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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국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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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국 Regno d'Italia | |||||
국기 | 국장 | ||||
F.E.R.T.[1] | |||||
상징 | |||||
국가 | 왕의 행진곡 (1861년~1943년, 1944년~1946년) 피아베 강의 전설 (1943년~1944년) 젊음이여(사실상) (1922년~1943년) | ||||
1936년 이탈리아 왕국의 본토 강역[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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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3월 17일 ~ 1946년 6월 18일 | |||||
이탈리아 통일 이전 | 왕정 폐지 이후 | ||||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 이탈리아 공화국[4] | ||||
트리에스테 자유 지구 | |||||
위치 | 남유럽, 리비아, 동아프리카 | ||||
수도 | 토리노(1861년~1865년) 피렌체(1865년~1871년) 로마(1871년~1946년) | ||||
정치체제 | 입헌군주제 파시스트 일당독재체제(1922년~1943년) 연합군 점령하 군정(1943년~1945년) 과도정부(1945년) | ||||
국가원수 | 국왕 | ||||
정부수반 | 총리 | ||||
역대 국왕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움베르토 1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움베르토 2세 | ||||
주요 총리 | 카밀로 카보우르 프란체스코 크리스피 조반니 졸리티 베니토 무솔리니 | ||||
인구 | 27,900,000명 (1870년) 37,200,000명 (1910년) 42,993,602명[5] (1936년) | ||||
민족 | 이탈리아인, 아랍인, 소말리인, 티그리냐인, 티그레인, 오로모인 등 | ||||
언어 | 이탈리아어[6] | ||||
면적 | 310,190km²(본토) 3,798,000km²(식민지 포함) | ||||
종교 | 가톨릭 (국교) | ||||
통화 | 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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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반도와 사르데냐, 시칠리아에 존재했던 왕국이다. 고대 로마 이후[7] 이탈리아 반도를 처음으로 통일한 국가였다. 이탈리아 왕국(Regno d'Italia)이라는 이름 하에 통일된 엄연한 제국주의 열강이었지만 근대 내내 열강치고는 불운의 국가였다.[8] 최대 영역은 이탈리아 본토와 리비아와 동아프리카 일부, 발칸 반도까지였으며, 이는 열강 중 독일 다음으로 작은 영토이다.그리스 왕국과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의 직계 후신이고 가톨릭이 국교여서 유럽 기준으로 제국이라고 칭해도 될 자격을 갖추었지만 제국(Impero)이라고 칭하지 않았다.[9] 다만 이탈리아 식민제국을 칭하기 위한 비공식적인 명칭으로 이탈리아 제국이라고 불렀다.[10]
이탈리아 왕국의 국력은 4대 메이저 열강[11]과 미국보다 상당히 약했고 그보다 한 체급 아래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일본 제국보다도 살짝 아래로 평가받고 무엇보다 군사력은 에티오피아 제국[12], 그리스 왕국한테도 털릴 정도로 열강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라 당시 열강들 중 최약체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2. 국기& 국장
이탈리아 왕국의 국기 | |
이탈리아 왕국의 정부기 | |
이탈리아 왕국의 국장 | |
<rowcolor=#fff> 1848~1870 | |
<rowcolor=#fff> 1870~1890 | |
<rowcolor=#fff> 1890~1929 1944~1946 | |
<rowcolor=#fff> 1929~1944[13] |
이탈리아 삼색기에 사보이아 가문의 문장인 붉은 바탕에 하얀 십자를 그린 문장을 추가한 것을 국기로 사용했다.
3. 역사
3.1. 건국에서 제1차 세계 대전까지
통일 전쟁은 1861년 이탈리아 왕국 건국 후에도 계속되어 1870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트렌티노알토아디제와 오스트리아 연해 지대를 제외한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통일을 주도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초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1870년 이탈리아 왕국의 인구는 2790만 명으로 유럽 국가 중 많은 편이었다.그러나 통일의 후유증이 너무 커[14] 많은 사람이 실업자로 전락하는 등 국내 혼란이 가중되었다. 통일 후 이탈리아 왕국의 의회는 카밀로 카보우르의 뒤를 이은 역사적 우파(Destra storica)가 주도하였다. 그들은 반도 내 관세 장벽의 철폐를 통한 번영을 꿈꾸었으나, 농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남부의 대토지 소작농들과 포 강 유역의 일용직 농업노동자들은 상품을 구매할 재력이 미비했다. 교역망을 확충하려 해도 교통-통신 기술력이 부족했다. 또한, 통일운동이 농촌 사회구조 개혁을 일축한 대가로 통일 후 남부에 브리간타조 반군이 들끓어, 이들을 진압하느라 전비를 더욱 많이 써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농촌에 고세율 정책을 실시하여 농촌 경제가 되려 후퇴했다. 다른 한편으로 로마 점령을 완수하면서 리소르지멘토 이데올로기가 생명을 다함과 동시에 자유주의 세력이 사상적 구심점을 잃어버렸다. 민족주의의 대중화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었고[15] 국민 통합에 유력한 이데올로기였던 가톨릭도 이용하기 어려웠다. 통일 과정에서 교황령을 멸망시켜버림에 따라 교황청과 반목했기 때문이다.[16]
1876년에 역사적 우파에 대항한 역사적 좌파(Sinistra storica)가 집권하였다. 이들은 선거권 확대를 이끌어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대변 세력의 이권에 집착해 야합에만 열중했고 제국주의적 확장을 이끌었다는 비판도 받는다. 마치니와 가리발디 추종자들로 시작한 이 당은 점점 남부 지주들의 정당으로 변모함으로써 세력을 불려 집권했다. 한편 이 시기엔 자유주의에 실망한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며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17] 등 혁명 세력이 점점 세를 불려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체제 전복을 막고 자유주의를 지키고자 역사적 좌파의 아고스티노 데프레티스와 역사적 우파의 마르코 밍게티는 손을 잡고 연립 정권을 구상하였는데, 이를 변환주의(transformismo)라고 부른다. 변환주의는 유연하고 중도적인 실용주의라고 긍정적으로 평가받기도 하나, 보통 정파간 이권 나눠먹기와 부정부패로 취급된다. 이러한 변환주의는 무솔리니의 집권으로 전통적 자유주의자들[18]이 세력을 잃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당시 이탈리아 식자층은 유물론이나 경제학보다는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것을 더욱 선호하고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19]이 있었다 보니 시대가 당면한 사회 문제도 경제나 사회 구조보다는 도덕성과 이데올로기의 부재에서 찾으려고 했다. 이러한 관점은 통일운동 시기부터 마치니 사상 등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역사적 좌파의 프란체스코 크리스피 총리 또한 마찬가지로, 그는 프랑스를 이탈리아인의 적으로 보며 프랑스를 전쟁에서 굴복시켜 이탈리아인의 민족 의식을 고양하려 했다. 크리스피 내각은 프랑스와의 관세전쟁을 벌이고[20]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설득해 독일 제국과의 삼국 동맹을 통해 프랑스를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전쟁을 거부했고 관세 전쟁은 남부의 과일 수출 산업을 붕괴시켰다.
한편 역사적 좌파가 이끄는 이탈리아 왕국은 국내의 혼란 해소 및 국제적 위상 제고, 남부 소작농의 이주를 통한 인구압 해소 등의 이유로 식민지 팽창에 주목을 하기 시작했다. 프란체스코 크리스피는 이탈리아 왕국군을 동원해서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일으켰으나 아도와 전투에서 패배해 체면을 구기며 사임하였다.[21] 하지만 이후 이탈리아는 리비아와[22] 소말리아 일부 지역을 식민화하는 데에 성공했다. 무솔리니 집권 후로도 제국주의 기조는 유지되어 알바니아와 1896년 패배의 굴욕을 당한 적 있던 에티오피아를 잠시 강점했다. 중국에는 1901년부터 조차지 형태의 이탈리아령 톈진이라는 식민지가 존재했으나, 1943년 일본에 의해 왕징웨이 정권에 반환됨으로써 사실상 소멸했고, 1947년 신생 이탈리아 공화국 정부에 의해 중국 국민정부에 공식적으로 반환되었다. 다른 열강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처지라 해도 이탈리아 왕국의 인구는 1910년에 3720만 명에 달했기 때문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크리스피 총리는 한편으론 남부 대지주의 토지를 분할하려다 의회의 지주 의원들로 인해 실패하고 이후로도 여러 정치 혼란 등을 겪으며 의회제를 혐오하기 시작해 대통령제를 검토하고 반대파를 탄압하는 권위주의적 모습도 보였다.[23] 결국 이탈리아 왕국의 1890년대는 세기말이라는 단어에 걸맞은 혼란상과 이로 인한 위기로 끝나고 말기의 크리스피와 루이지 펠루[24]는 계엄령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등 왕국의 의회 정치는 위험에 빠진다.
움베르토 1세가 암살됨으로써 더욱 심해질 뻔한 위기가 때마침 시작된 고속 경제성장으로 잦아들자, 사람들은 카보우르와 역사적 우파가 주장했던 번영의 꿈을 다시 꾸었다. 이탈리아 북서부 삼각지대의 공업은 1900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는 1914년 사이 폭발적으로 성장해 현재의 부유한 북부 산업의 기틀을 닦는다. 이러한 경제성장은 크리스피의 보호무역으로 인한 공업 성장 효과와 로마 은행 스캔들 이후 금융조직의 재정비, 석탄의 부족을 대체할 알프스 수력발전의 성장을 통해 가능했다. 피아트, 피렐리 등의 기업이 이 시기에 창설되었고 전통적 섬유산업 또한 큰 폭으로 성장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지도자가 조반니 졸리티이다. 그는 여러 경제성장 지원책을 펴고 선거권을 큰 폭으로 확대, 노사갈등에서 중립을 지키고 노동착취 규제법을 정비하는 등의 업적을 세웠으나 지지층이 미약해[25] 남부 지주들의 지지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해야만 했고 남부의 토지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자연히 공업 성장이 농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사회 변화도 공업이 발전한 북서부에만 집중되었다. 상공업의 발전으로 중산층이 성장하고 미래주의 예술 사조가 등장하였지만 실용 분야보단 철학과 추상적 이데올로기를 선호한 식자층 분위기로 인해 무직 지식인 문제[26]는 해결되지 못했고 이들은 사회 불만층이 되어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투신하던가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로 대표되는 초기 파시즘[27]을 지지하였다.
졸리티는 이러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을 일으켜 리비아를 점령하지만 리비아 각지에 반란군이 활개치는 반쪽짜리 점령이었던 데다가[28] 졸리티의 도덕성에 타격을 받아 정권이 흔들렸다. 졸리티는 어느 정도 전향적으로 변한 가톨릭과 협력해 정권을 이어나갔다.
이렇게 내부적으론 사회 문제로 몸살을 앓고 외부적으론 다른 열강들 틈바구니 속에 자기 영역을 넓혀 보겠다고 애쓰던 중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져 버린다.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삼국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같은 게르만어권인 오스트리아-헝가리만 감싸는 독일과 상당히 사이가 멀어진 것도 있었고[29], 사실 오스트리아와는 뿌리 깊은 적대 관계로 영토 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기도 했다.
게다가 삼국 동맹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한 동맹으로[30], 조약에 공수동맹인지 방어동맹인지 나타나 있지 않아 이탈리아의 자의적인 해석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선제 공격한 것이라는 명분으로 삼국 동맹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탈리아 내부적으로는 전쟁이 국민 통합과 쥐트티롤, 이스트리아 반도, 달마티아[31] 등의 미수복지를 오스트리아로부터 수복할 수 있는 기회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그 후 1915년 5월 협상국으로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이탈리아권 영토와 해외 식민지 약속을 받아 내고(런던 밀약)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하면서 협상국 측으로 참전했다.
3.2. 파시즘의 대두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영토를 보상으로 받는다는 약속이 온전하게 지켜지지 않았으며, 전후 회의에서 다른 참전국에 비해 돌아온 몫도 적어서 기껏해야 쥐꼬리만한 배상금과 트렌티노알토아디제, 이스트리아 반도를 얻었다.[32] 이런 상황에서 정부에 대한 불구의 승리(Vittoria Mutilata)라는 국민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한편 세계대전을 거치며 자유주의 세력이 약해졌고, 협상국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보통선거를 시행하면서 자유주의는 의회 주도권을 완전히 잃게 된다.[33] 자유주의 정당도 의회에 잔존했지만, 이탈리아 사회당(Partito Socialista Italiano)과 이탈리아 공산당(Partito Comunista Italiano), 가톨릭 계열의 이탈리아 인민당[34]이 주요 정당이 되었다. 한편 전시 산업 체제로 폭증했던 공업력과 고용 능력은 전쟁이 끝난 후 더 유지하기 힘들었고 그 와중에 전역자들이 노동 시장에 들어오며 실업률이 폭증했다. 농촌에서는 전쟁 당시 사기 유지를 위해 정부에서 공약한 토지 분배로 인해 미경작지 점유 운동이 일어났고 이를 통제하기도 힘들었고 공약한 바도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이를 눈감았다. 노동자들은 파업과 투쟁을 시작했고 고용주들은 졸리티 내각 이후로 유지되던 군경의 중립주의 정책에 반발했다. 결국 이탈리아는 1919년부터 1920년까지 2년간, 비엔니오 로소(Biennio rosso)라 불리는 사회 혼란을 맞이하였다.이런 상황 속에서 사회주의에서 전향한 베니토 무솔리니는 국가 파시스트당의 전신인 전투 파쇼를 조직한 뒤 서서히 지방 세력을 규합하여 중앙집권적 체제 형성을 추진하는 등 자신의 세력을 구축한 뒤 결국에는 왕실의 묵인 하에서 로마 진군이라는 사실상의 쿠데타로 정권을 휘어 잡게 되어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수립했다. 정권 초반에는 의회 안에서 기존 정치 세력들과 공존을 추구했으나[35] 파시스트 행동대의 과격 행동의 책임을 물으려는 시도가 있자 1925년 연설을 기점으로 독재 체제를 구축한다. 무솔리니는 정권을 잡은 뒤 헌법과 기존 관료 조직을 유지했으나 파시즘 대평의회라는 국가 최고의 의사 결정 기관을 만들었고, 야권 세력과 불만 세력을 탄압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스트 정권 설립 전과 집권 중에도 계속 지속적으로 정권의 안정을 심각하게 위협한 공산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 계열 반독재, 반파시스트 좌익 혁명 세력의 영향력도 막강했다 보니 프랑코 정권처럼 자국민에 대한 백색테러도 숱하게 저질렀다. 한편으론 국가 파시스트당내 조합주의, 과격파 혁명주의 세력을 숙청하고 기존 자유주의, 자본가, 지주 세력을 끌어들여 정권을 유지하는 면모도 보인다.[36] 원래 파시즘의 경제관은 사회주의와 비슷한 면이 있었지만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실질적으론 보수 기득권을 수호하는 포지션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합주의 이념을 완전히 버리진 않아 곡물 전투 등의 국가 주도 경제 운동을 펼치고 국영 곡식 저장소를 운영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대공황이 터지고 나선 국가 지주회사 IRI를 설립해 경제 개입을 통해 극복을 시도했다.[37]
파시즘 정권은 통일운동 이래 이탈리아의 식자층과 정권 대다수가 그러했듯이 경제나 사회체제보단 도덕성과 이데올로기를 중시했고 국가 통합을 위해 무솔리니 개인 숭배, 로마식 경례 등의 고대 로마 강조, 국민 조직화 등의 전체주의 행보를 보였다. 한편으론 교황과 라테라노 조약을 맺어 교황령 멸망 이후 지속된 로마 문제를 해결하고 이전 정권들이 받지 못했던 가톨릭의 이념적 지원을 받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사실상 기득권을 수호하는 입장이 되어 파시즘 혁명보단 보수 독재에 가까워지며 농민과 노동자들의 지지를 크게 얻어내진 못하였다.
3.3. 팽창 정책과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국민의 불만을 환기시키기 위한 팽창 정책으로서 스파치오 비탈레를 주장하고 로마 제국 부활이라는 명분 하에 에티오피아와 알바니아를 침공했다. 비록 알바니아는 3달도 채 버티지 못하고 강점되었지만, 에티오피아는 전면전으로 7달 동안 맞서 싸우다가[38], 결국 이듬해 5월 수도 아디스아바바가 함락되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의 거점을 장악했다고 할지라도, 전역이 확보된 것은 아니었다. 강점 기간 내내 에티오피아 일부 고원은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받드는 근왕세력의 통제 하에 남아있었다. 침공의 구체적 양상이 어떻든 간에 무솔리니 정권은 에티오피아 침공과 강점을 거부한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고,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에티오피아 황제를 겸하게 된다.1933년부터 무솔리니는 히틀러와 우호관계를 진전하기 시작했다. 에티오피아 및 알바니아 침공으로 미국·소련·프랑스·영국 등 다른 열강들과의 긴장이 고조되면서[39], 파시즘과 나치즘의 사이가 빠르게 가까워진다. 스페인 내전에는 함께 프란시스코 프랑코 진영에 자금·군장비·의용군을 파견하기도 했다. 비록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 당시 두 나라 간 긴장이 급속도로 높아졌지만 곧 진정되었고 이탈리아는 쥐트티롤 영유권 인정을 대가로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을 승인했다. 결국 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에 의해 궁지에 몰리자 이탈리아는 독일 편에 서서 프랑스에 선전포고 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에 추축국으로 참전하게 된다.
하지만 이탈리아 군대는 독일에게 털린 프랑스 남동부 지역을 침공하는 데도 고전을 면치 못했고 다른 지역에서도 연패하여 참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독일군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에티오피아와 리비아 전역이 연합군에게 털려버리고 그 후 1943년 추축국 중에서는 거의 이라크 왕국 다음으로 항복해 버렸다. 이후 이탈리아 왕국은 존속하지만, 이탈리아에 연합군의 군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무솔리니를 비롯한 파시스트 잔당들은 나치가 북이탈리아에 살로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만들고 거기서 연명하다가 결국 베를린 전투와 비슷한 시기에 멸망하면서 살로 공화국 지역은 자연스레 이탈리아 왕국 땅으로 돌아왔다.
나치 독일 초기에는 독일과 껄끄러운 관계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을 때는 전쟁까지도 고려하였고[40] 강철 조약 이후에도 당시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전통적인 우방 프랑스를 버리고 독일을 택한 데에 대한 우려를 표방했다.
특히 인종관에서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큰 차이를 보였는데 히틀러는 광적으로 인종적 순혈주의에 집착했는 데 반해 무솔리니가 추구한 제국주의와 급진적 민족주의는 생물학적 인종주의를 배격하며, 히틀러의 인종정책에 비판을 가했다. 이 시기 이탈리아는 옛 베네치아 공화국의 슬라브, 그리스계 영토들도 많이 흡수했고, 이탈리아는 원래 독일보다 인종적, 문화적인 면에서 다양성이 깊었기 때문에[41] 나치의 우생학적 인종 순혈주의에 대한 집착은 결코 대중화되기 힘든 토양이었다.
그러나 파시스트 이탈리아라고 해서 인종-민족주의적 차별과 박해를 가하지 않은 건 아니다. 나치식 순혈주의로 사람 급을 나누는걸 거북하게 여긴다는건 자국민 내부에서의 이야기일뿐, "통일 이탈리아인"으로서의 민족 정체성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거부하는 피지배 인종-민족들과는 갈등을 빚고 폭력을 행사했다. 베네치아와의 역사적 접점을 통해 주로 현지 크로아티아 남슬라브계 민족주의자들과 소유권을 두고 경쟁했던 달마티아 해안 지방에서는 학살과 인종청소를 저지르며, 류블랴나 일대에서만 현지 인구의 7~10% 정도의 사람들을 직영 혹은 동맹 나치스의 수용소로 보냈다. 그리스에서도 도메니콘 학살을 비롯한 반빨치산 '평정' 을 명분으로 대량 학살을 종종 저질렀으며, 아예 유색인종이었던 식민지 리비아와 침공 이후 연합군이 해방하기 전까지 점령했던 에티오피아에서는 훨씬 더 많은 수의 학살과 인종 청소를 저질렀다. 동맹국 독일과 연줄이 있는 쥐트티롤 지방에서도 반파시스트 숙청과 문화, 언어적 탄압을 저지르며 강제적인 이탈리아 동화 정책을 폈다.[42]
3.4. 항복과 왕정 폐지
그러나 이탈리아 왕국은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보다 훨씬 이른 1943년에 항복하고 연합국으로 돌아섰기 때문에[43] 추축국이었음에도 전후 처분에서 완전히 패전국 취급을 받지는 않았다[44]. 그 탓에 전범 재판이 따로 열리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식민지였던 리비아에서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에티오피아에서 기독교인 3만 명을 학살했으며 수천 명을 강제 수용소로 보냈던[45] 로돌포 그라치아니와 같은 전범들은 범죄 혐의가 명백했음에도 감형으로 풀려나 전후에 목숨을 보전했다.[46] 영토 상실 역시 전후 독일과 일본에 비해서 상당히 적은 편이다.[47] 물론 주요 추축국이었던 대가가 없는 건 아니었다. 식민지와 약간의 본토를 일거에 상실하고 UN에 1956년에야 가입할 수 있는 등[48], 소소한 페널티를 받았다.한편 백성의 신뢰를 잃은 암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퇴위까지 강행하면서 왕정을 사수하려 했지만, 이미 사보이아 가문은 민심을 잃어 왕정은 1946년 실시된 국민투표의 결과로서 폐지되었고[49], 결국 이탈리아 왕국은 공화국으로 바뀌게 되었다.투표결과[50]
밀라노, 베네치아, 제노바, 파비아, 볼로냐 등 중북부 도시의 공화제 찬성률은 60% 이상을 기록했으며, 볼로냐와 라벤나 선거구의 경우 80%를 돌파했다. 사보이아 가문의 중심지였던 토리노조차 60%를 상회했다. 왕정 지지 여론이 비교적 높았던 남부 나폴리는 공화국을 부정하고 왕정 신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일부 과격 왕당파는 무력으로 공화국을 전복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움베르토 2세가 나라의 분열과 내전을 초래하는 짓이라는 이유에서 거절했다.[51] 결국 왕정은 폐지되어 사보이아 가문은 망명을 떠났고, 마리 조제 왕비와 직계 남성들은 입국 금지 처분을 받았다. 왕조 몰락에 원인을 제공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1947년에 이집트에서, 마지막 국왕인 움베르토 2세는 1983년에 스위스에서 병사했다.[52] 추방되어 망명 생활을 하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디 사보이아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디 사보이아 등 나머지 왕족은 2002년과 2008년에 완전한 귀국 정착이 허용되어 귀국했다.
4. 역대 국왕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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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 이름 | 재위기간 |
1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 1861년~1878년 |
2 | 움베르토 1세 | 1878년~1900년 |
3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 1900년~1946년 |
4 | 움베르토 2세 | 1946년 |
5. 이탈리아 제국
이탈리아 왕국의 식민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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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이탈리아 제국 문서 참고하십시오.
6. 군사
자세한 내용은 이탈리아 왕국군 문서 참고하십시오.7. 평가
서로마 제국 이후로 이탈리아 최초의 통일 국가이자 최후의 통일 왕조였다는 점, 그리고 현대 이탈리아의 직접적 전신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탈리아는 본래 여러 이질적인 국가들로 나뉘어 있었으나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했기에 이탈리아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그러나 어두운 면모 역시 적지 않은데 제국주의 열강으로서 다수의 식민지를 경영했고 독가스 금지 조약에 서명했음에도 이를 위반하고 리비아와 에티오피아에서 독가스 공격을 가해 수많은 사람들을 살상했다. 게다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추축국의 일원으로서 나치의 침략전쟁에 협조하여 주변국을 침탈하였고 적잖은 전쟁범죄에도 관여하였다. 또한 파시즘의 사상적 기원지로서 살인 정권인 나치 독일의 탄생에도 간접적으로 일조하였다. 따라서 이탈리아 왕국에 대한 역사학적 평가는 꽤나 엇갈리는 편이나 대개 무솔리니 집권 시기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일쑤이다.
또한 이탈리아 왕국은 인구수와 잠재력에 비해 국력 면에서 열세였는데, 당대부터 열강이라 보기에 애매한 이탈리아의 위치는 여러 논쟁을 불러왔고 이로부터 강대국의 최소라는 개념이 도입되었다. 이탈리아가 독일과는 달리 완연한 열강으로써의 국력을 내보이지 못한 이유는 우선 구 양시칠리아 지역을 제대로 흡수하는 데에 실패하며 전 영토의 절반에 달하는 지역이 온전히 근대적 국민이 되지 못하였던 것이 크다. 또한 남부를 중심으로 자리잡은 대지주 중심의 토지 소유 체계를 타파하지도 못하며 상당히 많은 하층민들이 빈곤상태에 빠지게 되어 구매력 있는 시장을 형성하지도 못하였다. 그리고 이질적인 지역들을 통합시키기 위해 도입한 중앙집권적인 독일식 행정 체계는 비효율을 상설화하고 쓸모없는 부서들이 끊임없이 번식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 이탈리아 왕국 시기 이탈리아계 미국인, 이탈리아계 브라질인, 이탈리아계 아르헨티나인, 이탈리아계 캐나다인 등 신대륙 이민이 매우 활성화되었고[53] 왕국 시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문제점은 현대에도 일부 이어져 내려오며 이탈리아의 발전 가능성을 좀먹어왔다. 다만 이를 왕국 체제의 문제만으로 돌리기에는 이탈리아 반도 지역에 석탄 매장량이 부족한 등, 자연환경적으로 불리한 점이 어느정도 존재하였다.[54]
8. 미디어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연합국이었지만 1차 세계 대전을 다루는 미디어는 드물고 이마저도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에 밀려서 잘 등장하지 않는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일단 추축국인지라 당연히 좋게 묘사되는 편은 아니나, 추축 동맹이었던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존재감에 밀려 미디어상에서 잘 등장하지 않는다.[55]- 다이스가 제작한 게임이자 제1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하는 FPS 게임인 배틀필드 1에서 연합국인 대영제국, 미합중국, 프랑스 제3공화국, 러시아 제국과 함께 등장 세력으로 나온다.
- 벽람항로에서 이탈리아 왕국을 모티브로 한 사르데냐 엠파이어(사디아 제국)가 등장한다.
- 이런 배신의 역사 때문인지 대체역사물에서는 참다 못한 독일에게 숙청당하는 역할로도 등장한다. 일례로 드라마 높은 성의 사나이에서는 애진작에 독일의 일개 주가 되었고[56], 울펜슈타인 세계관에서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단 이유로 독일에게 강제 점령된다.
-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는 파시즘을 버린 독일군에게 제대로 능욕당하고 원래 역사보다 더 비참한 꼴로 왕정이 무너져 버린다.[57]
- 높은 성의 사나이 원작 소설[58]에서는 로마 제국의 남쪽 고토를 얻는데까진 성공한다. 그러나 구대륙의 주도권을 독일/일본에 일방적으로 빼앗기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신대륙(아메리카-오세아니아)엔 아예 발도 못 담근 탓에,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은 독일계나 일본계와는 다르게 서민으로 근근히 살고 있다. 때문에 무솔리니는 대놓고 '광대'라 불리며 지지도가 바닥을 치는 상황.
- Hearts of Iron IV 열강으로 속해 있기는 한데, 다른 열강들에 비해서 자원도 별로 없고, 인구도 적고, 공업력이 좋은 편도 아니다. 심지어 다른 열강들은 주력 사단이 9보나 12보 정도가 되는데 이 놈은 식민지 주둔군 수준의 6보 사단을 사용하고 있다. 기갑도 미치겠는 것이 분명 기갑사단인데 기병 대대가 4개 들어가있다.
열강호소인사실 이탈리아도 억울한 부분이 있는데 게임 자체가 이탈리아의 국력에 비해서 이탈리아가 해야 하는것이 너무 많다. 오히려 절대적인 국력만 놓고 보면 절대로 약하진 않다.
-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시리즈의 세번째 직품인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3에서는 이탈리아 전선과 북아프리카 전역이 배경이지만 독립 진영으로는 발매 당시부터 등장하지 않고 독일-이탈리아 혼성 부대인 독일 아프리카 군단에 덤으로 합쳐져서 등장한다. 차후 DLC 등으로 본토 이탈리아 왕국군이 등장할 지는 불명이다.
9. 기타
수도는 왕국 수립부터 1865년까지는 토리노, 1865년에서 1871년까지는 피렌체였으며. 1871년부터 왕국 멸망 시까지는 로마였다.추축국으로는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서 각각 활동했던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임팩트에 밀리고 제국주의 열강으로서도 대영제국이나 프랑스 식민제국의 인지도에 밀리는 등 존재감이 없다. 그나마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짙은 영향력과 악취를 남겼던 지방은 발칸반도, 북아프리카, 에티오피아 같은 남유럽과 아프리카의 몇 군데 뿐인데, 이들 모두 여러모로 세계 근현대사의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조선과는 움베르토 1세의 재위 기간인 1884년에 조이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수교하였고 대한 제국 수립 이후에도 외교를 이어갔으나 을사조약을 계기로 국교가 단절되었다.
선거권은 21세 이상으로 글을 아는 자에게만 부여되었다.
9.1. 표어 F.E.R.T.
F.E.R.T.는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때 채택된 사보이아 가문과 이탈리아 왕국의 표어이다.A.E.I.O.U처럼 F.E.R.T.가 무엇의 약자인지 확실히 정해진 것은 없고, 다만 몇몇 라틴어 구절의 약자일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되고 있다.
- Foedere et Religione Tenemur (We are bound by treaty and by religion)
우리는 조약과 종교 안에 존재한다. - Fortitudo Eius Rhodum Tenuit (His strength conquered Rhodes)
그의 강함(또는 용기)이 로도스를 정복했다. - Fortitudo Eius Rempublicam Tenet (His bravery preserves the state)
그의 강함이 우리 국가를 보전한다. - Fides Est Regni Tutela (Faith is the protector of Kingdom)
믿음이 우리 왕국의 수호자이다.
[1] 라틴어로,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표어 F.E.R.T. 항목 참고[2] 에게해에 위치한 이탈리아령 에게해 제도는 제외[3] 이탈리아 제국의 강역.[4]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살로 공화국)은 애초에 베니토 무솔리니가 나치 독일의 도움으로 세운,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괴뢰국이다. 괴뢰국이라도 기존의 국가가 망한 뒤 세워진 것이면 모를까 살로 공화국이 멸망할 때까지 그리고 살로 공화국이 망한 후 1년 뒤까지도 이탈리아 왕국은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탈리아 왕국이 망하고 합법적으로 들어선 현재의 이탈리아 공화국을 진정한 후계 국가로 봐야 한다.[5] 당시 9위.[6] 그 외에도 시칠리아어 등 주요 방언과 함께 소수 언어로 프랑스어, 독일어, 알바니아어, 그리스어, 아랍어도 쓰였다.[7] 동고트 왕국 멸망 이후 이탈리아를 일시적으로 통치했던 동로마 제국은 고대 로마의 연속체였을 뿐더러 동고트 왕국 자체가 이탈리아 반도 전역이 영토였으며 이탈리아 분열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이후 시작되었기에 제외된다.[8] 통일된 것까진 좋았지만 독일 제국, 그리고 일본 제국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너무 늦게 열강에 오르는 바람에 그들이 넘볼 만한 땅이 별로 남아있지 않았고 국제정세도 식민지 확장 막바지에 들어가고 있던 터라 뚜렷한 식민지 확장에는 실패하였다. 이것은 훗날 삼국이 국가의 향방에 위협을 느끼고 똘똘 뭉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이런 이유로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추축국보다 연합국에 반감을 갖는 경우가 적지 않다.[9] 황제를 칭하지 않은 이유는 국력의 문제가 아니라 토리노에서 열렸던 이탈리아 왕국의 첫 의회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황제(Imperatore)가 아닌 국왕(Re)의 칭호를 수여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왕국의 전신인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카를로 알베르토부터 입헌군주국이었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의회가 수여한 이탈리아 국왕(Re d'Italia)의 칭호를 받아 관련 법안에 서명해서 초대 이탈리아 국왕이 되었다. 그리고 15세기 말에 막시밀리안 1세가 대관식에서 교황의 권위를 부정한 독일과 달리 이탈리아는 가톨릭 국가로서 교황의 영향력을 무시하기 어려웠는데 통일 과정에서 교황과 사이가 나빠지는 바람에 교황으로부터 대관식을 치러 칭제할 상황도 아니었다.[10] 비슷하게 영국의 경우에도 실제로는 왕국이지만 식민지까지 포괄하여 부르기 위한 명칭으로 대영제국이라고 불렀다. 단, 영국 국왕의 경우 인도 제국의 황제를 겸임했기 때문에 황제국으로 부를 건덕지는 있었다.[11] 대영제국 / 프랑스 공화국 / 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 / 러시아 제국, 소련[12] 그나마 2차 침공 때 겨우 수도를 점령해 병합을 선포하긴 했으나 이마저 완전히 에티오피아를 장악하지는 못해 여전히 일부 세력들이 저항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국제 사회에서 식민지로 인정을 못 받았다.[13] 파시스트 정권의 상징 파스케스 추가.[14] 중세부터 근대까지 내내 수많은 국가가 병립해 있었고, 그 발전 양상도 달랐다. 이탈리아 통일 전쟁 당시에는 완전하게 이탈리아화되었지만, 굳이 따진다면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통치 가문인 사보이아 가문의 뿌리는 프랑스계였다. 물론 당시 이탈리아 내의 주요 국가인 토스카나 대공국과 모데나 공국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방계가, 파르마 공국과 양시칠리아 왕국은 스페인 부르봉 왕조가 통치하고 있었고 베네치아와 롬바르디아 왕국은 오스트리아 제국 직할령이어서 사보이아 가문은 이들에 비하면 훨씬 이탈리아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15] 카보우르가 통일 이탈리아를 만들었으니 이제 이탈리아인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 데에는 이런 맥락이 있었다. 후대의 안토니오 그람시는 부르주아 혁명 세력이 사회 개혁을 통한 민중과의 연대를 거부하며 민족주의에 냉소적인 여론을 자초했다고 평했다.[16] 교황은 바티칸에 틀어박혀 바티칸 포로를 선언하며 신생 이탈리아 왕국을 부정했고, 오르시니 가문, 콜론나 가문 등을 비롯한 교황령의 유명 귀족 가문은 교황령 멸망에 반발하며 검은 귀족이 되었다. 이른바 '로마 문제'이며, 무솔리니가 라테라노 조약을 맺을 때까지 이탈리아의 주요 정치현안 중 하나였다.[17] 이탈리아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이후 1900년에 움베르토 1세를 암살했다.[18] 1913년 졸리티 정권기가 되면 역사적 우파와 좌파 모두 세력이 줄어들고 사회당 등의 타 정당이 의회에 참여하여 19세기부터 이어진 자유주의 세력은 변환주의 연대를 넘어 아예 자유 연합(Unione Liberale, Liberal Union)이라는 이름으로 한 몸이 되었다. 이후 1922년 전간기 혼란 중에 이탈리아 자유당(Partito Liberale Italiano, Italian Liberal Party)으로 개명하여 파시즘 정권 성립을 지원했다가 무솔리니 독재정권 수립 후 활동 금지당하나 2차대전 이후 재건되어 1994년까지 유지되었다.[19] 사실 이탈리아 뿐만이 아니라 20세기 대륙부 유럽 지식계층 전반에 이런 경향이 존재했다. 20세기 초중반을 화려하게 장식한 이데올로기의 난립 역시 이러한 경향 하에서 벌어진 일. 오히려 유럽 대륙보다는 영미권의 실용주의와 경험주의가 특이하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20] 당시 국제 추세가 보호주의로 흐르기도 하였다.[21] 이후 무솔리니 정권 시기 1936년에 와서야 에티오피아를 겨우 강점했으나, 그나마도 1941년경 영국군 주도 연합군에 의해 축출당해 강점 기간이 5년 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 강점도 완벽하지 못해서 강점 기간 내내 에티오피아 고원 일부 지역은 하일레 셀라시에를 지지하는 저항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전후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의 옛 식민지로서가 아니라 이탈리아에 대한 승전국으로서 이탈리아로부터 배상금을 받았다.[22] 이탈리아-튀르크 전쟁[23] 브리간타조 반란 이후 통일 정부는 반란의 억압적 진압과 중앙집권적 시스템 강요, 교육과 징병 강제 등의 '자유를 강요'하는 행보를 보여왔고 식자층 사이에선 사회 문제의 원인을 자유주의의 나약함, 이기주의, 탐욕성에서 찾아 반자유주의적인 주장을 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사회 혼란을 억압으로 해결하려는 전통이 이탈리아 파시즘의 토양이라는 주장도 있다.[24] 군 장성 출신 총리이다.[25] 졸리티가 손을 잡으려 한 사회주의 세력은 비협조적이었고 경제 성장의 수혜자 상공업 부르주아들은 졸리티의 친노동 정책에 분노했다. 당시 성장한 상공업 중산층의 지지 또한 미약했다.[26] 남북 경제격차와 엮여 고급 일자리가 부족한 남부에서 특히 심했고 해고 시 바로 불만 계층이 될 식자층이 행정조직과 사법조직에 포진해 있다는 점이 비효율적인 행정기구를 개혁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27] 사회주의를 제압하지 못하는 자유주의의 나약함을 비난하며 개인이 아닌 국가를 중심으로 한 이데올로기를 제창했다.[28] 당시 발칸 전쟁으로 정신이 없었던 오스만 제국을 이기고 리비아의 통치권을 받아오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현지 세력의 저항과 이탈리아의 1차대전 참전이 겹치며 현지 자치 세력과의 애매한 타협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이후 1922년 독가스와 강제수용소를 동원한 재정복을 시작했고 1931년 영화 사막의 라이온으로 유명한 오마르 무크타르를 처형하고 나서야 직접 통치력을 굳혔다.[29] 전쟁 직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게 최후통첩을 준비할 때 명색이 동맹인데도 이탈리아와 상의를 하나도 하지 않고 오로지 독일과 상의를 하는 모습을 보고는 끝내 미련을 버렸다.[30]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프랑스가 독일에 대해 반감을 품고 복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따라 만든 동맹이 삼제동맹이었다. 프랑스가 만일 러시아 제국과 손을 잡는다면 독일은 앞뒤로 위험한 상황이 되기 때문에 러시아를 끌어들인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발칸 반도를 서로의 앞마당이라 생각하여 힘을 과시하면서 위태위태한 상황을 지속시키자 그에 대한 대안으로 삼국 동맹을 체결하였다.[31] 달마티아는 로마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와 달마티아어 등에 근거하여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미수복지로 취급받았다.[32] 원래 이탈리아는 발칸 방면으로의 확장을 꾀했고 실제로도 런던 밀약에 의거, 달마티아 할양을 보장받았으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민족주의자들이 이를 막기 위해 그래도 같은 남슬라브 민족인 세르비아 밑으로 들어가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설립했고 협상국, 특히 미국의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에 의거해 이를 승인하며 이탈리아의 야욕은 저지되었다.[33] 이탈리아처럼 하부 구조가 전근대적이고 부실한 나라로 갈수록 자유주의는 중상류층 부르주아의 전유물이 되는 일은 흔하다. 하층부가 보통 전통 보수주의에 경도되거나 사회주의로 넘어가기 때문.[34] 기독교민주당(Democrazia Cristiana)의 전신이다.[35]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탈리아판 수권법인 아체르보 법이 통과된 것 또한 이 시기이다. 당시 이탈리아 정계에 보수파를 중심으로 혼란에 염증을 느끼는 분위기가 존재했고 자유주의와 의회제의 결점을 문제삼는 풍조가 이전부터 만연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36] 이는 스페인의 팔랑헤가 통합 팔랑헤로 바뀌는 과정과도 유사하다.[37] IRI는 2차대전 패전 후에도 살아남아 2002년 해체될 때 까지 현대 이탈리아 경제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38] 참고로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내에서도 군사강국이었다. 이미 이전에 이탈리아군을 괴멸시킨 사례도 있었다. 단, 아프리카 대부분은 주요 열강들의 식민지였으며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독립국이 없었다.[39] 이들 4개 국가가 침공을 노골적으로 방해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침공 결과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특히 미국과 소련은 이탈리아가 두 나라를 강점하고 있는 기간 내내 이들 나라에 대한 강점 자체를 승인하지 않았다. 프랑스와 영국도 이탈리아 왕의 에티오피아ㅈ 황제위와 알바니아 왕위를 승인하지 않고 강점 자체만 38년 인정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에 이탈리아가 참전하면서 이 승인마저도 취소한다. 연합국 진영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신생 이탈리아 정부와 체결한 '평화협정(Treaty of Peace)'에서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알바니아 강점의 합법성을 부인함을 분명히 했고 이탈리아 정부가 에티오피아 정부에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했다.[40]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병합되면 이탈리아 북동부가 나치 독일과 국경을 접하게 된다. 거기다 이탈리아에도 독일계 다수 지역인 쥐트티롤이 존재했으니 히틀러의 행보를 보아 주데텐란트 요구 같은 일이 일어날 걱정을 해야만 했다.[41] 로마제국 수백년간 지중해의 수도로써 수많은 인종이 유입되어 이탈리아 반도는 유전적 다양성이 매우 높은 지역이 되었다. 서로마가 멸망한 후로는 상대적으로 고립되긴 했지만 중세~근대에도 여전히 지중해 한 가운데에 툭 튀어나온 교통의 요지로써 많은 인종 유입과 혼합을 겪었다.[42]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병합을 이탈리아가 인정하는 조건으로 쥐트티롤 지방에 대한 탄압을 묵인했기 때문에 가능했다.[43] 무솔리니도 이탈리아 왕국 측이 끌어내려 체포했다. 다만 이후 독일의 도움에 의해 탈주했고, 이때 활약한 이가 바로 오토 스코르체니였다. 결국 탈주한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도움으로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사실상 독일의 괴뢰국)을 설립하고 추축국 편에서의 계보를 잇게 된다.[44] 그러나 중립국이나 연합국도 아닌 특별상태국이라는 제4의 분류가 적용되었다.[45] 1937년 2월 19일의 암살 시도와 그 이후의 대량 보복 학살 사건이었다.[46] 그라치아니는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이탈리아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으로 개헌한 이후인 1955년에 병사하기 전까지 정신 못 차리고 네오파시즘 운동의 지도자 노릇을 했다.[47] 식민지와 점령지, 조차지, 조계지, 괴뢰국 등을 제외한 순수 본토 기준 독일은 동프로이센 전역, 슐레지엔 거의 전역과 포메른의 중동부(힌터포메른), 브란덴부르크 동부(노이마르크), 작센의 극히 일부를 상실했다. 일본의 경우에도 가라후토(현 사할린 남부), 치시마 열도(현 쿠릴 열도)를 영구 상실했고 오키나와와 오가사와라 제도의 영유권도 1960~70년대까지 미국에 빼앗겼다. 반면 이탈리아의 경우 프랑스와 접한 국경 지역의 몇몇 마을들과 1차 대전 승전의 대가로서 주어진 이스트리아 반도, 그리고 달마티아의 자다르 정도만을 상실했으니 전체 면적 단위 상실한 영토의 비율이 타 추축국보다 확실히 미약했다. 실제로 독일은 24%, 일본은 11%의 본토를 빼앗긴 반면, 이탈리아는 전체 면적의 단 3%를 잃었다. 다만, 일본과 마찬가지로 리비아와 에게해 제도 등 식민지란 식민지는 전부 다 몰수당했다.[48] 명시적인 패전국인 일본, 핀란드나, 중립국이지만 연합국에 찍혔던 당시 프랑코 정권 치하 스페인과 비슷한 시기이다. 독일은 냉전의 상황으로 인해 한동안 동서독 모두 UN 가입에 제약을 받다가 서독이 할슈타인 원칙을 포기하고 동방 정책으로 전향한 1973년에 비로소 양국 모두 가입할 수 있었다.[49] 움베르토 2세는 국민투표 결과에 대해 조작된 부정선거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정치권과 법원이 인정하지 않았고, 확실한 증거도 없었다.[50] 연합군에 의해 일찍 해방되고 무솔리니 축출 이후 왕국 정부가 유지된 남부는 왕정 지지 여론이 높았으나 나치 독일이 축출당한 무솔리니를 내세워 만든 괴뢰국 살로 공화국에 저항하는 파르티잔 활동이 활발했던 북부는 공화국을 지지했다. 움베르토 1세만 해도 남부문제로 골치를 썩였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51] 왕정 유지에 투표한 유권자들도 대부분 내전을 감수할 만큼 왕정 유지에 사활적이지 않았다. 또한, 이탈리아 해방의 한 축인 연합국 측에서도 왕정 폐지로 인한 충돌을 원하지 않았다. 움베르토 2세는 '이탈리아는 오랜 전쟁으로 지쳐있으며, 내 조상들이 이탈리아를 통일했는데 어찌 내 손으로 다시 분열시키겠느냐.'라는 말로 내전 시도를 일축하였다.[52]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안장되었다가 2017년, 조상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가 묻힌 피에몬테의 비코포르테 성소로 이장되었다. 움베르토 2세는 사보이아 가문의 조상들이 묻혀 온 프랑스 사부아의 오트콩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53] 가난한 남부 뿐만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았고 1900년 이후로는 고도성장을 겪은 북부에서도 남부 못지 않은 이민자를 배출하였다.[54] 동시기 영국이나 독일 같은 경우는 토지 귀족 계층이 파괴되지 않은 채로 산업화와 근대 국민국가화에 온전히 성공하였는데 이는 소작농들을 토지개혁 없이 바로 도시 노동자로 불러들여도 미약하게나마 구매력을 가진 계층으로 성장시킬 수 있을 정도로 산업 잠재력 자체가 매우 높았던 점에 기인한다.[55] 사실 국력(해군은 그렇다쳐도 육군은 일본 육군이 열강 육군, 해군 뭐든 군대에서도 최약체)으로 봤을때는 이탈리아 왕국과 일본 제국 간 국력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존재감이 훨씬 큰 이유는 일본이 육군은 변변찮아도 해군만큼은 강국이었고, 사실상 독일의 하수인 노릇이나 했기 때문에 유럽 전선에서의 존재감이 부족한 이탈리아와 달리 일본은 독자적인 전선을 형성하여 주체적으로 전쟁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범죄의 규모가 비교적 작았고 피점령민에게 덜 포악했던 이탈리아 왕국에 비해 일제는 나치 독일에 버금가는 전쟁범죄와 만행들을 일삼아 대중들의 뇌리에 깊게 박혔기 때문이기도 하다. 덧붙이자면 일본의 변변찮은 육군도 있으나마나였던 중화민국 국민혁명군과 빈껍데기만 남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식민지 점령군에 비하면 강했다. 일본의 경우 자신의 강점인 해군력은 미국으로 향했고, 약점인 육군력은 더 약한 대륙을 향했기에 실제 군사적 역량보다 더 강한 듯한 착각을 준다. 반면 이탈리아는 주요 열강치고 매우 약했고 해군력은 비교적 강했으나 여전히 미국, 영국, 일본 등의 해군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56] 그나마 금발벽안 비율이 높은 북부 이탈리아인들은 아리아인 대우를 받으며 준 독일인으로 산다는 게 시즌 4에서 밝혀졌다. 그 말은 반대로 남부 이탈리아인들은 그런 대우를 못 받는단 소리다.[57]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망명으로 끝나는 원래 역사와 달리 전범으로서 처벌 받고 움베르토 2세는 왕좌에 앉아보지도 못한다. 결정적으로 70% 이상으로 원 역사를 압도하는 왕정 폐지 여론에 휩쓸린 채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당한다.[58] 상술했듯이 드라마판에서는 독일에게 토사구팽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