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13:31:35

시안 사건

시안 사변에서 넘어옴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15%"
{{{#!folding [ 정치 · 군사 ]
{{{#!wiki style="margin: -6px -1px"
상징 국기 · 국장 · 국가 · 국기가
정치·행정 정치 전반 · 오권분립 · 입법원 · 행정원(조직) · 사법원 · 헌법(중화민국 임시약법 ·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 · 정당(범람연맹 · 범록연맹) · 총통(총통부 · 대총통선거법 · 수정대총통선거법 · 총통 전용기) · 행정구역( · 미수복지구) · 행정조직 · 정부총통선거 · 총선 · 지방선거 · 국민대회
국가원수 쑨원 · 위안스카이 · 쉬스창 · 차오쿤 · 돤치루이 · 왕징웨이 · 탄옌카이 · 장제스 · 린썬 · 옌자간 · 장징궈 · 리덩후이 · 천수이볜 · 마잉주 · 차이잉원 · 라이칭더
국가원수(명단) · 총통(명단)
기타 정치인 옌시산 · 성스차이 · 우페이푸 · 리위안훙 · 장쭤린 · 후웨이더 · 옌후이칭 · 두시구이 · 구웨이쥔 · 펑위샹 · 마부팡 · 마훙빈 · 위유런 · 탕성즈 · 마훙쿠이 · 리쭝런 · 바이충시 · 룽윈 · 장쉐량 · 황싱 · 한궈위 · 장치천 · 주리룬 · 허우유이 · 쑹추위 · 커원저 · 쑤전창 · 셰창팅 · 천젠런 · 샤오메이친
부총통 · 행정원장 · 입법원장 · 감찰원장 · 대성지성선사봉사관
외교 외교 전반 · 여권 · 양안관계(하나의 중국 · 대만 해협 위기 · 92공식 · 양안통일 · 화독 · 대독) · 중화권 · 한국-대만 관계 · 대만-일본 관계 · 미국-대만 관계(타이완 관계법 · 타이완 동맹 보호법 · 대만 보증법 · 2022년 낸시 펠로시 대만 방문 및 중국 군사훈련 사태) · 한국-대만-일본 관계(자코타 삼각지대) · 재외공관
감정 친화 · 친대 · 반대 · 중화민국빠 · 대만빠
사법 · 치안 사법제도 · 경찰 · 국가안전국 · 소방 · 사형제도
군사 전반 국방부(역정서) · 대만군(육군 · 해군 · 공군 · 국민혁명군) · 계급 · 군복 · 보병장비 · 기갑차량 · 군함 · 항공병기 · 병역법 · 체대역 · 성공령 · 핵개발 · 군벌
}}}}}}}}}
[ 역사 ]
||<table width=100%><table bgcolor=#fff,#1f2023><table color=#373a3c,#ddd><bgcolor=#fe0000><width=15%> 역사 ||역사 전반(민국사 · 대만사) · 대만의 민주화 운동 · 등용제도 · 세금 제도 · 연호 · 역대 국명 · 군벌 · 대외 전쟁 및 분쟁 ||
시대 역사 전반 · 삼황오제 · · · (동주 · 서주 · 춘추시대 · 전국시대) · (초한쟁패기) · (전한 · · 후한) · 삼국시대 · 서진 · 오호십육국시대 · 남북조시대 · · (무주 · 호연) · 오대십국시대 · (북송 · 남송) · · · 서하 · · (남명 · · · 동녕국) · (태평천국) · 일치시기 · 만주국 · 중화민국(임시정부 · 북양정부 · 국민정부 · 호법정부 · 우한정부 · 임시정부(괴뢰) · 유신정부 · 왕징웨이 정권 · 국부천대 · 대만)
관직 한나라의 공경 · 삼국지 관직 · 외명부 · 환관조직 · 후궁제도 · 연성공
사서 흠정이십사사(사기 · 한서 · 후한서 · 삼국지 · 진서(晉書) · 송서 · 남제서 · 양서 · 진서(陳書) · 위서 · 북제서 · 주서 · 수서 · 남사 · 북사 · 구당서 · 신당서 · 구오대사 · 신오대사 · 송사 · 요사 · 금사 · 원사 · 명사) · 오월춘추 · 여씨춘추 · 월절서 · 국어 · 전국책 · 열녀전 · 위서 · 위략 · 화양국지 · 후한기 · 양기 · 자치통감 · 동관한기 · 건강실록 · 정관정요 · 역대명화기 · 신원사 · 원조비사 · 만주실록 · 청사고 · 십국춘추 · 십육국춘추 · 사고전서
사건 신해혁명(계축전쟁 · 호국전쟁) · 선후대차관 사건 · 중화민국 국회 해산 · 홍헌제제 · 부원지쟁 · 장훈복벽 · 제1차 호법운동 · 호법전쟁 · 5.4 운동 · 하남독군 교체 파동 · 안직전쟁 · 제2차 호법운동 · 영풍함 사건 · 외몽골 출병 · 직봉전쟁(1차 · 2차) · 국민혁명(1차 · 2차) · 탕산회의 · 동북역치 · 편견회의 · 호남 사건 · 반장전쟁(제1차 장계전쟁 · 제1차 장풍전쟁 · 중동로 사건 · 봉소전쟁 · 제2차 장계전쟁 · 제2차 장풍전쟁 · 장당전쟁 · 중원대전) · 초공작전 · 중국-티베트 전쟁 · 신강 침공 · 중일전쟁(만주사변 · 열하사변 · 시안 사건 · 국공합작) · 국공내전 · 국부천대 · 제1차 대만 해협 위기 · 제2차 대만 해협 위기 · 국광 작전 · 대만 계엄령 · 2.28 사건 · 중화문명부흥운동 · 중리 사건 · 메이리다오 사건 · 제3차 대만 해협 위기 · 대만 여권운동가 피살 사건 · 천수이볜 암살 미수 사건 · 해바라기 운동 · TWICE 쯔위 청천백일만지홍기 논란 · 8.15 대만 블랙 아웃
[ 사회 · 경제 ]
||<table width=100%><table bgcolor=#fff,#1f2023><table color=#373a3c,#ddd><bgcolor=#fe0000><width=15%> 경제 ||경제 전반 · 재정부 · 경제부 · 중화민국중앙은행 · 신대만 달러 · 대만증권거래소 · 타이베이거래소 · 기업(메인보드 제조사) · 이동통신사 · 아시아의 네 마리 용 · ECFA ||
교육 교육부 · 대학 목록 · 재대복교
교통 교통 전반 · 대만의 철도 환경 · 교통부 · 중화민국국도(중산고속공로 · 포모사고속공로) · 타이완 성도 · 공항 목록 · 항공사(중화항공 · 에바항공 · 스타럭스항공) · 타이완철로유한회사(THSR · 쯔창하오 · 구간차) · 대만의 시외버스 · 첩운(타이베이 첩운 · 타오위안 첩운 · 신베이 첩운 · 타이중 첩운 · 가오슝 첩운) · 이지카드 · 아이패스 · 아이캐시
민족 한족 · 본성인(객가) · 외성인 · 대만 원주민(아미족 · 아타얄족 · 따오족) · 인도네시아계 대만인 · 일본계 대만인 · 한국계 대만인
화교 화교(쿨리) · 차이나타운(인천 차이나타운) · 중국계 한국인(재한 화교 · 화교협회) · 중국계 미국인 · 중국계 러시아인(둥간족) · 중국계 브라질인 · 중국계 필리핀인(상글레이) ·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 중국계 베트남인 · 중국계 싱가포르인 · 중국계 태국인 · 중국계 호주인 · 중국계 일본인 · 중국계 캐나다인 · 대만계 한국인 · 대만계 미국인 · 대만계 일본인 · 대만계 캐나다인
[ 문화 ]
||<table width=100%><table bgcolor=#fff,#1f2023><table color=#373a3c,#ddd><colbgcolor=#fe0000><width=15%> 문화 전반 ||문화 전반 · 영화(금마장) · 드라마 · TV방송(CTV · CTS · TTV) · 라디오 방송 · 스포츠 · 중국시보 · 빈과일보 · 미술 · 파룬궁 · 등려군 · 거류증 · 중화 타이베이 ||
요리 요리 전반(대만 요리) · 지역별 요리 · 산둥 요리 · 쓰촨 요리 · 장쑤 요리 · 저장 요리 · 후난 요리 · 광둥 요리 · 안후이 요리 · 푸젠 요리 · 베이징 요리 · 상하이 요리 · 후베이 요리 · 윈난 요리 · 만주 요리 · 청진 요리 · 한국식(종류) · 미국식(종류) · 일본식(종류) · 러시아식 · 중국술 · 대만 술(백주 · 황주 · 맥주 · 금문고량주) · · 팔진 · 만한전석
전통문화 전통악기 · 경극(변검) · 잡극(포대희) · 모란정환혼기 · 샹치 · 바둑 · 마작(국표마작 · 광동마작 · 사천마작 · 홍콩대만마작 · 홍콩마작) · 만만디 · 시누아즈리 · 한푸(여성 한푸) · 치파오 · 변발 · 인민복 · 전족 · 회회력 · 시헌력 · 한시 · 무협물(중국사대기서) · 토루 · 사합원 · 패방 · 얼후 · 고쟁 · 비파 · 싼시엔 · 쓰후 · 싼후
현대문화 만화(팬시 프론티어) · 민국기년 · 정가(傷感情歌)
종교 · 신화 삼교 · 대승 불교(선종 · 정토교 · 시왕) · 도교(종파 · 상제 · 서왕모 · 구천현녀 · 일관도 · 육갑비축 · 도술 · 태극패 · 연단술) · 유교(변천사) · 백련교 · 중국 신화 · 하백 · 관우(관왕묘) · 마조 · 산해경 · 삼황오제(복희 · 신농 · 황제 · 소호 · 전욱 · 제곡 · 제지 · 제요 · 제순) · 헌원검 · 누조 · 창힐 · 치우 · 환상종(사신 · 사령 · 오룡 · 사흉) · 동방번개
언어 중국티베트어족 · 중국어(중화민국 국어) · 관화 · 민어(대만어) · 객가어 · 오어 · 월어 · 상어 · 민어 · 객가어 · 둥간어 · 기타 방언 · 한문 · 대만 제어 · 백화문 · 한자(정체자 · 방언자 · 중문대사전) · 주음부호 · 병음(우정식 병음 · 웨이드-자일스 표기법 · 국어라마자 · 통용병음 · 국어 주음부호 제2식 · 대라병음 · 한어병음 · 팔라디 표기법 · 객가어병음방안 · 월병 · 예일식 광동어표기법) · 중어중문학과 · 제2외국어(교과)/중국어 · TOCFL · 거란 문자 · 여진 문자 · 서하 문자
관광 관광 전반 · 국립고궁박물원 · 국부기념관 · 대만의 성 · 중정기념당 · 충렬사 · 원산대반점 · 예류 · 진과스 · 핑시선 · 우라이 · 타이베이 101 · 가오슝 85 타워 · 지우펀 · 샹산 · 펑후 · 진먼
전시장 타이베이 세계무역센터 · 난강전람관 · 가오슝전람관
}}} ||
西安事件
Xi'an Incident
왼쪽부터 장학량(장쉐량)과 양호성(양후청)
당시 사건을 보도하는 영국 언론사 브리티시 파테의 뉴스.
1. 개요2. 배경
2.1. 만주사변장쉐량의 몰락2.2. 마오쩌둥의 동정항일의 실패2.3. 공산당의 항일구국 선전2.4. 장쉐량과 공산당의 합작
3. 전개
3.1. 시안으로 온 장제스3.2. 장제스 억류3.3. 장쉐량의 8개 항목 요구통전3.4. 외부의 반응3.5. 협상 진행3.6. 저우언라이의 도착, 장제스의 석방
4. 이후5. 참고문헌6. 관련문서

1. 개요

1936년 12월 12일, 중화민국 옌안에 있던 중국공산당의 최후 잔당을 토벌하려는 초공작전을 지휘하고 있던 장쉐량·양후청이, 장쉐량 군의 본부인 시안을 방문 중이던 중국국민당 영수 장제스를 사로잡아서 국공합작을 요구하여 2차 국공합작의 계기가 된 사건. 서안 사건, 시안 사건, 시안 사태 등의 표현 등이 혼용된다.

2. 배경

파일:시안 사건 당시 중국 세력도.png
시안 사건 당시 중국 군벌 세력도
파일:서안사건 장쉐량.jpg
사건의 주역인 장쉐량과 휘하 장교들

2.1. 만주사변장쉐량의 몰락

장쉐량봉천군벌의 수장인 장쭤린의 아들로서, 거의 독립왕국이었던 만주와 20만 병력의 동북군을 물려받은 대군벌이었다. 봉천군벌은 1928년까지만 하더라도 국민당 북벌군을 이끄는 장제스와 첨예하게 대립했지만, 봉천군벌의 수장이자 중화민국 북양정부 육해공 대원수인 장쭤린이 관동군의 음모로 사망하고 장제스의 북벌군이 베이징을 점령, 만주를 위협하게 되자 일본과 협력하여 북벌군에 맞서거나, 장제스와 협력하여 내셔널리즘 열풍에 굴복하거나 두 가지 선택 중 하나를 해야 했다.

일본은 장쉐량을 강하게 압박하여 만주를 중국으로부터 분리하려 했으나 장쉐량이 장제스와 손잡는 것을 선택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형식상 동북군이 국민당 산하에 들어가고 장제스가 장쉐량을 국민당 동북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방식이었지만, 어쨌거나 이 때도 봉천군벌의 독립성은 그대로 인정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3년 후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동북군을 분쇄하고 만주 전역을 지배하게 된다. 장쉐량이 이끄는 20만 동북군이[1] 1~2만에 불과한 관동군에 참패한 것이다. 이는 일본군에게 전면전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던 장쉐량의 전략적 패착이었다.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장쉐량은 반격을 시도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지원을 요청하지만 장제스는 군사력이 후달려 만주를 군사적으로 되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만주를 외교적으로 되찾기 위해 국제연맹에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2] 왕징웨이, 후한민, 쑨커 등을 초청하여 초계파적인 국민당 회의를 열어 만주사변에 대응하고자 했는데, 회의장은 금세 만주를 잃은 것에 대한 책임을 성토하는 자리로 바뀌었고 장제스와 장쉐량이 공식 사퇴하는 일이 벌어졌으나 후임으로 등장한 쑨커, 왕징웨이 연립내각은 30일을 버티지 못한채 장제스에게 복귀를 요청했다.

사실 혼란스러운 국민당을 힘으로나마 누를 수 있던 것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육성한 국민혁명군, 상하이의 자본가들과 4대 가문이 제공하는 권위와 자금, 청방과 황푸군관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인맥을 가지고 있던 장제스만이 가능했다. 장제스는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릴 때마다 "그래 내가 부덕하니 난 사퇴, 너희들끼리 잘해보셈."이라면서 사퇴하였고 그러면 후임자들은 자신이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좌절하여 gg치고 장제스에게 돌아올 것을 간청하기 일쑤였다.[3]

결국 장쉐량은 1931년 12월 19일에 만주에서 철수하여 남은 영지인 러허에 틀어박히지만 일본은 1933년 열하사변을 일으켜서 러허도 점령해버렸다. 열하성 정부주석 탕위린은 태업을 일삼다가 개인 재산만 챙겨 적전도주했고 결국 열하도 싱겁게 일본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이에 장쉐량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 후 패잔병 10만 명을 이끌고 산해관 안으로 들어와서 산시성 근방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곳은 원래 다른 군벌 양후청이 약 4만명의 서북군을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다.

2.2. 마오쩌둥의 동정항일의 실패

한편 중국공산당은 중국 곳곳에서 해방구를 설치,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선포하고 장제스에 맞섰고 장제스의 무력 진압 시도인 초공작전에 맞서 수차례 승리를 거두면서 의기양양했으나 장제스의 대응 전술 발전, 국민혁명군의 현대화, 공산당 내부의 분열과 마오쩌둥 실각 등이 겹치면서 4차 초공작전부터 중심인 장시 소비에트를 제외한 여러 소비에트가 분쇄되었으며 가장 결정적인 공세였던 제5차 초공작전에서 장시 소비에트와 남아있던 모든 소비에트들이 붕괴되면서 기나긴 대장정의 길에 올라야 했다. 이 과정에서 마오쩌둥이 다시 권력을 잡았으며 마오쩌둥의 위협적인 경쟁자인 장궈타오 등은 몰락했다.

2만 5천리의 대서천 끝에 마오쩌둥은 1935년 11월에 수천으로 줄어든 병력을 이끌고 섬서성에 도착했다. 마오쩌둥은 공산당 중앙대표 주리치와 곽홍도를 좌경 기회주의자로 몰아 숙청하고 공산당 내부 우파로 몰려 숙청 위기였던 유지단, 고강 등을 석방하여 산시성의 홍군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당시 홍군은 물자 부족과 장제스의 위협에 시달리며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에 마오쩌둥은 당시 반장파들이라면 궁지에 몰렸을 때 모두 외쳤던 항일 카드를 선택, 1936년 2월 21일 동정항일을 선포하고 옌시산이 지배하는 염계군벌의 영지인 산시성을 침공하는 것을 돌파구로 선택했다.

2월 22일 공산군은 중양, 석루현성, 이석을 각기 공격하고 습 지역에 이르렀다. 당시 국민정부는 과거 반봉사건궈쑹링의 외교부장을 맡았었던 인루겅이 일본의 지원을 등에 업고 일으킨 기동사변에 맞서고 있었으므로 산시를 공격하기로 한 마오쩌둥의 결정은 도리어 일본을 돕는 일이었지만 국민당이 아니라 자신들이 항일을 한다는 공산당의 선전은 훗날 중일전쟁 때도 그랬듯이 잘 먹혔다(...) 한편 타이위안 수정주임 옌시산은 즉각 반격, 서북 소비 부사령관 장쉐량과 산시 수정주임 양후청과 합세하여 3월 8일 효의서교에서 3일간 교전하여 홍군 3천명을 섬멸하고 3월 22일 유지단의 부대를 기가원에서 야습해 전멸시키고 유지단을 죽였는데 이에 대해 마오쩌둥이 유지단을 일부러 죽였다는 음모론이 나오기도 했다. 3월 27일 옌시산은 장제스에게 승전보를 올렸다.
"우리 군은 24일 공산군의 요충을 일제히 공략하였다. 포로의 말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각 요충을 지킬 수 없다고 보고 홍군 5백여명을 이끌고 서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도중에 우리 군이 길목을 저지하여 3백여명의 사망자를 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마오쩌둥과 그의 처 허쯔전, 정치주임 양상쿤은 간신히 도망쳤다."

2.3. 공산당의 항일구국 선전

홍군은 산서성 내부에서 약탈을 하며 버티려 했지만 옌시산의 공세에 결국 5월 3일 섬서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군사력으로 국민정부와 정면대결이 완전히 불가능함을 인식한 마오쩌둥은 자신과 주더의 통전으로 5.5 통전이란 것을 보내 장제스에게 1개월 내에 정전화의를 행하여 항일 통일전선을 결성할 것을 청했다. 이는 중국 각지의 항일구국여론을 자신들의 편으로 포섭하고 시간을 벌려는 술책이었다. 이에 대해 장제스는 2차 양광사변 대책을 논하기 위해 7월 10일 개최된 국민당 제5기 2중전회에서 7월 13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앙이 외교에 대해 품고 있는 최저한도의 선은 영토주권을 완전하게 보호한다는 것이다. (...) 분명히 말해 만일 어느 나라인가 우리의 영토주권을 침해하는 때야말로 우리의 최후의 희생을 치를 때인 것이다."

즉, 아직까진 일본에게 영토주권이 침해당하는 수준은 아니므로 공산당이 주장하는 일본과의 전면전 요구를 거부하고 초공작전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이에 공산당은 8월 25일 반장, 반국민당 슬로건을 철회하고 <중국국민당에게 보내는 서한>을 발표했다.
"장 위원장의 보고는 귀당 5대전회의 정책에 새로운 해석을 첨가시켰다. 즉, 만일 누군가가 우리의 영토주권을 침해한다면 결코 용인하지 않겠으며 우리의 최후의 희생을 치르겠다고 토로하였다. 장위원장의 이러한 해석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중국 인민은 어떠한 때가 비로소 '평화 포기의 때'라 할 수 있는지, 또 어떠한 때가 '희생의 최후의 관두'인지를 이제까지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장 위원장의 이러한 해석이 과거에 비해 약간 진보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는 이러한 전보를 진심으로 환영한다."

이른바 반장항일에서 핍장항일로의 정책 전환이었다. 그간 장제스를 부르던 호칭도 장제스에서 5.5통전에서 장제스 씨로, 여기선 장 위원장으로 승격하고 국민당도 '귀당'이라 부르는 등 공산당은 명백히 장제스에 대한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여기에 저우언라이코민테른 대표 반한년을 난징으로 보내 국민당과 접촉했다. 천리푸는 공산당과의 화해에 4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1. 삼민주의를 순봉한다.
2. 장 위원장의 지휘에 복종한다.
3. 홍군을 해산하여 국군에 편입한다.
4. 소비에트를 해산하고 지방정부로 개편한다.

하지만 소비에트 해산이나 홍군 해산 등은 공산당으로서 명백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고 이후 공산당은 중국의 중간파를 포섭하여 국민정부를 흔들려는 방책에 집중했다.

2.4. 장쉐량과 공산당의 합작

이러한 공산당의 선전에 크게 동요한 것은 장쉐량이었다. 그가 서북초비 부총사령에 임명된지 얼마 안되어 대장정을 마친 홍군이 섬서의 현지 홍군과 합류, 장쉐량의 직계부대인 110사단, 107사단, 109사단을 잇달아 격파했다. 특히 1935년 9월의 감천 전투에서 110사단의 패배는 궤멸적이었으며 사단장 하립중이 전사하고 수천명이 홍군의 포로가 되었다. 110사단과 하립중은 장쉐량이 가장 신뢰하던 병력이었다. 가뜩이나 봉천군벌의 잔여 세력은 고향을 일본에 잃고 반일감정이 극에 달해 있었는데 같은 민족인 공산당과의 싸움에 나서야 한다는 것에, 그리고 거기서 패배했다는 것에 더욱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공산당은 이러한 상황을 놓치지 않고 1936년 1월 저우언라이를 서기로 하는 백군공작위원회를 발족시켜 동북군을 포섭하기 위한 움직임에 착수했다. 백군공작위원회는 동북군 포로들을 원대에 복귀시켜 동북군을 흔들었고 이에 감천에서 포위 해제를 요구하는 데모가 벌어지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양후청은 공산당원 왕병남을 개인 비서로 두는 등 공산당과 크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장쉐량에게 "소공 정지를 장위원장에게 진언해달라"고 장쉐량을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장쉐량은 장제스가 자신의 근거지인 만주와 화북수복에 열의를 보의지 않는 데다가 장제스 직속의 중앙군을 놔둔채 장쉐량군만 소모시키려 하자 장쉐량은 장제스의 본의를 의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장쉐량은 중국인끼리 싸우지 말고, 일본부터 몰아내야 한다고 장제스를 설득하려 했다. 실제 당시 여론 또한 반공보다는 반일에 기울어지고 있었다. 상해에서 국공합작을 촉구하던 일곱 명이 체포되자 전국에선 칠군자(七君子)를 석방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가 연일 이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장제스는 그런 보고를 받으며 "시안은 붉은 도시다!"라며 욕과 저주를 퍼부울 뿐이었고 시안에서 열어진 반일 시위에선 발포 사태가 벌어져 두명의 학생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거기에 좌파 고문들은 공산당과 협력하여 만주를 지켜야 한다는 뜻을 끊임없이 전달했다.

장제스가 대일 항쟁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국부군에 대일 항쟁의 능력이 없었다고 보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의 공세를 막기도 어려운 판에 아시아 최강의 육군과 세계적 수준의 해군을 보유한 일본에 역으로 공세로 나설 수는 없었다. 게다가 장제스가 군사적 선택지를 완전히 포기한 것도 아니고 장기적으로 늦어도 1940년대엔 만주를 군사적으로 수복하기 위하여 장강 삼각주 지역을 대대적으로 공업화하며 군대를 현대화하고 국가를 안정시키고 있었으며 초공작전도 그 일환이었다. 문제는 장제스의 이러한 계획은 어디까지나 장제스나 국민정부 고위층이나 알고 있는 계획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몰랐단 것이다. 즉 사정을 모르는 외부인 눈에는 장제스는 중국이 침략을 당하거나 말거나 신경쓰지 않고 권력을 위해 공산당 토벌에나 앞장서는 매국노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장제스가 대일 항쟁의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것으로 판단한 장쉐량은 공산당과 직접 접촉하기로 결정하고 옌안 교외에서 저우언라이와 2~3시간 정도 회담했다. 저우언라이는 항일을 위해 장제스의 지도를 먼저 인정해야 한다는 장쉐량에 말에 동조하였고 공산당도 다 장제스의 옛 부하로 과거의 관계를 회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역설했다. 이에 장쉐량, 저우언라이는 새로운 국공합작을 다룬 10개 조항에 동의했고 "장공에게 적극 진언하여 실현을 도모하겠다. 서로 식언은 하지 않기로 약속한다."고 확인하고 돌아왔다. 이후 장쉐량은 공산당과 사실상 휴전 상태에 들어갔고 이에 10월 22일 장제스가 시안으로 와서 공산당 토벌을 독려하는 한편 10월 28일에 장쉐량과 얘기했다. "군사가에는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 항복하느냐의 세가지 밖에 없습니다."라는 장쉐량의 말을 들은 장제스는 항복이란 말을 언급한 것 때문에 크게 화를 내며 장쉐량을 꾸짖은 후 뤄양을 거쳐 타이위안에 가서 옌시산과 회담했으나 동북군의 불소공 움직임은 거세질 뿐이었다.

3. 전개

3.1. 시안으로 온 장제스

1936년 12월 2일 장제스는 뤄양에서 장쉐량을 만나 실정을 물었고 이에 장쉐량은 시안의 사태가 급하니 시안을 방문해달라고 청했다. 이에 장제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12월 4일 시안에 와서 화청지에 투숙했다. 이미 시안의 상황은 매우 수상하여, 장제스가 공항에 내리자마자 수백명의 장교들이 서로 장제스에게 소공전에 대한 의견 개진을 청하였다. 장제스는 그들에게 의견이 있다면 상관인 장쉐량을 통해 상신하라고 설득했다. 그리고 동북군의 고급간부들을 모아 초공작전은 이제 성공이라는 최후의 단계를 앞에 두고 있다면서 작전 강화를 지시하고 항일은 시기상조임을 강조했다. 12월 7일에도 장쉐량과 양후청에게 소공 강화를 지시했다. 이후 신해혁명에 참여했던 대공보 주필 장계란이 장제스를 방문하여 장쉐량과 저우언라이가 회담했다는 소문은 공산당의 이간책이며 시안에서 소공정지, 일치항일의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보고했다. 12월 9일 시안에서 구국회외 학생연합회 데모대가 서북초비총부와 섬서성 정부로 몰려들어 시위했다. 시위대는 이어 장위원장에게 직접 청원하겠다고 경찰 저지선을 돌파하고 영해 철로를 따라 화청지로 몰려들었다. 이에 장쉐량이 이들을 설득하여 해산했으나 실은 설득이 아니라 영합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12월 10일 장제스는 장쉐량의 태도를 질책했고 그가 심리적으로 불안정함을 걱정했다. 12월 11일 다수의 군용차가 시안으로 이동해왔고 장쉐량 밑의 정치고문 여천재가 약속없는 면회를 요구해왔다. 그 역시 소공방침에 회의를 표명했고 장제스는 매우 통탄해했다. 장쉐량은 1936년 12월 11일의 회동을 통해 장제스를 마지막으로 설득하려 했지만, 이 것이 수포로 돌아가자 그간 훨씬 적극적이었던 양후청의 종용에 따라 장제스를 억류하기로 결심했다. 사실 이 계획은 사전에 탄로났지만, 장제스는 시안을 떠나길 거부했다. 다이리는 장쉐량이 공산당과 접촉한게 틀림없다면서 그를 즉각 체포할 것을 권유했지만 장제스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장제스는 그날 밤 연회에서 장쉐량, 양후청, 우학충을 연회에 초대했으나 양후청과 우학충은 선약이 있다며 나타나지 않았다. 장제스는 그날 밤의 연회를 마지막 일정으로, 다음날인 12일에 난징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이 때문에 장제스는 잠에 들려다가 시종장을 불러 경비를 강화할 것을 지시할까 고민했으나 이미 밤이 늦었고 자신이 거리낄 것이 없는데 방비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 그러지 않았다.

3.2. 장제스 억류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은 25세의 쑨밍쭈(손명구, 孫銘九) 상교[4] 이하 13명의 군관을 불러 장제스 체포를 지시했다. 장쉐량은 절대 총을 사용하지 않을 것, 만약 장제스가 부상을 입는다면 너희 모두를 총살형에 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손명구 상교는 4개 트럭에 탄 120명의 정예병력을 대동하고 장제스가 머무르고 있던 서안성 화청지를 습격하여 격렬한 총격전을 벌였다.[5] 이 과정에서 장제스의 호위병 대부분이 사살되었다. 새벽 4시 반에 막 일어나 잠옷 차림으로 체조를 하고 있던 장제스는 난데없는 총성에 호위병을 불러 정황을 알아보려 했으나 호위병이 돌아오기도 전에 다시 총성이 들려 다시 사람을 보냈고 더 많은 총성이 들리자 직감적으로 반란임을 알았다. 호위관 축배기와 시문표가 달려와 보고했다.
"반란군이 잇달아 침입하여 이미 제2교를 돌파했습니다. 우리의 응수로 많은 사상자를 내고 반란병은 우리 방위선이 견고함을 알고 현재 퇴각 중에 있습니다."

보고가 끝나자 모 구대장이 보낸 전령이 다시 보고했다.
전령: "반란군은 이미 제2분을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뒷산 보초의 전화에 따르면 그 쪽은 이상이 없으며 반란군도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장제스: "모 구대장은 어디에 있나?"
전령: "구대장은 이미 제2교 부근의 축산에서 부대를 지휘하며 저항하고 있습니다. 위원장께서는 빨리 뒷산으로 피하십시오."
장제스: "반란군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
전령: "가죽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전원 동북군의 장병입니다."

결국 장제스는 옷을 갈아입긴 커녕 틀니조차 챙기지 못하고 호위관 축배기, 시문표, 수행원 장효진을 따라 뒷산으로 달아났다. 비홍교를 지나 동쪽문에 이르렀는데 문이 잠겨있던지라 담장을 넘어 도망가야 했다. 담장은 3미터 높이로 크게 높진 않았으나 담장 너머에 도랑이 있었고 날이 어두워 넘어져 다치고 말았다. 통증 때문에 일어서지 못하는 장제스를 위병들이 부축하여 화청지 온천 뒷편의 산으로 피신시켰다. 이 과정에서 장제스는 수없이 넘어지고 미끄러져 많이 다쳤고 고통이 너무 심해서 부하들이 없었으면 일어날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할 지경이었다. 30분 정도 올라가 정상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장제스는 이미 포위된 상태였고 동행하던 위병들은 모두 총에 맞아 쓰러진 후였다. 장제스는 사방이 겹겹이 포위된 것을 보고 이 사태가 국부적인 반란이 아니라 동북군 전체의 반란임을 알고 도망치길 멈추고 되돌아갈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장제스는 산 중턱에서 넘어져 바위굴에 떨어졌고 극도로 지쳐 있던 장제스는 일어설 수도 없어 동굴에 몸을 숨기고 휴식하였다.

오전 9시가 되어서야 총성이 멎고 동북군 장병들이 산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바위굴 위에 다다른 동북군들이 장제스를 발견하고 사복 입은 자 "위원장이 아니겠는가? 총을 한방 쏘아볼까?"하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에 장제스가 외쳤다.
"나는 장 위원장이다. 무례는 용서치 않겠다. 나를 포로로 삼으려거든 차라리 당장 나를 사살하라. 조그만 모욕도 용서치 않겠다."

당연하지만 동북군은 그러지 않고 허공에 세발의 총을 쏘아 장제스를 발견했다는 신호를 보냈다. 이에 쑨밍쭈가 직접 올라왔다. 장제스는 자신을 맞이한 쑨밍쭈 상교에게 "만약 날 전우라고 생각한다면 날 쏴 죽여라."라고 부탁했지만 쑨밍쭈는 "위원장님은 제 포로이기도 합니다."라면서 당연히 그 부탁을 듣지 않았다. 쑨밍쭈는 장제스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하산할 것을 간청했고 이에 장제스는 시안 시내까지 가기 위해 말 한 필을 청했지만 말이 없었던 고로 쑨밍쭈가 직접 장제스를 업고 산을 내려와 그를 차에 태웠다. 장제스는 화청지 내부에 널브러져 있는 자신의 부하들의 시신을 목도하고 극도로 분노했고 자신을 맞이하는 군악대장교들에게 나에게 경례하지 말라며 분노를 토했다. 장제스는 다시 오전 10시 경에 서북수정공사가 설치된 신성대루의 양후청의 본거지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장제스는 장쉐량을 부를 것을 지시했고 30분 후에 장쉐량이 나타났다. 장쉐량이 정중히 경례하자 장제스가 물었다.
장제스: "오늘 일을 자네는 사전에 알고 있었나?"
장쉐량:" 몰랐습니다."
장제스: "몰랐다면 즉시 날 난징이나 뤄양으로 돌려보내야 마땅하다. 그렇게 하면 사태는 수습할 수 있다."
장쉐량: "사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만 위원장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장제스: "네가 날 위원장이라고 부르는가? 상관이라고 인정한다면 명령에 따라 뤄양으로 돌려보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는 반역자다. 나를 사살하라. 그 밖에는 너에게 할말이 없다."
장쉐량: "만일 위원장이 내 의견을 들어 주신다면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장제스: "너는 도대체 나의 부하인가 적인가? 부하라면 명령에 복종하여 나를 돌려보내라. 적이라면 나를 죽여라. 둘중의 하나다. 그 밖에는 나는 아무 말도 듣지 않겠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국공합작의 대의에 대해 설득하려 했지 격심한 언쟁이 이어질 뿐 진전이 없었고 극도로 분노한 장제스가 선포했다.
"이 세상이 끝없이 넓다 할 망정 네 몸을 의탁할 곳이 있을 줄 아느냐? 너는 살아서는 발 디딜 땅조차 없을 것이고 죽어서는 뼈를 묻을 곳 조차 없을 것이다. 네가 용감한 사나이라면 어서 나를 죽여라. 그렇지 않으면 네 죄를 뉘우치고 즉시 날 석방해라."

장쉐량이 재차 설득을 시도하자 그는 꺼지라고 욕을 퍼부으며 장쉐량을 내쫓았다. 장제스는 좁고 더러운 방에 수감되었는데 그는 장쉐량이 제공한 음식과 담요를 모두 거부했고 좋은 숙소로 이동시켜주겠다는 제의를 장쉐량이 직접 두 번이나 감방 문까지 와서 권했음에도 단호하게 물리쳤다. 장제스는 날 풀어주지 않으면 이곳에서 죽겠다는 의지를 완강하게 드러냈고 장제스를 체포했던 쑨밍쭈 상교가 직접 방에 들어가서 90분이나 설득했음에도 요지부동이었다. 쑨밍쭈는 장제스에게 자신의 권총을 주고 죽이고 싶으면 죽이라고까지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장제스의 태도에 장쉐량은 눈물까지 보였다. 만남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피를 보고 흥분한 양후청의 병사들은 장제스의 호위병들을 대부분 죽이고 장제스의 조카인 헌병대 장교 장샤오셴까지 죽였다. 그리고 시안 시내 안의 장제스의 부하들을 체포한단 구실로 대대적인 약탈을 벌였다. 시안 시내의 은행장이 총에 맞아 죽고 150만 위안 어치의 밀가루를 열차에서 강탈하기도 했다. 란저우 등지에서도 부화뇌동하여 반란이 일어났다. 이들의 난동을 보다 못한 일부 동북군 장교들이 제지에 나서자 이들은 동북군 장교들까지 살해하고 그간 대민마찰을 단속해 온 헌병대 사령부를 습격해 헌병들을 닥치는대로 죽이며 분풀이를 했다. 이때 샤오위안충도 살해당했으며 천청, 웨이리황, 주사오량, 장작빈, 장백리 등 중앙의 고급장교와 고관들이 체포되어 시안 영빈관에 억류되었다.

3.3. 장쉐량의 8개 항목 요구통전

장제스가 감금당했단 소식의 제1보가 도착한 것은 오후가 되어서였다. 장쉐량은 오후 5시에 서북초비총부의 전 직원을 소집하여 그들에게 사태의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초비작전이 싫었다. 바깥의 위험이 절박해 있는 상황 아래, 자국인에게 총을 겨누는 것이 괴로웠다. 나는 몇번이나 장 위원장에게 요청했으나 말주변도 없고 해서 뜻을 다 전하지 못했다. 장 위원장과의 의견의 차이를 해소하는 방법으로서 사직, 구두에 의한 방법, 병력을 움직이는 방법 세가지를 생각하였는데 마침내 3번째 방법을 사용한 이유는, 먼저 상하이의 구국 7영수 등의 체포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애국 미수죄 밖에 없다. 내가 그러한 의견을 장 위원장에게 말했던 바, '그렇게 보이는 것은 전국에 너 뿐이다.'라고 했다. 이어 12월 9일의 학생 데모에 관해 내가 전력을 다해 학생들을 돌려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장 위원장은 오히려 '왜 탄압하지 않느냐'라고 나를 나무랐다. 우리는 장 위원장에게 개인적인 원망은 없으며 장 위원장 개인에게 반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의 주장과 행동방식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장 위원장이 이제까지의 주장을 버리고 의연히 항일공작을 주재한다면 우리는 절대적으로 그를 옹호하며 그에게 복종한다."

장쉐량은 저녁에 난징의 국민정부에 전보를 보냈다. 전보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동북을 빼앗기고 나서 5년 동안 계속해서 굴욕을 당해왔다. 전선의 장병은 피로 얼룩져 싸우고 있는데 후방에서는 외교 당국이 타협을 꾀하고 있다. 나 장쉐량은 이제까지 눈물로 진언하였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마침내 좌시당함을 참지 못하고 장공을 충고하기에 이르렀다. 안전은 보장한다. 반성을 촉구할 뿐이다."

또한 8개 항목을 요구해왔다.
1. 난징 정부를 개편하여 각파의 참가시켜 공동으로 구국의 책임을 진다.
2. 일체의 내전을 정지한다.
3. 상하이에서 체포된 애국지도자[6]를 즉시 석방한다.
4. 전국의 모든 정치범을 석방할 것.
5. 인민의 집사, 결사 등 모든 자유를 보장할 것.
6. 인민의 애국운동을 개방할 것.
7. 손 총리의 유언을 확실히 준수하고 실행할 것.
8. 즉시 구국회의를 소집할 것.

이 통전에는 장쉐량, 양후청 이하 우학충, 하주국, 왕이철 등의 동북군, 섬서군 장교와 시안에 감금된 중앙군 장교 19명이 연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쉐량의 움직임은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장쉐량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스스로도 대단히 당황해했고 난징 정부는 오후 11시에 즉각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와 중앙정치 위원회를 소집, 장쉐량의 모든 직무를 박탈하고 체포, 징벌할 것을 결의했다. 또한 군정부장 허잉친의 지휘 아래 반란군 토벌 또한 결의했다. 여기에 시안 주둔군도 장쉐량의 말을 듣지 않았다. 장쉐량은 장제스의 부하들이 장악하고 있는 시안 공항을 점거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시안 주둔군은 그 명령을 거부했다. 게다가 장제스의 전투기들이 시안 시내로 날아들기 시작하면서 장쉐량은 더더욱 궁지에 몰렸다.

3.4. 외부의 반응

"아무도 시안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시안을 공격할 것입니다. 총사령관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허잉친

장제스가 억류되었다는 소식은 온 중국을, 나아가 전 세계를 흔들었다. 장제스의 아내 쑹메이링은 장제스 납치 소식에 즉각 장제스 뒷자리를 노리고 난리치는 군벌들을 보고 경악했다. 리쭝런은 장제스의 죽음을 감수하더라도 시안을 폭격해 잿더미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허잉친도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쑹메이링은 리쭝런의 주장을 듣고 "죽은 것이 틀림없는게 아니라 죽길 바라는 거겠지." 하고 이를 갈았다. 예외로 옌시산은 일본군의 침략이 목전에 있는 상황에 장제스가 죽으면 답이 없다고 판단하여 장제스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7] 또한 당시 타국에 나가 있던 왕징웨이는 장제스가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권력 회복의 기회임을 깨닫고 빠르게 움직였으나 그가 미처 귀국하기도 전에 장제스가 풀려났다.

소련은 장쉐량이 일본 스파이라고 주장했다. 반대로 일본은 장쉐량이 소련 스파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대사 넬슨 존슨은 장쉐량이 시카고 갱이나 다름없다고 비난했고 미국의 라이프지는 장제스가 비적떼에 납치되었다고 시안 사건을 크게 성토했다.

한편 장쉐량은 즉각 산서의 공산당과 접촉하여 장제스가 억류되었으니 저우언라이를 보내 협상을 하자고 제안했다. 옌안에 장제스 억류의 소식이 들려온 것은 12일 밤으로 많은 공산당원이 인민재판을 외치며 장제스를 죽이자고 했고 마오쩌둥도 처음엔 살장항일(殺蔣抗日)을 외쳤다. 그는 장쉐량, 양후청과 함께 삼위일체의 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국민정부에 맞설 것을 계획했지만 먼저 소련의 지시를 기다리기로 하고 모스크바에 전보를 보냈다. 장쉐량은 공산당에 호응하여 서북초비총부를 해산하고 항일연군 임시서북 군사위원회를 결성한 후 공산당 대표들을 기다렸다. 장쉐량은 14일에 공항에 직접 나와 공산당 대표들을 기다렸으나 저우언라이, 진방헌, 섭검영을 태운 비행기가 착륙에 실패하여 결국 15일에 이들은 말을 타고 시안으로 갔다.

마오쩌둥은 이들에게 장제스를 연행해 오라고 지시했으나 그것을 막은 자가 있었는데,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12월 14일 오후 스탈린은 연장 항일정책을 취하여 10일 이내의 장제스를 석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명령을 받은 저우언라이는 우왕좌왕하는 장쉐량과 양후청을 제치고 사실상 사건 해결의 주역으로 활약하여 장쉐량은 그가 마치 주모자였던 것과 같다고 했다.

조선의 교육가이자 종교인이던 김교신은 장제스를 매우 고평가하던 사람으로 장제스의 감금 소식에 1936년 12월 14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제 하루 동안 서울에 관계없이, 세상에 교섭 없이 신문지와 라디오를 접하지 않고 북한 산록에 지냈더니, 하루 동안에 동양 천지가 뒤집어진 것 같은 대사변이 생긴 줄을 오늘 오후에 신문을 보고야 처음 알았다. 장개석 씨가 서안서 장학량 군에게 감금되었다는 보도에 중국인이 아닌 우리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장(蔣)을 위하여 동정 안할 수 없고, 장(張)에 대하여 증오를 제지할 수 없으며, 중국 4억여 생령의 안정과 평안을 위하여 개탄을 마지못하다. 통신기관이 두절되어 장 씨의 생존 여부도 미확하다 하니 더욱 염려되다.

3.5. 협상 진행

사건 다음날인 13일, 장제스는 다리의 통증이 심해져 누워만 있었다. 그는 식사도 모피 외투도 거부했으며 자리를 옮기라는 어떠한 요구에도 거부했다. 장쉐량은 장제스가 방을 옮기자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자 사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난징으로 돌아갈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옮기자고 하는 것이라고까지 했지만 장제스는 "시안을 떠날 때는 공명정대하고 당당하게 가겠다. 몰래 빠져나가는 것 같은 일은 하지 않겠다. 인격을 지키는 일은 생명을 지키는 일보다 중요하다."라며 거부했다.

장제스 설득에 실패한 장쉐량은 오스트레일리아기자 윌리엄 헨리 도널드에게 도움을 청했다. 도널드는 장제스의 측근이었고 쑹메이링과도 긴밀한 관계였지만 동시에 장쉐량의 마약 중독을 치료해준 인연으로 장쉐량과도 친했다. 도널드는 난징 정부와 장쉐량의 연결을 위해 시안에 와달란 요청을 받았고 동시에 쑹메이링의 부탁도 받았다. 도널드는 쑹메이링의 편지와 장제스의 항일 투지를 증명하기 위한 장제스의 일기를 들고 시안으로 이동했다. 도널드는 12월 14일 오후 5시에 시안에 도착했고 장쉐량은 스코틀랜드인 재정 고문인 지미 엘더를 통역으로 하여 장제스 납치의 대의에 대해 설명했다. 도널드는 그 말을 듣고 쑹메이링의 편지를 전달했다. 쑹메이링의 편지는 총사령관 납치는 국가적인 재난을 불러 일으켜 통일을 방해함으로 빨리 총사령관을 풀어줄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쑹메이링은 이때까지 장쉐량을 더 좋은 자리로 옮겨주면 상황이 해결될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널드는 양후청과도 만나서 납치 사건을 규탄하고 장제스를 석방할 것을 요구했는데 양후청도 장쉐량도 요지부동이었다. 도널드는 성과없는 회동을 끝내고 참담한 몰골의 장제스과 면담했다. 도널드를 본 장제스는 눈물을 흘렸고 도널드는 쑹메이링의 편지를 전달해주었다. 도널드가 장제스에게 쑹메이링이 곧 시안에 직접 올 것이란 말을 전하자 장제스는 경악하여 이 비적들의 소굴에 내 아내가 오게 할 수는 없다고 한참을 울부짖었고 접견자들을 무시한 채 이불을 뒤집어 쓰고 돌아 누워버렸다. 도널드는 아무래도 더 좋은 숙소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고 장제스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그 말에 동의하여 수감된지 60시간만에 동북군 사단장 고배오의 집으로 숙소를 옮겼다. 장제스는 병사들에게 예우를 받으며 도널드의 손을 꼭 붙잡고 난방이 되는 가옥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장제스는 비로소 장쉐량의 8개 항목 통전에 대해 알게 되었고 장쉐량을 매우 매섭게 질책했다. 장쉐량은 장제스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그들을 내치고 대중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요구했고 그가 물러난 다음에 장제스는 도널드에게 이제 다 끝났다고 절규했다. 도널드는 뤄양으로 이동하여 쑹메이링에게 근황을 전해주었다. 쑹메이링은 국민당군의 수뇌부는 장 위원장의 목숨보다는 반공의 대의가 중요하다면서 시안을 공격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14일, 장쉐량은 장제스의 일기를 읽고 총통이 그의 생각보다 애국지사라는 것에 동의하고 자신의 요구 절반을 포기했다. 그는 사건 이후인 1937년 1월에 쓰여진 서안반월기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위원장의 일기와 중요문건들을 모두 보고 위원장의 인격의 고매함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위원장의 혁명에 대한 충성, 구국의 책임을 지고 고심하는 마음은 저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위원장은 부하들에 대해 너무나 과묵하여 일기에 씌어진 10분의 1만 알았더라도 이러한 경솔한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저는 제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전력을 다해 위원장을 지키지 못한다면 국가에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제스는 15일에 유서를 작성하여 도널드를 따라온 황인림에게 주었는데 이 유서는 쑹메이링 앞으로 된 것으로 자신이 부끄러움 없이 죽음에 임할 것이며 장징궈, 장웨이궈 두 아들을 부탁하며 그녀가 시안에 와선 안된다고 하는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답답해진 장쉐량은 쑹메이링을 초청하는 전보를 보냈으며 협상을 위해 쑹메이링의 오빠이자 은행가인 쑹쯔원에게 시안에 와달라고 요청했다. 12월 16일 허잉친이 토벌군 사령관에 취임하여 공세를 시작했다. 시안에는 폭격이 시작되어 시안 동부에 폭탄이 떨어졌고 이미 양후청의 섬서군이 중앙의 국민혁명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시안이 폭격당한다는 사실에 매우 반색했다. 하지만 폭설이 몰아쳐서 더 이상의 폭격은 어렵게 되었다. 이날 아침 장쉐량은 하얗게 질려서 장제스에게 4~7일 안에 장제스를 난징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했으나 폭격 때문에 어렵게 됐다고 했다. 저녁에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고등고문 장방진이 장쉐량의 부탁을 받고 민중의 고난을 고려하여 중앙군의 폭격과 진격을 자제시키라는 명령을 내려줄 것을 부탁했고 장제스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17일에 복건 수정주임 장정문에게 허잉친 앞으로 3일간 폭격을 정지하라는 편지를 주어 바깥으로 보냈다. 12월 18일 장제스의 신문이 난징과 상하이 신문에 게재되었고 장제스의 생존을 확인한 중국 국민들이 대거 안심하였다.

12월 19일, 장제스의 통증은 자꾸 심해졌고 장쉐량이 밤에 찾아와 8개 항목 중 4개 항목을 취하할테니 나머지라도 들어달라고 요청했으나 장제스는 거부했다. 12월 20일 도널드와 쑹쯔원이 쑹메이링의 다른 편지를 가지고 시안에 찾아왔다. 장제스는 쑹쯔원과 30분간 얘기했다. 장제스는 여차하면 자신과 함께 죽겠다는 쑹메이링의 편지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장제스는 쑹쯔원에게 자신은 죽어도 상관없으니 시안을 쓸어버리라면서 5일 이내에 시안을 포위공격하는 구체적인 전술을 지시하여 유언장과 함께 돌려보냈다.

쑹쯔원은 다음날인 12월 21일에 돌아갔고 그와 함께 난징으로 돌아간 도널드는 쑹메이링와 장제스의 심복인 다이리를 데리고 12월 22일, 다시 시안으로 이동했다.[8] 장제스의 편지를 받고 그 진위를 의심해하며 반란군 무력제압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는데 이에 쑹메이링이 평화 해결의 전망을 확신하며 직접 시안으로 찾아온 것이다. 쑹메이링을 다소 민망해하는 장쉐량이 직접 맞이했다. 쑹메이링은 중화민국을 위해 오랫동안 외교관으로 일했고 앞으로도 일할 실력을 발휘해서 장쉐량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를 한잔 마신 쑹메이링은 남편을 만나러 갔고 난리 중에 입은 부상이 낫지 않아 상처 투성이가 되어 침대에 누워 있는 남편을 보고 격노했다. 중앙군의 총공격을 기대하고 있던 장제스는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에 의아해하다가 쑹메이링을 보고 크게 놀랐다.
"놀랐다. 꿈만 같았다. 나는 일전에 쑹쯔원에게 부탁하여 결코 시안에 오지 말도록 전했으나 위험을 무릅쓰고 호랑이 굴로 들어온 것이다. 아내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였지만 나는 더욱 걱정이 될 뿐이다. 이제까지는 나의 생사는 도외시하여 왔으나 앞으로는 아내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편 쑹메이링은 분노를 드러내지 않고 온화하게 장쉐량과의 협상을 진행했다. 장쉐량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였으나 양후청이 8개 항목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석방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양후청 탓을 했고 모든 죄목을 뒤집어쓰고 희생양이 될 것을 우려한 양후청의 태도는 강경했다.[9] 양후청은 시안 동부의 국민혁명군을 철수시키고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줄 것을 서면으로 보증해달라고 했지만 장제스는 아무것도 들어줄 수 없다고 뻗댔다. 포위된 시안의 물자 상황은 나빠지고 있었고 국민당의 비행기들은 장제스가 납치되었단 사실에 온 중국이 분노하고 있다는 삐라를 뿌려 혼란을 가중시켰다.

3.6. 저우언라이의 도착, 장제스의 석방

파일:시안사건 장제스.jpg
장쉐량과 석방 기념 인증샷을 찍은 장제스. 두 사람의 사이의 인물은 장제스의 손윗처남인 쑹쯔원.
파일:서안사건 저우언라이.jpg
장제스와 협상을 마치고 옌안으로 돌아온 저우언라이. 마오쩌둥도 보인다.

이때 저우언라이가 시안에 도착했다. 이 무렵 스탈린은 시안 사건은 나치 독일과 손잡은 일본 제국이 중국의 내전을 심화시키려는 술수가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고 "장제스의 납치는 항일 투쟁에 대한 손해다"라고 통보했다. 저우언라이는 크렘린에서 내려온 평화적 해결책의 임무를 띄고 도착했다. 우선 쑹메이링이 저우언라이와 만나는 것에 동의했고 저우언라이는 쑹메이링에게 장제스야말로 중국의 유일한 지도자감이라고 강조하여 그녀의 환심을 샀다. 저우언라이는 중앙의 항일이 너무 미온적이라고 지적했으나 "우리들은 감금에 관여하고 있지 않다. 장 위원장을 숭배하는 마음에는 변화가 없다."고 말하며 장제스의 비위를 맞추었다. 쑹메이링은 "만일 위원장을 전국의 영수라고 믿는다면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정책에 따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고 저우언라이는 위원장의 난징 송환을 양후청에게 권고할 것을 약속했다.

쑹메이링은 후에 시안사벽 회상록에서 그를 '대국을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이나 장 위원장이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유력자'라고 표현했는데 국민당 공식기록에서 저우언라이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탓에 장제스와 저우언라이의 회담이 밝혀지지 않았고 단지 '유력자'와 장제스가 만났다고 되어 있었으나 장궈타오를 비롯한 공산당 쪽의 기록이 밝혀지면서 저우언라이의 존재가 드러났다.

12월 24일 저우언라이는 장제스와 만날 수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장제스를 교장 선생님이라 불렀고 저우언라이를 만난 장제스는 그를 반겼다.[10] 그는 더 이상의 내전은 안된다면서 "우린 적이지만 언제나 자네를 생각해왔네. 언젠가 자네와 같이 일할 날이 오길 바라네."라고 말했으며 저우언라이는 공산당원들도 장제스를 항일의 영도자로 지지한다고 했다.

다음날인 12월 25일 윌리엄 헨리 도널드가 쑹메이링에게 타자기를, 장제스에게 무릎담요를 선물했고 장제스는 선물을 받고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쑹메이링이 "위원장은 공산당에 대해서도 관대한 마음을 갖고 있다. 진정한 애국자라면 실행 불가능한 정책을 버리고 중앙의 지도에 대해 성의껏 협력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했고 협상 끝에 장제스는 저우언라이와의 두번째 회담에서 공산당이나 국민당이나 같은 중국인이므로 싸워선 안된다는 결론에 합의했다. 쑹메이링이 국공내전은 어디까지나 내정의 연장선으로 군사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정치로 해결할 문제라고 거들었다. 마침내 장제스는 구두로 공동 항일전선을 펴겠다는 데에 동의했다.

장쉐량은 쑹메이링의 석방 요구에 양후청이 석방을 반대하며 성문을 지키고 있어 어렵겠다면서 위장하여 차를 타고 뤄양으로 달아나라고 종용했으나 쑹메이링은 "변장해서 도망치는 것이라면 나도 남편도 함께 죽음을 택하겠다."고 거절했다. 쑹쯔원도 협상을 도와 장제스의 무조건 귀환을 설득했고 12월 25일을 계기로 사태가 결정적으로 변화했다. 아침에 쑹쯔원이 장제스를 찾아와 "장쉐량이 난징송환을 결정했다. 먼저 부인을 비행기로 보내고 위원장은 변장해서 장쉐량의 부대에 넣어 때를 보아 비행기로 탈출한다."고 보고했다. 이에 장제스는 때를 놓치면 끝장이라면서 중앙군과 동북군이 충돌하면 쑹메이링도 휩쓸릴 것이니 서둘러 탈출하라고 했으나 쑹메이링은 단호히 거부했다.
"내가 위험을 두려워하고 목숨을 아까워했다면 이 곳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에 온 이상 위원장과 함께가 아니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위원장의 성격을 보아 변장해서 몰래 가는 것 따위는 결코 허락치 않을 것입니다."

오전이 다 가고 점심이 돼서야 쑹쯔원이 양후청이 태도를 바꿀 것 같으나 아직 결정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12시반에 장쉐량이 찾아와 비행기는 준비되었으나 모든 것이 아직 미정이라면서 다시 방을 나갔다. 결국 시간이 늦어 난징에 제 시간에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해졌으나 뤄양까지라면 오후 4시에 이륙해서 당일에 도착이 가능했다. 오후 2시에 쑹쯔원이 찾아와 오늘 중에 출발할 것 같으니 준비하라고 했고 장쉐량이 찾아와 양후청이 완전히 동의했단 소식을 3시에 전했다.

뤄양으로 떠나기 전,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기다리라고 하고는 양후청을 불렀다. 30분이 지나 양후청이 나타나자 장제스는 두 사람을 자리에 앉게 하고 자신은 자리에 누워서 훈계했다.
"너희들은 오늘 국가의 대국을 중시하여 나를 난징으로 돌려보낼 결심을 했다. 나에게 문서를 조인하라거나 명령을 내리라거나 하는 강요를 하지 않았으며 또 어떠한 특수한 요구도 하지 않을 것을 결심했다. 이는 우리 중화민국이 위험에서 벗어나 안전으로 나갈 절호의 기회일 뿐 아니라 실로 중화민족의 인격과 고상한 문화의 표현이다. 너희들은 이제까지 반동파에게 선동되어 나에 대해 불평등하다든가, 혁명에 불성실하다고 생각해왔다. (...) 사변의 책임에 대해서 말하면 나에게도 또한 책임이 있다. 나는 최고통솔자로서 부하에게 이러한 위법행위를 하도록 한 책임을 지고 중앙에 스스로 처벌을 정하는 동시에 너희들의 회개의 심중도 중앙에 전하겠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나는 일생을 통해 다만 국가의 존망과 혁명의 달성을 위해 살아왔다. 개인적인 원망, 생사, 이해득실을 위해 일을 꾀한 적은 없다. (...)"

훈시 후 시안 공항에 도착하니 4시가 넘어 있었다. 장쉐량은 끝끝내 장제스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 난징에 갈 것임을 고집했다. 장제스는 그에게 동북군의 통솔 문제와 장쉐량 본인의 안위를 염려하여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만류했으나 결국 그는 모든 것을 양후청에게 일임한 다음에 장제스과 함께 뤄양으로 이동했고 5시 20분에 뤄양에 도착, 장제스과 같은 숙소에 머무른 다음에 각자 다른 비행기를 타고 난징으로 이동했다. 장제스는 군중의 환영을 받았고 도널드에게 차이위 대훈장[11]을 수여한 다음에 저장성으로 휴가를 떠났다. 장제스는 뤄양에 도착한 후 즉각적으로 중앙군에게 작전행동을 정지하라고 명령했다.

4. 이후

장제스의 석방에 대해서 공산당은 장제스가 요구사항을 수락했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장제스가 수락했다는 사안에 대한 통일된 보도도 없는 중구난방적인 선전밖에 없었다. 장제스의 석방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이를 환영하는 군중 집회가 열렸다.

12월 26일 오후, 장제스는 뤄양에서 난징으로 돌아왔고 국민정부 주석 린썬을 비롯한 수많은 정부 인사들이 장제스를 영접했다. 장제스는 12월 29일 시안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행정원장, 군사위원회 위원장을 사직했으나 국민정부와 국민당 중앙상무 위원회는 모두 이것을 반려했다. 장제스는 1개월 간의 휴가를 떠났고 1937년 정월을 고향에서 보냈다.

장쉐량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12월 31일 징역 10년과 공권박탈 5년을 선고받았다. 1937년 1월 4일 장제스는 그를 특별사면해주었지만 대신 장쉐량을 가택연금에 처했다. 장제스는 시안에서의 완강한 모습에 다시 지도자의 위치를 굳건히 했지만 전국 동시에서 끓어오르는 여론을 어찌하진 못해 초공작전을 취소하고 국공합작에 합의해야 했다.

장쉐량은 1937년 시커우에서 연금되었고 중국 곳곳의 안가를 전전하다가 1946년에 타이완섬으로 끌려갔고 장제스가 죽고 아들 장징궈가 총통 자리를 물려받은 이후에도 계속 갇혀있다가 장징궈까지 죽고 1993년 리덩후이 총통 재임기가 되고 나서야 겨우 연금 상태에서 풀려났다. 이후 그는 미국 하와이로 이주했고 2001년 그곳에서 죽었다. 대일 항쟁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상관을 억류할 정도로 고향인 동북을 그토록 사랑했으나 다시는 고향을 밟지 못했다. 연금 기간에 정치와는 인연을 끊고 역사 공부에 매진하여 명나라 역사의 전문가가 되었다고 한다. 쑹메이링은 장쉐량 석방을 장제스에게 권유했으나 믿었던 장쉐량에게 뒤통수 맞았던 배신감이 컸던 장제스는 끝내 이를 따르지 않았고 어느날 장쉐량이 위장병에 걸렸단 소식에 "그놈 곧 죽겠군" 하고 좋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에 의사를 보내 장쉐량을 치료해준 것이 쑹메이링이었다.[12] 장제스와 장징궈가 다 죽자 쑹메이링은 오랜만에 대만을 찾아 장쉐량의 연금 석방을 거들었다. 2001년에 장쉐량이 죽었을 때 쑹메이링은 뉴욕타임즈에서 그의 사망 소식을 읽고 조의를 표했으나 당시 104세였던 그녀가 장례식에 가기에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대리를 보냈다.

다른 주역인 양후청은 사건 이후 유럽 여행을 떠나 중일전쟁 발발 이후인 1938년 귀국하지만, 귀국 후 즉각 투옥되어 10여년 간 감옥생활을 하다가, 장제스가 대만으로 도피하기 직전인 1949년 충칭에서 장제스의 명령으로 부하, 맏딸과 함께 처형된다. 처는 양후청의 투옥 직후 항의하여 단식하다가 감옥에서 병사했다. 그 외에 살아남은 자녀는 공산당에 우대되어 중공 정권 하에서 관리생활을 했다.

장제스의 최측근 중 하나였던 허잉친(하응흠)은 이때 장제스가 죽거나 말거나 시안을 폭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장제스가 살아 돌아오자 신임을 잃어버렸고[13] 이후 장제스의 신임을 되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장제스의 신임은 천리푸, 천궈푸 형제, 천청, 다이리 등에게 옮겨간 후였다.

이 사건이 일어난 다음해에 중일전쟁이 발발한다. 중일전쟁에서 장제스는 그 누구보다도 국민들의 전의를 돋우며 항전을 주장했다. 사실 장제스는 일본인들을 제국주의자라고 혐오했지만 일본인들을 무력으로 몰아낼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했고 이 때문에 힘을 기르면서 때를 기다리자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진행되던 것이 1930년대 중반의 장제스의 경제개발과 군 현대화 계획이다. 이로 인해 장제스는 상당히 강력한 중앙군을 양성하고 항전의 밑거름을 다질 수 있었다. 장제스는 1939년 정도엔 일본과 일전을 겨뤄야 할 것으로 예측했으나 일본의 야욕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으니 시안 사건이 터진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37년에 전쟁이 터지고 만 것이다.[14]

5.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서안사건의 평화적 문제해결의 재고찰, 윤성주, 서울대학교.
  • 중국의 붉은 별, 에드거 스노우, 두레.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용의 유전자, 에릭 두르슈미트, 세종서적

6. 관련문서



[1] 비정규군과 관내 병력을 합치면 50만에 달했다.[2] 물론 당시 국제연맹은 국제 사회에서의 영향력이 형편없기도 하였고, 일본은 국제연맹 따위는 그냥 씹어버릴 정도로 막나가는 놈들이어서 실패로 돌아갔다.[3] 이 일로 장제스도 심각하게 빡쳤는지 "나를 비판하는 자들은 책임을 질 생각도 안하면서 나를 몰아낼 생각만 한다!"라고 일기에 서술했다.[4] (1908~2000) 이 사람도 참 우여곡절이 긴데, 후에 동북군 소속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포로가 된 이후 전향했다가, 일본이 항복하자 다시 국민당에 투항. 다시 공산당이 득세하자 공산측에 붙는다. 공산측에서는 기사회생의 전기가 된 시안 사건에서의 그의 공을 감안하여 처벌하지 않고 관리로 임용했다. 그 험악하던 중국 현대사의 폭풍 속에서도 천수를 누렸다.[5] 실제로 화청지에 가면 장제스가 머무르고 있었던 건물에 총알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6] 위의 7군자를 의미한다.[7] 일각에서는 옌시산은 시안 사건에 중립을 지켰으며 펑위샹이 해당 주장을 했다는 설도 있다.[8] 이때 쑹메이링과 다이리는 장제스의 구출에 실패할 때 자결을 각오하고 시안으로 왔다고 한다.[9] 그리고 그의 우려대로 그는 나중에 가족들과 함께 처형된다.[10] 장제스과 저우언라이는 1924년 황포군관학교(국민당군의 사관학교) 설립 당시 교장, 정치부 부주임으로 함께 일했으며, 장제스는 일찍부터 저우언라이의 재능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애썼다. 그러나 1925년 쑨원의 타계 이후 공산당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자 결별했다. 시안 사건을 계기로 어색하게나마 장제스, 저우언라이 두 사람은 10여 년만에 재회하게 된 것이었다.[11] 장제스의 어머니인 왕채옥(왕차이위)의 이름을 따서 제정한 훈장으로 대단한 권위를 자랑하는 훈장이다.[12] 장제스와 결혼하기 이전부터 쑹메이링은 장쉐량과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장쉐량은 죽기 직전의 회고에서 쑹메이링에게 이때 마음을 품고 있었음을 고백했다. 시안에서 장쉐량이 낮은 자세로 장제스를 대한 것 역시 쑹메이링과의 이러한 관계를 고려한 것이었다.[13] 그래도 대만 시절까지 이 양반은 고위직으로 누릴건 다 누렸다. 중국 주둔 일본군의 항복을 받은 것도 바로 이 사람. 기반을 다 날리고 몸만 털레털레 와서 실권 없는 명예직만 전전한 옌시산, 바이충시를 비롯한 다른 군벌들에 비해선 영화로운 말년을 보냈다.[14] 한 예로 60개 개편사를 편성하려고 했으나 현실은 갓 편성된 10개 사를 포함한 30개 사로, 그 중 8개 사만이 그럭저럭 신식무기를 보유할 뿐이었다. 참고로 개편사 3~5개가 일본군 정규사단 1개와 동일시 취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