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6-01-09 00:34:25

정웅

前 대한민국 육군 제31보병사단장
정웅
鄭雄 | Jeong wung
파일:unnamed (42).jpg
<colbgcolor=#34632a><colcolor=#fff> 출생 1928년 4월 17일[1]
전라남도 순천군 순천면 저전리
(현 전라남도 순천시 저전동)
사망 2021년 12월 23일 (향년 93세)
서울특별시 자택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2묘역
본관 경주 정씨[2]
배우자 전성원[3]
자녀 장남 정대균[4], 차남 정성균[5]
학력 순천공립중학교 (졸업)
육군호국사관학교 (졸업 / 1기)
육군대학교 (졸업)
합동참모대학 (졸업)
전북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 석사과정 수료)
종교 개신교(성결교회)
최종 당적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3
경력 전북대학교 ROTC 단장
제31향토방위사단장
민추협 부의장
평민당총재 안보국방특보
평민당 군정치 중립화 추진 위원장
김대중 대통령후보 선대본부 부위원장
평민당 안보국방위원장
평민당 당무지도위원회 부의장
평화민주당 행정위원
대한민국 국회의원
자유민주연합 특임행정촉탁위원
군사 경력
임관 육군보병학교 (1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49년 ~ 1980년
최종 계급 소장 (대한민국 육군)
지휘 육군본부 작전참모국 차장
육군 제31보병사단장
참전 6.25 전쟁
베트남 전쟁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5.18 민주화운동2.3. 정치 활동
3. 매체에서4. 선거 이력5. 둘러보기

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전직 정치인이다.

2. 생애

2.1. 초기

1928년 4월 17일 전라남도 순천군 순천면 저전리(현 순천시 저전동)에서 아버지 정구조(鄭求朝, 1903. 7. 29 ~ 1970. 1. 3)와 어머니 나주 정씨(羅州 丁氏, 1916. 10. 8 ~ 1978. 5. 3)[6] 사이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45년 3월 순천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군청에서 근무하다 1949년 육군호국사관학교에 지원해 합격하였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소집되어 호남 지구 공비토벌전과 저격 능선 등 전방에서 전투부대 중대장으로 싸웠다.

휴전 후 소령으로 진급하여 대한민국 육군본부 감찰관실에서 일하다 중령으로 진급하고 군 교육기관 교관과 전방사단의 사단 작전참모, 정보참모로 근무했다. 1968년 대령이 되면서 연대장을 하다 전북대학교 ROTC 단장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사단 참모장과 육군본부 작전참모국을 거쳐 1974년 사단 부사단장 재임 당시 국방부 유엔군 참전 기념비 건립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6.25에 참전한 유엔군 16개국 중 미국, 프랑스, 필리핀, 그리스 등 12개국의 기념비를 건립했다. 1976년 준장으로 진급하고 관구 참모장과 군사령부 인사참모로 근무했다. 1980년 1월 1일 소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제31보병사단 사단장으로 임명돼 광주로 부임했다.

2.2. 5.18 민주화운동

5.18 민주화운동 초기 육군 제31향토방위사단장으로서 '첫 번째'로 학생시위 진압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현장에 있는 시민들의 말을 경청하며 "유혈진압을 최대한 자제"했고, 이 때문에 "병력을 적절히 운용하지 못했고 분산 운용으로 효율적인 진압을 하지 못했다."는 명분으로 진압군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반면 신군부는 익산에 있는 특전사 제7공수특전여단을 '2번째 진압부대'로 파견했으며, 이들 2차 진압부대들은 학생-일반시민 구분없이 전투를 최우선으로 두는 행태를 보였으며, 특히 5월 21일 금남로에서 시민들을 향해 '총기발포'를 자행, "주민등록이 된 사망자" 수만 165명(후유증 사망자 376명)이 나오는 유혈사태를 불러오고 말았다.

당시 사단장이던 정웅 소장은 강경진압에 부정적이었다. 전남북계엄분소장 및 전투교육사령부(현 육군교육사령부) 사령관이었던 윤흥정 중장의 출동명령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7]

정웅 장군이 사단장으로 있던 31 향토사단에 대한 광주 시민들의 인터뷰 기사[8] 에 따르면 향토사단에게는 심지어 빵이나 음료수를 가져다주었다고 할 정도다. 31사단 병력은 공수부대와 달리 온건한 대응을 폈다는 증언이 다수 있다.[9]

신군부의 강경진압에 미온적이었다는 이유로 정웅 장군은 강제예편되었고, 이후 김대중에게 광주의 진상을 폭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며, 13대 총선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광주 북구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그가 당선되었을 때, '초선 출마자'가 91.5%로 전국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는데, 이는 정웅 장군이 신군부측의 발포 및 과잉진압 지시를 거부하고, 온건한 진압방식을 택하며 강제예편을 감수한 모습이, 시민 사회에 널리 알려진 덕분.

이는 군 지휘관의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기도 하다. 정웅의 온건 방침이 끝까지 고수되었다면, 그저 일부 대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해 훈방시키는 것으로 상황을 종결할 수 있었다는 것. 정웅을 밀어내고 등장한 2차 진압군들이, 불문곡직 구타[10]발포로 대표되는 초강경진압에 반발한 시민들 규모가 시위 학생 -> 시위대로 확대되고 -> 5/21일 도청 발포 후에는 시민군까지 등장하며, 갈수록 사안이 확대되고 확대된 모습과 대비되는 부분. 나아가, 현장을 살피지 않고 무조건 초강경 대응만 주문한[11] 상급자 지시가 아닌, 국민을 지킨다는 군인의 본분에 충실한 것이, 옳은 일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혹자는 정웅의 31사단이 시민들과 충돌해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말하는데, 이는 교묘하게 사실을 왜곡하는 주장이다. '정웅 사단장이 시위진압 권한을 행사한 건 5월 18일까지'였다. 신군부측에서 자신들의 무모한 명령(구타 및 발포)을 따르지 않는 정웅을 몰아내고, 2차 진압군을 파견한 후, 광주에 도착한 3공수여단을 31사단이 지원한 것을 '확대해석'한 것.
- 이들이 근거로 삼는 5월 20일의 택시행진은, 대학생을 태워줬다는 이유만으로 공수부대원들이, 택시기사를 때려죽인데 대해, 당초 소극적이었던 택시-버스 기사들이 반발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이 택시행진 전까지는, 1차 진압군이든 2차 진압군이든 시위 학생들을 상대하였다. 3공수여단이 노인장과 여고생, 택시기사 등 일반시민들에게까지 무분별하게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이 차츰 시위대에 합류하며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된 것.
- 무엇보다 계엄군과 시위대 모두 차량 사고가 발생해, 진압대원이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오로지 시민들의 책임으로 몰아세우고 + 나아가 31사단 및 정웅 사단장의 책임으로 몰아가는 건, 매우 부당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23일 해남에서 총격 사망자 2명 포함해서, 31사단의 유혈진압으로 총 6명이 사망했다고 5월단체는 밝혔다.("광주 향토사단이 5.18 진압중 시민 사살") 이 해남에서의 사망자 수 2명도 축소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실제 해남 사망자는 4~7명으로 추정된다. ("해남군부대서 시신 봤다"...청문회 증언 막아, 5.18 당시 해남 우슬재와 상등리에서 일어난 집단총격) 당시 23일부터 계엄군이 해남읍 해리와 옥천면 영춘리 경계에 있는 고개인 우슬재를 점령하고 군중과 차량들에게 발포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5.18 민주화운동/전개 참고.
서울고등법원 1996. 12. 16. 선고 96노1892 판결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류위반(뇌물)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하여 보면, 정웅 소장은 신군부의 명령을 거부했고, 실제로 상황 종료 이후 보안사의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 강제 전역했다(강제전역사유:근무지 이탈로 알려져 있다. 명령을 거부하기 위해 명령을 아예 안 받아버리고 지휘소 밖으로 나갔다고 알려져있음.). 만약 그가 신군부의 의도대로 강경 진압을 했다면 공수여단 및 20사단 등이 광주까지 출동할 필요도 없었으며, 소준열처럼[12] 진급을 했을 것이다. 그의 강제전역과 그 이후 한동안 보안사의 감시를 받은 것, 김대중을 도와 광주의 진상을 밝힌 것이 그가 신군부의 명령을 거부한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2.3. 정치 활동

대한민국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려고 했지만, 외부의 강압으로 후보자에서 사퇴하는 등 7년 동안 제약받는 사회생활을 하였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뤄진 후, 같은 해 8월 민주화추진협의회 부의장으로 임명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이 시기 자택이 테러를 당하는 등 많은 위협을 받았다. #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평화민주당 광주 북구 후보로 나가 5.18 희생자와 광주시민의 명예 회복을 내걸고 "초선 출마", 91.5%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13] 이후 평화민주당 5.18 진상조사특별위원장을 맡았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공천에서 탈락한 뒤 민주당을 탈당하고 박찬종이 창당한 신정치개혁당에 입당해 전국구 후보로 나섰으나 낙선했고, 이후 합당으로 자유민주연합 소속이 되었으나 자민련을 탈당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2021년 12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93세. #

3. 매체에서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1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광주 동·북

후보사퇴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광주

[[평화민주당|
평화민주당
]]
127,579 (91.5%) 당선 (1위) 초선[15]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신정치개혁당|
신정치개혁당
]]
369,044 (1.8%) 낙선(3번)
역대 후보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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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광주직할시 북구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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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주정의당 지대섭
2 통일민주당 정길성
3 평화민주당 정웅 당선
4 한주의통일한국당 신금남
· 서 갑 · 서 을 · · 광산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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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둘러보기

파일:광주광역시 휘장(1987~2000).svg 광주직할시 제13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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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수 김봉욱 박찬종 송현섭 정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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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2월 27일.[2] 문헌공파-참의공파 63세 병(炳) 항렬. 족보명은 정병웅(鄭炳雄).[3] 1937년 8월 7일생. 용궁 전씨(龍宮 全氏) 전달조(全達兆)의 딸이다.[4] 鄭大均. 1963년 1월 1일생. 경희대 교수[5] 鄭成均. 1965년 2월 7일생. 신한대 교수[6] 정하태(丁河泰)의 딸이다.[7] 다만 윤흥정 중장도 기관장들과 유지들의 항의 방문 이후에는 강경 진압을 자제하려고 하다가 작전 중 반 강제로 소준열 소장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8] 해당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략) 이와 관련하여 광주 사태를 목격했다는 박 모씨(38)는 『광주 사태 때 광주 시민들이 정 장군의 향토 사단 병력에는 빵, 음료수 등을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그때 공수부대는 얼룩무늬 군복을 , 향토 사단은 초록빛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향토 사단 병력은 시민들을 과잉진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때 향토 사단마저 발포를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라고 말했다. (후략)[9] 즉 향토사단인 31사단 병력은 공수부대처럼 무자비하게 진압봉을 휘두른 것이 아니라, 시민 및 시위대들과 최대한 대화를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는 것이다.[10] 이때 당시 쓰이던 시위 진압봉은, 박달나무소나무물푸레나무 등 내구성 높은 목재로 제작된 것들이다. 계엄군이, 자전거를 타고 도망치는 시민을 쫓아가 자전거 조수석의 안장을 내려쳤는데, 집에 와서 보니 철제 안장이 휘어있더라는 경험담이 있을 정도.[11] 예비군 수백만 명이 총기를 다룰 줄 아는 나라의 대도심에서, 무조건 두들겨패고 + 시민들에게 총기 발포까지 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12] 소준열은 대장까지 진급했다.[13] 당시 전국 최고 득표율 기록이였다. 이후 2024년 4월 10일에 치러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81세의 박지원이 전남 해남, 완도, 진도 지역구에서 92.35%를 달성하면서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14] 제5공화국에서는 12.12 당시 헌병감 김진기역, 4공화국에서 정웅 역을 맡은 후에는 괴로운 표정으로 유지 및 지역의 기관장들 앞에서 괴로운 표정으로 윤흥정과 같이 "왜 공수부대가 여기로 배치되어서 잔혹한 진압을 일삼는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회한을 토로한다. 그 이후 공수부대와 31사단 병력들에게 절대로 피를 부르는 작전에 임하지 말라고 호통을 쳤으며, 이를 어길 시에는 즉각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여담으로 윤흥정 중장도 자신이 이 사실을 처가 식구들에게 들어서 알았다고 말하며 사죄한 후에 정웅 소장을 보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라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15] 92.2.11 민주당 탈당 및 신정치개혁당 입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