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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두희가 1949년 6월 26일에 서울 경교장 자택 서재에서 기거하던 백범 김구를 총기로 암살한 사건.2. 전개
1949년 6월 26일 오후 김구는 자택인 서울 경교장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서재에서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러한 사건이 일어날 줄은 예상도 못하였으며 아무 일도 없이 평온하게 지내던 순간이었다.하지만 그 시각 경교장에 김구를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찾아왔으니 그는 바로 대한민국 육군 포병사령부 장교이자 김구가 이끌던 한국독립당 당원이었던 안두희 육군 포병소위였는데, 그는 당시 육군 정복 차림을 하고 경교장에 와서 비서진에게 백범 선생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다고 하고 비서진들의 안내에 따라 1층에서 대기하였다. 직후 육군 헌병 장교인 강홍모 대위가 군용차에 필요한 휘발유를 얻기 위해 방문하였고 안두희의 양해를 구하고 먼저 김구를 만났다. 강홍모가 나간 후 비서진들은 아무런 검문이나 경계 없이 안두희를 그대로 김구가 있는 서재로 보내주었지만 이 때까지 아무도 이 자가 김구를 죽이게 되리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하였으며 마침 안두희의 허리춤에 권총이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단지 군인이라는 이유로 검문이나 제지 없이 통과시켰다.
이때 김구는 서재에 있었으며 글씨를 쓰던 중 비서로부터 포병장교가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다며 보고했고 김구는 들어오라고 하였으며 잠시 후 안두희가 김구 앞에 나타나 "선생님, 먹을 갈아 드릴까요?" 라고 묻자 김구가 고개를 들어 안두희를 보려는 순간 안두희는 미국제 권총을 꺼내들어 약 1미터 거리에서 김구를 향해 4발의 총탄을 발포하였다. 다음은 재판 당시 안두희가 살해경위에 대해 말한 내용이다.
내가 선생 앞에 나가 거수경례를 하자 선생은 2미터 앞에 있는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그 때 선생은 매우 표정이 불쾌한 것이 역력했다. 선생은 38선 사태 및 포병의 편성 상태는 어떠냐고 묻기에 흐지부지 대답한 후 나는 선생에게 일부러 꾸며 거짓말을 하여 본심을 알아보려 하였다. … 나는 2, 3일 중 옹진 전투에 나가게 되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출정하며 선생님께 인사도 드리고 선생님의 포부도 똑바로 알고 싶어 왔습니다 하고 말하니까 선생은 국회 소장파 얘기를 꺼내며 세간에서는 경교장을 싸고 여러 가지 낭설이 떠돌고 있는 이때에 너까지 와서 이러면 남들이 색안경을 끼고 볼 테니 돌아가라고 말하였다. 나는 선생에게 그런 말을 하시는 선생을 어찌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저마저 선생님을 의심하게 됩니다. 정당이나 언론계에서는 모두 선생을 공산당과 악수한다고 합니다. 오늘을 꼭 선생님의 본심을 확실히 알고야 돌아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더니, 선생은 대노하시며, 이 놈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크게 떠들었다. 나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선생님은 선생님이 30여 년 간 투쟁한 탑을 지금 선생님 손으로 무너뜨리지 마십시오. 지금 이 때가 바로 선생님이 개심할 때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으니 본심으로 돌아가서 회개하십시오 하였다. 그랬더니 선생은 크게 노하시며, 에이 고약한 놈, 나에게 반동하는 놈은 국가와 민족의 반역이다 하고 말하였다. 나는 이 순간, 틀림없이 선생을 국가의 반동이라고 생각했다. 국가를 위하여 선생을 죽이는 것이 좋겠다고 나는 단정했다.
안두희, 김구를 쏜 까닭은?(1949년 6월 26일)
안두희, 김구를 쏜 까닭은?(1949년 6월 26일)
3. 사건 이후
안두희는 경교장을 빠져나가다가 경교장 경비들에게 잡혀서 헌병사령부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김구가 남북 협상을 통해서 정치 사회에 혼란을 주고 공산주의자들을 자극시키고 찬동시키는 범죄를 저질렀다면서 결국엔 참다 못해 김구를 죽였다고 말했으며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형기가 15년으로 감형되었다.이때 총성을 들은 비서진들이 서재로 달려가 보니 김구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김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여론은 깊은 애도를 표명하였다. 김구 암살 후 장례식까지 10일간 다녀간 조문객은 약 120여만 명으로 추산되었고 건물 안에 들어오지 못한 문상객도 많았다. 이승만 대통령도 김구 암살 후 6월 28일, 7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성명을 발표했다.김구 선생 급서에 통탄불금 (1949년 6월 28일) 7월 5일 서울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약 40∼50만의 인파가 몰려들었고 다른 도시에서도 각각 수만 명씩이 모여 고인을 애도하였다. 시신에 염을 하는 모습과 조문 인파를 담은 사진들[2]
사건 발생 1시간 24분 만에 전봉덕 헌병 부사령관이 이 사건은 안두희 개인의 단독 범행이라고 발표했으며 이승만 역시 이 사건이 한독당 내부의 집안싸움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 등이 살인교사 같은 누명을 쓰고 구속됐으며 안두희도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김구와 의견 충돌을 벌이다가 죽이게 되었다고 말했다. 1년 후 6.25 전쟁이 일어나자 형집행정지로 석방시켜 군에 복귀시켰고 정치권 일각에서 석방 논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자 계급을 소위에서 소령으로 특진시켰다. 결국 안두희는 재판 중 2계급 특진을 하였고 사건으로부터 1년여 만에 형 면제 처분을 받고 군에 복귀하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특혜를 받았다. 당시 헌병사령관이었던 장흥은 한독당 계열로 몰려 헌병사령관직에서 물러나고 전봉덕에게 사령관직을 넘겼다. 사령관직에서 물러난 직후 김창룡에게 조사를 받았는데 왜 안두희를 바로 영창에 구금했는지, 그리고 한독당 비밀당원인지의 여부를 추궁받았다고 한다.
예편 후 안두희는 강원도 양구군으로 건너가 군납공장을 차려 엄청난 재산을 축적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정권의 비호로 대저택까지 지어 떵떵거렸다. 김구 살해 진상규명은 1960년 4.19 혁명 이후에 진행되었는데 4월 29일에 한 시민이 안두희의 체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 게 신호탄이었고 같은 날 안두희의 집도 분노한 학생들에 의해 파괴됐다. 이 시기부터 진상규명 운동이 벌어져 6월 26일에 심산 김창숙이 백범 사망 11주기 추모식장에서 "선생을 저격한 안두희를 죽여라! 그리고 그 배후 조종자인 이승만을 규탄하자!"고 절규했다.
이에 안두희는 잠적했다가 1961년 4월 17일 '백범김구선생살해진상규명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재판을 받았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풀려났다. 동월 28일에 효창공원에서 열린 '백범 암살사건 배후자 규탄대회'에서 시민 3,000여 명이 국회의사당까지 가서 가두시위를 벌였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도로아미타불이 됐다. 그럼에도 안두희는 세인들에게 김구 암살범이라는 낙인을 받아 수차례 암살 및 살해 위협을 받아 왔고 1987년부터 민족정기구현회장 권중희에게 수차례 응징당하면서 진실을 고백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여기서 안두희는 이승만의 명령을 받아 김구를 암살했다고 얘기한 적이 있으나 이후 권중희의 납치,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었다고 부인하였으며 1992년에야 암살과 관련된 증언을 시작했고 백범 묘소에도 참배했다. 그러나 이후 본인 단독 범행이라고 얘기했으며, 언론사 인터뷰에서는 김창룡의 명령을 받았다고 얘기하기도 하고 미국이 시킨 일이라고 얘기하기도 하는 등 말을 자주 바꿨다.
1993년에 국회 법사위가 '백범김구암살진상규명소위원회'를 구성했고 1994년에는 안두희가 건강 악화로 들것에 실린 채 해당 위원회에서 증인으로 출석했으나 이승만과의 관계 등 배후세력에 대해선 실어증을 이유로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소위 측은 2년여간의 조사 후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를 내고 1995년 12월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보고서는 김구 암살 사건은 당시 정부 발표처럼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싼 내분 과정에서 안두희가 개인적 차원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이 분담된 사건으로 보고 있다.
안두희는 1996년 10월 23일 인천 신흥동 자택에서 버스기사 박기서가 휘두른 정의봉에 두들겨 맞아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4. 진상 규명
사건 당시 정부와 군 당국은 이 사건을 한독당 내부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몰아갔다. 사건 발생 직후 국방부는 안두희가 김구와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싸고 언쟁을 벌이다가 김구를 살해한 것이라고 발표하였으며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시키고 한국독립당에 가입하게 했다는 혐의로 한국독립당 조직부장이자 광복군 지휘관이었던 김학규(金學奎)를 구속하였다.7월 2일 이승만 대통령도 이 사건이 한국독립당의 내분으로 일어난 것이라는 내용의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 7월 20일 군 당국은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사건을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 한 친공산주의적인 한국독립당의 음모에 맞선 안두희의 ‘의거’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암살이 정치적 배경을 지녔음에는 당시에도 의문의 여지가 없었으며 사건 발생 이후 지속적으로 암살의 동기·이유, 배후 조종세력, 이승만·한국정부·미국의 개입여부 및 책임 등이 주요한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한국 사회 전반에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김구 암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의 목소리가 커졌으며 드디어 1992년에 안두희의 육성 증언이 나왔다. 이에 국회는 1993년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미 본격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던 도진순은 기존에 간행된 여러 기사들과 안두희 등 핵심관계자들의 증언을 면밀히 분석하는 한편 1949년 전후 김구의 정치노선을 집중분석했다. 도진순은 암살작전의 전개과정을 4단계로 분석하며, 암살배경으로 국내 및 미국과의 관련을 추적했다. 약 2년간의 조사 후 위원회는 그의 견해를 반영하여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이 보고서는 1995년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김구 암살사건은 당시 정부 발표처럼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싼 내분 과정에서 안두희가 개인적 차원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이 분담된 정권 차원의 범죄 행위였음이 밝혀졌다.
먼저 암살범 안두희의 1차적 배후는 ‘군부’였다. 즉, 포병사령관으로 안두희의 직속상관이자 같은 서북청년단 출신인 장은산(張銀山)이 암살을 명령하였고 사건 발생 이후 김창룡 특무대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으며 채병덕(蔡秉德) 총참모장, 전봉덕(田鳳德) 헌병 부사령관 등이 사후처리를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군, 만주군, 경찰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군부’와 더불어 안두희가 가담했던 서북청년단 세력들도 이 사건에 깊이 관여하였다. 또한 보고서는 김구 암살사건의 배후와 관련해 가장 큰 쟁점이 되어 온 이승만 대통령의 관련 여부에 대해, 암살 사건 이후 안두희의 행적과 군부의 보호 조치가 이승만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하였고, 또 그가 이 사건에 대해 도덕적·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 사건에 사전 개입하거나 암살을 지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미국의 관련 여부에 대해서도 미국이 암살사건에 대해 상당한 정보와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암살사건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의혹의 모략꾼' 김지웅이 암살 사건 전반을 계획 조율했으며 홍종만은 암살 하수인들을 관리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들은 모두 정권적 차원의 비호를 받았지만 안두희의 일차적 배후는 군부 쪽이었다. 즉, 안두희의 직속상관이자 같은 서북청년단 출신인 장은산 포병사령관이 암살을 명령하였고 사건 발생 이후 김창룡 당시 방첩대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으며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전봉덕 헌병 부사령관 등이 사후처리를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군, 만주군, 경찰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군부와 더불어 안두희가 가담했던 서북청년단 세력들도 이 사건에 깊이 관여하였다고 한다.
한필동 당시 1연대 헌병대장에 따르면 김창룡은 1연대 정보과장으로 지령을 내릴 위치가 아니었으며[2] 전봉덕 헌병 부사령관과 장은상 포병사령관이 비밀리에 주도하였다고 증언했다.
4.1. 미국 정보기관과의 관련 의혹
KBS 역사저널 그날 방송이다.2001년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가 미국 CIC 공작원이었다는 미군 기밀 문서가 발굴되었다. CIC는 특히 6·25전쟁 발발 시점을 사전에 인지하고 정확히 예측한 첩보로 유명하다.# 백범 김구의 손자인 김진 에 의하면, “안두희가 CIC 요원이라는 주장은 지난 1992년에도 안두희가 간접자백한 사실이 있다”고 말하였다. 안두희를 심문한 김인수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대표에 의하면, “문서는 심문 당시 ‘백범 암살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어 가능했다’는 안두희의 진술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백기완 전 백범사상연구소 소장은 “미국은 8·15 해방 이전부터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며 백범을 제거하려 했다”고 말하였다.#
김구의 통일운동은 미국이 현상유지정책 곧 분단고착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는데 큰 불안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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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미국은 김구 암살사건과 관계가 있다. 안두희의 직속상관으로 안두희에게 김구 살해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 포병사령관 장은산도 군사영어학교 출신으로 ‘미국통’이었다. 미국은 암살사건에 깊이 개입되어 있는 군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번 문서는 이 사건에 미국이 개입되어 있다는 또하나의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백범관련문서 의미]"백범 암살 '美방조설' 강력 뒷받침"
CIC는 소련과의 합의에 따라 1948년에 공식적으로는 한반도에서 모두 철수하였으나, 요원들의 상당수가 KMAG로 소속을 바꾸고, 그대로 남아서 계속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제임스 하우스만이다....
분명히 미국은 김구 암살사건과 관계가 있다. 안두희의 직속상관으로 안두희에게 김구 살해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 포병사령관 장은산도 군사영어학교 출신으로 ‘미국통’이었다. 미국은 암살사건에 깊이 개입되어 있는 군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번 문서는 이 사건에 미국이 개입되어 있다는 또하나의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백범관련문서 의미]"백범 암살 '美방조설' 강력 뒷받침"
한국학 중앙 연구원 이완범 교수의 저서이다.
김구 암살 직후 대한민국 정부는 김구의 암살 배경에 대해 철저히 함구했다. 그러나 익명의 대한민국 정부 고위층이 외국 기자들에게 김구의 쿠데타 미수 계획을 발설했다. 이에 <뉴욕타임스>는 한국 '정부 고위 소식통'을 인용하여 김구의 죽음은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 했던 군사 쿠데타 음모가 발각된 결과라고 곧장 보도했다.
한편 미국이 김구의 남북협상 노선에 강한 거부감을 가졌으며 육군 소위 안두희를 통해 김구 제거 작전을 실행시켰다는 소문이 있었다. 안두희가 장택상 등의 소개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 한국 책임자와 접촉했다고 진술했다는 증거가 있다.
(중략)
한편 <월간중앙> 1976년 2월호의 별책부록이 <CIA 외국 지도자 암살 계획-미 상원 조사 특별위원회 보고서>이다. 미국 상원 특별정보위원회는 포드 대통령의 "CIA의 정치적인 암살 계획 공개는 미국 외교 정책을 손상케 할 것"이라는 공개 반대 서한에도 불구하고 1975년 11월 20일 9개월간의 조사 끝에 346쪽에 달하는 미 CIA 활동 보고서를 공개했다. 프랭크 처치 정보위원장(민주당)은, 포드 대통령의 서한과 CIA 국장의 경질 등이 정보위원회의 활동을 파괴하려는 시도라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는 "악을 은폐하는 것은 전체주의 정부의 상표"라고 지적하고 정보위원회는 포드대통령의 여하한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조사 활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다짐했고 마침내 공개했다. 미국 상원 조사보고서는 단순한 암살 폭로 외에 장래 암살을 금하도록 공식 결의하며 시정책을 강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많은 외국 지도자가 CIA에 의해 암살되었음이 방증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암살 금지 결의가 있었지만 근절되지 않았다.
이완범, 한국학 중앙연구원 출판부, 미국의 한국 정치 개입사 연구 1권, 29~31P
한편 미국이 김구의 남북협상 노선에 강한 거부감을 가졌으며 육군 소위 안두희를 통해 김구 제거 작전을 실행시켰다는 소문이 있었다. 안두희가 장택상 등의 소개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 한국 책임자와 접촉했다고 진술했다는 증거가 있다.
(중략)
한편 <월간중앙> 1976년 2월호의 별책부록이 <CIA 외국 지도자 암살 계획-미 상원 조사 특별위원회 보고서>이다. 미국 상원 특별정보위원회는 포드 대통령의 "CIA의 정치적인 암살 계획 공개는 미국 외교 정책을 손상케 할 것"이라는 공개 반대 서한에도 불구하고 1975년 11월 20일 9개월간의 조사 끝에 346쪽에 달하는 미 CIA 활동 보고서를 공개했다. 프랭크 처치 정보위원장(민주당)은, 포드 대통령의 서한과 CIA 국장의 경질 등이 정보위원회의 활동을 파괴하려는 시도라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는 "악을 은폐하는 것은 전체주의 정부의 상표"라고 지적하고 정보위원회는 포드대통령의 여하한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조사 활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다짐했고 마침내 공개했다. 미국 상원 조사보고서는 단순한 암살 폭로 외에 장래 암살을 금하도록 공식 결의하며 시정책을 강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많은 외국 지도자가 CIA에 의해 암살되었음이 방증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암살 금지 결의가 있었지만 근절되지 않았다.
이완범, 한국학 중앙연구원 출판부, 미국의 한국 정치 개입사 연구 1권, 29~31P
백범 김구 연구자인 도진순 교수의 신동아 기고 글이다.
안두희는 이미 백범 암살사건과 미국의 관련에 대해 몇 번에 걸쳐 언급한 바 있다. 1984년 ‘월간조선’의 오효진과 인터뷰, 1992년 4월13일 ‘동아일보’에 특종보도된 권중희에 의한 자백, 1995년 김석용의 권유로 녹취한 테이프 121개에 담긴 그의 ‘마지막 증언’ 등이 그것이다.
먼저 1992년 4월13일자 ‘동아일보’ 특종 보도에서 ‘안두희는 ① 경무부장 조병옥과 수도청장 장택상 등의 소개로 미군 OSS의 한국 책임자 모 중령 등을 소개받았고, ② 미군 OSS 한국담당 장교와 안두희의 서북청년단이 긴밀하게 정보를 교환하였으며, ③ 미군 장교는 백범을 제거해야 할 Black Tiger라고 부르며 백범 암살의 필요성을 암시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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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는 1984년 오효진과 ‘자유스러운 인터뷰’에서 이미 미국과 백범 암살의 관련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언급하였다.
나는 정보에 밝았다. 미국의 정보원으로 서청원(西靑員)들이 많이 활약하고 있어서 미국 사람들이 백범을 싫어하는 것도 알았다. 언젠가는 미국의 비밀자료에서 ‘백범 제거계획’ 같은 것이 나올지도 모른다. 당시 가장 골칫거리가 백범이었으니까.(오효진, 1984, ‘안두희 고백’ (상) (하), ‘월간조선’ 7~8월호)
여기서 안두희는 자신이 미국 정보원이라고 직접 밝힌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소속된 서청원들이 미국 정보원으로 많이 일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 백의사나 서북청년단 소속 청년들은 미군 정보원으로 많이 활동하였다. 이번 은 그 연장선상에서 안두희도 CIC 정보원(informer) 또는 요원(agent)이라고 밝히고 있다. 나아가 1992년 그의 ‘마지막 증언’에서도 위와 마찬가지로 미군과의 관련은 한국 경찰 수뇌들의 소개로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안두희의 미국 관련 발언들은 상당히 일관되며 상호보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고, 모순되는 내용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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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은 쟁점은 안두희가 CIC 요원이라고 하더라도 1949년 암살 집행 당시 미군이 어떠한 영향력을 발휘했는가 하는 문제다. 그가 CIC 요원이라는 사실과 암살에 대한 미군의 영향력은 서로 관련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별개의 문제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도 안두희는 그의 ‘마지막 증언’에서 매우 생생하게 언급하고 있다.
한 열흘에 한 번씩 일주일에 한 번씩 그 미군 중위, 미군 저 24사단 중위가 있잖아요? 중령 대신 나한테 뭐 연락하갔다 그러구 자주 좀 서로 통하자고 얘기하던 중위가 - 그런데 중윈지 대윈지 잘 모르겠어요. - 나타나는 데 마이켈이라는 건 알지, 언제 뭐 중위 옷 입고 올 적도 있고, 대위 계급장 달고 올 적도 있고, 절반 이상 사복을 입고 올 적도 있고, 그런 친군데, 자주 드나드는 거예요. 특히 우리 정부가 생겨서 5·10선거가 끝나구서 자주 오는데…젊은 사람인데도 나보단 4, 5세 2, 3세 아랜 데도 나보다 아는 거 많고, 정치적인 얘기만 자꾸 물어보니 내가 정치 같은 걸 알 리가 없지요…어디서 배웠는지 우리 한국말은 자주 쓰는 데…한국말로 하다가 영어두 섞어서…나두 이제 쪼끔씩 영어를 배우는 겁니다.(‘마지막 증언’,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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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을 요약하면 안두희와 서북청년단은 경찰, 군 특무대와 연계되어 있었으며, 미군 정보장교와도 정기적으로 만나 백범과 한독당에 관한 정보를 논의했으며, 그것은 백범 암살을 기획한 김지웅의 정보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조심성이 많은 안두희로서는 백범 암살을 함부로 집행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정부 요인들의 견해를 탐문하고, 미국의 눈치를 보고 난 뒤에 실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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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생각으로는 백범 암살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부인하기 힘들다. 오히려 문제는 개입의 범위와 강도일 것이다. 현지 CIC 정보장교 차원이었는지, 대사관까지 개입된 수준이었는지, 본국 정부 정책의 일부였는지가 불분명할 뿐이다.
백범 암살관련 美발굴문서 완전분석
먼저 1992년 4월13일자 ‘동아일보’ 특종 보도에서 ‘안두희는 ① 경무부장 조병옥과 수도청장 장택상 등의 소개로 미군 OSS의 한국 책임자 모 중령 등을 소개받았고, ② 미군 OSS 한국담당 장교와 안두희의 서북청년단이 긴밀하게 정보를 교환하였으며, ③ 미군 장교는 백범을 제거해야 할 Black Tiger라고 부르며 백범 암살의 필요성을 암시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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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는 1984년 오효진과 ‘자유스러운 인터뷰’에서 이미 미국과 백범 암살의 관련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언급하였다.
나는 정보에 밝았다. 미국의 정보원으로 서청원(西靑員)들이 많이 활약하고 있어서 미국 사람들이 백범을 싫어하는 것도 알았다. 언젠가는 미국의 비밀자료에서 ‘백범 제거계획’ 같은 것이 나올지도 모른다. 당시 가장 골칫거리가 백범이었으니까.(오효진, 1984, ‘안두희 고백’ (상) (하), ‘월간조선’ 7~8월호)
여기서 안두희는 자신이 미국 정보원이라고 직접 밝힌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소속된 서청원들이 미국 정보원으로 많이 일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 백의사나 서북청년단 소속 청년들은 미군 정보원으로 많이 활동하였다. 이번 은 그 연장선상에서 안두희도 CIC 정보원(informer) 또는 요원(agent)이라고 밝히고 있다. 나아가 1992년 그의 ‘마지막 증언’에서도 위와 마찬가지로 미군과의 관련은 한국 경찰 수뇌들의 소개로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안두희의 미국 관련 발언들은 상당히 일관되며 상호보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고, 모순되는 내용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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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은 쟁점은 안두희가 CIC 요원이라고 하더라도 1949년 암살 집행 당시 미군이 어떠한 영향력을 발휘했는가 하는 문제다. 그가 CIC 요원이라는 사실과 암살에 대한 미군의 영향력은 서로 관련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별개의 문제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도 안두희는 그의 ‘마지막 증언’에서 매우 생생하게 언급하고 있다.
한 열흘에 한 번씩 일주일에 한 번씩 그 미군 중위, 미군 저 24사단 중위가 있잖아요? 중령 대신 나한테 뭐 연락하갔다 그러구 자주 좀 서로 통하자고 얘기하던 중위가 - 그런데 중윈지 대윈지 잘 모르겠어요. - 나타나는 데 마이켈이라는 건 알지, 언제 뭐 중위 옷 입고 올 적도 있고, 대위 계급장 달고 올 적도 있고, 절반 이상 사복을 입고 올 적도 있고, 그런 친군데, 자주 드나드는 거예요. 특히 우리 정부가 생겨서 5·10선거가 끝나구서 자주 오는데…젊은 사람인데도 나보단 4, 5세 2, 3세 아랜 데도 나보다 아는 거 많고, 정치적인 얘기만 자꾸 물어보니 내가 정치 같은 걸 알 리가 없지요…어디서 배웠는지 우리 한국말은 자주 쓰는 데…한국말로 하다가 영어두 섞어서…나두 이제 쪼끔씩 영어를 배우는 겁니다.(‘마지막 증언’,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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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을 요약하면 안두희와 서북청년단은 경찰, 군 특무대와 연계되어 있었으며, 미군 정보장교와도 정기적으로 만나 백범과 한독당에 관한 정보를 논의했으며, 그것은 백범 암살을 기획한 김지웅의 정보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조심성이 많은 안두희로서는 백범 암살을 함부로 집행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정부 요인들의 견해를 탐문하고, 미국의 눈치를 보고 난 뒤에 실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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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생각으로는 백범 암살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부인하기 힘들다. 오히려 문제는 개입의 범위와 강도일 것이다. 현지 CIC 정보장교 차원이었는지, 대사관까지 개입된 수준이었는지, 본국 정부 정책의 일부였는지가 불분명할 뿐이다.
백범 암살관련 美발굴문서 완전분석
백범 김구 암살에 대한 미국 문서에 관한 논문이다.
2001년 정병준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stration : NARA)에서 안두희가 미군방첩대(CIC)의 요원이자 극우 테러단체 백의사의 단원이었다는 문서를 발굴했다. 이를 계기로 김구암살과 관련해 지금까지 전혀 거론되지 않았던 새로운 문제제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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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등에서 새로 발굴한 미국자료에 기초해 김구암살의 배경과 진상에 접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특히 암살사건을 전후해 주한미대사관 등 미국정부기관의 정보 수집·분석·평가를 시기적 흐름에 따라 정리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발굴한 미국자료들을 통해 사건의 흐름과 사후처리과정에서 드러나는 암살의 배경을 추적하며, 이 사건이 1949년 한국정치에서 차지하는 정치적 지형에 대한 분석과 미국의 평가 등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한편 암살사건에 대한 미국의 해석과 입장을 파악하는 것을 부차적 목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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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9일 주한미대사 무초는 안두희 재판관련 보고서를 국무부에 송부했다. 이 보고서는 김구암살은 물론 김구에 대한 미대사관의 총정리 보고서였다. 여기서 무초는 김구에 대해 더욱 냉혹한 평가를 했다.
김구는 암살자의 생을 살았으며, 암살자의 앞잡이들과 친구들로 스스로를 에워쌌으며, 모든 죽음 가운데 그가 가장 잘 이해하던 바 그런 죽음을 맞이했다. 야망을 가진 사람으로 한국인 가운데 명성과 권위에서 이승만에 버금가는 인물이었으며, 지난날 그의 야망이 좌절된 데에 매우 격분했을 것이다. 그의 성격상 권력을 되찾기 위해 가용한 모든 수단을 활용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역사적으로나 기질적으로라도, 그가 좌익이 아니라 극우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현재 남한에서 야망이 좌절된 사실은 그로 하여금 불장난을 할 유혹을 갖게 만들었다. 아마도 사실 김구는 좌익과 연락망을 형성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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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의 여수 주둔 14연대의 반란사건은 사실 여부를 떠나 김구의 개입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주한미군 정보참모부는 김구가 반란을 선동했을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다고 기록했다. 그 근거로 첫째 경비대 내에 김구의 추종자들이 상당하며, 반란의 공격목표가 현 정부라는 점, 둘째 사건 직전 김구가 전남 광주를 방문했다는 점, 셋째 이범석 총리가 여수반란에 우익들이 개입했다고 발표한 점 등을 지목했다. 김구는 10월 27일 기자 회견에서 극우가 반란에 참가했다는 주장을 부인하는 발언을 해야 했다. 주한미군 정보당국은 김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킬 경우 공산당이 혼란상태를 이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특히 한국정부가 개별적인 군사쿠데타나 공산당의 폭동은 진압할 수 있지만 군사쿠데타와 공산당의 폭동이 동시에 발생할 경우 진압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논평한 바 있다. 이와 함께 송호성 육군총사령관이 면직되었는데, 주한미군 정보당국은 송호성이 김구의 사도(disciple)이며 김구가 송호성을 통해 국방경비대에 자신의 추종세력을 투입한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김구가 극좌·북한과 결합해 군사쿠데타를 감행할 지도 모른다는 미군정의 우려는 1949년 김구 암살 당시 한국정부가 ‘안두희의 증언’을 통해 유포했던 암살의 정당성과 같은 맥락이었다. 한국정부는 암살을 전후해 첫째 극우·극좌의 합작음모, 둘째 남북결합의 군사쿠데타, 셋째 이승만 암살계획의 동시진행 등의 음모에 김구가 깊숙이 개입했다고 선전했다. 이는 정보당국의 지속적인 관심사항이었고, 암살과 관련해 공작차원에서 추진된 목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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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인과관계에 대한 중요한정보보고가 미국내에서있었다. 바로실리보고서이다. 문서제목은「김구암살관련 배경정보」(1949. 6. 29.작성, 1949. 7. 1.보고)이며, 작성자는 미국 뉴욕주 제1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운영과장 죠지 E. 실리(George E. Cilley) 소령이었다. 이 문서의 핵심적 내용은 다음과 같은 3가지이다.
1. 안두희는 미군 방첩대의 정보원 및 요원으로 활동했다
2. 안두희는 우익 테러조직인 白衣社의 자살 특공대(혁명단) 단원이었다.
3. 金九와 백의사 司令 廉東振이 군부 내 反이승만파와 손잡고 군사쿠데타를일으키려 한 혐의가 있다.
이 문서에 대한 분석의 결과,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 정보원·요원이었으며, 또한 백의사의 자살특공대 대원이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실리보고서가 전하는 ‘김구쿠데타 계획설’은 1948년말 한국군 정보·공작당국이 파악하고 있던 김구에 대한 정치적 의혹과 공작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여순사건·혁명의용군사건·김구암살에서 드러나듯이 이는 조작된 혐의일 뿐 사실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의혹과 공작은 정계의 핵심실력자들을 통해 확대재생산되었고, 메아리효과를 통해 확산되었다. 결국 실리보고서가 전하는 ‘김구쿠데타 계획설’은 종국적으로 김구 제거의 논리가 되었고, 암살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홍보되었다.
한편 무초의 8월 9일자 보고서는 김구가 반정부적인 활동을 펼쳤으며, 쿠데타나 전복활동에 개입한 것이 사실일 것으로 추정했다. 김구암살과 관련해 미대사관이 이승만정부와 동일한 평가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초는 이렇게 썼다.
(김구는) 표면상으로 공산주의자는 아니지만, 다소간 신뢰할 수 없으며, 악의에 찬 인물이며, 극동의 음지에서 음모를 꾸몄으며, 그의 도덕적 등뼈는 혼란으로 점철된 대부분의 삶에 의해 왜곡되었다. 이는 단지 사건에 대한 정부측 견해의 억지 측면만은 아니다.
사실 김구는 그의 시대보다 오래 살았으며, 교육이나 진정한 능력이 결여된 인물로, 그를 에워싼 이기적 인사들의 도구가 되었다. (중략) 정부는 잘 조직된 정당을 갖춘 명망있고 야심있는 김구가 자신들에 대항하는 반대조직의 강력한 규합점이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무초의 결론은 위기와 기회의 변곡점에 도달해 있던 한국정부·군의 평가와 정확히 일치했다.
결론적으로 김구와 한국독립당이 전복활동에 관계했으며, 김구는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죽을만하며, 안(두희)소위는 그 결과 영웅으로 석방되어야 한다고 믿는 일련의 조작된 감정 뿐만 아니라 현재 상당한 진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대사관이나 주한미군 방첩대(CIC) 등은 김구암살의 직접적 배경정보를 획득하지 못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실리의 보고서가 드러내듯이 안두희의 배경과 이 암살의 정치적 동기 및 배후는 굳이 추적하지 않아도 분명하다는 상황인식을 갖고 있었다. 한 가지 특징적이고 공통적인 반응은 김구가 반국가, 반이승만정부 활동의 중심인물로 파악되었고, 암살이 그런 정치적 이유를 갖는다고 평가된 부분이다. 즉 암살의 주된 책임이 김구측에게 있었다는 인상이 강하다. 이는 신생 한국의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한 미국의 주된 관심사가 한국정세의 안정이었다는 사실과 긴밀한 연관관계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김구가 만약 미국의 이익과 관련된 인물이었다고 한다면 주한 미국정부기관의 보고나 기록들은 전혀 다른 내용과 평가를 담고 있었을 것이다.
미국 자료를 통해 본 백범 김구 암살의 배경과 미국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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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등에서 새로 발굴한 미국자료에 기초해 김구암살의 배경과 진상에 접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특히 암살사건을 전후해 주한미대사관 등 미국정부기관의 정보 수집·분석·평가를 시기적 흐름에 따라 정리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발굴한 미국자료들을 통해 사건의 흐름과 사후처리과정에서 드러나는 암살의 배경을 추적하며, 이 사건이 1949년 한국정치에서 차지하는 정치적 지형에 대한 분석과 미국의 평가 등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한편 암살사건에 대한 미국의 해석과 입장을 파악하는 것을 부차적 목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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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9일 주한미대사 무초는 안두희 재판관련 보고서를 국무부에 송부했다. 이 보고서는 김구암살은 물론 김구에 대한 미대사관의 총정리 보고서였다. 여기서 무초는 김구에 대해 더욱 냉혹한 평가를 했다.
김구는 암살자의 생을 살았으며, 암살자의 앞잡이들과 친구들로 스스로를 에워쌌으며, 모든 죽음 가운데 그가 가장 잘 이해하던 바 그런 죽음을 맞이했다. 야망을 가진 사람으로 한국인 가운데 명성과 권위에서 이승만에 버금가는 인물이었으며, 지난날 그의 야망이 좌절된 데에 매우 격분했을 것이다. 그의 성격상 권력을 되찾기 위해 가용한 모든 수단을 활용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역사적으로나 기질적으로라도, 그가 좌익이 아니라 극우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현재 남한에서 야망이 좌절된 사실은 그로 하여금 불장난을 할 유혹을 갖게 만들었다. 아마도 사실 김구는 좌익과 연락망을 형성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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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의 여수 주둔 14연대의 반란사건은 사실 여부를 떠나 김구의 개입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주한미군 정보참모부는 김구가 반란을 선동했을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다고 기록했다. 그 근거로 첫째 경비대 내에 김구의 추종자들이 상당하며, 반란의 공격목표가 현 정부라는 점, 둘째 사건 직전 김구가 전남 광주를 방문했다는 점, 셋째 이범석 총리가 여수반란에 우익들이 개입했다고 발표한 점 등을 지목했다. 김구는 10월 27일 기자 회견에서 극우가 반란에 참가했다는 주장을 부인하는 발언을 해야 했다. 주한미군 정보당국은 김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킬 경우 공산당이 혼란상태를 이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특히 한국정부가 개별적인 군사쿠데타나 공산당의 폭동은 진압할 수 있지만 군사쿠데타와 공산당의 폭동이 동시에 발생할 경우 진압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논평한 바 있다. 이와 함께 송호성 육군총사령관이 면직되었는데, 주한미군 정보당국은 송호성이 김구의 사도(disciple)이며 김구가 송호성을 통해 국방경비대에 자신의 추종세력을 투입한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김구가 극좌·북한과 결합해 군사쿠데타를 감행할 지도 모른다는 미군정의 우려는 1949년 김구 암살 당시 한국정부가 ‘안두희의 증언’을 통해 유포했던 암살의 정당성과 같은 맥락이었다. 한국정부는 암살을 전후해 첫째 극우·극좌의 합작음모, 둘째 남북결합의 군사쿠데타, 셋째 이승만 암살계획의 동시진행 등의 음모에 김구가 깊숙이 개입했다고 선전했다. 이는 정보당국의 지속적인 관심사항이었고, 암살과 관련해 공작차원에서 추진된 목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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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인과관계에 대한 중요한정보보고가 미국내에서있었다. 바로실리보고서이다. 문서제목은「김구암살관련 배경정보」(1949. 6. 29.작성, 1949. 7. 1.보고)이며, 작성자는 미국 뉴욕주 제1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운영과장 죠지 E. 실리(George E. Cilley) 소령이었다. 이 문서의 핵심적 내용은 다음과 같은 3가지이다.
1. 안두희는 미군 방첩대의 정보원 및 요원으로 활동했다
2. 안두희는 우익 테러조직인 白衣社의 자살 특공대(혁명단) 단원이었다.
3. 金九와 백의사 司令 廉東振이 군부 내 反이승만파와 손잡고 군사쿠데타를일으키려 한 혐의가 있다.
이 문서에 대한 분석의 결과,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 정보원·요원이었으며, 또한 백의사의 자살특공대 대원이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실리보고서가 전하는 ‘김구쿠데타 계획설’은 1948년말 한국군 정보·공작당국이 파악하고 있던 김구에 대한 정치적 의혹과 공작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여순사건·혁명의용군사건·김구암살에서 드러나듯이 이는 조작된 혐의일 뿐 사실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의혹과 공작은 정계의 핵심실력자들을 통해 확대재생산되었고, 메아리효과를 통해 확산되었다. 결국 실리보고서가 전하는 ‘김구쿠데타 계획설’은 종국적으로 김구 제거의 논리가 되었고, 암살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홍보되었다.
한편 무초의 8월 9일자 보고서는 김구가 반정부적인 활동을 펼쳤으며, 쿠데타나 전복활동에 개입한 것이 사실일 것으로 추정했다. 김구암살과 관련해 미대사관이 이승만정부와 동일한 평가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초는 이렇게 썼다.
(김구는) 표면상으로 공산주의자는 아니지만, 다소간 신뢰할 수 없으며, 악의에 찬 인물이며, 극동의 음지에서 음모를 꾸몄으며, 그의 도덕적 등뼈는 혼란으로 점철된 대부분의 삶에 의해 왜곡되었다. 이는 단지 사건에 대한 정부측 견해의 억지 측면만은 아니다.
사실 김구는 그의 시대보다 오래 살았으며, 교육이나 진정한 능력이 결여된 인물로, 그를 에워싼 이기적 인사들의 도구가 되었다. (중략) 정부는 잘 조직된 정당을 갖춘 명망있고 야심있는 김구가 자신들에 대항하는 반대조직의 강력한 규합점이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무초의 결론은 위기와 기회의 변곡점에 도달해 있던 한국정부·군의 평가와 정확히 일치했다.
결론적으로 김구와 한국독립당이 전복활동에 관계했으며, 김구는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죽을만하며, 안(두희)소위는 그 결과 영웅으로 석방되어야 한다고 믿는 일련의 조작된 감정 뿐만 아니라 현재 상당한 진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대사관이나 주한미군 방첩대(CIC) 등은 김구암살의 직접적 배경정보를 획득하지 못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실리의 보고서가 드러내듯이 안두희의 배경과 이 암살의 정치적 동기 및 배후는 굳이 추적하지 않아도 분명하다는 상황인식을 갖고 있었다. 한 가지 특징적이고 공통적인 반응은 김구가 반국가, 반이승만정부 활동의 중심인물로 파악되었고, 암살이 그런 정치적 이유를 갖는다고 평가된 부분이다. 즉 암살의 주된 책임이 김구측에게 있었다는 인상이 강하다. 이는 신생 한국의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한 미국의 주된 관심사가 한국정세의 안정이었다는 사실과 긴밀한 연관관계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김구가 만약 미국의 이익과 관련된 인물이었다고 한다면 주한 미국정부기관의 보고나 기록들은 전혀 다른 내용과 평가를 담고 있었을 것이다.
미국 자료를 통해 본 백범 김구 암살의 배경과 미국의 평가#
주한미국대사관 차원의 분석작업은 안두희에 대한 재판(1949. 8. 3~6)이 종결된 직후에야 이루어졌다. 현재까지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예리한 분석은 주한미국대사 무초가 국무장관에게 보고한 1949년 8월 9일자 문서다. 문서의 제목은 김구 암살의 영향 ; 안두희 재판과 판결이며 미국 중앙정보국(CIA) 문서철에 소장되어 있고 ① 김구 암살의 영향과 ② 안두희 재판·판결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두희 재판이 종결된 후 무초가 제출한 이 보고서는 암살사건과 김구에 대한 종합적 평가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암살 사건의 동기, 정치적 배경, 관련자들에 대한 구체적 정보를 담고 있지는 않다. 즉 암살 사건 자체를 다루기보다는 암살 사건 이후 한국 정부·군이 보여준 사건처리 과정에 보다 중점을 두고 있다. 무초의 보고서의 핵심은 크게 세 가지 점이다. 첫째, 한국군이 암살사건의 발생부터 재판까지 전과정에 강력하게 개입하고 조작했다. 둘째, 한국군은 김구암살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선전함으로써 암살범을 비호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셋째, 김구암살에 관한 한국정부의 주장은 상당부분 근거가 있다. 무초가 말한 암살 발생 이후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한국 정부의 수사와 발표가 안두희의 혐의 및 배후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김구가 암살당해야만할 정당한 이유와 동기, 한국독립당이 비난받아야할 동기 등을 선전하는데 집중되었다는 점이다. 때문에 무초는 암살사건이 발생한 이후 가장 의혹을 받은 대상이 첫째 과도한 관심과 개입을 하는 한국군, 둘째 김구의 활동이라고 논평했다. 실제로 한국군의 공식 조사결과 발표의 핵심은 역시 김구의 반민족·반정부·친공·반역행동과 쿠데타·대통령살해음모 등을 선전·부각시키려는 것이었다. 무초 주한미대사는 한국군이 최근 발표한 성명 가운데 가장 긴 성명이 바로 이 진상보도였으나, 안두희의 자백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이승만 정부는 김구 암살과 관련해 미대사관과 동일한 평가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김구가 표면상으로 공산주의자는 아니지만 신뢰할 수 없고 반정부적인 활동을 펼쳤으며, 쿠데타나 전복활동에 개입한 것이 사실일 것으로 추정했다. 한 가지 특징적이고 공통적인 반응은 김구가 반국가, 반이승만정부 활동의 중심인물로 파악되었고, 암살이 그런 정치적 이유를 갖는다고 평가된 부분이다. 즉 암살의 주된 책임이 김구측에게 있었다는 인상이 강하다. 이는 김구 암살이 신생 한국 정세의 안정과 긴밀한 연관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김구가 이승만에게 가장 참기 힘든 옆구리의 가시같은 존재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김구에 대해 냉정하고 부정적인 종합평가를 내렸다. 가장 큰 이유는 한국정부의 안정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반영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평가를 염두에 둔다면 미대사관이 암살과 관련된 깊숙한 정보파악이나 배경·인과관계 등 진실을 파헤치는데 큰 관심을 갖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적어도 김구의 제거가 미국의 이익이란 관점에서 해로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5. 대중매체에서
백범을 다룬 대중매체에선 자주 다뤄지는 소재인데 1981년작 MBC 드라마 <제1공화국> 19~20회와 1995년 KBS 광복 50주년 기획드라마 <김구> 제1회 및 16회(최종회), 2003년 4월 29일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 80회 등지에서 비중있게 다뤘다. 특히 <김구>에선 백범 암살 전 김창룡(서상익 분)과 안두희(정진각 분)가 암살 모의를 하는 장면으로 보아 김창룡이 백범 암살의 배후라는 설정으로 나왔는데 이에 김창룡의 장녀 김미원이 KBS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으나 1998년 대법원이 제작진의 손을 들어줬다.(대법원 97다19038)6. 참고 자료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개정증보 3판) - 서중석 저. 웅진지식하우스. 2020. p260.
- 네이버 지식백과 항목: 원본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이다.
- KBS1 <다큐멘터리극장> - '정치암살의 희생자들 4탄: 백범 김구' (1994. 02. 27.)
- KBS1 <역사저널 그날> 258회 '암살의 시대, 안두희는 왜 김구를 죽였나' (2020. 03. 31.)
- 미국 자료를 통해본 백범 김구 암살의 배경과 미국의 평가, 정병준, 한국역사연구회, 61권, pp.313~346, 2006-09-01, 한국현대사
- 정병준, 2004 공작원 안두희와 그의 시대 역사비평 겨울호 ; 정병준, 2005 백범 김구 암살 배경과 백의사 한국사연구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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