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당시 불에 타 버린 차량의 모습[1] |
1986년 10월 22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해태 타이거즈와 삼성 라이온즈의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삼성이 역전패 당하자 흥분한 2000여 명의 삼성 관중들이 해태 타이거즈의 구단 버스를 부순 뒤 불을 지른 사건이다.
1990년 잠실구장 관중 집단 난동 사건과 더불어 프로야구 사상 최악의 관중 폭력 사건으로 꼽히며 정치판의 영호남 지역갈등이 스포츠에 투영된 최악의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2. 배경
1986년 플레이오프에서 혈투 끝에 삼성 라이온즈가 OB 베어스를 3승 2패로 꺾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여 해태 타이거즈와 맞붙게 되었다.1986년 10월 19일 광주 무등야구장에서 마침내 한국시리즈 1차전이 열렸다. 해태의 선발 투수는 선동열. 삼성은 양일환을 선발로 내세웠고 3회에 양일환이 흔들리자 김영덕 삼성 감독은 발빠르게 진동한으로 투수를 교체했다. 진동한의 호투로 경기는 투수전 양상으로 흘러 7회까지 0-0의 상황이 이어지다가 마침내 7회초 삼성이 김성래의 홈런으로 2-0으로 승기를 잡았다.
3회에 구원 등판한 삼성의 진동한은 7회말까지 14명의 타자를 맞아 단 세 개의 안타만을 내주며 무실점으로 호투하고 있었다. 7회말을 마친 진동한은 덕아웃 앞에 서서 모자를 벗고 땀을 닦고 있었는데 그때 사건이 발생했다. 덕아웃 바로 위에 있던 해태 팬이 덕아웃 앞에 서 있던 진동한의 머리를 향해 소주병을 내던진 것이다. 김영덕 감독은 소주병에 맞아 머리 부상을 당한 진동한을 빼고 김시진으로 투수를 급히 교체했다.
그러나 8회에 구원 등판한 김시진은 몸이 덜 풀렸는지 김성한-김봉연에게 연속안타를 내주고 실점하여 2-1이 되었고 삼성이 3-1로 달아난 9회말에도 1사 후 밀어내기로 실점을 허용하여 3-3으로 경기는 연장전에 돌입했다. 연장전에서 해태는 조충열의 중전 안타에 이은 김일권의 보내기 번트, 서정환의 볼넷과 김성한의 결승타가 연결되어 4-3으로 역전승을 했다.
경기가 끝난 후 인터뷰에서 김영덕 감독은 진동한이 부상당하여 예기치 않게 투수 교체를 하게 된 것이 패전의 원인이 되었다고 말했고, 이를 TV로 지켜보던 대구 삼성 팬들을 격노하게 만들었다.
다음 날 열린 2차전에서는 삼성이 2:1로 승리하면서 양팀은 1승 1패로 동률이 되었다. 삼성 팬들은 진동한의 부상만 아니었다면 1, 2차전을 모두 잡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분노했다.[2]
3. 버스 방화 사건
대구광역시(1986년 당시 대구직할시)에서 텔레비전으로 한국시리즈 1, 2차전을 지켜본 대구아재들은 1차전의 패인을 해태팬의 소주병 투척으로 인해 진동한이 교체된 탓으로 여겨 크게 격분했는데 "너희들 대구로 오기만 해봐라. 그 땐 죽을 줄 알아라!"라며 벼르고 있었다. 일부 프로야구 관계자들은 10월 22~23일 대구에서 치러질 3, 4차전에 대해 우려했으며 결국 우려는 현실로 다가왔다.1986년 10월 22일 대구구장으로 이동하여 벌어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경기 시작 전부터 폭력 사태가 작게 일어났다고 하며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관중들의 격렬한 야유와 욕설이 터져 나오면서 양팀 관중들의 대립은 최고조에 달했다.
1회말 김성래의 2점 홈런에 힘입은 삼성이 3점을 내면서 앞서 나갔지만 2회초 2사에 해태 타이거즈의 김준환의 솔로홈런과 차영화의 투런홈런이 나오면서 경기는 3:3 동점이 되자 관중들의 야유와 빈병 투척이 시작되었다. 더 이상 경기 진행이 어렵다고 판단한 주심은 경찰서에 지원을 요청하고 경기를 중단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다시 속행되었다. 계속된 경기는 7회초 김성래의 실책으로 해태 타이거즈가 6:5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삼성의 패배로 경기가 끝나자 예고했던 대로 극대노한 관중들은 빈 병, 빈 깡통을 그라운드 안으로 쏟아붓기 시작했고 쓰레기가 담긴 대형 플라스틱 통까지 날아들었다. 관중들은 구장 내에서 소요를 일으킨 지 10여분 후 구장 밖으로 나와 "김응용 감독이 진동한에게 병을 던진 해태 팬을 대신해 사과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 그리고 선수들을 태우기 위해 대기 중이던 해태의 45인승 선수단 버스에 격렬한 분노를 토해냈다. 21시 45분쯤 해태 버스를 둘러싼 2천여 명의 관중들은 처음엔 버스의 차창 및 차체를 박살내다가 결국 버스 유리창을 깨고 커튼에[3] 불을 붙이기에 이르렀다.
경찰차와 소방차가 긴급 출동했지만 바리케이트까지 친 과격 팬들의 저지로 접근조차 못했다. 일부 관중들은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승용차 유리창까지 부수는 등 흥분이 극도에 이르렀다. 버스는 완전히 전소되었고 난동을 부리던 관중들은 출동한 경찰관들과 대치하면서 23시까지 농성을 벌였다. 경찰관들이 최루탄을 쏘면서 시위 진압에 나선 다음에야 관중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경기장 관리실로 대피하여 1시간 이상 갇혀 있었던 해태 선수단은 23시 5분쯤 경찰관들이 내준 버스로 숙소인 수성관광호텔로 돌아갈 수 있었다. 대구 북부경찰서는 난동 관중 일부를 현장에서 연행하여 조사했다. # 그러나 버스에 불을 지른 방화범은 이 문서를 읽고 있을 지금 이 시간까지도 찾지 못했다.[4]
당시 해태 감독이었던 김응용은 경기가 끝나고 나올 무렵 최윤범 해태 매니저가 뛰어오더니 “감독님, 버스에 불이 났습니다 불이!"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매니저가 계속 대성통곡을 하였는데, 김 감독은 오히려 웃으면서 "야 이 놈아! 웃어라 웃어. 불난 집이 재수 좋은 거 몰라?”라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현실이 되었다.. 네이버 뉴스 기사(PC로만 접속 가능) 티스토리 네이버 블로그
4. 사건 이후
4.1. 잔여경기 진행
이 사건은 한국시리즈 경기를 취재하러 나왔던 취재진들에 의해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폭동이나 일으키며 민폐 끼치는 야구팬은 필요가 없다고 강력하게 비난했으며 해태 측은 이런 분위기에서는 경기를 속행할 수 없다고 했다.KBO는 사건 당일 밤 비상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이용일 KBO 사무총장은 이 사건을 프로야구의 존속을 위협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로 여겼다고 회상했다. 관중들이 극도로 흥분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4차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왔고 그래서 처음에는 서울에서 중립경기로 4차전을 치르는 방안이 유력하게 대두되었지만 이용일 사무총장은 4차전을 서울에서 치른다면 앞으로 대구에서는 영영 야구 경기가 열리지 못할 수도 있다며 강력 반대했고 결국 경찰에 지원을 요청하여 대구에서 4차전을 치르기로 했다.
다음 날인 10월 23일 아침 대구에서 4차전이 불가하다는 외부 압력이 KBO로 쏟아졌다. 그러나 아침에 이용일 사무총장으로부터 보고받은 서종철 KBO 총재는 프로야구의 역사에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기지 않기 위해[5] 무슨 일이 있어도 대구 4차전을 강행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곧이어 서 총장은 대구시에 연락해 오전 중에 대구시 및 대구 경찰 당국과의 연석회의를 가졌고 11시에 기자회견을 열어 예정대로 경기를 치른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4차전은 500여 명의 전경 병력이 동원되어 삼엄한 경비 속에서 치러졌다. 관중들은 경찰관들의 철저한 소지품 검색을 받고 입장했으며 관중석 곳곳에 사복 경찰관들이 배치되었다.
4차전은 4회까지 0:0의 투수전으로 가다가 5회 해태가 1득점을 선취하고 앞서나갔으나 6회 삼성이 역전에 성공했지만 9회초 해태가 동점에 성공하면서 연장전으로 이어졌고 결국 해태가 7:4로 승리를 거뒀다.
4차전 후에도 분노에 찬 3천여 명의 관중들이 500여 명의 전경 병력에도 불구하고 선수단에게 오물을 투척하고 "오늘 경기를 취소하라"고 외치며 난동을 부렸으며 1차전에서 나온 해태 팬의 '빈병 투척 사건'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다. 경기가 종료된 지 30여분이 지나자 결국 경찰관들은 최루탄을 쏘며 강제 해산에 나섰다. 그러나 최루탄 발사에도 불구하고 관중들은 1시간 가량 난동을 지속했다. 양 팀 선수단은 덕아웃에서 추위에 떨며 대기하다가 밤 11시 반에야 구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후 관중들은 태평로로 이동하여 돌과 병을 던지며 경찰이 최루탄을 쏜 것에 대해 항의했다.
4.2. 손해배상 분쟁
당시 불에 타 버린 차량은 아시아자동차공업(現 기아)[6]의 AM919로 당시 출고된 지 1년밖에 안 된 차량이었다. 8,900만원에 달하는 차량[7]이 통째로 타 버렸으니 가난한 해태 구단은 망연자실했을 것이다. 참고로 당시 대학 등록금이 50만원 정도, 당시 기준으로 출시한 지 얼마 안 되었던 현대자동차의 플래그십 고급차인 1세대 현대 그랜저의 가격이 1,690만원~2,500만원이었으니 8,900만원이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다.[8]이에 대해 누가 손해배상을 해야 하는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엄밀히 말하면 불을 지른 건 관중들이니 관중들이 책임을 져야 겠지만 하고 많은 관중들 중 일부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도 없고 누가 불을 질렀는지 찾는 것도 불가능했다.
홈 구단이었던 삼성은 KBO의 책임을 주장하면서 피해 보상을 완강히 거부하고 버티면서 KBO와 갈등을 빚었다. 당시 생중계를 보고 있던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은 "저 불 낸 것은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느냐"고 묻자, 임원들은 "한국시리즈는 KBO가 주재하는 것이므로 삼성은 책임이 없다"고 말했다. 그룹 총수와 수뇌부의 의견이 이랬기 때문에 삼성 구단은 한푼도 보상할 수 없다며 배를 째라는 식으로 버텼다.
삼성 구단 측은 당시 정규시즌에서 플레이오프까지는 홈 팀이 주관하지만 한국시리즈는 KBO가 주관하므로[9] 전적으로 KBO의 책임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에 대해 KBO는 한국시리즈의 공정한 진행을 위해 경기를 주관할 뿐 관중 난동과 같은 부분까지 책임질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배상 문제는 삼성의 버티기로 해를 넘겨서도 지속되었다.
결국 해가 바뀌어 1987년, 빡칠 대로 빡친 KBO는 다른 구단들의 힘을 빌려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구단주 회의를 주최했다. 그러자 사태에 대해 보다 전향적인 태도를 갖고 있던 이건희 구단주(당시 삼성그룹 부회장)가 사건 수습을 위해 나서기 시작했다. 1987년 1월 12일 각 구단의 그룹 총수들이 참여한 총회가 열렸고 결국 이 회의에서 삼성 구단이 피해액의 사실상 전액을 배상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으며 앞으로도 한국시리즈에서 사고가 일어나면 홈 구단이 변상을 비롯한 모든 책임을 지는 규정이 추가되었다.
이후 삼성은 버스 수리비 및 버스 안에 있던 선수 물품들을 보상해 주었다. 삼성은 새 차를 사주는 대신 전소된 버스를 어떻게든 수리하여 살려내는 방법을 강구했고 그 결과 정확한 액수는 비공개지만 대략 차 수리비의 전액인 5,000여만 원[10]을 배상해 준 것으로 알려졌다.
김응용 감독이 이 사건을 회고하길, 삼성이 모든 것을 보상해준다고 하자 갑자기 김봉연이 "사실 그 안에 새 양복이 있었다, 방망이도 10개 정도 있었다!"는 식으로 불에 타서 존재가 불분명한 물건들을 적더니 다른 선수들도 있지도 않은 물건의 손해를 전부 배상해 달라고 요구하는 등 강짜를 부렸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없는 물건값을 청구해서 따로 챙긴 선수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다만 송유석이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해서 설명한 바에 따르면 버스 좌석 밑에 본인의 월급 20만원을 찾아서 뒀는데 한 달 살림을 해야 할 그 돈이 홀라당 없어진지라 굉장히 힘들었다고 했다. 위의 김봉연의 일화와는 정반대된 내용이다. 하지만 1985년에 신고선수로 입단한 프로 3년차이자 선수단 막내였던 송유석과 팀내 최고참이자 리그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인 김봉연은 팀내 입지가 달랐기 때문에 송유석은 자신의 피해액을 제대로 말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건이 발생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삼성 구단 홍보 관계자는 당시 배상 문제에 대해 “삼성 구단에서는 KBO가 내야 한다, 우리는 못 낸다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수리를 해준 걸로 알고 있다. 지금 같으면 KBO가 내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위 구단주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으로 지금은 한국시리즈를 포함한 모든 경기에서 홈 팀이 배상책임을 진다.
사건 이후에도 영호남 지역갈등이 여전했고 하필 당시 극강의 실력을 자랑하던 해태는 영남 구단인 삼성과 롯데를 승점자판기처럼 다뤘기 때문에 해태 선수들을 향한 영남 팬들의 오물 투척과 위협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해태 야구단은 대구를 비롯한 영남지역 원정에 나설 때마다 경찰관들의 호위를 받게 되었다. 때문에 해태 선수단은 대구, 부산, 마산 원정 때마다 상당한 불편과 행동의 제약을 받았다고 한다.
매일신문 [with 라이온즈 열정의 30년] ⑫1986년 해태 선수단 버스 방화사건
삼성 라이온즈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관련 자료[11]
5. 기타
- 영화 퍼펙트 게임에 롯데 팬[12]들이 해태 버스에 불을 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의 극적인 요소를 더하기 위한 장치였다. 과장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버스를 뒤집어 엎으려고 했고 방화를 시도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사실 이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도 해태 버스에 불을 지른 걸 꼴리건이나 마산아재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의외로 많았다.[13]
- 당시에는 타 팀 버스뿐 아니라 자 팀 버스도 당시 화난 아재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는데 대구아재들은 특히 인기 없는 감독이었던 김성근 감독 시절 구단 성적에 항의하기 위해 자팀 선수단 버스를 찾아가 놀이터처럼 애용했으며 대전아재들도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 자팀 버스를 부순 전력이 있을 정도였다. 롯데 팬들이 구단 버스를 찾아가서 감독과 면담한 것은 양반일 정도.
- 여담으로 이 사건 이후 아연실색한 KBO 측에서 MLB 사무국에 연락해 사고 수습 방안을 문의했는데 오히려 걱정이 아니라 축하한다는 반응이 돌아왔다고 한다. 한국 홈 팬들의 열성이 그렇게 뜨겁다면 프로야구의 성공은 확실하다며 오히려 부러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프로야구는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 프로 스포츠 리그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MLB 사무국의 안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이듬해인 1987년 한국시리즈는 같은 해 12월 16일 열린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더욱 지역주의가 극심해진 상황에서 해태와 삼성이 다시 맞대결했는데, 대구에서 열린 1, 2차전이 평일 경기였음에도 낮 경기로 열렸다.
[1] 버스가 전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차량은 수리하여 다시 운행되었다. 사실상 신차인 데다 비교적 하부는 멀쩡했기 때문이다. 현재도 개발도상국 같은 경우라면 저 정도의 전소 차량은 살려서 다시 운행하는 게 보통인데, 하부 프레임이 살아 있어 상부만 잘라내고 다시 제작해 붙이면 되기 때문이다.[2] 그렇게 되었다면 삼성의 한국시리즈 첫 우승도 16년 앞당겨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삼성은 한국시리즈 1, 2차전을 모두 승리로 가져간 적이 통산 3회(2005, 2011, 2012)로 의외로 적다. 이 시리즈 이후 1, 2차전을 모두 내준 팀이 역전 우승하기까지는 꼬박 21년이 걸렸다.[3] 햇빛을 가리는 용도로 있고 지금은 커튼 대신 블라인드를 다는 경우가 많다.[4]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분노로 가득 찬 2천명 이상의 훌리건이 폭동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난리를 쳤으니 버스에 불을 지른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5] 만약 4차전이 대구에서 열리지 못했다면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영호남 지역갈등이 더욱 극심했던 이듬해 한국시리즈는 전 경기를 중립경기로 치렀을 수도 있었다.[6] 공교롭게도 2001년에 기아가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하여 KIA 타이거즈가 되었다.[7] 2020년 기준으로 AM919 버스의 후속모델인 그랜버드 버스의 차량가격이 약 1억 8000만원이다. 사건 당시 8,900만원은 2020년 기준으로 1억 8000만원 정도 된다고 보면 된다.[8] 그랜저는 같은 해 7월에 출시했다. V6 3.0L 모델은 이 사건 이후인 1989년에 출시되었다. #[9]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사례가 시구자 선정.[10] 또는 신차 가격인 8,000여만 원의 반액이라는 설도 있다.[11] 2002년 한국시리즈 첫 우승 후 발간된 삼성 라이온즈의 사사(社史)인 '삼성 라이온즈 21'에서 발췌한 내용이다.[12] 영화상에서는 패배에 화가 난 롯데 팬들이 버스에 오르던 롯데 선수단에게 청문회를 시전했으나 구단 버스가 그냥 출발해 버렸고 꿩 대신 닭으로 해태 선수단에게 몰려갔다가 마침 보이는 버스에 방화한 것으로 나온다.[13] 사실 인터넷이 활성화된 후에는 2002년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며 상대적으로 삼성 팬들이 난리를 치는 경우가 줄었기 때문이다. 반면 롯데 팬들의 전투력은 21세기에도 건재했다. 특히 마산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