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9 22:55:56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

청명계획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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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정 쿠데타·반란 (시도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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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정부 사건 주동 세력
1948년 이승만 정부
제1공화국
제주 남로당 무장반란 사건*
(제주 4.3 사건)
남로당 제주도당
(김달삼 · 이덕구 등)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
(여수·순천 10.19 사건)
남로당 좌익세력
(지창수 · 김지회 등)
1952년 1차 개헌
(발췌 개헌)
이승만 정권
1954년 2차 개헌
(사사오입 개헌)
이승만 정권
1961년 장면 내각
제2공화국
5.16 군사정변 군사혁명위원회
(박정희 · 김종필 등)
1972년 박정희 정부
제3공화국
10월 유신 박정희 정권
1979년 박정희 정부
제4공화국
10.26 사건 김재규 등
위기관리정부
제4공화국
12.12 군사반란 하나회
(전두환 · 노태우 등)
1980년 5.17 내란 신군부
(전두환 · 노태우 등)
1990년 노태우 정부
제6공화국
청명계획* 국군보안사령부
2013년 박근혜정부
제6공화국
이석기 내란선동 사건* 통합진보당
(이석기 등)
2017년 2017년 계엄령 문건 사건* 국군기무사령부 및 군 일부 세력
*표시가 붙은 경우는 성공하지 못한 쿠데타 및 반란을 의미함. }}}}}}


1. 개요2. 전개3. 여파4. 당시 사찰대상 명단
4.1. 현직 의원4.2. 전직 의원4.3. 언론계 인사4.4. 그 외 주요인사
5. 민간인 사찰의 재현과 제2의 청명계획 의혹6. 유사 사례

1. 개요

1990년 국군보안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가 정치계, 노동계, 종교계, 재야 등 각계 주요 인사와 민간인을 상대로 정치 사찰을 벌인 일명 '청명계획'이 폭로된 사건이다. 전형적인 내부고발 사건으로 보기는 좀 애매한데, 내부고발자가 징병제 국가의 이었기 때문이다. 이 폭로로 결국 야당인사들을 제압하기 위한 친위쿠데타 계획은 취소되었고, 친여당 민간 세력과의 협조를 통한 정권유지로 전환하게 된다.

2. 전개

1990년 10월 4일, 보안사에서 복무하던 윤석양 대한민국 육군 이병(당시 24세)이 보안사가 정치계, 노동계, 종교계, 재야 등 각계 주요 인사와 민간인 1,303명을 상대로 정치 사찰을 벌였다고 폭로했다. # 그는 육군 복무 중 외대 시절 '혁명적 노동자계급투쟁동맹(사노맹)' 사건에 연루된 것 때문에 국군보안사령부에 연행된 후 서빙고 분실에서 강제로 대공 및 학원사찰 업무를 80일 동안 담당했다.[1] 윤석양은 고문을 못 이겨 운동권 동료 리스트를 토해내 모비딕[2]에서 근무하게 되었다고 하며,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폭로도 죄책감으로 한 것이니까 자신을 영웅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 출연해서 밝혔다.

1990년 9월 23일 새벽에 윤석양 이병은 위병소 근무자가 다음 근무자를 깨우기 위해 내무반으로 들어간 시간을 이용하여 미리 빼낸 이른바 '청명계획'이라는 민간인 사찰 계획의 사찰 대상자 명부철과 세 장의 플로피디스크를 가지고 탈영한다. 그리고 이를 언론에 폭로하며 양심선언을 하게 된다. 이에 사회는 발칵 뒤집혔고, 당시 사찰 대상이던 노무현(A급 분류), 한승헌, 김승훈, 문동환, 강동규, 이효재 등 각계의 주요 인사 145명은 1991년에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그리고 3당 합당으로 여당 정치인으로 변신했음에도 사찰 대상에 올랐던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은 "명색이 집권당 대표인 나마저도 보안사의 사찰 대상이라는 건 문제가 있다"라며 노태우 대통령을 압박하였다.

1989년 3월에 공안정국이 조성된 직후인 4월에 만들어진 청명계획은 만약 또다시 친위 쿠테타비상계엄이 발동될 경우, 방해가 될 만한 민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보안사령부에서 미리 체포 목록을 작성한 것이었다. 그 민간인들이 어떤 성향인지 판단하기 위한 평가는 이미 끝났고, 계획 발동 시 체포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 내용이 자택의 가구 배치, 진입/도주 가능 경로, 친인척 주거지 및 세세한 인적 사항이라서 청명계획 발동 시 근시일 내에 체포 작전이 실행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3. 여파

사회적으로 비판이 쇄도했고, 야당과 학생들을 비롯한 민주화 세력이 들불처럼 일어나 노태우는 1990년 10월 8일에 국방장관과 보안사령관을 전격 경질하였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인한 국민적 분노를 무마하기 위해 10월 13일범죄와의 전쟁이란 고식적인 수단을 사용한다. 보안사 측은 그간의 음험한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국군기무사령부'로 이름을 바꾸었고, 김영삼대통령이 된 1993년엔 국방부 장관과 기무사령관상하관계가 명확해지면서, 대통령과 기무사령관의 독대도 폐지되었다.

재판부는 '개인의 사생활과 비밀 및 자유에 대한 제한은 국가안전보장 등의 목적 내에서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고 보안사는 군사 기밀과 관련한 사항에 대해서만 사찰해야 하는데도 보안사가 군과 무관한 정치인, 교수, 종교인, 언론인을 부당한 방법으로 사찰한 것은 명백한 헌법 위반 행위'라고 했다. 따라서 국군보안사령부가 헌법상의 사생활 비밀과 자유를 침해한 점을 인정하여 원고들에게 각각 200만 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1998년 7월에 확정 판결했다. 이 사건으로 과거 정보기관의 정치 사찰 행위가 특정 인물의 사생활을 침해했음이 처음으로 공식 확인되었다.

사건을 폭로한 윤석양은 군무이탈죄로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복역하였다. 징역 1년 6개월 이상 복역은 공식적인 군 면제사유이므로 출소하더라도 부대로 복귀하지 않는다. 부대로 복귀하면 심각한 보복이 예상되기 때문에 사법부에서 처벌을 목적으로 징역을 선고했다기 보다는 남은 복무 기간을 격리된 군 교도소에서 마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추정된다.

윤석양은 출소 후 1995년에 '올해의 인권상'을 수상한다. 하지만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숨 죽이며 지내야 했다고 한다. 출소 이후에는 학교에 복학하여 졸업한 뒤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한다. 그리고 2017년 10월 12일에 방영된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 23년 만의 인터뷰를 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하나회 해체와 함께 반민주적인 잔재들이 사라지는 계기가 되는 중요한 시발점이 된 사건 중 하나다. 대한민국 지방선거지방자치제가 뿌리내린 것도 이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노태우 정부가 야당과 협상에 나섰기 때문이라는 평가다.

그리고 이후 보안사의 후신인 기무사는 이 사건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참으로 뻔뻔하게도 기무학교에서 장병들을 대상으로 윤석양 씨를 "조직과 군, 국가를 배신한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매도하는 내용의 적반하장정훈교육을 실시하며 반성 따위 전혀 없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기무학교에서 교육하는 간부들은 교육 받는 장병들 앞에서 윤석양 씨를 두고 "그놈 때문에 보안사 힘이 엄청나게 약해졌다. 보안사 때는 무시무시했다."라는 소리까지 하며 보안사 시절에 저지른 범죄들에 대해 하나도 반성 안 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리고 이들이 조금도 반성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명박 - 박근혜 정부 당시 유신, 군부 정권 당시 자행하던 여론 조작을 무대만 인터넷으로 옮겼을 뿐 그대로 저질렀다는 사실로 명료해졌다. 뿐만 아니라...

2018년 7월 언론 보도를 통해 기무사가 2014년 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간 세월호 유가족들을 사찰한 문건이 공개되어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 총리실, 경찰, 국정원 등 국가기관에 의한 댓글조작과 민간인 사찰이 수없이 밝혀져서 그리 새로운 느낌을 주지 않지만, 문제는 기무사의 경우 민간인을 대상으로 활동할 수 없는 군 조직이라는 점에서 국군사이버사령부의 댓글조작과 더불어 다시 한 번 적폐 청산의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사건이 되고 있다.

이제는 하다하다 친위 쿠데타를 저지르려 한 사실이 발각됐다. 그나마 전두환은 9사단의 일부만 동원했지만, 이 자들은 주력 기보사단들을 몽땅 시위 진압에 투입하려 했다. 이건 시위에 대한 마인드를 따지는 것에 앞서 안보에 대한 생각이 없는 수준으로, 박근혜 정부가 안보에 무감각했다는 걸 잘 보여주는 예시다. 다만 5공 내 개혁파들 대다수가 지지세력이라 그 규모가 컸고, 재벌그룹의 지지도 받았으며, 대통령 본인도 9사단장까지 한 노태우와 달리, 박근혜 체제는 대통령부터가 최순실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무능을 넘어 대통령으로써의 자질조차 없는 인물에 지지층도 한 줌 추종자들밖에 없는데, 그나마 상당수의 박정희 지지자들이 박근혜를 포기한 판이라 실현 가능성은 청명계획보다는 낮았다고 할 수 있다.

4. 당시 사찰대상 명단

당시 한겨레 기사 참조.

4.1. 현직 의원

20대 국회의원 기준.

4.2. 전직 의원

대통령이 4명

4.3. 언론계 인사

  • 김종철
    당시 한겨레 편집부위원장. 녹색평론 발행인.
  • 김중배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후 한겨레 사장, MBC 사장 역임.
  • 리영희
    당시 한겨레 논설고문 겸 한양대 교수. 2010년 별세.
  • 류근일
    당시 조선일보 논설위원실장. 류근일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류근일은 원래 유신체제와 철천지 원수 지간이였었고 실제 학창시절 남북학생회담을 주장하다 징역 15년형을 선고 받고, 민청학련 사건에도 연류되어 징역형을 살았던 운동권 출신이었다. 신군부 시절에는 징역살이까지는 하지 않았으나,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은 상황이였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고 본격적으로 우경화[6]가 되었다가, 점점 기득권에 편입되고, 김대중 정부노무현 정부를 비판하면서 더욱 급속하게 극우화한 인물이다.
  • 박원순
    당시 변호사로서 한겨레에 기고문을 내고 있었다. 서울특별시.
  • 송건호
    당시 한겨레 사장. 2001년 별세.

4.4. 그 외 주요인사

5. 민간인 사찰의 재현과 제2의 청명계획 의혹

하지만 2008년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기무사령관과 대통령의 독대가 부활했고, 기무사는 다시금 불법적으로 조직적인 민간인 사찰을 자행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2012년 4월에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불거지자, 새누리당 이상일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은 3월 30일 서면 브리핑을 통해 성역 없는 검찰수사를 당부하면서도 과거 DJ 정부에서도 국정원이 불법 도청을 한 적이 있다고 발표하였다.

2016년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을 때, 문민정부 이후로 숙청되었던 군 내 불법 사조직(하나회 등)이 청문회 과정에서 알자회라는 이름으로 다시 조직되어 군 인사권에 개입한 것이 밝혀지면서, 여차하면 계엄령이나 군사쿠데타까지 일으킬 수도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2014년 4월부터 10월까지 세월호 유가족들과 관련자들을 불법적으로 사찰한 것이 4년 후인 2018년 7월 밝혀지면서 다시 한 번 충격을 주고 있다.

그리고 2018년 7월 6일 탄핵정국 위수령 및 군대 투입 검토 폭로가 일어나면서 제 2의 청명계획 논란은 절정을 찍게 된다.

6. 유사 사례

다음 사례들은 전경, 공무원, 군인들의 양심선언 사례다.
2009 김영수 소령 양심선언(9억원대 군납부조리)
2008 이길준 의경 양심선언(일명 '촛불 의경' 양심선언)
1992 군 부재자투표 부정 폭로 사건
1991 박석진 일경 양심선언
1990 이문옥 감사관 구속 사건
1989 보안사 생매장 협박사건
1989 이동균 대위-김종대 중위 양심선언
1987 양승균 상경 양심선언


[1] 이 서빙고 분실은 일명 '빙고호텔'이라 불리던 곳으로, 군부독재 시절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 당한 곳이다.[2] 당시 보안사 관계자들이 민간인 사찰을 목적으로 운영하던 위장카페의 이름이 '모비딕'이었다.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한 이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온 한국 영화가 2011년에 개봉한 '모비딕'이다.[3] 지금의 서청원친박계 좌장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이 당시만 해도 김영삼의 측근이었다.[4]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회장이었고 운동권 출신 인사이기도 했다.[5] 당시에는 정의당 노회찬의원과 함께 운동권 PD(정파)의 거두였다.[6] 엄밀히는 본래는 우파였지만 전체주의 독재는 아주 비판하는 성향에 가까웠다. 그러나 박정희전두환 등과 각을 세웠던 비교적 개혁적 인물인 김영삼이 정권을 잡고 본격적인 개혁 정책을 보이면서, 류근일을 비롯한 여러 보수 논객들이 노골적인 우경화 노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