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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명종조 대왕대비 성렬대왕대비 | 聖烈大王大妃 |
태릉 능침 | |||
출생 | 1501년 12월 12일(음력 10월 22일) | ||
조선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
사망 | 1565년 5월 15일(음력 4월 6일) (향년 63세) | ||
조선 한성부 창덕궁 소덕당[1]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
능묘 | 태릉(泰陵) | ||
재위기간 | 조선 왕비 | ||
1517년 8월 16일 ~ 1544년 12월 14일 | |||
조선 왕대비 | |||
1544년 12월 14일 ~ 1545년 8월 22일 | |||
조선 대왕대비 | |||
1545년 8월 22일 ~ 1565년 5월 15일 | |||
조선 대왕대비 | 조선 국왕 수렴청정 | |||
1545년 8월 22일 ~ 1553년 8월 30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 파평 윤씨 | |
부모 | 부친 파산부원군 윤지임 (坡山府院君 尹之任, 1475 ~ 1534) 모친 전성부부인 전의 이씨 (全城府夫人 全義 李氏, 1475 ~ 1511) | ||
형제자매 | 8남 3녀 중 차녀 | ||
배우자 | 중종 | ||
자녀 | |||
종교 | 불교 | ||
봉작 | 왕비(王妃) → 왕대비(王大妃) → 성렬대왕대비(聖烈大王大妃) | ||
전호 | 문덕전(文德殿) | ||
존호 | 성렬인명(聖烈仁明) | ||
시호 | 문정왕후(文定王后)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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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종의 제2계비. 인종의 계모, 명종의 모후. 시호는 '성렬인명문정왕후(聖烈仁明文定王后)'.
2. 생애
2.1. 중종 치세: 중전 시기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딸로서 17세이던 1517년(중종 12), 당시 중종의 왕비이자 문정왕후에게는 9촌인 삼당고모인 장경왕후가 죽자, 원자 이호(훗날의 인종)의 외숙부이자 마찬가지로 9촌 숙부가 되는 윤임의 뒷배로 간택되어 가례를 치르고 중전이 되었다. 중전이 되었으므로 당시 태어난 원자 이호를 잘 돌봐야 할 책무가 있었고 처음에는 성심성의껏 양육했다.하지만 여기서부터 인간의 욕심이 시작되었다. 당시 중종은 여러 후궁들로부터 많은 서통 왕자들을 얻은 상태였으나 적통 왕자는 장경왕후가 낳은 원자 이호가 유일했다. 한미한 집안 출신인지라 든든한 친정 배경에 왕자들까지 생산한 후궁들보다도 기반이 미약했던[4] 문정왕후는 적통 왕자를 낳아 입지를 다지려 했다.[5] 실제로 문정왕후는 연달아 임신하여 의혜공주, 효순공주, 경현공주, 인순공주[6]를 낳았다.
문정왕후가 원하던 아들을 좀처럼 낳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설상가상으로 문정왕후에게 기어 오르던 경빈 박씨는 자신의 아들인 복성군을 내세워 문정왕후의 양자인 세자 이호에게 도전해 왔다. 세자의 또다른 친위 세력인 세자의 누나 효혜공주의 시아버지 김안로가 작서의 변을 조작하여 경빈 박씨를 찍어내고 조정의 가장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며, 문정왕후는 이들과 잠시 한 배를 타기도 했다. 문정왕후가 드라마에서는 군기잡는 연상의 이미지이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경빈 박씨보다 훨씬 나이가 어렸다고 한다.[7]
그러다 문정왕후가 34살의 늦은 나이에 마침내 고명아들[8] 경원대군을 낳으면서 정국에는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했다. 문정왕후가 경원대군을 낳기 3개월 전에 아버지인 윤지임이 사망하여 심신의 상태도 썩 좋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문정왕후뿐만 아니라 늦은 나이에 2번째 적자를 본 중종도 당연히 기뻐했다.
사실 경원대군을 낳기 전까지의 문정왕후는 세자의 편이 되어 세자를 감싸는 입장이었으며 작서의 변 사건 때도 문정왕후는 최대한 힘써서 세자를 지극정성 보호했다. 혹시나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한 채로 중종이 죽게 된다면 왕으로 즉위한 세자를 등에 업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대하던 아들을 낳자 문정왕후는 태도를 180도 싹 바꿔 노골적으로 세자를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중종 말년 세자가 있는 동궁 자선당이 불탄 사건의 배후로 문정왕후가 지목받을 정도다.[9] 신하들은 화재나는 멀뚱멀뚱 화재 이후 대신들이 대책을 논의함과 동시에 당시 관련자들을 문책한다고 했지만, 세자였던 인종이 소를 올려 아랫사람들을 벌하기보다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천벌이라고 자책하는 글을 남겼고, 결국 제대로 된 수사를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부터 자신의 남동생들을 불러 당파를 만드는데 그 유명한 윤원로와 윤원형.[10] 이들이 바로 소윤(小尹)의 축이다. 그 후 김안로는 명종을 등에 업은 문정왕후와 그녀의 남동생들인 윤원로와 윤원형이 급부상하는 것에 위기를 느껴 결국 이들을 제거하려 하려는 선을 넘게 된다. 이에 중종은 "김안로가 대역부도하다"며 도리어 그를 찍어내고 사약을 내린다. 이때 또 다른 세자의 보호자 윤임이 김안로 숙청에서 한 몫을 담당하는 바람에 세자를 옹호하는 세력(대윤)들을 때려잡는 데는 실패하고 다만 세력을 엇비슷하게 맞추는 데는 성공했다.
2.2. 인종 치세: 왕대비 시기
1544년(중종 39년), 중종이 죽고 세자가 즉위하여 인종이 되었으니 '소윤'은 사그라들고 '대윤'의 기세가 승승장구했다. 이와 더불어 소윤의 축 윤원로는 유관 등의 주도로 대윤의 탄핵을 당해 귀양살이까지 했다. 자신을 감싸던 윤원로가 사라지자 문정왕후는 자신의 아들인 경원대군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인종을 극도로 몰아세우면서 자신의 안위를 철저히 보존하려 했다. 부왕 중종의 장례 때 인종은 장례 의식을 철저히 준수[11]하며 안 그래도 허약한 몸을 망치고 있었는데 그랬던 인종에게 계모 문정왕후의 계속된 핍박은 더욱 치명타였다는 견해도 있다.[12]특히 인종이 식음을 전폐하고 장례 의식을 철저히 준수하는걸 본 정승들이 "세종대왕께서도 장례 중에 육선을 드셨습니다."하며 고기 들기를 권했으나 인종은 먹지 않겠다고 했고 문정왕후는 정승들 앞에서는 "주상께 고기를 드시라고 허락했는데 주상이 안 드시는걸 나한테 어쩌라고?"하면서 신하들이 "그럼 자전(대비)께서 먼저 고기 반찬을 드시죠. 그러면 주상께서도 드시겠죠."라고 건의하자 "내가 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상중에 고기를 먹니?"하고 정중히 거부했다.[13]
문정왕후가 인종을 몰아세우는 모습만 보인건 아니라서 인종의 환후가 위중하니 명산대천에 기도를 올릴 것을 지시하는 등 친밀한 모습도 많이 보였다. 그러나 사이가 좋았던건 아니고 이러한 행동들이 조정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려 한 연막 작전이었을 뿐이라는 해석이 많다.[14] 결국 인종은 몸이 본래 약한데다가 아버지 중종의 장례를 몸이 상할 정도로 무리하게 치르느라 등극한지 9개월만에 요절했다.
하지만 야사가 일반인들에게 더 유명한데 야사에서는 문정왕후가 환한 얼굴로 인종을 맞으며 떡을 주었는데 문제는 그 떡에 독극물이 있었고 떡을 먹으면서 '계모가 드디어 날 용서하나?' 싶었던 인종은 기쁜 마음에 떡을 먹었다가 그 후 얼마 안 되어 승하했다. 다른 야사에는 인종이 그 떡에 독이 있는걸 알면서도 마음이 너무 착한 나머지 떡을 먹고 죽는 걸 선택했다고도 한다.[15] 그러나 독살 떡밥이 사실이라면 사관들이 그와 관련하여 기록을 안 남았을리가 없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차기 왕 명종이 문정왕후의 친아들인데다가 한동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까지 했었기에 권력의 속성상 그런 의혹이 묻혔을 수 있고 따라서 독살 가능성 역시도 상당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듬해인 1545년(명종 즉위년), 결국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명종이고 이와 더불어 대왕대비인 문정왕후가[16] 수렴청정을 하였다.
2.3. 명종 치세: 대왕대비 시기
"미망인이 박덕하고 박복하여 거듭 큰 변고를 당하니 다만 통곡할 따름이다. 이제 주상이 어린 나이로 보위(寶位)를 계승하였으니 국가의 대사(大事)를 오로지 대신만 믿는 바이다. 또 지난날 근거없는 낭설을 유포하는 무리들이 사특한 말을 조작하여 나라를 어지럽히려 하였으므로 지금까지도 인심이 의구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시 이런 사특한 말을 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엄히 다스릴 것이다. 그러나 이왕의 낭설에 대해서는 위에서 털끝만한 사심(私心)도 없으므로 이를 다 탕척하고 힘써 인심을 안정시켜 조정을 편안하게 하려고 하니, 대신들도 의당 이 뜻을 알아서 인심을 진정시키고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돕도록 하라."
명종 즉위년(1545), 7월 7일 정유년 1번째 기사
명종 즉위년(1545), 7월 7일 정유년 1번째 기사
명종 2년에 성렬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인종 때는 재위 기간이 짧아 존호를 올릴 겨를이 없었던 모양.
결국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를 일으켜 인종을 위시한 윤임과 대윤을 찍어내었고 오히려 자신을 길들이려는 대신들이 윤원로를 귀양보내자 오히려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서 유관, 유인숙을 비롯한 대신들을 차례로 죽였고 백인걸, 권벌, 이언적을 비롯한 반대파 대신들도 유배를 보내 조정을 완전히 장악했다. 1547년(명종 2년), 일어난 양재역 벽서 사건[17]을 빌미로 다시 사림들과 눈엣가시였던 다른 왕족들도 제거하였다. 대윤의 잔당을 뿌리 뽑는다는 명분으로 을사사화보다도 양재역 벽서 사건이 그 여파는 더욱 컸다. 그리고 1549년(명종 4년), 충주에서 이홍윤의 옥사가 터지자 수십 명의 목을 날려버리고 충주를 유신현으로 강등시킴으로써 충청도[18]를 청홍도[19]로 바꾸었다. 그런데 이 이홍윤의 옥사가 가관인데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죽은 유학자 이약빙은 원래 충주의 대유학자로 일대의 선비들이 죄다 그의 문하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죽자 분노한 그의 아들 이홍윤이 아버지의 장지를 잡으며 친구들과 "좋은 날이 오면 옥사의 결과가 뒤집힐 것"이라는 요지의 '불온한 말'을 주고 받았다. 이홍윤의 이복형 이홍남이 이를 수상쩍게 여겨 고변을 함에 따라 10여 명이 능지되고 그 이상이 고문사하는 초대형 사건으로 커져 버렸다. 그런데 이런 대형 역모를 때려잡았는데도 공신 책봉이 없었다는 것 때문에 조작이 아니냐는 말이 있다. 거기에 초기에 책임자인 이기는 "미친 놈들이 모여서 헛소리 좀 한 사건이니 곤장이나 치고 유배나 보내고 말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언각이라는 자가 "헛소리를 하면서 한 일을 캐내야 한다"고 이기를 꼬드겼고 이에 이기는 난언율 사건을 역모 사건으로 확대하여 버렸다. 추신으로 정언각은 양재역 벽서 사건을 확대 해석하여 사건을 기여코 키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원래 괘서는 범인을 잡을 수도 없으니 보는 족족 태우는 것이 관례인데 정언각은 이를 떼어 갖다바친 것이다. 그런데 이기, 정순붕 등은 "벽서가 붙은 이유는 역적들에게 가볍게 벌을 준 탓이다."라고 전혀 관련도 없는 엉뚱한 종친 봉성군, 송인수, 이약빙, 이언적, 노수신, 정황, 유희춘, 권응정, 이천제, 권벌, 백인걸 등을 처벌할 것을 청한 것이다. 이를 대왕대비였던 문정왕후가 수락함에 따라 일대 피바람이 불었다.
이 정도면 완전히 여왕인데 세간에서도 문정왕후를 여걸이라 칭할 정도였다. 이와 더불어 소윤의 핵심인 남동생 윤원형, 이기, 정순붕, 임백령, 최보한 등에게 주요 요직을 주었고 윤원형의 첩인 정난정은 정경부인으로 올려주기까지 했다. 이와 더불어 문정왕후와 그 딸들인 공주들, 윤원형, 정난정까지 그 권세는 엄청났고 시전을 장악하여 시전 상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아서 드셨다. 한양 각지에 엄청난 사저를 가지고 백성들을 강제로 노역에 동원하여 엄청난 원성을 들었다. 헌데 소윤의 핵심들 중에서 잘나간 이들은 몇 안 된다. 우선 윤원형과 이기는 엄청난 권세를 누렸지만 정언각, 정순붕, 임백령, 최보한, 윤춘년 등은 사화 이후 몇 년도 못가서 죄다 골로 가버렸고 온건파였던 허자는 윤원형과 이기의 성미를 건드렸다가 숙청당했다. 이기 역시 말년에 윤원형과 대립하다가 실권을 다 잃고 1552년에 세상을 떠난다. 이후 권력은 윤원형이 거의 다 가지게 된다. 윤원형의 권력이 최강인 시절에 우의정이 진짜 알짜배기가 있는 권력이었으며 영의정은 정승으로써 별로 실권이 없었다. 병권을 감독하는 자리에 좌의정과 더불어 정승들 중 권력이 쎈 직책이었는데, 이량이 등용되자 윤원형이 그를 우습게 보아서인지 "한직에 머물러도 막후에 권력을 휘두르면 되겠지"라고 해서 1년도 안 되어 사임했는데 문제는 이량 또한 권력에 대한 욕심이 윤원형보다 더 배포가 커서인지 "차라리 우의정 하고 있을걸"이라고 후회막급하였다. 그런데 이량도 권력에 절정에 달했을 때 이조판서였으며 정승에 오르지 못하고 육조의 수장을 끝으로 실각되었다. 문정왕후 시기의 영의정은 윤인경, 홍언필, 심연원[20] 등이다. 윤원형은 심연원의 후임인 상진이 1558년(명종 13년)에서 1563년(명종 18년)까지 재임한 다음인 1563년(명종 18년)이 돼서야 영의정이 되었는데 문정왕후의 섭정이 종료된 다음에 외척 이량이 급부상할 시점에 명종이 외삼촌 윤원형을 안심시키는 차원으로 임명한 것이다.
야사에서 이미지가 너무 강해지자 사람들은 자주 명종을 '마마보이 임금'이라고까지 비하하기도 한다. 굳이 마마보이라고 불릴 만한 이유를 들자면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둔다고 했을 때 울며불며 사양했고 "대신들은 뭐하는가! 어머니를 말리지 않고!"라며 징징거렸던 모습 정도인데 사실 저런 쇼는 수렴청정을 거둘 때 다들 하였다.[21] 하지만 막상 친정을 시작한 후에는 딱히 모후의 간섭을 받지 않고 나름대로의 정치를 펼쳐 나갔다. 20살이 된 명종이 친정을 하자 편전을 내주고 물러난 문정왕후는 여전히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윤원형을 이용해 조정의 뜻을 모았다. 실제로 문정왕후의 권한이 막강하기는 했지만 수렴청정을 거두면서까지 정치에 크게 개입은 하지 않았고[22] 명종의 정책에 문정왕후가 크게 제동을 건 기록도 발견되지 않는다. 특히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중전 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을 크게 중용했는데 이에 대해서도 문정왕후는 이의를 전혀 제기하지 않았다. 야사에서는 문정왕후가 내시와 궁녀들을 이용해 명종을 항상 감시하게 했으며 명종에게 가서 따지고 만약 아들인 명종이 자신의 말을 안 들으면 다 큰 자식, 그것도 임금에게 뺨을 때리거나 회초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로 명종은 어머니만 보면 겁부터 먹고 쫄며 지냈다 카더라. 어디까지나 야사인 것에 주의. 그러나 이러한 야사도 어느 정도는 실제 상황을 반영하기는 한 모양이다. 다음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스스로 명종(明宗)을 부립(扶立)한 공이 있다 하여 때로 주상에게 ‘주상께서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하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곧 꾸짖고 호통을 쳐서 마치 민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함이 있었다. 상(上)의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김없이 받들었으나 때로 후원(後苑)의 외진 곳에서 눈물을 흘리었고 더욱 목놓아 울기까지 하였으니, 상(上)이 심열증(心熱症)을 얻은 것이 또한 이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명종실록 31권, 2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명종실록 31권, 2번째 기사
2.4. 불교 부흥
숭유억불인 조선에서 승려인 보우를 총애하여 불교의 중흥을 꾀하고 승려들의 과거인 승과[23]와 도첩제(度牒制)[24]를 부활시키는 등의 행보를 밟았다. 엄밀하게 따지면 불교를 총애한 것은 거의 전 시기의 조선 왕실의 특징이기도 했다. 애초에 성리학은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왕실 내부, 특히 궁중의 여인들에게는 매력이 없었다. 하지만 문정왕후와 이런 일반적 이들과는 실질적인 권력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결정적 차이가 있었다. 조선 왕조 500년을 통틀어서 가장 불교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노력해서 성과를 거둔 시기가 이 문정왕후의 치세이기도 하다. 이런 중흥책은 불교 자체에 대한 문정왕후의 개인적인 독실한 불심도 작용했겠지만 가뜩이나 자신의 말을 안 들어먹는 사림파들을 약화시키기 위한 계책이기도 했다. 이를 안 사림들과 유생들은 노발대발하며 큰 반발을 일으켰다.하지만 문정왕후의 국정 장악력 자체는 대단한 것이라 얼마 안 있어 사그라들었고 내수사의 권력화로 사대부들은 더이상 절에서 깽판을 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이건 이거대로 "내시 주제에 사대부를 능멸한다"고 사대부들의 어그로를 더 끌었다. 보우의 경우 사실 땡중으로 알려져 있지만 보우의 악행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엄밀하게 따지면 아니라고 봐야 한다. 실제로 보우 비판의 내용을 보면 국정이 문란해지고 재난이 늘고 하는 등의 이유를 보우와 불교에서 찾고 있을 정도이지만 분명한 비리의 증거를 대지 못하고 있다. 문정왕후 생전에 보우가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절에서 물건 훔치고 패악질 하던 유생들 중에서 가장 악질적이었던 황언징을 <경국대전>에도 언급되는 유생들이 절에 가지 못하도록 한 '금유생상사지법'을 통해서 처벌하고 유생들이 사찰에 들어가서 횡포를 부리는 것을 막은 것이었다. 이후 보우 처벌 후 과거 무학대사와 이성계가 머물렀을 정도로 대찰이자 조선 왕실의 원찰이었던 양주 회암사가 보우의 거점이었다는 이유로 유생들과 인근 농민들에 의해서 약탈되어서 말 그대로 터만 남을 정도가 될 정도로 불교에 대한 멸시가 강했던 조선 시대였기 때문에 "그까짓 절의 물건 좀 가져온 것이 무슨 죄냐, 황언징을 석방하고 보우를 처벌하라"는 상소가 물밀듯이 쏟아졌다. 또한 보우가 문정왕후의 쾌유를 기원하려는 목적으로 부처님오신날에 국가적인 대형 법회를 벌인 것을 두고 "많은 국고를 소모하였다"는 명목의 괘씸죄가 더해졌다. 사실 유생들 입장에서는 숭유억불이 모티브인 조선에서 불교를 부활시키려는 시도를 한 것만으로도 쳐죽일 놈이었다.
2.5. 죽음
문정왕후의 죽음에 얽힌 재미있는 설화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바, 문정왕후가 죽기 전 한강 두모포[25]에서 거대한 괴 물고기가 낚여 올라왔다. 이 광경을 구경하던 여러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이를 보고 "큰(大) 물고기(魚)가 낚여 올라오니(行), 이는 윤원형의 '형'(衡) 자를 암시하는 것이라 곧 그가 몰락 테크를 타게 될 것이다"라고 점쳤다.[26] 그로부터 3일 후, 과연 점괘대로 문정왕후가 죽음을 맞이하며 그와 동시에 윤원형과 정난정이 몰락하기 시작했다.문정왕후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유언에서 "주상이 이단(불교)을 박해하려거들랑 신하들 너희들이 좀 막으라"고 했는데 정황상 명종이 불교를 신봉하려 들어도 어림없는 판국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의 '사관 논평'에 나온 말이라서 문정왕후를 비하하는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유학자들 입장에서는 일단 대왕대비가 지나치게 전횡을 부린다는 것에 불만이 많았고[27] 무엇보다도 숭유억불 원칙을 가진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국가 차원[28]에서 불교를 중흥시키려는 시도를 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1565년(명종 20년), 창덕궁 소덕당에서 문정왕후는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하필이면 이것이 불교 행사를 위해 목욕재계하다 한기가 들어 중병[29]에 걸린 것이라[30] 가뜩이나 사대부들의 미움을 받으며 '적승'이니 '요승'이니 하는 오명은 다 듣던 보우는 완전히 죽일 놈이 됐다.
문정왕후의 죽음 이후로 윤원형과 정난정도 몰락하여 집에 처박혀 있다가 부부가 잇달아 요단강을 건너고, 보우는 한때 친했지만 살기 위해 배신한 윤원형까지 가세한 신하들의 처형 요구에 승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귀양갔다. 그리고 불교 중흥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제주목사 변협에게 곤장을 맞다가 이내 참수당한다. 사실 보우의 죽음은 엽기 그 자체였다. 엄밀하게 따지면 이런 식의 참수는 지방관이 함부로 내릴 수 없고 한양으로 올려서 처형해야 하는 것이 조선 시대의 법률 체계였다.[31] 그런데 보우는 일개 제주목사의 선에서 죽은 것이다.
보우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난 것이 6월 말에서 7월이었는데, 보우의 죽음이 도성에 알려진 것은 10월 중순이었다. 더욱 엽기적인 것은 실제 보우가 죽은 다음에도 유생들은 "보우를 죽이라"는 상소를 올렸고, 명종은 "이미 보우의 죄가 정해졌다"는 이유로 "더 이상 논죄하지 말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이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것이 바로 10월 14일, 보우의 죽음이 전해지기 바로 하루 전이었다. 여러모로 법률 체계를 무시한 처벌이었으나 그냥 저냥 넘어간 듯하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변협의 입을 빌려 "모후를 생각하면 죽이라는 명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했는데 꽤 그럴듯해 보이기는 한다. 사실 변협이 목을 쳐버리든 말든 보우가 발 붙이고 살아갈 수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만, 명종 입장에서는 그래도 어머니가 총애한 승려의 목을 날리라는 명령을 내리기에도 껄끄러울테니 이런 절충점이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또한 승과와 도첩제 등 문정왕후가 추진한 불교 융성책들은 모두 휴지통에 들어갔다. 그나마 살아남은 것은, 능침의 사찰이나 고찰의 경우는 잡인들이 함부로 출입하는 것을 막고 무뢰배가 유생인 척하고 절에 들어가서 행패를 부리지 못하도록 단속하라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출입한 것은 유생들이었으니 이런 명목상의 지시가 지켜질 리가 없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양주 회암사의 파괴로 단적으로 드러난다.
문정왕후의 죽음은 아들 명종에게 호기가 되었으나[32] 명종은 2년 뒤에 34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명종의 유일한 후사였던 아들 순회세자도 일찍이 요절한 상태라,[33] 명종 사후 왕통은 조선 개국(1392) 이래 처음으로 방계 서자 혈통인 하성군(선조)에게 이어지게 된다. 선조는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씨의 손자로, 조선의 첫 방계 계승은 이방원이 둘째형 이방과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것이다. 다만 이전까지 방계 계승을 이은 왕들은 아버지가 왕이었기 때문에 직계 계승으로도 볼 수 있고, 선조는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이 중종의 서자이기 때문에 '첫 방계 서자 혈통의 왕'이 된다.
2.6. 무덤
능은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태릉(泰陵). 유명한 태릉선수촌[34] 바로 근처에 있다. 왕비의 무덤인데 능호가 '클 태(泰)' 자인 것을 보면 문정왕후의 권세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데 크기도 웬만한 왕의 무덤보다도 더 크다.본래 중종의 능은 장경왕후의 무덤 옆인 지금의 예릉 위치에 조성되었으나, 문정왕후가 중종의 옆에 묻히고 싶었는지, 당시 광주군 언주리의 선릉(宣陵, 중종의 아버지 성종의 능) 근처로 이장시키고, 자신의 자리도 그 옆으로 예비해뒀었다. 그러나 정릉 근처가 지대가 낮아[35] 여름에 비만 오면 침수되었다 하여 결국 현재 자리에 묻혔다. 침수가 잦자 다시 묏자리를 옮기려고 하였으나 "거듭해서 묏자리를 옮기는 것은 불가하다"는 이유로 상소가 쏟아져서 중단되었을 정도로 당시에도 그런 이야기는 별로 먹히지도 않았다. 풍수지리가 맞건 틀리건 생전에 그만큼 문정왕후가 아들을 죽도록 들볶아 댔던 탓도 크다.
그런데 이 자리는 풍수지리상으로 무후지지(無後之地)라고 하며 후손이 끊기는 자리라는 것인데 당시에도 이 자리가 무후지지라는 소문이 파다했었나보다.[36]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명종은 윤원형과 총호사 심통원에게 대방동[37]과 경기도 장단군 이 2곳을 두고 의견을 물었는데 윤원형이 술관의 이야기를 듣고 대방동에 묻힌 사람의 후손을 비교해본 결과 풍수지리설이 별 신빙성이 없다고 여겨 결국 대방동이 묏자리로 전해졌다고 한다.[38]
하지만 남편 곁에 묻혔으면 시아버지와 남편처럼 능이 도굴되어 시신도 못찾는 지경이 되었을지도 모르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태릉 내부에 조선왕릉 전시관을 지어 놓았다. 태릉선수촌을 사이에 두고 아들 명종의 능인 강릉이 위치하고 있다. 조선 시대의 왕릉 중 유일하게 왕비릉이 왕릉을 앞장 선 형태라고 한다. 물론 왕의 어머니이기도 해서 그렇지만 묘의 위치 자체가 어머니 치맛바람에 치여 살던 명종의 삶을 사후에도 보여주고 있는 꼴이라 그저 지못미. 왕후답지 않게 큰 규모의 능역을 가진 덕분인지 현대에 들어서는 서울 노원구 시민들의 나들이 장소로 애용되고 있다. 정작 바로 옆에 붙은 강릉은 제한된 비공개 능역이라 사람도 별로 안 온다.[39] 문정왕후의 능인 태릉은 태조의 건원릉이 있는 동구릉, 세조의 광릉, 성종의 선릉, 중종의 정릉, 신덕왕후의 정릉, 명성황후의 홍릉 등과 더불어 지명화된 왕릉들 중 하나이다.
3. 평가
(상략) "사신은 논한다...... 그의 아우 윤원형(尹元衡)과 중외에서 권력을 전천(專擅)하매 20년 사이에 조정의 정사가 탁란(濁亂)하고 염치가 땅을 쓸어낸 듯 없어지며 생민(生民)이 곤궁하고 국맥(國脈)이 끊어졌으니, 종사가[40]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이다....... 윤씨는 천성이 강한(剛狠)하고 문자(文字)를 알았다. (중략) 윤비(尹妃)는 사직의 죄인이라고 할 만하다. 《서경(書經)》 목서(牧誓)에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 하였으니, 윤씨(尹氏)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조선왕조실록》 명종 31권, 명종 20년 4월 6일 2번째 기사
평가가 굉장히 좋지 못한 왕비인데, 8년간 섭정하며 사림들을 죽이고 권세를 이용하여 외척들을 비호한 부정부패의 온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이유에 대해서는 후술하겠지만 일각에서는 불교를 숭상한 여걸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조선왕조실록》 명종 31권, 명종 20년 4월 6일 2번째 기사
사림을 싫어한 나머지 윤원형으로 대표되는 척신세력과 자신을 따른 소윤을 전적으로 신임했는데 문제는 그들의 부패가 극심해(…) 국정이 심각하게 문란해졌다는 것. 황해도에서 임꺽정이 활동하던 시기가 이 시대였으니 당시 일반 백성들에게는 분명 수탈과 고통의 시기이다.[41] 거기다 문정왕후가 죽고 나서 개선되었냐면 그건 또 아니었으니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운 게 당연하고, 후자는 사실 지나치게 커진 사림파의 권한을 약화시킬 목적에서 한 거라 사대부 입장에서야 못마땅하겠지만 국가가 무너질 정도로 무리하게 힘을 실어준 것도 아니고 유생들의 행패를 저지하고 문정왕후가 시행한 승과는 세종대왕도 시행했던 거라서 객관적으로 봤을 땐 좀 지나치게 까인 분야다.[42]
사실 문정왕후를 까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건 역시 명종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효심을 다하던 인종을 견제해 죽게 만든 원흉 중 하나라는 것[43] 과 명종에게 매를 때렸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수렴청정이 끝났음에도 물러나지 않고 과하게 간섭했다는것, 인종에게 독을 탄 떡을 먹여 죽였다는 야사가 있을 정도로 문정왕후가 인종을 견제하고 괴롭혔다는 거. [44] 그래서 자신의 권력을 위해 적법한 후계자를 죽이고 명종을 꼭두각시로 내새워 실권을 장악한 망탁조의급의 인물로 평가된다.[45]
조선왕조가 세워진 지 100년 넘어가면서 생긴 중기적 문제들을 그냥 문정왕후의 책임으로 돌리고 본다는 의견도 있다. 가령 불교 문제만 해도 한때 땡중으로 매도되던 보우의 행보를 보면 딱히 땡중으로 부를 이유도 없고, 승과도 고려 때 하던 걸 조선 초기에도 계속하다가 연산군 때 폐지했다가 다시 부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승과, 즉 정식으로 스님이 되는 과정이 없는 관계로 가짜 중(무뢰배)들이 판을 치고 돈을 내지 못한 이들이 몰래 절에 들어가 중이 되는 경우도 있어 호구 파악에 어려움이 컸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로 성리학이 뿌리내리고, 유학자들의 입김이 강해지는데, 고려시대 폐단의 원흉인 불교가 다시 고개를 드는 게 당연히 불안했을 것이다. 그냥 폐지했다고 부활한 게 아니라, 폭군의 힘까지 빌려 간신히 폐지시켜 한시름 놓았는데, 그걸 문정왕후가 떡하니 다시 살려놓은 셈이니, 사림파 성리학자들의 입장에선 눈에 가시가 따로 없었던 것. 나라에서 시험을 친다는 것은 불교와 승려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메시지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국방력의 약화도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의 실정으로 인해 꾸준히 보고가 올라오면서 수면 위로 올라오던 것이 문정왕후 치세에 이르러서 폭발한 것인데, 왜 하필 그 시대에서 폭발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왕과 왕실의 권위가 높고, 정치를 잘했다면 억누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야사에 따르면 문정왕후는 인종에게 떡을 먹인 후 독살한 간악한 인간으로 알려질 정도로 이미지가 최악이었으며, 그녀의 남동생들도 폐단이 많았다. 즉, 왕과 왕실의 권위가 떨어진 것이다. ( ...) 그리고 방납의 폐단으로 대표되는 수취 제도의 문란은 문정왕후 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무오사화 이후 연산군 시절과 중종 시절부터 있었고 문정왕후가 죽은 후에도 조선 및 대한제국이 멸망되기 전까지 계속 이어져가던 문제다. 하지만 왕과 왕실의 권위가 살아있고, 정치를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권신이나 지방의 유력자들도 어느 정도 왕실의 눈치를 봐야 한다. 하지만 문정왕후와 외척들 때문에 왕실부터 막장이라 그들의 눈치를 전혀 볼 필요가 없는 상황이라면? 폐단의 급이 달라져도 이상할 게 없다. 이전부터 있었다란 변명으론 안 되는 것이다.
윤원형, 이기로 대표되는 소윤 측근들의 비리는 심각한 수준이었고 이걸 잡지 못했다. 아무리 이전부터 존재했던 문제점이라고는 하지만, 문정왕후 섭정 연간의 조선 조정은 갑자사화 이후 폭정을 일삼던 연산군이나 옥사로 인해 정국이 혼란에 빠진 중종 시대와 못지 않게 대형 옥사를 벌였다. 결국에는 명종의 친정 시기가 되어야 이러한 대형 옥사도 끝이 나게 되었다.[46]
어쨌거나 부모로서 사랑을 베풀지 못하고, 인종을 견제하고 죽음으로 몰아간 죄와 불교를 개인적으로 숭상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인정하려고 한 죄, 그리고 외척으로서 폐단을 일으키고 정치에 관여한 죄 때문에 사림들에 의해 까인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왕실에 관한 문제만큼은 제대로 못 까는 체제의 엄연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까였다. 훗날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47]가 아버지 청풍부원군 김우명을 구하기 위해 왕이 신하들과 면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발 뒤에서 울면서 왕을 은근히 압박하고 대신들에게 손가락질하고 욕을 하자, 한 신하는 명성왕후를 '문정왕후가 돌아온 건가여?'라며 까기도 하였다.
본 단락의 처음에 인용된 조선왕조실록의 사관의 논평은 문정왕후 사망 기사에 기록된 것이다. 후세의 인물들이 평가한 것도 아니고 당대의 평가가 종사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고, 윤씨는 사직의 죄인이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조선의 사관들에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해도 저런 고인드립성의 멘트를 사망 기사에 적는 경우는 없었을뿐더러, 문정왕후의 전이나 후나 사망 기사에 저런 심한 사론이 적힌 왕비는 더더욱 없었다. 21세기 기준으로 생각해봐도 누군가의 사망 기사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논평하면 고인드립 수준이다. "문정왕후의 숭불 정책에 대한 유림들의 반발심으로 저런 심한 사론이 적혔다"는 견해도 있으나,[48] 문정왕후는 섭정 기간에는 연산군이나 중종 못지않게 대형 옥사를 저지른 인물이었고 이와 함께 이에 대한 폐단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러나, 권신 윤원형과 그의 세력을 후원하며 국정을 농단한 문제[49]는 분명 문정왕후의 책임이기에, 저러한 사관들의 비판조차도 수위를 최대한 억제한 편이라는 시각 역시 존재한다.
4. 대중매체에서
}}}||<width=50%>||<rowcolor=#ffd400> 〈풍란〉의 문정왕후 | 〈풍란〉의 어린 문정왕후 |
<colbgcolor=#bf1400> 〈조광조〉의 문정왕후 |
* 1996년 KBS 2TV 드라마 《조광조》에서는 배우 김민정이 연기했다. 방영 당시 아직 아역 배우였던 김민정이 연기했는데, 아직 중종 치세인데다가 조광조(유동근)가 주인공인만큼, 중전으로 간택된 지 얼마 안된 어린 소녀로 묘사된다. 앞서 언급한데로 문정왕후는 17살에 이미 중년인 중종에게 간택되었던 만큼, 극 중 문정왕후가 어린 소녀로 나와서 중종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부부[50]로 묘사되는 것은 상당히 재현에 신경 쓴 부분. 다만, 자신의 양아들 원자를 처음부터 견제하려는 모습을 많이 보이면서, 어린 나이임에도 싹수는 꽤 노란 인물로 묘사된다.
<colbgcolor=#bf1400> 〈여인천하〉의 문정왕후 |
}}} ||
<colbgcolor=#bf1400> 〈대장금〉의 문정왕후 |
<colbgcolor=#bf1400> 〈옥중화〉의 문정왕후 |
<colbgcolor=#bf1400> 〈마녀보감〉의 문정왕후 |
5. 기타
- 문정왕후의 어보(御寶, 왕실 도장)는 지금 LA 카운티 박물관(LACMA)에 있다. 그 이유가 6.25 전쟁 당시에 문정왕후 어보를 포함해서 39개의 어보를 종묘에 있던걸 미군 병사가 멋대로 훔쳐갔다.[53] 2000년 LA 카운티 박물관이 경매로 산 것을 시민 단체가 확인했고 꾸준히 반환 요청을 한 결과 2013년 9월 반환 결정이 내려졌다. 이후에 현종 어보와 함께 국내에 들어오게 되었고 2017년 8월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가 되었다.
- 대비로 수렴청정(섭정)하던 시절의 공식 존호는 '성렬대비(聖烈大妃)'지만 대중적으로는 '문정왕후'라는 호칭이 더 알려져 있다. 인수대비와 반대로 알려진 케이스인데 '인수대비'라는 명칭은 생전에 받은 공식 존호로 대중에는 이 명칭이 더 유명하고 그녀의 실제 시호는 '소혜왕후'이다. 비슷한 사례로는 신정왕후가 해당되는데 대비 존호는 '효유대비'지만 흔히 성인 조씨를 이용한 '조 대비'로 더 알려졌다. 덕분에 일부 드라마 등에서 대비일 때는 '문정대비'라 표기하는 약간의 재현 오류가 있었다.
- 정희왕후[54], 소혜왕후, 순원왕후[55], 신정왕후, 명성황후 등의 왕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순왕후도 문정왕후가 누린 위세에는 미치지 못한다. 정순왕후도 위세가 대단하기는 했지만 소론인 이시수와의 논쟁에서 지고 물러나야 할 정도여서 자신에게 개긴 신하들을 죄다 숙청해버린 문정왕후의 서슬퍼럼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정순왕후가 문정왕후보다 나은 점은 절제와 원칙을 중시하였고 민생에 신경을 썼으며 양손자 정조의 정책을 잘 이어 받았다는 점이다. 문정왕후와 달리 숙청은 파직이나 유배의 형식이 대부분이었고 피의 숙청은 별로 안 좋아했다. 오히려 문정왕후 다음 갈 정도로 막강한 위세를 휘둘렀던건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였는데 이쪽은 되려 수렴청정을 하지 못했는데도 그 권세가 막강한 케이스였다.[56][57][58]
- 조선의 2번째 간택 왕비였다.[59] 간혹 장경왕후 윤씨가 간택 왕비라고 아는 경우가 많지만 장경왕후는 후궁 출신이다. 의외로 조선 왕조에는 간택 왕비가 별로 없는데 오히려 간택 세자빈 혹은 후궁 출신이거나 원경왕후 민씨처럼 군부인(왕자의 아내)이었다가 남편의 급작스런 즉위로 왕비가 함께 된 경우가 많다. 조선은 당연히 현대 한국보다 평균 수명이 짧았으므로 혼인 연령도 낮았는데 왕세자 시절에 혼인하지 않기가 어려운 것이다. 간택 왕비는 정비의 사망, 폐위 또는 세자가 혼인하기에 너무 어린데 갑자기 국왕이 사망하는 때에나 간택하게 되는 것이니 그 수가 적을 수 밖에 없었다. 조선 왕조의 간택 왕비는 총 11명이다.[60]
6. 가족 관계
- 장녀 : 의혜공주 - 청원위 한경록에게 하가
- 차녀: 효순공주 - 능원위 구사안에게 하가.
- 3녀 : 경현공주 - 영천위 신의에게 하가.
- 4녀 : 인순공주 - 4살에 요절했다.
- 장남 : 조선 13대 국왕 명종 이환
7. 참고 문서
[1] 창덕궁 선정전의 북쪽 동서에 위치해 있었으며 전란과 화재로 소실되었다.[2] 성별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공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3] 작호는 경원대군(慶原大君).[4] 간택 직전 윤지임은 오위 소속 종6품 관직인 장원서 별제를 역임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문정왕후의 친정이 아주 미약했느냐? 그것은 아니다. 전임이었던 장경왕후와는 9촌 삼종질간이었으며, 더 나아가 시어머니 정현왕후 역시 파평 윤씨 가문이었다. 또한 윤지임의 증조부인 윤사흔은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남동생이었다. 내력으로만 따지면 꿀릴 가문이 아니다.[5] 이것은 문정왕후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었다. 동서를 막론하고 역사에서 왕비가 본인의 기반을 다지는 가장 강력하고도 확실한 방법은 왕위를 계승할 적법한 왕자를 낳는 것이었다.[6] 경원대군 이후 8년 만에 인순공주를 출산했으나, 인순공주는 4살 때 죽었다.[7] 인터넷 상에는 경빈 박씨와 문정왕후가 8살 차이가 난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오류이다. 문정왕후(1501년생)와 8살 차이가 나는 것은 경빈의 아들 복성군(1509년생)이다. 여기에 경빈 박씨뿐만 아니라 창빈 안씨, 희빈 홍씨는 중종반정 이후 반정 공신의 양녀 자격으로 후궁으로 간택되어 입궁한 반면, 문정왕후는 장경왕후 사후에야 계비로 간택돼 입궁했으니 당연히 저 세 후궁들보다 한참 어릴 수밖에 없었다.[8] 문정왕후 입장에서만 고명아들. 중종에게는 이미 왕세자 인종을 비롯해 아들이 여럿 있었다.[9] 중종과 세자 인종 모두 수사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도 의문이었다. 인종이야 조선 최고의 효자이면서 역대 국왕 중에서 도덕군자 중 하나일 정도의 인물이지만 '자식들 사랑이 지극했던 아버지 중종은 왜 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이 들겠지만, 당시 중종은 버선발로 뛰어나와 세자 인종을 애타게 불렀고 이 자선당 화재 사건 당시가 중종 재위의 거의 끝무렵이었던 1543년(중종 33)으로 당시 중종이 연로한데다가 이후에는 병환이 들게 되었다. 그리고 화재 때 세자를 데려와야 하는 사관과 승지는 정작 불끄기는커녕 아무것도 안하고 멀뚱멀뚱 지켜만 보고 있고 결국 중종이 나서서 세자 인종을 직접 데려왔다.[10]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둘 다 오빠로 나왔으나 남동생들이 맞다. 윤원형 역할로 나온 배우 이덕화가 배우 전인화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액면상 어쩔 수 없이 오빠로 설정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11] 세종조차도 어머니 원경왕후의 장례에서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장례 의식을 완벽하게 지키지는 않았다. 정확하게는 완벽하게까지 지키는건 불가능했다.[12] 비슷한 예로 문종도 그렇게 몸을 망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인종은 원래부터 그리 이성계적인 체질을 물려받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인종 즉위 이후 허구한 날 육선을 드시라는 신하들과 거부하는 인종의 밀당이 계속된다. 상을 치르느라 더욱 악화된 어느 날 인종을 진맥한 내의원 어의에 따르면 "지금 상태로 고기를 드신들 소화도 못 시키고 더 탈이 날 수 있으니 타락죽(우유)이라도 마셔야 한다"고 했다. 그에 대한 인종의 대답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내가 많이 아파보이는 것일뿐, 죽을만치 아프지는 않소."였다. 보다 못한 사관이 "신하 놈들이 억지로라도 먹일 것이지, 안 먹이는 거 보면 먼가 있는 듯, 쯔쯔"하고 혀를 차는 비판 논평까지 덧붙였다.[13] 그런데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닌게 인종도 문정왕후의 허락 이후 육선을 받기는 받았다. 그런데 그대로 물리고 다시 나왔다는 기록이 허다하다.[14] 정순왕후 김씨와 정조가 사이가 안 좋았다는건 이덕일 부류의 소설에 불과하지만 문정왕후와 인종의 사이가 별로라는건 진짜다.[15] 2008 전설의 고향 4화 <귀서> 편에서는 '알면서 먹었다' 설을 택했다. 거기의 나레이션에서 "인종의 혼령이 자주 보였다"는 야사도 소개한 바 있다.[16] 명종의 형수이자 인종의 왕비인 인성왕후가 왕대비가 되어 있었으므로 문정왕후는 대왕대비가 되었다.[17] 양재역은 지금의 양재역이 아닌 현재 서울 서초구에 있는 말죽거리를 의미함.[18] 충주, 청주가 있는 도[19] 청주, 홍주가 있는 도[20] 훗날 동서 분당의 빌미가 되는 심의겸의 할아버지며 윤원형과 결탁한 심통원의 형이다.[21] 다만, 시기는 좀 늦은건 맞는게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둔다고 한 해인 1553년(명종 8년)에 명종은 20세의 어엿한 청년이었다. 물론 당시 상황이 친 문정왕후 파로 신하들이 꽉 차있었을 때라는 점, 몇 번 정도는 저런 쇼를 해줘야 불효자 딱지가 안 붙는다는 점 등을 감안해야 한다.[22] 만약 그랬다면 개입한 예를 문정왕후를 까기 위해 사관들이 안 실었을리가 없을 것인데 그런 기록은 없다.[23] 이 승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당 유정과 같은 인물들이다. 이 2명만 고려해도 조선은 본전 이상을 거두었다고 봐도 된다.[24] 승려가 출가했을 때 국가가 허가증을 발급하여 신분을 공인해 주던 제도[25] 한강과 중랑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지금의 서울 3호선 옥수역 부근.[26] 실록에 따르면 병중에 붕어가 먹고 싶었다고.[27] 한 고조 유방의 비인 여후와 애초에 나라를 세워버렸던 측천무후의 전례가 있으니, 긴장하는 것은 당연했다.[28] 조선 초기 사찰을 세우고 불경을 편찬한 그 수양대군마저도 불사는 개인적인 일로 치부, 처리했다.[29] 현재는 휴식이 체계화되고 각종 항생제 등이 잘 개발되어 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기에, 아무리 높은 신분의 지위라도 감기나 독감에 걸려서 죽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문정왕후는 65세였는데 당시로선 꽤 고령이고, 지금 기준으로도 감기나 독감의 고위험군에 속한다.[30] 무당 말을 듣고 12월 한 겨울에 홑치마 차림에 물벼락을 맞아 고뿔이 들어 죽은 명성왕후가 생각나는 최후.[31] 현대식으로 보면 조정의 의정부가 대법원이자 대검찰청이고, 제주목은 일개 검찰지검이나 지방법원의 지원이고, 한성부나 유수부 감영이 고등검찰청과 고등법원이다.[32] 이와는 별도로 문정왕후의 상례는 대왕의 예법으로 하도록 명하면서 논란이 있었다.[33] 심지어 순회세자는 친할머니 문정왕후보다 2년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문정왕후는 유일한 적장손이 자신보다 세상을 떠난걸 지켜보고 더 이상의 적장손을 보지 못한채 2년 뒤 세상을 떠났고, 명종까지 자식을 못남기고 선조를 양자로 삼으면서 승하하였다. 결국 문정왕후의 후손들은 모두 모계로 이어지며 자연스럽게 남계 자손만 종친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하던 조선 왕실과 인연이 멀어진다.[34] 태릉과 강릉의 복원을 위해 진천선수촌 등지로 일부 시설물을 제외하고 모두 이전, 철거가 예정되어 있다.[35] 원래 강남구 일대가 상습 침수 지역이라 묏자리로 쓰기에는 문제가 많다. 지금도 정릉 일대는 비가 오고 나면 웅덩이가 곳곳에 지는 걸 볼 수 있다.[36] 이 풍수설은 세종의 능과도 관련이 있다. '절사손장자'라고 해서 '무후지지'와 비슷한 의미였는데 세종의 마지막 항목 참고.[37]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이 아니라 오늘날 태릉이 위치한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이다.[38] 그런데 정말로 여기에 묻힌 명종은 후사가 끊겼으며 결국 중종과 창빈 안씨 사이의 서자 덕흥대원군의 아들인 하성군이 선조로 즉위하면서 이후 왕위는 방계 혈통으로 흘러간다.[39] 그래도 지금은 강릉도 공개 개방되기는 한다. 다만, 위치가 나쁘다.[40] 종묘와 사직.[41] 사실 황해도에서 도적이 횡행한 것은 세종 시절에도 있던 일이긴 하다. 그런데 명종 시절의 임꺽정은 그전까지의 도적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42] 물론 유학자들에게는 분명히 문제거리가 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숭유억불을 따르는지라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시대가 갈수록 불교를 억압하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43] 인종이 훌륭한 인품을 지녀 명군을 될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있다.[44] 실록에는 민가의 어머니처럼 왕을 꾸짖어 왕이 울분을 품었다는 정도의 기록이 있다. 게다가 명종이 이량을 등용하여 윤원형을 궁지에 몰아넣는 것을 구경만 하는 등 수렴청정을 거둔 후에도 위세는 등등했으며, 명종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인종을 불태워죽이려 했다는 말까지 있는 것을 볼 때,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을 거라고 보긴 힘들다. 더구나 명종에게 매를 때렸다는 기록까지 있다. 왕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왕의 몸을 때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대인데, 그걸 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에서 보통 인물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 시대의 사간은 목숨 내놓고 기록 적는 사람들이다. 왕의 어머니를 기록하는데, 사실이 아닌 기록을 적었다간 나중에 사간의 집안이 박살난다. 절대 과장으로 남길만한 기록이 아니다.[45] 특히 조선왕조의 첫 수렴청정이었던 정희왕후가 모범적인 수렴청정의 예를 보여줬기 때문에 특히나 악질적이었다.[46] 다만 명종 시기에도 이홍윤의 옥사 이후로는 이렇다할 옥사가 없다. 을사사화부터 이홍윤의 옥사로까지 이어지는 옥사나 사건들에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죽고 피해를 보긴 했지만 문정왕후가 살아있는 내내 옥사가 벌어진건 과장이다. 문정왕후는 초기에나 피바람이 불었지 그 이후는 딱히 숙청을 벌이지 않았다.[47] 고종의 비 명성황후 민씨가 아니다.[48] 세조비인 정희왕후도 왕실 대소사를 위해서 불공을 드릴 정도로 불교를 지나칠 정도로 신봉하였고, 연산군은 부친 성종을 위해서 수륙재를 지내려다가 신하들과 충돌한 적이 있다. 조선 전기는 겉으로는 숭유억불을 표방했으나 오랜기간 이어온 불교 숭상 관습이 왕실에도 남아 있었다.[49] 유명한 사례로 무관 원준량이 있다. 원준량은 전라우수사로, 제주도에 왜구가 침입했음에도 싸우지 않고 직무유기를 해버린 바람에 명종 7년에 유배형을 받은 바 있다. 그럼에도 중종 10년 을묘왜변 시기에 다시 전라좌수사로 복직된 상태였으며, 똑같은 짓을 반복했다는 명종 12년 사관의 기록이 있다. 전황을 전해들었음에도 지원하지 않고 술마시며 놀았다는 것. 이후에도 큰 처벌 없이 계속해서 승승장구 하였고, 문정왕후가 사망하고 윤원형 세력이 힘을 잃은 명종 21년에야 탄핵당한다. 재밌는 사실은 이 원준량이 그 유명한 원균의 아버지라는 점이다. 원균의 무과 급제에 원준량이 부정하게 관여한 정황을 고려한다면 엄청난 스노우볼을 굴린 셈이다.[50] 극 중 중종은 1968년생인 이진우가 연기했다. 방영 당시 이진우는 만 27세였지만 김민정은 만 13세였다.[51] 본래 역사상의 숙원 이씨는 단명하지만 연생은 명종 치세까지 건강하게 살아남는데, 아들 없이 딸만 낳았다는 것은 동일하다. 그러다보니 문정왕후의 숙청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듯.[52] 그것도 아들인 명종과 모든 대신들이 모인 조회 때 대놓고 불렀다.[53] 아직 미군 병사가 훔쳐간 어보 중 37개가 사라진 상태다.[54] 조선 7대 왕이였던 세조의 왕후[55] 순원왕후 역시 2번이나 수렴청정을 할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지만 친정인 안동 김씨의 횡포가 심했을 뿐이지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 김조순은 친정의 지나친 권세를 꺼렸다는 평가도 있다.[56] 이쪽은 아들인 숙종 재위기간때도 법적 시조모이자 대왕대비인 장렬왕후가 본인 생전 내내 살아있어서 문정왕후 만큼의 권력을 휘두르긴 어려웠다.(문정왕후는 시어머니 정현왕후가 남편 중종 대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57] 엄밀히 말하면 이쪽은 다른 의미로 권력을 크게 휘두른 쪽인데 시조모이자 대왕대비인 장렬왕후와 아들인 숙종의 의사를 무시하는 일종의 월권행위(더 나아가면 패륜으로도 볼 만한)를 많이 행했다. 적어도 궁중 법도는 지키거나 간혹 어겨도 지키려는 시늉 정도는 했던 문정왕후와는 다르게 명성왕후는 아예 법도를 대놓고 어길정도여서 보는 관점에서 따라선 문정왕후보다 더 막나간 것이다. 오죽하면 성깔 있기로 유명한 아들 숙종도 명성왕후 생전에는 성년이 된 뒤에도 명종마냥 어머니에게 거의 반발할수가 없었다.[58] 이러한 명성왕후의 성격을 유전 받아서인지, 아들인 숙종과 손자인 영조도 왕인것을 감안해도 조선왕조 역사상 막나가는 행보를 많이 보였다. 그나마 이 두 왕도 대왕대비인 장렬왕후, 인원왕후 생전까지는 조심했던것을 생각하면 멀쩡히 살아있는 시조모 대왕대비까지 무시하며 월권을 거리낌없이 행사하며 위세를 떨친 어머니(친할머니) 명성왕후보단 양반이다.[59] 조선 최초의 간택 왕비는 단종비 정순왕후이다.[60] 정순왕후(단종), 문정왕후 윤씨(중종), 인목왕후 김씨(선조), 장렬왕후 조씨(인조), 인현왕후 민씨(숙종), 인원왕후 김씨(숙종), 정순왕후 김씨(영조), 효현왕후 김씨, 효정왕후 홍씨(헌종), 철인왕후 김씨(철종), 명성황후 민씨(고종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