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우 감독의 수훈 및 수상 이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프랑스 문예공로훈장 수훈자 | ||||||||||||||||||||||||||||||||||||||||||||||||||||||||||||||||||||||||||||||||||||||||||||||||||
<colbgcolor=#002664><colcolor=#EDE4D3> 연도 | <colbgcolor=#EDE4D3><colcolor=#002664> 1993년 | ||||||||||||||||||||||||||||||||||||||||||||||||||||||||||||||||||||||||||||||||||||||||||||||||||
수여 | 프랑스 문화부 | ||||||||||||||||||||||||||||||||||||||||||||||||||||||||||||||||||||||||||||||||||||||||||||||||||
이름 | Jin Woo Chung | ||||||||||||||||||||||||||||||||||||||||||||||||||||||||||||||||||||||||||||||||||||||||||||||||||
국적 | Republic of Korea |
대한민국 국민포장 수훈자 | |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1972년 |
이름 | 정진우 |
분야 | 영화감독 |
국민포장 |
{{{#white 역대}}} | ||||
감독상 | ||||
제9회 (1972년) | → | 제10회 (1973년) | → | 제11회 (1990년) [1] |
김효천 (소장수) | → | 정진우 (섬개구리 만세) | → | 정지영 (남부군) |
역대 | ||||
감독상 | ||||
제17회 (1978년) | → | 제18회 (1979년) | → | 제19회 (1980년) |
임권택 (족보) | → | 정진우 (심봤다) | → | 이장호 (바람불어 좋은 날) |
제22회 (1983년) | → | 제23회 (1984년) | → | 제24회 (1985년) |
이두용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 → | 정진우 (자녀목) | → | 배창호 (깊고 푸른 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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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鎭宇
1938년 1월 17일 ~ ([age(1938-01-1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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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영화감독.196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이끈 대감독 중 한명으로 90년대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데뷔 당시 23살에 한국 최연소 감독이었다.
2. 활동
리즈 시절은 60년대말. 그 중에서도 1966년이다. 갓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초우, 하숙생과 같은 당대의 걸작들을 연달아 5개나 쏟아내는 기염을 토한다. 1971년에는 김기영 감독의 작품 '화녀'의 제작까지 담당했다. 더불어 제작자로서 오랜 역사를 가진 우진필림 대표였다. 그리고 씨네하우스 극장과 우진 비디오 프로덕션을 소유했다. 1989년 금지가 풀리자 한번에 마구 개봉하던 찰리 채플린 영화들도 당시 우진에서 수입, 극장개봉, 비디오로 다 냈었다.다만 흑백영화이던 당시의 인기와 작품성은 영화 골수팬들 정도나 알아주고, 지금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감독 정도로 아는 이들이 많다(…). 아무튼 한국 영화사를 설명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거장 중 한명이긴 한데 마지막 감독 영화가 되어버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흥행과 평으로 진짜 망해서 1996년 우진필림이 문을 닫고 씨네하우스 극장도 대우그룹에 팔아야 했다. 그리고 영화계에서 은퇴한 듯 활동이 없다. 가끔 자사 영화 복원 관련으로 언급되는게 전부.
한국 영화 역사에서는 동시녹음 선구자로 꼽히는 사람이다. 1977년에 토드 OA형 동시녹음카메라와 같은 당대 최첨단 동시녹음용 장비들을 들여와 1978년작 <율곡이이와 신사임당>에 처음 시도했고, 1979년 <심봤다>와 <가시를 삼킨 장미>, 1981년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등지의 동시녹음 영화를 만들었다.
2014년 대종상영화제에서 공로상을 수상했다. 수상 소감 도중, 자신의 영화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여러 번 수상했던 정윤희를 언급하며, 아들을 잃은 정윤희의 슬픔을 위로해주었다.
영화인들의 복지를 위한 재단인 한국영화인복지재단의 이사장을 오랜 기간 동안 맡고 있다. 그러나 복지재단의 기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하며 복지재단을 사유화 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2], 정진우 감독과 대립하는 쪽은 애마부인을 연출한 정인엽 감독인데, 이 쪽도 영화인협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저지른 비리가 많기는 마찬가지다. 참고로 그 말 많고 탈 많은 대종상을 주관하는 곳이 바로 영화인협회다.
3. 수상
- 1971년 제14회 부일영화상 감독상 (동춘)
- 1972년 국민포장 수훈
- 1972년 문화공보부장관 표창
- 1973년 제16회 청룡영화상 감독상 (섬개구리 만세)
- 1973년 제16회 부일영화상 감독상 (석화촌)
- 1979년 제18회 대종상 감독상 (심봤다)
- 1984년 제23회 대종상 감독상 (자녀목)
- 1985년 제5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감독상 (자녀목)
- 1993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슈발리에 수훈
- 1995년 춘사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 2004년 제27회 한국예총문화예술대상 (영화부문)
- 2014년 제51회 대종상 공로상
- 2015년 제35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공로상
- 2019년 제24회 춘사국제영화제 공로상
- 2019년 제68회 서울특별시 문화상 대중예술부문
- 2022년 제42회 황금촬영상영화제 공로상 감독부문
4. 해외 영화제 초청 이력
- 1972년 제2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 후보 (석화촌)
- 1973년 제2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 후보 (섬개구리 만세)
- 1984년 베니스국제영화제 비경쟁부문 전세계 10대영화 선정 (자녀목)
- 1985년 제1회 동경국제영화제 전세계 30대영화 선정 (자녀목)
5. 관련 문서
[1] 1973년까지 개최되었다가 중단, 1990년에 재개[2] 물론 본인은 자신의 재산이 수백억인데, 겨우 그까짓 푼돈에 욕심을 낼리 없고 자신은 자신의 돈으로 재단을 운영하기 까지 했다며 자신에 대한 비리 의혹을 모두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정진우는 과거에도 문예진흥기금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 되었던 전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