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6-07-07 10:23:36

미천왕

을불에서 넘어옴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구려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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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고구려 제15대 국왕
미천왕 | 美川王
파일:서대총 전경.jpg
미천왕릉으로 추정되는 서대총 전경
출생
(음력)
<colbgcolor=#fff,#1f2023>268년~280년대 초반 추정[1]
고구려[2]
사망
(음력)
331년 2월 (향년 50~60대 추정)
고구려
능묘 미천원(美川原)[3]
재위기간
(음력)
고구려 제15대 국왕
300년 9월 ~ 331년 2월 (30년 5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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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본관 <colbgcolor=#fff,#1f2023>횡성 고씨
성씨 고(高)
을불(乙弗) / 우불(憂弗)[4] / 을불리(乙弗利)[5]
조부 서천왕
부모 부친 고돌고
모친 미상
왕후 왕후 주씨
자녀 태자 고사유
왕자 고무
종교 무속
시호 미천왕(美川王)
호양왕(好壤王)[6] }}}}}}}}}

1. 개요2. 생애
2.1. 비운의 유소년기2.2. 왕위 등극2.3. 영토 확장2.4. 내치2.5. 말년2.6. 사후
3. 미천왕의 능4. 여담
4.1. 이름 관련 이야기
5. 《삼국사기》 기록6. 대중매체에서7. 둘러보기

1. 개요

予野人, 非王孫也。請更審之。
나는 야인이지 왕손이 아닙니다. 부디 다시 살펴보십시오.
즉위 이전, 창조리의 부하들이 자신을 찾아내자 의심하며 한 말. 《삼국사기》에 기록된 미천왕의 유일한 말이다.
고구려의 제15대 국왕.

큰아버지 봉상왕에게 아버지를 잃고 큰 고생을 겪어야 했지만, 국상 창조리의 도움으로 고구려의 새 임금이 되었고, 영토 확장 및 왕권 안정화로 고구려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즉 고구려 전성기의 뿌리를 마련한 명군이었다.[7] 그러나 동시에 한국사 최악의 고인능욕을 당한 비운의 군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비운의 유소년기

훗날 미천왕이 되는 을불은 서천왕의 차남 돌고의 아들로서 고위 왕족의 신분이었다. 하지만 292년 3월 백부 봉상왕이 왕권 강화를 빌미로 친족들을 경계하면서부터 그의 수난이 시작된다. 즉위 직후 숙신을 격파하며 영웅으로 떠오른 숙부 안국군 달가를 반역으로 몰아 처형함에 이어[8], 이듬해 9월에는 친동생인 돌고까지 숙청해버렸고 이 때문에 드라마틱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 것이다.

아버지 돌고가 처형당하자 을불은 필사적으로 도주하여 간신히 살아남았고, 촌구석인 수실촌(水室村)으로 도망가 신분을 숨긴 채 음모(陰牟)라는 부자의 집에 머슴으로 살게 되었다. 하지만 음모는 을불이 왕족일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을불은 죽어라 고생만 해야 했다. 낮에는 땔나무를 해오며 잠시도 쉬지 못했고, 밤에는 주인집 연못의 개구리[9]가 시끄러워 주인이 잠을 못 잔다고 들들 볶아 밤새 연못에 기와나 돌을 던지기도 했다.

결국 고된 머슴살이를 버티지 못하고, 1년만에 음모의 집에서 나와 소금 장수 재모와 만나 동업했다.[10] 소금 장수가 된 이후에도 불우한 생활은 매한가지였다. 재모와 함께 소금 장사를 마친 후에 압록강에 이르러 소금을 내려놓은 뒤 강 동쪽 사수촌(思收村)[11]에서 어떤 노파의 집에 머물렀다. 하룻밤 묵었을 때 그 집의 노파는 한 번 공짜로 소금 1말을 얻어갔는데, 숙박비로 준 소금을 더 달라는 것을 을불이 거절하자 앙심을 품은 노파는 을불이 잠든 사이 소금 가마니에 몰래 신발을 집어넣었다. 이후 노파는 짐을 지고 길을 떠나는 을불을 쫓아와 가마니 속에서 신발을 찾아내고는 그를 관가에 신고했다.

을불은 이 때문에 도둑으로 몰리게 되었다. 압록강 변의 재(宰)[12]팔랑귀처럼 노파의 말을 그대로 믿어버려 을불의 소금을 모조리 압수하고 신발 값으로 노파에게 준 뒤, 태형을 내려 매를 친 다음 내쫓아 버렸다. 갖은 고생을 한 을불은 골병이 들어 몸이 야위고 옷차림도 남루해져서 완전히 거지꼴이 되었다. 이런 처참한 몰골이었으니 그가 왕족이라는 사실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삼국시대 초기임에도 '임금을 받는 머슴', '행상을 포함한 상업' 등의 생활상이 묘사되기 때문에 상당히 흥미로운 대목이기도 하다. 이 부분만 떼어놓고 보면 조선 후기의 생활사라고 해도 믿어줄 정도이다. 사실 한반도의 경우 암염이 없어 해안가에서 소금을 생산해 내륙으로 운송해야 하는 소금 장수가 매우 일찍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3세기 중반 동천왕 대의 고구려에 대해 기록한 《삼국지》 〈동이전〉에서도 "하층민들이 먼 곳에서 쌀, 생선, 소금 등을 운반해 귀족들에게 공급한다"고 전하여 소금 장수의 존재가 검증된다.

2.2. 왕위 등극

한편 봉상왕은 날이 갈수록 포악해져 폭정이 심화되었다. 지진과 서리, 우박, 가뭄 등이 잇달아 일어나며 흉년이 지속되고 백성들의 굶주림은 극에 달하였지만, 봉상왕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궁실을 더 사치스럽고 웅장하게 짓는 데에만 치중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자주 시정을 건의하였음에도 왕은 따르지 않았고, 국고는 더욱더 바닥나고 있었다. 298년 11월에는 사람을 시켜 을불을 죽이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창조리가 간언하기를, "하늘의 재난이 거듭 닥쳐 흉년이 드니 백성들이 살길을 잃어 장정들은 사방으로 떠돌고 늙은이와 아이들은 구렁텅이에서 뒹굴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 대왕께서 일찍이 이를 생각지 않으시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몰아서 토목공사로 고달프게 하시니, 만 백성의 부모가 되신 뜻에 크게 어긋나는 일입니다. 하물며 이웃에 강하고 굳센 적이 있는데, 만일 우리가 피폐해진 틈을 타서 그들이 쳐들어온다면 사직과 백성들은 어찌 되겠습니까?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이를 깊이 헤아리소서."라고 하였다.

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임금이란 백성들이 우러러 보는 존재이다. 궁실이 장엄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 지금 국상은 과인을 비방함으로써 백성들의 칭송을 얻고자 하는가?"라고 하였다.

창조리가 말하기를, "임금이 백성을 걱정하지 않는다면 이는 인(仁)이 아니며, 신하가 임금에게 간언하지 않는다면 충(忠)이 아닙니다. 신이 이미 분에 넘치는 국상의 자리에 있기에 감히 말씀드리는 것이지, 어찌 감히 백성들의 칭송을 바라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고자 하는가? 다시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봉상왕 9년(300년) 8월조 #
2년 후인 300년 8월 봉상왕은 궁궐을 수리하기 위해 온 나라에서 남녀를 가리지 않고 15세가 넘는 이들을 징발하였는데, 당시 백성들은 먹을 것이 모자라고 일이 괴로워 정처없이 떠돌아다녔다. 이에 국상 창조리는 백성들의 괴로움을 헤아리고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여 궁궐 수리를 그만둘 것을 간하였지만, 봉상왕은 창조리가 자신을 비방함으로써 백성들의 칭송을 바라는 것이냐며 무시했다. 그럼에도 창조리가 뜻을 굽히지 않자 봉상왕은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고 싶은가"라고 답하며 오히려 목숨을 위협했다.
이때 국상 창조리가 장차 왕을 폐하려고 먼저 북부의 조불(祖弗)과 동부의 소우(蕭友) 등을 보내 산과 들을 물색하여 을불을 찾게 하였다. 비류강 기슭에 이르렀을 때 한 사나이가 배 위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비록 용모는 초췌했지만 행동거지가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 소우 등은 이 사람이 을불이라 짐작하고 나아가 절을 하며 말하기를, "지금 국왕이 무도하여 국상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왕을 폐위하려고 몰래 꾀하고 있습니다. 왕손께서는 행실이 검소하고 인자하셔서 사람을 사랑하시므로 선왕의 업을 이을 수 있다고 하여, 국상이 저희들을 보내 맞이하게 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을불이 의심하여 말하기를, "나는 야인이지 왕의 후손이 아닙니다. 부디 다시 살펴보십시오."라고 하였다.

소우 등이 말하기를, "지금의 임금은 인심을 잃은 지 오래되어 진실로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신하들이 왕손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으니, 청컨대 의심하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마침내 받들어 모시고 돌아가니, 창조리가 기뻐하며 을불을 오맥(烏陌) 남쪽 집에 모시고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원년(300년) 8월조 #
참다 못한 창조리는 왕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을 것임을 알고, 해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해 물러 나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왕을 폐위시킬 것을 모의하였다. 그는 새 왕을 옹립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인 조불과 소우를 비밀리에 파견하여 산과 들을 물색해 돌고의 아들인 을불을 찾아오게 했다. 비류강 기슭에서 을불을 만난 이들은 자기를 잡으러 온 줄 알고 애써 부인하는 을불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후 창조리에게 데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300년 9월, 봉상왕이 후산(侯山) 북쪽에서 사냥을 하자 창조리를 비롯한 신하들도 같이 사냥터에 갔다. 창조리는 다른 신하들에게 "나와 마음을 같이 하는 자는 나를 따라하라"고 말한 뒤 머리에 쓰고 있던 관에 갈댓잎을 꽂았는데, 이에 모든 신하들이 그를 따라했다. 민심이 자신의 편임을 확인한 창조리는 함께 반정을 일으켜 봉상왕을 폐위하고, 을불을 모셔다가 옥새와 인수를 바치어 즉위하게 했다. 봉상왕은 얼마 후 병사들로 포위된 감옥에서 자신의 두 아들과 함께 목매어 자살했다.

2.3. 영토 확장

당시 중국위진남북조시대가 잠시나마 분열을 멈추고 안정기에 접어든 서진 시대였는데, 서진은 삼국을 통일한 지 채 20년도 지나지 않은 290년대에 이르자 사마충 같은 암군가남풍, 사마륜 같은 탐욕스러운 간신과 황족들의 횡포로 처참하게 망가지기 시작했고 팔왕의 난, 영가의 난 같은 변란이 연달아 터져 나오면서 끝내 동양사 최대의 혼란기 오호십육국시대의 대문을 열고 말았다.

이는 과거 태조대왕후한 정벌이 실패로 돌아간 이래 오랫동안 중국의 압력에 시달려오던 고구려에게는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나 다름없었고, 미천왕은 고작 즉위 3년차인 302년 9월에 3만의 병력으로 현도군을 공격하여 8천여 명을 포로로 잡아 평양으로[13] 이주시키는 엄청난 전과를 세웠다. 고구려로서는 거의 200년에 달하는 긴 세월 만에 다시 시작된 정벌 전쟁이었다.

311년 8월에는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요동서안평현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서안평은 중국 단둥시의주군평안북도 일부가 포함된 압록강 하류 용천평야 일대로 추정되는데, 훗날 조선과 명나라의 외교 때 의주가 관문 역할을 했듯 한반도와 중국, 특히 요동을 거쳐 낙랑군한사군의 평양으로 연결되는 길목이자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거란 등 수많은 북방 민족들이 한반도를 공격할 때도 이 루트를 그대로 따랐다는 데서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 특히 압록강 중류에 도읍을 정한 고구려가 수로를 통해 황해로 진출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래서 태조대왕 때부터 고구려는 동북방의 소국들을 병합한 이래 여러 차례 서안평을 노렸으나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특히 동천왕 때는 위나라와의 외교 마찰이 일어나면서 서안평을 한 차례 공격해 승리하긴 했으나, 얼마 안 가 분노한 위나라가 보낸 관구검의 군대에게 대패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수도 국내성과 종속 관계였던 동예까지 빼앗기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기까지 했었다.

미천왕이 마침내 서안평을 차지하면서 수백 년 동안 동해안에 치우쳐 있던 고구려는 처음으로 서해와도 접한 영토를 확보했으며, 이는 험한 육로를 통해서만 주변국과 교류해야 했던 고구려에게 드디어 압록강을 통해 수도 국내성에서 바다로 바로 나갈 수 있는 수로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수군의 기반을 닦은 왕으로 평가를 내리기도 하는데, 서안평은 중국 만주 지방에서 가장 험한 지형을 자랑하는지라 수군을 동반한 수·륙 양진을 해야 점령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에 따른 것으로, 미천왕 때 여길 점령했다는 것은 바로 강력한 수군의 양성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거라는 뜻이다.[14]
14년 겨울 10월에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녀 2,000여 명을 사로잡았다. 15년 가을 9월에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략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 #
요동 사람 장통은 낙랑과 대방 두 군을 점거하고 고구려왕 을불리와 수 년에 걸쳐 서로 공격했으나 해결하지 못했다. 낙랑 사람 왕준이 장통을 설득하여 그 백성 1000여 가구를 통솔해서 모용외에게 귀부하니, 모용외는 낙랑군을 설치해서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로 삼았다.
자치통감》 〈진기〉 건흥 원년(313년) 4월조 #
영토 확장에 있어서 가장 큰 업적을 꼽으라면 단연 낙랑군대방군 점령이다. 당시 낙랑과 대방은 한족 군벌 수장 장통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미천왕과 몇 년이나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미천왕은 서안평이 막히면서 중국 본토와의 육로가 끊긴 월경지로 고립된 낙랑과 대방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하였는데, 끝내 이를 당해내지 못한 장통은 왕준(王遵)의 설득에 따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모용부로 도주해 버렸다.[15]

마침내 미천왕은 313년 10월에 낙랑을 멸망시키고 이듬해인 314년 9월에는 대방까지 무너뜨리면서 4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중국의 한반도 정치, 경제의 거점으로 군림하면서 고구려와 한반도의 여러 나라들을 괴롭혀 온 한사군을 완전히 축출하고 고조선의 고토를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자치통감》에서는 미천왕과 장통이 수 년에 걸쳐 서로 공격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고구려와 낙랑의 전쟁이 313년보다 몇 년이나 전부터 진행 중이던 장기전임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이는 낙랑이 결코 쉽게 무너질 상대가 아니었음을 의미하며 그만큼 국운을 건 치열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고구려의 운명을 바꾼 일대 사건이었다. 고구려가 건국된 압록강 중~상류 지역은 험준한 산악 지형이 대부분이었고 혹독한 기후에 더해 생산력도 부족해 당시 주류 산업이었던 농업축산업에 매우 불리한 고난의 땅이었다. 접한 바다는 교류할 나라가 적고 파도도 거친 동해안 일부가 전부였고, 어업을 한다 해도 수산물을 국내성과 접한 압록강으로 직접 공급하기 버거웠던 탓에 활용하기 어려운 바다였다. 그만큼 경제력을 키울 만한 기반이 부족했던 탓$에 국력도 그리 크지 않아서 미천왕 이전의 고구려는 분명 동시대 신라, 가야, 백제보다 체제 정비가 빨랐을지언정 대중들이 떠오르는 한반도요동의 패권국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16]

하지만 한반도 북부 지역을 온전히 가지게 된 고구려는 평안도 지역의 비옥한 평야 지대를 기반으로 한 농업 생산량의 비약적인 발전과 서해안의 제해권까지 움켜쥐게 되었으며, 풍족한 수산물 및 해상 무역에 유리한 입지까지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고국원왕소수림왕, 고국양왕의 내부 정비의 마무리와[17] 광개토대왕장수왕의 급격한 팽창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제력의 기반이 되었으며, 고구려가 중국의 통일 왕조와도 맞설 수 있는 패권국으로까지 발전하는 첫 번째 발걸음이 되었다. 이렇듯 구 한사군 일대는 새로 얻은 땅이지만 순식간에 고구려 국력의 기반이 된 가장 중요한 땅이 되었으니, 100여 년이 지난 뒤 장수왕은 수도를 아예 이곳의 평양성으로 천도하게 된다.

또한 고조선 멸망 이후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발전된 도시였던 평양과 그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한족 세력을 400여 년만에 내쳐 버린 전쟁이었다. 이렇게 오래 걸린 이유는 한나라는 물론 그 후계인 위나라서진까지 중국의 왕조들이 한반도 국가들의 성장을 방해하고 통제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데다가, 그 임무를 담당했던 한사군은 중국의 막강한 지원과 더불어 경제력과 제해권 등 여러 방면에서 한반도의 여러 토착 세력들을 압도하는 유리한 위치에 자리 잡고 강력한 영향력을 떨치고 있었던 반면, 고구려는 국내성 인근의 척박한 맨땅에서 시작해 이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멸망의 위기도 여러번 넘기며 300년 넘게 간신히 버텨온 국가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과 연관시켜 동예가 고구려에 정복된 시기 역시 이때쯤으로 보기도 한다. 낙랑군의 지배를 받던 동예는 2세기에 접어들면서, 한창 세력을 넓히면서 후한까지 공격하던 고구려의 간접적인 지배권에 복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8] 그러나 위나라관구검고구려를 침공하면서 고구려의 영향력이 크게 위축되자, 위나라는 한사군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통제력을 다시 뻗치기 시작했다. 이때 낙랑태수 유무대방태수 궁준이 마지막으로 기록에 남은 동예계 국가인 북한 강원도 안변군 지역의 불내예국을 침공하여 주요 읍락들을 위나라에 항복시켰고 동예는 다시 낙랑의 지배를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19]

이후 낙랑의 속국처럼 연명하던 동예 세력 상당수는 도중 다른 변수가 없었다면, 낙랑과 대방이 정복되었을 때 함께 고구려에 흡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강원도와 경북 일부 지역이 고구려 영역이 되고 신라와 국경을 마주하게 된 것 또한 미천왕의 업적이 되는 것이다.[20][21]

한편 중국에서 건너온 문화와 기술력을 누리던 한사군 세력은 고구려에 흡수되기도 했지만 적지 않은 수가 백제 등으로도 도주했는데, 덕분에 백제 역시 고구려와 덩달아 빠르게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고 멀지 않은 미래의 근초고왕이 급격한 팽창 정책을 주도하는 원동력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된다. 원래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라는 같은 뿌리를 둔 나라였으나 지리적인 이유로 접촉이 거의 없었고 자연스럽게 마찰이 일어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책계왕 때 고구려가 침공한 대방을 백제가 구원하면서 나빠지기 시작한 양국의 관계는 한사군이 사라지고 국경을 직접 맞대고 대치하면서 파탄에 이르고 한반도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두 나라의 오랜 역사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또한 낙랑과 대방을 통해 중국 문물을 수입하고 왜와 백제 등에 수출하고 있었던 가야의 발전에도 제동이 걸리게 되니, 낙랑과 대방의 멸망은 한국사 전체로 봐도 매우 큰 분기점이라고 할 만한 대사건이었다.

315년에는 302년에 공격했던 현도군을 다시 공격했다. 포로를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끝인 이전과 달리 현도성을 공격하여 깨뜨렸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고 언급되어 있는 걸 보면, 현도군의 중심부까지 밀고 들어갔을 정도로 매우 치명적인 공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도군은 이때 고구려에 점령되었거나 최소 중국의 지방 군현으로서의 역할을 완전히 상실했을 것으로 보이나, 여전히 현도군이라는 이름은 사라지지 않고 해당 지역의 독립적인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4세기 말에 모용부 국가였던 후연고국양왕의 고구려와 대치할 때는 후연의 영토로 확인되는데, 이를 고려해 보면 315년에 현도군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후술할 319년에 있었던 모용부와의 전쟁 때 요동군과 더불어 현도군 역시 모용부의 영토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다.[22]

이제 미천왕은 칼 끝을 요동으로 돌리지만, 요동은 지리적 요충지라 노리는 세력이 한둘이 아니었다. 특히 가장 급격히 성장하던 선비족 모용부오호십육국의 혼란 속에서 발생한 수많은 중국의 난민들을 모용외의 뛰어난 지도 아래 흡수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모용부의 성장을 경계한 서진의 평주자사 최비의 주도로 319년 12월, 모용부와 대치 중이었던 다른 선비 부족들인 우문부,[23] 단부와 연합하여 모용부를 공격하여 분할 점령하는 작전이 세워지고 고구려도 여기에 참가하게 된다.[24] 작전은 실행에 옮겨져 연합군은 모용부의 수도인 극성(棘城)을 포위했으나, 모용외는 사자를 파견해 소고기을 우문부에만 주었고 고구려와 단부 등에서는 이 이간질에 넘어가 우문부와 모용외가 모의했다고 의심해 철수하고 만다.

결국 우문부만 남아 단독으로 공격했지만 대패하여 우문부를 이끌던 우문실독관은 겨우 몸만 빠져나갔다. 최비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모용외에게 쫓기게 되자 결국 가족들과 함께 고구려로 망명했으며, 이 기회를 틈타 모용외는 한항, 고첨 등 최비의 부하들을 생포하고 최비가 주둔해 있었던 요동성까지 무너뜨리고 모용인 등 유능한 아들들을 요동에 배치시키면서 요동은 완전히 모용부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25] 비슷한 시기 하성(河城)에 주둔하고 있었던 고구려 장수 여노자[26]는 모용외가 파견한 장통[27]의 군대에게 공격당해 1천여 가구의 주민들과 함께 포로로 끌려가기까지 했다.

이후로도 미천왕은 요동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공격을 멈추지 않았으며 『양서』에서는 모용외가 미천왕의 공격을 막기 버거워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현도군을 공격한 315년 이후부터 미천왕이 사망한 331년 사이에 두 세력의 싸움이 매우 잦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 또한 미천왕이 모용부와의 전쟁에서 상당한 성과를 내기도 했었음을 추측케 한다. 모용외도 아들 모용한모용인 등을 보내 맞섰고 고구려도 상당히 고전한 건지 먼저 화의를 청하면서 둘의 싸움은 잠시 소강 상태에 이르나 했지만,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320년 12월에 다시 요동을 공격했다가 모용인에게 대패하여 더 이상 요동을 공격할 여력을 상실하고 만다.[28]

2.4. 내치

30년 동안 재위했으나, 애석하게도 미천왕의 내정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29] 하지만 정황상 왕권의 급격한 강화와 중앙집권의 발전이 있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미천왕의 정복 전쟁은 이전의 고구려 역사의 흐름을 보면 전례가 없을 정도로 갑작스럽게 대규모로 시작되었는데[30] 이는 중앙 조정을 중심으로 국론과 권력이 집중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미천왕이 즉위한 300년부터 302년의 현도군 공격을 제외하면 311년 서안평 공격 전까지 10년이 넘는 기간의 기록이 공백인데 311년부터 갑작스럽게 매우 활발한 군사 활동을 벌인 것을 보면, 이 10년의 시간 동안 매우 치열한 정치 싸움이나 상당 규모의 개혁 정책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더구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갑자기 옹립된 입장이라 왕권이 오히려 불안정했을 미천왕이 이런 대규모 군사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점도 이런 추측을 더욱 강조하게 한다.

또한 즉위 직후에 연달아 발생하는 괴이한 이변의 기록 등도[31] 당시 불안정한 정국을 상징한다는 해석으로 보기도 한다. 아무리 봉상왕이 폭군으로 폐위되었어도 기존 체제를 뒤집은 반란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인데 하필 새 왕은 오랫동안 떠돌이로 살았던 탓에 기반도 없고 능력도 검증되지 못한 인물이었으니, 이에 반발하는 세력이 등장하거나 모용외 같은 외부 세력이 이 기회를 노리고 견제를 시도하는 등 안 그래도 봉상왕 때부터 불안정했던 정국을 더욱 흔들어 놓을 사건들이 연달아 터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며, 이를 타개하는 것 역시 미천왕의 내정 정비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특히 창조리의 경우, 아무 힘도 없던 왕족을 왕으로 세웠으니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누렸을 가능성이 높으나 정작 그런 인물이 미천왕 즉위 직후 기록에서 완전히 없어진다. 물론 기록이 워낙 부족한 시기라서 창조리와 함께 움직인 조불과 소우, 봉상왕 때의 명장 고노자, 훗날의 을지문덕까지 갑자기 기록에서 사라진 인물이 한둘이 아니긴 하지만, 창조리는《삼국사기》에 개인 열전까지 있는 거물이었음에도 재임까지 일일이 기록될 정도로 중요한 관직이었던 국상 관직과 함께 사라졌다는 점은 왕권 강화 추진 과정에서의 숙청 여부를 짐작하게 한다.

실제로 을파소 이후 지속적으로 언급이 되던 국상 직위의 언급이 미천왕 즉위 직후부터 고구려 멸망 때까지 완전히 사라지는데, 미천왕이 여러 신하들을 제가회의를 통해 지휘, 통솔하며 국정을 총괄하는 관직을 별도로 두지 않아도 될 정도로 왕권 강화와 체제 정비를 이루게 되면서 국상 역시 폐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부총리급 직위였던 좌보와 우보를 합쳐 신설된 국상에 명림답부가 임명된 지 150여 년 만에 국상 벼슬이 날아간 것이다. 이후 고구려는 대대로, 막리지가 나올 때까지 국상에 비견될 벼슬이 나오지 않는다.

그 외에 오랫동안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가 고국천왕 때부터 본격화되긴 했으나, 여전히 완전히 안정된 것은 아니라서 산상왕, 중천왕, 서천왕까지 형제들의 반란이 연달아 터졌고 이를 심하게 경계해 숙부와 동생을 죽이기까지 했던 봉상왕까지, 수백 년 넘게 끊이질 않았던 고구려 왕실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 역시 미천왕 때가 되서야 완전히 종지부를 찍었다. 이 역시 전제화된 왕권 중심의 체제가 완전히 자리 잡았음을 의미할 수 있다.[32]

이러한 점들 때문에 태왕 칭호를 처음 사용한 후보로 추정되는 왕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왕이 바로 미천왕이기도 하다. 현재 발견되는 태왕 기록은 미천왕의 아들 고국원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는 '국강상성태왕'이라는 기록이 최초인데, 미천왕 때 대규모 영토 확장과 왕권 강화 등으로 나라 전체가 격변하는 과정에서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이 본격적으로 성립되었고, 그에 따라 기존보다 격을 높인 칭호을 만들었다는 추측도 개연성이 있기 때문. 《삼국사기》에는 미천왕의 또다른 칭호인 호양왕(好壤王)이 나오는데 '호'자, '상'자 칭호가 태왕호의 단편적인 일종으로 추정된다는 점도 이러한 추측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더불어 미천왕 때는 문화, 기술적으로도 상당한 격변의 시기였을 것이다. 한사군의 정복으로 간접적으로 들어오던 기술과 인재들이 고구려에 많이 유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고처럼 중국 본토의 많은 난민들이 오호십육국의 혼란을 피해 몰려들고 있던 때라서 중국 본토에서 유행하던 많은 문물 역시 고구려로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을 것이다. 소수림왕이 국교로 공인하게 되는 불교유교도 이 시기에 이미 어느정도 들어와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소수림왕은 왕이 전사하는 혼란 와중에, 그것도 즉위 초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기존의 주류 신앙과 크게 대비되는 외세의 신앙 도입을 통한 파격적인 개혁을 매우 빠르게 성사시켰다. 이미 고구려 곳곳에 불교 및 유교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깔려있지 않은 이상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33]

대표적인 예시로 거문고를 만든 왕산악이라는 인물이 미천왕 때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왕산악이 낙랑군에서 번성한 낙랑 왕씨라는 점, 거문고의 원조가 된 고금을 보낸 나라가 동시대에 존재한 진(晉)나라라는 점, 357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안악 3호분에서 거문고로 추정되는 악기가 발견된다는 점 등이 그 근거. 그가 만든 거문고는 오늘날까지도 그 이름이 전해지며 국악기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으니, 이 시기의 급격한 문화 발전을 보여주는 예시라 볼 수 있다.

2.5. 말년

320년 모용부와의 전쟁 이후로 다시 기록이 공백인데, 이 기간 동안은 점령했던 낙랑과 대방을 관리하여 고구려 영토로 귀속시키는 내정에 집중하지 않았을까하는 추정이 있다.

그리고 330년, 후조에게 사신을 보내 싸리나무 화살, 즉 호시(楛矢)를 주었다는 기록으로 다시 행적이 확인된다. 호시는 돌로 촉을 만든 화살인 석노(石砮)와 더불어 고대 중국 때부터 덕이 높은 천자인 성천자(聖天子)가 나타나면 동북방의 대표적인 이민족인 숙신이 조공하는 물품이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었으며, 그 외 여러 기록에서 동방의 이민족이 중국에 보낸 조공품으로 자주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미천왕의 이 행적은 이 시기에 숙신이 고구려에 복속된 상태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 이전에 고구려와 숙신이 관련된 마지막 기록은 280년에 숙신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달가가 토벌한 일인데, 그 이후 숙신의 행방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이 시기 때는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34]

한편 후조갈족 출신의 석륵[35] 319년에 조왕(趙王)을 칭하고 건국한 오호십육국시대의 초기를 대표하는 신생 강국이었다. 323년에는 모용부와의 화친을 시도했으나 돌아온 것은 모용외가 명목상 상국이자 후조의 적국이던 동진으로 사신을 잡아 압송시켜 버린 모욕적인 패기이자 도발이었다. 결국 325년우문부를 앞세워 모용외를 공격했다가 실패하는 등, 모용부를 미천왕과 마찬가지로 공동의 적으로 두고 있었다.

그리고 석륵은 330년 2월에 천왕으로 호칭을 바꾸더니 같은 해 9월에는 아예 황제까지 선포하고 중국 북방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명실상부한 동아시아의 최강자로 등극하게 되었다. 미천왕은 모용외가 요동을 장악하고 고구려까지 위협하는 상황을 타개할 방책을 모색하던 와중에 바로 이 타이밍을 노려, 축하 사신을 명목으로 후조와의 외교 관계를 맺고 모용부를 양쪽에서 압박하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고구려와 후조의 위치는 모용부를 완벽하게 양옆에서 포위하는 구조였다. 그 과정에서 우문부 출신의 선비족인 우문옥고가 고구려의 사신으로 파견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이 『진서』「석륵재기」에서 확인된다.

하지만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331년 2월, 다사다난한 삶을 살던 미천왕은 32년이라는 적지 않는 재위 기간을 마무리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아들 사유가 즉위하게 된다. 미천(美川) 언덕에 묻혔으며, 시호를 미천왕이라고 지었다.

2.6. 사후

모용외 역시 미천왕이 세상을 떠나고 2년이 지난 333년에 숨을 거두게 된다.[36] 하지만 고구려와 모용부의 대결은 모용부에게 승기가 넘어가고 있었고, 마침내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337년 주변 선비족들을 흡수통합하여 전연건국하고 왕을 선포하였으며, 후조를 밀어내고 화북 지방까지 석권하는 강대국으로 완성시켰다.

342년, 모용황은 미천왕을 이어 즉위한 아들 고국원왕의 고구려를 침공하여 수도 국내성환도성을 철저히 파괴하고 왕후와 태후[37] 포함해 5만여 명의 고구려인들을 납치하는 걸로도 모자라, 미천왕의 왕릉을 도굴해 유해까지 탈취하는 참혹한 치욕을 안겨주고 말았다. 더불어 345년에는 주요 요충지인 남소성까지 빼앗아 갔다.

하지만 전연이 조정의 권력 투쟁으로 혼란에 빠지자 고구려에게 여유가 생기게 된다. 저족이 세운 전진이 전연을 멸망시키자 고국원왕은 도망쳐온 전연의 모용평을 전진으로 압송해 버렸고, 미천왕의 손자 소수림왕고국양왕유교, 불교, 율령을 앞세운 개혁으로 국력을 회복시켰다.[38] 그 와중에 모용황의 아들 모용수후연을 세우며 다시 모용부를 일으키지만 얼마 못가 선비족 탁발부가 세운 북위와의 참합피 전투의 대패로 심각한 내분을 겪게 되었고, 증손자 광개토대왕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후연을 공격해 요동을 완전히 정복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북위와 고구려 사이에서 밀리고 있던 후연은 407년, 폭군 모용희가 반란으로 죽고 고구려계 고운[39] 북연으로 대체되니, 모용외가 고구려를 처음 침공한 293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위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했던 244년부터[40] 200여 년에 걸쳐 이어져 온 고구려와 모용부의 악연은 고구려의 승리로 종지부를 찍게 되었고, 100여 년 만에 미천왕의 한도 후손들이 철저히 풀어주게 되었다.

그후 현손자 장수왕북연북위에게 망하자 황제 풍홍을 고구려에 귀순시켰으나 대우에 불만을 품은 풍홍 일가가 이탈을 시도하자 제거한 후, 중국 대륙을 양분하고 있던 북위와 유송을 상대로 외교적으로 유리한 입지까지 다지면서 고구려를 당당한 동아시아의 패권국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오랫동안 수많은 외부 세력의 압력에 시달려온 변방의 소국 고구려가 중화제국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향해 가는 역사가 미천왕부터 시작해 현손자 장수왕까지, 무려 100년이 넘는 세월을 거친 끝에 그 정점을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3. 미천왕의 능

3.1. 안악 3호분?

1949년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설리[41]의 재령강 북쪽 구릉 서편에서 농리 정리 중 우연히 발견된 안악 3호분[42]의 주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안악 3호분은 고고학자 도유호가 발견했는데 비록 도굴당해서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잘 보존된 벽화들이 있었다.

최초 발굴자인 도유호와 월북 미술사가 김용준 등은 "이 무덤의 주인은 모용황의 아우 모용인쿠데타에 참가했다가 모용인이 죽음을 당하자 고구려로 망명한 전연의 장수 '동수(冬壽)'이다"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는 《진서》와 《자치통감》에 동수가 난을 피해 고구려로 망명왔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으며, 무덤 내부에 동수의 생애가 적혀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 대한민국 사학계에서도 동수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무덤 내부에 기록된 묵서명[43]에 의하면 서기 357년에 축조된 무덤이다.

그러나 북한 사학계에서는 몇 가지 근거를 들어 왕릉설을 주장하고 있다. 동수라는 글자가 무덤 주인이 아니라 군관의 일종인 '장하독(帳下督)'의 머리 위에 쓰여 있는 점[44], 주인공의 행렬 벽화에 그려진 깃발 옆에 '성상번(聖上幡)'이라는 명문이 쓰여 있는 점, 주인공 초상화에 고구려 왕의 왕관인 백라관(白羅冠)으로 추정되는 흰 비단 모자를 쓰고 있는 점[45]이 주로 거론된다.

이전까지는 왕릉설 내에서도 어느 왕릉인지를 밝히지 못하다가 1963년 주영헌 등의 학자들이 미천왕설을 주장했다. 이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초기에는 국내성 인근에 미천왕의 무덤이 있었는데[46] 모용황이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가져 갔다가 돌려받은 시신을 다시 묻은 곳이 이 곳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동수가 기록된 것은 시신 반환 또는 무덤 축조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라는 논지이다.

반면 근래 박진욱 교수는 고국원왕설을 주장했다. 고국원왕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고구려의 남쪽 평양'에서 전사했다고 되어 있다. 박진욱 교수는 이 기록을 달리 해석하여 '고구려의 남쪽 평양'이 아니라 '고구려의 남쪽 지방이던 황해도 근처'에 있던 '남평양'이라는 설을 주장했다. 고국원왕은 고국원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고국원이 남평양 근처였던 이 안악의 언덕이었다는 것이다.[47]

물론 안악 3호분 자체가 철저하게 도굴되어 유골은 물론 부장품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고증은 현재로서는 매우 힘든 상태다. 따라서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는 관련 기록이 나오지 않는 이상은 영원히 불분명하며 이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북한 학계의 추이에 대해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북한 학계는 스멀스멀 존엄이 역사에 개입하는 암운이 드리우다가 199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김씨 일가의 교조화된 연구로 변질되었으며, 민족주의 고취에 초점을 둔 해석이 공식적인 입장으로 표명되기 시작하였다. 안악 3호분을 동수의 무덤이라고 봤던 도유호가 학계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 대표적인 사례. 듣고 싶은 것만 들어서 그렇지, 사실 동수묘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미천왕설 또는 고국원왕설을 지지하는 북한학계와 자칭 소장파 학자들이 간과하는 근거가 있다.

안악 3호분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1. 안악 3호분은 당시 중국 요령성 일대에서 유행하던 형태의 무덤으로서 계보는 당연히 요령성 일대에서 찾아지는 외래계 무덤이며,
  2. 벽화의 구성이나 방식 또한 요령성의 가옥형 석실과 거의 동일하다.[48]
  3. 요령성에서 확인되는 가옥형 석실[49]들에서도 백라관으로 추정됐던 그 관과 똑같은 농관을 쓴 묘주들이 그려진 벽화가 수두룩하다.
  4. 왜 장하독의 머리 위에 묵서명이 써 있는가에 대한 문제도 사실 간단한데, 묘주도가 그려진 전실 서벽의 바로 옆인 북벽의 모서리에 있기 때문이다. 즉 묵서명의 위치는 장하독의 머리 위가 아닌 묘주도의 바로 옆이며, 벽의 위치가 다를 뿐이다. 또한 장하독 1명만 묵서명이 그렇게 소상히 쓰이는 것도 벽화의 구성 전체를 볼 때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당연히 묘주도의 설명으로 추정하는 것이다.[50]

'성상'이라고 쓰여진 부분이 지금은 판독하기 쉽지 않은데, 왕릉설을 주장하는 측의 타당한 논거는 딱 그것 하나뿐이다. 이쯤 되면 성상 하나만 갖고 왕릉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각주에서도 있듯이 이미 고구려 고분은 4세기에 적석총을 위시한 국내 지역, 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시 일대에 아주 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왜 통구 고분군에 미천왕이나 고국원왕[51]이 묻히지 아니하고, 이곳에 묻혔는가를 결코 설명하지 못하며, 당연히 전문학계의 견해가 아닌 게 수두룩하기 때문에 추가적 연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학계나 국내의 재야학계에서 이 무덤을 미천왕릉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바로 이곳이 낙랑군의 고지가 아니라는 것을 피력하기 위함이 근저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낙랑군 문서에도 있지만 이 일대는 313년 낙랑군의 축출 이후 서서히 고구려의 직접 지배 영토로 편입되었고, 4세기 당시에는 간접적인 지배의 방식을 채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천왕이나 고국원왕으로 보는 논리 자체도 허접할 뿐더러 안악 3호분의 묘주에 대한 문제는 고구려의 자체적 행정방식의 변화나 영역 관리 등의 내재적 문제와 전혀 결부되지 않고, 오직 낙랑군은 애초에 평양[52] 일대에 있지 않았다는 식으로 논지를 전개해 나간다.

3.2. 서대총

다만 한 가지 함정이라면 고구려 적석총이 집중적으로 축조되는 통구 고분군에서도 완전히 빼박이라고 할 수준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라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천왕의 무덤은 견해가 모여 있는 편인데, 바로 서대총이라는 것이다.

통구 고분군은 무기단식 적석총부터 계단식 적석총, 적석총의 완성형인 장군총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축조된 고구려의 고분군이다. 확인된 고구려 적석총 수의 90%가 다 이 고분군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봐도 무방하다.[53] 여기서 왕과 관련되어 주요한 것은 마치 신라대릉원 고분군처럼 누가봐도 왕이 아니면 이 무덤의 주인이 될 수 없을 이른바 왕릉급 무덤들이 10여기 정도가 분포하고 있다는 것이다.[54] 적석총의 형태 변화에 따른 시간적인 단계별 변화상을 고려하면 10기의 왕릉급 무덤들은 3세기 말부터 5세기 초에 형성된 것으로 고구려 왕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장지형 왕호를 사용하던 시점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고고학계에서는 미천왕부터 광개토대왕 또는 장수왕까지가 토론 가능한 근거를 바탕으로 논의되고 있다.

고구려 적석총의 변화 과정은 3세기 이전까지는 무기단식 적석총, 무기단에서 발전한 기단식 적석총이 유행하다가 3세기에 접어들어서는 계단식 적석총이라는 형태로 변화한다. 큰 규모의 적석총을 만들기 위해서 적석분구를 넓히면서 나타나는 형태의 무덤으로써 여기에서 발전하여 계단식 적석총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본격적인 계단식 적석총의 등장은 4세기 초반의 일로써 서대총이 계단식 적석총의 초현기에 해당하는 왕릉급 무덤이다. 그 외에도 칠성산 211호분과 우산하 992호분이 4세기 전반 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대총에서는 특히나 와당[55]에서 기축년▨▨간리작(己丑年▨▨干利作)이라는 명문이 있기 때문에 329년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적석총 발전 과정상 동일 단계의 적석총우산하 992호에서도 와당에서 무술년의 기록이 나오는데, 338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구려 적석총의 역사고고학적 편년이나 왕릉 비정이 완전히 일치된 견해가 모여져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서대총을 미천왕의 무덤이라고 보는 것에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편이다.

분명한 것은 원래 왕릉의 비정이라는 것이 최대한 근거를 모아서 추정되는 것일 뿐이며 무령왕릉처럼 빼박으로 지석이 나온다거나 하지 않는다면 확정이 어려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되지도 않는 얕은 근거만 모아 특정 무덤의 주인을 비정하는 우를 범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 방법이기도 하다.

만약 안악 3호분의 묘주를 미천왕이나 고국원왕이라고 한다면, 한참 고구려와 전쟁을 치렀던 전연의 영역 내에서 확인되는 중국식 무덤을 채택한 것이 된다. 설명할 필요성을 못 느낄 정도로 뒤의 상황과 맞는 것이 하나도 없고, 미천왕은 졸지에 장법마저도 중국식으로 바꿨음[56]에도 숙적인 전연에게 털려서 도굴까지 당하는 굴욕 중의 굴욕을 당하는 셈이다.

우산하 992호 무덤이 미천왕의 2차 왕릉일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4. 여담

"미천(美川)은 일찍이 황야(荒野)로 달아나 어려운 일을 골고루 겪었으므로, 의당 지혜로운 덕망과 술책이 있었을 것인데도, 일컬을 만한 덕이 없고 한갓 상국(上國)을 침범하는 것으로서 일을 삼았습니다."

4.1. 이름 관련 이야기

하필 이름이 이름인지라 역덕후가 아니거나 고구려의 역사를 처음으로 배우거나 무식하고 장난기가 심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미친왕'이라고 놀림감이 되는 경우가 흔하며, 또한 이 군주의 이름을 처음 접한 사람은 단순히 이름만 듣고 진짜로 미친 군주거나 무능한 군주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은근히 많다. 그렇지만 미천왕은 훌륭한 명군이지 절대로 미친왕이 아니며, 오히려 백부 봉상왕이야말로 미친왕이라는 타이틀이 더 어울린다. 또한 '신분이나 지위 따위가 하찮고 천하다'라는 뜻의 사전적 의미인 '미천(微賤)하다'와는 한자부터가 다르다. 다만 역사공부할 때 위의 소금장수 일화를 들어 ‘미천했던 (시기가 있던) 왕’으로 외우기도 하며, 왕족으로 다시 확인되기 전까지 삶이 정말로 당대 기준 미천한 머슴이나 장사꾼이었기 때문에 오해할만 하다.

5.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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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미천왕 본기〉
一年秋八月 미천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도망하여 곤궁하게 지내다
一年秋九月 미천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月 누런 안개가 끼다
一年冬十一月 강한 서북풍이 불다
一年冬十二月 혜성이 나타나다
三年秋九月 현도군을 침략하다
十二年秋八月 서안평을 점령하다
十四年冬十月 낙랑군을 축출하다
十五年春一月 왕자 사유를 태자로 삼다
十五年秋八月 대방군을 축출하다
十六年春二月 현도성을 공격하다
十六年秋八月 혜성이 나타나다
二十年冬十二月 진의 평주 자사 최비가 고구려로 도망해오다
二十一年冬十二月 요동을 침략하다
三十一年 후조에 사신을 보내다
三十二年春二月 미천왕이 죽다

링크로 들어가 본문을 보면 알겠지만, 즉위년 9월의 기록과 중국 측의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을 제외하면 기록이 상당히 간략하다. 이러한 경향은 〈미천왕 본기〉 이후의 〈고구려본기〉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장수왕 본기〉부터는 기록의 대부분을 중국 기록에서 인용해서 채웠다. 재위가 10년을 넘어가는 왕조차 기록이 매우 간략[58]하고, 자연재해 기록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백제본기〉보다는 그나마 낫지만.

6. 대중매체에서

알고 보면 대한민국에서 제왕을 영웅화하여 다룬 사극의 전형적인 줄거리인 왕실에서 쫓겨남 → 바깥을 방황 → 왕위 찬탈 → 정치 싸움과 정복 전쟁의 구조를 그대로 살아간 인물이다. 한국 사극에서 흔히 나오는 픽션을 위한 무리수들을 모두 고증이 가능하게 가지고 있다.[59] 이렇게 미천왕은 창작물에서 써먹을 떡밥을 고루 갖추고 있는 블루 오션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 번도 사극화가 된 적이 없다.[60]

실제로 그의 인생 스토리와 비슷한 줄거리를 지닌 서양 역사 소설 역작이 있는데, 이 소설은 픽션이라면 미천왕의 일생은 사료에서 분명히 증명되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강점이 있다. 그리고 저 소설의 주인공인 에드워드 6세는 몇 년 못 재위하고 요절했지만 미천왕은 즉위해서 대단한 업적을 남기고 죽었으며 고구려는 그 사후 수백 년 간 강성한 국가로 남았으니, 이 부분은 왕자와 거지 시대 배경의 직후 이야기인 엘리자베스 1세의 일대기와도 공통점이 있다. 그야말로 역사 매체로써는 매력이 넘치다 못해 폭발하는 소재인 것.
  • 역적 - 일단 미천왕이 역적으로 취급되었다는 기록 자체는 없지만, 봉상왕이 그를 암살하려다 실패했다는 기록도 있는 만큼 그 처지는 역적과 같았다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미천왕의 아버지 돌고는 자신의 친형인 봉상왕에게 모함을 받아 사형당했다. 웬만한 범죄로는 처벌받지 않는 왕족, 그것도 왕의 친 동생이자 혈통상 직계 왕족을 죽일 수 있는 가장 좋은 구실은 반란. 즉 역모죄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죽이기도 쉽고 그 자손들을 죽이거나 신분을 강등시켜 왕위 계승권 자체를 박탈시키기에도 적합하기 때문. 미천왕의 사례 말고도 동서 고금을 통츨어 자신의 왕권을 위해 자신의 형제 자매들을 역모죄를 구실삼아 숙청을 한 왕은 셀 수도 없이 많다. 다른 죄를 엮기도 하지만, 역모죄가 아닌 경우, 웬만해선 본인 외엔 당사자의 가족, 친족들까지 한꺼번에 숙청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 고생담 만들기 - 사극에서는 주인공의 고생을 연출하기 위해서 고증에도 없고 현실성도 없는 억지 고생담 만들기가 남발된다. 대표적으로 선덕여왕 타클라마칸 사막 보내기가 있었다.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미천왕은 텔레비전 앞에 앉은 시청자들이 '아이고 어떡해' 하며 눈물을 질질 짤 학대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음모한테 몸붙여 머슴일 하며 주인집에서 학대 당하고, 소금장사 하다 누명을 써서 전재산이나 다름 없는 소금을 압수 당하고, 심지어는 잡혀가서 곤장까지 맞는다.
  • 상단 입단 - 상도의 영향으로 주인공을 한 번쯤 상단에 입단시키는 사례가 많은데, 실제로 소금 장수 일을 했으므로 상단에 넣어도 무방하다. 재모 같은 인물은 '친구'나 '멘토' 쯤으로 재해석 하면 그럴듯 할 듯. 아버지를 일찍 여읜 미천왕에게 사실상 아버지 역할을 해줄 인물로도 적당하다. 딱 왕자와 거지의 마일스 헨든 같은 역할일 것이다.[61]
  • 메인 빌런 - 미천왕을 쫓아낸 봉상왕은 사서에서 명백하게 폭군으로 기록된 만큼, 아치 에너미 내지는 빌런으로 표현해도 무리가 없다. 봉상왕을 퇴위시키고 즉위한 이후에도 대외적으로 모용외 등의 강한 라이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극의 소재는 충분하다 못해 넘쳐 흐르는 수준이다.
  • 군주 등극 - 미천왕이 갖은 고생담을 극복하고 창조리의 도움을 받아 봉상왕을 폐하고 군주로 즉위하였다.
  • 정복 군주 - 낙랑군대방군을 완전히 정복해 고조선 멸망 400년만에 중국의 한반도 서북부 지배를 끝장냈다.
  • 인지도 높은 주변의 역사 - 미천왕이 지배할 즈음은 중국삼국시대 바로 다음 시대인 서진, 동진, 오호십육국 등이 존재하는 때이기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인기가 높은 삼국지에 대한 언급과 연관을 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특히 초반에 서천왕달가, 봉상왕돌고의 관계들을 조비&조예 VS 조창&조식, 원담 VS 원상&원희, 유기 VS 유종, 사마염 VS 사마유 등의 관계들에 빗대어 표현하면 일반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는 적합하다. 게다가 미천왕이 즉위할 때 중국의 지배자는 바로 그 유명한 사마의의 증손자인 사마충이었다. 사마의 본인도 공손연 정벌 등 고구려랑 관련이 없는 사람도 아니니 엮기 좋은 셈.
  • 대업을 이어나간 후계자들 - 미천왕의 아들인 고국원왕은 다소 암군이지만, 미천왕의 손자들은 바로 고구려 중흥을 야기한 소수림왕고국양왕이고, 증손자는 고구려를 크게 팽창시킨 광개토대왕이며, 현손자는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끈 장수왕이다. 미천왕에서 이어지는 명군 후계자들이 차고 넘친다. 이들로 바로 이어지는 후속작을 찍어도 계속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나올 것이다.

미천왕은 저 모든 것들을 집어넣어도 고증에 문제가 전혀 없을 만한 충분한 근거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지어낼 거 없이 원래 있는 거 그대로만 재현해도 만사 OK로, 인생 자체가 대하드라마. 사실 딱히 각색 없이 대충 써도 충분히 1편의 훌륭한 한국판 사극 드라마가 될 수 있는 스토리 라인을 갖춘 인물이지만, 아무래도 현대의 창작물은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대중에게 익숙한 조선 시대 위주로 지나치게 치중되어 이 시기가 아직까지는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비슷한 처지로는 불세출의 소드 마스터 고려척준경이 있다.[62] 미천왕의 인생 역정에 영감을 받고 이 훌륭한 소재를 이름만으로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군주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에 덧씌웠을 가능성도 있다.
  • 관련 작품으로는 그 유명한 《화랑세기》 필사본의 저자 박창화의 《을불대왕전》이 있다. 독자들에게 호평을 사고 있기는 한데 박창화 특유의 화랑세기틱한 취향이 여기에도 반영되어 버렸다고 한다. 한마디로 야설. 물론 박창화는 《화랑세기》처럼 나름 과학적 방법론을 동원하는 현대의 역사학자들까지 낚아낼 정도로 정교한 역사물을 창작하던 사람이라 역사적 고증에 상당히 충실한데다 수십 년 전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는 편이다.
  • 근래 여기에 처음으로 주목한 작가는 김진명으로, 작품명은 《고구려》인데 미천왕 부분은 이 중 1-3권을 담당한다. 다만 김진명이 쓴 작품이다보니 《을불대왕전》과 비교하기가 영 민망하다. 《을불대왕전》은 나름대로 고증에 충실했고 자신의 글이 창작이라고 확실히 명시했음에도 까가 있는 반면에 《고구려》는 성공한 대중작가의 작품이며 팬층이 꽤 두꺼운지라 첨언하지만 이 소설은 "공상역사소설"이다. 그냥 재미로 가볍게 읽자. 김진명의 《고구려》에서는 상부에 의해 아버지 돌고가 죽고 홀로 떠돌아다니게 된다. 일단 음모의 밑에서 머슴살이 한 것과 소금장수로 일했다는 것은 언급만 되고 그 뒤 다루라는 이름으로 낙랑의 양운거 밑에서 무예를 배우다가 양운거 밑을 떠나게 된다. 그 후 다시 고구려로 돌아가 저가라는 사람의 밑에 있다가 비무 대회에 나가 여노와 싸우게 된다. 하지만 상부가 자신을 알아볼까봐 싶어 일부러 여노에게 져주고 도망친다. 여노는 을불을 쫓아와 왜 도망친 건지 연유를 묻자 결국 여노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이후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저가와 저가 밑에 있던 무사 양우와 함께 길을 떠나게 된다. 낙랑에서 주아영을 만나고 후에 그와 싸우게 될 모용부의 모용외와 만나게 되고 그 후 숙신으로 가 그 곳의 족장 아달휼을 아군으로 삼는다. 그 후 창조리가 보낸 조불과 소우가 을불의 휘하에 들게 되고 상부가 고노자에게 군사를 줘서 그를 없애려고 하자 스스로 정찰병으로 분장해 직접 상부를 없애려고 한다. 그 후 창조리가 상부를 내치고 자신을 왕위에 올리자 창조리가 자신을 줄곧 돕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후 낙랑을 정벌하게 된다. 미천왕이 투석기에 전염병으로 죽은 병사를 실어서 성 안으로 던졌으며 낙랑군의 어머니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기 위해 늙은 여인의 초상화를 실어 날랐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작가의 순수 창작이다.
  • 2010년 KBS 드라마 근초고왕에서는 배우 곽인호가 연기했다. 과거의 인물인지라 비중은 거의 없지만 작중 시점으로부터 26년 전 그를 조우한 적이 있는 비류왕의 언급에 따르면 단창을 쓰는 솜씨가 신출귀몰하여 대방군 장군을 한방에 꿰뚫어 죽였다고 한다.
  • 2021년 제작이 계약된 김진명 원작의 동명 드라마 〈고구려〉에서 본격적으로 다루는 인물이다.
  • 2017년에 방영된 채널A의 <천일야사> 17회에서 신하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것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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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구려 군기.svg
고구려 왕실의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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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큰아버지인 봉상왕이 빨라도 253년 이후 출생하였고, 293년에 궁을 탈출해 머슴과 소금장수를 했었다는 것을 보면 이때 이미 최소 10대는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3] 미천왕의 능 문단 참조.[4] 이상 《삼국사기》의 기록.[5]위서》, 《양서》와 《자치통감》의 기록. 위서에서는 축약하여 그냥 利라 표기하기도 했다. 고대 한국 인명은 한자식 이름이 아니었으면 음차표기 과정에서 여러 형태로 표기되곤 했다.[6] 《삼국사기》 〈미천왕 본기〉에 나오는데, '양'은 고구려식 시법에서 '천'(川)과 상통 관계에 있으므로 '호'가 '미'(美)에 대응된다.[7]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미천왕[8] 이에 나라 사람들은 "안국군 달가가 없었더라면 양맥과 숙신의 난을 피하지 못했을텐데, 지금 그가 죽었으니 이젠 누구에게 의탁한단 말인가?"라며 눈물을 흘리었다고 전한다. 당시 봉상왕의 무차별적인 숙청에 대한 민심이 좋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기록이다.[9] 맹꽁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삼국사기》 원문에서는 (개구리 와)라고 기록되었으므로 개구리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10] 머슴살이 때 번 돈으로 장사 밑천을 댔을 것으로 여겨진다.[11] 현대의 의주군 일대로 추정된다. 이 지역은 서안평의 영역으로 당시 중국계 세력의 힘이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이곳에서 생활하며 서안평의 지리적 중요성을 깨달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12] 조선 시대수령과 비슷한 직책으로 추정된다. 봉상왕 대에 활약한 고노자 역시 신성재(新城宰)를 지내다가 신성태수로 승진한 바 있다.[13] 지금의 평양은 당시 낙랑에 있었으므로 동천왕 시기에 쌓았다는 평양성과 동일한 지역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압록강에서 멀지는 않은 곳으로 본다.[14] 다른 면에서 보면, 서안평 점령으로 고구려가 영토가 서해안과 접하게 되면서 고구려의 수군 육성 및 해상 교역 활동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15] 모용외는 이들을 수하로 받아들였고, 요서에 낙랑을 새로 설치한 뒤 장통에게 관리를 맡겼으며 왕준은 참군사(參軍事)로 삼았다.[16] 고구려가 약탈로 먹고 살았다는 이미지도 이런 불리한 지리적 이유가 큰 원인이 되었으며, 그마저도 국력의 한계로 개마국주나국, 옥저처럼 주변의 약소한 세력들을 정복하거나 항복시켜 공물을 받아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한사군부여 등 강적들과 싸우기도 했지만 고구려가 밀리는 구도는 변함이 없었다. 태조대왕고국천왕의 영토 확장 및 내정 정비의 성과로 안정적인 농업 위주의 경제 체제가 정착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한반도의 주도권을 쥘 만한 국력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17] 각각 서부 일대의 지배력 강화, 제도 개혁, 요동 진출의 기반 마련이라는 업적을 남겼다.[18] 정확한 때와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추정해 볼 만한 건 있다. 태조대왕후한과 싸울 때 낙랑의 변방을 공격한 적이 있는데, 공격 위치가 동예의 영역에 위치한 화려성(華麗城)이었다는 것이다. 이후 동예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이 공격이 고구려의 동예 복속과 적지 않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19] 이후 동예는 낙랑에 지속적으로 조공을 바치며 불내예후의 작위를 받았고 247년에는 불내예왕의 작위를 받았다. 아마 동예를 중요한 속국으로 삼아 고구려를 견제하는 데 활용하기 위한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20] 이 영상처럼 한국사의 영토 변천사를 그릴 때는 이러한 추정을 차용해, 강원도까지 고구려가 차지한 시기를 미천왕 시기로 보는 경우가 많다.[21] 단 동예가 이때 완전히 멸망한 것인지 고구려의 속국으로 예속되어 명맥을 이어갔을지는 분명하지 않다.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동예 관계 문서 참조.[22] 한참 후 광개토대왕이 현도군 지역을 완전히 점령하면서,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현도성이라는 이름으로 고구려의 최전방 요충지로 자리잡게 된다.[23] 수십 년 후에 이들에게서 갈라져 나온 세력이 거란으로 발전한다. 즉 우문부는 거란의 조상인 셈.[24] 봉상왕 때 두 차례나 고구려를 침공하고 서천왕릉의 도굴까지 시도했던 모용부였기에 감정적으로도 고구려에게 모용부는 타도의 대상이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위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도 모용외의 할아버지 모용목연이 위나라군 소속으로 참전하기까지 했을 정도로 징글징글한 원수였다.[25] 상술했듯 이 시기에 현도군 역시 모용부에게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26]자치통감』에는 여노자(如奴子), 『삼국사기』에는 여노(如孥)로 기록되어 있다. 봉상왕 때 인물인 고노자와 같은 이름을 가진 것으로 보아 여노는 여노자가 축약되거나 오기된 표기일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에는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 매우 적음에도 불구하고 동명이인이 적지 않게 확인되는데, 극재사고재사, 송옥구유옥구, 고어수(태조대왕의 아명)와 명림어수 등이 있다.[27] 미천왕에게 낙랑을 빼앗기고 모용외에게 귀순하더니 다시 고구려의 적으로 돌아온 것이다. 적은 기록이지만 미천왕과 참 질긴 악연이 있는 인물.[28]자치통감』에서는 이후로 고구려가 더 이상 요동을 넘보지 못할 정도였다고 언급하고 있을 정도로 치열하면서 타격이 큰 전투였을 것으로 보인다.[29]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미천왕 즉위 이후 시점부터 내용이 상당히 부실해지기 시작한다. 기록 문화의 정착과 유교적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전승이나 설화적인 내용이 점차 감소한 탓도 있겠지만, 관직 임명을 비롯한 비교적 사실적인 내용조차 줄어든 것을 보면 당시 전해지던 1차 사료의 분량 자체도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30] 특히 미천왕이 정복한 대상들은 신생 세력도 아니고 고구려가 건국될 때부터 300년 넘게 대립했던 강대한 적대 세력이었다.[31] 서북풍이 불었다, 혜성이 떨어졌다는 등.[32] 얼마 안가 소수림왕의 동생 고국양왕이 형의 보위를 계승한 일이 있긴 했지만 이는 소수림왕이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라 별 문제가 되진 않았다.[33] 고립된 위치 탓에 외부 문물을 접하기 매우 어려웠고 불교 공인에도 상당히 애를 먹었던 신라의 예시를 보면 이해가 쉽다. 또한 백제에 불교를 들인 침류왕은 재위 기간을 2년도 못 채우고 갑자기 죽은 데다가 아들이 아닌 동생이 왕위를 이었다는 수상한 정황 때문에, 백제에서도 불교에 대한 반발이 상당했고 침류왕도 그로 인해 터진 정변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추측이 유력하다. 주변국들이 이 모양이니 고구려의 순탄한 개혁은 결코 그냥 이루어진 게 아니라고 볼 수 있다.[34] 훗날 광개토대왕이 정벌한 대상 중에 숙신이 있었던 것을 보면 그 사이에 무슨 이유로 고구려의 복속에서 벗어난 듯하다.[35] 재미있게도 이 사람도 미천왕처럼 매우 가혹한 젊은 시절을 보냈던 사람이다. 미천왕과 달리 왕족 출신도 아니었고 노예로 팔려가기까지 했던 자수성가형 군주.[36] 석륵도 같은 해에 사망했다.[37] 미천왕의 부인. 미천왕의 시신은 금방 돌아왔으나 태후는 10년도 훨씬 지난 355년에야 고구려로 돌아왔는데, 왕실 최고의 어른 신분으로 적국의 인질까지 되는 등 남편 못지않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음에도 꽤 건강하게 살아간 듯하다.[38] 왕이 전사한 직후에 이렇게 별다른 반발 없이 새 문물을 도입하여 빠른 개혁이 가능했다는 것은 고국원왕이 그저 전쟁에서 고전하기만 했던 무능한 왕이 아니라 내실을 상당히 다져 놓아 멸망의 위기를 막은 왕일 수도 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사실 모용황의 침공 때도 일방적으로 밀리지만은 않았고 고무가 북쪽으로 공격해온 별동대를 궤멸시키는 등 적잖은 성과를 내기도 했다.[39] 전연이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끌려간 고구려인 고화(高和)의 손자이다.[40] 모용외의 할아버지인 모용목연이 위나라군 소속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41] 현재는 북한의 행정구역 마개조로 인해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가 되었다.[42] 안악 1호분과 안악 2호분도 있으나, 이 두 무덤은 도굴로 훼손이 심한데다가 안악 3호분이 비교적 벽화 보존이 잘 되어 유명한 것이다.[43] 먹물로 기록한 문장[44] 즉, 묘주를 동수가 모신 왕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다.[45]신당서》 〈동이전〉에 의하면 고구려 왕은 백라관이라는 관을 썼다고 한다.[46] 실제로 중국 집안 근처에 거대한 규모의 무덤이 도굴당한 채로 발견된 적이 있는데, 그게 모용외가 도굴한 서천왕의 무덤이라는 설도 있고 미천왕의 원래 무덤이라는 설도 있다.[47] 그러나 고구려 왕의 장지를 왕의 시호로 사용하던 고구려 문화의 특성상 고국원이 남평양 근처일 가능성은 적어보이는데, 고국원(故國原)이라는 단어 자체가 '옛 수도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광개토대왕의 시호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역시 국강상(國罡上), 즉 수도 언덕 위에 묻힌 임금이라는 의미이다. 만일 고국원이 남평양 인근이려면 남평양이 고구려에서 수도로 사용되었거나 인식된 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적은 없다. 당대 고구려의 묘지명인 〈모두루 묘지명〉에 의하면 고국원왕의 시호가 '국강상성태왕'으로 나오는 것처럼, 국강상성태왕이 묻혔던 고구려의 수도가 평양성 천도로 인해 더 이상 고구려의 수도가 아니게 되었을 때 '옛 수도 언덕에 묻히신 왕'이라는 의미로 '고국'이라는 말을 붙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고국원왕이 묻힌 곳은 반드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이어야 한다.[48] 왕이 아니면 이렇게 화려하게 그려질 수 없다고 했던 그런 행렬도도 다 있다. 안악 3호분이 결코 특별한 고구려의 무덤이 아닌 셈이다.[49] 안악 3호분도 그렇고 가옥을 묘사한 무덤이다.[50]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묵서들이 잘 남아 있었고, 지워졌다고 추정되는 부분은 없다. 즉 관리 한 명의 머리 위에 무수한 직책을 쓸 정도였다면 다른 관리들의 머리 위에도 당연히 써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참고로 장하독이라는 직책을 맡은 이의 그림은 안악 3호분에서도 모두 4명이 표현되어 있다.[51] 심지어 이들은 장지형(葬地形) 왕호를 채용했던 시기의 왕들로써 국, 천 등의 지명이 미천왕이나 고국원왕 말고도 더 있다. 광개토대왕 역시 업적을 제외한 명칭으로는 강상왕에 해당한다.[52] 물론 평양에서 안악군까지는 거리가 조금 있는 편이다.[53] 물론 범위 자체의 논란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집안 시내를 둘러싼 곳 만큼은 통구 고분군으로 부르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54] 물론 왕릉급 무덤을 왕릉급이라고 인식할 수 있게 짬찌 무덤도 넓고 많이 분포하고 있다.[55] 막새기와[56] 무령왕릉의 전축분이 대표적인 중국식 묘제를 채택한 사례다. 남조와의 교류의 결과로써, 당시 백제는 남조와의 조공관계를 통해 삼국 중에서도 외교적으로 유리한 입지를 점하고자 했다. 무령왕의 무덤에는 이러한 정치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57]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890416&cid=62135&categoryId=62281[58] 대표적으로 개로왕, 책계왕을 들 수 있다.[59] 이런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군주는 드문데, 미천왕 외에는 고려현종이 있다. 현종은 드라마 출연작은 있으나, 극에선 정작 현종 본인이 주인공이 아니라서 사실 제대로 안 쓴 것과 다름없다. 게다가 그 작품조차도 여러모로 문제투성이였고, 시청률도 망했다. 다만 2023년 후반기에 나온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의 주인공이 마침 현종이여서 그나마 다행으로 여긴다. 문제는 이 작품도 이정우명군 현종을 암군으로 꾸미는 바람에 시청자들에게 현종이 현쪽이로 불리게 되어 현종의 이미지 자체를 완전히 말아 먹어버렸다는 거다. 오히려 천추태후에 나온 현종이 그 때문에 어쩌다 보니 재평가 받고 있다.[60] 물론 사극화가 한 번도 된 적이 없는 역대 역사시대 군주는 비단 미천왕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시대 나라의 임금들도 꽤 있으므로 미천왕 한 명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미천왕만한 스토리텔링이 있는 군주는 드문데도 사극화가 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 아이러니할 따름이다.[61] 드라마 선덕여왕죽방 정도의 캐릭터를 생각하면 될듯하다.[62] 하지만 척준경은 행적 자체가 너무 줏대가 없는 편이라 뭐라 정의내리기 힘든 인물이다 보니 주인공으로 만들기에는 매력이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