4월에 독일 - 소련간의 무역협정이 체결된 점에서 보듯 어디까지나 프랑스에 대한 외교적인 제스처에 불과했고 실제로 독일을 완전히 적대시할 생각은 없었다.
결국 프랑스는 대독 강경 대응을 포기하고 라인란트 재무장을 인정했다. 라인란트 재무장의 성공이 시사하는 바는 여러가지 있었다. 독일이 정말로 베르사유 조약의 족쇄를 벗어던질 수 있다는 것이었고, 생각보다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게 강경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범국민적인 지지를 받으며 정치적으로 안정되어갔고, 곧 이어 그의 고향이자 또 다른 패전국이던 오스트리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6. 전쟁 당시 전황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letter-spacing: -0.9px; word-break: keep-all" {{{#000,#999 | <colbgcolor=#536349> 연표 | 사건 |
1936년 |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 |
1937년 | 7월 중일전쟁 발발(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 |
1938년 |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 |
1939년 |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 |
1940년 |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 |
1941년 |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 |
1942년 |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 |
1943년 |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 |
1944년 |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 |
1945년 |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 |
일자별 전황 |
유럽 전선에서의 추축국 최대 판도[47][48] | 태평양 전쟁에서의 일본 제국 최대 판도[49][50] |
1945년 5월 9일 나치 독일 항복 당시 |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 항복 당시 |
7. 연표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세계 대전/연표 문서 참고하십시오.8. 주요 전선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세계 대전/전선 문서 참고하십시오.9. 참전국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세계 대전/참전국 문서 참고하십시오.10. 피해와 전쟁 범죄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세계 대전/피해와 전쟁 범죄 문서 참고하십시오.11. 전후 연합국
연합국의 수는 매우 많지만 우선 이 문단에서는 추축국들과 가장 적극적으로 교전하고 이후 상임이사국에 자리에 오른 영국, 소련, 미국, 프랑스, 중화민국 국민정부를 중심으로 서술한다. 영국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
이 시기 영국은 더 이상 식민제국을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52] 식민지들을 차례로 독립시켜 대영제국을 점진적으로 해체하고, 이를 영연방이라는 국제 기구로 재편했다. 이 영연방을 통해 영국은 영연방 왕국 구성국들은 물론, 자국에 우호적인 과거 피식민 국가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영국의 전후 복구는 이 영연방 각국의 지원과 협력, 영연방 경제 연합을 통해 이뤄졌다. 이 시기 영연방 각국 사람들이 영국으로 건너가 부족한 일손을 채우기도 했는데, 이는 1972년 전까지 영연방 각국 사이에 자유 무역과 자유 이주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영연방이라는 기구와,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의 배려, 그리고 영국 문화의 소프트 파워 덕분에 영국은 초강대국에서 물러난 오늘날까지 어느 정도 세계적 영향력을 유지한다.
미국 United States of America |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을 패망시킨 덕에 미국은 태평양 전역과 서유럽의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고 기존 유럽의 열강들을 포함해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압도적인 경제력과 군사력, 핵무기까지 얻은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력 하에 놓였다. 해리 트루먼 행정부 시기 미국은 전세계적인 전후 복구와 경제 부흥에 힘쓰며 서방 세계의 정치적 지도자로 떠올랐으며, 군사는 물론 경제와 문화적으로도 헤게모니를 가지게 된다.
이때를 기점으로 국제 사회에 대한 미국의 입김은 기존 제국주의 열강들을 제치고 남을 수준으로 막강해졌으며 사실상 유엔을 비롯한 현재의 국제 질서가 정립되었다. 그러나 동유럽의 또 다른 초강대국인 소련하고 정치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해 곧 냉전이 이어졌다.
소련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
이 중에는 제정 시절에는 타국의 영토였던 지역들도 있었다. 동부 갈리치아나 체코슬로바키아를 해방하면서 얻은 카르파티아 루테니아, 그리고 베사라비아를 반환받을 때 얻은 북부 부코비나는 모두 옛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다. 그리고 한때 독일 제국의 영토였던 클라이페다(메멜)와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후에도 건사하는 데 성공했던 동프로이센 북부까지 차지했으며 나아가 극동 전선에서도 비교적 짧은 참전치고 남사할린의 재수복과 전 쿠릴 열도의 점령이라는 상당한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소련은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2,000 ~ 2,70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지만 동구권과 초기 중공, 북한, 북베트남 등 유라시아 각지에 다수의 위성국을 세워 상당한 국제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미국과 함께 초강대국이라는 타이틀을 차지하는 등 승리의 열매는 달콤했다. 이 당시 유럽에는 소련을 견제할 수 있는 국가가 없었다.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점령 당해 나라 자체가 너무 약해졌고, 전통적으로 강력했던 군사력도 크게 꺾였다. 영국은 사정이 그나마 나았으나 섬나라 특성상 육군이 소련군에 크게 밀렸는데, 소련군은 이에 반해 종전 시점에 13전선군이라는 어마어마한 군사력을 보유했다. 당시 서유럽은 미국의 도움 없이는 소련군을 상대로 자국 방어조차 거의 불가능했다.
이후 1948년부터 1991년 붕괴 전까지, 소련은 냉전 체제 하에서 공산주의 진영의 중심으로서 미국과 대립했다. 비록 2,000~2,700만의 인민들이 죽고 국토가 초토화되었지만, 그 대가로 얻은 것은 세계 양대 패권국의 지위였다.
프랑스 République française |
프랑스는 다른 4개국에 비해서는 프랑스 침공에서 독일에게 6주만에 털리고 망명정부로 전락해버려 전쟁에서의 기여도가 낮다. 하지만 2차대전 말기 프랑스 전체가 전쟁터가 되어 사망자는 60여만명으로 미영보다 많다. 전후 전장이 된 국토를 수습하고 전후 복구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비시 프랑스 부역자들에 대한 강도 높은 전범재판이 이루어졌다.
과거의 정치적인 영향력과 소련 견제를 의식한 미국, 영국의 도움 덕분에 유엔 상임이사국 자리는 확보했지만 크게 떨어진 위신과 정치적 영향력을 되찾겠다는 일념하에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개발을 강행하고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여러 차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알제리 전쟁)
결국 독립 전쟁들에서의 패배와 수에즈 전쟁에서 영국, 이스라엘과 함께 제대로 망신 당한 것으로 인해 프랑스는 식민지의 연쇄적인 독립 요구에 직면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사회적으로는 드골주의와 사민주의의 극렬한 좌우대립과 허무주의를 겪었다. 하지만 이런 대립 속에서도 프랑스 특유의 보편적 복지 체제를 형성하였다.
이 시기 프랑스는 전후 경제 복구와 유럽의 평화 체제 정착 및 또 다른 전쟁의 발발을 막기 위해 유럽 각국과의 협력 필요성을 느꼈고, 훗날 유럽 연합으로까지 이어지게 되는 최초의 유럽 공동체인 유럽석탄철강 공동체를 형성하여 오늘날 독일과 함께 유럽 공동체를 이끄는 두 주축이 된다.
중화민국 中華民國 |
중화민국은 1,500 ~ 2,000만의 사망자가 발생해 소련 다음으로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지만, 연합국 가담과 중일전쟁의 최종 승전을 통해 몰락한 일본 제국을 대체하여 아시아의 주도 국가로 자리매김할 뻔했다. 그러나 간신히 봉합했던 국공내전이 재발발하고 끝내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기존의 국민정부가 타이완 섬으로 국부천대하면서 철수하였다.
중국은 아직까지도 공산당 중심의 항일로 일본을 물리쳤다는 영화 등을 만들지만, 학계에는 중국공산당의 항일 운동은 보잘것 없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주로 국민당 계열의 군대가 일본군과 박 터지게 싸우는 동안 뒤에서 세력이나 키웠다는 비판도 듣는다. 현재는 중국공산당이 얼마나 기여를 했든 어쨌든 국민당이 중일전쟁에서 중화민국의 주력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1949년 대륙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으나 공산 중국 역시 곧 미국과 소련 양쪽에 밉보여 1970년대까지 고립되었다. 그 동안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 제사해 운동을 통해 국력을 소모했으나 중화민국이 UN에서 쫓겨난 자리를 또 다시 채운 후 야심차게 등장한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으로 중국은 허울뿐인 공산주의 국가로 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5개국이라 평가받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 그리고 중화민국을 대체한 중국[54]은 UN 상임이사국으로서 현재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11.1. 기타 주요국
- 폴란드 (Rzeczpospolita Polska)
폴란드는 이후 소련군과 그에 협력한 폴란드 공산당에 넘어가 공산화되어 폴란드 인민 공화국으로 소련의 위성국화 된다. 소련과 폴란드 공산당은 이 과정에서 파시스트들과 싸웠던 망명정부 및 폴란드 국내군 소속 장교들을 서방의 간첩으로 몰아 처형하는 희대의 만행을 저질렀다.
이후 소련의 간섭을 겪다가 이에 반발한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집권하고 후반기 경기 침체로 쫓겨나는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다가 레흐 바웬사의 자유 노조 운동으로 마침내 1989년 공산당 독재가 종식되었다. 폴란드는 냉전이 끝나자마자 바로 NATO와 유럽 연합에 가입하여 서방 세계에 복귀했다.
이후 소련의 간섭을 겪다가 이에 반발한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집권하고 후반기 경기 침체로 쫓겨나는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다가 레흐 바웬사의 자유 노조 운동으로 마침내 1989년 공산당 독재가 종식되었다. 폴란드는 냉전이 끝나자마자 바로 NATO와 유럽 연합에 가입하여 서방 세계에 복귀했다.
- 체코슬로바키아 (Česko-Slovenská Republika)
체코슬로바키아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뮌헨 협정 당시 독일에게 빼앗긴 국권과 수테텐란트 지방의 영유권을 나치의 패망으로 다시금 되찾았으며 망명정부의 활약으로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뒤이어 들어온 소련군과 소련이라는 외세를 등에 업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 의해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했다.
스탈린 사후 공산 체제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면서 알렉산데르 둡체크 등 개혁파 세력들이 집권하고 정치 민주화를 요구하는 반정부 운동이 일어났으나 소련이 체코에 개입하고 둡체크가 실각하면서 실패했다. 그러나 소련군의 반정부 운동 진압 이후에도 바츨라프 하벨 등이 이끄는 반공 세력들의 반정부 투쟁이 이후에도 지속해서 이어졌고 1989년 동유럽 자유화 바람을 틈타 벨벳 혁명이 일어나게 되어 야케스 공산당 서기장과 후사크 대통령이 퇴진하고 이후 실시된 민주 다당제 대선에서 반공 운동 지도자였던 하벨이 당선되면서 민주화를 이룩했다.
1993년 벨벳 이혼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갈라졌고 양국 모두 EU와 NATO에 가입했다.
스탈린 사후 공산 체제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면서 알렉산데르 둡체크 등 개혁파 세력들이 집권하고 정치 민주화를 요구하는 반정부 운동이 일어났으나 소련이 체코에 개입하고 둡체크가 실각하면서 실패했다. 그러나 소련군의 반정부 운동 진압 이후에도 바츨라프 하벨 등이 이끄는 반공 세력들의 반정부 투쟁이 이후에도 지속해서 이어졌고 1989년 동유럽 자유화 바람을 틈타 벨벳 혁명이 일어나게 되어 야케스 공산당 서기장과 후사크 대통령이 퇴진하고 이후 실시된 민주 다당제 대선에서 반공 운동 지도자였던 하벨이 당선되면서 민주화를 이룩했다.
1993년 벨벳 이혼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갈라졌고 양국 모두 EU와 NATO에 가입했다.
- 네덜란드 (Koninkrijk der Nederlanden)
네덜란드는 추축국에서 해방된 이후 연합국 자격을 얻었지만,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에서 독립하려고 하자 인도네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한물간 식민주의에 대한 거부와 공산주의의 확산을 경계하던 미국의 경제지원 관련 압박으로 인도네시아에서 철수, 인도네시아에게 상당량의 돈만 받고 독립을 승인했다.[55]
이후엔 수리남과 같은 해외 식민지가 모조리 독립하고 아루바 등 소수만 남긴 채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함께 유럽연합에 가입하고 현재는 서유럽의 중견 선진국으로 남았다. 그래도 전범재판에 대한 발언권을 확보하여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전쟁 범죄자들을 처벌할 수 있었다.
이후엔 수리남과 같은 해외 식민지가 모조리 독립하고 아루바 등 소수만 남긴 채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함께 유럽연합에 가입하고 현재는 서유럽의 중견 선진국으로 남았다. 그래도 전범재판에 대한 발언권을 확보하여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전쟁 범죄자들을 처벌할 수 있었다.
- 벨기에 (Koninkrijk België) / 룩셈부르크 (Groussherzogtum Lëtzebuerg)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지난번 1차 대전에 이어서 또 한 번 나치 독일에게 침공당하는 두 번째 수모를 겪는다. 프랑스로 가는 길목이라는 빌미로 히틀러가 중립국으로 있던 두 나라를 즉시 침공하라는 명령으로 독일군 부대들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영토에 침입하여 공격하였고 벨기에는 국왕이 직접 항복 선언을 하면서 패배를 인정했고 룩셈부르크도 또 한 번 중립을 표방했지만 나치 독일에게 짓밟힌다.
그나마 1차 대전 때 침공은 했지만 룩셈부르크 정부 행정은 보장해주었던 옛 독일 제국과는 달리 히틀러는 룩셈부르크 전역을 '독일국 룩셈부르크 주(州)'로 강제 편입시켰고 프랑스어와 룩셈부르크어를 쓰지 못하도록 금지했으며 룩셈부르크 청년들을 독일군으로 강제 징집령을 내려서 전쟁터로 내몰았다. 벨기에는 전후 해방되었지만 1960년 식민지로 있던 아프리카 콩고를 독립시켜주게 되나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콩고인 학살 및 노역 행적이 밝혀지면서 논란의 대상으로 올랐다. 룩셈부르크는 전후 복구를 거쳐서 유럽의 금융 허브로 통하게 되면서 유럽의 부국(富國)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나마 1차 대전 때 침공은 했지만 룩셈부르크 정부 행정은 보장해주었던 옛 독일 제국과는 달리 히틀러는 룩셈부르크 전역을 '독일국 룩셈부르크 주(州)'로 강제 편입시켰고 프랑스어와 룩셈부르크어를 쓰지 못하도록 금지했으며 룩셈부르크 청년들을 독일군으로 강제 징집령을 내려서 전쟁터로 내몰았다. 벨기에는 전후 해방되었지만 1960년 식민지로 있던 아프리카 콩고를 독립시켜주게 되나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콩고인 학살 및 노역 행적이 밝혀지면서 논란의 대상으로 올랐다. 룩셈부르크는 전후 복구를 거쳐서 유럽의 금융 허브로 통하게 되면서 유럽의 부국(富國)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나치 독일에게 잇따라 침공된 노르웨이와 덴마크는 1945년 5월 나치 독일의 패망 및 히틀러의 사망으로 연합국에 의해 해방이 되었다. 와중에 덴마크의 동군연합 아이슬란드 왕국은 덴마크가 항복하자 영국이 침공해 점령했고 종전 1년 전인 1944년 아돌프 히틀러가 아이슬란드의 독립을 승인하면서 완전히 독립했다.
전쟁 이후 노르웨이와 함께 중립을 포기하고 1945년에 UN에 가입하였으며 NATO에도 가입하였다. 해방 전 노르웨이와 덴마크 청년들이 독일군에 강제 징집 및 징병되어서 전쟁터로 나가서 독일군 신분으로 전사 및 부상을 입거나 연합국의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전쟁 이후 노르웨이와 함께 중립을 포기하고 1945년에 UN에 가입하였으며 NATO에도 가입하였다. 해방 전 노르웨이와 덴마크 청년들이 독일군에 강제 징집 및 징병되어서 전쟁터로 나가서 독일군 신분으로 전사 및 부상을 입거나 연합국의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 그리스 (Βασίλειον τῆς Ἑλλάδος)
그리스는 이탈리아 왕국군의 침공을 받았지만 반격 끝에 몰아내는 데 성공하게 되나 곧바로 나치 독일이 이탈리아를 돕기 위해 침공하자 이탈리아와 독일군에게 점령당했다가 1943년에 점령국이었던 이탈리아가 추축국에서 이탈, 연합국으로 전향하고, 1945년에 독일에서 히틀러가 베를린 공방전 끝에 자살하고 나치 정권이 패망하면서 해방되었다.
이후 튀르키예를 제외한 주변국이 모두 소련의 위성국이 되고 공산화되면서 그리스 내에서도 공산반란자들에 의해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연합국의 도움으로 물리쳤다. 그리스는 남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소련의 영향을 면했으며, 남유럽 국가 중 최초이자 유일하게 NATO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이후 튀르키예를 제외한 주변국이 모두 소련의 위성국이 되고 공산화되면서 그리스 내에서도 공산반란자들에 의해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연합국의 도움으로 물리쳤다. 그리스는 남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소련의 영향을 면했으며, 남유럽 국가 중 최초이자 유일하게 NATO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 튀르키예 (Türkiye Cumhuriyeti)
오스만 제국의 멸망과 공화정 전환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참패 후유증과 초대 대통령이던 아타튀르크가 더 이상 전쟁에 개입하지 말라고 하여 전간기와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중립국으로 있었다.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공하고 이어서 나치 독일이 유고슬라비아를 침략하는 와중에도 동쪽으로 아시아 및 중동으로 가는 길목 역할을 하는 지리적 특성도 있어서 중립을 유지하며 침공을 면하였다. 그러나 1944년 미국과 연합국의 참전 요구에 따라 중립을 포기하고 연합국에 참가, 나치 독일과 적대 관계를 맺고 1945년 UN에 원년 멤버로 가입했다.
12. 전후 추축국
추축국에서도 제2차 세계 대전을 통해 엄청난 사상자와 피해가 발생했다.추축국은 당시 기준으로도 심각한 만행을 자행했기 때문에 전후 추축국의 기존 정부는 대부분 해체되었는데 특히 추축국의 양대 주도 세력이었던 독일과 일본은 연합군에 영토 전체가 점령당하였다.
UN 헌장에는 지금까지도 구 추축국이 다시 전쟁을 준비하는 등의 불온한 움직임이 보일 경우 '연합국이나 기타 국가가 선전 포고 없이 바로 기습적으로 전쟁을 개시해도 무방하다'는 조항이 남아있다.[56] 현재는 물론 사문화된 상태이다.
나치 독일 Großdeutsches Reich |
나치 독일은 1945년 4월 말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한 후, 카를 되니츠가 후임자가 된 다음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하고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하며 전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되니츠 정부가 해산당하면서 국가가 일시적으로 소멸했고 전쟁을 주도하고 전쟁범죄를 저지른 나치의 수뇌부들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을 통해 처벌되었다.
전쟁기간 7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으며, 1938년에 독일에 합병됐던 오스트리아와도 합병 이전으로 돌아가 독일에서 분리되었고 주데텐란트를 비롯한 나치 시기의 점령지는 물론 국토 중앙에 오데르-나이세 선이 그어지며 그 이동에 위치한 동방 영토[57]들의 영유권을 상실했고[58] 침략전쟁에 대한 반동으로 많은 동부 독일인들이 고향에서 추방당해 다수의 실향민들이 발생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기준으로 111,765㎢의 영토를 상실했으며, 독일제국 기준으로[59] 1, 2차대전 모두 합쳐 183,835㎢ 를 상실하여 현재 독일의 영토는 357,022km² 다.
더군다나 그나마 남은 국토마저 동서로 분단되어 서쪽에는 독일연방공화국, 동쪽에는 독일민주공화국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였다. 그나마 독일군은 원래 해체될 예정이었지만 냉전으로 인해 독일이 냉전의 최전방이 되어버리면서 각각 동서독의 군대로 재탄생했다.
독일 분할 점령. |
서독 건국 초기에는 전범재판에서 처벌받은 나치군의 최고위 인사들을 제외하곤 1950, 60년대까지 나치의 잔존 세력들이 그대로 요직에 올라 있어 옛 나치 잔재 청산이 굉장히 미진했으나 68운동을 계기로 진정한 의미의 탈나치화가 시작되었다. 처벌받지 않은 전범급 인사들을 잇따라 체포하여 처벌하는 등 나치 잔재 청산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전쟁 당시 독일로부터 피해를 입었던 유럽 이웃 국가들에게도 사과와 배상을 했다.
다만 집시 학살이나 과거 독일 제국 시기 식민지였던 나미비아,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의 국가들 그리고 그리스, 불가리아, 몰타, 구 유고권 국가와 같은 독일과 거리가 먼 유럽 내 2차 대전 피해 국가들에 대한 사과가 미진하였다는 비판이 있다. 이를 의식한 듯 2016년에는 나미비아에서 저지른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 2023년에는 탄자니아에서 저지른 무분가족과 응긴도족 학살에 대해서 나마비아와 탄자니아에게 사과하였으며 2차 대전 당시 나치에게 피해를 입은 유럽 먼 나라들에게 대한 사과도 점차 고려하고 있는 중이다.
러시아와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꽤 남아있어 여전히 불편한 부분이 있는데, 냉전으로 자본주의 진영에 속했던 서독은 공산주의 진영인 소련과는 애초에 관계 회복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주변국과의 신뢰를 회복한 결과로 전승국들로부터 동서 통일을 승인받을 수 있었으며 오늘날에는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자 EU의 실질적인 리더로서 국제무대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탈리아 왕국 Regno d'Italia |
이탈리아 왕국은 1943년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이 붕괴한 후에 신정부가 들어서서 연합국에 항복하여 가담하였고 행정을 연합군이 세운 군정부에 위탁하였다. 이탈리아의 신정부는 무솔리니가 북쪽으로 도망가서 세운 정부와 독일군을 상대로 1945년 5월까지 전투를 벌였다.
일찍 항복하고 연합국으로 돌아섰기에 3대 추축국 중 사망자와 전후 처벌과 영토 손실이 가장 적었다. 약 50여만명이 사망했으며, 에티오피아, 리비아, 에게해 도서 등 식민지는 물론, 이스트리아 반도와 달마티아의 자다르, 프랑스와의 접경지 등 본토의 일부를 상실했다.
아프리카 식민지 제외하고 본토 기준으로 310,190km² 에서 302,068km² 로 줄어들어 8,122km² 영토를 상실했다. 1만도 채 안 되기 때문에 11만이 넘는 독일[60]이나 4만에 달하는 일본[61]에 비하면 영토 손실이 아주 적다.
1946년 국민투표를 통해 통일 이후 80년 이상 유지하던 입헌군주제를 폐지하고 입헌공화정으로 전환하며 추축국의 과거를 털어내고 이미지 전환에 성공하였다. 무솔리니 정권에 의해 1936년에 탈퇴했던 국제연맹의 후신 UN에 1955년에 공식 가입하여 국제정치에 복귀하였고 서독, 일본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도 전후 빠른 경제성장을 달성해 현재 G7의 일원이자 강대국의 최소 정도의 국력을 보유하는 준강대국이 되었다.
일본 제국 大日本帝國 |
일본 제국은 파시스트 이탈리아, 나치 독일이 각각 1943년과 1945년에 항복하며 추축국 세력들이 궤멸, 붕괴된 이후에도 1억 옥쇄를 결의하며 항복을 거부, 끝까지 연합국에게 저항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의 참전으로 감당할 수 없는 피해와 손실이 예상되자 쇼와 덴노의 명의로 항복을 선언하였다.
전쟁 기간 2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으며, 이후 군부 지도자들은 극동국제군사재판을 통해 처벌받았고 중국과 동남아 내 점령지, 만주국과 몽강국 등 괴뢰국, 남양 군도 등 위임통치령, 관동주 등 조차지, 톈진과 칭다오 등 조계지, 한반도와 대만섬 등 식민지(외지), 심지어 본토(내지)의 일부였던 남사할린(일본명 가라후토)과 쿠릴 열도(일본명 치시마 열도)까지 전부 영구히 상실했다.[62]
잃은 영토는 식민지 제외하고 본토 기준으로 남사할린, 쿠릴 열도의 북방 4섬 정도로 약 41,044㎢. 그래서 현재 남은 영토는 377,975km² 다.
미국이 일본 민심을 고려한 덕택에 천황제는 유지할 수 있었으나 일본군이 해체되어 자위대로 개편되었고 평화헌법과 서구 민주주의를 채택했으며 화족제를 폐지해야 했다.
그러나 미국의 역코스 정책과 1950년에 발발한 6.25 전쟁으로 경제적 부흥의 계기를 마련한 일본은 급격한 경제 발전으로 인해 1960년대에는 서유럽 강국들을, 1980년대에는 공산권의 초강대국 소련마저 제치며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한편 이러한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반세기 이상 자유민주당이 득세하면서 보수 세력이 민주적으로 정치 권력의 주류가 되었고,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사회가 우경화되었다.
따라서 한일기본조약 등으로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을 하고 호소카와[63], 무라야마 등 역대 일본 총리들의 담화를 통해 공식적인 사과도 했으나 이러한 노력이 무색하게도 정치인, 특히 우익 계열 정치인들의 과거 전쟁범죄에 반성하려 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주변국과 영토 분쟁도 존재한다.[64] 그래도 전후 경제성장으로 인해 오랫동안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군림했으며 현재도 세계 4위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주요 강대국 중 하나로 인정받는다.
12.1. 기타 주요국
- 헝가리 왕국 (Magyar Királyság)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의 헝가리 영토를 되찾고자 참전했으나 소련에 점령된 이후 패전 이전까지 얻은 땅들을 모조리 상실하고 공산화되어 헝가리 인민공화국이 된다.
스탈린 사후 소련에서 스탈린 격하 운동이 일어나자 총리 너지 임레는 개혁 개방을 시도했으나, 소련의 세력권에서 뛰쳐 나가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소련이 개입해 반소 시민군을 진압했다. 소련이 대신 세운 총리 카다르 야노시는 조심스럽게 개혁을 추진하여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성장해갔고, 동유럽 혁명으로 공산 정권이 붕괴하고 민주정부가 수립되었다. 1999년 NATO에 가입하고 2004년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
스탈린 사후 소련에서 스탈린 격하 운동이 일어나자 총리 너지 임레는 개혁 개방을 시도했으나, 소련의 세력권에서 뛰쳐 나가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소련이 개입해 반소 시민군을 진압했다. 소련이 대신 세운 총리 카다르 야노시는 조심스럽게 개혁을 추진하여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성장해갔고, 동유럽 혁명으로 공산 정권이 붕괴하고 민주정부가 수립되었다. 1999년 NATO에 가입하고 2004년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
- 루마니아 왕국 (Regatul României)
추축국의 패색이 짙어지자 미하이 1세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추축국에서 탈퇴하고 코민테른으로 들어왔으나 전후 공산화되어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으며 소련에게 빼앗긴 베사라비아 지역을 영구히 상실했다. 하지만 소련에게 점령당한 건 아니었던지라 1950년대 후반부터 소련과 점차 갈라지더니 1960년대에는 독자 노선을 타 서방과의 관계 개선과 중소결렬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등 탈소련 행보를 보였다.
동유럽 혁명으로 민주화된 이후 NATO, EU에 가입했다. 나치 독일의 압력으로 인해 추축국으로 들어와야 했다면서 독일에게 2차 대전과 관련된 과거사 사과를 요구하고 있으나 루마니아는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함께 유대인 학살도 벌이고, 독소 전쟁 당시 우크라이나 오데사 등 구 소련 일대의 도시를 점령, 군정 통치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 등 전쟁범죄도 저지르며 이탈리아 왕국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내는 등 추축국의 일원으로써 나치 독일의 전쟁 수행을 열심히 도운 전적으로 인해 독일은 사과하지 않고 있다.
- 불가리아 왕국 (Царство България)
추축국의 패색이 짙어지자 독일과의 수교, 동맹 관계를 끊고 연합국의 편을 들었으나 전후 공산화되어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이 되었다. 예전부터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였던 나라였기에 소련이 원자재 등을 저렴하게 공급해주기도 했고 불가리아 역시 소련의 농업 성장 집중 요구를 그대로 따라 농업국가가 되었다.
동유럽 혁명 이후 민주화된 지금도 물가는 저렴한 편이며, 민주화 이후 NATO와 EU에 가입했다. 불가리아는 가입 과정이 나치의 강압이었으며 독소전쟁에 대한 참전을 거부하고, 나치로부터 유태인과 집시인들을 보호해주는 등 반독 움직임을 보였고, 독일의 강압으로 추축군에 참여해야 했던 배경으로 자국이 전쟁의 피해국가라고 주장하며 독일에게 사과와 피해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나치의 강압에 추축국으로 참여해야 했던 실제 역사와는 별개로 자칫 독일이 불가리아의 요구를 수용하고 사과와 배상을 했다간 그리스 침공 당시 독일과 이탈리아, 불가리아에게 모국이 침공, 3분할 점령을 당했던 그리스에서 격렬하게 반발할 가능성이 높은데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독일과 지정학적으로 거리가 멀리 떨어진 불가리아에 대한 이해관계나 이득이 전무하기 때문에 독일은 불가리아에서 요구하는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과거사 사과와 배상을 모두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나치의 강압에 추축국으로 참여해야 했던 실제 역사와는 별개로 자칫 독일이 불가리아의 요구를 수용하고 사과와 배상을 했다간 그리스 침공 당시 독일과 이탈리아, 불가리아에게 모국이 침공, 3분할 점령을 당했던 그리스에서 격렬하게 반발할 가능성이 높은데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독일과 지정학적으로 거리가 멀리 떨어진 불가리아에 대한 이해관계나 이득이 전무하기 때문에 독일은 불가리아에서 요구하는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과거사 사과와 배상을 모두 거부하고 있다.
기존 추축국 구성국들은 전쟁 과정에서 국토 황폐화와 산업 파괴 등의 전쟁 피해를 크게 입은 이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 나라에서는 여전히 나치 독일과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시선이 여타 유럽 국가들 못지않게 좋지 않은 편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은 여타 유럽 국가들처럼 불가리아, 헝가리, 루마니아에서도 신생아의 명칭을 히틀러나 괴벨스, 힘러 등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 지도부의 명칭으로 짓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여기에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는 나치의 위협에 추축군으로 강제 참전했던 전쟁의 피해국가라고 주장하며 독일의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해 반대하거나, 현 독일이 폴란드와 체코 등 나치에게 피해를 입었던 주변 피해국에게 매년 사과하는 것처럼 자기 나라들에게도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과거사 사과를 해줄 것을 독일 정부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나치의 압력에 의해 합류한 것과 별개로 추축국이었던 역사적 배경이 있기 때문에 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피점령국이었던 폴란드, 체코와 주권국가였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는 역사적 상황이 전혀 다르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게 사과하지 않고 있다.
정작 독일은 2차 대전 발발 직전 1938년 국민 절대다수가 독일과의 자발적 합병에 찬성하여 자국에 병합하고 독일령 기간 내내 독일과 함께 나치의 전체주의 사상에 동조했던 오스트리아나 프랑코 정권 시기 친추축국 국가였었던 스페인에게는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국민군을 지원하면서 스페인에 파병된 독일 국방군이 저지른 게르니카 폭격 등 전쟁범죄 만행에 대해서는 루마니아, 불가리아와는 달리 공식적인 사과를 했는데, 이렇듯 독일은 추축국이고 연합국이고 상관없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 피해를 입었던 발칸반도 지역 국가들에 대해서는 사과나 피해배상금 지급 문제에 인색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또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었던 EU와 NATO 내의 유럽 회원 국가들 사이에서도 2차 대전 당시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는 나치 독일과 함께 전범국으로 봐야 하냐, 아니면 나치의 위협에 어쩔 수 없이 추축군으로 끌려가야 했던 정치적 피해국으로 봐야 하냐는 논란과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가 독일로부터 과거사 사과 밎 전쟁 피해 배상을 받을 자격이 있냐는 여부도 나라들마다 갈린다.
우선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독일과 이탈리아, 불가리아의 침공을 받아 3분할 점령을 당했던 그리스는 2차 대전 당시 독일과 군사 동맹을 맺고 전쟁에 참여했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가 무슨 전쟁 피해국이냐며 사과나 전쟁 피해배상을 독일로부터 요구할 자격이 전혀 없는 후안무치한 전범국가라며 터무니 없는 제2차 대전과 관련된 사과와 피해배상을 독일에 요구하기 전에 당시 발칸반도, 동유럽 일대에서 추축군으로 저질렀던 일들을 먼저 인정하고 사과하라며 비난하고 있다.
반면 제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게만 피해를 입었고,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게 피해를 입은 적이 없었던 폴란드와 체코, 노르웨이, 덴마크, 프랑스는 추축국이었어도 나치 독일의 강압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동맹을 맺었던 정치적인 피해국이 분명하다며 사과, 배상을 요구할 자격이 있거나, 전쟁 피해 배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사과만이라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두둔하기도 한다.[65]
이렇듯 현재 각 유럽 국가들마다 "나치와 동맹관계를 맺고 이웃국가들의 땅을 강탈하려던 전범국가가 독일에게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사과를 요구할 자격이 없다", "추축국이었어도 나치 독일의 강압에 추축국으로 끌려갔던 피해국가인 만큼 사과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양쪽 입장이 서로 팽팽하게 갈리는 상황이며 유럽 연합 내부에서는 그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 3개국들 모두에게 독일이 공식 사과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13. 영향
13.1. 인권 존중과 현대 윤리의 대두
민간인과 군인 사망자를 모두 합하여 약 5,000만~7,0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사망했다.[66] 이 전쟁의 여파로 서구권에서는 그동안 사회 주류였던 집단주의 사상이 쇠퇴하고 개인주의 사상이 대두되었다.[67] 전쟁 기간 중 벌어졌던 끔찍한 대량 학살과 전쟁 범죄 등에 대한 전 인류적 반성이 행해지면서 인권 경시 문제에 대한 심각성이 본격적으로 지적되고 인권 의식이 크게 향상되었으며, 개개인의 존엄성과 자유 의지 등을 존중하는 정책들이 적극적으로 대두되었고, 그와 동시에 개인의 심리에 초점을 맞춘 심리학 분야가 크게 발전했다. 외부적으로는 프랑스 샤를 드 골 정권을 중심으로 한 전후 공안 정국에 저항하고 사회적, 역사적 모순을 타파하려는 움직임이 여론의 지지를 얻었고, 이는 신좌파가 주축이 되어 발생한 정치, 사회, 문화적 운동인 68 운동을 촉발시켰다.2차 대전은 참정권이 개선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자치령 또는 식민지들은 본국에 대한 희생의 대가로 자치권의 확대를 요구했으며, 이를 계기로 자치령에 본국과 동등한 입법활동이 보장되거나 많은 식민지가 독립하는 등 변화가 생겼다(후술할 현대 국가 탄생 문단 참조). 대부분 국가의 여성 참정권 역시 이 시기를 기점으로 크게 향상되었는데, 총력전의 여파로 여군 병과가 연구되었고[68], 특히 남성이 징병되면서 산업 공백을 충당하기 위해 여성 노동자가 증가하였으며[69][70] 여성이 경제활동을 담당하면서 여론을 형성하고 권리 확대를 요구하게 되었다[71]. 이러한 배경은 전후 페미니즘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72]. 유색인종의 참정권 또한 비슷한 시기에 크게 확대되어, 미국에서는 1965년 연방 투표권법이 가결되어 유색인종의 참정권이 완전히 보장되었다.
13.2. 반전 의식의 강화와 민주적 전쟁 억제
총력전을 겪고 난 사람들은 이제 전쟁이 군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이 겪는 것[73]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전체주의와 제국주의는 과거의 위상을 잃고 몰락했다.[74] 또한 세계 대전은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는 인식을 전 세계인들에게 각인했다.2차 대전은 히로시마-나가사키로 대표되는 신무기 실험장의 각축전이었으며 이것들은 민간인이라고 전혀 피해가지 않았다.[75] 현대무기를 동원한 초토화작전이나 핵폭탄의 공포까지 목격한 국민들과 각국 정부는 이제는 확실하게 이긴다 해도 대충 배상금으로 뭉개버릴 수 없을 만큼 전쟁은 치를 대가가 큰 아주 비싼 수단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76][77]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냉전으로 인한 대립 구도가 전면전으로 발전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했다.[78] 물론 강대국들 간의 무력대결이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고, 약소국 사이의 대리전으로 대체되었다.
13.3. 현대 국제정세의 확립
모호하게 전쟁이 종결되어 불안정한 질서가 유지되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전간기와는 달리 제2차 세계 대전은 비교적 선악 구도가 명확했고,[79][80] 결정적으로 확실하게 승패가 갈렸기 때문에[81] 전후의 역사와 세계 질서가 완전히 결정되었다.특히 2차 대전으로 인한 가장 중요한 국제적 영향은 세계 패권의 중심이 기존의 서유럽에서 새롭게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과 소련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이 무렵까지 세계의 중심이었던 대영제국은 바로 이 시기부터 본격적인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이는 전쟁 중 유럽 대륙 전역이 히틀러의 수하에 떨어지며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시작하자, 영국의 경제가 피폐해지면서 식민지 관리에도 어려움을 겪은 것이 한 원인이었다. 1941년 미국이 참전한 이후 전장의 주도권마저 미군에 넘겨주었다.
특히 1941년 미국의 대추축국 선전 포고 전까지는 영국이 단독으로 대독일전을 수행했기 때문에 경제적 타격이 컸다. 특히 1940년에는 수도 런던이 대공습을 당하거나 영국의 생명줄인 해상 보급로에 중대한 위협이 가해지는 등 인도라는 거대 식민지가 아니었다면 생존조차 힘들었을 정도로 휘청였으며, 미국이 참전하면서 숨을 돌렸으나 미국이 주도권을 쥐고 전쟁을 이끌면서 영국은 미국의 보조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당시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게끔 많은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미국이 참전을 결정했을 때 영국에 상당히 무리가 있는 요구를 했었음에도 처칠은 이를 수용했다. 루즈벨트 재선 후, 영국의 지원 요청에 대해 미국이 했던 제안(미국측의 영국 정부 회계 감사, 금괴 요구, 영국 국영기업 소유권을 헐값에 미국으로 이전)만 봐도 2차 대전 당시의 영국과 미국의 관계와 영국의 처참한 입장을 한눈에 보여준다. 결국 2차 대전을 끝으로 대영제국의 패권은 무너졌으며, 서유럽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미국과 소련의 냉전 체제가 본격화되었다.
미국과 소련 이 두 나라는 제2차 세계 대전을 주도한 양대 세력이었다. 소련은 독소전쟁 때문에 자국 국민 40%가 동원되어 나치 독일에 대항하여 14%의 인구가 희생되는 처참한 사투를 벌였다. 이로 인해 훗날 베를린 공방전의 주인공으로 떠올랐으며 서방 세계에 대해 자신들의 지분을 당당히 요구할 수 있었고 미국 역시 태평양 전쟁에서 홀로 일본 제국을 상대하며 제국을 패망시켰고 유럽의 서부전선에서도 노르망디 작전을 성공시키고 프랑스를 해방시키며 전쟁에서 거대한 지분을 가지게 된다. 다만 미국은 자신만이 핵무기를 가지고 압도적 초강대국이 될 거라 생각하고 소련을 만만히 봤지만, 소련은 얼마 안 가 핵무기를 개발해냄으로서 양대 초강대국으로 미국에게 뒤떨어지지 않음을 명백하게 드러내었다.
냉전 체제가 시작되면서 미국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 진영에, 소련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진영에 각각 여러 국가들을 가담시키며 쌍방 간 세력 경쟁을 본격화했고, 이를 바탕으로 미국과 소련은 지구를 넘어 우주에서까지 체제 경쟁에서 승리하고 극초강대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패권 다툼을 벌였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벨기에 등의 다른 서유럽 제국주의 국가들도 막대한 전쟁 피해와 두 초강대국의 압박으로 인해 식민지를 청산하고 물러섰으며[82] 이에 따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과거 유럽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였던 수많은 독립 국가들이 새로 탄생하였다. 한국의 경우에도 카이로 선언에서 명시된 대로 8.15 광복을 맞이했다. 즉, 이미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쇠퇴하던 제국주의 풍조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완전히 막을 내렸다.
간혹 대리전의 형태로 전쟁이 발생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각국은 과거 국제연맹의 문제점과 과오를 되새겨 이와 같은 참혹한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세계적 통합과 협력 및 평화를 위해 유엔이라는 새로운 국제기구를 창설하였고 이는 지금도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친다.
13.4. 현대 국가의 탄생
제국주의 식민지 확장을 주도하던 유럽의 각 열강들이 1차대전때 받은 큰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기도 전에 다시 더 큰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면서, 도저히 유지가 불가능한 가지고 있었던 식민지들이 독립하게 되면서 현재 존재하는 대부분의 국민국가들을 직간접적으로 만들어낸 전쟁이기도 했다. 예컨대 현재의 대한민국으로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8.15 광복 또한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하지만 이 과정이 순탄치는 않아서 식민지를 평화적인 방식으로 독립시킨 국가들이[83] 있는가 하면, 자기들의 황폐해진 경제 재건을 식민지 빨대 꽂아서 할 생각을 포기하지 못한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포기 못해 2차 대전이 끝나고도 또다시 전쟁을[84] 치르기도 하였다. 또한 하나의 식민지로 묶여 있었던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 민족, 종교, 이념 등에 따른 갈등이 일어나 독립 후에도 인위적으로 그은 국경선과 민족갈등 등 내부 갈등을 수습하지 못해 다시 많은 혼란이 생기기도 했다.[85] 무엇보다, 제국주의가 채 마감되기도 전에 실질적으로 시작한 미소 냉전 구도로 인해 전세계가 다시 미국편이나 소련편이냐 제3세계냐를 가지고 선택의 길을 가느라 전후 혼란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나라들도 숱하다.[86]
이 전쟁을 기점으로 수많은 국가의 정치 체제나 정책이 바뀌었고 국가나 정권이 멸망하거나 재탄생하기도 했다. 독일 제3제국,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은 전쟁에 패배하고 나라가 연합국에 점령당해 멸망한 뒤 새로운 정부가 탄생했다. 독일은 나라가 둘로 분단되어 자유 진영의 서독과 공산 진영의 동독으로 나뉘어졌다가 탈냉전 이후에 통일됐으며, 이탈리아는 공화정으로 변모했고, 일본은 GHQ를 통해 민주주의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헝가리와 루마니아, 불가리아는 소련과 반파시즘 노선을 내걸며 게릴라 전을 하던 자국내 공산당 세력들의 영향하에 공산주의 체제가 수립되었다가 1989년 동유럽 혁명으로 민주 공화정으로 체제가 바뀌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서양 열강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하게 되었다. 다만 동유럽은 승전국의 하나로서 지역구 정리에 들어간 소련에 의해 공산화되거나 위성국으로 전락했다. 중국도 중일전쟁을 통해 국민정부가 혈투를 벌이는 동안 해방구를 건설하며 세력을 키운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에게 주도권이 넘어가게 되었다. 결국 국민정부는 뒤이어 이어진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타이완 섬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며 중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지 겨우 4년 후인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으로서 공산화된다. 한국의 독립과 남북분단도 제2차 세계 대전의 흐름과 맥락을 같이한다. 남한에는 미군이, 북한에는 소련군이 주둔하면서 서서히 분단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종전 5년 후 6.25 전쟁이 발발한다.[87]
14. 기타
- 워낙에 거대한 전쟁이다보니 세계 최대/세계 최초에 이름을 올린 것들이 많다.
- 세계 최대의 단일 전쟁
- 세계 최대의 상륙 작전
- 세계 최대의 전투[88]
- 세계 최대의 철수작전
- 세계 최대의 사상자를 낸 전투
- 이 부분은 논란이 있다. 일단 역사학계의 대세론 자체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세계 최대의 사상자가 발생한 전투로 간주하지만, 당시 집계된 소련이나 독일의 사료가 매우 부족한 관계로[89] 역사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다. 당장 인터넷에 검색만 해 봐도 웹사이트나 자료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 대륙타통작전, 바르바로사 작전, 베를린 전투 등 세계 최대의 사상자를 낸 전투는 매번 달라진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전술했듯이 사료 부족의 문제도 있고,[90] 이 "사상자" 개념에 전투 도중 사망한 민간인을 포함시키느냐의 여부 때문이다. 물론 순위권에 드는 전투들이 거의 대부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벌어진 전투라는 거에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없다.
- 세계 최대의 공세
- 여기도 논란이 있는데 이 부분은 "세계 최대의 공세"라는 뜻 자체가 중점을 과연 병력수에 두느냐 아님 동원한 총 장비의 숫자에 두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일단 바그라티온 작전이 세계 최대의 공세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르바로사 작전과 비교하여 추축국이 동원 병력(사단) 이 훨씬 더 많았다는 논리로 밀고 나가며,[91] 세계 최대의 공세가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소련군이 동원한 전차와 포병, 항공기 전력이 더 많았다는 논리를 내세운다.[92] 판단은 각자의 몫.
- 세계 최대의 전선
- 세계 최대의 해전[93]
- 세계 최대 규모의 사단이 동원된 단일 작전
- 세계 최초의 핵무기 실전 사용
- 사실상 근대 서구 문명이 만들어 놓은 모든 사조들이 복잡하게 얽혀 폭발한 전쟁이다. 쇠퇴한 왕정에서 막 파생된, 연약한 민주주의 사이에서 대공황을 딛고 자리잡아버린 극우 파시즘과 그에 결합한 우생학/극단민족주의,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성공으로 공산주의와 그에 반작용으로 오는 반공의 기조, 자유민주주의, 제국주의와 상반되는 의미의 민족주의까지 섞여들어간, 그야말로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해버린 전세계적 사조 충돌의 현장이다. 특히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독소전은 파시즘과 공산주의 간의 극렬한 이념 대립+인종/민족주의가 혼재되어 유례없이 많은 사상자를 낸 전쟁이다. 1차 대전만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전근대의 패권/영토싸움(간단히 말해서 땅따먹기)의 연장선으로 비교적 대결 구도가 단순하지만 2차 대전은 어느 정도 신념전쟁의 형태를 띄었고 그것도 냉전과는 달리 다극적 형태였다. 서로에 대한 상상초월한 광기와 극렬한 증오가 파생되었던 건 이 때문이다. 한 나라에서도 여러 세력이 갈려서 외세를 끌어들이고 서로 대립하고 뒷통수치고 싸우고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전쟁을 계기로 극단민족주의/우생학[94]에 기반한 파시즘 세력은 퇴조했고 이때 식민지인들이 전투에 많이 참여한 것을 계기로 제국주의도 같이 쇠퇴했다. 그 후 세계는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공산주의로 이분화되었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주류 사상이 되었다.[95]
- 제2차 세계 대전은 유럽 일대로 국한된 제1차 세계 대전[96]과 달리 전 세계가 전장이 되었는데[97] 유럽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의 국가까지 개입한 뒤 각자 북아프리카 전선과 아시아-태평양 전선으로 모두 직접적인 전장이 되었다. 아메리카 대륙 또한 진주만 공습을 당한 미국을 제외해도 해안가나 주요 항로가 추축국 잠수함들의 게릴라전에 시달렸으며[98] 남아메리카에서는 다수의 병력을 유럽으로 파병한 브라질이 있고, 칠레 역시 미국으로부터 수차례 전함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받았다.[99]
- 현재 공식적으로 생존한 2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들은 세계에 100만 명 이상이다. 2020년 기준 미국에만 30만 명 이상 생존하고 있으며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같은 전쟁 드라마도 이들 생존한 참전용사들 덕택에 실현되었다.#
15. 관련 어록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세계 대전/관련 어록 문서 참고하십시오.16. 관련 인물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세계 대전/관련 인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7. 창작물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세계 대전/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 발발 일자에 대해 다른 소수 의견(중일전쟁 발발일인 1937년 7월 7일로 보는 견해가 대표적)이 있다. 하지만 세계 사학계의 주류 견해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1939년 9월 1일을 공식 개전일로 본다. 왜냐하면 폴란드 침공을 기점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이다.[2] 실질적인 교전은 8월 15일에 종료. 일본 제국이 항복을 선언한 8월 15일이 아닌, 전함 미주리에서 항복 조약에 서명한 날인 9월 2일을 종전일로 본다.[3] 육대주인 아시아, 유럽,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그리고 오대양인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남극해, 북극해 모두가 전역(戰域)이다. 흔히 중남미에서는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지만, 중남미에서도 독일이 사주한 쿠데타가 발생하였으며, 브라질 연안에서 유보트가 격침당하거나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영국 해군을 피해 도망쳐 온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아트미랄 그라프 쉬페가 자침하는 등 간접적으로 전역에 포함되었다. 남극 대륙에서는 전투가 없었지만, 남극해에서는 독일 해군의 무장상선과 유보트가 케르겔렌 제도와 사우스조지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를 점령하고 영국 해군과 미합중국 해군을 습격했다.[4] 추축국의 주요 3개국인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일본 제국이 전황 악화로 말미암아 아돌프 히틀러의 자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등을 끝으로 모두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패전하였다.[5] 핀란드는 추축국이 아니라 소련에게 빼앗긴 영토 때문에 독소전쟁 당시 나치 독일의 공동교전국으로 참전했다.[6]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과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을 합친 수치.[7] 중립국이었지만 겨울전쟁 및 계속전쟁 당시 자원병들이 참전했다고 한다.#[8] 1939년 당시 약 23억 명에 달했던 세계 인구의 3% 정도가 희생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세계 대전/피해와 전쟁 범죄 참고.[9] 이때의 연합국이 오늘날 유엔의 직접적인 기원이며, 이들 5개국은 전후 유엔 상임이사국이 된다.[10] 단 중화민국은 1937년부터 일본 제국과 싸우고 있었으므로 중화민국의 실질적인 항전 기간은 8년이다. 자세한 내용은 중일전쟁 문서 참고.[11] 파랑은 영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연합국, 검정은 독일을 위시한 파시스트 추축국, 빨강은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세력권이다. 유럽 전선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사실상 메인이 된 전장으로, 거리가 가까운 북아프리카 전선과 중동 전선은 포함되었으나 유럽 전선 다음으로 높은 인지도를 가졌지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진행된 태평양 전쟁과 인지도가 떨어져 유명하지 않은 기타 전선들은 생략되었다. 다만 전쟁 말기까지 코르시카를 계속 추축국이 차지한 것으로 되어 있고, 계속전쟁에서 핀란드와 소련이 평화를 맺기 직전까지도 핀란드 전선이 변하지 않는 등 약간의 오류가 있다.[12] 폴란드 침공 이틀 뒤인 1939년 9월 3일 일요일 오전 11시 15분 BBC 홈 서비스를 통해 방송되었다.[13] 중일전쟁 시작설과 같이 여러 논쟁이 있기는 하지만 중일전쟁은 근본적으로 일본 제국의 독단적인 중국 침공에 가까운 반면, 폴란드 침공은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게 만듦으로써 본격적인 열강 간의 군사적 충돌을 야기했기 때문에 폴란드 침공을 보통 시작점으로 일컫는다.[14] 대표적으로 비무장지대로 선포되어 군대가 진입할 수 없었던 라인란트에 독일군을 진군시키고(라인란트 재무장), 전쟁 배상금도 지불할 생각 없으니 배째라는 식이었다. 애시당초 나치 정권 차원에서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는 대대적인 공약으로 선전되었으며, 이는 베르사유 조약을 혐오하던 독일 국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아 나치당의 지지 기반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15] 흔히 영국과 프랑스가 또 다시 독일과의 전쟁이 발발하는 것이 두려워 전쟁 이전 나치 독일을 향해 마찰이나 견제가 아닌 상당한 양보를 했다는 인식이 퍼져있고 실제로 어느 정도 맞으나, 사실 폴란드 침공이 게시된 1939년까지도 영국과 프랑스는 군사적으로 준비가 부족해 가짜 전쟁이 일어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에 대한 강경책은 군사적으로 어려운 점이 많고 재무장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한 실리적인 목적과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로 전쟁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던 국민들을 달래기 위해서도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게 어느 정도 유화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시각이 최근에 들어 조명되고 있다.[16] 그러나 프랑스는 프랑스 침공에서 독일에게 6주 만에 패배한 관계로 전쟁에서 일찍 이탈해버려 대개 전쟁을 오랫동안 이끈 국가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이후로도 자유 프랑스가 승계해 계속 활동하기는 했으나 전황에 미친 영항은 무척 미미했다.[17] 나치 독일은 열강 중에서도 상당한 강대국이었지만, 일본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은 열강 말석 수준의 국가였다. 반면 연합국은 미국, 소련, 대영제국이라는 당대 세계 최고의 강대국들이 전부 뭉친 상태였으며, 특히 일본 제국은 연합국에서 가장 강대한 국력을 지닌 미국과 전면으로 맞붙어야 했다.[18] 1939년 ~ 1942년 초[19] 그러나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쫒겨난 무솔리니가 이끄는 독일의 괴뢰국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이 여전히 연합국에게 저항하고 있었다.[20] 학자들 사이에서 통일되게 동의가 된 통계는 없다.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세계 대전/피해와 전쟁 범죄 참고.[21] 괴벨스가 남긴 일기를 편집하고 괴벨스 전기를 서술한 독일의 작가. 괴벨스는 1897년생으로 189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 출생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1920년대에 사회생활을 시작했다.[22] 독일은 총 영토의 13% 정도인 7만 km²의 땅과 총 인구의 10분 1 정도인 650만 명을 잃었는데, 이 비율을 대한민국으로 환산하면 경상남도, 대구광역시, 인천광역시를 모두 합친 영토(약 13,000km²)와 510만 명의 인구를 잃은 것이 된다.[23] 그런데 이렇게 군대가 축소되자 유능하고 선별된 장교들만이 이 구조조정에서 살아남게 되어 상당한 정예화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훗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하는 많은 독일 국방군 명장들이 이 시기 유능함이 입증되어 군에서 안 쫒겨나고 살아남은 인물들이다.[24] 프랑스의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는 아예 대놓고 "독일이라는 오렌지에서 더 이상 과즙이 떨어지지 않을 때까지 쥐어 짜야 한다."고 말했다.[25] 영국은 독일의 전쟁 배상금을 감면해주자는 입장이었으며 미국은 구 독일 제국령 식민지들에 대한 해체와 폴란드 독립 등 일부 사안을 제외하곤 독일에 대한 강경한 제재 부과에 반대했다.[26] 루르 점령 말기 한 독일인에게 암살 당한 프랑스 중령의 관을 운구하던 중 모자를 벗는 조의를 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만히 있던 독일인들을 구타하는 모습으로, 이런 행동은 고스란히 촬영되어서 훗날 나치 정권의 반프랑스 선전으로 사용되었다.[27] 당시 패전으로 인해 평판이 바닥으로 떨어진 독일과 세계 주요 강대국으로부터 모두 기피받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은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이라는 공통점으로 라팔로 조약 등을 통해 이미 우호적인 관계를 쌓고 있었고, 따라서 소련과 인접했던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심기를 매우 거슬리게 만들었다.[28] 2천억[29] 이 실망한 사람들 중에는 훗날 나치 인사가 되는 이들도 있었는데, 바로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그 중 한 명이다.[30] 1933년 11월 10일 베를린에 위치한 지멘스사의 공장에서 진행된 연설.[31] 이러한 주 정부의 판단에는 당시 바이에른 주가 상대적으로 좌파 진영의 세가 강한 베를린에 맞서는 보수 진영의 중심지였던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히틀러를 계속 가둬두기엔 그를 석방하라는 바이에른 내 보수층의 압박이 상당했었다.[32] 영상은 의지의 승리 중 한 장면이다. 의지의 승리는 나치 정권의 대표적인 선전 영화 중 하나로, 사악한 사상의 프로파간다라는 명백한 오점을 차치하면 1930년대 기준으로 미학적으로 매우 뛰어나며 선진적인 촬영 기법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다.[33] 19세기 말~20세기 초중반 일본제의 이미지는 21세기 현재 중국산이 가진 이미지와 비슷했다. 지금과 같은 이미지를 가지게 된건 1960년대 이후.[34] 제3대, 5대 조선 총독, 제30대 일본 총리. 사건 당시에는 내대신(內大臣)이라는 천황을 보좌하는 직책이었다.[35] 제20대 일본 총리. 사건 당시에는 대장대신(현 재무대신)이었다.[36] 15년 가까이 궁내성의 시종장을 지내며, 쇼와 덴노의 두터운 신임을 받던 인물로, 런던 해군 군축조약의 책임자로서 황도파로부터 간신으로 찍힌 인물이었다. 2.26 사건에서 피습을 당했으나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후일 제42대 일본 총리가 된다.[37] 어지간히 놀랐는지 탈출하자마자 차에서 담배부터 찾았다고 한다.[38] 위에 황도파가 습격한 인물들을 잘보면, 하나 같이 전부 쇼와 천황과 두터운 관계를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다.[39] 나가토 등 도쿄 앞바다에 있던 제1함대 예하 함정들이 2월 27일 원대복귀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전투배치지시와 함께 함포를 주요 육군 주둔지에 조준하고 여차하면 발포할 준비를 했다.[40] 괄호가 쳐진 부분은 영상에서 생략되었다.[41] 원문은 "군기 아래로"[42] 참고로 대한민국에서 휴전선 이남 50km가 비무장지대가 되면 서울특별시 대부분이 비무장화된다.[43]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44] 이틀 후에 1936년 총선 및 라인란트 재무장에 관한 국민투표가 예정되어 있었다.[45] 라인란트 재무장 20일 뒤이다.[46] 연설이 진행된 곳은 에센의 크루프 공장으로, 이곳은 불과 한달 전까지 비무장지대였던 곳이다.[47] 붉은 색은 소련, 초록색은 영국과 자유 프랑스로 전원 추축국에 항전하는 나라, 푸른색은 추축국 및 추축국에 점령된 나라들이나 괴뢰국들이며, 회색은 중립국이다.[48] 1942년 청색 작전 당시 독일이 확보한 최대 강역이다.[49] 붉은 색은 일본 제국에 항전하는 나라, 푸른색은 일본 제국 및 일본 제국에 점령된 나라들이나 동맹국이다. 소련은 아직 개입 이전인 1942년이라 중립국인 흰색이다.[50] 남방작전 이후 일본이 확보한 최대 강역이다.[51] 다만, 일각에서는 과도한 복지 때문에 오히려 영국이 경제적 침체기에 들어갔다는 주장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영국병 참조.[52] 여기에는 UN 창설멤버가 된 사우디아라비아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기도 했다. 훗날 사우디아라비아 + 쿠웨이트 + 구 영국 식민지였던 4개 국가들로 걸프 협력회의가 창설된다.[53] 일본군 잠수함이 함포로 미국 본토의 정유 시설을 포격하거나, 일본 잠수함에서 이륙한 수상기가 미국의 숲에 폭탄을 투하해 대규모 산불을 유발하거나 독일군 U보트가 미 동해안의 항구를 공격하는 간혈적 수준의 본토 공격은 있었지만 미국의 전쟁 수행 능력에 타격을 줄 수 없는 경미한 수준이었다.[54] 1971년, 유엔은 중국의 국민당 정부를 중국의 불법 정부로 간주하여 상임이사국에서 축출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산당 정부가 중국의 합법 정부로서 중화민국의 상임이사국 자리를 승계받았으며 대만은 결국 UN에서 자진탈퇴했다.[55] 당시 소련은 반제국주의 이념을 내걸고 독립을 시도하는 제3세계 국가들을 지원하고 있었고 이 인도네시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따라서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와 전쟁을 끌면 끌수록 공산주의의 인도네시아 내 확산 속도가 빨라질 것이 뻔했기에 미국 측에서는 빨리 네덜란드를 인도네시아에서 철수시켜야 했다.[56] 해당 조항은 유엔 헌장 53조와 107조이다. #, #[57] 브란덴부르크의 1/3(노이마르크), 포메른의 3/4(힌터포메른), 슐레지엔의 96%, 동프로이센 전역, 일부나마 남아있던 포젠과 서프로이센의 전역(포젠-서프로이센 변경주), 작센의 극히 일부.[58] 현재 대한민국에서 시판, 발간되고 있는 어린이용 세계사 및 세계 각국 문화를 다룬 세계문화 전집 서적들 대부분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 바이마르 공화국 및 나치 독일 초중반기 당시의 독일 영토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고 슐레지엔, 힌터포메른, 동프로이센 등 오데르 강 이동 지역의 동방 영토를 상실한 이후에 오데르강 이서 지역 일대로 획정된 현재 독일 영토로 묘사해놓은 책들이 꽤 있는데 이것은 아주 잘못된 역사적 오류이다.[59] 1차 대전 패전으로 약 72,070㎢ 상실[60] 슐레지엔 등 인구밀도가 높은 곳과 주요 곡창지대이던 동프로이센도 포함.[61] 그나마 인구 밀도가 높았던 지역은 아니다.[62] 남사할린, 쿠릴 열도와 마찬가지로 전전 일본의 내지였던 오가사와라 제도와 오키나와도 이때 같이 상실했으나 한 세대가 지난 1968년과 1972년에 미국으로부터 각각 반환받을 수 있었다.[63] 참고로, 이 총리의 외조부가 그 유명한 고노에 후미마로. 후미마로의 행적을 생각하면...[64] 특히 일본의 우경화와 재무장, 그리고 중국의 경제성장과 패권주의적 행보, 미중 대립의 격화, 인권 탄압 문제가 기존의 역사 문제 및 영토 분쟁과 맞물려 중국과의 관계가 가장 좋지 않다.[65] 폴란드, 체코, 노르웨이, 덴마크, 프랑스는 1938년 체코로부터 체코의 영토였던 주테텐란트를 뮌헨 협정으로 강탈, 병합하고,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독일에 대해선 전범국으로 분류하여 주변국 영토 강탈과 전쟁의 책임을 묻고 있지만, 정작 2차 대전 초기에 독일과 함께 추축군의 일원이었다가 전쟁 말기이던 1944년 나치 독일과의 동맹, 수교 관계를 단절하고 연합군으로 전향하였던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동유럽의 구 추축국 국가들에 대해서는 전범국가로 분류하지 않으며 이렇다 할 전쟁 책임을 묻지 않고 있다.[66] 1939년 세계 인구가 약 20억 명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2~3% 정도의 인구가 사망한 꼴이다.[67] 다만, 이는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섰던 서구권 한정이고 대부분 독재 정권이 들어섰던 동유럽이나 동아시아 지역 등에서는 경우 개인주의 사상의 대두가 이보다 늦었다. 동유럽의 경우는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승자로 떠오른 소련의 영향으로 인한 이유가 있었고,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로 탈바꿈한 이후 마오쩌둥이 공산주의 공고화와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한반도 역시 소련의 영향을 받은 북한과 미국의 영향을 받은 대한민국이 각각의 권력과 이념 강화를 위해, 일본은 패전국의 지위를 벗어남과 아울러 국가재건이라는 구실로 인한 이유가 있었다.[68] 다만 이들은 비전투병과로 배치되었고 특히 군무원이나 통신, 의무 병과로 배정되었다.[69] 특히 미국은 여성들이 후방사업으로 군수공장이나 단순 노무자로 취직하여 필요한 물자들이 차질없이 보급될 수 있도록 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70] 다만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서구권에서 여성 노동자의 숫자는 1차대전 이전부터 크게 늘어나고 있었고 여성 참정권 역시 2차 대전 이전부터 인정받았다. 전쟁보다는 산업 분야에서 여성 노동의 확대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71] 물론 주부라는 고전적인 역할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나 적어도 이 시점을 전후하여 여성들 역시 당당한 국가의 일원으로 부상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목소리 역시 정치권이 무시할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72]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역할과 수동적인 이미지를 벗고 국가와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참여하고 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하자는 의식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여성들 역시 지도자의 자리에도 올라야 한다는 사상도 고취된다.[73] 전쟁 중에 발생한 잔혹하고 조직적인 민간인 학살이 전쟁에 대한 인식 변화의 주 원인이었다.[74] 특히 피식민지 국가 출신들이었던 나라들 사이에선 외세를 배척하고 민족의 단결을 외치는 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특히 아프리카나 아시아 일부 국가들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다만 이중 일부는 이를 이용해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악용하는 일도 생겨났고 특히 외세의 영향을 받는다는 이유로 원조나 공업화 및 산업화 역시 거부하는 풍조도 생겨났다. 이는 한편으로는 국가발전을 더디게 하거나 정체시키는 원인을 제공하는 부작용이 되기도 했다.[75] 이는 일본의 소위 천황의 안위를 보위한다는 미명하에 행해진 '카미카제' 및 '1억 총옥쇄'와 같은 인명경시 풍조로 인해 미국으로 하여금 신속한 종전을 위해 내려진 원인이기도 했다. 나치 독일 역시 히틀러의 무지와 아집으로 인해 수도 베를린이 폭격당하기도 했고 결국에는 베를린 공방전으로 인해 수도가 함락되고 민간인이 희생됨은 물론, 국토가 분단되었던 비극을 겪었다. 게다가 일본은 종전을 선언했던 그 순간까지 이런 발악을 벌이는 등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76] 전근대에서 제국주의 시대까지 수백 년 동안 독일뿐 아니라 유럽 모든 국가들이 전쟁을 좀 과격한 목적 투사 수단 정도로 봤다. 따라서 전쟁으로 인해 출혈이 좀 있어도 얻은 영토나 패전국에 배상금을 지워서 해결하려는 마인드가 있었다. 전쟁의 무게감이 본격적으로 묵직해지기 시작한 건 몇백만 단위로 죽어나간 1차 대전부터이다. 특히나 2차 대전까지 가자 민간인들까지 천만 단위로 죽고, 아예 눈 앞에서 도시가 삭제당하는 원폭의 위력을 본 각국 정부와 국민들에게 전쟁은 근대 이전 시기보다 훨씬 참혹하고 무거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고 전 국토가 휩쓸렸기에 배후중상설 같은 음모는 자라날 틈조차도 없었다.[77] 여기에 식민지배로 신음하던 피지배국 백성들이 단지 지배국 국가의 '국민의 일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들과 연관이 없는 전쟁에 '징집'되어 끌려가야 했던 비극을 당해야 했다. 게다가 이렇게 참전해서 전사를 당했음에도 이들에게 내려진 결과는 철저한 버림받음과 무시였고 종전 이후에도 그 어떤 보상조차 받을 수 없었다.[78] 이 경향은 6.25 전쟁에도 확연히 나타나는 데, 당시 북한이 소련제 무기로 무장하면서 소련이 지원한다는 사실이 명확함에도 미국, 소련 둘다 서로 모르는 척했다. 그만큼 서로 전면전으로 가는 것을 꺼렸다.[79] 물론 표면적으로는 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벌이는 자유+공산 진영과 파시즘의 대결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1차 대전보다 선악 구도가 명확했다는 점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는데, 적어도 연합국들은 나치 독일처럼 '관료제를 동원한 공장식 학살로 특정 인종을 지상에서 멸절한다.'라는 전무후무한 구상을 하진 않았고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처럼 점령지 내 비무장 민간인들을 상대로 수만~수십만 단위의 무차별 학살과 강간을 자행하지도 않았다. 그나마 주요 추축국 중 가장 전쟁범죄가 적었던 이탈리아 왕국이 연합국 중 가장 불량했던 소련보다 전쟁범죄가 적었으나 여전히 소련 외 연합국에 비해서는 전쟁범죄가 잦았고 죄질이 나빴다. 게다가 그 외 추축국들이었던 헝가리, 루마니아 등도 상당히 잔악한 전쟁범죄를 많이 자행했다. 따라서 2차 대전은 '상대선 vs 절대악'이라는 보다 명확한 선악 구도를 보인다. 인터넷 상에서는 과거 연합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의 악행을 들어 '그놈이 그놈'이라는 의견 역시 존재하나, 앞서 말한 이유로 인해 양비론적 관점은 부적절하다. 가령 영국의 식민통치가 2-300년간 수백만을 죽였다면, 독일은 10여년간 유대인 600만과 슬라브인 수백만-천만 가량을 죽였다. 학살은 용인돼서는 안 되는 것이긴 하나,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나치가 더 심각하다.[80] 이를 두고 당시 연합국 최고사령관을 역임한 아이젠하워는 "역사상으로 이번처럼 독재/억압 세력과 자유/인권 세력이 정면으로 대결했던 전쟁은 없었다"고 평했다.[81] 제1차 세계 대전에선 어쨌거나 동맹국이 전멸하면서 협상국의 승리로 마무리되었지만, 삼국협상의 한 축이었던 러시아 제국은 공산주의에 휩쓸려(러시아 혁명) 전쟁 중 탈주했고 분명 전쟁에서 패배했던 오스만 제국이 갑자기 전쟁을 벌여 이기는(로잔 조약) 등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했다. 또한 전후 각국의 이해관계와 갑작스럽게 폭발한 이데올로기가 기승을 부리며 결국 20년 만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82] 일례로 프랑스는 전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식민지에 미련이 있어 '프랑스 식민제국 회복'이라는 미명 하에 이전 식민지였던 베트남과 알제리를 계속 통치하려 하였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목숨 걸었던 베트남과 알제리에서 모두 패배했고 뒤이어 1960년대를 기점으로 대부분의 프랑스 식민지가 독립해 나가며 결국 프랑스도 탈식민지화의 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비슷하게 네덜란드 역시 인도네시아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무단히 노력했으나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서 외교적으로 패배하며 탈식민지화의 길을 걸었다.[83] 영국의 영연방이 대표적이다.[84] 알제리 독립전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 그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식민지 청산과정에서 일어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다.[85] 6.25 전쟁, 베트남 전쟁처럼 이념에 따른 분단, 지금도 이어지는 아프리카의 민족과 부족간의 내전, 인도와 파키스탄의 무슬림과 힌두인들의 종교 분쟁처럼 열강들이 덮어두었던 문제들이 터져나왔다.[86] 그나마 이 당시는 사소한 분쟁도 그냥 두었다간 그대로 주변 세력이 떼거리로 달라붙어서 새우싸움이 고래싸움으로 빠르게 번지던 시점인지라 미국과 소련이 사소한 분쟁이라도 동네 패싸움 벌어진다는 명목으로 재빨리 말릴 수 있었던지라 전쟁의 위험이 덜했다.[87]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면서 등장한 것이 소련으로 상징되는 공산주의와 확산의 경계였다. 미국은 2차 대전이 끝난 후 소련의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우려 차원에서 유럽과 아시아에 친미, 반공 정권을 수립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특히 폐허가 된 유럽은 마셜 플랜으로 불리는 유럽 경제재건계획을 시행해 유럽이 소련에 의해 공산화가 되는 것을 막았으며 일본도 패전을 딛고 재기할 수 있었다. 심지어 미국 내에서는 매카시즘이 일어나 내부의 혼란도 일어났고 친미 독재정권을 지원하여 해당국의 반미 감정을 촉발하는 실책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에는 소련 견제 차원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개방을 돕고 이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했지만, 냉전 종식 이후에는 중국을 상대로 새로운 패권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88] 소수설이긴 하지만 세계 최대의 전투로 모스크바 전투를 꼽는 이들도 있다.[89] 독일 측 사료는 전쟁 막판에 죄다 파기되거나 소실되었고 소련 측 사료 역시 현재까지 온전히 남은 건 적다.[90] 특히 중국의 경우 혼란기였던 탓에 중앙정부가 지방까지 행정력을 투사할 수가 없던데다 일본과 중국 양측이 모두 전투 결과를 과장한 탓에 정말 심각할 정도로 사상자 관련 자료가 부족해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방해한다.[91] 바르바로사 작전 때 추축국은 약 380만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참고로 바그라티온 작전 때 소련군은 이의 절반이 안되는 약 160만명을 동원했다.[92] 바그라티온 작전 때 소련군은 약 6,700대의 전차, 32,700문의 야포, 7,700 기의 항공기를 동원했다. 참고로 바르바로사 작전 때 추축국은 약 3,700대의 전차, 23,000문의 야포, 그리고 5,300기의 항공기를 동원했다.[93] 동원된 함선들의 총 톤수를 계산했을 때 기준. 다만 해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전함의 참전 숫자만 집계한다면 유틀란트 해전 쪽이 앞선다.[94]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진화론과 결부된 우생학은 당시 유럽 내 지식인들 사이에도 만연했고 이는 독일만의 경우가 아니었다.[95] 공산권도 표면적으로는 민주주의였다. 실제로는 아니었지만.[96] 물론 중국,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남아메리카 등지에서도 교전이 있었지만 단지 부대 단위의 소규모 교전, 도시 규모의 공방전이거나 해전 정도가 전부 였으며, 유럽과 같은 대규모 전투는 없었다.[97] 애초부터 처음에는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말보다는 '대전쟁(The Great War)'라는 명칭이 더 널리 사용되었다. '세계 대전'이라는 명칭이 당시에도 없던 것은 아니나, 자주 사용되기 시작한 건 2차 대전 전후이다.[98] 미국 동해안에서는 상선의 대잠전(해군 함대가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잠수함을 제압하는 것이 아닌, 물자를 수송하는 선단이 자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하는 대잠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미 해군을 상대로 유보트가 미 동부 해안으로 대규모로 밀어닥쳐 엄청난 손실이 발생했고 미국 서해안이었던 알래스카에서는 아예 일본군이 상륙해서 알래스카 남부의 섬들을 14개월 간이나 점령했다.[99]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에 배치된 미국 전함들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미국은 칠레의 전함을 대여하려고 시도했다. 다만 칠레는 자국 안보공백을 이유로 거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