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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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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
金翰秀 | Kim Han-Soo
출생 1971년 10월 30일 ([age(1971-10-30)]세)
서울특별시 동작구[1]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서울강남초 - 신월중 - 광영고 - 중앙대 (신문방송학 / 학사)
신체 188cm, 94kg, B형
포지션 3루수, 1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94년 2차 1라운드 (전체 8번, 삼성)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 (1994~2007)
지도자 삼성 라이온즈 2군 타격코치 (2008)
요미우리 자이언츠 연수코치 (2009)
삼성 라이온즈 1군 타격보조코치 (2010)[2]
삼성 라이온즈 2군 수비코치 (2010)[3]
삼성 라이온즈 1군 타격코치 (2011~2016)
삼성 라이온즈 감독 (2017~2019)
두산 베어스 1군 수석코치 (2023)
두산 베어스 1군 타격코치 (2024)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타격코치 (2013)
병역 방위병 (1995~1996)
응원가 실로암[4]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삼성 라이온즈2.3. 연도별 성적
3. 지도자 경력4. 여담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야구인.

2022년까지는 삼성 라이온즈에서만 선수, 코치, 감독을 맡은 대표적인 원클럽맨이었다.[5]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삼성 라이온즈 감독을 맡았다.

1994년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6] 1994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2007년에 은퇴할 때까지 줄곧 삼성 라이온즈에서 뛴 원클럽맨이다. 삼성 라이온즈의 소리없는 강자로 14시즌동안 통산 WAR을 35 가까이 기록하는 등 준수한 내야수였다.

주 포지션은 3루수. 박석민, 이원석, 김영웅 이전 삼성의 핫코너를 책임지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2008년 3월 30일 은퇴식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2008년에는 2군 코치로 활동했다. 등번호는 50번 - 25번 - 5번이며, 5번을 가장 오래 달았고, 코치 시절에도 1년간 5번을 달았지만,[7]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코치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2010 시즌에는 86번으로 등번호를 바꾸었다.

2016년 10월 15일 자로 류중일 감독의 뒤를 이어 삼성 라이온즈의 제14대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 엠엘비파크 등에서는 류중일 감독의 재계약 불발에 아쉬워하면서도 다른 감독보다는 차라리 김한수가 제일 낫다는 평가. 여담으로 찬물옹이라는 별명에 따라 감독으로서의 별명은 냉동님, 찬동님이 되었다.

전임자인 류중일도 그렇듯이 김한수 역시 삼성 원클럽맨으로 활동한 프랜차이즈 선수이다. 게다가 둘 모두 프랜차이즈 스타라 불릴 만한 활약을 했으며 내야수 출신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출신지 서울특별시와 몸담은 팀의 연고지 대구광역시가 다르다는 것[8]과 현역 선수 시절의 우승 경력 정도. 류중일은 현역 시절엔 우승을 못하다가 코치가 되고 나서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첫 우승반지를 껴 봤고, 김한수는 선수 시절 3번의 우승을 경험하고 코치가 되고 나서 3번을 더 경험해봤다.

선수, 타격코치로서의 평가가 매우 좋고 실제로도 팬들에게 보인 면모로 신사 이미지, 사람 좋고 능력까지 좋은[9] 코치인 데다 삼성 라이온즈의 순혈 감독이라[10]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11] 감독으로서는 혹사를 하고[12] 재임 기간 내내 포스트시즌에 올리지 못하는 기대 이하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며 팬들에게 '김한숨'이라는 별명을 부여받고 까이는 존재가 되었다.

KBO 리그에서 이순철, 이만수와 함께 감독 빼고 다 잘하는 인물로 반드시 최우선적으로 거론되는 인물.[13] 이러한 유형의 경우 개인 역량은 충분하지만 성격이 감독에 적합하지 않거나 경기를 안정적으로 운영해가는 능력만 떨어지는 유형으로, 감독 재임 기간인 2017년~2019년의 실패가 이례적이었을 뿐 그 외의 커리어들은 대부분 성공적이었다.

2022년까지 선수 시절과 지도자 시절을 통틀어 몸담은 팀은 삼성 라이온즈 한 팀이였으나, 후배인 이승엽의 부름을 받아 두산의 수석코치로 부임하게 되었다.[14] 그의 야구인생을 통틀어 첫 이적이라고 할 수 있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삼성 라이온즈에 지명받기 전까지 서울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졸업한 서울 토박이다.
하지만 원 클럽맨으로 대구에서 워낙 오래 있었기 때문에 대구 팬들은 김한수가 전형적인 대구 출신 야구인의 코스인 경북고나 대구고 야구부 출신으로 대학만 서울에 간 것으로 착각했을 정도이다 실제로는 학창시절에는 대구와는 아무 인연이 없는 서울토박이, 서울 동작구에서 태어났다. 상도동에 있는 서울강남초등학교에 진학하여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이후 양천구 신월동 소재 신월중을 거쳐 역시 신월동 소재 광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과 (90학번)에 진학했다. 중앙대 야구부 시절 우상 장종훈을 만나 많은 조언을 들었다고 한다.

김진영삼미 슈퍼스타즈 감독과 김경기 SK 와이번스 2군 감독 부자(父子)와 더불어 KBO 리그의 대표적인 부자 야구스타로 유명했다. 김한수의 아버지인 김영복 前 농협 야구단 감독은 1950년대 등번호 5번을 달고 실업야구를 주름잡았던 명 3루수 출신의 야구인이었다.[15] 아들인 김한수도 대를 이어 3루수를 맡았고 현역 시절 등번호도 아버지와 같은 5번을 달았다.[16]

강남초등학교 5학년 때에 야구를 시작했으며, 장종훈을 존경했다고 한다. 또한 양준혁과 마찬가지로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할 뻔한 에피소드가 있었다.[17]

2.2. 삼성 라이온즈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3루수 부문 수상자 (1998~1999, 2001~2004)

핫 코너의 본좌, 김성래 - 김한수라는 삼성의 5번라인 중 한 명. 한때 김종훈과 함께 삼성 가을야구의 쌍두마차로 역임했다. OB 베어스 - 두산 베어스안경현 - 장원진에 뒤쳐지지 않는 최강의 쌍두마차로 꼽히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 1995년 유니폼의 전성 시대를 이끌었던 3김 타자 중 한 명이다.[18] 단 나이로 보나 커리어로 보나 인지도로 보나 가을에만 강하고 커리어 상 주전에는 한끗 못미친 둘보다 김한수가 한 수 위다.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kimhansoo1_600.jpg

주전 3루수였던 김용국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되자, 우용득 감독은 3루수 후보로 김한수를 낙점했다. 또한 그 뒤를 받칠 김태룡이 수비로는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워낙에 타격이 빈약했던지라 김한수는 신인이던 1994년부터 무난히 주전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1995년과 1996년 사이 방위병으로 복무하게 되여 반쪽짜리 선수가 되었고[19], 부상으로 시즌을 통째로 쉬기도 했다. 1996년 5월 21일 방위병에서 소집해제된 후 투입예정이였지만 손바닥, 무릎 부상으로 30경기에 출장하는데 그치고 1997년 백인천 감독 아래에서 본격적인 두각을 나타냈는데, 당시 이승엽-정경배-김태균-김한수로 이어지는 삼성의 철벽 내야진 라인업으로 종횡무진하며 맹활약하기 시작한다.

끊임없이 트레이드 떡밥이 나돌던 선수. 대표적으로 1997년 말 삼성이 현금 트레이드로 해태의 조계현을 영입했을 때도 원래는 현금이 아닌 김한수가 해태로 트레이드될 뻔했다는 설이 있었고[20] 2000년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어 최대어로 떠올랐던 홍현우가 만약 삼성으로 갔으면 김한수는 벤치워머 신세 내지는 트레이드 카드 신세밖에 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여기서 삼성 프런트가 김한수를 믿고 홍현우 영입을 포기했다는 일설이 있다는데 1999 시즌은 김한수 개인적인 커리어 하이었지만 99시즌은 역대급 타신투병 시즌이었던 데다가[21] 김한수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게 군복무를 마치고 98년도부터로 이 당시에는 별로 보여준게 없었다. 그래서 2000년에 상당히 부진했을때 삼성이 홍현우를 FA로 영입해 타선을 보강하고 김한수는 트레이드 카드로 쓸 것이라는 소문이 유력했을 정도였다. 어쨌든 당시 홍현우의 공격력이 워낙 압도적이었고 홍현우는 1990년대 누적 WAR 1위를 기록할 정도로 보여준 게 있었다. 게다가 홍현우는 주 포지션은 3루수였지만 커리어 하이를 보냈던 1999년 시즌에는 대부분 2루수로 출장했으며 이종범이 일본으로 간 뒤 해태 유격수 자리가 공백이 생겼을 때는 정성철 대신 가끔 유격수 알바도 뛰었다. 즉, 내야 아무 포지션이나 뛸 수 있는 선수가 타격, 수비, 선구안, 주루 모두 수준급이었기 때문에 데려왔으면 어떻게든 쓰일 수 있었지만, 그냥 삼성이 FA로 영입을 안 했고 이것이 신의 한수가 되었다.[22] 다만 만약 삼성이 이 당시 홍현우를 FA로 영입했다고 해도 3루수 김한수가 아니라 김한수보다 공격력이 떨어졌던 2루수 정경배가 밀렸을 가능성이 컸다.[23] 그리고 홍현우는 당시 삼성 못지않게 FA에 돈을 많이 투자하던 LG 트윈스로 갔다.[24]

비슷한 시기에는 두산 베어스김동주와도 트레이드가 이루어질 뻔했다는 이야기도 있고[25] 이후 주전 3루수를 찾던 롯데와 KIA의 요청으로 트레이드될 뻔했던 일화도 있었을 정도로 트레이드 떡밥이 많던 선수였다. 하지만 김한수의 경우 수비가 괜찮은 수준이었고 2000년 한 해만 폭망했지 한 5년간은 꾸준히 타율 0.280, 15홈런 정도를 쳐줬던 선수였던 데다가 WAR 2~4 정도 찍었을 정도로 준수했기 때문에[26] 은퇴할 때까지 삼성이 붙잡고 있다가 확연히 성적이 떨어진 2006년을 기점으로 밀려난다.

팀의 가을야구 진출과 2002년, 2005년의 우승 주역으로 활동했으며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할 때에는 팀의 주장으로 활약했다. 준우승을 이루어낸 2004년 한국시리즈 9차전에는 4번 타자로 활약하기까지 했다. 또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도 자주 차출되어 대표팀의 주전 3루수로 뛰었는데, 2000 시드니 올림픽,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등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 대회에 꾸준히 참석했다.
2004 시즌 후 FA 자격을 얻었고, 한 때 삼성과 협상이 결렬되어 팀을 떠날 위기에 처했으나, 우선 협상 마지막 날 4년 총 28억원(계약금 10억원, 연봉 4억원, 옵션 2억원)에 삼성과 계약하였다. 삼성과 재계약이 무산됐을 경우 롯데 자이언츠행이 매우 유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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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005년 선동열 감독이 부임한 뒤 골든글러브 유격수 출신 박진만이 FA로 합류함에 따라 전년도 유격수를 맡던 조동찬이 3루수로, 1루수를 보던 양준혁이 지명타자로 이동하는 등 내야진 교통정리가 이뤄졌고, 이미 30대 중반에 나이에 접어든 김한수는 자동적으로 1루수로 전향하며 10년간 정들었던 3루수를 포기하게 된다. 1루수 전향 첫 해인 2005년에는 타율 0.293에 15홈런으로 괜찮은 모습을 보였으나 2006년부터 노쇠화가 시작되며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2005년 한국시리즈에선 16타수 3안타를 기록하고 이듬해 2006년 한국시리즈부터는 21타수 1안타 타율 0.048을 기록하면서 큰 경기에서 기량이 떨어졌다. 한 때 KIA 타이거즈와 트레이드설도 있었다.[27] 결국 2007 시즌 후 FA 계약기간이 1년 남아 있었음에도 구단의 종용에 따라 은퇴, FA 계약 마지막 해였던 2008년에는 마이너스 옵션 5천만원을 삭감한 금액인 3억 5000만원의 잔여연봉을 받으며 2군 플레잉 코치로 뛰었다. 은퇴식은 2008년 3월 30일 대구 KIA전에서 열렸으며, 삼성 선수 출신 은퇴식은 류중일-김현욱 이후 3번째였다.

현역으로 뛰던 당시 수비만은 국내 정상급의 3루수였으며 언제나 안정된 수비로 김태균, 김재걸과 더불어 삼성의 철벽 내야진 구축에 일조했다. 김한수의 폭풍간지같은 수비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일품이다.[28]

선수 시절 3루수 골든글러브를 무려 6회나 수상하며 한대화, 최정(8회)에 이어 통산 3루수 골든글러브 수상 3위에 올라 있지만 이 중 몇 차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 편이다. 대표적인 피해자가 바로 김동주. 1998년 김동주는 신인이었으며[29] 김한수가 비교 우위이다. 1999년은 김한수의 커리어 하이이며 3루수 중 WAR 1위를 기록하며 수상했다. 2000년은 김동주가 3-30-100을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이었던데다 김한수는 이 해 예년과 다르게 부진했다 보니 압도적인 차이로 김동주의 수상. 2001년 김동주는 대부분 지명타자로 뛰었던 데다 김한수의 성적도 충분했다.[30] 논란이 가장 있던 시즌은 2002년으로, 김동주페르난데스가 압도적 성적을 기록했지만 정작 골든글러브는 삼성의 우승 버프로 김한수가 수상했다.[31] 2003년에는 김동주는 지명타자로 뛰면서 골든글러브 역시 지명타자 부문을 수상했고 김한수의 성적 역시 충분했다.[32] 2004년은 이범호가 3루수 중 압도적인 성적[33]을 기록해서 역시나 논란이 있는 시즌이다. 한국 프로야구 3루수 골든 글러브의 계보는 한대화-홍현우-김한수, 김동주-이범호-최정으로 볼 수 있는데 타격 성적만 본다면 가장 떨어진다. 김동주는 커리어 대부분 김한수의 타격을 압도했으며 홈런은 모든 시즌에서 우위에 있었다. 거기다 김동주가 속한 두산 베어스의 홈 구장은 그 드넓은 잠실이었던 반면, 삼성 라이온즈의 홈 구장은 시민구장이었으니. 타격성적만으로 골든글러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는데 수비 하나로 눌렀다기에는 논란이 많은 수상기록이다. 물론 수비실력이야 김한수가 우위였어도 대부분 타격성적이 김동주가 넘사벽이었으며, 수비에서도 김동주는 국가대표팀에서 3루수를 볼 만큼 돌글러브도 아니다. 삼성의 호성적과 김동주가 데뷔 초부터 잦은 부상과 사생활 문제로 인한 논란을 일으키면서 김한수가 혜택을 받았다는 게 중론이다.

전체적인 선수 시절의 커리어를 따져볼 때는 등번호 5번의 전 주인인 김성래와 달리 임팩트 있는 성적을 남긴 적은 없으나, 꾸준히 제 몫을 다해준 타자로 평가받는다. 통산 1497경기에 출장하여[34] 타율 0.289, 149홈런, 1514안타, 782타점에 골든글러브 3루수 부문 6회 수상, 최다 사구 2위, 최다 끝내기 안타 1위라는 기록을 남겼다. 특히 그의 전성기가 타고투저가 강했던 99~03년인걸 감안하더라도 거의 6000타석 가까이 들어서서 통산 wRC+가 112.4에 sWAR*가 34.36으로, 2000년을 제외하면 늘 제 몫을 해주던 선수였다. 괜히 별명이 소리 없이 강한 남자겠는가? 특히 뛰어난 수비와 적당한 타격으로 삼성 라이온즈의 2002년, 2005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크게 공헌한 측면에서, 박석민이 등장하기 이전 라이온즈 역사상 가장 뛰어난 3루수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어떻게 보면 강석천과 굉장한 비슷한 경우.[35]

초구에 강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김한수의 타격론으로는 경기 말 찬스 상황에서는 투수가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초구에 스트라이크를 던지려는 확률이 높아서 초구를 집중적으로 노린 게 타자 입장에서는 유리하다는 것이 그의 타격론이다. 또한 이정후, 박병호, 김하성 이 세 사람이 몸쪽 공을 통타할 때 나오는 몸통스윙과 특유의 팔로스루 동작은 김한수의 시그니처 스윙이자 주무기였는데. 이 중 박병호는 직접 김한수에게 조언을 구했고 김한수 역시 팔을 재빨리 놓아(만세타법에서 만세를 하지 않고 빠르게 내려놓듯이) 배트 스피드를 강화하는 훈련을 전수했다고 한다. 이후 김한수는 KBO 정상급 선수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비법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극찬했다.

2.3. 연도별 성적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글씨는 리그 5위 내 기록.
역대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출장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4 삼성 103 279 .272 76 13 2 10 31 41 6 17 .441 .313
1995 34 92 .304 28 4 0 2 13 17 3 4 .413 .330
1996 30 54 .185 10 0 0 0 1 7 1 4 .185 .241
1997 124 466 .292 136 27 1 9 68 57 9 43 .412 .350
1998 126
(1위)
463 .300 139 24 1 15 80 65 5 25 .454 .332
1999 128 497 .340
(4위)
169
(4위)
36
(3위)
1 18 88 87 7 46 .525 .391
2000 126 464 .263 122 26 1 7 57 54 8 43 .369 .322
2001 117 427 .311 133 29 2 13 61 59 3 41 .480 .366
2002 127 486 .311 151
(5위)
23 1 17 76 69 4 49 .467 .371
2003 131 478 .295 141 23 1 17 70 67 5 46 .454 .354
2004 133
(1위)
498 .271 135 30
(3위)
1 16 84 60 1 50 .432 .335
2005 114 406 .293 119 18 0 15 73 55 1 53 .448 .372
2006 103 343 .254 87 15 0 7 54 41 6 47 .359 .340
2007 101 289 .235 68 11 1 3 26 25 0 21 .319 .283
KBO 통산
(14시즌)
1497 5242 .289 1514 279 12 149 782 704 59 489 .432 .346

3.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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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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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담

  • 선해 보이는 외모에 걸맞게 대인배로 유명하며, 성실함과 인성을 모두 갖춘 선수로도 알려져 있다. 방위복무 때 원정 때면 경산에 찾아가 연습을 할 정도였다.
  • 1971년생임에도 불구하고 나이에 비해 상당히 동안이다. 코치와 감독 시절에도 은퇴 직전 외모와 별로 변한 게 없을 정도로 동안 외모를 꾸준히 유지 중이다. 변함없는 동안 외모 탓인지 한때 같은 팀에서 선수로 뛰었던 현재윤 해설위원과 제법 닮은 편이며, 안경을 쓴 채 정면을 보면 야왕 한대화와 비슷해보이고, 썬글라스와 모자까지 씌운 모습마저 김태한과 닮았다. 해외에도 닮은꼴이 있는데, 용사 요시히코와 마왕의 성에서 부처로 분한 배우 사토 지로와 닮았다.
  • 자신의 팬카페를 통해 매년 야구용품 자선경매를 열고 있다. 야구용품은 주변 동료 코치나 선수들에게 기증받는듯 하다.
  • 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의 대미를 장식한 명품조연이다. 당시 롯데 김민재의 안타 때 3루에 있던 김한수가 공을 더듬는 바람에 누상에 있던 임재철이 부리나케 홈으로 돌진, 결국 그게 롯데의 결승타점 및 득점이 되어 삼성은 치열했던 플레이오프에서 허무하게 탈락했다.
  • 별명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소리없이 강한 남자, 한수옹, 찬물옹 등등 여러 별명이 있었다. 특히 현역 시절 크게 눈에 띄지 않는 것 같은데 찬스에서는 유감없이 클러치 능력을 보여주었고 수비에서도 공헌도가 높아 팬들은 김한수를 소리없이 강한 남자 라고 입을 모아 칭송하기도.
  • 등번호인 5번과 '달려라 김한수~'와 '날려라 김한수~'로 시작하는 응원가는 김한수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36][37][38]
  • 같은 팀의 동갑내기인 김태균과 친한 사이라고 한다.[39]
  • 은퇴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코치 연수를 받다가 야구선수 기무라 타쿠야와 친해져 나중에 기무라가 한국에 오면 밥 한끼 사주기로 약속했지만, 기무라 타쿠야가 급사하면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 문서에도 서술되었지만, 2017년에 3루측 익사이팅존 일부 좌석을 한수 울타리존으로 지정했다. 해당 좌석을 구매한 팬들에게는 경기 전 그라운드로 초대해 승리를 기원하는 의미로 김한수 감독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기회가 주어진다. 취지와는 별개로 괴상한 이름 때문에 삼성 팬들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한수 울타리'는 김한수 감독 팬클럽의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즌 시작 후 최악의 성적으로 인해 20경기조차 채우지 못하고 잠정 폐지되었다.
  • 사시가 있다. 감독 취임식 당시 사진을 보면 양쪽 눈의 초점이 약간 다르다는 걸 알 수가 있다.
  • 감독으로의 기본적 역량은 떨어진다는 평가지만 야구 현장에 오랫동안 재직해서 그런지 야구에 대한 감이 있는 편이라 가끔씩 신의 한 수를 둔다. 이원석을 본인 요청으로 영입한 것과 4월 내내 삽질하던 다린 러프를 믿어준 것 또 2019 시즌 키움 히어로즈 9차전에서 박한이를 대타로 둬 역전타를 친 것도 포함.
  • 2018년 골든글러브 시상식 때 수염을 기른 것이 발견되었고, 이후 2019년 미디어데이에는 상당히 많이 길렀다.[40] 하지만 팬들은 당장 정리하라고 성화다. 본인도 이것을 알기라도 하였는지 7월 중에 싹 다 정리하였다.

5. 관련 문서


[1] 삼성 라이온즈의 지명을 받고 프로 입문 당시부터 대구광역시에서 활동한 탓에 현역 선수 시절에도 대구광역시 출신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데뷔 초 선수 시절에는 삼성의 나이 많은 팬분에게 "니는 경고 아가? 상고 아가?"라는 소리를 그렇게 많이 들었다고 한다.[2] ~6월 12일[3] 6월 13일~[4] 날려라~ 김한수(헤이!) 날려라~ 김한수(헤이!) 날려라~날려라~ 김한수X2[5] 요미우리식 순혈주의에 가장 잘 부합하는 삼성 선수로 꼽힌다. 2023년 이후로는 류중일과 투톱.[6] 1994년 삼성의 1차 지명자는 감병훈이었는데 막상 1994 시즌이 개막하고 뚜껑을 열어 보니 김한수가 1차 지명자 노릇을 했을 정도로 감병훈은 역대급 실패작이 되었다.[7] 김한수는 2004년 말 FA로 4년 계약한 뒤 계약 3년차였던 2007 시즌을 마치고 은퇴를 선언하기는 했지만, 정확하게 따지자면 2008년에는 FA 계약기간이 1년이 남아 있던 탓에 플레잉 코치 신분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4년 간의 FA 계약이 끝나자마자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코치 연수를 갔으며, 등번호 5번은 조동찬으로 이어지게 된다. 현재는 구자욱이 번호를 이어가고 있다.[8] 이 때문에 류중일성골로 분류하기도 한다.[9] 보통 사람이 좋으면 능력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으나 김한수의 경우 사람도 좋고 능력도 좋았다. 물론 타격코치로서의 역량 한정.[10] 요미우리식 순혈주의를 따졌을 때 류중일 이후, 삼성 라이온즈 순혈 제 1순위였다. 2023년 이후로는 류중일과 똑같은 진골이다.[11] 이때까지만 해도 김한수의 주요 별명은 '소리없는 강자', 내지 찬물옹 혹은 냉동님이었다.[12] 김한수 재임기 동안의 삼성이 객관적으로 약팀이긴 했지만, 확실하게 리빌딩을 한 것도 아니고 불펜 자원들을 계속 갈아마셨는데도 그에 걸맞은 성적이 안 나왔다는 게 문제였다.[13] 물론 이만수는 감독대행 시절을 포함 한국시리즈 2회 준우승의 커리어를 기록했지만, 임기 말년 가을야구 실패 및 선수 운영, 육성에 있어서 SK 팬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14] 사실 삼성에서는 이미 실패한 감독으로 분류되기에 그보다 낮은 코치로라도 다시 부르기는 쉽지 않다.[15] 공교롭게도 앞서 언급한 김진영 前 감독과는 인천고등학교 야구부 에서 인천고 50년대 전성기를 열었다. 유격수 김진영, 3루수 김영복. 이후 두 사람 모두 국가대표에도 함께 선발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16] 김영복 씨는 2000년 막내아들이었던 김한수의 결혼식 전날에 급정거하는 버스 안에서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히고 2달 동안 사경을 헤메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17] 중앙대 시절에 그다지 유명한 선수가 아니었던 김한수를 당시 신생 팀이었던 쌍방울이 김한수를 지명할 것으로 예상되었고 김한수 본인도 쌍방울이 지명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정작 삼성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자 본인도 놀랐다고 한다.[18] 나머지는 김종훈, 김재걸.[19] 그 시기에 이동수가 신인왕을 탔고, 홍현우가 3루수 골든글러브를 차지했다.[20] 야만없이지만 김한수가 1998년 해태 3루에서 그 정도 했으면 해태는 4강이 아니라 2위도 넘볼 수 있었을 만큼 2위와 5위의 차이가 몇 경기 안났다. 김한수와 포지션이 겹치는 홍현우야 2루로 가면 되니까.[21] 한국프로야구/1999년에 잘 나와 있다.[22] 당시 홍현우의 몸 상태를 어느정도 인지하고 있었던 삼성이 홍현우와 계약을 하는 조건으로 엄청난 옵션 조건을 걸어서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말이 있다.[23] 그리고 정경배는 2001년 시즌 부진했고 결국 그 해를 끝으로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된다.[24] 다만 홍현우의 몰락은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상태였다. 30-30을 찍으며 커리어하이 시즌이었던 1999 시즌 전 무리하게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게 되며 장타력을 불리는 데 성공했지만, 이는 결국 무릎 부상으로 이어졌고 실제로 FA 직전이었던 2000년에는 그 여파로 전년도보다 성적이 하락한 상태였다. 그리고 LG로 간 이후 그 후유증이 제대로 나타나며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고 은퇴하고 만다.[25] 2000년 혹은 2001년경으로, 당시 두산에서 연봉 문제로 갈등이 있던 골든 글러브 경쟁자 김동주를 삼성이 김한수와 현금을 내주고 영입하려는 시도를 실제로 했었지만, 두산에서 추가금을 요구하는 바람에 그냥 트레이드를 안 하고 넘어갔다는 비화도 기사로 나온 바가 있다. 그리고 두산이 추가금을 요구한 게 당연했다. 당시 김동주는 20대 초중나이로 OPS 0.9~1.0을 넘기를 밥먹듯이 하던 리그 최고의 타자였는데, 김한수는 김동주에 비해서 공격력이 좋지 않았던 데다가 나이도 이미 30대에 접어든 상황이었다. 실제로 당시 김응용 감독도 강력하게 트레이드를 요청했다.[26] 특히 2002년은 제 2의 커리어 하이었다.[27] 당시 부상과 태업 의혹까지 받던 투수 임창용과 함께 KIA의 병역문제가 해결된 좌완투수 전병두를 상대로 트레이드된다는 소문이 있었다.[28] 그러나 잘 알려져 있는 1999년 한 시즌 무실책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1999년 김한수의 실책은 12개.[29] 김동주는 시즌 24개 홈런을 기록했지만 0.265 타율로 규정타석 기준 김동주 커리어 로우 시즌이며 WAR도 김한수가 조금 높다. 그리고 스캇 쿨바라는 압도적인 3루수가 있었다. 단 쿨바는 시즌 중 1루수로 더 많이 나와서, 이 때문에 1루수 골든글러브 후보로 등록되고 이승엽에게 밀려 골든글러브 수상에 실패한다.[30] 3루수 WAR 3위, 타율 2위, 타점 1위, 홈런 4위 등[31] WAR만 놓고 봐도 페르난데스 6.39, 김동주 6.13, 김한수 4.68로 앞의 둘에 비해서 한창 밀린다.[32] 3루수 WAR 3위, 타율 2위, 타점 1위, 홈런 2위 등[33] 3루수 WAR 1위 타율 1위 홈런 1위 OPS 1위 최다안타 1위 타점 3위. 다만 유격수로 나온 경기가 꽤나 많아서, 이 해 이범호는 유격수 골든글러브 후보로 등록되었다. 그리고 박진만에게 밀려서 수상 실패.[34] 본인은 1500경기 출장 못한 게 아쉽다고.[35] 다만 강석천은 김한수와 달리 골든글러브를 한 번도 수상한 적이 없으며, 통산과 누적성적 모두 김한수에게 밀린다.[36] 그 전 주인은 김성래.[37] 논산 육군훈련소 기독교 종교행사의 공식 주제곡 실로암을 따왔다.[38] 대구구장 장내 아나운서 경력의 김제동의 증언에 따르면 어째서인지 이 노래가 경기장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달려라 이만수~'로 변질되었던 적도 있었댄다.[39] 같은 1971년생 동갑에, 중앙대학교 출신에, 1994년에 삼성에 입단한 동기에, 비슷한 시기에 군복무를 마치고 백인천의 총애를 받아 주전 3루수와 주전 유격수로 자리잡은 것, 그리고 각각 김성래강기웅의 등번호를 물러받은 것까지 둘의 공통점은 많은 편이다. 사실 위에 언급된 김종훈보다는 오히려 김태균이 쌍두마차의 성격이 더 강한 편이었다. 비록 김태균이 2002 시즌 초 롯데로 이적하고, 그 이후에 삼성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여러번 하기 시작하면서 묻혀지게 되었지만.[40] 김한수는 삼성에 있는 동안 수염을 안 길렀다. 그래서 팬들이 못 알아보는 경우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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