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23:05:09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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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호칭에 따른 국가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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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어원과 의미3. 역사학에서의 분류
3.1. 논의
3.1.1. 한자문화권3.1.2. 유럽 문화권
4. 제국의 면적5. 악의 제국?6. 여담7. 목록
7.1. 황제국7.2. 패권적 의미의 제국
7.2.1. 아시아7.2.2. 유럽7.2.3. 아프리카7.2.4. 아메리카7.2.5. 오세아니아7.2.6. 식민제국
8. 가공의 제국

[clearfix]

1. 개요

한국어 제국, 천자국, 상국, 황국, 대국, 천조
중국어 帝國(디궈), 天子國(톈쯔궈)
일본어 帝國(테이코쿠), 皇國(미쿠니/코코쿠)
라틴어 IMPERIVM
영어 Empire, Imperium(라틴어)
러시아어 Империя
독일어 Kaiserreich[1]
노르웨이어 Riket
스페인어 Imperio
포르투갈어 Império

제국(, Empire, Imperium)에 대한 보편적 정의는 없지만 보통 대부분 사용되는 의미는 '황제국가원수군주제 국가' 혹은 '여러 민족과 국가를 통치(지배)하는 국가'로 나뉜다.[2] 1970년대만 해도 에티오피아 제국, 이란 제국, 중앙아프리카 제국 등이 남아 있었지만 21세기에는 제국 국호를 사용하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3][4]

제국과 비슷한 의미로 황국(皇國)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말 그대로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란 뜻으로 대한제국일본 제국이 스스로를 황국이라고 칭했으며 천자국을 이렇게 부르기도 했다. 서양권 제국 개념과 구분되는 중화권 천자국 개념을 지칭하는 단어로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현재 한국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단어라 일본에서만 주로 볼 수 있다.

근대에 들어서는 식민제국을 단순히 '제국'으로 일컫는 경우도 많다. 공식적으로 제국이었던 적도 없고 군주를 황제 또는 여제로 칭하지도 않았던 대영제국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인데 지배했던 식민지 가운데 인도에 한해서만 제국과 황제의 호칭을 사용했음에도 통상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로서 제국이라고 인식되는 경우다.[5]

근대에 들어서서는 마르크스의 영향으로 제국 자체가 식민제국 용어와 관련돼서 부정적인 의미를 띄기도 했다.

2. 어원과 의미

비록 똑같이 '제국'이라는 단어로 묶여 있지만 동양천자국()과 서양엠파이어(Empire)는 그 뜻과 성격이 매우 다르다. 동아시아에서는 황제가 다스리는 전제군주제, 즉 제정을 정치체제로 채택한 국가를 의미한다. 다만 제국이라는 표현 자체는 옛 동아시아에서는 쓰이지 않았던 말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고종실록 이전까지는 '제국'이라는 표현이 아예 나오지 않는다. 실록 상에 帝國이 세 번 나오기는 하는데 이는 '제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글 중에 우연히 이어진 것이다. 서양에서는 동양과 다른 의미로 쓰이는데, 아테네 제국 (Athenian empire)의 예가 있듯이 전제 군주가 없더라도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그 안에서 다수의 민족이나 종족의 자치권을 부정하여 위계적, 계서적(階序的)으로 지배하는 국가를 보통 제국으로 지칭한다. 따라서 굳이 황제라는 전제 군주가 없더라도 제국이 될 수 있다. 현재 역사학계에서 쓰이는 용어도 이러한 서양적 관념 하의 제국이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제국"이라는 표현이 쓰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왕국 같은 개념 역시 동아시아에서는 일체 쓰이지 않았다. 제국에 해당되는 단어는 천자국이었고 왕국에 해당되는 단어는 제후국이었다. 동아시아에서 제국이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은 것은 동아시아의 황제는 "제국"이라고 불려야 할 하나의 나라가 아닌 천하 그 자체를 다스리는 사람[6]이었기 때문이다. 즉, "나라"가 아닌 "나라들의 집합체" 그 자체를 다스리는 사람이기에 황제의 통치권역에 감히 "나라"라는 단어 따위를 쓸 수가 없었다. 때문에 천자가 다스리는 중원 지역을 가리키는 중국이라는 단어는 가운데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나라의 가운데라는 국명이라기보단 지리적 뜻으로 이해되었다. 또한 중화권에서는 황제를 한 글자로 줄여쓸 때 '제'가 아니라 '황'을 선호해서 송나라 때의 당악을 보면 황제가 다스리는 지역을 '皇州'라고 표현했다. 자국을 황국이라고 부르던 시기의 일본도 천자국을 똑같이 '황국'이라고 표현했다.

서구권의 제국 개념은 고대 로마라틴어 Imperium(임페리움, 의미: 지배, 권위, 통제)에서 출발하는데 영어로 제국을 뜻하는 단어인 Empire(엠파이어) 역시 임페리움에서 비롯[7]되었다. 임페리움은 후술할 역사적 사건을 거쳐 '황제국'(혹은 황제권)과 '군사적 지배'의 밀접하지만 구분되는 두 개념을 포괄하는 단어가 되었다. 미국이 가끔 미제(美帝)로 불리는 것은 미국이 군주국은 아니지만 주변국에 군사적 영향력, 즉 '임페리움'을 행사한다는 인식 때문인데 이를 알면 임페리움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임페리움은 역시 라틴어인 Impero로부터 유래했는데, 정치적 의미의 '지배'보다도 '지휘'[8]가 원래 의미로, 로마 공화국집정관, 법무관, 조영관 등 선출직 정무관에게 고유의 지휘권[9], 즉 임페리움이 부여된 것과 관련이 있다. 공화정 중기 로마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2명의 현직 집정관이 맡지 않는[10] 여러 속주에 대해 원로원이 지정한 전직 집정관에게 집정관의 임페리움 중 해당 속주와 그 주둔군의 지휘권을 위임하는 Imperium proconsulare(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11])가 부여되었다. 그러면서 정무관의 권한을 의미하던 임페리움은 주로 군사 지휘권을 지칭하게 되었고, 임페리움 보유자를 의미하던 Imperator(임페라토르)는 군 사령관, 그 중에서도 개선식의 주인공[12]에게 바쳐지는 호칭이 되었다. 그런데 로마 공화정 붕괴 이후 아우구스투스에게 속주 총독의 임페리움을 앞서는 Imperium proconsulare maius(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 마이우스[13])가 부여되어 속주의 군 지휘관은 최고 임페리움을 가진 아우구스투스의 대리인으로 격하되었다. 결국 제정 로마가 정착되고 아우구스투스의 계승자들도 '임페리움'을 독점하며 자연스럽게 임페리움 보유자를 부르는 말일 뿐이었던 임페라토르는 이를 독점하고 상속하는 군주의 호칭이 되었고, 이후 임페리움은 임페라토르가 다스리는 나라, 곧 제국을 의미하는 단어로도 쓰이게 되었다.

제정이라고는 해도 뼈대는 군주제 또는 봉건제·군현제(즉 왕국)와 사실상 거기서 거기지만, 굳이 차이점을 꼽자면 제국은 내부에 여러 민족이 각자의 정체성과 때로는 신분상의 차별을 지닌 채 혼재되어 있으며 다수의 소국[14]을 영토 안에 아우르고 있거나 신하국의 형태로 주변에 거느린 상태[15]라는 것을 들 수 있겠다. 보편적으로 왕국(Kingdom)보다 권위에서 우월한 군주 국가라는 뉘앙스가 강하므로 주위의 이런저런 국가들 사이에서 특히 두각을 드러낼 만한 막강한 국력을 지니고 축적된 국력(무력)을 정복전쟁 등의 형태로써 활발히 행사함을 전제로 인정되는 경우가 많다. 중세시대까지 유럽에서 이 단어는 동로마 제국, 그리고 서로마 제국을 계승했다고 자처하는 신성 로마 제국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차차 국경을 넘어 여러 국가의 주관을 좌지우지 하는 강대국을 통칭하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동아시아권에선 천자황제가 다스리는 국가를 지칭한다. 당시 주변의 국가는 이 나라를 천자국으로 높여 불렀으며, 천자국에 입국하는 것을 하늘을 뵙는다는 뜻의 조천이라 부를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동아시아의 질서는 조공 체제와 관련이 깊은데 천자국이 주변국 위에 군림할 수 있게 하는 대신 소국은 대국을 섬기며 대국은 소국을 도와야 한다는 유교적 사상에 의해 상황에 따라 왕왕 달라지지만 되로 주고 말로 돌려받는 경우가 다반사인 것도 사실이었다. 이는 당시 중원의 문화와 경제력이 주변국을 압도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일단 군사력이 최약체로 알려진 송나라도 나름 주변국으로부터 천자국 대우는 받고 살았다.[16] 중동 지역의 경우 이슬람의 등장 전엔 페르시아 계통에서 황제의 뜻으로 쓰이던 샤한샤라는 호칭이 있었다. 이슬람의 등장 직후엔 이슬람 사회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정당한 후계자들이 칼리프의 칭호를 달고 전체 이슬람 제국을 통치했다. 당시 이슬람 사회 전체는 칼리프 아래의 단일 국가로 제국이라 불릴 만했다. 그러나 각 지역의 술탄들이 독립하면서 칼리프는 유명무실한 지위가 되었고 이후 오스만 제국의 군주들에게 직위가 양도되면서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의 수호자가 된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천자 역시 제대로 된 황제이고 중국 역시 제대로 된 제국인데 중국의 행정구역상 군(郡) 또는 국(國)이 왕국에 해당되기 때문이며 그 넓이와 규모 역시 조선이나 왜국보다 더 큰 군(郡) 또는 국(國)이 존재하기 때문에 천자=황제 역시 말이 된다. 중국에서 황제의 포지션은 천자이며 그 휘하 왕국의 왕의 포지션은 왕(천자의 친족) 또는 태수(일반인)가 된다. 삼국지를 보면 ○○태수라는 직함이 상당히 자주 나오는데 그 '태수'가 바로 황제 휘하의 관리다. 다만 천자의 일족이 다스리는 군(郡)인 국(國)의 경우 입헌군주제 또는 비주권군주제의 형식을 띠고 있어서 총리에 해당되는 국상(國相)이 왕 대신 해당 국을 다스린다. 호칭 역시 천자의 일족이 태수의 역할을 하고 있을 경우 남자는 왕, 여자는 공주로 칭한다.

3. 역사학에서의 분류

3.1. 논의

일반적인 역사학계의 평가에 따르면 BC 24세기 아카드 제국을 세계 최초의 제국으로 본다. 그러나 고대 문명 수준의 조직을 갖춘 제국은 신 아시리아 제국(916 ~ 612BC)을 최초로 본다. 동아시아 최초의 제국은 , 유럽 최초의 제국은 알렉산드로스 대왕헬레니즘 제국을 꼽는다. 이들보다 앞서 BC 3000년 경 고대 이집트 고왕국의 통일을 제국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지배자를 황제와 맞먹는 급의 파라오로 지칭한 것은 BC 1400년 경 신왕국에 들어와서였다.[17]

많은 역사학자들은 철기 시대에 들어서면서 생산력이 대규모로 향상되고 이러한 경제적 발전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사회체제가 정비되는 시점에 하나의 문화권을 통합하는 최초의 대제국들이 성립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대제국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가 최초이며, 그 뒤를 이어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가 성립했고 이어서 중국의 , 과 중앙아시아의 흉노 및 유럽의 로마 제국이 성립했다.

최초의 대제국이 성립한 철기 시대에는 또한 대제국이 성립되기 이전의 기존 체제 이념에 반기를 든 철학이 사상 최초로 등장했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인도우파니샤드 철학과 불교자이나교, 유럽그리스 철학, 중국제자백가 등이 이에 해당된다. 칼 야스퍼스는 이 시기에 축의 시대(독일어: Achsenzeit, 영어: Axial Age)라는 이름을 붙였다.

근대 민족국가, 국민국가 개념의 등장 이후에는 제국의 재 등장 가능성에 회의를 가진 시각이 늘고 있다. 제국은 다인종, 다문화를 포함하는 넓은 권역을 다스리는 국가인데, 근대 국민국가는 탄생배경 및 구조상 주류가 아닌 민족은 주류에 동화되지 않으면 소외, 심하면 탄압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그 반동으로 저항 및 분리독립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한 유럽 제국들의 몰락이나 단일민족의 제국을 주장했던 추축국의 몰락과 같은 사례가 이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사실 근대 이전에 거대한 제국을 세운 민족들의 경우에는 다문화적인 요소들인 '철학, 이데올로기, 종교' 등이 있어서 갈등을 최소화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관대함으로 유명한 페르시아로, 키루스 2세의 관대함은 유대인들에게도 찬양을 받았다. 로마 또한 다민족국가로 유명하고, 한나라는 적어도 고대 화하문명의 패권과 상징성이 강고했기 때문에 이방인이라도 스스로 중원인처럼 살면서 중원인을 자부하면 중원인으로 받아들였다. 한나라 개국시조의 고향도 원래 묘족이 세웠던 초나라였고 초한전쟁기의 항우를 상대로도 초나라 원숭이 드립이 있었던 걸 보면 한나라 또한 시작부터 순혈 화하족 국가는 아니었음에도 상당히 개방적이었던 것이다. 물론 오호십육국 시대가 되면 북방이민족들이 날뛰기는 하지만, 결국 이 북방이민족들마저 침투왕조를 통해 대거 중원에 동화되는 바람에 당나라 시절에는 중원인의 스펙트럼이 상당히 널럴해져서 황실 혈통이 선비족인지 아닌지 따지는 것도 별 의미가 없었고 안록산 같은 백인혼혈 중국인도 활동했었다. 중국에서 한족이냐 아니냐를 엄격하게 따지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강해진 것은 이민족들이 침투 대신 일방적 정복을 택한 송나라 이후의 일이다. 사실 한족 우월주의자들도 혈통적 민족주의자들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18] 관점에 따라서 이게 뭐가 다르냐고 할 수도 있지만 혈통이 다르면 엄청나게 배척하던 사람들에 비하면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으니 혁신적인 관점이기는 하다.

3.1.1. 한자문화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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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문화권에서는 원칙적으로는 제국이란 단어는 상당히 생소한 것이었다. 관념적으로 황제는 한 나라(國)에 국한되는 영역이 아니라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 쓰는 황제라는 표현은 진시황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19] 그러나 시황제의 진을 계승한 후대 왕조는 작은 규모의 정권까지 통틀어도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명목으로나마 로마 제국의 후예만을 공식적인 제국으로 인정해 주는 유럽과는 구분되는 점이다. 즉, 서양의 황제는 '로마 제국의 후예'라는 정통성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면, 동양의 황제는 '천하를 제패한 자', 그 중에서도 중원을 제패하고 통일한 국가가 그 중 가장 주된 조건이었다.[20] 물론 북방의 유목민족 국가들과 고구려는 조금 다른 사례이긴 하지만.

주변국에겐 연호와 직책(주로 왕이나 장군)을 하사하는 등의 조공 책봉 형식을 취했다. 천자국의 사상적 원칙상 주 목표 중 하나가 마치 로마제국처럼 자신들의 발달된 문화를 보급하고 문명을 전파하고 교화시키는 것이었는데. 초기 중원 왕조는 비교적 이 역할에 충실했고[21][22] 따라서 애초에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동아시아권에선 상대적으로 문물이 발달되었던 중원 이외 국가의 칭제에 대한 제약이 매우 강했으며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 대륙을 노리는 북방민족들은 천왕, 황제 등을 칭하면서 제국을 표방하였다. 또한 근대에 들어서는 일본 제국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이미 전세계에서 제국으로 인정해주고 있는 나라였으며,[23] 몽골 제국 같은 경우에도 세계 제국이었기 때문에 원나라의 존재 여부에 관계 없이 제국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베트남 같은 경우는 중국에 대해선 어디까지나 외왕내제의 체제를 갖고 있었지만 동북아동남아에 걸쳐 있었던 애매한 정황과 가급적 당시의 칭호를 존중해 주는 현대 학계의 동향에 따라 제국으로 인정하고 있다.

중국의 황제에게 영지를 분봉받은 경우나 조공 책봉을 통해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은 주변국들은 한 단계 아래인 제후국으로 칭해졌으나, 흉노등의 북방 기마족과의 관계에서는 세력의 우열에 따라 달라졌다. 중원 한족 왕조가 강하면 용병으로 일을 하거나 약탈한 것들을 바쳤고 거꾸로 북방 유목민이 강하면 한족 왕조에 조공을 받았다. 그 결과 중국[24]과 동격의 황제를 칭하고, 중국에서도 이를 인정했던 북조 국가들 및 요나라, 서하, 금나라 등이 나왔다.

결국 동양의 "황제"는 서양의 황제와 달리 세속적인 권력뿐만 아니라 문화와 종교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즉, 황제교황을 합친 존재였다. 교황이(실질 영토 자체는 작을지언정)전 기독교인들의 왕, 왕 중의 왕으로 군림하면서 서유럽에 영향력을 떨치며 종교개혁 이전까지 명실공히 서유럽의 지배자나 다름없었듯이, 동양의 천자 역시 모든 제후(왕)들의 상전이자 하늘의 아들으로 전 동아시아에 영향력을 끼치며 군림했다.

한때 개항기의 서구 열강조차 형식적으로는 조공국의 모양새를 취했다는 잘못된 정보가 유포되었으나, 서양의 외교 사절이 공식적으로 조공국임을 인정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에서 러시아어/만주어 조약문에서 알 수 있듯이 루스 차르국청나라는 서로 대등한 국가로 인정하고 있었다. 이와 관해선 영국과의 외교사가 유명하다. 영국 최초의 대중국 사절인 매카트니 경은 끝내 청나라 황제 앞에서 삼궤구고두례를 거부함과 동시에 조공국임을 부인하여 외교관계 수립도 무산된다. 아편전쟁 이후 결국 서양국가들과 국교를 수립하게 되었을 때 청나라는 대등한 관계를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한국 역사에서는 연호를 사용하거나 제후왕을 임명하여 국가원수가 왕중왕으로 군림하는 경우는 줄곧 있어 왔으나 정식으로 제국을 선포한 예는 대한제국이 있다

고구려의 경우엔 자국 군주를 황제로 칭하진 않았으나[25] 태왕[26]이라는 칭호를 내세워 전성기 시절 만주한반도 일대의 패권을 행사하고 동아시아의 주요 세력으로 군림했고 태왕호가 왕중왕의 의미로 사실상 황제호라고 볼때, 사실상 제국의 위치에 있었다.

백제 역시 왕중왕으로 군림하고 황제의 칭호를 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후백제, 후고구려 역시 고고학적으로 연호를 내걸었던 것이 확인되고 문헌적으로도 단지 일국의 지배자가 아닌 그 이상을 표방했다는 정황이 뚜렷하다. 그리고 이들을 통합한 고려는 전반기에 천자,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제정하였다[27] 외왕내제(外王內帝)로 분류되기도 한다.

조선의 고종대한제국을 선포했지만 불과 13년 만에 일본 제국에 의하여 멸망하고 만다.

일본의 경우는 중국의 천자(天子)처럼 천황이라는 독자적인 칭호를 쓰며 역사 내내 줄곧 독자 연호를 써왔으나, 전근대 동양에서 유일한 황제는 중원의 황제였으므로 국제적으로 제국으로 인정받는 것은 일본 제국 시기가 되어서야 가능했다.

베트남의 경우도 외왕내제를 내세워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칭했지만 대외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3.1.2. 유럽 문화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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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BC 27~395
서로마 제국
395~476
신성 로마 제국
962~1806
프랑스 제1제국
1804~1814
프랑스 제2제국
1852~1870
오스트리아 제국
1804~1867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867~1918
독일 제국
1871~1918
동로마 제국
395~1453

루스 차르국
1547~1721
러시아 제국
1721~1917
오스만 제국
1453~1922
불가리아 제1제국
919~1018
불가리아 제2제국
1185~1396/1422
같이보기
제3의 로마, 근대 유럽의 황제 가문
}}}}}}}}}}}}}}}

유럽에서는 전 유럽을 석권했던 로마 제국의 권위에 맞설 수 있는 기독교권을 통일한 대제국이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 로마 계승을 자처한 국가들 외에 황제를 자처하는 군주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16세기 아메리카필리핀을 식민지로 경영했던 스페인 왕조차도 감히 황제를 자처하지는 못했다. 카를 5세 시기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스페인의 국왕을 겸하긴 했는데 어디가지나 동군연합에 불과하지 스페인 본토의 황제를 칭한게 아니다. 국력이 당대 프랑스 왕국의 5분의 1도 안 될 비참한 지경인 동로마 제국 멸망 당시의 각 분국들은 어쨌든 로마 황제 계승의 연속성을 주장하며 저마다 황제를 자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통성이 중요한 황제와 달리 제국이라는 용어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현실을 나타내는 용어이기 때문에, 제위와 관계없이 본토 이외 식민지를 확보한 나라에서는 본토와 식민지를 아우르는 지배영역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제국'이라는 용어를 썼다. 이경우 본래 의미의 제국과 구분하기 위해 식민제국으로 부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는 대영제국, 스페인 제국, 프랑스 식민제국 등이 있다. 물론 본토를 지칭할 때는 제국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다.

유럽사에서 서로마 멸망 이후 제국을 자처한 국가는 다음과 같다.
3.1.2.1. 서로마 제국 계열
  • 서로마 제국 - 비록 반쪽만 남았지만 로마 제국 그 자체이다. 사실 그 이전에도 여러 황제를 두고 영토를 나눴으며 다시 합쳐지기도 했다. 또한 현재는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그로 인한 서유럽과 동유럽의 구분을 위해 구분하지만 당시에는 여전히 로마 제국 하나였다.[28]
  • 프랑크 왕국 - 카롤루스 대제교황의 대관식을 받아 서로마 제국의 계승국으로서의 황제 권위가 부활하게 된다. 이를 존중하여 영어에서는 Frankish Empire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후 프랑크 왕국이 분열 크리를 밟으며 서로마 제국 계승자의 지위는 정치적 거래의 제물로 서, 중, 동프랑크 왕국 사이를 떠돌아 다니다가 오토 1세 시기 작센 왕조의 동프랑크가 차지하게 된다.
    • 신성 로마 제국 - 다만 동로마 제국은 '황제'로서의 권위까지만 인정했으며, '로마 황제'의 칭호는 인정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동로마 황제는 신성 로마 황제를 로마인의 황제 (英 : Emperor of the Romans)가 아니라 로마시의 황제임을 인정했다.[29]
    • 프랑스 제국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1세)와 나폴레옹 3세 시대. 당시 대다수 유럽인들은 나폴레옹 본인에 대해서는 실질적으로 서로마 제국 혹은 프랑크 왕국을 계승할 어떠한 정통성도 없었기에 나폴레옹의 황제 칭호를 참칭으로 여겼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수립한 제국 자체는 스스로는 카롤루스 대제의 후계국을 자처했으므로 억지로나마 서로마 제국 계열로 분류할 수도 있다. 혁명 프랑스를 토대로 한 막강한 국력으로 유럽을 평정했기에, 힘으로 주변국을 찍어누르고 제국의 칭호를 얻은 국가라 할 수 있다.[33] 서유럽에선 이전에도 제국을 칭할 법한 강대국들이 많았지만 프랑크 제국 이후로 한 국가가 나머지 국가들을 완전히 압도했던 적이 없어서 함부로 황제의 칭호를 주장하지 못했다. 그런데 혁명 프랑스는 독보적으로 강했고 혼자서도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를 힘으로라도 제압할 수 있었기에 황제 칭호를 교황에게 강요하여 억지로 빼앗은 것이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이 황제 칭호를 칭하는 근거가 순전히 '압도적인 군사력'뿐이고 그 제위에는 어떠한 정통성도 없었기 때문에 위에서도 언급했듯 주변국들이 참칭이라고 했던 것이다. 결국 나폴레옹 시대 이후 '힘'으로 황제를 자처할 수 있어 로마 제국의 정통성은 신경을 안쓰게 되고 다른나라를 정복하여 편법으로 황제가 되는 식민 제국 국가들이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해 '황제 인플레 현상'이 19세기 이후에 벌어지게 된다. 다만 역설적이게도 국민들이 의회를 통해 황제로 임명해주는 나폴레옹식이 방법론적으로 시민들이 원로원을 통해 황제로 인정하는 로마식과 가장 유사하단 점이 특기할 부분이다. 황제 칭호의 정식 명칭이 프랑스인의 황제이고, 이는 과거 로마 제국의 '로마인의 황제'와 비슷한 칭호다.
3.1.2.2. 동로마 제국 계열
또한 민족 구성이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동로마 제국은 그대로 로마 그 자체였기에 당대에는 그냥 로마로 불렸다. 이 제국의 공식 명칭도 'Imperium Romanum'으로 로마 제국 그 자체였다. 이것이 위에 언급된 러시아가 로마의 후신을 자처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대체로 이 제국이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을 계기로 사라졌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지만 이러한 이유로 로마 제국이 계승국인 러시아의 존재를 감안해 러시아 혁명 발발 전까지 건재했다는 입장도 있는 것.
3.1.2.3. 예외

4. 제국의 면적

역사를 살펴보면 크고 아름다운 제국이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몽골 제국대영제국, 러시아 제국이 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은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로[36] 1920년 당시 세계 육지의 23.84%를 차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위인 몽골 제국은 역사상 가장 큰 단일국가이자 역사상 가장 큰 유목 제국이며, 황제가 국가권력의 수반인 나라 중 가장 큰 나라이다.
3위[37]러시아 제국알래스카를 가졌던 1867년까진 몽골 제국과 비등비등할 정도의 영토를 보유했으며 3개의 대륙[38]에 영토를 걸치고 있었다.[39]

반대로 작은 제국들도 있었는데 19세기아이티 제국은 오늘날의 아이티와 다를 바 없는 27,750km²의 소국이었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종주권을 주장했으나 이를 인정한다고 해도 히스파니올라 섬의 총면적이 76,480km²에 불과하니 한반도의 40%도 안 되었다.

중세로 거슬러 올라가면 콘스탄티노폴리스만을 겨우 보존하던 요안니스 8세 ~ 콘스탄티노스 11세 치세의 과거의 영광만이 남은 동로마 제국이나 멸망 직전의 라틴 제국(1260년 22,000km²), 로마 계열인 트라페준타 제국도 이 반열에 포함할 수 있다. 그리고 한반도를 영토로 한 대한제국도 제국 치고는 영토가 작은 편이다.

5. 악의 제국?

오늘날 '제국주의자'라는 단어는 정치적 욕설이다. 제국에 대한 비판은 대개 두 가지 형태를 취한다.
1. 제국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 수많은 피정복 민족을 효과적으로 다스리는 것은 결국 불가능하다.

2.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실행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제국은 파괴와 착취의 사악한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모든 민족은 자결권이 있고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된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1번의 주장은 넌센스에 불과하고, 2번은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실제로 제국은 역사상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정치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상 인류의 대부분은 제국에 속해 있었다. 실제로 제국은 매우 안정된 형태의 정치 체제였다.

대부분의 제국은 반란을 비교적 쉽게 진압했다. 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대개 외적의 침공이나 전염병, 자연 재해, 내분에 따른 지배 계층의 분열 정도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정복당한 민족이 제국의 지배자로부터 스스로 해방을 쟁취한 기록은 드물다. 대부분은 수백 년에 걸쳐 복속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들은 제국에 서서히 동화되어 고유 문화가 사멸되는 게 보통이었다.

가령 AD 476년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의 침공으로 마침내 무너졌을 때, 수 세기 전 로마에 정복당했던 민족들은 물고기의 뱃속에서 헤어나온 성경 속 요나와는 달리 갈가리 찢긴 제국의 사체에서 살아나오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 시점에서 이미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였다. 스스로를 피지배 민족의 부락민으로 믿고 부족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부족의 신들을 섬기고 부족의 신화와 전설을 노래하던 현지인의 생물학적 후손은 이제는 스스로를 로마인으로 여기며 로마인처럼 이야기하고, 로마인처럼 행동했다.

많은 경우 하나의 제국이 무너진다고 해서 피지배 민족이 온전히 독립하는 일은 드물었다. 옛 제국이 붕괴하거나 후퇴한 자리에 생긴 진공에는 새로운 제국이 발을 들여놓았다.

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하려면 수많은 사람을 대량으로 노예화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 공물을 거두어 들일 필요가 있었다. 정복 전쟁, 노예화, 징집, 대량 학살은 제국의 일반적 수단으로 꼽힌다.

그렇다고 해서 제국이 가치 있는 것을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모든 제국을 검게 지워버리고 제국의 유산을 모두 거부한다는 것은 인류 문화의 대부분을 거부하는 것이다.

제국의 엘리트는 정복에 따른 이익을 궁전, 군대, 성벽에만 쓰지 않았다. 문학, 철학, 예술, 의학, 사법 제도에도 썼다. 현재 남아 있는 인류의 문화적 성취 중 상당한 몫은 제국이 피정복민을 착취한 덕분에 생겨날 수 있었다. 예시를 들자면 이러하다.
  • 로마 제국이 제공한 이익과 번영 덕분에 키케로와 세네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사색과 집필을 할 여유를 누릴 수 있었다.
  • 타지마할은 무굴 제국이 인도 현지인을 착취해서 축적한 부가 없었다면 건설될 수 없었다.
  • 합스부르크 제국은 슬라브어, 헝가리어, 루마니아어를 사용하는 지역을 지배하면서 얻은 이익으로 하이든에게 연봉을 주고 모차르트에게 작곡을 의뢰했다.

엘리트 문화와 고급 예술을 넘어서 평민, 서민에게 초점을 맞추더라도, 대부분의 현대 문화에서 인류는 제국의 유산을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네 조상들이 총칼로써 강요당했던 제국의 언어로 말하고 생각하고 꿈꾼다.

오늘날 한국, 일본에서는 한자(漢字)로 글을 쓰고 말한다. 이들의 언어에서 한자를 지운다면 한국어, 일본어는 원시적인 언어로 퇴보할 것이다. 원래 기원이 무엇이었든, 알래스카의 배로우 반도에서 마젤란 해협에 이르는 남북 아메리카 대륙의 거의 모든 거주자는 네 제국의 언어(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영어) 중 하나로 의사소통을 한다. 오늘날 이집트인은 아랍어로 말하고, 아랍의 이슬람을 믿으며 스스로를 아랍인이라고 생각하며, 아랍 제국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7세기에 이집트를 정복했으며 이집트인이 일으킨 여러 차례의 반란을 철권으로 진압했던 제국을 말이다.

제국의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이른바 '전통' 요리이다. 흔히 사람들은 이탈리아 식당에서는 토마토 소스를 넣은 스파게티를 기대하고, 폴란드와 아일랜드 식당에서는 으깬 감자를, 아르헨티나의 식당에서는 수십 종의 바베큐 또는 스테이크 중 하나를 고를 것을, 한국 식당에서는 거의 모든 음식에 알싸한 마늘과 매운 고추가 들어갈 것을, 프랑스의 카페에서는 그윽한 향을 내뿜는 뜨겁고 진한 에스프레소를 기대한다.

하지만 이들 중 어떤 재료도 이들 국가가 원산지는 아니다. 
  • 토마토, 고추, 코코아의 원산지는 멕시코이다.
  • 커피의 원산지는 에티오피아이다.
  • 마늘의 원산지는 이집트이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단테 알리기에리는 커피를 마셔본 적도 없으며 토마토 소스를 버무린 스파게티를 먹어본 적도 없다.
  • 세종대왕은 음식에 고추를 넣어 먹은 일이 없다.
  • 감자가 폴란드와 아일랜드에 들어온 지는 17세기 초반이다.
  • 1492년에 아르헨티나에서 얻을 수 있는 스테이크는 쇠고기가 아니라 라마 고기로 만든 것 뿐이었다.

이들은 '고유' 음식이라기보다는 제국의 힘이 빚어낸 음식이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고유' 문화에 대해 흔히 이야기하지만, 만일 그 '고유성'이라는 것이 독자적으로 발달한 무엇,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고대부터 이어져 온 특정 지역의 전통으로만 구성된 것을 뜻한다면, 오늘날 지구상에는 고유 문화가 하나도 없다. 

지난 몇 세기 동안 모든 문화는 홍수처럼 범람한 제국의 영향에 의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좋든 싫든 역사에 절대선은 없다. 과거에 존재했던 문화 대부분은 고대이든 근대이든 어떤 무자비한 제국의 군대에 희생되었고, 제국은 이들의 문화를 망각 속에 밀어 넣었다. 이러한 제국도 마침내 무너지지만, 대체로 풍요롭고 지속적인 유산을 남긴다. 그러므로 현재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은 어디에 살고있든 제국의 후예이다.

이처럼 제국의 유산을 모두 거부한다는 것은 인류 문화, 역사의 대부분을 거부하는 것이다.

오늘날 인도인 중에서 의회 민주주의, 영어, 철도망, 사법제도, 크리켓, 차(茶)가 제국주의의 유산이라며 여기서 벗어나자고 국민 투표를 요구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서 국민투표를 요구하는 행위 자체가 그들이 옛 지배자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이 아닌가?

설령 어떤 나라에서 이전에 존재했던 조상들의 소위 '진정한' 문화를 재건하고 지키려는 희망에서 타 제국의 유산을 모조리 거부하더라도, 보나마나 그때 그들이 지키는 것은 그보다 더 오래된 다른 제국의 유산에 불과할 것이다.

문화적 유산이라는 까다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정말로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길을 택하든 그 첫걸음은 이 딜레마가 복잡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역사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해서 절대선과 절대악으로 나누는 것은 별 소용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40]

6. 여담

7. 목록

7.1. 황제국

7.1.1. 아시아

7.1.1.1. 동아시아
7.1.1.2. 유목 제국
7.1.1.3. 남아시아
7.1.1.4. 서아시아

7.1.2. 유럽[59]

7.1.3. 아프리카

7.1.4. 아메리카

7.2. 패권적 의미의 제국

7.2.1. 아시아

7.2.2. 유럽

7.2.3. 아프리카

7.2.4. 아메리카

7.2.5. 오세아니아

7.2.6. 식민제국

8. 가공의 제국


[1] 독일어로 황제를 뜻하는 카이저(Kaiser)와 국가를 뜻하는 라이히(Reich)를 합친 것. 그냥 줄여서 Reich(라이히)라고도 한다. 다만 무조건 황제의 나라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항목 참조.[2] 후자의 경우는 제국주의란 단어로 구분한다.[3] 현존하는 군주제 국가가 제국을 선포하거나, 공화정 국가에서 제정복고가 이루어지거나, 기존 정부를 무너뜨리고 새 정부가 제정으로 들어선다면 제국이 다시 등장할 수도 있으나 현재로서는 그럴 가능성이 매우 낮다. 어느 나라를 가도 시대가 어느 땐데(민주주의) 아직도 왕이 다스리냐는 소리 듣기 딱 좋다. 그나마 제국이라는 사전적 의미에 부합하는 나라가 현재도 없진 않은데 국가원수로 천황을 내세우고 있는 일본이 이에 해당한다. 물론 일본도 지금은 공식적으로 제국이란 표현은 안 쓰며 정식 국호는 "일본국"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입헌군주국처럼 군주(왕)이 실질적인 통치를 안 하는 국가의 경우에도 헌법상으로는 군주가 국가의 수장이라고 명시되는데, 일본은 천황이 명목상 국가원수도 아니고 그냥 '일본/일본 국민의 상징'이라고 되어 있다. 오히려 헌법에서 주권이 일본 국민에 있다는 것이 명시된다.[4] 동아시아에서 국호 맨 앞에 붙는 大는 제국임을 의미했는데 대부분 근대 이후 이 大자를 국호에서 삭제했다. 다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大를 사용해 오해할 수 있지만, 이는 Great Britain의 Great(=大)와 유사한 케이스로 제국을 의미하는 용법과는 다르다. 한국의 경우엔 삼한의 일부인 소한과 대비되는 개념에서 대한을, Great Britain은 Lesser Britain(프랑스 북서부 브류타뉴 지역)과 대비되는 개념에서 각각 大와 Great를 사용한 것이다. 물론 대한제국 시기의 大자 활용은 제국의 의미도 의도한 것이라 봐야겠지만, 이제와 제국이 아니게 되었다 하더라도 삼한 전체를 계승한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 大자를 제거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일본은 입헌군주제다.[5] 다만 영국은 자신들이 만든 단위계를 제국 단위계(Imperial system of units)라고 부르는 등 자신들을 제국으로 여기기도 했다.[6]명나라를 예로 들자면 명목상으로는 조선, 대월(베트남), 캄보디아, 일본, 여진족, 몽골족 모두가 명나라 황제의 백성이다.[7] Imperium은 영단어로도 쓰이는데, 이 쪽은 Empire와 묘하게 뉘앙스 차이가 있다. Empire는 정치적으로, Imperium은 군사적으로 우위를 차지한 것에 약간 무게가 실린다. 뒤에 이야기할 어원의 맥락이 반영된 것이다.[8] 영어로는 "command"에 해당한다.[9] 임페리움은 정무관의 권한에 맞춰 부여되었으며 꼭 군사 지휘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조영관의 '임페리움'은 수도 로마의 공공시설물과 이를 관리하는 인력들에 대한 것이었다.[10] 로마 공화국이 매년 전쟁을 수행하던 시기에, 집정관들은 보통 그 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던 전선을 맡았다.[11] 이후 전직 집정관만을 의미하던 proconsul은 속주 총독까지 지칭하는 단어로 확대되었고, 단순히 로마 정무관의 지휘권을 의미하던 임페리움은 로마의 속주 지배를 통한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개념이 된다.[12] 공화정 후기에는 임페라토르가 단순한 군 사령관의 호칭이 아니었다.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유권자이기도 했던 군단병들이 사령관을 자발적으로 "임페라토르!"로 부르며 환호하는 것은, 사령관에게 로마 귀족의 최고 영광이었던 개선식을 치를 자격이 있다고 승인하는 관례였다. 이후 개선식에서 군단병들과 전 로마인이 개선장군을 임페라토르로 칭하며 환호하는 일은 개선장군에게 부여되는 가장 특별한 영예였다. 또 특정 개인이 공화국을 뛰어넘는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을 매우 경계했던 로마 공화국에서, 예외적으로 개선장군은 개선식 당일만큼은 종교적 권위를 드러내는 분장과 의상으로 치장하고 신에 가까운 존재로 추앙받았다. 따라서 임페라토르는 개선장군에게만, 그것도 인생의 절정인 승리와 개선의 순간에만 허용되는[90] 초월적 영예와 선망이 집약된 호칭이었다. 따라서 이 호칭이 공화정기의 군사령관에게 부여되기는 했으나 군주의 칭호가 되어도 무리가 없을 정도[91]로 범접할 수 없는 권위가 있던 것이다. 이 호칭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지위뿐만 아니라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전공이 뒷받침되어야만 했는데, 공화정 후기에는 사소한 공을 세운 지휘관들조차 개선식을 위해 휘하 병사들에게 자신을 임페라토르로 불러줄 것을 요구해[92] 빈축을 샀다. 그러다보니 두 차례 내전의 승자였던 본인이 처음 영구적으로 임페라토르를 칭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군사적 실적이 부족한 후계자에게 임페라토르 칭호를 물려주면 로마인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당연했고 나아가 정통성까지 흔들림을 잘 알았던 아우구스투스티베리우스게르마니쿠스 등 후계자 후보들을 최전선에 파견해 임페라토르 호칭에 어울리는 군공을 쌓도록 하기 위해 각별히 노력했다.[93] 출발부터 서구의 황제와 제국 개념은 군 지휘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 것이다.[13] 독재관, 혹은 현직 집정관에게 부여되는 수준의 광범위하고 속주 총독이나 법무관 등의 임페리움에 우선하는 명령권이다. 원래 1년 임기의 집정관이나, 위기시에만 독재관에게 아주 짧게 부여되던 이러한 광범위한 임페리움은, 야심가들의 꼼수나 지속되는 내전 때문에 임페리움 마이우스로 이름을 바꿔 기한을 늘려가며 점차 상설직으로 변하는 흐름을 거쳐 결국 황제의 영구적 권한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라는 천재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지만, 제정으로의 변화는 기존 로마 공화정의 헌정질서, 모스 마이오룸(Mos maiorum)이 점차 유연화되고 붕괴되는 흐름의 연속선상에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원래 독재관에게는 집정관의 권한에도 우선하는 무제한의 임페리움이 부여되었지만, 공화정 중기까지는 위기 때만 임명되는 6개월 임기의 비상설 독재관이 다른 정무관들 위에 군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때문에 예외적 상황에서 독재관이 취임할 때를 빼면 집정관이 정국을 주도했으나, 공화정 후기 정쟁이 격화되고 전란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집정관 직에서도 상대 붕당의 집요한 반대, 특히 호민관의 거부관에 시달리던 공화정기의 거물들은 점차 반대가 불가능한 독재관의 비상대권에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합법적으로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지휘할 권한이 있던 현직 집정관 술라는 호민관 술피키우스의 책동으로 인해 마리우스에게 지휘권을 빼앗겼으며, 로마 입성 후 집정관에 취임해 가급적 법의 틀 내에서 내전을 수행하려던 카이사르는 군자금 확보 과정에서 호민관 메텔루스의 거부권 행사에 꽤나 애를 먹었다. 결국 술라와 카이사르는 통상적인 6개월의 임기 대신, 무기한 임기의 독재관에 취임하며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다만 술라카이사르 이후 독재관은 공포와 독선의 대명사가 되었고, 누구나 탐낼법한 초법적 권한이 있음에도 독재관 취임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 되었다. 때문에 폼페이우스는 독재관 취임 대신 해적 소탕을 위해 3년간[94] 바다와 해안의 속주, 군대에 한해 독재관의 권한만 행사하는 임페리움 마이우스를 민회에 요청해 승인받았고, 이를 본받은 2차 삼두정치의 구성원들은 제국을 셋으로 나눈 뒤 각자의 영역에 대한 5년 임기의 임페리움 마이우스를 민회로부터 부여받아 전권을 행사하였다. 이후 안토니우스와의 내전 과정에서 삼두정치 구성원들에게 부여되었던 임페리움이 확장되어, 옥타비아누스에게 본국 이탈리아, 제국의 전체 속주와 군대에 대한 임페리움 마이우스가 부여되었다. 결국 내전 승리 후 아우구스투스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제국이 안정되지 않았다는 구실을 들어, 이탈리아와 안정된 후방의 임페리움은 내놓았지만 죽을 때까지 전방 속주와 주둔군에 대한 지휘권만은 내려놓지 않았다. 결국 이는 후계자 티베리우스가 물려받아, 로마 황제가 대대로 세습하는 권한이 된다.[14] 예컨데 제국 내의 소왕국, 공국, 후국, 변경백령, 백국, 자치령 등이다.[15] 주로 동아시아에서 볼 수 있는 형태다.[16] 다만 체면을 살리기 위해 어마어마한 정부 재정의 지출이 있었으며 이는 모두 어마어마했던 송나라의 경제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17] 이집트를 제국이라고 보기 힘든 까닭은 주변국들을 직간접적으로 지배했다고 볼 동기가 매우 모자라기 때문이다. 이집트가 하도 빨리 나타나는 바람에 주변국 자체가 없었고, 주변국으로 성장할 만한 잠재력 있는 집단은 다 제 발로 이집트에 복속되려고 안간힘을 썼기 때문이다. 굳이 머리 터지게 써서 어려운 인프라와 기술을 구축하고 나라를 만들어서 그 이집트와 척을 지느니 그냥 이집트에 복속되어 이집트의 제도와 기술을 물려받는 편이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집트가 정말 국력을 기울여서 치른 전쟁은 히타이트와의 카데시 전투가 거의 처음이나 다름없었다.[18] 왜 한족 문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한족이 되려고 하지 않느냐? 하는 반감이다.[19] 어원은 삼황오제이다.[20] 사실 통상의 경우 정통성은 동양이 더 따졌는데 왜 황제로서의 자격은 유럽이 더 정통성을 따지냐는 의문이 드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그 이유는 교황의 존재였다. 교황이 직접 인정해야만 로마의 후예를 자처할 수 있었던 유럽은, 만약 "이전 제국(로마)에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으니 내가 뒤집겠다!"라는 식의 발언을 할 경우 교황에게 파문 당하고 가문이 풍비박산 났다. 반면 동양에서 교황의 포지션은 천자, 즉 중원의 패자 그 자체였다. 그래서 중원을 통일한 자가 "이전 왕조에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으니 내가 뒤집어엎겠다!"고 하면서 명분론을 통해 정당성을 스스로 부여할 수 있었다.[21] 이것은 문화적 가치하에 볼 수 있고, 실제로 중원 왕조는 중화문에 대한 정벌을 질서에 배치되는 토착 문명에 대한 멸시감을 갖고 있었다.[22] 또한 어디까지나 자국의 권위에 배치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관대함을 베풀었고, 전한왕검성 전투당나라고구려-당 전쟁의 예와 같이 자국이 구축한 질서를 따르지 않는 국가에 무력을 동원하기도 했다. 이는 중원 왕조의 군주와 관료들은 기본적으로 유학 교육을 받아 고도의 철학적 소양을 구비한 것에서 기인한다. 유학의 핵심 이론이 중화가 가장 존귀하고 이적은 비천하기에 마땅히 중화가 이적을 교화해야 한다는 '화이론'과, 천하의 지배자인 천자(天子) 밑으로 모든 이적의 수장들이 마땅히 복속해야 하며 이를 거부하는 자를 정벌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방벌론(放伐論)'이었다. 제국의 통치자 입장에서는 유학적 가치하에 제국의 근본이 되는 핵심 이념을 수호하기 위해서 이적에 대한 정벌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23] 사실 이 상황은 그 당시에 있었던 아시아주의라는 사상이 등장했던 배경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다. 아시아주의 문서로.[24] 양자강 유역 내지는 그보다 남쪽에 위치, 한족계열 왕조.[25] 다만, 고국양왕을 소열제라고 일컬은 중국 사서의 기록이 존재해 애매하긴 하다.[26] 태왕호는 황제가 왕보다 확실하게 위라는 인식이 생기기전 천왕호같은 왕중왕의 의미를 가져 사실상 황제호라는 견해도 다수 존재한다[27] 대표적으로 광종은 황제 칭호와 더불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항의로 인해 포기하였고 이후 고려 군주들은 외적으론간혹 몇몇 경우를 제외하곤 제국을 칭하지 않고 내부에서 천자국 체제를 갖추었다.[28] 하지만 공식적으로 서로마의 황제위는 서로마가 멸망할 때 로마의 분할통치 원칙에 따라 이미 자동으로 동로마에 귀속되어 있었다.[29] 당시 로마 市는 교황령이었고 교황령은 신성 로마 제국과는 별개의 국가였으나 이탈리아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황령과 신성 로마 제국을 부부관계와 비슷한 관계로 여기고 있었기에 로마 市의 주인은 신성 로마 황제라고 인식하고 있었다.[30] 그래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K.U.k(kaiserreich und königsreich)라고도 한다.[31] 히틀러가 황제가 아니었음을 생각하면 왜 제국이라 부르는지 의아해할 것인데, 제3제국은 독일어로 Das dritte Reich라고 한다. Reich는 황제가 통치하는 일반적인 제국(帝國, Empire)를 뜻하는 게 아니라 나라나 영토의 개념에 더 가깝다. 그러나 서로마 제국을 계승한 황제국임이 분명했던 신성 로마 제국도 Reich를 국호로 썼고 제3제국이라는 명칭에 신성 로마 제국 - 독일 제국으로 이어지는 유럽 중부의 강대국이라는 지위와 이미지를 이어받고자 하는 의도가 포함돼 있었음을 고려할 때, Reich에 중의적 의미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여담으로 독일 제국과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의 공식 국호는 모두 독일국(Deutsches Reich)이었다. 때문에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수상은 공식적으로는 이전 독일 제국의 수상들까지 포함하여 제 10대 독일 수상으로 명명된다.[32] 정작 히틀러는 군주제를 매우 혐오했던 사람이다.[33] 나폴레옹이 교황을 강압하여 스스로 황제의 관을 쓴 것이 단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준다.[34] 엄밀히 말하면 카이사르는 황제라기 보단 권위있는 황족에게 부여하는 부제(副帝) 혹은 공동황제의 칭호였다.[35] 서유럽에서 오스만 제국 파디샤를 황제로 인정한 것은 오스만 파디샤가 칼리파를 겸했기 때문에 타 문화권의 황제이자 교황과 비슷한 지위로 두고 인정한 것이지 로마 황제의 후계자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36] 단일 국가로서가 아닌 본토와 식민지의 영토 크기.[37] 몽골 제국보다 더 넓게 쳐주는 자료도 있다. 몽골 제국은 전근대 국가 특성상 국경이 모호하고 부마국 고려를 비롯한 종속국들을을 영토로 인정할지 말지의 여부(대부분의 자료에선 인정되는 편이다)에 따라 면적의 오차범위가 매우 크다. 따라서 사실 러시아 제국과 2, 3위를 가리는 비교가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38] 유럽, 아시아, 북아메리카[39] 또한 기껏해야 200년 정도밖에 전성기 시절의 영토를 유지하지 못한 1, 2위의 제국과는 달리 현재까지 수백년간 영토의 상당 부분을 보전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세계 영토 순위 1위이다.[40] 이 문단의 내용의 출처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이다.[41] 따라서 현대 역사학계로 넘어가면서 이들 국가의 제국 성립 연도가 뒤로 밀렸다. 한국사와 비교하면 조선대한제국왕실은 같지만 국가 체제를 구분하는 것과 비슷하다.[42] 정식 국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43] 그나마도 최근엔 돈 씀씀이만큼 성적이 안 나오는 경우가 늘고 있다.[44] 중국 대륙의 역대 왕조라고 해서 모든 국가들이 한족이 세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역대 왕조중 수, 당(선비족), 원나라(몽골족)나 청나라(만주족) 같이 이민족이 세운 왕조들도 많다.[45] 시황제황제 즉위 기준[46] 진 멸망 직후에 초의제가 황제로 즉위했으나, 1년도 못 가고 붕괴되었다.[47] 손권의 칭제 기준[48] 요태조의 칭제 기준[49] 정강의 변[50] 애산 전투[51] 금태조의 칭제 기준[52] 국가 자체는 1635년까지 존속했지만, 황제 칭호는 1388년까지만 사용했다.[53] 숭덕제의 칭제 기준[54] 덴무 천황 이전 야마토 왕권천황들은 살아있을 때 대왕에 해당하는 칭호인 오키미를 칭했다가 덴무 천황 또는 이후의 천황들에 의해 추존되었다.[55] 국내에서는 천황을 칭하고 대외적으로는 일본국왕 등의 칭호를 사용했다. 다만 천황이 허수아비로 전락한 막부 시대에는 아시카가 요시미츠쇼군들이 천황 대신 일본국왕으로 책봉받았다.[56] 정식 국호에서 제국을 삭제했지만, 천황은 여전히 국제사회에서 'Emperor of Japan'이라 불리고 있다.[57] 강덕제 즉위 기준.[58] 초기에는 왕중왕을 칭했으나 로마 제국에 맞서 정식으로 독립을 선포한 이후에는 아우구스투스임페라토르를 칭했다.[59] 역사적, 문화적으로 유럽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아나톨리아도 같이 서술한다.[60] 아우구스투스 즉위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까지[61]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의 동서 로마 분할통치 부터 라벤나 함락까지[62]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의 동서 로마 분할통치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까지[63] 4차 십자군 이후 수립된 동로마 제국잔존국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고 제국을 재건하는데 성공하여 정통으로 인정받고 있다.[64] 카롤루스황제 대관식 기준[65] 오토 1세의 황제 대관식 기준[66] 황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67] 나폴레옹의 몰락[68] 워털루 전투[69] 스당 전투[70] 대타협[71] 독일 통일[72] 독일 11월 혁명[73] 4차 십자군 이후에 수립된 동로마 잔존국이지만 니케아와 달리 정통으로 인정받지 못한다.[74]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의 칭제[75] 시메온 1세의 칭제 기준[76] 아센과 페터르의 난[77] 1396년 불가리아 제국의 마지막 영토였던 비딘 전제군주국까지 수도가 함락되어 황제였던 이반 스라치미르도 잡혀 옥사하나, 1397년 그의 아들이였던 콘스탄틴 아센 2세가 비딘 전제군주국의 제위를 계승했다고 기록된걸 보면 어떻게든 영향력은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78]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79] 러시아 혁명[80] 암하라어로 왕중왕을 뜻하는 느구서 너거스트를 칭했다.[81] '유일한 군주를 뜻하는 사파 잉카를 칭했다.[82] 독립운동가 장 자크 데살린황제 자크 1세로 등극하며 수립한 제국이다. 자크 1세가 암살당해서 단명했다.[83] 대통령 포스탱 엘리 술루크가 황제 포스탱 1세로 즉위하여 수립된 제국이다. 포스탱 1세 퇴위 이후 아이티는 다시 공화국이 되었다.[84] 토르가 태어나기 전 한정.토르가 태어난 후 작중 시점에서는 평화주의 노선으로 변경,제국주의 국가가 아닌 상태다.[85] 제국의 이름은 쓰지 않지만 지배층인 아인즈 울 고운을 선두로 하는 나자릭 지하대분묘의 목표가 세계정복이고 그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만큼 엄연히 창작물에서 말하는 제국의 사례에 들어간다.[86] 농담 삼아서 유럽연합을 제4제국으로 부르기도 한다.[87] 국명에 제국(Empire)이 붙어있지 않을 뿐이지 엄연히 황제가 통치하며, 국력 또한 코프룰루 구역 최강의 세력이다.[88] 작중에서 제국으로 불린다.[89] 황제가 존재하지도 않고, 오히려 로마 공화정과 비슷한 통치 구조이지만 황금기에는 감히 프로토스 제국에게 대적할 만한 세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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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개선식 이후에도 고참병들이 옛 사령관을 애정을 담아 임페라토르로 부를 때가 있기는 했지만, 그 정도의 예외를 제외하면 이는 모든 시민들이 사용하는 영구적인 호칭이 아니었다.[91] 실제로 마리우스나 술라,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 등 화려한 전공을 올려 임페라토르로 환호받았던 이들은 독재자로 군림해 왕으로 등극하게 될 거라는 의심을 끊임없이 받았다.[92] 정치적 사정으로 이런 경우에도 개선식이 허용되는 일이 가끔 있었는데, 당연히 당대 로마인들도 이름뿐인 개선식과 '임페라토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는 빠르게 잊혀졌다.[93] 이렇게 황제나 계승 후보자가 최전선에 나가야만 하는 관행은 클라우디우스 이후 제정이 안정화되고 브리타니아 정복처럼 휘하 장군들이 수행한 전쟁도 황제의 공으로 인정되어 자연스럽게 개선식을 치르게 되면서 정리된다. 대 드루수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등이 줄줄이 객사하는 등 교통이 매우 불편하고 전염병과 매복 등 위협이 도처에 존재하던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황제나 그 후계자가 계속 전선에 나가 있는 것은 위험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래도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에 앉아 서류만 만지지 않고 직접 출정했음을 보이기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잠깐이나마 브리타니아를 방문해야 했다. 그러면서 임페라토르는 자연스럽게 황제 가문이 세습하는 칭호가 된다.[94] 폼페이우스는 절대적 권한을 효율적으로 행사해 3개월 만에 임무를 완수하고 깔끔하게 이 전대미문의 임페리움 마이우스를 내려놓았다. 다만 이는 특정인에게 장기간 임페리움 마이우스를 부여할 수 있는 선례가 되어, 공화정 헌정의 붕괴로 이어지는 단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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