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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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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십리
往十里 | Wangsimni[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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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십리오거리와 왕십리역
파일:왕십리 생활권 지도.png
행정구역상 왕십리와 왕십리 생활권
1. 개요2. 지명 유래3. 지역 범위4. 지역 특징5. 행정구역상 왕십리
5.1. 역사
5.1.1. 전근대5.1.2. 일제강점기5.1.3. 현대
5.2. 행정구역
5.2.1. 법정동
5.2.1.1. 상왕십리동5.2.1.2. 하왕십리동5.2.1.3. 홍익동5.2.1.4. 도선동
5.2.2. 행정동
5.2.2.1. 왕십리도선동5.2.2.2. 왕십리2동
5.3. 지리5.4. 교통
5.4.1. 도로5.4.2. 철도5.4.3. 버스
5.5. 주거
5.5.1. 공동주택
5.6. 교육
6. 상권7. 왕십리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8. 출신 인물9. 여담10.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서울특별시 성동구 상왕십리동·하왕십리동·홍익동·도선동의 4개 법정동(행정동 왕십리도선동·왕십리2동)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서울의 부도심 중 하나이자, 서울 동북부 일대의 중심지이다.

왕십리동이라는 행정구역은 현재 존재하지 않으며, 위의 4개 법정동(2개 행정동)이 행정구역상 왕십리에 해당한다. 이보다 더 넓은 의미에서 왕십리라 일컫는 지역에는 왕십리역을 중심으로 행당동·사근동·마장동의 각 일부 지역과 상왕십리동과 인접한 중구 황학동 전체 및 신당동 북쪽 일부 지역이 포함된다.

2. 지명 유래

전설에 따르면, 조선 초에 무학대사태조의 명을 받고, 새로운 도읍지가 될 만한 땅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던 중에 지금의 왕십리 일대를 지나고 있었는데, 무학대사는 이곳을 명당이라 생각하여 도읍으로 정하자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 순간, 한 노인이 소를 끌고 지나가면서 소에게 "야, 이 무학 같이 미련한 소야!" 라고 하였다. 무학대사는 이를 듣고는 깜짝 놀라 노인에게 "혹시 도읍이 될 만한 곳을 아십니까?"라고 물었고, 노인은 "북서쪽으로 십 리를 더 가보시오. 도읍이 될 만한 터가 있을 것이오"라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2]

무학대사는 노인의 말을 좇아 십 리를 더 가 보았는데, 과연 한 나라의 도읍으로 삼을 만한 땅이 나왔다. 그곳이 지금의 한양도성이며, 무학대사가 노인을 만난 곳은 갈 왕(), 열 십(), 거리 단위 리() 자를 써서 왕십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에 덧붙여서 무학대사를 꾸짖은 노인이 실은 도선대사의 혼백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무학대사가 한양의 지세를 관망하고는 '그런 곳을 점지할 수 있는 사람은 도선대사밖에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으나, 이미 그 노인을 다시 찾을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사극 용의 눈물 23화에서도 이에 관해 야사로서 소개한 에피소드가 나왔다.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왕십리의 리(里)는 마을을 뜻하는 가 아니라 거리 단위 리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해방 이후 동제(洞制)가 시행된 이후에도 상왕십동·하왕십동이 아닌 상왕십리동·하왕십리동이 된 것이다.[3]

그밖에도 이 일대에는 무학대사의 호를 딴 지명이나 교명(校名)이 흔한데, 하왕십리동에는 무학봉(舞鶴峰)[4]서울무학초등학교가 있고, 행당동에는 무학중학교무학여자고등학교가 있다. 또한 1964년에 하왕십리동을 분리하여 2개의 법정동을 더 신설할 때, 하나는 홍익동, 나머지 하나는 무학대사가 왕십리에 이르렀을 때 만난 노인이 도선대사였다는 전설을 따라 도선동으로 명명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위 이야기는 신빙성이 좀 떨어지는데, 고려시대에 이미 이 일대를 '왕심(旺心)' 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표기가 변화하여 현재의 왕십리가 됐다는 설이 좀 더 설득력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5] 한자표기 또한 현용 중인 往十里만 있었던 게 아니라 王十里[6], 王尋里 등이 섞여 쓰이는 등 이미 당대에도 중구난방이었다. 이 때문인지 왕리는 현대 기준에서는 분명 오타인데도 오타로 취급되지 않는다.[7]

3. 지역 범위

현행 행정구역상 왕십리에 해당하는 지역은 성동구에 속하는 상왕십리동·하왕십리동·홍익동·도선동의 4개 법정동(행정동 왕십리도선동·왕십리2동)으로, 상왕십리역이 있는 지역이다. 사대문 안에 가까운 쪽이 상왕십리, 먼 쪽이 하왕십리이며, 하왕십리동에서 갈라져 나간 홍익동과 도선동은 하왕십리에 해당된다. 1975년에 상왕십리동의 대부분 지역이 중구로 편입되었으므로, 현행 행정구역상 왕십리는 대부분 옛날에 하왕십리라 일컫던 지역이며, 상왕십리역도 상왕십리동이 아닌 하왕십리동에 속해 있다. 단지 왕십리역과 구분하기 위해 상왕십리역으로 명명한 것이다.

넓은 의미로 일컫는 왕십리의 범위는 왕십리로를 따라 신당역에서 한양대역까지 대략 2.5km 거리가 연담화되어 있는 지역으로, 왕십리역을 중심으로 행당동·사근동·마장동의 각 일부 지역과 상왕십리동과 인접한 중구 황학동 전체 및 신당동 북쪽 일부 지역까지가 포함된다. 왕십리역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은 일제강점기 들어 동쪽으로 확장된 시가지이고, 황학동과 신당동 일부 지역은 1975년 이전에 왕십리에 포함되었던 지역이다.

현재는 대개 왕십리라 하면 왕십리역 일대를 말하는데, 왕십리역 자체는 행정구역상 하왕십리동이나 도선동이 아닌 행당동에 속한다. 때문에 행정구역상 왕십리에 속하는 지역과 왕십리역 일대와 별도로 구분하기 위해 왕십리역 일대를 왕십리, 상왕십리역 일대를 상왕십리로 구분하기도 한다. 왕십리의 동쪽 확장 범위는 왕십리역을 기준으로 북쪽으로는 마장동의 경원선 이서 지역, 남쪽으로는 행당1동과 행당도시개발구역, 동쪽으로는 한양대학교와 마장동의 경원선 이동 지역 중 한전 성동지사 이남 지역에 이른다. 왕십리역 동쪽 지역은 경원선 서쪽의 지역과 따로 구분하여 한양대, 혹은 한대앞이라고 부른다.

이보다 넓은 의미로 일컫는 왕십리의 범위는 성동구에서 청계천 서쪽, 중랑천 북쪽 지역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용답동·송정동·성수동을 제외하는 성동구 본토 전역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왕십리역 생활권에 속하는 지역이다.

왕십리역에 인접한 행당동·응봉동·사근동·마장동은 왕십리역 소생활권에 속한다. 행당2동·응봉동·원사근동(사근고개 동쪽 지역)·마장역 일대는 넓은 의미에서 말하는 왕십리의 범위에는 속하지 않지만, 왕십리역을 도보로 접근할 수 있거나, 관내에 철도역이 따로 없거나, 왕십리역에서 한 정거장 차이라 왕십리역을 거치는 수요가 많거나, 이마트 왕십리점에서 장을 보는 지역이다.

이보다 조금 떨어져 있는 금호동옥수동은 왕십리역 대생활권에 속한다. 왕십리역과는 거리가 어느 정도 있어 도보로 왕래하는 근린 생활권은 아니지만, 가장 가까운 중심지가 왕십리역이 되는 지역들이다. 신금호역옥수역 모두 환승 없이 두 정거장이면 왕십리역에 도착하는 곳에 있는 역들이며, 지하철을 타지 않더라도 독서당로가 왕십리역 방향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버스나 자가용으로는 10분 내외로 왕십리역에 도착할 수 있다.

4. 지역 특징

왕십리는 조선시대부터 한성부 성저십리에 속하였던 곳으로, 광희문을 통해 도성에서 빠져나오면 곧장 나오는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중랑천을 건너면 서울의 농경지대였던 뚝섬이 나오고, 뚝섬을 지나면 광나루를 통해 한강을 건너 충주·원주·영남 방면으로 지어지는 교통로가 이어졌다. 이렇듯 조선시대에는 경충대로의 시작점이자 종점이었기 때문에 왕십리 일대에 성외(城外) 시전이 발달하였고, 상인을 비롯한 중인(中人) 계층이 많이 살았다. 서울 사투리 중에 '~걸랑' 하는 것이 왕십리 일대에서 생겨난 특유의 방언인데, 이 당시 이 일대에 거주하던 중인 계층에서 쓰던 말이라고 한다.

또한 지금의 을지로5가에 군사들을 훈련하던 훈련원이 있었고, 마장동 일대에서 군마(軍馬)를 키웠고, 뚝섬에는 군사들을 사열하던 연무장(演武場)이 있었으므로 그 중간 지점인 왕십리 일대에 군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임오군란 당시에 구식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킨 중심지 역시 왕십리였고, 때문에 청군이 구식 군인들을 소탕할 적에 군인들이 많이 살던 왕십리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사대문 안강남, 동북부를 잇는 위치에 있어 각 지역에서 오는 주요 교통망이 교차하는 서울 동부의 교통 중심지가 되었다. 왕십리역2호선·5호선·경의중앙선·수인분당선의 4개 노선 환승역이며, 왕십리오거리에서는 을지로·성수동으로 연결되는 왕십리로와 강남·동북부로 연결되는 고산자로가 교차한다. 또한 성동구청·성동구의회·성동경찰서·성동소방서·성동광진교육지원청성동구의 주요 관공서들이 모여 있는 성동구의 행정 중심지이기도 하며,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가 인접하여 대학가의 성격을 띄는 복합적인 성격의 지역이다.

현재는 왕십리역과 왕십리오거리 일대가 왕십리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본디 왕십리의 중심지는 지금의 신당역이 있는 황학동 서울중앙시장과, 현재는 재개발이 된 왕십리뉴타운 일대였다. 1975년중구와 성동구가 난계로를 기준으로 경계를 조정하기 전까지는 그 일대 역시 상왕십리동과 하왕십리동에 포함되던 지역이었다. 황학동 가구거리가 왕십리 가구거리로 불리기도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난계로 동서 지역이 서로 지리적 단절 없이 같은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고, 상왕십리동 같은 경우는 상왕십리역보다 신당역이 근소하게 가까운 관계로 신당역 생활권에 포함되기도 한다.

왕십리역 일대는 1911년경원선이 개통됨과 동시에 왕십리역이 개업하고, 1940년대에 이르러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되며 새로 생긴 시가지이다. 이 시기에 지금의 고산자로가 개통되면서 왕십리오거리가 생겨난 것이다. 철도역과 인접한 곳에 주요 도로들이 교차하게 되자 왕십리역 일대는 서울 동부의 교통 중심지로 떠올랐고, 왕십리 지역의 새로운 중심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6.25 전쟁 이후에는 상경민들이 몰려들면서 왕십리 일대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1964년에는 하왕십리동에서 홍익동도선동이 분리되었으며, 왕십리 시가지는 성동교 방면으로 계속해서 확장되었다. 1954년, 한양대학교가 왕십리역 동쪽에 자리잡음에 따라 왕십리역과 한양대 사이에 있는 지역이 대학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부터 왕십리의 중심지는 지금의 황학동 쪽에서 왕십리역 쪽으로 점차 이동하기 시작하였으며, 왕십리역 주변 지역인 행당동·사근동·마장동 일대가 연담화되며 왕십리의 범위가 동쪽으로 크게 넓어졌다.

1979년에는 성수대교가 완공되면서 고산자로를 통해 강남과 곧바로 연결되었으며, 1983년에는 2호선이 이 일대를 지나면서 왕십리역은 환승역이 되고, 신당역·상왕십리역·한양대역이 개업하는 등 철도 교통망이 확충되었다. 이와 더불어 1980년대부터는 강남이 발전하면서 사대문 안과 강남 사이에 있는 왕십리를 거치는 교통량과 환승 수요도 크게 늘었다. 이렇듯 교통이 편리하고 한양대학교와 인접하였다는 지리적 이점은 갖추었으나, 왕십리오거리 일대 상권은 유독 발전하지 못 했다. 배후 상권이 부실한 탓으로 왕십리역의 환승 수요의 비해 승하차 인원이 현저히 떨어지는 현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왕십리는 지나가는 곳일 뿐, 머무는 곳이 못 되었다는 것이다.

왕십리 지역은 이미 1970년대부터 강남이나 지금의 광진구 지역 등 신규 개발된 외곽 지역으로 인구가 꾸준히 외부로 유출되는 도심 공동화를 겪으며 여러 동들이 통합되고, 개발이 정체되었다. 때문에 오랫동안 낙후된 지역이라는 인식이 강하였는데, 개발이 정체된 데에 더하여 이곳이 원래 서울 교외의 서민 주택가로 개발된 곳이었던 데다가, 지대가 낮아 1990년대까지만 해도 상습 침수지였다는 것도 그러한 인식이 만들어지는 데에 한몫하였다.

1995년에 성동구와 광진구가 분리되며 낙후되었던 왕십리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분구 이전까지 성동경찰서를 제외하면 성동구청을 비롯한 모든 관공서가 지금의 광진구 지역에 있었는데, 광진구와 분리되면서 성동구의 관공서들은 성동구 관내로 옮겨 와야 했다. 급하게 분구를 한 터라 한동안은 성동구청을 비롯한 관공서들이 관내 여러 곳에 흩어진 채 임시 청사를 사용하였으나, 2004년에 왕십리역 서북쪽 부지에 성동행정복합타운을 조성하여 관공서들이 모두 왕십리역 앞에 모이게 되었다.

2000년대부터는 이 일대의 낙후된 주택가를 재개발하는 계획들이 수립되었다. 특히 이명박 서울시장 재임 당시에 상왕십리동·하왕십리동·홍익동에 걸쳐 있던 지역이 길음뉴타운·미아뉴타운과 함께 뉴타운 시범사업 지구로 지정되어 왕십리뉴타운으로 추진되었다. 2011년에 착공하여 2014년에 완공되었다. 다만 시범사업 지구라서 다른 뉴타운에 비해 규모는 작은 편이다.

2008년에는 왕십리역도 복합쇼핑몰을 갖춘 민자역사로 건립되면서 점차 위상을 달리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경원선으로 인해 단절되어 있던 한대앞과 왕십리오거리가 왕십리역 민자역사의 지상 통로를 통해 연결되면서 하나의 상권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2012년에는 분당선의 개통으로 인해 전처럼 2호선을 타고 잠실까지 돌아서 갈 필요가 없어지면서 강남과의 접근성이 크게 개선되었는데, 수인분당선을 타면 강남구청역까지 단 7분, 선정릉역까지 9분에 주파할 수 있다.

강남과의 접근성이 개선되고, 민자역사 완공으로 상업 시설이 충족되자, 유동인구도 크게 늘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왕십리의 중심 상권은 전풍호텔 앞의 하왕십리동과 도선동 지역이었으나, 민자역사 준공 이후로는 왕십리의 중심지는 왕십리의 행정구역을 벗어나 행당동 일대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왕십리역 민자역사가 이 일대를 지나는 대부분의 유동인구를 흡수하는 바람에 주변 상권이 침체를 겪기도 했다.

왕십리뉴타운에 이어 경원선 선로 주변의 판자촌이 있던 자리도 재개발을 거쳐 서울숲더샾이 들어섰다. 더불어 인근의 성수동옥수동2010년대 이후 신 부촌을 형성하면서 왕십리는 그 중심 지역으로서 나날이 면모를 달리하고 있다. 아직은 낙후된 지역들이 제법 있으나, 이런 곳들도 대개 재개발에 들어갔거나 재개발을 준비 중이다. 한편 현재까지 이 지역은 상권이나 주택가는 있지만, 업무지구가 부실하다는 것이 단점이었으나, 장기적으로는 2030년대에 성동구청과 성동경찰서가 지금의 소월아트홀 자리로 이전하고, 지금의 행정타운 부지를 업무지구로 재개발하겠다는 계획이 있다.

지금 왕십리는 사대문 안과 강남 지역과의 교통 연계는 불편한 데가 없으나, 왕십리 이북의 다른 동북부 지역과는 교통 연계가 부실하여 동대문구·성북구·도봉구·강북구·노원구 등의 지역과는 접근성이 좋지 않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신설되는 서울 경전철 동북선은 왕십리역을 종점으로 결정하였고, 동북선이 완공되면 앞으로는 왕십리로 유입되는 유동인구가 지금보다 더 많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5. 행정구역상 왕십리

파일:왕십리 법정동 지도.png파일:왕십리 행정동 지도.png
<rowcolor=#fff> 법정동 경계 행정동 경계
이 문단에서는 행정구역상 왕십리에 속하는 상왕십리동·하왕십리동·홍익동·도선동의 4개 법정동(행정동 왕십리도선동·왕십리2동) 지역에 해당하는 내용만 서술하며, 넓은 의미에서 왕십리에 속하는 행당동·사근동·마장동 등에 해당하는 상세 내용은 각 문서를 참고하여 주십시오.

5.1. 역사

파일:왕십리 행정구역 변천도.png
왕십리의 행정구역 변화
(1894~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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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삼국시대 ~ 후삼국시대
{{{#!wiki style="margin-top:-5px;margin-bottom:-11px"
<tablewidth=100%> 475 고구려 북한산군(北漢山郡)
553 신라 신주(新州)
557 북한산주(北漢山州)
568 남천주(南川州)
604 한산정(漢山停)
660 한산주(漢山州)
757 한주 한양군(漢州 漢陽郡) }}}}}}}}}
{{{#!wiki style="margin:-0px -11px -5px"
{{{#!folding 고려시대
{{{#!wiki style="margin-top:-5px;margin-bottom:-11px"
995 관내도 양주목(關內道 楊州牧)
1018 양광도 양주목(楊廣道 楊州牧)
1067 남경(南京)
? 양광도 양주목
1104 남경(南京)
1308 한양부(漢陽府) }}}}}}}}}
{{{#!wiki style="margin:-0px -11px -5px"
{{{#!folding 조선시대
{{{#!wiki style="margin-top:-5px;margin-bottom:-11px"
1395 경기좌도 양주군(京畿左道 楊州郡)
1397 경기좌도 양주부(京畿左道 楊州府)
1413 경기도 양주부(京畿道 楊州府)
1424 한성부(漢城府)
남부 두모방
(南部 豆毛坊)
동부 인창방
(東部 仁昌坊)
1751 신당리계
(神堂里契)
신촌리계
(神村里契)
왕십리계
(往十里契)
? 왕십리1계
(往十里一契)
왕십리2계
(往十里二契)
1895 남서(南署) 두모방 왕십리계
신당리동
(神堂里洞)
무학동
(舞鶴洞)
여계동
(余溪洞)
단지동
(端池洞)
}}}}}}}}}
{{{#!wiki style="margin:-0px -11px -5px"
{{{#!folding 1910년 ~ 1975년
{{{#!wiki style="margin-top:-5px;margin-bottom:-11px"
법정동은 파란색, 행정동은 분홍색
1910. 10. 1. 경기도 경성부 남서 두모방 왕십리계
(京畿道 京城府 南署 豆毛坊 往十里契)
신당리동
(神堂里洞)
무학동
(舞鶴洞)
여계동
(余溪洞)
단지동
(端池洞)
1911. 4. 1. 두모면 인창면(仁昌面) 두모면(豆毛面)
신당리
(新堂里)
무학리
(舞鶴里)
왕십상리
(往十上里)
왕십하리
(往十下里)
단지리
(端池里)
1914. 4. 1.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京畿道 高陽郡 漢芝面)
신당리 하왕십리 상왕십리
(上往十里)
하왕십리
(下往十里)
1936. 4. 1. 경기도 경성부
신당정
(新堂町)
상왕십리정
(上往十里町)
하왕십리정
(上往十里町)
1943. 6. 10. 경기도 경성부 성동구(京畿道 京城府 城東區)
신당정 상왕십리정 하왕십리정
1946. 10. 9. 서울특별자유시 성동구
(서울特別自由市 城東區)
신당동
(新堂洞)
상왕십리동
(上往十里洞)
하왕십리동
(下往十里洞)
1947. 6. 황학동
(黃鶴洞)
동무학동
(東舞鶴洞)
서무학동
(西舞鶴洞)
북무학동
(北舞鶴洞)
중무학동
(中舞鶴洞)
남무학동
(南舞鶴洞)
용곡동
(龍谷洞)
앵구남동
(櫻丘南洞)
앵구중동
(櫻丘中洞)
앵구문화동
(櫻丘文化洞)
앵구생구동
(櫻丘生驅洞)
앵구유락동
(櫻丘有樂洞)
앵구행동
(櫻丘幸洞)
상왕십리서부동
(上往十里西部洞)
상왕십리동부동
(上往十里東部洞)
하왕십리서부동
(下往十里西部洞)
하왕십리중부동
(下往十里中部洞)
하왕십리동부동
(下往十里東部洞)
1949. 6. 동학동
(東鶴洞)
서학동
(西鶴洞)
북학동
(北鶴洞)
흥인동
(興仁洞)
충현동
(忠峴洞)
약수동
(藥水洞)
청구동
(靑丘洞)
동화동
(東化洞)
유락동
(有樂洞)
문화동
(文化洞)
1949. 8. 15. 서울특별시 성동구
(서울特別市 城東區)
1955. 4. 18. 황학동 무학1동
(舞鶴一洞)
무학2동
(舞鶴二洞)
흥인동 충현동 약수동 청구동 동화동 유락동 문화동 율원동
(栗苑洞)
무학봉동
(舞鶴峰洞)
상왕십리2동
(上往十里二洞)
상왕십리1동
(上往十里一洞)
하왕십리3동
(下往十里三洞)
하왕십리2동
(下往十里二洞)
하왕십리1동
(下往十里一洞)
1959. 10. 31. 현인동
(賢仁洞)
인창동
(仁昌洞)
당현동
(堂峴洞)
홍익동
(弘益洞)
도선동
(道詵洞)
1964. 9. 28. 신당동 상왕십리동 하왕십리동 홍익동 도선동
황학동 무학1동 무학2동 흥인동 충현동 약수동 청구동 동화동 유락동 문화동 율원동 무학봉동 현인동 인창동 하왕십리1동 홍익동 도선동 하왕십리2동
1966. 1. 6. 황학동 무학동
(舞鶴洞)
흥인동 신당동 상왕십리동 하왕십리동 홍익동 도선동
황학동 무학동 흥인동 충현동 약수동 청구동 동화동 유락동 문화동 율원동 무학봉동 현인동 인창동 하왕십리1동 홍익동 도선동 하왕십리2동
1970. 5. 5. 신당8동
(新堂八洞)
신당1동
(新堂一洞)
신당2동
(新堂二洞)
신당3동
(新堂三洞)
신당4동
(新堂四洞)
신당6동
(新堂六洞)
신당7동
(新堂七洞)
신당5동
(新堂五洞)
하왕십리1동 도선동 하왕십리2동
1975. 10. 1. 중구(中區) 성동구
황학동 무학동 흥인동 신당동 황학동 상왕십리동 하왕십리동 홍익동 도선동
신당8동 신당1동 신당2동 신당3동 신당4동 신당6동 신당7동 신당5동 신당8동 하왕십리1동 도선동 하왕십리2동
}}}}}}}}}
{{{#!wiki style="margin:-0px -11px -5px"
{{{#!folding 1975년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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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동은 파란색, 행정동은 분홍색
1975. 10. 1. 상왕십리동 하왕십리동 홍익동 도선동
하왕십리1동 도선동 하왕십리2동
1977. 9. 1. 상왕십리동 하왕십리동 홍익동 도선동 하왕십리동
하왕십리1동 도선동 하왕십리2동
1985. 9. 1. 왕십리1동
(往十里一洞)
왕십리2동
(往十里二洞)
2008. 8. 11. 왕십리도선동
(往十里道詵洞)
}}}}}}}}}
현대의 왕십리라고 이르는 지역은 본래 하왕십리(下往十里)라고 부르던 지역이고, 조선시대에는 한양도성에서 광희문을 나오면 거기서부터를 왕십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당동이 분리되었고[8], 1975년난계로 이서 지역이 중구 황학동과 신당동에 편입되면서 영역이 상당히 많이 축소되었다. 이로써 과거 상왕십리라고 부르던 지역은 대부분 중구로 넘어갔고, 과거 상왕십리의 일부만이 성동구 관내에 남아 있게 되었으며, 현재의 왕십리는 대부분 과거 하왕십리에 속하던 지역에 국한하게 되었다.

5.1.1. 전근대

995년(고려 성종 14년), 전국에 12(牧) 양주목(楊州牧)에 속했다가, 1067년(문종 21년)에 남경(南京)이 설치될 때 이에 속했다. 그 이후 쭉 남경에 속해 있다가 조선이 개국한 이후인 1395년, 한양으로 천도를 단행하면서 사대문안한성부로 정하고 그 외 지역은 경기좌도 양주군에 속하게 했는데, 왕십리도 이때 양주군에 속했다.

그러나 1424년(세종 6년), 한성부의 인구가 점차 늘어나고, 공신들에게 지급할 땅을 나누어 주기 위해 흥인지문광희문 바깥 지역을 한성부 동부와 남부에 편입하게 되었다. 이때 동부 성외 지역은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으로 나누어 관할하게 하였는데, 왕십리는 지금의 마장동, 사근동과 함께 동부 인창방에 속하게 되었고, 현재 성동구의 나머지 지역들은 남부 두모방(豆毛坊)에 속했다.

1751년(영조 27년)에는 동부 인창방 왕십리계(往十里契)에 속하였고, 고종 초에 잠시 왕십리1계와 왕십리2계로 나누어졌다가, 1894년 갑오개혁을 단행하며 다시 왕십리계가 되었다. 이때, 지금의 황학동, 흥인동, 신당동 일대가 모두 왕십리계에 편입되었고, 왕십리계는 동부 인창방에서 남부 두모방으로 잠시 옮겨진 듯하다.

5.1.2. 일제강점기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10월 1일한성부경기도 경성부로 개편될 때 이에 속했고, 이듬해인 1911년 4월 1일에는 기존 행정구역이었던 계(契)가 폐지됨에 따라 왕십리계도 폐지되었고, 왕십상리(往十上里), 왕십하리(往十下里), 무학리(舞鶴里), 단지리(端池里), 신당리(新堂里)로 나누어졌다. 이와 동시에 경성부 성외의 지역은 방(坊)에서 으로 개편하게 되면서 행정구역 경계가 조정되어, 왕십상리는 인창면에, 나머지 지역은 모두 두모면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4월 1일에는 부군면 통합으로 인해 경성부에서 고양군으로 이관됨과 동시에 두모면이 폐지되었고, 왕십리 전역이 마장동, 사근동, 행당동, 금호동, 옥수동과 함께 기존에 용산구 한남동, 이태원동, 서빙고동, 보광동 일대를 관할하던 한지면(漢芝面)에 편입되었다. 또한 왕십상리와 왕십하리는 각각 상왕십리와 하왕십리로 개칭되었고, 무학리와 단지리가 하왕십리에 통합되었다.

1936년 4월 1일에는 다시 경성부에 편입되어 상왕십리정(上往十里町), 하왕십리정(下往十里町)이 되었다. 기존에 하왕십리에 속하던 옛 무학리 일대가 이 무렵에 상왕십리정에 포함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현재 신당파인힐하나유보라아파트 자리에 있던 배명고등학교1940년에 옛 무학리 자리에 개교할 때에 상왕십리 783번지라는 주소를 썼던 것으로 확인된다. 1943년 6월 10일부로 구제(區制)가 실시될 때 성동구에 속하게 되었다.

5.1.3. 현대

해방 이후인 1947년 6월에는 지금의 행정동 제도의 전신인 동회(洞會) 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상왕십리동에는 상왕십리서부동회(上往十里西部洞會)와 상왕십리동부동회(上往十里東部洞會)의 2개 동회가, 하왕십리동에는 하왕십리서부동회(下往十里西部洞會), 하왕십리중부동회(下往十里中部洞會), 하왕십리동부동회(下往十里東部洞會), 3개 동회가 설치되었다.

1955년 4월 18일에는 동회 제도가 폐지되고 지금의 행정동 제도로 전환되며 상왕십리동부동은 상왕십리1동, 상왕십리서부동은 상왕십리2동, 하왕십리서부동은 하왕십리1동, 하왕십리중부동은 하왕십리2동, 하왕십리동부동은 하왕십리3동으로 개편되었으며, 정확한 기록은 불명이지만, 1958년에 작성된 지번입서울특별시가지도에 따르면 옛 무학리 일대에 무학봉동이라는 행정동이 이 무렵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필이면 무학봉동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현 신당역 사거리 일대에 무학동이라는 행정동이 또 존재해서 같은 지역이 아닌가 싶지만, 지번입서울특별시가지도에서는 무학봉 북쪽에 무학봉동(舞鶴峰洞)으로 기재되어 있다. 서울지명사전에서도 두 지역을 혼동해서 같은 지역으로 적어 두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하왕십리동의 월경지로 오해하게 되어 있지만, 무학동은 신당역 일대, 무학봉동은 성동고교 사거리 동남쪽으로 따로 떨어져 있는 별개의 행정구역이었다.

1959년 10월 31일에는 상왕십리1동이 인창동(仁昌洞)으로, 상왕십리2동이 현인동(賢仁洞)으로, 하왕십리1동이 도선동(道詵洞)으로, 하왕십리2동이 홍익동(弘益洞)으로, 하왕십리3동이 당현동(堂峴洞)으로 변경되었다. 인창동은 옛 인창방에서 따온 것이고, 현인동 또한 거기서 따온 지명이다. 도선동은 왕십리 전설에서 나오는 도선대사의 법명에서 따온 것이고, 홍익동은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에서 따왔다고 한다. 유일하게 당현동만 자연지명을 따왔는데, 지금의 청계벽산아파트에 있던 고개에 무당집이 많이 있어서 예로부터 당고개라 부르던 것을 동명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옛날 도성에서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광희문으로 빼냈는데, 이로 인해 광희문은 시구문(시체가 나오는 문)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광희문 밖으로 나오면 금호동 공동묘지로 가게 되어 있는데, 그 전에 왕십리 일대에서 넋을 달래는 굿을 먼저 하고 망자를 떠나 보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예로부터 이 일대이 무당집이나 신당이 많았고, 인근의 신당동[9]이나, 행당동[10]도 이런 이유로 지명이 생겼다.

1964년 9월 28일에는 법정동 도선동과 홍익동이 하왕십리동에서 분리되었다. 이로써 하왕십리동을 관할하는 법정동이 당현동 밖에 남지 않게 되어 당현동을 하왕십리1동으로 개칭하고, 법정동 도선동의 일부 지역을 행정동 도선동에서 분리시켜 하왕십리2동을 설치했다. 1959년 이전의 하왕십리1, 2동과는 명칭만 같을 뿐 전혀 다른 구역이다. 1970년 5월 5일에는 행정동 도선동과 홍익동이 도선동으로 통합되어 행정동 도선동이 법정동 도선동과 홍익동을 모두 관할하게 되었다.

1975년 10월 1일 자로 중구와 성동구가 난계로무학봉을 기준으로 행정구역 경계를 조정하면서 황학동, 흥인동, 무학동, 신당동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무학봉동 일대는 신당동 동북쪽 일부를 관할하던 행정동 율원동(栗苑洞)에 편입되었고, 현인동은 전역이 황학동으로, 인창동은 난계로 이서 지역이 황학동에 편입되며 현인동사무소와 인창동사무소가 폐지되었다. 난계로 이동 지역의 인창동 잔여 지역은 하왕십리1동에 편입되었다.

1977년 9월 1일에는 법정동 도선동에서 왕십리로 이남 지역이 하왕십리동으로 편입되었고, 1985년 9월 1일에 하왕십리1동, 하왕십리2동이 각각 왕십리1동과 왕십리2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이 지역도 도심공동화가 진행됨에 따라 인구가 많이 줄어서 행정동 통합의 필요성이 거론되어 2008년 8월 11일에는 왕십리1동과 도선동이 통합되어 왕십리도선동이 되었다. 최종적으로 왕십리도선동은 왕십리로 이북 전역을, 왕십리2동은 왕십리로 이남 지역을 관할하는 형태가 되었다.

5.2. 행정구역

5.2.1. 법정동

5.2.1.1. 상왕십리동
성동구법정동
상왕십리동

上往十里洞 | Sangwangsimni-dong
<colbgcolor=#009742><colcolor=#fff> 광역자치단체 서울특별시
기초자치단체 성동구
법정동코드 1120010100
소속 행정동 왕십리도선동
면적 0.15㎢
인구 3,666명[A]
인구밀도 24,440명/㎢
행정구역상 왕십리에 속하는 4개의 법정동 중 서쪽 부분에 있는 법정동으로, 행정동 왕십리도선동에서 관할하고 있다. 줄여서 상왕(上往)이라고도 한다.

동쪽은 하왕십리동, 난계로를 경계로 서쪽은 중구 황학동, 남쪽은 왕십리로를 경계로 중구 신당동, 북쪽은 동대문구 신설동에 접한다. 특히 상왕십리동의 서북쪽 경계점인 황학교종로구·중구·성동구·동대문구의 사합점(四合点)이기도 해서, 서북쪽으로는 종로구 숭인동과도 인접해 있다.

면적은 총 0.15㎢로, 본래는 면적이 더 컸으나, 1975년성동구와 중구의 경계를 조정하면서 상당 부분이 황학동과 신당동으로 편입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상왕십리동 영역의 대부분은 텐즈힐2단지아파트와 센트라스아파트가 차지하고 있으며, 센트라스아파트도 단지의 서쪽 일부는 상왕십리동에 걸쳐 있고, 나머지는 하왕십리동과 홍익동에 속한다. 하왕십리동과의 경계가 도로를 따라 나뉜 게 아니라, 과거 경계 그대로 구불구불하게 남았기 때문에 센트라스아파트 상가동은 하왕십리동에 속하거나[12], 경계에 걸쳐 있으며[13], 아파트 동마저도 104, 108, 109동은 경계 위에 어정쩡하게 놓여 있다.

센트라스아파트는 상왕십리동·하왕십리동·홍익동의 3개 법정동에 걸쳐 있지만, 단지 전체가 하왕십리동 1070로 단일 지번을 쓰고 있기 때문에 경계가 걸쳐 있더라도 딱히 큰 문제는 아니다.[14] 또한 인구 집계를 할 때에도 센트라스아파트 단지에서 상왕십리동에 걸쳐 있는 101~103·105~106·110·127~128·상가 I·J동은 상왕십리동의 인구로 집계되지 않고 하왕십리동의 인구로 집계된다. 실제로 상왕십리동 지번을 쓰는 아파트 단지는 텐즈힐2단지가 유일하며, 상왕십리동 인구를 집계할 때에도 텐즈힐2단지에 살고 있는 인구만 집계된다.

조선시대에는 상왕십리와 하왕십리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한성부 동부(東部) 인창방(仁昌坊) 왕십리계(往十里契)에 속하게 하게 하였는데, 고종 재위기에 기존 왕십리계를 왕십리1계와 왕십리2계로 나누었다. 이 중 왕십리1계는 상왕십리동의 전신에 해당한다. 이 왕십리1계와 왕십리2계는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왕십리계로 통합되었으며, 왕십리계는 이때 동부 인창방에서 남서(南署) 두모방(豆毛坊)에 편입되었다.

경술국치 이후인 1911년조선총독부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옛 왕십리1계 지역을 왕십상리(往十上里), 옛 왕십리2계 지역을 왕십하리(往十下里)로 정하며 다시 둘로 나뉘었다. 왕십리가 남북이 아닌 동서로 나뉘었는데 상하로 구분된 까닭은 동아시아에서 예로부터 동서남북에 관계 없이 수도를 위, 지방을 아래라고 불렀던 관습이 적용된 것이다. 흔히 서울에 갈 때는 '서울로 올라간다', 혹은 '상경(上京)'이라는 표현을 쓰고, 지방으로 갈 때는 '지방으로 내려간다' 혹은 '하방(下方)'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왕십리를 둘로 나누었을 때 사대문 안에 더 가까운 지역을 왕십상리, 더 먼 지역을 왕십하리로 명명한 것이다.

동시에 왕십상리는 인창면(옛 동부 인창방)으로 이관, 왕십하리는 두모면(옛 남부 두모방)에 남으면서 두 지역이 다른 면(面)으로 갈라졌다. 1914년 4월 11일 행정구역 개편 당시에는 왕십상리가 상왕십리로, 왕십하리가 하왕십리로 개칭되면서 상왕십리와 하왕십리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1911년에 인창면으로 이관되었던 상왕십리 지역은 옛 두모면 지역인 한지면(漢芝面)으로 이관되었고, 동시에 옛 한성부 성저십리 지역은 구용산신용산 일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경성부에서 고양군으로 이관함에 따라 고양군에 속하였다.

1936년에 경성부로 재편입되면서 상왕십리정(上往十里町)이 되었고, 이와 동시에 그 전까지 하왕십리에 속하였던 옛 무학리 지역이 상왕십리정으로 편입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동제(洞制)가 시행됨에 따라 상왕십리동이 되었고, 이 당시에는 지금의 황학동의 동쪽 지역과 하왕십리에서 편입한 무학봉 북쪽의 옛 무학리 지역이 상왕십리동에 속하였다. 1947년 6월에 지금의 행정동 제도의 전신인 동회(洞會) 제도가 시행되며 상왕십리동부동회(上往十里東部洞會)·상왕십리서부동회(上往十里西部洞會)의 2개 동회가 설치되었다.

1955년 4월 18일부로 동회 제도가 폐지되고 행정동 제도가 시행되면서 상왕십리동부동회는 상왕십리1동으로, 상왕십리서부동회는 상왕십리2동으로 바뀌었는데, 1958년에 작성된 지번입서울특별시가지도에 따르면 옛 무학리 지역에 무학봉동(舞鶴峰洞)이라는 표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1955년 행정동 제도 시행 당시에 행정동 무학봉동이 신설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당시 상왕십리동에는 총 3개의 행정동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1959년 10월 31일에는 상왕십리1동이 인창동(仁昌洞)으로, 상왕십리2동이 현인동(賢仁洞)으로 개칭되었다.

1975년 10월 1일부로 난계로·왕십리로·무학봉을 기준으로 성동구와 중구의 경계가 조정되면서 인창동 일부 지역과 현인동 전체 지역이 황학동으로, 무학봉동이 편입되었고, 상왕십리동 지역에는 인창동의 일부 지역만 남게 됨에 따라 인창동은 행정동 하왕십리1동으로 통합되었다. 상왕십리동은 하왕십리동 일부 지역과 함께 하왕십리1동의 관할 구역이 되었고, 하왕십리1동은 1985년 9월 1일에 왕십리1동으로 개칭되었으며, 도심 공동화로 인해 인구가 현저히 줄어듦에 따라 2008년 8월 11일부로 도선동과 통합되어 왕십리도선동이 되었다. 따라서 현재 상왕십리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은 왕십리도선동이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노후된 다세대 주택이 많은 곳이었으나, 2002년에 상왕십리동 전체와 하왕십리동·홍익동 일부 지역이 뉴타운 시범사업 지구로 지정되어 왕십리뉴타운으로 재개발되었다. 2011년에 공사에 착수하여 2017년에 모든 구역의 입주가 끝나 구역 해제가 되었으며, 현재 상왕십리동은 왕십리뉴타운의 일부 지역으로서, 동역 전체가 아파트 단지에 속하고 있다.

이 지역은 대체로 교통편은 하왕십리동에 속한 상왕십리역을 이용하는 편이나, 위치에 따라서는 신당역에 조금 더 근소하게 가까운 곳도 있으므로, 상왕십리동은 신당역 생활권으로도 볼 수 있는 곳이다. 텐즈힐2단지 쪽은 신설동역이 도보로 15분 내외의 거리에 있으며, 2호선이 아니라 1호선이나 우이신설선을 이용하는 경우에는 2호선을 타고 시청역에 가서 갈아타는 것보다는 걸어가서 신설동역에서 타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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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2. 하왕십리동
성동구법정동
하왕십리동

下往十里洞 | Hawangsimni-dong
<colbgcolor=#009742><colcolor=#fff> 광역자치단체 서울특별시
기초자치단체 성동구
법정동코드 1120010200
소속 행정동 왕십리도선동·왕십리2동
면적 0.62㎢
인구 30,833명[A]
인구밀도 49,730.65명/㎢
행정구역상 왕십리에 속하는 4개의 법정동 중 중간 부분과 남쪽 부분을 차지하는 법정동으로, 왕십리로 이북은 행정동 왕십리도선동이, 왕십리로 이남은 행정동 왕십리2동이 관할하고 있다. 줄여서 하왕(下往)이라고도 한다.

동쪽은 홍익동·도선동, 서쪽은 상왕십리동중구 신당동, 남쪽은 금호동1가·행당동, 북쪽은 청계천을 경계로 동대문구 용두동에 접한다. 단지 대부분이 하왕십리동에 속하는 청계벽산아파트의 일부 대지가 홍익동에 걸쳐 있는데, 이 대지는 홍익동의 실질월경지라서, 실질적으로는 하왕십리동의 북동쪽 지역은 마장동과 접하고 있기도 하다.

면적은 0.62㎢로, 왕십리에 속하는 4개의 법정동 중 면적이 가장 넓고, 인구가 가장 많다. 왕십리로 이북 지역은 모두 왕십리뉴타운으로 재개발되어 현재 센트라스아파트와 텐즈힐1단지가 있는 곳이다. 왕십리2동 관할 구역인 왕십리로 이남 지역은 다세대주택이 많은 곳이지만, 1989년에 완공된 한신무학아파트와 1996년에 완공된 무학현대아파트를 시작으로, 2000년대 들어 재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다.

특히 왕십리로 이남은 행당2동과 인접하여 있는 곳인데, 성동구에서 가장 큰 규모의 대단지 아파트인 행당대림아파트가 완공된 이후, 그 인근 지역으로서 덩달아 재개발이 촉진된 면이 있다. 다만 하왕십리동 전체로 보면, 왕십리로 이남에 무학봉이 있어, 실질적으로는 무학봉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생활권이 거의 단절되어 있으며, 무학봉 이북은 상왕십리역 생활권, 무학봉 이남은 행당2동과 같이 행당역 생활권에 속한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왕십리로 이남 지역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왕십리 문서
번 문단을
왕십리2동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조선시대에는 상왕십리와 하왕십리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한성부 동부(東部) 인창방(仁昌坊) 왕십리계(往十里契)에 속하게 하게 하였으며, 이에 속한 자연부락으로는 무학동·당현동·단지동 등이 있었다. 고종 재위기에 기존 왕십리계를 왕십리1계와 왕십리2계로 나누었는데, 이 중 왕십리2계는 하왕십리동의 전신에 해당한다. 이 왕십리1계와 왕십리2계는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왕십리계로 통합되었으며, 왕십리계는 이때 동부 인창방에서 남서(南署) 두모방(豆毛坊)에 편입되었다.

경술국치 이후인 1911년조선총독부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옛 왕십리1계 지역을 왕십상리(往十上里), 옛 왕십리2계 지역을 왕십하리(往十下里)로 정하며 다시 둘로 나뉘었다. 왕십리가 남북이 아닌 동서로 나뉘었는데 상하로 구분된 까닭은 동아시아에서 예로부터 동서남북에 관계 없이 수도를 위, 지방을 아래라고 불렀던 관습이 적용된 것이다. 흔히 서울에 갈 때는 '서울로 올라간다', 혹은 '상경(上京)'이라는 표현을 쓰고, 지방으로 갈 때는 '지방으로 내려간다' 혹은 '하방(下方)'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왕십리를 둘로 나누었을 때 사대문 안에 더 가까운 지역을 왕십상리, 더 먼 지역을 왕십하리로 명명한 것이다.

동시에 왕십상리는 인창면(옛 동부 인창방)으로 이관, 왕십하리는 두모면(옛 남부 두모방)에 남으면서 두 지역이 다른 면(面)으로 갈라졌다. 1914년 4월 11일 행정구역 개편 당시에는 왕십하리가 속하였던 두모면이 한지면(漢芝面)으로 개편되고, 옛 한성부 성저십리 지역은 구용산신용산 일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경성부에서 고양군으로 이관함에 따라 고양군에 속하였다. 동시에 왕십상리가 상왕십리로, 왕십하리가 하왕십리로 개칭되면서 상왕십리와 하왕십리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또한 상왕십리가 한지면으로 이관되면서 상왕십리와 하왕십리는 다시 같은 면에 소속되었다.

1936년에 경성부로 재편입되면서 하왕십리정(下往十里町)이 되었고, 이와 동시에 그 전까지 하왕십리에 속하였던 옛 무학리 지역이 상왕십리정으로 편입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동제(洞制)가 시행됨에 따라 하왕십리동이 되었다. 1947년 6월에 지금의 행정동 제도의 전신인 동회(洞會) 제도가 시행되며 하왕십리동부동회(下往十里東部洞會)·하왕십리중부동회(上往十里中部洞會)·하왕십리서부동회(上往十里西部洞會)의 3개 동회가 설치되었다.

1955년 4월 18일부로 동회 제도가 폐지되고 행정동 제도가 시행되면서 하왕십리동부동회는 하왕십리1동[하왕십리1동]으로, 하왕십리중부동회는 하왕십리2동으로, 하왕십리서부동회는 하왕십리3동으로 바뀌었다. 1959년 10월 31일에는 하왕십리1동이 도선동(道詵洞)으로, 하왕십리2동이 홍익동(弘益洞)으로, 하왕십리3동이 당현동(堂峴洞)으로 개칭되었다.

1964년 9월 28일에는 하왕십리동의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홍익동도선동을 법정동 하왕십리동에서 분리하여 새로운 법정동으로 신설하였고, 행정동 당현동은 하왕십리1동으로 개칭되었다. 동시에 행정동 도선동에서 관할하던 왕십리로 이남 지역은 하왕십리2동으로 분동되어 법정동 하왕십리동의 왕십리로 이남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1975년 10월 1일에는 성동구와 중구의 경계 조정으로 인해 상왕십리동의 대부분이 중구 황학동과 신당동으로 편입되면서 기존 상왕십리동을 관할하던 행정동 인창동의 관할 구역이 일부만 남게 됨에 따라 인창동을 하왕십리1동으로 통합하여 하왕십리1동이 상왕십리동 전체와 하왕십리동 일부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1985년 9월 1일에는 하왕십리1동이 왕십리1동으로, 하왕십리2동이 왕십리2동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도심 공동화로 인해 인구가 현저히 줄어들어 왕십리1동은 2008년 8월 11일부로 행정동 도선동과 통합하여 왕십리도선동으로 개편되었다. 따라서 현재 하왕십리동을 관할하고 있는 행정동은 왕십리도선동과 왕십리2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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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3. 홍익동
성동구법정동
홍익동

弘益洞 | Hongik-dong
<colbgcolor=#009742><colcolor=#fff> 광역자치단체 서울특별시
기초자치단체 성동구
법정동코드 1120010300
소속 행정동 왕십리도선동
면적 0.17㎢
인구 3,143명[A]
인구밀도 18,488.24명/㎢
행정구역상 왕십리에 속하는 4개의 법정동 중 동북쪽 부분에 있는 법정동으로, 행정동 왕십리도선동에서 관할하고 있다.

동쪽은 마장동·행당동, 서쪽은 하왕십리동, 남쪽은 하왕십리동·도선동, 북쪽은 청계천을 경계로 동대문구 용두동과 접한다. 용두동과 접하는 부분은 하왕십리동과 마장동 사이로 생긴 홍익동의 땅거스러미로, 실질적으로는 용두동과 거의 접하지 않으며, 동역(洞域)의 대부분은 청계벽산아파트 이남 지역이다.

또한 왕십리뉴타운의 텐즈힐1단지와 센트라스아파트 단지의 일부가 홍익동에 걸쳐 있는데, 이는 왕십리뉴타운 완공 이후에도 하왕십리동과의 경계가 아직 직선으로 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텐즈힐1단지 101동과 센트라스아파트 116·117·130동이 홍익동에 속하며, 텐즈힐1단지 102동과 센트라스아파트 115·118·상가 L동은 하왕십리동과 홍익동의 경계에 걸쳐 있다. 다만 아파트 단지는 단일 지번를 사용하기 때문에 경계가 걸쳐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 하왕십리동 주소를 쓰며, 인구 조사에도 텐즈힐1단지와 센트라스아파트 단지 중 홍익동에 걸쳐 있는 영역은 하왕십리동의 인구로 반영된다.[18]

본래 이곳은 도선동과 함께 법정동 하왕십리동에 속하던 곳이었다. 1947년 6월에 지금의 행정동 제도의 전신인 동회(洞會) 제도를 시행할 때, 하왕십리중부동회(下往十里中部洞會)가 지금의 법정동 홍익동 지역을 관할하는 동회로 신설되었고, 1955년 4월 18일부로 동회 제도가 폐지되고 행정동 제도가 시행됨에 따라, 하왕십리중부동회는 하왕십리2동[하왕십리2동]으로 바뀌었다. 하왕십리2동은 1959년 10월 31일에 홍익동으로 개칭되었으며, 이는 단군왕검이 세운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에서 따서 제정한 것이라고 한다.

1964년 9월 28일에는 행정동 홍익동 관할 구역이 신규 법정동으로 신설되면서 하왕십리동에서 완전히 분리되었다. 1970년 5월 5일에는 도심 공동화로 인해 인구가 줄어듦에 따라 행정동 홍익동이 행정동 도선동으로 통합되었고, 2008년 8월 11일부로 행정동 도선동이 왕십리1동과 통합되어 왕십리도선동이 신설되었다. 따라서 현재 홍익동을 관할하고 있는 행정동은 왕십리도선동이다.

큰 도로와 역세권에서는 조금 비껴나 있는 위치이기 때문에 유동인구가 많지 않고, 대부분 빌라나 다세대주택 등으로 구성된 주택가이다. 또한 면적이 작고, 남쪽에 있는 도선동과는 따로 구분될 만한 지리적인 장애물이나 폭이 넓은 도로가 없이 골목길을 따라 경계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거의 한 동네를 이루고 있다. 관내에는 성동구보건소와 서울특별시립동노인전문요양센터, 서울특별시립동부데이케어센터가 있으며, 한국기원이 이곳에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많은 연예인들을 배출한 한국예술고등학교가 홍익동 150번지에 있었으나, 2019년에 폐교하면서 현재는 폐건물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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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4. 도선동
성동구법정동
도선동

道詵洞 | Doseon-dong
<colbgcolor=#009742><colcolor=#fff> 광역자치단체 서울특별시
기초자치단체 성동구
법정동코드 1120010400
소속 행정동 왕십리도선동
면적 0.14㎢
인구 4,700명[A]
인구밀도 33,571.43명/㎢
행정구역상 왕십리에 속하는 4개의 법정동 중 동쪽 부분에 있는 법정동으로, 행정동 왕십리도선동에서 관할하고 있다.동쪽은 고산자로를 경계로 행당동, 서쪽과 북쪽은 홍익동, 남쪽은 왕십리로를 경계로 하왕십리동 접하고 있다.

면적은 총 0.14㎢로, 성동구에 속하는 법정동 중에서는 면적이 가장 작다. 이곳은 왕십리역상왕십리역의 사이에 있고, 왕십리로와 고산자로를 끼고 있다는 지리적 이점으로 오래 전부터 왕십리 동부 상권을 이루고 있었으며, 2000년대부터는 왕십리로를 따라 오피스 빌딩과 오피스텔 등이 들어서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큰 도로변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빌라, 다세대주택, 원룸 등으로 구성된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다.

본래 이 지역은 단지동(端池洞), 혹은 끝못골이라고 부르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십리계에 속하다가, 1911년 4월 11일경기도 경성부 두모면 단지리가 되었고, 1914년에 경성부에서 고양군 한지면으로 이관될 때부터는 하왕십리에 속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법정동 하왕십리동에 속하였으며, 1947년 6월에 지금의 행정동 제도의 전신인 동회(洞會) 제도를 시행할 때, 하왕십리동부동회(下往十里東部洞會)가 지금의 법정동 도선동과 행정동 왕십리2동 지역을 관할하는 동회로 신설되었다. 1955년 4월 18일부로 동회 제도가 폐지되고 행정동 제도가 시행됨에 따라, 하왕십리동부동회는 하왕십리1동[하왕십리1동]으로 바뀌었다.

하왕십리1동은 1959년 10월 31일에 도선동으로 개칭되었는데, 이는 예로부터 이 일대에 전해져 내려오는 도선대사에 대한 두 가지 설을 따른 것이다. 하나는 도선대사가 생전에 이 일대에 있는 무학봉에서 도를 닦았다는 전설을 따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 건국 이후에 새로운 도읍지로 삼을 만한 곳을 찾으라는 태조의 명을 받은 무학대사가 지금의 왕십리를 지나고 있을 때, 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인이 "야, 이 무학 같이 미련한 소야!"라고 호통을 쳤는데, 그걸 들은 무학대사가 노인이 범상치 않음을 알고, 노인에게 도읍이 될 만한 곳을 아느냐 물었더니, 북서쪽으로 십 리를 더 가 보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하는 이야기에서 노인이 바로 신라 말 비기도참설(秘記圖讖說)을 주장한 도선대사의 화신(化身)이었다는 전설을 따른 것이다.

1964년 9월 28일에는 행정동 도선동 관할 구역 중 왕십리로 이북의 일부 지역이 신규 법정동으로 신설되면서 하왕십리동에서 분리되었고, 법정동 도선동에 속하지 않은 기존 행정동 도선동 관할 구역 중 왕십리로 이남 지역은 행정동 하왕십리2동으로 분리되었다. 1970년 5월 5일에는 도심 공동화로 인해 인구가 줄어듦에 따라 행정동 홍익동이 행정동 도선동으로 통합되었고, 1977년 9월 1일에는 법정동 하왕십리동의 일부 지역이 법정동 도선동으로 편입되었다.

2008년 8월 11일에는 행정동 도선동이 법정동 상왕십리동 및 법정동 하왕십리동 중 왕십리로 이북 지역을 관할하던 행정동 왕십리1동과 통합되어 왕십리도선동이 신설되었다. 따라서 현재 도선동을 관할하고 있는 행정동은 왕십리도선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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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 행정동

5.2.2.1. 왕십리도선동
성동구행정동
왕십리도선동

往十里道詵洞 | Wangsimnidoseon-dong
<colbgcolor=#009742><colcolor=#fff> 광역자치단체 서울특별시
기초자치단체 성동구
행정표준코드 3030117
관할 법정동 상왕십리동·홍익동·도선동
하왕십리동(일부)
하위 행정구역 36통 266반
면적 0.72㎢
인구 26,198명[B]
인구밀도 36,386.11명/㎢
정치 {{{#!wiki style="margin:-0px -11px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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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센터 마장로 141 (상왕십리동 813)
왕십리도선동 주민센터
행정구역상 왕십리를 관할하는 2개의 행정동 중 왕십리로 이북 지역을 관할하는 행정동으로, 법정동 상왕십리동·홍익동·도선동 전체와 하왕십리동의 왕십리로 이북 지역을 관할하고 있다. 면적은 총 0.72㎢로, 관할 구역의 절반 정도는 왕십리뉴타운을 비롯한 아파트 단지가 차지하고 있고, 다른 절반 정도는 다세대주택·원룸·오피스텔 등의 주택가로 이루어져 있다.

1947년 6월에 지금의 행정동 제도의 전신인 동회(洞會) 제도를 시행할 때, 이 지역에는 상왕십리동부동회(上往十里東部洞會)·하왕십리동부동회(下往十里東部洞會)·하왕십리중부동회(上往十里中部洞會)·하왕십리서부동회(上往十里西部洞會)의 4개 동회가 설치되었는데, 이 중 하왕십리동부동회는 지금의 왕십리2동 지역까지 관할하였다. 1955년 4월 18일부로 동회 제도가 폐지되고 행정동 제도를 시행하면서 상왕십리1동·하왕십리1동[하왕십리1동]·하왕십리2동[하왕십리2동]·하왕십리3동으로 바뀌었으며, 1959년 10월 31일에는 인창동(仁昌洞)·도선동(道詵洞)·홍익동(弘益洞)·당현동(堂峴洞)으로 개칭되었다.

1964년 9월 28일에는 행정동 홍익동·도선동 관할 구역이 법정동 하왕십리동에서 분리되어 2개의 법정동이 신설되었고, 이때 당현동이 하왕십리1동으로 개칭되었으며, 행정동 도선동의 관할 구역 중 왕십리로 이남 지역은 하왕십리2동으로 분동되었다. 1970년 5월 5일에는 행정동 홍익동과 도선동이 통합되어 행정동 도선동이 법정동 홍익동과 도선동을 관할하게 되었고, 1975년 10월 1일에는 성동구와 중구의 경계 조정으로 인해 상왕십리동의 상당 부분이 중구 황학동신당동으로 편입하면서 상왕십리동의 일부 지역을 관할하던 행정동 인창동을 하왕십리1동(舊 당현동)에 통폐합하였다. 1985년 9월 1일에는 하왕십리1동이 왕십리1동으로 개칭되었으며, 이후 도심 공동화로 인해 인구가 현저히 줄어듦에 따라 2008년 8월 11일부로 왕십리1동과 행정동 도선동을 통합하여 왕십리도선동을 신설하였다.

본래 이 지역은 오래 전에 지어진 다세대주택이나 빌라로 이루어진 주택가와 공장들이 있던 곳이었으나, 1996년재개발을 통해 청계벽산아파트가 지어졌고, 2002년무학로 서쪽 지역이 모두 왕십리뉴타운 구역으로 지정되어 2017년까지 공사가 진행되었다. 왕십리도선동 주민센터는 왕십리뉴타운 재개발 당시, 성동구청기부채납을 하는 형태로 뉴타운과 같이 건립되었으며, 현재 왕십리뉴타운 2구역 텐즈힐아파트 상가에 입주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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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2. 왕십리2동
성동구행정동
왕십리제2동

往十里第二洞 | Wangsimni 2(i)-dong
<colbgcolor=#009742><colcolor=#fff> 광역자치단체 서울특별시
기초자치단체 성동구
행정표준코드 3030041
관할 법정동 하왕십리동(일부)
하위 행정구역 24통 189반
면적 0.41㎢
인구 16,071명[B]
인구밀도 39,197.56명/㎢
정치 {{{#!wiki style="margin:-0px -11px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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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 중구·성동구 갑

파일:zsdkl3gasdg.svg
전현희 (3선)
서울특별시의원 | 제2선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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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경 (초선)
성동구의원 | 나 선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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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연희 (3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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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균 (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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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진 (초선) }}}}}}}}}
주민센터 무학봉15길 7[26]
왕십리제2동 주민센터
행정구역상 왕십리를 관할하는 2개의 행정동 중 왕십리로 이남 지역을 관할하는 행정동으로, 하왕십리동의 왕십리로 이남 지역을 관할하고 있다.

면적은 총 0.41㎢로, 동역(洞域) 한가운데에 있는 무학봉으로 인해 대부분 가파른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은 1950년대 이후 상경민들이 무학봉의 비탈면에 집을 지으면서 형성된 산동네로, 1990년대까지만 해도 오래된 다세대주택빌라로 이루어진 낙후된 곳이었으나, 1980년대부터 조금씩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1989년에는 한신무학아파트가, 1996년에는 무학현대아파트가 완공되었다.

1980년대 말엽부터 인접한 행당동에 대규모 재개발 구역들이 지정되면서 왕십리2동의 무학봉 이남 지역도 뒤따라 재개발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하였다. 이 구역들은 1990년대부터 본격적인 사업 시행에 들어가 2000년대에는 완공을 보게 되었으며, 이때 지어진 아파트 단지들이 왕십리금호베스트빌·왕십리극동미라주·왕십리풍림아이원의 3개 단지이다. 남은 구역들도 2010년대에는 공사에 착수하였고, 2016년에 왕십리KCC스위첸이, 2017년에 왕십리자이가 완공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를 거쳐 현재는 관할 구역의 절반 정도는 아파트 단지들이 차지하고 있다.

1947년 6월에 지금의 행정동 제도의 전신인 동회(洞會) 제도가 시행되면서 지금의 도선동 지역과 함께 하왕십리동부동회(下往十里東部洞會)의 관할 구역이 되었고, 1955년 4월 18일부로 동회 제도가 폐지되고 행정동 제도가 시행됨에 따라 하왕십리1동[하왕십리1동]으로 바뀌었다. 1959년 10월 31일에는 하왕십리1동이 도선동으로 개칭되었다. 1964년 9월 28일에는 법정동 도선동이 하왕십리동에서 분리되었는데, 기존 행정동 도선동 관할 구역 중 왕십리로 이남 지역은 하왕십리동에 남았고, 행정동 도선동에서 분리되어 하왕십리2동이 신설되었다. 하왕십리2동은 1985년 9월 1일에 왕십리2동으로 개칭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왕십리2동은 무학봉을 기준으로 세 개의 생활권으로 나뉘는데, 왕십리로에 면한 무학봉 이북 지역은 상왕십리역 생활권, 무학봉 이남 지역은 인접한 행당2동·금호1가동과 같은 행당역 생활권에 속하고, 행당1동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서울무학초등학교 동쪽 지역은 왕십리역 생활권에 속하며, 행당1동과 함께 행당시장을 동네 상권으로 공유하고 있다.

난계로에 면해 있는 신당현대아파트와 래미안신당하이베르아파트는 왕십리2동의 무학봉 이남 지역과 같은 생활권에 속한다. 왕십리극동미라주나 왕십리풍림아이원 단지에 거주하는 학생들은 금호동1가에 속한 서울금북초등학교로 배정되며, 그 외 지역은 관내에 있는 서울무학초등학교로 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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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지리

북쪽에는 청계천이 있고, 남쪽은 무학봉이 가파른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청계천과 무학봉 사이에 있는 지역은 대체로 평지에 가까운 완만한 구릉지에 해당하는 지형이다. 과거 기록을 보면 무학봉 이북 지역을 일컬어 왕십리평(往十理坪), 또는 왕심평(往尋坪)이라 하였는데, 구릉지이기는 하지만 가파르지 않아 대체로 평지로 여겨진 듯하다. 6.25전쟁 전까지만 해도 이 일대에는 반농반상(半農半商)을 하는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무학봉은 남산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매봉산을 거쳐 북쪽으로 뻗은 끝에 있는 산봉우리로, 무학봉 이남 지역은 가파른 산지에 해당한다.

5.4. 교통

5.4.1. 도로

<rowcolor=#fff> 도로명 주요 경유지
<colbgcolor=#004a8b> 고산자로 <colbgcolor=#fff,#1f2023>성수대교왕십리역 ↔ 도선사거리동대문구청고려대역
난계로 금호동 ↔ 논골사거리 ↔ 성동고교 ↔ 청계8가신설동역
마장로 동대문역사문화공원황학사거리 ↔ 도선사거리마장역
무학로 상왕십리역 ↔ 청계9가 ↔ 용두동사거리 ↔ 안암오거리 ↔ 안암역
무학봉길 전구간 하왕십리동 소속
왕십리로 성동고교왕십리역뚝섬역서울숲역
왕십리는 사대문안강남구, 동북부를 잇는 교차로 역할을 하는 지역이다. 주요 간선 도로들은 왕십리로고산자로가 있는데, 모두 왕십리오거리에서 만나게 된다. 따라서 러시아워에는 왕십리오거리 일대가 상당한 정체를 빚기 일쑤다.

왕십리로가 관내를 동서로 관통하여 지나간다. 왕십리로는 본래 을지로퇴계로가 합류하는 한양공고 앞 사거리가 기점이었으나, 현재는 성동고등학교까지의 구간이 퇴계로에 편입되어 구간이 단축되었다. 왕십리로를 따라서 서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사대문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을지로를 따라 가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나오게 되고, 시청 방면으로 나아가게 되며, 퇴계로를 따라 가면 명동서울역 방면으로 나아가게 된다. 반대로 사대문안에서는 왕십리로를 통해 왕십리오거리로 나와서 강남구, 성수동, 용두동 등지로 분산된다. 왕십리로는 왕십리오거리에서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를 지나 성수동 서울숲까지 이어진다.

왕십리오거리에서 왕십리로와 교차하는 고산자로는 남으로는 응봉교성수대교를 거쳐 언주로에 접속하며 강남으로 이어지는 노선인데, 언주로를 따라 계속 남쪽으로 가다 보면 구룡터널을 지나 분당내곡간도시고속화도로를 타게 된다. 그 도로 끝으로 나오는 곳이 분당이다. 북으로는 동대문구청, 경동시장 등을 지나서 최종적으로는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 서울캠퍼스 앞으로 닿게 되며, 그곳에서 종암로와 접속하여 미아사거리역 방면으로 나아가게 된다.

고산자로는 응봉교에 진입하기 전에 응봉사거리(舊 응봉삼거리)에서 독서당로와 분기한다. 독서당로는 옥수동금호동 지역에서 왕십리역으로 갈 때 사용하는 주요 도로이다. 본래 응봉교가 개통하기 전에는 고산자로에서 곧장 독서당로로 이어져 옥수동, 금호동을 지나 한남동 한남오거리로 이어지게 되어 있었다. 고로, 이 도로를 따라서 쭉 가다 보면 한남오거리로 이어진다.

상왕십리동과 중구 황학동과 경계를 이루는 난계로는 북으로는 신설동역, 남으로는 금호동에 이르러 금호로와 접속하게 된다. 금호로를 따라 남쪽으로 쭉 내려가면 뚝섬로와 교차하는데, 거기서 한남동 방면으로 달리면 드라이브 코스로도 유명한 두무개다리터널이 나오고, 반대로 가면 용비교를 지나 성수동으로 이어진다.

북쪽으로는 청계천을 따라 달리는 청계천로가 있고, 관내에서 마장로무학로 같은 소도로들이 교차한다. 마장로는 왕십리도선동을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로서, 서쪽으로 황학동을 통과하여 신평화시장 앞에서 끝이 나고, 동쪽으로는 마장역을 지나 신답역교차로에서 사가정로로 이어진다. 무학로는 왕십리도선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로서, 남쪽으로는 상왕십리역에서 끝이 나고, 북쪽으로는 안암오거리에서 끝이 난다. 거기서 조금 더 직진해서 올라가면 안암역이 나온다.

5.4.2. 철도

파일:Seoulmetro2_icon.svg
상왕십리역
파일:ITX-청춘 BI.svg 파일:Seoulmetro2_icon.svg 파일:Seoulmetro5_icon.svg 파일:GJLine_icon.svg 파일:SBLine_icon.svg
왕십리역
서울 지하철 2호선왕십리로를 따라 지나간다. 상왕십리역이 하왕십리동 관내에 있고, 신당역, 왕십리역, 한양대역은 행정구역상 왕십리에 속하지는 않지만, 통상적으로 부르는 왕십리의 범위에 속한다.

특히, 인근에 2호선을 비롯하여 5호선, 경의중앙선, 수인분당선이 환승하는 왕십리역은 국내 최초 4개 노선 환승역이다. 또한, 앞으로 서울 경전철 동북선GTX-C가 왕십리역을 거치게 될 예정이다.

5.4.3. 버스

노선 주요 경유지
110A/B <colbgcolor=#fff,#1f2023>국민대길음역고려대역경동시장성동구청(왕십리역)한강진역공덕역홍대입구역서대문구청국민대
121 화계사 ↔ 길음역고려대역청량리역마장역한양대학교성수동서울숲
141 도봉산미아사거리역고려대역동대문구청(용두역) ↔ 성동구청(왕십리역)도산공원염곡동
145 번동신이문역답십리역동대문구청(용두역) ↔ 성동구청(왕십리역)압구정로데오역신사역강남역
148 번동수유역미아사거리역고려대역동대문구청(용두역) ↔ 성동구청(왕십리역)압구정역신사역논현역고속터미널역방배역
241 신내동청량리역 ↔ 용두동사거리 ↔ 상왕십리역행당역한남동논현역
302 상대원동복정역잠실역어린이대공원역왕십리역상왕십리역
421 염곡동강남역한남동이태원역삼각지역서울역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신설동역동대문구청(용두역) ↔ 성동구청(왕십리역)옥수동
463 염곡동역삼역압구정역왕십리역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서울역공덕역대한민국 국회의사당
N62 신월동목동역등촌역홍대입구역시청종각역동대문왕십리역건대입구역면목동
N73 구산동월드컵경기장홍대입구역시청동대문역사문화공원왕십리역건대입구역잠실역거여역복정역
2012 신내동망우역아차산역군자역왕십리역상왕십리역동대문역사문화공원
2013 면목역신답역왕십리역상왕십리역신당역성동공고청계벽산아파트 → 상왕십리역
2014 성수동왕십리역동대문역사문화공원
2015 신내동사가정역답십리역동대문구청(용두역) ↔ 성동구청(왕십리역)동대문역사문화공원
2016 신내동상봉역건대입구역왕십리역한남동이촌동
2222 자양동건대입구역어린이대공원역왕십리역동대문구청(용두역) ↔ 고려대역
4211 염곡동역삼역압구정역옥수동왕십리역한양여대
성동02 마장동현대아파트 → 마장역왕십리역무학여고 → 대현산체육관입구 → 논골사거리 → 행당역 → 금호벽산아파트 → 신금호역 → 금호벽산아파트 → 논골사거리 → 대현산체육관입구 → 응봉역 → 한신아파트 → 응봉사거리 → 무학여고왕십리역마장역 → 마장동현대아파트
성동03-1 신금호역행당역왕십리역 → 성동구청 → 왕십리도선동주민센터 → 왕십리중앙교회서울시설공단도선사거리 → 왕십리역행당역신금호역
성동03-2 왕십리KCC스위첸아파트행당역왕십리역한양대학교
성동08 금호역응봉역성동구청(왕십리역)서울시설공단청계벽산아파트 → 상왕십리역왕십리역응봉역금호역
성동14 응봉역 → 리버그린동아아파트 ↔ 서울숲리버뷰자이아파트 ↔ 왕십리역
6010 왕십리역응봉동금호동옥수동한남동동부이촌동인천국제공항

1권역에서 출발하여 강남구 방면으로 가는 간선버스와 중랑공영차고지에서 출발하는 지선버스 중 상당수는 왕십리역을 거치며, 성동구의 12개 마을버스 노선 중 무려 절반에 가까운 5개 노선이 왕십리역에서 회차하고 있다. 다만 아쉽게 느껴지는 점은 왕십리역 일대가 서울의 주요 교통 거점임에도 불구하고 광역버스경기도 시내버스가 경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5.5. 주거

서울 동북부의 교통 거점으로, 수많은 노선들이 교차하는 왕십리역이 있다는 것이 주거지로서의 큰 장점이며, 서울의 주요 업무지구인 사대문안이나 강남구가 아주 가깝다는 게 또한 장점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성동구 내에서도 한강변에 있는 성수동이나 금호동, 옥수동만큼 주거지로서 각광 받지는 않고 있는데, 이는 왕십리뉴타운와 일부 아파트단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구축 아파트이거나, 다세대주택이기 때문일 것이다.

도선동에는 직장인들을 위한 오피스텔이, 한양대 앞에는 학생들을 위한 원룸이 많다. 왕십리역 6번 출구에서 한대부고 앞까지의 한 블럭이 모두 원룸으로 구성된 지역이다. 그런데 이 일대는 먹자골목을 끼고 있기 때문에 심야시간대에도 매우 시끄러운 편이라 살기에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 심지어 대학생들이 그렇게 싸게 들어갈 수 있는 곳들도 아닌데다 시설도 오피스텔에 비하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가깝다는 메리트가 있어서 많이들 찾는 곳이다. 때문에 이 일대의 원룸 임대업자들은 월세 담합과 한양대 기숙사 건립 반대를 일삼고 있으며, 가게 점주들은 가격인상을 통해 대학생들의 자산을 즐겁게 탐닉하고 있다.

5.5.1. 공동주택

주택명 건설 입주일자 동수 세대수
홍익한신 파일:한신공영 로고_좌우.svg 1975. 6. 24. 3 95
한신무학 파일:한신공영 로고_좌우.svg 1989. 3. 30. 5 480
무학현대 파일:현대 심볼.svg 1996. 3. 15. 3 277
청계벽산 파일:벽산건설 로고(1991-2006).svg 1996. 06. 07. 7 822
한진해모로[28] 파일:한진 심볼.png 2001. 6. 18. 4 362
왕십리금호베스트빌 파일:금호아시아나 심볼.svg 2001. 10. 05. 6 458
왕십리극동미라주 파일:극동건설 CI.svg 2001. 12. 14. 3 414
왕십리풍림아이원 파일:풍림산업 로고.svg 2004. 11. 30. 15 758
청계대주파크빌 대주건설 2005. 11. 23. 1 101
성동삼성쉐르빌 파일:삼성 로고.svg 2006. 9. 13. 3 342
하왕십리신영지웰 파일:한라 CI.svg 2009. 10. 1. 2 82
왕십리모노퍼스 KT건설 2009. 11. 30. 2 69
텐즈힐2단지 파일:삼성 로고.svg 파일:대림산업 구 심볼.svg파일:GS그룹 아이콘.svg 파일:HDC 로고.svg 2014. 6. 26. 14 1,148
텐즈힐1단지 파일:삼성 로고.svg 파일:대림산업 구 심볼.svg파일:GS그룹 아이콘.svg 파일:HDC 로고.svg 2015. 4. 24. 21 1,702
왕십리KCC스위첸 파일:KCC건설 로고.svg 2016. 4. 28. 3 272
센트라스 파일:현대 심볼.svg파일:SK 로고.svg파일:포스코 CI.svg 2016. 11. 29. 30 2,529
왕십리자이 파일:GS그룹 아이콘.svg 2017. 7. 28. 7 713

5.6. 교육

왕십리도선동에는 서울숭신초등학교, 도선고등학교가 있고 왕십리2동에는 서울무학초등학교가 있다. 과거 이곳에는 배명중고등학교와 청구상업전수학교(일명 청구상고[29]), 한국예술고등학교가 있었지만, 배명중고등학교는 1984년송파구 삼전동으로 이전했고, 청구상업전수학교는 학생 수가 서서히 감소하다가 1997년에는 사실상 폐교 상태에 들어갔고, 2005년에는 완전히 폐교하였다. 건물 자체는 폐교 이후에도 양지사거리 인근에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었는데, 학교 건물이 8층 건물이라 그 기괴함이 더했다. 결국 2010년에 왕십리뉴타운 재개발 사업으로 인해 발파해체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88년에는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던 아세아학교가 홍익동 150번지에 터를 잡았고, 1999년한국예술고등학교로 인가를 변경한 이래 수많은 연예인들이 홍익동 교정에서 배출되었다. 그러나, 불명확한 이유로 2016년부터는 신입생 모집을 중단하였고, 2019년에는 완전히 폐교하였다. 2023년 기준으로는 건물을 철거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현재 왕십리에 남아 있는 학교 중에서 서울무학초등학교는 장장 120년의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로서, 왕십리의 터줏대감과 같은 곳이다. 본래는 1904년에 상왕십리 783번지[30]에서 사립 왕신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하였고, 1915년에는 왕십리공립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1939년에는 학생 수가 증가하면서 지금의 하왕십리동 950-1에 터를 잡았고, 원래 사용하던 자리는 배명고등학교에 물려주었다. 1945년에는 서울무학국민학교로 개칭하였으며, 그 당시까지만 해도 왕십리를 포함해서 금호동, 행당동 등지의 학생들마저 무학국민학교로 통학하였을만큼 큰 학교였다. 1958년에는 서울금호국민학교가 개교하며 무학국민학교 학생 456명이 그리로 이관되었고, 1962년에는 새로 개교한 서울행당국민학교로 21학급을 이관했으며, 1968년에는 서울금북국민학교가 개교하여 학생 815명을 이관하였다. 또, 2005년에는 서울행현초등학교가 개교하여 11학급이 이관되었으니, 무학초등학교로부터 갈라져 나간 학교만 해도 4개 학교가 된다.

서울숭신초등학교는 본래 1959년 4월 3일종로구 숭인동에서 개교한 학교였으나, 도심공동화로 인해 원래 있던 터를 떠나 2015년, 왕십리뉴타운 안에 터를 잡았다.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도선고등학교2017년에 개교하였는데, 성동구의 만성적인 학교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신설된 것이다. 성동고등학교가 가까이에 있기는 하지만, 성동고등학교가 이름과는 다르게 성동구가 아니라 중구에 속해 있기 때문에 가까워도 2지망에서는 성동고등학교를 쓸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십리뉴타운 내에 고등학교를 하나 더 설치한 것이다.

초등학교의 경우 왕십리뉴타운 안에 있는 단지들은 숭신초로, 왕십리2동 대부분 지역과 도선동 대부분 지역은 무학초로 배정되며, 센트라스아파트는 숭신초와 무학초 공동 통학 구역이다. 홍익동 전역과 도선동 일부 지역은 마장동서울동명초등학교로 배정되며, 왕십리2동에서도 극동미라주와 풍림아이원 단지의 일부는 서울금북초등학교로 배정된다. 중학교의 경우는 관내에 중학교가 없어 인근 무학중학교동마중학교로 배정된다. 고등학교는 관내에 도선고등학교가 있기는 하지만, 왕십리2동에서는 금호고등학교무학여자고등학교를 지망하는 학생들도 있다. 자율형 사립고등학교를 가려면 한양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도 멀지 않아 선택지 중 하나로 나쁘지 않다.

넓은 의미로써의 왕십리로 확장하자면 남서쪽에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가 위치해있다.

6. 상권

황학동에는 서울중앙시장이라는 제법 큰 규모의 재래시장이 있다. 한때 이곳은 남대문시장이나 동대문시장보다도 규모가 큰 도·소매시장으로서 양곡과 채소 등을 취급했었고, 당시 서울시민의 양곡 소비율 80% 이상이 이곳에서 거래될 정도였다. 6.25 전쟁 이후에 한국의 3대 시장에 꼽힐 정도였고, 현재도 동네 재래시장 치고는 규모가 꽤 큰 편이다. 분식 등의 각종 노포 등을 비롯해서 건어물, 주방용품, 가구 등을 주로 취급하며, 왕십리 주방거리로도 불리는 現 황학동 주방거리도 바로 이곳에 있다. 시장 지하에는 1971년에 생긴 신당지하상가가 있는데, 2000년대 들어 서울중앙시장과 신당지하상가가 여타 백화점이나 쇼핑몰 등에 경쟁력이 밀리자, 2009년에 서울시에서 새롭게 리뉴얼하여 신당창작아케이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현재 신당지하상가에는 젊은 예술인들의 공방이나 전시실이 입주해 있다.

왕십리하면 곱창이 유명하다. 왕십리가 언제부터 곱창으로 유명해졌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과거 왕십리 근처에는 마장동 뿐만 아니라 행당동, 신당동 등지에도 도축장이 많이 있었고[31], 그곳에서 고기들을 도축하고 나면 그 부속고기나 내장들을 가져 와 서민들에게 파는 가게들이 왕십리 일대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상왕십리동에 곱창집들이 밀집해 있었지만, 2000년대 들어 곱창골목을 포함해 상왕십리동 전역이 왕십리뉴타운으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도선동과 홍익동 등지로 곱창집들이 이전하여 그 명맥을 잇고 있다. 황학동에도 많은 곱창집들이 남아 있다.

왕십리로를 따라서는 공구상들이 밀집하여 자리잡고 있다. 최근에는 왕십리뉴타운의 재개발로 없어진 공구상이 많으며, 상왕십리역에서 왕십리역에 이르는 구간은 오피스텔이나 빌딩 등으로 재개발되면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 왕십리뉴타운이 재개발된 이후에는 왕십리로와 난계로 가변에 스트리트형 상가가 생겼다. 왕십리로를 따라 왕십리역 쪽으로 쭉 내려가다 보면 행당시장이라는 재래시장도 나오는데, 현재는 먹자골목이 조성되어 있다.

왕십리로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왕십리오거리에 이르는데, 왕십리역 위로 민자역사가 건립되어 있다. 1층과 지하에 엔터식스, 2~3층에 이마트 왕십리점, 3층에 영풍문고, 4~5층에 CGV, 5층에 푸드코트, 6~7층에 웨딩홀인 디노체컨벤션과 스크린골프장이 갖추어져 있어, 왕십리에서는 상권이 가장 큰 곳이기도 하다.

엔터식스 왕십리점은 엔터식스가 최초로 개점한 곳이기도 한데, 유럽풍의 고급진 스타일의 쇼핑 거리를 주력 컨셉으로 잡고 있으며, 그만큼 내부 인테리어가 깔끔하고 이국적이며 스타일리쉬한 편으로, 도쿄 오다이바에 위치했던 쇼핑몰 비너스포트를 벤치마킹한 것으로 보인다. 2층은 왕십리역 대합실 맞은편에 이마트가 입점했는데, 본래 성동구에는 이렇다 할 대형마트가 이마트 성수점 밖에 없어서 구민들이 주말마다 차를 끌고 성수동에 가면서 일대 도로가 다 정체될 정도였는데, 2008년에 왕십리에도 이마트가 개점하게 되어 행당동, 금호동, 옥수동, 마장동, 사근동 일대의 수요가 고스란히 왕십리역으로 옮겨 왔다. 4층에 있는 왕십리 CGV는 영화 시사회도 자주 할 정도로 규모가 꽤 큰 영화관으로, IMAX 상영관을 갖추어 서울 동북부에서 여기를 찾는 사람이 꽤 많다. 이외에도 포시즌 워터파크라는 실내 워터파크가 입점했는데, 영등포구 씨랄라에 이은 서울 내 2번째 실내 워터파크였으나, 2013년에 영업을 종료하였으며 그 자리에는 웨딩홀과 헬스장이 영업중이다. 워터파크 부속으로 딸려 있던 찜질방과 목욕탕은 한동안 유지되다가 2017년에 폐점했다.

왕십리민자역사 뒤로 넘어가면 한양대학교 재학생들을 수요층으로 하는 상권이 있다. 본래 원룸촌이었던 곳인데, 그 사이로 주점이나 펍이 많이 들어오며서 일대가 상권으로 변모했다. 바로 옆으로 한양시장이라는 재래시장이 있고 마조로 연선으로 오래된 상가 건물들이 있는데, 일대에서는 꽤 오랫동안 자리잡은 맛집들이 이곳에 모여 있다. 길 건너 한양대학교병원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약국이 많이 있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도 한양대 상권이 있는데, 이쪽은 조금 더 한산한 편이다. 바로 옆에 서울숲 더샵에 엔터식스 파크에비뉴가 입점해 있다.

왕십리로를 따라 한양대 방면으로 계속 내려가다 보면 소월아트홀 옆으로 무학여고로 통하는 샛길이 있다. 그 주변으로 레몬프라자와 카페들이 자리잡고 있다. 레몬프라자에는 롯데슈퍼가 입점했고, 지하에 사우나가 있었는데, 규모가 꽤 큰 편이었다. 본래는 사우나 지하 3층에 노래방이나 PC방 같은 위락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언젠가부터 점점 규모를 축소하다가 현재는 최종적으로 폐업한 상태이다.

왕십리 생활권의 서쪽 최대 범위인 다산로를 기준으로 동대문 패션타운 관광특구와 맞붙어 있다. 성동공고에서 도보 약 10분, 서울중앙시장에서는 15분 정도 거리에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있고, 신당역 7번 출구로 나가서 도보 5분 거리에는 신당동 떡볶이타운이 나온다.

7. 왕십리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

왕십리가 오래된 동네이기도 하고, 서민 주택가로서 장년층에게는 추억이 담긴 곳이기도 하니 왕십리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 노래 등이 정말 많다. 다만 2020년대의 왕십리는 마용성으로 불릴 정도로 변모하였는지라 이런 미디어물을 보면 장년층은 격세지감을 느끼고, 청년층은 공감을 못 하는 경우가 많다.
  • 김소월의 왕십리라는 시가 유명하다. 왕십리광장에도 김소월의 『왕십리』 시비(詩碑)가 마련되어 있다.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朔望)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往十里)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려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 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天安)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이 젖어서 늘어졌다데.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




    『신천지』, 1923.8.
  • 1976년에 개봉한 임권택 감독의 연출작인 왕십리가 있다. 신성일, 김영애, 전영선, 최불암 등 당대 톱스타들이 출연한 영화이며, 1976년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히는 편이다. 왕십리 일대를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당시 왕십리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는데, 전풍호텔이나 행당동 굴다리,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등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풍경들이 보인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살곶이다리 앞에서 찍었는데, 이 장면이 명장면으로 꼽히기도 한다. 1970년대 당시의 왕십리 일대 풍경이 궁금한 사람들은 한 번 보길 추천한다.
  • 1991년에는 김흥국의 위의 곡을 59년 왕십리라는 곡으로 리메이크를 했는데, 이게 대박을 쳐서 김흥국의 대표곡이 되었다.

    이 노래를 듣고 김흥국이 1959년에 왕십리에서 태어난 줄 아는 사람이 많은데, 김흥국이 1959년생인 건 맞지만, 태어난 건 강북구 번동(당시 성북구 번동)에서 태어났다고 한다.[32]
  • 살아 숨쉬는 왕십리의 분위기를 서울시 홍보대사인 바이올리니스트 여근하가 바이올린 곡으로 연주한 왕십리 아라리이다.

8. 출신 인물

9. 여담

2012년 디아블로 3 발매 당시 왕십리 게이트로 유명했다. 왕십리역 일대에 디아블로 3 소장판을 사려는 사람들로 불야성을 이뤘다고 한다.

10. 관련 문서


[1] 여기서 쓰인 '리'는 행정구역 단위로 쓰인 게 아니기 때문에 자음동화를 반영한 로마자 표기를 써야 한다. 로마자 표기법 참고[2] 버전에 따라 다르게 나오기도 하는데, 그 일대에 사는 한 노인이 소를 이용해 밭을 가는데, 이 소가 자꾸 엉뚱한 곳으로 가자 "이 무학 같은 놈아! 제대로 된 곳을 두고 왜 자꾸 엉뚱한 곳을 가느냐? 왕십리하란 말이다!"라고 호통을 치고 무학은 그 자리에서 왕십리를 떠올렸다는 버전도 있다.[3] 1911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는 왕십리1계가 왕십상리(現 상왕십리동)로, 왕십리2계가 왕십하리(現 하왕십리동)으로 명칭이 변경되기는 하였다.[4] 무학대사의 호는 舞鶴이 아닌 無學이다. 다만 무악재의 지명 유래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무학대사와 연관된 지명은 한자명이 대체로 舞鶴으로 남아 있다.[5] 애초에 무학대사는 천도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하륜이나 정도전 등에 의해 천도가 구체화되었다고. 물론 그런 거 다 떠나서 태조 이성계가 기득권이 꼴 보기 싫어서 천도하자고 떼쓴 게 가장 크다.[6] 이걸 직역하여 왕십리를 '킹스 크로스'라고 일컫는 개드립도 존재한다. 물론 그 역도 성립하여 런던, 시드니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킹스 크로스'를 한자로 직역하여 왕십리라고 부른다.[7] 참고로 정읍에는 진짜 왕리가 있었다고 한다.[8] 다만 지금의 신당동, 흥인동 일대는 원래 신당리계라는 독립된 계로 조선시대 내내 존재하다가, 1895년 갑오개혁 이후 잠깐 왕십리계에 포함된 것으로, 16년 뒤인 1911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며 다시 신당리로 독립한다.[9] 여긴 지명부터 神堂里였다. 귀신 신() 자가 마을 이름으로는 쓰기가 영 좋지 않다고 해서 갑오개혁 당시에 발음이 같은 新堂里로 바꾸게 된 것이다.[10] 집 당() 자가 행당동의 아기씨당이라는 신당으로부터 붙은 지명이다.[A] 2024년 4월 기준[12] A~C동, E~H동[13] D동[14] 다만, 각 세대 및 상가 호실별 지분을 나눌 때 대지가 경계가 걸칠 경우는 걸친 대로 나누게 된다.[A] 2024년 4월 기준[하왕십리1동] 1964년 9월 28일에 하왕십리동의 일부 지역을 관할하던 행정동 당현동의 이름을 개칭한 하왕십리1동과는 다른 행정동이다.[A] 2024년 4월 기준[18] 다만, 각 세대 및 상가 호실별 지분을 계산할 때는 사용한다.[하왕십리2동] 1964년 9월 28일에 행정동 도선동이 관할하던 구역에서 왕십리로 이남 지역을 분리하여 신설된 하왕십리2동과는 다른 행정동이다.[A] 2024년 4월 기준[하왕십리1동] [B] 2024년 5월 주민등록인구[하왕십리1동] [하왕십리2동] [B] [26] 하왕십리동 987-212[하왕십리1동] [28] 舊 한진그랑빌[29] 실제로는 특성화고등학교가 아니라 전수학교였다.[30]중구 신당동 855[31] 행당2동의 옛 지명이 도장골이었다고 한다.[32] 사실 김흥국은 원제목인 왕십리 앞에 자신들의 출생년도 '59년'을 넣자고 원곡 작곡가 이혜민에게 제안했다. 처음엔 반대했지만 결국 김흥국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참고로 둘은 동갑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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