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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읍성의 동문 향일문과 옹성[1] | 근처 건물에서 본 읍성의 전경 |
원래의 읍성. 파괴되지 않은 부분 | 일제강점기 경주읍성 성곽과 해자 |
대한민국의 사적 제96호 | ||
경주읍성 慶州邑城 Gyeongjueupseo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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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지 | |
면적 | 45,496㎡ | |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 |
제작시기 | 고려 우왕 4년 개축 | |
위치 |
1. 개요
慶州邑城 / Gyeongjueupseong경상북도 경주시 중부동에 위치한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 읍성이다. 사적 제96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현종 때인 1012년 기존 토성으로 축조했다가 조선시대에 석축으로 개축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일제강점기 들어오면서 동쪽 성벽 50m만 남기고 대부분이 헐렸지만 2011년 들어 경주시가 복원공사를 하였다.
2. 역사
2.1. 고려시대
935년 신라 제56대 경순왕이 서라벌을 떠나 개성에서 항복하면서 신라의 천년사직이 끝나고 도시 이름도 지금의 경주로 바꾼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경주는 고려시대에도 서경 평양과 함께 3경 중 하나인 동경(東京)으로서 중요한 도시로 나름 대접받긴 했지만, 수도였던 신라 때에 견주면 상당히 도시가 축소됐고 지금의 월성동이 중심이었던 신라 시절의 도심은 차츰 황폐화되었다.1012(현종3년)년에 기존 신라 왕경의 중심지였던 현 월성동에서 서북쪽으로 2km 가량 떨어진 곳에 경주읍성을 새로 지어 관청 등 시설을 모았다. 이때부터 월성동은 오늘날까지 논밭이나 빈 터가 됐고 경주읍성 쪽이 지금도 경주 시가지 중심지다. 어째서 기존 중심지를 포기했는지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학계에서 예측하기로는 경제가 어려워져 더 이상 신라 때처럼 북천의 범람을 제어하는 데 신경을 쓰기 어려워졌고, 예전처럼 온 나라의 물자가 모이는 수도도 아닌데 신라 시절처럼 경주분지가 시가지로 가득 차 있어서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땅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 밖에 고려시대부터 유행한 풍수지리에 따라 황남동의 고분과 남산(경주)의 북쪽을 피하려고 그랬다는 견해도 있다.[3]
현종은 대신 제방 남고루를 세워서, 경주읍성 부분은 북천의 범람 피해를 입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 뒤 1378년(우왕4년) 때 이르러 토성을 석축으로 개축하고 4개문을 정비하였다.
2.2. 조선시대
고려가 망하고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경주읍성도 변화가 시작되었다. 먼저 문종실록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충청·전라·경상도 도체찰사(忠淸全羅慶尙道都體察使) 정분(鄭苯)이 아뢰기를, "경상도(慶尙道)·충청도(忠淸道) 각 고을의 성자(城子)는 당초에 법식(法式)에 의하여 쌓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규식(規式)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그대로 둘 수 있는 각 고을과 시기에 미치도록 급히 개축(改築)해야 할 각 고을과 추후에 축조할 수 있는 각 고을, 그리고 물려서 쌓을 각 고을들을 마감하여 삼가 갖추어 계문(啓聞)합니다. 그대로 둘 곳은 다음과 같습니다. 경주부 읍성(慶州府邑城)은 주위가 4천 75척, 높이가 11척 6촌이고, 여장(女墻)의 높이는 1척 4촌이며, 적대(敵臺)가 26개소, 문(門)이 3개소인데 옹성(擁城)이 없고, 여장이 1천 1백 55개이며, 성안에 우물이 83개소이고, 해자(海子)는 아직 파지 않았습니다. (후략)
문종실록 9권, 문종 1년 9월 5일 경자 6번째기사 中
문종실록 9권, 문종 1년 9월 5일 경자 6번째기사 中
이 기록을 보면 알다시피 경주읍성 연구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 경주읍성 모습도 알 수 있다. 1척의 길이가 약 30cm이고, 1촌의 길이가 약 3cm이므로 높이는 약 3.48m이고 둘레는 약 1.2225km이다.
그 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당시 경주 판관이던 박의장[4]이 새벽에 동문으로 비격진천뢰를 발사하자 왜군이 놀라서 서생포왜성으로 달아났다고 징비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불탄 경주읍성 남문(징례문)[5]이 1631년에 준공되었고, 그 뒤에 전식[6]이 동, 서, 북을 차례로 개축했다고 한다.[7]
영조 때 한 번 더 개축하였다.
2.3. 일제강점기 이후
일제강점기가 들어선 뒤 전국에 읍성 철거 명령이 떨어졌고, 경주읍성도 철거 대상이 되었다. 1912년에 경주읍성이 철거되었는데 당시 사연이 있었다. 1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1912년쯤 불국사와 석굴암을 구경하려고 경주를 방문하였을 때 시내에 들어오는데 큰 성벽의 높이 때문에 차량이 통과할 수 없다고 하자 그대로 철거하였다고 한다.성벽이 철거된 뒤 나온 자재는 모두 경주선으로 투입되었으며, 동쪽 성벽 조금만 남기고 모두 철거하였다. 그 뒤론 계림초등학교의 담장 비슷한 역할도 하고 주민들의 쉽터 역할도 하다 2014년쯤 흰 철벽을 치더니 공사를 시작했다.
3. 경주읍성 성곽 복원
고려시대 이래 경주의 중심이었던 경주읍성 성곽도 복원이 진행중이다.
2018년 오늘날의 경주읍성 성곽 복원은 상당히 진척되었고, 동문인 향일문의 상량식도 거행되었다. 그리하여 2018년 11월 8일 향일문이 복원 되었다.그리고 북문인 공진문도 복원예정이다. 경주읍성의 핵심유적인 집경전 영역[9]의 복원도 진행될 것으로 보이며, 사진자료가 완벽하게 남아있고, 건물 일부가 남아있는 경주객사(동경관)도 복원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현지에서는 경주읍성 복원공사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10] 경주역 앞 시장 인근에는 "그런 거 복원할 예산으로 쇼핑센터 하나 더 지어달라"고 현수막까지 내걸었을 정도. 아무래도 읍성은 전국 어느 고을에나 하나씩 있는 유적이라 말 그대로 유적이 넘쳐나는 경주 기준으로는 희소성도 없고 딱히 관광객을 추가로 끌어들일 만한 곳도 아닌데다 위치가 현 시가지의 중심이라서 시민들의 불편도 다른 유적지 복원보다 큰 문제가 있었다. 또한 경주읍성 동편 북쪽 성벽 복원 당시에는 성벽 복원에 나설 것이 아니라 먼저 준공된 남쪽 읍성에 관광객들이 찾아오도록 주차장을 확보하고 주변 민가철거 등 정비 사업이 먼저인데 순서가 잘못되었다고 "경주시가 또다시 북쪽 복원 공사에 나서는 것은 여기 찔금 저기 찔금 판만 벌리는 거꾸로 행정"이라는 비판도 현지에서 있었다.[11] #
2022년 9월, 2019년 8월부터 시작됐던 경주읍성 5구간 발굴조사가 완료되어 동벽 남단부 일부를 제외한 전체 약 440m 정도의 경주읍성 동벽 실체 대부분이 드러나게 됐다. #
4. 경주읍성과 경주[출처]
경주읍성(이하 읍성)은 고려시대부터 줄곧 경주와 함께 하였다. 이미 고려시대에 성 안을 나누어 동부, 서부, 북부를 정하였고 조선시대에 와서는 성을 기준으로 읍내면[13]의 지명을 정하였다. 읍성이 헐린 뒤에도 경주의 동명의 상당수가 성과 관련된 것들을 기준으로 삼았으며, 민간 지명 중에서도 성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즉 성곽은 헐렸어도 아직 경주 사람들 마음 속에는 경주 읍성의 기억들이 경주 시내를 지키고 있는 셈.4.1. 관련 지명
- 성내동
- 동부동, 서부동, 북부동
고려시대에 성곽 안에서 성문들을 연결하는 동문로와 서문로(現 북성로), 남문로와 북문로(現 봉황로)를 기준으로 서쪽을 서부, 북동쪽을 북부, 동남쪽을 동부라고 칭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 노동동, 노서동(성남)
- 성건동(성북, 성서)
- 성동동
- 성안(에)
- 성밖(에)
5. 여담
신라의 처음 왕궁이었던 금성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곳에 예전부터 있던 성곽들을 고려시대에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다, 위치 자체도 기록상 맞아떨어지기 때문. 다만 왕궁이 있었던 곳이라면 유물이 많이 발굴되어야 정상인데, 아직까지 신라 시대의 유물들이 나오지 않고 있는지라 널리 지지받는 추정은 아니다.[1] 차가 없는 이유는 새벽에 촬영해서이다.[2] 현재 복원된 향일문은 경상북도 경주시 동부동 52[3] 이렇게 신라가 멸망한 뒤 곧바로 경주 시가지의 중심지가 월성동에서 읍성 일대로 옮겨지면서 월성동은 오랜 세월이 흘러 논밭이 되었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개발에서 비켜가 신라시대 유구가 고려 이후 유구와 크게 섞이지 않고 더 잘 보존되었다.[4] 뒷날 경주부윤이 된다. 무려 7년 동안 재임하여 역대 경주부윤 중 최장기간 재임했다.[5] 이 때 상량문은 전식의 아들인 전극항(1590~1636)이 지었다.[6] 자는 사서, 본관은 옥천. 류성룡의 문인으로 인조 때 경주부윤으로 재직(1631년 12월 ~ 1633년 4월)하였다.[7] 이하 내용들은 동경잡기[8] 2014년에서 2015년 사이까지는 북쪽의 벽을 넘어 다닐 수 있었는데 복원공사를 한다고 철창으로 막았다.[9] 집경전 건물 자체는 1631년 화재로 사라졌고, 집경전기구비의 경우는 1960년 즈음까지도 남아 있었다.[10] 사실 경주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고 전국적으로 개발 지역에서 문화재가 나오기라도 하면 현지 사투리로는 말 그대로 기함을 한다. 뭔가 유물이나 유적 비슷한 것이 발견되는 순간부터 공사는 올스톱되고 발굴한다고 공사가 지연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공사 자체가 취소되는 경우도 있는 것도 모자라 그 비용을 모두 문화재법에 따라 사비로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경주처럼 "땅에 삽만 꽂으면 문화재가 나온다"는 우스개까지 존재하는 동네에서는 유물 발견 소식이라고 났다 하면 뒷목부터 잡고 본다.[11] 허나 이는 매우 바보같은 주장인데, 남측 성벽 후면을 따라서 서측 남단~동측 남단 성벽을 관통하는 중심도로 화랑로와 성벽터를 따라 난 도로 남측 번화가, 서측 해자를 메꾸고 건설된 금성로, 남측 해자를 메꾼 뒤 지어진 번화가, 동측과 북측 해자를 메꾸고 지어진 주택가와 노후 아파트들, 서측 군영터 위에 지어진 슬럼화된 노후 주택가들 때문에, 남단부터 복원을 할 경우 사실상 시작도 전부터 부근의 건물이란 건물, 길이란 길은 있는 대로 싹다 갈아엎고 나서, 법에 따라 그 아래 땅까지 다 뒤집어 엎어서 유구 나오는거 싹다 캐내야 한다. 즉 성 하나 복원한답시고 20여만명이 사는 한 도시 중심지의 남쪽 정 중앙부 번화가 일대를 송두리째 초기화해야 한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 짓을 하려면 일대의 도로구조와 건물, 구획배치를 송두리째, 그것도 미발견유구의 보존을 위해 현재까지 밝혀진 신라시대 도로구조를 기반으로 그 주변 교통량을 감안한 재설계를 한 뒤 철저한 감독 하에 한땀 한땀, 중요한 미발견유물 캐내기도 전에 괜히 밟아 부수지 않게 조심해서 철거한 후 재시공해 나가야 하므로, 1년 예산 전액을 다 영끌해도 어림 반푼어치도 없고, 앞으로 최소 십수년간 예년보다 훨씬 많은 거액을 추가로 타와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결국 지방세의 증액으로 이어질 것이고, 따라서 결국 피해보는 것은 그 주장을 한 자신들과 자기가 낳아 기른 자식들이 되는 것이다. 시 입장에서는 그에 따른 더 큰 비판은 듣기 싫기에, 일부러 동측 중앙~북단부부터 먼저 시작해서, 북측을 거쳐 반시계방향으로 복원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실제 이미 위에 말한 금성로, 화랑로 등 몇몇을 제외한 시내 중심의 포장도로들은 대부분 신라시대에 지어져 각 방형구획을 나누던 대로들을 여태까지 최소한의 차량통행이 가능한 수준의 확장과 아스콘 포장과 약간씩의 노면등의 개량을 거쳐 2천 몇백 년간을 끊임없이 주욱 써온, 매우 유서깊은 도로들이자 신라의 유산이라는, 각지의 신라 성채들처럼 그 나름대로 귀하신 몸들이다.[출처] 정우인,『다시 천 년의 중심-성내동(城內洞),〈경주고등학교, 2023[13] 부내면, 경주면으로 개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