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03 00:46:11

영친왕

의민황태자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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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고종의 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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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순종조 황태자
영친왕 | 英親王
제2대 창덕궁 이왕
파일:영친왕.png
예복을 착용한 영친왕의 모습(1920년 4월 28일 결혼식 기념 사진)
출생 1897년 10월 20일
한성부 경운궁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책봉 1907년 8월 7일
한성부 덕수궁 중명전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사망 1970년 5월 1일 (향년 72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낙선재
능묘 영원(英園)
재위기간 대한제국 황태자
1907년 8월 7일~1910년 8월 29일
이왕세자
1910년 8월 29일~1926년 4월 25일
제2대 창덕궁 이왕
1926년 4월 27일~1947년 5월 3일
재임기간 대한제국 황실 수장 (명목상)
1926년 4월 27일~1970년 5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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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은(垠)[1]
신위 이왕세자(李王世子)
이왕(李王)
→ 평민(신헌법)
광천(光天)
명신재(明新齋)
명휘(明暉)
작호 영친왕(英親王)
사시 문인무장지효명휘의민태자
(文仁武莊至孝明暉懿愍太子)[2]
절일 천추경절(千秋慶節)
종교 유교 (성리학)가톨릭 (세례명: 요셉, Joseph)
신장 158cm
부모 부황 고종 태황제
모친 순헌황귀비
형제자매 완친왕
순종
의친왕
동생 덕혜옹주
배우자 이방자
자녀
슬하 2남 [ 펼치기 · 접기 ]
장남 이진(李晋)
차남 이구(李玖)
군사 경력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복무 일본 제국 육군
1913년~1945년
최종 계급 중장 }}}}}}}}}

1. 개요2. 호칭
2.1. 친왕 작호 관련2.2. '영친왕'과 '의민황태자'
3. 생애
3.1. 출생과 왕 책봉3.2. 황태자 책봉과 결혼3.3. 망국의 황태자3.4. 조선 이왕(李王)직 승계와 일제시대의 행적3.5. 광복 이후
3.5.1. 6.25 전쟁 시기
3.5.1.1. 영친왕의 참전 고려3.5.1.2. 제정복고 시도 연루
3.5.2. 환국과 사망3.5.3. 사후
4. 가족5. 여담6. 창작물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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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lbgcolor=#BF1400> 시대의 경계인,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KBS 〈역사스페셜〉, 2011. 5. 12.)
고종의 7남.[3] 순종의친왕의 이복동생, 덕혜옹주의 이복오빠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식민지 조선의 마지막 이왕(李王)이며, 일본 제국의 마지막 비주권군주이다.[4] 종묘에 배향된 마지막 조선-대한제국의 황족이다. 종묘 영녕전에는 '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英王)'이란 명칭으로 위패를 봉안했다.

2. 호칭

2.1. 친왕 작호 관련

대한민국에서 그의 통칭은 고종황제가 된 후에 내린 친왕 작호인 '영친왕(英親王)'이다.

간혹 '친왕(親王)'이 일본식 칭호이기 때문에 '친왕'에서 '친'을 뺀 '영왕'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 부인인 이방자 여사도 생전에 '영친왕'은 잘못된 호칭이니 '영왕'으로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5]

하지만, 사실 친왕 제도는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제도이고, 대한제국도 이에 준하여 제도를 정했기 때문에, '○친왕'을 가리켜 틀린 호칭이라고 하는 주장이 도리어 잘못이다.고종실록》 등에 '영왕'으로 적힌 예가 있긴 하나,[6] '영친왕' 칭호가 틀려서가 아니라, 단순히 '영친왕'을 줄여 쓴 표기일 뿐이다. 중국의 예를 들면, 청태조 누르하치의 아들인 예친왕(睿親王) 도르곤을 줄여서 '예왕(睿王)'이라고 부르곤 한다. 대한제국 시절 왕부에서 사용하던 도장에서도 '영친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파일:external/www.dapsa.kr/2014_05_01-P5019598.jpg 파일:attachment/영친왕/영친왕필적.jpg
<colbgcolor=#BF1400> 가운데 인장은 예서체로 '영친왕부', 오른쪽 인장은 전서체로
'영친왕부지인'(英親王府之印)이라고 새겼다. 왼쪽은 의친왕부의 인장.
<colbgcolor=#BF1400> 영친왕이 9세 때 쓴 글.
왼쪽에 英親王 九歲 作(영친왕 9세 작)이란 글씨와 英親王印(영친왕인)이라고 새긴 도장의 인영이 보인다.
또한, 영친왕도 스스로 '영친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9살 때(1905년) 쓴 글에도 스스로 '영친왕'이라고 서명했을 뿐만 아니라, '영친왕인(英親王印)'이라고 새긴 도장을 찍었다.

영친왕 호칭이 일본식이라는 오해가 생긴 근본적인 이유는, 한국이 수백 년 동안 정식 황제국 체제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친왕'이라는 호칭 자체가 생소했으며, 이에 따른 활용례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7]

또한, 일본에서는 중국이나 한국과 달리 황태자도 친왕으로 부르는데, 일본 황태자는 친왕 작위를 동시에 가지며 '황태자 ○○친왕'이라는 형식으로 호칭된다. 이 때문에 이은을 '황태자 영친왕'이라고 부르는 방식이 일본식 표현처럼 보였고, 이러한 혼동이 오해를 불러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

2.2. '영친왕'과 '의민황태자'

그런데 '영친왕' 호칭은 다른 이유로 문제가 된다. 이 칭호는 황태자가 되기 전에 쓴 칭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친왕'은 일반 황자에게 수여되는 작위이며, '황태자'는 황제의 후계자로서 그보다 격이 훨씬 높은 지위이므로, 중국과 한국의 예법에서는 '황태자'와 '친왕' 작위를 동시에 갖는 것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된 후, '영친왕' 작호는 폐기되었고, 이후 사용되지 않았다.

그가 생전에 지녔던 작위는 '영친왕(英親王)', '황태자(皇太子)', '이왕세자(李王世子)', '이왕(李王)'이다. 재위 당시에는 해당 지위에 맞는 칭호가 사용되었으나, 광복 이후 문제가 발생했다. '이왕세자'와 '이왕'은 일제강점기 이왕가의 잔재로 간주되어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고, 제정의 부활이 아니라 민주공화정 체제가 들어서는 마당에 '황태자'라는 호칭은 시기적으로 사용되기 적절하지 않다는 점에서 널리 쓰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가 대한제국 황태자로 있었던 기간도 길지 않아, 대중들이 '황태자' 호칭을 어색해 했으므로, 적절한 호칭을 선택하기 더욱 어려웠다.

결국, 대중이 가장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호칭은 이미 수십 년 전에 폐작된 '영친왕'이었다. '황태자', '이왕세자', '이왕'이 보통명사로서 지위의 세습으로 인해 시대에 따라 변하는 반면, '영친왕'은 특정 개인을 지칭하는 고유한 작호였기 때문이다.[8] 실제로 광복 후, 그 자신도 '영친왕'이라 칭했으며, 《대한뉴스》에서도 같은 호칭을 사용했다.제370호 - 〈영친왕비 입국〉제445호 - 〈영친왕 환국〉 제776호 - 〈영친왕 서거〉 이방자 여사도 남편 사후에 '영친왕기념사업회'를 설립했으며, 대한제국 황실의 종친인 사동궁가와 운현궁가에서도 그를 '영친왕'으로 칭했다.

사실, 일제강점기에도 '이왕'이나 '이왕세자'보다 '영친왕'이라는 호칭이 비공식적으로 더 자주 사용되었다. 이는 일제가 부여한 칭호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망국 이후 '황태자'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이 애매했고, 당시에 '황태자'라고 하면, 일본 황태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오해될 여지도 있었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는 시호인 '의민(懿愍)'을 붙여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 또는 '의민태자(懿愍太子)'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 시호 '의민'은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과 정부가 공동으로 구성한 '영친왕 장의위원회'에서 결정한 것으로,# 장의위원회 위원장은 이효상 당시 국회의장이었다.# 그리하여 종묘 영녕전에는 '의민황태자 영왕(英王)'이라는 칭호로 봉안되어 있으며, 아들 이구의 영결식에서도 대한민국 정부 측 인사인 국무총리가 '의민황태자 영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영왕 전하', 이해찬 국무총리는 '의민황태자 영왕 전하'라고 칭했으며, 의식에서는 전례에 따라 의민황태자를 '전하', 이구를 '황세손 저하', 이구의 사망을 '훙서(薨逝)'로 표현했다.[9] 이처럼, 시호 결정 과정에 정부가 일부 관여했으며, 이후에도 공적인 자리에서 정부 인사들이 '의민황태자'라는 시호를 사용한 점을 고려할 때, 정부 차원에서도 이를 일정 부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어쨌든 절반은 민간이 개입하여 올린 한계가 있고, 공식적으로 임금이 내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호 '의민'은 사시(私諡)로 취급되며, 완전한 공적인 시호라고 인정받지 못한다. 즉, '영친왕'은 대한제국 시기에 공식적으로 부여된 작호였으나, 황태자 승격과 함께 폐작되었으며, '의민황태자'는 황태자로서의 호칭이라는 점에서는 타당하지만, '의민'이라는 시호 자체가 공적 권위를 가지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진다.[10] 그러므로, 정부 인사가 공식 석상에서 '의민황태자'를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학계에서는 이를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위키백과에서는 황태자로서의 호칭인 '의민황태자'를 표제어로 등재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영친왕'이 더 널리 알려져 있으며, 백과사전과 학계에서도 주로 사용된다. 따라서 이 문서에서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영친왕' 호칭을 사용한다.

3. 생애

3.1. 출생과 왕 책봉

파일:의왕영왕책봉의궤.jpg
<colbgcolor=#BF1400> 《[[의왕|{{{#FFD400 의왕}}}]]영왕책봉의궤》[11]
대한제국 수립 직후인 1897년(광무 원년) 10월 20일 출생한 이은은 1900년(광무 4년) 이복형 의화군 이강과 함께 대한제국의 '왕'으로 책봉되었다.
고종 37년 8월 17일,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황자(皇子)를 책봉(冊封)했다.
이강(李堈)은 의왕(義王)으로 삼고 이은(李垠)은 영왕(英王)으로 삼았다.

《고종실록》 40권

3.2. 황태자 책봉과 결혼

1907년(융희 원년) 순종이 즉위한 후, 대한제국의 다음 계승자로는 이복형 의친왕이 유력했으나, 그의 반일 성향을 부담스럽게 여긴 일본과 친모 순헌황귀비 엄씨의 영향력으로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12]

종법상 의친왕이 황태자가 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엄귀비가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의친왕의 즉위를 막기 위해 일본과 협력했다는 주장도 있다. 엄귀비는 아관파천 당시 고종을 보필하며 공을 세운 후, 정1품 황귀비(皇貴妃)로 책봉되었으며, 이에 황위 계승 서열 1위였던 의친왕보다 영친왕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1902년(광무 6년) '일심회 사건(一心會)'이 황태자 책봉에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도 있다. 이 사건은 일본 유학생 일부가 고종을 양위시키고, 의친왕을 황제로 옹립하려 했던 사건으로, 의친왕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진행되었다. 사건이 발각된 후, 가담자 일부는 일본으로 망명했고,[13] 주동자 3인은 처형당했다. 이후 고종이 의친왕을 경계하기 시작하며 황태자 후보에서 배제되었고, 결국 영친왕이 책봉되었다는 해석이 있다.

형인 순종이 즉위한 상황에서 영친왕은 '황태제(皇太弟)'가 되어야 했지만, '황태자(皇太子)'로 책봉된 것은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14] 이는 고종이 실질적 황제로서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한 조치로도 해석된다.[15]

그러나, 대한제국이 쇠퇴하는 상황에서 황태자 책봉은 실질적 의미를 갖지 못했다.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 이후 고종이 일본의 강압으로 퇴위하자, 영친왕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16] 이후 일본 황족 출신인 마사코 여왕과 정략결혼을 했다.[17] 영친왕과 이방자의 관계는 비교적 원만했으나, 이에 대한 논란도 존재한다.[18]

결혼식은 1920년 4월 28일에 거행되었으며, 원래 1919년 1월 25일로 예정되었으나, 고종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인해 연기되었다. 한편, 영친왕은 메이지 덴노와의 관계가 비교적 원만했던 것으로 보이며, 덴노가 어린 영친왕을 총명한 아이로 여겨 친아들처럼 대했다고 전해진다.[19]

당시 일본 황족들은 매월 궁내성에서 생활비를 지급받았으나, 영친왕은 조선 왕가의 재산을 관리하는 이왕직(李王職)을 통해 필요 자금을 자유롭게 조달할 수 있었기에 생활이 유복했다.[20] 이러한 이유로 영친왕을 부러워하는 일본 황족들도 많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47년 5월 3일 일본의 신헌법이 시행되면서, 이왕가를 비롯한 일본 황족과 화족의 특권이 폐지되었고, 영친왕 역시 더 이상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3.3. 망국의 황태자

파일:external/pds.exblog.jp/e0171614_1111167.jpg
<colbgcolor=#BF1400> [[이토 히로부미|{{{#FFD400 이토 히로부미}}}]]와 영친왕[21]
그가 황태자로 책봉된 것은 결코 행운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로 인해 어린 나이에 사실상 인질처럼 일본으로 보내져 고국을 떠나야 했고, 노년에 이르러서야 돌아올 수 있었던 고통스러운 삶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대의 일반 조선인과 비교하면, 안전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가 겪어야 했던 삶의 굴곡을 고려하면, 안온한 생활을 단순한 특권으로만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영친왕의 일본 생활은 경제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이왕직을 계승한 데다,[22] 현역 일본제국 육군 중장으로 군에서 복무했기 때문이다.[23] 또한, 특권 계층인 왕공족이었기에, 태평양 전쟁 중에도 후방 보직을 맡으며, 신변의 위협을 받지 않았다. 그가 가장 고통스러워했던 것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 그리고 고독이었다고 유족들은 증언했다.

이와 관련한 일화도 전해진다. 어느 날, 이방자 여사가 방 안에서 공기놀이에나 사용할 법한 새하얀 조약돌을 발견하고, 그 출처를 물었다. 이에 영친왕은 머뭇거리다 결국 이렇게 답했다. "어릴 적부터 고향이 너무 그리워 창덕궁 낙선재에 있는 조약돌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썼고, 마침 황실에서 일본으로 가는 사람이 있어 그 조약돌을 전해주었다." 이후 그는 조약돌을 손에 쥐고 오랫동안 들여다보며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 고종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으며, 어머니 순헌황귀비의 마지막 순간도 함께하지 못했다.[24] 그나마 순종 사후 이왕직을 계승하면서 종묘에 들르는 것이 가능해졌지만, 한국 체류 기간이 매우 짧아 직접 제사를 지낼 수는 없었다. 이에 그는 사적으로 위패를 모셔 개인 사당을 만들어 간이 종묘를 운영했다.

이처럼 일본에서 수십 년을 보냈으나, 그는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1950년에는 《A First Book of Korean》이라는 한국어 교본을 레지널드 호러스 블라이스(Reginald Horace Blyth)와 공동 집필하기도 했다.[25]

그러나 조선에서 보낸 시간보다 일본에서 보낸 시간이 훨씬 길었기 때문인지, 그의 언행과 태도는 조선인보다는 일본인에 가까웠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3.4. 조선 이왕(李王)직 승계와 일제시대의 행적

파일:/pds/200903/07/25/a0116025_49b241028f7ec.jpg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06111006241240004010-001.jpg
<colbgcolor=#BF1400> 영친왕에게 경례하는 제2대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FFD400 하세가와 요시미치}}}]] <colbgcolor=#BF1400> [[1928년|{{{#FFD400 1928년}}}]] [[프랑스|{{{#FFD400 프랑스}}}]] 여행[26]에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1926년 4월 26일, 순종 황제가 붕어하자, 이튿날 영친왕은 일제강점기 당시 순종이 보유했던 '창덕궁 이왕'(昌德宮 李王)의 지위를 계승했다. 이왕직 내부에서는 그를 '사왕 전하'(嗣王殿下, しおうでんか)라고 불렀다. 그러나 영친왕이 한국을 방문할 수 있었던 날은 연중 종묘 제사가 열리는 며칠뿐이었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도쿄에서 보냈기에 '동경(東京) 이왕'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다이쇼 덴노와는 어린 시절부터[27]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이쇼 덴노가 지방에서 요양하던 말년, 영친왕은 그를 직접 찾아가 만났다고 전해진다. 다이쇼 덴노는 황태자 시절부터 꾸준히 한국어를 배웠으며, 영친왕과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으나, 당시 뇌일혈로 인해 말이 어눌해져 제대로 의사를 전달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영친왕이 이방자와 혼인했을 때, 다이쇼 덴노 역시 혼인에 직접 관여하여, 나시모토노미야 노리마사 왕을 불러 명령을 내린 바 있다.

이복 여동생 덕혜옹주조현병으로 인해 의사 표현을 하지 못하자, 영친왕은 후견인으로서 그녀와 소 다케유키의 이혼을 허락했다. 또한 자신 역시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덕혜옹주가 정신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병원비를 지원하는 등, 오빠로서 끝까지 여동생을 돌보려 했다고 한다.

영친왕은 일제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다방면으로 사람들과 교류했다. 관동 대학살 당시에는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신변의 위협을 느꼈으며, 혹시 모를 위험을 피하기 위해 궁내성 제2대기실 앞에 마련된 텐트 속에서 일주일 간 피신했다고 전해진다. 이방자 여사에 따르면, 조선인 학살 소식을 접한 영친왕은 슬픔과 분노로 목소리를 떨며,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괴로워했다고 한다.

한편, 영친왕은 일본 육군에서 정식으로 군사 교육을 받고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1917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29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으며, 1923년에는 일본 육군대학을 35기로 졸업했다.[28] 이후 육군참모본부에 배속되어 군 경력을 쌓았으며, 1935년 대좌로 진급한 뒤, 1938년 육군 소장, 1940년에는 육군 중장으로 승진했다.

1928년에는 근위보병 제2연대 대대장을, 1935년에는 우츠노미야 보병 제59연대 연대장을 역임했다.[29] 1941년에는 제51사단 사단장을 맡았으나[30] 곧 교육총감부로 인사 이동되었다. 영친왕이 떠난 후 제51사단은 비스마르크해 해전에서 미군의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며, 종전까지 심각한 보급난에 시달리다 전체 병력의 8분의 1만이 살아남은 상태로 전쟁을 마쳤다.

태평양 전쟁 말기, 영친왕은 일본 육군 제1항공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일본 육군 제1항공군은 1942년 4월 13일 창설된 부대로, 주로 일본 본토 방공을 담당하며 미군의 B-29 폭격에 대응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부대 창설 이후 종전까지 총 4명의 사령관이 있었으며, 그중 영친왕은 3대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약 2년간 재직하며, 가장 오랜 기간 부대를 지휘했다.

일각에서는 영친왕이 내선일체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명목상의 사령관 역할만 수행했을 뿐, 실질적인 지휘권이 없었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그러나 그가 사령관으로 재임했던 시기는 미군의 일본 본토 폭격이 본격화된 시기로, 일본의 전쟁 수행에 있어 중요한 시기였다. 따라서 단순한 허수아비 역할을 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일본 본토 방공 체계의 책임자로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된다.
파일:attachment/Image-Crown_Prince_Euimin.jpg
<colbgcolor=#BF1400> 일본군 예복을 입은 영친왕

3.5. 광복 이후

1945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은 일시적으로 무국적의 재일 한국인이 되었다. 이후 1947년 GHQ의 조치로 이왕직이 폐지되었고, 이에 따라 영친왕 역시 무일푼의 평민으로 강제 격하되었다.

《한성일보》[31] 1946년 8월 6일 자 기사에 따르면, 당시 영친왕은 《UP통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의 정세와 장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는 조선의 외교적 입장에 대해 "조선은 지정학적으로 무력에 의한 독립을 유지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으며, 일본보다도 공산주의의 침투가 용이할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공산당을 용납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라고 말했다. 또한, 삼팔선 문제에 대해서는 "독립에 장애가 되므로 빠르게 제거해야 하며, 과도기에는 일종의 국제관리기관을 설치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그는 조선의 민주화를 위해 "학교에서 조선어를 사용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일본어·영어·중국어 교육도 인정해야 한다."라고 했고, 종교 정책에 대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되 유교국교로 존속시켜야 한다."라고 밝혔다. 이는 당시 들어설 새로운 국가에 대한 그의 견해를 보여주는 발언이었다.

또한, 미군이 배포한 한국 관련 정보 팜플렛에는 영친왕이 직접 〈아리랑〉을 영어로 번역한 가사가 수록되었다.

이처럼 고국을 그리워하고 많은 관심을 두었던 영친왕과 달리, 당시 한국 사회는 그를 냉대했다. 그를 친일 황족으로 간주하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컸다. 대표적으로 의열단 출신이자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역임한 박건웅은 "동경의 이왕은 민족 반역자인데, 왜 광복 후 자살하지 않았느냐."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방자의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에 따르면, 영친왕은 이 발언을 직접 듣고, 충격을 받아 크게 괴로워했다고 한다.#

영친왕은 1945년 광복 직후와 1948년, 두 차례에 걸쳐 귀국을 요청했다. 그러나 1945년에는 미군정이, 1948년에는 이승만이 그의 귀국을 거부했다.

이승만 정부는 기본적으로 영친왕과 순정효황후 윤씨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으며, 이미 사망했던 이우에게만 다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이승만이 강경한 공화주의자로서 구 대한제국 황족들이 정치적으로 주목받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고종이 전제왕정을 선포하고 황제 독재를 지향했던 전례를 고려했을 때, 대한제국 체제의 부활 가능성은 공화주의자들에게 민주공화정의 근간을 위협하는 요소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당시 공화주의자들은 모두 영친왕의 귀국을 경계했다. 또한, 독립운동에 기여하지 않은 채 1947년까지 일본 최고위 왕족과 일제 군 장성으로서 특권을 누렸던 대한제국 황족들에 대한 반감도 한국 사회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승만과 영친왕은 직접 만난 적도 있었다.[32] 광복 후, 이승만이 재일 미군정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했을 때, 영친왕과 우연히 조우했다. 당시 영친왕은 자신의 귀국 문제를 논의해보려 했으나, 이승만은 냉담하게 반응하며, "오든 가든 마음대로 하시구려."라고 말했다. 이후 영친왕은 이 일을 두고, "대단히 실망스러운 날이었다."라고 회고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 정부는 영친왕이 일본 황족으로 살아온 것이 일본 국적 취득과 동일하다고 해석하며, 그의 귀국을 공식적으로 거부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호적을 기준으로 영친왕 부부를 재일 한국인으로 보았기 때문에, 영친왕과 이방자 모두 무국적 상태가 되었다.

이 조치는 당시 제정된 남조선과도정부 법률 제11호 〈국적에 관한 임시조례〉와도 충돌했다. 해당 법률에 따르면, 조선인을 부친으로 둔 사람에게 조선 국적을 부여하도록 규정했으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조선 국적은 자동으로 대한민국 국적으로 전환되었다. 이 법에 따르면 영친왕 역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으나, 이승만은 영친왕이 일반 조선인과 같은 조선적이 아닌, 별도의 황실 호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그의 대한민국 국민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이승만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외국인' 신분인 영친왕의 귀국을 불허한 것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그의 국적을 영구 박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와 함께 구 대한제국 황실(이왕가)의 상당한 재산 역시 국고로 귀속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 황실이 자체적으로 처분한 재산도 많았으나, 결국 6.25 전쟁 이후 구 황실의 남은 자산은 사동궁창덕궁 낙선재 정도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친왕은 "나는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니다."라며 아내 이방자에게 계속해서 고통을 호소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영친왕은 극심한 생활고까지 겪게 되었다. 귀국이 불허되었고,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으며, 그나마 방문하는 이들조차도 그를 이용하려는 의도를 가진 경우가 많았다. 결국, 그는 큰 사기를 당해 남은 재산마저 잃었고, 점차 경제적으로 궁핍해졌다.

그와 가깝게 지냈던 구황족들은 1947년 5월 3일, 새로운 《일본국 헌법》(소위 평화헌법) 시행 이후 다이쇼 덴노의 직계를 제외하고 대부분 황적이탈을 했으며, 이에 따라 그들 역시 생계를 위해 각자도생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영친왕을 도울 여력이 없었다.

이방자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어느 날 한 여성이 이방자를 찾아왔을 때, 집 안에 누군가가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여성이 자세히 보니 그가 바로 영친왕이었지만, 그는 방문객이 왔는지조차 신경 쓰지 않은 채, 처음부터 끝까지 뒤돌아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는 영친왕이 극심한 외로움 속에서 점차 사회와 단절되어 갔음을 보여준다.

3.5.1. 6.25 전쟁 시기

3.5.1.1. 영친왕의 참전 고려
6.25 전쟁 시기에 노획한 조선인민군 문서를 바탕으로 한 정병준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북한에서는 일본 육군대학 출신의 영친왕이 남한으로 귀국하여 육군참모총장으로서 직접 대한민국 국군을 지휘할 가능성을 고려했다고도 한다.

이를 두고 현실성이 없다는 지적도 있다. 일본군에서는 대부분의 황족들이 장성 계급을 받았으며, 일부 야전군 사령관이 된 경우를 제외하면 실제 지휘 능력과는 큰 관련이 없었다. 또한, 영친왕을 비롯하여 '왕'이나 '공'이라는 칭호를 받은 구 대한제국의 황족들 역시 일본 황족과 유사한 대우를 받았던 만큼, 영친왕이 만주군이나 일본군에서 복무했다는 이유만으로 실전 경험이 있는 한국군 장교들보다 군사적으로 우월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영친왕은 미국의 일본 본토 폭격이 본격화되던 시기, 본토 방공의 최일선을 담당하는 핵심 부대인 일본 육군 제1항공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이를 고려하면, 그의 군사적 지휘 능력이 부족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군사적 차원에서 보았을 때, 영친왕은 충분히 영입 대상으로 검토될 수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종보스 대통령 이승만이 그를 강하게 적대했던 만큼, 그의 군 복귀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따라서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영친왕이 한국군에 영입된다는 시나리오는 현실성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3.5.1.2. 제정복고 시도 연루
파일:1952.07.16 왕정복고당 검거.jpg
<colbgcolor=#BF1400> 1952년 7월 16일 자 《경향신문》 기사.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2071600329202002&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52-07-16&officeId=00032&pageNo=2&printNo=1851&publishType=00020|{{{#FFD400 왕정복구를 몽상, 일당 8명을 검거 문초 중.}}}]]
그런 가운데,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부터 1952년 사이, 실제로 제정복고를 목표로 영친왕을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 주동자는 다름 아닌 이유립이었다. 《환단고기》로 잘 알려진 바로 그 인물이 맞다. 1952년 7월 12일 자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유립은 청주대학 상과대학 학생 이용하와 함께 1951년 8월경 조총련의 전신인 '재일조련선전부(在日朝聯宣傳部)'의 지령을 받아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음모를 꾸몄다. 이를 위해 같은 해 9월 초, '정치혁명민족협의회(政治革命民族協議會)'라는 비밀 결사 조직을 결성하고 은밀하게 회원을 모집했다. 또한, '불구레문화사'라는 간판을 내걸어 활동을 위장한 뒤, 일본에 있던 영친왕을 국가 수령(원수)으로 모시는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국명을 '대달(大達)', 국가는 '신가(神歌)', 연호는 '개벽(開闢)', 국화는 '진달래'로 정했다. 또한, 국기는 기존 태극기에서 사괘를 제거한 후, 중앙에 연한 검은색 원을 배치한 황색 바탕의 디자인으로 결정했다. 이후, 영친왕에게 보내는 문서를 전달하기 위해 이용하를 시켜, 당시 경상남도 부산시 구포(龜浦)로 피난해 있던 순정효황후에게 전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부산중부경찰서 사찰계 형사에 의해 적발되었고, 주모자들은 체포되었다. 이유립과 이용하를 비롯해 노동당원 노봉우, 통관업자 홍성도, 사주업자 이석영, 한국독립당 대전시책 박헌철 등 일당 8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서울지방검찰청에 송치되어 수사를 받았다. 단순 가담자들은 대부분 무혐의로 석방되었으나, 이유립, 이용하, 홍성도, 노봉우는 기소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열린 공판에서 이유립과 이용하는 징역 3년, 홍성도는 징역 2년, 노봉우는 징역 4년을 각각 구형받았으나,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아 석방되었다.[33]

비록, 영친왕이 이 사건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었으나, 이러한 움직임까지 발생하자, 이승만 정부는 그를 더욱 경계했다. 당시에는 대한제국을 경험한 중장년층이 다수 존재했던 만큼, 왕정복고 가능성에 대한 민감한 반응이 더욱 증폭되었다.

3.5.2. 환국과 사망

파일:의민태자, 이구, 이방자.png 파일:Yeongchin.png
<colbgcolor=#BF1400>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 가족 사진.
가운데의 인물이 영친왕의 아들 이구. 앞 왼쪽부터 영친왕, 이방자 여사.[34]
<colbgcolor=#BF1400> 옆 사진과 같은 시기의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1957년, 유학 중이던[35] 아들 이구를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가려던 영친왕이 일본 국적을 취득한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 국민들 사이에서 그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커졌다. 영친왕은 이후 김을한 기자를 통해 "국적 같은 것은 나중에 쉽게 회복할 수 있을 줄 알았다."라고 말하며, 오랫동안 왕공족으로 살아온 탓에 근대적 법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취지로 해명했다.

한편, 1955년에는 여동생 덕혜옹주소 다케유키와 이혼할 당시, 덕혜옹주의 후견인 자격으로 이혼에 합의했다. 조현병을 앓던 덕혜옹주는 의사 결정 능력이 전무했기 때문에, 영친왕과 아내 이방자가 후견인으로서 대신 이혼 절차를 진행했다고 한다.

1947년 신 《일본국 헌법》 시행 이후, 평민이 된 영친왕과 큰조카 이건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들은 도쿄 이왕가저세이부 철도에 매각했는데, 이는 과거 대한민국 정부가 주일 한국 영사관 부지로 매입하려 했던 곳이었다. 이 사실이 한국에 알려지면서, 영친왕에 대한 국내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이방자 여사의 친정인 구 나시모토 가문과 몇몇 재일 조선인들의 도움을 받아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처지였던 아이신기오로 푸제[36]사가 히로가 종전 후 중국에서 극심한 고초를 겪은 것과 달리, 영친왕은 종전 당시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범으로 취급받지 않고 일본에 머물 수 있었다. 더욱이 만주국에서 실권은 없었으나, 정치적 활동에 관여했던 푸제와 달리, 영친왕은 이미 소멸한 대한제국의 황족으로서 어떠한 정치적 역할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만큼 책임질 행동을 한 것이 없었다.

1961년, 아들 이구 부부가 거주하는 하와이를 방문하고 일본으로 돌아가던 중 뇌일혈이 재발하여 이후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다(실어증). 이방자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영친왕이 처음 쓰러진 것은 1958년이었다.

이승만 정부4.19 혁명으로 붕괴된 후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자, 영친왕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된 장도영에게 편지를 보내 5.16 군사정변을 국가재건의 대업으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같은 해 9월 5일, 왕정복고 논란을 일으킨 이유립 등 유생 14인은 영친왕의 귀국을 희망하는 서신을 보냈다.관련자료 이후 장도영이 숙청되고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이승만과 달리 영친왕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박정희의 지원으로 영친왕은 한국 국적을 회복했으며, 1963년 11월 22일 혼수상태로 56년 만에 귀국했다. 박정희는 하와이에 머물던 이승만의 귀국을 불허한 반면,[37] 대한제국 황족들에게는 상당한 호의를 보였다. 영친왕의 귀국과 동생 덕혜옹주의 귀국 역시 이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파일:영친왕 이방자 이구.jpg
<colbgcolor=#BF1400> 귀국 후 명동성모병원에서 영친왕, 이방자 여사, 아들 이구
영친왕은 1년간 서울 명동성모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퇴원했으며, 이후 이방자 여사와 함께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의 일반 주택과 창덕궁 낙선재에서 거주하며 국가에서 지급하는 국고 보조금으로 생활했다. 그러나 생활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고, 본인과 덕혜옹주의 병원비가 300만 원 가까이 밀리는 등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38]

결국, 영친왕은 귀국 7년 후인 1970년 5월 1일 향년 72세로 생을 마감했다.[39]
<colbgcolor=#BF1400> [[대한뉴스|{{{#FFD400 〈대한뉴스〉}}}]] 제 776호에서 다룬 영친왕 장례식

3.5.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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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영친왕 부부의 합장묘 영원(英園)
장례는 9일장으로 치러졌다. 1970년 5월 9일, 창덕궁 희정당 앞에서 영결식이 거행된 후, 시신을 모신 재궁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홍유릉으로 운구되었다. 이곳은 그의 아버지 고종과 형 순종이 안장된 대한제국 황실의 능역으로, 영친왕의 무덤에는 '영원(英園)'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신위는 '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英王)'으로 종묘에 봉안되었다.

영친왕은 생전에 대한제국의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나, 나라가 망한 후, '이왕'으로 불렸다. 황제에 즉위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무덤은 홍유릉과 달리 황제릉으로 조성되지 않았다. 또한, 대한제국 시기에 황태자의 무덤을 조성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무덤의 양식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위치한 문조의 수릉을 참고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는 수릉이 조선 왕세자의 무덤 중 가장 나중에 조성되었으며, 이후 문조가 '왕(익종)'과 '황제(문조)'로 각각 추존되었기 때문이다.

황제릉과 왕릉은 석물 배치 방식, 참도(포장된 길) 구조, 정자각 양식 등이 차이를 보인다. 홍유릉을 비롯한 대한제국 황제릉은 조선왕릉 중에서도 돋보이는 구조를 하고 있으나, 영친왕의 무덤은 대한제국 멸망 이후 조성된 것임에도, 조선 후기 왕릉의 전통적인 제후왕릉 양식을 따랐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과 대한민국 정부가 공동으로 구성한 영친왕장의위원회는 영친왕을 '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英王)'이라는 사시(私諡)로 추존했다.[40]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은 영친왕의 황태자 책봉이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하여, '의민황태자 영왕'이라는 이름으로 대한제국 황실의 마지막 구성원을 종묘 영녕전에 봉안했다. '민(愍)'이라는 시호는 일반적으로 불행한 삶을 살거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인물에게 위로의 의미를 담아 올리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고려의 공민왕, 혹은 유비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 유협에게 올린 '효민황제(孝愍皇帝)' 시호가 그 예시이다.

영친왕과 이후 사망한 이방자 여사의 신위를 마지막으로, 종묘의 정전 및 영녕전의 제실이 정확히 채워졌다.[41]

영친왕의 장례식에는 일본 황족들이 비공식적으로 조문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부인이자 이방자 여사의 이종사촌인 세쓰코(勢津子) 비, 그리고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부부 등이 빈소를 찾았다.

4.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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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사진은 영친왕과 가족들.
왼쪽부터 [[순종(대한제국)|{{{#FFD400
순종}}}]]과 [[순정효황후|{{{#FFD400 순정효황후 윤씨}}}]]. 중앙에는 영친왕과 [[이방자|{{{#FFD400 이방자}}}]] 여사, 아들 [[이구(1931)|{{{#FFD400 이구}}}]].
오른쪽은 [[고종(대한제국)|{{{#FFD400
고종}}}]]과 [[순헌황귀비|{{{#FFD400 순헌황귀비}}}]] 순이다.
이방자 여사와의 사이에서 아들 2명을 두었지만, 장남[42]은 일찍 죽었다. 차남인 이구는 결혼은 했지만 슬하에 자식은 두지 못했다. 그 때문에 실제로는 대가 끊겼으나, 의친왕가에서 양자를 받아야 했을 때, 황실서열 1위 이준은 의친왕가의 종손으로서 사동궁을 이어야 했기에 사촌 동생인 이원[43]전주 이씨 대동 종약원에 의해 이구의 양자로 지명되어 명목상으로나마 황실의 제사를 모시는 사손이란 의미의 황사손으로서 대를 이었다. 다만, 1990년 민법 개정으로 사후 양자 입적은 인정되지 않으므로, 명목상 대통을 이었으되, 호적상 실제 양자 입적이 행해진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굳이 따지자면, '대한제국 황실'의 계통은 의친왕계로 넘어갔다고 봐도 무방하다.

===# 처가 #===
쇼와 22년(1947년) 직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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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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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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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라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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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담

  • 파일:영친왕.jpg

    <colbgcolor=#BF1400> 권오창 화백이 그린 영친왕 초상화

    동강 권오창 화백이 그의 영정을 그렸다.# 권오창 화백은 이외에도 고종, 명성황후, 순종의 초상화도 직접 그린 바 있다.
  • 생전에는 구 황실에 대한 예우와 동정적인 시각이 일부 존재했지만, 이방자 여사와의 결혼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독립운동가들은 영친왕을 매국노로 인식했다. 이는 공화정에 반대하던 복벽파의 몰락을 초래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특히 《독립신문》은 영친왕이 국권을 빼앗고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원수의 나라에 장가를 들었다며 그를 '금수(禽獸)'라고 비난했다. 또한, 독립운동가 서상한은 영친왕 부부를 폭살시키기 위해 사제 폭탄을 준비했으나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다. 이러한 배경에서 영친왕의 큰아들 이진의 독살설이 단순한 뜬소문으로만 볼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 8.15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영친왕이 일본군 중장을 지낸 점, 일본 정부로부터 정기적인 금전 지원을 받았다는 점, 중일전쟁 당시 중국 화북 지역에서 선전 활동을 했다는 점, 그리고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 본토 방위를 담당했던 제1 육군 항공군 사령관으로 복무한 점 등이 문제시되며, 그를 친일파로 기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왕공족 대부분이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고, 일본 황족 또한, 군사 교육을 필수적으로 받았으며, 영친왕 역시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사실상 인질처럼 끌려간 처지였다는 점을 고려하여, '왕공족에게 친일보다는 망국의 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하다.'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따라서, 왕공족 중에서도 적극적인 친일 활동 여부를 기준으로 친일파를 구분했으며, 영친왕과 이우는 일제에 적극 가담한 역적과 동일 선상에서 보기 어렵다는 해석이 나왔다. 특히, 영친왕은 한반도에서 조선인을 탄압하거나 중국 전선에서 학살을 지휘한 인물이 아니라, 후방 부대의 얼굴마담 역할에 그쳤다는 점이 반론으로 제기되었다.
  • 일제강점기 영친왕이 한국어를 사용한 방식에 대한 증언이 엇갈린다.

  • 언뜻 보기에, 이형근과 이홍직의 증언은 상반되어 보이지만, 이 차이는 공식적·비공식적 자리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조선인이라고 해도,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을 대하는 이상, 일본 황족으로서 일본어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지만, 이화회 회원들과의 만남에서는 보다 자유롭게 한국어를 사용해도 된다고 여겼을 수 있다. 또한, 증언자의 입장 차이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이형근은 일본군 체제 내에서 영친왕을 바라보았고, 이홍직은 그의 한국어 사용을 강조하고 싶었을 수 있다. 결국, 영친왕은 일본어가 더 익숙했지만, 필요에 따라 한국어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두 증언은 모순되지 않으며, 영친왕의 언어 사용 방식이 상황에 따라 달랐음을 보여준다.
  • 영친왕은 유럽 순방 중 여러 주요 인사를 만났으며, 이 과정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유럽의 정세와 왕족들의 독특한 면모를 접했다. 특히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전공(戰功)을 높이 평가했던 그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1차 세계대전의 전략·전술에 대해 논의했으며, 힌덴부르크가 "독일 국민은 배상금 압박에도 결코 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자 크게 감명받아, "그분은 독일의 혼과 힘을 지닌 분."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또한, 역사와 문화에 조예가 깊었던 구스타프 6세 아돌프가 자신의 고려자기 콜렉션을 보여주며, "동양 하면 사람들은 인도와 중국만 떠올리지만, 코리아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이러한 문화를 창조한 정신적 힘은 결코 멸망할 수 없다."라고 말하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 영친왕은 생전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으며, 일본의 대표적인 화가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에게 그림을 사사(賜寫, 베껴서 그림을 그리는 것)하기도 했다.
  • 1929년 8월, 경의선 금촌역 광장에서 김대길이라는 남성이 만취 상태로 영친왕의 동생을 사칭하며,[46] 차표를 공짜로 얻으려다 이를 제지하는 역무원을 폭행하고, 유리창을 부수는 등 행패를 부렸다가 군중에 의해 제지당했다.# 하지만, 영친왕은 성인이 된 고종의 아들 중 막내였으며, 남동생들은 모두 유아기에 사망했기 때문에, 김대길이 사칭한 '영친왕의 동생'이라는 인물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 패전 후, 영친왕은 프리메이슨에 가입했다. 당시 일본 프리메이슨은 사회 저명인사와 귀족 계층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었으며, 전전(戰前) 일본 지배층 다수가 가입했다. 영친왕 또한 관동 로지의 초대 워십풀 마스터를 역임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6. 창작물

  • 파일:김홍석 영친왕.png

    <colbgcolor=#BF1400> 〈덕혜: 조선의 마지막 황녀〉의 영친왕

    1996년 MBC 8.15 광복절 51주년 특집극 〈덕혜: 조선의 마지막 황녀〉에서는 배우 김홍석이 연기했다.[51]
  • 파일:external/blogimg.goo.ne.jp/55cafdcfeb6841564b5d38863a39955d.jpg

    <colbgcolor=#BF1400> 〈무지개를 건넌 왕비〉 포스터

    2006년 일본의 후지 테레비에서 영친왕과 이방자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를 방영했다. 제목은 〈무지개를 건넌 왕비(虹を架ける王妃)〉로 장혁주(1905~1998) 작가의 소설 《비원의 꽃》을 원작으로 했다. 극본은 마키노 노조미, 연출은 카와케 슌사쿠 PD가 각각 맡았으며 제작 협력은 일본 영상교토와 한국 MBC가 각각 맡았는데, 의외로 고증에 충실하다고 한다.# 제목부터가 이방자 여사의 수기에 나오는 문장의 인용. 배우 오카다 준이치가 영친왕 역, 배우 칸노 미호가 이방자 여사 역을 맡았다. 주연 배우들과 실존 인물들의 외모가 닮지 않은 것을 문제삼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일본 사극이나 한국 사극이나 주연은 어느 정도 외모가 업그레이드되는 캐스팅 관행이고, V6오카다 준이치는 외모는 비슷하지 않지만, 영친왕이 '체구는 작지만 군인답게 다부졌다.'라는 말을 들었던 것을 고려할 때 체격 면에서 닮은 점이 있다. 작품 자체는 동북아시아판 〈로미오와 줄리엣〉 비슷한 비극의 연인으로 해석했지만, 어디까지나 등장 인물만을 미화했을 뿐 오히려 한국에 우호적인 시각에서 본 드라마이다. 일례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가 잠시나마 언급되는가 하면, 관동 대지진 당시 한국인 학살에 대해 영친왕이 격노해서 뛰쳐나가려 하고, 이방자는 학살에 대해 "너무 심하다."라고 한탄하는 장면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직접 촬영했는데,[52] 창덕궁 후원, 화성행궁, 홍유릉 등에서 회상신 및 결혼식을 촬영했으며, 전익령[53] 등 한국 배우도 조연 및 단역으로 출연했다. 현지 촬영과 현지 배우 캐스팅에도 공을 들였다는 사실 역시 드라마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고 평가받는다.
  • 파일:external/163caca117deddc2f516c8bf2b115527a28450781de192461ab05200e9dc6c43.jpg

    <colbgcolor=#BF1400> 〈덕혜옹주〉의 영친왕

    2016년 개봉한 영화 〈덕혜옹주〉에서는 배우 박수영[54]이 연기했다. 영친왕과 매우 닮은 모습으로 호평을 받았다. 영화 속 영친왕 망명 작전의 경우 근거 자료가 부족해서 의친왕 망명 작전에 대한 기록을 대신 참고했다고 한다. 대체적으로 온화하고 사람 좋은 모습으로 나오기는 하지만, 망명하기로 결심해놓고 아내와 여동생 덕혜옹주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망명을 포기하는 부정적인 모습도 보여준다. 물론, 여기서 나오는 망명 사건은 완전한 허구이다.
  • 게임 〈Hearts of Iron IV〉의 모드 〈하츠 오브 코리아〉에서는, 위에서 설명했듯이, 《환단고기》를 추종하는 계열 단체의 추대를 받아서 황제에 오를 수도 있다. 계연수의 꼭두각시가 될 수도, 계연수를 숙청하고 전제군주가 될 수도 있다. 처음 특성은 형편없지만, 플레이에 따라 세종대왕이성계 수준의 철인군주이자 대원수로 만들 수 있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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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혈통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실선은 친자, 점선은 양자 관계임
※ 왕족 / 황족으로서 경술국치 이전에 정식 봉호를 은 사람만 기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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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호는 사후 추증된 인물이며, 흥선헌의대원왕을 제외하면 대한제국 수립 이전 사망한 왕족임
※ 영친왕은 이은의 황태자 책봉과 더불어 폐기된 작호로, 황태자 자격으로 받은 '의민황태자'라는 시호가 있으나,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지은 사시(私諡)이므로 표기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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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기자신 영친왕(은, 垠)을 비롯하여 이복 형들인 순종(척, 坧)의친왕(강, 堈)도 항렬자 휘에 흙 '토(土)'변을 공유한다.[2]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사시(私諡)로, 아내 이방자가 1967년 설립한 신체장애자훈련원 명휘원(明暉園)이 영친왕의 아호에서 따와 이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아호를 그대로 사시에 올린 것으로 보인다. 다른 글자와 달리 暉(휘)는 시호에 쓰인 예가 전무하다. 한편 의민황태자라는 호칭에 관한 논란에 대해서는 아래 '호칭 관련' 문단 참고.[3] 유년기에 사망한 자녀 포함. 성인기까지 생존한 자녀 중에서는 3남이다.[4] 이전에 류큐 국왕을 류큐 번왕이라는 비주권군주제로 편입하긴 했지만, 이후 왕위가 완전히 폐지되고, 일본의 귀족으로 격하되었다.[5] 1984년 《경향신문》에 연재된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를 재출간한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지식 공작소, 2014년)의 '일러두기'에는 "이방자 여사의 유지(遺指)에 따라 '영친왕'을 '영왕'으로 호칭한다."라는 말이 있다.[6] '의화군 이강(李堈)은 의왕(義王)으로 삼고 이은(李垠)은 영왕(英王)으로 삼았다.' 《고종실록》 고종 37년(1900년 / 대한 광무光武 4년) 8월 17일(양력) 1번째 기사 중화전에 나아가 황자를 책봉하다[7] 대한제국 선포 이전의 조선 왕조에서 친왕에 해당하던 작위는 대군(大君)과 (君)이다.[8] 사실, 친왕 작위도 세습이 가능했으며, 영친왕이 친왕 신분을 유지한 채 사망했다면, 아들 이구가 2대 영친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황태자 승격과 함께 영친왕 작호가 폐기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라가 멸망하면서 대한제국의 영친왕 작위를 지닌 사람이 이은 한 명뿐이 된 것이다.[9] 영결식에서 읽었을 때는 '의민황태자 영왕 전하'라고 했는데, 정부 기록에는 '의민황태자 영친왕 전하'라고 적혀 있는 경우도 발견된다.〈이구 영결식〉 〈대한제국 황세손 영결식 조사〉(국무총리) 〈故 황세손 이구 영결식 식사〉(문화재청장)[10] 순종의 황후 순정효황후 윤씨의 호칭도 마찬가지 경우이나, 영친왕의 경우처럼 대중이 공히 부를 칭호가 없다는 이유로 크게 문제를 삼지는 않는 분위기이다. 영친왕의 아내 이방자와 아들 이구에게도 각각 '자행황태자비(慈行皇太子妃)'와 '회은황세손(懷隱皇世孫)'이라는 사시가 있으나, 이들은 대한제국 시기(1897~1910년)에 공식적으로 황태자비나 황세손 작위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사시 여부를 떠나 황태자비나 황세손이라는 칭호 자체부터가 적절한지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 엄밀히 말해, 이들은 황태자비나 황세손이 아니라 단지 남편과 아버지가 황태자였던 사람일 뿐이다. 이방자는 일본에서 '여왕(女王)' 칭호를 사용하다가, 1920년 영친왕과 결혼하면서 '이왕세자비(李王世子妃)'를 거쳐, 최종적으로 '이왕비(李王妃)'에 이르렀다. 이구 역시 순종 사후인 1931년에 태어나 처음부터 '이왕세자(李王世子)'였으며, 광복 후 평민이 되었다. 그는 황태자의 적장남을 의미하는 '황태손(皇太孫)'이 아닌, '황실의 세계(世系)를 잇는 후손'이란 뜻의 '황세손(皇世孫)'으로 불렸으며, 이 때문에 시호 역시 '황태손'이 아닌 '황세손'으로 정해졌다.[11] 1900년 8월 대한제국 고종황제(高宗皇帝)의 황자인 의화군(義和君) 강(堈)과 은(垠)을 각각 '의왕(義王)'과 '영왕(英王)'으로 책봉한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보물1901-6호[12] 《순종실록》 순종 1권, 즉위년(1907년 정미 / 대한 융희(隆熙) 1년) 8월 7일(양력) 1번째 기사 영왕 은(垠)을 황태자로 책봉하다, 동년 9월 7일(양력) 1번째 기사 황태자를 책봉하고 축하를 받고 대사령을 반포하다[13] 유길준, 장인근 등.[14] 순종 행장에서는 "순종 황제가 왕가의 전례를 따라 아우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하여 백성의 여망에 부응하고 국가의 근본을 더욱 굳건하게 했다."라고 기록되었다.[15] 이는 조선태종이 '왕세제'가 아닌 '왕세자'로 책봉된 사례와 유사하다.[16] 초기에는 일본 황태자와 유사한 예우를 받았으나, 경술국치 이후 '이왕 전하(李王殿下)'로 불리며 화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1911년 육군 유년 학교 예과에 편입되었고, 1917년 일본육군사관학교 제29기로 졸업했다.[17] 원래 영친왕에게는 약혼녀 민갑완(閔甲完)이 있었으나 파혼되었다.[18] 일부 기록에서는 "이방자는 외부 활동에 집중하느라 병든 영친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라는 기술도 있다.[19] 메이지 덴노는 영친왕에게 최신 장난감, 은제 문구류, 영사기 등을 선물했으며, 영친왕은 특히 영사기를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20] 이왕직은 광범위한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건국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 경희대학교 등 서울 주요 대학 부지 상당수가 과거 이왕직 소유지였다.[21] 옛 영상에는 이토 히로부미 앞에서 박수를 치며 뛰어 놀거나 그네를 타는 영친왕이 나온다. 이를 가지고 망해가는 대한제국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암군의 모습이라고 평하는 이들도 있지만, 당시 그는 초등학교 고학년 나이(9~11세)의 어린 소년이었을 뿐임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영친왕 앞에서는 친절을 베풀었다고 한다. 또래 아이들을 초대해 같이 뛰어놀게 하면서, 영친왕이 일제에 대한 반항심 또는 적개심조차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만들었다. 여담으로 역사의 아이러니인지 1945년에는 맥아더가 히로히토를 찾아가서 의도적으로 비슷한 구도로 사진을 찍어서 일본 민중을 정신적으로 굴복시켰다.[22] 이 때문에 명목상으로나마 일제강점기 조선의 교과서에서도 천황 바로 뒤, 총독보다 앞선 위치에 등장했다. 또한, 이왕가는 일본의 대다수 화족들이 부러워할 만큼 막대한 유산을 보유하고 있었다.[23] 참고로 일본군 중장은 현재 한국군 중장보다 높은 계급이다.[24] 다만, 순헌황귀비는 장티푸스로 사망했기 때문에, 애당초 임종을 지켜보는 것이 어려웠다. 전염병이 창궐하던 당시, 감염자의 시신을 직접 볼 수도 없었으며, 시신을 공개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황이었다.[25] 이 책의 예문 대부분은 하오체로 작성되었으며, 영친왕이 직접 손글씨로 작성한 것이다. 삽화 역시 그가 직접 그렸다. 책의 첫 번째 예문은 인상적으로도 '나는 고기를 머그오(I eat meat)'였다. 이는 그가 유복한 생활을 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26] 사진은 모나코 공국의 궁전.[27] 1907년, 대한제국 황태자로 재위하던 당시, 황태자 신분이었던 요시히토 친왕(훗날 다이쇼 덴노)이 방한하여 대면한 적이 있었다.[28] 당시 육군대학 제35기 동기가 홍사익이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총 4명 뿐이었으며, 홍사익을 제외한 영친왕, 이건, 이우는 모두 왕공족이었다.[29] 1936년 2.26 사건 당시, 영친왕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보병 제59연대를 이끌고 도쿄로 진주했으나, 도착한 당일 반란이 이미 진압되어 교전은 없었다. 이후 제59연대는 만주를 거쳐 태평양 전쟁 당시 팔라우로 배속되었으며, 1944년 앙가우르 전투에서 옥쇄했다.[30] 1941년 7월 1일부터 같은 해 11월 16일까지 재직하며 약 4개월간 근무했다.[31] 1946년 2월, 미군정 하에서 민정장관이었던 안재홍이 창간한 신문으로, 보수적인 논조를 띄었다. 6.25 전쟁 당시 안재홍이 납북되면서 폐간되었다.[32] tmi사족으로, 파는 다르지만, 전주 이씨 전체를 놓고 볼 때, 이승만은 흥선대원군과 같은 항렬이기 때문에(시조 40세손), 영친왕에게는 22살 많은 할아버지 뻘이 된다.[33] 단, 노봉우는 6.25 전쟁 이전 남조선로동당원이었던 전력으로 인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추가로 선고받았다.[34] 관련 자료(김을한의 《인간 이은》, 이방자 여사의 《세월이여 왕조여》 등)를 보면 1958년~1961년 사이에 미국(하와이 등)에서 간간이 머문 적이 있는데, 그 때 사진이라고 한다.[35] 이때 이구가 출국을 위해 여권 발급을 요청했으나, 이승만이 이를 거절하여 결국 일본 정부에서 발급한 임시 여권을 사용해야 했다.[36] 푸제는 청나라 선통제의 동생으로, 일본 화족 가문의 딸인 사가 히로와 결혼했다. 푸제는 만주국을 탈출해 일본으로 향하다가 소련군에 붙잡혀 형인 푸이와 함께 전범으로 수감되었으며, 소련에서 중국으로 송환되어 무순 전범 관리소2에 오랫동안 구금되었다.[37] 이는 제2공화국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38] 병원비가 이처럼 밀린 이유는 국가가 지원한 병원비를 이구가 횡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구의 비리 행각은 일본 측에도 알려졌던 것으로 보이며, 그 때문에 영친왕의 장례식 당시, 일본 황실 측이 마련한 조의금을 상주인 이구가 아닌 한국 정부 관계자에게 직접 전달했다고 한다.[39]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 개통을 불과 두 달 앞둔 시점이었다. 반면, 아내와 여동생은 1988 서울 올림픽까지 지켜보았다.[40] 대한제국 황족을 다룬 《제국의 후예들》에 따르면, '의민(懿愍)'의 의미는 '평생 동안 고난의 길을 걸었다.'라는 뜻이다. 원래 시호는 고인의 생전 행적을 평가하는 의미를 가지지만, 영친왕의 경우에는 그의 인생 자체가 시호에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41] 흥미로운 점으로, 구한말 조선 왕실에서는 종묘 정문인 창엽문(蒼葉門)이 조선왕조의 운명을 암시한다는 도참설(圖讖說)이 전해졌다. 당시 '창(蒼)'을 파자하면, '十十', '八', '君'이 되어 28명의 군주를 의미하며, '엽(葉)'은 '十十', '世', '木'으로 해석되어 20대를 뜻한다. 당시 26대 임금이었던 고종은 이 도참설을 듣고 불안을 느껴 역술가들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실제로, 조선왕조의 계보를 보면, 왕조의 대수(代數)는 20대, 군주의 숫자는 28명으로, 영친왕까지 포함하면, 도참설과 정확히 일치하는 셈이 된다. 다만, 이러한 예언이 조선 멸망을 전후하여 후대에 끼워 맞추어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42] 이진(李晉). 대통을 이을 종손이었으므로, 영친왕과 이방자 내외가 대한민국으로 함께 데려가 얼굴을 비췄는데, 한국 땅에서 먹은 것이 잘못되었는지 초콜릿 색깔의 검고 갈색 구토를 계속 하다 생후 8개월이라는 어린 나이에 일찍 죽었다. 훗날 이방자 여사는 "궁에 (영친왕) 전하와 나의 사이를 시기하는 자가 있어 사주를 받고 했을 일."이라며 독살설을 주장했지만 확실하게 밝혀지진 않았다. 굳이 현실적으로 생각해본다면 너무 어린 나이에 당시 열악한 환경에서 먼 거리를 왔다갔다하느라 몸에 무리가 가해진 상태에서 맞지 않는 음식을 먹은 것이 탈이 난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의학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은 때라 아직 몸이 약한 어린 아기가 작은 병에도 사망하는 일이 적지 않았고, 이는 왕실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43] 의친왕의 9남 황손 이갑(이충길)의 장남이자 의친왕의 손자로서, 황사손 계승 전 본명은 이상협.[44] 의친왕의 9남 이갑의 아들로, 이구 황세손 사망 후, 황실서열 1위 이준은 의친왕가 종손으로 사동궁을 이어야 했기에, 사촌동생 이원이 이구에게 사후양자로 출계하여 황사손이 되었다.[45] 이왕직 장학금을 받는 장학회급비생들의 모임. 이왕직 장학금은 영친왕이 자신의 친용금을 쪼개어 조선의 인재를 육성할 목적으로 조성했다.[46] 당시 영친왕은 ‘이왕 전하’로 불렸으며, ‘영친왕’이라는 호칭은 대한제국 시절을 회고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47] 이서구(1899~1981) 작가의 시나리오를 원작으로 하여 정진우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48] 극본은 김영곤, 연출은 나영세 PD이다.[49] 신봉승 작가의 시나리오를 원작으로 하여 극본은 김지수, 연출은 사극계의 거장 김재형 PD가 각각 맡았다.[50] 이 둘은 KBS 2TV 주말연속극 〈달빛가족〉에서도 부부였다.[51]조선왕조 500년 - 대원군〉에서는 영친왕의 아버지 고종을 연기했다.[52] 후지 테레비의 제휴사인 MBC에서 적극 지원을 해주었다고 한다.[53] 작중 이름은 '이천희'로 영친왕이 어렸을 때 잘 따르던 궁녀 역으로 등장한다. 나중에 엄귀비가 설립한 숙명여학교의 학생들이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와서 영친왕 부부를 만나는데, 그 여학생들 중에 이천희의 딸이 있었다(이천희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꼭 조선으로 돌아오십시오."라는 여학생들의 말에 영친왕은 슬퍼한다.[54] 1970년생 남자 배우로 〈말죽거리 잔혹사〉의 선생님, 〈타짜〉의 고니(조승우) 삼촌, 〈건축학개론〉의 건축소 소장, 〈완득이〉의 완득이 아버지 등을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