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10월 10일 ~ ([age(1942-10-10)]세)
1. 개요
대한민국의 법조인 및 정치인.2. 생애
1942년 10월 10일 경상북도 군위군 소보면(現 대구광역시 군위군 소보면) 출생. 의성 안계중학교, 대구 계성고등학교, 1966년 2월 25일 경북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1981년 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사법 전공으로 법학 석사 학위[2]를 취득했다.경북대학교 1학년 재학 중이던 1960년 4.19 혁명에 참여했다. 졸업 후 1973년 제15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5기로 수료했다. 이후 1975년부터 1977년까지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판사, 1977년부터 1980년까지 대구지방법원 판사, 1980년부터 1981년까지 전주지방법원 정읍지원 판사로 근무했다. 그러나 1979년 10월 4일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당시 김영삼에게 격려편지를 보냈던 것과 장기간 가택 연금 상태에 있던 김대중을 방문했던 것이 드러나 전두환 정부로부터 '국가관이 없는 판사'로 낙인 찍혀 법관 옷을 벗게 되었다.[3]
이후 경상북도 대구시(현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1가에 법률사무소를 설립해 증권 및 재건축 전문 변호사 및 변리사[4]로 활동하였다.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당시 학생운동가를 숨겨주었다 하여 범인은닉죄로 구속된 최기식(崔基植) 신부를 무료로 변론하는 등 여러 경북대학교·계명대학교 학생들의 시위사건을 맡아 변론했다. 또한 1984년 5월 12일에는 대구광역시 서구 비산동에 법률의 무지와 빈곤으로 변호인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시민들을 위해 무료인권상담소를 개설했다. 이 밖에 경북대학교 법과대학에 강사로 출강하기도 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대구직할시 서구·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한민주당 유성환 후보와 한국국민당 이만섭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당파국민연합 후보로 대구광역시 달서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연합 박종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종류 | 선거구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85 |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 대구 서구·중구[5] | [[민주한국당|]] | 34,225표 (10.23%) | 낙선 (4위) |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 대구 달서구 갑 | | 4,944표 (5.99%) | 낙선 (5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