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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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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 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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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BO_Retired_LG_41_svg.png 파일:KBO Retired LG 9.png 파일:KBO Retired LG 33.png
김용수
(1999.04.19.)
이병규
(2017.07.09.)
박용택
(2022.07.03.)
선수명 하단 일자: 은퇴식 및 영구 결번식 진행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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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1차 지명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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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1)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조호(1) {{{#!folding (12명) {{{#!folding (8명) {{{#!folding (9명) {{{#!folding (7명)
1987년 1988년 1989년 1990년 1991년
노찬엽
정태관
김영직
이국성
이용철
김상호
김기범
최훈재
나웅
김동수
이병훈
송구홍
1992년 1993년 1994년 1995년 1996년
임선동 이상훈 유지현 심재학 이정길
{{{#!folding (고졸)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이병규
{{{#!folding (고졸)
조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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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태
{{{#!folding (고졸)
최경환 이동현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김광희 박경수 장진용 박병호 김기표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1) 2011년(1)
봉중근
김유선
이형종 오지환 신정락(1) 임찬규(1)
2012년(1) 2013년(1) 2014년 2015년 2016년
조윤준(1) 강승호(1) 임지섭 김재성 김대현
2017년 2018년 2019년 2020년 2021년
고우석 김영준 이정용 이민호 강효종
2022년 2023년(1) 2024년(1) 2025년(1) 2026년(1)
조원태 김범석(1) 지명권 양도 김영우
(1) 전면 드래프트 시행연도
(2) 지명 후 미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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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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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00> 1982 1983~1984 1985 1986 1987
이길환 하기룡 정삼흠 오영일 김건우
<rowcolor=#ffff00> 1988 1989 1990 1991 1992
김용수 김기범 최일언 김용수 김기덕
<rowcolor=#fff> 1993~1994 1995~1996 1997~1998 1999 2000~2001
김태원 이상훈 김용수 손혁 해리거
<rowcolor=#fff> 2002 2003~2004 2005 2006 2007
만자니오 이승호 장문석 최상덕 박명환
<rowcolor=#fff> 2008 2009 2010 2011 2012
브라운 봉중근 곤잘레스 리즈 주키치
<rowcolor=#fff> 2013 2014 2015~2017 2018~2019 2020
리즈 김선우 소사 윌슨 차우찬
<rowcolor=#fff> 2021 2022 2023 2024 2025
켈리 플럿코 켈리 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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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수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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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gv1.png파일:Twins_champion_v2.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0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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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M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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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1983 1984 1985 1986
김유동
OB 베어스 / 외야수
김봉연
해태 타이거즈 / 내야수
유두열
롯데 자이언츠 / 외야수
-[a] 김정수
해태 타이거즈 / 투수
1987 1988 1989 1990 1991
김준환
해태 타이거즈 / 외야수
문희수
해태 타이거즈 / 투수
박철우
해태 타이거즈 / 내야수
김용수
LG 트윈스 / 투수
장채근
해태 타이거즈 / 포수
1992 1993 1994 1995 1996
박동희
롯데 자이언츠 / 투수
이종범
해태 타이거즈 / 내야수
김용수
LG 트윈스 / 투수
김민호
OB 베어스 / 내야수
이강철
해태 타이거즈 / 투수
1997 1998 1999 2000 2001
이종범
해태 타이거즈 / 내야수
정민태
현대 유니콘스 / 투수
구대성
한화 이글스 / 투수
퀸란
현대 유니콘스 / 내야수
우즈
두산 베어스 / 내야수
2002 2003 2004 2005 2006
마해영
삼성 라이온즈 / 지명타자
정민태
현대 유니콘스 / 투수
조용준
현대 유니콘스 / 투수
오승환
삼성 라이온즈 / 투수
박진만
삼성 라이온즈 / 내야수
2007 2008 2009 2010 2011
김재현
SK 와이번스 / 지명타자
최정
SK 와이번스 / 내야수
나지완
KIA 타이거즈 / 외야수
박정권
SK 와이번스 / 내야수
오승환
삼성 라이온즈 / 투수
2012 2013 2014 2015 2016
이승엽
삼성 라이온즈 / 내야수
박한이
삼성 라이온즈 / 외야수
나바로
삼성 라이온즈 / 내야수
정수빈
두산 베어스 / 외야수
양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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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018 2019 2020 2021
양현종
KIA 타이거즈 / 투수
한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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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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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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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수
kt wiz / 내야수
2022 2023 2024
김강민
SSG 랜더스 / 외야수
오지환
LG 트윈스 / 내야수
김선빈
KIA 타이거즈 / 내야수
[a] 삼성 라이온즈의 전후기 통합우승으로 인한 한국시리즈 미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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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98 KBO 리그 다승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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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KBO 리그 승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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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1987, 1989 KBO 리그 구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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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2위 3위 4위
선동열 최동원 이종범 이승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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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 12위 24위 25위
박철순 이만수 백인천 김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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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위 32위 33위 35위
이상훈 박정태 니퍼트 배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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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위 20위 28위 31위
장효조 김시진 한대화 김재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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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위 13위 18위 26위
이강철 정민철 정민태 조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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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위 17위 23위 36위
김태균 박재홍 박경완 홍성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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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위 37위 38위 39위
전준호 이순철 정근우 박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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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위 15위 19위 22위
양준혁 박용택 이병규 김기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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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위 29위 30위 40위
장종훈 김동주 심정수 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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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위 8위 16위 21위
송진우 구대성 김용수 임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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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표 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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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투수 마일스톤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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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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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진
(1983~1992)
1987년 / 124승
최동원
(1983~1990)
1990년 / 103승
선동열
(1985~1995)
1990년 / 146승
장호연
(1983~1995)
1993년 / 109승
윤학길
(1986~1997)
1994년 / 117승
정삼흠
(1985~1996)
1996년 / 106승
이강철
(1989~2005)
1996년 / 152승
조계현
(1989~2001)
1996년 / 126승
송진우
(1989~2009)
1997년 / 210승
김용수
(1985~2000)
1998년 / 126승
정민철
(1992~2009)
1999년 / 161승
김상진
(1989~2003)
1999년 / 122승
이상군
(1986~2001)
2000년 / 100승
한용덕
(1987~2004)
2000년 / 120승
정민태
(1992~2008)
2000년 / 124승
김원형
(1991~2011)
2005년 / 134승
임창용
(1995~2018)
2007년 / 130승
김수경
(1998~2012)
2007년 / 112승
이상목
(1990~2009)
2008년 / 100승
손민한
(1997~2015)
2009년 / 123승
이대진
(1993~2012)
2009년 / 100승
박명환
(1996~2015)
2010년 / 103승
배영수
(2000~2019)
2012년 / 138승
장원삼
(2006~2020)
2015년 / 121승
윤성환
(2004~2020)
2016년 / 135승
김광현
(2007~)
2016년 / 170승
장원준
(2004~2023)
2016년 / 132승
양현종
(2007~)
2017년 / 179승
송승준
(2007~2021)
2017년 / 109승
니퍼트
(2011~2018)
2018년 / 102승
차우찬
(2006~2023)
2019년 / 112승
유희관
(2009~2021)
2021년 / 101승
류현진
(2006~)
2024년 / 108승
}}}}}}}}} ||
300세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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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5px -1px -11px"
오승환
(2005~)
2021년 / 400세이브
}}}}}}}}} ||
2000탈삼진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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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5px -1px -11px"
송진우
(1989~2009)
2008년 / 2048탈삼진
양현종
(2007~)
2024년 / 2076탈삼진
}}}}}}}}} ||
같이 보기: KBO 리그 타자 마일스톤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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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연봉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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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fff> 1982 1983 1984 1985 1986
박철순
OB / 2400만원
장명부
삼미 / 1억 8000만원(1)
장명부
삼미 / 2500만엔
장명부
삼미 / 1억 400만원
최동원
롯데 / 5800만원
<rowcolor=#fff> 1987 1988 1989 1990 1991
최동원
롯데 / 8910만원
최동원
롯데 / 8910만원(2)
최동원
삼성 / 9000만원(3)
선동열
해태 / 9000만원
선동열
해태 / 1억 500만원
<rowcolor=#fff> 1992 1993 1994 1995 1996
선동열
해태 / 1억 2000만원
선동열
해태 / 1억원
선동열
해태 / 1억 3000만원
선동열
해태 / 1억 3000만원
김용수
LG / 1억 1000만원
<rowcolor=#fff> 1997 1998 1999 2000 2001
김용수
LG / 1억 2200만원
양준혁
삼성 / 1억 4000만원
정명원
현대 / 1억 5400만원
이승엽
삼성 / 3억원
이승엽
삼성 / 3억원
<rowcolor=#fff> 2002 2003 2004 2005 2006
이종범
KIA / 4억 3000만원
이승엽
삼성 / 6억 3000만원
정민태
현대 / 7억 4000만원
심정수
삼성 / 7억 5000만원
심정수
삼성 / 7억 5000만원
<rowcolor=#fff> 2007 2008 2009 2010 2011
심정수
삼성 / 7억 5000만원
심정수
삼성 / 7억 5000만원
김동주
두산 / 7억원
김동주
두산 / 7억원
김동주
두산 / 7억원
<rowcolor=#fff> 2012 2013 2014 2015 2016
김태균
한화 / 15억원
김태균
한화 / 15억원
김태균
한화 / 15억원
김태균
한화 / 15억원
김태균
한화 / 16억원
<rowcolor=#fff> 2017 2018 2019 2020 2021
이대호
롯데 / 25억원
이대호
롯데 / 25억원
이대호
롯데 / 25억원
이대호
롯데 / 25억원
추신수
SSG / 27억원
<rowcolor=#fff> 2022 2023 2024
김광현
SSG / 81억원
구자욱
삼성 / 20억원
류현진·박동원
한화·LG / 25억원
(1) 당시 언론에 발표된 금액은 계약금 4000만원, 연봉 4000만원을 합쳐 총 8000만원이었다.
실제로는 계약금 1500만엔(약 4500만원), 연봉 2500만엔(약 7500만원), 부대 비용 6000만원을 합쳐 총 1억 8000만원이었다.
(2) 실제 연봉 계약은 시즌 중이었던 6월 29일에 이루어져서 실수령액은 35,862,750원이다. 최동원 90만원 사건 참조.
(3) 실제 연봉 계약은 시즌 중이었던 6월 23일에 이루어져서 실수령액은 47,400,000원이다. 항목 참조.
}}}}}}}}} ||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c30452><tablebgcolor=#c30452> 파일:LG 트윈스 엠블럼.svgLG 트윈스 2군
역대 감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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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30452><colcolor=#c8ab37> LG 트윈스 No.41
김용수
金龍洙 | Kim Yongsoo
출생 1960년 5월 2일 ([age(1960-05-02)]세)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국적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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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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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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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학력 홍릉국민학교 (졸업)
동대문중학교 (졸업)
동대문상업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 79 / 학사)
신체 173cm, 72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3년 1차 지명 (MBC)
1985년 1차 지명 (MBC)
소속팀 한일은행 야구단 (1983~1984)
MBC 청룡-LG 트윈스 (1985~2000)
지도자 베로비치 다저스[1] 연수코치 (2001)
LG 트윈스 2군 투수코치 (2002)
LG 트윈스 2군 책임·투수코치 (2003)
LG 트윈스 2군 투수코치 (2004, 2007~2009)[2]
LG 트윈스 1군 투수코치 (2009)[3]
중앙대학교 야구부 감독 (2010~2012)
은평구BC 투수 총괄 코디네이터 (2023)
GD챌린저스 코치 (2024~)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코치 (2003)
대한민국 여자 야구 국가대표팀 투수코치 (2016)
프런트 LG 트윈스 스카우트 (2010)
해설위원 KBS SKY 스포츠 야구 해설위원 (2005~2006)
병역 예술체육요원[4]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선수 경력3. 피칭 스타일4. 지도자 경력
4.1. LG 트윈스 코치 1기 시절4.2. LG 트윈스 코치 2기 시절4.3. 투수코치로서의 평가4.4. 중앙대학교 감독 시절4.5. 대한민국 여자 야구 국가대표팀 투수코치 시절4.6. 은평구BC 투수 총괄 코디네이터
5. 해설가 경력6. 근황7. 연도별 주요 성적
7.1. 그가 남긴 기록7.2. 수상 내역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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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LG 트윈스를 절대 지지않는 팀으로 만드는 것이 나의 할 일이다."
ㅡ 야구는 전설이다 LG 김용수 편 中

MBC 청룡, LG 트윈스의 투수. LG의 유일한 20세기 한국시리즈 MVP이자 LG 투수 유일의 한국시리즈 MVP,[5] KBO 리그 최초의 통산 100승 - 200세이브의 기록을 보유한 프랜차이즈 스타.[6] 자신을 아끼지 않으며 한결같이 한 팀을 지켜 온 모습에서 따 온 '노송'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다.[7]

MBC 청룡LG 트윈스의 역사를 잇는 산증인인 선수이기도 하다. 때문에 LG 팬들이 자체적으로 구입해서 야구장에 입고 오는 청룡 유니폼에는 그의 41번을 마킹하고 오는 경우가 자주 있다.[8]

2. 선수 경력

파일:KBO 40주년 특집 김용수 일러스트.jpg
파일:MBCbluedragon41.png
MBC 청룡 시절
파일:1994Kimyongsu.jpg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순간

다른 선수들에 비해 다소 늦은 시기인, 동대문중학교 1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9][10] 참고로 본래는 3루수였는데 선발 투수 한 명을 새로 뽑아야 하는 상황에서 감독이 김용수의 선배들에게 누가 적합하냐고 물어보자 만장일치로 다 김용수라고 답했다고 한다. 동대문상업고등학교[11]중앙대학교 체육교육과(79학번)를 졸업하고 실업 야구 팀인 한일은행 야구단을 거쳐[12] 1985년 계약금 2,300만 원에 MBC 청룡에 입단했다. 1984년에는 이상군, 선동열, 류중일 등과 함께 LA 올림픽에 참가했다.

LG 트윈스 최초의 영구결번식을 가진 선수(41번)이며, 한국프로야구에서 최초의 200세이브-100승을 거둔 선수이기도 하다. 다만 41번이라는 등번호는 애초부터 김용수가 원해서 달았던 번호가 아니었다. 훗날 김용수 본인이 이에 대한 비화를 공개했는데, 본래는 대학 시절부터 쓰던 14번을 달고 싶어했다. 그러나 김용수가 MBC 청룡에 입단했을 때 14번의 원래 주인은 선배 투수였던 이광권이었다. 김용수는 이광권에게 "선배님, 14번 좀 주시면 안되겠습니까?"라고 물어봤다가 단칼에 거절당했다. 결국 남는 등번호 중에 마음에 드는 번호를 고르자고 해서 38번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청룡 감독으로 복귀한 김동엽 감독이 "내래 삼팔따라지라서 38번을 써야갔서!"라고 말하며 38번을 가져가 버렸다. 그렇게 해서 달게 된 번호가 주인 없이 남은 41번이었고, 별 수 없이 41번을 달게 되었다. 등번호를 41번으로 결정한 이후 김용수는 팀 동료들에게 "너 얼마 못하겠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본인도 맘에 들었는지 이광권의 은퇴 이후에도 41번을 계속해서 달았다.[13] 이러한 비화들은 30번대 이후 등번호가 '2군 선수들이 다는 등번호'라는 당시의 선입견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프로 입단 2년째인 1986년 1점대 방어율에 26세이브로 세이브왕을 차지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후 1987년과 1989년에도 세이브 1위를 기록하며 198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팀의 마무리로 자리잡았다. 그러다 팀이 럭키금성그룹에 매각되어 LG 트윈스로 출범하게 된 첫 해인 1990년, 정삼흠과 보직을 바꾸어 선발로 전환했는데,[14] 포크볼을 구사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였다. 12승을 거둠과 동시에 1990년 한국시리즈에서 2승을 혼자 따내 LG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며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했다.

1991년에도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190이닝 12승 11패 10세이브 ERA 2.79로 훌륭한 성적을 거뒀지만 무리하게 굴려진 여파로 인해 좌골 신경통이 발생했다. 결국 1992년 5승 4패 ERA 5.16으로 기량이 급격히 떨어졌고, 일각에서는 은퇴 이야기까지 나오는 등 극심한 부진을 겪게 된다.[15]

그는 선배 박철순의 조언을 받아들여 수술 대신 재활을 선택했고 부상에서 회복된 1993년에 다시 마무리 투수로 복귀하는데, 3년 연속 30세이브를 달성함과 동시에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1승 2세이브를 기록하며 최초의 2회 한국시리즈 MVP 수상을 달성했다. 다만 이 시기에는 선동열, 정명원, 김경원 등 강력한 마무리들이 등장해서 상대적으로 평가가 낮아지기도 했다.[16] 1995년 6월 14일 잠실 OB전에 10회말 2사2루에서 타석에 들어섰고 삼진으로 물러났다.[17] 시즌이 끝난 이후 연봉 협상에서 트윈스 최초의 억대 연봉을 받는 선수가 되었다.

1996년부터는 혹사와 척추분리증으로 선발 등판이 힘들었던 이상훈을 대신해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면서 16승 7패 9세이브 ERA 1.43으로 성공적인 선발 복귀를 했다. 다만 다음 해인 1997년부터 다시 마무리로 다시 돌아갈 예정이었고 실제로 천보성 신임 감독 역시 김용수를 마무리로 쓰려고 했지만, 김용수가 신임 감독이던 천보성에게 선발로 뛰고 싶다고 우기는 바람에 이상훈은 1997년에도 마무리로 뛰게 되고, 김용수는 선발로 고정된다. 대신 이상훈 부럽지 않은 활약으로 이닝 많이 먹어주는 선발투수로 활약하며 1997년 177⅔이닝 12승, 1998년에는 175이닝 18승을 거뒀는데, 특히 1998년에는 18승으로 다승 1위에 오르면서 최고령 다승왕이 되었다. 특히 1998년 다승왕 등극은 시즌 막판까지 현대 유니콘스정민태와 다승왕 경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9월 27일 현대전에서 구원 등판해 구원승을 올려 17승으로 정민태와 공동 1위가 됐다가, 다음 날인 9월 28일 현대전에 곧바로 선발 등판해 18승째를 선발승으로 가져가면서 김용수가 단독 다승왕에 올랐다. 다만 다승왕과 승률왕에 오르고도 투수 골든글러브는 정민태가 받았는데, 이는 김용수가 거둔 18승 중 3승은 구원승이었던 반면 정민태는 17승 모두 선발승이었던 데다 이닝 소화력 역시 정민태 200⅔이닝, 김용수 175이닝으로 꽤나 차이가 났다. WAR 역시 정민태 5.26, 김용수 3.50으로 정민태가 우위였으며[18] 결정적으로 김용수의 소속팀 LG가 준우승한 반면 정민태는 한국시리즈에서 2승 1세이브로 호투해 현대를 우승시키고 한국시리즈 MVP까지 차지하면서 정민태가 우위였다.

1999년에는 다시 마무리로 돌아와 26세이브를 거뒀고, 마지막 2시즌 동안에도 리그 최고령 선수로 활약하면서[19] 노장의 관록을 보여주며 2000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KBO 리그 최초로 영구 결번식을 가진 선수지만, 은퇴식은 하지 않았다. 은퇴식을 본인과 구단 모두 원하지 않았고, 은퇴 당시 선수 생활을 더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 실제로 현역 생활 마지막 해인 2000년에는 마무리 자리를 장문석에게 넘겨 줘서 기록으로만 따졌을 때는 6승 4패 4세이브에 평균자책점 5.24였지만, 소화한 이닝은 무려 127이닝이었다. 김용수는 8월 즈음에 성적이 하락세를 타자 은퇴를 진지하게 고민했으나, 이후 성적이 다시 상승곡선을 그리면서 현역 연장의 의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이광은 감독이 은퇴를 종용하디시피 했고, 구단 역시 이에 동조하는 입장에 가까웠다.[20] 그렇게 김용수는 2000년 11월 20일 기자회견을 갖고 현역 은퇴를 밝혀야 했다. 프로입단 16년만의 일이었다.

이광은 당시 감독과[21] LG 구단이 등 떠밀듯이 은퇴만 시키지 않았으면 마무리로서는 아닐지라도 중간 계투 투수로 몇 년 더 뛰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22][23] 은퇴기자회견에서 김용수는 은연 중에 “1년 정도는 더 뛰고 싶었는데…”라며 기자회견 중에도 아쉬움을 드러냈다.

불암콩콩코믹스 레전드 - 김용수 편

3. 피칭 스타일

파일:김용수포심패스트.gif
143km/h 포심 패스트볼[24]
파일:김용수스플리터.gif
128km/h 스플리터[25]
파일:김용수슬라이더.gif
121km/h 슬라이더
파일:Honeycam 2019-09-28 00-07-29.gif
117km/h 커브

예나 지금이나 투수로써는 작은 키인 173cm[26]의 불리한 신체 조건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직구와 다양한 변화구를 던지는 파워피처형 투수였다. '노송'이라는 별명과 온화한 이미지, 롱런이라는 특징으로 인해 기교파로 오인되기도 하나 데뷔 초기에는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를 주 무기로 하여 평균 140km, 최고 145km 정도의 빠른 공을 던지는 강속구 계열의 투수였다[27]. 주 무기는 데뷔 초기에는 슬라이더. 이후 청룡이 LG로 바뀐 1990년대 이후에는 포크볼을 추가로 구사했는데, 현재는 이 구종이 스플리터에 더 가깝다고 평가된다. 포크볼은 KBO에 굉장히 늦게 도입된 편인데, 스플리터는 더 늦게 도입되었기 때문에 김용수 본인이 밝히지 않는 한 포크볼인지 스플리터인지 명확히 정의내리기는 어렵다. 이는 최동원이 던진 역회전 공도 마찬가지. 스플리터인지 포크볼인지 싱커인지 의견이 제각각 갈린다.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이기에 별명은 "노송"이지만, 이건 35세 이후에도 꾸준히 활약해서 붙은 별명. 20대 시절의 별명은 슬라이더가 날카롭다고 "면도날"[28]. LG가 잘나가던 시절에는 '제국의 파수꾼'이라는 별명도 잠시 있었다. 심지어 1998년에는 만 38세의 나이로 18승을 기록하면서 역대 최고령 다승왕에 등극했다.[29] 심지어는 은퇴한 후에도 4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130km/h대의 공을 던진다는 소문이 있다.[30] 수더분한 이미지와 다르게 어깨 근육이 대단히 발달되어 있어[31] 속구 자체가 강력[32]했고, 다양한 구종을 모두 잘 던졌다. 140중반대의 속구와 커브, 슬라이더, 포크볼 등을 모두 적절하게 잘 구사한 투수로 단순한 기교파가 아니라 구속이 꽤 좋은 투수였다.

또한 훌륭한 구원투수가 되기에 적합한 신체적 장점을 갖고 있었다. 작은 체구지만 전성기 시절의 혹사로 얻은 좌골신경통 외엔 딱히 큰 부상을 당한 적이 없었던 튼튼한 몸과 가만히 있다가 마운드에 구원 등판해서 1개나 2개의 연습투구만 해도 몸이 완벽하게 풀리는 축복 받은 체질이 바로 그것이었다.

4. 지도자 경력

4.1. LG 트윈스 코치 1기 시절

2000년을 끝으로 은퇴한 후 LG 트윈스 구단의 지원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가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서 1년간 코치 연수를 받았고, 2002년에 귀국하여 2004년까지 LG에서 2군 투수코치를 맡았다.

2003년에는 LG의 2군 감독이 공석이었기 때문에 책임코치라는 직함을 달고 사실상 2군 감독으로 활동하였고, 2004년에는 다시 2군 투수코치가 되었는데[33] 김성근과 사이가 안 좋은 것인지, 구단의 지시를 받은 것인지, 김성근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선수들에게 가혹하게 대해, 은퇴를 시켰다는 증언이 있다. https://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15839 1군에서 난타 당하고 내려온 투수들이 2군에 갔다 오면 투구 밸런스가 잡혀 제법 좋은 투구를 해서, 이 때 까지만 해도 팬들 사이에선 평가가 매우 좋았다.[34] 이동현, 김광삼 등의 젊은 투수들이 멘토처럼 따르던 코치였으나 2004년 시즌 후 재계약에 실패하면서 LG를 떠나게 되었다. LG와의 재계약에 실패한 이유가 참 웃긴데, 당시 감독이었던 어떤 사람김용수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35] 자신이 팀을 운영하는 데 불편하다는 이유로 내쳤다.#

더군다나 그 사람은 잠실구장에 걸려있던 김용수의 41번 영구 결번 유니폼까지 떼어내게 하는 졸렬함의 끝을 보여주며 가뜩이나 이상훈의 강제 트레이드, 류지현의 은퇴, 김재현마저 FA로 이적하게 되어 이미 화난 팬들의 분노를[36] 그야말로 극한까지 시험했다. LG가 10년 암흑기를 거치고 많은 감독들이 팬들에게 욕을 먹었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역대 최악의 감독으로 이순철이 꼽히는 이유, 볼드모트도 아닌데 이름으로 조차 불리지 않고 별명[37]으로 불릴 정도로 LG 팬들이 증오해 마지 않는다. 시간이 흐른 뒤 해설자 이순철로서는 그러려니 하지만 감독 이순철은 용서 못한다는 LG팬들이 아직도 많을 정도, 롯데 팬들이 백인천 감독을 보는 시선과 비슷하다.

4.2. LG 트윈스 코치 2기 시절

이후 2년간 해설위원으로 있다가, 2007년 시즌을 앞두고 김재박 감독의 취임과 동시에 2군 투수코치로 부임하며 2년만에 LG로 돌아왔다. 이 시절 사이버 투수 김유선의 투구를 보고 "내가 저 새끼 던지는 거 보면 돌아버릴 지경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는 카더라가 있지만, 그의 평소 성품으로 봤을 때 실제로 그런 말을 했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그만큼 김유선이 개판이었다는 뜻이겠지만...[38]

그 후 2008 시즌 종료 후 양상문 1군 투수코치가 롯데 자이언츠의 2군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영입했던 일본인 코치 다카하시 미치타케 투수코치[39]가 김재박 감독과의 커뮤니케이션 부족을 이유로 시즌 도중 2군으로 내려오자 다카하시를 대신하여 2009년 시즌 중반부터 1군 투수코치를 맡았다.

그러다가 2009년 시즌 도중, 주전 포수인 조인성심수창이 경기 중에 말다툼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이 둘이 말다툼을 할 때도 강하게 말리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자, '얼마나 김용수 코치가 만만하게 보였으면 김용수 코치 보는 앞에서 저랬겠느냐'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일단 2군 투수코치 시절 키워낸 유망주가 하나도 없었던데다[40] 1군 투수코치로 올라온 뒤에도 투수진 운영을 잘하기는커녕 외부적으로 이런 모습을 보이자 코치로서의 평가는 더 떨어지게 된다. 결국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겠지만, 시즌이 끝나고 박종훈 감독 부임과 동시에 1군 투수코치가 윤학길[41][42]로 바뀌었고, 동시에 김용수 코치는 스카우트 팀으로 전보되었다.

4.3. 투수코치로서의 평가

MBC 청룡-LG 트윈스 역사상 최고의 투수로 팀 레전드로 추앙받는 대선수이나, 투수코치로써는 단순히 팀을 넘어서 리그 역사를 통틀어서도 평가가 아주 크게 낮은 축에 속한다. 이것만으로 팬덤에게 어느 정도 평가가 깎여버렸다. 정현욱이나 이상군보다 조금 나은 정도이고, 조계현 & 윤학길 등과 동급으로 취급될 정도로 실적이 없다. 특히나 이들 중에서도 현역 시절 가장 레전드급 투수이니만큼 더욱 부진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1군 투수코치로 재임했던 기간이 고작 몇 개월 이었던 걸 감안한다면 너무 가혹한 평가일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비록 능력은 별로 없었으나 이순철이 쫓아낸 데에 대한 동정으로 그렇게까지 심한 질타는 받지 않는 편이다. 1군 투수코치로 재임했던 기간이 워낙 짧았던 만큼, 코치로서 평가를 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2군에서 투수코치로서 꽤 오래 있었는데도 2군에서 이렇다 할 투수 한 명 제대로 키워내질 못했고, 비싼 계약금 들여서 데려온 좌완투수 서승화를 비롯해서 안 터진 유망주도 많았다. 또한 현역 시절의 그 날카로운 변화구를 전수하지도 못한 건 어느 정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또 공교롭게도 그 시기가 바로 LG의 암흑기였다. 그 예로 1차 지명자가 김유선. 신사 중의 신사로 평가받을 정도로 사람 좋은 김용수가 1군 코치진들에게서 김유선에 대해 물어보자 '저 새끼 던지는 거 보면 아마 돌아버릴 겁니다.'[43]라는 말을 했다는 소문이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LG 투수진 자체가 기량미달이라 김용수가 키워내는 데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사람 좋고 선수들 편하게 해 주는 걸로는 높이 평가받지만, 성격 자체가 너무 순하고 선수들을 강하게 채찍질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다. 속사정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외부에서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정도니. 그리고 심수창, 조인성의 말다툼 사건 이후로는 평가가 더 나빠졌고, 이는 해임으로 이어진다.

4.4. 중앙대학교 감독 시절

파일:external/sccdn.chosun.com/2012092101001481700120601.jpg
스카우트 일을 잠시 하다가 2010년, 모교인 중앙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했다. 미우나 고우나 LG 트윈스의 레전드이고 대학 감독으로써 지도자로써의 역량을 확실히 레벨 업하길 바라는 LG 팬들이 많다. 그러나 어느 날 중앙대학교 투수들은 하나같이 월미도 바이킹 제구를 선보이고...

중앙대학교 감독 시절 LG 트윈스에 포수 조윤준을 1차 지명자로 강력 추천 했다는 루머가 있으나, 본인은 이 루머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부인하였다. 다만 LG 구단에 투수 유희관을 추천한 적은 있다고 한다. 링크 다만 유희관을 추천했었다는 말은 걸러 들어야 할 게 유희관은 2009 KBO 신인드래프트 에서 두산에 지명 되었다. 즉 김용수가 중앙대 감독을 맡았을 당시에는 이미 프로 선수였었다. 다만 중앙대 감독 시절이 아닌 LG 코치 시절에 2군 연습경기에서 유희관의 투구를 보고 추천했었을 수도 있고. 그나마 이 쪽이 더 개연성 있다.

거기에다가 심판에게 식사비로 100만 원을 건넨 혐의가 드러나, 대한야구협회로부터 3년 간 지도자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2012년 11월 고정식에게 중앙대학교 야구부의 감독직을 넘긴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참고로 100만 원은 본인의 돈으로 건넨 게 아니라, 학부모들이 돈을 모아 건낸 것이다. 관행상 있었던 일이었다고 그를 비호하는 주장도 있긴 하지만 심판에게 뇌물 공여는 넓은 의미로 보면 승부조작으로 연결될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이고, 오히려 관행상 있었던 일이었기에 징계가 약하게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014년 12월 16일 롯데 자이언츠의 2군 투수코치로 계약했다는 기사가 나왔으나, 다음 날인 12월 17일에 위의 징계를 이유로 계약을 철회하며 야인으로 돌아갔다.[44]

2015년 3월 25일, 대한야구협회가 이사회를 열어 그의 자격정지를 전면 해제했다.

4.5. 대한민국 여자 야구 국가대표팀 투수코치 시절

선수 시절 감독이었던 이광환의 요청에 의해 2016년 여자 야구 국가대표팀에서 투수코치 겸 인스트럭터로 여자 선수들을 지도하였다.

2017년 2월 포항제철고제주특별자치도 전지훈련에 인스트럭터로 참여한다고 한다. LG 시절 절친한 팀 동료였던 김영직의 요청이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또한 2017년 1학기부터 서울대에서 교양과목 강의도 한다고 한다. 과거 LG 시절 스승이자 서울대 야구부 감독으로 있는 이광환의 추천이라는 듯.

4.6. 은평구BC 투수 총괄 코디네이터

2023년 송구홍이 감독으로 있는 은평구 베이스볼 클럽 투수 총괄 코디네이터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성적 부진으로 송구홍과 함께 사퇴했다.

5. 해설가 경력

2005년부터 2006년까지 KBS SKY 스포츠에서 해설위원으로 있었다. 카더라에 의하면 다른 팀에서도 코치 제안을 받았었지만, LG가 아닌 다른 팀에서 야구하는건 아무 의미가 없다며 코치 제안을 거절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해설로서는 좋지 못한 평을 받았다. 해설을 할 때에 부적합한 용어를 사용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

특히 2006년 7월 2일에 김동수안영명이 빈볼 시비가 일어나자[45], "저건 고의성이 있는 빈볼이다. 저래선 안 된다."라는 말을 남기면서[46][47], 한화 팬들에게 많은 욕을 먹었다. 이 때문에 한동안 해설을 하지 못했다.

결국 2007 시즌을 앞두고 LG 트윈스 구단의 러브콜을 받아 해설위원을 그만두고 코치로 복귀했다.

6.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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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9일 LG 트윈스의 2호 영구 결번 이병규의 영구 결번식에 깜짝 등장하여 꽃다발을 주고 포옹을 하면서 LG팬들을 감동시켰다.[48] 5년 후 트윈스의 3호 영구 결번 박용택의 은퇴 및 영구 결번식에도 등장하여 박용택과 포옹을 하였다.[49]

투수코치로는 존재감이 없었으나, 선수 김용수는 이야기가 다르다. 현역 시절의 활약이 워낙 압도적인 데다가 현재에도 LG 트윈스 역대 투수 중에서는 감히 노송을 넘볼 만한 선수도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LG팬들에게는 좋은 추억[50]으로 남아 있는 인물이다.

비록 LG를 떠난 지 오래됐지만, 아직까지도 팀에 대한 애정이 상당하고, 팀의 선수들이나 코칭스태프들과 자주 연락하며 지내는 것 같다. 강연 자리나 지인들 혹은 팬들을 만나면 과거 LG에서 선수나 코치로 있었던 시절에 있었던 썰이나 LG 선수들에 대해 많은 썰들을 푼다고 한다. 한희가 많은 기회를 받지 못해 아쉽다는 이야기, 양상문 감독과도 친구라[51] 자주 이야기를 나누는데, 양상문이 팀에 우타자가 없다고 맨날 징징대더니 정의윤을 SK로 보내 버렸다는 이야기, 이병규와 자주 전화 통화를 한단 이야기 등등 그를 직접 만났던 어떤 팬의 이야기

현재는 서울대학교에서 야구 교양 수업 교수로 출강 중이며, 가끔 잠실야구장에서 열리는 LG 홈 경기를 직관하러 오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한다. 잠실 직관을 가서 김용수를 목격한 LG 팬들이 인사를 하면 반갑게 맞아주며 먼저 악수도 청하고, 사진이나 싸인 요청도 잘 들어준다고 한다.

2019년 홈 개막전에 1990 + 1994 우승 멤버들이 초청되어 오랜만에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섰다. 이 날은 시구는 김용수, 시구 포수는 김동수, 시타는 유지현이 맡았다. 다만 중계를 맡은 SPOTV가 라인업 소개를 하다가 시구 중계를 패스하여(참 가지가지 한다.....) TV 중계는 되지 못하고 나중에 LG 공식 SNS에서 공개되었다. 이 날 LG는 토미 조셉의 홈런을 앞세워 아슬아슬하게 승리했다.

2019년 7월 21일 KBO 올스타전/2019년 중계전 SPOTV 스포츠 타임 베이스볼 프리뷰에서 초대되었다.

2020년 11월 제자인 심수창이 진행하는 유튜브 프로그램 스톡킹에 출연해서 '100승은 선발을 계속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록'이라는 망언(?)을 남겼다.[52]

2021년 들어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어 팬들과 소통하고 있다. 노송이라는 별명답게 인스타그램 닉네임도 'oldpinetree41' 이다. 환갑을 넘긴 중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띄어쓰기와 맞춤법이 굉장히 정확한 편이며, 필력도 상당히 우수한 편이다. 또한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통해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LG 트윈스의 클로저 계보를 잇는 까마득한 후배 고우석에게 마무리 투수의 자세에 대해 조언했는데, 마무리 투수는 절대 마운드에서 감정을 노출하면 안 된다면서 감정 조절을 잘 할 것을 당부하면서 팬들의 호평을 받았다.[53] 이재원에게는 역전 쓰리런 홈런을 칭찬하면서 트윈스의 중심타자로 성장하길 바란다는 덕담을 건넸고 고우석이 최연소 100세이브를 달성할 때에도 축하와 함께 세대교체가 잘 되어가고 있어 팀의 미래가 기대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레전드 까는 게 일상인 LG 트윈스 갤러리에서 유일하게 음해당하지 않는 팀 레전드라 할 수 있다[54]

2022년 후배 외야수 박용택의 은퇴식 이후 무제한 사인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인스타에 올린 후기에서 박용택과 같이 사인을 해주고 싶었지만 동선이 흐트러지고 박용택이 주인공인데 관심이 분산될까봐 일찍 자리를 떴다고 팬들에게 죄송함을 전했다. 그리고 동년 9월 19일 프로야구 40주년 레전드 올스타 40인에 '전천후 투수'라는 타이틀을 달고 선정되었다. 이를 기념하는 행사는 10월 3일 김용수의 시구와 함께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하필 이 날 서울에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2022년 LG의 마지막 홈 경기인 10월 9일로 연기되었는데 또 비가 쏟아져서 연기되었고, 다행히도 11일에 무사히 진행되었다.

2023년에 송구홍이 감독을 맡은 은평구BC U-19팀 코치로 합류했으나, 성적 부진으로 사퇴했다.

LG가 29년 만에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하자, 우승반지 사진을 올린 피드에서 과거 포스트시즌에서 한없이 약해지던 LG 행보로 인해 패배주의적인 마인드에 시달리며 걱정이 많은 팬들을 독려하며 상대팀이 누구던, 에이스 투수가 등판하던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응원을 부탁했다.# 이 글을 본 대다수의 LG 팬들은 감탄을 넘어서 경이로움까지 표했는데, 도저히 운동선수 출신의 글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55] 맞춤법이 정확하며 필력도 우수하다는 것이 그 이유. 실제로 그동안 김용수가 인스타그램에 게시한 글은 하나의 잘 써진 칼럼이라 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그리고 LG는 2023년 한국시리즈에서 KT를 상대로 1차전을 패배로 시작했으나 2차전과 3차전 경기 후반까지 끌려가던 경기를 극적인 뒤집기로 연이어 이기며 주도권을 잡았고 4차전과 5차전까지 손쉽게 승리하면서 시리즈 4승 1패로 마침내 29년 만의 통합우승에 성공했다. LG 트윈스 선수단은 김용수의 응원대로 정규시즌에서 가장 잘했던 본인들의 야구를 해냈다. 또한 상대팀 에이스가 나와도, 경기 막판까지 끌려가고 있어도 주눅들지 않고 극복해냈다.

이러한 상징성 때문인지 2023년 한국시리즈 1차전 시구자로 낙점되었다. 시포자는 김동수.

2024년에는 오김박 트리오가 나란히 먹튀의 모습을 보여주자,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고액 연봉 타자가 분발해줬으면 좋겠다"는 글을 올렸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아갈차의 삭제 요청이 있어서인지 글을 내렸다.

7.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5 MBC 6 21⅔ 1 2 2 - 0.333 3.74 22 2 7 14 9 9 1.338
1986 60
(1위)
178 9 9 26
(1위)
- 0.500 1.67
(4위)
128 4 62 74 40 33 1.051
1987 52
(1위)
141 9 5 24
(1위)
- 0.643 1.98
(2위)
109 6 40 71 34 31 1.028
1988 34 98⅔ 3 5 11
(3위)
- 0.375 4.47 118 5 34 51 51 49 1.510
1989 47
(1위)
104⅓ 5 5 22
(1위)
- 0.500 3.19 107 2 32 51 43 37 1.304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0 LG 33 149⅔ 12 5 5 - 0.706
(3위)
2.04
(3위)
122 4 41 119 40 34 1.069
1991 41 190 12 11 10
(5위)
- 0.522 2.79 172 5 70 129 71 59 1.232
1992 14 61 5 4 0 - 0.556 5.16 62 5 20 27 37 35 1.295
1993 50
(1위)
75⅔ 6 2 26
(2위)
- 0.750 1.55 53 3 22 60 16 13 0.965
1994 42
(5위)
63⅓ 5 5 30
(3위)
- 0.500 2.56 46 1 11 44 24 18 0.884
1995 48
(2위)
69 4 2 30
(2위)
- 0.667 1.43 59 1 11 44 12 11 1.000
1996 48 130⅔ 16
(3위)
7 9 - 0.696
(3위)
2.82 123 6 39 92 55 41 1.217
1997 28 177⅔
(4위)
12 8 0 - 0.600 3.70 163 16 51 121 82 73 1.159
1998 32 175 18
(1위)
6 2 - 0.750 3.45 176 11 52 116 74 67 1.263
1999 46 68⅔ 3 9 26
(3위)
- 0.250 2.88 70 5 16 48 23 22 1.209
2000 32 127 6 4 4 1 0.600 5.24 142 10 51 85 83 74 1.449
KBO 통산
(16시즌)
613 1831⅓ 126 89 227
(4위)
1 0.586 2.98 1672 86 559 1146 694 606 1.185

7.1. 그가 남긴 기록

은퇴일자는 2000년 11월 20일로 선수 생활 동안 걸어온 발자취는 다음과 같다.
  1. 1985년 MBC 청룡 소속으로 데뷔.(6경기 1승 2패 2세이브) 경기 도중 타구에 무릎을 맞는 중상으로 시즌 종료.
  2. 1986년 구원 1위 (35SP).
  3. 1987년 구원 1위 (33SP). 통산 100경기 출장(8.15 잠실 OB전).
  4. 1989년 구원 1위 (26SP).
  5. 1990년 선발 전향 성공(33경기 12승 5패 5세이브).
  6. 1991년 통산 100세이브(8.10 잠실 OB전).
  7. 1992년 부상(좌골 신경통) 후유증으로 부진.(14경기 5승 4패)
  8. 1993년 마무리 복귀.(구원 2위, 32SP, 50경기 6승 2패 26세이브)
  9. 투수 최초 300경기 출장(5.26 잠실 OB전).
  10. 1994년 통산 150세이브(7.28 태평양전). 통산 200세이브 포인트(9.23 삼성전).
  11. 1995년 2년 연속 30세이브 투수 최초 400경기출전(6.25 쌍방울전).
  12. 1996년 선발·마무리 겸직. 통산 250세이브 포인트(6.6 잠실 롯데전), 전구단 상대 승리(8.6 롯데전, 시즌 3번째).
  13. 1997년 프로투수 최초 투수 500경기 출전 및 97시즌 4호 전구단 상대 승리(잠실 해태전).
  14. 1998년 개인통산 100승 달성(4.22 잠실 쌍방울전 달성).
  15. 3년 연속 전구단 상대 승리(9.2 잠실 롯데전 달성).
  16. 1998년 역대 최고령 다승왕 기록 달성(18승, 당시 38세)
  17. 통산 1천탈삼진 달성(9.11 잠실 쌍방울전). 시즌 다승 및 승률 1위 (18승, 0.750).
  18. 1999년 통산 200세이브(4.15 인천 현대전). 통산 100승 200세이브는 국내 최초이자[56] 일본에도 기록이 없고 미국에서도 4명뿐인 진기록.
  19. 국내 최초 영구 결번식을 치름(4.19 잠실 한화전).
  20. 2000년 투수 최초 통산 600경기 출장(7.15 잠실 한화전).
  21. 포스트시즌 통산 최다 경기 출장(28경기).
  22. 통산 613경기에 등판.
  23. 126승 89패 227세이브(방어율 2.98) 1146삼진 기록.

KBO 리그 역사적으로 본다면 최초로 '1이닝 클로저'라는 보직을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전에 마무리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용수에 앞서 최초의 전문 마무리 역할을 한 권영호도 있었다. 하지만 권영호의 경우는 7회부터 구원등판하는 경우도 잦았으므로 어떻게 보면 불펜 투수로서 보는 시각도 존재하기도 한다. 김용수도 이광환이 부임한 1992년 이전에는 2, 3이닝 이상도 던지는 고전적 의미의 마무리 역할이었다. 1이닝 클로저의 역할은 이광환이 LG의 투수 운용시스템에 중간 계투에 역할을 부여하는 분업체계를 도입하면서 확립되었고[57] 1991년, 백인천 말기 선발-중간-마무리를 가리지 않는 무리한 등판으로 지병이 되어 버린 좌골 신경통을 얻은 그가 다시 마무리 투수로서 재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김용수 은퇴 무렵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자신의 투구 이닝을 철저하게 관리해서 재기할 수 있게 해 준 이광환 감독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 내용도 있다.

이러한 1이닝 클로저라는 역할의 확립으로 인해 LG는 흔히 말하는 리드를 빼앗기면 뒤집기 힘든 팀으로 거듭날 수 있었고, 이를 많은 팀들이 모방, 그 후로 선발-중간계투-마무리라는 체계가 다져지게 된다. 하지만 도입초기에는 2~3이닝을 책임지면서 시즌 규정투구이닝을 채우는 경우도 다반사였던 고전적 마무리에 익숙해 있던 대한민국의 야구팬들에게 매우 생소하게 비쳤으며, 9회 1이닝만 던지고 세이브 숫자를 쌓아올리는 모습을 보면서 김용수의 임무를 아주 편안한 임무로 생각하기도 했다. 당시의 LG까들이 김용수를 깔 때 가장 많이 하던 말이 '김용수는 1이닝만 던지고 편하게 세이브를 챙긴다'였다.

하지만 이 역할이 얼마나 어려운 역할인지는 그 후의 세계 프로야구의 흐름을 보면 명약관화. 또 은퇴한 후 2012년까지, 즉 12년 동안이나 그가 보유한 통산 세이브의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그동안 수많은 후배들이, 때로는 1년에 40~50세이브씩 거두면서 5~6년안에 그의 기록을 넘어설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한국에서 통산 200세이브를 거둔 투수는 2012년 시즌 후를 기준으로 그를 제외하면 구대성오승환, 임창용밖에 없다. 물론 구대성과 임창용은 중간에 5년간 해외리그에서 외도를 한 탓도 있지만, 김용수도 때로는 팀의 필요에 의해 선발로 전향할 수 밖에 없었던 시기(1990~1992년, 1997~1998년)도 있었고, 대졸에 LA 올림픽 참가를 위하여 실업 야구팀인 한일은행에서 뛴 탓에 실질적인 KBO 데뷔 시즌에 이미 25세(...)였던 것과, 은퇴를 종용받아 김용수 역시 마무리로서 뛴 기간에 손해를 봤다는 사실들도 고려해야 할 듯.

그의 기록에 도전했던 수많은 도전자들이 3~4년 화려하게 불태우면서 기록에 접근하지만 그 뒤로는 부상과 부진 등으로 5년에 10세이브도 추가하지 못하면서 은퇴하게 되는 상황이 반복되고, FA 도입으로 선수들의 해외진출이 자유로워지면서 김용수의 저주라고 불리기도 하며 몇십년간은 깨지지 않을 기록으로 남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하지만 결국 오승환이 2012년 7월 1일자로 개인 통산 228세이브를 거둬 통산 세이브 기록을 갈아치우며 12년간 변하지 않던 통산 최다 세이브 기록은 다시 쓰이게 되었다. 이리하여 통산 세이브 기록은 오승환에게 넘겨주고 2위로 내려앉았다. 하지만 통산 세이브 1~2위였던 오승환임창용불법 도박에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다른 의미로 저주에 걸려버렸다.

허나 김용수의 100승 - 200세이브는 선발-중간-마무리로 분업된 현대 야구의 특성상 앞으로 나오기 힘든 대기록은 틀림없다.[58] 김용수의 이 기록을 두 번째로 달성한 투수는 임창용인데 김용수가 이 기록을 달성한 것이 1999년이고, 임창용이 이 기록을 국내 성적만으로 달성한 것은 2015년의 일이다. 그 동안 이 대기록을 따라가는 듯한 선수는 있었지만 달성한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김용수는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면서 선발로는 기본 10승 정도는 해줬으며, 마무리로는 최소 20세이브 이상을 꾸준히 해온 결과 그런 대기록을 만들 수 있었다. 선발 투수의 덕목인 완급조절, 지구력, 경기운영과 마무리 투수의 덕목인 배짱, 집중력을 두루 갖춘 흔치 않은 유형의 투수였던 것. 이것만 봐도 김용수가 얼마나 대단한 투수였는지 그대로 말해준다.

7.2. 수상 내역

수상 한국시리즈 우승 2회 (1990, 1994)
한국시리즈 MVP 2회 (1990, 1994)
승리 1위 (1998)
승률 1위 (1998)
구원왕 3회 (1986, 1987, 1989)

8. 관련 문서



[1]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산하 싱글A[2] ~6월 13일[3] 6월 14일~[4] 1983년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 우승#[5] 1990, 1994년 한국시리즈 MVP 이후 LG가 고난의 시간을 보내면서 그가 유일했다가, 유격수 오지환이 LG 통산 2번째 MVP를 차지하며 계보를 경신했다. 따라서 김용수는 LG 투수 최초이자 유일한 투수 한국시리즈 MVP이고, LG 타자 최초의 한국시리즈 MVP는 오지환이 기록한다.[6] KBO 리그 전체를 통틀어서도 높이 평가받는 투수로 누적 WAR이 선동열, 송진우 다음으로 WAR계산을 어떻게 하더라도 투수 5위 안에 든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현역 생활이 길었으니 어느 정도 감안을 해야겠지만 WAR이란게 오히려 마이너스로 깎아 먹을수도 있는 스탯이다. 그 이강철이나 정민철도 WAR이 마이너스인 해가 있었던 반면 김용수는 꾸준하게 플러스를 유지했다. 은퇴 시즌인 2000년에 41살이었는데, 그 때도 WAR +1.8을 기록했다.[7] 김용수 본인의 인스타그램 아이디도 그래서 @oldpinetree41이다.[8] 물론 김용수 말고도 MBC - LG 루트를 탄 인물들이 더 있지만 김재박이나 이광은은 LG로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은퇴한 데다가 감독 시절이 흑역사로 남았고, 김상훈, 정삼흠 등도 해설위원/지도자 시절의 부족함으로 인해 이미지가 많이 희석된 편.[9] 김용수 본인은 과거를 회고하며 남들보다 2년 늦게 시작한 것이 오히려 16년의 장수를 가능케 했는데, 친구들은 다른 훈련할 때 본인은 죽어라고 기본기 훈련만 계속했고 그것이 나중에 돌아보니까 그 때 기본기를 착실하게 훈련한 것이 부상 없이 오래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자평했다.[10] 참고로 야구부에 들어가게 된건 중학교 1학년이지만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한 건 봄방학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중학교 2학년때부터 시작한 것이라고 스톡킹에서 밝혔다.[11] 공식적으로 동대문상고는 2003년을 끝으로 없어졌지만, 동대문상고 야구부가 같은 재단인 청원고로 이어졌기 때문에 두 팀을 하나로 본다.[12] 국가대표 합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당시 상무 야구단의 프로 선수 입대가 허용이 안되어서 실업야구를 갔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국가대표가 되어 병역을 마치기는 했다.[13] 본인이 염두에 두지는 않았겠지만, 우연히도 41번은 1960~1980년대 메이저리그의 명투수인 톰 시버의 번호이기도 했다.[14] 그렇다고 아예 구원 투수로 안 나온 건 아니다. 선발로 12승을 거뒀지만 팀이 필요하면 구원으로도 몇 경기 등판하는 등 5세이브를 획득했다. 선발투수로 전환했지만 구원으로 몇 번 등판했던 2001~2003년 삼성 임창용의 포지션과 비슷했다.[15] 1992년 당시 한국식 나이로 33살이었는데, 30살 이상이면 노장 취급 받고 30대 중반만 넘어가도 바로 은퇴하던 시대였던 걸 생각하면, 이 때 회복을 못 했을 경우 그대로 은퇴했을 가능성이 크다.[16] 3년 연속 30세이브의 꾸준함을 보여준 김용수에 비해, 선동열은 1993년에 역대 최저 ERA인 0.78을 기록했고, 정명원은 1994년에 최초로 40세이브 달성과 동시에 투수 골든글러브를 따냈으며, 김경원은 1993년에 ERA 2위에 혹사로 무너지기 전까진 강속구 마무리로 이름을 날렸다.[17] 만약 여기서 안타를 쳤으면, 훗날 2001년의 송진우보다 앞선 투수 첫 끝내기 안타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해당 장면은 당일 MBC 뉴스데스크 방송 도중에 중계되었다.[18] 다만 그렇다고 그 해 정민태가 투수 WAR 1위는 아니었다. 1998년 투수 WAR 1위는 6.13을 기록한 정명원이었고, 정민태는 진필중(5.57)에 이은 3위였다. 김용수는 이들보다 한창 아래인 15위.[19] 다만 마지막 시즌인 2000년에는 공식적으로 최고령 선수는 맞았지만 실질적인 최고령 선수는 삼성 라이온즈의 외국인 타자 훌리오 프랑코였다. 프랑코의 실제 생년월일은 1956년생(?)이지만 KBO 생년월일을 1961년생으로 등록했기 때문에 1960년생인 김용수가 공식적으로 최고령 선수였던 것. 자세한 내용은 훌리오 프랑코 문서 참조.[20] 김용수는 마무리 훈련 도중 “만약 구단이 은퇴시킨다면 구단이 마련해 주는 은퇴식이나 은퇴 경기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결국 은퇴식, 은퇴경기 모두 이뤄지지 못했다.[21] 현역 마지막 시즌이던 2000년 시즌 중 김용수가 이광은 감독의 투수 운영 건을 가지고 항명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덕분에 말년에 이광은 감독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대표적으로 그의 현역 마지막 경기가 되었던 두산과의 2000년 플레이오프 6차전에서는 9회 2사까지 김용수가 잘 막아놓았던 상황에서 무리하게 장문석으로 교체되어 마운드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결과는 장문석이 동점/역전 홈런을 연달아 허용하고, LG는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 무엇보다도 이광은 감독과 김용수의 나이차는 불과 5살밖에 차이나지 않았기에 젊은 감독이던 이광은의 입장에서는 노장 선수였던 김용수를 껄끄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광은 본인이 상당히 선수들을 휘어잡으려는 스타일이었으니, 이에 반기를 든 선수단의 리더인 김용수가 더욱 마음에 안 들터.[22] 김용수 본인이 만 40세까지 선수 생활을 했을 정도로 스스로 몸 관리를 잘 하는 스타일이었던데다가 더군다나 후임 감독이 이광은과는 정 반대로 베테랑 선수를 신뢰하다 못 해서 갈아먹김성근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최소한 2002년이나 2003년까지 현역으로 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23] 스텟을 봐도 조정방어율은 리그 평균치보다 낮았지만 조정FIP은 111.8으로 낮은 편이 아니였으며 2000년이 꽤 심한 타고투저 시절이였다는 걸 상기하면 최소 1년은 더 두고 볼만한 상황이였다.[24] 당시 나이가 39세[25] 김동주가 OB 소속으로 언급되어있기 때문에 1998년 9월 영상이다. 김동주가 OB 소속으로 활약한 시즌은 딱 이 시즌이었고, 이듬해 두산으로 팀 이름이 바뀐다.[26] 전성기였던 1980년대 ~ 1990년대 초반 기준으로도 작은 편이었다. 동 시기 최고의 선발이었던 최동원이 179cm, 선동열이 184cm이었다. 그리고 동년배인 다른 팀 에이스들 중 체구가 작은 편인 이상군, 장호연도 176cm, 양상문도 175cm였다. 또한 김용수와 함께 1990년대 초반 엘지 투수진의 4인방이었던 김태원이 190cm, 정삼흠이 184cm, 이상훈이 180cm였으니...[27] 김용수의 전성기이던 1980년대말 ~ 1990년대 초반 KBO 평균 구속은 135 ~ 137km 정도였다. 1980년대에 최고구속 150km를 훌쩍 넘겼던 최동원을 제외하면, 1990년대 초반에 KBO에서 최고구속 150Km를 시즌중 단 한번이라도 보여줄 수 있다고 알려진 투수는 선동열(해태), 박동희(롯데), 김태원(LG) 3명 정도라 일컬어지던 시대였다. 2020년대 기준으로 김용수는 150-155에 가까운 구속을 던진 셈. 정확히는 평균 147-148km에 최고 153km 정도를 던질 수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토종 투수들 중에는 곽빈 혹은 박세웅, 외인 투수들 중에는 훗날 본인을 잇는 팀 레전드 투수가 되는 케이시 켈리와 구속이 비슷한 셈.[28] 하지만 면도날은 후배인 조규제도 훗날 얻은 별명이기도 했고 김용수 세대에서도 제구력이 좋은 투수들에게 언론이 쉽게 붙이다가 떼었다가 하던 별명이라 김용수만의 별명이라 할 만큼 유명하지는 못했다. 물론 김용수는 계속 잘했으니 그 호칭을 잃은 적이 없거 또 별명에 잘 어울리는 선수이기도 랬다.[29] 시즌 막판에 16승 상태로 다승왕 경쟁을 하고 있었는데, 감독의 배려로 2일 연속 등판해서 모두 승리를 기록했다. 하지만 주어진 찬스를 놓치지 않고 모두 승리로 연결시킨 부분은 분명 선수의 능력이다.[30] 우리 나이로 49세였던 2008년 LG 러브 페스티벌에서 잠실야구장 전광판에 132km/h를 찍었다. 그리고 2018년 한 인터뷰에서 말하길 최근에 스피드 건으로 구속을 측정하니 128km/h가 나왔다고 한다. 회갑을 지난 2021년 스톡킹에서는 작년에 사회인 야구 하면서 나온 구속이 120km/h인데, 3주정도 훈련하면 130km/h는 찍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언급하였다.[31] 웨이트 트레이닝과 새벽 4시에 6km 러닝을 거르지 않던 몸짱이었다.[32] 선동열 같은 강속구 투수는 아니었지만 140 초중반의 만만치 않은 속구를 워낙 면도날처럼 찔러 넣다보니 속구 자체가 강력했다. 또 변화구가 다양해서 타자들이 더 헷갈려 하곤 했다.[33] 이광환 감독이 사의를 표명했고, 결국 잔여 계약기간을 2군에서 채우게 되었다.[34] 사실 2군 투수코치라 1군에 비해 별로 주목받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당시 1군 투수코치였던 정삼흠이상군이 야구계에서 이름값으로 코치한다는 평을 듣는 수준의 인물인지라 김용수의 성과가 반사적인 효과로 더욱 좋게 보인 점도 없지 않다. 그리고 정삼흠은 2003년 시즌 도중 김재현의 음주운전 차량에 동석했다가 시즌 후 해임되었고 다시는 프로로 돌아오지 못 하고 있다.[35] 김용수는 이순철보다 1살 많은 데다가(이순철이 고교 시절 1년 유급했기 때문에 학번은 2년 차이. 이순철은 덕분에 빠른 1963년생인 선동열과도 친구로 지낸다.), 출신 대학(김용수-중앙대, 이순철-연세대)도 달라서 접점이 아예 없었다.[36] 이 일이 모두 2004년 한 해에 일어났다. 시즌 6위로 가을야구도 못한데다가 병풍까지 터져서 LG팬들은 짜증나는 상황인데 이런 상황에서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이자 팀의 상징과도 같았던 투수코치를 내쳤으니...[37] 순페이 등의 별명.[38] 후일 김유선 본인이 모 인터뷰에서 이 당시 입스가 온데다 팔이 말리는 증상까지 겪었다고 술회했다. 이랬으니 공을 제대로 던질리가 만무했던 것.[39]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선수 - 투수코치로 일했던 인물로, 주니치 - LG가 자매구단이었기 때문에 LG가 투수진 강화를 위해서 모셔오다시피 한 인물이었다. 다카하시는 2011년을 끝으로 과거 주니치에서 지도했던 선동열이 KIA 감독이 되자 그를 따라 KIA 투수코치로 자리를 옮겼으나 1년만에 재계약에 실패해 한국을 떠났다.[40] 최소한 1기 시절은 선수들이 2군을 다녀오면 제구도 잡혀서 왔지만 문제는 2기 시절은 그 마저도 없었다.[41] 그 전 시즌에는 히어로즈의 2군 감독을 하고 있었다.[42] 윤학길은 이 때 박종훈과 인연을 맺어 박종훈이 한화 단장으로 갈 때 그를 따라서 투수코치로 부임했다.[43]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김유선은 일명 입스+팔이 말리는 증상이 있었다고 했으니 지켜보는 김용수 코치야 그렇다 쳐도 던지는 당사자는 미쳐 돌아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입스가 온 것을 뒤늦게나 알았다 했으니...[44] 아무런 말이 없으면 2015년 11월까지 징계가 유효한 상태지만, 한국야구위원회와 대한야구협회간에는 징계 조항의 상호 규약이 없다. 따라서 아마추어 팀이라면 몰라도, 롯데에서 활동해도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법규보다 사람들 사이에서 크게 벌어질 논란이지만 말이다.[45] 이 경기에서 김동수안영명에게 싸대기를 때리자, 송진우가 덕아웃에서 나와 김동수에게 날라차기를 날렸다. 그렇긴 한데, 정작 송지만심광호가 맞았다.[46] 진실은 본인만이 알겠지만, 현역 시절에 항상 같이 배터리를 짜던 김동수가 빈볼을 맞자 편파적으로 해설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47] 안영명 문서에도 나와있듯이 이때 김동수를 맞힌 이유는 구대성이 시켜서 던진 빈볼이 맞긴 했다. 하지만 보통 해설위원들은 이런 상황에서 눈치껏 "볼이 많이 빠졌군요."라던가 "당사자들만이 알겠죠." 같이 유연하게 대처한다. 실제로 거의 빈볼임이 확실한 이동걸 빈볼 사건 당시에도 중계를 하던 한명재 캐스터는 "이건 좀 아닙니다."라는 묵직한 한마디만 날렸다.[48] 그리고 본인도 정말 오랜만에 잠실야구장 그라운드를 밟았다.[49] 이땐 이병규도 함께 등장했다.[50] 좋은 추억 정도를 넘어, 전설적인 입지를 차지하는 대선수다. 프로야구를 초창기부터 지켜본 40대 이상 올드팬들에게는 청룡과 LG를 잇는 대표격 스타이기 때문이다.[51] 1961년생 5월생인 양상문이 왜 1960년 5월생 김용수와 친구 사이로 지내는지 궁금해하는 팬들이 많을텐데, 양상문이 학교를 1년 조기입학하는 바람에 1960년생들과 동기다.[52] 물론 이건 김용수가 대단한 것이다. 선발 로테이션을 오랜 세월 동안 계속해서 지키는 일은 당연히 어렵기 때문. 게다가 아무리 본인이 잘 던져도 타선이나 수비가 부진하면 승이 날아가는 정민철 - 류현진같은 사례를 보면 더욱 어려운 것이다.[53] 이 때 본인은 꼰대 기질을 앞세워서 하는 조언이라며 자신을 한껏 낮췄으나, 실제로는 꼰대 기질은 전 혀 앞세우지 않았으며, 오히려 진심으로 후배를 다독이면서 조언을 해준 것이다. 그의 인품을 알 수 있는 부분.[54] 같은 LG의 프랜차이즈 출신인 이상훈, 류지현, 이병규, 박용택 등이 LG 트윈스 갤러리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까이는 것만 봐도 답 나온다. 다만 김용수도 과거 투수코치로 재직했을 때는 무능하다며 까였던 바가 있다.[55] 운동선수가 아닌 학자, 기자가 쓴 글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다는 평이다.[56] 2015시즌에 임창용이 한국에서만 100승 200세이브를 올리면서, 국내에 100승 200세이브를 올린 선수는 역사상 단 2명이다.[57] 사실 메이저리그도 선발-중간계투-1이닝클로저 일명 '라루사이즘'이 등장한 건 1980년대 말 토니 라루사 감독부터다. 미국도 그전까지는 중무리 투수 운용이 만연했다.[58] 대한민국보다 야구 역사가 훨씬 오래 된 일본프로야구에서는 100승 - 200세이브를 달성한 선수는 없지만 200승 - 150 세이브를 기록한 선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