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2-11 23:09:31

태조(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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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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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 高皇帝
태조 고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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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태조(太祖)
존호 조선 지인계운
(至仁啓運)
대한제국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
(至仁啓運應天肇通光勳永命)
시호 조선 성문신무대왕
(聖文神武大王)
강헌(康獻)[1]
대한제국 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2]
(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
출생 1335년 10월 11일
원나라 쌍성총관부 화령
(구 함경남도 영흥군, 현 금야군)[3]
사망 1408년 5월 24일 (72년 7개월 22일 / 26,533일)
조선 한성부 창덕궁 광연루 별전
능묘 건원릉(健元陵)
재위 조선 국왕
1392년 8월 5일 ~ 1398년 9월 5일
(6년 2개월 9일 / 2,261일)
조선 태상왕
1398년 9월 5일 ~ 1408년 5월 24일
(9년 8개월 4일 / 3,534일)
서명 파일:태조 수결.jpg[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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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全州)
성계(成桂), 개명 이후에는 단(旦)[5]
중결(仲潔) / 군진(君晋)
송헌(松軒) / 송헌거사(松軒居士)
부모 부친 환조 연무성환대왕, 모친 의혜왕후
왕비 신의왕후, 신덕왕후 }}}}}}

1. 개요2. 상세3. 생애4. 시호, 묘호, 휘5. 배우자와 자녀들
5.1. 정비5.2. 계비5.3. 후궁 및 자녀들
6. 어진7. 여진족설8. 평가
8.1. 왕씨 몰살8.2. 북한의 평가
9. 사용한 무구10. 이야깃거리11. 대중 문화에서
11.1. 사극11.2. 영화11.3. 게임11.4. 소설
12. 관련 문서13. 둘러보기(계보)


1. 개요

조선의 초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이며 한민족 역사상 마지막 요동정벌자이다.[6]

1335년 10월 27일(음력 10월 11일)~1408년 6월 18일(음력 5월 24일), 재위: 1392년 8월 5일(음력 7월 17일)~1398년 10월 14일(음력 9월 5일)

2. 상세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고황제(高皇帝). 초명은 이성계(李成桂)로, 세간에는 다른 역대 국왕과 달리 태조라는 묘호보다는 이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7]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한 이후에 이름을 단(旦)으로 바꾸었다.[8] 후에 대한제국의 고종이 그를 황제로 추존하였다.

사방팔방에서 위기에 처한 고려 말기에 전국 각지의 반란군한족 반란군인 홍건적, 멸망한 원나라군벌, 남쪽에서 패악질을 부렸던 왜구, 그리고 심심하면 침입했던 여진족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동아시아에서 싸울 수 있었던 적들을 상대로 전부 대승을 거두었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고려마저 멸망시켜버림으로서 당대 동아시아의 모든 세력들과 싸워서 이긴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한 마디로 왕이 되지 않았어도 이순신과 쌍벽을 이루는 '상승불패(常勝不敗)의 명장\'으로 칭송받았을 위인이다.[9]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수많은 세력들을 격파한 그도 인생에 있어 딱 한 번 패배를 하는데, 바로 아들 이방원과의 싸움인 조사의의 난이었다. 한마디로 아들빼고 다 이긴 역대급 '불패명장\'이라 할 수 있다.

고려 말기, 권문세족의 횡포로 암울하였던 현실에 불만이 폭발해버린 정도전, 남은, 조준, 윤소종신진사대부들과 손을 잡고 힘을 키운 뒤 요동 정벌, 명나라 공격에 떠밀려 참전하여[10] 압록강 위화도까지 갔던 때 반란을 일으켜 역으로 고려 조정을 공격한 위화도 회군 사건으로 우왕쿠데타로 몰아내고 4년 동안 권력 장악 준비 작업 끝에 마침내 공양왕을 쫓아내면서 역성혁명에 성공하여 고려를 뒤엎어버리고 새롭게 조선을 개국한다. 이성계의 책사이자 오른팔이었던 정도전 등과 함께 조선 왕조 500년의 기반을 닦았으나, 후계자 문제로 아들 이방원반란을 겪고, 권력에서 밀려나 비교적 불우한 말년을 보낸 끝에 사망했다.

조선 왕조에서 가장 많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11](58세), 영조 다음으로 장수하고, 동시에 두 번째로 많은 나이(64세)까지 재위한 왕이다. 숙종이 60세[12], 중종선조가 57세, 고종이 56세, 세종대왕이 54세, 태종이 52세, 광해군이 49세, 정종은 44세까지만 재위했다. 영조는 31세에 즉위해서 훙서하기까지 약 52년간 호랑이 등을 탔다. 조선 왕 평균 수명이 47세 정도인데, 이성계는 47세에 동북면 도지휘사(관찰사 수준)의 지위였고, 의안대군 이방석을 얻었다.

변방의 무인에서 시작하여, 외적과 맞서 싸워서 두각을 나타낸 끝에 결국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아들의 반란으로 인해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나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인생 자체가 사실상 한 편의 드라마 같았던 인물이기도 하다.[13]

3. 생애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태조(조선)/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시호, 묘호, 휘

유교 예법 상 제후국은 묘호를 올릴 수 없다. 천자의 칭호이니까. 시호도 스스로 올릴 수 없는데 이는 천자의 신하로서 천자가 주는 시호를 받아야하기 때문이다.[14][15] 하지만 조선은 두 가지 모두 무시했다. 태조 포함 태조의 사대조에게 모두 천자의 묘호를 올리고 독자적 시호를 올렸다. 하지만 그래도 성리학의 국가인 만큼 외교적으론 철저하게 예법을 지켰다.

우선 묘호는 절대 명에 알려지지 않게 했다. 그리고 시호는 독자적으로 올리되 명 천자가 보내준 시호를 대표시호로 삼았다.[16] 그래서 조선이 올린 시호는 대표시호가 되지 않고 명이 보낸 시호를 묘호 뒤에 대 자를 붙혀 사용했다. 그래서 조선이 정한 공식 존호는 '태조 강헌대왕(太祖 康獻大王)'.[17]

전조 고려 마냥 굳이 조선의 자주적 묘호와 시호를 합쳐 부른다면 '태조 신무대왕(太祖 神武大王)'이 된다.[18] 위대한 무장이었던 점을 감안해 올린 시호로 이성계의 두 아내들도 神 자 돌림 시호를 가지게 된다.[19] 군주와 아내의 시호를 맞추는 예법은 천자국의 예법으로[20][21], 태조 이성계에게만 이 예법을 적용하고 후대 국왕 왕후들은 시호를 맞추지 않았다.

조선조 역대 국왕의 자주적 시호 중 마지막 부분을 보면 태조 아래의[22] 모든 국왕이 '~효'로 끝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태종은 광효(光孝), 세종은 명효(明孝), 숙종은 원효(元孝) 등등. 이들은 태조의 자손으로 효성을 다해 국가를 이끌었다는 뜻으로 받은 것이다. [23]

종합하면 비록 태조의 대표시호는 명의 시호로 했지만, 조선은 시호 예법에 있어 해줄 수 있는 모든 예우를 바쳤다.

후 대한제국이 열리고 대표시호를 바꾸었다. 함흥본궁의 위패엔 태조고황제라 쓰여있는데 이는 대표시호를 '강헌대왕'에서 '고황제'로 바꿨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 정식 시호는 명과 조선의 시호를 합친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었는데, 대한제국이 되면서 고황제(高皇帝)로 추증하며 명나라로부터 받은 시호인 '강헌(康獻)'이 뺐다. 그래서 최종 정식 시호는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이다.[24]

왕건과 마찬가지로 본명이 매우 대중에게 익숙하다. 그래서 대중적으로도 이성계나 태조 이성계라 많이 부른다. 오늘날에 많이 쓰이는 표현은 아니지만, 과거에는 '이태조(李太祖)'라고도 많이 불렸는데, 오늘날에도 장년, 노년층에서 이성계를 이태조라고 부르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사실 이태조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지만 조선시대에도 고려 태조 왕건을 가리켜 '왕태조(王太祖)'라고 부른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어감영 좋지는 않지만 일본어 잔재론 같은 명칭은 아니다. 다만 정확한 표현은 아니기 때문에 안 쓰는 것이 좋다.[25]

왕이 되면서 피휘 문제 때문에 이름을 이단(李旦)으로 개명했다. 이성계의 성(成)자는 원래 이름으로 꽤 잘 쓰고, 일상적으로도 너무 자주 쓰이는 글자라서 아예 왕 본인이 갈아버린 것. 아침 단(旦)을 쓰고 있는데 조선에도 아침 조(朝)가 붙은 걸 보면 노린 듯. 피휘로 인해 조선시대의 문헌에서는 단(旦)자의 日과 一 사이를 연결하는 짧은 획을 하나 더 썼고, 함부로 글자를 고칠 수 없는 경전에서 이 글자가 나올 때에는 원래 음 대신에 됴(=조)로 독음을 달았다.

이단이라는 이름조차 군주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도 금기시 하기에 거의 불리지 않았다. 이단이라는 이름이 자주 쓰인 것은 구한말의 일로 피휘를 할 필요가 없던 서양인들은 조선의 역사를 소개할 때 이단이라는 이름을 직접 사용했다. 국내에서는 오랜 피휘의 역사 때문에 이단이라는 이름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아서 역시 이성계라는 이름으로 주로 쓰인다.

5. 배우자와 자녀들

5.1. 정비

5.2. 계비

  • 계비 : 신덕왕후, 대한 신덕 고황후(神德 高皇后) 강씨(康氏)
    • 무안대군(撫安大君) 이방번(李芳蕃)
    • 의안대군(宜安大君) 이방석(李芳碩)
    • 경순공주(慶順公主), 하가(下嫁) 개국공신(開國功臣) 흥안군 이제(興安君 李濟)

5.3. 후궁 및 자녀들

  • 후궁 : 성비 원씨(誠妃 元氏)[27]
  • 후궁 : 정경궁주 유씨(貞慶宮主 柳氏)
  • 후궁 : 화의옹주 김씨(和義翁主 金氏)[28]
    • 숙신옹주(淑愼翁主), 하가(下嫁) 당성위(唐城尉) 홍해(洪海)
  • 후궁 : 찬덕 주씨(贊德 周氏)
    • 의령옹주(宜寧翁主), 하가(下嫁) 계천위(啓川尉) 이등(李䔲)

6. 어진

대한민국의 국보
파일:external/pbs.twimg.com/Gn371bnO.jpg
316호
완주 화암사 극락전
(完州 花巖寺 極樂殿])
317호
조선태조어진
(朝鮮太祖御眞)
318호
포항 중성리 신라비
(浦項 中城里 新羅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ng_Taejo_Yi_02.jpg 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파일:external/pbs.twimg.com/Gn371bnO.jpg
공식명칭 한글 조선태조어진
한자 朝鮮太祖御眞
영어
분류 번호 국보 317호
소재지 대한민국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44-0
분류 유물 / 일반 회화 / 인물화/ 초상화
시설 1폭
지정 연도 2012년 6월 29일
제작 시기 조선, 1872년

얼굴 부분을 확대한 사진.

전북 전주시의 경기전에 봉안되어 있는 태조 어진. 지금까지 남아있는 조선 시대 어진 중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은 어진이다. 태조 재위 당시에 제작된 집경전의 어진을 1409년(태종 10년)에 모사하여 경기전에 봉안한 것을 1872년(고종 9년)에 다시 그대로 모사한 것이다. 청룡포 어진이 당대로부터 전해지는 유일한 어진이며, 홍룡포 버전은 후대인 헌종 대에 왕명에 따라 홍색으로 용포 색깔을 바꾸어 모사한 것이다. 참고로, 한국전쟁 당시에 부산광역시로 옮겨왔었는데, 보관 도중에 화재로 얼굴을 포함해 절반 부분이 날라가버렸고, 복원을 통해 2011년에 공개됐다.

7. 여진족설

이성계가 조선의 건국군주이므로 조선까들은 그 뿌리를 흔들기 위해서인지 이성계 출신에 대해 여진족설, 달단족설, 화교설 등 갖가지 설을 만들어 주장하고 있다. 특히 그 중 여진족설은 가장 많이 알려져서 한국의 조선까 뿐 아니라 일본 혐한들, 그리고 이들에게 편승한 한국의 일뽕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단골 소재(?)다.

고대 혈통 문제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과학적으로 알아내기가 힘든 편이라 해결이 안 된 문제가 많으며, 역사와 소설을 구분 못하는 사이비들이나 제멋대로 역사를 왜곡날조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지 기본적으로 역사는 사실이고 사료나 과학, 논리 등을 이용하여 사실을 알아내거나 그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은 명확한 근거가 나올 때까지는 확정을 내리지 않는 것이 기본이다. 승자가 사서를 날조할 수 있을지언정 이미 발생한 과거의 역사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며, 또한 오늘날의 역사학은 학문이고 과학적 방법론으로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지 감정적으로 맘대로 날조해도 되는게 아니다.[29]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근거랍시고 들이대는 주장들도 보면 다 반박이 가능한 수준이라 신빙성이 꽤나 떨어진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에 따르면 전주 이씨로, 본래 전주에서 상당한 세력을 갖추고 근거하던 가문 출신이라지만 정작 전주에 있던 시절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고 역대 선조로 기록된 인명은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은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다?
    • 교차검증이 제대로 안되는 것은 본디 본래 전주 이씨가 아니라는 근거는 될지 몰라도 이성계 일족이 여진족이라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여진족이 검증이 안되니 검증이 안되면 무조건 여진족인가? 게다가 족보를 구매해서 윤색할거라면 보다 논란거리가 적은 집안들이 한둘이 아닌데 뭐하러 고려사 역적의 대명사였던 이의방 집안의 족보[30]를 구매해서는 어떻게든 이의방의 존재를 감추려 안달을 하겠는가? 또 목조 이안사는 고려를 배신하고 원에 귀부한 정황이 실록에 명명백백히 실려 있는데 족보를 날조할거라면 굳이 이안사를 매국노로 만들고 변명하느라 애를 쓸 이유도 없다.[31]
  • 목조 이안사가 전주에서 삼척, 그리고 또 동북면으로 이주할 때 그에 딸린 1백 70여 가(家)가 따라서 같이 이주했다고 하는데, 당시의 1가는 현대의 핵가족보다 훨씬 큰 집단이었고 이런 대규모 가구가 유력 세력가를 따라 한꺼번에 멀리까지 이동하는 것은 농경사회보다 유목사회의 모습에 가깝다?
    • 지금이야 거의 전국토가 개간되어서 농사 하면 그냥 원래 있는 논밭에 씨 뿌리고 일구기만 하면 되는 줄 알지만 과거의 농사는 근세까지도 나대지나 삼림, 늪지에 대한 대대적인 개척과 개간작업이 요구되었다. 전주 인근 호남평야의 개척이 산기슭에서 평원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 고려시대의 일이며, 특히 호남평야는 면적에 비해 하천의 유량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32] 저수지 축조 등의 토목관개사업이 수반되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대대적인 개척사업을 진두지휘할 지방 유력호족의 지위가 이후 시기에 비해 훨씬 강력했던 것이며, 다량의 노동력과 그 노동력을 통솔하는 유력자가 없이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개개인의 황무지 개간이라는 매우 고된 작업을 의미했다. 교과서에서 왜 선사시대 쌀농사 연대를 중요하게 다루는가? 바로 초기 쌀농사가 대량의 노동력을 요구하며 이런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체제, 정치체제의 등장 시기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지의 개간률과 이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이 높아지면서 향리의 권력이 축소된 조선시대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33] 게다가 이 호족들은 사병을 통해 치안까지 제공했고, 지도자가 도망친 상황에서 이안사와 싸우던 안렴사나 별장이 남은 이들에게 정치적 보복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으니 지역민들도 그와 함께 이동할 동인은 충분했다. 이에 반해 유목민은 끊임없이 물과 풀을 찾아서 돌아다녀야 하니 오히려 흩어지는 경향을 보이며 여기에서 바로 장자들을 빨리 독립시켜 내보내고자 말자상속이라는 특유의 상속시스템이 나온 것이다. 이들은 거주를 집단으로 할 지언정 생업 목적의 이동을 대집단으로 하지는 않는다(물과 풀이 빨리 고갈되니까). 지도자를 따라 집단으로 이주하는 것이 모두 유목민이라면, 후한 말에 유비를 따라 피난간 형주인 10만은 사실 남중국에 살던 흉노족들이었단 말인가? 게다가 동만주의 여진족들은 반농반목민들이지 유목민이 아니다.
  • 태조실록 총서에서 이안사가 '석성(石城)을 쌓아 소와 말을 놓아 먹였다.'거나, 도조 이춘이 함주로 이주할 때 이주하는 이유로 목축(牧畜)하는 데 편리함을 언급했다는 점으로 농업보다 목축의 비중이 높았던 집단으로 보인다?
    • 우선 원사료 내용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원문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斡東東南三十餘里, 有海島曰者考羅, 北連於陸。 穆祖築石城, 以放牛馬。

      알동의 동남쪽 30여리에 자고라라는 해도(섬)가 있는데 북쪽으로 육지에 닿았다. 목조가 석성을 쌓아 우마를 놓아 먹였다.

      즉 알동 본토에서 목축을 한 것도 아니고 따로 떨어진 섬을 목장으로 삼은 것이며, 이것은 고려시대부터 유구한 전통이었다. 동아시아 농업의 알파요 오메가인 소야 말 할 것도 없고, 말은 농경민족에게도 이동수단 혹은 군사자원으로서 매우 중요했다. 전술했듯이 13세기의 유력자들은 사병을 보유하여 집단의 안전을 도모했는데 전근대에 말은 군사력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가축이었다. 도조의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천호직이라는 게 중앙집권국가의 지방관처럼 안정된 영역을 가진 지위가 아니라 다른 천호 및 부족들과의 치열한 투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꽤 고달픈 신세라 충분한 기병이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다. 게다가 당시 함흥 이북의 동북면은 미개척된 산림지대로 맹수가 우글거리는데다가 기후 문제로 토지의 생산성이 낮아 농업과 수렵을 병행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당연한 선택이었고, 같은 환경에 속한 여진족들과 생활양식이 겹치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또한 도조가 알동에서 쫓겨나 재기할 때는 등주(안변) 호장 최기열에게 장가를 들어 영업전을 경작하면서 알동에서 남하하여 합류한 주민들을 모아 함주로 북상한 것인데 이것만 봐도 농업보다 목축이 위주였다는 주장은 별 근거가 없다. 지역 호족 쯤 되는 사람이 (고려인 보기에는)농사도 지을 줄 모르는 여진족놈에게 딸을 후처로 주어 경작을 맡긴다니, 집안 말아먹을 일 있는가?
  • 이성계의 선조들을 보좌하는 장수들은 퉁두란을 비롯해 주로 여진족 세력가들이었는데, 중세 사회에서 특별한 이유로 엮인 것도 아님에도 순수 농경지역 출신 지도자인 이성계 집안을 순순히 따랐다는 점이 역시 납득하기 힘든 점이다?
    • 여진족 데리고 다닌다고 다 여진족이라는 논리대로면 고려시대의 유금필도 여진족들에게 대추장으로 추대되었고 이징옥은 여진족과 함께 난을 일으키려 시도했으니 여진족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이는 현대로 치면 외국인 친구랑 같이 다니거나 외국인 동료와 같이 일하면 한국인이 아니라 외국인으로 단정하는 것과 똑같다. 본래 야인들은 일신의 무력에 경도되어 굴복하는 경향이 컸을 뿐이며, 이성계 개인의 무력은 충분히 여진 부족장들을 압도할 수준이었다. 어차피 사료상으로도 여진족들이 전주 이씨 일가를 동류로 여기지 않았고 심지어는 다구리까지 놓은데다가 그렇게 도망간 이춘을 알동 사람들이 따라 내려왔다는 대목으로 간단히 반박된다. 정작 그 여진족들 중에 이성계를 따라 개경 가서 정착한 것은 이지란 하나였다.
  • 순수 농경지역인 전주 출신의 목조가 북방으로 이주한 후 금방 천호장과 다루가치의 지위를 원황제에게서 하사받는데 뜨내기에 불과한 목조에게 뜬금없이 고위직을 내린 것이고 이런 사실을 믿기 어렵다?
    • 다스리는 영지와 영민이 많은 세력가이자 실력자라서 그 영민들을 관리하라고 천호장 지위를 받는건데 농경이고 유목이고가 무슨 상관인가? 게다가 이 역시사료의 서술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는데, 이안사는 삼척 시절부터 무리를 이끌고 왜구와 몽골의 침략을 막은 공적으로 고려 조정에서도 의주병마사 직함을 내릴 정도로 의주(원산)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해 원에게서 줄기찬 러브콜을 받아 귀부하여 천호장과 다루가치직을 받은 것이지 어느날 갑자기 덜컥 항복하고 천호장이 된 것이 아니다. 한양 조씨 집안은 아예 귀부하고 쌍성총관 자리를 먹었는데, 이런 논리면 한양 조씨도 여진족 집안이란 말인가? 어차피 정복자인 몽골의 입장에서는 고려인이건 여진족이건 한인이건 색목인이건 간에 자기들보다 아래인 것은 매한가지이며 그저 각자의 능력과 세력이 더 중요한 고려요소였을 뿐이다. 반면 터줏대감인 여진족들은 이 굴러온 뜨내기에 대해 분명히 보복을 가해 내쫓기까지 했다.
  • 태조와 태종이 반대를 무릅쓰고 장자가 아닌 막내에게 양위한 점은 몽골 등 북방민족의 일반적 풍습과 같다?[34]
    • 실록은 읽고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처음부터 막내인 의안대군을 책봉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유교국가에서 그럴 수도 없었고. 실록에서 태조가 먼저 세자로 밀었던 건 무안대군 이방번이고 그는 신덕왕후의 입장에서는 장자였다. 안변한씨를 왕후 시호도 주지 않을 정도로 홀대했던 당시 상황에서 이방번을 '적장자' 취급하는 것은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방번이 세자 경쟁에서 밀린 것은 기록상으로는 성격적 결함, 정치적으로는 고려왕실의 사위라는 입지상의 확실한 문제가 있다. 태종이 세종에게 승계한 것은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부적격자라서 그랬단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게다가 위에서도 말자상속에 대해 잠깐 언급했듯이 말자상속이라는 건 오히려 말자보다 장자에게 무리와 가축과 새로운 땅이라는 더 큰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시스템으로, 청나라 같은 특수한 사례 아니고서야 유목민족도 정주왕조화 되면 가급적 장자상속을 하거나 장자에게 왕위 대신 인센티브를 주거나 했다.[35] 유목민식 말자상속 논리로 이방석을 책봉했으면 골수 반몽주의 사대부들이 잘도 이방석의 책봉을 용인했겠는가?

이런 점만 봐도 이성계 여진족설에 대해서는 그닥 신뢰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성계의 혈통이 여진족이라는 주장에는 문헌 근거가 전혀 없다. 이성계의 혈통은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의 서두에 상당히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이안사에서 이성계로 이어지는 혈통은 심지어 외가의 외가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다. 기록상 이성계의 혈통은 고려인 혈통으로만 이어졌다. 역으로 이성계 이전에도 금사, 송막기문 등에는 금나라 태조 완안아골타의 6대조는 김함보라는 신라-고려 교체기 시절의 인물로 그 계보가 기록되어있는데, 이를 보면 한반도에서 북쪽으로 이주하여 세력을 일으킨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여진족들은 이성계 일족을 다른 족속으로 여기고 공격하기도 했다. 물론 통두란의 예에서 보듯이 우호적인 교류도 했겠지만, 고려인과 여진족이 서로를 다르게 보았다는 문헌적 근거가 있다.

만약 여진족 출신이 고려에 귀부해 왕이 될 수 있을 정도였다면 이성계 외에도 고려 중앙조정에서 한자리 차지한 여진족 출신 유력인사가 존재하고, 이성계의 세력형성 과정에서도 동족(?)인 여진족들이 힘을 보태줬어야 합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쪽에서는 정작 퉁두란 외에 딱히 쌍성에서부터 이성계를 따라왔거나, 혹은 이성계와 비슷한 케이스로 중앙에서까지 활동한 여진족을 전혀 제시하지 못한다. 오히려 퉁두란을 제외한 여진족들은 쌍성 수복 이후에도 줄기차게 고려를 건드렸고, 이성계에게 진압된 이후로는 고려라는 국가가 아닌 이성계라는 한 개인에게 충성을 바쳤을 뿐이다. 만약 조선왕조가 이성계가 여진족임을 숨기려 했다면 그와 평생을 함께한 퉁두란도 세트로 날조하는 것이 가장 안전했을 것이다. 이성계가 개경에 내려온지 얼마 안되는 여진족임에도 전주 이씨 족보를 구해서 날조할 수 있었다면, 아예 한국사 사상 최강의 권신이 되어서는 의형제인 이지란에게 적당한 족보 하나 못 구해줬겠는가? 이성계를 적장자로 만들기 위해 멀쩡한 이원계를 졸지에 서장자로 만든 것이 조선왕조인데 퉁두란을 고려인으로 윤색하는 것이 어려웠겠는가? 하지만 정작 조선왕조는 퉁두란의 여진족 집안 내력을 세세히 밝히고 있으며, 청해 이씨 집안도 자기 집안이 악비 후손이네 하면서 덧칠은 했을지언정 여진족 출신이라는 사실을 감추지는 못했다.

이성계가 여진족 출신이라면 흔적 남길 곳은 이지란 말고도 많다. 당장 명나라에서도 이성계를 이인임의 자손으로 기록했을지언정 여진족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애초에 여진족이라고 봤으면 명백한 고려인인 이인임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그대로 받아 적지는 않았을 것이며, 그 이전에 이성계를 무고한 윤이, 이초 일당 역시 이인임 자손 운운이 아니라 그보다 몇배는 치욕스러운 여진족 출신 운운하며 요동침공설을 부추겼을 것이다.[36] 또한 동만주 여진족들 사이에서 이성계와 관련한 구전이 안 남았을 것이며, 그렇다면 조선왕조에 대해 왕가의 출신부족으로써의 지분을 요구하지 않았겠는가? 여진족 시절에야 조선에 비해 약소했으니 요구가 씹혔다 쳐도, 여진족 출신 만주족 왕조인 청나라에서는 이걸 안 이용해먹었겠는가? 대번에 "느그 왕 여진족이니까 이제 큰집인 우리한테 들어오는 건 당연 ㄳ" 하는 식으로 써먹고 오늘날 중국 측에서도 닳아서 가루가 되도록 우려먹고 있을 일이다.[37] 심지어 청나라는 대청회전을 편찬하면서 대명회전 원본을 따를지(이인임 자손설) 수정본을 따를지(이인임 무관설)를 고민했을 뿐이다. 여진족 본인들조차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생각 자체를 안 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이 지역의 고려인들과 여진인들은 서로를 혼동하지도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여진족이라는 일방적인 주장의 근거는 고작 당시 정황상 이성계의 선조가 이주한 동북방에 여진족이 많이 살았다는 것 뿐이다. 쌍성총관부가 있는 동북 지역은 중부 지방과는 달리 여진족 역시 꽤 많이 살기는 했다. 사실 이 지역 함흥은 험한 산과 바다로 막혀 지리적 접근성은 떨어지는데, 그 지역 자체는 사람이 거주하기에 적당한 자연환경, 함흥 평야 지역이다. 이 때문에 고대부터 여러 민족이 거쳐간 지역으로(옥저가 있었던 곳이 여기) 시대에 따라 옥저, 고구려, 여진, 고려 등이 경합하는 지역이었다.

고려는 처음부터 고구려 승계의식을 표방하며 일어섰고 국조인 태조 왕건이 강력하게 북진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과거부터 이 지역의 여진족들을 회유하고 귀화시키거나, 다른 지역의 고려인들을 이주시킨다거나, 정 안되면 물리적으로 본때를 보이거나 하는 식으로 중요하게 여겨왔다. 공민왕이 함흥 지방의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면서, "본래 고려 영토"임을 확실하게 선언한 것도 이런 상황탓이다. 이는 조선에 들어와서 마찬가지였는데, 조선 초기에 함경도에서 여진족의 귀화를 받아들이고 조선인과 결혼시켜주는 등의 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이안사가 인망을 얻고 무리를 이끌어 고려 조정으로부터 병마사 직함을 받았다는 대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북방으로의 고려인 이주는 정책적,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난 결과이다. 전혀 특수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기록에 따르면 이성계 일족의 이주는 달랑 한 가족이 혼자 이주한 것은 아니었다. 이안사를 따라간 사람들만 천호이며, 이안사 휘하에 있던 고려인은 거의 수천호가 된다고 한다. 전근대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면 중앙보다는 민족색이 얕아질지 몰라도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충분히 간직할 수 있다. 기록에 남은 전주이씨의 가계는 철저하게 함흥, 안변 일대 고려계 집안끼리의 통혼을 통해 이어져왔는데 당장 재외 한인커뮤니티만 봐도 줄기차게 한인집안끼리 결혼하며 버티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게다가 그들의 고향인 고려는 바로 이웃에 있었으며, 비록 주권이 많이 훼손되기는 했으나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춘의 동복형 이송이나 이성계의 이복형 이원계는 쌍성이 원나라 땅이던 시절에 고려 조정에 출사하기까지 했다.(고선지와는 이래서 다르다.) 고구려가 망하고 왕족 약광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고구려 유민들은 무려 500년간(!) 자기들끼리만 통혼하며 버텨왔으며 발해 멸망 이후 발해계 주민들도 금 조정이 적극적으로 한족화시키기 전까지 근 200년간 발해계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고작 조국과의 접경지대에서 4세대쯤 정체성을 고수하는 것 정도는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런 이주는 당대 상황에서 이성계 일족만의 특수한 경우가 아니었다. 고려사를 비롯한 각종 기록들을 보면, 무신 정권을 전후로 해서 고려 사회의 막장화가 가속화하면서 백성들이 유망이 심해지고 있었다. 이성계의 선조처럼, 자기 동네 향리나 지방관과의 마찰이 이주의 원인인 경우도 심심찮게 존재한다. 고려 시대 자체가 주현이 따로 있고, 속현이 따로 있는 시대로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영향력이 그렇게 강한 시절이 아니었다.

현대로 따지자면, 이성계 일족은 조선 말에 간도 이주, 개척 시기에 그쪽으로 흘러가 현재 중국의 조선족이 된 사람들과 비슷한 경우였다. 이들은 해방 후 60년이 지났지만 자치주를 유지하고 있으며, 장기간에 걸쳐 자신을 민족적으로 여전히 '조선계'인 중국인이라 생각하고 동화되는 중이다. 의무교육을 비롯해 각종 정책으로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는 현대 중국에서도 이런데, 전근대의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는 여진 - 고려 관계에서는 그 속도가 더 느리고 영향력도 적을 수밖에 없다.

또한 당시 여진족은 금나라의 멸망으로 완전히 몰락한 상태라 종족적으로 고려 이상으로 안습해졌다. 나라도 없고,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어, 통일된 정치 체제를 가진 민족도 아니고, 문화적인 헤게모니도 상실했다. 그저 몽골의 지배 아래 있는 여러 소수 민족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며, 심지어 고려 북방 지역에서도 야인(野人)이라 불리는 여러 종족 가운데 한 부족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여말선초의 문헌에서 이 지역의 부족들은 '여진'보다는 '야인'으로 통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신의 부족 이름을 '여진족'으로 삼는 종족만 있었던 게 아니기 때문이다. 금나라 같은 대제국을 세운 민족이니 역량은 어마어마했으리라는 환상 섞인 추측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작 금나라는 일단 기본적으로 파탄국가 수준의 시스템으로 운좋게 화북을 냠냠했을 뿐이고[38] 화북평원과 만주를 이어주는 연결고리 격인 오늘날의 북경을 뺏기고 난 후 금 정부의 통제력이 사라진만주를 먼저 몽골에게 빼앗기고 이후 개봉으로 천도하여 화북-화중 영토로 버티다가 개봉 근처의 채주를 마지막으로 멸망했기 때문에 금나라 시절의 그 막강한 역량은 이 시기 동만주 여진족들에게는 거의 계승된 것이 없었다. 그 결과 원말명초의 격변기에도 만주의 여진족은 나하추 등의 지도 아래 북원의 부용세력으로 소비되거나 부족별로 각자도생의 길을 걸었지 자체적으로 어떠한 통합적인 정치체 구축을 시도해본 바가 관찰되지 않는다. 북방 야인들이 '여진' - '만주'라는 정체성으로 통합되는 것은 후백년 뒤 후금의 건국을 기다려야 했고, 그나마도 서만주 건주위 중심의 통합이라 동만주 지역은 변방 신세를 면치 못했다. 애초에 만주 국가의 진출방향은 언제나 일관되게 서쪽향이었으며 동만주는 동부여발해 정도를 제외하면 역사적으로 변방을 면해본 바가 손에 꼽을 수준이다. 결과적으로 당시 동만주-동북면 지역에서 중심이 되는 문화는 원 제국으로서 패권을 잡고 있던 몽골 문화였다. 여진족도 몽골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청나라 시대까지 몽골어가 널리 쓰였고, 만주문자도 몽골문자를 개량해서 만들었을 정도다.

이런 면에서 차라리 원 제국의 일부로써 원나라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생기지 문화적, 민족적 역량이나 색채가 약한 여진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질 가능성은 낮았다. 물론 이성계는 여진족과 긴밀한 교류를 가졌고, 그들을 통솔할 수 있는 배경에는 여진족과 문화, 민족 등에서 정체성의 공감 / 공유가 있겠지만, 그 정체성은 혈통적 정체성이 아니라 동북면 지역과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이라는 지역적, 부족적 성격이었다. 여진족이라는 혈통적 정체성을 가졌다면 여진족 통합에 나서는 게 이치에 맞다. 하지만 이자춘은 원과 고려 사이에서 고려에 귀순하고 지배층의 일원이 된다. 그리고 이성계 가문이 가졌던 여진족의 문화적,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공감 / 공유과 교류는 지역 기반을 동북면에서 한반도 중심인 개성 - 한양으로 옮기자 단 1세대만에 사라졌다. 동북면 출신 어머니를 둔 정종, 태종조차 태조와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본인들도 동북면 여진족과 연결을 강화하거나 과거 영향력을 복원하려고 하지 않았다. 여진족 역시 자신들의 윗사람이었던 태조 이성계의 혈족에 전과 같은 충성을 바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여진족 부하라는 이들도 몇번째 얘기하지만 퉁두란 말고는 다들 참교육해서 무릎꿇리고 복종시킨 것이지 무슨 동족의 유대감으로 복속시킨 게 아니다.퉁두란도 쳐맞지만 않았지 사실상 참교육당한 수준 심지어 이원경 같은 경우는 항복할 때 아예 자신의 조상이 고려사람이라며 투항했지 여진족의 ㅇ자도 꺼내지 않았다.

특히 가장 중요한 점은, 이성계 일족은 자기들 스스로를 고려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는 점. 일부의 편견과 달리 여진족과 한반도의 사람들은 고대부터 그 정체성이나 언어가 확실히 구분되는 별개의 민족이었다.[39] 이런 상황에서 이성계 가족이 실제로는 여진족이면서 고려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또, 그럴만한 이유도 없다. 애초에 이들이 여진족이었다면 공민왕을 편들어 쌍성총관부를 고려에 바치느니 차라리 쌍성지역의 여진족을 규합하여 동만주를 제패해 아쿠타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게다가 여진족 집안이 귀부한지 단 1세대만에 그 빡세디 빡센 고려 문과 합격생을 줄줄이 배출해낸다는 것도 기적 그 자체다.[40]

따라서 여진족 설은 조선 왕조에 대한 어떤 감정적인 해석, 혹은 만주 지역에 대한 민족주의적 감상에 따른 해석에서 비롯된 낭설로 봐야 될 것이다. 사실은 고려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내리는 상상에 불과하다.

색이 옅다는 것으로 따진다면 타국인과 교류하며 지냈던 국경 지방이나 외따로 떨어진 제주도는 우리 땅이 아니라고 하는 것, 경상도 해안지방에 왜관이 있었다고 일본인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성계 여진족설과 같은 논리로 보면 앞서 언급했듯이 쌍성총관부에서 99년이나 살았던 한양 조씨들도 여진족이라는 말이 된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쌍성총관부를 몽골에 넘긴 반란세력도 조씨에서 주도했고 다시 고려에 귀화시킨 세력도 조씨에서 주도했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고려에 귀화할 때 도움을 줌으로써 고려 정부에 출사하게 된다. 조씨 가문이 저렇게 상반된 행동을 하게 된 이유는 세대가 흐르면서 쌍성총관부의 관직세습 때문에 가문이 분열했기 때문이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조선까의 주장을 대충 소개하자면 여진족이 만주 지역만이 아니라 한반도 북방에도 꽤 살았다는 것과 으레 나오는 과거 족보의 신뢰성을 걸고 넘어지는데, 태조 총서의 기록에 李璘, 李隣 등으로 조상의 한자가 다르게 기록되는 혼선이 있고 족보의 가문도 전라도 전주(全州)에 있었는데, 갑자기 동북면 쪽이 근거지가 되는 행적을 증명하는 증거의 신뢰성이 약하기 때문에 이씨 족보[41]를 구매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고려에서 여진족이 하루 아침에 족보를 사서 고려인 귀족 행세를 할 수 있다는 상상 자체가 역사적 무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억지일 뿐이다.
  • 첫째, 고려는 폐쇄적인 문벌에 기반한 세습 귀족 계층이 주도하는 국가였으며 철저한 계급 체제를 갖추고 있었므로 세습 문벌 외의 잡상인이 족보를 살 수도, 산다고 귀족 행세를 할 수도 없었다. 적어도 가문의 방계나 인척, 지인들은 가짜 귀족이라는 것을 바로 눈치챌테니. 이 귀족이라는 건 악명높은 음서제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후대 조선의 양반과는 궤를 달리하는 극도의 폐쇄적 집단으로 혈통이 결여되면 단순히 노력만으로는 진입이 불가능한 이너서클이다. 그런데 이성계의 집안은 이미 쌍성 시절부터 고려 조정에 음서로 출사를 해왔다.[42] 이는 쌍성 시절에도 이성계 집안이 고려 조정과 연계를 완전히 끊지 않았고, 조정에서도 이성계 집안에 명예직 벼슬을 꾸준히 수여해왔기 때문이다. 여진족설은 여기서부터 이미 박살난다. 이너서클 귀족집단들이 미쳤다고 고려인도 아닌 여진족에게 음서 자리를 내주겠는가?[43] 이성계 집안의 계보에서는 목조의 할머니가 문극겸의 딸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굴러들어온 여진족 나부랭이 따위가 자기 집안 외손이라고 주장하면 전주 이씨네야 족보를 팔아먹었으니 그렇다 쳐도 당대의 명문가인 남평 문씨 문중은 모계가 부계 못지 않게 중요했던 고려 사회 분위기에서 가만히 있었겠는가? 족보의 매매나 위조는 대격변기였던 후삼국시대나, 활자와 인쇄술이 어느 정도 대중화되면서 족보의 간행이 활발해서 개나소나 돈만 있으면 족보를 한 질 뽑아낼 수 있게 된 조선후기의 이야기지, 이도 저도 해당되지 않는 고려시대에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대 최고의 권신이었던 정중부이의민, 김준, 이인임도 집안 내력을 뜯어고치지는 못했다.[44]이인임은 대신 이성계를 자기 후손으로 만들었다 하물며 여진족 나부랭이가 족보 사다가 출사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겠는가?
  • 둘째, 고려는 수백년동안 북방 야만족의 거듭된 침략에 저항하면서 확고한 민족 의식이 자리잡은 일종의 민족 국가로서,[45] 북방 야만족에게 개방적이지도 않았을 뿐더러 야만족 출신이 주로 노비나 백정 계급으로서 천시되는 상황에서 여진족 나부랭이가 출신을 숨기고 귀족 행세를 할래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46] 애초에 황제에게 천호장 직위를 받았다면 이미 원나라 조정에서도 그 신원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거나 최소한 명문가로 인증한 것이다. 황제국의 벼슬이란건 신원도 불분명한 자에게 아무렇게나 던져 줄 수있는게 아니니까. 심지어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승계 문제로 계모와 다투면서 아예 직접 원 조정의 공인까지 받았다. 그렇다면 이미 고려 지배층들도 모두 알고있을 것을 무슨 수로 속인단 말인가? 이것은 누구보다도 쌍성 총관부의 한양 조씨들이 증인이다. 이성계의 가문이 여진족이었다면 적어도 원나라 시절 쌍성 총관부에선 당연히 알고 있었을 텐데, 역사서 어디를 봐도 그런 내용은 전혀 없다. 당장 이성계가 출사한 이래 즉위하기까지 그와 대립하던 이들이 이인임, 조민수, 정몽주 등 한둘이 아니었고, 반면에 이성계를 지지한 것이 반몽주의를 내세운 신진사대부들이었다. 이성계의 혈통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면 반대세력들이 "저새끼 여진족" 한마디로 정치생명을 끝장낼 수 있었음에도 누구도 이를 이용해먹은 적이 없다. 또 이성계가 이정도로 혈통에 약점을 지닌 상태라면 폐가입진이라며 감히 왕실의 혈통을 문제삼는 정치적 모험을 감행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 셋째,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신천 강씨(신덕왕후)나 성주 이씨(이인임 집안) 등의 귀족 계급과 혼사를 트려면 당연히 같은 고려인 귀족급이어야 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세력이 크다한들 당시에 전주 이씨 일가가 고려인인지도 확실치 않은 북방 군벌 나부랭이였다면 고려 중앙 정계의 귀족들과 가문대 가문으로 혼사를 트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민주주의가 들어온지 오래된 오늘날의 일본에도 부라쿠민 집안에서 천황가나 정치인 가문과 가문대 가문으로 혼사를 트고 상류층으로 편입하는 것이 관습상 불가능에 가까운데, 하물며 수백년 전의 고려에서 어찌 그게 가능한 일이겠는가? 여진족 출신임이 확실한 이지란 사례와 비교해보면 차이가 나는데, 그나마 개경에 따라와 출사한 이지란도 이미 시집을 두번이나 갔고 그나마도 한번은 시집갔다가 뭔가 사고를 쳐서 쫓겨난 여자를[47] 선심쓰듯 넘겨받는 처지였다. 그나마 이지란은 처가 누구인지도 기록되어 있고 후에 신덕왕후 강씨의 친척을 후처로 맞이하기라도 했지, 명색이 검교직일지언정 문하부사까지 간 이원경 같은 경우는 아예 누구한테 장가갔는지 기록도 없다(...). 반면 이성계는 전통의 명문가인 신천 강씨 집안의 장녀를, 그것도 자기 아들보다도 어린 계처를 얻었으며, 그 숙부인 강윤충과 사촌 강우도 이자흥의 사위들로 이성계에게는 사촌매형이 되었다. 이는 신덕왕후의 친가인 곡산 강씨, 외가인 진주 강씨 모두 이성계를 비롯한 쌍성 전주이씨 가문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집안의 운명을 걸었다는 것으로서 이성계의 가계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48] 이성계의 형 이원계는 더욱 대단(?)해서, 개성 김씨[49], 경주 김씨, 남평 문씨 집안의 여식들을 줄줄이 처로 맞이했다.[50] 이복동생 이화 역시 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초부터 내려오는 명문가인 교하 노씨 집안에 장가를 들었다.

그러므로 결론은 이성계 여진족 썰은 설득력이 없다고 보면 된다.

8. 평가

조선 왕조의 개국자였기에 조선 시대에 쓰인 기록에서는 행적에 대해서 필요 이상의 신격화도 많은 편이지만, 전반적인 기록을 보면 고려시대에는 천하제일의 명궁이요 당대 동북아 최강의 용사인 동시에 유능한 군인이었다. 또한 적이나 오랑캐라고 해서 무조건 뚜드려잡지 않고 가능한한 항복시켜 부하로 포섭하는 관대한 덕장의 면모도 있었다. 가히 난세에는 영웅이라 할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왕으로서는 행정이나 정책적으로 정도전, 조준 등을 재상으로 세우고 새 왕조의 기틀을 닦는 작업은 충실하게 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군인 출신답게 화통한 면이 있어서 조회 때에도 "번잡한 예절은 생략하고, 할 말 있는 대신은 빨랑 나와서 의견을 말해 봐"라는 식으로 말한 적도 많았으며, 소탈하고 격의 없는 스타일이었다고. 왕이 되던 날 아침으로 먹은 것이 물에 만 밥 한그릇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실록에는 "평소에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였지만 한번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 하나의 화기(和氣) 덩어리가 되어 많은 이들이 태조를 사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정치가로서는 자신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과신한 것인지 상식적으로도 뻔한 정치적 변수에 무신경한 기질이 있었다. 이게 기록에는 덕있는 사람의 면모로 포장되어있지만, 사실은 정치적 무능의 일종이다. 이성계란 사람 자체가 머리 복잡한 정치에는 별로 맞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낙마사고 이후 결국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정몽주를 죽이지 않으면 전주 이씨 전체가 멸족당할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차마 손을 대지 못해서 질질 끌었고, 막내를 왕이 되면 그 형들이 모조리 다 끝이 좋지 않게 될 것임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자신만 건강하게 살아있으면 괜찮을거라고 과신한 탓인지 막무가내로 막내를 세자로 밀었다. 결국 이성계나 정도전보다도 정치적 결단을 잘 해낸 것은 결국 그 아들인 태종 이방원이었다.

8.1. 왕씨 몰살

태조 이성계는 혼자서 고려를 구한 수준의 불세출의 명장이자 전설적인 전공을 세웠고 고려 말의 폐단에 일격을 날리며 새 나라를 창업한 위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민중의 신망이 높았던 최영이나 (본의는 아니었다고 한들) 정몽주 등 고려의 충신들을 숙청하고 죽이는데 일조하기도 하였으며, 한국사의 드문 대규모 학살자이기도 하다. 새 왕조가 건국되고 그 전 시대의 기득권 세력인 왕족이나 귀족세력이 숙청당하는 것은 드문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사에서 이렇게 전대 왕족들을 몰살한 사람은 이성계가 유일하다.

그래서 전국의 왕씨를 조직적으로 학살하는 등으로 인해 개성 왕씨 문중에서는 가문의 철천지 원수나 다름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왕씨가 아니라도 왕씨와 연을 맺고 있던 개성 사람들은 일가붙이를 학살한 이성계를 굉장히 증오했다. 조선이 망할 때까지 조선과 한양 자체를 싫어했을 정도이다.[51]

8.2. 북한의 평가

북한의 역사 교과서 조선력사에선, 이성계를 고려를 배반한 역적이라고 규정하고 리조 봉건 시대의 괴수라면서 엄청나게 폄하하기도 했다. 김일성 생전엔 그가 금야군으로 지나가고 있을때는 아예 열차 커튼을 닫아서 보지 않을만큼 엄청나게 싫어했다고. 이는 군사 정권 시절 한국 사회에서도 조선 시대를 무조건 당쟁이나 벌이던 뒤떨어진 시대로 매도하던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역사 해석은 이전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매도하여 당시의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뤄졌다고 보기도 한다. 세월이 흐르면 재평가될지도.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성계가 정도전, 조준등의 신진사대부들과 함께 당시로선 혁신적인 정치방식을 시도한 혁명가적 면모도 보였고, 민본주의에 기반한 정책도 펼쳤지만, 동시에 한국사에선 드문 대규모 학살자이기도 했다. 물론 새 왕조가 건국되고 그 전 시대의 기득권 세력인 왕족이나 귀족 세력이 숙청당하는 것이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사에서 이렇게 자세하게 전대 왕족과 기득권 귀족들을 몰살했다고 기록된 사람은 이성계가 유일할 것이다.[52] 다만 현대까지 오면 학살로는 이 인간들이 제일 많이 자행하긴 했다.[53] 현대사임에도 이들의 학살에 대해서는 기록이 의외로 많지 않아서 그렇지, 최악의 학살을 그것도 부패 기득권층도 아닌 민간인들을 상대로 자행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인간 백정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근세사 파트가 아예 붕 떠버린 북한 입장에서는 마냥 백안시만 할 수는 없어서 좀 애매한 상황에 놓여있다.[54] 사실 역적 프레임 씌우자면 자기들이 그렇게 띄워주는 고려 역시 왕건궁예 통수친거라. 어쨌든간에 북쪽 출신으로 나라를 세웠고, 특히나 고려 이전 유적은 죄다 작살났고 조선시대 유적은 별 볼 일 없고 아예 궁궐 유산이 전무하다시피 한 북한 입장에서는 이성계 덕에 남겨진 함흥본궁만 해도 엄청난 문화유산이기 때문에 나름대로는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다. 지금 함흥본궁만 해도 한국전쟁 때 파손된 것을 없는 돈 들여 거의 완전히 복구해놓고 함흥력사박물관으로 쓰고 있으니 그 츤데레적인 관심을 짐작할 수 있다.

9. 사용한 무구

태조는 대초명적(大哨鳴鏑)[55]을 쏘기를 좋아하였다. 싸리나무로써 살대를 만들고, 의 깃으로써 깃을 달아서, 폭이 넓고 길이가 길었으며, 순록(馴鹿)의 뿔로써 소리통(哨)을 만드니, 크기가 만 하였다. 살촉은 무겁고 살대는 길어서, 보통의 화살과 같지 않았으며, 활의 힘도 또한 보통 것보다 배나 세었다. 젊었을 때 환조를 따라 사냥을 하는데, 환조가 화살을 뽑아서 보고 말하기를, "이는 (범상한) 사람이 쓸 수있는 물건이 아니다."고 하였다.
태조실록 태조 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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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사용했던 어궁구(御弓具)는 일제강점기까지 보존되었던 흔치 않은 활유물이었으며 사실상 조선 최고의 명궁으로 알려져 있다. 어궁구는 함흥의 조선 왕실 사당인 함흥본궁(咸興本宮)에 소장되어 있었지만, 불행히도 한국전쟁 중 함흥본궁이 불타버린 이후 행방이 묘연한 상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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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칼로 알려진 전어도(傳御刀)가 지금도 남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자루 부분의 길이가 길어서 사진으로 보면 어째 단검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사실 길이가 150cm에 육박하는 대검이다. 길이 중 1/3가량, 약 50cm가 자루부분이라 이라기 보다도 폴암 같은 느낌. 더불어 일부에 알려진 바와 다르게 역날검은 아닌데, 칼날은 일반적인 환도처럼 휘어진 바깥에 있고 칼끝만 반대 방향으로 생긴 것. 칼끝 부분에는 양쪽에 날이 있는지라 일종의 의사도라 볼 수 있다. 지금 전해지는 유물은 실제 이성계가 쓰던 칼은 아니고 아들인 이방원이 이성계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만든 모방품이라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이 검은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나옹대사와 무학대사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어 알게 된 명당 자리에서 얻게 된 것을 아들에게 준 것이라고 하며, 이 칼로 명당 자리를 지키던 괴물을 죽이고 묘를 이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성계 일파가 우왕을 죽일 때 의 후손이라 그 어떤 무기도 통하지 않자, 이성계가 이 검으로 손수 베어 죽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 뒤 우왕이 가지고 있던 사진참사검이 저주를 내려 이성계의 수하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가자 무학의 조언에 따라 사진참사검 옆에 이 검을 꽂아 저주를 막았고, 두 칼은 3일 밤낮으로 싸우며 울다가 전어도는 박살나고 사진참사검은 금이 갔다고 한다.

사진참사검은 비록 망가졌지만, 이성계의 혈통에 내린 저주가 남아 있어서 그것을 막기 위해 조선 왕실에서는 용의 기운을 가진 사진참사검과는 정반대로 호랑이의 기운이 담긴 사인참사검을 신하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정기적으로 제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전어도와 사진참사검은 무학대사가 거두었고 현재는 행방이 묘연하다고 하는데, 어디까지나 야사인만큼 믿거나 말거나…

여튼 개성있고 뽀대 나는 외형에 여러가지 전설까지 양념처럼 버무려져 있고 특히 한국 대중문화에서 꽤 자주 등장하는 사진참사검과의 연관성까지 있는데다, 전설적인 무용을 자랑하던 창업군주의 칼이라는 점에서 안유명한게 이상할 정도이지만 안타깝게도 사용자가 보우마스터라… 안습.

또한 정사가 아닌 야사에만 나오는 내용이지만 이성계의 화살보다 빠른 말도 있다. 내용은 이성계가 젊은 시절 무예를 갈고 닦을때 어느 연못에서 튀어나온 한마리 용마가 있었는데, 이 용마는 몹시 사나워 아무도 길들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이성계가 이 소문을 듣고 찾아가 아무도 길들이지 못한 말을 길들이기에 성공해 자신의 말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후로 무예 연습을 계속하다가 자신의 말이 얼마나 빠른지, 그리고 자신의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알기위해 과녁에 화살을 쏘고 말을 달려 화살을 따라잡기로 했다. 그러나 말을 타고 전력질주로 과녁에 도착하자 화살이 이미 박혀있는걸 보고 말이 화살보다 느린것에 빡친 이성계는 말을 곧바로 죽여버린다. 하지만 과녁에 박혀있는 화살은 예전에 쏜 화살이었고, 말을 죽이자 자신이 쏜 화살이 날아와 과녁에 꽂히게 된다. 이걸 본 이성계는 자신의 급한 성격을 고쳤다는 훈훈한 이야기. 사실 이 이야기는 견훤의 설화로 상주시에서, 김덕령의 설화로 광주광역시에서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용비어천가에서는 8마리의 애마들도 확인된다. 이름은 각각 유린청, 횡운골, 추풍오, 현표, 발전자, 용등자, 응상백, 사자황이다. 이를 조선 왕실에서는 '태조의 팔준(八駿)'이라고 불렀는데, 동각잡기에 이 말들에 대한 간단한 내력도 기록되어 있다.
  • 유린청(遊麟靑=기린과 노니는 청마): 함흥에서 난 말로 제1차 요동정벌황산 대첩 때 이 말을 탔고, 전장에서 화살 세 대를 맞았으며 31살 때 죽었는데 장사지낼 때 석조(石槽)에 넣어 묻었다. 실제로 이성계는 황산 대첩 때 혼전 중에 말 두 필을 잃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어쩌면 이 때 죽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말만 유독 수명과 어떻게 장사지내줬는지까지 기록된 걸 보면 이 말이 이성계가 가장 아꼈던 말로 추정된다.
  • 횡운골(橫雲鶻=구름을 가로지르는 송골매): 여진산 말로 나하추와 싸울 때나 홍건적을 토벌할 때 탔다고 한다. 기록대로면 이성계가 가장 젊은 시절부터 활용했던 말이다.
  • 추풍오(追風烏=바람을 쫓는 까마귀): 여진산 말로 화살 한 대를 맞았다.
  • 발전자(發電赭=번개를 발하는 적색 말): 안변에서 난 말.
  • 용등자(龍騰紫=용처럼 오르는 밤색 말): 단천에서 난 말로 해주에서 왜구를 토벌할 때 탄 말이며 화살 한 대를 맞았다.
  • 응상백(凝霜白=서리가 내린 백마): 제주산 말로 위화도 회군 때 탔던 말이다.
  • 사자황(獅子黃=사자 같은 누런 말): 강화 매도에서 난 말로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할 때 탔다.
  • 현표(玄豹=검은 표범): 함흥산 말로 토아동(兔兒洞)에서 왜구를 토벌할 때 탔다.

10. 이야깃거리

  •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은 이성계와 무학대사에 얽힌 야사에서 유래한 듯 하다.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보고 장난 삼아 "내 눈에는 대사가 돼지처럼 보이는구려."라고 놀리자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소승은 전하가 부처님처럼 보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성계가 야자타임 진짜 못하네 "허허, 나는 대사를 돼지라고 했는데 대사는 왜 나를 부처님처럼 보인다고 하는 것이오?"라고 묻자 무학대사는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는 법이지요"(猪眼觀之卽猪 佛眼觀之卽佛)라고 받아쳐 이성계가 크게 웃었다고 한다.
  • 이외에도 앞에서 설명했던 그 유명한 '집 무너지는 꿈'의 해몽 이야기 등으로 무학대사와 평생 동안의 우정과 관련한 일화가 많이 남아있다. 역사상으로도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좋은 상담자이자 벗이었고 이성계에 의해 유교 국가 조선에서 고려의 불교 제도인 '왕사'로 무학대사를 임명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수도 한양의 위치를 정할 때 둘이서 같이 골몰하기도 했다. 봉우리가 딱 1백개였는데 하루 아침에 하나가 그냥 언덕으로 닳아버려서 명당에서 탈락했다는 원통이 고개 이야기도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주인공이다.
  • 돼지 띠로 민간 설화 등을 보면 묘하게 돼지와 연관되곤 한다. 꿈에서 자를 문 돼지가 이성계의 꿈에 나타났다는 설화가 있고, 개성에서는 돼지 고기를 성계육이라 부르며 이성계를 두고두고 깠다는 민담도 있다. 그리고 그 돼지 고기로 끓인 탕을 성계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조선 시대 미륵 신앙 / 반정부 승려 조직인 당취(땡추)들은 아예 주기적으로 돼지를 죽인 뒤 그 생고기를 씹으며 이성계를 저주하는 의식을 치루었다고 한다. 또한 조랭이 떡은 이성계의 개성에 있는 고려 왕씨 일족을 몰살하는 행각에 분노하여 이성계의 주리를 튼다는 의미를 담아 만들어진 떡이다.
  • 무학대사가 종묘를 28간만 짓게 해서 조선이 28대까지 갈 것을 예언했다는 얘기가 있으나, 뻥이다.[56] 종묘는 처음 지을 때 제후의 예법에 따라서 7간으로 지었고, 이후 정전을 확장하고 별전인 영녕전까지 지어서 지금은 추존 군주까지 포함하여 38군주 1황태자를 모시고 있다. 1980년대에 국내에 단전 호흡 붐을 일으켰던 소설 <단>에서도 이와 거의 같은 이야기가 나오니 최소 30년은 된 도시 전설이다.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 조선 왕조의 멸망은 필연이었다는 일제의 선전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조선 왕조 관련한 어떤 모 역사책에선 무학대사가 수도를 한양[57]에 자리잡으려 할 때 그 일대를 가리키며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 약 5백년 정도는 갈 것입니다"라고 이성계에게 말했고 태조는 이에 흡족해 하였다 이런 내용도 있다고.
  • 아들인 태종과의 사이는 매우 안 좋은 편이었지만 실록을 보면 같이 연회를 가지거나 같이 식사를 하는 등 나름대로 화해를 하고 부자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이 보인다. 실록을 보면 태종이 임금 자리에 오르고 조사의의 난이 끝나고 돌아온 이후 죽을 때까지의 기록을 살펴 보면 수라를 헌수하거나, 연회를 베풀어 드리거나, 놀러 나갔다가 궁으로 돌아오는 태조를 마중나가거나 하는 일들이 여럿 기록되어 있다. 태조 이성계도 자신의 고려 변방시절 이방원이 자신의 가문의 빛이 됐던 아끼는 아들이었으니[58] 그 마음은 어디 가지 않았을 것이다.
  • 조사의의 난이 진압된 후 끌려오다시피 한양으로 귀환한 후에는 태종의 감시를 받고 유폐되다시피 했다는 말이 있지만 조사의의 난 이후에도 온천에 요양을 가거나 왕실의 원찰(대표적으로 양주시회암사) 등 사찰로 행차하는 등 야외 활동을 한 여러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다.
  • 함흥차사 야사와 이어지는 이야기로 함흥에서 돌아올 때 마중나온 아들 태종을 죽이려 했던 이야기도 유명하다. 태종이 이성계를 마중나가기 전 아버지를 맞고 나서 열 연회의 가건물을 설치할 때 태종의 참모인 하륜이 태종에게 건물의 기둥을 굵게 할 것을 주문했고 태종은 그 말을 따랐다. 이윽고 이성계가 도착하고 태종은 절을 올리려 했는데 이성계는 갑자기 활을 들어 아들을 향해 쏘려고 했다. 놀란 태종은 재빨리 기둥 뒤로 피했고 화살은 굵은 기둥에 박혀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 그리고 연회를 여는데 하륜이 또 귓속말로 태종에게 "전하께서 태상왕께 직접 술을 올리지 마시고 아랫사람을 통해 올리십시오"라고 진언했다. 태종은 그 말을 따라 아랫사람을 시켜 이성계에게 술을 올렸는데 이를 본 이성계는 "이 모두가 천운이구나"라며 허탈하게 웃더니 철퇴를 품 속에서 꺼내 상에 올려놨다고 한다.[59] 야사의 기록이고 실은 조사의의 난 이후 얌전히 돌아와서 편히 살았지만 이 이야기는 실은 아들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할 수 있다.
  • 조사의의 난 전의 이야기지만 실록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연회 중에 태종과 신하들이 "불교를 좋아하시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불공을 꼭 밖에서 드리셔야 합니까?"라고 묻자 이성계는 다음과 같이 쏘아붙여 태종을 무안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태조의 한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대들의 뜻은 내 이미 알고 있다.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두 아들과 한 사람의 사위를 위함이다."(태종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 때 죽은 방번과 방석, 사위인 흥안군 이제) 하고 공중에다 큰 소리로 말하기를, "우리는 이미 서방 정토로 가고 있다!" -《태종실록》태종 2년(1402년) 1월 28일

    어쩌면 이성계가 불교에 매달린 것은 모든 게 허상에 불과하다는 불교의 교리에 감복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변방의 장수로 시작해서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한 나라를 세우는 임금이 되었는데, 말년엔 다른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된 아들과 싸우다가 감시받는 신세가 되었으니… 게다가 이안사가 함흥으로 이주할 때부터 고려인이던 이씨 일가의 종교는 불교였다. 이는 고대 샤머니즘을 신봉하는 주위 여진족과는 대별되는 점이다. 비록 조선이 숭유억불을 기치로 삼았지만 이는 전조 고려에 대항하기 위한 구실이었고 실제로는 이 당시 원 황실로부터 들어온 티베트 불교의 잔재가 일소되고 고려 본래의 선종 중심의 불교로 일신되었다. 승려로서 조선 왕실의 국사가 된 무학이 바로 이런 저류를 반영한 것이며 이후 이성계는 조선 왕실의 원찰이면서 행궁 역할도 가능한 회암사를 창건하여 이런 친 불교적 성격을 분명히 했다. 즉, 그 당시 사대부들처럼 외적으로는 왕도 정치ㅡ도학 정치를 부르짖으면서도 집에서는 시침떼고 불교를 숭상했던 것이다.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그 업보를 받았느니, 그래서 불교를 믿으며 참회했느니 하는 다양한 해석도 있다.
    그래도 말년에는 왕실에서 더 이상 유혈사태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확실했던 것 같다. 태종이 왕실의 사돈이었던 이거이 부자를 숙청할 무렵, 이를 태상왕 태조에게 고하자, 태조는 하늘을 한참 쳐다보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 뜻대로[60] 결정했겠지만, 회안이 이미 쫓겨나고, 익안군이 이미 죽고, 상왕이 출입하지 않으니, 친척 가운데 살아 있는 자가 몇 사람이냐? 일이 이루어질 때에는 돕는 자가 많지만, 일이 낭패할 때에는 돕는 자가 적다. 사생지간에 돕는 자는 친척 같은 것이 없다. 네가 그들을 보전하면, 국가의 재앙이나 천변(天變)·지괴(地怪)가 적어질 것이다. 이 일은 큰 것인데, 나는 장차 큰 근심이 있을까 두려워한다." - <태종실록> 태종 4년(1404년) 10월 20일

    저 말은 '방간이는 폐인 됐고, 방의는 죽고, 방과는 찌그러져 있는데, 우리 친척 중 살아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냐? 그래도 어려울 때 의지할 사람은 친척뿐이야. 사돈네는 살려줘야지 나라에 나쁜 일이 안 생길 거야.'라는 요지의 훈계. 3남 이방의는 이 해 9월에 이미 병사한 뒤였다.

    이성계의 아들 8명 중 5명이 이성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장남 이방우는 술병으로 죽었고 6남 이방연은 조선 건국 전에 요절했으며 7남 이방번과 8남 이방석은 왕자의 난 때 살해되었다. 이래저래 자식복은 없었다. 태조의 이 말을 들은 태종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실록의 이 날 기록은 전한다. 결국 이거이 집안은 폐서인이 되고 고향으로 낙향하는 데 그치는데, 이렇게 관대한 처분을 받은 것은 태조의 절절한 이야기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61]

    사실, 자식들이 서로를 죽이는 참극에서 이성계가 보여준 비통한 절규나 그래도 어려울 때 믿을 사람은 친족뿐인데 친족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훈계(또는 호소)는 자신의 육친들이 서로를 죽이는 참극을 벌이는 데 대한 분노와 고통으로부터 나온 것이기도 하겠지만, 이성계의 성장 기반을 볼 때 아주 실용적인 처세 원칙이기도 하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일단 이성계는 변방 국경의 반독립적 호족 출신이고, 게다가 국경 밖에 살던 이들은 주로 유목민(반유목민)이었으며, 이성계의 일족 자신도 그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는 점, 그리고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했기 때문에 주변의 여진족과 갈등 관계에 있었다.

    일단 유목민의 경우 떠돌아 다니며 방목하는 특성상 지연이나 학연 등의 의미가 없고,[62] 따라서 사회적으로 혈연의 의미가 그만큼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한번 갈라주면 끝인 토지와는 달리 유목민의 재산인 가축은 형제가 많으면 각자의 몫이 좀 줄어들더라도 잘 키우면 쑥쑥 새끼를 낳아서 불어나기 때문에[63] 형제간의 유산 갈등이 농경민보다는 덜한 편이다.

    이 때문에 거친 유목민 사회에서는 유사시에 의지가 될 수 있는 친족[64]과의 관계를 그만큼 중시하게 되는 것. 더구나, 주변의 여진족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빠지기 쉬운 변경의 호족 입장에서는 그만큼 친족들의 강한 유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성계가 젊었을 적 함부로 다른 장수들을 무시하는 실책을 범하다 위기에 빠졌을 때 그를 도와준 것도 종중의 다른 어른들이 보내준 병력이었고, 그의 아들들 역시 군사 활동이나 개국 과정 전반에서 아버지의 심복 부하로서 큰 활약을 했다.

    결국, 이성계의 세력 기반은 일족 공동체였고, 이 '이성계 일족'은 전주 이씨 친족 집단을 중심으로 고려계 유이민들이 뭉쳐 있는[65] 형태였다는 것. 이런 집단의 경우, 친족간의 유대가 극히 중요할 뿐 아니라, 친족의 수[66]가 그 일족의 세력을 나타내는 척도이기도 한 것.(이자춘이 유목민의 풍습을 받아들여 여러 부인을 맞아 많은 자식을 둔 것 역시 이런 상황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보면, 왕권을 탐내 서로[67] 죽여대는 아들들의 행태는 이성계가 성장하고, 활약한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완전히 미친 짓이고, 당장 배고프다고 제 살 깎아먹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태인 셈. 물론 육친이 육친을 죽이는 것 자체가 이미 끔찍한 짓이지만 그의 입장에선 아예 일족의 자멸을 위해 몸부림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일족 공동체에서는 다른 형제에게 가장 자리가 넘어가더라도 그냥 덮어놓고 협력하는 쪽이 현명하다. 내분을 벌이면 일족의 힘이 약해지고, 그만큼 외부의 위협에도 취약해지겠지만 계속 힘을 합치고 있으면 형제계승이나 숙질계승도 충분히 기대할 수 있으니까. 물론 조선 왕조는 그 후 500년 이상 유지되었고, 그 기간 동안 조선 왕실의 정치적, 사회적 논리는 이성계에게 익숙했던 일족 논리와는 많이 달랐지만, 조선 말 나라가 멸망해가는 와중에도 일족들끼리 싸움 때문에 집안이 힘을 합치기는커녕 알아서 소모해가며 몰락을 가속화시킨 것을 생각할 때 이성계의 우려는 결코 틀리지 않았다.
  • 주원장키배를 뜬 적이 있다. 항목 참조. 본격 세기말 패왕 키보드 배틀. 또 주원장과 이성계 사이에는 희한한 전설이 하나있다. 주원장 집안이 원래는 한반도쪽 가문인데 어릴 때 이성계 아버지와 명당을 다투다 주원장이 차지한 명당으로 주원장은 명 태조가 되고, 옆에 명당을 차지한 이성계는 조선 태조가 되었다는 전설. 명당 이야기를 떠나서 사실 명 왕조가 조선과 관련이 있다는 객관적인 근거들은 꽤 있다(?)는 주장도 있다. 명나라가 국가사업으로 편찬한 지리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명 태조 주원장이 이르기를 "짐의 조상은 조선인이다. 짐의 조상의 묘소가 조선에 있다"라는 구절이 있다는 주장.[68] 또한 주원장의 아들 명 성조 영락제의 생모가 고려사람이라는 기록도 있다. 즉 영락제의 생모가 효자고황후 마씨가 아닌 고려에서 원나라로 온 공비(貢妃)라는 기록. 명나라 황실 종묘의 제사를 주관하는 곳의 기록인 '남경태상시지(南京太常寺志)'에는 영락제의 생모는 공비(碽妃)라고 하였다. '경례남도봉선전기사(敬禮南都奉先殿紀事)'에는 "여러 비빈들이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한 비(妃)만이 서쪽에 있다. 성조(영락제)를 낳았기 때문에, 다른 비빈들이 감히 나란히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조선에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권근도 이를 언급한 걸 보면 조선에서도 이를 인식하고 있었으니, 조선과 명나라가 유독 가까웠던 데는 기저에 이러한 이유들도 있었을 것이다.
  • 이와 별개로 주원장과 사돈을 맺을뻔한 적도 있었는데 잘 안 알려져있지만 실제로 있었던 혼담으로 1396년 6월-1397년 4월까지 진지하게 조선과 명나라 양측에서 논의되었던 사안이라고 한다. 만약 성사되었다면 이방석의 세자빈이 명나라 황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주원장이 먼저 사돈관계를 맺자고 주장했던것으로 보이는데 태조실록 9권, 태조 5년 6월 13일 기해 1번째기사 황제가 혼사 맺자고 했다는 것을 종묘에 고유하였다. 그 이후 진지하게 조선과 명나라 양측에서 혼담이 오가면서 서로 잘 풀리는 듯 싶더니 1397년 4월에 주원장이 갑자기 이성계에게 "내가 이렇게 진지하게 사돈 맺으려고 했는데 니가 좆같이 굴어서 파토났다 씨발아!"라고 공문을 보내면서 결국 파토가 났다고 한다. # 아마도 정황상 주원장은 결혼까지 하면 이성계가 지랄하지 않겠지라고 생각했고 이성계는 결혼까지 할 정도면 요동정도는 지참금으로 챙겨먹을 수 있겠지하고 서로 정반대로 오해하는 바람에 파토가 난 것으로 추정된다. #
  • 이성계의 젊은 시절, 그는 명마를 얻어서 열심히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활터에서 자신이 활을 쏘고 달려서 만약에 화살보다 늦게 오면 목을 벨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화살을 쏜 다음 말을 몰고 달렸는데, 화살이 표적에 꽂혀 있었다. 자신이 화살보다 늦게 온 줄 알고 그가 약속대로 명마의 목을 베는 순간 다른 화살이 과녁에 꽂혔는데, 알고 보니 그게 이성계가 쏜 것이었고 이성계가 본 건 이미 박혀있던 화살이었다는 것. 그는 자신의 성급함을 후회하며 명마를 고이 묻어주었고, 그 뒤 조선의 왕이 되었을 때도 이 일을 잊지 않고 말 묘비를 세워준 곳이 오늘날의 파주의 치마대가 되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맹꽁이 서당에서도 소개가 됐다.
  • 단순히 무용만 믿고 싸우는 인물이 아닌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고려말 1377년 서해도(지금의 황해도) 지역에서 날뛰던 왜구를 토벌하러 갔을 때 한 차례 격퇴한 왜구가 험한 지형에서 섶으로 방벽을 만들고 버티기에 들어가자 느닷없이 풍악을 연주시키고 술을 마시고 있다가 기습적으로 병사들에게 왜구의 진 주변에 불을 질렀다. 왜구들은 그냥 당할 수 없어서 진에서 뛰쳐나와 고려군에게 달려들었지만 이를 예측하여 사방에서 왜구를 공격했다. 그럼에도 왜구들의 저항도 격렬해 왜구가 쏜 화살이 이성계의 술병까지 깼지만 의연함을 잃지 않고 부하들에게 소탕을 명령해 이성계는 술을 마시고 고기 구워먹으며 왜구들이 타죽거나 무기에 맞아 죽는 모습을 구경했다.
  • 태조의 가문은 서진의 시초이자, 삼국지로 유명한 사마의 가문과 상당히 흡사하다. 명문가 출신의 전 왕조(위나라, 고려)의 우수한 전략 사령관이자, 중앙 정부의 권신 출신의 사마의와 이성계, 그리고 휘하에 아버지를 따라 무예와 군재에 재능을 가진 아들이 있고(사마사이방과)[69] 문재와 정치에 뛰어난 작은 아들이 형에게 모든 정권을 물려받았다. (사마소, 이방원)[70]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했으며(고평릉 사변, 위화도 회군), 대낮에 황제 내지는 충신을 때려죽인 전과가 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은 권력을 잡자마자 무자비한 숙청을 일으키고, 아버지를 도와 반정(고평릉 사변, 위화도 회군)에도 활약을 했다. 또한 기가 세고 유력자 가문의 아내를 두었으며(장춘화, 신덕왕후), 망나니와 같은 큰 손자(사마염, 양녕대군)와 그 밑에 공부를 좋아하는 총명한 작은 손자(사마유, 충녕대군)까지... 거의 복사 + 붙여넣기 수준의 집안이다.
  • 가문에 관련해 상당히 골때리는 우여곡절이 있었으니 바로 '종계변무 사건' 되시겠다. 고려 말기 이성계의 준동을 우려한 반이성계파가 명나라 조정에 '윤이(尹彛)', '이초(李初)'를 첩자로 파견해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다' 라는 헛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한다. 일단 얼핏 명나라 내에서도 크게 믿지 않는 분위기였긴 했는데, 불씨는 태조 즉위 후에 터졌다. 조선이 계속 명나라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일 낌새가 보이자 명나라에서 항의하기 위해 찾아온 사신이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라는 발언을 한 것이다. 명나라에서 거짓말로 알 거라고 생각했던 태조는 당연히 오밤중에 벼락맞은 꼴이 되었고, 그 사신에게 '나는 이인임이 아니라 이자춘의 아들이다'라고 일러 보낸다. 이후의 전개는 종계변무 문서 참조.

11. 대중 문화에서

활솜씨와 기가 막힌 용병술로 멸망을 향해 달려가던 고려의 운명을 수없이 돌려세운 무적의 장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불세출의 명장 이미지'보다는 '조선을 세운 임금' 이미지가 강해서 그런지 서브컬처쪽에선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이는 이성계가 세운 조선이 온갖 편견(+덤으로 근현대사의 군사정권에 대한 반동까지) 때문에 현대인에게 이미지가 안 좋게 박힌 것도 한 몫한 듯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성계과 조선에 대한 평가가 비교적 객관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했고, 이후부턴 대중 매체에서도 제법 다뤄지는 편. 사실 조선만 놓고 보면 사극 단골 시대다 무인 시절 그의 화려한 전적과 무력이 알려진 덕에 소드마스터 척준경과 함께 한국사 ''사상 최강의 무력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다만 아직은 무인으로서의 전적보단 임금이 되는 과정이 아무래도 더 부각되는 편이다.

11.1. 사극

워낙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겪었고 한국사의 왕조 창업 군주들 중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사람이라서 이성계와 그의 시기는 사극에서도 자주 다뤄졌다. 고구려고주몽, 백제온조, 신라박혁거세, 발해대조영, 고려왕건 등도 있지만 조선을 세운 이성계에 비하면 이들 한국사 창업 군주들은 단 한 번 밖에 사극화되지 않았거나 사극화되지 않고 있는 등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다.(그도 그럴 것이 조선 이전 시대는 정확한 사료가 거의 없으니..) 다만 분명히 모든 중요한 결정을 본인이 주도해서 했고 정도전은 이성계의 지지가 없으면 시체나 다름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용의 눈물 이후의 사극들은 하나같이 정도전에게 모든걸 맡기고 뒤에 앉아있는 허수아비 군주로 묘사되기 일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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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눈물에서의 태조 이성계(김무생).
  • 개국에서는 임동진이, 용의 눈물에서는 김무생이 열연했다. 특히 김무생은 용의 눈물은 물론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도 태조를 연기할 만큼 이성계 전문배우였다.[71] 김무생 의 태조는 실록을 바탕으로 하여 아들인 이방원을 향한 무한한 혐오감이나 정도전과의 우정 등 인간적인 태조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다. 김무생 씨의 카리스마는 유동근의 태종 이방원과 더불어 용의 눈물을 압도하여 지금도 이성계하면 김무생이라고 할 정도이다. 태조 어진과의 외모상 싱크로율이 굉장히 높기도 했고. 가히 레퍼런스급의 명연기를 보여주었기에 지금도 김무생을 뛰어넘는 이성계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자세한 것은 이성계(용의 눈물) 참고. 허나 드라마 정도전이 방영된 이후로는 유동근이 그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김무생이 열연한 이성계는 수많은 명장면이 있다. 그 중에서는 조사의의 난에서 진 태조가 돌아와 태종의 문안을 받으며 춤추는 장면이 있다. 태종은 "아바마마! 소자의 춤을 보시옵소서" 하면서 통곡하고 태조도 이내 슬퍼하며 태종을 끌어안는 장면은 최고의 장면 중 하나로 기억되기도 한다. 드라마 속에서는 야사의 이야기들도 거의 재현하고 있다.

    무학대사와의 '뭐 눈엔 뭐만 보인다.'는 일화도 나오며 태종을 죽이려고 천막에 대고 화살을 쐈지만, 미리 하륜의 충고에 따라 기둥을 준비한 태종이 기둥 뒤로 숨고, 태조가 쏜 화살이 기둥에 박혀 태종이 살아남자, 나중에는 술자리에서 소매에 숨긴 작은 철퇴를 휘두르지만 태종이 피해내는 모습을 보고 "천운이로고. 과인이 이리하여도 막지 못하는 것을 어느 누가 막으랴"라며 체념하는 장면은 조선 개국왕조의 비애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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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에서의 태조 이성계(유동근).
2014년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유동근이 이성계 역을 맡았다. 유동근이 용의 눈물에서 이성계의 애증의 대상이었던 아들 태종(이방원)을 맡았던 것을 생각하면 가히 최강의 배우개그. 헌데 포스가 김무생이 연기했던 이성계와 필적하는 수준이다. 실제로 유동근은 이성계 역을 맡으면서 김무생 선배 생각이 난다며 감회가 새롭다고 밝히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이성계(정도전) 항목 참고.

조부까지는 몽골의 천호로서, 아버지 대부터는 고려의 장수로서, 확실한 고려인도 몽고인도 아닌 자신의 정체성에 고민한다는 설정이다. 이 설정의 반영으로 작중 북방 사투리를 사용하는데, 일단 4회 예고편에서는 실제 출신 지역인 동북이 아니라 서북 방언을 쓰고 있다. 제작진이 그것을 모를리는 없겠으나 그렇다고 동북 방언을 쓰는 것도 시대상 맞지 않는다. 그래도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동북 방언서북 방언이 섞인 괴악한 북부 방언을 사용한다.[72] 사실 애당초 북방 사투리 쓰는 설정은 제작진이 큰 고민을 하고 시작한게 아니라 피디가 북쪽 사투리 한 번 써보는게 어떨까 해서 하게 되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는 서북 방언의 어휘를 사용하나 ~했지비, ~했음매라는 어미도 사용한다. 동북 방언 항목에도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했지비, ~했슴매는 동북 방언에서 주로 쓰이는 어미이다. 다만 이 어미는 만주어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여진족과 가까운 동북면의 특성상 꽤 오래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대 동북방언을 복원할 수 없는 여건상 어휘는 같은 북부계통인 서북방언에서, 어미는 여진어의 영향을 받은 현 동북방언에서 취하는 것이 그나마 택할 수 있는 길일지도 모른다.

현재의 동북 방언은 놀랄만큼 동남 방언과 비슷하다. 그 이유는 드라마 시점에서 후대인 세종대왕 시절 4군 6진이 개척되며 시행된 사민정책으로 경상도 지역 사람들이 함경도 지방으로 넘어와 개척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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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에서의 태조 이성계(이진우).
  • MBC 드라마 신돈에선 이진우가 역할을 맡았다. 극중 시기가 시기인만큼 여타 다른 사극과는 달리 장수로써 한참 활약하던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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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풍수에서의 태조 이성계(지진희).
  • SBS 드라마 대풍수에서는 지진희가 연기했다. 청장년 시절부터 등장해 기존 사극에 비해 비교적 젊은 모습인데다, 사실상 여진족 족장에 가까운 파격적인 묘사로 주목받았으나 결과는...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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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룡이 나르샤에서의 태조 이성계(천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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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세종에서의 태조 이성계(정두홍).
  • KBS 대왕 세종에서는 종묘에서 근신 중이던 양녕대군의 회상씬으로 잠시 등장한다. 여기에선 말을 타고 왜구와 싸우는 무장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무술 감독 겸 배우인 정두홍 씨가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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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에서의 태조 이성계(김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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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나라에서의 태조 이성계(김영철).
  • 나의 나라 역시 배우개그적인 요소가 정도전 못지 않은데, 태종 역을 2번이나 맡았던 배우가 태조로 나오며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의 태종은 장혁이 맡았는데 장혁 또한 순수의 시대에 이어 같은 역을 두 번째로 다시 연기한다. 또 이 두 사람은 아이리스 2에 이어 두 번째로 부자 지간을 연기한다. 게다가 이성계 역을 맡은 김영철은 태조 왕건에서 궁예 역을 맡은 바 있어서 궁예가 이성계로 환생하여 왕건의 후손들에게 복수했다는 배우개그도 가능하다. 이 정도면 제작진이 일부러 캐스팅을 노린 게 맞다.

    보통 이성계는 조선의 개국 시조로서 덕이 있는 사람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지만 나의 나라 속의 이성계는 철저한 야심가이자 냉혹하고, 권력 그 자체가 곧 대의이며, 식견있는 노련함까지 갖춘 권신의 포지션으로 나온다. 예를 들어 공요군이 진격하기 전, 우왕은 선발로 죄수부대 500명을 요동으로 올려 보내는데 요동의 선발대가 생각 외로 잘 버티자, 이성계는 회군의 명분이 없어질 것을 우려해 처음에는 안 그런척하다가 자신의 사병 가별초를 이용해 선발대를 몰래 척살해 버린다. 기존 사극에선 주로 악역들이 담당하던 일을 행한 것이다. 덕분에 나의 나라에서는 이성계가 진짜로 죄 없는 백성을 죽였다는 사실로 이색 등에게 공격받는다.

    자식들에게도 냉혹해서 가족들을 구하고 돌아온 이방원이 개국을 입에 담으며 권력의 정점에 오르려는 남전에게 함부로 앞에 나서지 말라며 협박하자 품계와 직위로 남전을 공격하던 이방원을 똑같은 방법으로 모욕한다. 큰 일을 한 자식에게 애썼다는 말을 하는 대신 이성계는 자기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면 자기 자식이라도 모두를 주인과 밑으로 나누고 아들 이방원과의 갈등요소를 만든다.

    위화도 회군 성공 이후 남전이 역모의 말들을 내뱉었는데 남전에게 '말을 삼가는 법을 배워야겠다' 라고 말한 것도, 정말 입 닥치라는게 아니라 본심을 숨기라는 식이다. 왕위에 대한 욕망은 있으나 덕장의 면모를 잃기 싫어했던 정도전의 이성계, 정도전과 이방원으로부터 아예 왕위에 욕심이 없다는 평을 받은 육룡이 나르샤 속 이성계와는 크게 다르다.

11.2. 영화

해적: 바다로 간 산적에선 이대연이 배역을 맡았다. 영화 초반, 원래 군관이었던 주인공 장사정(김남길)과 위화도 회군문제로 대립하던 과정에서 칼부딤까지 일어나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치닫게 되었는데, 이때 장사정이 모흥갑(김태우)을 제압한 후 던진 검을 허리춤에 차고있던 칼을 뽑아 발도술로 튕겨내는 무시무시한 반사신경을 보여주었다. 결국 장사정은 군을 나가 산적이 되었다.

이후 시간이 흘러 조선이 건국되었을때, 명나라 황제에게서 국새를 받아 공식적으로 왕으로 인정받기 직전, 국새가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이송되는 과정에 사신 한상질(오달수)의 실수로 국새를 고래가 삼켜버려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국새를 잃어버린 장본인인 한상질에게 15일 내로 국새를 되찾아오라는 명을 내린다. 결국 국새는 찾지 못했고, 국새를 다시받는 대신, 댓가로 명나라 황제에게 공녀 500명과 환관 200명을 바치기 위해서 백성들을 징집해야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지만, 어느날 야심한 밤 침소에 찾아와 자신에게 검을 겨눈 장사정과 재회하고, 그와의 짧은 대화 후 느낀게 있었는지 공물을 보내지 않기로 한다.

11.3. 게임

코에이의 원조비사와 징기스칸 4에서도 등장. 원조비사에서는 최영과 더불어 전투치 A를 받고 있고, 특히, 이성계는 다른 능력치도 준수해 고려의 먼치킨 무장으로 포진하고 있다. 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2와 4에서 등장. 시나리오 2에서는 등장 시기도 늦고 능력치가 전부 70대(라고는 해도 이 게임에서 능력치가 70대를 찍으면 준먼치킨이다.)지만, 시나리오 4에서는 전투치가 80대로 올라 있으며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연사 특기에 능력치가 업그레이드되며 화공 특기까지 보유하게 되어 궁병이나 궁기병을 이끌면 사기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한다. 특히 공성전에서 적으로 만날 경우 상대하기 대단히 껄끄럽다. 어쩐 일인지 수군 적성도 A라 해전에서도 엄청난 면모를 발휘한다.

이 게임 전 시나리오 통틀어 고려 무장 중에서는 최고의 먼치킨으로 명의 서달이나 무로마치 막부아시카가 요시미츠 등과도 비등하게 싸울 수 있다. 코에이에서 고려 장수에게 이 정도 능력치를 준 것도 나름의 배려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한족, 몽골족, 여진족, 왜구와 모두 싸워서 이겼던 이성계가 완전 '국내용' 장수였음에도 전투치가 90대 중반을 찍은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와 비교하자니 불만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등용' 특기가 없다. 능력치 총합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동일하다 요리토모가 정 87 전 68 지 76으로 총합 231, 이성계는 정 76 전 83 지 72로 역시 231. 파킷포함 능력치 총합으로는 요리토모와 함께 공동 41위이다.

여하간 시나리오 1 ~ 3의 고려와 달리 시나리오 4의 고려가 안습을 벗어나게 하는데 결정적인 장군이다. 코에이가 한국 인물에 이 정도로 대우를 해준 건 처음이라고 봐도 좋다. 이와 비슷한 대우를 받은 건 삼국지 시리즈에서 역사 무장으로 등장한 이순신 정도지만 삼국지 장수들보다 낮은 능력치를 받는 역사 무장들의 한계상 -물론 이순신 장군은 그중에서도 강한 편이지만- 가장 좋은 대우를 받은건 이성계다. 특히 일러스트가 가상 인물이 아니고 시나리오4 설명에서 중요한 장수라고 설명했다.[75] 아무래도 징기스칸4의 특징인 왕조 창업자 버프가 한몫을 한듯하다.

플스판의 시나리오 2에선 다른 건 다 원판의 능력치인데 전투만 85로 파킷 때보다 더 올라갔다. 수군 적성이 A인지라 일본의 공략 페이지에선 무로마치 막부에서 쳐들어오면 바다에서 다 요격하라고 써져있다. 다만 고려를 무너뜨렸다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건지 초기 충성도가 다소 낮아서 명이나 원, 일본으로 플레이하면 영입 대상 무장이기도 하다. 특히 원나라로 플레이하면 이성계가 게임상 수명도 긴 편인 데다가 연사, 화공을 동시에 가져서 주력군인 궁기병을 이끌기 딱 적합해서 최대한 빨리 영입해 오는 것이 좋다.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도 등장한다. 열풍전 PS판에서 고대 무장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통솔 85 무력 74 지력 70 정치 72에 외교와 배락 특기를 가졌다. 적성은 수군 A, 족경 B, 기마 D, 철포 E. 주로 육전에서 말타고 이민족을 쫓아내던 무장인데 수군이 A고 육군은 바닥을 기고 있다. 징기스칸4에서도 그렇고 코에이가 또 조사를 대충 한듯하다. 왜구를 쫓아낸것을 크게 평가한 모양이지만 이성계군의 주력은 여진 + 고려인으로 이루어진 친위 기병대였고 전투 양상 또한 고려 내륙으로 침투해온 적들을 요격하는 형태였다. 특이하게도 열전을 보면 고려를 멸망시키고 황제가 되었다고 한다. 잘못된 열전과 별개로 역사적으로 일본은 조선에 사신을 보낼때 조선 국왕을 조선 황제 또는 고려 황제라고 표현한 경우가 종종 있다.

크래시 피버의 한국 서버 스토리로 인게임에 등장하였다. 초위저드급 퀘스트 클리어를 통해 획득할 수 있는 유닛으로 나오고, 상당한 업적들 때문인지 때문인지 웬만한 한정 유닛들을 압도하는 성능으로 나왔다. 게임의 스토리에서는 설정상 이방원의 무차별 숙청을 보다못해 근정전 액세스 키를 가지고 잠적하여 이성계를 찾으러 가는 게 퀘스트의 내용이다.

유로파 유니버셜리스 4에서는 'Seonggye (Taejo)'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능력치는 행정, 외교, 군사 순으로 5,4,5 이다. 참고로 이 게임의 능력치 상한은 6이다.

11.4. 소설

고려 말을 무대로 하는 작품에는 무조건 등장한다.
김성한 작가 한국사 역사소설
요하 왕건 이성계 7년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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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 작가의 소설 '조선태조 이성계'에서는 주인공. 작가의 역사소설 중 1960년대 말에 완성된 최초 작품이다. 고려 공민왕 10년 박의의 난을 진압하는 모습부터 등장하며 왕자의 난으로 양위를 하고 물러나는 모습까지 그리고 있다. 이성계뿐 아니라 여말선초의 많은 인물들의 시각에서도 전개된다. 절판 및 재출간을 반복하다가 최근 2014년 재출간되었다.

12. 관련 문서

13. 둘러보기(계보)

고려의 문하시중
최영 이성계 심덕부
고려의 명목상 국왕
,전임,
공양왕
1392년 ~ 1393년 ,후임,
(국호 변경)
조선의 초대 국왕
,전임,
(국호 변경)
1393년 ~ 1398년 ,후임,
정종

[1] 황제 추존과 동시에 폐지[2] 1897년 고종에 의해 황제로 추존되면서 받은 시호. 그러하여 태조 고황제로도 이 항목에 들어올 수 있다.[3] 흔히 함흥으로 착각하는데, 정확하게는 함흥 인근의 화령이다. 그래도 함흥이 이성계의 본거지였던 것은 사실.[4] 현존하고 있는 조선왕의 친필 수결 6종(태조, 태종, 세조, 정조, 순조, 고종) 중 하나. #, ##[5] 피휘 시 불편함을 방지하기 위해 자주 쓰이는 글자로 이루어진 성계 대신 덜 쓰이는 단으로 바꾸었다. 굳이 旦(아침 단)으로 개명한 이유는 조선(朝鮮)의 朝(아침 조)와 통하기 때문. 조선의 건국자이므로 조선과 통하는 글자를 골라 개명한 것이다. 여담으로 조선시대에는(그리고 현대의 유림들도) 피휘 때문에 旦 자를 '단'이라고 읽지 않고 朝의 발음인 '됴'(현대어로는 '조')로 바꿔 읽었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고문헌의 旦은 朝로 바꿔 썼고(대자·代字), 정 旦을 써야 하면 획을 하나 빼서 '므'와 비슷한 형태로 적었다(결획·缺劃).[6] 한반도 세력의 마지막 요동점유는 제1차 요동정벌 당시 이성계의 요동성 함락과 점령이 마지막이었다.[7] 다른 왕들처럼 그냥 '태조'라고만 하면 고려태조 왕건과 혼동이 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가령 네이버에서는 '태조'를 치면 드라마 태조 왕건의 영향도 있어 태조 왕건이 더 상위에 자동 완성된다. 혹은 '태조 이성계'와 같은 식으로 묘호와 이름을 둘 다 쓰는 경우도 많다.[8] 왕의 이름은 피휘를 해야 하기 때문에 자주 쓰지 않는 한 글자 이름으로 바꾼 것. 당예종 이단의 휘와 한자까지 같다.[9] 조선 건국 이전까지 한번도 패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처럼 같은 무패명장인 이순신과 비교하는 평가도 있다. 물론 이순신은 노량에서 전사하면서 성웅으로 추앙받았지만 역성혁명을 일으키지 않았던데 비해 이성계는 살아남고 영웅으로 칭송받으며 마지막에는 결국 역성혁명까지 이룩했다는 점에서 차이점도 크다.[10] 애시당초 이성계는 명나라의 철령 이북에 대한 영유권 요구로 시작된 명나라와 고려의 외교 분쟁에서 요동 정벌을 통한 명나라와의 전쟁에 반대했다. 요동 정벌 직전 4불가론을 내세우며 괜히 고려 조정의 요동 정벌에 반대한게 아니다.[11] 더불어서 유일하게 50대에 즉위한 군주이기도 하다. 그 다음은 차남 정종으로, 정종 또한 유일하게 40대에 즉위하였다. 태조와 대비되게 가장 적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군주는 헌종으로, 즉위 당시 8세였다.[12] 환갑이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환갑에 죽은 게 아니다. 숙종은 만 59세에 사망했다. 환갑은 61세를 뜻하는 것이다. 60세는 '육순'이라고 하나, 이는 그리 많이 쓰이지는 않는 단어이다.[13] 그래서 사극도 많이 만들어졌다.[14] 그래서 원 간섭기의 고려가 독자적 묘호도 시호도 없었다. 묘호는 고려 말까지 회복하지 못했고 시호는 경효대왕 때 회복한다.[15] 그래서 당이 기록한 발해의 연호와 시호는 사개(私改), 사사로이 바꾸다. 사시(私諡), 사사로히 시호를 올리다.로 적었다. 당 입장에선 제후국인 발해가 천자의 연호를 쓰고 시호를 천자에게 안받고 독자적으로 올렸기 때문.[16] 고려의 경우 원 간섭기 이전엔 묘호를 독자적으로 쓰고 시호도 누구한테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쓰고 독자적 시호를 대표시호로 삼았다. 고려국왕 문서의 '某조, 某종 某某대왕'의 모모는 전부 독자적 시호이다.[17] 조선왕조실록도 태조강헌대왕실록으로 되있다. 하지만 청이 들어선 후 대표시호를 아예 없애는 쪽으로 간다.[18] 실제로 이렇게 불린 적은 없다. 조선왕조 당시 이성계의 대표시호는 어디까지나 강헌대왕(康獻大王)이었다.[19] 신의왕후, 신덕왕후.[20] 대한제국이 이 시호 예법을 철저히 따랐다. 고종 '태'황제와 명성'태'황후, 순종 '효'황제와 순명'효'황후가 그 사례다.[21] 고려는 세조 위무왕과 위숙왕후 때부터 시작해 원 간섭기 이전인 원종 순효왕과 순경태후 때까지 이 예법을 지켰다.[22] 효종은 제외이다.[23] 효종만 정덕(正德)인데 이는 이미 묘호에 효 자가 들어가 있어서 겹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24] 군주와 아내의 시호를 맞추는 예법도 다시 부활해 태조 고황제의 시호에 맞춰 왕후들도 신의'고'황후, 신덕'고'황후로 추존됐다.[25] 베트남의 경우 국호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왕조교체가 자주 일어나서 이태조, 여태조, 쩐태조 같이 성과 묘호를 붙어쓰는게 정식이다.[26] 신의왕후 소생들은 당시엔 '대군'이라는 칭호가 없어서 그냥 군(君)으로만 호칭했다. 대군이라는 작위는 태종 시기에 등장한 작위이므로 정종과 태종은 실제 대군이 된 적은 없었다. 나머지는 후세에 추증받은 것이다.[27] 태상왕이 된 이후에 정식 봉작되는 바람에 후궁으로 분류되었다.[28] 김해의 관기 출신으로 이름은 칠점선이다. 외모가 출중해서 태조의 눈에 들었다고 한다[29] 일본 위키에 나오는 것처럼 https://ja.wikipedia.org/wiki/%E6%9D%8E%E6%88%90%E6%A1%82 혐한들이 대놓고 왜곡을 벌이기도 하지만 저런 걸 볼 때는 명확한 근거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편이 좋다. 저런 이상한 학자들이 일본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명확한 근거가 없는 이상 확정적 정설이니 세계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니 이런 것들은 다 뻘소리에 불과하다.[30] 이의방은 직접적으로 의종을 죽인 전과가 있다. 고려사를 통틀어 신하가 왕을 죽인 사례는 강조, 이의방, 홍륜의 3명(이의방의 사주를 받은 이의민까지 넣으면 4명) 뿐인데 홍륜 사건은 이성계가 출사한 이후의 일이고 강조는 적어도 외적과 싸우다가 절개를 지켰다는 실드거리라도 있으니 이의방은 그야말로 당대 고려사회에서 탑클래스의 역신 중 역신이다.[31] 누구의 배신으로 원에게 패배하고 끌려갔는데 당당한 모습을 보여 원에서 감탄하며 벼슬을 어쩌구 하는 식으로 미담 꾸미는 건 일도 아니다. 어차피 원나라도 망하고 없는데 딴지 걸 사람도 없고 총서에서 한 번 언급하고 지나가는거라 승정원일기 같은 데 흔적이 남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그냥 원에서 꼬시니까 넘어갔다고 쿨하게 인정해버리고 들어간다.[32] 교과서에서는 만경강과 동진강이 있어 물이 풍부 운운하지만 전북지역에서는 이 대목에서 실소한다. 지금도 만경강은 금강 상류 용담댐의 물을 도수터널을 통해 공급받아 버티는 중이며 이 때문에 전북과 충남 간의 물 분쟁은 오래된 갈등 이슈이다.물 한줄기 안보이는 안주평야보다얀 낫다[33] 한참 뒤인 일제강점기에도 저수지나 수로 등 관개시설 확충을 위해 지역마다 수리조합을 만든 것을 보면 대체 쌀농사를 위한 노동력과 자본이 얼마나 필요한건지 대충 가늠할 수 있다.[34] 몽골을 비롯한 중세 동북아의 유목부족들은 대개 자식들이 성년이 되면 각자의 상속분을 챙겨 분가한 이후에 막내가 아버지의 남은 재산 모두를 상속받았다.[35] 진왕 보르지긴 카말라가 이런 케이스. 동생인 테무르와 황위 계승 경쟁을 벌였으나 "님은 영지에 칭기즈칸 무덤까지 있는 양반이 황위까지 필요함? 칭기즈칸 무덤이나 잘 관리하셈."라는 여론에 밀렸다.[36] 이성계가 여진족이라고 주장하면 그 연장선상에서 동만주 여진족들을 규합해 요동침공에 투입한다는 식으로 좀 더 그럴싸하게 말을 꾸며낼 수 있다. 그런데 왜 안했겠는가?[37] 심지어 이지란은 건주여진 출신으로 누르하치가 바로 그의 친척 아이신기오로 먼터무의 후손이다. 그렇다면 누르하치나 그 후손들이 자기네 친척어르신의 의형제라는 이성계에 대해서는 안 알아봤을 것이며, 당장 집안에서 이성계에 관한 이야기가 안 전해져왔겠는가?[38] 오히려 무리하게 화북을 쳐묵한 탓에 남송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세폐 없이는 국정 운영이 안 될 지경이었고 초원지역의 통제에도 실패해 대재앙에 직면하게 되었다.[39] 과거에야 만주어 자료를 일반인이 찾기 어려우니 단어 몇 개 가져다가 혹세무민하는 이들이 판을 쳤지만, 이제는 유투브나 구글에서 조금만 검색해보면 만주어 자료가 여럿 나오는 시대다.[40] 심지어 이방원은 우왕 9년 문과 급제자 중 나이가 확인되는 이들 중에서는 최연소 합격자다. 이방원의 과거 급제 동기가 후에 이방석의 장인이 되었다가 무인정사 때 죽는 심효생인데 그는 무려 만34세, 이방원보다 2배 많은 나이로 을과 2위로 급제했다. 명백한 고려인인 심효생이 이 정도인데 그나마 한자문화권인 한족 출신도 아니고 여진족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이 고려 문과에 급제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보는가? 애초에 고려고 조선이고 간에 여진족들에 대한 귀부정책은 제법 시행되었지만 이들 여진족들은 지방 토관직이나 받는 정도로 족했지 중앙에서 과거에 급제한 사례는 전무했다.[41] 당시 성씨는 그 가문의 봉토와 귀족의 증거라 성씨를 가진 고려인이 몽골에 귀화하면 반드시 자신의 성씨는 남겨 놓았다.[42] 도조 이춘의 동복형 이송, 이성계의 이복형 이원계 등. 사촌형 이천계 역시 이자춘 부자보다도 먼저 고려에 귀부했다.[43] 이지란의 아들들은 음서로 출사한 정황이 보이나 이는 이지란의 가계가 완전히 귀부한 이후의 일이다. 애초에 고려의 무관임용 자체가 정확한 제도적 장치가 없이 그냥 종군해서 공을 세우면 무관직을 주는 방식이라 문관직이 아닌 무관직으로 데뷔한 경우는 마냥 음서라고 볼 수도 없다.[44] 이인임은 그래도 원간섭기 초기인 충렬왕대에 학문을 닦아 일어난 가문이라 그렇다 쳐도 정중부는 묶여서 개경에 보내졌다고 기록될 정도의 흙수저였고 이의민이나 김준은 아예 천민이었으니 권력 잡으면 충분히 족보 뜯어고칠만 했다. 후에 정선 이씨 족보에서 베트남 왕족 출신이라고 기록해놓긴 했지만 이건 이의민 죽고도 300년이나 지난 후의 일이다.[45] 이 때문에 한국은 '민족은 근대의 발명'이라는 현대 서양 학계의 주류설을 완전히 뒤집는 사례로 엄청난 골칫거리다.[46] 정도전은 모계가 노비 출신이라는 의혹만 제기되었음에도 정치 생명은 물론 일신의 생명까지 끝장날 뻔 했었다.[47] '의를 상하게 해서' 쫓겨나 이인임에게 뇌물을 주고 무마했다는 것을 보면 어떠한 범죄적 사건일 가능성도 있다.[48] 신덕왕후는 일반적으로 곡산 강씨로 설명하는데, 곡산 강씨는 신덕왕후의 아버지인 강윤성 대에 신천 강씨에서 분벌된 가문으로 현재는 다시 신천 강씨의 일원으로 합쳐졌기 때문에 그냥 신천 강씨 집안으로 봐도 무방하다. 신천 강씨는 무려 신라시대부터 이어지는 집안이며, 특히 고려 태조 왕건의 증조모 집안으로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즉 이성계를 비롯한 쌍성 전주이씨 가문은 비교적 최근에 흥한 신흥족벌을 운좋게 잡은 것도 아니고, 족히 수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깊은 진짜배기 명문가와 겹사돈을 맺은 것이다.[49] 여긴 의성 김씨에서 문종조에 분적한 집안이다. 참고로 의성 김씨는 경순왕의 후손들이다.[50] 심지어 삼배인 남평 문씨는 바로 그 문익점의 딸이다.[51] 개성 지역에 전해지는 민담 가운데 이성계를 뒷담까는 내용의 민담이 유난히 많다.[52] 당장 왕건만 봐도 여러 호족들을 혼인 정책 등으로 아우르는 정책을 썼다. 이렇게 된데는 이성계가 고려 무장 시절 그만큼 비주류 출신으로 고려의 기득권 세력에 무시받은 증오가 쌓였다는 것+정도전이 이를 적극 추진했던 탓도 컸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53] 물론 박정희나 김정은도 반대파들 탄압하고 고문, 숙청했다는 점에선 도긴개긴이긴 하다. 형제복지원 사건도 박정희 때 시행된게 전두환 때까지 이어져온거니.. 그 외 부마항쟁 당시 발포 발언도 있다.[54] 남북이 각자의 영역 내에서 한반도의 역사적 정통성을 제시하자면 남한은 삼한-백제/신라/가야-통일신라-고려-조선-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상고-고대-중세-근세-근현대의 흐름을 완성할 수 있지만, 북한은 아무리 용을 써도 고조선-고구려-발해-고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근세가 공백이 된다. 지역별로 따지면 남한도 고려를 빼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고려의 수도 개성은 완전 접경지대로 역사적으로 경기수도권에 속한데다가 원래 남한 땅인것을 북한이 뺏어간 것이라 남한에서도 충분히 지분을 요구할 수 있고, 조선왕조는 고려의 승계국가로 그 자산을 거의 모조리 흡수했기 때문에 다시 서울을 점유하고 그 자산(특히 고려사와 같은 서지자료들)을 물려받은 남한 쪽이 북한 쪽에 비해 월등히 연구 성과가 높다. 게다가 조선왕조로 오면 빼도박도 못할 남한 영역인 서울을 수도로 삼은 정권이라 북한 지역은 조선시대 내내 평양이든 삼수갑산이든 서울에 종속된 지방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북한이 괜히 6.25중에 그렇게 욕하는 조선왕조의 실록을 한 세트 통째로 실어간 게 아니다.[55] 글자 그대로 큰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화살이다.[56] 주원장에게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57] 원래 한양 전에 충청도 계룡 부근으로 잡았다가 취소시키고 왕십리 일대로 수도를 재선정.[58] 태종 이방원은 이성계의 아들 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했던 경력이 있다. 방원이 과거에 급제하자 이성계는 매우 기뻐해서 이 사실을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또, 방원이 급제하면서 고려 조정에 몸을 담게 되었고 이 일은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하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59] 철퇴가 아니라 던지는 무기인 철구(鐵球 : 쇠공)였다는 이야기도 있다.[60] 이 '네 뜻대로'는 의역이 아니다. 실록 원문에도 '너 여(汝)'자를 쓰고 있다. 태상왕 태조는 태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태종을 '주상'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태종을 사가에 있을 때처럼 격의 없이 '너'라고 부르기도 했던 듯.[61]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태종의 외척 가문인 민씨 집안은 이거이 입장에서는 폐서인이 된 자신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할 정도로 박살이 났다.[62] 지연은 물론이려니와 학연은 거의 없다. 학연이나 교육이라봐야 자기 부족 내에서 말은 이렇게 타라 하는 식의 교육뿐이니...[63] 물론 한파라도 찾아오면 확 줄어들기도 하고.[64] 특히 형제등의 가까운 친족.[65] 이들 유이민 집단 중에서 이씨는 아니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신들이 나왔을 것이다.[66] 특히 제몫을 할 수 있는 성인 남성의 수.[67] 그리고 역시 중요한 혈연 동맹인 사위까지.[68] 출처 필요.[69] 특히 둘은 기록상 외모까지도 흡사하다! 눈 밑에 혹이 있었던 무골의 사마사와, 실록에 묘사된 곰처럼 강건한 체구에 눈 밑에 큰 사마귀가 있다는 이방과.[70] 그러나 정치가로서의 기량을 비교하면 이방원이 몇 차원 쯤은 고단수다.[71] 뿐만 아니라 김무생은 1967년 TBC에서 방영한 이성계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극본은 신봉승, 이 드라마는 방영된 지가 오래 되어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김무생이 당시 어떤 배역을 연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방원을 연기 했을거라 추측된다. 그 드라마에서 이성계 역은 김성원이 연기하였다.[72] 그러나 한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대본 리딩 당시 제대로 된 동북방언을 구사했더니 알아듣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부정확하지만 익숙한 북한 사투리를 사용하는 것으로 했다고 한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식은 "북한 사투리 = 서북 방언"이기에 내린 결정인듯.[73] 위 '여진족설' 항목에 비춰봐도 에러지만, 정말 여진족이라 해도 오른쪽 사진의 분장은 오버가 심하다.[74] 김기현은 김영철이 똑같이 이방원으로 나온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영의정 유정현 역할로 출연했다.[75] 근데 일러스트가 딱 조선의 선비라서 좀 벙찐다.