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5:48:18

인종(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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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17대 대왕
인종 | 仁宗
파일:고려 인종 시책.jpg
의종 대에 제작된 인종의 시책
출생 1109년 10월 29일
고려 개경 개성부 순덕왕후의 사저
(現 경기도 개성시)
즉위 1122년 5월 15일
고려 개경 개성부 정궁 중광전
(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사망 1146년 4월 10일 (향년 36세)
고려 개경 개성부 정궁 보화전
(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능묘 장릉(長陵)
재위기간 고려 왕태자
1115년 2월 28일 ~ 1122년 5월 15일 (7년)
고려 제17대 대왕
1122년 5월 15일 ~ 1146년 4월 10일 (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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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본관 개성 왕씨
구(構) → 해(楷)
부모 부왕 예종
모후 순덕왕후
형제자매 3남 3녀 중 2남
배우자 연덕궁주, 복창원주, 공예왕후, 선평왕후
자녀 5남 4녀
종교 불교
인표(仁表)
묘호 인종(仁宗)
시호 극안공효대왕(克安恭孝大王)[1]
절일 영정절(永貞節) → 안정절(安貞節) → 경용절(慶龍節) }}}}}}}}}
파일:국보94호참외모양병.jpg
장릉에서 출토된 청자참외문양꽃병
1. 개요2. 묘호와 시호3. 생애
3.1. 재위 초기3.2. 여진과의 관계3.3. 이자겸의 난(1126년)3.4. 묘청의 난(1135년 ~ 1136년)3.5. 붕어
4. 가족관계5. 신성제왕6. 기타7. 대중매체8. 같이보기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고려의 제17대 대왕.

묘호는 '인종'(仁宗), 시호는 '공효대왕'(恭孝大王). 는 '해'(楷).

인종의 치세는 정치적으로 끊이지 않는 혼란의 연속이었는데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에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 굵직한 역대급 사건사고가 연달아 터지면서 바람잘 날이 없었다. 외할아버지 이자겸이 난을 일으켰을 당시에는 궁궐에 타서 전소되는 엄청난 화를 입었으며, 묘청의 난 당시에는 묘청서경의 주민들을 선동하는 바람에 거의 내란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제8대 현종 이후 100여 년간 지속되었던 고려의 전성기이자 태평성대가 이 시기에 종말을 고했으며, 인종 대에는 그동안 기존 문벌귀족 사회의 아래에서 축적되고 있던 불합리함과 그에 대한 불만도 한꺼번에 본격적으로 터져나오면서 나라도 점차 흔들려가기 시작했다. 제6대 성종음서 제도가 생기고, 성종 본인도 신권 우대와 신분제 강화를 너무 지향해서 문벌귀족 사회가 등장했던 것은 맞지만, 인종의 부친 예종 시기까지만 해도 고려 군주의 왕권과 위상이 약하지는 않았었다. 제15대 숙종과 제16대 예종의 왕권은 신하들이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을 만큼 막강했던 편. 그 시절까지만 했어도 신권이 왕권보다 더 강한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기록을 보면 비록 일생을 정치적 혼란에 시달려야만 했었고 본의 아니게 고려의 쇠퇴 계기를 제공해버렸지만, 군주로서의 자질만큼은 갖췄던 것으로 보인다. 인종이 이자겸의 세력을 제거했을 때 반역을 했던 이자겸과 일족을 주살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으나, 인종은 이자겸이 한때나마 자신의 장인이었으며, 또한 외할아버지였기에 차마 죽일 수는 없다 하여 대신 유배형을 내리는 데 그쳤고, 이자겸의 가족들도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당대의 사람들은 이를 두고 인종을 '자비 있고 덕 있는 왕'이라 칭송하였고, 그래서 '인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그 외에 공이 있다고는 하나 궁궐에 불을 질렀으니 당장 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척준경을 끝까지 옹호해주며 유배를 보내고서도 편히 지내도록 배려해 주었다거나 이자겸의 음모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었던 이자겸의 들을 보살펴주었던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능력과는 상관없이 인간성만큼은 좋은 사람이었던 듯.

그러나 일각에서는 반역자들과 일족에 대한 처벌이 미약하다며 인종을 우유부단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척준경이 나중에 한 짓을 보면 척준경 건에 대해서는 실수한 것일 수도 있으나, 이자겸의 딸들의 경우는 얘기가 다른데, 아버지까지 저버리고도 남편을 지켜준 셈이니 우유부단하게 판단해서 그녀들을 봐줬다고 하기도 뭣하다. 한 마디로 인종의 비들(이자겸의 딸들)은 비록 반역자의 자식이기는 했지만 반역에 참가하기는 커녕 인종에게의 충의와 지조를 지켜가며 그의 목숨을 보호해줬으니 무차별하게 처벌했다면 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인종은 이자겸 일가의 궁중 퇴출 후에는 묘청 등을 비롯한 신진 일파들을 측근 세력으로 키워보려고도 해 봤다. 그러나 개경김부식을 비롯한 기존 집권층의 반발에 부딪혀서 실패했던 데다 묘청 또한 반란을 일으킨 뒤 제거되면서 씻을 수 없는 정치적 타격을 입은 것으로 추측된다. 인종은 권력 다툼과 2번의 큰 반란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일생 동안 왕위를 지키기에 급급했기 때문인지 본인만의 치적을 남길 새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인종의 업적은 형부(刑部)에 속해 있었던 율학을 국자감[2]으로 옮겨 경사 6학[3]으로 정비했다는 점과 김부식으로 하여금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했다는 점 정도였으니 당시에 김부식 같은 대학자가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종의 치세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고려 전기 사회의 붕괴 조짐이 드러난 시대라 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종 본인은 군주로서의 능력이 부족했을지언정 국정을 잘 돌보기 위해 《삼국사기》 편찬, 경사 6학 정비, 유신지교 15개조를 발표하는 등 평생 동안 나라를 돌보는데 최선을 다 했다. 인종이 발표한 유신 개혁안 15개 조항의 내용은 재변이 연달아 일어나고 이자겸의 난으로 민심이 어지러워진 것은 임금인 자신의 허물 탓이라고 했고, 이에 자책하면서 중앙과 지방에 정치 개혁안을 내린 것이었다.

그의 집권기까지만 했어도 고려의 태평성대가 표면적으로는 유지되는 듯 보였다. 인종 재위기에는 지배층간의 분열 역시 심화되어 결국 다음 임금인 아들 의종 때부터 고려는 무신정변 등의 온갖 정치적 변란 등으로 인하여 본격적으로 쇠락의 길로 빠져들게 되면서 고려 역사의 전개가 완전히 뒤틀리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사실 고려의 쇠락은 인종보다는 아들 의종의 책임이 훨씬 막대한 게 사실이다. 하필 의종이 정무에 관심은 전혀 없고 노는 것이 제일 좋아 20여년간 먹고 놀기만 한 놀자파 암군이었으니...

인종은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평생을 권력 다툼에 시달려야 했고, 그의 사후에서도 정변이 자주 일어났으니 개인적으로는 불행하고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인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담하지 않으며 평생 국정에 집중한 것으로 볼 때 의지만큼은 어느 명군들 못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2. 묘호와 시호

공식 묘호는 '인종'(仁宗)이다. 묘호를 달리 불러 '인묘'(仁廟)라고도 불렸다. <인종 시책>에선 인종 묘호를 올렸다고 언급한다.

시호는 '극안공효대왕'(克安恭孝大王)이다. 대표시호는 어들 의종이 올린 '공효대왕'(恭孝大王)이다. <인종 시책>에서 의종은 왜 '공효' 시호를 올렸는지 설명했는데,
(恭)은
'덕(德)의 기틀을 지켰다.'
(孝)는
'행한 일의 의도가 매우 고귀하다.'
란 뜻으로 올렸다고 한다.

생전의 존호, 미칭은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당시 재위 때 일컬어진 존칭으로 '신성제왕'(神聖帝王)이 있다. 정지상의 《동산재기》(東山齋記)[4], <염경애 묘지명>에선 '천자'(天子)로 불렸다. 《동문선》에 수록된 <서경 대화궁 대연치어>에선 인종은 '천'(天), '건원'(乾元), '황상'(皇上)으로 불렸고, 그의 거처는 '제소'(帝所), 그의 얼굴은 '천안'(天顔)으로 불렸다.

3. 생애

"고선철왕(古先哲王)들은 방하(方夏)[5]를 보살필 땐 반드시 저이(儲貳)[6]를 세워 천서(天序)를 잇게 했다. 감히 사사롭게 편애하는 마음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포용하여 국본(國本)을 다지고자 한 것이다.

짐(朕)이 자리에 오른 뒤, 계속하여 빼어난 후사를 찾고 있었다. 점을 쳐보기도 하고 신료들에게 물어보기도 하여 좋은 날을 정해 오늘 휴명(休命)[7]을 기쁘게 펼치겠다.

아(咨)! 너(爾) 원자(元子) 구(構)는 중용의 순수함과 산악의 굳은 자태를 가졌다. 인의효우를 아는 그 마음은 타고 난 것이다.

(생략)

이에 동조의 자리(東朝之位)를 쥐게 하니, 조종(祖宗)을 뛰어 넘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신을 보내 지절(持節)을 들고 널 왕태자(王太子)로 책명한다.

오호라(於戱)! 경손함과 진중한 마음가짐만이 고귀함을 드러낼 수 있다. 넌 사부의 훈계를 지키고 향락을 경계하며 바른 사람이 아니면 거부하고 바른 소리가 아니면 듣지 말거라. 네가 좋은 풍습을 보여 만방(萬邦)을 보다듬어야 짐의 아들이 고선철왕들과도 견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도다. 말을 듣고 영원히 복을 누리거라.
- 《고려사》 <예종 세가> 중 인종의 왕태자 책봉문.
《고려사》 <김인존 열전>에 따르면 예종은 왕태자 책봉을 서경 장락궁에서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김인존의 반대로 개경에서 치르게 되었다. 만약 서경에서 태자 책봉식이 거행됐다면 목종과 더불어 서경에서 후계자가 된 임금이 되었을 수도 있다. 개경 밖에서 후계자가 된 국왕으로는 강도에서 태손태자가 됐던 충렬왕도 있다. 만 6세에 태자가 되었으며 7년 동안 동궁에서 거처했다.

예종은 인종의 나이가 어린 것을 걱정해 붕어하기 며칠 전 미리 한안인[8]을 통해 국새(國璽)를 전달하고 직접 인종에게 유언을 전했다. 신하들을 모두 소환해 유조를 선포했고, 인종은 예종이 붕어하기 전 며칠간은 권국사(權國事)가 되어 임금 아래, 태자 이상의 지위에 올랐다.

이렇게 1122년 부왕인 예종의 갑작스러운 붕어로 인해 권국사 왕해는 만 13세의 어린 나이로 고려 대왕의 자리에 올랐다.

3.1. 재위 초기

그러나 인종이 왕에 오르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려사》<인종 세가> -총서-에
예종 17년(1122년) 4월 병신일에 예종이 붕어하자 (예종의) 여러 동생들[9]은 왕[10]이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를 탐내기도 했으나, 평장사[11] 이자겸이 왕을 받들어 중광전[12]에서 즉위시켰다.
라는 기사가 등장한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보면 외할아버지인 이자겸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오른 것으로 유력하게 추정해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훈요십조 등으로 인해 마땅히 승계할만한 자식이 없거나, 있더라도 문제가 있는 경우에 형제가 상속받는 케이스가 자주 있었다. 덕종은 슬하에 자식이 없어 동생 정종이 계승받았고, 정종은 아들들의 나이가 어려서 문종이 바통을 넘겨 받았다. 2대 혜종의 아들 역시 나이가 어려 대신 정종이 즉위했고, 정종의 아들도 어려 광종이 즉위했다. 선종의 아들 헌종도 몸이 약해 숙종이 보위를 찬탈한 적이 있다.

이러한 연유로 인종의 입지는 위태로웠고 외조부인 이자겸은 인종의 정적이 될만한 이들을 조정에서 없애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고려사》 <숙종 종실 열전>을 보면 가장 위험했던 4남 왕보는 경상도 성주군, 5남 왕효는 남부 지방으로 유배를 가듯 떠났고 6남 왕서는 자기 사병을 해산시키고, 손님을 받지 않으며 에 미쳐 사는 척해 이자겸의 마수에서 피해갈 수 있었다.

겨우 왕실이 조용해졌지만 왕이 어린데다 외조부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으니 외척의 힘이 커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종의 외조부였던 이자겸은 왕을 대신해 권력을 한 손에 움켜 쥐고 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리며 갖은 횡포를 부렸다. 게다가 이자겸은 자신의 두 딸을 강제로 인종과 혼인시켰는데 본래 고려 왕실에 근친혼이 성행하고 있었지만 이자겸의 두 딸은 인종에게는 이모가 되는지라 당시 예법으로도 인종과 결혼할 수 없는 사이였다.

3.2. 여진과의 관계

인종이 즉위한지 1년 후인 1123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서는 금 태조 완안아골타가 붕어하고, 금 태종 완안오걸매가 즉위했다. 이 시기에 금나라와 북송은 번갈아가며 고려에 사신을 보내며 동맹을 제의했다.

7월에는 합문지후 후장이 이끄는 60여 명에 이르는 북송 사신단이 금나라를 공격해달라는 내용의 국서를 가지고 고려에 들어왔다.

8월에는 금나라 사신 고백숙 등이 고려에 와서 전란을 피해 고려로 망명한 주민들의 송환을 요구하는 금 태종의 의사를 전달했다. 인구가 감소했던 고려는 옛날부터 전란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고려에 오는 북방 민족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고려는 끝내 이들을 송환하지 않았다.

또한 금 태종은 인종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요나라 천조제서하로 도주한 사실을 알리려고 사신을 보냈는데 국경에서 접대를 불손히 해 고려에 이르지 못했다. 고려가 요나라를 섬기는 예로써 앞으로 금나라를 섬겨야 할 것이다. 태조의 서거로 요나라 황제를 잡지 못했다"
고 말했다. 요나라 황제도 도주했으니 이제는 고려가 금나라에 사대하라는 것과 자신의 황제 등극을 통보하는 내용이었다. 금 태종은 1125년 무주에서 요나라 황제인 천조제를 사로잡았고, 결국 요나라는 태조 야율아보기가 건국한 이후 9대 219년만에 멸망했다.

1125년 금 태종은 고려에서 온 국서를 접수하기를 거부했는데 이유는 국서의 서식이 (表)가 아니고 고려 왕이 신(臣)을 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금나라는 고려에 대해 요나라를 섬겼던 것처럼 금나라를 섬기라고 해 칭신사대(稱臣事大)의 관계를 요구했는데 이것을 기정사실화하려는 것이었다.

고려는 이에 대해 한동안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듬해인 1126년 조정 회의에서 금나라와의 관계 설정 문제를 논의했다. 윤언이를 위시한 대다수는 오랑캐와 상대할 수 없다고 했으나, 실권자 이자겸과 여진 정벌에 참여했던 척준경 등이
"금나라가 예전에는 작은 나라로서 고려와 요나라를 섬겼으나 지금은 강대해져 요나라와 북송을 멸망시켜 정치적, 군사적 강국이 되었고 우리와 접경해 제반 정세가 사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왕의 법도(이성계의 제2차 요동정벌 4불가론 중 하나와 유사)이니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 예를 지키는 것이 좋다"
고 했고 인종은 이 주장을 전면 채택했다. 이어 4월 인종은 정응문 등을 금나라에 보내 자신을 (臣)이라고 칭하는 등 금나라와 사대의 예로 국교를 맺게 되었다.

3.3. 이자겸의 난(1126년)

한편 인종은 만 18세가 되던 해에 외조부이자 장인인 이자겸의 횡포를 보다 못한 나머지 몰래 자신의 세력을 규합해 이자겸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고위 무관 최탁, 오탁, 권수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하여 궁궐 내에 있던 이자겸의 끄나풀들을 모두 제거하라고 사주했다. 그러나 이를 사전에 알아챈 이자겸은 숭덕부(인종이 내린 이자겸의 관저)로 신하들을 소집하여 비밀리에 회의를 가졌으며, 자신과는 사돈지간이었던 척준경에게 군사를 내주고 궁궐로 보냈다.

척준경은 궁궐 내에서 소란을 피우는 역적들을 무찌른다는 명분으로 본궐에 군사를 이끌고 나타났는데, 함부로 궁성을 공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얼마 동안은 일단 대치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궐 내에서 이자겸의 수하들이 제거당하는 소란 통에 척준경의 아들 척순과 동생 척준신이 살해당하는데, 궁밖에 내던져진 시체들을 척준경의 부하들이 발견한다. 이 사실을 알고 분기탱천한 척준경이 공격을 명하자[13] 궁궐은 한순간에 불타서 잿더미가 돼버리고 한순간에 지낼 곳이 사라져버린 인종은 외조부에 소환당해 남궁에 갔다가 이자겸의 자택(개명택)에 머무른다. 이것도 호위대와 같이 간 것도 아니라 왕이 호위병도 가마도 없이 홀로 걸어서 갔다. 이 사건이 바로 이자겸의 난이다.

이자겸은 이제 본격적으로 왕이 되기 위한 야심을 드러내어 십팔자위왕(十八子爲王)이라는 프로파간다를 퍼뜨리는 한편, 인종을 독살하여 왕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를 꾸미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인종의 왕후였던 두 딸은 뭔가 수상함을 눈치채고 독이 든 을 일부러 맨땅에 흘리고,[14] 독을 넣은 탕약을 실수로 떨어트린 척 하고 깨먹는 등 번번히 방해하는 바람에 두 번이나 물거품이 되고 만다. 두 왕후는 이자겸이 축출당한 후 궁에서 쫓겨났지만, 인종을 헌신적으로 보살핀 보답인지 반역자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노비나 가택을 하사 받는 등 꽤 대접을 잘 받았다고 한다.

한편 인종은 이자겸과 척준경 간의 사이가 틀어졌음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남몰래 최사전을 보내 척준경에게 선물을 하사하는 한편 조서를 내려 그를 회유하는데 성공한다. 인종에게 충성을 맹세한 척준경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내분을 일으킨 덕분에 결국 이자겸은 축출당하고 만다.

이와 관련해서도 엄청난 기록이 있는데, 척준경이 인종을 모시고 내전으로 들어갈 때 방망이 하나만 들고 있었다고 한다. 이자겸 측의 군인들이 막아서자 그가 고함만 내질렀을 뿐이었는데도 감히 척준경 일행을 공격할 엄두를 못 냈다고...

이후 비록 반역자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외조부의 목숨을 거둘 수는 없었으니 전라도 영광으로 유배보내 처벌을 유배 조치만으로 끝내고, 그 곳에서 사망하자 사후 관작을 어느 정도 돌려주었다. '검교태사 및 한양공'. 즉, 명예 태사에 한양의 공작이다.

인종은 척준경의 공적을 치하하여 문하시중에 제수하려고 했으나 척준경이 거절했고, 대신 신흥사 공신각에 그의 초상화를 걸어놓아 명예를 세워주었다. 그러나 이후 서경파의 정지상의 주도로 신하들이 그를 극렬히 탄핵하자 척준경이 눈치를 채기 전에 기습적으로 체포, 삭탈관직하고 '귀향형'에 처했다.

이 유배지는 척준경의 고향 곡주였다. 척준경이 받았던 처벌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귀향형으로, 죄인을 고향으로 귀향시킨 뒤 관직에 두번 다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도록 한 형벌이다. 형벌 기간 만료 후에도 관직에는 죽을 때까지 일절 복귀할 수 없다는 점이 특이한데, 후에 이는 조선시대의 '귀양형'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후 1144년, 척준경은 얼마 후 등창이 발병하여 사망했다.

드디어 최악의 외척 이자겸과 그 세력을 일소하는데 성공한 인종은 새롭게 국정을 이끌어야한다는 결심을 가졌고, 서경파 육성에 나선다.

3.4. 묘청의 난(1135년 ~ 1136년)

인종은 자신을 문벌귀족으로부터 지지해줄 외척 인주 이씨들이 한 순간에 자취를 감추게 되자 새로운 친위 세력 육성을 시도했다. 바로 그들이 서경파였는데 선왕 숙종, 예종이 장락궁 행차, 궁궐 건설, 여진 정벌 등을 통해 세력기반을 다져 놓았고 대부분 문벌귀족이 개경 출신이라 서경엔 힘이 닿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용한 것이었다. 이자겸 축출 뒤,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던 인종은 정지상, 백수한 등에게 의도적으로 힘을 실어주었다. 또한 서경 출신인 승려에게도 힘을 실었는데 그가 바로 풍수지리와 도참을 연구하던 묘청이다.

딱 여기까지면 꽤 괜찮았을 것이다. 정지상과 김부식은 각자 서경 대 개경, 문장 대 문장으로 끊임없이 대결해온 희대의 라이벌로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서경은 장락궁을 중심으로 용덕궁, 대화궁, 구제궁 등 이름 있는 궁궐이 조성돼 서경 분사 조정과 개경 중앙 조정의 힘도 서로 견제해야 하는 통에 바빠졌다. 게다가 윤언이(서경파가 제안한 '칭제건원'을 지지)같은 전형적인 개경 문벌귀족도 대금 사대 문제로 서경파를 은근히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는 등 정계가 복잡해졌다.

인종은 뒤에서 이 모든 것을 통제하며 조금씩 왕권을 강화해나갔다. 문제는 이 대립이 갈수록 커지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묘청이 특히나 계속 선을 넘는 행동을 범했다는 것이 화근이었다.

시발점은 서경 천도 논의 때문이었다. 여진족 즉 금나라에 대한 사대는 고려에게 큰 수치였다. 《고려사》 <인종 세가> 재위 9년(1131년) 9월 정유일 기록엔 대간이 한 신하를 고발했는데 무관이 문관직에 임명되어서이기도 했으나 그가 공공연히
"국가가 나에게 1,000명의 군대를 주면 금국(金國)에 들어가 그 주(主)를 사로잡아 바치겠다!"
라고 떠들고 다녀서 금 조정이 이를 알게 되면 외교적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간쟁했다. 하지만 인종은 결국 그를 임명했다.

묘청은 이 상황을 이용해 서경으로 천도하면 금나라를 포함한 천하 36개국이 고려에게 머리를 조아릴 것이라고 한껏 떠들었다. 묘청은 서경으로 천도하기 위해 온갖 술수로 인종을 현혹시키려 안간힘을 썼다. 예를 들면 대동강 물에 기름진 을 넣어서 강이 오색 영롱하게 빛나 보이게 했다는 둥, 서경의 궁궐로 들어가니까 노랫 소리가 들렸다는 둥의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조정에서 이와 관련한 논쟁이 있었지만 개경파의 거두였던 김부식의 거센 반대로 실패로 돌아갔으며 서경에 지은 대화궁에서 연이은 불길한 징조가 묘청의 입지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비단 대화궁만이 아니라서 중흥사라는 절에서는 화재가 나고 인종이 행차하던 도중에 갑자기 폭풍우가 내리며 길 잃고 늪에 빠지고 진눈깨비까지 내리는 등 악재가 일어났고 이는 정적들에게 좋은 공격거리가 되었다.

인종 역시 조금씩 막나가던 묘청의 행동에 제동을 걸었고, 급기야 자신의 입지에 큰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한 묘청은 결국 반란을 일으키는 극단적인 선택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묘청과 그 세력은 나라 이름을 대위라고 짓고 서경 이북 지역을 장악해 나갔으나 총사령관 김부식의 재빠른 조처로 곧 서경에 고립되었고, 김부식의 조이기 전략 중 내분으로 묘청은 부장 조광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이후 서경 민심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서경 사람들이 다시 저항하였고, 완전히 이를 진압하는 데는 1년이라는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서경 천도 문제는 인종이 사실상 일부러 키운 것이나 다름없어 소위 묘청의 난이라 불린 사건은 왕 대신 묘청이나 정지상 등의 서경파가 덤터기를 쓴 것으로 본 게 타당하다.

묘청의 난으로 꽤 큰 타격을 입은 인종은 결국 스스로를 탓하는 조서를 써 중서문하성 및 기타 정부기관에 선포하였다. 이자겸의 난 때는 자책하는 조서를 쓰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서경의 난이 매우 큰 충격이었음을 헤아려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관련하여 《동문선》 제23권에 <인왕죄기교서>(仁王罪己敎書)가 남아 있다. 특이한 건 내용에선 '죄기조서'라고 칭했는데 분류는 '교서'로 했다.

3.5. 붕어

짐(朕)은 황천(皇天)의 권명(眷命)을 받들며 열성(列聖)을 이어 삼한(三韓)을 다스린지 25년이 되었다. 오늘이 되어 일이 많아 부담이 쌓이니 질병이 누적되어 치료가 소용이 없어 대점(大漸)에 이르렀다.

오호라! 성철의 도(聖哲之道)는 존망을 아는 것이며 불로의 말(佛老之言)은 생사를 알라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것은 이치에 자연스러운 것이다. 돌아가는 자는 변화에 순응해 남지 않고, 남아있는 자는 슬퍼하며 효를 드러내는 것은 천하의 도이다.

아! 너 왕태자(王太子) 현(晛)은 충효(忠孝)의 미덕을 갖추고 타고난 자질을 가지고 있으니, 덕업(德業)이 융성하여 인망(人望)을 갖추었다. 이에 마땅히 왕위(王位)에 오를 수 있도다. 제사는 하루를 달로 계산하고 산릉의 제도는 검약하게 하라. 성현의 철칙을 깊게 생각하고 조종의 영광을 저버리지 말라.

문무백료(文武百寮)는 다 같이 협력하여 국정을 이끌어 나가고 왕가(王家)를 보우하라. 중외(中外)에 이를 포고해 짐의 뜻을 알게하라.
- 《고려사》 <인종 세가> 중 발췌. 인종의 마지막 유조(遺詔)로 왕태자에게 나라를 맡기고 있다.

어렸을 적부터 온갖 역경과 고난을 겪은 탓인지 결국 38세라는 비교적 젊은 보령에 병을 얻어 본궐 보화전(保和殿)에서 붕어했다. 야사에는 멀쩡하던 왕이 갑자기 병이 들자 의원의 치료에도 소용이 없어 점쟁이를 불러 점을 쳤는데 이자겸, 척준경, 묘청 등의 귀신이 왕의 몸에 씌여 병이 생겼다고 한다. 결국 왕실에서는 용한 무당을 불러 굿을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어 인종은 끙끙 앓다가 승하했다고 전해진다.

고려 역대 임금 중 시책(諡冊)이 남아있는 유일한 임금이기도 하다. 시책은 으로 만들어서 옥책(玉冊)이라 불리기도 하고, 귀한 책이라 해서 보책(寶冊)이라고도 한다. 선대 임금이 죽으면 차대 임금이 선대에게 시호를 올렸고, 천자일 경우 묘호까지 올렸음을 고하기 위해 작성한 문서이다. 흰 대리석으로 만들었으며 글자를 새기고 을 채워 넣어 외관이 매우 화려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유물은 글자에 채운 금이 거의 긁어진 상태이다. 시책의 양 끝에는 부월(斧鉞)을 들고 있는 호위 무장을 그려 넣었으며, 인종이 죽은 뒤 1146년 3월 태자 왕현이 만들어 올렸다. 자신을 신(臣)으로 표현했고, 인종이 호경지란(鎬京之亂)을 제압한 것을 칭송했으며, 시호 '공효'(恭孝)를 올린 이유를 설명하고, 묘호 '인종'(仁宗)을 소개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4. 가족관계


5. 신성제왕

조서를 내리기를,
"제왕의 덕은 무엇보다 겸손을 우선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노자(老子)는 '왕(王)과 공(公)은 스스로를 고(孤: 아버지가 없음)[19], 과(寡: 덕이 적음), 불곡(不穀: 착하지 못함)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또 한나라 광무제(光武帝)는 조서에서 신하들이 상서를 올릴 때 성(聖)자를 쓰지 말라고 하였으며, 공자도 역시 인자(仁者)나 성인(聖人)이라고 자처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신하가 임금을 높이고 찬미할 때 사용하는 호칭이 정도에 지나치므로 이는 합당한 일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상소나 공문서에서 "신성제왕(神聖帝王)"이라 일컫지 말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고려사》 인종 16년(1138년) 2월 26일

당대 고려인들이 군주를 어떻게 표현했는지에 대해 인종 스스로가 내린 조서에 나와 있다.[20]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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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려 인종 시책.jpg
인종 시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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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보94호참외모양병.jpg
인종의 능인 장릉에서 출토된 청자 참외모양 병
  • 인종은 현재 북한의 영토인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에 있는 장릉에 안장되었는데 다른 고려왕릉들처럼 이미 구한말 혹은 일제강점기 때 도굴당했다. 위에 있는 사진 두 장은 국보 제94호인 청자참외문양꽃병과 인종의 '옥돌 <시책>'으로 인종의 장릉에서 출토된 부장품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정식 학술 발굴에 의한 출토품이 아니고, 1916년에 조선총독부 박물관일본인 골동상에게 구입하면서 유물대장에 인종의 '옥돌 <시책>'과 함께 장릉 출토라고 기록해 놓아 신빙성이 아주 높다. 또 이것 외에 알려진 부장품으로 질이 우수한 청자 접시 5점 1세트, 청자합, 청자 받침대, 뚜껑 있는 청자잔, 숟가락과 젓가락, 청동 내합과 옥돌 외합, 청동 인장 등도 있다. 정작 도굴꾼이 파냈다는 장릉의 위치는 당시에는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기록대로 개성 서쪽 벽곶동으로만 추정했다. 1945년 광복 이후 북한에서 이에 대해 조사했다는 보고는 아직 없다.
  • 송사》에 의하면 태자 시절 금나라가 발흥할 때 북송의 외교정책에 대해 조언했다고 한다. 1118년 고려가 북송에 의관을 파견할 것을 요청했는데 당시 11세였던 인종이 의관에게 "송나라금나라와 손잡고 요나라를 정벌할 것이라고 하는데 요나라는 금나라를 막을 수 있는 방패가 될 수 있다"라고 했다. 의관은 1119년 송나라로 귀국했고, 이 의견을 전달했지만 송나라 황제 휘종이 의관이 정치에 관여한다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후 북송은 금나라의 도움으로 요나라를 멸망시켰고, 그 결과는 정강의 변남송의 건국이었다. 사실 이 조언은 11세인 인종의 개인적인 의견이라기보다는 태자 교육의 결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종이 어려서부터 공부를 하는데 성실했고, 군주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며, 인종 때까지는 군주들이 노력을 많이 했다. 문제는 자식에게는 그러한 능력과 의지를 전달하지 못했다.
  • 《고려사》 <악지> -아악- 부분에는 인종의 태묘 악장 제목이 적혀있다. 제목은 <이안>(理安)이고, 가사는 빠져 있다.
  • 여러가지 의미로 고려 왕조의 중간에 위치한 임금이다. 인종은 34명의 왕 중 딱 17번째의 임금이다. 18대 왕 의종부터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까지 한 명도 빠짐없이 인종의 후손이므로 고려 왕조의 중시조 역할을 하였고, 인종 이후를 기점으로 고려가 쇠락했다. 즉, 다시 말하면 1대~17대:발전 기간, 18대~34대: 쇠퇴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 북송 말기의 관료였던 서긍이 고려에 사신으로 다녀간 후에 지은 《고려도경》에서 인종의 외모와 인품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서긍이 고려에 갔을 때, 인종은 재위 1~2년차 14세의 소년이었는데 서긍은 그 외모에 대하여 몸집은 작았으나 용모가 아름다고 풍만했다고 했으며,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자비롭고 배운 것이 많았다고 했다. 또한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엄격하고도 명백히 했다고 묘사했고, 그 몸가짐이 단장하면서도 성인의 기풍이 있어서 과연 고려의 임금이 될만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해(楷)는 왕우(王俁)의 세자이다. 임인년 봄 3월에 우가 병이 위독하매 이자겸(李資謙)을 불러들여 후사(後嗣) 일을 의논했었는데, 4월에 우가 죽자 이자겸 등이 곧 해를 세워 왕을 삼았다. 해는 용모가 준수하고 키는 작으나 얼굴이 풍후하며 살이 찐 편이었다. 성격이 지혜롭고 배운 것이 많으며, 또한 매우 엄명하며, 동궁(東宮)에 있을 때 관속(官屬)들이 과오를 범하면 반드시 꾸지람을 당했다. 즉위하여서는 비록 나이가 어렸지만 나라 관원들이 자못 두려워하고 꺼렸다. 이번에 신사(信使)가 가매, 그가 조서(詔書)와 표문(表文)을 받고 연향(燕饗)하는 예를 거행하는데, 올라가고 내려감과 나아가고 물러감이 여유가 있어 성인(成人)의 풍도가 있으니, 역시 동이(東夷)의 어진 왕이 됨직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2권 <세차>(世次)
  • 인종 사후로 고려의 왕위 계승은 매우 뒤틀리게 된다. 그 이후 정상적인 즉위와 퇴위 과정을 보낸 이는 거의 없었는데 고종 정도가 유일하고[21] 나머지는 다 그 계승과 물러나는 과정에서 문제가 많았다.[22]
  • 한국사 시험에서 묘청의 난과 이자겸의 난의 순서를 물어보는 문제가 출제되기도 하는데 같은 인종 시기라 헷갈리기 쉽다. 이자겸의 난이 더 앞선다는 것을 기억하자.

7. 대중매체

  • 2003년 KBS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배우 이성호가 연기했다. 극중에서는 거의 특별출연이나 다름없는 비중으로 정중부김돈중 과거의 불상사 및 회상에서 약간 언급되는 것으로 나온다.

8. 같이보기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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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대장공주 · 정신부주 · 숙창원비 김씨 계국대장공주 · 의비 · 정비 · 순화원비 홍씨 · 조비 · 순비 허씨 복국장공주 · 조국장공주 · 경화공주 · 명덕태후 홍씨 · 수비 권씨
강양공 왕자 · 소군 왕서 · 정녕원비 · 명순원비 세자 왕감 · 덕흥군 용산원자
충혜왕 공민왕 공양왕
덕녕공주 · 희비 윤씨 · 화비 홍씨 · 은천옹주 임씨 휘의노국대장공주 · 혜비 이씨 · 익비 한씨 · 정비 안씨 · 신비 염씨 순비 노씨
석기 · 장녕공주 - 세자 왕석 · 숙녕궁주 · 정신궁주 · 경화궁주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열전(列傳)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92권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 유금필 · 최응 · 최언위 (최광윤 최행귀 최광원) · 왕유 왕자지 · 박술희 · 최지몽 · 왕식렴 · 박수경 · 왕순식 이총언 견금 윤선 흥달 선필 태평 · 공직 · 박영규
93권
서필 · 최승로 최제안 · 쌍기 · 최량 · 한언공 · 류방헌 · 김심언 · 최항 · 채충순
94권
서희 서눌 서공 · 유진 · 강감찬 · 최사위 · 황보유의 장연우 · 양규 (양대춘) · 지채문 지녹연 · 하공진 · 김은부 · 주저 · 강민첨 · 곽원 · 왕가도 · 김맹 · 류소 · 윤징고 · 위수여 · 전공지 · 이주헌 · 이주좌 · 안소광 · 조지린
95권
최충 최유선 최사제 최약 최윤의 · 이자연 이자량 이자인 이혁유 이자현 이자덕 이예 이공수 이지저 이오 이광진 · 박인량 박경인 박경백 박경산 · 황주량 · 류신 · 왕총지 · 위계정 · 소태보 왕국모 고의화 · 문정 · 정문 · 김원정 · 손관 · 최사량 · 김선석 · 임의 임원후 임극충 임극정 임부 임유 임익 임항 · 김한충
96권
최사추 · 김인존 · 윤관 윤언순 (윤언식 윤언민 윤언이) 윤인첨 윤세유 윤상계 · 오연총
97권
김부일 김부의 · 고령신 · 김황원 이궤 · 곽상 곽여 · 유재 호종단 신안지 · 김경용 (김인규) · 최홍사 · 한안인 · 이영 · 한충 · 임개 유녹숭 · 김준 · 류인저 · 강증 · 허경 · 문관 · 정항 정서 · 김극검 · 김약온
98권
김부식 김돈중 김군수 · 정습명 · 고조기 · 김정순 · 정극영 · 박정유 · 최사전 · 김향 · 최자성 · 김진 · 임완 · 최기우 · 김수자 · 최유 · 이숙 이위 · 허재
99권
양원준 · 최유청 최당 최린 최선 최종준 최온 최문본 최평 최옹 · 이공승 · 신숙 · 한문준 · 문극겸 · 류공권 류택 · 조영인 · 왕세경 · 이순우 · 임민비 · 최척경 · 함유일 · 염신약 · 이지명 · 유응규 유자량 · 현덕수 · 최균 최보순 최윤개 · 김거공 · 한유한
100권
두경승 · 우학유 · 노영순 · 조위총 · 방서란 · 박제검 · 기탁성 · 홍중방 · 경대승 · 진준 · 최세보 · 박순필 · 이영진 · 백임지 · 이준창 · 최충렬 · 정세유 정숙첨 정안 · 정국검 이유성 · 정방우 · 정언진
101권
민영모 민식 · 송저 · 김광중 김체 · 안유발 · 최여해 · 최우청 · 왕규 · 차약송 기홍수 · 정극온 · 류광식 · 권경중 · 김태서 김약선 김미 · 문한경 권세후 백돈명 · 노인수 · 김의원
102권
금의 · 이규보 이익배 · 유승단 · 김인경 김승무 · 이공로 · 이인로 오세재 조통 임춘 · 조문발 · 이순목 이수 · 김창 · 송국첨 · 최자 하천단 · 채송년 채정蔡楨 · 손변 · 권수평 · 이순효 장순량 · 송언기 · 김수강 · 김지대 · 이장용
<rowcolor=#670000,#fedc89> 103권 104권
조충 조변 · 김취려 김문연 김변 · 이적 · 채정蔡靖 · 박서 송문주 · 김경손 김혼 · 최춘명 · 김희제 · 이자성 · 김윤후 · 김응덕 김방경 김구용 김제안 김흔 김순 김영돈 김영후 김사형 박구 · 한희유 · 나유 나익희 · 원충갑 · 김주정 김심 김종연 김석견
105권
류경 류승 류돈 류만수 · 허공 허종 허관 허금 허부 허유 · 홍자번 홍승서 홍영통 · 정가신 · 안향 안우기 안목 · 설공검 · 유천우 · 조인규 조서 조연 조덕유 조린 조연수 조위
106권
백문절 백이정 · 박항 · 곽예 · 주열 · 이주 이행검 · 장일 · 김구 · 이승휴 이연종 · 김훤 김개물 · 정해 정오 정포 정공권 · 조간 · 심양 · 추적 이인정 채우 · 김유성 곽린 · 윤해 윤택 · 이영 · 엄수안 · 안전 · 최수황 · 박유 · 홍규 홍융
<rowcolor=#670000,#fedc89> 107권 108권
한강 한악 한수 한방신 · 원부 원충 원호 원선지 원송수 · 김련 · 김부윤 · 정인경 · 권단 권부 권준 권렴 권용 권적 (권고) 권화 권근 · 민지 민상정 민종유 민적 민사평 민변 민제 · 김지숙 김인연 · 정선 · 이혼 · 최성지 최문도 · 채홍철 · 김이 · 이인기 · 홍빈 · 조익청 · 배정지 · 손수경
109권
박전지 · 오형 · 이진 · 윤신걸 박효수 · 허유전 · 박충좌 · 윤선좌 · 이조년 이승경 · 이곡 · 우탁 · 안축 안종원 안보 · 최해 · 장항 · 이성 · 조렴 왕백 · 이백겸 · 신군평
<rowcolor=#670000,#fedc89> 110권 111권
최유엄 · 김태현 김광재 · 김륜 김경직 김희조 김승구 · 왕후 왕중귀 · 한종유 · 이제현 이달존 이보림 · 이능간 염제신 · 이암 이강 · 홍언박 홍사우 류연 · 류탁 · 경복흥 · 김속명 · 이자송 · 조돈 조인옥 · 최재 · 송천봉 · 홍중선 · 김도 · 임박 · 문익점
112권
이공수 · 류숙 류실 · 이인복 · 백문보 · 전녹생 · 이존오 · 이달충 · 설손 설장수 · 한복 · 이무방 · 정습인 · 하윤원 · 박상충 · 박의중 · 조운흘
113권
안우 김득배 이방실 · 정세운 · 안우경 · 최영 · 정지 · 윤가관 · 김장수
114권
윤환 · 이성서 · 이수산 이념 · 이승로 · 황상 · 지용수 · 나세 · 김선치 · 전이도 · 구영검 · 오인택 · 김보 · 변광수 · 정지상 · 임군보 · 나흥유 · 목인길 · 김유 · 양백연 · 지용기 · 하을지 · 우인열 · 문달한 · 김주 · 최운해
{{{#!wiki style="margin: -16px -11px"<rowcolor=#670000,#fedc89> 115권 116권 117권
이색 · 우현보 · 이숭인 심덕부 · 이림 · 왕강 · 박위 · 이두란 · 남은 정몽주 · 김진양 · 강회백 · 이첨 · 성석린
<rowcolor=#670000,#fedc89> 118권 119권 120권
조준 정도전 윤소종 윤회종 · 오사충 · 김자수 }}}
121권
<rowcolor=#670000,#fedc89> 「양리(良吏)」 「충의(忠義)」
유석 · 왕해 · 김지석 · 최석 · 정운경 홍관 · 고보준 · 정의 · 문대 · 조효립 · 정문감
<rowcolor=#670000,#fedc89> 「효우(孝友)」 「열녀(烈女)」
문충 · 석주 · 최루백 · 위초 · 서릉 · 김천 · 황수 · 정유 · 조희참 · 정씨 · 손유 · 권거의 노준공 · 신씨 · 윤구생 · 반전 · 군만 유씨 · (현문혁의 처) · (홍의의 처) · (안천검의 처) · (강화부 세 여인) · 최씨 · 배씨 · 문씨 · 김씨 · 안씨 · 이씨 · (권금의 처)
122권
{{{#!wiki style="margin: -16px -11px"<rowcolor=#670000,#fedc89> 「방기(方技)」 「환자(宦者)」 「혹리(酷吏)」
김위제 · 이녕 (이광필) · 이상로 · 오윤부 · 설경성 정함 · 백선연 · 최세연 · 이숙 · 임백안독고사 · 방신우 · 이대순 · 우산절 · 고용보 · 김현 · 안도치 · 신소봉 · 이득분 · 김사행 송길유 · 심우경 }}}
123권 「폐행1(嬖幸一)」
유행간 · 영의 · 김존중 · 정세신 · 백승현 · 강윤소 · 염승익 · 이분희 이습 · 권의 채모 이덕손 · 임정기 (민훤) · 주인원 · 이지저 고종수 김유 · 인후 인승단 · 장순룡 차신 노영 · 조윤통
124권 「폐행2(嬖幸二)」
윤수 윤길보 (송화) · 이정 김문비 이병 · 원경 · 박의 · 박경량 · 전영보 · 강윤충 · 배전 · 민환 · 윤석 · 손기 · 정방길 임중연 강융 · 신청 박청 · 왕삼석 양재 조신경 최노성 윤현 안규 · 최안도 이의풍 김지경 이인길 · 노영서 박양연 송명리 · 김흥경 · 반복해 · 신원필
125권 「간신1(姦臣一)」
문공인 · 박승중 · 최홍재 · 최유칭 · 박훤 · 송분 · 왕유소 · 송방영 · 오잠 석주 · 김원상 · 류청신 · 권한공 · 채하중 · 신예 전숙몽 · 이춘부 · 김원명 · 김횡 · 지윤
126권 「간신2(姦臣二)」
이인임 · 임견미 · 염흥방 · 조민수 · 변안열 · 왕안덕
{{{#!wiki style="margin: -16px -11px"<rowcolor=#670000,#fedc89> 127권 「반역1(叛逆一)」 128권 「반역2(叛逆二)」 129권 「반역3(叛逆三)」
환선길 · 이흔암 · 왕규 · 김치양 · 강조 · 이자의 · 이자겸 · 척준경 · 묘청 (정지상) 정중부 이광정 송유인 · 이의방 · 이의민 · 정방의 · 조원정 석린 최충헌 최이 최항 최의 }}}
<rowcolor=#670000,#fedc89> 130권 「반역4(叛逆四)」 131권 「반역5(叛逆五)」
한순 다지 · 홍복원 (홍차구 홍군상 홍선 장위 류종) · 이현 · 조숙창 · 조휘 · 김준 · 임연 · 조이 김유 이추 · 한홍보 · 우정 · 최탄 · 배중손 조적 · 조일신 · 김용 · 기철 · 노책 · 권겸 · 최유 · 홍륜 · 김문현 · 김의
132권 「반역6(叛逆六)」
신돈
133·134·135·136·137권
신우(우왕) (신창(창왕)) }}}}}}}}}}}}

금사(金史)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f5d7de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본기(本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권 「세기(世紀)」 2권 「태조기(太祖紀)」 3권 「태종기(太宗紀)」
여진 완안아골타 완안오걸매
4권 「희종기(熙宗紀)」 5권 「전폐제기(前廢帝紀)」 6·7·8권 「세종기(世宗紀)」
완안합랄 완안적고내 완안오록
9·10·11·12권 「장종기(章宗紀)」 13권 「후폐제기(後廢帝紀)」 14·15·16권 「선종기(宣宗紀)」
완안마달갈 완안과승 완안오도보
17·18권 「애종기(哀宗紀)」 19권 「세기·보(世紀補)」
완안영갑속 완안승과 · 완안와리타 · 완안호토와
※ 20권 ~ 58권은 志에 해당. 59권 ~ 62권은 表에 해당. 금사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b82647> 63·64권 「후비전(后妃傳)」 ||
명의황후 · 사황후 · 절황후 · 공정황후 · 위순황후 · 소숙황후 · 익간황후 · 정선황후 · 정선황후 · 경희황후 · 성목황후 · 광의황후 · 흠헌황후
선헌황후 · 소숭비 · 흠인황후 · 도평황후 · 도단부인 · 대부인 · 도단폐후 · 흠자황후 · 정의황후 · 소덕황후 · 이원비 · 효의황후 · 소성황후
흠회황후 · 이원비 · 도단왕후 · 왕황후 · 명혜황후 · 도단황후
65·66권 「시조이하종실전(始祖以下宗室傳)」
완안알로 · 완안배로 · 완안사고덕 · 완안사이보 · 완안사리홀 · 완안호고출 · 완안발흑 · 완안숭성 · 완안핵손 · 완안마파 · 완안알대 · 완안알새 · 완안알자 · 완안앙 · 완안조 · 완안외가 · 완안호십문 · 완안합주 · 완안괵보 · 완안충 · 완안제 · 완안출로 · 완안호석개 · 완안종현 · 완안달라 · 완안변 · 완안고 · 완안혁 · 완안아희
67권 「석현등전(石顯等傳)」 68권 「완안환도등전(完顔歡都等傳)」
석현 · 환난 · 산달 · 오춘 · 납배 · 마산 · 둔은 · 유가 · 아소 · 회리보 완안환도 · 완안야가
69권 「태조제자전(太祖諸子傳)」 70권 「완안살개등전(完顔撒改等傳)」
완안종준(宗儁) · 완안종걸 · 완안종간 · 완안종민 · 완안원 완안살개 · 완안습불실 · 석토문
71권 「완안알로등전(完顔斡魯等傳)」 72권 「완안누실등전(完顔婁室等傳)」
완안알로 · 완안알로고발근 · 완안파로화 · 오찰홀 · 완안도모 완안누실 · 완안은출가 · 완안습고내
73권 「완안아리합만등전(完顔阿離合懣等傳)」 74권 「완안종한등전(完顔宗翰等傳)」
완안아리합만 · 완안알종도 · 완안종웅 · 완안희윤 완안종한 · 완안종망
75권 「노언륜등전(盧彥倫等傳)」
노언륜 · 모자렴 · 이삼석 · 공경종 · 이사기 · 심장 · 좌기궁 · 우중문 · 조의용 · 강공필 · 좌필
76권 「태종제자등전(太宗諸子等傳)」
완안포로호 · 완안호로 · 완안아로 · 완안알야 · 완안알본
77권 「완안종필등전(完顔宗弼等傳)」 78권 「유언종등전(劉彥宗等傳)」
완안알철 · 장방창 · 유예 · 완안창 유언종 · 유규 · 시립애 · 한기선
79권 「역경등전(酈瓊等傳)」
역경 · 이성 · 공언주 · 서문 · 시의생 · 장중부 · 장중언 · 우문허중 · 왕륜
80권 「희종제자등전(熙宗諸子等傳)」
완안제안 · 완안도제 · 사묘아리 · 완안돌합속 · 오연포로혼 · 적잔휘 · 대달불야 · 포속월 · 완안아리보
81권 「골모파등전(鶻謀琶等傳)」
골모파 · 적고질 · 아도한 · 협곡사노 · 아륵근몰도로 · 황괵적고본 · 포찰호잔 · 협곡오리보 · 왕백룡 · 고표 · 온체한포리특 · 백덕특리보 · 야율회의 · 소왕가노 · 전호 · 정진
82권 「곽약사등전(郭藥師等傳)」
곽약사 · 야율도산 · 오연호리개 · 오연오리보 · 소공 · 완안습불주 · 흘석렬호랄 · 야율서 · 곽기충 · 오손와륜 · 안잔문도 · 복산혼탄 · 정건충
오고론삼합 · 이랄온 · 소중공 · 소중선 · 고송 · 완안광영 · 완안원수 · 완안신사아보 · 완안광양
83권 「장통고등전(張通古等傳)」 84권 「완안고등전(完顔杲等傳)」
장통고 · 장호 · 장현소 · 장여필 · 야율안례 · 납합춘년 · 기재 완안살리갈 · 누완온돈사충 · 완안분도 · 고정 · 백언경 · 장경인
85권 「세종제자전(世宗諸子傳)」
완안영중 · 완안영도 · 완안영공 · 완안영덕 · 완안영성 · 완안영승
86권 「이석등전(李石等傳)」
이석 · 완안복수 · 독길의 · 오연포리흑 · 오연포할노 · 오연사랄 · 이사웅 · 이방고초올 · 패출로정방 · 완안영덕 · 포찰알론 · 협곡사랄
87권 「흘석렬지녕등전(紇石烈志寧等傳)」 88권 「흘석렬양필등전(紇石烈良弼等傳)」
흘석렬지녕 · 복산충의 · 도단합희 흘석렬양필 · 완안수도 · 석거 · 당괄안례 · 이랄조삼
89권 「소보형등전(蘇保衡等傳)」
소보형 · 적영고 · 위자평 · 맹호 · 양숙 · 이랄조 · 이랄자경
90권 「조원등전(趙元等傳)」
조원 · 이랄안 · 고기덕 · 마풍 · 완안올불갈 · 유휘유 · 가소충 · 이랄알리타 · 아륵근언충 · 장구사 · 고간 · 고방기 · 정위인
91권 「완안살개등전(完顏撒改等傳)」
완안살개 · 방적 · 온체한이실만 · 신토만 · 이랄성 · 석말변 · 양중무 · 포찰세걸 · 소회충 · 이랄안답 · 패출로아로한 · 조흥상 · 석말영 · 경사휘
92권 「모석등전(毛碩等傳)」
모석 · 이상달 · 조망지 · 대회정 · 노효검 · 노용 · 이시 · 도단극녕
93권 「현종제자등전(顯宗諸子等傳)」
완안종 · 완안괴 · 완안종이 · 완안종헌 · 완안개 · 완안홍유 · 완안홍정 · 완안홍희 · 완안홍연 · 완안홍휘 · 완안특린 · 완안거 · 완안선 · 완안조 · 완안종각 · 완안수충 · 완안현령 · 완안수순 · 독길사충 · 완안승유 · 복산계 · 말연사예탑 · 완안종호
94권 「협곡청신등전(耶律化哥等傳)」
협곡청신 · 완안양 · 협곡형 · 완안안국 · 요리패질
95권 「이랄리등전(移剌履等傳)」
이랄리 · 장만공 · 포찰통 · 점할알특랄 · 정휘 · 유위 · 동사중 · 왕울 · 마혜적 · 마기 · 양백통 · 이방고감
96권 「황구약등전(黃久約等傳)」
황구약 · 이안 · 이유 · 왕분 · 허안인 · 양양 · 노백달
97권 「배만형등전(裴滿亨等傳)」
배만형 · 알륵충 · 장대절 · 장형 · 한석 · 등엄 · 거구 · 하양정 · 염공정 · 초욱 · 유중수 · 이완 · 마백록 · 양백원 · 유기 · 강원필 · 이랄익
98권 「완안광등전(完顏匡等傳)」 99권 「도단일등전(徒單鎰等傳)」
완안광 · 완안강 도단일 · 가현 · 손탁 · 손즉강 · 이혁
100권 「맹주등전(孟鑄等傳)」
맹주 · 종단수 · 완안여산 · 노탁 · 완안백가 · 출호균수 · 장휘 · 고횡 · 이복형
101권 「완안승휘등전(完顔承暉等傳)」 102권 「복산안정등전(僕散安貞等傳)」
완안승휘 · 말연진충 · 복산단 · 경단의 · 이영 · 패출로덕유 · 오고론경수 복산안정 · 전탁 · 완안필 · 몽고강 · 필란아로대
103권 「완안중원등전(完顏仲元等傳)」
완안중원 · 완안아린 · 완안정 · 오고론장수 · 완안좌 · 완안교주 · 석말중온 · 오고론례 · 포찰아리 · 오둔양 · 완안포랄도 · 협곡석리가 · 술갑신가 · 흘석연환단 · 완안아리불손 · 완안철가 · 납란호포랄
104권 「납탄모가등전(納坦謀嘉等傳)」
납탄모가 · 추곡 · 고림 · 맹규 · 오림답여 · 곽오 · 온체한달 · 왕확 · 이랄복승 · 오둔효충 · 포찰사충 · 흘석렬호실문 · 완안우 · 알륵합타 · 포찰이랄도
105권 「정채등전(程寀等傳)」
정채 · 임웅상 · 공번 · 범공 · 장용직 · 유구 · 왕소 · 양백웅 · 소공 · 온체한체달 · 장한 · 임요총
106권 「장위등전(張暐等傳)」 107권 「고여려등전(高汝礪等傳)」
장위 · 가익겸 · 유병 · 출호고기 · 이랄탑불야 고여려 · 장행신
108권 「서정등전(胥鼎等傳)」 109권 「완안소란등전(完顏素蘭等傳)」
서정 · 후지 · 파호로 · 사안석 완안소란 · 진규 · 허고
110권 「양운익등전(楊雲翼等傳)」 111권 「고리갑석륜등전(古里甲石倫等傳)」
양운익 · 조병문 · 한옥 · 풍벽 · 이헌보 · 뇌연 · 정진 고리갑석륜 · 완안와가 · 살합련 · 강신 · 오림답호토 · 완안사열 · 흘석렬아오탑
112권 「완안합달등전(完顏合達等傳)」 113권 「완안새불등전(完顏賽不等傳)」 114권 「백화등전(白華等傳)」
완안합달 · 이랄포가 완안새불 · 완안백살 · 적잔합희 백화 · 사묘애실 · 석말세적
115권 「완안노신등전(完顏奴申等傳)」 116권 「도단올전등전(徒單兀典等傳)」 117권 「도단익도등전(徒單益都等傳)」
완안노신 · 최립 · 이기 · 섭대기 · 적잔위흔 도단올전 · 석잔여로환 · 포찰관노 · 완안승립 도단익도 · 점가형산 · 왕빈 · 국용안 · 시청
118권 「묘도윤등전(苗道潤等傳)」
묘도윤 · 왕복 · 이랄중가노 · 무선 · 장보 · 장진 · 정안민 · 곽문진 · 호천작 · 장개 · 연령
119권 「점갈노신등전(粘葛奴申等傳)」
점갈노신 · 유천기 · 완안대루실 · 완안중루실 · 완안소루실 · 오고론호 · 장천강 · 완안중덕
120권 「세척전(世戚傳)」
석가노 · 배만달 · 홀도 · 단도공 · 오고론포로호 · 당괄덕온 · 오고론점몰갈 · 포찰아호질 · 오림답휘 · 포찰정수 · 도단사충 · 도단역 · 오림답복
오고론원충 · 당괄공 · 오림답림 · 단도공필 · 단도명 · 단도사희
121·122·123·124권 「충의전(忠義傳)」
호사보 · 특호 · 복홀득 · 점할한노 · 조규 · 온체한포도 · 와리야 · 납란작적 · 위전 · 완안선양 · 협곡수중 · 석말원의 · 백덕매화상 · 오고손올둔 · 고수약 · 화속가안례 · 왕유한 · 이랄고여열 · 송의 · 오고론영조 · 오고론중온 · 구주 · 이연 · 이덕기 · 왕의 · 왕회 · 제응양 · 출갑법심 · 고석 · 오승가 · 오고론덕승 · 장순 · 마양 · 백덕와가 · 오둔추화상 · 종탄 · 패출로복수 · 오방걸 · 납합포랄도 · 여해열알출 · 시무선 · 온체한로아 · 양지승 · 가방헌 · 이랄아리합 · 완안육근 · 흘석렬학수 · 포찰누실 · 여해열자록 · 조익 · 후소숙 · 왕좌 · 황괵구주 · 오림답걸주 · 타만사열 · 이방고포로호 · 올안외가 · 올안외출호 · 점할정 · 도단항 · 완안진화상 · 양옥연 · 오고론흑한 · 타만호토문 · 희여작 · 애신 · 우현 · 장방헌 · 유전 · 마경상 · 상형 · 출갑탈로회 · 양달부 · 풍연등 · 오고손중단 · 오고손노신 · 포찰기 · 채팔아 · 온돈창손 · 완안강산 · 필자륜 · 곽하마
125·126권 「문예전(文藝傳)」
한방 · 채송년 · 오격 · 마정국 · 임순 · 조가 · 곽장천 · 소영기 · 호려 · 왕경 · 양백인 · 정자담 · 당회영 · 조풍 · 주앙 · 왕정균 · 유앙
이경 · 유종익 · 여중부 · 이순보 · 왕욱 · 송구가 · 방주 · 이헌능 · 왕약처 · 왕원절 · 손국강 · 마구주 · 이분 · 원덕명 ,子 호문,
127권 「효우·은일전(孝友隱逸傳)」
온체한알로보 · 진안 · 유유 · 맹흥 · 왕진 · 유정 · 저승량 · 왕거비 · 조질 · 두시승 · 학천정 · 설계원 · 고중진 · 장잠 · 왕여매 · 송가 · 신원 · 왕여가
128권 「순리전(循吏傳)」
노극충 · 우덕창 · 범승길 · 왕정 · 장혁 · 이첨 · 유민행 · 부신징 · 유환 · 고창복 · 손덕연 · 조감 · 포찰정류 · 여해열수우 · 석말원 · 장구
조중복 · 무도 · 흘석렬덕 · 장특립 · 왕호
129권 「혹리·영행전(酷吏佞幸傳)」
고염산 · 포찰합주 · 소이 · 장중가 · 이통 · 마흠 · 고회정 · 소유 · 서지국
130권 「열녀전(列女傳)」
사리질 · 강주주 · 완안아로진 · 풍묘진 · 포찰명수 · 섭순영 · 장봉노
131권 「환관·방기전(宦官方技傳)」
양충 · 송규 · 반수항 · 유완소 · 장종정 · 이경사 · 기천석 · 장원소 · 마귀중 · 무정 · 이무 · 호덕신
132권 「역신전(逆臣傳)」
병덕 · 당괄변 · 오대 · 대흥국 · 도단아리출호 · 복산사공 · 도단정 · 이노승 · 완안원의 · 흘석렬집중
133권 「반신전(叛臣傳)」
장각 · 야율여도 · 이랄와간
134·135권 「외국열전(外國列傳)」
서하 · 고려 ,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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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사》 <인종 세가> 마지막 조 기준.[2] 제1대 태조 왕건 때 경학(京學)이 있었는데 성종(成宗)이 관제를 개혁하면서 경학을 국자감이라 개칭하였다.[3] 국자학(國子學)·태학(太學)·사문학(四門學)·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4] 원문은 실전됐고 《파한집》 <권하>에 일부분이 발췌되어 기록되어 있다.[5] 천하의 다른 말.[6] 태자의 다른 말.[7] 아름다운 명령.[8] 韓安仁. 예종이 태자를 부탁한 고명대신 중 한 명으로 조정에서 존재감이 컸다. 이후 다른 고명대신들과 내분이 생기고 외척 이자겸에게 밀리면서 허무하게 사라지고 만다.[9] 숙종의 아들은 예종, 왕필(차남, 일찍 죽음), 원명국사(3남, 이미 출가), 왕교(7남, 일찍 죽음)를 제외하고도 왕보(4남), 왕효(5남), 왕서(6남) 3명이나 있었다.[10] 인종을 의미.[11] 당시 이자겸은 중서문하성 소속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였다.[12] 重光殿. 본궐에서 가장 활발하게 사용된 편전이다. 본궐의 여러 편전 중 제1편전이라 부를 수 있다.[13] 이 과정에서 인종은 이제 그만 하라며 얼른 군대를 해산하라고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14] 이 과정에서 새들이 날아와서 이걸 쪼아 먹었는데, 당연히 독이 온 몸에 퍼져서 다 그 자리에서 죽었다. 참고로 이 부분도 버전에 따라서는 일부러 맨땅에 흘린 게 아니라 밖으로 나가지 않고 궁궐 안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몰래 새들이 날아올 타이밍을 맞춘 뒤 새들이 날아오자 그들에게 대신 실컷 먹으라고 던져주었고, 그걸 먹은 새들은 자연히 독이 몸에 퍼져서 죽었다는 버전도 있다.[15] 강릉공 왕온의 아들로 문종의 4대손[16] 대원공 왕효의 아들로 숙종의 손자[17] 한남백(漢南伯) 왕기(王杞)의 아들로 현종의 5대손[18] 영녕군(永寧君) 왕유(王瑜)의 아들로 숙종의 증손[19] '고아(孤兒)'의 그 '고(孤)'다. 일반적인 부자 상속제 하에서는 부왕이 승하해야 세자가 승계받아 왕위에 오르는 것인 만큼, 아버지가 이미 죽어서 없어야 한다(...).[20] 다만 당시 임금을 일컫을 때 '신성(또는 성신)'과 '제왕'을 붙여 쓰지는 않고 보통 따로 떼서 부르는 것이 대다수였다. 때문에 '신성제왕' 자체가 하나의 존호라고 보기는 어렵다. 김부식의 표문에 따르면, 신성이나 제왕보다는 '성상' 또는 '성자'라고 불린 경우가 상당히 빈번했으며, 동시기 송나라도 황제를 그리 부르고는 했다.[21] 다만 고종은 재위기간 내내 꼭두각시 노릇이었기에 즉위나 퇴위에서만 정상이었지 인종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수모를 겪었다.[22] 의종(강제퇴위)-명종(강제옹립, 강제퇴위)-신종(강제옹립)-희종(강제퇴위)-강종(강제옹립)-고종-원종(강제퇴위 1번)-충렬왕(강제퇴위 1번)-충선왕(강제퇴위 1번)-충숙왕(퇴위 1번)-충혜왕(강제퇴위 2번)-충정왕(퇴위당한 아버지 대신 즉위)-충목왕(강제퇴위)-공민왕(강제즉위, 암살)-우왕(이인임에게 옹립, 강제퇴위)-창왕(강제옹립, 강제퇴위)-공양왕(강제옹립, 강제퇴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