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문서명 != null
문서의 [[https://namu.wiki/acl/시어도어 루스벨트|{{{#!html <span style="color: var(--espejo-link-color, var(--text-color))">ACL 탭</span>}}}]]을 확인하세요.
{{{#!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D1635, #0D164A 20%, #0D164A 80%, #0D1635); color: #ffc224"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조지 워싱턴 | 존 애덤스 | 토머스 제퍼슨 | 제임스 매디슨 | |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제임스 먼로 | 존 퀸시 애덤스 | 앤드루 잭슨 | 마틴 밴 뷰런 | |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존 타일러 | 제임스 K. 포크 | 재커리 테일러 |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
밀러드 필모어 | 프랭클린 피어스 | 제임스 뷰캐넌 | 에이브러햄 링컨 |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앤드루 존슨 | 율리시스 S. 그랜트 | 러더퍼드 B. 헤이스 | 제임스 A. 가필드 | |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
체스터 A. 아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벤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
제25대 | 제26대 | 제27대 | 제28대 | |
윌리엄 매킨리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 우드로 윌슨 | |
제29대 | 제30대 | 제31대 | 제32대 | |
워런 G. 하딩 | 캘빈 쿨리지 | 허버트 후버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
제33대 | 제34대 | 제35대 | 제36대 | |
해리 S. 트루먼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존 F. 케네디 | 린든 B. 존슨 | |
제37대 | 제38대 | 제39대 | 제40대 | |
리처드 닉슨 | 제럴드 포드 | 지미 카터 | 로널드 레이건 | |
제41대 | 제42대 | 제43대 | 제44대 | |
조지 H. W. 부시 | 빌 클린턴 | 조지 W. 부시 | 버락 오바마 | |
제45대 | 제46대 | 제47대 | ||
도널드 트럼프 | 조 바이든 | 도널드 트럼프 | ||
}}}}}}}}}}}} |
<colcolor=#0d1635,#0d1635>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ececec, #fff 20%, #fff 80%, #ececec)"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존 애덤스 | 토머스 제퍼슨 | 에런 버 | 조지 클린턴 | |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엘브리지 게리 | 대니얼 D. 톰킨스 | 존 C. 칼훈 | 마틴 밴 뷰런 | |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리처드 멘터 존슨 | 존 타일러 | 조지 M. 댈러스 | 밀러드 필모어 |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
윌리엄 R. 킹 | 존 C. 브레킨리지 | 해니벌 햄린 | 앤드루 존슨 |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스카일러 콜팩스 | 헨리 윌슨 | 윌리엄 A. 휠러 | 체스터 A. 아서 | |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
토머스 A. 헨드릭스 | 리바이 P. 모턴 | 애들레이 E. 스티븐슨 | 개릿 A. 호바트 | |
제25대 | 제26대 | 제27대 | 제28대 |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찰스 W. 페어뱅크스 | 제임스 S. 셔먼 | 토머스 R. 마셜 | |
제29대 | 제30대 | 제31대 | 제32대 | |
캘빈 쿨리지 | 찰스 G. 도스 | 찰스 커티스 | 존 낸스 가너 | |
제33대 | 제34대 | 제35대 | 제36대 | |
헨리 A. 월리스 | 해리 S. 트루먼 | 앨번 W. 바클리 | 리처드 닉슨 | |
제37대 | 제38대 | 제39대 | 제40대 | |
린든 B. 존슨 | 휴버트 험프리 | 스피로 애그뉴 | 제럴드 포드 | |
제41대 | 제42대 | 제43대 | 제44대 | |
넬슨 록펠러 | 월터 먼데일 | 조지 H. W. 부시 | 댄 퀘일 | |
제45대 | 제46대 | 제47대 | 제48대 | |
앨 고어 | 딕 체니 | 조 바이든 | 마이크 펜스 | |
제49대 | 제50대 | |||
카멀라 해리스 | JD 밴스 | |||
}}}}}}}}}}}} |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 |||
| |||
본명 |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 Theodore Roosevelt Jr. | ||
출생 | 1858년 10월 27일 | ||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 | |||
사망 | 1919년 1월 6일 (향년 60세) | ||
뉴욕주 오이스터베이 | |||
묘소 | 영스 메모리얼 묘지 | ||
재임기간 | 제25대 부통령 | ||
1901년 3월 4일~1901년 9월 14일 | |||
제26대 대통령 | |||
1901년 9월 14일~1909년 3월 4일 | |||
서명 | |||
링크 | 홈페이지[1]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 아버지 시어도어 루스벨트 시니어(1831~1878) 어머니 마샤 스튜어트 불럭 루스벨트(1835~1884) | |
형제자매 | 누나 안나 루스벨트 (1855~1931) 남동생 엘리엇 루스벨트 (1860~1894)[2] 여동생 코리네 루스벨트 (1861~1933) | ||
배우자 | 앨리스 해서웨이 리 루스벨트 (1861~1884, 사별) 에디스 커밋 케로 루스벨트 (1861~1948, 재혼) | ||
자녀 | 앨리스 루스벨트(1884~1980) 시어도어 루스벨트 3세(1887~1944) 커밋 루스벨트(1889~1943) 에설 루스벨트(1891~1977) 아치볼드 루스벨트(1894~1979) 퀜틴 루스벨트 (1897~1918) | ||
학력 | 하버드 대학교 (B.A.) 컬럼비아 대학교 법학대학원 (사후 J.D.)[3] | ||
병역 | 미합중국 육군 대령 예편[4] | ||
종교 | 개신교 (개혁교회 / 미국 개혁교회)[5] | ||
신체 | 키 178cm / 체중 95kg / O형 | ||
최종 당적 | [6] | ||
문장 | }}}}}}}}} |
|
백악관 공식 초상화[7] |
1. 개요
제26대 미국 대통령의 육성 |
|
Speak softly and carry a big stick, and you will go far.
말은 부드럽게 하되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다녀라. 그러면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루스벨트가 즐겨 사용한 말.[11][12]
미국의 제26대 대통령.말은 부드럽게 하되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다녀라. 그러면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루스벨트가 즐겨 사용한 말.[11][12]
역대 최연소의 나이에 취임한 미국 대통령이자, 20세기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며, 전임자 승계 대통령 중 처음으로 재선된 대통령이기도 하다.[13] 미국인 최초의 노벨상(평화상, 1906년) 수상자이기도 하다.[14]
20세기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설립한 대통령이자, 독특한 성품으로 여러 흥미로운 일화들을 남긴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미국 제32대 대통령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는 먼 친척 관계이다.
Theodore라는 인명에 대해서 테오도어, 테오도르, 디어도어 등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외래어 표기법 상 치 마찰음과 모음화 R을 반영한 /ˈθiːədɔːr/(시어도어)로 표기한다. Roosevelt라는 성씨는 네덜란드어에서 온 것으로 roos(로스, '장미')와 veld(벨트, '들판')가 합쳐진 조어이다.[15]
2. 약력
- 1882. 뉴욕주 하원의원
- 1883.1. 뉴욕주 하원의장
- 1895.5. 뉴욕주 경찰청장
- 1895. 뉴욕주 인사위원회 위원
- 1897.4. 해군차관
- 1899.1. 제33대 뉴욕 주지사
- 1901.3. 제25대 미국 부통령
- 1901.9. 제26대 미국 대통령
- 1912. 제28대 미국 대통령 선거 진보당 대선 후보 (낙선)
3. 일생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시어도어 루스벨트/생애#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시어도어 루스벨트/생애#|]] 부분을
참고하십시오.4. 가족
|
(왼쪽부터) TR에 기대 있는 퀜틴, TR 본인, 안경을 쓴 시어도어 3세, 앉아있는 아치볼드, 흰 드레스를 입은 앨리스, 커밋, 앉아있는 후처 에디스, 에설 |
사별한 전처 앨리스 리 루스벨트(1861년 7월 29일~1884년 2월 14일) 사이에서 딸 앨리스를 두었다. 이후 후처 에디스(1861년 8월 6일~1948년 9월 30일) 사이에서 5명의 자녀를 두었다.
- 앨리스 루스벨트: 1884년 2월 12일~1980년 2월 20일 (향년 96세)
아버지를 닮았는지 성격이 꽤 괴팍하고 독설가로 유명했는데, 가장 유명한 독설이 29대 대통령 워런 하딩을 평가한 말이다. "그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다만 멍청이었을 뿐이지." 그리고 친척 프랭클린 D. 루스벨트 가족을 두고도 "3분의 2는 물러터진 옥수수죽(프랭클린을 말한다)이고 나머지 3분의 1은 엘리너"라고 말할 정도로 평소 말이 꽤 거칠었다. 게다가 루스벨트가 자국에서의 업적과 인기와는 별개로 자식농사를 제대로 시킨 것인지 실로 의심스러울 정도로 앨리스의 평소 행적은 꽤 개차반에 가까웠는데, 1905년에 대한제국에 고종의 초청을 받은 외교 사절 신분으로 공식 방문해선 유교국가에서 절대 해서는 안 될 극히 무례한 행동을 일삼아서 구설수에 올랐다. 대표적인 예시로
명성황후의 능에서 승마바지 차림으로 말채찍을 들고 조형물인 석마(石馬)를 탔다. 이 사건은 당시 대한제국 황실 의전담당차 있던 독일인 에마 크뢰벨(Emma Kroebel)이 본국에서 <나는 어떻게 조선의 황궁에 들어오게 되었는가(Wie ich an den koreanischen Kaiserhof kam)>라는 책을 펴내면서 알려지게 된다.
1909년 11월 16일자 뉴욕 타임스에서 앨리스의 무례한 행동에 대한 기사가 실리자마자 다음날, 앨리스의 남편 니콜라스 롱워스(Nicholas Longworth) 공화당 의원이 내용이 전부 다 거짓말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코넬 대학교 도서관에 근무하던 한국인 사서가 관련 사진을 발견함으로서 앨리스가 외교사 무례의 신기원을 이룩하고 간 것이 사실임이 드러났다.[16] 그도 그럴 것이 이 당시 앨리스와 외교 사절단은 이미 일본에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대한제국에는 고종이 초대해서 어쩔 수 없이 예의를 차릴 겸 들른 길이었다.[17] 고종과 각부 대신들은 저런 앨리스를 인천에서부터 맞이해 서울에서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출국할 때까지 극진히 대접했다. 앨리스는 고종이 서글프고 애처로웠다는 말을 남겼다. 고종의 융숭한 대접과 앨리스의 행적 자료
“(고종 알현 당시) 그녀는 승마복을 입고 있었고 승마용 채찍을 한 손에 들고 입에는 시가를 물었다. (명성황후릉인 홍릉에 방문해서는) 동물 석상에 관심을 가졌는데, 특히 말 석상을 보고서는 말에서 내려 재빨리 석마(石馬) 위에 올라탔다. 그토록 신성한 곳에서 그토록 무례한 짓을 저지른 것은 한국 외교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앨리스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
그녀는 대한제국을 방문하기 전 청나라를 방문하여 서태후도 만났는데 서태후를 가리켜 “중간 정도의 신장에 치파오 걸친 모습이 수려하고 장엄했다. 대국 통치자의 풍모가 넘치는 걸출한 여성이다.” 라고 기록하였다. 앨리스는 서태후와의 만남이 매우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
저런 모습들처럼 어린 시절부터 워낙 왈가닥이라서 백악관에 손님이 찾아오면 "미합중국 대통령은 맨날 자식을 때려요!"라고 소리지르는 장난을 즐겼으며, 뱀을 목에 걸고 나타나는 바람에 백악관 방문객들을 깜짝 놀래키곤 했다. 그런데 앨리스가 아니라도 루스벨트의 자식들은 백악관에 있을 때 모두 나이가 어렸다. 그런데 형제들이 아버지의 단점들만 물려받은 건지 아니면 루스벨트 부부가 자식교육을 잘못 시킨 건지 하나같이 말썽꾸러기들이라 숱한 장난으로 백악관을 난장판으로 만들어서 영부인과 백악관 직원들의 속을 뒤집어놓곤 했다고 한다. 이렇듯 그는 미국의 대통령 뿐 아니라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의 역할도 백악관에서 함께 수행해야 했다. 루스벨트 본인도 "저는 미합중국의 대통령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제 딸 앨리스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한 번에 다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말했다. 꽤 악동이었던 그조차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 정도니 말 다 한 셈이다. 말년에 누군가가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묻자, "실리보다는 허세만 가득찬 양반이었죠."라고 아버지를 깠다. 15살 연상으로 훗날 미국 하원의장을 역임한 니컬러스 롱워스와 결혼해서 폴리나 롱워스(1925~1957)라는 딸을 낳았는데, 앨리스가 너무 장수해서 폴리나와 폴리나의 남편(앨리스의 사위)을 먼저 보내는 슬픔을 보게 된다. 사실 폴리나는 정식 남편인 니컬러스 롱워스 소생이 아니라 앨리스가 미국의 정치인 윌리엄 보라랑 바람펴서 낳은 딸로 대외적으로는 부부 사이의 딸로 알려졌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생몰년도를 보면 알겠지만 상당히 장수했기 때문에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2차 대전기에는 자신의 먼 친척의 입장과는 상반되게도 미국의 전쟁 개입을 반대하는 고립주의 성향의 단체인 미국우선주의위원회(America First Committee)로도 왕성히 활동했다. 좋게 말하면 세력균형에 의한 외교를 중요시하던 자신의 아버지의 입장을 따랐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이미 세력균형에서 집단안보로 넘어가는 역사적 흐름을 읽지 못하고 시대착오적 입장을 마지막까지 견지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 장남 시어도어 3세[18]: 1887년 9월 13일~1944년 7월 12일 (향년 56세)
아버지 못지 않은 풍운아였다. 1, 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한 베테랑이자 하딩-쿨리지 정권에서 해군성 차관, 필리핀 총독, 푸에르토리코 총독을 역임한 공화당의 거물급 정치가였는데, 2차 세계대전에 1사단의 26연대를 지휘하는 대령으로 참전,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 전투를 거치며 준장까지 진급했다.
당시 상관이 오마 브래들리 장군과 조지 S. 패튼 장군이었는데, 브래들리와 패튼 두 사람 모두 부하 장병들에게 너무 자유분방하고 친근하게 대해서 결과적으로 군 기강을 흐트러지게 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의 리더쉽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1시단은 최정예 부대였지만, 이탈리아 민간인들을 너무 약탈하는 바람에 민원이 심해서 미군 최고 지휘부를 빡치게 하였다.
그래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는 자신의 상관이자 죽이 잘 맞았던 친구인 1사단장 테리 앨런과 함께 나란히 1사단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는 제4보병사단의 부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제4보병사단의 부사단장이던 시어도어 3세는 자청해서 제1파로 상륙했는데, 제1파의 최고령, 최선임 미군이었다고 한다.
당시 오마하 해변에 상륙할 예정이었지만 유타해변 인근에 수백명의 병력들과 잘못 상륙했다. 현장에서 장교, 참모진들이 최선임자인 그에게 "장군님, 이제 뭘 어떡해야 합니까?" 라고 물어보았다.
장교들은 병력들을 집결해서 유타나 오마하에 있는 병력들을 지원하자 같은 구체적인 명령을 원했겠지만 주변을 둘러보고는 오히려 자신들이 잘못 상륙한 곳이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좋은 곳임을 눈치채고 피는 못속인다고 루스벨트 집안답게 "뭘 어떡하냐고? 여기서부터 전쟁을 시작하는거다!" 라고 외치곤 권총을 들고 뛰어다니며 유타 해변에 상륙한 병력들을 집결시켜 자신들이 발견한 독일군의 허점으로 돌격,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그러나 상륙 33일 만에 심장마비로 사망, 결국 사후에 명예 훈장을 수훈받았다.
아버지와는 달리 먼 친척뻘 되는 FDR을 싫어한 것으로도 유명했다고. 슬하에는 그레이스, 시어도어 4세, 코닐리어스, 퀜틴 주니어가 있다.
1시단은 최정예 부대였지만, 이탈리아 민간인들을 너무 약탈하는 바람에 민원이 심해서 미군 최고 지휘부를 빡치게 하였다.
그래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는 자신의 상관이자 죽이 잘 맞았던 친구인 1사단장 테리 앨런과 함께 나란히 1사단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는 제4보병사단의 부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제4보병사단의 부사단장이던 시어도어 3세는 자청해서 제1파로 상륙했는데, 제1파의 최고령, 최선임 미군이었다고 한다.
당시 오마하 해변에 상륙할 예정이었지만 유타해변 인근에 수백명의 병력들과 잘못 상륙했다. 현장에서 장교, 참모진들이 최선임자인 그에게 "장군님, 이제 뭘 어떡해야 합니까?" 라고 물어보았다.
장교들은 병력들을 집결해서 유타나 오마하에 있는 병력들을 지원하자 같은 구체적인 명령을 원했겠지만 주변을 둘러보고는 오히려 자신들이 잘못 상륙한 곳이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좋은 곳임을 눈치채고 피는 못속인다고 루스벨트 집안답게 "뭘 어떡하냐고? 여기서부터 전쟁을 시작하는거다!" 라고 외치곤 권총을 들고 뛰어다니며 유타 해변에 상륙한 병력들을 집결시켜 자신들이 발견한 독일군의 허점으로 돌격,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그러나 상륙 33일 만에 심장마비로 사망, 결국 사후에 명예 훈장을 수훈받았다.
아버지와는 달리 먼 친척뻘 되는 FDR을 싫어한 것으로도 유명했다고. 슬하에는 그레이스, 시어도어 4세, 코닐리어스, 퀜틴 주니어가 있다.
* 차남 커밋: 1889년 10월 10일~1943년 6월 4일 (향년 53세)
제1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했고, 제2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했지만 2차 대전 중에 전쟁에 대한 우울증과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리다가 알래스카에 파견 나가있던 중 그곳에서 자살했다. 슬하에 커밋 주니어[19], 조셉, 벨, 더크가 있다.
* 차녀 에설: 1891년 8월 13일~1977년 12월 10일 (향년 86세)
어그로를 끄는 이복 언니, 세계대전에 참전한 오빠들과 남동생들에 비해 평범한 생을 살다 갔다. 리처드 더비와 결혼해서 리처드 주니어, 이디스, 세라, 주디스를 낳았다.
* 삼남 아치볼드: 1894년 4월 10일~1979년 10월 13일 (향년 85세)
두 형처럼 1, 2차 대전에 모두 참전했다. 두 형처럼 1, 2차 대전에 모두 참전했다. 두 차례의 참전때마다 무릎에 부상을 입어서 나중에 두 번의 다른 전쟁에서 같은 부상으로 두 번이나 100% 장애로 분류된 미국의 유일한 참전용사라는 영광(?)을 얻었다고 한다.
루스벨트의 아들들 중 2차대전 이후로도 살아남은 유일한 아들이다. 아치볼드 주니어, 시어도라, 낸시, 에디, 재커리를 두었다.
* 사남 퀜틴: 1897년 11월 19일~1918년 7월 14일 (향년 20세)
심한 장난꾸러기였는데, 그는 5, 6명 정도의 친구들을 데리고 백악관에서 말썽을 부렸고 심지어는 찢어 뭉친 종잇조각을 백악관에 걸린 대통령 초상화에 붙여 놓았다가 루스벨트에게 크게 혼난 적도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육군 항공대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던 중인 1918년 7월 14일 독일 전투기들과 공중전을 벌이다가 머리에 기관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그의 시신은 비행기와 함께 독일군 후방에 떨어졌는데, 그가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아들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독일군 지휘부는 그가 적군임에도 불구하고 천여명의 독일군 병력을 동원해서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뤄줬다고 한다.
4.1.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의 관계
미국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재임 1933-1945)가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12촌 동생이다.[20] 물론 한국으로 치면 사실상 본관만 같은 남남이나[21], 테디의 조카인 엘리너 루스벨트가 프랭클린과 결혼하여 프랭클린은 테디의 조카사위도 된다.[22] 그러다보니 사적으론 둘이 교류가 제법 활발했다고 한다.우선 둘이 막 결혼한 시절 테디가 프랭클린에게 결혼생활에 대한 조언을 해 준 편지도 남아 있으며, 1905년 두 사람의 결혼식 때 신부인 엘리너를 테디가 직접 프랭클린에게 인계해 주며 장인어른 역할을 했다. 테디 본인도 프랭클린을 두고 "그 녀석을 위해서라면 총알도 내가 대신 맞을 수 있다."[23]라고 했을 정도로 대단히 프랭클린을 마음에 들어했다고. 하지만 둘의 정치 노선은 다소 달랐던 편. 일단 테디는 공화당, 프랭클린은 민주당이었고 프랭클린은 테디의 정적이었던 우드로 윌슨을 지지했다. 물론 혁신주의라는 큰 틀에서는 공통점도 있었기에, 젊은 프랭클린은 테디가 본 책, 쓴 책은 모두 읽어봤다고 할 정도로 그를 존경했지만, 한편으로는 반드시 넘어야 할 라이벌로도 생각했다고 한다.
참고로 둘은 후술되어있기도 하지만 한국인들에겐 한반도 문제 관련해서 상반된 행보로도 알려져있는데, 다만 이건 딱히 시어도어는 친일이고 프랭클린(더 나아가 후임 해리 트루먼까지)은 반일이라 그랬다는 식의 1차원적인 해석보단, 당시 미국과 일본의 목적이 어긋난 데에서 그 주요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어도어 재임기 시절 서양 열강들은 중국에서의 지배권 확보를 위해 일본이 러시아를 견제하고 시베리아로 진출하길 바라고 있었다. 허나 일본은 자신의 목표를 시베리아가 아닌 중국으로 명확히 설정하고 있었기에[24], 이것은 조선 침략기의 미국인(시어도어 루스벨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의 일본관과 중국 침략기의 미국인(프랭클린 D. 루스벨트, 해리 트루먼)의 일본관이 정반대인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양국간 관계가 훼손되자, 일본 제국은 진주만 공습이란 무리수를 두게 되고 태평양 전쟁으로 패전하게 된다.
한반도만을 중심에 두지 않고 전반적인 외교정책을 바라보면 공통점도 있는데, 두 대통령 모두 대외 개입 및 영향력 투사를 강력히 지지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테디 때나 FDR 때나 미국은 고립주의 성향이 다소 강했지만, 테디는 미국의 라틴아메리카 개입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퇴임 이후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지지하였으며 위에서도 언급된 "태평양 연안에서 미국이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는 게 내 꿈이다."와 같은 말을 남겼다. FDR은 말할 것도 없이 진주만 공습 이전부터 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의사를 밝혔고 2차대전 동안 미국 또는 미국을 넘어 연합군 진영을 이끌었고 전후 세계 질서 재편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관여했다. 위 테디의 꿈인 태평양 연안에서 미국의 지배력을 이룬 것은 덤.
또한 테디와 FDR은 미국 역사에서 얼마 없는[25] 3선 출마를 한 대통령들이다.[26] 차이점이 있다면 테디는 낙선한 반면 FDR은 미국 유일의 3선 당선을 넘어 4선까지 했다 임기 중 사망하여, 이후 미국 의회가 대통령 3선 이상 금지를 수정헌법에 반영하는데 이바지(?)했다는 점.
5. 평가
둥글둥글한 외모와 테디라는 별명, 그리고 학자, 정복자, 카우보이, 군인, 경찰, 탐험가, 사냥꾼,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력과 전임자의 암살로 갑작스럽게 대통령이 됐음에도 대통령 시절 국내에 남긴 여러 진보적 정책, 흥미로운 일화들로 인해 미국 내에서는 꽤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으로는 다혈질에 가까운 인물로 싸우는 걸 좋아하기도 했다.당시 서구권에서 우생학이나 사회진화론은 심지어 버나드 쇼처럼 일부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꽤 수용되고 있었고, 심지어는 아시아권 개화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거론되고 있었으며, 제국주의 또한 당시에는 특별히 우파적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관점에서 마냥 보수주의라고 평하긴 좀 무리가 있긴 하다. 그래서인지 엘리자베스 워런, 버니 샌더스 같은 현대 미국의 상당한 정치권 진보주의자[27]들도 시어도어를 존경한다고 밝히기도 하였다.[28] 실제로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던 당시 정치판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정치성향은 중도좌파 내지 좌파로 평가받기도 했다. 대외정책이야 사실 정도의 차이일 뿐 이미 시대 트렌드가 제국주의여서 링컨급 신념을 지닌 대통령이 아닌 이상 다수는 시어도어랑 비슷한 길을 걸었을거라고 보는 학자들이 상당하다. 물론 그래봤자 위선적인 전쟁광 제국주의자일 뿐이라고 비판하는 학자도 있긴 있다.
대통령으로서의 업적과 능력만 놓고 보면 가장 평가가 높은 공화당 대통령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29] 미국의 국력 신장을 이끈 대통령으로 뽑히며, 덕분에 미국 대통령 평가 순위나 인기 랭킹에서도 보통은 10위권 안에 든다. 심지어 2010년 시에나대학교에서 시행한[30] 대통령 업적 평가에선 2위라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는데, 참고로 이 조사에서 1위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3위는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 두 루스벨트가 그 유명한 링컨을 누른 셈. 참고로 이 조사에서 당시 현직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는 15위를 차지했다. 러시모어 산에 있는 큰 바위 얼굴에도 그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것은 그가 미국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31]
영국의 역사가 휴 브로건은 그를 "에이브러햄 링컨 이후 백악관에서 제일 유능한 사람, 앤드루 잭슨 이후 가장 정열적인 사람, 존 퀸시 애덤스 이후 최고의 독서가"라고 평가했으며,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는 "아버지는 장례식에 가면 시체가 되고, 결혼식에 가면 신부가 되고, 세례식에 가면 아기가 되고 싶어하셨지요."[32]라고 회상했다. 뭔 소린가 하니 주인공 기질이 강했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후술하겠지만 장례식장에서 관에 들어가보고 싶다고 자살 소동까지 벌였으니 과장도 아니다.
아나키스트인 놈 촘스키는 그를 "악랄한 제국주의자이자 최악의 정신병자"라고 혹평했으며 미국 진보주의 계열 사학자인 하워드 진 역시 "진보주의의 탈을 쓴 보수주의자", "전쟁광이자 제국주의자"라고 혹평했다. 전임인 윌리엄 매킨리와 묶어서 미국 역사상 최악의 전쟁광이자 제국주의자로 혹평받기도 한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상호 불간섭을 표방한 먼로 독트린에 수정조항을 달아 라틴아메리카에 간섭하기 시작하였는데, 파나마 운하 건설 중에 콜롬비아와 마찰이 생기자 파나마의 반란과 분리독립을 배후조종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다만 루스벨트가 진짜 보수주의자라고 보긴 어렵고 자유제국주의자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네오콘 계열에게는 전략적 측면, 경제적 측면에서 상반된 평가를 받는데, 전략적 측면에서는 루스벨트 추론과 대백색함대 세계순방 등으로 미국의 세계전략을 수립한 위인으로 평가하는 반면, 경제적 측면에서는 위에 나온 독점금지법 때문에 자유시장경제를 억압하고 후퇴시킨 사회주의자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말은 부드럽게 하되 몽둥이는 큰 걸 들고 다녀라"(Speak softly, and carry a big stick)라는 시어도어의 말은 당시 미국의 외교정책을 잘 보여준다. 사실 국내 정책에서도 반대파들 상대로 종종 써먹었다.
5.1. 뉴 내셔널리즘의 거물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결정적으로 고평가받는 점은 극단적 자본주의의 한계를 벗어난 개입경제로 미국의 현대적 복지체제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전반적으로 테디는 자유방임주의, 불간섭주의 기조 하에 있었던 이전 대통령들과 달리 내정과 외교 양면에서 국가의 적극적이고 강력한 권한 행사를 추구했던 사람이었다. 내정에선 독과점 철폐, 산업의 국가 통제, 노동자 보호, 과격 노동 운동 강경 대응 등 국가가 기업과 노조 양면으로 산업 전반에 적극 개입했으며, 외교적으로는 먼로주의로 상징되는 미국의 전통적 외교 노선인 불간섭주의를 폐기하고 개입주의와 제국주의적 팽창주의를 추구했다. 그 결과 재임기간 중 필리핀을 식민지화하여 미국을 제국주의 열강 대열에 합류시켰다. 물론 이후 그의 후임으로 우드로 윌슨 같은 진보적 자유주의자나 공화당 출신의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이 연이어 대통령이 되면서 루스벨트의 팽창주의, 개입주의가 그대로 계승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본인의 집권기 이전 한동안 존재감과 역할이 그리 돋보이지 않던 미국 대통령의 역할과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자연보호에 앞장선 것으로도 나름 유명하다. 미국의 많은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만들었고, 2억 에이커 이상의 지역에서 산림개발을 금지했다. 루스벨트가 이렇게 적극적인 자연보호 정책을 펼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자연 파괴를 막으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당시 유행했던 사회진화론적 사고에서 자연을 보호하여 미국인들의 야생성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국립공원들을 지정하여 개발되지 못하도록 막은 것도 있다.[33]
그는 기존의 자본주의를 비관적으로 보았고 사회복지와 노동자, 여성의 권익문제에 관심을 보였는데 이러한 루스벨트의 정책을 뉴 내셔널리즘이라고 한다.
5.2. 인종차별 관련
한국에서는 제국주의로 인한 한일합병 문제 때문에 유별나게 인종차별적인 인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당시 기준에서는 되레 인종문제에서 유화적인 편에 속했다. 패권주의적 정책을 시행했으나, 그는 기본적으로 근대주의자로써 전근대적인 남부백인들의 (KKK로 대표되는) 흑인 핍박에 대해서는 미개한 전근대적 짓거리로 보고 경멸했으며, KKK를 탄압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보로 인해 현대 미국에서조차도 KKK를 옹호했던 우드로 윌슨 수준의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라고 보는 시각이 주류이다.오히려 루스벨트는 당대 기준에서는 반인종주의적이라고 보일 만한 행보도 보였다. 예를 들어 당대 가장 영향력 있던 흑인 지도자 부커 T. 워싱턴을 백악관에 초청하였는데, 이는 당시 흑인에 대한 인식을 고려하면 파격적 행보였고, 부커 워싱턴은 최초로 백악관에 방문한 흑인으로 기록되었다. 남북 전쟁 직전 대통령을 지낸 프랭클린 피어스에 대한 그의 평가에서도[34] 노예제를 혐오한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5.3. 친일·혐한·혐중 성향
"조선은 미개하여 스스로를 통치할 자격이 없으니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자국 미국에서는 존경하는 대통령 10위 안에 매번 들 정도로 평판이 좋고 일본에서도 일본을 높이 평가한 점 덕분에 상당히 긍정적으로 인식되는 대통령이다. 반면 대한민국과 중국 입장에서는 결코 좋게 볼 수 없는 인물인데, 대놓고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나 되는 게 낫다고 밝혔을 정도로 한국을 혐오했음은 물론이고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시키는데 크게 공헌했기 때문이다.일단 미국 사학계에서는 루스벨트가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한일병합에 반대의사를 보이지 않았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통념과는 달리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태생부터가 꽤 친일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는 단지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소극적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방관한 정도가 아니라 미국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임을 이유로 적극적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지지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본 문화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반면 한국에 대해선 철저하게 멸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당시 서구인들 사이에 꽤 널리 퍼져 있던 인종개량주의와 사회진화론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그는 당시 문명의 상위에 있던 앵글로-색슨계 미국인이 가장 우월한 인종이라 믿었으며, 미국인에 의해 세계가 주도되어야 한다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팽창주의적 제국주의를 표방한 대외정책에서도 잘 드러난다.[35]
이러한 신념을 가졌던 그는 아시아에서 빠른 속도로 문명화를 이루어낸 일본에 대해서도 무척 우호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철저한 인종주의자였음에도 일본인들만큼은 황인종이 아닌 문명화된 백인의 일원으로 보았다. 그는 "튀르키예인들보다 일본인들이 인종적으로 우리(백인종)에게 더 가깝다. 튀르키예인들은 우리의 국제사회(소위 ‘문명권’)에서 구제 불능 회원인 반면 일본인들은 바람직한 신입 회원이라 생각한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36][37] 그는 1899년 영문으로 발간된 니토베 이나조의 부시도에 깊은 감명을 받고 사무라이 정신에 심취하여 이 책을 30권이나 사서 지인들에게 나눠줬을 정도였고 에도 시대의 대표적 명군 우에스기 요잔[38]을 존경한다고 말하기도 했고,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BANZAI"라고 글을 메모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루스벨트는 도고 헤이하치로의 훈시를 영어로 번역한 후 미군에 배포했으며, 일본 외교관들에게서 일본 요리를 대접받을 때 그 당시 일반적인 서양인들은 날생선을 사용하는 일본 요리(특히 회)에 기겁을 했지만 루스벨트 본인은 맛있다고 칭찬하며 잘 먹었다고 한다. 루스벨트 시절 미일관계는 단순히 태평양 방면에서 미국의 외교적 이익을 얻기 위한 차원을 넘어 루스벨트 개인의 일본에 대한 호감이 작용한 게 아닌가 하는 말까지 나올 정도.
반면 한국은 혐오한 루스벨트는 1900년“나는 일본이 한국을 손에 넣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루스벨트는 1905년 언론인 조지 케넌이 보낸 편지 겸 기고문 <나태한 나라, 한국>을 읽고 “한국에 관하여 쓴 당신의 글은 정말 마음에 든다”며 극찬을 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는 이런 견해가 보다 구체화되어있다. "한국인은 본래 일본인 또는 중국인과 같은 수준에서 사물을 파악할 능력이 없으며 사물에 제대로 보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부패했기 때문에 자력으로 훌륭한 사회를 만들고 지켜나갈 수 없다. 조선인이 갖고 있는 인종적 결함과 낡고 뒤떨어진 정치·사회제도 탓에 외부로부터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는 후진 상태를 벗어나기 어렵다." 또 루스벨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조선은 극동의 모든 나라에서, 아니 이 세상에서 가장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의 나라이며, 조선 민족은 가장 문명이 뒤쳐진 인종이다. 조선인은 자치에 전적으로 적합하지 않다. 반면 일본은 입헌정치의 나라이며 일본 민중은 지성과 활력, 활기에 넘치는 문명 국민이다." 출처.[39] 편지 일부 내용
그리고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서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도왔고[40] 그해 을사조약 체결 당시 대한제국의 거중조정[41] 요청에도 불구하고 수수방관했으며, 1908년 신사협정, 미일중재조약, 다카히라-루트 협정 등으로 일본의 조선 지배를 확인하는 협정을 수차례나 타결했다.
그는 또한 일본과 달리 서구화에 실패하고 근대화도 늦었던 중국에 대해서도 매우 배타적이었다. 그는 "중국인과 일본인을 같은 인종이라 말한다면 이것은 얼마나 당치도 않은 말이냐?”고 말할 정도로 중국을 부정적으로 여겼으며, 포츠머스 회담엔 조선과 함께 청나라 또한 회담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하려 했을 정도로 중국도 좋아하지 않았다.
미국인들에게는 링컨, 워싱턴 다음으로 중요하고 친숙하고 인지도가 높은 대통령 중 한 명이지만, 비미국인 중 미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애초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도 잘 모른다. 원래 위인전의 특징이 인물의 부정적인 면은 철저히 감추려는 성향이 있기도 하고. 아래의 7번 문단에 나오는 미국산 창작물에서도 친일 성향 및 동아시아 관련은 잘 언급되지 않고, 오히려 6번 문단에 나오는 사냥이나 존 슈랭크가 저지른 암살 미수 등 다른 일화들이 더 유명하다. 희화화를 한다면 총들고 동물 사냥하는 사냥덕후로 묘사되는 편이다.
일뽕 성향의 미국 유튜버 토니 마라노가 말하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한국. 미국 내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동아시아의 관계는 어쩌면 이러한 극렬 와패니즈들만 관심 가질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 네이버 캐스트: 왜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일본의 한국 지배를 원했는가?
5.3.1. 친일의 이면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친일 성향은 이론의 여지가 없으나, 사실 이는 문화적 부분에서 기인한 것이 컸기에, 그 역시 정치적인 부분에서는 일본을 도우면서도 때론 경계하기도 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일본에 대해 많이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을 경계하는 방법도 알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도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마냥 친일이라고 평가하진 않는다. 앨프리드 머핸에게 보낸 1897년 서한에서도 일본의 위협을 거론하며 하와이의 병합을 서둘러야 한다고 촉구한 적도 있었다.[42]또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우호적이었으나 동시에 필리핀을 향한 일본의 세력확대를 경계하여 포츠머스 조약에서 러시아에도 지나친 손해가 가지 않게 노력하였다.[43] 이로써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견제하길 바랐고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강성해지는 조짐이 보이자 일본에 대한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루스벨트는 하와이 일본인의 본토 이주를 엄금하고 일본 해군의 태평양 상륙을 우려하여 미국 해군의 증강을 촉구했다. 유진 헤일 상원 의원에게 보내는 1906년 10월 27일자 서신에서는 태평양의 반일 캠페인을 우려하고 일본과의 전쟁이 있을 시 미래가 염려된다 할 정도로 고민이 있어 대통령 재임 당시 끊임없이 미합중국 해군의 양적, 질적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1907년 12월에 시작한 미해군의 전세계 원정인 대백색함대 원정에서 일본 해군대신 사이토 마코토의 정식 초청을 받아 함대가 일본을 방문하여 새로운 시대의 미국이 주도할 해군력을 제대로 과시했다. 이 때의 일본은 러일전쟁 쓰시마 해전의 압승으로 인하여 해군력의 자부심이 강했는데 요코하마 입항 당시 미합중국 해군 대백색함대 위용의 충격을 받아(쿠로후네 사건과 비교하여 일본에서는 백선 내항 사건이라고 한다.) 일본 제국 해군이 미국을 라이벌로 생각하며 함대 증강에 노력하게 되는 계기로 이어진다.
1907년에는 일본과의 신사협정을 맺어 비숙련 노동자의 이민을 금지하기로 합의하였다. 법무장관 녹스에게 보낸 1909년 2월 8일자 편지에서 그는 이민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일본인 노동자는 배제되어야 하는데, 전쟁의 위험을 피하는 똑똑한 방법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이 같은 루스벨트의 이민 제한 정책은 후에 1924년 이민법에서 일본계를 포함한 아시아계의 전면 이민을 금지하는 정책으로 확대됐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44]
한편으로는 언론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반일 캠페인을 전개해 일본인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샌프란시스코 시 당국이 일본인 학생들을 중국인들이 다니는 아시아인 학교로 전학시키려 했는데, 이를 일본인을 중국인과 동급으로 취급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직접 개입해 무산시킨 사례도 있었다. 이 개입은 본인의 일본 애호 성향이 원인이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루스벨트는 일본과의 외교에서 상당한 이득을 얻어내기도 했다.
그는 친일 성향이 있었고 일본 문화에 호감을 가진 건 분명하지만 기본적으론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하는 직업인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와패니즈들마냥 일본에 맹목적으로 우호적인 태도를 갖진 않은 것이다.
애시당초 친일이니 와패니즈니 하는 현대의 관점에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그대로 대입하는게 웃긴 것이다. 당대의 인종개량주의와 사회진화론을 열렬히 신봉했다는게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루스벨트가 일본 문화를 좋아한 것과 별개로 일본에 대한 정치적 경계가 공과 사를 구분하는 정치인이라서 그랬다는 것도 사실 맞지 않는 말이다. 단지 루스벨트는 백인, 그 중에서도 앵글로색슨이 가장 우월한 인종이라고 믿는 인종차별주의자고 일본인도 한국인/중국인 등 몇몇 국가들보단 뛰어나지만 그래봤자 본인같은 백인이나 앵글로색슨 미국인보다는 열등한 민족이고 세계의 주인은 자신들이라고 생각했을 뿐인 것이다.[45]
그냥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는 애호하지만 어느 분야든 주류인 서구를 넘으려고 하면 견제하고 한 대 쥐어박는 정도의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스러운 사고방식에 불과하고 그러니까 정치적 견제도 그냥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실 20세기 초의 일본의 지식인들의 글들을 보다보면 그 전까지는 서구의 문물이나 사고방식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다가 넘을 수 없는 차별의 벽을 계속해서 마주하고는 점차적으로 흑화(?)하는 변화의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결국 일본인들은 발전해도 인종에 대한 차별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점점 이런 사고는 반대로 서양에 대한 동양의 우월함을 외치는 아시아주의나 대동아 공영권같은 방식으로 분출되지만 또 그 안에서도 일본인들의 이중심리(서양의 차별 때문에 동양인이 뭉쳐야 한다고 외치지만 그 와중에도 일본인과 비 일본인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심리)들도 많이 보이는 등 당대 일본 지식인들의 글들에는 그러한 분열적인 심사를 보이는 내용들이 많이 보인다.
6. 기타
- 시어도어의 애칭이 '테디(Teddy)'라서 테디 루스벨트라고도 알려져 있고 미국에서도 테디 루스벨트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정작 본인은 테디라고 불리는 것을 대단히 싫어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테디'라는 애칭은 'Teddy', 'Teddie'라는 표기가 있는데 가족들이나 그의 친구들은 그를 부를 때 Teddie라는 표기를 사용했다고 하며, 루스벨트 본인은 자신의 이름을 줄여서 Thee라고 쓴 적이 있다. 당시 국민들이 부른 애칭은 Teddy이고 오늘날에도 Teddy Roosevelt라고 쓰는데 Teddie와는 달리 Teddy란 표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당시 언론에서는 풀네임 머릿글자를 따서 TR이라고 불렸는데, 이것은 언론에서 대통령을 이니셜로만 부른 최초의 사례이다. 한국 언론에서 정치인을 YS, DJ, JP, MB 등으로 부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인데, 그 원조격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친족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미들네임인 델러노까지 포함해서 FDR로 부르기도 한다.
- 라이트 형제가 비행에 성공한 시기가 루스벨트 재임기였는데, 그래서인지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비행기를 탄 대통령이 되었다. 또한 최초로 자동차를 탄 대통령이기도 하다. 해군 잠수함에 최초로 탑승하여 직접 잠수함을 조타하기도 했다. 다만 죽은 날짜가 하필이면 2살 연상인 토머스 우드로 윌슨 재임기에 죽었다.
사냥복 차림의 루스벨트 "당신 나라에는 특이한 것이 두 개 있는데, 바로 나이아가라 폭포와 당신네 나라 대통령이오." - 루스벨트 재임기에 미국을 방문한 한 영국 외교관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음에도 어딘가 특이한 면이 있어서 아래의 일화에서 보듯 기행도 많이 일삼았다. 오죽하면 영국 외교관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왔을까.
- 프랑스 대사인 주세랑이라는 사람과 함께 산책을 했는데 산책하다가 너무 깊어서 걸어서 건너가기 힘든 개울을 만나자 대통령은 갑자기 옷을 훌훌 벗고 주세랑 대사에게 옷을 벗을 것을 권했다. 결국 그 프랑스 외교관도 웃통을 벗고(…) 미국 대통령과 함께 헤엄쳐서 개울을 건넜다. 또한 그와 함께 산책한 영국 대사는 그 날 일기에 죽는 줄 알았다. 산책이라더니 어떻게 2시간 반 동안 등산하냐.며 이런 식의 일기를 남겼을 정도였고, 그 영국 대사가 지쳐서 움직이지 못하자 앞서가다 말고 내려와서 영국 대사를 잡아끌고 끝까지 올라갔다. 또한 한 친구와 산책하다가 산 속에서 폭발음이 들렸는데, 이것은 채석장에서 굴을 터뜨린 소리였다. 당연히 바위조각들이 튀고 머리 위로 쏟아지는데 되려 친구에게 '바위조각 많이 떨어지는 곳으로 가 보자'고 억지로 끌고 갔다고 한다. 이게 뭐 산책인지 유격 훈련인지 분간이 가지 않지만 이런 일화를 보면 마이페이스 기질이 있었다.
- 운동을 너무 좋아해서 대통령 시절 복싱선수 존 설리번을 백악관에 불러 복싱 연습을 했을 정도였다. 연습 중 부상당한 적도 많지만 눈이 찢어져도 끝까지 연습을 했다. 정통으로 한쪽 눈을 얻어맞은 적도 있었는데 결국은 그 눈의 시력을 잃었다(즉, 애꾸눈). 국회의원들을 데리고 장애물 경주를 하기도 했다. 루스벨트의 하버드 동기였던 일본 외교관 가네코 겐타로[46]는 루스벨트가 운동을 좋아한다는 점을 알고 일본 유도 선수들과 스모 선수들을 백악관으로 초빙해 일주일에 세 번씩 대련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기도 하였다. 백악관에 요코즈나를 초청한 적도 있다.
- 1912년 대선에 출마하여 밀워키에서 연설을 준비 중에 괴한[47]에게 피격당해서 오른쪽 가슴에 총을 맞았는데 갈비뼈가 부러지고 가슴에 총탄이 박힌 채로 한 시간 동안 연설을 한 후에 병원으로 갔다. 그나마 연설도 숨을 헐떡이면서 겨우겨우 해냈으며 연설 후 의사에게도 '들것에 누워 가기 싫다. 내 발로 걸어가겠다'며 끝내 병원까지 걸어갔다. 총탄이 루스벨트의 상의 가슴 주머니에 있던 안경 케이스와 연설문을 뚫고 가슴 근육에 박혔는데, 워낙 운동과 탐험으로 다져진 강건한 체구였던 덕택에 폐를 뚫고 들어오는 치명상을 입지 않았다. 이 행동에 대해서 그의 반대자인 우드로 윌슨 등도 '나는 루스벨트의 정치 노선에는 반대하지만, 그 기개는 존경한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또한 루스벨트가 총상을 치료하는 중에는 같이 대선에 출마한 윌슨과 태프트 모두 선거운동을 중단했다고 한다.
-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에게 1개 기병 사단을 지휘해서 참전하겠다고 요구했다. 물론 윌슨은 거절했다.
무스를 타고 있는 시어도어 루스벨트[48][49]
모험심이 강해 탐험과 사냥이 취미다 보니, 자연환경보호정책을 편 것 치고는 상당히 사냥한 동물들이 많았는데, 이 당시에는 자연보호활동과 사냥을 하는 것의 괴리가 문제되지 않았던 모양으로(사실 지금도 들개 등 유해조수가 나타나면 동물보호협회 소속 엽사가 총 들고 온다)이를 가지고 루스벨트를 비판하는 이는 생각보다 드물었다. 사실 자연보호 운동을 시작한 사람들 자체가 프로 사냥꾼인 경우가 부지기수였는데, 이는 그들 사냥꾼이야말로 동물 숫자의 감소를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10년 전에는 초원에 우글거리던 코끼리떼가 지금은 손꼽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면 경각심을 느끼는 것도 자연스럽다. 어찌보면 코끼리가 다시 많아져야 내가 사냥을 즐길 수 있다(좋게 말하면 인류가 자연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사냥과 관련한 유명한 일화로는 테디 베어 이야기가 있는데 관련 일화는 해당 항목 참고.
- 탐험에 대해서는 1909년 대통령에서 퇴임하자마자 스미스소니언 협회의 지원을 받는 과학탐험대를 인솔하여 바로 아프리카 탐험을 떠났다. 1913년에는 브라질에 위치한 지도에 나와 있지 않는 미탐사 지역인 다우트 강 탐험을 직접 이끌기도 했다. 탐험을 마치고 루스벨트는 "소년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라고 소감을 말했다.
- 위의 아들이 한 말처럼 진짜로 장례식장에서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말려서 실패했지만 그는 관에 들어가 보고 싶다며 징징댔다고 한다.
- 골치를 앓고 있던 중요한 사안에 대해 정부의 고위관리와 회의하던 도중에 조카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아저씨, 4시가 넘었어요!"라고 말하자 관리에게 "저 아이들하고 4시에 사냥을 가기로 했는데, 미안하지만 이 문제는 나중에 논합시다. 원래 애들에게 있어서 기다린다는 것은 아주 견디기 힘든 일 아니오?"라며 회의도 대충 끝내고 냅다 사냥을 나가버렸다.
- 아이들을 좋아해서 대통령 시절에도 자식이나 조카들을 데리고 어울려 놀곤 했다. 함께 사냥을 가거나 승마를 하기도 했으며 베개싸움까지도 했다. 심지어는 아이들과 함께 백악관 만찬장의 쥐잡기를 진두지휘했다고 한다. 영부인 이디스는 이렇게 말했다. "제 아이가 7명인데(원래 루스벨트 부부의 아이는 6명인데, 남편까지 합쳐서 한 말) 시어도어가 제일 어려요."
- 스테이크를 좋아해서 즐겨먹었으며 음식을 한가지가 아닌 항상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는 것을 좋아하는 미식가였다.
- 뉴욕 경찰청장 때와 주지사 시절에는 검은 망토로 변장하거나 경찰관으로 변장하고 공무원들이 있는 곳을 돌며 졸거나 근무를 똑바로 안 하는 공무원들을 보면 즉석에서 질책했다고 한다. 일종의 암행어사를 직접 했던 셈이다.
- 그림도 취미 중 하나였다. 자식들이나 어린이들에게 직접 편지를 썼는데 어린이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아이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항상 그림을 그려서 편지를 보냈다.
그가 편지에 그린 그림. 두 번째 그림은 백악관 정원의 풍경이다.
- 맥스웰하우스 커피의 유명한 캐치프레이즈인 "마지막 한 방울까지(good to the last drop)"[50]가 오랫동안 이 양반 작품으로 알려져 왔었다. 1907년 그가 맥스웰하우스 커피점에서 커피를 마시게 되었는데 커피가 어찌나 맛있던지 저 말을 하며 격찬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 의도적으로 퍼뜨린 루머이며 후에 제너럴 푸즈의 전 회장 클리퍼드 스필러가 테디 루스벨트의 말에서 따온 게 아니라고 확인해 줬다. 1920년대 코카콜라도 같은 문구를 사용했다고 한다. 어찌됐건 루스벨트가 엄청난 커피광이었다는 건 사실이다.
텍사스라는 이름의 말을 키웠으며, 이 말과 관련한 미담도 많다.
- 사진기억력을 가져 매일 아침 커피타임에 책 한 권씩을 읽었다고 한다. 한 번은 친구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책을 빌려줬는데 책의 분량이 좀 많았다. 그러나 저녁 식사 때 초대되어 다시 찾아가보니 대통령은 이미 그 책을 독파하여 '그 책 읽어보니까 어떤 부분은 어떻고…'라며 인상 깊었던 부분에 대해 친구에게 열심히 설명했을 정도. 속독 능력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다독으로도 유명했다. 덧붙여 친척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도 속독 능력자였다고 한다.
- 루스벨트에게는 38구경 권총이 있었는데, 인생을 함께 한 총이었다. 이 총은 박물관에서 두번이나 도난당했다. 첫번째 도난은 박물관 뒤 숲에서 찾았고 두번째 도난은 어처구니없게 잃어버린 후[52] 20년만에 되찾게 되었다.
- 간혹 웹상에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어록으로 "보수주의자를 화나게 만들고 싶으면, 그에게 거짓말을 하라. 리버럴(좌파)을 화나게 만들고 싶으면, 그에게 진실을 말하라"(To anger a conservative, lie to him. To anger a liberal, tell him the truth.)라는 표현이 떠다니기도 했지만, 실제로 루스벨트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옥스포드 영어사전 편집자 베리 포픽(B.Popik)이 현존하는 모든 어록들을 검토해 봤지만, 그런 말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루스벨트의 당적이 공화당이기 때문에 생긴 루머로 보이는데, 애초에 대기업을 규제하고 법치주의를 강조하면서도 노동자 권익을 보호하고, 일본에 유화적인 정치적 포지션을 오늘날의 기준으로 분류한다는 것은 적절치 않은 일이다.
- 니미츠급 항공모함의 4번함 CVN-71에 이름이 붙었다. 참고로 항공모함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별명은 '큰 몽둥이(Big Stick)'.
- 처음으로 시크릿 서비스가 미국 대통령의 경호 임무를 맡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전임 대통령인 윌리엄 매킨리가 암살당하자 더 이상 대통령의 경호 임무를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의회가 재무부 산하 기관인 미국 비밀경호국에 경호 임무를 맡긴 것이다.
- 아래 명언을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목표(별)을 향해 바래보고 꿈을 위한 내실을 다져라(땅을 꿋꿋이 디뎌라)라는 의미.Keep your eyes on the stars, and your feet on the ground.네 두 눈은 별을 향하고, 네 두 발은 땅을 꿋꿋이.
- 미국 미식축구 역사에도 한 획을 그었다. 초창기 미식축구는 아이비 리그에서 활성화되어 점점 야구와 어깨를 나란히하는 인기종목으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미식축구 특유의 과격성과 폭력성, 특히 선수보호란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 선수들의 크고작은 부상에, 영구적 장애, 심하면 사망도 나올정도라 미식축구 폐지론까지 나올정도로 여론이 나빠졌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거 사내들이 스포츠 좀 하면 다칠수도 있는거 아니오?" 라면서 오히려 젊은이들의 진취성을 높이자고 미식축구를 적극 활성화 시켰는데, 하필 얼마후 하버드 대학교 선수였던 아들이 경기도중에 코뼈가 박살나자 경기를 일으켜 그날 즉시 NCAA 임원, 각 대학교 코칭스태프, 총장을 집합시켜 회의를 해서 강제로 보호장구를 의무화 시킨다.
- 재임 중 최초로 해외를 공무 목적으로 갔던 대통령이었다. 당시 파나마 운하 점검차로 왔던 것이다.
- 언론인 윌리엄 앨런 화이트가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친분이 있어서 그의 진보당 창당을 도왔다.
- 하마를 사육해서 고기를 얻자는 일명 미국 하마법안(American Hippo bill)의 주요 지지자였다. 하원 결의안 23261호라고 불리는 이 법안은 다음과 같은 배경에서 나왔다. 당시 미국은 외국에서 들여온 부레옥잠에 고통받고, 고기공급이 부족했는데 하마가 부레옥잠을 먹고, 하마는 인간이 잡아먹으면 두가지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 덤으로 하마고기를 소와 돼지를 섞은 맛이라고 평했다. 꽤 인기를 끈 이론이었지만, 주요 지지자인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죽으면서 무산되었다.#
7. 창작물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 시리즈에 로빈 윌리엄스가 이 역으로 등장했다. 항목 참조.위 영화의 주요 촬영장소가 된 뉴욕의 미국 자연사박물관 입구의 동상 주인공이 바로 시어도어 루스벨트다. 그러나 동상 좌우로 아메리카 원주민, 흑인이 마치 떠받드는 듯한 구도를 취하는 모습 때문에 인종차별의 상징이라는 비판도 받아왔다. 결국 조지 플로이드 흑인 시위가 진행 중인 2020년 6월 철거가 결정되었다. 시어도어 뿐만 아니라 처칠, 콜럼버스 등의 유명인들의 동상이 철거되었다.
2017년 마틴 스콜세지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손잡고 영화 루스벨트를 제작할 것이라는 기사가 뜨기도 했다. 해당작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대두(The Rise of Theodore Roosevelt)'라는 전기를 원작으로 하는데 이 전기는 버락 오바마가 애독하는 책 중 하나라고. 루스벨트의 삶을 다룬 3부작 전기 중 1부에 해당된다. 루스벨트의 탄생부터 전임 대통령 암살 소식을 듣는 곳까지 1부, 2부인 시어도어 렉스는 대통령 퇴임까지를 다루고 있다. 참고로 이 논픽션의 작가는 80년대 레이건 친화적인 전기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1997년 작품인 '러프 라이더즈'에도 주인공격. 루스벨트가 러프라이더로 참전한 미국-스페인 전쟁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루스벨트 역으로 플래툰의 번즈 하사로 유명한 톰 베린저가 출연. 철저히 미국 중심적으로 전쟁을 해석하고 있지만, 시대적 고증과 전투묘사는 괜찮은 편이니 19세기 말엽의 무기나 전쟁에 관심이 있다면 볼 만한 영화.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3에서는 러시모어 산에 있는 그의 머리 위에 ICBM 발사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름하여 '루스벨트 지구 멸망'이라는 병기로 개조되었다.
타임라인-191 시리즈[53]에서는 1편에선 농장주를 하다가 의용병을 이끌고 캐나다의 영국군을 무찌르는 영웅으로 나오고 이후 민주당 대통령이 돼서 북부를 부흥시켜 1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대통령으로 나온다. 최전선에 시찰가는 장면이 버젓히 나온다. 다만 여기서는 퇴임 후 골프를 치다가 사망하는 걸로 처리된다.
영국에서 나온 대체역사 소설 시리즈에서는 루스벨트가 1912년에 진짜로 암살된 후 혼란의 와중에서 트로츠키주의에 감화된 사회주의자들이 공산혁명을 일으켜 대통령 일가를 참살하고 유럽 자유주의의 강대국인 러시아와 냉전구도를 이끄는 이야기도 있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PLUTO에 등장하는 캐릭터 Dr. 루스벨트도 이 인물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이다. 특히 테디 베어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사살급.
문명 6에서 미국 지도자로 전작인 문명 5의 워싱턴을 제치고 확정되었다. 본작에서 지도자들 이미지는 실사풍과 캐리커처풍 이미지를 적절히 조합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자세한 것은 문명 6/등장 문명/미국 참고. 두툰의 문명 만화에서의 주 포지션은 막강한 피지컬을 앞세워 주변국들을 때려잡는 깡패 포지션.
엠파이어 어스 2의 미국 캠페인 초반이 미국-스페인 전쟁을 다루므로 루스벨트도 캠페인에서 영웅 유닛으로 등장한다.
타잔에서 아프리카를 방문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하필이면 몸값을 차지하려는 악당들에게 납치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타잔이 지켜주자 다행히 무사히 돌아간다.영상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1회 초반에 잠시 등장한다. 테디 루즈벨트는 유진 초이 대위(이병헌 분)와 카일 무어 소령(데이비드 맥기니스 분)을 백악관으로 불러서 전투에서의 성과를 치하하고 세계 전반에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그들을 한반도로 파견한다. 동양권에서 방영한 드라마 치고, 해당 배우의 외모나 발성 등이 실제 테디와 상당히 일치하는 편이다. 이때 테디가 했던 발언은 당시 시대상과 실제 테디 루즈벨트의 철학을 잘 보여주는 터라 매우 인상적인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케일럽 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 <에일리어니스트>에서 등장. 그의 경찰국장 시절 행적을 다룬다. 주인공인 크라이즐러와 무어와는 하버드 대학교 시절의 친구로, 정신의학적, 법의학적 시선으로 연쇄살인범을 쫓는 주인공들을 도와준다. 사건을 대충 덮기를 바라는 사교계 거물이나, 새로운 수사방법을 백안시하는 경찰 내부 분위기 때문에 주인공들에게 투덜거리거나 차갑게 대하는 경우가 있기는 해도 전반적으로 긍정적으로 그려졌다.[55] 배우는 허트 로커에서 엘드리지 역을 맡은 브라이언 게러티.
Epic Rap Battles of History에서 ERB 뉴스의 진행자로 등장하며 "What's up bitches?(잘 지내냐, 새끼들아?)"하는 인사가 특징적이다. 나중에 시즌 5에서 윈스턴 처칠과의 대결로 등장하기도 하며 ERB 뉴스의 해당 인사를 셀프 패러디했다.
숀 코너리의 주연의 1975년작 영화 바람과 라이온에서 루즈벨트 역시 주연급 인물로 등장한다. 영화에서 루즈벨트 역을 맡은 브라이언 키스의 연기는 극찬을 받았고, 루즈벨트 대통령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으면 반드시 그 영화를 볼 것을 추천한다. 근래에도 EBS 등에서 종종 방영이 되고 있다.
8. 어록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시어도어 루스벨트/어록#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시어도어 루스벨트/어록#|]] 부분을
참고하십시오.9.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880 - 1911 | 입당 정계 입문 탈당 |
| 1912 - 1916 | 입당 정계 은퇴 탈당 |
| 1916 - 1919 | 복당 사망 |
10.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 당선 여부 | 비고 |
1886 | 뉴욕시장 선거 | 뉴욕시 | | 60,435 (27.52%) | 낙선 (3위) | |
1896 | 뉴욕주지사 선거 | 뉴욕주 | 661,707 (49.02%) | 당선 (1위) | 초선 | |
1900 | 미국 부통령 선거[A] | 미합중국 | 7,218,039 (51.67%, 292명) | |||
1904 | 미국 대통령 선거 | 7,626,593 (56.41%, 336명) | ||||
1912 | 미국 대통령 선거 | | 4,119,207 (27.39%, 88명) | 낙선 (2위) |
11. 둘러보기
Mt. Rushmore 러시모어 산 | |||
<rowcolor=#FFFFFF> 초대 미국 대통령 | 3대 미국 대통령 | 26대 미국 대통령 | 16대 미국 대통령 |
조지 워싱턴 | 토머스 제퍼슨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에이브러햄 링컨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letter-spacing:-0.5px" | 초대 조지 클린턴 | 제2대 존 제이 | 초대2 조지 클린턴 | 제3대 모건 루이스 | 제4대 대니얼 D. 톰킨스 |
제5대 존 테일러 | 제6대 드윗 클린턴 | 제7대 조셉 C. 예이츠 | 제6대2 드윗 클린턴 | 제8대 너새니얼 피처 | |
제9대 마틴 밴 뷰런 | 제10대 에노스 T. 스루프 | 제11대 윌리엄 L. 마시 | 제12대2 윌리엄 H. 수어드 | 제13대 윌리엄 C. 바우크 | |
제14대 사일러스 라이트 | 제15대 존 영 | 제16대 해밀턴 피시 | 제17대 워싱턴 헌트 | 제18대 호레이쇼 시모어 | |
제19대 마이런 H. 클라크 | 제20대 존 A. 킹 | 제21대 애드윈 D. 모건 | 제18대2 호레이쇼 시모어 | 제22대 루벤 펜튼 | |
제23대 존 T. 호프먼 | 제24대 존 애덤스 딕스 | 제25대 새뮤얼 J. 틸던 | 제26대 루시어스 로빈슨 | 제27대 알론조 B. 코넬 | |
제28대 그로버 클리블랜드 | 제29대 데이비드 H. 힐 | 제30대 로스웰 P. 플라워 | 제31대 리바이 P. 모턴 | 제32대 프랭크 S. 블랙 | |
제33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 제34대 벤저민 오델 | 제35대 프랭크 W. 히긴스 | 제36대 찰스 에번스 휴스 | 제37대 호레이스 화이트 | |
제38대 존 앨든 딕스 | 제39대 윌리엄 슐저 | 제40대 마틴 H. 글린 | 제41대 찰스 S. 휘트먼 | 제42대 앨 스미스 | |
제43대 네이선 L. 밀러 | 제42대2 앨 스미스 | 제44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제45대 허버트 리먼 | 제46대 찰스 폴레티 | |
제47대 토머스 E. 듀이 | 제48대 W. 애버럴 해리먼 | 제49대 넬슨 록펠러 | 제50대 맬컴 윌슨 | 제51대 휴 캐리 | |
제52대 마리오 쿠오모 | 제53대 조지 퍼타키 | 제54대 엘리엇 스피처 | 제55대 데이비드 패터슨 | 제56대 앤드루 쿠오모 | |
제57대 캐시 호컬 | }}}}}}}}} |
{{{#!wiki style="padding-top: 5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582d2d, #663334, #663334, #582d2d)"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25%;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20세기 ] {{{#!wiki style="margin:-5px -1px" | <rowcolor=#cd9f51> 1901 | 1902 | ||
| | | | |
앙리 뒤낭 | 프레데리크 파시 | 엘리 뒤코묑 | 샤를 알베르 고바 | |
<rowcolor=#cd9f51> 1903 | 1904 | 1905 | 1906 | |
| - | | | |
윌리엄 랜들 크리머 | 국제법학회 | 베르타 폰 주트너 | 시어도어 루스벨트 | |
<rowcolor=#cd9f51> 1907 | 1908 | |||
| | | | |
에르네스토 모네타 | 루이 르노 | 클라스 아르놀드손 | 프레드리크 바예르 | |
<rowcolor=#cd9f51> 1909 | 1910 | 1911 | ||
| | - | | |
데스투르넬 드 콩스탕 | 오귀스트 베르나르트 | 국제평화국 | 알프레트 프리트 | |
<rowcolor=#cd9f51> 1911 | 1912 | 1913 | 1917 | |
| | | | |
토비아스 아서르 | 엘리후 루트 | 앙리 라퐁텐 | 국제적십자위원회 | |
<rowcolor=#cd9f51> 1919 | 1920 | 1921 | ||
| | | | |
우드로 윌슨 | 레옹 부르주아 | 얄마르 브란팅 | 크리스티안 랑에 | |
<rowcolor=#cd9f51> 1922 | 1925 | 1926 | ||
| | | | |
프리드쇼프 난센 | 오스틴 체임벌린 | 찰스 G. 도스 | 아리스티드 브리앙 | |
<rowcolor=#cd9f51> 1926 | 1927 | 1929 | ||
| | | | |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 페르디낭 뷔송 | 루트비히 크비데 | 프랭크 켈로그 | |
<rowcolor=#cd9f51> 1930 | 1931 | 1933 | ||
| | | | |
나탄 셰데르블롬 | 제인 애덤스 | 니컬러스 버틀러 | 노먼 에인절 | |
<rowcolor=#cd9f51> 1934 | 1935 | 1936 | 1937 | |
| | | | |
아서 헨더슨 | 카를 폰 오시에츠키 | 카를로스 라마스 | 로버트 세실 | |
<rowcolor=#cd9f51> 1938 | 1944 | 1945 | 1946 | |
| | | | |
난센 국제난민 사무국 | 국제적십자위원회 | 코델 헐 | 에밀리 그린 볼치 | |
<rowcolor=#cd9f51> 1946 | 1947 | 1949 | 1950 | |
| | | | |
존 모트 | 퀘이커 봉사협회 | 존 보이드 오어 | 랠프 번치 | |
<rowcolor=#cd9f51> 1951 | 1952 | 1953 | 1954 | |
| | | | |
레옹 주오 | 알베르트 슈바이처 | 조지 마셜 | 유엔난민기구 | |
<rowcolor=#cd9f51> 1957 | 1958 | 1959 | 1960 | |
| | | | |
레스터 피어슨 | 도미니크 피르 | 필립 노엘베이커 | 앨버트 루툴리 | |
<rowcolor=#cd9f51> 1961 | 1962 | 1963 | 1964 | |
| | | | |
다그 함마르셸드 | 라이너스 폴링 | 국제적십자위원회 | 마틴 루터 킹 | |
<rowcolor=#cd9f51> 1965 | 1968 | 1969 | 1970 | |
| | | | |
유니세프 | 르네 카생 | 국제노동기구 | 노먼 볼로그 | |
<rowcolor=#cd9f51> 1971 | 1973 | 1974 | ||
| | | | |
빌리 브란트 | 헨리 키신저 | 레득토 (수상 거부) | 사토 에이사쿠 | |
<rowcolor=#cd9f51> 1974 | 1975 | 1976 | ||
| | | | |
숀 맥브라이드 | 안드레이 사하로프 | 베티 윌리엄스 | 메어리드 코리건 | |
<rowcolor=#cd9f51> 1977 | 1978 | 1979 | ||
| | | | |
국제앰네스티 | 안와르 사다트 | 메나헴 베긴 | 마더 테레사 | |
<rowcolor=#cd9f51> 1980 | 1981 | 1982 | ||
| | | | |
아돌포 에스키벨 | 유엔난민기구 | 알바 뮈르달 | 알폰소 로블레스 | |
<rowcolor=#cd9f51> 1983 | 1984 | 1985 | 1986 | |
| | - | | |
레흐 바웬사 | 데즈먼드 투투 | 핵전쟁방지국제의사회 | 엘리 비젤 | |
<rowcolor=#cd9f51> 1987 | 1988 | 1989 | 1990 | |
| | | | |
오스카르 아리아스 | 유엔 평화유지군 | 달라이 라마 14세 | 미하일 고르바초프 | |
<rowcolor=#cd9f51> 1991 | 1992 | 1993 | ||
| | | | |
아웅 산 수 치 | 리고베르타 멘추 | 넬슨 만델라 | 프레데리크 빌럼 데 클레르크 | |
<rowcolor=#cd9f51> 1994 | 1995 | |||
| | | | |
이츠하크 라빈 | 시몬 페레스 | 야세르 아라파트 | 조지프 로트블랫 | |
<rowcolor=#cd9f51> 1995 | 1996 | 1997 | ||
| | | | |
퍼그워시 회의 | 카를로스 벨로 | 조제 하무스오르타 | 조디 윌리엄스 | |
<rowcolor=#cd9f51> 1997 | 1998 | 1999 | ||
- | | | | |
지뢰금지국제운동 | 존 흄 | 데이비드 트림블 | 국경없는의사회 | |
<rowcolor=#cd9f51> 2000 | ||||
| ||||
김대중 | ||||
}}}
}}}
}}}
- [ 21세기 ]
- ##
<rowcolor=#cd9f51> 2001 2002 2003 유엔 코피 아난 지미 카터 시린 에바디 <rowcolor=#cd9f51> 2004 2005 2006 왕가리 마타이 국제원자력기구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무함마드 유누스 <rowcolor=#cd9f51> 2006 2007 2008 그라민 은행 앨 고어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패널 마르티 아티사리 <rowcolor=#cd9f51> 2009 2010 2011 버락 오바마 류샤오보 엘런 존슨 설리프 리마 보위 <rowcolor=#cd9f51> 2011 2012 2013 2014 타우왁쿨 카르만 유럽연합 화학무기금지기구 말랄라 유사프자이 <rowcolor=#cd9f51> 2014 2015 2016 2017 - 카일라시 사티아르티 튀니지 국민4자대화기구 후안 마누엘 산토스 핵무기 폐기 국제 운동 <rowcolor=#cd9f51> 2018 2019 2020 드니 무퀘게 나디아 무라드 아비 아머드 세계식량계획 <rowcolor=#cd9f51> 2021 2022 마리아 레사 드미트리 무라토프 메모리알 시민자유센터 <rowcolor=#cd9f51> 2022 2023 2024 알레스 발랴츠키 나르게스 모하마디 일본 원수폭 피해자 단체 협의회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Time 100: The Most Important People of the Century | ||||
지도자들 & 혁명가들 부문 # | |||||
시어도어 루스벨트 | 블라디미르 레닌 | 마거릿 생어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엘리너 루스벨트 | |
아돌프 히틀러 | 윈스턴 처칠 |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 다비드 벤구리온 | 마오쩌둥 | |
마틴 루터 킹 | 루홀라 호메이니 | 마거릿 대처 | 로널드 레이건 | 미하일 고르바초프 | |
레흐 바웬사 | 넬슨 만델라 | 요한 바오로 2세 | 호찌민 | 탱크맨 | |
같이 보기: 과학자 & 사상가 부문, 예술가 & 연예인 부문, 건설자 & 거인 부문, 영웅 & 아이콘 부문 | }}}}}}}}} |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0d164a,#FFC224> 정당 | 대통령 후보 | 순위 | |
<rowcolor=#0d164a,#FFC224> 부통령 후보 | 비고 | |||
| 민주당 |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 2위 | |
애들레이 스티븐슨 1세 | 낙선 | |||
| 공화당 | 윌리엄 맥킨리 | 1위 | |
시어도어 루스벨트 | 당선 | |||
| 사회당 | 유진 데브스 | 4위 | |
잡 해리먼 | 낙선 | |||
금주당 | 존 울레이 | 3위 | ||
헨리 맷카프 | 낙선 | |||
| }}}}}}}}}}}} |
{{{#!wiki style="margin:-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e81018><tablebgcolor=#e81018> '''[[시어도어 루스벨트|{{{+1 | 시어도어 루스벨트 관련 문서 |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e81018> 일생 | 생애 | ||
가족 | 조카 엘리너 루스벨트 · 친척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
역대 선거 | 1904년 미국 대통령 선거 · 1912년 미국 대통령 선거 | |||
관련 정치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 우드로 윌슨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부커 T. 워싱턴 | |||
사건사고 | 미국-스페인 전쟁 · 암살 미수 사건 | |||
조직 | 공화당 · 진보당 | |||
평가 | 평가 | |||
기타 | 테디 베어 · 박물관이 살아있다 시리즈 · 루스벨트 가문 · 미국의 현대자유주의 | |||
TR 행정부 | ||||
정책 | 반독점법 · 뉴 내셔널리즘 · 스퀘어 딜 · 자유제국주의 · 자유주의적 매파 | |||
사건사고 | 가쓰라-태프트 밀약 · 샌프란시스코 지진 · 스티븐스 저격사건 · 이로쿼이 극장 화재 사고 · 인류학의 날 · 포츠머스 조약 | |||
| }}}}}}}}} |
미국 자유주의 관련 문서 (1934년 이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주요 이념 | 고전적 자유주의 · 급진주의 | |
연관 이념 | 1934년 이전 | 공화주의 · 대중주의 · 민주주의 · 사회자유주의 · 세속주의 · 이신주의 · 진보주의 · 자유민주주의 · 자유방임주의 · 자코뱅주의 · 잭슨 민주주의 · 제퍼슨 민주주의 · 폐지주의 · 평등주의 · 초월주의 | |
1934년 이후 | 자유지상주의 · 재정보수주의 · 진보주의 · 현대자유주의 | ||
연관 개념 | 건국의 아버지들 · 개인주의 · 도금 시대· 미국 혁명 · 반연방주의(주의 권리) · 법 앞의 평등 · 서프러제트 · 자결권 · 자연권 · 자유국제주의 · 자유민주주의 · 자코뱅주의 · 작은 정부 · 지방자치 · 진보 시대 · 종교의 자유 · 친프랑스 · 표현의 자유 | ||
정당, 계파 | 국민민주당 · 공화당*(급진파) · 공화파** · 민주공화당 · 민주당*(잭슨 민주주의) · 반행정당 · 버번 민주당 · 자유공화당 · 진보당(1912년 · 1924년) | ||
인물 | W. E. B. 듀보이스 · 랠프 월도 에머슨 · 로버트 M. 라폴레트 · 벤저민 프랭클린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앤드루 잭슨 · 우드로 윌슨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보라 · 찰스 섬너 · 토머스 제퍼슨 · 프레드릭 더글러스 · 하이럼 존슨 · 해리엇 터브먼 · 헨리 데이비드 소로 | ||
▼ 현대 미국의 자유주의 | |||
미국 정치 관련 문서 (사회주의 · 현대자유주의(←1934년 이전) · 자유지상주의 · 보수주의(대안 우파)) * 진보 시대에는 주류, 그 외 시대에는 당 내 계파 | }}}}}}}}} |
[1] 대통령 도서관 및 박물관.[2] 그 유명한 엘리너 루스벨트의 친정아버지다. 엘리너는 어릴적 부모를 잃고 큰아버지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고.[3] J.D.(법무박사)학위는 1960년대 이후 법학대학원에서 생긴 학위라서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컬럼비아 로스쿨에서 2008년에 수여하였다.[4] 미국-스페인 전쟁 중이었던 1898년에 해당 계급으로 특별임관 되었으며 귀국 후 예편하였다.[5] 네덜란드계 개혁교회 교단이다.[6] 원래 2선까지 지낼 때까지 공화당이었지만 3선을 시도할 때 잠깐 진보당 소속이었다. 이후 대선 낙선 이후인 1917년에 복당하였다.[7] 1903년 제작[8] 실제 연설문의 가운데 부분이 없는데 녹음되지 못했는지 연설을 생략했는지 알 수 없다.[9] 당연히 진짜 친구들은 아니고 연설을 듣는 지지자들을 부르는 호칭이다. 말투도 대부분의 말투에서 동사원형을 제외하면 비축약형과 과거분사 앞에 have/has를 붙이는 등 영어 기준으로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다.[10] 인민, 또는 국민으로 번역할 수 있다.[11] 그는 이 말을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아프리카 속담'이라고 소개했으며, 루스벨트의 외교 정책은 물론 그의 개인적 인품도 잘 보여주는 말로 특히나 'Big stick'은 거의 그를 상징하는 키워드가 되었다.[12] 위 영상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고 여린 편인데, 이 문구를 들먹이며 수긍하는 댓글들이 많다.[13] 취임 당시 만 42세 11개월. 역대 최연소로 당선된 미국 대통령은 만 43세 6개월에 취임한 존 F. 케네디이며, 루스벨트의 첫 취임은 전임 대통령인 매킨리의 암살로 인한 사망으로 인한 승계였기 때문에 선거를 통한 취임은 1905년에 이뤄졌다.[14] 대한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진 1905년 러·일 간의 포츠머스 조약을 중재한 대가이다.[15] 미국 영어 발음은 /ˈroʊz(ə)vɛlt, -vəlt/(로저벨트·로저벌트 등)에 가까우나, 관용을 존중한 '*루스벨트'가 규정 용례로 제시돼 있다(별표가 관용 표기를 나타냄). 루즈벨트라고 표기되기도 하는데, 이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도 마찬가지이다.[16] 명성황후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제쳐두고라도 당시 현 황제(고종)의 황후이었던 사람의 무덤가에서 예를 갖춰야 하는 것이 상식인데 능의 조형물에 올라타 사진을 찍은 것은 정말 무례한 행동이 맞다.[17] 네이버 웹툰 조선왕조실톡에서도 이 에피소드가 실려있다.[18] 이 문서에 소개된 아버지의 풀네임이 시어도어 루스벨트 2세(주니어)이니 그 아들은 3세. 덤으로 미국 대통령 중에도 풀네임이 주니어 혹은 ○세인 대통령들이 은근 있는 편이다.[19] 모하메드 모사데크 항목에 나와있는 당시 CIA 요원으로써 이란의 석유산업 국유화를 막기 위해 모사데크 정권을 전복시킨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다.[20] 6대조가 같은 인물이다.[21] 단적으로 같은 시대 인물인 고종과 명성황후가 12촌간이었다. 조선은 친가와는 달리 외가와의 근친에는 다소 무심했다. 친가와의 근친에 엄격한 이유는 친가는 호적상 촌수가 꼬이기 때문이다. 12촌이면 할아버지와 손자만큼 나이차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시어도어와 프랭클린은 23살 차이다. 그러나 가문 내 교류가 계속되었다면 꽤 가깝게 지내게 될 수도 있는 촌수다. 사실 시어도어와 프랭클린의 아버지끼리는 1831년생과 1828년생으로 10촌 형제지간임에도 촌수에 비해 나이차가 많지 않았지만 프랭클린의 아버지가 프랭클린을 너무 늦게 가지는 바람에 그 정도로 나이차가 난 것. 프랭클린의 이복형은 1854년생으로 12촌 형제인 시어도어와 촌수처럼 나이가 비슷하다.[22] 엘리너의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사실상 엘리너를 키운 것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었다. 시어도어는 엘리너에게는 삼촌(큰아버지)이 된다.[23] 영어권에서 매우 아끼는 사람에게 쓰는 관용 표현이다.[24] 동아시아에서 중국 대륙 진출이 가지는 상징성은 단순히 영토 확장의 의미가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중화사상이 남아있던 시대였기에,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있어서 대륙진출은 동아시아 문명 전체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당연히 일본은 서구 열강의 의도와 달리 중국 대신 러시아를 선택할 리가 없었다.[25] 이 둘을 제외하면 그로버 클리블랜드와 도널드 트럼프가 있다.[26] 재선 대통령인 율리시스 S. 그랜트도 3선 출마 의지는 있었으나 결국 출마를 하진 않았다. 사실 테디도 처음은 선거가 아닌 전직 대통령 매킨리의 사망에 의한 승계였으니 정석적인 3선은 아니다. 물론 부통령으로 출마하여 당선되기는 했었다. 4선도 준비는 했다만 상기했듯 출마 전에 사망했다.[27] 정치권 진보주의자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미국 내에선 충분히 급진적이라 평가받는 워런, 샌더스보다 더 급진적인 놈 촘스키 같은 극좌파 성향의 경우엔 외려 부정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28] 샌더스와 정치적 연계성이 짙은 버몬트 진보당은 계보를 타고 올라가면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진보당(불 무스당)에 뿌리를 두고 있고 실제 버몬트 진보당의 상징도 불 무스일 정도로 테디는 미국의 정통적 진보주의의 상징이다.[29] 대체로 기존의 미디어들은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공화당 대통령들은 민주당 대통령들보다 대부분 더 낮은 순위에 랭크된다. 그러나 시어도어 루스벨트, 에이브러햄 링컨의 경우 공화당 대통령들임에도 불구하고 역대 최고의 대통령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이들이 대통령을 하던 시절에는 공화당은 전형적인 보수정당이 아니었고 이들도 따라서 상당히 지금 민주당에 가까운 성향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링컨은 노예제를 철폐하는 매우 리버럴한 정책을 폈고 테디또한 외교적 측면에서 제국주의적인 성향을 보였을 뿐 사실상 현 민주당계 정당의 주류 이념인 사회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통치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진짜로 보수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대통령 중에서 가장 높은 평을 받는 대통령은 로널드 레이건인데, 그는 인기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높은 축이지만 미디어의 평가로는 보통 중간 정도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30] 이 대학은 1982년 이후 자주 미국의 정치학자들이나 역사가, 정치인 등을 모아서 대통령 업적평가를 한다.[31] 다만 당시엔 시어도어 대신 우드로 윌슨이 들어갈 뻔도 했다.[32] “My father always wanted to be the corpse at every funeral, the bride at every wedding and the baby at every christening.”출처.[33] 여담으로 이는 문명 6의 미국 종특으로 반영되어 있다.[34] "형편없는 실력에, 비천한 환경 속에 놓여서는 강자에게 침묵하고 약자에게 비열하게 굴었다. 노예제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그 무엇을 요구하더라도 그들에게 맞출 수 있도록 일을 준비하였다."[35] 당시 미 동부 엘리트 출신인 백인 특유의 오만함과 인종적 편견.[36] 물론 당연하게도 일본인보다는 같은 코카서스 인종인 튀르키예인이 유전적으로 미국 백인에 훨씬 가깝다.[37] 19세기에 급격히 세력이 위축되었지만 그래도 열강의 말석이었던 오스만 제국을 "같은 급"으로 쳐주지도 않고 폄하하는 것은 구미권에 만연했다. 크림 전쟁 당시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오스만 제국을 유럽의 환자로 폄하했다.[38] 요네가와 번의 9대 번주로 당시 요네가와 번은 재정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이었는데 요잔은 15년간 번주로 있으면서 각종 정책을 통해 요네가와 번이 진 빚을 모두 청산했다. 심지어 그의 통치 말엽에 텐메이 대기근이 시작되었는데 요네가와 번은 이를 피해갔다.[39]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인종적인 편견이나 관련 악담을 많이 한 편이다. 러시아인에 대해서도 "흑인, 황인, 백인을 통틀어서 제일 진실하지 못하고, 불성실하고 거만한-줄여서 말하면 절대 믿으면 안되는-사람들이 러시아 사람이다(No human beings, black, yellow or white, could be quite as untruthful, as insincere, as arrogant — in short, as untrustworthy in every way — as the Russians)"라고 혹평하기도 했다.[40] 물론 직접적 조약 참여자는 후임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지만, 밀약이 맺어질 당시 대통령은 루스벨트였고, 태프트는 엄연히 루스벨트의 특사 자격으로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당연히 루스벨트 본인도 이 밀약에서 본인의 의중을 반영하지 않았을 수가 없다.[41] 19세기 말 조선과 미국의 수교조약에 "수교국 중 한쪽이 위험에 처할 경우, 다른 한쪽이 우호적 중재에 나선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당시 조선은 이를 미국의 준동맹 공약으로 여겨 기대를 품었지만, 미국은 이를 형식적인 우호 표시로만 여겨 별 신경을 안 썼다.[42] 당시 하와이 왕국에서는 일본에 서신을 보내 자신들을 병합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다. 물론 이제 막 메이지 유신을 한 일본에 그럴 만한 여력이 있을 리 없었거니와 설령 일본이 하와이에 탐을 내더라도 미국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43] 사실 이는 러일전쟁이 끝난 이유가 '일본의 압승' 이 아닌 피의 일요일 사건이라는 러시아 내부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당시 러일전쟁에만 7년치 재정을 투입하고 있었으며, 이것도 모자라서 영국과 미국에게 채권을 판매하여 간신히 전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러시아는 발트함대가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에게 박살이 나는 등 열강으로써의 체면을 구기기는 했으나,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재정적인 문제는 일본에 비해서 훨씬 여유로웠다. 그러다가 러시아에서는 피의 일요일 사건을 진압해야 하고, 일본에서는 재정문제로 인해 전쟁 수행능력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러일전쟁을 마치고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협상 분위기도 러시아가 '이럴 거면 그냥 전쟁 계속 하자' 는 식으로 베짱을 부리는 경우도 있었고, 일본 역시 미국의 중재가 있었다고는 하나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당시와는 달리 이것저것 마음껏 뜯어내지도 못했으며, 이는 일본 내부에서 반미 감정 폭발의 원인이 되었다.[44] 미국의 사학자 앨프리드 휘트니 그리즈월드의 미극동정책사 131페이지 참고.[45] 이것은 2차대전기 일본과 같이 추축국 그룹을 형성했던 독일의 히틀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인은 말귀를 잘 알아들어 써먹기 좋은 동양의 원숭이 정도가 그의 인식이었으며, 그의 저서 나의 투쟁에 등장하는 일본인 비하 대목은 그 시기 일본에 번역 소개될 때 통편집돼 잘려나갔고, 독일이라면 열광하던 일본의 신세대는 그런 것을 모르고 군인과 외교관이 되었다.[46] 이토 히로부미 내각에서 농무상과 법무상을 지냈다.[47]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전임 매킨리 암살을 사주했다는 음모론을 믿는 자였다.[48] 해당 사진은 루스벨트의 사진중 가장 유명한 것이고 실제로 아는 사람들도 많지만, 하버드 도서관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컬렉션 소속 큐레이터 헤더 콜에 따르면, 합성된 사진이다. 1912년 대통령 경선때, 뉴욕 트리뷴에 각 후보가 당을 대표하는 동물을 타는 모습으로 올릴 목적으로 Underwood & Underwood 사진 회사에 의해 합성된 것. 출처 (사실 그냥 봐도 무스와 루스벨트의 사진 해당도가 차이난다.)[49]
사진이 진짜였다면 코끼리 타고 있는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왠지 더 대단해보인다. 오른쪽은 우드로 윌슨.[50] 정확하게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좋구만!"이지만 한국에서는 저 표현으로 쓰인다.[51] 참고로 독수리가 미국의 상징이 된 것은 다름아니라 로마제국의 문장이 독수리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독수리를 문장이나 상징동물로 써먹고 있으며 미국 역시 독립전쟁 이후부터 줄곧 잘 써먹었다. 다만 회색곰 역시 루스벨트의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미국의 여러 주, 대표적으로 캘리포니아 등에서 종종 마스코트로 써먹고 있긴 하다.[52] 앤더슨이라는 사람의 여자친구가 남편이 훔친 걸 앤더슨에게 알려줬고 앤더슨은 그걸 FBI에 연락하였다.[53] 남부연합이 승리해서 미국이 분단되는 대체역사물.[54] 또한 이 대사 직전에 했던 말 역시 인상적인데 "앞으로 미국의 미래는 유럽이 있는 대서양이 아닌 중국이 있는 태평양에서 좌우될 것"이라는 21세기의 정세를 내다본 듯한 식견을 보여주고 있다. 마침 드라마가 나왔던 2018년부터 미국-중국 패권 경쟁이 본격화되어서 더더욱 와닿기도 했고.[55] 이 당시 행적만 보자면 어쨌든 미화된 것은 아니다. 실제로 루스벨트는 경찰 내부 개혁파로 활동하면서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A] 대통령 후보는 윌리엄 매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