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bordercolor=#ea0029><tablebgcolor=#ea0029> | KIA 타이거즈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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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 문서는 해태 타이거즈의 특징을 설명한 문서다.2. 소수정예
해태 타이거즈는 창단 때부터 자원이 많지 않아[1] 소수정예로 운영되었다. 그리하여 주전과 백업 선수들의 기량차는 엄청났으며, 이렇다 보니 2군도 원년 멤버 프로야구 팀 중에서 가장 늦게 생겼다. 타 팀은 1980년대 중반부터 이미 2군을 만들고 있었으나, 해태는 그보다 한참 늦은 1994년에 2군을 신설했다.[2]이후 모기업이 기아자동차로 바뀌었음에도 2군 시설은 여전히 부실했고, 팜의 역할을 거의 못하고 있다가 그나마 2012년 2군 구장을 새로 리모델링하며 상황이 나아졌다. 코치의 수도 전 구단 중에서 가장 적었고[3], 2000년대 이전까지는 코치도 순혈만을 선호하여 타 팀 출신은 거의 오지 못했다.
3. 열악한 운동 환경
무등 야구장은 물방개가 튀어나오고 천연잔디도 이 곳 저 곳 패여 있었으며 사실상 맨땅에 가까울 정도였다. 일본의 한 야구 관계자가 무등 야구장을 보곤 프로팀의 홈구장일 것이라고 생각을 못해 '낙후되었지만 괜찮은 연습장'이라고 평했을 정도. 2군 구장이 없어 1군과 같이 사용했으며 무등 야구장 뒤에 있는 호승관은 환기 시설이 좋지 않아 선수들이 배팅 연습을 하고 잠깐 바깥에 나와 숨을 고른 뒤 다시 들어갔다. 비닐하우스는 비닐이 찢겨 있었으며 헬스장의 헬스 기구도 낡았다. 80년대 사진을 보면 김성한은 공사장 현장에서 볼 법한 불 깡통에 불을 피워놓고라커룸도 환기 시설이 좋지 않아 서열이 높은 선수가 출입문 쪽에 앉았고 신참 선수들은 출입문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야만 했다. 또한 라커룸에는 개인별 의자 대신 평상이 있었으며 평상도 고참 선수들만 이용 가능했다. 김성한은 아예 평상에 드러누웠고 그럴 때 선수들은 앉지도 못했다. 이대호의 유튜브 채널에 게스트로 나온 이종범은 당시 해태의 열악한 라커룸에 대해, 자갈 낀 시멘트 바닥에 선배들은 담배를 피고 꽁초를 맨바닥에 버렸으며 평상 밑엔 쥐가 기어다녔다고 회상하기도 했다.1분 42초부터
4. 물샐틈없던 투수 왕국
KBO 역사상 최고의 오버핸드 선동열, 최고의 사이드암 임창용, 최고의 언더핸드 이강철을 모두 보유했던 투수 왕조였다.[4] 1998년 IMF 사태로 모기업이 부도나기 전까지는 매우 탄탄했다. 1980년대에는 선동열, 이상윤, 차동철, 방수원, 김정수, 문희수 등의 쟁쟁한 투수들이 가득했고, 1990년대 초반까지는 선동열-조계현-이강철로 이어지는 강력한 선발라인을 가졌으며, 1990년대 중후반에는 선발 조계현-이강철-이대진 으로 이어지는 원투쓰리펀치에 선동열-김정수-임창용으로 이어지는 언터쳐블 마무리, 또 임창용, 김상진 등의 떠오르는 신예들을 축으로 우승을 이룩하였다.야구도 결국 많은 득점과 적은 실점을 통해 승리를 해야하는 종목이기 때문에 투타 중 한쪽이 약하면 우승을 하기 힘들다. 9회 우승을 거둘 만큼 잘했던 팀이었기에 타선도 좋았다. 그러나 해태는 기본적으로 투수력이 타격보다 좋았다. 해태는 1985년과 무너져 가던 말년의 1999년, 2000년 말고는 최소 리그 평균급, 대다수의 시즌에서 리그 상위권의 투수력을 선보였다. 1980년대에는 방수원, 신동수, 김정수가, 1990년대에는 기존의 김정수와, 송유석, 선동열, 임창용이 중간계투나 마무리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해태 투수진은 난공불락이었다. 정회열이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이야기했듯 해태는 투수의 팀이었다.
해태의 9번 우승을 살펴보면 1983년 타격의 힘으로 보통의 투수진인데도 우승이 가능했다. 그러나 1986, 1987년은 투수들이 더 잘해서 우승을 했고, 1988년은 타선도 매우 강했으나 투수가 그보다도 더 강력하게 리그를 지배해서 우승했다. 1989년도 역시 투수가 더 잘해서 우승했다. 1991년은 타격이 강했으나 투수가 매우 좋아서 우승공로가 더 컸다. 1993년도 투수는 삼성과 비슷하게 리그 탑이었고, 타선은 삼성의 강타선과 급차이가 나는 2위급이었다. 그러나 중요할 때 투수들이 삼성 타자들을 눌러버려서 우승했다. 1996년과 1997년 역시 중위권 타격팀을 투수들의 힘으로 우승을 하게 되었다. 즉, 리그에서 우승 패턴을 살펴보면 타격이 중위권인데 투수가 좋아서, 타격이 상위 혹은 1위였는데 투수는 그보다 더 압도적으로 잘해서 우승을 했다. 반면 팀의 몰락기였던 1999 시즌은 팀 홈런 1위이자 당시 한 시즌 팀 최다홈런 기록을 경신할 정도로 폭발적인 타력을 선보이고도 투수진의 붕괴[5]로 승률 7위에 머물렀다.
5. 짜임새를 갖춘 김씨 타선
해태는 강력한 투수력을 바탕으로 왕조를 이룩했는데 투수력을 받쳐주는 강력한 타력도 함께 있었기에 리그를 호령하는 강팀이 될 수 있었다. 쉽게 말하면 투타의 균형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팀이었던 셈이다. 둘 중에 한 쪽으로만 팀 전력의 무게 중심이 쏠리면 우승이 불가능한 팀이 된다. 타격으로만 특화됐던 팀 중 하나가 준우승만 밥 먹듯이 하던 1980~1990년대 삼성 라이온즈였고[6] 투수력으로만 특화됐던 팀이 중하위권을 주로 맴돌았던 태평양 돌핀스였다. 간단하게 2021 시즌 롯데가 팀 평균자책점 10위, 팀타율 1위였는데 그 결과는 정규 리그 8위였다는 걸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거다.[7]특히 화끈한 장타력와 정확한 소총 타선의 조화가 확실했던 팀인데 김일권, 이순철, 이종범으로 이어지는 리드오프 계보가 확실했고 정확성과 파워를 겸비한 김성한, 김종모, 김준환, 한대화, 홍현우, 장성호에 거포 역할을 했던 김봉연, 이호성은 물론 작전 수행 능력이 뛰어났던 서정환, 김종국, 공수를 겸비했던 엘리트 포수 김무종, 장채근, 최해식 등이 꾸준히 등장하면서 해태의 득점력을 배가시켰다. 특히 1980년대 초중반의 야수 라인업을 보면 김일권-김성한-김봉연-김준환-김종모-김무종 등 김씨 선수들이 많았고 게다가 감독마저도 김씨여서 'KKK타선', '가장 한국적인 타선', '가장 한국적인 팀'이라는 별명까지도[8] 생겼다.
6. 선두타자 홈런의 왕국
이종범이야 44개의 기록을 갖고 있으니 말할 것도 없고, 그 전임자인 이순철과 후임자인 장성호도 펀치력이 상당해서, 매년 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했으며 20개 넘게도 펑펑 쳐댔다. 해태를 상대하는 선발 투수들은 늘 1번타자를 조심해야 했다.7. 상당히 엄격한 군기
해태는 야구계에서 상당히 군기가 센 것으로 유명했다. 군기반장의 역할이 확실히 있었던 팀 중 하나다. 군기의 기반은 역시나 지연과 학연이었다. 물론 옛날에는 끈끈한 지역 연고제를 기반으로 한국프로야구가 진행되었기에 비단 해태만 그런 게 아니라 원년 6개 구단 중에 안 그런 팀이 없었지만, 그 중에서도 해태는 원년 시절부터 호남 출신 선수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들이 보여주는 유대관계가 남달랐다.[9] 더구나 연고 지역 내 출신학교 간의 갈등도 적었으며[10] 누구도 쉽게 무너뜨리지 못하는 엄격한 위계질서 덕분에 선수단 내 분란이 없었다. 대신 선후배 간 원칙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면 코칭 스태프의 묵인 하에 구타와 체벌이 가해지는 경우도 있었다.문제는 구타와 같은 폭력이 똥군기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감독부터가 버젓이 TV 카메라 돌아가는 앞에서 선수들 구타를 즐긴 위인인지라 코치진들도 대놓고 선수들에게 욕설이나 구타를 항상 일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최향남의 경우 신인 시절 해태의 무서운 분위기에 도저히 적응을 못해 군대를 상무가 아닌 현역으로 갔으며[11], 한대화가 1993년도 시즌 끝나고 LG로 트레이드 된 것도 이런 똥군기로 인한 감독과의 불화[12] 때문이란 설까지 있을 정도. 이런 상황인지라 다른 팀 선수들이 해태에 트레이드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LG 소속이었던 손혁, 두산의 최용호[13], 그리고 삼성의 양준혁이 그 예. 1996년에는 선수들의 불만이 쌓이다 터져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사건이라는 희대의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14]
- 사사구에서 이병훈 해설이 당시 해태 분위기를 언급했는데, 이 시기에는 타 팀의 이적생들, 특히 호남 이외 지역 출신 선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우리 선수 아니다라는 식으로 천대를 받은 듯 하다. 그래서 이런 대우에 빡친 이병훈이 이호성과 주먹다짐을 했다고 한다.[15] 다만 타 구단에서 나이 많은 선수가 들어올 경우 해태 팀 내 고참이 "나와 비슷한 연배니 잘 모셔라."라고 얘기하면 군기 바짝 든 후배들이 직속 선배 대접을 해 줬다고 한다.[16] 이렇게 비호남권 출신 선수에 대해서는 배척의 문화가 강했던 팀이지만, 그렇다고 타지 출신 중에도 타이거즈 선수단 문화에 적응해 성공한 케이스가 없는 건 아니다. 대구광역시 출신의 서정환[17], 대전광역시 출신의 한대화[18], 인천광역시 출신의 최상덕[19] 등이 대표적 사례.
- 박충식에 의하면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이런 구타 문화가 남아 있었다고 하며, 팀 내 멤버 중에서 나이가 3년차 이상은 "형", 5년차 이상은 "선배"라고 부르도록 호칭도 구분되어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선배에 대한 인사도 일단 정지 후 90도로 하도록 했다.[20] 참고로 타 팀에서는 보통 나이 차이가 7 ~ 8년 이하면 XX(이) 형, 그 이상이면 XXX 선배님[21]이라고 부른다. 참고로 기아로 팀이 바뀌고 00년대 후반까지는 남아 있었다가 시간이 흐른 뒤에는 호칭 구분이 타 팀과 비슷해졌다. 따라서 오로지 30대 중반을 넘긴 최고참급의 선수만이 모든 선수들한테 선배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해태에서의 호칭법과 인사법.
- 1994년 해태 소속이었던 한대화가 LG 트윈스로 가서 했던 일이 군기 잡는 일이었다고 한다. 당시 LG 트윈스는 신바람 야구란 컬러로 젊은 선수들이 서로 편안하게 형/동생하는 사이인 것을 보고 문화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기강이 해이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 연령으로 보나 커리어로 보나 고참급이었던 한대화가 이것을 보고 군기반장을 했다고 한다. 1996년 시즌 종료 후 해태에서 LG로 이적한 송유석도 LG 야수조의 자유분방한 팀 분위기에 놀랐으며[22], 이를 보고 기강을 잡으면서 선수단의 투표로 주장으로 선출됐다.
- 1997년 LG 트윈스에서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한 후 얼마 안 되어 최훈재가 이종범, 홍현우, 이대진[23]이 같이 운동장에서 도시락을 까 먹는 것을 보며, "너희들 밥 먹니?"라며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러자 그들이 먹는 것을 쓰레기통에 치우고 운동장에서 다시 연습하러 갔다고 한다. 최훈재가 말한 뜻은 "어? 너희 지금 밥 먹고 있었니?"라는 단순한 질문이었지만[24], 후배 선수들은 "너네 설마 지금 연습도 안 하고 밥 먹고 있는 거냐?"라고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어느 때는 최훈재가 연습 끝나고 연습 장비를 치우려고 하니 후배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바로 치웠다고 한다. 이때 당시 최훈재는 LG에서 이적한지 얼마 안 된 상태였으며, 후에 회고하기를 자신이 뛴 어느 구단에서도 그렇게 행동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사실 이적생이었던 최훈재가 저렇게 대접을 받은건 당시 투수조 최고참 라인이던 이강철, 조계현과 입단 동기라서 이 둘이 최훈재를 잘 챙겨줬었던 덕이 크다. 팀내 최고참들이 챙겨주는 사람이니 후배들이 최훈재를 우습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최훈재 일화, 중앙일보 기사
- 위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자유분방한 LG와 군대문화 같은 해태는 그야말로 팀 분위기가 극과 극이었다. 그러니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준 선수들이 해태로 트레이드가 되고 모두 부진하거나 아예 트레이드를 거부했던 것이다. LG에서 해태로 이적한 선수들 중에서 그나마 성공한 선수가 최훈재였는데, 그도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친정팀 LG를 침몰시킨 주역이었지만 거기까지였고, 단 두 시즌 만에 두산 베어스로 재트레이드되었다. 물론 이건 야수조 한정이고 LG는 투수조 군기가 빡빡하기로 악명 높았다. 해태는 반대로 투수조 군기가 의외로 널널했다[25].
- 양준혁이 해태로 이적 후 마련한 광주광역시의 한 아파트에 이삿짐 트럭을 타고 도착했을 당시, 팀 후배이자 영남대학교 후배인 오철민[26]과 곽현희가 대기하고 있었으며 이삿짐 정리까지 다 했다고 한다. 강태원의 딸의 돌잔치 때 일부러 양준혁이 늦게 갔으나[27] 해태 선수들 모두 기다리고 있었고, 경기장에서 후배들이 그라운드 정리와 선배들의 간식거리를 준비해 놓지 않으면 아무리 야구를 잘 해도 혼났다고 한다. 양준혁이 말하는 해태 시절 오철민과 최상덕이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하여 부연 설명을 했는데, 오철민과 곽현희뿐만 아니라 대여섯 명이 이사 작업을 도왔으며, 양준혁의 집과 가까웠던 최상덕도 가서 도와줬다고 한다.
- 가끔 경기 후 집합[28]이 걸렸는데, 카리스마 군기반장 오궁갑이 악역을 맡았다.이병훈이 해태에 간 첫 날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성한이 말한 바에 따르면 해태 타이거즈의 군기반장 계보는 김일권, 김성한, 이순철, 송유석, 이호성 순으로 이어진단다. 김일권이 술회하기를 타교 출신 선수를 때리면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군산상고 직속 후배였던 김성한을 화장실로 불러 몽둥이 찜질을 가했고 김성한도 이에 수긍하고 맞았다고 한다.
- 이종범과 홍현우가 짬밥이 낮던 시절에 팀 분위기도 안 좋은데 캐치볼 도중 웃었다는 이유로 맞았다. 이종범 뺨 맞은 사연
- 데드볼에 맞아도 아픈 내색은 할 수가 없었다. # 아픈 내색을 하면 상대 투수에게 구위에 자신감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
- 해태에서 신인 시절을 보냈던 정성훈도 군기를 꽤 잡는 성격으로 유명하다. 김태군, 양석환 갈구는 정성훈 다만 이 때는 집중만 했으면 안 할 수도 있던 실책을 굳이 멍청하게 저질러버렸던 둘인지라 정성훈이 잡을 만 했다는 의견이 많았으며, 선수들 사이에서도 정성훈이 다른 부분에서 똥군기를 잡았다는 증언은 나오지 않았다. 즉, 똥군기를 괜시리 잡기보단 잡아야 할 부분에서 진지하게 훈계를 하는 스타일이라 보면 된다.
- 그러나 이강철은 밖에서 보는 것처럼 군기가 강하지는 않다고 이야기했다. 이강철이 말하는 해태 이강철은 제2대 군기반장 김성한이 늘 본보기로 삼았던 선수였는데, 이건 이강철이 모난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이강철 같이 잘 하는 선수를 본보기로 삼아야 다른 선수들이 정신을 차린다는 생각이었다. 또한 동국대 야구부 후배도 사정 봐주지 않고 더 심하게 갈구며 공적인 기강을 세운다는 대의명분을 만들기에 좋았을 것이다. 이강철은 김성한이 무서워 늘 숨어 있었고, 김성한은 "이강철이 어디 갔냐?!" 하면서 화를 내며 이강철을 찾았다. 다만 현재와 마찬가지로 훈련은 야수조와 투수조가 따로하고 이강철은 입단하자마자 4년연속 15승, 선동열이 마무리로 전향하자 1선발 에이스 노릇을 했기 때문에 관리를 받았다고 봐야 한다.
- 이호준은 스톡킹에서 외국인 선수들이 한국 음식에 적응 못하고 피자를 사달라고 하면 당시 팀에서는 밥상을 엎었다고 하며 그 결과 해태에서 뛴 외국인 선수들은 다들 젓가락질을 잘했다고 했다. 또한 집합 때 신참 선수들처럼 열중쉬어 부동자세에 선배가 말하면 똑같이 '예! 알겠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걸 또 다 해줬네.[29]
- 게임에서 패하여 화가 났던 김응용 감독은 구단 버스를 한적한 교외에 세우고 선수들을 내리게 한 다음 무등 야구장까지 뛰어오라는 벌을 종종 내렸다.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선수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돌아왔다. 김성한은 택시, 김종모, 장진범, 송일섭, 주동식, 김무종은 달리기, 송유석은 경운기를 탔다.[30] 주동식, 김무종은 재일교포들이라 한국말이 서툴렀는데 '프로야구 이거 아니야', '감독 나빠요', '빠가야로'를 내뱉었다고 했다.
- 위의 여러 일화들을 읽어 봤다면 알겠지만, 해태 타이거즈의 엄격한 군기는 대개 김성한, 이순철, 이호성 등의 타자들 위주로 주도됐고, 또한 심한 편이었다. 역으로 투수 고참인 선동열[31],이강철, 이대진 등은 타자조 고참들에게 맞는 경우는 있어도 본인이 타인에게 폭력을 사용한 이야기는 없는 편이다. 이후 최향남이나 임창용 같이 그 엄격한 군기로 악명높은 구단인 타이거즈에서 염색을 하거나 나이트 등으로 놀러다니는 등 일탈을 한 투수들이 많아서 엄격한 타이거즈의 군기는 엄밀히 말해 타자에서만 한했다.[32]
8. 높은 충성도
빡센 군기와 열악한 운동 환경과는 달리 소속 팀에 대한 선수들의 충성도가 강한 걸로도 유명하다. 특히 해태의 영광을 겪었던 선수들이 더 그렇다. 서정환, 최상덕, 김상현, 이호준, 정성훈, 홍현우, 장성호, 임창용, 홍세완, 유동훈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33] 김상현처럼 트레이드 되자 가기 싫다며 거부, 심지어 울었다는 에피소드가 꼭 들어 있다.- 2000년대 KIA로 넘어가면서 이종범과 이대진이 총대를 메고 똥군기 및 악폐습을 줄이는데 노력했지만 2010년대 들어서도 다른 팀들에 비해서는 군기가 쎄다. 김주찬도 한 방송에서 다른 팀보다 군기가 쎈거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고 2015년에는 경기끝나고 단체로 원산폭격 비슷한 모습이 사진에 찍히기도 했다.[34]
- 임창용이나 이호준, 정성훈, 장성호는 이적 후에도 친정 팀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35] 이는 KIA로 바뀐 이후에도 이어져 신종길 같은 경우는 한화시절에 자신이 트레이드 대상에 올랐다고 하자 자신은 고향팀 아니면 안 간다고 선언했을 정도다.
- 임창용도 해태에서 삼성으로 팔려나간 이후 꾸준히 타이거즈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고 다녔고 트레이드까지 요청했었을 정도로 팀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그리고 돌고 돌아 2016년에 KIA로 다시 돌아왔다.[36]
이런 걸 감안하면 그 시절 해태 타이거즈는 엄격한 군기나 열악한 운동 환경, 부실한 모기업 지원과는 별개로 외부에서는 다 알 수 없는 상당한 매력이 있던 팀으로 보인다. 사실 해태 타이거즈로의 이적을 거부한 끝에 어쩔 수 없이 오게 된 양준혁 같은 경우도 위에 캡쳐된 자서전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정작 와서는 해태 타이거즈의 팀 컬러와 분위기를 상당히 맘에 들어했고 그 후에도 타이거즈에 대해 좋은 말만 했으면 했지 절대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 물론 이적 거부 과정에서 은퇴 이야기까지 꺼냈기에 광주의 타이거즈 팬들은 그를 마냥 좋게 보진 않지만. 당연하지만 이는 올드 팬들 한정이고 양준혁이 해태에서 뛴지도 20년이 넘었다보니 요즘 타이거즈 팬들은 양준혁에게 그렇게까지 악감정이 없으며 심지어 양준혁이 타이거즈 소속이었던것도 몰랐던 사람도 있다.
9. 부실한 연봉과 지원
먼저 결론부터 요약하자면, 타이거즈는 모기업이 해태여서 9번이나 챔피언을 먹은 것이 아니라 해태였음에도 9번이나 챔피언을 먹은 것이다.모기업 해태가 일단 공업화가 덜 된 전라도의 기업이었기 때문에 재정 상태가 부실했다. 그리하여 야구단에 많은 돈을 투자할 수 없었다. 구단의 연봉 협상 관계자가 신인 계약금을 받으려는 이종범에게 "광주는 물가가 싸기 때문에 서울에서 1억 받는 것보다는 광주에서 7000만원을 받는 게 낫다."라고 말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모기업 해태제과가 당대의 구단 삼미 슈퍼스타즈처럼 재정이 영 좋지 못했고,[37] 그러니 선수들에 대한 대우가 매우 나쁠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2000년대 후반의 넥센처럼 트레이드를 대놓고 막 하는 악행은 아니었더라도[38] 1980년대 프로야구단들이 대부분 그랬지만, 특히 해태의 경우에는 오프시즌 때 연봉 분쟁이 거의 연례행사였다. 그런데 이것도 거액에 해외로 이적시킬 수 있었던 선동열과 이종범마저 없었으면 쌍방울보다도 더 먼저 구단이 문을 닫을 뻔했다.
당시 대구아재들이 일으킨 해태 타이거즈 버스 방화 사건이 있었을 때 홈구단이었던 삼성 라이온즈는 버스 수리비 및 버스 안에 들어 있었던 해태 선수들의 물품에 대한 보상도 이뤄졌었는데, 후일 김봉연의 인터뷰를 보면 해태 선수들은 실제 피해액 말고도 버스 안에 있지도 않았던 양복이나 야구 물품들이 불탔다고 보상을 요구했고, 그런 것들도 삼성 측에서 군말없이 보상을 해 줬다는 일화도 있었다고 한다. 해태의 지원이 얼마나 부실했는지를 대변해 주는 부분이다. #
1980년대부터 선수단에 대한 대우는 1990년대 쌍방울 레이더스 만큼이나 악명이 높았다. 차라리 삼청태가 해태보다 백배천배 나을 정도였다. 송유석의 증언으로, 치료실 바닥에 쥐가 왔다갔다하며, 비가 새는 공간에서 매트를 가져다놓고 치료했다. 심지어는 부상 선수들의 재활비도 제대로 주지 않아서 자비로 재활훈련을 해야 하는 등,[39] 지금 기준으로 보면 도저히 프로 구단이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환경이 상당히 열악했다. 1차 선수협 사태[40] 역시 '김대현·이순철 교통사고 사건' 이후 해태 구단에서 어떠한 위로도 제대로 해 주지 못해 일어났던 일이었다. 심지어는 파파이스 치킨이 먹고 싶다는 외국인 투수 루이스 안두하에게 그냥 광주광역시 양동시장에서 파는 양동통닭을 사다 주기도 했다.[41] 이 파파이스 사건과 더불어 당시 김성한 감독이 피칭에 전혀 문제가 없었음에도 강판시키자 분노, 그대로 팀을 떠나버렸다. 최상덕과 오철민의 증언에 따르면 구단에서 각종 상품권(해태마트, 에스콰이어 구두)을 주는 대신 월급에서 차감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즉, 강매나 다름없었다.또한 타이거즈에서 내야수로 활약한 김민철은 입단할 때 신인 선수들에게 다른 선수들이 쓰던 유니폼을 입어야 했을 정도[42] 로 열악했다.
그렇다고 개성 강한 해태 선수단이 부실한 처우에 대해 무작정 참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첫 번째 우승 직후에 불만이 제대로 폭발했다. 당시 해태제과는 1984년 시즌 시작과 더불어 승리 수당이라 볼 수 있는 메리트 시스템을 폐지하고 서울 원정 숙소의 등급을 낮추는 조치를 단행한다. 우승 보너스는 더 못 줄 망정 오히려 선수단의 처우를 악화시킨 격이 됐다. 결국 이 조치는 선수단의 사기를 급격하게 떨어뜨리는 계기가 된다. 불만이 가득찬 선수단이 결국 폭발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것이 올드 야빠들에게 익히 알려진 해태 타이거즈 불고기 항명사건이다.
박건배 해태제과 사장 겸 타이거즈 구단주는 타이거즈가 1984년 시즌 처음으로 서울 원정을 온 4월 10일 저녁 서울 강남의 한 고급 고깃집을 빌려서 불고기 만찬을 베풀기로 했다. 김응용 감독 이하 선수단 전원이 참석했는데 선수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침묵한 가운데 불판 위의 불고기에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그 사이 불판 위의 고기는 까맣게 타들어갔고, 이를 눈앞에서 목격한 박건배 구단주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김응용 감독이 "어떤 놈이 이런 짓을 작당했느냐?"라고 버럭 화를 냈고, 이때 팀 내에서 개인주의적 성향 때문에 미움을 받았던 김일권이 일방적으로 주동자로 찍히는 오해가 벌어지게 된다.[43] 여기에 김일권은 김응용 감독에게 회식 후 항의를 했고, 오랫동안 이 불고기 화형식 사건은 김일권의 주도 하에 벌어졌다는 이야기가 번졌다. 결국 김일권은 김응용 감독의 눈밖에 났지만 당장의 선수가 부족했던 팀 사정상 어쩔 수 없이 김일권을 써야 했고, 이순철이 팀의 주축 외야수로 자리를 잡자 1988년, 태평양 돌핀스로 현금 트레이드하게 된다.
훗날 김일권이 SBS Sports 야구본색, 전설의 타이거즈, 야사시TV 등 각종 프로그램들에 출연해서 밝힌 바에 따르면 원래 불고기 화형식을 계획한 사람은 본인이 아니라 팀 내 최고참이자 군산상고 선배였던 김봉연과 김준환이었다고 한다. 이들의 1년 후배였던 김일권은 김봉연, 김준환이 "같이 동참하겠느냐"라고 묻자 선배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동조하기는 했지만 "구단주의 눈치를 봐서 먹는 척이라도 하자"라는 뜻도 전했다고 한다. 다만 타이밍을 놓쳐서 그냥 고기를 다 태워먹었다고 한다.
어쨌든 한창 구단이 잘 나가던 1980년대에도 이런 판국이었고, 1997년 외환위기 여파로 모기업 해태제과가 부도를 맞고 해태그룹 자체가 해체되자 그나마 있던 지원마저 부실해졌다. 급기야 주력 선수까지 외국 리그나 다른 부자 구단들에 팔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자[44] 1997년까지도 기세등등했던 성적은 금세 곤두박질쳤다.
이종범이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돌아올 때 당시 김응용이 있던 삼성 라이온즈를 돌아가고 싶은 구단으로 꼽은 것도 바로 이런 선수에 대한 대우가 좋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기아자동차로의 인수가 최종 결정되면서 이종범은 KIA 타이거즈에 복귀하게 되었다. 엄밀히 따지면 삼성에 가고 싶다고 직접적으로 얘기한 건 아니고 "김응용 감독 밑에서 뛰고 싶다."라는 이야기였다. 다만 이종범이 KIA행 결심을 굳힌데는 김응용 감독이 너는 KIA로 가야한다고 설득한 것도 한 몫을 했다고 한다.
우승 후 선수단에 대한 우승 보너스가 1만원도 채 안되는 해태제과 종합선물세트였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해태의 열악한 지원을 비꼰 진담 같은 농담. 다만 명절 선물로 종합선물세트를 주긴 했다고 한다. 시중에서 파는 종합선물세트와는 달리 해태에서 판매하는 양주도 들어 있었다.
임창용의 증언에 의하면 보통은 1,000만원대를 받았고 특A급 기준 2,500만원 정도였다고 한다.[45] 거기다 1993년에 우승했을 때는 앨범 제작까지 시키는 기행을 보여줬다. 1993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음에도 보너스 줄 돈이 없었는데 앨범을 내서 그 수익금이라도 벌어보자는 뜻이었다. 그래서 탄생한 프로젝트 그룹이 양수경과 선동열&이종범의 투앤원. 참고로 이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당시 타이거즈 단장인 이상국이었다. 선동열과 이종범이 현역에서 은퇴한 지금은 이것도 추억이 되었지만, 당시엔 비웃음거리였다. 셋 다 이름값이 있었던 데다가 프로야구 인기는 최고조에 달했기 때문에 가창료를 당시 돈으로 500만원 가량 받는 등 나름대로 기대할 만 했다만 정작 흥행에서 철저하게 망했기 때문이다. 앨범을 3만장 찍었는데 겨우 20장 팔렸고, 그나마도 김응용 감독이 직접 10장을 사 줬다고 한다. 결국 앨범은 타이거즈 구단에서 직접 매입해서 팬들에게 기념품으로 나눠주는 신세가 되었다. 이 앨범이 망한 뒤에는 김응용은 선동열과 이종범이 다치기만 하면 농담조로 코치에게
심지어 구단 담당자 측에서는 "롯데에선 아파트 지으면 되고, 삼성에선 컴퓨터 조립하면 된다지만, 우리는 너네 연봉 주려면 과자 몇 트럭을 팔아야 하는지 알아?!" 하며 선수들에게 대놓고 일갈했다고 전해진다. 해태에서 잠시 몸담았던 이병훈 해설위원의 일화에 의하면 연봉 협상하는 자리에서 "너, 선동열한테 연봉 주려면 맛동산하고 써니텐[46] 얼마나 팔아야 하는 줄 알아?"라고 말할 정도이니 말 다했다. 선동열도 현역시절 연봉 1억을 요구했더니 구단 담당자 왈, "야 이사람아, 1억이면 아카시아껌을 몇 통이나 팔아야 하는지 알기나 해?"[47]라고 거절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 그래서, 당시에 이병훈도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는지 구단 담당자에게 "부라보콘도 있잖아요?"라고 맞받아쳤다가 크게 혼나기도 했었다고 밝힌 적이 있었다.
이런 식의 말을 현재의 KIA 타이거즈로 빗대보자면 (물론 실제로 이러진 않았지만) "니 연봉이 쏘렌토 몇 대인 줄 알긴 하냐?", "너희들 연봉 주느라 카니발 몇 대나 조립해야 하는지 알아!"라고 말하는 식이다. 물론 자동차는 단가가 상당히 높다 보니 쏘렌토나 카니발 한 3~40대 정도 팔면 현행 고액 연봉자 연봉이 나오고, 그랜버드 한 100대 정도 팔면 특급 FA를 잡을 수 있지만, 맛동산, 부라보콘 같은 제과류는 단가가 낮아서 정말로 몇십 ~ 몇백 만 단위로 팔아야 나오는 금액이다.
후에 해태 타이거즈가 현대자동차그룹으로 넘어간 이후 박건배 전 구단주는 전 해태 선수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이렇게라도 해서 팀을 이끌어 오지 않았는가? 그 당시 섭섭하게 했던 건 미안하네."라는 뉘앙스의 말을 하기도 했다. 김응용의 말에 의하면 박건배 회장은 야구단에 돈을 쓰고 싶어 했으나 박건배 회장 아래 이사진들이 '야구단에 돈 쓰는 건 돈 낭비'라고 했다고 하며 박건배 회장을 옹호하고 있단다. 물론, 진실은 당사자들만이 알겠지만 말이다.
이후 해태그룹은 전자 사업은 물론 중공업 사업까지 진출하며 몸집을 불렸고 1990년대 한때 재계 서열 30위 안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IMF 크리를 맞고 호남의 이웃 구단 쌍방울 레이더스와 더불어 선수를 팔아 연명하는 지경까지 이르자 어쩔 수 없이 야구단을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동안 연습구장도 마련하지 못할 정도였으며[48] 체력단련실은 일개 동네 헬스클럽보다도 못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해태제과에서 생산하는 일부 제품들 문서를 보면 "너희들 연봉 줄려면 ○○○ 몇 개 팔아야 하는지 알아?!" 하는 개드립이 달려 있다. 이 개드립의 예외라면 해태 타이거즈가 현대자동차그룹으로 인수된 이후에 출시된 마루시리즈[49], 얼려먹는 초코만들기, 오사쯔나 허니버터칩 정도이다. 이종범이 비디오스타에 양준혁과 같이 출연했을 당시 양준혁이 '팀 성적은 해태보다 안 좋았어도 연봉은 이종범보다 항상 높았다'라고 말하자 이종범은 '회사가 (비교가) 안 돼요~ 삼성은 반도체 팔고 우리(해태)는 맛동산 10봉지 파는디~'라고 말할 정도였다.[50]
이렇듯 구단의 재정이 열악했던 탓에, 해태가 강팀이었던 것을 못내 아쉬워 했던 타 팀 선수들이 많았다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전해진다. "밥 먹듯 우승하는 해태 선수들도 고작 그 돈 받고 뛰는데 느그들이 무슨 낯짝으로 그렇게 돈을 많이 달라 지랄이냐?" 식의 말이 연봉 협상 때마다 나오는 구단 측의 레퍼토리였는데, 특히 KBO 한국시리즈에서 해태에게 매번 무릎을 꿇어야 했던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과 해태의 동종업계 라이벌 구단 롯데 자이언츠 선수들이 이런 압박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한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봉연, 김성한, 이건열 등이 술회하기를 삼성 선수들과 농담삼아서 '이번 한국시리즈는 우리(해태)가 질 테니까 보너스 너네(삼성)랑 나눠 갖자'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삼성 선수들이 연봉 협상에서 연봉 인상을 주장하면 삼성 프런트에서는 '우승도 못 하는 주제에 무슨 돈 타령이냐'라고 타박했으며, 이만수가 친구 김성한에게 전화를 걸어서 '야! 올해 너 연봉 좀 많이 받아랏! 너가 많이 받아야 나도 많이 받을 거 아니냐!'하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김응용 감독도 비슷하게 다른 팀 감독들이 네가 많이 받아야 우리도 더 받는다라는 하소연으로 인해 연봉 협상 당시에 계약금은 됐으니 연봉을 더 올려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어느 시즌에서는 전반기에서 1위를 차지하면 팀원들에게 보너스를 주기로 했으나 0.5게임차로 OB에게 1위를 놓치자 팀원들 앞으로 준비했던 보너스 1.5억원을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태음료 CF 계약금으로 줘버려서 당시 상조회장(주장)이던 이순철이 구단 사무실을 찾아가서 싸웠다고 했다.
하지만 재정적 지원은 열악했어도 선수들의 식단만큼은 의외로 풍성했다는 평이다. 특히 선수단 식단에 매 끼니마다 고기가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물며 하와이 전지훈련 때 나오는 햄버거에는 원래 레시피보다 고기 패티를 몇 장 더 얹어서 줄 정도였다고 한다.[51] 물론, 프로 스포츠 구단이면 아무리 환경이 열악해도 먹는 것 만큼은 풍족해야되고 당연히 이 정도는 기본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다만 이것도 해태 구단에 식비예산이 특별히 많아서 자발적으로 매일 고기를 밥상에 올린 게 아니라 김응용 감독의 요청사항 때문이었다고 한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김응용 감독은 젊은 시절 엄청난 식욕을 자랑하는 육식주의자(...) 성향이었는데, 단백질이 풍부히 들어간 고기를 많이 먹어야 선수들이 힘을 낼 수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게 지나쳐서 매 끼니 때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간에 고기요리를 많이 먹어야되다 보니 선수들에게는 꽤나 고역스러웠다고 한다.[52] 남들이 보기에는 부러운 식단이라지만, 그것도 몽골인 수준으로 너무 많이 먹이니 선수들이 질리고 지겨워한 것이었다.
10. 자율야구 그리고 연습량
타 팀에서는 코칭 스태프 주도하에 훈련을 실시했지만 해태는 선수들이 알아서 연습하는 문화였다. 김응룡 감독은 '훈련을 오래하면 선수들이 다친다'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으며 팀 단체 훈련은 수비 훈련 때만 하는 것으로 했고 선수들은 알아서 섀도우 피칭, 티배팅, 배팅 볼 배팅 등을 했다. 선수들은 김응룡 감독의 자율야구의 원조라고 말하고 있다.타자들은 타격 연습에 대한 욕심이 상당했다. 조를 짜서 배팅 볼 투수가 던져주는 배팅 볼을 인당 5~7개씩 치고 다음 대기하는 선수들에게 넘겨줘야 하는데 혼자서 10~20개씩 치고 넘겨줘서 후배들은 고작 1~3개만 칠수 있었으며 그마저도 대기하고 있던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야 너 빨리 나와'라고 말하거나, 배팅 케이지 앞에서 서로 먼저, 서로 더 치겠다고 싸웠다고 한다.연습량이 모자란 선수들은 모교인 광주일고, 광주상고에 가서 후배들에게 빵과 음료수를 사주고 배팅 볼을 던져주라고 할 정도로 훈련에 열심이었다. 또한 경기가 저녁에 있을 경우 선수들이 보통 14시 경에 출근한다고 하면 일부 선수는 12-13시부터 나와서 배팅 연습을 했다. 이건열과 송유석은 배팅 볼을 던져주고 김성한이 사주는 짬뽕을 먹었으며 김성한은 그렇게 자신을 위해 고생한 후배들에게 짬뽕뿐만 아니라 짜장면, 볶음밥까지 사줬다고 술회했다.
해태는 유독 서울 원정 경기에서 강했는데 그 이유는 선수들이 대학교를 서울에서 대부분 졸업하여 지인들이 많고 이들과 놀기 위해서였다. 만약 서울 원정 경기에서 패할 경우 외출 금지였으며 이는 코칭 스태프가 금지했다기 보다는 선수들이 알아서 외출을 자제하고 내일 게임을 준비한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파악 못 하고 외출을 시도하는 선수들은 숙소 창문 밖 배관을 타고 내려가기도 했으며 코칭 스태프들에게 적발되면 아낌없는 질타를 받았다. 전날 지인들과 술잔을 나눈 선수들은 쓰린 속을 달래려 짬뽕을 경기 중간 클리닝 타임 때 시켜 먹고는 했다. 배달부가 배달통을 들고 덕아웃에 들어와 '짬뽕 시키신 분?'을 외쳤다고 한다.
군기가 강한 팀이었지만 의리가 강했고 선배들이 후배들을 위하는 마음도 강했다. 선배가 후배와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야구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폼에 문제가 있다면 코칭 스태프가 아닌 선배들이 바로 잡아주기도 했다.
11. 팬덤
호남 출향인이 수도권, 충청권, 영남권 등 전국 각지에 진출한 이유로 해태의 원정 경기 때 홈 팀을 응원하는 관중들보다 오히려 원정 팀 해태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였다. KIA 타이거즈로 바뀐 2000년대 이후에도 KIA의 홈 경기는 평일보다는 주말에 주로 편성하고 있다.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일권과 서정환은 광주광역시 거주 당시 이웃들이 담가준 김장김치를 받았으며, 김봉연은 교통사고로 한동안 운전이 곤란할 당시 택시기사가 매일 집 앞에 대기하고 있었으며 택시비를 지불하려고 하자 '올 시즌 끝날 때까지 요금 안 받겠습니다. 그 대신 홈런을 많이 쳐주십시오'라고 해서 택시기사 가족을 초청해 고기를 대접했다고 했다. 방수원은 병원에 방문했을 당시 먼저 대기하고 있던 환자들의 차트 위로 본인의 차트를 간호사가 올려놨다고 했으며, 김종모는 디스코텍에 방문했을 당시 다른 테이블에서 본인이 있던 테이블로 술과 안주를 보내왔다고 했다. 김성한은 부산 사직야구장 게임을 앞두고 인파속을 뚫고 본인에게 다가온 어느 팬이 꼬깃꼬깃 접은 1만원권 1장을 손에 쥐어주면서 '이 놈으로 짬뽕 사먹고 오늘도 홈런을 쳐달라'[53]라고 말해 김성한을 울컥하게 만들었으며 김성한은 그날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홈런을 쏘아올리며 팬들의 기대에 보답했다.
12. 의의
해태 타이거즈의 강력함은 다른 팀들에게는 충격과 공포의 전력이었고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해태 타이거즈 특유의 끈끈한 근성 야구[54]는 당시 호남인들의 일상의 유일한 낙이요 희망이었다.워낙에 전설적인 그 이름의 무게로 인해서 "지금의 KIA 타이거즈는 해태의 전설에 좀 눌려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KIA는 해태의 계보를 계속 이으려고 함과 동시에 해태 색을 지우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야구를 오래봤던 올드 팬들의 반발이 심해지니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워낙에 성적이 좋은 전설적인 구단이며 호남을 연고로 한 탓에 지역 출신 선수들에게는 선호도가 높았다. 예를 들면, 군산상고를 나온 최해식은 쌍방울이 창단되는 해 졸업하여 지역 우선 지명을 당하면서 "해태 가고 싶은데 1년만 늦게 창단되지..." 하며 눈물을 삼켰다고 한다. 다행히도 최해식은 몇 년 뒤 트레이드가 되어 해태 선수가 될 수 있었는데 최해식의 증언에 따르면 우승 보너스도 나쁘지 않았던 편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해태 선수들이 실제로 받았던 지원은 형편없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해태제과의 재정이 애초부터 영 좋지 못한 상황에서 구단을 억지로 창단했고 마음대로 해체도 할 수 없었던 상황이라 마냥 해태 구단만을 탓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전라도 지역에 프로야구단을 운영할 만한 대기업이 없었던[55] 당시 지역 경제 사정이 모든 것의 원인이다. 만약 풍족한 모기업을 뒤에 두고 창단을 했다면 해태와 같은 성적이 나왔을까. 그런 점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거나 지금도 해태 전성기를 보낸 김봉연, 김성한 등의 OB들의 해태 부심은 대단하다. 하지만, 광주일고 출신인 박재홍은 많은 계약금을 줄 수 없었던 해태를 거부하고 현대와 계약했다. 그리고 KIA로 바뀐 뒤에도 KIA에서 뛰다가 FA 취득일 수 문제 등으로 구단과의 마찰을 빚다가 SK로 이적했다. 그 결과 호남 팬들은 박재홍을 고향을 버린 사악한 놈 취급을 하게 되었다. 다만 이후 밝혀진 진실에 따르면 현대 계약 건은 박재홍의 잘못은 아니었고 일종의 인질극에 걸린 것이었으며 KIA에 있을 때도 올드 스쿨의 대표 주자였던 김성한 감독과 정재공 단장과의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당연하겠지만 이는 김 감독과 정 단장의 잘못이 컸는데 자세한 건 박재홍 문서 참조. 문제는 이게 박재홍이 은퇴하고 10년이 넘게 흐른 2020년경에나 밝혀진 진실이었다는 것. 그동안 박재홍은 고향 팬들에게 부당한 매도를 당하며 마음 고생을 심하게 해야 했고 오죽했으면 레전드 40 인터뷰에서 다음 생에선 고향팀 선수로 뛰며 고향 팬들에게 사랑받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토로했을 정도였다.
어쨌든 해태 타이거즈의 선전은 그 자체로 1980년대 정치·사회·경제·문화적으로 소외되고 핍박받았던 전라도 지역 시·도민들에게 위안과 화합의 매개체로 작용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초의 응원단장으로 활동한 임갑교 옹의 활약상과 임갑교 옹의 색소폰 반주에 맞춰 관중들이 불렀던 구슬픈 곡조의 응원가 목포의 눈물이다. 이는 해태의 첫 우승 당시 잠실야구장에서 제창한 것이 유명한 장면인데 프로야구의 출범이 소위 3S 정책의 일환으로 탄생한 산물이었지만 역으로 호남 지역에서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 과정의 상처와 그로 인한 호남 소외 정서를 프로야구 승리의 기쁨으로 표출하는 분출구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을 할 수 있다.
특히 해태의 선전은 1980년대 호남 지역민들의 정치적 울분을 해소하는 해방구이자 2년전 일어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충격에 대한 분출구라는 점을 꼽을 수 밖에 없다. 대표적으로 영남대에 재학중이다 잠시 집을 방문했던방수원은 계엄군에게 찔려 기절을 당한 뒤 일어나보자 선동렬의 아버지가 무릎꿇고 선수들 교육 잘 시켜놓겠다고 빈 덕분에 다같이 살 수 있었다는 증언,
김정수는 맹장수술로 입원 해있는 당시 갑자기 시체와 부상자들이 병원에 들어오고 집에 갔더니 어머니가 벽에 솜이불을 두르고 있었다는 증언, 장채근은 그당시 고등학생이였지만 야구선수라 몸집이 크다보니 대학생으로 오해당해 계엄군에 붙잡였던 경험을 증언했다 #광주일고[56],광주상고 출신들을 아무래도 직접 5.18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경기에서 이긴 해태 팬들이 승리의 찬가 형식으로 목포의 눈물을 제창한 후 어김없이 외쳤던 구호는 김응용 감독이나 당시 주축 선수였던 김성한, 김봉연, 선동열도 아닌 호남의 정신적 지주였던 정치인 김대중이었다. 실제로 이것 때문에 빙그레 이글스에서 뛰었던 투수인 김대중[57]은 특이하게도 광주 원정 때 등판하면 광주의 해태 팬들에게 이름이 외쳐지는 진풍경을 경험하기도 했다. 덕분에 광주 야구 팬들은 빙그레가 광주에 원정 오면 내심 김대중이 등판하길 바라며 김대중의 이름을 외쳐댔고 그래서 김영덕 당시 빙그레 감독이 일종의 팬 서비스로 승패 상관없이 김대중을 등판시켜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야구 자유기고가 김은식은 2009년에 펴낸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에서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을 통해서 표출된 호남의 정서를 1980~90년대 현대사의 주요 장면과 연결시켜서 서술하고 있다. 당시 "타지에 나가 일을 하면서 살던 전라도 사람들에게도 별로 다를 바가 없어서, 전라도 바깥에서 마음놓고 자유롭게 전라도 사투리를 쓸 수 있는 곳은 야구장밖에 없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는 지역 연고가 더욱 강했던 시절임에도 해태 타이거즈가 전국구급의 구단으로 인기가 많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13. 유니폼
1983년부터 1995년까지 해태 홈 경기 유니폼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 경기 유니폼을 본뜬 것이었다.그러나 원정 경기 유니폼은 매우 독특해서 다른 나라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빨간상의에 검은 바지였고, 이는 김동엽 초대 감독의 디자인으로 알려져 있다. 해태 런던 드라이진에 붙어 있었던 영국 버킹엄 궁 근위병의 복장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설이 있다. 이 유니폼은 하도 강렬한 인상을 줘서 해태 타이거즈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58] 또한 검은 바지는 열을 흡수하여 여름만 되면 선수들이 땀 때문에 고생했다고 한다. 이종범이 예전에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일명 "검빨 쫄쫄이" 유니폼의 단점을 자세히 이야기한 적이 있다.
1996년부터는 원정과 홈 경기 유니폼 모두 앞가슴의 "해태" 한글 로고를 영문으로 바꾼 새로운 유니폼이 도입된다.
해태의 검빨 유니폼은 아직도 올드 야구 팬이건 현대 야구 팬이건 간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지만 오늘날 팬들은 올드 유니폼 데이를 하면, 당연히 하얀색의 홈 팀 전용 유니폼만 보다가 검빨 유니폼을 보니 적응이 잘 안되는 모양...
구단 쪽의 반응은 영 미지근했지만, 2011년 7월 26일 삼성과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실시했다.[59] 아이러니한 것은 이 유니폼을 입은 2연전을 삼성에 전패했고, 이것이 KIA 후반기의 몰락의 시초가 되었다. 결국 4위로 정규 시즌을 마치고, 포스트시즌에서도 광탈했다.
2013년 8월 11일에도 올드 유니폼 데이를 실시했다. 이날도 삼성과의 경기를 가졌으며, 이번에는 삼성전 연패를 끊는 귀중한 승리를 안겨주었다.
2020년 6월 20~21일 오랜만에 올드 유니폼 데이를 실시한다. 상대는 또 삼성이다. 이번에는 문희수와 김봉연의 시구와 시타를 맡기로 되어 있다. 88고속도로 씨리즈 참고.
2022년 5월 8일 한화 전에서 어버이날 특집으로 전 구단이 올드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했다. 이때 한화 역시 이에 호응하여 빙그레 시절 유니폼을 입었다.
[1] 호남 야구가 꽃피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이다. 경북 쪽의 야구 명문고들이 1950년대부터 나온 것을 보면 한참이 지난 후다. 2000년대 이후 각 팀의 주축 선수들이 호남 출신인 경우가 많다는 것과 비교해 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모습.[2] 사실 공식적으로 2군이 있던 건 그 이전인데, 2군이 본격적으로 활성화 된 것은 김성근이 부임한 1994년부터이다.[3] 김봉연, 김준환, 서정환은 선수 말년에 플레잉 코치를 겸했다.[4] 이 셋이 동시에 있던 시절은 1995년 딱 1년뿐이다. 그마저도 임창용은 당시 주로 2군에 있었고 선동열이 주니치로 떠난 1996년부터 주전으로 활약했다. 대신 이강철과 임창용도 조계현이나 이대진 등 선동열 데뷔 후에 등장한 정통파 에이스들과 같이 뛰어봤으니 이 공식은 성립된다.[5] 이강철, 이대진, 권명철의 부상, 임창용의 이적, 김상진의 위암 투병[6] 물론 삼성도 투수진이 약했던 건 결코 아니었으며 한국시리즈 우승을 못해서 그렇지 8~90년대 삼성도 가을야구 단골 손님이었다.[7] 하지만 이쪽은 LG가 동 시즌 팀 평균자책점 1위, 팀 타율 8위였는데 정규 리그 3위를 했다는 반박거리가 존재한다. 오히려 야구는 투수 놀음이라는 걸 증명하는 사례가 될 수도 있다.[8] 한국에서 가장 흔한 성씨가 김씨라서 비롯된 이야기다.[9] 이는 광주광역시 - 전라남도 - 전라북도 할 것 없이 전라도 출신이라면 유독 끈끈하게 뭉치는 지역적 특성도 한 몫을 했다. 해외에서도 모인다는 호남향우회가 괜히 한국 3대 연고주의 사조직으로 꼽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각종 선거들에서도 민주당계 정당이 호남에서 괜히 80% 이상의 몰표를 얻는 것이 아니다.[10] 당시 해태 선수단 내에는 군산상고, 광주일고, 광주상고, 광주진흥고 등 호남권 내 여러 학교의 선수들이 모여 있었다. 비중으로는 군산상고 출신이 매우 많았지만 이들은 군림하지 않았고, 타교 출신 선수들과 어울리며 팀을 이끌어가면서 학교간 파벌 싸움을 만들지 않았다. 이와 달리 롯데 자이언츠는 경남고와 부산고 출신 선수끼리 파벌 싸움이 심각했고, 삼성 라이온즈도 대구상고와 경북고 간의 갈등이 있었으며, 빙그레 - 한화 역시 천안북일고와 세광고 출신 선수 간 갈등이 있었다.[11] 그 당시는 아마추어 선수만 상무에 입대할 수 있었다. 참고로 2014년 이후의 군대가 아닌 쌍팔년도 ~ 90년대 초 군대로 흔히 말하는 밤에 점호 끝나고 줄빠따 안 맞는 날이 더 무서운 날이던 시절.[12] 1993년도 KBO 올스타전에서 한대화에게 발길질을 했으며, 이게 전파까지 타서 한동안 논란이 되었다.[13] 이 선수는 KIA로 바뀐 이후였는데도 트레이드를 거부한 케이스. 하지만 이 선수가 KIA로 오기 전 해에 감독이 포수를 폭행한 사건이 터진 것을 감안하면 이해 못 할 처사는 아니었다.[14] 김일권, 김성한의 뒤를 이어 군기반장을 맡은 이순철을 유남호 수석코치가 때린 게 사태의 발단이었다. 코치들도 무서웠지만 선수들은 선수들간의 위계질서 및 팀워크를 제일 중요하게 여겼고 최고참 선수가 맞는 걸 보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김일권, 김종모 당시 코치가 수습해보려고 했으나 유남호에 막혀 수습이 어려웠다.[15] 다만 이병훈 본인의 말을 보면 이 사건으로 인해 이호성과 친해졌다고 한다. 둘 다 동갑내기인데다 같은 1990년에 데뷔를 했다. 이호성은 당해 년도 골든글러브 수상, 이병훈은 팀의 첫 우승을 맛보았다.[16] 이 쪽으로 유명한 케이스가 후술하게 될 최훈재다.[17] 삼성 라이온즈에서 넘어왔는데, 한국프로야구 출범 후 최초의 트레이드 선수였고, 한동안 팀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했다. 본인 스스로도 자신은 전라도 사람이라고 할 정도.[18] 원래는 OB 베어스가 충청도 연고팀이던 시절에 뛰었다가 해태로 트레이드 됐다. 물론 애초부터 순순히 해태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19] 1992년 해태의 1차지명 신인이던 박재홍과의 지명권 트레이드로 해태에 입단했다.[20] 여담이지만, 박충식은 오히려 인사를 받는 쪽이었다. 당시 그보다 나이 많은 고참선수라고 해 봐야 이호성이나 최해식, 김태룡 정도였으니 말이다.[21] 친한 사이인 경우 성만 붙여 X 선배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22] LG 아수조에서의 서열 정하기는 입단 순서가 아닌 연봉 순서였다고 한다.[23] 당시 저 셋은 5년차 이상 뛴 베테랑들이었다.[24] 이제 여기서 그러면 나도 같이 먹어도 될까? 라는 의미도 내제되어 있었다고 한다.[25] 사실 투수조도 저런 군기문화로 고생을 많이 하긴 했지만 군기반장 계보를 이으며 투수들을 갈궜던 이들은 전원 야수들이었고 투수진 대표들이던 선동열, 이강철, 조계현, 이대진 등은 군기를 잡으려 드는 인물들은 아니었다. 특히 이대진은 나중에 이종범과 함께 해태 시절의 똥군기를 대거 정리하기도 했다. 거기에 노는거 좋아하던 임창용에 대해서도 딱히 제재가 없었던 걸 보면...[26] 1997년에 입단한 좌완투수로, 1996 애틀랜타 올림픽 국가대표였다.[27] 양준혁이 해태로 오는 과정이 순탄치 못했던 탓에 차마 대놓고 고개를 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28] 해태 내에서는 미팅이라고 표현한다.[29] 왜냐면 운동계에서의 엄격한 군기는 서구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생각보다 큰 문제 없이 해태 문화(...)에 적응한 것일지도 모른다.[30] 송유석은 스타급 선수들은 손만 흔들어도 팬들이 태워주는데 본인처럼 인상 강하고 무명 선수들은 무서워서 태워주지 않는다며 경운기를 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31] 선동열은 현역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도자가 된 이후에도 성적과 상관없이 굉장히 호탕하고, 어린 선수들에게 잘 하면 직접 용돈을 주는 등 인격적인 면에서는 결함이 전혀 없다.[32] 역으로 투수 쪽에서 군기가 제일 심했던 팀은 LG 트윈스다. 이상훈이 1년 후배 류택현한테까지 원산폭격을 시켰다거나 야구 설렁설렁 한다고 안경을 낀 신윤호의 따귀를 때린 이야기들은 워낙 유명하고, 최원호나 오상민, 장문석 등도 투수 고참일 때 투수조장 시켜서 애들 좀 잡으라고 오더를 내린 일화도 있고, 이동현과 봉중근 때까지도 성격 괄괄한 투수조 조장이 후배 투수 군기잡는 문화가 강했다. 2016년 류제국이 주장이 된 이후로부터 상당히 개선이 되었고 임찬규가 최고참 급인 2020년대는 해당사항이 없다. 야수조와 투수조의 군기가 정 반대였던 셈.[33] 특히 위에 예시로 언급된 선수 중에 호남 출신이 많은데 그중에도 이호준, 정성훈, 홍현우, 임창용은 해태의 제1연고지인 광주 출신이었다. 그만큼 고향을 떠나 타지로 가는 것이 두려웠던 셈. 그러나 서정환, 최상덕, 장성호, 홍세완, 유동훈처럼 타 지역 출신임에도 해태에 대한 무한 애정을 드러내는 선수들도 있다. 특히 서정환의 해태 사랑은 남달라서 대구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호남 출신으로 아는 사람도 많으며 본인 역시 자신은 전라도 사람이라고 할 정도다.[34] 다만 2015년 사건은 선수가 아니라 더 윗선에서 내린 지시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다.[35] 임창용은 삼성과 일본에서 잘 나갈 때도 "은퇴는 꼭 타이거즈에서 하고 싶다"라는 발언을 꼭 했다. 이호준은 SK와 KIA가 한창 대립각을 세울 때도 공공연히 "KIA가 우승했으면 좋겠다"라는 얘기를 서슴없이 했고, 양팀 사이의 벤클 시에도 아예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NC에서 은퇴 시즌에 광주 원정 경기에서 은퇴는 꼭 타이거즈에서 하고 싶었다는 소회를 밝히기까지 했다. 정성훈은 현대 이적 소식이 나오자 떠나기 싫다고 대성통곡 했고, 그 후 올스타전 때 KIA 헬멧을 쓰고 나오는 기행을 선보이기도 했다. 장성호는 이적 후에도 경기장에서 타이거즈 팬들을 접할 기회가 생기면 꼭 자기가 먼저 나서서 적극적으로 피드백을 하고 야구공 같은 걸 선물로 건낼 정도였다.[36] 다만 첫 FA때 KIA가 아닌 원 소속 팀 삼성과 계약을 했다. 이는 삼성이랑 대립각을 세우면서까지 해외 진출을 추진했다가 잘 풀리지 않았고 KIA 역시 시장에서 철수한지 오래라 삼성 말고는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37] 프로야구 팀은 여러 프로 스포츠들 중에서도 돈이 상당히 많이 들어가는 편이다. 한국의 프로야구 팀의 모기업들은 대개 삼성, LG, 롯데, 기아(현대자동차), 두산, 한화, 신세계그룹, KT 등 재계에서도 손꼽히는 대기업들이다.[38] 지금이야 트레이드가 잉여 전력을 내주고 즉전감이나 유망주를 받아오는 등 각 팀의 약점을 보완하는 수단, 즉 비지니스 중의 하나로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했지만, 1980년대 ~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트레이드 당한 선수는 그 팀에서 거진 토사구팽 당한 꼴이나 다름없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최동원.[39] 삼성에서 트레이드해서 온 박충식의 증언이다. 해태는 와 보니까 재활은 커녕 일개 헬스클럽만도 못한 운동시설만 있었다고 한다. 일례로 웨이트기기에 쇠로 된 추가 아니라 돌을 매달아 놨었다고 하며, 양준혁의 증언에 의하면 아령의 칠이 벗겨질 정도였다고 한다.[40] 이 사건으로 최동원이 롯데에서 토사구팽 당하다시피 하며 김시진과 맞트레이드 되었다.[41] 사실 양동통닭 자체는 양이 많고 맛도 나쁘지 않아서 광주광역시민들에게 인기가 매우 많은 시장 통닭이다. 2015년 11월에 백종원의 3대 천왕에도 등장했을 정도로 맛도 좋고 전통도 깊고 인지도도 높다. 양동통닭도 좋은 치킨이지만, 안두하가 원했던 파파이스가 아니어서 문제였던 것이다. 광주에 파파이스 지점이 아예 없었다면 그나마 정상참작이 되겠다만, 당시 광주에는 파파이스 매장이 2개나 존재하고 있었다. 즉, 사줄 수 있었음에도 안 사준 것이기에 해태는 이 사태에 대해서도 솔직히 욕 먹어도 싸다. 물론 박충식의 증언과 같은 여러 정황들을 살펴 본다면 정말로 단순히 치킨 하나 때문에 해태를 떠난 것은 아닐 것이다.[42] 심지어 유니폼 마킹마저 달랐다.[43] 따귀를 맞았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김일권이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밝히기로는 서로 멱살을 잡으려다가 선수들이 겨우 말렸으며, '감독이 때리면 내가 맞을 성격이냐?'라고 덧붙였다.[44] 그래도 1997년 이후의 쌍방울 레이더스처럼 선수들을 무지막지하게 팔아치우지는 않았다. 해태가 수십억의 트레이드 머니를 받으면서 선수 교환을 단행한 것은 1998년 말 20억원의 현금이 추가로 오간 양준혁과 임창용의 트레이드가 사실상 유일하다. 물론 해외 구단으로 선수를 보내며 이적료를 받은 적은 있다. 그 사례들이 주니치 드래곤즈로 간 선동열과 이종범.[45] 90년대 당시에는 어느 정도 자리잡은 대기업 직장인 1년치 급여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46] 여담이지만 써니텐을 생산하는 해태htb는 지금은 LG생활건강 계열로 넘어갔다.[47] 현재 기준으로 약 20만 개. 물론 당시 기준으로 보면 더 팔아야 했을 수도 있다.[48] 원래 해태는 1990년대 전라남도 함평군에 전용 연습구장 부지를 매입해서 장기적으로 연습구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외환위기 이후 구단 재정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기존의 계획이 무산됐다. 이후에도 해태는 연습구장도 없이 2군을 운영해야 했고, KIA로 넘어간 이후에야 전라남도청으로부터 2군용 야구장 하나를 빌려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전남 야구장이다. 이후 시간이 더 지나 기아 챌린저스 필드가 지어지고 나서야 제대로 된 2군 시설이 갖춰지게 된다.[49] 체리마루, 호두마루, 피스타치오마루 등.[50] 여담으로 헬멧에 봉봉, 맛동산, 브라보콘 등 해태제과와 해태음료 상표를 붙일 때 창피했다고 덧붙였다.[51]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성한과 최해식이 설명하기를 김응룡 감독은 햄버거를 워낙 좋아해서 햄버거를 만드는 재미교포 레프티 리에게 부탁해서 패티를 더 얹었으며 선수들은 햄버거에 질린 나머지 고기 패티를 비둘기에게 주자 나중에는 비둘기들이 비만이 됐고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피하지 않을 정도라고 했다.[52] 오랫동안 김응용 감독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김성한은 한화 이글스에 와서도 김응용 감독의 고기사랑이 이어져서 한화 선수단도 매 끼니마다 고기를 먹어야 했다고 회상했다. 김치찌개, 국수 등을 먹고 있으면 '그딴 걸 먹기 때문에 니들이 힘을 못 쓰는 거 아니야?'라고 타박하면서 '양놈들을 봐라! 고기를 먹으니 저렇게 힘이 좋은 거 아니냐!'라고 육식을 장려했다고 한다. 대만 전지훈련 때 선수들과 코치들은 향이 강한 대만 음식을 힘겨워하고 있는 와중에 김응용 감독만큼은 '촌놈들은 이렇게 맛있는 것도 먹을 줄 모르고!' 하면서 혼자서 독식했다고 한다. 투수 김봉영(김봉연이 아님)은 고기를 남기자 김응룡 감독은 '야! 쟤 한국으로 돌려보내!'라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강영식과 채태인, 이태양의 사례를 봐도 김응용 감독은 맘에 든 유망주에게도 직접 햄을 구워 먹일 정도로 육식을 강요한다고 알려져 있다. 비슷한 사례로 6/70년대 당시 정부에서 비록 영양학 측면에서의 접근은 아니었지만 예전부터 고기를 먹여야 힘이 나고 체력이 좋아진다는 속설에 의거해서 축구 국가대표팀 대상으로 세끼 내내 쇠갈비를 푸짐하게 먹였다고 한다.[53] 사직 야구장 게임 바로 전날 잠실야구장에서 김성한이 게임을 앞두고 짬뽕을 먹는 모습을 기자가 포착했고 김성한이 홈런 2방을 때리자 '김성한 짬뽕포'라고 기사를 썼다.[54]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을 때 우승 확률이 100%라는 해태 타이거즈였지만, 압도적인 전력이라고 평가를 받은 시즌은 1988, 1991, 1993 시즌 정도밖에 없다. 1987년, 1996년, 1997년은 오히려 예상을 깬 우승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55] 상위 문서인 해태 타이거즈 문서에도 나오지만 창단 당시 호남권 프로야구단 창단 후보로 꼽혔던 기업은 삼양사, 금호그룹, 대한교육보험 등이 있었지만 삼양사는 형님 회사가 문화사업을 맡고, 금호와 교보는 다른 문화사업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야구단 창단을 고사했다. 이외에도 대상그룹이나 쌍방울그룹 등이 또 다른 호남 연고 대기업이라고 볼 수 있지만 다른 대기업들보다 덩치가 많이 왜소했고 재무 구조 역시 불안했다. 실제로 쌍방울은 1990년대 전북을 연고로 레이더스 야구단을 창단했으나 자금난 때문에 문을 닫고 말았다.[56] 특히나 광주일고는 학교와 운동장이 광주시내 한복판 금남로에 있었다.[57] 심지어 이쪽은 이름을 구성하는 한자도 똑같다![58] 이 때문에 KIA에서 올드 유니폼 데이에 매우 소극적인 면도 있었을 것이다. 기아는 해태의 계승을 외치지만, 동시에 해태 색을 지우고 싶어하기도 했었다. 결국 2020년 현재는 이 색 조합의 올드 유니폼을 출시하고 판매하는 것으로 팬들의 손을 들어주긴 했다.[59] 그런데 하필이면 유니폼을 제작한 회사가 네포스다! 그래서 팬들 사이에서는 1회용 이벤트로 끝내는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