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24 21:22:24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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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국의 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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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
Somalia Italiana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파일: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 국장.svg
국기 국장
1889년~1941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소말리아계 여러 술탄국[1] 소말릴란드 군정
수도 모가디슈
공용어 이탈리아어, 소말리아어, 아랍어
종교 이슬람교

1. 개요2. 역사

1. 개요

이탈리아가 소말리아계 여러 술탄국들과 보호 조약을 맺으면서 만든 식민지이탈리아 왕국보호령이다.

1936년에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의 구성국이 된다. 1941년 영국군에 점령당해 군정이 설치되었으나 세계대전이 끝난 후 UN은 이탈리아에게 다시 신탁통치하도록 해 1950년 소말리아 신탁통치령이 출범한다.

2. 역사

1876년 체사레 코렌티는 이탈리아 지리학회를 통해 아프리카 탐험대를 조직했다. 이듬해 만프레도 캄페리오가 탐험 잡지 『L’Esploratore』 를 창간했고, 1879년에는 이탈리아 산업계가 참여한 아프리카 상업 탐험 협회가 설립되었다. 1880년에는 소말리아에서 아프리카 클럽이 만들어졌고, 이는 3년 뒤 이탈리아 아프리카 협회로 발전하였다. 이탈리아는 수에즈 운하아덴만 때문에 소말리아를 식민화하려고 했고, 이탈리아는 호비요 술탄국과 마제르틴 술탄국을 보호령으로 만들어버렸다.

1890년 4월 24일, 이탈리아 증기선 볼타가 워르셰이크 해안으로 파견되었다. 중위 카를로 자바글리가 지휘했으며, 하위예 씨족의 압가알 하위 부족 지도자와 만나 우호 의사 전달 및 선물 증정이 목적이었다. 자바글리와 함께 선원 6명과 아랍 통역사 세이드 아흐메드가 동행했다. 그러나 상륙 후, 현지 추장의 신호로 매복 공격이 벌어졌다. 자바글리는 즉시 부상을 입고 배 위에서 사망했으며, 선원들은 탈출을 시도하다 사방에서 공격을 받았다. 선원 베르토렐로는 부상 후 사망했고, 배는 화살에 뒤덮인 채 귀환했으며, 자바글리의 시신은 참수된 상태였다.

이에 분노한 이탈리아는 1891년 2월, 잔지바르 주재 영사 필로나르디에게 명령해 소말리아를 본격적으로 식민화 할 준비를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1893년, 필로나르디와 이탈리아 해군이 여러 항구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10월 2일 메르카에서 이탈리아 장교 마우리치오 탈모네가 소말리인들에게 살해되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님모와 자시라 해안이 폭격당했으며, 필로나르디는 노예제 단속과 무역 수입 증대를 시도했다. 1895년, 필로나르디는 줌보를 추가 점령했다. 1896년 11월, 임시총독이던 안토니오 체키가 라푸울레 근처에서 와단전사들에게 습격받아 사망했고, 이 사건은 소말리아의 아드와로 불렸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1897년 2월 1일, 조르지오 소렌티노 대위가 라푸울레 보복 원정을 지휘했다. 그는 엘바와 고베르놀로 함선의 지원을 받아 이탈리아 병사들의 유해를 수습하고 체키 요새를 건설했다. 이후 님모 마을을 불태우고, 게시라에서 주민 70명을 체포했으며, 라푸울레 등 마을들을 파괴했다. 전투에서 소말리인 약 50명이 사망, 이탈리아군 1명이 전사했다.

이렇게 서로 주고받는 와중에 소말리아에서 대규모 반이탈리아 봉기가 발생했다. 주도 세력은 노예무역에 대한 이탈리아 식민회사의 단속에 반발한 비말 씨족이었다. 그러나 1905~1908년, 이탈리아군은 여러 전투에서 비말 세력을 제압하며 점차 남부 소말리아를 장악했다. 1912년 이후, 사이이드 모하메드 압둘라 하산이 이끄는 데르비시 운동은 이탈리아 남부 소말리아 확장에 맞서 히란 지역에서 저항했다. 그 와중에 영국은 주바랜드 지역을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에 양도하면서 이탈리아의 영토가 확대되기도 했다.

1923~1927년, 무솔리니 정권은 왕립 식민군단을 동원해 소말리아 전역을 무력 점령하였다. 북부 술탄국들은 조약상 자치가 있었지만, 데 베키 총독이 도착한 뒤 이탈리아는 이를 직접 통치 체제로 전환되었다. 1927년, 2년간의 저항 끝에 이탈리아가 소말리아 전역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1930년대 초, 총독 귀도 코르니와 마우리치오 라바는 동화 정책을 추진해, 많은 소말리인이 식민군에 입대하였고, 이탈리아인 이민자 수천 명이 모가디슈와 주변 농업지로 이주해 농경지를 개간하였다. 1930년 기준, 이탈리아인 약 22,000명이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에 거주하였다.

1935년, 모가디슈는 이탈리아 해군의 주요 기지이자 보급항으로 발전하였다. 무솔리니는 대소말리아를 이탈리아 식민제국의 핵심으로 보고, 이를 에티오피아 침공의 정당화 근거로 삼았다. 무솔리니는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복수할 겸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소말리 병사 약 4만 명이 참전했으며, 대부분 이탈리아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였다. 1936년 6월, 전쟁이 끝나자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는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와 함께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에 통합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영국과 이탈리아는 적대관계가 되었다. 이탈리아군이 영국령 소말릴란드 점령, 케냐 북부(모얄레, 부나) 및 프랑스령 소말리아 일부 지역까지 확보해, 무솔리니는 소말리 지도자들에게 이탈리아가 대소말리아를 이룩했다고 자화자찬하였다. 그러나 1940년 말~1941년 봄, 영국군의 반격으로 이탈리아군이 격퇴당했고, 1941년 봄, 영국이 이탈리아령 및 영국령 소말릴란드, 오가덴 전역을 탈환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UN은 이탈리아에게 다시 신탁통치하도록 해 1950년 소말리아 신탁통치령이 출범한다.
[1] 비말 술탄국, 호비오 술탄국, 마지르틴 술탄국, 히랍 이맘국(야쿠비 왕조), 겔레디 술탄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